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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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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교육, 그리고 일제강점기'''===
 
==='''출생, 교육, 그리고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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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Pesron|박명진}}은 1903년 7월 3일 서울시 양교동에서 박기붕(朴其鵬)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1920년 {{TagInstitution|중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925년 4월에 {{TagInstitution|경성치과의학교}}에 입학하고, 1928년 4월 8일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28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의원에 의무부수로 치과부에 근무하였고, 1928년 6월 15일 {{TagInstitution|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수, 1928년 11월 6일 경성치과의학교 부수에 임명되었다. 1929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교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되자, 그는 1929년 5월 10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편입하였고, 1930년 4월 26일 4학년 과정을 마치고, {{TagInstitution|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본과 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30년 4월 28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수가 되었다12). 1928년, 1931년 {{TagPesron|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교 일원으로 조선치과의학회 학술강연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TagPesron|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수가 된 후 연구에 힘을 다하였다. 1934년 10월 10일 경성제국대학 약리학교실에서 연구하고(지도교수 柳樂達見, 杉原), 1937년 12월 16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수여 받았다. 1943년 {{TagPesron|박명진}}은 서울 종로 3정목에서 개업을 하기도 하였다. <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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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Person|박명진}}은 1903년 7월 3일 서울시 양교동에서 박기붕(朴其鵬)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1920년 {{TagInstitution|중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925년 4월에 {{TagInstitution|경성치과의학교}}에 입학하고, 1928년 4월 8일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28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의원에 의무부수로 치과부에 근무하였고, 1928년 6월 15일 {{TagInstitution|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수, 1928년 11월 6일 경성치과의학교 부수에 임명되었다. 1929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교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되자, 그는 1929년 5월 10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편입하였고, 1930년 4월 26일 4학년 과정을 마치고, {{TagInstitution|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본과 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30년 4월 28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수가 되었다12). 1928년, 1931년 {{TagPerson|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교 일원으로 조선치과의학회 학술강연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TagPerson|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수가 된 후 연구에 힘을 다하였다. 1934년 10월 10일 경성제국대학 약리학교실에서 연구하고(지도교수 柳樂達見, 杉原), 1937년 12월 16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수여 받았다. 1943년 {{TagPerson|박명진}}은 서울 종로 3정목에서 개업을 하기도 하였다. <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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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의학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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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후 역사 주체로써 자주적인 자아를 실천하는 교육을 하는 스승으로써 {{TagPesron|박명진}}은 한국 치의학 교육에 전력을 다하였다. 1945년 11월 1일 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경성치과대학으로 개편하고 학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8월 22일 군정법령 제102호인 「국립서울대학교설치령」에 의거하여 박명진, 이유경, 정보라 등은 경성치과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치과대학으로 편입시키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 후 1953년 8월 26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은 32개월간의 부산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복귀하였다. 1954년 4월 6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학술 활동이 인정되어 학술원위원에 피선되었다.<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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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후 역사 주체로써 자주적인 자아를 실천하는 교육을 하는 스승으로써 {{TagPerson|박명진}}은 한국 치의학 교육에 전력을 다하였다. 1945년 11월 1일 {{TagPerson|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경성치과대학으로 개편하고 학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8월 22일 군정법령 제102호인 「국립서울대학교설치령」에 의거하여 박명진, 이유경, 정보라 등은 경성치과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치과대학으로 편입시키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 후 1953년 8월 26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은 32개월간의 부산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복귀하였다. 1954년 4월 6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TagPerson|박명진}}은 학술 활동이 인정되어 학술원위원에 피선되었다.<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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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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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후 {{TagPesron|박명진}}은 치과의사회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TagPesron|박명진}}은 광복 후 조선치과의사회와 서울지회 한성치과의사회의 설립은 그 기원을 1925년에 조직되었던 한성치과의사회가 일본관헌의 간섭으로 1940년에 폐지되었다가 1945년에 조선치과의사회로 다시 발족한 것이라 하였다. 1946년 4월 조선치과의사회 총회에서 위원장에 {{TagPesron|박명진}}, 부위원장에 안병식이 선출되었다. 1957년 서울대학교치과대학 학장 {{TagPesron|박명진}}에 의해 대한치과의사협회 회관 마련의 기초가 이루어졌다.<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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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후 {{TagPerson|박명진}}은 치과의사회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TagPerson|박명진}}은 광복 후 조선치과의사회와 서울지회 한성치과의사회의 설립은 그 기원을 1925년에 조직되었던 한성치과의사회가 일본관헌의 간섭으로 1940년에 폐지되었다가 1945년에 조선치과의사회로 다시 발족한 것이라 하였다. 1946년 4월 조선치과의사회 총회에서 위원장에 {{TagPerson|박명진}}, 부위원장에 안병식이 선출되었다. 1957년 서울대학교치과대학 학장 {{TagPerson|박명진}}에 의해 대한치과의사협회 회관 마련의 기초가 이루어졌다.<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치과의학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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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후 치과의사회는 치과의학회와 분리되지 않았다. 치과의학회는 치과의사회의 한 기관이 되어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하였다. 1948년 5월 23일 {{TagPesron|박명진}}은 학회장으로 조선치과의학회 제2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1953년 4월 18-19일 대한치과의학회 제5회 학술강연회 및 총회는 양일간 부산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가교사 강당에서 열렸다.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 {{TagPesron|박명진}}은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주관하였다. <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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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후 치과의사회는 치과의학회와 분리되지 않았다. 치과의학회는 치과의사회의 한 기관이 되어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하였다. 1948년 5월 23일 {{TagPerson|박명진}}은 학회장으로 조선치과의학회 제2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1953년 4월 18-19일 대한치과의학회 제5회 학술강연회 및 총회는 양일간 부산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가교사 강당에서 열렸다.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 {{TagPerson|박명진}}은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주관하였다. <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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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위생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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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치과의사회의 주요 활동은 학술강연회와 구강위생계몽이었다. {{TagPesron|박명진}}은 구강위생강조주간 행사에 방송연자와 무료진료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6년 6월 9일-15일까지 조선치과의사회는 구강위생강조주간을 설정하여 구강검사, 유치발치, 구강위생계몽강연을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실시한 바 있었다. 1946년 {{TagPesron|박명진}}은 치과행정에 참여하였다. 초기 미군정하에 치무국에 치과의사 면허 및 등록위원회(일명 : 치과의사자격 심사위원회)를 두어 위원장 안종서(조선치과의사회 위원장), 위원 겸 상임서기 원제신(치무국장), 위원 {{TagPesron|박명진}}(경성치과대학 학장), 위원 정보라(경성치과대학 교수), 위원 이유경(경성치과대학 교수), 위원 문기옥(조선치과의사회 부위원장), 위원 조호연(경성대학 교수) 등을 위촉하고 일제의 면허증을 미군정면허로 갱신 교부하였다. {{TagPesron|박명진}}은 전문과목 표방허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1952년 11월 보건부는 국민의료법 제41조와 동법시행세칙 제34조에 의거 보건부 내에 의료업자 전문과목 심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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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치과의사회의 주요 활동은 학술강연회와 구강위생계몽이었다. {{TagPerson|박명진}}은 구강위생강조주간 행사에 방송연자와 무료진료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6년 6월 9일-15일까지 조선치과의사회는 구강위생강조주간을 설정하여 구강검사, 유치발치, 구강위생계몽강연을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실시한 바 있었다. 1946년 {{TagPerson|박명진}}은 치과행정에 참여하였다. 초기 미군정하에 치무국에 치과의사 면허 및 등록위원회(일명 : 치과의사자격 심사위원회)를 두어 위원장 안종서(조선치과의사회 위원장), 위원 겸 상임서기 원제신(치무국장), 위원 {{TagPerson|박명진}}(경성치과대학 학장), 위원 정보라(경성치과대학 교수), 위원 이유경(경성치과대학 교수), 위원 문기옥(조선치과의사회 부위원장), 위원 조호연(경성대학 교수) 등을 위촉하고 일제의 면허증을 미군정면허로 갱신 교부하였다. {{TagPerson|박명진}}은 전문과목 표방허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1952년 11월 보건부는 국민의료법 제41조와 동법시행세칙 제34조에 의거 보건부 내에 의료업자 전문과목 심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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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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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Pesron| 박명진}}은 한국의 치의학과 치과계를 온전히 증거하는 산 역사였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1957년에 발행한 『유네스코 한국총람』에 게재한 「한국의 치과의학」이라는 글에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한국치의학의 과거, 현재를 기술하고 있었다. 즉 일제강점기 치의학의 도입, 한국인 치과의사의 등장, 치의학 교육, 치과의사 단체의 설립으로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 한국인 치과의사회, 광복 후 치의학 교육,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 6.25동란과 치의학 교육에 대한 글을 남기었다. 특히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원이 한성치과의사회에 있다고 하였다.<ref>『[https://www.kda.or.kr/kda/kdajournalopen/kdajournalopencont1/journal_detail_view.kda?journal_key=36&journal_sub_key=198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치과의사협회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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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치과의학회 발표 연제'''===
 
==='''경성치과의학회 발표 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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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2년 10월 30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연속주조의 응용에 대하여, {{TagPesr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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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9월 23, 24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구개용적과 치궁과의 관계, {{TagPesr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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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9월 23, 24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구개용적과 치궁과의 관계, {{TagPers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1934년 9월 23, 24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보철장치의 수학적 관찰, {{TagPesr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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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9월 23, 24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보철장치의 수학적 관찰, {{TagPers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1935년 9월 22, 23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아비산이 지각신경 및 운동신경에 미치는 작용의 추보, {{TagPesr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1936년 9월 22, 23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2, 3의 지속적 해열작용을 갖는 약물의 진통작용에 대하여, {{TagPesr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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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9월 22, 23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아비산이 지각신경 및 운동신경에 미치는 작용의 추보, {{TagPers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1936년 9월 22, 23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2, 3의 지속적 해열작용을 갖는 약물의 진통작용에 대하여, {{TagPers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아비산의 약리작용에 대한 일고찰, {{TagPesron|박명진}}, 矢尾太郞<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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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산의 약리작용에 대한 일고찰, {{TagPerson|박명진}}, 矢尾太郞<br/>
 
1938년 9월 24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학술강연회 2-3 국소마취약의 운동신경섬유 자극 역가에 미치는 「에프에프린」의 영향 <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1938년 9월 24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학술강연회 2-3 국소마취약의 운동신경섬유 자극 역가에 미치는 「에프에프린」의 영향 <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특히 「아드레날린」과의 비교에 대하여, 제1보고 「벤졸」 및 유도체의 운동신경섬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TagPesr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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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아드레날린」과의 비교에 대하여, 제1보고 「벤졸」 및 유도체의 운동신경섬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TagPerson|박명진}}<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제2보고 「페놀」류, {{TagPesron|박명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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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보고 「페놀」류, {{TagPerson|박명진}}<br/>
「칼비톨」의 2, 3 약리학적 실험에 대하여, {{TagPesron|박명진}}, 山口一香  <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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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비톨」의 2, 3 약리학적 실험에 대하여, {{TagPerson|박명진}}, 山口一香  <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1939년 9월 24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주사약 용해제에 관한 2-3의 실험적 연구, {{TagPesron|박명진}}, 山口一香<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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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24일 {{TagGroup|경성치과의학회}} 주사약 용해제에 관한 2-3의 실험적 연구, {{TagPerson|박명진}}, 山口一香<ref>『[https://medhist.or.kr/upload/pdf/kjmh-13-2-252.pdf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대한의사사학회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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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7일 (수) 16:28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손규영(JBNU2024))이 작성했습니다.




박명진 (朴明鎭)
박명진.jpeg
출처 : 박명진
 
한글명 박명진 한자명 朴明鎭 영문명 Park Myoung-Jin 가나명 Kobayashi Akihide 이칭
성별 생년 1903년 몰년 1957년 출신지 서울시 양교동 전공 치의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1903년∼1957년. 치의학자·교육자. 서울 출생. 일제강점기에 경성치과전문학교기관를 졸업하고 이 학교 교수로 있다가 광복을 맞자 이 학교를 접수, 초대교장이 되었다.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기관가 창설되자, 이 학교를 치과대학에 편입시켜 1·2·3대에 걸쳐 학장을 역임하면서 치과대학의 발판을 굳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25년에 창립된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모임인 한성치과의사회단체 임원과 회장을 지내면서, 일본인 치과의사 단체인 경성치과의사회단체의 압력에 대항하여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단결과 치과의료 향상에 이바지하였고, 광복 후 조선치과의사회단체 회장으로 있으면서 서울과 경성의 두 갈래로 갈라진 치과의사회를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대한치과의학회단체 회장을 초대부터 연임하는 한편, 초창기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해마다 종합학술대회를 열고, 1954년 학술지를 창간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1]


생애


출생, 교육, 그리고 일제강점기

박명진인물은 1903년 7월 3일 서울시 양교동에서 박기붕(朴其鵬)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1920년 중앙중학교기관를 졸업하였다. 그는 1925년 4월에 경성치과의학교기관에 입학하고, 1928년 4월 8일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28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의원에 의무부수로 치과부에 근무하였고, 1928년 6월 15일 경성제국대학기관 의학부 부수, 1928년 11월 6일 경성치과의학교 부수에 임명되었다. 1929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교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되자, 그는 1929년 5월 10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편입하였고, 1930년 4월 26일 4학년 과정을 마치고,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기관 본과 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30년 4월 28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수가 되었다12). 1928년, 1931년 박명진인물은 경성치과의학교 일원으로 조선치과의학회 학술강연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박명진인물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수가 된 후 연구에 힘을 다하였다. 1934년 10월 10일 경성제국대학 약리학교실에서 연구하고(지도교수 柳樂達見, 杉原), 1937년 12월 16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수여 받았다. 1943년 박명진인물은 서울 종로 3정목에서 개업을 하기도 하였다. [2]


치의학 교육

광복 후 역사 주체로써 자주적인 자아를 실천하는 교육을 하는 스승으로써 박명진인물은 한국 치의학 교육에 전력을 다하였다. 1945년 11월 1일 박명진인물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경성치과대학으로 개편하고 학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8월 22일 군정법령 제102호인 「국립서울대학교설치령」에 의거하여 박명진, 이유경, 정보라 등은 경성치과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치과대학으로 편입시키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 후 1953년 8월 26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은 32개월간의 부산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복귀하였다. 1954년 4월 6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인물은 학술 활동이 인정되어 학술원위원에 피선되었다.[3]


치과의사회 활동

광복 후 박명진인물은 치과의사회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박명진인물은 광복 후 조선치과의사회와 서울지회 한성치과의사회의 설립은 그 기원을 1925년에 조직되었던 한성치과의사회가 일본관헌의 간섭으로 1940년에 폐지되었다가 1945년에 조선치과의사회로 다시 발족한 것이라 하였다. 1946년 4월 조선치과의사회 총회에서 위원장에 박명진인물, 부위원장에 안병식이 선출되었다. 1957년 서울대학교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인물에 의해 대한치과의사협회 회관 마련의 기초가 이루어졌다.[4]


치과의학회 활동

광복 후 치과의사회는 치과의학회와 분리되지 않았다. 치과의학회는 치과의사회의 한 기관이 되어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하였다. 1948년 5월 23일 박명진인물은 학회장으로 조선치과의학회 제2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1953년 4월 18-19일 대한치과의학회 제5회 학술강연회 및 총회는 양일간 부산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가교사 강당에서 열렸다.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 박명진인물은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주관하였다. [5]


구강위생계몽

치과의사회의 주요 활동은 학술강연회와 구강위생계몽이었다. 박명진인물은 구강위생강조주간 행사에 방송연자와 무료진료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6년 6월 9일-15일까지 조선치과의사회는 구강위생강조주간을 설정하여 구강검사, 유치발치, 구강위생계몽강연을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실시한 바 있었다. 1946년 박명진인물은 치과행정에 참여하였다. 초기 미군정하에 치무국에 치과의사 면허 및 등록위원회(일명 : 치과의사자격 심사위원회)를 두어 위원장 안종서(조선치과의사회 위원장), 위원 겸 상임서기 원제신(치무국장), 위원 박명진인물(경성치과대학 학장), 위원 정보라(경성치과대학 교수), 위원 이유경(경성치과대학 교수), 위원 문기옥(조선치과의사회 부위원장), 위원 조호연(경성대학 교수) 등을 위촉하고 일제의 면허증을 미군정면허로 갱신 교부하였다. 박명진인물은 전문과목 표방허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1952년 11월 보건부는 국민의료법 제41조와 동법시행세칙 제34조에 의거 보건부 내에 의료업자 전문과목 심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6]


산 역사

박명진인물은 한국의 치의학과 치과계를 온전히 증거하는 산 역사였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1957년에 발행한 『유네스코 한국총람』에 게재한 「한국의 치과의학」이라는 글에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한국치의학의 과거, 현재를 기술하고 있었다. 즉 일제강점기 치의학의 도입, 한국인 치과의사의 등장, 치의학 교육, 치과의사 단체의 설립으로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 한국인 치과의사회, 광복 후 치의학 교육,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 6.25동란과 치의학 교육에 대한 글을 남기었다. 특히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원이 한성치과의사회에 있다고 하였다.[7]





연구


경성치과의학회 발표 연제

1932년 10월 30일 경성치과의학회단체, 연속주조의 응용에 대하여, 박명진인물[8]

1933년 9월 23, 24일 경성치과의학회단체, 구개용적과 치궁과의 관계, 박명진인물[9]
1934년 9월 23, 24일 경성치과의학회단체, 보철장치의 수학적 관찰, 박명진인물[10]
1935년 9월 22, 23일 경성치과의학회단체 아비산이 지각신경 및 운동신경에 미치는 작용의 추보, 박명진인물[11]
1936년 9월 22, 23일 경성치과의학회단체 2, 3의 지속적 해열작용을 갖는 약물의 진통작용에 대하여, 박명진인물[12]
아비산의 약리작용에 대한 일고찰, 박명진인물, 矢尾太郞
1938년 9월 24일 경성치과의학회단체 학술강연회 2-3 국소마취약의 운동신경섬유 자극 역가에 미치는 「에프에프린」의 영향 [13]
특히 「아드레날린」과의 비교에 대하여, 제1보고 「벤졸」 및 유도체의 운동신경섬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박명진인물[14]
제2보고 「페놀」류, 박명진인물
「칼비톨」의 2, 3 약리학적 실험에 대하여, 박명진인물, 山口一香 [15]
1939년 9월 24일 경성치과의학회단체 주사약 용해제에 관한 2-3의 실험적 연구, 박명진인물, 山口一香[16]

1940년 9월 22일 경성치과의학회단체 금속제제의 치아 및 구강부속조직내 흡수에 관한 실험적 연구, 박명진인물 [17]


논문

박명진인물, 단기간 주조법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2권 2호 1933.

박명진인물, 혈액형 치궁형 및 구개용적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3권 2호 1934.
박명진인물, 보철장치의 수학적 관찰, 경성치과의학회잡지 3권 3,4호 1934.
박명진인물, 아비산의 지각신경 또는 운동신경에 미치는 작용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4권 3,4호 1935.
박명진인물, 2, 3의 지속적 해열작용을 갖는 약물의 진통작용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5권 4호 1937.
박명진인물, 내가 고안한 회전국부교합기에 대하여, 만선지치계 7권 7호 1938.
박명진인물, 山口一香, 吉村邦一, 시호의 집토끼 체온에 미치는 작용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7권 2호 1938.
박명진인물, 벤졸 및 그 유도체의 운동신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제1보고 벤졸 및 벤졸 핵 수소원자 1개가 단지 알킬기, 할로겐기, 니트로기, 아미드기, 또는 시안으로서 치환시키는 것, 경성치과의학회잡지 7권 1호 1938.
박명진인물, 벤졸 및 그 유도체의 운동신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제2보고 Phenol류, 경성치과의학회잡지 8권 3호 1940.
박명진인물, 벤졸 및 그 유도체의 운동신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제3보고 안식향산류, 경성치과의학회잡지 8권 4호 1940.
박명진인물, 창연제와 연제 투여 집토끼의 구강 내 기관에 의한 창연과 연침착에 관한 분광경적 검색에 대하여(독문), 일본의학집보 약물학 14권 1호 1941.

박명진인물, 아드레날린, 피로갈핀 및 아트로핀 투여한 집토끼의 연제투여 후의 구강 내기관에 의한 연침착에 관한 분광경적 검색에 대하여(독문), 일본의학집보 약물학 15권 2, 3호 1942.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박기붕 Person: 박명진 A hasSon B
Person: 박명진 Institution: 경성치과의학교 A graduates B
Person: 박명진 Institution: 조선총독부의원 A worksAt B
Person: 박명진 Group: 한성치과의사회회 A presidentof B
Person: 박명진 Institution: 경성치과대학 A deanof B
Person: 박명진 Group: 조선치과의사회 A isMemberOf B
Essay:〈대변자의 역할을 완수하라〉, <<조선치계>> Person: 박명진 A writer B
Essay:〈우리의 기록>, 《저경지》제1권 제5호 Person: 박명진 A writer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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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 Graph






참고자원


현원복,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대한치과의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학자. 교육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재의,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대한치과의사협회지』제 49권 11, 2011.11.24.,『대한치과의사협회』online, 대한치과의사협회

신재의,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대한의학사학회지』제13권 제2호, 2004.12.,『대한의학사학회』online, 대한의학사학회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2.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online, 대한치과의사협회지
  3.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online, 대한치과의사협회지
  4.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online, 대한치과의사협회지
  5.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online, 대한치과의사협회지
  6.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online, 대한치과의사협회지
  7.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online, 대한치과의사협회지
  8.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
  9.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
  10.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
  11.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
  12.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
  13.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
  14.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
  15.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
  16.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
  17. 일제 강점기의 치의학(齒醫學)과 그 제도의 운영online, 대한의사사학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