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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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1: (1)삼별초난의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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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번={{TagSpage|35-2}}<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목차1-1원문3번={{TagSpage|35-2}}<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목차1-1원문4번={{TagSpage|35-3}}이라 하였다. 이것은 三別抄가 革罷되던 그 翌日인 六月 乙巳(一日)에 이러난 일이어니와 裴仲孫 盧永禧 等이 디디여 表面에 나타나 三別抄를 操縱하야 暴動을 이르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cite no="01">「蒙古兵大至 殺戮人民」</cite>이라 하야 民衆을 激昂 또는 恐動케 하고 다시 <cite no="02">「凡欲輔國者 皆會毬庭」</cite>이라 하야 그들의 目的이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同時에 民心을 오로지 外敵에 向케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云云한 「蒙古兵」은 이미 論한 바와 가치 元宗이 끌고 온 頭輦哥의 蒙古兵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當時 江都의 人民이 이에 應하야 바로 毬庭으로 모혀든 것을 보면 頭輦哥의 蒙古兵의 進入은 高麗의 軍民을 매우 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官民 特히 文武 兩班의 島外 脫出을 嚴重히 禁遏하였나{{TagPage|36}}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勢力의 分散과 要人의 脫走를 防止함과 아울러 島內의 事情의 漏洩됨을 念慮한 까닭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金剛庫 武器를 끄내여 軍卒에게 分與하였다는 것은 武裝의 擴充 强化를 意味하는 바어니와 여기에서 말한 軍卒이라는 것은 다만 三別抄만 가르친 것이 아닌 듯하니 當時 府衛兵은 비록 衰頺하였으나 오히려 國軍의 一部로서 存在하였음으로 생각컨대 三別抄 以外에도 江都에 散在한 府衛兵 또는 奴隸 等(三別抄가 奴隸를 만히 驅去 南下한 것으로 보와)을 糾合하야 武裝을 强制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元來 三別抄는 오랫동안 對蒙 抗戰에 活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와 이때에 비로소 金剛庫 武器로써 武裝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島內의 團束과 防備 計劃을 굳게 하는 한편에 王族이요 또 王室 近親인 {{TagRef|44}}承化侯 溫<ref>[[파일: 김상기 삼별초-1.png|가운데|1340px]]</ref>을 王으로 擁立하고 官府의 署置와 官員의 任命을 行하야 舊都에 도라간 松京 政府에 對하야 새로운 政府를 세운 것이다. 이는 蒙古에 屈服한 元宗을 國王으로 認치 아니함을 意味하는 것으로서 앞서 林衍의 元宗 擅廢와 그의 軌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抗蒙策을 續行함에는 統制된 國家的 體制가 또한 必要케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李白起와 蒙古에서 보내여 온 回回(註四十五)를 버렸나니 前者 卽 李白起를 버힌 것으로 보면 反對派를 威壓하야 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그들이 애초에 亂을 이르키려 劃策할 때에 李白起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나니 吾人은 이것을 가지고도 三別抄亂이 미리부터 어느 計劃 밑에서 進行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後者 卽 回回를 街上에서 버힌 것은 그들이 斷乎한 對蒙 態度를 다시 國人에게 보{{TagSpage|37-1}}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목차1-1원문4번={{TagSpage|35-3}}이라 하였다. 이것은 三別抄가 革罷되던 그 翌日인 六月 乙巳(一日)에 이러난 일이어니와 裴仲孫 盧永禧 等이 디디여 表面에 나타나 三別抄를 操縱하야 暴動을 이르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cite no="01">「蒙古兵大至 殺戮人民」</cite>이라 하야 民衆을 激昂 또는 恐動케 하고 다시 <cite no="02">「凡欲輔國者 皆會毬庭」</cite>이라 하야 그들의 目的이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同時에 民心을 오로지 外敵에 向케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云云한 「蒙古兵」은 이미 論한 바와 가치 元宗이 끌고 온 頭輦哥의 蒙古兵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當時 江都의 人民이 이에 應하야 바로 毬庭으로 모혀든 것을 보면 頭輦哥의 蒙古兵의 進入은 高麗의 軍民을 매우 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官民 特히 文武 兩班의 島外 脫出을 嚴重히 禁遏하였나{{TagPage|36}}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勢力의 分散과 要人의 脫走를 防止함과 아울러 島內의 事情의 漏洩됨을 念慮한 까닭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金剛庫 武器를 끄내여 軍卒에게 分與하였다는 것은 武裝의 擴充 强化를 意味하는 바어니와 여기에서 말한 軍卒이라는 것은 다만 三別抄만 가르친 것이 아닌 듯하니 當時 府衛兵은 비록 衰頺하였으나 오히려 國軍의 一部로서 存在하였음으로 생각컨대 三別抄 以外에도 江都에 散在한 府衛兵 또는 奴隸 等(三別抄가 奴隸를 만히 驅去 南下한 것으로 보와)을 糾合하야 武裝을 强制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元來 三別抄는 오랫동안 對蒙 抗戰에 活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와 이때에 비로소 金剛庫 武器로써 武裝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島內의 團束과 防備 計劃을 굳게 하는 한편에 王族이요 또 王室 近親인 {{TagRef|44}}承化侯 溫<ref>[[파일: 김상기 삼별초-1.png|가운데|1340px]]</ref>을 王으로 擁立하고 官府의 署置와 官員의 任命을 行하야 舊都에 도라간 松京 政府에 對하야 새로운 政府를 세운 것이다. 이는 蒙古에 屈服한 元宗을 國王으로 認치 아니함을 意味하는 것으로서 앞서 林衍의 元宗 擅廢와 그의 軌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抗蒙策을 續行함에는 統制된 國家的 體制가 또한 必要케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李白起와 蒙古에서 보내여 온 回回(註四十五)를 버렸나니 前者 卽 李白起를 버힌 것으로 보면 反對派를 威壓하야 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그들이 애초에 亂을 이르키려 劃策할 때에 李白起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나니 吾人은 이것을 가지고도 三別抄亂이 미리부터 어느 計劃 밑에서 進行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後者 卽 回回를 街上에서 버힌 것은 그들이 斷乎한 對蒙 態度를 다시 國人에게 보{{TagSpage|37-1}}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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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번={{TagSpage|37-2}}裴仲孫 等의 이러한 擧事는 絶對 決心과 覺悟가 없이는 行키 어려운 바로서 이것은 一時的 感情의 激昂에서 突發한 兵變도 아니요 또는 烏合之衆의 暴動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깊은 由來와 歷史的 根據가 있는 것임은 우에서 累述한 바와 같거니와 다시 江都를 손에 너코 敢然히 松京 側과 蒙古를 相對로 이러나게 된 三別抄 側의 戰略的 條件을 차저보면 ① 三別抄는 國軍의 中心이 되여왔음으로 三別抄가 갈러서게 되면 松京 側의 兵力은 甚히 {{TagRef|46}}貧弱한 것으로서<ref>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 六月條에 「以金方慶爲逆賊(〇三別抄를 가르친 것) 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 軍一千餘人 追討三別抄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追討使 金方慶이 겨우 六十餘名의 兵卒을 거느릴 程度로서 三別抄亂 卽後의 松京 側의 兵力이 甚히 貧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同書 元宗 十二年 四·五月條에 依하면 珍島 攻擊에 際하야 京軍을 增派할제 府衛兵이 그 額에 차지 못함으로 文武 散職 白丁 雜色과 및 僧徒를 뽑았으나 五百餘人에 지나지 못하였다.</ref> 蒙古와의 合作이 實現될지라도 三別抄 側으로 보면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던 것 ② 江華는 約 四十年 동안의 首都이었음으로 비록 元宗이 舊京 還都를 表明하였으나 國家의 中心은 아직도 江華이었으며 國家의 蓄積도 이곳에 있고 百宮들은 마짐 燕京으로부터 도라오는 元宗을 마지하며 만히 松京에 건너 갔으나 그들의 妻子들은 依然히 이곳에 남어 있는 狀態이었다. 그럼으로 國家의 蓄積은 그대로 三別抄의 資源이 되는 것이며(下見) 百官의 妻孥를 抑留함은 他日 松京 側을 어느 程度까지 牽制할 수가 있을 법한 것이었다. ③ 그 우에 所謂 「深入海島」는 歷代 抗蒙策에 있어 最高 또는 最後의 計劃으로 되여 온 것으로서 깊이 南方 海中 卽 珍島로 드러가 根據를 定하는 데에도 江都에 集中된 船隻을 驅用하는 것이 最好의 方途가 되였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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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번={{TagSpage|37-3}}다음 三別抄의 南下에 나아가 살펴보면 元來 江都는 塩河(甲串江)를 隔하야 陸地와 指呼의 사이에 있음으로 水戰에 拙劣한 蒙古兵과는 그곳을 根據로 하야 約 四十年 동안 對抗하여 왔으나 元宗이 蒙古와{{TagPage|38-1}} 結托한 以上 情勢는 前에 比하야 크게 變化한 바가 있어 다시 이곳을 根據로 하기는 到底히 不可能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三別抄 側에서는 애초부터 江都를 버리고 다시 南方 海上에 根據地를 求할 것은 넉넉히 推斷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런데 三別抄의 南下에 對하야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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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번={{TagSpage|38-2}}<blockquote no="02">江華守卒 多亡出陸 賊度不能守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 南下</blockquote>
|목차1-1원문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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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8번={{TagSpage|38-3}}라 한 記事가 보이나 이는 當時 松京 側에서 나린 臆測에 不過한 것으로서 그의 南下는 明白히 抗蒙派의 傳統策 또는 豫定 計劃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다. 다시 同傳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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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9번={{TagSpage|38-4}}<blockquote no="03">邦悅(〇判太史局事安邦悅)當還都時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blockquote>
|목차1-1원문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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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0번={{TagSpage|38-5}}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安邦悅이 還都時를 當하야 還都派를 따러 出陸할까 三別抄를 따러 入海할까 去就에 迷惑케 되였음으로 奉恩寺에 奉安한 太祖의 眞影 앞에 나아가 占을 처가지고 決定하였다는 것이다. 일로 보면 三別抄의 南下 計劃은 이미 「還都時」 以前에 定해졌던 것으로 解釋되는바 「還都時」라는 것은 대체 어느 때를 가르친 것인지 五月 二十三日에 還都를 榜示한 때가 아니면 同月 二十七日에 元宗이 燕京으로부터 松京에 도라올제 妃嬪 以下가 모다 江都에서 出陸하던 때를 가르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松京에서는 이미 同月 二十六日에 李仁成을 江華에 보내여 太祖의 眞影을 밧드러 간 {{TagRef|47}}點<ref>高麗史 卷二十六 元宗 十一年 五月 乙丑條 叅照.</ref>을 叅照하야 상고해보면 李仁成으로 말미암어 移安된 太祖의 眞影은 奉恩寺의 것으로 推斷되는 바로서 安邦{{TagPage|39-1}}悅의 占친 것은 二十六日 以前에 屬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그러타면 「還都時」라는 것은 還都를 榜示하던 二十三日을 가르친 것일지니 이와 가치 본다면 三別抄의 南下는 分明히 豫定 計劃이었음도 推斷할 수가 있는 同時에 이러한 計劃이야말로 三別抄로 하여금 大膽한 行動을 取케 한 一大 動機라고도 할지며 이러케 보는 데에서 安邦悅의 占친 意義도 더욱 閳明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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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1번={{TagSpage|39-2}}三別抄의 南下는 高麗史 元宗 十一年 六月 辛未(三日)條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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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2번={{TagSpage|39-3}}<blockquote no="04">剽掠子女財貨 乘舟南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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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3번={{TagSpage|39-4}}라 하야 動亂이 勃發된 그 再翌日인 六月 三日로 되여 있으나 다시 高麗紀事 至元 七年 六月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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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4번={{TagSpage|39-5}}<blockquote no="05">是日(〇二日)晩 植報 叛兵悉遁去 三日 世子愖(〇諶)報 叛兵劫府庫燒圖籍 逃入海中 行省使人覘江華 島中百姓皆空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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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5번={{TagSpage|39-6}}이라 한 記事와 叅照해보면 當時 三別抄는 江都의 人物 府庫를 휩쓰러 가지고 遷動한 만큼 하로 동안에는 到底히 完了치 못할 것으로서 二日부터 開始되여 三日에 이르러 끝난 것으로 解釋되는 바이며 所謂 그들의 「卷土入海」의 狀況에 關하야는 前擧 裴仲孫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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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6번={{TagSpage|39-7}}<blockquote no="06">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缸破江 舳艫相接 無慮千餘艘 時百官咸出迎王 其妻孥 皆爲賊所掠 慟哭之聲振動天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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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7번={{TagSpage|39-8}}라 한 記事와 元宗 十二年 八月에 蒙古 中書省에 보낸 高麗의 國書 가운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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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8번={{TagSpage|40-1}}<blockquote no="07">又若奴婢 各從其主者也 當其主順命就陸 乃因打疊家産而還江都者 悉被驅者(高麗史 卷二七)</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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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9번={{TagSpage|40-2}}라 한 것으로써 그의 概況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그 反面에 이로 因하야 松京 側에서 바든 打擊은 實로 深刻한 바가 있었다.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一年 六月 乙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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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0번={{TagSpage|40-3}}<blockquote no="08">幸頭輦哥屯所 (〇白州?) 時初出古京 衣冠未備 王及百官 皆以戒服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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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1번={{TagSpage|40-4}}이라 한 것이던지 仝 九月 癸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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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2번={{TagSpage|40-5}}<blockquote no="09">設藏經道場於本闕 王始備法駕 然侍從甚少 樂官未具 文武官多有步行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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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0번=
  
 
|목차1-1해독문1번=① 삼별초난의 발발과 그의 남하
 
|목차1-1해독문1번=① 삼별초난의 발발과 그의 남하
 
|목차1-1해독문2번=원종 11년 5월 무진(29일)에 혁파 문제를 계기로 하여 삼별초의 동란은 드디어 본격화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앞서 든 고려사 배중손전에
 
|목차1-1해독문2번=원종 11년 5월 무진(29일)에 혁파 문제를 계기로 하여 삼별초의 동란은 드디어 본격화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앞서 든 고려사 배중손전에
 
|목차1-1해독문3번=<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목차1-1해독문3번=<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목차1-1해독문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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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번=이라 하였다. 이것은 삼별초가 혁파되던 그 다음 날인 6월 을사(1일)에 일어난 일이거니와 배중손 노영희 등이 드디어 표면에 나타나 삼별초를 조종하여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cite no="01">”蒙古兵大至 殺戮人民”</cite>이라 하여 민중을 격앙 또는 공동(恐動)하게 하고 다시 <cite no="02">”凡欲輔國者 皆會毬庭”/cite>이라 하여 그들의 목적이 몽고병을 방어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동시에 민심을 오로지 외적에 향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운운한 ‘몽고병’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원종이 끌고 온 두련가(頭輦哥)의 몽고병을 가리킨 것이거니와 당시 강도의 인민이 이에 응하여 바로 구정(毬庭)으로 모여든 것을 보면 두련가의 몽고병의 진입은 고려의 군민을 매우 날극(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관민 특히 문무 양반의 섬 밖 탈출을 엄중히 금알(禁遏)하였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세력의 분산과 요인(要人)의 탈주를 방지함과 아울러 섬 안의 사정의 누설됨을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금강고(金剛庫) 무기를 꺼내어 군졸에게 분여하였다는 것은 무장의 확충 강화를 의미하는 바거니와 여기에서 말한 군졸이라는 것은 다만 삼별초만 가리킨 것이 아닌 듯하니 당시 부위군은 비록 쇠퇴하였으나 오히려 국군의 일부로서 존재하였음으로 생각건대 삼별초 이외에도 강도에 산재한 부위병 또는 노예 등(삼별초가 노예를 많이 구거(驅去) 남하한 것으로 보아)을 규합하여 무장을 강제한 것이 아닐까 한다. 원래 삼별초는 오랫동안 대몽 항전에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에 비로소 금강고 무기로써 무장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섬 안의 단속과 방비 계획을 굳게 하는 한편에 왕족이요 또 왕실 근친인 {{TagRefT|44}}승화후 온<ref group="a">[[파일: 김상기 삼별초-1.png|가운데|1340px]]</ref>을 왕으로 옹립하고 관부의 서치(署置)와 관원의 임명을 행하여 옛 도읍지에 돌아간 송경 정부에 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운 것이다. 이는 몽고에 굴복한 원종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앞서 임연의 원종 천폐와 그의 궤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항몽책을 속행함에는 통제된 국가적 체제가 또한 필요하게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이백기와 몽고에서 보내어 온 {{TagRefT|45}}회회(回回)<ref group="a">회회는 회흘(골)인을 가리킨 것인지 회회 교도를 가리킨 것인지 또 회회는 정치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인지 혹은 종교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인지 연구를 요할 문제이다.</ref>를 버렸나니 전자 즉 이백기를 벤 것으로 보면 반대파를 위압하여 이론(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애초에 난을 일으키려 획책할 때에 이백기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도 삼별초난이 미리부터 어느 계획 밑에서 진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후자 즉 회회를 가상(街上에)서 벤 것은 그들이 단호한 대몽 태도를 다시 국인(國人)에게 보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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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번=배중손 등의 이러한 거사는 절대 결심과 각오가 없이는 행하기 어려운 바로서 이것은 일시적 감정의 격앙에서 돌발한 병변도 아니요 또는 오합지중의 폭동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깊은 유래와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임은 위에서 거듭 말한 바와 같거니와 다시 강도를 손에 넣고 감연히 송경 측과 몽고를 상대로 일어나게 된 삼별초 측의 전략적 조건을 찾아보면 ① 삼별초는 국군의 중심이 되어왔으므로 삼별초가 갈라서게 되면 송경 측의 병력은 심히 {{TagRefT|46}}빈약한 것으로서<ref group="a">고려사절요(권18) 원종 11년 6월조에 「以金方慶爲逆賊(〇삼별초를 가리킨 것) 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 軍一千餘人 追討三別抄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추토사 김방경이 겨우 60여명의 군졸을 거느릴 정도로서 삼별초난 직후의 송격 측의 병력이 심히 빈약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같은 책 원종 12년 5·5월조에 의하면 진도 공격에 제하여 경군(京軍)을 증파할 때 부위병이 그 수에 차지 못하므로 문무 산직 백정 잡색과 및 승도를 뽑았으나 5백여인에 지나지 못하였다.</ref> 몽고와의 합작이 실현될지라도 삼별초 측으로 보면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던 것 ② 강화는 약 40년 동안의 수도였으므로 비록 원종이 구경 환도를 표명하였으나 국가의 중심은 아직도 강화였으며 국가의 축적(蓄積)도 이곳에 있고 백궁(百宮)들은 마침 연경으로부터 돌아오는 원종을 맞이하며 많이 송경에 건너 갔으나 그들의 처자들은 의연히 이곳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축적은 그대로 삼별초의 자원이 되는 것이며(아래에서 볼 것임) 백궁의 처노(妻孥)를 억류함은 다른 날 송경 측을 어느 정도까지 견제할 수가 있을 법한 것이었다. ③ 그 위에 소위 ‘심입해도’는 역대 항몽책에 있어 최고 또는 최후의 계획으로 되어 온 것으로서 깊이 남방 해중 즉 진도로 들어가 근거를 정하는 데에도 강도에 집중된 선척을 구용(驅用)하는 것이 최호의 방도가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목차1-1해독문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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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번=다음 삼별초의 남하에 나아가 살펴보면 원래 강도는 염하(갑곶강)를 격(隔)하여 육지와 지호(指呼)의 사이에 있으므로 수전에 졸렬한 몽고병과는 그곳을 근거로 하여 약 40년 동안 대항하여 왔으나 원종이 몽고와 결탁한 이상 정세는 전에 비하여 크게 변화한 바가 있어 다시 이곳을 근거로 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별초 측에서는 애초부터 강도를 버리고 다시 남하 해상에 근거지를 구할 것은 넉넉히 추단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런데 삼별초의 남하에 대하여 앞서 든 고려사 배중손전에
|목차1-1해독문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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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번=<blockquote no="02">江華守卒 多亡出陸 賊度不能守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 南下</blockquote>
|목차1-1해독문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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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8번=라 한 기사가 보이나 이는 당시 송경 측에서 내린 억측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의 남하는 명백히 항몽파의 전통책 또는 예정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다. 다시 같은 전에 의하면
|목차1-1해독문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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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9번=邦悅<blockquote no="03">(〇判太史局事安邦悅)當還都時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blockquote>
|목차1-1해독문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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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0번=라 한 기사가 보이니 이는 안방열이 환도 때를 당하여 환도파를 따라 출륙할까 삼별초를 따라 입해할까 거취에 미혹하게 되었으므로 봉은사에 봉안한 태조의 진영(眞影) 앞에 나아가 점을 쳐가지고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삼별초의 남하 계획은 이미 ‘환도 때’ 이전에 정해졌던 것으로 해석되는바 ‘환도 때’라는 것은 대체 어느 때를 가리킨 것인지 5월 23일에 환도를 방시한 때가 아니면 같은 달 27일에 원종이 연경으로부터 송경에 돌아올 때 비빈 이하가 모두 강도에서 출륙하던 때를 가리킨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송경에서는 이미 같은 달 26일에 이인성을 강화에 보내어 태조의 진영을 받들어 간 {{TagRefT|47}}점<ref group="a">고려사 권26 원종 11년 5월 을축조 참조.</ref>을 참조하여 상고해보면 이인성으로 말미암아 이안(移安)된 태조의 진영은 봉은사의 것으로 추단되는 바로서 안방열의 점친 것은 26일 이전에 속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그렇다면 ‘환도 때’라는 것은 환도를 방시하던 23일을 가리킨 것일지니 이와 같이 본다면 삼별초의 남하는 분명히 예정 계획이었음도 추단할 수가 있는 동시에 이러한 계획이야말로 삼별초로 하여금 대담한 행동을 취하게 한 일대 동기라고도 할 것이며 이렇게 보는 데에서 안방열의 점친 의의도 더욱 천명되는 바이다.
|목차1-1해독문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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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1번=삼별초의 남하는 고려사 원종 11년 6월 신미(3일)조에 의하면
|목차1-1해독문1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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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2번=<blockquote no="04">剽掠子女財貨 乘舟南下</blockquote>
|목차1-1해독문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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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3번=라 하여 동란이 발발된 그 이틀 뒤인 6월 3일로 되어 있으나 다시 고려기사 지원 7년 6월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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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4번=<blockquote no="05">是日(〇二日)晩 植報 叛兵悉遁去 三日 世子愖(〇諶)報 叛兵劫府庫燒圖籍 逃入海中 行省使人覘江華 島中百姓皆空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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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5번=이라 한 기사와 참조해보면 당시 삼별초는 강도의 인물 부고(府庫)를 휩쓸어 가지고 천동한 만큼 하루 동안에는 도저히 완료하지 못할 것으로서 2일부터 개시되어 3일에 이르러 끝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며 소위 그들의 ‘권토입해’의 상황에 관하여는 앞서 든 배중손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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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6번=<blockquote no="06">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缸破江 舳艫相接 無慮千餘艘 時百官咸出迎王 其妻孥 皆爲賊所掠 慟哭之聲振動天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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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7번=라 한 기사와 원종 12년 8월에 몽고 중서성에 보낸 고려의 국서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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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8번=<blockquote no="07">又若奴婢 各從其主者也 當其主順命就陸 乃因打疊家産而還江都者 悉被驅者(고려사 27)</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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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9번=라 한 것으로써 그의 개황(概況)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그 반면에 이로 인하여 송경 측에서 받은 타격은 실로 심각한 바가 있었다. 고려사 원종 세가 11년 6월 을해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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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0번=<blockquote no="08">幸頭輦哥屯所 (〇白州?) 時初出古京 衣冠未備 王及百官 皆以戒服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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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1번=이라 한 것이든지 같은 해 9월 계해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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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2번=<blockquote no="09">設藏經道場於本闕 王始備法駕 然侍從甚少 樂官未具 文武官多有步行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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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4일 (목) 13:4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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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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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3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3월
시작쪽 34쪽 종료쪽 85쪽 전체쪽 52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6.삼별초난의 경과

삼별초난은 편의상 전후 양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으니 전기는 즉 배중손 노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승화후를 추대해 가지고 진도에 입거(入據)하여 한 국가의 체제로써 항전하던 것이며 후기는 진도가 공함된 후에 김통정 등의 새로운 중심 인물이 출현하여 제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하던 시기이다. 원래 이 전후의 양자는 서로 계속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목표와 동향에는 하등의 변화를 찾아보기 어려우나 체제상으로 또는 세력상으로 보면 후자 즉 후기에 이르러서는 벌써 삼별초의 위세는 석일(昔日)의 관(觀)을 잃게 된 것이었다.
쪽수▶P34-1三別抄亂은 便宜上 前後 兩期로 나누워 볼 수가 있으니 前期는 即 裴仲孫 盧永禧 等이 中心이 되여 承化侯를 推戴해 가지고 珍島에 入據하야 한 國家의 體制로써 抗戰하던 것이며 後期는 珍島가 攻陷된 後에 金通精 等의 새로운 中心 人物이 出現하야 濟州로 드러가 抗戰을 繼續하던 時期이다. 元來 이 前後의 兩者는 서로 繼續的의 것으로서 그들의 目標와 動向에는 何等의 變化를 차저보기 어려우나 體制上으로 또는 勢力上으로 보면 後者 即 後期에 이르러서는 발서 三別抄의 威勢는 昔日의 觀을 일케 된 것이였다.





































본문1-1: (1)삼별초난의 전기


① 삼별초난의 발발과 그의 남하
쪽수▶P34-2① 三別抄亂의 勃發과 그의 南下
원종 11년 5월 무진(29일)에 혁파 문제를 계기로 하여 삼별초의 동란은 드디어 본격화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앞서 든 고려사 배중손전에
쪽수▶P35-1元宗 十一年 五月 戊辰(二十九日)에 革罷 問題를 契機로 하야 三別抄의 動亂은 디디여 本格化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

쪽수▶P35-2

(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

이라 하였다. 이것은 삼별초가 혁파되던 그 다음 날인 6월 을사(1일)에 일어난 일이거니와 배중손 노영희 등이 드디어 표면에 나타나 삼별초를 조종하여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蒙古兵大至 殺戮人民”이라 하여 민중을 격앙 또는 공동(恐動)하게 하고 다시 ”凡欲輔國者 皆會毬庭”/cite>이라 하여 그들의 목적이 몽고병을 방어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동시에 민심을 오로지 외적에 향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운운한 ‘몽고병’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원종이 끌고 온 두련가(頭輦哥)의 몽고병을 가리킨 것이거니와 당시 강도의 인민이 이에 응하여 바로 구정(毬庭)으로 모여든 것을 보면 두련가의 몽고병의 진입은 고려의 군민을 매우 날극(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관민 특히 문무 양반의 섬 밖 탈출을 엄중히 금알(禁遏)하였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세력의 분산과 요인(要人)의 탈주를 방지함과 아울러 섬 안의 사정의 누설됨을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금강고(金剛庫) 무기를 꺼내어 군졸에게 분여하였다는 것은 무장의 확충 강화를 의미하는 바거니와 여기에서 말한 군졸이라는 것은 다만 삼별초만 가리킨 것이 아닌 듯하니 당시 부위군은 비록 쇠퇴하였으나 오히려 국군의 일부로서 존재하였음으로 생각건대 삼별초 이외에도 강도에 산재한 부위병 또는 노예 등(삼별초가 노예를 많이 구거(驅去) 남하한 것으로 보아)을 규합하여 무장을 강제한 것이 아닐까 한다. 원래 삼별초는 오랫동안 대몽 항전에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에 비로소 금강고 무기로써 무장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섬 안의 단속과 방비 계획을 굳게 하는 한편에 왕족이요 또 왕실 근친인 현대문주44▶승화후 온[a 1]을 왕으로 옹립하고 관부의 서치(署置)와 관원의 임명을 행하여 옛 도읍지에 돌아간 송경 정부에 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운 것이다. 이는 몽고에 굴복한 원종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앞서 임연의 원종 천폐와 그의 궤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항몽책을 속행함에는 통제된 국가적 체제가 또한 필요하게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이백기와 몽고에서 보내어 온 현대문주45▶회회(回回)[a 2]를 버렸나니 전자 즉 이백기를 벤 것으로 보면 반대파를 위압하여 이론(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애초에 난을 일으키려 획책할 때에 이백기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도 삼별초난이 미리부터 어느 계획 밑에서 진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후자 즉 회회를 가상(街上에)서 벤 것은 그들이 단호한 대몽 태도를 다시 국인(國人)에게 보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쪽수▶P35-3이라 하였다. 이것은 三別抄가 革罷되던 그 翌日인 六月 乙巳(一日)에 이러난 일이어니와 裴仲孫 盧永禧 等이 디디여 表面에 나타나 三別抄를 操縱하야 暴動을 이르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蒙古兵大至 殺戮人民」이라 하야 民衆을 激昂 또는 恐動케 하고 다시 「凡欲輔國者 皆會毬庭」이라 하야 그들의 目的이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同時에 民心을 오로지 外敵에 向케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云云한 「蒙古兵」은 이미 論한 바와 가치 元宗이 끌고 온 頭輦哥의 蒙古兵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當時 江都의 人民이 이에 應하야 바로 毬庭으로 모혀든 것을 보면 頭輦哥의 蒙古兵의 進入은 高麗의 軍民을 매우 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官民 特히 文武 兩班의 島外 脫出을 嚴重히 禁遏하였나▶P36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勢力의 分散과 要人의 脫走를 防止함과 아울러 島內의 事情의 漏洩됨을 念慮한 까닭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金剛庫 武器를 끄내여 軍卒에게 分與하였다는 것은 武裝의 擴充 强化를 意味하는 바어니와 여기에서 말한 軍卒이라는 것은 다만 三別抄만 가르친 것이 아닌 듯하니 當時 府衛兵은 비록 衰頺하였으나 오히려 國軍의 一部로서 存在하였음으로 생각컨대 三別抄 以外에도 江都에 散在한 府衛兵 또는 奴隸 等(三別抄가 奴隸를 만히 驅去 南下한 것으로 보와)을 糾合하야 武裝을 强制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元來 三別抄는 오랫동안 對蒙 抗戰에 活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와 이때에 비로소 金剛庫 武器로써 武裝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島內의 團束과 防備 計劃을 굳게 하는 한편에 王族이요 또 王室 近親인 원문주44▶承化侯 溫[1]을 王으로 擁立하고 官府의 署置와 官員의 任命을 行하야 舊都에 도라간 松京 政府에 對하야 새로운 政府를 세운 것이다. 이는 蒙古에 屈服한 元宗을 國王으로 認치 아니함을 意味하는 것으로서 앞서 林衍의 元宗 擅廢와 그의 軌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抗蒙策을 續行함에는 統制된 國家的 體制가 또한 必要케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李白起와 蒙古에서 보내여 온 回回(註四十五)를 버렸나니 前者 卽 李白起를 버힌 것으로 보면 反對派를 威壓하야 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그들이 애초에 亂을 이르키려 劃策할 때에 李白起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나니 吾人은 이것을 가지고도 三別抄亂이 미리부터 어느 計劃 밑에서 進行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後者 卽 回回를 街上에서 버힌 것은 그들이 斷乎한 對蒙 態度를 다시 國人에게 보쪽수▶P37-1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배중손 등의 이러한 거사는 절대 결심과 각오가 없이는 행하기 어려운 바로서 이것은 일시적 감정의 격앙에서 돌발한 병변도 아니요 또는 오합지중의 폭동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깊은 유래와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임은 위에서 거듭 말한 바와 같거니와 다시 강도를 손에 넣고 감연히 송경 측과 몽고를 상대로 일어나게 된 삼별초 측의 전략적 조건을 찾아보면 ① 삼별초는 국군의 중심이 되어왔으므로 삼별초가 갈라서게 되면 송경 측의 병력은 심히 현대문주46▶빈약한 것으로서[a 3] 몽고와의 합작이 실현될지라도 삼별초 측으로 보면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던 것 ② 강화는 약 40년 동안의 수도였으므로 비록 원종이 구경 환도를 표명하였으나 국가의 중심은 아직도 강화였으며 국가의 축적(蓄積)도 이곳에 있고 백궁(百宮)들은 마침 연경으로부터 돌아오는 원종을 맞이하며 많이 송경에 건너 갔으나 그들의 처자들은 의연히 이곳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축적은 그대로 삼별초의 자원이 되는 것이며(아래에서 볼 것임) 백궁의 처노(妻孥)를 억류함은 다른 날 송경 측을 어느 정도까지 견제할 수가 있을 법한 것이었다. ③ 그 위에 소위 ‘심입해도’는 역대 항몽책에 있어 최고 또는 최후의 계획으로 되어 온 것으로서 깊이 남방 해중 즉 진도로 들어가 근거를 정하는 데에도 강도에 집중된 선척을 구용(驅用)하는 것이 최호의 방도가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쪽수▶P37-2裴仲孫 等의 이러한 擧事는 絶對 決心과 覺悟가 없이는 行키 어려운 바로서 이것은 一時的 感情의 激昂에서 突發한 兵變도 아니요 또는 烏合之衆의 暴動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깊은 由來와 歷史的 根據가 있는 것임은 우에서 累述한 바와 같거니와 다시 江都를 손에 너코 敢然히 松京 側과 蒙古를 相對로 이러나게 된 三別抄 側의 戰略的 條件을 차저보면 ① 三別抄는 國軍의 中心이 되여왔음으로 三別抄가 갈러서게 되면 松京 側의 兵力은 甚히 원문주46▶貧弱한 것으로서[2] 蒙古와의 合作이 實現될지라도 三別抄 側으로 보면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던 것 ② 江華는 約 四十年 동안의 首都이었음으로 비록 元宗이 舊京 還都를 表明하였으나 國家의 中心은 아직도 江華이었으며 國家의 蓄積도 이곳에 있고 百宮들은 마짐 燕京으로부터 도라오는 元宗을 마지하며 만히 松京에 건너 갔으나 그들의 妻子들은 依然히 이곳에 남어 있는 狀態이었다. 그럼으로 國家의 蓄積은 그대로 三別抄의 資源이 되는 것이며(下見) 百官의 妻孥를 抑留함은 他日 松京 側을 어느 程度까지 牽制할 수가 있을 법한 것이었다. ③ 그 우에 所謂 「深入海島」는 歷代 抗蒙策에 있어 最高 또는 最後의 計劃으로 되여 온 것으로서 깊이 南方 海中 卽 珍島로 드러가 根據를 定하는 데에도 江都에 集中된 船隻을 驅用하는 것이 最好의 方途가 되였을 것으로 믿는다.
다음 삼별초의 남하에 나아가 살펴보면 원래 강도는 염하(갑곶강)를 격(隔)하여 육지와 지호(指呼)의 사이에 있으므로 수전에 졸렬한 몽고병과는 그곳을 근거로 하여 약 40년 동안 대항하여 왔으나 원종이 몽고와 결탁한 이상 정세는 전에 비하여 크게 변화한 바가 있어 다시 이곳을 근거로 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별초 측에서는 애초부터 강도를 버리고 다시 남하 해상에 근거지를 구할 것은 넉넉히 추단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런데 삼별초의 남하에 대하여 앞서 든 고려사 배중손전에
쪽수▶P37-3다음 三別抄의 南下에 나아가 살펴보면 元來 江都는 塩河(甲串江)를 隔하야 陸地와 指呼의 사이에 있음으로 水戰에 拙劣한 蒙古兵과는 그곳을 根據로 하야 約 四十年 동안 對抗하여 왔으나 元宗이 蒙古와▶P38-1 結托한 以上 情勢는 前에 比하야 크게 變化한 바가 있어 다시 이곳을 根據로 하기는 到底히 不可能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三別抄 側에서는 애초부터 江都를 버리고 다시 南方 海上에 根據地를 求할 것은 넉넉히 推斷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런데 三別抄의 南下에 對하야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江華守卒 多亡出陸 賊度不能守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 南下

쪽수▶P38-2

江華守卒 多亡出陸 賊度不能守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 南下

라 한 기사가 보이나 이는 당시 송경 측에서 내린 억측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의 남하는 명백히 항몽파의 전통책 또는 예정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다. 다시 같은 전에 의하면
쪽수▶P38-3라 한 記事가 보이나 이는 當時 松京 側에서 나린 臆測에 不過한 것으로서 그의 南下는 明白히 抗蒙派의 傳統策 또는 豫定 計劃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다. 다시 同傳에 依하면
邦悅

(〇判太史局事安邦悅)當還都時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

쪽수▶P38-4

邦悅(〇判太史局事安邦悅)當還都時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

라 한 기사가 보이니 이는 안방열이 환도 때를 당하여 환도파를 따라 출륙할까 삼별초를 따라 입해할까 거취에 미혹하게 되었으므로 봉은사에 봉안한 태조의 진영(眞影) 앞에 나아가 점을 쳐가지고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삼별초의 남하 계획은 이미 ‘환도 때’ 이전에 정해졌던 것으로 해석되는바 ‘환도 때’라는 것은 대체 어느 때를 가리킨 것인지 5월 23일에 환도를 방시한 때가 아니면 같은 달 27일에 원종이 연경으로부터 송경에 돌아올 때 비빈 이하가 모두 강도에서 출륙하던 때를 가리킨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송경에서는 이미 같은 달 26일에 이인성을 강화에 보내어 태조의 진영을 받들어 간 현대문주47▶[a 4]을 참조하여 상고해보면 이인성으로 말미암아 이안(移安)된 태조의 진영은 봉은사의 것으로 추단되는 바로서 안방열의 점친 것은 26일 이전에 속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그렇다면 ‘환도 때’라는 것은 환도를 방시하던 23일을 가리킨 것일지니 이와 같이 본다면 삼별초의 남하는 분명히 예정 계획이었음도 추단할 수가 있는 동시에 이러한 계획이야말로 삼별초로 하여금 대담한 행동을 취하게 한 일대 동기라고도 할 것이며 이렇게 보는 데에서 안방열의 점친 의의도 더욱 천명되는 바이다.
쪽수▶P38-5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安邦悅이 還都時를 當하야 還都派를 따러 出陸할까 三別抄를 따러 入海할까 去就에 迷惑케 되였음으로 奉恩寺에 奉安한 太祖의 眞影 앞에 나아가 占을 처가지고 決定하였다는 것이다. 일로 보면 三別抄의 南下 計劃은 이미 「還都時」 以前에 定해졌던 것으로 解釋되는바 「還都時」라는 것은 대체 어느 때를 가르친 것인지 五月 二十三日에 還都를 榜示한 때가 아니면 同月 二十七日에 元宗이 燕京으로부터 松京에 도라올제 妃嬪 以下가 모다 江都에서 出陸하던 때를 가르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松京에서는 이미 同月 二十六日에 李仁成을 江華에 보내여 太祖의 眞影을 밧드러 간 원문주47▶[3]을 叅照하야 상고해보면 李仁成으로 말미암어 移安된 太祖의 眞影은 奉恩寺의 것으로 推斷되는 바로서 安邦▶P39-1悅의 占친 것은 二十六日 以前에 屬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그러타면 「還都時」라는 것은 還都를 榜示하던 二十三日을 가르친 것일지니 이와 가치 본다면 三別抄의 南下는 分明히 豫定 計劃이었음도 推斷할 수가 있는 同時에 이러한 計劃이야말로 三別抄로 하여금 大膽한 行動을 取케 한 一大 動機라고도 할지며 이러케 보는 데에서 安邦悅의 占친 意義도 더욱 閳明되는 바이다.
삼별초의 남하는 고려사 원종 11년 6월 신미(3일)조에 의하면
쪽수▶P39-2三別抄의 南下는 高麗史 元宗 十一年 六月 辛未(三日)條에 依하면

剽掠子女財貨 乘舟南下

쪽수▶P39-3

剽掠子女財貨 乘舟南下

라 하여 동란이 발발된 그 이틀 뒤인 6월 3일로 되어 있으나 다시 고려기사 지원 7년 6월조의
쪽수▶P39-4라 하야 動亂이 勃發된 그 再翌日인 六月 三日로 되여 있으나 다시 高麗紀事 至元 七年 六月條의

是日(〇二日)晩 植報 叛兵悉遁去 三日 世子愖(〇諶)報 叛兵劫府庫燒圖籍 逃入海中 行省使人覘江華 島中百姓皆空 云云

쪽수▶P39-5

是日(〇二日)晩 植報 叛兵悉遁去 三日 世子愖(〇諶)報 叛兵劫府庫燒圖籍 逃入海中 行省使人覘江華 島中百姓皆空 云云

이라 한 기사와 참조해보면 당시 삼별초는 강도의 인물 부고(府庫)를 휩쓸어 가지고 천동한 만큼 하루 동안에는 도저히 완료하지 못할 것으로서 2일부터 개시되어 3일에 이르러 끝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며 소위 그들의 ‘권토입해’의 상황에 관하여는 앞서 든 배중손전의
쪽수▶P39-6이라 한 記事와 叅照해보면 當時 三別抄는 江都의 人物 府庫를 휩쓰러 가지고 遷動한 만큼 하로 동안에는 到底히 完了치 못할 것으로서 二日부터 開始되여 三日에 이르러 끝난 것으로 解釋되는 바이며 所謂 그들의 「卷土入海」의 狀況에 關하야는 前擧 裴仲孫傳의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缸破江 舳艫相接 無慮千餘艘 時百官咸出迎王 其妻孥 皆爲賊所掠 慟哭之聲振動天地

쪽수▶P39-7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缸破江 舳艫相接 無慮千餘艘 時百官咸出迎王 其妻孥 皆爲賊所掠 慟哭之聲振動天地

라 한 기사와 원종 12년 8월에 몽고 중서성에 보낸 고려의 국서 가운데에
쪽수▶P39-8라 한 記事와 元宗 十二年 八月에 蒙古 中書省에 보낸 高麗의 國書 가운대에

又若奴婢 各從其主者也 當其主順命就陸 乃因打疊家産而還江都者 悉被驅者(고려사 27)

쪽수▶P40-1

又若奴婢 各從其主者也 當其主順命就陸 乃因打疊家産而還江都者 悉被驅者(高麗史 卷二七)

라 한 것으로써 그의 개황(概況)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그 반면에 이로 인하여 송경 측에서 받은 타격은 실로 심각한 바가 있었다. 고려사 원종 세가 11년 6월 을해조에
쪽수▶P40-2라 한 것으로써 그의 概況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그 反面에 이로 因하야 松京 側에서 바든 打擊은 實로 深刻한 바가 있었다.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一年 六月 乙亥條에

幸頭輦哥屯所 (〇白州?) 時初出古京 衣冠未備 王及百官 皆以戒服行

쪽수▶P40-3

幸頭輦哥屯所 (〇白州?) 時初出古京 衣冠未備 王及百官 皆以戒服行

이라 한 것이든지 같은 해 9월 계해조에
쪽수▶P40-4이라 한 것이던지 仝 九月 癸亥條에

設藏經道場於本闕 王始備法駕 然侍從甚少 樂官未具 文武官多有步行者

쪽수▶P40-5

設藏經道場於本闕 王始備法駕 然侍從甚少 樂官未具 文武官多有步行者
























본문1-2: (2)삼별초난의 후기




































본문1-3: (3)삼별초의 패인




































본문


본문2: 7.결언








































본문2-1: (1)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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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김상기 삼별초-1.png
  2. 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 六月條에 「以金方慶爲逆賊(〇三別抄를 가르친 것) 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 軍一千餘人 追討三別抄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追討使 金方慶이 겨우 六十餘名의 兵卒을 거느릴 程度로서 三別抄亂 卽後의 松京 側의 兵力이 甚히 貧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同書 元宗 十二年 四·五月條에 依하면 珍島 攻擊에 際하야 京軍을 增派할제 府衛兵이 그 額에 차지 못함으로 文武 散職 白丁 雜色과 및 僧徒를 뽑았으나 五百餘人에 지나지 못하였다.
  3. 高麗史 卷二十六 元宗 十一年 五月 乙丑條 叅照.






현대문주


  1. 김상기 삼별초-1.png
  2. 회회는 회흘(골)인을 가리킨 것인지 회회 교도를 가리킨 것인지 또 회회는 정치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인지 혹은 종교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인지 연구를 요할 문제이다.
  3. 고려사절요(권18) 원종 11년 6월조에 「以金方慶爲逆賊(〇삼별초를 가리킨 것) 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 軍一千餘人 追討三別抄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추토사 김방경이 겨우 60여명의 군졸을 거느릴 정도로서 삼별초난 직후의 송격 측의 병력이 심히 빈약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같은 책 원종 12년 5·5월조에 의하면 진도 공격에 제하여 경군(京軍)을 증파할 때 부위병이 그 수에 차지 못하므로 문무 산직 백정 잡색과 및 승도를 뽑았으나 5백여인에 지나지 못하였다.
  4. 고려사 권26 원종 11년 5월 을축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