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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출생과 정체성 확립의 시기(1896년~1920년))
(화가로서의 활동과 여성 해방의 실천(1921년~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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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서의 활동과 여성 해방의 실천(1921년~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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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0일 (수) 21:16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박혜민(JBNU2025))이 작성했습니다.




나혜석(羅蕙錫)
나혜석.jpg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B%82%98%ED%98%9C%EC%84%9D-Na_Hye-seok.jpg#/media/%ED%8C%8C%EC%9D%BC:%EB%82%98%ED%98%9C%EC%84%9D-Na_Hye-seok.jpg
 
한글명 나혜석 한자명 羅蕙錫 영문명 Na Hyeseok 가나명 이칭 정월
성별 여성 생년 1896년 몰년 1948년 출신지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전공 유화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였다.[1] 일본 유학 시절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여자계>학술지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1918)작품를 발표했다.[2]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데 힘썼고 초창기[이른 아침])작품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1922년부터 1932년까지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기관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3] 또한, 3 1 운동 때는 여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가시키기 위해 활동을 하다가 다섯 달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으며,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현에서 살 때는 국경을 넘어 다니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보여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4]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5] 1915년 4월 김정화(金貞和)인물 등과 함께 발기하여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朝鮮女子留學生親睦會)단체를 조직하면서 행동으로 옮겨졌다.[6] 나혜석은 이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7]


생애


출생과 정체성 확립의 시기(1896년~1920년)

한말에 사법관을 거쳐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인물의 5남매 중 넷째로 수원에서 태어났다.[8]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기관를 입학하기 전에는 이름이 아지(兒只), 입학 후에는 명순(明順)이었으나, 졸업 무렵에는 혜석으로 바꾸었다. [9]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10] 먼저 일본에 유학한 오빠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공간에 있는 시립여자미술학교기관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11] 일본으로 건너간 이듬해인 1914년에 도쿄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학술지에 「이상적 부인」작품을 발표하였고 1918년에『여자계』학술지에 단편소설 「경희작품를 발표하였다.[12] 나혜석은 1917년 10월 17일 동경 조선교회당 내에서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여자친목회단체 총무로 선출됐다.[13] 1915년 4월 김정화(金貞和) 등과 함께 발기하여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朝鮮女子留學生親睦會)단체를 조직하면서 행동으로 옮겨졌다.[14] 친목회의 취지는 동경에 있는 조선 여자 서로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지식을 계발하며 국내 여성을 지도 계몽하자는 데 있었다. [15]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 교사를 지냈다. [16] 1919년 경성부 운니동 37번지 집에서 혼자 그림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이 때 동경에서 유학생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있었고,3/1운동사건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했다. [17] 일제 군경에 체포돼 8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일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일제의 배려로 면소 및 방면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옥중사건에서 곤욕을 치뤘다.[18]


화가로서의 활동과 여성 해방의 실천(1921년~1930년)

유학시절 약혼자였던 시인 최승구인물가 죽은 후 변호사인 김우영인물과 결혼하였다.[19] 김우영은 동경 유학시절부터 적극적으로 나혜석에게 구애를 해왔던 인물이었다. [20] 이러한 인연으로 1920년 24살의 나혜석은 3년전 상처하고 독신으로 살고 있던 김우영과 결혼했다.[21]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유화 개인전사건을 가졌으며, 4월에는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기관에 홍일점으로 유화를 출품하였다.[22] 1927년에는 만주 안동현(安東縣) 부영사로 일본 정부 외교관 신분이던 남편 김우영(金雨英)과 함께 세계 일주 여행사건에 올라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Roger Bissière, 1888∼1964)의 화실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23] 이어 유럽 각국의 미술관 순례를 통해서 미술 시야를 넓히고, 미국을 거쳐 1929년에 귀국사건하였다.[24] 파리에서 만났던 최린과의 관계가 귀국 후 새삼스럽게 문제가 되면서 1930년 이혼사건을 한 나혜석은 제국미술전람회기관에 입선하고 여자미술학사를 차리는 등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꿈꾸었다.[25]


작가로서의 활동과 생애의 후반기(1931년~1948년)

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26] 자기의 연애, 결혼,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심리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식민지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가 가지는 모순을 비판한 글 "이혼고백장"(1934)과 "신생활에 들면서"(1935)을 발표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27] 최린[덧말 1]에게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28] 1935년「신생활에 들면서」(『삼천리』)를 발표하고 1936년에 소설 「현숙」을, 1937년에는 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였다.[29] 나혜석의 화가로서의 활동은 1935년 서울의 조선관 전시장에서 가졌던 「근작 소품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30] 이후 최후의 100여 점의 개인전에 대한 평단과 대중의 싸늘한 반응에 직면하여 붓을 놓은 채 수덕사와 마곡사 등을 전전하며 정처없는 유랑의 길에 올랐다.[31]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32]





연구


예술적 성과

나혜석은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이 조선 여성 전체의 진보라고 하는 점을 늘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신여성의 대표 인물로서,조선미술전람회에 계속 입선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의식적인 여성적 글쓰기를 펼친 작가이기도 하다.[33] 여자유학생친목회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여자계』에는 첫 소설 「경희」(1918).[덧말 2] 를 발표하여 근대문학사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34] 1921년 3월 19일부터 이틀간 경성일보 후원으로 내청각(來靑閣) 전시장에서 첫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35]풍경화를 중심으로 한 70여 점의 유화가 출품된 개인 전시회는 서울에서 한국인 화가로 열리는 최초의 일이었던 만큼 신문에 대서특필됐다.[36]한국인으로서는 2번째이고, 한국 여류 최초의 유화 개인전이었다.[37] 한국 근대 미술사에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사건이었다. [38]같은 해 4월 3일 매일신보에는 자기 고백적인 시인형의 집을 발표했다.[39] 자신의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아이는 엄마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규정한 "어머니 된 감상기(1922)는 여성 고유의 경험을 처음으로 공론화시킨 것으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40]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과 특선을 거듭하였다.[41]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천후궁(天后宮)’을 출품해 특선에 입상했다. [42] 전년도 4회에 출품한 ‘낭랑묘(朗朗廟)’가 서양화 3등을 수상한 데 이어 연속 수상이었다. [43]1931년에는 도쿄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도 입선하였다. [44]


나혜석 전시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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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우리 시대의 작가", 『한국미술진흥원』online, 한국미술진흥원.
  2. "우리 시대의 작가", 『한국미술진흥원』online, 한국미술진흥원.
  3. "연도별문화인물", 한국의문화인물, 『전통문화포털』online,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4. "연도별문화인물", 한국의문화인물, 『전통문화포털』online,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5. "연도별문화인물", 한국의문화인물, 『전통문화포털』online,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6.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7.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8.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연도별문화인물", 한국의문화인물, 『전통문화포털』online,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12.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14.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15.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16.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7.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18.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9. "연도별문화인물", 한국의문화인물, 『전통문화포털』online,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20.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21.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22.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3.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4.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5. "우리 시대의 작가", 『한국미술진흥원』online, 한국미술진흥원.
  26. "연도별문화인물", 한국의문화인물, 『전통문화포털』online,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27. "우리 시대의 작가", 『한국미술진흥원』online, 한국미술진흥원.
  28.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9.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0.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1.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32. "연도별문화인물", 한국의문화인물, 『전통문화포털』online,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33. "우리 시대의 작가", 『한국미술진흥원』online, 한국미술진흥원.
  34. (최은규 기자,) 「[길 위의 미술관 - 나혜석 ②]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오」, 『데일리아트』online, 미술세계, 작성일: 2024년 08월 14일.
  35.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36.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37.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38.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39. 김은영 기자, 「여성 독립운동 자금모금책... 일군경에 체포 옥고치러」, 『수원신문』online, 수원신문, 작성일: 2011년 04월 03일.
  40. "우리 시대의 작가", 『한국미술진흥원』online, 한국미술진흥원.
  41.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2. (이한수 기자,) 「100년 전 신문에 "자궁에 염증 생겨 그림 못 그렸다" 화가 나혜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5년 12월 10일.
  43. (이한수 기자,) 「100년 전 신문에 "자궁에 염증 생겨 그림 못 그렸다" 화가 나혜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5년 12월 10일.
  44. "나혜석(羅蕙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5. (최은규 기자,) 「[길 위의 미술관 - 나혜석 ④] 나는 다만 새벽녘에 우는 닭이 되려 할 뿐입니다」, 『데일리아트』online, 미술세계, 작성일: 2024년 10월 07일.
  46. (최은규 기자,) 「[길 위의 미술관 - 나혜석 ④] 나는 다만 새벽녘에 우는 닭이 되려 할 뿐입니다」, 『데일리아트』online, 미술세계, 작성일: 2024년 10월 07일.
  47. (최은규 기자,) 「[길 위의 미술관 - 나혜석 ④] 나는 다만 새벽녘에 우는 닭이 되려 할 뿐입니다」, 『데일리아트』online, 미술세계, 작성일: 2024년 10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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