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화적에 대하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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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원문1번=一般으로 朝鮮文化 方面이 다 그러하지만 美術工藝品에 있어서도 文獻 乃至 遺跡이 稀貴한 中 特히 上古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無怪한 편이나 僅僅 五百年 前 乃至 千年 前 間의 高麗의 畫跡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奇怪를 지나 처 摩訶 不可思議의 일이라 할 만하다. 論者 있어 그 理由를 說明하여 가로되 或은 兵禍不息을 擧證하고 或은 藝道에 對한 一般의 無敎無關心을 附會하나 前論은 오히려 事實에 近似하지만 後論은 一段의 檢討를 經하여야 할 것이 爲先 筆者가 當場에 問題하고 있는 高麗의 藝道에 對한 愛好가 凡論常識으로써 議할 바 아니어서 斷簡 尺素 散見되는 記錄에서나마 一大 豪華版을 그려낼 수 있으니 麗初 以來 寺社建築의 莊嚴, 顯高 間의 八萬大藏經과 一般書籍의 印行, 毅宗 前後의 別宮 離殿의 修麗와 및 靑磁의 發達, 忠烈 忠宣間의 寫經藝術의 發達, 其他 塔碑, 螺鈿漆器, 金錯銅器의 發達 이러한 晝道 以外의 片例를 모두 姑捨是하고 純全히 繪畫美術에서의 例만 들더라도 國初의 圖畫院 乃至 畫局의 設立이 大書特書할 重要한 事實로 「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같은 內外가 推抑하는 唯一의 朝鮮美術案內書도「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云云의 妄論을 輕擧히 斷論하였으나 高麗史 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 이란 記錄이 있고, 破閑集의 李寧의 記事中에 「睿宗時畫局」이란 句와 東文選 李仁老 二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J의 句가 있으니, 畫院畫局의 存在를 어찌 疑心하랴。實로 이 畫院의 設置야말로 將次로는 繪畫美術의 校化(아카데미슴)의 一 遠因을 形成할 것이나, 그러나 그 施設 當初에 있어서는 畫用의 重且大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br/> 그러나 高麗時代의 畫道에 對한 愛好를 이 畫院의 一事로써만 立證하려 함은 九牛一毛에 比의 不過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具體的 事實을 들어 말하면, 歷代 諸王 中 獻宗(주석1) 仁宗(주석2) 明宗 忠宣王 恭愍王 等 至尊으로서 畫道에 精進한 이가 많음은 歷史上 드문 일이며, 睿宗은 天章閣을 九禁에 剏立하여 宋帝의 御筆書畫를 玩藏하여 때때로 群臣에게  宣示하였으며, 毅宗朝에는 內侍의 左右番이 遊競에 憑托하여 珍寶 書畫를 獻上하였으며, 忠宣王은 燕邸에 萬卷堂을 剏構하 閻復, 姚燧, 趙孟頫, 虞集 等 碩儒와 名畫 大家들로 交遊하되 特히 本國에서 詩書畫三絕로 稱頌되던 李益齋를 召致하여 그들과 交遊하게 하였으니, 王이 이미 能書의 才로써 다시 三絕의 益齋公을 召致한 것은 忖度하건댄 例文致學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畫道에 精進, 名畫의 收拾에도 意略이 있었다 할 것이니 趙孟顆(주석3) 벌써 名畫大家이지만 姑蘇 朱德潤과도 親交를 맺고 王公儼,任仁癸, 李衎, 張彥輔, 劉道權 等 大家들을 品騰하며, 韋偃의 畫松 韓幹의 畫馬 等 古畫를 들어 詩畫一致의 畫論을 設立한 鷄林公이 어찌 高麗畫 發展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士大夫로서 畫道에 能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주석4)─ 智勒寺의 廣智禪師가 一釋徒로서 「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好畫癖을 들지 마자(5) 그러나 圖畫見聞誌에「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無一二, 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同書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麗人의 好畫癖의 一端 證明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高麗史列 傳 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微光弼 三韓圖畫殆絕矣, 基厚乃署之」라함이 있으니 明宗은 오히려 能畫人物인 만큼 그 意見은 個人的 意見에 不過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 「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衆意를 強調한 것이며 「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大勢를 알고 서의 結着이었든지 千言萬辭의 注釋을 要치 않는 絕對의 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畫道에 對한 關心은 高麗社會에 一般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決코 李朝末葉 以後의 朝鮮의 情狀으로써 過去를 忖度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br/>그러면 上述한 背景 속에서 자라난 高麗의 繪畫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筆者가 貧弱한 文獻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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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원문1번= {{TagSpage|109}}一般으로 朝鮮文化 方面이 다 그러하지만 美術工藝品에 있어서도 文獻 乃至 遺跡이 稀貴한 中 特히 上古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無怪한 편이나 僅僅 五百年 前 乃至 千年 前 間의 高麗의 畫跡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奇怪를 지나 처 摩訶 不可思議의 일이라 할 만하다. 論者 있어 그 理由를 說明하여 가로되 或은 兵禍不息을 擧證하고 或은 藝道에 對한 一般의 無敎無關心을 附會하나 前論은 오히려 事實에 近似하지만 後論은 一段의 檢討를 經하여야 할 것이 爲先 筆者가 當場에 問題하고 있는 高麗의 藝道에 對한 愛好가 凡論常識으로써 議할 바 아니어서 斷簡 尺素 散見되는 記錄에서나마 一大 豪華版을 그려낼 수 있으니 麗初 以來 寺社建築의 莊嚴, 顯高 間의 八萬大藏經과 一般書籍의 印行, 毅宗 前後의 別宮 離殿의 修麗와 및 靑磁의 發達, 忠烈 忠宣間의 寫經藝術의 發達, 其他 塔碑, 螺鈿漆器, 金錯銅器의 發達 이러한 晝道 以外의 片例를 모두 姑捨是하고 純全히 繪畫美術에서의 例만 들더라도 國初의 圖畫院 乃至 畫局의 設立이 大書特書할 重要한 事實로 「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같은 內外가 推抑하는 唯一의 朝鮮美術案內書도「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云云의 妄論을 輕擧히 斷論하였으나, {{TagPage|110}}高麗史 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 이란 記錄이 있고, 破閑集의 李寧의 記事中에 「睿宗時畫局」이란 句와 東文選 李仁老 二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J의 句가 있으니, 畫院畫局의 存在를 어찌 疑心하랴。實로 이 畫院의 設置야말로 將次로는 繪畫美術의 校化(아카데미슴)의 一 遠因을 形成할 것이나, 그러나 그 施設 當初에 있어서는 畫用의 重且大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br/> 그러나 高麗時代의 畫道에 對한 愛好를 이 畫院의 一事로써만 立證하려 함은 九牛一毛에 比의 不過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具體的 事實을 들어 말하면, 歷代 諸王 中 {{TagRef|1}}獻宗<ref>원문주석1</ref> {{TagRef|2}}仁宗<ref>원문주석2</ref> 明宗 忠宣王 恭愍王 等 至尊으로서 畫道에 精進한 이가 많음은 歷史上 드문 일이며, 睿宗은 天章閣을 九禁에 剏立하여 宋帝의 御筆書畫를 玩藏하여 때때로 群臣에게  宣示하였으며, 毅宗朝에는 內侍의 左右番이 遊競에 憑托하여 珍寶 書畫를 獻上하였으며, 忠宣王은 燕邸에 萬卷堂을 剏構하 閻復, 姚燧, 趙孟頫, 虞集 等 碩儒와 名畫 大家들로 交遊하되 特히 本國에서 詩書畫三絕로 稱頌되던 李益齋를 召致하여 그들과 交遊하게 하였으니, 王이 이미 能書의 才로써 다시 三絕의 益齋公을 召致한 것은 忖度하건댄 例文致學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畫道에 精進, 名畫의 收拾에도 意略이 있었다 할 것이니 {{TagRef|3}}趙孟顆<ref>원문주석3</ref> 벌써 名畫大家이지만 姑蘇 朱德潤과도 親交를 맺고 王公儼,任仁癸, 李衎, 張彥輔, 劉道權 等 大家들을 品騰하며, 韋偃의 畫松 韓幹의 畫馬 等 古畫를 들어 詩畫一致의 畫論을 設立한 鷄林公이 어찌 高麗畫 發展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 {{TagRef|4}}士大夫로서 畫道에 能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ref>원문주석4</ref>─ 智勒寺의 廣智禪師가 一釋徒로서 {{TagRef|5}}「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好畫癖을 들지 마자<ref>원문주석5</ref> 그러나 圖畫見聞誌에「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無一二, 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同書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TagPage|111}}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麗人의 好畫癖의 一端 證明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高麗史列 傳 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微光弼 三韓圖畫殆絕矣, 基厚乃署之」라 함이 있으니 明宗은 오히려 能畫人物인 만큼 그 意見은 個人的 意見에 不過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 「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衆意를 強調한 것이며 「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大勢를 알고 서의 結着이었든지 千言萬辭의 注釋을 要치 않는 絕對의 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畫道에 對한 關心은 高麗社會에 一般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決코 李朝末葉 以後의 朝鮮의 情狀으로써 過去를 忖度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br/>그러면 上述한 背景 속에서 자라난 高麗의 繪畫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筆者가 貧弱한 文獻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소개글해독문1번=일반으로 조선문화 방면이 다 그러하지만 미술공예품에 있어서도 문헌 내지 유적이 희귀한 중 특히 상고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무괴(無怪)한 편이나 근근 오백년 전 내지 천년 전 간의 고려의 별적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기괴를 지나 처 마하 불가사의의 일이라 할 만하다. 논자 있어 그 이유를 설명하여 가로되 혹은 병화부식(兵禍不息)을 거증하고 혹은 예도에 대한 일반의 무교무관심을 부회하나 전론은 오히려 사실에 근사하지만 후론은 일단의 검토를 경하여야 할 것이 위선 필자가 당장에 문제하고 있는 고려의 예도에 대한 애호가 범론상식으로써 의할 바 아니어서 단간 척소 산견되는 기록에서나마 일대 호화판을 그려낼 수 있으니, 여초 이래 사사건축의 장엄, 현고간의 팔만대장경과 일반서적의 인행, 의종 전후의 별궁 이전의 수려와 및 청자의 발달, 충렬 충선간의 사경예술의 발달, 기타 탑비, 나전칠기, 금착동기의 발달, 이러한 주도 이외의 편례를 모두 고사시하고 순전히 회화미술에서의 예만 들더라도 국초의 도화원 내지 화국의 설립이 대서특서할 중요한 사실로「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같은 내외가 추억하는 유일의 조선미술안내서도「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 운운의 망론을 경거히 단론하였으나, 고려사 백관지 외직(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이란 기록이 있고, 파한집(破閑集)의 이영(李寧)의 기사 중에 「睿宗時畫局」이란 구와 동문선 이인로 이상귀휴도찬서(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J의 구가 있으니, 화원화국의 존재를 어찌 의심하랴. 실로 이 화원의 설치야말로 장차로는 회화미술의 교화(아카데미슴)의 한 원인(遠因)을 형성할 것이나, 그러나 그 시설 당초에 있어서는 화용의 중차대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시설(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br/> 그러나 고려시대의 화도에 대한 애호를 이 화원의 한 일(一事)로써만 입증하려 함은 구우일모에 비의 불과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구체적 사실을 들어 말하면, 역대 제왕 중 헌종(주석1) 인종(주석2) 명종 충선왕 공민왕 등 지존으로서 화도에 정진한 이가 많음은 역사상 드문 일이며, 예종은 천장각(天章閣)을 구금에 창립하여 송제의 어필서화(御筆書畫)를 완장하여 때때로 군신에게 선시하였으며, 의종조에는 내시의 좌우번(左右番)이 유경(遊競)에 빙탁하여 진보 서화를 헌상하였으며, 충선왕은 연저(燕邸)에 만권당을 창구하 염복(閻復), 도수(姚燧), 조맹부(趙孟頫) 우집(虞集) 등 석유(碩儒)와 명화 대가들로 교유하되 특히 본국에서 시서화삼절(詩書畫三絕)로 칭송되던 이익재(李益齋)를 소치하여 그들과 교유하게 하였으니, 왕이 이미 능서의 재주로써 다시 삼절의 익재공(益齋公)을 소치한 것은 촌탁(忖度)하건댄 예문치학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화도에 정진, 명화의 수습에도 의략이 있었다 할 것이니 조맹과(趙孟顆)(주석3) 벌써 명화대가이지만 고소 주덕윤(朱德潤)과도 친교를 맺고 왕공엄(王公儼), 임인계(仁癸), 이간(李衎), 장언보(張彥輔), 유도권(劉道權) 등 대가들을 품등하며, 위언(韋偃)의 화송畫松 한간(韓幹)의 화마(畫馬) 등 고화를 들어 시화일치의 화론(畫論)을 설립한 계림공(鷄林公)이 어찌 고려화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 <br/> 사대부로서 화도에 능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주석4)─지륵사(智勒寺)의 광지선사(廣智禪師)가 일석도( 一釋徒)로서 「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호화벽을 들지 마자(주석5) 그러나 도화견문지(圖畫見聞誌)에 「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 無一二, {{ruby|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같은 글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고려인의 호화벽의 일단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려사 열전 이녕조(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ruby|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ruby|微光弼三韓圖畫殆絕矣|○○○○○○○○○○}}, {{ruby|基厚乃署之|○○○○○}}」라 함이 있으니 명종은 오히려 그림에 능한 인물인 만큼 그 의견은 개인적 의견에 불과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ruby|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중의를 강조한 것이며 「{{ruby|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대세를 알고 서의 결착이었든지 천언만사의 주석을 요(要)치 않는 절대의 호증(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화도에 대한 관심은 고려사회에 일반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결코 이조(李朝)말엽 이후의 조선의 정상으로써 과거를 촌도(忖道)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br/> 그러면 상술한 배경 속에서 자라난 고려의 회화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필자가 빈약한 문헌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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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해독문1번=일반으로 조선 문화 방면이 다 그러하지만 미술 공예품에 있어서도 문헌 내지 유적이 희귀한 중 특히 상고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무괴(無怪)한 편이나 근근 오백년 전 내지 천 년 전 간의 고려의 별적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기괴를 지나 처 마하 불가사의의 일이라 할 만하다. 논자 있어 그 이유를 설명하여 가로되 혹은 병화부식(兵禍不息)을 거증하고 혹은 예도에 대한 일반의 무교 무관심을 부회하나 전론은 오히려 사실에 근사하지만 후론은 일단의 검토를 경하여야 할 것이 위선 필자가 당장에 문제하고 있는 고려의 예도에 대한 애호가 범론상식으로써 의할 바 아니어서 단간 척소 산견되는 기록에서나마 일대 호화판을 그려낼 수 있으니, 여초 이래 사사건축의 장엄, 현고 간의 팔만대장경과 일반 서적의 인행, 의종 전후의 별궁 이전의 수려와 및 청자의 발달, 충렬 충선간의 사경예술의 발달, 기타 탑비, 나전칠기, 금착동기의 발달, 이러한 주도 이외의 편례를 모두 고사시하고 순전히 회화미술에서의 예만 들더라도 국초의 도화원 내지 화국의 설립이 대서특서할 중요한 사실로 '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 같은 내외가 추억하는 유일의 조선미술안내서도<cite no="01">"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cite> 운운의 망론을 경거히 단론하였으나, 고려사 백관지 외직(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이란 기록이 있고, 파한집(破閑集)의 이영(李寧)의 기사 중에 「睿宗時畫局」이란 구와 동문선 이인로 이상귀휴도찬서(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J의 구가 있으니, 화원화국의 존재를 어찌 의심하랴. 실로 이 화원의 설치야말로 장차로는 회화미술의 교화(아카데미슴)의 한 원인(遠因)을 형성할 것이나, 그러나 그 시설 당초에 있어서는 화용의 중차대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시설(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br/> 그러나 고려시대의 화도에 대한 애호를 이 화원의 한 일(一事)로써만 입증하려 함은 구우일모에 비의 불과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구체적 사실을 들어 말하면, 역대 제왕 중 {{TagRefT|1}}헌종<ref group="a">해독문주석1</ref> {{TagRefT|2}}인종<ref group="a">해독문주석2</ref> 명종 충선왕 공민왕 등 지존으로서 화도에 정진한 이가 많음은 역사상 드문 일이며, 예종은 천장각(天章閣)을 구금에 창립하여 송제의 어필서화(御筆書畫)를 완장하여 때때로 군신에게 선시하였으며, 의종조에는 내시의 좌우번(左右番)이 유경(遊競)에 빙탁하여 진보 서화를 헌상하였으며, 충선왕은 연저(燕邸)에 만권당을 창구하 염복(閻復), 도수(姚燧), 조맹부(趙孟頫) 우집(虞集) 등 석유(碩儒)와 명화 대가들로 교유하되 특히 본국에서 시서화삼절(詩書畫三絕)로 칭송되던 이익재(李益齋)를 소치하여 그들과 교유하게 하였으니, 왕이 이미 능서의 재주로써 다시 삼절의 익재공(益齋公)을 소치한 것은 촌탁(忖度)하건댄 예문치학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화도에 정진, 명화의 수습에도 의략이 있었다 할 것이니 {{TagRefT|3}}조맹과(趙孟顆)<ref group="a">해독문주석3</ref> 벌써 명화대가이지만 고소 주덕윤(朱德潤)과도 친교를 맺고 왕공엄(王公儼), 임인계(仁癸), 이간(李衎), 장언보(張彥輔), 유도권(劉道權) 등 대가들을 품등하며, 위언(韋偃)의 화송畫松 한간(韓幹)의 화마(畫馬) 등 고화를 들어 시화일치의 화론(畫論)을 설립한 계림공(鷄林公)이 어찌 고려화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 <br/> {{TagRefT|4}}사대부로서 화도에 능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ref group="a">해독문주석4</ref>─지륵사(智勒寺)의 광지선사(廣智禪師)가 일석도( 一釋徒)로서 {{TagRefT|5}}「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호화벽을 들지 마자<ref group="a">해독문주석5</ref> 그러나 도화견문지(圖畫見聞誌)에 「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 無一二, {{ruby|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같은 글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고려인의 호화벽의 일단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려사 열전 이녕조(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ruby|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ruby|微光弼三韓圖畫殆絕矣|○○○○○○○○○○}}, {{ruby|基厚乃署之|○○○○○}}」라 함이 있으니 명종은 오히려 그림에 능한 인물인 만큼 그 의견은 개인적 의견에 불과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ruby|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중의를 강조한 것이며 「{{ruby|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대세를 알고 서의 결착이었든지 천언만사의 주석을 요(要)치 않는 절대의 호증(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화도에 대한 관심은 고려사회에 일반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결코 이조(李朝)말엽 이후의 조선의 정상으로써 과거를 촌도(忖道)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br/> 그러면 상술한 배경 속에서 자라난 고려의 회화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필자가 빈약한 문헌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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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 {{TagSpage|111-3}}元來 繪畫의 始源이 人物畫에 있었음은 作畫衝動이 發揮되기 시작하는 兒童의 戱畫에 도 證明할 수 있으나, 그러나 初期의 人物畫는 類型的 人物畫이어서 어느 特殊한 個性을 가진 特殊한 人物畫 即 肖像畫가 아니었다. 이러한 意味의 肖像畫가 언제부터 朝鮮서 發生되었을까 함은 매우 推定하기 어려운 것이니 例컨대 高句麗壁畫에 나타난 人物畫들은 肖像畫라는 이 보다 오히려 類型的 人物畫에 가까운데 百濟의 阿佐太子는 벌써 完全한 肖像畫를 남긴 듯이 傳하여 내려오니, 어느 世代에 肖像畫가 비로소 發展되었는지 確實이 말하기 어려웁고 新羅統一期에 들어와서는 確實한 肖像畫가 있었던 듯하여 多少의 文獻에 남아 있다。例컨대 雙溪寺 眞鑒禪師 碑文에 보이는 6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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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 {{TagSpage|111-2}}元來 繪畫의 始源이 人物畫에 있었음은 作畫衝動이 發揮되기 시작하는 兒童의 戱畫에 도 證明할 수 있으나, 그러나 初期의 人物畫는 類型的 人物畫이어서 어느 特殊한 個性을 가진 特殊한 人物畫 即 肖像畫가 아니었다. 이러한 意味의 肖像畫가 언제부터 朝鮮서 發生되었을까 함은 매우 推定하기 어려운 것이니 例컨대 高句麗壁畫에 나타난 人物畫들은 肖像畫라는 이 보다 오히려 類型的 人物畫에 가까운데 百濟의 阿佐太子는 벌써 完全한 肖像畫를 남긴 듯이 傳하여 내려오니, 어느 世代에 肖像畫가 비로소 發展되었는지 確實이 말하기 어려웁고 新羅統一期에 들어와서는 確實한 肖像畫가 있었던 듯하여 多少의 文獻에 남아 있다。例컨대 雙溪寺 眞鑒禪師 碑文에 보이는 6조 {{TagPage|112-1}}影이든지 斷俗寺 神行禪師 碑文에 보이는 神行의 眞影이라든지 毗盧庵 眞空大師 碑文에 보이는 道儀의 眞影이라든지 三國史記 弓裔傳에 보이는 浮石寺의 新羅王像 等이 그 特例이다. 그러나 그數 文獻的으로 實로 寥寥함에 比하여 高麗朝에서의 肖像畫의 發達은 놀랄만한 數爻와 系統이 있으니, 歷代 諸王의 眞殿, 圖形功臣의 肖像 等은 그중에도 意義 깊은 것으로 朝鮮에 있어서는 麗朝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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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 원래 회화의 시원(始源)이 인물화에 있었음은 작화 충동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아동의 희화에서도 증명할 수 있으나, 그러나 초기의 인물화는 유형적 인물화여서 어느 특수한  개성을 가진 특수한 인물화 즉 초상화가 아니었다. 이러한 의미의 초상화가 언제부터 조선에서 발생되었을까 함은 매우 추정하기 어려운 것이니 예컨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인물화들은 초상화라는 것보다 오히려 유형적 인물화에 가까운데 백제의 아좌태자(阿佐太子)는 벌써 완전한 초상화를 남긴 듯이 전하여 내려오니, 어느 세대에 초상화가 비로소 발전되었는지 확실히 말하기 어려웁고 신라통일기에 들어와서는 확실한 초상화가 있었던 듯하여 다소의 문헌에 남아 있다. 예컨대 쌍계사 진감선사(雙溪寺 眞鑒禪師) 비문에 보이는 6조영이든지 단속사 신행선사(斷俗寺 神行禪師) 비문에 보이는 신행(神行)의 진영이라든지 비로암 진공대사(毗盧庵 眞空大師) 비문에 보이는 도의(道儀)의 진영이라든지 삼국사기 궁예전에 보이는 부석사(浮石寺)의 신라왕상 등이 그 특례이다. 그러나 그 수가 문헌적으로 실로 요요(寥寥)함에 비하여 고려조에서의 초상화의 발달은 놀랄만한 수효와 계통이 있으니, 역대 제왕의 진전(眞殿), 도형공신(圖形功臣)의 초상 등은 그중에도 의미 깊은 것으로 조선에 있어서는 고려조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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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번= {{TagSpage|112-2}}黃胤錫 頤齋集에 髙麗 眞殿의 源始說이 있으니 하였으되 漢制自諸帝各廟在京師者外,別立原廟,又爲高帝百世 不遷, 分立高廟于郡國, 蓋周末春秋之世, 已以邑有 先君之墓者, 謂之都, 而漢國之也, 至唐 追尊老子爲玄元皇帝, 通中外立塑像爲廟,而諸帝亦以塑像配焉,宋眞宗崇道教,又因唐京有景靈宮,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 並以諸帝塑像繪容安之,而其以配于老子者, 徃往不一,我東高麗眞殿之設,實其遺也云云 即 高麗諸王의 眞殿(殿影)을 景靈殿이라 함이 이 景靈宮에서 由來한 것임을 이에 알 것이요, 平壤의 聖容殿 永柔 鳳進寺 南의 太祖 影殿 等이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의 影殿에 該當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孝思觀이란 것이 所謂 別廟에 該當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寺社의 眞殿이 所謂 配于老子式에 該當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다. 다만 高麗史 尹紹宗 列傳에 「景靈殿太祖皇考之別廟 孝思親太祖眞之所在」라 하여 있으나, {{TagRef|6}}事實에 있어서 景靈殿은 太祖皇考뿐 아니라 四代歷祖의 眞을 비롯하여<ref>원문주석6</ref> 肅宗(元宗 2年), 睿宗(仁宗 2年), 仁宗(毅宗 2年), 明宗(元宗 6年), 康宗(高宗 2年), 高宗(元宗 2年), 元宗(忠烈 2年), 忠烈(忠宣 2年), 忠惠(忠穆 2年) 등, 비록 斷片的이나마 歷代諸王의 眞影을 奉安한 事實이 麗史에 있으니景靈殿이 곧 高麗諸王의 眞殿이었다 할 것이요, 孝思觀(恭愍王代에 景命殿이라 改稱하다) 만은 太祖의 眞影만이 있었던 듯하여 다른 王의 眞影을 奉安한 事實이 보이지 않는다. 景靈殿은 {{TagPage|113-1}}即 闕內에 있던 原廟이요, 孝思觀은 闕外 奉恩寺에 있던 別廟이나, 內殿에도 別廟가 있었던 듯하여 麗史 高宗 12年條에 「內殿康宗眞殿」이란 句가 보이며, 中葉 以後로 들면서부터는 眞殿에 對하여 特別한 稱號를 붙인 듯 하여 忠烈王의 眞殿을 明仁殿이라 하고 齊國公主의 眞殿을 仁和殿이라 하고, 王輪寺의 魯國公主의 眞殿을 仁熙殿이라 하고, 恭愍王의 眞殿 惠明殿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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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번= {{TagSpage|113-2}}이밖에 陵廟에도 眞殿이 있었음은 世祖 昌陵의 眞殿이 그 一例요, 正陵 丁字閣에 있던 魯國公主의 眞影도 그 一例이나, 後者는 陵前에 있던 雲岩寺(一云 光岩寺 或云 廣通普濟寺)에 所 屬되었던 것인 듯싶으니 大抵 陵墓 近處에 寺院을 設置하고 寺院 近處에 陵墓를 經營하여 그 寺刹을 因하여 곧 願刹을 삼고, {{TagRef|7}} 이내 眞殿을 設置함은 高麗의 特色이였다 하여도 可할 것이요<ref>원문주석7</ref> 其外 寺刹까지도 各王의 願刹을 삼고 眞 殿을 經營함은 前에 己述한 바와 같이 支那에서 諸帝의 塑 像繪容을 奉安한 宮觀에 老子像을 配置함과 그 意態가 類似한 것으로 이제 歷代 諸王의 眞影이 있던 寺刹을 列擧하 면 大略 左와 같다. 世祖의 眞影─靈通寺(明宗 2年) (年代만 推擧한 것은 歷史에 衣함 以下 倣比) <br/> 太祖의 眞影─靈通寺(明宗 2年) 泰安寺(明宗 2年) 奉恩寺(明宗 11年)<br/> 連山 開泰寺 (恭愍王 11年) 竹州 奉業寺 (恭愍王 12年) 如恩縣 陽 山寺 (이는 禑王 六年에 順興으로 移安) 龍泉寺(周世鵬 武陵世稿)<br/> 成宗의 眞影─開國寺(高宗 4年)<br/> 顯宗의 眞影─玄化寺(同寺 碑文)에서 崇敎寺로(高宗 4年) 皇考 安 宗 皇妣 順聖太后 皇姉 成穆長公主 王妃 元貞王后 等 의 眞影─玄化寺(同寺 碑文) 後에 安宗神은 顯宗과 함께 崇 敎寺로 (高宗 4年)<br/> 靖宗의 眞影─大安寺(明宗 10年)<br/> 妃 仁睿順德王后의 眞影─國淸寺(肅宗 元年) 安和寺(睿宗 15年)<br/> 肅宗의 眞影─開國寺(睿宗 元年)에서 天壽寺(睿宗 11年)로 安 和寺로 (元宗 2年)<br/> 妃明懿王后의 眞影─開國寺(睿宗 8年)에서 天壽寺로 (睿宗 11年) {{TagPage|114-1}} 仁宗 及 恭睿王后의 眞影─儺通寺(明宗 14年)<br/> 毅宗의 眞影─海安寺(明宗 5年)에서 宣孝寺(吳彌院)로 佛 住寺로 (明宗 26年)<br/> 明宗의 眞影─靈通寺(忠宣 2年)<br/> 康宗의 眞影─玄化寺에서 崇敎寺로 王輪寺로(高宗 4年)<br/> 忠烈王의 眞影─西普通寺 靈眞殿 (同王 34年) 妙蓮寺(同寺 碑文)<br/> 妃齊國公主의 眞影─妙蓮寺(忠宣 5年)<br/> 忠宣王의 眞影─妙蓮寺(同寺 碑文) 海安寺(翼齋集)昇天府 興天 寺(恭愍 6年)<br/> 妃 韓國公主의 眞影─興天寺(恭愍 6年)<br/> 懿妃의 眞影─靑雲寺에서 妙蓮寺로(忠肅 8年)<br/> 忠肅王의 眞影─天水寺(恭愍王 22年)<br/> 妃 濮國長公主의 眞影─順天寺(忠肅 8年) <br/> 忠惠王 及 德寧公主의 眞影─神孝寺(禑王 3年)<br/> 恭愍王 及 順靜王后의 眞影─王輪寺 惠明殿(禑王 2年)<br/> 魯國公主의 眞影─王輪寺 仁熙殿(恭愍王 15年) 光岩寺 (恭愍王 23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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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번= {{TagSpage|114-2}}以外에도 上述한 寺社眞殿 外에 麗史 兵制에 弘圓寺 九祖 堂, 興王寺, 大雲寺, 重光寺, 弘護寺, 乾元寺 等의 眞殿이 보이며, 尹之彪 墓誌에 泰雲寺 眞殿(이것은 大雲寺와 同一한 것인 듯) 등이 보이니, 麗史를 더욱 仔細히 뒤지면 上述한 것 以外에 寺刹이 많을 것 같다.
|목차1-1원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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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번= {{TagSpage|114-3}}却說 上述한 諸王의 眞影은 舉皆 畫工의 손에서 製作 되었을 것은 勿論이나 何等의 事實을 이에 對하여 傳함이 없고 補閑集에 李琪가 그렸다는 {{TagRef|8}}毅宗眞<ref>원문주석8</ref>은 地方民의 自好 에서 나온 것이요, 大覺國師가 宋帝로부터 받은 文宗의 眞 影(同師文集)은 어떠한 것인지 不明하고 {{TagRef|9}}忠烈王 及 齊國公主眞 만은 元人의 所作이며<ref>원문주석9</ref> {{TagRef|10}}雲岩寺의 魯國公主眞은 恭愍王의 親筆로 有名하나<ref>원문주석10</ref> 그 以外 眞影에 對하여는 모두 作者가 未詳하다. {{TagRef|11}}長湍 華藏寺에 恭愍王의 自畫像이 있어 有名 하였으나<ref>원문주석11</ref> 지금에 傳하지 않고 德倖히 大正 5年度 古蹟 調査報告書에 漫漶된 畫幅의 寫眞이 있어 그윽히 餘香을 {{TagPage|115-1}} 엿볼 수 있으나 眞僞를 모를 것이며 {{TagRef|12}}恭愍王의 畫像으로 다시 尹澤에게 下賜된 바 있었으나<ref>원문주석12</ref> 지금에 勿論 傳함이 없을 것이다.
|목차1-1원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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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번= {{TagSpage|115-2}} 畫態에 對하여서도 勿論 傳함이 없고 高麗史節要 明宗 14年條에 太后의 畫像이 立像이 아니였고 坐像이었음 을 傳함이 있으니, 恭愍王 眞影의 畫態와 對照할제 當代 眞影의 大體 樣式은 얼마간 推想할 수 있다 하겠다.
  
|목차1-1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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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번= 황윤석(黃胤錫) 이재집(頤齋集)에 고려 진전의 원시설이 있으니 하였으되 <blockquote no="01">漢制自諸帝各廟在京師者外,別立原廟,又爲高帝百世 不遷, 分立高廟于郡國, 蓋周末春秋之世, 已以邑有 先君之墓者, 謂之都, 而漢國之也, 至唐 追尊老子爲玄元皇帝, 通中外立塑像爲廟,而諸帝亦以塑像配焉,宋眞宗崇道教,又因唐京有景靈宮,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 並以諸帝塑像繪容安之,而其以配于老子者, 徃往不一,我東高麗眞殿之設,實其遺也云云 </blockquote> 즉 고려제왕의 진전(영전)을 경령전(景靈殿)이라 함이 이 경령궁(景靈宮) 에서 유래한 것임을 이에 알 것이요, 평양의 성용전(聖容殿) 영 유(永柔) 봉진사(鳳進寺) 남쪽의 태조 영전 등이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의 영전에 해당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효사관(孝思觀)이란 것 이 소위 별묘에 해당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사사(寺社) 의 진전이 소위 배우노자식(配于老子式)에 해당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다. 다만 고려사 윤소종(尹紹宗) 열전에  <cite no="02">"景靈殿太祖皇考之別廟孝思親太祖眞之所在"</cite>라 하여 있으나, {{TagRefT|6}}사실에 있어서 경령 전(景靈殿)은 태조황고뿐 아니라 사대역조의 진을 비롯하여 <ref group="a">해독문주석6</ref> 숙종 (원종 2년), 예종(인종 2년), 인종(의종 2년), 명종(원종 6년), 강종(고종 2년), 고종 원종(충렬 2년), 충렬(충선 2년), 충혜(충목 2년) 등, 비록 단편적 이나마 역대 제왕의 진영을 봉안(奉安)한 사실이 고려사에 있으니 경령전(景靈殿)이 곧 고려제왕의 진전이었다 할 것이요, 효사관(공민왕 대에 경명전(景命殿)이라 개칭하다) 만은 태조의 진영만이 있었던 듯하여 다른 왕의 진영을 봉안한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경령전은 즉 궐내에 있던 원묘이요, 효사관은 궐외 봉은사에 있던 별묘이나, 내전에도 별묘가 있었던 듯하여 고려사 고종 12년조에 <cite no="03">"內殿康宗眞殿"</cite>이란 구가 보이며, 중엽 이후로 들면서부터는 진전에 대하여 특별한 칭호를 붙인 듯 하여 충렬왕의 진전을 명인전(明仁殿)이라 하고 제국공주의 진전을 인화전(仁和殿)이라 하고, 왕륜사의 노국공주의 진전을 인희전(仁熙殿)이라 하고, 공민왕의 진전 혜명전(惠明殿)이라 하였다.
|목차1-1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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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번= 이밖에 능묘에도 진전이 있었음은 세조 창릉의 진전이 그 일례요, 정릉 정자각에 있던 노국공주의 진영도 그 일례이나, 후자는 릉 앞에 있던 운암사(雲岩寺)(누구는 광언사(光岩寺)라 하고, 혹자는 광통 보제사(廣通普濟寺)라 한다)에 소속되었던 것인 듯싶으니 대저 능묘 근처에 사원을 설치하고 사원 근처에 능묘를 경영하여 그 사찰을 인하여 곧 원찰을 삼고, {{TagRefT|7}} 이내 진전을 설치함은 고려의 특색이었다 하여도 될 것이요<ref group="a">해독문주석7</ref> 그 외 사찰까지도 각 왕의 원찰을 삼고 진 전을 경영함은 전에 기술한 바와 같이 지나(支那, 중국)에서 제제(諸帝)의 소상회용(所像繪容)을 봉안한 궁관에 노자상(老子像)을 배치함과 그 의태가 유사한 것으로 이제 역대 제왕의 진영이 있던 사찰을 열거하면 대략 좌측과 같다.  <blockquote no="02">세조의 진영─영통사(명종 2년) (연대만 추거한 것은 역사에 의함 이하 방비) <br/> 태조의 진영─영통사(명종 2년) 태안사(명종 2년) 봉은사(명종 11년)<br/> 연산 개태사 (공민왕 11년) 죽주 봉업사 (공민왕 12년) 여은현 양 산사 (이는 우왕 6년에 순흥으로 이안) 용천사(주세붕 무능세고)<br/> 성종의 진영─개국사(고종 4년)<br/> 현종의 진영─현화사(동사 비문)에서 숭교사로(고종 4년) 황고 안 종 황비 순성태후 황자 성목장공주 왕비 원정왕후 등 의 진영─현화사(동사 비문) 후에 안종신은 현종과 함께 숭 교사로 (고종 4년)<br/> 정종의 진영─대안사(명종 10년)<br/> 비 인예순덕왕후의 진영─국청사(숙종 원년) 안화사(예종 15년)<br/> 숙종의 진영─개국사(예종 원년)에서 천수사(예종 11년)로 안화사로 (원종 2년)<br/> 비명의왕후의 진영─개국사(예종 8년)에서 천수사로 (예종 11년) 인종 급 공예왕후의 진영─나통사(명종 14년)<br/> 의종의 진영─해안사(명종 5년)에서 선효사(오미원)로 불 주사로 (명종 26년)<br/> 명종의 진영─영통사(충선 2년)<br/> 강종의 진영─현화사에서 숭교사로 왕륜사로(고종 4년)<br/> 충렬왕의 진영─서보통사 영진전(동왕 34년) 묘련사(동사 비문)<br/> 비 제국공주의 진영─묘련사(충선 5년)<br/> 충선왕의 진영─묘련사(동사 비문) 해안사(익재집) 승청부 흥천 사(공민 6년)<br/> 비 한국공주의 진영─흥천사(공민 6년)<br/> 의비의 진영─청운사에서 묘련사로(충숙 8년)<br/> 충숙왕의 진영─천수사(공민왕 22년)<br/> 비 복국장공주의 진영─순천사(충숙 8년) <br/> 충혜왕 급 덕영공주의 진영─신효사(우왕 3년)<br/> 공민왕 급 순정왕후의 진영─왕륜사 혜명전(우왕 2년)<br/> 노국공주의 진영─왕륜사 인희전(공민왕 15년) 광암사(공민왕 23년)</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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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번= 이외에도 상술한 사사진전 외에 고려사 병제에 홍원사 구조 당, 흥왕사, 대운사, 중광사, 홍호사, 건원사 등의 진전이 보이며, 윤지표(尹之彪) 묘지에 태운사 진전(이것은 대운사와 동일한 것인 듯) 등이 보이니, 고려사를 더욱 자세히 뒤지면 상술한 것 이외에 사찰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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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번= 각설 상술한 제왕의 진영은 거개 화공의 손에서 제작 되었을 것은 물론이나 하등의 사실을 이에 대하여 전함이 없고 보한집(補閑集)에 이기(李琪)가 그렸다는 {{TagRefT|8}}의종진(毅宗眞)<ref group="a">해독문주석8</ref>은 지방민의 자호(自好) 에서 나온 것이요, 대각국사가 송제로부터 받은 문종의 진 영(동사문집)은 어떠한 것인지 불명하고 {{TagRefT|9}}충렬왕 급 제국공주진 만은 원나라 사람의 소작(所作)이며<ref group="a">해독문주석9</ref> {{TagRefT|10}}운암사의 노국공주진은 공민왕의 친필로 유명하나<ref group="a">해독문주석10</ref> 그 이외 진영에 대하여는 모두 제작자가 미상하다. {{TagRefT|11}} 장단 화장사에 공민왕의 자화상이 있어 유명하였으나<ref group="a">해독문주석11</ref> 지금에 전하지 않고 덕행히 대정 5년도 고적 조사보고서에 만환(漫漶)된 화폭의 사진이 있어 그윽히 여향을 엿볼 수 있으나 진위를 모를 것이며 {{TagRefT|12}}공민왕의 화상으로 다시 윤택(尹澤)에게 하사된 바 있었으나<ref group="a">해독문주석12</ref> 지금에 물론 전함이 없을 것이다.
|목차1-1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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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번= 화태에 대하여서도 물론 전함이 없고 고려사절요 명종 14년조에 태후의 화상이 입상이 아니였고 좌상이었음을 전함이 있으니, 공민왕 진영의 화태와 대조하면 당대 진영의 대체적인 양식은 얼마간 추상할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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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5일 (금) 16:5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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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화적에 대하여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高麗畵跡 對하야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3호 발행기관 震檀學會
저자 고유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
시작쪽 109쪽 종료쪽 131쪽 전체쪽 23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일반으로 조선 문화 방면이 다 그러하지만 미술 공예품에 있어서도 문헌 내지 유적이 희귀한 중 특히 상고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무괴(無怪)한 편이나 근근 오백년 전 내지 천 년 전 간의 고려의 별적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기괴를 지나 처 마하 불가사의의 일이라 할 만하다. 논자 있어 그 이유를 설명하여 가로되 혹은 병화부식(兵禍不息)을 거증하고 혹은 예도에 대한 일반의 무교 무관심을 부회하나 전론은 오히려 사실에 근사하지만 후론은 일단의 검토를 경하여야 할 것이 위선 필자가 당장에 문제하고 있는 고려의 예도에 대한 애호가 범론상식으로써 의할 바 아니어서 단간 척소 산견되는 기록에서나마 일대 호화판을 그려낼 수 있으니, 여초 이래 사사건축의 장엄, 현고 간의 팔만대장경과 일반 서적의 인행, 의종 전후의 별궁 이전의 수려와 및 청자의 발달, 충렬 충선간의 사경예술의 발달, 기타 탑비, 나전칠기, 금착동기의 발달, 이러한 주도 이외의 편례를 모두 고사시하고 순전히 회화미술에서의 예만 들더라도 국초의 도화원 내지 화국의 설립이 대서특서할 중요한 사실로 '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 같은 내외가 추억하는 유일의 조선미술안내서도"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 운운의 망론을 경거히 단론하였으나, 고려사 백관지 외직(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이란 기록이 있고, 파한집(破閑集)의 이영(李寧)의 기사 중에 「睿宗時畫局」이란 구와 동문선 이인로 이상귀휴도찬서(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J의 구가 있으니, 화원화국의 존재를 어찌 의심하랴. 실로 이 화원의 설치야말로 장차로는 회화미술의 교화(아카데미슴)의 한 원인(遠因)을 형성할 것이나, 그러나 그 시설 당초에 있어서는 화용의 중차대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시설(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화도에 대한 애호를 이 화원의 한 일(一事)로써만 입증하려 함은 구우일모에 비의 불과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구체적 사실을 들어 말하면, 역대 제왕 중 현대문주1▶헌종[a 1] 현대문주2▶인종[a 2] 명종 충선왕 공민왕 등 지존으로서 화도에 정진한 이가 많음은 역사상 드문 일이며, 예종은 천장각(天章閣)을 구금에 창립하여 송제의 어필서화(御筆書畫)를 완장하여 때때로 군신에게 선시하였으며, 의종조에는 내시의 좌우번(左右番)이 유경(遊競)에 빙탁하여 진보 서화를 헌상하였으며, 충선왕은 연저(燕邸)에 만권당을 창구하 염복(閻復), 도수(姚燧), 조맹부(趙孟頫) 우집(虞集) 등 석유(碩儒)와 명화 대가들로 교유하되 특히 본국에서 시서화삼절(詩書畫三絕)로 칭송되던 이익재(李益齋)를 소치하여 그들과 교유하게 하였으니, 왕이 이미 능서의 재주로써 다시 삼절의 익재공(益齋公)을 소치한 것은 촌탁(忖度)하건댄 예문치학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화도에 정진, 명화의 수습에도 의략이 있었다 할 것이니 현대문주3▶조맹과(趙孟顆)[a 3] 벌써 명화대가이지만 고소 주덕윤(朱德潤)과도 친교를 맺고 왕공엄(王公儼), 임인계(仁癸), 이간(李衎), 장언보(張彥輔), 유도권(劉道權) 등 대가들을 품등하며, 위언(韋偃)의 화송畫松 한간(韓幹)의 화마(畫馬) 등 고화를 들어 시화일치의 화론(畫論)을 설립한 계림공(鷄林公)이 어찌 고려화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
현대문주4▶사대부로서 화도에 능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a 4]─지륵사(智勒寺)의 광지선사(廣智禪師)가 일석도( 一釋徒)로서 현대문주5▶「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호화벽을 들지 마자[a 5] 그러나 도화견문지(圖畫見聞誌)에 「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 無一二, 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같은 글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고려인의 호화벽의 일단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려사 열전 이녕조(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微光弼三韓圖畫殆絕矣(○○○○○○○○○○), 基厚乃署之(○○○○○)」라 함이 있으니 명종은 오히려 그림에 능한 인물인 만큼 그 의견은 개인적 의견에 불과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중의를 강조한 것이며 「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대세를 알고 서의 결착이었든지 천언만사의 주석을 요(要)치 않는 절대의 호증(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화도에 대한 관심은 고려사회에 일반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결코 이조(李朝)말엽 이후의 조선의 정상으로써 과거를 촌도(忖道)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면 상술한 배경 속에서 자라난 고려의 회화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필자가 빈약한 문헌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쪽수▶P109一般으로 朝鮮文化 方面이 다 그러하지만 美術工藝品에 있어서도 文獻 乃至 遺跡이 稀貴한 中 特히 上古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無怪한 편이나 僅僅 五百年 前 乃至 千年 前 間의 高麗의 畫跡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奇怪를 지나 처 摩訶 不可思議의 일이라 할 만하다. 論者 있어 그 理由를 說明하여 가로되 或은 兵禍不息을 擧證하고 或은 藝道에 對한 一般의 無敎無關心을 附會하나 前論은 오히려 事實에 近似하지만 後論은 一段의 檢討를 經하여야 할 것이 爲先 筆者가 當場에 問題하고 있는 高麗의 藝道에 對한 愛好가 凡論常識으로써 議할 바 아니어서 斷簡 尺素 散見되는 記錄에서나마 一大 豪華版을 그려낼 수 있으니 麗初 以來 寺社建築의 莊嚴, 顯高 間의 八萬大藏經과 一般書籍의 印行, 毅宗 前後의 別宮 離殿의 修麗와 및 靑磁의 發達, 忠烈 忠宣間의 寫經藝術의 發達, 其他 塔碑, 螺鈿漆器, 金錯銅器의 發達 이러한 晝道 以外의 片例를 모두 姑捨是하고 純全히 繪畫美術에서의 例만 들더라도 國初의 圖畫院 乃至 畫局의 設立이 大書特書할 重要한 事實로 「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같은 內外가 推抑하는 唯一의 朝鮮美術案內書도「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云云의 妄論을 輕擧히 斷論하였으나, ▶P110高麗史 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 이란 記錄이 있고, 破閑集의 李寧의 記事中에 「睿宗時畫局」이란 句와 東文選 李仁老 二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J의 句가 있으니, 畫院畫局의 存在를 어찌 疑心하랴。實로 이 畫院의 設置야말로 將次로는 繪畫美術의 校化(아카데미슴)의 一 遠因을 形成할 것이나, 그러나 그 施設 當初에 있어서는 畫用의 重且大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高麗時代의 畫道에 對한 愛好를 이 畫院의 一事로써만 立證하려 함은 九牛一毛에 比의 不過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具體的 事實을 들어 말하면, 歷代 諸王 中 원문주1▶獻宗[1] 원문주2▶仁宗[2] 明宗 忠宣王 恭愍王 等 至尊으로서 畫道에 精進한 이가 많음은 歷史上 드문 일이며, 睿宗은 天章閣을 九禁에 剏立하여 宋帝의 御筆書畫를 玩藏하여 때때로 群臣에게 宣示하였으며, 毅宗朝에는 內侍의 左右番이 遊競에 憑托하여 珍寶 書畫를 獻上하였으며, 忠宣王은 燕邸에 萬卷堂을 剏構하 閻復, 姚燧, 趙孟頫, 虞集 等 碩儒와 名畫 大家들로 交遊하되 特히 本國에서 詩書畫三絕로 稱頌되던 李益齋를 召致하여 그들과 交遊하게 하였으니, 王이 이미 能書의 才로써 다시 三絕의 益齋公을 召致한 것은 忖度하건댄 例文致學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畫道에 精進, 名畫의 收拾에도 意略이 있었다 할 것이니 원문주3▶趙孟顆[3] 벌써 名畫大家이지만 姑蘇 朱德潤과도 親交를 맺고 王公儼,任仁癸, 李衎, 張彥輔, 劉道權 等 大家들을 品騰하며, 韋偃의 畫松 韓幹의 畫馬 等 古畫를 들어 詩畫一致의 畫論을 設立한 鷄林公이 어찌 高麗畫 發展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 원문주4▶士大夫로서 畫道에 能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4]─ 智勒寺의 廣智禪師가 一釋徒로서 원문주5▶「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好畫癖을 들지 마자[5] 그러나 圖畫見聞誌에「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無一二, 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同書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P111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麗人의 好畫癖의 一端 證明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高麗史列 傳 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微光弼 三韓圖畫殆絕矣, 基厚乃署之」라 함이 있으니 明宗은 오히려 能畫人物인 만큼 그 意見은 個人的 意見에 不過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 「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衆意를 強調한 것이며 「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大勢를 알고 서의 結着이었든지 千言萬辭의 注釋을 要치 않는 絕對의 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畫道에 對한 關心은 高麗社會에 一般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決코 李朝末葉 以後의 朝鮮의 情狀으로써 過去를 忖度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면 上述한 背景 속에서 자라난 高麗의 繪畫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筆者가 貧弱한 文獻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본문


본문1: 一.人物畫


원래 회화의 시원(始源)이 인물화에 있었음은 작화 충동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아동의 희화에서도 증명할 수 있으나, 그러나 초기의 인물화는 유형적 인물화여서 어느 특수한 개성을 가진 특수한 인물화 즉 초상화가 아니었다. 이러한 의미의 초상화가 언제부터 조선에서 발생되었을까 함은 매우 추정하기 어려운 것이니 예컨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인물화들은 초상화라는 것보다 오히려 유형적 인물화에 가까운데 백제의 아좌태자(阿佐太子)는 벌써 완전한 초상화를 남긴 듯이 전하여 내려오니, 어느 세대에 초상화가 비로소 발전되었는지 확실히 말하기 어려웁고 신라통일기에 들어와서는 확실한 초상화가 있었던 듯하여 다소의 문헌에 남아 있다. 예컨대 쌍계사 진감선사(雙溪寺 眞鑒禪師) 비문에 보이는 6조영이든지 단속사 신행선사(斷俗寺 神行禪師) 비문에 보이는 신행(神行)의 진영이라든지 비로암 진공대사(毗盧庵 眞空大師) 비문에 보이는 도의(道儀)의 진영이라든지 삼국사기 궁예전에 보이는 부석사(浮石寺)의 신라왕상 등이 그 특례이다. 그러나 그 수가 문헌적으로 실로 요요(寥寥)함에 비하여 고려조에서의 초상화의 발달은 놀랄만한 수효와 계통이 있으니, 역대 제왕의 진전(眞殿), 도형공신(圖形功臣)의 초상 등은 그중에도 의미 깊은 것으로 조선에 있어서는 고려조가 처음이다.
쪽수▶P111-2元來 繪畫의 始源이 人物畫에 있었음은 作畫衝動이 發揮되기 시작하는 兒童의 戱畫에 도 證明할 수 있으나, 그러나 初期의 人物畫는 類型的 人物畫이어서 어느 特殊한 個性을 가진 特殊한 人物畫 即 肖像畫가 아니었다. 이러한 意味의 肖像畫가 언제부터 朝鮮서 發生되었을까 함은 매우 推定하기 어려운 것이니 例컨대 高句麗壁畫에 나타난 人物畫들은 肖像畫라는 이 보다 오히려 類型的 人物畫에 가까운데 百濟의 阿佐太子는 벌써 完全한 肖像畫를 남긴 듯이 傳하여 내려오니, 어느 世代에 肖像畫가 비로소 發展되었는지 確實이 말하기 어려웁고 新羅統一期에 들어와서는 確實한 肖像畫가 있었던 듯하여 多少의 文獻에 남아 있다。例컨대 雙溪寺 眞鑒禪師 碑文에 보이는 6조 ▶P112-1影이든지 斷俗寺 神行禪師 碑文에 보이는 神行의 眞影이라든지 毗盧庵 眞空大師 碑文에 보이는 道儀의 眞影이라든지 三國史記 弓裔傳에 보이는 浮石寺의 新羅王像 等이 그 特例이다. 그러나 그數 文獻的으로 實로 寥寥함에 比하여 高麗朝에서의 肖像畫의 發達은 놀랄만한 數爻와 系統이 있으니, 歷代 諸王의 眞殿, 圖形功臣의 肖像 等은 그중에도 意義 깊은 것으로 朝鮮에 있어서는 麗朝가 처음이다.





































본문1-1: (甲)眞殿의 發達


황윤석(黃胤錫) 이재집(頤齋集)에 고려 진전의 원시설이 있으니 하였으되

漢制自諸帝各廟在京師者外,別立原廟,又爲高帝百世 不遷, 分立高廟于郡國, 蓋周末春秋之世, 已以邑有 先君之墓者, 謂之都, 而漢國之也, 至唐 追尊老子爲玄元皇帝, 通中外立塑像爲廟,而諸帝亦以塑像配焉,宋眞宗崇道教,又因唐京有景靈宮,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 並以諸帝塑像繪容安之,而其以配于老子者, 徃往不一,我東高麗眞殿之設,實其遺也云云

즉 고려제왕의 진전(영전)을 경령전(景靈殿)이라 함이 이 경령궁(景靈宮) 에서 유래한 것임을 이에 알 것이요, 평양의 성용전(聖容殿) 영 유(永柔) 봉진사(鳳進寺) 남쪽의 태조 영전 등이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의 영전에 해당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효사관(孝思觀)이란 것 이 소위 별묘에 해당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사사(寺社) 의 진전이 소위 배우노자식(配于老子式)에 해당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다. 다만 고려사 윤소종(尹紹宗) 열전에 "景靈殿太祖皇考之別廟孝思親太祖眞之所在"라 하여 있으나, 현대문주6▶사실에 있어서 경령 전(景靈殿)은 태조황고뿐 아니라 사대역조의 진을 비롯하여 [a 6] 숙종 (원종 2년), 예종(인종 2년), 인종(의종 2년), 명종(원종 6년), 강종(고종 2년), 고종 원종(충렬 2년), 충렬(충선 2년), 충혜(충목 2년) 등, 비록 단편적 이나마 역대 제왕의 진영을 봉안(奉安)한 사실이 고려사에 있으니 경령전(景靈殿)이 곧 고려제왕의 진전이었다 할 것이요, 효사관(공민왕 대에 경명전(景命殿)이라 개칭하다) 만은 태조의 진영만이 있었던 듯하여 다른 왕의 진영을 봉안한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경령전은 즉 궐내에 있던 원묘이요, 효사관은 궐외 봉은사에 있던 별묘이나, 내전에도 별묘가 있었던 듯하여 고려사 고종 12년조에 "內殿康宗眞殿"이란 구가 보이며, 중엽 이후로 들면서부터는 진전에 대하여 특별한 칭호를 붙인 듯 하여 충렬왕의 진전을 명인전(明仁殿)이라 하고 제국공주의 진전을 인화전(仁和殿)이라 하고, 왕륜사의 노국공주의 진전을 인희전(仁熙殿)이라 하고, 공민왕의 진전 혜명전(惠明殿)이라 하였다.
쪽수▶P112-2黃胤錫 頤齋集에 髙麗 眞殿의 源始說이 있으니 하였으되 漢制自諸帝各廟在京師者外,別立原廟,又爲高帝百世 不遷, 分立高廟于郡國, 蓋周末春秋之世, 已以邑有 先君之墓者, 謂之都, 而漢國之也, 至唐 追尊老子爲玄元皇帝, 通中外立塑像爲廟,而諸帝亦以塑像配焉,宋眞宗崇道教,又因唐京有景靈宮,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 並以諸帝塑像繪容安之,而其以配于老子者, 徃往不一,我東高麗眞殿之設,實其遺也云云 即 高麗諸王의 眞殿(殿影)을 景靈殿이라 함이 이 景靈宮에서 由來한 것임을 이에 알 것이요, 平壤의 聖容殿 永柔 鳳進寺 南의 太祖 影殿 等이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의 影殿에 該當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孝思觀이란 것이 所謂 別廟에 該當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寺社의 眞殿이 所謂 配于老子式에 該當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다. 다만 高麗史 尹紹宗 列傳에 「景靈殿太祖皇考之別廟 孝思親太祖眞之所在」라 하여 있으나, 원문주6▶事實에 있어서 景靈殿은 太祖皇考뿐 아니라 四代歷祖의 眞을 비롯하여[6] 肅宗(元宗 2年), 睿宗(仁宗 2年), 仁宗(毅宗 2年), 明宗(元宗 6年), 康宗(高宗 2年), 高宗(元宗 2年), 元宗(忠烈 2年), 忠烈(忠宣 2年), 忠惠(忠穆 2年) 등, 비록 斷片的이나마 歷代諸王의 眞影을 奉安한 事實이 麗史에 있으니景靈殿이 곧 高麗諸王의 眞殿이었다 할 것이요, 孝思觀(恭愍王代에 景命殿이라 改稱하다) 만은 太祖의 眞影만이 있었던 듯하여 다른 王의 眞影을 奉安한 事實이 보이지 않는다. 景靈殿은 ▶P113-1即 闕內에 있던 原廟이요, 孝思觀은 闕外 奉恩寺에 있던 別廟이나, 內殿에도 別廟가 있었던 듯하여 麗史 高宗 12年條에 「內殿康宗眞殿」이란 句가 보이며, 中葉 以後로 들면서부터는 眞殿에 對하여 特別한 稱號를 붙인 듯 하여 忠烈王의 眞殿을 明仁殿이라 하고 齊國公主의 眞殿을 仁和殿이라 하고, 王輪寺의 魯國公主의 眞殿을 仁熙殿이라 하고, 恭愍王의 眞殿 惠明殿이라 하였다.
이밖에 능묘에도 진전이 있었음은 세조 창릉의 진전이 그 일례요, 정릉 정자각에 있던 노국공주의 진영도 그 일례이나, 후자는 릉 앞에 있던 운암사(雲岩寺)(누구는 광언사(光岩寺)라 하고, 혹자는 광통 보제사(廣通普濟寺)라 한다)에 소속되었던 것인 듯싶으니 대저 능묘 근처에 사원을 설치하고 사원 근처에 능묘를 경영하여 그 사찰을 인하여 곧 원찰을 삼고, 현대문주7▶ 이내 진전을 설치함은 고려의 특색이었다 하여도 될 것이요[a 7] 그 외 사찰까지도 각 왕의 원찰을 삼고 진 전을 경영함은 전에 기술한 바와 같이 지나(支那, 중국)에서 제제(諸帝)의 소상회용(所像繪容)을 봉안한 궁관에 노자상(老子像)을 배치함과 그 의태가 유사한 것으로 이제 역대 제왕의 진영이 있던 사찰을 열거하면 대략 좌측과 같다.

세조의 진영─영통사(명종 2년) (연대만 추거한 것은 역사에 의함 이하 방비)
태조의 진영─영통사(명종 2년) 태안사(명종 2년) 봉은사(명종 11년)
연산 개태사 (공민왕 11년) 죽주 봉업사 (공민왕 12년) 여은현 양 산사 (이는 우왕 6년에 순흥으로 이안) 용천사(주세붕 무능세고)
성종의 진영─개국사(고종 4년)
현종의 진영─현화사(동사 비문)에서 숭교사로(고종 4년) 황고 안 종 황비 순성태후 황자 성목장공주 왕비 원정왕후 등 의 진영─현화사(동사 비문) 후에 안종신은 현종과 함께 숭 교사로 (고종 4년)
정종의 진영─대안사(명종 10년)
비 인예순덕왕후의 진영─국청사(숙종 원년) 안화사(예종 15년)
숙종의 진영─개국사(예종 원년)에서 천수사(예종 11년)로 안화사로 (원종 2년)
비명의왕후의 진영─개국사(예종 8년)에서 천수사로 (예종 11년) 인종 급 공예왕후의 진영─나통사(명종 14년)
의종의 진영─해안사(명종 5년)에서 선효사(오미원)로 불 주사로 (명종 26년)
명종의 진영─영통사(충선 2년)
강종의 진영─현화사에서 숭교사로 왕륜사로(고종 4년)
충렬왕의 진영─서보통사 영진전(동왕 34년) 묘련사(동사 비문)
비 제국공주의 진영─묘련사(충선 5년)
충선왕의 진영─묘련사(동사 비문) 해안사(익재집) 승청부 흥천 사(공민 6년)
비 한국공주의 진영─흥천사(공민 6년)
의비의 진영─청운사에서 묘련사로(충숙 8년)
충숙왕의 진영─천수사(공민왕 22년)
비 복국장공주의 진영─순천사(충숙 8년)
충혜왕 급 덕영공주의 진영─신효사(우왕 3년)
공민왕 급 순정왕후의 진영─왕륜사 혜명전(우왕 2년)
노국공주의 진영─왕륜사 인희전(공민왕 15년) 광암사(공민왕 23년)

쪽수▶P113-2이밖에 陵廟에도 眞殿이 있었음은 世祖 昌陵의 眞殿이 그 一例요, 正陵 丁字閣에 있던 魯國公主의 眞影도 그 一例이나, 後者는 陵前에 있던 雲岩寺(一云 光岩寺 或云 廣通普濟寺)에 所 屬되었던 것인 듯싶으니 大抵 陵墓 近處에 寺院을 設置하고 寺院 近處에 陵墓를 經營하여 그 寺刹을 因하여 곧 願刹을 삼고, 원문주7▶ 이내 眞殿을 設置함은 高麗의 特色이였다 하여도 可할 것이요[7] 其外 寺刹까지도 各王의 願刹을 삼고 眞 殿을 經營함은 前에 己述한 바와 같이 支那에서 諸帝의 塑 像繪容을 奉安한 宮觀에 老子像을 配置함과 그 意態가 類似한 것으로 이제 歷代 諸王의 眞影이 있던 寺刹을 列擧하 면 大略 左와 같다. 世祖의 眞影─靈通寺(明宗 2年) (年代만 推擧한 것은 歷史에 衣함 以下 倣比)
太祖의 眞影─靈通寺(明宗 2年) 泰安寺(明宗 2年) 奉恩寺(明宗 11年)
連山 開泰寺 (恭愍王 11年) 竹州 奉業寺 (恭愍王 12年) 如恩縣 陽 山寺 (이는 禑王 六年에 順興으로 移安) 龍泉寺(周世鵬 武陵世稿)
成宗의 眞影─開國寺(高宗 4年)
顯宗의 眞影─玄化寺(同寺 碑文)에서 崇敎寺로(高宗 4年) 皇考 安 宗 皇妣 順聖太后 皇姉 成穆長公主 王妃 元貞王后 等 의 眞影─玄化寺(同寺 碑文) 後에 安宗神은 顯宗과 함께 崇 敎寺로 (高宗 4年)
靖宗의 眞影─大安寺(明宗 10年)
妃 仁睿順德王后의 眞影─國淸寺(肅宗 元年) 安和寺(睿宗 15年)
肅宗의 眞影─開國寺(睿宗 元年)에서 天壽寺(睿宗 11年)로 安 和寺로 (元宗 2年)
妃明懿王后의 眞影─開國寺(睿宗 8年)에서 天壽寺로 (睿宗 11年) ▶P114-1 仁宗 及 恭睿王后의 眞影─儺通寺(明宗 14年)
毅宗의 眞影─海安寺(明宗 5年)에서 宣孝寺(吳彌院)로 佛 住寺로 (明宗 26年)
明宗의 眞影─靈通寺(忠宣 2年)
康宗의 眞影─玄化寺에서 崇敎寺로 王輪寺로(高宗 4年)
忠烈王의 眞影─西普通寺 靈眞殿 (同王 34年) 妙蓮寺(同寺 碑文)
妃齊國公主의 眞影─妙蓮寺(忠宣 5年)
忠宣王의 眞影─妙蓮寺(同寺 碑文) 海安寺(翼齋集)昇天府 興天 寺(恭愍 6年)
妃 韓國公主의 眞影─興天寺(恭愍 6年)
懿妃의 眞影─靑雲寺에서 妙蓮寺로(忠肅 8年)
忠肅王의 眞影─天水寺(恭愍王 22年)
妃 濮國長公主의 眞影─順天寺(忠肅 8年)
忠惠王 及 德寧公主의 眞影─神孝寺(禑王 3年)
恭愍王 及 順靜王后의 眞影─王輪寺 惠明殿(禑王 2年)
魯國公主의 眞影─王輪寺 仁熙殿(恭愍王 15年) 光岩寺 (恭愍王 23年)
이외에도 상술한 사사진전 외에 고려사 병제에 홍원사 구조 당, 흥왕사, 대운사, 중광사, 홍호사, 건원사 등의 진전이 보이며, 윤지표(尹之彪) 묘지에 태운사 진전(이것은 대운사와 동일한 것인 듯) 등이 보이니, 고려사를 더욱 자세히 뒤지면 상술한 것 이외에 사찰이 많을 것 같다.
쪽수▶P114-2以外에도 上述한 寺社眞殿 外에 麗史 兵制에 弘圓寺 九祖 堂, 興王寺, 大雲寺, 重光寺, 弘護寺, 乾元寺 等의 眞殿이 보이며, 尹之彪 墓誌에 泰雲寺 眞殿(이것은 大雲寺와 同一한 것인 듯) 등이 보이니, 麗史를 더욱 仔細히 뒤지면 上述한 것 以外에 寺刹이 많을 것 같다.
각설 상술한 제왕의 진영은 거개 화공의 손에서 제작 되었을 것은 물론이나 하등의 사실을 이에 대하여 전함이 없고 보한집(補閑集)에 이기(李琪)가 그렸다는 현대문주8▶의종진(毅宗眞)[a 8]은 지방민의 자호(自好) 에서 나온 것이요, 대각국사가 송제로부터 받은 문종의 진 영(동사문집)은 어떠한 것인지 불명하고 현대문주9▶충렬왕 급 제국공주진 만은 원나라 사람의 소작(所作)이며[a 9] 현대문주10▶운암사의 노국공주진은 공민왕의 친필로 유명하나[a 10] 그 이외 진영에 대하여는 모두 제작자가 미상하다. 현대문주11▶ 장단 화장사에 공민왕의 자화상이 있어 유명하였으나[a 11] 지금에 전하지 않고 덕행히 대정 5년도 고적 조사보고서에 만환(漫漶)된 화폭의 사진이 있어 그윽히 여향을 엿볼 수 있으나 진위를 모를 것이며 현대문주12▶공민왕의 화상으로 다시 윤택(尹澤)에게 하사된 바 있었으나[a 12] 지금에 물론 전함이 없을 것이다.
쪽수▶P114-3却說 上述한 諸王의 眞影은 舉皆 畫工의 손에서 製作 되었을 것은 勿論이나 何等의 事實을 이에 對하여 傳함이 없고 補閑集에 李琪가 그렸다는 원문주8▶毅宗眞[8]은 地方民의 自好 에서 나온 것이요, 大覺國師가 宋帝로부터 받은 文宗의 眞 影(同師文集)은 어떠한 것인지 不明하고 원문주9▶忠烈王 及 齊國公主眞 만은 元人의 所作이며[9] 원문주10▶雲岩寺의 魯國公主眞은 恭愍王의 親筆로 有名하나[10] 그 以外 眞影에 對하여는 모두 作者가 未詳하다. 원문주11▶長湍 華藏寺에 恭愍王의 自畫像이 있어 有名 하였으나[11] 지금에 傳하지 않고 德倖히 大正 5年度 古蹟 調査報告書에 漫漶된 畫幅의 寫眞이 있어 그윽히 餘香을 ▶P115-1 엿볼 수 있으나 眞僞를 모를 것이며 원문주12▶恭愍王의 畫像으로 다시 尹澤에게 下賜된 바 있었으나[12] 지금에 勿論 傳함이 없을 것이다.
화태에 대하여서도 물론 전함이 없고 고려사절요 명종 14년조에 태후의 화상이 입상이 아니였고 좌상이었음을 전함이 있으니, 공민왕 진영의 화태와 대조하면 당대 진영의 대체적인 양식은 얼마간 추상할 수 있다 하겠다.
쪽수▶P115-2 畫態에 對하여서도 勿論 傳함이 없고 高麗史節要 明宗 14年條에 太后의 畫像이 立像이 아니였고 坐像이었음 을 傳함이 있으니, 恭愍王 眞影의 畫態와 對照할제 當代 眞影의 大體 樣式은 얼마간 推想할 수 있다 하겠다.
































본문1-2: (乙)圖形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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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3: (丙)其他의 肖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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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 二.宗敎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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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1: (甲)佛敎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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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2: (乙)儒敎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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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3: (丙)道教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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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4: (丁)神道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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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戊)自由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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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四.實用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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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1: (甲)天文地理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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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2: (乙)經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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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3: (丙)其他雜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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