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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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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2일 (목) 23:41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4-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윤정SNU2024)이 작성했습니다.




김성태(金星泰)
출처 :
 
한글명 김성태 한자명 金星泰 영문명 가나명 이칭
성별 남 생년 1894년 몰년 1962년 출신지 경기도 양주구읍 전공 예술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해방 이후「양주별산대놀이」해금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이다.[1]


생애


출생 및 어린시절

성운(盛運)인물의 아들로 경기도 양주구읍(楊州舊邑)에서 출생했다.[2] 아버지는 무부(巫夫)이자 「양주별산대놀이」의 명연희자이며 모가비였고, 어머니 한간난이는 ‘옴팽이 만신’이라는 이름으로 양주군일대에서 이름난 큰무당이었다.[3] 14세 때부터 아버지와 이창유(李昌裕)인물에게서 산대춤을 배웠는데, 특히 왜장녀의 배꼽춤은 이들을 본받아 배웠다고 한다.[4]


학력

김성태는 서당을 다녔다. 서당 이후 30세까지는 헌병보조원기관에서 지냈다. 그 뒤로는 광복 10년 전까지 순사기관를 지냈으며, 광복 때까지 소방단장기관과 경방단부단장(警防團副團長)기관 등을 지냈다.[5]


활동

순사를 그만둔 뒤에는 양주구읍에서 소실을 두고, 청요리점을 경영하기도 했다.[6] 그러나 그는 민족항일기에도 「양주별산대놀이」를 계속하며 전승을 이어가려고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6·25남침사건으로 마을이 소실된 이후에도, 환도 후 다시 가면을 제작해 탈놀이를 계속하게 했다. 1957년 11월 9일 한국연극학회단체 주최로 이화여자고등학교기관 노천극장에서 「양주별산대놀이」를 공연함으로써 광복 후 처음으로 일반에게 이들의 탈놀음을 선보였고, 박준섭(朴俊燮)인물 · 박동환(朴東煥)인물과 더불어 명연희자로서의 솜씨를 보였다.[7]





연구


양주별산대놀이

한국전쟁사건 이후 탈이 소실되고 다수의 연희자가 사망하며 전승되던 양주별산대놀이는 큰 타격을 입었다.[8] 이후 1950년대에 김성대(金成大, 1907~1970)인물의 후원으로 당시 전 과장에 걸친 연희 능력을 갖추었던 김성태가 탈을 제작하며 남은 소수의 인원과 함께 놀이를 복원하였다.[9] 그리고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단체가 결성되면서 당시 8명의 연희자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10] 이때 김성태는 양주 별산대놀이가 무형유산으로 선정되자 제1급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jpg
[사진출처=『위키백과』online, 위키백과.]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성운 Person: 김성태 A hasSon B
Person: 김성태 Institution: 서당 A graduates B
Person: 김성태 Institution: 헌병보조원 A worksAt B
Person: 김성태 Institution: 순사 A worksAt B
Person: 김성태 Institution: 소방단장,경방단부단장 A worksAt B
Person: 김성태 Group: 양주별산대놀이 A isMemberOf B
Person: 김성태 Person: 김상용 A hasSon B



Timeline


<>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 "김성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2. ↑ "김성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3. ↑ "김성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4. ↑ "김성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5. ↑ "김성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6. ↑ "김성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7. ↑ "김성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8. ↑ "양주별산대놀이",『국악사전』
  9. ↑ "양주별산대놀이",『국악사전』
  10. ↑ "양주별산대놀이",『국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