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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 {{TagSpage|58-1}}松江歌辭는 單行本으로 刊行된 木板本과 또는 寫本으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木板本에는 關北本 關西本 義城本 黃州本 星州本 등이 있다. 우선 그 各本에 대하야 약간의 說明을 試하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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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번= {{TagSpage|58-2}}1. 關北本</br>이건 關北(咸鏡道)에서 刊行된 것으로서 芝湖集卷六과 海東歌謠와 古今歌曲에 記載된 松江歌辭後跋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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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번= {{TagSpage|58-3}}<blockquote no="01">北關 舊有公歌曲之刊行而顧年代已久 且經兵燹 謝失其傳 誠可惜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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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번= {{TagSpage|58-4}}와 같이 年代가 오래되고 또는 兵燹을 겪어 失傳되었다. 이 跋文 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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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번= {{TagSpage|58-5}}<blockquote no="02">庚午元月上澣 完山後人 李選 書于東城之幽蘭軒</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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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번= {{TagSpage|58-6}}을 보면 이건 李朝肅宗朝人 李選, 號는 芝湖라는 이가 宋尤菴 門人으로서 그 內弟 金萬重과 함께 臺論을 받어 車城(慶尙道張機)에 귀양 가 있을 때 즉 肅宗 十六年庚午(一六九O)에 지은 것이니 아마 肅宗 以前 光海主 때 무렵에 刊行된 것인 듯, 이것이 松江歌辭本으로는 最初의 刊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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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번= {{TagSpage|59-1}}2. 關西本</br>이건 關西觀察營인 平壤에서 刊行된 것이고 鎮板考卷第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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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8번= {{TagSpage|59-2}}<blockquote no="03">松江歌辭一卷 關西觀察營藏 印紙十五張</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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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9번= {{TagSpage|59-3}}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얻어 볼 수 없는 것이다.</br>[[파일:이병기_송강가사1-1.png|섬네일|가운데|星州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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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0번= {{TagSpage|59-4}}3. 義城本</br>이건 松江의 玄孫 鄭澔, 號는 丈岩이라 하는 이가 慶尙道 義城縣令으로 가 있을 때에 刊行하였다. 그 刊行年月은 分明치는 못하나 肅宗十餘年頃인 듯하고 또한 지금은 얻어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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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번= {{TagSpage|59-5}}4. 黃州本</br>이것도 義城本과 거의 같은 年代 松江의 玄孫壻요 李淸江 濟臣의 五世孫인 李徵夏가 黃海道 黃州通判으로 가 있을 때 刊行하였{{TagPage|60-1}}다 하나, 亦是 얻어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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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번= {{TagSpage|60-2}}5. 星州本</br>이 冊은 縱三O.四糎, 橫一八.八糎, 板框 縱二O.八糎, 橫一二六糎, 每張前後面 各八行 每行十六字요 全卷上下兩部로 되어 上部는 總二十四張에 關東別曲 思美人曲 續美人曲 星山別曲 將進酒辭가 있고 下部는 總二十張에 短歌라는 題目이 있고 警民編에 載見한다는 十六首와 其他 六十三首와 洊(松江玄孫)謹書, 觀夏 (松江五世孫)追記의 附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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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번= {{TagSpage|60-3}}已上에 其他 六十三首란 건 뒤에 또 仔細히 말하려니와 事實 이 冊에는 두 首를 한 대문으로 하여 六十二首로 되어있고 이 冊의 張數는 上下兩部를 都合하여 四十四張이 되나 鏤板考卷第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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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번= {{TagSpage|60-4}}<blockquote no="04">松菴歌辭一卷 星州牧藏 印紙一牒三張</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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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번= {{TagSpage|60-5}}으로 적혔으니 印紙一牒三張은 白紙二十三張, 이걸 半折하면 四十六張이 되니 그 남어지 三張은 餘裕를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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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번= {{TagSpage|60-6}}이 冊은 肅宗二十四年(一六九八)에 松江의 玄孫 鄭洊이 繕寫하여 놓고 미처 刊行은 못한 것을 그 뒤 英祖二十三年(一七四七)에 그 아들 鄭觀夏가 慶尙道 景州牧使로 가 있을 때에 刊行한 것이다. 이 冊附錄에 그의 追記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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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번= {{TagSpage|60-7}}<blockquote no="05">先人在世時 慨然兩本之眞贋相雜 眩於取舍 改寫一通 將付剞劂氏而有志未就 尋常痛恨 盖有年矣 昨夏 來莅星州 鳩聚梓板 一句而工訖 此亦有待而然歟 玆用廣布知舊間 以續 先君子未就之意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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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8번= {{TagSpage|60-8}}이라 하였으니 「先人在世時 慨然兩本之眞贋相雜 眩於取舍云云」함은 또 그 附錄의 鄭洊謹書를 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그뿐더러 위에 말한 義城本 黃州本의 來歷도 消詳하게 말해있다. 이에 그 原文의 大義를 들어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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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9번= {{TagSpage|61-1}}<blockquote no="06">文清公(松江)의 長短歌曲이 世上에 行하는 것이 若干篇이로되 여러 번 兵亂을 겪어 眞本은 전하지 않는다. 여러 子孫들 집에 각각 所藏함이 있으나 傳寫할 때의 誤字된 것, 傳誦하는 이의  添補한 것이 많다. 再從兄 澔氏가 義州 원으로 가 있을 때 이걸 걱정하고 刊行을 하였으나 諸本의 同異함을 널리 取하지 못하였다. 내 집에 舊藏하든 것과 校正하여본즉 舛誤된 것이 많고 短歌에는 逸失된 것도 많다. 또 畸翁의 아들 涖의 謄寫한 것과 考證하여본즉 내 집의 舊蔵한 것과 같은데 내 것은 王考 抱翁公이 命寫한 것이고 涖의 것은 畸翁의 전한 바를 받은 것이니 이것이 정말 眞本이다. 姊兄 李徵夏氏는 항상 우리 文清先祖考를 남달리 景慕하고 또한 이 일의 本末을 잘 아는데 마츰 黃州通判으로 가 있어 이걸 刊布하였다. 그러나 뒤에 보는 이들은 兩本의 眞贋을 분간하지 못하고 取舍함에 眩亂할까 하여 내 고쳐 一通을 써 剞劂에 붙인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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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0번= {{TagSpage|61-2}}하였다. 이 글 가운데 「兩本의 眞贋」을 말한 것은 贋은  鄭澔의 義城本을 가리친 것이고 眞은 李徵夏의 黃州本을 가리친 것 같다. 黃州本이야말로 李徵夏의 妻家인 鄭洊의 집에서 온 것이겠고 鄭澔의 舊藏眞本이란 것은 鄭弘溟, 號는 畸菴(畸翁)이란 이에게서 온 것일 것이다. 儒學源淵譜(魚允迪著)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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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1번= {{TagSpage|61-3}}<blockquote no="07">栗谷  沙溪  畸菴  抱翁</br>李珥―金長生―酁弘溟―鄭瀁</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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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2번= {{TagSpage|61-4}}과 같이 鄭洊의 王考 抱翁이라 하는 이가 畸翁에게 衣鉢을 받을 때에 이러한 歌辭本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畸翁의 아들 鄭涖의 것이 自己의 것과 같으니 眞本이라고 함은 덜 된 수작이다. 또 鄭澔의 義城本을 贋本이라 함도 믿을 수 없다. 自己의 말따나 「여러 번 兵亂을 겪어 眞本은 전하지 않는다」하고 여러 子孫들 집의 所藏한 것은 모다 贋本이고 自己의 것만 眞本이라 함이 풍치는 말도 같다. 또한 參考로 그 世系表를 그려보자.</br>[[파일:이병기_송강가사1-2.png|섬네일|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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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3번= {{TagSpage|62-1}}이와 같이 그 많은 子孫들 집에서 제마다 所重하게 여기는 제 先祖의 歌辭를 하필 贋本을 所藏하였으리오. 畸菴은 松江의 끝의 아들로 나이 겨우 열두 살에 그 父喪을 당하였으니 그 當時에는 松江의 歌辭같은 걸 收拾할 철도 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종 長成하여 그 집안에 전하든 것은 벗겼다드라도 이것만을 眞本이라 할 理由는 될 수 없다. 어떠튼 지금 와서는 이밖에 얻어 볼 수 없으니 이것이 홀로 貴重함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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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4번= {{TagSpage|62-2}}已上 말한 다섯 本外는 警民編에 실린 것이 있으니 이건 松江이 江原監司 때 지은 短歌十六首다. 完南府院君 李厚源이 金正國의 警民編寫本을 海西(黃海道)에서 얻어 諺解를 하고 또 陳古靈, 眞西山의 勸諭文 따위와 松江의 이 短歌와를 附錄으로 하고 孝宗九年(一六五八)에 諸道에 廣布하고저 하여 刊行한 것이다. 星州本보다도 八十餘年을 앞선 것이고 한 字書도 刓缺한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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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5번= {{TagSpage|62-3}}요마적 刊行된 單行本, 또는 雜歌本에 끼어 있는 松江歌辭는 荒雜하기 짝이 없고 寫本으로 전하는 것에는 星州本보다도 더 眞正하다고 볼만한 것이 있으니 思美人曲帖과 協律大成과 같은 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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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6번= {{TagSpage|63-1}}思美人曲帖은 絹本 縱三六.五糎 橫二四.五糎 總十幅. 第一幅 乃至 第五幅에 騷體 즉 楚辭體로 翻譯한 思美人曲 續美人曲을 쓰고 第五幅 乃至 第八幅에 甲申季夏坯窩散人書라는 跋文이 있고 第九幅 乃至 十幅에는 思美人曲 續美人曲의 原文을 句節을 나누어 나란이 쓰고 글씨도 퍽 精美하여 體帖이라도 삼을만하다. 坯窩는 金相肅의號, 人品 文章 書法이 높다고 일캇든 것이다. 甲申은 곳英祖四十年(一七六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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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7번= {{TagSpage|63-2}}協律大成은 江原道 江陵 李根友氏 家藏인 古寫本인데 全卷四部로 되어 第一部에는 調律之法 洋琴圖 與民樂 靈山會相 羽調 界面調의 曲譜 譜標 歌曲之風度 形容十五條目 梅花點長短이 있고 第二部에는 永言全部라는 題目을 두고 歌曲源流나 靑丘永言과 같은 長短歌들이 있고 第三部에는 女唱秩이라는 題目에 亦是 長短歌들이 있고 第四部에는 漁父辭 處士歌와 같은 歌詞와 關東別曲이 있다. 이 關東別曲이야말로 다른 本과는 다른 점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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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8번= {{TagSpage|63-3}}松江의 短歌로는 短歌抄集 古今歌曲 海東歌謠 靑丘永言 歌曲源流 大東風雅 其他 歌詞冊에 몇 首씩 적혀있다. 이것도 모다 參考가 되려니와 關東別曲譯 思美人曲解 將進酒辭譯과 같은 翻譯들도 버릴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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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9번= {{TagSpage|63-4}}關東別曲譯은 七言詩로 하여 間或 誤譯한 것이 있으며 李澤堂(名은 植, 光海朝人)이 少時에 지은 것이라 한다. 西浦漫筆(肅宗朝人 金萬重著)에는 澤堂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어떠튼 그 번역은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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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0번= {{TagSpage|63-5}}思美人曲解는 研經齋全集(正祖朝人 成海應著) 卷之一에 보이는 것과 같이 五言으로 하여 雜歌謠體로서 번역한 것이다 坯窩의 것보다도 더 簡明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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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1번= {{TagSpage|63-6}}將進酒辭譯은 金北軒(名은 春澤 肅宗朝人)이 詞體로 번역한 것이다. 北軒集卷四를 보면 北軒의 親舊요 松江의 後孫인 鄭重汝를 맞나 술을 마시고 노는데 重汝가 취하여 병을 두들기며 그 先祖 松江의 將進酒辭를 부르고 그것이 俗諺{{TagPage|64-1}}으로 되었음을 恨하고 漢文으로 번역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런 뒤 十年이 지나, 重汝는 죽고 그 아들이 臨陂謫所로 찾어 왔을 때 비로소 하여준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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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2번= {{TagSpage|64-2}}參考書에 대한 말은 이만큼 하여두고 다시 星州本으로 돌아가 그 歌辭를 逐條하여 보면 혹은 訛傳 혹은 誤書 落書 혹은 刓缺된 字들이 如干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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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3번= {{TagSpage|64-3}}同卷上二張 後面第七行 關東別曲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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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4번= {{TagSpage|64-4}}<blockquote no="08">半반空공{{ruby|이|○}} 소소ᄯᅳ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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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5번= {{TagSpage|64-5}}의 {{ruby|이|○}}는 {{ruby|의|○}}의 誤字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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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6번= {{TagSpage|64-6}}同卷上四張 前面第八行의 「넙거나 넙은 天텬下하 엇ᄯᅵᄒᆞ야 젹닷말고」라는 句節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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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7번= {{TagSpage|64-7}}<blockquote no="09">어와 뎌 境界를 어이ᄒᆞ면 알거이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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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8번= {{TagSpage|64-8}}하는 한 句節이 빠진 것이다. 이는 協律大成에나 李澤堂 關東別曲譯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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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9번= {{TagSpage|64-9}}<blockquote no="10">優優大哉彼境界 欲窺涯溪何渺渺</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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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0번= {{TagSpage|64-10}}란 것을 보드라도 이 句節이 다 적혀있고 그 文脈으로도 當然히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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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1번= {{TagSpage|64-11}}同卷上七張 前面第二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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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2번= {{TagSpage|64-12}}<blockquote no="11">바다ᄒᆡ 날제ᄂᆞᆫ 萬만國이 {{ruby|일위|○○}}더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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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3번= {{TagSpage|64-13}}의 {{ruby|일위|○○}}는 알 수 없는 말이더니 協律大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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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4번= {{TagSpage|64-14}}<blockquote no="11">萬國이 {{ruby|어릐|○○}}더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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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5번= {{TagSpage|65-1}}라 하고 澤堂 譯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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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6번= {{TagSpage|65-2}}<blockquote no="12">初離海上{{ruby|耀|○}}萬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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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7번= {{TagSpage|65-3}}이라 하였으니 즉 {{ruby|일위|○○}}는 {{ruby|어릐|○○}}의 缺字요 어릐는 어릐어릐 비친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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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8번= {{TagSpage|65-4}}同卷上七張 後面第八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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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9번= {{TagSpage|65-5}}<blockquote no="13">어듸 잇{{ruby|낫|○}} 말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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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0번= {{TagSpage|65-6}}의 {{ruby|낫|○}}은 {{ruby|닷|○}}의 缺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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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1번= {{TagSpage|65-7}}同卷上十張 後面第四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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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2번= {{TagSpage|65-8}}<blockquote no="14">{{ruby|말|○}}디쟈 鶴학을 ᄐᆞ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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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3번= {{TagSpage|65-9}}의 {{ruby|말|○}}은 {{ruby|달|○}}(月)의 誤字이고 澤堂譯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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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4번= {{TagSpage|65-10}}<blockquote no="15">須臾言訖鶴飛去</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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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5번= {{TagSpage|65-11}}의 須臾言訖도 또한 盲從한 誤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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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6번= {{TagSpage|65-12}}同卷上十張 後面第八行과 十一張 前面第一行 同別曲落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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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7번= {{TagSpage|65-13}}<blockquote no="16">明명月월이 千쳔山산萬만落낙의 아니 비쵠ᄃᆡ업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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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8번= {{TagSpage|65-14}}는 古今歌曲과 같은 册에도 이와 같이 적혔으나 그 前文과는 아무 聯絡 照應도 없는 한 군소리다. 傳寫할 때 訛誤된 것인 듯하다. 그리고 그 訛誤된 것을 도리어 살리기 위하여 위에 말한 {{ruby|달|○}}디쟈와 같은 것도 {{ruby|말|○}}디쟈로  改竄한 듯하다. 協律大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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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9번= {{TagSpage|65-15}}<blockquote no="17">기러ᄂᆡ다 다 기러ᄂᆡ며 퍼ᄂᆡ다 다 퍼ᄂᆡ랴</br>{{TagPage|66-1}}兒孩야 盞을 씨셔 이 술 ᄒᆞᆫ 盞 어다(더)가</br>九重으로 도라가셔 모다 醉케 ᄒᆞ오리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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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0번= {{TagSpage|66-2}}하고 澤堂譯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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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1번= {{TagSpage|66-3}}<blockquote no="18">欲汲欲汲不盡汲 呼兒洗盞更酌一盃酒 回逢九重令重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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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2번= {{TagSpage|66-4}}라 하였다. 과연 이것이야말로 그 前文의 뜻을 받어 結末을 지은 것이다. 그 前文을 들어 말하면 대개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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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3번= {{TagSpage|66-5}}<blockquote no="19">關東等地를 遊覽하든 途次, 望洋亭에 올라 바다도 바라보고 달뜨는 光景도 바라보고 啟明星이 돋도록 고초 앉어 流霞酒 부어 잡고 달더러 말도 뭇고 또는 잠도 들어 꿈에 한 道 를 맞나 黃庭經 一字를 그릇 읽고 人間에 下謫하였다는 수작도 하고 술도 勸하고 달이 지자 鶴을 타고 九空으로 오르다가 空中 玉簫소리에 잠을 깨어 굽어보니 바다는 茫茫하여 그 깊이나 넓이를 알 수 없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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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4번= {{TagSpage|66-6}}이 글 가운데에 「啓明星(샛별)이 돋도록.」이라는 말이 있는 걸 보드라도 밤은 거의 샐 때가 된 것이니 「달지자」라든가 잠을 개어 바다를 굽어보고 「兒孩야」라든가 하고 云云함이 妥當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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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5번= {{TagSpage|66-7}}同卷上十三張 後面第五行 思美人曲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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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6번= {{TagSpage|66-8}}<blockquote no="20">深심山산窮궁{{ruby|谷|○}} 쳠{{ruby|닛|○}}ᄀᆞ티 ᄆᆡᆼ그쇼셔</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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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7번= {{TagSpage|66-9}}는 思美人曲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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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8번= {{TagSpage|66-10}}<blockquote no="21">심산궁곡{{ruby|을|○}}</br>쳠{{ruby|낫|○}}ᄀᆞ치 ᄆᆡᆼ그쇼셔</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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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9번= {{TagSpage|67-1}}라 하였으니 深山窮谷 밑에 「을」이 漏落되고 졈닛은 「졈낫」의 誤字임이 分明하야, 졈낫은 정낮, 곳 한낮이라는 말이다. 坯窩譯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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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0번= {{TagSpage|67-2}}<blockquote no="22">深山兮窮谷 燭之分如日</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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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1번= {{TagSpage|67-3}}이라 하고 思美人解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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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2번= {{TagSpage|67-4}}<blockquote no="23">深山與窮谷 光明如日燭</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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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3번= {{TagSpage|67-5}}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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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4번= {{TagSpage|67-6}}同卷上十七張 後面第六行 續美人曲의 「어엿븐 그림재 날 조ᄎᆞᆯᄲᅮᆫ이로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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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5번= {{TagSpage|67-7}}<blockquote no="24">ᄎᆞ라리 싀여지여 낙월이나 되어 이셔</br>님계신 창밧긔 번드시 비최리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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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6번= {{TagSpage|67-8}}하는 句節이 빠진 것이다. 이것이 思美人曲帖에 적혀 있고 그 譯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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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7번= {{TagSpage|67-9}}<blockquote no="25">寧此身兮溘死 化落月兮雲際 美人兮窓外 願流照兮無掩影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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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8번= {{TagSpage|67-10}}라고 하였다. 만일 이 句節이 없고 보면 그다음에 있는 同曲落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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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79번= {{TagSpage|67-11}}<blockquote no="26">각시님 ᄃᆞᆯ이야 ᄏᆞ니와 구즌비나 되쇼셔</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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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80번= {{TagSpage|67-12}}함은 그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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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81번= {{TagSpage|67-13}}同卷上十九張 後面第一行 星山別曲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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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82번= {{TagSpage|67-14}}<blockquote no="27">그림재 {{ruby|버|○}}을 삼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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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83번= {{TagSpage|68-1}}의 {{ruby|버|○}}는 {{ruby|벗|○}}이요 同卷下六張 前面第四行 短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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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84번= {{TagSpage|68-2}}<blockquote no="28">내말고{{ruby|디|○}}드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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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85번= {{TagSpage|68-3}}의 {{ruby|디|○}}는 {{ruby|텨|○}}니 短歌抄集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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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86번= {{TagSpage|68-4}}<blockquote no="29">내말고{{ruby|텨|○}}드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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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04번= {{TagSpage|69-6}}<blockquote no="38">비단옷{{ruby|비|○}}ᄉ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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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05번= {{TagSpage|69-7}}의 {{ruby|비|○}}ᄉᆞ니는 {{ruby|버|○}}ᄉᆞ니요 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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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06번= {{TagSpage|69-8}}<blockquote no="39">어{{ruby|ᄯᅵ|○}}는 엇{{ruby|디|○}}</br>올{{ruby|나|○}}는 올{{ruby|라|○}}</br>{{ruby|인|○}}ᄂᆞ니는 {{ruby|잇|○}}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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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07번= {{TagSpage|69-9}}로 써야함과 {{ruby|에|○}}, {{ruby|의|○}}의 토(助詞)를 混同하여 쓰는 따위의 綴字의 틀림은 이루 다 들어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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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08번= {{TagSpage|69-10}}그리고 이 短歌들을 그 形式으로 嚴正하게 본다면 그 어떤 것은 間或 句의 字數가 더하거나 덜한 것이 있다. 이도 傳할 때의 誤錯도 있겠지마는 本是 이걸 지을 때에 作者가 不注意를 하였거나 혹은 일부러 破格을 하고 이와 같이 하여 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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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09번= {{TagSpage|69-11}}同卷下一張 前面第三乃至第六行 短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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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0번= {{TagSpage|69-12}}<blockquote no="40">아바님날나흐시고어마님날기ᄅᆞ시니두분곳아니시면이몸이사라실가「하ᄂᆞᆯᄀᆞᄐᆞᆫ」ᄀᆞ업ᄉᆞᆫ恩은德덕을어ᄃᆡ다혀갑ᄉᆞ오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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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1번= {{TagSpage|70-1}}에 「하ᄂᆞᆯᄀᆞᄐᆞᆫ」의 句는 한 字가 더하다. 이 句를 歌曲에서는 四章이라 時調에서는 終章 第一句라 일칻는데 若干 辭說體로 된 노래 形式을 除해놓고는 字數가 꼭 一定하여 三字만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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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2번= {{TagSpage|70-2}}同卷下一張 後面第一行乃至第四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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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3번= {{TagSpage|70-3}}<blockquote no="41">「형아아ᄋᆡ야」 녜ᄉᆞᆯᄒᆞᆯᄆᆞᆫ져보와뉘손ᄃᆡ타나관ᄃᆡ양저조차ᄀᆞᄐᆞᄉᆞᆫ다 「ᄒᆞᆫ졋먹고」 길러나이셔닷ᄆᆞᄋᆞᆷ을먹디마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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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4번= {{TagSpage|70-4}}에 「형아아ᄋᆡ야」의 句는 한두 字가 덜하다. 從來 短歌에 이 첫 句가 이와 같이 五字만으로 된 것은 그 例가 이밖에 별로 없다. 이 句는 적어도 六字乃至八九字는 되어야 한다. 「ᄒᆞᆫ졋먹고」의 句는 위에 말한 「하ᄂᆞᆯᄀᆞᄐᆞᆫ」의 句와 같이 한 字가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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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5번= {{TagSpage|70-5}}同卷下五張 後面第二乃至第五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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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6번= {{TagSpage|70-6}}<blockquote no="42">기울계대니거니ᄯᆞ나죡박귀업거니ᄯᆞ나비록이셰간이「판탕ᄒᆞᆯ망졍」고온님괴기옷괴면그ᄅᆞᆯ밋고살리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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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7번= {{TagSpage|70-7}}에 「판탕ᄒᆞᆯ망졍」의 句도 한두 字가 덜하다. 亦是 이 句도 이와 같은 五字만으로 된 것이 별로 없고 적어도 六字乃至八九字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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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8번= {{TagSpage|70-8}}同卷下十一張 前面第一乃至第四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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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19번= {{TagSpage|70-9}}<blockquote no="43">中듕書셔堂당白ᄇᆡᆨ玉옥杯ᄇᆡᄅᆞᆯ十십년만의고텨보니ᄆᆞᆰ고흰비ᄎᆞᆫ어제론듯ᄒᆞ다마ᄂᆞᆫ엇더라사ᄅᆞᆷ의ᄆᆞᄋᆞᆷ은朝죠夕셕變변ᄒᆞᄂᆞᆫ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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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0번= {{TagSpage|70-10}}에 「朝죠夕셕變변ᄒᆞᄂᆞᆫ고」는 한 字가 덜하다는 것보다 한 字가 빠진듯하다. 곧 「朝죠夕셕變변」밑에 「을」 한 字가 빠진 것이다. 과연 海東歌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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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1번= {{TagSpage|71-1}}<blockquote no="44">朝夕變{{ruby|을|○}}ᄒᆞᆫ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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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2번= {{TagSpage|71-2}}라 하였고 靑丘永言一本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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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3번= {{TagSpage|71-3}}<blockquote no="45">朝夕變{{ruby|을|○}}ᄒᆞᄂᆞᆫ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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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4번= {{TagSpage|71-4}}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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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5번= {{TagSpage|71-5}}同卷下十二張 前面第六乃至第八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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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6번= {{TagSpage|71-6}}<blockquote no="46">쇠나기할즐기미년닙페솟ᄃᆞ로개물무ᄃᆞᆫ흔젹은젼혀몰라보리로다내ᄆᆞᄋᆞᆷ「뎌ᄀᆞᄐᆞ야」덜믈줄을모ᄅᆞ고져</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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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7번= {{TagSpage|71-7}}에 「뎌ᄀᆞᄐᆞ야」의 句는 한두 字가 덜하다. 이 句는 적어도 五字乃至七八字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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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8번= {{TagSpage|71-8}}同卷下十三張 前面第二乃至第五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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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29번= {{TagSpage|71-9}}<blockquote no="47">녯ᄉᆞ랑이제ᄉᆞ랑어제嬌교態ᄐᆡ오ᄂᆞᆯ嬌교態ᄐᆡ로다「ᄉᆡᆼ각ᄒᆞ니」ᄭᅮ미오陳딘跡젹이라쳣ᄆᆞᄋᆞᆷ가ᄉᆡ디옷아니면도라셜법인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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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0번= {{TagSpage|71-10}}에 「ᄉᆡᆼ각ᄒᆞ니」의 句도 이 넉 字만으로는 不足하다. 이 句도 五字乃至七八字는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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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1번= {{TagSpage|71-11}}同卷下十四張 前面第二乃至第四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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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2번= {{TagSpage|71-12}}<blockquote no="48">明명珠쥬四ᄉᆞ萬만斛곡을년닙픠다바다셔담ᄂᆞᆫᄃᆞᆺ되ᄂᆞᆫᄃᆞᆺ어드리보내ᄂᆞᆫ다헌ᄉᆞᄒᆞᆫ「물방올ᄅᆞᆫ」어위계워ᄒᆞᄂᆞᆫ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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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3번= {{TagSpage|71-13}}에 「물방올ᄅᆞᆫ」의 句도 위에 말한 「뎌ᄀᆞᄐᆞ야」의 句와 같이 한두 字가 不足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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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4번= {{TagSpage|71-14}}同卷下十六張 前面第三乃至第五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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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5번= {{TagSpage|71-15}}<blockquote no="49">松숑林님의눈이오니가지마다곳치로다ᄒᆞᆫ가지것거내여님겨신ᄃᆡ보내고져「님이」보신후제야노디다엇디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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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6번= {{TagSpage|72-1}}에 「님이」의 句는 한 字가 不足하다. 이 句는 三字가 되어야 한다. 協律大成과 靑丘永言에는 이 句가 「님계셔」라는 三字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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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7번= {{TagSpage|72-2}}同十六張 後面第六乃至第八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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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8번= {{TagSpage|72-3}}<blockquote no="50">이몸이俊주傑걸이런ᄃᆞᆯ님이언제ᄇᆞ리시리ᄎᆞᆯ하리俗쇽士ᄉᆞ라쟈님을조차노닐러니俗쇽士ᄉᆞ셔도「아니니」님못볼가ᄒᆞ노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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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39번= {{TagSpage|72-4}}에 「아니니」의 句는 二三字가 不足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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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0번= {{TagSpage|72-5}}同卷下十七張 前面第二乃至第五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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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1번= {{TagSpage|72-6}}<blockquote no="51">花화灼쟉灼쟉범나븨雙ᄡᅡᆼ雙ᄡᅡᆼ柳뉴靑쳥靑쳥괴ᄭᅩ리雙ᄡᅡᆼ雙ᄡᅡᆼᄂᆞᆯ즘숭긜즘숭다雙ᄡᅡᆼ雙ᄡᅡᆼᄒᆞ다마ᄂᆞᆫ「엇디」「이내몸은」혼자雙ᄡᅡᆼ이업ᄂᆞ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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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2번= {{TagSpage|72-7}}에 「엇디」와 「이내몸은」과의 句는 각기 한 字씩 부족하다. 古今歌曲의 感物條에는 이 句들을 「엇지타」「이내人生은」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오히려 正傳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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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3번= {{TagSpage|72-8}}그리고 또 同卷下十二張 後面第七行乃至同十三張 前面第五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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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4번= {{TagSpage|72-9}}<blockquote no="52">南남山산뫼어ᄃᆞ메萬만高고學학士ᄉᆞ草초堂당지어곳두고ᄃᆞᆯ두고바회두고믈둔ᄂᆞᆫ이술조차둔ᄂᆞᆫ양ᄒᆞ야날을오라ᄒᆞ거니녯ᄉᆞ랑이제ᄉᆞ랑어제嬌교態ᄐᆡ오ᄂᆞᆯ嬌교態ᄐᆡ로다각ᄉᆡᆼᄒᆞ니ᄭᅮ미오陳딘跡젹이라첫ᄆᆞᄋᆞᆷ가ᄉᆡ디옷아니면도라셜법인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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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5번= {{TagSpage|72-10}}하는 이 대문은 다시 나누어 적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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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6번= {{TagSpage|72-11}}<blockquote no="53">南남山산뫼어ᄃᆞ메 萬만高고學학士ᄉᆞ草초堂당지어 곳두고ᄃᆞᆯ두고바회두고믈둔ᄂᆞᆫ이 술조차 둔ᄂᆞᆫ양ᄒᆞ야날을오라ᄒᆞ거니{{TagPage|73-1}}녯ᄉᆞ랑이제ᄉᆞ랑 어제嬌교態ᄐᆡ오ᄂᆞᆯ嬌교態ᄐᆡ로다 ᄉᆡᆼ각ᄒᆞ니ᄭᅮ미오 陳딘跡젹이라 첫ᄆᆞᄋᆞᆷ 가ᄉᆡ디옷아니면 도라셜법잇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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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7번= {{TagSpage|73-2}}라 하는 두 首의 短歌가 判然하다. 이건 板刻할 때 刻手의 失手로만 볼 수가 없다. 이러한 例가 또 있으니 松岩(權好文 宣祖朝人)續集 卷之六 閑居十八曲의 그 十六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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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8번= {{TagSpage|73-3}}<blockquote no="54">行藏有道ᄒᆞ니ᄇᆞ리면구태구ᄒᆞ랴山之南水之北병들고늘근날를뉘라셔懷實迷邦ᄒᆞ니 오라말ᄒᆞᄂᆞ뇨聖賢의가신길히萬古애ᄒᆞᆫ가지라隱커니見커니道ㅣ얻디다ᄅᆞ리一道ㅣ오다ᄅᆞ디아니커니아ᄆᆞᄃᆡᆫ들엇더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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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49번= {{TagSpage|73-4}}라 하는 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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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0번= {{TagSpage|73-5}}<blockquote no="55">行藏有道ᄒᆞ니 ᄇᆞ리면 구태구ᄒᆞ랴 山之南水之北병들고늘근날를 뉘라셔 懷實迷邦ᄒᆞ니오라말ᄒᆞᄂᆞ뇨</br>聖賢의가신길히 萬古애ᄒᆞᆫ가지라 隱커니見커니道ㅣ얻디다ᄅᆞ리 一道ㅣ오 다ᄅᆞ디아니커니아ᄆᆞᄃᆡᆫ들엇더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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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1번= {{TagSpage|73-6}}라 하고 區分하여 적을 것이다. 이와 같이 노래에 대하여는 그것이 한 대문인지 두 대문인지도 모르고 다만 그 子孫이나 門徒들이 自己의 祖上이나 先生의 것이라 하여 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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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2번= {{TagSpage|73-7}}그러나 그 中에는 自己의 祖上이나 先生의 것도 아닌 것이 없지 않다. 이 册의 短歌에도 松江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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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3번= {{TagSpage|73-8}}同卷下十張 後面第一行 短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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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4번= {{TagSpage|73-9}}<blockquote no="56">{{ruby|어와|○○}}버{{ruby|힐시고|○○○}}落낙落낙長댱松숑{{ruby|버힐시고|○○○○}}져근덧두던들棟동樑냥材저되리러니{{ruby|어즈버|○○○}}明명堂당이기울{{ruby|거든무서ᄉᆞ로바|○○○○○○○}}러{{ruby|려뇨|○○}}</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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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5번= {{TagSpage|74-1}}는 古今歌曲의 慨世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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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6번= {{TagSpage|74-2}}<blockquote no="57">{{ruby|엇그제|○○○}}버{{ruby|힌솔이|○○○}}落落長松{{ruby|아니런가|○○○○}}저근덧두던들棟樑材되리러니{{ruby|이後의|○○○}}明堂이기울{{ruby|면어ᄂᆞ남기바치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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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7번= {{TagSpage|74-3}}라 하였으며 河西(金麟厚 明宗朝人)全集續編卷首의 悼林士遂(亨秀號錦湖)冤死作短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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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8번= {{TagSpage|74-4}}<blockquote no="58">昨日伐了木 百尺長松 非也歟 若使至今在 可作棟樑材 嗚呼 明堂傾矣 于何以支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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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59번= {{TagSpage|74-5}}라 하고 繙譯되어 있다. 이는 松江의 作이 아니고 松江이 受學하든 金河西의 作이다. 林士遂(錦湖)는 全羅道 羅州사람으로서 퍽 豪邁하고 文武의 才를 겸하였고 李退溪가 매양 奇壯士라고 稱頌하든 이다. 明宗二年(一五四七)에 「女主 執政於上 奸臣李芑等 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라는 匿名書를 누가 良才驛 壁 위에 써 부쳤다고 鄭彦慤 尹元衡 等이 이를 尹任의 堂이 한 것이라고 그때 名人들을 많이 죽이는데 錦湖도 尹任과 한 洞里에 살고 直言을 잘함으로 하여 曖昧하게 걸리어 죽었다. 金河西는 그와 同道에 살며 交分도 있었을 것이라 그의 冤死함을 슬퍼하고 이러한 노래를 지음도 그럴듯할 것이다. 그때 松江은 나이 겨우 十二歲다. 이러한 노래를 지을 수 없다. 松江이 長成하여서는 錦湖를 追慕하고 河西가 지은 이 短歌를 愛誦하기는 하였을 것이다. 錦湖의 從子 林檜는 松江의 사외가 되는지라 남다른 사이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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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0번= {{TagSpage|74-6}}同卷下十四張 後面第一行乃至第四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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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1번= {{TagSpage|74-7}}<blockquote no="59">風풍霜상섯거틴날의잇ᄀᆡᆺ퓐黃황菊花화ᄅᆞᆯ銀은盤반의것거다마玉옥堂당으로 보내실샤桃도李리야곳이론양마라님의ᄯᅳᄃᆞᆯ알괘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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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2번= {{TagSpage|74-8}}는 海東歌謠, 青丘永言, 歌曲源流에는 宋純(俛仰亭)의 作이라 하였고 芝峯類說 卷十四 歌詞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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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3번= {{TagSpage|75-1}}<blockquote no="60">明廟朝 折御苑黄菊 賜玉堂官 命撰進歌詞 玉官 倉卒不能就 時 宋純 以宰樞直摠府 乃借製以進 上野之驚喜 問誰作此者 玉堂官 不敢隱 以實對 乃大加賞賜 其詞 至今傳于樂府</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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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4번= {{TagSpage|75-2}}라 하였으니 이 노래는 이때 宋純이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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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5번= {{TagSpage|75-3}}同卷下十七張 後面第一行乃至第三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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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6번= {{TagSpage|75-4}}<blockquote no="61">잘새ᄂᆞᆫᄂᆞ라들고새ᄃᆞᆯ은도다온다외나모ᄃᆞ리예혼자가ᄂᆞᆫ뎌듕아네뎔이얼마나ᄒᆞ관ᄃᆡ먼북소ᄅᆡ들리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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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7번= {{TagSpage|75-5}}도 宋純의 作이다. 그의 俛仰亭短歌 七篇 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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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8번= {{TagSpage|75-6}}<blockquote no="62">宿鳥兮飛入 新月兮漸昇 時獨木兮橋上 獨去兮彼僧 爾寺兮何許 遠鍾聲兮入聆</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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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69번= {{TagSpage|75-7}}이라고 이 노래를 翻譯한 것이 있음을 보면 이도 그의 作임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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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0번= {{TagSpage|75-8}}同卷下十五張 後面第七行乃至同十六張 前面第二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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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1번= {{TagSpage|75-9}}<blockquote no="63">우리집모든ᄋᆡᆨ을네혼자맛다이셔人인間간의디디마오野야樹슈의걸렷다가비오고ᄇᆞ람분날이어ᄃᆞᆫ 自ᄌᆞ然연消쇼滅멸ᄒᆞ여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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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2번= {{TagSpage|75-10}}도 松江의 作이 아니다. 石洲(權鞸)詩別集 卷之七 二十七張에는 {{ruby|翻俗傳|○○○}}紙鳶歌라 하는 題目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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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3번= {{TagSpage|75-11}}<blockquote no="64">我家諸厄爾帶去 不落人間掛野樹  只應春天風雨時 自然消滅無尋處</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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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4번= {{TagSpage|75-12}}라 하였다. 그때 이러한 紙鳶歌가 俗傳하든 것이다. 權石洲는 松江의 門人이다. 이 노래가 松江의 作이고 보면 이러하게 {{ruby|翻俗傳|○○○}}이라 할 리가 萬無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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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5번= {{TagSpage|75-13}}또는 松江의 作으로도 이 册에는 빠진 듯한 것이 있으니 海東歌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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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6번= {{TagSpage|76-1}}<blockquote no="65">風波에일리든그ᄇᆡ어드로가닷말고구름이머흘거든처음에날줄어이허술ᄒᆞᆫᄇᆡ가진分네모다操心ᄒᆞ시소</br>저긔섯는저소나모섬도설사길ᄭᆞ의가적은듯들의혀저굴헝에서고라쟈ᄉᆞᆺᄯᅴ刀츼멘分네는다직으려ᄒᆞ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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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7번= {{TagSpage|76-2}}이라 하는 것들이 그것이고 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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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8번= {{TagSpage|76-3}}<blockquote no="66">蘆花픠온고ᄃᆡ 落霞ᄅᆞᆯ빗기ᄯᅴ고 三三五五히섯거노ᄂᆞᆫ져白鷗야 우리도 江湖舊盟을 차자볼가 ᄒᆞ노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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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79번= {{TagSpage|76-4}}하는 이 노래도 大東風雅에는 松江의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歌曲源流의 적은 것과 같이 金河西의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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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80번= {{TagSpage|76-5}}또 五山說林(宣祖朝人 車天輅 撰)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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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81번= {{TagSpage|76-6}}<blockquote no="67">鄭松江之爲繡衣出北塞也 {{ruby|作一短歌|○○○○}} 未機 明廟 賓天 盖赤歌讖也 後 公以觀察使 巡至吉州 三老妓 唱其歌 醉後 公作一絶曰 二十年前塞下曲 何年落此妓林中 孤臣未死天涯淚 欲向康陵酒曉風</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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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82번= {{TagSpage|76-7}}이라 하는 것이 있고 이걸 松江別集卷二 附錄年譜 奉使北關條에도 引用하였으나 그 短歌의 內容만은 記錄하지 않았다. 이 短歌는 歌讖이 되든 만큼 일부러 忌諱하여 빼어버렸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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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 {{TagSpage|58-1}}송강가사는 단행본으로 간행된 목판본과 또는 사본으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목판본에는 관북본(關北本), 관서본(關西本), 의성본(義城本), 황주본(黃州本), 성주본(星州本) 등이 있다. 우선 그 각본(各本)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하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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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번= {{TagSpage|58-2}}1. 관북본</br>이건 관북(함경도)에서 간행된 것으로서 {{TagBook|[[지호집]]}} 권6과 {{TagBook|[[해동가요]]}}와 {{TagBook|[[고금가곡]]}}에 기재된 송강가사 후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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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번= {{TagSpage|58-3}}<blockquote no="01">北關 舊有公歌曲之刊行而顧年代已久 且經兵燹 謝失其傳 誠可惜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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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번= {{TagSpage|58-4}}와 같이 연대(年代)가 오래되고 또는 병선(兵燹)을 겪어 실전(失傳)되었다. 이 발문 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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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번= {{TagSpage|58-5}}<blockquote no="02">庚午元月上澣 完山後人 李選 書于東城之幽蘭軒</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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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번= {{TagSpage|58-6}}을 보면 이건 이조 숙종조인 {{TagPerson|[[이선]]}}, 호는 지호(芝湖)라는 이가 송우암(宋尤菴) 문인으로서 그 내제 {{TagPerson|[[김만중]]}}과 함께 대론(臺論)을 받아 차성(경상도 장기)에 귀양 가 있을 때 즉 숙종 16년 경오(1690)에 지은 것이니 아마 숙종 이전 광해주 때 무렵에 간행된 것인 듯, 이것이 송강가사본으로는 최초의 간행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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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번= {{TagSpage|59-1}}2. 관서본</br>이건 관서관찰영인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고 {{TagBook|[[진판고]]}} 권제6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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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번= {{TagSpage|59-2}}<blockquote no="03">松江歌辭一卷 關西觀察營藏 印紙十五張</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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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번= {{TagSpage|59-3}}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얻어 볼 수 없는 것이다.</br>[[파일:이병기_송강가사1-1.png|섬네일|가운데|星州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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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번= {{TagSpage|59-4}}3. 의성본</br>이건 송강의 현손 {{TagPerson|[[정호]]}}, 호는 장암(丈岩)이라 하는 이가 경상도 의성현령으로 가 있을 때에 간행하였다. 그 간행 연월은 분명치는 못하나 숙종 십여 년 경인 듯하고 또한 지금은 얻어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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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번= {{TagSpage|59-5}}4. 황주본</br>이것도 의성본과 거의 같은 연대 {{TagPerson|[[송강]]}}의 현손서요 {{TagPerson|[[이제신|이청강 제신]]}}의 오세손인 {{TagPerson|[[이징하]]}}가 황해도 황주통판으로 가 있을 때 간행하였{{TagPage|60-1}}다 하나, 역시 얻어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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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번= {{TagSpage|60-2}}5. 성주본</br>이 책은 종 30.4리, 횡 18.8리, 판광 종 20.8리, 횡 126리, 매장 전후면 각 8행, 매행 16자요 전권 상하 양부로 되어 상부는 총 24장에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가 있고 하부는 총 20장에 단가라는 제목이 있고 경민편(警民編)에 재견한다는 16수와 기타 63수와 천(송강 현손)근서, 관하(송강 오세손)추기의 부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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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번= {{TagSpage|60-3}}이상에 기타 63수란 건 뒤에 또 자세히 말하려니와 사실 이 책에는 두 수를 한 대문으로 하여 62수로 되어있고 이 책의 장수는 상하 양부를 도합하여 44장이 되나 {{TagBook|[[누판고]]}} 권제6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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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번= {{TagSpage|60-4}}<blockquote no="04">松菴歌辭一卷 星州牧藏 印紙一牒三張</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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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번= {{TagSpage|60-5}}으로 적혔으니 인지(印紙) 일첩삼장은 백지 23장, 이걸 반절하면 46장이 되니 그 나머지 3장은 여유를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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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번= {{TagSpage|60-6}}이 책은 숙종 24년(1698)에 {{TagPerson|[[송강]]}}의 현손 {{TagPerson|[[정천]]}}이 선사하여 놓고 미처 간행은 못한 것을 그 뒤 영조 23년(1747)에 그 아들 {{TagPerson|[[정관하]]}}가 경상도 경주목사로 가 있을 때에 간행한 것이다. 이 책 부록에 그의 추기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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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번= {{TagSpage|60-7}}<blockquote no="05">先人在世時 慨然兩本之眞贋相雜 眩於取舍 改寫一通 將付剞劂氏而有志未就 尋常痛恨 盖有年矣 昨夏 來莅星州 鳩聚梓板 一句而工訖 此亦有待而然歟 玆用廣布知舊間 以續 先君子未就之意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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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8번= {{TagSpage|60-8}}이라 하였으니 「先人在世時 慨然兩本之眞贋相雜 眩於取舍云云」함은 또 그 부록의 정천근서를 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그뿐더러 위에 말한 의성본 황주본의 내역도 소상하게 말해있다. 이에 그 해독문의 대의를 들어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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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9번= {{TagSpage|61-1}}<blockquote no="06">文清公(松江)의 長短歌曲이 世上에 行하는 것이 若干篇이로되 여러 번 兵亂을 겪어 眞本은 전하지 않는다. 여러 子孫들 집에 각각 所藏함이 있으나 傳寫할 때의 誤字된 것, 傳誦하는 이의  添補한 것이 많다. 再從兄 澔氏가 義州 원으로 가 있을 때 이걸 걱정하고 刊行을 하였으나 諸本의 同異함을 널리 取하지 못하였다. 내 집에 舊藏하든 것과 校正하여본즉 舛誤된 것이 많고 短歌에는 逸失된 것도 많다. 또 畸翁의 아들 涖의 謄寫한 것과 考證하여본즉 내 집의 舊蔵한 것과 같은데 내 것은 王考 抱翁公이 命寫한 것이고 涖의 것은 畸翁의 전한 바를 받은 것이니 이것이 정말 眞本이다. 姊兄 李徵夏氏는 항상 우리 文清先祖考를 남달리 景慕하고 또한 이 일의 本末을 잘 아는데 마츰 黃州通判으로 가 있어 이걸 刊布하였다. 그러나 뒤에 보는 이들은 兩本의 眞贋을 분간하지 못하고 取舍함에 眩亂할까 하여 내 고쳐 一通을 써 剞劂에 붙인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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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0번= {{TagSpage|61-2}}하였다. 이 글 가운데 「兩本의 眞贋」을 말한 것은 안(贋)은 {{TagPerson|[[정호]]}}의 의성본을 가리킨 것이고 진(眞)은 {{TagPerson|[[이징하]]}}의 황주본을 가리킨 것 같다. 황주본이야말로 {{TagPerson|[[이징하]]}}의 처가인 {{TagPerson|[[정천]]}}의 집에서 온 것이겠고 {{TagPerson|[[정호]]}}의 구장진본이란 것은 {{TagPerson|[[정홍명]]}}, 호는 기암(기옹)이란 이에게서 온 것일 것이다. {{TagBook|[[유학원연보]]}}({{TagPerson|[[어윤적]]}} 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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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1번= {{TagSpage|61-3}}<blockquote no="07">栗谷  沙溪  畸菴  抱翁</br>李珥―金長生―酁弘溟―鄭瀁</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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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2번= {{TagSpage|61-4}}과 같이 {{TagPerson|[[정천]]}}의 왕고 {{TagPerson|[[포옹]]}}이라 하는 이가 {{TagPerson|[[정홍명|기옹]]}}에게 의발을 받을 때에 이러한 가사본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TagPerson|[[정홍명|기옹]]}}의 아들 {{TagPerson|[[정리]]}}의 것이 자기의 것과 같으니 진본이라고 함은 덜 된 수작이다. 또 {{TagPerson|[[정호]]}}의 의성본을 안본이라 함도 믿을 수 없다. 자기의 말따나 「여러 번 병란을 겪어 진본은 전하지 않는다」하고 여러 자손들 집의 소장한 것은 모두 안본이고 자기의 것만 진본이라 함이 풍치는 말도 같다. 또한 참고로 그 세계표(世系表)를 그려보자.</br>[[파일:이병기_송강가사1-2.png|섬네일|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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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3번= {{TagSpage|62-1}}이와 같이 그 많은 자손들 집에서 제마다 소중하게 여기는 제 선조의 가사를 하필 안본을 소장하였으리오. {{TagPerson|[[정홍명|기암]]}}은 {{TagPerson|[[송강]]}}의 끝의 아들로 나이 겨우 열두 살에 그 부상을 당하였으니 그 당시에는 {{TagPerson|[[송강]]}}의 가사같은 걸 수습할 철도 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종 장성하여 그 집안에 전하던 것은 벗겼다 하더라도 이것만을 진본이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어떻든 지금 와서는 이밖에 얻어 볼 수 없으니 이것이 홀로 귀중함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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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4번= {{TagSpage|62-2}}이상 말한 다섯 본 외는 경민편에 실린 것이 있으니 이건 {{TagPerson|[[송강]]}}이 강원감사 때 지은 단가 16수다. 완남부원군 {{TagPerson|[[이후원]]}}이 {{TagPerson|[[김정국]]}}의 경민편 사본을 해서(황해도)에서 얻어 언해를 하고 또 진고령, 진서산의 권유문 따위와 {{TagPerson|[[송강]]}}의 이 단가와를 부록으로 하고 효종 9년(1658)에 제도(諸道)에 광포하고자 하여 간행한 것이다. 성주본보다도 팔십여 년을 앞선 것이고 한 자서도 완결(刓缺)한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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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5번= {{TagSpage|62-3}}요마적 간행된 단행본, 또는 잡가본에 끼어 있는 송강가사는 황잡하기 짝이 없고 사본으로 전하는 것에는 성주본보다도 더 진정하다고 볼만한 것이 있으니 {{TagBook|[[사미인곡첩]]}}과 {{TagBook|[[협률대성]]}}과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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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6번= {{TagSpage|63-1}}{{TagBook|[[사미인곡첩]]}}은 견본 종 36.5리 횡 24.5리 총 10폭. 제1폭 내지 제5폭에 소체(騷體) 즉 초사체(楚辭體)로 번역한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쓰고 제5폭 내지 제8폭에 갑신 계하 배와산인서라는 발문이 있고 제9폭 내지 10폭에는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해독문을 구절을 나누어 나란히 쓰고 글씨도 퍽 정미하여 체첩(體帖)이라도 삼을만하다. 배와(坯窩)는 {{TagPerson|[[김상숙]]}}의 호, 인품 문장 서법이 높다고 일컫던 것이다. 갑신은 곧 영조 40년(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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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7번= {{TagSpage|63-2}}{{TagBook|[[협률대성]]}}은 강원도 강릉 {{TagPerson|[[이근우]]}}씨 가장(家藏)인 고사본인데 전권 4부로 되어 제1부에는 조율지법 양금도 여민락 영산회상 우조 계면조의 곡보 보표 가곡지풍도 형용십오조목 매화점장단이 있고 제2부에는 영언전부라는 제목을 두고 가곡원류나 청구영언과 같은 장단가들이 있고 제3부에는 여창질이라는 제목에 역시 장단가들이 있고 제4부에는 어부사 처사가와 같은 가사와 관동별곡이 있다. 이 관동별곡이야말로 다른 본과는 다른 점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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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8번= {{TagSpage|63-3}}{{TagPerson|[[송강]]}}의 단가로는 {{TagBook|[[단가초집]]}} {{TagBook|[[고금가곡]]}} {{TagBook|[[해동가요]]}} {{TagBook|[[청구영언]]}} {{TagBook|[[가곡원류]]}} {{TagBook|[[대동풍아]]}} 기타 가사책에 몇 수씩 적혀있다. 이것도 모두 참고가 되려니와 관동별곡역 사미인곡해 장진주사역과 같은 번역들도 버릴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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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9번= {{TagSpage|63-4}}관동별곡역은 칠언시로 하여 간혹 오역한 것이 있으며 {{TagPerson|[[이식|이택당]]}}(명은 식, 광해조인)이 소시(少時)에 지은 것이라 한다. {{TagBook|[[서포만필]]}}(숙종조인 {{TagPerson|[[김만중]]}} 저)에는 {{TagPerson|[[이식|택당]]}}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어떻든 그 번역은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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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0번= {{TagSpage|63-5}}사미인곡해는 {{TagBook|[[연경재전집]]}}(정조조인 {{TagPerson|[[성해응]]}}저) 권지1에 보이는 것과 같이 오언으로 하여 잡가요체로서 번역한 것이다 {{TagPerson|[[김상숙|배와]]}}의 것보다도 더 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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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1번= {{TagSpage|63-6}}장진주사역은 {{TagPerson|[[김춘택|김북헌]]}}(명은 춘택 숙종조인)이 사체로 번역한 것이다. {{TagBook|[[북헌집]]}} 권4를 보면 {{TagPerson|[[김춘택|북헌]]}}의 친구요 {{TagPerson|[[송강]]}}의 후손인 {{TagPerson|[[정중여]]}}를 만나 술을 마시고 노는데 {{TagPerson|[[정중여|중여]]}}가 취하여 병을 두들기며 그 선조 {{TagPerson|[[송강]]}}의 장진주사를 부르고 그것이 속언{{TagPage|64-1}}으로 되었음을 한하고 한문으로 번역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런 뒤 10년이 지나, {{TagPerson|[[정중여|중여]]}}는 죽고 그 아들이 임피 적소로 찾아 왔을 때 비로소 하여준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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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2번= {{TagSpage|64-2}}참고서에 대한 말은 이만큼 하여두고 다시 성주본으로 돌아가 그 가사를 축조하여 보면 혹은 와전 혹은 오서 낙서 혹은 완결(刓缺)된 자들이 여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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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3번= {{TagSpage|64-3}}동권 상2장 후면 제7행 관동별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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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4번= {{TagSpage|64-4}}<blockquote no="08">半반空공{{ruby|이|○}} 소소ᄯᅳ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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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5번= {{TagSpage|64-5}}의 {{ruby|이|○}}는 {{ruby|의|○}}의 오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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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6번= {{TagSpage|64-6}}동권 상4장 전면 제8행의 「넙거나 넙은 天텬下하 엇ᄯᅵᄒᆞ야 젹닷말고」라는 구절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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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7번= {{TagSpage|64-7}}<blockquote no="09">어와 뎌 境界를 어이ᄒᆞ면 알거이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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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8번= {{TagSpage|64-8}}하는 한 구절이 빠진 것이다. 이는 {{TagBook|[[협률대성]]}}에나 {{TagPerson|[[이식|이택당]]}} 관동별곡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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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9번= {{TagSpage|64-9}}<blockquote no="10">優優大哉彼境界 欲窺涯溪何渺渺</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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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0번= {{TagSpage|64-10}}란 것을 보드라도 이 구절이 다 적혀있고 그 문맥으로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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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1번= {{TagSpage|64-11}}동권 상7장 전면 제2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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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2번= {{TagSpage|64-12}}<blockquote no="11">바다ᄒᆡ 날제ᄂᆞᆫ 萬만國이 {{ruby|일위|○○}}더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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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3번= {{TagSpage|64-13}}의 {{ruby|일위|○○}}는 알 수 없는 말이더니 {{TagBook|[[협률대성]]}}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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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4번= {{TagSpage|64-14}}<blockquote no="11">萬國이 {{ruby|어릐|○○}}더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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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5번= {{TagSpage|65-1}}라 하고 택당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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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6번= {{TagSpage|65-2}}<blockquote no="12">初離海上{{ruby|耀|○}}萬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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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7번= {{TagSpage|65-3}}이라 하였으니 즉 {{ruby|일위|○○}}는 {{ruby|어릐|○○}}의 결자요 어릐는 어릐어릐 비친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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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8번= {{TagSpage|65-4}}동권 상7장 후면 제8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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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9번= {{TagSpage|65-5}}<blockquote no="13">어듸 잇{{ruby|낫|○}} 말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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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0번= {{TagSpage|65-6}}의 {{ruby|낫|○}}은 {{ruby|닷|○}}의 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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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1번= {{TagSpage|65-7}}동권 상10장 후면 제4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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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2번= {{TagSpage|65-8}}<blockquote no="14">{{ruby|말|○}}디쟈 鶴학을 ᄐᆞ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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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3번= {{TagSpage|65-9}}의 {{ruby|말|○}}은 {{ruby|달|○}}(月)의 오자이고 {{TagPerson|[[이식|택당]]}} 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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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4번= {{TagSpage|65-10}}<blockquote no="15">須臾言訖鶴飛去</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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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5번= {{TagSpage|65-11}}의 수유언흘(須臾言訖)도 또한 맹종한 오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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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6번= {{TagSpage|65-12}}동권 상10장 후면 제8행과 11장 전면 제1행 동별곡 낙구(落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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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7번= {{TagSpage|65-13}}<blockquote no="16">明명月월이 千쳔山산萬만落낙의 아니 비쵠ᄃᆡ업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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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8번= {{TagSpage|65-14}}는 {{TagBook|[[고금가곡]]}}과 같은 책에도 이와 같이 적혔으나 그 전문과는 아무 연락 조응도 없는 한 군소리다. 전사할 때 와오(訛誤)된 것인 듯하다. 그리고 그 와오된 것을 도리어 살리기 위하여 위에 말한 {{ruby|달|○}}디쟈와 같은 것도 {{ruby|말|○}}디쟈로  개찬한 듯하다. {{TagBook|[[협률대성]]}}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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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9번= {{TagSpage|65-15}}<blockquote no="17">기러ᄂᆡ다 다 기러ᄂᆡ며 퍼ᄂᆡ다 다 퍼ᄂᆡ랴</br>{{TagPage|66-1}}兒孩야 盞을 씨셔 이 술 ᄒᆞᆫ 盞 어다(더)가</br>九重으로 도라가셔 모다 醉케 ᄒᆞ오리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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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0번= {{TagSpage|66-2}}하고 택당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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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1번= {{TagSpage|66-3}}<blockquote no="18">欲汲欲汲不盡汲 呼兒洗盞更酌一盃酒 回逢九重令重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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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2번= {{TagSpage|66-4}}라 하였다. 과연 이것이야말로 그 전문(前文)의 뜻을 받아 결말을 지은 것이다. 그 전문을 들어 말하면 대개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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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3번= {{TagSpage|66-5}}<blockquote no="19">關東等地를 遊覽하든 途次, 望洋亭에 올라 바다도 바라보고 달뜨는 光景도 바라보고 啟明星이 돋도록 고초 앉어 流霞酒 부어 잡고 달더러 말도 뭇고 또는 잠도 들어 꿈에 한 道 를 맞나 黃庭經 一字를 그릇 읽고 人間에 下謫하였다는 수작도 하고 술도 勸하고 달이 지자 鶴을 타고 九空으로 오르다가 空中 玉簫소리에 잠을 깨어 굽어보니 바다는 茫茫하여 그 깊이나 넓이를 알 수 없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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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4번= {{TagSpage|66-6}}이 글 가운데에 「계명성(샛별)이 돋도록.」이라는 말이 있는 걸 보드라도 밤은 거의 샐 때가 된 것이니 「달지자」라든가 잠을 개어 바다를 굽어보고 「아해야」라든가 하고 운운함이 타당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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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5번= {{TagSpage|66-7}}동권 상13장 후면 제5행 사미인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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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6번= {{TagSpage|66-8}}<blockquote no="20">深심山산窮궁{{ruby|谷|○}} 쳠{{ruby|닛|○}}ᄀᆞ티 ᄆᆡᆼ그쇼셔</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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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7번= {{TagSpage|66-9}}는 {{TagBook|[[사미인곡첩]]}}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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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8번= {{TagSpage|66-10}}<blockquote no="21">심산궁곡{{ruby|을|○}}</br>쳠{{ruby|낫|○}}ᄀᆞ치 ᄆᆡᆼ그쇼셔</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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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9번= {{TagSpage|67-1}}라 하였으니 심산궁곡 밑에 「을」이 누락되고 졈닛은 「졈낫」의 오자임이 분명하여, 졈낫은 정낮, 곳 한낮이라는 말이다. 배와역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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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0번= {{TagSpage|67-2}}<blockquote no="22">深山兮窮谷 燭之分如日</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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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1번= {{TagSpage|67-3}}이라 하고 {{TagBook|[[사미인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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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2번= {{TagSpage|67-4}}<blockquote no="23">深山與窮谷 光明如日燭</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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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3번= {{TagSpage|67-5}}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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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4번= {{TagSpage|67-6}}동권 상17장 후면 제6행 속미인곡의 「어엿븐 그림재 날 조ᄎᆞᆯᄲᅮᆫ이로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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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5번= {{TagSpage|67-7}}<blockquote no="24">ᄎᆞ라리 싀여지여 낙월이나 되어 이셔</br>님계신 창밧긔 번드시 비최리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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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6번= {{TagSpage|67-8}}하는 구절이 빠진 것이다. 이것이 {{TagBook|[[사미인곡첩]]}}에 적혀 있고 그 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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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7번= {{TagSpage|67-9}}<blockquote no="25">寧此身兮溘死 化落月兮雲際 美人兮窓外 願流照兮無掩影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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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8번= {{TagSpage|67-10}}라고 하였다. 만일 이 구절이 없고 보면 그다음에 있는 동곡 낙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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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79번= {{TagSpage|67-11}}<blockquote no="26">각시님 ᄃᆞᆯ이야 ᄏᆞ니와 구즌비나 되쇼셔</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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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0번= {{TagSpage|67-12}}함은 그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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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1번= {{TagSpage|67-13}}동권 상19장 후면 제1행 성산별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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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2번= {{TagSpage|67-14}}<blockquote no="27">그림재 {{ruby|버|○}}을 삼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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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3번= {{TagSpage|68-1}}의 {{ruby|버|○}}는 {{ruby|벗|○}}이요 동권 하6장 전면 제4행 단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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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4번= {{TagSpage|68-2}}<blockquote no="28">내말고{{ruby|디|○}}드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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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5번= {{TagSpage|68-3}}의 {{ruby|디|○}}는 {{ruby|텨|○}}니 {{TagBook|[[단가초집]]}}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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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6번= {{TagSpage|68-4}}<blockquote no="29">내말고{{ruby|텨|○}}드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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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7번= {{TagSpage|68-5}}라 하였고 그 다음 제5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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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8번= {{TagSpage|68-6}}<blockquote no="30">널로ᄒᆞ야다{{ruby|ᅟᅴᆺ|○}}거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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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89번= {{TagSpage|68-7}}의 {{ruby|ᅟᅴᆺ|○}}은 {{ruby|닛|○}}(忘)이요 동권 하6장 후면 제7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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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0번= {{TagSpage|68-8}}<blockquote no="31">이몸{{ruby|히|○}}러내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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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1번= {{TagSpage|68-9}}의 {{ruby|히|○}}는 {{ruby|허|○}}요 同卷下十張 後面第五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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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2번= {{TagSpage|68-10}}<blockquote no="32">술닉{{ruby|딧|○}}말어제듯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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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3번= {{TagSpage|68-11}}의 {{ruby|딧|○}}은 {{ruby|닷|○}}이요 동권 하11장 후면 제5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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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4번= {{TagSpage|68-12}}<blockquote no="33">비{{ruby|은|○}}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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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5번= {{TagSpage|68-13}}은 비{{ruby|온|○}}날이요 동권 하12장 후면 제7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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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6번= {{TagSpage|68-14}}<blockquote no="34">學{{ruby|하|○}}士ᄉᆞ</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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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7번= {{TagSpage|68-15}}는 學{{ruby|학|○}}ᄉᆞ요 동권 하14장 후면 제7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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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8번= {{TagSpage|68-16}}<blockquote no="35">년{{ruby|님|○}}ᄑᆡ</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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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99번= {{TagSpage|69-1}}는 년{{ruby|닙|○}}ᄑᆡ요 동권 하15장 전면 제1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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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0번= {{TagSpage|69-2}}<blockquote no="36">디거{{ruby|아|○}}</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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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1번= {{TagSpage|69-3}}는 디거{{ruby|야|○}}요 동15장 후면 제1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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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2번= {{TagSpage|69-4}}<blockquote no="37">嬌교{{ruby|熊|○}}ᄐᆡ</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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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3번= {{TagSpage|69-5}}의 {{ruby|熊|○}}ᄐᆡ는 {{ruby|熊|○}}ᄐᆡ요 동권 하19장 전면 제8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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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4번= {{TagSpage|69-6}}<blockquote no="38">비단옷{{ruby|비|○}}ᄉ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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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5번= {{TagSpage|69-7}}의 {{ruby|비|○}}ᄉᆞ니는 {{ruby|버|○}}ᄉᆞ니요 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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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6번= {{TagSpage|69-8}}<blockquote no="39">어{{ruby|ᄯᅵ|○}}는 엇{{ruby|디|○}}</br>올{{ruby|나|○}}는 올{{ruby|라|○}}</br>{{ruby|인|○}}ᄂᆞ니는 {{ruby|잇|○}}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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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7번= {{TagSpage|69-9}}로 써야 함과 {{ruby|에|○}}, {{ruby|의|○}}의 토(조사)를 혼동하여 쓰는 따위의 철자의 틀림은 이루 다 들어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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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8번= {{TagSpage|69-10}}그리고 이 단가들을 그 형식으로 엄정하게 본다면 그 어떤 것은 간혹 구의 자수(字數)가 더하거나 덜한 것이 있다. 이도 전할 때의 오착도 있겠지마는 본시 이걸 지을 때에 작자가 부주의를 하였거나 혹은 일부러 파격을 하고 이와 같이 하여 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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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09번= {{TagSpage|69-11}}동권 하1장 전면 제3 내지 제6행 단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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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0번= {{TagSpage|69-12}}<blockquote no="40">아바님날나흐시고어마님날기ᄅᆞ시니두분곳아니시면이몸이사라실가「하ᄂᆞᆯᄀᆞᄐᆞᆫ」ᄀᆞ업ᄉᆞᆫ恩은德덕을어ᄃᆡ다혀갑ᄉᆞ오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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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1번= {{TagSpage|70-1}}에 「하ᄂᆞᆯᄀᆞᄐᆞᆫ」의 구는 한두 자가 더하다. 이 구를 가곡에서는 사장(四章)이라 시조에서는 종장 제1구라 일컫는데 약간 사설체(辭說體)로 된 노래 형식을 제해 놓고는 자수가 꼭 일정하여 3자만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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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2번= {{TagSpage|70-2}}동권 하1장 후면 제1행 내지 제4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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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3번= {{TagSpage|70-3}}<blockquote no="41">「형아아ᄋᆡ야」 녜ᄉᆞᆯᄒᆞᆯᄆᆞᆫ져보와뉘손ᄃᆡ타나관ᄃᆡ양저조차ᄀᆞᄐᆞᄉᆞᆫ다 「ᄒᆞᆫ졋먹고」 길러나이셔닷ᄆᆞᄋᆞᆷ을먹디마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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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4번= {{TagSpage|70-4}}에 「형아아ᄋᆡ야」의 구는 한두 자가 덜하다. 종래 단가에 이 첫 구가 이와 같이 5자만으로 된 것은 그 예가 이밖에 별로 없다. 이 구는 적어도 6자 내지 8, 9자는 되어야 한다. 「ᄒᆞᆫ졋먹고」의 구는 위에 말한 「하ᄂᆞᆯᄀᆞᄐᆞᆫ」의 구와 같이 한 자가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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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5번= {{TagSpage|70-5}}동권 하5장 후면 제2 내지 제5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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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6번= {{TagSpage|70-6}}<blockquote no="42">기울계대니거니ᄯᆞ나죡박귀업거니ᄯᆞ나비록이셰간이「판탕ᄒᆞᆯ망졍」고온님괴기옷괴면그ᄅᆞᆯ밋고살리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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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7번= {{TagSpage|70-7}}에 「판탕ᄒᆞᆯ망졍」의 구도 한두 자가 덜하다. 역시 이 구도 이와 같은 5자만으로 된 것이 별로 없고 적어도 6자 내지 8, 9자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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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8번= {{TagSpage|70-8}}동권 하11장 전면 제1 내지 제4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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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19번= {{TagSpage|70-9}}<blockquote no="43">中듕書셔堂당白ᄇᆡᆨ玉옥杯ᄇᆡᄅᆞᆯ十십년만의고텨보니ᄆᆞᆰ고흰비ᄎᆞᆫ어제론듯ᄒᆞ다마ᄂᆞᆫ엇더라사ᄅᆞᆷ의ᄆᆞᄋᆞᆷ은朝죠夕셕變변ᄒᆞᄂᆞᆫ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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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0번= {{TagSpage|70-10}}에 「죠셕 변ᄒᆞᄂᆞᆫ고」는 한 자가 덜하다는 것보다 한 자가 빠진듯하다. 곧 「죠셕 변」 밑에 「을」 한 자가 빠진 것이다. 과연 {{TagBook|[[해동가요]]}}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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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1번= {{TagSpage|71-1}}<blockquote no="44">朝夕變{{ruby|을|○}}ᄒᆞᆫ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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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2번= {{TagSpage|71-2}}라 하였고 {{TagBook|[[청구영언]]}} 일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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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3번= {{TagSpage|71-3}}<blockquote no="45">朝夕變{{ruby|을|○}}ᄒᆞᄂᆞᆫ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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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4번= {{TagSpage|71-4}}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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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5번= {{TagSpage|71-5}}동권 하12장 전면 제6 내지 제8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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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6번= {{TagSpage|71-6}}<blockquote no="46">쇠나기할즐기미년닙페솟ᄃᆞ로개물무ᄃᆞᆫ흔젹은젼혀몰라보리로다내ᄆᆞᄋᆞᆷ「뎌ᄀᆞᄐᆞ야」덜믈줄을모ᄅᆞ고져</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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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7번= {{TagSpage|71-7}}에 「뎌ᄀᆞᄐᆞ야」의 구는 한두 자가 덜하다. 이 구는 적어도 5자 내지 7, 8자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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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8번= {{TagSpage|71-8}}동권 하13장 전면 제2 내지 제5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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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29번= {{TagSpage|71-9}}<blockquote no="47">녯ᄉᆞ랑이제ᄉᆞ랑어제嬌교態ᄐᆡ오ᄂᆞᆯ嬌교態ᄐᆡ로다「ᄉᆡᆼ각ᄒᆞ니」ᄭᅮ미오陳딘跡젹이라쳣ᄆᆞᄋᆞᆷ가ᄉᆡ디옷아니면도라셜법인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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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0번= {{TagSpage|71-10}}에 「ᄉᆡᆼ각ᄒᆞ니」의 구도 이 넉 자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구도 5자 내지 7, 8자는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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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1번= {{TagSpage|71-11}}동권 하14장 전면 제2 내지 제4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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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2번= {{TagSpage|71-12}}<blockquote no="48">明명珠쥬四ᄉᆞ萬만斛곡을년닙픠다바다셔담ᄂᆞᆫᄃᆞᆺ되ᄂᆞᆫᄃᆞᆺ어드리보내ᄂᆞᆫ다헌ᄉᆞᄒᆞᆫ「물방올ᄅᆞᆫ」어위계워ᄒᆞᄂᆞᆫ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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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3번= {{TagSpage|71-13}}에 「물방올ᄅᆞᆫ」의 구도 위에 말한 「뎌ᄀᆞᄐᆞ야」의 구와 같이 한두 자가 부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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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4번= {{TagSpage|71-14}}동권 하16장 전면 제3 내지 제5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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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5번= {{TagSpage|71-15}}<blockquote no="49">松숑林님의눈이오니가지마다곳치로다ᄒᆞᆫ가지것거내여님겨신ᄃᆡ보내고져「님이」보신후제야노디다엇디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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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6번= {{TagSpage|72-1}}에 「님이」의 구는 한 자가 부족하다. 이 구는 3자가 되어야 한다. {{TagBook|[[협률대성]]}}과 {{TagBook|[[청구영언]]}}에는 이 구가 「님계셔」라는 3자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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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7번= {{TagSpage|72-2}}동 16장 후면 제6 내지 제8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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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8번= {{TagSpage|72-3}}<blockquote no="50">이몸이俊주傑걸이런ᄃᆞᆯ님이언제ᄇᆞ리시리ᄎᆞᆯ하리俗쇽士ᄉᆞ라쟈님을조차노닐러니俗쇽士ᄉᆞ셔도「아니니」님못볼가ᄒᆞ노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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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39번= {{TagSpage|72-4}}에 「아니니」의 구는 2, 3자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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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0번= {{TagSpage|72-5}}동권 하17장 전면 제2 내지 제5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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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1번= {{TagSpage|72-6}}<blockquote no="51">花화灼쟉灼쟉범나븨雙ᄡᅡᆼ雙ᄡᅡᆼ柳뉴靑쳥靑쳥괴ᄭᅩ리雙ᄡᅡᆼ雙ᄡᅡᆼᄂᆞᆯ즘숭긜즘숭다雙ᄡᅡᆼ雙ᄡᅡᆼᄒᆞ다마ᄂᆞᆫ「엇디」「이내몸은」혼자雙ᄡᅡᆼ이업ᄂᆞ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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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2번= {{TagSpage|72-7}}에 「엇디」와 「이내몸은」과의 구는 각기 한 자씩 부족하다. {{TagBook|[[고금가곡]]}}의 감물조(感物條)에는 이 구들을 「엇지타」 「이내人生은」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오히려 정전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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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3번= {{TagSpage|72-8}}그리고 또 동권 하12장 후면 제7행 내지 동13장 전면 제5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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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4번= {{TagSpage|72-9}}<blockquote no="52">南남山산뫼어ᄃᆞ메萬만高고學학士ᄉᆞ草초堂당지어곳두고ᄃᆞᆯ두고바회두고믈둔ᄂᆞᆫ이술조차둔ᄂᆞᆫ양ᄒᆞ야날을오라ᄒᆞ거니녯ᄉᆞ랑이제ᄉᆞ랑어제嬌교態ᄐᆡ오ᄂᆞᆯ嬌교態ᄐᆡ로다각ᄉᆡᆼᄒᆞ니ᄭᅮ미오陳딘跡젹이라첫ᄆᆞᄋᆞᆷ가ᄉᆡ디옷아니면도라셜법인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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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5번= {{TagSpage|72-10}}하는 이 대문은 다시 나누어 적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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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6번= {{TagSpage|72-11}}<blockquote no="53">南남山산뫼어ᄃᆞ메 萬만高고學학士ᄉᆞ草초堂당지어 곳두고ᄃᆞᆯ두고바회두고믈둔ᄂᆞᆫ이 술조차 둔ᄂᆞᆫ양ᄒᆞ야날을오라ᄒᆞ거니{{TagPage|73-1}}녯ᄉᆞ랑이제ᄉᆞ랑 어제嬌교態ᄐᆡ오ᄂᆞᆯ嬌교態ᄐᆡ로다 ᄉᆡᆼ각ᄒᆞ니ᄭᅮ미오 陳딘跡젹이라 첫ᄆᆞᄋᆞᆷ 가ᄉᆡ디옷아니면 도라셜법잇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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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7번= {{TagSpage|73-2}}라 하는 두 수의 단가가 판연하다. 이건 판각할 때 각수(刻手)의 실수로만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예가 또 있으니 {{TagPerson|[[권호문|송암]]}}(권호문 선조조인)속집 권지6 한거십팔곡의 그 16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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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8번= {{TagSpage|73-3}}<blockquote no="54">行藏有道ᄒᆞ니ᄇᆞ리면구태구ᄒᆞ랴山之南水之北병들고늘근날를뉘라셔懷實迷邦ᄒᆞ니 오라말ᄒᆞᄂᆞ뇨聖賢의가신길히萬古애ᄒᆞᆫ가지라隱커니見커니道ㅣ얻디다ᄅᆞ리一道ㅣ오다ᄅᆞ디아니커니아ᄆᆞᄃᆡᆫ들엇더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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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49번= {{TagSpage|73-4}}라 하는 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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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0번= {{TagSpage|73-5}}<blockquote no="55">行藏有道ᄒᆞ니 ᄇᆞ리면 구태구ᄒᆞ랴 山之南水之北병들고늘근날를 뉘라셔 懷實迷邦ᄒᆞ니오라말ᄒᆞᄂᆞ뇨</br>聖賢의가신길히 萬古애ᄒᆞᆫ가지라 隱커니見커니道ㅣ얻디다ᄅᆞ리 一道ㅣ오 다ᄅᆞ디아니커니아ᄆᆞᄃᆡᆫ들엇더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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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1번= {{TagSpage|73-6}}라 하고 구분하여 적을 것이다. 이와 같이 노래에 대하여는 그것이 한 대문인지 두 대문인지도 모르고 다만 그 자손이나 문도들이 자기의 조상이나 선생의 것이라 하여 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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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2번= {{TagSpage|73-7}}그러나 그 중에는 자기의 조상이나 선생의 것도 아닌 것이 없지 않다. 이 책의 단가에도 {{TagPerson|[[송강]]}}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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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3번= {{TagSpage|73-8}}동권 하10장 후면 제1행 단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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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4번= {{TagSpage|73-9}}<blockquote no="56">{{ruby|어와|○○}}버{{ruby|힐시고|○○○}}落낙落낙長댱松숑{{ruby|버힐시고|○○○○}}져근덧두던들棟동樑냥材저되리러니{{ruby|어즈버|○○○}}明명堂당이기울{{ruby|거든무서ᄉᆞ로바|○○○○○○○}}러{{ruby|려뇨|○○}}</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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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5번= {{TagSpage|74-1}}는 {{TagBook|[[고금가곡]]}}의 개세조(慨世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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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6번= {{TagSpage|74-2}}<blockquote no="57">{{ruby|엇그제|○○○}}버{{ruby|힌솔이|○○○}}落落長松{{ruby|아니런가|○○○○}}저근덧두던들棟樑材되리러니{{ruby|이後의|○○○}}明堂이기울{{ruby|면어ᄂᆞ남기바치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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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7번= {{TagSpage|74-3}}라 하였으며 {{TagPerson|[[김인후|하서]]}}(김인후 명종조인)전집 속편 권수의 도임사수(형수 호 금호) 원사작단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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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8번= {{TagSpage|74-4}}<blockquote no="58">昨日伐了木 百尺長松 非也歟 若使至今在 可作棟樑材 嗚呼 明堂傾矣 于何以支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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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59번= {{TagSpage|74-5}}라 하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TagPerson|[[송강]]}}의 작(作)이 아니고 {{TagPerson|[[송강]]}}이 수학하던 {{TagPerson|[[김인후|김하서]]}}의 작이다. {{TagPerson|[[임사수]]}}(금호)는 전라도 나주사람으로서 퍽 호매하고 문무의 재를 겸하였고 {{TagPerson|[[이황|이퇴계]]}}가 매양 기장사(奇壯士)라고 칭송하던 이다. 명종 2년(1547)에 「女主 執政於上 奸臣李芑等 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라는 익명서를 누가 양재역 벽 위에 써 부쳤다고 {{TagPerson|[[정언각]]}} {{TagPerson|[[윤원형]]}} 등이 이를 {{TagPerson|[[윤임]]}}의 당이 한 것이라고 그때 명인들을 많이 죽이는데 {{TagPerson|[[임사수|금호]]}}도 {{TagPerson|[[윤임]]}}과 한 동리에 살고 직언을 잘함으로 하여 애매하게 걸리어 죽었다. {{TagPerson|[[김인후|김하서]]}}는 그와 동도에 살며 교분도 있었을 것이라 그의 원사(冤死)함을 슬퍼하고 이러한 노래를 지음도 그럴듯할 것이다. 그때 {{TagPerson|[[송강]]}}은 나이 겨우 12세다. 이러한 노래를 지을 수 없다. {{TagPerson|[[송강]]}}이 장성하여서는 {{TagPerson|[[임사수|금호]]}}를 추모하고 {{TagPerson|[[김인후|하서]]}}가 지은 이 단가를 애송하기는 하였을 것이다. {{TagPerson|[[임사수|금호]]}}의 종자 {{TagPerson|[[임회]]}}는 {{TagPerson|[[송강]]}}의 사외가 되는지라 남다른 사이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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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0번= {{TagSpage|74-6}}同卷下十四張 後面第一行乃至第四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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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1번= {{TagSpage|74-7}}<blockquote no="59">風풍霜상섯거틴날의잇ᄀᆡᆺ퓐黃황菊花화ᄅᆞᆯ銀은盤반의것거다마玉옥堂당으로 보내실샤桃도李리야곳이론양마라님의ᄯᅳᄃᆞᆯ알괘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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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2번= {{TagSpage|74-8}}는 {{TagBook|[[해동가요]]}}, {{TagBook|[[청구영언]]}}, {{TagBook|[[가곡원류]]}}에는 {{TagPerson|[[송순]]}}(면앙정)의 작이라 하였고 {{TagBook|[[지봉유설]]}} 권14 가사조(歌詞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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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3번= {{TagSpage|75-1}}<blockquote no="60">明廟朝 折御苑黄菊 賜玉堂官 命撰進歌詞 玉官 倉卒不能就 時 宋純 以宰樞直摠府 乃借製以進 上野之驚喜 問誰作此者 玉堂官 不敢隱 以實對 乃大加賞賜 其詞 至今傳于樂府</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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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4번= {{TagSpage|75-2}}라 하였으니 이 노래는 이때 {{TagPerson|[[송순]]}}이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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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5번= {{TagSpage|75-3}}同卷下十七張 後面第一行乃至第三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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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6번= {{TagSpage|75-4}}<blockquote no="61">잘새ᄂᆞᆫᄂᆞ라들고새ᄃᆞᆯ은도다온다외나모ᄃᆞ리예혼자가ᄂᆞᆫ뎌듕아네뎔이얼마나ᄒᆞ관ᄃᆡ먼북소ᄅᆡ들리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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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7번= {{TagSpage|75-5}}도 {{TagPerson|[[송순]]}}의 작이다. 그의 {{TagBook|[[면앙정단가]]}} 7편 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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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8번= {{TagSpage|75-6}}<blockquote no="62">宿鳥兮飛入 新月兮漸昇 時獨木兮橋上 獨去兮彼僧 爾寺兮何許 遠鍾聲兮入聆</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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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69번= {{TagSpage|75-7}}이라고 이 노래를 번역한 것이 있음을 보면 이도 그의 작임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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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0번= {{TagSpage|75-8}}동권 하15장 후면 제7행 내지 동16장 전면 제2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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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1번= {{TagSpage|75-9}}<blockquote no="63">우리집모든ᄋᆡᆨ을네혼자맛다이셔人인間간의디디마오野야樹슈의걸렷다가비오고ᄇᆞ람분날이어ᄃᆞᆫ 自ᄌᆞ然연消쇼滅멸ᄒᆞ여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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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2번= {{TagSpage|75-10}}도 {{TagPerson|[[송강]]}}의 작이 아니다. {{TagBook|[[석주시별집|석주(권필)시별집]]}} 권지7 27장에는 {{ruby|번속전|○○○}}지연가라 하는 제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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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3번= {{TagSpage|75-11}}<blockquote no="64">我家諸厄爾帶去 不落人間掛野樹  只應春天風雨時 自然消滅無尋處</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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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4번= {{TagSpage|75-12}}라 하였다. 그때 이러한 지연가(紙鳶歌)가 속전하던 것이다. {{TagPerson|[[권필|권석주]]}}는 {{TagPerson|[[송강]]}}의 문인이다. 이 노래가 {{TagPerson|[[송강]]}}의 작이고 보면 이러하게 {{ruby|번속전|○○○}}이라 할 리가 만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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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5번= {{TagSpage|75-13}}또는 {{TagPerson|[[송강]]}}의 작으로도 이 책에는 빠진 듯한 것이 있으니 {{TagBook|[[해동가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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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6번= {{TagSpage|76-1}}<blockquote no="65">風波에일리든그ᄇᆡ어드로가닷말고구름이머흘거든처음에날줄어이허술ᄒᆞᆫᄇᆡ가진分네모다操心ᄒᆞ시소</br>저긔섯는저소나모섬도설사길ᄭᆞ의가적은듯들의혀저굴헝에서고라쟈ᄉᆞᆺᄯᅴ刀츼멘分네는다직으려ᄒᆞᄂᆞ니</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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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7번= {{TagSpage|76-2}}이라 하는 것들이 그것이고 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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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8번= {{TagSpage|76-3}}<blockquote no="66">蘆花픠온고ᄃᆡ 落霞ᄅᆞᆯ빗기ᄯᅴ고 三三五五히섯거노ᄂᆞᆫ져白鷗야 우리도 江湖舊盟을 차자볼가 ᄒᆞ노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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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79번= {{TagSpage|76-4}}하는 이 노래도 {{TagBook|[[대동풍아]]}}에는 {{TagPerson|[[송강]]}}의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TagBook|[[가곡원류]]}}의 적은 것과 같이 {{TagPerson|[[김인후|김하서]]}}의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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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80번= {{TagSpage|76-5}}또 {{TagBook|[[오산설림]]}}(선조조인 {{TagPerson|[[차천로]]}} 찬)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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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81번= {{TagSpage|76-6}}<blockquote no="67">鄭松江之爲繡衣出北塞也 {{ruby|作一短歌|○○○○}} 未機 明廟 賓天 盖赤歌讖也 後 公以觀察使 巡至吉州 三老妓 唱其歌 醉後 公作一絶曰 二十年前塞下曲 何年落此妓林中 孤臣未死天涯淚 欲向康陵酒曉風</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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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82번= {{TagSpage|76-7}}이라 하는 것이 있고 이걸 {{TagBook|[[송강별집]]}} 권2 부록 연보 봉사북관조(奉使北關條)에도 인용하였으나 그 단가의 내용만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 단가는 가참(歌讖)이 되던 만큼 일부러 기휘(忌諱)하여 빼어버렸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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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번= {{TagSpage|76-8}}松江歌辭의 그 作家는 과연 어떤 이며 어떤 生活을 하든 인가. 이에 그 文集 傳記 年譜 其他 記錄을 상고하여 보자. 그는 鄭澈 字季涵 號松江 延日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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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번= {{TagSpage|77-1}}그 高祖 淵은 兵曹判書, 曾祖 自淑은 金堤郡守, 祖 潙는  健元參奉, 父 惟沉은 敦寧府判官인데 大司諫 竹山人 安彭壽의 女를 娶하여 四男二女를 두니  滋, 沼, 滉과 松江이고, 長女는 仁宗의 貴人이 되고 次女는 桂林君 瑠의 夫人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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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3번= {{TagSpage|77-2}}松江은 李朝 中宗三十一年(一五三六) 丙申閏十二月初六日 京城 藏義洞第에서 生하였고 그 어렸을 때 큰누의를 보러 東宮에 자주 드나들며 그때 大君으로 게시는 明宗과 年相若한 터이라 함께 놀기도 하고 퍽 정답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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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4번= {{TagSpage|77-3}}十歲되든 때, 그 姊夫 桂林君 瑠가 鄭順明, 許磁 등의 誣陷으로 仁宗元年인 乙巳士禍에 死하고 伯兄 滋는 잡혀서 杖流되어 途中에서 죽고 父는 坐配되었다. 그럼으로 여러 햇 동안 失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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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5번= {{TagSpage|77-4}}十六歲되든 때, 그 아버지가 비로소 釋放되어 全羅道 昌平 唐旨山 밑에 가서 寓居하였다. 그 祖父 潙의 墓所가 거긔 있는 까닭에 그 墓下를 찾어간 것이다. 松江도 그때 그 아버지를 따러가 있으면서 스스로 學問의 必要함을 깨닷고 金河西 麟厚에게, 또는 奇高峰 大升에게 가서 배웠는데 奇高峯은 벌서 그가 非凡한 인 줄을 알고 하로는 山으로 놀러가서 水石이 淸絕한 한 이상한 곳을 당하매 누가 말하되 世間의 人品도 이와 같은 이가 있느냐 한즉 高峯은 鄭아모개가 당함 즉 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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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6번= {{TagSpage|77-5}}十七歲에 文化柳氏 强項의 女를 娶하고 그리고 四男二女를 두고 交流하든 親舊도 많은 가운데 栗谷 李珥, 牛溪 成渾 龜峯 宋翼弼이 가장 莫逆한 사이로서 서로 琢磨하고 勉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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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7번= {{TagSpage|77-6}}二十二歲에 松川 梁應鼎에게도 從學하였다. 明宗十六年辛酉, 二十七歲가 되어 進士試 一等을 하고 그 翌年壬戌에 文科壯元을 하매 明宗께서 榜目을 보고 竹馬의 舊諠을 생각고 퍽 깃버하시며 特別히 酒饌을 下賜하시고 司憲府特平을 除授하였다. 그러자 明宗의 從兄 景陽君이 그 妻家의 財産을 빼앗고저 그 妻娚을 誘殺한지라 그 일이 發覺되어 景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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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8번= {{TagSpage|78-1}}父子가 死刑을 당하게 되었다. 明宗께서 私囑하여 寬貸하라 하였으나 마츰내 聽從지 않았다. 그러하여 明宗의 뜻을 거스르고 오래 淸選을 얻지 못하고 겨우 佐郞, 典籍, 都事의 職을 遞除하다가, 三十一歲에 이르러 正郎, 直講, 獻納, 特平으로서 北關御史도 되어 明宗賓天의 歌讖의 노래도 지었고 비로소 玉堂에 選入되어 修撰, 佐郞, 從事官, 校理 또는 湖南御史도 되고 三十五歲에는 그 父親喪을 당하여 京畿道 高陽新院에 廬墓를 살어 服闋하고 그 翌年에 또 母親喪을 당하여 高陽新院에 하고 廬墓하고 服闋을 하고 나니 四十歲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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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9번= {{TagSpage|78-2}}때는 마츰 宣祖八年(一五七五) 靑陽郡 沈義謙이 일즉 舍人이 되어 領相 尹元衡 집에 일을 품하러 갔는데 元衡의 婿 李肇敏과는 서로 아는 터이라 書室로 끌려들어간 바에 金孝元의 寢具가 놓여있음을 보고 沈이 속으로 더러이 여기고 선비고 어찌 權門의 무식한 子弟를 상종하여 함께 있을가 하고 그 뒤 孝元이 文科 壯元을 하고 才名이 높아 鉉郞에 薦望되매 沈이 沮止하였다. 그리하여 孝元이 朗僚에 있은 지 일곱 해만에 비로소 銓曹에 들고 남더러 말하되 義謙은 愚直하고 草率하니 크게는 쓰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孝元이 틈을 타서 報復하리라 하고 孝元의 儕輩들은 沈을 미워하고 일로 말미암아 朝野에 黨論이 나누기 시작하였다. 松江은 이때 直提學, 掌樂院正, 司諫의 職으로 있으며, 時議에 不合하여 解職을 하고 故鄕으로 가려다 말고 同副承旨兼修撰官으로 出仕도 하니 때는 더욱 分黨의 說이 성하여 義謙의 儕輩를 西人이라, 孝元의 儕輩를 東人이라 하여 朝臣은 물론이고 碌碌無名한 이까지라도 모다 東西의 名目에 들었다. 松江도 西人의 한 사람으로서 時輩의 短處를 들어 많이 말도 하고 한번은 술을 취하여 東人의 有數한 李潑과 論爭하다가 潑의 얼굴에 침을 뱉고 일어났다. 그 뒤로부터는 東人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고 혹은 被劾, 혹은 詆斥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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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0번= {{TagSpage|79-1}}四十五歲에는 江原道 觀察使가 되어 風化를 善導키 위한 短歌 十六首와 關東山水를 讚美한 關東別曲이라는 長歌 등을 지었고 頹落하고 埋沒하여있든 寧越의 魯山君 墓를 修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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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1번= {{TagSpage|79-2}}그 翌年에는 大司成이 되고 더욱 詆斥을 받어 그해 가을에 昌平으로 돌아가 있다가 特旨로서 全羅道 觀察使가 되고 한 해만에 都承旨, 禮曹參判에  遞拜하고 咸鏡道 觀察使가 되여 또 한 해를 지내고 禮曹判書로 特陞되자 嗜酒失儀한다는 司憲府의 啓와 交搆生禍, 또는 剛偏忌克之人이라는 司諫院의 啓로서 論劾을 당하고 여러 번 上疏하여 辭免하기를 빌었으나 許하지 않았고 四十九歲 되든 해에는 大司憲을 除授하고 特히 驄馬를 賜給하여 出入케하여 驄馬御史라는 이름도 얻고 그 이듬해에는 判敦寧으로 遞拜하고 朝臣의 訾毁와 또는 兩司의 論斥을 받고 高陽에 退去하였다가 昌平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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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2번= {{TagSpage|79-3}}이러하여 한 五年 동안은 昌平에서 그 妻의 外戚인 金成遠의 山亭을 얻어 있으며 水石과 鷗鶴으로 더불어 벗도 삼고 讀書, 彈琴, 嘯詠도 하며 항상 國事를 걱정하고 君恩을 생각하였다. 星山別曲, 思美人曲, 續美人曲도 이때 지은 것이다. 新硏經齋全集卷之一 思美人曲解에는 「鄭松江 竄江界 作此詞」라 하였으나 松江別集券七附錄 畸翁所錄에는 「前後美人曲 在此鄉(昌平)時所作 不記某年 似是 丁亥戊子年間耳」라 하였고 松江原集卷一 詩 大帖(지금 潭陽 太田面 松江 舊基) 酒席呼韻의 「一曲長歌思美人 此身雖老此心新 明年梅發窓前樹 折寄江南第一春」이라 한 것을 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松江이라는 號도 이곳에서 얻은 것이니 同 原集 詩 宿松江亭舍의 「借名三十載 非主亦非賓 茅茨纔盖屋 復作北歸人」이라 한 것이 그걸 말함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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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3번= {{TagSpage|79-4}}宣祖 二十二年己丑 五十四歲가 되어 그 長子喪을 당하고 葬事를 지내러 高陽에 와 있을 때, 마츰 鄭汝立의 謀叛하는 일{{TagPage|80-1}}이 發聲되었다. 그 變을 듣고 即時 大內에 들어가니 上이 忠節을 獎勵하시고 右議政을 特拜하여 按治에 당하고 이어 崔永慶의 獄을 다스리고 그다음 庚寅에 左議政으로 陞拜하고 光國平難의 兩勳을 策하고 寅城府君이 되었고 그다음 辛卯閏二月에 建儲를 하고저 하다가 上의 뜻을 크게 거스르고 그해 三月에 「爲大臣 沉于酒色 其誤國事 固矣」라는 安德仁 등의 詆斥을 받고 龍山村舍에 나가서 特命하고 드듸어 兩司의 論啟를 받어 罷職되고 처음은 明川에 配하였다가 晉州로 命移되자 江界로 改贊되어 加棘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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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4번= {{TagSpage|80-2}}그 이듬해는 壬辰亂이라 大駕가 西狩하실 새 松京에 이르러 放釋하여 召命을 나리어 平壤에 拜謁하고 義州로 扈駕하고 體察使가 되어 江華에 멈으르고 宣祖二十六年(一五九三) 癸巳에 奉使하여 明에 갔다가 復命하고 同年十二月十八日 江華에서 卒하니 年이 五十八, 그 遺著에는 松江集 七冊과 歌辭 一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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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5번= {{TagSpage|80-3}}그의 一生은 已上과 같으려니와 다시 그에 대한 評들을 들어보면 松江別集 卷二 年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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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6번= {{TagSpage|80-4}}<blockquote no="68">退溪稿中 有古諫臣風</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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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7번= {{TagSpage|80-5}}이라 하였고 尤菴集 沙溪語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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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8번= {{TagSpage|80-6}}<blockquote no="69">沙溪先生 嘗曰 君以鄭松江爲何如人 對曰 小子父兄 嘗言其淸直狹隘之人 先生曰 是矣 此公 自恃清白無瑕 眼下無人 終爲一世所仇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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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9번= {{TagSpage|80-7}}이라 하였고 石潭日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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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0번= {{TagSpage|80-8}}<blockquote no="70">一日 上(宣祖) 問朴淳曰 予以澈 有才氣而狹隘 人多不合 然 若以澈爲小人 則渠必不服矣 淳曰 殿下 知澈 深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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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1번= {{TagSpage|80-9}}라 하였고 龜峯集 卷之一 詩 遊南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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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2번= {{TagSpage|81-1}}<blockquote no="71">衣草人三四 於塵世外遊(龜峯) 洞深花意懶 山疊水聲幽(栗谷) 斷嶽盃中畵 長風袖裏秋(松江) 白雲山下起 歸路駕靑牛(牛溪)</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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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3번= {{TagSpage|81-2}}라 하여 各其 性格을 말하였고 同卷之五 祀栗谷書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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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4번= {{TagSpage|81-3}}<blockquote no="72">僕之疎迂(栗谷) 涵之好酒(松江) 原之退縮(牛溪) 皆可憂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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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5번= {{TagSpage|81-4}}라 하였고 松江別集 卷六 附錄 申欽撰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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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6번= {{TagSpage|81-5}}<blockquote no="73">觀其風調 麗落 咨性 清朗 愛人下士 不爲畛域 廉於物欲 信於交知 居家孝悌 立朝潔白 當求之古人中 有時 持杯半酣 口詠手書 長詩短歌 交就錯成 軟語團圞 形跡俱忘 爽然相對 不覺膝之前也 余見人 多矣 未嘗見此格韻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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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7번= {{TagSpage|81-6}}라 하였고 遲川遺事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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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8번= {{TagSpage|81-7}}<blockquote no="74">崔嗚吉 嘗問於李恒福曰 鄭松江 何如人 恒福曰 半醉時 抵掌談論 望之若天上人 豈俗子輩 所可彷彿乎 鳴吉 後語人曰 吾未見松江 而以白沙高眼 欽服如此 可想其言論風釆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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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9번= {{TagSpage|81-8}}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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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30번= {{TagSpage|81-9}}그때 當路하여 그 波瀾이 重疊한 黨爭의 渦中에 浮沉하고 여러 번 큼즉한 獄事를 按治하게 되매 자연 得謗을 아니 얻을 수 없다. 그런데 宋江은 剛直은 하나 狹隘하다는 評을 듣는 이라 그 仇嫉을 받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는 政客으로보다도 한 藝術家로서의 氣質이 더한 듯하다. 酒와 色을 좋아한다는 것으로는 그다지 덜릴 것이 없다. 그는 꾀죄한 한낱 謹飭에 그칠 이가 아니고 豪逸도 하고 放奔도 하다. 다만 그때 그것만으로 崇尙하고 敎養하든 儒學과 漢文에 젖어 그 溝壑을 벗어날 만한 별다른 思想은 없다드라도 때때로 自然과 人事에 대하여 남달리 感動하고 素朴하게{{TagPage|82-1}}率直하게 表現한 것이 지금 우리가 한 보배로 보는 그의 歌辭들이다. 그는 儒學이나 漢詩文에 能하지마는 그의 참다운 造詣와 生命은 그의 歌辭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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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번= {{TagSpage|76-8}}송강가사의 그 작가는 과연 어떤 이며 어떤 생활을 하던 인가. 이에 그 문집, 전기, 연보, 기타 기록을 상고하여 보자. 그는 {{TagBook|[[정철]]}} 자 계함, 호 송강, 연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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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번= {{TagSpage|77-1}}그 고조 연(淵)은 병조판서, 증조 자숙(自淑)은 김제군수, 조 위(潙)는 건원참봉, 부 유침(惟沉)은 돈녕부판관인데 대사간 죽산인 {{TagPerson|[[안팽수]]}}의 여(女)를 취하여 사남이녀를 두니  자(滋), 소(沼), 황(滉)과 {{TagPerson|[[송강]]}}이고, 장녀는 인종의 귀인이 되고 차녀는 계림군 류(瑠)의 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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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3번= {{TagSpage|77-2}}{{TagPerson|[[송강]]}}은 이조 중종 31년(1536) 병신 윤12월 초6일 경성 장의동 제에서 생하였고 그 어렸을 때 큰 누이를 보러 동궁에 자주 드나들며 그때 대군으로 게시는 명종과 연상약(年相若)한 터이라 함께 놀기도 하고 퍽 정답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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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4번= {{TagSpage|77-3}}10세 되던 때, 그 자부 계림군 류가 {{TagPerson|[[정순명]]}}, {{TagPerson|[[허자]]}} 등의 무함(誣陷)으로 인종 원년인 을사사화에 사(死)하고 백형 자는 잡혀서 장류(杖流)되어 도중에서 죽고 부는 좌배되었다. 그럼으로 여러 해 동안 실학(失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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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5번= {{TagSpage|77-4}}16세 되던 때, 그 아버지가 비로소 석방되어 전라도 창평 당지산 밑에 가서 우거하였다. 그 조부 위의 묘소가 거기 있는 까닭에 그 묘하(墓下)를 찾아간 것이다. {{TagPerson|[[송강]]}}도 그때 그 아버지를 따러가 있으면서 스스로 학문의 필요함을 깨닫고 {{TagPerson|[[김인후|김하서]]}} 인후에게, 또는 {{TagPerson|[[기고봉]]}} 대승에게 가서 배웠는데 {{TagPerson|[[기고봉]]}}은 벌써 그가 비범한 인 줄을 알고 하로는 산으로 놀러가서 수석이 청절한 한 이상한 곳을 당하매 누가 말하되 세간의 인품도 이와 같은 이가 있느냐 한즉 {{TagPerson|[[기고봉|고봉]]}}은 정 아무개가 당함 즉 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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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6번= {{TagSpage|77-5}}17세에 문화유씨 {{TagPerson|[[강항]]}}의 여를 취하고 그리고 사남이녀를 두고 교류하던 친구도 많은 가운데 율곡 {{TagPerson|[[이이]]}}, 우계 {{TagPerson|[[성혼]]}} 구봉 {{TagPerson|[[송익필]]}}이 가장 막역한 사이로서 서로 탁마하고 면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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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7번= {{TagSpage|77-6}}22세에 송천 {{TagPerson|[[양응정]]}}에게도 종학하였다. 명종 16년 신유, 27세가 되어 진사시 일등을 하고 그 익년 임술에 문과장원을 하매 명종께서 방목(榜目)을 보고 죽마의 구훤(舊諠)을 생각고 퍽 기뻐하시며 특별히 주찬을 하사하시고 사헌부특평을 제수하였다. 그러자 명종의 종형 {{TagPerson|[[경양군]]}}이 그 처가의 재산을 빼앗고자 그 처남을 유살(誘殺)한지라 그 일이 발각되어 경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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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8번= {{TagSpage|78-1}}부자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명종께서 사촉(私囑)하여 관대하라 하였으나 마침내 청종(聽從)지 않았다. 그러하여 명종의 뜻을 거스르고 오래 청선(淸選)을 얻지 못하고 겨우 좌랑, 전적, 도사의 직을 체제하다가, 31세에 이르러 정랑, 직강, 헌납, 특평으로서 북관어사도 되어 명종빈천의 가참의 노래도 지었고 비로소 옥당에 선입되어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또는 호남어사도 되고 35세에는 그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 신원에 여묘(廬墓)를 살아 복결하고 그 익년에 또 모친상을 당하여 고양 신원에 하고 여묘하고 복결을 하고 나니 40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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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9번= {{TagSpage|78-2}}때는 마침 선조 8년(1575) 청양군 {{TagPerson|[[심의겸]]}}이 일찍 사인(舍人)이 되어 영상 {{TagPerson|[[윤원형]]}} 집에 일을 품하러 갔는데 {{TagPerson|[[윤원형|원형]]}}의 서 {{TagPerson|[[이조민]]}}과는 서로 아는 터이라 서실로 끌려들어간 바에 {{TagPerson|[[김효원]]}}의 침구가 놓여있음을 보고 심이 속으로 더러이 여기고 선비고 어찌 권문의 무식한 자제를 상종하여 함께 있을까 하고 그 뒤 {{TagPerson|[[김효원|효원]]}}이 문과장원을 하고 재명이 높아 현랑에 천망(薦望)되매 심이 저지하였다. 그리하여 {{TagPerson|[[김효원|효원]]}}이 낭요(朗僚)에 있은 지 일곱 해만에 비로소 전조(銓曹)에 들고 남더러 말하되 {{TagPerson|[[심의겸|의겸]]}}은 우직하고 초솔(草率)하니 크게는 쓰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TagPerson|[[김효원|효원]]}}이 틈을 타서 보복하리라 하고 {{TagPerson|[[김효원|효원]]}}의 제배(儕輩)들은 심을 미워하고 이로 말미암아 조야(朝野)에 당론이 나뉘기 시작하였다. {{TagPerson|[[송강]]}}은 이때 직제학, 장악원정, 사간의 직으로 있으며, 시의(時議)에 불합하여 해직을 하고 고향으로 가려다 말고 동부승지 겸 수찬관으로 출사도 하니 때는 더욱 분당의 설이 성하여 {{TagPerson|[[심의겸|의겸]]}}의 제배를 서인이라, {{TagPerson|[[김효원|효원]]}}의 제배를 동인이라 하여 조신(朝臣)은 물론이고 녹녹무명(碌碌無名)한 이까지라도 모두 동서의 명목에 들었다. {{TagPerson|[[송강]]}}도 서인의 한 사람으로서 시배(時輩)의 단처(短處)를 들어 많이 말도 하고 한번은 술을 취하여 동인의 유수한 {{TagPerson|[[이발]]}}과 논쟁하다가 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일어났다. 그 뒤로부터는 동인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고 혹은 피핵(被劾), 혹은 저척(詆斥)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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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0번= {{TagSpage|79-1}}45세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풍화를 선도키 위한 단가 16수와 관동산수를 찬미한 관동별곡이라는 장가 등을 지었고 퇴락하고 매몰하여있던 영월의 {{TagPerson|[[노산군]]}} 묘를 수축(修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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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1번= {{TagSpage|79-2}}그 익년에는 대사성이 되고 더욱 저척을 받아 그해 가을에 창평으로 돌아가 있다가 특지로서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한 해만에 도승지, 예조참판에  체배(遞拜)하고 함경도 관찰사가 되여 또 한 해를 지내고 예조판서로 특승되자 기주실의(嗜酒失儀)한다는 사헌부의 계(啓)와 교구생화(交搆生禍), 또는 강편기극지인(剛偏忌克之人)이라는 사간원의 계로서 논핵을 당하고 여러 번 상소하여 사면하기를 빌었으나 허하지 않았고 49세 되던 해에는 대사헌을 제수하고 특히 총마(驄馬)를 사급(賜給)하여 출입케하여 총마어사라는 이름도 얻고 그 이듬해에는 판돈녕으로 체배하고 조신의 자훼(訾毁)와 또는 양사의 논척을 받고 고양에 퇴거하였다가 창평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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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2번= {{TagSpage|79-3}}이러하여 한 5년 동안은 창평에서 그 처의 외척인 {{TagPerson|[[김성원]]}}의 산정을 얻어 있으며 수석(水石)과 구학(鷗鶴)으로 더불어 벗도 삼고 독서, 탄금, 소영도 하며 항상 국사를 걱정하고 군은(君恩)을 생각하였다.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도 이때 지은 것이다. {{TagBook|[[신연경재전집]]}} 권지1 사미인곡해에는 「鄭松江 竄江界 作此詞」라 하였으나 {{TagBook|[[송강별집]]}} 권7 부록 기옹소록에는 「前後美人曲 在此鄉(昌平)時所作 不記某年 似是 丁亥戊子年間耳」라 하였고 {{TagBook|[[송강원집]]}} 권1 시 대첩(지금 담양 태전면 송강 구기) 주석호운의 「一曲長歌思美人 此身雖老此心新 明年梅發窓前樹 折寄江南第一春」이라 한 것을 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TagPerson|[[송강]]}}이라는 호도 이곳에서 얻은 것이니 동 원집 시 숙송강정사의 「借名三十載 非主亦非賓 茅茨纔盖屋 復作北歸人」이라 한 것이 그걸 말함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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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3번= {{TagSpage|79-4}}선조 22년 기축 54세가 되어 그 장자상을 당하고 장사를 지내러 고양에 와 있을 때, 마침 {{TagPerson|[[정여립]]}}의 모반하는 일{{TagPage|80-1}}이 발성되었다. 그 변을 듣고 즉시 대내에 들어가니 상이 충절을 장려하시고 우의정을 특배하여 안치(按治)에 당하고 이어 {{TagPerson|[[최영경]]}}의 옥(獄)을 다스리고 그다음 경인에 좌의정으로 승배(陞拜)하고 과국평난(光國平難)의 양훈을 책(策)하고 인성부군이 되었고 그다음 신묘 윤2월에 건저(建儲)를 하고자 하다가 상의 뜻을 크게 거스르고 그해 3월에 「爲大臣 沉于酒色 其誤國事 固矣」라는 {{TagPerson|[[안덕인]]}} 등의 저척을 받고 용산촌사(龍山村舍)에 나가서 특명(特命)하고 드디어 양사의 논계(論啟)를 받아 파직되고 처음은 명천에 배(配)하였다가 진주로 명이(命移)되자 강계로 개찬(改贊)되어 가극(加棘)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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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4번= {{TagSpage|80-2}}그 이듬해는 임진난이라 대가(大駕)가 서수(西狩)하실 새 송경에 이르러 방석(放釋)하여 소명을 나리어 평양에 배알(拜謁)하고 의주로 호가(扈駕)하고 체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고 선조 26년(1593) 계사에 봉사(奉使)하여 명(明)에 갔다가 복명(復命)하고 동년 12월 18일 강화에서 졸(卒)하니 년이 58, 그 유저에는 송강집 7책과 가사 1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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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5번= {{TagSpage|80-3}}그의 일생은 이상과 같으려니와 다시 그에 대한 평들을 들어보면 {{TagBook|[[송강별집]]}} 권2 연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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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6번= {{TagSpage|80-4}}<blockquote no="68">退溪稿中 有古諫臣風</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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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7번= {{TagSpage|80-5}}이라 하였고 {{TagBook|[[우암집]]}} 사계어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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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8번= {{TagSpage|80-6}}<blockquote no="69">沙溪先生 嘗曰 君以鄭松江爲何如人 對曰 小子父兄 嘗言其淸直狹隘之人 先生曰 是矣 此公 自恃清白無瑕 眼下無人 終爲一世所仇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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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9번= {{TagSpage|80-7}}이라 하였고 {{TagBook|[[석담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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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0번= {{TagSpage|80-8}}<blockquote no="70">一日 上(宣祖) 問朴淳曰 予以澈 有才氣而狹隘 人多不合 然 若以澈爲小人 則渠必不服矣 淳曰 殿下 知澈 深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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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1번= {{TagSpage|80-9}}라 하였고 {{TagBook|[[구봉집]]}} 권지1 시 유남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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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2번= {{TagSpage|81-1}}<blockquote no="71">衣草人三四 於塵世外遊(龜峯) 洞深花意懶 山疊水聲幽(栗谷) 斷嶽盃中畵 長風袖裏秋(松江) 白雲山下起 歸路駕靑牛(牛溪)</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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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3번= {{TagSpage|81-2}}라 하여 각기 성격을 말하였고 동권 지5 사율곡서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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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4번= {{TagSpage|81-3}}<blockquote no="72">僕之疎迂(栗谷) 涵之好酒(松江) 原之退縮(牛溪) 皆可憂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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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5번= {{TagSpage|81-4}}라 하였고 {{TagBook|[[송강별집]]}} 권6 부록 신흠찬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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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6번= {{TagSpage|81-5}}<blockquote no="73">觀其風調 麗落 咨性 清朗 愛人下士 不爲畛域 廉於物欲 信於交知 居家孝悌 立朝潔白 當求之古人中 有時 持杯半酣 口詠手書 長詩短歌 交就錯成 軟語團圞 形跡俱忘 爽然相對 不覺膝之前也 余見人 多矣 未嘗見此格韻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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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7번= {{TagSpage|81-6}}라 하였고 {{TagBook|[[지천유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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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8번= {{TagSpage|81-7}}<blockquote no="74">崔嗚吉 嘗問於李恒福曰 鄭松江 何如人 恒福曰 半醉時 抵掌談論 望之若天上人 豈俗子輩 所可彷彿乎 鳴吉 後語人曰 吾未見松江 而以白沙高眼 欽服如此 可想其言論風釆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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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9번= {{TagSpage|81-8}}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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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30번= {{TagSpage|81-9}}그때 당로(當路)하여 그 파란이 중첩한 당쟁의 와중에 부침하고 여러 번 큼직한 옥사를 안치하게 되매 자연 득방(得謗)을 아니 얻을 수 없다. 그런데 {{TagPerson|[[송강]]}}은 강직은 하나 협애하다는 평을 듣는 이라 그 구질(仇嫉)을 받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는 정객으로보다도 한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더한 듯하다. 주와 색을 좋아한다는 것으로는 그다지 덜릴 것이 없다. 그는 꾀죄한 한낱 근칙(謹飭)에 그칠 이가 아니고 호일(豪逸)도 하고 방분(放奔)도 하다. 다만 그때 그것만으로 숭상하고 교양하던 유학과 한문에 젖어 그 구학을 벗어날 만한 별다른 사상은 없다더라도 때때로 자연과 인사에 대하여 남달리 감동하고 소박하게{{TagPage|82-1}}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지금 우리가 한 보배로 보는 그의 가사들이다. 그는 유학이나 한시문에 능하지마는 그의 참다운 조예와 생명은 그의 가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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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번= {{TagSpage|82-2}}敍上함과 같이 宋江이 우리 歌道에 通達함은 그 素質과 修鍊에도 있으려니와 또는 얼마큼 그 傳統도 있을 줄로 안다. 말하자면 宋江은 金河西 麟厚에게, 河西는 宋俛仰 純에게 그걸 師受함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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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번= {{TagSpage|82-3}}金麟厚는 字 厚之 號 河西 또는 湛齋 蔚山人 李朝 中宗五年(一五一0) 全羅道 長城 大麥洞에서 生하고 進士文科로 弘文校理를 지내고 仁宗東宮 때 經筳에 侍講하고 卽位한 뒤 남다른 寵遇를 받고 仁宗이 昇遐한 뒤에는 다시 仕進하지 않고 長城에 돌아가서 後進들을 가르치고 水石을 사랑하여 吟詠도 하고 그러다가 明宗十五年(一五六0)에 卒하니 年이 五十一. 顯宗朝에 이르러 道德風節로서 吏判을 追贈하고 正祖朝에는 領議政으로 贈職되고 諡를 文正公이라 하고 文廟에 從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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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3번= {{TagSpage|82-4}}河西의 노래로는 지금 전하는 것은 悼林士遂歌 蘆花歌,自然歌―이 세 首밖에 없는데 悼林士遂歌, 蘆花歌는 이미 板本의 考訂에서 말한 바와 같이 松江歌辭에 編入한 것은 과연 誤錯이고 또 自然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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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4번= {{TagSpage|82-5}}<blockquote no="75">靑山도 졀로졀로 綠水ㅣ라도 졀로졀로 山졀로졀로 水졀로졀로 山水間에 나도 졀로졀로 그 中에 졀로졀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졀로졀로ᄒᆞ리라</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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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5번= {{TagSpage|82-6}}는 海東歌謠나 大東風雅에 宋尤菴 時烈의 作으로 되었으나 河西集 續編 卷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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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6번= {{TagSpage|82-5}}<blockquote no="76">青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自然水自然自然 山水間我自然</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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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7번= {{TagSpage|83-1}}이라 하여 河西의 作으로서 번역되었고 自然亭이라는 亭子까지도 있었다 한다. 이보다 더 많이 그 作品을 얻어볼 수 없음은 恨한 노릇이로되 이것만으로도 넉넉이 그 衣鉢을 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이고 그리고 儒學淵源譜에는 그가 金慕齋安國의 門人으로만 되어있으나 河西集 卷之七 附錄卷二 叙述에 「先生 初學於新平宋先生純 又出入于 新齋崔先生山斗 慕齋金先生安國 二生先之門」이라 한 것을 보면 宋俛仰 純에게 受業을 한 것도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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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8번= {{TagSpage|83-2}}宋純은 字 遂初 號 企村, 또는 俛仰亭 新平人. 成宗二十四年(一四九三) 全羅道 譚陽서 生하고 進士 文科로 湖堂에 뽑히고 參判에 있을 때 具壽聃과 締結하여 異議를 皷生하였다는 臺啓를 맞나 舒川으로 귀양도 가고 李芑가 罷相된 뒤 放還하여 右贊成도 되고 大小科回榜宴도 치루고 耆老社에도 들고 潭陽에 退老하매 亭子를 지어 俛仰亭이라 하고 亭壁에 「俛有地仰有天 亭中中興浩然 招風月揖山川 扶藜杖送百年」이라 써 붙이고 歌辭도 짓고 消日하다가 宣祖十六年(一五八三)에 卒하니 生이 九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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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9번= {{TagSpage|83-3}}그의 歌辭에 風霜歌, 잘새歌는 板本의 考訂에서 말한 바와 같으려니와 긔밖에 또 俛仰亭短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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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0번= {{TagSpage|83-4}}<blockquote no="77">俛則地兮 仰則天兮 兩位之際兮 從而生我分居焉 領溪山兮風月 將與偕分老云</br>廣廣之野兮 川亦修而修兮 如雪兮白沙 如雲之鋪分 無事携竿之人兮 會日落兮不知</br> 松籬兮昇月 至竹梢兮轉離 玄琴兮樍按 岩邊兮猶坐 何許失伻兮鴻雁 獨鳴兮云徂{{TagPage|84-1}}山作兮屏風 野外兮周置 過去兮有雲 咸欲宿兮入來 何無小兮落日 而獨逾兮而去兮</br>見山頂兮夕陽 而跳游兮羣魚 惟無心兮此釣干 無以兮剩疑 满江月 將生此間 興兮不可支</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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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1번= {{TagSpage|84-2}}라고 번역된 것과 俛仰亭新翻長歌와 俛仰續集卷之一 燕行錄短歌 한 首가 전하여 있는데 俛仰亭長歌는 俛仰亭歌라고도 하여 芝峯類說(李朝 光海朝人 李晬光著) 卷十四 歌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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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2번= {{TagSpage|84-3}}<blockquote no="78">如近世 宋純 鄭徹 所作 最善―宋純俛仰亭歌―盛行於世</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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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3번= {{TagSpage|84-4}}라 하였고 旬五志(孝宗朝人 洪萬宗著)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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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4번= {{TagSpage|84-5}}<blockquote no="79">俛仰亭歌 宋二相純所製 說盡山水之勝 舖張遊賞之樂中 自有浩然之越</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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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5번= {{TagSpage|84-6}}라 하였고 東岳集(宣祖朝人 李安訥著) 卷之九 俛仰亭次壁上韻에는 그 밑의 註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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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6번= {{TagSpage|84-7}}<blockquote no="80">亭在府(潭陽)南十里許 故四宰(右贊成) 宋相公諱純之宅也 晚歳 退休竹亭 以居以終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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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7번= {{TagSpage|84-8}}이라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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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8번= {{TagSpage|84-9}}<blockquote no="81">湖南形勝此山川 九邑峯巒一檻前 謝屐平生煩夢想 習迆暇日好留連 沙禽暝帶渓橋雨 岸樹秋疑野店烟 不用老夫新着句 相公歌曲至今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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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19번= {{TagSpage|84-10}}이라 하였고 竹窓閑話(光海朝人 李德炯著)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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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0번= {{TagSpage|84-11}}<blockquote no="82">余爲全羅監司 巡到潭陽 時 府使 今判樞鄭公光績 謂余曰 本府十里外 有故钊書 宋公亭子 號爲俛仰 景致頍勝 幸襜帷暫臨 以辨淸遊 翌日 鄭公 先徍候焉 余亦繼至 亭臨絕岸 隱映於蒼松翠竹之間 眼界曠遠 山川風景 果爲道內名區{{TagPage|85-1}}余與府伯 登臨設酌 帶月而還 宋公諱純 風流豪邁 爲一代名卿 所著無等諸曲 至今傳唱 辭甚清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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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1번= {{TagSpage|85-2}}이라 하였고 이 中의 無等諸曲이란 건 즉 俛仰亭歌를 이름이고 또 明美堂(近代人 李寧齋 建昌著) 卷五詩 俛仰亭에는 그 밑의 註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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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2번= {{TagSpage|85-3}}<blockquote no="83">亭在潭陽 宋判書純故居 宋公 有重名 年九十 退於此 嘗出遊 朴思菴(淳) 鄭松江(澈) 季靑蓮(侯白) 林白湖(悌) 四公 爲擔其輿 正廟時 湖南道科 以擔輿俛仰亭 命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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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3번= {{TagSpage|85-4}}라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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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4번= {{TagSpage|85-5}}<blockquote no="84">宋公名德使人思 鄉國風流盛一時 亭子依然江上在 轎夫如此世間奇 山光渺渺水千折 野影漫漫天四垂 俛仰無端一惆悵 今誰擔我我擔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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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5번= {{TagSpage|85-6}}라 하였고 朝鮮人物號譜(近代人 金龍赫著) 下卷 俛仰亭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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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6번= {{TagSpage|85-7}}<blockquote no="85">松江諸公 皆服事之 享潭陽龜山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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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7번= {{TagSpage|85-8}}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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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원문28번= {{TagSpage|85-9}}已上의 말들을 綜合하여 보드라도 俛仰亭은 과연 그 風流도 놀랍거니와 그 歌道에도 그 年代의 한 巨匠임은 물론이다. 翻譯된 그 長短歌들이 原文 그대로 전하였드라면 더 얼마나 좋았을 것이냐. 다만 霜風歌 잘새歌로도 그 造詣가 어떠함은 足히 엿볼 수 있으며 松江의 歌道도 間接으로나 또는 直接으로 그 師受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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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번= {{TagSpage|82-2}}서상함과 같이 {{TagPerson|[[송강]]}}이 우리 가도에 통달함은 그 소질과 수련에도 있으려니와 또는 얼마큼 그 전통도 있을 줄로 안다. 말하자면 {{TagPerson|[[송강]]}}은 {{TagPerson|[[김인후|김하서]]}} 인후에게, 하서는 {{TagPerson|[[송순|송면앙]]}} 순에게 그걸 사수함이 아닌가 한다.
|목차2-2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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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번= {{TagSpage|82-3}}{{TagPerson|[[김인후]]}}는 자 후지 호 하서 또는 담재,  울산인 이조 중종 5년(1510) 전라도 장성 대맥동에서 생하고 진사문과로 홍문교리를 지내고 인종 동궁 때 경정에 시강하고 즉위한 뒤 남다른 총우를 받고 인종이 승하한 뒤에는 다시 사진(仕進)하지 않고 장성에 돌아가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수석을 사랑하여 음영도 하고 그러다가 명종 15년(1560)에 졸하니 년이 51. 현종조에 이르러 도덕풍절로서 이판을 추증(追贈)하고 정조조에는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시(諡)를 문정공이라 하고 문묘에 종사하였다.
|목차2-2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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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3번= {{TagSpage|82-4}}{{TagPerson|[[김인후|하서]]}}의 노래로는 지금 전하는 것은 도림사수가, 노화가, 자연가―이 세 수밖에 없는데 도림사수가, 노화가는 이미 판본의 고정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송강가사에 편입한 것은 과연 오착이고 또 자연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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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4번= {{TagSpage|82-5}}<blockquote no="75">靑山도 졀로졀로 綠水ㅣ라도 졀로졀로 山졀로졀로 水졀로졀로 山水間에 나도 졀로졀로 그 中에 졀로졀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졀로졀로ᄒᆞ리라</blockquote>
|목차2-2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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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5번= {{TagSpage|82-6}}는 {{TagBook|[[해동가요]]}}나 {{TagBook|[[대동풍아]]}}에 {{TagPerson|[[송시열|송우암]]}} 시열의 작으로 되었으나 {{TagBook|[[하서집]]}} 속편 권수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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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6번= {{TagSpage|82-5}}<blockquote no="76">青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自然水自然自然 山水間我自然</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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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7번= {{TagSpage|83-1}}이라 하여 {{TagPerson|[[김인후|하서]]}}의 작으로서 번역되었고 자연정이라는 정자(亭子)까지도 있었다 한다. 이보다 더 많이 그 작품을 얻어 볼 수 없음은 한한 노릇이로되 이것만으로도 넉넉히 그 의발(衣鉢)을 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이고 그리고 {{TagBook|[[유학연원보]]}}에는 그가 {{TagPerson|[[김안국|김모재]]}} 안국의 문인으로만 되어있으나 {{TagBook|[[하서집]]}} 권지7 부록 권2 서술에 「先生 初學於新平宋先生純 又出入于 新齋崔先生山斗 慕齋金先生安國 二生先之門」이라 한 것을 보면 {{TagPerson|[[송순|송면앙]]}} 순에게 수업을 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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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8번= {{TagSpage|83-2}}{{TagPerson|[[송순]]}}은 자 수초 호 기촌, 또는 면앙정 , 신평인. 성종 24년(1493) 전라도 담양서 생하고 진사 문과로 호당에 뽑히고 참판에 있을 때 구수담과 체결하여 이의(異議)를 고생(皷生)하였다는 대계(臺啓)를 만나 서천으로 귀양도 가고 이기가 파상된 뒤 방환하여 우찬성도 되고 대소과 회방연도 치루고 기로사에도 들고 담양에 퇴로하매 정자를 지어 면앙정이라 하고 정벽에 「俛有地仰有天 亭中中興浩然 招風月揖山川 扶藜杖送百年」이라 써 붙이고 가사도 짓고 소일하다가 선조 16년(1583)에 졸하니 생이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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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9번= {{TagSpage|83-3}}그의 가사에 풍상가, 잘새가는 판본의 고정에서 말한 바와 같으려니와 그밖에 또 면앙정단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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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0번= {{TagSpage|83-4}}<blockquote no="77">俛則地兮 仰則天兮 兩位之際兮 從而生我分居焉 領溪山兮風月 將與偕分老云</br>廣廣之野兮 川亦修而修兮 如雪兮白沙 如雲之鋪分 無事携竿之人兮 會日落兮不知</br> 松籬兮昇月 至竹梢兮轉離 玄琴兮樍按 岩邊兮猶坐 何許失伻兮鴻雁 獨鳴兮云徂{{TagPage|84-1}}山作兮屏風 野外兮周置 過去兮有雲 咸欲宿兮入來 何無小兮落日 而獨逾兮而去兮</br>見山頂兮夕陽 而跳游兮羣魚 惟無心兮此釣干 無以兮剩疑 满江月 將生此間 興兮不可支</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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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1번= {{TagSpage|84-2}}라고 번역된 것과 면앙정신번장가와 {{TagBook|[[면앙속집]]}} 권지1 연행록단가 한 수가 전하여 있는데 면앙정장가는 면앙정가라고도 하여 {{TagBook|[[지봉유설]]}}(이조 광해조인 {{TagPerson|[[이수광]]}} 저) 권14 가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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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2번= {{TagSpage|84-3}}<blockquote no="78">如近世 宋純 鄭徹 所作 最善―宋純俛仰亭歌―盛行於世</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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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3번= {{TagSpage|84-4}}라 하였고 {{TagBook|[[순오지]]}}(효종조인 {{TagPerson|[[홍만종]]}} 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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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4번= {{TagSpage|84-5}}<blockquote no="79">俛仰亭歌 宋二相純所製 說盡山水之勝 舖張遊賞之樂中 自有浩然之越</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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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5번= {{TagSpage|84-6}}라 하였고 {{TagBook|[[동악집]]}}(선조조인 {{TagPerson|[[이안눌]]}} 저) 권지9 면앙정차벽상운에는 그 밑의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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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6번= {{TagSpage|84-7}}<blockquote no="80">亭在府(潭陽)南十里許 故四宰(右贊成) 宋相公諱純之宅也 晚歳 退休竹亭 以居以終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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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7번= {{TagSpage|84-8}}이라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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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8번= {{TagSpage|84-9}}<blockquote no="81">湖南形勝此山川 九邑峯巒一檻前 謝屐平生煩夢想 習迆暇日好留連 沙禽暝帶渓橋雨 岸樹秋疑野店烟 不用老夫新着句 相公歌曲至今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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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19번= {{TagSpage|84-10}}이라 하였고 {{TagBook|[[죽창한화]]}}(광해조인 {{TagPerson|[[이덕형]]}} 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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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0번= {{TagSpage|84-11}}<blockquote no="82">余爲全羅監司 巡到潭陽 時 府使 今判樞鄭公光績 謂余曰 本府十里外 有故钊書 宋公亭子 號爲俛仰 景致頍勝 幸襜帷暫臨 以辨淸遊 翌日 鄭公 先徍候焉 余亦繼至 亭臨絕岸 隱映於蒼松翠竹之間 眼界曠遠 山川風景 果爲道內名區{{TagPage|85-1}}余與府伯 登臨設酌 帶月而還 宋公諱純 風流豪邁 爲一代名卿 所著無等諸曲 至今傳唱 辭甚清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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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1번= {{TagSpage|85-2}}이라 하였고 이 중의 무등제곡이란 건 즉 면앙정가를 이름이고 또 {{TagBook|[[명미당]]}}(근대인 {{TagPerson|[[이건창|이영재]]}} 건창 저) 권5 시 면앙정에는 그 밑의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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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2번= {{TagSpage|85-3}}<blockquote no="83">亭在潭陽 宋判書純故居 宋公 有重名 年九十 退於此 嘗出遊 朴思菴(淳) 鄭松江(澈) 季靑蓮(侯白) 林白湖(悌) 四公 爲擔其輿 正廟時 湖南道科 以擔輿俛仰亭 命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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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3번= {{TagSpage|85-4}}라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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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4번= {{TagSpage|85-5}}<blockquote no="84">宋公名德使人思 鄉國風流盛一時 亭子依然江上在 轎夫如此世間奇 山光渺渺水千折 野影漫漫天四垂 俛仰無端一惆悵 今誰擔我我擔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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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5번= {{TagSpage|85-6}}라 하였고 {{TagBook|[[조선인물호보]]}}(근대인 {{TagPerson|[[김용혁]]}} 저) 하권 면앙정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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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6번= {{TagSpage|85-7}}<blockquote no="85">松江諸公 皆服事之 享潭陽龜山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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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7번= {{TagSpage|85-8}}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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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2해독문28번= {{TagSpage|85-9}}이상의 말들을 종합하여 보더라도 {{TagPerson|[[송순|면앙정]]}}은 과연 그 풍류도 놀랍거니와 그 가도에도 그 연대의 한 거장임은 물론이다. 번역된 그 장단가들이 해독문 그대로 전하였더라면 더 얼마나 좋았을 것이냐. 다만 상풍가, 잘새가로도 그 조예가 어떠함은 족히 엿볼 수 있으며 {{TagPerson|[[송강]]}}의 가도도 간접으로나 또는 직접으로 그 사수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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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 {{TagSpage|86-1}}1.俛仰亭新翻長歌 一篇</br>無等山兮一枝 東迤出兮遙絕 斯爲霽月峯兮 干其上兮登陟 無邊兮大野 曷爲兮斟酌而出 去之九曲兮 偕掩遮兮 群布其中兮一曲 若潛窟老龍 罷初睡兮矯苜 寬廣兮巖上 有松竹兮披拓 爱置兮亭子 若乘雲靑鶴 指千里兮張翼 玉泉山兮龍泉 有下兮其水 亭子前兮廣野 條復條兮派勢 綠何爲兮母白 廣何爲兮母修 疑長羅兮遍鋪 宛雙龍兮蚴蟉 何方逝兮何事促 如奔如追兮 會夜晝之不識 遵水兮沙汀 如雪兮平展 紛紛鴻雁 相戱兮何物 或集或下兮 或聚或散 間蘆花兮呌啄 廣野外兮長天 下有周包兮 由耶屛耶畫耶 若高若低兮 若續若斷 或往或住兮 或隱或現 而其紛紜之中兮 有若羚名兮 不畏天而獨立 秋月山兮作頭 龍龜夢仙佛 臺魚登湧 珍錦城山于虚空兮 羅列遠近窓間 一何多兮 和拌擔者烟霞 青者山嵐兮 白者雲 千巖萬壑 作渠家兮 而出而入 一畫圖兮常掛 或升或降兮 或浮長空 或度曠野 或絳或黑 或薄或濃兮 斜陽之與落 細雨之以澹 一年兮亦四時 何景兮不覩 百種劑發兮洞 林島鳴兮候 籃輿兮催路 松下曲逕兮來又去 綠楊有情兮 黃栗留嬌態兮 不勝樹竹兮參錯 綠陰兮攸凝 百尺闌千兮發長睡 水上凉風兮不知止 濃霜兮旣灑 山色兮錦繡 黃雲兮亦何爲 萬頃兮乎鋪 漁笛亦不勝興兮 隨月兮吹弄 草木兮旣盡枯 江山兮埋没 造物兮多事 裝之兮永雪 瓊宮珠戶兮 玉海銀山 粉 眼前兮布列 離人間而去來兮 而此身兮無暇 此欲見兮彼欲聞 風欲引兮月欲迓 江魚兮何時釣 花圃兮誰人鋤 此一方兮步視 煩惱兮心中 無可棄之事兮 朝猶歉兮夕豈厭 今日不足兮 來日豈不來 紛無問兮可休 則路徑兮雖夷徒 然一藜杖兮 亦將至兮盡磨 酒旣熟兮寕無友俾 或彈或引兮 或吹百種聲兮醉興催 憂何自兮愁何傳 或臥或起兮 或俛或仰 放肆兮遨遊 天地兮亦寬 廣日月兮亦閑暇 未嘗識羲皇兮 此世界兮未嘗識 神仙兮其我身兮 此江山兮風月 茍管領兮亨百年 被岳陽{{TagPage|87-1}}樓上兮 縱令李太白兮 居之浩蕩兮 情懷何有兮 加焉如是 游且老兮亦君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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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 {{TagSpage|87-2}}2. 燕行錄短歌</br>二十一日 李珥上踕曰 朝廷百官中 校理宋純 可遣燕京 上答曰 予意所當者 即招宋純至 上日 卿可行燕京 即賜 缺缺 一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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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 {{TagSpage|87-3}}十三日 發行裝 入謝恩而出 時 李滉 李珥 柳希春 奇大升 羅世纘 金麟厚 洪春卿 洪春年 臨別 各作詩傾盃 李珥曰 美哉 宋先生此行 何異於神仙乎 李滉 羅世纘曰 他日 玉堂輩 今作燕京仙 宋公 馬上 感上恩 口占作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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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 {{TagSpage|87-4}}<blockquote no="86">上有堯舜之君 四方皆太乎烟花로다 머리를 고텨 ᄭᆡ워 玉簪을 ᄀᆞ라고 燕京에 조회ᄒᆞᆫ 노신이야 죽어 ᄇᆡᆨ골이 된ᄃᆞᆯ 충셩을 변ᄒᆞᆯ소냐</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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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번= {{TagSpage|87-5}}叔獻(珥) 答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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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6번= {{TagSpage|87-6}}<blockquote no="87">저긔 가시ᄂᆞᆫ 宋夫子ᄂᆞᆫ 道德文章 뉘가 모랄손가 湖堂玉堂柱石ᄒᆞᄂᆞᆫ 宋夫子ᄂᆞᆫ 國恩이버 장정에 나아간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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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7번= {{TagSpage|87-7}}洪石壁(春卿) 和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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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8번= {{TagSpage|87-8}}<blockquote no="88">宋夫子斯文道德의 일홈은 엇지 東方ᄲᅮᆫ이리오 大明皇帝 宋夫子 일홈 듣고 안지겻다 千萬歲後에 이날 恩光 이즐소냐.</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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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9번= {{TagSpage|87-9}}諸賢 作別而罷 栗谷日記又松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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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 {{TagSpage|86-1}}1.俛仰亭新翻長歌 一篇</br>無等山兮一枝 東迤出兮遙絕 斯爲霽月峯兮 干其上兮登陟 無邊兮大野 曷爲兮斟酌而出 去之九曲兮 偕掩遮兮 群布其中兮一曲 若潛窟老龍 罷初睡兮矯苜 寬廣兮巖上 有松竹兮披拓 爱置兮亭子 若乘雲靑鶴 指千里兮張翼 玉泉山兮龍泉 有下兮其水 亭子前兮廣野 條復條兮派勢 綠何爲兮母白 廣何爲兮母修 疑長羅兮遍鋪 宛雙龍兮蚴蟉 何方逝兮何事促 如奔如追兮 會夜晝之不識 遵水兮沙汀 如雪兮平展 紛紛鴻雁 相戱兮何物 或集或下兮 或聚或散 間蘆花兮呌啄 廣野外兮長天 下有周包兮 由耶屛耶畫耶 若高若低兮 若續若斷 或往或住兮 或隱或現 而其紛紜之中兮 有若羚名兮 不畏天而獨立 秋月山兮作頭 龍龜夢仙佛 臺魚登湧 珍錦城山于虚空兮 羅列遠近窓間 一何多兮 和拌擔者烟霞 青者山嵐兮 白者雲 千巖萬壑 作渠家兮 而出而入 一畫圖兮常掛 或升或降兮 或浮長空 或度曠野 或絳或黑 或薄或濃兮 斜陽之與落 細雨之以澹 一年兮亦四時 何景兮不覩 百種劑發兮洞 林島鳴兮候 籃輿兮催路 松下曲逕兮來又去 綠楊有情兮 黃栗留嬌態兮 不勝樹竹兮參錯 綠陰兮攸凝 百尺闌千兮發長睡 水上凉風兮不知止 濃霜兮旣灑 山色兮錦繡 黃雲兮亦何爲 萬頃兮乎鋪 漁笛亦不勝興兮 隨月兮吹弄 草木兮旣盡枯 江山兮埋没 造物兮多事 裝之兮永雪 瓊宮珠戶兮 玉海銀山 粉 眼前兮布列 離人間而去來兮 而此身兮無暇 此欲見兮彼欲聞 風欲引兮月欲迓 江魚兮何時釣 花圃兮誰人鋤 此一方兮步視 煩惱兮心中 無可棄之事兮 朝猶歉兮夕豈厭 今日不足兮 來日豈不來 紛無問兮可休 則路徑兮雖夷徒 然一藜杖兮 亦將至兮盡磨 酒旣熟兮寕無友俾 或彈或引兮 或吹百種聲兮醉興催 憂何自兮愁何傳 或臥或起兮 或俛或仰 放肆兮遨遊 天地兮亦寬 廣日月兮亦閑暇 未嘗識羲皇兮 此世界兮未嘗識 神仙兮其我身兮 此江山兮風月 茍管領兮亨百年 被岳陽{{TagPage|87-1}}樓上兮 縱令李太白兮 居之浩蕩兮 情懷何有兮 加焉如是 游且老兮亦君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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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 {{TagSpage|87-2}}2. 燕行錄短歌</br>二十一日 李珥上踕曰 朝廷百官中 校理宋純 可遣燕京 上答曰 予意所當者 即招宋純至 上日 卿可行燕京 即賜 缺缺 一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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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 {{TagSpage|87-3}}十三日 發行裝 入謝恩而出 時 李滉 李珥 柳希春 奇大升 羅世纘 金麟厚 洪春卿 洪春年 臨別 各作詩傾盃 李珥曰 美哉 宋先生此行 何異於神仙乎 李滉 羅世纘曰 他日 玉堂輩 今作燕京仙 宋公 馬上 感上恩 口占作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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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 {{TagSpage|87-4}}<blockquote no="86">上有堯舜之君 四方皆太乎烟花로다 머리를 고텨 ᄭᆡ워 玉簪을 ᄀᆞ라고 燕京에 조회ᄒᆞᆫ 노신이야 죽어 ᄇᆡᆨ골이 된ᄃᆞᆯ 충셩을 변ᄒᆞᆯ소냐</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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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6번= {{TagSpage|87-6}}<blockquote no="87">저긔 가시ᄂᆞᆫ 宋夫子ᄂᆞᆫ 道德文章 뉘가 모랄손가 湖堂玉堂柱石ᄒᆞᄂᆞᆫ 宋夫子ᄂᆞᆫ 國恩이버 장정에 나아간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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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8일 (화) 14:55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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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가사의 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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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松江歌辭의 研究(其一)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4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기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6년4월
시작쪽 058쪽 종료쪽 087쪽 전체쪽 030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문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판본의 고정


쪽수▶P58-1송강가사는 단행본으로 간행된 목판본과 또는 사본으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목판본에는 관북본(關北本), 관서본(關西本), 의성본(義城本), 황주본(黃州本), 성주본(星州本) 등이 있다. 우선 그 각본(各本)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하면 이러하다.
쪽수▶P58-1松江歌辭는 單行本으로 刊行된 木板本과 또는 寫本으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木板本에는 關北本 關西本 義城本 黃州本 星州本 등이 있다. 우선 그 各本에 대하야 약간의 說明을 試하면 이러하다.
쪽수▶P58-21. 관북본
이건 관북(함경도)에서 간행된 것으로서 지호집서적 권6과 해동가요서적고금가곡서적에 기재된 송강가사 후발의
쪽수▶P58-21. 關北本
이건 關北(咸鏡道)에서 刊行된 것으로서 芝湖集卷六과 海東歌謠와 古今歌曲에 記載된 松江歌辭後跋의
쪽수▶P58-3

北關 舊有公歌曲之刊行而顧年代已久 且經兵燹 謝失其傳 誠可惜也

쪽수▶P58-3

北關 舊有公歌曲之刊行而顧年代已久 且經兵燹 謝失其傳 誠可惜也

쪽수▶P58-4와 같이 연대(年代)가 오래되고 또는 병선(兵燹)을 겪어 실전(失傳)되었다. 이 발문 끝의
쪽수▶P58-4와 같이 年代가 오래되고 또는 兵燹을 겪어 失傳되었다. 이 跋文 끝의
쪽수▶P58-5

庚午元月上澣 完山後人 李選 書于東城之幽蘭軒

쪽수▶P58-5

庚午元月上澣 完山後人 李選 書于東城之幽蘭軒

쪽수▶P58-6을 보면 이건 이조 숙종조인 이선인물, 호는 지호(芝湖)라는 이가 송우암(宋尤菴) 문인으로서 그 내제 김만중인물과 함께 대론(臺論)을 받아 차성(경상도 장기)에 귀양 가 있을 때 즉 숙종 16년 경오(1690)에 지은 것이니 아마 숙종 이전 광해주 때 무렵에 간행된 것인 듯, 이것이 송강가사본으로는 최초의 간행인 듯하다.
쪽수▶P58-6을 보면 이건 李朝肅宗朝人 李選, 號는 芝湖라는 이가 宋尤菴 門人으로서 그 內弟 金萬重과 함께 臺論을 받어 車城(慶尙道張機)에 귀양 가 있을 때 즉 肅宗 十六年庚午(一六九O)에 지은 것이니 아마 肅宗 以前 光海主 때 무렵에 刊行된 것인 듯, 이것이 松江歌辭本으로는 最初의 刊行인 듯하다.
쪽수▶P59-12. 관서본
이건 관서관찰영인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고 진판고서적 권제6에는
쪽수▶P59-12. 關西本
이건 關西觀察營인 平壤에서 刊行된 것이고 鎮板考卷第六에는
쪽수▶P59-2

松江歌辭一卷 關西觀察營藏 印紙十五張

쪽수▶P59-2

松江歌辭一卷 關西觀察營藏 印紙十五張

쪽수▶P59-3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얻어 볼 수 없는 것이다.
星州本
쪽수▶P59-3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얻어 볼 수 없는 것이다.
星州本
쪽수▶P59-43. 의성본
이건 송강의 현손 정호인물, 호는 장암(丈岩)이라 하는 이가 경상도 의성현령으로 가 있을 때에 간행하였다. 그 간행 연월은 분명치는 못하나 숙종 십여 년 경인 듯하고 또한 지금은 얻어 볼 수 없다.
쪽수▶P59-43. 義城本
이건 松江의 玄孫 鄭澔, 號는 丈岩이라 하는 이가 慶尙道 義城縣令으로 가 있을 때에 刊行하였다. 그 刊行年月은 分明치는 못하나 肅宗十餘年頃인 듯하고 또한 지금은 얻어 볼 수 없다.
쪽수▶P59-54. 황주본
이것도 의성본과 거의 같은 연대 송강인물의 현손서요 이청강 제신인물의 오세손인 이징하인물가 황해도 황주통판으로 가 있을 때 간행하였▶P60-1다 하나, 역시 얻어 볼 수 없다.
쪽수▶P59-54. 黃州本
이것도 義城本과 거의 같은 年代 松江의 玄孫壻요 李淸江 濟臣의 五世孫인 李徵夏가 黃海道 黃州通判으로 가 있을 때 刊行하였▶P60-1다 하나, 亦是 얻어 볼 수 없다.
쪽수▶P60-25. 성주본
이 책은 종 30.4리, 횡 18.8리, 판광 종 20.8리, 횡 126리, 매장 전후면 각 8행, 매행 16자요 전권 상하 양부로 되어 상부는 총 24장에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가 있고 하부는 총 20장에 단가라는 제목이 있고 경민편(警民編)에 재견한다는 16수와 기타 63수와 천(송강 현손)근서, 관하(송강 오세손)추기의 부록 등이 있다.
쪽수▶P60-25. 星州本
이 冊은 縱三O.四糎, 橫一八.八糎, 板框 縱二O.八糎, 橫一二六糎, 每張前後面 各八行 每行十六字요 全卷上下兩部로 되어 上部는 總二十四張에 關東別曲 思美人曲 續美人曲 星山別曲 將進酒辭가 있고 下部는 總二十張에 短歌라는 題目이 있고 警民編에 載見한다는 十六首와 其他 六十三首와 洊(松江玄孫)謹書, 觀夏 (松江五世孫)追記의 附錄 등이 있다.
쪽수▶P60-3이상에 기타 63수란 건 뒤에 또 자세히 말하려니와 사실 이 책에는 두 수를 한 대문으로 하여 62수로 되어있고 이 책의 장수는 상하 양부를 도합하여 44장이 되나 누판고서적 권제6에는
쪽수▶P60-3已上에 其他 六十三首란 건 뒤에 또 仔細히 말하려니와 事實 이 冊에는 두 首를 한 대문으로 하여 六十二首로 되어있고 이 冊의 張數는 上下兩部를 都合하여 四十四張이 되나 鏤板考卷第六에는
쪽수▶P60-4

松菴歌辭一卷 星州牧藏 印紙一牒三張

쪽수▶P60-4

松菴歌辭一卷 星州牧藏 印紙一牒三張

쪽수▶P60-5으로 적혔으니 인지(印紙) 일첩삼장은 백지 23장, 이걸 반절하면 46장이 되니 그 나머지 3장은 여유를 둔 것이다.
쪽수▶P60-5으로 적혔으니 印紙一牒三張은 白紙二十三張, 이걸 半折하면 四十六張이 되니 그 남어지 三張은 餘裕를 둔 것이다.
쪽수▶P60-6이 책은 숙종 24년(1698)에 송강인물의 현손 정천인물이 선사하여 놓고 미처 간행은 못한 것을 그 뒤 영조 23년(1747)에 그 아들 정관하인물가 경상도 경주목사로 가 있을 때에 간행한 것이다. 이 책 부록에 그의 추기를 보면
쪽수▶P60-6이 冊은 肅宗二十四年(一六九八)에 松江의 玄孫 鄭洊이 繕寫하여 놓고 미처 刊行은 못한 것을 그 뒤 英祖二十三年(一七四七)에 그 아들 鄭觀夏가 慶尙道 景州牧使로 가 있을 때에 刊行한 것이다. 이 冊附錄에 그의 追記를 보면
쪽수▶P60-7

先人在世時 慨然兩本之眞贋相雜 眩於取舍 改寫一通 將付剞劂氏而有志未就 尋常痛恨 盖有年矣 昨夏 來莅星州 鳩聚梓板 一句而工訖 此亦有待而然歟 玆用廣布知舊間 以續 先君子未就之意焉

쪽수▶P60-7

先人在世時 慨然兩本之眞贋相雜 眩於取舍 改寫一通 將付剞劂氏而有志未就 尋常痛恨 盖有年矣 昨夏 來莅星州 鳩聚梓板 一句而工訖 此亦有待而然歟 玆用廣布知舊間 以續 先君子未就之意焉

쪽수▶P60-8이라 하였으니 「先人在世時 慨然兩本之眞贋相雜 眩於取舍云云」함은 또 그 부록의 정천근서를 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그뿐더러 위에 말한 의성본 황주본의 내역도 소상하게 말해있다. 이에 그 해독문의 대의를 들어 말하면
쪽수▶P60-8이라 하였으니 「先人在世時 慨然兩本之眞贋相雜 眩於取舍云云」함은 또 그 附錄의 鄭洊謹書를 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그뿐더러 위에 말한 義城本 黃州本의 來歷도 消詳하게 말해있다. 이에 그 原文의 大義를 들어 말하면
쪽수▶P61-1

文清公(松江)의 長短歌曲이 世上에 行하는 것이 若干篇이로되 여러 번 兵亂을 겪어 眞本은 전하지 않는다. 여러 子孫들 집에 각각 所藏함이 있으나 傳寫할 때의 誤字된 것, 傳誦하는 이의 添補한 것이 많다. 再從兄 澔氏가 義州 원으로 가 있을 때 이걸 걱정하고 刊行을 하였으나 諸本의 同異함을 널리 取하지 못하였다. 내 집에 舊藏하든 것과 校正하여본즉 舛誤된 것이 많고 短歌에는 逸失된 것도 많다. 또 畸翁의 아들 涖의 謄寫한 것과 考證하여본즉 내 집의 舊蔵한 것과 같은데 내 것은 王考 抱翁公이 命寫한 것이고 涖의 것은 畸翁의 전한 바를 받은 것이니 이것이 정말 眞本이다. 姊兄 李徵夏氏는 항상 우리 文清先祖考를 남달리 景慕하고 또한 이 일의 本末을 잘 아는데 마츰 黃州通判으로 가 있어 이걸 刊布하였다. 그러나 뒤에 보는 이들은 兩本의 眞贋을 분간하지 못하고 取舍함에 眩亂할까 하여 내 고쳐 一通을 써 剞劂에 붙인다.

쪽수▶P61-1

文清公(松江)의 長短歌曲이 世上에 行하는 것이 若干篇이로되 여러 번 兵亂을 겪어 眞本은 전하지 않는다. 여러 子孫들 집에 각각 所藏함이 있으나 傳寫할 때의 誤字된 것, 傳誦하는 이의 添補한 것이 많다. 再從兄 澔氏가 義州 원으로 가 있을 때 이걸 걱정하고 刊行을 하였으나 諸本의 同異함을 널리 取하지 못하였다. 내 집에 舊藏하든 것과 校正하여본즉 舛誤된 것이 많고 短歌에는 逸失된 것도 많다. 또 畸翁의 아들 涖의 謄寫한 것과 考證하여본즉 내 집의 舊蔵한 것과 같은데 내 것은 王考 抱翁公이 命寫한 것이고 涖의 것은 畸翁의 전한 바를 받은 것이니 이것이 정말 眞本이다. 姊兄 李徵夏氏는 항상 우리 文清先祖考를 남달리 景慕하고 또한 이 일의 本末을 잘 아는데 마츰 黃州通判으로 가 있어 이걸 刊布하였다. 그러나 뒤에 보는 이들은 兩本의 眞贋을 분간하지 못하고 取舍함에 眩亂할까 하여 내 고쳐 一通을 써 剞劂에 붙인다.

쪽수▶P61-2하였다. 이 글 가운데 「兩本의 眞贋」을 말한 것은 안(贋)은 정호인물의 의성본을 가리킨 것이고 진(眞)은 이징하인물의 황주본을 가리킨 것 같다. 황주본이야말로 이징하인물의 처가인 정천인물의 집에서 온 것이겠고 정호인물의 구장진본이란 것은 정홍명인물, 호는 기암(기옹)이란 이에게서 온 것일 것이다. 유학원연보서적(어윤적인물 저)의
쪽수▶P61-2하였다. 이 글 가운데 「兩本의 眞贋」을 말한 것은 贋은 鄭澔의 義城本을 가리친 것이고 眞은 李徵夏의 黃州本을 가리친 것 같다. 黃州本이야말로 李徵夏의 妻家인 鄭洊의 집에서 온 것이겠고 鄭澔의 舊藏眞本이란 것은 鄭弘溟, 號는 畸菴(畸翁)이란 이에게서 온 것일 것이다. 儒學源淵譜(魚允迪著)의
쪽수▶P61-3

栗谷 沙溪 畸菴 抱翁
李珥―金長生―酁弘溟―鄭瀁

쪽수▶P61-3

栗谷 沙溪 畸菴 抱翁
李珥―金長生―酁弘溟―鄭瀁

쪽수▶P61-4과 같이 정천인물의 왕고 포옹인물이라 하는 이가 기옹인물에게 의발을 받을 때에 이러한 가사본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기옹인물의 아들 정리인물의 것이 자기의 것과 같으니 진본이라고 함은 덜 된 수작이다. 또 정호인물의 의성본을 안본이라 함도 믿을 수 없다. 자기의 말따나 「여러 번 병란을 겪어 진본은 전하지 않는다」하고 여러 자손들 집의 소장한 것은 모두 안본이고 자기의 것만 진본이라 함이 풍치는 말도 같다. 또한 참고로 그 세계표(世系表)를 그려보자.
이병기 송강가사1-2.png
쪽수▶P61-4과 같이 鄭洊의 王考 抱翁이라 하는 이가 畸翁에게 衣鉢을 받을 때에 이러한 歌辭本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畸翁의 아들 鄭涖의 것이 自己의 것과 같으니 眞本이라고 함은 덜 된 수작이다. 또 鄭澔의 義城本을 贋本이라 함도 믿을 수 없다. 自己의 말따나 「여러 번 兵亂을 겪어 眞本은 전하지 않는다」하고 여러 子孫들 집의 所藏한 것은 모다 贋本이고 自己의 것만 眞本이라 함이 풍치는 말도 같다. 또한 參考로 그 世系表를 그려보자.
이병기 송강가사1-2.png
쪽수▶P62-1이와 같이 그 많은 자손들 집에서 제마다 소중하게 여기는 제 선조의 가사를 하필 안본을 소장하였으리오. 기암인물송강인물의 끝의 아들로 나이 겨우 열두 살에 그 부상을 당하였으니 그 당시에는 송강인물의 가사같은 걸 수습할 철도 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종 장성하여 그 집안에 전하던 것은 벗겼다 하더라도 이것만을 진본이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어떻든 지금 와서는 이밖에 얻어 볼 수 없으니 이것이 홀로 귀중함은 말할 것도 없다.
쪽수▶P62-1이와 같이 그 많은 子孫들 집에서 제마다 所重하게 여기는 제 先祖의 歌辭를 하필 贋本을 所藏하였으리오. 畸菴은 松江의 끝의 아들로 나이 겨우 열두 살에 그 父喪을 당하였으니 그 當時에는 松江의 歌辭같은 걸 收拾할 철도 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종 長成하여 그 집안에 전하든 것은 벗겼다드라도 이것만을 眞本이라 할 理由는 될 수 없다. 어떠튼 지금 와서는 이밖에 얻어 볼 수 없으니 이것이 홀로 貴重함은 말할 것도 없다.
쪽수▶P62-2이상 말한 다섯 본 외는 경민편에 실린 것이 있으니 이건 송강인물이 강원감사 때 지은 단가 16수다. 완남부원군 이후원인물김정국인물의 경민편 사본을 해서(황해도)에서 얻어 언해를 하고 또 진고령, 진서산의 권유문 따위와 송강인물의 이 단가와를 부록으로 하고 효종 9년(1658)에 제도(諸道)에 광포하고자 하여 간행한 것이다. 성주본보다도 팔십여 년을 앞선 것이고 한 자서도 완결(刓缺)한 곳이 없다.
쪽수▶P62-2已上 말한 다섯 本外는 警民編에 실린 것이 있으니 이건 松江이 江原監司 때 지은 短歌十六首다. 完南府院君 李厚源이 金正國의 警民編寫本을 海西(黃海道)에서 얻어 諺解를 하고 또 陳古靈, 眞西山의 勸諭文 따위와 松江의 이 短歌와를 附錄으로 하고 孝宗九年(一六五八)에 諸道에 廣布하고저 하여 刊行한 것이다. 星州本보다도 八十餘年을 앞선 것이고 한 字書도 刓缺한 곳이 없다.
쪽수▶P62-3요마적 간행된 단행본, 또는 잡가본에 끼어 있는 송강가사는 황잡하기 짝이 없고 사본으로 전하는 것에는 성주본보다도 더 진정하다고 볼만한 것이 있으니 사미인곡첩서적협률대성서적과 같은 책이다.
쪽수▶P62-3요마적 刊行된 單行本, 또는 雜歌本에 끼어 있는 松江歌辭는 荒雜하기 짝이 없고 寫本으로 전하는 것에는 星州本보다도 더 眞正하다고 볼만한 것이 있으니 思美人曲帖과 協律大成과 같은 冊이다.
쪽수▶P63-1사미인곡첩서적은 견본 종 36.5리 횡 24.5리 총 10폭. 제1폭 내지 제5폭에 소체(騷體) 즉 초사체(楚辭體)로 번역한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쓰고 제5폭 내지 제8폭에 갑신 계하 배와산인서라는 발문이 있고 제9폭 내지 10폭에는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해독문을 구절을 나누어 나란히 쓰고 글씨도 퍽 정미하여 체첩(體帖)이라도 삼을만하다. 배와(坯窩)는 김상숙인물의 호, 인품 문장 서법이 높다고 일컫던 것이다. 갑신은 곧 영조 40년(1764).
쪽수▶P63-1思美人曲帖은 絹本 縱三六.五糎 橫二四.五糎 總十幅. 第一幅 乃至 第五幅에 騷體 즉 楚辭體로 翻譯한 思美人曲 續美人曲을 쓰고 第五幅 乃至 第八幅에 甲申季夏坯窩散人書라는 跋文이 있고 第九幅 乃至 十幅에는 思美人曲 續美人曲의 原文을 句節을 나누어 나란이 쓰고 글씨도 퍽 精美하여 體帖이라도 삼을만하다. 坯窩는 金相肅의號, 人品 文章 書法이 높다고 일캇든 것이다. 甲申은 곳英祖四十年(一七六四).
쪽수▶P63-2협률대성서적은 강원도 강릉 이근우인물씨 가장(家藏)인 고사본인데 전권 4부로 되어 제1부에는 조율지법 양금도 여민락 영산회상 우조 계면조의 곡보 보표 가곡지풍도 형용십오조목 매화점장단이 있고 제2부에는 영언전부라는 제목을 두고 가곡원류나 청구영언과 같은 장단가들이 있고 제3부에는 여창질이라는 제목에 역시 장단가들이 있고 제4부에는 어부사 처사가와 같은 가사와 관동별곡이 있다. 이 관동별곡이야말로 다른 본과는 다른 점이 많은 것이다.
쪽수▶P63-2協律大成은 江原道 江陵 李根友氏 家藏인 古寫本인데 全卷四部로 되어 第一部에는 調律之法 洋琴圖 與民樂 靈山會相 羽調 界面調의 曲譜 譜標 歌曲之風度 形容十五條目 梅花點長短이 있고 第二部에는 永言全部라는 題目을 두고 歌曲源流나 靑丘永言과 같은 長短歌들이 있고 第三部에는 女唱秩이라는 題目에 亦是 長短歌들이 있고 第四部에는 漁父辭 處士歌와 같은 歌詞와 關東別曲이 있다. 이 關東別曲이야말로 다른 本과는 다른 점이 많은 것이다.
쪽수▶P63-3송강인물의 단가로는 단가초집서적 고금가곡서적 해동가요서적 청구영언서적 가곡원류서적 대동풍아서적 기타 가사책에 몇 수씩 적혀있다. 이것도 모두 참고가 되려니와 관동별곡역 사미인곡해 장진주사역과 같은 번역들도 버릴 건 아니다.
쪽수▶P63-3松江의 短歌로는 短歌抄集 古今歌曲 海東歌謠 靑丘永言 歌曲源流 大東風雅 其他 歌詞冊에 몇 首씩 적혀있다. 이것도 모다 參考가 되려니와 關東別曲譯 思美人曲解 將進酒辭譯과 같은 翻譯들도 버릴 건 아니다.
쪽수▶P63-4관동별곡역은 칠언시로 하여 간혹 오역한 것이 있으며 이택당인물(명은 식, 광해조인)이 소시(少時)에 지은 것이라 한다. 서포만필서적(숙종조인 김만중인물 저)에는 택당인물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어떻든 그 번역은 번역이다.
쪽수▶P63-4關東別曲譯은 七言詩로 하여 間或 誤譯한 것이 있으며 李澤堂(名은 植, 光海朝人)이 少時에 지은 것이라 한다. 西浦漫筆(肅宗朝人 金萬重著)에는 澤堂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어떠튼 그 번역은 번역이다.
쪽수▶P63-5사미인곡해는 연경재전집서적(정조조인 성해응인물저) 권지1에 보이는 것과 같이 오언으로 하여 잡가요체로서 번역한 것이다 배와인물의 것보다도 더 간명하다.
쪽수▶P63-5思美人曲解는 研經齋全集(正祖朝人 成海應著) 卷之一에 보이는 것과 같이 五言으로 하여 雜歌謠體로서 번역한 것이다 坯窩의 것보다도 더 簡明하다.
쪽수▶P63-6장진주사역은 김북헌인물(명은 춘택 숙종조인)이 사체로 번역한 것이다. 북헌집서적 권4를 보면 북헌인물의 친구요 송강인물의 후손인 정중여인물를 만나 술을 마시고 노는데 중여인물가 취하여 병을 두들기며 그 선조 송강인물의 장진주사를 부르고 그것이 속언▶P64-1으로 되었음을 한하고 한문으로 번역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런 뒤 10년이 지나, 중여인물는 죽고 그 아들이 임피 적소로 찾아 왔을 때 비로소 하여준 것이라 하였다.
쪽수▶P63-6將進酒辭譯은 金北軒(名은 春澤 肅宗朝人)이 詞體로 번역한 것이다. 北軒集卷四를 보면 北軒의 親舊요 松江의 後孫인 鄭重汝를 맞나 술을 마시고 노는데 重汝가 취하여 병을 두들기며 그 先祖 松江의 將進酒辭를 부르고 그것이 俗諺▶P64-1으로 되었음을 恨하고 漢文으로 번역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런 뒤 十年이 지나, 重汝는 죽고 그 아들이 臨陂謫所로 찾어 왔을 때 비로소 하여준 것이라 하였다.
쪽수▶P64-2참고서에 대한 말은 이만큼 하여두고 다시 성주본으로 돌아가 그 가사를 축조하여 보면 혹은 와전 혹은 오서 낙서 혹은 완결(刓缺)된 자들이 여간이 아니다.
쪽수▶P64-2參考書에 대한 말은 이만큼 하여두고 다시 星州本으로 돌아가 그 歌辭를 逐條하여 보면 혹은 訛傳 혹은 誤書 落書 혹은 刓缺된 字들이 如干이 아니다.
쪽수▶P64-3동권 상2장 후면 제7행 관동별곡의
쪽수▶P64-3同卷上二張 後面第七行 關東別曲의
쪽수▶P64-4

半반空공() 소소ᄯᅳ니

쪽수▶P64-4

半반空공() 소소ᄯᅳ니

쪽수▶P64-5()()의 오자요
쪽수▶P64-5()()의 誤字요
쪽수▶P64-6동권 상4장 전면 제8행의 「넙거나 넙은 天텬下하 엇ᄯᅵᄒᆞ야 젹닷말고」라는 구절 다음에는
쪽수▶P64-6同卷上四張 前面第八行의 「넙거나 넙은 天텬下하 엇ᄯᅵᄒᆞ야 젹닷말고」라는 句節 다음에는
쪽수▶P64-7

어와 뎌 境界를 어이ᄒᆞ면 알거이고

쪽수▶P64-7

어와 뎌 境界를 어이ᄒᆞ면 알거이고

쪽수▶P64-8하는 한 구절이 빠진 것이다. 이는 협률대성서적에나 이택당인물 관동별곡역의
쪽수▶P64-8하는 한 句節이 빠진 것이다. 이는 協律大成에나 李澤堂 關東別曲譯의
쪽수▶P64-9

優優大哉彼境界 欲窺涯溪何渺渺

쪽수▶P64-9

優優大哉彼境界 欲窺涯溪何渺渺

쪽수▶P64-10란 것을 보드라도 이 구절이 다 적혀있고 그 문맥으로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
쪽수▶P64-10란 것을 보드라도 이 句節이 다 적혀있고 그 文脈으로도 當然히 있어야 할 것이다.
쪽수▶P64-11동권 상7장 전면 제2행의
쪽수▶P64-11同卷上七張 前面第二行의
쪽수▶P64-12

바다ᄒᆡ 날제ᄂᆞᆫ 萬만國이 일위(○○)더니

쪽수▶P64-12

바다ᄒᆡ 날제ᄂᆞᆫ 萬만國이 일위(○○)더니

쪽수▶P64-13일위(○○)는 알 수 없는 말이더니 협률대성서적에는
쪽수▶P64-13일위(○○)는 알 수 없는 말이더니 協律大成에는
쪽수▶P64-14

萬國이 어릐(○○)더니

쪽수▶P64-14

萬國이 어릐(○○)더니

쪽수▶P65-1라 하고 택당역에는
쪽수▶P65-1라 하고 澤堂 譯에는
쪽수▶P65-2

初離海上耀()萬國

쪽수▶P65-2

初離海上耀()萬國

쪽수▶P65-3이라 하였으니 즉 일위(○○)어릐(○○)의 결자요 어릐는 어릐어릐 비친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쪽수▶P65-3이라 하였으니 즉 일위(○○)어릐(○○)의 缺字요 어릐는 어릐어릐 비친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쪽수▶P65-4동권 상7장 후면 제8행의
쪽수▶P65-4同卷上七張 後面第八行의
쪽수▶P65-5

어듸 잇() 말고

쪽수▶P65-5

어듸 잇() 말고

쪽수▶P65-6()()의 결자.
쪽수▶P65-6()()의 缺字.
쪽수▶P65-7동권 상10장 후면 제4행의
쪽수▶P65-7同卷上十張 後面第四行의
쪽수▶P65-8

()디쟈 鶴학을 ᄐᆞ고

쪽수▶P65-8

()디쟈 鶴학을 ᄐᆞ고

쪽수▶P65-9()()(月)의 오자이고 택당인물 역의
쪽수▶P65-9()()(月)의 誤字이고 澤堂譯의
쪽수▶P65-10

須臾言訖鶴飛去

쪽수▶P65-10

須臾言訖鶴飛去

쪽수▶P65-11의 수유언흘(須臾言訖)도 또한 맹종한 오역이다.
쪽수▶P65-11의 須臾言訖도 또한 盲從한 誤譯이다.
쪽수▶P65-12동권 상10장 후면 제8행과 11장 전면 제1행 동별곡 낙구(落句)의
쪽수▶P65-12同卷上十張 後面第八行과 十一張 前面第一行 同別曲落句의
쪽수▶P65-13

明명月월이 千쳔山산萬만落낙의 아니 비쵠ᄃᆡ업다

쪽수▶P65-13

明명月월이 千쳔山산萬만落낙의 아니 비쵠ᄃᆡ업다

쪽수▶P65-14고금가곡서적과 같은 책에도 이와 같이 적혔으나 그 전문과는 아무 연락 조응도 없는 한 군소리다. 전사할 때 와오(訛誤)된 것인 듯하다. 그리고 그 와오된 것을 도리어 살리기 위하여 위에 말한 ()디쟈와 같은 것도 ()디쟈로 개찬한 듯하다. 협률대성서적에는
쪽수▶P65-14는 古今歌曲과 같은 册에도 이와 같이 적혔으나 그 前文과는 아무 聯絡 照應도 없는 한 군소리다. 傳寫할 때 訛誤된 것인 듯하다. 그리고 그 訛誤된 것을 도리어 살리기 위하여 위에 말한 ()디쟈와 같은 것도 ()디쟈로 改竄한 듯하다. 協律大成에는
쪽수▶P65-15

기러ᄂᆡ다 다 기러ᄂᆡ며 퍼ᄂᆡ다 다 퍼ᄂᆡ랴
▶P66-1兒孩야 盞을 씨셔 이 술 ᄒᆞᆫ 盞 어다(더)가
九重으로 도라가셔 모다 醉케 ᄒᆞ오리라

쪽수▶P65-15

기러ᄂᆡ다 다 기러ᄂᆡ며 퍼ᄂᆡ다 다 퍼ᄂᆡ랴
▶P66-1兒孩야 盞을 씨셔 이 술 ᄒᆞᆫ 盞 어다(더)가
九重으로 도라가셔 모다 醉케 ᄒᆞ오리라

쪽수▶P66-2하고 택당역에는
쪽수▶P66-2하고 澤堂譯에는
쪽수▶P66-3

欲汲欲汲不盡汲 呼兒洗盞更酌一盃酒 回逢九重令重醉

쪽수▶P66-3

欲汲欲汲不盡汲 呼兒洗盞更酌一盃酒 回逢九重令重醉

쪽수▶P66-4라 하였다. 과연 이것이야말로 그 전문(前文)의 뜻을 받아 결말을 지은 것이다. 그 전문을 들어 말하면 대개 이러하다.
쪽수▶P66-4라 하였다. 과연 이것이야말로 그 前文의 뜻을 받어 結末을 지은 것이다. 그 前文을 들어 말하면 대개 이러하다.
쪽수▶P66-5

關東等地를 遊覽하든 途次, 望洋亭에 올라 바다도 바라보고 달뜨는 光景도 바라보고 啟明星이 돋도록 고초 앉어 流霞酒 부어 잡고 달더러 말도 뭇고 또는 잠도 들어 꿈에 한 道 를 맞나 黃庭經 一字를 그릇 읽고 人間에 下謫하였다는 수작도 하고 술도 勸하고 달이 지자 鶴을 타고 九空으로 오르다가 空中 玉簫소리에 잠을 깨어 굽어보니 바다는 茫茫하여 그 깊이나 넓이를 알 수 없다.

쪽수▶P66-5

關東等地를 遊覽하든 途次, 望洋亭에 올라 바다도 바라보고 달뜨는 光景도 바라보고 啟明星이 돋도록 고초 앉어 流霞酒 부어 잡고 달더러 말도 뭇고 또는 잠도 들어 꿈에 한 道 를 맞나 黃庭經 一字를 그릇 읽고 人間에 下謫하였다는 수작도 하고 술도 勸하고 달이 지자 鶴을 타고 九空으로 오르다가 空中 玉簫소리에 잠을 깨어 굽어보니 바다는 茫茫하여 그 깊이나 넓이를 알 수 없다.

쪽수▶P66-6이 글 가운데에 「계명성(샛별)이 돋도록.」이라는 말이 있는 걸 보드라도 밤은 거의 샐 때가 된 것이니 「달지자」라든가 잠을 개어 바다를 굽어보고 「아해야」라든가 하고 운운함이 타당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쪽수▶P66-6이 글 가운데에 「啓明星(샛별)이 돋도록.」이라는 말이 있는 걸 보드라도 밤은 거의 샐 때가 된 것이니 「달지자」라든가 잠을 개어 바다를 굽어보고 「兒孩야」라든가 하고 云云함이 妥當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쪽수▶P66-7동권 상13장 후면 제5행 사미인곡의
쪽수▶P66-7同卷上十三張 後面第五行 思美人曲의





본문2: 2. 송강의 생활과 그 가도의 전통


본문2-1: 1.


쪽수▶P76-8송강가사의 그 작가는 과연 어떤 이며 어떤 생활을 하던 인가. 이에 그 문집, 전기, 연보, 기타 기록을 상고하여 보자. 그는 정철서적 자 계함, 호 송강, 연일인.
쪽수▶P76-8松江歌辭의 그 作家는 과연 어떤 이며 어떤 生活을 하든 인가. 이에 그 文集 傳記 年譜 其他 記錄을 상고하여 보자. 그는 鄭澈 字季涵 號松江 延日人.
쪽수▶P77-1그 고조 연(淵)은 병조판서, 증조 자숙(自淑)은 김제군수, 조 위(潙)는 건원참봉, 부 유침(惟沉)은 돈녕부판관인데 대사간 죽산인 안팽수인물의 여(女)를 취하여 사남이녀를 두니 자(滋), 소(沼), 황(滉)과 송강인물이고, 장녀는 인종의 귀인이 되고 차녀는 계림군 류(瑠)의 부인이 되었다.
쪽수▶P77-1그 高祖 淵은 兵曹判書, 曾祖 自淑은 金堤郡守, 祖 潙는 健元參奉, 父 惟沉은 敦寧府判官인데 大司諫 竹山人 安彭壽의 女를 娶하여 四男二女를 두니 滋, 沼, 滉과 松江이고, 長女는 仁宗의 貴人이 되고 次女는 桂林君 瑠의 夫人이 되었다.
쪽수▶P77-2송강인물은 이조 중종 31년(1536) 병신 윤12월 초6일 경성 장의동 제에서 생하였고 그 어렸을 때 큰 누이를 보러 동궁에 자주 드나들며 그때 대군으로 게시는 명종과 연상약(年相若)한 터이라 함께 놀기도 하고 퍽 정답게 지냈다.
쪽수▶P77-2松江은 李朝 中宗三十一年(一五三六) 丙申閏十二月初六日 京城 藏義洞第에서 生하였고 그 어렸을 때 큰누의를 보러 東宮에 자주 드나들며 그때 大君으로 게시는 明宗과 年相若한 터이라 함께 놀기도 하고 퍽 정답게 지냈다.
쪽수▶P77-310세 되던 때, 그 자부 계림군 류가 정순명인물, 허자인물 등의 무함(誣陷)으로 인종 원년인 을사사화에 사(死)하고 백형 자는 잡혀서 장류(杖流)되어 도중에서 죽고 부는 좌배되었다. 그럼으로 여러 해 동안 실학(失學)하였다.
쪽수▶P77-3十歲되든 때, 그 姊夫 桂林君 瑠가 鄭順明, 許磁 등의 誣陷으로 仁宗元年인 乙巳士禍에 死하고 伯兄 滋는 잡혀서 杖流되어 途中에서 죽고 父는 坐配되었다. 그럼으로 여러 햇 동안 失學하였다.
쪽수▶P77-416세 되던 때, 그 아버지가 비로소 석방되어 전라도 창평 당지산 밑에 가서 우거하였다. 그 조부 위의 묘소가 거기 있는 까닭에 그 묘하(墓下)를 찾아간 것이다. 송강인물도 그때 그 아버지를 따러가 있으면서 스스로 학문의 필요함을 깨닫고 김하서인물 인후에게, 또는 기고봉인물 대승에게 가서 배웠는데 기고봉인물은 벌써 그가 비범한 인 줄을 알고 하로는 산으로 놀러가서 수석이 청절한 한 이상한 곳을 당하매 누가 말하되 세간의 인품도 이와 같은 이가 있느냐 한즉 고봉인물은 정 아무개가 당함 즉 하다고 하였다.
쪽수▶P77-4十六歲되든 때, 그 아버지가 비로소 釋放되어 全羅道 昌平 唐旨山 밑에 가서 寓居하였다. 그 祖父 潙의 墓所가 거긔 있는 까닭에 그 墓下를 찾어간 것이다. 松江도 그때 그 아버지를 따러가 있으면서 스스로 學問의 必要함을 깨닷고 金河西 麟厚에게, 또는 奇高峰 大升에게 가서 배웠는데 奇高峯은 벌서 그가 非凡한 인 줄을 알고 하로는 山으로 놀러가서 水石이 淸絕한 한 이상한 곳을 당하매 누가 말하되 世間의 人品도 이와 같은 이가 있느냐 한즉 高峯은 鄭아모개가 당함 즉 하다고 하였다.
쪽수▶P77-517세에 문화유씨 강항인물의 여를 취하고 그리고 사남이녀를 두고 교류하던 친구도 많은 가운데 율곡 이이인물, 우계 성혼인물 구봉 송익필인물이 가장 막역한 사이로서 서로 탁마하고 면려하였다.
쪽수▶P77-5十七歲에 文化柳氏 强項의 女를 娶하고 그리고 四男二女를 두고 交流하든 親舊도 많은 가운데 栗谷 李珥, 牛溪 成渾 龜峯 宋翼弼이 가장 莫逆한 사이로서 서로 琢磨하고 勉勵하였다.
쪽수▶P77-622세에 송천 양응정인물에게도 종학하였다. 명종 16년 신유, 27세가 되어 진사시 일등을 하고 그 익년 임술에 문과장원을 하매 명종께서 방목(榜目)을 보고 죽마의 구훤(舊諠)을 생각고 퍽 기뻐하시며 특별히 주찬을 하사하시고 사헌부특평을 제수하였다. 그러자 명종의 종형 경양군인물이 그 처가의 재산을 빼앗고자 그 처남을 유살(誘殺)한지라 그 일이 발각되어 경양의
쪽수▶P77-6二十二歲에 松川 梁應鼎에게도 從學하였다. 明宗十六年辛酉, 二十七歲가 되어 進士試 一等을 하고 그 翌年壬戌에 文科壯元을 하매 明宗께서 榜目을 보고 竹馬의 舊諠을 생각고 퍽 깃버하시며 特別히 酒饌을 下賜하시고 司憲府特平을 除授하였다. 그러자 明宗의 從兄 景陽君이 그 妻家의 財産을 빼앗고저 그 妻娚을 誘殺한지라 그 일이 發覺되어 景陽의
쪽수▶P78-1부자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명종께서 사촉(私囑)하여 관대하라 하였으나 마침내 청종(聽從)지 않았다. 그러하여 명종의 뜻을 거스르고 오래 청선(淸選)을 얻지 못하고 겨우 좌랑, 전적, 도사의 직을 체제하다가, 31세에 이르러 정랑, 직강, 헌납, 특평으로서 북관어사도 되어 명종빈천의 가참의 노래도 지었고 비로소 옥당에 선입되어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또는 호남어사도 되고 35세에는 그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 신원에 여묘(廬墓)를 살아 복결하고 그 익년에 또 모친상을 당하여 고양 신원에 하고 여묘하고 복결을 하고 나니 40세가 되었다.
쪽수▶P78-1父子가 死刑을 당하게 되었다. 明宗께서 私囑하여 寬貸하라 하였으나 마츰내 聽從지 않았다. 그러하여 明宗의 뜻을 거스르고 오래 淸選을 얻지 못하고 겨우 佐郞, 典籍, 都事의 職을 遞除하다가, 三十一歲에 이르러 正郎, 直講, 獻納, 特平으로서 北關御史도 되어 明宗賓天의 歌讖의 노래도 지었고 비로소 玉堂에 選入되어 修撰, 佐郞, 從事官, 校理 또는 湖南御史도 되고 三十五歲에는 그 父親喪을 당하여 京畿道 高陽新院에 廬墓를 살어 服闋하고 그 翌年에 또 母親喪을 당하여 高陽新院에 하고 廬墓하고 服闋을 하고 나니 四十歲가 되었다.
쪽수▶P78-2때는 마침 선조 8년(1575) 청양군 심의겸인물이 일찍 사인(舍人)이 되어 영상 윤원형인물 집에 일을 품하러 갔는데 원형인물의 서 이조민인물과는 서로 아는 터이라 서실로 끌려들어간 바에 김효원인물의 침구가 놓여있음을 보고 심이 속으로 더러이 여기고 선비고 어찌 권문의 무식한 자제를 상종하여 함께 있을까 하고 그 뒤 효원인물이 문과장원을 하고 재명이 높아 현랑에 천망(薦望)되매 심이 저지하였다. 그리하여 효원인물이 낭요(朗僚)에 있은 지 일곱 해만에 비로소 전조(銓曹)에 들고 남더러 말하되 의겸인물은 우직하고 초솔(草率)하니 크게는 쓰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효원인물이 틈을 타서 보복하리라 하고 효원인물의 제배(儕輩)들은 심을 미워하고 이로 말미암아 조야(朝野)에 당론이 나뉘기 시작하였다. 송강인물은 이때 직제학, 장악원정, 사간의 직으로 있으며, 시의(時議)에 불합하여 해직을 하고 고향으로 가려다 말고 동부승지 겸 수찬관으로 출사도 하니 때는 더욱 분당의 설이 성하여 의겸인물의 제배를 서인이라, 효원인물의 제배를 동인이라 하여 조신(朝臣)은 물론이고 녹녹무명(碌碌無名)한 이까지라도 모두 동서의 명목에 들었다. 송강인물도 서인의 한 사람으로서 시배(時輩)의 단처(短處)를 들어 많이 말도 하고 한번은 술을 취하여 동인의 유수한 이발인물과 논쟁하다가 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일어났다. 그 뒤로부터는 동인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고 혹은 피핵(被劾), 혹은 저척(詆斥)도 당하였다.
쪽수▶P78-2때는 마츰 宣祖八年(一五七五) 靑陽郡 沈義謙이 일즉 舍人이 되어 領相 尹元衡 집에 일을 품하러 갔는데 元衡의 婿 李肇敏과는 서로 아는 터이라 書室로 끌려들어간 바에 金孝元의 寢具가 놓여있음을 보고 沈이 속으로 더러이 여기고 선비고 어찌 權門의 무식한 子弟를 상종하여 함께 있을가 하고 그 뒤 孝元이 文科 壯元을 하고 才名이 높아 鉉郞에 薦望되매 沈이 沮止하였다. 그리하여 孝元이 朗僚에 있은 지 일곱 해만에 비로소 銓曹에 들고 남더러 말하되 義謙은 愚直하고 草率하니 크게는 쓰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孝元이 틈을 타서 報復하리라 하고 孝元의 儕輩들은 沈을 미워하고 일로 말미암아 朝野에 黨論이 나누기 시작하였다. 松江은 이때 直提學, 掌樂院正, 司諫의 職으로 있으며, 時議에 不合하여 解職을 하고 故鄕으로 가려다 말고 同副承旨兼修撰官으로 出仕도 하니 때는 더욱 分黨의 說이 성하여 義謙의 儕輩를 西人이라, 孝元의 儕輩를 東人이라 하여 朝臣은 물론이고 碌碌無名한 이까지라도 모다 東西의 名目에 들었다. 松江도 西人의 한 사람으로서 時輩의 短處를 들어 많이 말도 하고 한번은 술을 취하여 東人의 有數한 李潑과 論爭하다가 潑의 얼굴에 침을 뱉고 일어났다. 그 뒤로부터는 東人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고 혹은 被劾, 혹은 詆斥도 당하였다.
쪽수▶P79-145세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풍화를 선도키 위한 단가 16수와 관동산수를 찬미한 관동별곡이라는 장가 등을 지었고 퇴락하고 매몰하여있던 영월의 노산군인물 묘를 수축(修築)하였다.
쪽수▶P79-1四十五歲에는 江原道 觀察使가 되어 風化를 善導키 위한 短歌 十六首와 關東山水를 讚美한 關東別曲이라는 長歌 등을 지었고 頹落하고 埋沒하여있든 寧越의 魯山君 墓를 修築하였다.
쪽수▶P79-2그 익년에는 대사성이 되고 더욱 저척을 받아 그해 가을에 창평으로 돌아가 있다가 특지로서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한 해만에 도승지, 예조참판에 체배(遞拜)하고 함경도 관찰사가 되여 또 한 해를 지내고 예조판서로 특승되자 기주실의(嗜酒失儀)한다는 사헌부의 계(啓)와 교구생화(交搆生禍), 또는 강편기극지인(剛偏忌克之人)이라는 사간원의 계로서 논핵을 당하고 여러 번 상소하여 사면하기를 빌었으나 허하지 않았고 49세 되던 해에는 대사헌을 제수하고 특히 총마(驄馬)를 사급(賜給)하여 출입케하여 총마어사라는 이름도 얻고 그 이듬해에는 판돈녕으로 체배하고 조신의 자훼(訾毁)와 또는 양사의 논척을 받고 고양에 퇴거하였다가 창평으로 돌아갔다.
쪽수▶P79-2그 翌年에는 大司成이 되고 더욱 詆斥을 받어 그해 가을에 昌平으로 돌아가 있다가 特旨로서 全羅道 觀察使가 되고 한 해만에 都承旨, 禮曹參判에 遞拜하고 咸鏡道 觀察使가 되여 또 한 해를 지내고 禮曹判書로 特陞되자 嗜酒失儀한다는 司憲府의 啓와 交搆生禍, 또는 剛偏忌克之人이라는 司諫院의 啓로서 論劾을 당하고 여러 번 上疏하여 辭免하기를 빌었으나 許하지 않았고 四十九歲 되든 해에는 大司憲을 除授하고 特히 驄馬를 賜給하여 出入케하여 驄馬御史라는 이름도 얻고 그 이듬해에는 判敦寧으로 遞拜하고 朝臣의 訾毁와 또는 兩司의 論斥을 받고 高陽에 退去하였다가 昌平으로 돌아갔다.
쪽수▶P79-3이러하여 한 5년 동안은 창평에서 그 처의 외척인 김성원인물의 산정을 얻어 있으며 수석(水石)과 구학(鷗鶴)으로 더불어 벗도 삼고 독서, 탄금, 소영도 하며 항상 국사를 걱정하고 군은(君恩)을 생각하였다.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도 이때 지은 것이다. 신연경재전집서적 권지1 사미인곡해에는 「鄭松江 竄江界 作此詞」라 하였으나 송강별집서적 권7 부록 기옹소록에는 「前後美人曲 在此鄉(昌平)時所作 不記某年 似是 丁亥戊子年間耳」라 하였고 송강원집서적 권1 시 대첩(지금 담양 태전면 송강 구기) 주석호운의 「一曲長歌思美人 此身雖老此心新 明年梅發窓前樹 折寄江南第一春」이라 한 것을 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송강인물이라는 호도 이곳에서 얻은 것이니 동 원집 시 숙송강정사의 「借名三十載 非主亦非賓 茅茨纔盖屋 復作北歸人」이라 한 것이 그걸 말함이 아니냐.
쪽수▶P79-3이러하여 한 五年 동안은 昌平에서 그 妻의 外戚인 金成遠의 山亭을 얻어 있으며 水石과 鷗鶴으로 더불어 벗도 삼고 讀書, 彈琴, 嘯詠도 하며 항상 國事를 걱정하고 君恩을 생각하였다. 星山別曲, 思美人曲, 續美人曲도 이때 지은 것이다. 新硏經齋全集卷之一 思美人曲解에는 「鄭松江 竄江界 作此詞」라 하였으나 松江別集券七附錄 畸翁所錄에는 「前後美人曲 在此鄉(昌平)時所作 不記某年 似是 丁亥戊子年間耳」라 하였고 松江原集卷一 詩 大帖(지금 潭陽 太田面 松江 舊基) 酒席呼韻의 「一曲長歌思美人 此身雖老此心新 明年梅發窓前樹 折寄江南第一春」이라 한 것을 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松江이라는 號도 이곳에서 얻은 것이니 同 原集 詩 宿松江亭舍의 「借名三十載 非主亦非賓 茅茨纔盖屋 復作北歸人」이라 한 것이 그걸 말함이 아니냐.
쪽수▶P79-4선조 22년 기축 54세가 되어 그 장자상을 당하고 장사를 지내러 고양에 와 있을 때, 마침 정여립인물의 모반하는 일▶P80-1이 발성되었다. 그 변을 듣고 즉시 대내에 들어가니 상이 충절을 장려하시고 우의정을 특배하여 안치(按治)에 당하고 이어 최영경인물의 옥(獄)을 다스리고 그다음 경인에 좌의정으로 승배(陞拜)하고 과국평난(光國平難)의 양훈을 책(策)하고 인성부군이 되었고 그다음 신묘 윤2월에 건저(建儲)를 하고자 하다가 상의 뜻을 크게 거스르고 그해 3월에 「爲大臣 沉于酒色 其誤國事 固矣」라는 안덕인인물 등의 저척을 받고 용산촌사(龍山村舍)에 나가서 특명(特命)하고 드디어 양사의 논계(論啟)를 받아 파직되고 처음은 명천에 배(配)하였다가 진주로 명이(命移)되자 강계로 개찬(改贊)되어 가극(加棘)까지 하였다.
쪽수▶P79-4宣祖 二十二年己丑 五十四歲가 되어 그 長子喪을 당하고 葬事를 지내러 高陽에 와 있을 때, 마츰 鄭汝立의 謀叛하는 일▶P80-1이 發聲되었다. 그 變을 듣고 即時 大內에 들어가니 上이 忠節을 獎勵하시고 右議政을 特拜하여 按治에 당하고 이어 崔永慶의 獄을 다스리고 그다음 庚寅에 左議政으로 陞拜하고 光國平難의 兩勳을 策하고 寅城府君이 되었고 그다음 辛卯閏二月에 建儲를 하고저 하다가 上의 뜻을 크게 거스르고 그해 三月에 「爲大臣 沉于酒色 其誤國事 固矣」라는 安德仁 등의 詆斥을 받고 龍山村舍에 나가서 特命하고 드듸어 兩司의 論啟를 받어 罷職되고 처음은 明川에 配하였다가 晉州로 命移되자 江界로 改贊되어 加棘까지 하였다.
쪽수▶P80-2그 이듬해는 임진난이라 대가(大駕)가 서수(西狩)하실 새 송경에 이르러 방석(放釋)하여 소명을 나리어 평양에 배알(拜謁)하고 의주로 호가(扈駕)하고 체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고 선조 26년(1593) 계사에 봉사(奉使)하여 명(明)에 갔다가 복명(復命)하고 동년 12월 18일 강화에서 졸(卒)하니 년이 58, 그 유저에는 송강집 7책과 가사 1책이 있다.
쪽수▶P80-2그 이듬해는 壬辰亂이라 大駕가 西狩하실 새 松京에 이르러 放釋하여 召命을 나리어 平壤에 拜謁하고 義州로 扈駕하고 體察使가 되어 江華에 멈으르고 宣祖二十六年(一五九三) 癸巳에 奉使하여 明에 갔다가 復命하고 同年十二月十八日 江華에서 卒하니 年이 五十八, 그 遺著에는 松江集 七冊과 歌辭 一册이 있다.
쪽수▶P80-3그의 일생은 이상과 같으려니와 다시 그에 대한 평들을 들어보면 송강별집서적 권2 연보에
쪽수▶P80-3그의 一生은 已上과 같으려니와 다시 그에 대한 評들을 들어보면 松江別集 卷二 年譜에
쪽수▶P80-4

退溪稿中 有古諫臣風

쪽수▶P80-4

退溪稿中 有古諫臣風

쪽수▶P80-5이라 하였고 우암집서적 사계어록에
쪽수▶P80-5이라 하였고 尤菴集 沙溪語錄에
쪽수▶P80-6

沙溪先生 嘗曰 君以鄭松江爲何如人 對曰 小子父兄 嘗言其淸直狹隘之人 先生曰 是矣 此公 自恃清白無瑕 眼下無人 終爲一世所仇嫉

쪽수▶P80-6

沙溪先生 嘗曰 君以鄭松江爲何如人 對曰 小子父兄 嘗言其淸直狹隘之人 先生曰 是矣 此公 自恃清白無瑕 眼下無人 終爲一世所仇嫉

쪽수▶P80-7이라 하였고 석담일기서적
쪽수▶P80-7이라 하였고 石潭日記에
쪽수▶P80-8

一日 上(宣祖) 問朴淳曰 予以澈 有才氣而狹隘 人多不合 然 若以澈爲小人 則渠必不服矣 淳曰 殿下 知澈 深矣

쪽수▶P80-8

一日 上(宣祖) 問朴淳曰 予以澈 有才氣而狹隘 人多不合 然 若以澈爲小人 則渠必不服矣 淳曰 殿下 知澈 深矣

쪽수▶P80-9라 하였고 구봉집서적 권지1 시 유남옥에
쪽수▶P80-9라 하였고 龜峯集 卷之一 詩 遊南獄에
쪽수▶P81-1

衣草人三四 於塵世外遊(龜峯) 洞深花意懶 山疊水聲幽(栗谷) 斷嶽盃中畵 長風袖裏秋(松江) 白雲山下起 歸路駕靑牛(牛溪)

쪽수▶P81-1

衣草人三四 於塵世外遊(龜峯) 洞深花意懶 山疊水聲幽(栗谷) 斷嶽盃中畵 長風袖裏秋(松江) 白雲山下起 歸路駕靑牛(牛溪)

쪽수▶P81-2라 하여 각기 성격을 말하였고 동권 지5 사율곡서후에
쪽수▶P81-2라 하여 各其 性格을 말하였고 同卷之五 祀栗谷書後에
쪽수▶P81-3

僕之疎迂(栗谷) 涵之好酒(松江) 原之退縮(牛溪) 皆可憂矣

쪽수▶P81-3

僕之疎迂(栗谷) 涵之好酒(松江) 原之退縮(牛溪) 皆可憂矣

쪽수▶P81-4라 하였고 송강별집서적 권6 부록 신흠찬전에
쪽수▶P81-4라 하였고 松江別集 卷六 附錄 申欽撰傳에
쪽수▶P81-5

觀其風調 麗落 咨性 清朗 愛人下士 不爲畛域 廉於物欲 信於交知 居家孝悌 立朝潔白 當求之古人中 有時 持杯半酣 口詠手書 長詩短歌 交就錯成 軟語團圞 形跡俱忘 爽然相對 不覺膝之前也 余見人 多矣 未嘗見此格韻也

쪽수▶P81-5

觀其風調 麗落 咨性 清朗 愛人下士 不爲畛域 廉於物欲 信於交知 居家孝悌 立朝潔白 當求之古人中 有時 持杯半酣 口詠手書 長詩短歌 交就錯成 軟語團圞 形跡俱忘 爽然相對 不覺膝之前也 余見人 多矣 未嘗見此格韻也

쪽수▶P81-6라 하였고 지천유사서적
쪽수▶P81-6라 하였고 遲川遺事에
쪽수▶P81-7

崔嗚吉 嘗問於李恒福曰 鄭松江 何如人 恒福曰 半醉時 抵掌談論 望之若天上人 豈俗子輩 所可彷彿乎 鳴吉 後語人曰 吾未見松江 而以白沙高眼 欽服如此 可想其言論風釆也

쪽수▶P81-7

崔嗚吉 嘗問於李恒福曰 鄭松江 何如人 恒福曰 半醉時 抵掌談論 望之若天上人 豈俗子輩 所可彷彿乎 鳴吉 後語人曰 吾未見松江 而以白沙高眼 欽服如此 可想其言論風釆也

쪽수▶P81-8라 하였다.
쪽수▶P81-8라 하였다.
쪽수▶P81-9그때 당로(當路)하여 그 파란이 중첩한 당쟁의 와중에 부침하고 여러 번 큼직한 옥사를 안치하게 되매 자연 득방(得謗)을 아니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송강인물은 강직은 하나 협애하다는 평을 듣는 이라 그 구질(仇嫉)을 받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는 정객으로보다도 한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더한 듯하다. 주와 색을 좋아한다는 것으로는 그다지 덜릴 것이 없다. 그는 꾀죄한 한낱 근칙(謹飭)에 그칠 이가 아니고 호일(豪逸)도 하고 방분(放奔)도 하다. 다만 그때 그것만으로 숭상하고 교양하던 유학과 한문에 젖어 그 구학을 벗어날 만한 별다른 사상은 없다더라도 때때로 자연과 인사에 대하여 남달리 감동하고 소박하게▶P82-1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지금 우리가 한 보배로 보는 그의 가사들이다. 그는 유학이나 한시문에 능하지마는 그의 참다운 조예와 생명은 그의 가사에 있는 것이다.
쪽수▶P81-9그때 當路하여 그 波瀾이 重疊한 黨爭의 渦中에 浮沉하고 여러 번 큼즉한 獄事를 按治하게 되매 자연 得謗을 아니 얻을 수 없다. 그런데 宋江은 剛直은 하나 狹隘하다는 評을 듣는 이라 그 仇嫉을 받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는 政客으로보다도 한 藝術家로서의 氣質이 더한 듯하다. 酒와 色을 좋아한다는 것으로는 그다지 덜릴 것이 없다. 그는 꾀죄한 한낱 謹飭에 그칠 이가 아니고 豪逸도 하고 放奔도 하다. 다만 그때 그것만으로 崇尙하고 敎養하든 儒學과 漢文에 젖어 그 溝壑을 벗어날 만한 별다른 思想은 없다드라도 때때로 自然과 人事에 대하여 남달리 感動하고 素朴하게▶P82-1率直하게 表現한 것이 지금 우리가 한 보배로 보는 그의 歌辭들이다. 그는 儒學이나 漢詩文에 能하지마는 그의 참다운 造詣와 生命은 그의 歌辭에 있는 것이다.




















본문2-2: 2.


쪽수▶P82-2서상함과 같이 송강인물이 우리 가도에 통달함은 그 소질과 수련에도 있으려니와 또는 얼마큼 그 전통도 있을 줄로 안다. 말하자면 송강인물김하서인물 인후에게, 하서는 송면앙인물 순에게 그걸 사수함이 아닌가 한다.
쪽수▶P82-2敍上함과 같이 宋江이 우리 歌道에 通達함은 그 素質과 修鍊에도 있으려니와 또는 얼마큼 그 傳統도 있을 줄로 안다. 말하자면 宋江은 金河西 麟厚에게, 河西는 宋俛仰 純에게 그걸 師受함이 아닌가 한다.
쪽수▶P82-3김인후인물는 자 후지 호 하서 또는 담재, 울산인 이조 중종 5년(1510) 전라도 장성 대맥동에서 생하고 진사문과로 홍문교리를 지내고 인종 동궁 때 경정에 시강하고 즉위한 뒤 남다른 총우를 받고 인종이 승하한 뒤에는 다시 사진(仕進)하지 않고 장성에 돌아가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수석을 사랑하여 음영도 하고 그러다가 명종 15년(1560)에 졸하니 년이 51. 현종조에 이르러 도덕풍절로서 이판을 추증(追贈)하고 정조조에는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시(諡)를 문정공이라 하고 문묘에 종사하였다.
쪽수▶P82-3金麟厚는 字 厚之 號 河西 또는 湛齋 蔚山人 李朝 中宗五年(一五一0) 全羅道 長城 大麥洞에서 生하고 進士文科로 弘文校理를 지내고 仁宗東宮 때 經筳에 侍講하고 卽位한 뒤 남다른 寵遇를 받고 仁宗이 昇遐한 뒤에는 다시 仕進하지 않고 長城에 돌아가서 後進들을 가르치고 水石을 사랑하여 吟詠도 하고 그러다가 明宗十五年(一五六0)에 卒하니 年이 五十一. 顯宗朝에 이르러 道德風節로서 吏判을 追贈하고 正祖朝에는 領議政으로 贈職되고 諡를 文正公이라 하고 文廟에 從祀하였다.
쪽수▶P82-4하서인물의 노래로는 지금 전하는 것은 도림사수가, 노화가, 자연가―이 세 수밖에 없는데 도림사수가, 노화가는 이미 판본의 고정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송강가사에 편입한 것은 과연 오착이고 또 자연가의
쪽수▶P82-4河西의 노래로는 지금 전하는 것은 悼林士遂歌 蘆花歌,自然歌―이 세 首밖에 없는데 悼林士遂歌, 蘆花歌는 이미 板本의 考訂에서 말한 바와 같이 松江歌辭에 編入한 것은 과연 誤錯이고 또 自然歌의
쪽수▶P82-5

靑山도 졀로졀로 綠水ㅣ라도 졀로졀로 山졀로졀로 水졀로졀로 山水間에 나도 졀로졀로 그 中에 졀로졀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졀로졀로ᄒᆞ리라

쪽수▶P82-5

靑山도 졀로졀로 綠水ㅣ라도 졀로졀로 山졀로졀로 水졀로졀로 山水間에 나도 졀로졀로 그 中에 졀로졀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졀로졀로ᄒᆞ리라

쪽수▶P82-6해동가요서적대동풍아서적송우암인물 시열의 작으로 되었으나 하서집서적 속편 권수에는
쪽수▶P82-6는 海東歌謠나 大東風雅에 宋尤菴 時烈의 作으로 되었으나 河西集 續編 卷首에는
쪽수▶P82-5

青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自然水自然自然 山水間我自然

쪽수▶P82-5

青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自然水自然自然 山水間我自然

쪽수▶P83-1이라 하여 하서인물의 작으로서 번역되었고 자연정이라는 정자(亭子)까지도 있었다 한다. 이보다 더 많이 그 작품을 얻어 볼 수 없음은 한한 노릇이로되 이것만으로도 넉넉히 그 의발(衣鉢)을 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이고 그리고 유학연원보서적에는 그가 김모재인물 안국의 문인으로만 되어있으나 하서집서적 권지7 부록 권2 서술에 「先生 初學於新平宋先生純 又出入于 新齋崔先生山斗 慕齋金先生安國 二生先之門」이라 한 것을 보면 송면앙인물 순에게 수업을 한 것도 사실이다.
쪽수▶P83-1이라 하여 河西의 作으로서 번역되었고 自然亭이라는 亭子까지도 있었다 한다. 이보다 더 많이 그 作品을 얻어볼 수 없음은 恨한 노릇이로되 이것만으로도 넉넉이 그 衣鉢을 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이고 그리고 儒學淵源譜에는 그가 金慕齋安國의 門人으로만 되어있으나 河西集 卷之七 附錄卷二 叙述에 「先生 初學於新平宋先生純 又出入于 新齋崔先生山斗 慕齋金先生安國 二生先之門」이라 한 것을 보면 宋俛仰 純에게 受業을 한 것도 事實이다.
쪽수▶P83-2송순인물은 자 수초 호 기촌, 또는 면앙정 , 신평인. 성종 24년(1493) 전라도 담양서 생하고 진사 문과로 호당에 뽑히고 참판에 있을 때 구수담과 체결하여 이의(異議)를 고생(皷生)하였다는 대계(臺啓)를 만나 서천으로 귀양도 가고 이기가 파상된 뒤 방환하여 우찬성도 되고 대소과 회방연도 치루고 기로사에도 들고 담양에 퇴로하매 정자를 지어 면앙정이라 하고 정벽에 「俛有地仰有天 亭中中興浩然 招風月揖山川 扶藜杖送百年」이라 써 붙이고 가사도 짓고 소일하다가 선조 16년(1583)에 졸하니 생이 91.
쪽수▶P83-2宋純은 字 遂初 號 企村, 또는 俛仰亭 新平人. 成宗二十四年(一四九三) 全羅道 譚陽서 生하고 進士 文科로 湖堂에 뽑히고 參判에 있을 때 具壽聃과 締結하여 異議를 皷生하였다는 臺啓를 맞나 舒川으로 귀양도 가고 李芑가 罷相된 뒤 放還하여 右贊成도 되고 大小科回榜宴도 치루고 耆老社에도 들고 潭陽에 退老하매 亭子를 지어 俛仰亭이라 하고 亭壁에 「俛有地仰有天 亭中中興浩然 招風月揖山川 扶藜杖送百年」이라 써 붙이고 歌辭도 짓고 消日하다가 宣祖十六年(一五八三)에 卒하니 生이 九十一.
쪽수▶P83-3그의 가사에 풍상가, 잘새가는 판본의 고정에서 말한 바와 같으려니와 그밖에 또 면앙정단가의
쪽수▶P83-3그의 歌辭에 風霜歌, 잘새歌는 板本의 考訂에서 말한 바와 같으려니와 긔밖에 또 俛仰亭短歌의
쪽수▶P83-4

俛則地兮 仰則天兮 兩位之際兮 從而生我分居焉 領溪山兮風月 將與偕分老云
廣廣之野兮 川亦修而修兮 如雪兮白沙 如雲之鋪分 無事携竿之人兮 會日落兮不知
松籬兮昇月 至竹梢兮轉離 玄琴兮樍按 岩邊兮猶坐 何許失伻兮鴻雁 獨鳴兮云徂▶P84-1山作兮屏風 野外兮周置 過去兮有雲 咸欲宿兮入來 何無小兮落日 而獨逾兮而去兮
見山頂兮夕陽 而跳游兮羣魚 惟無心兮此釣干 無以兮剩疑 满江月 將生此間 興兮不可支

쪽수▶P83-4

俛則地兮 仰則天兮 兩位之際兮 從而生我分居焉 領溪山兮風月 將與偕分老云
廣廣之野兮 川亦修而修兮 如雪兮白沙 如雲之鋪分 無事携竿之人兮 會日落兮不知
松籬兮昇月 至竹梢兮轉離 玄琴兮樍按 岩邊兮猶坐 何許失伻兮鴻雁 獨鳴兮云徂▶P84-1山作兮屏風 野外兮周置 過去兮有雲 咸欲宿兮入來 何無小兮落日 而獨逾兮而去兮
見山頂兮夕陽 而跳游兮羣魚 惟無心兮此釣干 無以兮剩疑 满江月 將生此間 興兮不可支

쪽수▶P84-2라고 번역된 것과 면앙정신번장가와 면앙속집서적 권지1 연행록단가 한 수가 전하여 있는데 면앙정장가는 면앙정가라고도 하여 지봉유설서적(이조 광해조인 이수광인물 저) 권14 가사에
쪽수▶P84-2라고 번역된 것과 俛仰亭新翻長歌와 俛仰續集卷之一 燕行錄短歌 한 首가 전하여 있는데 俛仰亭長歌는 俛仰亭歌라고도 하여 芝峯類說(李朝 光海朝人 李晬光著) 卷十四 歌詞에
쪽수▶P84-3

如近世 宋純 鄭徹 所作 最善―宋純俛仰亭歌―盛行於世

쪽수▶P84-3

如近世 宋純 鄭徹 所作 最善―宋純俛仰亭歌―盛行於世

쪽수▶P84-4라 하였고 순오지서적(효종조인 홍만종인물 저)에
쪽수▶P84-4라 하였고 旬五志(孝宗朝人 洪萬宗著)에
쪽수▶P84-5

俛仰亭歌 宋二相純所製 說盡山水之勝 舖張遊賞之樂中 自有浩然之越

쪽수▶P84-5

俛仰亭歌 宋二相純所製 說盡山水之勝 舖張遊賞之樂中 自有浩然之越

쪽수▶P84-6라 하였고 동악집서적(선조조인 이안눌인물 저) 권지9 면앙정차벽상운에는 그 밑의 주에
쪽수▶P84-6라 하였고 東岳集(宣祖朝人 李安訥著) 卷之九 俛仰亭次壁上韻에는 그 밑의 註에
쪽수▶P84-7

亭在府(潭陽)南十里許 故四宰(右贊成) 宋相公諱純之宅也 晚歳 退休竹亭 以居以終云

쪽수▶P84-7

亭在府(潭陽)南十里許 故四宰(右贊成) 宋相公諱純之宅也 晚歳 退休竹亭 以居以終云

쪽수▶P84-8이라 하여
쪽수▶P84-8이라 하여
쪽수▶P84-9

湖南形勝此山川 九邑峯巒一檻前 謝屐平生煩夢想 習迆暇日好留連 沙禽暝帶渓橋雨 岸樹秋疑野店烟 不用老夫新着句 相公歌曲至今傳

쪽수▶P84-9

湖南形勝此山川 九邑峯巒一檻前 謝屐平生煩夢想 習迆暇日好留連 沙禽暝帶渓橋雨 岸樹秋疑野店烟 不用老夫新着句 相公歌曲至今傳

쪽수▶P84-10이라 하였고 죽창한화서적(광해조인 이덕형인물 저)에
쪽수▶P84-10이라 하였고 竹窓閑話(光海朝人 李德炯著)에
쪽수▶P84-11

余爲全羅監司 巡到潭陽 時 府使 今判樞鄭公光績 謂余曰 本府十里外 有故钊書 宋公亭子 號爲俛仰 景致頍勝 幸襜帷暫臨 以辨淸遊 翌日 鄭公 先徍候焉 余亦繼至 亭臨絕岸 隱映於蒼松翠竹之間 眼界曠遠 山川風景 果爲道內名區▶P85-1余與府伯 登臨設酌 帶月而還 宋公諱純 風流豪邁 爲一代名卿 所著無等諸曲 至今傳唱 辭甚清婉

쪽수▶P84-11

余爲全羅監司 巡到潭陽 時 府使 今判樞鄭公光績 謂余曰 本府十里外 有故钊書 宋公亭子 號爲俛仰 景致頍勝 幸襜帷暫臨 以辨淸遊 翌日 鄭公 先徍候焉 余亦繼至 亭臨絕岸 隱映於蒼松翠竹之間 眼界曠遠 山川風景 果爲道內名區▶P85-1余與府伯 登臨設酌 帶月而還 宋公諱純 風流豪邁 爲一代名卿 所著無等諸曲 至今傳唱 辭甚清婉

쪽수▶P85-2이라 하였고 이 중의 무등제곡이란 건 즉 면앙정가를 이름이고 또 명미당서적(근대인 이영재인물 건창 저) 권5 시 면앙정에는 그 밑의 주에
쪽수▶P85-2이라 하였고 이 中의 無等諸曲이란 건 즉 俛仰亭歌를 이름이고 또 明美堂(近代人 李寧齋 建昌著) 卷五詩 俛仰亭에는 그 밑의 註에
쪽수▶P85-3

亭在潭陽 宋判書純故居 宋公 有重名 年九十 退於此 嘗出遊 朴思菴(淳) 鄭松江(澈) 季靑蓮(侯白) 林白湖(悌) 四公 爲擔其輿 正廟時 湖南道科 以擔輿俛仰亭 命題

쪽수▶P85-3

亭在潭陽 宋判書純故居 宋公 有重名 年九十 退於此 嘗出遊 朴思菴(淳) 鄭松江(澈) 季靑蓮(侯白) 林白湖(悌) 四公 爲擔其輿 正廟時 湖南道科 以擔輿俛仰亭 命題

쪽수▶P85-4라 하여
쪽수▶P85-4라 하여
쪽수▶P85-5

宋公名德使人思 鄉國風流盛一時 亭子依然江上在 轎夫如此世間奇 山光渺渺水千折 野影漫漫天四垂 俛仰無端一惆悵 今誰擔我我擔誰

쪽수▶P85-5

宋公名德使人思 鄉國風流盛一時 亭子依然江上在 轎夫如此世間奇 山光渺渺水千折 野影漫漫天四垂 俛仰無端一惆悵 今誰擔我我擔誰

쪽수▶P85-6라 하였고 조선인물호보서적(근대인 김용혁인물 저) 하권 면앙정조에는
쪽수▶P85-6라 하였고 朝鮮人物號譜(近代人 金龍赫著) 下卷 俛仰亭條에는
쪽수▶P85-7

松江諸公 皆服事之 享潭陽龜山祠

쪽수▶P85-7

松江諸公 皆服事之 享潭陽龜山祠

쪽수▶P85-8라 하였다.
쪽수▶P85-8라 하였다.
쪽수▶P85-9이상의 말들을 종합하여 보더라도 면앙정인물은 과연 그 풍류도 놀랍거니와 그 가도에도 그 연대의 한 거장임은 물론이다. 번역된 그 장단가들이 해독문 그대로 전하였더라면 더 얼마나 좋았을 것이냐. 다만 상풍가, 잘새가로도 그 조예가 어떠함은 족히 엿볼 수 있으며 송강인물의 가도도 간접으로나 또는 직접으로 그 사수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쪽수▶P85-9已上의 말들을 綜合하여 보드라도 俛仰亭은 과연 그 風流도 놀랍거니와 그 歌道에도 그 年代의 한 巨匠임은 물론이다. 翻譯된 그 長短歌들이 原文 그대로 전하였드라면 더 얼마나 좋았을 것이냐. 다만 霜風歌 잘새歌로도 그 造詣가 어떠함은 足히 엿볼 수 있으며 松江의 歌道도 間接으로나 또는 直接으로 그 師受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3: 參考


쪽수▶P86-11.俛仰亭新翻長歌 一篇
無等山兮一枝 東迤出兮遙絕 斯爲霽月峯兮 干其上兮登陟 無邊兮大野 曷爲兮斟酌而出 去之九曲兮 偕掩遮兮 群布其中兮一曲 若潛窟老龍 罷初睡兮矯苜 寬廣兮巖上 有松竹兮披拓 爱置兮亭子 若乘雲靑鶴 指千里兮張翼 玉泉山兮龍泉 有下兮其水 亭子前兮廣野 條復條兮派勢 綠何爲兮母白 廣何爲兮母修 疑長羅兮遍鋪 宛雙龍兮蚴蟉 何方逝兮何事促 如奔如追兮 會夜晝之不識 遵水兮沙汀 如雪兮平展 紛紛鴻雁 相戱兮何物 或集或下兮 或聚或散 間蘆花兮呌啄 廣野外兮長天 下有周包兮 由耶屛耶畫耶 若高若低兮 若續若斷 或往或住兮 或隱或現 而其紛紜之中兮 有若羚名兮 不畏天而獨立 秋月山兮作頭 龍龜夢仙佛 臺魚登湧 珍錦城山于虚空兮 羅列遠近窓間 一何多兮 和拌擔者烟霞 青者山嵐兮 白者雲 千巖萬壑 作渠家兮 而出而入 一畫圖兮常掛 或升或降兮 或浮長空 或度曠野 或絳或黑 或薄或濃兮 斜陽之與落 細雨之以澹 一年兮亦四時 何景兮不覩 百種劑發兮洞 林島鳴兮候 籃輿兮催路 松下曲逕兮來又去 綠楊有情兮 黃栗留嬌態兮 不勝樹竹兮參錯 綠陰兮攸凝 百尺闌千兮發長睡 水上凉風兮不知止 濃霜兮旣灑 山色兮錦繡 黃雲兮亦何爲 萬頃兮乎鋪 漁笛亦不勝興兮 隨月兮吹弄 草木兮旣盡枯 江山兮埋没 造物兮多事 裝之兮永雪 瓊宮珠戶兮 玉海銀山 粉 眼前兮布列 離人間而去來兮 而此身兮無暇 此欲見兮彼欲聞 風欲引兮月欲迓 江魚兮何時釣 花圃兮誰人鋤 此一方兮步視 煩惱兮心中 無可棄之事兮 朝猶歉兮夕豈厭 今日不足兮 來日豈不來 紛無問兮可休 則路徑兮雖夷徒 然一藜杖兮 亦將至兮盡磨 酒旣熟兮寕無友俾 或彈或引兮 或吹百種聲兮醉興催 憂何自兮愁何傳 或臥或起兮 或俛或仰 放肆兮遨遊 天地兮亦寬 廣日月兮亦閑暇 未嘗識羲皇兮 此世界兮未嘗識 神仙兮其我身兮 此江山兮風月 茍管領兮亨百年 被岳陽▶P87-1樓上兮 縱令李太白兮 居之浩蕩兮 情懷何有兮 加焉如是 游且老兮亦君恩.
쪽수▶P86-11.俛仰亭新翻長歌 一篇
無等山兮一枝 東迤出兮遙絕 斯爲霽月峯兮 干其上兮登陟 無邊兮大野 曷爲兮斟酌而出 去之九曲兮 偕掩遮兮 群布其中兮一曲 若潛窟老龍 罷初睡兮矯苜 寬廣兮巖上 有松竹兮披拓 爱置兮亭子 若乘雲靑鶴 指千里兮張翼 玉泉山兮龍泉 有下兮其水 亭子前兮廣野 條復條兮派勢 綠何爲兮母白 廣何爲兮母修 疑長羅兮遍鋪 宛雙龍兮蚴蟉 何方逝兮何事促 如奔如追兮 會夜晝之不識 遵水兮沙汀 如雪兮平展 紛紛鴻雁 相戱兮何物 或集或下兮 或聚或散 間蘆花兮呌啄 廣野外兮長天 下有周包兮 由耶屛耶畫耶 若高若低兮 若續若斷 或往或住兮 或隱或現 而其紛紜之中兮 有若羚名兮 不畏天而獨立 秋月山兮作頭 龍龜夢仙佛 臺魚登湧 珍錦城山于虚空兮 羅列遠近窓間 一何多兮 和拌擔者烟霞 青者山嵐兮 白者雲 千巖萬壑 作渠家兮 而出而入 一畫圖兮常掛 或升或降兮 或浮長空 或度曠野 或絳或黑 或薄或濃兮 斜陽之與落 細雨之以澹 一年兮亦四時 何景兮不覩 百種劑發兮洞 林島鳴兮候 籃輿兮催路 松下曲逕兮來又去 綠楊有情兮 黃栗留嬌態兮 不勝樹竹兮參錯 綠陰兮攸凝 百尺闌千兮發長睡 水上凉風兮不知止 濃霜兮旣灑 山色兮錦繡 黃雲兮亦何爲 萬頃兮乎鋪 漁笛亦不勝興兮 隨月兮吹弄 草木兮旣盡枯 江山兮埋没 造物兮多事 裝之兮永雪 瓊宮珠戶兮 玉海銀山 粉 眼前兮布列 離人間而去來兮 而此身兮無暇 此欲見兮彼欲聞 風欲引兮月欲迓 江魚兮何時釣 花圃兮誰人鋤 此一方兮步視 煩惱兮心中 無可棄之事兮 朝猶歉兮夕豈厭 今日不足兮 來日豈不來 紛無問兮可休 則路徑兮雖夷徒 然一藜杖兮 亦將至兮盡磨 酒旣熟兮寕無友俾 或彈或引兮 或吹百種聲兮醉興催 憂何自兮愁何傳 或臥或起兮 或俛或仰 放肆兮遨遊 天地兮亦寬 廣日月兮亦閑暇 未嘗識羲皇兮 此世界兮未嘗識 神仙兮其我身兮 此江山兮風月 茍管領兮亨百年 被岳陽▶P87-1樓上兮 縱令李太白兮 居之浩蕩兮 情懷何有兮 加焉如是 游且老兮亦君恩.
쪽수▶P87-22. 燕行錄短歌
二十一日 李珥上踕曰 朝廷百官中 校理宋純 可遣燕京 上答曰 予意所當者 即招宋純至 上日 卿可行燕京 即賜 缺缺 一件
쪽수▶P87-22. 燕行錄短歌
二十一日 李珥上踕曰 朝廷百官中 校理宋純 可遣燕京 上答曰 予意所當者 即招宋純至 上日 卿可行燕京 即賜 缺缺 一件
쪽수▶P87-3十三日 發行裝 入謝恩而出 時 李滉 李珥 柳希春 奇大升 羅世纘 金麟厚 洪春卿 洪春年 臨別 各作詩傾盃 李珥曰 美哉 宋先生此行 何異於神仙乎 李滉 羅世纘曰 他日 玉堂輩 今作燕京仙 宋公 馬上 感上恩 口占作歌曰
쪽수▶P87-3十三日 發行裝 入謝恩而出 時 李滉 李珥 柳希春 奇大升 羅世纘 金麟厚 洪春卿 洪春年 臨別 各作詩傾盃 李珥曰 美哉 宋先生此行 何異於神仙乎 李滉 羅世纘曰 他日 玉堂輩 今作燕京仙 宋公 馬上 感上恩 口占作歌曰
쪽수▶P87-4

上有堯舜之君 四方皆太乎烟花로다 머리를 고텨 ᄭᆡ워 玉簪을 ᄀᆞ라고 燕京에 조회ᄒᆞᆫ 노신이야 죽어 ᄇᆡᆨ골이 된ᄃᆞᆯ 충셩을 변ᄒᆞᆯ소냐

쪽수▶P87-4

上有堯舜之君 四方皆太乎烟花로다 머리를 고텨 ᄭᆡ워 玉簪을 ᄀᆞ라고 燕京에 조회ᄒᆞᆫ 노신이야 죽어 ᄇᆡᆨ골이 된ᄃᆞᆯ 충셩을 변ᄒᆞᆯ소냐

쪽수▶P87-5叔獻(珥) 答謌曰
쪽수▶P87-5叔獻(珥) 答謌曰
쪽수▶P87-6

저긔 가시ᄂᆞᆫ 宋夫子ᄂᆞᆫ 道德文章 뉘가 모랄손가 湖堂玉堂柱石ᄒᆞᄂᆞᆫ 宋夫子ᄂᆞᆫ 國恩이버 장정에 나아간다

쪽수▶P87-6

저긔 가시ᄂᆞᆫ 宋夫子ᄂᆞᆫ 道德文章 뉘가 모랄손가 湖堂玉堂柱石ᄒᆞᄂᆞᆫ 宋夫子ᄂᆞᆫ 國恩이버 장정에 나아간다

쪽수▶P87-7洪石壁(春卿) 和謌曰
쪽수▶P87-7洪石壁(春卿) 和謌曰
쪽수▶P87-8

宋夫子斯文道德의 일홈은 엇지 東方ᄲᅮᆫ이리오 大明皇帝 宋夫子 일홈 듣고 안지겻다 千萬歲後에 이날 恩光 이즐소냐.

쪽수▶P87-8

宋夫子斯文道德의 일홈은 엇지 東方ᄲᅮᆫ이리오 大明皇帝 宋夫子 일홈 듣고 안지겻다 千萬歲後에 이날 恩光 이즐소냐.

쪽수▶P87-9諸賢 作別而罷 栗谷日記又松齋日記
쪽수▶P87-9諸賢 作別而罷 栗谷日記又松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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