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연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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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번= 그후 조선의 불교 수입은 {{TagRefT|6}}소수림왕 2년 이전에 민간에서 이미 사신한 자 있었다는 것이 논의되어 있으나<ref group="a">해독문주석6</ref> {{TagRefT|7}}고구려의 최초 불찰인 성문사라는 것이 성문이란 일공관의 변용이었다 할진댄<ref group="a">해독문주석7</ref> 탑파의 기원은 적어도 이후에 있었을 것은 물론이나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사실이 보이지 않고 오직 {{TagRefT|8}}요동성 육왕탑의 전설과 평양성 서 대보산 하의 영탑 전설이 가장 황탄한 설화 형식으로 전하여 있고<ref group="a">해독문주석8</ref> 북사에 "有僧尼多寺塔"으로써 일컫고 있던 {{TagRefT|9}}백제에 있어서도 탑파의 초건 년대를 종잡을 수 없는 채 탑장 아비지와 미륵사 천왕사<ref group="a">해독문주석9</ref> {{TagRefT|10}}도양사의 탑기가<ref group="a">해독문주석10</ref> 있을 뿐이요 {{TagRefT|11}}가락국에는 신라에 불교가 수입되기 전에 가장 전설적인 금관성 파사석탑기가 보이고<ref group="a">해독문주석11</ref> {{TagRefT|12}}신라 또한 가장 뒤늦은 교국임에도 불구하고 탑파 초건에 관한 특별한 기록이 없는 채 흥륜사의 탑기가 후대에 보인다.<ref group="a">해독문주석12</ref> 이와 같이 문징의 부비는 해동 탑파의 기원을 용역히 정립치 못하게 하고 있으나, 그러나 당대의 불교 신앙이 불상 사리를 동시예 숭배하여 전탑 경영이 상당히 발전된 위진 육조의 영향 하에 계발된 것인즉 불법 전수와 함께 또는 얼마 후에 탑파의 조영이 있었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으니 이러한 견지에서 해동의 조탑 기원을 가정한다면 소수림왕 2년 전후부터 "下敎崇信佛法求福" 하였다는 고국양왕 말년까지(A.D.372-392) 전후 20년간에는 적어도 최외한 경영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차1해독문5번= 그후 조선의 불교 수입은 {{TagRefT|6}}소수림왕 2년 이전에 민간에서 이미 사신한 자 있었다는 것이 논의되어 있으나<ref group="a">해독문주석6</ref> {{TagRefT|7}}고구려의 최초 불찰인 성문사라는 것이 성문이란 일공관의 변용이었다 할진댄<ref group="a">해독문주석7</ref> 탑파의 기원은 적어도 이후에 있었을 것은 물론이나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사실이 보이지 않고 오직 {{TagRefT|8}}요동성 육왕탑의 전설과 평양성 서 대보산 하의 영탑 전설이 가장 황탄한 설화 형식으로 전하여 있고<ref group="a">해독문주석8</ref> 북사에 "有僧尼多寺塔"으로써 일컫고 있던 {{TagRefT|9}}백제에 있어서도 탑파의 초건 년대를 종잡을 수 없는 채 탑장 아비지와 미륵사 천왕사<ref group="a">해독문주석9</ref> {{TagRefT|10}}도양사의 탑기가<ref group="a">해독문주석10</ref> 있을 뿐이요 {{TagRefT|11}}가락국에는 신라에 불교가 수입되기 전에 가장 전설적인 금관성 파사석탑기가 보이고<ref group="a">해독문주석11</ref> {{TagRefT|12}}신라 또한 가장 뒤늦은 교국임에도 불구하고 탑파 초건에 관한 특별한 기록이 없는 채 흥륜사의 탑기가 후대에 보인다.<ref group="a">해독문주석12</ref> 이와 같이 문징의 부비는 해동 탑파의 기원을 용역히 정립치 못하게 하고 있으나, 그러나 당대의 불교 신앙이 불상 사리를 동시예 숭배하여 전탑 경영이 상당히 발전된 위진 육조의 영향 하에 계발된 것인즉 불법 전수와 함께 또는 얼마 후에 탑파의 조영이 있었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으니 이러한 견지에서 해동의 조탑 기원을 가정한다면 소수림왕 2년 전후부터 "下敎崇信佛法求福" 하였다는 고국양왕 말년까지(A.D.372-392) 전후 20년간에는 적어도 최외한 경영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차1해독문6번= 그러한 즉 조선 탑파의 기원을 이룬 탑파는 어떠한 종류의 어떠한 형식의 것이었을까. 조선에서의 조탑 시원을 이미 고구려에 둔 이상 이 문제는 즉 고구려의 탑파에 대한 문제로 환치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TagRefT|13}}이동충태(伊東忠太, 이토 주타) 박사가 일찍이 간단한 시론을 보였지만<ref group="a">해독문주석13</ref>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다시 문제삼는 학자가 나지 아니하니 이는 요컨대 유물, 유문이 가히 빙거할만한 것이 없는 탓이라 필자─ 또한 새삼스레 무슨 호증이 있을 바가 아니니 다시 입론할 여지도 없는 바이지만 서술의 순서상 일언을 비치 아니할 수 없으니, 대저 중국 자체에 있어서도 인도 원래의 복분식 전탑 형식 가부색 가왕의 작리부도에서 췌득하여 중국식으로 발전하게 된 누각식 부도와가 그 어느 것이 중국 탑파의 시원을 이루었을까가 문제되어 있는 이때 고분 축조 형식에 벌써 서역적 투팔 천정 수법이 성용되어 있고 한편으론 비록 황탄한 전설이나마 요동성 육왕탑과 같이 인도식 복분 형식의 토탑 기록을 가장 오랜 전설인 듯이 가지고 있는 고구려에 있어 탑파의 시원 형식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실로 난문에 전하는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목차1해독문6번= 그러한 즉 조선 탑파의 기원을 이룬 탑파는 어떠한 종류의 어떠한 형식의 것이었을까. 조선에서의 조탑 시원을 이미 고구려에 둔 이상 이 문제는 즉 고구려의 탑파에 대한 문제로 환치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TagRefT|13}}이동충태(伊東忠太, 이토 주타) 박사가 일찍이 간단한 시론을 보였지만<ref group="a">해독문주석13</ref>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다시 문제삼는 학자가 나지 아니하니 이는 요컨대 유물, 유문이 가히 빙거할만한 것이 없는 탓이라 필자─ 또한 새삼스레 무슨 호증이 있을 바가 아니니 다시 입론할 여지도 없는 바이지만 서술의 순서상 일언을 비치 아니할 수 없으니, 대저 중국 자체에 있어서도 인도 원래의 복분식 전탑 형식 가부색 가왕의 작리부도에서 췌득하여 중국식으로 발전하게 된 누각식 부도와가 그 어느 것이 중국 탑파의 시원을 이루었을까가 문제되어 있는 이때 고분 축조 형식에 벌써 서역적 투팔 천정 수법이 성용되어 있고 한편으론 비록 황탄한 전설이나마 요동성 육왕탑과 같이 인도식 복분 형식의 토탑 기록을 가장 오랜 전설인 듯이 가지고 있는 고구려에 있어 탑파의 시원 형식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실로 난문에 전하는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목차1해독문7번= 그러나 이곳에 다시 생각하여 볼 것은 중국 자체의 원시 탑파설에 있어 상술한 바와 같이 두 가지 계통설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 인도식 복분부도는 위진 이후에 경영된 운강 기타 석굴의 조벽에서 매우 왜곡된 형식으로서 누각식 탑파가 동시에 볼 수 있을 뿐임에 반하여 누각식 탑파 형식은 비록 조형상으론 다시 고고한 실례(例)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전에 말한 착융의 목조 탑파 건립 사실이 문헌을 통하여 최고한 예로 전하여 있고 북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A.D.493)─경영한 용문의 석굴사에서는 복분식 탑파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다시 또 육조 이후 수당을 통하여 누각식 탑파가 중국 탑파의 본류를 이르고 있으며 또 〿〿에 있어서도 역사를 통하여 복분식 부도로는 극히 전설적인 전거의 요동성 육왕탑이 고고한 일례로 남아 있고 {{TagRefT|14}}〿일기로 들어와서 통도사 계단이란<ref group="a">해독문주석14</ref> 것이 하나 전하여 있고 그리고 고려 이후에 들어와 다소의 류형이 있다 하나 〿〿 왜곡된 복분 형식에 한한 점에서 조선의 탑파도 원래가 중국의 탑파 규범 아래 누각식 탑파가 조종을 이루었던 것으로 따라서 조선 탑파의 시원 형식은 누각식 탑파계에로 돌려봄이 가장 순리일 듯싶다. 이러한 이산 하에서 필자는 목조 탑파로부터 고찰의 실마리를 열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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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번= 그러나 이곳에 다시 생각하여 볼 것은 중국 자체의 원시 탑파설에 있어 상술한 바와 같이 두 가지 계통설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 인도식 복분부도는 위진 이후에 경영된 운강 기타 석굴의 조벽에서 매우 왜곡된 형식으로서 누각식 탑파가 동시에 볼 수 있을 뿐임에 반하여 누각식 탑파 형식은 비록 조형상으론 다시 고고한 실례(例)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전에 말한 착융의 목조 탑파 건립 사실이 문헌을 통하여 최고한 예로 전하여 있고 북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A.D.493)─경영한 용문의 석굴사에서는 복분식 탑파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다시 또 육조 이후 수당을 통하여 누각식 탑파가 중국 탑파의 본류를 이르고 있으며 또 〿〿에 있어서도 역사를 통하여 복분식 부도로는 극히 전설적인 전거의 요동성 육왕탑이 고고한 일례로 남아 있고 {{TagRefT|14}}〿일기로 들어와서 통도사 계단이란<ref group="a">해독문주석14</ref> 것이 하나 전하여 있고 그리고 고려 이후에 들어와 다소의 유형이 있다 하나 〿〿 왜곡된 복분 형식에 한한 점에서 조선의 탑파도 원래가 중국의 탑파 규범 아래 누각식 탑파가 조종을 이루었던 것으로 따라서 조선 탑파의 시원 형식은 누각식 탑파계에로 돌려봄이 가장 순리일 듯싶다. 이러한 이산 하에서 필자는 목조 탑파로부터 고찰의 실마리를 열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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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8번= {{TagSpage|18-1}}以上으로써 우리는 朝鮮 木塔婆의 變遷을 槪觀하였다. 三國期의 生動的 純粹性에서, 靜的인 修飾的인 것으로, 이어 다시 風水的으로 迷信的으로 雜信的으로 內容이 變遷되는 同時에 造型樣式도 漸次 頹廢不純한 길로 떨어져 들어간 經路를 볼 수 있다. 社會의 變相을 斟酌하고 文化의 變相을 斟酌하고 信仰의 變相을 斟酌한다면 가장 論理的인 因果的인 經過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傾向은 다른 材料의 塔婆를 觀察함에서 더욱 具體的인 知識을 얻을 것 같다.
 
|목차2원문18번= {{TagSpage|18-1}}以上으로써 우리는 朝鮮 木塔婆의 變遷을 槪觀하였다. 三國期의 生動的 純粹性에서, 靜的인 修飾的인 것으로, 이어 다시 風水的으로 迷信的으로 雜信的으로 內容이 變遷되는 同時에 造型樣式도 漸次 頹廢不純한 길로 떨어져 들어간 經路를 볼 수 있다. 社會의 變相을 斟酌하고 文化의 變相을 斟酌하고 信仰의 變相을 斟酌한다면 가장 論理的인 因果的인 經過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傾向은 다른 材料의 塔婆를 觀察함에서 더욱 具體的인 知識을 얻을 것 같다.
  
|목차2해독문1번= 기술한 바와 같이 인도에서의 탑파의 본원적 형식은 토양으로 조축한 복분식 부도이었다. 그러나 복분의 반구양식이 그 기단과 함께 적취에 반한 공덕의 관념으로 말미암마 탑고됨에 따라 복분의 탑신은 포탄형으로 수고하여지고 기단의 층도도 중후하게 되며, 이어 곧 기단과 탑신에 시설되었던 난순이 건축적 방실의 형태로 변천되며 또는 탑중거불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탑실을 고의로 경영하게 되니 탑파가 전체로 누각식 건물로 번안될 인연이 이러한 데부터 있었던 것이다. 건타라 지방에 작리부도라는 목층 고탑이 가부색가왕대에 벌써 건조되었다는 것도 그 발생 과정에 하등의 비약적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는 까닭이 이러한데 있거니와 당대에 목조의 고루건축으로서는 세계적 발전을 보이고 있던 중국으로서 법현 이하 다수한 구법승으로 말미암아 발견되고 전파된 이 작리부도가 간접 직접으로 중국 탑파 조성에 중요한 규범을 이루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서역제국을 통하여 습득한 당대의 탑파 지식이 원본적 복분 형식을 탐득하였다느니보다 당대에 한창 유행되고 성용되어 있던 기루식 탑파가 먼저 유전되었을 것이 순리로 상상되는 바이니 그러므로 위서 석로지에 <br/> 凡宮塔制度 猃依天竺舊狀而重構之 從一級至三五七九 世人相承 謂之浮圖 或云佛圖 <br/> 라고 있어 탑파의 형식이 천축구상에 의하였다 하나 복분식 부도와는 전연 다른 층루식 건물일 뿐더러 한인이 그로써 곧 탑규의 정형인 듯이 여기고 있는 소식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에서의 탑파에 대한 이러한 상식은 이어 곧 조선에 있어서도 그 실정을 같이 하였을 것이니 그러므로 삼국유사가 전하는 삼보감통록의 요동성 육왕탑이라는 것은 잘해야 발해대 사실의 오전에 부과한 것이었을 것이요 거론할 재료도 못된다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목조 탑파야말로 조선 탑위의 시원이었고 조종이었으니 다만 교화가 편파된 지 1500여년에 문헌 상으로도 전하여 온 것이 그리 많지 못하고 현물로서도 이조 중엽 이후에 속하는─ 탑파의 의의를 상실하고 있는 이기의 고루 건물이 남아 있을 뿐이니 "龍象擇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落 出現於世 西域名憎 降臨於境"하던 해동의 교국으로 이 어인 변상이랴. 요요한 문헌과 황잔한 유적에서나마 탑상을 엿보지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 이곳에 있다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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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번= 기술한 바와 같이 인도에서의 탑파의 본원적 형식은 토양으로 조축한 복분식 부도이었다. 그러나 복분의 반구양식이 그 기단과 함께 적취에 반한 공덕의 관념으로 말미암마 탑고됨에 따라 복분의 탑신은 포탄형으로 수고하여지고 기단의 층도도 중후하게 되며, 이어 곧 기단과 탑신에 시설되었던 난순이 건축적 방실의 형태로 변천되며 또는 탑중거불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탑실을 고의로 경영하게 되니 탑파가 전체로 누각식 건물로 번안될 인연이 이러한 데부터 있었던 것이다. 건타라 지방에 작리부도라는 목층 고탑이 가부색가왕대에 벌써 건조되었다는 것도 그 발생 과정에 하등의 비약적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는 까닭이 이러한데 있거니와 당대에 목조의 고루건축으로서는 세계적 발전을 보이고 있던 중국으로서 법현 이하 다수한 구법승으로 말미암아 발견되고 전파된 이 작리부도가 간접 직접으로 중국 탑파 조성에 중요한 규범을 이루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서역제국을 통하여 습득한 당대의 탑파 지식이 원본적 복분 형식을 탐득하였다느니보다 당대에 한창 유행되고 성용되어 있던 기루식 탑파가 먼저 유전되었을 것이 순리로 상상되는 바이니 그러므로 위서 석로지에 <blockquote no="03">凡宮塔制度 猃依天竺舊狀而重構之 從一級至三五七九 世人相承 謂之浮圖 或云佛圖</blockquote>라고 있어 탑파의 형식이 천축구상에 의하였다 하나 복분식 부도와는 전연 다른 층루식 건물일 뿐더러 한인이 그로써 곧 탑규의 정형인 듯이 여기고 있는 소식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에서의 탑파에 대한 이러한 상식은 이어 곧 조선에 있어서도 그 실정을 같이 하였을 것이니 그러므로 삼국유사가 전하는 삼보감통록의 요동성 육왕탑이라는 것은 잘해야 발해대 사실의 오전에 부과한 것이었을 것이요 거론할 재료도 못된다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목조 탑파야말로 조선 탑위의 시원이었고 조종이었으니 다만 교화가 편파된 지 1500여년에 문헌 상으로도 전하여 온 것이 그리 많지 못하고 현물로서도 이조 중엽 이후에 속하는─ 탑파의 의의를 상실하고 있는 이기의 고루 건물이 남아 있을 뿐이니 <cite no="01">"龍象擇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落 出現於世 西域名憎 降臨於境"</cite>하던 해동의 교국으로 이 어인 변상이랴. 요요한 문헌과 황잔한 유적에서나마 탑상을 엿보지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 이곳에 있다 할까.
|목차2해독문2번= 대저 삼국기의 사료는 모든 방면이 그러하지만 탑파의 조건 사실, 특히 목조 탑파의 건립 사실에 있어서도 요요하니 지금 알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예로는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흥륜사 황룡사 기타의 소수 예가 있을 뿐이다. 백제의 미륵사탑에 관하여는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blockquote no="03">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因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食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云云</blockquote> 이라 한 구중의 <cite no="03">"殿塔廊廡各三所創之"</cite>란 일절로써 추고코자 하는 바이니 그 현 유적지는 전라북도 익산군 김마면 기산리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최외한 석탑 일기와 초체가 다수 산재하여 있으며 일찍이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다다시) 박사로 말미암아 학계에 보고된 바 있었는데 그는 전설과 유적을 전반적으로 의심하고서 신라 문무왕 말년에 고구려의 종실 안승의 신라 래투의 사실에 부회시켜 통일 이후에 속할 사관으로써 입론하였더니(주15) 후에 그의 문하인 등도 해치랑(藤島 亥治郞, 후지시마 가이치로) 공학 박사는 그 유지를 다시 고찰한 후, 현존한 석탑만을 관야씨 설에 부합되는 것으로 지지하고 사찰의 원기는 그 규모의 굉대함이라든지 가람의 배치 의태가 전설대로 백제 무왕대에 속할 것으로 또는 적어도 륙조 가람 배치법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삼국기 즉 백제 시대에 속할 가람일 것이라는 것을 주장한 바가(주16)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금서룡 문학 박사도 문제한 바 있었고(주17) 필자 자신의 의견도 있으나 이는 후회에 서술하기로 하고 등도 박사의 고증에 의하여 현 사역을 보건대 현존한 석탑 구역은 "殿塔廊廡各三所創之"라고 한 것 중의 서구에 속한 것으로 그는 이를 서탑원이라 가칭하고 이 구역의 동편으로 당탑지 의 토양이 또다시 구가 있음으로써 이곳을 동탑원지로써 칭하고 다시 이 양탑 원지 위로 품자형으로 일탑원지를 추정하여 전탑 삼소라는 것을 설정하고 동탑원과 중탑원에는 목조 탑파가, 서탑원의 석탑 형식과 같은 류의 탑파가 있었을 것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 다시 더 구체적으로 상정할 자료가 없는 이상 백제의 목탑은 해결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돌이켜 신라에서의 상태를 보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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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 대저 삼국기의 사료는 모든 방면이 그러하지만 탑파의 조건 사실, 특히 목조 탑파의 건립 사실에 있어서도 요요하니 지금 알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예로는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흥륜사 황룡사 기타의 소수 예가 있을 뿐이다. 백제의 미륵사탑에 관하여는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blockquote no="04">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因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食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云云</blockquote> 이라 한 구중의 <cite no="02">"殿塔廊廡各三所創之"</cite>란 일절로써 추고코자 하는 바이니 그 현 유적지는 전라북도 익산군 김마면 기산리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최외한 석탑 일기와 초체가 다수 산재하여 있으며 일찍이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다다시) 박사로 말미암아 학계에 보고된 바 있었는데 그는 전설과 유적을 전반적으로 의심하고서 신라 문무왕 말년에 고구려의 종실 안승의 신라 래투의 사실에 부회시켜 통일 이후에 속할 사관으로써 입론하였더니(주15) 후에 그의 문하인 등도 해치랑(藤島 亥治郞, 후지시마 가이치로) 공학 박사는 그 유지를 다시 고찰한 후, 현존한 석탑만을 관야씨 설에 부합되는 것으로 지지하고 사찰의 원기는 그 규모의 굉대함이라든지 가람의 배치 의태가 전설대로 백제 무왕대에 속할 것으로 또는 적어도 륙조 가람 배치법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삼국기 즉 백제 시대에 속할 가람일 것이라는 것을 주장한 바가(주16)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금서룡 문학 박사도 문제한 바 있었고(주17) 필자 자신의 의견도 있으나 이는 후회에 서술하기로 하고 등도 박사의 고증에 의하여 현 사역을 보건대 현존한 석탑 구역은 "殿塔廊廡各三所創之"라고 한 것 중의 서구에 속한 것으로 그는 이를 서탑원이라 가칭하고 이 구역의 동편으로 당탑지 의 토양이 또다시 구가 있음으로써 이곳을 동탑원지로써 칭하고 다시 이 양탑 원지 위로 품자형으로 일탑원지를 추정하여 전탑 삼소라는 것을 설정하고 동탑원과 중탑원에는 목조 탑파가, 서탑원의 석탑 형식과 같은 류의 탑파가 있었을 것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 다시 더 구체적으로 상정할 자료가 없는 이상 백제의 목탑은 해결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돌이켜 신라에서의 상태를 보지 아니할 수 없다.
|목차2해독문3번= 대저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기는 삼국사기에 이른바 법흥왕 15년보다 그 이전에 있었을 것이 여러가지로 증명할 수 있으나 그러나 법흥왕대 불교가 국교로써 수립되기 전까지는 당탑의 장엄이 특히 있었을법하지 아니하니 삼국유사의 아도기라 전설 중에 보이는 칠처가람설은 너무 전설적인 것이므로 거론할 수 없고 신라의 최초 불찰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것은 흥륜사, 영흥사가 있으니 흥륜사는 법흥왕 14년 정미에 초창하여(주18) 법흥왕 22년 을묘에 대개하고 진흥왕 5년에 필성하였다 하고 영흥사 역 동대에 창위하였다 한다. 그러나 건축적 장엄은─특히 우리가 문제하는 탑파에 대하여는 삼국유사 권3 「興輪寺壁畫普賢條」조의 <cite no="XX">"殿塔及草樹土石皆發異香"</cite>이란 한 구와 동서 권5 「金現感虎」 조의 <cite no="XX">"新羅俗 每當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兢德興輪寺之殿塔 爲商會"</cite>라는 일 구절이 있을 뿐이요 유적으로도 하등 이 이상의 사실을 천발시킬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이후 3보의 융성을 따라 당탑의 조영은 연복년 증가하여 태청 천수간(진흥왕대)에는 벌써 "寺寺星張, 塔塔雁行" 하는 성관을 이루게 되었으나 목조 탑파의 장엄은 의연히 찾기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 권5 "月明師兜率歌"중에 <cite no="XX">"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畵慈氏像前"</cite>이란 구에서 내원(천주사)(주19) 탑파가 목조 탑파로서 그 안에 벽화 석가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동서 「二惠同塵」 조에 <cite no="XX">"志鬼心火出燒其塔"</cite>이란 구에서 영묘사에 목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주20) 선덕왕대 창건이라는 경주 지림사에도 정광여래 사리각인 삼층탑이 있었다 하지만(주21) 고신라기의 목조 탑파의 대표적 작품으로 가장 구체적 문징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황룡사 구층구이 하나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 <blockquote no="XX">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慈藏)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徳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乃 以寳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来 経營木石 伊于龍春 一云 龍樹 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㓕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攺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台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并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 大和寺在阿由縣南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霊䕃乎</blockquote>/> 라 하는 것이 탑파 조영의 동기와 경과의 구체적 보고로서 가장 회자되어 있는 기록이며 신라 삼빈의 하나에 대한 유명한 사실이다. 현금 경주 내동면 구황리에 남아있는 초체에 의하여 추고되는 탑파의 대는 초층 평면이 약 73척 4지로 각 주(柱) 사이가 10척 4촌강의 7간4면인 49간 건물이라 중앙에는 폭 약 4척, 고 2척 7촌 5분의 입방형 돌기석면 위에 약 6촌 전후의 원형 요혈이 있는 찬주석이 놓여있다. 전거한 문례에 의하면 총고 225척의 탑파이라하나 이만한 평면으로서 구층탑이었다면 총고 적어도 삼사백척은 되었으리라고 한다.(주22) 비로소 그 보장함을 알 수 있거니와 조선에서는 물론이요 일본에도 이만한 기구의 탑파는 없었다 한다. 고려태조가 고지에 의하여 경중을 물었다는 신라 삼보의 하나요, 통업 기원을 위하여 효성한 탑파도 그것이요, 몽고병란에 회로될 때까지 누차의 개수를(주23) 힘쓴 것도 이 탑이요, 현종대 조유궁을 헐어서까지 중창한 것도(주24) 이 탑이니 혁조계선은 정치적 상탈이어니와 민족적으로 얼만한 존숭의 적이었든지 가히 알만하다. 지림사의 목조 탑파라는 것이 초력 평간 약 60척 7촌, 각주간 거리 6척 23촌의 삼층탑파로서 중앙 양주석이 폭 7촌 5분 심 약 5촌의 이중방혈이 있다는 것쯤은 비록 삼국기의 탑파라 하더라도 비교도 안 되는 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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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번= 대저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기는 삼국사기에 이른바 법흥왕 15년보다 그 이전에 있었을 것이 여러가지로 증명할 수 있으나 그러나 법흥왕대 불교가 국교로써 수립되기 전까지는 당탑의 장엄이 특히 있었을법하지 아니하니 삼국유사의 아도기라 전설 중에 보이는 칠처가람설은 너무 전설적인 것이므로 거론할 수 없고 신라의 최초 불찰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것은 흥륜사, 영흥사가 있으니 흥륜사는 법흥왕 14년 정미에 초창하여(주18) 법흥왕 22년 을묘에 대개하고 진흥왕 5년에 필성하였다 하고 영흥사 역 동대에 창위하였다 한다. 그러나 건축적 장엄은─특히 우리가 문제하는 탑파에 대하여는 삼국유사 권3 「興輪寺壁畫普賢條」조의 <cite no="03">"殿塔及草樹土石皆發異香"</cite>이란 한 구와 동서 권5 「金現感虎」 조의 <cite no="04">"新羅俗 每當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兢德興輪寺之殿塔 爲商會"</cite>라는 일 구절이 있을 뿐이요 유적으로도 하등 이 이상의 사실을 천발시킬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이후 3보의 융성을 따라 당탑의 조영은 연복년 증가하여 태청 천수간(진흥왕대)에는 벌써 "寺寺星張, 塔塔雁行" 하는 성관을 이루게 되었으나 목조 탑파의 장엄은 의연히 찾기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 권5 "月明師兜率歌"중에 <cite no="05">"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畵慈氏像前"</cite>이란 구에서 내원(천주사)(주19) 탑파가 목조 탑파로서 그 안에 벽화 석가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동서 「二惠同塵」 조에 <cite no="06">"志鬼心火出燒其塔"</cite>이란 구에서 영묘사에 목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주20) 선덕왕대 창건이라는 경주 지림사에도 정광여래 사리각인 삼층탑이 있었다 하지만(주21) 고신라기의 목조 탑파의 대표적 작품으로 가장 구체적 문징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황룡사 구층구이 하나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 <blockquote no="05">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慈藏)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徳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乃 以寳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来 経營木石 伊于龍春 一云 龍樹 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㓕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攺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台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并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 大和寺在阿由縣南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霊䕃乎</blockquote>라 하는 것이 탑파 조영의 동기와 경과의 구체적 보고로서 가장 회자되어 있는 기록이며 신라 삼빈의 하나에 대한 유명한 사실이다. 현금 경주 내동면 구황리에 남아있는 초체에 의하여 추고되는 탑파의 대는 초층 평면이 약 73척 4지로 각 주(柱) 사이가 10척 4촌강의 7간4면인 49간 건물이라 중앙에는 폭 약 4척, 고 2척 7촌 5분의 입방형 돌기석면 위에 약 6촌 전후의 원형 요혈이 있는 찬주석이 놓여있다. 전거한 문례에 의하면 총고 225척의 탑파이라하나 이만한 평면으로서 구층탑이었다면 총고 적어도 삼사백척은 되었으리라고 한다.(주22) 비로소 그 보장함을 알 수 있거니와 조선에서는 물론이요 일본에도 이만한 기구의 탑파는 없었다 한다. 고려태조가 고지에 의하여 경중을 물었다는 신라 삼보의 하나요, 통업 기원을 위하여 효성한 탑파도 그것이요, 몽고병란에 회로될 때까지 누차의 개수를(주23) 힘쓴 것도 이 탑이요, 현종대 조유궁을 헐어서까지 중창한 것도(주24) 이 탑이니 혁조계선은 정치적 상탈이어니와 민족적으로 얼만한 존숭의 적이었든지 가히 알만하다. 지림사의 목조 탑파라는 것이 초력 평간 약 60척 7촌, 각주간 거리 6척 23촌의 삼층탑파로서 중앙 양주석이 폭 7촌 5분 심 약 5촌의 이중방혈이 있다는 것쯤은 비록 삼국기의 탑파라 하더라도 비교도 안 되는 예라 할 것이다.
|목차2해독문4번= 각설 상술한 삼국기 탑파의 일이의 예는 즉 육조식 가람 배치법(일본서 말하는 백제 칠당 가람제라는 것)의 일탑식 가람 제창기의 예이니 탑파 중심의 가람  배치법이 중요시되던 한위 이래의 전통적 배치법에서 영향되던 경영이라 따라서 그 경영도 장위함이 본색이었으나 차차로 상설의 중요성이 미신적으로 고조됨을 따라 탑파의 배치는 수식적으로 도안적으로 라렬케 되어 김당(상전)에 대한 보처로서의 배설을 받게 되니 이것이 중국의 수당 이후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신라통일 전후부터의 양탑식 가람제도의 발생 연기이였다. 이리하여 목조 탑파 그 자체도 가구에 치중하려던 웅도를 잃고 점차로 장식적 건물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러한 경향은 석탑의 변천에서 명료히 간취할 수 있으나 소수의 유례나마 목조 탑파에서도 보지 못할 바 아니니 이러한 경향에 있는 탑파로 문헌이나 유적으로 전하여 있는 예를 모조리 긁어모아 사천왕사의 동서탑, 망덕사의 동서탑, 보문사의 동서탑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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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번= 각설 상술한 삼국기 탑파의 한둘의 예는 즉 육조식 가람 배치법(일본서 말하는 백제 칠당 가람제라는 것)의 일탑식 가람 제창기의 예이니 탑파 중심의 가람  배치법이 중요시되던 한위 이래의 전통적 배치법에서 영향되던 경영이라 따라서 그 경영도 장위함이 본색이었으나 차차로 상설의 중요성이 미신적으로 고조됨을 따라 탑파의 배치는 수식적으로 도안적으로 나열케 되어 김당(상전)에 대한 보처로서의 배설을 받게 되니 이것이 중국의 수당 이후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신라통일 전후부터의 양탑식 가람제도의 발생 연기이였다. 이리하여 목조 탑파 그 자체도 가구에 치중하려던 웅도를 잃고 점차로 장식적 건물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러한 경향은 석탑의 변천에서 명료히 간취할 수 있으나 소수의 유례나마 목조 탑파에서도 보지 못할 바 아니니 이러한 경향에 있는 탑파로 문헌이나 유적으로 전하여 있는 예를 모조리 긁어모아 사천왕사의 동서탑, 망덕사의 동서탑, 보문사의 동서탑 등을 들 수 있다.
|목차2해독문5번= 사천왕사(현 변주군 내동면 배반리 유사지)는 문무왕 15년에 당병 내침에 제하여 명랑법사의 신인 밀법에 의하여 호국양병코자 창립하였거니와 대정 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 제1책의 유지조사에 의하면  <blockquote no="XX">南方東塔의 土壇高 4尺 3寸으로 礎石이 12枚가 있어 東西南北으로 各四枚式 配列되어있고(即 三間四至의 建物이다) 中央에 一大礎石(即 榛柱心石)이 놓여있다. 各礎石의 間隔은 5尺 1寸이요 礎列의 一邊長은 23尺 5寸이다. 礎石의 形狀은 比較的 簡單하고 側礎는 花崗石으로서 邊長 2尺 高 1寸의 方形突起가 있을 뿐이요 中心 礎石도 略同形이나 突起邊長은 3尺 8寸餘, 高는 3寸이요 中央에 1尺과 8寸大의 二段方形의 凹形孔穴이있다. 西塔址도 大概 같고 東西塔址의 中心距離는 約 135尺이다. 以上大意抄譯</blockquote> 즉 층고는 부명이나 변장 13척 5촌의 삼간사지의 탑파임을 알 수 있다. 동 보고서에는 다시 북동, 북서에 각기 방형토단에 상술한 탑지와 유사한 배열법을 갖고 있는 이기의 지형 탑지로 오인하고 소위 사천왕사라는 명칭에 부의시키기 위한 경영이였던듯이 립론하였지만 이는 요컨댄 가람배치법에 대한 부비한 식견의 소치이었고 북동, 북서의 탑지라는 것은 두은 경루, 고루(또는 종루)에 해당한 건물이였던 것이다. 이는 하여간에 우리는 탑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유명한 유물을 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즉 사천왕상을 반육고로 부조한 와각과(증장천, 지국천이 발견되었다) 화릉형(소위 간오형이란 것) 녹유추벽과 또 실상화만을 심각한 와전 등이니 설에 의하면 실상화만의 와전은 중앙에 깔리고 화릉형 녹유벽은 연식이 되어있었다 하며 사천왕벽은 벽간에 감식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특히 필자가 흥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양지사석조에  <blockquote no="XX">釋良志 未詳祖考鄉邑 唯現跡於善德王朝(中略) 旁通雜譽 神妙絕比 叉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並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下略)</blockquote>라는 절이니 유래 공장의 천기로서 죽백에 성명을 남긴 자─효천의 잔성보다 더욱 영성한 조선에 있어 이와 같이 대서특서되어있을 뿐 아니라 현금 사천왕사지에서 발견된 벽전의 류─그 조법이 절묘 괴려 웅혼한 점에서 성당예풍에 손색을 보이지 않고 해동공예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이때 석량지를 눈앞에 그려보지 아니할 수 없다. "선덕왕조에 현적키 시작한" 그는 문무왕대까지 생존하여 그 절묘한 신기를 포만한 노기를 마음껏 발굴하였던 모양이니 석량지는 사천왕사로서 말미암아 그 성명을 오늘에 다시 살렸고, 사천왕사는 석량지로 말미암아 오늘날 그 장엄이 다시 추상케 되니 묘호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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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번= 사천왕사(현 변주군 내동면 배반리 유사지)는 문무왕 15년에 당병 내침에 제하여 명랑법사의 신인 밀법에 의하여 호국양병코자 창립하였거니와 대정 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 제1책의 유지조사에 의하면  <blockquote no="06">南方東塔의 土壇高 4尺 3寸으로 礎石이 12枚가 있어 東西南北으로 各四枚式 配列되어있고(即 三間四至의 建物이다) 中央에 一大礎石(即 榛柱心石)이 놓여있다. 各礎石의 間隔은 5尺 1寸이요 礎列의 一邊長은 23尺 5寸이다. 礎石의 形狀은 比較的 簡單하고 側礎는 花崗石으로서 邊長 2尺 高 1寸의 方形突起가 있을 뿐이요 中心 礎石도 略同形이나 突起邊長은 3尺 8寸餘, 高는 3寸이요 中央에 1尺과 8寸大의 二段方形의 凹形孔穴이있다. 西塔址도 大概 같고 東西塔址의 中心距離는 約 135尺이다. 以上大意抄譯</blockquote> 즉 층고는 부명이나 변장 13척 5촌의 삼간사지의 탑파임을 알 수 있다. 동 보고서에는 다시 북동, 북서에 각기 방형토단에 상술한 탑지와 유사한 배열법을 갖고 있는 이기의 지형 탑지로 오인하고 소위 사천왕사라는 명칭에 부의시키기 위한 경영이였던 듯이 입론하였지만 이는 요컨댄 가람배치법에 대한 불비한 식견의 소치이었고 북동, 북서의 탑지라는 것은 두은 경루, 고루(또는 종루)에 해당한 건물이였던 것이다. 이는 하여간에 우리는 탑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유명한 유물을 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즉 사천왕상을 반육고로 부조한 와각과(증장천, 지국천이 발견되었다) 화릉형(소위 간오형이란 것) 녹유추벽과 또 실상화만을 심각한 와전 등이니 설에 의하면 실상화만의 와전은 중앙에 깔리고 화릉형 녹유벽은 연식이 되어있었다 하며 사천왕벽은 벽간에 감식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특히 필자가 흥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양지사석조에  <blockquote no="07">釋良志 未詳祖考鄉邑 唯現跡於善德王朝(中略) 旁通雜譽 神妙絕比 叉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並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下略)</blockquote>라는 절이니 유래 공장의 천기로서 죽백에 성명을 남긴 자─효천의 잔성보다 더욱 영성한 조선에 있어 이와 같이 대서특서되어있을 뿐 아니라 현금 사천왕사지에서 발견된 벽전의 류─그 조법이 절묘 괴려 웅혼한 점에서 성당예풍에 손색을 보이지 않고 해동공예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이때 석량지를 눈앞에 그려보지 아니할 수 없다. "선덕왕조에 현적키 시작한" 그는 문무왕대까지 생존하여 그 절묘한 신기를 포만한 노기를 마음껏 발굴하였던 모양이니 석량지는 사천왕사로서 말미암아 그 성명을 오늘에 다시 살렸고, 사천왕사는 석량지로 말미암아 오늘날 그 장엄이 다시 추상케 되니 묘호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목차2해독문6번= 이 사천왕사와 인연을 같이 하고 시대를 같이 하고 지역을 같이 하고 사관을 거의 같이 한 듯한 사찰이 있으니 이는 즉 망덕사이다. 삼국사기 권9 경덕왕 14년조에  <blockquote no="XX">望德寺塔動 唐令狐澄新羅國記曰其國爲唐立此寺故以爲名兩塔相對髙十三層忽震動開合如欲傾倒者數日其年禄山亂疑其應也</blockquote>라고 있는 이 주기가 우리에게 가장 흥미를 끄는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거한 대정 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에 의하여 유적의 특히 탑지의 현상을 종합하여 보면 대략 4척고토단 위에 변장 2척 1촌 내외의 방형돌기가 있는 초석 10기가 각 석의 간격 약 3척 2‧3촌의 거리를 갖고 일변에 사매식 나열되어 있으니 변 총장18척 내외의 삼간사지의 탑파임을 알 수 있겠고 중앙의 찰주심석은 변장2척 1촌대의 팔각형으로 중앙에 이단의 요형공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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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6번= 이 사천왕사와 인연을 같이 하고 시대를 같이 하고 지역을 같이 하고 사관을 거의 같이 한 듯한 사찰이 있으니 이는 즉 망덕사이다. 삼국사기 권9 경덕왕 14년조에  <blockquote no="08">望德寺塔動 唐令狐澄新羅國記曰其國爲唐立此寺故以爲名兩塔相對髙十三層忽震動開合如欲傾倒者數日其年禄山亂疑其應也</blockquote>라고 있는 이 주기가 우리에게 가장 흥미를 끄는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거한 대정 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에 의하여 유적의 특히 탑지의 현상을 종합하여 보면 대략 4척고토단 위에 변장 2척 1촌 내외의 방형돌기가 있는 초석 10기가 각 석의 간격 약 3척 2‧3촌의 거리를 갖고 일변에 사매식 나열되어 있으니 변 총장18척 내외의 삼간사지의 탑파임을 알 수 있겠고 중앙의 찰주심석은 변장2척 1촌대의 팔각형으로 중앙에 이단의 요형공혈이 있다.
 
|목차2해독문7번= 이와 같이 변장 18척 내외의 삼간사지탑으로 층고가 13층이었다면 실로 괴기하게도 준초하였던 감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양탑간의 중심 거리─약 105척의 한격을 갖고 있으면서 삼국사기에 누대를 통하여 "二塔相擊"이니 "二塔戰"이니 하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사실에 있어 상당한 고층이였던 듯은 하다. 장식의 공은 사천왕사만큼 차질 수 없다 하더라도 기당키 위한 사관이었으니 어찌 또한 소홀하였으랴 진주초석이 이미 유례없는 팔각의 교기를 정하였음에서도 장식의 화엄성을 대강 상상할 수 있다 하겠다.
 
|목차2해독문7번= 이와 같이 변장 18척 내외의 삼간사지탑으로 층고가 13층이었다면 실로 괴기하게도 준초하였던 감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양탑간의 중심 거리─약 105척의 한격을 갖고 있으면서 삼국사기에 누대를 통하여 "二塔相擊"이니 "二塔戰"이니 하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사실에 있어 상당한 고층이였던 듯은 하다. 장식의 공은 사천왕사만큼 차질 수 없다 하더라도 기당키 위한 사관이었으니 어찌 또한 소홀하였으랴 진주초석이 이미 유례없는 팔각의 교기를 정하였음에서도 장식의 화엄성을 대강 상상할 수 있다 하겠다.
 
|목차2해독문8번= 이 외에 역사상으로 불명하나 경주 내동면 보문리 김당평에 보문사지에 양탑지가 있다 한다. 등도 박사의 추고에 의하면 동서탑파의 거리  일칠육당척이요 삼간사지의 삼중탑으로서 각주간 8척 간격이라 하고 현금 서탑지에는 변장 약 4척 5촌대의 정방형 대석 위에 직경 약 4척 1촌 고 약 8촌 3분의 팔판연화형 연주심석이 있어 차종초석으로서는 망덕사의 그것보다 더 화려할 뿐 아니라 일본 전국에 있어서도 이만한 심초의 예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이에 따른 탑파의 화식─ 또한 대단하였을 것이나 상상은 그만두기로 하자.
 
|목차2해독문8번= 이 외에 역사상으로 불명하나 경주 내동면 보문리 김당평에 보문사지에 양탑지가 있다 한다. 등도 박사의 추고에 의하면 동서탑파의 거리  일칠육당척이요 삼간사지의 삼중탑으로서 각주간 8척 간격이라 하고 현금 서탑지에는 변장 약 4척 5촌대의 정방형 대석 위에 직경 약 4척 1촌 고 약 8촌 3분의 팔판연화형 연주심석이 있어 차종초석으로서는 망덕사의 그것보다 더 화려할 뿐 아니라 일본 전국에 있어서도 이만한 심초의 예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이에 따른 탑파의 화식─ 또한 대단하였을 것이나 상상은 그만두기로 하자.
 
|목차2해독문9번= 이상 빈약한 소수의 거례이나, 그러나 삼국기 탑파가 탑파 중심 사상에서 그 결구의 웅위에 치중하였다가 통일기로 들면서부터 탑규의 지위가 일개 보처의 의의로 폄하되어 결구보다도 조식에 엄중케 된 대체의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조대한 잡석 주초에서 가공된 초석으로 화벽의 수법에서 팽벽의 수법으로, 지토조간에서 추벽의 조간, 유벽의 조간으로 초소한 용와에서 화엄된 와용으로(와당조법의 화려를 뜻함) 한마디로 말하면 동적 의의, 실본적 의의가 사라지고 정적으로 장식적으로 폄하되어갔다.
 
|목차2해독문9번= 이상 빈약한 소수의 거례이나, 그러나 삼국기 탑파가 탑파 중심 사상에서 그 결구의 웅위에 치중하였다가 통일기로 들면서부터 탑규의 지위가 일개 보처의 의의로 폄하되어 결구보다도 조식에 엄중케 된 대체의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조대한 잡석 주초에서 가공된 초석으로 화벽의 수법에서 팽벽의 수법으로, 지토조간에서 추벽의 조간, 유벽의 조간으로 초소한 용와에서 화엄된 와용으로(와당조법의 화려를 뜻함) 한마디로 말하면 동적 의의, 실본적 의의가 사라지고 정적으로 장식적으로 폄하되어갔다.
 
|목차2해독문10번= 이러한 본의의 타락은 공업을 수성하여 안일로 퇴폐되어 들어가는 통일후〿의 신라사회에서는 구출할 수 없는 일이요─이러한 동기로 말미암아 석탑이 독특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지만─신흥 기세에 뛰놀던 고려의 창업기운에 의뢰치 않고서는 복활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목차2해독문10번= 이러한 본의의 타락은 공업을 수성하여 안일로 퇴폐되어 들어가는 통일후〿의 신라사회에서는 구출할 수 없는 일이요─이러한 동기로 말미암아 석탑이 독특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지만─신흥 기세에 뛰놀던 고려의 창업기운에 의뢰치 않고서는 복활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목차2해독문11번= 려태조의 십훈요가 얼마나 사료로서의 엄밀성을 가졌을까는 의문이지만 국가의 대업이 법력으로 말미암아 취술된다하여 사원 창작에 치력하였던 것만은 그 행적에 의하여 믿을만하니 창업 시초에 도내십찰을 창립한 것도 저간의 소식의 일단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blockquote no="XX">昔新羅造九層塔 ○皇龍寺塔 遂成一統之業 今欲開京建七層塔 西京建九層塔 冀借玄功除群醜 合三韓爲一家(註28)</blockquote>운운의 건탑으로 말미암은 호국창업의 우원관 〿〿 신라의 고지를 모방한 만큼 이로 말미암아 탑파의 중흥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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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1번= 려태조의 십훈요가 얼마나 사료로서의 엄밀성을 가졌을까는 의문이지만 국가의 대업이 법력으로 말미암아 취술된다하여 사원 창작에 치력하였던 것만은 그 행적에 의하여 믿을만하니 창업 시초에 도내십찰을 창립한 것도 저간의 소식의 일단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blockquote no="09">昔新羅造九層塔 ○皇龍寺塔 遂成一統之業 今欲開京建七層塔 西京建九層塔 冀借玄功除群醜 合三韓爲一家(註28)</blockquote>운운의 건탑으로 말미암은 호국창업의 우원관 〿〿 신라의 고지를 모방한 만큼 이로 말미암아 탑파의 중흥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목차2해독문12번= 지금 개경의 칠중탑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기 목조 탑파로서는 서경 중흥사의 구층탑(註29), 중흥사의 탑(註30), 개경 진관사의 구층탑(註31), 혜일 중광사탑(註32) 서〿 김강사의 탑(註33) 남원 만복사의 오중탑(註34) 개경 연복사의 오중탑 등을 문헌에서나마 찾아볼 수 있다. 이 중에 건축장엄이 제법 전하여 있는 것은 연복사의 오중탑파가 하나 있다. 고려도경 권17 사우, 광통보제사(즉 연복사) 조에 <blockquote no="XX">廣通普濟寺 在王府之南 泰安門內直北百餘步 寺額揭於官道南向 中門榜日神通之門 正殿極雄壯 過於王居 榜日羅漢〿殿(中略) 殿之西爲浮屠 五級高逾二百尺 後爲法堂 旁爲居(下略)</blockquote>라 보이니 "五級高逾二百尺"도 고려 목탑파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보고이거니와 "殿之西爲浮屠"라는 것도 자미있는 배치법의 하나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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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2번= 지금 개경의 칠중탑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기 목조 탑파로서는 서경 중흥사의 구층탑(註29), 중흥사의 탑(註30), 개경 진관사의 구층탑(註31), 혜일 중광사탑(註32) 서〿 김강사의 탑(註33) 남원 만복사의 오중탑(註34) 개경 연복사의 오중탑 등을 문헌에서나마 찾아볼 수 있다. 이 중에 건축장엄이 제법 전하여 있는 것은 연복사의 오중탑파가 하나 있다. 고려도경 권17 사우, 광통보제사(즉 연복사) 조에 <blockquote no="10">廣通普濟寺 在王府之南 泰安門內直北百餘步 寺額揭於官道南向 中門榜日神通之門 正殿極雄壯 過於王居 榜日羅漢〿殿(中略) 殿之西爲浮屠 五級高逾二百尺 後爲法堂 旁爲居(下略)</blockquote>라 보이니 "五級高逾二百尺"도 고려 목탑파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보고이거니와 "殿之西爲浮屠"라는 것도 자미있는 배치법의 하나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이다.
|목차2해독문13번= 이곳에 가람 배치에 대하여 일언을 삽입하건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삼국기의 일탑식 가람에서는 자오선상에 남하여 문•탑•김당•강당이 순차로 놓이고 탑과 김당을 내정에 포함하고 강당과 문을 련락하여 사방형 랑무가 돌려 있고 승방과 식당이 따로 정연히 배치되니 이것을 칠당가람제라고 일본에서는 불렀던 것이다. 즉 탑과 김당이 남북으로 정연히 놓였던 것이니 이는 상설과 사리와가 평등의 지위를 가졌던 까닭이다. 그럼으로 일본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당과 탑을 동서로 또는 서동으로 병치하는 가람 배치법을 일찍이 취하였으니 이것이 내량의 법륭사 법기사 법륜사 등의 "플랜"(평면)이었다. 즉 고의 탑과 광의 당을 좌우로 배치함에서 건축조형상 력의 평형이란 특이한 배치법 창안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로 일본서 창안한 독특한 가람배치법이라 칭할 만한 것이어서 중국 조선에서 우금것 그 유례들을 볼 수 없었다. 조선의 신라통일 전후부터의 가람배치라는 것도 이미 술한 바와 같이 탑의 의의가 보처로서 폄하되어 각형랑무 안에 중심에 앉은 김당을 획위하기 위한 것처럼 좌우 량탑이 벌어지게 되고 북으로는 동서에 경루 고루가 배설되어 마치 이 오각이 골패의 관오모양으로 배치되었다가 선찰이 융성됨을 따라 가람배치는 마침내 잡연 부정하게 되었고 탑자의 위치도 정위가 없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한가지 연복사의 당탑과, 또 위에 말한 남원 만관사의 당탑배치가 동전서탑, 동탑서전의 형식을 갖고 있어 멀리 저 법륭사 법륜사 등과 동일한 배치를 가지고 있는 듯이 되어있으니 이곳에 일본의 창안이라는 상술한 배치법이 다시 검토를 받지 아니치 못하게 된다. 다만 이곳의 조선에서의 예는 시대적으로 매우 뒤늦으며 또 만복사의 당탑배치라는 것은 사찰 그 자체가 인도의 고의를 본따(주35) 전체로 동향되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므로 자료로써는 매우 희박한 점이 없지 않으나 전체로 자미있는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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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3번= 이곳에 가람 배치에 대하여 일언을 삽입하건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삼국기의 일탑식 가람에서는 자오선상에 남하여 문‧탑‧김당‧강당이 순차로 놓이고 탑과 김당을 내정에 포함하고 강당과 문을 련락하여 사방형 랑무가 돌려 있고 승방과 식당이 따로 정연히 배치되니 이것을 칠당가람제라고 일본에서는 불렀던 것이다. 즉 탑과 김당이 남북으로 정연히 놓였던 것이니 이는 상설과 사리와가 평등의 지위를 가졌던 까닭이다. 그럼으로 일본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당과 탑을 동서로 또는 서동으로 병치하는 가람 배치법을 일찍이 취하였으니 이것이 내량의 법륭사 법기사 법륜사 등의 "플랜"(평면)이었다. 즉 고의 탑과 광의 당을 좌우로 배치함에서 건축조형상 역의 평형이란 특이한 배치법 창안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로 일본서 창안한 독특한 가람배치법이라 칭할 만한 것이어서 중국 조선에서 우금것 그 유례들을 볼 수 없었다. 조선의 신라통일 전후부터의 가람배치라는 것도 이미 술한 바와 같이 탑의 의의가 보처로서 폄하되어 각형랑무 안에 중심에 앉은 김당을 획위하기 위한 것처럼 좌우 량탑이 벌어지게 되고 북으로는 동서에 경루 고루가 배설되어 마치 이 오각이 골패의 관오모양으로 배치되었다가 선찰이 융성됨을 따라 가람배치는 마침내 잡연 부정하게 되었고 탑자의 위치도 정위가 없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한가지 연복사의 당탑과, 또 위에 말한 남원 만관사의 당탑배치가 동전서탑, 동탑서전의 형식을 갖고 있어 멀리 저 법륭사 법륜사 등과 동일한 배치를 가지고 있는 듯이 되어있으니 이곳에 일본의 창안이라는 상술한 배치법이 다시 검토를 받지 아니치 못하게 된다. 다만 이곳의 조선에서의 예는 시대적으로 매우 뒤늦으며 또 만복사의 당탑배치라는 것은 사찰 그 자체가 인도의 고의를 본따(주35) 전체로 동향되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므로 자료로써는 매우 희박한 점이 없지 않으나 전체로 자미있는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목차2해독문14번= 그러나 이 연복사의 당탑의 배치도 후에 그 위치가 변경되었던 듯하여 권근의 탑중창기문에는  <blockquote no="XX">演福實據城中闉闠之側 本號唐寺 方言唐與大相似 亦謂大寺 爲屋最鉅 至千餘權 內鑿三池九井 其南又起五層之塔 以應風水 其說備載舊籍 兹不贅陳云云</blockquote>이라 있다. 이리하여 모처럼 조선에 하나 보이기 시작한 특별한 배치의 가람도 그 자료로서의 귀중성을 잃게 되고 말았으니 그 이유로는 동기문 중에  <blockquote no="XX">王氏亭國五百年 屢更喪亂 寺之興廢 殆非一次 此塔之壞 不知的在何時 </blockquote>라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나 하여간 자료성을 다소 상실케 된 것은 가석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본문제로 돌아가서 고려 탑자로 또 이조 탑자로 가장 유명한 이 연복사탑의 장엄에 대하여 다시 고찰치 않으면 아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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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4번= 그러나 이 연복사의 당탑의 배치도 후에 그 위치가 변경되었던 듯하여 권근의 탑중창기문에는  <blockquote no="11">演福實據城中闉闠之側 本號唐寺 方言唐與大相似 亦謂大寺 爲屋最鉅 至千餘權 內鑿三池九井 其南又起五層之塔 以應風水 其說備載舊籍 兹不贅陳云云</blockquote>이라 있다. 이리하여 모처럼 조선에 하나 보이기 시작한 특별한 배치의 가람도 그 자료로서의 귀중성을 잃게 되고 말았으니 그 이유로는 동기문 중에  <blockquote no="12">王氏亭國五百年 屢更喪亂 寺之興廢 殆非一次 此塔之壞 不知的在何時 </blockquote>라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나 하여간 자료성을 다소 상실케 된 것은 가석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본문제로 돌아가서 고려 탑자로 또 이조 탑자로 가장 유명한 이 연복사탑의 장엄에 대하여 다시 고찰치 않으면 아니 되겠다.
|목차2해독문15번= <blockquote no="XX">至恭愍王 欲勞之而未就 後有狂儈長遠心者 夤緣權貴 優民伐材 卒亦罔成 恭讓君賴將相之力 復祖宗之緒 即位以來 事佛益力 爰命天珪等 募工興役 辛未二月始事 掘舊址塡木石 以固厥基 迄今乃竪 橫縱六楹 克壯且廣 累至五層覆以扁石 將訖厥功 憲臣有言而中輟 </blockquote>이라 한 것은 권근 중창기문의 한 절이거니와 "將訖厥功而中輟"한 것은 마침내 조선태조로 하여금 그 공덕을 거두게 함이었으니 초건이 이미 "以應風水"하기 위함이였고 중창이 또한 국태민안하기 위한 것이었음에(주36) 부구하고 고려실이 조선으로 말미암아 혁명되고, 뿐만 아니라 다시 조선 태조로 하여금 "亦資衛敎利邦國 五層復建畢功役"이란 의식을 내었다 하면 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역사적 운명이냐. 복아리민지자로 해인사 고탑을 중수하였다는 사실과(註37) 함께 려태조의 건탑 이유와 선덕왕의 건탑 이유가 시대를 초월하여 완강히 계연을 맺고 있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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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5번= <blockquote no="13">至恭愍王 欲勞之而未就 後有狂儈長遠心者 夤緣權貴 優民伐材 卒亦罔成 恭讓君賴將相之力 復祖宗之緒 即位以來 事佛益力 爰命天珪等 募工興役 辛未二月始事 掘舊址塡木石 以固厥基 迄今乃竪 橫縱六楹 克壯且廣 累至五層覆以扁石 將訖厥功 憲臣有言而中輟 </blockquote>이라 한 것은 권근 중창기문의 한 절이거니와 "將訖厥功而中輟"한 것은 마침내 조선태조로 하여금 그 공덕을 거두게 함이었으니 초건이 이미 "以應風水"하기 위함이였고 중창이 또한 국태민안하기 위한 것이었음에(주36) 부구하고 고려실이 조선으로 말미암아 혁명되고, 뿐만 아니라 다시 조선 태조로 하여금 "亦資衛敎利邦國 五層復建畢功役"이란 의식을 내었다 하면 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역사적 운명이냐. 복아리민지자로 해인사 고탑을 중수하였다는 사실과(註37) 함께 려태조의 건탑 이유와 선덕왕의 건탑 이유가 시대를 초월하여 완강히 계연을 맺고 있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목차2해독문16번=  <blockquote no="XX">董工益勤 功乃生成 實申壬冬十有二月也 癸酉之春(朝鮮太祖卽位2年) 塗塈丹臒 翬飛雲表 鳥翔天際 金碧炫燿 輝暎半空 上安佛舍利 中庋大藏 下置毗盧肖像</blockquote>요컨댄─종횡 육함이라 하였으니 오간사지의 오층건물로 "覆以扁石"이라 하였으니 상륜의 형굉은 아니요 노반복발 이 형식을 말한 듯하며 "上安佛舍利"는 이 복발에 불사리를 안치함을 이른 것인 듯하며(주38) "中皮大藏具萬軸"이라 하였으니 층루까지 통하여 다닐 수 있었던 듯하며(주39) "下置毘盧備嚴飾"이라 한것은 의궤상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탑내존상으로 비로만 있었다면 일종 이례가 아니었을까. 즉 대체에 있어 탑파의 순수성이 매우 왜곡된 감이 있지 아니할까. 이것은 또한 당대 불교의 잡박성을 상징함이 아니였을까 대방의 교종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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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6번=  <blockquote no="14">董工益勤 功乃生成 實申壬冬十有二月也 癸酉之春(朝鮮太祖卽位2年) 塗塈丹臒 翬飛雲表 鳥翔天際 金碧炫燿 輝暎半空 上安佛舍利 中庋大藏 下置毗盧肖像</blockquote>요컨댄─종횡 육함이라 하였으니 오간사지의 오층건물로 "覆以扁石"이라 하였으니 상륜의 형굉은 아니요 노반복발 이 형식을 말한 듯하며 "上安佛舍利"는 이 복발에 불사리를 안치함을 이른 것인 듯하며(주38) "中皮大藏具萬軸"이라 하였으니 층루까지 통하여 다닐 수 있었던 듯하며(주39) "下置毘盧備嚴飾"이라 한 것은 의궤상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탑내존상으로 비로만 있었다면 일종 이례가 아니었을까. 즉 대체에 있어 탑파의 순수성이 매우 왜곡된 감이 있지 아니할까. 이것은 또한 당대 불교의 잡박성을 상징함이 아니였을까 대방의 교종를 바라는 바이다.
 
|목차2해독문17번= 각설 이씨 조선으로 들어와서의 최초의 목조 탑파는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후 어떠한 것이 또 경영되었는지는 졸연히 알기 어려우며 현재 조선의 목조 탑파 형식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화순 쌍봉사의 삼중각과 보은, 법주사의 팔상전이 있을 뿐이다. 전자는 평상에 있어, 층고에 있어, 배치에 있어, 탑파의 모영을 가지고 있으나, 그러나 대웅전으로 이용되어 있어 내용적으로 다를 뿐더러 이층옥개도 상륜 복발 등 탑파로서의 없지 못할 규약적 양식을 갖지 아니하고 보통 전각식의 중옥형개를 가지고 있음에서 한 개의 준아위외한 고루 건물에 지나지 아니하니 문제되지 아니하며(주40) 보은 법주사의 건물은 사상적으론 탑파의 정신을 떠남이 있으나(유상전이라 불러 있는 까닭에) 조형상으론 탑파로서의 규약을 제법 준수하고 있는 데서 현금 조선의 유일한 목조 탑파라 아니할 수 없다.(주41) 사부에 의하면 인조 2년 벽암대사의 중창이라 하니 그 초창은 불명이거니와(주42) 현재의 양식은 거대한 석계 위에 변장 37척 5촌대의 오사지의 탑신이 놓여있다. 초창에는 사방에서 통하는 문이 중간마다 있고 제삼층 사층의 탑신은 삼간사지요 제오층은 탑신을 갖지 아니한 채 옥미가 놓여있다. 오포중앙의 사주식 건물로 단확이 베풀어져 있고 피와식이며 옥정에는 노반이 중첩되어 있고 조그만 복발 위에 오륜을 꿰어찬 찰간보주 끝에서 결색이 사출하여 전각사우에 매여 달렸고 각층 전각사우에 보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내부에 있어 일층이상은 물론 통치 못하게 되어있고 찰주사면에는 석가팔변상도가 각면 이부식 괘치되어있고 단 위에 가장 아름답지 못한 소불상 나한경들이 잡연히 놓여있으니 이 불상들은 없어진 용화전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지면에는 판상이 깔려있고 외벽은 전부 〿창이 뚫려 있으나 일부는 근대식 유리창으로 인하여 고치를 많이 잃고 제이층 외부 정면에는 팔상전이란 액이 붙어 있다. 상륜고는 약 13척, 탑총고는 약 80여척, 전체로 광폭의 도가 심함으로써 안정솔은 크나 찰간 기타 저왜한 감이 불무하다.(주43) 지금 동편으로 단각문을 연결한 토장이 쌓여 있으니 탑의 미관을 위하여, 탑의 존엄을 위하여 의당 허러침이 가할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이곳에도 이조기에 들어와서의 탑파의 지위가 얼마나 폄하되고 있었는가가 입증된다.
 
|목차2해독문17번= 각설 이씨 조선으로 들어와서의 최초의 목조 탑파는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후 어떠한 것이 또 경영되었는지는 졸연히 알기 어려우며 현재 조선의 목조 탑파 형식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화순 쌍봉사의 삼중각과 보은, 법주사의 팔상전이 있을 뿐이다. 전자는 평상에 있어, 층고에 있어, 배치에 있어, 탑파의 모영을 가지고 있으나, 그러나 대웅전으로 이용되어 있어 내용적으로 다를 뿐더러 이층옥개도 상륜 복발 등 탑파로서의 없지 못할 규약적 양식을 갖지 아니하고 보통 전각식의 중옥형개를 가지고 있음에서 한 개의 준아위외한 고루 건물에 지나지 아니하니 문제되지 아니하며(주40) 보은 법주사의 건물은 사상적으론 탑파의 정신을 떠남이 있으나(유상전이라 불러 있는 까닭에) 조형상으론 탑파로서의 규약을 제법 준수하고 있는 데서 현금 조선의 유일한 목조 탑파라 아니할 수 없다.(주41) 사부에 의하면 인조 2년 벽암대사의 중창이라 하니 그 초창은 불명이거니와(주42) 현재의 양식은 거대한 석계 위에 변장 37척 5촌대의 오사지의 탑신이 놓여있다. 초창에는 사방에서 통하는 문이 중간마다 있고 제삼층 사층의 탑신은 삼간사지요 제오층은 탑신을 갖지 아니한 채 옥미가 놓여있다. 오포중앙의 사주식 건물로 단확이 베풀어져 있고 피와식이며 옥정에는 노반이 중첩되어 있고 조그만 복발 위에 오륜을 꿰어찬 찰간보주 끝에서 결색이 사출하여 전각사우에 매여 달렸고 각층 전각사우에 보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내부에 있어 일층이상은 물론 통치 못하게 되어있고 찰주사면에는 석가팔변상도가 각면 이부식 괘치되어있고 단 위에 가장 아름답지 못한 소불상 나한경들이 잡연히 놓여있으니 이 불상들은 없어진 용화전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지면에는 판상이 깔려있고 외벽은 전부 〿창이 뚫려 있으나 일부는 근대식 유리창으로 인하여 고치를 많이 잃고 제이층 외부 정면에는 팔상전이란 액이 붙어 있다. 상륜고는 약 13척, 탑총고는 약 80여척, 전체로 광폭의 도가 심함으로써 안정솔은 크나 찰간 기타 저왜한 감이 불무하다.(주43) 지금 동편으로 단각문을 연결한 토장이 쌓여 있으니 탑의 미관을 위하여, 탑의 존엄을 위하여 의당 허러침이 가할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이곳에도 이조기에 들어와서의 탑파의 지위가 얼마나 폄하되고 있었는가가 입증된다.
 
|목차2해독문18번= 이상으로써 우리는 조선 목탑파의 변천을 개관하였다. 삼국기의 생동적 순수성에서, 정적인 수식적인 것으로, 이어 다시 풍수적으로 미신적으로 잡신적으로 내용이 변천되는 동시에 조형양식도 점차 퇴폐부순한 길로 떨어져 들어간 경로를 볼 수 있다. 사회의 변상을 짐작하고 문화의 변상을 짐작하고 신앙의 변상을 짐작한다면 가장 논리적인 인과적인 경과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재료의 탑파를 관찰함에서 더욱 구체적인 지식을 얻을 것 같다.
 
|목차2해독문18번= 이상으로써 우리는 조선 목탑파의 변천을 개관하였다. 삼국기의 생동적 순수성에서, 정적인 수식적인 것으로, 이어 다시 풍수적으로 미신적으로 잡신적으로 내용이 변천되는 동시에 조형양식도 점차 퇴폐부순한 길로 떨어져 들어간 경로를 볼 수 있다. 사회의 변상을 짐작하고 문화의 변상을 짐작하고 신앙의 변상을 짐작한다면 가장 논리적인 인과적인 경과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재료의 탑파를 관찰함에서 더욱 구체적인 지식을 얻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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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 {{TagSpage|18-2}} 二. 甓塔(或云博塔)(註四四)<br/> 屢述한 바와 같이 印度 西域을 通하여서의 塔婆의 原本的 材枓는 塼〿에 있었고 中國에서는 中國 特有의 高樓式 木造 建物로 塔婆를 翻案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西域 天竺의 知識이 漸次 具體的으로 傅輸되고 또 木造 塔婆의 非永久性에 鑑하여 博甓 建物에 남들은 發展과 技能을 갖고 있는 中國民으로 하여금 일찍이 甓塼의 塔婆를 容易히 營造케 하였다. 그러나 當代의 西域 天竺의 塼塔은 前에도 말한 바 있었지만 初期의 覆盆 形式에서 砲彈形 樓閣式으로 進化된 形態의 塔婆가 流行되고 있었음에서 同時에 塔婆를 樓閣代述物로 理解하고 있든 中國民에게 塼塔은 中國式 樓閣形式으로 客易히 翻案케 하였다. 지금 中國 現存된 塼塔으로서 最古한 것에 屬한다는 北魏 孝明帝 正光 4年(A.D.523)의 崇岳寺 十二角十五層塼塔(河南 省崇山), 東魏 武定 2年(A.D.544)의 神通寺 四門塔(山東省 歷城縣)(註45) 等을 보더라도 모두 塼甓으로써 中國의 木造 建物을 그대로 翻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爾後 塼塔이 中國에서는 가장 盛用케 되었나니 이는 塼甓生産의 豊富, 造築의 容易, 層級의 特高可能(即 木造 塔葵보다 얼마든지 높이 쌓을 수 있다), 持續의 永久 等 {{TagPage|19-1}}여러가지 便宜가 있었던 關係이나 그러나 塼塔의 流行은 建築的 塔婆에서, 即 實用 可能의 建物로서의 塔婆에서, 非實用的인 裝飾的인 造營으로 흐르게 되었으니 이는 다만 積聚를 뜻하든 塔婆 原意로의 回歸인 듯하기는 하나 그러나 實相에 있어서는 工藝的으로 頹落될 運命을 內在하고 있었던 것이다. 中國에서의 이러한 塔婆의 變相은 朝鮮으로서도 받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그것이 朝鮮의 塼塔이다. 그러나 幸일지 不幸일지 朝鮮은 塼의 나라가 아니였다. 塼은 가장 非生產的인 資料이었다. 樂浪帶力의 塼甕古墳, 二影響에서 造營된 公州의 약간의 塼甕古墳을 除하고서는 三國 以後 近代에 이르기까지 純粹한 塼甓의 建物이란 朝鮮서 찾을 수 없다. 塼塔의 形式을 朝鮮에 最初로 傳하였다는 芬皇寺의 塔이 塼 그 自體로써 造築된 것이 아니요 安山岩 塼에 擬模시켜 造築한 것이며 九黃里 廢寺址에도 이와 類似한 破塔材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아 新羅의 初期塼塔, 即 朝鮮의 初期塼塔이 石材에서 出發치 아니하면 아니되었던, 即 塼이 非生產的이였던 事情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當代에 塼에 知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前에 말한 釋良志가 小塼塔을 造成하여 錫杖寺中에 奉安한 事實이 三國遺事에 보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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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 {{TagSpage|19-2}}이와 같이 塼은 非生產的이었으나 그러나 塼塔에 〿한 不時的 憧憬은 마침내 黑褐色의 安山岩을 長 約 1尺 2寸으로부터, 1尺 8寸까지, 厚 約 2寸 5分으로부터 3寸까지의 小石片으로 만들어 築塔케 하였다. 그러므로 材料는 石材라 하더라도 目的과 意識이, 따라서 手法과 樣式이 全部 塼塔規約에 屬한 것이므로 우리는 芳皇寺의 塔과 및 九黃里 癈寺址에 였는 破塔을 朝鮮 塼塔의 先驅로 보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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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 {{TagSpage|19-3}}九黃里 無名廢寺址에 있다는 塔材는 全혀 그 原形을 復舊 想像키 어려우나, 門石破材의 手法이라든지 〿〿〿〿의 浮彫樣式이라든지 土壇大의 類似한 點 等에서 芬皇寺塔과 同代의 作品으로 同一 樣式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TagPage|20}}우리는 芬皇寺 塔婆의 樣式을 考察함으로써 朝鮮 塼塔의 原始樣式을 알 수 있다 하겠다. 大抵 이 芬皇寺에 闊하여는 일찍이 三國史記에 善德王 3年(A.D.634)에 竣成되었다는 記錄이 있으나 塔婆에 關하여는 何等의 文献이 없더니 東京 雜記에 <br/> 芬皇寺九層塔 新羅三寶之一也 壬辰之亂 賊毁其半  後有愚僧 欲改築之 又毁其半  得一珠 形如碁子 光似水精 擧而燭之 則洞見其外 太陽照處 以綿近之 則火發燃綿 今藏在栢栗寺 <br/>라는 記事가 있음에서 일찍이 그 層級을 問題하고 또 外敵 調伏의 皇龍寺塔 建立緣起를 이 便에 附會하는 等, 東京雜記의 誤記(新羅 三寶之一로서의 塔은 이 芬皇寺塔이 아니고 皇龍寺 九層塔이었다)에 立脚한 誤倫繆說이 一時 流行되었으나 近者는 純全히 造型形式에 立脚한 層級說이 云云되어 原形을 7層으로 봄이 가장 妥當한 듯이 되어있다.(주석47) 大正 4年, 總督府의 손으로 全部 修築할 때 塔中 石函에서 裝金具, 玉類, 貝器, 金銀銅의 容器, 裁縫道具 等 古新羅의 遺物과 함께 崇寧重寶, 五銖常平 等 高麗 以來의 古錢이 發見되어 近古에 이미 開塔의 痕跡이 된 바 있었지만 修復되기 前의 狀態를 復舊시켜보면 方 約 43尺 高 約 3尺 8寸의 花崗雜石의 基壇이 塔身의 地平石을 向하여 約 5人 高로 비스듬히 올라가고 이 地平石 위에 邊長 約 21尺 45寸大의 塔身이 놓여있다. 屋蓋는 六段의 받침이 밑에서 받쳐올리고 七段째가 檐牙로 되었고 上而은 다시 10段의 層段이 第2塔身으로 向하여 비스듬히 줄어들어 갔다. 第2層도 亦然하고 第4層은 方錐式으로 쌓아올라가다가 頂上에서 發見된 仰花形 角不이 塔頂에 놓여있다. 基壇四隅에는 원악 6個의 獅子坐像이 있었다 하나 兩介는 다른 곳에서 섞여든 것이요 4介石이 護塔의 意味로 安置되었으리라 하며 塔身에는 四面에 花崗石으로 上楣 地法 門柱 等을 짜아 만든 龕室緣口가 있고 室內에는 四面佛이(註48) 奉安되었{{TagPage|21-1}}었을 것이나 이곳은 일찍이 破毁 改築되어 原狀이 不明하고 門柱 兩便에는 가장 優秀한 彫刻의 金剛力士 立像이 남아있다. 總高 現在 約 30尺餘, 高度에 있어서 그리 壯하지는 못하나 全體 幅度에서 雄偉한 覇氣를 感得할 수 있는 作品이다. 即 基壇이 低矮廣大하고 初層塔身이 長矩立方으로 되어있어 安定率이 極度로 發揮되어 있는 곳에 三國期 塔婆의 特色을 갖고 있는 同時에 屋蓋의 層段手法이 博塔으로서의 最初의 手法을 規約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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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 {{TagSpage|21-2}}그러나 이러한 塔婆를 契機로 하여 非生產的인 塼甓으로써 造塔을 꾀하게 된 統一期 以後의 塼塔은 建築的 安定率보다도 裝高修飾의 建物로 變相되었으니 우리는 그 最古한 例로 安東邑內 新世洞의 7層塼塔을 들 수 있다. 이 塔은 朝鮮서 가장 最初로 塼을 使用하여 造築한 高塔으로서(現在 總高 約 45, 6尺이니 朝鮮塼塔으로서는 最高한 遺物이다) 屋蓋의 手法은 塼이란 材料에서 必然的으로 誘導된 曆段 바침으로써 芬皇寺塔과 같이 處理되었으나 屋蓋 上而에는 茸瓦殘片이 處處에 남아 있어 木造 高樓 建物의 意態를 充實히 模倣하였고 頂上의 露盤 以上은 潰落되었으나 第一塔身의 南面에는 龕室이 열려 있어 內部 天井이 四角方錐形으로 줄어들어 頂上에 擦柱長竿이 꾀여 있었던 한 隧穴이 높이 뚫려있고 室內에는 佛像이 安置되었던 듯하나 지금은 그 形跡조차 찾을 수 없다. 이러한 塔身의 峻峭, 道瓦의 修飾的 模倣, 一室 以上 더 經營할 수 없는 初層塔身의 小規模性 等에서 우리는 그 建物로서의 生動的 本意의 發露보다도 一介의 裝置物로서의 意態를 充分히 볼 수 있으나 그러나 이러한 裝置物로서의 意態를 우리는 그 基壇의 手法에서 더욱 具體的으로 證得할 수 있다. 即 基壇은 元來 重層이었던 모양이나 上層은 潰落된 채 石灰로써 丹墳에 가차없게 아무렇게나 補强되어있으니 問題치 말고 下成基壇 橫 2尺 7寸 縱 2尺 6寸 內外의 花崗板石이 前面은 中間에 層段이 놓였으므로 左右에 二枚式 嵌入되어 있으나 左右側面과 後面에는 多少 原狀과는 錢함이 있다 하더라도 各面 六枚{{TagPage|22-1}}式 羅立되었고 各石面마다 天部坐像의 遒勁한 浮彫模樣이 남아 있다. 即 이곳에 建築的 意欲보다도 修飾物로서의 意欲이 意識的으로 目的的으로 發揮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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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번= {{TagSpage|22-2}}이러한 藝術意欲의 傾向을 羅代 以後 어떠한 塼塔에서든지 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時代가 떨어질수록 더욱 發揮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即 安東邑內 南部에 또 하나 있는 五層塼塔은 基壇이 全혀 破潰되어 原狀을 알 수 없으나 塔身屋蓋의 手法이 全혀 新世洞의 塔婆와 같고 基壇의 彫飾이 저것보다 壯嚴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初層 塔身 南面에 小龕 一室이 依然히 經營되고 第二塔身에는 仁王 兩像을 高肉浮彫로 陽刻한 花崗方石이 純全히 裝飾的으로 끼여 있고 第三塔身에는 小空龕室이 또다시 形式的으로 뚫려있다. 勿論 龕室에는 모두 佛像이 놓여 있었을 것이로되 지금은 남아있지 아니하였다. 또 一直面 造塔洞에 있는 五層塼塔도 立體樣式은 大概 前者와 같으나 第一塔身은 花崗方石으로써 造築하여 南面에 一室을 經營하고 門狹立石에는 雄健한 彫法으로 된 高肉浮彫의 仁王立像이 嵌壁되어 있고 博面에는 處處에 實相花蔓이 陽刻되어있다. 即 塼이 非生產的인 材料이므로 貴重히 씨여있고 貴重한 材料이므로 華嚴을 도읍기 爲하여 씨여있고 華嚴을 도읍기 爲함으로써 塼面 自體에 華飾이 加工된 것이니 淸道郡內 佛靈寺에 있는 塼塔의 破材에 實相花蔓과 佛菩薩과 塔形들이 陽刻되어 있는 것이라든지(註四九) 佛像殿堂 等을 陽刻한 出所不明의 破塔塼材가 處處에 있음이라든지(주석50) 모두 裝飾品으로서의 塼塔의 價値를 證明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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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6번= {{TagSpage|22-3}}이 中에 京畿道 驪州 神勒寺에 있는 五層塼塔은 塔材에 流麗한 花紋이 陽刻되어 있어 일찍부터 有名하였으나 成化萬曆 雍正年間을 두고 屢次의 修復을 입은 까닭에(註51) 原形은 매우 歪曲되었을 것이요 더욱이 이 塔婆의 初建年代에 關하여는 新羅 初의 說과 高麗 末의 說이 對立되고 있어(註44) 아직 歸結을 보지 못한 채 있지만 大體에 있어 裝飾的 藝術意欲을 {{TagPage|23-1}}가진 系統의 作으로 看做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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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7번= {{TagSpage|23-2}}以外에 文獻上으론 輿地勝覽 卷49 甲山 山川條에 "白塔洞有塼塔"이라 하였으나 朝鮮의 塼塔으로 看儆할 것인지 疑問이며 同書 卷25 榮川 古跡條에 有名한 無信塔이란 것이 있지만 지금은 없어진 듯하며 三國遺事에는 例의 釋良志가 小塼塔을 造成하여 錫杖寺에 安置한 事實이 보이나 모두 그 形式을 알 수 없고 輿地勝覽 卷10 衿川 安養寺條에 보이는 安義寺의 七層塼塔이란 것은 高麗太祖의 創建으로 傅하여 있을 뿐 아니라 造型 上으로도 特別한 壯嚴이 있었던 듯하다. 李崇仁의 重修記文中 一節에 <br/> 按寺乘 昔太祖將征不庭 行過此 望山頭 雲成五采 異之 使人往視 果得老浮屠雲下 名能正 與之言稱旨 此寺之所出立也 寺之南有塔 累甎七層 蓋以瓦 最下一層 環以周廡十又二間 毎壁繪佛扶隆 人天之像 外樹楯楣 以限出入 其爲匝麗 他寺未有也 <br/>라고 있다. 即 寺塔建立의 綠由인 同時에 塔婆形式의 報告이니 上擧한 記文에 依하건대 大經 2形式이 安東邑 新世洞에 있는 七將塼塔과 近似하였을 것이로되 初層塔身의 龕室이 없고 基壇도 닯았을 듯하며 第一塔身을 싸고도는 周廡가 木造回閣으로 三間四至이었고 每壁에 佛菩薩人天之像을 繪飾한 모양이나 이는 後文에 具體的으로 叙述되어 있으며 廡閣 外部에는 欄楯이 돌려 있었다 한다. 即 特別한 裝置인데 禑王 7年(辛酉歲) 重創時의 事略을 보면 <br/> 起工是年八月某甲子也 斷手九月某甲子也 落成冬十月某甲子也 是日殿下遺內侍朴元桂降香 以道侶一千 大作佛事安舍利十二並佛牙 一塔中訖 布施四衆 無慮三千焉 其丹腦 歲壬戍春三月也 英繪像 歲癸亥秋八月也 塔內四壁 東藥師會 南釋迦涅槃會 西彌陀極樂會 北金經神衆會 周廡十二間 每壁一像 所謂十二行年佛〿 <br/>{{TagPage|24-1}}라 있다. 即 塔內 四壁이란 것은 第一塔身의 四面을 말한 것일지니 塔身에는 勿論 舍利 12와 佛牙 1이 奉安되었고 그것을 護衛하여 塔身外面에 四會圖가 있었던 것이며 周廡十二間 每壁一像의 12行年佛의 繪像이 있었다 하니 三間四至의 建物每間에 繪像이 있었다면 門戶經營이 없었던 듯하니 實際에 있어 可能하였을까가 疑問이다. 外樹欄楯以限出入이란 句에서 혹 그럴듯하게 생각할런지 모르나 塔內 四壁에 繪像을 베풀었다면 周廡를 通하여 들어가지 않지 못할 것이요 또 周廡十二間의 繪壁도 外面壁에 그려진 것이 아니요 內面壁에 그려졌을 것이니 記文이 多少 模糊한 點이 없지 않으나 大體로 特殊한 塼塔이었음을 알 수 있다. 原形은 일찍이 破毁된 듯하여 (輿地勝覽에까지 실린 것을 보아 李朝 中葉까지는 있었던 듯하지만) 지금 그 破塔塼材가 總督府 博物館에 收藏되어 있는데 그 塼面에는 佛坐像이 數位씩 浮彫되어 있으므로 보아 全體로 매우 華麗한 塔婆이였음을 想像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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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8번= {{TagSpage|24-2}}以上은 現今까지 알려져 있는 朝鮮塼塔의 全般例이다. 이밖에 安東郡 吉安面, 南後面에 各 一基가 있다는 巷說이 있으나 아직 調査되지 않은 채 있어 그 有無도 不明이요 일찍이 新羅時代 遺塔으로 尙州邑外에 「石心土皮」의 五重塔이 있어 (註52) 特異한 部類에 屬하는 것이나 大體로 塼塔意欲을 模倣한 것으로 有名하였지만 數年前에 倒壞되어 다시 더 參考할 餘地도 없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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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9번= {{TagSpage|24-3}}이와 같이 朝鮮서의 塼塔은 그 數가 木造塔婆와 못지 않게 少數에 屬하며 또 木造塔婆와 步調를 같이하여 建築的에서 裝飾的인 것에로 變遷되었다하나 材料의 性質上 木造塔婆보다 一層 더 裝飾的인 것으로의 傾向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슨 連關性을 가진 繼聯된 發生을 보였다느니 보다 드문 드문 花火的 成生史를 보이고 또 그建立 因緣에 있어,{{TagPage|25}}新羅 統一初의 一時的 造成事實과 照應되어 麗朝統業期에 不時的建立을 보게 될 것은 그 樹塔意識에 木塔建立意識과 同一한 作用에 對應하고 있는 듯하니 이러한 點들은 要컨대 塼塔이 朝鮮서는 建立되기 어려운, 即 博이 非生產的 材料이요 따라서 貴重한 材料이었던 것에 全般的 理由가 있었지 아니하였을까 木造塔婆는 長久한 時日과 複雜한 工技와 許多한 費用을 들여도 永久히 保存키 어렵고 塼塔 역시 上述한 바와 같이 非經濟的이요 또 容易치 않은 것이었다면 伽藍의 創立이 年復年 急速度로 增加되는 大勢에 需應되기 爲하여 朝鮮서 材料的으로 얻기 쉽고 工技的으로 單純 容易하고 保存에 永久性이 多大한 石塔建立이 急度로 發展되고 따라서 그곳에 비로소 朝鮮的 特色이 發揮되었음에 何等의 異常을 느낄 바 없다. 이곳에 石塔婆의 樣式을 硏究함으로써 本硏究의 中心이 있다 하겠다. (續)
  
|목차3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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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 누술한 바와 같이 인도 서역을 통하여서의 탑파의 원본적 재두는 전〿에 있었고 중국에서는 중국 특유의 고루식 목조 건물로 탑파를 번안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서역 천축의 지식이 점차 구체적으로 부수되고 또 목조 탑파의 비영구성에 감하여 박벽 건물에 남들은 발전과 기능을 갖고 있는 중국민으로 하여금 일찍이 벽전의 탑파를 용역히 영조케 하였다. 그러나 당대의 서역 천축의 전탑은 전에도 말한 바 있었지만 초기의 복분 형식에서 포탄형 누각식으로 진화된 형태의 탑파가 유행되고 있었음에서 동시에 탑파를 누각대술물로 리해하고 있든 중국민에게 전탑은 중국식 누각형식으로 객역히 번안케 하였다. 지금 중국 현존된 전탑으로서 최고한 것에 속한다는 북위 효명제 정광 4년(A.D.523)의 숭악사 십이각십오층전탑(河南 성숭산), 동위 무정 2년(A.D.544)의 신통사 사문탑(산동성 역성현)(註45) 등을 보더라도 모두 전벽으로써 중국의 목조 건물을 그대로 번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전탑이 중국에서는 가장 성용케 되었나니 이는 전벽생산의 풍부, 조축의 용역, 층급의 특고가능(즉 목조 탑규보다 얼마든지 높이 쌓을 수 있다), 지속의 영구 등 여러가지 편의가 있었던 관계이나 그러나 전탑의 행은 건축적 탑파에서, 즉 실용 가능의 건물로서의 탑파에서, 비실용적인 장식적인 조영으로 흐르게 되었으니 이는 다만 적취를 뜻하든 탑파 원의로의 회귀인 듯하기는 하나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공예적으로 퇴락될 운명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이러한 탑파의 변상은 조선으로서도 받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그것이 조선의 전탑이다. 그러나 행일지 불행일지 조선은 전(塼)의 나라가 아니였다. 전은 가장 비생산적인 자료(資料)이었다. 낙랑대력의 전옹고분, 이 영향에서 조영된 공주의 약간의 전옹고분을 제하고서는 삼국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순수한 전벽의 건물이란 조선서 찾을 수 없다. 전탑의 형식을 조선에 최초로 전하였다는 분황사의 탑이 전 그 자체로써 조축된 것이 아니요 안산암 전에 의모(擬模)시켜 조축한 것이며 구황리 폐사지에도 이와 유사한 파탑재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아 신라의 초기전탑, 즉 조선의 초기 전탑이 석재에서 출발치 아니하면 아니되었던, 즉 전이 비생산적이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당대에 전에 지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전에 말한 석량지가 소전탑을 조성하여 석장사중에 봉안한 사실이 삼국유사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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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 이와 같이 전은 비생산적이었으나 그러나 전탑에 〿한 부시적 동경은 마침내 흑갈색의 안산암을 장 약 1척 2촌으로부터, 1척 8촌까지, 후 약 2촌 5분으로부터 3촌까지의 소석편으로 만들어 축탑케 하였다. 그러므로 재료는 석재라 하더라도 목적과 의식이, 따라서 수법과 양식이 전부 전탑규약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는 방황사의 탑과 및 구황리 폐사지에 였는 파탑을 조선 전탑의 선구로 보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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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 구황리 무명폐사지에 있다는 탑재는 전혀 그 원형을 복구 상상키 어려우나, 문석파재의 수법이라든지 〿〿〿〿의 부조양식이라든지 토단대의 류사한 점 등에서 분황사탑과 동대의 작품으로 동일 양식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분황사 탑파의 양식을 고찰함으로써 조선 전탑의 원시양식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대저 이 분황사에 활하여는 일찍이 삼국사기에 선덕왕 3년(A.D.634)에 준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탑파에 관하여는 하등의 문헌이 없더니 동경 잡기에  <blockquote no="15">芬皇寺九層塔 新羅三寶之一也 壬辰之亂 賊毁其半  後有愚僧 欲改築之 又毁其半  得一珠 形如碁子 光似水精 擧而燭之 則洞見其外 太陽照處 以綿近之 則火發燃綿 今藏在栢栗寺</blockquote>라는 기사가 있음에서 일찍이 그 층급을 문제하고 또 외적 조복의 황룡사탑 건립연기를 이 편에 부회하는 등, 동경잡기의 오기(신라 삼보지일로서의 탑은 이 분황사탑이 아니고 황룡사 구층탑이었다)에 입각한 오륜무설이 일시 유행되었으나 근자는 순전히 조형형식에 입각한 층급설이 운운되어 원형을 7층으로 봄이 가장 타당한 듯이 되어있다.(주석47) 대정 4년, 총독부의 손으로 전부 수축할 때 탑중 석함에서 장김구, 옥류, 패기, 김은동의 용기, 재봉도구 등 고신라의 유물과 함께 숭녕중보, 오수상평 등 고려 이래의 고전이 발견되어 근고에 이미 개탑의 흔적이 된 바 있었지만 수복되기 전의 상태를 복구시켜보면 방 약 43척 고 약 3척 8촌의 화강잡석의 기단이 탑신의 지평석을 향하여 약 5인 고로 비스듬히 올라가고 이 지평석 위에 변장 약 21척 45촌대의 탑신이 놓여있다. 옥개는 륙단의 받침이 밑에서 받쳐올리고 칠단째가 첨아로 되었고 상이은 다시 10단의 층단이 제2탑신으로 향하여 비스듬히 줄어들어 갔다. 제2층도 역연하고 제4층은 방추식으로 쌓아올라가다가 정상에서 발견된 앙화형 각부이 탑정에 놓여있다. 기단사우에는 원악 6개의 사자좌상이 있었다 하나 량개는 다른 곳에서 섞여든 것이요 4개석이 호탑의 의미로 안치되었으리라 하며 탑신에는 사면에 화강석으로 상미 지법 문주 등을 짜아 만든 감실연구가 있고 실내에는 사면불이(註48) 봉안되었었을 것이나 이곳은 일찍이 파훼 개축되어 원상이 부명하고 문주 양편에는 가장 우수한 조각의 김강력사 입상이 남아있다. 총고 현재 약 30척여, 고도에 있어서 그리 장하지는 못하나 전체 폭도에서 웅위한 패기를 감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즉 기단이 저왜광대하고 초층탑신이 장구입방으로 되어있어 안정솔이 극도로 발휘되어 있는 곳에 삼국기 탑파의 특색을 갖고 있는 동시에 옥개의 층단수법이 박탑으로서의 최초의 수법을 규약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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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 그러나 이러한 탑파를 계기로 하여 비생산적인 전벽으로써 조탑을 꾀하게 된 통일기 이후의 전탑은 건축적 안정솔보다도 장고수식의 건물로 변상되었으니 우리는 그 최고한 예로 안동읍내 신세동의 7층전탑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조선서 가장 최초로 전을 사용하여 조축한 고탑으로서(現在 총고 약 45, 6척이니 조선전탑으로서는 최고한 유물이다) 옥개의 수법은 전이란 재료에서 필연적으로 유도된 역단 받침으로써 분황사탑과 같이 처리되었으나 옥개 상이에는 용와잔편이 처처에 남아 있어 목조 고루 건물의 의태를 충실히 모방하였고 정상의 노반 이상은 궤락되었으나 제일탑신의 남면에는 감실이 열려 있어 내부 천정이 사각방추형으로 줄어들어 정상에 찰주장간이 꾀여 있었던 한 수혈이 높이 뚫려있고 실내에는 불상이 안치되었던 듯하나 지금은 그 형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러한 탑신의 준초, 도와의 수식적 모방, 일실 이상 더 경영할 수 없는 초층탑신의 소규모성 등에서 우리는 그 건물로서의 생동적 본의의 발로보다도 일개의 장치물로서의 의태를 충분히 볼 수 있으나 그러나 이러한 장치물로서의 의태를 우리는 그 기단의 수법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증득할 수 있다. 즉 기단은 원래 중층이었던 모양이나 상층은 궤락된 채 석회로써 단분에 가차없게 아무렇게나 보강되어있으니 문제치 말고 하성기단 횡 2척 7촌 종 2척 6촌 내외의 화강판석이 전면은 중간에 층단이 놓였으므로 좌우에 이매식 감입되어 있으나 좌우측면과 후면에는 다소 원상과는 전함이 있다 하더라도 각면 육매식 나립(羅立)되었고 각 석면마다 천부좌상의 주경(遒勁)한 부조모양이 남아 있다. 즉 이곳에 건축적 의욕보다도 수식물로서의 의욕이 의식적으로 목적적으로 발휘되어 있는 것이다.
|목차3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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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번= 이러한 예술의욕의 경향을 신라 대 이후 어떠한 전탑에서든지 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시대가 떨어질수록 더욱 발휘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안동읍내 남부에 또 하나 있는 오층전탑은 기단이 전혀 파궤되어 원상을 알 수 없으나 탑신옥개의 수법이 전혀 신세동의 탑파와 같고 기단의 조식이 저것보다 장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초층 탑신 남면에 소감 일실이 의연히 경영되고 제2탑신에는 인왕 양상을 고육부조로 양각한 화강방석이 순전히 장식적으로 끼여 있고 제3탑신에는 소공감실이 또다시 형식적으로 뚫려있다. 물론 감실에는 모두 불상이 놓여 있었을 것이로되 지금은 남아있지 아니하였다. 또 일직면 조탑동에 있는 오층전탑도 입체양식은 대개 전자와 같으나 제일탑신은 화강방석으로써 조축하여 남면에 일실을 경영하고 문협립석에는 웅건한 조법으로 된 고육부조의 인왕립상이 감벽되어 있고 박면에는 처처에 실상화만이 양각되어있다. 즉 전이 비생산적인 재료이므로 귀중히 씨여있고 귀중한 재료이므로 화엄을 도읍기 위하여 씨여있고 화엄을 도읍기 위함으로써 전면 자체에 화식이 가공된 것이니 청도군내 불령사에 있는 전탑의 파재에 실상화만과 불보살과 탑형들이 양각되어 있는 것이라든지(주사구) 불상전당 등을 양각한 출소부명의 파탑전재가 처처에 있음이라든지(주석50) 모두 장식품으로서의 전탑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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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6번= 이 중에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 있는 오층전탑은 탑재에 유려한 화문이 양각되어 있어 일찍부터 유명하였으나 성화만력 옹정 년간을 두고 누차의 수복을 입은 까닭에(주51) 원형은 매우 왜곡되었을 것이요 더욱이 이 탑파의 초건년대에 관하여는 신라 초의 설과 고려 말의 설이 대립되고 있어(주44) 아직 귀결을 보지 못한 채 있지만 대체에 있어 장식적 예술의욕을 가진 계통의 작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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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7번= 이외에 문헌상으론 여지승람 권49 갑산 산천조에 "백탑동유전탑"이라 하였으나 조선의 전탑으로 간경할 것인지 의문이며 동서 권25 영천 고적조에 유명한 무신탑이란 것이 있지만 지금은 없어진 듯하며 삼국유사에는 례의 석량지가 소전탑을 조성하여 석장사에 안치한 사실이 보이나 모두 그 형식을 알 수 없고 여지승람 권10 금천 안양사조에 보이는 안의사의 칠층전탑이란 것은 고려태조의 창건으로 부하여 있을 뿐 아니라 조형 상으로도 특별한 장엄이 있었던 듯하다. 이숭인의 중수기문중 한 절에  <blockquote no="16">按寺乘 昔太祖將征不庭 行過此 望山頭 雲成五采 異之 使人往視 果得老浮屠雲下 名能正 與之言稱旨 此寺之所出立也 寺之南有塔 累甎七層 蓋以瓦 最下一層 環以周廡十又二間 毎壁繪佛扶隆 人天之像 外樹楯楣 以限出入 其爲匝麗 他寺未有也</blockquote>라고 있다. 즉 사탑건립의 녹유인 동시에 탑파형식의 보고이니 상거한 기문에 의하건대 대경 2형식이 안동읍 신세동에 있는 칠장전탑과 근사하였을 것이로되 초층탑신의 감실이 없고 기단도 닯았을(달랐을) 듯하며 제일탑신을 싸고도는 주무가 목조회각으로 삼간사지이었고 매벽에 불보살인천지상을 회식한 모양이나 이는 후문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무각 외부에는 난순이 돌려 있었다 한다. 즉 특별한 장치인데 우왕 7년(신유세) 중창시의 사략을 보면  <blockquote no="17">起工是年八月某甲子也 斷手九月某甲子也 落成冬十月某甲子也 是日殿下遺內侍朴元桂降香 以道侶一千 大作佛事安舍利十二並佛牙 一塔中訖 布施四衆 無慮三千焉 其丹腦 歲壬戍春三月也 英繪像 歲癸亥秋八月也 塔內四壁 東藥師會 南釋迦涅槃會 西彌陀極樂會 北金經神衆會 周廡十二間 每壁一像 所謂十二行年佛〿</blockquote>라 있다. 즉 탑내 사벽이란 것은 제일탑신의 사면을 말한 것일지니 탑신에는 물론 사리 열둘과 불아 하나가 봉안되었고 그것을 호위하여 탑신외면에 사회도가 있었던 것이며 주무십이간 매벽일상의 12행년불의 회상이 있었다 하니 삼간사지의 건물매간에 회상이 있었다면 문호경영이 없었던 듯하니 실제에 있어 가능하였을까가 의문이다. '外樹欄楯以限出入'이란 구에서 혹 그럴듯하게 생각할런지 모르나 탑내 사벽에 회상을 베풀었다면 주무를 통하여 들어가지 않지 못할 것이요 또 주무십이간의 회벽도 외면벽에 그려진 것이 아니요 내면벽에 그려졌을 것이니 기문이 다소 모호한 점이 없지 않으나 대체로 특수한 전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형은 일찍이 파훼된 듯하여 (여지승람에까지 실린 것을 보아 리조 중엽까지는 있었던 듯하지만) 지금 그 파탑전재가 총독부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는데 그 전면에는 불좌상이 수위씩 부조되어 있으므로 보아 전체로 매우 화려한 탑파이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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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8번= 이상은 현금까지 알려져 있는 조선전탑의 전반례이다. 이밖에 안동군 길안면, 남후면에 각 일기가 있다는 항설이 있으나 아직 조사되지 않은 채 있어 그 유무도 부명이요 일찍이 신라시대 유탑으로 상주읍 외에 「석심토피」의 오중탑이 있어 (주52) 특이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나 대체로 전탑의욕을 모방한 것으로 유명하였지만 수년전에 도괴되어 다시 더 참고할 여지도 없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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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9번= 이와 같이 조선서의 전탑은 그 수가 목조탑파와 못지 않게 소수에 속하며 또 목조탑파와 보조를 같이하여 건축적에서 장식적인 것에로 변천되었다하나 재료의 성질상 목조탑파보다 일층 더 장식적인 것으로의 경향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슨 연관성을 가진 계연된 발생을 보였다느니 보다 드문 드문 화화적 성생사를 보이고 또 그건립 인연에 있어, 신라 통일 초의 일시적 조성사실과 조응되어 려조통업기에 부시적건립을 보게 될 것은 그 수탑의식에 목탑건립의식과 동일한 작용에 대응하고 있는 듯하니 이러한 점들은 요컨대 전탑이 조선서는 건립되기 어려운, 즉 박이 비생산적 재료이요 따라서 귀중한 재료이었던 것에 전반적 이유가 있었지 아니하였을까 목조탑파는 장구한 시일과 복잡한 공기와 허다한 비용을 들여도 영구히 보존키 어렵고 전탑 역시 상술한 바와 같이 비경제적이요 또 용역치 않은 것이었다면 가람의 창립이 매년 급속도로 증가되는 대세에 수응되기 위하여 조선서 재료적으로 얻기 쉽고 공기적으로 단순 용역하고 보존에 영구성이 다대한 석탑건립이 급도로 발전되고 따라서 그곳에 비로소 조선적 특색이 발휘되었음에 하등의 이상을 느낄 바 없다. 이곳에 석탑파의 양식을 연구함으로써 본연구의 중심이 있다 하겠다.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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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7일 (일) 16: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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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탑파의 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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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塔娑의 研究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6호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6년 11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31쪽 전체쪽 031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佛塔偈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幾千秋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後不休 <br/ ─慈藏作─
佛塔偈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幾千秋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後不休 <br/ ─慈藏作─






본문


본문1: 서론


불가에 독특한 건축으로 탑파라는 것이 있으니 이는 범어 Stupa 파리어 ThuPa의 사음이라 불사리를 봉안하는 취상을 이름이나 후에 불교의 역사적 전개, 교리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석가의 유적 내지 경설의─말하자면 법사리의 숭배 목적으로 적취되는 건물, 즉 지제 현대문주1▶Chaitya[a 1]까지도 중화 이동에 있어서는 탑파라는 명칭 아래 총괄되어 있고 또다시 불사리·법사리를 호지하는 승려의 사리를 봉치한 경영까지도 사리의 의의가 광의로 해석되어 탑파로써 부르게 현대문주2▶되었다.[a 2]
쪽수▶P001佛家에 獨特한 建築으로 塔婆라는 것이 있으니 이는 梵語 Stupa 巴利語 ThuPa의 寫音이라 佛舍利를 奉安하는 聚相을 이름이나 後에 佛敎의 歷史的 展開, 教理의 發展으로 말미암아 釋迦의 遺跡 乃至 經說의 ─말하자면 法舍利의 崇拜 目的으로 積聚되는 建物, 即 支提 원문주1▶Chaitya[1]까지도 中華以東에 있어서는 塔婆라는 名稱 아래 總括되어 있고 ▶P002-1또다시 佛舍利·法舍利를 護持하는 僧侶의 舍利를 封置한 經營까지도 舍利의 意義가 廣義로 解釋되어 塔婆로써 부르게 원문주2▶되었다.[2]
이와 같이 탑파는 불가의 신앙 중심인─또는 신앙 전체인 불법승 삼보를 봉안하고 표치하고 기념하는 건물이라 불교 신앙 시대에 있어서 항상 가람의 중심을 이루었을 것은 물론이요 후에 비록 우상숭배‧유법숭배로 신앙 내용이 번천되어 조상‧회상‧사경‧간경의 의의가 고조되어 당전자장의 중요성이 늘어 탑파 중심 사상에 현대문주3▶다소의 변천이 있었다 하더라도[a 3] 그것이 원래가 불교인 이상, 불도인 이상, 사리 숭배는 근본적으로 포업할 수 없었고 또 여러 경전마다 사리 숭배, 조탑 공덕이 설교되는 한편 현대문주4▶민속적 신앙과의 혼융으로[a 4] 말미암아 조탑 행사는 미신적으로 유행되게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소로는 척촌에 미만하는 공예적인 토탑 옥탑 김탑으로부터 대로는 수십 수백척의 웅위한 고탑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의 형식 탑파가 조영되고 또 한편으로는 화탑, 인탑, 각탑, 조탑 등 도상적탑파까지 성용케되었다.
쪽수▶P002-2이와 같이 塔婆는 佛家의 信仰 中心人─또는 信仰 全體인 佛法僧 三寶를 奉安하고 標幟하고 記念하는 建物이라 佛敎 信仰 時代에 있어서 恒常 伽藍의 中心을 이루었을 것은 勿論이요 後에 비록 偶像崇拜‧遺法崇拜로 信仰 內容이 樊遷되어 造像‧繪像‧寫經‧刊經의 意義가 高調되어 堂殿慈藏의 重要性이 늘어 塔婆中心思想에 원문주3▶多少의 變遷이 있었다 하더라도[3] 그것이 元來가 佛敎인 以上, 佛徒인 以上, 舍利崇拜는 根本的으로 抛嶪할수 없었고 또 여러 經典마다 舍利崇拜, 造塔功德이 說敎되는 한편 원문주4▶民俗的信仰과의 混融으로[4] 말미암아 造塔行事는 迷信的으로 流行되게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小로는 尺寸에 未滿하는 工藝的인 土塔 玉塔 金塔으로부터 大로는 數十 數百尺의 雄偉한 高塔에 이르기까지 多種多樣의 形式塔婆가 造營되고 또 한편으로는 畫塔, 印塔, 刻塔, 彫塔等 圖像的塔婆까지 盛用케되었다.
이와 같이 잡다한 종류와 형식의 탑파가 조성되고 건립됨에는 반드시 그 동기를 이루는 사상적 배경 즉 교리의 변천이 커다란 맥전을 이루고 있나니 이러한 의미에서 교리사 상에서 내다본 탑파의 변천이란 것이 불학도로서 가장 중요한 호제목의 하나일 것이요 또 긴급한 연구 재료일 것이로되 교리 교사에 대하여는 전혀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감히 당치 못할 것이므로 문제를 제한하여 필자는 다못(다만) 미술사적 견지에서 조선 탑파 형식의 변천을 고찰하여 볼까 한다.
쪽수▶P002-3이와 같이 雜多한 種類와 形式의 塔婆가 造成되고 建立됨에는 반드시 그 動機를 이루는 思想的 背景 即 敎理의 變遷이 커다란 脈塼을 이루고 있나니 이러한 意味에서 敎理史 上에서 내다본 塔婆의 變遷이란 것이 佛學徒로서 가장 重要한 好題目의 하나일 것이요 또 緊急한 硏究 材料일 것이로되 敎理 敎史에 對하여는 全혀 門外漢인 筆者로서는 敢히 當치 못할 것이므로 問題를 制限하여 筆者는 다못 美術史的 見地에서 朝鮮 塔婆 形式의 變遷을 考察하여 볼까 한다.
탑파가 이미 불가에 특유한 건물이라 할진댄 그 기원이 불교와 함께 있었을 듯하나 그러나 인도에서의 탑파의 기원에 대하여는 일찍이 파라문교 시대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석가재세(在世) 시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석가입멸 후에 발생된 것이라고도 하여 그 설이 분분하여 아주 귀일되지 못한 채로 있고 중국에서의 초건된 기원설에 관하여는 고승전에

康僭會 吳赤烏十年(A.D.247)至建康 孫權分求舍利旣得之 權爲造塔 晋帝過江更修飾之 此中國造塔始也

라 하였으나 후한서 도겸전 중에

(笮融) 大起浮屠寺 註浮屠佛也 上累金盤 下爲層樓 又堂閣周回 可容三千許人云云

의 구가 있어 후한 영제 중평 6년(A.D.189)으로부터 현대문주5▶헌제 초평 4년(A.D.193) 간에 이미 탑파의 건립 사실이 있었음을 말하였으니[a 5] 그 기원의 구원함을 可히 알 수 있다.
쪽수▶P002-4塔婆가 이미 佛家에 特有한 建物이라 할진댄 그 起源이 佛敎와 함께 있었을 듯하나 그러나 印度에서의 塔婆의 起▶P003-1源에 對하여는 일찍이 婆羅門敎 時代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釋迦在世 時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釋迦入滅 後에 發生된 것이라고도 하여 그 說이 粉粉하여 아주 歸一되지 못한 채로 있고 中國에서의 初建된 起源說에 關하여는 高僧傳에
康僭會 吳赤烏十年(A.D.247)至建康 孫權分求舍利旣得之 權爲造塔 晋帝過江更修飾之 此中國造塔始也
라 하였으나 後漢書 陶謙傳 中에
(笮融) 大起浮屠寺 註浮屠佛也 上累金盤 下爲層樓 又堂閣周回 可容三千許人云云
의 句가 있어 後漢 靈帝 中平 6年(A.D.189)으로부터 원문주5▶獻帝 初平 4年(A.D.193) 間에 이미 塔婆의 建立 事實이 있었음을 말하였으니[5] 그 起源의 久遠함을 可히 알 수 있다.
그후 조선의 불교 수입은 현대문주6▶소수림왕 2년 이전에 민간에서 이미 사신한 자 있었다는 것이 논의되어 있으나[a 6] 현대문주7▶고구려의 최초 불찰인 성문사라는 것이 성문이란 일공관의 변용이었다 할진댄[a 7] 탑파의 기원은 적어도 이후에 있었을 것은 물론이나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사실이 보이지 않고 오직 현대문주8▶요동성 육왕탑의 전설과 평양성 서 대보산 하의 영탑 전설이 가장 황탄한 설화 형식으로 전하여 있고[a 8] 북사에 "有僧尼多寺塔"으로써 일컫고 있던 현대문주9▶백제에 있어서도 탑파의 초건 년대를 종잡을 수 없는 채 탑장 아비지와 미륵사 천왕사[a 9] 현대문주10▶도양사의 탑기가[a 10] 있을 뿐이요 현대문주11▶가락국에는 신라에 불교가 수입되기 전에 가장 전설적인 금관성 파사석탑기가 보이고[a 11] 현대문주12▶신라 또한 가장 뒤늦은 교국임에도 불구하고 탑파 초건에 관한 특별한 기록이 없는 채 흥륜사의 탑기가 후대에 보인다.[a 12] 이와 같이 문징의 부비는 해동 탑파의 기원을 용역히 정립치 못하게 하고 있으나, 그러나 당대의 불교 신앙이 불상 사리를 동시예 숭배하여 전탑 경영이 상당히 발전된 위진 육조의 영향 하에 계발된 것인즉 불법 전수와 함께 또는 얼마 후에 탑파의 조영이 있었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으니 이러한 견지에서 해동의 조탑 기원을 가정한다면 소수림왕 2년 전후부터 "下敎崇信佛法求福" 하였다는 고국양왕 말년까지(A.D.372-392) 전후 20년간에는 적어도 최외한 경영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쪽수▶P003-2그後 朝鮮의 佛敎 輸入은 원문주6▶小獸林王 2年 以前에 民間에서 이미 私信한 者 있었다는 것이 論議되어 있으나[6] 원문주7▶高句麗의 最初 佛刹인 省門寺라는 것이 省門이란 一公館의 變用이었다 할진댄[7] 塔婆의 起源은 적어도 이後에 있었을 것은 勿論이나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事實이 보이지 않고 오직 원문주8▶遼東城 育王塔의 傳說과 平壤城 西 大寶山 下의 靈塔 傳說이 가장 荒誕한 說話 形式으로 傳하여 있고[8] 北史에 "有僧尼多寺塔"으로써 일컫고 있던 원문주9▶百濟에 있어서도 塔婆의 初建 年代를 종잡을 수 없는 채 塔匠 阿非知와 彌勒寺 天王寺[9] 원문주10▶道讓寺의 塔記가[10] 있을 뿐이요 원문주11▶駕洛國에는 新羅에 佛敎가 輸入되기 前에 가장 傳說的인 金官城 婆娑石塔記가 보이고[11] 원문주12▶新羅 또한 가장 뒤늦은 敎國임에도 不拘하고 塔婆 初建에 關한 特別한 記錄이 없는 채 興輪寺의 塔記가 後代에 보인다.[12] 이와 같이 文徵의 不備는 海東 塔婆의 起源을 容易히 定立치 못하게 하고 있으나, 그러나 當代의 佛敎 信仰이 佛像 舍利를 同時예 崇拜하여 殿塔 經營이 相當히 發展된 魏晉 六朝의 影響 下에 啓發된 것인즉 佛法 傳授와 함께 또는 居無何에 塔婆의 造營이 있었을 것으로 想定할 수 있으니 이러한 見▶P004-1地에서 海東의 造塔 起源을 假定한다면 小獸林王 2年 前後부터 "下敎崇信佛法求福" 하였다는 故國讓王 末年까지(A.D.372-392) 前後 20年間에는 적어도 崔嵬한 經營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즉 조선 탑파의 기원을 이룬 탑파는 어떠한 종류의 어떠한 형식의 것이었을까. 조선에서의 조탑 시원을 이미 고구려에 둔 이상 이 문제는 즉 고구려의 탑파에 대한 문제로 환치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현대문주13▶이동충태(伊東忠太, 이토 주타) 박사가 일찍이 간단한 시론을 보였지만[a 13]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다시 문제삼는 학자가 나지 아니하니 이는 요컨대 유물, 유문이 가히 빙거할만한 것이 없는 탓이라 필자─ 또한 새삼스레 무슨 호증이 있을 바가 아니니 다시 입론할 여지도 없는 바이지만 서술의 순서상 일언을 비치 아니할 수 없으니, 대저 중국 자체에 있어서도 인도 원래의 복분식 전탑 형식 가부색 가왕의 작리부도에서 췌득하여 중국식으로 발전하게 된 누각식 부도와가 그 어느 것이 중국 탑파의 시원을 이루었을까가 문제되어 있는 이때 고분 축조 형식에 벌써 서역적 투팔 천정 수법이 성용되어 있고 한편으론 비록 황탄한 전설이나마 요동성 육왕탑과 같이 인도식 복분 형식의 토탑 기록을 가장 오랜 전설인 듯이 가지고 있는 고구려에 있어 탑파의 시원 형식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실로 난문에 전하는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쪽수▶P004-2然則 朝鮮 塔婆의 起源을 이룬 塔婆는 어떠한 種類의 어떠한 形式의 것이었을까. 朝鮮에서의 造塔 始源을 이미 高句麗에 둔 以上 이 問題는 即 高句麗의 塔婆에 對한 問題로 換置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對하여는 원문주13▶伊東忠太 博士가 일찍이 簡單한 試論을 보였지만[13] 結末을 보지 못한 채 다시 問題삼는 學者가 나지 아니하니 이는 要컨대 遺物, 遺文이 可히 憑據할만한 것이 없는 탓이라 筆者─ 또한 새삼스레 무슨 好證이 있을 바가 아니니 다시 立論할 餘地도 없는 바이지만 叙述의 順序上 一言을 費치 아니할 수 없으니, 大抵 中國 自體에 있어서도 印度 原來의 覆盆式 塼塔 形式 迦賦色 迦王의 雀離浮屠에서 揣得하여 中國式으로 發展하게 된 樓閣式 浮屠와가 그 어느 것이 中國 塔婆의 始源을 이루었을까가 問題되어 있는 이때 古墳 築造 形式에 벌써 西域的 鬪八 天井 手法이 盛用되어 있고 한편으론 비록 荒誕한 傳說이나마 遼東城 育王塔과 같이 印度式 覆盆 形式의 土塔 記錄을 가장 오랜 傳說인 듯이 가지고 있는 高句麗에 있어 塔婆의 始源 形式을 어떻게 設定할 것인가─實로 難問에 展하는 課題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 다시 생각하여 볼 것은 중국 자체의 원시 탑파설에 있어 상술한 바와 같이 두 가지 계통설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 인도식 복분부도는 위진 이후에 경영된 운강 기타 석굴의 조벽에서 매우 왜곡된 형식으로서 누각식 탑파가 동시에 볼 수 있을 뿐임에 반하여 누각식 탑파 형식은 비록 조형상으론 다시 고고한 실례(例)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전에 말한 착융의 목조 탑파 건립 사실이 문헌을 통하여 최고한 예로 전하여 있고 북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A.D.493)─경영한 용문의 석굴사에서는 복분식 탑파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다시 또 육조 이후 수당을 통하여 누각식 탑파가 중국 탑파의 본류를 이르고 있으며 또 〿〿에 있어서도 역사를 통하여 복분식 부도로는 극히 전설적인 전거의 요동성 육왕탑이 고고한 일례로 남아 있고 현대문주14▶〿일기로 들어와서 통도사 계단이란[a 14] 것이 하나 전하여 있고 그리고 고려 이후에 들어와 다소의 유형이 있다 하나 〿〿 왜곡된 복분 형식에 한한 점에서 조선의 탑파도 원래가 중국의 탑파 규범 아래 누각식 탑파가 조종을 이루었던 것으로 따라서 조선 탑파의 시원 형식은 누각식 탑파계에로 돌려봄이 가장 순리일 듯싶다. 이러한 이산 하에서 필자는 목조 탑파로부터 고찰의 실마리를 열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쪽수▶P004-3그러나 이곳에 다시 생각하여 볼 것은 中國 自體의 原始 塔婆說에 있어 上述한 바와 같이 두 가지 系統說이 對立하고 있다 하나 印度式 覆盆浮屠는 魏晉 以後에 經營된 雲岡 其他 石窟의 彫壁에서 매우 歪曲된 形式으로서 樓閣式 塔婆가 同時에 볼 수 있을 뿐임에 反하여 樓閣式 塔婆 形式은 비록 造型上으론 다시 高古한 實例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前에 말한 笮融의 木造 塔婆 建立 事實이 文獻을 通하여 最古한 例로 傳하여 있고 北魏 孝文帝가 洛陽으로 遷都한 後(A.D.493)─經營한 龍門의 石窟寺에서는 覆盆式 塔婆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다시 또 六朝 以後 隋唐을 通하여 樓閣式 塔婆▶P005-1가 中國 塔婆의 本流를 이르고 있으며 또 〿〿에 있어서도 歷史를 通하여 覆盆式 浮屠로는 極히 傳說的인 前擧의 遼東城 育王塔이 高古한 一例로 남아 있고 원문주14▶〿一期로 들어와서 通度寺 戒壇이란[14] 것이 하나 傳하여 있고 그리고 高麗 以後에 들어와 多少의 類形이 있다 하나 〿〿 歪曲된 覆盆 形式에 限한 點에서 朝鮮의 塔婆도 原來가 中國의 塔婆 規範 아래 樓閣式 塔婆가 祖宗을 이루었던 것으로 따라서 朝鮮 塔婆의 始源 形式은 樓閣式 塔婆系에로 돌려봄이 가장 順理일 듯싶다. 이러한 理山 下에서 筆者는 木造 塔婆로부터 考察의 실마리를 열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본문2: 1. 木造塔婆


기술한 바와 같이 인도에서의 탑파의 본원적 형식은 토양으로 조축한 복분식 부도이었다. 그러나 복분의 반구양식이 그 기단과 함께 적취에 반한 공덕의 관념으로 말미암마 탑고됨에 따라 복분의 탑신은 포탄형으로 수고하여지고 기단의 층도도 중후하게 되며, 이어 곧 기단과 탑신에 시설되었던 난순이 건축적 방실의 형태로 변천되며 또는 탑중거불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탑실을 고의로 경영하게 되니 탑파가 전체로 누각식 건물로 번안될 인연이 이러한 데부터 있었던 것이다. 건타라 지방에 작리부도라는 목층 고탑이 가부색가왕대에 벌써 건조되었다는 것도 그 발생 과정에 하등의 비약적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는 까닭이 이러한데 있거니와 당대에 목조의 고루건축으로서는 세계적 발전을 보이고 있던 중국으로서 법현 이하 다수한 구법승으로 말미암아 발견되고 전파된 이 작리부도가 간접 직접으로 중국 탑파 조성에 중요한 규범을 이루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서역제국을 통하여 습득한 당대의 탑파 지식이 원본적 복분 형식을 탐득하였다느니보다 당대에 한창 유행되고 성용되어 있던 기루식 탑파가 먼저 유전되었을 것이 순리로 상상되는 바이니 그러므로 위서 석로지에

凡宮塔制度 猃依天竺舊狀而重構之 從一級至三五七九 世人相承 謂之浮圖 或云佛圖

라고 있어 탑파의 형식이 천축구상에 의하였다 하나 복분식 부도와는 전연 다른 층루식 건물일 뿐더러 한인이 그로써 곧 탑규의 정형인 듯이 여기고 있는 소식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에서의 탑파에 대한 이러한 상식은 이어 곧 조선에 있어서도 그 실정을 같이 하였을 것이니 그러므로 삼국유사가 전하는 삼보감통록의 요동성 육왕탑이라는 것은 잘해야 발해대 사실의 오전에 부과한 것이었을 것이요 거론할 재료도 못된다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목조 탑파야말로 조선 탑위의 시원이었고 조종이었으니 다만 교화가 편파된 지 1500여년에 문헌 상으로도 전하여 온 것이 그리 많지 못하고 현물로서도 이조 중엽 이후에 속하는─ 탑파의 의의를 상실하고 있는 이기의 고루 건물이 남아 있을 뿐이니 "龍象擇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落 出現於世 西域名憎 降臨於境"하던 해동의 교국으로 이 어인 변상이랴. 요요한 문헌과 황잔한 유적에서나마 탑상을 엿보지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 이곳에 있다 할까.
쪽수▶P005-2己述한 바와 같이 印度에서의 塔婆의 本源的 形式은 土壤으로 造築한 覆盆式 浮屠이었다. 그러나 覆盆의 半球樣式이 그 基壇과 함께 積聚에 伴한 功德의 觀念으로 말미암마 塔高됨에 따라 覆盆의 塔身은 砲彈形으로 秀高하여지고 基壇의 層度도 重後하게 되며, 이어 곧 基壇과 塔身에 施設되었던 欄楯이 建築的 房室의 形態로 變遷되며 또는 塔中居佛의 思想으로 말미암아 塔室을 故意로 經營하게 되니 塔婆가 全體로 樓閣式 建物로 飜案될 因緣이 이러한 데부터 있었던 것이다. 健陀羅 地方에 雀離浮屠라는 木層高塔이 迦賦色迦王代에 벌써 建造되었다는 것도 그 發生 過程에 何等의 飛躍的 無理를 느끼게 하지 않는 所以然이 이러한데 있거니와 當代에 木造의 高樓建築으로서는 世界的 發展을 보이고 있던 中國으로서 法顯 以下 多數한 求法僧으로 말미암아 發見되고 傳播된 이 雀離浮屠가 間接 直接으로 中國 塔婆 造成에 重要한 規範을 이루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西域諸國을 通하여 拾得한 當代의 塔婆 知識이 原本的 覆盆 形式 ▶P006-1을 探得하였다느니보다 當代에 한창 流行되고 盛用되어 있던 騎樓式 塔婆가 먼저 流傳되었을 것이 順理로 想像되는 바이니 그러므로 魏書 釋老志에
凡宮塔制度 猃依天竺舊狀而重構之 從一級至三五七九 世人相承 謂之浮圖 或云佛圖
라고 있어 塔婆의 形式이 天竺舊狀에 依하였다 하나 覆盆式 浮屠와는 全然 다른 層樓式 建物일 뿐더러 漢人이 그로써 곧 塔葵의 定形인 듯이 여기고 있는 消息을 알 수 있다. 即 中國에서의 塔婆에 對한 이러한 常識은 이어 곧 朝鮮에 있어서도 그 實情을 같이 하였을 것이니 그러므로 三國遺事가 傳하는 三寶感通錄의 遼東城 育王塔이라는 것은 잘해야 渤海代 事實의 誤傳에 不過한 것이었을 것이요 擧論할 材料도 못된다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木造 塔婆야말로 朝鮮 塔萎의 始源이었고 祖宗이었으니 다만 敎化가 遍播된 지 1500餘年에 文獻 上으로도 傳하여 온 것이 그리 많지 못하고 現物로서도 李朝 中葉 以後에 屬하는─ 塔婆의 意義를 喪失하고 있는 二基의 高樓 建物이 남아 있을 뿐이니 "龍象擇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落 出現於世 西域名憎 降臨於境"하던 海東의 敎國으로 이 어인 變相이랴. 寥寥한 文獻과 荒殘한 遺跡에서나마 塔相을 엿보지 아니할 수 없는 所以然이 이 곳에 있다할까.
대저 삼국기의 사료는 모든 방면이 그러하지만 탑파의 조건 사실, 특히 목조 탑파의 건립 사실에 있어서도 요요하니 지금 알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예로는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흥륜사 황룡사 기타의 소수 예가 있을 뿐이다. 백제의 미륵사탑에 관하여는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因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食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云云

이라 한 구중의 "殿塔廊廡各三所創之"란 일절로써 추고코자 하는 바이니 그 현 유적지는 전라북도 익산군 김마면 기산리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최외한 석탑 일기와 초체가 다수 산재하여 있으며 일찍이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다다시) 박사로 말미암아 학계에 보고된 바 있었는데 그는 전설과 유적을 전반적으로 의심하고서 신라 문무왕 말년에 고구려의 종실 안승의 신라 래투의 사실에 부회시켜 통일 이후에 속할 사관으로써 입론하였더니(주15) 후에 그의 문하인 등도 해치랑(藤島 亥治郞, 후지시마 가이치로) 공학 박사는 그 유지를 다시 고찰한 후, 현존한 석탑만을 관야씨 설에 부합되는 것으로 지지하고 사찰의 원기는 그 규모의 굉대함이라든지 가람의 배치 의태가 전설대로 백제 무왕대에 속할 것으로 또는 적어도 륙조 가람 배치법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삼국기 즉 백제 시대에 속할 가람일 것이라는 것을 주장한 바가(주16)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금서룡 문학 박사도 문제한 바 있었고(주17) 필자 자신의 의견도 있으나 이는 후회에 서술하기로 하고 등도 박사의 고증에 의하여 현 사역을 보건대 현존한 석탑 구역은 "殿塔廊廡各三所創之"라고 한 것 중의 서구에 속한 것으로 그는 이를 서탑원이라 가칭하고 이 구역의 동편으로 당탑지 의 토양이 또다시 구가 있음으로써 이곳을 동탑원지로써 칭하고 다시 이 양탑 원지 위로 품자형으로 일탑원지를 추정하여 전탑 삼소라는 것을 설정하고 동탑원과 중탑원에는 목조 탑파가, 서탑원의 석탑 형식과 같은 류의 탑파가 있었을 것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 다시 더 구체적으로 상정할 자료가 없는 이상 백제의 목탑은 해결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돌이켜 신라에서의 상태를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006-2大抵 三國期의 史料는 모든 方面이 그러하지만 塔婆의 造建 事實, 特히 木造 塔婆의 建立 事實에 있어서도 寥寥하니 지금 알 수 있는 가장 有名한 例로는 百濟의 彌勒寺, 新羅의 興輪寺 皇龍寺 其他의 少數 例가 있을 뿐이다. 百濟의 彌勒寺塔에 關하여는 三國遺事 卷2 武王條에
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因所願也 ▶P007-1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食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云云
이라 한 句中의 "殿塔廊廡各三所創之"란 一節로써 推考코자 하는 바이니 그 現 遺跡地는 全羅北道 益山郡 金馬面 箕山里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崔嵬한 石塔 一基와 礎砌가 多數 散在하여 있으며 일찍이 關野貞 博士로 말미암아 學界에 報告된 바 있었는데 그는 傳說과 遺跡을 全般的으로 疑心하고서 新羅 文武王 末年에 高句麗의 宗室 安勝의 新羅 來投의 史實에 附會시켜 統一 以後에 屬할 寺觀으로써 立論하였더니(註15) 後에 그의 門下인 藤島 亥治郞 工學 博士는 그 遺址를 다시 考察한 後, 現存한 石塔만을 關野氏 說에 符合되는 것으로 支持하고 寺刹의 原基는 그 規模의 宏大함이라든지 伽藍의 配置 意態가 傳說대로 百濟 武王代에 屬할 것으로 또는 적어도 六朝 伽藍 配置法을 正統的으로 繼承한 三國期 即 百濟 時代에 屬할 伽藍일 것이라는 것을 主張한 바가(註16) 있었다. 이에 對하여는 今西龍 文學 博士도 問題한 바 있었고(註17) 筆者 自身의 意見도 있으나 이는 後回에 敍述하기로 하고 藤島 博士의 考證에 依하여 現 寺域을 보건대 現存한 石塔 區域은 "殿塔廊廡各三所創之"라고 한 것 中의 西區에 屬한 것으로 그는 이를 西塔院이라 假稱하고 이 區域의 東便으로 堂塔址 의 土壤이 또다시 區가 있음으로써 이곳을 東塔院址로써 稱하고 다시 이 兩塔 院址 위로 品字形으로 一塔院址를 推定하여 殿塔 三所라는 것을 設定하고 東塔院과 中塔院에는 木造 塔婆가, 西塔院의 石塔 形式과 같은 類의 塔婆가 있었을 것을 立證하였다. 그러나 그 以上 다시 더 具體的으로 想定할 資料가 없는 以上 百濟의 木塔은 解決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問題를 돌이켜 新羅에서의 狀態를 보지 아니할 수 없다.
대저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기는 삼국사기에 이른바 법흥왕 15년보다 그 이전에 있었을 것이 여러가지로 증명할 수 있으나 그러나 법흥왕대 불교가 국교로써 수립되기 전까지는 당탑의 장엄이 특히 있었을법하지 아니하니 삼국유사의 아도기라 전설 중에 보이는 칠처가람설은 너무 전설적인 것이므로 거론할 수 없고 신라의 최초 불찰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것은 흥륜사, 영흥사가 있으니 흥륜사는 법흥왕 14년 정미에 초창하여(주18) 법흥왕 22년 을묘에 대개하고 진흥왕 5년에 필성하였다 하고 영흥사 역 동대에 창위하였다 한다. 그러나 건축적 장엄은─특히 우리가 문제하는 탑파에 대하여는 삼국유사 권3 「興輪寺壁畫普賢條」조의 "殿塔及草樹土石皆發異香"이란 한 구와 동서 권5 「金現感虎」 조의 "新羅俗 每當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兢德興輪寺之殿塔 爲商會"라는 일 구절이 있을 뿐이요 유적으로도 하등 이 이상의 사실을 천발시킬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이후 3보의 융성을 따라 당탑의 조영은 연복년 증가하여 태청 천수간(진흥왕대)에는 벌써 "寺寺星張, 塔塔雁行" 하는 성관을 이루게 되었으나 목조 탑파의 장엄은 의연히 찾기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 권5 "月明師兜率歌"중에 "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畵慈氏像前"이란 구에서 내원(천주사)(주19) 탑파가 목조 탑파로서 그 안에 벽화 석가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동서 「二惠同塵」 조에 "志鬼心火出燒其塔"이란 구에서 영묘사에 목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주20) 선덕왕대 창건이라는 경주 지림사에도 정광여래 사리각인 삼층탑이 있었다 하지만(주21) 고신라기의 목조 탑파의 대표적 작품으로 가장 구체적 문징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황룡사 구층구이 하나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慈藏)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徳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乃 以寳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来 経營木石 伊于龍春 一云 龍樹 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㓕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攺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台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并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 大和寺在阿由縣南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霊䕃乎

라 하는 것이 탑파 조영의 동기와 경과의 구체적 보고로서 가장 회자되어 있는 기록이며 신라 삼빈의 하나에 대한 유명한 사실이다. 현금 경주 내동면 구황리에 남아있는 초체에 의하여 추고되는 탑파의 대는 초층 평면이 약 73척 4지로 각 주(柱) 사이가 10척 4촌강의 7간4면인 49간 건물이라 중앙에는 폭 약 4척, 고 2척 7촌 5분의 입방형 돌기석면 위에 약 6촌 전후의 원형 요혈이 있는 찬주석이 놓여있다. 전거한 문례에 의하면 총고 225척의 탑파이라하나 이만한 평면으로서 구층탑이었다면 총고 적어도 삼사백척은 되었으리라고 한다.(주22) 비로소 그 보장함을 알 수 있거니와 조선에서는 물론이요 일본에도 이만한 기구의 탑파는 없었다 한다. 고려태조가 고지에 의하여 경중을 물었다는 신라 삼보의 하나요, 통업 기원을 위하여 효성한 탑파도 그것이요, 몽고병란에 회로될 때까지 누차의 개수를(주23) 힘쓴 것도 이 탑이요, 현종대 조유궁을 헐어서까지 중창한 것도(주24) 이 탑이니 혁조계선은 정치적 상탈이어니와 민족적으로 얼만한 존숭의 적이었든지 가히 알만하다. 지림사의 목조 탑파라는 것이 초력 평간 약 60척 7촌, 각주간 거리 6척 23촌의 삼층탑파로서 중앙 양주석이 폭 7촌 5분 심 약 5촌의 이중방혈이 있다는 것쯤은 비록 삼국기의 탑파라 하더라도 비교도 안 되는 예라 할 것이다.
쪽수▶P007-2大抵 佛敎가 新羅에 傳播되기는 三國史記에 이른바 法興王 15年보다 그 以前에 있었을 것이 여러가지로 證明할 수 있으나 그러나 法興王代 佛敎가 國敎로써 樹立되기 前까지는 堂塔의 壯嚴이 特히 있었을 법하지 아니하니 三國 ▶P008-1遺事의 阿道基羅 傳說 中에 보이는 七處伽藍說은 너무 傳說的인 것이므로 擧論할 수 없고 新羅의 最初 佛刹로 歷史上 가장 有名한 것은 興輪寺, 永興寺가 있으니 興輪寺는 法興王 14年 丁未에 草創하여(註18) 法興王 22年 乙卯에 大開하고 眞興王 5年에 畢成하였다 하고 永興寺 亦 同代에 創違하였다 한다. 그러나 建築的 莊嚴은─特히 우리가 問題하는 塔婆에 對하여는 三國遺事 卷3 「興輪寺壁畫普賢條」條의 "殿塔及草樹土石皆發異香"이란 一句와 同書 卷5 「金現感虎」 條의 "新羅俗 每當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兢德興輪寺之殿塔 爲商會"라는 一 句節이 있을 뿐이요 遺跡으로도 何等 이 以上의 事實을 闡發시킬 資料가 남아있지 않다. 爾後 3寶의 隆盛을 따라 堂塔의 造營은 年復年 增加하여 太清 天壽間(眞興王代)에는 벌써 "寺寺星張, 塔塔雁行" 하는 盛觀을 이루게 되었으나 木造 塔婆의 壯嚴은 依然히 찾기 어렵다. 다만 三國遺事 卷5 "月明師兜率歌"中에 "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畵慈氏像前"이란 句에서 內院(天柱寺)(註19) 塔婆가 木造 塔婆로서 그 안에 壁畵 釋迦像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同書 「二惠同塵」 條에 "志鬼心火出燒其塔"이란 句에서 靈廟寺에 木塔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註20) 善德王代 創建이라는 慶州 祗林寺에도 定光如來 舍利閣인 三層塔이 있었다 하지만(註21) 古新羅期의 木造 塔婆의 代表的 作品으로 가장 具體的 文徵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皇龍寺 九層球이 하나 있을 뿐이다. 三國遺事에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慈藏)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徳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乃 以寳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来 経營木石 伊于龍春 一云 龍樹 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㓕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攺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台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P009-1并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 大和寺在阿由縣南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霊䕃乎
라 하는 것이 塔婆 造營의 動機와 經過의 具體的 報告로서 가장 膾炙되어 있는 記錄이며 新羅 三賓의 一에 對한 有名한 史實이다. 現今 慶州 內東面 九黃里에 남아있는 礎砌에 依하여 推考되는 塔婆의 大는 初層 平面이 約 73尺 4至로 各柱 間이 10尺 4寸强의 7間4面인 49間 建物이라 中央에는 幅 約 4尺, 高 2尺 7寸 5分의 立方形 突起石面 위에 約 6寸 前後의 圓形 凹穴이 있는 燦柱石이 놓여있다. 前擧한 文例에 依하면 總高 225尺의 塔婆이라하나 이만한 平面으로서 九層塔이었다면 總高 적어도 三四百尺은 되었으리라고 한다.(註22) 비로소 그 保壯함을 알 수 있거니와 朝鮮에서는 勿論이요 日本에도 이만한 機構의 塔婆는 없었다 한다. 麗太祖가 故智에 依하여 輕重을 물었다는 新羅 三寶의 一이요, 統業 祈願을 爲하여 効聲한 塔婆도 그것이요, 蒙古兵亂에 灰爐될 때까지 屢次의 改修를(註23) 힘쓴 것도 이 塔이요, 顯宗代 朝遊宮을 헐어서까지 重創한 것도(註24) 이 塔이니 革朝繼禪은 政治的 常奪이어니와 民族的으로 얼만한 尊崇의 的이었든지 可히 알만하다. 祗林寺의 木造 塔婆라는 것이 初曆 平間 約 60尺 7寸, 各柱間 距離 6尺 23寸의 三層塔婆로서 中央 樣柱石이 幅 7寸 5分 深 約 5寸의 二重方穴이 있다는 것쯤은 비록 三國期의 塔婆라 하더라도 比較도 안 되는 例이라 할 것이다.
각설 상술한 삼국기 탑파의 한둘의 예는 즉 육조식 가람 배치법(일본서 말하는 백제 칠당 가람제라는 것)의 일탑식 가람 제창기의 예이니 탑파 중심의 가람 배치법이 중요시되던 한위 이래의 전통적 배치법에서 영향되던 경영이라 따라서 그 경영도 장위함이 본색이었으나 차차로 상설의 중요성이 미신적으로 고조됨을 따라 탑파의 배치는 수식적으로 도안적으로 나열케 되어 김당(상전)에 대한 보처로서의 배설을 받게 되니 이것이 중국의 수당 이후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신라통일 전후부터의 양탑식 가람제도의 발생 연기이였다. 이리하여 목조 탑파 그 자체도 가구에 치중하려던 웅도를 잃고 점차로 장식적 건물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러한 경향은 석탑의 변천에서 명료히 간취할 수 있으나 소수의 유례나마 목조 탑파에서도 보지 못할 바 아니니 이러한 경향에 있는 탑파로 문헌이나 유적으로 전하여 있는 예를 모조리 긁어모아 사천왕사의 동서탑, 망덕사의 동서탑, 보문사의 동서탑 등을 들 수 있다.
쪽수▶P09-2却說 上述한 三國期 塔婆의 一二의 例는 即 六朝式 伽藍 配治法(日本서 말하는 百濟 七堂 伽藍制라는 것)의 一塔式 伽藍 制脹期의 例이니 塔婆 中心의 伽藍 配置法이 重要視되던 漢魏 以來의 傳統的 配置法에서 影響되던 經營이라 따라서 그 經營도 壯偉함이 本色이었으나 次次로 像設의 重要性이 迷信的으로 高調됨을 따라 塔婆의 配置는 修飾的으로 圖案的으로 羅列케 되어 金堂(像殿)에 對한 補處로서의 配設을 받게 되니 이것이 中國의 隋唐 以後의 影響을 받기 시작▶P10-1한 新羅統一 前後부터의 兩塔式 伽藍制度의 發生 緣起이였다. 이리하여 木造 塔婆 그 自體도 架構에 致重하려던 雄度를 잃고 漸次로 裝飾的 建物에 치우치는 傾向이 있었으니 이러한 傾向은 石塔의 變遷에서 明瞭히 看取할 수 있으나 少數의 遺例나마 木造 塔婆에서도 보지 못할 바 아니니 이러한 傾向에 있는 塔婆로 文獻이나 遺跡으로 傳하여 있는 例를 모조리 긁어모아 四天王寺의 東西塔, 望德寺의 東西塔, 普門寺의 東西塔 等을 들 수 있다.
사천왕사(현 변주군 내동면 배반리 유사지)는 문무왕 15년에 당병 내침에 제하여 명랑법사의 신인 밀법에 의하여 호국양병코자 창립하였거니와 대정 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 제1책의 유지조사에 의하면

南方東塔의 土壇高 4尺 3寸으로 礎石이 12枚가 있어 東西南北으로 各四枚式 配列되어있고(即 三間四至의 建物이다) 中央에 一大礎石(即 榛柱心石)이 놓여있다. 各礎石의 間隔은 5尺 1寸이요 礎列의 一邊長은 23尺 5寸이다. 礎石의 形狀은 比較的 簡單하고 側礎는 花崗石으로서 邊長 2尺 高 1寸의 方形突起가 있을 뿐이요 中心 礎石도 略同形이나 突起邊長은 3尺 8寸餘, 高는 3寸이요 中央에 1尺과 8寸大의 二段方形의 凹形孔穴이있다. 西塔址도 大概 같고 東西塔址의 中心距離는 約 135尺이다. 以上大意抄譯

즉 층고는 부명이나 변장 13척 5촌의 삼간사지의 탑파임을 알 수 있다. 동 보고서에는 다시 북동, 북서에 각기 방형토단에 상술한 탑지와 유사한 배열법을 갖고 있는 이기의 지형 탑지로 오인하고 소위 사천왕사라는 명칭에 부의시키기 위한 경영이였던 듯이 입론하였지만 이는 요컨댄 가람배치법에 대한 불비한 식견의 소치이었고 북동, 북서의 탑지라는 것은 두은 경루, 고루(또는 종루)에 해당한 건물이였던 것이다. 이는 하여간에 우리는 탑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유명한 유물을 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즉 사천왕상을 반육고로 부조한 와각과(증장천, 지국천이 발견되었다) 화릉형(소위 간오형이란 것) 녹유추벽과 또 실상화만을 심각한 와전 등이니 설에 의하면 실상화만의 와전은 중앙에 깔리고 화릉형 녹유벽은 연식이 되어있었다 하며 사천왕벽은 벽간에 감식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특히 필자가 흥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양지사석조에

釋良志 未詳祖考鄉邑 唯現跡於善德王朝(中略) 旁通雜譽 神妙絕比 叉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並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下略)

라는 절이니 유래 공장의 천기로서 죽백에 성명을 남긴 자─효천의 잔성보다 더욱 영성한 조선에 있어 이와 같이 대서특서되어있을 뿐 아니라 현금 사천왕사지에서 발견된 벽전의 류─그 조법이 절묘 괴려 웅혼한 점에서 성당예풍에 손색을 보이지 않고 해동공예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이때 석량지를 눈앞에 그려보지 아니할 수 없다. "선덕왕조에 현적키 시작한" 그는 문무왕대까지 생존하여 그 절묘한 신기를 포만한 노기를 마음껏 발굴하였던 모양이니 석량지는 사천왕사로서 말미암아 그 성명을 오늘에 다시 살렸고, 사천왕사는 석량지로 말미암아 오늘날 그 장엄이 다시 추상케 되니 묘호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0-2四天王寺(現 邊洲郡 內東面 排盤里 有寺址)는 文武王 15年에 唐兵 來侵에 際하여 明郎法師의 神印 密法에 依하여 護國讓兵코자 創立하였거니와 大正 11年度 古蹟調査報告書 第1冊의 遺址調査에 依하면
南方東塔의 土壇高 4尺 3寸으로 礎石이 12枚가 있어 東西南北으로 各四枚式 配列되어있고(即 三間四至의 建物이다) 中央에 一大礎石(即 榛柱心石)이 놓여있다. 各礎石의 間隔은 5尺 1寸이요 礎列의 一邊長은 23尺 5寸이다. 礎石의 形狀은 比較的 簡單하고 側礎는 花崗石으로서 邊長 2尺 高 1寸의 方形突起가 있을 뿐이요 中心 礎石도 略同形이나 突起邊長은 3尺 8寸餘, 高는 3寸이요 中央에 1尺과 8寸大의 二段方形의 凹形孔穴이있다. 西塔址도 大概 같고 東西塔址의 中心距離는 約 135尺이다. 以上大意抄譯
即 層高는 不明이나 邊長 13尺 5寸의 三間四至의 塔婆임을 알 수 있다. 同 報告書에는 다시 北東, 北西에 各其 方形土壇에 上述한 塔址와 類似한 配列法을 갖고 있는 二基의 地形 塔址로 誤認하고 所謂 四天王寺라는 名稱에 副意시키기 爲한 經營이였던듯이 立論하였지만 이는 要컨댄 伽藍配置法에 對한 不備한 識見의 所致이었고 北東, 北西의 塔址라는 것은 竇은 經樓, 鼓樓(또는 鐘樓)에 該當한 建物이였던 것이다. 이는 何如間에 우리는 塔址에서 發見되었다는 有名한 遺物을 忘却하여서는 아니된다. 即 四天王像을 半肉高로 浮彫한 瓦覺과(增長天, 持國天이 發見되었▶P11-1다) 花菱形(所謂 干烏形이란 것) 綠釉甃甓과 또 實相花蔓을 深刻한 瓦塼 等이니 說에 依하면 實相花蔓의 瓦塼은 中央에 깔리고 花菱形 綠釉甓은 緣飾이 되어있었다 하며 四天王甓은 壁間에 嵌飾되었던 것이 아닐까 推測된다. 特히 筆者가 興味있게 생각하는 것은 三國遺事에 보이는 良志使錫條에
釋良志 未詳祖考鄉邑 唯現跡於善德王朝(中略) 旁通雜譽 神妙絕比 叉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並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下略)
라는 一節이니 由來 工匠의 賤技로서 竹帛에 姓名을 남긴 者─曉天의 殘星보다 더욱 零星한 朝鮮에 있어 이와 같이 大書特書되어있을 뿐 아니라 現今 四天王寺址에서 發見된 甓塼의 類─그 彫法이 絕妙 瑰麗 雄渾한 點에서 盛唐藝風에 遜色을 보이지 않고 海東工藝를 爲하여 萬丈의 氣焰을 吐하고 있는 이때 釋良志를 눈앞에 그려보지 아니할 수 없다. "善德王朝에 現跡키 시작한" 그는 文武王代까지 生存하여 그 絕妙한 神技를 包滿한 老技를 마음껏 發掘하였던 모양이니 釋良志는 四天王寺로서 말미암아 그 聲名을 오늘에 다시 살렸고, 四天王寺는 釋良志로 말이암아 오늘날 그 壯嚴이 다시 推想케 되니 妙好因緣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사천왕사와 인연을 같이 하고 시대를 같이 하고 지역을 같이 하고 사관을 거의 같이 한 듯한 사찰이 있으니 이는 즉 망덕사이다. 삼국사기 권9 경덕왕 14년조에

望德寺塔動 唐令狐澄新羅國記曰其國爲唐立此寺故以爲名兩塔相對髙十三層忽震動開合如欲傾倒者數日其年禄山亂疑其應也

라고 있는 이 주기가 우리에게 가장 흥미를 끄는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거한 대정 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에 의하여 유적의 특히 탑지의 현상을 종합하여 보면 대략 4척고토단 위에 변장 2척 1촌 내외의 방형돌기가 있는 초석 10기가 각 석의 간격 약 3척 2‧3촌의 거리를 갖고 일변에 사매식 나열되어 있으니 변 총장18척 내외의 삼간사지의 탑파임을 알 수 있겠고 중앙의 찰주심석은 변장2척 1촌대의 팔각형으로 중앙에 이단의 요형공혈이 있다.
쪽수▶P11-2이 四天王寺와 因緣을 같이 하고 時代를 같이 하고 地域을 같이 하고 寺觀을 거의 같이 한 듯한 寺刹이 있으니 이는 即 望德寺이다. 三國史記 卷9 景德王 14年條에
望德寺塔動 唐令狐澄新羅國記曰其國爲唐立此寺故以爲名兩塔相對髙十三層忽震動開合如欲傾倒者數日其年禄山亂疑其應也
라고 있는 이 註記가 우리에게 가장 興味를 끄는 記錄이라 아니할 수 없다. 前擧한 大正 11年度 古蹟調査報告書에 依하여 遺跡의 特히 塔址의 現狀을 綜合하여 보면 ▶P12-1大略 4尺高土壇 위에 邊長 2尺 1寸 內外의 方形突起가 있는 礎石10基가 各石의 間隔 約 3尺 2‧3寸의 距離를 갖고 一邊에 四枚式 羅列되어 있으니 邊總長18尺內外의 三間四至의 塔婆임을 알 수 있겠고 中央의 擦柱心石은 邊長2尺 1寸大의 八角形으로 中央에 二段의 凹形孔穴이 있다.
이와 같이 변장 18척 내외의 삼간사지탑으로 층고가 13층이었다면 실로 괴기하게도 준초하였던 감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양탑간의 중심 거리─약 105척의 한격을 갖고 있으면서 삼국사기에 누대를 통하여 "二塔相擊"이니 "二塔戰"이니 하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사실에 있어 상당한 고층이였던 듯은 하다. 장식의 공은 사천왕사만큼 차질 수 없다 하더라도 기당키 위한 사관이었으니 어찌 또한 소홀하였으랴 진주초석이 이미 유례없는 팔각의 교기를 정하였음에서도 장식의 화엄성을 대강 상상할 수 있다 하겠다.
쪽수▶P12-2이와 같이 邊長 18尺 內外의 三間四至塔으로 層高가 13層이었다면 實로 怪奇하게도 峻峭하였던 感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兩塔間의 中心 距離─約 105尺의 閒隔을 갖고 있으면서 三國史記에 屢代를 通하여 "二塔相擊"이니 "二塔戰"이니 하는 記錄이 있음을 볼 때 事實에 있어 相當한 高層이였던 듯은 하다. 裝飾의 功은 四天王寺만큼 차질 수 없다 하더라도 欺唐키 爲한 寺觀이었으니 어찌 또한 踈忽하였으랴 榛柱礎石이 이미 類例없는 八角의 巧技를 呈하였음에서도 裝飾의 華嚴性을 대강 想像할 수 있다 하겠다.
이 외에 역사상으로 불명하나 경주 내동면 보문리 김당평에 보문사지에 양탑지가 있다 한다. 등도 박사의 추고에 의하면 동서탑파의 거리 일칠육당척이요 삼간사지의 삼중탑으로서 각주간 8척 간격이라 하고 현금 서탑지에는 변장 약 4척 5촌대의 정방형 대석 위에 직경 약 4척 1촌 고 약 8촌 3분의 팔판연화형 연주심석이 있어 차종초석으로서는 망덕사의 그것보다 더 화려할 뿐 아니라 일본 전국에 있어서도 이만한 심초의 예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이에 따른 탑파의 화식─ 또한 대단하였을 것이나 상상은 그만두기로 하자.
쪽수▶P12-3이 外에 歷史上으로 不明하나 慶州 內東面 普門里 金堂坪에 普門寺址에 兩塔址가 있다 한다. 藤島 博士의 推考에 依하면 東西塔婆의 距離 一七六唐尺이요 三間四至의 三重塔으로서 各柱間 8尺 間隔이라 하고 現今 西塔址에는 邊長 約 4尺 5寸大의 正方形 臺石 위에 直徑 約 4尺 1寸 高 約 8寸 3分의 八辦蓮花形 椽柱心石이 있어 此種礎石으로서는 望德寺의 그것보다 더 華麗할 뿐 아니라 日本 全國에 있어서도 이만한 心礎의 例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이에 따른 塔婆의 華飾─ 또한 대단하였을 것이나 想像은 그만두기로 하자.
이상 빈약한 소수의 거례이나, 그러나 삼국기 탑파가 탑파 중심 사상에서 그 결구의 웅위에 치중하였다가 통일기로 들면서부터 탑규의 지위가 일개 보처의 의의로 폄하되어 결구보다도 조식에 엄중케 된 대체의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조대한 잡석 주초에서 가공된 초석으로 화벽의 수법에서 팽벽의 수법으로, 지토조간에서 추벽의 조간, 유벽의 조간으로 초소한 용와에서 화엄된 와용으로(와당조법의 화려를 뜻함) 한마디로 말하면 동적 의의, 실본적 의의가 사라지고 정적으로 장식적으로 폄하되어갔다.
쪽수▶P12-4以上 貧弱한 少數의 擧例이나, 그러나 三國期 塔婆가 塔婆 中心 思想에서 그 結構의 雄偉에 置重하였다가 統一期로 들면서부터 塔葵의 地位가 一介 補處의 意義로 貶下되어 結構보다도 彫飾에 儼重케 된 大體의 過程을 살필 수 있다. ▶P13-1粗大한 雜石 柱礎에서 加工된 礎石으로 畵壁의 手法에서 膨壁의 手法으로, 地土槽間에서 甃甓의 槽間, 釉甓의 槽間으로 草踈한 茸瓦에서 華嚴된 瓦茸으로(瓦當彫法의 華麗를 뜻함) 一言以藏之하면 動的 意義, 實本的 意義가 사라지고 靜的으로 裝飾的으로 貶下되어갔다.
이러한 본의의 타락은 공업을 수성하여 안일로 퇴폐되어 들어가는 통일후〿의 신라사회에서는 구출할 수 없는 일이요─이러한 동기로 말미암아 석탑이 독특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지만─신흥 기세에 뛰놀던 고려의 창업기운에 의뢰치 않고서는 복활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쪽수▶P13-2이러한 本意의 墮落은 功業을 遂城하여 安逸로 頹廢되어 들어가는 統一後〿의 新羅社會에서는 救出할 수 없는 일이요─이러한 動機로 말미암아 石塔이 獨特한 發展을 이루게 되었지만─新興 氣勢에 뛰놀던 高麗의 創業氣運에 依賴치 않고서는 復活될 수 없는 狀態에 이르렀던 것이다.
려태조의 십훈요가 얼마나 사료로서의 엄밀성을 가졌을까는 의문이지만 국가의 대업이 법력으로 말미암아 취술된다하여 사원 창작에 치력하였던 것만은 그 행적에 의하여 믿을만하니 창업 시초에 도내십찰을 창립한 것도 저간의 소식의 일단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昔新羅造九層塔 ○皇龍寺塔 遂成一統之業 今欲開京建七層塔 西京建九層塔 冀借玄功除群醜 合三韓爲一家(註28)

운운의 건탑으로 말미암은 호국창업의 우원관 〿〿 신라의 고지를 모방한 만큼 이로 말미암아 탑파의 중흥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쪽수▶P13-3麗太祖의 十訓要가 얼마나 史料로서의 嚴密性을 가졌을까는 疑問이지만 國家의 大業이 法力으로 말미암아 就戌된다하여 寺院 創作에 致力하였던 것만은 그 行蹟에 依하여 믿을만하니 創業 始初에 都內十刹을 創立한 것도 這間의 消息의 一端을 傳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昔新羅造九層塔 ○皇龍寺塔 遂成一統之業 今欲開京建七層塔 西京建九層塔 冀借玄功除群醜 合三韓爲一家(註28)
云云의 建塔으로 말미암은 護國創業의 祐願觀 〿〿 新羅의 古智를 模倣한 만큼 이로 말미암아 塔婆의 中興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지금 개경의 칠중탑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기 목조 탑파로서는 서경 중흥사의 구층탑(註29), 중흥사의 탑(註30), 개경 진관사의 구층탑(註31), 혜일 중광사탑(註32) 서〿 김강사의 탑(註33) 남원 만복사의 오중탑(註34) 개경 연복사의 오중탑 등을 문헌에서나마 찾아볼 수 있다. 이 중에 건축장엄이 제법 전하여 있는 것은 연복사의 오중탑파가 하나 있다. 고려도경 권17 사우, 광통보제사(즉 연복사) 조에

廣通普濟寺 在王府之南 泰安門內直北百餘步 寺額揭於官道南向 中門榜日神通之門 正殿極雄壯 過於王居 榜日羅漢〿殿(中略) 殿之西爲浮屠 五級高逾二百尺 後爲法堂 旁爲居(下略)

라 보이니 "五級高逾二百尺"도 고려 목탑파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보고이거니와 "殿之西爲浮屠"라는 것도 자미있는 배치법의 하나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이다.
쪽수▶P13-4지금 開京의 七重塔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高麗期 木造 塔婆로서는 西京 重興寺의 九層塔(註29), 中興寺의 塔(註30), 開京 眞觀寺의 九層塔(註31), 慧日 重光寺塔(註32) 西〿 金剛寺의 塔(註33) 南原 萬福寺의 五重塔(註34) 開京 演福寺의 五重塔 等을 文獻에서나마 찾아볼 수 있다. 이 中에 建築壯嚴이 제법 傳하여 있는 것은 演福寺의 五重塔婆가 하나 있다. 高麗圖經 卷17 祠宇, 廣通普濟寺(即 演福寺) 條에
▶P14-1廣通普濟寺 在王府之南 泰安門內直北百餘步 寺額揭於官道南向 中門榜日神通之門 正殿極雄壯 過於王居 榜日羅漢〿殿(中略) 殿之西爲浮屠 五級高逾二百尺 後爲法堂 旁爲居(下略)
라 보이니 "五級高逾二百尺"도 高麗 木塔婆에 對한 唯一한 具體的 報告이거니와 "殿之西爲浮屠"라는 것도 滋味있는 配置法의 하나로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다.
이곳에 가람 배치에 대하여 일언을 삽입하건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삼국기의 일탑식 가람에서는 자오선상에 남하여 문‧탑‧김당‧강당이 순차로 놓이고 탑과 김당을 내정에 포함하고 강당과 문을 련락하여 사방형 랑무가 돌려 있고 승방과 식당이 따로 정연히 배치되니 이것을 칠당가람제라고 일본에서는 불렀던 것이다. 즉 탑과 김당이 남북으로 정연히 놓였던 것이니 이는 상설과 사리와가 평등의 지위를 가졌던 까닭이다. 그럼으로 일본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당과 탑을 동서로 또는 서동으로 병치하는 가람 배치법을 일찍이 취하였으니 이것이 내량의 법륭사 법기사 법륜사 등의 "플랜"(평면)이었다. 즉 고의 탑과 광의 당을 좌우로 배치함에서 건축조형상 역의 평형이란 특이한 배치법 창안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로 일본서 창안한 독특한 가람배치법이라 칭할 만한 것이어서 중국 조선에서 우금것 그 유례들을 볼 수 없었다. 조선의 신라통일 전후부터의 가람배치라는 것도 이미 술한 바와 같이 탑의 의의가 보처로서 폄하되어 각형랑무 안에 중심에 앉은 김당을 획위하기 위한 것처럼 좌우 량탑이 벌어지게 되고 북으로는 동서에 경루 고루가 배설되어 마치 이 오각이 골패의 관오모양으로 배치되었다가 선찰이 융성됨을 따라 가람배치는 마침내 잡연 부정하게 되었고 탑자의 위치도 정위가 없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한가지 연복사의 당탑과, 또 위에 말한 남원 만관사의 당탑배치가 동전서탑, 동탑서전의 형식을 갖고 있어 멀리 저 법륭사 법륜사 등과 동일한 배치를 가지고 있는 듯이 되어있으니 이곳에 일본의 창안이라는 상술한 배치법이 다시 검토를 받지 아니치 못하게 된다. 다만 이곳의 조선에서의 예는 시대적으로 매우 뒤늦으며 또 만복사의 당탑배치라는 것은 사찰 그 자체가 인도의 고의를 본따(주35) 전체로 동향되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므로 자료로써는 매우 희박한 점이 없지 않으나 전체로 자미있는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쪽수▶P14-2이곳에 伽藍 配置에 對하여 一言을 揷入하건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三國期의 一塔式 伽藍에서는 子午線上에 南하여 門•塔•金堂•講堂이 順次로 놓이고 塔과 金堂을 內庭에 包含하고 講堂과 門을 連絡하여 四方形 廊廡가 돌려 있고 僧房과 食堂이 따로 整然히 配置되니 이것을 七堂伽藍制라고 日本에서는 불렀던 것이다. 即 塔과 金堂이 南北으로 整然히 놓였던 것이니 이는 像設과 舍利와가 平等의 地位를 가졌던 까닭이다. 그럼으로 日本에서는 이러한 意味로 堂과 塔을 東西로 또는 西東으로 並置하는 伽藍 配置法을 일찍이 取하였으니 이것이 奈良의 法隆寺 法起寺 法輪寺等의 "플랜"(平面)이었다. 即 高의 塔과 廣의 堂을 左右로 配置함에서 建築造型上 力의 平衡이란 特異한 配置法 創案한 것이었다. 이것은 事實로 日本서 創案한 獨特한 伽藍配置法이라 稱할 만한 것이어서 中國 朝鮮에서 于今것 그 類例들을 볼 수 없었다. 朝鮮의 新羅統一 前後부터의 伽藍配置라는 것도 이미 述한 바와 같이 塔의 意義가 補處로서 貶下되어 角形廊廡 안에 中心에 앉은 金堂을 獲衛하기 爲한 것처럼 左右 兩塔이 벌어지게 되고 北으로는 東西에 經樓 鼓樓가 配設되어 마치 이 五閣이 骨牌의 冠五모양으로 配置되었다가 禪刹이 隆盛됨을 따라 伽藍配置는 마침내 雜然 不整하게 되었고 塔姿의 位置도 定位가 없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한가지 演福寺의 堂塔과, 또 위에 말한 南原 萬關寺의 堂塔配置가 東殿西塔, 東塔西殿의 形式을 갖고 있어 멀리 저 法隆寺 法輪寺 等과 同一한 配置를 가지▶P15-1고 있는 듯이 되어있으니 이곳에 日本의 創案이라는 上述한 配置法이 다시 檢討를 받지 아니치 못하게 된다. 다만 이곳의 朝鮮에서의 例는 時代的으로 매우 뒤늦으며 또 萬福寺의 堂塔配置라는 것은 寺刹 그 自體가 印度의 古意를 본따(註35) 全體로 東向되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므로 資料로써는 매우 稀薄한 點이 없지 않으나 全體로 滋味있는 問題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연복사의 당탑의 배치도 후에 그 위치가 변경되었던 듯하여 권근의 탑중창기문에는

演福實據城中闉闠之側 本號唐寺 方言唐與大相似 亦謂大寺 爲屋最鉅 至千餘權 內鑿三池九井 其南又起五層之塔 以應風水 其說備載舊籍 兹不贅陳云云

이라 있다. 이리하여 모처럼 조선에 하나 보이기 시작한 특별한 배치의 가람도 그 자료로서의 귀중성을 잃게 되고 말았으니 그 이유로는 동기문 중에

王氏亭國五百年 屢更喪亂 寺之興廢 殆非一次 此塔之壞 不知的在何時

라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나 하여간 자료성을 다소 상실케 된 것은 가석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본문제로 돌아가서 고려 탑자로 또 이조 탑자로 가장 유명한 이 연복사탑의 장엄에 대하여 다시 고찰치 않으면 아니 되겠다.
쪽수▶P15-2그러나 이 演福寺의 堂塔의 配置도 後에 그 位置가 變更되었던 듯하여 權近의 塔重創記文에는
演福實據城中闉闠之側 本號唐寺 方言唐與大相似 亦謂大寺 爲屋最鉅 至千餘權 內鑿三池九井 其南又起五層之塔 以應風水 其說備載舊籍 兹不贅陳云云
이라 있다. 이리하여 모처럼 朝鮮에 하나 보이기 시작한 特別한 配置의 伽藍도 그 資料로서의 貴重性을 잃게 되고 말았으니 그 理由로는 同記文 中에
王氏亭國五百年 屢更喪亂 寺之興廢 殆非一次 此塔之壞 不知的在何時
라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나 何如間 資料性을 多少 喪失케 된 것은 可惜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本問題로 돌아가서 高麗 塔姿로 또 李朝 塔姿로 가장 有名한 이 演福寺塔의 壯嚴에 對하여 다시 考察치 않으면 아니 되겠다.

至恭愍王 欲勞之而未就 後有狂儈長遠心者 夤緣權貴 優民伐材 卒亦罔成 恭讓君賴將相之力 復祖宗之緒 即位以來 事佛益力 爰命天珪等 募工興役 辛未二月始事 掘舊址塡木石 以固厥基 迄今乃竪 橫縱六楹 克壯且廣 累至五層覆以扁石 將訖厥功 憲臣有言而中輟

이라 한 것은 권근 중창기문의 한 절이거니와 "將訖厥功而中輟"한 것은 마침내 조선태조로 하여금 그 공덕을 거두게 함이었으니 초건이 이미 "以應風水"하기 위함이였고 중창이 또한 국태민안하기 위한 것이었음에(주36) 부구하고 고려실이 조선으로 말미암아 혁명되고, 뿐만 아니라 다시 조선 태조로 하여금 "亦資衛敎利邦國 五層復建畢功役"이란 의식을 내었다 하면 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역사적 운명이냐. 복아리민지자로 해인사 고탑을 중수하였다는 사실과(註37) 함께 려태조의 건탑 이유와 선덕왕의 건탑 이유가 시대를 초월하여 완강히 계연을 맺고 있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5-3至恭愍王 欲勞之而未就 後有狂儈長遠心者 夤緣權貴 優民伐材 卒亦罔成 恭讓君賴將相之力 復祖宗之緒 即位以來 事佛益力 爰命天珪等 募工興役 辛未二月始事 掘舊址塡木石 以固厥基 迄今乃竪 橫縱六楹 克壯且廣 累至五層覆▶P16-1以扁石 將訖厥功 憲臣有言而中輟
이라 한 것은 權近 重創記文의 一節이거니와 "將訖厥功而中輟"한 것은 마침내 朝鮮太祖로 하여금 그 功德을 거두게 함이었으니 初建이 이미 "以應風水"하기 爲함이였고 重創이 또한 國泰民安하기 僞한 것이었음에(註36) 不拘하고 麗室이 朝鮮으로 말미암아 革命되고, 뿐만 아니라 다시 朝鮮 太祖로 하여금 "亦資衛敎利邦國 五層復建畢功役"이란 意識을 내었다 하면 이 얼마나 固執스러운 歷史的 運命이냐. 福阿利民之資로 海印寺 古塔을 重修하였다는 事實과(註37) 함께 麗太祖의 建塔 理由와 善德王의 建塔 理由가 時代를 超越하여 頑強히 繼緣을 맺고 있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董工益勤 功乃生成 實申壬冬十有二月也 癸酉之春(朝鮮太祖卽位2年) 塗塈丹臒 翬飛雲表 鳥翔天際 金碧炫燿 輝暎半空 上安佛舍利 中庋大藏 下置毗盧肖像

요컨댄─종횡 육함이라 하였으니 오간사지의 오층건물로 "覆以扁石"이라 하였으니 상륜의 형굉은 아니요 노반복발 이 형식을 말한 듯하며 "上安佛舍利"는 이 복발에 불사리를 안치함을 이른 것인 듯하며(주38) "中皮大藏具萬軸"이라 하였으니 층루까지 통하여 다닐 수 있었던 듯하며(주39) "下置毘盧備嚴飾"이라 한 것은 의궤상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탑내존상으로 비로만 있었다면 일종 이례가 아니었을까. 즉 대체에 있어 탑파의 순수성이 매우 왜곡된 감이 있지 아니할까. 이것은 또한 당대 불교의 잡박성을 상징함이 아니였을까 대방의 교종를 바라는 바이다.
쪽수▶P16-2董工益勤 功乃生成 實申壬冬十有二月也 癸酉之春(朝鮮太祖卽位2年) 塗塈丹臒 翬飛雲表 鳥翔天際 金碧炫燿 輝暎半空 上安佛舍利 中庋大藏 下置毗盧肖像
要컨댄─縱橫六檻이라 하였으니 五間四至의 五層建物로 "覆以扁石"이라 하였으니 相輪의 形宏은 아니요 露盤覆鉢 이 形式을 말한 듯하며 "上安佛舍利"는 이 覆鉢에 佛舍利를 安置함을 이른 것인 듯하며(註38) "中皮大藏具萬軸"이라 하였으니 層樓까지 通하여 다닐 수 있었던 듯하며(註39) "下置毘盧備嚴飾"이라 한것은 儀軌上 그 理由를 알 수 없으나 塔內尊像으로 毘盧만 있었다면 一種 異例가 아니었을까. 即 大體에 있어 塔婆의 純粹性이 매우 歪曲된 感이 있지 아니할까. 이것은 또한 當代 佛敎의 雜駁性을 象徵함이 아니였을까 大方의 敎宗를 바라는 바이다.
각설 이씨 조선으로 들어와서의 최초의 목조 탑파는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후 어떠한 것이 또 경영되었는지는 졸연히 알기 어려우며 현재 조선의 목조 탑파 형식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화순 쌍봉사의 삼중각과 보은, 법주사의 팔상전이 있을 뿐이다. 전자는 평상에 있어, 층고에 있어, 배치에 있어, 탑파의 모영을 가지고 있으나, 그러나 대웅전으로 이용되어 있어 내용적으로 다를 뿐더러 이층옥개도 상륜 복발 등 탑파로서의 없지 못할 규약적 양식을 갖지 아니하고 보통 전각식의 중옥형개를 가지고 있음에서 한 개의 준아위외한 고루 건물에 지나지 아니하니 문제되지 아니하며(주40) 보은 법주사의 건물은 사상적으론 탑파의 정신을 떠남이 있으나(유상전이라 불러 있는 까닭에) 조형상으론 탑파로서의 규약을 제법 준수하고 있는 데서 현금 조선의 유일한 목조 탑파라 아니할 수 없다.(주41) 사부에 의하면 인조 2년 벽암대사의 중창이라 하니 그 초창은 불명이거니와(주42) 현재의 양식은 거대한 석계 위에 변장 37척 5촌대의 오사지의 탑신이 놓여있다. 초창에는 사방에서 통하는 문이 중간마다 있고 제삼층 사층의 탑신은 삼간사지요 제오층은 탑신을 갖지 아니한 채 옥미가 놓여있다. 오포중앙의 사주식 건물로 단확이 베풀어져 있고 피와식이며 옥정에는 노반이 중첩되어 있고 조그만 복발 위에 오륜을 꿰어찬 찰간보주 끝에서 결색이 사출하여 전각사우에 매여 달렸고 각층 전각사우에 보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내부에 있어 일층이상은 물론 통치 못하게 되어있고 찰주사면에는 석가팔변상도가 각면 이부식 괘치되어있고 단 위에 가장 아름답지 못한 소불상 나한경들이 잡연히 놓여있으니 이 불상들은 없어진 용화전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지면에는 판상이 깔려있고 외벽은 전부 〿창이 뚫려 있으나 일부는 근대식 유리창으로 인하여 고치를 많이 잃고 제이층 외부 정면에는 팔상전이란 액이 붙어 있다. 상륜고는 약 13척, 탑총고는 약 80여척, 전체로 광폭의 도가 심함으로써 안정솔은 크나 찰간 기타 저왜한 감이 불무하다.(주43) 지금 동편으로 단각문을 연결한 토장이 쌓여 있으니 탑의 미관을 위하여, 탑의 존엄을 위하여 의당 허러침이 가할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이곳에도 이조기에 들어와서의 탑파의 지위가 얼마나 폄하되고 있었는가가 입증된다.
쪽수▶P16-3却說 李氏 朝鮮으로 들어와서의 最初의 木造 塔婆는 이것을 契機로 하여 그후 어떠한 것이 또 經營되었는지는 卒然히 알기 어려우며 現在 朝鮮의 木造 塔婆 形式 建物로 남아 있는 것은 和順 雙峯寺의 三重閣과 報恩, 法住寺의 捌相殿이 있을 뿐이다. 前者는 平商에 있어, 層高에 있어, 配置에 있어, 塔婆의 模影을 가지고 있으나, 그러나 大雄殿으로 ▶P17利用되어 있어 內容的으로 다를 뿐더러 二層屋蓋도 相輪 覆鉢 等 塔婆로서의 없지 못할 規約的 樣式을 갖지 아니하고 普通 殿閣式의 重屋形蓋를 가지고 있음에서 한 개의 峻峨危嵬한 高樓 建物에 지나지 아니하니 問題되지 아니하며(註40) 報恩 法住寺의 建物은 思想的으론 塔婆의 精神을 떠남이 있으나(柳相殿이라 불러 있는 까닭에) 造型上으론 塔婆로서의 規約을 제법 遵守하고 있는 데서 現今 朝鮮의 唯一한 木造 塔婆라 아니할 수 없다.(註41) 寺傅에 依하면 仁祖 2年 碧岩大師의 重創이라 하니 그 初創은 不明이거니와(註42) 現在의 樣式은 巨大한 石階 위에 邊長 37尺 5寸大의 五四至의 塔身이 놓여있다. 初創에는 四方에서 通하는 門이 中間마다 있고 第三層 四層의 塔身은 三間四至요 第五層은 塔身을 갖지 아니한 채 屋楣가 놓여있다. 五包重昻의 四注式 建物로 丹艧이 베풀어져 있고 皮瓦式이며 屋頂에는 露盤이 重疊되어 있고 조그만 覆鉢 위에 五輪을 꿰어찬 檫竿寶珠 끝에서 結索이 四出하여 轉角四隅에 매여 달렸고 各層 轉角四隅에 寶鐸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內部에 있어 一層以上은 勿論 通치 못하게 되어있고 擦柱四面에는 釋迦八變相圖가 各面 二部式 掛置되어있고 壇 위에 가장 아름답지 못한 小佛像 羅漢儆들이 雜然히 놓여있으니 이 佛像들은 없어진 龍華殿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地面에는 板床이 깔려있고 外壁은 全部 〿窓이 뚫려 있으나 一部는 近代式 瑠璃窓으로 因하여 古致를 많이 잃고 第二層 外部 正面에는 捌相殿이란 額이 붙어 있다. 相輪高는 約 13尺, 塔總高는 約 80餘尺, 全體로 廣幅의 度가 甚함으로써 安定率은 크나 檫竿 其他 低矮한 感이 不無하다.(註43) 지금 東便으로 單脚門을 連結한 土墻이 쌓여 있으니 塔의 美觀을 爲하여, 塔의 尊嚴을 爲하여 宜當 허러침이 可할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이곳에도 李朝期에 들어와서의 塔婆의 地位가 얼마나 貶下되고 있었는가가 立證된다.
이상으로써 우리는 조선 목탑파의 변천을 개관하였다. 삼국기의 생동적 순수성에서, 정적인 수식적인 것으로, 이어 다시 풍수적으로 미신적으로 잡신적으로 내용이 변천되는 동시에 조형양식도 점차 퇴폐부순한 길로 떨어져 들어간 경로를 볼 수 있다. 사회의 변상을 짐작하고 문화의 변상을 짐작하고 신앙의 변상을 짐작한다면 가장 논리적인 인과적인 경과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재료의 탑파를 관찰함에서 더욱 구체적인 지식을 얻을 것 같다.
쪽수▶P18-1以上으로써 우리는 朝鮮 木塔婆의 變遷을 槪觀하였다. 三國期의 生動的 純粹性에서, 靜的인 修飾的인 것으로, 이어 다시 風水的으로 迷信的으로 雜信的으로 內容이 變遷되는 同時에 造型樣式도 漸次 頹廢不純한 길로 떨어져 들어간 經路를 볼 수 있다. 社會의 變相을 斟酌하고 文化의 變相을 斟酌하고 信仰의 變相을 斟酌한다면 가장 論理的인 因果的인 經過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傾向은 다른 材料의 塔婆를 觀察함에서 더욱 具體的인 知識을 얻을 것 같다.































본문3: 2. 甓塔(或云博塔)


누술한 바와 같이 인도 서역을 통하여서의 탑파의 원본적 재두는 전〿에 있었고 중국에서는 중국 특유의 고루식 목조 건물로 탑파를 번안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서역 천축의 지식이 점차 구체적으로 부수되고 또 목조 탑파의 비영구성에 감하여 박벽 건물에 남들은 발전과 기능을 갖고 있는 중국민으로 하여금 일찍이 벽전의 탑파를 용역히 영조케 하였다. 그러나 당대의 서역 천축의 전탑은 전에도 말한 바 있었지만 초기의 복분 형식에서 포탄형 누각식으로 진화된 형태의 탑파가 유행되고 있었음에서 동시에 탑파를 누각대술물로 리해하고 있든 중국민에게 전탑은 중국식 누각형식으로 객역히 번안케 하였다. 지금 중국 현존된 전탑으로서 최고한 것에 속한다는 북위 효명제 정광 4년(A.D.523)의 숭악사 십이각십오층전탑(河南 성숭산), 동위 무정 2년(A.D.544)의 신통사 사문탑(산동성 역성현)(註45) 등을 보더라도 모두 전벽으로써 중국의 목조 건물을 그대로 번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전탑이 중국에서는 가장 성용케 되었나니 이는 전벽생산의 풍부, 조축의 용역, 층급의 특고가능(즉 목조 탑규보다 얼마든지 높이 쌓을 수 있다), 지속의 영구 등 여러가지 편의가 있었던 관계이나 그러나 전탑의 행은 건축적 탑파에서, 즉 실용 가능의 건물로서의 탑파에서, 비실용적인 장식적인 조영으로 흐르게 되었으니 이는 다만 적취를 뜻하든 탑파 원의로의 회귀인 듯하기는 하나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공예적으로 퇴락될 운명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이러한 탑파의 변상은 조선으로서도 받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그것이 조선의 전탑이다. 그러나 행일지 불행일지 조선은 전(塼)의 나라가 아니였다. 전은 가장 비생산적인 자료(資料)이었다. 낙랑대력의 전옹고분, 이 영향에서 조영된 공주의 약간의 전옹고분을 제하고서는 삼국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순수한 전벽의 건물이란 조선서 찾을 수 없다. 전탑의 형식을 조선에 최초로 전하였다는 분황사의 탑이 전 그 자체로써 조축된 것이 아니요 안산암 전에 의모(擬模)시켜 조축한 것이며 구황리 폐사지에도 이와 유사한 파탑재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아 신라의 초기전탑, 즉 조선의 초기 전탑이 석재에서 출발치 아니하면 아니되었던, 즉 전이 비생산적이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당대에 전에 지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전에 말한 석량지가 소전탑을 조성하여 석장사중에 봉안한 사실이 삼국유사에 보인다.
쪽수▶P18-2 二. 甓塔(或云博塔)(註四四)
屢述한 바와 같이 印度 西域을 通하여서의 塔婆의 原本的 材枓는 塼〿에 있었고 中國에서는 中國 特有의 高樓式 木造 建物로 塔婆를 翻案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西域 天竺의 知識이 漸次 具體的으로 傅輸되고 또 木造 塔婆의 非永久性에 鑑하여 博甓 建物에 남들은 發展과 技能을 갖고 있는 中國民으로 하여금 일찍이 甓塼의 塔婆를 容易히 營造케 하였다. 그러나 當代의 西域 天竺의 塼塔은 前에도 말한 바 있었지만 初期의 覆盆 形式에서 砲彈形 樓閣式으로 進化된 形態의 塔婆가 流行되고 있었음에서 同時에 塔婆를 樓閣代述物로 理解하고 있든 中國民에게 塼塔은 中國式 樓閣形式으로 客易히 翻案케 하였다. 지금 中國 現存된 塼塔으로서 最古한 것에 屬한다는 北魏 孝明帝 正光 4年(A.D.523)의 崇岳寺 十二角十五層塼塔(河南 省崇山), 東魏 武定 2年(A.D.544)의 神通寺 四門塔(山東省 歷城縣)(註45) 等을 보더라도 모두 塼甓으로써 中國의 木造 建物을 그대로 翻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爾後 塼塔이 中國에서는 가장 盛用케 되었나니 이는 塼甓生産의 豊富, 造築의 容易, 層級의 特高可能(即 木造 塔葵보다 얼마든지 높이 쌓을 수 있다), 持續의 永久 等 ▶P19-1여러가지 便宜가 있었던 關係이나 그러나 塼塔의 流行은 建築的 塔婆에서, 即 實用 可能의 建物로서의 塔婆에서, 非實用的인 裝飾的인 造營으로 흐르게 되었으니 이는 다만 積聚를 뜻하든 塔婆 原意로의 回歸인 듯하기는 하나 그러나 實相에 있어서는 工藝的으로 頹落될 運命을 內在하고 있었던 것이다. 中國에서의 이러한 塔婆의 變相은 朝鮮으로서도 받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그것이 朝鮮의 塼塔이다. 그러나 幸일지 不幸일지 朝鮮은 塼의 나라가 아니였다. 塼은 가장 非生產的인 資料이었다. 樂浪帶力의 塼甕古墳, 二影響에서 造營된 公州의 약간의 塼甕古墳을 除하고서는 三國 以後 近代에 이르기까지 純粹한 塼甓의 建物이란 朝鮮서 찾을 수 없다. 塼塔의 形式을 朝鮮에 最初로 傳하였다는 芬皇寺의 塔이 塼 그 自體로써 造築된 것이 아니요 安山岩 塼에 擬模시켜 造築한 것이며 九黃里 廢寺址에도 이와 類似한 破塔材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아 新羅의 初期塼塔, 即 朝鮮의 初期塼塔이 石材에서 出發치 아니하면 아니되었던, 即 塼이 非生產的이였던 事情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當代에 塼에 知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前에 말한 釋良志가 小塼塔을 造成하여 錫杖寺中에 奉安한 事實이 三國遺事에 보여 있다.
이와 같이 전은 비생산적이었으나 그러나 전탑에 〿한 부시적 동경은 마침내 흑갈색의 안산암을 장 약 1척 2촌으로부터, 1척 8촌까지, 후 약 2촌 5분으로부터 3촌까지의 소석편으로 만들어 축탑케 하였다. 그러므로 재료는 석재라 하더라도 목적과 의식이, 따라서 수법과 양식이 전부 전탑규약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는 방황사의 탑과 및 구황리 폐사지에 였는 파탑을 조선 전탑의 선구로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9-2이와 같이 塼은 非生產的이었으나 그러나 塼塔에 〿한 不時的 憧憬은 마침내 黑褐色의 安山岩을 長 約 1尺 2寸으로부터, 1尺 8寸까지, 厚 約 2寸 5分으로부터 3寸까지의 小石片으로 만들어 築塔케 하였다. 그러므로 材料는 石材라 하더라도 目的과 意識이, 따라서 手法과 樣式이 全部 塼塔規約에 屬한 것이므로 우리는 芳皇寺의 塔과 및 九黃里 癈寺址에 였는 破塔을 朝鮮 塼塔의 先驅로 보지 아니할 수 없다.
구황리 무명폐사지에 있다는 탑재는 전혀 그 원형을 복구 상상키 어려우나, 문석파재의 수법이라든지 〿〿〿〿의 부조양식이라든지 토단대의 류사한 점 등에서 분황사탑과 동대의 작품으로 동일 양식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분황사 탑파의 양식을 고찰함으로써 조선 전탑의 원시양식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대저 이 분황사에 활하여는 일찍이 삼국사기에 선덕왕 3년(A.D.634)에 준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탑파에 관하여는 하등의 문헌이 없더니 동경 잡기에

芬皇寺九層塔 新羅三寶之一也 壬辰之亂 賊毁其半 後有愚僧 欲改築之 又毁其半 得一珠 形如碁子 光似水精 擧而燭之 則洞見其外 太陽照處 以綿近之 則火發燃綿 今藏在栢栗寺

라는 기사가 있음에서 일찍이 그 층급을 문제하고 또 외적 조복의 황룡사탑 건립연기를 이 편에 부회하는 등, 동경잡기의 오기(신라 삼보지일로서의 탑은 이 분황사탑이 아니고 황룡사 구층탑이었다)에 입각한 오륜무설이 일시 유행되었으나 근자는 순전히 조형형식에 입각한 층급설이 운운되어 원형을 7층으로 봄이 가장 타당한 듯이 되어있다.(주석47) 대정 4년, 총독부의 손으로 전부 수축할 때 탑중 석함에서 장김구, 옥류, 패기, 김은동의 용기, 재봉도구 등 고신라의 유물과 함께 숭녕중보, 오수상평 등 고려 이래의 고전이 발견되어 근고에 이미 개탑의 흔적이 된 바 있었지만 수복되기 전의 상태를 복구시켜보면 방 약 43척 고 약 3척 8촌의 화강잡석의 기단이 탑신의 지평석을 향하여 약 5인 고로 비스듬히 올라가고 이 지평석 위에 변장 약 21척 45촌대의 탑신이 놓여있다. 옥개는 륙단의 받침이 밑에서 받쳐올리고 칠단째가 첨아로 되었고 상이은 다시 10단의 층단이 제2탑신으로 향하여 비스듬히 줄어들어 갔다. 제2층도 역연하고 제4층은 방추식으로 쌓아올라가다가 정상에서 발견된 앙화형 각부이 탑정에 놓여있다. 기단사우에는 원악 6개의 사자좌상이 있었다 하나 량개는 다른 곳에서 섞여든 것이요 4개석이 호탑의 의미로 안치되었으리라 하며 탑신에는 사면에 화강석으로 상미 지법 문주 등을 짜아 만든 감실연구가 있고 실내에는 사면불이(註48) 봉안되었었을 것이나 이곳은 일찍이 파훼 개축되어 원상이 부명하고 문주 양편에는 가장 우수한 조각의 김강력사 입상이 남아있다. 총고 현재 약 30척여, 고도에 있어서 그리 장하지는 못하나 전체 폭도에서 웅위한 패기를 감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즉 기단이 저왜광대하고 초층탑신이 장구입방으로 되어있어 안정솔이 극도로 발휘되어 있는 곳에 삼국기 탑파의 특색을 갖고 있는 동시에 옥개의 층단수법이 박탑으로서의 최초의 수법을 규약짓고 있는 것이다.
쪽수▶P19-3九黃里 無名廢寺址에 있다는 塔材는 全혀 그 原形을 復舊 想像키 어려우나, 門石破材의 手法이라든지 〿〿〿〿의 浮彫樣式이라든지 土壇大의 類似한 點 等에서 芬皇寺塔과 同代의 作品으로 同一 樣式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P20우리는 芬皇寺 塔婆의 樣式을 考察함으로써 朝鮮 塼塔의 原始樣式을 알 수 있다 하겠다. 大抵 이 芬皇寺에 闊하여는 일찍이 三國史記에 善德王 3年(A.D.634)에 竣成되었다는 記錄이 있으나 塔婆에 關하여는 何等의 文献이 없더니 東京 雜記에
芬皇寺九層塔 新羅三寶之一也 壬辰之亂 賊毁其半 後有愚僧 欲改築之 又毁其半 得一珠 形如碁子 光似水精 擧而燭之 則洞見其外 太陽照處 以綿近之 則火發燃綿 今藏在栢栗寺
라는 記事가 있음에서 일찍이 그 層級을 問題하고 또 外敵 調伏의 皇龍寺塔 建立緣起를 이 便에 附會하는 等, 東京雜記의 誤記(新羅 三寶之一로서의 塔은 이 芬皇寺塔이 아니고 皇龍寺 九層塔이었다)에 立脚한 誤倫繆說이 一時 流行되었으나 近者는 純全히 造型形式에 立脚한 層級說이 云云되어 原形을 7層으로 봄이 가장 妥當한 듯이 되어있다.(주석47) 大正 4年, 總督府의 손으로 全部 修築할 때 塔中 石函에서 裝金具, 玉類, 貝器, 金銀銅의 容器, 裁縫道具 等 古新羅의 遺物과 함께 崇寧重寶, 五銖常平 等 高麗 以來의 古錢이 發見되어 近古에 이미 開塔의 痕跡이 된 바 있었지만 修復되기 前의 狀態를 復舊시켜보면 方 約 43尺 高 約 3尺 8寸의 花崗雜石의 基壇이 塔身의 地平石을 向하여 約 5人 高로 비스듬히 올라가고 이 地平石 위에 邊長 約 21尺 45寸大의 塔身이 놓여있다. 屋蓋는 六段의 받침이 밑에서 받쳐올리고 七段째가 檐牙로 되었고 上而은 다시 10段의 層段이 第2塔身으로 向하여 비스듬히 줄어들어 갔다. 第2層도 亦然하고 第4層은 方錐式으로 쌓아올라가다가 頂上에서 發見된 仰花形 角不이 塔頂에 놓여있다. 基壇四隅에는 원악 6個의 獅子坐像이 있었다 하나 兩介는 다른 곳에서 섞여든 것이요 4介石이 護塔의 意味로 安置되었으리라 하며 塔身에는 四面에 花崗石으로 上楣 地法 門柱 等을 짜아 만든 龕室緣口가 있고 室內에는 四面佛이(註48) 奉安되었▶P21-1었을 것이나 이곳은 일찍이 破毁 改築되어 原狀이 不明하고 門柱 兩便에는 가장 優秀한 彫刻의 金剛力士 立像이 남아있다. 總高 現在 約 30尺餘, 高度에 있어서 그리 壯하지는 못하나 全體 幅度에서 雄偉한 覇氣를 感得할 수 있는 作品이다. 即 基壇이 低矮廣大하고 初層塔身이 長矩立方으로 되어있어 安定率이 極度로 發揮되어 있는 곳에 三國期 塔婆의 特色을 갖고 있는 同時에 屋蓋의 層段手法이 博塔으로서의 最初의 手法을 規約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탑파를 계기로 하여 비생산적인 전벽으로써 조탑을 꾀하게 된 통일기 이후의 전탑은 건축적 안정솔보다도 장고수식의 건물로 변상되었으니 우리는 그 최고한 예로 안동읍내 신세동의 7층전탑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조선서 가장 최초로 전을 사용하여 조축한 고탑으로서(現在 총고 약 45, 6척이니 조선전탑으로서는 최고한 유물이다) 옥개의 수법은 전이란 재료에서 필연적으로 유도된 역단 받침으로써 분황사탑과 같이 처리되었으나 옥개 상이에는 용와잔편이 처처에 남아 있어 목조 고루 건물의 의태를 충실히 모방하였고 정상의 노반 이상은 궤락되었으나 제일탑신의 남면에는 감실이 열려 있어 내부 천정이 사각방추형으로 줄어들어 정상에 찰주장간이 꾀여 있었던 한 수혈이 높이 뚫려있고 실내에는 불상이 안치되었던 듯하나 지금은 그 형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러한 탑신의 준초, 도와의 수식적 모방, 일실 이상 더 경영할 수 없는 초층탑신의 소규모성 등에서 우리는 그 건물로서의 생동적 본의의 발로보다도 일개의 장치물로서의 의태를 충분히 볼 수 있으나 그러나 이러한 장치물로서의 의태를 우리는 그 기단의 수법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증득할 수 있다. 즉 기단은 원래 중층이었던 모양이나 상층은 궤락된 채 석회로써 단분에 가차없게 아무렇게나 보강되어있으니 문제치 말고 하성기단 횡 2척 7촌 종 2척 6촌 내외의 화강판석이 전면은 중간에 층단이 놓였으므로 좌우에 이매식 감입되어 있으나 좌우측면과 후면에는 다소 원상과는 전함이 있다 하더라도 각면 육매식 나립(羅立)되었고 각 석면마다 천부좌상의 주경(遒勁)한 부조모양이 남아 있다. 즉 이곳에 건축적 의욕보다도 수식물로서의 의욕이 의식적으로 목적적으로 발휘되어 있는 것이다.
쪽수▶P21-2그러나 이러한 塔婆를 契機로 하여 非生產的인 塼甓으로써 造塔을 꾀하게 된 統一期 以後의 塼塔은 建築的 安定率보다도 裝高修飾의 建物로 變相되었으니 우리는 그 最古한 例로 安東邑內 新世洞의 7層塼塔을 들 수 있다. 이 塔은 朝鮮서 가장 最初로 塼을 使用하여 造築한 高塔으로서(現在 總高 約 45, 6尺이니 朝鮮塼塔으로서는 最高한 遺物이다) 屋蓋의 手法은 塼이란 材料에서 必然的으로 誘導된 曆段 바침으로써 芬皇寺塔과 같이 處理되었으나 屋蓋 上而에는 茸瓦殘片이 處處에 남아 있어 木造 高樓 建物의 意態를 充實히 模倣하였고 頂上의 露盤 以上은 潰落되었으나 第一塔身의 南面에는 龕室이 열려 있어 內部 天井이 四角方錐形으로 줄어들어 頂上에 擦柱長竿이 꾀여 있었던 한 隧穴이 높이 뚫려있고 室內에는 佛像이 安置되었던 듯하나 지금은 그 形跡조차 찾을 수 없다. 이러한 塔身의 峻峭, 道瓦의 修飾的 模倣, 一室 以上 더 經營할 수 없는 初層塔身의 小規模性 等에서 우리는 그 建物로서의 生動的 本意의 發露보다도 一介의 裝置物로서의 意態를 充分히 볼 수 있으나 그러나 이러한 裝置物로서의 意態를 우리는 그 基壇의 手法에서 더욱 具體的으로 證得할 수 있다. 即 基壇은 元來 重層이었던 모양이나 上層은 潰落된 채 石灰로써 丹墳에 가차없게 아무렇게나 補强되어있으니 問題치 말고 下成基壇 橫 2尺 7寸 縱 2尺 6寸 內外의 花崗板石이 前面은 中間에 層段이 놓였으므로 左右에 二枚式 嵌入되어 있으나 左右側面과 後面에는 多少 原狀과는 錢함이 있다 하더라도 各面 六枚▶P22-1式 羅立되었고 各石面마다 天部坐像의 遒勁한 浮彫模樣이 남아 있다. 即 이곳에 建築的 意欲보다도 修飾物로서의 意欲이 意識的으로 目的的으로 發揮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욕의 경향을 신라 대 이후 어떠한 전탑에서든지 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시대가 떨어질수록 더욱 발휘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안동읍내 남부에 또 하나 있는 오층전탑은 기단이 전혀 파궤되어 원상을 알 수 없으나 탑신옥개의 수법이 전혀 신세동의 탑파와 같고 기단의 조식이 저것보다 장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초층 탑신 남면에 소감 일실이 의연히 경영되고 제2탑신에는 인왕 양상을 고육부조로 양각한 화강방석이 순전히 장식적으로 끼여 있고 제3탑신에는 소공감실이 또다시 형식적으로 뚫려있다. 물론 감실에는 모두 불상이 놓여 있었을 것이로되 지금은 남아있지 아니하였다. 또 일직면 조탑동에 있는 오층전탑도 입체양식은 대개 전자와 같으나 제일탑신은 화강방석으로써 조축하여 남면에 일실을 경영하고 문협립석에는 웅건한 조법으로 된 고육부조의 인왕립상이 감벽되어 있고 박면에는 처처에 실상화만이 양각되어있다. 즉 전이 비생산적인 재료이므로 귀중히 씨여있고 귀중한 재료이므로 화엄을 도읍기 위하여 씨여있고 화엄을 도읍기 위함으로써 전면 자체에 화식이 가공된 것이니 청도군내 불령사에 있는 전탑의 파재에 실상화만과 불보살과 탑형들이 양각되어 있는 것이라든지(주사구) 불상전당 등을 양각한 출소부명의 파탑전재가 처처에 있음이라든지(주석50) 모두 장식품으로서의 전탑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쪽수▶P22-2이러한 藝術意欲의 傾向을 羅代 以後 어떠한 塼塔에서든지 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時代가 떨어질수록 더욱 發揮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即 安東邑內 南部에 또 하나 있는 五層塼塔은 基壇이 全혀 破潰되어 原狀을 알 수 없으나 塔身屋蓋의 手法이 全혀 新世洞의 塔婆와 같고 基壇의 彫飾이 저것보다 壯嚴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初層 塔身 南面에 小龕 一室이 依然히 經營되고 第二塔身에는 仁王 兩像을 高肉浮彫로 陽刻한 花崗方石이 純全히 裝飾的으로 끼여 있고 第三塔身에는 小空龕室이 또다시 形式的으로 뚫려있다. 勿論 龕室에는 모두 佛像이 놓여 있었을 것이로되 지금은 남아있지 아니하였다. 또 一直面 造塔洞에 있는 五層塼塔도 立體樣式은 大概 前者와 같으나 第一塔身은 花崗方石으로써 造築하여 南面에 一室을 經營하고 門狹立石에는 雄健한 彫法으로 된 高肉浮彫의 仁王立像이 嵌壁되어 있고 博面에는 處處에 實相花蔓이 陽刻되어있다. 即 塼이 非生產的인 材料이므로 貴重히 씨여있고 貴重한 材料이므로 華嚴을 도읍기 爲하여 씨여있고 華嚴을 도읍기 爲함으로써 塼面 自體에 華飾이 加工된 것이니 淸道郡內 佛靈寺에 있는 塼塔의 破材에 實相花蔓과 佛菩薩과 塔形들이 陽刻되어 있는 것이라든지(註四九) 佛像殿堂 等을 陽刻한 出所不明의 破塔塼材가 處處에 있음이라든지(주석50) 모두 裝飾品으로서의 塼塔의 價値를 證明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중에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 있는 오층전탑은 탑재에 유려한 화문이 양각되어 있어 일찍부터 유명하였으나 성화만력 옹정 년간을 두고 누차의 수복을 입은 까닭에(주51) 원형은 매우 왜곡되었을 것이요 더욱이 이 탑파의 초건년대에 관하여는 신라 초의 설과 고려 말의 설이 대립되고 있어(주44) 아직 귀결을 보지 못한 채 있지만 대체에 있어 장식적 예술의욕을 가진 계통의 작으로 간주된다.
쪽수▶P22-3이 中에 京畿道 驪州 神勒寺에 있는 五層塼塔은 塔材에 流麗한 花紋이 陽刻되어 있어 일찍부터 有名하였으나 成化萬曆 雍正年間을 두고 屢次의 修復을 입은 까닭에(註51) 原形은 매우 歪曲되었을 것이요 더욱이 이 塔婆의 初建年代에 關하여는 新羅 初의 說과 高麗 末의 說이 對立되고 있어(註44) 아직 歸結을 보지 못한 채 있지만 大體에 있어 裝飾的 藝術意欲을 ▶P23-1가진 系統의 作으로 看做된다.
이외에 문헌상으론 여지승람 권49 갑산 산천조에 "백탑동유전탑"이라 하였으나 조선의 전탑으로 간경할 것인지 의문이며 동서 권25 영천 고적조에 유명한 무신탑이란 것이 있지만 지금은 없어진 듯하며 삼국유사에는 례의 석량지가 소전탑을 조성하여 석장사에 안치한 사실이 보이나 모두 그 형식을 알 수 없고 여지승람 권10 금천 안양사조에 보이는 안의사의 칠층전탑이란 것은 고려태조의 창건으로 부하여 있을 뿐 아니라 조형 상으로도 특별한 장엄이 있었던 듯하다. 이숭인의 중수기문중 한 절에

按寺乘 昔太祖將征不庭 行過此 望山頭 雲成五采 異之 使人往視 果得老浮屠雲下 名能正 與之言稱旨 此寺之所出立也 寺之南有塔 累甎七層 蓋以瓦 最下一層 環以周廡十又二間 毎壁繪佛扶隆 人天之像 外樹楯楣 以限出入 其爲匝麗 他寺未有也

라고 있다. 즉 사탑건립의 녹유인 동시에 탑파형식의 보고이니 상거한 기문에 의하건대 대경 2형식이 안동읍 신세동에 있는 칠장전탑과 근사하였을 것이로되 초층탑신의 감실이 없고 기단도 닯았을(달랐을) 듯하며 제일탑신을 싸고도는 주무가 목조회각으로 삼간사지이었고 매벽에 불보살인천지상을 회식한 모양이나 이는 후문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무각 외부에는 난순이 돌려 있었다 한다. 즉 특별한 장치인데 우왕 7년(신유세) 중창시의 사략을 보면

起工是年八月某甲子也 斷手九月某甲子也 落成冬十月某甲子也 是日殿下遺內侍朴元桂降香 以道侶一千 大作佛事安舍利十二並佛牙 一塔中訖 布施四衆 無慮三千焉 其丹腦 歲壬戍春三月也 英繪像 歲癸亥秋八月也 塔內四壁 東藥師會 南釋迦涅槃會 西彌陀極樂會 北金經神衆會 周廡十二間 每壁一像 所謂十二行年佛〿

라 있다. 즉 탑내 사벽이란 것은 제일탑신의 사면을 말한 것일지니 탑신에는 물론 사리 열둘과 불아 하나가 봉안되었고 그것을 호위하여 탑신외면에 사회도가 있었던 것이며 주무십이간 매벽일상의 12행년불의 회상이 있었다 하니 삼간사지의 건물매간에 회상이 있었다면 문호경영이 없었던 듯하니 실제에 있어 가능하였을까가 의문이다. '外樹欄楯以限出入'이란 구에서 혹 그럴듯하게 생각할런지 모르나 탑내 사벽에 회상을 베풀었다면 주무를 통하여 들어가지 않지 못할 것이요 또 주무십이간의 회벽도 외면벽에 그려진 것이 아니요 내면벽에 그려졌을 것이니 기문이 다소 모호한 점이 없지 않으나 대체로 특수한 전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형은 일찍이 파훼된 듯하여 (여지승람에까지 실린 것을 보아 리조 중엽까지는 있었던 듯하지만) 지금 그 파탑전재가 총독부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는데 그 전면에는 불좌상이 수위씩 부조되어 있으므로 보아 전체로 매우 화려한 탑파이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쪽수▶P23-2以外에 文獻上으론 輿地勝覽 卷49 甲山 山川條에 "白塔洞有塼塔"이라 하였으나 朝鮮의 塼塔으로 看儆할 것인지 疑問이며 同書 卷25 榮川 古跡條에 有名한 無信塔이란 것이 있지만 지금은 없어진 듯하며 三國遺事에는 例의 釋良志가 小塼塔을 造成하여 錫杖寺에 安置한 事實이 보이나 모두 그 形式을 알 수 없고 輿地勝覽 卷10 衿川 安養寺條에 보이는 安義寺의 七層塼塔이란 것은 高麗太祖의 創建으로 傅하여 있을 뿐 아니라 造型 上으로도 特別한 壯嚴이 있었던 듯하다. 李崇仁의 重修記文中 一節에
按寺乘 昔太祖將征不庭 行過此 望山頭 雲成五采 異之 使人往視 果得老浮屠雲下 名能正 與之言稱旨 此寺之所出立也 寺之南有塔 累甎七層 蓋以瓦 最下一層 環以周廡十又二間 毎壁繪佛扶隆 人天之像 外樹楯楣 以限出入 其爲匝麗 他寺未有也
라고 있다. 即 寺塔建立의 綠由인 同時에 塔婆形式의 報告이니 上擧한 記文에 依하건대 大經 2形式이 安東邑 新世洞에 있는 七將塼塔과 近似하였을 것이로되 初層塔身의 龕室이 없고 基壇도 닯았을 듯하며 第一塔身을 싸고도는 周廡가 木造回閣으로 三間四至이었고 每壁에 佛菩薩人天之像을 繪飾한 모양이나 이는 後文에 具體的으로 叙述되어 있으며 廡閣 外部에는 欄楯이 돌려 있었다 한다. 即 特別한 裝置인데 禑王 7年(辛酉歲) 重創時의 事略을 보면
起工是年八月某甲子也 斷手九月某甲子也 落成冬十月某甲子也 是日殿下遺內侍朴元桂降香 以道侶一千 大作佛事安舍利十二並佛牙 一塔中訖 布施四衆 無慮三千焉 其丹腦 歲壬戍春三月也 英繪像 歲癸亥秋八月也 塔內四壁 東藥師會 南釋迦涅槃會 西彌陀極樂會 北金經神衆會 周廡十二間 每壁一像 所謂十二行年佛〿
▶P24-1라 있다. 即 塔內 四壁이란 것은 第一塔身의 四面을 말한 것일지니 塔身에는 勿論 舍利 12와 佛牙 1이 奉安되었고 그것을 護衛하여 塔身外面에 四會圖가 있었던 것이며 周廡十二間 每壁一像의 12行年佛의 繪像이 있었다 하니 三間四至의 建物每間에 繪像이 있었다면 門戶經營이 없었던 듯하니 實際에 있어 可能하였을까가 疑問이다. 外樹欄楯以限出入이란 句에서 혹 그럴듯하게 생각할런지 모르나 塔內 四壁에 繪像을 베풀었다면 周廡를 通하여 들어가지 않지 못할 것이요 또 周廡十二間의 繪壁도 外面壁에 그려진 것이 아니요 內面壁에 그려졌을 것이니 記文이 多少 模糊한 點이 없지 않으나 大體로 特殊한 塼塔이었음을 알 수 있다. 原形은 일찍이 破毁된 듯하여 (輿地勝覽에까지 실린 것을 보아 李朝 中葉까지는 있었던 듯하지만) 지금 그 破塔塼材가 總督府 博物館에 收藏되어 있는데 그 塼面에는 佛坐像이 數位씩 浮彫되어 있으므로 보아 全體로 매우 華麗한 塔婆이였음을 想像할 수 있다.
이상은 현금까지 알려져 있는 조선전탑의 전반례이다. 이밖에 안동군 길안면, 남후면에 각 일기가 있다는 항설이 있으나 아직 조사되지 않은 채 있어 그 유무도 부명이요 일찍이 신라시대 유탑으로 상주읍 외에 「석심토피」의 오중탑이 있어 (주52) 특이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나 대체로 전탑의욕을 모방한 것으로 유명하였지만 수년전에 도괴되어 다시 더 참고할 여지도 없이 되었다.
쪽수▶P24-2以上은 現今까지 알려져 있는 朝鮮塼塔의 全般例이다. 이밖에 安東郡 吉安面, 南後面에 各 一基가 있다는 巷說이 있으나 아직 調査되지 않은 채 있어 그 有無도 不明이요 일찍이 新羅時代 遺塔으로 尙州邑外에 「石心土皮」의 五重塔이 있어 (註52) 特異한 部類에 屬하는 것이나 大體로 塼塔意欲을 模倣한 것으로 有名하였지만 數年前에 倒壞되어 다시 더 參考할 餘地도 없이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서의 전탑은 그 수가 목조탑파와 못지 않게 소수에 속하며 또 목조탑파와 보조를 같이하여 건축적에서 장식적인 것에로 변천되었다하나 재료의 성질상 목조탑파보다 일층 더 장식적인 것으로의 경향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슨 연관성을 가진 계연된 발생을 보였다느니 보다 드문 드문 화화적 성생사를 보이고 또 그건립 인연에 있어, 신라 통일 초의 일시적 조성사실과 조응되어 려조통업기에 부시적건립을 보게 될 것은 그 수탑의식에 목탑건립의식과 동일한 작용에 대응하고 있는 듯하니 이러한 점들은 요컨대 전탑이 조선서는 건립되기 어려운, 즉 박이 비생산적 재료이요 따라서 귀중한 재료이었던 것에 전반적 이유가 있었지 아니하였을까 목조탑파는 장구한 시일과 복잡한 공기와 허다한 비용을 들여도 영구히 보존키 어렵고 전탑 역시 상술한 바와 같이 비경제적이요 또 용역치 않은 것이었다면 가람의 창립이 매년 급속도로 증가되는 대세에 수응되기 위하여 조선서 재료적으로 얻기 쉽고 공기적으로 단순 용역하고 보존에 영구성이 다대한 석탑건립이 급도로 발전되고 따라서 그곳에 비로소 조선적 특색이 발휘되었음에 하등의 이상을 느낄 바 없다. 이곳에 석탑파의 양식을 연구함으로써 본연구의 중심이 있다 하겠다. (속)
쪽수▶P24-3이와 같이 朝鮮서의 塼塔은 그 數가 木造塔婆와 못지 않게 少數에 屬하며 또 木造塔婆와 步調를 같이하여 建築的에서 裝飾的인 것에로 變遷되었다하나 材料의 性質上 木造塔婆보다 一層 더 裝飾的인 것으로의 傾向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슨 連關性을 가진 繼聯된 發生을 보였다느니 보다 드문 드문 花火的 成生史를 보이고 또 그建立 因緣에 있어,▶P25新羅 統一初의 一時的 造成事實과 照應되어 麗朝統業期에 不時的建立을 보게 될 것은 그 樹塔意識에 木塔建立意識과 同一한 作用에 對應하고 있는 듯하니 이러한 點들은 要컨대 塼塔이 朝鮮서는 建立되기 어려운, 即 博이 非生產的 材料이요 따라서 貴重한 材料이었던 것에 全般的 理由가 있었지 아니하였을까 木造塔婆는 長久한 時日과 複雜한 工技와 許多한 費用을 들여도 永久히 保存키 어렵고 塼塔 역시 上述한 바와 같이 非經濟的이요 또 容易치 않은 것이었다면 伽藍의 創立이 年復年 急速度로 增加되는 大勢에 需應되기 爲하여 朝鮮서 材料的으로 얻기 쉽고 工技的으로 單純 容易하고 保存에 永久性이 多大한 石塔建立이 急度로 發展되고 따라서 그곳에 비로소 朝鮮的 特色이 發揮되었음에 何等의 異常을 느낄 바 없다. 이곳에 石塔婆의 樣式을 硏究함으로써 本硏究의 中心이 있다 하겠다. (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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