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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7일 (일) 18:2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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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운(白南雲)
백남운.jpg
출처 : 러시아 위키피디아 〈백남운〉 페이지
 
한글명 백남운 한자명 白南雲 영문명 Paek Nam-un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894년 몰년 1979년 출신지 고창 전공 역사학, 경제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식민지 조선과 해방 공간 그리고 북한에서 활약한 역사학자, 경제학자, 정치인.


생애

백남운의 생애는 홍종욱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서술하였다.[1]


출생과 성장

백남운은 1894년 2월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1912년부터 3년간 당시 식민지 조선 최고의 관립학교 중 하나였던 수원농림학교에서 배웠다. 이후 강화공립보통학교 교원, 강화군 삼림조합 기수 등을 지냈고, 1918년 10월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일본 유학

일본에서 건너간 뒤 얼마간 1919년 1월 가이조샤(改造社)를 창립하는 야마모토 사네히코(山本實彦) 집에서 ‘서생’으로 머물었다.[2] 어떤 인연으로 야마모토와 맺어졌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1927년에 백남운이 야마모토에게 보낸 편지가 전하고,[3], 1932년 5월 야마모토가 경성을 여행했을 때 ‘오랜 지인(年来の知己)’ 백남운과 여러 차례 만난 것으로 보아[4], 두 사람 사이의 친교는 계속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남운은 1919년 3월 도쿄고등상업학교(東京高等商業學校)에 진학했다. 동경고상은 마침 1920년부터 6년제의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으로 승격되었다. 1922년 본과에 올라간 백남운은 일년 전 부임한 다카타 야스마(高田保馬)의 지도를 받게 된다. 후일 백남운은 「사회학의 성립 유래와 임무」라는 글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하였고, 또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활약하면서도 ‘생명욕’, ‘사회력’ 등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다카다 사회학의 영향이 지적되기도 한다.[5]


식민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

1925년 3월 도쿄상대를 졸업한 백남운은 귀국과 동시에 연희전문학교(延禧専門学校) 상과(商科) 교원으로 부임했다. 당시 연전 상과 과장은 1922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조선의 가와카미 하지메’라 불리던 이순탁(李順鐸)이었다.

역사가로서 백남운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데는 1933년 9월 가이조샤(改造社) 경제학 전집 제61권으로 출판된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의 역할이 컸다. 사적유물론에 입각해 한국 고대사를 정리한 이 책은 당대 일본과 중국의 마르크스 역사학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한국사 연구에서 오늘날까지도 참조되는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 교원으로서 한국 사회사 연구를 개척한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는 이 책을 “조선의 종합경제사는 이에 새로운 출발점을 부여받았다.”[6]고 높이 평가했다.

백남운은 조선경제학회를 세워 스스로 대표간사를 맡고 중앙아카데미 창설을 주창하는 등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활약했다. 1937년에는 『조선봉건사회경제사(朝鮮封建社會經濟史)』를 펴내는 등 경제사 연구의 심화를 꾀하나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3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연전 상과의 교원이었던 이순탁, 백남운, 노동규 등이 체포된 ‘연희전문 경제연구회 사건’은 ‘원산민족해방전선 사건’과 더불어 중일전쟁 이후 일어난 대표적인 지식인 탄압 사건이었다. 일제 관헌은 이들 두 사건을 코민테른의 인민전선전술에 입각한 활동으로 몰고 갔지만, 특히 ‘연희전문 경제연구회 사건’의 경우는 교원 및 학생의 일상적인 연구, 교육에 대한 탄압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옥중에서 전향서를 쓰는 등의 고초를 겪은 백남운은 1940년 7월 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연희전문에서 쫓겨났다.


해방 공간에서 정치인으로 활약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백남운은 조선학술원을 창설하고 스스로 위원장을 맡았다. 식민지기의 중앙아카데미 창설 주장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경성제국대학에서 제국 자를 뗀 경성대학의 자치위원장을 맡아 대학 재건에 힘썼다. 1945년 12월에는 정식으로 법문학부 교수로 임명되나 1946년 6월 미군정의 대학 운영에 반대하여 교수직을 그만뒀다. 한편 1946년 2월에는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다 북한으로 귀국한 조선독립동맹과 연이 닿아 그 경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정치의 일선에 나섰다. 그 뒤 조선독립동맹은 신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1946년 가을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합당을 둘러싸고, 백남운은 폭 넓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주장하며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여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남조선노동당 결성에 대항하지만 실패했다. 그 후 여운형이 위원장을 맡은 근로인민당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북한에서 활동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가한 백남운은 교육상(1948~1956), 과학원장(1956~1961), 노동당 중앙위원(1961~1979), 최고인민회의 의장(1967~1972) 등을 역임했다. 남쪽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 숙청을 당하는 등 비참한 결말을 지은 데 비해 백남운은 말년까지 북한 정권의 중추에 머물렀다. 1979년 6월 85세로 사망한 백남운은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연구


데이터


Data Network





참고자원




주석


  1. 洪宗郁, 「白南雲: 普遍としての〈民族=主体〉」, 趙景達 외 편, 『講座 東アジアの知識人 4 戦争と向き合って』, 有志舎, 2014(출판사 책 소개 페이지 연결)
  2. 방기중,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 1930~40년대 백남운의 학문과 정치경제 사상』, 역사비평사, 1992, 44쪽.
  3. 改造社関係資料研究会編, 『光芒の大正―川内まごころ文学館蔵山本實彦関係書簡集―』, 思文閣, 2009.
  4. 山本實彦, 『満・鮮』, 改造社, 1932, 17~28쪽.
  5. 이준식, 「백남운의 사회사 인식」,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40, 1993.12.
  6. 四方博, 「朝鮮」, 社會經濟史學會編, 『社會經濟史學の發達』, 岩波書店,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