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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8일 (금) 17: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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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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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2)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0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9년04월
시작쪽 19쪽 종료쪽 58쪽 전체쪽 40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5.삼별초의 기인





































본문1-1: (1)강화천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동태와 여몽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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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9-1三別抄亂은 江都(江華)로부터 舊京(開城)에 還都할 지음에 그것을 契機로 하야 이러난것이니 이 亂의 由來를 추워보는 데 있어 吾人은 먼저 江華遷都의 動機와 및 그의 意義와 効果 또는 그로 因하야 일어난 麗蒙 兩國의 關係로부터 살펴볼 必要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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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9-2江華遷都의(○○○○○) 事情(○○) 江華遷都는 第一回 蒙古侵入을 바든 後에 일어난 事實이니 이에 關하야 高麗史節要(卷十六)에 依하면 高宗 十九年 六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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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9-3

崔瑀 會宰樞於其第 議遷都 時國家 昇平旣久 京都 戶至十萬 金碧相望 人情 安土重遷 然畏瑀 無敢發一言者 (中略) 夜別抄指諭金世沖 排門而入 詰瑀曰 松京 太祖以來 歷代持守 凡二百餘年 城堅而兵食足 固當戮力而守 以衛社稷▶P20-1棄此而去 將安所都乎 瑀問守城策 世冲不能對 御史大夫大集成(崔怡 後室의 父)謂瑀曰 世冲效兒女之言 敢沮大議 請斬之 以示中外 鷹揚軍上護軍金鉉寶 希集成意 亦言之 遂引世冲 斬之 是日 瑀奏請王速下殿 西幸江華 王猶豫未決 瑀奪祿轉車百餘兩 輸家財于江華 京師洶洶 令有司 刻日 發送五部人戶 仍榜示城中曰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 又分遣使于諸道 徙民山城海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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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2라 하였다. 太祖以來 三百餘年—金世沖의 言內에 二百餘年 云云이라 하였으나 二는 三의誤가 아니면 거저 어름치고 말한 것으로 생각되거니와—동안 首都로서의 松京은 人戶가 殷盛하야 金碧이 相望하리 만큼 繁昌하였음으로 都城의 人情은 安土重遷에 기우러질 것도 또한 當然한 일이다. 그러나 崔瑀의 威勢에 눌려 兪升旦(兪升旦의 反對論은 다음에 述할 터) 金世沖 以外에는 反對의 發言을 敢히 하는 者가 없었다. 金世沖은 單純한 武人으로서 「城堅而兵食足」이라는 것을 드러 어데까지던저 社稷을 衛護하자는 것이었으나, 具體的인 松京의 守城策을 뭇는 데에는 亦是 對答이 막혔던 것이다. 遷都論이 디디여 大勢를 制하야 崔瑀는 斷然히 金世沖을 베혀 人心을 威壓하고 即日(六月 十六日 乙丑)로 高宗께 奏請하야 速히 江華로 行幸할 것을 재촉하고 期日을 定하야 松京의 五部人戶를 江華에 옮기려 할 새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이라고 榜示하고 또 諸道에 使者를 보내여 地方人民도 山城 海島에 옴긴 것이니 遷都 決定에 當하야 崔瑀의 決心과 勇斷이 어떠하였음을 推察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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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0-3이와 가티 遷都를 決定한 崔瑀는 그 翌日에 二領軍을 江華에 發하야 宮闕의 經營을 急히 하였으나 七月 七日에 高宗이 江華에 건너갔을 때에 江華客館에 入御한 것을 보면 宮室이 미처 整備되기도 前에 遷都를 急히 하였던 것으로서, 遷都時의 倉皇한 情景은 다음의 記事로써 想像할 수가 있는 것이니 同書 高宗 十九年 七月 乙酉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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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1-1

王 發開京 次于昇天府(今 開豊郡) 丙戌 入御江華客館 時 霖雨彌旬 泥濘沒脛 人馬僵仆 達官及良家婦女 至有跣足負戴者 鰥寡孤獨 失所號哭者 不可勝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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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1-2라 하였다. 高麗의 江華遷都는 蒙古의 侵寇에 對한 消極的 抵抗策에서 나온 것이니 高宗十八年(蒙古 太宗 三年) 八月에 撒禮塔이 侵入한 以來로 地方的으로는 朴犀 金慶孫 等의 龜州大捷을 보왔으나 標桿殘暴한 蒙古兵은 疾風과 가티 閃馳하야 西北 一帶를 蹂躙하고 同年 十二月頃에는 開城 附近에까지 出沒함에 이르렀다. 그 우에 蒙古人의 貪虐은 예전 遼•金人과 달러 우리 側의 卑辭厚幣의 外交的 儀禮만으로는 滿足하지 아니하고 侵略地에는 達魯花赤(斷事官)까지 두어 高麗의 主權을 侵蝕하며 麗廷에 向하여는 王公大官의 童男童女를 비롯하야 金銀珠子錦繡綾羅水獺皮 等 珍貴한 物資의 徵索은 그의 度를 極하던 것이다. 이에 對하야 高麗 側에서도 尋常한 手段으로서는 當키 어려움을 覺悟하게 된 것으로서 當時 執政者인 崔瑀는 디디여 遷都의 大事를 斷行치 아니치 못한 것이다.































본문1-2: (2)고려무인의 전통적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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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3: (3)환도문제와 삼별초난과의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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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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