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초기의 건도문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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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 二, 태조조의 건도문제)
(본문3: 三, 정종 및 태종조의 천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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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TagSpage|59-3}}(甲) 定宗의 即位와 開京移都
 
|목차3원문1번={{TagSpage|59-3}}(甲) 定宗의 即位와 開京移都
 
|목차3원문2번={{TagSpage|59-4}}太祖의 創業 後 七年이요, 漢陽 新都의 工役을 完了한 後 겨우 二年에, 王室에는 一大 不祥事가 이러났었다. 在來 史家의 所謂 『芳碩(世子)의 亂』 혹 『鄭道傳의 亂』이란 것이 즉 그것이다. 그러나 在來의 이 亂稱은 좀 抑鬱한 稱呼인 듯하므로 차랄이 이를 靖安君 芳遠(第五王子 太宗)의 亂 혹은 王子의 亂이라고 하는 편이 妥當할 것 같다. 지금 簡單히 그 亂의 {{TagPage|60}}顚末을 말하면—太祖에게는 八人의 男子가 있어, 第一男으로부터 第六男까지는 神懿王后 韓氏의 所生이요, 第七男 第八男은 神德王后 康氏의 所生이니, 太祖 即位 初(元年)에 建儲問題가 이러나 太祖는 康妃의 意向을 重히 여기어 第七男 芳蕃을 세워 世子를 삼으려 하매, 裵克廉 趙浚 等은 그 爲人의 狂悖함을 指摘하야, 반드시 康妃의 所生을 세울진대 季男 芳碩이 稍可하다고 하야 奏請하야 芳碩을 世子로 삼게 하였다. 開國功臣 鄭道傳 南誾 沈孝生(世子嬪 父) 等은 다 子芳碩을 輔導하든 有力한 人物들이었다. 그런데 韓氏 所生의 諸王子는 이 建儲에 對하야 얼마나 큰 不平과 猜忌를 품었을까는 想像하야 남음이 있다. 就中 第五王子 靖安君 芳遠(後의太宗)과 같은 이는 太祖의 創業을 輔佐하든(마치 唐의 太宗과 같이) 功勞가 많고 英邁의 資를 가춘 異數의 人임에 不拘하고 世子의 冊立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心中의 不平은 더욱 컸을 것이다. 太祖 七年의 變亂은 즉 이 建儲에 對한 宿憾의 武力的 暴擧로 볼 수 있는 것이어니와, 國史에 鄭道傳 南誾 等이 世子 芳碩에게 附하야 韓氏 所生의 諸王子를 忌하야 七年 八月에 太祖의 委席을 機會로 삼아 이들에게 一網打盡의 禍를 주려고 할새, 그 陰謀가 漏洩되야 靖安君 一派는 忿起하야 未然에 이를 鎭壓하야 所謂 安社의 功을 세웠다고 하였으나, 이런 事實은 우리 會員 李相佰 氏의 所說과 같이(本學報 第二卷, 同氏의 三峰人物考 參照) 여러 가지로 疑訝를 갖게 하야 信用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靖安君 黨人(李茂)의 誣僞的 告發을 그대로 실린 바에 不過한 것인 듯하며, 要컨대 이 變亂은 鄭道傳 側에서는 아지 못하는 중에 當하였으므로 陰謀는 실상 道傳 側에서 이러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靖安君 黨人 側에서 禳成되야 이때(太祖의 病患을 好機로 삼아) 君을 激動하야 暗夜 中에 道傳 等 襲擊殺害하고 亂의 責任을 世子及道傳 等에 轉嫁하였든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떠튼 이 變亂의 責任者로 汚名을 쓴 世子 芳碩은 結局 廢位되야 遠配道 中 靖安君의 部下에게 殺害되고, 그 同母兒인 撫安君 芳蕃도 同樣의 慘禍를 입고 말었다. 世子 側 一派의 죽음은 실로 {{TagPage|61-1}}抱寃漲天 含淚入地의 不幸이요, 또 그 變亂은 一種의 骨肉之爭으로 王室의 말할 수 없는 慘劇이었다. 世子의 廢位와 同時에 그 位는 當然히 靖安君에게로 도라가야 할 것이므로 諸臣들은 靖安君으로써 世子를 삼기를 願하매, 君은 이를 固辭하고 第二兄 永安君 芳果에게 讓하야 太祖의 允許를 받었다. 靖安君이 이와 같이 固辭하고 特히 永安君을 推한 것은, 勿論 自己는 당정 嫌疑로운 괴로운 立場에 있었든 거와 永安君의 無野心한 人品이 將來에 어떠한 態度를 取할 것을 미리 看破한 所以였다. 太祖는 芳碩 芳蕃의 不幸을 드시고 크게 震怒하야 이로부터 心事 자못 散亂하야 政治에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翌九月에 마침내 位를 世子 芳果에게 禪하게 되였다. 이는 곧 第二代 定宗大王이시니, 定宗은 처음부터 王位繼承에 對한 野心은 없었든 모양이나, 右 變亂의 結果로 이와 같이 極位에 오르게 된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定宗은 父王을 尊하야 上王이라 稱하였다.
 
|목차3원문2번={{TagSpage|59-4}}太祖의 創業 後 七年이요, 漢陽 新都의 工役을 完了한 後 겨우 二年에, 王室에는 一大 不祥事가 이러났었다. 在來 史家의 所謂 『芳碩(世子)의 亂』 혹 『鄭道傳의 亂』이란 것이 즉 그것이다. 그러나 在來의 이 亂稱은 좀 抑鬱한 稱呼인 듯하므로 차랄이 이를 靖安君 芳遠(第五王子 太宗)의 亂 혹은 王子의 亂이라고 하는 편이 妥當할 것 같다. 지금 簡單히 그 亂의 {{TagPage|60}}顚末을 말하면—太祖에게는 八人의 男子가 있어, 第一男으로부터 第六男까지는 神懿王后 韓氏의 所生이요, 第七男 第八男은 神德王后 康氏의 所生이니, 太祖 即位 初(元年)에 建儲問題가 이러나 太祖는 康妃의 意向을 重히 여기어 第七男 芳蕃을 세워 世子를 삼으려 하매, 裵克廉 趙浚 等은 그 爲人의 狂悖함을 指摘하야, 반드시 康妃의 所生을 세울진대 季男 芳碩이 稍可하다고 하야 奏請하야 芳碩을 世子로 삼게 하였다. 開國功臣 鄭道傳 南誾 沈孝生(世子嬪 父) 等은 다 子芳碩을 輔導하든 有力한 人物들이었다. 그런데 韓氏 所生의 諸王子는 이 建儲에 對하야 얼마나 큰 不平과 猜忌를 품었을까는 想像하야 남음이 있다. 就中 第五王子 靖安君 芳遠(後의太宗)과 같은 이는 太祖의 創業을 輔佐하든(마치 唐의 太宗과 같이) 功勞가 많고 英邁의 資를 가춘 異數의 人임에 不拘하고 世子의 冊立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心中의 不平은 더욱 컸을 것이다. 太祖 七年의 變亂은 즉 이 建儲에 對한 宿憾의 武力的 暴擧로 볼 수 있는 것이어니와, 國史에 鄭道傳 南誾 等이 世子 芳碩에게 附하야 韓氏 所生의 諸王子를 忌하야 七年 八月에 太祖의 委席을 機會로 삼아 이들에게 一網打盡의 禍를 주려고 할새, 그 陰謀가 漏洩되야 靖安君 一派는 忿起하야 未然에 이를 鎭壓하야 所謂 安社의 功을 세웠다고 하였으나, 이런 事實은 우리 會員 李相佰 氏의 所說과 같이(本學報 第二卷, 同氏의 三峰人物考 參照) 여러 가지로 疑訝를 갖게 하야 信用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靖安君 黨人(李茂)의 誣僞的 告發을 그대로 실린 바에 不過한 것인 듯하며, 要컨대 이 變亂은 鄭道傳 側에서는 아지 못하는 중에 當하였으므로 陰謀는 실상 道傳 側에서 이러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靖安君 黨人 側에서 禳成되야 이때(太祖의 病患을 好機로 삼아) 君을 激動하야 暗夜 中에 道傳 等 襲擊殺害하고 亂의 責任을 世子及道傳 等에 轉嫁하였든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떠튼 이 變亂의 責任者로 汚名을 쓴 世子 芳碩은 結局 廢位되야 遠配道 中 靖安君의 部下에게 殺害되고, 그 同母兒인 撫安君 芳蕃도 同樣의 慘禍를 입고 말었다. 世子 側 一派의 죽음은 실로 {{TagPage|61-1}}抱寃漲天 含淚入地의 不幸이요, 또 그 變亂은 一種의 骨肉之爭으로 王室의 말할 수 없는 慘劇이었다. 世子의 廢位와 同時에 그 位는 當然히 靖安君에게로 도라가야 할 것이므로 諸臣들은 靖安君으로써 世子를 삼기를 願하매, 君은 이를 固辭하고 第二兄 永安君 芳果에게 讓하야 太祖의 允許를 받었다. 靖安君이 이와 같이 固辭하고 特히 永安君을 推한 것은, 勿論 自己는 당정 嫌疑로운 괴로운 立場에 있었든 거와 永安君의 無野心한 人品이 將來에 어떠한 態度를 取할 것을 미리 看破한 所以였다. 太祖는 芳碩 芳蕃의 不幸을 드시고 크게 震怒하야 이로부터 心事 자못 散亂하야 政治에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翌九月에 마침내 位를 世子 芳果에게 禪하게 되였다. 이는 곧 第二代 定宗大王이시니, 定宗은 처음부터 王位繼承에 對한 野心은 없었든 모양이나, 右 變亂의 結果로 이와 같이 極位에 오르게 된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定宗은 父王을 尊하야 上王이라 稱하였다.
|목차3원문3번={{TagSpage|61-2}}以上은 太祖 末年의 王子亂 乃至 定宗 即位의 事情에 就하야 略述한 바이어니와, 王子亂과 같은 不祥事에 繼續하야 定宗 即位 初에 自然界에도 여러 가지 異常한 現象이 나타났었다. 혹은 群烏가 聚噪하고 혹은 野鵲이 來巢하고 혹은 災異가 屢見하야, 무슨 不吉의 徵兆나 아닌가 하야, 이때 人心에 不安을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야 書雲觀에서는 이를 理由로 하야 上書하야 避方하기를 請하였다. 避方은 즉 避凶就吉이니 凶方을 避하야 吉方으로 移御하자는 말이었다. 定宗은 이로 因하야 元年 正月 壬申(一日)에 宗親 及 左政丞 趙浚 等 諸功臣을 會合하고 書雲觀 所上의 書를 보이시며 避方의 可否, 즉 移御의 與否에 하야 問議하시었다. 定宗實錄 卷一에<blockquote no="21">書雲觀上言 羣烏聚噪 野鵲來巢 災異屢見 宜修省消變 且宜避方 上 乃悉召宗親及左政丞趙浚等諸宰 執示以書雲觀所上書 且問避方可否云云</blockquote>{{TagPage|62-1}}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王의 問議에 對하야 諸臣은 다 避方하는 것이 可하다 하고, 그 方所에 就하여는 畿內 州縣에는 大小臣僚와 宿衛軍의 依寓할 곳이 없지만, 오직 松都에는 宮闕과 群臣의 第宅이 完全한 채로 남아있다는 뜻을 上奏하였다. 問題는 意外로 速히 進行되야 아무 異議 없이 松都에 移御하기로 決定되야, 同年(元年) 正月 七日에 斷然히 이를 實行함에 이르렀다. 形式은 避方이라고 하야 暫時 移御에 不過한 것 같이 보이지만, 其實은 遷都와 조곰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王子의 變亂 以來 心中이 자못 不樂한 太祖께서는 이 移御에 對하야 더욱 不愉快를 늣기사 途中에서 從員을 도라다 보시며 말씀하기를 『初移都漢陽 非獨吾志 與國人議之』라 하시고 慷慨無量의 눈물을 흘리시었다는 이야기가 實錄에 보이거니와 이과 反對로 이때 松都에 對한 懷舊의 情과 漢陽의 草創에 견디지 못하든 一般 都民들은 거이 熱狂的으로 이 移御를 조와하였든 모양이니, 實錄에는 當時 都의 情況을 記錄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blockquote no="22">初都人皆懷舊都 聞欲還都 相與喜悅 提携負戴 絡繹于路 使守城門以止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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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TagSpage|61-2}}以上은 太祖 末年의 王子亂 乃至 定宗 即位의 事情에 就하야 略述한 바이어니와, 王子亂과 같은 不祥事에 繼續하야 定宗 即位 初에 自然界에도 여러 가지 異常한 現象이 나타났었다. 혹은 群烏가 聚噪하고 혹은 野鵲이 來巢하고 혹은 災異가 屢見하야, 무슨 不吉의 徵兆나 아닌가 하야, 이때 人心에 不安을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야 書雲觀에서는 이를 理由로 하야 上書하야 避方하기를 請하였다. 避方은 즉 避凶就吉이니 凶方을 避하야 吉方으로 移御하자는 말이었다. 定宗은 이로 因하야 元年 正月 壬申(一日)에 宗親 及 左政丞 趙浚 等 諸功臣을 會合하고 書雲觀 所上의 書를 보이시며 避方의 可否, 즉 移御의 與否에 하야 問議하시었다. 定宗實錄 卷一에<blockquote no="21">書雲觀上言 羣烏聚噪 野鵲來巢 災異屢見 宜修省消變 且宜避方 上 乃悉召宗親及左政丞趙浚等諸宰 執示以書雲觀所上書 且問避方可否云云</blockquote>{{TagPage|62-1}}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王의 問議에 對하야 諸臣은 다 避方하는 것이 可하다 하고, 그 方所에 就하여는 畿內 州縣에는 大小臣僚와 宿衛軍의 依寓할 곳이 없지만, 오직 松都에는 宮闕과 群臣의 第宅이 完全한 채로 남아있다는 뜻을 上奏하였다. 問題는 意外로 速히 進行되야 아무 異議 없이 松都에 移御하기로 決定되야, 同年(元年) 正月 七日에 斷然히 이를 實行함에 이르렀다. 形式은 避方이라고 하야 暫時 移御에 不過한 것 같이 보이지만, 其實은 遷都와 조곰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王子의 變亂 以來 心中이 자못 不樂한 太祖께서는 이 移御에 對하야 더욱 不愉快를 늣기사 途中에서 從員을 도라다 보시며 말씀하기를 <cite no="29">『初移都漢陽 非獨吾志 與國人議之』</cite>라 하시고 慷慨無量의 눈물을 흘리시었다는 이야기가 實錄에 보이거니와 이과 反對로 이때 松都에 對한 懷舊의 情과 漢陽의 草創에 견디지 못하든 一般 都民들은 거이 熱狂的으로 이 移御를 조와하였든 모양이니, 實錄에는 當時 都의 情況을 記錄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blockquote no="22">初都人皆懷舊都 聞欲還都 相與喜悅 提携負戴 絡繹于路 使守城門以止之</blockquote>
|목차3원문4번={{TagSpage|62-2}}定宗께서도 松都移御를 대단 기뻐하셨든 것은 翌二月 松都 壽昌宮(西小門 內에 있든 宮으로 太祖 即位하시든 곳)을 本闕로 삼아 御하였을 때 그 北苑에 올라 左右를 도라다 보시고 『以前朝太祖之智 建都于此 豈偶然哉』라고 말슴하섰다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또 實錄의 上文에 接하야 『遂有移都松京之志』라고 한 것을 보면, 이 松都 移御가 尋常한 一時的의 것이 아님을 더욱 깨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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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TagSpage|62-2}}定宗께서도 松都移御를 대단 기뻐하셨든 것은 翌二月 松都 壽昌宮(西小門 內에 있든 宮으로 太祖 即位하시든 곳)을 本闕로 삼아 御하였을 때 그 北苑에 올라 左右를 도라다 보시고 <cite no="30">『以前朝太祖之智 建都于此 豈偶然哉』</cite>라고 말슴하섰다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또 實錄의 上文에 接하야 <cite no="31">『遂有移都松京之志』</cite>라고 한 것을 보면, 이 松都 移御가 尋常한 一時的의 것이 아님을 더욱 깨달을 것이다.
 
|목차3원문5번={{TagSpage|62-3}}要컨대 定宗의 松都 移御는 事實上 新都 漢陽을 버리는 것과 同樣의 舉動이었거니와, 그 理由는 決코 單純히 書雲觀의 奏請한 意味의 避方에만 있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실상 重要한 理由는 漢陽 奠都한 지 불과 四五年만에 王子의 亂이 이러나 骨肉이 피를 흘리는 不祥事를 보게 되고, 일로 因하야 太祖는 寶位를 버리시고 隱居하시게 되{{TagPage|63-1}}였으므로 이것이 혹 漢陽 地德의 所致가 아닌가 하는 風水地理的 信念에 依한 避方의 義가 더 深刻하였든 것과, 그 다음으로는 太祖 以外의 君臣의 松都에 對한 懷舊의 情이 懇切하였든 것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簡單히 말하면, 定宗朝의 遷都의 事情은, 第一 王子의 亂, 第二 君臣의 松都懷舊의 情, 第三 自然界의 異變에 있었든 것이다. 第一 第二의 事情은 實質的 無言의 理由임에 對하야, 第三의 事情은 形式的 有言의 口實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목차3원문5번={{TagSpage|62-3}}要컨대 定宗의 松都 移御는 事實上 新都 漢陽을 버리는 것과 同樣의 舉動이었거니와, 그 理由는 決코 單純히 書雲觀의 奏請한 意味의 避方에만 있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실상 重要한 理由는 漢陽 奠都한 지 불과 四五年만에 王子의 亂이 이러나 骨肉이 피를 흘리는 不祥事를 보게 되고, 일로 因하야 太祖는 寶位를 버리시고 隱居하시게 되{{TagPage|63-1}}였으므로 이것이 혹 漢陽 地德의 所致가 아닌가 하는 風水地理的 信念에 依한 避方의 義가 더 深刻하였든 것과, 그 다음으로는 太祖 以外의 君臣의 松都에 對한 懷舊의 情이 懇切하였든 것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簡單히 말하면, 定宗朝의 遷都의 事情은, 第一 王子의 亂, 第二 君臣의 松都懷舊의 情, 第三 自然界의 異變에 있었든 것이다. 第一 第二의 事情은 實質的 無言의 理由임에 對하야, 第三의 事情은 形式的 有言의 口實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목차3원문6번={{TagSpage|63-2}}(乙) 太宗의 即位와 遷都問題
 
|목차3원문6번={{TagSpage|63-2}}(乙) 太宗의 即位와 遷都問題
 
|목차3원문7번={{TagSpage|63-3}}(A) 芳幹의 亂과 太宗의 即位
 
|목차3원문7번={{TagSpage|63-3}}(A) 芳幹의 亂과 太宗의 即位
|목차3원문8번={{TagSpage|63-4}}定宗의 開京 移御 後 겨우 一年에 또 王子의 亂이 이러났다. 所謂 芳幹은 亂이 이것이다. 芳幹은 太祖의 第四子 懷安君 그이로서 韓氏 所生 王子 中 太宗과 같이 王位繼承에 對한 野心도 있고 또 豪氣도 있든 不碌々한 人物이었다. 그러나 懷安君은 靖安君의 人格과 功勳과 努力과 威望에는 및을 수 없었고, 따라서 항상 猜疑不安 中에 있든바, 마침 知中樞 朴苞가 密告하되 靖安이 장차 懷安을 圖하려 한다고 하였다. 苞는 앞서 戊寅 王子亂에 靖安君을 도아 功勞가 많었음에 不拘하고 賞爵이 높지 못함에 怏怏不樂하야 이제 懷安을 衝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懷安은 苞의 煬動에 依하야 兵을 擧하야 靖安君을 除하려 하매 靖安도 이를 알고 역시 兵을 出하야 드듸어 兩軍의 交戰을 보게 되니 이야말로 同母 骨肉間의 血戰이었다. 戰局은 懷安(芳幹)軍 편이 不利하야 勢窮敗走를 免치 못하고, 마침내 懷安은—「擧兵作亂」 「謀害同氣」의 罪로 王命으로 特히 極刑에 一等을 減하야 黃海道 兎山에 流配되고, 朴苞는 煬動의 罪로써 竄誅되{{TagPage|64-1}}고 말었다. 亂後 定宗은 河崙 等의 奏請에 依하야 上王(太祖)의 許諾을 얻어 靖安君을 세워 世子를 삼으시고 仍히 下敎하야 曰 『國本定然後 衆志定 今者之亂 正以國本未定也』라고 하였다. 同年 七月에 王은 上王(太祖)에게 太上王의 尊號를 올리고 드듸어 十一月에 이르러는 位를 世子에게 傳하시니 在位 不過 二年. 新主는 곧 第三代 太宗大王이시었다. 太宗의 王位繼承은 저 戊寅亂(太祖 七年) 以後 거이 決定的으로 되다싶이 하야 단지 時日의 早晩問題뿐이었지만, 이번에 이와 같이 速히 實現된 것은 勿論 우의 芳幹의 亂이 이를 促進시킨 것이었다. 太宗은 定宗을 높이어 上王이라 하시고 이로부터 萬機를 總裁하시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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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8번={{TagSpage|63-4}}定宗의 開京 移御 後 겨우 一年에 또 王子의 亂이 이러났다. 所謂 芳幹은 亂이 이것이다. 芳幹은 太祖의 第四子 懷安君 그이로서 韓氏 所生 王子 中 太宗과 같이 王位繼承에 對한 野心도 있고 또 豪氣도 있든 不碌々한 人物이었다. 그러나 懷安君은 靖安君의 人格과 功勳과 努力과 威望에는 및을 수 없었고, 따라서 항상 猜疑不安 中에 있든바, 마침 知中樞 朴苞가 密告하되 靖安이 장차 懷安을 圖하려 한다고 하였다. 苞는 앞서 戊寅 王子亂에 靖安君을 도아 功勞가 많었음에 不拘하고 賞爵이 높지 못함에 怏怏不樂하야 이제 懷安을 衝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懷安은 苞의 煬動에 依하야 兵을 擧하야 靖安君을 除하려 하매 靖安도 이를 알고 역시 兵을 出하야 드듸어 兩軍의 交戰을 보게 되니 이야말로 同母 骨肉間의 血戰이었다. 戰局은 懷安(芳幹)軍 편이 不利하야 勢窮敗走를 免치 못하고, 마침내 懷安은—「擧兵作亂」 「謀害同氣」의 罪로 王命으로 特히 極刑에 一等을 減하야 黃海道 兎山에 流配되고, 朴苞는 煬動의 罪로써 竄誅되{{TagPage|64-1}}고 말었다. 亂後 定宗은 河崙 等의 奏請에 依하야 上王(太祖)의 許諾을 얻어 靖安君을 세워 世子를 삼으시고 仍히 下敎하야 曰 <cite no="32">『國本定然後 衆志定 今者之亂 正以國本未定也』</cite>라고 하였다. 同年 七月에 王은 上王(太祖)에게 太上王의 尊號를 올리고 드듸어 十一月에 이르러는 位를 世子에게 傳하시니 在位 不過 二年. 新主는 곧 第三代 太宗大王이시었다. 太宗의 王位繼承은 저 戊寅亂(太祖 七年) 以後 거이 決定的으로 되다싶이 하야 단지 時日의 早晩問題뿐이었지만, 이번에 이와 같이 速히 實現된 것은 勿論 우의 芳幹의 亂이 이를 促進시킨 것이었다. 太宗은 定宗을 높이어 上王이라 하시고 이로부터 萬機를 總裁하시게 되였다.
 
|목차3원문9번={{TagSpage|64-2}}(B), 壽昌宮의 火災와 第一回 遷都議
 
|목차3원문9번={{TagSpage|64-2}}(B), 壽昌宮의 火災와 第一回 遷都議
|목차3원문10번={{TagSpage|64-3}}그런데 太宗 即位 翌月(定宗 二年 十二月)에 開京에는 一大 災變이 이러났었다. 즉 이때 本闕인 壽昌宮에 火災가 이러나 寢室로부터 大殿에까지 延燒하야, 極力 이를 鎭壓하였으나, 當時 觀念으로는 國家의 一大 不祥事이었다. 이 火災는 觀念으로나 實際上으로나 王의 移御를 必要케 하는 同時에 依例的인 遷都論의 擡頭를 戟刺시킴 足하였다. 과연 火災 直後 太宗께서는 趙浚 成石璘 以下 文臣 十餘人을 會하시고 書雲觀 所藏의 祕記密書에 按하야 遷都의 利害吉凶을 議論케 하시니 定宗實錄 二年 十二月條에<blockquote no="23">(上)謂平壤伯趙浚·昌寧伯成石璘以下文官十餘人曰 不幸有災 卿等按書雲觀秘密圖籍 議遷都利害以聞云云</blockquote>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즉 이것이 太宗朝의 遷都問題에 關한 第一回的 會議이었다. 이 會議에 있어 諸臣의 論議는 자못 紛紜하야 意見의 一致를 보지 못하고 말었지만, 新任의 右政丞 河崙만은 太祖朝에서와 같이 如前히 東方秘記에 依하야 母岳 遷都를 建議하였다. 그러나 太宗께서는 일즉부터 儒學의 敎養을 받으심이 깊어 迷信思想에는 그다시 惑信{{TagPage|65-1}}하시지 않는 터이지만, 이 會議에서 더욱 讖緯術數의 說이 人心을 眩惑케 함이 甚한 것을 깨다르시고 諸大臣에게 일러 曰 『今讖緯術數之言 縱橫不止 眩惑人心 何以處之』라 하시고, 또 『新都 乃至父主所創也 何必別建都邑 以勞民乎』라고 하야 父王의 所創인 新都 漢陽을 全혀 버리기 어려운 뜻을 보이시고 드듸어 命하야 術數地利의 書를 禁케 하였다 한다. 太宗의 이 言敎는 當時 儒臣들의 見解에 比하야 可謂 百尺竿頭에 一步를 내킨 것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特히 그 漢都支持說과 같은 것은 太上王의 意思를 尊重히 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太祖께서는 앞서부터 漢陽을 버리는 것을 여간 遺憾으로 역이시지 아니하야, 開京 遷都 後에도 가끔 漢陽에 獨幸하신 일이 實錄에 나타나거니와 定宗 二年 十一月 에는 太祖께서 五臺山으로부터 開京에 還하야 新主인 太宗을 보시고 特히 漢陽 還都의 意로써 諭하신 일까지 있었다. 定宗實錄 同年 同月條에 이 事實을 記載하야 曰<blockquote no="24">先是 太上王常欲遷都漢陽 至是 謂上曰 汝兄欲還漢陽 以慰我心 其志已定 汝能體予乎 上對曰子心何敢不從命乎</blockquote>라고 하였다. 이에 依하면 太宗의 우의 言敎는 確實히 太上王의 志를 尊重且繼承하시는 意味인 것이 더욱 分明하고, 또 上王(定宗)도 역시 그러하였든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太宗의 言敎는 단지 王의 意思表示에 不過하였을 뿐이요 그대로 곧 實行할 것을 聲明하신 바는 아니었다. 그리하야 이때의 遷都議는 아무 決末을 보지 못한 채로 주저앉고 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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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0번={{TagSpage|64-3}}그런데 太宗 即位 翌月(定宗 二年 十二月)에 開京에는 一大 災變이 이러났었다. 즉 이때 本闕인 壽昌宮에 火災가 이러나 寢室로부터 大殿에까지 延燒하야, 極力 이를 鎭壓하였으나, 當時 觀念으로는 國家의 一大 不祥事이었다. 이 火災는 觀念으로나 實際上으로나 王의 移御를 必要케 하는 同時에 依例的인 遷都論의 擡頭를 戟刺시킴 足하였다. 과연 火災 直後 太宗께서는 趙浚 成石璘 以下 文臣 十餘人을 會하시고 書雲觀 所藏의 祕記密書에 按하야 遷都의 利害吉凶을 議論케 하시니 定宗實錄 二年 十二月條에<blockquote no="23">(上)謂平壤伯趙浚·昌寧伯成石璘以下文官十餘人曰 不幸有災 卿等按書雲觀秘密圖籍 議遷都利害以聞云云</blockquote>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즉 이것이 太宗朝의 遷都問題에 關한 第一回的 會議이었다. 이 會議에 있어 諸臣의 論議는 자못 紛紜하야 意見의 一致를 보지 못하고 말었지만, 新任의 右政丞 河崙만은 太祖朝에서와 같이 如前히 東方秘記에 依하야 母岳 遷都를 建議하였다. 그러나 太宗께서는 일즉부터 儒學의 敎養을 받으심이 깊어 迷信思想에는 그다시 惑信{{TagPage|65-1}}하시지 않는 터이지만, 이 會議에서 더욱 讖緯術數의 說이 人心을 眩惑케 함이 甚한 것을 깨다르시고 諸大臣에게 일러 曰 <cite no="33">『今讖緯術數之言 縱橫不止 眩惑人心 何以處之』</cite>라 하시고, 또 <cite no="34">『新都 乃至父主所創也 何必別建都邑 以勞民乎』</cite>라고 하야 父王의 所創인 新都 漢陽을 全혀 버리기 어려운 뜻을 보이시고 드듸어 命하야 術數地利의 書를 禁케 하였다 한다. 太宗의 이 言敎는 當時 儒臣들의 見解에 比하야 可謂 百尺竿頭에 一步를 내킨 것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特히 그 漢都支持說과 같은 것은 太上王의 意思를 尊重히 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太祖께서는 앞서부터 漢陽을 버리는 것을 여간 遺憾으로 역이시지 아니하야, 開京 遷都 後에도 가끔 漢陽에 獨幸하신 일이 實錄에 나타나거니와 定宗 二年 十一月 에는 太祖께서 五臺山으로부터 開京에 還하야 新主인 太宗을 보시고 特히 漢陽 還都의 意로써 諭하신 일까지 있었다. 定宗實錄 同年 同月條에 이 事實을 記載하야 曰<blockquote no="24">先是 太上王常欲遷都漢陽 至是 謂上曰 汝兄欲還漢陽 以慰我心 其志已定 汝能體予乎 上對曰子心何敢不從命乎</blockquote>라고 하였다. 이에 依하면 太宗의 우의 言敎는 確實히 太上王의 志를 尊重且繼承하시는 意味인 것이 더욱 分明하고, 또 上王(定宗)도 역시 그러하였든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太宗의 言敎는 단지 王의 意思表示에 不過하였을 뿐이요 그대로 곧 實行할 것을 聲明하신 바는 아니었다. 그리하야 이때의 遷都議는 아무 決末을 보지 못한 채로 주저앉고 말었다.
 
|목차3원문11번={{TagSpage|65-2}}(C), 第二回의 遷都儀와 決裂
 
|목차3원문11번={{TagSpage|65-2}}(C), 第二回의 遷都儀와 決裂
|목차3원문12번={{TagSpage|65-3}}그후 遷都 問題는 얼마 동안 提議되지 아니하고 中止 狀態로 있더니, 太宗 二年 七月에 이르러 또다시 會議가 열리게 되였다. 이것도 이때 天變地怪가 뒤를 이어 續起함에 動機된 바이어니와 太宗께서는 同月 十一日에 河崙 金士衡 李茂 等을 召하사 三府(議政府·司平府·承樞府)의 文武諸臣으로 더부러 漢陽 遷都의 可否를 討議케 하였다. 이때도 諸臣의 意見은 區區{{TagPage|66}}不一하야, 或은 『當在舊都(開京)』, 或은 『當還新都(漢陽)』, 或은 『移都母岳』이라 하는 등, 三派의 分裂을 보게되였는데, 三府가 드디어 『以在舊都爲可 還新都爲不便』이란 假決議를 上奏한 것을 보면 還都 反對의 意見이 多大數를 占하였든 모양이다. 그러면 太宗께서는 이 三府의 奏議에 對하야 어떠한 態度와 暗示를 보이섰느냐 하면, 實錄 同年 同月 壬辰(十一 日)條에 『上以新都太上王創建之地․舊都人心所安 意未決 見三府之議 心不便 問近臣曰 成王在鎬京 廟在豊乎 在洛乎 皆不能對 又召金瞻問之 亦不能對 上曰 周公所洛邑而祭文王騎牛一 武王騂牛一 則宗廟必在洛矣 金科曰 成王居鎬 有大事則至豊宗廟必在豊矣 末能決之 上意以爲 若成王居鎬 宗廟在洛邑 則今予在舊都而宗廟在新都 亦宜』라고 쓰여있다. 이에 依하면 이때 太宗의 立場은 대단 困難하섰으니 첫재 新都 漢陽은 太上王의 創建하신 곳으로 宗廟가 그곳에 있고, 또(우에 말한 바와 같이) 太上王이 王에게 還都의 意로써 諭하신 일까지 있는 터이라 그 뜻에 거실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둘재 舊都 開城은 人民의 安心安業 懷土重遷의 地라 民意에 反하야 그곳을 갑작이 떠나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로 역이었든 까닭이다. 그리하야 王은 文武諸臣의 意見을 徵하였든바, 그 講論은 右와 같이 遷都를 反對하는 派가 많어 心中에 缺然함을 免치 못하게 되였고, 또 다시 이를 古事에 徵키 爲하야 周의 成王이 鎬京에 居하였을 때에 宗廟가 洛에 있었는지 豊에 있었는지?를 二三文臣에게 무르시었든바, 신통한 對答이 없거늘 太宗은 가라사대 周公이 洛邑을 成하고 文王 武王에게 騎牛騂牛를 祭한 것을 보면 宗廟가 洛邑에 있었든 것이 分明하다 하매, 金科는 가로대 成王이 鎬에 居하야 大事가 있으면 豐에 갔었으니 宗廟가 반듯이 豊에 있었으리라고 하야, 이 問題도 能히 決치 못하였으나, 太宗의 意思는 周의 宗廟가 과연 洛邑에 있었다고 하면 그 例에 따라 新都 漢陽에 宗廟를 그대로 두고 松京에 仍都하여도 조흘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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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2번={{TagSpage|65-3}}그후 遷都 問題는 얼마 동안 提議되지 아니하고 中止 狀態로 있더니, 太宗 二年 七月에 이르러 또다시 會議가 열리게 되였다. 이것도 이때 天變地怪가 뒤를 이어 續起함에 動機된 바이어니와 太宗께서는 同月 十一日에 河崙 金士衡 李茂 等을 召하사 三府(議政府·司平府·承樞府)의 文武諸臣으로 더부러 漢陽 遷都의 可否를 討議케 하였다. 이때도 諸臣의 意見은 區區{{TagPage|66}}不一하야, 或은 『當在舊都(開京)』, 或은 『當還新都(漢陽)』, 或은 『移都母岳』이라 하는 등, 三派의 分裂을 보게되였는데, 三府가 드디어 <cite no="35">『以在舊都爲可 還新都爲不便』</cite>이란 假決議를 上奏한 것을 보면 還都 反對의 意見이 多大數를 占하였든 모양이다. 그러면 太宗께서는 이 三府의 奏議에 對하야 어떠한 態度와 暗示를 보이섰느냐 하면, 實錄 同年 同月 壬辰(十一 日)條에 <cite no="36">『以在舊都爲可 還新都爲不便』</cite> <cite no="37">『上以新都太上王創建之地․舊都人心所安 意未決 見三府之議 心不便 問近臣曰 成王在鎬京 廟在豊乎 在洛乎 皆不能對 又召金瞻問之 亦不能對 上曰 周公所洛邑而祭文王騎牛一 武王騂牛一 則宗廟必在洛矣 金科曰 成王居鎬 有大事則至豊宗廟必在豊矣 末能決之 上意以爲 若成王居鎬 宗廟在洛邑 則今予在舊都而宗廟在新都 亦宜』</cite>라고 쓰여있다. 이에 依하면 이때 太宗의 立場은 대단 困難하섰으니 첫재 新都 漢陽은 太上王의 創建하신 곳으로 宗廟가 그곳에 있고, 또(우에 말한 바와 같이) 太上王이 王에게 還都의 意로써 諭하신 일까지 있는 터이라 그 뜻에 거실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둘재 舊都 開城은 人民의 安心安業 懷土重遷의 地라 民意에 反하야 그곳을 갑작이 떠나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로 역이었든 까닭이다. 그리하야 王은 文武諸臣의 意見을 徵하였든바, 그 講論은 右와 같이 遷都를 反對하는 派가 많어 心中에 缺然함을 免치 못하게 되였고, 또 다시 이를 古事에 徵키 爲하야 周의 成王이 鎬京에 居하였을 때에 宗廟가 洛에 있었는지 豊에 있었는지?를 二三文臣에게 무르시었든바, 신통한 對答이 없거늘 太宗은 가라사대 周公이 洛邑을 成하고 文王 武王에게 騎牛騂牛를 祭한 것을 보면 宗廟가 洛邑에 있었든 것이 分明하다 하매, 金科는 가로대 成王이 鎬에 居하야 大事가 있으면 豐에 갔었으니 宗廟가 반듯이 豊에 있었으리라고 하야, 이 問題도 能히 決치 못하였으나, 太宗의 意思는 周의 宗廟가 과연 洛邑에 있었다고 하면 그 例에 따라 新都 漢陽에 宗廟를 그대로 두고 松京에 仍都하여도 조흘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목차3원문13번={{TagSpage|67-1}}이와 같이 遷都 問題는 이번에도 역시 未決한 채로 保留되고 말았거니와, 太宗實錄 三年 正月條에 『臺諫請移宗廟於松都 上曰此事非父王之意 當與議政府議而定』이라 하고, 또 翌二月條에 『三府議定都松京 營宮闕于乾德殿古基 允之』라고 한 것을 보면, 우의 遷都議가 決裂된 지 六個月에 臺諫으로부터는 宗廟를 松都에 移安하자는 建議가 있었고, 그 翌月에 三府에서는 松京에 定都하야 乾德殿 古基에 宮闕을 營하기를 議하야 允許를 받었든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르러 漢陽 遷都 問題는 더욱 더욱 坐礁의 運을 當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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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3번={{TagSpage|67-1}}이와 같이 遷都 問題는 이번에도 역시 未決한 채로 保留되고 말았거니와, 太宗實錄 三年 正月條에 <cite no="38">『臺諫請移宗廟於松都 上曰此事非父王之意 當與議政府議而定』</cite>이라 하고, 또 翌二月條에 <cite no="39">『三府議定都松京 營宮闕于乾德殿古基 允之』</cite>라고 한 것을 보면, 우의 遷都議가 決裂된 지 六個月에 臺諫으로부터는 宗廟를 松都에 移安하자는 建議가 있었고, 그 翌月에 三府에서는 松京에 定都하야 乾德殿 古基에 宮闕을 營하기를 議하야 允許를 받었든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르러 漢陽 遷都 問題는 더욱 더욱 坐礁의 運을 當하게 되였다.
 
|목차3원문14번={{TagSpage|67-2}}(D), 松漢兩京制 及 漢陽遷都의 敎
 
|목차3원문14번={{TagSpage|67-2}}(D), 松漢兩京制 及 漢陽遷都의 敎
|목차3원문15번={{TagSpage|67-3}}우의 臺諫의 提議인 宗廟移安論은 當時 一般의 輿論을 代表한 것으로서 이는 무엇보다도 松京 定都의 前提로서의 큰 意義가 있는 것이어니와 이것이 允許되지 못한 限內에는 松京의 定都는 永久性과 確實性을 가젔다고 할 수 없고 따라서 漢陽 遷都 問題는 全혀 絶望 狀態에 있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太宗은 항상 太上王의 旨도 重히 역이시지만, 一般 의 輿論을 크게 敬聽하시는 터이므로 宗廟 移安 問題에 就하여서도 이를 鄭重히 討議하기 爲하야 四年 七月 二十八日에 다음과 같은 敎旨를 議政府에 下하시였다.<blockquote no="25">往者移御此京 非爲永遷 乃避方耳 故宗廟社稷乃在漢京 然猶豫未定于玆六年 近者天變地怪屢彰警告 豈非以宗廟社稷遠在漢陽 都邑未定 人心未寧而然耶 久居于此 人皆懷土安業 難於遷徙 移安宗廟社稷于此都何如 明日議以聞(太宗實錄 卷四)</blockquote>이에 依하면 當時 開京의 臣民들이 懷土安業으로 얼마나 遷都를 질겨하지 아니하였든 거와 또 이로 因하야 遷都議가 늘 決末을 보지도 못하고 내려왔든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하야 右의 敎旨는 臣民이 正히 遷都를 좋아하지 아니할 {{TagPage|68}}것 같으면 宗廟社稷을 開京으로 移安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었다. 議政府는 右敎에 依하야 宗親諸君과 三府耆老를 會合하고<br/>一, 漢京에 都를 定함이 可하냐<br/>二, 그렇지 않으면 漢京의 宗廟를 松京으로 移하는 것이 可하냐<br/>의 두 問題에 就하야 討議하였다. 이 會議에서 諸大臣은 모다 第二를 可하다 하야, 松京에 定都하야 宗廟를 옮겨옴이 좋다고 主張하였으나 오직 贊成事 南在만은 이에 異議하야 『宗廟를 移安하는 것은 자못 重大한 일인즉 널리 經史를 考査하야 古法例에 質한 後에 可히 行할 것이라』고 하였다. 當時 元老요 議長인 左政丞 趙浚은 南在의 說을 取하야 곧 古典 中의 事例를 調査케 하야 드듸어 成周의 兩京制를 按得하였다. 그리하야 浚은 折衷的으로 『漢京은 太上王의 創建하신 바요 松京은 人民安業의 地라 共히 廢할 수 없은즉 松京에도 別히 宗廟를 세워, 兩處 共히 四時의 祀를 行하야 저 周나라의 鎬京洛邑의 制를 模倣함이 可하다』고 決議하야 써 太宗께 上奏하였다. 그런즉 首府는 依然히 松京에 定하자는 意味에 지나지 않는다. 太宗께서는 事를 더 慎重히 考慮하시려고 할 뿐 아니라 항상 太上王의 志를 重히 역이사 漢陽에 留意치 아니하심이 아님으로, 數日 後 또 三府의 耆老를 紫門에 會하고 우의 議題를 再次 討議케 하였다. 그러나 討議의 結果는 前日과 마찬가지어서 『漢京但有宗廟而已 松京將爲子孫萬世之地』라고 하였다. 太宗께서도 이제는 더 議論의 餘地가 없다고 斷念하시었는지 斷然 兩京의 制를 取하야 議政府에 下敎하야<blockquote no="26">漢京 太祖所創之地 且宗廟所在 或往或來 無廢兩都 自今無更有議</blockquote>라고 하시었다. 但 松京에 宗廟를 別立하자는 趙浚 等의 提議는 不允된 모양이다. 그리하야 九月에는 世子가 대신 漢京{{TagPage|69-1}}에 가서 宗廟에 拜謁한 일까지 있었다. 이는 모다 太上王의 所創인 漢京을 될수록 無意味的 存在에서 救出하려는 努力의 表示임은 事實이나, 그러나 政治 經濟 其他 文化의 모든 中心機關이 실제 松京에 있어 運轉되는以上, 所謂 兩京의 制는 形式的 觀念的 存在에 不過한 것으로서, 漢京은 依然히 尸位와 다름이 없게 되였다. 그런즉 이것이 漢陽 還都를 切望하시는 太上王의 志와 어그러짐은 勿論이요, 父作子述의 道를 지키려는 太宗의 眞意도 아니었다. 民意에 順從하자면 太上王의 志를 저버리게 되고 反對로 太上王의 志를 體하자면 民意에 거실리게 될 수밖에 없는 立場에 서신 太宗의 苦痛은 실로 想像함에 足할 것이다. 右의 兩京制는 이 兩 難點을 多少 折衷 緩和하려는 意圖에서 나온 것이나 실상은 民意에 順從한 것이요 太上王의 本意를 體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太宗의 右의 聲言 끝에 『自今無更有議』라고까지 하신 말삼은 과연 얼마만치의 確保性을 가진 것인지 스스로 疑問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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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5번={{TagSpage|67-3}}우의 臺諫의 提議인 宗廟移安論은 當時 一般의 輿論을 代表한 것으로서 이는 무엇보다도 松京 定都의 前提로서의 큰 意義가 있는 것이어니와 이것이 允許되지 못한 限內에는 松京의 定都는 永久性과 確實性을 가젔다고 할 수 없고 따라서 漢陽 遷都 問題는 全혀 絶望 狀態에 있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太宗은 항상 太上王의 旨도 重히 역이시지만, 一般 의 輿論을 크게 敬聽하시는 터이므로 宗廟 移安 問題에 就하여서도 이를 鄭重히 討議하기 爲하야 四年 七月 二十八日에 다음과 같은 敎旨를 議政府에 下하시였다.<blockquote no="25">往者移御此京 非爲永遷 乃避方耳 故宗廟社稷乃在漢京 然猶豫未定于玆六年 近者天變地怪屢彰警告 豈非以宗廟社稷遠在漢陽 都邑未定 人心未寧而然耶 久居于此 人皆懷土安業 難於遷徙 移安宗廟社稷于此都何如 明日議以聞(太宗實錄 卷四)</blockquote>이에 依하면 當時 開京의 臣民들이 懷土安業으로 얼마나 遷都를 질겨하지 아니하였든 거와 또 이로 因하야 遷都議가 늘 決末을 보지도 못하고 내려왔든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하야 右의 敎旨는 臣民이 正히 遷都를 좋아하지 아니할 {{TagPage|68}}것 같으면 宗廟社稷을 開京으로 移安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었다. 議政府는 右敎에 依하야 宗親諸君과 三府耆老를 會合하고<br/>一, 漢京에 都를 定함이 可하냐<br/>二, 그렇지 않으면 漢京의 宗廟를 松京으로 移하는 것이 可하냐<br/>의 두 問題에 就하야 討議하였다. 이 會議에서 諸大臣은 모다 第二를 可하다 하야, 松京에 定都하야 宗廟를 옮겨옴이 좋다고 主張하였으나 오직 贊成事 南在만은 이에 異議하야 『宗廟를 移安하는 것은 자못 重大한 일인즉 널리 經史를 考査하야 古法例에 質한 後에 可히 行할 것이라』고 하였다. 當時 元老요 議長인 左政丞 趙浚은 南在의 說을 取하야 곧 古典 中의 事例를 調査케 하야 드듸어 成周의 兩京制를 按得하였다. 그리하야 浚은 折衷的으로 『漢京은 太上王의 創建하신 바요 松京은 人民安業의 地라 共히 廢할 수 없은즉 松京에도 別히 宗廟를 세워, 兩處 共히 四時의 祀를 行하야 저 周나라의 鎬京洛邑의 制를 模倣함이 可하다』고 決議하야 써 太宗께 上奏하였다. 그런즉 首府는 依然히 松京에 定하자는 意味에 지나지 않는다. 太宗께서는 事를 더 慎重히 考慮하시려고 할 뿐 아니라 항상 太上王의 志를 重히 역이사 漢陽에 留意치 아니하심이 아님으로, 數日 後 또 三府의 耆老를 紫門에 會하고 우의 議題를 再次 討議케 하였다. 그러나 討議의 結果는 前日과 마찬가지어서 <cite no="40">『漢京但有宗廟而已 松京將爲子孫萬世之地』</cite>라고 하였다. 太宗께서도 이제는 더 議論의 餘地가 없다고 斷念하시었는지 斷然 兩京의 制를 取하야 議政府에 下敎하야<blockquote no="26">漢京 太祖所創之地 且宗廟所在 或往或來 無廢兩都 自今無更有議</blockquote>라고 하시었다. 但 松京에 宗廟를 別立하자는 趙浚 等의 提議는 不允된 모양이다. 그리하야 九月에는 世子가 대신 漢京{{TagPage|69-1}}에 가서 宗廟에 拜謁한 일까지 있었다. 이는 모다 太上王의 所創인 漢京을 될수록 無意味的 存在에서 救出하려는 努力의 表示임은 事實이나, 그러나 政治 經濟 其他 文化의 모든 中心機關이 실제 松京에 있어 運轉되는以上, 所謂 兩京의 制는 形式的 觀念的 存在에 不過한 것으로서, 漢京은 依然히 尸位와 다름이 없게 되였다. 그런즉 이것이 漢陽 還都를 切望하시는 太上王의 志와 어그러짐은 勿論이요, 父作子述의 道를 지키려는 太宗의 眞意도 아니었다. 民意에 順從하자면 太上王의 志를 저버리게 되고 反對로 太上王의 志를 體하자면 民意에 거실리게 될 수밖에 없는 立場에 서신 太宗의 苦痛은 실로 想像함에 足할 것이다. 右의 兩京制는 이 兩 難點을 多少 折衷 緩和하려는 意圖에서 나온 것이나 실상은 民意에 順從한 것이요 太上王의 本意를 體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太宗의 右의 聲言 끝에 <cite no="40">『自今無更有議』</cite>라고까지 하신 말삼은 과연 얼마만치의 確保性을 가진 것인지 스스로 疑問에 있는 것이다.
|목차3원문16번={{TagSpage|69-2}}兩京制의 決議가 있은 지 불과 두 달에, 즉 同四年 九月에 太上王이 太宗에게 傳旨하여 曰 『始予遷都漢陽 遷徙之煩 予豈不知 然松都王氏舊都 不可仍居也 今王復都于此 非勤循始祖之意』라 하야 都를 松京에 定하는 것이 不可함을 諭하시매, 王은 곧 議政府에 旨를 下하야 『漢城我太上王創建之地 社稷宗廟在焉 久曠不居 非繼志之孝 明年冬予當徙居 宜令修茸宮室』이라 하야 明年 冬에 漢京으로 遷都할 決心을 보이고 同時에 새로 漢京에 離宮을 이르키기 爲하야 離宮造成都監 及提調를 두시더니, 成石璘 李茂 等의 『漢京父王所都 亦有宮闕在 雖還都 何必更作離宮』이라는 啓請에 依하야 離宮 造成을 宮闕(本宮)修補로 變케 하였다는 事實이 또한 實錄에 보인다. 이에 依하면 太祖께서 얼마나 松京을 싫어하시고 漢京 還都를 切望하섰든 거와, 또 太宗께서도 父王의 志를 繼述하시려고 이번에는 斷然 民意에 걸실려서라도 漢京에 遷都하시려는 決心과 準備를 보이신 것이 分明하거니와, 吾人은 이때의 政治가 너무도 朝變夕改的임에 놀래{{TagPage|70-1}}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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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6번={{TagSpage|69-2}}兩京制의 決議가 있은 지 불과 두 달에, 즉 同四年 九月에 太上王이 太宗에게 傳旨하여 曰 <cite no="41">『始予遷都漢陽 遷徙之煩 予豈不知 然松都王氏舊都 不可仍居也 今王復都于此 非勤循始祖之意』</cite>라 하야 都를 松京에 定하는 것이 不可함을 諭하시매, 王은 곧 議政府에 旨를 下하야 <cite no="42">『漢城我太上王創建之地 社稷宗廟在焉 久曠不居 非繼志之孝 明年冬予當徙居 宜令修茸宮室』</cite>이라 하야 明年 冬에 漢京으로 遷都할 決心을 보이고 同時에 새로 漢京에 離宮을 이르키기 爲하야 離宮造成都監 及提調를 두시더니, 成石璘 李茂 等의 <cite no="43">『漢京父王所都 亦有宮闕在 雖還都 何必更作離宮』</cite>이라는 啓請에 依하야 離宮 造成을 宮闕(本宮)修補로 變케 하였다는 事實이 또한 實錄에 보인다. 이에 依하면 太祖께서 얼마나 松京을 싫어하시고 漢京 還都를 切望하섰든 거와, 또 太宗께서도 父王의 志를 繼述하시려고 이번에는 斷然 民意에 걸실려서라도 漢京에 遷都하시려는 決心과 準備를 보이신 것이 分明하거니와, 吾人은 이때의 政治가 너무도 朝變夕改的임에 놀래{{TagPage|70-1}}지 아니할 수 없다.
 
|목차3원문17번={{TagSpage|70-2}}그러나 그때의 所謂 遷都 移御 造宮 等 問題는 高麗朝에서와 같이 대개는 實際生活上의 切實한 事情과 必要로보다도 어떠한 思想 觀念의 遊戲로 이러나는 것이므로 항상 이리했다 저리했다 하는 變動性을 띄고 있었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方面에 關한 政治의 朝變夕改는(高麗朝로부터) 當時에는 도리어 例事로 알아 그다지 怪異하게 역이던 것이 아니였다.
 
|목차3원문17번={{TagSpage|70-2}}그러나 그때의 所謂 遷都 移御 造宮 等 問題는 高麗朝에서와 같이 대개는 實際生活上의 切實한 事情과 必要로보다도 어떠한 思想 觀念의 遊戲로 이러나는 것이므로 항상 이리했다 저리했다 하는 變動性을 띄고 있었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方面에 關한 政治의 朝變夕改는(高麗朝로부터) 當時에는 도리어 例事로 알아 그다지 怪異하게 역이던 것이 아니였다.
 
|목차3원문18번={{TagSpage|70-3}}(E) 河崙의 奏請과 母岳相宅
 
|목차3원문18번={{TagSpage|70-3}}(E) 河崙의 奏請과 母岳相宅
|목차3원문19번={{TagSpage|70-4}}이와 같이 漢陽 遷都의 무거운 決心과 準備를 보이시는 이때에 또 晋山府院君 河崙에 依하야 母岳遷都論이 이러났었다. 太宗實錄 四年 九月條에<blockquote no="27">丁巳(十九日)晋山府院君河崙上書 請移都漢陽母岳 初崙以地理讖書移都母岳 至是復請</blockquote>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니, 河崙은 앞서 太祖時로부터 母岳說을 主張하던 이므로 어데까지든지 年來의 持論을 實現하려고 하야 이번에 또 書請한 것임을 알 수 있다. 河崙의 이 提唱은 當時 松京에 陰沴의 災가 있음과 太祖 太宗의 漢京 遷都의 諭敎가 있음에도 基因한 바이지만 무엇보다도 高麗朝로부터 流行하여오는 地理圖讖書에 依하야 母岳의 地를 神祕視하고 重要視하는 데 더 큰 理由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太宗께서는 원래 地理圖讖의 說을 질겨하시지는 아니하야 처음에 禁止令을 내리시기까지 하였지만, 觀念上 地理의 說을 全혀 不信하시는 편은 아니었으며, 또 河崙의 母岳說이 屢次 主張하여오는 만치 거기에 어떠한 理由와 根據가 있나 하는 好奇心을 가지시게도 되였다. 그리하야 太宗은 마침내 河崙의 說에 움직이신 바ㅣ 되야 太祖時 同樣으로 母岳一帶를 親히 相宅하시게 되였다. 여기서 더욱 吾{{TagPage|71}}人은 그때의 遷都論이 地理圖讖 等 觀念의 遊戲로 움지겨짐을 볼 수 있다. 十月 二日에 太宗은 河崙 趙浚 以下 諸臣을 데리시고 開京을 出發하야 四日에 目的地에 到達하시였다. 母岳은 今 京城 西大門 外 延禧·新村 一帶의 後山임은 앞서도 말한 바이다. 太宗께서 親히 母岳 中峯에 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白旗를 漢江邊에 세우게 하고 四方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기를 『此合都邑之地 晋山府院君(河崙)之所言也 白旗之北 可以邑居』라고 하였다. 下山하야 宰相 地官 等을 集合하야 明堂을 求하신 후, 特히 地官 尹莘達 等에게 漢陽 新都와 이 母岳과의 地理上 優劣을 무르시었다. 이에 對하야 莘達은 曰<blockquote no="28">以地理論之 漢陽前後石山險而明堂水絶 不可爲都 此地以讖書考之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此言旣不虛矣 其書其可信也 “李氏出則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 今母岳北有大路 則此地正合其讖 又曰 “眼前三江挹如滿月” 此地三江在前 亦合讖書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blockquote>라고 하야, 漢陽 新都는 地理上 不可함에 對하야 母岳은 書에 一一符合하는 優越의 地라고 明言하였다. 그 所謂 「讖書」는 書名을 들지 아니하였지만 高麗時代(特히 末期)로부터 流行하여오는 秘記의 一種임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其中에 『王氏 五百年 後에는 李氏가 出한다』, 『李氏가 出하면 三角山 南에 都邑을 作한다』 하는 것은 마치 後世의 鄭鑑錄 中에 李氏가 亡한 後 鄭氏가 出하야 鷄龍山에 都邑을 作한다는 意味의 讖說과 서루 類似하며, 또 거기 『三角山南』이니 『須防北大路』니 『眼前三江』이니 하는 것은 다 莘達의 說과 같이 母岳의 地를(中心·標準으로 삼아) 意味한 것이 分明하니, 所謂 北大路는 今 西大門 外 義州通에서 母岳재 고개를 지나 弘濟院으로 通하는 大路를 가르친 것이고, 三江은 漢江의 栗島 汝矣島의 砂洲로 된 三派의 水流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尹莘達의 母岳贊成說에 對하야 吾人이 一疑訝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莘達의 太祖時에 있어서의 言說과 前後 正反對임을 認치 아니할 수 없는 所以이다.{{TagPage|72}} 그림 {{TagPage|73-1}}換言하면 太祖時에는 그는 이미 述한 바와 같이 母岳이 地理上 不可하다는 說과 漢陽이 開京에 다음가는 吉地라는 說을 執하더니, 지금 와서는 그와 正反對의 意見을 陳述하니, 抑 무슨 理由인가. 太祖時에도 그들을 이끌고 母岳을 親相하야 그들의 反對로 마침내 漢陽에 建都하였음에 不拘하고 지금 그 奏言 끝에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라고 한 것은 이 무슨意味의 말인가. 吾人은 더욱더욱 그의 言說에 要領을 얻을 수 없다. 그가 前後 幾年間(約 十年間) 精神(記憶)及智識에 있어 一變動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前後不同의 說은 어떠한 手段—즉 媒進策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든가. 만일 그러한 功利的 心理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실로 欺君岡上의 罪를 免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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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9번={{TagSpage|70-4}}이와 같이 漢陽 遷都의 무거운 決心과 準備를 보이시는 이때에 또 晋山府院君 河崙에 依하야 母岳遷都論이 이러났었다. 太宗實錄 四年 九月條에<blockquote no="27">丁巳(十九日)晋山府院君河崙上書 請移都漢陽母岳 初崙以地理讖書移都母岳 至是復請</blockquote>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니, 河崙은 앞서 太祖時로부터 母岳說을 主張하던 이므로 어데까지든지 年來의 持論을 實現하려고 하야 이번에 또 書請한 것임을 알 수 있다. 河崙의 이 提唱은 當時 松京에 陰沴의 災가 있음과 太祖 太宗의 漢京 遷都의 諭敎가 있음에도 基因한 바이지만 무엇보다도 高麗朝로부터 流行하여오는 地理圖讖書에 依하야 母岳의 地를 神祕視하고 重要視하는 데 더 큰 理由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太宗께서는 원래 地理圖讖의 說을 질겨하시지는 아니하야 처음에 禁止令을 내리시기까지 하였지만, 觀念上 地理의 說을 全혀 不信하시는 편은 아니었으며, 또 河崙의 母岳說이 屢次 主張하여오는 만치 거기에 어떠한 理由와 根據가 있나 하는 好奇心을 가지시게도 되였다. 그리하야 太宗은 마침내 河崙의 說에 움직이신 바ㅣ 되야 太祖時 同樣으로 母岳一帶를 親히 相宅하시게 되였다. 여기서 더욱 吾{{TagPage|71}}人은 그때의 遷都論이 地理圖讖 等 觀念의 遊戲로 움지겨짐을 볼 수 있다. 十月 二日에 太宗은 河崙 趙浚 以下 諸臣을 데리시고 開京을 出發하야 四日에 目的地에 到達하시였다. 母岳은 今 京城 西大門 外 延禧·新村 一帶의 後山임은 앞서도 말한 바이다. 太宗께서 親히 母岳 中峯에 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白旗를 漢江邊에 세우게 하고 四方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기를 <cite no="44">『此合都邑之地 晋山府院君(河崙)之所言也 白旗之北 可以邑居』</cite>라고 하였다. 下山하야 宰相 地官 等을 集合하야 明堂을 求하신 후, 特히 地官 尹莘達 等에게 漢陽 新都와 이 母岳과의 地理上 優劣을 무르시었다. 이에 對하야 莘達은 曰<blockquote no="28">以地理論之 漢陽前後石山險而明堂水絶 不可爲都 此地以讖書考之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此言旣不虛矣 其書其可信也 “李氏出則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 今母岳北有大路 則此地正合其讖 又曰 “眼前三江挹如滿月” 此地三江在前 亦合讖書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blockquote>라고 하야, 漢陽 新都는 地理上 不可함에 對하야 母岳은 書에 一一符合하는 優越의 地라고 明言하였다. 그 所謂 「讖書」는 書名을 들지 아니하였지만 高麗時代(特히 末期)로부터 流行하여오는 秘記의 一種임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其中에 『王氏 五百年 後에는 李氏가 出한다』, 『李氏가 出하면 三角山 南에 都邑을 作한다』 하는 것은 마치 後世의 鄭鑑錄 中에 李氏가 亡한 後 鄭氏가 出하야 鷄龍山에 都邑을 作한다는 意味의 讖說과 서루 類似하며, 또 거기 『三角山南』이니 『須防北大路』니 『眼前三江』이니 하는 것은 다 莘達의 說과 같이 母岳의 地를(中心·標準으로 삼아) 意味한 것이 分明하니, 所謂 北大路는 今 西大門 外 義州通에서 母岳재 고개를 지나 弘濟院으로 通하는 大路를 가르친 것이고, 三江은 漢江의 栗島 汝矣島의 砂洲로 된 三派의 水流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尹莘達의 母岳贊成說에 對하야 吾人이 一疑訝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莘達의 太祖時에 있어서의 言說과 前後 正反對임을 認치 아니할 수 없는 所以이다.
|목차3원문20번={{TagSpage|73-2}}그런데 이때 莘達의 同僚로서 太祖時에 莘達과 意見을 같이하였든 劉旱雨는 漢陽에 就하여는 역시 『前後石山嶮而明堂無水 不可爲都 地理書曰 流水不長 人必絶 蓋言不可也』라 하고, 母岳에 對하여는 『此地亦未正合規局』이라 하야, 新都와 母岳이 共히 風水地理上의 缺陷이 있음을 論하였고, 또 그 同僚 李陽達은 『漢陽雖曰明堂無水 自廣通橋(今大廣橋)以上有水流焉 前面有水 四面回抱 稍可爲都 此地則未合規局 然欲都之 則此非明堂 下有明堂』이라 하야, 漢陽은 過히 不 可함이 없고 母岳은 規局에 合치 아니하나 正히 이곳에 定都하려면 明堂은 더 아랫 쪽에 있다고 하였다. 같은 書雲觀員 사이에도 이러케 異論이 各出하야 劉(旱雨)와 尹(莘達)은 漢陽의 地理가 不可하다고 함에 對하야 李(陽達)는 그다지 不可함이 없다 하고, 또 尹은 母岳이 讖書에 應하야 좋다고 함에 對하야 劉와 李는 前과 같이 그 地理의 不可함을 唱하였는바, 但 李만은 이번에 下有明堂의 條件을 添附하였다. 以上 三人의 說은 確實히 前後에 있어 多少의 異同을 生하였다. 漢陽의 地理가 不可할 것 같으면 그들—特히 劉尹 兩人은 太祖時에 어찌하야 異議를 말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太祖로 하여금 漢陽建都를 實現하시도록 幇助 혹은 默過하였든가 하는 疑訝가 없을 수 없다. 이때 太宗께서도 이러한 疑{{TagPage|74-1}}心을 품으사 『予觀地理書 曰先看水 後看山 若不用地理書則已 用則明堂無水之地 不可爲都明矣 汝等皆知地理 初從太上王建都邑 何不言此故乎』라고 責質하시매, 尹莘達은 『臣於其時 適遭親喪 未能扈從』이라 하고, 劉旱雨는 『臣等非不言 但不得專耳』라고 對答하였다. 그러나 이 尹劉 兩人의 答辨이 과연 信用할 만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또한 의심치 아니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尹莘達은 旣述한 바와 같이 太祖의 漢陽 相宅 當時에 車駕를 隨從하야 太祖의 諮問에 應對하였든 事實이 記錄에 明示되여 있고, 劉旱雨도 그때 母岳에서 奉答 中에 分明히 (崔融·尹莘達과 한가지) 『一國之內 扶蘇(松岳)明堂爲上 南京(漢陽)次之』라고 하였으므로써다. 이것이 무슨 記錄의 錯誤거나 혹은 그들의 前事에 對한 記憶의 錯誤라면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은 事實이라면 이는 分明한 欺君罔上이다. 太宗께서는 尹劉 兩人에 對하야 追窮치 아니하시고, 李陽達에 對하야 역시 不愉快한 語調로 『汝於建都之時 從太上王而行 豈不知明堂水 絶之地不可建都也 乃何建都於漢陽 大興土木之役 以欺父王乎 父王在新都 不豫 幾殆而復 存沒則關乎大命矣 厥後變故屢興 無一好事 乃還松都 至今國人咎予棄父王新都』라고 하였다. 陽達은 이에 對하야 『明堂雖曰無水 前面始流 况其時盡言不諱 但非臣所專耳』라고 辯解하매 太宗께서는 더욱 怒하사 『汝在我前 强言如此 豈於他處自服』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當時 書雲觀員의 奏言 中에는 確實히 種種의 遁辭가 含在하였음을 더욱 看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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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0번={{TagSpage|72}}[[파일:이병도_이조건도-4.png|섬네일|가운데|450px]]
|목차3원문21번={{TagSpage|74-2}}太宗은 陽達의 『下有明堂』說에 依하야 上明堂에서 다시 一里를 下하야 明堂을 求할새, 母岳說의 持論인 河崙은 이에 對하야 『上明堂은 마치 松都의 康安殿과 같고 下明堂은 松都의 壽昌宮과 같다』고 比較하야 上下明堂이 다 松都의 그것과 仿佛함을 陳言하였다. 이때의 所謂 上明堂 下明堂은 母岳의 어느 地點을 가르쳐 이름인지 자세치 못하나, 아마 上明堂은 古 延禧宮 터(延禧宮은 世宗 三년 辛丑에 (上王)太宗께서 創建하신 一離宮이니, 世宗實錄地理志에 「晉山府院君河崙嘗以此地爲母岳明堂可建都邑·歲辛丑太宗思其言爲營離宮」이라고 보인다) 下明堂은 今 綏{{TagPage|75-1}}慶園(一云宣禧墓莊祖私親暎嬪李氏墓)局 內인 듯하다. 그러나 이 母岳明堂은 太祖時로부터 本來 問題가 많고 말성이 있든 곳이요, 또 이때에도 河崙 尹莘達 李良 等 數人의 贊成者를 除한 以外에는 대개 不可하다는 意見을 陳述하였지만, 지금 實地에 있어 보더라도 母岳明堂은 左右의 幅이 좀 狹隘할 뿐만 아니라 前面 漢江 沿岸의 距里도 短近하야 一離宮이나 小都市를 營한다면 몰라도 一國의 首府란 大都市를 建設함에는 稍稍 不適當한 感이 있다. 勿論 그것이라도 近代都市 格으로 漢江을 中間에 놓고 그 南北의 地를 죄다 取한다면 지금 京城보다도 더 훌륭한 處地와 條件을 갖이고 있지만, 그때에는 首都 守備의 軍事的 必要로 城郭을 쌋는 때라 그와 같이 廣範圍에 걸치지 못할 것은 勿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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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1번={{TagSpage|72}}換言하면 太祖時에는 그는 이미 述한 바와 같이 母岳이 地理上 不可하다는 說과 漢陽이 開京에 다음가는 吉地라는 說을 執하더니, 지금 와서는 그와 正反對의 意見을 陳述하니, 抑 무슨 理由인가. 太祖時에도 그들을 이끌고 母岳을 親相하야 그들의 反對로 마침내 漢陽에 建都하였음에 不拘하고 지금 그 奏言 끝에 <cite no="45">『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cite>라고 한 것은 이 무슨意味의 말인가. 吾人은 더욱더욱 그의 言說에 要領을 얻을 수 없다. 그가 前後 幾年間(約 十年間) 精神(記憶)及智識에 있어 一變動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前後不同의 說은 어떠한 手段—즉 媒進策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든가. 만일 그러한 功利的 心理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실로 欺君岡上의 罪를 免치 못할 것이다.
|목차3원문22번={{TagSpage|75-2}}(F), 漢陽 定都와 昌德宮의 創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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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2번={{TagSpage|73-2}}그런데 이때 莘達의 同僚로서 太祖時에 莘達과 意見을 같이하였든 劉旱雨는 漢陽에 就하여는 역시 <cite no="46">『前後石山嶮而明堂無水 不可爲都 地理書曰 流水不長 人必絶 蓋言不可也』</cite>라 하고, 母岳에 對하여는 <cite no="47">『此地亦未正合規局』</cite>이라 하야, 新都와 母岳이 共히 風水地理上의 缺陷이 있음을 論하였고, 또 그 同僚 李陽達은 <cite no="48">『漢陽雖曰明堂無水 自廣通橋(今大廣橋)以上有水流焉 前面有水 四面回抱 稍可爲都 此地則未合規局 然欲都之 則此非明堂 下有明堂』</cite>이라 하야, 漢陽은 過히 不 可함이 없고 母岳은 規局에 合치 아니하나 正히 이곳에 定都하려면 明堂은 더 아랫 쪽에 있다고 하였다. 같은 書雲觀員 사이에도 이러케 異論이 各出하야 劉(旱雨)와 尹(莘達)은 漢陽의 地理가 不可하다고 함에 對하야 李(陽達)는 그다지 不可함이 없다 하고, 또 尹은 母岳이 讖書에 應하야 좋다고 함에 對하야 劉와 李는 前과 같이 그 地理의 不可함을 唱하였는바, 但 李만은 이번에 下有明堂의 條件을 添附하였다. 以上 三人의 說은 確實히 前後에 있어 多少의 異同을 生하였다. 漢陽의 地理가 不可할 것 같으면 그들—特히 劉尹 兩人은 太祖時에 어찌하야 異議를 말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太祖로 하여금 漢陽建都를 實現하시도록 幇助 혹은 默過하였든가 하는 疑訝가 없을 수 없다. 이때 太宗께서도 이러한 疑{{TagPage|74-1}}心을 품으사 <cite no="49">『予觀地理書 曰先看水 後看山 若不用地理書則已 用則明堂無水之地 不可爲都明矣 汝等皆知地理 初從太上王建都邑 何不言此故乎』</cite>라고 責質하시매, 尹莘達은 <cite no="50">『臣於其時 適遭親喪 未能扈從』</cite>이라 하고, 劉旱雨는 <cite no="51">『臣等非不言 但不得專耳』</cite>라고 對答하였다. 그러나 이 尹劉 兩人의 答辨이 과연 信用할 만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또한 의심치 아니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尹莘達은 旣述한 바와 같이 太祖의 漢陽 相宅 當時에 車駕를 隨從하야 太祖의 諮問에 應對하였든 事實이 記錄에 明示되여 있고, 劉旱雨도 그때 母岳에서 奉答 中에 分明히 (崔融·尹莘達과 한가지) <cite no="52">『一國之內 扶蘇(松岳)明堂爲上 南京(漢陽)次之』</cite>라고 하였으므로써다. 이것이 무슨 記錄의 錯誤거나 혹은 그들의 前事에 對한 記憶의 錯誤라면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은 事實이라면 이는 分明한 欺君罔上이다. 太宗께서는 尹劉 兩人에 對하야 追窮치 아니하시고, 李陽達에 對하야 역시 不愉快한 語調로 <cite no="53">『汝於建都之時 從太上王而行 豈不知明堂水 絶之地不可建都也 乃何建都於漢陽 大興土木之役 以欺父王乎 父王在新都 不豫 幾殆而復 存沒則關乎大命矣 厥後變故屢興 無一好事 乃還松都 至今國人咎予棄父王新都』</cite>라고 하였다. 陽達은 이에 對하야 <cite no="54">『明堂雖曰無水 前面始流 况其時盡言不諱 但非臣所專耳』</cite>라고 辯解하매 太宗께서는 더욱 怒하사 <cite no="55">『汝在我前 强言如此 豈於他處自服』</cite>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當時 書雲觀員의 奏言 中에는 確實히 種種의 遁辭가 含在하였음을 더욱 看破할 수 있다.
|목차3원문23번={{TagSpage|75-3}}太宗의 母岳 相宅은 이리하야 끝을 냈지만, 反對者가 多數를 占하야 太宗께서는 心中에 多少 缺然한 바가 없지 아니하였든 모양이나, 그러나 一部의 贊成派도 있고 謝書에 合하는 點도 있어서 이곳을 全然 斷念치는 아니하셨든 모양이다. 松都 漢京에 母岳 候補地를 加하야 三者 中 어느 것을 吉地로 擇할까 함에 就하야 이를 究竟的으로 決定하기 爲하야 太宗은 先祖 神明에 訴하야 그 앞에서 이를 判斷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 翌翌日인 六日 早朝에 太宗께서 親히 新都 漢陽의 宗廟門 外에 이르사 民衆에게 左의 一言을 告하신 것으로써 알 수 있다.<blockquote no="29">予在松都 屢有水旱災變 下敎求言 自政丞趙浚以下言當還新都者多矣 然新都亦多變故 都邑未定 人心不靜 今入宗廟告以松都·新都·母岳 占其吉凶 從吉定都 定都之後 雖有災變 母有提議</blockquote>太宗은 다시 大廟 內에 드러가사 群臣으로 더부러 禮拜 上香하신 후 前朝 太祖 定都時의 例에 依하야 擲錢으로써 卜筮에 대신하여 吉凶을 占하시었다. 擲錢의 判斷은 新都가 二吉一凶이요 松京 母岳이 共히 二凶一吉이었다. 於是乎 上은 都{{TagPage|76-1}}를 漢陽 新都에 定하기로 決하시고, 그와 同時에 新都 鄕校洞(舊 校洞 今 慶雲洞) 東北邊의 地(今 昌德宮)를 相하야 離宮 創造를 命하신 후 開京으로 還御하시었다. 太上王은 王을 보시고 『定都漢陽 孝莫大焉』이라고 하섰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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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3번={{TagSpage|74-2}}太宗은 陽達의 『下有明堂』說에 依하야 上明堂에서 다시 一里를 下하야 明堂을 求할새, 母岳說의 持論인 河崙은 이에 對하야 『上明堂은 마치 松都의 康安殿과 같고 下明堂은 松都의 壽昌宮과 같다』고 比較하야 上下明堂이 다 松都의 그것과 仿佛함을 陳言하였다. 이때의 所謂 上明堂 下明堂은 母岳의 어느 地點을 가르쳐 이름인지 자세치 못하나, 아마 上明堂은 古 延禧宮 터(延禧宮은 世宗 三년 辛丑에 (上王)太宗께서 創建하신 一離宮이니, 世宗實錄地理志에 <cite no="56">「晉山府院君河崙嘗以此地爲母岳明堂可建都邑·歲辛丑太宗思其言爲營離宮」</cite>이라고 보인다) 下明堂은 今 綏{{TagPage|75-1}}慶園(一云宣禧墓莊祖私親暎嬪李氏墓)局 內인 듯하다. 그러나 이 母岳明堂은 太祖時로부터 本來 問題가 많고 말성이 있든 곳이요, 또 이때에도 河崙 尹莘達 李良 等 數人의 贊成者를 除한 以外에는 대개 不可하다는 意見을 陳述하였지만, 지금 實地에 있어 보더라도 母岳明堂은 左右의 幅이 좀 狹隘할 뿐만 아니라 前面 漢江 沿岸의 距里도 短近하야 一離宮이나 小都市를 營한다면 몰라도 一國의 首府란 大都市를 建設함에는 稍稍 不適當한 感이 있다. 勿論 그것이라도 近代都市 格으로 漢江을 中間에 놓고 그 南北의 地를 죄다 取한다면 지금 京城보다도 더 훌륭한 處地와 條件을 갖이고 있지만, 그때에는 首都 守備의 軍事的 必要로 城郭을 쌋는 때라 그와 같이 廣範圍에 걸치지 못할 것은 勿論이다.  
|목차3원문24번={{TagSpage|76-2}}新都에는 훌륭한 本宮(景福宮)이 있음에 不拘하고 이와 같이 따로 離宮을 作할 것을 命하신 것은 무슨 理由인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本宮에 對한 避方의 意味에서 經營되는 것이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景福宮을 御所로 삼었든 太祖時代에는 人事及自然界에 있어 여러 가지 變異가 出現하였으므로 그곳을 避하야 新別宮에 居하시려는 意味와 動機에 不過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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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4번={{TagSpage|75-2}}(F), 漢陽 定都와 昌德宮의 創建
|목차3원문25번={{TagSpage|76-3}}太宗은 翌五年 二月에 또 新都에 行幸하야 離宮의 營造를 보시고 駐留 約一個月에 開京에로 還御하시었는데, 이때 遷都의 脅威를 받은 開京 城內의 民心은 刻一刻으로 不安을 늣기게 되고 近臣 中에도 往往 民心에 共鳴하야 遷都를 反對하는 者가 있었다. 이 때문에 王은 또 한 번 宰臣의 輿論을 徵하기 爲하야 八月 三日에 議政府에 命하야 漢陽 遷都의 可否(실상은 遲速)를 會議케 하였든바, 議政府의 上奏는 『年風飢不可』라 하야 이해의 凶作을 理由로 하야 遷都의 不可(실상은 保留)를 主張하였다. 民意를 重히 역이는 政治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님은 아니나, 그로 因하야 旣定方針을 實行치 못하고 늘 姑息과 猶豫에 빠저 種種의 弊端을 生하게 하는 것은 決코 政治의 理想이 아니다. 太宗은 英邁의 主로 일컸는 님금이지만 원래 儒學 出身으로 儒敎主義的 規範과 理想에 依하야 進行하려 하는 이만치, 實際에 있어서의 果斷은 武人 出身인 太祖에 比하야 훨신 不及이시었다. 遷都의 猶豫未定은 실로 이러한 데 原因함이 많거니와 太宗과 같이 民意를 重히 역이시는 님금도 우의 議政府의 上奏에는 多少 不快를 늣기사, 陰陽讖諱의 說과 前日의 鄭重한 決議를 방패로 삼아 『陰陽書曰 王氏五百年後 李氏興 遷南京 今李氏之興 果然遷南京 南京之說 不可不信也 且向者相地之時 說者{{TagPage|77-1}}紛紛未定 予乃躬詣宗廟卜旣得吉 離宮已成 遷都之計定矣 將以十月移于漢京 本宮則不御也』라 하시고, 또 그 후 數日에도 宰臣을 再會하고 遷都에 對한 굳은 決心과 態度를 보이섰으니, 太宗實錄 五年 八月條에<blockquote no="30">壬申(九日)還移御敬德宮 (中略) 與兵曹判書南在·刑曹判書李文和·戶曹判書李至·議政府贊成事尹柢·工曹判書韓尙敬 議遷漢京 上曰 我太上王 肇建新邑 此乃李氏不易之定都也 自我上王移幸松都之後 因仍不還 于今七年 違於父作子述之道 寡人之罪也 去秋松都有陰沴之災 故往新都 卜于宗廟 旣得吉 今春又往視其修葺 工已幾畢 往還之計定矣 小民臣室皆曰不可 此安土重遷之意也 尙敬對曰盤庚遷都 利害甚明 然小民臣室猶安土重遷 上曰若今年不遷 明年又不遷 因循不遷 則松都人家日益稠密 漢邑日益凋廢 將如之何 況陰陽家曰松都乃廢君臣之地 人皆曰歲凶不可遷 此包藏凶惡之人也 豊海京畿雖有旱災 有餘各道則不爲歉矣 名言歲凶而排擊遷都之意者 不愛社稷之臣也 南在曰安有包藏凶惡而排擊乎 上曰頃有遷都之議而新都與母岳皆非而此都乃可 此包藏之言也</blockquote>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右 記事 中에도 太宗께서 韓尙敬 및 南在에게 答하신 말삼은 가장 深刻하고 峻烈하야 君主로서의 威嚴을 보이는 同時에 異論의 衆出을 막는 데 가장 힘 있는 말삼이었다. 太宗의 말씀과 같이 一年 二年 因循姑息하야 遷都를 斷行치 아니하면 松都의 戶口는 날로 增加하여지고 漢京의 그것은 反對로 날마다 減少하여서 그때에는 遷都의 實行이 더욱 困難할 것은 勿論이다. 當時 流行의 陰陽書에 松都는 君臣을 廢하는 곳이라는 말이 있음에 不拘하고 種種의 口實을 비러 遷都를 反對하는 것은 凶惡한 마음을 包藏한 것이라고 하신 말삼은 실상 陰陽說을 借來하야 衆口의 異論을 막는 방패를 삼으려 함에 不過한 것이나 그 말삼이 얼마나 날카러웠든 것을 想像함에 足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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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5번={{TagSpage|75-3}}太宗의 母岳 相宅은 이리하야 끝을 냈지만, 反對者가 多數를 占하야 太宗께서는 心中에 多少 缺然한 바가 없지 아니하였든 모양이나, 그러나 一部의 贊成派도 있고 謝書에 合하는 點도 있어서 이곳을 全然 斷念치는 아니하셨든 모양이다. 松都 漢京에 母岳 候補地를 加하야 三者 中 어느 것을 吉地로 擇할까 함에 就하야 이를 究竟的으로 決定하기 爲하야 太宗은 先祖 神明에 訴하야 그 앞에서 이를 判斷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 翌翌日인 六日 早朝에 太宗께서 親히 新都 漢陽의 宗廟門 外에 이르사 民衆에게 左의 一言을 告하신 것으로써 알 수 있다.<blockquote no="29">予在松都 屢有水旱災變 下敎求言 自政丞趙浚以下言當還新都者多矣 然新都亦多變故 都邑未定 人心不靜 今入宗廟告以松都·新都·母岳 占其吉凶 從吉定都 定都之後 雖有災變 母有提議</blockquote>太宗은 다시 大廟 內에 드러가사 群臣으로 더부러 禮拜 上香하신 후 前朝 太祖 定都時의 例에 依하야 擲錢으로써 卜筮에 대신하여 吉凶을 占하시었다. 擲錢의 判斷은 新都가 二吉一凶이요 松京 母岳이 共히 二凶一吉이었다. 於是乎 上은 都{{TagPage|76-1}}를 漢陽 新都에 定하기로 決하시고, 그와 同時에 新都 鄕校洞(舊 校洞 今 慶雲洞) 東北邊의 地(今 昌德宮)를 相하야 離宮 創造를 命하신 후 開京으로 還御하시었다. 太上王은 王을 보시고 <cite no="57">『定都漢陽 孝莫大焉』</cite>이라고 하섰다 한다.
|목차3원문261번={{TagSpage|77-2}}太宗은 後 數日에 太上王을 뵙고 장차 漢京으로 還御할 뜻을 告하시매, 太上王은 크게 기뻐하사 曰 『陰陽之說 雖不足{{TagPage|78-1}}信 王氏五百年後 李氏得國而都漢京 我家果應其說 夫豈虛哉 且我家其豫有得國之心乎 王之欲遷漢京 實非王心 天使之然也』라고 하시었다. 王氏 五百年 後에 李氏가 出하야 漢陽(南京)에 都를 作한다는 讖說은 우의 太宗의 말삼 가운대에도 보이거니와, 이는 앞서 尹莘達의 上言 中에 보이는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李氏出則 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란 讖說과 거이 內容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다만 前者는 後者의 『三角山南』『漢陽』 즉 『南京』으로 解釋한 데 不過한 것이 아닌가 한다. 後者의 『須防北大路』의 句로 보면 『三角山南』은 尹莘達의 解釋과 같이 母岳의 地라고 함이 可하니 前者의 說은 즉 漢陽 主張派의 我田引水的 解釋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如何했든 太祖와 太宗께서는 이런 類의 讖說을 단지 遷都運動의 手段이나 方便으로서 利用하시는 데 그칠 뿐만 아니라 觀念上 어느 程度까지 이를 神祕하게 역시었든 것 같다. 特히 太祖께서는 松都地氣衰旺說을 믿으심이 깊어 即位 初로붙어 遷都에 汲汲하셨든 것은 앞서 婁次 말한 바이며 太宗께서는 역시 前述함과 같이 儒學 出身이니만치 원래 이러한 迷信을 좋아하지 아니하사 처음에는 圖讖地理의 書를 禁하신 일까지 있지만, 또 全然 이를 不信치도 아니하셨든 것은 王의 前後 言行을 通하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太宗께서 漢陽 遷都를 急히 하려고 하심은 이보다도 첫재 (屢述한 바와 같이) 太上王의 志를 繼述하려 하심이요 둘재 松漢 兩京의 戶口의 盛衰를 念慮하신 까닭임은 더 말할 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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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6번={{TagSpage|76-2}}新都에는 훌륭한 本宮(景福宮)이 있음에 不拘하고 이와 같이 따로 離宮을 作할 것을 命하신 것은 무슨 理由인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本宮에 對한 避方의 意味에서 經營되는 것이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景福宮을 御所로 삼었든 太祖時代에는 人事及自然界에 있어 여러 가지 變異가 出現하였으므로 그곳을 避하야 新別宮에 居하시려는 意味와 動機에 不過함이었다.
|목차3원문27번={{TagSpage|78-2}}그런데 當時 遷都反對運動은 各 階級을 通하야 熾烈하였든 모양이니 儒臣으로 有名한 陽村 權近도 其中의 一人이었다. 權近은 역시 年凶을 理由로 하야 數次 上書로써 遷都의 不可함을 論하였는데, 第二次 上疏 中에는 『遷都之擧 謀及卿士 謀及庶民 皆曰可然後定焉』이라 하는 儒者流의 迂闊한 論法을 試하기까지 하였다. 太宗께서는 이를 보시고 『告于宗廟 告于太上 大計已定 何可改也』라 하시고, 다시 左右를 도라보시며 일러 曰 『今有上書止遷都者 是聽人指揮而爲之{{TagPage|79-1}}也 漢京乃國初所創 子孫所當持守愚民但知移徙之勞而苟安耳 士大夫識理者 亦何心沮之歟』라고 하시었다. 權近의 遷都反對疏가 太宗의 말삼과 같이 과연 남의 指揮를 받어서 한 것인지 아닌지는 判斷하기 어렵지만, 當時 松京 城內에는 이 遷都 問題로 人心이 非常히 不安한 狀態에 있었으므로 혹은 남의 指囑이나 衝動에 依하야 異議를 提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떠튼 太宗께서는 權近과 같은 事理를 아는 士大夫로서 君心이 存한 바를 理解치 못하고 한갓 남의 指囑에 雷同하야 遷都를 反對하는 것으로 認識하시었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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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7번={{TagSpage|76-3}}太宗은 翌五年 二月에 또 新都에 行幸하야 離宮의 營造를 보시고 駐留 約一個月에 開京에로 還御하시었는데, 이때 遷都의 脅威를 받은 開京 城內의 民心은 刻一刻으로 不安을 늣기게 되고 近臣 中에도 往往 民心에 共鳴하야 遷都를 反對하는 者가 있었다. 이 때문에 王은 또 한 번 宰臣의 輿論을 徵하기 爲하야 八月 三日에 議政府에 命하야 漢陽 遷都의 可否(실상은 遲速)를 會議케 하였든바, 議政府의 上奏는 <cite no="58">『年風飢不可』</cite>라 하야 이해의 凶作을 理由로 하야 遷都의 不可(실상은 保留)를 主張하였다. 民意를 重히 역이는 政治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님은 아니나, 그로 因하야 旣定方針을 實行치 못하고 늘 姑息과 猶豫에 빠저 種種의 弊端을 生하게 하는 것은 決코 政治의 理想이 아니다. 太宗은 英邁의 主로 일컸는 님금이지만 원래 儒學 出身으로 儒敎主義的 規範과 理想에 依하야 進行하려 하는 이만치, 實際에 있어서의 果斷은 武人 出身인 太祖에 比하야 훨신 不及이시었다. 遷都의 猶豫未定은 실로 이러한 데 原因함이 많거니와 太宗과 같이 民意를 重히 역이시는 님금도 우의 議政府의 上奏에는 多少 不快를 늣기사, 陰陽讖諱의 說과 前日의 鄭重한 決議를 방패로 삼아 <cite no="59">『陰陽書曰 王氏五百年後 李氏興 遷南京 今李氏之興 果然遷南京 南京之說 不可不信也 且向者相地之時 說者{{TagPage|77-1}}紛紛未定 予乃躬詣宗廟卜旣得吉 離宮已成 遷都之計定矣 將以十月移于漢京 本宮則不御也』</cite>라 하시고, 또 그 후 數日에도 宰臣을 再會하고 遷都에 對한 굳은 決心과 態度를 보이섰으니, 太宗實錄 五年 八月條에<blockquote no="30">壬申(九日)還移御敬德宮 (中略) 與兵曹判書南在·刑曹判書李文和·戶曹判書李至·議政府贊成事尹柢·工曹判書韓尙敬 議遷漢京 上曰 我太上王 肇建新邑 此乃李氏不易之定都也 自我上王移幸松都之後 因仍不還 于今七年 違於父作子述之道 寡人之罪也 去秋松都有陰沴之災 故往新都 卜于宗廟 旣得吉 今春又往視其修葺 工已幾畢 往還之計定矣 小民臣室皆曰不可 此安土重遷之意也 尙敬對曰盤庚遷都 利害甚明 然小民臣室猶安土重遷 上曰若今年不遷 明年又不遷 因循不遷 則松都人家日益稠密 漢邑日益凋廢 將如之何 況陰陽家曰松都乃廢君臣之地 人皆曰歲凶不可遷 此包藏凶惡之人也 豊海京畿雖有旱災 有餘各道則不爲歉矣 名言歲凶而排擊遷都之意者 不愛社稷之臣也 南在曰安有包藏凶惡而排擊乎 上曰頃有遷都之議而新都與母岳皆非而此都乃可 此包藏之言也</blockquote>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右 記事 中에도 太宗께서 韓尙敬 및 南在에게 答하신 말삼은 가장 深刻하고 峻烈하야 君主로서의 威嚴을 보이는 同時에 異論의 衆出을 막는 데 가장 힘 있는 말삼이었다. 太宗의 말씀과 같이 一年 二年 因循姑息하야 遷都를 斷行치 아니하면 松都의 戶口는 날로 增加하여지고 漢京의 그것은 反對로 날마다 減少하여서 그때에는 遷都의 實行이 더욱 困難할 것은 勿論이다. 當時 流行의 陰陽書에 松都는 君臣을 廢하는 곳이라는 말이 있음에 不拘하고 種種의 口實을 비러 遷都를 反對하는 것은 凶惡한 마음을 包藏한 것이라고 하신 말삼은 실상 陰陽說을 借來하야 衆口의 異論을 막는 방패를 삼으려 함에 不過한 것이나 그 말삼이 얼마나 날카러웠든 것을 想像함에 足하다.
|목차3원문28번={{TagSpage|79-2}}太宗의 遷都에 對한 決心과 果斷은 더욱더욱 움직일 수 없게 되야 이해(五年) 九月에는 上王(定宗)이 먼저 漢京으로 移御하시고 王은 齋陵(母后 神懿皇后 韓氏陵)에 參拜하야 移都를 告하였으며 十月 五日에는 太上王께 詣謁하야 역시 還都를 告하시매 太上王은 特히 置酒爲歡하섰다 한다. 그리하야 太宗께서는 十月 八日로써 松京을 發하사 十一日에 漢京에 이르시었다. (太上王은 十一月에 還都). 먼저 宮廟에 參拜하신 후 蓮花坊(今 蓮池町) 故領議政府事 趙浚第로 御하시니 그것은 이때 離宮의 工役이 아직 完了되지 아니하였든 까닭이다. 離宮의 落成은 十九日에 이르러 비로소 告하게 되니 凡一百十八間, 이름을 昌德宮이라고 하였다. (白岳 下의 景福宮을 西正闕이라고 하면 鷹峯 下의 이 宮은 東別宮이라고 할 수 있었다). 翌二十日에 離宮에 御하야 百宮의 賀禮와 獻壽를 받을새 앞서 遷都를 反對하든 議政府 贊成事 權近은 華岳의 詩를, 또 母岳 遷都를 主張하든 左政丞 河崙은 漢江의 詩를 各各 製進하야 王都의 永安과 王業의 永昌을 頌하였다. 오래동안 論議 紛紜하고 猶豫未決 中에 있든 遷都 問題는 於是乎 完全히 落着을 告하야 以後 五百年間 기리 李氏 朝鮮의 政治 文化 其他의 中心地로 一定不變의 根盤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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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8번={{TagSpage|77-2}}太宗은 後 數日에 太上王을 뵙고 장차 漢京으로 還御할 뜻을 告하시매, 太上王은 크게 기뻐하사 曰 <cite no="60">『陰陽之說 雖不足{{TagPage|78-1}}信 王氏五百年後 李氏得國而都漢京 我家果應其說 夫豈虛哉 且我家其豫有得國之心乎 王之欲遷漢京 實非王心 天使之然也』</cite>라고 하시었다. 王氏 五百年 後에 李氏가 出하야 漢陽(南京)에 都를 作한다는 讖說은 우의 太宗의 말삼 가운대에도 보이거니와, 이는 앞서 尹莘達의 上言 中에 보이는 <cite no="61">『王氏五百年後 李氏出』</cite> <cite no="62">『李氏出則 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cite>란 讖說과 거이 內容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다만 前者는 後者의 『三角山南』 『漢陽』 즉 『南京』으로 解釋한 데 不過한 것이 아닌가 한다. 後者의 <cite no="63">『須防北大路』</cite>의 句로 보면 『三角山南』은 尹莘達의 解釋과 같이 母岳의 地라고 함이 可하니 前者의 說은 즉 漢陽 主張派의 我田引水的 解釋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如何했든 太祖와 太宗께서는 이런 類의 讖說을 단지 遷都運動의 手段이나 方便으로서 利用하시는 데 그칠 뿐만 아니라 觀念上 어느 程度까지 이를 神祕하게 역시었든 것 같다. 特히 太祖께서는 松都地氣衰旺說을 믿으심이 깊어 即位 初로붙어 遷都에 汲汲하셨든 것은 앞서 婁次 말한 바이며 太宗께서는 역시 前述함과 같이 儒學 出身이니만치 원래 이러한 迷信을 좋아하지 아니하사 처음에는 圖讖地理의 書를 禁하신 일까지 있지만, 또 全然 이를 不信치도 아니하셨든 것은 王의 前後 言行을 通하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太宗께서 漢陽 遷都를 急히 하려고 하심은 이보다도 첫재 (屢述한 바와 같이) 太上王의 志를 繼述하려 하심이요 둘재 松漢 兩京의 戶口의 盛衰를 念慮하신 까닭임은 더 말할 배도 없다.
|목차3원문29번={{TagSpage|80-1}}四, 餘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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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9번={{TagSpage|78-2}}그런데 當時 遷都反對運動은 各 階級을 通하야 熾烈하였든 모양이니 儒臣으로 有名한 陽村 權近도 其中의 一人이었다. 權近은 역시 年凶을 理由로 하야 數次 上書로써 遷都의 不可함을 論하였는데, 第二次 上疏 中에는 <cite no="64">『遷都之擧 謀及卿士 謀及庶民 皆曰可然後定焉』</cite>이라 하는 儒者流의 迂闊한 論法을 試하기까지 하였다. 太宗께서는 이를 보시고 <cite no="65">『告于宗廟 告于太上 大計已定 何可改也』</cite>라 하시고, 다시 左右를 도라보시며 일러 曰 <cite no="66">『今有上書止遷都者 是聽人指揮而爲之{{TagPage|79-1}}也 漢京乃國初所創 子孫所當持守愚民但知移徙之勞而苟安耳 士大夫識理者 亦何心沮之歟』</cite>라고 하시었다. 權近의 遷都反對疏가 太宗의 말삼과 같이 과연 남의 指揮를 받어서 한 것인지 아닌지는 判斷하기 어렵지만, 當時 松京 城內에는 이 遷都 問題로 人心이 非常히 不安한 狀態에 있었으므로 혹은 남의 指囑이나 衝動에 依하야 異議를 提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떠튼 太宗께서는 權近과 같은 事理를 아는 士大夫로서 君心이 存한 바를 理解치 못하고 한갓 남의 指囑에 雷同하야 遷都를 反對하는 것으로 認識하시었든 모양이다.
|목차3원문30번={{TagSpage|80-2}}李朝 初期—即 太祖·定宗 및 太宗朝—의 建都 혹 遷都의 事情 乃至 經過는 대게 上述한 바와 같거니와, 要컨대 定宗의 開京 移都를 除하고는 太祖 太宗 兩代의 遷都는 여러 가지 問題로 時日을 遷延하고 君臣의 心身을 勞함이 많았으니 風水地理에 依한 相擇의 困難, 安土重遷으로 말미암은 遷都 反對論 等은 그 가장 主된 理由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會議를 거듭하고 相宅을 試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바, 太祖時에는 漢陽 鷄龍山 母岳等 三處의 競爭的 候補地로 말미암아 心的 物的의 勞를 費함이 컸었고, 太宗時에도 母岳相宅 乃至 松都 漢陽 母岳의 三處 中 何者를 擇할까 함에 苦心을 많이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松都 臣民의 安土重遷으로 因하야 問題를 猶豫未決케 함이 컸었다. 그러나 太祖는 松都(地)氣衰의 從來讚說 信함이 깊고 또 武人 出身이시니만치 果斷性에 富하였으므로 여간한 反對論은 이를 排除하야 三年만에 드듸어 漢陽奠都를 實現하섰고, 太宗은 太祖의 新都 創建의 旨를 重히 역이시면서도 儒學 出身이시니만치 果斷性과 實行力은 太祖에 不及하심이 많어 항상 民意에 順應하고 會議마다 重臣의 議論에 끄을리시다가 마침내 即位 五六年만에 新都 還御를 決行하시었지만 이것도 실상은 太上王의 鄭重한 諭旨에 依하야 갑작이 果斷을 갖으시게 된 것이다. 이때 만일 太上王이 在世치 아니하셨거나 혹은 그러한 董督的 諭告가 없었드러면, 太宗의 漢京 還都는 實現되지 아니하였거나 實現되드라도 더 훨신 時日의 遷延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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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0번={{TagSpage|79-2}}太宗의 遷都에 對한 決心과 果斷은 더욱더욱 움직일 수 없게 되야 이해(五年) 九月에는 上王(定宗)이 먼저 漢京으로 移御하시고 王은 齋陵(母后 神懿皇后 韓氏陵)에 參拜하야 移都를 告하였으며 十月 五日에는 太上王께 詣謁하야 역시 還都를 告하시매 太上王은 特히 置酒爲歡하섰다 한다. 그리하야 太宗께서는 十月 八日로써 松京을 發하사 十一日에 漢京에 이르시었다. (太上王은 十一月에 還都). 먼저 宮廟에 參拜하신 후 蓮花坊(今 蓮池町) 故領議政府事 趙浚第로 御하시니 그것은 이때 離宮의 工役이 아직 完了되지 아니하였든 까닭이다. 離宮의 落成은 十九日에 이르러 비로소 告하게 되니 凡一百十八間, 이름을 昌德宮이라고 하였다. (白岳 下의 景福宮을 西正闕이라고 하면 鷹峯 下의 이 宮은 東別宮이라고 할 수 있었다). 翌二十日에 離宮에 御하야 百宮의 賀禮와 獻壽를 받을새 앞서 遷都를 反對하든 議政府 贊成事 權近은 華岳의 詩를, 또 母岳 遷都를 主張하든 左政丞 河崙은 漢江의 詩를 各各 製進하야 王都의 永安과 王業의 永昌을 頌하였다. 오래동안 論議 紛紜하고 猶豫未決 中에 있든 遷都 問題는 於是乎 完全히 落着을 告하야 以後 五百年間 기리 李氏 朝鮮의 政治 文化 其他의 中心地로 一定不變의 根盤을 열게 된 것이다.
|목차3원문31번={{TagSpage|80-3}}上述한 바로써 보면 李朝 初期의 漢陽 奠都는 決코 單純 且順調로 實現되었든 것이 아니라 複雜多端 波瀾重疊한 가운{{TagPage|81-1}}대서 決末을 보게 된 것을 充分히 알 수 있지만, 漢陽이 여러 번 遷移의 威脅을 當하고 또 母岳과 같은 有力한 敵對的 候補地를 갖이고서도 마침내 候都의 榮를 입게 된 것은 어떠한 理由와 關係로 因함이었든가? 이는 勿論 그 特殊한 地理性과 歷史性에 負한 바ㅣ 많은 것이니 끝으로 吾人은 漢陽의 地理歷史的 特殊性에 就하야 一言을 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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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1번={{TagSpage|80-1}}四, 餘言
|목차3원문32번={{TagSpage|81-2}}먼저 그 地理的 特殊性을 말하면, 그때는 風水地理를 重히 역이든 時代이므로, 또한 먼저 그 方面의 地理를 考察할 必要가 있다. 漢陽은 北岳 즉 白岳을 主山으로 삼어 그 左右枝에 依하야 環抱된 곳이니, 白岳의 右枝는 西으로 다라나 仁王山을 이르키고 거기서 敦義門(西大門) 昭義門(西小門) 崇禮門(南大門)을 거처 다시 南山을 이르키어 案山을 作하면서 光熙門址에 이르러 발을 멈추었으며, 左枝는 東으로 뻗어 鵂岩과 鷹峰을 솟치면서 惠化門(東小門)을 지나 駱山에 이르러 무릅을 꾸렸다. 그런즉 白岳은 風水家의 所謂 玄武요 仁王은 白虎, 駱山은 靑龍, 南山은 朱雀이다. 漢陽은 右枝가 길고 左支가 짜르므로 이를 風水家의 所謂 右旋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西으로 入海하는 漢江과 서루 逆하여 있다. 風水에는 『逆』을 主要 條件의 하나로 치는 것이니 山水의 逆이 없으면 地脈의 環抱를 볼 수 없고 水口의 關鎖를 이루지 못하야 地氣가 散流된다는 것이다. 漢陽은 이 點으로보아 山水의 逆을 充分히 얻은 곳이니 水流로 말하드라도 白岳 左右峽에서 흐르는 明堂水는 市內를 東으로 貫流하야 東大門과 光熙門(水口門) 사이를 빠저 旺深里(往十里) 踏深里를 지나 纛島에서 漢江으로 들어간다. 漢江은 漢陽의 客水로 北漢江 南漢江의 二大 줄기가 楊平 龍津에서 서루 合치어 三角山 諸谷의 衆水를 받어드리면서 漢陽 一帶의 地를 環抱하야 西北으로 西海에 들어가거니와, 三角 山의 모든 山水의 줄기는 또한 漢陽을 中心으로 하야 聚會하여 있다. 母岳의 地는 같은 漢江 流域이지만 山水의 環抱와 水口의 關鎖가 漢陽처럼 緊密치 못한 것이 一大 缺點이다. 다시 白岳의 來脈을 살펴보면 멀리 長白山에서 {{TagPage|82-1}}起原한 安邊의 鐵嶺에서 分岐되야 그 一枝가 南馳하야 楊州의 奇雄인 道峯山을 이르키고 거기서 다시 西南行하야 太淸을 뚤런 三角을 솟치고 南으로 文殊 普賢의 諸峯을 作하면서 正脈을 白岳으로 뻗게 되였다. 일로써 在來의 學者들은 漢陽을 東方精氣의 融結鍾會處로 讃美하였으니 八域志의 著者 李重煥은 『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라 하고(八城志 京畿道條) 耳溪 洪良浩는 『東方靈淑之氣 噓融結 鍾成萬年之神都』라고(耳溪集 卷十四 報恩寺重修記) 하였거니와, 이런 類의 讚辭는 이루 枚擧하기 겨를이 없다. 風水專門家로서는 旣述한 尹莘達 等의 言論과 같이 漢陽의 第一缺點을 石山의 嶮한 것과 明堂水의 豐富치 못한 것을 치나, 그러나 이만한 缺點은 어데서든지 免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튼 漢陽은 風水地理의 第一條件인 『山水聚會』의 地로 認定치 아니할 수 없고, 이 點에 있어서는 母岳을 凌함이 大하고 松都에 不及함이 조금도 없다. 太祖時 雲觀員의 說에는 扶蘇明堂(開城)을 國內의 第一 吉地, 이 白岳明堂을 第二 吉地로 말하였지만, 九變圖란 高麗秘記에는 木覓을 第一花, 松岳을 第二花, 平壤을 第三花로 치든 것이니,(本 學報 第八卷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參照) 花란 것은 風水家의 語로 大吉地를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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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2번={{TagSpage|80-2}}李朝 初期—即 太祖·定宗 및 太宗朝—의 建都 혹 遷都의 事情 乃至 經過는 대게 上述한 바와 같거니와, 要컨대 定宗의 開京 移都를 除하고는 太祖 太宗 兩代의 遷都는 여러 가지 問題로 時日을 遷延하고 君臣의 心身을 勞함이 많았으니 風水地理에 依한 相擇의 困難, 安土重遷으로 말미암은 遷都 反對論 等은 그 가장 主된 理由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會議를 거듭하고 相宅을 試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바, 太祖時에는 漢陽 鷄龍山 母岳等 三處의 競爭的 候補地로 말미암아 心的 物的의 勞를 費함이 컸었고, 太宗時에도 母岳相宅 乃至 松都 漢陽 母岳의 三處 中 何者를 擇할까 함에 苦心을 많이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松都 臣民의 安土重遷으로 因하야 問題를 猶豫未決케 함이 컸었다. 그러나 太祖는 松都(地)氣衰의 從來讚說 信함이 깊고 또 武人 出身이시니만치 果斷性에 富하였으므로 여간한 反對論은 이를 排除하야 三年만에 드듸어 漢陽奠都를 實現하섰고, 太宗은 太祖의 新都 創建의 旨를 重히 역이시면서도 儒學 出身이시니만치 果斷性과 實行力은 太祖에 不及하심이 많어 항상 民意에 順應하고 會議마다 重臣의 議論에 끄을리시다가 마침내 即位 五六年만에 新都 還御를 決行하시었지만 이것도 실상은 太上王의 鄭重한 諭旨에 依하야 갑작이 果斷을 갖으시게 된 것이다. 이때 만일 太上王이 在世치 아니하셨거나 혹은 그러한 董督的 諭告가 없었드러면, 太宗의 漢京 還都는 實現되지 아니하였거나 實現되드라도 더 훨신 時日의 遷延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목차3원문33번={{TagSpage|82-2}}이러한 風水地理的 考察을 떠나 실제 人文地理學上으로 이를 考察하여 보드라도 漢陽은 所謂 山河襟帶의 要鎭으로 軍事上의 要를 得할 뿐더러 水陸交通의 便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또 그 位置가 半島의 거이 中央에 있어 道理의 均正을 得하야, 一國의 首都로서 조금도 遜色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漢江의 惠澤은 지금도 우리가 日夕으로 크게 입고 있지만 昔日에는 特히 運輸로 말미암아 그 惠澤이 컸으니 各處로부터 輻湊하는 物貨—무엇보다도 國家經濟의 基本인 모든 稅와 貢物은 대개 이 漢江을 通하야 京城에 들어오는 것이다. 李朝時代의 城郭이 比較的 小範圍로 局限되였기 때문에 京城의 市街發展을 妨害한 點이 적지 않었지만, 그것은 地理의 허물이 아니라 城郭의 罪, 制度의 罪이다. 만일 京{{TagPage|83-1}}城의 範圍를 좀 넓히어서—勿論 그때에는 지금처럼 廣範圍로 取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高麗時代의 南京制에 倣하야 西至를 母岳(鞍山), 南至를 漢江邊까지 이르게 하고 內外 重城을 둘렀드러면, 그다지 좁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市街의 發展 國都의 防守도 더 圖謀할 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옛날 朝鮮 都市의 特色과 必須條件은 亂時 所用의 山城의 背景을 갖는 것인데 漢陽이야말로 天險의 北漢을 갖음으로서 일즉부터 이름이 높었다. 百濟 句麗 新 羅의 三國은 勿論이요 高麗時代에도 이를 利用하야 山城을 築하였으며, 李朝에서는 뒤늦게 肅宗時에야 비로소 大規模的으로 北漢의 內外城을 經營하게 되였지만, 이 山城은 실로 地理的으로 險固하고 歷史的으로 久遠하든 것이다. 要컨대 漢陽의 地理는 비단 風水上으로뿐만 아니라 政治·軍事上으로나 運輸·交通上으로나 또 自然風景上으로 한 優越性을 갖이고 있어, 얼마던지 이를 人文的으로 利用하면 利用할 수 있게 된 곳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好條件을 갖춘 地는 半島 中部地方에서 다시 더 求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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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3번={{TagSpage|80-3}}上述한 바로써 보면 李朝 初期의 漢陽 奠都는 決코 單純 且順調로 實現되었든 것이 아니라 複雜多端 波瀾重疊한 가운{{TagPage|81-1}}대서 決末을 보게 된 것을 充分히 알 수 있지만, 漢陽이 여러 번 遷移의 威脅을 當하고 또 母岳과 같은 有力한 敵對的 候補地를 갖이고서도 마침내 候都의 榮를 입게 된 것은 어떠한 理由와 關係로 因함이었든가? 이는 勿論 그 特殊한 地理性과 歷史性에 負한 바ㅣ 많은 것이니 끝으로 吾人은 漢陽의 地理歷史的 特殊性에 就하야 一言을 加하려 한다.
|목차3원문34번={{TagSpage|83-2}}다음으로 漢陽의 歷史的 特殊性을 말하면 여기서 그것을 論함에는 너무도 豐富한 內容을 갖었지만 그 一言以論之하면 이곳은 半島의 中央에 位置하야 古代에 있어서는 南北 諸民族의 係爭地로 되야 樂浪 眞番 辰國, 또는 百濟 高句麗 新羅 三國의 爭霸場裏에 들어가 각각 一時 그 所有가 되고, 中世 高麗時代에는 高麗 三京의 하나로 歷代의 造宮 巡駐가 展次 行하야 王室과 特殊의 關係을 갖든이만치, 歷史上에 너무도 著名한 곳이다. 百濟 初期의 都城인 慰禮가 바루 지금의 京城 그곳인지 아닌지는 자세치 못하나, 同國의 北漢城이라든지, 高句麗 時代의 北漢山郡(一名 南平壤), 新羅 所有 時代의 北漢山州 及 漢陽郡이 다 지금 京城의 前身 前稱이였든 것은 無疑하며, 또 그 漢陽의 名을 처음으로 얻기는 新羅의 半島 統一 後 約 一世紀에 가까운 景德王 十四年(A.D.755)의 일이어니와, 高麗 初에는 또 이를 楊州라고 改稱하게 {{TagPage|84}}되였다. 楊州의 稱을 갖이든 今 京城에 高麗 三京의 一인 南京이 最初로 開創되기는 第十一代 文宗二十一·二年頃(A.D 1067–1068)에 屬하고 그 후 再次 大規模的으로 建置되기는 第十五代 肅宗 六年(A.D.1101)에 屬하나니 이때에는 特히 諸種 秘記—道詵記 道詵踏山記 三角山明堂記 神誌祕詞 等에 據하야 即 여기에 京을 두고 巡駐하면 時間的으로 王業이 永昌(延長)하고 空間的으로 海外 三十六國이 來朝하리라는 讖說에 움직이어 京을 두게 된 것이다(靑丘學叢 第二號 所載 拙稿 「高麗南京建置に就いて」 參照). 文宗의 南京宮址는 지금 어느 곳인지 알 道理가 없으나 肅宗의 이르킨 宮基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今 景福宮 뒤 神武門 밖앗이었으며, 當時 南京의 四至는 李朝의 그것보다는 西와 南으로 稍大하야 西는 岐峯(母岳), 南은 沙里(龍山 新草町)에 至하고 北과 東은 역시 李朝 時代와 같이 白岳과 駱山으로써 界限을 삼었다. 그후 睿宗(第十六代) 仁宗(第十七代) 毅宗(第十八代)의 三王도 父祖의 志를 이어 南京을 重視하는 同時에 때때로 巡駐를 試하고 第二十三代 高宗 二十一年(A.D.1234)에는 南京에 새로 假闕을 이르키고 巡駐의 代로 御衣를 移安한 일이 있었다. 假闕은 本闕에 對한 離宮 혹은 別宮의 義어니와 이 假闊의 基는 今 昌慶苑 內가 아니었는가 한다. 마치 李朝에서 景福宮(本闕)에 對하야 東으로 昌德宮(離宮)이 經營되든 거와 같이 肅宗의 本闕에 對하야 역시 東으로 高宗의 假闕이 세워젔든 것이라고 推測된다. 降하야 忠烈王 三十四年(A.D.1308)에는 南京을 고치어 漢陽府로 貶稱하는 同時에 別로 이를 重視치 아니하더니 恭愍王 禑王 및 恭讓王의 麗末 三四代 동안은 所謂 松都氣衰의 讖說이 盛行하야 漢陽을 또다시 重視하는 同 時에 이곳으로 遷都하려 하야 여러 번 宮闕을 修營하였으며, 特히 恭讓王 二年(A.D.1390)에는 斷然 漢陽으로 移御하야 留守를 松都에 置하더니 半年이 못 되야 도로 舊都로 還駕하고 又一年에 王은 廢位되야 李氏 朝鮮의 現出을 보게되였다(雜誌 朝鮮 第一九四號 拙文 「麗末の遷都問題」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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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4번={{TagSpage|81-2}}먼저 그 地理的 特殊性을 말하면, 그때는 風水地理를 重히 역이든 時代이므로, 또한 먼저 그 方面의 地理를 考察할 必要가 있다. 漢陽은 北岳 즉 白岳을 主山으로 삼어 그 左右枝에 依하야 環抱된 곳이니, 白岳의 右枝는 西으로 다라나 仁王山을 이르키고 거기서 敦義門(西大門) 昭義門(西小門) 崇禮門(南大門)을 거처 다시 南山을 이르키어 案山을 作하면서 光熙門址에 이르러 발을 멈추었으며, 左枝는 東으로 뻗어 鵂岩과 鷹峰을 솟치면서 惠化門(東小門)을 지나 駱山에 이르러 무릅을 꾸렸다. 그런즉 白岳은 風水家의 所謂 玄武요 仁王은 白虎, 駱山은 靑龍, 南山은 朱雀이다. 漢陽은 右枝가 길고 左支가 짜르므로 이를 風水家의 所謂 右旋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西으로 入海하는 漢江과 서루 逆하여 있다. 風水에는 『逆』을 主要 條件의 하나로 치는 것이니 山水의 逆이 없으면 地脈의 環抱를 볼 수 없고 水口의 關鎖를 이루지 못하야 地氣가 散流된다는 것이다. 漢陽은 이 點으로보아 山水의 逆을 充分히 얻은 곳이니 水流로 말하드라도 白岳 左右峽에서 흐르는 明堂水는 市內를 東으로 貫流하야 東大門과 光熙門(水口門) 사이를 빠저 旺深里(往十里) 踏深里를 지나 纛島에서 漢江으로 들어간다. 漢江은 漢陽의 客水로 北漢江 南漢江의 二大 줄기가 楊平 龍津에서 서루 合치어 三角山 諸谷의 衆水를 받어드리면서 漢陽 一帶의 地를 環抱하야 西北으로 西海에 들어가거니와, 三角 山의 모든 山水의 줄기는 또한 漢陽을 中心으로 하야 聚會하여 있다. 母岳의 地는 같은 漢江 流域이지만 山水의 環抱와 水口의 關鎖가 漢陽처럼 緊密치 못한 것이 一大 缺點이다. 다시 白岳의 來脈을 살펴보면 멀리 長白山에서 {{TagPage|82-1}}起原한 安邊의 鐵嶺에서 分岐되야 그 一枝가 南馳하야 楊州의 奇雄인 道峯山을 이르키고 거기서 다시 西南行하야 太淸을 뚤런 三角을 솟치고 南으로 文殊 普賢의 諸峯을 作하면서 正脈을 白岳으로 뻗게 되였다. 일로써 在來의 學者들은 漢陽을 東方精氣의 融結鍾會處로 讃美하였으니 八域志의 著者 李重煥은 <cite no="67">『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cite>라 하고(八城志 京畿道條) 耳溪 洪良浩는 <cite no="68">『東方靈淑之氣 噓融結 鍾成萬年之神都』</cite>라고(耳溪集 卷十四 報恩寺重修記) 하였거니와, 이런 類의 讚辭는 이루 枚擧하기 겨를이 없다. 風水專門家로서는 旣述한 尹莘達 等의 言論과 같이 漢陽의 第一缺點을 石山의 嶮한 것과 明堂水의 豐富치 못한 것을 치나, 그러나 이만한 缺點은 어데서든지 免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튼 漢陽은 風水地理의 第一條件인 『山水聚會』의 地로 認定치 아니할 수 없고, 이 點에 있어서는 母岳을 凌함이 大하고 松都에 不及함이 조금도 없다. 太祖時 雲觀員의 說에는 扶蘇明堂(開城)을 國內의 第一 吉地, 이 白岳明堂을 第二 吉地로 말하였지만, 九變圖란 高麗秘記에는 木覓을 第一花, 松岳을 第二花, 平壤을 第三花로 치든 것이니,(本 學報 第八卷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參照) 花란 것은 風水家의 語로 大吉地를 이름이다.
|목차3원문35번={{TagSpage|85}}이와 같이 漢陽은 地理歷史上에 있어 特殊한 地位를 占한 곳으로, 就中 麗朝에서는 陰陽地理家의 讚頌하든 理想的 吉地로 歷代 王室과의 特殊한 關係를 맺어오든 것이다. 李朝 太祖께서 即位 當初에 漢陽 遷都의 敎를 내리시고, 그 후 鷄龍山 母岳 等地가 相當한 競爭的 候補地로 있었음에 不拘하고 마침내 漢陽이 遷都의 榮을 보게 된 것은 右述한 特殊性에 負함이 많음과 한가지 麗朝 以來의 觀念과 思想에 傳統된 바가 많었든 것이다. 太宗도 역시 父王의 志를 繼承하는 同時에 右의 特殊性과 傳統的 觀念에 依하야 결국 漢陽을 擇하게 되였거니와 이런 點으로 보면 李朝 初期의 漢陽 奠都는 비록 中間의 許多한 事情과 波瀾이 있었다 할지라도 必然的 當然的 運命에 支配되였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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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5번={{TagSpage|82-2}}이러한 風水地理的 考察을 떠나 실제 人文地理學上으로 이를 考察하여 보드라도 漢陽은 所謂 山河襟帶의 要鎭으로 軍事上의 要를 得할 뿐더러 水陸交通의 便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또 그 位置가 半島의 거이 中央에 있어 道理의 均正을 得하야, 一國의 首都로서 조금도 遜色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漢江의 惠澤은 지금도 우리가 日夕으로 크게 입고 있지만 昔日에는 特히 運輸로 말미암아 그 惠澤이 컸으니 各處로부터 輻湊하는 物貨—무엇보다도 國家經濟의 基本인 모든 稅와 貢物은 대개 이 漢江을 通하야 京城에 들어오는 것이다. 李朝時代의 城郭이 比較的 小範圍로 局限되였기 때문에 京城의 市街發展을 妨害한 點이 적지 않었지만, 그것은 地理의 허물이 아니라 城郭의 罪, 制度의 罪이다. 만일 京{{TagPage|83-1}}城의 範圍를 좀 넓히어서—勿論 그때에는 지금처럼 廣範圍로 取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高麗時代의 南京制에 倣하야 西至를 母岳(鞍山), 南至를 漢江邊까지 이르게 하고 內外 重城을 둘렀드러면, 그다지 좁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市街의 發展 國都의 防守도 더 圖謀할 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옛날 朝鮮 都市의 特色과 必須條件은 亂時 所用의 山城의 背景을 갖는 것인데 漢陽이야말로 天險의 北漢을 갖음으로서 일즉부터 이름이 높었다. 百濟 句麗 新 羅의 三國은 勿論이요 高麗時代에도 이를 利用하야 山城을 築하였으며, 李朝에서는 뒤늦게 肅宗時에야 비로소 大規模的으로 北漢의 內外城을 經營하게 되였지만, 이 山城은 실로 地理的으로 險固하고 歷史的으로 久遠하든 것이다. 要컨대 漢陽의 地理는 비단 風水上으로뿐만 아니라 政治·軍事上으로나 運輸·交通上으로나 또 自然風景上으로 한 優越性을 갖이고 있어, 얼마던지 이를 人文的으로 利用하면 利用할 수 있게 된 곳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好條件을 갖춘 地는 半島 中部地方에서 다시 더 求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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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6번={{TagSpage|83-2}}다음으로 漢陽의 歷史的 特殊性을 말하면 여기서 그것을 論함에는 너무도 豐富한 內容을 갖었지만 그 一言以論之하면 이곳은 半島의 中央에 位置하야 古代에 있어서는 南北 諸民族의 係爭地로 되야 樂浪 眞番 辰國, 또는 百濟 高句麗 新羅 三國의 爭霸場裏에 들어가 각각 一時 그 所有가 되고, 中世 高麗時代에는 高麗 三京의 하나로 歷代의 造宮 巡駐가 展次 行하야 王室과 特殊의 關係을 갖든이만치, 歷史上에 너무도 著名한 곳이다. 百濟 初期의 都城인 慰禮가 바루 지금의 京城 그곳인지 아닌지는 자세치 못하나, 同國의 北漢城이라든지, 高句麗 時代의 北漢山郡(一名 南平壤), 新羅 所有 時代의 北漢山州 及 漢陽郡이 다 지금 京城의 前身 前稱이였든 것은 無疑하며, 또 그 漢陽의 名을 처음으로 얻기는 新羅의 半島 統一 後 約 一世紀에 가까운 景德王 十四年(A.D.755)의 일이어니와, 高麗 初에는 또 이를 楊州라고 改稱하게 {{TagPage|84}}되였다. 楊州의 稱을 갖이든 今 京城에 高麗 三京의 一인 南京이 最初로 開創되기는 第十一代 文宗二十一·二年頃(A.D 1067–1068)에 屬하고 그 후 再次 大規模的으로 建置되기는 第十五代 肅宗 六年(A.D.1101)에 屬하나니 이때에는 特히 諸種 秘記—道詵記 道詵踏山記 三角山明堂記 神誌祕詞 等에 據하야 即 여기에 京을 두고 巡駐하면 時間的으로 王業이 永昌(延長)하고 空間的으로 海外 三十六國이 來朝하리라는 讖說에 움직이어 京을 두게 된 것이다(靑丘學叢 第二號 所載 拙稿 「高麗南京建置に就いて」 參照). 文宗의 南京宮址는 지금 어느 곳인지 알 道理가 없으나 肅宗의 이르킨 宮基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今 景福宮 뒤 神武門 밖앗이었으며, 當時 南京의 四至는 李朝의 그것보다는 西와 南으로 稍大하야 西는 岐峯(母岳), 南은 沙里(龍山 新草町)에 至하고 北과 東은 역시 李朝 時代와 같이 白岳과 駱山으로써 界限을 삼었다. 그후 睿宗(第十六代) 仁宗(第十七代) 毅宗(第十八代)의 三王도 父祖의 志를 이어 南京을 重視하는 同時에 때때로 巡駐를 試하고 第二十三代 高宗 二十一年(A.D.1234)에는 南京에 새로 假闕을 이르키고 巡駐의 代로 御衣를 移安한 일이 있었다. 假闕은 本闕에 對한 離宮 혹은 別宮의 義어니와 이 假闊의 基는 今 昌慶苑 內가 아니었는가 한다. 마치 李朝에서 景福宮(本闕)에 對하야 東으로 昌德宮(離宮)이 經營되든 거와 같이 肅宗의 本闕에 對하야 역시 東으로 高宗의 假闕이 세워젔든 것이라고 推測된다. 降하야 忠烈王 三十四年(A.D.1308)에는 南京을 고치어 漢陽府로 貶稱하는 同時에 別로 이를 重視치 아니하더니 恭愍王 禑王 및 恭讓王의 麗末 三四代 동안은 所謂 松都氣衰의 讖說이 盛行하야 漢陽을 또다시 重視하는 同 時에 이곳으로 遷都하려 하야 여러 번 宮闕을 修營하였으며, 特히 恭讓王 二年(A.D.1390)에는 斷然 漢陽으로 移御하야 留守를 松都에 置하더니 半年이 못 되야 도로 舊都로 還駕하고 又一年에 王은 廢位되야 李氏 朝鮮의 現出을 보게되였다(雜誌 朝鮮 第一九四號 拙文 「麗末の遷都問題」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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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7번={{TagSpage|85}}이와 같이 漢陽은 地理歷史上에 있어 特殊한 地位를 占한 곳으로, 就中 麗朝에서는 陰陽地理家의 讚頌하든 理想的 吉地로 歷代 王室과의 特殊한 關係를 맺어오든 것이다. 李朝 太祖께서 即位 當初에 漢陽 遷都의 敎를 내리시고, 그 후 鷄龍山 母岳 等地가 相當한 競爭的 候補地로 있었음에 不拘하고 마침내 漢陽이 遷都의 榮을 보게 된 것은 右述한 特殊性에 負함이 많음과 한가지 麗朝 以來의 觀念과 思想에 傳統된 바가 많었든 것이다. 太宗도 역시 父王의 志를 繼承하는 同時에 右의 特殊性과 傳統的 觀念에 依하야 결국 漢陽을 擇하게 되였거니와 이런 點으로 보면 李朝 初期의 漢陽 奠都는 비록 中間의 許多한 事情과 波瀾이 있었다 할지라도 必然的 當然的 運命에 支配되였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끝)
  
 
|목차3해독문1번=(갑) 정종의 즉위와 개경이도
 
|목차3해독문1번=(갑) 정종의 즉위와 개경이도
|목차3해독문2번=태조의 창업 후 7년이요, 한양 신도의 공역을 완료한 후 겨우 2년에, 왕실에는 일대 불상사가 일어났었다. 재래 사가의 소위 『방석(세자)의 난』 『정도전의 난』이란 것이 즉 그것이다. 그러나 재래의 이 난칭은 좀 억울한 칭호인 듯하므로 차랄이 이를 정안군 방원(第5왕자 태종)의 난 혹은 왕자의 난이라고 하는 편이 妥當할 것 같다. 지금 간단히 그 난의 전말을 말하면—태조에게는 8인의 아들이 있어, 제1남으로부터 제6남까지는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요, 제7남 제8남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니, 태조 즉위 초(원년)에 건저문제가 일어나 태조는 강비의 의향을 중히 여기어 제7남 방번을 세워 세자를 삼으려 하매, 배극렴, 조준 등은 그 위인의 광패함을 지적하여, 반드시 강비의 소생을 세울진대 계남 방석이 좀더 가하다고 하여 주청하여 방석을 세자로 삼게 하였다.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심효생(세자빈 부) 등은 다 자 방석을 보도하던 유력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한씨 소생의 여러 왕자는 이 건저에 대하여 얼마나 큰 불평과 시기를 품었을까는 상상하여 남음이 있다. 특히 제5왕자 정안군 방원(후의태종)과 같은 이는 태조의 창업을 보좌하던(마치 당의 태종과 같이) 공로가 많고 영매의 자질을 가춘 이수의 인임에 불구하고 세자의 책립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심중의 불평은 더욱 컸을 것이다. 태조 7년의 변란은 즉 이 건저에 대한 숙감(宿憾)의 무력적 폭거로 볼 수 있는 것이어니와, 국사에 정도전, 남은 등이 세자 방석에게 부(附)하여 한씨 소생의 여러 왕자를 시기하여 7년 8월에 태조의 위석을 기회로 삼아 이들에게 일망타진의 화를 주려고 할새, 그 음모가 누설되어 정안군 일파는 분기하여 미연에 이를 진압하여 소위 안사의 공을 세웠다고 하였으나, 이런 사실은 우리 회원 이상백씨의 말한 바와 같이(본 학보 제2권, 동씨의 삼봉인물고 참조) 여러 가지로 의아를 갖게 하여 신용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정안군 당인(이무)의 무위적 고발을 그대로 실은 바에 불과한 것인 듯하며, 요컨대 이 변란은 정도전 측에서는 알지 못하는 중에 당하였으므로 음모는 실상 도전 측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안군 당인 측에서 양성되어 이때(태조의 병환을 호기로 삼아) 군을 격동하여 암야 중에 도전 등 습격살해하고 난의 책임을 세자 및 도전 등에 전가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떻든 이 변란의 책임자로 오명을 쓴 세자 방석은 결국 폐위되어 원배도중 정안군의 부하에게 살해되고, 그 동모아인 무안군 방번도 동양의 참화를 입고 말았다. 세자 측 일파의 죽음은 실로 포원창천(抱寃漲天), 함루입지(含淚入地)의 불행이요, 또 그 변란은 일종의 골육지쟁으로 왕실의 말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세자의 폐위와 동시에 그 자리는 당연히 정안군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므로 제신들은 정안군으로써 세자를 삼기를 원하매, 군은 이를 고사하고 제2형 영안군 방과에게 양보하여 태조의 윤허를 받았다. 정안군이 이와 같이 고사하고 특히 영안군을 추대한 것은, 물론 자기는 당장 혐의로운 괴로운 입장에 있었던 거와 영안군의 무야심한 인품이 장래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을 미리 간파한 바였다. 태조는 방석 방번의 불행을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여 이로부터 심사 자못 산란하여 정치에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익9월에 마침내 자리를 세자 방과에게 선위하게 되었다. 이는 곧 제2대 정종대왕이시니, 정종은 처음부터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은 없었던 모양이나, 위 변란의 결과로 이와 같이 극위에 오르게 된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정종은 부왕을 존하여 상왕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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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태조의 창업 후 7년이요, 한양 신도의 공역을 완료한 후 겨우 2년에, 왕실에는 일대 불상사가 일어났었다. 재래 사가의 소위 ‘방석(세자)의 난’ ‘정도전의 난’이란 것이 즉 그것이다. 그러나 재래의 이 난칭은 좀 억울한 칭호인 듯하므로 차랄이 이를 정안군 방원(第5왕자 태종)의 난 혹은 왕자의 난이라고 하는 편이 妥當할 것 같다. 지금 간단히 그 난의 전말을 말하면—태조에게는 8인의 아들이 있어, 제1남으로부터 제6남까지는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요, 제7남 제8남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니, 태조 즉위 초(원년)에 건저문제가 일어나 태조는 강비의 의향을 중히 여기어 제7남 방번을 세워 세자를 삼으려 하매, 배극렴, 조준 등은 그 위인의 광패함을 지적하여, 반드시 강비의 소생을 세울진대 계남 방석이 좀더 가하다고 하여 주청하여 방석을 세자로 삼게 하였다.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심효생(세자빈 부) 등은 다 자 방석을 보도하던 유력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한씨 소생의 여러 왕자는 이 건저에 대하여 얼마나 큰 불평과 시기를 품었을까는 상상하여 남음이 있다. 특히 제5왕자 정안군 방원(후의태종)과 같은 이는 태조의 창업을 보좌하던(마치 당의 태종과 같이) 공로가 많고 영매의 자질을 가춘 이수의 인임에 불구하고 세자의 책립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심중의 불평은 더욱 컸을 것이다. 태조 7년의 변란은 즉 이 건저에 대한 숙감(宿憾)의 무력적 폭거로 볼 수 있는 것이어니와, 국사에 정도전, 남은 등이 세자 방석에게 부(附)하여 한씨 소생의 여러 왕자를 시기하여 7년 8월에 태조의 위석을 기회로 삼아 이들에게 일망타진의 화를 주려고 할새, 그 음모가 누설되어 정안군 일파는 분기하여 미연에 이를 진압하여 소위 안사의 공을 세웠다고 하였으나, 이런 사실은 우리 회원 이상백씨의 말한 바와 같이(본 학보 제2권, 동씨의 삼봉인물고 참조) 여러 가지로 의아를 갖게 하여 신용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정안군 당인(이무)의 무위적 고발을 그대로 실은 바에 불과한 것인 듯하며, 요컨대 이 변란은 정도전 측에서는 알지 못하는 중에 당하였으므로 음모는 실상 도전 측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안군 당인 측에서 양성되어 이때(태조의 병환을 호기로 삼아) 군을 격동하여 암야 중에 도전 등 습격살해하고 난의 책임을 세자 및 도전 등에 전가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떻든 이 변란의 책임자로 오명을 쓴 세자 방석은 결국 폐위되어 원배도중 정안군의 부하에게 살해되고, 그 동모아인 무안군 방번도 동양의 참화를 입고 말았다. 세자 측 일파의 죽음은 실로 포원창천(抱寃漲天), 함루입지(含淚入地)의 불행이요, 또 그 변란은 일종의 골육지쟁으로 왕실의 말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세자의 폐위와 동시에 그 자리는 당연히 정안군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므로 제신들은 정안군으로써 세자를 삼기를 원하매, 군은 이를 고사하고 제2형 영안군 방과에게 양보하여 태조의 윤허를 받았다. 정안군이 이와 같이 고사하고 특히 영안군을 추대한 것은, 물론 자기는 당장 혐의로운 괴로운 입장에 있었던 거와 영안군의 무야심한 인품이 장래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을 미리 간파한 바였다. 태조는 방석 방번의 불행을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여 이로부터 심사 자못 산란하여 정치에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익9월에 마침내 자리를 세자 방과에게 선위하게 되었다. 이는 곧 제2대 정종대왕이시니, 정종은 처음부터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은 없었던 모양이나, 위 변란의 결과로 이와 같이 극위에 오르게 된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정종은 부왕을 존하여 상왕이라 칭하였다.
|목차3해독문3번=이상은 태조 말년의 왕자난 내지 정종 즉위의 사정에 대하여 약술한 바이어니와, 왕자난과 같은 불상사에 계속하여 정종 즉위 초에 자연계에도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었다. 혹은 새 무리가 취조(聚噪)하고 혹은 야작(野鵲)이 내소(來巢)하고 혹은 재이가 누견하여, 무슨 불길의 징조나 아닌가 하여, 이때 인심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운관에서는 이를 이유로 하여 상서하여 피방하기를 청하였다. 피방은 즉 피흉취길이니 흉방을 피하여 길방으로 이어하자는 말이었다. 정종은 이로 인하여 원년 정월 임신(1일)에 종친 및  좌정승 조준 등 여러 공신을 회합하고 서운관이 올린 서를 보이시며 피방의 가부, 즉 이어의 여부에 하여 문의하시었다. 정종실록 권1에<blockquote no="21">書雲觀上言 羣烏聚噪 野鵲來巢 災異屢見 宜修省消變 且宜避方 上 乃悉召宗親及左政丞趙浚等諸宰 執示以書雲觀所上書 且問避方可否云云</blockquote>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왕의 문의에 대하여 제신은 다 피방하는 것이 가하다 하고, 그 방소에 대하여는 기내 주현에는 대소신료와 숙위군의 의우할 곳이 없지만, 오직 송도에는 궁궐과 군신의 제택이 완전한 채로 남아있다는 뜻을 상주하였다. 문제는 의외로 속히 진행되어 아무 이의 없이 송도에 이어하기로 결정되어, 동년(원년) 정월 7일에 단연히 이를 실행함에 이르렀다. 형식은 피방이라고 하여 잠시 이어에 불과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실상은 천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왕자의 변란 이래 심중이 자못 좋지 않은 태조께서는 이 이어에 대하여 더욱 불유쾌를 느끼사 도중에서 종원(從員)을 돌아다 보시며 말씀하기를 『초이도한양 非獨吾志 與國人議之』라 하시고 강개무량의 눈물을 흘리시었다는 이야기가 실록에 보이거니와 이과 반대로 이때 송도에 대한 회구의 정과 한양의 초창에 견디지 못하던 일반 도민(都民)들은 거의 열광적으로 이 이어를 좋아하였던 모양이니, 실록에는 당시 도읍의 정황을 기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blockquote no="22">初都人皆懷舊都 聞欲還都 相與喜悅 提携負戴 絡繹于路 使守城門以止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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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이상은 태조 말년의 왕자난 내지 정종 즉위의 사정에 대하여 약술한 바이어니와, 왕자난과 같은 불상사에 계속하여 정종 즉위 초에 자연계에도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었다. 혹은 새 무리가 취조(聚噪)하고 혹은 야작(野鵲)이 내소(來巢)하고 혹은 재이가 누견하여, 무슨 불길의 징조나 아닌가 하여, 이때 인심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운관에서는 이를 이유로 하여 상서하여 피방하기를 청하였다. 피방은 즉 피흉취길이니 흉방을 피하여 길방으로 이어하자는 말이었다. 정종은 이로 인하여 원년 정월 임신(1일)에 종친 및  좌정승 조준 등 여러 공신을 회합하고 서운관이 올린 서를 보이시며 피방의 가부, 즉 이어의 여부에 하여 문의하시었다. 정종실록 권1에<blockquote no="21">書雲觀上言 羣烏聚噪 野鵲來巢 災異屢見 宜修省消變 且宜避方 上 乃悉召宗親及左政丞趙浚等諸宰 執示以書雲觀所上書 且問避方可否云云</blockquote>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왕의 문의에 대하여 제신은 다 피방하는 것이 가하다 하고, 그 방소에 대하여는 기내 주현에는 대소신료와 숙위군의 의우할 곳이 없지만, 오직 송도에는 궁궐과 군신의 제택이 완전한 채로 남아있다는 뜻을 상주하였다. 문제는 의외로 속히 진행되어 아무 이의 없이 송도에 이어하기로 결정되어, 동년(원년) 정월 7일에 단연히 이를 실행함에 이르렀다. 형식은 피방이라고 하여 잠시 이어에 불과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실상은 천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왕자의 변란 이래 심중이 자못 좋지 않은 태조께서는 이 이어에 대하여 더욱 불유쾌를 느끼사 도중에서 종원(從員)을 돌아다 보시며 말씀하기를 <cite no="29">初移都漢陽 非獨吾志 與國人議之</cite>라 하시고 강개무량의 눈물을 흘리시었다는 이야기가 실록에 보이거니와 이과 반대로 이때 송도에 대한 회구의 정과 한양의 초창에 견디지 못하던 일반 도민(都民)들은 거의 열광적으로 이 이어를 좋아하였던 모양이니, 실록에는 당시 도읍의 정황을 기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blockquote no="22">初都人皆懷舊都 聞欲還都 相與喜悅 提携負戴 絡繹于路 使守城門以止之</blockquote>
|목차3해독문4번=정종께서도 송도이어를 대단 기뻐하셨던 것은 익2월 송도 수창궁(서소문 내에 있던 궁으로 태조 즉위하시던 곳)을 본궐로 삼아 어하였을 때 그 북원에 올라 좌우를 돌아다 보시고 『以前朝太祖之智 建都于此 豈偶然哉』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또 실록의 위 문장에 접하여 『遂有移都松京之志』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송도 이어가 심상한 일시적의 것이 아님을 더욱 깨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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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정종께서도 송도이어를 대단 기뻐하셨던 것은 익2월 송도 수창궁(서소문 내에 있던 궁으로 태조 즉위하시던 곳)을 본궐로 삼아 어하였을 때 그 북원에 올라 좌우를 돌아다 보시고 <cite no="30">以前朝太祖之智 建都于此 豈偶然哉</cite>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또 실록의 위 문장에 접하여 <cite no="31">遂有移都松京之志</cite>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송도 이어가 심상한 일시적의 것이 아님을 더욱 깨달을 것이다.
 
|목차3해독문5번=요컨대 정종의 송도 이어는 사실상 신도 한양을 버리는 것과 동양의 거동이었거니와, 그 이유는 결코 단순히 서운관의 주청한 의미의 피방에만 있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실상 중요한 이유는 한양 전도한 지 불과 4-5년만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골육이 피를 흘리는 불상사를 보게 되고, 일로 인하여 태조는 보위를 버리시고 은거하시게 되였으므로 이것이 혹 한양 지덕의 소치가 아닌가 하는 풍수지리적 신념에 의한 피방의 의의가 더 심각하였던 것과, 그 다음으로는 태조 이외의 군신의 송도에 대한 회구의 정이 간절하였던 것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간단히 말하면, 정종조의 천도의 사정은, 첫째 왕자의 난, 둘째 군신의 송도회구의 정, 셋째 자연계의 이변에 있었던 것이다. 첫째, 둘째의 사정은 실질적 무언의 이유임에 대하여, 셋째의 사정은 형식적 유언의 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목차3해독문5번=요컨대 정종의 송도 이어는 사실상 신도 한양을 버리는 것과 동양의 거동이었거니와, 그 이유는 결코 단순히 서운관의 주청한 의미의 피방에만 있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실상 중요한 이유는 한양 전도한 지 불과 4-5년만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골육이 피를 흘리는 불상사를 보게 되고, 일로 인하여 태조는 보위를 버리시고 은거하시게 되였으므로 이것이 혹 한양 지덕의 소치가 아닌가 하는 풍수지리적 신념에 의한 피방의 의의가 더 심각하였던 것과, 그 다음으로는 태조 이외의 군신의 송도에 대한 회구의 정이 간절하였던 것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간단히 말하면, 정종조의 천도의 사정은, 첫째 왕자의 난, 둘째 군신의 송도회구의 정, 셋째 자연계의 이변에 있었던 것이다. 첫째, 둘째의 사정은 실질적 무언의 이유임에 대하여, 셋째의 사정은 형식적 유언의 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목차3해독문6번=(乙) 태종의 즉위와 천도문제
 
|목차3해독문6번=(乙) 태종의 즉위와 천도문제
 
|목차3해독문7번=(A) 방간의 난과 태종의 즉위
 
|목차3해독문7번=(A) 방간의 난과 태종의 즉위
|목차3해독문8번=정종의 개경 이어 후 겨우 1년에 또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소위 방간의 난이 이것이다. 방간은 태조의 제4자 회안군 그이로서 한씨 소생 왕자 중 태종과 같이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도 있고 또 호기도 있던 불녹록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회안군은 정안군의 인격과 공훈과 노력과 위망에는 미칠 수 없었고, 따라서 항상 시의불안 중에 있던바, 마침 지중추 박포가 밀고하되 정안이 장차 회안을 꾀하려 한다고 하였다. 포는 앞서 무인 왕자난에 정안군을 도아 공로가 많았음에 불구하고 상작(賞爵)이 높지 못함에 앙앙불낙하여 이제 懷安을 衝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회안은 포의 양동에 의하여 병을 일으켜 정안군을 제하려 하매 정안도 이를 알고 역시 병을 내어 드디어 양군의 교전을 보게 되니 이야말로 동모 골육간의 혈전이었다. 전국은 회안(방간)군 편이 불리하여 세궁패주를 면치 못하고, 마침내 회안은—「거병작난」 「謀害同氣」의 죄로 왕명으로 특히 극형에 1등을 감하여 황해도 토산에 유배되고, 박포는 양동의 죄로써 찬주되고 말았다. 난후 정종은 하륜 등의 주청에 의하여 상왕(태조)의 허락을 얻어 정안군을 세워 세자를 삼으시고 이어 하교하여 왈 『國本定然後 衆志定 今者之亂 正以國本未定也』라고 하였다. 동년 7월에 왕은 상왕(태조)에게 태상왕의 존호를 올리고 드디어 11월에 이르러는 자리를 세자에게 전하시니 재위 불과 2년. 새 군주는 곧 제3대 태종대왕이시었다. 태종의 왕위계승은 저 무인난(태조 7년) 이후 거의 결정적으로 되다시피 하여 단지 시일의 조만 문제뿐이었지만, 이번에 이와 같이 속히 실현된 것은 물론 우의 방간의 난이 이를 촉진시킨 것이었다. 태종은 정종을 높이어 상왕이라 하시고 이로부터 만기를 총재하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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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8번=정종의 개경 이어 후 겨우 1년에 또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소위 방간의 난이 이것이다. 방간은 태조의 제4자 회안군 그이로서 한씨 소생 왕자 중 태종과 같이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도 있고 또 호기도 있던 불녹록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회안군은 정안군의 인격과 공훈과 노력과 위망에는 미칠 수 없었고, 따라서 항상 시의불안 중에 있던바, 마침 지중추 박포가 밀고하되 정안이 장차 회안을 꾀하려 한다고 하였다. 포는 앞서 무인 왕자난에 정안군을 도아 공로가 많았음에 불구하고 상작(賞爵)이 높지 못함에 앙앙불낙하여 이제 懷安을 衝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회안은 포의 양동에 의하여 병을 일으켜 정안군을 제하려 하매 정안도 이를 알고 역시 병을 내어 드디어 양군의 교전을 보게 되니 이야말로 동모 골육간의 혈전이었다. 전국은 회안(방간)군 편이 불리하여 세궁패주를 면치 못하고, 마침내 회안은—‘거병작난’ ‘모해동기’의 죄로 왕명으로 특히 극형에 1등을 감하여 황해도 토산에 유배되고, 박포는 양동의 죄로써 찬주되고 말았다. 난후 정종은 하륜 등의 주청에 의하여 상왕(태조)의 허락을 얻어 정안군을 세워 세자를 삼으시고 이어 하교하여 왈 <cite no="32">國本定然後 衆志定 今者之亂 正以國本未定也</cite>라고 하였다. 동년 7월에 왕은 상왕(태조)에게 태상왕의 존호를 올리고 드디어 11월에 이르러는 자리를 세자에게 전하시니 재위 불과 2년. 새 군주는 곧 제3대 태종대왕이시었다. 태종의 왕위계승은 저 무인난(태조 7년) 이후 거의 결정적으로 되다시피 하여 단지 시일의 조만 문제뿐이었지만, 이번에 이와 같이 속히 실현된 것은 물론 우의 방간의 난이 이를 촉진시킨 것이었다. 태종은 정종을 높이어 상왕이라 하시고 이로부터 만기를 총재하시게 되었다.
 
|목차3해독문9번=(B), 수창궁의 화재와 第1회 천도 논의
 
|목차3해독문9번=(B), 수창궁의 화재와 第1회 천도 논의
|목차3해독문10번=그런데 태종 즉위 익월(정종 2년 12월)에 개경에는 일대 재변이 일어났었다. 즉 이때 본궐인 수창궁에 화재가 일어나 침실로부터 대전에까지 연소하여, 극력 이를 진압하였으나, 당시 관념으로는 국가의 일대 불상사이었다. 이 화재는 관념으로나 실제상으로나 왕의 이어를 필요케 하는 동시에 의례적인 천도론의 대두를 자극시킴 족하였다. 과연 화재 직후 태종께서는 조준 성석린 이하 문신 10여인을 모으시고 서운관 소장의 비기밀서에 비추어 천도의 이해길흉을 의론케 하시니 정종실록 2년 12월조에<blockquote no="23">(上)謂平壤伯趙浚·昌寧伯成石璘以下文官十餘人曰 不幸有災 卿等按書雲觀秘密圖籍 議遷都利害以聞云云</blockquote>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즉 이것이 태종조의 천도문제에 관한 제1회적 회의이었다. 이 회의에 있어 제신의 논의는 자못 분분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말았지만, 신임의 우정승 하륜만은 태조조에서와 같이 여전히 동방비기에 의하여 모악 천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는 일즉부터 유학의 교양을 받으심이 깊어 미신사상에는 그다지 혹신하시지 않는 터이지만, 이 회의에서 더욱 참위술수의 설이 인심을 현혹케 함이 심한 것을 깨달으시고 제대신에게 일러 왈 『今讖緯術數之言 縱橫不止 眩惑인심 何이處之』라 하시고, 또 『신도 내지父주所創也 何必別건도읍 이勞民乎』라고 하여 부왕의 소창인 신도 한양을 전혀 버리기 어려운 뜻을 보이시고 드디어 명하여 술수지리의 서를 금하게 하였다 한다. 태종의 이 언교는 당시 유신들의 견해에 비하여 가위 백척간두에 일보를 내킨 것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특히 그 한도 지지설과 같은 것은 태상왕의 의사를 존중히 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태조께서는 앞서부터 한양을 버리는 것을 여간 유감으로 여기시지 아니하여, 개경 천도 후에도 가끔 한양에 독행하신 일이 실록에 나타나거니와 정종 2년 11월 에는 태조께서 오대산으로부터 개경에 돌아와 신주인 태종을 보시고 특히 한양 환도의 뜻으로써 효유유하신 일까지 있었다. 정종실록 동년 동월조에 이 사실을 기재하여 왈<blockquote no="24">先是 太上王常欲遷都漢陽 至是 謂上曰 汝兄欲還漢陽 以慰我心 其志已定 汝能體予乎 上對曰子心何敢不從命乎</blockquote>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태종의 우의 언교는 확실히 태상왕의 뜻을 존중 또 계승하시는 의미인 것이 더욱 분명하고, 또 상왕(정종)도 역시 그러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태종의 언교는 단지 왕의 의사표시에 불과하였을 뿐이요 그대로 곧 실행할 것을 성명하신 바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때의 천도 논의는 아무 결말을 보지 못한 채로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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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0번=그런데 태종 즉위 익월(정종 2년 12월)에 개경에는 일대 재변이 일어났었다. 즉 이때 본궐인 수창궁에 화재가 일어나 침실로부터 대전에까지 연소하여, 극력 이를 진압하였으나, 당시 관념으로는 국가의 일대 불상사이었다. 이 화재는 관념으로나 실제상으로나 왕의 이어를 필요케 하는 동시에 의례적인 천도론의 대두를 자극시킴 족하였다. 과연 화재 직후 태종께서는 조준 성석린 이하 문신 10여인을 모으시고 서운관 소장의 비기밀서에 비추어 천도의 이해길흉을 의론케 하시니 정종실록 2년 12월조에<blockquote no="23">(上)謂平壤伯趙浚·昌寧伯成石璘以下文官十餘人曰 不幸有災 卿等按書雲觀秘密圖籍 議遷都利害以聞云云</blockquote>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즉 이것이 태종조의 천도문제에 관한 제1회적 회의이었다. 이 회의에 있어 제신의 논의는 자못 분분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말았지만, 신임의 우정승 하륜만은 태조조에서와 같이 여전히 동방비기에 의하여 모악 천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는 일즉부터 유학의 교양을 받으심이 깊어 미신사상에는 그다지 혹신하시지 않는 터이지만, 이 회의에서 더욱 참위술수의 설이 인심을 현혹케 함이 심한 것을 깨달으시고 제대신에게 일러 왈 <cite no="33">今讖緯術數之言 縱橫不止 眩惑人心 何以處之</cite>라 하시고, 또 <cite no="34">新都 乃至父主所創也 何必別建都邑 以勞民乎</cite>라고 하여 부왕의 소창인 신도 한양을 전혀 버리기 어려운 뜻을 보이시고 드디어 명하여 술수지리의 서를 금하게 하였다 한다. 태종의 이 언교는 당시 유신들의 견해에 비하여 가위 백척간두에 일보를 내킨 것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특히 그 한도 지지설과 같은 것은 태상왕의 의사를 존중히 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태조께서는 앞서부터 한양을 버리는 것을 여간 유감으로 여기시지 아니하여, 개경 천도 후에도 가끔 한양에 독행하신 일이 실록에 나타나거니와 정종 2년 11월 에는 태조께서 오대산으로부터 개경에 돌아와 신주인 태종을 보시고 특히 한양 환도의 뜻으로써 효유유하신 일까지 있었다. 정종실록 동년 동월조에 이 사실을 기재하여 왈<blockquote no="24">先是 太上王常欲遷都漢陽 至是 謂上曰 汝兄欲還漢陽 以慰我心 其志已定 汝能體予乎 上對曰子心何敢不從命乎</blockquote>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태종의 우의 언교는 확실히 태상왕의 뜻을 존중 또 계승하시는 의미인 것이 더욱 분명하고, 또 상왕(정종)도 역시 그러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태종의 언교는 단지 왕의 의사표시에 불과하였을 뿐이요 그대로 곧 실행할 것을 성명하신 바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때의 천도 논의는 아무 결말을 보지 못한 채로 주저앉고 말았다.
 
|목차3해독문11번=(C), 제2회의 천도 논의와 결렬
 
|목차3해독문11번=(C), 제2회의 천도 논의와 결렬
|목차3해독문12번=그 후 천도 문제는 얼마 동안 제의되지 아니하고 중지 상태로 있더니, 태종 2년 7월에 이르러 또다시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것도 이때 천변지괴가 뒤를 이어 속기함에 동기된 바이어니와 태종께서는 동월 11일에 하륜, 김사형 이무 등을 부르사 삼부(의정부·사평부·승추부)의 문무제신으로 더불어 한양 천도의 가부를 토의케 하였다. 이때도 제신의 의견은 구구불일하여, 혹은 『當在舊都(개경), 혹은 『當還신도(한양), 혹은 『이도모악』이라 하는 등, 3파의 분열을 보게되었는데, 삼부가 드디어 『이在舊都爲가 還신도爲불편』이란 가결의를 상주한 것을 보면 환도 반대의 의견이 다대수를 점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면 태종께서는 이 삼부의 주의(奏議)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와 암시를 보이셨느냐 하면, 실록 동년 동월 임진(11일)조에 『上以新都太上王創建之地․舊都人心所安 意未決 見三府之議 心不便 問近臣曰 成王在鎬京 廟在豊乎 在洛乎 皆不能對 又召金瞻問之 亦不能對 上曰 周公所洛邑而祭文王騎牛一 武王騂牛一 則宗廟必在洛矣 金科曰 成王居鎬 有大事則至豊宗廟必在豊矣 末能決之 上意以爲 若成王居鎬 宗廟在洛邑 則今予在舊都而宗廟在新都 亦宜』라고 쓰여있다. 이에 의하면 이때 태종의 입장은 대단 곤란하셨으니 첫째 신도 한양은 태상왕의 창건하신 곳으로 종묘가 그곳에 있고, 또(위에 말한 바와 같이) 태상왕이 왕에게 환도의 뜻으로써 유하신 일까지 있는 터이라 그 뜻에 거스르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둘째 구도 개성은 인민의 안심안업 회토중천의 땅이라 민의에 반하여 그곳을 갑자기 떠나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로 여기었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왕은 문무제신의 의견을 물었던바, 그 강론은 위와 같이 천도를 반대하는 파가 많아 심중에 결연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또 다시 이를 고사에 비추기 위하여 주의 성왕이 호경에 거하였을 때에 종묘가 낙에 있었는지 풍에 있었는지?를 두세 문신에게 물으시었던바, 신통한 대답이 없거늘 태종은 가라사대 주공이 낙읍을 이루고 문왕, 무왕에게 기우성우(騎牛騂牛)를 제한 것을 보면 종묘가 낙읍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매, 김과는 가로대 성왕이 호에 거하여 대사가 있으면 풍에 갔었으니 종묘가 반드시 풍에 있었으리라고 하여, 이 문제도 능히 결정치 못하였으나, 태종의 의사는 주의 종묘가 과연 낙읍에 있었다고 하면 그 예에 따라 신도 한양에 종묘를 그대로 두고 송경에 잉도하여도 조흘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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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2번=그 후 천도 문제는 얼마 동안 제의되지 아니하고 중지 상태로 있더니, 태종 2년 7월에 이르러 또다시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것도 이때 천변지괴가 뒤를 이어 속기함에 동기된 바이어니와 태종께서는 동월 11일에 하륜, 김사형 이무 등을 부르사 삼부(의정부·사평부·승추부)의 문무제신으로 더불어 한양 천도의 가부를 토의케 하였다. 이때도 제신의 의견은 구구불일하여, 혹은 ‘당재구도(개경), 혹은 ‘당환신도(한양), 혹은 ‘이도모악’이라 하는 등, 3파의 분열을 보게되었는데, 삼부가 드디어 <cite no="35">以在舊都爲可 還新都爲不便</cite>이란 가결의를 상주한 것을 보면 환도 반대의 의견이 다대수를 점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면 태종께서는 이 삼부의 주의(奏議)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와 암시를 보이셨느냐 하면, 실록 동년 동월 임진(11일)조에 <cite no="36">以在舊都爲可 還新都爲不便</cite> <cite no="37">上以新都太上王創建之地․舊都人心所安 意未決 見三府之議 心不便 問近臣曰 成王在鎬京 廟在豊乎 在洛乎 皆不能對 又召金瞻問之 亦不能對 上曰 周公所洛邑而祭文王騎牛一 武王騂牛一 則宗廟必在洛矣 金科曰 成王居鎬 有大事則至豊宗廟必在豊矣 末能決之 上意以爲 若成王居鎬 宗廟在洛邑 則今予在舊都而宗廟在新都 亦宜</cite>라고 쓰여있다. 이에 의하면 이때 태종의 입장은 대단 곤란하셨으니 첫째 신도 한양은 태상왕의 창건하신 곳으로 종묘가 그곳에 있고, 또(위에 말한 바와 같이) 태상왕이 왕에게 환도의 뜻으로써 유하신 일까지 있는 터이라 그 뜻에 거스르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둘째 구도 개성은 인민의 안심안업 회토중천의 땅이라 민의에 반하여 그곳을 갑자기 떠나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로 여기었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왕은 문무제신의 의견을 물었던바, 그 강론은 위와 같이 천도를 반대하는 파가 많아 심중에 결연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또 다시 이를 고사에 비추기 위하여 주의 성왕이 호경에 거하였을 때에 종묘가 낙에 있었는지 풍에 있었는지?를 두세 문신에게 물으시었던바, 신통한 대답이 없거늘 태종은 가라사대 주공이 낙읍을 이루고 문왕, 무왕에게 기우성우(騎牛騂牛)를 제한 것을 보면 종묘가 낙읍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매, 김과는 가로대 성왕이 호에 거하여 대사가 있으면 풍에 갔었으니 종묘가 반드시 풍에 있었으리라고 하여, 이 문제도 능히 결정치 못하였으나, 태종의 의사는 주의 종묘가 과연 낙읍에 있었다고 하면 그 예에 따라 신도 한양에 종묘를 그대로 두고 송경에 잉도하여도 조흘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목차3해독문13번=이와 같이 천도 문제는 이번에도 역시 미결한 채로 보류되고 말았거니와, 태종실록 3년 정월조에 『臺諫請移宗廟於松都 上曰此事非父王之意 當與議政府議而定』이라 하고, 또 익2월조에 『三府議定都松京 營宮闕于乾德殿古基 允之』라고 한 것을 보면, 위의 천도 논의가 결렬된 지 6개월에 대간으로부터는 종묘를 송도에 이안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그 익월에 삼부에서는 송경에 정도하여 건덕전 옛 터에 궁궐을 조영하기를 논의하여 윤허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르러 한양 천도 문제는 더욱 더욱 좌초의 운을 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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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3번=이와 같이 천도 문제는 이번에도 역시 미결한 채로 보류되고 말았거니와, 태종실록 3년 정월조에 <cite no="38">臺諫請移宗廟於松都 上曰此事非父王之意 當與議政府議而定</cite>이라 하고, 또 익2월조에 <cite no="39">三府議定都松京 營宮闕于乾德殿古基 允之</cite>라고 한 것을 보면, 위의 천도 논의가 결렬된 지 6개월에 대간으로부터는 종묘를 송도에 이안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그 익월에 삼부에서는 송경에 정도하여 건덕전 옛 터에 궁궐을 조영하기를 논의하여 윤허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르러 한양 천도 문제는 더욱 더욱 좌초의 운을 당하게 되었다.
 
|목차3해독문14번=(D), 송한양경제  및  한양천도의 교
 
|목차3해독문14번=(D), 송한양경제  및  한양천도의 교
|목차3해독문15번=위의 대간의 제의인 종묘이안론은 당시 일반의 여론을 대표한 것으로서 이는 무엇보다도 송경 정도의 전제로서의 큰 의의가 있는 것이어니와 이것이 윤허되지 못한 한에는 송경의 정도는 영구성과 확실성을 가졌다고 할 수 없고 따라서 한양 천도 문제는 전혀 절망 상태에 있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태종은 항상 태상왕의 뜻도 중히 여기시지만, 일반의 여론을 크게 경청하시는 터이므로 종묘 이안 문제에 대하여서도 이를 정중히 토의하기 위하여 4년 7월 28일에 다음과 같은 교지를 의정부에 내리시었다.<blockquote no="25">往者移御此京 非爲永遷 乃避方耳 故宗廟社稷乃在漢京 然猶豫未定于玆六年 近者天變地怪屢彰警告 豈非以宗廟社稷遠在漢陽 都邑未定 人心未寧而然耶 久居于此 人皆懷土安業 難於遷徙 移安宗廟社稷于此都何如 明日議以聞(太宗實錄 卷四)</blockquote>이에 의하면 당시 개경의 신민들이 회토안업으로 얼마나 천도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던 거와 또 이로 인하여 천도 논의가 늘 결말을 보지도 못하고 내려왔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하여 위의 교지는 신민이 정말 천도를 좋아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종묘사직을 개경으로 이안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었다. 의정부는 위 교에 의하여 종친제군과 삼부기로를 회합하고<br/>1, 한경에 도읍을 정함이 가하냐<br/>2, 그렇지 않으면 한경의 종묘를 송경으로 옮기는 것이 가하냐<br/>의 두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제대신은 모두 둘째를 가하다 하여, 송경에 정도하여 종묘를 옮겨옴이 좋다고 주장하였으나 오직 찬성사 남재만은 이에 이의하여 『종묘를 이안하는 것은 자못 중대한 일인즉 널리 경사를 고사하여 고법례에 대질한 후에 가히 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원로요 의장인 좌정승 조준은 남재의 설을 취하여 곧 고전 중의 사례를 조사케 하여 드디어 성주의 양경제를 안득하였다. 그리하여 준은 절충적으로 『한경은 태상왕의 창건하신 바요 송경은 인민안업의 땅이라 공히 폐할 수 없은즉 송경에도 별도로 종묘를 세워, 두 곳 공히 4시의 제사를 행하여 저 주나라의 호경낙읍의 제를 모방함이 가하다』고 결의하여 써 태종께 상주하였다. 그런즉 수부는 의연히 송경에 정하자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태종께서는 일을 더 신중히 고려하시려고 할 뿐 아니라 항상 태상왕의 뜻을 중히 여기사 한양에 유의치 아니하심이 아니므로, 수일 후 또 삼부의 기로를 자문에 모으고 위의 의제를 재차 토의케 하였다. 그러나 토의의 결과는 전날과 마찬가지어서 『한경但有종묘而已 송경將爲子孫萬世之地』라고 하였다. 태종께서도 이제는 더 의론의 여지가 없다고 단념하시었는지 단연 양경의 제를 취하여 의정부에 하교하여<blockquote no="26">漢京 太祖所創之地 且宗廟所在 或往或來 無廢兩都 自今無更有議</blockquote>라고 하시었다. 단 송경에 종묘를 별립하자는 조준 등의 제의는 불윤된 모양이다. 그리하여 9월에는 세자가 대신 한경에 가서 종묘에 배알한 일까지 있었다. 이는 모두 태상왕의 창건한 바인 한경을 될수록 무의미적 존재에서 구출하려는 노력의 표시임은 사실이나, 그러나 정치 경제 기타 문화의 모든 중심기관이 실제 송경에 있어 운전되는이상, 소위 양경의 제는 형식적 관념적 존재에 불과한 것으로서, 한경은 의연히 시위(尸位)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런즉 이것이 한양 환도를 절망하시는 태상왕의 뜻과 어그러짐은 물론이요, 부작자술의 도를 지키려는 태종의 진의도 아니었다. 민의에 순종하자면 태상왕의 뜻을 저버리게 되고 반대로 태상왕의 뜻을 체(體)하자면 민의에 거스르게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서신 태종의 고통은 실로 상상함에 족할 것이다. 위의 양경제는 이 양 난점을 다소 절충 완화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실상은 민의에 순종한 것이요 태상왕의 본의를 체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태종의 위의 성언 끝에 『自今無更有議』라고까지 하신 말씀은 과연 얼마만치의 확보성을 가진 것인지 스스로 의문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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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5번=위의 대간의 제의인 종묘이안론은 당시 일반의 여론을 대표한 것으로서 이는 무엇보다도 송경 정도의 전제로서의 큰 의의가 있는 것이어니와 이것이 윤허되지 못한 한에는 송경의 정도는 영구성과 확실성을 가졌다고 할 수 없고 따라서 한양 천도 문제는 전혀 절망 상태에 있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태종은 항상 태상왕의 뜻도 중히 여기시지만, 일반의 여론을 크게 경청하시는 터이므로 종묘 이안 문제에 대하여서도 이를 정중히 토의하기 위하여 4년 7월 28일에 다음과 같은 교지를 의정부에 내리시었다.<blockquote no="25">往者移御此京 非爲永遷 乃避方耳 故宗廟社稷乃在漢京 然猶豫未定于玆六年 近者天變地怪屢彰警告 豈非以宗廟社稷遠在漢陽 都邑未定 人心未寧而然耶 久居于此 人皆懷土安業 難於遷徙 移安宗廟社稷于此都何如 明日議以聞(太宗實錄 卷四)</blockquote>이에 의하면 당시 개경의 신민들이 회토안업으로 얼마나 천도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던 거와 또 이로 인하여 천도 논의가 늘 결말을 보지도 못하고 내려왔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하여 위의 교지는 신민이 정말 천도를 좋아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종묘사직을 개경으로 이안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었다. 의정부는 위 교에 의하여 종친제군과 삼부기로를 회합하고<br/>1, 한경에 도읍을 정함이 가하냐<br/>2, 그렇지 않으면 한경의 종묘를 송경으로 옮기는 것이 가하냐<br/>의 두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제대신은 모두 둘째를 가하다 하여, 송경에 정도하여 종묘를 옮겨옴이 좋다고 주장하였으나 오직 찬성사 남재만은 이에 이의하여 “종묘를 이안하는 것은 자못 중대한 일인즉 널리 경사를 고사하여 고법례에 대질한 후에 가히 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원로요 의장인 좌정승 조준은 남재의 설을 취하여 곧 고전 중의 사례를 조사케 하여 드디어 성주의 양경제를 안득하였다. 그리하여 준은 절충적으로 “한경은 태상왕의 창건하신 바요 송경은 인민안업의 땅이라 공히 폐할 수 없은즉 송경에도 별도로 종묘를 세워, 두 곳 공히 4시의 제사를 행하여 저 주나라의 호경낙읍의 제를 모방함이 가하다”고 결의하여 써 태종께 상주하였다. 그런즉 수부는 의연히 송경에 정하자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태종께서는 일을 더 신중히 고려하시려고 할 뿐 아니라 항상 태상왕의 뜻을 중히 여기사 한양에 유의치 아니하심이 아니므로, 수일 후 또 삼부의 기로를 자문에 모으고 위의 의제를 재차 토의케 하였다. 그러나 토의의 결과는 전날과 마찬가지어서 <cite no="40">漢京但有宗廟而已 松京將爲子孫萬世之地</cite>라고 하였다. 태종께서도 이제는 더 의론의 여지가 없다고 단념하시었는지 단연 양경의 제를 취하여 의정부에 하교하여<blockquote no="26">漢京 太祖所創之地 且宗廟所在 或往或來 無廢兩都 自今無更有議</blockquote>라고 하시었다. 단 송경에 종묘를 별립하자는 조준 등의 제의는 불윤된 모양이다. 그리하여 9월에는 세자가 대신 한경에 가서 종묘에 배알한 일까지 있었다. 이는 모두 태상왕의 창건한 바인 한경을 될수록 무의미적 존재에서 구출하려는 노력의 표시임은 사실이나, 그러나 정치 경제 기타 문화의 모든 중심기관이 실제 송경에 있어 운전되는이상, 소위 양경의 제는 형식적 관념적 존재에 불과한 것으로서, 한경은 의연히 시위(尸位)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런즉 이것이 한양 환도를 절망하시는 태상왕의 뜻과 어그러짐은 물론이요, 부작자술의 도를 지키려는 태종의 진의도 아니었다. 민의에 순종하자면 태상왕의 뜻을 저버리게 되고 반대로 태상왕의 뜻을 체(體)하자면 민의에 거스르게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서신 태종의 고통은 실로 상상함에 족할 것이다. 위의 양경제는 이 양 난점을 다소 절충 완화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실상은 민의에 순종한 것이요 태상왕의 본의를 체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태종의 위의 성언 끝에 <cite no="40">自今無更有議</cite>라고까지 하신 말씀은 과연 얼마만치의 확보성을 가진 것인지 스스로 의문에 있는 것이다.
|목차3해독문16번=양경제의 결의가 있은 지 불과 두 달에, 즉 동4년 9월에 태상왕이 태종에게 전지하여 왈 『始予遷都漢陽 遷徙之煩 予豈不知 然松都王氏舊都 不可仍居也 今王復都于此 非勤循始祖之意』라 하여 도읍을 송경에 정하는 것이 불가함을 유하시매, 왕은 곧 의정부에 지를 내리어 『漢城我太上王創建之地 社稷宗廟在焉 久曠不居 非繼志之孝 明年冬予當徙居 宜令修茸宮室』이라 하여 명년 겨울에 한경으로 천도할 결심을 보이고 동시에 새로 한경에 이궁을 일으키기 위하여 이궁조성도감 및 제조를 두시더니, 성석린, 이무 등의 『漢京父王所都 亦有宮闕在 雖還都 何必更作離宮』이라는 계청에 의하여 이궁 조성을 궁궐(본궁)수보로 변하게 하였다는 사실이 또한 실록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태조께서 얼마나 송경을 싫어하시고 한경 환도를 간절히 바라셨든 것과, 또 태종께서도 부왕의 뜻을 계술하시려고 이번에는 단연 민의에 거슬러서라도 한경에 천도하시려는 결심과 준비를 보이신 것이 분명하거니와, 우리는 이때의 정치가 너무도 조변석개적임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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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6번=양경제의 결의가 있은 지 불과 두 달에, 즉 동4년 9월에 태상왕이 태종에게 전지하여 왈 <cite no="41">始予遷都漢陽 遷徙之煩 予豈不知 然松都王氏舊都 不可仍居也 今王復都于此 非勤循始祖之意</cite>라 하여 도읍을 송경에 정하는 것이 불가함을 유하시매, 왕은 곧 의정부에 지를 내리어 <cite no="42">漢城我太上王創建之地 社稷宗廟在焉 久曠不居 非繼志之孝 明年冬予當徙居 宜令修茸宮室</cite>이라 하여 명년 겨울에 한경으로 천도할 결심을 보이고 동시에 새로 한경에 이궁을 일으키기 위하여 이궁조성도감 및 제조를 두시더니, 성석린, 이무 등의 <cite no="43">漢京父王所都 亦有宮闕在 雖還都 何必更作離宮</cite>이라는 계청에 의하여 이궁 조성을 궁궐(본궁)수보로 변하게 하였다는 사실이 또한 실록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태조께서 얼마나 송경을 싫어하시고 한경 환도를 간절히 바라셨든 것과, 또 태종께서도 부왕의 뜻을 계술하시려고 이번에는 단연 민의에 거슬러서라도 한경에 천도하시려는 결심과 준비를 보이신 것이 분명하거니와, 우리는 이때의 정치가 너무도 조변석개적임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목차3해독문17번=그러나 그때의 소위 천도 이어 조궁 등 문제는 고려조에서와 같이 대개는 실제생활상의 절실한 사정과 필요로보다도 어떠한 사상 관념의 유희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항상 이리했다 저리했다 하는 변동성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면에 관한 정치의 조변석개는(고려조로부터) 당시에는 도리어 예사로 알아 그다지 괴이하게 여기던 것이 아니였다.
 
|목차3해독문17번=그러나 그때의 소위 천도 이어 조궁 등 문제는 고려조에서와 같이 대개는 실제생활상의 절실한 사정과 필요로보다도 어떠한 사상 관념의 유희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항상 이리했다 저리했다 하는 변동성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면에 관한 정치의 조변석개는(고려조로부터) 당시에는 도리어 예사로 알아 그다지 괴이하게 여기던 것이 아니였다.
 
|목차3해독문18번=(E) 하륜의 주청과 모악상택
 
|목차3해독문18번=(E) 하륜의 주청과 모악상택
|목차3해독문19번=이와 같이 한양 천도의 무거운 결심과 준비를 보이시는 이때에 또 진산부원군 하륜에 의하여 모악천도론이 일어났었다. 태종실록 4년 9월조에<blockquote no="27">丁巳(十九日)晋山府院君河崙上書 請移都漢陽母岳 初崙以地理讖書移都母岳 至是復請</blockquote>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니, 하륜은 앞서 태조시로부터 모악설을 주장하던 이므로 어디까지든지 연래의 지론을 실현하려고 하여 이번에 또 서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륜의 이 제창은 당시 송경에 음려의 재가 있음과 태조 태종의 한경 천도의 유교(諭敎)가 있음에도 기인한 바이지만 무엇보다도 고려조로부터 유행하여오는 지리도참서에 의하여 모악의 땅을 신비시하고 중요시하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태종께서는 원래 지리도참의 설을 즐겨하시지는 아니하여 처음에 금지령을 내리시기까지 하였지만, 관념상 지리의 설을 전혀 불신하시는 편은 아니었으며, 또 하륜의 모악설이 누차 주장하여오는 만치 거기에 어떠한 이유와 근거가 있나 하는 호기심을 가지시게도 되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마침내 하륜의 설에 움직이신 바가 되어 태조시 동양으로 모악일대를 친히 상택하시게 되었다. 여기서 더욱 우리는 그때의 천도론이 지리도참 등 관념의 유희로 움직여짐을 볼 수 있다. 10월 2일에 태종은 하륜 조준 이하 제신을 데리시고 개경을 출발하여 4일에 목적지에 도달하시였다. 모악은 지금 경성 서대문 밖 연희·신촌 일대의 후산임은 앞서도 말한 바이다. 태종께서 친히 모악 중봉에 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백기를 한강변에 세우게 하고 사방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기를 『此合都邑之地 晋山府院君(河崙)之所言也 白旗之北 可以邑居』라고 하였다. 하산하여 재상, 지관 등을 집합하여 명당을 구하신 후, 특히 지관 윤신달 등에게 한양 신도와 이 모악과의 지리상 우열을 물으시었다. 이에 대하여 신달은 왈<blockquote no="28">以地理論之 漢陽前後石山險而明堂水絶 不可爲都 此地以讖書考之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此言旣不虛矣 其書其可信也 “李氏出則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 今母岳北有大路 則此地正合其讖 又曰 “眼前三江挹如滿月” 此地三江在前 亦合讖書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blockquote>라고 하여, 한양 신도는 지리상 불가함에 대하여 모악은 서에 일일이 부합하는 우월의 땅이라고 명언하였다. 그 소위 「참서」는 서명을 들지 아니하였지만 고려시대(특히 말기)로부터 유행하여오는 비기의 일종임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중에 『왕씨 5百年 후에는 이씨가 出한다』, 『이씨가 出하면 삼각산 남에 도읍을 作한다』 하는 것은 마치 후세의 정감록 중에 이씨가 망한 후 정씨가 出하여 계룡산에 도읍을 作한다는 의미의 참설과 서로 유사하며, 또 거기 『三角山南』이니 『須防北大路』니 『眼前三江』이니 하는 것은 다 신달의 설과 같이 모악의 땅을(중심·標準으로 삼아) 의미한 것이 분명하니, 소위 북대로는 지금 서대문 밖 의주통에서 모악재 고개를 지나 홍제원으로 통하는 대로를 가르친 것이고, 삼강은 한강의 율도, 여의도의 사주로 된 3파의 물줄기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윤신달의 모악찬성설에 대하여 우리이 하나의 의아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신달의 태조시에 있어서의 언설과 전후 정반대임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소이이다. 그림 환언하면 태조시에는 그는 이미 술한 바와 같이 모악이 지리상 불가하다는 설과 한양이 개경에 다음가는 길지라는 설을 고집하더니, 지금 와서는 그와 정반대의 의견을 진술하니, 대체 무슨 이유인가. 태조시에도 그들을 이끌고 모악을 친상하여 그들의 반대로 마침내 한양에 건도하였음에 불구하고 지금 그 주언 끝에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라고 한 것은 이 무슨 의미의 말인가. 우리은 더욱더욱 그의 언설에 요령을 얻을 수 없다. 그가 전후 몇 년간(약 10년간) 정신(기억) 및 지식에 있어 변동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전후부동의 설은 어떠한 수단—즉 매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만일 그러한 공리(공리)적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실로 기군강상(欺君岡上)의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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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9번=이와 같이 한양 천도의 무거운 결심과 준비를 보이시는 이때에 또 진산부원군 하륜에 의하여 모악천도론이 일어났었다. 태종실록 4년 9월조에<blockquote no="27">丁巳(十九日)晋山府院君河崙上書 請移都漢陽母岳 初崙以地理讖書移都母岳 至是復請</blockquote>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니, 하륜은 앞서 태조시로부터 모악설을 주장하던 이므로 어디까지든지 연래의 지론을 실현하려고 하여 이번에 또 서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륜의 이 제창은 당시 송경에 음려의 재가 있음과 태조 태종의 한경 천도의 유교(諭敎)가 있음에도 기인한 바이지만 무엇보다도 고려조로부터 유행하여오는 지리도참서에 의하여 모악의 땅을 신비시하고 중요시하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태종께서는 원래 지리도참의 설을 즐겨하시지는 아니하여 처음에 금지령을 내리시기까지 하였지만, 관념상 지리의 설을 전혀 불신하시는 편은 아니었으며, 또 하륜의 모악설이 누차 주장하여오는 만치 거기에 어떠한 이유와 근거가 있나 하는 호기심을 가지시게도 되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마침내 하륜의 설에 움직이신 바가 되어 태조시 동양으로 모악일대를 친히 상택하시게 되었다. 여기서 더욱 우리는 그때의 천도론이 지리도참 등 관념의 유희로 움직여짐을 볼 수 있다. 10월 2일에 태종은 하륜 조준 이하 제신을 데리시고 개경을 출발하여 4일에 목적지에 도달하시였다. 모악은 지금 경성 서대문 밖 연희·신촌 일대의 후산임은 앞서도 말한 바이다. 태종께서 친히 모악 중봉에 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백기를 한강변에 세우게 하고 사방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기를 <cite no="44">此合都邑之地 晋山府院君(河崙)之所言也 白旗之北 可以邑居</cite>라고 하였다. 하산하여 재상, 지관 등을 집합하여 명당을 구하신 후, 특히 지관 윤신달 등에게 한양 신도와 이 모악과의 지리상 우열을 물으시었다. 이에 대하여 신달은 왈<blockquote no="28">以地理論之 漢陽前後石山險而明堂水絶 不可爲都 此地以讖書考之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此言旣不虛矣 其書其可信也 “李氏出則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 今母岳北有大路 則此地正合其讖 又曰 “眼前三江挹如滿月” 此地三江在前 亦合讖書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blockquote>라고 하여, 한양 신도는 지리상 불가함에 대하여 모악은 서에 일일이 부합하는 우월의 땅이라고 명언하였다. 그 소위 ‘참서’는 서명을 들지 아니하였지만 고려시대(특히 말기)로부터 유행하여오는 비기의 일종임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중에 “왕씨 500년 후에는 이씨가 나온다”, “이씨가 나오면 삼각산 남에 도읍을 짓는다” 하는 것은 마치 후세의 정감록 중에 이씨가 망한 후 정씨가 나와 계룡산에 도읍을 짓는다는 의미의 참설과 서로 유사하며, 또 거기 ‘三角山南’이니 ‘須防北大路’니 ‘眼前三江’이니 하는 것은 다 신달의 설과 같이 모악의 땅을(중심·標準으로 삼아) 의미한 것이 분명하니, 소위 북대로는 지금 서대문 밖 의주통에서 모악재 고개를 지나 홍제원으로 통하는 대로를 가르친 것이고, 삼강은 한강의 율도, 여의도의 사주로 된 3파의 물줄기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윤신달의 모악찬성설에 대하여 우리이 하나의 의아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신달의 태조시에 있어서의 언설과 전후 정반대임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소이이다.
|목차3해독문20번=그런데 이때 신달의 동료로서 태조시에 신달과 의견을 같이하였던 유한우는 한양에 대하여는 역시 『前後石山嶮而明堂無水 不可爲都 地理書曰 流水不長 人必絶 蓋言不可也』라 하고, 모악에 대하여는 『此地亦未正合規局』이라 하여, 신도와 모악이 공히 풍수지리상의 결함이 있음을 논하였고, 또 그 동료 이양달은 『漢陽雖曰明堂無水 自廣通橋(今大廣橋)以上有水流焉 前面有水 四面回抱 稍可爲都 此地則未合規局 然欲都之 則此非明堂 下有明堂』이라 하여, 한양은 과히 불가함이 없고 모악은 규국에 부합하지 아니하나 정녕 이곳에 정도하려면 명당은 더 아래 쪽에 있다고 하였다. 같은 서운관원 사이에도 이렇게 이론이 각출하여 유(한우)와 윤(신달)은 한양의 지리가 불가하다고 함에 대하여 이(양달)는 그다지 불가함이 없다 하고, 또 윤은 모악이 참서에 응하여 좋다고 함에 대하여 유와 이는 전과 같이 그 지리의 불가함을 주창하였는바, 단 이만은 이번에 하유명당의 조건을 첨부하였다. 이상 3인의 설은 확실히 전후에 있어 다소의 이동(異同)을 낳았다. 한양의 지리가 불가할 것 같으면 그들—특히 유, 윤 2인은 태조시에 어찌하여 이의를 말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태조로 하여금 한양건도를 실현하시도록 방조 혹은 묵과하였던가 하는 의아가 없을 수 없다. 이때 태종께서도 이러한 의심을 품으사 『予觀地理書 曰先看水 後看山 若不用地理書則已 用則明堂無水之地 不可爲都明矣 汝等皆知地理 初從太上王建都邑 何不言此故乎』라고 책질하시매, 윤신달은 『臣於其時 適遭親喪 未能扈從』이라 하고, 유한우는 『臣等非不言 但不得專耳』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윤, 유 2인의 답변이 과연 신용할 만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또한 의심치 아니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윤신달은 기술한 바와 같이 태조의 한양 상택 당시에 거가를 수종하여 태조의 자문에 응대하였던 사실이 기록에 명시되어 있고, 유한우도 그때 모악에서 봉답 중에 분명히 (최융·윤신달과 한가지) 『一國之內 扶蘇(松岳)明堂爲上 南京(漢陽)次之』라고 하였으므로써다. 이것이 무슨 기록의 착오거나 혹은 그들의 앞 일에 대한 기억의 착오라면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은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한 기군망상이다. 태종께서는 윤, 유 2인에 대하여 추궁치 아니하시고, 이양달에 대하여 역시 불유쾌한 어조로 『汝於建都之時 從太上王而行 豈不知明堂水 絶之地不可建都也 乃何建都於漢陽 大興土木之役 以欺父王乎 父王在新都 不豫 幾殆而復 存沒則關乎大命矣 厥後變故屢興 無一好事 乃還松都 至今國人咎予棄父王新都』라고 하였다. 양달은 이에 대하여 『明堂雖曰無水 前面始流 况其時盡言不諱 但非臣所專耳』라고 변해(辯解)하매 태종께서는 더욱 노하사 『汝在我前 强言如此 豈於他處自服』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당시 서운관원의 주언 중에는 확실히 종종의 둔사가 함재하였음을 더욱 간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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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0번=[[파일:이병도_이조건도-4.png|섬네일|가운데|450px]]
|목차3해독문21번=태종은 양달의 『下有明堂』설에 의하여 상명당에서 다시 일리를 내려가 명당을 구할새, 모악설의 지론인 하륜은 이에 대하여 『상명당은 마치 송도의 강안전과 같고 하명당은 송도의 수창궁과 같다』고 비교하여 상하명당이 다 송도의 그것과 방불함을 진언하였다. 이때의 소위 상명당 하명당은 모악의 어느 地點을 가르쳐 이름인지 자세치 못하나, 아마 상명당은 연희궁 터(연희궁은 세종 3년 신축에 (상왕)태종께서 創建하신 一이궁이니, 세종실록地理志에 「晉山府院君河崙嘗以此地爲母岳明堂可建都邑·歲辛丑太宗思其言爲營離宮」이라고 보인다) 하명당은 지금 수경원(일운 선희묘 장조 사친 영빈 이씨묘)국 내인 듯하다. 그러나 이 모악명당은 태조시로부터 본래 문제가 많고 말성이 있던 곳이요, 또 이때에도 하륜 윤신달 이랑 등 수 사람의 찬성자를 제한 이외에는 대개 불가하다는 의견을 진술하였지만, 지금 실지에 있어 보더라도 모악명당은 좌우의 폭이 좀 협애할 뿐만 아니라 전면 한강 연안의 거리도 단근하여 한두 궁이나 소도시를 조영한다면 몰라도 일국의 수부란 대도시를 건설함에는 조금 부적당한 감이 있다. 물론 그것이라도 근대도시 격으로 한강을 중간에 놓고 그 남북의 땅을 죄다 취한다면 지금 경성보다도 더 훌륭한 처지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에는 수도 수비의 군사적 필요로 성곽을 쌓는 때라 그와 같이 광범위에 걸치지 못할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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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1번=환언하면 태조시에는 그는 이미 술한 바와 같이 모악이 지리상 불가하다는 설과 한양이 개경에 다음가는 길지라는 설을 고집하더니, 지금 와서는 그와 정반대의 의견을 진술하니, 대체 무슨 이유인가. 태조시에도 그들을 이끌고 모악을 친상하여 그들의 반대로 마침내 한양에 건도하였음에 불구하고 지금 그 주언 끝에 <cite no="45">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cite>라고 한 것은 이 무슨 의미의 말인가. 우리은 더욱더욱 그의 언설에 요령을 얻을 수 없다. 그가 전후 몇 년간(약 10년간) 정신(기억) 및 지식에 있어 변동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전후부동의 설은 어떠한 수단—즉 매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만일 그러한 공리(공리)적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실로 기군강상(欺君岡上)의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목차3해독문22번=(F), 한양 정도와 창덕궁의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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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2번=그런데 이때 신달의 동료로서 태조시에 신달과 의견을 같이하였던 유한우는 한양에 대하여는 역시 <cite no="46">前後石山嶮而明堂無水 不可爲都 地理書曰 流水不長 人必絶 蓋言不可也</cite>라 하고, 모악에 대하여는 <cite no="47">此地亦未正合規局</cite>이라 하여, 신도와 모악이 공히 풍수지리상의 결함이 있음을 논하였고, 또 그 동료 이양달은 <cite no="48">漢陽雖曰明堂無水 自廣通橋(今大廣橋)以上有水流焉 前面有水 四面回抱 稍可爲都 此地則未合規局 然欲都之 則此非明堂 下有明堂</cite>이라 하여, 한양은 과히 불가함이 없고 모악은 규국에 부합하지 아니하나 정녕 이곳에 정도하려면 명당은 더 아래 쪽에 있다고 하였다. 같은 서운관원 사이에도 이렇게 이론이 각출하여 유(한우)와 윤(신달)은 한양의 지리가 불가하다고 함에 대하여 이(양달)는 그다지 불가함이 없다 하고, 또 윤은 모악이 참서에 응하여 좋다고 함에 대하여 유와 이는 전과 같이 그 지리의 불가함을 주창하였는바, 단 이만은 이번에 하유명당의 조건을 첨부하였다. 이상 3인의 설은 확실히 전후에 있어 다소의 이동(異同)을 낳았다. 한양의 지리가 불가할 것 같으면 그들—특히 유, 윤 2인은 태조시에 어찌하여 이의를 말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태조로 하여금 한양건도를 실현하시도록 방조 혹은 묵과하였던가 하는 의아가 없을 수 없다. 이때 태종께서도 이러한 의심을 품으사 <cite no="49">予觀地理書 曰先看水 後看山 若不用地理書則已 用則明堂無水之地 不可爲都明矣 汝等皆知地理 初從太上王建都邑 何不言此故乎</cite>라고 책질하시매, 윤신달은 <cite no="50">臣於其時 適遭親喪 未能扈從</cite>이라 하고, 유한우는 <cite no="51">臣等非不言 但不得專耳</cite>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윤, 유 2인의 답변이 과연 신용할 만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또한 의심치 아니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윤신달은 기술한 바와 같이 태조의 한양 상택 당시에 거가를 수종하여 태조의 자문에 응대하였던 사실이 기록에 명시되어 있고, 유한우도 그때 모악에서 봉답 중에 분명히 (최융·윤신달과 한가지) <cite no="52">一國之內 扶蘇(松岳)明堂爲上 南京(漢陽)次之</cite>라고 하였으므로써다. 이것이 무슨 기록의 착오거나 혹은 그들의 앞 일에 대한 기억의 착오라면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은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한 기군망상이다. 태종께서는 윤, 유 2인에 대하여 추궁치 아니하시고, 이양달에 대하여 역시 불유쾌한 어조로 <cite no="53">汝於建都之時 從太上王而行 豈不知明堂水 絶之地不可建都也 乃何建都於漢陽 大興土木之役 以欺父王乎 父王在新都 不豫 幾殆而復 存沒則關乎大命矣 厥後變故屢興 無一好事 乃還松都 至今國人咎予棄父王新都</cite>라고 하였다. 양달은 이에 대하여 <cite no="54">明堂雖曰無水 前面始流 况其時盡言不諱 但非臣所專耳</cite>라고 변해(辯解)하매 태종께서는 더욱 노하사 <cite no="55">汝在我前 强言如此 豈於他處自服</cite>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당시 서운관원의 주언 중에는 확실히 종종의 둔사가 함재하였음을 더욱 간파할 수 있다.
|목차3해독문23번=태종의 모악 상택은 이리하여 끝을 냈지만, 반대자가 다수를 점하여 태종께서는 심중에 다소 결연한 바가 없지 아니하였던 모양이나, 그러나 일부의 찬성파도 있고 사서에 합하는 점도 있어서 이곳을 전연 단념치는 아니하셨던 모양이다. 송도 한경에 모악 후보지를 가하여 삼자 중 어느 것을 길지로 택할까 함에 대하여 이를 구경적으로 결정하기 위하여 태종은 선조신명에 소하여 그 앞에서 이를 판단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 익익일인 6일 조조에 태종께서 친히 신도 한양의 종묘문 외에 이르사 민중에게 아래의 일언을 고하신 것으로써 알 수 있다.<blockquote no="29">予在松都 屢有水旱災變 下敎求言 自政丞趙浚以下言當還新都者多矣 然新都亦多變故 都邑未定 人心不靜 今入宗廟告以松都·新都·母岳 占其吉凶 從吉定都 定都之後 雖有災變 母有提議</blockquote>태종은 다시 대묘 내에 들어가사 군신으로 더불어 예배 상향하신 후 전조 태조 정도시의 예에 의하여 척전(擲錢)으로써 복서에 대신하여 길흉을 점하시었다. 척전의 판단은 신도가 이길일흉이요 송경, 모악이 공히 이흉일길이었다. 이에 상은 도읍을 한양 신도에 정하기로 결하시고, 그와 동시에 신도 향교동(구 교동 지금 경운동) 동북변의 땅(지금 창덕궁)를 상(相)하여 이궁 창조를 명하신 후 개경으로 환어하시었다. 태상왕은 왕을 보시고 『定都漢陽 孝莫大焉』이라고 하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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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3번=태종은 양달의 ‘하유명당(下有明堂)’설에 의하여 상명당에서 다시 일리를 내려가 명당을 구할새, 모악설의 지론인 하륜은 이에 대하여 “상명당은 마치 송도의 강안전과 같고 하명당은 송도의 수창궁과 같다”라고 비교하여 상하명당이 다 송도의 그것과 방불함을 진언하였다. 이때의 소위 상명당 하명당은 모악의 어느 地點을 가르쳐 이름인지 자세치 못하나, 아마 상명당은 연희궁 터(연희궁은 세종 3년 신축에 (상왕)태종께서 創建하신 한 이궁이니, 세종실록지리지에 <cite no="56">晉山府院君河崙嘗以此地爲母岳明堂可建都邑·歲辛丑太宗思其言爲營離宮</cite>이라고 보인다) 하명당은 지금 수경원(일운 선희묘 장조 사친 영빈 이씨묘)국 내인 듯하다. 그러나 이 모악명당은 태조시로부터 본래 문제가 많고 말성이 있던 곳이요, 또 이때에도 하륜 윤신달 이랑 등 수 사람의 찬성자를 제한 이외에는 대개 불가하다는 의견을 진술하였지만, 지금 실지에 있어 보더라도 모악명당은 좌우의 폭이 좀 협애할 뿐만 아니라 전면 한강 연안의 거리도 단근하여 한두 궁이나 소도시를 조영한다면 몰라도 일국의 수부란 대도시를 건설함에는 조금 부적당한 감이 있다. 물론 그것이라도 근대도시 격으로 한강을 중간에 놓고 그 남북의 땅을 죄다 취한다면 지금 경성보다도 더 훌륭한 처지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에는 수도 수비의 군사적 필요로 성곽을 쌓는 때라 그와 같이 광범위에 걸치지 못할 것은 물론이다.  
|목차3해독문24번=신도에는 훌륭한 본궁(경복궁)이 있음에 불구하고 이와 같이 따로 이궁을 만들 것을 명하신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본궁에 대한 피방의 의미에서 경영되는 것이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복궁을 어소로 삼았던 태조시대에는 인사 및 자연계에 있어 여러 가지 변이가 출현하였으므로 그곳을 피하여 신별궁에 거하시려는 의미와 동기에 불과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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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4번=(F), 한양 정도와 창덕궁의 창건
|목차3해독문25번=태종은 익5년 2월에 또 신도에 행행하여 이궁의 영조를 보시고 주유 약 1개월에 개경에로 환어하시었는데, 이때 천도의 협위를 받은 개경 성내의 민심은 각일각으로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근신 중에도 왕왕 민심에 공명하여 천도를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 이 때문에 왕은 또 한 번 재신의 여론을 비추기 위하여 8월 3일에 의정부에 명하여 한양 천도의 가부(실상은 지속(遲速))를 회의케 하였던바, 의정부의 상주는 『年風飢불가』라 하여 이해의 흉작을 이유로 하여 천도의 불가(실상은 보류)를 주장하였다. 민의를 중히 여기는 정치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님은 아니나, 그로 인하여 기정 방침을 실행치 못하고 늘 고식과 유예에 빠져 종종의 폐단을 낳은는 것은 결코 정치의 이상이 아니다. 태종은 영매의 주로 일컫는 임금이지만 원래 유학 출신으로 유교주의적 규범과 이상에 의하여 진행하려 하는 이만치, 실제에 있어서의 과단은 무인 출신인 태조에 비하여 훨씬 미치지 못하시었다. 천도의 유예미정은 실로 이러한 데 원인함이 많거니와 태종과 같이 민의를 중히 여기시는 임금도 우의 의정부의 상주에는 다소 불쾌를 느끼사, 음양참휘의 설과 전날의 정중한 결의를 방패로 삼아 『陰陽書曰 王氏五百年後 李氏興 遷南京 今李氏之興 果然遷南京 南京之說 不可不信也 且向者相地之時 說者紛紛未定 予乃躬詣宗廟卜旣得吉 離宮已成 遷都之計定矣 將以十月移于漢京 本宮則不御也』라 하시고, 또 그 후 수일에도 재신을 다시 모으고 천도에 대한 굳은 결심과 태도를 보이셨으니, 태종실록 5년 8월조에<blockquote no="30">壬申(九日)還移御敬德宮 (中略) 與兵曹判書南在·刑曹判書李文和·戶曹判書李至·議政府贊成事尹柢·工曹判書韓尙敬 議遷漢京 上曰 我太上王 肇建新邑 此乃李氏不易之定都也 自我上王移幸松都之後 因仍不還 于今七年 違於父作子述之道 寡人之罪也 去秋松都有陰沴之災 故往新都 卜于宗廟 旣得吉 今春又往視其修葺 工已幾畢 往還之計定矣 小民臣室皆曰不可 此安土重遷之意也 尙敬對曰盤庚遷都 利害甚明 然小民臣室猶安土重遷 上曰若今年不遷 明年又不遷 因循不遷 則松都人家日益稠密 漢邑日益凋廢 將如之何 況陰陽家曰松都乃廢君臣之地 人皆曰歲凶不可遷 此包藏凶惡之人也 豊海京畿雖有旱災 有餘各道則不爲歉矣 名言歲凶而排擊遷都之意者 不愛社稷之臣也 南在曰安有包藏凶惡而排擊乎 上曰頃有遷都之議而新都與母岳皆非而此都乃可 此包藏之言也</blockquote>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위 기사 중에도 태종께서 한상경 및 남재에게 答하신 말씀은 가장 심각하고 준열하여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는 동시에 이론의 중출을 막는 데 가장 힘 있는 말씀이었다. 태종의 말씀과 같이 1년 2년 인순고식하여 천도를 단행치 아니하면 송도의 호구는 날로 증가하여지고 한경의 그것은 반대로 날마다 감소하여서 그때에는 천도의 실행이 더욱 곤란할 것은 물론이다. 당시 유행의 음양서에 송도는 군신을 폐하는 곳이라는 말이 있음에 불구하고 종종의 구실을 빌려 천도를 반대하는 것은 흉악한 마음을 포장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실상 음양설을 빌려와 중구의 이론을 막는 방패를 삼으려 함에 불과한 것이나 그 말씀이 얼마나 날카로웠던 것을 상상함에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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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5번=태종의 모악 상택은 이리하여 끝을 냈지만, 반대자가 다수를 점하여 태종께서는 심중에 다소 결연한 바가 없지 아니하였던 모양이나, 그러나 일부의 찬성파도 있고 사서에 합하는 점도 있어서 이곳을 전연 단념치는 아니하셨던 모양이다. 송도 한경에 모악 후보지를 가하여 삼자 중 어느 것을 길지로 택할까 함에 대하여 이를 구경적으로 결정하기 위하여 태종은 선조신명에 소하여 그 앞에서 이를 판단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 익익일인 6일 조조에 태종께서 친히 신도 한양의 종묘문 외에 이르사 민중에게 아래의 일언을 고하신 것으로써 알 수 있다.<blockquote no="29">予在松都 屢有水旱災變 下敎求言 自政丞趙浚以下言當還新都者多矣 然新都亦多變故 都邑未定 人心不靜 今入宗廟告以松都·新都·母岳 占其吉凶 從吉定都 定都之後 雖有災變 母有提議</blockquote>태종은 다시 대묘 내에 들어가사 군신으로 더불어 예배 상향하신 후 전조 태조 정도시의 예에 의하여 척전(擲錢)으로써 복서에 대신하여 길흉을 점하시었다. 척전의 판단은 신도가 이길일흉이요 송경, 모악이 공히 이흉일길이었다. 이에 상은 도읍을 한양 신도에 정하기로 결하시고, 그와 동시에 신도 향교동(구 교동 지금 경운동) 동북변의 땅(지금 창덕궁)를 상(相)하여 이궁 창조를 명하신 후 개경으로 환어하시었다. 태상왕은 왕을 보시고 <cite no="57">定都漢陽 孝莫大焉</cite>이라고 하셨다 한다.
|목차3해독문261번=태종은 후 수일에 태상왕을 뵙고 장차 한경으로 환어할 뜻을 고하시매, 태상왕은 크게 기뻐하사 왈 『陰陽之說 雖不足信 王氏五百年後 李氏得國而都漢京 我家果應其說 夫豈虛哉 且我家其豫有得國之心乎 王之欲遷漢京 實非王心 天使之然也』라고 하시었다. 왕씨 500년 후에 이씨가 나와 한양(남경)에 도읍을 만든다는 참설은 우의 태종의 말씀 가운데에도 보이거니와, 이는 앞서 윤신달의 상언 중에 보이는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李氏出則 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란 참설과 거의 내용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다만 전자는 후자의 『삼각산남』, 『한양』 『남경』으로 해석한 데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후자의 『須防北大路』의 구절로 보면 『삼각산남』은 윤신달의 해석과 같이 모악의 땅이라고 함이 가하니 전자의 설은 즉 한양 주장파의 아전인수적 해석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하했든 태조와 태종께서는 이런 류의 참설을 단지 천도운동의 수단이나 방편으로서 이용하시는 데 그칠 뿐만 아니라 관념상 어느 정도까지 이를 신비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특히 태조께서는 송도지기쇠왕설을 믿으심이 깊어 즉위 초로부터 천도에 급급하셨던 것은 앞서 누차 말한 바이며 태종께서는 역시 전술함과 같이 유학 출신이니만치 원래 이러한 미신을 좋아하지 아니하사 처음에는 도참지리의 서를 금하신 일까지 있지만, 또 전연 이를 불신치도 아니하셨던 것은 왕의 전후 언행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께서 한양 천도를 급히 하려고 하심은 이보다도 첫째 (누술한 바와 같이) 태상왕의 뜻을 계술하려 하심이요 둘째 송한 양경의 호구의 성쇠를 염려하신 까닭임은 더 말할 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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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6번=신도에는 훌륭한 본궁(경복궁)이 있음에 불구하고 이와 같이 따로 이궁을 만들 것을 명하신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본궁에 대한 피방의 의미에서 경영되는 것이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복궁을 어소로 삼았던 태조시대에는 인사 및 자연계에 있어 여러 가지 변이가 출현하였으므로 그곳을 피하여 신별궁에 거하시려는 의미와 동기에 불과함이었다.
|목차3해독문27번=그런데 당시 천도반대운동은 각 계급을 통하여 치열하였던 모양이니 유신으로 유명한 양촌 권근도 그 중의 1인이었다. 권근은 역시 흉년을 이유로 하여 수차 상서로써 천도의 불가함을 논하였는데, 제2차 상소 중에는 『遷都之擧 謀及卿士 謀及庶民 皆曰可然後定焉』이라 하는 유자류의 우활한 논법을 시더하기까지 하였다. 태종께서는 이를 보시고 『告于宗廟 告于太上 大計已定 何可改也』라 하시고, 다시 좌우를 돌아보시며 일러 曰 『今有上書止遷都者 是聽人指揮而爲之也 漢京乃國初所創 子孫所當持守愚民但知移徙之勞而苟安耳 士大夫識理者 亦何心沮之歟』라고 하시었다. 권근의 천도반대소가 태종의 말씀과 같이 과연 남의 지휘를 받아서 한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당시 송경 성내에는 이 천도 문제로 인심이 비상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혹은 남의 지촉이나 충동에 의하여 이의를 제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태종께서는 권근과 같은 사리를 아는 사대부로서 군심이 존한 바를 이해치 못하고 한갓 남의 지촉에 뇌동하여 천도를 반대하는 것으로 인식하시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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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7번=태종은 익5년 2월에 또 신도에 행행하여 이궁의 영조를 보시고 주유 약 1개월에 개경에로 환어하시었는데, 이때 천도의 협위를 받은 개경 성내의 민심은 각일각으로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근신 중에도 왕왕 민심에 공명하여 천도를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 이 때문에 왕은 또 한 번 재신의 여론을 비추기 위하여 8월 3일에 의정부에 명하여 한양 천도의 가부(실상은 지속(遲速))를 회의케 하였던바, 의정부의 상주는 <cite no="58">年風飢不可</cite>라 하여 이해의 흉작을 이유로 하여 천도의 불가(실상은 보류)를 주장하였다. 민의를 중히 여기는 정치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님은 아니나, 그로 인하여 기정 방침을 실행치 못하고 늘 고식과 유예에 빠져 종종의 폐단을 낳은는 것은 결코 정치의 이상이 아니다. 태종은 영매의 주로 일컫는 임금이지만 원래 유학 출신으로 유교주의적 규범과 이상에 의하여 진행하려 하는 이만치, 실제에 있어서의 과단은 무인 출신인 태조에 비하여 훨씬 미치지 못하시었다. 천도의 유예미정은 실로 이러한 데 원인함이 많거니와 태종과 같이 민의를 중히 여기시는 임금도 우의 의정부의 상주에는 다소 불쾌를 느끼사, 음양참휘의 설과 전날의 정중한 결의를 방패로 삼아 <cite no="59">陰陽書曰 王氏五百年後 李氏興 遷南京 今李氏之興 果然遷南京 南京之說 不可不信也 且向者相地之時 說者紛紛未定 予乃躬詣宗廟卜旣得吉 離宮已成 遷都之計定矣 將以十月移于漢京 本宮則不御也</cite>라 하시고, 또 그 후 수일에도 재신을 다시 모으고 천도에 대한 굳은 결심과 태도를 보이셨으니, 태종실록 5년 8월조에<blockquote no="30">壬申(九日)還移御敬德宮 (中略) 與兵曹判書南在·刑曹判書李文和·戶曹判書李至·議政府贊成事尹柢·工曹判書韓尙敬 議遷漢京 上曰 我太上王 肇建新邑 此乃李氏不易之定都也 自我上王移幸松都之後 因仍不還 于今七年 違於父作子述之道 寡人之罪也 去秋松都有陰沴之災 故往新都 卜于宗廟 旣得吉 今春又往視其修葺 工已幾畢 往還之計定矣 小民臣室皆曰不可 此安土重遷之意也 尙敬對曰盤庚遷都 利害甚明 然小民臣室猶安土重遷 上曰若今年不遷 明年又不遷 因循不遷 則松都人家日益稠密 漢邑日益凋廢 將如之何 況陰陽家曰松都乃廢君臣之地 人皆曰歲凶不可遷 此包藏凶惡之人也 豊海京畿雖有旱災 有餘各道則不爲歉矣 名言歲凶而排擊遷都之意者 不愛社稷之臣也 南在曰安有包藏凶惡而排擊乎 上曰頃有遷都之議而新都與母岳皆非而此都乃可 此包藏之言也</blockquote>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위 기사 중에도 태종께서 한상경 및 남재에게 答하신 말씀은 가장 심각하고 준열하여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는 동시에 이론의 중출을 막는 데 가장 힘 있는 말씀이었다. 태종의 말씀과 같이 1년 2년 인순고식하여 천도를 단행치 아니하면 송도의 호구는 날로 증가하여지고 한경의 그것은 반대로 날마다 감소하여서 그때에는 천도의 실행이 더욱 곤란할 것은 물론이다. 당시 유행의 음양서에 송도는 군신을 폐하는 곳이라는 말이 있음에 불구하고 종종의 구실을 빌려 천도를 반대하는 것은 흉악한 마음을 포장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실상 음양설을 빌려와 중구의 이론을 막는 방패를 삼으려 함에 불과한 것이나 그 말씀이 얼마나 날카로웠던 것을 상상함에 족하다.
|목차3해독문28번=태종의 천도에 대한 결심과 과단은 더욱더욱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이해(5년) 9월에는 상왕(정종)이 먼저 한경으로 이어하시고 왕은 재릉(모후 신의황후 한씨릉)에 참배하여 이도를 고하였으며 10월 5일에는 태상왕께 예알하여 역시 환도를 고하시매 태상왕은 특히 치주위환(置酒爲歡)하셨다 한다. 그리하여 태종께서는 10월 8일로써 송경을 출발하사 11일에 한경에 이르시었다. (태상왕은 11월에 환도). 먼저 궁묘에 참배하신 후 연화방(今 연지정) 고령의정부사 조준 제로 어하시니 그것은 이때 이궁의 공역이 아직 완료되지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이궁의 낙성은 19일에 이르러 비로소 고하게 되니 범118칸, 이름을 창덕궁이라고 하였다. (백악 하의 경복궁을 서정궐이라고 하면 응봉 하의 이 궁은 동별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익 20일에 이궁에 어하여 백궁의 하례와 헌수를 받을새 앞서 천도를 반대하던 의정부 찬성사 권근은 화악의 시를, 또 모악 천도를 주장하던 좌정승 하륜은 한강의 시를 각각 제진하여 왕도의 영안과 왕업의 영창을 노래하였다. 오래동안 논의 분분하고 유예미결 중에 있던 천도 문제는 이에 완전히 낙착을 고하여 이후 500년간 길이 이씨 조선의 정치 문화 기타의 중심지으로 일정불변의 근반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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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8번=태종은 후 수일에 태상왕을 뵙고 장차 한경으로 환어할 뜻을 고하시매, 태상왕은 크게 기뻐하사 왈 <cite no="60">陰陽之說 雖不足信 王氏五百年後 李氏得國而都漢京 我家果應其說 夫豈虛哉 且我家其豫有得國之心乎 王之欲遷漢京 實非王心 天使之然也</cite>라고 하시었다. 왕씨 500년 후에 이씨가 나와 한양(남경)에 도읍을 만든다는 참설은 우의 태종의 말씀 가운데에도 보이거니와, 이는 앞서 윤신달의 상언 중에 보이는 <cite no="61">王氏五百年後 李氏出</cite>, <cite no="62">李氏出則 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cite>란 참설과 거의 내용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다만 전자는 후자의 ‘삼각산남’, ‘한양’ ‘남경’으로 해석한 데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후자의 <cite no="63">須防北大路</cite>의 구절로 보면 ‘삼각산남’은 윤신달의 해석과 같이 모악의 땅이라고 함이 가하니 전자의 설은 즉 한양 주장파의 아전인수적 해석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하했든 태조와 태종께서는 이런 류의 참설을 단지 천도운동의 수단이나 방편으로서 이용하시는 데 그칠 뿐만 아니라 관념상 어느 정도까지 이를 신비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특히 태조께서는 송도지기쇠왕설을 믿으심이 깊어 즉위 초로부터 천도에 급급하셨던 것은 앞서 누차 말한 바이며 태종께서는 역시 전술함과 같이 유학 출신이니만치 원래 이러한 미신을 좋아하지 아니하사 처음에는 도참지리의 서를 금하신 일까지 있지만, 또 전연 이를 불신치도 아니하셨던 것은 왕의 전후 언행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께서 한양 천도를 급히 하려고 하심은 이보다도 첫째 (누술한 바와 같이) 태상왕의 뜻을 계술하려 하심이요 둘째 송한 양경의 호구의 성쇠를 염려하신 까닭임은 더 말할 바도 없다.
|목차3해독문29번=4, 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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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9번=그런데 당시 천도반대운동은 각 계급을 통하여 치열하였던 모양이니 유신으로 유명한 양촌 권근도 그 중의 1인이었다. 권근은 역시 흉년을 이유로 하여 수차 상서로써 천도의 불가함을 논하였는데, 제2차 상소 중에는 <cite no="64">遷都之擧 謀及卿士 謀及庶民 皆曰可然後定焉</cite>이라 하는 유자류의 우활한 논법을 시더하기까지 하였다. 태종께서는 이를 보시고 <cite no="65">告于宗廟 告于太上 大計已定 何可改也</cite>라 하시고, 다시 좌우를 돌아보시며 일러 曰 <cite no="66">今有上書止遷都者 是聽人指揮而爲之也 漢京乃國初所創 子孫所當持守愚民但知移徙之勞而苟安耳 士大夫識理者 亦何心沮之歟</cite>라고 하시었다. 권근의 천도반대소가 태종의 말씀과 같이 과연 남의 지휘를 받아서 한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당시 송경 성내에는 이 천도 문제로 인심이 비상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혹은 남의 지촉이나 충동에 의하여 이의를 제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태종께서는 권근과 같은 사리를 아는 사대부로서 군심이 존한 바를 이해치 못하고 한갓 남의 지촉에 뇌동하여 천도를 반대하는 것으로 인식하시었던 모양이다.
|목차3해독문30번=이조 초기—즉 태조·정종 및 태종조—의 건도 혹 천도의 사정 내지 경과는 대게 상술한 바와 같거니와, 요컨대 정종의 개경 이도를 제하고는 태조, 태종 양대의 천도는 여러 가지 문제로 시일을 천연하고 군신의 심신을 씀이 많았으니 풍수지리에 의한 상택의 곤란, 안토중천으로 말미암은 천도 반대론 등은 그 가장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회의를 거듭하고 상택을 시도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바, 태조시에는 한양, 계룡산, 모악 등 3곳의 경쟁적 후보지로 말미암아 심적 물적 힘씀이 컸었고, 태종시에도 모악상택 내지 송도 한양 모악의 3곳 중 어느 것을 택할까 함에 고심을 많이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송도 신민의 안토중천으로 인하여 문제를 유예미결케 함이 컸었다. 그러나 태조는 송도기쇠의 종래 찬설 믿음이 깊고 또 무인 출신이시니만치 과단성에 풍부하였으므로 여간한 반대론은 이를 배제하여 3년만에 드디어 한양전도를 실현하셨고, 태종은 태조의 신도 창건의 지를 중히 여기시면서도 유학 출신이시니만치 과단성과 실행력은 태조에 미치지 못하심이 많아 항상 민의에 순응하고 회의마다 중신의 의론에 끌리시다가 마침내 즉위 56년만에 신도 환어를 결행하시었지만 이것도 실상은 태상왕의 정중한 유지에 의하여 갑자기 과단을 가지시게 된 것이다. 이때 만일 태상왕이 재세치 아니하셨거나 혹은 그러한 동독적 유고가 없었드러면, 태종의 한경 환도는 실현되지 아니하였거나 실현되더라도 더 훨씬 시일의 천연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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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0번=태종의 천도에 대한 결심과 과단은 더욱더욱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이해(5년) 9월에는 상왕(정종)이 먼저 한경으로 이어하시고 왕은 재릉(모후 신의황후 한씨릉)에 참배하여 이도를 고하였으며 10월 5일에는 태상왕께 예알하여 역시 환도를 고하시매 태상왕은 특히 치주위환(置酒爲歡)하셨다 한다. 그리하여 태종께서는 10월 8일로써 송경을 출발하사 11일에 한경에 이르시었다. (태상왕은 11월에 환도). 먼저 궁묘에 참배하신 후 연화방(今 연지정) 고령의정부사 조준 제로 어하시니 그것은 이때 이궁의 공역이 아직 완료되지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이궁의 낙성은 19일에 이르러 비로소 고하게 되니 범118칸, 이름을 창덕궁이라고 하였다. (백악 하의 경복궁을 서정궐이라고 하면 응봉 하의 이 궁은 동별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익 20일에 이궁에 어하여 백궁의 하례와 헌수를 받을새 앞서 천도를 반대하던 의정부 찬성사 권근은 화악의 시를, 또 모악 천도를 주장하던 좌정승 하륜은 한강의 시를 각각 제진하여 왕도의 영안과 왕업의 영창을 노래하였다. 오래동안 논의 분분하고 유예미결 중에 있던 천도 문제는 이에 완전히 낙착을 고하여 이후 500년간 길이 이씨 조선의 정치 문화 기타의 중심지으로 일정불변의 근반을 열게 된 것이다.
|목차3해독문31번=상술한 바로써 보면 이조 초기의 한양 전도는 결코 단순 순조로이 실현되었던 것이 아니라 복잡다단 파란중첩한 가운데에서 결말을 보게 된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한양이 여러 번 천이의 위협을 당하고 또 모악과 같은 유력한 적대적 후보지를 갖이고서도 마침내 후도(候都)의 영(榮)을 입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와 관계로 인함이었던가? 이는 물론 그 특수한 지리성과 역사성에 진 바가 많은 것이니 끝으로 우리은 한양의 지리역사적 특수성에 대하여 일언을 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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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1번=4, 여언
|목차3해독문32번=먼저 그 지리적 특수성을 말하면, 그때는 풍수지리를 중히 여기던 시대이므로, 또한 먼저 그 방면의 지리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양은 북악 즉 백악을 주산으로 삼어 그 좌우지에 의하여 환포된 곳이니, 백악의 우지는 서으로 다라나 인왕산을 일으키고 거기서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 숭례문(남대문)을 거처 다시 남산을 일으키어 안산을 작하면서 광희문 터에 이르러 발을 멈추었으며, 좌지는 동으로 뻗어 휴암과 응봉을 솟치면서 혜화문(동소문)을 지나 낙산에 이르러 무릎을 꿇렸다. 그런즉 백악은 풍수가의 소위 현무요 인왕은 백호, 낙산은 청룡, 남산은 주작이다. 한양은 우지가 길고 좌지가 짧으므로 이를 풍수가의 소위 우선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서로 입해하는 한강과 서로 역(逆)하여 있다. 풍수에는 『逆』을 주요 조건의 하나로 치는 것이니 산수의 역이 없으면 지맥의 환포를 볼 수 없고 수구의 관쇄를 이루지 못하여 지기가 산류된다는 것이다. 한양은 이 점으로 보아 산수의 역을 충분히 얻은 곳이니 수류로 말하더라도 백악 좌우협에서 흐르는 명당수는 시내를 동으로 관류하여 동대문과 광희문(수구문) 사이를 빠져 왕심리(왕십리) 답심리를 지나 뚝섬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한강은 한양의 객수로 북한강 남한강의 2대 줄기가 양평, 용진에서 서로 합치어 삼각산 제곡의 중수를 받아드리면서 한양 일대의 땅을 환포하여 서북으로 서해에 들어가거니와, 삼각산의 모든 산수의 줄기는 또한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취회하여 있다. 모악의 땅은 같은 한강 유역이지만 산수의 환포와 수구의 관쇄가 한양처럼 긴밀치 못한 것이 일대 결점이다. 다시 백악의 내맥을 살펴보면 멀리 장백산에서 기원한 안변의 철령에서 분기되어 그 일지가 남치하여 양주의 기웅인 도봉산을 일으키고 거기서 다시 서남행하여 태청을 뚫는 삼각을 솟치고 남으로 문수보현의 제봉을 작하면서 정맥을 백악으로 뻗게 되었다. 일로써 재래의 학자들은 한양을 동방정기의 융결종회처로 찬미하였으니 팔역지의 저자 이중환은 『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라 하고(8성志 경기道조) 이계 홍양호는 『東方靈淑之氣 噓融結 鍾成萬年之神都』라고(耳溪集 卷十四 報恩寺重修記) 하였거니와, 이런 류의 찬사는 이루 매거하기 겨를이 없다. 풍수전문가로서는 기술한 윤신달 등의 언론과 같이 한양의 제일 결점을 석산의 험한 것과 명당수의 풍부치 못한 것을 치나, 그러나 이만한 결점은 어디서든지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든 한양은 풍수지리의 제일 조건인 『산수취회』의 땅으로 인정치 아니할 수 없고, 이 점에 있어서는 모악을 능가함이 대하고 송도에 미치지 못함이 조금도 없다. 태조시 운관원의 설에는 부소명당(개성)을 국내의 제일 길지, 이 백악명당을 제이 길지로 말하였지만, 구변도란 고려비기에는 목멱을 제일화, 송악을 제이화, 평양을 제삼화로 치던 것이니,(본 학보 제8권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참조) 화(花)란 것은 풍수가의 말로 대길지를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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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2번=이조 초기—즉 태조·정종 및 태종조—의 건도 혹 천도의 사정 내지 경과는 대게 상술한 바와 같거니와, 요컨대 정종의 개경 이도를 제하고는 태조, 태종 양대의 천도는 여러 가지 문제로 시일을 천연하고 군신의 심신을 씀이 많았으니 풍수지리에 의한 상택의 곤란, 안토중천으로 말미암은 천도 반대론 등은 그 가장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회의를 거듭하고 상택을 시도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바, 태조시에는 한양, 계룡산, 모악 등 3곳의 경쟁적 후보지로 말미암아 심적 물적 힘씀이 컸었고, 태종시에도 모악상택 내지 송도 한양 모악의 3곳 중 어느 것을 택할까 함에 고심을 많이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송도 신민의 안토중천으로 인하여 문제를 유예미결케 함이 컸었다. 그러나 태조는 송도기쇠의 종래 찬설 믿음이 깊고 또 무인 출신이시니만치 과단성에 풍부하였으므로 여간한 반대론은 이를 배제하여 3년만에 드디어 한양전도를 실현하셨고, 태종은 태조의 신도 창건의 지를 중히 여기시면서도 유학 출신이시니만치 과단성과 실행력은 태조에 미치지 못하심이 많아 항상 민의에 순응하고 회의마다 중신의 의론에 끌리시다가 마침내 즉위 56년만에 신도 환어를 결행하시었지만 이것도 실상은 태상왕의 정중한 유지에 의하여 갑자기 과단을 가지시게 된 것이다. 이때 만일 태상왕이 재세치 아니하셨거나 혹은 그러한 동독적 유고가 없었드러면, 태종의 한경 환도는 실현되지 아니하였거나 실현되더라도 더 훨씬 시일의 천연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목차3해독문33번=이러한 풍수지리적 고찰을 떠나 실제 인문지리학상으로 이를 고찰하여 보더라도 한양은 소위 산하금대의 요진으로 군사상의 요를 득할 뿐더러 수륙교통의 편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또 그 위치가 반도의 거의 중앙에 있어 도리의 균정을 득하여, 일국의 수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한강의 혜택은 지금도 우리가 일석으로 크게 입고 있지만 옛날에는 특히 운수로 말미암아 그 혜택이 컸으니 각처로부터 폭주(輻湊)하는 물화—무엇보다도 국가경제의 기본인 모든 세와 공물은 대개 이 한강을 통하여 경성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조시대의 성곽이 비교적 소범위로 국한되었기 때문에 경성의 시가발전을 방해한 점이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지리의 허물이 아니라 성곽의 죄, 제도의 죄이다. 만일 경성의 범위를 좀 넓히어서—물론 그때에는 지금처럼 광범위로 취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고려시대의 남경제에 본받아 서지를 모악(안산), 남지를 한강변까지 이르게 하고 내외 중성을 둘렀더라면, 그다지 좁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시가의 발전 국도의 방수도 더 도모할 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옛날 조선 도시의 특색과 필수조건은 난시 소용의 산성의 배경을 갖는 것인데 한양이야말로 천험의 북한을 가짐으로써 일찍부터 이름이 높었다. 백제, 구려, 신라의 삼국은 물론이요 고려시대에도 이를 이용하여 산성을 쌓았으며, 이조에서는 뒤늦게 숙종시에야 비로소 대규모적으로 북한의 내외성을 경영하게 되었지만, 이 산성은 실로 지리적으로 험고하고 역사적으로 구원하던 것이다. 요컨대 한양의 지리는 비단 풍수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상으로나 운수·교통상으로나 또 자연풍경상으로 한 우월성을 갖이고 있어, 얼마든지 이를 인문적으로 이용하면 이용할 수 있게 된 곳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호조건을 갖춘 땅은 반도 중부지방에서 다시 더 구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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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3번=상술한 바로써 보면 이조 초기의 한양 전도는 결코 단순 순조로이 실현되었던 것이 아니라 복잡다단 파란중첩한 가운데에서 결말을 보게 된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한양이 여러 번 천이의 위협을 당하고 또 모악과 같은 유력한 적대적 후보지를 갖이고서도 마침내 후도(候都)의 영(榮)을 입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와 관계로 인함이었던가? 이는 물론 그 특수한 지리성과 역사성에 진 바가 많은 것이니 끝으로 우리은 한양의 지리역사적 특수성에 대하여 일언을 가하려 한다.
|목차3해독문34번=다음으로 한양의 역사적 특수성을 말하면 여기서 그것을 논함에는 너무도 풍부한 내용을 가졌지만 그 한 마디로 논하면 이곳은 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고대에 있어서는 남북 제민족의 계쟁지으로 되어 낙랑, 진번, 진국 또는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쟁패장리에 들어가 각각 일시 그 소유가 되고, 중세 고려시대에는 고려 삼경의 하나로 역대의 조궁 순주가 전차 행하여 왕실과 특수의 관계을 갖던 이만치, 역사상에 너무도 저명한 곳이다. 백제 초기의 도성인 위례가 바로 지금의 경성 그곳인지 아닌지는 자세치 못하나, 동국의 북한성이라든지, 고구려 시대의 북한산군(일명 남평양), 신라 소유 시대의 북한산주  및  한양군이 다 지금 경성의 전신, 전칭이였던 것은 무의하며, 또 그 한양의 이름을 처음으로 얻기는 신라의 반도 통일 후 약 1세기에 가까운 경덕왕 14년(A.D.755)의 일이어니와, 고려 초에는 또 이를 양주라고 개칭하게 되다. 양주의 칭을 가지던 지금 경성에 고려 삼경의 하나인 남경이 최초로 개창되기는 제11대 문종21·2년경(A.D 1067–1068)에 속하고 그 후 재차 대규모적으로 건치되기는 제15대 숙종 6년(A.D.1101)에 속하나니 이때에는 특히 제종 비기—도선기 도선답산기, 삼각산명당기, 신지비사 등에 의거하여 즉 여기에 경을 두고 순주하면 시간적으로 왕업이 영창(연장)하고 공간적으로 해외 36국이 내조하리라는 참설에 움직이어 경을 두게 된 것이다(청구학총 제2호 소재 졸고 「高麗南京建置に就いて」 참조). 문종의 남경궁지는 지금 어느 곳인지 알 도리가 없으나 숙종이 일으킨 궁기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지금 경복궁 뒤 신무문 바깥이었으며, 당시 남경의 사지는 이조의 그것보다는 서와 남으로 조금 더 커서 서는 기봉(모악), 남은 사리(용산 신초정)에 이르고 북과 동은 역시 이조시대와 같이 백악과 낙산으로써 한계를 삼았다. 그후 예종(제16대) 인종(제17대) 의종(제18대)의 세 왕도 부조의 뜻을 이어 남경을 중시하는 동시에 때때로 순주를 시도하고 제23대 고종 21년(A.D.1234)에는 남경에 새로 가궐을 일으키고 순주의 대로 어의를 이안한 일이 있었다. 가궐은 본궐에 대한 이궁 혹은 별궁의 뜻이어니와 이 가활의 터는 지금 창경원 내가 아니었는가 한다. 마치 이조에서 경복궁(본궐)에 대하여 동으로 창덕궁(이궁)이 경영되던 것과 같이 숙종의 본궐에 대하여 역시 동으로 고종의 가궐이 세워젔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내려와 충렬왕 34년(A.D.1308)에는 남경을 고치어 한양부로 폄칭하는 동시에 별로 이를 중시치 아니하더니 공민왕 우왕 및 공양왕의 여말 3-4대 동안은 소위 송도기쇠의 참설이 성행하여 한양을 또다시 중시하는 동시에 이곳으로 천도하려 하여 여러 번 궁궐을 수영하였으며, 특히 공양왕 2년(A.D.1390)에는 단연 한양으로 이어하여 유수를 송도에 두더니 반년이 못 되어 도로 구도로 환가하고 또 1년에 왕은 폐위되어 이씨 조선의 현출을 보게 되었다(잡지 조선 제194호 졸문 「麗末の遷都問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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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4번=먼저 그 지리적 특수성을 말하면, 그때는 풍수지리를 중히 여기던 시대이므로, 또한 먼저 그 방면의 지리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양은 북악 즉 백악을 주산으로 삼어 그 좌우지에 의하여 환포된 곳이니, 백악의 우지는 서으로 다라나 인왕산을 일으키고 거기서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 숭례문(남대문)을 거처 다시 남산을 일으키어 안산을 작하면서 광희문 터에 이르러 발을 멈추었으며, 좌지는 동으로 뻗어 휴암과 응봉을 솟치면서 혜화문(동소문)을 지나 낙산에 이르러 무릎을 꿇렸다. 그런즉 백악은 풍수가의 소위 현무요 인왕은 백호, 낙산은 청룡, 남산은 주작이다. 한양은 우지가 길고 좌지가 짧으므로 이를 풍수가의 소위 우선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서로 입해하는 한강과 서로 역(逆)하여 있다. 풍수에는 ‘역(逆)’을 주요 조건의 하나로 치는 것이니 산수의 역이 없으면 지맥의 환포를 볼 수 없고 수구의 관쇄를 이루지 못하여 지기가 산류된다는 것이다. 한양은 이 점으로 보아 산수의 역을 충분히 얻은 곳이니 수류로 말하더라도 백악 좌우협에서 흐르는 명당수는 시내를 동으로 관류하여 동대문과 광희문(수구문) 사이를 빠져 왕심리(왕십리) 답심리를 지나 뚝섬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한강은 한양의 객수로 북한강 남한강의 2대 줄기가 양평, 용진에서 서로 합치어 삼각산 제곡의 중수를 받아드리면서 한양 일대의 땅을 환포하여 서북으로 서해에 들어가거니와, 삼각산의 모든 산수의 줄기는 또한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취회하여 있다. 모악의 땅은 같은 한강 유역이지만 산수의 환포와 수구의 관쇄가 한양처럼 긴밀치 못한 것이 일대 결점이다. 다시 백악의 내맥을 살펴보면 멀리 장백산에서 기원한 안변의 철령에서 분기되어 그 일지가 남치하여 양주의 기웅인 도봉산을 일으키고 거기서 다시 서남행하여 태청을 뚫는 삼각을 솟치고 남으로 문수보현의 제봉을 작하면서 정맥을 백악으로 뻗게 되었다. 일로써 재래의 학자들은 한양을 동방정기의 융결종회처로 찬미하였으니 팔역지의 저자 이중환은 <cite no="67">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cite>라 하고(팔성지 경기도조) 이계 홍양호는 <cite no="68">東方靈淑之氣 噓融結 鍾成萬年之神都</cite>라고(耳溪集 卷十四 報恩寺重修記) 하였거니와, 이런 류의 찬사는 이루 매거하기 겨를이 없다. 풍수전문가로서는 기술한 윤신달 등의 언론과 같이 한양의 제일 결점을 석산의 험한 것과 명당수의 풍부치 못한 것을 치나, 그러나 이만한 결점은 어디서든지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든 한양은 풍수지리의 제일 조건인 ‘산수취회’의 땅으로 인정치 아니할 수 없고, 이 점에 있어서는 모악을 능가함이 대하고 송도에 미치지 못함이 조금도 없다. 태조시 운관원의 설에는 부소명당(개성)을 국내의 제일 길지, 이 백악명당을 제이 길지로 말하였지만, 구변도란 고려비기에는 목멱을 제일화, 송악을 제이화, 평양을 제삼화로 치던 것이니,(본 학보 제8권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참조) 화(花)란 것은 풍수가의 말로 대길지를 이름이다.
|목차3해독문35번=이와 같이 한양은 지리역사상에 있어 특수한 지위를 점한 곳으로, 특히 고려조에서는 음양지리가의 찬송하던 이상적 길지로 역대 왕실과의 특수한 관계를 맺어오던 것이다. 이조 태조께서 즉위 당초에 한양 천도의 교를 내리시고, 그 후 계룡산 모악 등지가 상당한 경쟁적 후보지로 있었음에 불구하고 마침내 한양이 천도의 영을 보게 된 것은 상술한 특수성에 진 바가 많음과 한가지 고려조 이래의 관념과 사상에 전통된 바가 많았던 것이다. 태종도 역시 부왕의 뜻을를 계승하는 동시에 위의 특수성과 전통적 관념에 의하여 결국 한양을 택하게 되었거니와 이런 점으로 보면 이조 초기의 한양 전도는 비록 중간의 허다한 사정과 파란이 있었다 할지라도 필연적 당연적 운명에 지배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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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5번=이러한 풍수지리적 고찰을 떠나 실제 인문지리학상으로 이를 고찰하여 보더라도 한양은 소위 산하금대의 요진으로 군사상의 요를 득할 뿐더러 수륙교통의 편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또 그 위치가 반도의 거의 중앙에 있어 도리의 균정을 득하여, 일국의 수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한강의 혜택은 지금도 우리가 일석으로 크게 입고 있지만 옛날에는 특히 운수로 말미암아 그 혜택이 컸으니 각처로부터 폭주(輻湊)하는 물화—무엇보다도 국가경제의 기본인 모든 세와 공물은 대개 이 한강을 통하여 경성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조시대의 성곽이 비교적 소범위로 국한되었기 때문에 경성의 시가발전을 방해한 점이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지리의 허물이 아니라 성곽의 죄, 제도의 죄이다. 만일 경성의 범위를 좀 넓히어서—물론 그때에는 지금처럼 광범위로 취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고려시대의 남경제에 본받아 서지를 모악(안산), 남지를 한강변까지 이르게 하고 내외 중성을 둘렀더라면, 그다지 좁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시가의 발전 국도의 방수도 더 도모할 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옛날 조선 도시의 특색과 필수조건은 난시 소용의 산성의 배경을 갖는 것인데 한양이야말로 천험의 북한을 가짐으로써 일찍부터 이름이 높었다. 백제, 구려, 신라의 삼국은 물론이요 고려시대에도 이를 이용하여 산성을 쌓았으며, 이조에서는 뒤늦게 숙종시에야 비로소 대규모적으로 북한의 내외성을 경영하게 되었지만, 이 산성은 실로 지리적으로 험고하고 역사적으로 구원하던 것이다. 요컨대 한양의 지리는 비단 풍수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상으로나 운수·교통상으로나 또 자연풍경상으로 한 우월성을 갖이고 있어, 얼마든지 이를 인문적으로 이용하면 이용할 수 있게 된 곳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호조건을 갖춘 땅은 반도 중부지방에서 다시 더 구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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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6번=다음으로 한양의 역사적 특수성을 말하면 여기서 그것을 논함에는 너무도 풍부한 내용을 가졌지만 그 한 마디로 논하면 이곳은 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고대에 있어서는 남북 제민족의 계쟁지으로 되어 낙랑, 진번, 진국 또는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쟁패장리에 들어가 각각 일시 그 소유가 되고, 중세 고려시대에는 고려 삼경의 하나로 역대의 조궁 순주가 전차 행하여 왕실과 특수의 관계을 갖던 이만치, 역사상에 너무도 저명한 곳이다. 백제 초기의 도성인 위례가 바로 지금의 경성 그곳인지 아닌지는 자세치 못하나, 동국의 북한성이라든지, 고구려 시대의 북한산군(일명 남평양), 신라 소유 시대의 북한산주  및  한양군이 다 지금 경성의 전신, 전칭이였던 것은 무의하며, 또 그 한양의 이름을 처음으로 얻기는 신라의 반도 통일 후 약 1세기에 가까운 경덕왕 14년(A.D.755)의 일이어니와, 고려 초에는 또 이를 양주라고 개칭하게 되다. 양주의 칭을 가지던 지금 경성에 고려 삼경의 하나인 남경이 최초로 개창되기는 제11대 문종21·2년경(A.D 1067–1068)에 속하고 그 후 재차 대규모적으로 건치되기는 제15대 숙종 6년(A.D.1101)에 속하나니 이때에는 특히 제종 비기—도선기 도선답산기, 삼각산명당기, 신지비사 등에 의거하여 즉 여기에 경을 두고 순주하면 시간적으로 왕업이 영창(연장)하고 공간적으로 해외 36국이 내조하리라는 참설에 움직이어 경을 두게 된 것이다(청구학총 제2호 소재 졸고 「高麗南京建置に就いて」 참조). 문종의 남경궁지는 지금 어느 곳인지 알 도리가 없으나 숙종이 일으킨 궁기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지금 경복궁 뒤 신무문 바깥이었으며, 당시 남경의 사지는 이조의 그것보다는 서와 남으로 조금 더 커서 서는 기봉(모악), 남은 사리(용산 신초정)에 이르고 북과 동은 역시 이조시대와 같이 백악과 낙산으로써 한계를 삼았다. 그후 예종(제16대) 인종(제17대) 의종(제18대)의 세 왕도 부조의 뜻을 이어 남경을 중시하는 동시에 때때로 순주를 시도하고 제23대 고종 21년(A.D.1234)에는 남경에 새로 가궐을 일으키고 순주의 대로 어의를 이안한 일이 있었다. 가궐은 본궐에 대한 이궁 혹은 별궁의 뜻이어니와 이 가활의 터는 지금 창경원 내가 아니었는가 한다. 마치 이조에서 경복궁(본궐)에 대하여 동으로 창덕궁(이궁)이 경영되던 것과 같이 숙종의 본궐에 대하여 역시 동으로 고종의 가궐이 세워젔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내려와 충렬왕 34년(A.D.1308)에는 남경을 고치어 한양부로 폄칭하는 동시에 별로 이를 중시치 아니하더니 공민왕 우왕 및 공양왕의 여말 3-4대 동안은 소위 송도기쇠의 참설이 성행하여 한양을 또다시 중시하는 동시에 이곳으로 천도하려 하여 여러 번 궁궐을 수영하였으며, 특히 공양왕 2년(A.D.1390)에는 단연 한양으로 이어하여 유수를 송도에 두더니 반년이 못 되어 도로 구도로 환가하고 또 1년에 왕은 폐위되어 이씨 조선의 현출을 보게 되었다(잡지 조선 제194호 졸문 「麗末の遷都問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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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7번=이와 같이 한양은 지리역사상에 있어 특수한 지위를 점한 곳으로, 특히 고려조에서는 음양지리가의 찬송하던 이상적 길지로 역대 왕실과의 특수한 관계를 맺어오던 것이다. 이조 태조께서 즉위 당초에 한양 천도의 교를 내리시고, 그 후 계룡산 모악 등지가 상당한 경쟁적 후보지로 있었음에 불구하고 마침내 한양이 천도의 영을 보게 된 것은 상술한 특수성에 진 바가 많음과 한가지 고려조 이래의 관념과 사상에 전통된 바가 많았던 것이다. 태종도 역시 부왕의 뜻을를 계승하는 동시에 위의 특수성과 전통적 관념에 의하여 결국 한양을 택하게 되었거니와 이런 점으로 보면 이조 초기의 한양 전도는 비록 중간의 허다한 사정과 파란이 있었다 할지라도 필연적 당연적 운명에 지배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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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0일 (수) 15: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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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초기의 건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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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李朝初期의 建都問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9 발행기관 @
저자 이병도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8년7월
시작쪽 030쪽 종료쪽 085쪽 전체쪽 056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이 소논문은 지금으로부터 8-9년 전인 소화 5년경에 소야덕삼(小野德三)씨의 경영하던 조선학보 제1권 제1호, 제2호에 연재발표하던 중, 불행히 동 지의 폐간으로 말미암아 완료되지 못하고 그대로 옛 상자 안에서 뒹굴고 있던 것인데, 이번에 다소의 수보를 가하여 여기에 또다시 발표하게 되었다. 독자는 이를 양해할지어다.
쪽수▶P31-1이 小論文은 지금으로부터 八九年 前인 昭和 五年頃에 小野德三氏의 經營하든 朝鮮學報 第一卷 第一號 第二號에 連載發表하든 中, 不幸히 同誌의 廢刊으로 말미암아 完了되지 못하고 그대로 舊篋 中에서 뒹굴고 있든 것인데, 이번에 多少의 修補를 加하야 여기에 또다시 發表하게 되였다. 讀者는 이를 諒할지어다.






본문


본문1: 一, 서언


왕조가 혁(革)하면 국호를 개칭한다 국도를 천전(遷奠)한다 하는 것은 지나를 중심으로 한 동양 여러 나라 역사상에 흔히 보는 사례의 하나이어니와 고려 왕조에 대신한 이씨 조선에 있어서도 또한 이러한 예에 빠지지는 아니하였다. 단 이조 태조께서는 특히 고려하신 바가 있어, 즉위 초에 당연히 고칠 국호를 당분간 전대로 고려라 칭하고 전장(典章)제도도 다 옛것에 그대로 하여 일견 구왕조의 존재 혹은 연장과 같은 감을 줌에 불구하고, 국도천전(遷奠)에 대하여는 매우 일찍부터 관심유의하사 그 경영에 분주하셨다. 국호를 정식으로 고치어 ‘조선’이라고 하기는 태조 즉위 2년 2월이었음에 대하여, 천도의 교를 내리시기는 즉위 후 아직 1개월을 넘지 아니하여서의 일이었다. 물론 국호와 같은 것은 당시 지나 명정(명廷)과 일단 교섭하여 그 재택을 비는 일이 있기 때문에 다소의 지연을 낳았다고 하겠지만 그 교섭은 즉위 후 4개월만에 처음으로 일어났으며, 또 이것도 이때 명으로부터 국호를 무엇이라고 고치였느냐고 질문을 받아 비로소 일어난 것이었다. 어떻든 태조께서는 즉위 당초에 있어 국호 개칭과 같은 것은 제2차적 관심사로 여기시고, 그 대신 건도문제를 제1차적 급무로 생각하신 것 같다. 태조께서 무슨 까닭으로 그와 같이 생각하셨느냐함에 대하여는 후에 차차 논술하려고 하거니와 이렇게 긴급시하던 전도(전도)문제는 용이히 뜻대로 결정되지 아니하여 군신(군신) 간에 종종의 이론(異論)도 일어났고 또 택지에 대하여도 혹은 한양(지금 경성) 혹은 계룡산(공주) 혹은 모악(경성 서쪽) 등지가 그 후보지로 제안되어 태조가 친히 상지(相地)하기 위하여 여러 번 거가(거가)를 번거롭게 하였으며, 계룡산에는 일시 토목의 역까지 보게 되다가 중도에 이를 정파하는 운에 빠지는 등 자못 여러 가지 파란을 중첩하여 겨우 태조 3년 10월에 이르러 지금 경성인 한양에 건도의 이상을 실현하게 되었다. 한양의 신도는 실로 심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막대한 노비(勞費)를 들인 바의 결과이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한양은 이도(이도)의 협위를 받아 제2대 정종 즉위 익년에는 신도를 버리고 구경인 송도(松都)로 이어하였으며 태종이 정종의 선위를 받으심에 미치어서는 태상왕의 지(旨)를 중히 여기사 한양 환도의 교를 내리시었는데 종종한 이론이 반복되어 일시는 송도 한양 양경(兩京)의 제를 취하고 또 앞날과 같게 모악을 상택(相宅)하게까지 되다가 동왕(同王) 5년 10월에는 신도 한양으로 재천하여 조선 500년의 정치 및 문화의 중추로 일정불변의 지위를 줌에 이르렀다.
쪽수▶P31-2王朝가 革하면 國號를 改稱한다 國都를 遷奠한다 하는 것은 支那를 中心으로 한 東洋 諸國史上에 흔이 보는 事例의 하나이어니와 高麗 王朝에 대신한 李氏 朝鮮에 있어서도 또한 이러한 例에 빠지지는 아니하였다. 但 李朝 太祖께서는 特히 考慮하신 바가 있어, 即位 初에 當然히 고칠 國號를 當分間 前대로 高麗라 稱하고 典章制度도 다 舊에 仍하야 一見 舊王朝의 存在 혹은 延長과 같은 感을 줌에 不拘하고, 國都遷奠에 對하여는 매우 일찍부터 關心留意하사 그 經營에 奔走하섰다. 國號를 正式으로 고치어 『朝鮮』이라고 하기는 太祖 即位 二年 二月이었음에 對하야, 遷都의 敎를 내리시기는 即位 後 아직 一個月을 넘지아니하야서의 일이었다. 勿論 國號와 같은 것은 當時 支那 明廷과 一旦 交涉하야 그 裁擇을 乞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多少의 遲延을 生하였다고 하겠지만 그 交涉은 即位 後 四個月만에 처음으로 일어났으며, 또 이것도 이때 明으로부터 國號를 무엇이라고 고치였느냐고 質問을 받어 비로소 일어난 것이었다. 어떠튼 太祖▶P32-1께서는 即位 當初에있어 國號 改稱과 같은 것은 第二次的 關心事로 역이시고, 그 대신 建都問題를 第一次的 急務로 생각하신 것 같다. 太祖께서 무슨 까닭으로 그와 같이 생각하섰느냐함에 對하여는 後에 차차 論述하려고 하거니와 이렇게 緊急視하든 奠都問題는 容易히 如意하게 決定되지 아니하야 群臣 間에 種種의 異論도 일어났고 또 擇地에 對하여도 혹 은 漢陽(今京城) 혹은 鷄龍山(公州) 혹은 母岳(京城西) 等地가 그 候補地로 提案되야 太祖ㅣ 親히 相地키 爲하야 여러 번 車駕를 번거럽게 하였으며, 鷄龍山에는 一時 土木의 役까지 보게 되다가 中途에 이를 停罷하는 運에 빠지는 등 자못 여러가지 波瀾을 重疊하야 겨우 太祖 三年 十月에 이르러 지금 京城인 漢陽에 建都의 理想을 實現하게 되였다. 漢陽의 新都는 실로 心的으로나 物的으로나 莫大한 勞費를 드린 바의 結果이었다. 그런데 그후 얼마 아니되야 漢陽은 移都의 脅威를 받어 第二代 定宗 即位 翌年에는 新都를 버리고 舊京인 松都로 移御하였으며 太宗이 定宗의 禪位를 받으심에 및어서는 太上王의 旨를 重히 역이사 漢陽 還都의 敎를 내리시었는데 種種한 異論이 反復되야 一時는 松都 漢陽 兩京의 制를 取하고 또 前日 同樣으로 母岳을 相宅하게까지 되다가 同王 五年 十月에는 新都 漢陽으로 再遷하야 朝鮮 五百年의 政治及文化의 中樞로 一定不變의 地位를 줌에 이르렀다.
이조 초기의 건도문제를 일언으로 논하면 위와 같지만 그 전말의 진상을 오로지 상세히 고찰하려면 다시 절항을 나누어 논술함이 편리하다고 생각하거니와, 우리가 여기서 특히 천명하려고 하는 바는 태조 및 태종께서 이 건도문제에 대하여 왜 또는 어떻게 심신을 번로케 하였으며? 천도 및 상택에 있어 왜 의론이 일치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끝으로 한양이 여러 번 전도(奠都) 중지의 운명을 당하면서도 결국 택정의 과녁이 되고 만 것은 무슨 이유에 기인함인가에 있다. 이 소편의 주지는 실로 이등 제점을 밝히려 함이다.
쪽수▶P32-2李朝 初期의 建都問題를 一言으로 論之하면 右와 같지만 그 顚末의 眞相을 애오라지 詳細히 考察하려면 다시 節項을 나누어 論述함이 便利하다고 생각하거니와, 吾人이 여기서 特히 闡明하려고 하는 바는 太祖及太宗께서 이 建都問題에 對하야 웨 또는 어떠케 心身을 煩勞케 하였으며? 遷都及相宅에 있어 웨 議論이 一致치 아니하였으며? 또 끝으로 漢陽이 여러 번 奠都 中止의 運을 當하면서도 結局 擇定의 的이 되고 만 것은 무슨 理由에 基因함인가에 있다. 이 小篇의 主旨는 실로 이등 諸點을 밝히려 함이다.
또 한 가지 말하여 둘 것은 재래 야사와 속설에 전하는 이조 건도에 관한 종종의 설화는 여러 가지로 믿기 어려운 황탄괴이의 것이 많이 있어 지금도 일부의 인사는 이를 거의 사실과 같이 믿는 이가 있는 모양이나, 그러한 불경무계의 설은 진정한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는 우리에게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아니할뿐더러 도리어 방해가 적지 않다. 그래서 나는 주로 정사인 실록에 의거하여 간간 다른 유력한 기록을 참고하여 당시 건도문제의 진상을 밝히어 보려 한다.
쪽수▶P33-1또 한 가지 말하여 둘 것은 在來 野史와 俗說에 傳하는 李朝 建都에 關한 種種의 說話는 여러 가지로 믿기 어려운 荒誕怪異의 것이 만히 있어 지금도 一部의 人士는 이를 거이 事實과 같이 믿는 이가 있는 모양이나, 그러한 不經無稽의 說은 眞正한 歷史的 事實을 探究하는 吾人에게는 何等의 도움이 되지 아니할뿐더러 도리어 妨害가 적지 않다. 그래서 나는 主로 正史인 實錄에 據하야 間間 다른 有力한 記錄을 參考하야 當時 建都問題의 眞相을 밝히어 보려 한다.




































본문2: 二, 태조조의 건도문제


(甲) 최초의 이도경영
쪽수▶P33-2(甲) 最初의 移都經營
태조께서 임신 추7월 17일 개경(개성) 수창궁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하신 후 아직 1개월이 못 되어 천도의 교를 내리시었다 함은 전술한 바이지만, 다시 이를 태조실록에 비추어 보면 즉위원년 추8월 임술(13일)조에

敎都評議使移都漢陽

이라 하고, 또 동월 갑자(15일)조에

遣三司右僕射李恬于漢陽府 修葺宮室

이라고 하였음으로써 분명하다. 그리하여 그 최초의 천도 후보지는 당시의 한양부, 지금의 경성이던 것을 역시 알 수있다. 세상에서는 흔히 공주의 계룡산이 그 최초의 후보지이었던 것같이 믿어왔지만 이는 야사의 전하는 바이요 정사에는 이와 같이(계룡산보다도) 한양이 먼저 되어있던 것을 말하여준다. 위 문장 중 ‘수즙궁실’이라 함은 신궁의 창조를 뜻하는 것보다 차라리 재래의 것, 즉 전조(고려) 이래의 구궁을 수리 혹은 증축한다는 말 같거니와, 전조의 구궁이라도 한양에는 수개 처가 있었음으로 그중의 어느 것을 수즙(修葺)한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고, 또 이러한 기사만으로는 혹 엄밀한 의미의 신도 경영이라고 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런데 동년 9월, 태조께서 평주(평산)온천에 행행하였을 때, 시중 배극렴 조준 등이 온천에 이르러 계(啓)하되

竊見漢陽宮闕未成 都郭未成 扈從之人奪入民戶 天時向寒 民無所歸 請待營築宮室城郭 布置各司 然後遷都

이라고 하였음을 보면 이때 신도경영은 단지 궁만을 수즙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성의 축조 내지 각 관아의 건치에 이르기까지의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은 이로써 훌륭한 신도 경영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태조의 천도에 대한 조급하신 태도는 그 즉위 후 1개월 내에 천도의 교를 내리신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또한 위 배극렴 등의 주언(奏言)의 반면에 있어서도 사과반(思過半)함이 있다. 환언하면 태조께서는 신도의 궁실성곽이 아직 영축되기 전에 천도를 급히 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배극렴 등이 위와 같이 하였던 것이다.
쪽수▶P33-3太祖께서 壬申 秋七月 十七日 開京(開城) 壽昌宮에서 盛大한 即位式을 舉行하신 후 아직 一箇月이 못 되여 遷都의 敎를 下하였다 함은 前述한 바이지만, 다시 이를 太祖實錄에 徵하면 即位元年 秋八月壬戌(十三日)條에

敎都評議使移都漢陽

이라 하고, 또 同月 甲子(十五日)條에

遣三司右僕射李恬于漢陽府 修葺宮室

이라고 하였음으로써 分明하다. 그리하야 그 最初의 遷都 候補地는 當時의 漢陽府, 지금의 京城이던 것을 역시 알 수있다. 世上에서는 흔이 公州의 鷄龍山이 그最初의 候補地이었든 것같이 믿어왔지마는 이는 野史의 傳하는 바이요 正史에는 이와 같이(鷄龍山보다도) 漢陽이 먼저 되여있던 것을 말하여준다. 右文中 『修葺宮室』이라 함은 新宮의 創造를 意하는 것보다 차라리 在來의 것, 즉 前朝(高麗) 以來의 舊宮을 修理 或은 增築한다는 말같거니와, 前朝의 舊宮이라▶P34-1도 漢陽에는 數箇處가 있었음으로 其中의 어는 것을 修葺한다는 것인지 未審하고, 또 이러한 記事만으로는 혹 嚴密한 意味의 新都 經營이라고 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런데 同年 九月, 太祖께서 平州(平山)溫泉에 行幸하였을 때, 侍中 裵克廉 趙浚 等이 溫泉에 詣하야 啓하되

竊見漢陽宮闕未成 都郭未成 扈從之人奪入民戶 天時向寒 民無所歸 請待營築宮室城郭 布置各司 然後遷都

이라고 하였음을 보면 이때 新都經營은 단지 宮만을 修葺하는 데 끝이지 않고 都城의 築造 乃至 各 官衙의 建置에 이르기까지의 計劃이 있었던 것이다. 吾人은 이로써 훌륭한 新都 經營이라고 認定할 수 있다. 太祖의 遷都에 對한 燥急하신 態度는 그 即位 後 一箇月 內에 遷都의 敎를 下하신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또한 右 裵克廉 等의 奏言의 反面에 있어서도 思過半함이 있다. 換言하면 太祖께서는 新都의 宮室城郭이 아직 營築되기 前에 遷都를 急히 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裵克廉 等이 右와 같이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태조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천도를 급히 하려고 하심이었는가. 이를 단순히 왕조경질에 수반하는 천도, 즉 정치 인심 기타 외관을 일신하려고 하는 천도로만 생각하여서는 그 급하신 진의가 저편에 있었는지 잘 모를 것이다. 태조의 진의는 이러한 사정보다도 차라리 어떠한 신비적 사상, 속히 말하면 개경이라고 하는 지덕쇠패의 땅, 망국의 기지를 하로라도 속히 피하려고 하는 미신적 사상, 즉 음양지리(풍수)적 사상에 拘泥된 바이었다. 그것은 후에 차차 말할 태조의 언행에 의하여 충분히 알 수 있지만 먼저 실록 원년 9월 무신(30일)조에

上召書雲觀(○天文地理 陰陽測候 等을 司함)官 問營宗廟地 啓曰城內(○開城) 無吉地 莫若前朝舊基 上曰 亡國舊基何更用之

라고 함에 비추어 보아도 이를 추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조께서는 못처럼 신도를 경영하심에 당하여 하등의 택지의 의론도 없이 바루 한양에 이도(移都)할 것을 하교하신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는 후술할 바와 같이 한양이 고려의 문종, 숙종 이래 남경의 땅으로서 또는 음양지리상으로 선택된 이상향으로서 역대의 왕실 특히 여말 왕실의 누차 창궁순주(創宮巡住)를 시도한, 일시(우왕 및 공양왕 때)는 천도까지 행하던 곳이어서와, 이때 태조께서도 대개 여기에 전통되시었던 것이다.
쪽수▶P34-2그러면 太祖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遷都를 急히 하려고 하심이었는가. 이를 單純히 王朝更迭에 伴하는 遷都, 即 政治 人心 其他 外觀을 一新하려고 하는 遷都로만 생각하여서는 그 急하신 眞意가 那邊에 있었는지 잘 모를 것이다. 太祖의 眞意는 이러한 事情보다도 차라리 어떠한 神秘的 思想, 速히 말하면 開京이라고 하는 地德衰敗의 地, 亡國의 基地를 하로라도 速히 避하려고 하는 迷信的 思想, 즉 陰陽地理(風水)的 思想에 拘泥된 所以이었다. 그것은 後에 차차 말할 太祖의 言行에 依하야 充分히 알 수 있지만 먼저 實錄 元年 九月 戊申(三十日)條에

上召書雲觀(○天文地理 陰陽測候 等을 司함)官 問營宗廟地 啓曰城內(○開城) 無吉地 莫若前朝舊基 上曰 亡國舊基何更用之

라고 함에 徵하야 보아도 이를 推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太祖께서는 못처럼 新都를 經營하심에 當하야 何等의 ▶P35-1擇地의 議論도 없이 바루 漢陽에 移都할 것을 下敎하신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는 後述할 바와 같이 漢陽이 高麗의 文宗 肅宗 以來 南京의 地로서 또는 陰陽地理上으로 選擇된 理想鄕으로서 歷代의 王室 特히 麗末 王室의 屢次 創宮巡住를 試한 一時(禑王及恭讓王時)는 遷都까지 行하든 곳이어서와, 이때 太祖께서도 대개 여기에 傳統되시었던 것이다.
(乙) 계룡산의 신도공사와 그 정파
쪽수▶P35-2(乙) 鷄龍山의 新都工事와 그 停罷
그런데 태조께서는 즉위 2년 정월에 이르러 돌연히 공주 계룡산에 행행할 지(旨)를 공포하시고 드디어 이달 19일에 군신을 거느리고 송경을 출발하여 도중 양주 회암사에서 왕사 자초(自超, 즉 무학)를 데리고 목적지로 향하시게 되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계룡산의 지리적 형세를 친히 살피어 신도를 거기에 경영하려고 하심이어니와, 신도 한양 경영하시다가 이와 같이 갑작이 계룡산 상지를 행하려고 하심은 문득 어떠한 사정에 인함인가? 나는 태조실록 전년(원년) 11월 갑진(27일)조에

遣政堂文學權仲和于楊廣․慶尙․全羅道 相安胎之地

라 함과, 동 실록 2년 춘 정월조에

戊申(二日) 胎室證考使權仲和還 上言全羅道珍同縣相得吉地 乃獻山水形勢圖 兼獻楊廣道鷄龍山都邑圖

라고 한 기사를 발견하였다. 이는 앞서 태조께서 정당문학 권중화를 양광(지금의 경기 忠淸道)·경상·전라도 방면에 보내어 왕실 안태(安胎)의 땅을 상(相)하게 하였던바, 중화는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전라도 진동현(지금 전북 금산군 서부)의 산수형세도와 양광도의 계룡산도읍도를 태조께 헌상하였다는 것이다. 진동현의 산수형세도는 물론 안태지로서의 지도이나 소위 계룡산도읍도란 것은 이와는 의의가 다른, 즉 도명과 같이 도읍(후보지)용의 지도이였을 것이다. 그러면 이때 태조는 이 도읍도를 보시고 권중화의 설에 움직인 바 되어 불시에 계룡산 상지를 행하시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권중화는 여말 우왕 때에도 상지관으로 뽑히어 동왕 4년에는 왕명을 받들어 북소궁궐의 옛 기반(지금 황해도 신계군 기달산 남)를 답사한 일이 있었고, 또 다음에 말할 바와 같이 태조의 거가에 호종하여 계룡산에 이르러 지리를 심찰하였을 때에도 신도의 종묘, 사직, 궁전, 조시의 형세도를 진상하였던 터이며, 또 태종실록(8년 11월)의 동인 사전에 醫藥地理卜筮 摩有不通이라고 함과 같이 원래 그는 지리학 내지 의약복서(醫藥卜筮)에까지 정통하였던 유자이었다. 그런즉 권중화는 태조 즉위 원년(11월 27일)에 왕명을 봉하여 양광‧경상‧전라의 제도에 가서 이곳저곳으로 태실의 땅을 구심할 적에 양광도 공주 계룡산에 이르러 그 지리적 형세의 비범함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곳은 태실의 당으로서보다도 도읍의 땅으로 한층 적당하다고 하여 이에 그곳의 형세도를 묘사하여 임무를 마치고 익년 정월에 개경으로 돌아와 (참고로) 이 그림을 바치는 동시에 아마 그곳 지리의 장점을 아울러 주신(奏申)하였던바, 태조께서는 크게 기뻐하사 드디어 태조 스스로 이곳을 상택하시려고 출가한 형편이었다.
쪽수▶P35-3그런데 太祖께서는 即位 二年 正月에 이르러 突然히 公州 鷄龍山에 行幸할 旨를 公布하시고 드디어 이달 十九日에 群臣을 거느리고 松京을 發하야 途中 楊州 檜巖寺에서 王師 自超(即無學)를 다리고 目的地로 向하시게 되였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鷄龍山의 地理的 形勢를 親히 삺이어 新都를 거기에 經營하려고 하심이어니와, 新都 漢陽 經營하시다가 이와 같이 갑작이 鷄龍山 相地를 行하려고 하심은 문득 어떠한 事情에 因함인가? 나는 太祖實錄 前年(元年)十一月 甲辰(二十七日)條에

遣政堂文學權仲和于楊廣․慶尙․全羅道 相安胎之地

라 함과, 同實錄 二年 春正月條에

戊申(二日) 胎室證考使權仲和還 上言全羅道珍同縣相得吉地 乃獻山水形勢圖 兼獻楊廣道鷄龍山都邑圖

라고 한 記事를 發見하였다. 이는 앞서 太祖께서 政堂文學 權仲和를 楊廣(지금의 京畿 忠淸道)·慶尙·全羅道 方面에 보내여 王室安胎의 地를 相케 하였든바, 仲和는 踏査를 마치고 도라와 全羅道 珍同縣(今 全北 錦山郡 西部)의 山水形勢圖와 楊廣道의 鷄龍▶P36-1山都邑圖를 太祖께 獻上하였다는 것이다. 珍同縣의 山水形勢圖는 勿論 安胎地로서의 地圖이나 所謂 鷄龍山都邑圖란 것은 이와는 意義가 다른, 즉 圖名과 같이 都邑(候補地)用의 地圖이였을 것이다. 그러면 이때 太祖는 이 都邑圖를 보시고 權仲和의 說에 움직인 바 되여 不時에 鷄龍山 相地를 行하시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權仲和는 麗末 禑王時에도 相地官으로 뽑히어 同王 四年에는 王命을 받들어 北蘇宮闕의 舊基(今 黃海道 新溪郡 箕達山 南)를 踏査한 일이 있었고, 또 다음에 말할 바와 같이 太祖의 車駕에 扈從하야 鷄龍山에 이르러 地理를 審察하였을 때에도 新都의 宗廟 社稷 宮殿 朝市의 形勢圖를 進上하였든 터이며, 또 太宗實錄(八年 十一月)의 同人史傳에 『醫藥地理卜筮 摩有不通』이라고 함과 같이 원래 그는 地理學 乃至 醫藥卜筮에까지 精通하였든 儒者이었다. 그런즉 權仲和는 太祖 即位 元年(十一月 二十七日)에 王命을 奉하야 楊廣‧慶尙‧全羅의 諸道에 往하야 이곳저곳으로 胎室의 地를 求審할 적에 楊廣道 公州 鷄龍山에 이르러 그 地理的 形勢의 非凡함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곳은 胎室의 地로서보다도 都邑의 地로 一層 適當하다고 하야 이예 그곳의 形勢圖를 描寫하야 任務를 마치고 翌年 正月에 開京으로 도라와 (參考로) 이 그림을 바치는 同時에 아마 그곳 地理의 長處를 아울러 奏申하였든바, 太祖께서는 크게 기뻐하사 드디어 太祖 스스로 이곳을 相宅하시려고 出駕한 次第이었다.
태조께서 신도를 택정하심에 얼마나 열중하시었던가는 친상의 거가를 명하신 것으로도 헤아릴 수 있지만 또 한가지 좋은 자료가 될 만한 것은 이 행행의 도중, 경성(개경)으로부터 지중추원사 정요가 도평의사사(후의 의정부)의 계를 가지고 급히 와 현비(신덕왕후 강씨)의 병보와 및 평주(평산) 봉주(봉산) 등처의 초적의 보고를 주신하였을 때에 태조가 불쾌히 여기시어 草賊有邊將報歟 何者來告歟라고 무르시매 曜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太祖 또 가로되 遷都 世家大族所共惡 欲籍以止之也 宰相久居松京 安土重遷 遷都豈其意耶라 하였고 扈從臣 南誾이 對曰 臣等濫與功臣 蒙恩上位 雖遷怒新邑 有何不足 松京田宅 豈足惜耶 今此行 已近鷄龍 願上往觀營都之地 臣等留擊草賊이라고 위로하고 권하시하매 태조가 遷都 卿等亦不欲也 自古 易姓受命之主 必遷都邑 今我急觀鷄龍者 欲於吾身親定新都也云云이라고 하신 후 노를 억제치 못하시고 거가를 돌이키려 하시매 남은 등은 크게 당황하여 이민도라는 자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여 病必廖 草賊亦不足慮라 하고 다시 회의하여 거가를 나아가도록 청하여 드디어 목적지로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에 의하여 이때 태조의 천도에 대한 의향이 어떠하였던가를 십분 헤아릴 수 있는 동시에 송경에 있는 세가대족이 안토중천(安土重遷)으로 천도를 즐겨하지 아니한 듯한 사실도 태조의 말씀에 의하여 살필 수 있다.
쪽수▶P36-2太祖께서 新都를 擇定하심에 얼마나 熱中하시었든가는 親相의 車駕를 命하신 것으로도 헤아릴 수 있지만 또 한가지 好資料가 될 만한 것은 이 行幸의 途中, 京城(開京)으로부터 知中樞院事 鄭曜가 都評議使司(後의 議政府)의 啓을 가지고 急來하야 顯妃(神德王后 康氏)의 病報와 및 平州(平山) 鳳州(鳳山) 等處의 草賊의 報를 奏申하였을 때에 太祖가 불쾌히 역이사 『草賊有邊將報歟 何者來告歟」라고 무르시매 曜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太祖 또 가로되 『遷都 世家大族所共惡 欲▶P37-1籍以止之也 宰相久居松京 安土重遷 遷都豈其意耶』라 하였고 扈從臣 南誾이 對曰 『臣等濫與功臣 蒙恩上位 雖遷怒新邑 有何不足 松京田宅 豈足惜耶 今此行 已近鷄龍 願上往觀營都之地 臣等留擊草賊』이라고 且慰且勸하매 太祖가 『遷都 卿等亦不欲也 自古 易姓受命之主 必遷都邑 今我急觀鷄龍者 欲於吾身親定新都也云云』이라고 하신 후 怒를 抑制치 못하시고 車駕를 도리키려 하시매 南誾 等은 크게 唐荒하야 李敏道라는 者로 하여금 占을 치게 하야 『病必廖 草賊亦不足慮』라 하고 다시 會議하야 車駕를 進하도록 請하야 드디어 目的地로 向하게 되였다고 한다. 吾人은 이에 依하야 이때 太祖의 遷都에 對한 意向이 어떠하였든가를 十分 察得할 수 있는 同時에 松京에 있는 世家大族이 安土重遷으로 遷都를 질겨하지 아니한 듯한 事實도 太祖의 말씀에 依하야 삺일 수 있다.
태조의 거가는 2월 8일 계룡산 아래에 도착하였다. 익일 군신을 이끌고 신도의 산수형세를 상심하고 다시 호종신 성석린·김주·남은 등에 명하여 교통의 편부, 도로의 험이, 성곽의 형세를 살피게 하고 또 그 이튿날은 서운관원 및 풍수학인으로 하여금 권중화의 새로히 진상한 신도의 종묘·사직·궁전·조시의 형세도에 의하여 그 면세를 심시케 하였다. 11일에는 다시 태조 친히 신도중앙의 고부에 오르사 주위의 형세를 바라보시며 왕사 자초에게 지리의 여하를 물었던바, 자초는 잘 알지 못하겠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태조께서는 대단 합의하시었던지 5일 동안이나 주가(駐駕)하신 후 계룡산을 출발하여 경도(개성)로 환어하시고, 상의문하부사 김주 동지중추 박영충 및 전 밀직 최칠석 등은 그곳에 머물러 신도 경영의 감독의 임무에 당하였다. 이리하여 계룡산 상택의 결과는 한양의 신도 경영으로 하여금 좌초의 운명을 당하게 하였다. 계룡산은 고래로 내외에 알려진 명산이니, 당의 장초금의 한원(번이부) 백제조에 鷄山東峙라 함과 동서 雍氏註所引括地志에 國東有鷄藍山云云이라 한 것은 다 당시 백제국도(부여읍) 동의 명산인 이 계룡산을 지칭한 것으로서 이때의 이름이 이미 당대(당代) 중국인에게도 저문(著聞)되었던 것을 (이에 의하여)알 수 있거니와 계룡을 또 계람(鷄藍)이라고 서칭한 예는 신라 경명왕 8년 최치원 소찬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에도 보인다. ‘계룡’은 고려 이래의 서칭으로 그 이전에는 ‘계람(鷄藍)’ 혹은 ‘계람(鷄籃)’이라고 하였던 것 같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계룡이고 계람一作籃이고 다 방언의 음역인 듯하니 즉 이들은 저 죽령의 서쪽, 조령과 병치한 계립령의 계립과 동일한 어원의 이사(異寫)일 것이다. 계립이 마각‧마골의 뜻인 ‘겨릅’의 취음인 것은 계립을 일운 마목현 또는 마골산이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니, 윤정기의 󰡔東寰錄󰡕(卷四)에 麻骨以方言稱之則鷄立이라고 한 것을 참고함이 더욱 좋다. 그러면 계람·계룡도 ‘겨릅’(마골)의 의미임에 틀림없을 듯. 고대 지명 산천명에는 서로 같은 것이 많았던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신라일통시대에는 계룡산이 신라 오악 중의 하나(서악)로 중사(中祀)에 편입되었던 것은 삼국사기 (권32)제사지에 명시한 바어니와, 고려시대에는 고려 태조의 십훈요 중에 車峴以南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이란 당시 지리사상의 전통적 신념이 인심을 지배하여 따라서 이 계룡산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아니하였던 것 같았다. (東國輿地勝覽 卷十八, 連山縣學校鄕校條, 鄭以吾의 記 中에 是郡地 前朝太祖及我太上王(이씨 태조를 이름) 皆欲定都之地也라고 하여 마치 왕씨 태조도 계룡산 부근에 정도하려고 하였던 것 같이 말하였으나 이는 무근거한 부회(附會)의 설일 것이다) 그러나 이조 초에 이르러 이와 같이 천도의 땅으로까지 택상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계룡산은 다시 신비시하게 되어 이를 중심으로 하여 싸고도는 종종의 비기, 참설이 이조 후반기를 통하여 성행하게 되었다. 예하면 정감록이란 기서(譏書)에는 이씨의 다음에 정씨가 일어나 계룡산에 도읍을 정한다는 설이 있어 이로 인하여 이곳을 더욱 더욱 신비시하여 연전(年前) 계룡산 신도 내에는 일시 각처로부터 모여드는 미신의 무리가 부지기수였다. 본조시대의 풍수가는 계룡산의 지리를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세 혹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세라 하여 한층 진기시하였으니, 계룡의 산됨이 멀리 남쪽 덕유산으로 분기북주하여 공주 동에 이르러 C자형으로 우회하여 조종을 돌아다보는 형세와 같다 하여 이를 회룡고조라 하고 또 이것이 만곡하여 안으로 구불어든 까닭에 산태극이라고도 하며 이 태극 내에서 유수(流水)가 동남으로 빠져 다시 동북으로 역류하여 금강과 합하여 계룡의 북을 흘러 공주읍을 지나 서해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를 수태극이라고 한다. 그런즉 권중화가 특히 계룡산 도읍도를 진상하여 태조를 움직이게 한 것과 또 태조의 친상의 결과가 이를 가합하게 여긴 것은 역시 상술함과 같은 이유에 기인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쪽수▶P37-2太祖의 車駕는 二月 八日 鷄龍山 下에 到着하였다. 翌日 群臣을 익글고 新都의 山水形勢를 相審하고 다시 扈從臣 成石璘·金湊·南誾 等에 命하야 交通의 便否, 道路의 險易, 城郭의 形勢를 삺이게 하고 또 그 이튼날은 書雲觀員 及 風水學人으로 하여금 權仲和의 새로히 進上한 新都의 宗廟·社稷·宮殿·朝市의 形勢圖에 依하야 그 面勢를 審視케 하였다. 十一日에는 다시 太祖 親히 新都中央의 高阜에 오르사 周圍의 形勢를 바라보시며 王師 自超에게 地理의 如何를 問하였든바, 自超는 잘 아지 못하겠다고 알외었다. 그러나 太祖께서는 대단 合意하시었든지 五日 동안이나 駐駕하신 후 鷄龍山을 發하야 京都(開城)로 還御하시고, 商議門下府事 金湊 同知中樞 朴永忠 及 前密直 崔七夕 等은 그곳에 留하야 新都 經營의 監督의 任에 當하였다. 이리하여 鷄龍山 相宅의 結果는 漢陽의 新都 經營으로 하여금 坐礁의 運을 當케 하였다. 鷄龍山은 古來로 內外에 알려진 名山이니, 唐의 張楚金의 翰苑(蕃夷部)百濟條에 『鷄山東峙』라 함과 同書 雍氏註所引括地志에 『國東有鷄藍山云云』이라 한 것은 다 當時 百濟國都(扶餘邑) 東의 名山인 이 鷄龍山을 指稱한 것으로서 이때의 이름▶P38이 이미 唐代 中國人에게도 著聞되였든 것을 (이에 依하야)알 수 있거니와 鷄龍을 또 鷄藍이라고 書稱한 例는 新羅景明王 八年 崔致遠所撰인 聞慶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에도 보인다. 『鷄龍』은 高麗 以來의 書稱으로 그 以前에는 『鷄藍』 혹은 『鷄籃』이라고 하였든 것 같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鷄龍이고 鷄藍一作籃이고 다 方言의 音譯인 듯하니 즉 이들은 저 竹嶺의 西, 鳥嶺과 並峙한 鷄立嶺의 鷄立과 同一한 語源의 異寫일 것이다. 鷄立이 麻殼‧麻骨의 意인 『겨릅』의 取音인 것은 鷄立을 一云 麻木峴 또는 麻骨山이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니, 尹廷琦의 󰡔東寰錄󰡕(卷四)에 『麻骨以方言稱之則鷄立』이라고 한 것을 參考함이 더욱 좋다. 그러면 鷄藍·鷄龍도 『겨릅』(麻骨)의 의미임에 틀림없을 듯. 古代 地名 山川名에는 서루 같은 것이 많었든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新羅一統時代에는 鷄龍山이 新羅 五岳 中의 하나(西岳)로 中祀에 編入되였든 것은 三國史記 (卷三十二)祭祀志에 明示한 바어니와, 高麗時代에는 麗太祖의 十訓要 中에 『車峴以南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이란 當時 地理思想의 傳統的 信念이 人心을 支配하야 따라서 이 鷄龍山도 그다지 重要視하지 아니하였든 것 같았다. (東國輿地勝覽 卷十八, 連山縣學校鄕校條, 鄭以吾의 記 中에 『是郡地 前朝太祖及我太上王(李氏 太祖를 이름) 皆欲定都之地也』라고 하야 마치 王氏 太祖도 鷄龍山 附近에 定都하려고 하였든 것 같이 말하였으나 이는 無根據한 附會의 說일 것이다) 그러나 李朝 初에 이르러 이와 같이 遷都의 地로까지 擇相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鷄龍山은 다시 神祕視하게 되야 이를 中心으로 하야 싸고도는 種種의 祕記 讖說이 李朝 後半期를 通하야 盛行하게 되였다. 例하면 鄭鑑錄이란 譏書에는 李氏의 다음에 鄭氏가 이러나 鷄龍山에 都邑을 定한다는 說이 있어 이로 因하야 이곳을 더욱 더욱 神祕視하야 年前 鷄龍山 新都 內에는 一時 各處로부터 모여드는 迷信의 徒가 不知其數였다. 本朝時代의 風水家는 鷄龍山의 地理를 『回龍顧祖』의 勢 혹은 『山太極水太極』의 勢라 하야 一層 珍奇視하였으니, 鷄龍의 山됨이 멀리 南쪽 德裕山으로 分岐北走하야 公州 東에 이르러 C字形으로 迂回하야 祖宗을 도라다보는 形勢와 같다 하야 이를 回龍顧祖라 하고 또 이것이 彎曲하야 안으로 꾸불어든 까닭에 山太極이라고도 하며 이 太極 內에서 流水가 東南으로 빠저 다시 東北으로 逆流하야 錦江과 合하야 鷄龍의 北을 흘러 公州邑을 지나 西海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를 水太極이라고 한다. 그런즉 權仲和가 特히 鷄龍山 都邑圖를 進▶P39-1上하야 太祖를 움직이게 한 것과 또 太祖의 親相의 結果가 이를 可合하게 여긴 것은 역시 右述함과 같은 理由에 基因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3월에 이르러 신도 기내에 속할 주현, 부曲, 향 범 81을 정하고 (농기로 인하여)신도 공역의 민정과 공장(工匠)을 놓고, 9월에 또다시 경상·전라도안렴사에 명하여 도역을 징발하여 신도에 이르게 하고 또 민력의 노비(勞費)를 염려하여 승도를 모집하여 이에 대신케 하기도 하였다.
쪽수▶P39-2三月에 이르러 新都 畿內에 屬할 州縣 部曲 鄕 凡八十一을 定하고 (農期로 因하야)新都 工役의 民丁과 工匠을 放하고, 九月에 또다시 慶尙·全羅道按廉使에 命하야 徒役을 徵發하야 新都에 赴케 하고 또 民力의 勞費를 念慮하야 僧徒를 募集하야 이에 대신케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신도 공사는 의연 진행하여 10월 11월을 지나 12월에 이르매 조영을 개시한 지 거의 1년이 되었다. 그동안 공사의 진척은 어느 정도까지 되었는가는 이를 비출 만한 명백한 기사를 발견할 수 없지만, 거금 400여 년 전의 편찬물인 동국여지승람(卷十8) 연산현 계룡산주에 我太祖即位初 欲移都于山南 車駕親巡卜吉 略定基址 肇興工役(中略) 至今號其地爲新都 溝渠礎砌獨在라 하였고 지금에도 그곳(신도 안)에 단지 구거의 유적, 초체용의 석재가 무가공한 채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역사가 그다지 진척하지는 아니한 듯하며, 단지 지역의 정리, 목재 석재의 채벌운반에 지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쪽수▶P39-3이와 같이 하야 新都 工事는 依然 進行하야 十月 十一月을 지나 十二月에 이르매 營始한 지 거이 一年이 되였다. 그동안 工事의 進陟은 어느 程度까지 되였는가는 이를 徵할 만한 明白한 記事를 發見할 수 없지만, 距今 四百餘年 前의 編纂物인 東國輿地勝覽(卷十八) 連山縣 鷄龍山註에 『我太祖即位初 欲移都于山南 車駕親巡卜吉 略定基址 肇興工役(中略) 至今號其地爲新都 溝渠礎砌獨在』라 하였고 지금에도 그곳(新都 안)에 단지 溝渠의 遺跡, 礎砌用의 石材가 無加工한 채로 남어있는 것을 보면 役事가 그다지 進陟하지는 아니한듯하며, 단지 地域의 整理, 木材 石材의 採伐運搬에 지나지 못하였든 것 같다.
그런데 이해(2년) 12월 1일에 신도공사는 돌연 정파의 명령을 받게 되었다. 실록 동년 동월조에

壬申(一日)遣大將軍沈孝生 如鷄龍山 罷新都之役

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그러면 이는 어떠한 사유로 인함인가? 위 기사의 다음에

京畿左右道都觀察使河崙上言 都邑宜在國中 鷄龍山地偏於南 與東西北面相阻 且臣甞葬臣父 粗閱風水諸書 今聞鷄龍之地 山自乾來 水流巽去 是宋朝胡舜臣(申?) 所謂 ‘水破長生 衰敗立至之地’ 不宜建都 上命進書 令判門下府事權仲和 判三司事鄭道傳․判中樞院事南在等與崙參考 且覈驗前朝諸山陵吉凶以聞 於是 以奉常寺諸山陵形止案山水來去 考之 吉凶皆契 乃命孝生罷新都之役 中外大悅 胡氏之書 自此始行

[그림]이라고 보이어 있다. 이에 의하면 신도(계룡산) 정파의 원인은 당시 경기도도관찰사 하륜의 반대에 의한 것으로서, 그 반대의 이유는 요컨대 ①계룡산의 위치가 남방에 치우쳐 동서북 삼면과 서로 조격하여
쪽수▶P39-4그런데 이해(二年) 十二月 一日에 新都工事는 突然 停罷의 命令을 받게 되였다. 實錄 同年 同月條에

壬申(一日)遣大將軍沈孝生 如鷄龍山 罷新都之役

이라고 한 것이 即 그것이다. 그러면 이는 어떠한 事由로 因함인가? 右記事의 다음에

京畿左右道都觀察使河崙上言 都邑宜在國中 鷄龍山地偏於南 與東西北面相阻 且臣甞葬臣父 粗閱風水諸書 今聞鷄龍之地 山自乾來 水流巽去 是宋朝胡舜臣(申?) 所謂 『水破長生 衰敗立至之地』 不宜建都 上命進書 令判▶P40-1門下府事權仲和 判三司事鄭道傳․判中樞院事南在等與崙參考 且覈驗前朝諸山陵吉凶以聞 於是 以奉常寺諸山陵形止案山水來去 考之 吉凶皆契 乃命孝生罷新都之役 中外大悅 胡氏之書 自此始行

이라고 보이어 있다. 이에 依하면 新都(鷄龍山) 停罷의 原因은 當時 京畿道都觀察使 河崙의 反對에 依한 것으로서, 그 反對의 理由는 要컨대 ①鷄龍山의 位置가 南方에 偏하야 東西北 三面과 서로 阻隔하야
鷄龍山附近圖(大東輿地圖에서)
쪽수▶P40-2
鷄龍山附近圖(大東輿地圖에서)
도리의 균형을 얻지 못하고 뿐만 아니라 ②풍수상으로 보더라도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서북방)으로부터 오고 수는 손방(동남방)으로 흘러가니 이는 즉 송조의 풍수가 호순신(申)의 이른바 水破長生 衰敗立至의 땅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건도하여서는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태조는 호씨설의 합부를 시험하기 위하여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하륜과 함께 전조(고려조) 여러 산릉의 ‘산수래거’의 형세를 호씨의 설에 대조하여 과거의 길흉을 고검케 하였더니 과연 길흉이 거의 계합하여 드디어 위와 같은 명령을 내리시었던 것이다. 계룡산의 땅이 일국의 중앙을 벗어나 수륙의 교통까지도 불편한 것은 말하자면 실제의 인문지리상으로 보아 일국의 수도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은 당초부터 이미 인식하였을 것이지만 단지 풍수지리상으로 보아 chosen된 길지라고 하여 공역을 일으키어 1년간이나 역사를 진행하여 왔던 것인데, 지금 하륜의 이론—풍수상의 결함이 있다는 설이 한번 일어남에 미치어 홀연히 정파의 운을 만났던 것이다. 즉 풍수지리설에 좌우되어 거역의 기파(起罷)를 본 것이니 실로 일종의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은 당시에 있어서는 아무러치도 않은 尋常普통한 일과 같이 알았든 모양이다. 그러나 상기 실록기사 끝에 中外大悅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신도 공사의 노역에 부대끼던 인민은 물론이요, 개경에서 안토중천하던 세가대족도 역시 크게 기뻐하였을 줄로 믿는다.
쪽수▶P41-1道里의 均衡을 얻지 못하고 뿐만 아니라 ②風水上으로 보드라도 鷄龍山의 地됨이 山은 乾方(西北方)으로부터 오고 水는 巽方(東南方)으로 흘러가니 이는 즉 宋朝의 風水家 胡舜臣(申)의 이른바 『水破長生 衰敗立至』의 地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建都하여서는 不可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야 太祖는 胡氏說의 合否를 試驗하기 爲하야 諸臣으로 하여금 河崙과 함께 前朝(麗朝) 諸山陵의 『山水來去』의 形勢를 胡氏의 說에 對照하야 過去의 吉凶을 考檢케 하였더니 과연 吉凶이 거이 契合하야 드디어 如上의 命令을 下하였던 것이다. 鷄龍山의 地가 一國의 中央을 버서나 水陸의 交通까지도 不便한 말하자면 實際의 人文地理上으로 보아 一國의 首都가 될 資格이 없는 것은 當初부터 이미 認識하였을 것이지만 단지 風水地理上으로 보아 chosen된 吉地라고 하야 工役을 이르키어 一年間이나 役事를 進行하여 왔든 것인데, 지금 河崙의 異論—風水上의 缺陷이 있다는 說이 한번 이러남에 및어 忽然이 停罷의 運을 맛났던 것이다. 即 風水地理說에 左右되여 巨役의 起罷를 본 것이니 실로 一種의 觀念의 遊戲에 不過하였든 것이다. 이런 일은 當時에 있어서는 아무러치도 않은 尋常普通한 일과 같이 알았든 모양이다. 그러나 上記 實錄記事 끝에 『中外大悅』이라고 한 것을 보면 新都 工事의 勞役에 부댓기든 人民은 勿論이요, 開京에서 安土重遷하든 世家大族도 역시 大悅하였을 줄로 믿는다.
1년간의 거역을 일조일석에 깨트린 하륜은 타일 태종조에 수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지만, 그 호학박식의 풍, 특히 음양지리에 정통하였던 것은 태종실록(16년 11월)동인(同人)의 사전 중에 性好讀書 手不釋卷 (中略) 至於陰陽·醫術 星辰·地理 皆極其精이라 하였음으로서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륜의 설의 근거가 되든 호씨의 소위 ‘수파장생(水破長生)’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이론을 추궁할진댄 자연 호씨의 서에 대질하여 볼 수밖에 없다. 호씨의 서는 이때 하륜에 의하여 수입되어 이래 조선에 유행되는 동시에 풍수학인의 수험과목 중의 한 중요한 것으 되어오던 것이니, 그 책은 지금 항간에는 잘 얻어볼 수 없으나, 규장각도서 중에 1본(조선본)이 소장되어 그 책의 내용을 조사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유쾌하다고 생각한다. 서명은 즉 호순신지리신법이라고 하는 것인데, 실록에는 호순신의 申자가 臣으로 되어있으나, 그것은 申臣 2자의 음 상동으로 잘못된 것인 듯하다. 호씨의 사적은 자세치 않으나 그 책에 奉議郎賜緋魚袋胡舜申撰이라고 한 것을 보면 송대의 유품문관이던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 서문·본론을 통하여 보면 그는 유자문인으로서의 풍격이 더 높던 이로 풍수학에 정통하여 일가의 특색을 세운 이니, 그 소위 신법이란 것은 오산(金木水火土) 생왕의 법칙에 천상구성유행의 법을 응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 책 상권에 수론이라고 제한 데를 보면 아래의 1절이 보인다.

山靜物而屬陰 水動物而屬陽 陰道體常 陽生變化 故吉凶禍福見於水者尤急 蓋山如人之形體 水如人之血脈 人有形體生長枯榮 一資於血脈 血脈周流於一身之間 厥有度數 順而不差 則其人必康且强 逆而失節 則其人必病且亡矣 此自然之理 不易之道也 故是法必欲水之來去與山合然後爲吉 五山生旺死絶各有定方 大率欲水各自其吉方來 凶方去 貪居養生 武居官旺 故水欲其來 若去則衝敗生旺氣矣 文居沐冠廉居病死 祿居胎絶 故水欲其去 若來則乖厲之氣隨至矣 巨居衰 輔弼佐之 此物出入之門 故其水來去皆宜 破居墓 此氣藏蓄之地 故其水不宜來去 其理皆可考如此云云

쪽수▶P41-2一年間의 巨役을 一朝一夕에 깨트린 河崙은 他日 太宗朝에 首相의 位에까지 오른 人物이지만, 그 好學博識의 風, 特히 陰陽地理에 精通하였든 것은 太宗實錄(十六年 十一月)同人의 史傳 中에 『性好讀書 手不釋卷 (中略) 至於陰陽·醫術 星辰·地理 皆極其精』이라 하였음으로서 알 수 있다. 그런데 河崙의說의 根據가 되든 胡氏의 所謂 『水破長生』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意味하는 것인지? 그 理論을 追窮할진댄 自然 胡氏의 書에 質하여 볼 수밖에 없다. 胡氏의 書는 이때 河崙에 依하야 輸入되야 以來 朝鮮에 流行되는 同時에 風水學人의 受驗科目 中의 한 重要한 者로 되여오든 것이니, 그 冊▶P42-1은 지금 巷間에는 잘 얻어볼 수 없으나, 奎章閣圖書 中에 一本(朝鮮本)이 所藏되야 그 書의 內容을 調查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愉快하다고 생각한다. 書名은 즉 胡舜申地理新法이라고 하는 것인데, 實錄에는 胡舜申의 申字가 臣으로 되여있으나, 그것은 申臣二字의 音 相同으로 잘못된 것인 듯하다. 胡氏의 事蹟은 자세치 않으나 其書에 『奉議郎賜緋魚袋胡舜申撰』이라고 한 것을 보면 宋代의 有品文官이든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 序文·本論을 通하야 보면 그는 儒者文人으로서의 風格이 더 높든 이로 風水學에 精通하야 一家의 特色을 세운 이니, 그 所謂 新法이란 것은 五山(金木水火土) 生旺의 法則에 天上九星遊行의 法을 應用한 것에 不過한 것이다. 其書 上卷에 水論이라고 題한 데를 보면 左記의 一節이 보인다.

山靜物而屬陰 水動物而屬陽 陰道體常 陽生變化 故吉凶禍福見於水者尤急 蓋山如人之形體 水如人之血脈 人有形體生長枯榮 一資於血脈 血脈周流於一身之間 厥有度數 順而不差 則其人必康且强 逆而失節 則其人必病且亡矣 此自然之理 不易之道也 故是法必欲水之來去與山合然後爲吉 五山生旺死絶各有定方 大率欲水各自其吉方來 凶方去 貪居養生 武居官旺 故水欲其來 若去則衝敗生旺氣矣 文居沐冠廉居病死 祿居胎絶 故水欲其去 若來則乖厲之氣隨至矣 巨居衰 輔弼佐之 此物出入之門 故其水來去皆宜 破居墓 此氣藏蓄之地 故其水不宜來去 其理皆可考如此云云

아래 문은 소위 水破長生 衰敗立至의 설을 음미하는 데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개소이니, 그 대의를 말하면—산(山)은 음이요 수(水)는 양이다. 양은 변화를 작용하므로 길흉화복이 수에 관계되는 바— 가장 많고 또 빠르다. 대개 지리를 인간에 비하면, 산은 사람의 형체와 같고 수는 사람의 혈맥과 같은 것이다. 혈액이 체내에서 순환하여 신진대사의 적당함을 얻으면 인체의 건강을 보전할 수 있지만, 만일 그러하지 못하면 병사를 면하지 못한다. 산수의 이치도 마찬가지여 수(혈액)의 래거는 오산의 길흉정방과 상합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나니, 즉 수가 길방에서 와서 흉방으로 흘러가면 생의 기를 산출하여 길복한 땅을 이룰 수 있으되 만일 이와 반대로 흉방에서 흘러와서 길방으로 흘러갈 것 같으면 생왕의 기를 깨뜨려 흉화의 결과를 야기한다는 말이다. 예하면 오산생왕의 법으로 탐랑(성)이 양생(방)에 있고 무곡성이 관왕방에 있는 ‘길방’으로부터는 물이 와야 할 것이요 반대로 거기에 흘러가서는 아니되며 문곡(성)이 목관(방)에 있고 염정(성)이 병사(방)에 있고 녹존(성)이 태절(방)에 있는 ‘흉방’에는 물이 흘러가야 될 것이요 거기로부터 흘러와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쪽수▶P42-2左文은 所謂 『水破長生 衰敗立至』의 說을 吟味하는 데 가장 適切하다고 생각되는 箇所이니, 그 大意를 말하면—山은 陰이요 水는 陽이다. 陽은 變化를 作用하므로 吉凶禍福이 水에 關係되는 바— 가장 많고 또 速하다. 대개 地理를 人間에 譬하면, 山은 人의 形體와 같고 水는 人의 血脈과 같은 것이다. 血液이 體內에서 循還하야 新陳代謝의 適當함을 얻으면 人體의 健康을 保全할 수 있지마는, 만일 그러하지 못하면 病死를 免하지 못한다. 山水의 理도 亦然하야 ▶P43-1水(血液)의 來去는 五山의 吉凶定方과 相合치 아니하면 아니되나니, 즉 水가 吉方에서 來하야 凶方으로 흘러가면 生의 氣를 產出하야 吉福한 地를 이룰 수 있으되 만일 이와 反對로 凶方에서 흘러와서 吉方으로 흘러갈 것 같으면 生旺의 氣를 衝破하야 凶禍의 結果를 惹起한다는 말이다. 例하면 五山生旺의 法으로 貪狼(星)이 養生(方)에 있고 武曲星이 官旺方에 있는 『吉方』으로부터는 물이 와야 할 것이요 反對로 거기에 흘러가서는 아니되며 文曲(星)이 沐冠(方)에 있고 廉貞(星)이 病死(方)에 있고 祿存(星)이 胎絕(方)에 있는 『凶方』에는 물이 흘러가야 될 것이요 거기로부터 흘러와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상기지리서)성방길흉에 대하여 알기 쉽게 표시하면 이러하다.
쪽수▶P43-2다시 (上記地理書)星方吉凶에 對하야 알기 쉽게 表示하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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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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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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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성방과 실제의 24 방위와의 관계는 어떠하냐 하면 이것은 산의 내용(맥) 소득의 괘와 선국 여하(좌우)에 의하여 정하여지는 것이다. 예하면 계룡산이 하륜의 말한 바와 같이 山自乾來라고 하면, 건(서북)은 오행 중의 금에 속하여 금산이 되며, 국법은 좌로 돌아 있으므로 이를 좌선국이라고 한다. 좌선국의 금의 기포(금기의 시)는 인(동북)에서 시작하여 절·태·양·생·목·관·관·왕·쇠·병·사·묘의 순서로 돌아가는 것으로 지금 그 ‘건’괘에 의한 절태법을 도로 표시하면 우와 같다. 그런즉 산이 건방에서 온 계룡산 땅(원맥은 실상 남방으로부터다)에 있어서는 그림에서 보인 것 과 같이 진손사방(동남방)이 길방인 양생(탐랑)이 되고, 신경유방(서방)이 또한 길방인 관왕(무곡)이 된다. 이 지리법의 이론으로 보면 계룡산의 수는 이 두 길방 중 어느 편에든지 흘러가서는 길기를 깨트리(즉 수파장생)는 고로 좋지 못하다는 것이어니와 실제 계룡산의 수는 하륜의 말함과 같이 장생(양생)방인 손방에 흘러가서 결국 기지는 소위 水破長生衰敗立至의 땅이 됨을 불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쪽수▶P44-2右 星方과 실제의 二十四 方位와의 關係는 어떠하냐 하면 이것은 山의 來龍(脈) 所得의 卦와 旋局 如何(左右)에 의하여 定하여지는 것이다. 例하면 鷄龍山이 河崙의 말한 바와 같이 『山自乾來』라고 하면, 乾(西北)은 五行 中의 金에 屬하야 金山이 되며, 局法은 左로 旋하여 있으므로 이를 左旋局이라고 한다. 左旋局의 金의 起胞(金氣의 始)는 寅(東北)에서 始作하여 絶·胎·養·生·沐·冠·官·旺·衰·病·死·墓의 順序로 돌아가는 것으로 지금 그 『乾』卦에 의한 絶胎法을 圖로 표시하면 우와 같다. 그런즉 山이 乾方에서 온 鷄龍山地(遠脈은 실상南 方으로부터다)에 있어서는 圖示와 같이 辰巽巳方(東南方)이 吉方인 養生(貪狼)이 되고, 申庚酉方(西方)이 또한 吉方인 官旺(武曲)이 된다. 이 地理法의 理論으로 보면 鷄龍山의 水는 이 두(二) 吉方 中 어느 편에던지 흘러가서는 吉氣를 깨트리(即 水破長生)는 고로 좋지 못하다는 것이어니와 실제 鷄龍山의 水는 河崙의 말함과 같이 長生(養生)方인 巽方에 흘러가서 結局 其地는 所謂 『水破長生衰敗立至』의 地가 됨을 不免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 지리서 하권에 ‘상지론(相地論)’이라고 한 조를 보면

乾山而廉破 山高水來 水皆出巽巳 此爲凶甚矣

라고 한 1절이 있지만, 역시 상술한 이론에 의하여 발한 말로서, 건산이 염정파군의 형세(고최한 산세를 이름)일 것 같으면 수류의 방향은 선사방에 있어 흉함이 심하다고 한다.
쪽수▶P44-3또 그 地理書 下卷에 『相地論』이라고 한 條를 보면▶P45-1

乾山而廉破 山高水來 水皆出巽巳 此爲凶甚矣

라고 한 一節이 있지만, 역시 上述한 理論에 依하야 發한 말로서, 乾山이 廉貞破軍의 形勢(高崔한 山勢를 云함)일 것 같으면 水流의 方向은 選巳方에 있어 凶함이 甚하다고 한다.
이렇게 논하여 보면 하륜의 계룡산 불가설은 상당히 깊이 호씨의 서를 참고하고 주장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거니와, 하륜의 설이 더욱 효과를 주하게 된 것은 기술한 바와 같이 호씨의 산수래거에 관한 이론을 전조 여러 산릉의 형세길흉에 응용고험하여 부합한바가 많은 데 귀의된 것이다. 따라서 하륜의 설은 그 제1조건에 “계룡이 중앙에서 벗어졌다”라고 하는 것보다도 그 제2조건에 “풍수지리상의 결함이 있다”라는 논난으로 그 공을 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쪽수▶P45-2이렇게 論하야 보면 河崙의 鷄龍山 不可說은 相當히 깊이 胡氏의 書를 參考하고 主張한 것이라고 認定할 수밖에 없거니와, 河崙의 說이 더욱 效를 奏하게 된 것은 旣述한 바와 같이 胡氏의 山水來去에 關한 理論을 前朝 諸山陵의 形勢吉凶에 應用考驗하야 符合한바ㅣ 많은 데 歸依된 것이다. 따라서 河崙의 說은 그 第一條件에 『鷄龍이 中央에서 버서젔다』고 하는 것보다도 그 第二條件에 『風水地理上의 缺陷이 있다』는 論難으로 그 功을 奏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 모악천도설과 반대론
쪽수▶P45-3(丙) 母嶽遷都說과 反對論
하륜의 주언에 의하여 계룡산의 신도 공사를 중도에 정파한 태조께서는 전조 이래의 서운관 소장의 비록을 거의 다 하륜에게 하사하시며 그것을 고열하여 새로히 천도의 땅을 택정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익3년 2월의 실록 기사를 보면, 무자(18일)조에는

遣左侍中趙浚·領三司事權仲和等十一人 率書雲觀員吏等 賷地理祕錄撮要 相遷都之地于母岳南

이라 하고, 동월 癸己(二13일)조에는

領三司事權仲和·左侍中趙浚等 回自母岳 啓曰母岳南地狹 不可遷都 唯左右道都 觀察使河崙獨曰 母岳明堂 雖似狹窄 然以松都康安殿․平壤長樂宮觀之 則稍爲寬廣 且於前朝祕錄及中國通行地理之法 皆合 上曰予欲觀覽以定之

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그 후 천도의 땅으로 물의된 것은 모악(안산)의 남지 지금의 경성부 연희정‧신촌정 일대로서, 이미 대신 상지사 등을 보내어 실지 시찰까지 시킨 것이니 대체 이 모악설을 처음으로 발설한 이가 누구냐 하면 그는 또한 하륜이라고 인정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위 계사조 기사에 상지관 등의 복명이 대다수는 그 땅이 협착하여서 불가하다고 함에 대하여, 유독 하륜은 반대하기를 모악명당이 얼마쯤 좁은 것같이 보이지만 개성의 강안전(지금 만월대 부근)과 평양의 장락궁(금 만수대하 상수리)에 비하면 다소 관광(寬廣)할 뿐 아니라 풍수상의 조건이 전조 비록이나 당시 유행하는 중국 지리법에 부합한다고 함으로써다. 자세히 말하면 하륜은 앞서 태조께서 주신 전조 비록을 열람하고 고구한 결과, 모악의 남지가 비기에 보인 여러 조건에 부합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태조께 상주하였으므로 인하여 상술한 바와 같이 상지관 등(물론 하륜도 그 중에 참가한 듯)을 파견하게 된 것인 듯하다. 권중화·조준 등의 母岳南地狹 不可遷都의 설에 대한 하륜의 변박은 태조의 경청하신 바 되어 予欲親覽以定之라는 태조의 말씀이 위 기사 끝에 보이고, 또한 실록 동년 6월조에 上敎都評議使司曰 母岳新都之地 前旣命十餘宰相觀之 今旣一定 而書雲觀員劉旱雨․李陽達等 乃曰 以臣所學觀之 非定都之地也라 하였다. 이 교를 생각하면 태조께서는 차차 모악의 땅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신 데 대하여 서운관원인 유한우, 이양달 등은 의연히 그 땅을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어디까지든지 반대의 태도를 취한 것 같다. 그러므로 태조는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길지를 구하게 하였더니 유한우는 선점(위치 미상)의 땅을 후보지로 제의하거늘 즉시 대신 등을 보내어 실지를 관찰케 하였던바, 그곳도 또한 불가하다는 평이 있어, 남은과 같은 이는 이양달 등을 꾸짖되 “너희 등은 지리의 술을 끼고 왕왕 불칭의 땅으로서 도읍할 만한 땅이라 하여 상총을 모폐하니 마땅히 후일 징계치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라고까지 하였다. 이때 도평의사사에서도 또한 천도 후보지를 불일사(개성의 동) 역내에 상(相)하였으나 역시 부적당하다고 하였다.
쪽수▶P45-4河崙의 奏言에 依하야 鷄龍山의 新都 工事를 中途에 停罷한 太祖께서는 前朝 以來의 書雲觀 所藏의 秘錄을 거이 다 河崙에게 下賜하시며 그것을 考閱하야 새로히 遷都의 地를 擇定하라고 命하였다. 그런데 翌三年 二月의 實錄 記事를 보면, 戊子(十八日)條에는

遣左侍中趙浚·領三司事權仲和等十一人 率書雲觀員吏等 賷地理祕錄撮要 相遷都之地于母岳南

이라 하고, 同月 癸己(二十三日)條에는

領三司事權仲和·左侍中趙浚等 回自母岳 啓曰母岳南地狹 不可遷都 唯左右道都 觀察使河崙獨曰 母岳明堂 雖似狹窄 ▶P46然以松都康安殿․平壤長樂宮觀之 則稍爲寬廣 且於前朝祕錄及中國通行地理之法 皆合 上曰予欲觀覽以定之

라 하였다. 이에 依하면 其後 遷都의 地로 物議된 것은 母岳(鞍山)의 南地 지금의 京城府 延禧町‧新村町 一帶로서, 이미 大臣 相地師 等을 보내여 實地 視察까지 시킨 것이니 대체 이 母岳說을 처음으로 發說한 이가 누구냐 하면 그는 또한 河崙이라고 認定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왜 그러냐 하면 右 癸巳條 記事에 相地官 等의 復命이 大多數는 其地가 狹窄하여서 不可하다고 함에 對하야, 唯獨 河崙은 反對하기를 母岳明堂이 얼마쯤 좁은 것같이 보이지만 開城의 康安殿(今 滿月臺 附近)과 平壤의 長樂宮(今 萬壽臺下 上需里)에 比하면 多少 寬廣할 뿐 아니라 風水上의 條件이 前朝 秘錄이나 當時 流行하는 中國 地理法에 符合한다고 함으로써다. 詳言하면 河崙은 앞서 太祖께서 주신 前朝 秘錄을 閱覽하고 考究한 結果, 母岳의 南地가 祕記에 보인 諸條件에 符合한 것으로 認하고, 그것을 太祖께 上奏하였으므로 因하야 上述한 바와 같이 相地官 等(勿論 河崙도 其中에 參加한 듯)을 派遣하게 된 것인 듯하다. 權仲和·趙浚 等의 『母岳南地狹 不可遷都』의 說에 對한 河崙의 辨駁은 太祖의 傾聽하신 바 되야 『予欲親覽以定之』라는 太祖의 말삼이 右記事 끝에 보이고, 또한 實錄 同年 六月條에 『上敎都評議使司曰 母岳新都之地 前旣命十餘宰相觀之 今旣一定 而書雲觀員劉旱雨․李陽達等 乃曰 以臣所學觀之 非定都之地也』라 하였다. 此教를 考하면 太祖께서는 차차 母岳의 地에 都를 定하려고 하신 데 對하야 書雲觀員인 劉旱雨 李陽達 等은 依然히 其地를 不可하다고 主張하야 어데까지든지 反對의 態度를 取한 것 같다. 그러므로 太祖는 此二人으로 하여금 다시 吉地를 求하게 하였더니 劉旱雨는 鐥岾(位置 未詳)의 地를 候補地로 提議하거늘 即時 大臣 等을 보내여 實地를 觀察케 하였든바, 그곳도 또한 不可하다는 評이 있어, 南誾과 같은 이는 李陽達 等을 꾸짖되 『汝等은 地理의 術을 挾하야 往往 不稱의 地로써 都할 만한 地라 하야 上聰을 冒蔽하니 맛당히 後을日 懲戒치 아니 하면 아니되겠▶P47-1다』고까지 하였다. 이때 都評議使司에서도 또한 遷都 候補地를 佛日寺(開城의 東) 域內에 相하였으나 역시 不適當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의론이 각출하여 귀정을 보지 못하고 한갓 시일 옮기게 되므로 태조께서는 도평의사사의 계청에 의하여 이 해(3년) 7월 12일에 음양산정도감이라는 임시관청을 설하게 하시고, 권중화, 정도전, 성석린, 남은, 정총, 하륜 등 제신으로 하여금 서운관원과 더불어 모든 지리도참의 서를 모아 참고산정하여, 이로써 신중히 건도의 땅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는 앞서부터 친람하시려고 하는 모악의 형세를 하루라도 속히 안하에 놓고 택정하시려고 하여, 음양서산정의 종료를 기다리지 않고, 8월 8일에 도평의사사 및 기타 문무제신을 거느리고 거가를 몰아 목적지에 향하였다.
쪽수▶P47-2이처럼 議論이 各出하야 歸正을 보지 못하고 한갓 時 日遷하게 되므로 太祖께서는 都評議使司의 啓請에 依하야 이 해(三年) 七月 十二日에 陰陽刪定都監이라는 臨時官廳을 設하게 하시고, 權仲和 鄭道傳 成石璘 南誾 鄭摠 河崙 等 諸臣으로 하여금 書雲觀員과 더부러 모든 地理圖讖의 書를 集하야 參考刪定하야, 써 慎重히 建都의 地를 求하려고 하였다. 이때 太祖는 앞서부터 親覽하시려고 하는 母岳의 形勢를 一日이라도 速히 眼下에 놓고 擇定하시려고 하야, 陰陽書刪定의 終了를 기다리지 않고, 八月 八日에 都評議使司 及其他文武諸臣을 거느리고 車駕를 모라 目的地에 向하였다.
8월 11일 모악에 이르러 신도의 땅을 상찰하시게 되었다. 판서운관사 윤신달 서운부정 유한우 등은 진언하되 “이 땅은 도읍함에 부적당하다”하고 반대의 의사를 표하였다. 이때 태조와 한우와의 사이에는 잠깐 분연한 문답이 왕래하였으니, 즉 실록에 다음과 같이 보이어 있다.

(上曰 “汝等妄相是非 此地若有不可 則考諸本文以聞” 莘達等退 相與論議) 上召旱雨 問之曰 “此地竟不可乎” 對曰 “以臣所見 實爲不可” 上曰 “此地旣不可 何地爲可” 旱雨對曰 “臣不知” 上怒曰 “汝爲書雲觀 謂之不知 欺誰歟 松都地氣衰旺之說 汝不聞乎” 旱雨對曰 “此 圖讖所說 臣但學地理 未知圖讖” 上曰 “古人圖讖亦因地理而言 豈憑虛無據而言之 且言汝心所可者” 旱雨對曰 “前朝太祖 相松山明堂作宮闕 而中葉已後 明堂久廢 君王屢徙離宮 臣疑明堂地德不衰 宜復作闕 仍都松京” 上曰 “予將決意遷都 若曰近境之內 更無吉地 則三國所都 亦爲吉地 宜合議以聞”

또 여기에 계속하여

乃謂左侍中趙浚·右侍中金士衡曰 “書雲觀在前朝之季 謂松都地德已衰 數上書請遷漢陽 近以鷄龍爲可都 動衆興役 勞擾生民 今又以此地爲可都 及其來觀 則旱雨等曰不可 反以松都明堂爲可 互相爭論 以誣國家 是曾無所懲故也 卿等趣令書雲員吏 各陳可都之地以聞” 兼判書雲觀事崔融·及尹莘達·劉旱雨等 上書以爲 一國之內扶蘇明堂松都爲上 南京漢陽次之 是夕 上次于母岳下

라고 하였다. 위의 양 기사에서 태조의 천도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경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이와 같이 조급히 천도하시려고 하는 이유가 항상 송도지덕쇠왕의 설에 의존하던 것을 지금 한층 명백히 간파된다. 그런데 서법관원 등의 의견은 어디까지든지 하륜의 주창한 모악설에는 반대하여 도리어 구경 송악 제일의 길지, 남경 한양을 그 다음으로 삼는 데 거의 일치하였던 것 같다. 위 태조의 (조준 등에게 이르신 말씀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여계(麗季)에는 서운관원이 항상 송도지덕의 쇠해감을 말하여 한양에 천도를 청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송도를 ‘지덕불쇠’의 땅이라고 하니 실로 선후당착의 언행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야말로 국가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생각컨대 서운관원의 이르는 말은 반드시 깊은 논거와 확실한 정견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단지 시의염량으로 대세의 기울어짐을 살피어 이러니 저러니 하는 데 불과하다고 하여도 무방하다. 그것은 이때 모악설을 반대한 서운관원의 1인인 윤신달이 후에 태종조에 이르러는 번연히 이 땅의 적호함을 역설한 바로써 명백하다(후장 참조). 또 당시 정신간의 여론이 대개 천도 불찬성의 경향을 띠었던 것은 다음에 열거할 바와 같이 엄연한 사실이니, 그것을 참고하여 보아도 사반과함이 있다.
쪽수▶P47-3八月 十一日 母岳에 이르러 新都의 地를 相察하시게 되였다. 判書雲觀事 尹莘達 書雲副正 劉旱雨 等은 進言하되 『此地는 都함에 不適當하다』하고 反對의 意思를 表하였다. 이때 太祖와 旱雨와의 사이에는 暫間 紛然한 問答이 往來하였으니, 즉 實錄에 다음과 같이 보이어 있다.

(上曰 『汝等妄相是非 此地若有不可 則考諸本文以聞』 莘達等退 相與論議) 上召旱雨 問之曰 『此地竟不可乎』 對曰 『以臣所見 實爲不可』 上曰 『此地旣不可 何地爲可』 旱雨對曰 『臣不知』 上怒曰 『汝爲書雲觀 謂之不知 欺誰歟 松都地氣衰旺之說 汝不聞乎』 旱雨對曰 『此 圖讖所說 臣但學地理 未知圖讖』 上曰 『古人圖讖亦因地理而言 豈憑虛無據而言之 且言汝心所可者』 旱雨對曰 『前朝太祖 相松山明堂作宮闕 而中葉已後 明堂久廢 君王屢徙離宮 臣疑明堂地德不衰 宜復作闕 仍都松京』 上曰 『予將決意遷都 若曰近境之內 更無吉地 則三國所▶P48都 亦爲吉地 宜合議以聞』

또 여기에 繼續하야

乃謂左侍中趙浚·右侍中金士衡曰 『書雲觀在前朝之季 謂松都地德已衰 數上書請遷漢陽 近以鷄龍爲可都 動衆興役 勞擾生民 今又以此地爲可都 及其來觀 則旱雨等曰不可 反以松都明堂爲可 互相爭論 以誣國家 是曾無所懲故也 卿等趣令書雲員吏 各陳可都之地以聞』 兼判書雲觀事崔融·及尹莘達·劉旱雨等 上書以爲 一國之內扶蘇明堂松都爲上 南京漢陽次之 是夕 上次于母岳下

라고 하였다. 右의 兩 記事에서 太祖의 遷都에 對한 意志가 얼마나 强硬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同時에 이와 같이 燥急히 遷都하시려고 하는 理由가 항상 松都地德衰旺의 說에 存하던 것을 지금 一層 明白히 看破된다. 그런데 書法觀員 等의 意見은 어데까지든지 河崙의 主唱한 母岳說에는 反對하야 도리어 舊京松嶽 第一의 吉地, 南京 漢陽을 其次로 삼는데 거이 一致하였던 것 같다. 右 太祖의 (趙浚 等에게 이르신 말씀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麗季에는 書雲觀員이 항상 松都地德의 衰해감을 말하야 漢陽에 遷都를 請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松都를 『地德不衰』의 地라고 하니 실로 先後撞着의 言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야말로 國家를 誣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생각컨대 書雲觀員의 이르는 말은 반드시 깊은 論據와 確實한 定見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단지 時宜炎凉으로 大勢의 기우러짐을 察하야 이러니 저러니 하는 데 不過하다고 하여도 無妨하다. 그것은 이때 母岳說을 反對한 書雲觀員의 一人인 尹莘達이 後에 太宗朝에 至하여는 翻然히 此地의 適好할을 力說한 바로써 明白하다(後章 參照). 또 當時 廷臣間의 輿論이 대개 遷都不贊成의 傾向을 띄였던 것은 다음에 列擧할 바와 같이 嚴然한 事實이니, 그것을 參考하여 보아도 思半過함이 있다.
익12일에 태조께서는 여러 재상에 향하여 천도의 땅에 대하여 각각 의견을 물었는데, 제신의 응답은 대요가 아래와 같다.
쪽수▶P49-1翌十二日에 太祖께서는 諸宰相에 向하야 遷都의 地에 就하야 各各 意見을 徵하였는데, 諸臣의 應答은 大要가 左와 같다.
(A) 판삼사사 정도전은 모악은 정확히 일국의 중앙에 있어서 교통도 편하지만, 단지 유감은 한 동내에 안으로는 궁침을, 밖으로는 조시종사를 들일 수 없으니, 왕의 거중어경의 땅은 아니다. 음양술수의 설은 알지 못하나 중국과 같은 대역대의 제도로도 관중(서도) 낙양(동도) 금릉(남경) 연경(북경) 등 네 곳에 더 지나지 않고 구도를 잉습하는 예가 많았으며, 또 제왕의 도회를 반드시 술수로써만 셈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민력을 휴양하고 인사를 굽어 살필 때이며, 음양사의 소위 지기성쇠설은 반드시 그 인심에 각득처가 있는 것이 아니요, 다 고인의 설을 전용함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 모악불가설과 천도상조론을 창하였다.
쪽수▶P49-2(A) 判三司事 鄭道傳은 母岳은 正히 一國의 中央에 있어서 交通도 便하지만, 단지 遺憾은 一洞內에 內 로는 宮寢을, 外로는 朝市宗社를 容할 수 없으니, 王者의 居重御輕의 地는 아니다. 陰陽術數의 說은 아지 못하나 中國과 같은 大歷代의 帝都로도 關中(西都) 洛陽(東都) 金陵(南京) 燕京(北京) 等 四處에 더 지나지 않고 舊都를 仍襲하는 例가 많았으며, 또 帝王의 都會를 반드시 術數로써만 計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民力을 休養하고 人事를 俯察할 때이며, 陰陽師의 所謂 地氣盛衰說은 반드시 其人心에 覺得處가 있는 것이 아니요, 다 古人의 說을 傳用함에 不過한 것이라고 하야, 母岳不可說과 遷都尙早論을 唱하였다.
(B) 문하시중찬성사 성석린도 이 땅(모악)은 산수의 모임과 조운의 편리가 있어 가하다고 할 수 있지만, 명당(좌처)이 경착하고 후산이 저미하여 규국이 왕의 도읍에는 불합하며, 개경의 부소산수에는 혹은 역처(배역)가 있다 하여 자래좌우 소순주의 설이 있었은즉 지금 부소명당(만월대)을 본궐로 하고 그 근처에를 복(卜)하여 순주의 곳으로 하면 행심(幸甚)하다고 하여, 역시 모악불가설 및 천도상조론을 고집하였다.
쪽수▶P49-3(B) 門下侍中贊成事 成石璘도 此地(母岳)는 山水의 會와 漕運의 便이 있어 可하다고 할 수 있지만, 明堂(坐處)이 傾窄하고 後山이 低微하야 規局이 王者의 都邑에는 不合하며, 開京의 扶蘇山水에는 或은 逆處(背逆)가 있다 하야 自來左右 蘇巡住의 說이 있었은즉 지금 扶蘇明堂(滿月臺)을 本闕로 하고 그 近處에를 卜하야 巡住의 所로 하면 幸甚하다고 하야, 亦是 母岳不可說 及遷都尙早論을 執하였다.
(C) 정당문학 정총은 또한 모악반대론자의 1인으로서 이르기를 부소는 도선이 “이곳에 도읍하면 삼토(삼한)을 통유하리라”라고 하였기 때문에, 전조 시조가 처음으로 여기에 도읍하여 과연 통삼하고, 이후 500년을 지나 마치었지만, 그렇게 마친 것은 운수의 소치요 지덕의 관계는 아니니 개경이라도 무방할 듯하며, 모악은 명당이 심협하고 주산이 함닉하고 수구가 관쇄치 않다. 이것을 길지라고 하면 어찌하여 고인이 이용치 아니하였을까? 부득이 개경을 버리고 달리 구한다면 널리 이를 탐멱함이 가하다고 주창하였다.
쪽수▶P49-4(C) 政堂文學 鄭摠은 또한 母岳反對論者의 一人으로서 이르기를 扶蘇는 道詵이 『이곳에 都하면 三土(三韓)을 統有하리라』고 하였기 때문에, 前朝 始祖가 처음으로 여기에 都하야 과연 統三하고, 以後 五百年을 經하야 終하였지만, 그렇게 終한 것은 運數의 所致요 地德의 關係는 아니니 開京이라도 無妨할 듯하며, 母岳은 明堂이 甚狹하고 主山이 陷溺하고 水口가 關鎖치 않다. 이것을 吉地라고 하면 어찌하야 古人이 利用치 아니하였을까? 不得已 開京을 버리고 달▶P50-1리 求한다면 널리 이를 探覔함이 可하다고 奏唱하였다.
(D) 그 다음 모악천도론을 주장하는 첨서중추원사 하륜은 왈 모악의 형세가 좀 비협하기는 하지만 저 향국(享國)이 장구하던 계림(경주)과 평양의 궁궐 터에 비하면 실제 관광(관광)할 뿐 아니라 국내 중앙에 위치하고 조운도 통하고 산하가 표리하여 있으며, 또 동방 전현의 밀설(비기)에 의거하여 보더라도 서로 계합되는 점이 많고, 중국 지리 제가의 산수조취의 설과도 서로 가가운운 점이 있는 것은 전일에도 말한 바이다. 만일 전현의 설을 써서 만세의 기틀을 세우려면 모악보다 나은 곳이 다시 없으리라 하였고.
쪽수▶P50-2(D) 그 다음 母岳遷都論을 主張하는 僉書中樞院事 河崙은 曰 母岳의 形勢가 좀 卑狹하기는 하지만 저 享國이 長久하든 鷄林(慶州)과 平壤의 宮闕 터에 比하면 實際 寬廣할 뿐 아니라 國內 中央에 位置하고 漕運도 通하고 山河가 表裡하여있으며, 또 東方 前賢의 密說(秘記)에 據하여 보더라도 서로 契合되는 點이 많고, 中國 地理諸家의 山水朝聚의 說과도 相近한 點이 있는 것은 前日에도 말한 바이다. 만일 前賢의 說을 用하야 萬世의 基를 세우려면 母岳보다 나은 곳이 다시 없으리라 하였고.
(E) 중추원학사 이직은 동방밀설에 가로되 ‘삼각남면’, 가로되 ‘임한강’, 또 가로되 ‘모산’이라고 한 것은, 다 이 땅을 가리켜 이른 바이나, 대저 복지천도라는 것은 중대한 일인즉 반드시 천에 응하고 인에 순한 후 이것을 행할 것이며, 모악명당은 자기도 역시 좁다고 생각된다 하여, 결국은 모악천도에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쪽수▶P50-3(E) 中樞院學士 李稷은 東方密說에 曰 『三角南面』, 曰 『臨漢江』, 又曰 『母山』이라고 한 것은, 다 此地를 가리처 이른 바이나, 大抵 卜地 遷都라는 것은 重大한 일인즉 반드시 天에 應하고 人에 順한 後 이것을 行할 것이며, 母岳明堂은 自己도 역시 좁다고 생각된다 하야, 結局은 母岳遷都에 反對의 意思를 表示하였다.
이와 같이 하륜을 제한 이외의 여러 재상은 서운관원 등과 같이 다 모악 내지 천도를 불가하다고 하는 의견으로서, 모악의 지리상 결함은 第一 국면이 좁고 후산이 얕고 수구(한강으로 들어가는 작은 천 입구)가 관쇄(환포)되지 아니하다는 데 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실지에 가서 보더라도 모악 남한강 이북의 땅은 왕의 도읍로서는 좀 협애한 관이 있고 그리고 후산이나 수구도 반대론자의 이르는 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풍수상 이론으로는 주산이 높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되고 명당(국면)이 관광(寬廣)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되고 수구가 환포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하륜의 소위 ‘동방전현밀설’은 즉 이직의 이른바 ‘동방밀설’ 그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저 고려 일대를 풍미하던 도선밀(비)사와 같은 비기류에 불과할 것이며, 그 밀기(이직이 인용한 바)에 ‘삼각남면’이라든지 ‘임한강’이라는 것은 결국 모악과 같은 명당의 땅이가 삼각산 남에 있어 한강에 임하여 있다는 비밀문자로서, 하륜의 언론은 대개 여기에 근거를 두어 “실지와 고문이 서로 부합하니 신도의 땅을 이밖에 구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것이다.
쪽수▶P50-4이와 같이 河崙을 除한 以外의 諸宰相은 書雲觀員 等과 같이 다 母岳乃至遷都를 不可하다고 하는 意見으로서, 母岳의 地理上 缺陷은 第一局面이 좁고 後山이 얕고 水口(漢江으로 入하는 小川口)가 關鎖(環抱)되지 아니하다는 데 있다. 事實 지금 우리가 實地에 가서 보더라도 母岳 南漢江 以北의 地는 王者의 都로서는 좀 狹隘한 觀이 있고 그리고 後山이나 水口도 反對論者의 이르는 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風水上 理論으로는 主山이 높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되고 明堂(局面)이 寬廣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되고 水口가 環抱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河崙의 所謂 『東方前賢密說』은 즉 李稷의 이른바 『東方密說』 그것을 指稱하는 것으로 저 高麗 一代를 風靡하든 道詵密(祕)祀와 같은 祕記類에 不過할 것이며, 그 密記(李稷 所引)에 『三角南面』이라든지 『臨漢江』이라는 것은 結局 母岳과 같은 明堂의 地가 三角山南에 있어 漢江에 臨▶P51-1하여 있다는 祕密文字로서, 河崙의 言論은 대개 여기에 根據를 두어 『實地와 古文이 서로 符合하니 新都의 地를 이밖에 求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 이하 여러 재상 여러 지사는 상술한 바와 같이 다 이 모악천도론에 대하여서는 반대의 의견을 진술한 까닭에 태조의 희망과 기대는 또다시 미운(迷雲)에 잠기게 되었다. 그래서 태조께서는 불쾌한 안색을 띄워 予將遷都決疑於昭格殿이라고 한 후, 곧 거가를 돌이키어 도중 남경(지금 경성)에 들리게 되었다. 소격전(송도 소재)은 천지성신의 초제를 행하는 곳이니, 제신의 이론에 불만을 품은 태조께서는 이번에는 천지성신의 신명에 소원하여 천도의 가부길흉을 결정하고 싶다고 생각하신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모악 친상은 전혀 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쪽수▶P51-2그런데 鄭道傳 以下 諸宰相 諸地師는 上述한 바와 같이 다 이 母岳遷都論에 對하여서는 反對의 意見을 進述한 까닭에 太祖의 希望과 期待는 또다시 迷雲에 잠기게 되였다. 그래서 太祖께서는 不快한 顏色을 띄워 『予將遷都決疑於昭格殿』이라고 한 후, 곧 車駕를 도리키어 途中 南京(지금 京城)에 들리게 되였다. 昭格殿(松都 所在)은 天地星辰의 醮祭를 行하는 곳이니, 諸臣의 異論에 不滿을 품은 太祖께서는 이번에는 天地星辰의 神明에 訴願하야 遷都의 可否吉凶을 決하고 싶다고 생각하신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母岳親相은 全혀 그 效果를 거두지 못하고 말었다.
(丁) 한양전도
쪽수▶P51-3(丁) 漢陽奠都
부소명당(송도)을 제하고는 남경의 땅이 길하다고 하는 서운관원의 의견에 의하여 태조께서는 익10일에 제신과 더불어 남경 구궁의 기지(지금 경복궁 뒤, 신무문 외지)를 상택하시고 산세를 관망하시면서 지사 윤신달 등에게 향하여 “이 땅은 어떠한가”하고 물으시었다. 신달이 대답하되 “우리나라 내에서는 송경을 상지로 하고, 이 땅을 그 다음로 할 것이지만 단지 유감되는 것은 건방(서북)이 저하하고 수천(소위 명당수)이 고학하여 있을 뿐이외다”고 아뢰매, 태조께서는 기뻐하사 “송경인들 어찌 부족한 곳이 없으랴마는, 지금 보니 이 땅의 형세는 참으로 왕도에 상응한다. 하물며 조운에 편하고 도리가 균하여 인사에도 또한 편리가 만치 아니하냐” 하고 말하시며 다시 왕사 자초(무학)에게 소견을 물으시니, 자초—대답하되 “이 땅은 사면이 높고 중앙이 평탄하여 성읍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나 중의에 좇아서 결정하소서”라고 하였다. 다시 여러 재상에게 문의하시매 제신은 한 입으로 “반드시 천도하실 바에는 이곳이 가장 적의할 듯합니다”고 아뢰였으나 유독 모악설을 고집하던 하륜만은 불찬성의 어조로 이 땅의 산세에는 비록 그러할 듯한 곳이 있다 할지라도 지리(풍수)법상으로 논하면 불가하다 하고, 그 불가한 이유는 특히 들어 말하지 아니하였던지 그 기사가 보이지 아니한다. 이에 태조는 중의를 좇아 한양을 다시 신도의 후보지로 결정하시게 되었다. 태조의 한양 정도의 형편은 대개 이러한 내력을 가지고 온 것이어니와, 서거정(1440-1488)의 筆苑雜記 卷二를 보면

余年九歲十歲時 與國初日者李陽達同里閈 李年八十五六 精神不衰 嘗語曰初定漢都時 河崙云 道詵記有漢水入明堂之語 宜建母岳南 必今衍禧宮之基 我(李)云 華岳(白岳)之南 實是大地 亦不害漢水入明堂之說 衆議不決 我云道詵密記曰 西有孔岩 又有丹書石壁 孔岩則於二地皆在 西須覔丹書可決 乃得丹書於仁王洞石上 字劃磨滅 漫不可識 然得此定議建都云云

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것은 즉 사가재 서거정 자신이 어릴 대에 국초 서운관의 1인인 이양달에게 들은 이야기라는데, 처음 한양에 정도할 제 하륜은 도선기에 “한수가 명당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므로 도읍을 모악의 남(지금 연희궁 터)에 건설함이 가하다고 하였으나 설자 이양달은 “화악 즉 백악의 남이라 하더라도 실로 대지이어서 한수입명당의 설에 조금도 어그러지지 아니한다” 하여, 중의가 오히려 결정치 못하거늘 자기가 또 이르기를 도선기에 “서에 공암이 있고 또 석벽에 단서(丹書)가 있다”고 하였으니, 공암은 한양과 모악 2개소에 다 같이 있으니, 두 땅의 서쪽에 단서를 구하여 이를 결정할 것이라 하여, 필경 그 단서를 한양 인왕동(지금의 청운, 신교 2동) 석벽 위에서 발견하고, 그 자획이 마멸하여 읽을 수 없었지만 어떻든 이것을 얻고 비로소 건도의 논의를 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서거정 자신이 이양달에게 직접 들은 사실이라 하니까 극히 귀중한 사료의 하나이나, 다만 공암에서 단서를 구하여 한양에 도읍을 정하게 되었다는 말은 실록에는 나의 조사한 바로는 기재가 보이지 아니한다. 물론 실록에 보이지 않는다고 곧 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러나 이러한 주의에 값할 만한 언론과 사실이 있었다고 하면 대개 실록에 기입이 되어있을 터인데 그것이 보이지 아니함은 실로 괴이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륜이 도선기에 소위 漢水入明堂설에 의하여 모악설 주장한 데 대하여 이양달은 이론을 기고 한양설을 고집한 것만은 실록과 같이 확실한 것이다.

또 한가지 말하여둘 것은 이중환의 팔역지(일명 택리지)에 昔羅僧道詵留記 繼王者李而都於漢陽 故麗中葉使尹瓘相地於白岳之南 仍種李 及繁茂 輒芟伐之 以壓勝 及我朝受禪 使僧無學定都邑之地 無學自白雲臺尋脈 到萬景 西南行至碑峰 有一石碑 大刻有 ‘無學誤尋到此’六字 即道詵所立也 無學遂改路 從萬景正南脈 直到白岳下見三脈合爲一坪 遂定宮城之址 即麗時種李處也라고 한 전설은 민간에 널리 행하는 이야기나, 황탄하기 짝이 없으니 무엇보다도 무학이 비봉에 이르러 도선의 세운 ‘無學誤尋到此’의 6자를 새긴 석비를 보고 길을 고쳐서 한양궁성 터를 정하였다는 그것이 더욱 절도할 말이다. 비봉의 석비는 추사 김정희가 발견한 바와 같이 도선의 비가 아니라 신라의 유명한 진흥왕의 순경비로 왕의 혁혁한 척경을 의미하는 귀중한 monument이어니와, 야사속설의 불경함이 이렇듯 심한 것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다음 앞 1절의 종이설은 아마 서거정의 필원잡기와 홍만종의 순오지 등에서 유래된 것인 듯한데, 이씨가 왕씨에 대신하여 한양에 도읍한다는 참설은 뒷장에 말한 바와 같이 고려조(적어도 말기)로부터 전하여오는 것이 명백하나 (물론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설은 오래 전부터 유행되어 고려 인종시에는 국구 이자겸이 ‘十八字(李자의 파획)참’에 의하여 불궤를 도모하려고 한 일이 있었고, 또 여말 우왕 14년에는 ‘木子(역시 李자의 파획)得國’의 동요가 있어서 군민노소를 불문하고 다 이를 노래하였다 한다. 전자는 고려사 이자겸전에 후자는 동사 오행지2에 보이어 있다) 그러나 고려에서 이 때문에 남경을 두고 이수(李樹)를 심어 무성하면 문득 이를 작벌하였다는 것은 물론 정사에는 전하지 않는 야설로 역시 신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설의 최고(最古) 기록인 필원잡기(卷一)에는 이를 以漢陽爲李氏都者 見於道詵圖讖 是以高麗建南京于漢陽 種李樹 擇李姓以尹 王亦歲一巡幸 埋龍鳳帳壓之라 쓰고 벌이설은 보이지 아니한다. 서씨의 이 종이설도 대체 무엇에 근거한 말인지 그 출처가 미상하고, 뿐만 아니라 고려에서는 이시 성 사람 이외의 사람으로 남경에 유수된 자가 무수히 기록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은 이러한 종이설 벌이설에도 귀를 기우리고 싶지 아니하며, 필경 이것은 단순히 이씨가 나라를 득한다는 설에 부회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쪽수▶P51-4扶蘇明堂(松都)을 除하고는 南京의 地가 吉하다고 하는 書雲觀員의 意見에 依하야 太祖께서는 翌十日에 諸臣과 더불어 南京 舊宮의 基地(今 景福宮 後, 神武門 外地)를 相宅하시고 山勢를 觀望하시면서 地師 尹莘達 等에게 向하야 『此地는 如何한가』하고 무르시었다. 莘達이 對答하되 『我國 內에서는 松京을 上地로 하고, 此地를 其次로 할 것이지만 단지 遺憾되는 것은 乾方(西北)이 低下하고 水泉(所謂 明堂水)이 枯涸하여 있을 뿐이외다』고 아뢰이매, 太祖께서는 기뻐하사 『松京인들 어찌 不足한 곳이 없으랴마는, 지금 보니 此地의 形勢는 참으로 王都에 相應한다. 況且 漕運에 便하고 道里가 均하야 人事에도 또한 便利가 만치 아니하냐』 하고 말하시며 다시 王師 自超(無學)에게 所見을 徵하신대, 自超—對▶P52答하되 『此地는 四面이 높고 中央이 平坦하야 城邑에 適合하다고 생각되나 衆議에 조차서 決定하소서』라고 하였다. 다시 諸宰相에게 問議하시매 諸臣은 一口로 『반드시 遷都하실 바에는 이곳이 가장 適宜할 듯합니다』고 아뢰였으나 唯獨 母岳說을 固執하든 河崙만은 不贊成의 語調로 此地의 山勢에는 비록 그러할 듯한 곳이 있다 할지라도 地理(風水)法上으로 論하면 不可하다 하고, 그 不可한 理由는 特히 들어 말하지 아니하였든지 그 記事가 보이지 아니한다. 이에 太祖는 衆議를 좇아 漢陽을 다시 新都의 候補地로 決定하시게 되였다. 太祖의 漢陽 定都의 次第는 대개 이러한 來歷을 가지고 온 것이어니와, 徐居正(一四四0-一四八八)의 筆苑雜記 卷二를 보면

余年九歲十歲時 與國初日者李陽達同里閈 李年八十五六 精神不衰 嘗語曰初定漢都時 河崙云 道詵記有漢水入明堂之語 宜建母岳南 必今衍禧宮之基 我(李)云 華岳(白岳)之南 實是大地 亦不害漢水入明堂之說 衆議不決 我云道詵密記曰 西有孔岩 又有丹書石壁 孔岩則於二地皆在 西須覔丹書可決 乃得丹書於仁王洞石上 字劃磨滅 漫不可識 然得此定議建都云云

이라는 記事가 있다. 이것은 즉 四佳齋 徐居正 自身이 幼時에 國初書雲觀의 一人인 李陽達에게 드른 이야기라는데, 처음 漢陽에 定都할제 河崙은 道詵記에 『漢水가 明堂에 入한다』고 하였으므로 都邑을 母岳의 南(今衍禧 宮址)에 建設함이 可하다고 하였으나 說者 李陽達은 『華岳 即白岳의 南이라 하더라도 實로 大地이어서 漢水入明堂의 說에 조금도 어그러지지 아니한다』 하야, 衆議가 오히려 決치 못하거늘 自己가 또 이르기를 道詵記에 『西에 孔岩이 있고 또石壁에 丹書가 있다』고 하였으니, 孔岩은 漢陽과 母岳 二箇所에 다 같이 있으니, 兩地의 西쪽에 丹書를 求하야 이를 決定할 것이라 하야, 畢竟 그 丹書를 漢陽 仁王洞(지금의 淸雲 新橋 兩洞) 石壁上에서 發見하고, 그 字劃이 磨滅하야 읽을 수 없었지만 어떠튼 이것▶P53을 얻고 비로소 建都의 議를 定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此記事는 徐居正 自身이 李陽達에게 直接 드른 事實이라 하니까 極히 貴重한 史料의 하나이나, 다만 孔岩에서 丹書를 求하야 漢陽에 都를 定하게 되었다는 말은 實錄에는 나의 調查한 바로는 記載가 보이지 아니한다. 勿論 實錄에 보이지 않는다고 곧 이를 否定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러나 이러한 注意에 値할 만한 言論과 事實이 있었다고 하면 대개 實錄에 記入이 되여있을 터인데 그것이 보이지 아니함은 실로 怪異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河崙이 道詵記에 所謂 『漢水入明堂』說에 依하야 母岳說 主張한 데 對하야 李陽達은 異論을 挾하고 漢陽說을 執한 것만은 實錄과 같이 確實한 것이다.

또 한가지 辯하여둘 것은 李重煥의 八域志(一名 擇里志)에 『昔羅僧道詵留記 繼王者李而都於漢陽 故麗中葉使尹瓘相地於白岳之南 仍種李 及繁茂 輒芟伐之 以壓勝 及我朝受禪 使僧無學定都邑之地 無學自白雲臺尋脈 到萬景 西南行至碑峰 有一石碑 大刻有 ‘無學誤尋到此’六字 即道詵所立也 無學遂改路 從萬景正南脈 直到白岳下見三脈合爲一坪 遂定宮城之址 即麗時種李處也』라고 한 傳說은 民間에 널리 行하는 이야기나, 荒誕하기 짝이 없으니 무엇보다도 無學이 碑峯에 이르러 道詵의 세운 『無學誤尋到此』의 六字를 색인 石碑를 보고 길을 곷어서 漢陽宮城 터를 定하였다는 그것이 더욱 絶倒할 말이다. 碑峯의 石碑는 秋史 金正喜가 發見한 바와 같이 道詵의 碑가 아니라 新羅의 有名한 眞興王의 巡境碑로 王의 赫々한 拓境을 意味하는 貴重한 monument이어니와, 野史俗說의 不經함이 이럿틋 甚한 것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다음 前 一節의 種李說은 아마 徐居正의 筆苑雜記와 洪萬宗의 旬五志 等에서 由來된 것인 듯한데, 李氏가 王氏에 대신하야 漢陽에 都한다는 讖說은 後章에 말한 바와 같이 麗朝(적어도 末期)로부터 傳하여오는 것이 明白하나 (勿論 李氏가 國 得한다는 說은 오래 前부터 流行되야 高麗 仁宗時▶P54-1에는 國舅 李資謙이 『十八字(李字의 破劃)讖』에 依하야 不軌를 圖하려고 한 일이 있었고, 또 麗末 禑王 十四年에는 木子(역시 李字의 破劃)得國』의 童謠가 있어서 軍民老少를 不問하고 다 이를 노래하였다 한다. 前者는 高麗史 李資謙傳에 後者는 同史 五行志二에 보이어 있다) 그러나 高麗에서 이 때문에 南京을 두고 李樹를 植하야 茂盛하면 문득 이를 斫伐하였다는 것은 勿論 正史에는 傳치 않는 野說로 역시 信用할 수 없는 것이다. 그 說의 最古記錄인 筆苑雜記(卷一)에는 이를 『以漢陽爲李氏都者 見於道詵圖讖 是以高麗建南京于漢陽 種李樹 擇李姓以尹 王亦歲一巡幸 埋龍鳳帳壓之』라 記하고 伐李說은 보이지 아니한다. 徐氏의 이 種李說도 대체 무엇에 根據한 말인지 그 出處가 未詳하고, 뿐만 아니라 高麗에서는 李姓人 以外의 사람으로 南京에 留守된 者가 無數히 記錄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吾人은 이러한 種李說 伐李說에도 귀를 기우리고 싶지 아니하며, 畢竟 이것은 單히 李氏가 國을 得한다는 說에 附會하야 이러난 것이 아니었든가 생각된다.

태조께서는 한양을 두 번째 신도의 후보지로 정하고, 마침내 거가를 돌이키었지만, 이는 반드시 정식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며, 비록 정식으로 확정되었더라도 어디든지 새로운 후보지가 나타나면 또다시 그리로 옮겨갈 모양이므로 확연부동의 결정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때 또 종종의 새 후보지가 각인각색으로 제창되었다. 혹은 적성 광실원의 동지가 밀서에 부합된다 하고, 혹은 장단의 도라산, 혹은 임진현의 신경(즉 고려조의 좌소 백악, 지금의 장단군 백학산으로 공민왕 때에 이궁을 일으켜 일시 이어하였던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신경이라 칭함)이 길지라고 하여, 태조께서는 환가 도중에 일일이 그곳을 역관하였으나, 어느 것이나 모두 불가하다는 평을 받고 말았다.
쪽수▶P54-2太祖께서는 漢陽을 두 번째 新都의 後補地로 定하고, 마침내 車駕를 도리키었지만, 이는 반드시 正式으로 確定된 것은 아니며, 비록 正式으로 確定되었드라도 어데던지 새로운 候補地가 나타나면 또다시 그리로 옮겨갈 모양이므로 確然不動의 決定은 아니었다. 그리하야 이때 또 種々의 新候補地가 各人各色으로 提唱되었다. 或은 積城廣實院의 東地가 密書에 符合된다 하고, 或은 長湍의 都羅山, 或은 臨津縣의 新京(即 麗朝의 左蘇 白岳, 지금의 長湍郡 白鶴山으로 恭愍王時에 離宮을 起하여 一時 移御하였든 때문에 時人이 新京이라 稱함)이 吉地라고 하여, 太祖께서는 還駕 途中에 一一히 그곳을 歷觀하였으나, 어느 것이나 모다 不可하다는 評을 받고 말었다.
이때 대신들 중에는 태조의 한양천도의 결의를 굳게 하여 이를 정식으로 결정하기 위하여 상서신청하는 이가 있었다. 즉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등은 다음과 같이 주청하였다.

(前略)恭惟殿下以盛德神功受天之命 奄有一國 旣更制度以建萬世之統 宜定厥都以立萬世之基 竊觀漢陽表裏山河 形勢之勝 自古所稱 四方道里之均 舟車所通 定都于玆 以永于後 允合天人之意

쪽수▶P54-3於是乎 大臣들 中에는 太祖의 漢陽遷都의 決意를 굳게 하야 이를 正式으로 決定하기 爲하야 上書申請하는 이가 있었▶P55-1다. 即 左政丞 趙浚과 右政丞 金士衡 等은 다음과 같이 奏請하였다.

(前略)恭惟殿下以盛德神功受天之命 奄有一國 旣更制度以建萬世之統 宜定厥都以立萬世之基 竊觀漢陽表裏山河 形勢之勝 自古所稱 四方道里之均 舟車所通 定都于玆 以永于後 允合天人之意

태조께서는 이에 응종하여, 마침내 9월에는 판문하부사 권중화, 판삼사사 정도전, 청성백 심덕부, 참찬문하부사 김주, 좌복사 남은, 중추원학 사이직 등 6인의 중신을 한양에 보내어 묘사(廟社) 궁궐 조시 및 도로의 기지를 정하게 하였다. 중화 등 은 전조(고려) 숙종시의 소영(所營)에 관계한 남경 구궁의 터(지금 경복궁 신무문 밖)가 너무 협애하다고 하여 다시 그 남쪽을 상(相)하여 해산(서북산, 즉 백악)를 주산으로 하여 임좌병향(북좌남향)을 취하매, 국면이 평연광활하여 군룡(전면의 여러 산)이 와서 조손하는 것 같아 지리적으로 면세의 마땅함을 얻고, 다시 여기서 동 수 리의 땅을 상하여 감산(북산, 즉 창덕궁의 후산)을 주로 하여 역시 임좌병향의 자리를 취하여 종묘의 터를 정하고, 공히 도를 제하여 돌아와 태조께 바치었다. 전자는 지금의 경복궁, 후자는 지금의 종묘의 땅이다. 이와 같이 종묘궁궐의 기지가 정하여지매 청성백 심덕부와 참찬문하부사 김주는 한양에 머물러 신도 경영을 관리하는 임무에 당하였다. 계룡산 상택 이래로 좌초의 운을 당한 한양 신도의 경영은 이로써 부활의 날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말하여 둘 것은 차천로의 오산설림을 보면 거기에 (上略)無學乃卜漢陽曰 仁王山作鎭 白岳南山爲左右龍虎 鄭道傳難之曰 自古帝王皆南面而治 未聞東向也 無學曰 不從吾言 垂二百年 當思吾言(中略)『按山水祕記云 擇都者若信聽僧言 則稍有延存之望 若鄭姓人出而是非 則傳不五世 簒奪之禍生 歲纔二百 板蕩亂至 愼之愼之 山水祕記 乃新羅僧義相大師之所著 豫知八百年後之事 若合符契 豈非聖僧耶 以今觀之 祕記所謂僧言者乃謂無學也 所謂鄭姓人者乃謂鄭道傳也云云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역시 세인의 숙지하는 이야기어니와 앞 1절은 무엇에 의한 것인지 정사에는 보이지 않는 설화이며, 후 1절에 이른바 산수비기라는 것도 과연 나승의상의 소저라고 할지? 매우 의심스러운—차라리 저자 미상의 후세 날조의 의서(議書)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요컨대 위 기사 전체가 불확실성을 띤 괴탄한 설화로써 충만된 것이므로 우리의 돌이켜 생각할 한내에 있지 않다고 하여 좋을 것이다.

쪽수▶P55-2太祖께서는 이에 應從하야, 마침내 九月에는 判門下府事 權仲和 判三司事 鄭道傳 靑城伯沈德符 參贊門下府事 金湊 左僕射 南誾 中樞院學 士李稷 等 六人의 重臣을 漢陽에 보내어 廟社 宮闕 朝市 及道路의 基地를 定하게 하였다. 仲和 等 은 前朝(高麗) 肅宗時의 所營에 係한 南京 舊宮의 址(지금 景福宮 神武門 外)가 너무 狹隘하다고 하야 다시 그 南을 相하야 亥山(西北山, 即白岳)를 主山으로 하야 壬座丙向(北座南向)을 取하매, 局面이 平衍廣闊하야 群龍(前面의 諸山)이 와서 朝損하는 것 같아 地理的으로 面勢의 맛당함을 얻고, 다시 여기서 東 數里의 地를 相하야 坎山(北山, 即 昌德宮의 後山)을 主로 하야 역시 壬座丙向의 位를 取하야 宗廟의 基를 定하고, 共히 圖를 製하야 도라와 太祖께 바치었다. 前者는 지금의 景福宮, 後者는 지금의 宗廟의 地이다. 이와 같이 宗廟宮闕의 基地가 定하여지매 靑城伯沈德符와 參贊門下府事 金湊는 漢陽에 留하야 新都 經營을 管理하는 任에 當하였다. 鷄龍山 相宅 以來로 坐礁의 運을 當한 漢陽 新都의 經營은 이로써 復活의 日을 보게 되였다.

여기에 또 한 가지 辨하여 둘 것은 車天輅의 五山說林을 보면 거기에 『(上略)無學乃卜漢陽曰 仁王山作鎭 白岳南山爲左右龍虎 鄭道傳難之曰 自古帝王皆南面而治 未聞東向也 無學曰 不從吾言 垂二百年 當思吾言』(中略)『按山水祕記云 擇都者若信聽僧言 則稍有延存之望 若鄭姓人出而是非 則傳不五世 簒奪之禍生 歲纔二百 板蕩亂至 愼之愼之 山水祕記 乃新羅僧義相大師之所著 豫知八百年後之事 若合符契 豈非聖僧耶 以今觀之 祕記所謂僧言者乃謂無學也 所▶P56-1謂鄭姓人者乃謂鄭道傳也云云』이라는 記事가 있는데 역시 世人의 熟知하는 이야기어니와 前 一節은 무엇에 依한 것인지 正史에는 보이지 않는 說話이며, 後 一節에 이른바 山水秘記라는 것도 果然 羅僧義相의 所著라고 할지? 매우 의심스러운—차랄이 著者 未詳의 後世 捏造의 議書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要컨대 右 記事 全體가 不確實性을 띄운 怪誕한 說話로써 充滿된 것이므로 吾人의 顧考할 限內에 있지 않다고 하야 좋을 것이다.

송도기쇠의 설을 깊이 혹신하여 하루라도 속히 이를 피하여 신도에 안정하시려고 열중하신 태조는 신도 공사에 착수하기 전에 드디어 천도를 결행하여 구 한양부 객사(지금의 돈의정 부근인 듯)로서 임시이궁을 삼었었다. 이때는 곧 태조 3년 갑술 10월 25일(신묘)이니, 즉위 1개월 내에 천도하려고 조급하시던 것이 이제야 겨우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태조께서는 민력의 노비(勞費)를 염려하심이었던지 아직 공사 착수의 명은 내리시지 아니하였었다. 익11월에 도평의사사는 다음과 같은 주언으로써 궁묘성곽에 대한 기공을 청하였다.

恭惟殿下受命啓統 俯從輿望 以定都于漢陽 萬世無疆之業 實基於此 然而寢廟未成 宮室未作 城郭未築 殆非所以 尊京師而重根本也 殿下雖重民力不欲興工 然此三者 皆不可不作 宜命攸司董治其役 以營寢廟 作宮室 築都城 申孝敬於祖宗 示尊嚴於民 且使國勢永固 然後 一國之規模始備 而萬世之貽謀益遠矣 伏惟殿下施行焉

태조께서는 위 주청에 의하여 공작국을 두고 드디어 공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실록 동월(11월) 신유(25일)조에

命都評議使司會百官于母岳 更相宅都之地 僉曰狹隘 乃止

라고 적히어 있는 것을 보면 그 후에 또다시 모악설이 대두되어 백관을 그곳에 모아 놓고 더 한번 지리를 상찰하였던 바, 제신이 다 이구동음으로 협애하다고 하여 그만 그치고 말았던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태조의 한양 신도에 대한 의향이 오히려 유예미결 중에 있던 것을 추찰할 수 있다. 신도의 공사를 속히 착수하지 않은 것은 물론 상기 도평의사사의 주언과 같이 당시 민력을 중히 여기는 의사가 있던 까닭도 있겠지만, 또한 위와 같은 모악재상택의 의향이 내재하였음에도 그 이유가 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쪽수▶P56-2松都氣衰의 說을 깊이 惑信하야 一日이라도 速히 이를 避하야 新都에 安定하시려고 熱中하신 太祖는 新都 工事에 着手하기 前에 드듸어 遷都를 決行하야 舊漢陽府 客舍(지금의 敦義町 附近인 듯)로서 臨時離宮을 삼었었다. 이때는 곧 太祖 三年 甲戌 十月 二十五日(辛卯)이니, 即位 一箇月 內에 遷都하려고 燥急하시던 것이 이제야 겨우 實現되였든 것이다. 그런데 이때 太祖께서는 民力의 勞費를 念慮하심이었든지 아직 工事 着手의 命은 내리시지 아니하였었다. 翌十一月에 都評議使司는 다음과 같은 奏言으로써 宮廟城郭에 對한 起工을 請하였다.

恭惟殿下受命啓統 俯從輿望 以定都于漢陽 萬世無疆之業 實基於此 然而寢廟未成 宮室未作 城郭未築 殆非所以 尊京師而重根本也 殿下雖重民力不欲興工 然此三者 皆不可不作 宜命攸司董治其役 以營寢廟 作宮室 築都城 申孝敬於祖宗 示尊嚴於民 且使國勢永固 然後 一國之規模始備 而萬世之貽謀益遠矣 伏惟殿下施行焉

太祖께서는 右 奏請에 依하야 工作局을 두고 드듸어 工事를 이르키게 하였다. 그러나 實錄 同月(十一月) 辛酉(二十五日)條에

命都評議使司會百官于母岳 更相宅都之地 僉曰狹隘 乃止

라고 적히어 있는 것을 보면 其後에 또다시 母岳說이 擡頭되야 百官을 그곳에 모듸어 노코 더 한번 地理를 相察하였든▶P57-1바, 諸臣이 다 異口同音으로 狹隘하다고 하야 그만 끝이고 말았든 것을 알 수 있는 同時에 太祖의 漢陽 新都에 對한 意向이 오히려 猶豫未決 中에 있든 것을 推察할 수 있다. 新都의 工事를 速히 着手하지 않은 것은 勿論 上記 都評議使司의 奏言과 같이 當時 民力을 重히 역이는 意思가 있든 까닭도 있겠지만, 또한 右와 같은 母岳再相宅의 意向이 內在하였음에도 그 理由가 있든 것이 아닌가 한다.
12월 3일에 이르러 판삼사사 정도전을 명하여 황천후토의 신을 제하고 공사의 시작을 고하게 하며,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어 산천의 神에 祭고한 후 정식으로 공사를 개시하였던 것이다. 인민의 노고를 덜기 위하여 익4년 정월에 여러 산의 승도를 모집하여 이에 대신케 하고, 7월에는 기호의 민정 합계 15000인을 징발하여 궁궐 공사에 다다르게 하였더니 공여기 대단히 진척하여 이달에 대묘와 신궁이 낙성을 고하게 되었다. 신궁은 즉 경복궁이니, 총 390여칸으로서 되고, 후에 그 주위를 전장 1810진척, 높이 21척 1촌의 장벽으로써 두르고, 문을 세워 그 동을 건춘, 서를 영추, 남을 정문(후에 광화문이라 고침), 북을 신무라 명명하고, 그 정문의 앞을 좌우 2열로 나누어 각 관아를 설치하였다. 신궁 및그 제전 제문의 명칭은 다 정도전이 찬한 것이니, 그것은 그해(4년) 10월 5일(을미)에 신묘에서 조종을 제향하고 후에 신궁에서 군신을 회연하던 때, 태조께서 도전에게 今定都 享廟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이라 명하였으므로 이를 찬진한 것이었다.
쪽수▶P57-2十二月 三日에 이르러 判三司事 鄭道傳을 命하야 皇天后土의 神을 祭하고 工事의 始作을 告하게 하며, 또 參贊門下府事 金立堅을 보내여 山川의 神에 祭告한 後 正式으로 工事를 開始하였던 것이다. 人民의 勞苦를 덜기 僞하야 翌四年 正月에 諸山의 僧徒를 募하야 이에 대신케 하고, 七月에는 畿湖의 民丁 合計 一萬五千人을 徵發하야 宮闕 工事에 赴케 하였더니 工役이 대단이 進陟하야 이달에 大廟와 新宮이 落成을 告하게 되었다. 新宮은 즉 景福宮이니, 總三百九十餘間으로서 되고, 後에 그 周圍를 全長 一千八百十三步, 高 二十一尺一寸의 墻壁으로써 둘으고, 門을 세워 그 東을 建春, 西를 迎秋, 南을 正門(後에 光化門이라 改함), 北을 神武라 命名하고, 그 正門의 앞을 左右 二列에 分하야 各 官衙를 設置하였다. 新宮 및그 諸殿諸門의 名稱은 다 鄭道傳의 撰한 것이니, 그것은 그해(四年) 十月 五日(乙未)에 新廟에서 祖宗을 祭享하고 後에 新宮에서 群臣을 會宴하든 때, 太祖께서 道傳에게 『今定都 享廟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이라 命하였으므로 이를 撰進한 것이었다.
또 이미 도성조축도감을 두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성 기지를 정하게 하여, 익5년 정월에는 경상 전라 강원 및 서북면의 안주 이남, 동북면의 함주(함흥) 이남의 민정 범 118070인을 징발하여 도성 축조에 착수하고, 2월 말에 이르러 일단 민정을 방귀하였다가 다시 그해 가을에 강원 경상 전라 3도의 민 79000을 징모하여 8월로부터 9월에 걸쳐
쪽수▶P57-3또 이미 都城造築都監을 두고 鄭道傳으로 하여금 城基를 定하게 하야, 翌五年 正月에는 慶尙 全羅 江原 及 西北面의 安州 以南, 東北面의 咸州(咸興) 以南의 民丁 凡十一萬八千七十人을 徵發하야 都城 築造에 着手하고, 二月末에 至하야 一旦 民丁을 放歸하였다가 다시 그해 가을에 江原 慶尙 全羅 三道의 民 七萬九千을 徵募하야 八月로부터 九月에 亘하
京城圖(大東輿地圖에서)
쪽수▶P58-1
京城圖(大東輿地圖에서)
그 잔역을 마치게 하였다. 성은 북은 백악, 동은 낙타, 서는 인왕, 남은 남산을 그 사지(四至)로 하여 고기(高崎)한 곳은 석성, 그렇지 않은 곳은 토성으로 쌓아 전장 59500척에 달하였다. 또 거기에 팔방성문을 세워 그 정북을 숙청이라 하고, 동북을 홍화(중종 6년에 혜화문이라 고치니 속칭 동소문), 정동을 흥인(속칭 동대문), 동남을 광희(속칭 수구문. 혹은 남소문지를 광희문의 구지라고 추정하는 이가 있으나, 그는 오견이다), 정남을 숭례(속칭 남대문), 서남을 소덕(속칭 서소문. 후에 예종의 비 장순왕후에 휘인소덕의 시를 올린 후로는 소의라 고침), 정서를 돈의(속칭 서대문. 처음에는 지금 사직정의 서있 것을 세종시에 지금 서대문 터로 옮기고 새 문의 속칭을 득함), 서북을 창의(속칭 자하문)라고 하였다. 도성 건축과 동시에 즉 태조 5년 4월(19일)에는 전대 도시제도의 하나인 부방의 제를 펴 성내를 동서남북 및 중앙의 5부로 구분하고, 다시 이것을 52방에 소별하여 동부 12방 남부 11방 서부 11방 북부 十방 중부 8방으로 하였다. 또 이미 (전년) 기내의 행정구획도 정하여 재래의 경기 소속의 주현(공양왕 2년, 경기를 좌우도에 나누어 장단, 임강, 토산, 임진, 송림, 마전, 적성, 파평을 좌도로 하고. 개성, 강음, 해풍, 덕수, 우봉을 우도로 하였다) 이외에 다시 광주, 수원, 양근, 쌍부(지금 수원의 서변) 용구, 처인(이상 2현은 지금의 용인군), 이천, 천녕(지금 여주의 서부), 지평, 양주, 부평, 철원, 연안 등을 내속시키어, 양주 이하를 우도로, 광주, 수원 이하의 제군현을 좌도로 분속케 하였다.
쪽수▶P58-2야 그 殘役을 畢하게 하였다. 城은 北은 白岳, 東은 駱駝, 西는 仁王, 南은 南山을 其 四至로 하야 高崎한 곳은 石城, 그렇지 않은 곳은 土城으로 築하야 全長 五萬九千五百尺에 達하였다. 또 거기에 八方城門을 立하야 其正北을 肅淸이라 하고, 東北을 弘化(中宗 六年에 惠化門이라 改하니 俗稱 東小門), 正東을 興仁(俗稱 東大門), 東南을 光熙(俗稱 水口門. 或은 南小門址를 光熙門의 舊址라고 推定하는 이가 있으나, 그는 誤見이다), 正南을 崇禮(俗稱 南大門), 西南을 昭德(俗稱 西小門. 後에 睿宗의 妃 章順主后에 徽仁昭德의 諡를 올린 후로는 昭義라 改함), 正西를 敦義(俗稱 西大門. 처음에는 今 社稷町의 西이던 것을 世宗時에 今 西大門址로 옴기고 新門의 俗稱을 得함), 西北을 彰義(俗稱 紫霞門)라고 하였다. 都城 建築과 同時에 即 太祖 五年 四月(十九日)에는 前代 都市制度의 一인 部坊의 制를 敷하야 城內를 東西南北 및 中央의 五部로 區分하고, 다시 이것을 五十二坊에 小別하야 東部 十二坊 南部 十一坊 西部 十一坊 北部 十坊 中部 八坊으로 하였다. 또 이▶P59-1미 (前年) 畿內의 行政區劃도 定하야 在來의 京畿 所屬의 州縣(恭讓王 二年, 京畿를 左右道에 分하야 長湍, 臨江, 兎山, 臨津, 松林, 麻田, 積城, 波平을 左道로 하고. 開城, 江陰, 海豊, 德水, 牛峰을 右道로 하였다) 以外에 다시 廣州 水原 楊根 雙阜(今 水原의 西邊) 龍駒 處仁(以上 二縣은 지금의 龍仁郡) 利川 川寧(今 驪州의 西部) 砥平 楊州 富平 鐵原 延安 等을 來屬시키어, 楊州 以下를 右道로, 廣州 水原 이하의 諸郡縣을 左道로 分屬케 하였다.
신궁 묘사의 웅려함과 주위 도성의 위이함과 8방성문의 홍예누각이라든지 즐비한 제관아는 아울러 신도의 면목을 족히 장려하게 하였다. 태조 즉위 당초의 이상은 이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거니와 그간 천도가부문제, 택지난 및 계룡산의 일시 공역 등으로 인하여 군신상하가 얼마나 심신을 번로하고 물질과 시일을 또 얼마나 많이 허비하였던가를 생각하면, 한양전도는 실로 정신상, 물질상 막대한 노비(勞費)를 제공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쪽수▶P59-2新宮廟社의 雄麗함과 周圍 都城의 逶迤함과 八方城門의 虹霓樓閣이라든지 櫛比한 諸官衙는 아울러 新都의 面目을 足히 壯麗하게 하였다. 太祖 即位 當初의 理想은 이에 이르러 비로소 完全히 實現되었다고 할 수 있거니와 其間 遷都可否問題, 擇地難 及鷄龍山의 一時 工役 等으로 因하야 君臣上下가 얼마나 心身을 煩勞하고 物質과 時日을 또 얼마나 만히 虛費하였든가를 생각하면, 漢陽奠都는 실로 精神上 物質上 莫大한 勞費를 提供한 結果라고 할 것이다.


















본문3: 三, 정종 및 태종조의 천도문제


(갑) 정종의 즉위와 개경이도
쪽수▶P59-3(甲) 定宗의 即位와 開京移都
태조의 창업 후 7년이요, 한양 신도의 공역을 완료한 후 겨우 2년에, 왕실에는 일대 불상사가 일어났었다. 재래 사가의 소위 ‘방석(세자)의 난’ 혹 ‘정도전의 난’이란 것이 즉 그것이다. 그러나 재래의 이 난칭은 좀 억울한 칭호인 듯하므로 차랄이 이를 정안군 방원(第5왕자 태종)의 난 혹은 왕자의 난이라고 하는 편이 妥當할 것 같다. 지금 간단히 그 난의 전말을 말하면—태조에게는 8인의 아들이 있어, 제1남으로부터 제6남까지는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요, 제7남 제8남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니, 태조 즉위 초(원년)에 건저문제가 일어나 태조는 강비의 의향을 중히 여기어 제7남 방번을 세워 세자를 삼으려 하매, 배극렴, 조준 등은 그 위인의 광패함을 지적하여, 반드시 강비의 소생을 세울진대 계남 방석이 좀더 가하다고 하여 주청하여 방석을 세자로 삼게 하였다.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심효생(세자빈 부) 등은 다 자 방석을 보도하던 유력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한씨 소생의 여러 왕자는 이 건저에 대하여 얼마나 큰 불평과 시기를 품었을까는 상상하여 남음이 있다. 특히 제5왕자 정안군 방원(후의태종)과 같은 이는 태조의 창업을 보좌하던(마치 당의 태종과 같이) 공로가 많고 영매의 자질을 가춘 이수의 인임에 불구하고 세자의 책립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심중의 불평은 더욱 컸을 것이다. 태조 7년의 변란은 즉 이 건저에 대한 숙감(宿憾)의 무력적 폭거로 볼 수 있는 것이어니와, 국사에 정도전, 남은 등이 세자 방석에게 부(附)하여 한씨 소생의 여러 왕자를 시기하여 7년 8월에 태조의 위석을 기회로 삼아 이들에게 일망타진의 화를 주려고 할새, 그 음모가 누설되어 정안군 일파는 분기하여 미연에 이를 진압하여 소위 안사의 공을 세웠다고 하였으나, 이런 사실은 우리 회원 이상백씨의 말한 바와 같이(본 학보 제2권, 동씨의 삼봉인물고 참조) 여러 가지로 의아를 갖게 하여 신용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정안군 당인(이무)의 무위적 고발을 그대로 실은 바에 불과한 것인 듯하며, 요컨대 이 변란은 정도전 측에서는 알지 못하는 중에 당하였으므로 음모는 실상 도전 측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안군 당인 측에서 양성되어 이때(태조의 병환을 호기로 삼아) 군을 격동하여 암야 중에 도전 등 습격살해하고 난의 책임을 세자 및 도전 등에 전가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떻든 이 변란의 책임자로 오명을 쓴 세자 방석은 결국 폐위되어 원배도중 정안군의 부하에게 살해되고, 그 동모아인 무안군 방번도 동양의 참화를 입고 말았다. 세자 측 일파의 죽음은 실로 포원창천(抱寃漲天), 함루입지(含淚入地)의 불행이요, 또 그 변란은 일종의 골육지쟁으로 왕실의 말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세자의 폐위와 동시에 그 자리는 당연히 정안군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므로 제신들은 정안군으로써 세자를 삼기를 원하매, 군은 이를 고사하고 제2형 영안군 방과에게 양보하여 태조의 윤허를 받았다. 정안군이 이와 같이 고사하고 특히 영안군을 추대한 것은, 물론 자기는 당장 혐의로운 괴로운 입장에 있었던 거와 영안군의 무야심한 인품이 장래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을 미리 간파한 바였다. 태조는 방석 방번의 불행을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여 이로부터 심사 자못 산란하여 정치에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익9월에 마침내 자리를 세자 방과에게 선위하게 되었다. 이는 곧 제2대 정종대왕이시니, 정종은 처음부터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은 없었던 모양이나, 위 변란의 결과로 이와 같이 극위에 오르게 된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정종은 부왕을 존하여 상왕이라 칭하였다.
쪽수▶P59-4太祖의 創業 後 七年이요, 漢陽 新都의 工役을 完了한 後 겨우 二年에, 王室에는 一大 不祥事가 이러났었다. 在來 史家의 所謂 『芳碩(世子)의 亂』 혹 『鄭道傳의 亂』이란 것이 즉 그것이다. 그러나 在來의 이 亂稱은 좀 抑鬱한 稱呼인 듯하므로 차랄이 이를 靖安君 芳遠(第五王子 太宗)의 亂 혹은 王子의 亂이라고 하는 편이 妥當할 것 같다. 지금 簡單히 그 亂의 ▶P60顚末을 말하면—太祖에게는 八人의 男子가 있어, 第一男으로부터 第六男까지는 神懿王后 韓氏의 所生이요, 第七男 第八男은 神德王后 康氏의 所生이니, 太祖 即位 初(元年)에 建儲問題가 이러나 太祖는 康妃의 意向을 重히 여기어 第七男 芳蕃을 세워 世子를 삼으려 하매, 裵克廉 趙浚 等은 그 爲人의 狂悖함을 指摘하야, 반드시 康妃의 所生을 세울진대 季男 芳碩이 稍可하다고 하야 奏請하야 芳碩을 世子로 삼게 하였다. 開國功臣 鄭道傳 南誾 沈孝生(世子嬪 父) 等은 다 子芳碩을 輔導하든 有力한 人物들이었다. 그런데 韓氏 所生의 諸王子는 이 建儲에 對하야 얼마나 큰 不平과 猜忌를 품었을까는 想像하야 남음이 있다. 就中 第五王子 靖安君 芳遠(後의太宗)과 같은 이는 太祖의 創業을 輔佐하든(마치 唐의 太宗과 같이) 功勞가 많고 英邁의 資를 가춘 異數의 人임에 不拘하고 世子의 冊立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心中의 不平은 더욱 컸을 것이다. 太祖 七年의 變亂은 즉 이 建儲에 對한 宿憾의 武力的 暴擧로 볼 수 있는 것이어니와, 國史에 鄭道傳 南誾 等이 世子 芳碩에게 附하야 韓氏 所生의 諸王子를 忌하야 七年 八月에 太祖의 委席을 機會로 삼아 이들에게 一網打盡의 禍를 주려고 할새, 그 陰謀가 漏洩되야 靖安君 一派는 忿起하야 未然에 이를 鎭壓하야 所謂 安社의 功을 세웠다고 하였으나, 이런 事實은 우리 會員 李相佰 氏의 所說과 같이(本學報 第二卷, 同氏의 三峰人物考 參照) 여러 가지로 疑訝를 갖게 하야 信用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靖安君 黨人(李茂)의 誣僞的 告發을 그대로 실린 바에 不過한 것인 듯하며, 要컨대 이 變亂은 鄭道傳 側에서는 아지 못하는 중에 當하였으므로 陰謀는 실상 道傳 側에서 이러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靖安君 黨人 側에서 禳成되야 이때(太祖의 病患을 好機로 삼아) 君을 激動하야 暗夜 中에 道傳 等 襲擊殺害하고 亂의 責任을 世子及道傳 等에 轉嫁하였든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떠튼 이 變亂의 責任者로 汚名을 쓴 世子 芳碩은 結局 廢位되야 遠配道 中 靖安君의 部下에게 殺害되고, 그 同母兒인 撫安君 芳蕃도 同樣의 慘禍를 입고 말었다. 世子 側 一派의 죽음은 실로 ▶P61-1抱寃漲天 含淚入地의 不幸이요, 또 그 變亂은 一種의 骨肉之爭으로 王室의 말할 수 없는 慘劇이었다. 世子의 廢位와 同時에 그 位는 當然히 靖安君에게로 도라가야 할 것이므로 諸臣들은 靖安君으로써 世子를 삼기를 願하매, 君은 이를 固辭하고 第二兄 永安君 芳果에게 讓하야 太祖의 允許를 받었다. 靖安君이 이와 같이 固辭하고 特히 永安君을 推한 것은, 勿論 自己는 당정 嫌疑로운 괴로운 立場에 있었든 거와 永安君의 無野心한 人品이 將來에 어떠한 態度를 取할 것을 미리 看破한 所以였다. 太祖는 芳碩 芳蕃의 不幸을 드시고 크게 震怒하야 이로부터 心事 자못 散亂하야 政治에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翌九月에 마침내 位를 世子 芳果에게 禪하게 되였다. 이는 곧 第二代 定宗大王이시니, 定宗은 처음부터 王位繼承에 對한 野心은 없었든 모양이나, 右 變亂의 結果로 이와 같이 極位에 오르게 된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定宗은 父王을 尊하야 上王이라 稱하였다.
이상은 태조 말년의 왕자난 내지 정종 즉위의 사정에 대하여 약술한 바이어니와, 왕자난과 같은 불상사에 계속하여 정종 즉위 초에 자연계에도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었다. 혹은 새 무리가 취조(聚噪)하고 혹은 야작(野鵲)이 내소(來巢)하고 혹은 재이가 누견하여, 무슨 불길의 징조나 아닌가 하여, 이때 인심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운관에서는 이를 이유로 하여 상서하여 피방하기를 청하였다. 피방은 즉 피흉취길이니 흉방을 피하여 길방으로 이어하자는 말이었다. 정종은 이로 인하여 원년 정월 임신(1일)에 종친 및 좌정승 조준 등 여러 공신을 회합하고 서운관이 올린 서를 보이시며 피방의 가부, 즉 이어의 여부에 하여 문의하시었다. 정종실록 권1에

書雲觀上言 羣烏聚噪 野鵲來巢 災異屢見 宜修省消變 且宜避方 上 乃悉召宗親及左政丞趙浚等諸宰 執示以書雲觀所上書 且問避方可否云云

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왕의 문의에 대하여 제신은 다 피방하는 것이 가하다 하고, 그 방소에 대하여는 기내 주현에는 대소신료와 숙위군의 의우할 곳이 없지만, 오직 송도에는 궁궐과 군신의 제택이 완전한 채로 남아있다는 뜻을 상주하였다. 문제는 의외로 속히 진행되어 아무 이의 없이 송도에 이어하기로 결정되어, 동년(원년) 정월 7일에 단연히 이를 실행함에 이르렀다. 형식은 피방이라고 하여 잠시 이어에 불과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실상은 천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왕자의 변란 이래 심중이 자못 좋지 않은 태조께서는 이 이어에 대하여 더욱 불유쾌를 느끼사 도중에서 종원(從員)을 돌아다 보시며 말씀하기를 初移都漢陽 非獨吾志 與國人議之라 하시고 강개무량의 눈물을 흘리시었다는 이야기가 실록에 보이거니와 이과 반대로 이때 송도에 대한 회구의 정과 한양의 초창에 견디지 못하던 일반 도민(都民)들은 거의 열광적으로 이 이어를 좋아하였던 모양이니, 실록에는 당시 도읍의 정황을 기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初都人皆懷舊都 聞欲還都 相與喜悅 提携負戴 絡繹于路 使守城門以止之

쪽수▶P61-2以上은 太祖 末年의 王子亂 乃至 定宗 即位의 事情에 就하야 略述한 바이어니와, 王子亂과 같은 不祥事에 繼續하야 定宗 即位 初에 自然界에도 여러 가지 異常한 現象이 나타났었다. 혹은 群烏가 聚噪하고 혹은 野鵲이 來巢하고 혹은 災異가 屢見하야, 무슨 不吉의 徵兆나 아닌가 하야, 이때 人心에 不安을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야 書雲觀에서는 이를 理由로 하야 上書하야 避方하기를 請하였다. 避方은 즉 避凶就吉이니 凶方을 避하야 吉方으로 移御하자는 말이었다. 定宗은 이로 因하야 元年 正月 壬申(一日)에 宗親 及 左政丞 趙浚 等 諸功臣을 會合하고 書雲觀 所上의 書를 보이시며 避方의 可否, 즉 移御의 與否에 하야 問議하시었다. 定宗實錄 卷一에

書雲觀上言 羣烏聚噪 野鵲來巢 災異屢見 宜修省消變 且宜避方 上 乃悉召宗親及左政丞趙浚等諸宰 執示以書雲觀所上書 且問避方可否云云

▶P62-1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王의 問議에 對하야 諸臣은 다 避方하는 것이 可하다 하고, 그 方所에 就하여는 畿內 州縣에는 大小臣僚와 宿衛軍의 依寓할 곳이 없지만, 오직 松都에는 宮闕과 群臣의 第宅이 完全한 채로 남아있다는 뜻을 上奏하였다. 問題는 意外로 速히 進行되야 아무 異議 없이 松都에 移御하기로 決定되야, 同年(元年) 正月 七日에 斷然히 이를 實行함에 이르렀다. 形式은 避方이라고 하야 暫時 移御에 不過한 것 같이 보이지만, 其實은 遷都와 조곰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王子의 變亂 以來 心中이 자못 不樂한 太祖께서는 이 移御에 對하야 더욱 不愉快를 늣기사 途中에서 從員을 도라다 보시며 말씀하기를 『初移都漢陽 非獨吾志 與國人議之』라 하시고 慷慨無量의 눈물을 흘리시었다는 이야기가 實錄에 보이거니와 이과 反對로 이때 松都에 對한 懷舊의 情과 漢陽의 草創에 견디지 못하든 一般 都民들은 거이 熱狂的으로 이 移御를 조와하였든 모양이니, 實錄에는 當時 都의 情況을 記錄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初都人皆懷舊都 聞欲還都 相與喜悅 提携負戴 絡繹于路 使守城門以止之

정종께서도 송도이어를 대단 기뻐하셨던 것은 익2월 송도 수창궁(서소문 내에 있던 궁으로 태조 즉위하시던 곳)을 본궐로 삼아 어하였을 때 그 북원에 올라 좌우를 돌아다 보시고 以前朝太祖之智 建都于此 豈偶然哉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또 실록의 위 문장에 접하여 遂有移都松京之志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송도 이어가 심상한 일시적의 것이 아님을 더욱 깨달을 것이다.
쪽수▶P62-2定宗께서도 松都移御를 대단 기뻐하셨든 것은 翌二月 松都 壽昌宮(西小門 內에 있든 宮으로 太祖 即位하시든 곳)을 本闕로 삼아 御하였을 때 그 北苑에 올라 左右를 도라다 보시고 『以前朝太祖之智 建都于此 豈偶然哉』라고 말슴하섰다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또 實錄의 上文에 接하야 『遂有移都松京之志』라고 한 것을 보면, 이 松都 移御가 尋常한 一時的의 것이 아님을 더욱 깨달을 것이다.
요컨대 정종의 송도 이어는 사실상 신도 한양을 버리는 것과 동양의 거동이었거니와, 그 이유는 결코 단순히 서운관의 주청한 의미의 피방에만 있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실상 중요한 이유는 한양 전도한 지 불과 4-5년만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골육이 피를 흘리는 불상사를 보게 되고, 일로 인하여 태조는 보위를 버리시고 은거하시게 되였으므로 이것이 혹 한양 지덕의 소치가 아닌가 하는 풍수지리적 신념에 의한 피방의 의의가 더 심각하였던 것과, 그 다음으로는 태조 이외의 군신의 송도에 대한 회구의 정이 간절하였던 것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간단히 말하면, 정종조의 천도의 사정은, 첫째 왕자의 난, 둘째 군신의 송도회구의 정, 셋째 자연계의 이변에 있었던 것이다. 첫째, 둘째의 사정은 실질적 무언의 이유임에 대하여, 셋째의 사정은 형식적 유언의 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쪽수▶P62-3要컨대 定宗의 松都 移御는 事實上 新都 漢陽을 버리는 것과 同樣의 舉動이었거니와, 그 理由는 決코 單純히 書雲觀의 奏請한 意味의 避方에만 있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실상 重要한 理由는 漢陽 奠都한 지 불과 四五年만에 王子의 亂이 이러나 骨肉이 피를 흘리는 不祥事를 보게 되고, 일로 因하야 太祖는 寶位를 버리시고 隱居하시게 되▶P63-1였으므로 이것이 혹 漢陽 地德의 所致가 아닌가 하는 風水地理的 信念에 依한 避方의 義가 더 深刻하였든 것과, 그 다음으로는 太祖 以外의 君臣의 松都에 對한 懷舊의 情이 懇切하였든 것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簡單히 말하면, 定宗朝의 遷都의 事情은, 第一 王子의 亂, 第二 君臣의 松都懷舊의 情, 第三 自然界의 異變에 있었든 것이다. 第一 第二의 事情은 實質的 無言의 理由임에 對하야, 第三의 事情은 形式的 有言의 口實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乙) 태종의 즉위와 천도문제
쪽수▶P63-2(乙) 太宗의 即位와 遷都問題
(A) 방간의 난과 태종의 즉위
쪽수▶P63-3(A) 芳幹의 亂과 太宗의 即位
정종의 개경 이어 후 겨우 1년에 또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소위 방간의 난이 이것이다. 방간은 태조의 제4자 회안군 그이로서 한씨 소생 왕자 중 태종과 같이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도 있고 또 호기도 있던 불녹록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회안군은 정안군의 인격과 공훈과 노력과 위망에는 미칠 수 없었고, 따라서 항상 시의불안 중에 있던바, 마침 지중추 박포가 밀고하되 정안이 장차 회안을 꾀하려 한다고 하였다. 포는 앞서 무인 왕자난에 정안군을 도아 공로가 많았음에 불구하고 상작(賞爵)이 높지 못함에 앙앙불낙하여 이제 懷安을 衝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회안은 포의 양동에 의하여 병을 일으켜 정안군을 제하려 하매 정안도 이를 알고 역시 병을 내어 드디어 양군의 교전을 보게 되니 이야말로 동모 골육간의 혈전이었다. 전국은 회안(방간)군 편이 불리하여 세궁패주를 면치 못하고, 마침내 회안은—‘거병작난’ ‘모해동기’의 죄로 왕명으로 특히 극형에 1등을 감하여 황해도 토산에 유배되고, 박포는 양동의 죄로써 찬주되고 말았다. 난후 정종은 하륜 등의 주청에 의하여 상왕(태조)의 허락을 얻어 정안군을 세워 세자를 삼으시고 이어 하교하여 왈 國本定然後 衆志定 今者之亂 正以國本未定也라고 하였다. 동년 7월에 왕은 상왕(태조)에게 태상왕의 존호를 올리고 드디어 11월에 이르러는 자리를 세자에게 전하시니 재위 불과 2년. 새 군주는 곧 제3대 태종대왕이시었다. 태종의 왕위계승은 저 무인난(태조 7년) 이후 거의 결정적으로 되다시피 하여 단지 시일의 조만 문제뿐이었지만, 이번에 이와 같이 속히 실현된 것은 물론 우의 방간의 난이 이를 촉진시킨 것이었다. 태종은 정종을 높이어 상왕이라 하시고 이로부터 만기를 총재하시게 되었다.
쪽수▶P63-4定宗의 開京 移御 後 겨우 一年에 또 王子의 亂이 이러났다. 所謂 芳幹은 亂이 이것이다. 芳幹은 太祖의 第四子 懷安君 그이로서 韓氏 所生 王子 中 太宗과 같이 王位繼承에 對한 野心도 있고 또 豪氣도 있든 不碌々한 人物이었다. 그러나 懷安君은 靖安君의 人格과 功勳과 努力과 威望에는 및을 수 없었고, 따라서 항상 猜疑不安 中에 있든바, 마침 知中樞 朴苞가 密告하되 靖安이 장차 懷安을 圖하려 한다고 하였다. 苞는 앞서 戊寅 王子亂에 靖安君을 도아 功勞가 많었음에 不拘하고 賞爵이 높지 못함에 怏怏不樂하야 이제 懷安을 衝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懷安은 苞의 煬動에 依하야 兵을 擧하야 靖安君을 除하려 하매 靖安도 이를 알고 역시 兵을 出하야 드듸어 兩軍의 交戰을 보게 되니 이야말로 同母 骨肉間의 血戰이었다. 戰局은 懷安(芳幹)軍 편이 不利하야 勢窮敗走를 免치 못하고, 마침내 懷安은—「擧兵作亂」 「謀害同氣」의 罪로 王命으로 特히 極刑에 一等을 減하야 黃海道 兎山에 流配되고, 朴苞는 煬動의 罪로써 竄誅되▶P64-1고 말었다. 亂後 定宗은 河崙 等의 奏請에 依하야 上王(太祖)의 許諾을 얻어 靖安君을 세워 世子를 삼으시고 仍히 下敎하야 曰 『國本定然後 衆志定 今者之亂 正以國本未定也』라고 하였다. 同年 七月에 王은 上王(太祖)에게 太上王의 尊號를 올리고 드듸어 十一月에 이르러는 位를 世子에게 傳하시니 在位 不過 二年. 新主는 곧 第三代 太宗大王이시었다. 太宗의 王位繼承은 저 戊寅亂(太祖 七年) 以後 거이 決定的으로 되다싶이 하야 단지 時日의 早晩問題뿐이었지만, 이번에 이와 같이 速히 實現된 것은 勿論 우의 芳幹의 亂이 이를 促進시킨 것이었다. 太宗은 定宗을 높이어 上王이라 하시고 이로부터 萬機를 總裁하시게 되였다.
(B), 수창궁의 화재와 第1회 천도 논의
쪽수▶P64-2(B), 壽昌宮의 火災와 第一回 遷都議
그런데 태종 즉위 익월(정종 2년 12월)에 개경에는 일대 재변이 일어났었다. 즉 이때 본궐인 수창궁에 화재가 일어나 침실로부터 대전에까지 연소하여, 극력 이를 진압하였으나, 당시 관념으로는 국가의 일대 불상사이었다. 이 화재는 관념으로나 실제상으로나 왕의 이어를 필요케 하는 동시에 의례적인 천도론의 대두를 자극시킴 족하였다. 과연 화재 직후 태종께서는 조준 성석린 이하 문신 10여인을 모으시고 서운관 소장의 비기밀서에 비추어 천도의 이해길흉을 의론케 하시니 정종실록 2년 12월조에

(上)謂平壤伯趙浚·昌寧伯成石璘以下文官十餘人曰 不幸有災 卿等按書雲觀秘密圖籍 議遷都利害以聞云云

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즉 이것이 태종조의 천도문제에 관한 제1회적 회의이었다. 이 회의에 있어 제신의 논의는 자못 분분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말았지만, 신임의 우정승 하륜만은 태조조에서와 같이 여전히 동방비기에 의하여 모악 천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는 일즉부터 유학의 교양을 받으심이 깊어 미신사상에는 그다지 혹신하시지 않는 터이지만, 이 회의에서 더욱 참위술수의 설이 인심을 현혹케 함이 심한 것을 깨달으시고 제대신에게 일러 왈 今讖緯術數之言 縱橫不止 眩惑人心 何以處之라 하시고, 또 新都 乃至父主所創也 何必別建都邑 以勞民乎라고 하여 부왕의 소창인 신도 한양을 전혀 버리기 어려운 뜻을 보이시고 드디어 명하여 술수지리의 서를 금하게 하였다 한다. 태종의 이 언교는 당시 유신들의 견해에 비하여 가위 백척간두에 일보를 내킨 것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특히 그 한도 지지설과 같은 것은 태상왕의 의사를 존중히 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태조께서는 앞서부터 한양을 버리는 것을 여간 유감으로 여기시지 아니하여, 개경 천도 후에도 가끔 한양에 독행하신 일이 실록에 나타나거니와 정종 2년 11월 에는 태조께서 오대산으로부터 개경에 돌아와 신주인 태종을 보시고 특히 한양 환도의 뜻으로써 효유유하신 일까지 있었다. 정종실록 동년 동월조에 이 사실을 기재하여 왈

先是 太上王常欲遷都漢陽 至是 謂上曰 汝兄欲還漢陽 以慰我心 其志已定 汝能體予乎 上對曰子心何敢不從命乎

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태종의 우의 언교는 확실히 태상왕의 뜻을 존중 또 계승하시는 의미인 것이 더욱 분명하고, 또 상왕(정종)도 역시 그러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태종의 언교는 단지 왕의 의사표시에 불과하였을 뿐이요 그대로 곧 실행할 것을 성명하신 바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때의 천도 논의는 아무 결말을 보지 못한 채로 주저앉고 말았다.
쪽수▶P64-3그런데 太宗 即位 翌月(定宗 二年 十二月)에 開京에는 一大 災變이 이러났었다. 즉 이때 本闕인 壽昌宮에 火災가 이러나 寢室로부터 大殿에까지 延燒하야, 極力 이를 鎭壓하였으나, 當時 觀念으로는 國家의 一大 不祥事이었다. 이 火災는 觀念으로나 實際上으로나 王의 移御를 必要케 하는 同時에 依例的인 遷都論의 擡頭를 戟刺시킴 足하였다. 과연 火災 直後 太宗께서는 趙浚 成石璘 以下 文臣 十餘人을 會하시고 書雲觀 所藏의 祕記密書에 按하야 遷都의 利害吉凶을 議論케 하시니 定宗實錄 二年 十二月條에

(上)謂平壤伯趙浚·昌寧伯成石璘以下文官十餘人曰 不幸有災 卿等按書雲觀秘密圖籍 議遷都利害以聞云云

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즉 이것이 太宗朝의 遷都問題에 關한 第一回的 會議이었다. 이 會議에 있어 諸臣의 論議는 자못 紛紜하야 意見의 一致를 보지 못하고 말었지만, 新任의 右政丞 河崙만은 太祖朝에서와 같이 如前히 東方秘記에 依하야 母岳 遷都를 建議하였다. 그러나 太宗께서는 일즉부터 儒學의 敎養을 받으심이 깊어 迷信思想에는 그다시 惑信▶P65-1하시지 않는 터이지만, 이 會議에서 더욱 讖緯術數의 說이 人心을 眩惑케 함이 甚한 것을 깨다르시고 諸大臣에게 일러 曰 『今讖緯術數之言 縱橫不止 眩惑人心 何以處之』라 하시고, 또 『新都 乃至父主所創也 何必別建都邑 以勞民乎』라고 하야 父王의 所創인 新都 漢陽을 全혀 버리기 어려운 뜻을 보이시고 드듸어 命하야 術數地利의 書를 禁케 하였다 한다. 太宗의 이 言敎는 當時 儒臣들의 見解에 比하야 可謂 百尺竿頭에 一步를 내킨 것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特히 그 漢都支持說과 같은 것은 太上王의 意思를 尊重히 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太祖께서는 앞서부터 漢陽을 버리는 것을 여간 遺憾으로 역이시지 아니하야, 開京 遷都 後에도 가끔 漢陽에 獨幸하신 일이 實錄에 나타나거니와 定宗 二年 十一月 에는 太祖께서 五臺山으로부터 開京에 還하야 新主인 太宗을 보시고 特히 漢陽 還都의 意로써 諭하신 일까지 있었다. 定宗實錄 同年 同月條에 이 事實을 記載하야 曰

先是 太上王常欲遷都漢陽 至是 謂上曰 汝兄欲還漢陽 以慰我心 其志已定 汝能體予乎 上對曰子心何敢不從命乎

라고 하였다. 이에 依하면 太宗의 우의 言敎는 確實히 太上王의 志를 尊重且繼承하시는 意味인 것이 더욱 分明하고, 또 上王(定宗)도 역시 그러하였든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太宗의 言敎는 단지 王의 意思表示에 不過하였을 뿐이요 그대로 곧 實行할 것을 聲明하신 바는 아니었다. 그리하야 이때의 遷都議는 아무 決末을 보지 못한 채로 주저앉고 말었다.
(C), 제2회의 천도 논의와 결렬
쪽수▶P65-2(C), 第二回의 遷都儀와 決裂
그 후 천도 문제는 얼마 동안 제의되지 아니하고 중지 상태로 있더니, 태종 2년 7월에 이르러 또다시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것도 이때 천변지괴가 뒤를 이어 속기함에 동기된 바이어니와 태종께서는 동월 11일에 하륜, 김사형 이무 등을 부르사 삼부(의정부·사평부·승추부)의 문무제신으로 더불어 한양 천도의 가부를 토의케 하였다. 이때도 제신의 의견은 구구불일하여, 혹은 ‘당재구도(개경)’, 혹은 ‘당환신도(한양)’, 혹은 ‘이도모악’이라 하는 등, 3파의 분열을 보게되었는데, 삼부가 드디어 以在舊都爲可 還新都爲不便이란 가결의를 상주한 것을 보면 환도 반대의 의견이 다대수를 점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면 태종께서는 이 삼부의 주의(奏議)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와 암시를 보이셨느냐 하면, 실록 동년 동월 임진(11일)조에 以在舊都爲可 還新都爲不便 上以新都太上王創建之地․舊都人心所安 意未決 見三府之議 心不便 問近臣曰 成王在鎬京 廟在豊乎 在洛乎 皆不能對 又召金瞻問之 亦不能對 上曰 周公所洛邑而祭文王騎牛一 武王騂牛一 則宗廟必在洛矣 金科曰 成王居鎬 有大事則至豊宗廟必在豊矣 末能決之 上意以爲 若成王居鎬 宗廟在洛邑 則今予在舊都而宗廟在新都 亦宜라고 쓰여있다. 이에 의하면 이때 태종의 입장은 대단 곤란하셨으니 첫째 신도 한양은 태상왕의 창건하신 곳으로 종묘가 그곳에 있고, 또(위에 말한 바와 같이) 태상왕이 왕에게 환도의 뜻으로써 유하신 일까지 있는 터이라 그 뜻에 거스르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둘째 구도 개성은 인민의 안심안업 회토중천의 땅이라 민의에 반하여 그곳을 갑자기 떠나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로 여기었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왕은 문무제신의 의견을 물었던바, 그 강론은 위와 같이 천도를 반대하는 파가 많아 심중에 결연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또 다시 이를 고사에 비추기 위하여 주의 성왕이 호경에 거하였을 때에 종묘가 낙에 있었는지 풍에 있었는지?를 두세 문신에게 물으시었던바, 신통한 대답이 없거늘 태종은 가라사대 주공이 낙읍을 이루고 문왕, 무왕에게 기우성우(騎牛騂牛)를 제한 것을 보면 종묘가 낙읍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매, 김과는 가로대 성왕이 호에 거하여 대사가 있으면 풍에 갔었으니 종묘가 반드시 풍에 있었으리라고 하여, 이 문제도 능히 결정치 못하였으나, 태종의 의사는 주의 종묘가 과연 낙읍에 있었다고 하면 그 예에 따라 신도 한양에 종묘를 그대로 두고 송경에 잉도하여도 조흘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쪽수▶P65-3그후 遷都 問題는 얼마 동안 提議되지 아니하고 中止 狀態로 있더니, 太宗 二年 七月에 이르러 또다시 會議가 열리게 되였다. 이것도 이때 天變地怪가 뒤를 이어 續起함에 動機된 바이어니와 太宗께서는 同月 十一日에 河崙 金士衡 李茂 等을 召하사 三府(議政府·司平府·承樞府)의 文武諸臣으로 더부러 漢陽 遷都의 可否를 討議케 하였다. 이때도 諸臣의 意見은 區區▶P66不一하야, 或은 『當在舊都(開京)』, 或은 『當還新都(漢陽)』, 或은 『移都母岳』이라 하는 등, 三派의 分裂을 보게되였는데, 三府가 드디어 『以在舊都爲可 還新都爲不便』이란 假決議를 上奏한 것을 보면 還都 反對의 意見이 多大數를 占하였든 모양이다. 그러면 太宗께서는 이 三府의 奏議에 對하야 어떠한 態度와 暗示를 보이섰느냐 하면, 實錄 同年 同月 壬辰(十一 日)條에 『以在舊都爲可 還新都爲不便』 『上以新都太上王創建之地․舊都人心所安 意未決 見三府之議 心不便 問近臣曰 成王在鎬京 廟在豊乎 在洛乎 皆不能對 又召金瞻問之 亦不能對 上曰 周公所洛邑而祭文王騎牛一 武王騂牛一 則宗廟必在洛矣 金科曰 成王居鎬 有大事則至豊宗廟必在豊矣 末能決之 上意以爲 若成王居鎬 宗廟在洛邑 則今予在舊都而宗廟在新都 亦宜』라고 쓰여있다. 이에 依하면 이때 太宗의 立場은 대단 困難하섰으니 첫재 新都 漢陽은 太上王의 創建하신 곳으로 宗廟가 그곳에 있고, 또(우에 말한 바와 같이) 太上王이 王에게 還都의 意로써 諭하신 일까지 있는 터이라 그 뜻에 거실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둘재 舊都 開城은 人民의 安心安業 懷土重遷의 地라 民意에 反하야 그곳을 갑작이 떠나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로 역이었든 까닭이다. 그리하야 王은 文武諸臣의 意見을 徵하였든바, 그 講論은 右와 같이 遷都를 反對하는 派가 많어 心中에 缺然함을 免치 못하게 되였고, 또 다시 이를 古事에 徵키 爲하야 周의 成王이 鎬京에 居하였을 때에 宗廟가 洛에 있었는지 豊에 있었는지?를 二三文臣에게 무르시었든바, 신통한 對答이 없거늘 太宗은 가라사대 周公이 洛邑을 成하고 文王 武王에게 騎牛騂牛를 祭한 것을 보면 宗廟가 洛邑에 있었든 것이 分明하다 하매, 金科는 가로대 成王이 鎬에 居하야 大事가 있으면 豐에 갔었으니 宗廟가 반듯이 豊에 있었으리라고 하야, 이 問題도 能히 決치 못하였으나, 太宗의 意思는 周의 宗廟가 과연 洛邑에 있었다고 하면 그 例에 따라 新都 漢陽에 宗廟를 그대로 두고 松京에 仍都하여도 조흘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이와 같이 천도 문제는 이번에도 역시 미결한 채로 보류되고 말았거니와, 태종실록 3년 정월조에 臺諫請移宗廟於松都 上曰此事非父王之意 當與議政府議而定이라 하고, 또 익2월조에 三府議定都松京 營宮闕于乾德殿古基 允之라고 한 것을 보면, 위의 천도 논의가 결렬된 지 6개월에 대간으로부터는 종묘를 송도에 이안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그 익월에 삼부에서는 송경에 정도하여 건덕전 옛 터에 궁궐을 조영하기를 논의하여 윤허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르러 한양 천도 문제는 더욱 더욱 좌초의 운을 당하게 되었다.
쪽수▶P67-1이와 같이 遷都 問題는 이번에도 역시 未決한 채로 保留되고 말았거니와, 太宗實錄 三年 正月條에 『臺諫請移宗廟於松都 上曰此事非父王之意 當與議政府議而定』이라 하고, 또 翌二月條에 『三府議定都松京 營宮闕于乾德殿古基 允之』라고 한 것을 보면, 우의 遷都議가 決裂된 지 六個月에 臺諫으로부터는 宗廟를 松都에 移安하자는 建議가 있었고, 그 翌月에 三府에서는 松京에 定都하야 乾德殿 古基에 宮闕을 營하기를 議하야 允許를 받었든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르러 漢陽 遷都 問題는 더욱 더욱 坐礁의 運을 當하게 되였다.
(D), 송한양경제 및 한양천도의 교
쪽수▶P67-2(D), 松漢兩京制 及 漢陽遷都의 敎
위의 대간의 제의인 종묘이안론은 당시 일반의 여론을 대표한 것으로서 이는 무엇보다도 송경 정도의 전제로서의 큰 의의가 있는 것이어니와 이것이 윤허되지 못한 한에는 송경의 정도는 영구성과 확실성을 가졌다고 할 수 없고 따라서 한양 천도 문제는 전혀 절망 상태에 있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태종은 항상 태상왕의 뜻도 중히 여기시지만, 일반의 여론을 크게 경청하시는 터이므로 종묘 이안 문제에 대하여서도 이를 정중히 토의하기 위하여 4년 7월 28일에 다음과 같은 교지를 의정부에 내리시었다.

往者移御此京 非爲永遷 乃避方耳 故宗廟社稷乃在漢京 然猶豫未定于玆六年 近者天變地怪屢彰警告 豈非以宗廟社稷遠在漢陽 都邑未定 人心未寧而然耶 久居于此 人皆懷土安業 難於遷徙 移安宗廟社稷于此都何如 明日議以聞(太宗實錄 卷四)

이에 의하면 당시 개경의 신민들이 회토안업으로 얼마나 천도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던 거와 또 이로 인하여 천도 논의가 늘 결말을 보지도 못하고 내려왔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하여 위의 교지는 신민이 정말 천도를 좋아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종묘사직을 개경으로 이안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었다. 의정부는 위 교에 의하여 종친제군과 삼부기로를 회합하고
1, 한경에 도읍을 정함이 가하냐
2, 그렇지 않으면 한경의 종묘를 송경으로 옮기는 것이 가하냐
의 두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제대신은 모두 둘째를 가하다 하여, 송경에 정도하여 종묘를 옮겨옴이 좋다고 주장하였으나 오직 찬성사 남재만은 이에 이의하여 “종묘를 이안하는 것은 자못 중대한 일인즉 널리 경사를 고사하여 고법례에 대질한 후에 가히 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원로요 의장인 좌정승 조준은 남재의 설을 취하여 곧 고전 중의 사례를 조사케 하여 드디어 성주의 양경제를 안득하였다. 그리하여 준은 절충적으로 “한경은 태상왕의 창건하신 바요 송경은 인민안업의 땅이라 공히 폐할 수 없은즉 송경에도 별도로 종묘를 세워, 두 곳 공히 4시의 제사를 행하여 저 주나라의 호경낙읍의 제를 모방함이 가하다”고 결의하여 써 태종께 상주하였다. 그런즉 수부는 의연히 송경에 정하자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태종께서는 일을 더 신중히 고려하시려고 할 뿐 아니라 항상 태상왕의 뜻을 중히 여기사 한양에 유의치 아니하심이 아니므로, 수일 후 또 삼부의 기로를 자문에 모으고 위의 의제를 재차 토의케 하였다. 그러나 토의의 결과는 전날과 마찬가지어서 漢京但有宗廟而已 松京將爲子孫萬世之地라고 하였다. 태종께서도 이제는 더 의론의 여지가 없다고 단념하시었는지 단연 양경의 제를 취하여 의정부에 하교하여

漢京 太祖所創之地 且宗廟所在 或往或來 無廢兩都 自今無更有議

라고 하시었다. 단 송경에 종묘를 별립하자는 조준 등의 제의는 불윤된 모양이다. 그리하여 9월에는 세자가 대신 한경에 가서 종묘에 배알한 일까지 있었다. 이는 모두 태상왕의 창건한 바인 한경을 될수록 무의미적 존재에서 구출하려는 노력의 표시임은 사실이나, 그러나 정치 경제 기타 문화의 모든 중심기관이 실제 송경에 있어 운전되는이상, 소위 양경의 제는 형식적 관념적 존재에 불과한 것으로서, 한경은 의연히 시위(尸位)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런즉 이것이 한양 환도를 절망하시는 태상왕의 뜻과 어그러짐은 물론이요, 부작자술의 도를 지키려는 태종의 진의도 아니었다. 민의에 순종하자면 태상왕의 뜻을 저버리게 되고 반대로 태상왕의 뜻을 체(體)하자면 민의에 거스르게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서신 태종의 고통은 실로 상상함에 족할 것이다. 위의 양경제는 이 양 난점을 다소 절충 완화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실상은 민의에 순종한 것이요 태상왕의 본의를 체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태종의 위의 성언 끝에 自今無更有議라고까지 하신 말씀은 과연 얼마만치의 확보성을 가진 것인지 스스로 의문에 있는 것이다.
쪽수▶P67-3우의 臺諫의 提議인 宗廟移安論은 當時 一般의 輿論을 代表한 것으로서 이는 무엇보다도 松京 定都의 前提로서의 큰 意義가 있는 것이어니와 이것이 允許되지 못한 限內에는 松京의 定都는 永久性과 確實性을 가젔다고 할 수 없고 따라서 漢陽 遷都 問題는 全혀 絶望 狀態에 있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太宗은 항상 太上王의 旨도 重히 역이시지만, 一般 의 輿論을 크게 敬聽하시는 터이므로 宗廟 移安 問題에 就하여서도 이를 鄭重히 討議하기 爲하야 四年 七月 二十八日에 다음과 같은 敎旨를 議政府에 下하시였다.

往者移御此京 非爲永遷 乃避方耳 故宗廟社稷乃在漢京 然猶豫未定于玆六年 近者天變地怪屢彰警告 豈非以宗廟社稷遠在漢陽 都邑未定 人心未寧而然耶 久居于此 人皆懷土安業 難於遷徙 移安宗廟社稷于此都何如 明日議以聞(太宗實錄 卷四)

이에 依하면 當時 開京의 臣民들이 懷土安業으로 얼마나 遷都를 질겨하지 아니하였든 거와 또 이로 因하야 遷都議가 늘 決末을 보지도 못하고 내려왔든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하야 右의 敎旨는 臣民이 正히 遷都를 좋아하지 아니할 ▶P68것 같으면 宗廟社稷을 開京으로 移安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었다. 議政府는 右敎에 依하야 宗親諸君과 三府耆老를 會合하고
一, 漢京에 都를 定함이 可하냐
二, 그렇지 않으면 漢京의 宗廟를 松京으로 移하는 것이 可하냐
의 두 問題에 就하야 討議하였다. 이 會議에서 諸大臣은 모다 第二를 可하다 하야, 松京에 定都하야 宗廟를 옮겨옴이 좋다고 主張하였으나 오직 贊成事 南在만은 이에 異議하야 『宗廟를 移安하는 것은 자못 重大한 일인즉 널리 經史를 考査하야 古法例에 質한 後에 可히 行할 것이라』고 하였다. 當時 元老요 議長인 左政丞 趙浚은 南在의 說을 取하야 곧 古典 中의 事例를 調査케 하야 드듸어 成周의 兩京制를 按得하였다. 그리하야 浚은 折衷的으로 『漢京은 太上王의 創建하신 바요 松京은 人民安業의 地라 共히 廢할 수 없은즉 松京에도 別히 宗廟를 세워, 兩處 共히 四時의 祀를 行하야 저 周나라의 鎬京洛邑의 制를 模倣함이 可하다』고 決議하야 써 太宗께 上奏하였다. 그런즉 首府는 依然히 松京에 定하자는 意味에 지나지 않는다. 太宗께서는 事를 더 慎重히 考慮하시려고 할 뿐 아니라 항상 太上王의 志를 重히 역이사 漢陽에 留意치 아니하심이 아님으로, 數日 後 또 三府의 耆老를 紫門에 會하고 우의 議題를 再次 討議케 하였다. 그러나 討議의 結果는 前日과 마찬가지어서 『漢京但有宗廟而已 松京將爲子孫萬世之地』라고 하였다. 太宗께서도 이제는 더 議論의 餘地가 없다고 斷念하시었는지 斷然 兩京의 制를 取하야 議政府에 下敎하야

漢京 太祖所創之地 且宗廟所在 或往或來 無廢兩都 自今無更有議

라고 하시었다. 但 松京에 宗廟를 別立하자는 趙浚 等의 提議는 不允된 모양이다. 그리하야 九月에는 世子가 대신 漢京▶P69-1에 가서 宗廟에 拜謁한 일까지 있었다. 이는 모다 太上王의 所創인 漢京을 될수록 無意味的 存在에서 救出하려는 努力의 表示임은 事實이나, 그러나 政治 經濟 其他 文化의 모든 中心機關이 실제 松京에 있어 運轉되는以上, 所謂 兩京의 制는 形式的 觀念的 存在에 不過한 것으로서, 漢京은 依然히 尸位와 다름이 없게 되였다. 그런즉 이것이 漢陽 還都를 切望하시는 太上王의 志와 어그러짐은 勿論이요, 父作子述의 道를 지키려는 太宗의 眞意도 아니었다. 民意에 順從하자면 太上王의 志를 저버리게 되고 反對로 太上王의 志를 體하자면 民意에 거실리게 될 수밖에 없는 立場에 서신 太宗의 苦痛은 실로 想像함에 足할 것이다. 右의 兩京制는 이 兩 難點을 多少 折衷 緩和하려는 意圖에서 나온 것이나 실상은 民意에 順從한 것이요 太上王의 本意를 體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太宗의 右의 聲言 끝에 『自今無更有議』라고까지 하신 말삼은 과연 얼마만치의 確保性을 가진 것인지 스스로 疑問에 있는 것이다.
양경제의 결의가 있은 지 불과 두 달에, 즉 동4년 9월에 태상왕이 태종에게 전지하여 왈 始予遷都漢陽 遷徙之煩 予豈不知 然松都王氏舊都 不可仍居也 今王復都于此 非勤循始祖之意라 하여 도읍을 송경에 정하는 것이 불가함을 유하시매, 왕은 곧 의정부에 지를 내리어 漢城我太上王創建之地 社稷宗廟在焉 久曠不居 非繼志之孝 明年冬予當徙居 宜令修茸宮室이라 하여 명년 겨울에 한경으로 천도할 결심을 보이고 동시에 새로 한경에 이궁을 일으키기 위하여 이궁조성도감 및 제조를 두시더니, 성석린, 이무 등의 漢京父王所都 亦有宮闕在 雖還都 何必更作離宮이라는 계청에 의하여 이궁 조성을 궁궐(본궁)수보로 변하게 하였다는 사실이 또한 실록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태조께서 얼마나 송경을 싫어하시고 한경 환도를 간절히 바라셨든 것과, 또 태종께서도 부왕의 뜻을 계술하시려고 이번에는 단연 민의에 거슬러서라도 한경에 천도하시려는 결심과 준비를 보이신 것이 분명하거니와, 우리는 이때의 정치가 너무도 조변석개적임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69-2兩京制의 決議가 있은 지 불과 두 달에, 즉 同四年 九月에 太上王이 太宗에게 傳旨하여 曰 『始予遷都漢陽 遷徙之煩 予豈不知 然松都王氏舊都 不可仍居也 今王復都于此 非勤循始祖之意』라 하야 都를 松京에 定하는 것이 不可함을 諭하시매, 王은 곧 議政府에 旨를 下하야 『漢城我太上王創建之地 社稷宗廟在焉 久曠不居 非繼志之孝 明年冬予當徙居 宜令修茸宮室』이라 하야 明年 冬에 漢京으로 遷都할 決心을 보이고 同時에 새로 漢京에 離宮을 이르키기 爲하야 離宮造成都監 及提調를 두시더니, 成石璘 李茂 等의 『漢京父王所都 亦有宮闕在 雖還都 何必更作離宮』이라는 啓請에 依하야 離宮 造成을 宮闕(本宮)修補로 變케 하였다는 事實이 또한 實錄에 보인다. 이에 依하면 太祖께서 얼마나 松京을 싫어하시고 漢京 還都를 切望하섰든 거와, 또 太宗께서도 父王의 志를 繼述하시려고 이번에는 斷然 民意에 걸실려서라도 漢京에 遷都하시려는 決心과 準備를 보이신 것이 分明하거니와, 吾人은 이때의 政治가 너무도 朝變夕改的임에 놀래▶P70-1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소위 천도 이어 조궁 등 문제는 고려조에서와 같이 대개는 실제생활상의 절실한 사정과 필요로보다도 어떠한 사상 관념의 유희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항상 이리했다 저리했다 하는 변동성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면에 관한 정치의 조변석개는(고려조로부터) 당시에는 도리어 예사로 알아 그다지 괴이하게 여기던 것이 아니였다.
쪽수▶P70-2그러나 그때의 所謂 遷都 移御 造宮 等 問題는 高麗朝에서와 같이 대개는 實際生活上의 切實한 事情과 必要로보다도 어떠한 思想 觀念의 遊戲로 이러나는 것이므로 항상 이리했다 저리했다 하는 變動性을 띄고 있었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方面에 關한 政治의 朝變夕改는(高麗朝로부터) 當時에는 도리어 例事로 알아 그다지 怪異하게 역이던 것이 아니였다.
(E) 하륜의 주청과 모악상택
쪽수▶P70-3(E) 河崙의 奏請과 母岳相宅
이와 같이 한양 천도의 무거운 결심과 준비를 보이시는 이때에 또 진산부원군 하륜에 의하여 모악천도론이 일어났었다. 태종실록 4년 9월조에

丁巳(十九日)晋山府院君河崙上書 請移都漢陽母岳 初崙以地理讖書移都母岳 至是復請

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니, 하륜은 앞서 태조시로부터 모악설을 주장하던 이므로 어디까지든지 연래의 지론을 실현하려고 하여 이번에 또 서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륜의 이 제창은 당시 송경에 음려의 재가 있음과 태조 태종의 한경 천도의 유교(諭敎)가 있음에도 기인한 바이지만 무엇보다도 고려조로부터 유행하여오는 지리도참서에 의하여 모악의 땅을 신비시하고 중요시하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태종께서는 원래 지리도참의 설을 즐겨하시지는 아니하여 처음에 금지령을 내리시기까지 하였지만, 관념상 지리의 설을 전혀 불신하시는 편은 아니었으며, 또 하륜의 모악설이 누차 주장하여오는 만치 거기에 어떠한 이유와 근거가 있나 하는 호기심을 가지시게도 되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마침내 하륜의 설에 움직이신 바가 되어 태조시 동양으로 모악일대를 친히 상택하시게 되었다. 여기서 더욱 우리는 그때의 천도론이 지리도참 등 관념의 유희로 움직여짐을 볼 수 있다. 10월 2일에 태종은 하륜 조준 이하 제신을 데리시고 개경을 출발하여 4일에 목적지에 도달하시였다. 모악은 지금 경성 서대문 밖 연희·신촌 일대의 후산임은 앞서도 말한 바이다. 태종께서 친히 모악 중봉에 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백기를 한강변에 세우게 하고 사방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기를 此合都邑之地 晋山府院君(河崙)之所言也 白旗之北 可以邑居라고 하였다. 하산하여 재상, 지관 등을 집합하여 명당을 구하신 후, 특히 지관 윤신달 등에게 한양 신도와 이 모악과의 지리상 우열을 물으시었다. 이에 대하여 신달은 왈

以地理論之 漢陽前後石山險而明堂水絶 不可爲都 此地以讖書考之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此言旣不虛矣 其書其可信也 “李氏出則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 今母岳北有大路 則此地正合其讖 又曰 “眼前三江挹如滿月” 此地三江在前 亦合讖書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

라고 하여, 한양 신도는 지리상 불가함에 대하여 모악은 서에 일일이 부합하는 우월의 땅이라고 명언하였다. 그 소위 ‘참서’는 서명을 들지 아니하였지만 고려시대(특히 말기)로부터 유행하여오는 비기의 일종임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중에 “왕씨 500년 후에는 이씨가 나온다”, “이씨가 나오면 삼각산 남에 도읍을 짓는다” 하는 것은 마치 후세의 정감록 중에 이씨가 망한 후 정씨가 나와 계룡산에 도읍을 짓는다는 의미의 참설과 서로 유사하며, 또 거기 ‘三角山南’이니 ‘須防北大路’니 ‘眼前三江’이니 하는 것은 다 신달의 설과 같이 모악의 땅을(중심·標準으로 삼아) 의미한 것이 분명하니, 소위 북대로는 지금 서대문 밖 의주통에서 모악재 고개를 지나 홍제원으로 통하는 대로를 가르친 것이고, 삼강은 한강의 율도, 여의도의 사주로 된 3파의 물줄기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윤신달의 모악찬성설에 대하여 우리이 하나의 의아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신달의 태조시에 있어서의 언설과 전후 정반대임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소이이다.
쪽수▶P70-4이와 같이 漢陽 遷都의 무거운 決心과 準備를 보이시는 이때에 또 晋山府院君 河崙에 依하야 母岳遷都論이 이러났었다. 太宗實錄 四年 九月條에

丁巳(十九日)晋山府院君河崙上書 請移都漢陽母岳 初崙以地理讖書移都母岳 至是復請

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니, 河崙은 앞서 太祖時로부터 母岳說을 主張하던 이므로 어데까지든지 年來의 持論을 實現하려고 하야 이번에 또 書請한 것임을 알 수 있다. 河崙의 이 提唱은 當時 松京에 陰沴의 災가 있음과 太祖 太宗의 漢京 遷都의 諭敎가 있음에도 基因한 바이지만 무엇보다도 高麗朝로부터 流行하여오는 地理圖讖書에 依하야 母岳의 地를 神祕視하고 重要視하는 데 더 큰 理由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太宗께서는 원래 地理圖讖의 說을 질겨하시지는 아니하야 처음에 禁止令을 내리시기까지 하였지만, 觀念上 地理의 說을 全혀 不信하시는 편은 아니었으며, 또 河崙의 母岳說이 屢次 主張하여오는 만치 거기에 어떠한 理由와 根據가 있나 하는 好奇心을 가지시게도 되였다. 그리하야 太宗은 마침내 河崙의 說에 움직이신 바ㅣ 되야 太祖時 同樣으로 母岳一帶를 親히 相宅하시게 되였다. 여기서 더욱 吾▶P71人은 그때의 遷都論이 地理圖讖 等 觀念의 遊戲로 움지겨짐을 볼 수 있다. 十月 二日에 太宗은 河崙 趙浚 以下 諸臣을 데리시고 開京을 出發하야 四日에 目的地에 到達하시였다. 母岳은 今 京城 西大門 外 延禧·新村 一帶의 後山임은 앞서도 말한 바이다. 太宗께서 親히 母岳 中峯에 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白旗를 漢江邊에 세우게 하고 四方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기를 『此合都邑之地 晋山府院君(河崙)之所言也 白旗之北 可以邑居』라고 하였다. 下山하야 宰相 地官 等을 集合하야 明堂을 求하신 후, 特히 地官 尹莘達 等에게 漢陽 新都와 이 母岳과의 地理上 優劣을 무르시었다. 이에 對하야 莘達은 曰

以地理論之 漢陽前後石山險而明堂水絶 不可爲都 此地以讖書考之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此言旣不虛矣 其書其可信也 “李氏出則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 今母岳北有大路 則此地正合其讖 又曰 “眼前三江挹如滿月” 此地三江在前 亦合讖書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

라고 하야, 漢陽 新都는 地理上 不可함에 對하야 母岳은 書에 一一符合하는 優越의 地라고 明言하였다. 그 所謂 「讖書」는 書名을 들지 아니하였지만 高麗時代(特히 末期)로부터 流行하여오는 秘記의 一種임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其中에 『王氏 五百年 後에는 李氏가 出한다』, 『李氏가 出하면 三角山 南에 都邑을 作한다』 하는 것은 마치 後世의 鄭鑑錄 中에 李氏가 亡한 後 鄭氏가 出하야 鷄龍山에 都邑을 作한다는 意味의 讖說과 서루 類似하며, 또 거기 『三角山南』이니 『須防北大路』니 『眼前三江』이니 하는 것은 다 莘達의 說과 같이 母岳의 地를(中心·標準으로 삼아) 意味한 것이 分明하니, 所謂 北大路는 今 西大門 外 義州通에서 母岳재 고개를 지나 弘濟院으로 通하는 大路를 가르친 것이고, 三江은 漢江의 栗島 汝矣島의 砂洲로 된 三派의 水流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尹莘達의 母岳贊成說에 對하야 吾人이 一疑訝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莘達의 太祖時에 있어서의 言說과 前後 正反對임을 認치 아니할 수 없는 所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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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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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언하면 태조시에는 그는 이미 술한 바와 같이 모악이 지리상 불가하다는 설과 한양이 개경에 다음가는 길지라는 설을 고집하더니, 지금 와서는 그와 정반대의 의견을 진술하니, 대체 무슨 이유인가. 태조시에도 그들을 이끌고 모악을 친상하여 그들의 반대로 마침내 한양에 건도하였음에 불구하고 지금 그 주언 끝에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라고 한 것은 이 무슨 의미의 말인가. 우리은 더욱더욱 그의 언설에 요령을 얻을 수 없다. 그가 전후 몇 년간(약 10년간) 정신(기억) 및 지식에 있어 변동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전후부동의 설은 어떠한 수단—즉 매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만일 그러한 공리(공리)적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실로 기군강상(欺君岡上)의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쪽수▶P72換言하면 太祖時에는 그는 이미 述한 바와 같이 母岳이 地理上 不可하다는 說과 漢陽이 開京에 다음가는 吉地라는 說을 執하더니, 지금 와서는 그와 正反對의 意見을 陳述하니, 抑 무슨 理由인가. 太祖時에도 그들을 이끌고 母岳을 親相하야 그들의 反對로 마침내 漢陽에 建都하였음에 不拘하고 지금 그 奏言 끝에 『太上王時未得此地 建都漢陽矣』라고 한 것은 이 무슨意味의 말인가. 吾人은 더욱더욱 그의 言說에 要領을 얻을 수 없다. 그가 前後 幾年間(約 十年間) 精神(記憶)及智識에 있어 一變動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前後不同의 說은 어떠한 手段—즉 媒進策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든가. 만일 그러한 功利的 心理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실로 欺君岡上의 罪를 免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신달의 동료로서 태조시에 신달과 의견을 같이하였던 유한우는 한양에 대하여는 역시 前後石山嶮而明堂無水 不可爲都 地理書曰 流水不長 人必絶 蓋言不可也라 하고, 모악에 대하여는 此地亦未正合規局이라 하여, 신도와 모악이 공히 풍수지리상의 결함이 있음을 논하였고, 또 그 동료 이양달은 漢陽雖曰明堂無水 自廣通橋(今大廣橋)以上有水流焉 前面有水 四面回抱 稍可爲都 此地則未合規局 然欲都之 則此非明堂 下有明堂이라 하여, 한양은 과히 불가함이 없고 모악은 규국에 부합하지 아니하나 정녕 이곳에 정도하려면 명당은 더 아래 쪽에 있다고 하였다. 같은 서운관원 사이에도 이렇게 이론이 각출하여 유(한우)와 윤(신달)은 한양의 지리가 불가하다고 함에 대하여 이(양달)는 그다지 불가함이 없다 하고, 또 윤은 모악이 참서에 응하여 좋다고 함에 대하여 유와 이는 전과 같이 그 지리의 불가함을 주창하였는바, 단 이만은 이번에 하유명당의 조건을 첨부하였다. 이상 3인의 설은 확실히 전후에 있어 다소의 이동(異同)을 낳았다. 한양의 지리가 불가할 것 같으면 그들—특히 유, 윤 2인은 태조시에 어찌하여 이의를 말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태조로 하여금 한양건도를 실현하시도록 방조 혹은 묵과하였던가 하는 의아가 없을 수 없다. 이때 태종께서도 이러한 의심을 품으사 予觀地理書 曰先看水 後看山 若不用地理書則已 用則明堂無水之地 不可爲都明矣 汝等皆知地理 初從太上王建都邑 何不言此故乎라고 책질하시매, 윤신달은 臣於其時 適遭親喪 未能扈從이라 하고, 유한우는 臣等非不言 但不得專耳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윤, 유 2인의 답변이 과연 신용할 만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또한 의심치 아니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윤신달은 기술한 바와 같이 태조의 한양 상택 당시에 거가를 수종하여 태조의 자문에 응대하였던 사실이 기록에 명시되어 있고, 유한우도 그때 모악에서 봉답 중에 분명히 (최융·윤신달과 한가지) 一國之內 扶蘇(松岳)明堂爲上 南京(漢陽)次之라고 하였으므로써다. 이것이 무슨 기록의 착오거나 혹은 그들의 앞 일에 대한 기억의 착오라면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은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한 기군망상이다. 태종께서는 윤, 유 2인에 대하여 추궁치 아니하시고, 이양달에 대하여 역시 불유쾌한 어조로 汝於建都之時 從太上王而行 豈不知明堂水 絶之地不可建都也 乃何建都於漢陽 大興土木之役 以欺父王乎 父王在新都 不豫 幾殆而復 存沒則關乎大命矣 厥後變故屢興 無一好事 乃還松都 至今國人咎予棄父王新都라고 하였다. 양달은 이에 대하여 明堂雖曰無水 前面始流 况其時盡言不諱 但非臣所專耳라고 변해(辯解)하매 태종께서는 더욱 노하사 汝在我前 强言如此 豈於他處自服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당시 서운관원의 주언 중에는 확실히 종종의 둔사가 함재하였음을 더욱 간파할 수 있다.
쪽수▶P73-2그런데 이때 莘達의 同僚로서 太祖時에 莘達과 意見을 같이하였든 劉旱雨는 漢陽에 就하여는 역시 『前後石山嶮而明堂無水 不可爲都 地理書曰 流水不長 人必絶 蓋言不可也』라 하고, 母岳에 對하여는 『此地亦未正合規局』이라 하야, 新都와 母岳이 共히 風水地理上의 缺陷이 있음을 論하였고, 또 그 同僚 李陽達은 『漢陽雖曰明堂無水 自廣通橋(今大廣橋)以上有水流焉 前面有水 四面回抱 稍可爲都 此地則未合規局 然欲都之 則此非明堂 下有明堂』이라 하야, 漢陽은 過히 不 可함이 없고 母岳은 規局에 合치 아니하나 正히 이곳에 定都하려면 明堂은 더 아랫 쪽에 있다고 하였다. 같은 書雲觀員 사이에도 이러케 異論이 各出하야 劉(旱雨)와 尹(莘達)은 漢陽의 地理가 不可하다고 함에 對하야 李(陽達)는 그다지 不可함이 없다 하고, 또 尹은 母岳이 讖書에 應하야 좋다고 함에 對하야 劉와 李는 前과 같이 그 地理의 不可함을 唱하였는바, 但 李만은 이번에 下有明堂의 條件을 添附하였다. 以上 三人의 說은 確實히 前後에 있어 多少의 異同을 生하였다. 漢陽의 地理가 不可할 것 같으면 그들—特히 劉尹 兩人은 太祖時에 어찌하야 異議를 말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太祖로 하여금 漢陽建都를 實現하시도록 幇助 혹은 默過하였든가 하는 疑訝가 없을 수 없다. 이때 太宗께서도 이러한 疑▶P74-1心을 품으사 『予觀地理書 曰先看水 後看山 若不用地理書則已 用則明堂無水之地 不可爲都明矣 汝等皆知地理 初從太上王建都邑 何不言此故乎』라고 責質하시매, 尹莘達은 『臣於其時 適遭親喪 未能扈從』이라 하고, 劉旱雨는 『臣等非不言 但不得專耳』라고 對答하였다. 그러나 이 尹劉 兩人의 答辨이 과연 信用할 만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또한 의심치 아니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尹莘達은 旣述한 바와 같이 太祖의 漢陽 相宅 當時에 車駕를 隨從하야 太祖의 諮問에 應對하였든 事實이 記錄에 明示되여 있고, 劉旱雨도 그때 母岳에서 奉答 中에 分明히 (崔融·尹莘達과 한가지) 『一國之內 扶蘇(松岳)明堂爲上 南京(漢陽)次之』라고 하였으므로써다. 이것이 무슨 記錄의 錯誤거나 혹은 그들의 前事에 對한 記憶의 錯誤라면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은 事實이라면 이는 分明한 欺君罔上이다. 太宗께서는 尹劉 兩人에 對하야 追窮치 아니하시고, 李陽達에 對하야 역시 不愉快한 語調로 『汝於建都之時 從太上王而行 豈不知明堂水 絶之地不可建都也 乃何建都於漢陽 大興土木之役 以欺父王乎 父王在新都 不豫 幾殆而復 存沒則關乎大命矣 厥後變故屢興 無一好事 乃還松都 至今國人咎予棄父王新都』라고 하였다. 陽達은 이에 對하야 『明堂雖曰無水 前面始流 况其時盡言不諱 但非臣所專耳』라고 辯解하매 太宗께서는 더욱 怒하사 『汝在我前 强言如此 豈於他處自服』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當時 書雲觀員의 奏言 中에는 確實히 種種의 遁辭가 含在하였음을 더욱 看破할 수 있다.
태종은 양달의 ‘하유명당(下有明堂)’설에 의하여 상명당에서 다시 일리를 내려가 명당을 구할새, 모악설의 지론인 하륜은 이에 대하여 “상명당은 마치 송도의 강안전과 같고 하명당은 송도의 수창궁과 같다”라고 비교하여 상하명당이 다 송도의 그것과 방불함을 진언하였다. 이때의 소위 상명당 하명당은 모악의 어느 地點을 가르쳐 이름인지 자세치 못하나, 아마 상명당은 옛 연희궁 터(연희궁은 세종 3년 신축에 (상왕)태종께서 創建하신 한 이궁이니, 세종실록지리지에 晉山府院君河崙嘗以此地爲母岳明堂可建都邑·歲辛丑太宗思其言爲營離宮이라고 보인다) 하명당은 지금 수경원(일운 선희묘 장조 사친 영빈 이씨묘)국 내인 듯하다. 그러나 이 모악명당은 태조시로부터 본래 문제가 많고 말성이 있던 곳이요, 또 이때에도 하륜 윤신달 이랑 등 수 사람의 찬성자를 제한 이외에는 대개 불가하다는 의견을 진술하였지만, 지금 실지에 있어 보더라도 모악명당은 좌우의 폭이 좀 협애할 뿐만 아니라 전면 한강 연안의 거리도 단근하여 한두 궁이나 소도시를 조영한다면 몰라도 일국의 수부란 대도시를 건설함에는 조금 부적당한 감이 있다. 물론 그것이라도 근대도시 격으로 한강을 중간에 놓고 그 남북의 땅을 죄다 취한다면 지금 경성보다도 더 훌륭한 처지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에는 수도 수비의 군사적 필요로 성곽을 쌓는 때라 그와 같이 광범위에 걸치지 못할 것은 물론이다.
쪽수▶P74-2太宗은 陽達의 『下有明堂』說에 依하야 上明堂에서 다시 一里를 下하야 明堂을 求할새, 母岳說의 持論인 河崙은 이에 對하야 『上明堂은 마치 松都의 康安殿과 같고 下明堂은 松都의 壽昌宮과 같다』고 比較하야 上下明堂이 다 松都의 그것과 仿佛함을 陳言하였다. 이때의 所謂 上明堂 下明堂은 母岳의 어느 地點을 가르쳐 이름인지 자세치 못하나, 아마 上明堂은 古 延禧宮 터(延禧宮은 世宗 三년 辛丑에 (上王)太宗께서 創建하신 一離宮이니, 世宗實錄地理志에 「晉山府院君河崙嘗以此地爲母岳明堂可建都邑·歲辛丑太宗思其言爲營離宮」이라고 보인다) 下明堂은 今 綏▶P75-1慶園(一云宣禧墓莊祖私親暎嬪李氏墓)局 內인 듯하다. 그러나 이 母岳明堂은 太祖時로부터 本來 問題가 많고 말성이 있든 곳이요, 또 이때에도 河崙 尹莘達 李良 等 數人의 贊成者를 除한 以外에는 대개 不可하다는 意見을 陳述하였지만, 지금 實地에 있어 보더라도 母岳明堂은 左右의 幅이 좀 狹隘할 뿐만 아니라 前面 漢江 沿岸의 距里도 短近하야 一離宮이나 小都市를 營한다면 몰라도 一國의 首府란 大都市를 建設함에는 稍稍 不適當한 感이 있다. 勿論 그것이라도 近代都市 格으로 漢江을 中間에 놓고 그 南北의 地를 죄다 取한다면 지금 京城보다도 더 훌륭한 處地와 條件을 갖이고 있지만, 그때에는 首都 守備의 軍事的 必要로 城郭을 쌋는 때라 그와 같이 廣範圍에 걸치지 못할 것은 勿論이다.
(F), 한양 정도와 창덕궁의 창건
쪽수▶P75-2(F), 漢陽 定都와 昌德宮의 創建
태종의 모악 상택은 이리하여 끝을 냈지만, 반대자가 다수를 점하여 태종께서는 심중에 다소 결연한 바가 없지 아니하였던 모양이나, 그러나 일부의 찬성파도 있고 사서에 합하는 점도 있어서 이곳을 전연 단념치는 아니하셨던 모양이다. 송도 한경에 모악 후보지를 가하여 삼자 중 어느 것을 길지로 택할까 함에 대하여 이를 구경적으로 결정하기 위하여 태종은 선조신명에 소하여 그 앞에서 이를 판단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 익익일인 6일 조조에 태종께서 친히 신도 한양의 종묘문 외에 이르사 민중에게 아래의 일언을 고하신 것으로써 알 수 있다.

予在松都 屢有水旱災變 下敎求言 自政丞趙浚以下言當還新都者多矣 然新都亦多變故 都邑未定 人心不靜 今入宗廟告以松都·新都·母岳 占其吉凶 從吉定都 定都之後 雖有災變 母有提議

태종은 다시 대묘 내에 들어가사 군신으로 더불어 예배 상향하신 후 전조 태조 정도시의 예에 의하여 척전(擲錢)으로써 복서에 대신하여 길흉을 점하시었다. 척전의 판단은 신도가 이길일흉이요 송경, 모악이 공히 이흉일길이었다. 이에 상은 도읍을 한양 신도에 정하기로 결하시고, 그와 동시에 신도 향교동(구 교동 지금 경운동) 동북변의 땅(지금 창덕궁)를 상(相)하여 이궁 창조를 명하신 후 개경으로 환어하시었다. 태상왕은 왕을 보시고 定都漢陽 孝莫大焉이라고 하셨다 한다.
쪽수▶P75-3太宗의 母岳 相宅은 이리하야 끝을 냈지만, 反對者가 多數를 占하야 太宗께서는 心中에 多少 缺然한 바가 없지 아니하였든 모양이나, 그러나 一部의 贊成派도 있고 謝書에 合하는 點도 있어서 이곳을 全然 斷念치는 아니하셨든 모양이다. 松都 漢京에 母岳 候補地를 加하야 三者 中 어느 것을 吉地로 擇할까 함에 就하야 이를 究竟的으로 決定하기 爲하야 太宗은 先祖 神明에 訴하야 그 앞에서 이를 判斷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 翌翌日인 六日 早朝에 太宗께서 親히 新都 漢陽의 宗廟門 外에 이르사 民衆에게 左의 一言을 告하신 것으로써 알 수 있다.

予在松都 屢有水旱災變 下敎求言 自政丞趙浚以下言當還新都者多矣 然新都亦多變故 都邑未定 人心不靜 今入宗廟告以松都·新都·母岳 占其吉凶 從吉定都 定都之後 雖有災變 母有提議

太宗은 다시 大廟 內에 드러가사 群臣으로 더부러 禮拜 上香하신 후 前朝 太祖 定都時의 例에 依하야 擲錢으로써 卜筮에 대신하여 吉凶을 占하시었다. 擲錢의 判斷은 新都가 二吉一凶이요 松京 母岳이 共히 二凶一吉이었다. 於是乎 上은 都▶P76-1를 漢陽 新都에 定하기로 決하시고, 그와 同時에 新都 鄕校洞(舊 校洞 今 慶雲洞) 東北邊의 地(今 昌德宮)를 相하야 離宮 創造를 命하신 후 開京으로 還御하시었다. 太上王은 王을 보시고 『定都漢陽 孝莫大焉』이라고 하섰다 한다.
신도에는 훌륭한 본궁(경복궁)이 있음에 불구하고 이와 같이 따로 이궁을 만들 것을 명하신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본궁에 대한 피방의 의미에서 경영되는 것이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복궁을 어소로 삼았던 태조시대에는 인사 및 자연계에 있어 여러 가지 변이가 출현하였으므로 그곳을 피하여 신별궁에 거하시려는 의미와 동기에 불과함이었다.
쪽수▶P76-2新都에는 훌륭한 本宮(景福宮)이 있음에 不拘하고 이와 같이 따로 離宮을 作할 것을 命하신 것은 무슨 理由인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本宮에 對한 避方의 意味에서 經營되는 것이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景福宮을 御所로 삼었든 太祖時代에는 人事及自然界에 있어 여러 가지 變異가 出現하였으므로 그곳을 避하야 新別宮에 居하시려는 意味와 動機에 不過함이었다.
태종은 익5년 2월에 또 신도에 행행하여 이궁의 영조를 보시고 주유 약 1개월에 개경에로 환어하시었는데, 이때 천도의 협위를 받은 개경 성내의 민심은 각일각으로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근신 중에도 왕왕 민심에 공명하여 천도를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 이 때문에 왕은 또 한 번 재신의 여론을 비추기 위하여 8월 3일에 의정부에 명하여 한양 천도의 가부(실상은 지속(遲速))를 회의케 하였던바, 의정부의 상주는 年風飢不可라 하여 이해의 흉작을 이유로 하여 천도의 불가(실상은 보류)를 주장하였다. 민의를 중히 여기는 정치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님은 아니나, 그로 인하여 기정 방침을 실행치 못하고 늘 고식과 유예에 빠져 종종의 폐단을 낳은는 것은 결코 정치의 이상이 아니다. 태종은 영매의 주로 일컫는 임금이지만 원래 유학 출신으로 유교주의적 규범과 이상에 의하여 진행하려 하는 이만치, 실제에 있어서의 과단은 무인 출신인 태조에 비하여 훨씬 미치지 못하시었다. 천도의 유예미정은 실로 이러한 데 원인함이 많거니와 태종과 같이 민의를 중히 여기시는 임금도 우의 의정부의 상주에는 다소 불쾌를 느끼사, 음양참휘의 설과 전날의 정중한 결의를 방패로 삼아 陰陽書曰 王氏五百年後 李氏興 遷南京 今李氏之興 果然遷南京 南京之說 不可不信也 且向者相地之時 說者紛紛未定 予乃躬詣宗廟卜旣得吉 離宮已成 遷都之計定矣 將以十月移于漢京 本宮則不御也라 하시고, 또 그 후 수일에도 재신을 다시 모으고 천도에 대한 굳은 결심과 태도를 보이셨으니, 태종실록 5년 8월조에

壬申(九日)還移御敬德宮 (中略) 與兵曹判書南在·刑曹判書李文和·戶曹判書李至·議政府贊成事尹柢·工曹判書韓尙敬 議遷漢京 上曰 我太上王 肇建新邑 此乃李氏不易之定都也 自我上王移幸松都之後 因仍不還 于今七年 違於父作子述之道 寡人之罪也 去秋松都有陰沴之災 故往新都 卜于宗廟 旣得吉 今春又往視其修葺 工已幾畢 往還之計定矣 小民臣室皆曰不可 此安土重遷之意也 尙敬對曰盤庚遷都 利害甚明 然小民臣室猶安土重遷 上曰若今年不遷 明年又不遷 因循不遷 則松都人家日益稠密 漢邑日益凋廢 將如之何 況陰陽家曰松都乃廢君臣之地 人皆曰歲凶不可遷 此包藏凶惡之人也 豊海京畿雖有旱災 有餘各道則不爲歉矣 名言歲凶而排擊遷都之意者 不愛社稷之臣也 南在曰安有包藏凶惡而排擊乎 上曰頃有遷都之議而新都與母岳皆非而此都乃可 此包藏之言也

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위 기사 중에도 태종께서 한상경 및 남재에게 答하신 말씀은 가장 심각하고 준열하여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는 동시에 이론의 중출을 막는 데 가장 힘 있는 말씀이었다. 태종의 말씀과 같이 1년 2년 인순고식하여 천도를 단행치 아니하면 송도의 호구는 날로 증가하여지고 한경의 그것은 반대로 날마다 감소하여서 그때에는 천도의 실행이 더욱 곤란할 것은 물론이다. 당시 유행의 음양서에 송도는 군신을 폐하는 곳이라는 말이 있음에 불구하고 종종의 구실을 빌려 천도를 반대하는 것은 흉악한 마음을 포장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실상 음양설을 빌려와 중구의 이론을 막는 방패를 삼으려 함에 불과한 것이나 그 말씀이 얼마나 날카로웠던 것을 상상함에 족하다.
쪽수▶P76-3太宗은 翌五年 二月에 또 新都에 行幸하야 離宮의 營造를 보시고 駐留 約一個月에 開京에로 還御하시었는데, 이때 遷都의 脅威를 받은 開京 城內의 民心은 刻一刻으로 不安을 늣기게 되고 近臣 中에도 往往 民心에 共鳴하야 遷都를 反對하는 者가 있었다. 이 때문에 王은 또 한 번 宰臣의 輿論을 徵하기 爲하야 八月 三日에 議政府에 命하야 漢陽 遷都의 可否(실상은 遲速)를 會議케 하였든바, 議政府의 上奏는 『年風飢不可』라 하야 이해의 凶作을 理由로 하야 遷都의 不可(실상은 保留)를 主張하였다. 民意를 重히 역이는 政治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님은 아니나, 그로 因하야 旣定方針을 實行치 못하고 늘 姑息과 猶豫에 빠저 種種의 弊端을 生하게 하는 것은 決코 政治의 理想이 아니다. 太宗은 英邁의 主로 일컸는 님금이지만 원래 儒學 出身으로 儒敎主義的 規範과 理想에 依하야 進行하려 하는 이만치, 實際에 있어서의 果斷은 武人 出身인 太祖에 比하야 훨신 不及이시었다. 遷都의 猶豫未定은 실로 이러한 데 原因함이 많거니와 太宗과 같이 民意를 重히 역이시는 님금도 우의 議政府의 上奏에는 多少 不快를 늣기사, 陰陽讖諱의 說과 前日의 鄭重한 決議를 방패로 삼아 『陰陽書曰 王氏五百年後 李氏興 遷南京 今李氏之興 果然遷南京 南京之說 不可不信也 且向者相地之時 說者▶P77-1紛紛未定 予乃躬詣宗廟卜旣得吉 離宮已成 遷都之計定矣 將以十月移于漢京 本宮則不御也』라 하시고, 또 그 후 數日에도 宰臣을 再會하고 遷都에 對한 굳은 決心과 態度를 보이섰으니, 太宗實錄 五年 八月條에

壬申(九日)還移御敬德宮 (中略) 與兵曹判書南在·刑曹判書李文和·戶曹判書李至·議政府贊成事尹柢·工曹判書韓尙敬 議遷漢京 上曰 我太上王 肇建新邑 此乃李氏不易之定都也 自我上王移幸松都之後 因仍不還 于今七年 違於父作子述之道 寡人之罪也 去秋松都有陰沴之災 故往新都 卜于宗廟 旣得吉 今春又往視其修葺 工已幾畢 往還之計定矣 小民臣室皆曰不可 此安土重遷之意也 尙敬對曰盤庚遷都 利害甚明 然小民臣室猶安土重遷 上曰若今年不遷 明年又不遷 因循不遷 則松都人家日益稠密 漢邑日益凋廢 將如之何 況陰陽家曰松都乃廢君臣之地 人皆曰歲凶不可遷 此包藏凶惡之人也 豊海京畿雖有旱災 有餘各道則不爲歉矣 名言歲凶而排擊遷都之意者 不愛社稷之臣也 南在曰安有包藏凶惡而排擊乎 上曰頃有遷都之議而新都與母岳皆非而此都乃可 此包藏之言也

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右 記事 中에도 太宗께서 韓尙敬 및 南在에게 答하신 말삼은 가장 深刻하고 峻烈하야 君主로서의 威嚴을 보이는 同時에 異論의 衆出을 막는 데 가장 힘 있는 말삼이었다. 太宗의 말씀과 같이 一年 二年 因循姑息하야 遷都를 斷行치 아니하면 松都의 戶口는 날로 增加하여지고 漢京의 그것은 反對로 날마다 減少하여서 그때에는 遷都의 實行이 더욱 困難할 것은 勿論이다. 當時 流行의 陰陽書에 松都는 君臣을 廢하는 곳이라는 말이 있음에 不拘하고 種種의 口實을 비러 遷都를 反對하는 것은 凶惡한 마음을 包藏한 것이라고 하신 말삼은 실상 陰陽說을 借來하야 衆口의 異論을 막는 방패를 삼으려 함에 不過한 것이나 그 말삼이 얼마나 날카러웠든 것을 想像함에 足하다.
태종은 후 수일에 태상왕을 뵙고 장차 한경으로 환어할 뜻을 고하시매, 태상왕은 크게 기뻐하사 왈 陰陽之說 雖不足信 王氏五百年後 李氏得國而都漢京 我家果應其說 夫豈虛哉 且我家其豫有得國之心乎 王之欲遷漢京 實非王心 天使之然也라고 하시었다. 왕씨 500년 후에 이씨가 나와 한양(남경)에 도읍을 만든다는 참설은 우의 태종의 말씀 가운데에도 보이거니와, 이는 앞서 윤신달의 상언 중에 보이는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李氏出則 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란 참설과 거의 내용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다만 전자는 후자의 ‘삼각산남’, ‘한양’ 즉 ‘남경’으로 해석한 데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후자의 須防北大路의 구절로 보면 ‘삼각산남’은 윤신달의 해석과 같이 모악의 땅이라고 함이 가하니 전자의 설은 즉 한양 주장파의 아전인수적 해석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하했든 태조와 태종께서는 이런 류의 참설을 단지 천도운동의 수단이나 방편으로서 이용하시는 데 그칠 뿐만 아니라 관념상 어느 정도까지 이를 신비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특히 태조께서는 송도지기쇠왕설을 믿으심이 깊어 즉위 초로부터 천도에 급급하셨던 것은 앞서 누차 말한 바이며 태종께서는 역시 전술함과 같이 유학 출신이니만치 원래 이러한 미신을 좋아하지 아니하사 처음에는 도참지리의 서를 금하신 일까지 있지만, 또 전연 이를 불신치도 아니하셨던 것은 왕의 전후 언행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께서 한양 천도를 급히 하려고 하심은 이보다도 첫째 (누술한 바와 같이) 태상왕의 뜻을 계술하려 하심이요 둘째 송한 양경의 호구의 성쇠를 염려하신 까닭임은 더 말할 바도 없다.
쪽수▶P77-2太宗은 後 數日에 太上王을 뵙고 장차 漢京으로 還御할 뜻을 告하시매, 太上王은 크게 기뻐하사 曰 『陰陽之說 雖不足▶P78-1信 王氏五百年後 李氏得國而都漢京 我家果應其說 夫豈虛哉 且我家其豫有得國之心乎 王之欲遷漢京 實非王心 天使之然也』라고 하시었다. 王氏 五百年 後에 李氏가 出하야 漢陽(南京)에 都를 作한다는 讖說은 우의 太宗의 말삼 가운대에도 보이거니와, 이는 앞서 尹莘達의 上言 中에 보이는 『王氏五百年後 李氏出』 『李氏出則 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란 讖說과 거이 內容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다만 前者는 後者의 『三角山南』 『漢陽』 즉 『南京』으로 解釋한 데 不過한 것이 아닌가 한다. 後者의 『須防北大路』의 句로 보면 『三角山南』은 尹莘達의 解釋과 같이 母岳의 地라고 함이 可하니 前者의 說은 즉 漢陽 主張派의 我田引水的 解釋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如何했든 太祖와 太宗께서는 이런 類의 讖說을 단지 遷都運動의 手段이나 方便으로서 利用하시는 데 그칠 뿐만 아니라 觀念上 어느 程度까지 이를 神祕하게 역시었든 것 같다. 特히 太祖께서는 松都地氣衰旺說을 믿으심이 깊어 即位 初로붙어 遷都에 汲汲하셨든 것은 앞서 婁次 말한 바이며 太宗께서는 역시 前述함과 같이 儒學 出身이니만치 원래 이러한 迷信을 좋아하지 아니하사 처음에는 圖讖地理의 書를 禁하신 일까지 있지만, 또 全然 이를 不信치도 아니하셨든 것은 王의 前後 言行을 通하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太宗께서 漢陽 遷都를 急히 하려고 하심은 이보다도 첫재 (屢述한 바와 같이) 太上王의 志를 繼述하려 하심이요 둘재 松漢 兩京의 戶口의 盛衰를 念慮하신 까닭임은 더 말할 배도 없다.
그런데 당시 천도반대운동은 각 계급을 통하여 치열하였던 모양이니 유신으로 유명한 양촌 권근도 그 중의 1인이었다. 권근은 역시 흉년을 이유로 하여 수차 상서로써 천도의 불가함을 논하였는데, 제2차 상소 중에는 遷都之擧 謀及卿士 謀及庶民 皆曰可然後定焉이라 하는 유자류의 우활한 논법을 시더하기까지 하였다. 태종께서는 이를 보시고 告于宗廟 告于太上 大計已定 何可改也라 하시고, 다시 좌우를 돌아보시며 일러 曰 今有上書止遷都者 是聽人指揮而爲之也 漢京乃國初所創 子孫所當持守愚民但知移徙之勞而苟安耳 士大夫識理者 亦何心沮之歟라고 하시었다. 권근의 천도반대소가 태종의 말씀과 같이 과연 남의 지휘를 받아서 한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당시 송경 성내에는 이 천도 문제로 인심이 비상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혹은 남의 지촉이나 충동에 의하여 이의를 제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태종께서는 권근과 같은 사리를 아는 사대부로서 군심이 존한 바를 이해치 못하고 한갓 남의 지촉에 뇌동하여 천도를 반대하는 것으로 인식하시었던 모양이다.
쪽수▶P78-2그런데 當時 遷都反對運動은 各 階級을 通하야 熾烈하였든 모양이니 儒臣으로 有名한 陽村 權近도 其中의 一人이었다. 權近은 역시 年凶을 理由로 하야 數次 上書로써 遷都의 不可함을 論하였는데, 第二次 上疏 中에는 『遷都之擧 謀及卿士 謀及庶民 皆曰可然後定焉』이라 하는 儒者流의 迂闊한 論法을 試하기까지 하였다. 太宗께서는 이를 보시고 『告于宗廟 告于太上 大計已定 何可改也』라 하시고, 다시 左右를 도라보시며 일러 曰 『今有上書止遷都者 是聽人指揮而爲之▶P79-1也 漢京乃國初所創 子孫所當持守愚民但知移徙之勞而苟安耳 士大夫識理者 亦何心沮之歟』라고 하시었다. 權近의 遷都反對疏가 太宗의 말삼과 같이 과연 남의 指揮를 받어서 한 것인지 아닌지는 判斷하기 어렵지만, 當時 松京 城內에는 이 遷都 問題로 人心이 非常히 不安한 狀態에 있었으므로 혹은 남의 指囑이나 衝動에 依하야 異議를 提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떠튼 太宗께서는 權近과 같은 事理를 아는 士大夫로서 君心이 存한 바를 理解치 못하고 한갓 남의 指囑에 雷同하야 遷都를 反對하는 것으로 認識하시었든 모양이다.
태종의 천도에 대한 결심과 과단은 더욱더욱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이해(5년) 9월에는 상왕(정종)이 먼저 한경으로 이어하시고 왕은 재릉(모후 신의황후 한씨릉)에 참배하여 이도를 고하였으며 10월 5일에는 태상왕께 예알하여 역시 환도를 고하시매 태상왕은 특히 치주위환(置酒爲歡)하셨다 한다. 그리하여 태종께서는 10월 8일로써 송경을 출발하사 11일에 한경에 이르시었다. (태상왕은 11월에 환도). 먼저 궁묘에 참배하신 후 연화방(今 연지정) 고령의정부사 조준 제로 어하시니 그것은 이때 이궁의 공역이 아직 완료되지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이궁의 낙성은 19일에 이르러 비로소 고하게 되니 범118칸, 이름을 창덕궁이라고 하였다. (백악 하의 경복궁을 서정궐이라고 하면 응봉 하의 이 궁은 동별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익 20일에 이궁에 어하여 백궁의 하례와 헌수를 받을새 앞서 천도를 반대하던 의정부 찬성사 권근은 화악의 시를, 또 모악 천도를 주장하던 좌정승 하륜은 한강의 시를 각각 제진하여 왕도의 영안과 왕업의 영창을 노래하였다. 오래동안 논의 분분하고 유예미결 중에 있던 천도 문제는 이에 완전히 낙착을 고하여 이후 500년간 길이 이씨 조선의 정치 문화 기타의 중심지으로 일정불변의 근반을 열게 된 것이다.
쪽수▶P79-2太宗의 遷都에 對한 決心과 果斷은 더욱더욱 움직일 수 없게 되야 이해(五年) 九月에는 上王(定宗)이 먼저 漢京으로 移御하시고 王은 齋陵(母后 神懿皇后 韓氏陵)에 參拜하야 移都를 告하였으며 十月 五日에는 太上王께 詣謁하야 역시 還都를 告하시매 太上王은 特히 置酒爲歡하섰다 한다. 그리하야 太宗께서는 十月 八日로써 松京을 發하사 十一日에 漢京에 이르시었다. (太上王은 十一月에 還都). 먼저 宮廟에 參拜하신 후 蓮花坊(今 蓮池町) 故領議政府事 趙浚第로 御하시니 그것은 이때 離宮의 工役이 아직 完了되지 아니하였든 까닭이다. 離宮의 落成은 十九日에 이르러 비로소 告하게 되니 凡一百十八間, 이름을 昌德宮이라고 하였다. (白岳 下의 景福宮을 西正闕이라고 하면 鷹峯 下의 이 宮은 東別宮이라고 할 수 있었다). 翌二十日에 離宮에 御하야 百宮의 賀禮와 獻壽를 받을새 앞서 遷都를 反對하든 議政府 贊成事 權近은 華岳의 詩를, 또 母岳 遷都를 主張하든 左政丞 河崙은 漢江의 詩를 各各 製進하야 王都의 永安과 王業의 永昌을 頌하였다. 오래동안 論議 紛紜하고 猶豫未決 中에 있든 遷都 問題는 於是乎 完全히 落着을 告하야 以後 五百年間 기리 李氏 朝鮮의 政治 文化 其他의 中心地로 一定不變의 根盤을 열게 된 것이다.
4, 여언
쪽수▶P80-1四, 餘言
이조 초기—즉 태조·정종 및 태종조—의 건도 혹 천도의 사정 내지 경과는 대게 상술한 바와 같거니와, 요컨대 정종의 개경 이도를 제하고는 태조, 태종 양대의 천도는 여러 가지 문제로 시일을 천연하고 군신의 심신을 씀이 많았으니 풍수지리에 의한 상택의 곤란, 안토중천으로 말미암은 천도 반대론 등은 그 가장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회의를 거듭하고 상택을 시도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바, 태조시에는 한양, 계룡산, 모악 등 3곳의 경쟁적 후보지로 말미암아 심적 물적 힘씀이 컸었고, 태종시에도 모악상택 내지 송도 한양 모악의 3곳 중 어느 것을 택할까 함에 고심을 많이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송도 신민의 안토중천으로 인하여 문제를 유예미결케 함이 컸었다. 그러나 태조는 송도기쇠의 종래 찬설 믿음이 깊고 또 무인 출신이시니만치 과단성에 풍부하였으므로 여간한 반대론은 이를 배제하여 3년만에 드디어 한양전도를 실현하셨고, 태종은 태조의 신도 창건의 지를 중히 여기시면서도 유학 출신이시니만치 과단성과 실행력은 태조에 미치지 못하심이 많아 항상 민의에 순응하고 회의마다 중신의 의론에 끌리시다가 마침내 즉위 56년만에 신도 환어를 결행하시었지만 이것도 실상은 태상왕의 정중한 유지에 의하여 갑자기 과단을 가지시게 된 것이다. 이때 만일 태상왕이 재세치 아니하셨거나 혹은 그러한 동독적 유고가 없었드러면, 태종의 한경 환도는 실현되지 아니하였거나 실현되더라도 더 훨씬 시일의 천연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쪽수▶P80-2李朝 初期—即 太祖·定宗 및 太宗朝—의 建都 혹 遷都의 事情 乃至 經過는 대게 上述한 바와 같거니와, 要컨대 定宗의 開京 移都를 除하고는 太祖 太宗 兩代의 遷都는 여러 가지 問題로 時日을 遷延하고 君臣의 心身을 勞함이 많았으니 風水地理에 依한 相擇의 困難, 安土重遷으로 말미암은 遷都 反對論 等은 그 가장 主된 理由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會議를 거듭하고 相宅을 試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바, 太祖時에는 漢陽 鷄龍山 母岳等 三處의 競爭的 候補地로 말미암아 心的 物的의 勞를 費함이 컸었고, 太宗時에도 母岳相宅 乃至 松都 漢陽 母岳의 三處 中 何者를 擇할까 함에 苦心을 많이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松都 臣民의 安土重遷으로 因하야 問題를 猶豫未決케 함이 컸었다. 그러나 太祖는 松都(地)氣衰의 從來讚說 信함이 깊고 또 武人 出身이시니만치 果斷性에 富하였으므로 여간한 反對論은 이를 排除하야 三年만에 드듸어 漢陽奠都를 實現하섰고, 太宗은 太祖의 新都 創建의 旨를 重히 역이시면서도 儒學 出身이시니만치 果斷性과 實行力은 太祖에 不及하심이 많어 항상 民意에 順應하고 會議마다 重臣의 議論에 끄을리시다가 마침내 即位 五六年만에 新都 還御를 決行하시었지만 이것도 실상은 太上王의 鄭重한 諭旨에 依하야 갑작이 果斷을 갖으시게 된 것이다. 이때 만일 太上王이 在世치 아니하셨거나 혹은 그러한 董督的 諭告가 없었드러면, 太宗의 漢京 還都는 實現되지 아니하였거나 實現되드라도 더 훨신 時日의 遷延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상술한 바로써 보면 이조 초기의 한양 전도는 결코 단순 순조로이 실현되었던 것이 아니라 복잡다단 파란중첩한 가운데에서 결말을 보게 된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한양이 여러 번 천이의 위협을 당하고 또 모악과 같은 유력한 적대적 후보지를 갖이고서도 마침내 후도(候都)의 영(榮)을 입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와 관계로 인함이었던가? 이는 물론 그 특수한 지리성과 역사성에 진 바가 많은 것이니 끝으로 우리은 한양의 지리역사적 특수성에 대하여 일언을 가하려 한다.
쪽수▶P80-3上述한 바로써 보면 李朝 初期의 漢陽 奠都는 決코 單純 且順調로 實現되었든 것이 아니라 複雜多端 波瀾重疊한 가운▶P81-1대서 決末을 보게 된 것을 充分히 알 수 있지만, 漢陽이 여러 번 遷移의 威脅을 當하고 또 母岳과 같은 有力한 敵對的 候補地를 갖이고서도 마침내 候都의 榮를 입게 된 것은 어떠한 理由와 關係로 因함이었든가? 이는 勿論 그 特殊한 地理性과 歷史性에 負한 바ㅣ 많은 것이니 끝으로 吾人은 漢陽의 地理歷史的 特殊性에 就하야 一言을 加하려 한다.
먼저 그 지리적 특수성을 말하면, 그때는 풍수지리를 중히 여기던 시대이므로, 또한 먼저 그 방면의 지리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양은 북악 즉 백악을 주산으로 삼어 그 좌우지에 의하여 환포된 곳이니, 백악의 우지는 서으로 다라나 인왕산을 일으키고 거기서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 숭례문(남대문)을 거처 다시 남산을 일으키어 안산을 작하면서 광희문 터에 이르러 발을 멈추었으며, 좌지는 동으로 뻗어 휴암과 응봉을 솟치면서 혜화문(동소문)을 지나 낙산에 이르러 무릎을 꿇렸다. 그런즉 백악은 풍수가의 소위 현무요 인왕은 백호, 낙산은 청룡, 남산은 주작이다. 한양은 우지가 길고 좌지가 짧으므로 이를 풍수가의 소위 우선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서로 입해하는 한강과 서로 역(逆)하여 있다. 풍수에는 ‘역(逆)’을 주요 조건의 하나로 치는 것이니 산수의 역이 없으면 지맥의 환포를 볼 수 없고 수구의 관쇄를 이루지 못하여 지기가 산류된다는 것이다. 한양은 이 점으로 보아 산수의 역을 충분히 얻은 곳이니 수류로 말하더라도 백악 좌우협에서 흐르는 명당수는 시내를 동으로 관류하여 동대문과 광희문(수구문) 사이를 빠져 왕심리(왕십리) 답심리를 지나 뚝섬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한강은 한양의 객수로 북한강 남한강의 2대 줄기가 양평, 용진에서 서로 합치어 삼각산 제곡의 중수를 받아드리면서 한양 일대의 땅을 환포하여 서북으로 서해에 들어가거니와, 삼각산의 모든 산수의 줄기는 또한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취회하여 있다. 모악의 땅은 같은 한강 유역이지만 산수의 환포와 수구의 관쇄가 한양처럼 긴밀치 못한 것이 일대 결점이다. 다시 백악의 내맥을 살펴보면 멀리 장백산에서 기원한 안변의 철령에서 분기되어 그 일지가 남치하여 양주의 기웅인 도봉산을 일으키고 거기서 다시 서남행하여 태청을 뚫는 삼각을 솟치고 남으로 문수보현의 제봉을 작하면서 정맥을 백악으로 뻗게 되었다. 일로써 재래의 학자들은 한양을 동방정기의 융결종회처로 찬미하였으니 팔역지의 저자 이중환은 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라 하고(팔성지 경기도조) 이계 홍양호는 東方靈淑之氣 噓融結 鍾成萬年之神都라고(耳溪集 卷十四 報恩寺重修記) 하였거니와, 이런 류의 찬사는 이루 매거하기 겨를이 없다. 풍수전문가로서는 기술한 윤신달 등의 언론과 같이 한양의 제일 결점을 석산의 험한 것과 명당수의 풍부치 못한 것을 치나, 그러나 이만한 결점은 어디서든지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든 한양은 풍수지리의 제일 조건인 ‘산수취회’의 땅으로 인정치 아니할 수 없고, 이 점에 있어서는 모악을 능가함이 대하고 송도에 미치지 못함이 조금도 없다. 태조시 운관원의 설에는 부소명당(개성)을 국내의 제일 길지, 이 백악명당을 제이 길지로 말하였지만, 구변도란 고려비기에는 목멱을 제일화, 송악을 제이화, 평양을 제삼화로 치던 것이니,(본 학보 제8권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참조) 화(花)란 것은 풍수가의 말로 대길지를 이름이다.
쪽수▶P81-2먼저 그 地理的 特殊性을 말하면, 그때는 風水地理를 重히 역이든 時代이므로, 또한 먼저 그 方面의 地理를 考察할 必要가 있다. 漢陽은 北岳 즉 白岳을 主山으로 삼어 그 左右枝에 依하야 環抱된 곳이니, 白岳의 右枝는 西으로 다라나 仁王山을 이르키고 거기서 敦義門(西大門) 昭義門(西小門) 崇禮門(南大門)을 거처 다시 南山을 이르키어 案山을 作하면서 光熙門址에 이르러 발을 멈추었으며, 左枝는 東으로 뻗어 鵂岩과 鷹峰을 솟치면서 惠化門(東小門)을 지나 駱山에 이르러 무릅을 꾸렸다. 그런즉 白岳은 風水家의 所謂 玄武요 仁王은 白虎, 駱山은 靑龍, 南山은 朱雀이다. 漢陽은 右枝가 길고 左支가 짜르므로 이를 風水家의 所謂 右旋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西으로 入海하는 漢江과 서루 逆하여 있다. 風水에는 『逆』을 主要 條件의 하나로 치는 것이니 山水의 逆이 없으면 地脈의 環抱를 볼 수 없고 水口의 關鎖를 이루지 못하야 地氣가 散流된다는 것이다. 漢陽은 이 點으로보아 山水의 逆을 充分히 얻은 곳이니 水流로 말하드라도 白岳 左右峽에서 흐르는 明堂水는 市內를 東으로 貫流하야 東大門과 光熙門(水口門) 사이를 빠저 旺深里(往十里) 踏深里를 지나 纛島에서 漢江으로 들어간다. 漢江은 漢陽의 客水로 北漢江 南漢江의 二大 줄기가 楊平 龍津에서 서루 合치어 三角山 諸谷의 衆水를 받어드리면서 漢陽 一帶의 地를 環抱하야 西北으로 西海에 들어가거니와, 三角 山의 모든 山水의 줄기는 또한 漢陽을 中心으로 하야 聚會하여 있다. 母岳의 地는 같은 漢江 流域이지만 山水의 環抱와 水口의 關鎖가 漢陽처럼 緊密치 못한 것이 一大 缺點이다. 다시 白岳의 來脈을 살펴보면 멀리 長白山에서 ▶P82-1起原한 安邊의 鐵嶺에서 分岐되야 그 一枝가 南馳하야 楊州의 奇雄인 道峯山을 이르키고 거기서 다시 西南行하야 太淸을 뚤런 三角을 솟치고 南으로 文殊 普賢의 諸峯을 作하면서 正脈을 白岳으로 뻗게 되였다. 일로써 在來의 學者들은 漢陽을 東方精氣의 融結鍾會處로 讃美하였으니 八域志의 著者 李重煥은 『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라 하고(八城志 京畿道條) 耳溪 洪良浩는 『東方靈淑之氣 噓融結 鍾成萬年之神都』라고(耳溪集 卷十四 報恩寺重修記) 하였거니와, 이런 類의 讚辭는 이루 枚擧하기 겨를이 없다. 風水專門家로서는 旣述한 尹莘達 等의 言論과 같이 漢陽의 第一缺點을 石山의 嶮한 것과 明堂水의 豐富치 못한 것을 치나, 그러나 이만한 缺點은 어데서든지 免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튼 漢陽은 風水地理의 第一條件인 『山水聚會』의 地로 認定치 아니할 수 없고, 이 點에 있어서는 母岳을 凌함이 大하고 松都에 不及함이 조금도 없다. 太祖時 雲觀員의 說에는 扶蘇明堂(開城)을 國內의 第一 吉地, 이 白岳明堂을 第二 吉地로 말하였지만, 九變圖란 高麗秘記에는 木覓을 第一花, 松岳을 第二花, 平壤을 第三花로 치든 것이니,(本 學報 第八卷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參照) 花란 것은 風水家의 語로 大吉地를 이름이다.
이러한 풍수지리적 고찰을 떠나 실제 인문지리학상으로 이를 고찰하여 보더라도 한양은 소위 산하금대의 요진으로 군사상의 요를 득할 뿐더러 수륙교통의 편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또 그 위치가 반도의 거의 중앙에 있어 도리의 균정을 득하여, 일국의 수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한강의 혜택은 지금도 우리가 일석으로 크게 입고 있지만 옛날에는 특히 운수로 말미암아 그 혜택이 컸으니 각처로부터 폭주(輻湊)하는 물화—무엇보다도 국가경제의 기본인 모든 세와 공물은 대개 이 한강을 통하여 경성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조시대의 성곽이 비교적 소범위로 국한되었기 때문에 경성의 시가발전을 방해한 점이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지리의 허물이 아니라 성곽의 죄, 제도의 죄이다. 만일 경성의 범위를 좀 넓히어서—물론 그때에는 지금처럼 광범위로 취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고려시대의 남경제에 본받아 서지를 모악(안산), 남지를 한강변까지 이르게 하고 내외 중성을 둘렀더라면, 그다지 좁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시가의 발전 국도의 방수도 더 도모할 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옛날 조선 도시의 특색과 필수조건은 난시 소용의 산성의 배경을 갖는 것인데 한양이야말로 천험의 북한을 가짐으로써 일찍부터 이름이 높었다. 백제, 구려, 신라의 삼국은 물론이요 고려시대에도 이를 이용하여 산성을 쌓았으며, 이조에서는 뒤늦게 숙종시에야 비로소 대규모적으로 북한의 내외성을 경영하게 되었지만, 이 산성은 실로 지리적으로 험고하고 역사적으로 구원하던 것이다. 요컨대 한양의 지리는 비단 풍수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상으로나 운수·교통상으로나 또 자연풍경상으로 한 우월성을 갖이고 있어, 얼마든지 이를 인문적으로 이용하면 이용할 수 있게 된 곳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호조건을 갖춘 땅은 반도 중부지방에서 다시 더 구하기 어렵다.
쪽수▶P82-2이러한 風水地理的 考察을 떠나 실제 人文地理學上으로 이를 考察하여 보드라도 漢陽은 所謂 山河襟帶의 要鎭으로 軍事上의 要를 得할 뿐더러 水陸交通의 便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또 그 位置가 半島의 거이 中央에 있어 道理의 均正을 得하야, 一國의 首都로서 조금도 遜色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漢江의 惠澤은 지금도 우리가 日夕으로 크게 입고 있지만 昔日에는 特히 運輸로 말미암아 그 惠澤이 컸으니 各處로부터 輻湊하는 物貨—무엇보다도 國家經濟의 基本인 모든 稅와 貢物은 대개 이 漢江을 通하야 京城에 들어오는 것이다. 李朝時代의 城郭이 比較的 小範圍로 局限되였기 때문에 京城의 市街發展을 妨害한 點이 적지 않었지만, 그것은 地理의 허물이 아니라 城郭의 罪, 制度의 罪이다. 만일 京▶P83-1城의 範圍를 좀 넓히어서—勿論 그때에는 지금처럼 廣範圍로 取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高麗時代의 南京制에 倣하야 西至를 母岳(鞍山), 南至를 漢江邊까지 이르게 하고 內外 重城을 둘렀드러면, 그다지 좁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市街의 發展 國都의 防守도 더 圖謀할 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옛날 朝鮮 都市의 特色과 必須條件은 亂時 所用의 山城의 背景을 갖는 것인데 漢陽이야말로 天險의 北漢을 갖음으로서 일즉부터 이름이 높었다. 百濟 句麗 新 羅의 三國은 勿論이요 高麗時代에도 이를 利用하야 山城을 築하였으며, 李朝에서는 뒤늦게 肅宗時에야 비로소 大規模的으로 北漢의 內外城을 經營하게 되였지만, 이 山城은 실로 地理的으로 險固하고 歷史的으로 久遠하든 것이다. 要컨대 漢陽의 地理는 비단 風水上으로뿐만 아니라 政治·軍事上으로나 運輸·交通上으로나 또 自然風景上으로 한 優越性을 갖이고 있어, 얼마던지 이를 人文的으로 利用하면 利用할 수 있게 된 곳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好條件을 갖춘 地는 半島 中部地方에서 다시 더 求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한양의 역사적 특수성을 말하면 여기서 그것을 논함에는 너무도 풍부한 내용을 가졌지만 그 한 마디로 논하면 이곳은 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고대에 있어서는 남북 제민족의 계쟁지으로 되어 낙랑, 진번, 진국 또는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쟁패장리에 들어가 각각 일시 그 소유가 되고, 중세 고려시대에는 고려 삼경의 하나로 역대의 조궁 순주가 전차 행하여 왕실과 특수의 관계을 갖던 이만치, 역사상에 너무도 저명한 곳이다. 백제 초기의 도성인 위례가 바로 지금의 경성 그곳인지 아닌지는 자세치 못하나, 동국의 북한성이라든지, 고구려 시대의 북한산군(일명 남평양), 신라 소유 시대의 북한산주 및 한양군이 다 지금 경성의 전신, 전칭이였던 것은 무의하며, 또 그 한양의 이름을 처음으로 얻기는 신라의 반도 통일 후 약 1세기에 가까운 경덕왕 14년(A.D.755)의 일이어니와, 고려 초에는 또 이를 양주라고 개칭하게 되다. 양주의 칭을 가지던 지금 경성에 고려 삼경의 하나인 남경이 최초로 개창되기는 제11대 문종21·2년경(A.D 1067–1068)에 속하고 그 후 재차 대규모적으로 건치되기는 제15대 숙종 6년(A.D.1101)에 속하나니 이때에는 특히 제종 비기—도선기 도선답산기, 삼각산명당기, 신지비사 등에 의거하여 즉 여기에 경을 두고 순주하면 시간적으로 왕업이 영창(연장)하고 공간적으로 해외 36국이 내조하리라는 참설에 움직이어 경을 두게 된 것이다(청구학총 제2호 소재 졸고 「高麗南京建置に就いて」 참조). 문종의 남경궁지는 지금 어느 곳인지 알 도리가 없으나 숙종이 일으킨 궁기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지금 경복궁 뒤 신무문 바깥이었으며, 당시 남경의 사지는 이조의 그것보다는 서와 남으로 조금 더 커서 서는 기봉(모악), 남은 사리(용산 신초정)에 이르고 북과 동은 역시 이조시대와 같이 백악과 낙산으로써 한계를 삼았다. 그후 예종(제16대) 인종(제17대) 의종(제18대)의 세 왕도 부조의 뜻을 이어 남경을 중시하는 동시에 때때로 순주를 시도하고 제23대 고종 21년(A.D.1234)에는 남경에 새로 가궐을 일으키고 순주의 대로 어의를 이안한 일이 있었다. 가궐은 본궐에 대한 이궁 혹은 별궁의 뜻이어니와 이 가활의 터는 지금 창경원 내가 아니었는가 한다. 마치 이조에서 경복궁(본궐)에 대하여 동으로 창덕궁(이궁)이 경영되던 것과 같이 숙종의 본궐에 대하여 역시 동으로 고종의 가궐이 세워젔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내려와 충렬왕 34년(A.D.1308)에는 남경을 고치어 한양부로 폄칭하는 동시에 별로 이를 중시치 아니하더니 공민왕 우왕 및 공양왕의 여말 3-4대 동안은 소위 송도기쇠의 참설이 성행하여 한양을 또다시 중시하는 동시에 이곳으로 천도하려 하여 여러 번 궁궐을 수영하였으며, 특히 공양왕 2년(A.D.1390)에는 단연 한양으로 이어하여 유수를 송도에 두더니 반년이 못 되어 도로 구도로 환가하고 또 1년에 왕은 폐위되어 이씨 조선의 현출을 보게 되었다(잡지 조선 제194호 졸문 「麗末の遷都問題」 참조).
쪽수▶P83-2다음으로 漢陽의 歷史的 特殊性을 말하면 여기서 그것을 論함에는 너무도 豐富한 內容을 갖었지만 그 一言以論之하면 이곳은 半島의 中央에 位置하야 古代에 있어서는 南北 諸民族의 係爭地로 되야 樂浪 眞番 辰國, 또는 百濟 高句麗 新羅 三國의 爭霸場裏에 들어가 각각 一時 그 所有가 되고, 中世 高麗時代에는 高麗 三京의 하나로 歷代의 造宮 巡駐가 展次 行하야 王室과 特殊의 關係을 갖든이만치, 歷史上에 너무도 著名한 곳이다. 百濟 初期의 都城인 慰禮가 바루 지금의 京城 그곳인지 아닌지는 자세치 못하나, 同國의 北漢城이라든지, 高句麗 時代의 北漢山郡(一名 南平壤), 新羅 所有 時代의 北漢山州 及 漢陽郡이 다 지금 京城의 前身 前稱이였든 것은 無疑하며, 또 그 漢陽의 名을 처음으로 얻기는 新羅의 半島 統一 後 約 一世紀에 가까운 景德王 十四年(A.D.755)의 일이어니와, 高麗 初에는 또 이를 楊州라고 改稱하게 ▶P84되였다. 楊州의 稱을 갖이든 今 京城에 高麗 三京의 一인 南京이 最初로 開創되기는 第十一代 文宗二十一·二年頃(A.D 1067–1068)에 屬하고 그 후 再次 大規模的으로 建置되기는 第十五代 肅宗 六年(A.D.1101)에 屬하나니 이때에는 特히 諸種 秘記—道詵記 道詵踏山記 三角山明堂記 神誌祕詞 等에 據하야 即 여기에 京을 두고 巡駐하면 時間的으로 王業이 永昌(延長)하고 空間的으로 海外 三十六國이 來朝하리라는 讖說에 움직이어 京을 두게 된 것이다(靑丘學叢 第二號 所載 拙稿 「高麗南京建置に就いて」 參照). 文宗의 南京宮址는 지금 어느 곳인지 알 道理가 없으나 肅宗의 이르킨 宮基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今 景福宮 뒤 神武門 밖앗이었으며, 當時 南京의 四至는 李朝의 그것보다는 西와 南으로 稍大하야 西는 岐峯(母岳), 南은 沙里(龍山 新草町)에 至하고 北과 東은 역시 李朝 時代와 같이 白岳과 駱山으로써 界限을 삼었다. 그후 睿宗(第十六代) 仁宗(第十七代) 毅宗(第十八代)의 三王도 父祖의 志를 이어 南京을 重視하는 同時에 때때로 巡駐를 試하고 第二十三代 高宗 二十一年(A.D.1234)에는 南京에 새로 假闕을 이르키고 巡駐의 代로 御衣를 移安한 일이 있었다. 假闕은 本闕에 對한 離宮 혹은 別宮의 義어니와 이 假闊의 基는 今 昌慶苑 內가 아니었는가 한다. 마치 李朝에서 景福宮(本闕)에 對하야 東으로 昌德宮(離宮)이 經營되든 거와 같이 肅宗의 本闕에 對하야 역시 東으로 高宗의 假闕이 세워젔든 것이라고 推測된다. 降하야 忠烈王 三十四年(A.D.1308)에는 南京을 고치어 漢陽府로 貶稱하는 同時에 別로 이를 重視치 아니하더니 恭愍王 禑王 및 恭讓王의 麗末 三四代 동안은 所謂 松都氣衰의 讖說이 盛行하야 漢陽을 또다시 重視하는 同 時에 이곳으로 遷都하려 하야 여러 번 宮闕을 修營하였으며, 特히 恭讓王 二年(A.D.1390)에는 斷然 漢陽으로 移御하야 留守를 松都에 置하더니 半年이 못 되야 도로 舊都로 還駕하고 又一年에 王은 廢位되야 李氏 朝鮮의 現出을 보게되였다(雜誌 朝鮮 第一九四號 拙文 「麗末の遷都問題」 參照).
이와 같이 한양은 지리역사상에 있어 특수한 지위를 점한 곳으로, 특히 고려조에서는 음양지리가의 찬송하던 이상적 길지로 역대 왕실과의 특수한 관계를 맺어오던 것이다. 이조 태조께서 즉위 당초에 한양 천도의 교를 내리시고, 그 후 계룡산 모악 등지가 상당한 경쟁적 후보지로 있었음에 불구하고 마침내 한양이 천도의 영을 보게 된 것은 상술한 특수성에 진 바가 많음과 한가지 고려조 이래의 관념과 사상에 전통된 바가 많았던 것이다. 태종도 역시 부왕의 뜻을를 계승하는 동시에 위의 특수성과 전통적 관념에 의하여 결국 한양을 택하게 되었거니와 이런 점으로 보면 이조 초기의 한양 전도는 비록 중간의 허다한 사정과 파란이 있었다 할지라도 필연적 당연적 운명에 지배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끝)
쪽수▶P85이와 같이 漢陽은 地理歷史上에 있어 特殊한 地位를 占한 곳으로, 就中 麗朝에서는 陰陽地理家의 讚頌하든 理想的 吉地로 歷代 王室과의 特殊한 關係를 맺어오든 것이다. 李朝 太祖께서 即位 當初에 漢陽 遷都의 敎를 내리시고, 그 후 鷄龍山 母岳 等地가 相當한 競爭的 候補地로 있었음에 不拘하고 마침내 漢陽이 遷都의 榮을 보게 된 것은 右述한 特殊性에 負함이 많음과 한가지 麗朝 以來의 觀念과 思想에 傳統된 바가 많었든 것이다. 太宗도 역시 父王의 志를 繼承하는 同時에 右의 特殊性과 傳統的 觀念에 依하야 결국 漢陽을 擇하게 되였거니와 이런 點으로 보면 李朝 初期의 漢陽 奠都는 비록 中間의 許多한 事情과 波瀾이 있었다 할지라도 必然的 當然的 運命에 支配되였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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