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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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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조선에서 더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3ㆍ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상급학교에서 입학원서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 해 동안 농사를 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ref>임정혁,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교육과학사, 2003), 19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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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지배하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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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그는 졸업한 해인 1930년 4월에 '일본수학물리학회'에 입회하였으나, 식민지 지배하에서 연구직을 얻지 못하였다. 수년 후, 개성의 {{TagInstitution|[[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등보통학교]]}}의 교원이 되어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38년 4월에 만주의 {{TagInstitution|[[신경공업대학|신경공업대학]]}}의 교수가 되고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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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그는 졸업한 해인 1930년 4월에 '일본수학물리학회'에 입회하였으나, 식민지 지배하에서 연구직을 얻지 못하였다. "조선 사람이라고 하여 일본 학자들이 나의 논문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민족적 멸시"<ref>임정혁,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교육과학사, 2003), 194쪽</ref>를 느끼면서도 그는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수년 후, 개성의 {{TagInstitution|[[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등보통학교]]}}의 교원이 되어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ref>[https://www.jstage.jst.go.jp/article/subutsukaishi1927/15/1/15_1_15/_pdf/-char/ja 자료]의 20쪽을 보면 도상록이 송도고등보통학교 소속으로 나온다.</ref> 이 때 그는 그의 첫 논문인 「헬륨화 수소이온에 대한 양자역학적 취급」을 완성하였다. 그 후 만주의 {{TagInstitution|[[신경공업대학|신경공업대학(新京工業大學)]]}}<ref>『조선대백과사전』 제6권(백과사전출판사, 1998년)에서는 신경공업대학을 장춘공업대학이라고 표기하였으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 신경공업대학은 일본 항복 후, 중화민국(中華民國)에서 학교를 넘겨받으며 다른 학교와 병합하여 국립장춘대학(國立長春大學)을 세웠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국립장춘대학은 폐교되며, 여러개의 학교로 흩어졌다. </ref>의 교수가 되고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다. <ref>그가 신경공업대학의 교수로 취임된 날짜가 명확하지 않다. 『조선대백과사전』에서는 1938년 4월로 나와있으나, 참고자료로 참고한 「물리학자 도상록의 생애와 연구활동에 대하여」에서는 그가 1940년대에 교수가 되었다고 나와있다.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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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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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그는 1945년 8월 16일에 창설된 '조선학술원'의 이학부장과 기획과·출판과의 위원을 맡았으며, 12월 27일에 창립된 ‘조쏘문화협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46년 1월 16일에 ‘과학기술자련맹’의 기구가 확대되었을때에는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또 2월 17일에 ‘조선교육자협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도 공동의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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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도상록은 1945년 8월 16일에 창설된 '조선학술원'의 이학부장과 기획과·출판과의 위원을 맡았으며, 12월 27일에 창립된 ‘조쏘문화협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46년 1월 16일에 ‘과학기술자련맹’의 기구가 확대되었을때에는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또 2월 17일에 ‘조선교육자협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도 공동의장을 맡는 등 여러 사회정치활동에 참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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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공업대학의 교수로 있던 도상록은 해방되자마자 서울로 돌아와 경성대학 물리학과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중심에 서서 일하였다.<ref>문만용ㆍ김영식, 『한국 근대과학 형성과정 자료』(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 51쪽</ref> 해방 후 남한지역은 미국의 군정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교육관계는 문교부가 주관하였다. 10월 17일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었고, 11월 3일부터 강의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문교부가 개칭할 때 이공학부장으로는 대리로 최규남(崔奎南)을 임명하였고, 후에 정식으로 교토제국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이태규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태규는 당시 일본에 살고 있었으며, 도상록은 경성대학 이미 물리학과의 교수진을 구성하고 이공학부 전반에 걸쳐서 지도적 역할을 하고 대학교원들로부터 이공학부장으로 공인되고 있던 상태였다. 이러한 대립은 '국대안'<ref>국립서울대학교안</ref>이 거론되며 첨예화되었다. 당시 이공학부장이었던 도상록은 교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미군정에 반대의견을 제출하였고, 그런 속에서 도상록이 교수직에서 파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많은 학자들이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그 무렵, 북한에서도 종합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교원을 확보하기 위해 김일성이 친필 서명한 초청장을 지닌 사람들이 전국으로 파견되었다. 이 때 추방되었던 학자들의 상당수가 월북하여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도상록 역시 1946년 6월에 월북하였다.<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03_1_0030753 해당 링크]에서는 도상록이 1946년 5월에 월북하였다고 되어있으나, 도상록의 「첫 졸업식을 가진것은 종합대학발전에서 뜻깊은 일입니다」(『인민들속에서17』,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에 따르면 김일성을 만난 1946년 7월 3일이 월북한지 나흘째 되는 날이므로, 6월에 월북한 것이 맞다. </ref>
해방 후 경성대학교의 이공부학부장을 지냈으나, 미군정에 반대의견을 제출하며 파면되었다. 그리고 그는 1946년 5월 월북<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03_1_0030753</ref>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창립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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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종합대학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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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그는 평양에 머무르다 1946년 7월 3일 당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의 접견을 받는다. 이 석상에서 도상록은 김일성으로부터 북한에서의 종학대학 창설에 힘써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 후 이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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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그는 평양에 머무르다 1946년 7월 3일 김일성의 접견을 받는다. 이 석상에서 도상록은 김일성으로부터 북한에서의 종학대학 창설에 힘써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 후 이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이 때 도상록은 과학원의 설립을 건의하였으며, 김일성은 종합대학의 토대가 마련이 되고 안정화되면 과학원 설립에 힘쓰겠다 말했다. <ref>「남조선에서 온 물리학자 도상록과 한 담화」(『김일성전집4』,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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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6년에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 초대학부장을 지냈고, 1948년 연구원 원장으로 지냈으며, 1950년에 물리학교수로, 1953년에 물리강좌장으로, 1954년에 핵물리강좌장으로 임명되었다. 학교에 있을 『핵구조론』,『량자역학』,『원자로물리』등 새로운 과학분야의 교과서, 참고서 30여종을 집필하고 핵가속장치를 비롯한 핵물리실험장치들을 연구개발하였고, 새로운 과목들을 개척하였다.
그는 1946년에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 초대학부장을 지냈고, 1948년 연구원 원장으로 지냈다. 그리고 1950년에 물리학교수로 임명되었다.
 
 
 
초창기 김일성종합대학 창설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1952년 이북에서 과학원이 설립되었을 홍명희(洪命憙), 최삼열(崔三悅: 경성고공 토목과, 1919; 제6고등학교, 1923; 도호쿠대 화학과, 1927; 교토제대 조수 및 이화학연구소 근무), 계응상(桂應祥), 백남운(白南雲), 최명학(崔明鶴), 이승기, 박시형(朴時亨) 등과 함께 원사(院士)에 임명되었다. <ref>https://www.kps.or.kr/content/50years/html/kps25.htm</ref> 그는 북한의 첫 물리학 원사이다. 1986년 그는 인민과학자칭호를 받았고, 1973년 10월에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다. 등 수많은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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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도상록은 초창기 김일성종합대학 창설에 기여한 공로로 홍명희(洪命憙), 최삼열(崔三悅), 계응상(桂應祥), 백남운(白南雲), 최명학(崔明鶴), 이승기, 박시형(朴時亨) 등과 함께 원사(院士)에 임명되었다. <ref>https://www.kps.or.kr/content/50years/html/kps25.htm</ref> 그는 북한의 첫 물리학 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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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그는 인민과학자칭호를 받았고, 1973년 10월에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외에도 국기훈장제1급, 로력훈장 등 수많은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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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혁,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 교육과학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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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31일 (금) 03: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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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록(都相祿)
도상록.jpg
출처 : 조선의 오늘 2023년 3월 20일자 기사[1]
 
한글명 도상록 한자명 都相祿 영문명 Do Sang Rok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03년 몰년 1990년 출신지 함경남도 함흥시 전공 핵물리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도상록은 북한의 물리학자이며, 2000년 통일부 보고서는 도상록을 '북한의 핵 과학 아버지'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평가했다.[2]


생애


어린시절

도상록은 1903년 10월 13일 함경남도 함흥시 회상구역 덕산동의 빈농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1919년에 영생고등보통학교기관를 졸업하였다. 1919년 영생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일 때, 3월 1일을 맞이사건하였다. 당시 판결문을 살펴보면, 그는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선언서 3천여 매를 인쇄하였으며, 구 한국 깃발 18개를 제작하였다. 법에 따라 징역 3월형을 받아야 하는게 마땅하나, 범죄의 정상(情狀)을 헤아려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3] "그러나 나는 조선에서 더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3ㆍ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상급학교에서 입학원서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 해 동안 농사를 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4]


일본 유학

도상록은 1925년에 일본의 제6고등학교기관[5]를, 1930년에 도쿄제국대학기관 물리학과를 졸업하였다.[6] 졸업 후, 그는 조선에서 물리학 연구를 이어나가기엔 아직 여건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고향인 함흥에 돌아가지 않고 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문헌들과 잡지들을 수집하였으며 그것들을 모조리 뒤졌다. 이것이 귀국한 후, 나의 이후 연구 사업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7]


식민지 지배하의 연구

그는 졸업한 해인 1930년 4월에 '일본수학물리학회'에 입회하였으나, 식민지 지배하에서 연구직을 얻지 못하였다. "조선 사람이라고 하여 일본 학자들이 나의 논문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민족적 멸시"[8]를 느끼면서도 그는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수년 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기관의 교원이 되어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9] 이 때 그는 그의 첫 논문인 「헬륨화 수소이온에 대한 양자역학적 취급」을 완성하였다. 그 후 만주의 신경공업대학(新京工業大學)기관[10]의 교수가 되고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다. [11]


해방 직후

도상록은 1945년 8월 16일에 창설된 '조선학술원'의 이학부장과 기획과·출판과의 위원을 맡았으며, 12월 27일에 창립된 ‘조쏘문화협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46년 1월 16일에 ‘과학기술자련맹’의 기구가 확대되었을때에는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또 2월 17일에 ‘조선교육자협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도 공동의장을 맡는 등 여러 사회정치활동에 참여하였다.
신경공업대학의 교수로 있던 도상록은 해방되자마자 서울로 돌아와 경성대학 물리학과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중심에 서서 일하였다.[12] 해방 후 남한지역은 미국의 군정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교육관계는 문교부가 주관하였다. 10월 17일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었고, 11월 3일부터 강의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문교부가 개칭할 때 이공학부장으로는 대리로 최규남(崔奎南)을 임명하였고, 후에 정식으로 교토제국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이태규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태규는 당시 일본에 살고 있었으며, 도상록은 경성대학 이미 물리학과의 교수진을 구성하고 이공학부 전반에 걸쳐서 지도적 역할을 하고 대학교원들로부터 이공학부장으로 공인되고 있던 상태였다. 이러한 대립은 '국대안'[13]이 거론되며 첨예화되었다. 당시 이공학부장이었던 도상록은 교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미군정에 반대의견을 제출하였고, 그런 속에서 도상록이 교수직에서 파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많은 학자들이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그 무렵, 북한에서도 종합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교원을 확보하기 위해 김일성이 친필 서명한 초청장을 지닌 사람들이 전국으로 파견되었다. 이 때 추방되었던 학자들의 상당수가 월북하여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도상록 역시 1946년 6월에 월북하였다.[14]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그는 평양에 머무르다 1946년 7월 3일 김일성의 접견을 받는다. 이 석상에서 도상록은 김일성으로부터 북한에서의 종학대학 창설에 힘써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 후 이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이 때 도상록은 과학원의 설립을 건의하였으며, 김일성은 종합대학의 토대가 마련이 되고 안정화되면 과학원 설립에 힘쓰겠다 말했다. [15]
그는 1946년에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 초대학부장을 지냈고, 1948년 연구원 원장으로 지냈으며, 1950년에 물리학교수로, 1953년에 물리강좌장으로, 1954년에 핵물리강좌장으로 임명되었다. 학교에 있을 때 『핵구조론』,『량자역학』,『원자로물리』등 새로운 과학분야의 교과서, 참고서 30여종을 집필하고 핵가속장치를 비롯한 핵물리실험장치들을 연구개발하였고, 새로운 과목들을 개척하였다.


과학원

1952년 김일성은 과학 연구사업을 위하여 과학원을 창설할 계획을 세우고, 1952년 12월 과학원이 창설되었다. [16]

이 때, 도상록은 초창기 김일성종합대학 창설에 기여한 공로로 홍명희(洪命憙), 최삼열(崔三悅), 계응상(桂應祥), 백남운(白南雲), 최명학(崔明鶴), 이승기, 박시형(朴時亨) 등과 함께 원사(院士)에 임명되었다. [17] 그는 북한의 첫 물리학 원사이다.

1986년 그는 인민과학자칭호를 받았고, 1973년 10월에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외에도 국기훈장제1급, 로력훈장 등 수많은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타계

1990년 2월 13일 타계하였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그의 사진과 그가 집필한 주요 책들, 논문들은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의 조카인 도명희씨는 현재 탈북한 것으로 확인된다. [18]





연구




데이터


도상록 네트워크 그래프 그리기(※입력된 내용을 수정해보세요)








참고자원







주석


  1. https://dprktoday.com/news/63487
  2. 본 내용은 확인하지 못하여, 다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3.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62&evntId=0034971274&evntdowngbn=Y&indpnId=000000369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4. 임정혁,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교육과학사, 2003), 193쪽
  5. 현 오카야마대학교(岡山大学)
  6. 북한의 대외 선전 언론 '조선의 오늘'과 『조선대백과사전』 제6권(백과사전출판사, 1998년)에서는 도상록의 졸업 일자를 1932년 3월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 한국물리학회 50년사에 나와있는 자료와 [[파일:제국의_외지출신_과학자들.pdf |]] 35쪽의 경성대학 이공학부 초기 교원 일람 표를 보면 1930년 졸업으로 되어있어, 1930년으로 기술하였다.
  7. 임정혁,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교육과학사, 2003), 194쪽
  8. 임정혁,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교육과학사, 2003), 194쪽
  9. 자료의 20쪽을 보면 도상록이 송도고등보통학교 소속으로 나온다.
  10. 『조선대백과사전』 제6권(백과사전출판사, 1998년)에서는 신경공업대학을 장춘공업대학이라고 표기하였으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 신경공업대학은 일본 항복 후, 중화민국(中華民國)에서 학교를 넘겨받으며 다른 학교와 병합하여 국립장춘대학(國立長春大學)을 세웠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국립장춘대학은 폐교되며, 여러개의 학교로 흩어졌다.
  11. 그가 신경공업대학의 교수로 취임된 날짜가 명확하지 않다. 『조선대백과사전』에서는 1938년 4월로 나와있으나, 참고자료로 참고한 「물리학자 도상록의 생애와 연구활동에 대하여」에서는 그가 1940년대에 교수가 되었다고 나와있다.
  12. 문만용ㆍ김영식, 『한국 근대과학 형성과정 자료』(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 51쪽
  13. 국립서울대학교안
  14. 해당 링크에서는 도상록이 1946년 5월에 월북하였다고 되어있으나, 도상록의 「첫 졸업식을 가진것은 종합대학발전에서 뜻깊은 일입니다」(『인민들속에서17』,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에 따르면 김일성을 만난 1946년 7월 3일이 월북한지 나흘째 되는 날이므로, 6월에 월북한 것이 맞다.
  15. 「남조선에서 온 물리학자 도상록과 한 담화」(『김일성전집4』,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16. 도상록,「과학원이 창설되기까지」(『인민들속에서4』, 조선로동당출판사, 1963)
  17. https://www.kps.or.kr/content/50years/html/kps25.htm
  18. https://www.hankyung.com/entertainment/article/201909225787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