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문왕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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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 {{TagSpage|182-1}}葛文王은 特히 新羅史에 나타나는 稱號로서 三國史記(卷一) 儒理 尼師今條에 「妃日知{{ruby|葛文王|○○○}}之女也」라는 記事에 뵈이는 것이 그의 最初이며, 그리하야 新羅統一期에 이르기까지 자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稱號에 對한 解釋에 있어서는 同書(同卷) 逸聖 尼師今紀 「封朴阿道  爲葛文王」 註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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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번= {{TagSpage|182-2}}<blockquote no="01">新羅追封 稱葛文王 其義末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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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번= {{TagSpage|182-3}}이라 하고 三國遺事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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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번= {{TagSpage|182-4}}<blockquote no="02">羅人 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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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번= {{TagSpage|182-5}}이라 하였다. {{TagRef|1}}遺事의 이 記事는 史記의 것을 蹈襲한 듯하거니와,<ref>三國遺事(卷一) 第二 南解王條에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羅末名儒崔致遠 作帝王三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今記新羅事  具存方言 亦宜矣 羅人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이라 한 것과 三國史記(卷四) 智證 麻立干條에「論日新羅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中略)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라 한 것을 對照해보면 內容과 句法이 서로 一致하며 또 遺事(卷三) 原宗興法條에 註로서 「羅人凡追封王者 皆稱葛文王 其實 史臣亦云未詳」이라 한 것을 보면 史臣은 金富軾을 가르친 것이며 「史論曰云云」은 「忠臣金富軾論曰云云」으로 解釋된다.</ref> 엇젯던 일로 보면 高麗에 있어서도 적어도 仁宗 時代에 와서는 葛文王의 意味가 이미 未詳한 것에 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前擧한 史記의 記事에 있어 葛文王 그것의 意味는 未詳이라 하였으나 葛文王이라는 稱號는 追封王에게 일커럿던 것이라 하였나니, 이 「追封」이라는 二字는 {{TagPage|183-1}}後世에 나려오면서 高文의 意義를 푸는 데에 好個의 條件, 好個의 根據로서 利用되여온 것이다. 葛文에 對하야 {{ruby|星湖 李瀷|○○○○}}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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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번= {{TagSpage|183-2}}<blockquote no="03">新羅之世 多追尊異姓 皆稱葛文王 本宗正統 謂之麻立干 葛與麻 以絰帶言也 按周禮 王爲諸侯總 縗弁而加絰 同姓則麻 異姓則葛 謂葛絰之王別於本宗也<sup>星湖僿說 經史篇 八</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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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번= {{TagSpage|183-3}}라 하야 「追封」을 條件으로 「死」를 聯想하고 喪禮服制의 絰帶를 끄러 「異姓則葛」의 葛과 葛文王의 葛과에 關係를 부칠 새 마리(頭) 또는 마루(宗)의 寫音인 麻立의 麻까지 드러 葛絰에 對한 麻絰로 附會하야 葛文을 喪服制의 葛絰에서 나온 것이라 解釋하였다. 그리고 이와 同一한 解釋은 星湖의 高弟 {{ruby|順庵 安鼎福|○○○○○}}에게서도 차저볼 수가 있는 것이니<sup>東史綱目·附錄</sup> 이와 같이 漢字의 字義나 儒學思想에 拘泥된 解釋에 對하야는 깊은 穿鑿을 새삼스러히 하고저 아니하거니와 우선 簡單히 몇 가지 點을 드러 吟味해 보면, {{TagRef|2}}(가)新羅의 葛文王 稱號를 가진 이로는 所謂 異姓 以外에도 本宗에 屬한 것이 또한 많으며,<ref>助賁 尼師今과 그의 弟 沾解 尼師今의 父는 骨正(世神) 葛文王이요 味鄒王은 父 仇道를 葛文王에 封하였으며(三國史記 卷二) 智證 麻立干은 習寶 葛文王의 子요 眞興王은 葛文王 立宗의 子요(仝書卷四) 太宗 武烈王은 (卓)文興 葛文王의 子다(三國遺事·王曆).</ref>그리고 (나)所謂 本宗正統에도 葛文王의 稱號와 井行하야 麻立干 以外에 尼師(叱)今의 稱號도 있으니 이 같은 稱號와 葛과의 關係를 어떻게 解釋하며, (다)設令 葛文은 追封과 關係가 있다 할지라도 喪服制를 가지고 이름을 부친다는 것도 首肯키 어려우니와, 하물며 古代 新羅에 있어 中國式의 喪服制가 行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음에랴 이와 같은 뜻으로도 星湖의 解釋에 좇기 어려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차라리 在來로 이저왔던 葛文王의 意味에 對하야 解釋을 나리려던 그의 努力을 感謝할 것이다. 다음 이에 對하야 {{ruby|頤齋 黃胤錫|○○○○○}}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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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8번= {{TagSpage|183-4}}<blockquote no="04">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東國方言 謂死日走斤 葛之方言近走 文之方言近斤<sup>頤齋遺藁 雜著 華音方言字義</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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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9번= {{TagSpage|183-5}}이리하야 葛文에 對하야 言語上으로 吏讀的 解說을 試한 것은 頤齋의 卓見으로서 葛文 解釋에 一步를 내켜 노흔 것이다. {{TagPage|184-1}}그러나 「葛文」을 「주근」으로 訓讀하야 死의 意味로 解釋한 것은, 葛文의 本訓(칙글)으로 보아도 妥當하다고 생각키 어려우며, 또 古代의 習俗이 아모리 素樸하였다 할지라도 「주근」이라는 것은 所謂 追封 稱號의 性質上으로 보아도 맛당한 것으로는 믿기 어려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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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0번= {{TagSpage|184-2}}이와 같은 傾向을 띠운 解釋이 最近에 이르러도 또한 적지 아니한 것이니, {{ruby|葛城末治|○○○○}} 氏는 新羅의 葛文王에 對하야 모두 追封이라는 斷定 아래에서 葛文을 「칙혀」 卽 「칙혀올림」의 未來動詞인 Chic-kul로 訓讀할 것이라 하야 葛文王을 崇上王이라는 意味라 하였으며<sup>東洋學報 第十三卷 第四號·葛城末治 氏의 「新羅斯文王に就て」</sup> 最近에 {{ruby|梁柱東|○○○}} 氏도 葛文王을 追封의 것으로 보고 葛文王을 갈만님금(藏王)으로 읽을 것이며 또 或 「交」「代」의 古訓이 「갈마든다」라는 것으로 代王의 義로도 解釋할 것이라 하고, 다시 的確한 解釋이라 하야 殮의 訓 「갈물」을 들어 葛文王은 「薨王」이라고 解釋하였다<sup>靑丘學叢 第二十二號 梁柱東 氏의 「葛文王·その他」</sup>. 以上 兩氏의 解釋에 對하야 먼저 葛城 氏의 說로 보면 葛文의 訓으로 든 「칙글」을 「칙힐」이라는 未來動詞와 같이 보아준다 하더라도 現代語인 未來動詞를 가지고 대번에 新羅 古代에 끄집어 올리는 것은 매우 危險한 일로 생각한다. 비록 葛城 氏 는 自己의 說을 辯護하기 爲하야 『遺事王暦 篇に 「第十四儒禮尼師今 一作世里智王」と出づ 儒禮は 弩儒又は儒理とも書し世nuliを 義讀したるものにして 智は人名の後に 附する敬稱たり 訓蒙字に 世の義を nuliとせるにて知るべし云云』이라는 예를 들어 『史記及遺の二書に 收載せられたる當時の地名·人名·官職名·其の他金石に鐫刻せられたる史? 讀等に就て 文字の用例を見るに, 吾人が 今日用ふるものと酷似せるは 勿論云云」이라고 論하고(實은 現今에는 「世」를 누리라고도 하지 않지마는), 다시 新羅의 語法에 對하야 「而して當時の語辭には 今日の如き過·現‧來の劃然たる區別なかりしものならん」<sup>前擧 東洋學報</sup>이라는 獨斷的 辯解를 나리였다. 이것은 「칙힐」이라는 말이 新羅에도 있었으리{{TagPage|185-1}}라는 것을 暗暗理에 辯解하는 同時에 新羅말에 過去 現在 未來의 區別이 劃然치 못하였다는 것은 葛交이 所謂 未來動詞가 됨을 塗糊하려는 意圖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新羅에 「칙힐」이라는 말이 있고 없던 것과 新羅말에 過·現·來가 區分이 劃然하였던지 안 하였던지는 아직 別問題로 하고라도 다만 氏의 根據한 現代語 「칙힐」을 가지고 보면 過去에 屬한 人物(?)의 追封에 未來動詞를 稱號로 부첫다는 것은 자못 矛盾된 嫌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多大한 疑問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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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번= {{TagSpage|185-2}}다음 梁柱東 氏의 갈만임금說은 비록 藏殮의 訓을 訓蒙字會와 石峯千字文에서 取하였다 하나 이 亦 近世語에 準據한 것이라 반드시 古代 新羅에 溯及하야 틀림없음을 保證키 어려우며, 또 葛文王을 「갈만님금」으로 읽는다면 적어도 葛文王의 王을 尼師(叱)으로 쓴 例가 없는 以上에 자못 速斷의 嫌이 不無한 것으로 생각된다. (葛文王의 王과 尼師今 麻立干 等의 關係는 下文에서 論할 터) 그리고 갈만님금 即 薨王은 黃頤齋의 주근王 即 「死王」說과 同樣의 解釋으로서 우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死」 또는 「薨」은 稱號로서의 妥當性이 적으며, 所謂 追封說로 보와도 別意義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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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번= {{TagSpage|185-3}}以上에서 列擧한 星湖로부터 梁柱東 氏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葛文王에 對한 解釋은 나의 臆測일지는 모르나 거의 다 그의 根據를 追封에 둔 듯싶다. 追封은 死者를 前提로 하는 만큼 死로서의 解說이 이와 같이 綿綿하야 끊임없는 것이다. 그러나 史記나 遺事를 通트러보면 일찍이 故今 西龍 博士도 指摘한 바와 같이 追封에만 限한 稱號가 아닌 듯하니<sup>新羅史硏究·新羅葛文王考</sup>, 史記와 遺事에 依하야 살펴보면 葛文王의 稱號를 가진 이로는 日知 葛文王을 비롯하야 葛文王 史恭에 이르기까지 대개 十七八名을 들 수가 있으나 그 가운대에 「封」으로 말미암어 된 葛文王은 六名에 지나지 못하고 {{TagPage|186-1}}그 外는 모두 葛文王某 또는 某葛文王으로(葛文王號를 부치는데, 이와 같은 두 가지 例가 있으나 意味에 있어서는 同一한 것임) 뵈일 뿐으로서 그들 葛文王은 果然 封함으로 因하야 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封으로 因하야 된 것으로 뵈이는 六名의 葛文王에 就하야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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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번= {{TagSpage|186-2}}<blockquote no="05">{{TagBlock|5-1}}(1), 封朴阿道 爲葛文王<sup>三國史記 卷一 逸聖 尼師今 十五年條</sup></br>{{TagBlock|5-2}}(2), 封父骨正 爲世神葛文王<sup>仝書 卷二 沾解 尼師今 元年條</sup></br>{{TagBlock|5-3}}(3), 封老仇道 爲葛文王<sup>仝書 仝卷 味鄒 尼師今 二年條</sup></br>{{TagBlock|5-4}}(4), 八月以伊飡弩里夫 爲上大等 封母弟伯飯 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sup>仝書 卷四 眞平王 元年條</sup></br>{{TagBlock|5-5}}{{TagRef|3}}(5), 太宗 武烈王의 父 文興 葛文王<ref>三國遺事(王曆) 第二十九 太宗 武烈王條에 「名春秋, 金氏, 眞智王子龍春卓文興葛文王之子也 龍春一作龍樹」라 하였고 三國史記 卷五 太宗 武烈王 元年條에 「夏四月 追封王考僞文興大王」이라 하엿나니 이 兩書의 記事를 對照하여 보면 龍春 卓 文興 葛文王의 卓字는 誤字 또는 衍字인 듯하며 文興 葛文王은 追封에 屬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음.</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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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번= {{TagSpage|186-3}}以上 六名의 葛文王은 「封」으로 因하야 될 듯하나, 果然 追封에 屬한 것인가 다시 이에 關하야 살펴보면, (1)朴阿道에 있어서는 「封朴阿道爲葛文王」이라는 斷片的 記事뿐임으로 이것을 가지고 追封 與否를 論하기는 元來 不可能한 것이며, (2)骨正은 伐休 尼師今<sup>第九代</sup>의 長子로서 奈解 尼師今<sup>第十代</sup> 即位 以前에 이미 死去하였음으로 그의 子 沾解 尼師今<sup>第十二代</sup> 때에 世神이라는 美號를 부처 追封한 것으로 믿으며 {{TagRef|4}}(3)仇道는 味鄒尼師今이 父로서 味鄒尼師今 二年에 封한 것이니, 葛城 氏도 指摘한 바와 같이<ref>東洋學報 第十三卷 第四號·葛城末治 氏 「新羅女王に就いて」에 史記に考仇道を封じて葛文王と爲すとあるを以て是亦追討たらざるべからず 禮記に「生曰父曰母曰妻 死曰考曰祝曰嬪」とあり……按ずるに仇道は阿達羅王十九年波珍飡を拜し 伐休王二年仇須兮と興に左右軍主と爲りし人にして當時二十歳と假定すれば(中略)味鄒王二年は九十七歳に相當す 此の年齢より見るも味鄒王即位以前旣に死亡し 即位の後之を葛文王に追封したるものと解釋するを妥當とすべし云云.</ref> 年齡上으로 보와 追封인 것을 推察할 수가 있는 것이다. (4)眞正 葛文王(伯飯)과 眞安 葛文王(國飯 葛文王으로도 뵈임)에 있어서는 우선 眞安 葛文王을 들어 살펴보면 그는 眞平王의 母弟요 眞德女王의 父니 만일 眞安葛文王이라는 것이 追封이라면 國飯(國芬 國安으로도 씨엿슴)은 眞平王 元年까지에 死去한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그럿타면 眞德女王의 生年을 國飯의 追封된 해 即 眞平王 元年(西紀五七九)으로 假定하여도 女王의 即位{{TagPage|187-1}}한 때의(西紀六四七) 年齡은 六十九成의 老齡일지니 史記(卷五)에 女王에 對하야 「姿質豊麗長七尺 垂手過膝」이라는 記事라던지 其他 여러 가지 事情을 아울러 생각해 보면, 女王이 七十의 老齡으로 即位하였다고는  認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眞平王 元年에 國飯을 封한 것이 追封인지 아닌지는 아직 硏究해 볼 問題라고 생각하며, 다음 (5)太宗 武烈王의 父 龍春에 關하여는 史記의 「追封王考 爲文興大王」과 遺事의 「龍春卓文興葛文王」이라는 記事를 對照하야 보면 文興 葛文王이라는 것은 追封으로도 看做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sup>註3 參照</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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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번= {{TagSpage|187-2}}이와 같이 封으로 因하야 된 六名의 葛文王 中에도 追封으로 確認되는 것은 겨우 世神(骨正) 仇道 文興의 三名뿐이니 만일 史記에 「追封皆稱葛文王」이라는 文句가 없었다 하면 追封에 根據한 近世 以來의 여러 가지 解釋이 果然 出現하게 되었을까도 疑問일 것이다. {{TagRef|5}}그뿐만 아니라 上代 新羅에 果然 追封의 例가 있었던가도 問題려니와 그 우에 葛文王이라는 名稱 自體에 있어서도 다만 葛文을 가지고 「王」의 修飾詞的 또는 形容詞的으로만 解釋하기 어려운 點이 있는 것이니 元來 新羅에 있어 王이라는 漢式 稱號를 부친 것이 智證王 四年부터서의 일이다.<ref>三國史記(卷四) 智證王 四年條에 「冬十月 群臣上言(前略)又觀 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世 但稱方言 未正尊稱今群臣一意 謹上尊號新羅國王 王從之」라 뵈임.</ref> 이와 같이 智證王 四年 以前에는 國王의 稱號로서도 居西干 次次雄 尼師(叱)今 麻立干 等을 부쳤던 것이니, 特히 葛文王에 限하야 以前부터 「王」을 부첬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며, 따러서 葛文이 만일 王字를 기달러 비로소 完全한 意味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적어도 智證王 以前에는 葛文王의 王에 該當한 在來語를 부쳤던 證左가 없는 以上 그들의 解釋은 妥當性을 일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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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번= {{TagSpage|187-3}}그럼으로 新羅 初期부터 나타나는 葛文王이라는 稱號에 있어 「王」이라는 것만은 智證王 以後에 부처진 것일지나, 葛文이라는 것은 在來로 써나려오던 獨立的 意味를 가추운 普通 稱號이었던것이 아닐런가 한다. 만일 이 같은 臆測이 容認된다면 葛文의 解釋으로 王字를 기달러 비로소 意味를 나타나게 되는(葛文 밑에 王에 該當한 在來語의 부처진 例가 없는 以{{TagPage|188-1}}上에) 「주근」「칙킬」「갈믄」 等은 獨立的 稱號로 씨여질 것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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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번= {{TagSpage|188-2}}葛文王에 對한 解釋에 있어서는 以上에 列擧한 追封을 根據로 한 諸說 以外에 近來에 또 {{ruby|今西龍|○○○}} 博士의 골몸(骨身)說과 {{ruby|鮎貝房之進|○○○○○}} 氏의 葛川宮說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今西 博士의 골몸說에 있어서는 그의 著 新羅史硏究·新羅葛文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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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8번= {{TagSpage|188-3}}<blockquote no="06">葛Kal字を假りて表示せる語は, 骨Kol字を假りて表示せる親族家族の話なる可し, 即ち骨品の骨なる可し, 文は字音mumの假字にして, 身體の義即ち現代語の mom を表示せしものなるべし, 葛文は親身の義なる可し, 葛文王の王字は中古に至り漢字の使用流行するに至り恐らくば法興, 眞興の頃に於て漢譯せしものにして百濟に君の文字を用ひ, 日本に鶏彌と稱し, 新羅に於ては錦または今の假字を用ひし語なりしなる可し.</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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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9번= {{TagSpage|188-4}}라 하였다. 이 說에 있어 「골몸」과 「갈문」과의 語音 關係는 아직 그만두고라도 (가)骨은 新羅 骨品의 骨이라 하였으나 新羅에는 聖骨 眞骨 또는 第一骨 第二骨의 區別이 있었으니 어느 骨을 가르쳐 骨몸이라 하였는지 「親身의 義」라는 것만 가지고는 漠然한 感이 있으며 (나)新羅語에 있어 「골몸」에 對應되는 語로 某々의 몸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 以上 골몸이라는 말이 朝鮮語上으로 보와 生疎한 늣낌을 주는 것이며, 葛文王의 王은 法興, 眞興王頃에 漢譯한 것으로서 百濟에 君字를 쓰고 日本에는 鷄彌라 稱하고 新羅에 있어서는 錦 또는 假字를 썻던 語일지라󰡕 하였으나 葛文錦 또는 葛文今으로 씨인 證跡이 없는 以上 結局 無意味한 推論에 不過한 것이니, 이와 같은 點으로 보아 今西 博士 說에 追從키 어려우며, 다음 鮎貝 氏의 葛川宮說에 있어서는 葛文을 地名으로 보는 見地에서 葛文의 文을 借水의 方言이라 하야 川의 借字로 보며 또 文의 訓 「글」은 골(巷, 洞, 谷)의 借字로도 보와 葛文이 地名일 것을 論斷하고, 三國史記(職官志)에 보이는 宮號를 列擧한 後에 特히 葛川宮典이라는 것에 着眼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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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0번= {{TagSpage|189-1}}<blockquote no="07">右宮號城の中葛川宮の葛川は正に葛文にして五萬分地圖寧越の里名葛文里とも同名となる譯なり, 今慶州を中心として葛川と云ふ川名無きかを廣く聞質すも是と同名一切無し, 唯慶州の東北邦里約二里許に左の辰韓六村の一なる習比部 後の臨川部屬村に葛谷と云ふ里名あり(中略) 葛谷は今も同名にて現存しあること, 五萬分地圖所載の如く, 共南約十町許にして勿川里あり(中略) 葛谷里の葛と 勿川里の勿とを合すれば葛文にして 川とを合すれば葛川となれば, 新羅盛時には本と一部落たりしを後代衰殘して別々の里名となりしにあらざるかを思ふものなり.<sup>鮎貝 氏·雜攷王 第一輯·葛文條</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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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1번= {{TagSpage|189-2}}라 하야 葛文을 葛川으로 速斷하고, 그것을 立證하기 爲하야 葛谷의 葛과 勿川里의 勿을 合하면 葛文이 되고, 勿川里의 川을 合하면 葛川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自由스러운 推論으로서 獨斷의 度를 넘은 듯하며, 그리고 이와 같이 葛文을 地名으로 본 다음과 같은 結論을 나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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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2번= {{TagSpage|189-3}}<blockquote no="08">さて此の宮號に地名を稱したるは最近までも繼續され居たる朝鮮の習俗たりしなり, 即ち 「王の生家」「王妃の生家」「王子大君の家」を稱して明禮宮, 於義宮, 壽進宮, 龍洞宮, 雲峴宮, 竹洞宮, 樓洞宮, 磚洞宮 等, 坊名詞名を一般が稱し居たるは新羅の遺俗なり, 又直に此の宮號を人敬稱にも移して, 雲峴大監(註略) 竹洞大監(註略) 桂洞大監(註略と稱したるなり(註略)即ち大監が王に代はりたる丈けにて葛文王と同一の稱呼なり.<sup>鮎貝 氏 著 仝上</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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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3번= {{TagSpage|189-4}}라 하야 葛文王은 葛川宮에 살던 人物들이라는 것을 論斷하였다. 이 說에 있어서는 (가)우선 葛文이 地名으로서의 葛川인 것이 疑問이며, (나)近世 朝鮮의 習俗이라 하야 宮號에 地名을 부치고 또 宮號를 「人敬稱」에 옮겨 쓰는 것을 (이런 것은 朝鮮뿐만 아니겠으나) 들어 대번에 上代 新羅의 古習이라 하는 것도 아직 硏究의 餘地가 있는 問題요, (다)또는 新羅 上代{{TagPage|190-1}}로부터 統一期에 이르기까지 約 六百年間의 各 氏族의 數만흔 葛文王들이 葛川宮에서만  사럿드라는 것은 梁柱東 氏도 指摘한 바와 같이<sup>靑丘學叢 二十二號</sup> 想像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鮎貝 氏 說에도 多大한 疑問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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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 갈문왕(葛文王)은 특히 신라사에 나타나는 칭호로서 {{TagBook|[[삼국사기]]}}(권1) {{TagPerson|[[유리이사금]]}} 조에 <cite no="01">“妃日知{{ruby|葛文王|○○○}}之女也”</cite>라는 기사에 보이는 것이 그의 최초이며, 그리하여 신라통일기에 이르기까지 자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칭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TagBook|[[삼국사기|같은 책]]}}(같은 권) {{TagPerson|[[일성이사금]]}} 기(紀) <cite no="02">“封朴阿道 爲葛文王”</cite>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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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번= <blockquote no="01">新羅追封 稱葛文王 其義末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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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번= 이라 하고 {{TagBook|[[삼국유사]]}}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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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번= <blockquote no="02">羅人 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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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번= 이라 하였다. {{TagRefT|1}}{{TagBook|[[삼국유사|유사]]}}의 이 기사는 {{TagBook|[[삼국사기|사기]]}}의 것을 도습(蹈襲)한 듯하거니와,<ref group="a">{{TagBook|[[삼국유사]]}}(권1) 제2 남해왕조에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羅末名儒崔致遠 作帝王三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今記新羅事  具存方言 亦宜矣 羅人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이라 한 것과 {{TagBook|[[삼국사기]]}}(권4) {{TagPerson|[[지증마립간]]}}조에 “論日新羅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中略)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라 한 것을 대조해 보면 내용과 구법이 서로 일치하며 또 {{TagBook|[[삼국유사|유사]]}}(권3) 원종흥법조에 주로서 “羅人凡追封王者 皆稱葛文王 其實 史臣亦云未詳”이라 한 것을 보면 사신(史臣)은 {{TagPerson|[[김부식]]}}을 가리키는 것이며 “史論曰云云”은 “忠臣金富軾論曰云云”으로 해석된다.</ref> 어쨌든 이로 보면 고려에 있어서도 적어도 {{TagPerson|[[인종]]}} 시대에 와서는 갈문왕의 의미가 이미 미상(未詳)한 것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어급한 사기의 기사에 있어 갈문왕 그것의 의미는 미상이라 하였으나 갈문왕이라는 칭호는 추봉왕(追封王)에게 일컬었던 것이라 하였으니, 이 ‘추봉’이라는 2자는 후세에 내려오면서 고문의 의의를 푸는 데에 호개의 조건, 호개의 근거로서 이용되어온 것이다. 갈문에 대하여 {{TagPerson|[[이익|{{ruby|성호 이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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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번= <blockquote no="03">新羅之世 多追尊異姓 皆稱葛文王 本宗正統 謂之麻立干 葛與麻 以絰帶言也 按周禮 王爲諸侯總 縗弁而加絰 同姓則麻 異姓則葛 謂葛絰之王別於本宗也<sup>{{TagBook|[[성호사설]]}} 경사편(經史篇) 8</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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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번= 라 하여 ‘추봉’을 조건으로 ‘사(死)’를 연상하고 상례복제(喪禮服制)의 질대(絰帶)를 끌어 <cite no="03">“異姓則葛”</cite>의 갈(葛)과 갈문왕의 갈(葛)과에 관계를 붙일 때 머리(頭) 또는 마루(宗)의 사음(寫音)인 마립(麻立)의 마(麻)까지 들어 갈질(葛絰)에 대한 마질(麻絰)로 부회하여 갈문을 상복제의 갈질에서 나온 것이라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해석은 성호의 뛰어난 제자 {{TagPerson|[[안정복|{{ruby|순암 안정복|○○○○○}}]]}}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니<sup>{{TagBook|[[동사강목]]}}·부록</sup> 이와 같이 한자의 글자 뜻이나 유학사상에 얽매인 해석에 대하여는 깊은 천착을 새삼스러히 하고자 아니하거니와 우선 간단히 몇 가지 점을 들어 음미해 보면, {{TagRefT|2}}(가)신라의 갈문왕 칭호를 가진 이로는 소위 다른 성(姓) 이외에도 본종에 속한 것이 또한 많으며,<ref group="a">{{TagPerson|[[조분이사금]]}}과 그의 동생 {{TagPerson|[[첨해이사금]]}}의 아버지는 골정(세신) 갈문왕이요 {{TagPerson|[[미추왕]]}}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으며({{TagBook|[[삼국사기]]}} 권2) 지증 마립간은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요 {{TagPerson|[[진흥왕]]}}은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요({{TagBook|[[삼국사기|사기]]}} 권4) 태종 {{TagPerson|[[무열왕]]}}은 (탁)문흥 갈문왕의 아들이다({{TagBook|[[삼국유사]]}}·왕력)</ref> 그리고 (나)소위 본종정통(本宗正統)에도 갈문왕의 칭호와 병행하여 마립간 이외에 이사(질)금의 칭호도 있으니 이 같은 칭호와 갈(葛)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며, (다)설령 갈문은 추봉과 관계가 있다 할지라도 상복제를 가지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도 수긍키 어려우니와, 하물며 고대 신라에 있어 중국식의 상복제가 이뤄졌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음에랴 이와 같은 뜻으로도 성호의 해석을 좇기 어려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차라리 재래로 잊어 왔던 갈문왕의 의미에 대하여 해석을 내리려던 그의 노력을 감사할 것이다. 다음 이에 대하여 {{TagPerson|[[황윤석|{{ruby|이재 황윤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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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번= <blockquote no="04">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東國方言 謂死日走斤 葛之方言近走 文之方言近斤<sup>{{TagBook|[[이재유고]]}} 잡저 화음방언자의</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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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번= 이리하여 갈문에 대하여 언어상으로 이두(吏讀)적 해설을 시도한 것은 이재의 탁견으로서 갈문 해석에 일보를 내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갈문’을 ‘주근’으로 훈독(訓讀)하여 죽음(死)의 의미로 해석한 것은, 갈문의 본훈(本訓)(칙글)으로 보아도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며, 또 고대의 습속이 아무리 소박하였다 할지라도 ‘주근’이라는 것은 소위 추봉 칭호의 성질상으로 보아도 마땅한 것으로는 믿기 어려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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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번= 이와 같은 경향을 띤 해석이 최근에 이르러도 또한 적지 아니한 것이니, {{TagPerson|[[갈성말치|{{ruby|갈성말치|○○○○}}]]}}(葛城末治) 씨는 신라의 갈문왕에 대하여 모두 추봉이라는 단정 아래에서 갈문을 ‘칙혀’ 즉 ‘칙혀올림’의 미래동사인 Chic-kul로 훈독할 것이라 하여 갈문왕을 숭상왕(崇上王)이라는 의미라 하였으며<sup>{{TagJournal|[[동양학보]]}} {{TagVolume|[[동양학보 13-4|제13권 제4호]]}}·{{TagPerson|[[갈성말치]]}} 씨의 「{{TagArticle|[[新羅斯文王に就て]]}}」</sup> 최근에 {{TagPerson|[[양주동|{{ruby|양주동|○○○}}]]}} 씨도 갈문왕을 추봉의 것으로 보고 갈문왕을 갈만님금(장왕(藏王))으로 읽을 것이며 또 혹 ‘交’‘代’의 옛 훈(訓)이 ‘갈마든다’라는 것으로 대왕(代王)의 뜻으로도 해석할 것이라 하고, 다시 적확한 해석이라 하여 염(殮)의 훈(訓) ‘갈물’을 들어 갈문왕은 ‘훙왕(薨王)’이라고 해석하였다<sup>{{TagJournal|[[청구학총]]}} {{TagVolume|[[청구학총 22|제22호]]}} {{TagPerson|[[양주동]]}} 씨의 「{{TagArticle|[[葛文王·その他]]}}」</sup>. 이상 {{TagPerson|[[양주동|양씨]]}}의 해석에 대하여 먼저 {{TagPerson[[갈성말치|갈성]]}} 씨의 설로 보면 갈문의 훈(訓)으로 든 ‘칙글’을 ‘칙힐’이라는 미래동사와 같이 본다 하더라도 현대어인 미래동사를 가지고 대번에 신라 고대에 끄집어 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생각한다. 비록 {{TagPerson[[갈성말치|갈성]]}} 씨는 자기의 설을 변호하기 위하여 <cite no="04">“遺事王暦 篇に 「第十四儒禮尼師今 一作世里智王」と出づ 儒禮は 弩儒又は儒理とも書し世nuliを 義讀したるものにして 智は人名の後に 附する敬稱たり 訓蒙字に 世の義を nuliとせるにて知るべし云云”이라는 예를 들어 “史記及遺の二書に 收載せられたる當時の地名·人名·官職名·其の他金石に鐫刻せられたる史? 讀等に就て 文字の用例を見るに, 吾人が 今日用ふるものと酷似せるは 勿論云云”</cite>이라고 논하고(실은 지금에는 ‘세(世)’를 누리라고도 하지 않지마는), 다시 신라의 어법에 대하여 <cite no="05">“而して當時の語辭には 今日の如き過·現‧來の劃然たる區別なかりしものならん”</cite><sup>앞의 {{TagJournal|[[동양학보]]}}</sup>이라는 독단적 변해를 내렸다. 이것은 ‘칙힐’이라는 말이 신라에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암암리에 변해하는 동시에 신라말에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획연치 못하였다는 것은 갈문이 소위 미래동사가 됨을 도호(塗糊)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에 ‘칙힐’이라는 말이 있고 없던 것과 신라말에 과거(過)·현재(現)·미래(來)가 구분이 획연하였던지 안 하였던지는 아직 별문제로 하고라도 다만 씨가 근거한 현대어 ‘칙힐’을 가지고 보면 과거에 속한 인물(?)의 추봉에 미래동사를 칭호로 붙였다는 것은 자못 모순된 혐(嫌)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커다란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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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번= 다음 {{TagPerson|[[양주동]]}} 씨의 갈만임금설은 비록 장염(藏殮)의 훈(訓)을 {{TagBook|[[훈몽자회]]}}와 {{TagBook|[[석봉천자문]]}}에서 취하였다 하나 이 역시 근세어에 준거한 것이라 반드시 고대 신라에 소급하여 틀림없음을 보증하기 어려우며, 또 갈문왕을 ‘갈만님금’으로 읽는다면 적어도 갈문왕의 왕을 이사(질)으로 쓴 예가 없는 이상에 자못 속단의 혐이 없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갈문왕의 왕과 이사금, 마립간 등의 관계는 아래 글에서 논할 터) 그리고 갈만님금 즉 훙왕은 {{TagPerson|[[황윤석|황이재]]}}의 주근왕 즉 ‘사왕(死王)’설과 같은 해석으로서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死)’ 또는 ‘훙(薨)’은 칭호로서의 타당성이 적으며, 소위 추봉설로 보아도 별 의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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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번= 이상에서 열거한 {{TagPerson|[[이익|성호]]}}로부터 {{TagPerson|[[양주동]]}} 씨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갈문왕에 대한 해석은 나의 억측일지는 모르나 거의 다 그의 근거를 추봉에 둔 듯싶다. 추봉은 사자를 전제로 하는 만큼 사(死)로서의 해설이 이와 같이 면면하여 끊임없는 것이다. 그러나 {{TagBook|[[삼국사기|사기]]}}나 {{TagBook|[[삼국유사|유사]]}}를 통틀어보면 일찍이 고 {{TagPerson|[[금서룡]]}}(今西龍) 박사도 지적한 바와 같이 추봉에만 한한 칭호가 아닌 듯하니<sup>{{TagBook|[[신라사연구]]}}·{{TagArticle|[[신라갈문왕고]]}}</sup>, {{TagBook|[[삼국사기|사기]]}}나 {{TagBook|[[삼국유사|유사]]}}에 의하여 살펴보면 갈문왕의 칭호를 가진 이로는 일지(日知) 갈문왕을 비롯하여 갈문왕 사공(史恭)에 이르기까지 대개 17, 8명을 들 수가 있으나 그 가운데에 ‘봉(封)’으로 말미암아 된 갈문왕은 6명에 지나지 못하고 그 외는 모두 갈문왕모 또는 모갈문왕으로(갈문왕호를 붙이는데, 이와 같은 두 가지 예가 있으나 의미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임) 보일 뿐으로서 그들 갈문왕은 과연 봉함으로 인하여 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봉으로 인하여 된 것으로 보이는 6명의 갈문왕에 대하여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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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번= <blockquote no="05">{{TagBlock|5-1}}(1), 封朴阿道 爲葛文王<sup>{{TagBook|[[삼국사기]]}} 권1 {{TagPerson|[[일성이사금]]}} 15년조</sup></br>{{TagBlock|5-2}}(2), 封父骨正 爲世神葛文王<sup>{{TagBook|[[삼국사기|같은 책]]}} 권2 {{TagPerson|[[첨해이사금]]}} 원년조</sup></br>{{TagBlock|5-3}}(3), 封老仇道 爲葛文王<sup>{{TagBook|[[삼국사기|같은 책]]}} 같은 권 {{TagPerson|[[미추이사금]]}} 2년조</sup></br>{{TagBlock|5-4}}(4), 八月以伊飡弩里夫 爲上大等 封母弟伯飯 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sup>{{TagBook|[[삼국사기|같은 책]]}} 권5 {{TagPerson|[[진평왕]]}} 원년조</sup></br>{{TagBlock|5-5}}{{TagRefT|3}}(5), 태종 {{TagPerson|[[무열왕]]}}의 아버지 문흥(文興) 갈문왕<ref group="a">{{TagBook|[[삼국유사]]}}(왕력) 제29 태종 {{TagPerson|[[무열왕]]}}조에 “名春秋、金氏、眞智王子龍春卓文興葛文王之子也 龍春一作龍樹”라 하였고 {{TagBook|[[삼국사기]]}} 권5 태종 무열왕 원년조에 “夏四月 追封王考僞文興大王”이라 하였으니 이 두 책의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용춘(龍春) 탁(卓) 문흥(文興) 갈문왕의 탁(卓)자는 오자 또는 연자(衍字)인 듯하며 문흥 갈문왕은 추봉에 속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음.</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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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번= 이상 6명의 갈문왕은 ‘봉’으로 인하여 될 듯하나, 과연 추봉에 속한 것인가 다시 이에 관하여 살펴보면, (1)박아도(朴阿道)에 있어서는 <cite no="06">“封朴阿道爲葛文王”</cite>이라는 단편적 기사뿐이므로 이것을 가지고 추봉 여부를 논하기는 원래 불가능한 것이며, (2)골정(骨正)은 {{TagPerson|[[벌휴이사금]]}}<sup>제9대</sup>의 장자로서 {{TagPerson|[[내해이사금]]}}<sup>제10대</sup> 즉위 이전에 이미 사거(死去)하였음으로 그의 아들 {{TagPerson|[[첨해이사금]]}}<sup>제12대<sup> 때에 세신(世神)이라는 미호(美號)를 붙여 추봉한 것으로 믿으며 {{TagRefT|4}}(3)구도(仇道)는 {{TagPerson|[[미추이사금]]}}이 아버지로서 {{TagPerson|[[미추이사금]]}} 2년에 봉한 것이니, {{TagPerson|[[갈성말치|갈성]]}} 씨도 지적한 바와 같이<ref group="a">{{TagJournal|[[동양학보]]}} {{TagVolume|[[동양학보 13-4|제13권 제4호]]}} {{TagPerson|[[갈성말치]]}} 씨 「{{TagArticle|[[新羅女王に就いて]]}}」에 史記に考仇道を封じて葛文王と爲すとあるを以て是亦追討たらざるべからず 禮記に「生曰父曰母曰妻 死曰考曰祝曰嬪」とあり……按ずるに仇道は阿達羅王十九年波珍飡を拜し 伐休王二年仇須兮と興に左右軍主と爲りし人にして當時二十歳と假定すれば(中略)味鄒王二年は九十七歳に相當す 此の年齢より見るも味鄒王即位以前旣に死亡し 即位の後之を葛文王に追封したるものと解釋するを妥當とすべし云云.</ref> 연령상으로 보아 추봉인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4)진정(眞正) 갈문왕(백반(伯飯))과 진안 갈문왕(국반(國飯) 갈문왕으로도 보임)에 있어서는 우선 진안 갈문왕을 들어 살펴보면 그는 {{TagPerson|[[진평왕]]}}의 아우요 {{TagPerson|[[진덕여왕]]}}의 아버지니 만일 진안 갈문왕이라는 것이 추봉이라면 국반(국분(國芬), 국안(國安)으로도 쓰였음)은 {{TagPerson|[[진평왕]]}} 원년까지 사거한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그렇다면 {{TagPerson|[[진덕여왕]]}}이 태어난 해를 국반이 추봉된 해 즉 {{TagPerson|[[진평왕]]}} 원년(서기 579)으로 가정하여도 여왕이 즉위한 때의(서기 647) 연령은 69세의 노령일지니 {{TagBook|[[삼국사기|사기]]}}(권5)에 여왕에 대하여 <cite no="07">“姿質豊麗長七尺 垂手過膝”</cite>이라는 기사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사정을 아울러 생각해 보면, 여왕이 칠십의 노령으로 즉위하였다고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TagPerson|[[진평왕]]}} 원년에 국반을 봉한 것이 추봉인지 아닌지는 아직 연구해 볼 문제라고 생각하며, 다음 (5)태종 {{TagPerson|[[무열왕]]}}의 아버지 용춘(龍春)에 관하여는 {{TagBook|[[삼국사기|사기]]}}의 <cite no="08">“追封王考 爲文興大王”</cite>과 {{TagBook|[[삼국유사|유사]]}}의 <cite no="09">“龍春卓文興葛文王”</cite>이라는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문흥 갈문왕이라는 것은 추봉으로도 간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sup>주3 참조</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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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번= 이와 같이 봉으로 인하여 된 6명의 갈문왕 중에도 추봉으로 확인되는 것은 겨우 세신(골정), 구도, 문흥의 3명뿐이니 만일 사기에 <cite no="10">“追封皆稱葛文王”</cite>이라는 문구가 없었다 하면 추봉에 근거한 근세 이래의 여러 가지 해석이 과연 출현하게 되었을까도 의문일 것이다. {{TagRefT|5}}그뿐만 아니라 상대 신라에 과연 추봉의 예가 있었던가도 문제이지만 그 위에 갈문왕이라는 명칭 자체에 있어서도 다만 갈문을 가지고 ‘왕(王)’의 수식사적 또는 형용사적으로만 해석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니 원래 신라에 있어 왕이라는 한식 칭호를 붙인 것이 {{TagPerson|[[지증왕]]}} 4년부터의 일이다.<ref group="a">{{TagBook|[[삼국사기]]}}(권5) {{TagPerson|[[지증왕]]}} 4년조에 “冬十月 群臣上言(前略)又觀 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世 但稱方言 未正尊稱今群臣一意 謹上尊號新羅國王 王從之”라 보임.</ref> 이와 같이 {{TagPerson|[[지증왕]]}} 4년 이전에는 국왕의 칭호로서도 거서간, 차차웅, 이사(질)금, 마립간 등을 붙였던 것이니, 특히 갈문왕에 한하여 이전부터 ‘왕’을 붙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며, 따라서 갈문이 만일 왕(王)자를 기다려 비로소 완전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적어도 지증왕 이전에는 갈문왕의 왕에 해당한 재래어를 붙였던 증좌가 없는 이상 그들의 해석은 타당성을 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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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번= 그러므로 신라 초기부터 나타나는 갈문왕이라는 칭호에 있어 ‘왕’이라는 것만은 {{TagPerson|[[지증왕]]}} 이후에 붙여진 것일지나, 갈문이라는 것은 재래로 써 내려오던 독립적 의미를 갖춘 보통 칭호였던것이 아닐런가 한다. 만일 이 같은 억측이 용인된다면 갈문의 해석으로 왕(王)자를 기다려 비로소 의미를 나타나게 되는(갈문 밑에 왕에 해당하는 재래어의 붙여진 예가 없는 이상에) ‘주근’, ‘칙킬’, ‘갈믄’ 등은 독립적 칭호로 쓰일 것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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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번= 갈문왕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이상에 열거한 추봉을 근거로 한 모든 설 이외에 근래에 또 {{TagPerson|[[금서룡|{{ruby|금서룡|○○○}}]]}} 박사의 골몸(骨身)설과 {{TagPerson|[[점패방지진|{{ruby|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씨의 갈천궁(葛川宮)설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TagPerson|[[금서룡|금서]]}} 박사의 골몸설에 있어서는 그의 저 {{TagBook|[[신라사연구]]}}·{{TagArticle|[[신라갈문왕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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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8번= <blockquote no="06">葛Kal字を假りて表示せる語は, 骨Kol字を假りて表示せる親族家族の話なる可し, 即ち骨品の骨なる可し, 文は字音mumの假字にして, 身體の義即ち現代語の mom を表示せしものなるべし, 葛文は親身の義なる可し, 葛文王の王字は中古に至り漢字の使用流行するに至り恐らくば法興, 眞興の頃に於て漢譯せしものにして百濟に君の文字を用ひ, 日本に鶏彌と稱し, 新羅に於ては錦または今の假字を用ひし語なりしなる可し.</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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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9번= 라 하였다. 이 설에 있어 ‘골몸’과 ‘갈문’과의 어음 관계는 아직 그만두고라도 (가)골(骨)은 신라 골품의 골이라 하였으나 신라에는 성골, 진골 또는 제1골, 제2골의 구별이 있었으니 어느 골을 가르쳐 골몸이라 하였는지 ‘친신(親身)의 뜻’이라는 것만 가지고는 막연한 감이 있으며 (나)신라어에 있어 ‘골몸’에 대응되는 말로 모모(某々)의 몸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 이상 골몸이라는 말이 조선어상으로 보아 생소한 느낌을 주는 것이며, 갈문왕의 왕은 {{TagPerson|[[법흥왕|법흥]]}}, {{TagPerson|[[진흥왕]]}}쯤에 한역(漢譯)한 것으로서 백제는 군(君)자를 쓰고 일본에는 계미(鷄彌)라 칭하고 신라에 있어서는 금(錦) 또는 가(假)자를 썻던 말일지라 하였으나 갈문금(葛文錦) 또는 갈문금(葛文今)으로 쓰인 증적(證跡)이 없는 이상 결국 무의미한 추론에 불과한 것이니, 이와 같은 점으로 보아 {{TagPerson|[[금서룡|금서]]}} 박사 설을 추종하기 어려우며, 다음 {{TagPerson|[[점패방지진|점패]]}} 씨의 갈천궁설에 있어서는 갈문을 지명으로 보는 견지에서 갈문의 문을 차수(借水)의 방언이라 하여 천(川)의 차자(借字)로 보며 또 문(文)의 훈(訓) ‘글’은 골(항(巷), 동(洞), 곡(谷))의 차자로도 보아 갈문이 지명일 것을 논단하고, {{TagBook|[[삼국사기]]}}(직관지)에 보이는 궁호(宮號)를 열거한 뒤에 특히 갈천궁전(宮典)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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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0번= <blockquote no="07">右宮號城の中葛川宮の葛川は正に葛文にして五萬分地圖寧越の里名葛文里とも同名となる譯なり, 今慶州を中心として葛川と云ふ川名無きかを廣く聞質すも是と同名一切無し, 唯慶州の東北邦里約二里許に左の辰韓六村の一なる習比部 後の臨川部屬村に葛谷と云ふ里名あり(中略) 葛谷は今も同名にて現存しあること, 五萬分地圖所載の如く, 共南約十町許にして勿川里あり(中略) 葛谷里の葛と 勿川里の勿とを合すれば葛文にして 川とを合すれば葛川となれば, 新羅盛時には本と一部落たりしを後代衰殘して別々の里名となりしにあらざるかを思ふものなり.<sup>{{TagPerson|[[점패방지진|점패]]}} 씨·잡고(雜攷) 왕 제1집·갈문조</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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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1번= 라 하여 갈문을 갈천으로 속단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갈곡(葛谷)의 갈과 물천리(勿川里)의 물을 합하면 갈문이 되고, 물천리의 천을 합하면 갈천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유스러운 추론으로서 독단의 도를 넘은 듯하며, 그리고 이와 같이 갈문을 지명으로 본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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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2번= <blockquote no="08">さて此の宮號に地名を稱したるは最近までも繼續され居たる朝鮮の習俗たりしなり, 即ち 「王の生家」「王妃の生家」「王子大君の家」を稱して明禮宮, 於義宮, 壽進宮, 龍洞宮, 雲峴宮, 竹洞宮, 樓洞宮, 磚洞宮 等, 坊名詞名を一般が稱し居たるは新羅の遺俗なり, 又直に此の宮號を人敬稱にも移して, 雲峴大監(註略) 竹洞大監(註略) 桂洞大監(註略と稱したるなり(註略)即ち大監が王に代はりたる丈けにて葛文王と同一の稱呼なり.<sup>{{TagPerson|[[점패방지진|점패]]}} 씨 지음, 위의 책</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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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3번= 라 하여 갈문왕은 갈천궁에 살던 인물들이라는 것을 논단하였다. 이 설에 있어서는 (가)우선 갈문이 지명으로서의 갈천인 것이 의문이며, (나)근세 조선의 습속이라 하여 궁호에 지명을 붙이고 또 궁호를 ‘인경칭(人敬稱)’에 옮겨 쓰는 것을 (이런 것은 조선뿐만 아니겠으나) 들어 대번에 상대 신라의 오랜 습속이라 하는 것도 아직 연구의 여지가 있는 문제요, (다)또는 신라 상대로부터 통일기에 이르기까지 약 600년간의 각 씨족의 수많은 갈문왕들이 갈천궁에서만 살았더라는 것은 {{TagPerson|[[양주동]]}} 씨도 지적한 바와 같이<sup>{{TagJournal|[[청구학총]]}} {{TagVolume|[[청구학총 22|제22호]]}}</sup>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TagPerson|[[점패방지진|점패]]}} 씨 설에도 커다란 의문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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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8일 (월) 13: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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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문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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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葛文王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5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 7월
시작쪽 182쪽 종료쪽 201쪽 전체쪽 020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갈문왕(葛文王)은 특히 신라사에 나타나는 칭호로서 삼국사기서적(권1) 유리이사금인물 조에 “妃日知葛文王(○○○)之女也”라는 기사에 보이는 것이 그의 최초이며, 그리하여 신라통일기에 이르기까지 자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칭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같은 책서적(같은 권) 일성이사금인물 기(紀) “封朴阿道 爲葛文王” 주에
쪽수▶P182-1葛文王은 特히 新羅史에 나타나는 稱號로서 三國史記(卷一) 儒理 尼師今條에 「妃日知葛文王(○○○)之女也」라는 記事에 뵈이는 것이 그의 最初이며, 그리하야 新羅統一期에 이르기까지 자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稱號에 對한 解釋에 있어서는 同書(同卷) 逸聖 尼師今紀 「封朴阿道 爲葛文王」 註에

新羅追封 稱葛文王 其義末詳

쪽수▶P182-2

新羅追封 稱葛文王 其義末詳

이라 하고 삼국유사서적에도
쪽수▶P182-3이라 하고 三國遺事에도

羅人 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

쪽수▶P182-4

羅人 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

이라 하였다. 현대문주1▶유사서적의 이 기사는 사기서적의 것을 도습(蹈襲)한 듯하거니와,[a 1] 어쨌든 이로 보면 고려에 있어서도 적어도 인종인물 시대에 와서는 갈문왕의 의미가 이미 미상(未詳)한 것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어급한 사기의 기사에 있어 갈문왕 그것의 의미는 미상이라 하였으나 갈문왕이라는 칭호는 추봉왕(追封王)에게 일컬었던 것이라 하였으니, 이 ‘추봉’이라는 2자는 후세에 내려오면서 고문의 의의를 푸는 데에 호개의 조건, 호개의 근거로서 이용되어온 것이다. 갈문에 대하여 성호 이익(○○○○)인물
쪽수▶P182-5이라 하였다. 원문주1▶遺事의 이 記事는 史記의 것을 蹈襲한 듯하거니와,[1] 엇젯던 일로 보면 高麗에 있어서도 적어도 仁宗 時代에 와서는 葛文王의 意味가 이미 未詳한 것에 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前擧한 史記의 記事에 있어 葛文王 그것의 意味는 未詳이라 하였으나 葛文王이라는 稱號는 追封王에게 일커럿던 것이라 하였나니, 이 「追封」이라는 二字는 ▶P183-1後世에 나려오면서 高文의 意義를 푸는 데에 好個의 條件, 好個의 根據로서 利用되여온 것이다. 葛文에 對하야 星湖 李瀷(○○○○)

新羅之世 多追尊異姓 皆稱葛文王 本宗正統 謂之麻立干 葛與麻 以絰帶言也 按周禮 王爲諸侯總 縗弁而加絰 同姓則麻 異姓則葛 謂葛絰之王別於本宗也성호사설서적 경사편(經史篇) 8

쪽수▶P183-2

新羅之世 多追尊異姓 皆稱葛文王 本宗正統 謂之麻立干 葛與麻 以絰帶言也 按周禮 王爲諸侯總 縗弁而加絰 同姓則麻 異姓則葛 謂葛絰之王別於本宗也星湖僿說 經史篇 八

라 하여 ‘추봉’을 조건으로 ‘사(死)’를 연상하고 상례복제(喪禮服制)의 질대(絰帶)를 끌어 “異姓則葛”의 갈(葛)과 갈문왕의 갈(葛)과에 관계를 붙일 때 머리(頭) 또는 마루(宗)의 사음(寫音)인 마립(麻立)의 마(麻)까지 들어 갈질(葛絰)에 대한 마질(麻絰)로 부회하여 갈문을 상복제의 갈질에서 나온 것이라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해석은 성호의 뛰어난 제자 순암 안정복(○○○○○)인물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니동사강목서적·부록 이와 같이 한자의 글자 뜻이나 유학사상에 얽매인 해석에 대하여는 깊은 천착을 새삼스러히 하고자 아니하거니와 우선 간단히 몇 가지 점을 들어 음미해 보면, 현대문주2▶(가)신라의 갈문왕 칭호를 가진 이로는 소위 다른 성(姓) 이외에도 본종에 속한 것이 또한 많으며,[a 2] 그리고 (나)소위 본종정통(本宗正統)에도 갈문왕의 칭호와 병행하여 마립간 이외에 이사(질)금의 칭호도 있으니 이 같은 칭호와 갈(葛)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며, (다)설령 갈문은 추봉과 관계가 있다 할지라도 상복제를 가지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도 수긍키 어려우니와, 하물며 고대 신라에 있어 중국식의 상복제가 이뤄졌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음에랴 이와 같은 뜻으로도 성호의 해석을 좇기 어려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차라리 재래로 잊어 왔던 갈문왕의 의미에 대하여 해석을 내리려던 그의 노력을 감사할 것이다. 다음 이에 대하여 이재 황윤석(○○○○○)인물
쪽수▶P183-3라 하야 「追封」을 條件으로 「死」를 聯想하고 喪禮服制의 絰帶를 끄러 「異姓則葛」의 葛과 葛文王의 葛과에 關係를 부칠 새 마리(頭) 또는 마루(宗)의 寫音인 麻立의 麻까지 드러 葛絰에 對한 麻絰로 附會하야 葛文을 喪服制의 葛絰에서 나온 것이라 解釋하였다. 그리고 이와 同一한 解釋은 星湖의 高弟 順庵 安鼎福(○○○○○)에게서도 차저볼 수가 있는 것이니東史綱目·附錄 이와 같이 漢字의 字義나 儒學思想에 拘泥된 解釋에 對하야는 깊은 穿鑿을 새삼스러히 하고저 아니하거니와 우선 簡單히 몇 가지 點을 드러 吟味해 보면, 원문주2▶(가)新羅의 葛文王 稱號를 가진 이로는 所謂 異姓 以外에도 本宗에 屬한 것이 또한 많으며,[2]그리고 (나)所謂 本宗正統에도 葛文王의 稱號와 井行하야 麻立干 以外에 尼師(叱)今의 稱號도 있으니 이 같은 稱號와 葛과의 關係를 어떻게 解釋하며, (다)設令 葛文은 追封과 關係가 있다 할지라도 喪服制를 가지고 이름을 부친다는 것도 首肯키 어려우니와, 하물며 古代 新羅에 있어 中國式의 喪服制가 行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음에랴 이와 같은 뜻으로도 星湖의 解釋에 좇기 어려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차라리 在來로 이저왔던 葛文王의 意味에 對하야 解釋을 나리려던 그의 努力을 感謝할 것이다. 다음 이에 對하야 頤齋 黃胤錫(○○○○○)

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東國方言 謂死日走斤 葛之方言近走 文之方言近斤이재유고서적 잡저 화음방언자의

쪽수▶P183-4

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東國方言 謂死日走斤 葛之方言近走 文之方言近斤頤齋遺藁 雜著 華音方言字義

이리하여 갈문에 대하여 언어상으로 이두(吏讀)적 해설을 시도한 것은 이재의 탁견으로서 갈문 해석에 일보를 내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갈문’을 ‘주근’으로 훈독(訓讀)하여 죽음(死)의 의미로 해석한 것은, 갈문의 본훈(本訓)(칙글)으로 보아도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며, 또 고대의 습속이 아무리 소박하였다 할지라도 ‘주근’이라는 것은 소위 추봉 칭호의 성질상으로 보아도 마땅한 것으로는 믿기 어려운 바이다.
쪽수▶P183-5이리하야 葛文에 對하야 言語上으로 吏讀的 解說을 試한 것은 頤齋의 卓見으로서 葛文 解釋에 一步를 내켜 노흔 것이다. ▶P184-1그러나 「葛文」을 「주근」으로 訓讀하야 死의 意味로 解釋한 것은, 葛文의 本訓(칙글)으로 보아도 妥當하다고 생각키 어려우며, 또 古代의 習俗이 아모리 素樸하였다 할지라도 「주근」이라는 것은 所謂 追封 稱號의 性質上으로 보아도 맛당한 것으로는 믿기 어려운 바이다.
이와 같은 경향을 띤 해석이 최근에 이르러도 또한 적지 아니한 것이니, 갈성말치(○○○○)인물(葛城末治) 씨는 신라의 갈문왕에 대하여 모두 추봉이라는 단정 아래에서 갈문을 ‘칙혀’ 즉 ‘칙혀올림’의 미래동사인 Chic-kul로 훈독할 것이라 하여 갈문왕을 숭상왕(崇上王)이라는 의미라 하였으며동양학보학술지 제13권 제4호권호·갈성말치인물 씨의 「新羅斯文王に就て원고 최근에 양주동(○○○)인물 씨도 갈문왕을 추봉의 것으로 보고 갈문왕을 갈만님금(장왕(藏王))으로 읽을 것이며 또 혹 ‘交’‘代’의 옛 훈(訓)이 ‘갈마든다’라는 것으로 대왕(代王)의 뜻으로도 해석할 것이라 하고, 다시 적확한 해석이라 하여 염(殮)의 훈(訓) ‘갈물’을 들어 갈문왕은 ‘훙왕(薨王)’이라고 해석하였다청구학총학술지 제22호권호 양주동인물 씨의 「葛文王·その他원고. 이상 양씨인물의 해석에 대하여 먼저 {{TagPerson갈성}} 씨의 설로 보면 갈문의 훈(訓)으로 든 ‘칙글’을 ‘칙힐’이라는 미래동사와 같이 본다 하더라도 현대어인 미래동사를 가지고 대번에 신라 고대에 끄집어 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생각한다. 비록 {{TagPerson갈성}} 씨는 자기의 설을 변호하기 위하여 “遺事王暦 篇に 「第十四儒禮尼師今 一作世里智王」と出づ 儒禮は 弩儒又は儒理とも書し世nuliを 義讀したるものにして 智は人名の後に 附する敬稱たり 訓蒙字に 世の義を nuliとせるにて知るべし云云”이라는 예를 들어 “史記及遺の二書に 收載せられたる當時の地名·人名·官職名·其の他金石に鐫刻せられたる史? 讀等に就て 文字の用例を見るに, 吾人が 今日用ふるものと酷似せるは 勿論云云”이라고 논하고(실은 지금에는 ‘세(世)’를 누리라고도 하지 않지마는), 다시 신라의 어법에 대하여 “而して當時の語辭には 今日の如き過·現‧來の劃然たる區別なかりしものならん”앞의 동양학보학술지이라는 독단적 변해를 내렸다. 이것은 ‘칙힐’이라는 말이 신라에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암암리에 변해하는 동시에 신라말에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획연치 못하였다는 것은 갈문이 소위 미래동사가 됨을 도호(塗糊)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에 ‘칙힐’이라는 말이 있고 없던 것과 신라말에 과거(過)·현재(現)·미래(來)가 구분이 획연하였던지 안 하였던지는 아직 별문제로 하고라도 다만 씨가 근거한 현대어 ‘칙힐’을 가지고 보면 과거에 속한 인물(?)의 추봉에 미래동사를 칭호로 붙였다는 것은 자못 모순된 혐(嫌)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커다란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쪽수▶P184-2이와 같은 傾向을 띠운 解釋이 最近에 이르러도 또한 적지 아니한 것이니, 葛城末治(○○○○) 氏는 新羅의 葛文王에 對하야 모두 追封이라는 斷定 아래에서 葛文을 「칙혀」 卽 「칙혀올림」의 未來動詞인 Chic-kul로 訓讀할 것이라 하야 葛文王을 崇上王이라는 意味라 하였으며東洋學報 第十三卷 第四號·葛城末治 氏의 「新羅斯文王に就て」 最近에 梁柱東(○○○) 氏도 葛文王을 追封의 것으로 보고 葛文王을 갈만님금(藏王)으로 읽을 것이며 또 或 「交」「代」의 古訓이 「갈마든다」라는 것으로 代王의 義로도 解釋할 것이라 하고, 다시 的確한 解釋이라 하야 殮의 訓 「갈물」을 들어 葛文王은 「薨王」이라고 解釋하였다靑丘學叢 第二十二號 梁柱東 氏의 「葛文王·その他」. 以上 兩氏의 解釋에 對하야 먼저 葛城 氏의 說로 보면 葛文의 訓으로 든 「칙글」을 「칙힐」이라는 未來動詞와 같이 보아준다 하더라도 現代語인 未來動詞를 가지고 대번에 新羅 古代에 끄집어 올리는 것은 매우 危險한 일로 생각한다. 비록 葛城 氏 는 自己의 說을 辯護하기 爲하야 『遺事王暦 篇に 「第十四儒禮尼師今 一作世里智王」と出づ 儒禮は 弩儒又は儒理とも書し世nuliを 義讀したるものにして 智は人名の後に 附する敬稱たり 訓蒙字に 世の義を nuliとせるにて知るべし云云』이라는 예를 들어 『史記及遺の二書に 收載せられたる當時の地名·人名·官職名·其の他金石に鐫刻せられたる史? 讀等に就て 文字の用例を見るに, 吾人が 今日用ふるものと酷似せるは 勿論云云」이라고 論하고(實은 現今에는 「世」를 누리라고도 하지 않지마는), 다시 新羅의 語法에 對하야 「而して當時の語辭には 今日の如き過·現‧來の劃然たる區別なかりしものならん」前擧 東洋學報이라는 獨斷的 辯解를 나리였다. 이것은 「칙힐」이라는 말이 新羅에도 있었으리▶P185-1라는 것을 暗暗理에 辯解하는 同時에 新羅말에 過去 現在 未來의 區別이 劃然치 못하였다는 것은 葛交이 所謂 未來動詞가 됨을 塗糊하려는 意圖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新羅에 「칙힐」이라는 말이 있고 없던 것과 新羅말에 過·現·來가 區分이 劃然하였던지 안 하였던지는 아직 別問題로 하고라도 다만 氏의 根據한 現代語 「칙힐」을 가지고 보면 過去에 屬한 人物(?)의 追封에 未來動詞를 稱號로 부첫다는 것은 자못 矛盾된 嫌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多大한 疑問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다음 양주동인물 씨의 갈만임금설은 비록 장염(藏殮)의 훈(訓)을 훈몽자회서적석봉천자문서적에서 취하였다 하나 이 역시 근세어에 준거한 것이라 반드시 고대 신라에 소급하여 틀림없음을 보증하기 어려우며, 또 갈문왕을 ‘갈만님금’으로 읽는다면 적어도 갈문왕의 왕을 이사(질)으로 쓴 예가 없는 이상에 자못 속단의 혐이 없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갈문왕의 왕과 이사금, 마립간 등의 관계는 아래 글에서 논할 터) 그리고 갈만님금 즉 훙왕은 황이재인물의 주근왕 즉 ‘사왕(死王)’설과 같은 해석으로서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死)’ 또는 ‘훙(薨)’은 칭호로서의 타당성이 적으며, 소위 추봉설로 보아도 별 의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쪽수▶P185-2다음 梁柱東 氏의 갈만임금說은 비록 藏殮의 訓을 訓蒙字會와 石峯千字文에서 取하였다 하나 이 亦 近世語에 準據한 것이라 반드시 古代 新羅에 溯及하야 틀림없음을 保證키 어려우며, 또 葛文王을 「갈만님금」으로 읽는다면 적어도 葛文王의 王을 尼師(叱)으로 쓴 例가 없는 以上에 자못 速斷의 嫌이 不無한 것으로 생각된다. (葛文王의 王과 尼師今 麻立干 等의 關係는 下文에서 論할 터) 그리고 갈만님금 即 薨王은 黃頤齋의 주근王 即 「死王」說과 同樣의 解釋으로서 우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死」 또는 「薨」은 稱號로서의 妥當性이 적으며, 所謂 追封說로 보와도 別意義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상에서 열거한 성호인물로부터 양주동인물 씨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갈문왕에 대한 해석은 나의 억측일지는 모르나 거의 다 그의 근거를 추봉에 둔 듯싶다. 추봉은 사자를 전제로 하는 만큼 사(死)로서의 해설이 이와 같이 면면하여 끊임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기서적유사서적를 통틀어보면 일찍이 고 금서룡인물(今西龍) 박사도 지적한 바와 같이 추봉에만 한한 칭호가 아닌 듯하니신라사연구서적·신라갈문왕고원고, 사기서적유사서적에 의하여 살펴보면 갈문왕의 칭호를 가진 이로는 일지(日知) 갈문왕을 비롯하여 갈문왕 사공(史恭)에 이르기까지 대개 17, 8명을 들 수가 있으나 그 가운데에 ‘봉(封)’으로 말미암아 된 갈문왕은 6명에 지나지 못하고 그 외는 모두 갈문왕모 또는 모갈문왕으로(갈문왕호를 붙이는데, 이와 같은 두 가지 예가 있으나 의미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임) 보일 뿐으로서 그들 갈문왕은 과연 봉함으로 인하여 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봉으로 인하여 된 것으로 보이는 6명의 갈문왕에 대하여 살펴보면
쪽수▶P185-3以上에서 列擧한 星湖로부터 梁柱東 氏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葛文王에 對한 解釋은 나의 臆測일지는 모르나 거의 다 그의 根據를 追封에 둔 듯싶다. 追封은 死者를 前提로 하는 만큼 死로서의 解說이 이와 같이 綿綿하야 끊임없는 것이다. 그러나 史記나 遺事를 通트러보면 일찍이 故今 西龍 博士도 指摘한 바와 같이 追封에만 限한 稱號가 아닌 듯하니新羅史硏究·新羅葛文王考, 史記와 遺事에 依하야 살펴보면 葛文王의 稱號를 가진 이로는 日知 葛文王을 비롯하야 葛文王 史恭에 이르기까지 대개 十七八名을 들 수가 있으나 그 가운대에 「封」으로 말미암어 된 葛文王은 六名에 지나지 못하고 ▶P186-1그 外는 모두 葛文王某 또는 某葛文王으로(葛文王號를 부치는데, 이와 같은 두 가지 例가 있으나 意味에 있어서는 同一한 것임) 뵈일 뿐으로서 그들 葛文王은 果然 封함으로 因하야 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封으로 因하야 된 것으로 뵈이는 六名의 葛文王에 就하야 살펴보면

5-1▶(1), 封朴阿道 爲葛文王삼국사기서적 권1 일성이사금인물 15년조
5-2▶(2), 封父骨正 爲世神葛文王같은 책서적 권2 첨해이사금인물 원년조
5-3▶(3), 封老仇道 爲葛文王같은 책서적 같은 권 미추이사금인물 2년조
5-4▶(4), 八月以伊飡弩里夫 爲上大等 封母弟伯飯 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같은 책서적 권5 진평왕인물 원년조
5-5▶현대문주3▶(5), 태종 무열왕인물의 아버지 문흥(文興) 갈문왕[a 3]

쪽수▶P186-2

5-1▶(1), 封朴阿道 爲葛文王三國史記 卷一 逸聖 尼師今 十五年條
5-2▶(2), 封父骨正 爲世神葛文王仝書 卷二 沾解 尼師今 元年條
5-3▶(3), 封老仇道 爲葛文王仝書 仝卷 味鄒 尼師今 二年條
5-4▶(4), 八月以伊飡弩里夫 爲上大等 封母弟伯飯 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仝書 卷四 眞平王 元年條
5-5▶원문주3▶(5), 太宗 武烈王의 父 文興 葛文王[3]

이상 6명의 갈문왕은 ‘봉’으로 인하여 될 듯하나, 과연 추봉에 속한 것인가 다시 이에 관하여 살펴보면, (1)박아도(朴阿道)에 있어서는 “封朴阿道爲葛文王”이라는 단편적 기사뿐이므로 이것을 가지고 추봉 여부를 논하기는 원래 불가능한 것이며, (2)골정(骨正)은 벌휴이사금인물제9대의 장자로서 내해이사금인물제10대 즉위 이전에 이미 사거(死去)하였음으로 그의 아들 첨해이사금인물제12대 때에 세신(世神)이라는 미호(美號)를 붙여 추봉한 것으로 믿으며 현대문주4▶(3)구도(仇道)는 미추이사금인물이 아버지로서 미추이사금인물 2년에 봉한 것이니, 갈성인물 씨도 지적한 바와 같이[a 4] 연령상으로 보아 추봉인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4)진정(眞正) 갈문왕(백반(伯飯))과 진안 갈문왕(국반(國飯) 갈문왕으로도 보임)에 있어서는 우선 진안 갈문왕을 들어 살펴보면 그는 진평왕인물의 아우요 진덕여왕인물의 아버지니 만일 진안 갈문왕이라는 것이 추봉이라면 국반(국분(國芬), 국안(國安)으로도 쓰였음)은 진평왕인물 원년까지 사거한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그렇다면 진덕여왕인물이 태어난 해를 국반이 추봉된 해 즉 진평왕인물 원년(서기 579)으로 가정하여도 여왕이 즉위한 때의(서기 647) 연령은 69세의 노령일지니 사기서적(권5)에 여왕에 대하여 “姿質豊麗長七尺 垂手過膝”이라는 기사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사정을 아울러 생각해 보면, 여왕이 칠십의 노령으로 즉위하였다고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진평왕인물 원년에 국반을 봉한 것이 추봉인지 아닌지는 아직 연구해 볼 문제라고 생각하며, 다음 (5)태종 무열왕인물의 아버지 용춘(龍春)에 관하여는 사기서적“追封王考 爲文興大王”유사서적“龍春卓文興葛文王”이라는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문흥 갈문왕이라는 것은 추봉으로도 간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주3 참조.
쪽수▶P186-3以上 六名의 葛文王은 「封」으로 因하야 될 듯하나, 果然 追封에 屬한 것인가 다시 이에 關하야 살펴보면, (1)朴阿道에 있어서는 「封朴阿道爲葛文王」이라는 斷片的 記事뿐임으로 이것을 가지고 追封 與否를 論하기는 元來 不可能한 것이며, (2)骨正은 伐休 尼師今第九代의 長子로서 奈解 尼師今第十代 即位 以前에 이미 死去하였음으로 그의 子 沾解 尼師今第十二代 때에 世神이라는 美號를 부처 追封한 것으로 믿으며 원문주4▶(3)仇道는 味鄒尼師今이 父로서 味鄒尼師今 二年에 封한 것이니, 葛城 氏도 指摘한 바와 같이[4] 年齡上으로 보와 追封인 것을 推察할 수가 있는 것이다. (4)眞正 葛文王(伯飯)과 眞安 葛文王(國飯 葛文王으로도 뵈임)에 있어서는 우선 眞安 葛文王을 들어 살펴보면 그는 眞平王의 母弟요 眞德女王의 父니 만일 眞安葛文王이라는 것이 追封이라면 國飯(國芬 國安으로도 씨엿슴)은 眞平王 元年까지에 死去한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그럿타면 眞德女王의 生年을 國飯의 追封된 해 即 眞平王 元年(西紀五七九)으로 假定하여도 女王의 即位▶P187-1한 때의(西紀六四七) 年齡은 六十九成의 老齡일지니 史記(卷五)에 女王에 對하야 「姿質豊麗長七尺 垂手過膝」이라는 記事라던지 其他 여러 가지 事情을 아울러 생각해 보면, 女王이 七十의 老齡으로 即位하였다고는 認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眞平王 元年에 國飯을 封한 것이 追封인지 아닌지는 아직 硏究해 볼 問題라고 생각하며, 다음 (5)太宗 武烈王의 父 龍春에 關하여는 史記의 「追封王考 爲文興大王」과 遺事의 「龍春卓文興葛文王」이라는 記事를 對照하야 보면 文興 葛文王이라는 것은 追封으로도 看做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註3 參照.
이와 같이 봉으로 인하여 된 6명의 갈문왕 중에도 추봉으로 확인되는 것은 겨우 세신(골정), 구도, 문흥의 3명뿐이니 만일 사기에 “追封皆稱葛文王”이라는 문구가 없었다 하면 추봉에 근거한 근세 이래의 여러 가지 해석이 과연 출현하게 되었을까도 의문일 것이다. 현대문주5▶그뿐만 아니라 상대 신라에 과연 추봉의 예가 있었던가도 문제이지만 그 위에 갈문왕이라는 명칭 자체에 있어서도 다만 갈문을 가지고 ‘왕(王)’의 수식사적 또는 형용사적으로만 해석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니 원래 신라에 있어 왕이라는 한식 칭호를 붙인 것이 지증왕인물 4년부터의 일이다.[a 5] 이와 같이 지증왕인물 4년 이전에는 국왕의 칭호로서도 거서간, 차차웅, 이사(질)금, 마립간 등을 붙였던 것이니, 특히 갈문왕에 한하여 이전부터 ‘왕’을 붙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며, 따라서 갈문이 만일 왕(王)자를 기다려 비로소 완전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적어도 지증왕 이전에는 갈문왕의 왕에 해당한 재래어를 붙였던 증좌가 없는 이상 그들의 해석은 타당성을 잃는 것이다.
쪽수▶P187-2이와 같이 封으로 因하야 된 六名의 葛文王 中에도 追封으로 確認되는 것은 겨우 世神(骨正) 仇道 文興의 三名뿐이니 만일 史記에 「追封皆稱葛文王」이라는 文句가 없었다 하면 追封에 根據한 近世 以來의 여러 가지 解釋이 果然 出現하게 되었을까도 疑問일 것이다. 원문주5▶그뿐만 아니라 上代 新羅에 果然 追封의 例가 있었던가도 問題려니와 그 우에 葛文王이라는 名稱 自體에 있어서도 다만 葛文을 가지고 「王」의 修飾詞的 또는 形容詞的으로만 解釋하기 어려운 點이 있는 것이니 元來 新羅에 있어 王이라는 漢式 稱號를 부친 것이 智證王 四年부터서의 일이다.[5] 이와 같이 智證王 四年 以前에는 國王의 稱號로서도 居西干 次次雄 尼師(叱)今 麻立干 等을 부쳤던 것이니, 特히 葛文王에 限하야 以前부터 「王」을 부첬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며, 따러서 葛文이 만일 王字를 기달러 비로소 完全한 意味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적어도 智證王 以前에는 葛文王의 王에 該當한 在來語를 부쳤던 證左가 없는 以上 그들의 解釋은 妥當性을 일른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초기부터 나타나는 갈문왕이라는 칭호에 있어 ‘왕’이라는 것만은 지증왕인물 이후에 붙여진 것일지나, 갈문이라는 것은 재래로 써 내려오던 독립적 의미를 갖춘 보통 칭호였던것이 아닐런가 한다. 만일 이 같은 억측이 용인된다면 갈문의 해석으로 왕(王)자를 기다려 비로소 의미를 나타나게 되는(갈문 밑에 왕에 해당하는 재래어의 붙여진 예가 없는 이상에) ‘주근’, ‘칙킬’, ‘갈믄’ 등은 독립적 칭호로 쓰일 것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쪽수▶P187-3그럼으로 新羅 初期부터 나타나는 葛文王이라는 稱號에 있어 「王」이라는 것만은 智證王 以後에 부처진 것일지나, 葛文이라는 것은 在來로 써나려오던 獨立的 意味를 가추운 普通 稱號이었던것이 아닐런가 한다. 만일 이 같은 臆測이 容認된다면 葛文의 解釋으로 王字를 기달러 비로소 意味를 나타나게 되는(葛文 밑에 王에 該當한 在來語의 부처진 例가 없는 以▶P188-1上에) 「주근」「칙킬」「갈믄」 等은 獨立的 稱號로 씨여질 것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갈문왕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이상에 열거한 추봉을 근거로 한 모든 설 이외에 근래에 또 금서룡(○○○)인물 박사의 골몸(骨身)설과 점패방지진(○○○○○)인물(鮎貝房之進) 씨의 갈천궁(葛川宮)설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금서인물 박사의 골몸설에 있어서는 그의 저 신라사연구서적·신라갈문왕고원고
쪽수▶P188-2葛文王에 對한 解釋에 있어서는 以上에 列擧한 追封을 根據로 한 諸說 以外에 近來에 또 今西龍(○○○) 博士의 골몸(骨身)說과 鮎貝房之進(○○○○○) 氏의 葛川宮說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今西 博士의 골몸說에 있어서는 그의 著 新羅史硏究·新羅葛文考에

葛Kal字を假りて表示せる語は, 骨Kol字を假りて表示せる親族家族の話なる可し, 即ち骨品の骨なる可し, 文は字音mumの假字にして, 身體の義即ち現代語の mom を表示せしものなるべし, 葛文は親身の義なる可し, 葛文王の王字は中古に至り漢字の使用流行するに至り恐らくば法興, 眞興の頃に於て漢譯せしものにして百濟に君の文字を用ひ, 日本に鶏彌と稱し, 新羅に於ては錦または今の假字を用ひし語なりしなる可し.

쪽수▶P188-3

葛Kal字を假りて表示せる語は, 骨Kol字を假りて表示せる親族家族の話なる可し, 即ち骨品の骨なる可し, 文は字音mumの假字にして, 身體の義即ち現代語の mom を表示せしものなるべし, 葛文は親身の義なる可し, 葛文王の王字は中古に至り漢字の使用流行するに至り恐らくば法興, 眞興の頃に於て漢譯せしものにして百濟に君の文字を用ひ, 日本に鶏彌と稱し, 新羅に於ては錦または今の假字を用ひし語なりしなる可し.

라 하였다. 이 설에 있어 ‘골몸’과 ‘갈문’과의 어음 관계는 아직 그만두고라도 (가)골(骨)은 신라 골품의 골이라 하였으나 신라에는 성골, 진골 또는 제1골, 제2골의 구별이 있었으니 어느 골을 가르쳐 골몸이라 하였는지 ‘친신(親身)의 뜻’이라는 것만 가지고는 막연한 감이 있으며 (나)신라어에 있어 ‘골몸’에 대응되는 말로 모모(某々)의 몸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 이상 골몸이라는 말이 조선어상으로 보아 생소한 느낌을 주는 것이며, 갈문왕의 왕은 법흥인물, 진흥왕인물쯤에 한역(漢譯)한 것으로서 백제는 군(君)자를 쓰고 일본에는 계미(鷄彌)라 칭하고 신라에 있어서는 금(錦) 또는 가(假)자를 썻던 말일지라 하였으나 갈문금(葛文錦) 또는 갈문금(葛文今)으로 쓰인 증적(證跡)이 없는 이상 결국 무의미한 추론에 불과한 것이니, 이와 같은 점으로 보아 금서인물 박사 설을 추종하기 어려우며, 다음 점패인물 씨의 갈천궁설에 있어서는 갈문을 지명으로 보는 견지에서 갈문의 문을 차수(借水)의 방언이라 하여 천(川)의 차자(借字)로 보며 또 문(文)의 훈(訓) ‘글’은 골(항(巷), 동(洞), 곡(谷))의 차자로도 보아 갈문이 지명일 것을 논단하고, 삼국사기서적(직관지)에 보이는 궁호(宮號)를 열거한 뒤에 특히 갈천궁전(宮典)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쪽수▶P188-4라 하였다. 이 說에 있어 「골몸」과 「갈문」과의 語音 關係는 아직 그만두고라도 (가)骨은 新羅 骨品의 骨이라 하였으나 新羅에는 聖骨 眞骨 또는 第一骨 第二骨의 區別이 있었으니 어느 骨을 가르쳐 骨몸이라 하였는지 「親身의 義」라는 것만 가지고는 漠然한 感이 있으며 (나)新羅語에 있어 「골몸」에 對應되는 語로 某々의 몸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 以上 골몸이라는 말이 朝鮮語上으로 보와 生疎한 늣낌을 주는 것이며, 葛文王의 王은 法興, 眞興王頃에 漢譯한 것으로서 百濟에 君字를 쓰고 日本에는 鷄彌라 稱하고 新羅에 있어서는 錦 또는 假字를 썻던 語일지라󰡕 하였으나 葛文錦 또는 葛文今으로 씨인 證跡이 없는 以上 結局 無意味한 推論에 不過한 것이니, 이와 같은 點으로 보아 今西 博士 說에 追從키 어려우며, 다음 鮎貝 氏의 葛川宮說에 있어서는 葛文을 地名으로 보는 見地에서 葛文의 文을 借水의 方言이라 하야 川의 借字로 보며 또 文의 訓 「글」은 골(巷, 洞, 谷)의 借字로도 보와 葛文이 地名일 것을 論斷하고, 三國史記(職官志)에 보이는 宮號를 列擧한 後에 特히 葛川宮典이라는 것에 着眼하야

右宮號城の中葛川宮の葛川は正に葛文にして五萬分地圖寧越の里名葛文里とも同名となる譯なり, 今慶州を中心として葛川と云ふ川名無きかを廣く聞質すも是と同名一切無し, 唯慶州の東北邦里約二里許に左の辰韓六村の一なる習比部 後の臨川部屬村に葛谷と云ふ里名あり(中略) 葛谷は今も同名にて現存しあること, 五萬分地圖所載の如く, 共南約十町許にして勿川里あり(中略) 葛谷里の葛と 勿川里の勿とを合すれば葛文にして 川とを合すれば葛川となれば, 新羅盛時には本と一部落たりしを後代衰殘して別々の里名となりしにあらざるかを思ふものなり.점패인물 씨·잡고(雜攷) 왕 제1집·갈문조

쪽수▶P189-1

右宮號城の中葛川宮の葛川は正に葛文にして五萬分地圖寧越の里名葛文里とも同名となる譯なり, 今慶州を中心として葛川と云ふ川名無きかを廣く聞質すも是と同名一切無し, 唯慶州の東北邦里約二里許に左の辰韓六村の一なる習比部 後の臨川部屬村に葛谷と云ふ里名あり(中略) 葛谷は今も同名にて現存しあること, 五萬分地圖所載の如く, 共南約十町許にして勿川里あり(中略) 葛谷里の葛と 勿川里の勿とを合すれば葛文にして 川とを合すれば葛川となれば, 新羅盛時には本と一部落たりしを後代衰殘して別々の里名となりしにあらざるかを思ふものなり.鮎貝 氏·雜攷王 第一輯·葛文條

라 하여 갈문을 갈천으로 속단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갈곡(葛谷)의 갈과 물천리(勿川里)의 물을 합하면 갈문이 되고, 물천리의 천을 합하면 갈천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유스러운 추론으로서 독단의 도를 넘은 듯하며, 그리고 이와 같이 갈문을 지명으로 본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쪽수▶P189-2라 하야 葛文을 葛川으로 速斷하고, 그것을 立證하기 爲하야 葛谷의 葛과 勿川里의 勿을 合하면 葛文이 되고, 勿川里의 川을 合하면 葛川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自由스러운 推論으로서 獨斷의 度를 넘은 듯하며, 그리고 이와 같이 葛文을 地名으로 본 다음과 같은 結論을 나리게 되었다.

さて此の宮號に地名を稱したるは最近までも繼續され居たる朝鮮の習俗たりしなり, 即ち 「王の生家」「王妃の生家」「王子大君の家」を稱して明禮宮, 於義宮, 壽進宮, 龍洞宮, 雲峴宮, 竹洞宮, 樓洞宮, 磚洞宮 等, 坊名詞名を一般が稱し居たるは新羅の遺俗なり, 又直に此の宮號を人敬稱にも移して, 雲峴大監(註略) 竹洞大監(註略) 桂洞大監(註略と稱したるなり(註略)即ち大監が王に代はりたる丈けにて葛文王と同一の稱呼なり.점패인물 씨 지음, 위의 책

쪽수▶P189-3

さて此の宮號に地名を稱したるは最近までも繼續され居たる朝鮮の習俗たりしなり, 即ち 「王の生家」「王妃の生家」「王子大君の家」を稱して明禮宮, 於義宮, 壽進宮, 龍洞宮, 雲峴宮, 竹洞宮, 樓洞宮, 磚洞宮 等, 坊名詞名を一般が稱し居たるは新羅の遺俗なり, 又直に此の宮號を人敬稱にも移して, 雲峴大監(註略) 竹洞大監(註略) 桂洞大監(註略と稱したるなり(註略)即ち大監が王に代はりたる丈けにて葛文王と同一の稱呼なり.鮎貝 氏 著 仝上

라 하여 갈문왕은 갈천궁에 살던 인물들이라는 것을 논단하였다. 이 설에 있어서는 (가)우선 갈문이 지명으로서의 갈천인 것이 의문이며, (나)근세 조선의 습속이라 하여 궁호에 지명을 붙이고 또 궁호를 ‘인경칭(人敬稱)’에 옮겨 쓰는 것을 (이런 것은 조선뿐만 아니겠으나) 들어 대번에 상대 신라의 오랜 습속이라 하는 것도 아직 연구의 여지가 있는 문제요, (다)또는 신라 상대로부터 통일기에 이르기까지 약 600년간의 각 씨족의 수많은 갈문왕들이 갈천궁에서만 살았더라는 것은 양주동인물 씨도 지적한 바와 같이청구학총학술지 제22호권호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점패인물 씨 설에도 커다란 의문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89-4라 하야 葛文王은 葛川宮에 살던 人物들이라는 것을 論斷하였다. 이 說에 있어서는 (가)우선 葛文이 地名으로서의 葛川인 것이 疑問이며, (나)近世 朝鮮의 習俗이라 하야 宮號에 地名을 부치고 또 宮號를 「人敬稱」에 옮겨 쓰는 것을 (이런 것은 朝鮮뿐만 아니겠으나) 들어 대번에 上代 新羅의 古習이라 하는 것도 아직 硏究의 餘地가 있는 問題요, (다)또는 新羅 上代▶P190-1로부터 統一期에 이르기까지 約 六百年間의 各 氏族의 數만흔 葛文王들이 葛川宮에서만 사럿드라는 것은 梁柱東 氏도 指摘한 바와 같이靑丘學叢 二十二號 想像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鮎貝 氏 說에도 多大한 疑問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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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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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三國遺事(卷一) 第二 南解王條에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羅末名儒崔致遠 作帝王三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今記新羅事 具存方言 亦宜矣 羅人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이라 한 것과 三國史記(卷四) 智證 麻立干條에「論日新羅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中略)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라 한 것을 對照해보면 內容과 句法이 서로 一致하며 또 遺事(卷三) 原宗興法條에 註로서 「羅人凡追封王者 皆稱葛文王 其實 史臣亦云未詳」이라 한 것을 보면 史臣은 金富軾을 가르친 것이며 「史論曰云云」은 「忠臣金富軾論曰云云」으로 解釋된다.
  2. 助賁 尼師今과 그의 弟 沾解 尼師今의 父는 骨正(世神) 葛文王이요 味鄒王은 父 仇道를 葛文王에 封하였으며(三國史記 卷二) 智證 麻立干은 習寶 葛文王의 子요 眞興王은 葛文王 立宗의 子요(仝書卷四) 太宗 武烈王은 (卓)文興 葛文王의 子다(三國遺事·王曆).
  3. 三國遺事(王曆) 第二十九 太宗 武烈王條에 「名春秋, 金氏, 眞智王子龍春卓文興葛文王之子也 龍春一作龍樹」라 하였고 三國史記 卷五 太宗 武烈王 元年條에 「夏四月 追封王考僞文興大王」이라 하엿나니 이 兩書의 記事를 對照하여 보면 龍春 卓 文興 葛文王의 卓字는 誤字 또는 衍字인 듯하며 文興 葛文王은 追封에 屬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음.
  4. 東洋學報 第十三卷 第四號·葛城末治 氏 「新羅女王に就いて」에 史記に考仇道を封じて葛文王と爲すとあるを以て是亦追討たらざるべからず 禮記に「生曰父曰母曰妻 死曰考曰祝曰嬪」とあり……按ずるに仇道は阿達羅王十九年波珍飡を拜し 伐休王二年仇須兮と興に左右軍主と爲りし人にして當時二十歳と假定すれば(中略)味鄒王二年は九十七歳に相當す 此の年齢より見るも味鄒王即位以前旣に死亡し 即位の後之を葛文王に追封したるものと解釋するを妥當とすべし云云.
  5. 三國史記(卷四) 智證王 四年條에 「冬十月 群臣上言(前略)又觀 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世 但稱方言 未正尊稱今群臣一意 謹上尊號新羅國王 王從之」라 뵈임.






현대문주


  1. 삼국유사서적(권1) 제2 남해왕조에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羅末名儒崔致遠 作帝王三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今記新羅事 具存方言 亦宜矣 羅人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이라 한 것과 삼국사기서적(권4) 지증마립간인물조에 “論日新羅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中略)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라 한 것을 대조해 보면 내용과 구법이 서로 일치하며 또 유사서적(권3) 원종흥법조에 주로서 “羅人凡追封王者 皆稱葛文王 其實 史臣亦云未詳”이라 한 것을 보면 사신(史臣)은 김부식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며 “史論曰云云”은 “忠臣金富軾論曰云云”으로 해석된다.
  2. 조분이사금인물과 그의 동생 첨해이사금인물의 아버지는 골정(세신) 갈문왕이요 미추왕인물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으며(삼국사기서적 권2) 지증 마립간은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요 진흥왕인물은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요(사기서적 권4) 태종 무열왕인물은 (탁)문흥 갈문왕의 아들이다(삼국유사서적·왕력)
  3. 삼국유사서적(왕력) 제29 태종 무열왕인물조에 “名春秋、金氏、眞智王子龍春卓文興葛文王之子也 龍春一作龍樹”라 하였고 삼국사기서적 권5 태종 무열왕 원년조에 “夏四月 追封王考僞文興大王”이라 하였으니 이 두 책의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용춘(龍春) 탁(卓) 문흥(文興) 갈문왕의 탁(卓)자는 오자 또는 연자(衍字)인 듯하며 문흥 갈문왕은 추봉에 속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음.
  4. 동양학보학술지 제13권 제4호권호 갈성말치인물 씨 「新羅女王に就いて원고」에 史記に考仇道を封じて葛文王と爲すとあるを以て是亦追討たらざるべからず 禮記に「生曰父曰母曰妻 死曰考曰祝曰嬪」とあり……按ずるに仇道は阿達羅王十九年波珍飡を拜し 伐休王二年仇須兮と興に左右軍主と爲りし人にして當時二十歳と假定すれば(中略)味鄒王二年は九十七歳に相當す 此の年齢より見るも味鄒王即位以前旣に死亡し 即位の後之を葛文王に追封したるものと解釋するを妥當とすべし云云.
  5. 삼국사기서적(권5) 지증왕인물 4년조에 “冬十月 群臣上言(前略)又觀 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世 但稱方言 未正尊稱今群臣一意 謹上尊號新羅國王 王從之”라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