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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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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1일 (금) 20:2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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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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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浿水考 학술지 테스트테스트 수록권호 력사과학 1955-1 발행기관 테스트테스트
저자 최익한 역자 테스트 집필일자 1930년03월12일 게재연월 1930년03월
시작쪽 009쪽 종료쪽 040쪽 전체쪽 032쪽 연재여부 @ 범주 자료 분야 어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손진태의 「지나민족의 웅계신앙과 그 전설」은 『진단학보』 3권(1935.9.)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은 1장 "웅계에 관한 신앙"과 2장 "계신전설"로 구성된다. 이청원은 주석1▶「『진단학보』 제3권을 읽고」[해제 1]에서 이 글이 분석한 중국의 웅계신앙의 특징은 조선의 웅계신앙을 설명하는 데 유익하다고 주장하였다.






목차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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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본문1: 서론


테스트입니다
쪽수▶P150-1슬라빅(Alexander Slawik)氏는, 이미 한번 東亞日報紙上에도 紹介된 일이 있거니와, 現 墺地利國의 一 靑年史家로서 東洋學 특히 朝鮮史學을 專攻하고 있는 貴異한 學者이다. 在墺國留學 중의 同胞 都宥浩氏의 말을 들으면 슬라빅氏는 方今 朝鮮古代의 民族移動에 관하여 긴 論文(學位論文)을 쓰고 있는데, 氏의 學識과 朝鮮史에 대한 造詣가 相當히 깊어, 그 論文에서 期待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한다. 氏는 漢文과 日文을 能讀할 뿐만 아니라, 善熟히 이를 쓰고 짓고 하며, 또 朝鮮語에 관하여도 매우 留意하고 있다는 篤工의 士이다.
현대문주1▶테스트입니다[a 1]
쪽수▶P150-2筆者가 앞서 󰡔靑丘學叢󰡕 第13號에 「浿水考」란 一小篇을 發表하였는데, 그것이 前記 都宥浩氏에게 一部 건너가게 되매, (굴러서) 슬라빅氏에게까지 接目 一讀되었던 모양이다. 氏는 拙稿에 대하여 (大體는 贊同이지만) 若干 疑訝의 處, 異議의 部分이 있다고 하여, 一論考(附後)를 日漢文으로 草하여, 都氏를 통하여 나에게 보냈다. 내가 이를 接受한 때는 客臘 念日頃이었다. 海外 累萬里 異域에서, 더구나 氏와 같은 ▶P151-1篤工 同攻의 士로부터, 이러한 貴重한 敎評을 蒙惠함에 대하여, 나는 크게 光榮으로 생각하는 同時에 또한 깊이 氏에게 感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氏의 글월은 물론 氏의 自筆에 係한 것으로, 누구든지 보면 그 字劃의 무르녹음이 西洋人의 筆이라고는 곧이듣지 아니 할 만큼 되었다. 墺國人士 중에도 이렇게 朝鮮史를 眞摯하게 硏究하는이가 있나 하는 원문주1▶感嘆을 禁치 못하였다.[1] 우리는 먼 異域에 한 훌륭한 벗을 얻음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氏의 好意에 갑(報)기 爲하여, 또 氏의 異見에 不服하는 點도 있어, 이에 拙文을 草하여 氏의 再敎를 仰하는 바이다.
현대문주2▶테스트입니다[a 2]
쪽수▶P151-2슬라빅氏의 余에게 致한 書의 題目은 즉 「李丙燾 著 󰡔浿水考󰡕를 읽고」란 것이다. 이 書題만으로는 「浿水考」 全體에 관한 評論같이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氏의 論考를 通讀하여 보면, 浿水 그것에 관하여는 何等의 評說과 異論을 보임이 없고, 또 都宥浩氏의 書信에 의하여도 氏의 말이 浿水에 관한 意見을 들어 보던 중 가장 滿足한 解答을 나의 論文에서 처음 보았노라고-이는 물론 過讚이지만-하였다 함으로, 나의 원문주2▶浿水說의[2] 主要點에 대하여는 대체로 贊同의 뜻을 가져 異議가 없는 것 같고, 다만 拙稿 중의 部分論 枝葉論이라고 할 만한 󰡔漢書󰡕地理志 玄菟郡 西蓋馬縣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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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
현대문주3▶테스트입니다[a 3]
쪽수▶P151-3云云의 註句에 관한 解釋과, 여기 보이는 馬訾水 及 西蓋馬縣의 ▶P152-1位置에 就하여 氏는 나와 見解를 달리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또 여기의 鹽難水(즉 鴨綠江)의 鹽難과 소위 東明傳說 중에 나타나는 ‘大水’의 掩淲 淹 掩施 掩滯 奄利等 種種의 稱號가 古音上 원문주3▶結局 同一하다는 것[3], 저 ‘挹婁’의 古音도 이들과 類似하다는 것, 玄菟郡 上殷台縣의 ‘殷台’의 古音도 또한 이들과 類似한 즉 上殷台縣의 位置는 鹽難水의 中流 혹 上流에 있었다고 생각된다는 것이, 그의 副論이다. (그러나 氏의 이들 新說이 어떠할지?)



































본문2: 一. 황하문화




본문2-1: ① 재배문화와 중국문화 일반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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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3(생략) 되지 못한다-그러나 稷山 舊邑에서 直北 約 8~9里 되는 곳에 ‘都下里’(혹은 都監里ㆍ忠南 天安郡 成歡面)란 里名과 都下里에서 西北 약 6里되는 곳 즉 安城川 合流處에 ‘安宮▶P14-1里’(或云宮里ㆍ同上)란 里名과 其外 同川 流域인 振威郡 芙蓉面의 ‘坪宮里’(一云 上宮里) ‘新宮里’(一云 下宮里) 등의 里名이 있는 것은 크게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들 洞里에서 아직 그럴듯한 遺跡과 遺物은 發見하지 못하였지만, 그 里名은 必然 尋常하지 않은 久遠한 由來와 歷史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속히 말하면, 稷山 舊邑의 北 安城川 流域은 이 等地를 國都로 삼던 어느 時代 즉 辰國時代 내지 그 正統인 馬韓時代의 宮闕都市가 있던 곳이 아닌가.
이병도 삼한-1.png
쪽수▶P14-2
이병도 삼한-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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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3그리하여 그러한(都字 宮字 붙은) 里名이 傳稱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최근 物故한 中樞院 囑託 大原利武氏도 일찍이 이 地名에 注意를 拂하여 同 地域을 馬韓時代의 都邑 所在地로 推定한 일이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意見과 전혀 一致하며, 오직 나는 馬韓時代뿐만 아니라, 그 以前 辰國時代로부터의▶P15-1都闕 소재지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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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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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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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조선중앙일보』, 1935.11.9~14.






원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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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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