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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3.호수와 봉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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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7번={{TagSpage|23-2}}여기서 吾人은 奉足의 給付에 있어서의 身分의 反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別侍衛·內禁衛와 또 貴族 軍人에 對한 記事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임이 助戶의 도움을 빌지 않드래도, 많은 率丁을 그 戶內에 가지는 大戶의 主人公인지라, 그 戶의 戶首로서 그의 榮譽로운 立役에 當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奉足으로서의 助丁이 그의 戶 밖에서 주워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上記 여러{{TagPage|24-1}} 軍人─院主 津尺까지 軍人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院主 노릇·津尺 노릇이 그들의 國家에 對하야 저야 할 役이기 때문에─이 奉足 不給의 限度의 差異를 그들 軍人의 가지는 富의 스스로인 反映일 것이며, 그 各種의 軍人 中에 있어서의 絕對的 多數는 그 奉足 發給의 最大 限度 以下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奉足戶에 關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勿論이다. 例하면 <cite no="06">「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cite>라 할 때, 一般의 田地를 가지지 못하는 奉足의 大多數임을 演繹하는 것은 잘못일까. 우의 記事는 大戶나 殘殘戶나 區別치 않고 또 그의 土地에 對한 質的인 區別도 考慮치 않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서 그것에서부터 戶라고는 하기 어려운 殘殘戶 乃至는 不成戶의 絕對的 多數인 것을 前節의 證明을 빌지 않드래도 斷定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히 하야 그 編成한 結果는 어떠하였을까. 單寒한 戶首의 戶에다가 單寒한 奉足의 戶를 合算한들 그것은 큰 一戶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우의 記事가 비록 戶로써 單位를 삼었다고 한들, 이러한 實情에 있는 限, 大部分 「三丁一戶」라든가 「五丁一戶」라든가 하는 丁 單位와 別다른 差異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목차3원문17번={{TagSpage|23-2}}여기서 吾人은 奉足의 給付에 있어서의 身分의 反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別侍衛·內禁衛와 또 貴族 軍人에 對한 記事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임이 助戶의 도움을 빌지 않드래도, 많은 率丁을 그 戶內에 가지는 大戶의 主人公인지라, 그 戶의 戶首로서 그의 榮譽로운 立役에 當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奉足으로서의 助丁이 그의 戶 밖에서 주워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上記 여러{{TagPage|24-1}} 軍人─院主 津尺까지 軍人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院主 노릇·津尺 노릇이 그들의 國家에 對하야 저야 할 役이기 때문에─이 奉足 不給의 限度의 差異를 그들 軍人의 가지는 富의 스스로인 反映일 것이며, 그 各種의 軍人 中에 있어서의 絕對的 多數는 그 奉足 發給의 最大 限度 以下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奉足戶에 關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勿論이다. 例하면 <cite no="06">「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cite>라 할 때, 一般의 田地를 가지지 못하는 奉足의 大多數임을 演繹하는 것은 잘못일까. 우의 記事는 大戶나 殘殘戶나 區別치 않고 또 그의 土地에 對한 質的인 區別도 考慮치 않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서 그것에서부터 戶라고는 하기 어려운 殘殘戶 乃至는 不成戶의 絕對的 多數인 것을 前節의 證明을 빌지 않드래도 斷定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히 하야 그 編成한 結果는 어떠하였을까. 單寒한 戶首의 戶에다가 單寒한 奉足의 戶를 合算한들 그것은 큰 一戶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우의 記事가 비록 戶로써 單位를 삼었다고 한들, 이러한 實情에 있는 限, 大部分 「三丁一戶」라든가 「五丁一戶」라든가 하는 丁 單位와 別다른 差異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목차3원문18번={{TagSpage|24-2}}慶尙道地理志, 道內時居條에 依하면 各色 軍人에 對한 奉足 給付의 單位는 丁을 標準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목차3원문18번={{TagSpage|24-2}}慶尙道地理志, 道內時居條에 依하면 各色 軍人에 對한 奉足 給付의 單位는 丁을 標準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목차3원문19번={{TagSpage|24-3}}<blockquote no="18">別牌……………八一六名………………奉足……三, 九四七名</blockquote><br/>佳衛……………二, 一二〇名…………奉足……九, 八九五名{{TagPage|25-1}}<br/>營鎭屬………二, 二六一名……………奉足…………六, 一〇七名<br/>守城軍………一, 二二三名……………奉足…………二, 三六二名<br/>騎船………一五, 九四一名……………奉足………二六, 〇七一名<br/>雜色………一六, 五七四名……………奉足………四七, 四六二名<br/>計…正軍三九, 九三五名…………奉足………一〇三, 八四四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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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9번={{TagSpage|24-3}}<blockquote no="18">別牌……………八一六名………………奉足……三, 九四七名<br/>佳衛……………二, 一二〇名…………奉足……九, 八九五名{{TagPage|25-1}}<br/>營鎭屬………二, 二六一名……………奉足…………六, 一〇七名<br/>守城軍………一, 二二三名……………奉足…………二, 三六二名<br/>騎船………一五, 九四一名……………奉足………二六, 〇七一名<br/>雜色………一六, 五七四名……………奉足………四七, 四六二名<br/>計…正軍三九, 九三五名…………奉足………一〇三, 八四四名</blockquote>
 
|목차3원문20번={{TagSpage|25-2}}이 중 騎船軍은 正軍一에 對하야 奉足 二丁을 넘고 있으나, 三丁 一戶라는 原則은 終始 不變이라고 생각되고, 일즉이 太祖實錄, 七年 秋九月 壬午條, 恭靖王의 敎旨에서도 이를 强調하고 있다. 騎船軍의 이러한 「三丁一戶」 原則은 世祖의 保法에 이르러 事實上 「四丁一戶」로 하게 되였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甲士·別侍衛와 같은 것도 助丁發給에 있어서 丁을 單位로 하고 있다. 世祖實錄에서 이것을 보면 左와 같다.
 
|목차3원문20번={{TagSpage|25-2}}이 중 騎船軍은 正軍一에 對하야 奉足 二丁을 넘고 있으나, 三丁 一戶라는 原則은 終始 不變이라고 생각되고, 일즉이 太祖實錄, 七年 秋九月 壬午條, 恭靖王의 敎旨에서도 이를 强調하고 있다. 騎船軍의 이러한 「三丁一戶」 原則은 世祖의 保法에 이르러 事實上 「四丁一戶」로 하게 되였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甲士·別侍衛와 같은 것도 助丁發給에 있어서 丁을 單位로 하고 있다. 世祖實錄에서 이것을 보면 左와 같다.
 
|목차3원문21번={{TagSpage|25-3}}<blockquote no="19">{{TagRef|7}}一、甲士·別侍衛 奴婢·土田數少者 無助丁 而番上宿衛爲難 故給助丁三人 然而敬差官等 不覈奴婢土田之數 例給助丁三人 軍士內 自占良民 以爲已奴 多般侵虐 雖富實軍士 因緣請托 皆受助丁 一家三人 俱出供役 民力敷 不因而流亡 請令諸邑守令 更考所耕及奴婢多少 若<br/>所耕五結以下 奴婢十口以下 給助丁三人<br/>所耕七結以下 奴婢十二口以下 給二人{{TagPage|26-1}}<br/>所耕十結以下 奴婢十五口以下 給一人<ref>世祖實錄, 四年 十一月 癸已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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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7번=여기서 우리는 봉족의 급부에 있어서의 신분의 반영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별시위·내금위와 또 귀족 군인에 대한 기사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이미 조호의 도움을 빌지 않더라도, 많은 솔정을 그 호 내에 가지는 대호의 주인공인지라, 그 호의 호수로서 그의 영예로운 입역에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족으로서의 조정이 그의 호 밖에서 주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 쓴 여러 군인─원주 진척까지 군인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원주 노릇·진척 노릇이 그들의 국가에 대하여 저야 할 역이기 때문에─이 봉족 불급의 한도의 차이를 그들 군인의 가지는 부의 스스로인 반영일 것이며, 그 각종의 군인 중에 있어서의 절대적 다수는 그 봉족 발급의 최대 한도 이하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봉족호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물론이다. 예를 들면 <cite no="06">“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cite>라 할 때, 일반의 전지를 가지지 못하는 봉족의 대다수임을 연역하는 것은 잘못일까. 위의 기사는 대호나 천천호나 구별치 않고 또 그의 토지에 대한 질적인 구별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그것에서부터 호라고는 하기 어려운 천천호 내지는 불성호의 절대적 다수인 것을 앞 절의 설명을 빌지 않더라도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 편성한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단한한 호수의 호에다가 단한한 봉족의 호를 합산한들 그것은 큰 1호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위의 기사가 비록 호로써 단위를 삼았다고 한들, 이러한 실정에 있는 한, 대부분 ‘3정1호’라든가 ‘5정1호’라든가 하는 정 단위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목차3해독문17번=여기서 우리는 봉족의 급부에 있어서의 신분의 반영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별시위·내금위와 또 귀족 군인에 대한 기사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이미 조호의 도움을 빌지 않더라도, 많은 솔정을 그 호 내에 가지는 대호의 주인공인지라, 그 호의 호수로서 그의 영예로운 입역에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족으로서의 조정이 그의 호 밖에서 주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 쓴 여러 군인─원주 진척까지 군인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원주 노릇·진척 노릇이 그들의 국가에 대하여 저야 할 역이기 때문에─이 봉족 불급의 한도의 차이를 그들 군인의 가지는 부의 스스로인 반영일 것이며, 그 각종의 군인 중에 있어서의 절대적 다수는 그 봉족 발급의 최대 한도 이하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봉족호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물론이다. 예를 들면 <cite no="06">“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cite>라 할 때, 일반의 전지를 가지지 못하는 봉족의 대다수임을 연역하는 것은 잘못일까. 위의 기사는 대호나 천천호나 구별치 않고 또 그의 토지에 대한 질적인 구별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그것에서부터 호라고는 하기 어려운 천천호 내지는 불성호의 절대적 다수인 것을 앞 절의 설명을 빌지 않더라도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 편성한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단한한 호수의 호에다가 단한한 봉족의 호를 합산한들 그것은 큰 1호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위의 기사가 비록 호로써 단위를 삼았다고 한들, 이러한 실정에 있는 한, 대부분 ‘3정1호’라든가 ‘5정1호’라든가 하는 정 단위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목차3해독문18번=경상도지리지, 도내시거조에 의하면 각색 군인에 대한 봉족 급부의 단위는 정을 표준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목차3해독문18번=경상도지리지, 도내시거조에 의하면 각색 군인에 대한 봉족 급부의 단위는 정을 표준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목차3해독문19번=<blockquote no="18">別牌……………八一六名………………奉足……三, 九四七名</blockquote><br/>佳衛……………二, 一二〇名…………奉足……九, 八九五名{{TagPage|25-1}}<br/>營鎭屬………二, 二六一名……………奉足…………六, 一〇七名<br/>守城軍………一, 二二三名……………奉足…………二, 三六二名<br/>騎船………一五, 九四一名……………奉足………二六, 〇七一名<br/>雜色………一六, 五七四名……………奉足………四七, 四六二名<br/>計…正軍三九, 九三五名…………奉足………一〇三, 八四四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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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0번=이 중 기선군은 정군一에 대하여 봉족 2정을 넘고 있으나, 3정 1호라는 원칙은 종시 불변이라고 생각되고, 일찍이 태조실록, 7년 가을 9월 임오조, 공정왕의 교지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기선군의 이러한 ‘3정1호’ 원칙은 세조의 보법(保法)에 이르러 사실상 ‘4정1호’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甲士·別시위와 같은 것도 조정發給에 있어서 丁을 단위로 하고 있다. 세조실록에서 이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목차3해독문20번=이 중 기선군은 정군一에 대하여 봉족 2정을 넘고 있으나, 3정 1호라는 원칙은 종시 불변이라고 생각되고, 일찍이 태조실록, 7년 가을 9월 임오조, 공정왕의 교지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기선군의 이러한 ‘3정1호’ 원칙은 세조의 보법(保法)에 이르러 사실상 ‘4정1호’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甲士·別시위와 같은 것도 조정發給에 있어서 丁을 단위로 하고 있다. 세조실록에서 이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목차3해독문21번=<blockquote no="19">{{TagRefT|7}}一、甲士·別시위 奴婢·土田數少者 無助丁 而番上宿衛爲難 故給助丁三人 然而敬差官等 不覈奴婢土田之數 例給助丁三人 軍士內 自占良民 以爲已奴 多般侵虐 雖富實軍士 因緣請托 皆受助丁 一家三人 俱出供役 民力敷 不因而流亡 請令諸邑守令 更考所耕及奴婢多少 若<br/>所耕五結以下 奴婢十口以下 給助丁三人<br/>所耕七結以下 奴婢十二口以下 給二人{{TagPage|26-1}}<br/>所耕十結以下 奴婢十五口以下 給一人<ref group="a">세조실록, 4년 11월 계사조</ref></blockquote>
 
|목차3해독문21번=<blockquote no="19">{{TagRefT|7}}一、甲士·別시위 奴婢·土田數少者 無助丁 而番上宿衛爲難 故給助丁三人 然而敬差官等 不覈奴婢土田之數 例給助丁三人 軍士內 自占良民 以爲已奴 多般侵虐 雖富實軍士 因緣請托 皆受助丁 一家三人 俱出供役 民力敷 不因而流亡 請令諸邑守令 更考所耕及奴婢多少 若<br/>所耕五結以下 奴婢十口以下 給助丁三人<br/>所耕七結以下 奴婢十二口以下 給二人{{TagPage|26-1}}<br/>所耕十結以下 奴婢十五口以下 給一人<ref group="a">세조실록, 4년 11월 계사조</ref></blockquote>

2024년 10월 28일 (월) 20:3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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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초기 국역편성의 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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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李朝初期 國役編成의 基底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4 발행기관
저자 김석형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6월
시작쪽 1쪽 종료쪽 50쪽 전체쪽 50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머리말


국가가 인민에 대하여 그의 직접적인 노동력을 수취한다는 것, 곧 부역이라는 것은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여 구성되는 봉건적 국가의 한 징표로서 주지되는 사실이다. 국가 재정의 운용이 현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봉건적 국가는, 봉쇄적이요 개개로 고립한 일반적 자연경제에 제한되는 것이므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부문의 요구를 충당하려면, 인민을 직접 징발, 사역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소(大小)의 토목 영선에는 물론이요, 이조초기와 같아서는, 궁중의 잡역과 병기 집물의 제조까지도 직접 인민을 징발하여 이에 당하게 하였고, 그뿐 아니라 자염, 목부, 조세의 조전, 도기, 자기의 제조 등에도, 모두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조선조 초기의 인민이 지는 국역은 실로 많기도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역은 지방 관아에서 지방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또 중앙에서 국가 전체의 목적 아래에서 필요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줄 안다. 경국대전 호전 요부조에 “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이라 한 것은 전자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해당 조 말미의 세주(細註)에 “京城底十里, 皆京役”이라 한 것으로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지방적 국역은 그것이 여하한 사적 과정을 밟아 왔든, 후자의 전체적 국역이라고 할 만한 것에 비하면, 소규모의 것이었고 지방에 따라 또한 사정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본론에 있어서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다. 후자인 전체적 국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일시적인 것, 예를 들면 한성도시건설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출전 같은 것과 항구적인 것과를 구별할 수 있으니, 본론의 이른바 국역이라는 것은, 곧, 이 전체적인 국역 중에서도 항구적인 것을 가리킨 것이다.
쪽수▶P1-1國家가 人民에 對하여 그의 直接的인 勞働力을 收取한다는 것, 곧 賦役이라는 것은 一般的 自然經▶P2濟를 土臺로 하여 構成되는 封建的 國家의 한 徵表로서 周知되는 事實이다. 國家 財政의 運用이 現代의 그것과 根本的으로 相異한 封建的 國家는, 封鎻的이요 個個로 孤立한 一般的 自然經濟에 制限되는 것이므로 勞働力을 必要로 하는 모든 部門의 要求를 充當할랴면, 人民을 直接 徵發, 使役하는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大小의 土木 營繕에는 勿論이요, 李朝 初期와 같아서는, 宮中의 雜役과 兵器 什物의 製造에까지도 直接 人民을 徵發하여 이에 當케 하였고, 그뿐 아니라 煮塩, 牧夫, 租稅의 漕轉, 陶器, 磁器의 製造 等에도, 凡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朝鮮朝 初期의 人民이 지는 國役은 實로 많기도 많었든 것이다. 이러한 國役은 地方 官衙에서 地方的으로 必要로 하는 것과, 또 中央에서 國家 全體의 目的 아래에에서 必要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大別할 수 있을 줄 안다. 經國大典 戶典 徭賦條에 「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이라 한 것은 前者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該條 末尾의 細註에 「京城底十里, 皆京役」이라 한 것으로도 自明한 事實이다. 이러한 地方的 國役은 그것이 如何한 史的 過程을 밟어왔든, 後者의 全體的 國役이라고 할 만한 것에 比하면, 小規模의 것이었고 地方에 딿아 또한 事情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本論에 있어서는 건다리지 않기로 한다. 後者인 全體的 國役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一時的인 것, 例하면 漢城都市建設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出戰 같은 것과 恒久的인 것과를 區別할 수 있으니, 本論의 이른바 國役이라는 것은, 곧, 이 全體的인 國役 中에서도 恒久的인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국역에 대하여는 경국대전에도 별다른 규정이 없으니, 그것은 곧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이 노동부대가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초기의 병제가 소위 부병제라 하여 국민개병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였고, 신분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모든 인민의 활동을 규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국민개병의 원칙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위에 말한 노동부대가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제공되는 것도 이러한 신분을 토대로 한 개병주의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양반의 자손이 져야 하는 병역은 갑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천인이 져야 하는 병역은 괭이와 삽을 드는 노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병역이 아니라, 당시의 국역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세종실록 10년 8월 임오조에 보이는 양성지의 의견은 차간(此間)의 소식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쪽수▶P3-1이러한 意味의 國役에 對하여는 經國大典에도 別다른 規定이 없으니, 그것은 곧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이 勞働部隊가 提供되기 때문이었다. 朝鮮朝 初期의 兵制가 所謂 府兵制라 하야 國民皆兵主義의 原則에 立脚하였고, 身分이라는 것이 그 社會의 모든 人民의 活動을 規定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國民皆兵의 原則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判異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에 말한 勞働部隊가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提供되는 것도 이러한 身分을 土臺로 한 皆兵主義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兩班의 子孫이 저야 하는 兵役은 甲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賤人이 저야 하는 兵役은 굉이와 삽을 드는 勞働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軍役이라는 것은 單純한 兵役이 아니라, 當時의 國役의 根幹을 이루웠든 것이다. 世宗實錄 十年 八月 壬午條에 보이는 梁誠之의 意見은 此間의 消息을 端的으로 말하고 있다.

(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

쪽수▶P3-2

(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

양성지의 이 열거가 당시의 제색군인을 모두 망라한 것이냐 아니냐는 고사하고라도, 그가 제색군인을 역목(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병종론(兵種論)에 의하면 오늘날의 기술적인 병종과는 판이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당시의 병종이 신분에 제한되어 결정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역군이라든가 사명군이라 하는 범주를 번상군이라든가 보군이라든가 하는 범주와 같은 가치에 있어서 논하였으나, 후자는 기술적인 것이었으므로 사령, 역군과 동일시될 성질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병종론에서 선군을 빼었고 또 역군인 대졸과 공천 중에서도 선상노를 불문에 부쳤다. 사령인 섭(攝)60도 번상군이요 보군이었다. 그의 병종론에 소루(疎漏)한 감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신분을 토대로 하여 병종을 논한 데에 그의 탁견이 보인다. 대개, 당시에 있어서 병종을 구분하는 것은 신분이었고, 또한 반대로 군역(국역)의 부담에 있어서 다시 그의 신분은 세분화되었으니, 예를 들면,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방패는 활과 칼 대신에 괭이와 삽을 드는, 병역 아닌 역군이라는 병역을 졌으며, 또한 그가 역군인 방패라는 병역을 지는 데에서, 그의 신분은 신량역천 중의 세분화된 방패라는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병사라는 것은 적어도 조선조 초기에 있어서는 단순한 기술상의 병사가 아니라 그 사회 구성 관계에 있어서의 신분의 운명적인 존재상이었던 것이다.
쪽수▶P3-3梁誠之의 이 列擧가 當時의 諸色軍人을 總히 網羅한 것이냐 아니냐는 姑捨하고라도, 그가 諸色軍人을 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兵種論에 依하면 오늘날쪽수▶P4-1의 技術的인 兵種과는 判異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當時의 兵種이 身分에 制限되여 決定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役軍이라든가 使命軍이라 하는 範疇를 番上軍이라든가 步軍이라든가 하는 範疇와 같은 價値에 있어서 論하였으나, 後者는 技術的인 것이었으므로 使令, 役軍과 同一視될 性質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兵種論에서 船軍을 빼었고 또 役軍인 隊卒과 公賤 中에서도 選上奴를 不問에 붙였다. 使令인 攝六十도 番上軍이요 步軍이었다. 그의 兵種論에 疎漏한 憾이 없지 않지만, 大體로 身分을 土臺로 하여 兵種을 論한 데에 그의 卓見이 보인다. 大概, 當時에 있어서 兵種을 區分하는 것은 身分이었고, 또한 反對로 軍役(國役)의 負擔에 있어서 다시 그의 身分은 細分化되였으니, 例하면, 身良役賤의 身分이었기 때문에 防牌는 활과 칼 代身에 굉이와 삽을 드는, 兵役 아닌 役軍이라는 兵役을 졌으며, 또한 그가 役軍인 防牌라는 兵役을 지는 데에서, 그의 身分은 身良役賤 中의 細分化된 防牌라는 身分이 되었든 것이다. 兵士라는 것은 적어도 朝鮮朝 初期에 있어서는 單純한 技術 上의 兵士가 아니라 그 社會 構成 關係에 있어서의 身分의 運命的인 存在相이었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병사는 당시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는 국가 재정의 특이한 운용에 의하여, 또 한번 윤색을 받게 되니, 당시의 병제 조직의 해부는 이 두 가지의 요소를 실마리로 하여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신분의 구현이었던 이 이조초기의 인민은 법제적인 호구법에 의하여 편성되고 조직되어, 국가에 대한 여러가지 부담을 졌다. 병역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병사는 이 호구법의 수단에 의하여 처음 전 인민층에서 추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추출된 병사는 그의 신분적 제한에 있어서 ‘성색’되었고, 국가는 이를 제가 가지는 특이한 방법으로서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추출 편성되는 병사는, 또 다시 서반 관료 조직의 일원으로서 편입되어, 처음 구체적인 병사가 되었던 지라, 이 두 가지 과정에 의하여 처음, 단순한 인정(人丁)은 일개의 전문적인 병사가 되니, 전자의 과정은 후자의 그것의 토대요, 후자의 그것은 전자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본론에 있어서는 군역의 조직의 근본을 이루는 이 호구법에서 그치기로 한다.
쪽수▶P4-2이러한 意味의 兵士는 當時 一般的 自然經濟를 土臺로 하는 國家 財政의 特異한 運用에 依하야, 또 한번 潤色을 받게 되니, 當時의 兵制 組織의 解剖는 이 두 가지의 要素를 실마리로 하야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身分의 具現이었든 이 李朝 初期의 人民은 法制的인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組織되여, 國家에 對한 여러가지 負擔을 젔다. 兵役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兵▶P5-1士는 이戶口法의 手段에 依하야 처음 全 人民層에서 抽出되였든 것이다. 이렇게 하야 抽出된 兵士는 그의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 「成色」되였고, 國家는 이를 제가 가지는 特異한 方法으로서 組織하였든 것이다. 이렇듯 抽出 編成되는 兵士는, 또 다시 西班 官僚 組織의 一員으로서 編入되여, 처음 具體的인 兵士가 되였든 지라, 이 두 가지 過程에 依하야 처음, 單純한 人丁은 一個의 專門的인 兵士가 되니, 前者의 過程은 後者의 그것의 土臺요, 後者의 그것은 前者의 當然한 結果이지마는, 本論에 있어서는 軍役의 組織의 根本을 이루는 이 戶口法에서 그치기로 한다.
호구법이라는 것이 당시에 있어서의 신분 제도에 의존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호구법이야말로 그 신분 제도를 강화하는 관건이었던 것이다. 곧 호적이라는 것이 그의 신분에 따라서, 특권의 증명서도 되고 병역의 대장도 되는 것이었다. 이조초기의 전 인민이 호구법에 의하여 편성되고, 인정이 이에 의하여 추출되고, 이렇듯 추출된 인정 중에서 또 군인인 정정(正丁)이 다시 추출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형식 중에는, 고려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중국(특히 당)에 배운 바도 많았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허무한 시간적 또는 공간적 관계에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본론의 취재할 문제는 당시 사회의 구성 관계에서 인과 지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형식적인 인연이 그다지 중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시의 호적이 여하히 중국식을 빌렸고, 고려의 형식에 배웠다고 하더래도, 당시의 독특한 사회 구성 관계를 몰각한다면, 그는 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회득(會得)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이, 군역과 호구법을 논한다는 제일보(一步)에서 당시의 전법을 논하게 된 것이다. 대개, 호구의 편성에 당면하여 이에 본질적인 제한을 줄 것은 그의 토지에 대한 소유 관계이기 때문이다.
쪽수▶P5-2戶口法이라는 것이 當時에 있어서의 身分 制度에 依存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戶口法이야말로 그 身分 制度를 强化하는 關鍵이었든 것이다. 곧 戶籍이라는 것이 그의 身分에 따라서, 特權의 證明書도 되고 兵役의 臺帳도 되는 것이었다. 李朝 初期의 全 人民이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人丁이 이에 依하야 抽出되고, 이렇듯 抽出된 人丁 中에서 또 軍人인 正丁이 다시 抽出되는 이러한 過程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形式 中에는, 高麗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中國(特히 唐)에 배운 바도 많었겠지만, 吾人은 이러한 虛無한 時間的 또는 空間的 關係에 言及치 않으랴 한다. 그것은 本論의 取材할 問題는 當時 社會의 構成 關係에서 因果 지워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形式的인 因緣이 그다지 重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當時의 戶籍이 如何히 中國式을 빌었고, 高麗의 形式에 배웠다고 하드래도, 當時의 獨特한 社會 構成 關係를 沒却한다면, 그는 이에 對하야 아모것도 會得치 몯할 것이▶P6-1다. 이렇듯이, 軍役과 戶口法을 論한다는 第一步에서 當時의 田法을 論하게 된 것이다. 大概, 戶口의 編成에 當面하야 이에 本質的인 制限을 줄 것은 그의 土地에 對한 所有 關係이기 때문이다.


































본문2: 2.전법과 호


이조초기의 전법은 공양왕 3년에 창정된 소위 과전법에 의하여, 최후의 결정을 보았던 것은 주지되는 사실이다. 고려사 권78, 지(志)권 제32, 식화1에 보이는바 공양왕 3년 5월, 도평의사사의 상언에 의하여 창정된 과전법의 세목은, 전제 개혁론자들의 종래 창도하여 온 것의 실천인 점에 있어서, 그것은 물론 고려말 대토지 사유와 전연 대척적인 것이었다. 즉 대토지 사유에 의한 이 사회의 근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의 분배의 불균형을 타파한 것에, 그의 최대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전법의 창정에 의하여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권력적 간섭과, 그 분배의 균형이 꾀하여 졌던 것이다. 이하, 이 과전법의 세목 중에서 수속·상속·벌칙 등을 쟁하하고, 직접 이 분배와 소유에 관한 항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쪽수▶P6-2李朝 初期의 田法은 恭讓王 三年에 創定된 所謂 科田法에 依하야, 最後의 決定을 보았든 것은 周知되는 事實이다. 高麗史 卷七十八, 志卷 第三十二, 食貨一에 보여지는바 恭讓王 三年 五月, 都評議使司의 上言에 依하야 創定된 科田法의 細目은, 田制 改革論者들의 從來 唱導하여 온 것의 實踐인 點에 있어서, 그것은 勿論 麗末 大土地 私有와 全然 對蹠的인 것이었다. 即 大土地 私有에 依한 이 社會의 根本的인 生產手段인 土地의 分配의 不均衡을 打破한 것에, 그의 最大 眼目이 있었든 것이다. 이 科田法의 創定에 依하야 土地 所有에 對한 國家의 權力的 干涉과, 그 分配의 均衡이 꽤하여 졌든 것이다. 以下, 이 科田法의 細目 中에서 手續·相續·罰則 等을 除外하고, 直接 이 分配와 所有에 關한 項目을 들면 如左하다.

一. 拘收公私徃年田籍 盡行檢覆 覈其眞僞 因舊損益 以定陵寢·倉庫·宮司·軍資寺 及寺院·外官職田·廪給田·鄕·津·驛吏·軍匠·雜色之田
一. 京畿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第一科, 自在內大君 至門下侍中 一▶P7-1百五十結 (中略) 第十八科 權務散職 十結
一. 外方王室之藩 宜置軍田 以餋軍士 東西兩界 依舊充軍需 六道閑良官吏 不論資品高下 隨其本田多少 各給軍田十結, 或 五結.
一. 軍·鄉吏及諸有役人 如有死亡無後者 逃避本役者 赴京從仕者則 代其役者 遞受其田
一. 今後 凡稱私田 其主雖有罪犯 不許沒爲公田
一.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倡妓·僧尼等人 身及子孫 不許受田
一.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糓三十斗 此外有橫歛者 以曮論
一. 除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外 凡有田者 皆納稅 水田一結 白米二斗 旱田一結 黃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一. 田主奪田客所耕田 一負至五負 笞二十 每五負 加一等 罪至杖八十 職牒不收 一結以上 其丁許人遞受
一. 佃客 母得將所耕田 擅賣·擅興別戶之人 如有死亡·移徒·戶絕者 多占餘田 故令荒蕪者 其田聽從田主住意區處

쪽수▶P6-3

一. 拘收公私徃年田籍 盡行檢覆 覈其眞僞 因舊損益 以定陵寢·倉庫·宮司·軍資寺 及寺院·外官職田·廪給田·鄕·津·驛吏·軍匠·雜色之田
一. 京畿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第一科, 自在內大君 至門下侍中 一▶P7-1百五十結 (中略) 第十八科 權務散職 十結
一. 外方王室之藩 宜置軍田 以餋軍士 東西兩界 依舊充軍需 六道閑良官吏 不論資品高下 隨其本田多少 各給軍田十結, 或 五結.
一. 軍·鄉吏及諸有役人 如有死亡無後者 逃避本役者 赴京從仕者則 代其役者 遞受其田
一. 今後 凡稱私田 其主雖有罪犯 不許沒爲公田
一.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倡妓·僧尼等人 身及子孫 不許受田
一.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糓三十斗 此外有橫歛者 以曮論
一. 除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外 凡有田者 皆納稅 水田一結 白米二斗 旱田一結 黃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一. 田主奪田客所耕田 一負至五負 笞二十 每五負 加一等 罪至杖八十 職牒不收 一結以上 其丁許人遞受
一. 佃客 母得將所耕田 擅賣·擅興別戶之人 如有死亡·移徒·戶絕者 多占餘田 故令荒蕪者 其田聽從田主住意區處

과전법의 창정은 종래의 대토지 사유의 양기(揚棄)인 점에 있어서 사전의 공전화는 물론, 그의 분배가 대형의 토지 사유에서 소형의 토지 소유로 변하였다는 것에 최대 안목이 있다는 것은 상술한 바이다. 앞서 든 과전법의 세목에 의하면 경기에 있어서만 사전이 인정될 뿐으로, 명목은 여하튼 중앙 권력이 미치기 쉬운 거리에 두었고, 지방 6도에서도 수기사전다소(●●●●●●)하여 10결 혹은 5결의 사전이 군전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면 또 이러한 토지 분배에 있어서 소유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현대문주1▶우선, 이에 대하여 신진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씨에게 들어보기로 하자.[a 1] 그의 의견은 대개 이러하였다.
쪽수▶P7-2科田法의 創定은 從來의 大土地 私有의 揚棄인 點에 있어서 私田의 公田化는 勿論, 그의 分配가 大型의 土地 私有에서 小型의 土地 所有로 變하였다는 것에 最大 眼目이 있다는 것은 上述한 바이다. 前揭 科田法의 細目에 依하면 京畿에 있어서만 私田이 認定될 뿐으로, 名目은 如何튼 中央 權力이 미치기 쉬운 距離에 두었고, 地方 六道에서도 隨其私田多少(●●●●●●)하야 十結 或은 五結의 私田이 軍田으로서 認定▶P8-1받었다. 그러면 또 이러한 土地 分配에 있어서 所有 關係는 어떠하였든가. 원문주1▶于先, 이에 對하야 新進 深谷敏鐵氏에게 들어보기로 하자.[1] 그의 意見은 大概 이러하였다.
전국의 전지는 그 전종의 여하를 물문하고, 국가의 권력적 간섭을 받게 되니, 곧 국가는 전국의 전지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이러므로 전국의 전지는 모두가 공전이요, 뿐만 아니라,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을 제외한 모든 전지는 국가에 대하여 납세의 의무를 지고 수전자(受田者)의 전인 공신전과 같은 것은 납세의 의무까지도 지지 않는 전지라 하더라도 국가를 이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므로 그냥 사전이 아니라 ‘공전 중의 사전’이라. 국가는 전지에 대하여 수세·수조의 이중 수취를 행하는데, 그 중에는 면세의 전지도 있고, 과전·군전·공신전 등(수전자의 전)에 대하여는 국가는 수조하지 않으니 이들이 곧 ‘공전 중의 사전’인 것이다. 나머지의 전지는 국가 직속의 전지로서 특제한 자 외 납세·납조라는 이중의 지대를 국가에 대하여 지불하므로 그들은 ‘공전 중의 공전’이라 할 수 있다. 또 수전자의 전인 경우에는 수전자는 그의 전지에 대하여 국가 대신에 전객(佃客)에게서 수조를 할 수 있으니, 곧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전주는 전객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하여 천매·천여하지를 못하니 전객은 그 토지에 대하여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같은 한 조각의 전지를 들어 그것의 소유 관계의 내용을 살핀다면 국가·전주·전객의 3요소가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위와 같은 3개의 지배 형태를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쪽수▶P8-2全國의 田地는 그 田種의 如何를 勿問하고, 國家의 權力的 干涉을 받게 되니, 곧 國家는 全國의 田地에 對하야 「處分 管理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한다. 이러므로 全國의 田地는 모다가 公田이요, 뿐만 아니라, 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을 除外한 모든 田地는 國家에 對하야 納稅의 義務를 지고 受田者의 田인 功臣田과 같은 것은 納稅의 義務까지도 지지 않는 田地라 하드래도 國家를 이에 對하야 「處分 管理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하므로 그냥 私田이 아니라 「公田 中의 私田」이라. 國家는 田地에 對하야 收稅·收租의 二重 收取를 行하는데, 그 中에는 免稅의 田地도 있고, 科田·軍田·功臣田 等(受田者의 田)에 對하야는 國家는 收租치 않으니 이들이 곧 「公田 中의 私田」인 것이다,. 남어지의 田地는 國家 直屬의 田地로서 特除한 者 外 納稅·納租라는 二種의 地代를 國家에 對하야 支拂하므로 그들은 「公田 中의 公田」이라 할 수 있다. 또 受田者의 田인 境遇에는 受田者는 그의 田地에 對하야 國家 代身에 佃客에게서 收租를 할 수 있으니, 곧 「收租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한다. 田主는 佃客이 耕作하는 土地에 對하야 擅賣·擅與하지를 못하니 佃客은 그 土地에 對하야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같은 한 조각의 田地를 들어 그것의 所有 關係의 內容을 살핀다면 國家·田主·佃客의 三要素가 그를 支配하고 있어서, 如上 三個의 支配 形態를 抽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과전법의 창정은 대형의 토지 사유를 소형의 토지 공유(후카야씨의 말대로 토지분배라고 할까)로 바꾸어 놓았으니, 곧 과전법의 본질적인 두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쓰인 과전법의 세목에 의하면 경기에 있어서만 150결 이하의 사전이 용인되고 그것은 그의 명목으로 하는 바가 어떠하였든 국가 권력의 가장 미치기 쉬운 거리에다가 둔 것으로, 외방 6도에는 10결 내지 5결의 사전이 군전이라는 명목 아래에 용치되었을 뿐이었다. 이 군전은 위에 쓰인 세목에 의하면 외방 6도에 있는 것으로서 경기라든지 양계에 있어서는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양계 또는 경기에 시위왕실하는 병사가 있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니, 곧 군전을 받은 자는 반드시 시위왕실할 의무가 있더라도 반대로 시위왕실하는 자가 반드시 군전의 절수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전이라는 것은 소형의 ‘공전 중의 사전’으로서 전세만을 국가에 지불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군전은 수기본전다소(●●●●●●)하여 절수되었던 것이라, 일반 군인이 가지고 있는 곧 생활의 지반으로 하고 있는 전지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군전은 군인 중의 특수한 부류—수전패—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그들은 경기와 양계를 제한 지방에서 소형의 ‘공전 중의 사전’인 10결 혹 5결을 ‘수조권’에 기초하여 ‘지배’하는 자였다. 나머지의 군인은 귀족 양반의 출신을 별문제로 하고는 군전의 절수를 받지 못하고, 그들의 생활 지반은 ‘공전 중의 공전’이었고 위에 쓰인 세목에 보이는 전객이었던 것이다. 즉, ‘군향리 및 제유역인’의 전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그들은 납세·납조를 하여야 하고,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하는 자였다. 따라서 경기와 양계에 군전이 없다고 함은 이 공전 중의 사전으로서의 군전을 말함이요, 이러한 군인전이라고나 할 공전 중의 공전은 전국적으로 편재하였다고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군인과 향리와 기타 유역인이 전국적으로 편재하고 또 군인전이라고나 할 것의 소유 관계의 내용이 상술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이렇듯 군인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납조함으로써 그의 전객을 소작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조(租)라는 것이 1결 20석(2백두)에 대하여 30두, 2석이라는 10분의 1이라는 것은 그들 전객을 오히려 오늘날의 자작농에 견줄 수 있게 한다.
쪽수▶P9-1이렇듯, 科田法의 創定은 大型의 土地 私有를 小型의 土地 公有(深谷氏의 말대로 土地支配라고 할까)로 바꾸워 놓았으니, 곧 科田法의 本質的인 二面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上記 科田法의 細目에 依하면 京畿에 있어서만 百五十結 以下의 私田이 容認되고 그것은 그의 名目으로 하는 바가 어떠하였든 國家 權力의 가장 미치기 쉬운 距離에다가 둔 것으로, 外方 六道에는 十結 乃至 五結의 私田이 軍田이라는 名目 下에 容置되였을 뿐이었다. 이 軍田은 上記 細目에 依하면 外方 六道에 있는 것으로서 京畿라든지 兩界에 있어서는 그의 存在를 否定하고 있다. 그러나 兩界 또는 京畿에 侍衛 王室하는 兵士가 있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니, 곧 軍田을 받은 者는 반듯이 侍衛 王室할 義務가 있드래도 反對로 侍衛 王室하는 者가 반다시 軍田의 折受者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軍田이라는 것은 小型의 「公田 中의 私田」으로서 田稅만을 國家에 支拂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軍田은 隨其本田多少(●●●●●●)하야 折受되였든 것이라, 一般 軍人이 가지고 있는 곧 生活의 地盤으로 하고 있는 田地와는 區別되어야 하는 것이다. 軍田은 軍人 中의 特殊한 部類—受田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그들은 京畿와 兩界를 除한 地方에서 小型의 「公田 中의 私田」인 十結 或 五結을 「收租權」에 基하야 「支配」하는 者이었다. 남어지의 軍人은 貴族 兩班의 出身을 別問題로 하고는 軍田의 折受를 받지 못하고, 그들의 生活 地盤은 「公田 中의 公田」이었고 上記 細目에 보이는 佃客이었든 것이다. 即, 「軍鄕吏 及 諸有役人」의 田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그들은 納稅·納租를 하여야 하고,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하는 者이었다. 따라서 京畿와 兩界에 軍田이 없다고 함▶P10-1은 이 公田 中의 私田으로서의 軍田을 말함이요, 이러한 軍人田이라고나 할 公田 中의 公田은 全國的으로 遍在하였다고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軍人과 鄕吏와 其他 有役人이 全國的으로 遍在하고 또 軍人田이라고나 할 것의 所有 關係의 內容이 上述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이렇듯 軍人田이라고 할 만한 것은 納租함으로써 그의 佃客을 小作人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租라는 것이 一結 二十石(二百斗)에 對하야 三十斗, 二石이라는 十分之一이라는 것은 그들 佃客을 오히려 오늘날의 自作農에 견줄 수 있게 한다.
당시의 병제가 디디고 서는 기초는 토지 소유 관계뿐만은 아니었다. 봉건적 사회라는것은 신분제라는 질긴 제한이 그의 주장된 징표를 이루는 것으로서, 병제는 또한 이 신분적 제한을 기초로 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대체 신분이라는 것은 단순한 특권, 혹은 전통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기본 조건에 기초한 계급이라는 것의 법률적인 현상 형태겠으며, 병제가 디디고 서는 또 하나의 기초인 신분적 제한은 병제와 전제와의 관계와 독립하여 따로 병제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병제와 전제와의 관계의 중간적 계기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토지 제도는 직접 병종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신분 제한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당시의 군인은 그 신분에 의하여 병종의 결정되고, 또 이 병종이라는 것이 그의 신분을 다시 한 번 세분화시키는 것이었다. 선군은 양인이라 하였지만 또 선군이라는 양인 중의 한 신분층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0-2當時의 兵制가 디디고 서는 基礎는 土地 所有 關係뿐만은 아니었다. 封建的 社會라는것은 身分制라는 질긴 制限이 그의 주장된 徵表를 이루는 것으로서, 兵制는 또한 이 身分的 制限을 基礎로 하지 아니치 몯하였다. 大體 身分이라는 것은 單純한 特權, 或은 傳統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經濟的인 基本 條件에 基礎한 階級이라는 것의 法律的인 現象 形態이겠으며, 兵制가 디디고 서는 또 하나의 基礎인 身分的 制限은 兵制와 田制와의 關係와 獨立하여 따로이 兵制와 關係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兵制와 田制와의 關係의 中間的 契機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土地 制度는 直接 兵種과 關係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身分 制限을 通過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當時의 軍人은 그 身分에 依하야 兵種의 決定되고, 또 이 兵種이라는 것이 그의 身分을 다시 한 번 細分化시키는 것이었다. 船軍은 良人이라야 하였지마는 또 船軍이라는 良人 中의 한 身分層이 있었든 것이다.
당시의 신분층을 크게 나누어 귀족 양반과 양인과 천인, 또 양인과 천인의 중간층인 신량역천, 이 네 개의 기본층으로 나눌 수 있으니 그중 신량역천에 대하여는 세종실록, 원년 5월 경오조에,
쪽수▶P10-3當時의 身分層을 크게 나누어 貴族 兩班과 良人과 賤人, 또 良人과 賤人의 中間層인 身良役賤, 이▶P11-1 네 個의 基本層으로 나눌 수 있으니 그중 身良役賤에 對하야는 世宗實錄, 元年 五月 庚午條에,

國俗 以身良役賤者 或稱干 或稱尺

쪽수▶P11-2

國俗 以身良役賤者 或稱干 或稱尺

이라 하여 흔히 소위 간척의 무리라는 것이 곧 그들이다. 그들은 양인이면서도 국가에 의하여 천인이 질 역을 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분은 또 어떠한 경제적인 기본 조건에 서서 있었던가, 위의 과전법에 의하면,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와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볼 수 있었으니, 수조자인 전주와 경작자인 전객을 구별할 수 있었다. 전주는 국가 제(諸)기관과 사원을 제하고는 공신전·과전·군전의 절수자의 일군이었고, 그들은 소위 양반귀족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객이라는 것에는 ‘군·향리 내지 제유역인’으로서, 거기에는 양인과 신량역천과 천인이 넓게 포함되고 있다. 그 중 ‘공사천구·공상·매복맹인·무격·창기·승니 등인(等人)’은 ‘신(身) 및 자손’이 ‘불허수전’이므로, 이들 천인 무리는 양인과 신량역천과 더불어 토지에 대하여 ‘경작권에 기초한 지배’는 할 수 있으나, 양인처럼 수전하여 즉 수조자로서의 출세를 바랄 수 없는 자였다. 양인은 자유민으로서 사환(仕宦)하여 양반이 될 수 있으므로 법제적으로는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인 ‘수전’에도 참여할 수 있는 신분층이요, 또 천인은 국가 또—공천—개인에—사천—그 인격을 소유되는 자로서, 후자인 사천은 승려와 더불어 사민이므로 국역을 직접으로 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공천 중에서도 납공노비와 선상노비를 가릴 수 있어서, 선상은 다른 신분층과 같이 국역에 직접 당하는 자요 납공은 그 대신에 공을 바치는 자이다. 이러한 특별한 자를 제한 모든 신분층은 모두 다 군(국)역을 졌지만 거기에는 병역이라는 이름은 같으나 벼슬로서의 병역도 있었고 한 천역으로서의 병역도 있었으니, 그것은 모두가 다 이 신분적 제한의 당연소치(●●●●)였다. 또 위에도 한 차례 말한 바와 같이 그가 무슨 병역을 지느냐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신분이 제한할 것이고, 한 번 어떠한 병종이 되고 보면 그것이 곧 그의 더 자세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병종은 바로 그것이 신분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쪽수▶P11-3이라 하야 흔이 所謂 干尺의 徒라는 것이 곧 그들이다. 그들은 良人이면서도 國家에 依하야 賤人이 질 役을 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身分은 또 어떠한 經濟的인 基本 條件에 서서 있었든가, 우의 科田法에 依하면, 『收租權에 基한 土地支配』와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볼 수 있었으니, 收租者인 田主와 耕作者인 佃客을 區別할 수 있었다. 田主는 國家 諸機關과 寺院을 除하고는 功臣田·科田·軍田의 折受者의 一群이었고, 그들은 所謂 兩班貴族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佃客이라는 것에는 『軍·鄉吏 及 諸有役人』으로서, 거기에는 良人과 身良役賤과 賤人이 넓이 包含되고 있다. 그 중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娼妓·僧尼 等人』은 『身 及 子孫』이 『不許受田』이므로, 이들 賤人 群은 良人과 身良役賤과 더부러 土地에 對하야 『耕作權에 基한 支配』는 할 수 있으나, 良人처럼 受田하야 即 收租者로서의 出世를 바랄 수 없는 者이었다. 良人은 自由民으로서 仕宦하야 兩班이 될 수 있으므로 法制的으로는 『收租權에 基한 土地支配』인 『受田』에도 叅與할 수 있는 身分層이요, 또 賤人은 國家 또—公賤—個人에—私賤—그 人格을 所有되는 者로서, 後者인 私賤은 僧侶와 더부러 私民이므로 國役을 直接으로 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公賤 中에서도 納貢奴婢와 選上奴婢를 가릴 수 있어서, 選上은 다른 身分層과 같이 國役에 直接 當하는 者요 納貢은 그 代身에 貢을 바치는 者이다. 이러한 特別한 者를 除한 모▶P12-1든 身分層은 모도 다 軍(國)役을 졌지만 거기에는 兵役이라는 일홈은 같으나 벼슬로서의 兵役도 있었고 한 賤役으로서의 兵役도 있었으니, 그것은 모도가 다 이 身分的 制限의 當然所致이었다. 또 우에도 一言한 바와 같이 그가 무슨 兵役을 지느냐는 것은 그의 基本的인 身分이 制限할 것이고, 한 번 어떠한 兵種이 되고 보면 그것이 곧 그의 더 仔細한 身分이 되였기 때문에 當時의 兵種은 바로 그것이 身分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국역과 토지 소유와의 관계가 신분적 제한이라는 중간 다리를 거쳐서 맺어지는 것이므로, 이에 이르러 우리는 임이 이들 병종의 복잡다기할 토지 소유 내용을 추상할 수 있거니와, 다시 나아가 당시의 일반 양인 병사만을 살피어 보더라도, 위에 해석한 과전법의 내용을 저 후카야씨처럼 개괄적으로만 검토하기에 그침을 망설이게 할 것이다. 군전의 절수자는 ‘시위왕실’할 의무가 있더라도 ‘시위왕실’하는 자가 반드시 군전 절수자가 아님은 상술한 바거니와, 일반 병사는 고사하고 양인의 토지의 수조권에 대해서는 법제적으로는 권리가 있으나, 예를 들면 정병의 시위패라는 것은 무수전패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국가의 이에 대한 전지 절수는 처음부터 고려될 바 아니었다. 태종 6년 5월, 수전품관의 시위의 법을 신명할 때 의정부는 계(啓)하여
쪽수▶P12-2이와 같이 國役과 土地 所有와의 關係가 身分的 制限이라는 中間 다리를 거치어서 맺히여 지는 것이므로, 이에 이르러 吾人은 임이 이들 兵種의 複雜多岐할 土地 所有 內容을 推想할 수 있거니와, 다시 나아가 當時의 一般 良人 兵士만을 살피어 본다드래도, 우에 解釋한 科田法의 內容을 저 深谷氏처럼 概括的으로만 檢討하기에 그침을 망서리게 할 것이다. 軍田의 折受者는 『侍衛王室』할 義務가 있드래도 『侍衛王室』하는 者가 반듯이 軍田 折受者가 아님은 上述한 바이어니와, 一般 兵士는 姑捨하고 良人의 土地의 收租權에 對해서는 法制的으로는 權利가 있으나, 例하면 正兵의 侍衛牌라는 것은 無受田牌에도 드러가지 못하고, 國家의 이에 對한 田地 折受는 처음부터 顧慮될 바 아니었다. 太宗 六年 五月, 受田品官의 侍衛의 法을 申明할새 議政府는 啓하야

현대문주2▶受田品官 全爲居京城 衛王室 載在六典 無識之徒 不顧立法之意 累年在外 以致衛虛疎 又憑受田 不肯應當外方軍役 本府會受敎旨以禁之 顧乃不長成法 只求自便 切見 外方侍衛軍·騎船軍·未受一畝之田 尙且長年從軍 受田品官則於京於外 一無所從 實爲不當 (下略) [a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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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주2▶受田品官 全爲居京城 衛王室 載在六典 無識之徒 不顧立法之意 累年在外 以致衛虛疎 又憑受田 不肯應當外方軍役 本府會受敎旨以禁之 顧乃不長成法 只求自便 切見 外方侍衛軍·騎船軍·未受一畝之田 尙且長年從軍 受田品官則▶P13-1於京於外 一無所從 實爲不當 (下略) [2]

이라 하였으니, 양인군 중의 절대 다수인 시위군·기선군이 개국의 순간부터 일무(一畝)의 전지도 절수되지 못했든 것이다. 양인이 이렇거든, 그 이하의 신분층인 신량역천·천인 중의 입종자(立從者)는 과전법의 명문이 없을지라도 자명한 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조초기의 소위 병사라는 대부분의 인민은 군전의 절수에 참여하지 못하고 “未受一畝之田”한 자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혹은 소위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들추어, 일반 병사의 빈곤을 단정하기 주저할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과전법 창정의 불철저성과 실제와 명목과의 괴리를 살피지 못하면 잘못일 것이다. 우리는 태종 3년 6월 사간원의 전제 조정에 관한 의견 중에서 이러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쪽수▶P13-2이라 하였으니, 良人軍 中의 絕對 多數인 侍衛軍·騎船軍이 開國의 瞬間부터 一畝의 田地도 折受되지 못했든 것이다. 良人이 이렿거든, 그 以下의 身分層인 身良役賤·賤人 中의 立從者는 科田法의 明文이 없을지라도 自明한 바 있을 것이다. 따라서 李朝 初期의 所謂 兵士라는 大部分의 人民은 軍田의 折受에 叅與치 못하고 『未受一畝之田』한 者이었음을 推論할 수 있다. 或은 所謂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들추어, 一般 兵士의 貧困을 斷定하기 躊躇할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科田法 創定의 不徹底性과 實際와 名目과의 乖離를 살피지 못하면 잘못일 것이다. 우리는 太宗 三年 六月 司諫院의 田制 調整에 關한 意見 中에서 이러한 實例를 볼 수 있다.

현대문주3▶公私賤隸·巫覡·娼妓·工商·僧尼·賣卜盲人等 身及子孫 不許受田 此誠萬世之令典也 今者 公私賤隸 濫受土田 以亂成法 十有七人 其所受之田 揔六百九十餘結 (下略)[a 3]

쪽수▶P13-3

원문주3▶公私賤隸·巫覡·娼妓·工商·僧尼·賣卜盲人等 身及子孫 不許受田 此誠萬世之令典也 今者 公私賤隸 濫受土田 以亂成法 十有七人 其所受之田 揔六百九十餘結 (下略)[3]

과전법의 명목으로 하는 바와 실제와의 괴리는 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후카야씨는 과전법의 명목으로 하는 바를 상세히 분석하여 저 3개의 토지분배 형태를 추출하였으나, 우리는 이것으로서 당시의 토지 소유 관계의 전부라 하지는 못한다. 이 사회에 있어서 명목으로 하는 바에만 충실하다가는 드디어 진리를 찾지 못하리라. 태종 6년, 좌정승 하윤의 민폐에 관한 일절(一節)에
쪽수▶P13-4科田法의 名目으로 하는 바와 實際와의 乖離는 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深谷氏는 科田法의 名目으로 하는 바를 詳細히 分析하야 저 三個의 土地支配 形態를 抽出하였으나, 吾人은 이것으로서 當時의 土地 所有 關係의 全部라 하지는 못한다. 이 社會에 있어서 名目으로 하는 바에만 忠實하다가는 드디여 眞理를 찾지 못하리라. 太宗 六年, 左政丞 河崙의 民弊에 關한 一節에

현대문주4▶又品官 鄕吏 廣占土田 招納流亡 並作半收 其弊甚於私田 私田一結 只收二石 並作一結 多取十餘石 (下略)[a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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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주4▶又品官 鄕吏 廣占土田 招納流亡 並作半收 其弊甚於私田 私田一結 只收二石 並作一結 多取十餘石 (下略)[4]

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병작의 경향은 이 글에서 벌써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소위 농장이라는 과전법의 취지에 역행하는 계기의 발전에 따라 더욱 심해져 갔을 것이다. 이조초기의 농장이 어떠한 과정을 걸어갔는가는 청구학총, 제17호 소재, 스도 요시유키(周藤吉之)씨의 논문에서 대개 그 현대문주5▶윤곽만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a 5] 이 병작이라는 것은 따라서 또 하나의 토지분배 형태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이 ‘병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라고 할 만한 것이야말로 이조초기의 토지 소유의 커다란 숨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이러한 ‘병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전주와 타인 간에 성립하는 것이요, 그것이 전주와 그가 소유하는 사천과의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듯 당시의 토지 소유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네 가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소유라는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판이한 것이었다. 이러한 토지 소유에 대한 질적인 차이와 또 그것의 양적인 차이가 이 사회에 있어서, 인민의 부(富)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미수일무지전(未受一畝之田)’하는 일반 병사는 과연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어떻게 하여 토지에 긴박되어 있었을까. 이 사회에 있어서 주장된 생산수단인 토지에 대한 질적인 또 양적인 차이가 그대로 호에 편성에 당하여 다기한 제한을 주었고, 또 이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복잡무쌍한 신분 제한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쪽수▶P14-1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並作의 傾向은 이 글에서 벌서 暗示되여 있는 것처럼, 所謂 農庄이라는 科田法의 趣旨에 逆行하는 契機의 發展에 따라 더욱 甚하여저 갔을 것이다. 李朝 初期의 農庄이 어떠한 過程을 걸어갔는가는 靑丘學叢, 第十七號 所載, 周藤吉之氏의 論文에서 大概 그 원문주5▶輪廓만이라도 斟酌할 수 있을 것이다.[5] 이 並作이라는 것은 따라서 또 하나의 土地支配 形態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이 『並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라고 할 만한 것이야말로 李朝 初期의 土地所有의 크다란 숨은 存在가 아니었든가. 이러한 『並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라고 할 만한 것은 그 田主와 他人 間에 成立하는 것이요, 그것이 田主와 그가 所有하는 私賤과의 間에 成立하는 關係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듯 當時의 土地 所有의 內容은 具體的으로는 네 가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所有라는 槪念과는 本質的으로 判異한 것이었다. 이러한 土地 所有에 對한 質的인 差異와 또 그것의 量的인 差異가 이 社會에 있어서, 人民의 富의 差異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未受一畝之田」하는 一般 兵士는 果然 質的으로 또 量的으로 어떻게 하야 土地에 緊縛되어 있었을까. 이 社會에 있어서 주장된 生產手段인 土地에 對한 質的인 또 量的인 差異가 고대로 戶에 編成에 當하야 多岐한 制限을 주었고, 또 이것이야말로 이 社會의 複雜無雙한 身分 制限의 基礎를 이루웠든 것이다.
조(租)와 부(賦)와 공(貢)은 당시의 국가의 인민에 대한 수취의 3대 부문으로, 전이출조(田以出租)하고 호이출부(戶以出賦)라 하여 호라는 것은 부라는 직접적 노력 수취의 법제적인 단위로 되어 있었다. 공양왕 3년의 전제개혁(과전법 창정)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복잡한 토지 소유 관계 밑에 성립된 이 사회의 호라는 것은 여하한 실정에 있었던가. 상술한바 토지 소유의 검토는 중외의 병역에 당할 인민의 부의 불균형을 결론지었다. 또 구체적인 일례에서, 그 경작자에는 더욱 불리한 토지 소유의 또 하나의 형(型)을 추출하였다. 여하튼 이 사회에 있어서의 부의 불균형은 벌써 태조 원년 9월, 도평의사사에 의하여 엉성하나마 호를 통하여 그 실정을 보여주고 있다.
쪽수▶P14-2租와 賦와 貢은 當時의 國家의 人民에 對한 收取의 三大 部門으로, 田以出租하고 戶以出賦라 하야 戶라는 것은 賦라는 直接的 勞力 收取의 法制的인 單位로 되어 있었다. 恭讓王 三年의 田制改革(科田法 創▶P15-1定)을 契機로 하야 새로운 複雜한 土地 所有 關係 밑에 成立된 이 社會의 戶라는 것은 如何한 實情에 있었든가. 上述한바 土地 所有의 檢討는 中外의 兵役에 當할 人民의 富의 不均衡을 結論지웠다. 또 具體的인 一例에서, 그 耕作者에는 더욱 不利한 土地 所有의 또 하나의 型을 抽出하였다. 如何튼 이 社會에 있어서의 富의 不均衡은 벌서 太祖 元年 九月, 都評議使司에 依하야 엉성하나마 戶를 通하야 그 實情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문주6▶一. 民丁 自十六歲 至六十歲當役 十丁以上爲大戶 五丁以上爲中戶 四丁以下爲小戶 計丁籍民 如有徭役 大月出一名 中戶井二 出一名 小戶井三 出一名 以均其役 若有流亡者 問其所以 尤加憐恤 務令完聚[a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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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주6▶一. 民丁 自十六歲 至六十歲當役 十丁以上爲大戶 五丁以上爲中戶 四丁以下爲小戶 計丁籍民 如有徭役 大月出一名 中戶井二 出一名 小戶井三 出一名 以均其役 若有流亡者 問其所以 尤加憐恤 務令完聚[6]

16세 이상으로써 성년이 되어 한 사람 분의 부담을 지고, 60세에 이르러 면역된다는 것은 이래 병역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이 기사의 대호·중호·소호가 인정의 다수로써 표준 삼은 것은 동시에 그 부를 표준 삼은 것과 다름 없으니, 태종 6년 11월에 경기를 제외한 지방의 호의 등급을 상호·중호·하호·불성호의 4등급으로 정할 때에 표준을 보면 알 수 있다.
쪽수▶P15-3十六歲 以上으로써 成年이 되여 한 사람 分의 負擔을 지고, 六十歲에 이르러 免役된다는 것은 爾來 兵役에 있어서도 變함이 없었다. 이 記事의 大戶·中戶·小戶가 人丁의 多數로써 標準 삼은 것은 同時에 그 富를 標準 삼은 것과 다름 없으니, 太宗 六年 十一月에 京畿를 除外한 地方의 戶의 等級을 上戶·中戶·下戶·不成戶의 四等級으로 定할 때에 標準을 보면 알 수 있다.

현대문주7▶議政府定煙戶米之法 以聞 京中 (中略) 外方 則有田十五結 男女十五日以上 爲上戶 田十結 男女十口以上 爲中戶田五結 男女五日以上 爲下戶 田一結 男女一二口 爲不成戶 幷三戶月爲一戶 (下略)[a 7]

쪽수▶P15-4

원문주7▶議政府定煙戶米之法 以聞 京中 (中略) 外方 則有田十五結 男女十五日以上 爲上戶 田十結 男女十口以上 爲中戶田五結 男女五日以上 爲下戶 田一結 男女一二口 爲不成戶 幷三戶月爲一戶 (下略)[7]

그런데, 세종 17년 3월에 이르러서는 호의 등급이 다시 5분(五分)되었다. 즉 대호·중호·소호·천호·천천호의 5등급이 바로 그것인데, 대개 부의 불균형의 발전의 결과일 것이다.
쪽수▶P15-5그런데, 世宗 十七年 三月에 이르러서는 戶의 等級이 다시 五分되였다. 即 大戶·中戶·小戶·殘戶·殘殘戶의 五等級이 바로 그것인데, 大概 富의 不均衡의 發展의 結果일 것이다.

현대문주8▶戶曹啓 各道各官戶籍 以田五十結 爲大戶 三十結以上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差等差役 京中五部 則以間架爲定 四十間以上 爲大戶 三十間以上 爲中戶 十間以上 爲小戶 五間以上 爲殘戶 四間以下 爲殘殘戶 差等戶籍施行[a 8]

쪽수▶P16-1

원문주8▶戶曹啓 各道各官戶籍 以田五十結 爲大戶 三十結以上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差等差役 京中五部 則以間架爲定 四十間以上 爲大戶 三十間以上 爲中戶 十間以上 爲小戶 五間以上 爲殘戶 四間以下 爲殘殘戶 差等戶籍施行[8]

여기에는 사천은 심에 들어있을 리 없고, 신분적 제한에 있어서는 공천·신량역천·양인·양반을 개괄한 것이려니와, 그 소위 전결이라는 것이 여하한 질의 것인가, ‘수조권’에 기초한 것인가, 혹은 ‘경작권’ 또 ‘병작권’에 기초한 것인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전결의 양적인 차이에서 오는 호의 차등은 또한 그 전결 소유 내용의 질적인 차이를 내포하는 것일 것이며, 그 호의 주인공 되는 사람의 신분을 반영하고 있으리라 함은 모험이 아닐 줄 생각한다. 그리고 이 호조의 계(啓)는 소위 청허(聽許)를 얻었다는 명문(明文)이 없지만, 이대로 실시되었다는 것은 익년 7월, 강원도 감사의 계(啓)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동시에 그 도(道)에 있어서는 소위 천천호의 절대적 다수임을 볼 수 있다.
쪽수▶P16-2여기에는 私賤은 심에 들어있을 理 없고,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는 公賤·身良役賤·良人·兩班을 概括한 것이려니와, 그 所謂 田結이라는 것이 如何한 質의 것인가, 『收租權』에 基한 것인가, 或은 『耕作權』 또 『並作權』에 基한 것인가 確實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田結의 量的인 差異에서 오는 戶의 差等은 또한 그 田結 所有 內容의 質的인 差異를 內包하는 것일 것이며, 그 戶의 主人公 되는 사람의 身分을 反映하고 있으리라 함은 冒險이 아닐 줄 생각한다. 그리고 이 戶曹의 啓는 所謂 聽許를 얻었다는 明文이 없지마는, 이대로 實施되였다는 것은 翌年 七月, 江原道 監司의 啓에 依하야 알 수 있다. 同時에 그 道에 있어서는 所謂 殘殘戶의 絕對的 多數임을 볼 수 있다.

현대문주9▶今定諸道戶籍 五十結以上 爲大戶 二(三?)十結以上 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 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然 此道二十六官 民戶摠一萬一千五百三十有八 其中大戶十 中戶七十一 小戶一千六百四十一 殘月二千四十三 殘殘戶七千七百七十三 地狹民少 而嶺西 則山田所出倍於正田 嶺外 則又有魚鹽之利 若以他道成籍 分定差役 則非唯定役爲難 勞逸不均 今後道內戶籍 以二十結以下 十結以上 爲中戶 六結以上 爲小戶 四結以上 爲殘戶 三結以下 爲殘殘戶 從之[a 9]

쪽수▶P16-3

원문주9▶今定諸道戶籍 五十結以上 爲大戶 二(三?)十結以上 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 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然 此道二十六官 民戶摠一萬一千五百三十有八 其中大戶十 中戶七十一 小戶一千六百四十一 殘月二千四十三 殘殘戶七千七百七十三 地狹民少 而嶺西 則山田所出倍於正田 嶺外 則又有魚鹽之利 若以他道成籍 分定差役 則非唯定役爲難 勞逸不均 今後道內戶籍 以二十結以下 十結以上 爲中戶 六結以上 爲小戶 四結以上 爲殘戶 三結以下 爲殘殘戶 從之[9]

유래, 강원도라는 데는 천하의 빈도(貧道)로서, 그는 그 도의 생산력이 다른 도에 미치지 못하는 데에서 근본적인 이유를 찾겠지만, 상식적으로는 부호가 적은 데에 그 빈도인 까닭이 있으므로, 빈호가 많다고 하여 빈도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강원도 감사의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자명한 일이다. 부도(富道)라고 하는 경상도는 빈호가 적어서 부도였던 것은 아니다. 실로 하3도라는 데는 부호의 연수(淵藪)였던 동시에 빈호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강원도에 있어서의 천천호의 절대적 다수는 드디어 전국적인 천천호의 다수적 존재를 연역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천천호란 토지분배에 대하여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빈약한 것이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이조초기에 있어서의 소위 ‘단한’한 군호의 본질적인 조건을 이루는 것이었고, 또 이 ‘단한’한 데에서야말로 봉족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7-1由來, 江原道란 데는 天下의 貧道로서, 그는 그 道의 生產力이 他道에 미치지 몯하는 데에서 根本的인 理由를 찾겠지마는, 常識的으로는 富戶가 적은 데에 그 貧道인 所以가 있으므로, 貧戶가 많다고 하야 貧道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江原道 監司의 말을 기다리지 않드래도 自明한 일이다. 富道라고 하는 慶尙道는 貧戶가 적어서 富道이었든 것은 아니다. 實로 下三道라는 데는 富戶의 淵藪이었든 同時에 貧戶의 巢窟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江原道에 있어서의 殘殘戶의 絕對的 多數는 드디어 全國的인 殘殘戶의 多數的 存在를 演繹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殘殘戶란 土地支配에 對하야 質的으로나 量的으로 나 貧弱한 것이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李朝 初期에 있어서의 所謂 「單寒」한 軍戶의 本質的인 條件을 이루는 것이었고, 또 이 「單寒」한 데에서야말로 奉足이라는 것이 주워지는 所以가 있었든 것이다.



























본문3: 3.호수와 봉족


전자에 말한 바와도 같이 일반 군인의 경제적 지반이 박약한 데다가, 그 중 특별한 자를 제외하고는, 녹봉미(祿俸米)의 관선(官船)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그 입역의 기간 중의 비용은 모두 다 자변(自辨)이었다. 이런 것은 국가에서 지우는 큰 부역에 있어서는 공통한 현상으로 정군이 입역하는 데 대하여 그 역에 해당하지 않는 나머지의 사람으로서 봉족을 삼아, 이에 대한 비용을 조변(調辨)하게 하였다. 세종실록에 봉족에 관한 이런 설명이 있다.
쪽수▶P18-1前者에 말한 바와도 같이 一般 軍人의 經濟的 地盤이 薄弱한 데다가, 그 중 特別한 者를 除外하고는, 祿俸米의 官船에도 叅與치 못하고, 그 立役의 期間 中의 費用은 모도 다 自辨이었다. 이런 것은 國家에서 지우는 큰 賦役에 있어서는 共通한 現象으로 正軍이 立役하는 데 對하야 그 役에 當치 않는 남어지의 사람으로서 奉足을 삼아, 이에 對한 費用을 調辨케 하였다. 世宗實錄에 奉足에 關한 이런 說明이 있다.

현대문주1▶凡正一名 給餘丁 使之出財力 以助正丁 國俗謂之奉足[a 10]

쪽수▶P18-2

원문주1▶凡正一名 給餘丁 使之出財力 以助正丁 國俗謂之奉足[10]

봉족은 조정(助丁), 또는 관하(영안도), 인록(제주도)이라고도 하니 이는 인정에 대하여 부를 때요, 호로써, 이런 일에 당하게 할 때는 이를 봉족호 또는 조호(助戶)라고 한다. 그리고 군역에 있어서는 호수(戶首)라고 하여 그 호의 장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이에 당하고, 봉족은 그에게 인솔되는 나머지의 인정이 당하게 되었었다. 이러한 일은 물론 호적의 수단을 빌려서 처음 실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역부담의 단위로서의 호는 전 절에서 논한 바와 같은 경제적인 기초 조건 때문에 다수한 인정을 옹(擁)할 큰 호도 있고, 불성호와 같은 그 자신 단독으로는 입역이 불가능한 호도 있었다. 전자에 관하여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본다.
쪽수▶P18-3奉足은 助丁, 또는 管下(永安道), 人祿(濟州島)이라고도 하니 이는 人丁에 對하야 부를 때요, 戶로써, 이런 일에 當케 할 때는 이를 奉足戶 또는 助戶라고 한다. 그레고 軍役에 있어서는 戶首라고 하야 그 戶의 長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이에 當하고, 奉足은 그에게 引率되는 남어지의 人丁이 當하게 되였었다. 이러한 일은 勿論 戶籍의 手段을 비러서 처음 實行할 수 있었다. 그리고 國役負擔의 單位로서의 戶는 前節 所論한 바와 같은 經濟的인 基礎 條件 때문에 多數한 人丁을 擁할 큰 戶도 있고, 不成戶와 같은 그 自身 單獨으로는 立役이 不可能한 戶도 있었다. 前者에 關하야 우리는 이러한 實例를 본다.

현대문주2▶(上略) 各官大小인민等 家產排置 衣食各備人 數多率居 稱爲一戶者 勿令除出 仍舊完接[a 11](下路)

쪽수▶P19-1

원문주2▶(上略) 各官大小人民等 家產排置 衣食各備人 數多率居 稱爲一戶者 勿令除出 仍舊完接[11] (下路)

이러한 수개(數個)의 살림을 포함하는 큰 호도 있는 일방에 불성호, 무가호와 같은 빈호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자와 같은 경우에는 그 자신 단독으로 입역이 불가능하므로, ‘3가위1호’·’5정위1호’ 내지는 ‘3정위1호’라는 통합한 법제적 범주로서의 호에 의하여 병역 기타 수시의 역에 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의미의 호는 이 사회에 있어서처럼, 천천호와 같은 단한한 호가 절대적 다수로 존재하는 경우에는 입역의 단위로서의 호의 거진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3가위1호’하자는 논의는 저 유명한 태조 ‘안변지책’에서 벌써 보이는 바로 ‘3정위1호’라는 것과 본질적도 하등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앞 절 인용문 중의 “불성호를 병3호하여 위1호”라는 말도 또한 같은 것이다. ‘병3호’의 호는 한 ‘살림’이란 뜻일 것이고, ‘위1호’의 호는 이 법제적인 범주로서의 호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대개 3가로써 1호를 만든다는 등의 일은, 저 단한한 호의 경우이므로, 이에는 성인 남자인 정(丁)이 둘씩이나 셋씩이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하여, 병역의 단위로서의 호는 부호인 경우에는 그 자신 단독으로 한낱의 단위가 되는 것이지만, 절대적 다수인 빈호의 경우에는 ‘5정위1호’ 내지는 ‘3정위1호’와 같은 법제적인 단위로서의 호가 한낱의 단위가 되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정군인 호수는 그 집의 가장이요, 봉족은 그 집의 솔정인 경우도 있고(부호), 이런 의미를 떠나서 호수와 봉족과의 관계가 성립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빈호)
쪽수▶P19-2이러한 數個의 살림을 包含하는 큰 戶도 있는 一方에 不成戶, 無家戶와 같은 貧戶가 있음을 닞어서는 안 될 것이다. 後者와 같은 境遇에는 그 自身 單獨으로 立役이 不可能함으로, 「三家爲一戶」·「五丁爲一戶」 乃至는 「三丁爲一戶」라는 統合한 法制的 範疇로서의 戶에 依하야 兵役 其他 隨時의 役에 當케 하였다. 이러한 意味의 戶는 이 社會에 있어서처럼, 殘殘戶와 같은 單寒한 戶가 絕對的 多數로 存在하는 境遇에는 立役의 單位로서의 戶의 거진 大部分을 占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三家爲一戶」하자는 論議는 저 有名한 太祖 「安邊之策」에서 벌서 보이는 바로 「三丁爲一戶」라는 것과 本質的도 何等 다름이 없는 것이다. 前節 引用文 中의 「不成戶를 幷三戶하야 爲一戶」라는 말도 또한 같은 것이다. 「幷三戶」의 戶는 한 「살림」이란 뜻일 것이고, 「爲一戶」의 戶는 이 法制的인 範疇로서의 戶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大概 三家로써 一戶를 맨든다는 等의 일은, 저 單寒한 戶의 境遇이므로, 이에는 成人 男子인 丁이 둘式이나 셋式이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하야, 兵役의 單位로서의 戶는 富戶인 境遇에는 그 自身 單獨으로 한낱의 單位가 되는 것이지만, 絕對的 多數인 貧戶의 境遇에는 「五丁爲一戶」 乃至는 「三丁爲一戶」와 같은 法制的인 單位로서의 戶가 한낱의 單位가 되는 것이 通例이다. 따라서 正軍인 戶首는 그 집의 家長이요, 奉足은 그 집의 率丁인 境遇도 있고(富戶), 이런 意味를 떠나서 戶首와 奉足과의 關係가 成立하는 境遇도 있을 것이다. (빈호)
군역이 그의 신분 제한에 의하여 한낱 은상(恩賞)도 되고 또는 한낱 고역도 된다는 것을 앞서 논하였다. 신분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 있어서 생산수단인 토지의 지배와 또 양적인 분배에 의하여 결정되는 이상, 신분에 있어서의 번쇄한 차등은 그대로 호라는 것의 번쇄한 차등에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신분적 제한은 제색 군인의 호수와 봉족과의 관계를 여하히 결정하였는가. 그것이 한 개의 영예인 병역은 부호에 의하여 지워지는 것은 물론, 그것이 호수에 의하여 입역되었다는 것 또한 재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의 부역인 때, 그것은 호수된 자—빈호를 모아 법제적으로 만든 호의—에 의하여, 곧 그 중에 그래도 나은 자에 의하여 입역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양인의 병역 중에서는 가장 천역이요 고역이든 선군에서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본다.
쪽수▶P20-1軍役이 그의 身分 制限에 依하야 한낱 恩賞도 되고 또는 한낱 苦役도 된다는 것을 前述하였다. 身分이라는 것은 그 社會에 있어서 生產手段인 土地의 支配와 또 量的인 分配에 依하야 決定되는 以上, 身分에 있어서의 煩𤨏한 差等은 고대로 戶라는 것의 煩𤨏한 差等에 反映되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身分的 制限은 諸色 軍人의 戶首와 奉足과의 關係를 如何히 決定하였는가. 그것이 한 個의 榮譽인 兵役은 富戶에 依하야 지워지는 것은 勿論, 그것이 戶首에 依하야 立役되였다는 것 또한 再論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의 賦役인 때, 그것은 戶首된 者—貧戶를 모아 法制的으로 만든 戶의—에 依하야, 곧 그 중에 그래도 나은 者에 依하야 立役되지 않는 境遇도 있다. 良人의 兵役 中에서는 가장 賤役이요 苦役이든 船軍에서 우리는 이러한 實例를 본다.

현대문주3▶刑曹啓報恩船軍孫於火 旣殺其戶首金厚律 (下略)[a 12]

쪽수▶P20-2

원문주3▶刑曹啓報恩船軍孫於火 旣殺其戶首金厚律 (下略)[12]

즉, 호수와 정군과의 승리(乘離)한 경우인데 이런 일은 실로 이에서 그치지는 아니하였다. 봉족이 정군에 대신하여 입역한다는 것, 곧 소위 대입(代立)이라는 것은 나중엔 드디어 관허되어져 가는 것이었다. 또 공천인 선상노라든지 전운노에 이르러서는 ‘3정위1호’하여, 호수와 봉족을 정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호수가 정군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역이 신분선을 좇아 천화(賤化)함을 따라 호수와 정군과의 관계가 승리(乘離)하여져 갔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일반 병역에 있어서는 호수=정군이라는 관계가 정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한 호수와 봉족과의 관계에 었어서는, 호수=정군에 대하여 그의 봉족은 재산상, 신분상, 호수보다 못한 사람으로써 이에 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태종 4년 6월, 갑사 아래의 제색군인에 대하여 봉족을 급부할 때의 규정을 보면 이러하다.
쪽수▶P20-3即, 戶首와 正軍과의 乘離한 境遇인데 이런 일은 實로 이에서 그치지는 아니하였다. 奉足이 正軍에 代身하야 立役한다는 것, 곧 所謂 代立이라는 것은 나종엔 드디여 官許되여저 가는 것이었다. 또 公賤인 選上奴라든지 轉運奴에 이르러서는 『三丁爲一戶』하야, 戶首와 奉足을 定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戶首가 正軍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役이 身分線을 조차 賤化함을 따라 戶首와 正軍과의 關係가 乘離하였저 갔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原則的으로는, 一般 兵役에 있어서는 戶首=正軍이라는 關係가 正常的이다. 그렇기 때문에 正常한 戶首와 奉足과의 關係에 었어서는, 戶首=正軍에▶P21-1 對하야 그의 奉足은 財産上, 身分上, 戶首보다 못한 사람으로써 이에 當케 하였든 것이다. 太宗 四年 六月, 甲士 以下의 諸色軍人에 對하야 奉足을 給付할 제의 規定을 보면 이러하다.

현대문주4▶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都[a 13]

쪽수▶P21-2

원문주4▶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都[13]

그리고, 양인 병사의 봉족은 노비와 솔정이 많은 대호인 경우에는, 그것의 발급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은, ‘3정위1호’라든가 하는 법제적인 호인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양인으로써 주어졌다.
쪽수▶P21-3그레고, 良人 兵士의 奉足은 奴婢와 率丁이 많은 大戶인 境遇에는, 그것의 發給을 必要로 하지 않지만은, 「三丁爲一戶」라든가 하는 法制的인 戶인 境遇에는 原則的으로 良人으로써 주워졌다.

현대문주5▶左參賛姜孟卿 將本府議曰 軍士助丁 皆用良民 (下略)[a 14]

쪽수▶P21-4

원문주5▶左參賛姜孟卿 將本府議曰 軍士助丁 皆用良民 (下略)[14]

같은 양인으로써 봉족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사람을 정군=호수로 하고, 또는 봉족으로 하느냐에 대하여는, ‘시취’에 입격한 자를 ‘재(才)’라 하여 이를 호수=정군으로 하고, 불입격자로서 ‘불재(不才)’라 하여 봉족에 충한다는 원칙상의 형식적인 차별이 있기는 하지만, 위에 인용한 기사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호수와 봉족과의 사이에는 재산상 신분상의 규약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일방 그 자신 단독으로 입역이 가능한 호도 있고 특수한 법제적인 호도 있고 하여, 다 같이 그 안에서 호수와 봉족을 뽑아낸다는 사정에 비추어, 이러한 ‘재’ ‘불재’의 차별과 같은 것은 불가능에 속하는 일이다. 세조실록, 14년 6월 병오조에 ‘정군 봉족의 재·불재 전도’하였음을 고치자는 논의가 보이는데, 이는 이 때의 소식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호수와 봉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 봉족의 정군=호수에게 대하여 지불할 재력의 일정한 액(額)이 없더니 예종 원년 3월에 이르러 처음 이의 설정(設定)을 보게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쪽수▶P21-5같은 良人으로써 奉足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사람을 正軍=戶首로 하고, 또는 奉足으로 하느냐에 對하야는, 「試取」에 入格한 者를 「才」라 하야 이를 戶首=正軍으로 하고, 不入格者로서 「不才」라 하야 奉足에 充한다는 原則 上의 形式的인 差別이 있기는 하지만, 우에 引用한 記事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戶首와 奉足과의 사이에는 財產上 身分上의 規約이 임이 存在하는 것이고, 一方 그 自身 單獨으로 立役이 可能한 戶도 있고 特殊한 法制的인 戶도 있고 하야, 다 같이 그 안에서 戶首와 奉足을 뽑아낸다는 實情에 비추워, 이러한 「才」 「不才」의 差別과 같은 것은 不可能에 屬하는 일이다. 世祖實錄, 十四年 六月 丙午條에 「正軍 奉足의 才·不才 顚倒」하였음을 곧히자는 論議가 보이는데, 이는 이 間의 消息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戶首와 奉足 間의 關係에 있어서, 奉足의 正軍=戶首에게 對하야 支拂할 財力의 一定한 額이 없더니 睿宗 元年 三月에 이르러 처음 이의 設定을 보게 되였다. 實錄에 依하면,

현대문주6▶兵曹據慶尙北道節度使啓本啓 諸色軍士助丁 助役價錢 無定數 故每於番上時 侵奪助丁 綿布八九匹 因而破產 或至逃散 其弊不貲 請今後番上時 除自願備馬 或隨從者外 近道三日程 則人二匹 遠道則 四匹備給 其仍濫徵者 許助丁自告 京中本曹 外方節度使 隨即推論 依軍令 杖九十 極邊充軍 以杜冒濫之弊 幷諭他道從之[a 15]

쪽수▶P22-1

원문주6▶兵曹據慶尙北道節度使啓本啓 諸色軍士助丁 助役價錢 無定數 故每於番上時 侵奪助丁 綿布八九匹 因而破產 或至逃散 其弊不貲 請今後番上時 除自願備馬 或隨從者外 近道三日程 則人二匹 遠道則 四匹備給 其仍濫徵者 許助丁自告 京中本曹 外方節度使 隨即推論 依軍令 杖九十 極邊充軍 以杜冒濫之弊 幷諭他道從之[15]

이러한 조정의 정군에 대하여 지불할 재력의 공정(公定) 가격이 운위되는 것은, 물론 저 법제적인 호, 즉 단한한 살림의 묶음인 호에 있어서요 그것이 대호인 경우는 물론 아닐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대호인 경우에는 봉족으로서 혹은 봉족의 대신으로서 주어지는 소위 솔정 내지 노비가 많음으로 그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공정 가격론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쪽수▶P22-2이러한 助丁의 正軍에 對하야 支拂할 財力의 公定 價格이 云爲되는 것은, 勿論 저 法制的인 戶, 即 單寒한 살림의 묵굼인 戶에 있어서요 그것이 大戶인 境遇는 勿論 아닐 것이다. 웨 그러냐 하면 大戶인 境遇에는 奉足으로서 或은 奉足의 代身으로서 주워지는 所謂 率丁 乃至 奴婢가 많음으로 그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公定 價格論이 問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국 이래, 제색군인에 대하여 봉족이 여하한 비례로 급부되었던가는 일즉이 기선군호에 대한 ‘3정위1호’ 원칙에 의하여 엿볼 수 있다. 곧, 1정은 정군=호수요, 3정은 솔정=봉족, 선군이라는 것이 고역이라 양인의 최하층에 의하여 지워지는 것이니, 이 경우에 정이라는 것은 단한한 그들로서는 호라 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각종 군인에 대하여 일시로 그의 봉족의 정액이 결정된 것은 태종 4년 6월이었다. 개국 후 최초의 일로, 세조 10년 병역 부담의 단위가 ‘호’ 대신에 ‘보’(保)로 옮아 갈 때까지, 그 사이에 조그마한 변동은 있기는 하였지만 봉족 정액의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실록에서 이에 관한 기사를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22-3開國 以來, 諸色軍人에 對하야 奉足이 如何한 比例로 給付되였든가는 일즉이 騎船軍戶에 對한 「三丁爲一戶」 原則에 依하야 엿볼 수 있다. 곧, 一丁은 正軍=戶首요, 二丁은 率丁=奉足, 船軍이라는 것이 苦役이라 良人의 最下層에 依하야 지워지는 것이매, 이 境遇에 丁이라는 것은 單寒한 그들로서는 戶라 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레고, 各種 軍人에 對하야 一時로 그의 奉足의 定額이 決定된 것은 太宗 四年 六月이었다. 開國 後 最初의 일로, 世祖 十年 兵役 負擔의 單位가 「戶」 代身에 「保」로 옮어 갈 때까지, 그 사이에 조곰한 變動은 있기는 하였지만 奉足 定額의 原則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實錄에서 이에 關한 記事를 記錄하면 다음과 같다.

命各道各官 分其民戶貧富強弱 以給助戶 議政府啓 外方民戶 富强者 多得助戶 而貧富者 反不得助戶 流移失所 軍▶P23-1額日減 願各道差等詳定
一. 甲士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一戶 六七結以上 不給
一. 侍衛牌 完山子弟牌 一二結以下給奉足二戶 三四結以下 給奉足一戶 五六結以上 不給
一. 騎船軍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給奉足一戶 七八結以上 自立一領 十五結以上 自立二領
一. 鎭屬軍 及吹鍊軍鐵所干 一二結以上者 戶三四結以上 不給
一. 守城軍及日守兩班 止用三四結以下者 不許用五六結以上者 亦不給奉足
一. 各司吏典·隊長·隊副·丁·皂隸·都府外·守公·軍器監別軍·速毛赤·吹螺赤·一二結以下 給奉足一戶 三四結以上 不給
一. 鄉吏·一二結以下 給同類奉足一戶 四結以上 不給
一. 公衙丘陵·院主・津尺同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者 上項奉足定給外 各色有常役者 俱不給奉足(각주4와 같다)

쪽수▶P22-4

命各道各官 分其民戶貧富強弱 以給助戶 議政府啓 外方民戶 富强者 多得助戶 而貧富者 反不得助戶 流移失所 軍▶P23-1額日減 願各道差等詳定
一. 甲士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一戶 六七結以上 不給
一. 侍衛牌 完山子弟牌 一二結以下給奉足二戶 三四結以下 給奉足一戶 五六結以上 不給
一. 騎船軍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給奉足一戶 七八結以上 自立一領 十五結以上 自立二領
一. 鎭屬軍 及吹鍊軍鐵所干 一二結以上者 戶三四結以上 不給
一. 守城軍及日守兩班 止用三四結以下者 不許用五六結以上者 亦不給奉足
一. 各司吏典·隊長·隊副·丁·皂隸·都府外·守公·軍器監別軍·速毛赤·吹螺赤·一二結以下 給奉足一戶 三四結以上 不給
一. 鄉吏·一二結以下 給同類奉足一戶 四結以上 不給
一. 公衙丘陵·院主・津尺同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者 上項奉足定給外 各色有常役者 俱不給奉足(註4와 같다)

여기서 우리는 봉족의 급부에 있어서의 신분의 반영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별시위·내금위와 또 귀족 군인에 대한 기사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이미 조호의 도움을 빌지 않더라도, 많은 솔정을 그 호 내에 가지는 대호의 주인공인지라, 그 호의 호수로서 그의 영예로운 입역에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족으로서의 조정이 그의 호 밖에서 주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 쓴 여러 군인─원주 진척까지 군인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원주 노릇·진척 노릇이 그들의 국가에 대하여 저야 할 역이기 때문에─이 봉족 불급의 한도의 차이를 그들 군인의 가지는 부의 스스로인 반영일 것이며, 그 각종의 군인 중에 있어서의 절대적 다수는 그 봉족 발급의 최대 한도 이하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봉족호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물론이다. 예를 들면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라 할 때, 일반의 전지를 가지지 못하는 봉족의 대다수임을 연역하는 것은 잘못일까. 위의 기사는 대호나 천천호나 구별치 않고 또 그의 토지에 대한 질적인 구별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그것에서부터 호라고는 하기 어려운 천천호 내지는 불성호의 절대적 다수인 것을 앞 절의 설명을 빌지 않더라도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 편성한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단한한 호수의 호에다가 단한한 봉족의 호를 합산한들 그것은 큰 1호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위의 기사가 비록 호로써 단위를 삼았다고 한들, 이러한 실정에 있는 한, 대부분 ‘3정1호’라든가 ‘5정1호’라든가 하는 정 단위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쪽수▶P23-2여기서 吾人은 奉足의 給付에 있어서의 身分의 反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別侍衛·內禁衛와 또 貴族 軍人에 對한 記事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임이 助戶의 도움을 빌지 않드래도, 많은 率丁을 그 戶內에 가지는 大戶의 主人公인지라, 그 戶의 戶首로서 그의 榮譽로운 立役에 當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奉足으로서의 助丁이 그의 戶 밖에서 주워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上記 여러▶P24-1 軍人─院主 津尺까지 軍人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院主 노릇·津尺 노릇이 그들의 國家에 對하야 저야 할 役이기 때문에─이 奉足 不給의 限度의 差異를 그들 軍人의 가지는 富의 스스로인 反映일 것이며, 그 各種의 軍人 中에 있어서의 絕對的 多數는 그 奉足 發給의 最大 限度 以下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奉足戶에 關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勿論이다. 例하면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라 할 때, 一般의 田地를 가지지 못하는 奉足의 大多數임을 演繹하는 것은 잘못일까. 우의 記事는 大戶나 殘殘戶나 區別치 않고 또 그의 土地에 對한 質的인 區別도 考慮치 않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서 그것에서부터 戶라고는 하기 어려운 殘殘戶 乃至는 不成戶의 絕對的 多數인 것을 前節의 證明을 빌지 않드래도 斷定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히 하야 그 編成한 結果는 어떠하였을까. 單寒한 戶首의 戶에다가 單寒한 奉足의 戶를 合算한들 그것은 큰 一戶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우의 記事가 비록 戶로써 單位를 삼었다고 한들, 이러한 實情에 있는 限, 大部分 「三丁一戶」라든가 「五丁一戶」라든가 하는 丁 單位와 別다른 差異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경상도지리지, 도내시거조에 의하면 각색 군인에 대한 봉족 급부의 단위는 정을 표준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쪽수▶P24-2慶尙道地理志, 道內時居條에 依하면 各色 軍人에 對한 奉足 給付의 單位는 丁을 標準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別牌……………八一六名………………奉足……三, 九四七名
佳衛……………二, 一二〇名…………奉足……九, 八九五名▶P25-1
營鎭屬………二, 二六一名……………奉足…………六, 一〇七名
守城軍………一, 二二三名……………奉足…………二, 三六二名
騎船………一五, 九四一名……………奉足………二六, 〇七一名
雜色………一六, 五七四名……………奉足………四七, 四六二名
計…正軍三九, 九三五名…………奉足………一〇三, 八四四名

쪽수▶P24-3

別牌……………八一六名………………奉足……三, 九四七名
佳衛……………二, 一二〇名…………奉足……九, 八九五名▶P25-1
營鎭屬………二, 二六一名……………奉足…………六, 一〇七名
守城軍………一, 二二三名……………奉足…………二, 三六二名
騎船………一五, 九四一名……………奉足………二六, 〇七一名
雜色………一六, 五七四名……………奉足………四七, 四六二名
計…正軍三九, 九三五名…………奉足………一〇三, 八四四名

이 중 기선군은 정군一에 대하여 봉족 2정을 넘고 있으나, 3정 1호라는 원칙은 종시 불변이라고 생각되고, 일찍이 태조실록, 7년 가을 9월 임오조, 공정왕의 교지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기선군의 이러한 ‘3정1호’ 원칙은 세조의 보법(保法)에 이르러 사실상 ‘4정1호’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甲士·別시위와 같은 것도 조정發給에 있어서 丁을 단위로 하고 있다. 세조실록에서 이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쪽수▶P25-2이 중 騎船軍은 正軍一에 對하야 奉足 二丁을 넘고 있으나, 三丁 一戶라는 原則은 終始 不變이라고 생각되고, 일즉이 太祖實錄, 七年 秋九月 壬午條, 恭靖王의 敎旨에서도 이를 强調하고 있다. 騎船軍의 이러한 「三丁一戶」 原則은 世祖의 保法에 이르러 事實上 「四丁一戶」로 하게 되였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甲士·別侍衛와 같은 것도 助丁發給에 있어서 丁을 單位로 하고 있다. 世祖實錄에서 이것을 보면 左와 같다.

현대문주7▶一、甲士·別시위 奴婢·土田數少者 無助丁 而番上宿衛爲難 故給助丁三人 然而敬差官等 不覈奴婢土田之數 例給助丁三人 軍士內 自占良民 以爲已奴 多般侵虐 雖富實軍士 因緣請托 皆受助丁 一家三人 俱出供役 民力敷 不因而流亡 請令諸邑守令 更考所耕及奴婢多少 若
所耕五結以下 奴婢十口以下 給助丁三人
所耕七結以下 奴婢十二口以下 給二人▶P26-1
所耕十結以下 奴婢十五口以下 給一人[a 16]

쪽수▶P25-3

원문주7▶一、甲士·別侍衛 奴婢·土田數少者 無助丁 而番上宿衛爲難 故給助丁三人 然而敬差官等 不覈奴婢土田之數 例給助丁三人 軍士內 自占良民 以爲已奴 多般侵虐 雖富實軍士 因緣請托 皆受助丁 一家三人 俱出供役 民力敷 不因而流亡 請令諸邑守令 更考所耕及奴婢多少 若
所耕五結以下 奴婢十口以下 給助丁三人
所耕七結以下 奴婢十二口以下 給二人▶P26-1
所耕十結以下 奴婢十五口以下 給一人[16]



























































































본문4: 4.호적과 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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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5.군액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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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6.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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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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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史學雜誌 第五十編 第五號 第六號 所載 深谷敏鐵氏 論文 「鮮初の土地制度 一斑」
  2. 太宗實錄, 六年 五月 壬戌條
  3. 同 三年 六月 乙亥條
  4. 同 六年 十一月 己卯條
  5. 靑丘學叢, 第十七號 所載 周藤吉三氏 論文 「麗末鮮初に於ける農莊について」에 依하면, 「鮮初の農莊は, 太祖·太宗頃に漸く少く, 世宗より世祖に至り漸次發達し, 成宗頃になると, 非常なる發達を遂げた」라는 말이 보인다.
  6. 太祖實錄, 元年 九月 壬寅條
  7. 太宗實錄, 六年 十一月 癸酉條
  8. 世宗實錄, 十七年 三月 戊寅條
  9. 同 十八年 七月 壬戌條
  10. 世宗實錄, 二年 正月 乙巳條
  11. 太宗實錄, 八年 十一月 丁卯條
  12. 世宗實錄, 八年 十月 己丑條
  13. 太宗實錄, 四年 六月 壬戌條
  14. 世祖實錄, 元年 九月 丙子條
  15. 睿宗實錄, 元年 三月 甲午條
  16. 世祖實錄, 四年 十一月 癸已條






현대문주


  1. 사학잡지 제50편 제5호 제6호 소재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씨 논문 「鮮初の土地制度 一斑」
  2. 태종실록, 6년 5월 임술조
  3. 같은 책 3년 6월 을해조
  4. 같은 책 6년 11월 기묘조
  5. 청구학총, 제17호 소재 스도 요시유키씨 논문 「麗末鮮初に於ける農莊について」에 의하면, “鮮初の農莊は, 太祖·太宗頃に漸く少く, 世宗より世祖に至り漸次發達し, 成宗頃になると, 非常なる發達を遂げた”라는 말이 보인다.
  6. 태조실록, 원년 9월 임인조
  7. 태종실록, 6년 11월 계유조
  8. 세종실록, 17년 3월 무인조
  9. 같은 책 18년 7월 임술조
  10. 세종실록, 2년 정월 을사조
  11. 태종실록, 8년 11월 정묘조
  12. 세종실록, 8년 10월 기축조
  13. 태종실록, 4년 6월 임술조
  14. 세조실록, 원년 9월 병자조
  15. 예종실록, 원년 3월 갑오조
  16. 세조실록, 4년 11월 계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