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1)"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새 문서: __NOTOC__ <font face="함초롬돋움"> {{버튼클릭|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버튼클릭|XML 문서 다운받기}} <br...)
 
(본문1: 제목A)
44번째 줄: 44번째 줄:
 
=='''본문'''==
 
=='''본문'''==
 
----
 
----
==='''본문1: 제목A'''===
+
==='''본문1: 1.서언'''===
 
----
 
----
 
{{Layout1
 
{{Layout1
|목차1원문1번={{TagSpage|150-1}}슬라빅(Alexander Slawik)氏는, 이미 한번 東亞日報紙上에도 紹介된 일이 있거니와, 現 墺地利國의 一 靑年史家로서 東洋學 특히 朝鮮史學을 專攻하고 있는 貴異한 學者이다. 在墺國留學 중의 同胞 都宥浩氏의 말을 들으면 슬라빅氏는 方今 朝鮮古代의 民族移動에 관하여 긴 論文(學位論文)을 쓰고 있는데, 氏의 學識과 朝鮮史에 대한 造詣가 相當히 깊어, 그 論文에서 期待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한다. 氏는 漢文과 日文을 能讀할 뿐만 아니라, 善熟히 이를 쓰고 짓고 하며, 또 朝鮮語에 관하여도 매우 留意하고 있다는 篤工의 士이다.
+
|목차1원문1번={{TagSpage|2-1}}中末期의 高麗는 可謂 內亂 外寇로 終始된 觀이 있다 할지니, 特히 內亂 中에도 妙淸의 西京叛亂과 鄭仲夫 一派의 武夫의 亂과 本槁에서 論述하려는 三別抄亂이 가장 著名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三大 亂은 어느 것이나 그의 由來가 자못 複雜多端한 만큼 政治 社會 乃至 思想上에 끼친바 影響이 實로 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三者에 나아가 槪括的으로 살펴보면 後者 即 三別抄亂은 前 二者 即 妙淸 鄭仲夫의 亂에 比하야 자못 趣를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妙淸 鄭仲夫의 亂은 內部的 運動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三別抄亂은 複雜한 內部的 事情 以外에 外部 壓力에 對한 一種의 反撥運動이었다. 그리하야 그의 結果에 있어서도 內部에 끼친바 影響보다도 國內에 뻐더드는 外力의 消長에 至大한 關係를 가진 것이다. 다시 縱으로 三大亂의 裡面에 흐르는 潮流를 살펴보면 妙淸一派로 말미암어 나타난 高麗人의 自我的 精神은 다시 林衍 裴仲孫 等의 排蒙思想으로 出現되였으며 鄭仲夫 一派로 말미암어 馴致된 武士 專橫의 氣勢는 三別抄의 動向에 指針이 되였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脉絡을 추워보면 三別抄亂은 妙淸 鄭仲夫 兩亂의 潮流가 合致된 데에서 出現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吾人은 中末期 高麗에 있어 對內對外의 政治的 動向과 그에 關한 思潮의 對流 形態를 溯究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목차1원문2번={{TagSpage|150-2}}筆者가 앞서 󰡔靑丘學叢󰡕 第13號에 「浿水考」란 一小篇을 發表하였는데, 그것이 前記 都宥浩氏에게 一部 건너가게 되매, (굴러서) 슬라빅氏에게까지 接目 一讀되었던 모양이다. 氏는 拙稿에 대하여 (大體는 贊同이지만) 若干 疑訝의 處, 異議의 部分이 있다고 하여, 一論考(附後)를 日漢文으로 草하여, 都氏를 통하여 나에게 보냈다. 내가 이를 接受한 때는 客臘 念日頃이었다. 海外 累萬里 異域에서, 더구나 氏와 같은 {{TagPage|151-1}}篤工 同攻의 士로부터, 이러한 貴重한 敎評을 蒙惠함에 대하여, 나는 크게 光榮으로 생각하는 同時에 또한 깊이 氏에게 感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氏의 글월은 물론 氏의 自筆에 係한 것으로, 누구든지 보면 字劃의 무르녹음이 西洋人의 筆이라고는 곧이듣지 아니 할 만큼 되었다. 墺國人士 중에도 이렇게 朝鮮史를 眞摯하게 硏究하는이가 있나 하는 {{TagRef|1}}感嘆을 禁치 못하였다.<ref>테스트용 입니다</ref> 우리는 먼 異域에 한 훌륭한 벗을 얻음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氏의 好意에 갑(報)기 爲하여, 또 氏의 異見에 不服하는 點도 있어, 이에 拙文을 草하여 氏의 再敎를 仰하는 바이다.
 
|목차1원문3번={{TagSpage|151-2}}슬라빅氏의 余에게 致한 書의 題目은 즉 「李丙燾 著 󰡔浿水考󰡕를 읽고」란 것이다. 이 書題만으로는 「浿水考」 全體에 관한 評論같이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氏의 論考를 通讀하여 보면, 浿水 그것에 관하여는 何等의 評說과 異論을 보임이 없고, 또 都宥浩氏의 書信에 의하여도 氏의 말이 浿水에 관한 意見을 들어 보던 중 가장 滿足한 解答을 나의 論文에서 처음 보았노라고-이는 물론 過讚이지만-하였다 함으로, 나의 {{TagRef|2}}浿水說의<ref>테스트용 입니다</ref> 主要點에 대하여는 대체로 贊同의 뜻을 가져 異議가 없는 것 같고, 다만 拙稿 중의 部分論 枝葉論이라고 할 만한 󰡔漢書󰡕地理志 玄菟郡 西蓋馬縣條의
 
|목차1원문4번=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
 
|목차1원문5번={{TagSpage|151-3}}云云의 註句에 관한 解釋과, 여기 보이는 馬訾水 及 西蓋馬縣의 {{TagPage|152-1}}位置에 就하여 氏는 나와 見解를 달리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또 여기의 鹽難水(즉 鴨綠江)의 鹽難과 소위 東明傳說 중에 나타나는 ‘大水’의 掩淲 淹 掩施 掩滯 奄利等 種種의 稱號가 古音上 {{TagRef|3}}結局 同一하다는 것<ref>테스트용 입니다</ref>, 저 ‘挹婁’의 古音도 이들과 類似하다는 것, 玄菟郡 上殷台縣의 ‘殷台’의 古音도 또한 이들과 類似한 즉 上殷台縣의 位置는 鹽難水의 中流 혹 上流에 있었다고 생각된다는 것이, 그의 副論이다. (그러나 氏의 이들 新說이 어떠할지?)
 
  
 
+
|목차1해독문1번=중말기의 고려는 가위 내란 외구로 종시된 관이 있다 할지니, 특히 내란 중에도 묘청의 서경반란과 정중부 일파의 무부(武夫)의 난과 본고에서 논술하려는 삼별초난이 가장 그 저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3대 난은 어느 것이나 그의 유래가 자못 복잡다단한 만큼 정치 사회 내지 사상상(上)에 끼친바 영향이 실로 다대(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3자에 나아가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후자 즉 삼별초난은 전 2자 즉 묘청 정중부의 난에 비하여 자못 그 뜻을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묘청 정중부의 난은 내부적 운동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삼별초난은 복잡한 내부적 사정 이외에 외부 압력에 대한 일종의 반발운동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결과에 있어서도 내부에 끼친바 영향보다도 국내에 뻗어드는 외력의 소장(消長)에 지대한 관계를 가진 것이다. 다시 종(縱)으로 이 3대 난의 이면에 흐르는 조류를 살펴보면 묘청 일파로 말미암아 나타난 고려인의 자아적 정신은 다시 임연 배중손 등의 배몽(排蒙)사상으로 출현되었으며 정중부 일파로 말미암아 순치된 무사 전횡의 기세는 삼별초의 동향에 지침이 되었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맥락을 추려보면 삼별초난은 묘청 정중부 양 난의 조류가 합치된 데에서 출현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말기 고려에 있어 대내대외의 정치적 동향과 그에 관한 사조의 대류 형태를 소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목차1해독문1번=테스트입니다
 
|목차1해독문2번=테스트입니다{{TagRefT|1}}<ref group="a">테스트용 입니다</ref>
 
|목차1해독문3번=테스트입니다{{TagRefT|2}}<ref group="a">테스트용 입니다</ref>
 
|목차1해독문4번=테스트입니다
 
|목차1해독문5번=테스트입니다{{TagRefT|3}}<ref group="a">테스트용 입니다</ref>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024년 10월 17일 (목) 14:58 판

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다운받기

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1)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1)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9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8년07월
시작쪽 1쪽 종료쪽 29쪽 전체쪽 29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서언


중말기의 고려는 가위 내란 외구로 종시된 관이 있다 할지니, 특히 내란 중에도 묘청의 서경반란과 정중부 일파의 무부(武夫)의 난과 본고에서 논술하려는 삼별초난이 가장 그 저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3대 난은 어느 것이나 그의 유래가 자못 복잡다단한 만큼 정치 사회 내지 사상상(上)에 끼친바 영향이 실로 다대(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3자에 나아가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후자 즉 삼별초난은 전 2자 즉 묘청 정중부의 난에 비하여 자못 그 뜻을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묘청 정중부의 난은 내부적 운동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삼별초난은 복잡한 내부적 사정 이외에 외부 압력에 대한 일종의 반발운동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결과에 있어서도 내부에 끼친바 영향보다도 국내에 뻗어드는 외력의 소장(消長)에 지대한 관계를 가진 것이다. 다시 종(縱)으로 이 3대 난의 이면에 흐르는 조류를 살펴보면 묘청 일파로 말미암아 나타난 고려인의 자아적 정신은 다시 임연 배중손 등의 배몽(排蒙)사상으로 출현되었으며 정중부 일파로 말미암아 순치된 무사 전횡의 기세는 삼별초의 동향에 지침이 되었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맥락을 추려보면 삼별초난은 묘청 정중부 양 난의 조류가 합치된 데에서 출현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말기 고려에 있어 대내대외의 정치적 동향과 그에 관한 사조의 대류 형태를 소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쪽수▶P2-1中末期의 高麗는 可謂 內亂 外寇로 終始된 觀이 있다 할지니, 特히 內亂 中에도 妙淸의 西京叛亂과 鄭仲夫 一派의 武夫의 亂과 本槁에서 論述하려는 三別抄亂이 가장 그 著名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三大 亂은 어느 것이나 그의 由來가 자못 複雜多端한 만큼 政治 社會 乃至 思想上에 끼친바 影響이 實로 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三者에 나아가 槪括的으로 살펴보면 後者 即 三別抄亂은 前 二者 即 妙淸 鄭仲夫의 亂에 比하야 자못 그 趣를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妙淸 鄭仲夫의 亂은 內部的 運動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三別抄亂은 複雜한 內部的 事情 以外에 外部 壓力에 對한 一種의 反撥運動이었다. 그리하야 그의 結果에 있어서도 內部에 끼친바 影響보다도 國內에 뻐더드는 外力의 消長에 至大한 關係를 가진 것이다. 다시 縱으로 이 三大亂의 裡面에 흐르는 潮流를 살펴보면 妙淸一派로 말미암어 나타난 高麗人의 自我的 精神은 다시 林衍 裴仲孫 等의 排蒙思想으로 出現되였으며 鄭仲夫 一派로 말미암어 馴致된 武士 專橫의 氣勢는 三別抄의 動向에 指針이 되였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脉絡을 추워보면 三別抄亂은 妙淸 鄭仲夫 兩亂의 潮流가 合致된 데에서 出現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吾人은 中末期 高麗에 있어 對內對外의 政治的 動向과 그에 關한 思潮의 對流 形態를 溯究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문2: 제목B


테스트입니다
쪽수▶P152-2슬라빅(Alexander Slawik)氏는, 이미 한번 東亞日報紙上에도 紹介된 일이 있거니와, 現 墺地利國의 一 靑年史家로서 東洋學 특히 朝鮮史學을 專攻하고 있는 貴異한 學者이다. 在墺國留學 중의 同胞 都宥浩氏의 말을 들으면 슬라빅氏는 方今 朝鮮古代의 民族移動에 관하여 긴 論文(學位論文)을 쓰고 있는데, 氏의 學識과 朝鮮史에 대한 造詣가 相當히 깊어, 그 論文에서 期待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한다. 氏는 漢文과 日文을 能讀할 뿐만 아니라, 善熟히 이를 쓰고 짓고 하며, 또 朝鮮語에 관하여도 매우 留意하고 있다는 篤工의 士이다.
테스트입니다현대문주4▶[a 1]
쪽수▶P152-3筆者가 앞서 󰡔靑丘學叢󰡕 第13號에 「浿水考」란 一小篇을 發表하였는데, 그것이 前記 都宥浩氏에게 一部 건너가게 되매, (굴러서) 슬라빅氏에게까지 接目 一讀되었던 모양이다. 氏는 拙稿에 대하여 (大體는 贊同이지만) 若干 疑訝의 處, 異議의 部分이 있다고 하여, 一論考(附後)를 日漢文으로 草하여, 都氏를 통하여 나에게 보냈다. 내가 이를 接受한 때는 客臘 念日頃이었다. 海外 累萬里 異域에서, 더구나 氏와 같은 ▶P153篤工 同攻의 士로부터, 이러한 貴重한 敎評을 蒙惠함에 대하여, 나는 크게 光榮으로 생각하는 同時에 또한 깊이 氏에게 感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氏의 ▶P154-1글월은 물론 氏의 自筆에 係한 것으로, 누구든지 보면 그 字劃의 무르녹음이 西洋人의 筆이라고는 곧이듣지 아니 할 만큼 되었다. 墺國人士 중에도 이렇게 朝鮮史를 眞摯하게 硏究하는이가 있나 하는 원문주4▶感嘆을 禁치 못하였다.[1] 우리는 먼 異域에 한 훌륭한 벗을 얻음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氏의 好意에 갑(報)기 爲하여, 또 氏의 異見에 不服하는 點도 있어, 이에 拙文을 草하여 氏의 再敎를 仰하는 바이다.
테스트입니다현대문주5▶[a 2]
쪽수▶P154-2슬라빅氏의 余에게 致한 書의 題目은 즉 「李丙燾 著 󰡔浿水考󰡕를 읽고」란 것이다. 이 書題만으로는 「浿水考」 全體에 관한 評論같이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氏의 論考를 通讀하여 보면, 浿水 그것에 관하여는 何等의 評說과 異論을 보임이 없고, 또 都宥浩氏의 書信에 의하여도 氏의 말이 浿水에 관한 意見을 들어 보던 중 가장 滿足한 解答을 나의 論文에서 처음 보았노라고-이는 물론 過讚이지만-하였다 함으로, 나의 원문주5▶浿水說의[2] 主要點에 대하여는 대체로 贊同의 뜻을 가져 異議가 없는 것 같고, 다만 拙稿 중의 部分論 枝葉論이라고 할 만한 󰡔漢書󰡕地理志 玄菟郡 西蓋馬縣條의
테스트입니다
쪽수▶P154-3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
테스트입니다현대문주6▶[a 3]
쪽수▶P154-4云云의 註句에 관한 解釋과, 여기 보이는 馬訾水 及 西蓋馬縣의 ▶P155位置에 就하여 氏는 나와 見解를 달리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또 여기의 鹽難水(즉 鴨綠江)의 鹽難과 소위 東明傳說 중에 나타나는 ‘大水’의 掩淲 淹 掩施 掩滯 奄利等 種種의 稱號가 古音上 원문주6▶結局 同一하다는 것[3], 저 ‘挹婁’의 古音도 이들과 類似하다는 것, 玄菟郡 上殷台縣의 ‘殷台’의 古音도 또한 이들과 類似한 즉 上殷台縣의 位置는 鹽難水의 中流 혹 上流에 있었다고 생각된다는 것이, 그의 副論이다. (그러나 氏의 이들 新說이 어떠할지?)





































본문3: 제목C


테스트입니다
쪽수▶P13(생략) 되지 못한다-그러나 稷山 舊邑에서 直北 約 8~9里 되는 곳에 ‘都下里’(혹은 都監里ㆍ忠南 天安郡 成歡面)란 里名과 都下里에서 西北 약 6里되는 곳 즉 安城川 合流處에 ‘安宮▶P14-1里’(或云宮里ㆍ同上)란 里名과 其外 同川 流域인 振威郡 芙蓉面의 ‘坪宮里’(一云 上宮里) ‘新宮里’(一云 下宮里) 등의 里名이 있는 것은 크게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들 洞里에서 아직 그럴듯한 遺跡과 遺物은 發見하지 못하였지만, 그 里名은 必然 尋常하지 않은 久遠한 由來와 歷史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속히 말하면, 稷山 舊邑의 北 安城川 流域은 이 等地를 國都로 삼던 어느 時代 즉 辰國時代 내지 그 正統인 馬韓時代의 宮闕都市가 있던 곳이 아닌가.
이병도 삼한-1.png
쪽수▶P14-2
이병도 삼한-1.png
테스트입니다
쪽수▶P14-3그리하여 그러한(都字 宮字 붙은) 里名이 傳稱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최근 物故한 中樞院 囑託 大原利武氏도 일찍이 이 地名에 注意를 拂하여 同 地域을 馬韓時代의 都邑 所在地로 推定한 일이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意見과 전혀 一致하며, 오직 나는 馬韓時代뿐만 아니라, 그 以前 辰國時代로부터의▶P15-1都闕 소재지로 보고 싶다.
테스트입니다
원문입니다
테스트입니다
원문입니다



































































































본문4: 제목D


테스트입니다
辰國은 저 朝鮮(樂浪) 眞番 臨屯의 諸部族과 한 가지 古代 半島內의
테스트입니다
一國으로 일찍이 中國에 알려진 著名한 나라이어니와, 辰國의 名이 文獻
테스트입니다
上에 나타나기는 이미 󰡔史記󰡕, 󰡔漢書󰡕의 朝鮮傳에서부터이다. 󰡔漢
테스트입니다
書󰡕 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史記󰡕 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다시피한
테스트입니다
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修辭上의 異同과 添削이 있음은 別問題로 삼고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테스트용 입니다
  2. 테스트용 입니다
  3. 테스트용 입니다






현대문주


  1. 테스트용 입니다
  2. 테스트용 입니다
  3. 테스트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