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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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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학력 그리고 그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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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권덕규(權悳奎, 호는 애류 崖溜)는 1891년 8월 7일에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휘문고보, 중앙고보 등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조선어 연구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애주가로도 유명하여 학교가 끝나면 선술집으로 들렀다가 집에 가는 것이 일과였다. 집 판 돈을 술값으로 다 날리기도 하고 술 한 잔 걸치고 라디오 생방송을 하다가 코를 골고 잠을 드는 등 유명한 일화가 많다. 거침없고 고집이 세지만 과오는 솔직하게 인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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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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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는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일제 형사들이 그를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고 갔다가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돌려보냈다. 그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연루된 33인 중 하나였다. 조선어학회의 회원으로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활약했고, '조선어대사전'의 편찬 위원을 맡았기에 일제의 탄압은 불가피했다. 그는 해방 뒤 십일회 회원에 포함됐으나 행방불명됐다. 저서로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 <을지문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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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는 한민족을 영구히 말살하고자 일본어를 국어로, 일문을 국문으로 보급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 책동은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빚어졌다.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 선열들은 우리말과 글을 영구히 보존해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언어 독립운동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맞서는 항일투쟁이었다.
 
|내용= 일제는 한민족을 영구히 말살하고자 일본어를 국어로, 일문을 국문으로 보급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 책동은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빚어졌다.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 선열들은 우리말과 글을 영구히 보존해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언어 독립운동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맞서는 항일투쟁이었다.
조선어학회 항일투사들은 언어 독립운동의 내용으로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선정하며,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는 등 민족어 규범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고자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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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Institution|조선어학회}} 항일투사들은 언어 독립운동의 내용으로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선정하며,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는 등 민족어 규범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고자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진행했다.
이렇게 조선어학회가 일제의 일본어 상용정책에 맞서 조선말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33인을 체포해 탄압했다. 일제로부터 고문도 많이 받아 {{TagPerson|이윤재}}와 {{TagPerson|한징}}이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TagPerson|이극로}}, {{TagPerson|최현배}}, {{TagPerson|정인승}} 등 핵심 인사들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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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TagInstitution|조선어학회}}가 일제의 일본어 상용정책에 맞서 조선말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33인을 체포해 탄압했다. 일제로부터 고문도 많이 받아 {{TagPerson|이윤재}}와 {{TagPerson|한징}}이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TagPerson|이극로}}, {{TagPerson|최현배}}, {{TagPerson|정인승}} 등 핵심 인사들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2019년까지 조선어학회 선열 33인 가운데 25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 3명({{TagPerson|이극로}}, {{TagPerson|이만규}}, {{TagPerson|정열모}})은 분단 때문에 포상이 이뤄지지 못한 사례다.
 
2019년까지 조선어학회 선열 33인 가운데 25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 3명({{TagPerson|이극로}}, {{TagPerson|이만규}}, {{TagPerson|정열모}})은 분단 때문에 포상이 이뤄지지 못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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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조의 한글사전 『말모이』 편찬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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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는 {{TagPerson|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과 그의 제자인 권덕규가 민족주의적인 애국계몽의 수단으로 편찬하였다. 911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거의 원고가 마무리되었으나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현재는 그 일부의 원고가 남아 있다. 현전하는 『말모이』는 표제가 ㅁㅏㄹㅁㅗㅇㅣ로 가로 풀어쓰기로 되어 있으며, ‘알기’·‘본문(本文)’·‘찾기’·‘자획(字劃)찾기’로 짜여져 있다. 청색 원고지에 붓으로 쓴 이 원고본은 판심서명이 ‘말모이’로 되어 있고, 240자의 원고지로 모두 153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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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30일 (목) 14:5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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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규(權悳奎)
권덕규.png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한글명 권덕규 한자명 權悳奎 영문명 Kwon Deok-gyu 가나명 이칭 애류(崖溜)
성별 생년 1890년 몰년 1950년 출신지 경기 김포 전공 독립운동, 국어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권덕규(權悳奎, 1890년 ~ 1950년)는 한국의 국어학자이자, 역사가였다. 호는 애류(崖溜)이며, 1913년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모교와 중앙학교·중동학교에서 국어 및 국사를 가르쳤다. 주시경(周時經)의 뒤를 잇는 몇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 뒤 조선어학회의 역사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12월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하였다.


생애


출생 및 학력 그리고 그의 특징

권덕규(權悳奎, 호는 애류 崖溜)는 1891년 8월 7일에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회문의숙기관을 졸업한 뒤, 휘문고보, 중앙고보 등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조선어 연구회기관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애주가로도 유명하여 학교가 끝나면 선술집으로 들렀다가 집에 가는 것이 일과였다. 집 판 돈을 술값으로 다 날리기도 하고 술 한 잔 걸치고 라디오 생방송을 하다가 코를 골고 잠을 드는 등 유명한 일화가 많다. 거침없고 고집이 세지만 과오는 솔직하게 인정하였다고 한다.


활동사항

휘문고보기관, 중앙고보기관, 중등학교기관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으며, 주시경인물 선생의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 1921년 조선어 연구회 창립 회원이었다. 1930년 맞춤법 통일안 원안 작성 위원이었으며 표준말 사정 위원으로서 저서로는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 <을지문덕>이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

이는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일제 형사들이 그를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고 갔다가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돌려보냈다. 그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연루된 33인 중 하나였다. 조선어학회기관의 회원으로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활약했고, '조선어대사전'의 편찬 위원을 맡았기에 일제의 탄압은 불가피했다. 그는 해방 뒤 십일회 회원에 포함됐으나 행방불명됐다. 저서로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 <을지문덕> 등이 있다.


상훈

권덕규 선생이 반일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에 참여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과 <조선어대사전>의 편찬을 통해, 우리말과 한글을 영구히 유지하는 언어 독립투쟁을 전개한 공훈이 인정돼 광복 74주년이 되는 올해에 독립유공자로 결정됐다. 늦었지만 참으로 기쁜 일이다.





연구


『조선어 연구의 필요』

「조선어 연구의 필요」에서 자신의 연구 단계를 3단계로 설정하였는데, 첫째 ‘실용’, 말과 글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적는 방법에 대한 연구 단계. 둘째 ‘과학’,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단계. 셋째 ‘응용’, 고대의 언어, 문자, 문학 등을 통해 인문 발달의 과정을 탐구하는 단계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일제는 한민족을 영구히 말살하고자 일본어를 국어로, 일문을 국문으로 보급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 책동은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빚어졌다.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 선열들은 우리말과 글을 영구히 보존해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언어 독립운동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맞서는 항일투쟁이었다.

조선어학회기관 항일투사들은 언어 독립운동의 내용으로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선정하며,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는 등 민족어 규범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고자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진행했다. 이렇게 조선어학회기관가 일제의 일본어 상용정책에 맞서 조선말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33인을 체포해 탄압했다. 일제로부터 고문도 많이 받아 이윤재인물와 한징인물이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극로인물, 최현배인물, 정인승인물 등 핵심 인사들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2019년까지 조선어학회 선열 33인 가운데 25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 3명(이극로인물, 이만규인물, 정열모인물)은 분단 때문에 포상이 이뤄지지 못한 사례다.


최조의 한글사전 『말모이』 편찬 참여

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는 최남선(崔南善)인물이 설립한 조선광무회기관에서 주시경과 그의 제자인 권덕규가 민족주의적인 애국계몽의 수단으로 편찬하였다. 911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거의 원고가 마무리되었으나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현재는 그 일부의 원고가 남아 있다. 현전하는 『말모이』는 표제가 ㅁㅏㄹㅁㅗㅇㅣ로 가로 풀어쓰기로 되어 있으며, ‘알기’·‘본문(本文)’·‘찾기’·‘자획(字劃)찾기’로 짜여져 있다. 청색 원고지에 붓으로 쓴 이 원고본은 판심서명이 ‘말모이’로 되어 있고, 240자의 원고지로 모두 153면이다.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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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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