"태평통재 잔권 소고―특히 신라수이전 일문에 대하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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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4번= {{TagSpage|205-2}}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疑問을 갖이게 될 것이다. 첫째로는 殊異傅의 著者는 果然 누구인가. 大東韻府群玉에 보이는 바와 같이 新羅 崔致遠이냐. 또는 海東高僧傳에 있는 바와 같이 高麗 朴寅亮이냐. 또는 두 사람 以外의 어떤 사람이냐. 둘째로는 「殊異傳」·「古本殊異傳」·「新羅殊異傳」 等은 果然 同一한 殊異傳을 가르침인가. 萬若 同一한 것이라고 하면 그 正式的 書名은 果然 어떤 것인가.  
 
|원문14번= {{TagSpage|205-2}}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疑問을 갖이게 될 것이다. 첫째로는 殊異傅의 著者는 果然 누구인가. 大東韻府群玉에 보이는 바와 같이 新羅 崔致遠이냐. 또는 海東高僧傳에 있는 바와 같이 高麗 朴寅亮이냐. 또는 두 사람 以外의 어떤 사람이냐. 둘째로는 「殊異傳」·「古本殊異傳」·「新羅殊異傳」 等은 果然 同一한 殊異傳을 가르침인가. 萬若 同一한 것이라고 하면 그 正式的 書名은 果然 어떤 것인가.  
 
|원문15번= {{TagSpage|205-3}}먼저 첫째로 殊異傳의 著者에 對하여 考察해보자. 太平通載 殘卷 六十八에는 本 小稿 끝에 한 것과 같이 崔致遠이라는 條目 下에 相當히 기다란 新羅殊異傳의 逸文이 보이는데 그 內容을 보면 新羅 崔致遠을 모델로 삼은 一種의 說話이다. 이 新羅殊異傳의 逸文이 崔致遠을 모델 삼은 長文의 說話인 點에 있어서 新羅殊異憾이 崔致遠 그의 著述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 說話는 많이 縮畧되어 벌서부{{TagPage|206-1}}터 大東韻府群玉 卷十五, 仙女紅袋條에 轉載되여 있어서 이에 對하여 故 今西龍 博士는 「新羅殊異傳及其逸文」<sup>今西龍 遺著 新羅史研究 五八九―五九五頁</sup>이라는 論文 中에
 
|원문15번= {{TagSpage|205-3}}먼저 첫째로 殊異傳의 著者에 對하여 考察해보자. 太平通載 殘卷 六十八에는 本 小稿 끝에 한 것과 같이 崔致遠이라는 條目 下에 相當히 기다란 新羅殊異傳의 逸文이 보이는데 그 內容을 보면 新羅 崔致遠을 모델로 삼은 一種의 說話이다. 이 新羅殊異傳의 逸文이 崔致遠을 모델 삼은 長文의 說話인 點에 있어서 新羅殊異憾이 崔致遠 그의 著述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 說話는 많이 縮畧되어 벌서부{{TagPage|206-1}}터 大東韻府群玉 卷十五, 仙女紅袋條에 轉載되여 있어서 이에 對하여 故 今西龍 博士는 「新羅殊異傳及其逸文」<sup>今西龍 遺著 新羅史研究 五八九―五九五頁</sup>이라는 論文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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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6번= {{TagSpage|206-2}}<blockquote no="05">(前畧)尙ほ大東韻玉が引く此書<sup>〇新羅殊異傳</sup>の一節に崔致遠の名を記せるものあり. これに因りて此書を崔氏よりも後人の著述なりと考ふるは, 此書を崔氏の著と信ぜし後人, 例へば韻玉の撰者が, 原文に予とあるを崔と改訂することあるべき事實を無視せるものなるが故に亦不可なり.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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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7번= {{TagSpage|206-3}}이라 하여 新羅殊異傳 中에 崔致遠의 일흠이 보인다고 해서 新羅殊異傅을 崔致遠보담도 後사람의 著述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하였다. 勿論 自己 著書 中에 自己 姓名을 記入하여 自己 이야기를 쓸 수도 있고 또 崔致遠의 著書 中에 予라고 하였던 것을 後人이 이를 他書에 轉載할 때 崔致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常識的으로 생각해 볼 때 大部分 說話·傳說的인 記事를 羅列한 著述 中에 著者 自身에 대한 說話를 記載할 수가 있을가. 가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極히 드문 例外에 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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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8번= {{TagSpage|206-4}}新羅殊異傳 逸文 中에 보이는 崔致遠에 關한 이야기는 崔致遠의 正當한 傳記는 아니다. 이는 崔致遠을 모델로 한 一種 說話에 不過하다. 이러한 點으로서 新羅殊異傳은 決코 崔致遠의 撰述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殊異傳의 著者는 누구일가. 여기서 우리는 殊異傳에 關한 現存 最古文獻인 覺訓의 海東高僧傳에 「若按朴寅亮殊異傳」 云云이라 한 一節에 依하야 殊異傳의 著者는 朴寅亮 그이라고 認定할 수밖에 없다. 朴寅亮에 關하여는 高麗史 卷九十五에 그 傳이 있거니와 그는 文宗朝에 登第한 後 右副承宣·禮部侍郞·翰林學士·承旨·同知中樞院事 等을 歷任하여 右僕射叅知政事에 이르렀는데 肅宗 元年(1096 A.D.)에 卒하였다. 그는 文詞가 雅麗하여 當時 外交에 關한 公文書는 대개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하며 特히 文宗 三十四年 戶部尙書柳洪과 같이 宋나라에 使臣 갔을 때는 宋人들이 朴寅亮과 또 一行 中의 한 사람인 金覲의 尺牘·表狀·題詠을 보고 稱嘆하기 마지 않어 드디어 두 사람의 詩文을 小華集이라 하야 刊行까지 하였다고 하며 또 그는 古今錄 十卷의 著述이 있어 秘府에 藏置하였{{TagPage|207-1}}었다고 하나 지금 傳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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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9번= {{TagSpage|207-2}}다음 둘째로 「殊異傳」·「古本殊異傳」·「新羅殊異傳」 等이 果然 全혀 同一한 것이냐 또는 그 名稱과 같이 內容도 多少 다른 것이었느냐 하는 데 對하여 考察해 보자. 여기서 우리는 「殊異傳」 或은 「古本殊異傳」 或은 「新羅殊異傳」이라 하여 諸書에 引用된 全部를 모아가지고 이를 比較檢討해서 자세히 고찰할 때―그 詳細한 說明은 省畧하지만―거기에는 가장 큰 두 가지 共通點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其一 어떤 것이나 다 一種의 靈異說話的 要素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것 其二는 敍述의 形式이 서로 거진 同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內容的으로나 形式的으로나 서로 共通點이 많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殊異傳」이나 「古本殊異傳」이나 「新羅殊異傳」이나는 다 同一한 殊異傳을 가르침이요 殊異傳이라는 것은 (우리 朝鮮에 있어서는) 單 一種밖에 없었으리라고 보고 싶다. 勿論 殊異傳이는 名稱인 以上 누구의 著를 莫論하고 大體에 있어서 內容的 共通點이 있을 것은 事實이나 그러나 高麗 中葉 以前에 있어서 벌서 著者를 달리하는 殊異傳이 數種이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現今에 있어서 殊異傳이라는것이 過去에 數種 있었다고 推測되는 아무런 資料도 없다. 또 或 新羅 때에된 殊異傳은 없었던가 하는 疑問도 있을 것이나 이에 對하여도 亦是 是認 或은 否認할 만한 如何한 記錄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想像할 수 있는 新羅의 文學이라는 槪念에 殊異傳 逸文을 비추어 본다고 하면 殊異傳이 羅末 崔致遠의 著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以上 新羅 全時代를 通하여 殊異傅을 著述할 만한 이는 없었을 것 같다. 이러한 點에 立脚해서 앞서 考察한 殊異傳의 著者가 朴寅亮이라는 것과 아울러 생각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結論에 到達할 것이다. 즉 殊異傳은 高麗 朴寅亮의 著述이며 朴寅亮의 殊異傳 以外에는 다른殊異傳은 없을 것이다. 다만 朴寅亮 殊異傅의 正式的인 名稱이 「殊異傳」이냐 「新羅殊異傳」이냐―三國遺事에 「古本殊異傳」이라 함은 「오래된 册 殊異傳」이라는 意味로 解釋된다―함에 對하여는 어떤 것이 正當하다고 곧 斷定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三國遺事 以前 即 高麗時代文獻에는 「新{{TagSpage|208-1}}羅」 두 字를 冠한 殊異傳의 일홈은 어데서나 차자볼 수 없고 李朝에 들어서 처음 太平通載에 「新羅殊異傳」이라 하였다. 이것으로써 보면 最初는 거저 「殊異傳」이라고만 하였던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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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0번= {{TagSpage|208-2}}끝으로 以上과 같은 卑見에 過히 틀림이 없다고 하면 如何한 理由로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은 殊異傳의 著者를 崔致遠이라고 誤認하였을가 하는 疑問이 當然히 이러날 것이다. 이에 對하여는 나는 다음과 같은 臆測을 내리고자 한다. 三國遺事 卷四, 圓光西學條에 東京<sup>〇今 慶州</sup>安逸戶長貞孝家에 古本殊異傳이 있었다고 하였음을 보면 三國遺事 編纂 當時 即 高麗 忠烈王 時代에 있어서도 벌써 殊異傳의 傅本이 稀貴하였을 뿐만 아니라 著者가 分明치 않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바 殊異傳에는 時間的으로 新羅 以前에 關한 說話·傳說이 많이 記載되어 있으므로 後世 사람들은―大東韻府群玉의 著者 權文海 以下―不注意하게도 新羅 末葉에 있어서 가장 有名하였던 文人이요 不遇한 宋年을 보낸 崔致遠 그이로써 드디어 殊異傳의 著者를 삼고 말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昭和十五年六月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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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1번= {{TagSpage|208-3}}[附載]太平通載卷六十八, 崔致遠條</br>崔致遠</br>崔致遠 字孤雲 年十二 西學於唐 乾符甲午 學士裵瓚掌試 一擧登魁科 調授溧水縣尉 常遊縣南界招賢館 館前岡 有古塚 號雙女墳 古今名賢遊覽之所 致遠題詩石門曰 誰家二女此遺墳 寂寂泉扃幾怨春 形影空留溪畔月 姓名難問塚頭塵 芳情徜許通幽夢 永夜何妨慰旅人 孤館若逢雲雨會 與君繼賦洛川神 題罷到館 是時 月白風淸 杖藜徐步 忽覩一女 姿容綽約 手操紅袋 就前曰 八娘子九娘子 傳語秀才 朝來特勞玉趾 兼賜瓊章 各有酬答 謹令奉呈 公回顧驚惶再問 何姓娘子 女曰 朝間拂石題詩處 卽二娘所居也 公乃悟 見第一袋 是八娘子 奉酬秀才 其詞曰 幽魂離恨寄孤墳 桃臉柳眉猶帶春 鶴駕難尋三島路 鳳𨥁空墮九泉塵 當時在世長羞客 今日含嬌未識人 深愧詩詞知妾意 一回延首一傷神 次見第二袋 是九娘子 其詞曰 往來誰顧路傍墳 鸞鏡鴛衾盡惹塵 一死一生天上命 花開花落世間春 每希秦女能抛俗 不學任姬愛媚人 欲薦襄王雲雨夢 千思萬檍損精神 又書於後幅曰 莫怪藏名姓 孤魂畏俗人 欲將心事說 能許暫相親 公旣見芳詞 頗有喜色 乃問其女名字 曰翠襟 公悅而挑之 翠襟怒曰 秀才合與回書 空欲累人 致遠乃作詩 付翠襟曰 偶把狂詞{{TagSpage|209}}題古墳 豈期仙女問風塵 翠襟猶帶瓊花艶 紅袖應含玉樹春 偏隱姓名寄俗客 巧裁文字惱詩人 斷腸唯願陪歡笑 祝禱天靈與萬神 繼書末幅云 靑鳥無端報事由 暫時相憶淚雙流 今宵若不逢仙質 判却殘生入地求 翠襟得詩還 迅如飇逝 致遠獨立哀吟 久無來耗 乃詠短歌 向畢 香氣忽來 良久 二女齊至 正是一雙明玉 兩朶瑞蓮 致遠驚喜如夢 拜云 致遠海島微生 風塵末吏 豈期仙侶猥顧風流 輒有戱言 便垂芳躅 二女微笑無言 致遠作詩曰 芳宵幸得暫相親 何事無言對暮春 將謂得知秦室婦 不知元是息夫人 於是 紫裙者恚曰 始欲笑言 便蒙輕蔑 息嬀曾從二壻賤妾未事一夫 公言夫人不言 言必有中 二女皆笑 致遠乃問曰 娘子居在何方 族序是誰 紫裙者隕淚曰 兒與小妹 溧水縣楚城鄕張氏之二女也 先父不爲縣吏 獨占鄕豪 富似銅山 侈同金谷及姉年十八 妹年十六 父母論嫁 阿奴則定婚鹽商 小妹則許嫁茗估 姉妹每說移天 未滿于心 鬱結難伸 遽至夭亡 所冀仁賢 勿萌猜嫌 致遠曰 玉音昭然 豈有猜慮 乃問二女 寄墳已久 去館非遙 如有英雄相遇 何以示現美談 紅袖者曰 往來者皆是鄙夫 今幸遇秀才 氣秀鼇山 可與談玄玄之理 致遠將進酒謂二女曰 不知俗中之味 可獻物外之人乎 紫裙者曰 不食不飮 無飢無渴 然幸接瓌姿 得逢瓊液 豈敢辭違 於是 飮酒各賦詩 皆是淸絶不世之句 是時 明月如晝 淸風似秋 其姉改令曰 便將月爲題 以風爲韻 於是致遠作起聯曰 金波滿目泛長空 千里愁心處處同 八娘曰 輪影動無迷舊路 桂花開不待春風 九娘曰 圓輝漸皎三更外 離思偏傷一望中 致遠曰 練色舒時分錦帳 珪模映處透珠櫳 八娘曰 人間遠別腸堪斷 泉下孤眠恨莫窮 九娘曰 每羨嫦娥多計較 能抛香閣到仙宮 公歎訝尤甚 乃曰 此時 無笙歌奏於前 能事未能畢矣 於是 紅袖乃顧婢翠襟 而謂致遠曰 絲不如竹 竹不如肉 此婢善歌 乃命訴衷情詞 翠襟歛袵一歌 淸雅絶世 於是 三人半酣 致遠乃挑二女曰 嘗聞盧充逐獵 忽遇良姻 阮肇尋仙 得逢嘉配 芳情若許 姻好可成 二女皆諾曰 虞帝爲君 雙雙在御 周郞作將 兩兩相隨 彼昔猶然 今胡不爾 致遠喜出望外 乃相與排三淨枕 展一新衿 三人同衿繾綣之情 不可具談 致遠戱二女曰 不向閨中作黃公之子婿 翻來塚側 夾陳氏之女奴 未測何緣得逢此會 女兄作詩曰 聞語知君不是賢 應緣慣與女奴眠 弟應聲續尾曰 無端嫁得風狂漢 强被輕言辱地仙 公答爲詩曰 五百年來始遇賢 且歡今夜得雙眠 芳心莫怪親狂客 曾向春風占謫仙 小頃, 月落鷄鳴 二女皆驚謂公曰 樂極悲來 離長會促 是人世貴賤同傷 況乃存沒異途 升沈殊路 每慙白晝虛擲芳時 只應拜一夜之歡 從此作千年之恨 始喜同衾之有幸 遽嗟破鏡之無期 二女{{TagSpage|210}}各贈詩曰 星斗初回更漏闌 欲言離緖淚闌干 從玆更結千年恨 無計重尋五夜歡 又曰 斜月照窓紅臉冷 曉風飄袖翠眉攢 辭君步步偏腸斷 雨散人歸入夢難 致遠見詩不覺垂淚 二女謂致遠曰 徜或他時 重經此處 修掃荒塚 言訖卽滅 明旦 致遠歸塚邊 彷徨嘯咏 感歎尤甚 作長歌自慰 曰 草暗塵昏雙女墳 古來名迹竟誰聞 唯傷廣野千秋月 空鎖巫山兩片雲 自恨雄才爲遠吏 偶來孤館尋幽邃 戱將詞句向門題 感得仙姿侵夜至 紅錦袖紫羅裙 坐來蘭麝逼人薰 翠眉丹頰皆超俗 飮態詩情又出群 對殘花傾美酒 雙雙妙舞呈纖手 狂心已亂不知羞 芳意試看相許否 美人顔色久低迷 半含笑能半含啼 面熟自然心似火 臉紅寧假醉如 泥歌艶詞打懽合 芳宵良會應前定 纔聞謝女啓淸談 又見班姬推雅詠 情深意密始求親 正是艶陽桃李辰 明月倍添衾枕思 香風偏惹綺羅身 綺羅身衾枕思 幽歡未已離愁至 數聲餘歌斷孤魂 一點殘燈照雙淚 曉天鸞鶴各西東 獨坐思量疑夢中 沉思疑夢又非夢 愁對朝雲歸碧空 匹馬長嘶望行路 狂生猶再尋遺墓 不逢羅襪步芳塵 但見花枝泣朝露 腸欲斷首頻回 泉戶寂寥誰爲開 頓轡望時無恨淚 垂鞭吟處有餘哀 暮春風暮春日 柳花撩亂迎風疾 常將旅思怨韶光 況是離情念芳質 人間事愁殺人 始聞達路又迷津 草沒銅臺千古恨 花開金谷一朝春 阮肇劉晨是凡物 秦皇漢帝非仙骨 當詩嘉會杳難追 後代遺名徒可悲 悠然來忽然去 是知風雨無常主 我來此地逢雙女 遙似襄王夢雲雨 大丈夫大丈夫 壯氣須除兒女恨 莫將心事戀妖狐 後致遠擢第 東還路上歌詩云 浮世榮華夢中夢 白雲深處好安身 乃退而長往 尋僧於山林江海 結小齋 築石臺 耽玩文書 嘯詠風月 逍遙偃仰於其間 南山淸凉寺·合浦縣月影臺·智理山雙溪寺·石南寺·墨泉石臺 種牧丹 至今猶存 皆其遊歷也 最後 隱於伽倻山海印寺 與兄大德賢俊·南岳師定玄 探賾經論 遊心沖漠 以終老焉<sup>出新羅殊異傳</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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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 (수) 14:0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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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통재 잔권 소고―특히 신라수이전 일문에 대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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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太平通載殘卷小考―特히 新羅殊異傳逸文에 對하야―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2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인영 역자 집필일자 1940년 6월 게재연월 1940년 9월
시작쪽 202쪽 종료쪽 210쪽 전체쪽 009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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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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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2-1太平通載 缺本 二册―存卷六十八之七十, 九十六之百―은 最近에 이르러 처음으로 發現된 朝鮮 古刊本의 하나이다. 木版 匡郭 縱二四·五糎 橫一六·〇糎(卷九十七首葉) 或은 縱二四·二糎 橫一六·〇糎(卷六十八首葉) 四周單邊(卷六十八之七十) 或은 雙邊(卷九十六之百) 烏絲欄 每半葉十行 行十九字 板心에는 上魚尾 黑口 「太平通戴卷幾」라 하였는데 이는 板式·字體‧紙質 等으로 봐서 宣祖 壬辰 以前 古刊本에 틀림없다.(圖版叅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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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2-2이 太平通載는 李朝世宗·世祖·成宗朝의 文人 逸齋成任의 編纂으로 그弟 虛白堂 成俔은 慵齋叢話 卷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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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2-3

佰氏文安公,〇成任 好學忘倦 嘗在集賢殿 抄錄太平廣記五百卷 約爲群節五十卷 刊行於世 又聚諸書及廣記群節 爲太平通載八十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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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2-4이라 하고 成宗實錄 卷一百六十九, 十五年 甲辰 八月 甲戍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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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2-5

知中樞府事成任卒……年六十四 謚文安 博聞多見文 寬裕和平安 任爲人 器度寬洪 識見精博 善書工文 尤長於律詩 嘗倣太平廣記 編輯古今異聞 名曰大(太)平通載 行于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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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2-6라 하였다. 成任의 太平廣記詳節도 現在 零本으로 傳하는 것이 있지만 太平通戴로 말하면―지금 남어있는 것만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것 같이―朝鮮·支那▶P203-1古文獻을 널리 涉獵하여 編輯한 것으로서 한 朝鮮 古書가 많이 散失된 現今에 있어서 文獻的 價値는 實로 크다고 않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右揭 慵齋叢話에는 太 平通載가 都合 八十卷이라고 하였으나 同書 殘卷으로 볼진댄 적어도 百卷 以上 되는 것은 確實하다. 다만 過去 우리 朝鮮에 있어서는 흔히 卷과 册을 混同한 例가 적지 않음으로 八十卷이라고 한 것은 곧 八十册을 意味한 것인지도 모른다. 萬若 慵齋叢話의 八十卷이라는 것이 八十册을 意味한 것이라고 하면 現行本이 세 卷 乃至 다섯 卷을 한 册으로 삼은 데 依해서 推測해 보면 元來 同書는 적어도 二四十卷 以上의 巨帙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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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3-2그러면 이 太平通載 殘卷은 언제 어데서 刊行된 것인가. 이에 對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記事를 提示코자 한다. 成宗實錄 卷二百八十五, 二十四年 癸丑 十二月 戊子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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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3-3

弘文館副提學金諶等 上箚子曰 伏聞頃者 李克墩爲慶尙監司 李宗準爲都事時 將所刊酉陽雜俎·唐宋詩話·遺山樂府及破閑·補閑集·太平通載等書以獻 旣命藏之內府 旋下唐宋詩話·破閑·補閑等集 令臣等略註歷代年號·人物出處以進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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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3-4이라 하고 同書 卷二百八十五, 二十四年 癸丑 十二月 己丑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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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3-5

吏曹判書李克墩來啓 太平通載·補閑等集 前監司時 已始開刊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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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3-6이라 하였다. 由是觀之면 太平通載는 酉陽雜爼·唐宋詩話‧遺山樂府‧破閑集及補閑集들과 아울러 李克墩이 慶尙道 觀察使 時代에 慶尙道서 刊行한 데 틀림없다. 그러면 李克墩 慶尙監司 時代는 언제인가. 成宗實錄卷二百六十二 及 卷二百七十四에 依하면 慶尙道 觀察使 李克墩은 成宗 二十三年 壬子 二月에 辭朝 赴任하였는데 그 다음에 慶尙道 觀察使에 任命된 李季男은 成宗 二十四年 癸丑 三月에 辭朝 赴任하였음으로 李克墩 慶尙監司 時代는 成宗 二十三年 壬子 二月로부터 翌年 三月까지 約一年 一個月間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太平通載는 이 동안에―成宗 二十三年頃―慶尙道서 刊行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最近 發現된 古刊本 太平通載 殘卷이 이 成宗 二十三年頃의 慶尙道 刊本일 것은 그 板式과 紙質로 봐서 또한 容易히 推測할 수 있다. 다만 이 太平通載가 ▶P204-1當時 慶尙道 어떤 邑에서 開刊되었는지는 未詳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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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4-2太平通載 殘卷 中에 蒐集된 文獻을 보건댄 (1)郁離子 (2)效顰集 (3)三國遺事(○○○○) (4)新羅殊異傳(○○○○○) (5)法苑珠林 (6)太平廣記 (7)勸善書 (8)閑中新錄 (9)列異傳 (10)名臣言行錄 (11)湖海新聞 (12)宋學士文集 (13)劉向新序 (14)陳嘉獻奉使錄 (15)晋書 (16)搜神記 (17)詩學大成 (18)龍城集 (19)靈怪集 (20)茟談 (21)宋史 (22)元史 (23)江湖紀聞 (24)高麗史(○○○) (25)韻府群玉 (26)乘異 (27)摭遺新說 (28)醉翁談錄 (29)剪燈餘話 (30)剪燈新話 (31)列子 (32)劉向說苑 (33)韓詩外傳 (34)戰國策 (35)事文類聚 (36)林間錄 (37)史記 (38)世說新話 (39)東坡志 (40)釋苑詞林 (41)言行拾遺 (42)東坡文集 (43)東坡別集 (44)龍門子 (45)笑海叢珠 等 多數에 達한다. 이것으로써 보면 太平通載 全卷 中에는 勿論 이 以上의 文獻이 網羅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되거니와 高麗史·三國遺事·新羅殊異傳 같은 우리 古文獻이 探錄되어 있음은 특히 注目되는 바이다. 高麗史는 卷七十 黃虵條 及 卷一百 李資諒條에 三國遺事는 卷六十八鼻荆郞條에, 新羅殊異傳 卷六十八 崔致遠條에 各各 引用되어 있는데, 三書 中 前 二書에 引用된 記載는 지금 傳하는 一然의 三國遺事 鄭麟趾 等의 高麗史와 同文이다. 그러나 崔致遠條에 收錄된 新羅殊異傳의 逸文만은 高麗 中葉 以前 說話文學을 考察함에 있어서 重要한 新資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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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4-3從來 殊異傳 或은 新羅殊異傳이라는 일홈으로 諸書에 抄錄된 것을 볼진댄 먼저 高麗 高宗때 僧覺訓의 奉宣撰인 海東高僧傳 卷一, 釋阿道條에 殊異傳을 引用하되 이를 「朴寅亮殊異傅」이라 하야 「殊異傳」의 著者를 朴寅亮이라고 明記하였으며 同書 卷一, 釋法空條에도 「殊異傳」 參考해서 적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殊異傳」의 名稱과 그 逸文이 文獻에 나타나는 最初의 것이다. 다음 高麗 忠烈王 僧 一然의 三國遺事에는 卷四, 圓光西學條에 「東京安逸戶長貞孝家 在古本殊異傳 載圓光法師傳」이라 하고 「古本殊異傳」 中에서 圓光法師에 關한 글을 轉載하였다. (三國遺事 卷四, 寳壤梨木條에 「爾後人 作新羅異傳」 云云의 句가 있으나 「新羅異傳」이라는 것이 「新羅殊異傳」과 同一한 것인지 아닌지는 全혀 알 수 없다.) 그 다음 李朝 成宗 ▶P205-1때 四佳 徐居正은 그 著 筆苑雜記 卷二에 「新羅殊異体云」 이라 하야 「新羅殊異傳」 中에서 迎烏·細烏夫妻 이야기를 이끌었고 또 다음 李朝 宣祖 初年에 權文海는 그 著 大東韻府群玉에 「新羅殊異傳」을 崔致遠의 作이라고 引用書 目條에 明記한 다음 卷八 揷石相·卷九 竹筒美女·卷十二 老翁化狗·卷十五 仙女紅袋·卷十五 虎願·卷二十 心火繞塔 等 條에 이를 抄錄하였다. 權文海 以後에는 殊異傳을 引用한 文獻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거니와 다만 仁祖 때 金烋는 그 著 海東文獻總錄目錄卷에 「新羅殊異傳」의 著者을 亦是 崔致遠이라고 하고 또 그 後 增補文獻備考 卷二百四十六, 藝文考熊纂類에도 「新羅殊異傳 文昌候崔致遠撰」이라 하야 亦是 「新羅殊異傳」의 撰者를 新羅 崔致遠으로 認定하고 말았다. 그러나 宣祖 壬辰 後에 이르러 新羅殊異傳을 崔致遠 撰이라 한 것은 新羅殊異傳을 實祭로 보고 그 著者까지도 確認한 것이 아니라 모름직이 다만 大東韻府群玉에 依하여 記錄하였을 뿐일 것이다. 생각컨대 殊異傳은 壬辰 以後 湮滅된 것 같으며 또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이 果然 殊異傳에서 直接 이를 引用하였는지 或은 太平通載에서 轉載하였는지 이 點은 明確치 않다. 그러나 太平通載의 撰者 成任과 筆苑雜記 著者 徐居正이 殊異傳을 實見했음은 事實일 것으로 적어도 殊異傳이 成宗 때까지 傳來했음은 否認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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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5-2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疑問을 갖이게 될 것이다. 첫째로는 殊異傅의 著者는 果然 누구인가. 大東韻府群玉에 보이는 바와 같이 新羅 崔致遠이냐. 또는 海東高僧傳에 있는 바와 같이 高麗 朴寅亮이냐. 또는 두 사람 以外의 어떤 사람이냐. 둘째로는 「殊異傳」·「古本殊異傳」·「新羅殊異傳」 等은 果然 同一한 殊異傳을 가르침인가. 萬若 同一한 것이라고 하면 그 正式的 書名은 果然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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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5-3먼저 첫째로 殊異傳의 著者에 對하여 考察해보자. 太平通載 殘卷 六十八에는 本 小稿 끝에 한 것과 같이 崔致遠이라는 條目 下에 相當히 기다란 新羅殊異傳의 逸文이 보이는데 그 內容을 보면 新羅 崔致遠을 모델로 삼은 一種의 說話이다. 이 新羅殊異傳의 逸文이 崔致遠을 모델 삼은 長文의 說話인 點에 있어서 新羅殊異憾이 崔致遠 그의 著述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 說話는 많이 縮畧되어 벌서부▶P206-1터 大東韻府群玉 卷十五, 仙女紅袋條에 轉載되여 있어서 이에 對하여 故 今西龍 博士는 「新羅殊異傳及其逸文」今西龍 遺著 新羅史研究 五八九―五九五頁이라는 論文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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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6-2

(前畧)尙ほ大東韻玉が引く此書〇新羅殊異傳の一節に崔致遠の名を記せるものあり. これに因りて此書を崔氏よりも後人の著述なりと考ふるは, 此書を崔氏の著と信ぜし後人, 例へば韻玉の撰者が, 原文に予とあるを崔と改訂することあるべき事實を無視せるものなるが故に亦不可なり.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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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6-3이라 하여 新羅殊異傳 中에 崔致遠의 일흠이 보인다고 해서 新羅殊異傅을 崔致遠보담도 後사람의 著述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하였다. 勿論 自己 著書 中에 自己 姓名을 記入하여 自己 이야기를 쓸 수도 있고 또 崔致遠의 著書 中에 予라고 하였던 것을 後人이 이를 他書에 轉載할 때 崔致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常識的으로 생각해 볼 때 大部分 說話·傳說的인 記事를 羅列한 著述 中에 著者 自身에 대한 說話를 記載할 수가 있을가. 가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極히 드문 例外에 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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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6-4新羅殊異傳 逸文 中에 보이는 崔致遠에 關한 이야기는 崔致遠의 正當한 傳記는 아니다. 이는 崔致遠을 모델로 한 一種 說話에 不過하다. 이러한 點으로서 新羅殊異傳은 決코 崔致遠의 撰述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殊異傳의 著者는 누구일가. 여기서 우리는 殊異傳에 關한 現存 最古文獻인 覺訓의 海東高僧傳에 「若按朴寅亮殊異傳」 云云이라 한 一節에 依하야 殊異傳의 著者는 朴寅亮 그이라고 認定할 수밖에 없다. 朴寅亮에 關하여는 高麗史 卷九十五에 그 傳이 있거니와 그는 文宗朝에 登第한 後 右副承宣·禮部侍郞·翰林學士·承旨·同知中樞院事 等을 歷任하여 右僕射叅知政事에 이르렀는데 肅宗 元年(1096 A.D.)에 卒하였다. 그는 文詞가 雅麗하여 當時 外交에 關한 公文書는 대개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하며 特히 文宗 三十四年 戶部尙書柳洪과 같이 宋나라에 使臣 갔을 때는 宋人들이 朴寅亮과 또 一行 中의 한 사람인 金覲의 尺牘·表狀·題詠을 보고 稱嘆하기 마지 않어 드디어 두 사람의 詩文을 小華集이라 하야 刊行까지 하였다고 하며 또 그는 古今錄 十卷의 著述이 있어 秘府에 藏置하였▶P207-1었다고 하나 지금 傳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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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7-2다음 둘째로 「殊異傳」·「古本殊異傳」·「新羅殊異傳」 等이 果然 全혀 同一한 것이냐 또는 그 名稱과 같이 內容도 多少 다른 것이었느냐 하는 데 對하여 考察해 보자. 여기서 우리는 「殊異傳」 或은 「古本殊異傳」 或은 「新羅殊異傳」이라 하여 諸書에 引用된 全部를 모아가지고 이를 比較檢討해서 자세히 고찰할 때―그 詳細한 說明은 省畧하지만―거기에는 가장 큰 두 가지 共通點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其一 어떤 것이나 다 一種의 靈異說話的 要素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것 其二는 敍述의 形式이 서로 거진 同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內容的으로나 形式的으로나 서로 共通點이 많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殊異傳」이나 「古本殊異傳」이나 「新羅殊異傳」이나는 다 同一한 殊異傳을 가르침이요 殊異傳이라는 것은 (우리 朝鮮에 있어서는) 單 一種밖에 없었으리라고 보고 싶다. 勿論 殊異傳이는 名稱인 以上 누구의 著를 莫論하고 大體에 있어서 內容的 共通點이 있을 것은 事實이나 그러나 高麗 中葉 以前에 있어서 벌서 著者를 달리하는 殊異傳이 數種이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現今에 있어서 殊異傳이라는것이 過去에 數種 있었다고 推測되는 아무런 資料도 없다. 또 或 新羅 때에된 殊異傳은 없었던가 하는 疑問도 있을 것이나 이에 對하여도 亦是 是認 或은 否認할 만한 如何한 記錄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想像할 수 있는 新羅의 文學이라는 槪念에 殊異傳 逸文을 비추어 본다고 하면 殊異傳이 羅末 崔致遠의 著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以上 新羅 全時代를 通하여 殊異傅을 著述할 만한 이는 없었을 것 같다. 이러한 點에 立脚해서 앞서 考察한 殊異傳의 著者가 朴寅亮이라는 것과 아울러 생각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結論에 到達할 것이다. 즉 殊異傳은 高麗 朴寅亮의 著述이며 朴寅亮의 殊異傳 以外에는 다른殊異傳은 없을 것이다. 다만 朴寅亮 殊異傅의 正式的인 名稱이 「殊異傳」이냐 「新羅殊異傳」이냐―三國遺事에 「古本殊異傳」이라 함은 「오래된 册 殊異傳」이라는 意味로 解釋된다―함에 對하여는 어떤 것이 正當하다고 곧 斷定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三國遺事 以前 即 高麗時代文獻에는 「新쪽수▶P208-1羅」 두 字를 冠한 殊異傳의 일홈은 어데서나 차자볼 수 없고 李朝에 들어서 처음 太平通載에 「新羅殊異傳」이라 하였다. 이것으로써 보면 最初는 거저 「殊異傳」이라고만 하였던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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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8-2끝으로 以上과 같은 卑見에 過히 틀림이 없다고 하면 如何한 理由로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은 殊異傳의 著者를 崔致遠이라고 誤認하였을가 하는 疑問이 當然히 이러날 것이다. 이에 對하여는 나는 다음과 같은 臆測을 내리고자 한다. 三國遺事 卷四, 圓光西學條에 東京〇今 慶州安逸戶長貞孝家에 古本殊異傳이 있었다고 하였음을 보면 三國遺事 編纂 當時 即 高麗 忠烈王 時代에 있어서도 벌써 殊異傳의 傅本이 稀貴하였을 뿐만 아니라 著者가 分明치 않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바 殊異傳에는 時間的으로 新羅 以前에 關한 說話·傳說이 많이 記載되어 있으므로 後世 사람들은―大東韻府群玉의 著者 權文海 以下―不注意하게도 新羅 末葉에 있어서 가장 有名하였던 文人이요 不遇한 宋年을 보낸 崔致遠 그이로써 드디어 殊異傳의 著者를 삼고 말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昭和十五年六月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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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8-3[附載]太平通載卷六十八, 崔致遠條
崔致遠
崔致遠 字孤雲 年十二 西學於唐 乾符甲午 學士裵瓚掌試 一擧登魁科 調授溧水縣尉 常遊縣南界招賢館 館前岡 有古塚 號雙女墳 古今名賢遊覽之所 致遠題詩石門曰 誰家二女此遺墳 寂寂泉扃幾怨春 形影空留溪畔月 姓名難問塚頭塵 芳情徜許通幽夢 永夜何妨慰旅人 孤館若逢雲雨會 與君繼賦洛川神 題罷到館 是時 月白風淸 杖藜徐步 忽覩一女 姿容綽約 手操紅袋 就前曰 八娘子九娘子 傳語秀才 朝來特勞玉趾 兼賜瓊章 各有酬答 謹令奉呈 公回顧驚惶再問 何姓娘子 女曰 朝間拂石題詩處 卽二娘所居也 公乃悟 見第一袋 是八娘子 奉酬秀才 其詞曰 幽魂離恨寄孤墳 桃臉柳眉猶帶春 鶴駕難尋三島路 鳳𨥁空墮九泉塵 當時在世長羞客 今日含嬌未識人 深愧詩詞知妾意 一回延首一傷神 次見第二袋 是九娘子 其詞曰 往來誰顧路傍墳 鸞鏡鴛衾盡惹塵 一死一生天上命 花開花落世間春 每希秦女能抛俗 不學任姬愛媚人 欲薦襄王雲雨夢 千思萬檍損精神 又書於後幅曰 莫怪藏名姓 孤魂畏俗人 欲將心事說 能許暫相親 公旣見芳詞 頗有喜色 乃問其女名字 曰翠襟 公悅而挑之 翠襟怒曰 秀才合與回書 空欲累人 致遠乃作詩 付翠襟曰 偶把狂詞쪽수▶P209題古墳 豈期仙女問風塵 翠襟猶帶瓊花艶 紅袖應含玉樹春 偏隱姓名寄俗客 巧裁文字惱詩人 斷腸唯願陪歡笑 祝禱天靈與萬神 繼書末幅云 靑鳥無端報事由 暫時相憶淚雙流 今宵若不逢仙質 判却殘生入地求 翠襟得詩還 迅如飇逝 致遠獨立哀吟 久無來耗 乃詠短歌 向畢 香氣忽來 良久 二女齊至 正是一雙明玉 兩朶瑞蓮 致遠驚喜如夢 拜云 致遠海島微生 風塵末吏 豈期仙侶猥顧風流 輒有戱言 便垂芳躅 二女微笑無言 致遠作詩曰 芳宵幸得暫相親 何事無言對暮春 將謂得知秦室婦 不知元是息夫人 於是 紫裙者恚曰 始欲笑言 便蒙輕蔑 息嬀曾從二壻賤妾未事一夫 公言夫人不言 言必有中 二女皆笑 致遠乃問曰 娘子居在何方 族序是誰 紫裙者隕淚曰 兒與小妹 溧水縣楚城鄕張氏之二女也 先父不爲縣吏 獨占鄕豪 富似銅山 侈同金谷及姉年十八 妹年十六 父母論嫁 阿奴則定婚鹽商 小妹則許嫁茗估 姉妹每說移天 未滿于心 鬱結難伸 遽至夭亡 所冀仁賢 勿萌猜嫌 致遠曰 玉音昭然 豈有猜慮 乃問二女 寄墳已久 去館非遙 如有英雄相遇 何以示現美談 紅袖者曰 往來者皆是鄙夫 今幸遇秀才 氣秀鼇山 可與談玄玄之理 致遠將進酒謂二女曰 不知俗中之味 可獻物外之人乎 紫裙者曰 不食不飮 無飢無渴 然幸接瓌姿 得逢瓊液 豈敢辭違 於是 飮酒各賦詩 皆是淸絶不世之句 是時 明月如晝 淸風似秋 其姉改令曰 便將月爲題 以風爲韻 於是致遠作起聯曰 金波滿目泛長空 千里愁心處處同 八娘曰 輪影動無迷舊路 桂花開不待春風 九娘曰 圓輝漸皎三更外 離思偏傷一望中 致遠曰 練色舒時分錦帳 珪模映處透珠櫳 八娘曰 人間遠別腸堪斷 泉下孤眠恨莫窮 九娘曰 每羨嫦娥多計較 能抛香閣到仙宮 公歎訝尤甚 乃曰 此時 無笙歌奏於前 能事未能畢矣 於是 紅袖乃顧婢翠襟 而謂致遠曰 絲不如竹 竹不如肉 此婢善歌 乃命訴衷情詞 翠襟歛袵一歌 淸雅絶世 於是 三人半酣 致遠乃挑二女曰 嘗聞盧充逐獵 忽遇良姻 阮肇尋仙 得逢嘉配 芳情若許 姻好可成 二女皆諾曰 虞帝爲君 雙雙在御 周郞作將 兩兩相隨 彼昔猶然 今胡不爾 致遠喜出望外 乃相與排三淨枕 展一新衿 三人同衿繾綣之情 不可具談 致遠戱二女曰 不向閨中作黃公之子婿 翻來塚側 夾陳氏之女奴 未測何緣得逢此會 女兄作詩曰 聞語知君不是賢 應緣慣與女奴眠 弟應聲續尾曰 無端嫁得風狂漢 强被輕言辱地仙 公答爲詩曰 五百年來始遇賢 且歡今夜得雙眠 芳心莫怪親狂客 曾向春風占謫仙 小頃, 月落鷄鳴 二女皆驚謂公曰 樂極悲來 離長會促 是人世貴賤同傷 況乃存沒異途 升沈殊路 每慙白晝虛擲芳時 只應拜一夜之歡 從此作千年之恨 始喜同衾之有幸 遽嗟破鏡之無期 二女쪽수▶P210各贈詩曰 星斗初回更漏闌 欲言離緖淚闌干 從玆更結千年恨 無計重尋五夜歡 又曰 斜月照窓紅臉冷 曉風飄袖翠眉攢 辭君步步偏腸斷 雨散人歸入夢難 致遠見詩不覺垂淚 二女謂致遠曰 徜或他時 重經此處 修掃荒塚 言訖卽滅 明旦 致遠歸塚邊 彷徨嘯咏 感歎尤甚 作長歌自慰 曰 草暗塵昏雙女墳 古來名迹竟誰聞 唯傷廣野千秋月 空鎖巫山兩片雲 自恨雄才爲遠吏 偶來孤館尋幽邃 戱將詞句向門題 感得仙姿侵夜至 紅錦袖紫羅裙 坐來蘭麝逼人薰 翠眉丹頰皆超俗 飮態詩情又出群 對殘花傾美酒 雙雙妙舞呈纖手 狂心已亂不知羞 芳意試看相許否 美人顔色久低迷 半含笑能半含啼 面熟自然心似火 臉紅寧假醉如 泥歌艶詞打懽合 芳宵良會應前定 纔聞謝女啓淸談 又見班姬推雅詠 情深意密始求親 正是艶陽桃李辰 明月倍添衾枕思 香風偏惹綺羅身 綺羅身衾枕思 幽歡未已離愁至 數聲餘歌斷孤魂 一點殘燈照雙淚 曉天鸞鶴各西東 獨坐思量疑夢中 沉思疑夢又非夢 愁對朝雲歸碧空 匹馬長嘶望行路 狂生猶再尋遺墓 不逢羅襪步芳塵 但見花枝泣朝露 腸欲斷首頻回 泉戶寂寥誰爲開 頓轡望時無恨淚 垂鞭吟處有餘哀 暮春風暮春日 柳花撩亂迎風疾 常將旅思怨韶光 況是離情念芳質 人間事愁殺人 始聞達路又迷津 草沒銅臺千古恨 花開金谷一朝春 阮肇劉晨是凡物 秦皇漢帝非仙骨 當詩嘉會杳難追 後代遺名徒可悲 悠然來忽然去 是知風雨無常主 我來此地逢雙女 遙似襄王夢雲雨 大丈夫大丈夫 壯氣須除兒女恨 莫將心事戀妖狐 後致遠擢第 東還路上歌詩云 浮世榮華夢中夢 白雲深處好安身 乃退而長往 尋僧於山林江海 結小齋 築石臺 耽玩文書 嘯詠風月 逍遙偃仰於其間 南山淸凉寺·合浦縣月影臺·智理山雙溪寺·石南寺·墨泉石臺 種牧丹 至今猶存 皆其遊歷也 最後 隱於伽倻山海印寺 與兄大德賢俊·南岳師定玄 探賾經論 遊心沖漠 以終老焉出新羅殊異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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