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초기 국역편성의 기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본문2: 2.전법과 호)
(본문1: 1.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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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TagSpage|1-1}}國家가 人民에 對하여 그의 直接的인 勞働力을 收取한다는 것, 곧 賦役이라는 것은 一般的 自然經{{TagPage|2}}濟를 土臺로 하여 構成되는 封建的 國家의 한 徵表로서 周知되는 事實이다. 國家 財政의 運用이 現代의 그것과 根本的으로 相異한 封建的 國家는, 封鎻的이요 個個로 孤立한 一般的 自然經濟에 制限되는 것이므로 勞働力을 必要로 하는 모든 部門의 要求를 充當할랴면, 人民을 直接 徵發, 使役하는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大小의 土木 營繕에는 勿論이요, 李朝 初期와 같아서는, 宮中의 雜役과 兵器 什物의 製造에까지도 直接 人民을 徵發하여 이에 當케 하였고, 그뿐 아니라 煮塩, 牧夫, 租稅의 漕轉, 陶器, 磁器의 製造 等에도, 凡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朝鮮朝 初期의 人民이 지는 國役은 實로 많기도 많었든 것이다. 이러한 國役은 地方 官衙에서 地方的으로 必要로 하는 것과, 또 中央에서 國家 全體의 目的 아래에에서 必要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大別할 수 있을 줄 안다. 經國大典 戶典 徭賦條에 <cite no="01">「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cite>이라 한 것은 前者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該條 末尾의 細註에 <cite no="02">「京城底十里, 皆京役」</cite>이라 한 것으로도 自明한 事實이다. 이러한 地方的 國役은 그것이 如何한 史的 過程을 밟어왔든, 後者의 全體的 國役이라고 할 만한 것에 比하면, 小規模의 것이었고 地方에 딿아 또한 事情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本論에 있어서는 건다리지 않기로 한다. 後者인 全體的 國役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一時的인 것, 例하면 漢城都市建設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出戰 같은 것과 恒久的인 것과를 區別할 수 있으니, 本論의 이른바 國役이라는 것은, 곧, 이 全體的인 國役 中에서도 恒久的인 것을 가르친 것이다.
 
|목차1원문1번={{TagSpage|1-1}}國家가 人民에 對하여 그의 直接的인 勞働力을 收取한다는 것, 곧 賦役이라는 것은 一般的 自然經{{TagPage|2}}濟를 土臺로 하여 構成되는 封建的 國家의 한 徵表로서 周知되는 事實이다. 國家 財政의 運用이 現代의 그것과 根本的으로 相異한 封建的 國家는, 封鎻的이요 個個로 孤立한 一般的 自然經濟에 制限되는 것이므로 勞働力을 必要로 하는 모든 部門의 要求를 充當할랴면, 人民을 直接 徵發, 使役하는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大小의 土木 營繕에는 勿論이요, 李朝 初期와 같아서는, 宮中의 雜役과 兵器 什物의 製造에까지도 直接 人民을 徵發하여 이에 當케 하였고, 그뿐 아니라 煮塩, 牧夫, 租稅의 漕轉, 陶器, 磁器의 製造 等에도, 凡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朝鮮朝 初期의 人民이 지는 國役은 實로 많기도 많었든 것이다. 이러한 國役은 地方 官衙에서 地方的으로 必要로 하는 것과, 또 中央에서 國家 全體의 目的 아래에에서 必要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大別할 수 있을 줄 안다. 經國大典 戶典 徭賦條에 <cite no="01">「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cite>이라 한 것은 前者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該條 末尾의 細註에 <cite no="02">「京城底十里, 皆京役」</cite>이라 한 것으로도 自明한 事實이다. 이러한 地方的 國役은 그것이 如何한 史的 過程을 밟어왔든, 後者의 全體的 國役이라고 할 만한 것에 比하면, 小規模의 것이었고 地方에 딿아 또한 事情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本論에 있어서는 건다리지 않기로 한다. 後者인 全體的 國役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一時的인 것, 例하면 漢城都市建設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出戰 같은 것과 恒久的인 것과를 區別할 수 있으니, 本論의 이른바 國役이라는 것은, 곧, 이 全體的인 國役 中에서도 恒久的인 것을 가르친 것이다.
 
|목차1원문2번={{TagSpage|3-1}}이러한 意味의 國役에 對하여는 經國大典에도 別다른 規定이 없으니, 그것은 곧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이 勞働部隊가 提供되기 때문이었다. 朝鮮朝 初期의 兵制가 所謂 府兵制라 하야 國民皆兵主義의 原則에 立脚하였고, 身分이라는 것이 그 社會의 모든 人民의 活動을 規定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國民皆兵의 原則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判異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에 말한 勞働部隊가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提供되는 것도 이러한 身分을 土臺로 한 皆兵主義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兩班의 子孫이 저야 하는 兵役은 甲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賤人이 저야 하는 兵役은 굉이와 삽을 드는 勞働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軍役이라는 것은 單純한 兵役이 아니라, 當時의 國役의 根幹을 이루웠든 것이다. 世宗實錄 十年 八月 壬午條에 보이는 梁誠之의 意見은 此間의 消息을 端的으로 말하고 있다.
 
|목차1원문2번={{TagSpage|3-1}}이러한 意味의 國役에 對하여는 經國大典에도 別다른 規定이 없으니, 그것은 곧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이 勞働部隊가 提供되기 때문이었다. 朝鮮朝 初期의 兵制가 所謂 府兵制라 하야 國民皆兵主義의 原則에 立脚하였고, 身分이라는 것이 그 社會의 모든 人民의 活動을 規定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國民皆兵의 原則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判異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에 말한 勞働部隊가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提供되는 것도 이러한 身分을 土臺로 한 皆兵主義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兩班의 子孫이 저야 하는 兵役은 甲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賤人이 저야 하는 兵役은 굉이와 삽을 드는 勞働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軍役이라는 것은 單純한 兵役이 아니라, 當時의 國役의 根幹을 이루웠든 것이다. 世宗實錄 十年 八月 壬午條에 보이는 梁誠之의 意見은 此間의 消息을 端的으로 말하고 있다.
|목차1원문3번={TagSpage|3-2}}<blockquote no="01">(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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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번={{TagSpage|3-2}}<blockquote no="01">(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blockquote>
 
|목차1원문4번={{TagSpage|3-3}}梁誠之의 이 列擧가 當時의 諸色軍人을 總히 網羅한 것이냐 아니냐는 姑捨하고라도, 그가 諸色軍人을 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兵種論에 依하면 오늘날{{TagSpage|4-1}}의 技術的인 兵種과는 判異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當時의 兵種이 身分에 制限되여 決定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役軍이라든가 使命軍이라 하는 範疇를 番上軍이라든가 步軍이라든가 하는 範疇와 같은 價値에 있어서 論하였으나, 後者는 技術的인 것이었으므로 使令, 役軍과 同一視될 性質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兵種論에서 船軍을 빼었고 또 役軍인 隊卒과 公賤 中에서도 選上奴를 不問에 붙였다. 使令인 攝六十도 番上軍이요 步軍이었다. 그의 兵種論에 疎漏한 憾이 없지 않지만, 大體로 身分을 土臺로 하여 兵種을 論한 데에 그의 卓見이 보인다. 大概, 當時에 있어서 兵種을 區分하는 것은 身分이었고, 또한 反對로 軍役(國役)의 負擔에 있어서 다시 그의 身分은 細分化되였으니, 例하면, 身良役賤의 身分이었기 때문에 防牌는 활과 칼 代身에 굉이와 삽을 드는, 兵役 아닌 役軍이라는 兵役을 졌으며, 또한 그가 役軍인 防牌라는 兵役을 지는 데에서, 그의 身分은 身良役賤 中의 細分化된 防牌라는 身分이 되었든 것이다. 兵士라는 것은 적어도 朝鮮朝 初期에 있어서는 單純한 技術 上의 兵士가 아니라 그 社會 構成 關係에 있어서의 身分의 運命的인 存在相이었든 것이다.
 
|목차1원문4번={{TagSpage|3-3}}梁誠之의 이 列擧가 當時의 諸色軍人을 總히 網羅한 것이냐 아니냐는 姑捨하고라도, 그가 諸色軍人을 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兵種論에 依하면 오늘날{{TagSpage|4-1}}의 技術的인 兵種과는 判異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當時의 兵種이 身分에 制限되여 決定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役軍이라든가 使命軍이라 하는 範疇를 番上軍이라든가 步軍이라든가 하는 範疇와 같은 價値에 있어서 論하였으나, 後者는 技術的인 것이었으므로 使令, 役軍과 同一視될 性質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兵種論에서 船軍을 빼었고 또 役軍인 隊卒과 公賤 中에서도 選上奴를 不問에 붙였다. 使令인 攝六十도 番上軍이요 步軍이었다. 그의 兵種論에 疎漏한 憾이 없지 않지만, 大體로 身分을 土臺로 하여 兵種을 論한 데에 그의 卓見이 보인다. 大概, 當時에 있어서 兵種을 區分하는 것은 身分이었고, 또한 反對로 軍役(國役)의 負擔에 있어서 다시 그의 身分은 細分化되였으니, 例하면, 身良役賤의 身分이었기 때문에 防牌는 활과 칼 代身에 굉이와 삽을 드는, 兵役 아닌 役軍이라는 兵役을 졌으며, 또한 그가 役軍인 防牌라는 兵役을 지는 데에서, 그의 身分은 身良役賤 中의 細分化된 防牌라는 身分이 되었든 것이다. 兵士라는 것은 적어도 朝鮮朝 初期에 있어서는 單純한 技術 上의 兵士가 아니라 그 社會 構成 關係에 있어서의 身分의 運命的인 存在相이었든 것이다.
 
|목차1원문5번={{TagSpage|4-2}}이러한 意味의 兵士는 當時 一般的 自然經濟를 土臺로 하는 國家 財政의 特異한 運用에 依하야, 또 한번 潤色을 받게 되니, 當時의 兵制 組織의 解剖는 이 두 가지의 要素를 실마리로 하야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身分의 具現이었든 이 李朝 初期의 人民은 法制的인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組織되여, 國家에 對한 여러가지 負擔을 젔다. 兵役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兵{{TagPage|5-1}}士는 이戶口法의 手段에 依하야 처음 全 人民層에서 抽出되였든 것이다. 이렇게 하야 抽出된 兵士는 그의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 「成色」되였고, 國家는 이를 제가 가지는 特異한 方法으로서 組織하였든 것이다. 이렇듯 抽出 編成되는 兵士는, 또 다시 西班 官僚 組織의 一員으로서 編入되여, 처음 具體的인 兵士가 되였든 지라, 이 두 가지 過程에 依하야 처음, 單純한 人丁은 一個의 專門的인 兵士가 되니, 前者의 過程은 後者의 그것의 土臺요, 後者의 그것은 前者의 當然한 結果이지마는, 本論에 있어서는 軍役의 組織의 根本을 이루는 이 戶口法에서 그치기로 한다.
 
|목차1원문5번={{TagSpage|4-2}}이러한 意味의 兵士는 當時 一般的 自然經濟를 土臺로 하는 國家 財政의 特異한 運用에 依하야, 또 한번 潤色을 받게 되니, 當時의 兵制 組織의 解剖는 이 두 가지의 要素를 실마리로 하야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身分의 具現이었든 이 李朝 初期의 人民은 法制的인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組織되여, 國家에 對한 여러가지 負擔을 젔다. 兵役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兵{{TagPage|5-1}}士는 이戶口法의 手段에 依하야 처음 全 人民層에서 抽出되였든 것이다. 이렇게 하야 抽出된 兵士는 그의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 「成色」되였고, 國家는 이를 제가 가지는 特異한 方法으로서 組織하였든 것이다. 이렇듯 抽出 編成되는 兵士는, 또 다시 西班 官僚 組織의 一員으로서 編入되여, 처음 具體的인 兵士가 되였든 지라, 이 두 가지 過程에 依하야 처음, 單純한 人丁은 一個의 專門的인 兵士가 되니, 前者의 過程은 後者의 그것의 土臺요, 後者의 그것은 前者의 當然한 結果이지마는, 本論에 있어서는 軍役의 組織의 根本을 이루는 이 戶口法에서 그치기로 한다.
 
|목차1원문6번={{TagSpage|5-2}}戶口法이라는 것이 當時에 있어서의 身分 制度에 依存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戶口法이야말로 그 身分 制度를 强化하는 關鍵이었든 것이다. 곧 戶籍이라는 것이 그의 身分에 따라서, 特權의 證明書도 되고 兵役의 臺帳도 되는 것이었다. 李朝 初期의 全 人民이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人丁이 이에 依하야 抽出되고, 이렇듯 抽出된 人丁 中에서 또 軍人인 正丁이 다시 抽出되는 이러한 過程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形式 中에는, 高麗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中國(特히 唐)에 배운 바도 많었겠지만, 吾人은 이러한 虛無한 時間的 또는 空間的 關係에 言及치 않으랴 한다. 그것은 本論의 取材할 問題는 當時 社會의 構成 關係에서 因果 지워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形式的인 因緣이 그다지 重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當時의 戶籍이 如何히 中國式을 빌었고, 高麗의 形式에 배웠다고 하드래도, 當時의 獨特한 社會 構成 關係를 沒却한다면, 그는 이에 對하야 아모것도 會得치 몯할 것이{{TagPage|6-1}}다. 이렇듯이, 軍役과 戶口法을 論한다는 第一步에서 當時의 田法을 論하게 된 것이다. 大概, 戶口의 編成에 當面하야 이에 本質的인 制限을 줄 것은 그의 土地에 對한 所有 關係이기 때문이다.
 
|목차1원문6번={{TagSpage|5-2}}戶口法이라는 것이 當時에 있어서의 身分 制度에 依存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戶口法이야말로 그 身分 制度를 强化하는 關鍵이었든 것이다. 곧 戶籍이라는 것이 그의 身分에 따라서, 特權의 證明書도 되고 兵役의 臺帳도 되는 것이었다. 李朝 初期의 全 人民이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人丁이 이에 依하야 抽出되고, 이렇듯 抽出된 人丁 中에서 또 軍人인 正丁이 다시 抽出되는 이러한 過程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形式 中에는, 高麗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中國(特히 唐)에 배운 바도 많었겠지만, 吾人은 이러한 虛無한 時間的 또는 空間的 關係에 言及치 않으랴 한다. 그것은 本論의 取材할 問題는 當時 社會의 構成 關係에서 因果 지워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形式的인 因緣이 그다지 重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當時의 戶籍이 如何히 中國式을 빌었고, 高麗의 形式에 배웠다고 하드래도, 當時의 獨特한 社會 構成 關係를 沒却한다면, 그는 이에 對하야 아모것도 會得치 몯할 것이{{TagPage|6-1}}다. 이렇듯이, 軍役과 戶口法을 論한다는 第一步에서 當時의 田法을 論하게 된 것이다. 大概, 戶口의 編成에 當面하야 이에 本質的인 制限을 줄 것은 그의 土地에 對한 所有 關係이기 때문이다.
  
|목차1해독문1번=국가가 인민에 대하여 그의 직접적인 노동력을 수취한다는 것, 곧 부역이라는 것은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여 구성되는 봉건적 국가의 한 징표로서 주지되는 사실이다. 국가 재정의 운용이 현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봉건적 국가는, 봉쇄적이요 개개로 고립한 일반적 자연경제에 제한되는 것이므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부문의 요구를 충당하려면, 인민을 직접 징발, 사역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소(大小)의 토목 영선에는 물론이요, 이조초기와 같아서는, 궁중의 잡역과 병기 집물의 제조까지도 직접 인민을 징발하여 이에 당하게 하였고, 그뿐 아니라 자염, 목부, 조세의 조전, 도기, 자기의 제조 등에도, 모두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조선조 초기의 인민이 지는 국역은 실로 많기도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역은 지방 관아에서 지방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또 중앙에서 국가 전체의 목적 아래에서 필요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줄 안다. 경국대전 호전 요부조에 <cite no="01">”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cite>이라 한 것은 전자에 해당한 것인데, 그것은 해당 조 말미의 세주(細註)에 <cite no="02">”京城底十里, 皆京役”</cite>이라 한 것으로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지방적 국역은 그것이 여하한 사적 과정을 밟아 왔든, 후자의 전체적 국역이라고 할 만한 것에 비하면, 소규모의 것이었고 지방에 따라 또한 사정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본론에 있어서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다. 후자인 전체적 국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일시적인 것, 예를 들면 한성도시건설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출전 같은 것과 항구적인 것과를 구별할 수 있으니, 본론의 이른바 국역이라는 것은, 곧, 이 전체적인 국역 중에서도 항구적인 것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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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국가가 인민에 대하여 그의 직접적인 노동력을 수취한다는 것, 곧 부역이라는 것은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여 구성되는 봉건적 국가의 한 징표로서 주지되는 사실이다. 국가 재정의 운용이 현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봉건적 국가는, 봉쇄적이요 개개로 고립한 일반적 자연경제에 제한되는 것이므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부문의 요구를 충당하려면, 인민을 직접 징발, 사역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소(大小)의 토목 영선에는 물론이요, 이조초기와 같아서는, 궁중의 잡역과 병기 집물의 제조까지도 직접 인민을 징발하여 이에 당하게 하였고, 그뿐 아니라 자염, 목부, 조세의 조전, 도기, 자기의 제조 등에도, 모두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조선조 초기의 인민이 지는 국역은 실로 많기도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역은 지방 관아에서 지방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또 중앙에서 국가 전체의 목적 아래에서 필요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줄 안다. 경국대전 호전 요부조에 <cite no="01">”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cite>이라 한 것은 전자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해당 조 말미의 세주(細註)에 <cite no="02">”京城底十里, 皆京役”</cite>이라 한 것으로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지방적 국역은 그것이 여하한 사적 과정을 밟아 왔든, 후자의 전체적 국역이라고 할 만한 것에 비하면, 소규모의 것이었고 지방에 따라 또한 사정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본론에 있어서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다. 후자인 전체적 국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일시적인 것, 예를 들면 한성도시건설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출전 같은 것과 항구적인 것과를 구별할 수 있으니, 본론의 이른바 국역이라는 것은, 곧, 이 전체적인 국역 중에서도 항구적인 것을 가리킨 것이다.
 
|목차1해독문2번=이러한 의미의 국역에 대하여는 경국대전에도 별다른 규정이 없으니, 그것은 곧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이 노동부대가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초기의 병제가 소위 부병제라 하여 국민개병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였고, 신분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모든 인민의 활동을 규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국민개병의 원칙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위에 말한 노동부대가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제공되는 것도 이러한 신분을 토대로 한 개병주의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양반의 자손이 져야 하는 병역은 갑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천인이 져야 하는 병역은 괭이와 삽을 드는 노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병역이 아니라, 당시의 국역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세종실록 10년 8월 임오조에 보이는 양성지의 의견은 차간(此間)의 소식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목차1해독문2번=이러한 의미의 국역에 대하여는 경국대전에도 별다른 규정이 없으니, 그것은 곧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이 노동부대가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초기의 병제가 소위 부병제라 하여 국민개병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였고, 신분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모든 인민의 활동을 규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국민개병의 원칙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위에 말한 노동부대가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제공되는 것도 이러한 신분을 토대로 한 개병주의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양반의 자손이 져야 하는 병역은 갑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천인이 져야 하는 병역은 괭이와 삽을 드는 노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병역이 아니라, 당시의 국역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세종실록 10년 8월 임오조에 보이는 양성지의 의견은 차간(此間)의 소식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목차1해독문3번=<blockquote no="01">(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blockquote>
 
|목차1해독문3번=<blockquote no="01">(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blockquote>

2024년 10월 28일 (월) 12:0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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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초기 국역편성의 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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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李朝初期 國役編成의 基底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4 발행기관
저자 김석형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6월
시작쪽 1쪽 종료쪽 50쪽 전체쪽 50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머리말


국가가 인민에 대하여 그의 직접적인 노동력을 수취한다는 것, 곧 부역이라는 것은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여 구성되는 봉건적 국가의 한 징표로서 주지되는 사실이다. 국가 재정의 운용이 현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봉건적 국가는, 봉쇄적이요 개개로 고립한 일반적 자연경제에 제한되는 것이므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부문의 요구를 충당하려면, 인민을 직접 징발, 사역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소(大小)의 토목 영선에는 물론이요, 이조초기와 같아서는, 궁중의 잡역과 병기 집물의 제조까지도 직접 인민을 징발하여 이에 당하게 하였고, 그뿐 아니라 자염, 목부, 조세의 조전, 도기, 자기의 제조 등에도, 모두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조선조 초기의 인민이 지는 국역은 실로 많기도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역은 지방 관아에서 지방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또 중앙에서 국가 전체의 목적 아래에서 필요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줄 안다. 경국대전 호전 요부조에 ”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이라 한 것은 전자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해당 조 말미의 세주(細註)에 ”京城底十里, 皆京役”이라 한 것으로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지방적 국역은 그것이 여하한 사적 과정을 밟아 왔든, 후자의 전체적 국역이라고 할 만한 것에 비하면, 소규모의 것이었고 지방에 따라 또한 사정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본론에 있어서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다. 후자인 전체적 국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일시적인 것, 예를 들면 한성도시건설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출전 같은 것과 항구적인 것과를 구별할 수 있으니, 본론의 이른바 국역이라는 것은, 곧, 이 전체적인 국역 중에서도 항구적인 것을 가리킨 것이다.
쪽수▶P1-1國家가 人民에 對하여 그의 直接的인 勞働力을 收取한다는 것, 곧 賦役이라는 것은 一般的 自然經▶P2濟를 土臺로 하여 構成되는 封建的 國家의 한 徵表로서 周知되는 事實이다. 國家 財政의 運用이 現代의 그것과 根本的으로 相異한 封建的 國家는, 封鎻的이요 個個로 孤立한 一般的 自然經濟에 制限되는 것이므로 勞働力을 必要로 하는 모든 部門의 要求를 充當할랴면, 人民을 直接 徵發, 使役하는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大小의 土木 營繕에는 勿論이요, 李朝 初期와 같아서는, 宮中의 雜役과 兵器 什物의 製造에까지도 直接 人民을 徵發하여 이에 當케 하였고, 그뿐 아니라 煮塩, 牧夫, 租稅의 漕轉, 陶器, 磁器의 製造 等에도, 凡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朝鮮朝 初期의 人民이 지는 國役은 實로 많기도 많었든 것이다. 이러한 國役은 地方 官衙에서 地方的으로 必要로 하는 것과, 또 中央에서 國家 全體의 目的 아래에에서 必要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大別할 수 있을 줄 안다. 經國大典 戶典 徭賦條에 「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이라 한 것은 前者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該條 末尾의 細註에 「京城底十里, 皆京役」이라 한 것으로도 自明한 事實이다. 이러한 地方的 國役은 그것이 如何한 史的 過程을 밟어왔든, 後者의 全體的 國役이라고 할 만한 것에 比하면, 小規模의 것이었고 地方에 딿아 또한 事情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本論에 있어서는 건다리지 않기로 한다. 後者인 全體的 國役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一時的인 것, 例하면 漢城都市建設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出戰 같은 것과 恒久的인 것과를 區別할 수 있으니, 本論의 이른바 國役이라는 것은, 곧, 이 全體的인 國役 中에서도 恒久的인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국역에 대하여는 경국대전에도 별다른 규정이 없으니, 그것은 곧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이 노동부대가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초기의 병제가 소위 부병제라 하여 국민개병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였고, 신분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모든 인민의 활동을 규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국민개병의 원칙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위에 말한 노동부대가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제공되는 것도 이러한 신분을 토대로 한 개병주의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양반의 자손이 져야 하는 병역은 갑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천인이 져야 하는 병역은 괭이와 삽을 드는 노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병역이 아니라, 당시의 국역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세종실록 10년 8월 임오조에 보이는 양성지의 의견은 차간(此間)의 소식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쪽수▶P3-1이러한 意味의 國役에 對하여는 經國大典에도 別다른 規定이 없으니, 그것은 곧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이 勞働部隊가 提供되기 때문이었다. 朝鮮朝 初期의 兵制가 所謂 府兵制라 하야 國民皆兵主義의 原則에 立脚하였고, 身分이라는 것이 그 社會의 모든 人民의 活動을 規定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國民皆兵의 原則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判異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에 말한 勞働部隊가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提供되는 것도 이러한 身分을 土臺로 한 皆兵主義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兩班의 子孫이 저야 하는 兵役은 甲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賤人이 저야 하는 兵役은 굉이와 삽을 드는 勞働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軍役이라는 것은 單純한 兵役이 아니라, 當時의 國役의 根幹을 이루웠든 것이다. 世宗實錄 十年 八月 壬午條에 보이는 梁誠之의 意見은 此間의 消息을 端的으로 말하고 있다.

(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

쪽수▶P3-2

(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

양성지의 이 열거가 당시의 제색군인을 모두 망라한 것이냐 아니냐는 고사하고라도, 그가 제색군인을 역목(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병종론(兵種論)에 의하면 오늘날의 기술적인 병종과는 판이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당시의 병종이 신분에 제한되어 결정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역군이라든가 사명군이라 하는 범주를 번상군이라든가 보군이라든가 하는 범주와 같은 가치에 있어서 논하였으나, 후자는 기술적인 것이었으므로 사령, 역군과 동일시될 성질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병종론에서 선군을 빼었고 또 역군인 대졸과 공천 중에서도 선상노를 불문에 부쳤다. 사령인 섭(攝)60도 번상군이요 보군이었다. 그의 병종론에 소루(疎漏)한 감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신분을 토대로 하여 병종을 논한 데에 그의 탁견이 보인다. 대개, 당시에 있어서 병종을 구분하는 것은 신분이었고, 또한 반대로 군역(국역)의 부담에 있어서 다시 그의 신분은 세분화되었으니, 예를 들면,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방패는 활과 칼 대신에 괭이와 삽을 드는, 병역 아닌 역군이라는 병역을 졌으며, 또한 그가 역군인 방패라는 병역을 지는 데에서, 그의 신분은 신량역천 중의 세분화된 방패라는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병사라는 것은 적어도 조선조 초기에 있어서는 단순한 기술상의 병사가 아니라 그 사회 구성 관계에 있어서의 신분의 운명적인 존재상이었던 것이다.
쪽수▶P3-3梁誠之의 이 列擧가 當時의 諸色軍人을 總히 網羅한 것이냐 아니냐는 姑捨하고라도, 그가 諸色軍人을 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兵種論에 依하면 오늘날쪽수▶P4-1의 技術的인 兵種과는 判異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當時의 兵種이 身分에 制限되여 決定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役軍이라든가 使命軍이라 하는 範疇를 番上軍이라든가 步軍이라든가 하는 範疇와 같은 價値에 있어서 論하였으나, 後者는 技術的인 것이었으므로 使令, 役軍과 同一視될 性質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兵種論에서 船軍을 빼었고 또 役軍인 隊卒과 公賤 中에서도 選上奴를 不問에 붙였다. 使令인 攝六十도 番上軍이요 步軍이었다. 그의 兵種論에 疎漏한 憾이 없지 않지만, 大體로 身分을 土臺로 하여 兵種을 論한 데에 그의 卓見이 보인다. 大概, 當時에 있어서 兵種을 區分하는 것은 身分이었고, 또한 反對로 軍役(國役)의 負擔에 있어서 다시 그의 身分은 細分化되였으니, 例하면, 身良役賤의 身分이었기 때문에 防牌는 활과 칼 代身에 굉이와 삽을 드는, 兵役 아닌 役軍이라는 兵役을 졌으며, 또한 그가 役軍인 防牌라는 兵役을 지는 데에서, 그의 身分은 身良役賤 中의 細分化된 防牌라는 身分이 되었든 것이다. 兵士라는 것은 적어도 朝鮮朝 初期에 있어서는 單純한 技術 上의 兵士가 아니라 그 社會 構成 關係에 있어서의 身分의 運命的인 存在相이었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병사는 당시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는 국가 재정의 특이한 운용에 의하여, 또 한번 윤색을 받게 되니, 당시의 병제 조직의 해부는 이 두 가지의 요소를 실마리로 하여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신분의 구현이었던 이 이조초기의 인민은 법제적인 호구법에 의하여 편성되고 조직되어, 국가에 대한 여러가지 부담을 졌다. 병역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병사는 이 호구법의 수단에 의하여 처음 전 인민층에서 추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추출된 병사는 그의 신분적 제한에 있어서 ‘성색’되었고, 국가는 이를 제가 가지는 특이한 방법으로서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추출 편성되는 병사는, 또 다시 서반 관료 조직의 일원으로서 편입되어, 처음 구체적인 병사가 되었던 지라, 이 두 가지 과정에 의하여 처음, 단순한 인정(人丁)은 일개의 전문적인 병사가 되니, 전자의 과정은 후자의 그것의 토대요, 후자의 그것은 전자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본론에 있어서는 군역의 조직의 근본을 이루는 이 호구법에서 그치기로 한다.
쪽수▶P4-2이러한 意味의 兵士는 當時 一般的 自然經濟를 土臺로 하는 國家 財政의 特異한 運用에 依하야, 또 한번 潤色을 받게 되니, 當時의 兵制 組織의 解剖는 이 두 가지의 要素를 실마리로 하야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身分의 具現이었든 이 李朝 初期의 人民은 法制的인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組織되여, 國家에 對한 여러가지 負擔을 젔다. 兵役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兵▶P5-1士는 이戶口法의 手段에 依하야 처음 全 人民層에서 抽出되였든 것이다. 이렇게 하야 抽出된 兵士는 그의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 「成色」되였고, 國家는 이를 제가 가지는 特異한 方法으로서 組織하였든 것이다. 이렇듯 抽出 編成되는 兵士는, 또 다시 西班 官僚 組織의 一員으로서 編入되여, 처음 具體的인 兵士가 되였든 지라, 이 두 가지 過程에 依하야 처음, 單純한 人丁은 一個의 專門的인 兵士가 되니, 前者의 過程은 後者의 그것의 土臺요, 後者의 그것은 前者의 當然한 結果이지마는, 本論에 있어서는 軍役의 組織의 根本을 이루는 이 戶口法에서 그치기로 한다.
호구법이라는 것이 당시에 있어서의 신분 제도에 의존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호구법이야말로 그 신분 제도를 강화하는 관건이었던 것이다. 곧 호적이라는 것이 그의 신분에 따라서, 특권의 증명서도 되고 병역의 대장도 되는 것이었다. 이조초기의 전 인민이 호구법에 의하여 편성되고, 인정이 이에 의하여 추출되고, 이렇듯 추출된 인정 중에서 또 군인인 정정(正丁)이 다시 추출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형식 중에는, 고려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중국(특히 당)에 배운 바도 많았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허무한 시간적 또는 공간적 관계에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본론의 취재할 문제는 당시 사회의 구성 관계에서 인과 지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형식적인 인연이 그다지 중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시의 호적이 여하히 중국식을 빌렸고, 고려의 형식에 배웠다고 하더래도, 당시의 독특한 사회 구성 관계를 몰각한다면, 그는 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회득(會得)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이, 군역과 호구법을 논한다는 제일보(一步)에서 당시의 전법을 논하게 된 것이다. 대개, 호구의 편성에 당면하여 이에 본질적인 제한을 줄 것은 그의 토지에 대한 소유 관계이기 때문이다.
쪽수▶P5-2戶口法이라는 것이 當時에 있어서의 身分 制度에 依存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戶口法이야말로 그 身分 制度를 强化하는 關鍵이었든 것이다. 곧 戶籍이라는 것이 그의 身分에 따라서, 特權의 證明書도 되고 兵役의 臺帳도 되는 것이었다. 李朝 初期의 全 人民이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人丁이 이에 依하야 抽出되고, 이렇듯 抽出된 人丁 中에서 또 軍人인 正丁이 다시 抽出되는 이러한 過程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形式 中에는, 高麗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中國(特히 唐)에 배운 바도 많었겠지만, 吾人은 이러한 虛無한 時間的 또는 空間的 關係에 言及치 않으랴 한다. 그것은 本論의 取材할 問題는 當時 社會의 構成 關係에서 因果 지워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形式的인 因緣이 그다지 重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當時의 戶籍이 如何히 中國式을 빌었고, 高麗의 形式에 배웠다고 하드래도, 當時의 獨特한 社會 構成 關係를 沒却한다면, 그는 이에 對하야 아모것도 會得치 몯할 것이▶P6-1다. 이렇듯이, 軍役과 戶口法을 論한다는 第一步에서 當時의 田法을 論하게 된 것이다. 大概, 戶口의 編成에 當面하야 이에 本質的인 制限을 줄 것은 그의 土地에 對한 所有 關係이기 때문이다.


































본문2: 2.전법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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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3.호수와 봉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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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4.호적과 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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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5.군액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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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6.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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