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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학술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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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국사관 관장인 역사학자 신석호(1904~1981)는 한 해 뒤인 1948년 12월 학술지 『사해(史海)』 창간호에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 후 독도 문제를 처음 학술적으로 다룬 이 글의 머리말은 “필자는 작년 8월 16일부터 약 2주일간 민정장관 안재홍 선생의 명령을 받고 독도를 실지(實地) 답사한 일이 있으므로 이 일문(一文)을 초(草)하여 독도가 본래 우리나라에 속한 섬이었던 것을 명백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독도의 지세(地勢)와 산물(産物)’ ‘독도의 명칭'‘삼봉도(三峰島)와 독도’‘울릉도 소속 문제와 독도’‘울릉도 개척과 독도’‘일본의 독도 강탈’‘일본 영유 이후의 독도’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독도를 역사적·자료적·연구사적으로 고찰했다. 신석호가 이 논문에서 고증하고 주장한 내용은 1950년대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한국 측 논리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독도 1947』<ref>이 책은 전후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독도 인식과 정책에 대해 다룬다.</ref>(2010년·돌베개)에서 “신석호의 글은 1947~1948년의 시점에 작성된 독도 영유권 관련 자료·근거의 집대성이었으며, 독도 연구의 시원을 연 기념비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독도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로 외교부에 제공했다. 그는 독도 문제가 한일회담에서 중요 의제로 떠오르자 『사상계』<ref> 1953년 4월에 장준하가 문교부 기관지인 《사상》을 인수해 창간한 월간 종합교양지이다. </ref> 1960년 8월호에 ‘독도의 내력’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조치에 대해 ‘강도행위가 아니면 사기행위’라고 질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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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신석호는 한 해 뒤인 1948년 12월 학술지 『사해(史海)』 창간호에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 후 독도 문제를 처음 학술적으로 다룬 이 글의 머리말은 “필자는 작년 8월 16일부터 약 2주일간 민정장관 안재홍 선생의 명령을 받고 독도를 실지(實地) 답사한 일이 있으므로 이 일문(一文)을 초(草)하여 독도가 본래 우리나라에 속한 섬이었던 것을 명백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독도의 지세(地勢)와 산물(産物)’ ‘독도의 명칭'‘삼봉도(三峰島)와 독도’‘울릉도 소속 문제와 독도’‘울릉도 개척과 독도’‘일본의 독도 강탈’‘일본 영유 이후의 독도’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독도를 역사적·자료적·연구사적으로 고찰했다. 신석호가 이 논문에서 고증하고 주장한 내용은 1950년대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한국 측 논리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독도 1947』<ref>이 책은 전후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독도 인식과 정책에 대해 다룬다.</ref>(2010년·돌베개)에서 “신석호의 글은 1947~1948년의 시점에 작성된 독도 영유권 관련 자료·근거의 집대성이었으며, 독도 연구의 시원을 연 기념비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독도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로 외교부에 제공했다. 그는 독도 문제가 한일회담에서 중요 의제로 떠오르자 『사상계』<ref> 1953년 4월에 장준하가 문교부 기관지인 《사상》을 인수해 창간한 월간 종합교양지이다. </ref> 1960년 8월호에‘독도의 내력' 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조치에 대해 ‘강도행위가 아니면 사기행위’라고 질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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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7일 (금) 22: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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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申奭鎬)
신석호.jpg
출처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080
 
한글명 신석호 한자명 申奭鎬 영문명 Shin SokHo 가나명 寺谷修三 이칭 寺谷修三
성별 남성 생년 1904년 몰년 1981년 출신지 경상북도 봉화 전공 사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해방 이후 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 한국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한 학자, 역사학자이다.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인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었고,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되고, 수사관으로 승진해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해방 후 일제가 없애려던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유리원판을 소각 직전에 빼돌려 일제의 침략상을 밝히는데 기여했다.


생애


학창 시절

1910년부터 홍치유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18년 4월 경북 봉화공립보통학교[1]에 입학, 3·1운동과 관련되어 1919년 6월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4월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 1921년 3월까지 수학했다. 귀국 후 1921년 4월 중동학교에 입학, 1924년 3월 졸업했다. 졸업 직후인 192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1926년 3월 수료 후,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1929년 3월 졸업했다.


해방 전 근무

조선총독부[2] 직속 기구인 조선사편수회[3]의 촉탁이 되었고, 1930년 5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되고, 1937년 9월 수사관으로 승진해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조선사편수회 설치 초기인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 소재 대학 출신들이 직원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경성제대가 설치된 이후로는 이 대학 사학과 졸업생들이 주로 충당되었다. 신석호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1930년 8월에는 청구학회의 편집위원이 되어 10년간 활동했다. 한편 1934년 진단학회[4]의 발기인이 되었다. 1940년에는 기원2600년축전 기념장을 수여받았다.


조선사편수회.jpg
조선사편수회 위원장 및 회장
출처 : 우리역사넷〕



해방 직후

해방 직후, 조선사편수회가 보관하고 있던 「일본공사관기록」의 원판을 소각하려 하자, 김건태와 함께 중추원 서고로 옮겨 보관했다. 또 이 자료에 기초해 해방 후 한국사 연구기관의 모태가 된 국사관[5](현 국사편찬위원회)을 창설했다. 해방 직후 근현대 일본측 자료에 가장 정통한 학자 중 한명이었다. 1947년 한국산악회의 독도 학술 조사에 참가했다. 1948년 12월 역사잡지 《사해》에 한국의 독도 영유권 역사를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은 이후 독도 연구는 물론 한국의 독도 인식과 정책의 기본적인 골조를 세워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공사관기록.png
일본공사관기록 1권 1장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현대 한국 역사 교육과 문화의 선구자

1945년 8월 진단학회 상임위원, 10월 조선역사협회 부회장, 12월 조선사연구회 부회장이 되었다. 1946년 1월에는 임시중등국사교원양성소를 설립하고 강사로 활동했고, 3월에는 국사관을 설립, 9월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1946년 3월 고려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1947년 1월 국민학교 및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수요목제정위원, 2월에는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이 되었다. 1949년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다. 1951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겸임했으며, 1954년 제1회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고,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62년에는 독립유공자상훈심의위원회 위원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종신회원이 되었다. 1961년에는 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5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6]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67년 12월 한국사연구회를 조직, 회장으로 취임했다.


연구


독도 학술 조사

신석호는 한 해 뒤인 1948년 12월 학술지 『사해(史海)』 창간호에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 후 독도 문제를 처음 학술적으로 다룬 이 글의 머리말은 “필자는 작년 8월 16일부터 약 2주일간 민정장관 안재홍 선생의 명령을 받고 독도를 실지(實地) 답사한 일이 있으므로 이 일문(一文)을 초(草)하여 독도가 본래 우리나라에 속한 섬이었던 것을 명백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독도의 지세(地勢)와 산물(産物)’ ‘독도의 명칭'‘삼봉도(三峰島)와 독도’‘울릉도 소속 문제와 독도’‘울릉도 개척과 독도’‘일본의 독도 강탈’‘일본 영유 이후의 독도’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독도를 역사적·자료적·연구사적으로 고찰했다. 신석호가 이 논문에서 고증하고 주장한 내용은 1950년대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한국 측 논리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독도 1947』[7](2010년·돌베개)에서 “신석호의 글은 1947~1948년의 시점에 작성된 독도 영유권 관련 자료·근거의 집대성이었으며, 독도 연구의 시원을 연 기념비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독도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로 외교부에 제공했다. 그는 독도 문제가 한일회담에서 중요 의제로 떠오르자 『사상계』[8] 1960년 8월호에‘독도의 내력' 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조치에 대해 ‘강도행위가 아니면 사기행위’라고 질타했다.


독도위치.jpg
신석호가 1948년 12월 발표한 '독도 소속에 대하여' 논문에 첨부된 지도.
출처 : 조선일보』2020년 5월 10일자 기사〕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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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
  2. 1910년∼1945년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한 일본 제국주의 최고의 식민통치기구
  3. 1925년 일제가 한국사를 연구 편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부설로 설치한 한국사 연구기관.
  4. 1934년 한국 및 인근지역 문화의 연구를 위해 설립된 학술단체.
  5. 1946년 3월에 신석호 등의 인사가 조선사편수회 자료를 접수하여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 설치했다. 1949년 3월 대통령령 제417호로 직제가 국사편찬위원회로 개편되었다.
  6. 민족 문화의 보전 · 전승 · 계발 · 연구를 추진하여 민족 문화의 진흥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1965년 서울에서 민간 단체로 발족된 재단법인.
  7. 이 책은 전후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독도 인식과 정책에 대해 다룬다.
  8. 1953년 4월에 장준하가 문교부 기관지인 《사상》을 인수해 창간한 월간 종합교양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