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학보 제3권을 읽고(이청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본문3: 진단학보(震檀學報) 제3권을 읽고(三) (「동아일보」1935년 11월 13일))
1번째 줄: 1번째 줄:
 
__NOTOC__
 
__NOTOC__
 
<font face="함초롬돋움">
 
<font face="함초롬돋움">
{{버튼클릭|[[:분류:ArticleJD|동아일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버튼클릭|[http://dh.aks.ac.kr/~nkh/xml/jd/JDA193509076.xml XML 문서 보기]}}
+
{{버튼클릭|[[:분류:ArticleJD|동아일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버튼클릭|XML 문서 보기}}
 
<br/><br/>
 
<br/><br/>
 
{{원고정보JD  
 
{{원고정보JD  

2023년 12월 2일 (토) 02:55 판

동아일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보기

진단학보 제3권을 읽고(이청원)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진단학보 제3권을 읽고(이청원) 학술지 동아일보 수록권호 동아일보_19351109 발행기관 동아일보사
저자 이청원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5년11월
시작쪽 3쪽 종료쪽 3쪽 전체쪽 연재여부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1935년 11월 동아일보에 실린 이청원의 진단학보 제3권 서평.




목차







본문


본문1: 진단학보(震檀學報) 제3권을 읽고(上) (「동아일보」1935년 11월 9일)


지금까지 무시하여 왔던 조선의 역사적 과거를 알자! 이것은 현금 조선인 전체의 요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 요구 중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금일의 기형적인 조선은 많이 왜곡되어 있다 할지언정 그것은 바로 옛날의 조선의 발전한 것이었다. 물론 그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유기적, 진화적인 것이 아니고 도약적인 변화 그것이었다. --현금의 기형적인 일견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위협적인 특수성의 사적발전에 있어서 과학적으로 분탁分柝하여서만이 이것의 해결적 내용의 기초적 인식과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이 곳에 조선역사연구의 현실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過去한 역사적 사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호화로운 약동을 치게 하는 것은 우리들 과학적 학도들의 격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작년 중춘中春 진단학회가 이 나라의 일부인사들의 기대아래에서 창립되고 그 회보로서 진단학보가 삼권까지 세상에 나왔다. 이것은 빈약한 우리 학계에 있어서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좋지 못한 결과도 산출하였다는 것을 조금도 숨겨서는 아니 된다. “사회적 운행을 초월한 순수사유”이니, “순수한 개인의 자기사상”이니 하는 따위의 “늘 점차적으로”라는 기분 좋은 선율(메로틱)에 따라가는 관념론적 사관으로 이 나라의 젊은 학구자學究者들에게 소화불량의 결과를 주었다는 것이 즉 그것이다. 우리는 늘 이상과 같은 관점과 준비 아래서만 이 회會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울 수 있는 것이다.
@
인제 이 학보 제삼권의 내용을 보건대, 그에는 당연히 제기하여야 할 상당히 귀중한 문제가 가만히 있으며 종래의 케케묵은 통속사가들보다 엄청난 발전의 자취가 보인다. 그러나 발전이라는 것은 선행자들과 전연 본질적으로 다른 발전이 아니고 오직 그들 선행자들의 제기한 명제를 일반화하고 수정하고 보충하고 다른 일면을 분리하였다는 의미에서이다. 이 의미에서 우리 학계에 남겨준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시민적 유산도 받지 못한 이 나라의 신흥 사학계에 있어서는, 인제 각 논문을 일독하고 필자의 소감을 약간 적어볼까 한다.
@
◇역대가집(歷代歌集) 편찬의식에 대하여(조윤택趙潤澤씨)
@
조선은 유독 남달리 시가가 다른 소설, 희곡 보다는 훨씬 발달하였던 것이다.
@
우리는 이에 대하여 약간 말하여보자. 그것은 이 논문의 필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시가는 신분, 격식의 여하를 불구하고 뚜렷한 발전을 본 것이니 이것은 상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 형태의 여하를 불구하고 구래의 생산양식을 파괴하는 것이나 조선에 있어서는 원시공산사회부터 노예소유자적 구성에로의 발전, 전화轉化는 즉 이 변혁은 상업의 미발달에 제약되어서 이상하게도 불철저하였다. 이것은 원시공산사회의 유물이 광범히 여명餘命을 보존케 한 역사적 조건으로 그 중 원시공산사회의 가무의 유풍遺風은 특히 현저하였던 것으로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은 그의 좋은 예이다. 이 곳에 조선에 있어서의 시가詩歌발전의 사회적, 역사적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문학사상에 있어서의 시가의 지위는 “중추적中樞的”인 것이다. 필자 조윤택씨는 근래에 와서 시가연구의 발표로서 학계에 나타난 청년학도로서, 그는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비로소 “아세아”적 봉건조선을 창설한 통일 후 신라의 역사적인 일대전환기인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에 각간위인角干魏人과 화상대구和尙大矩가 칙명에 의하여 “삼대목三大目”을 편찬한 것을 일본의 만엽집萬葉集에 비응比應하면서 조선에 있어서의 가집 편찬사업의 사적발전의 단서라고 한 다음, 봉건고려에 와서는 이 사업은 하등의 진전을 보지 못하였으나 이조에 와서는 커다란 진전을 보았고, 씨는 이에 대하여 “이조는 유교로써 건국의 이상을 세웠던 만큼 가락歌樂에 대하여는 특별한 용의用意를 한 듯하여, 우선 창업당초, 국가대강大綱의 조직제도가 성립되자 곧 힘을 구악舊樂정리와 신악新樂성립에 썼으니 운운”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충실한 분석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것은 아니었다. 봉건이조의 지배자 철학으로서의 유교, 그와 이 가집편찬의 성대한 것의 내면적인 분석이 결여되지 않았는가 하는 감이 있다. 즉 봉건이조의 이데올로기적 조류로서의 유교는 이 봉건관료 양반적으로 조직된 신분제도의 강화 및 그를 유교적인 화려한 의식에 의하여 둘러싸고 그 제도적 위엄을 민중의 달할 수 없는 지점에 놓기 위하여서는 절대로 이 화려하기 천사적天使的이며, 따라서 왕조적으로 조성된 노래와 그의 보편화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 곳에서 봉건이조에 있어서의 가집편찬의 성대를 본 비밀을 발견하여서만 비로소 문제제기의 정당성과 옳은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씨는 다시 붓을 돌려 민간에 있어서의 가집편찬을 이조유교사에 있어서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이발기발理發氣發(세칭 사칠四七논쟁)논쟁의 일방의 웅雄으로서의 이퇴계의 문헌을 인용하고 그 외에 악장가사樂章歌詞에 관하여 또 이조 중엽이후에 편찬된 주요한 가집으로서의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집海東歌集, 금고가곡今古歌曲, 동가선남東歌選南, 동태평가董太平歌,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을 구체적인 사료에 있어서 해설하였다. 그러고 씨는 본론에 들어가 가체분류歌體分類, 작가, 원작, 분절分節, 편자 및 서발序跋에 대한 편찬자의 의의를 말하였다. 대관절 이 소론은 시가에 대한 근래에 드문 논색論索이라 하겠다.
@


































본문2: 진단학보(震檀學報) 제3권을 읽고(中) (「동아일보」1935년 11월 12일)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이상백李相佰씨)
@
이 논문은 금권今券에 와서 완결된 것으로 이씨조선 개국초기의 봉건적, 왕조적 특권을 중심으로 한 이모형제異母兄弟의 대난투에 있어서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씨 독특한 필치로 된 논문이다. 씨는 태조와 그의 건국에 있어서의 잊지 못할 공신으로서, 도전道傳, 남은南誾 등과의 친밀한 상호관계로부터, 이른바 세자문제에 있어서의 그들의 이해관계의 동일同一을 논하고, 방원芳遠=태종의 전후 모순되는 논죄論罪와 후세의 절대주의적 교육을 받은 사가들이, 태조와 도전道傳, 남은南誾 양인兩人을 분리하야 후자에게만, 이른바 무인변란戊寅變亂의 죄를 부담시켜서, 태종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를 누열陋劣하다 논하고, 그러므로 세상에서 정도전란亂이라고 하는 무인란은 방원芳遠이, 태조세자(방석芳碩), 도전道傳, 남은南誾 등을 상대로 한 “쿠데타”이고, 태조는 최후까지 이것을 일종의 반란으로 분노하였고 자존심 많은 방원芳遠과 건국공신들과의 불화를 논한 다음 최후로, 도전道傳의 신분, 혈통문제를 논하였다. 이 문제는 그 당시의 신분적으로 조직된 봉건관료제도에 있어서는 차정적次定的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씨는 신분 운운하는 계통으로서 단양丹陽 우씨禹氏가 현보玄寶 일가의 소전所傳과 차원부車原頫 일문一門의 새원기璽寃記 주장을 논하고 그 전설의 진상을 규명, 그 전설의 성립되는 이유, 형상,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역사적, 사회적 조건이 흥미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성립된 것이고 또 그 전설 자체에도 의문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
끝으로 건국의 대공신大功臣인 삼봉 정도전이 반신叛臣, 천얼賤孼 대우는 태종과의 이해관계에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동시에 이씨조선의 본질적인 변화와 그 실력의 중심이 건국자의 수중으로부터 반대파의 장중掌中에 이전된 것을 의미한다고 논하였다.그러나 이것은 이씨조선의 본질적 변화는 아니고 오직 봉건적, 왕조적 특권 때문에 이상理想이 다른 것이지 이씨조선의 본질로서의 “아세아”적 봉건적 수취는 조금도 변화함이 없었던 것이다.
@
◇지나支那민족의 웅계熊鷄신앙과 그 전설(손진태孫晉泰씨)
@
이 논문은 지나민족의 닭“토템”에 관한 것으로서 한응소漢應劭의 “풍속통의風俗通義”(한위총서본漢魏叢書本) 권8 웅계조熊鷄條를 인용하고 청사자靑史子의 설은 도교음양오행설이라고, 그러므로 지나민족이 문제용계門祭用鷄를 오행설의 후後라고 하나 이 문제용계의 민간신앙은 벌써 이 오행설이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정당히도 논하고 도가류道家流의 해석에 가일봉加一捧 한 다음 닭 토템의 기원을 닭이 울면 밤이 밝고 밤이 밝으면 귀신이 보이지 않으므로 원시시대의 인간들은 신계晨鷄가 울면 야중夜中에 횡행하던 귀류鬼類가 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므로 처음은 귀신은 닭을 무서워하는 것이라 하고 그다음 닭은 귀신을 쫒는 것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나민족은 그 미개한 의식에 있어서 일종의 종교적 민족이었으므로 그들은 종교적 관념의 화신인 가지각색의 귀신을 무서워했으며 이 귀신들은 닭이 울면 날이 밝고 마치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듯했으므로 그들은 주술적 의미에서 신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는 계신鷄神전설이 있어서 조선처럼 닭 토테미즘의 유풍이 많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유익한 논문이라 하겠다.
@
◇삼한문제의 신新고찰(2)(이병도李丙燾씨)
@
씨의 신연구에 의하면 “한韓”의 칭호는 “진辰”의 칭호의 후後이며 지나의 고문헌을 중심으로 한 이 한韓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 이른바 준왕입해準王入海 이전에는 “한韓”이 없었는데, 準 입후入後에 “자호한왕自號韓王”은 여하히 이해할까? 그것은 준準이 약간의 무리를 데리고 진국辰國에 들어온 것은 속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준準은 진辰의 허용을 받아 진辰의 일변지一邊地에서 “나라”(부락部落)를 건설한 다음 한왕韓王이라 하고, 그 “나라”(부락部落)의 명名도 이로 인해【역주: ‘이로 인해’는 원문에는 ‘인하야’】 한韓으로 되었다.
@
그러므로, 한韓의 명칭의 기원은 이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그것이 전체의 명칭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 “한韓”의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역성한亦姓韓, 위위만소벌爲衛滿所伐, 천거해중遷居海中”을 인용하고, 이것은 확실히 조선왕 준準의 입해入海(입진入辰) 사실을 말하며, 한韓은 왕王 준準의 본성本姓이 한씨韓氏였으므로, 그로 인하여, 한왕韓王 운운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은 지금까지의 통속사가에 의하여 전개된 설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것으로, 퍽이나 주목되는 논문이라 하겠다.
@
◇고려화적畵跡에 대하여(고유섭高裕燮씨)
@
이 논문은 고려에는 그리 큰 화적畵跡이 없다고 하는 이론에 대한 반격으로 화려한 고려의 화적을 논한 것이다.
@
그런데 우리가 화적을 문제 삼을 때 그것은 단순한 골동품으로서보다도【역주: 원문은 보담도】 이 기념품들은 그 당시의 복잡한 사정을 겨울 또는 사진적 조형미술처럼 복사하지 않는다 할지언정 그 어느 정도까지의 반영인 것이며 따라서 그 당시의 왕조적 세계관, 또는 사정을 무언無言으로서 말하고 있는 때문이다. 그런데 씨는 고려의 화적에서 인물화, 종교화, 자유화, 실용화 등에 긍亘하여 구체적인 사료를 배열하고 끝으로 나대羅代의 회화관과 대조하면 회화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에로의 변천의 커다란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에 이러이러한 명화가 있고 또 이 자기의 주장을 위하여 많은 문헌을 인용하나 이것은 통속사가들의 고증욕을 만족시킬 따름이라는 것이다. 오직 문제는 그를 통하여 그 배후에서 너울거리고 숨 쉬고 있던 묻혀있고 왜곡된 사회의 발굴 그것이다.
@


































본문3: 진단학보(震檀學報) 제3권을 읽고(三) (「동아일보」1935년 11월 13일)


◇조선의 거석문화연구(한흥수韓興洙씨)
@
이 논문은 근래에 드문 신연구라 하겠고, 씨는 서론에 있어서, 거석문화연구의 의의를 논하고 “태양거석문화와 조선”에서 , 태양숭배는 거석문화인들의 공통한 특징으로, 거석문화기념물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卍은 태양숭배, 즉 태양 토템의 상징으로, 조선의 거석문화도 당연히 일반거석문화권에 속한다고 “조선거석문화인의 생활과 사상”에서는 조선원시사회의 발전과정, 즉 수렵경제로부터 목축=농경경제에로의 발전을 말하고 이 농업생산의 발전은 이 농업생산을 완전히 지배하는 듯 하는 자연의 맹목적 힘에 대한 따라서 그것들을 지배하는 듯 하는 초자연력=천체에 대한 신비를 느끼며 이것은 태양 토템으로 나타나고 이 태양 토템은 현대종교와 본질 상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후 농업공동체의 붕괴과정에 들어와 주술자, 장로 등 불생산不生産 특권자가 이 원시인의 자연현상에 대한 공포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애니미즘과 주술의 연합체인 원시종교를 구성하였고 이 태양 토템과 종교신앙과는 인연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관념론자는 아니나 이 설에 동의할 수는 없다. 즉 원시인들은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서 종국적 구별이 없었고 그 조건으로 그들은 종교의 제일요소로서의 초자연력,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신앙이 생겼다. 그들은 자기들의 무력을 주관적 방법에 의하여 보정하였고 토테미즘은 종교의 일단계一段階였던 것이다. 태양 토템신앙은 다른 토템신앙처럼 수렵생활의 습관에 제약된 것이 아니고 농경경제에 들어와 이 태양은 농업생활의 암흑면, 부정적 측면, 홍수, 지진, 한발旱魃 등의 배제를 장악하는 자者로 등장하고 이것은 조선에 있어서는 용龍의 형태로 나타나 한발 때는 이 용에게 걸우乞雨하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원시인과 같은 농업민족에 있어서는 농작의 원천이 되는 천=용은 세상에 있어서 최강자의 상징이었다. 즉 태양 토테미즘 신앙은 종교신앙의 원시적 형태였다. 씨가 원시종교의 형성시기라고 한 농업공동체의 붕괴기는 종교적 관념의 화신의 가지각색의 영혼이 인간적 형태 아래서 표상되었던 것이다. “조선거석유풍의 종류”에서는 일一, 선돌 이二ㅡ 고인돌 삼三, 칠성七星 사四, 돌무덤 등을 분탁하였다. 대관절 근래에 드문 신연구의 성과라 하겠다.
@













































본문4: 진단학보(震檀學報) 제3권을 읽고(完) (「동아일보」1935년 11월 14일)


◇역사연구의 방법론(신남철申南澈 역譯)
@
우리 조선에 있어서는 아직 체계있는 역사연구의 소개, 규명이 없는데, 이번 신씨역의 이 논문은 역사연구의 기술적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동同논문에는 “...역사에 있어서도 연구방법이라고 하는 것이 한 개의 결정적인 역할을 연演하고 있는 것이다”하고 그는 역사연구에 있어서의 방법론의 결정적 의의를 말하고 있다.
@
참으로 이 방법론의 정확 여하는 그 역사적 서술에 있어서의 과학적 성과의 여하한 초인적 상식도 총명도 개인적 천부天賦도 그 자체에 있어서 오류, 실패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풍부하다 할지언정 그릇된 사관에 있어서 씌워졌다고 한다면 그것의 과학적 가치는 당연히 압살되고 말 것이다. 오직 과학적 방법론에 있어서만 비로소 역사적 법칙성의 일반적 성질의 인식, 역사적 경과의 모든 구체적인 특수성의 전기구적全機構的인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
그러나 이 논문은 사관적 문제의 제기보다도 기술적 측면이 내용구성의 주요부분이었으며 이 논문에 대해서 필자는 만족은 느끼지 않으나 빈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사학계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충동을 줄 것이다. -아직 이 방면의 구체적 지시가 전무함으로-독자제군은 이 논문과 동시에 소련의 사가 뿌이고프스키의 사학개론과(백양사판(白揚社版), 그의 일부분은 홍기문洪起文씨가, 금춘今春 조선일보에 “사학방법론?”이라는 제하題下에 소개하였다.) 동同 뿌이고프스키 외제外諸씨의 합저合著인 “고고학개론”(도쿄, 백양사판)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
◇난박蘭舶 제주도 난파기 부附조선국기記
@
이 화란인和蘭人의 손으로 된 선선국기鮮鮮國記는 오늘날 우리들이 과거의 조선의 면용面容을 아는데 귀중한 사료의 하나라 하겠고 그 역譯에 있어서의 조밀한 용의와 노력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할 따름이다.
@
이 국기는 조선의 정서 및 여러 방면에 대하여 간단하나마 왕조연대기보다 훨씬 충실히 복사하고 있다. 이것은 금일 봉건이조-그 시대는 벌써 중앙집권적 “아세아”적 봉건이조의 외형적인 통일이 완전히 균열되고 즉 봉건제도 붕괴의 역사적 제조건이 불가피적으로 성숙하고 또 기형적이나마 새로운 시대의 맹아가 벌써 서풍낙일西風落日의 봉토안에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연구에 있어서 흥미있는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
@
이만큼으로 이 학보권學報券을 읽은 후의 약간의 소감은 그치겠다. 그러고 요즈음에 와서 조선연구의 격화한 것은 우리들의 즐거워할 현상의 하나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에 따라서 더욱이 과학적인 역사적 사명을 가진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조선연구의 유일한 담당자로서의 아직 원시상태에 있는 이 나라의 신흥학계의 임무의 중대 또 긴급함을 말하여둔다.
@
10월 31일 도쿄에서
@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