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1)"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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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번={{TagSpage|152-2}}슬라빅(Alexander Slawik)氏는, 이미 한번 東亞日報紙上에도 紹介된 일이 있거니와, 現 墺地利國의 一 靑年史家로서 東洋學 특히 朝鮮史學을 專攻하고 있는 貴異한 學者이다. 在墺國留學 중의 同胞 都宥浩氏의 말을 들으면 슬라빅氏는 方今 朝鮮古代의 民族移動에 관하여 긴 論文(學位論文)을 쓰고 있는데, 氏의 學識과 朝鮮史에 대한 造詣가 相當히 깊어, 그 論文에서 期待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한다. 氏는 漢文과 日文을 能讀할 뿐만 아니라, 善熟히 이를 쓰고 짓고 하며, 또 朝鮮語에 관하여도 매우 留意하고 있다는 篤工의 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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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번={{TagSpage|3-1}}三別抄는 高宗時에 崔瑀<sup>(後名은 怡)</sup>의 손에 依하야 組織된 夜別抄가 左右別抄로 分化한 것에 神義軍을 加하야 일커른 것이니 (三別抄의 種別에 關하야는 下節에서 更述할 터이나) 이 三別抄를 考察함에 있어서는 먼저 以前부터 나타나 보이는 別抄(軍)에 對하야 상고치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元來 夜別抄 左右別抄 三別抄 等의 名稱은 그 自體가 在來 別抄의 稱에 「夜」 「左」 「右」 또는 「三」의 修飾語가 〿터 特殊名稱으로 된 것임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라고 믿는 바이니 만일 그러타면 兩者 사이에 어느 程度까지 關聯性이 있을 것으로 推測되는 바이다. 이러한 意味에서 먼저 在來 別抄에 나아가 살펴보면 高麗史(卷百二十九) 崔忠獻傳에
|목차2원문2번={{TagSpage|152-3}}筆者가 앞서 󰡔靑丘學叢󰡕 第13號에 「浿水考」란 一小篇을 發表하였는데, 그것이 前記 都宥浩氏에게 一部 건너가게 되매, (굴러서) 슬라빅氏에게까지 接目 一讀되었던 모양이다. 氏는 拙稿에 대하여 (大體는 贊同이지만) 若干 疑訝의 處, 異議의 部分이 있다고 하여, 一論考(附後)를 日漢文으로 草하여, 都氏를 통하여 나에게 보냈다. 내가 이를 接受한 때는 客臘 念日頃이었다. 海外 累萬里 異域에서, 더구나 氏와 같은 {{TagPage|153}}篤工 同攻의 士로부터, 이러한 貴重한 敎評을 蒙惠함에 대하여, 나는 크게 光榮으로 생각하는 同時에 또한 깊이 氏에게 感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氏의 {{TagPage|154-1}}글월은 물론 氏의 自筆에 係한 것으로, 누구든지 보면 그 字劃의 무르녹음이 西洋人의 筆이라고는 곧이듣지 아니 할 만큼 되었다. 墺國人士 중에도 이렇게 朝鮮史를 眞摯하게 硏究하는이가 있나 하는 {{TagRef|4}}感嘆을 禁치 못하였다.<ref>테스트용 입니다</ref> 우리는 먼 異域에 한 훌륭한 벗을 얻음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氏의 好意에 갑()기 爲하여, 또 氏의 異見에 不服하는 點도 있어, 이에 拙文을 草하여 氏의 再敎를 仰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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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번={{TagSpage|3-2}}<blockquote no="01">明宗四年 元帥奇卓誠 擊趙位寵 聞忠獻勇敢 選補別抄都令</blockquote>
|목차2원문3번={{TagSpage|154-2}}슬라빅氏의 余에게 致한 書의 題目은 즉 「李丙燾 著 󰡔浿水考󰡕를 읽고」란 것이다. 이 書題만으로는 「浿水考」 全體에 관한 評論같이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氏의 論考를 通讀하여 보면, 浿水 그것에 관하여는 何等의 評說과 異論을 보임이 없고, 또 都宥浩氏의 書信에 의하여도 氏의 말이 浿水에 관한 意見을 들어 보던 중 가장 滿足한 解答을 나의 論文에서 처음 보았노라고-이는 물론 過讚이지만-하였다 함으로, 나의 {{TagRef|5}}浿水說의<ref>테스트용 입니다</ref> 主要點에 대하여는 대체로 贊同의 뜻을 가져 異議가 없는 것 같고, 다만 拙稿 중의 部分論 枝葉論이라고 할 만한 󰡔漢書󰡕地理志 玄菟郡 西蓋馬縣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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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번={{TagSpage|3-3}}이라 한 것이 別抄에 關한 最初의 記事이다. 이는 明宗 四年에 元帥 奇卓誠이 西京에 叛據한 趙位寵을 討伐할 때에 崔忠獻이 別抄都令으로 選補되였다는 것이어니와, 이에 關하야 崔忠獻 墓誌(朝鮮金石總覽 上 四四二頁)에는
|목차2원문4번={{TagSpage|154-3}}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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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번={{TagSpage|3-4}}<blockquote no="02">大定甲午<sup>〇明宗四年</sup> 盜起西都 推轂元帥 授鉞徂征 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 擧公爲都令 以當一面 陷陣却敵 登陴先入 遂克戡定</blockquote>
|목차2원문5번={{TagSpage|154-4}}云云의 註句에 관한 解釋과, 여기 보이는 馬訾水 及 西蓋馬縣의 {{TagPage|155}}位置에 就하여 氏는 나와 見解를 달리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또 여기의 鹽難水(즉 鴨綠江)의 鹽難과 소위 東明傳說 중에 나타나는 ‘大水’의 掩淲 淹 掩施 掩滯 奄利等 種種의 稱號가 古音上 {{TagRef|6}}結局 同一하다는 것<ref>테스트용 입니다</ref>, 저 ‘挹婁’의 古音도 이들과 類似하다는 것, 玄菟郡 上殷台縣의 ‘殷台’의 古音도 또한 이들과 類似한 즉 上殷台縣의 位置는 鹽難水의 中流 혹 上流에 있었다고 생각된다는 것이, 그의 副論이다. (그러나 氏의 이들 新說이 어떠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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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번={{TagSpage|3-5}}이라 하였다. 前擧 高麗史의 記事에는 槪稱的으로 다만 別抄로 쓰여있으나 이 墓誌는 特히 個人의 行蹟을 主로 한 만큼 보담 자세히 戰鋒別抄라 하야 別抄의 種別과 그의 任務를 記存한 것이 吾人의 注意를 끄는 바이다. 이 戰鋒別抄에 關{{TagPage|4-1}}한 上下 記事를 通하야 보면 池內宏博士도 대개 類似한 見解를 내렸거니와(史學雜誌 第三十七編 第九號 所載, 池內博士 「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 戰鋒別抄는 一種의 決死的 先鋒隊 또는 決死的 游擊隊와 같이 活動하던 特選 兵隊의 稱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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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6번={{TagSpage|4-2}}다시 別抄에 關하야 高麗史節要(卷十四) 高宗 三年 九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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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7번={{TagSpage|4-3}}<blockquote no="03">三軍 各發別抄一百 神騎四十人 行至朝陽(〇价川) 阿爾川邊 與契丹兵戰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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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8번={{TagSpage|4-4}}이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高宗 三年에 遼東의 契丹(大遼收國)이 侵寇할새 이것을 防制키 爲하야 三軍 即 中軍(盧元純의 引率한) 右軍(吳應夫) 後軍(金就勵)이 出動하였을 때에 三軍은 먼저 別抄와 神騎로써 敵兵에 當케 한 것이다. 일로 보면 當時 三軍은 神騎(神騎에 關하야는 아래에서 論할 터)와 別抄로써 前哨隊 또는 游擊隊와 같이 活動케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 三軍의 別抄도 또한 前擧 崔忠獻의 戰鋒別抄와 같은 것으로 推斷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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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9번={{TagSpage|4-5}}別抄는 元來 本軍에 對한 「特選兵隊」의 稱으로서 軍事 行動에 際하야 特히 勇敢한 兵卒을 뽑아 臨時的으로 編成된 것이 그의 本 面目이였던 듯하다. 前擧 崔忠獻의 戰鋒別抄에 關한 記事를 비롯하야 益齋亂藁()에 보이는 金就礪行軍記에 依하면 前擧 三軍이 別抄를 先遺한 것을 가르처 <cite no="01">「三軍各選精銳 禦之」</cite>라 하였다. 益齋의 이 記事에는 다만 <cite no="02">「精銳를 뽑았다」</cite> 하야 別抄라는 名稱이 보이지 아니하나 이에 依하야 當時 三軍의 別抄는 本軍으로부터 精銳分子를 뽑아 編成된 것만은 알 수가 있다. 다시 別抄의 意味에 있어서는 그의 名稱 自體로도 또한 理解할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別抄의 「別」은 이미 肅宗朝에 尹瓘이 創設한 別武班(아래에서 論述할 터)의 別과 같이 「普通」에 對한 「特別」의 意로 쓴 것임은 張皇한 說明을 기다릴 것도 없는 바이며, {{TagRef|1}}別抄의 「抄」는 빼일(쵸)로 訓하였을 것으로서<ref>金麟厚 百聯抄解(華巖書院 版本이니 이 版은 河西의 筆蹟을 그대로 刻한 것이라는 說이 있음)에 「百聯抄解」를 「온갓 글귀 {{ruby|ᄲᅡ|○}}사긴 거시라」고 訓하였음.</ref> 選取 또는 {{ruby|略取|○○}}의 意로 쓰였던 것으로 믿는다. 다시 高麗史 上에 나아가 軍事에 關한 抄字의 用例를 몇 가지 드러보면 <cite no="03">「抄僧爲軍」</cite>(高麗{{TagPage|5-1}}史 卷八十一, 兵志一) <cite no="04">「各道{{ruby|抄|○}}軍使等 {{ruby|抄|○}}閑良子弟」</cite> <cite no=”05”>「元帥於原定別抄外 又{{ruby|抄|○}}煙戶軍 又抄別軍」</cite> <cite no=”06”>「加定各道元帥 分遣{{ruby|抄|○}}軍」</cite>(幷仝上) 等 句에 보이는 「抄」는 選取의 意로 쓰인 것들이며, 朝鮮朝에 드러서도 各種의 別抄와 抄軍의 稱이 最近世에까지 있었던 것으로서 別抄軍 駕前別抄 壯抄 新抄槍手 精抄軍 等의 名稱이 보이나니(增補文轍 備考兵考), 이것들도 모다 選取의 意로서 「抄」를 부치게 된 것임은 <cite no="07">「別抄軍 本摠戎廳束伍中 抄選而別其號者也」</cite>(全書卷百十兵考二)라는 精抄軍에 關한 解說을 가지고도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朝鮮朝에 이르러서도 各種 抄軍의 名稱이 보이거니와 이는 前朝의 것을 蹈襲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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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0번={{TagSpage|5-2}}要컨대 高麗의 別抄(軍)는 特選兵隊의 稱인 것은 以上의 論述한 것으로서 대개 究明되였을 줄로 생각하거니와, 다시 한거름 나아가 三別抄 또는 一般 別抄 出現의 必然性과 그의 意義를 밝히려는 意味 아래에서 먼저 中末期에 이르기까지의 高麗兵制의 沿革을 槪察할 必要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高麗의 兵制는 대개 唐의 府(府衛)兵制에 依倣한 것이니 高麗史(卷八十三) 百官志(三) 州縣軍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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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1번={{TagSpage|5-3}}<blockquote no="04">高麗兵制 大抵皆做唐之府術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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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2번={{TagSpage|5-4}}이라 하였고, 또 同志(二) 西班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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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3번={{TagSpage|5-5}}<blockquote no="05">二年(〇太祖) 置六衛 穆宗五年 備置六衛職員 後置鷹揚龍虎二軍 在六衛之上 後又設重房 使二軍六衛上大將軍 皆會焉毅 明以降 武臣用事 重房之權 益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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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4번={{TagSpage|5-6}}이라 하였다. 대개 太祖 二年에 唐의 府兵制에 依倣하야 六衛(左右衛 神虎衛 興威衛 金吾衛 監門衛)가 設置되였고 다시 穆宗 五年에 이르러 六衛의 官制가 完備되였으며, 그 後에 다시 應揚龍虎의 二軍을 六衛의 우에 두웠고 (二軍六衛{{Tagpage|6-1}}를 幷稱하야 八衛라고도 함) 또 뒤에 二軍六衛의 首腦들로써 (一般宰樞도 𠫵列하였으나)重房(軍機 邊事를 議決하던 軍事的 機關)을 設置하였으나 毅宗 明宗時에 이르러 武官(鄭仲夫 崔忠獻 等)이 專橫함에 미처 國家의 軍事上 最高機關인 重房이 그들의 幕府로 化하야 國權을 專擅케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應揚龍虎二軍 및 重房의 設置는 果然 어느 時代에 屬한 것인지 上引文의 <cite no="08">「後置⋯⋯」</cite> <cite no="09">「後又設⋯⋯」</cite> 等의 寞然한 記事로는 推斷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其他 다른 史料에도 또한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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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5번={{TagSpage|6-2}}어쨋던 二軍六衛는 太祖로부터 穆宗에 걸처 整備된 兵制인 것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어니와 地方軍에 있어서는 <cite no="10">「高麗兵制 大抵皆倣唐之府衛 則兵之散在州縣者 意亦皆屬乎六衛 非六衛外 別有州縣軍也 然無可考 姑以此目之」</cite>(高麗史卷八十三兵志三州縣軍序)라 하야 州縣軍의 隸屬系統에 關하야는 的確한 資料가 남어있지 아니하였던 것으로서 高麗史 編者도 다만 推論에 끌이고 말었으나, 元來 府兵制 自體로 보와 邊方要地의 鎭戌軍은 勿論이어니와 各州縣에 散在한 所謂 州縣軍도 대개 六衛에 屬하였을 것으로 推斷하여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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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6번={{TagSpage|6-3}}그러나 太祖 以來 整備된 高麗의 軍制는 時日의 經過를 따러 漸次로 解弛하야 文宗時에 이르러서는 발서 紊亂의 兆에 現著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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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7번={{TagSpage|6-4}}<blockquote no="06">二十五年(〇文宗) 六月 制日 近聞 諸衛軍人 亡命者 甚多 是由執事不公 富强者 托勢以免 貧窮者 獨受其勞 衣食乏絕 而略無休息 云云</blockquote>(仝書卷八十一 兵志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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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8번={{TagSpage|6-5}}이라 한 記事로 보면 文宗 때에 이르러 兵制 紊亂의 原因으로 ①軍人으로서 逃亡하는 者가 많이 생기며 ②富强한 者는 勢力을 利用하야 兵役을 免하고 貧窮한 者만이 그에 當함으로 貧窮한 그들은 쉬일 틈이 없으되 衣食의 絕乏을 보게 되{{Tagpage|7-1}}여 兵力의 低劣하여 진 것을 提示한 것이니, 이때부터 高麗의 府衛兵은 質과 量에 있어 자못 貧弱케 된 것이다. 그리하야 이 結果는 드듸어 外敵 防禦와 治安 維持에 特殊軍團의 出現을 促進식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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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9번={{TagSpage|7-2}}다음 肅宗朝 尹瓘의 建議에 依하여 創設된 別武班에 關하여 살펴보면 高麗史(卷九十六)尹瓘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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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0번={{TagSpage|7-3}}<blockquote no="07">奏曰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於是 建議 始立別武班 自文武散官吏胥 至于商賈僕隷及州府郡縣 凡有馬者爲神騎 無馬者爲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等軍 年二十以上男子非擧子 皆屬神步 西班與諸鎭府軍人 四時訓錬 又選僧徒 爲降魔軍 遂鍊兵畜穀 以圖再擧</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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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1번={{TagSpage|7-4}}라 하였다. 肅宗 九年에 東北의 强敵인 東女眞의 侵入을 防禦할새 尹瓘 같은 이도 처음에는 林幹의 失敗한 뒤를 이어 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東女眞에 當하였다가 또한 兵力의 多大한 損失을 보게 되였다. 그리하야 그는 朝廷에 建白하여 別武班을 組織한 것이니 尹瓘은 먼저 그의 失敗의 原因으로서 <cite no="11">「敵騎我步」</cite>들었다. 元來 步兵만으로는 騎兵에 當키 어려운 것으로서 當時 그러한 쓰린 經驗을 맛본 尹瓘은 새로히 神騎軍이라는 騎兵隊를 組織하는 同時에 步兵에 있어서는 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 等 各種으로써 特別軍制를 定하고 別로히 佾徒로써 降魔軍이라는 것을 組織하였으니 이와 같이 步兵에까지 別制를 세운 것은 疑心할 것도 없이 綏弛 衰弱한 在來 兵制의 補强策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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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2번={{TagSpage|7-5}}이 別武班이라는 特別軍團은 後日(睿宗時) 尹瓘의 女眞征伐에 成功한 基礎가 되였으며 女眞征伐에 많은 效果를 거두웠던 것이니 <cite no="12">「逮至肅宗 東女眞構釁 於是 銳意桿禦 日事鍊兵 遂置別武班⋯⋯⋯是雖不合古制 然亦用之一時 而收功有足稱者」</cite> (仝書 卷八十一 兵志一)라 한 記事로도 推察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別武班은 東女眞에 對한 攻防을 目標로 하야 생긴 것인 만큼 二軍六衛의 正規 兵制와 같이 制度로서의 永續性이 적은 것으로서 얼마 아니되여 崩解하였던 것으로 믿나니{{Tagpage|8-1}} 前擧 <cite no="13">「亦用之一時 而收功」</cite>이라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中에도 오직 神騎軍만은 그의 活動이 高宗 未年까지 자조 史上에 나타나 보이나니 元來 이 特殊 騎兵隊인 神騎軍(神騎班이라는 稱도 있으니 이 神騎班의 班도 別武班의 班에서 무더 온 듯함)은 高麗 兵力의 缺陷을 補足하야써 大陸 強敵(女眞 契丹 蒙古)의 勁騎에 對하게 되었으므로 그의 必要와 効果가 他班의 比가 아니였을 것으로서 後代에까지 存置된 것이 아닐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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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3번={{TagSpage|8-2}}그러나 一面에 있어 在來의 府兵制는 그의 內容이 비록 虛弱하여졌다 할지라도 그의 體制는 依然히 高麗末까지 存續되였으니, 恭讓王 元年 二月 諫官이 府兵을 論한 上䟽 가운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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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4번={{TagSpage|8-3}}<blockquote no="08">我太祖 設府兵 令軍簿司典馬攝之政 身彩武藝備完者 得與其選 是以 將得其人 卒伍精强 近年以來 入仕多門 兵政一壞 或拘於都目 或出於請謁 不問老幼才否 而授之 於是 襁褓幼子工商奴隷 無尺寸之功 坐耗天祿 一有緩急 將何以用之 甚非先王設兵之意也 願令精選勇略兼備者 以代尸祿之輩 云云</blockquote> (高麗史 卷八十一 兵志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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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5번={{TagSpage|8-4}}이라 한 記事의 一例로도 這間의 消息을 넉々히 였볼 수 있을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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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6번={{TagSpage|8-5}}以上에서 高麗 初期로부터 中末頃에 걸처서의 兵制의 變遷과 그의 傾向을 대개 概述하였거니와 毅宗 明宗時에 이르러는 兵權이 武臣의 손에 도라가고 그에 따러 武士의 專橫時代가 馴致되었다. <cite no="14">「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 悍將勁卒 皆屬私家」</cite>(仝書 兵志序)라 한 것은 그 事情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政柄과 兵權이 武臣의 손에 드러가 所謂 武士專橫時가 始作되기는 毅宗時 鄭仲夫의 亂으로부터서의 일이다. 그리하야 三別抄라는 特殊兵隊도 이러한 時代에 出現한 것이니 이에서 吾人은 다시 武士專橫時代가 馴致되기까지의 經路를 따저 三別抄와의 關係를 밝힐 必要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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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7번={{TagSpage|9-1}}{{TagRef|2}}高麗에는 이미 毅宗에 앞서 仁宗 때로부터 下剋上의 風이 자못 行하야 權臣(李資謙 拓俊京 等)의 橫暴과 內亂(妙淸의)의 迸發로 因하야 王權이 式微하였고 다시 毅宗에 이르러서는 王의 縱恣 游逸의 放蕩한 行動은 政治와 綱紀를 極度로 壞亂케 하였으며 이에 따러 人民의 困苦는 자못 悲慘한 光景을 나타내였다.<ref></ref> 그 우에 當時 高麗에는 右文政治의 結果로서 文武의 差別이 생겨 武臣은 文官의 下風에 서게 되였다. 元來 國家의 干城인 武士는 直接 軍卒의 指揮에 當하고 있는 만큼 實際的 勢力은 섯부른 文官의 比가 아니니 文武의 差別이 비록 右文政治에서 나온 風習의 所致라 하나 이에 對하야 武士의 心中에는 본대 釋然히 알배가 아니다. 그리하야 一旦 文武統御의 道를 일케 되면 鬱積했던 武夫의 感情이 一時에 爆發할 것은 避키 어려운 事勢라 할 것이다. 毅宗 二十四年에 이러난 鄭仲夫 一派의 武士의 大叛亂은 實로 이러한 動機에서 이러난 것이니, 當時 그들 武士는 <cite no="15">「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cite>(高麗史 卷百二十八 鄭仲夫傳)이라 하야 前부터 君寵과 地位를 팡패로 武夫를 凌辱하던 文官과 宦寺는 勿論, 文冠을 머리에 언진 者까지 一綱打盡格으로 誅滅하고 드듸어 毅宗의 癈弑와 明宗의 擁立을 쉽사리 行하야 武士의 天下를 咄嗟間에 뀌며내였고, 明宗 三年 八月에 일어난 金甫當의 與兵事件으로 말미암어 武士의 勢力은 더욱 鞏固케 되여 모든 {{TagRef|3}}國權은 完全히 武士의 手中에 들게 되었다.<ref></ref> (鄭仲夫亂에 關하야는 下節에서 다시 論述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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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8번={{TagSpage|9-2}}이와 같이 文官이 꺽구러지고 武士의 專橫時代가 되매 政權의 爭奪은 다시 武臣들 사이에 이러나게 되였으며 그들의 武器는 말할 것도 없이 兵力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야 前擧 <cite no="16">「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cite>라 한 記事와 같이 當時 國軍은 대개 專橫武臣의 爪牙로 化함에 이르렀거니와 그러나 旣述한 바와 같이 國軍은 이미 腐敗 無力한 우에 武將 權臣輩는 各自의 位勢 保持와 政權 爭奪에 獨自의 勢力 背景이 必要케 되었던 것이니 이에서 所謂 私兵이 出現할 것도 必然한{{TagSpage|10-1}} 理勢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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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9번={{TagSpage|10-2}}私兵에 있어서는 明宗 九年에 將軍 慶大升이 鄭仲夫 一黨을 뭇지른 뒤에 不平武士와 여러 政敵에 備키 爲하야 勇士 百數十人을 招募하야 所謂 長枕大被로써 門下에 留養하고 都房이라 號하였다.(高麗史 卷白七十五 慶大升傳) 이것이 武臣의 私兵으로 처음 나타나는 記事어니와 그러나 이밖에 當時 武將勢家의 家兵으로서 看過치 못할 것은 所謂 그들의 門客家僮이라는 것이니 李義旼 一族 崔忠獻 一族과 및 朴晋材 等의 門客家僮은 모다 {{TagRef|4}}家兵으로서 活動하였다.<ref></ref> 元來 武臣의 門客家僮이 家兵의 起原이 되였을 것은 內藤雋輔氏도 이미 指摘한 바어니와 (靑丘學叢 第十五號 同氏 「高麗兵制管見」)이 또한 自然의 理勢라 할 것이니 慶大升의 {{ruby|都房|○○}}은 그의 門客家僮에게 부친 特別 名稱에 不過한 것이며, 崔忠獻 一族의 「門客家僮」이 자조 「家兵」으로 混稱된 것도 이러한 關係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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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0번={{TagSpage|10-3}}이 같은 武將權臣의 家兵은 崔忠獻 一族에 이르러 더욱 盛하야 國軍을 凌駕하리 만큼 되였었으니 崔忠獻의 侍從門客은 거의 三千人이었다는 記事를 비롯하야(高麗史 崔忠獻傳) 高宗 三年에 契丹(遼東의)이 侵入할 때에 我兵 中에 驍勇한 者는 거의 崔忠獻 父子(崔忠獻의 子 崔瑀)의 門客이요 官軍은 모다 老弱嬴卒임으로 그를 點檢하던 元帥도 勇氣가 풀렸다 하며(高麗史節要 卷一四 高宗 三年十一月條, 高麗史 卷一百三 趙沖傳) 同年 十二月에 崔忠獻이 家兵을 檢閱할새 左梗里로부터 右梗里에 이르기까지 數重으로 列을 지어 二三里에 뺏치었고 崔瑀(後名의 怡)의 家兵은 選地橋로부터 梨嶺을 지나 崇仁門에 이르렀다(高麗史節要 仝上 十二月條)는 몇 가지 例로도 그의 槪况을 推察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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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1번={{TagSpage|10-4}}崔氏 一族의 家兵은 이와 같이 大規模로 擴張됨을 따러 그의 機構도 漸次 組織化되였으니 高麗史 崔忠獻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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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2번={{TagSpage|10-5}}<blockquote no="09">忠獻 自知縱恣 恐其變生不測 凡文武官閑良軍卒强有力者 皆招致 分爲六番 更日直宿其家 號都房 其出入 合番擁衛{{Tagpage|11-1}}如赴戰鬪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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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3번={{TagSpage|11-2}}이 하였다. 이 崔忠獻의 都房은 그의 組織 動機가 前擧 慶大升의 그것과 全혀 同一한 것으로서 慶大升의 都房制를 踏襲한 것일지나 다만 崔忠獻의 都房은 六隊로 나누워 날을 定하야 六番 宿衛케 하였음으로 六番都房 또는 都房六番의 稱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特히 崔忠獻이 出入할 때에는 都房六番 全體가 擁護하야 마치 戰陣에 나가는 것과 같이 威勢가 森嚴하였던 것이니 慶大升의 都房에 比하야 그 規模와 組織이 자못 擴張되고 緻密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崔怡의 執權時代에 이르러서는 都房이 內外의 二部로 分化된 外에 馬別抄라는 特別 騎兵隊와 書房三番이라는 {{TagRef|5}}特殊宿衛가 設置되었으며<ref></ref> {{TagRef|6}}다시 崔沆에 이르러서는 都房이 三十六番으로 組織이 擴大되였다.<ref></ref> 이와 같은 武將 權臣의 家兵宿衛인 都房 乃至 書房의 制는 最後로 林惟茂 때에까지 踏襲되였던 것이니 일로 보면 當時 政權을 싸고 軋轢과 爭奪을 일삼던 武將 權臣에 있어 家兵의 存在가 얼마나 必要不可缺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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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4번={{TagSpage|11-3}}要컨대 毅宗 明宗 以後 武士의 跋扈時期에 있어 武將 權臣은 各々 家兵을 私蓄하야 서로 政權 爭奪을 일삼으며 國王의 廢立도 任意로 行하게 되매 政治와 綱紀의 壊亂은 極度에 達하였다. 이에 따러 地方에는 不逞輩의 叛亂과 草賊의 跳梁이 各處에서 井發하며 都城 附近에도 {{TagRef|7}}盜窃이 자못 盛行하고<ref></ref> 公私奴隷의 무리까지 恐怖할 만한 {{TagRef|8}}陰謀를 劃策하였다.<ref></ref> 이와 같이 治安과 秩序가 紊亂하였고 그 우에 契丹의 뒤를 이어 强敵 蒙古의 壓力을 받게 됨에 이르러 當時 府兵은 이미 綏弛된 지 오랜 지라 外寇內患에 當키 어려웠던 것이니 이러한 情勢 아래에서 權臣 崔瑀의 손에 依하야 特殊兵團이 創設된 것이니 이것이 所謂 三別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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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7일 (목) 15: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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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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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1)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9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8년07월
시작쪽 1쪽 종료쪽 29쪽 전체쪽 29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서언


중말기의 고려는 가위 내란 외구로 종시된 관이 있다 할지니, 특히 내란 중에도 묘청의 서경반란과 정중부 일파의 무부(武夫)의 난과 본고에서 논술하려는 삼별초난이 가장 그 저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3대 난은 어느 것이나 그의 유래가 자못 복잡다단한 만큼 정치 사회 내지 사상상(上)에 끼친바 영향이 실로 다대(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3자에 나아가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후자 즉 삼별초난은 전 2자 즉 묘청 정중부의 난에 비하여 자못 그 뜻을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묘청 정중부의 난은 내부적 운동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삼별초난은 복잡한 내부적 사정 이외에 외부 압력에 대한 일종의 반발운동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결과에 있어서도 내부에 끼친바 영향보다도 국내에 뻗어드는 외력의 소장(消長)에 지대한 관계를 가진 것이다. 다시 종(縱)으로 이 3대 난의 이면에 흐르는 조류를 살펴보면 묘청 일파로 말미암아 나타난 고려인의 자아적 정신은 다시 임연 배중손 등의 배몽(排蒙)사상으로 출현되었으며 정중부 일파로 말미암아 순치된 무사 전횡의 기세는 삼별초의 동향에 지침이 되었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맥락을 추려보면 삼별초난은 묘청 정중부 양 난의 조류가 합치된 데에서 출현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말기 고려에 있어 대내대외의 정치적 동향과 그에 관한 사조의 대류 형태를 소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쪽수▶P2-1中末期의 高麗는 可謂 內亂 外寇로 終始된 觀이 있다 할지니, 特히 內亂 中에도 妙淸의 西京叛亂과 鄭仲夫 一派의 武夫의 亂과 本槁에서 論述하려는 三別抄亂이 가장 그 著名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三大 亂은 어느 것이나 그의 由來가 자못 複雜多端한 만큼 政治 社會 乃至 思想上에 끼친바 影響이 實로 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三者에 나아가 槪括的으로 살펴보면 後者 即 三別抄亂은 前 二者 即 妙淸 鄭仲夫의 亂에 比하야 자못 그 趣를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妙淸 鄭仲夫의 亂은 內部的 運動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三別抄亂은 複雜한 內部的 事情 以外에 外部 壓力에 對한 一種의 反撥運動이었다. 그리하야 그의 結果에 있어서도 內部에 끼친바 影響보다도 國內에 뻐더드는 外力의 消長에 至大한 關係를 가진 것이다. 다시 縱으로 이 三大亂의 裡面에 흐르는 潮流를 살펴보면 妙淸一派로 말미암어 나타난 高麗人의 自我的 精神은 다시 林衍 裴仲孫 等의 排蒙思想으로 出現되였으며 鄭仲夫 一派로 말미암어 馴致된 武士 專橫의 氣勢는 三別抄의 動向에 指針이 되였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脉絡을 추워보면 三別抄亂은 妙淸 鄭仲夫 兩亂의 潮流가 合致된 데에서 出現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吾人은 中末期 高麗에 있어 對內對外의 政治的 動向과 그에 關한 思潮의 對流 形態를 溯究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문2: 2.고려병제의 변천과 삼별초









































본문3: 제목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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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3(생략) 되지 못한다-그러나 稷山 舊邑에서 直北 約 8~9里 되는 곳에 ‘都下里’(혹은 都監里ㆍ忠南 天安郡 成歡面)란 里名과 都下里에서 西北 약 6里되는 곳 즉 安城川 合流處에 ‘安宮▶P14-1里’(或云宮里ㆍ同上)란 里名과 其外 同川 流域인 振威郡 芙蓉面의 ‘坪宮里’(一云 上宮里) ‘新宮里’(一云 下宮里) 등의 里名이 있는 것은 크게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들 洞里에서 아직 그럴듯한 遺跡과 遺物은 發見하지 못하였지만, 그 里名은 必然 尋常하지 않은 久遠한 由來와 歷史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속히 말하면, 稷山 舊邑의 北 安城川 流域은 이 等地를 國都로 삼던 어느 時代 즉 辰國時代 내지 그 正統인 馬韓時代의 宮闕都市가 있던 곳이 아닌가.
이병도 삼한-1.png
쪽수▶P14-2
이병도 삼한-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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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3그리하여 그러한(都字 宮字 붙은) 里名이 傳稱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최근 物故한 中樞院 囑託 大原利武氏도 일찍이 이 地名에 注意를 拂하여 同 地域을 馬韓時代의 都邑 所在地로 推定한 일이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意見과 전혀 一致하며, 오직 나는 馬韓時代뿐만 아니라, 그 以前 辰國時代로부터의▶P15-1都闕 소재지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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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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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제목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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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國은 저 朝鮮(樂浪) 眞番 臨屯의 諸部族과 한 가지 古代 半島內의
테스트입니다
一國으로 일찍이 中國에 알려진 著名한 나라이어니와, 辰國의 名이 文獻
테스트입니다
上에 나타나기는 이미 󰡔史記󰡕, 󰡔漢書󰡕의 朝鮮傳에서부터이다. 󰡔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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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 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史記󰡕 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다시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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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修辭上의 異同과 添削이 있음은 別問題로 삼고












































데이터


Triple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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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현대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