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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와세다대학 예과 시절)
(와세다대학 예과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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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1915년 4월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제3부에 입학했다. 집안에 말하지 않고 일본 유학을 결정했지만, 사과의 편지를 올려 용서를 받고 매달 학비를 지원 받았다. 와세다대학 캠퍼스에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유의 기운이 넘쳤다. 고등예과 제3부(문학부)는 문학, 사학, 철학을 전공할 예과생 집단이었다. 이병도는 문학개론, 철학개론, 논리학, 영어, 일본 고문, 한문, 서양문화사 등 여러 과목을 수강했다. 영어 공부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그 덕분에 인문학의 소양을 높이고 서구의 학술과 문화에 다가설 기초를 다졌다.
 
이병도는 1915년 4월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제3부에 입학했다. 집안에 말하지 않고 일본 유학을 결정했지만, 사과의 편지를 올려 용서를 받고 매달 학비를 지원 받았다. 와세다대학 캠퍼스에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유의 기운이 넘쳤다. 고등예과 제3부(문학부)는 문학, 사학, 철학을 전공할 예과생 집단이었다. 이병도는 문학개론, 철학개론, 논리학, 영어, 일본 고문, 한문, 서양문화사 등 여러 과목을 수강했다. 영어 공부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그 덕분에 인문학의 소양을 높이고 서구의 학술과 문화에 다가설 기초를 다졌다.
 
와세다대학에서는 많은 한국인 친구를 사귀었다. 4년 연상의 이광수능 예과 동기동창이었다. 이광수가 철학과로 진학한 후에도 같이 수업을 듣고 방학 때는 함께 귀국하기도 했다. 1년 선배인 현상윤(사학급사회학과), 김여제(영문과), 2년 선배인 최두선(철학과), 신익희(정경과), 3년 선배인 장덕수(정경과) 등을 비롯해 백남훈, 최팔용, 김명식, 송계백, 김종철 등과도 교류가 있었다. 당시 와세다대학에는 20명이 넘은 한국 학생이 동창회를 조직해 매달 모여 친목을 도모했다.<br>
 
와세다대학에서는 많은 한국인 친구를 사귀었다. 4년 연상의 이광수능 예과 동기동창이었다. 이광수가 철학과로 진학한 후에도 같이 수업을 듣고 방학 때는 함께 귀국하기도 했다. 1년 선배인 현상윤(사학급사회학과), 김여제(영문과), 2년 선배인 최두선(철학과), 신익희(정경과), 3년 선배인 장덕수(정경과) 등을 비롯해 백남훈, 최팔용, 김명식, 송계백, 김종철 등과도 교류가 있었다. 당시 와세다대학에는 20명이 넘은 한국 학생이 동창회를 조직해 매달 모여 친목을 도모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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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_와세다.png|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이병도와 한국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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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7일 (월) 21:5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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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이병도.jpg
출처 : 위키피디아
 
한글명 이병도 한자명 李丙燾 영문명 Lee Byeong-do 가나명 이칭 두계 斗溪 杜溪
성별 남성 생년 1896년 몰년 1989년 출신지 경기도 용인 전공 한국사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역사학자. 교육행정가. 보성전문학교에서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사학급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중앙학교 교원,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등을 지내면서 한국사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1934년 진단학회를 세우고 우리말로 된 학술지 진단학보를 발행했다. 해방 후 서울대 사학과 교수를 지내며 수많은 한국사학자를 길러냈다. 학술원 원장, 문교부 장관 등을 지냈다.


생애


출생과 한학 공부

이하 이병도의 생애에 대해서는 민현구,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의 수학(修學)과정과 초기 학술활동(學術活動), 진단학보, 116, 2012를 참조했다.

이병도는 1896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이병도의 집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양반가였다. 부친 이봉구(李봉구)는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전직 무관이었다. 이병도는 6세부터 집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천자문에서 시작하여 8세에 "통감"을 배우고 한시 습작도 익혀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병도의 집은 1907년에 서울로 이사했다. 이병도는 14살인 1910년에 상투 틀고 관을 쓴 모습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한학 수업은 1911년까지 이어졌다. 9년 동안의 수업으로 이병도는 높은 한학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을 지낸 농재 이익(1629~1690)이 10대조였고, 이익의 손자로 저명한 성리학자인 도암 이재(1680~1746)는 방팔대조였다. 이병도는 10대조의 친필본 "농재일기"와 도암의 유학 관련 저술인 "주형"(10책)을 가장 소중한 애장품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병도 학문의 가학적 배경을 시사한다.[1]


신식 교육과 보성전문학교

이병도는 서울에 온 해에 어른들 몰래 초등학교 수준의 보광학교에서 1년 남짓 배웠다. 13살 때에는 봉명학교라는 야간 강습소를 역시 어른들 몰래 1년간 다니면서 일어, 한어, 수학 등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15살이 된 결혼 이듬해인 1911년에는 떳떳하게 불교고등학원 예비과에 입학했다. 불교고등학원은 일본인 승려들이 포교 수단을 설치한 사립학교로 영어, 지리, 역사, 수학, 물리, 화학 및 불전을 가르치는 중등학교였다. 이병도는 불교고등학원에서 1년간 배웠는데 교사가 모두 일본인 승려라 일본어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1912년 3월에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교에 입학했다. 이병도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법률'에는 매력을 느낄 수 없었지만 국제법 특히 역사적 케이스가 있는 국제공법에 흥미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졸업 1년 전부터 와세다대학 교외강의록을 주문해 입시준비를 했다. 1915년 봄에 보성전문학교 졸업과 동시에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와세다대학 예과 시절

이병도는 1915년 4월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제3부에 입학했다. 집안에 말하지 않고 일본 유학을 결정했지만, 사과의 편지를 올려 용서를 받고 매달 학비를 지원 받았다. 와세다대학 캠퍼스에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유의 기운이 넘쳤다. 고등예과 제3부(문학부)는 문학, 사학, 철학을 전공할 예과생 집단이었다. 이병도는 문학개론, 철학개론, 논리학, 영어, 일본 고문, 한문, 서양문화사 등 여러 과목을 수강했다. 영어 공부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그 덕분에 인문학의 소양을 높이고 서구의 학술과 문화에 다가설 기초를 다졌다.

와세다대학에서는 많은 한국인 친구를 사귀었다. 4년 연상의 이광수능 예과 동기동창이었다. 이광수가 철학과로 진학한 후에도 같이 수업을 듣고 방학 때는 함께 귀국하기도 했다. 1년 선배인 현상윤(사학급사회학과), 김여제(영문과), 2년 선배인 최두선(철학과), 신익희(정경과), 3년 선배인 장덕수(정경과) 등을 비롯해 백남훈, 최팔용, 김명식, 송계백, 김종철 등과도 교류가 있었다. 당시 와세다대학에는 20명이 넘은 한국 학생이 동창회를 조직해 매달 모여 친목을 도모했다.

(
이병도 와세다.png
) 이병도는 1916년 7월에 고등예과를 수료했다.


독일 베를린에서의 유학 생활과 항일 활동


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png
왼쪽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가타야마 센, 이의경, 이극로.
출처 : 조선일보 1927년 5월 14일자 기사.〕



런던에서의 유학 생활과 음성학 연구


연구


문법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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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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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이병도, 나의 애장품, 수상잡필, 212~2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