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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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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7일 (일) 13:21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한지원(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고희동(高羲東)
고희동 자화상.png
출처 : 네이버 블로그[1]
 
한글명 고희동 한자명 高羲東 영문명 Go, Hui-dong 가나명 コウ キドウ[2]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886[3]년 몰년 1965[3]년 출신지 서울[3] 전공 서양화[3]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고희동인물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동양화를 공부한 동양화가이자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이다.[4] 그는 화가로서 일제강점기 「정자관을 쓴 자화상」작품, 「부채를 든 자화상」작품, 「금강산진주담폭포」작품, 「탐승」작품 등의 작품을 남겼다.[3] 또한 그는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그리고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3]


생애


관료 생활과 화가로의 입문

고희동인물은 1886년 3월 11일 한성부공간 남부 훈도방 정승계 수표교동공간에서 아버지 고영철인물(高永喆)과 어머니 전주 이씨인물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5] 그는 14세 때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기관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1904년 궁내부기관 주사로 취직하여 궁중 내의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을 하였다.[3] 그리고 이 무렵 을사보호조약사건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현실 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하였다.[3]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安中植)인물과 조석진(趙錫晉)인물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이었다.[3] 그러나 당시 화단은 중국공간의 화보를 충실히 임모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여기에 환멸을 느낀 그는 궁내부기관 시절 외국인들과 접촉으로 대할 수 있었던 서양의 그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3]


일본 유학과 미술 교육자 활동

고희동인물은 1909년 일본공간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기관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4] 그리고 그곳에서 일본공간에 최초로 서양식 미술이론을 도입한 구로다 세이키인물에게서 그림을 배웠다.[5] 1915년 3월 29일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5] 귀국 후에는 중앙고등보통학교기관와 휘문고등보통학교기관, 보성고등보통학교기관, 중동고등보통학교기관 등지에서 미술교사를 지냈다.[5] 도상봉인물·이마동인물·오지호인물·구본웅인물등 1세대 서양화가 대부분이 그의 제자였다.[6]


광복 이후의 행정과 정계 진출

고희동인물은 광복사건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단체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단체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3]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사건이 일어나자 김일성인물의 납북 리스트에 오르게 되어 납치 위기를 맞는다.[5]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기관이 개원되자 종신회원에 선출됨과 동시에 초대 회장에 취임했으며,[5] 1960년에는 민주당단체 소속으로 출마하여 참의원기관(參議院) 의원으로 국회기관에 진출하기도 했다.[4] 1965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다가 10월 22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공간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5]





연구


근대적 자아의 표출: '자화상'과 시대 인식

고희동인물의 첫 서양화 작품이자 한국인이 그린 첫 서양화는 ‘정자관을 쓴 자화상작품’이다.[6] 이는 고희동인물이 도쿄미술학교기관를 졸업하면서 졸업요건으로 그린 자화상으로, 현재 도쿄예술대학교 박물관기관에 보존돼 있다.[6] 이 작품이 특이한 점은 그가 눈에 띄는 조선인 복장에 정자관을 썼다는 것이다.[6] 그는 자신의 머리에 정자관을 씌움으로써, 성균관을 졸업한 유생이라도 된 듯 스스로를 당당하게 그렸다.[6] 졸업 후 귀국한 해 여름에 그린 ‘부채를 든 자화상작품’도 모시 적삼을 풀어 헤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강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서적을 꽂은 서가와 서양화를 배치해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했다.[6] 프랑스어에 능숙했던 그는 프랑스 공사관기관에서 열린 소규모 전시회에 서양화 화풍을 흉내낸 자신의 그림을 출품하기도 했다.[4]


동서양 화풍의 절충과 '신(新)한국화' 모색

고희동인물은 일본공간에서 귀국 후 10년 만인 1920년 후반, 동양화로 전향하여 서양화적 수법을 가미한 풍(風)을 개척하였다.[3] 구체적으로 그의 화풍은 남종화의 선염법(渲染法)을 쓰지 않고 서양화의 기법을 가미하여 북종화에서 쓰던 부벽준에 가까운 음영법을 쓴 것이 특징이다.[4] 전통적 수묵화법에 서양화의 색채 및 기법을 쓰는 절충양식의 새로운 한국화를 시도한 것이다.[7] 그러나 양식적으로는 독자성을 이루지 못하여 독립된 화가로서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3]


화단(畵壇)의 설계자: 미술 행정과 교육

고희동인물은 1918년 일본인 서양화가로 조직된 조선미술가협회단체에 대항하여, 당시 서화계의 중진과 대가들을 종용하여 최초의 한국인 서화가들의 모임이자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書畫協會)단체를 결성하였다.[5][3] 서화협회단체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은 회원 작품전으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사건이 열렸다.[3] 또한 회원전과 더불어 계몽 사업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지인 『서화협회보학술지(書畫協會報)』를 창간하기도 했다.[3] 이후 1936년 제15회전을 끝으로 서화협회단체가 더 이상 열리지 않을 때까지 총무 또는 회장으로 민족진영의 미술가 단합에 정력을 기울였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사건에서 오랫동안 심사 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3] 그가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자 했던 욕망 속에는, 최초의 서양화가로 상징되는 자신을 포함해 조선 예술가 전체의 위상을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6] 결과적으로 그는 ‘환쟁이’를 ‘화가’의 위치로 격상시키기 위해 애쓴 선구자였음에 틀림없다.[6]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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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 Graph






참고자원


"고희동", 『나무위키』online.

"고희동", 『위키백과』online.

김인혜, 「조선인이 그린 최초의 서양화는 조선인의 自畵像이었다」,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4년 03월 31일.

"작가소개 | 춘곡 고희동”, 『고희동 미술관』 online, 종로문화재단.






주석


  1. ↑ 셜리,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다.", 『셜리의 베이스캠프 837』online, 작성일: 2011년 05월 26일.
  2. ↑ 고희동의 한자명 高羲東을 가타카나로 표기한 것으로, '코우 키도우'라고 읽음.
  3. ↑ 3.00 3.01 3.02 3.03 3.04 3.05 3.06 3.07 3.08 3.09 3.10 3.11 3.12 3.13 3.14 3.15 3.16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민백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4. ↑ 4.0 4.1 4.2 4.3 4.4 "고희동", 『위키백과』online.
  5. ↑ 5.0 5.1 5.2 5.3 5.4 5.5 5.6 5.7 "고희동", 『나무위키』online.
  6. ↑ 6.0 6.1 6.2 6.3 6.4 6.5 6.6 6.7 김인혜, 「조선인이 그린 최초의 서양화는 조선인의 自畵像이었다」,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4년 03월 31일.
  7. ↑ "작가소개 | 춘곡 고희동”, 『고희동 미술관』 online, 종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