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인물고(1) -무인난설원기를 중심으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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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3번= {{TagSpage|12-3}}所謂 道傳 陰謀 (即 謀害宗親)의 風說 或 中傷을 芳遠에게 傳導한 길을 追跡하여 보면 大畧 三種이 있는 것 같으니. 그 第一은 義安君 和요 第二는 李茂와 閔無疾 無咎 兄弟요 第三은 李憂李 居易 父子이다. 이 外에도 朴苞와 其他의 人物이 있으나 此等은 以下에 記述하는 바와 같이 이 三者 中의 仝系의 消息이므로 別示하지 않는다. 此等 各種 各様의 密吿를 一一히 그 內容을 知悉할 수 없으나, 그 中에는 서로 相異한 듯한 點도 있은즉, 그 內容을 한번 探査하여 볼 必要가 있을까 한다.  
 
|원문13번= {{TagSpage|12-3}}所謂 道傳 陰謀 (即 謀害宗親)의 風說 或 中傷을 芳遠에게 傳導한 길을 追跡하여 보면 大畧 三種이 있는 것 같으니. 그 第一은 義安君 和요 第二는 李茂와 閔無疾 無咎 兄弟요 第三은 李憂李 居易 父子이다. 이 外에도 朴苞와 其他의 人物이 있으나 此等은 以下에 記述하는 바와 같이 이 三者 中의 仝系의 消息이므로 別示하지 않는다. 此等 各種 各様의 密吿를 一一히 그 內容을 知悉할 수 없으나, 그 中에는 서로 相異한 듯한 點도 있은즉, 그 內容을 한번 探査하여 볼 必要가 있을까 한다.  
 
|원문14번= {{TagSpage|12-4}}義安君 和의 密吿는, 上記한 바에 依하여서는 그 內容을 明白히 斷言할 수 없고, 단지 「知其謀」라 하나 「卜者安植曰, 世子異母兄有天命者非. 道傳聞之曰, 即當除之, 何患乎, 義安君和, 知其謀, 密吿 靖安君」의 記錄은 解釋에 依하여는 이 卜者安植에게 對한 道傳의 暴言을 和가密吿한 것 같이 보인다. 或은 그 密吿의 內容이 以下에 紀錄할 閨無疾 李茂의 密吿 內容과 같은 것이었을는지 모르나 그 點은 다음에 미루고, 이 道傳 壯談의 風說만을 問題로 하면 그것이 深房密語일만침 그 眞僞를 難測하며, 그 密語를 對話者 安植이가 漏洩하였다면 容或無怪하였으나 그 所自出이 全然不明할뿐 아니라 다못 和가 知其謀하였다고 記載한 바로서 眞相을 云云할 수 없다. 그{{TagPage|13-1}}뿐 아니라 設或 그 壯談이 眞相이라 하나 이미 芳碩을 世子로 册立한 以上, 太祖 歿後에는 當然히 國主가 될것이며, 이 世子에게 對하야 異母兄이 所譴 「有天命」하다고 하여 그 實頊을 圖謀한다면 鄭이 國君을 爲하야 「即當除之」하는 것이 忠烈의 士이라고 할지언정 謀逆라 할수는 萬無하니, 道傳의 此種壯言의 風說을 芳遠 兄弟가 個人的으로 不快不安하게 생각함은 當然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潜謀不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文意를 有天命하다고 하야 如何間 即當除之하자는 뜻으로 보지않고, 그 所謂 天命을 實理시키려하면 (寶位를 窺하는 野心으로 蠢動하면) 即 當除之하리니 何患之有리오 하였다 하면 當然한 事實일뿐아니라 鄭道傳으로서는 그만한 責任과 意志가 있었으리라고 推測하여도 不當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密吿는 그 內容의 眞僞틀 쳣제 斷定하기 어려우므로 重視할 問題는 되지 못할듯하다.  
 
|원문14번= {{TagSpage|12-4}}義安君 和의 密吿는, 上記한 바에 依하여서는 그 內容을 明白히 斷言할 수 없고, 단지 「知其謀」라 하나 「卜者安植曰, 世子異母兄有天命者非. 道傳聞之曰, 即當除之, 何患乎, 義安君和, 知其謀, 密吿 靖安君」의 記錄은 解釋에 依하여는 이 卜者安植에게 對한 道傳의 暴言을 和가密吿한 것 같이 보인다. 或은 그 密吿의 內容이 以下에 紀錄할 閨無疾 李茂의 密吿 內容과 같은 것이었을는지 모르나 그 點은 다음에 미루고, 이 道傳 壯談의 風說만을 問題로 하면 그것이 深房密語일만침 그 眞僞를 難測하며, 그 密語를 對話者 安植이가 漏洩하였다면 容或無怪하였으나 그 所自出이 全然不明할뿐 아니라 다못 和가 知其謀하였다고 記載한 바로서 眞相을 云云할 수 없다. 그{{TagPage|13-1}}뿐 아니라 設或 그 壯談이 眞相이라 하나 이미 芳碩을 世子로 册立한 以上, 太祖 歿後에는 當然히 國主가 될것이며, 이 世子에게 對하야 異母兄이 所譴 「有天命」하다고 하여 그 實頊을 圖謀한다면 鄭이 國君을 爲하야 「即當除之」하는 것이 忠烈의 士이라고 할지언정 謀逆라 할수는 萬無하니, 道傳의 此種壯言의 風說을 芳遠 兄弟가 個人的으로 不快不安하게 생각함은 當然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潜謀不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文意를 有天命하다고 하야 如何間 即當除之하자는 뜻으로 보지않고, 그 所謂 天命을 實理시키려하면 (寶位를 窺하는 野心으로 蠢動하면) 即 當除之하리니 何患之有리오 하였다 하면 當然한 事實일뿐아니라 鄭道傳으로서는 그만한 責任과 意志가 있었으리라고 推測하여도 不當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密吿는 그 內容의 眞僞틀 쳣제 斷定하기 어려우므로 重視할 問題는 되지 못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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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5번= {{TagSpage|13-2}}第二의 李茂, 閔無疾 一派의 密吿 內容은 太宗 九年에 李茂의 罪를 議할 時의 記錄 中에 있는 「上謂群臣曰, 李茂今繫獄中, 卿等豈能悉知其故, 予欲盡召臣僚而吿之, 勢未可也, 卿等明聽予言, 歲在戊寅, 父王疾篤彌留, 予與昆季, 侍疾于景福宮時, 予只聞李茂之名, 未之相親, 茂因無疾, 交納於我, 日吿予臼, 南誾鄭道傳伺上疾篤, 謀不利於正嫡, 公其預圖, 間五六日, 復來謂予曰, 冬外警徽颦冷聲普時哉不可失也, 予曰, 君請先徃會處, 稽留其計, 至日暮, 義安大君入闕內, 呼予者再, 時日己昏矣, 大君暨諸昆季, 待我至甚忙, 及至中官尹貴自內而出, 問靖安君來歟, 予應曰諾, 貴風召諸君入內, 興安君跌予靴曰, 速入, 予聞茂之言, 固自有疑, 及觀事變有異, 托以如厠遂走出, 諸昆季亦自內走至吿變, 遂與至道傳會處」(註十一)의 記錄을 보면, 初頭에 引用한 太祖 七年 八月 二十六日의 記事 中에 있는 「至是日晡時, 閔無疾詣 靖安君邸, 入與 夫人偶語良久……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坐密{{TagPage|14-1}}語良久」한 것이 李茂의 所吿와 同一한 內容이었던 것을 推測할수 있으며, 더욱 「李茂, 素有中立之計, 密以間等謀甞罟由竭安, 至是, 隨無疾來謁, 少頃先去, 茂, 無疾近姻也, 竹城君朴苞, 亦徃來其間, 暗伺彼之動靜」의 記錄을 恭照하여보면, 이 密吿의 內容은 前文에 引用한 바와 같이 李茂의 所自出로, 李茂와 朴苞가 居中探査하야 密吿한 것을 可知할 것이다. 그리고 그 內容은 鄭道傳, 南誾, 沈孝生, 張至和 等이 「托以省問 上疾, 日夜聚松靦闔妾家, 相與密謀,  令芳碩, 濟及親軍衛都鎭撫朴懿, 左副承旨盧石柱, 右副承旨卞仲良在內, 稱上病篤, 急召諸王子, 入內則以內奴及甲士攻之, 道傳間等外應, 約以己巳擧事」라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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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6번= {{TagSpage|14-2}}그러면 이 李茂의 密吿한 內容이 果然 如何한 程度의 眞實性을 가지고 있었나? 李茂의 第二次 密吿 時의 말이 「今夕道傳等欲擧事」라 하며 또 「約以己巳擧事」라 한 것을 보면, 靖安君의 쿠데타 斷行 當日이 所謂 道傳 擧事의 當夕이거늘, 道傳 一派의 行動과 當時의 事態가 이러한 準備와 用意를 推測할 수 있는 一點證左가 없으니, 이것을 如何히 解释하여야 可할까. 첫째, 夜二鼓에 宮內에서 諸王子를 召入한 即後의 時間이라면, 鄭南 一派에게 上記한 바와 같은 計劃이 있었다 하면 當然히 무슨 緊張한 態度와 準備가 있어야 할것이거늘, 靖安君이 南誾 妾家를 襲擊하였을 때 道傳, 誾 等은 會座言笑하고 平然히 있으며 門外에는 鞍馬 數匹과 奴僕皆睡하는 狀態가 可疑하다고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當時의 靖安君의 軍勢가 全部 合하야 「騎兵纔十, 步卒纔九人, 乃出 夫人所備鐵槍, 中折分與軍士, 諸君從者及各人奴僕十餘皆執杖, 獨小斤把劎」의 貧弱한 勢力으로 萬若 上記한 것 같은 用意가 道傳의 便에 있었다 하면, 當時 兵權의 大勢를 잡고 있는 鄭道傳과 南誾을 麟息間에 覆滅시키기는 새로이 도리어 蟠螂의 龍車에 向하는 比諭가 될 것이 아닌가. 이 點은 上記文 中에도 靖安君 一派외 危懼憶彻한 態度가 그 實相올 傳하는 것이{{TagPage|15-1}}니, 「靖安君謂叔蕃曰, 勢力則不可敵矣, 斬道傳閭等, 然後我四五兄弟, 駐馬于三軍府門前, 以觀國人之心, 人心不從則己, 翕然從之則我等得生」이라는 悲壯한 决心이 그 平時의 實力 差異를 보이는 것이다. 萬若 道傳, 簡等이 이 已巳日에 擧事할라 하였으면 더군다나 外應할라 하였다하면, 그 平時의 實力과 當夜의 너무도 無備한 것이 異常하지 안을가. 또한 便으로 宮內에서도 「諸王子, 入則以內奴甲士攻之」하리라 하나 그러한 準備와 形跡은 全然히 볼 수 없으며, 眞相은 그런 準備가 없드래도 그럴듯하게 臆測할 수나 牽强附會할 수만 있더라도 그렇다고 記載할 만한 當時의 情狀임에도 不拘하고 全然 想像만한 記錄도 없으니, 그 眞僞는 推想하기 어렵지 않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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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7번= {{TagSpage|15-2}}또 正嫡을 謀害할 陰謀가 具體化되었고, 더욱 己巳日 當夕에 臨迫하였다고 해서는 趙浚과 金士衡 等의 左右兩相이 全然 이러한 形勢도 想像할 수도 없다는 듯 하는 態度가 異常하니, 「浚士衡等下馬, 趨而過橋, 靖安君曰, 卿等何不憂李氏社稷, 浚士衡等, 驚懼跪于馬前, 君曰, 道傳間等貪立幼孽, 欲勢除我同母兄弟, 我是以爲弱者先手也, 浚等叩頭曰, 彼之所爲吾等未甞知也」라는 記錄이 그것이며, 또 靖安君이 趙浚을 招請함에 對하야 靖安의 焦燥한 마음에도 不拘하고 趙浚이 오랫동안 去就틀 猶豫 不決한 것도 浚이 道傳, 誾 等의 陰謀說을 信用하지 못한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當時의 趙浚과 道傳 南誾과의 사이에는 昔日과 다른 間隙이있었으므로 (이것은 이 밀에 詳述) 萬若 조금이라도 可疑할 點이 있었더라면 趙浚이 이다지 猶豫하지도 않을 것이며, 卜者에게 筮하거나 右相 金士術에게 相議하거나 할 必要도 없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大事가 (宗子들을 剪除하려는) 靖安君 一派 些細히는 李茂 以外에는 아무도 豫察한 形跡이 全無한것이 可疑하니 趙浚, 金士衡은 勿論하고 所謂 宮內에서 예로를 斷行할 李濟와 卞仲良 等의 態度도 此文 初頭에 引用한 바로서 보아서는 이러한 大事를 决行할 用意는 勿論,{{TagPage|16-1}}그러한 緊迫한 狀態를 豫測하지도 못한 듯 한 것이 異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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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8번= {{TagSpage|16-2}}또 한 가지 더 實例를 들어 所謂 此種 謀逆의 實體可疑함을 證明하여 보자. 初頭 引交 中 南誾의 項에 「南誾, 逃出城水門, 隱於城外圃幕, 法景等左右扶持, 暫不離焉, 閭欲詣巡軍, 法等止之, 誾曰, 道傳爲人所憎故見誅, 我無憎之者, 自詣巡軍門外, 見斬」이라는 記事가 있으니, 이것이 王子들을 劾除하려고 陰謀한 자의 態度이며 陰謀 實行 當夜에 襲擊을 받은 자의 言行일가. 이 記事를 平心으로 解釋하면 南誾은 靖安君의 突然한 襲擊이 何故인지 全然 無知하며 그것은 다못 平時 私怨을 가진 자가 道傳을 襲擊함에 不過하다고 깊이 믿었던 것을 表示하는 것이 아닌가. 平素로 道傳과 上記한 바와 같은 陰謀가 있었다 하면 더욱 그것이 擧事 當日이라 하면 이러한 平然한 一言行을 取一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 無罪함을 自信하고 自進하야 巡軍門 外에 간 行動만을 보더라도 萬事가 轄然自明하다고 할 것이다. 死者無口하니 이 外에 斬殺올 當한 人物들을 一一히 探査할 수 없으나 이 南誾의 泰然한 最後의 行動이 後日의 所謂 戊寅之變의 原因이라고 千言萬記하는 것 보단 確然한 眞相을 우리의 腦中에 銘刻하는 것 같다. (南誾의 態度로 이 變亂의 性質을 檢査證明할 方策은 이 外에도 許多하나 省畧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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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9번= {{TagSpage|16-3}}이 때의 所謂 陰圖不軌라는 密吿에 對한 眞相은 後日에 이르러 太宗 九年十月에 王이 「予聞度之言, 固身有疑」라 하고(註十二) 대단히 冷靜한 態度와 理性의 判斷있는 形迹을 보이는 點이 있다. 勿論 「及觀事變有異」라고 當時의 自已 行動을 是認하려는 努力은 變함이 없으나, 最初(太祖 七年 八月 二十六日)에 閔無疾의 密吿를 됼은 直後의 興奮한 態度 即 「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立密讀良久, 夫人執君衣, 請勿謂闕君曰, 豈可畏死不詣……若有變則我當出來擧八, 以觀國人之心也, 乃佛衣而出」한 狀態와는 判異함이 있다. 이것을 十{{TagPage|17-1}}年이란 時間이 經過한 때문에 當時의 興奮이 沈消하였다고 보는 것이 當然하나, 또 한層 더 깊이 一時의 興奮이 消沈하고 보니, 그 李茂의 密吿라는 것이 아무 實相 없었던 것과 따라서이 密吿만으로 輕輕히 大事를 擧行하였다고 보이기틀 未安히 생각한 一種 發明에 가까운 心境을 抱持하고 있던 것을 推想할 수 있다고 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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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0번= {{TagSpage|19-2}} 이것은 所謂 「事變有異」라는 것이 아무 實體를 明確히 할 수 없는 그 記錄 狀態로 보아서도 推測할 수 있다. 그것은 「至初夜, 有人, 自內出曰, 上病劇, 欲避病, 諸王子速入內, 從者命勿許入」이라는 것이 最大 嫌疑며, 이 直前에 「芳蕃將入內, 靖安君呼之, 芳蕃搔首遂巡, 不應而入」이란 事實이 더욱 靖安의 疑心을 돋우고, 王子入內를 請하였을 때 宮內 無燈한 것을 보고 靖安의 疑心에는 暗鬼가 생겨서 李茂 閔無疾의 密吿에 있는 「入內則以內奴甲士攻之」라는 례로의 實現을 믿은 것이다. 勿論 靖安도 이것만으로서는 아무리 하여도 너무 自信하기 漠然하였던지 腹痛이라 하야 入厠坐思良久한 것이 當時의 興奮과 襲惻과 理性의 相刻을 이기지 못하야 混亂한 頭腦로 焦燥하던 情相을 볼 수 있다. 이때 入內하였던 益安과 懷安이 走出呼嘲安君者再함을 만나 憶慟의 情에 激動을 받아 瞬間에 大決意를 맺고 頹欄을 旣倒에 돌리려는 乾坤一擲의 反抗을 決意한 것이다. 所謂 弱者先手라는 決斷이 여기서 비로소 생긴 것이라고 볼 것이다. 益安 懷安의 走出呼靖安하였다는 것을 重大意味 있는 듯이 보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이것은 諸王子 入內 中에 靖站만 入內하지 않음이 良久함에 疑心하야 불러나온 것이라 解釋하야 아무 無理가 없으며, 더 군다나 諸王子가 入內의 命을 받아 西廊에서 下庭하였을 때 「靖安君與益安, 懷安, 上黨諸君, 暫立戶內, 密語舊制, 宮中諸門夜必張燈」이라 하고 이날에 마침 「見宮門無燈, 益疑之」한 事實을恭照하면, 益安, 懷安에게도 此夕의 靖後君의 異常한 態度와 密語가 心中에 무슨 暗影을 던졌을 것이 當然히 推測되며. 그 當者 靖安이 密語하고 疑之{{TagPage|18-1}}한 直後에 良久히 入內하지 않는 態度가, 兩人에게 一極의 恐怖와 危懼의 情을 일으킬 것이 當然하다. 走出呼靖安 하는 것을 特히 宮內에 異常한 準備있는 것을 目擊한 結果라고만 할 必要가 없으며, 더욱 益安 懷安이 平時로 부터 同母兄弟로, 繼妃 康氏를 專寵하는 太祖아래에 있어 家庭 內部의 苦勞와 不平이 共通하였으리라고 推想되는 狀態로 보면, 靖安의 平時 態度 (方碩 芳蕃의 寵位에 對한 不平) 가 即 同母兄 益安懷安에게도 同一한 心事라 볼 것이며, 또 靖安의 接受한 密吿가 그 全部는 아니라도 그 傾向과 風聞만이라도 兩人에게까지 傳導될 可能이 있었다면, 靖安君이 上述한 바와 갈이 興奮하였던 當夕의 益安 懷安 兩人의 走出呼名을 過大히 重大히 생각하고 意味를 附會할 必要가 全無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萬若 宮內에 靖安 等이 想像한 바 같은 례로의 準備가 있었다 하면, 靖安 一派에 有利할 資料면 차라리 針小棒大라고 하여도 可할만한 記述의 態度인 殘存 文籍에, 一點 具體的 實例는 勿論 이어니와 讀者로 推測이라도 시킬만한 것이 없으니, 그 陰謀計劃의 實在를 疑心하지 않을 수없다. 이런것을, 太宗 九年 十月에 이르러서는 這間의 消息을, 王은 「予聞茂之言, 固自有疑, 及觀事變有異, 托以如厠, 遂走出, 諸昆季, 亦自內走至吿變」이라고 하야, 「吿變」이란 文字를 泛然히 使用하게 되며, 또 이 文字에 依하여 무슨 陰謀의 實相이 宮內에 있었던 것을 推測시키려 한다. 이것을 다못 揑造라 하야 一笑에 付하기 보다는 文字의 援用이 空中에 虚事를 搆成하여가는 一例를 볼 수 있다고 銘心할것이다. 이 記事 中에는 「托以如厠, 遂走出」이라 하야, 前에 「入厠坐思」한 것과 相對된 點이 있으나, 이것은 前記가 正確할 것만 付記하고, 그 理由는 省畧에 從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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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1번= {{TagSpage|18-2}}以上의 論述에 依하야, 筆者는 南誾等이 「謀害王子」하려하였다는 具體的 證左를 發見하지 못하며,더욱{{TagPage|19-1}}「己巳夕擧事」 云云의 李茂 閔無疾等의 密吿가 實體없는 寃罪이었던 것 을 믿는다. 그러면 다음에 第三의 李愛(李居易 子)의 密吿란 것은 如何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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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2번= {{TagSpage|19-2}}太宗 十一年 十一月의 記錄 中에 「己巳, 賜敎書于上黨君李愛……歲在戊寅, 南誾等將逐我母兄弟於海島, 愛以間之戚屬故, 知其謀, 潜語予曰, 禍將發矣, 兄將若何, 予吿之以先發之, 故自是歸心于我, 共定大計」(註十三)라는 것이 그 內容이니, 愛의 密吿한 바는 靖安君의 同母兄弟를 海島에 逐하려 한다는 陰謀요, 剪除라든지 謀害라던지 甚至於 己巳 夕에 內奴 甲士로써 攻之한다는 等의 急激手段은 아니었다. 이 愛의 密吿가 李茂의 密吿한 것과 다른 別箇의 陰謀인지 同一 陰謀의 內容 相違인지는 未確하나, 事理를 推測하건대 鄭南이 靖安君 同母兄弟틀 排斥하려고, 成은 流逐 或은 剪除를 計劃하였다 하기보단, 鄭南의 陰謀에 對한 風說 或은 그 內容에 對한 外間의 臆測과 解釋이 이 같이 數種에 나누어 있었다고 볼 것이다. 이런 觀點에서 보면, 이 李藻의 密吿 內容은 그 可能性이 前記李 茂等의 觀測보다는 多大할뿐 아니라, 形便에 따라서는 이만한 非常手段을 道傳과 南誾이 計劃할 可能性이 있으리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太祖가 繼妃康氏를 專寵하고 그 所出인 芳碩을 世子를 刑立하고, 康氏의 所產인 芳碩 芳蕃을 寵愛優待하는대 對한, 靖安君을 先頭로 한 益安 懷安 (永安君의 暫時 不問) 等 韓氏 所生의 異腹兄들의 家庭的 不平과, 鄭道傳 南誾 兩人의 太祖에 對한 誠忠이, 世子로 策立된 芳碩을 保護함에 傾倒하야, 世子를 嫉視하고 그 地位를 危殆하게하는, 運動과 存在에 對하여는, 그를 除排하기에 手段을 不惜할만한 態度를 推測할 수 있으며, 이 兩方의 利害가 相衝 突擊함도 不可避할 事態이라 할지 모르는 때문이다, 그러나 李 慶가 靖安君의 同母妹 慶愼翁主를 娶한 人物인 點으로 보아 그의 利害關係가 어느 便에 重할지 可知하겠으며,{{TagPage|20}}따라서 그 情報의 確實性에는 多少間 疑問이 있을것을 推測할수있다. 이렇게 이 李囊의密吿程度의實相에도 可 擁하 点이 있다면, 李茂의 密吿한것 갈은急激한 直接行動, 따라서 多大한準備를 必要로할 手段이 있었다고믿 雀수는 없으며, 또 當時의各方의 事態로 보아도 道傳(芳碩)派로서는 그다지 緊張할 必要가없었다는것이 眞相 일듯하다. 그是안이라 當時의事態星 推想하드래도 芳遠 一 派에 世子, 芳碩)에게對한 具體的 反抗運動이 없는 以上 이러한 非常手段을 取할 必要가없욜것이니, 問題는 現實로 權力의 中心을 잡고 있는 道傳(及世子)- 涙가 아 니요, 常時로 不平과憶刼에 焦燥햐는芳遠 - 派의 態度에 있었다 하겟다. 그러나 只今 現實의 事態를 眼中에두지 않고,  兩派의 根本的 利害關係是 考察하면,  靖安君 芳遠은 太祖의八子中에도 가장 氣力과 見識이豊富한 政治 家로, 太祖의「化家爲國」運戲에도 不少한 盡瘁是 하였다 하며, 道傳은 麗末國初에 있어가장 情熱과 實行力이 많 은 政治家이었을뿐 아니라, 太祖 即位後에는 太祖의 信任과 實力이 政界의最大存在였고, 또 이우에 當時에는 軍事의 主權을 掌握하笠엇다. 南聞도 亦 太祖 卽位에 第 一 位라고稱할만한 大功을 세웟을뿐 아니라,  當代의 軍 事의 大勢를 잡고, 그政見이 道傳과 肝膽相照한 사이었엇다. 沈孝生은 其女를 世子 芳碩의妃로 冊하였으니,  끄個人的 關係로 보아도 道傳과 合할 理由가있을것이다. 이러한 兩個의 勢力이 正面으로 衝突하엿다면,  當時의實力 程度로 보아 勿論 世子 芳碩派, 卽 道傳 南聞派가 領袖 一 觸외勝利률 可保할것이며,  萬若 太祖歿後의 芳 碩 繼位에 靖安等이 不服抗拒한다면, 流逐은 勿論 極刑이라도 避하지못하였을지모르겠다. 그러므로, 太祖의 病篤 한 當時에그 歿後의 地位에 不安한 靖安君立의 耳朶에는, 各種의 流說과 風聞이 들어왔을 것이며, 道傳 間等을中心으로 한 芳碩派(現狀維持派)의 威振天下하는 實力에 比하야너무도 貧弱한 靖安派의 勢力이 더욱더욱 削減{{TagPage|21-1}}하여가는 情勢가, 心中에 焦燥와 憶惑을 도아서, 實相없는 確實하지 않은 密吿틀 잡고, 決死의 勇氣로 影子와 間爭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靖安의 戊寅 擧事는 참으로 危機一髮이라고 할 것이오, 萬若 敵方에 少許의 準備가 있어도 決코 成功하지 못할 冒險일뿐 아니라, 萬若 一敗地에 떨어젔던들, 이 空然한 白紙의 擧事가 萬世의 嘲笑를 받였을 것이다. 그러나「勝爲官軍敗爲敵」이라는 日諺과 같이, 道傳間을 斬誅만하면 三軍府 門前에가서 次心의 所歸에 自己의 成敗를 一任하겠다는 靖安의 悲壯한 決意에서 나온 天運의 勝利가 歷史를 異常하게도 變革서킨 것어, 우리의 感懷를 크게도 일으킨다. 三峯의 謀叛說이 四百餘年의 定說이나, 이제 그 眞相을 訂正할 必要가 있지 않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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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3번= {{TagSpage|21-2}}以上의 畧論으로써 戊寅之變의 眞相을 一面으로 檢討하였으나, 그만으로 두어서는 너도무 皮相的 觀察만에 그칠 念應가 있기에, 다음에 鄭道傳 一派와 靖安君 芳遠과의 衝突한 根本的 利害에 對하야, 좀더 追求하여둘 必要가 있다. 곧 말하면. 前段 末句에 畧說한 王室 內部의 家庭的 不滿이 勿論 大部分의 根本 原因이나,(註十四) 이것을 또다른 半面으로 좀더 直接的 具體的인 利害關係로 보아서 兩者가 如何히 相容하지 못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一考할 必 要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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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4번= {{TagSpage|21-3}}이 問題를 생각할 때, 우리의 心中에 第一 먼저 일어나는 疑問은, 本文 初頭에 引用한 實錄 中의 「道傳, 又嗾卞仲良上疏, 請罷諸王子兵權, 至再一一」이라는 文句와, 太宗 三年에 王의 懷舊의 말 가운데 「父王卽位之初, 以勇兵皆委於我」(註十五)라는 것을 比較하야, 靖安이 道傳에게 兵權의 削奪을 怨함이 있지 않았는지, 적어도 이 點이 兩者不容{{TagPage|22-1}}한 一理由가 되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設令 그런 事實이 있다 하드라도, 李朝의 新國家가 成立된 以上, 諸般의 政治와 制度가 中央集權的 形態를 띄여가는 것이 當然한 現像이므로, 特히 道傳의 個人的 野心을 云云할 수는 勿論없을 뿐 아니라, 이 運動을 大觀하여보면, 芳碩과 芳遠間의 些少한 關係는 勿論, 細細한 政治的勢力 問題와는 關係없이,  別로히 獨立한 問題로 이 後에도 繼續되어간 것이요, 그것이 國家(王室)를 中心으로 利害를 顧慮할 問題인 즉, 道傳(卽 芳碩派)이 王室의 中心 利害를 代表할 때 그가 運動의 中軸이며, 道傳 敗歿 後에 芳遠이 政權의 中心일 때 그가 亦 그 運動의 主動者 됨이 當然하다.(註十六) 그러므로 芳遠이 在野 時(?)에 道傳의 勢力集中的 政治施設에 不滿을 가젔다 하여도, 아무 異常한 點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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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3번= 소위 도전 음모 (즉 謀害宗親(모해종친))의 풍설 혹 중상을 방원에게 전도한 길을 추적하여 보면 대략 3종이 있는 것 같으니. 그 제1은 義安君(의안군) 和(화)요 제2는 李茂(이무)와 閔無疾(민무질) 無咎(무구) 형제요 제3은 李憂李(이우리) 居易(거이) 부자이다. 이 외에도 朴苞(박포)와 기타의 인물이 있으나 이들은 이하에 기술하는 바와 같이 이 3자 중의 동계의 소식이므로 별시하지 않는다. 이들 각종 각양의 밀고를 일일히 그 내용을 知悉(지실)할 수 없으나, 그 중에는 서로 상이한 듯한 점도 있은즉, 그 내용을 한번 탐사하여 볼 필요가 있을까 한다.  
 
|해독문13번= 소위 도전 음모 (즉 謀害宗親(모해종친))의 풍설 혹 중상을 방원에게 전도한 길을 추적하여 보면 대략 3종이 있는 것 같으니. 그 제1은 義安君(의안군) 和(화)요 제2는 李茂(이무)와 閔無疾(민무질) 無咎(무구) 형제요 제3은 李憂李(이우리) 居易(거이) 부자이다. 이 외에도 朴苞(박포)와 기타의 인물이 있으나 이들은 이하에 기술하는 바와 같이 이 3자 중의 동계의 소식이므로 별시하지 않는다. 이들 각종 각양의 밀고를 일일히 그 내용을 知悉(지실)할 수 없으나, 그 중에는 서로 상이한 듯한 점도 있은즉, 그 내용을 한번 탐사하여 볼 필요가 있을까 한다.  
 
|해독문14번= 의안군 화의 밀고는, 상기한 바에 의하여서는 그 내용을 명백히 단언할 수 없고, 단지 「知其謀」라 하나 「卜者安植曰, 世子異母兄有天命者非. 道傳聞之曰, 即當除之, 何患乎, 義安君和, 知其謀, 밀고 靖安君」의 기록은 해석에 의하여는 이 卜者(복자) 安植(안식)에게 대한 도전의 폭언을 화가 밀고한 것 같이 보인다. 혹은 그 밀고의 내용이 이하에 기록할 민무질 이무의 밀고 내용과 같은 것이었을는지 모르나 그 점은 다음에 미루고, 이 도전 장담의 풍설만을 문제로 하면 그것이 深房密語(심방밀어)일만침 그 진위를 難測(난측)하며, 그 밀어를 대화자 안식이가 누설하였다면 容或無怪(용혹무괴)하였으나 그 所自出(소자출)이 전연 불명할뿐 아니라 다못 화가 知其謀(지기모)하였다고 기재한 바로서 진상을 운운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설혹 그 장담이 진상이라 하나 이미 방석을 세자로 책립한 이상, 태조 몰 후에는 당연히 국주가 될것이며, 이 세자에게 대하여 異母兄(이모형)이 소견 「有天命」하다고 하여 그 實頊(실욱)을 도모한다면 정이 국군을 위하여 「即當除之」하는 것이 충렬의 士(사)이라고 할지언정 謀逆(모역)라 할수는 만무하니, 도전의 此種壯言(차종장언)의 풍설을 방원 형제가 개인적으로 불쾌불안하게 생각함은 당연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潜謀不軌(잠모부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문의를 有天命(유천명)하다고 하여 여하간 即當除之(즉당제지)하자는 뜻으로 보지않고, 그 소위 천명을 實理(실리)시키려하면 (보위를 窺(규)하는 야심으로 준동하면) 즉 當除之(당제지)하리니 何患之有(하환지유)리오 하였다 하면 당연한 사실일 뿐 아니라 정도전으로서는 그만한 책임과 의지가 있었으리라고 추측하여도 부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밀고는 그 내용의 진위를 첫째 단정하기 어려우므로 중시할 문제는 되지 못할듯하다.
 
|해독문14번= 의안군 화의 밀고는, 상기한 바에 의하여서는 그 내용을 명백히 단언할 수 없고, 단지 「知其謀」라 하나 「卜者安植曰, 世子異母兄有天命者非. 道傳聞之曰, 即當除之, 何患乎, 義安君和, 知其謀, 밀고 靖安君」의 기록은 해석에 의하여는 이 卜者(복자) 安植(안식)에게 대한 도전의 폭언을 화가 밀고한 것 같이 보인다. 혹은 그 밀고의 내용이 이하에 기록할 민무질 이무의 밀고 내용과 같은 것이었을는지 모르나 그 점은 다음에 미루고, 이 도전 장담의 풍설만을 문제로 하면 그것이 深房密語(심방밀어)일만침 그 진위를 難測(난측)하며, 그 밀어를 대화자 안식이가 누설하였다면 容或無怪(용혹무괴)하였으나 그 所自出(소자출)이 전연 불명할뿐 아니라 다못 화가 知其謀(지기모)하였다고 기재한 바로서 진상을 운운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설혹 그 장담이 진상이라 하나 이미 방석을 세자로 책립한 이상, 태조 몰 후에는 당연히 국주가 될것이며, 이 세자에게 대하여 異母兄(이모형)이 소견 「有天命」하다고 하여 그 實頊(실욱)을 도모한다면 정이 국군을 위하여 「即當除之」하는 것이 충렬의 士(사)이라고 할지언정 謀逆(모역)라 할수는 만무하니, 도전의 此種壯言(차종장언)의 풍설을 방원 형제가 개인적으로 불쾌불안하게 생각함은 당연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潜謀不軌(잠모부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문의를 有天命(유천명)하다고 하여 여하간 即當除之(즉당제지)하자는 뜻으로 보지않고, 그 소위 천명을 實理(실리)시키려하면 (보위를 窺(규)하는 야심으로 준동하면) 즉 當除之(당제지)하리니 何患之有(하환지유)리오 하였다 하면 당연한 사실일 뿐 아니라 정도전으로서는 그만한 책임과 의지가 있었으리라고 추측하여도 부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밀고는 그 내용의 진위를 첫째 단정하기 어려우므로 중시할 문제는 되지 못할듯하다.
|해독문1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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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5번= 제2의 이무, 민무질 일파의 밀고 내용은 태종 9년에 이무의 죄를 議(의)할 때의 기록 중에 있는 「上謂群臣曰, 李茂今繫獄中, 卿等豈能悉知其故, 予欲盡召臣僚而吿之, 勢未可也, 卿等明聽予言, 歲在戊寅, 父王疾篤彌留, 予與昆季, 侍疾于景福宮時, 予只聞李茂之名, 未之相親, 茂因無疾, 交納於我, 日吿予臼, 南誾鄭道傳伺上疾篤, 謀不利於正嫡, 公其預圖, 間五六日, 復來謂予曰, 冬外警徽颦冷聲普時哉不可失也, 予曰, 君請先徃會處, 稽留其計, 至日暮, 義安大君入闕內, 呼予者再, 時日己昏矣, 大君暨諸昆季, 待我至甚忙, 及至中官尹貴自內而出, 問靖安君來歟, 予應曰諾, 貴風召諸君入內, 興安君跌予靴曰, 速入, 予聞茂之言, 固自有疑, 及觀事變有異, 托以如厠遂走出, 諸昆季亦自內走至吿變, 遂與至道傳會處」(주11)의 기록을 보면, 초두에 인용한 태조 7년 8월 26일의 기사 중에 있는 「至是日晡時, 閔無疾詣 靖安君邸, 入與 夫人偶語良久……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坐密語良久」한 것이 이무의 所吿(소고)와 동일한 내용이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으며, 더욱 「李茂, 素有中立之計, 密以間等謀甞罟由竭安, 至是, 隨無疾來謁, 少頃先去, 茂, 無疾近姻也, 竹城君朴苞, 亦徃來其間, 暗伺彼之動靜」의 기록을 참조하여 보면, 이 밀고의 내용은 전문에 인용한 바와 같이 이무의 所自出(소자출)로, 李茂(이무)와 朴苞(박포)가 居中探査(거중심사)하여 밀고한 것을 可知(가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정도전, 남은, 沈孝生(심효생), 張至和(장지화) 등이 「托以省問 上疾, 日夜聚松靦闔妾家, 相與密謀,  令芳碩, 濟及親軍衛都鎭撫朴懿, 左副承旨盧石柱, 右副承旨卞仲良在內, 稱上病篤, 急召諸王子, 入內則以內奴及甲士攻之, 道傳間等外應, 約以己巳擧事」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해독문16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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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6번= 그러면 이 이무의 밀고한 내용이 과연 여하한 정도의 진실성을 가지고 있었나? 이무의 제2차 밀고 시의 말이 「今夕道傳等欲擧事」라 하며 또 「約以己巳擧事」라 한 것을 보면, 정안군의 쿠데타 단행 당일이 소위 도전 거사의 當夕(당석)이거늘, 도전 일파의 행동과 당시의 사태가 이러한 준비와 용의를 추측할 수 있는 一點證左(일점증좌)가 없으니, 이것을 여하히 해석하여야 가할까. 첫째, 夜二鼓(야이고)에 궁내에서 제 왕자를 召入(소입)한 즉 후의 시간이라면, 정남 일파에게 상기한 바와 같은 계획이 있었다 하면 당연히 무슨 긴장한 태도와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거늘, 정안군이 남은 첩가를 습격하였을 때 도전, 은 등은 會座言笑(회좌언소)하고 평연히 있으며 문 외에는 鞍馬(안마) 수 필과 奴僕皆睡(노복개수)하는 상태가 可疑(가의)하다고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당시의 정안군의 군세가 전부 합하여 「騎兵纔十, 步卒纔九人, 乃出 夫人所備鐵槍, 中折分與軍士, 諸君從者及各人奴僕十餘皆執杖, 獨小斤把劎」의 빈약한 세력으로 만약 상기한 것 같은 용의가 도전의 편에 있었다 하면, 당시 병권의 대세를 잡고 있는 정도전과 남은을 麟息(인식) 간에 覆滅(복멸)시키기는 새로이 도리어 蟠螂(반랑)의 龍車(용차)에 향하는 비유가 될 것이 아닌가. 이 점은 상기문 중에도 정안군 일파 외 危懼憶彻(위구억철)한 태도가 그 실상을 전하는 것이니, 「靖安君謂叔蕃曰, 세력則不可敵矣, 斬道傳閭等, 然後我四五兄弟, 駐馬于三軍府門前, 以觀國人之心, 人心不從則己, 翕然從之則我等得生」이라는 비장한 결심이 그 평시의 실력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만약 도전, 은 등이 이 기사일에 거사할라 하였으면 더군다나 외응할라 하였다하면, 그 평시의 실력과 당야의 너무도 무비한 것이 이상하지 않을까. 또한 편으로 궁내에서도 「諸王子, 入則以內奴甲士攻之」하리라 하나 그러한 준비와 형적은 전연히 볼 수 없으며, 진상은 그런 준비가 없더래도 그럴듯하게 억측할 수나 견강부회할 수만 있더라도 그렇다고 기재할 만한 당시의 情狀(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전연 상상만한 기록도 없으니, 그 진위는 추상하기 어렵지 않다 할 것이다.
|해독문17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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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7번= 또 정적을 모해할 음모가 구체화되었고, 더욱 기사일 당석에 임박하였다고 해서는 조준과 金士衡(김사형) 등의 좌우 양상이 전연 이러한 형세도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하는 태도가 이상하니, 「浚士衡等下馬, 趨而過橋, 靖安君曰, 卿等何不憂李氏社稷, 浚士衡等, 驚懼跪于馬前, 君曰, 道傳間等貪立幼孽, 欲勢除我同母兄弟, 我是以爲弱者先手也, 浚等叩頭曰, 彼之所爲吾等未甞知也」라는 기록이 그것이며, 또 정안군이 조준을 초청함에 대하여 정안의 초조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조준이 오랫동안 거취를 유예 불결한 것도 준이 도전, 은 등의 음모설을 신용하지 못한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당시의 조준과 도전 남은과의 사이에는 昔日(석일)과 다른 간극이있었으므로 (이것은 이 밀에 상술) 만약 조금이라도 可疑(가의)할 점이 있었더라면 조준이 이다지 유예하지도 않을 것이며, 복자에게 筮(서)하거나 우상 김사술에게 상의하거나 할 필요도 없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대사가 (종자들을 전제하려는) 정안군 일파 자세히는 이무 이외에는 아무도 豫察(예찰)한 형적이 전무한 것이 가의하니 조준, 김사형은 물론하고 소위 궁내에서 예로를 단행할 李濟(이제)와 卞仲良(변중량) 등의 태도도 이 글 초두에 인용한 바로서 보아서는 이러한 대사를 결행할 용의는 물론, 그러한 긴박한 상태를 예측하지도 못한 듯한 것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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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8번=  또 한 가지 더 실례를 들어 소위 此種(차종) 모역의 실체 可疑(가의)함을 證明하여 보자. 초두 引文(인문) 중 남은의 항에 「南誾, 逃出城水門, 隱於城外圃幕, 法景等左右扶持, 暫不離焉, 閭欲詣巡軍, 法等止之, 誾曰, 道傳爲人所憎故見誅, 我無憎之者, 自詣巡軍門外, 見斬」이라는 기사가 있으니, 이것이 왕자들을 劾除(핵제)하려고 음모한 자의 태도며 음모 실행 當夜(당야)에 습격을 받은 자의 언행일까. 이 기사를 平心(평심)으로 해석하면 남은은 정안군의 돌연한 습격이 何故(하고)인지 전연 무지하며 그것은 다못 평시 私怨(사원)을 가진 자가 도전을 습격함에 불과하다고 깊이 믿었던 것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가. 평소로 도전과 상기한 바와 같은 음모가 있었다 하면 더욱 그것이 거사 당일이라 하면 이러한 평연한 일 언행을 取一(취일)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 무죄함을 자신하고 자진하여 巡軍門(순군부) 외에 간 행동만을 보더라도 만사가 轄然自明(할연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死者無口(사자무구)하니 이 외에 참살올 당한 인물들을 일일히 탐사할 수 없으나 이 남은의 태연한 최후의 행동이 후일의 소위 무인지변의 원인이라고 千言萬記(천언만기)하는 것보단 확연한 진상을 우리의 뇌 중에 銘刻(명각)하는 것 같다. (남은의 태도로 이 변란의 성질을 검사증명할 방책은 이 외에도 허다하나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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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9번= 이 때의 소위 陰圖不軌(음도불궤)라는 밀고에 대한 진상은 후일에 이르러 태종 9년 10월에 왕이 「予聞度之言, 固身有疑」라 하고(주12) 대단히 냉정한 태도와 이성의 판단있는 형적을 보이는 점이 있다. 물론 「及觀事變有異」라고 당시의 자기 행동을 시인하려는 노력은 변함이 없으나, 최초(태조 7년 8월 26일)에 민무질의 밀고를 들은 직후의 흥분한 태도 즉 「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立密讀良久, 夫人執君衣, 請勿謂闕君曰, 豈可畏死不詣……若有變則我當出來擧八, 以觀國人之心也, 乃佛衣而出」한 상태와는 판이함이 있다. 이것을 10년이란 시간이 경과한 때문에 당시의 흥분이 沈消(침소)하였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나, 또 한 층 더 깊이 일시의 흥분이 소침하고 보니, 그 이무의 밀고라는 것이 아무 실상 없었던 것과 따라서 이 밀고만으로 輕輕(경경)히 대사를 거행하였다고 보이기틀 미안히 생각한 일종 발명에 가까운 심경을 抱持(포지)하고 있던 것을 추상할 수 있다고 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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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0번= 이것은 소위 「事變有異」라는 것이 아무 실체를 명확히 할 수 없는 그 기록 상태로 보아서도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至初夜, 有人, 自內出曰, 上病劇, 欲避病, 諸王子速入內, 從者命勿許入」이라는 것이 최대 혐의며, 이 직전에 「芳蕃將入內, 靖安君呼之, 芳蕃搔首遂巡, 不應而入」이란 사실이 더욱 정안의 의심을 돋우고, 왕자 入內(입내)를 청하였을 때 궁내 無燈(무등)한 것을 보고 정안의 의심에는 暗鬼(암귀)가 생겨서 이무 민무질의 밀고에 있는 「入內則以內奴甲士攻之」라는 례로의 실현을 믿은 것이다. 물론 정안도 이것만으로서는 아무리 하여도 너무 자신하기 막연하였던지 복통이라 하여 入厠坐思良久(입측좌사량구)한 것이 당시의 흥분과 襲惻(습측)과 이성의 相刻(상각)을 이기지 못하여 혼란한 두뇌로 초조하던 情相(정상)을 볼 수 있다. 이때 입내하였던 益安(익안)과 懷安(회안)이 走出呼嘲安君者再(주출호조정안자재)함을 만나 憶慟(억통)의 정에 격동을 받아 순간에 대결의를 맺고 頹欄(퇴란)을 기도에 돌리려는 건곤일척의 반항을 결의한 것이다. 소위 弱者先手(약자선수)라는 결단이 여기서 비로소 생긴 것이라고 볼 것이다. 익안 회안의 走出呼靖安(주출호정안)하였다는 것을 중대 의미있는 듯이 보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이것은 제왕자 입내 중에 정참만 입내하지 않음이 良久(양구)함에 의심하여 불러나온 것이라 해석하여 아무 무리가 없으며, 더군다나 제왕자가 입내의 명을 받아 西廊(서랑)에서 下庭(하정)하였을 때 「靖安君與益安, 懷安, 上黨諸君, 暫立戶內, 密語舊制, 宮中諸門夜必張燈」이라 하고 이날에 마침 「見宮門無燈, 益疑之」한 사실을 참조하면, 익안, 회안에게도 此夕(차석)의 정안군의 이상한 태도와 밀어가 심중에 무슨 暗影(암영)을 던졌을 것이 당연히 추측되며. 그 당자 정안이 밀어하고 의지한 직후에 良久(양구)히 입내하지 않는 태도가, 양인에게 일극의 공포와 危懼(위구)의 정을 일으킬 것이 당연하다. 走出呼靖安(주출호정안) 하는 것을 특히 궁내에 이상한 준비있는 것을 목격한 결과라고만 할 필요가 없으며, 더욱 익안 회안이 평시로 부터 同母兄弟(동모형제)로, 계비 강씨를 專寵(전총)하는 태조 아래에 있어 가정 내부의 苦勞(고로)와 불평이 공통하였으리라고 추상되는 상태로 보면, 정안의 평시 태도 (방석 芳蕃(방번)의 寵位(총위)에 대한 불평) 가 즉 同母兄(동모형) 익안 회안에게도 동일한 심사라 볼 것이며, 또 정안의 접수한 밀고가 그 전부는 아니라도 그 경향과 풍문만이라도 양인에게까지 전도될 가능이 있었다면, 정안군이 상술한 바와 갈이 흥분하였던 당석의 익안 회안 양인의 주출호명을 과대히 중대히 생각하고 의미를 부회할 필요가 전무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만약 궁내에 정안 등이 상상한 바 같은 례로의 준비가 있었다 하면, 정안 일파에 유리할 자료면 차라리 침소봉대라고 하여도 가할만한 기술의 태도인 잔존 문적에, 일점 구체적 실례는 물론 이어니와 독자로 추측이라도 시킬만한 것이 없으니, 그 음모계획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없다. 이런것을, 태종 9년 10월에 이르러서는 저간의 소식을, 왕은 「予聞茂之言, 固自有疑, 及觀事變有異, 托以如厠, 遂走出, 諸昆季, 亦自內走至吿變」이라고 하여, 「吿變」이란 문자를 범연히 사용하게 되며, 또 이 문자에 의하여 무슨 음모의 실상이 궁내에 있었던 것을 추측시키려 한다. 이것을 다못 揑造(열조)라 하여 일소에 付(부)하기 보다는 문자의 援用(원용)이 공중에 허사를 구성하여가는 일례를 볼 수 있다고 명심할 것이다. 이 기사 중에는 「托以如厠, 遂走出」이라 하여, 전에 「入厠坐思」한 것과 상대된 점이 있으나, 이것은 전기가 정확할 것만 부기하고, 그 이유는 생략에 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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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1번= 이상의 논술에 의하야, 필자는 남은등이 「謀害王子」하려하였다는 구체적 증좌를 발견하지 못하며,더욱 「己巳夕擧事」 운운의 이무 민무질 등의 밀고가 실체없는 원죄이었던 것을 믿는다. 그러면 다음에 제3의 李愛(이애, 李居易(이거이) 아들)의 밀고란 것은 여하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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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2번= 태종 11년 11월의 기록 중에 「己巳, 賜敎書于上黨君李愛……歲在戊寅, 南誾等將逐我母兄弟於海島, 愛以間之戚屬故, 知其謀, 潜語予曰, 禍將發矣, 兄將若何, 予吿之以先發之, 故自是歸心于我, 共定大計」(주13)라는 것이 그 내용이니, 애의 밀고한 바는 정안군의 동모형제를 海島(해도)에 逐(축)하려 한다는 음모요, 剪除(전제)라든지 모해라던지 심지어 기사 夕(석)에 內奴 (내노) 甲士(갑사)로써 攻之(공지)한다는 등의 급격 수단은 아니었다. 이 애의 밀고가 이무의 밀고한 것과 다른 별개의 음모인지 동일 음모의 내용 相違(상위)인지는 未確(미확)하나, 사리를 추측하건대 鄭南(정남)이 정안군 동모형제틀 배척하려고, 혹은 流逐(유축) 혹은 剪除(전제)를 계획하였다 하기보단, 정남의 음모에 대한 풍설 혹은 그 내용에 대한 외간의 억측과 해석이 이같이 수종에 나누어 있었다고 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애의 밀고 내용은 그 가능성이 전기 이무 등의 관측보다는 다대할뿐 아니라, 형편에 따라서는 이만한 비상수단을 도전과 남은이 계획할 가능성이 있으리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태조가 계비 강씨를 전총하고 그 소출인 방석을 세자를 책립하고, 강씨의 소산인 방석 방번을 총애 우대하는데 대한, 정안군을 선두로 한 익안 회안 (永安君(영안군)의 잠시 불문) 등 한씨 소생의 이복형들의 가정적 불평과, 정도전 남은 양인의 태조에 대한 誠忠(성충)이, 세자로 책립된 방석을 보호함에 傾倒(경도)하여, 세자를 嫉視(질시)하고 그 지위를 위태하게하는, 운동과 존재에 대하여는, 그를 除排(제배)하기에 수단을 不惜(불석)할 만한 태도를 추측할 수 있으며, 이 양방의 이해가 상충 돌격함도 불가피할 사태이라 할지 모르는 때문이다, 그러나 이애가 정안군의 同母妹(동모매) 慶愼翁主(경신옹주)를 취한 인물인 점으로 보아 그의 이해관계가 어느 편에 중할지 可知(가지)하겠으며, 따라서 그 정보의 확실성에는 다소간 의문이 있을 것을 추측할수있다. 이렇게 이 이애의 밀吿정도의 실상에도 가의한 점이 있다면, 이무의 밀고한 것 같은 급격한 직접 행동, 따라서 다대한 준비를 필요로할 수단이 있었다고 믿을 수는 없으며, 또 당시의 각방의 사태로 보아도 도전(방석)파로서는 그다지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진상 일듯하다. 그 뿐 아니라 당시의 사태를 추상하드래도 방원 일파에 세자, 방석에게 대한 구체적 반항 운동이 없는 이상 이러한 비상수단을 취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문제는 현실로 권력의 중심을 잡고있는 도전(및 세자) 일파가 아니요, 상시로 불평과 억겁에 초조하는 방원 일파의 태도에 있었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 현실의 사태를 안중에 두지 않고, 양파의 근본적 이해 관계를 고찰하면,  정안군 방원은 태조의 8자 중에도 가장 기력과 견식이 풍부한 정치가로, 태조의 「化家爲國」 운동에도 불소한 盡瘁(진췌)를 하였다 하며, 도전은 여말국초에 있어 가장 정열과 실행력이 많은 정치가이었을뿐 아니라, 태조 즉위 후에는 태조의 신임과 실력이 정계의 최대 존재였고, 또 이우에 당시에는 군사의 주권을 장악하였었다. 남은도 亦(역) 태조 즉위에 제1위라고 칭할만한 대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당대의 군사의 대세를 잡고, 그 정견이 도전과 肝膽相照(간담상조)한 사이였었다. 沈孝生(심효생)은 其女(기녀)를 세자 방석의 비로 冊(책)하였으니, 그 개인적 관계로 보아도 도전과 합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양개의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였다면, 당시의 실력 정도로 보아 물론 세자 방석파, 즉 도전 남은파가 領袖(영수) 一觸(일촉)의 승리를 可保(가보)할 것이며, 만약 태조 몰후의 방석 繼位(계위)에 정안 등이 불복 항거한다면, 流逐(유축)은 물론 극형이라도 피하지 못하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태조의 병독한 당시에 그 몰후의 지위에 불안한 靖安君立(정안군립)의 耳朶(이타)에는, 각종의 流說(유설)과 풍문이 들어왔을 것이며, 도전 은 등을 중심으로 한 방석파(현상유지파)의 威振天下(위진천하)하는 실력에 비하여너무도 빈약한 정안파의 세력이 더욱 더욱 삭감하여가는 정세가, 심중에 초조와 憶惑(억혹)을 도와서, 실상없는 확실하지 않은 밀고를 잡고, 결사의 용기로 影子(영자)와 간쟁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정안의 무인 거사는 참으로 위기일발이라고 할 것이오, 만약 敵方(적방)에 少許(소허)의 준비가 있어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모험일뿐 아니라, 만약 一敗地(일패지)에 떨어젔던들, 이 공연한 백지의 거사가 만세의 조소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勝爲官軍敗爲敵」이라는 日諺(일언)과 같이, 도전 은을 斬誅(참주)만 하면 三軍府(삼군부) 문전에 가서 次心(차심)의 所歸(소귀)에 자기의 성패를 일임하겠다는 정안의 비장한 결의에서 나온 천운의 승리가 역사를 이상하게도 변혁시킨 것이, 우리의 감회를 크게도 일으킨다. 삼봉의 모반설이 400여 년의 정설이나, 이제 그 진상을 정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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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3번=  이상의 약론으로써 무인지변의 진상을 일면으로 검토하였으나, 그만으로 두어서는 너무도 피상적 관찰만에 그칠 염려가 있기에, 다음에 정도전 일파와 정안군 방원과의 충돌한 근본적 이해에 대하여, 좀 더 추구하여 둘 필요가 있다. 곧 말하면. 전단 末句(말구)에 약설한 왕실 내부의 가정적 불만이 물론 대부분의 근본 원인이나,(주14) 이것을 또 다른 반면으로 좀 더 직접적 구체적인 이해관계로 보아서 양자가 여하히 상용하지 못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일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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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4번=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의 심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의문은, 본문 초두에 인용한 실록 중의 「道傳, 又嗾卞仲良上疏, 請罷諸王子兵權, 至再一一」이라는 문구와, 태종 3년에 왕의 懷舊(회구)의 말 가운데 「父王卽位之初, 以勇兵皆委於我」(주15)라는 것을 비교하여, 정안이 도전에게 병권의 삭탈을 원함이 있지 않았는지, 적어도 이 점이 양자 불용한 이유가 되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설령 그런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이조의 신국가가 성립된 이상, 제반의 정치와 제도가 중앙집권적 형태를 띄어가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므로, 특히 도전의 개인적 야심을 운운할 수는 물론 없을 뿐 아니라, 이 운동을 大觀(대관)하여보면, 방석과 방원 간의 사소한 관계는 물론, 세세한 정치적 세력 문제와는 관계없이, 별로히 독립한 문제로 이 후에도 계속되어 간 것이요, 그것이 국가(왕실)를 중심으로 이해를 고려할 문제인 즉, 도전(즉 방석파)이 왕실의 중심 이해를 대표할 때 그가 운동의 중축이며, 도전 패몰 후에 방원이 정권의 중심일 때 그가 亦(역) 그 운동의 주동자 됨이 당연하다.(주16) 그러므로 방원이 재야 시(?)에 도전의 세력 집중적 정치시설에 불만을 가졌다 하여도, 아무 이상한 점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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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9일 (화) 11: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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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인물고(1) -무인난설원기를 중심으로-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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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峰人物考(一) -戊寅難雪寃記를 中心으로-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2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상백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5년04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45쪽 전체쪽 045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이조 초기의 조선사회를 연구하려 하면 여러 방면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나 가장 평범한 방법으로도 종래의 사승(史乘) 상에 문제 많은 인물을 다시 고찰하므로 가장 간편히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종래의 역사가 근래의 소위 학문적 방법의 결핍 혹은 전무에 의한 결점 외에 그 기록과 소전(所傳)이 너무도 공평함을 잃은 태도의 소산이므로 보아서, 숙독심안(熟讀深案)하여 세심히 당시의 진상을 적출할 필요가 있는 때문이다. 필자는 원래 소위 역사상 저명한 개인의 사적 공과의 논평에는 특별한 흥미도 없고, 또 이러한 고증을 본의로 하지도 않으나, 여상(如上)의 의미에 있어서 종래의 인물 평가와 전기에는 절심(絕深)한 불평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일례를 이에 약기(略記)하여볼까 한다.
쪽수▶P1 相李朝 初期의 朝鮮社會를 硏究하려하면 여러 方面으로 考察할 必要가 있을 것이나 가장 平凡한 方法으로도 從來의 史乘上에 問題 많은 人物을 다시 考察하므로 가장 簡便히 큰 收穫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點은 從來의 歷史가 近來의 所謂 學問的 方法의 缺乏 或은 全無에 依한 缺點 外에 그 記錄과 所傳이 너무도 公平함을 잃은 態度의 所産이므로 보아서, 熟讀深案하야 細心히 當時의 眞相을 摘出할 必要가 있는 때문이다. 筆者는 元來 所謂 歷史上 著名한 個人의 事蹟 功過의 論評에는 特別한 興味도 없고, 또 이러한 考證을 本意로 하지도 않으나, 如上의 意味에 있어서 從來의 人物 評價와 傳記에는 絕深한 不平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一例를 이에 略記하여볼까 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 사상의 인물을 점검하면 문제의 표적이 많을 것이나 더욱 여말 국초의 허다한 인물은 그 시기가 왕조 교체기인 만큼 검사할 문제가 많다. 三峯(삼봉) 鄭道傳(정도전)은 그 중에도 가장 현저한 일례이니, 삼봉의 一上一下(일상일하) 하고 一顯一沒(일현일몰)하던 반복한 생애도 문제가 많거니와 그 막대한 공적에 비하여 참담한 최후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지 毀譽(훼예)가 紛紜(분운)하고 流傳(유전)이 不少(불소)한즉 그 진상을 포착하기 지난한 형세에 있다. 三峯集(삼봉집) 십사권이(주1) 있으나 이 점에는 아무 명답을 주지 않으니, 각종의 주위와 형세를 추찰하여 산출하는 결론으로 焦急(초급)히 장담하기는 어려울듯하나, 일종의 해석으로 통용하게 되면 다행일까 한다.
쪽수▶P2-1 이러한 觀點으로 우리 史上의 人物을 點檢하면 問題의 標的이 많을 것이나 더욱 麗末 國初의 許多한 人物은 그 時機가 王朝 交替期인 만큼 檢査할 問題가 많다. 三峯 鄭道傳은 그 中에도 가장 顯著한 一例이니, 三峯의 一上一下 하고 一顯一沒하던 反覆한 生涯도 問題가 많거니와 그 莫大한 功績에 比하야 慘憺한 最後를 어떻게 解釋하여야 할지 毀譽가 紛紜하고 流傳이 不少한즉 그 眞相을 捕捉하기 至難한 形勢에 있다. 三峯集 十四卷이(註一) 있으나 이 点에는 아무 明答을 주지 않으니, 各種의 周圍와 形勢를 推察하야 產出하는 結論으로 焦急히 壯談하기는 어려울듯하나, 一種의 解釋으로 通用하게 되면 多幸일까 한다.
삼봉의 전기는 전기 삼봉집에(주2) 의하여 알 수 있으며, 髙麗史(고려사)와 기타의 舊蹟(구적)을 종합하여 흥미있는 문제가 불소하나 이 논고 중에는 삼봉의 전반생, 아니 생애의 대부분 즉 가장 활발하고 榮辱交至(영욕교지)하던 생존 시는 잠깐 주제 외로 두고, 그의 전광석화같이 몰락한 최후, 소위 恭昭之難(공소지난) 또는 戊寅之亂(무인지란)의 진상을 중심으로 고구해보고, 그 몰후에 삼봉의 일신에 첨가된 세평을 따라서 考査(고사)하여볼까 한다.
쪽수▶P2-2 三峯의 傳記는 前記 三峯集에(註二) 依하야 알 수 있으며, 髙麗史와 其他의 舊籟을 綜合하야 興味있는 問題가 不少하나 이 論稿 中에는 三峯의 前半生, 아니 生涯의 大部分 即 가장 活潑하고 榮辱交至하던 生存時는 暫間 主題 外로 두고, 그의 電光石火같이 沒落한 最後, 所謂 恭昭之難 또는 戊寅之亂의 眞相을 中心으로 考究해보고, 그 沒後에 三峯의 一身에 添加된 世評을 따라서 考査하여볼가 한다.
삼봉이 피주(被誅)한 태조 7년 8월 26일의 돌변에 대한 태조실록의 기재를 먼저 일독할 필요가 있다.
쪽수▶P2-3三峯이 被誅한 太祖 七年 八月 二十六日의 突變에 對한 太祖實錄의 記載를 먼저 一讀할 必要가 있다.

己巳, 奉化伯鄭道傳, 宜城君南誾, 及富城君沈孝生等, 謀害諸王子, 不克, 伏誅, 初 上以 靖安君開國之功, 諸子無與爲比, 特 賜世傳東北面加別赤五百餘戶, 其後以諸王子及功臣, 爲各道節制使, 分管侍衛兵馬, 靖安君全羅道, 撫安君芳蕃東北面, 於是, 靖安君, 以加別赤, 讓芳蕃, 芳蕃受而不辭, 上知之, 亦不責還也, 道傳, 間等, 謀欲擅權, 貧立幼孽, 謂孝生孤寒易制, 譽其女有婦德, 精爲世子芳碩嬪, 與世子同母兄芳蕃, 姊夫興安君李濟等, 同謀多樹黨與, 將欲去諸王子, 暗嗾宦者金師幸密啓, 請依中朝諸皇封王之例, 分遣諸王子於各道, 上 不答, 其後, 上諷諭 靖安君曰, 外間之議, 汝輩不可不知, 宜論諸兄戒愼之, 道傳等又嗾卞仲良上疏, 請罷諸王 子兵權, 至再三, 上不允, 卜者安植曰, 世子異母兄, 有天命者非.道傳聞之曰, 即當除之, 何患乎, 義安君和 知其謀, 密吿 靖安君, 至是宦者曹恂傳旨曰, 予病甚不欲接人, 惟世子外, 母得入見, 師幸恂皆其黨也, 道傳, 閭, 孝生, 判中樞李勲, 前恭賛李茂, 興城君張至和, 星山君李稷等, 托以省問 上疾, 日夜聚松覗闍妾家, 相與 密謀.令芳碩, 濟, 及親軍衛都鎭撫朴藏, 左副承旨盧石柱, 右副承知卞仲良, 在內, 稱 上病篤, 急召諸王子, 入則以內奴及甲士攻之, 道傳閭等外應, 初财古巴麥恥, 先是, 蹟安君密謂知安山那事李叔蕃曰, 姦殲在平時, 固無疑矣, 伺上違豫必生變, 予若召汝則宜速來, 至是, 閔無咎以埔安君命, 召之而至.時, 上病劇, 靖安君及:益安君芳毅, 懷安君芳幹, 淸原君沈惊, 上黨君李伯卿, 義安君和, 及李濟等, 皆會宿勤政殿門外西廊, 至是日哺. 時, 閔無疾詣靖安君邸, 入與夫人偶語良久, 夫人急召小斤曰, 汝速詣闕, 請公來, 小斤曰, 諸君皆會一廳, 奴將何辭以吿, 夫人曰, 汝以我胸腹卒痛奔吿則 公當速來矣, 小斤, 牽馬詣西廊, 具吿之, 義安君贈以請心蘇合 等藥曰, 宜速往治之, 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立密語良久, 夫人執君衣, 請勿詣闕, 君曰豈可畏死不詣, 且諸兄皆在禁中, 不可不使知之, 若有變則我當出來擧兵, 以觀國人之心也, 乃拂衣而出, 夫人追及戶外曰, 愼之愼之, 日己昏矣, 時命罷諸王子所領侍衛牌, 己十餘日矣, 唯芳蕃撼兵如舊, 靖安君初罷兵, 盡燒營中軍器至是, 夫人潜備兵仗, 爲應變計, 李茂素有中立之計, 密以閣等謀, 甞吿靖安, 至是, 隨無疾來謁, 少頃先去, 茂無疾之近姻也, 竹城君朴苞亦徃來其間, 暗伺彼之動靜, 於是, 靖安君命無咎, 使叔蕃備兵甲, 宿于本邸門前辛克禮家待變. 乃詣闕入西廊, 直宿諸君皆不留馬, 獨靖安君使小斤秣馬西廊後, 芳蕃將入內, 靖安君呼之, 芳蕃搔首逡巡不應而入, 至初夜, 有人自內出曰 上疾劇, 欲避病, 諸王子速入內, 從者命勿許入,和, 琮, 濟, 先出立庭, 靖安君與益安, 懷安, 上黨諸君, 暫立戶內, 密語, 舊制, 宮中諸門夜必張燈, 至是, 見宮門無燈, 益疑之, 和, 及濟, 琮, 先入內, 靖安君稱腹痛, 出西廊門外, 入厠坐思良久, 益安, 懷安等走出, 呼靖安君者再, 君曰, 諸兄是何高聲呼耶, 乃立以兩袖拍之曰, 勢不得己也, 卽馳馬出宮城西門, 益安, 懷(安), 上黨, 皆步走, 唯上黨能及靖安君馬, 益安懷安, 或仆蹭, 靖安君使馬天牧, 召芳蕃曰, 請出來從我, 厥終彼亦不全汝矣, 芳蕃臥內廊房, 見天牧, 起坐聞訖, 還臥, 芳蕃億從,皆無賴之徒, 唯事射御, 且妄欲謀移儲位久矣, 一日謂芳蕃曰 吾等己緣中, 乾使公得代芳碩位, 敎命將至矣, 請母出以待, 芳蕃信而不出外人哂之, 靖安知其不相容, 故召之不從, 靖安君到本邸洞口軍營前路, 駐馬呼叔蕃, 叔蕃率壯士二人, 甲而出, 安益公仓安)上羸懷安父子亦得騎馬, 有李居易, 趙英茂.辛克禮, 徐益, 文彬, 沈龜齡等, 皆歸心靖安者也"至是, 無咎, 無疾, 皆會, 騎兵纔十, 步卒纔九人, 乃出夫人所備鐵槍, 中折分與軍士, 諸君從者及备人奴僕十餘皆執杖, 獨小斤把翎, 君馳至栽所北癒呼叔蕃曰, 今日之事若之何. 叔蕃對曰, 事己至此不須懼也, 請出軍暁辭君命以山城二字, 行岌三軍府門前以待天命. 芳碩等, 聞變欲率兵出戰, 令軍士禮賓少卿奉元良, 登宫南門, 覘軍衆寡, 自光化門至南山, 鐵騎彌滿, 芳碩等惧不敢出, 時人以爲神助, 君又呼叔蕃曰, 如何則可, 叔蕃對曰, 到姦黨會所, 以兵圍而火之, 出者輒殺可矣, 夜二鼓, 將過松覗, 叔蕃奔馬吿曰, 此小洞即間妾家也, 靖安君駐馬, 先使步卒小斤等十餘人, 圍其家有鞍馬數匹, 其在門外奴僕皆睡, 道傳間等, 張燈會坐言笑, 小斤等窺戶未入, 忽有三矢相繼落屋瓦有聲, 小斤等還出洞口, 問矢之所從來, 叔蕃曰我矢也. 令小斤等還入圍之. 火其隣家三處, 道傳等皆逃匿, 孝生, 勲, 至和等皆見殺, 道傳逃入其隣前判事閔富家, 富吿曰, 有皤腹者入吾家, 君知其爲道傳, 乃令小斤等四人, 捕之, 道傳伏閨中, 小斤等叱之出外, 道傳持尺劎不能行步, 匍匐而出, 小斤等叱令棄劎, 道傳棄劎出門曰, 請勿殺, 願二言而死, 小斤等曳出至靖安君馬前, 道傳曰, 昔者公旣活我, 願今亦活之, 昔者指壬申歲也, 君曰, 汝爲朝鮮奉化伯顧不足耶, 何爲惡至是也, 令斬之, 初夫人欲自至君所立處, 同其禍敗, 徒步而出, 君麾下士崔廣大等力諫止之, 間奴金夫分以道傳笠劎來, 夫人乃還, 道傳有子四人, 游泳聞變急赴, 爲游兵所殺, 湛自刎於家, 初湛吿於父曰, 今日之事不可不吿於靖安君也, 道傳曰, 我旣背髙麗, 今又背:此附彼, 人雖不, 獨無愧於心乎, 李茂, 出門中流矢, 乃曰我李茂也, 步卒將殺之靖安君曰勿殺, 乃與之馬, 閭, 率伴人河景崔泛等逃竄, 稷乘屋, 詐爲. 奴僕, 作滅火狀, 仍得逃免. 闕內人, 望見松靦火焰張天, 奔吿于上, 宮中衛士. 鼓角而噪, 李天祐, 自其家率伴二人將, 赴闕馬天牧望之, 追及於安國坊洞口曰, 非天祐令公乎, 天祐不答, 天牧曰, 令公不答而去則矢可畏也, 天祐曰, 汝非馬司直乎, 何呼我耶, 天牧答曰, 靖安君與諸王子會于此矣, 天祐趨詣靖安君, 且曰, 今擧此事, 何不早使我知之, 靖安君遣朴苞閔無疾, 召左政丞趙浚, 浚猶豫, 使卜者筮其去就, 而不即赴, 又使叔蕃促之, 靖安君迎至中路, 浚已與右政丞金士衡來, 帶甲伴人多從之, 到嘉會坊洞口橋, 步卒以兵把截曰, 唯兩政丞入, 浚士衡等, 下馬, 趨而過橋, 靖安君曰, 卿等何不憂李氏社稷, 浚士衡等.驚懼跪于馬前, 君曰, 道傳聞等舍心如世那象斜孙亦跳, 方幣我是以爲弱者先手也, 浚等叩頭冃術阡堂世警, 就虾也, 君曰, 如此大事, 宜吿國家, 今日之事, 勢迫不暇吿耳, 公等宜速合坐, 石柱, 神良, 在闕內, 使人呼都承旨李文和, 右承旨金陸于家, 文和奔至, 問曰上體若何石柱曰, 上疾篇, 牛夜子時, 欲避病于西小凉亭, 於是, 諸承旨俱謂勤政殿門, 都鎭撫朴歲, 立於勤政殿門, 高聲呼曰, 軍士來杏, 文和問曰, 此時避御乎, 何吹角耶, 菠曰, 何嗣避御, 奉化伯, 宜城君會處, 有數多軍馬, 圍而火之, 故吹角耳, 先是, 靖安君謂叔蕃曰, 勢力則不可敵矣, 斬道傳闍等然後, 我四五兄弟, 駐馬于三車府門前, 以槻國人之心, 人心不從則己, 翕然從之則我輩得生, 至是, 靖安君還到三軍府門前駐馬, 夜己四鼓, 素所注篱者, 相權來集矣, 賛成柳曼殊率子原之 謁馬前, 靖安君曰, 何故來耶, 曼殊曰, 聞上將移御臣家’今不移御, 且聞有變, 故急來欲侍衛耳, 曰甲而來乎, 曼殊曰否, 即與之甲, 令立馬後, 天祐吿曰, 曼殊乃道傳間之黨, 不可不殺, 埔安君曰, 不可, 懷安及天祐强之曰, 如此倉卒之際, 衆議不可沮也, 靖安君顧謂叔蕃曰, 勢難得己, 命數其罪, 曼殊即下馬, 執靖安君馬轡曰, 我當白之矣白之矣, 靖安君, 令從者解之, 殊猶, 堅執不解, 小斤以小刀剌頷下曼殊仰倒, 乃斬之, 靖安君謂原之曰, 汝無罪可歸家矣, 懷安, 追斬于融賓門前, 浚士衡等, 入坐都評議司, 靖安 君意荆, 方碩等若搴術士出宫門交戰, 則我軍少勢將却矣, 若稍却則合坐諸相, 當在彼軍之後而或從彼矣, 使人詳於都堂曰, 我兄弟在路上而諸相入坐都堂, 不可, 宜即移坐于雲從街上, 遂令禮曹, 率會百官, 親軍衛都鎭撫趙溫, 亦直宿闕內, 靖安君使人召溫及朴蕨, 湿聞命即以麾丁甲士牌頭等出謁馬前, 蕨不應良次, 不得己佩劎而出, 增宣君溫賞以待, 聽見筆勢弱, 乃吿曰, 凡諸處分乞待天明, 其志, 以謂天明則, 兵弱之形著而衆心不附矣, 靖诙君使赴都堂, 懷安請于君使人斬之, 靖安君命温盡出宿衛甲士, 溫即遣牌頭等入闕, 盡以宿衛甲士出, 於是, 勤政股以南, 甲士攏出, 脫甲棄兵, 命各自歸家, 初, 李茂, 見兵勢弱, 詐稱恍惚, 使人扶持, 白於靖安君曰, 中箭處痛甚. 請就都堂兒房, 休息, 君曰可, 小頃, 茂聞朴歲見誅, 即還出, 翌日鷄鳴, 上召石柱入內, 黎明不召文和, 文和詣西凉亭, 世子與芳蕃, 濟, 和, 良祐, 淙叩樞相張思吉, 張湛, 鄭臣義等. 皆己入內, 自諸君樞相大小內官丁至內奴, 皆被甲帶劎, 唯曹恂及金陸石柱仲良不甲, 石柱傳 旨文和曰, 製敎書, 文和曰請辭, 石柱曰, 倣韓山君所製誅三元帥敎書之意, 製之可也, 文和曰, 看知之乎, 石柱曰, 破賊之功一時之或有, 無君之心萬世之不宥, 是其詞也, 文和曰, 今之罪魁離歟, 石柱曰, 罪魁則更禀于上, 先可起草, 督之急, 文和執筆曰, 君亦解屬文以親禀之意製之, 我當書之, 石柱製曰, 某某等, 潜圖不軌, 欲害開國元勳某某等, 以漏洩被捉, 皆令就戮, 其刼從鷺與, 皆宥不問, 草成, 石桂賛草入啓, 上曰, 姑待兩政丞來, 擬議頒之, 已而, 都堂率百官, 聞于上曰, 道傳間孝生等, 結黨陰謀, 欲害我親勳, 以亂我國家, 臣等, 事迫不及以聞, 已得誅除, 願上勿驚, 李濟方在側, 復于土曰, 諸王子起兵, 共誅間等, 禍將及身, 請以衛士出攻, 上曰, 勿憂一禍豈及汝和亦止之曰, 自中事也. 不必相戰, 濟拨劎睥睨者數矣, 和安然不動, 時永安, 爲上禱病致齋于昭格殿, 聞變, 潜率一奴, 繩城而出, 步至豐壤,隱於金仁貴家, 靖安君使人尋之, 迎到宮城南門外, 日腾吳矣, 時人皆欲請於上, 以靖安君爲世子, 增安君固讓, 請以永安君爲世子, 永安君曰, 當初建義開國至於今日之事, 皆是靖安之功, 我不可爲世子, 靖安君讓益固曰, 欲定國本嘗在嫡長, 永安君曰, 然則我當有以處之. 於是, 靖安君令都堂率百官上疏曰, 立嫡以長萬世之經, 殿下捨長立幼, 道傳等挾世子欲害諸王子, 禍在不測, 幸賴天地宗社之靈, 亂臣伏誅, 願殿下立嫡長, 永安君爲世子, 疏上, 文和讀訖, 世子亦在側, 上良久曰, 皆吾子也, 何不可之有, 顧謂芳磧曰, 於汝便矣, 上旣允下, 在內諸相問何事, 文和答曰, 易世子也, 石柱奉敎草, 使文和署名, 文和不受, 次請和, 亦不受 次請坐 中諸相, 皆不受, 文和曰, 君之所製書, 何不自増乎, 石柱曰, 諾, 乃署名袖之, 石柱, 石柱入內, 承 命出曰, 教書改寫速下, 文和曰何以改之, 石柱曰, 開國功臣道傳南誾等, 潜圖不軌, 謀害王子宗室, 今己漏洩, 功不掩罪, 己皆就戳, 其刼從黨與, 罔治, 使仲良書以進, 上令侍女扶起, 押訖還臥, 病劇, 欲吐未吐曰, 如有物在咽喉間不下, 靖安君令軍器直長金謊, 開武庫, 出甲槍, 授火桶軍百餘人, 用勢稍振, 甲士申龍鳳, 入闕傳 靖安君言曰, 與安君撫安君各歸私第, 義安君以下何不出來, 睹君相目不言, 更督之, 和以下皆出, 惊, 由宮城水門逃出, 獨鄭臣義遲留, 促之乃出, 都堂請出芳硝, 上曰, 旣己判付, 出去何害, 芳, 碩泣辭, 賢嬪牽衣而哭, 芳磧拂衣而出, 初議置遠方, 出宮城西門, 李居易, 李伯卿, 趙璞等, 議于都堂, 使人殺于道, 都堂又請出芳蕃, 上謂芳蕃曰, 世子則己矣, 汝不過置遠方耳, 芳蕃將出宮, 城南門, 靖安君下馬入門內, 携手語曰.簡等旣剪除我輩, 則汝亦終不免, 故我招之, 汝何不從耶, 今雖出外, 未幾必曜矣, 好去好去, 將置通津, 過楊花渡, 宿渡丞館, 芳幹與李伯卿等, 又議於都堂,,使人殺之, 靖安君聞芳碩芳蕃之死, 密語叔蕃曰, 柳曼殊予尙欲保全, 况骨肉乎, 居易父子不吿於我, 議於都堂, 戕害我母氣, 今人心未定, 故我隱忍不敢示怒也, 汝母出僦言, 軍士執仲良石柱及南贄等以出, 仲良仰視靖安君曰, 我注意於公, 今己數年矣, 君曰, 彼口亦肉也, 贄, 聞之弟, 時爲右廂節制使, 並囚于巡 軍而追斬于路, 李濟出, 靖安君胴濟曰, 可歸本家, 上遂策, 永安宼爲世子, 敎曰, 立嫡以長萬世之經, 宗子維城 寡人之望, 惟爾父臣甞開國, 捨長立幼, 乃以芳碩爲世于, 於孙科点暫盐幺知, 置穿聾弋 小林制费曳容, 賢舟團瓦死虾趴硏八詠, 折陌會町 朴世林那, 如當就赤僧林部, 部蠻駅込, 日者, 道傳闔孝生至和等, 潜圖 不軌, 搖亂根本, 幸賴天地 宗社之佑, 罪人伏誅, 王室再安, 芳碩禍胎, 不可留置國都, 放諸東裔, 予旣悔前日之裡, 又因百僚之請, 席建爾爲王世子, 於戲, 克明其德, 無忝爾所生, 徃盡乃心, 鎭撫我社稷, 乃命文和, 金瞼, 出謁,世子, 世子召文和曰, 內無可侍衛者, 爾速還入內, 文和即還入, 曹恂宣毋子命曰, 除侍女及內奴外, 餘皆出之, 文和亦出, 世子曰, 爾何出來, 文和具吿其由, 世子曰非謂汝也, 宜速還入侍, 又谷上將軍李敷, 入內待衛 ... 南时选出城水門, 瞟於城外圃幕, 沄景等左右扶持, 暫不離焉, 間欲詣巡軍, 法等止之, 闔曰, 道傳爲人鼻故見誅我無憎之者, 自脂巡軍門外,(註三) 見斬……靖安君與諸王子, 張幕於監巡廳前, 會宿三日, 其後, 入褚三軍府, 至世子受內彈後, 各還私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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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 奉化伯鄭道傳, 宜城君南誾, 及富城君沈孝生等, 謀害諸王子, 不克, 伏誅, 初 上以 靖安君開國之功, 諸子無與爲比, 特 賜世傳東北面加別赤五百餘戶, 其後以諸王子及功臣, 爲各道節制使, 分管侍衛兵馬, 靖安君全羅道, 撫安君芳蕃東北面, 於是, 靖安君, 以加別赤, 讓芳蕃, 芳蕃受而不辭, 上知之, 亦不責還也, 道傳, 間等, 謀欲擅權, 貧立幼孽, 謂孝生孤寒易制, 譽其女有婦德, 精爲世子芳碩嬪, 與世子同母兄芳蕃, 姊夫興安君▶P3李濟等, 同謀多樹黨與, 將欲去諸王子, 暗嗾宦者金師幸密啓, 請依中朝諸皇封王之例, 分遣諸王子於各道, 上 不答, 其後, 上諷諭 靖安君曰, 外間之議, 汝輩不可不知, 宜論諸兄戒愼之, 道傳等又嗾卞仲良上疏, 請罷諸王 子兵權, 至再三, 上不允, 卜者安植曰, 世子異母兄, 有天命者非.道傳聞之曰, 即當除之, 何患乎, 義安君和 知其謀, 密吿 靖安君, 至是宦者曹恂傳旨曰, 予病甚不欲接人, 惟世子外, 母得入見, 師幸恂皆其黨也, 道傳, 閭, 孝生, 判中樞李勲, 前恭賛李茂, 興城君張至和, 星山君李稷等, 托以省問 上疾, 日夜聚松覗闍妾家, 相與 密謀.令芳碩, 濟, 及親軍衛都鎭撫朴藏, 左副承旨盧石柱, 右副承知卞仲良, 在內, 稱 上病篤, 急召諸王子, 入則以內奴及甲士攻之, 道傳閭等外應, 初财古巴麥恥, 先是, 蹟安君密謂知安山那事李叔蕃曰, 姦殲在平時, 固無疑矣, 伺上違豫必生變, 予若召汝則宜速來, 至是, 閔無咎以埔安君命, 召之而至.時, 上病劇, 靖安君及:益安君芳毅, 懷安君芳幹, 淸原君沈惊, 上黨君李伯卿, 義安君和, 及李濟等, 皆會宿勤政殿門外西廊, 至是日哺. 時, 閔無疾詣靖安君邸, 入與夫人偶語良久, 夫人急召小斤曰, 汝速詣闕, 請公來, 小斤曰, 諸君皆會一廳, 奴將何辭以吿, 夫人曰, 汝以我胸腹卒痛奔吿則 公當速來矣, 小斤, 牽馬詣西廊, 具吿之, 義安君贈以請心蘇合 等藥曰, 宜速往治之, 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立密語良久, 夫人執君衣, 請勿詣闕, 君曰豈可畏死不詣, 且諸兄皆在禁中, 不可不使知之, 若有變則我當出來擧兵, 以觀國人之心也, 乃拂衣而出, 夫人追及戶外曰, 愼之愼之, 日己昏矣, 時命罷諸王子所領侍衛牌, 己十餘日矣, 唯芳蕃撼兵如舊, 靖安君初罷兵, 盡燒營中軍器至是, 夫人潜備兵仗, 爲應變計, 李茂素有中立之計, 密以閣等謀, 甞吿靖安, 至是, 隨無疾來謁, 少頃先去, 茂無疾之近姻也, 竹城君朴苞亦徃來其間, 暗伺彼之動靜, 於是, 靖安君命無咎, 使叔蕃備兵甲, 宿于▶P4本邸門前辛克禮家待變. 乃詣闕入西廊, 直宿諸君皆不留馬, 獨靖安君使小斤秣馬西廊後, 芳蕃將入內, 靖安君呼之, 芳蕃搔首逡巡不應而入, 至初夜, 有人自內出曰 上疾劇, 欲避病, 諸王子速入內, 從者命勿許入,和, 琮, 濟, 先出立庭, 靖安君與益安, 懷安, 上黨諸君, 暫立戶內, 密語, 舊制, 宮中諸門夜必張燈, 至是, 見宮門無燈, 益疑之, 和, 及濟, 琮, 先入內, 靖安君稱腹痛, 出西廊門外, 入厠坐思良久, 益安, 懷安等走出, 呼靖安君者再, 君曰, 諸兄是何高聲呼耶, 乃立以兩袖拍之曰, 勢不得己也, 卽馳馬出宮城西門, 益安, 懷(安), 上黨, 皆步走, 唯上黨能及靖安君馬, 益安懷安, 或仆蹭, 靖安君使馬天牧, 召芳蕃曰, 請出來從我, 厥終彼亦不全汝矣, 芳蕃臥內廊房, 見天牧, 起坐聞訖, 還臥, 芳蕃億從,皆無賴之徒, 唯事射御, 且妄欲謀移儲位久矣, 一日謂芳蕃曰 吾等己緣中, 乾使公得代芳碩位, 敎命將至矣, 請母出以待, 芳蕃信而不出外人哂之, 靖安知其不相容, 故召之不從, 靖安君到本邸洞口軍營前路, 駐馬呼叔蕃, 叔蕃率壯士二人, 甲而出, 安益公仓安)上羸懷安父子亦得騎馬, 有李居易, 趙英茂.辛克禮, 徐益, 文彬, 沈龜齡等, 皆歸心靖安者也"至是, 無咎, 無疾, 皆會, 騎兵纔十, 步卒纔九人, 乃出夫人所備鐵槍, 中折分與軍士, 諸君從者及备人奴僕十餘皆執杖, 獨小斤把翎, 君馳至栽所北癒呼叔蕃曰, 今日之事若之何. 叔蕃對曰, 事己至此不須懼也, 請出軍暁辭君命以山城二字, 行岌三軍府門前以待天命. 芳碩等, 聞變欲率兵出戰, 令軍士禮賓少卿奉元良, 登宫南門, 覘軍衆寡, 自光化門至南山, 鐵騎彌滿, 芳碩等惧不敢出, 時人以爲神助, 君又呼叔蕃曰, 如何則可, 叔蕃對曰, 到姦黨會所, 以兵圍而火之, 出者輒殺可矣, 夜二鼓, 將過松覗, 叔蕃奔馬吿曰, 此小洞即間妾家也, 靖安君駐馬, 先使步卒小斤等十餘人, 圍其家有鞍馬數匹, 其在門外奴僕皆睡, 道傳間等, 張燈會坐言笑, 小斤等窺戶未入, 忽有三矢相繼落屋瓦有聲, 小斤等▶P5還出洞口, 問矢之所從來, 叔蕃曰我矢也. 令小斤等還入圍之. 火其隣家三處, 道傳等皆逃匿, 孝生, 勲, 至和等皆見殺, 道傳逃入其隣前判事閔富家, 富吿曰, 有皤腹者入吾家, 君知其爲道傳, 乃令小斤等四人, 捕之, 道傳伏閨中, 小斤等叱之出外, 道傳持尺劎不能行步, 匍匐而出, 小斤等叱令棄劎, 道傳棄劎出門曰, 請勿殺, 願二言而死, 小斤等曳出至靖安君馬前, 道傳曰, 昔者公旣活我, 願今亦活之, 昔者指壬申歲也, 君曰, 汝爲朝鮮奉化伯顧不足耶, 何爲惡至是也, 令斬之, 初夫人欲自至君所立處, 同其禍敗, 徒步而出, 君麾下士崔廣大等力諫止之, 間奴金夫分以道傳笠劎來, 夫人乃還, 道傳有子四人, 游泳聞變急赴, 爲游兵所殺, 湛自刎於家, 初湛吿於父曰, 今日之事不可不吿於靖安君也, 道傳曰, 我旣背髙麗, 今又背:此附彼, 人雖不, 獨無愧於心乎, 李茂, 出門中流矢, 乃曰我李茂也, 步卒將殺之靖安君曰勿殺, 乃與之馬, 閭, 率伴人河景崔泛等逃竄, 稷乘屋, 詐爲. 奴僕, 作滅火狀, 仍得逃免. 闕內人, 望見松靦火焰張天, 奔吿于上, 宮中衛士. 鼓角而噪, 李天祐, 自其家率伴二人將, 赴闕馬天牧望之, 追及於安國坊洞口曰, 非天祐令公乎, 天祐不答, 天牧曰, 令公不答而去則矢可畏也, 天祐曰, 汝非馬司直乎, 何呼我耶, 天牧答曰, 靖安君與諸王子會于此矣, 天祐趨詣靖安君, 且曰, 今擧此事, 何不早使我知之, 靖安君遣朴苞閔無疾, 召左政丞趙浚, 浚猶豫, 使卜者筮其去就, 而不即赴, 又使叔蕃促之, 靖安君迎至中路, 浚已與右政丞金士衡來, 帶甲伴人多從之, 到嘉會坊洞口橋, 步卒以兵把截曰, 唯兩政丞入, 浚士衡等, 下馬, 趨而過橋, 靖安君曰, 卿等何不憂李氏社稷, 浚士衡等.驚懼跪于馬前, 君曰, 道傳聞等舍心如世那象斜孙亦跳, 方幣我是以爲弱者先手也, 浚等叩頭冃術阡堂世警, 就虾也, 君曰, 如此大事, 宜吿國家, 今日之事, 勢迫不暇吿耳, 公等宜速合坐, 石柱, 神良, 在闕內, 使人呼都承旨李文和, 右承旨金陸于家, 文和奔至, 問曰上體若何▶P6石柱曰, 上疾篇, 牛夜子時, 欲避病于西小凉亭, 於是, 諸承旨俱謂勤政殿門, 都鎭撫朴歲, 立於勤政殿門, 高聲呼曰, 軍士來杏, 文和問曰, 此時避御乎, 何吹角耶, 菠曰, 何嗣避御, 奉化伯, 宜城君會處, 有數多軍馬, 圍而火之, 故吹角耳, 先是, 靖安君謂叔蕃曰, 勢力則不可敵矣, 斬道傳闍等然後, 我四五兄弟, 駐馬于三車府門前, 以槻國人之心, 人心不從則己, 翕然從之則我輩得生, 至是, 靖安君還到三軍府門前駐馬, 夜己四鼓, 素所注篱者, 相權來集矣, 賛成柳曼殊率子原之 謁馬前, 靖安君曰, 何故來耶, 曼殊曰, 聞上將移御臣家’今不移御, 且聞有變, 故急來欲侍衛耳, 曰甲而來乎, 曼殊曰否, 即與之甲, 令立馬後, 天祐吿曰, 曼殊乃道傳間之黨, 不可不殺, 埔安君曰, 不可, 懷安及天祐强之曰, 如此倉卒之際, 衆議不可沮也, 靖安君顧謂叔蕃曰, 勢難得己, 命數其罪, 曼殊即下馬, 執靖安君馬轡曰, 我當白之矣白之矣, 靖安君, 令從者解之, 殊猶, 堅執不解, 小斤以小刀剌頷下曼殊仰倒, 乃斬之, 靖安君謂原之曰, 汝無罪可歸家矣, 懷安, 追斬于融賓門前, 浚士衡等, 入坐都評議司, 靖安 君意荆, 方碩等若搴術士出宫門交戰, 則我軍少勢將却矣, 若稍却則合坐諸相, 當在彼軍之後而或從彼矣, 使人詳於都堂曰, 我兄弟在路上而諸相入坐都堂, 不可, 宜即移坐于雲從街上, 遂令禮曹, 率會百官, 親軍衛都鎭撫趙溫, 亦直宿闕內, 靖安君使人召溫及朴蕨, 湿聞命即以麾丁甲士牌頭等出謁馬前, 蕨不應良次, 不得己佩劎而出, 增宣君溫賞以待, 聽見筆勢弱, 乃吿曰, 凡諸處分乞待天明, 其志, 以謂天明則, 兵弱之形著而衆心不附矣, 靖诙君使赴都堂, 懷安請于君使人斬之, 靖安君命温盡出宿衛甲士, 溫即遣牌頭等入闕, 盡以宿衛甲士出, 於是, 勤政股以南, 甲士攏出, 脫甲棄兵, 命各自歸家, 初, 李茂, 見兵勢弱, 詐稱恍惚, 使人扶持, 白於靖安君曰, 中箭處痛甚. 請就都堂兒房, 休息, 君曰可, 小頃, 茂聞朴歲見誅, 即還出, 翌日鷄鳴, 上召石柱入內, 黎明不召文和, 文▶P7和詣西凉亭, 世子與芳蕃, 濟, 和, 良祐, 淙叩樞相張思吉, 張湛, 鄭臣義等. 皆己入內, 自諸君樞相大小內官丁至內奴, 皆被甲帶劎, 唯曹恂及金陸石柱仲良不甲, 石柱傳 旨文和曰, 製敎書, 文和曰請辭, 石柱曰, 倣韓山君所製誅三元帥敎書之意, 製之可也, 文和曰, 看知之乎, 石柱曰, 破賊之功一時之或有, 無君之心萬世之不宥, 是其詞也, 文和曰, 今之罪魁離歟, 石柱曰, 罪魁則更禀于上, 先可起草, 督之急, 文和執筆曰, 君亦解屬文以親禀之意製之, 我當書之, 石柱製曰, 某某等, 潜圖不軌, 欲害開國元勳某某等, 以漏洩被捉, 皆令就戮, 其刼從鷺與, 皆宥不問, 草成, 石桂賛草入啓, 上曰, 姑待兩政丞來, 擬議頒之, 已而, 都堂率百官, 聞于上曰, 道傳間孝生等, 結黨陰謀, 欲害我親勳, 以亂我國家, 臣等, 事迫不及以聞, 已得誅除, 願上勿驚, 李濟方在側, 復于土曰, 諸王子起兵, 共誅間等, 禍將及身, 請以衛士出攻, 上曰, 勿憂一禍豈及汝和亦止之曰, 自中事也. 不必相戰, 濟拨劎睥睨者數矣, 和安然不動, 時永安, 爲上禱病致齋于昭格殿, 聞變, 潜率一奴, 繩城而出, 步至豐壤,隱於金仁貴家, 靖安君使人尋之, 迎到宮城南門外, 日腾吳矣, 時人皆欲請於上, 以靖安君爲世子, 增安君固讓, 請以永安君爲世子, 永安君曰, 當初建義開國至於今日之事, 皆是靖安之功, 我不可爲世子, 靖安君讓益固曰, 欲定國本嘗在嫡長, 永安君曰, 然則我當有以處之. 於是, 靖安君令都堂率百官上疏曰, 立嫡以長萬世之經, 殿下捨長立幼, 道傳等挾世子欲害諸王子, 禍在不測, 幸賴天地宗社之靈, 亂臣伏誅, 願殿下立嫡長, 永安君爲世子, 疏上, 文和讀訖, 世子亦在側, 上良久曰, 皆吾子也, 何不可之有, 顧謂芳磧曰, 於汝便矣, 上旣允下, 在內諸相問何事, 文和答曰, 易世子也, 石柱奉敎草, 使文和署名, 文和不受, 次請和, 亦不受 次請坐 中諸相, 皆不受, 文和曰, 君之所製書, 何不自増乎, 石柱曰, 諾, 乃署名袖之, 石柱, 石柱入內, 承 命出曰, ▶P8教書改寫速下, 文和曰何以改之, 石柱曰, 開國功臣道傳南誾等, 潜圖不軌, 謀害王子宗室, 今己漏洩, 功不掩罪, 己皆就戳, 其刼從黨與, 罔治, 使仲良書以進, 上令侍女扶起, 押訖還臥, 病劇, 欲吐未吐曰, 如有物在咽喉間不下, 靖安君令軍器直長金謊, 開武庫, 出甲槍, 授火桶軍百餘人, 用勢稍振, 甲士申龍鳳, 入闕傳 靖安君言曰, 與安君撫安君各歸私第, 義安君以下何不出來, 睹君相目不言, 更督之, 和以下皆出, 惊, 由宮城水門逃出, 獨鄭臣義遲留, 促之乃出, 都堂請出芳硝, 上曰, 旣己判付, 出去何害, 芳, 碩泣辭, 賢嬪牽衣而哭, 芳磧拂衣而出, 初議置遠方, 出宮城西門, 李居易, 李伯卿, 趙璞等, 議于都堂, 使人殺于道, 都堂又請出芳蕃, 上謂芳蕃曰, 世子則己矣, 汝不過置遠方耳, 芳蕃將出宮, 城南門, 靖安君下馬入門內, 携手語曰.簡等旣剪除我輩, 則汝亦終不免, 故我招之, 汝何不從耶, 今雖出外, 未幾必曜矣, 好去好去, 將置通津, 過楊花渡, 宿渡丞館, 芳幹與李伯卿等, 又議於都堂,,使人殺之, 靖安君聞芳碩芳蕃之死, 密語叔蕃曰, 柳曼殊予尙欲保全, 况骨肉乎, 居易父子不吿於我, 議於都堂, 戕害我母氣, 今人心未定, 故我隱忍不敢示怒也, 汝母出僦言, 軍士執仲良石柱及南贄等以出, 仲良仰視靖安君曰, 我注意於公, 今己數年矣, 君曰, 彼口亦肉也, 贄, 聞之弟, 時爲右廂節制使, 並囚于巡 軍而追斬于路, 李濟出, 靖安君胴濟曰, 可歸本家, 上遂策, 永安宼爲世子, 敎曰, 立嫡以長萬世之經, 宗子維城 寡人之望, 惟爾父臣甞開國, 捨長立幼, 乃以芳碩爲世于, 於孙科点暫盐幺知, 置穿聾弋 小林制费曳容, 賢舟團瓦死虾趴硏八詠, 折陌會町 朴世林那, 如當就赤僧林部, 部蠻駅込, 日者, 道傳闔孝生至和等, 潜圖 不軌, 搖亂根本, 幸賴天地 宗社之佑, 罪人伏誅, 王室再安, 芳碩禍胎, 不可留置國都, 放諸東裔, 予旣悔前日之裡, 又因百僚之請, 席建爾爲王世子, 於戲, 克明其德, 無忝爾所生, 徃盡乃心, 鎭撫我社稷, 乃命文和, 金▶P9-1瞼, 出謁,世子, 世子召文和曰, 內無可侍衛者, 爾速還入內, 文和即還入, 曹恂宣毋子命曰, 除侍女及內奴外, 餘皆出之, 文和亦出, 世子曰, 爾何出來, 文和具吿其由, 世子曰非謂汝也, 宜速還入侍, 又谷上將軍李敷, 入內待衛 ... 南时选出城水門, 瞟於城外圃幕, 沄景等左右扶持, 暫不離焉, 間欲詣巡軍, 法等止之, 闔曰, 道傳爲人鼻故見誅我無憎之者, 自脂巡軍門外,(註三) 見斬……靖安君與諸王子, 張幕於監巡廳前, 會宿三日, 其後, 入褚三軍府, 至世子受內彈後, 各還私第.

이상에 적배(摘配)한 실록의 인문(引文)은 삼봉 정도전이 이씨(성계)를 화가위국(化家爲國)하기 위하여, 심혈을 경진하고 일신의 복멸(覆滅)을 몇 번이나 경험하면서도 불요불굴(不撓不屈)한 막대의 공에 비하여 너무도 이상하고 돌연한 비참한 최후를 설명하기에 가장 필요한 기록이며, 500여 년을 지난 금일에 이르도록 망연모호한 그 진상을 추찰하기에 유일 최대의 자료라 하여도 불가함이 없을 듯하므로, 약간 용장(冗長)한 점이 있음을 불구하고 전문을 재록(載錄)한 것이다.
쪽수▶P9-2 以上에 摘配한 實銀의 引文은 三峯 鄭道傳이 李氏(成桂)를 化家爲國하기 爲하야, 心血을 傾盡하고 一身의 覆滅을 몇 번이나 經驗하면서도 不撓不屈한 莫大의 功에 比하야 너무도 異常하고 突然한 悲慘한 最後를 說明하기에 가장 必要한 記錄이며, 五百餘年을 지난 今日에 이르도록 茫然模糊한 그 眞相을 推察하기에 唯一 最大의 資料라하여도 不可함이 없을 듯하므로, 若干 冗長한 點이 있음을 不拘하고 全文을 載錄한 것이다.
이 기록을 일독하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바 정도전 남은의 소위 죄상이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죄상은 (1) 방석(芳碩)을 세자로 추대하였다는 것이며, (2) 또 종친을 배척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食立幼孽, 欲爲後嗣, 以奪長幼之序, 以亂嫡庶之分」(주4) 이라는 것과, 「道傳等, 挟世子飲害諸王子, 禍在不測」(주5)이란 것이니, 이것을 더욱 자세히 말하면 태조의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태조 즉위 전년 몰, 후년 봉작)의 출인 5인의 왕자를 배척하고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소출인 제8자 방석(芳碩)을 세자로 영립(迎立)한 것 까지도, 도전의 소치같이 선언하는 것이며、이 세자를 보찬(保讚)하기 위하여 이복형들을 다못 배척할 뿐이 아니라 「전제(剪除)」하려는 비상수단의 실현이 경각의 간에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사소한 문제가 후일에 첨가되나, 죄상의 주목은 이 양점에 다하는 듯 하므로, 우선 이 점을 탐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쪽수▶P9-3 이 記錄을 一督하고 우리가 생각할수 있는바 鄭道傳 南誾의 所謂 罪狀이란 무엇인가。가장 重要한 罪狀은 (一) 芳碩을 世子로 推戴하였다는 것이며, (二) 또 宗親율 排斥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具體的으로 말하면, 「食立幼孽, 欲爲後嗣, 以奪長幼之序, 以亂嫡庶之分」(註四) 이라는 것과, 「道傳等, 挟世子飲害諸王子, 禍在不測」(註五)이란 것이니, 이것을 더욱 些糊히 말하면 太祖의 神懿王后 韓氏(太祖 即位前年 歿, 後年 封爵)의 出인 五人의 王子를 排斥하고 神德王后 康氏외 所出인 第八子 芳碩을 世子로 迎立한 것 까지도, 道傳의 所致같이 宣言하는 것이며、이 世子를 保讚하기 爲하야 異腹兄들을 다못 排斥할 뿐이 아니라 「剪除」하려는 非常手段의 實現이 頃刻의 間에 있었다▶P10-1고 한다. 이 外에도 여러가지 些少한 問題가 後日에 添加되나, 罪狀의 主目은 이 兩點에 다하는듯 하므로, 爲先 이 點을 探査하여 볼 必要가 있다.
방석을 세자로 책립(册立)함에 대하여는 태조실록에 「已巳, 立幼孽芳碩, 爲王世子, 初, 功臣裴克廉, 趙浚, 鄭道傳等, 請建世子, 欲以年以功爲請, 王重康氏意在芳蕃, 芳蕃狂率無狀, 功臣等難之, 私相謂曰, 若必欲立康氏出, 季子差可, 及是, 上問誰可爲世子者, 未有以立長立功切言者, 克廉曰, 季子爲可, 上遂決意立之」(주6)라고 있으며, 이 사실은, 태조가 7월 17일에 즉위한 후 1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8월 20일에 결정된 것이라, 이것이 7, 8년을 경과한 후에 비로소 돌변을 일으킬 직접 원인이 되리라고 보기는 좀 이상한 점이 있다 하겠다. 더욱 그 사실의 내용을 점검하면 방석을 건립한 것은 태조가 계비(繼妃) 강씨의 의중을 맞았다는 것이 진상일 것이며 (소위 賢否(현부)는 이곳에는 잠시 불문하더라도), 방석을 進言(진언)한 죄를 말하려면 裴克廉(배극렴)이 最重(최중)할 것이거늘, 세자 건립의 연유로 배를 문책한 사실은 물론. 후일에라도 배를 운운함이 전무하니 이상하다 않을 수 없다 물론 배는 태조 원년 11월에 졸하였으므로(주7) 후일의 논난을 면하였다 볼수있으나, 배, 정과 같이 왕의 문의를 받은 趙浚(조준)은, 이 무인의 난에 생명을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소위 定社功臣(정사공신)의 영예를 받았으니, 방석 건립의 책임만으로 도전을 滅誅(멸주)하였다고 볼 수는 전연 불가능한 것을 알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조준이 방석 건립에 관여함이 중대한 것은, 太宗實錄(태종실록)의 조준졸 항에 그 전기를 약기한 일에도 기재한 바가 있으며,(주8) 定宗(정종) 2년 1월 芳幹之亂(방간지난)에 조준이 두문불출한 죄를 司法府(사법부)가 該(해)하는 글 중에도 「姑以顯著五事縷陳如左, 當國初廢嫡立庶之際, 浚方爲上相, 力陳大義, 以回 天意, 以正天偷, 則戊寅之嬷, 何日而生乎, 慮不出此, 阿意曲從, 與道傳南誾, 遂立庶孽, 勢將損國……此其一 也」(주9)라고 있으니, 이 세자 건립의 죄상으로 말하면, 적어도 도전과 조준은 동죄라고 볼 것이거늘, 후세의 所論(소론)이 罪同罰異(동죄벌이)의 불공평한 평가를 할 이유가 없는 것을 可知(가지)할 것이다.
쪽수▶P10-2芳碩을 世子로 册立함에 對하여는 太祖實錄에 「已巳, 立幼孽芳碩, 爲王世子, 初, 功臣裴克廉, 趙浚, 鄭道傳等, 請建世子, 欲以年以功爲請, 王重康氏意在芳蕃, 芳蕃狂率無狀, 功臣等難之, 私相謂曰, 若必欲立康氏出, 季子差可, 及是, 上問誰可爲世子者, 未有以立長立功切言者, 克廉曰, 季子爲可, 上遂決意立之」(註六)라고 있으며, 이 事實은, 太祖가 七月 十七日에 即位한 後 一箇月밖에 지나지 않은 八月 二十日에 決定된 것이라, 이것이 七八年을 經過한 後에 비로소 突變을 일으킬 直接 原因이 되리라고 보기는 좀 異常한 點이 있다 하겠다. 더욱 그 事實의 內容을 點檢하면 芳碩을 建立한 것은 太祖가 繼妃 康氏의 意中을 맞았다는 것이 眞相일 것이며 (所謂 賢否는 이곳에는 暫時 不問하더라도), 劳碩을 進言한 罪를 말하려면 裴克廉이 最重할 것이거늘, 世子 建立의 緣由로 裴를 問責한 事實은 勿論. 後日에라도 裴를 云云함이 全無하니 異常하다 않을 수 없다 勿論 裴는 太祖 元年 十一月에 卒하였으므로(註七) 後日의 論難을 免하였다 볼수있으나, 裴, 鄭과 같이 王의 間議틀 받은 趙浚은, 이 戊寅의 亂에 生命을 保存하였을 뿐아니라 所謂 定社功臣의 榮譽를 받았으니, 芳碩 建立의 責任만으로 道傳을 滅洙하였다고 볼 수는 全然 不可能한 것을 알 것이다. 그뿐 아니라 趙浚이 芳碩 建立에 關與함이 重大한 것은, 太宗實錄의 趙浚卒 項에 그 傳記를 畧記한 事에도 記載한 바가 있으며,(註八) 定宗 二年 一月 芳幹之亂에 趙浚이 杜門不出한 罪를 司法府가 該하는 文中에도 「姑以顯著五事縷陳如左, 當國初廢嫡立庶之際, 浚方爲上相, 力陳大義, 以回 天意, 以正天偷, 則戊寅之嬷, 何日而生乎, 慮不出此, 阿意曲從, 與道傳南誾, 遂立庶孽, 勢將損國……此其一 也」(註九)라고 있으니, 이 世子 建立의 罪狀으로▶P11-1맡하먼, 적어도 道傳과 趙浚은 同罪라고 볼것이어늘, 後世의 所論이 罪同罰異의 不公平한 評價를 할 理由가 없는 것을 可知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이 도전의 최중한 죄상이라고 후세에 선전하는 것이, 당시에는 결코 그렇지도 않았던것을 추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위에 인용한 태조실록 引文(인문) 중에 있는바 希安公(희안공) 芳速(방속)의 쿠-데타-가 성공한 후 태조가 병석에서 永安君(영안군) 방과를 세자로 수립하기를 허락하고 내린 교서 중에 있는 「立嫡以長萬世之經, 宗子維城寡人之望, 惟诫父臣甞開國, 捨長立幼, 乃以芳碩爲世子, 不獨予昵愛不明之過, 道傳闔等亦不得辭其責矣, 卧岭卧新加林您黔玲為智, 當其時若以楚國愛少之誡, 據經廷靜, 予不敢不從, 如道傳等, 不惟不靜, 猶恐其不立」이라는 말이 어떻게 도전의 「葬」가 소극적이며 미소한가를 표시한다. 이 교서는 당시의 상태로 보아 설령 태조의 승락을 얻은 교서라 하더라도 정안군 방원 일파의 의사가 그대로 발표되었다 볼 수 있을 것이나, 방원 일파로도 도전의 죄상이 적극적으로 방석 옹립에 있다고 할 수는 없고, 단지 극히 소극적으로 태조의 소위를 정정하지 않았음에 있다 하니, 그것이 문죄의 이유로서는 如何(여하)히 미약무력한가를 알수있으며, 따라서 당시의 이 점을 문책한 의미가 후세의 그것과 판이함을 추측할 수 있다.
쪽수▶P11-2그뿐 아니라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이 道傳의 最重한 罪狀이라고 後世에 喧傳하는 것이, 當時에는 決코 그렇지도 않았던것을 推想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우에 引用한 太祖實錄 引文 中에 있는바 希安公 芳速의 쿠-데타-가 成功한 後 太祖가 病席에서 永安君 芳果를 世子로 樹立하기를 許諾하고 내린 敎書 中에 있는 「立嫡以長萬世之經, 宗子維城寡人之望, 惟诫父臣甞開國, 捨長立幼, 乃以芳碩爲世子, 不獨予昵愛不明之過, 道傳闔等亦不得辭其責矣, 卧岭卧新加林您黔玲為智, 當其時若以楚國愛少之誡, 據經廷靜, 予不敢不從, 如道傳等, 不惟不靜, 猶恐其不立」이라는 말이 어떻게 道傳의 「葬」가 消極的이며 微少한가를 表示한다. 이 敎書는 當時의 狀態로 보아 設令 太祖의 承諾을 얻은 敎書라 하더라도 靖安君 芳遠 一派의 意思가 그대로 發表되었다 볼 수 있을 것이나, 芳遠 一派로도 道傳의 罪狀이 積極的으로 芳碩 擁立에 있다고 할 수는 없고, 單只 極히 消極的으로 太祖의 所爲를 廷靜하지 않았음에 있다 하니, 그것이 問罪의 理由로서는 如何히 微弱無力한가를 알수있으며, 따라서 當時의 이 點을 問責한 意味가 後世의 그것과 判異함을 推測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은 태종 9년 8월에 왕이 세자에게 선위하려고 할 때 河崙(하륜)에게 그 內意(내의)를 말한 중에 「我 太祖, 亦於乙宴年間, 傳位劳碩, 退居後宮, 則吾等終無敢動矣, 安有戊寅之變乎」(주10)라고 한 것을 보면, 방석 책립에 대하여 불평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나, 그 문제는 부득이 단념하였던 것 같은 심사와, 무인년에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으면 이 이유와 불평만으로 변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리라는 감상을 규찰할 수 있다.
쪽수▶P11-3이러한推測은 太宗 九年 八月에 王이 世子에게 禪位하려고 할 때 河崙에게 그 內意를 말한中에 「我 太祖, 亦於乙宴年間, 傳位劳碩, 退居後宮, 則吾等終無敢動矣, 安有戊寅之變乎」(註十)라고 한 것을 보면, 芳碩 冊立에 對하야 不平을 가졌던 것은 事實이나, 그 問題는 不得己 斷念하였던 것 갈은 心思와, 戊寅年에 特別한 理由가 있지 않았으면 이 理由와 不平만으로 變亂을 일으키지 않았으리라는 感想을 窺察할 수 있다.
그러면 무인년 변란 당시의 「특별한 사정」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쪽수▶P12-1 그러면 戊寅年 變亂 當時의 「特別한 事情」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이것이 위에 거조한 중의 제2에 당하는 소위 「謀害宗親」의 음모일 것이나, 이 점에 대한 결론을 먼저 들면 그것은 진위 불명한 풍설 또는 실상이 있다고 인정할 수 없는 억측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며, 靖安君(정안군) 芳遠(방원)의 연래의 불평이 이 풍설의 影子(영자)에 경악한 것이며, 태조의 위중한 병세가 이 억겁을 일층 더 선란하게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관측일 것 같다.
쪽수▶P12-2 이것이 우에 擧條한 中의 第二에 當하는 所謂 「謀害宗親」의 陰謀일 것이나, 이 點에 對한 結論을 먼저 들면 그것은 眞僞 不明한 風說 또는 實相이 있다고 認定할 수 없는 臆測에 不過하다고 생각되며, 靖安君 芳遠의 年來의 不平이 이 風說의 影子에 驚愕한 것이며, 太祖의 危重한 病勢가 이 憶刼을 一層 더 煽亂하게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妥當한 觀測일 것 같다.
소위 도전 음모 (즉 謀害宗親(모해종친))의 풍설 혹 중상을 방원에게 전도한 길을 추적하여 보면 대략 3종이 있는 것 같으니. 그 제1은 義安君(의안군) 和(화)요 제2는 李茂(이무)와 閔無疾(민무질) 無咎(무구) 형제요 제3은 李憂李(이우리) 居易(거이) 부자이다. 이 외에도 朴苞(박포)와 기타의 인물이 있으나 이들은 이하에 기술하는 바와 같이 이 3자 중의 동계의 소식이므로 별시하지 않는다. 이들 각종 각양의 밀고를 일일히 그 내용을 知悉(지실)할 수 없으나, 그 중에는 서로 상이한 듯한 점도 있은즉, 그 내용을 한번 탐사하여 볼 필요가 있을까 한다.
쪽수▶P12-3所謂 道傳 陰謀 (即 謀害宗親)의 風說 或 中傷을 芳遠에게 傳導한 길을 追跡하여 보면 大畧 三種이 있는 것 같으니. 그 第一은 義安君 和요 第二는 李茂와 閔無疾 無咎 兄弟요 第三은 李憂李 居易 父子이다. 이 外에도 朴苞와 其他의 人物이 있으나 此等은 以下에 記述하는 바와 같이 이 三者 中의 仝系의 消息이므로 別示하지 않는다. 此等 各種 各様의 密吿를 一一히 그 內容을 知悉할 수 없으나, 그 中에는 서로 相異한 듯한 點도 있은즉, 그 內容을 한번 探査하여 볼 必要가 있을까 한다.
의안군 화의 밀고는, 상기한 바에 의하여서는 그 내용을 명백히 단언할 수 없고, 단지 「知其謀」라 하나 「卜者安植曰, 世子異母兄有天命者非. 道傳聞之曰, 即當除之, 何患乎, 義安君和, 知其謀, 밀고 靖安君」의 기록은 해석에 의하여는 이 卜者(복자) 安植(안식)에게 대한 도전의 폭언을 화가 밀고한 것 같이 보인다. 혹은 그 밀고의 내용이 이하에 기록할 민무질 이무의 밀고 내용과 같은 것이었을는지 모르나 그 점은 다음에 미루고, 이 도전 장담의 풍설만을 문제로 하면 그것이 深房密語(심방밀어)일만침 그 진위를 難測(난측)하며, 그 밀어를 대화자 안식이가 누설하였다면 容或無怪(용혹무괴)하였으나 그 所自出(소자출)이 전연 불명할뿐 아니라 다못 화가 知其謀(지기모)하였다고 기재한 바로서 진상을 운운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설혹 그 장담이 진상이라 하나 이미 방석을 세자로 책립한 이상, 태조 몰 후에는 당연히 국주가 될것이며, 이 세자에게 대하여 異母兄(이모형)이 소견 「有天命」하다고 하여 그 實頊(실욱)을 도모한다면 정이 국군을 위하여 「即當除之」하는 것이 충렬의 士(사)이라고 할지언정 謀逆(모역)라 할수는 만무하니, 도전의 此種壯言(차종장언)의 풍설을 방원 형제가 개인적으로 불쾌불안하게 생각함은 당연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潜謀不軌(잠모부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문의를 有天命(유천명)하다고 하여 여하간 即當除之(즉당제지)하자는 뜻으로 보지않고, 그 소위 천명을 實理(실리)시키려하면 (보위를 窺(규)하는 야심으로 준동하면) 즉 當除之(당제지)하리니 何患之有(하환지유)리오 하였다 하면 당연한 사실일 뿐 아니라 정도전으로서는 그만한 책임과 의지가 있었으리라고 추측하여도 부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밀고는 그 내용의 진위를 첫째 단정하기 어려우므로 중시할 문제는 되지 못할듯하다.
쪽수▶P12-4義安君 和의 密吿는, 上記한 바에 依하여서는 그 內容을 明白히 斷言할 수 없고, 단지 「知其謀」라 하나 「卜者安植曰, 世子異母兄有天命者非. 道傳聞之曰, 即當除之, 何患乎, 義安君和, 知其謀, 密吿 靖安君」의 記錄은 解釋에 依하여는 이 卜者安植에게 對한 道傳의 暴言을 和가密吿한 것 같이 보인다. 或은 그 密吿의 內容이 以下에 紀錄할 閨無疾 李茂의 密吿 內容과 같은 것이었을는지 모르나 그 點은 다음에 미루고, 이 道傳 壯談의 風說만을 問題로 하면 그것이 深房密語일만침 그 眞僞를 難測하며, 그 密語를 對話者 安植이가 漏洩하였다면 容或無怪하였으나 그 所自出이 全然不明할뿐 아니라 다못 和가 知其謀하였다고 記載한 바로서 眞相을 云云할 수 없다. 그▶P13-1뿐 아니라 設或 그 壯談이 眞相이라 하나 이미 芳碩을 世子로 册立한 以上, 太祖 歿後에는 當然히 國主가 될것이며, 이 世子에게 對하야 異母兄이 所譴 「有天命」하다고 하여 그 實頊을 圖謀한다면 鄭이 國君을 爲하야 「即當除之」하는 것이 忠烈의 士이라고 할지언정 謀逆라 할수는 萬無하니, 道傳의 此種壯言의 風說을 芳遠 兄弟가 個人的으로 不快不安하게 생각함은 當然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潜謀不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文意를 有天命하다고 하야 如何間 即當除之하자는 뜻으로 보지않고, 그 所謂 天命을 實理시키려하면 (寶位를 窺하는 野心으로 蠢動하면) 即 當除之하리니 何患之有리오 하였다 하면 當然한 事實일뿐아니라 鄭道傳으로서는 그만한 責任과 意志가 있었으리라고 推測하여도 不當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密吿는 그 內容의 眞僞틀 쳣제 斷定하기 어려우므로 重視할 問題는 되지 못할듯하다.
제2의 이무, 민무질 일파의 밀고 내용은 태종 9년에 이무의 죄를 議(의)할 때의 기록 중에 있는 「上謂群臣曰, 李茂今繫獄中, 卿等豈能悉知其故, 予欲盡召臣僚而吿之, 勢未可也, 卿等明聽予言, 歲在戊寅, 父王疾篤彌留, 予與昆季, 侍疾于景福宮時, 予只聞李茂之名, 未之相親, 茂因無疾, 交納於我, 日吿予臼, 南誾鄭道傳伺上疾篤, 謀不利於正嫡, 公其預圖, 間五六日, 復來謂予曰, 冬外警徽颦冷聲普時哉不可失也, 予曰, 君請先徃會處, 稽留其計, 至日暮, 義安大君入闕內, 呼予者再, 時日己昏矣, 大君暨諸昆季, 待我至甚忙, 及至中官尹貴自內而出, 問靖安君來歟, 予應曰諾, 貴風召諸君入內, 興安君跌予靴曰, 速入, 予聞茂之言, 固自有疑, 及觀事變有異, 托以如厠遂走出, 諸昆季亦自內走至吿變, 遂與至道傳會處」(주11)의 기록을 보면, 초두에 인용한 태조 7년 8월 26일의 기사 중에 있는 「至是日晡時, 閔無疾詣 靖安君邸, 入與 夫人偶語良久……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坐密語良久」한 것이 이무의 所吿(소고)와 동일한 내용이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으며, 더욱 「李茂, 素有中立之計, 密以間等謀甞罟由竭安, 至是, 隨無疾來謁, 少頃先去, 茂, 無疾近姻也, 竹城君朴苞, 亦徃來其間, 暗伺彼之動靜」의 기록을 참조하여 보면, 이 밀고의 내용은 전문에 인용한 바와 같이 이무의 所自出(소자출)로, 李茂(이무)와 朴苞(박포)가 居中探査(거중심사)하여 밀고한 것을 可知(가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정도전, 남은, 沈孝生(심효생), 張至和(장지화) 등이 「托以省問 上疾, 日夜聚松靦闔妾家, 相與密謀, 令芳碩, 濟及親軍衛都鎭撫朴懿, 左副承旨盧石柱, 右副承旨卞仲良在內, 稱上病篤, 急召諸王子, 入內則以內奴及甲士攻之, 道傳間等外應, 約以己巳擧事」라고 볼 수밖에 없다.
쪽수▶P13-2第二의 李茂, 閔無疾 一派의 密吿 內容은 太宗 九年에 李茂의 罪를 議할 時의 記錄 中에 있는 「上謂群臣曰, 李茂今繫獄中, 卿等豈能悉知其故, 予欲盡召臣僚而吿之, 勢未可也, 卿等明聽予言, 歲在戊寅, 父王疾篤彌留, 予與昆季, 侍疾于景福宮時, 予只聞李茂之名, 未之相親, 茂因無疾, 交納於我, 日吿予臼, 南誾鄭道傳伺上疾篤, 謀不利於正嫡, 公其預圖, 間五六日, 復來謂予曰, 冬外警徽颦冷聲普時哉不可失也, 予曰, 君請先徃會處, 稽留其計, 至日暮, 義安大君入闕內, 呼予者再, 時日己昏矣, 大君暨諸昆季, 待我至甚忙, 及至中官尹貴自內而出, 問靖安君來歟, 予應曰諾, 貴風召諸君入內, 興安君跌予靴曰, 速入, 予聞茂之言, 固自有疑, 及觀事變有異, 托以如厠遂走出, 諸昆季亦自內走至吿變, 遂與至道傳會處」(註十一)의 記錄을 보면, 初頭에 引用한 太祖 七年 八月 二十六日의 記事 中에 있는 「至是日晡時, 閔無疾詣 靖安君邸, 入與 夫人偶語良久……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坐密▶P14-1語良久」한 것이 李茂의 所吿와 同一한 內容이었던 것을 推測할수 있으며, 더욱 「李茂, 素有中立之計, 密以間等謀甞罟由竭安, 至是, 隨無疾來謁, 少頃先去, 茂, 無疾近姻也, 竹城君朴苞, 亦徃來其間, 暗伺彼之動靜」의 記錄을 恭照하여보면, 이 密吿의 內容은 前文에 引用한 바와 같이 李茂의 所自出로, 李茂와 朴苞가 居中探査하야 密吿한 것을 可知할 것이다. 그리고 그 內容은 鄭道傳, 南誾, 沈孝生, 張至和 等이 「托以省問 上疾, 日夜聚松靦闔妾家, 相與密謀, 令芳碩, 濟及親軍衛都鎭撫朴懿, 左副承旨盧石柱, 右副承旨卞仲良在內, 稱上病篤, 急召諸王子, 入內則以內奴及甲士攻之, 道傳間等外應, 約以己巳擧事」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이무의 밀고한 내용이 과연 여하한 정도의 진실성을 가지고 있었나? 이무의 제2차 밀고 시의 말이 「今夕道傳等欲擧事」라 하며 또 「約以己巳擧事」라 한 것을 보면, 정안군의 쿠데타 단행 당일이 소위 도전 거사의 當夕(당석)이거늘, 도전 일파의 행동과 당시의 사태가 이러한 준비와 용의를 추측할 수 있는 一點證左(일점증좌)가 없으니, 이것을 여하히 해석하여야 가할까. 첫째, 夜二鼓(야이고)에 궁내에서 제 왕자를 召入(소입)한 즉 후의 시간이라면, 정남 일파에게 상기한 바와 같은 계획이 있었다 하면 당연히 무슨 긴장한 태도와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거늘, 정안군이 남은 첩가를 습격하였을 때 도전, 은 등은 會座言笑(회좌언소)하고 평연히 있으며 문 외에는 鞍馬(안마) 수 필과 奴僕皆睡(노복개수)하는 상태가 可疑(가의)하다고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당시의 정안군의 군세가 전부 합하여 「騎兵纔十, 步卒纔九人, 乃出 夫人所備鐵槍, 中折分與軍士, 諸君從者及各人奴僕十餘皆執杖, 獨小斤把劎」의 빈약한 세력으로 만약 상기한 것 같은 용의가 도전의 편에 있었다 하면, 당시 병권의 대세를 잡고 있는 정도전과 남은을 麟息(인식) 간에 覆滅(복멸)시키기는 새로이 도리어 蟠螂(반랑)의 龍車(용차)에 향하는 비유가 될 것이 아닌가. 이 점은 상기문 중에도 정안군 일파 외 危懼憶彻(위구억철)한 태도가 그 실상을 전하는 것이니, 「靖安君謂叔蕃曰, 세력則不可敵矣, 斬道傳閭等, 然後我四五兄弟, 駐馬于三軍府門前, 以觀國人之心, 人心不從則己, 翕然從之則我等得生」이라는 비장한 결심이 그 평시의 실력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만약 도전, 은 등이 이 기사일에 거사할라 하였으면 더군다나 외응할라 하였다하면, 그 평시의 실력과 당야의 너무도 무비한 것이 이상하지 않을까. 또한 편으로 궁내에서도 「諸王子, 入則以內奴甲士攻之」하리라 하나 그러한 준비와 형적은 전연히 볼 수 없으며, 진상은 그런 준비가 없더래도 그럴듯하게 억측할 수나 견강부회할 수만 있더라도 그렇다고 기재할 만한 당시의 情狀(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전연 상상만한 기록도 없으니, 그 진위는 추상하기 어렵지 않다 할 것이다.
쪽수▶P14-2그러면 이 李茂의 密吿한 內容이 果然 如何한 程度의 眞實性을 가지고 있었나? 李茂의 第二次 密吿 時의 말이 「今夕道傳等欲擧事」라 하며 또 「約以己巳擧事」라 한 것을 보면, 靖安君의 쿠데타 斷行 當日이 所謂 道傳 擧事의 當夕이거늘, 道傳 一派의 行動과 當時의 事態가 이러한 準備와 用意를 推測할 수 있는 一點證左가 없으니, 이것을 如何히 解释하여야 可할까. 첫째, 夜二鼓에 宮內에서 諸王子를 召入한 即後의 時間이라면, 鄭南 一派에게 上記한 바와 같은 計劃이 있었다 하면 當然히 무슨 緊張한 態度와 準備가 있어야 할것이거늘, 靖安君이 南誾 妾家를 襲擊하였을 때 道傳, 誾 等은 會座言笑하고 平然히 있으며 門外에는 鞍馬 數匹과 奴僕皆睡하는 狀態가 可疑하다고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當時의 靖安君의 軍勢가 全部 合하야 「騎兵纔十, 步卒纔九人, 乃出 夫人所備鐵槍, 中折分與軍士, 諸君從者及各人奴僕十餘皆執杖, 獨小斤把劎」의 貧弱한 勢力으로 萬若 上記한 것 같은 用意가 道傳의 便에 있었다 하면, 當時 兵權의 大勢를 잡고 있는 鄭道傳과 南誾을 麟息間에 覆滅시키기는 새로이 도리어 蟠螂의 龍車에 向하는 比諭가 될 것이 아닌가. 이 點은 上記文 中에도 靖安君 一派외 危懼憶彻한 態度가 그 實相올 傳하는 것이▶P15-1니, 「靖安君謂叔蕃曰, 勢力則不可敵矣, 斬道傳閭等, 然後我四五兄弟, 駐馬于三軍府門前, 以觀國人之心, 人心不從則己, 翕然從之則我等得生」이라는 悲壯한 决心이 그 平時의 實力 差異를 보이는 것이다. 萬若 道傳, 簡等이 이 已巳日에 擧事할라 하였으면 더군다나 外應할라 하였다하면, 그 平時의 實力과 當夜의 너무도 無備한 것이 異常하지 안을가. 또한 便으로 宮內에서도 「諸王子, 入則以內奴甲士攻之」하리라 하나 그러한 準備와 形跡은 全然히 볼 수 없으며, 眞相은 그런 準備가 없드래도 그럴듯하게 臆測할 수나 牽强附會할 수만 있더라도 그렇다고 記載할 만한 當時의 情狀임에도 不拘하고 全然 想像만한 記錄도 없으니, 그 眞僞는 推想하기 어렵지 않다 할 것이다.
또 정적을 모해할 음모가 구체화되었고, 더욱 기사일 당석에 임박하였다고 해서는 조준과 金士衡(김사형) 등의 좌우 양상이 전연 이러한 형세도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하는 태도가 이상하니, 「浚士衡等下馬, 趨而過橋, 靖安君曰, 卿等何不憂李氏社稷, 浚士衡等, 驚懼跪于馬前, 君曰, 道傳間等貪立幼孽, 欲勢除我同母兄弟, 我是以爲弱者先手也, 浚等叩頭曰, 彼之所爲吾等未甞知也」라는 기록이 그것이며, 또 정안군이 조준을 초청함에 대하여 정안의 초조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조준이 오랫동안 거취를 유예 불결한 것도 준이 도전, 은 등의 음모설을 신용하지 못한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당시의 조준과 도전 남은과의 사이에는 昔日(석일)과 다른 간극이있었으므로 (이것은 이 밀에 상술) 만약 조금이라도 可疑(가의)할 점이 있었더라면 조준이 이다지 유예하지도 않을 것이며, 복자에게 筮(서)하거나 우상 김사술에게 상의하거나 할 필요도 없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대사가 (종자들을 전제하려는) 정안군 일파 자세히는 이무 이외에는 아무도 豫察(예찰)한 형적이 전무한 것이 가의하니 조준, 김사형은 물론하고 소위 궁내에서 예로를 단행할 李濟(이제)와 卞仲良(변중량) 등의 태도도 이 글 초두에 인용한 바로서 보아서는 이러한 대사를 결행할 용의는 물론, 그러한 긴박한 상태를 예측하지도 못한 듯한 것이 이상하다.
쪽수▶P15-2또 正嫡을 謀害할 陰謀가 具體化되었고, 더욱 己巳日 當夕에 臨迫하였다고 해서는 趙浚과 金士衡 等의 左右兩相이 全然 이러한 形勢도 想像할 수도 없다는 듯 하는 態度가 異常하니, 「浚士衡等下馬, 趨而過橋, 靖安君曰, 卿等何不憂李氏社稷, 浚士衡等, 驚懼跪于馬前, 君曰, 道傳間等貪立幼孽, 欲勢除我同母兄弟, 我是以爲弱者先手也, 浚等叩頭曰, 彼之所爲吾等未甞知也」라는 記錄이 그것이며, 또 靖安君이 趙浚을 招請함에 對하야 靖安의 焦燥한 마음에도 不拘하고 趙浚이 오랫동안 去就틀 猶豫 不決한 것도 浚이 道傳, 誾 等의 陰謀說을 信用하지 못한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當時의 趙浚과 道傳 南誾과의 사이에는 昔日과 다른 間隙이있었으므로 (이것은 이 밀에 詳述) 萬若 조금이라도 可疑할 點이 있었더라면 趙浚이 이다지 猶豫하지도 않을 것이며, 卜者에게 筮하거나 右相 金士術에게 相議하거나 할 必要도 없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大事가 (宗子들을 剪除하려는) 靖安君 一派 些細히는 李茂 以外에는 아무도 豫察한 形跡이 全無한것이 可疑하니 趙浚, 金士衡은 勿論하고 所謂 宮內에서 예로를 斷行할 李濟와 卞仲良 等의 態度도 此文 初頭에 引用한 바로서 보아서는 이러한 大事를 决行할 用意는 勿論,▶P16-1그러한 緊迫한 狀態를 豫測하지도 못한 듯 한 것이 異常하다.
또 한 가지 더 실례를 들어 소위 此種(차종) 모역의 실체 可疑(가의)함을 證明하여 보자. 초두 引文(인문) 중 남은의 항에 「南誾, 逃出城水門, 隱於城外圃幕, 法景等左右扶持, 暫不離焉, 閭欲詣巡軍, 法等止之, 誾曰, 道傳爲人所憎故見誅, 我無憎之者, 自詣巡軍門外, 見斬」이라는 기사가 있으니, 이것이 왕자들을 劾除(핵제)하려고 음모한 자의 태도며 음모 실행 當夜(당야)에 습격을 받은 자의 언행일까. 이 기사를 平心(평심)으로 해석하면 남은은 정안군의 돌연한 습격이 何故(하고)인지 전연 무지하며 그것은 다못 평시 私怨(사원)을 가진 자가 도전을 습격함에 불과하다고 깊이 믿었던 것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가. 평소로 도전과 상기한 바와 같은 음모가 있었다 하면 더욱 그것이 거사 당일이라 하면 이러한 평연한 일 언행을 取一(취일)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 무죄함을 자신하고 자진하여 巡軍門(순군부) 외에 간 행동만을 보더라도 만사가 轄然自明(할연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死者無口(사자무구)하니 이 외에 참살올 당한 인물들을 일일히 탐사할 수 없으나 이 남은의 태연한 최후의 행동이 후일의 소위 무인지변의 원인이라고 千言萬記(천언만기)하는 것보단 확연한 진상을 우리의 뇌 중에 銘刻(명각)하는 것 같다. (남은의 태도로 이 변란의 성질을 검사증명할 방책은 이 외에도 허다하나 생략한다).
쪽수▶P16-2또 한 가지 더 實例를 들어 所謂 此種 謀逆의 實體可疑함을 證明하여 보자. 初頭 引交 中 南誾의 項에 「南誾, 逃出城水門, 隱於城外圃幕, 法景等左右扶持, 暫不離焉, 閭欲詣巡軍, 法等止之, 誾曰, 道傳爲人所憎故見誅, 我無憎之者, 自詣巡軍門外, 見斬」이라는 記事가 있으니, 이것이 王子들을 劾除하려고 陰謀한 자의 態度이며 陰謀 實行 當夜에 襲擊을 받은 자의 言行일가. 이 記事를 平心으로 解釋하면 南誾은 靖安君의 突然한 襲擊이 何故인지 全然 無知하며 그것은 다못 平時 私怨을 가진 자가 道傳을 襲擊함에 不過하다고 깊이 믿었던 것을 表示하는 것이 아닌가. 平素로 道傳과 上記한 바와 같은 陰謀가 있었다 하면 더욱 그것이 擧事 當日이라 하면 이러한 平然한 一言行을 取一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 無罪함을 自信하고 自進하야 巡軍門 外에 간 行動만을 보더라도 萬事가 轄然自明하다고 할 것이다. 死者無口하니 이 外에 斬殺올 當한 人物들을 一一히 探査할 수 없으나 이 南誾의 泰然한 最後의 行動이 後日의 所謂 戊寅之變의 原因이라고 千言萬記하는 것 보단 確然한 眞相을 우리의 腦中에 銘刻하는 것 같다. (南誾의 態度로 이 變亂의 性質을 檢査證明할 方策은 이 外에도 許多하나 省畧한다).
이 때의 소위 陰圖不軌(음도불궤)라는 밀고에 대한 진상은 후일에 이르러 태종 9년 10월에 왕이 「予聞度之言, 固身有疑」라 하고(주12) 대단히 냉정한 태도와 이성의 판단있는 형적을 보이는 점이 있다. 물론 「及觀事變有異」라고 당시의 자기 행동을 시인하려는 노력은 변함이 없으나, 최초(태조 7년 8월 26일)에 민무질의 밀고를 들은 직후의 흥분한 태도 즉 「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立密讀良久, 夫人執君衣, 請勿謂闕君曰, 豈可畏死不詣……若有變則我當出來擧八, 以觀國人之心也, 乃佛衣而出」한 상태와는 판이함이 있다. 이것을 10년이란 시간이 경과한 때문에 당시의 흥분이 沈消(침소)하였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나, 또 한 층 더 깊이 일시의 흥분이 소침하고 보니, 그 이무의 밀고라는 것이 아무 실상 없었던 것과 따라서 이 밀고만으로 輕輕(경경)히 대사를 거행하였다고 보이기틀 미안히 생각한 일종 발명에 가까운 심경을 抱持(포지)하고 있던 것을 추상할 수 있다고 하지 못할까?
쪽수▶P16-3이 때의 所謂 陰圖不軌라는 密吿에 對한 眞相은 後日에 이르러 太宗 九年十月에 王이 「予聞度之言, 固身有疑」라 하고(註十二) 대단히 冷靜한 態度와 理性의 判斷있는 形迹을 보이는 點이 있다. 勿論 「及觀事變有異」라고 當時의 自已 行動을 是認하려는 努力은 變함이 없으나, 最初(太祖 七年 八月 二十六日)에 閔無疾의 密吿를 됼은 直後의 興奮한 態度 即 「靖安君即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 鼎立密讀良久, 夫人執君衣, 請勿謂闕君曰, 豈可畏死不詣……若有變則我當出來擧八, 以觀國人之心也, 乃佛衣而出」한 狀態와는 判異함이 있다. 이것을 十▶P17-1年이란 時間이 經過한 때문에 當時의 興奮이 沈消하였다고 보는 것이 當然하나, 또 한層 더 깊이 一時의 興奮이 消沈하고 보니, 그 李茂의 密吿라는 것이 아무 實相 없었던 것과 따라서이 密吿만으로 輕輕히 大事를 擧行하였다고 보이기틀 未安히 생각한 一種 發明에 가까운 心境을 抱持하고 있던 것을 推想할 수 있다고 하지 못할까?
이것은 소위 「事變有異」라는 것이 아무 실체를 명확히 할 수 없는 그 기록 상태로 보아서도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至初夜, 有人, 自內出曰, 上病劇, 欲避病, 諸王子速入內, 從者命勿許入」이라는 것이 최대 혐의며, 이 직전에 「芳蕃將入內, 靖安君呼之, 芳蕃搔首遂巡, 不應而入」이란 사실이 더욱 정안의 의심을 돋우고, 왕자 入內(입내)를 청하였을 때 궁내 無燈(무등)한 것을 보고 정안의 의심에는 暗鬼(암귀)가 생겨서 이무 민무질의 밀고에 있는 「入內則以內奴甲士攻之」라는 례로의 실현을 믿은 것이다. 물론 정안도 이것만으로서는 아무리 하여도 너무 자신하기 막연하였던지 복통이라 하여 入厠坐思良久(입측좌사량구)한 것이 당시의 흥분과 襲惻(습측)과 이성의 相刻(상각)을 이기지 못하여 혼란한 두뇌로 초조하던 情相(정상)을 볼 수 있다. 이때 입내하였던 益安(익안)과 懷安(회안)이 走出呼嘲安君者再(주출호조정안자재)함을 만나 憶慟(억통)의 정에 격동을 받아 순간에 대결의를 맺고 頹欄(퇴란)을 기도에 돌리려는 건곤일척의 반항을 결의한 것이다. 소위 弱者先手(약자선수)라는 결단이 여기서 비로소 생긴 것이라고 볼 것이다. 익안 회안의 走出呼靖安(주출호정안)하였다는 것을 중대 의미있는 듯이 보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이것은 제왕자 입내 중에 정참만 입내하지 않음이 良久(양구)함에 의심하여 불러나온 것이라 해석하여 아무 무리가 없으며, 더군다나 제왕자가 입내의 명을 받아 西廊(서랑)에서 下庭(하정)하였을 때 「靖安君與益安, 懷安, 上黨諸君, 暫立戶內, 密語舊制, 宮中諸門夜必張燈」이라 하고 이날에 마침 「見宮門無燈, 益疑之」한 사실을 참조하면, 익안, 회안에게도 此夕(차석)의 정안군의 이상한 태도와 밀어가 심중에 무슨 暗影(암영)을 던졌을 것이 당연히 추측되며. 그 당자 정안이 밀어하고 의지한 직후에 良久(양구)히 입내하지 않는 태도가, 양인에게 일극의 공포와 危懼(위구)의 정을 일으킬 것이 당연하다. 走出呼靖安(주출호정안) 하는 것을 특히 궁내에 이상한 준비있는 것을 목격한 결과라고만 할 필요가 없으며, 더욱 익안 회안이 평시로 부터 同母兄弟(동모형제)로, 계비 강씨를 專寵(전총)하는 태조 아래에 있어 가정 내부의 苦勞(고로)와 불평이 공통하였으리라고 추상되는 상태로 보면, 정안의 평시 태도 (방석 芳蕃(방번)의 寵位(총위)에 대한 불평) 가 즉 同母兄(동모형) 익안 회안에게도 동일한 심사라 볼 것이며, 또 정안의 접수한 밀고가 그 전부는 아니라도 그 경향과 풍문만이라도 양인에게까지 전도될 가능이 있었다면, 정안군이 상술한 바와 갈이 흥분하였던 당석의 익안 회안 양인의 주출호명을 과대히 중대히 생각하고 의미를 부회할 필요가 전무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만약 궁내에 정안 등이 상상한 바 같은 례로의 준비가 있었다 하면, 정안 일파에 유리할 자료면 차라리 침소봉대라고 하여도 가할만한 기술의 태도인 잔존 문적에, 일점 구체적 실례는 물론 이어니와 독자로 추측이라도 시킬만한 것이 없으니, 그 음모계획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없다. 이런것을, 태종 9년 10월에 이르러서는 저간의 소식을, 왕은 「予聞茂之言, 固自有疑, 及觀事變有異, 托以如厠, 遂走出, 諸昆季, 亦自內走至吿變」이라고 하여, 「吿變」이란 문자를 범연히 사용하게 되며, 또 이 문자에 의하여 무슨 음모의 실상이 궁내에 있었던 것을 추측시키려 한다. 이것을 다못 揑造(열조)라 하여 일소에 付(부)하기 보다는 문자의 援用(원용)이 공중에 허사를 구성하여가는 일례를 볼 수 있다고 명심할 것이다. 이 기사 중에는 「托以如厠, 遂走出」이라 하여, 전에 「入厠坐思」한 것과 상대된 점이 있으나, 이것은 전기가 정확할 것만 부기하고, 그 이유는 생략에 종한다.
쪽수▶P19-2 이것은 所謂 「事變有異」라는 것이 아무 實體를 明確히 할 수 없는 그 記錄 狀態로 보아서도 推測할 수 있다. 그것은 「至初夜, 有人, 自內出曰, 上病劇, 欲避病, 諸王子速入內, 從者命勿許入」이라는 것이 最大 嫌疑며, 이 直前에 「芳蕃將入內, 靖安君呼之, 芳蕃搔首遂巡, 不應而入」이란 事實이 더욱 靖安의 疑心을 돋우고, 王子入內를 請하였을 때 宮內 無燈한 것을 보고 靖安의 疑心에는 暗鬼가 생겨서 李茂 閔無疾의 密吿에 있는 「入內則以內奴甲士攻之」라는 례로의 實現을 믿은 것이다. 勿論 靖安도 이것만으로서는 아무리 하여도 너무 自信하기 漠然하였던지 腹痛이라 하야 入厠坐思良久한 것이 當時의 興奮과 襲惻과 理性의 相刻을 이기지 못하야 混亂한 頭腦로 焦燥하던 情相을 볼 수 있다. 이때 入內하였던 益安과 懷安이 走出呼嘲安君者再함을 만나 憶慟의 情에 激動을 받아 瞬間에 大決意를 맺고 頹欄을 旣倒에 돌리려는 乾坤一擲의 反抗을 決意한 것이다. 所謂 弱者先手라는 決斷이 여기서 비로소 생긴 것이라고 볼 것이다. 益安 懷安의 走出呼靖安하였다는 것을 重大意味 있는 듯이 보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이것은 諸王子 入內 中에 靖站만 入內하지 않음이 良久함에 疑心하야 불러나온 것이라 解釋하야 아무 無理가 없으며, 더 군다나 諸王子가 入內의 命을 받아 西廊에서 下庭하였을 때 「靖安君與益安, 懷安, 上黨諸君, 暫立戶內, 密語舊制, 宮中諸門夜必張燈」이라 하고 이날에 마침 「見宮門無燈, 益疑之」한 事實을恭照하면, 益安, 懷安에게도 此夕의 靖後君의 異常한 態度와 密語가 心中에 무슨 暗影을 던졌을 것이 當然히 推測되며. 그 當者 靖安이 密語하고 疑之▶P18-1한 直後에 良久히 入內하지 않는 態度가, 兩人에게 一極의 恐怖와 危懼의 情을 일으킬 것이 當然하다. 走出呼靖安 하는 것을 特히 宮內에 異常한 準備있는 것을 目擊한 結果라고만 할 必要가 없으며, 더욱 益安 懷安이 平時로 부터 同母兄弟로, 繼妃 康氏를 專寵하는 太祖아래에 있어 家庭 內部의 苦勞와 不平이 共通하였으리라고 推想되는 狀態로 보면, 靖安의 平時 態度 (方碩 芳蕃의 寵位에 對한 不平) 가 即 同母兄 益安懷安에게도 同一한 心事라 볼 것이며, 또 靖安의 接受한 密吿가 그 全部는 아니라도 그 傾向과 風聞만이라도 兩人에게까지 傳導될 可能이 있었다면, 靖安君이 上述한 바와 갈이 興奮하였던 當夕의 益安 懷安 兩人의 走出呼名을 過大히 重大히 생각하고 意味를 附會할 必要가 全無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萬若 宮內에 靖安 等이 想像한 바 같은 례로의 準備가 있었다 하면, 靖安 一派에 有利할 資料면 차라리 針小棒大라고 하여도 可할만한 記述의 態度인 殘存 文籍에, 一點 具體的 實例는 勿論 이어니와 讀者로 推測이라도 시킬만한 것이 없으니, 그 陰謀計劃의 實在를 疑心하지 않을 수없다. 이런것을, 太宗 九年 十月에 이르러서는 這間의 消息을, 王은 「予聞茂之言, 固自有疑, 及觀事變有異, 托以如厠, 遂走出, 諸昆季, 亦自內走至吿變」이라고 하야, 「吿變」이란 文字를 泛然히 使用하게 되며, 또 이 文字에 依하여 무슨 陰謀의 實相이 宮內에 있었던 것을 推測시키려 한다. 이것을 다못 揑造라 하야 一笑에 付하기 보다는 文字의 援用이 空中에 虚事를 搆成하여가는 一例를 볼 수 있다고 銘心할것이다. 이 記事 中에는 「托以如厠, 遂走出」이라 하야, 前에 「入厠坐思」한 것과 相對된 點이 있으나, 이것은 前記가 正確할 것만 付記하고, 그 理由는 省畧에 從한다.
이상의 논술에 의하야, 필자는 남은등이 「謀害王子」하려하였다는 구체적 증좌를 발견하지 못하며,더욱 「己巳夕擧事」 운운의 이무 민무질 등의 밀고가 실체없는 원죄이었던 것을 믿는다. 그러면 다음에 제3의 李愛(이애, 李居易(이거이) 아들)의 밀고란 것은 여하한 것인가.
쪽수▶P18-2以上의 論述에 依하야, 筆者는 南誾等이 「謀害王子」하려하였다는 具體的 證左를 發見하지 못하며,더욱▶P19-1「己巳夕擧事」 云云의 李茂 閔無疾等의 密吿가 實體없는 寃罪이었던 것 을 믿는다. 그러면 다음에 第三의 李愛(李居易 子)의 密吿란 것은 如何한 것인가.
태종 11년 11월의 기록 중에 「己巳, 賜敎書于上黨君李愛……歲在戊寅, 南誾等將逐我母兄弟於海島, 愛以間之戚屬故, 知其謀, 潜語予曰, 禍將發矣, 兄將若何, 予吿之以先發之, 故自是歸心于我, 共定大計」(주13)라는 것이 그 내용이니, 애의 밀고한 바는 정안군의 동모형제를 海島(해도)에 逐(축)하려 한다는 음모요, 剪除(전제)라든지 모해라던지 심지어 기사 夕(석)에 內奴 (내노) 甲士(갑사)로써 攻之(공지)한다는 등의 급격 수단은 아니었다. 이 애의 밀고가 이무의 밀고한 것과 다른 별개의 음모인지 동일 음모의 내용 相違(상위)인지는 未確(미확)하나, 사리를 추측하건대 鄭南(정남)이 정안군 동모형제틀 배척하려고, 혹은 流逐(유축) 혹은 剪除(전제)를 계획하였다 하기보단, 정남의 음모에 대한 풍설 혹은 그 내용에 대한 외간의 억측과 해석이 이같이 수종에 나누어 있었다고 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애의 밀고 내용은 그 가능성이 전기 이무 등의 관측보다는 다대할뿐 아니라, 형편에 따라서는 이만한 비상수단을 도전과 남은이 계획할 가능성이 있으리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태조가 계비 강씨를 전총하고 그 소출인 방석을 세자를 책립하고, 강씨의 소산인 방석 방번을 총애 우대하는데 대한, 정안군을 선두로 한 익안 회안 (永安君(영안군)의 잠시 불문) 등 한씨 소생의 이복형들의 가정적 불평과, 정도전 남은 양인의 태조에 대한 誠忠(성충)이, 세자로 책립된 방석을 보호함에 傾倒(경도)하여, 세자를 嫉視(질시)하고 그 지위를 위태하게하는, 운동과 존재에 대하여는, 그를 除排(제배)하기에 수단을 不惜(불석)할 만한 태도를 추측할 수 있으며, 이 양방의 이해가 상충 돌격함도 불가피할 사태이라 할지 모르는 때문이다, 그러나 이애가 정안군의 同母妹(동모매) 慶愼翁主(경신옹주)를 취한 인물인 점으로 보아 그의 이해관계가 어느 편에 중할지 可知(가지)하겠으며, 따라서 그 정보의 확실성에는 다소간 의문이 있을 것을 추측할수있다. 이렇게 이 이애의 밀吿정도의 실상에도 가의한 점이 있다면, 이무의 밀고한 것 같은 급격한 직접 행동, 따라서 다대한 준비를 필요로할 수단이 있었다고 믿을 수는 없으며, 또 당시의 각방의 사태로 보아도 도전(방석)파로서는 그다지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진상 일듯하다. 그 뿐 아니라 당시의 사태를 추상하드래도 방원 일파에 세자, 방석에게 대한 구체적 반항 운동이 없는 이상 이러한 비상수단을 취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문제는 현실로 권력의 중심을 잡고있는 도전(및 세자) 일파가 아니요, 상시로 불평과 억겁에 초조하는 방원 일파의 태도에 있었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 현실의 사태를 안중에 두지 않고, 양파의 근본적 이해 관계를 고찰하면, 정안군 방원은 태조의 8자 중에도 가장 기력과 견식이 풍부한 정치가로, 태조의 「化家爲國」 운동에도 불소한 盡瘁(진췌)를 하였다 하며, 도전은 여말국초에 있어 가장 정열과 실행력이 많은 정치가이었을뿐 아니라, 태조 즉위 후에는 태조의 신임과 실력이 정계의 최대 존재였고, 또 이우에 당시에는 군사의 주권을 장악하였었다. 남은도 亦(역) 태조 즉위에 제1위라고 칭할만한 대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당대의 군사의 대세를 잡고, 그 정견이 도전과 肝膽相照(간담상조)한 사이였었다. 沈孝生(심효생)은 其女(기녀)를 세자 방석의 비로 冊(책)하였으니, 그 개인적 관계로 보아도 도전과 합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양개의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였다면, 당시의 실력 정도로 보아 물론 세자 방석파, 즉 도전 남은파가 領袖(영수) 一觸(일촉)의 승리를 可保(가보)할 것이며, 만약 태조 몰후의 방석 繼位(계위)에 정안 등이 불복 항거한다면, 流逐(유축)은 물론 극형이라도 피하지 못하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태조의 병독한 당시에 그 몰후의 지위에 불안한 靖安君立(정안군립)의 耳朶(이타)에는, 각종의 流說(유설)과 풍문이 들어왔을 것이며, 도전 은 등을 중심으로 한 방석파(현상유지파)의 威振天下(위진천하)하는 실력에 비하여너무도 빈약한 정안파의 세력이 더욱 더욱 삭감하여가는 정세가, 심중에 초조와 憶惑(억혹)을 도와서, 실상없는 확실하지 않은 밀고를 잡고, 결사의 용기로 影子(영자)와 간쟁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정안의 무인 거사는 참으로 위기일발이라고 할 것이오, 만약 敵方(적방)에 少許(소허)의 준비가 있어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모험일뿐 아니라, 만약 一敗地(일패지)에 떨어젔던들, 이 공연한 백지의 거사가 만세의 조소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勝爲官軍敗爲敵」이라는 日諺(일언)과 같이, 도전 은을 斬誅(참주)만 하면 三軍府(삼군부) 문전에 가서 次心(차심)의 所歸(소귀)에 자기의 성패를 일임하겠다는 정안의 비장한 결의에서 나온 천운의 승리가 역사를 이상하게도 변혁시킨 것이, 우리의 감회를 크게도 일으킨다. 삼봉의 모반설이 400여 년의 정설이나, 이제 그 진상을 정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쪽수▶P19-2太宗 十一年 十一月의 記錄 中에 「己巳, 賜敎書于上黨君李愛……歲在戊寅, 南誾等將逐我母兄弟於海島, 愛以間之戚屬故, 知其謀, 潜語予曰, 禍將發矣, 兄將若何, 予吿之以先發之, 故自是歸心于我, 共定大計」(註十三)라는 것이 그 內容이니, 愛의 密吿한 바는 靖安君의 同母兄弟를 海島에 逐하려 한다는 陰謀요, 剪除라든지 謀害라던지 甚至於 己巳 夕에 內奴 甲士로써 攻之한다는 等의 急激手段은 아니었다. 이 愛의 密吿가 李茂의 密吿한 것과 다른 別箇의 陰謀인지 同一 陰謀의 內容 相違인지는 未確하나, 事理를 推測하건대 鄭南이 靖安君 同母兄弟틀 排斥하려고, 成은 流逐 或은 剪除를 計劃하였다 하기보단, 鄭南의 陰謀에 對한 風說 或은 그 內容에 對한 外間의 臆測과 解釋이 이 같이 數種에 나누어 있었다고 볼 것이다. 이런 觀點에서 보면, 이 李藻의 密吿 內容은 그 可能性이 前記李 茂等의 觀測보다는 多大할뿐 아니라, 形便에 따라서는 이만한 非常手段을 道傳과 南誾이 計劃할 可能性이 있으리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太祖가 繼妃康氏를 專寵하고 그 所出인 芳碩을 世子를 刑立하고, 康氏의 所產인 芳碩 芳蕃을 寵愛優待하는대 對한, 靖安君을 先頭로 한 益安 懷安 (永安君의 暫時 不問) 等 韓氏 所生의 異腹兄들의 家庭的 不平과, 鄭道傳 南誾 兩人의 太祖에 對한 誠忠이, 世子로 策立된 芳碩을 保護함에 傾倒하야, 世子를 嫉視하고 그 地位를 危殆하게하는, 運動과 存在에 對하여는, 그를 除排하기에 手段을 不惜할만한 態度를 推測할 수 있으며, 이 兩方의 利害가 相衝 突擊함도 不可避할 事態이라 할지 모르는 때문이다, 그러나 李 慶가 靖安君의 同母妹 慶愼翁主를 娶한 人物인 點으로 보아 그의 利害關係가 어느 便에 重할지 可知하겠으며,▶P20따라서 그 情報의 確實性에는 多少間 疑問이 있을것을 推測할수있다. 이렇게 이 李囊의密吿程度의實相에도 可 擁하 点이 있다면, 李茂의 密吿한것 갈은急激한 直接行動, 따라서 多大한準備를 必要로할 手段이 있었다고믿 雀수는 없으며, 또 當時의各方의 事態로 보아도 道傳(芳碩)派로서는 그다지 緊張할 必要가없었다는것이 眞相 일듯하다. 그是안이라 當時의事態星 推想하드래도 芳遠 一 派에 世子, 芳碩)에게對한 具體的 反抗運動이 없는 以上 이러한 非常手段을 取할 必要가없욜것이니, 問題는 現實로 權力의 中心을 잡고 있는 道傳(及世子)- 涙가 아 니요, 常時로 不平과憶刼에 焦燥햐는芳遠 - 派의 態度에 있었다 하겟다. 그러나 只今 現實의 事態를 眼中에두지 않고, 兩派의 根本的 利害關係是 考察하면, 靖安君 芳遠은 太祖의八子中에도 가장 氣力과 見識이豊富한 政治 家로, 太祖의「化家爲國」運戲에도 不少한 盡瘁是 하였다 하며, 道傳은 麗末國初에 있어가장 情熱과 實行力이 많 은 政治家이었을뿐 아니라, 太祖 即位後에는 太祖의 信任과 實力이 政界의最大存在였고, 또 이우에 當時에는 軍事의 主權을 掌握하笠엇다. 南聞도 亦 太祖 卽位에 第 一 位라고稱할만한 大功을 세웟을뿐 아니라, 當代의 軍 事의 大勢를 잡고, 그政見이 道傳과 肝膽相照한 사이었엇다. 沈孝生은 其女를 世子 芳碩의妃로 冊하였으니, 끄個人的 關係로 보아도 道傳과 合할 理由가있을것이다. 이러한 兩個의 勢力이 正面으로 衝突하엿다면, 當時의實力 程度로 보아 勿論 世子 芳碩派, 卽 道傳 南聞派가 領袖 一 觸외勝利률 可保할것이며, 萬若 太祖歿後의 芳 碩 繼位에 靖安等이 不服抗拒한다면, 流逐은 勿論 極刑이라도 避하지못하였을지모르겠다. 그러므로, 太祖의 病篤 한 當時에그 歿後의 地位에 不安한 靖安君立의 耳朶에는, 各種의 流說과 風聞이 들어왔을 것이며, 道傳 間等을中心으로 한 芳碩派(現狀維持派)의 威振天下하는 實力에 比하야너무도 貧弱한 靖安派의 勢力이 더욱더욱 削減▶P21-1하여가는 情勢가, 心中에 焦燥와 憶惑을 도아서, 實相없는 確實하지 않은 密吿틀 잡고, 決死의 勇氣로 影子와 間爭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靖安의 戊寅 擧事는 참으로 危機一髮이라고 할 것이오, 萬若 敵方에 少許의 準備가 있어도 決코 成功하지 못할 冒險일뿐 아니라, 萬若 一敗地에 떨어젔던들, 이 空然한 白紙의 擧事가 萬世의 嘲笑를 받였을 것이다. 그러나「勝爲官軍敗爲敵」이라는 日諺과 같이, 道傳間을 斬誅만하면 三軍府 門前에가서 次心의 所歸에 自己의 成敗를 一任하겠다는 靖安의 悲壯한 決意에서 나온 天運의 勝利가 歷史를 異常하게도 變革서킨 것어, 우리의 感懷를 크게도 일으킨다. 三峯의 謀叛說이 四百餘年의 定說이나, 이제 그 眞相을 訂正할 必要가 있지 않을가.
이상의 약론으로써 무인지변의 진상을 일면으로 검토하였으나, 그만으로 두어서는 너무도 피상적 관찰만에 그칠 염려가 있기에, 다음에 정도전 일파와 정안군 방원과의 충돌한 근본적 이해에 대하여, 좀 더 추구하여 둘 필요가 있다. 곧 말하면. 전단 末句(말구)에 약설한 왕실 내부의 가정적 불만이 물론 대부분의 근본 원인이나,(주14) 이것을 또 다른 반면으로 좀 더 직접적 구체적인 이해관계로 보아서 양자가 여하히 상용하지 못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일고할 필요가 있다.
쪽수▶P21-2以上의 畧論으로써 戊寅之變의 眞相을 一面으로 檢討하였으나, 그만으로 두어서는 너도무 皮相的 觀察만에 그칠 念應가 있기에, 다음에 鄭道傳 一派와 靖安君 芳遠과의 衝突한 根本的 利害에 對하야, 좀더 追求하여둘 必要가 있다. 곧 말하면. 前段 末句에 畧說한 王室 內部의 家庭的 不滿이 勿論 大部分의 根本 原因이나,(註十四) 이것을 또다른 半面으로 좀더 直接的 具體的인 利害關係로 보아서 兩者가 如何히 相容하지 못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一考할 必 要가 있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의 심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의문은, 본문 초두에 인용한 실록 중의 「道傳, 又嗾卞仲良上疏, 請罷諸王子兵權, 至再一一」이라는 문구와, 태종 3년에 왕의 懷舊(회구)의 말 가운데 「父王卽位之初, 以勇兵皆委於我」(주15)라는 것을 비교하여, 정안이 도전에게 병권의 삭탈을 원함이 있지 않았는지, 적어도 이 점이 양자 불용한 이유가 되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설령 그런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이조의 신국가가 성립된 이상, 제반의 정치와 제도가 중앙집권적 형태를 띄어가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므로, 특히 도전의 개인적 야심을 운운할 수는 물론 없을 뿐 아니라, 이 운동을 大觀(대관)하여보면, 방석과 방원 간의 사소한 관계는 물론, 세세한 정치적 세력 문제와는 관계없이, 별로히 독립한 문제로 이 후에도 계속되어 간 것이요, 그것이 국가(왕실)를 중심으로 이해를 고려할 문제인 즉, 도전(즉 방석파)이 왕실의 중심 이해를 대표할 때 그가 운동의 중축이며, 도전 패몰 후에 방원이 정권의 중심일 때 그가 亦(역) 그 운동의 주동자 됨이 당연하다.(주16) 그러므로 방원이 재야 시(?)에 도전의 세력 집중적 정치시설에 불만을 가졌다 하여도, 아무 이상한 점이 없지 않은가.
쪽수▶P21-3이 問題를 생각할 때, 우리의 心中에 第一 먼저 일어나는 疑問은, 本文 初頭에 引用한 實錄 中의 「道傳, 又嗾卞仲良上疏, 請罷諸王子兵權, 至再一一」이라는 文句와, 太宗 三年에 王의 懷舊의 말 가운데 「父王卽位之初, 以勇兵皆委於我」(註十五)라는 것을 比較하야, 靖安이 道傳에게 兵權의 削奪을 怨함이 있지 않았는지, 적어도 이 點이 兩者不容▶P22-1한 一理由가 되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設令 그런 事實이 있다 하드라도, 李朝의 新國家가 成立된 以上, 諸般의 政治와 制度가 中央集權的 形態를 띄여가는 것이 當然한 現像이므로, 特히 道傳의 個人的 野心을 云云할 수는 勿論없을 뿐 아니라, 이 運動을 大觀하여보면, 芳碩과 芳遠間의 些少한 關係는 勿論, 細細한 政治的勢力 問題와는 關係없이, 別로히 獨立한 問題로 이 後에도 繼續되어간 것이요, 그것이 國家(王室)를 中心으로 利害를 顧慮할 問題인 즉, 道傳(卽 芳碩派)이 王室의 中心 利害를 代表할 때 그가 運動의 中軸이며, 道傳 敗歿 後에 芳遠이 政權의 中心일 때 그가 亦 그 運動의 主動者 됨이 當然하다.(註十六) 그러므로 芳遠이 在野 時(?)에 道傳의 勢力集中的 政治施設에 不滿을 가젔다 하여도, 아무 異常한 點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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