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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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1: (1)삼별초난의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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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번={{TagSpage|35-1}}元宗 十一年 五月 戊辰(二十九日)에 革罷 問題를 契機로 하야 三別抄의 動亂은 디디여 本格化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목차1-1원문2번={{TagSpage|35-1}}元宗 十一年 五月 戊辰(二十九日)에 革罷 問題를 契機로 하야 三別抄의 動亂은 디디여 本格化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목차1-1원문3번={{TagSpage|35-2}}<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목차1-1원문3번={{TagSpage|35-2}}<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목차1-1원문4번={{TagSpage|35-3}}이라 하였다. 이것은 三別抄가 革罷되던 그 翌日인 六月 乙巳(一日)에 이러난 일이어니와 裴仲孫 盧永禧 等이 디디여 表面에 나타나 三別抄를 操縱하야 暴動을 이르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cite no="01">「蒙古兵大至 殺戮人民」</cite>이라 하야 民衆을 激昂 또는 恐動케 하고 다시 <cite no="02">「凡欲輔國者 皆會毬庭」</cite>이라 하야 그들의 目的이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同時에 民心을 오로지 外敵에 向케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云云한 「蒙古兵」은 이미 論한 바와 가치 元宗이 끌고 온 頭輦哥의 蒙古兵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當時 江都의 人民이 이에 應하야 바로 毬庭으로 모혀든 것을 보면 頭輦哥의 蒙古兵의 進入은 高麗의 軍民을 매우 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官民 特히 文武 兩班의 島外 脫出을 嚴重히 禁遏하였나{{TagPage|36}}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勢力의 分散과 要人의 脫走를 防止함과 아울러 島內의 事情의 漏洩됨을 念慮한 까닭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金剛庫 武器를 끄내여 軍卒에게 分與하였다는 것은 武裝의 擴充 强化를 意味하는 바어니와 여기에서 말한 軍卒이라는 것은 다만 三別抄만 가르친 것이 아닌 듯하니 當時 府衛兵은 비록 衰頺하였으나 오히려 國軍의 一部로서 存在하였음으로 생각컨대 三別抄 以外에도 江都에 散在한 府衛兵 또는 奴隸 等(三別抄가 奴隸를 만히 驅去 南下한 것으로 보와)을 糾合하야 武裝을 强制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元來 三別抄는 오랫동안 對蒙 抗戰에 活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와 이때에 비로소 金剛庫 武器로써 武裝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島內의 團束과 防備 計劃을 굳게 하는 한편에 王族이요 또 王室 近親인 {{TagRef|44}承化侯 溫<ref>[[김상기_삼별초-1.png|가운데|1340px]]</ref>을 王으로 擁立하고 官府의 署置와 官員의 任命을 行하야 舊都에 도라간 松京 政府에 對하야 새로운 政府를 세운 것이다. 이는 蒙古에 屈服한 元宗을 國王으로 認치 아니함을 意味하는 것으로서 앞서 林衍의 元宗 擅廢와 그의 軌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抗蒙策을 續行함에는 統制된 國家的 體制가 또한 必要케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李白起와 蒙古에서 보내여 온 回回(註四十五)를 버렸나니 前者 卽 李白起를 버힌 것으로 보면 反對派를 威壓하야 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그들이 애초에 亂을 이르키려 劃策할 때에 李白起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나니 吾人은 이것을 가지고도 三別抄亂이 미리부터 어느 計劃 밑에서 進行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後者 卽 回回를 街上에서 버힌 것은 그들이 斷乎한 對蒙 態度를 다시 國人에게 보{{TagSpage|37-1}}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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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 (수) 16: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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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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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3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3월
시작쪽 34쪽 종료쪽 85쪽 전체쪽 52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6.삼별초난의 경과

삼별초난은 편의상 전후 양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으니 전기는 즉 배중손 노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승화후를 추대해 가지고 진도에 입거(入據)하여 한 국가의 체제로써 항전하던 것이며 후기는 진도가 공함된 후에 김통정 등의 새로운 중심 인물이 출현하여 제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하던 시기이다. 원래 이 전후의 양자는 서로 계속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목표와 동향에는 하등의 변화를 찾아보기 어려우나 체제상으로 또는 세력상으로 보면 후자 즉 후기에 이르러서는 벌써 삼별초의 위세는 석일(昔日)의 관(觀)을 잃게 된 것이었다.
쪽수▶P34-1三別抄亂은 便宜上 前後 兩期로 나누워 볼 수가 있으니 前期는 即 裴仲孫 盧永禧 等이 中心이 되여 承化侯를 推戴해 가지고 珍島에 入據하야 한 國家의 體制로써 抗戰하던 것이며 後期는 珍島가 攻陷된 後에 金通精 等의 새로운 中心 人物이 出現하야 濟州로 드러가 抗戰을 繼續하던 時期이다. 元來 이 前後의 兩者는 서로 繼續的의 것으로서 그들의 目標와 動向에는 何等의 變化를 차저보기 어려우나 體制上으로 또는 勢力上으로 보면 後者 即 後期에 이르러서는 발서 三別抄의 威勢는 昔日의 觀을 일케 된 것이였다.





































본문1-1: (1)삼별초난의 전기


{{Layout1-1 |목차1-1원문1번=쪽수▶P34-2① 三別抄亂의 勃發과 그의 南下 |목차1-1원문2번=쪽수▶P35-1元宗 十一年 五月 戊辰(二十九日)에 革罷 問題를 契機로 하야 三別抄의 動亂은 디디여 本格化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목차1-1원문3번=쪽수▶P35-2

(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

|목차1-1원문4번=쪽수▶P35-3이라 하였다. 이것은 三別抄가 革罷되던 그 翌日인 六月 乙巳(一日)에 이러난 일이어니와 裴仲孫 盧永禧 等이 디디여 表面에 나타나 三別抄를 操縱하야 暴動을 이르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蒙古兵大至 殺戮人民」이라 하야 民衆을 激昂 또는 恐動케 하고 다시 「凡欲輔國者 皆會毬庭」이라 하야 그들의 目的이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同時에 民心을 오로지 外敵에 向케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云云한 「蒙古兵」은 이미 論한 바와 가치 元宗이 끌고 온 頭輦哥의 蒙古兵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當時 江都의 人民이 이에 應하야 바로 毬庭으로 모혀든 것을 보면 頭輦哥의 蒙古兵의 進入은 高麗의 軍民을 매우 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官民 特히 文武 兩班의 島外 脫出을 嚴重히 禁遏하였나▶P36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勢力의 分散과 要人의 脫走를 防止함과 아울러 島內의 事情의 漏洩됨을 念慮한 까닭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金剛庫 武器를 끄내여 軍卒에게 分與하였다는 것은 武裝의 擴充 强化를 意味하는 바어니와 여기에서 말한 軍卒이라는 것은 다만 三別抄만 가르친 것이 아닌 듯하니 當時 府衛兵은 비록 衰頺하였으나 오히려 國軍의 一部로서 存在하였음으로 생각컨대 三別抄 以外에도 江都에 散在한 府衛兵 또는 奴隸 等(三別抄가 奴隸를 만히 驅去 南下한 것으로 보와)을 糾合하야 武裝을 强制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元來 三別抄는 오랫동안 對蒙 抗戰에 活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와 이때에 비로소 金剛庫 武器로써 武裝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島內의 團束과 防備 計劃을 굳게 하는 한편에 王族이요 또 王室 近親인 원문주44}承化侯 溫[1]을 王으로 擁立하고 官府의 署置와 官員의 任命을 行하야 舊都에 도라간 松京 政府에 對하야 새로운 政府를 세운 것이다. 이는 蒙古에 屈服한 元宗을 國王으로 認치 아니함을 意味하는 것으로서 앞서 林衍의 元宗 擅廢와 그의 軌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抗蒙策을 續行함에는 統制된 國家的 體制가 또한 必要케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李白起와 蒙古에서 보내여 온 回回(註四十五)를 버렸나니 前者 卽 李白起를 버힌 것으로 보면 反對派를 威壓하야 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그들이 애초에 亂을 이르키려 劃策할 때에 李白起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나니 吾人은 이것을 가지고도 三別抄亂이 미리부터 어느 計劃 밑에서 進行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後者 卽 回回를 街上에서 버힌 것은 그들이 斷乎한 對蒙 態度를 다시 國人에게 보쪽수▶P37-1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



본문1-2: (2)삼별초난의 후기




































본문1-3: (3)삼별초의 패인




































본문


본문2: 7.결언








































본문2-1: (1)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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