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학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창립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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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회 설립, 진단학보 발간을 주도한 것은 역사학자 이병도다. 이병도가 진단학회를 주도한 것은 그 사무소를 자신의 집에 둔 데서 알 수 있다. (「彙報 震檀學會創立」, 『震檀學報』 1, 1934.12, 224쪽)<br>
 
진단학회 설립, 진단학보 발간을 주도한 것은 역사학자 이병도다. 이병도가 진단학회를 주도한 것은 그 사무소를 자신의 집에 둔 데서 알 수 있다. (「彙報 震檀學會創立」, 『震檀學報』 1, 1934.12, 224쪽)<br>
  
1920년 이병도는 염상섭, 김억 등이 주도한 문예지 『廢墟』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아카데미즘 역사학의 태두로서는 뜻밖의 경력이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말로 된 잡지를 발간하는 의의를 일찍이 깨닫고 있던 셈이다. 권보드래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어 글쓰기의 공간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조선인들은 새롭게 형성된 ‘유사-사회’에서 ‘유사-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2019, 456쪽.). 이병도의 『震檀學報』 발간 역시 우리말과 글로 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후식민(postcolonial) 주체의 싹을 틔우려는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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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이병도는 염상섭, 김억 등이 주도한 문예지 『廢墟』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아카데미즘 역사학의 태두로서는 뜻밖의 경력이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말로 된 잡지를 발간하는 의의를 일찍이 깨닫고 있던 셈이다. 권보드래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어 글쓰기의 공간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조선인들은 새롭게 형성된 ‘유사-사회’에서 ‘유사-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2019, 456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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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震檀學報』 발간 역시 우리말과 글로 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후식민(postcolonial) 주체의 싹을 틔우려는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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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檀學報』는 한국인이 주도하는 우리말로 된 학술지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다. 『震檀學報』 창간호 「휘보」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br>
  
『震檀學報』는 한국인이 주도하는 우리말로 된 학술지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다. 『震檀學報』 창간호 「휘보」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근래 조선(문화)을 연구하는 경향과 誠熱이 날로 높아가는 상태에 있는 것은 참으로 慶賀에 견디지 못하는 바이나, 그런 경향과 誠熱이 조선인 자체에서보다 조선인 이외의 인사 간에 더 많고 큼을 발견하게 된다. 그 까닭은 우리 스스로 냉정히 캐어볼 필요가 있지만, 어떻든 우리는 그런 연구까지 남에게 밀어 맡기어, 오직 그들의 노력과 성과만을 기다리고 힘입기를 바라는 자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힘이 빈약하고 연구가 拙劣할지라도, 自奮自進하야 또 서로 협력하야, 조선문화를 개척 발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될 의무와 사명을 가진 것이다. 어느 社會의 文化든지 그것을 眞實 且 正確히 檢討 認識하고, 또 이를 向上發達함에는 그 社會에 生을 受하고, 그 風俗 慣習中에서 자라나고, 그 言語를 말하는 社會의 사람의 努力과 誠熱에 期待함이 더 큰 까닭”이라고 적었다.(「彙報 震檀學會創立」, 223~227쪽;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근래 조선(문화)을 연구하는 경향과 誠熱이 날로 높아가는 상태에 있는 것은 참으로 慶賀에 견디지 못하는 바이나, 그런 경향과 誠熱이 조선인 자체에서보다 조선인 이외의 인사 간에 더 많고 큼을 발견하게 된다. 그 까닭은 우리 스스로 냉정히 캐어볼 필요가 있지만, 어떻든 우리는 그런 연구까지 남에게 밀어 맡기어, 오직 그들의 노력과 성과만을 기다리고 힘입기를 바라는 자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힘이 빈약하고 연구가 拙劣할지라도, 自奮自進하야 또 서로 협력하야, 조선문화를 개척 발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될 의무와 사명을 가진 것이다. 어느 社會의 文化든지 그것을 眞實 且 正確히 檢討 認識하고, 또 이를 向上發達함에는 그 社會에 生을 受하고, 그 風俗 慣習中에서 자라나고, 그 言語를 말하는 社會의 사람의 努力과 誠熱에 期待함이 더 큰 까닭”이라고 적었다.(「彙報 震檀學會創立」, 223~227쪽;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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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병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日政 中期까지도 우리 社會에는 아직 우리 손으로 된, 이렇다 할 權威 있는 學術誌가 없었다. 그래서 純粹 學術的인 論文은 부득불 外國 學術에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筆者도 그러한 類의 論文은 일찌기 日本東大 中心의 《史學雜誌》 및 《東洋學報》와 또 朝鮮史編修會의 《靑丘學叢》 등에 발표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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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政 中期까지도 우리 社會에는 아직 우리 손으로 된, 이렇다 할 權威 있는 學術誌가 없었다. 그래서 純粹 學術的인 論文은 부득불 外國 學術에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筆者도 그러한 類의 論文은 일찌기 日本東大 中心의 《史學雜誌》 및 《東洋學報》와 또 朝鮮史編修會의 《靑丘學叢》 등에 발표하였던 것이다.<br>
1930年을 前後하여 京城帝大 出身 중에 國學 同志들이 생기게 되고, 또 日本 留學에서 돌아오는 同志들이 해마다 늘게 되자 우리들 사이에는 자연히 國學 中心의 學會와 學術誌의 必要性을 절실히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이러한 宿志는 마침내 이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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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年을 前後하여 京城帝大 出身 중에 國學 同志들이 생기게 되고, 또 日本 留學에서 돌아오는 同志들이 해마다 늘게 되자 우리들 사이에는 자연히 國學 中心의 學會와 學術誌의 必要性을 절실히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이러한 宿志는 마침내 이루어지고 말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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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1934년 『震檀學報』 창간 이후 이병도의 일본어 글쓰기는 중단된다. 차마 우리말 논문을 보낼 수 없었을 『稻葉博士還曆紀念滿鮮史論叢』(1938)에는 한문으로 지은 글을 보탰다(「斗溪先生 論著目錄」, 『歷史家의 遺香』, 501〜517쪽, 참조.). 일본어 글쓰기 회피가 그저 우연이 아닌 의식적인 실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로 된 『震檀學報』는 오늘날 한국어로 된 인문학을 가능하게 한 원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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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震檀學報』 창간 이후 이병도의 일본어 글쓰기는 중단된다. 차마 우리말 논문을 보낼 수 없었을 『稻葉博士還曆紀念滿鮮史論叢』(1938)에는 한문으로 지은 글을 보탰다(「斗溪先生 論著目錄」, 『歷史家의 遺香』, 501〜517쪽, 참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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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글쓰기 회피가 그저 우연이 아닌 의식적인 실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로 된 『震檀學報』는 오늘날 한국어로 된 인문학을 가능하게 한 원점이었다.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2024년 6월 12일 (수) 10:10 판

창립과 활동

창립과 의의

진단학회 조직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병도, 손진태, 조윤제, 이윤재, 송석하 등이었는데, 역사학자·국어국문학자·민속학자가 힘을 합친 것이었다. 조윤제는 경성제대 조선어문학전공 제1회 졸업생이었는데, 진단학회의 예비모임을 자택에서 열 정도로 진단학회 성립과 운영에서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진단학회의 성립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1934. 5. 송석하, 손진태, 이병도, 이윤재 등 제동지와 협의하여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니, 이것은 사실상 당시의 조선민속학회의 『조선민속』과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을 통합한 종합학술지다.”
(조윤제(1964), 「(趙潤濟自編) 陶南年譜」, 陶南 趙潤濟博士 回甲紀念事業會, 『陶南 趙潤濟博士 回甲紀念論文集』, 신진사, 17쪽;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5쪽)

진단학회 설립, 진단학보 발간을 주도한 것은 역사학자 이병도다. 이병도가 진단학회를 주도한 것은 그 사무소를 자신의 집에 둔 데서 알 수 있다. (「彙報 震檀學會創立」, 『震檀學報』 1, 1934.12, 224쪽)

1920년 이병도는 염상섭, 김억 등이 주도한 문예지 『廢墟』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아카데미즘 역사학의 태두로서는 뜻밖의 경력이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말로 된 잡지를 발간하는 의의를 일찍이 깨닫고 있던 셈이다. 권보드래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어 글쓰기의 공간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조선인들은 새롭게 형성된 ‘유사-사회’에서 ‘유사-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2019, 456쪽.).

이병도의 『震檀學報』 발간 역시 우리말과 글로 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후식민(postcolonial) 주체의 싹을 틔우려는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震檀學報』는 한국인이 주도하는 우리말로 된 학술지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다. 『震檀學報』 창간호 「휘보」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근래 조선(문화)을 연구하는 경향과 誠熱이 날로 높아가는 상태에 있는 것은 참으로 慶賀에 견디지 못하는 바이나, 그런 경향과 誠熱이 조선인 자체에서보다 조선인 이외의 인사 간에 더 많고 큼을 발견하게 된다. 그 까닭은 우리 스스로 냉정히 캐어볼 필요가 있지만, 어떻든 우리는 그런 연구까지 남에게 밀어 맡기어, 오직 그들의 노력과 성과만을 기다리고 힘입기를 바라는 자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힘이 빈약하고 연구가 拙劣할지라도, 自奮自進하야 또 서로 협력하야, 조선문화를 개척 발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될 의무와 사명을 가진 것이다. 어느 社會의 文化든지 그것을 眞實 且 正確히 檢討 認識하고, 또 이를 向上發達함에는 그 社會에 生을 受하고, 그 風俗 慣習中에서 자라나고, 그 言語를 말하는 社會의 사람의 努力과 誠熱에 期待함이 더 큰 까닭”이라고 적었다.(「彙報 震檀學會創立」, 223~227쪽;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이병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日政 中期까지도 우리 社會에는 아직 우리 손으로 된, 이렇다 할 權威 있는 學術誌가 없었다. 그래서 純粹 學術的인 論文은 부득불 外國 學術에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筆者도 그러한 類의 論文은 일찌기 日本東大 中心의 《史學雜誌》 및 《東洋學報》와 또 朝鮮史編修會의 《靑丘學叢》 등에 발표하였던 것이다.

1930年을 前後하여 京城帝大 出身 중에 國學 同志들이 생기게 되고, 또 日本 留學에서 돌아오는 同志들이 해마다 늘게 되자 우리들 사이에는 자연히 國學 中心의 學會와 學術誌의 必要性을 절실히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이러한 宿志는 마침내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1934년 『震檀學報』 창간 이후 이병도의 일본어 글쓰기는 중단된다. 차마 우리말 논문을 보낼 수 없었을 『稻葉博士還曆紀念滿鮮史論叢』(1938)에는 한문으로 지은 글을 보탰다(「斗溪先生 論著目錄」, 『歷史家의 遺香』, 501〜517쪽, 참조.).

일본어 글쓰기 회피가 그저 우연이 아닌 의식적인 실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로 된 『震檀學報』는 오늘날 한국어로 된 인문학을 가능하게 한 원점이었다.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발기인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

이름 생몰년 학력(졸업연도) 전공 비고
고유섭 高裕燮 1905~1944 경성제대(1930) 미술사 사망(1944)
김두헌 金斗憲 1903~1981 도쿄제대(1929) 윤리학 서울대 교수
김상기 金庠基 1901~1977 早稻田大(1931) 역사학(동양사) 서울대 교수
김태준 金台俊 1905~1950 경성제대(1931) 국문학사 사망(1950)
김효경 金孝敬 1904~? 大正大(1932) 종교학·민속학 동국대교수, 납북
문일평 文一平 1888~1939 早稻田大(1911입) 역사학 사망(1939)
박문규 朴文奎 1906~1971 경성제대(1930) 경제사 월북, 김일성대 교수
백낙준 白樂濬 1895~1985 예일대(1927) 철학(교회사)박사 경성대 총장, 연희대 총장
손진태 孫晉泰 1900~? 早稻田大(1927) 민속학 서울대 교수, 납북
송석하 宋錫夏 1904~1948 동경상과대 (1922입) 민속학 서울대교수, 사망(1948)
신석호 申奭鎬 1904~1981 경성제대(1929) 역사학 조선사편수회, 고려대 교수
우호익 禹浩翊 1897~1983 早稻田大(1927) 역사학 숭실대 교수
유홍렬 柳洪烈 1911~1995 경성제대(1935) 역사학 서울대 교수
이병기 李秉岐 1891~1968 한성사범(1913) 국문학(시조) 서울대 교수
이병도 李丙燾 1896~1989 早稻田大(1919) 역사학 편집겸발행인 서울대 교수
이상백 李相佰 1904~1966 早稻田大(1927) 사회학(사회사) 서울대 교수
이선근 李瑄根 1905~1983 早稻田大(1929) 역사학(서양사) 서울대 교수
이윤재 李允宰 1888~1943 北京大(1921입) 국어학 옥사(1943)
이은상 李殷相 1903~1982 早稻田大 (1925~27청강) 국문학/역사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재욱 李在郁 1906~? 경성제대(1931) 국문학 총독부도서관, 납북
이희승 李熙昇 1896~1989 경성제대(1930) 국어학 서울대 교수
조윤제 趙潤濟 1904~1976 경성제대(1929) 국문학사 서울대 교수
최현배 崔鉉培 1894~1970 교토제대(1925) 국어학 연세대 교수
홍순혁 洪淳赫 1899~? 早稻田大(1927) 역사학(국어학) 연세대 교수, 납북

위원(1934~1939)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

이름 1934 1936 1937 1939 생몰년 학력(졸업연도) 전공 비고
고유섭 高裕燮 1905~1944 경성제대(1930) 미술사 사망(1944)
김두헌 金斗憲 1903~1981 도쿄제대(1929) 윤리학 서울대 교수
김상기 金庠基 1901~1977 早稻田大(1931) 역사학(동양사) 서울대 교수
김태준 金台俊 1905~1950 경성제대(1931) 국문학사 사망(1950)
서두수 徐斗銖 1907~1994 경성제대(1930) 일본문학 워싱턴주립대 교수
손진태 孫晉泰 1900~? 早稻田大(1927) 민속학 서울대 교수, 납북
송석하 宋錫夏 1904~1948 동경상과대 (1922입) 민속학 서울대교수, 사망(1948)
양주동 梁柱東 1903~1977 早稻田大(1928) 국문학사 동국대 교수
유홍렬 柳洪烈 1911~1995 경성제대(1935) 역사학 서울대 교수
이병기 李秉岐 1891~1968 한성사범(1913) 국문학(시조) 서울대 교수
이병도 李丙燾 1896~1989 早稻田大(1919) 역사학 편집겸발행인 서울대 교수
이상백 李相佰 1904~1966 早稻田大(1927) 사회학(사회사) 서울대 교수
이숭녕 李崇寧 1908~1994 경성제대(1933) 국어학 서울대 교수
이윤재 李允宰 1888~1943 北京大(1921입) 국어학 옥사(1943)
이인영 李仁榮 1930~? 경성제대(1930) 역사학 서울대 교수, 납북
이희승 李熙昇 1896~1989 경성제대(1930) 국어학 서울대 교수
조윤제 趙潤濟 1904~1976 경성제대(1929) 국문학사 서울대 교수

데이터





참고문헌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