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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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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30일 (목) 02: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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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록(都相祿)
도상록.jpg
출처 : 조선의 오늘 2023년 3월 20일자 기사[1]
 
한글명 도상록 한자명 都相祿 영문명 Do Sang Rok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03년 몰년 1990년 출신지 함경남도 함흥시 전공 핵물리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도상록은 북한의 물리학자이며, 2000년 통일부 보고서는 도상록을 '북한의 핵 과학 아버지'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평가했다.


생애


일본 유학 전

도상록은 1903년 10월 13일 함경남도 함흥시의 빈농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1919년에 영생고등보통학교기관를 졸업하였다. 1919년 영생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일 때, 3월 1일을 맞이사건하였다. 당시 판결문을 살펴보면, 그는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선언서 3천여 매를 인쇠하였으며, 구 한국 깃발 18개를 제작하였다. 법에 따라 징역 3월형을 받아야 하는게 마땅하나, 범죄의 정상(情狀)을 헤아려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2] 이 후 그의 수기에 따르면, 삼일운동의 여파로 국내의 학교가 입학원서를 접수하지 않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일본 유학

도상록은 1925년에 일본의 제6고등학교기관를, 1930년에 도쿄제국대학기관 물리학과를 졸업하였다.[3] 그는 대학시기에도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몇 해 휴학하여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식민지 지배하의 연구

그는 졸업한 해인 1930년 4월에 '일본수학물리학회'에 입회하였으나, 식민지 지배하에서 연구직을 얻지 못하였다. 수년 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기관의 교원이 되어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38년 4월에 만주의 신경공업대학기관의 교수가 되고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다.


해방 직후

그는 1945년 8월 16일에 창설된 '조선학술원'의 이학부장과 기획과·출판과의 위원을 맡았으며, 12월 27일에 창립된 ‘조쏘문화협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46년 1월 16일에 ‘과학기술자련맹’의 기구가 확대되었을때에는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또 2월 17일에 ‘조선교육자협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도 공동의장을 맡았다. 해방 후 경성대학교의 이공부학부장을 지냈으나, 미군정에 반대의견을 제출하며 파면되었다. 그리고 그는 북으로 넘어가 김일성종합대학 창립에 참여하게 된다.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그는 평양에 머무르다 1946년 7월 3일 당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의 접견을 받는다. 이 석상에서 도상록은 김일성으로부터 북한에서의 종학대학 창설에 힘써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 후 이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는 1946년에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 초대학부장을 지냈고, 1948년 연구원 원장으로 지냈다. 그리고 1950년에 물리학교수로 임명되었다.

초창기 김일성종합대학 창설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1952년 이북에서 과학원이 설립되었을 때 홍명희(洪命憙), 최삼열(崔三悅: 경성고공 토목과, 1919; 제6고등학교, 1923; 도호쿠대 화학과, 1927; 교토제대 조수 및 이화학연구소 근무), 계응상(桂應祥), 백남운(白南雲), 최명학(崔明鶴), 이승기, 박시형(朴時亨) 등과 함께 원사(院士)에 임명되었다. [4] 그는 북한의 첫 물리학 원사이다. 1986년 그는 인민과학자칭호를 받았고, 김일성훈장 등 수많은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았다.


북에서의 연구사업


타계

1990년 2월 13일 타계하였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그의 사진과 그가 집필한 주요 책들, 논문들은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연구




데이터


도상록 네트워크 그래프 그리기(※입력된 내용을 수정해보세요)








참고자원


임정혁, 「물리학자 도상록의 생애와 연구활동에 대하여」, 『한국사론』 42, 국사편찬위원회, 200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