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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34년 5월, 경성 선린상업학교 3학년 조권형이 수학여행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가던 중 고향인 전북 금산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조권형은 고향 친구들을 만나 권유했다. "내가 친구들하고 함께 활동하는 독서회가 있어. 일반 과학서적을 돌려가며 읽고 있지. 금산에서도 이런 모임을 만드는 게 어때? 우리 독서회하고 연락을 취하면서 서적도 교환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이를 알게 된 금산경찰서가 득달같이 조권형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취조하는 과정에서 조권형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이자 신건설 관계자인 정병창과 조용림 등에게서 지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신건설의 배후에 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뭔가 수상하다고 여긴 금산경찰서는 곧 사건 전체를 전북경찰서로 넘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점에 전북경찰서가 진행하고 있던 수사가 '전북공산당 재건운동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북경찰서는 '금산독서회'와 '신건설'을 공산당 재건운동의 세포조직으로 받아들였다. 공산당은 일제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사상과 공산주의운동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었고, 일본은 이를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었다. 전북경찰서는 신건설뿐만 아니라 카프에 관련된 이들까지 죄다 검거해 들이기 시작했다. (<font color="blue" size="3">※출처: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91002.010130754440001 〔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7〕 '신건설' 사건과 전향(2019.10.02.) 『영남일보』]</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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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7일 (금) 02:05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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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설사 사건
신건설사사건.jpg
출처 : 매일신보(每日申報) 1935년 09월 30일자 기사.
 
한글명 신건설사 사건 한자명 新建設社事件 영문명 가나명 원명칭
이칭 제2차 카프검거 사건 유형 일제탄압 분류 문화 발생국 한국 발생연도 1934년



항목

차례


개요 경과 시각과 해석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1934년 신건설이 지방 공연 중일 때, 양성순이 지휘한 전북경찰서 고등계가 중심이 되어 신건설사 회원들을 대거 체포했다. 처음에는 금산에서 한 학생이 가지고 있던 신건설의 전단이 빌미가 되었고, 전북 지역을 시작으로 차츰 확대되어 경성부와 평안북도, 평양, 경기도 등지에서 남녀 약 70여 명이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주로 학생, 교사, 기자, 배우 등 지식인들이었다. 한편 이 사건은 카프가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프의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어 조직 활동이 불가능해진데다, 관련자들이 수사를 받고 있던 중에 고등계 경찰은 카프 간부들에게 해체를 지속적으로 지시했다. 이에 따라 카프는 자진 해체하였으며, 카프 가맹단체인 신건설사도 고등계의 지시를 받고 해체되었다. 활발하던 경향파 연극 활동도 이를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출처: 〈신건설사 사건〉 『위키백과』)




경과


1932년 8월 '신건설' 극단의 창립

신건설은 1932년 8월 서울 숭일동에서 창립된 극단이었다. 당시 프로연극(프롤레타리아연극)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합류하였으며 ‘정당한 프롤레타리아 연극 건설’과 ‘좌익 극단의 불성실성을 극복한 공연 활동’ 등을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극단 설립의 주역이 다른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주춤하다가 재정비를 거쳐 1933년 1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프로연극계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을 망라했기 때문에 명실공히 프로연극인들의 결집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극단 멤버의 대부분이 카프의 맹원이었다. 1934년 2월에는 카프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카프 연극부에 가맹되기까지 했다. (※출처: 〔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7〕 '신건설' 사건과 전향(2019.10.02.) 『영남일보』)


1933년 11월부터 시작된 〈서부전선 이상 없다〉 공연

신건설은 1933년 11월23일 〈서부전선 이상 없다〉 공연에 들어갔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독일 소설가 에리히 레마르크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었다. 신건설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김유영이 프로영화 제작 시에 절감했던 일제의 검열 문제를 똑같이 한계로 느낀 때문이었다. 즉 검열을 피하기 위해 원작이 가진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극장에서 합법적으로 공연된 1930년대 최초의 프로연극으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에서도 주의 깊게 다뤄졌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배경은 다르지만 당시의 일본과 여러 면에서 비교된 까닭이었다. 이에 노동자와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면서 뜨거운 열기 속에 공연이 진행되었다. 지방공연도 계획이 되었다. 하지만 왕십리에서 올린 몇 차례 공연 이후로 무대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전북 금산에서 독서회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7〕 '신건설' 사건과 전향(2019.10.02.) 『영남일보』)


1934년 5월 조권형과 금산 독서회

1934년 5월, 경성 선린상업학교 3학년 조권형이 수학여행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가던 중 고향인 전북 금산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조권형은 고향 친구들을 만나 권유했다. "내가 친구들하고 함께 활동하는 독서회가 있어. 일반 과학서적을 돌려가며 읽고 있지. 금산에서도 이런 모임을 만드는 게 어때? 우리 독서회하고 연락을 취하면서 서적도 교환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이를 알게 된 금산경찰서가 득달같이 조권형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취조하는 과정에서 조권형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이자 신건설 관계자인 정병창과 조용림 등에게서 지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신건설의 배후에 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뭔가 수상하다고 여긴 금산경찰서는 곧 사건 전체를 전북경찰서로 넘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점에 전북경찰서가 진행하고 있던 수사가 '전북공산당 재건운동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북경찰서는 '금산독서회'와 '신건설'을 공산당 재건운동의 세포조직으로 받아들였다. 공산당은 일제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사상과 공산주의운동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었고, 일본은 이를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었다. 전북경찰서는 신건설뿐만 아니라 카프에 관련된 이들까지 죄다 검거해 들이기 시작했다. (※출처: 〔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7〕 '신건설' 사건과 전향(2019.10.02.) 『영남일보』)


1934년 6월 이후의 상황: 전국적 확대

처음에는 금산을 방문한 조권형이 빌미가 되었으나, 전북 지역을 시작으로 차츰 확대되어 경성부와 평안북도, 평양, 경기도 등지에서 남녀 약 70여 명이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주로 학생, 교사, 기자, 배우 등 지식인들이었다. 이 사건은 카프가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프의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어 조직 활동이 불가능해진데다, 관련자들이 수사를 받고 있던 중에 고등계 경찰은 카프 간부들에게 해체를 지속적으로 지시했다. 이에 따라 카프는 자진 해체하였으며, 카프 가맹단체인 신건설사도 고등계의 지시를 받고 해체되었다. 활발하던 경향파 연극 활동도 이를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체포된 70여 명 가운데 핵심 인물인 23명이 추려져 1935년 10월에 기소되었다. 공판에 회부된 사람들은 두달 후인 12월에 전원 불기소 집행유예로 풀났다.[1] (※출처: 〈신건설사 사건〉 『위키백과』)




시각과 해석

정작 문제의 도화선이 된 ‘신건설사’보다 ‘카프’가 먼저 해산계를 제출하고 해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신건설사’의 활동을 문제 삼은 것은 결국 카프를 해체할 명목을 찾기 위한 것이었고, 당시 일제의 관심은 정작 카프 조직의 해산에 있었음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북 금산서에서 한 학생을 검거한 사건이 ‘신건설사’라는 조직을 검거하는 것으로, 다시 그 상부 조직인 ‘카프’를 해체하는 것으로 번진 과정을 통해, 당시 일제는 점차 마수를 드러냈던 것이다. ‘신건설사’ 사건은 프로 예맹 출신 인사 23명을 공판에 회부하기까지 만 1년 반이 걸렸으며, 장장 1년 8개월에 걸쳐 신문지상을 장악했던 사건이었다. 실제로 체형이 구형된 것은 박완식, 정청산 2명이었는데, 이전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받은 집행유예가 아직 만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영희, 윤기정, 이기영, 김유영의 경우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가장 중형이 구형되었다. 이중 박영희, 이기영, 윤기정은 이후 공소 공판에서 전심보다 중하게 3년이 구형되었다. 형량의 경중을 보더라도 ‘신건설사’ 사건의 핵심은 신극 운동을 벌인 ‘신건설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카프’ 조직에 있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이경수, 「일제 강점기 필화 문학 연구의 범주 설정 문제 - ‘신건설사’ 사건을 중심으로」, 182쪽.)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Event: 신건설사 사건 Person: 김유영 A isRelatedTo B
Event: 신건설사 사건 Person: 한설야 A isRelatedTo B
Event: 신건설사 사건 Group: 신건설(극단) A isRelatedTo B





참고자원


이경수, 「일제 강점기 필화 문학 연구의 범주 설정 문제 - ‘신건설사’ 사건을 중심으로」, 『비교한국학』 15(2), 국제비교한국학회, 171~193.



주석


  1. 이 가운데 김유영이라는 예명으로 잘 알려진 김영득은 이 사건으로 복역한 사실이 항일 문화운동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