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2)"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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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1: (1)강화천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동태와 여몽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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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7번={{TagSpage|24-8}}라고 指摘하였다. 이 高麗의 國書는 우리 側의 行動을 辯解하려는 意圖도 包含되였을 것이나 吾人은 이 멫 가지 條件을 通하야 這間의 消息을 어느 程度까지 探索할 수가 있는 것이니, (A) 먼저 宋立章에 關한 事實로부터 살펴보면 宋立章은 池義深을 따러 蒙古에 건너갔다가(遼陽?) 逃還한 者라 한 것으로 보와 그는 同年 三月에 池義深과 가티 蒙古에 건너{{TagPage|25-1}}갓다가 六月 十五日(甲子)에 逃歸하였던 {{TagRef|23}}宋得昌<ref>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六月 甲子條에 「校尉宋得昌 自池義深行李逃來云 義深到撒禮塔所 撒禮塔怒曰 {{ruby|前送文牒內事件|○○○○○○○}} 何不辦來 執送義深于帝所 餘皆拘囚」라 하였다. 다시 「前送文牒內事件 云云」은 그들이 이에 앞서 高麗에 要求한 事項을 가르친 것이니 當時 蒙古의 要求에는 水獺皮 一千領 國王 諸王 公主 郡主 大官人 童男 五百箇 童女 五百箇 諸般工匠(刺繡婦人도 드렀음)을 筆頭로 한 것이다. 이에 對하야 高麗에서는 童男童女와 諸般工匠 以外에 可能한 程度까지는 誠意를 뵈였던 것이니 池義深의 뒤를 이워 다시 趙叔昌 等을 보내며 羅絹 綾紬 金銀器 血畵 轄畵扇 等을 보내였으며 特히 水獺皮는 一千領을 要求한 데 對하야 갓갓스로 求하야 九百七十七領을 보내여 주웠다.</ref>의 一行이었던 듯하거니와 다시 이에 關聯하야 高麗史節要의 記事를 드러보면 <cite no="03">「樞密院副使致仕宋義 與其甥將軍尹秀 叛入蒙古 初 義以隊正 隨使如蒙古 知欲加兵於我 逃還以告 遷都江華 以功 驟至樞副 至是 復都舊京 義懼蒙古詰前事 挈家 投頭輦哥以叛」(卷十八 元宗 十一年 八月條)</cite>이라 하였다. 일로 보면 宋義와 宋立章은 그의 行動으로 보나 本國에 逃歸한 時期로 보나 서로 一致한 바가 있나니 생각컨대 宋立章과 宋義는 同一한 人物로서 宋立章은 {{TagRef|24}}對蒙關係上<ref>宋義는 舊京 還都 後에 蒙古의 迫究를 두려워하야 미리 蒙古에 叛附한 點과 江華遷都 後에 蒙古에서는 자조 宋立章의 引渡를 要求하던 點을 아울러 생각하면 宋立章을 形式上 義로 일음을 곳처 蒙古의 注目을 避하면서 高麗 朝廷에 서서 樞密院 副使까지 歷任한 것이 안일런가 한다.</ref> 「義」로 改名한 것이나 아닐런가 한다. 어쨌든 宋立章은 池義深의 行李로부터 逃還한 點으로써 推察하여 보면 當時 高麗에서는 蒙古 要求에 어느 程度까지 誠意를 보인 데에도 不拘하고 貪虐 無厭한 蒙古人은 高麗의 使臣까지 拿致 拘囚한 것만 가지고도(註二十三 叅照) 그들의 動兵機運이 또 다시 움지겼던 것은 疑心치 못할 일이니 {{TagRef|25}}宋立章의 報告는 十分의 믿엄性이 있던 것이다.<ref>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九月 答蒙古 官人書에 「項有宋立章者 來言上國將舉大兵 來征弊邑 其言有不可不信者 云云」이라 하였다.</ref> (B) 北界 逆民의 作亂 聲言 云云은 생각컨대 同年 七月에 宣州(宣川)에서 이러난 達魯花赤의 尹復昌 射殺事件이 아니면 同年 八月 一日에 西京에서 閔曦 崔滋溫 等의 達魯花赤 暗殺計劃으로 말미암어 이러난 {{TagRef|26}}騷動<ref>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七月條에 「遣內侍尹復昌 往北界諸城 奪達魯花赤弓矢 復昌到宣州 達魯花赤 射殺之」라 하였고 全 八月 己酉朔條에 「西京巡撫使大將軍閔曦 與司錄崔滋溫 密使將校等 謀殺達魯花赤 西京人間之曰 如是則我京 必如平州 爲蒙兵所城 途叛 壬戌執崔滋溫 囚之 留守崔壽及判官 分臺御史六曹員等 皆逃竄于楮島」라 하였다.</ref>을 가르친 것인 듯하니 이 두 事件은 모다 江華遷都의 決定 또는 實行 後의 事實로서 高麗 側의 일부러 느러노흔 辯解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믿으며, (C) 蒙古人이 義州에서 船隻을 準備 云云이라 한 것은 蒙古가 이에 앞서 高麗로부터 船舶과 水手를 빌어간 일이 있는 우에 또 當時 蒙古軍은 高麗에 對하야 늘 待機 狀態에 있었음으로 또한 있을 만한 消息이라 할 것이다.
 
|목차1-1원문27번={{TagSpage|24-8}}라고 指摘하였다. 이 高麗의 國書는 우리 側의 行動을 辯解하려는 意圖도 包含되였을 것이나 吾人은 이 멫 가지 條件을 通하야 這間의 消息을 어느 程度까지 探索할 수가 있는 것이니, (A) 먼저 宋立章에 關한 事實로부터 살펴보면 宋立章은 池義深을 따러 蒙古에 건너갔다가(遼陽?) 逃還한 者라 한 것으로 보와 그는 同年 三月에 池義深과 가티 蒙古에 건너{{TagPage|25-1}}갓다가 六月 十五日(甲子)에 逃歸하였던 {{TagRef|23}}宋得昌<ref>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六月 甲子條에 「校尉宋得昌 自池義深行李逃來云 義深到撒禮塔所 撒禮塔怒曰 {{ruby|前送文牒內事件|○○○○○○○}} 何不辦來 執送義深于帝所 餘皆拘囚」라 하였다. 다시 「前送文牒內事件 云云」은 그들이 이에 앞서 高麗에 要求한 事項을 가르친 것이니 當時 蒙古의 要求에는 水獺皮 一千領 國王 諸王 公主 郡主 大官人 童男 五百箇 童女 五百箇 諸般工匠(刺繡婦人도 드렀음)을 筆頭로 한 것이다. 이에 對하야 高麗에서는 童男童女와 諸般工匠 以外에 可能한 程度까지는 誠意를 뵈였던 것이니 池義深의 뒤를 이워 다시 趙叔昌 等을 보내며 羅絹 綾紬 金銀器 血畵 轄畵扇 等을 보내였으며 特히 水獺皮는 一千領을 要求한 데 對하야 갓갓스로 求하야 九百七十七領을 보내여 주웠다.</ref>의 一行이었던 듯하거니와 다시 이에 關聯하야 高麗史節要의 記事를 드러보면 <cite no="03">「樞密院副使致仕宋義 與其甥將軍尹秀 叛入蒙古 初 義以隊正 隨使如蒙古 知欲加兵於我 逃還以告 遷都江華 以功 驟至樞副 至是 復都舊京 義懼蒙古詰前事 挈家 投頭輦哥以叛」(卷十八 元宗 十一年 八月條)</cite>이라 하였다. 일로 보면 宋義와 宋立章은 그의 行動으로 보나 本國에 逃歸한 時期로 보나 서로 一致한 바가 있나니 생각컨대 宋立章과 宋義는 同一한 人物로서 宋立章은 {{TagRef|24}}對蒙關係上<ref>宋義는 舊京 還都 後에 蒙古의 迫究를 두려워하야 미리 蒙古에 叛附한 點과 江華遷都 後에 蒙古에서는 자조 宋立章의 引渡를 要求하던 點을 아울러 생각하면 宋立章을 形式上 義로 일음을 곳처 蒙古의 注目을 避하면서 高麗 朝廷에 서서 樞密院 副使까지 歷任한 것이 안일런가 한다.</ref> 「義」로 改名한 것이나 아닐런가 한다. 어쨌든 宋立章은 池義深의 行李로부터 逃還한 點으로써 推察하여 보면 當時 高麗에서는 蒙古 要求에 어느 程度까지 誠意를 보인 데에도 不拘하고 貪虐 無厭한 蒙古人은 高麗의 使臣까지 拿致 拘囚한 것만 가지고도(註二十三 叅照) 그들의 動兵機運이 또 다시 움지겼던 것은 疑心치 못할 일이니 {{TagRef|25}}宋立章의 報告는 十分의 믿엄性이 있던 것이다.<ref>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九月 答蒙古 官人書에 「項有宋立章者 來言上國將舉大兵 來征弊邑 其言有不可不信者 云云」이라 하였다.</ref> (B) 北界 逆民의 作亂 聲言 云云은 생각컨대 同年 七月에 宣州(宣川)에서 이러난 達魯花赤의 尹復昌 射殺事件이 아니면 同年 八月 一日에 西京에서 閔曦 崔滋溫 等의 達魯花赤 暗殺計劃으로 말미암어 이러난 {{TagRef|26}}騷動<ref>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七月條에 「遣內侍尹復昌 往北界諸城 奪達魯花赤弓矢 復昌到宣州 達魯花赤 射殺之」라 하였고 全 八月 己酉朔條에 「西京巡撫使大將軍閔曦 與司錄崔滋溫 密使將校等 謀殺達魯花赤 西京人間之曰 如是則我京 必如平州 爲蒙兵所城 途叛 壬戌執崔滋溫 囚之 留守崔壽及判官 分臺御史六曹員等 皆逃竄于楮島」라 하였다.</ref>을 가르친 것인 듯하니 이 두 事件은 모다 江華遷都의 決定 또는 實行 後의 事實로서 高麗 側의 일부러 느러노흔 辯解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믿으며, (C) 蒙古人이 義州에서 船隻을 準備 云云이라 한 것은 蒙古가 이에 앞서 高麗로부터 船舶과 水手를 빌어간 일이 있는 우에 또 當時 蒙古軍은 高麗에 對하야 늘 待機 狀態에 있었음으로 또한 있을 만한 消息이라 할 것이다.
 
|목차1-1원문28번={{TagSpage|25-2}}以上 세 가지 條件을 通하야 보면 <cite no="04">「蒙古軍이 將次 大擧 侵寇」</cite>한다는 것이 서로 共通한바로서 이러한 消息이야말로 江華遷都를 急速히 促進시킨 主要한 動機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가운대에도 所謂 宋立章의 報告가 가장 힘 있게 崔怡를 움지긴 것 같다. 우에서 論한 바와 가티 宋立章이 果然 高宗 十九年 六月 十五日(甲子)에 本國에 逃還한 宋得{{TagPage|26-1}}昌의 一行이었다면 그 翌日인 十六日(乙丑)에 崔怡가 斷乎하게 또는 急遽히 遷都를 決定한 것도 偶然한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1-1원문28번={{TagSpage|25-2}}以上 세 가지 條件을 通하야 보면 <cite no="04">「蒙古軍이 將次 大擧 侵寇」</cite>한다는 것이 서로 共通한바로서 이러한 消息이야말로 江華遷都를 急速히 促進시킨 主要한 動機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가운대에도 所謂 宋立章의 報告가 가장 힘 있게 崔怡를 움지긴 것 같다. 우에서 論한 바와 가티 宋立章이 果然 高宗 十九年 六月 十五日(甲子)에 本國에 逃還한 宋得{{TagPage|26-1}}昌의 一行이었다면 그 翌日인 十六日(乙丑)에 崔怡가 斷乎하게 또는 急遽히 遷都를 決定한 것도 偶然한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1-1원문2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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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9번={{TagSpage|26-2}}다음 江華遷都를 決定한 以後에 高麗의 對蒙 態度를 살펴보면 더욱 硬化한 것을 看取할 수가 있는 바이다. 前擧한 바와 가티 尹復昌을 派送하야 北界諸城(龍岡 宣州 等地)에 來駐하던 蒙古의 達魯花赤의 弓矢를 押收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蒙古 官人의 武裝解除를 意味한 것이다. 다시 遷都를 前後하야 北界各地의 達魯花赤이 만히 {{TagRef|27}}被殺되였던 듯하며<ref>元高麗紀事 太宗 四年(高宗 十九年) 六月條에 「本國叛 殺各縣達魯花赤(〇元史高高傳 仝年 六月條에 盡殺朝廷所置達嚕噶齊七十二人 云云이라 하였음) 率王京及諸州郡人民 竄於海島拒守」라 하였고 高麗史 高宗 十九年 六月 答蒙古 官人書 中에 「又稱達魯花赤交死則死留下來 如今儞每拿捕縛者事 右達魯花赤 其在京邑者 接遇甚謹 略不忤意大國豈不聞之耶 又於列城 委命厚對 其間容或有不如國教者 予不能一一知之」라 하야 地方에서 達魯花赤의 被殺된 것을 否認치 아니하였다.</ref> 同年 十二月에는 蒙古軍의 總帥 撒禮塔이 處仁城(今 龍仁郡)에서 僧金允侯에게 射殺되였든 것은 著名한 事實이다.
|목차1-1원문3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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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0번={{TagSpage|26-3}}이와 가티 高麗에서는 中央과 地方이 海島를 根據로 하야 遠來한 敵의 銳鋒을 避하는 同時에 隨時 隨處에 敵을 邁擊하는 體勢를 取함에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爾後 約 三十年 동안 麗蒙 兩國의 抗戰이 始作된 기틀이라 할 것이다. 當時 高麗의 對蒙 態度와 方略이 이러하게 進展되기까지의 事情은 同年(十九年) 十二月에 東眞國(蒲鮮萬奴)에 보낸 國書 가운대에도 대강 나타나 보이니 그의 答東眞書에
|목차1-1원문3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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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1번={{TagSpage|26-4}}<blockquote no="10">夫所謂蒙古者 猜忍莫甚 雖和之 不足以信之 則我朝之與好 非必出於本意 然如前書所通 越己卯歲 於江東城 勢有不得已 因有和好之約 是以 年前 其軍馬之來也 彼雖背盟棄信 肆虐如此 我朝以謂 寧使曲在彼耳 庶不欲效尤 故遂接遇如初 以禮遣之 今國朝 雖遷徙都邑 當其軍馬之來 則猶待之彌篤 而彼尙略不顧此意 橫行遠近外境 殘暴寇掠 與昔尤甚 由是 四方州郡 莫不嬰城堅守 或阻水自固 以觀其變 而彼益有呑啖之志 以圖攻取 則其在列郡 豈必拘國之指揮與交包禍之人 自速養虎被噬之患耶 於是 非特入守而已 或往往有因民之不忍 出與之戰 殺獲官人士卒 不爲不多矣至今年十二月十六日 水州屬邑處仁部曲之小城 方與對戰 射中魁帥撒禮塔 殺之 俘虜亦多 餘衆潰散 云云</blockquote>
|목차1-1원문3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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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2번={{TagSpage|27-1}}이라 하였다. 이 國書는 李奎報의 作이어니와(東國李相國集 卷二十八 叅照) 大抵 麗蒙 兩國의 關係는 高宗 五年-六年(己卯)頃에 江東城을 占據한 契丹人(大遼收國의 喊舍)을 攻滅할 때에 비로소 親和의 約(兄弟의 約)을 맺게 된 것이니 이는 高麗 國內에 入寇한 契丹의 遺種을 蒙古의 協力으로 攻破한 關係上 儀禮的으로 成立된 것이다. 그러나 猜疑 殘暴한 蒙古人은 {{TagRef|28}}著古與(札古雅)遭難事件<ref>高麗史 卷二十二 高宗 十二年 正月 癸未條에 「蒙古使(〇著古與) 離西京 渡鴨綠江 但賷國贐獺皮 其餘紬布等物 皆棄野而去中途 爲盜所殺 蒙古 反疑我 遂與之絕」이라 하였고 仝 十九年 十一月條의 答蒙古 沙打官人書에 依하면 著古與를 殺害한 것은 實로 亐加下(金帥)라 明示되였다. 그뿐만 아니라 元史高麗傳과 元高麗紀事와 가튼 蒙古 側 記錄에도 「盜殺之於途」 또는 「中途爲賊所害」로 보이나니 使者 殺害를 口實로 하야 侵入한 것은 그들의 侵略을 爲한 稱頉에 不過한 것이다.</ref>을 口實로 하야 盟約을 破棄하고 突然히 入寇하야 殘暴을 極하던 것으로서 이러한 蒙古와의 和約은 본대 信賴키 어려우며 그 우에 蒙古人은 併吞의 禍心을 품었음으로 尋常한 手段으로는 當키 어려운 바이다. 이리하야 듸듸여 「阻水自固」의 擧에 出하야 蒙兵의 行動範圍 밖에서 遼擊케 된 事情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特히 同 國書 中에는 地方에서의 反擊에 對하야 人民의 自發的 行動과 가티 表示되였으나 이것은 外交上 修飾에 不外한 것으로서 地方의 그 가튼 行動은 國家 方針에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다.
|목차1-1원문3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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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3번={{TagSpage|27-2}}② {{ruby|江都의|○○○}} {{ruby|經營과|○○○}} {{ruby|防備|○○}}. 高宗 十九年 七月에 江華遷都가 決行된 뒤에 首都로서의 經營과 그의 防備施設을 상고해보는 것이 또 한 가지 必要한 일이라고 믿는 바이니 이것은 江華를 中心으로 하야 이러난 對內 對外의 여러가지 事件과 關聯을 가진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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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4번={{TagSpage|27-3}}우에서 言及한 바와 가티 高宗 十九年 六月 十六日에 崔怡는 遷都를 決定하자 그 翌日에 二營軍을 江華에 發하야 宮闕을 始營하였으니 (그 舊地는 今 江華 邑內) 이는 遷都에 迫頭하야 우선 移御할 王居를 修理하였음에 不過한 것으로 믿으며, 首都로서의 營造는 遷都 以後에 漸次로 進捗되었던 것이니 高宗 二十一年 正月 癸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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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5번={{TagSpage|27-4}}<blockquote no="11">徵諸道民丁 營宮闕及百司(高麗史 卷二十三 宗高 世家)</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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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6번={{TagSpage|27-5}}라 한 것으로 보면 首都의 經營이 이때에야 겨우 具體的 進行을 보게된 듯하다. 그리고 그의 規模와 排置는 대개 松都{{TagPage|28-1}}의 그것을 模倣한 것으로서 宮殿(宮城諸門)寺社 毬庭의 稱號로부터 八關 燃燈 行香 道場에 이르기까지 대개 松都의 것을 踏襲하였으니 同書 仝年 二月 癸未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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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7번={{TagSpage|28-2}}<blockquote no="12">燃燈 王如奉恩寺 以故叅政車倜家 爲奔恩寺 撤民家 以廣輩路 時雖遷都草創 然凡毬庭宮殿寺社號 皆擬松都 八關燃燈行香道場 一依舊式</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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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8번={{TagSpage|28-3}}이라 하였다. 다시 宮殿 寺社의 稱號에 나아가 兩者의 一致한 例를 멫 가지 드러보면 康安股 壽昌宮 麗正宮 景靈殿(太祖를 主로 하야 祖宗의 眞影을 奉安한 곳) 大觀殿 功臣堂 奉恩寺(太祖願堂) 法王寺 興國寺 王輪寺 妙通寺 安和寺 普濟寺 彌勒寺 帝釋院 九曜堂 等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江華의 北山을 松岳으로 부른 것도 이러한 關係에서 나온 듯하거니와) 이러한 經營은 또 한 一時에 完成되지 못할 것은 勿論이니 國子監(高宗 三十八年) 九曜堂(同 四十年) 太廟(同 四十二年) 等은 崔沆의 執權時代에 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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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9번={{TagSpage|28-4}}要컨대 江華의 首都로서의 經營은 대개 崔怡로부터 崔沆의 執權時代에 걸처 完成의 域에 達한 것으로 보아도 조흘 것이니 이에서 江華의 施設은 首都로서의 遜色이 없을 만큼 되었던 것으로서 舊都인 松都에 對하야 江都로써 불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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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번=삼별초난은 강도(강화)로부터 구경(개성)에 환도할 즈음에 그것을 계기로 하여 일어난 것이니 이 난의 유래를 추려보는 데 있어 우리는 먼저 강화천도의 동기와 및 그의 의의와 효과 또는 그로 인하여 일어난 여몽 양국의 관계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목차1-1해독문1번=삼별초난은 강도(강화)로부터 구경(개성)에 환도할 즈음에 그것을 계기로 하여 일어난 것이니 이 난의 유래를 추려보는 데 있어 우리는 먼저 강화천도의 동기와 및 그의 의의와 효과 또는 그로 인하여 일어난 여몽 양국의 관계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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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7번=라고 지적하였다. 이 고려의 국서는 우리 측의 행동을 변해(辯解)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었을 것이나 우리는 이 몇 가지 조건을 통하여 저간의 소식을 어느 정도까지 탐색할 수가 있는 것이니, (A) 먼저 송립장에 관한 사실로부터 살펴보면 송립장은 지의심을 따라 몽고에 건너갔다가(요양?) 도환한 자라 한 것으로 보아 그는 같은 해 3월에 지의심과 같이 몽고에 건너갔다가 6월 15일(갑자)에 도귀(逃歸)하였던 {{TagRefT|23}}송득창<ref group=“a”>고려사 권23 고종 19년 6월 갑자조에 「校尉宋得昌 自池義深行李逃來云 義深到撒禮塔所 撒禮塔怒曰 {{ruby|前送文牒內事件|○○○○○○○}} 何不辦來 執送義深于帝所 餘皆拘囚」라 하였다. 다시 「前送文牒內事件 云云」은 그들이 이에 앞서 고려에 요구한 사항을 가리킨 것이니 당시 몽고의 요구에는 수달피 1천령 국왕 제왕 공주 군주 대관인 동남 500개 동녀 500개 제반 공장(자수부인도 들었음)을 필두로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동남동녀와 제반 공장 이외에 가능한 정도까지는 성의를 보였던 것이니 지의심의 뒤를 이어 다시 조숙창 등을 보내며 나견 능주 금은기 혈서 할화선 등을 보내었으며 특히 수달피는 1천령을 요구한 데 대하여 가까스로 구하여 977령을 보내 줬다.</ref>의 일행이었던 듯하거니와 다시 이에 관련하여 고려사절요의 기사를 들어보면 <cite no="03">”樞密院副使致仕宋義 與其甥將軍尹秀 叛入蒙古 初 義以隊正 隨使如蒙古 知欲加兵於我 逃還以告 遷都江華 以功 驟至樞副 至是 復都舊京 義懼蒙古詰前事 挈家 投頭輦哥以叛”(권18 원종 11년 8월조)</cite>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송의와 송립장은 그의 행동으로 보나 본국에 도귀한 시기로 보나 서로 일치한 바가 있으니 생각건대 송립장과 송의는 동일한 인물로서 송립장은 {{TagRefT|24}}대몽관계상<ref group=“a”>송의는 구경 환도 후에 몽고의 박구(迫究)를 두려워하여 미리 몽고에 반부(叛附)한 점과 강화천도 후에 몽고에서는 자주 송립장의 인도를 요구하던 점을 아울러 생각하면 송립장을 형식상 의로 이름을 고쳐 몽고의 주목을 피하면서 고려 조정에 서서 추밀원 부사까지 역임한 것이 아닐까 한다.</ref> ‘의’로 개명한 것이나 아닐까 한다. 어쨌든 송립장은 지의심의 행리로부터 도환한 점으로써 추찰하여 보면 당시 고려에서는 몽고 요구에 어느 정도까지 성의를 보인 데에도 불구하고 탐학 무염한 몽고인은 고려의 사신까지 나치(拿致) 구수(拘囚)한 것만 가지고도(주23 참조) 그들의 동병기운이 또 다시 움직였던 것은 의심치 못할 일이니 {{TagRefT|25}}송립장의 보고는 십분의 믿음성이 있던 것이다.<ref group=“a”>고려사 권23 고종 19년 9월 답몽고 관인서에 「項有宋立章者 來言上國將舉大兵 來征弊邑 其言有不可不信者 云云」이라 하였다.</ref> (B) 북계 역민의 작란 성언 운운은 생각건대 같은 해 7월에 선주(선천)에서 일어난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윤복창 사살사건이 아니면 같은 해 8월 1일에 서경에서 민희 최자온 등의 다루가치 암살계획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TagRefT|26}}소동<ref group=“a”>고려사 권3 고종 19년 7월조에 「遣內侍尹復昌 往北界諸城 奪達魯花赤弓矢 復昌到宣州 達魯花赤 射殺之」라 하였고 같은 해 8월 기유삭조에 「西京巡撫使大將軍閔曦 與司錄崔滋溫 密使將校等 謀殺達魯花赤 西京人間之曰 如是則我京 必如平州 爲蒙兵所城 途叛 壬戌執崔滋溫 囚之 留守崔壽及判官 分臺御史六曹員等 皆逃竄于楮島」라 하였다.</ref>을 가리킨 것인 듯하니 이 두 사건은 모두 강화천도의 결정 또는 실행 후의 사실로서 고려 측의 일부러 늘어놓은 변해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믿으며, (C) 몽고인이 의주에서 선척을 준비 운운이라 한 것은 몽고가 이에 앞서 고려로부터 선박과 수수를 빌려간 일이 있는 위에 또 당시 몽고군은 고려에 대하여 늘 대기 상태에 있었으므로 또한 있을 만한 소식이라 할 것이다.
 
|목차1-1해독문27번=라고 지적하였다. 이 고려의 국서는 우리 측의 행동을 변해(辯解)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었을 것이나 우리는 이 몇 가지 조건을 통하여 저간의 소식을 어느 정도까지 탐색할 수가 있는 것이니, (A) 먼저 송립장에 관한 사실로부터 살펴보면 송립장은 지의심을 따라 몽고에 건너갔다가(요양?) 도환한 자라 한 것으로 보아 그는 같은 해 3월에 지의심과 같이 몽고에 건너갔다가 6월 15일(갑자)에 도귀(逃歸)하였던 {{TagRefT|23}}송득창<ref group=“a”>고려사 권23 고종 19년 6월 갑자조에 「校尉宋得昌 自池義深行李逃來云 義深到撒禮塔所 撒禮塔怒曰 {{ruby|前送文牒內事件|○○○○○○○}} 何不辦來 執送義深于帝所 餘皆拘囚」라 하였다. 다시 「前送文牒內事件 云云」은 그들이 이에 앞서 고려에 요구한 사항을 가리킨 것이니 당시 몽고의 요구에는 수달피 1천령 국왕 제왕 공주 군주 대관인 동남 500개 동녀 500개 제반 공장(자수부인도 들었음)을 필두로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동남동녀와 제반 공장 이외에 가능한 정도까지는 성의를 보였던 것이니 지의심의 뒤를 이어 다시 조숙창 등을 보내며 나견 능주 금은기 혈서 할화선 등을 보내었으며 특히 수달피는 1천령을 요구한 데 대하여 가까스로 구하여 977령을 보내 줬다.</ref>의 일행이었던 듯하거니와 다시 이에 관련하여 고려사절요의 기사를 들어보면 <cite no="03">”樞密院副使致仕宋義 與其甥將軍尹秀 叛入蒙古 初 義以隊正 隨使如蒙古 知欲加兵於我 逃還以告 遷都江華 以功 驟至樞副 至是 復都舊京 義懼蒙古詰前事 挈家 投頭輦哥以叛”(권18 원종 11년 8월조)</cite>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송의와 송립장은 그의 행동으로 보나 본국에 도귀한 시기로 보나 서로 일치한 바가 있으니 생각건대 송립장과 송의는 동일한 인물로서 송립장은 {{TagRefT|24}}대몽관계상<ref group=“a”>송의는 구경 환도 후에 몽고의 박구(迫究)를 두려워하여 미리 몽고에 반부(叛附)한 점과 강화천도 후에 몽고에서는 자주 송립장의 인도를 요구하던 점을 아울러 생각하면 송립장을 형식상 의로 이름을 고쳐 몽고의 주목을 피하면서 고려 조정에 서서 추밀원 부사까지 역임한 것이 아닐까 한다.</ref> ‘의’로 개명한 것이나 아닐까 한다. 어쨌든 송립장은 지의심의 행리로부터 도환한 점으로써 추찰하여 보면 당시 고려에서는 몽고 요구에 어느 정도까지 성의를 보인 데에도 불구하고 탐학 무염한 몽고인은 고려의 사신까지 나치(拿致) 구수(拘囚)한 것만 가지고도(주23 참조) 그들의 동병기운이 또 다시 움직였던 것은 의심치 못할 일이니 {{TagRefT|25}}송립장의 보고는 십분의 믿음성이 있던 것이다.<ref group=“a”>고려사 권23 고종 19년 9월 답몽고 관인서에 「項有宋立章者 來言上國將舉大兵 來征弊邑 其言有不可不信者 云云」이라 하였다.</ref> (B) 북계 역민의 작란 성언 운운은 생각건대 같은 해 7월에 선주(선천)에서 일어난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윤복창 사살사건이 아니면 같은 해 8월 1일에 서경에서 민희 최자온 등의 다루가치 암살계획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TagRefT|26}}소동<ref group=“a”>고려사 권3 고종 19년 7월조에 「遣內侍尹復昌 往北界諸城 奪達魯花赤弓矢 復昌到宣州 達魯花赤 射殺之」라 하였고 같은 해 8월 기유삭조에 「西京巡撫使大將軍閔曦 與司錄崔滋溫 密使將校等 謀殺達魯花赤 西京人間之曰 如是則我京 必如平州 爲蒙兵所城 途叛 壬戌執崔滋溫 囚之 留守崔壽及判官 分臺御史六曹員等 皆逃竄于楮島」라 하였다.</ref>을 가리킨 것인 듯하니 이 두 사건은 모두 강화천도의 결정 또는 실행 후의 사실로서 고려 측의 일부러 늘어놓은 변해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믿으며, (C) 몽고인이 의주에서 선척을 준비 운운이라 한 것은 몽고가 이에 앞서 고려로부터 선박과 수수를 빌려간 일이 있는 위에 또 당시 몽고군은 고려에 대하여 늘 대기 상태에 있었으므로 또한 있을 만한 소식이라 할 것이다.
 
|목차1-1해독문28번=이상 세 가지 조건을 통하여 보면 <cite no="04">“몽고군이 장차 대거 침구”</cite>한다는 것이 서로 공통한 바로서 이러한 소식이야말로 강화천도를 급속히 촉진시킨 주요한 동기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가운데에도 소위 송립장의 보고가 가장 힘 있게 최이를 움직인 것 같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송립장이 과연 고종 19년 6월 15일(갑자)에 본국에 도환한 송득창의 일행이었다면 그 익일인 16일(을축)에 최이가 단호하게 또는 급거히 천도를 결정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1-1해독문28번=이상 세 가지 조건을 통하여 보면 <cite no="04">“몽고군이 장차 대거 침구”</cite>한다는 것이 서로 공통한 바로서 이러한 소식이야말로 강화천도를 급속히 촉진시킨 주요한 동기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가운데에도 소위 송립장의 보고가 가장 힘 있게 최이를 움직인 것 같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송립장이 과연 고종 19년 6월 15일(갑자)에 본국에 도환한 송득창의 일행이었다면 그 익일인 16일(을축)에 최이가 단호하게 또는 급거히 천도를 결정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1-1해독문2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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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9번=다음 강화천도를 결정한 이후에 고려의 대몽 태도를 살펴보면 더욱 경화한 것을 간취할 수가 있는 바이다. 앞서 든 바와 같이 윤복창을 파송하여 북계제성(용강 선주 등지)에 내주(來駐)하던 몽고의 달로화치의 궁시를 압수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몽고 관인의 무장해제를 의미한 것이다. 다시 천도를 전후하여 북계 각지의 달로화치가 많이 {{TagRefT|27}}피살되었던 듯하며<ref group=“a”>원고려기사 태종 4년(고종 19년) 6월조에 「本國叛 殺各縣達魯花赤(〇원사고고전 같은 해 6월조에 盡殺朝廷所置達嚕噶齊七十二人 云云이라 하였음) 率王京及諸州郡人民 竄於海島拒守」라 하였고 고려사 고종 19년 6월 답몽고 관인서 중에 「又稱達魯花赤交死則死留下來 如今儞每拿捕縛者事 右達魯花赤 其在京邑者 接遇甚謹 略不忤意大國豈不聞之耶 又於列城 委命厚對 其間容或有不如國教者 予不能一一知之」라 하여 지방에서 달로화치의 피살된 것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다.</ref> 같은 해 12월에는 몽고군의 총수 살리타가 처인성(오늘날 용인군)에서 승려 김윤후에게 사살되었던 것은 저명한 사실이다.
|목차1-1해독문3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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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0번=이와 같이 고려에서는 중앙과 지방이 해도를 근거로 하여 원래(遠來)한 적의 예봉을 피하는 동시에 수시 수처에 적을 매격(邁擊)하는 체세(體勢)를 취함에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이후 약 30년 동안 여몽 양국의 항전이 시작된 기틀이라 할 것이다. 당시 고려의 대몽 태도와 방략이 이러하게 진전되기까지의 사정은 같은 해(19년) 12월에 동진국(포선만노)에 보낸 국서 가운데에도 대강 나타나 보이니 그의 답동진서(答東眞書)에
|목차1-1해독문3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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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1번=<blockquote no="10">夫所謂蒙古者 猜忍莫甚 雖和之 不足以信之 則我朝之與好 非必出於本意 然如前書所通 越己卯歲 於江東城 勢有不得已 因有和好之約 是以 年前 其軍馬之來也 彼雖背盟棄信 肆虐如此 我朝以謂 寧使曲在彼耳 庶不欲效尤 故遂接遇如初 以禮遣之 今國朝 雖遷徙都邑 當其軍馬之來 則猶待之彌篤 而彼尙略不顧此意 橫行遠近外境 殘暴寇掠 與昔尤甚 由是 四方州郡 莫不嬰城堅守 或阻水自固 以觀其變 而彼益有呑啖之志 以圖攻取 則其在列郡 豈必拘國之指揮與交包禍之人 自速養虎被噬之患耶 於是 非特入守而已 或往往有因民之不忍 出與之戰 殺獲官人士卒 不爲不多矣至今年十二月十六日 水州屬邑處仁部曲之小城 方與對戰 射中魁帥撒禮塔 殺之 俘虜亦多 餘衆潰散 云云</blockquote>
|목차1-1해독문3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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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2번=이라 하였다. 이 국서는 이규보가 지은 것이어니와(동국이상국집 권28 참조) 대저 여몽 양국의 관계는 고종 5년-6년(기묘)경에 강동성을 점거한 글단 사람(대요수국의 함사)을 공멸할 때에 비로소 친화의 약(형제의 약)을 맺게 된 것이니 이는 고려 국내에 입구(入寇)한 글단의 유종을 몽고의 협력으로 공파한 관계상 의례적으로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시의 잔포한 몽고인은 {{TagRefT|28}}저고여(찰고아)조난사건<ref group=“a”>고려사 권22 고종 12년 정월 계미조에 「蒙古使(〇著古與) 離西京 渡鴨綠江 但賷國贐獺皮 其餘紬布等物 皆棄野而去中途 爲盜所殺 蒙古 反疑我 遂與之絕」이라 하였고 같은 왕 19년 11월조의 답몽고 사타관인서에 의하면 저고여를 살해한 것은 실로 우가하(김수)라 명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원사고려전과 원고려기사와 같은 몽고 측 기록에도 「盜殺之於途」 또는 「中途爲賊所害」로 보이니 사자 살해를 구실로 하여 침입한 것은 그들의 침략을 위한 칭탈에 불과한 것이다.</ref>을 구실로 하여 맹약을 파기하고 돌연히 입구하여 잔포를 극하던 것으로서 이러한 몽고와의 화약은 본대 신뢰하기 어려우며 그 위에 몽고인은 병탄의 화심을 품었으므로 심상한 수단으로는 당하기 어려운 바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수자고’의 거(擧)에 출하여 몽병의 행동범위 밖에서 요격하게 된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같은 국서 중에는 지방에서의 반격에 대하여 인민의 자발적 행동과 같이 표시되었으나 이것은 외교상 수식에 불외한 것으로서 지방의 그 같은 행동은 국가 방침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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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3번=② {{ruby|강도의|○○○}} {{ruby|경영과|○○○}} {{ruby|방비|○○}}. 고종 19년 7월에 강화천도가 결행된 뒤에 수도로서의 경영과 그의 방비시설을 상고해보는 것이 또 한 가지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 바이니 이것은 강화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대내 대외의 여러가지 사건과 관련을 가진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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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4번=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 19년 6월 16일에 최이는 천도를 결정하자 그 익일에 2영군을 강화에 발하여 궁궐을 시영(始營)하였으니 (그 옛 땅은 오늘날 강화 읍내) 이는 천도에 박두하여 우선 이어(移御)할 왕거(王居)를 수리하였음에 불과한 것으로 믿으며, 수도로서의 영조(營造)는 천도 이후에 점차로 진보되었던 것이니 고종 21년 정월 계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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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5번=<blockquote no="11">徵諸道民丁 營宮闕及百司(고려사 권213 원종 세가)</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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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6번=라 한 것으로 보면 수도의 경영이 이때에야 겨우 구체적 진행을 보게 된 듯하다. 그리고 그의 규모와 배치는 대개 송도의 그것을 모방한 것으로서 궁전(궁성제문)사사 구정(毬庭)의 칭호로부터 8관 연등 행향 도장에 이르기까지 대개 송도의 것을 답습하였으니 같은 책 같은 해 2월 계미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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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7번=<blockquote no="12">燃燈 王如奉恩寺 以故叅政車倜家 爲奔恩寺 撤民家 以廣輩路 時雖遷都草創 然凡毬庭宮殿寺社號 皆擬松都 八關燃燈行香道場 一依舊式</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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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8번=이라 하였다. 다시 궁전 사사의 칭호에 나아가 양자의 일치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강안전 수창궁 여정궁 경령전(태조를 주로 하여 조종의 진영을 봉안한 곳) 대관전 공신당 봉은사(태조원당) 법왕사 흥국사 왕륜사 묘통사 안화사 보제사 미륵사 제석원 구요당 등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강화의 북산을 송악으로 부른 것도 이러한 관계에서 나온 듯하거니와) 이러한 경영은 또 한 일시에 완성되지 못할 것은 물론이니 국자감(고종 38년) 구요당(같은 왕 40년) 태묘(같은 왕 42년) 등은 최항의 집권시대에 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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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9번=요컨대 강화의 수도로서의 경영은 대개 최이로부터 최항의 집권시대에 걸쳐 완성의 지경에 달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니 이에서 강화의 시설은 수도로서의 손색이 없을 만큼 되었던 것으로서 옛 도읍인 송도에 대하여 강도로써 불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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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0일 (일) 21: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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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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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2)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0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9년04월
시작쪽 19쪽 종료쪽 58쪽 전체쪽 40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5.삼별초의 기인





































본문1-1: (1)강화천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동태와 여몽관계


삼별초난은 강도(강화)로부터 구경(개성)에 환도할 즈음에 그것을 계기로 하여 일어난 것이니 이 난의 유래를 추려보는 데 있어 우리는 먼저 강화천도의 동기와 및 그의 의의와 효과 또는 그로 인하여 일어난 여몽 양국의 관계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19-1三別抄亂은 江都(江華)로부터 舊京(開城)에 還都할 지음에 그것을 契機로 하야 이러난 것이니 이 亂의 由來를 추워보는 데 있어 吾人은 먼저 江華遷都의 動機와 및 그의 意義와 効果 또는 그로 因하야 일어난 麗蒙 兩國의 關係로부터 살펴볼 必要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강화천도의(○○○○○) 사정(○○). 강화천도는 제1회 몽고침입을 받은 후에 일어난 사실이니 이에 관하여 고려사절요(권16)에 의하면 고종 19년 6월조에
쪽수▶P19-2江華遷都의(○○○○○) 事情(○○). 江華遷都는 第一回 蒙古侵入을 바든 後에 일어난 事實이니 이에 關하야 高麗史節要(卷十六)에 依하면 高宗 十九年 六月條에

崔瑀 會宰樞於其第 議遷都 時國家 昇平旣久 京都 戶至十萬 金碧相望 人情 安土重遷 然畏瑀 無敢發一言者 (중략) 夜別抄指諭金世沖 排門而入 詰瑀曰 松京 太祖以來 歷代持守 凡二百餘年 城堅而兵食足 固當戮力而守 以衛社稷棄此而去 將安所都乎 瑀問守城策 世冲不能對 御史大夫大集成(최이 후실의 아버지)謂瑀曰 世冲效兒女之言 敢沮大議 請斬之 以示中外 鷹揚軍上護軍金鉉寶 希集成意 亦言之 遂引世冲 斬之 是日 瑀奏請王速下殿 西幸江華 王猶豫未決 瑀奪祿轉車百餘兩 輸家財于江華 京師洶洶 令有司 刻日 發送五部人戶 仍榜示城中曰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 又分遣使于諸道 徙民山城海島

쪽수▶P19-3

崔瑀 會宰樞於其第 議遷都 時國家 昇平旣久 京都 戶至十萬 金碧相望 人情 安土重遷 然畏瑀 無敢發一言者 (中略) 夜別抄指諭金世沖 排門而入 詰瑀曰 松京 太祖以來 歷代持守 凡二百餘年 城堅而兵食足 固當戮力而守 以衛社稷▶P20-1棄此而去 將安所都乎 瑀問守城策 世冲不能對 御史大夫大集成(崔怡 後室의 父)謂瑀曰 世冲效兒女之言 敢沮大議 請斬之 以示中外 鷹揚軍上護軍金鉉寶 希集成意 亦言之 遂引世冲 斬之 是日 瑀奏請王速下殿 西幸江華 王猶豫未決 瑀奪祿轉車百餘兩 輸家財于江華 京師洶洶 令有司 刻日 發送五部人戶 仍榜示城中曰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 又分遣使于諸道 徙民山城海島

라 하였다. 태조 이래 300여년—김세충의 말 속에는 200여년 운운이라 하였으나 2는 3의 오기가 아니면 그저 어림치고 말한 것으로 생각되거니와—동안 수도로서의 송경은 인호(人戶)가 은성(殷盛)하여 금벽이 상망하리 만큼 번창하였으므로 도성의 인정은 안토중천에 기울어 질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최우의 위세에 눌려 유승단(유승단의 반대론은 다음에 술할 터) 김세충 이외에는 반대의 발언을 감히 하는 자가 없었다. 김세충은 단순한 무인으로서 ”城堅而兵食足”이라는 것을 들어 어디까지든지 사직(社稷)을 위호하자는 것이었으나, 구체적인 송경의 수성책을 묻는 데에는 역시 대답이 막혔던 것이다. 천도론이 드디어 대세를 제(制)하여 최우는 단연히 김세충을 베어 인심을 위압하고 즉일(6월 17일 을축)로 고종께 주청하여 속히 강화로 행행(行幸)할 것을 재촉하고 기일을 정하여 송경의 오부(五部) 인호를 강화에 옮기려 할 때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이라고 방시하고 또 제도(諸道)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방인민도 산성 해도에 옮긴 것이니 천도 결정에 당하여 최우의 결심과 용단이 어떠하였음을 추찰할 수가 있다.
쪽수▶P20-2라 하였다. 太祖 以來 三百餘年—金世沖의 言內에 二百餘年 云云이라 하였으나 二는 三의 誤가 아니면 거저 어름치고 말한 것으로 생각되거니와—동안 首都로서의 松京은 人戶가 殷盛하야 金碧이 相望하리 만큼 繁昌하였음으로 都城의 人情은 安土重遷에 기우러 질 것도 또한 當然한 일이다. 그러나 崔瑀의 威勢에 눌려 兪升旦(兪升旦의 反對論은 다음에 述할 터) 金世沖 以外에는 反對의 發言을 敢히 하는 者가 없었다. 金世沖은 單純한 武人으로서 「城堅而兵食足」이라는 것을 드러 어데까지던저 社稷을 衛護하자는 것이었으나, 具體的인 松京의 守城策을 뭇는 데에는 亦是 對答이 막혔던 것이다. 遷都論이 디디여 大勢를 制하야 崔瑀는 斷然히 金世沖을 베혀 人心을 威壓하고 即日(六月 十六日 乙丑)로 高宗께 奏請하야 速히 江華로 行幸할 것을 재촉하고 期日을 定하야 松京의 五部 人戶를 江華에 옮기려 할 새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이라고 榜示하고 또 諸道에 使者를 보내여 地方人民도 山城 海島에 옴긴 것이니 遷都 決定에 當하야 崔瑀의 決心과 勇斷이 어떠하였음을 推察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천도를 결정한 최우는 그 익일에 2영군을 강화에 발하여 궁궐의 경영을 급히 하였으나 7월 7일에 고종이 강화에 건너갔을 때에 강화 객관에 입어(入御)한 것을 보면 궁실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천도를 급히 하였던 것으로서, 천도 때의 창황(倉皇)한 정경은 다음의 기사로써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니 같은 책 고종 19년 7월 을유조에
쪽수▶P20-3이와 가티 遷都를 決定한 崔瑀는 그 翌日에 二領軍을 江華에 發하야 宮闕의 經營을 急히 하였으나 七月 七日에 高宗이 江華에 건너갔을 때에 江華 客館에 入御한 것을 보면 宮室이 미처 整備되기도 前에 遷都를 急히 하였던 것으로서, 遷都時의 倉皇한 情景은 다음의 記事로써 想像할 수가 있는 것이니 同書 高宗 十九年 七月 乙酉條에

王 發開京 次于昇天府(오늘날 개풍군) 丙戌 入御江華客館 時 霖雨彌旬 泥濘沒脛 人馬僵仆 達官及良家婦女 至有跣足負戴者 鰥寡孤獨 失所號哭者 不可勝計

쪽수▶P21-1

王 發開京 次于昇天府(今 開豊郡) 丙戌 入御江華客館 時 霖雨彌旬 泥濘沒脛 人馬僵仆 達官及良家婦女 至有跣足負戴者 鰥寡孤獨 失所號哭者 不可勝計

라 하였다. 고려의 강화천도는 몽고의 침구에 대한 소극적 저항책에서 나온 것이니 고종 18년(몽고 태종 3년) 8월에 살리타(撒禮塔)가 침입한 이래로 지방적으로는 박서 김경손 등의 귀주대첩을 보았으나 표한(標悍) 잔폭한 몽고병은 질풍과 같이 섬치(閃馳)하여 서북 일대를 유린하고 같은 해 12월경에는 개성 부근에까지 출몰함에 이르렀다. 그 위에 몽고인의 탐학(貪虐)은 예전 요•금 사람과 달라 우리 측의 비사(卑辭) 후폐(厚幣)의 외교적 의례만으로는 만족하지 아니하고 침략지에는 달로화치(단사관)까지 두어 고려의 주권을 침식하며 여정(麗廷)에 향하여는 왕공대관의 동남동녀를 비롯하여 금 은주자(金銀珠子) 금수(錦繡) 능라(綾羅) 수달피(水獺皮) 등 진귀한 물자의 징색(徵索)은 그의 도를 극하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 측에서도 심상한 수단으로서는 당하기 어려움을 각오하게 된 것으로서 당시 집정자인 최우는 드디어 천도의 대사를 단행하지 아니하지 못한 것이다.
쪽수▶P21-2라 하였다. 高麗의 江華遷都는 蒙古의 侵寇에 對한 消極的 抵抗策에서 나온 것이니 高宗 十八年(蒙古 太宗 三年) 八月에 撒禮塔이 侵入한 以來로 地方的으로는 朴犀 金慶孫 等의 龜州大捷을 보왔으나 標悍殘暴한 蒙古兵은 疾風과 가티 閃馳하야 西北 一帶를 蹂躙하고 同年 十二月頃에는 開城 附近에까지 出沒함에 이르렀다. 그 우에 蒙古人의 貪虐은 예전 遼•金人과 달러 우리 側의 卑辭 厚幣의 外交的 儀禮만으로는 滿足하지 아니하고 侵略地에는 達魯花赤(斷事官)까지 두어 高麗의 主權을 侵蝕하며 麗廷에 向하여는 王公大官의 童男童女를 비롯하야 金銀珠子 錦繡 綾羅 水獺皮 等 珍貴한 物資의 徵索은 그의 度를 極하던 것이다. 이에 對하야 高麗 側에서도 尋常한 手段으로서는 當키 어려움을 覺悟하게 된 것으로서 當時 執政者인 崔瑀는 디디여 遷都의 大事를 斷行치 아니치 못한 것이다.
최우의 강화천도는 몽고 방어에 자못 자신을 가지고 행한 것이니 천도에 반대하던 김세충이 송경 수성책에 답하지 못함으로 즉석에서 베인 것으로도 저간의 사정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원래 유목민족의 습성을 아직까지 벗지 못한 몽고인의 수전(水戰)에 졸렬한 점은 일찍부터 고려에 간파하게 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이러한 몽고의 약점을 공방(攻防)에 이용한 것은 지방에서부터 먼저 시험하였으니 고종 18년 9월에 몽고병이 황봉 두 주에 침범하니 두 주수는 인민을 거느리고 철도(황주)에 입보(入保)하였고 또 같은 책 같은 해(18년) 10월조에
쪽수▶P21-3崔瑀의 江華遷都는 蒙古 防禦에 자못 自信을 가지고 行한 것이니 遷都에 反對하던 金世沖이 松京 守城策에 答치 못함으로 卽席에서 베힌 것으로도 這間의 事情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元來 遊牧民族의 習性을 아직까지 벗지 못한 蒙古人의 水戰에 拙劣한 點은 일직부터 高麗에 看破케 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이러한 蒙古의 弱點을 攻防에 利用한 것은 地方에서부터 먼저 試驗하였으니 高宗 十八年 九月에 蒙古兵이 黃鳳 二州에 侵犯하매 二州守는 人民을 거느리고 鐵島(黃州)에 入保하였고 또 同書 同年(十八年) 十月條에

咸新鎭報曰 國家若遣舟楫 我當盡殺留城蒙人小尾生等 然後卷城乘舟如京 乃命金永時等三十人 具舟楫以送 果殺蒙人幾盡 小尾生 先覺亡去 副使全僩 率吏民 入保薪島

쪽수▶P21-4

咸新鎭報曰 國家若遣舟楫 我當盡殺留城蒙人小尾生等 然後卷城乘舟如京 乃命金永時等三十人 具舟楫以送 果殺蒙人幾盡 小尾生 先覺亡去 副使全僩 率吏民 入保薪島

라 한 것으로 보면 함신진(의주)에서는 주즙(舟楫)의 편을 얻어 유주(留駐)하는 몽고인을 오살(鏖殺)한 다음에 신도(용천)에 입보한 일까지 있었다.
쪽수▶P22-1라 한 것으로 보면 咸新鎭(義州)에서는 舟楫의 便을 어더 留駐하는 蒙古人을 鏖殺한 다음에 薪島(龍川)에 入保한 일까지 있었다.
이와 같이 몽고 침구의 벽두에 있어 각지에서는 벌써 해도에 입보하고 또는 주즙의 편으로써 몽고에 당한 것은 강화천도의 남상(濫觴)이 된 것으로 믿거니와 다시 몽고인은 그들 자신의 약점을 고려에 향하여 폭로도 하였으니 고려사(권23) 고종 19년 2월조에
쪽수▶P22-2이와 가티 蒙古侵寇의 劈頭에 있어 各地에서는 발서 海島에 入保하고 또는 舟楫의 便으로써 蒙古에 當한 것은 江華遷都의 濫觴이 된 것으로 믿거니와 다시 蒙古人은 그들 自身의 弱點을 高麗에 向하야 暴露도 하였으니 高麗史(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二月條에

遣西京都領鄭應卿 前靜州副使朴得芬 押船三十艘 水手三千人 發龍州浦(오늘날 용천) 赴蒙古 從其請也

쪽수▶P22-3

遣西京都領鄭應卿 前靜州副使朴得芬 押船三十艘 水手三千人 發龍州浦(今 龍川) 赴蒙古 從其請也

라 하였다. 현대문주21▶이것은 몽고 태종 4년에 동진(동하라고도 칭하는 것이니 오늘날 간도지방에 있었음)의 포선만노(蒲鮮萬奴)를 치려 할 때의 일인 듯 하거니와[“a” 1] 당시 양국 사이에는 화전의 판이 아직 결정되지 못한 데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향하여 선박과 수수(水手)를 청한 것은 명백히 몽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소위 ‘조수자고(阻水自固)’의 대책을 천도 이후에도 강조한 바가 있으니
쪽수▶P22-4라 하였다. 원문주21▶이것은 蒙古 太宗 四年에 東眞(東夏라고도 稱하는 것이니 今 間島地方에 있었음)의 蒲鮮萬奴를 치려 할 때의 일인 듯 하거니와[1] 當時 兩國 사이에는 和戰의 局이 아직 決定되지 못한 데에도 不拘하고 高麗에 向하야 船舶과 水手를 請한 것은 明白히 蒙古 自身의 弱點을 드러 보인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럼으로 高麗에서는 所謂 「阻水自固」의 策을 遷都 以後에도 强調한 바가 있으니

郎將尹椿 自蒙古軍來 椿板入蒙古有年(고종 40년 10월에 양근성방호별감으로서 몽고에 출강하였던 자) 至是 逃還言曰⋯⋯車羅大 甞將舟師七十艘盛陳旗幟 欲攻押海(羅州近海의 島) 使椿及一官人 乘別船督戰 押海人 置二砲於大艦 待之 兩軍 相待未戰 車羅大臨岸望之 召椿等曰 我船受砲(○○○○) 必糜碎(○○○) 不可當也(○○○○) 更令移船攻之 押海人 隨處備砲 故蒙人遂罷水攻之具(○○○○○○○○) 爲今計 宜屯田島內(○○○○○) 且耕且守(○○○○) 淸野以待(○○○○) 策之上也(○○○○) 崔流然之(고려사절요 권17 고종 43년 6월조)

쪽수▶P22-5

郎將尹椿 自蒙古軍來 椿板入蒙古有年(高宗 四十年 十月에 楊根城防護別監으로서 蒙古에 出降하였던 者) 至是 逃還言曰⋯⋯車羅大 甞將舟師七十艘盛陳旗幟 欲攻押海(羅州近海의 島) 使椿及一官人 乘別船督戰 押海人 置二砲於大艦 待之 兩軍 相待未戰 車羅大臨岸望之 召椿等曰 我船受砲(○○○○) 必糜碎(○○○) 不可當也(○○○○) 更令移船攻之 押海人 隨處備砲 故蒙人遂罷水攻之具(○○○○○○○○) 爲今計 宜屯田島內(○○○○○) 且耕且守(○○○○) 淸野以待(○○○○) 策之上也(○○○○) 崔流然之(高麗史節要 卷十七 高宗 四十三年 六月條)

라 한 윤춘의 보고는 그가 경험한 몽고인의 약점을 들어 최우 이래 고려의 대몽방략의 적절한 것을 다시금 칭도(稱道)하는 동시에 그것의 강화를 고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쪽수▶P22-6라 한 尹椿의 報告는 그가 經驗한 蒙古人의 弱點을 드러 崔瑀 以來 高麗의 對蒙方略의 適切한 것을 다시금 稱道하는 同時에 그것의 强化를 高調한 것으로 解釋된다.
이와 같이 보아 오면 최우의 천도를 단행한 의도와 천도지로서 강화를 택한 의미도 이해할 수가 있으니 개성은 비록 북으로 천마 성거의 험(險)을 액(扼)하고 있다 하나 역시 수적의 땅으로서 서쪽으로부터서의 대륙경적을 막아 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단구(丹寇) 때로부터 쓰린 경험을 가진 바이다. 그러나 강화는 나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개성과도 가까운 위에 혈구 마니의 천험과 갑곶의 요진을 옹유(擁有)한 형승(形勝)의 땅으로서 소위 천지의 현대문주22▶오구(奧區)[“a” 2]를 이루어 비록 육지에 핍근하다 하나 고려의 제해력을 가하면 넉넉히 몽고에 당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쪽수▶P23-1이와 가티 보와 오면 崔瑀의 遷都를 斷行한 意圖와 遷都地로서 江華를 擇한 意味도 理解할 수가 있으니 開城은 비록 北으로 天磨 聖居의 險을 扼하고 있다 하나 亦是 受敵의 地로서 西으로부터서의 大陸勁敵을 막어 내기 어려운 것은 이미 丹寇 때로부터 쓰린 經驗을 가진 바이다. 그러나 江華는 國의 中間에 位置하야 開城과도 가까운 우에 穴口 摩尼의 天險과 甲串의 要津을 擁有한 形勝의 地로서 所謂 天地의 원문주22▶奧區[2]를 이루워 비록 陸地에 逼近하다 하나 高麗의 制海力을 加하면 넉넉히 蒙古에 當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강화피란의 의견은 이미 천도의 전년 즉 고종 18년 12월경에 나타나게 되었으니
쪽수▶P23-2그런데 江華避亂의 意見은 이미 遷都의 前年 即 高宗 十八年 十二月頃에 나타나게 되였으니

昇天府副使尹繗 錄事朴文檥 潜置家屬于江華 乃說崔瑀曰 江華可以避亂 瑀信之 使二人先徍審之 云云(고려사절요 권16 고종 18년 12월조)

쪽수▶P23-3

昇天府副使尹繗 錄事朴文檥 潜置家屬于江華 乃說崔瑀曰 江華可以避亂 瑀信之 使二人先徍審之 云云(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八年 十二月條)

이라 한 기사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몽고병은 도성 부근까지 출몰함으로 승천부 부사 윤인과 녹사 박문의 등은 그들의 가속을 미리 강화에 옮기고 최이(우)에게 강화는 난을 피할 만한 곳이라고 빙징(憑懲)한 것이다. 윤인 등은 강화를 다만 피란지로서 들었으나 최이는 집권자로서 국정을 전단(專壇)하고 있던 만큼 피란을 통종한 것은 최이의 개인에 관한 것으로만 볼 것도 아니며 그 위에 최이는 바로 윤인 등으로 하여금 실지로 강화를 답사시킨 것도 단순한 개인의 피란지를 물색케 하였다는 것보다 천도지로서의 적부성을 다시 내사하게 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니 이렇게 본다면 윤인 등의 강화 피란을 권고한 것도 몽고 침구에 대한 천도피란을 건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쪽수▶P23-4이라 한 記事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當時 蒙古兵은 都城 附近까지 出沒함으로 昇天府 副使 尹繗과 錄事 朴文檥 等은 그들의 家屬을 미리 江華에 옮기고 崔怡(瑀)에게 江華는 亂을 避할 만한 곳이라고 憑懲한 것이다. 尹繗 等은 江華를 다만 避亂地로서 드렀으나 崔怡는 執權者로서 國政을 專壇하고 있던 만큼 避亂을 通慫한 것은 崔怡의 個人에 關한 것으로만 볼 것도 아니며 그 우에 崔怡는 바로 尹繗 等으로 하여금 實地로 江華를 踏査시킨 것도 單純한 個人의 避亂地를 物色케 하였다는 것보다 遷都地로서의 適否性을 다시 內査케 한 것으로 解釋되는 바이니 이렇게 본다면 尹繗 等의 江華 避亂을 勸告한 것도 蒙古侵寇에 對한 遷都避亂을 建議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그 익년(19년) 정월에 이르러 살리타는 침략 각지에 달로화치(達魯花赤)를 남기고 일단 살거(撒去)하였으나 몽고와의 관계는 자못 용이하지 아니한 바가 있고 몽고병의 행동은 또한 예측을 불허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해 2월에 들어서부터는 천도문제가 벌써 표면화하여 재추 중신의 회의를 거듭하였으니 2월 20일(신미)에
쪽수▶P23-5그 翌年(十九年) 正月에 이르러 撒禮塔은 侵略 各地에 達魯花赤을 남기고 一旦 撒去하였으나 蒙古와의 關係는 자못 容易치 아니한 바가 있고 蒙古兵의 行動은 또한 豫測을 不許하던 것이다. 그리하야 同年 二月에 드러서부터는 遷都問題▶P24-1가 발서 表面化하야 宰樞 重臣의 會議를 거듭하였으니 二月 二十日(辛未)에

宰樞 會典牧司 議移都(고려사 권33)

쪽수▶P24-2

宰樞 會典牧司 議移都(高麗史 卷三十三)

라 하였고 같은 해 5월 23일(계묘)에
쪽수▶P24-3라 하였고 同年 五月 二十三日(癸卯)에

四品以上 又會議 皆日城守拒敵 唯宰樞鄭畝大集成等曰 宜徙都避難(위와 같음)

쪽수▶P24-4

四品以上 又會議 皆日城守拒敵 唯宰樞鄭畝大集成等曰 宜徙都避難(上同)

이라 하였다. 안토중천의 민정을 누르고 300여년의 수도를 천이(遷移)하는 것은 원래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시 회의를 거듭한 것은 천도의 가부를 논함에 있었고 국도의 후보지에 관하여서는 그다지 이론이 없었던 듯하니, 그는 강화가 당시 유일의 후보지였던 까닭으로 믿는다. 그리하여 강화천도는 이미 논거한 바와 같이 같은 해 6월에 들어 급속히 결정되어 창졸간에 실현을 봄에 이르렀다.
쪽수▶P24-5이라 하였다. 安土重遷의 民情을 누르고 三百餘年의 首都를 遷移하는 것은 元來 容易한 일이 아니다. 그럼으로 當時 會議를 거듭한 것은 遷都의 可否를 論함에 있었고 國都의 候補地에 關하야서는 그다지 異論이 없었던 듯하니, 그는 江華가 當時 唯一의 候補地이었던 까닭으로 믿는다. 그리하야 江華遷都는 이미 論擧한 바와 가티 同年 六月에 드러 急速히 決定되여 倉卒間에 實現을 봄에 이르렀다.
강화천도에 있어 그와 같이 급거히 행하게 된 데에는 상당히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것같으니 이에 관하여 단적으로 같은 해 11월 몽고의 천도 힐문에 답한 고려의 국서에 의하면 천도 결행의 동기로서
쪽수▶P24-6江華遷都에 있어 그와 가티 急遽히 行하게 된 데에는 相當히 複雜한 事情이 있었던 것같으니 이에 關하야 端的으로 同年 十一月 蒙古의 遷都 詰問에 答한 高麗의 國書에 依하면 遷都 決行의 動機로서

(전략) (A) 未幾 忽有宋立章者 從池義深行李 詣在上國逃來者言 大國將擧大兵來討 己有約束 百姓聞之 驚駭顚嚬 其逃閃者多矣 (B) 俄又聞 北界一二城逆民等 妄諭其城達魯花赤 殺戮平民 又殺臣所遣內臣 此人 是候上國使佐 値行李 則迎到京師者也 而乃殺之 因以作亂 聲言大國兵馬來也 (C)又聞 上國使佐 到義州 令淮備大船一千艘 待涉軍馬(고려사 권23)

쪽수▶P24-7

(前略) (A) 未幾 忽有宋立章者 從池義深行李 詣在上國逃來者言 大國將擧大兵來討 己有約束 百姓聞之 驚駭顚嚬 其逃閃者多矣 (B) 俄又聞 北界一二城逆民等 妄諭其城達魯花赤 殺戮平民 又殺臣所遣內臣 此人 是候上國使佐 値行李 則迎到京師者也 而乃殺之 因以作亂 聲言大國兵馬來也 (C)又聞 上國使佐 到義州 令淮備大船一千艘 待涉軍馬(高麗史 卷二十三)

라고 지적하였다. 이 고려의 국서는 우리 측의 행동을 변해(辯解)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었을 것이나 우리는 이 몇 가지 조건을 통하여 저간의 소식을 어느 정도까지 탐색할 수가 있는 것이니, (A) 먼저 송립장에 관한 사실로부터 살펴보면 송립장은 지의심을 따라 몽고에 건너갔다가(요양?) 도환한 자라 한 것으로 보아 그는 같은 해 3월에 지의심과 같이 몽고에 건너갔다가 6월 15일(갑자)에 도귀(逃歸)하였던 현대문주23▶송득창[“a” 3]의 일행이었던 듯하거니와 다시 이에 관련하여 고려사절요의 기사를 들어보면 ”樞密院副使致仕宋義 與其甥將軍尹秀 叛入蒙古 初 義以隊正 隨使如蒙古 知欲加兵於我 逃還以告 遷都江華 以功 驟至樞副 至是 復都舊京 義懼蒙古詰前事 挈家 投頭輦哥以叛”(권18 원종 11년 8월조)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송의와 송립장은 그의 행동으로 보나 본국에 도귀한 시기로 보나 서로 일치한 바가 있으니 생각건대 송립장과 송의는 동일한 인물로서 송립장은 현대문주24▶대몽관계상[“a” 4] ‘의’로 개명한 것이나 아닐까 한다. 어쨌든 송립장은 지의심의 행리로부터 도환한 점으로써 추찰하여 보면 당시 고려에서는 몽고 요구에 어느 정도까지 성의를 보인 데에도 불구하고 탐학 무염한 몽고인은 고려의 사신까지 나치(拿致) 구수(拘囚)한 것만 가지고도(주23 참조) 그들의 동병기운이 또 다시 움직였던 것은 의심치 못할 일이니 현대문주25▶송립장의 보고는 십분의 믿음성이 있던 것이다.[“a” 5] (B) 북계 역민의 작란 성언 운운은 생각건대 같은 해 7월에 선주(선천)에서 일어난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윤복창 사살사건이 아니면 같은 해 8월 1일에 서경에서 민희 최자온 등의 다루가치 암살계획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현대문주26▶소동[“a” 6]을 가리킨 것인 듯하니 이 두 사건은 모두 강화천도의 결정 또는 실행 후의 사실로서 고려 측의 일부러 늘어놓은 변해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믿으며, (C) 몽고인이 의주에서 선척을 준비 운운이라 한 것은 몽고가 이에 앞서 고려로부터 선박과 수수를 빌려간 일이 있는 위에 또 당시 몽고군은 고려에 대하여 늘 대기 상태에 있었으므로 또한 있을 만한 소식이라 할 것이다.
쪽수▶P24-8라고 指摘하였다. 이 高麗의 國書는 우리 側의 行動을 辯解하려는 意圖도 包含되였을 것이나 吾人은 이 멫 가지 條件을 通하야 這間의 消息을 어느 程度까지 探索할 수가 있는 것이니, (A) 먼저 宋立章에 關한 事實로부터 살펴보면 宋立章은 池義深을 따러 蒙古에 건너갔다가(遼陽?) 逃還한 者라 한 것으로 보와 그는 同年 三月에 池義深과 가티 蒙古에 건너▶P25-1갓다가 六月 十五日(甲子)에 逃歸하였던 원문주23▶宋得昌[3]의 一行이었던 듯하거니와 다시 이에 關聯하야 高麗史節要의 記事를 드러보면 「樞密院副使致仕宋義 與其甥將軍尹秀 叛入蒙古 初 義以隊正 隨使如蒙古 知欲加兵於我 逃還以告 遷都江華 以功 驟至樞副 至是 復都舊京 義懼蒙古詰前事 挈家 投頭輦哥以叛」(卷十八 元宗 十一年 八月條)이라 하였다. 일로 보면 宋義와 宋立章은 그의 行動으로 보나 本國에 逃歸한 時期로 보나 서로 一致한 바가 있나니 생각컨대 宋立章과 宋義는 同一한 人物로서 宋立章은 원문주24▶對蒙關係上[4] 「義」로 改名한 것이나 아닐런가 한다. 어쨌든 宋立章은 池義深의 行李로부터 逃還한 點으로써 推察하여 보면 當時 高麗에서는 蒙古 要求에 어느 程度까지 誠意를 보인 데에도 不拘하고 貪虐 無厭한 蒙古人은 高麗의 使臣까지 拿致 拘囚한 것만 가지고도(註二十三 叅照) 그들의 動兵機運이 또 다시 움지겼던 것은 疑心치 못할 일이니 원문주25▶宋立章의 報告는 十分의 믿엄性이 있던 것이다.[5] (B) 北界 逆民의 作亂 聲言 云云은 생각컨대 同年 七月에 宣州(宣川)에서 이러난 達魯花赤의 尹復昌 射殺事件이 아니면 同年 八月 一日에 西京에서 閔曦 崔滋溫 等의 達魯花赤 暗殺計劃으로 말미암어 이러난 원문주26▶騷動[6]을 가르친 것인 듯하니 이 두 事件은 모다 江華遷都의 決定 또는 實行 後의 事實로서 高麗 側의 일부러 느러노흔 辯解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믿으며, (C) 蒙古人이 義州에서 船隻을 準備 云云이라 한 것은 蒙古가 이에 앞서 高麗로부터 船舶과 水手를 빌어간 일이 있는 우에 또 當時 蒙古軍은 高麗에 對하야 늘 待機 狀態에 있었음으로 또한 있을 만한 消息이라 할 것이다.
이상 세 가지 조건을 통하여 보면 “몽고군이 장차 대거 침구”한다는 것이 서로 공통한 바로서 이러한 소식이야말로 강화천도를 급속히 촉진시킨 주요한 동기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가운데에도 소위 송립장의 보고가 가장 힘 있게 최이를 움직인 것 같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송립장이 과연 고종 19년 6월 15일(갑자)에 본국에 도환한 송득창의 일행이었다면 그 익일인 16일(을축)에 최이가 단호하게 또는 급거히 천도를 결정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쪽수▶P25-2以上 세 가지 條件을 通하야 보면 「蒙古軍이 將次 大擧 侵寇」한다는 것이 서로 共通한바로서 이러한 消息이야말로 江華遷都를 急速히 促進시킨 主要한 動機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가운대에도 所謂 宋立章의 報告가 가장 힘 있게 崔怡를 움지긴 것 같다. 우에서 論한 바와 가티 宋立章이 果然 高宗 十九年 六月 十五日(甲子)에 本國에 逃還한 宋得▶P26-1昌의 一行이었다면 그 翌日인 十六日(乙丑)에 崔怡가 斷乎하게 또는 急遽히 遷都를 決定한 것도 偶然한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강화천도를 결정한 이후에 고려의 대몽 태도를 살펴보면 더욱 경화한 것을 간취할 수가 있는 바이다. 앞서 든 바와 같이 윤복창을 파송하여 북계제성(용강 선주 등지)에 내주(來駐)하던 몽고의 달로화치의 궁시를 압수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몽고 관인의 무장해제를 의미한 것이다. 다시 천도를 전후하여 북계 각지의 달로화치가 많이 현대문주27▶피살되었던 듯하며[“a” 7] 같은 해 12월에는 몽고군의 총수 살리타가 처인성(오늘날 용인군)에서 승려 김윤후에게 사살되었던 것은 저명한 사실이다.
쪽수▶P26-2다음 江華遷都를 決定한 以後에 高麗의 對蒙 態度를 살펴보면 더욱 硬化한 것을 看取할 수가 있는 바이다. 前擧한 바와 가티 尹復昌을 派送하야 北界諸城(龍岡 宣州 等地)에 來駐하던 蒙古의 達魯花赤의 弓矢를 押收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蒙古 官人의 武裝解除를 意味한 것이다. 다시 遷都를 前後하야 北界各地의 達魯花赤이 만히 원문주27▶被殺되였던 듯하며[7] 同年 十二月에는 蒙古軍의 總帥 撒禮塔이 處仁城(今 龍仁郡)에서 僧金允侯에게 射殺되였든 것은 著名한 事實이다.
이와 같이 고려에서는 중앙과 지방이 해도를 근거로 하여 원래(遠來)한 적의 예봉을 피하는 동시에 수시 수처에 적을 매격(邁擊)하는 체세(體勢)를 취함에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이후 약 30년 동안 여몽 양국의 항전이 시작된 기틀이라 할 것이다. 당시 고려의 대몽 태도와 방략이 이러하게 진전되기까지의 사정은 같은 해(19년) 12월에 동진국(포선만노)에 보낸 국서 가운데에도 대강 나타나 보이니 그의 답동진서(答東眞書)에
쪽수▶P26-3이와 가티 高麗에서는 中央과 地方이 海島를 根據로 하야 遠來한 敵의 銳鋒을 避하는 同時에 隨時 隨處에 敵을 邁擊하는 體勢를 取함에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爾後 約 三十年 동안 麗蒙 兩國의 抗戰이 始作된 기틀이라 할 것이다. 當時 高麗의 對蒙 態度와 方略이 이러하게 進展되기까지의 事情은 同年(十九年) 十二月에 東眞國(蒲鮮萬奴)에 보낸 國書 가운대에도 대강 나타나 보이니 그의 答東眞書에

夫所謂蒙古者 猜忍莫甚 雖和之 不足以信之 則我朝之與好 非必出於本意 然如前書所通 越己卯歲 於江東城 勢有不得已 因有和好之約 是以 年前 其軍馬之來也 彼雖背盟棄信 肆虐如此 我朝以謂 寧使曲在彼耳 庶不欲效尤 故遂接遇如初 以禮遣之 今國朝 雖遷徙都邑 當其軍馬之來 則猶待之彌篤 而彼尙略不顧此意 橫行遠近外境 殘暴寇掠 與昔尤甚 由是 四方州郡 莫不嬰城堅守 或阻水自固 以觀其變 而彼益有呑啖之志 以圖攻取 則其在列郡 豈必拘國之指揮與交包禍之人 自速養虎被噬之患耶 於是 非特入守而已 或往往有因民之不忍 出與之戰 殺獲官人士卒 不爲不多矣至今年十二月十六日 水州屬邑處仁部曲之小城 方與對戰 射中魁帥撒禮塔 殺之 俘虜亦多 餘衆潰散 云云

쪽수▶P26-4

夫所謂蒙古者 猜忍莫甚 雖和之 不足以信之 則我朝之與好 非必出於本意 然如前書所通 越己卯歲 於江東城 勢有不得已 因有和好之約 是以 年前 其軍馬之來也 彼雖背盟棄信 肆虐如此 我朝以謂 寧使曲在彼耳 庶不欲效尤 故遂接遇如初 以禮遣之 今國朝 雖遷徙都邑 當其軍馬之來 則猶待之彌篤 而彼尙略不顧此意 橫行遠近外境 殘暴寇掠 與昔尤甚 由是 四方州郡 莫不嬰城堅守 或阻水自固 以觀其變 而彼益有呑啖之志 以圖攻取 則其在列郡 豈必拘國之指揮與交包禍之人 自速養虎被噬之患耶 於是 非特入守而已 或往往有因民之不忍 出與之戰 殺獲官人士卒 不爲不多矣至今年十二月十六日 水州屬邑處仁部曲之小城 方與對戰 射中魁帥撒禮塔 殺之 俘虜亦多 餘衆潰散 云云

이라 하였다. 이 국서는 이규보가 지은 것이어니와(동국이상국집 권28 참조) 대저 여몽 양국의 관계는 고종 5년-6년(기묘)경에 강동성을 점거한 글단 사람(대요수국의 함사)을 공멸할 때에 비로소 친화의 약(형제의 약)을 맺게 된 것이니 이는 고려 국내에 입구(入寇)한 글단의 유종을 몽고의 협력으로 공파한 관계상 의례적으로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시의 잔포한 몽고인은 현대문주28▶저고여(찰고아)조난사건[“a” 8]을 구실로 하여 맹약을 파기하고 돌연히 입구하여 잔포를 극하던 것으로서 이러한 몽고와의 화약은 본대 신뢰하기 어려우며 그 위에 몽고인은 병탄의 화심을 품었으므로 심상한 수단으로는 당하기 어려운 바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수자고’의 거(擧)에 출하여 몽병의 행동범위 밖에서 요격하게 된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같은 국서 중에는 지방에서의 반격에 대하여 인민의 자발적 행동과 같이 표시되었으나 이것은 외교상 수식에 불외한 것으로서 지방의 그 같은 행동은 국가 방침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쪽수▶P27-1이라 하였다. 이 國書는 李奎報의 作이어니와(東國李相國集 卷二十八 叅照) 大抵 麗蒙 兩國의 關係는 高宗 五年-六年(己卯)頃에 江東城을 占據한 契丹人(大遼收國의 喊舍)을 攻滅할 때에 비로소 親和의 約(兄弟의 約)을 맺게 된 것이니 이는 高麗 國內에 入寇한 契丹의 遺種을 蒙古의 協力으로 攻破한 關係上 儀禮的으로 成立된 것이다. 그러나 猜疑 殘暴한 蒙古人은 원문주28▶著古與(札古雅)遭難事件[8]을 口實로 하야 盟約을 破棄하고 突然히 入寇하야 殘暴을 極하던 것으로서 이러한 蒙古와의 和約은 본대 信賴키 어려우며 그 우에 蒙古人은 併吞의 禍心을 품었음으로 尋常한 手段으로는 當키 어려운 바이다. 이리하야 듸듸여 「阻水自固」의 擧에 出하야 蒙兵의 行動範圍 밖에서 遼擊케 된 事情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特히 同 國書 中에는 地方에서의 反擊에 對하야 人民의 自發的 行動과 가티 表示되였으나 이것은 外交上 修飾에 不外한 것으로서 地方의 그 가튼 行動은 國家 方針에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다.
강도의(○○○) 경영과(○○○) 방비(○○). 고종 19년 7월에 강화천도가 결행된 뒤에 수도로서의 경영과 그의 방비시설을 상고해보는 것이 또 한 가지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 바이니 이것은 강화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대내 대외의 여러가지 사건과 관련을 가진 까닭이다.
쪽수▶P27-2江都의(○○○) 經營과(○○○) 防備(○○). 高宗 十九年 七月에 江華遷都가 決行된 뒤에 首都로서의 經營과 그의 防備施設을 상고해보는 것이 또 한 가지 必要한 일이라고 믿는 바이니 이것은 江華를 中心으로 하야 이러난 對內 對外의 여러가지 事件과 關聯을 가진 까닭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 19년 6월 16일에 최이는 천도를 결정하자 그 익일에 2영군을 강화에 발하여 궁궐을 시영(始營)하였으니 (그 옛 땅은 오늘날 강화 읍내) 이는 천도에 박두하여 우선 이어(移御)할 왕거(王居)를 수리하였음에 불과한 것으로 믿으며, 수도로서의 영조(營造)는 천도 이후에 점차로 진보되었던 것이니 고종 21년 정월 계해에
쪽수▶P27-3우에서 言及한 바와 가티 高宗 十九年 六月 十六日에 崔怡는 遷都를 決定하자 그 翌日에 二營軍을 江華에 發하야 宮闕을 始營하였으니 (그 舊地는 今 江華 邑內) 이는 遷都에 迫頭하야 우선 移御할 王居를 修理하였음에 不過한 것으로 믿으며, 首都로서의 營造는 遷都 以後에 漸次로 進捗되었던 것이니 高宗 二十一年 正月 癸亥에

徵諸道民丁 營宮闕及百司(고려사 권213 원종 세가)

쪽수▶P27-4

徵諸道民丁 營宮闕及百司(高麗史 卷二十三 宗高 世家)

라 한 것으로 보면 수도의 경영이 이때에야 겨우 구체적 진행을 보게 된 듯하다. 그리고 그의 규모와 배치는 대개 송도의 그것을 모방한 것으로서 궁전(궁성제문)사사 구정(毬庭)의 칭호로부터 8관 연등 행향 도장에 이르기까지 대개 송도의 것을 답습하였으니 같은 책 같은 해 2월 계미조에
쪽수▶P27-5라 한 것으로 보면 首都의 經營이 이때에야 겨우 具體的 進行을 보게된 듯하다. 그리고 그의 規模와 排置는 대개 松都▶P28-1의 그것을 模倣한 것으로서 宮殿(宮城諸門)寺社 毬庭의 稱號로부터 八關 燃燈 行香 道場에 이르기까지 대개 松都의 것을 踏襲하였으니 同書 仝年 二月 癸未條에

燃燈 王如奉恩寺 以故叅政車倜家 爲奔恩寺 撤民家 以廣輩路 時雖遷都草創 然凡毬庭宮殿寺社號 皆擬松都 八關燃燈行香道場 一依舊式

쪽수▶P28-2

燃燈 王如奉恩寺 以故叅政車倜家 爲奔恩寺 撤民家 以廣輩路 時雖遷都草創 然凡毬庭宮殿寺社號 皆擬松都 八關燃燈行香道場 一依舊式

이라 하였다. 다시 궁전 사사의 칭호에 나아가 양자의 일치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강안전 수창궁 여정궁 경령전(태조를 주로 하여 조종의 진영을 봉안한 곳) 대관전 공신당 봉은사(태조원당) 법왕사 흥국사 왕륜사 묘통사 안화사 보제사 미륵사 제석원 구요당 등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강화의 북산을 송악으로 부른 것도 이러한 관계에서 나온 듯하거니와) 이러한 경영은 또 한 일시에 완성되지 못할 것은 물론이니 국자감(고종 38년) 구요당(같은 왕 40년) 태묘(같은 왕 42년) 등은 최항의 집권시대에 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쪽수▶P28-3이라 하였다. 다시 宮殿 寺社의 稱號에 나아가 兩者의 一致한 例를 멫 가지 드러보면 康安股 壽昌宮 麗正宮 景靈殿(太祖를 主로 하야 祖宗의 眞影을 奉安한 곳) 大觀殿 功臣堂 奉恩寺(太祖願堂) 法王寺 興國寺 王輪寺 妙通寺 安和寺 普濟寺 彌勒寺 帝釋院 九曜堂 等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江華의 北山을 松岳으로 부른 것도 이러한 關係에서 나온 듯하거니와) 이러한 經營은 또 한 一時에 完成되지 못할 것은 勿論이니 國子監(高宗 三十八年) 九曜堂(同 四十年) 太廟(同 四十二年) 等은 崔沆의 執權時代에 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요컨대 강화의 수도로서의 경영은 대개 최이로부터 최항의 집권시대에 걸쳐 완성의 지경에 달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니 이에서 강화의 시설은 수도로서의 손색이 없을 만큼 되었던 것으로서 옛 도읍인 송도에 대하여 강도로써 불러진 것이다.
쪽수▶P28-4要컨대 江華의 首都로서의 經營은 대개 崔怡로부터 崔沆의 執權時代에 걸처 完成의 域에 達한 것으로 보아도 조흘 것이니 이에서 江華의 施設은 首都로서의 遜色이 없을 만큼 되었던 것으로서 舊都인 松都에 對하야 江都로써 불러진 것이다.















본문1-2: (2)고려무인의 전통적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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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3: (3)환도문제와 삼별초난과의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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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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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元史에는 太宗 四年에 東眞征伐에 關한 記事가 보이지 아니하나 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八年 冬十月條에 「蒙古二人 持牒 至平州……其牒云 我兵初至咸新鎭 迎降者皆不返 汝國若不下 我終不返 降則當向東眞矣」라 하였고 元高麗紀事 太宗 五年 四月 高麗에 보이는 國書 中에 「朕命汝征討萬奴 爲何 逗遛不進此汝之罪三也」라 한 記事와 仝書 己酉 八月 十五日 高麗에 보니 皇后太子의 懿旨에 「於壬辰年(太宗 四年) 令隨從撒兒塔 征討萬奴 爾等即郤違背 遷入海島」라 한 記事를 對照하야 상고해 보면 蒙古 太宗은 撒禮塔을 식혀 高麗를 치게 할 적에 萬一 高麗가 歸降한다면 다시 高麗로부터 揆兵을 어더 東眞까지 연겁퍼 討平할 計劃이었던 것 갓다. 일로 보면 當時 蒙古의 請에 依하야 船隻과 水手를 보내게 된 것도 (비록 그들의 要求에는 차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또한 東眞征伐計劃에 關聯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2. 崔滋 三都賦 江都條에 보임.
  3. 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六月 甲子條에 「校尉宋得昌 自池義深行李逃來云 義深到撒禮塔所 撒禮塔怒曰 前送文牒內事件(○○○○○○○) 何不辦來 執送義深于帝所 餘皆拘囚」라 하였다. 다시 「前送文牒內事件 云云」은 그들이 이에 앞서 高麗에 要求한 事項을 가르친 것이니 當時 蒙古의 要求에는 水獺皮 一千領 國王 諸王 公主 郡主 大官人 童男 五百箇 童女 五百箇 諸般工匠(刺繡婦人도 드렀음)을 筆頭로 한 것이다. 이에 對하야 高麗에서는 童男童女와 諸般工匠 以外에 可能한 程度까지는 誠意를 뵈였던 것이니 池義深의 뒤를 이워 다시 趙叔昌 等을 보내며 羅絹 綾紬 金銀器 血畵 轄畵扇 等을 보내였으며 特히 水獺皮는 一千領을 要求한 데 對하야 갓갓스로 求하야 九百七十七領을 보내여 주웠다.
  4. 宋義는 舊京 還都 後에 蒙古의 迫究를 두려워하야 미리 蒙古에 叛附한 點과 江華遷都 後에 蒙古에서는 자조 宋立章의 引渡를 要求하던 點을 아울러 생각하면 宋立章을 形式上 義로 일음을 곳처 蒙古의 注目을 避하면서 高麗 朝廷에 서서 樞密院 副使까지 歷任한 것이 안일런가 한다.
  5. 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九月 答蒙古 官人書에 「項有宋立章者 來言上國將舉大兵 來征弊邑 其言有不可不信者 云云」이라 하였다.
  6. 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七月條에 「遣內侍尹復昌 往北界諸城 奪達魯花赤弓矢 復昌到宣州 達魯花赤 射殺之」라 하였고 全 八月 己酉朔條에 「西京巡撫使大將軍閔曦 與司錄崔滋溫 密使將校等 謀殺達魯花赤 西京人間之曰 如是則我京 必如平州 爲蒙兵所城 途叛 壬戌執崔滋溫 囚之 留守崔壽及判官 分臺御史六曹員等 皆逃竄于楮島」라 하였다.
  7. 元高麗紀事 太宗 四年(高宗 十九年) 六月條에 「本國叛 殺各縣達魯花赤(〇元史高高傳 仝年 六月條에 盡殺朝廷所置達嚕噶齊七十二人 云云이라 하였음) 率王京及諸州郡人民 竄於海島拒守」라 하였고 高麗史 高宗 十九年 六月 答蒙古 官人書 中에 「又稱達魯花赤交死則死留下來 如今儞每拿捕縛者事 右達魯花赤 其在京邑者 接遇甚謹 略不忤意大國豈不聞之耶 又於列城 委命厚對 其間容或有不如國教者 予不能一一知之」라 하야 地方에서 達魯花赤의 被殺된 것을 否認치 아니하였다.
  8. 高麗史 卷二十二 高宗 十二年 正月 癸未條에 「蒙古使(〇著古與) 離西京 渡鴨綠江 但賷國贐獺皮 其餘紬布等物 皆棄野而去中途 爲盜所殺 蒙古 反疑我 遂與之絕」이라 하였고 仝 十九年 十一月條의 答蒙古 沙打官人書에 依하면 著古與를 殺害한 것은 實로 亐加下(金帥)라 明示되였다. 그뿐만 아니라 元史高麗傳과 元高麗紀事와 가튼 蒙古 側 記錄에도 「盜殺之於途」 또는 「中途爲賊所害」로 보이나니 使者 殺害를 口實로 하야 侵入한 것은 그들의 侵略을 爲한 稱頉에 不過한 것이다.






현대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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