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본문4: 4.공법 정착 이후의 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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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0번={{TagSpage|99-4}}<blockquote no="05">備考 一, 頃畝法에서는 周尺 方五尺 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 百畝爲一頃이다. 따라서 一畝는 六千平方周尺이다<sup>世宗實錄 二十五年 十一月 甲子條</sup>.<br/>二, 여기 結負를 頃畝로 換算할 때에 使用한 {{ruby|周尺|○○}}은 그 實長이 曲尺 六寸六分에 該當하니(柳馨遠磻溪隨錄 卷二 所載 世宗朝所定 周尺圖<sup>後世復原者也</sup> 及 增補文獻備考 卷九十一 樂考度量衡條 參照), 이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田 各 一結의 實積을 尺貫法 度量衡의 坪數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br/>上田一結 一, 八四六坪强 一, 八四四坪<br/>中田一結 二, 八九七坪弱 二, 八九七坪{{TagPage|100-1}}<br/>下田一結 四, 一八四坪弱 四, 一八二坪<br/>(下段의 數字는 和田一郎博士 著 「朝鮮의 土地制度 及 地稅制度 調査報告書」 大正 九年 刊中의 數字 同書 六九五頁)<br/>三, 또 上中下 三種田의 量田尺에 依한 面積과 (三種田이 다 各其 量田尺으로 六尺爲一步 三十五步 平方爲一結, 即 一結은 二百十量田尺平方 即 四萬四千一百平方尺) 周尺에 依한 面積(上田은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과의 關係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量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br/>上田尺 曲一·二二八尺(0.66曲尺×√152568(周尺)÷210(量田尺)=1.2276曲尺etc.)<br/>中田尺 曲一·五三七尺<br/>下田尺 曲一·八四八尺<br/>이에 三種尺의 實長은 二指計十<sup>(指幅)</sup> 云々의 淵源에 符節을 合하듯이 맞는다.<br/>四, 手指尺의 性質을 最初에 생각해 본 이는 丁茶山인데 그는 經世遺表(卷九 結負考辨)에서 手指尺을 規定하야 <cite no="01">「⋯⋯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cite>라 하얐으니 即 「指」라는 것을 「뺌」으로 解釋한 것이다. 그러나 指를 뺌으로 解釋한다면 吾人이 本項 冒頭에 揭出한바 手指尺에 關한 두 가지 資料 中 後者 即 龍飛御天歌의 二十指·二十五指·三十指 說을 說明할 수가 있으나 前者 即 世宗實錄에 보이는 河演 上言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 說을 說明할 수가 없을 뿐더러(萬一 指를 뺌이라면 二指計十 等의 苟且한 表現法을 取할 理가 없다) 三種尺의 實長이 너머 기러저서 上田一結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의 實積에 到底히 符合치 아니하야 그 不當한 것이 的確한즉, 이는 그의 千慮一失에 屬하는 것이다. 다음에 手指尺의 實長을 實際로 計算한 사람은 河合弘民 博士인데 (同文館判, 經濟大辭書 結負條 參照, 大正 三年 刊), 그는 그의 計算 經路를 仔細이 밝히지 아니하얐으나 何如間에 龍飛御天歌에 실려 있는 上中下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와 結負{{TagPage|101-1}} 作成法에 依하야 計算하였다는 것인데 그 結果 一{{ruby|指長曲尺一寸三分餘|○○○○○○○○○}} 即 一等田尺一尺長 二尺六寸餘를 得하얐다. 그러나 龍飛御天歌의 資料란 딴 것이 아니니, 三等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는 吾人이 前揭 使用한 것이오 結負 作成法이라는 것은 <cite no="02">「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ruby|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cite>로 叙述되여 있는 것이니 實積 四十四尺一寸爲束이라는 말은 實積 四百四十一尺爲一負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實積 四萬四千一百尺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二百十尺平方爲一結(√44100=210) 即 六尺爲一步, 三十五步平方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當然이 吾人의 得한 結果와 符合하여야 할 것이다. 勿論 博士도 周尺長은 曲六寸六分임을 알고 있다(前揭 辭書 土地制度條 參照). 吾人의 {{ruby|計算|○○}}에 틀림이 없는 限 博士의 得한 結果는 誤謬이다. 그리고 博士는 {{ruby|一指|○○}}長曲尺一寸三分餘를 得하고는 「一指」의 處置에 困難하야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曲一寸三分餘에는 當치 않다), <cite no="03">「一指란 손가락 두 개의 幅이리라」</cite>고 附說하였으나 거북한 說明이다. 다음 和田一郎 博士는 高麗 結負를 論할 지음에, 上中下三種田의 坪數만 算出하고 (前出. 方法은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에 依하야), 三種手指尺의 說明은 不可解라 하야 抛棄하였다(前揭 書 六九六頁). 河合 博士의 論文이 計算의 經過를 밝히지 안 하였음으로 盛岡高農 鏡保之助敎授가 다시 手指尺長의 計算을 試하였는데(盛岡高等農林學校 創立 二十五周年 記念論叢. 昭和 三年 刊. 「時代를 달리 한 結負制度 間의 脈絡.」), 敎授는 計算의 資料를 專혀 文獻 備考에 是賴한 지라 同書 卷百四十八에 工巧롭게도 魚魯之謬를 犯하야 있는바 世宗 二十五年 賛成 河演 上言 中에 보이는 高麗 結負制에 關한 數字를 無批判하게 써서 計算을 하야(雪上加霜으로 氏의 計算法이 亦 荒唐無稽하다) 結局 一指長 曲一寸二分七厘一毛 即 一等{{TagPage|102-1}}尺長二尺五寸四分二厘를 得하였다. 文獻 備考만을 是賴하였다 하지마는 同書 中에는 前記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만 있는 것이 아니라, 亦是 正當한 資料도 있으니 그것은 李朝 肅宗 三十五年 平川君 申琓의 上疏에 보이는 數字로(同書 卷百四十二), 亦是 龍飛御天歌와 같이 <cite no="04">「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cite>의 說明法이다. 鏡氏도 한 번은 이 數字를 들어서 計算을 하야 一指長曲五分九厘五毛 即 上田尺長曲一尺 二寸九分을 得하였으나 (事實은 吾人의 得한 結果와 當然이 符合하여야 할 것이지마는 거기도 計算의 差錯이 있어 近似하게밖에 못 되였다.) 博士 河合弘氏의 一指長一寸三分餘에는 大端이 距離가 먼 지라 周章狼狽하야 平川君疏 中의 數字를 誤謬라 하야 버리고, 前記와 같이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 中의 數字를 取하야 計算한 結果, 偶然이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니 이것은 河合 博士의 一指에 가까운 지라, 大喜하고 다음엔 一步를 進하여 河合 博士와 自己와의 相異는 博士의 計算이 不精한 타시라고 定해 버렸다. 또,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고는 그 結果를 高麗 結負法의 他要素에 類推하야 새로운 臆說을 創造하였으나 本論에는 그다지 緊要치 안 하니 多及치 안 한다. 何如間에 手指尺의 考究가 從來 以上과 같음으로 그 眞意을 沒却할가 저어하야 多少 長皇한 叙述을 試한 바이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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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0번={{TagSpage|99-4}}<blockquote no="05">備考 一, 頃畝法에서는 周尺 方五尺 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 百畝爲一頃이다. 따라서 一畝는 六千平方周尺이다<sup>世宗實錄 二十五年 十一月 甲子條</sup>.<br/>二, 여기 結負를 頃畝로 換算할 때에 使用한 {{ruby|周尺|○○}}은 그 實長이 曲尺 六寸六分에 該當하니(柳馨遠磻溪隨錄 卷二 所載 世宗朝所定 周尺圖<sup>後世復原者也</sup> 及 增補文獻備考 卷九十一 樂考度量衡條 參照), 이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田 各 一結의 實積을 尺貫法 度量衡의 坪數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br/>上田一結 一, 八四六坪强 一, 八四四坪<br/>中田一結 二, 八九七坪弱 二, 八九七坪{{TagPage|100-1}}<br/>下田一結 四, 一八四坪弱 四, 一八二坪<br/>(下段의 數字는 和田一郎博士 著 「朝鮮의 土地制度 及 地稅制度 調査報告書」 大正 九年 刊中의 數字 同書 六九五頁)<br/>三, 또 上中下 三種田의 量田尺에 依한 面積과 (三種田이 다 各其 量田尺으로 六尺爲一步 三十五步 平方爲一結, 即 一結은 二百十量田尺平方 即 四萬四千一百平方尺) 周尺에 依한 面積(上田은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과의 關係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量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br/>上田尺 曲一·二二八尺(0.66曲尺×√152568(周尺)÷210(量田尺)=1.2276曲尺etc.)<br/>中田尺 曲一·五三七尺<br/>下田尺 曲一·八四八尺<br/>이에 三種尺의 實長은 二指計十<sup>(指幅)</sup> 云々의 淵源에 符節을 合하듯이 맞는다.<br/>四, 手指尺의 性質을 最初에 생각해 본 이는 丁茶山인데 그는 經世遺表(卷九 結負考辨)에서 手指尺을 規定하야 <cite no="01">⋯⋯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cite>라 하얐으니 即 「指」라는 것을 「뺌」으로 解釋한 것이다. 그러나 指를 뺌으로 解釋한다면 吾人이 本項 冒頭에 揭出한바 手指尺에 關한 두 가지 資料 中 後者 即 龍飛御天歌의 二十指·二十五指·三十指 說을 說明할 수가 있으나 前者 即 世宗實錄에 보이는 河演 上言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 說을 說明할 수가 없을 뿐더러(萬一 指를 뺌이라면 二指計十 等의 苟且한 表現法을 取할 理가 없다) 三種尺의 實長이 너머 기러저서 上田一結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의 實積에 到底히 符合치 아니하야 그 不當한 것이 的確한즉, 이는 그의 千慮一失에 屬하는 것이다. 다음에 手指尺의 實長을 實際로 計算한 사람은 河合弘民 博士인데 (同文館判, 經濟大辭書 結負條 參照, 大正 三年 刊), 그는 그의 計算 經路를 仔細이 밝히지 아니하얐으나 何如間에 龍飛御天歌에 실려 있는 上中下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와 結負{{TagPage|101-1}} 作成法에 依하야 計算하였다는 것인데 그 結果 一{{ruby|指長曲尺一寸三分餘|○○○○○○○○○}} 即 一等田尺一尺長 二尺六寸餘를 得하얐다. 그러나 龍飛御天歌의 資料란 딴 것이 아니니, 三等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는 吾人이 前揭 使用한 것이오 結負 作成法이라는 것은 <cite no="02">「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ruby|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cite>로 叙述되여 있는 것이니 實積 四十四尺一寸爲束이라는 말은 實積 四百四十一尺爲一負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實積 四萬四千一百尺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二百十尺平方爲一結(√44100=210) 即 六尺爲一步, 三十五步平方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當然이 吾人의 得한 結果와 符合하여야 할 것이다. 勿論 博士도 周尺長은 曲六寸六分임을 알고 있다(前揭 辭書 土地制度條 參照). 吾人의 {{ruby|計算|○○}}에 틀림이 없는 限 博士의 得한 結果는 誤謬이다. 그리고 博士는 {{ruby|一指|○○}}長曲尺一寸三分餘를 得하고는 「一指」의 處置에 困難하야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曲一寸三分餘에는 當치 않다), <cite no="03">「一指란 손가락 두 개의 幅이리라」</cite>고 附說하였으나 거북한 說明이다. 다음 和田一郎 博士는 高麗 結負를 論할 지음에, 上中下三種田의 坪數만 算出하고 (前出. 方法은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에 依하야), 三種手指尺의 說明은 不可解라 하야 抛棄하였다(前揭 書 六九六頁). 河合 博士의 論文이 計算의 經過를 밝히지 안 하였음으로 盛岡高農 鏡保之助敎授가 다시 手指尺長의 計算을 試하였는데(盛岡高等農林學校 創立 二十五周年 記念論叢. 昭和 三年 刊. 「時代를 달리 한 結負制度 間의 脈絡.」), 敎授는 計算의 資料를 專혀 文獻 備考에 是賴한 지라 同書 卷百四十八에 工巧롭게도 魚魯之謬를 犯하야 있는바 世宗 二十五年 賛成 河演 上言 中에 보이는 高麗 結負制에 關한 數字를 無批判하게 써서 計算을 하야(雪上加霜으로 氏의 計算法이 亦 荒唐無稽하다) 結局 一指長 曲一寸二分七厘一毛 即 一等{{TagPage|102-1}}尺長二尺五寸四分二厘를 得하였다. 文獻 備考만을 是賴하였다 하지마는 同書 中에는 前記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만 있는 것이 아니라, 亦是 正當한 資料도 있으니 그것은 李朝 肅宗 三十五年 平川君 申琓의 上疏에 보이는 數字로(同書 卷百四十二), 亦是 龍飛御天歌와 같이 <cite no="04">「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cite>의 說明法이다. 鏡氏도 한 번은 이 數字를 들어서 計算을 하야 一指長曲五分九厘五毛 即 上田尺長曲一尺 二寸九分을 得하였으나 (事實은 吾人의 得한 結果와 當然이 符合하여야 할 것이지마는 거기도 計算의 差錯이 있어 近似하게밖에 못 되였다.) 博士 河合弘氏의 一指長一寸三分餘에는 大端이 距離가 먼 지라 周章狼狽하야 平川君疏 中의 數字를 誤謬라 하야 버리고, 前記와 같이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 中의 數字를 取하야 計算한 結果, 偶然이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니 이것은 河合 博士의 一指에 가까운 지라, 大喜하고 다음엔 一步를 進하여 河合 博士와 自己와의 相異는 博士의 計算이 不精한 타시라고 定해 버렸다. 또,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고는 그 結果를 高麗 結負法의 他要素에 類推하야 새로운 臆說을 創造하였으나 本論에는 그다지 緊要치 안 하니 多及치 안 한다. 何如間에 手指尺의 考究가 從來 以上과 같음으로 그 眞意을 沒却할가 저어하야 多少 長皇한 叙述을 試한 바이다.</blockquote>
 
|목차1-1원문11번={{TagSpage|102-2}}그런데 上中下 三種田의 實際 分布 狀況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慶尙·全羅道에서는 上田은 千結 中에 一二結 中 田은 百結 中에 一二結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었다. 또 慶尙·全羅 以外의 道에는 上田은 絕無하고 千結 中에 一二結의 中田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였다. 即 大凡하게 말하자면 全國 田은 一結五十七畝의 劃一的인 制度에 依存하고 있었든 것이다.<sup>(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sup>
 
|목차1-1원문11번={{TagSpage|102-2}}그런데 上中下 三種田의 實際 分布 狀況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慶尙·全羅道에서는 上田은 千結 中에 一二結 中 田은 百結 中에 一二結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었다. 또 慶尙·全羅 以外의 道에는 上田은 絕無하고 千結 中에 一二結의 中田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였다. 即 大凡하게 말하자면 全國 田은 一結五十七畝의 劃一的인 制度에 依存하고 있었든 것이다.<sup>(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sup>
 
|목차1-1원문12번={{TagSpage|102-3}}다음 田分 三等法의 是非를 暫間 檢討하건댄 大關切 三種田의 面積比는 16:25:36이오 그것들에서 同額의 租稅를 (一結三十斗) 徵收한다 하니 그렇면 此等 三種田 同一面積의 生產量의 比는 一等田:二等田=25:16과, 二等田:三等田=26:25와의 連比 67:42:30(이 數字{{TagPage|103-1}}는 後에 말할 바와 같이, 世宗이 新量田法을 設定하라고 三種田法의 不合理를 論할 때에 든 數字인데 그것은 當時 一結稅額 三十斗가 가르키는 數 三十을 便宜上 下田에 配當하고 作成한 數字로 槪算이다.)이 되여야 처음으로 收稅의 公平을 期할 수가 있을 것이다. 果然 三種量田尺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과 三種田 同一面積의 收量과의 사이에 이러한 偶然的인 神秘的인 關係가 存在할 수가 있었을가. 全然 생각지 못할 일이다. 實로 三種尺의 決定, 따라서 또 그 平方으로 되는 地積의 決定은 가장 原始的인 自然發生的인 數 觀念의 基礎 우에 선 것이였다.
 
|목차1-1원문12번={{TagSpage|102-3}}다음 田分 三等法의 是非를 暫間 檢討하건댄 大關切 三種田의 面積比는 16:25:36이오 그것들에서 同額의 租稅를 (一結三十斗) 徵收한다 하니 그렇면 此等 三種田 同一面積의 生產量의 比는 一等田:二等田=25:16과, 二等田:三等田=26:25와의 連比 67:42:30(이 數字{{TagPage|103-1}}는 後에 말할 바와 같이, 世宗이 新量田法을 設定하라고 三種田法의 不合理를 論할 때에 든 數字인데 그것은 當時 一結稅額 三十斗가 가르키는 數 三十을 便宜上 下田에 配當하고 作成한 數字로 槪算이다.)이 되여야 처음으로 收稅의 公平을 期할 수가 있을 것이다. 果然 三種量田尺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과 三種田 同一面積의 收量과의 사이에 이러한 偶然的인 神秘的인 關係가 存在할 수가 있었을가. 全然 생각지 못할 일이다. 實로 三種尺의 決定, 따라서 또 그 平方으로 되는 地積의 決定은 가장 原始的인 自然發生的인 數 觀念의 基礎 우에 선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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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2원문2번={{TagSpage|121-2}}二十五年 十月 癸丑 下敎의 其一―結負法을 廢止하야 量田은 實積主義의 頃畝法에 依하야 統一하고 다만 田品을 五等으로 나누어서 收租에 階段을 둔다는 原則과 및 其後의 諸實踐은 守舊論者들의 시끄러운 反對論을 惹起하였다. 그들의 論旨를 들으면 다음과 같었다.
 
|목차3-2원문2번={{TagSpage|121-2}}二十五年 十月 癸丑 下敎의 其一―結負法을 廢止하야 量田은 實積主義의 頃畝法에 依하야 統一하고 다만 田品을 五等으로 나누어서 收租에 階段을 둔다는 原則과 및 其後의 諸實踐은 守舊論者들의 시끄러운 反對論을 惹起하였다. 그들의 論旨를 들으면 다음과 같었다.
 
|목차3-2원문3번={{TagSpage|121-3}}<blockquote no="16">{{ruby|第一로|○○○}}, 王은 結負制를 古制(中華先王之制)가 아니라 하야 排斥하고, 즐겨 頃畝法을 採用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古制라 하드라도 百姓에 大利害가 없고, 다만 一般의 視聽을 驚駭케 할 뿐이 아니냐. {{ruby|다음|○○}} 頃畝法을 採用하면, 五等田의 一單位面積은 다 같은 故로 그들의 稅額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年分九等法을 乘하면, 都合 五九四十五種의 各異한 稅額을 區別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여, 算計煩冗하야 奸吏가 因緣爲盜할 것이다. {{ruby|또|○}}, 從來에 兵役과 賦役은 結負法에 依하야 一結幾何라는 標準으로 簡單이 賦課할 수가 있었으나, 頃畝法에 依하야 田分五等으로 稅額이 各異하야지면, 兵役과 賦役의 賦課率도 또한 煩鎻하야 질 것이다. 頃畝法은 以上의 三缺陷을 가진 것이니, 在來의 結負法을 좇아 諸等田의 面積의 廣狹을 適宜斟酌하야 同一 名目의 一結로 하고, 거기다 同科收租를 하는 것이 좋다. 一結의 稅額이 皆同하면 오직 年分에 依한 差異가 있을 뿐으로 其法이 極簡하다.</blockquote>
 
|목차3-2원문3번={{TagSpage|121-3}}<blockquote no="16">{{ruby|第一로|○○○}}, 王은 結負制를 古制(中華先王之制)가 아니라 하야 排斥하고, 즐겨 頃畝法을 採用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古制라 하드라도 百姓에 大利害가 없고, 다만 一般의 視聽을 驚駭케 할 뿐이 아니냐. {{ruby|다음|○○}} 頃畝法을 採用하면, 五等田의 一單位面積은 다 같은 故로 그들의 稅額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年分九等法을 乘하면, 都合 五九四十五種의 各異한 稅額을 區別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여, 算計煩冗하야 奸吏가 因緣爲盜할 것이다. {{ruby|또|○}}, 從來에 兵役과 賦役은 結負法에 依하야 一結幾何라는 標準으로 簡單이 賦課할 수가 있었으나, 頃畝法에 依하야 田分五等으로 稅額이 各異하야지면, 兵役과 賦役의 賦課率도 또한 煩鎻하야 질 것이다. 頃畝法은 以上의 三缺陷을 가진 것이니, 在來의 結負法을 좇아 諸等田의 面積의 廣狹을 適宜斟酌하야 同一 名目의 一結로 하고, 거기다 同科收租를 하는 것이 좋다. 一結의 稅額이 皆同하면 오직 年分에 依한 差異가 있을 뿐으로 其法이 極簡하다.</blockquote>
|목차3-2원문4번={{TagSpage|121-4}}【筆者는 생각컨대 此種論者의 頃畝法 反對 理由의 하나로, 여기는 叙述되여 있지 아니하지만, 頃畝法 實施에 依하야 當然이 惹起될 또 한 가지 混亂이 있다. 그것은 諸處折給田 特히 科田·功臣田·別賜田 等 私田의 折給額에 關한 問題다. 從來 此等私田은 結單位로써 折給되여 있고, 一結當 收稅額은 皆同하였든 故로 田主 等은 此等 私田에서 아모 不平이 없이 自己에게 도라오는 稅額을 安心하고 取할 수가 있었으나, 萬一 頃畝法으로 하야 一結의 田積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稅額이 各異하야진다면, 私田의 受給者들은 從來와 같이 不平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도라오는 稅를 取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無限한 混亂이 惹起될 것은 當然한 일이{{TagPage|122-1}}다. 그렇다고 해서 田의 等級에 依하야 私田의 折給額을 加減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田制의 根本을 攪亂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야 頃畝制는 이 社會의 封建官僚에 對하야 어듸까지든지 귀찮은 物件이었다. 일즉이 柳磻溪는 그 隨錄(卷之一)에 있어서 <cite no="09">「{{ruby|古|○}}(中國){{ruby|之頃畝|○○○}}는 {{ruby|主地|○○}}(積)하고, {{ruby|今|○}}(朝鮮) {{ruby|之結負|○○○}}는 {{ruby|主稅|○○}}한다」</cite>는 것을 論하고, <cite no="10">「{{ruby|古今法制|○○○○}}의 {{ruby|指意所分|○○○○}}이 {{ruby|斯可見矣|○○○○}}로다」</cite>하고 痛歎한 일이 있지마는, 二 所謂 「指意」란, 이 全體로서의 封建政府 그것의 指意이기 前에, 爲先 個人으로서의 封建官僚의 指意이었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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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2원문4번={{TagSpage|121-4}}【筆者는 생각컨대 此種論者의 頃畝法 反對 理由의 하나로, 여기는 叙述되여 있지 아니하지만, 頃畝法 實施에 依하야 當然이 惹起될 또 한 가지 混亂이 있다. 그것은 諸處折給田 特히 科田·功臣田·別賜田 等 私田의 折給額에 關한 問題다. 從來 此等私田은 結單位로써 折給되여 있고, 一結當 收稅額은 皆同하였든 故로 田主 等은 此等 私田에서 아모 不平이 없이 自己에게 도라오는 稅額을 安心하고 取할 수가 있었으나, 萬一 頃畝法으로 하야 一結의 田積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稅額이 各異하야진다면, 私田의 受給者들은 從來와 같이 不平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도라오는 稅를 取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無限한 混亂이 惹起될 것은 當然한 일이{{TagPage|122-1}}다. 그렇다고 해서 田의 等級에 依하야 私田의 折給額을 加減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田制의 根本을 攪亂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야 頃畝制는 이 社會의 封建官僚에 對하야 어듸까지든지 귀찮은 物件이었다. 일즉이 柳磻溪는 그 隨錄(卷之一)에 있어서 <cite no="10">「{{ruby|古|○}}(中國){{ruby|之頃畝|○○○}}는 {{ruby|主地|○○}}(積)하고, {{ruby|今|○}}(朝鮮) {{ruby|之結負|○○○}}는 {{ruby|主稅|○○}}한다」</cite>는 것을 論하고, <cite no="11">「{{ruby|古今法制|○○○○}}의 {{ruby|指意所分|○○○○}}이 {{ruby|斯可見矣|○○○○}}로다」</cite>하고 痛歎한 일이 있지마는, 二 所謂 「指意」란, 이 全體로서의 封建政府 그것의 指意이기 前에, 爲先 個人으로서의 封建官僚의 指意이었든 것이다.】
 
|목차3-2원문5번={{TagSpage|122-2}}此에 對하야 王은 다음과 같이 反駁하였다.
 
|목차3-2원문5번={{TagSpage|122-2}}此에 對하야 王은 다음과 같이 反駁하였다.
 
|목차3-2원문6번={{TagSpage|122-3}}<blockquote no="17">{{ruby|第一로|○○○}} {{ruby|頃畝法이|○○○○}} {{ruby|一定하면|○○○○}}, {{ruby|地品의|○○○}} {{ruby|高下를|○○○}} {{ruby|變更할|○○○}} {{ruby|境遇에는|○○○○}} {{ruby|다만|○○}} {{ruby|그|○}} {{ruby|稅額을|○○○}} {{ruby|改定하면|○○○○}} {{ruby|그만이요|○○○○}}, {{ruby|量田의|○○○}} {{ruby|數는|○○}} {{ruby|自若하야|○○○○}} {{ruby|何等의|○○○}} {{ruby|變更을|○○○}} {{ruby|받지|○○}} {{ruby|아니한다|○○○○}}. {{ruby|그러나|○○○}} {{ruby|萬一|○○}} {{ruby|地品에|○○○}} {{ruby|依하야|○○○}} {{ruby|結負를|○○○}} {{ruby|定한다면|○○○○}}, {{ruby|地品을|○○○}} {{ruby|變更할|○○○}} {{ruby|때마다|○○○}} {{ruby|自然이|○○○}} {{ruby|結負의|○○○}} {{ruby|數가|○○}} {{ruby|變化를|○○○}} {{ruby|받고|○○}}, {{ruby|따라서|○○○}} {{ruby|田制의|○○○}} {{ruby|細胞組織인|○○○○○}} {{ruby|字丁之制|○○○○}}<sup>(五結爲一字)</sup>{{ruby|가|○}} {{ruby|盡壞하야|○○○○}} {{ruby|紛紜하기|○○○○}} {{ruby|짝이|○○}} {{ruby|없으리니|○○○○}}, {{ruby|奸吏는|○○○}} {{ruby|이로|○○}} {{ruby|因緣하야|○○○○}} {{ruby|盜를|○○}} {{ruby|할|○}} {{ruby|것이다|○○○}}.<br/>땅에 大小가 있어 同科收租하는 것이 收稅上 便利한 것은 諸君의 所論과 같으나, 古 聖人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理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行치 않고 頃畝法에 因하야 後世에 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理致가 있었든 까닭이다.<br/>{{ruby|다음|○○}}, 諸君은 頃畝法에 依한 收稅의 煩鎻를 呼訴하나 損實法 때 일을 생각하면, 當時 田分收租의 節目이야말로 奚啻千萬하였느냐(逐段損實). 그러면 서로 能히 이를 行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新法은 煩冗하다 하지마는 民은 다만「吾田은 某等田이니 某等年에는 幾斗를 納하면 된다」는 것만 외여두면, 奸吏에게 속을 理가 없다. 下三道에 現行되여 있는 貢法(三等田 差科 收稅)으로만 보드라도 差科 收稅는 諸君이 念慮하는 것 같이 煩鎻한 것은 決코 아니다.<br/>{{ruby|第三으로|○○○○}}, 兵役·賦役의 賦課는 何必 從來의 一結幾許에 固執할 것 없이 새로 定하는 稅額의 多寡에 依하야 適當이 賦課하면 그만 아니냐.</blockquote>
 
|목차3-2원문6번={{TagSpage|122-3}}<blockquote no="17">{{ruby|第一로|○○○}} {{ruby|頃畝法이|○○○○}} {{ruby|一定하면|○○○○}}, {{ruby|地品의|○○○}} {{ruby|高下를|○○○}} {{ruby|變更할|○○○}} {{ruby|境遇에는|○○○○}} {{ruby|다만|○○}} {{ruby|그|○}} {{ruby|稅額을|○○○}} {{ruby|改定하면|○○○○}} {{ruby|그만이요|○○○○}}, {{ruby|量田의|○○○}} {{ruby|數는|○○}} {{ruby|自若하야|○○○○}} {{ruby|何等의|○○○}} {{ruby|變更을|○○○}} {{ruby|받지|○○}} {{ruby|아니한다|○○○○}}. {{ruby|그러나|○○○}} {{ruby|萬一|○○}} {{ruby|地品에|○○○}} {{ruby|依하야|○○○}} {{ruby|結負를|○○○}} {{ruby|定한다면|○○○○}}, {{ruby|地品을|○○○}} {{ruby|變更할|○○○}} {{ruby|때마다|○○○}} {{ruby|自然이|○○○}} {{ruby|結負의|○○○}} {{ruby|數가|○○}} {{ruby|變化를|○○○}} {{ruby|받고|○○}}, {{ruby|따라서|○○○}} {{ruby|田制의|○○○}} {{ruby|細胞組織인|○○○○○}} {{ruby|字丁之制|○○○○}}<sup>(五結爲一字)</sup>{{ruby|가|○}} {{ruby|盡壞하야|○○○○}} {{ruby|紛紜하기|○○○○}} {{ruby|짝이|○○}} {{ruby|없으리니|○○○○}}, {{ruby|奸吏는|○○○}} {{ruby|이로|○○}} {{ruby|因緣하야|○○○○}} {{ruby|盜를|○○}} {{ruby|할|○}} {{ruby|것이다|○○○}}.<br/>땅에 大小가 있어 同科收租하는 것이 收稅上 便利한 것은 諸君의 所論과 같으나, 古 聖人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理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行치 않고 頃畝法에 因하야 後世에 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理致가 있었든 까닭이다.<br/>{{ruby|다음|○○}}, 諸君은 頃畝法에 依한 收稅의 煩鎻를 呼訴하나 損實法 때 일을 생각하면, 當時 田分收租의 節目이야말로 奚啻千萬하였느냐(逐段損實). 그러면 서로 能히 이를 行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新法은 煩冗하다 하지마는 民은 다만「吾田은 某等田이니 某等年에는 幾斗를 納하면 된다」는 것만 외여두면, 奸吏에게 속을 理가 없다. 下三道에 現行되여 있는 貢法(三等田 差科 收稅)으로만 보드라도 差科 收稅는 諸君이 念慮하는 것 같이 煩鎻한 것은 決코 아니다.<br/>{{ruby|第三으로|○○○○}}, 兵役·賦役의 賦課는 何必 從來의 一結幾許에 固執할 것 없이 새로 定하는 稅額의 多寡에 依하야 適當이 賦課하면 그만 아니냐.</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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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2원문22번={{TagSpage|125-4}}四. 同科收租에 依한 各等田의 實積<br/>六等田을 다 五十七畝로 一結을 定하여 가지고, 이에 依하여, 二와 같이 收稅額을 各々 달리 한다면, 非但{{TagPage|126-1}} 節目이 煩鎻해질 뿐 아니라, 私田折給·兵役·賦役 負擔 等에 關하여 算計가 甚煩함을 未免하리니, 前例에 依하여 結負의 廣狹을 各々 다르게 定하여 가지고, 同科收租를 行하기로 한다. 그러면 如何한 稅額을 基準으로 하여 結負의 廣狹을 定할 것인가. 萬一 六等田 一結의 七斗五升을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 一結은 五十七畝가 될 것이나, 一等田의 一結이 너머 좁아진다. 同理로 一等田 一結의 三十斗를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允執厥中하여 {{ruby|二十斗同科|○○○○○}}로써 結의 積을 定하기로 한다. 其結果는 左와 如하다.<br/>一等田一結 三八·〇畝(57(畝):30(斗)=x(畝): 20(斗). x=38畝 etc.<br/>二等田一結 四四·七<br/>三等田一結 五四·二<br/>四等田一結 六九·〇<br/>五等田一結 九五·〇<br/>六等田一結 一五二·〇
 
|목차3-2원문22번={{TagSpage|125-4}}四. 同科收租에 依한 各等田의 實積<br/>六等田을 다 五十七畝로 一結을 定하여 가지고, 이에 依하여, 二와 같이 收稅額을 各々 달리 한다면, 非但{{TagPage|126-1}} 節目이 煩鎻해질 뿐 아니라, 私田折給·兵役·賦役 負擔 等에 關하여 算計가 甚煩함을 未免하리니, 前例에 依하여 結負의 廣狹을 各々 다르게 定하여 가지고, 同科收租를 行하기로 한다. 그러면 如何한 稅額을 基準으로 하여 結負의 廣狹을 定할 것인가. 萬一 六等田 一結의 七斗五升을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 一結은 五十七畝가 될 것이나, 一等田의 一結이 너머 좁아진다. 同理로 一等田 一結의 三十斗를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允執厥中하여 {{ruby|二十斗同科|○○○○○}}로써 結의 積을 定하기로 한다. 其結果는 左와 如하다.<br/>一等田一結 三八·〇畝(57(畝):30(斗)=x(畝): 20(斗). x=38畝 etc.<br/>二等田一結 四四·七<br/>三等田一結 五四·二<br/>四等田一結 六九·〇<br/>五等田一結 九五·〇<br/>六等田一結 一五二·〇
 
|목차3-2원문23번={{TagSpage|126-2}}五. 年分九等에 依한 諸等田一結의 稅額<br/>上々年 二〇斗 上中年 一八斗<br/>上下年 一六斗 中上年 一四斗<br/>中々年 一二斗 中下年 一〇斗<br/>下上年 八斗 下中年 六斗<br/>下々年 四斗<br/> (上中年=上々年 20斗×0.9=18斗. etc.)
 
|목차3-2원문23번={{TagSpage|126-2}}五. 年分九等에 依한 諸等田一結의 稅額<br/>上々年 二〇斗 上中年 一八斗<br/>上下年 一六斗 中上年 一四斗<br/>中々年 一二斗 中下年 一〇斗<br/>下上年 八斗 下中年 六斗<br/>下々年 四斗<br/> (上中年=上々年 20斗×0.9=18斗. etc.)
|목차3-2원문24번={{TagSpage|126-3}}六. 各 等田의 一量田尺<br/>各 等田은 다 其 {{ruby|量田尺|○○○}} 一〇〇尺四方으로 一結을 삼는다. 따라서 各量田尺의 周尺에 依한 長은 다음과 같이 定한다.<br/>一等田尺 周尺 四尺七寸七分<br/>二等田尺 周尺 五尺一寸八分<br/>三等田尺 周尺 五尺七寸〇分<br/>四等田尺 周尺 六尺四寸三分<br/>五等田尺 周尺 七尺五寸五分<br/>六等田尺 周尺 九尺五寸五分<br/>註一. 頃畝法에는 周尺五尺四方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인 故로 一畝는 六〇〇〇平方周尺이다. 따라서{{TagPage|127-1}} 1-等田尺=√16000(平方周尺)×38(畝)÷100=4.77周尺이 된다. 餘皆倣此)<br/>二. 이에 各 等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一周尺은 曲〇·六六尺).<br/>一等田尺 曲三·一四八尺<br/>二等田尺 曲三·四一九尺<br/>三等田尺 曲三·七六二尺<br/>四等田尺 曲四・三四四尺<br/>五等田尺 曲四·九八三尺<br/>六等田尺 曲六·三〇三尺<br/>다시 이 曲尺 數에 依하여 各 等田一結의 實積을 坪數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 (各 等田一結은 各 其量田尺의 百尺平方이오, 一坪은 勿論 曲六尺平方이다.)<br/>一等田一結 二,七五三·一坪<br/>二等田一結 三,三四六·七坪<br/>三等田一結 三,九三一·九坪<br/>四等田一結 四,七二三·五坪<br/>五等田一結 六,八九七・三坪<br/>六等田一結 一一,〇三五·五坪<br/>三. 世宗朝 所定周尺은 旣述한 바와 같이 曲六寸六分이나, 後에 其長이 느러나서, 磻溪隨錄(卷二)에 <cite no="11">「今量田尺所用周尺<sup>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sup>」</cite>이라 하고 그려 놓은 周尺은 其長이 曲七寸이나 되니, 이것은 仁祖 十二 甲戌年 以後에 느러난 것이다. (文獻備考 卷百四十二 參照) 따라서 甲戌 以後의 尺長과 結積에는 多少의 差異가 生하는 것이니 注意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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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2원문24번={{TagSpage|126-3}}六. 各 等田의 一量田尺<br/>各 等田은 다 其 {{ruby|量田尺|○○○}} 一〇〇尺四方으로 一結을 삼는다. 따라서 各量田尺의 周尺에 依한 長은 다음과 같이 定한다.<br/>一等田尺 周尺 四尺七寸七分<br/>二等田尺 周尺 五尺一寸八分<br/>三等田尺 周尺 五尺七寸〇分<br/>四等田尺 周尺 六尺四寸三分<br/>五等田尺 周尺 七尺五寸五分<br/>六等田尺 周尺 九尺五寸五分<br/>註一. 頃畝法에는 周尺五尺四方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인 故로 一畝는 六〇〇〇平方周尺이다. 따라서{{TagPage|127-1}} 1-等田尺=√16000(平方周尺)×38(畝)÷100=4.77周尺이 된다. 餘皆倣此)<br/>二. 이에 各 等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一周尺은 曲〇·六六尺).<br/>一等田尺 曲三·一四八尺<br/>二等田尺 曲三·四一九尺<br/>三等田尺 曲三·七六二尺<br/>四等田尺 曲四・三四四尺<br/>五等田尺 曲四·九八三尺<br/>六等田尺 曲六·三〇三尺<br/>다시 이 曲尺 數에 依하여 各 等田一結의 實積을 坪數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 (各 等田一結은 各 其量田尺의 百尺平方이오, 一坪은 勿論 曲六尺平方이다.)<br/>一等田一結 二,七五三·一坪<br/>二等田一結 三,三四六·七坪<br/>三等田一結 三,九三一·九坪<br/>四等田一結 四,七二三·五坪<br/>五等田一結 六,八九七・三坪<br/>六等田一結 一一,〇三五·五坪<br/>三. 世宗朝 所定周尺은 旣述한 바와 같이 曲六寸六分이나, 後에 其長이 느러나서, 磻溪隨錄(卷二)에 <cite no="12">「今量田尺所用周尺<sup>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sup>」</cite>이라 하고 그려 놓은 周尺은 其長이 曲七寸이나 되니, 이것은 仁祖 十二 甲戌年 以後에 느러난 것이다. (文獻備考 卷百四十二 參照) 따라서 甲戌 以後의 尺長과 結積에는 多少의 差異가 生하는 것이니 注意하기 바란다.
 
|목차3-2원문25번={{TagSpage|127-2}}七. 結負束把<br/>結負束把의 이름은 從來와 같이 한다. 一結爲百負, 一負爲十束, 一束爲十把, 故로 結負束把와 新量田尺과의 關係는 如左하다.<br/>一結 1〇,〇〇〇平方量田尺<br/>一負 1〇〇平方量田尺<br/>一束 1〇平方量田尺<br/>一把 1平方量田尺<br/>또 一字五結의 制는 舊에 依한다.<br/>(以上 一 及 二는 田積과 稅額을 決定하는 데 있어서의 論理的 過程이오 法의 表面에는 三, 四, 五, 六, 七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勿論이다.)
 
|목차3-2원문25번={{TagSpage|127-2}}七. 結負束把<br/>結負束把의 이름은 從來와 같이 한다. 一結爲百負, 一負爲十束, 一束爲十把, 故로 結負束把와 新量田尺과의 關係는 如左하다.<br/>一結 1〇,〇〇〇平方量田尺<br/>一負 1〇〇平方量田尺<br/>一束 1〇平方量田尺<br/>一把 1平方量田尺<br/>또 一字五結의 制는 舊에 依한다.<br/>(以上 一 及 二는 田積과 稅額을 決定하는 데 있어서의 論理的 過程이오 法의 表面에는 三, 四, 五, 六, 七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勿論이다.)
 
|목차3-2원문26번={{TagSpage|127-3}}八. 諸位田의 移動<br/>田積 改定에 伴하야 公私諸位田의 給付額에 當然이 移動이 生할 것이나, 此는 爲先 舊額에 依하야 端數{{TagPage|128-1}}를 부처 給해 두기로 한다.
 
|목차3-2원문26번={{TagSpage|127-3}}八. 諸位田의 移動<br/>田積 改定에 伴하야 公私諸位田의 給付額에 當然이 移動이 生할 것이나, 此는 爲先 舊額에 依하야 端數{{TagPage|128-1}}를 부처 給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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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2해독문2번=25년 10월 계축 하교의 그 1―결부법을 폐지하여 양전은 실적주의의 경묘법에 의하여 통일하고 다만 전품을 5등으로 나누어서 수조에 계단을 둔다는 원칙과 및 그 후의 제실천은 수구론자들의 시끄러운 반대론을 야기하였다. 그들의 논지를 들으면 다음과 같았다.
 
|목차3-2해독문2번=25년 10월 계축 하교의 그 1―결부법을 폐지하여 양전은 실적주의의 경묘법에 의하여 통일하고 다만 전품을 5등으로 나누어서 수조에 계단을 둔다는 원칙과 및 그 후의 제실천은 수구론자들의 시끄러운 반대론을 야기하였다. 그들의 논지를 들으면 다음과 같았다.
 
|목차3-2해독문3번=<blockquote no="16">{{ruby|제1로|○○○}}, 왕은 결부제를 옛 제도(중화선왕지제)가 아니라 하여 배척하고, 즐겨 경묘법을 채용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옛 제도라 하더라도 백성에 큰 이해가 없고, 다만 일반의 시청을 경해하게 할 뿐이 아니냐. {{ruby|다음|○○}} 경묘법을 채용하면, 5등전의 1단위면적은 다 같은 고로 그들의 세액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연분9등법을 승하면, 도합 59405종의 각이한 세액을 구별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어, 산계 번용(煩冗)하여 간리가 인연위도(因緣爲盜)할 것이다. {{ruby|또|○}}, 종래에 병역과 부역은 결부법에 의하여 1결기하라는 표준으로 간단히 부과할 수가 있었으나, 경묘법에 의하여 전분5등으로 세액이 각이하여지면, 병역과 부역의 부과율도 또한 번쇄하여 질 것이다. 경묘법은 이상의 세 결함을 가진 것이니, 재래의 결부법을 좇아 모든 등전의 면적의 광협을 적의 짐작하여 동일 명목의 1결로 하고, 거기다 동과 수조를 하는 것이 좋다. 1결의 세액이 모두 같으면 오직 연분에 의한 차이가 있을 뿐으로 이 법이 극간(極簡)하다.</blockquote>
 
|목차3-2해독문3번=<blockquote no="16">{{ruby|제1로|○○○}}, 왕은 결부제를 옛 제도(중화선왕지제)가 아니라 하여 배척하고, 즐겨 경묘법을 채용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옛 제도라 하더라도 백성에 큰 이해가 없고, 다만 일반의 시청을 경해하게 할 뿐이 아니냐. {{ruby|다음|○○}} 경묘법을 채용하면, 5등전의 1단위면적은 다 같은 고로 그들의 세액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연분9등법을 승하면, 도합 59405종의 각이한 세액을 구별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어, 산계 번용(煩冗)하여 간리가 인연위도(因緣爲盜)할 것이다. {{ruby|또|○}}, 종래에 병역과 부역은 결부법에 의하여 1결기하라는 표준으로 간단히 부과할 수가 있었으나, 경묘법에 의하여 전분5등으로 세액이 각이하여지면, 병역과 부역의 부과율도 또한 번쇄하여 질 것이다. 경묘법은 이상의 세 결함을 가진 것이니, 재래의 결부법을 좇아 모든 등전의 면적의 광협을 적의 짐작하여 동일 명목의 1결로 하고, 거기다 동과 수조를 하는 것이 좋다. 1결의 세액이 모두 같으면 오직 연분에 의한 차이가 있을 뿐으로 이 법이 극간(極簡)하다.</blockquote>
|목차3-2해독문4번=【필자는 생각건대 이러한 논자의 경묘법 반대 이유의 하나로, 여기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경묘법 실시에 의하여 당연히 야기될 또 한 가지 혼란이 있다. 그것은 모든 곳의 절급전 특히 과전·공신전·별사전 등 사전의 절급액에 관한 문제다. 종래 이들 사전은 결단위로써 절급되어 있고, 1결당 수세액은 모두 같았던 고로 전주 등은 이들 사전에서 아무 불평이 없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세액을 안심하고 취할 수가 있었으나, 만일 경묘법으로 하여 1결의 전적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세액이 각이하여진다면, 사전의 수급자들은 종래와 같이 불평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돌아오는 세를 취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무한한 혼란이 야기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의 등급에 의하여 사전의 절급액을 가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전제의 근본을 교란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여 경묘제는 이 사회의 봉건관료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귀찮은 물건이었다. 일찍이 유반계는 그 수록(권지1)에 있어서 <cite no="09">{{ruby|古|○}}(中國){{ruby|之頃畝|○○○}}는 {{ruby|主地|○○}}(積)하고, {{ruby|今|○}}(朝鮮) {{ruby|之結負|○○○}}는 {{ruby|主稅|○○}}한다”</cite>는 것을 논하고, <cite no="10">{{ruby|古今法制|○○○○}}의 {{ruby|指意所分|○○○○}}이 {{ruby|斯可見矣|○○○○}}로다”</cite>하고 통탄한 일이 있지만, 2 소위 ‘지의(指意)’란, 이 전체로서의 봉건정부 그것의 지의이기 전에, 우선 개인으로서의 봉건관료의 지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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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2해독문4번=【필자는 생각건대 이러한 논자의 경묘법 반대 이유의 하나로, 여기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경묘법 실시에 의하여 당연히 야기될 또 한 가지 혼란이 있다. 그것은 모든 곳의 절급전 특히 과전·공신전·별사전 등 사전의 절급액에 관한 문제다. 종래 이들 사전은 결단위로써 절급되어 있고, 1결당 수세액은 모두 같았던 고로 전주 등은 이들 사전에서 아무 불평이 없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세액을 안심하고 취할 수가 있었으나, 만일 경묘법으로 하여 1결의 전적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세액이 각이하여진다면, 사전의 수급자들은 종래와 같이 불평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돌아오는 세를 취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무한한 혼란이 야기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의 등급에 의하여 사전의 절급액을 가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전제의 근본을 교란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여 경묘제는 이 사회의 봉건관료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귀찮은 물건이었다. 일찍이 유반계는 그 수록(권지1)에 있어서 <cite no="10">{{ruby|古|○}}(中國){{ruby|之頃畝|○○○}}는 {{ruby|主地|○○}}(積)하고, {{ruby|今|○}}(朝鮮) {{ruby|之結負|○○○}}는 {{ruby|主稅|○○}}한다”</cite>는 것을 논하고, <cite no="11">{{ruby|古今法制|○○○○}}의 {{ruby|指意所分|○○○○}}이 {{ruby|斯可見矣|○○○○}}로다”</cite>하고 통탄한 일이 있지만, 2 소위 ‘지의(指意)’란, 이 전체로서의 봉건정부 그것의 지의이기 전에, 우선 개인으로서의 봉건관료의 지의였던 것이다.】
 
|목차3-2해독문5번=이에 대하여 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목차3-2해독문5번=이에 대하여 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목차3-2해독문6번=<blockquote no="17">{{ruby|제1로|○○○}} {{ruby|경묘법이|○○○○}} {{ruby|일정하면|○○○○}}, {{ruby|지품의|○○○}} {{ruby|고하를|○○○}} {{ruby|변경할|○○○}} {{ruby|경우에는|○○○○}} {{ruby|다만|○○}} {{ruby|그|○}} {{ruby|세액을|○○○}} {{ruby|개정하면|○○○○}} {{ruby|그만이요|○○○○}}, {{ruby|양전의|○○○}} {{ruby|수는|○○}} {{ruby|자약하여|○○○○}} {{ruby|하등의|○○○}} {{ruby|변경을|○○○}} {{ruby|받지|○○}} {{ruby|아니한다|○○○○}}. {{ruby|그러나|○○○}} {{ruby|만일|○○}} {{ruby|지품에|○○○}} {{ruby|의하여|○○○}} {{ruby|결부를|○○○}} {{ruby|정한다면|○○○○}}, {{ruby|지품을|○○○}} {{ruby|변경할|○○○}} {{ruby|때마다|○○○}} {{ruby|자연히|○○○}} {{ruby|결부의|○○○}} {{ruby|수가|○○}} {{ruby|변화를|○○○}} {{ruby|받고|○○}}, {{ruby|따라서|○○○}} {{ruby|전제의|○○○}} {{ruby|세포조직인|○○○○○}} {{ruby|자정지제|○○○○}}<sup>(5결위1자)</sup>{{ruby|가|○}} {{ruby|진괴하여|○○○○}} {{ruby|분운하기|○○○○}} {{ruby|짝이|○○}} {{ruby|없으리니|○○○○}}, {{ruby|간리는|○○○}} {{ruby|이로|○○}} {{ruby|인연하여|○○○○}} {{ruby|도를|○○}} {{ruby|할|○}} {{ruby|것이다|○○○}}.<br/>땅에 대소가 있어 동과 수조하는 것이 수세상 편리한 것은 제군의 소론과 같으나, 옛성인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행하지 않고 경묘법에 인하여 후세에 수범(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이치가 있었던 까닭이다.<br/>{{ruby|다음|○○}}, 제군은 경묘법에 의한 수세의 번쇄를 호소하나 손실법 때 일을 생각하면, 당시 전분수조의 절목이야말로 해시(奚啻) 천만하였느냐(축단손실). 그러면 서로 능히 이를 행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신법은 번용하다 하지만 백성은 다만 ‘모든 전은 어느 등전이니 모든 해에는 기두를 납하면 된다’는 것만 외워두면, 간리에게 속을 리가 없다. 하3도에 현행되어 있는 공법(3등전 차과 수세)으로만 보더라도 차과 수세는 제군이 염려하는 것 같이 번쇄한 것은 결코 아니다.<br/>{{ruby|제3으로|○○○○}}, 병역·부역의 부과는 하필 종래의 1결기허에 고집할 것 없이 새로 정하는 세액의 다과에 의하여 적당히 부과하면 그만 아니냐.</blockquote>
 
|목차3-2해독문6번=<blockquote no="17">{{ruby|제1로|○○○}} {{ruby|경묘법이|○○○○}} {{ruby|일정하면|○○○○}}, {{ruby|지품의|○○○}} {{ruby|고하를|○○○}} {{ruby|변경할|○○○}} {{ruby|경우에는|○○○○}} {{ruby|다만|○○}} {{ruby|그|○}} {{ruby|세액을|○○○}} {{ruby|개정하면|○○○○}} {{ruby|그만이요|○○○○}}, {{ruby|양전의|○○○}} {{ruby|수는|○○}} {{ruby|자약하여|○○○○}} {{ruby|하등의|○○○}} {{ruby|변경을|○○○}} {{ruby|받지|○○}} {{ruby|아니한다|○○○○}}. {{ruby|그러나|○○○}} {{ruby|만일|○○}} {{ruby|지품에|○○○}} {{ruby|의하여|○○○}} {{ruby|결부를|○○○}} {{ruby|정한다면|○○○○}}, {{ruby|지품을|○○○}} {{ruby|변경할|○○○}} {{ruby|때마다|○○○}} {{ruby|자연히|○○○}} {{ruby|결부의|○○○}} {{ruby|수가|○○}} {{ruby|변화를|○○○}} {{ruby|받고|○○}}, {{ruby|따라서|○○○}} {{ruby|전제의|○○○}} {{ruby|세포조직인|○○○○○}} {{ruby|자정지제|○○○○}}<sup>(5결위1자)</sup>{{ruby|가|○}} {{ruby|진괴하여|○○○○}} {{ruby|분운하기|○○○○}} {{ruby|짝이|○○}} {{ruby|없으리니|○○○○}}, {{ruby|간리는|○○○}} {{ruby|이로|○○}} {{ruby|인연하여|○○○○}} {{ruby|도를|○○}} {{ruby|할|○}} {{ruby|것이다|○○○}}.<br/>땅에 대소가 있어 동과 수조하는 것이 수세상 편리한 것은 제군의 소론과 같으나, 옛성인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행하지 않고 경묘법에 인하여 후세에 수범(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이치가 있었던 까닭이다.<br/>{{ruby|다음|○○}}, 제군은 경묘법에 의한 수세의 번쇄를 호소하나 손실법 때 일을 생각하면, 당시 전분수조의 절목이야말로 해시(奚啻) 천만하였느냐(축단손실). 그러면 서로 능히 이를 행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신법은 번용하다 하지만 백성은 다만 ‘모든 전은 어느 등전이니 모든 해에는 기두를 납하면 된다’는 것만 외워두면, 간리에게 속을 리가 없다. 하3도에 현행되어 있는 공법(3등전 차과 수세)으로만 보더라도 차과 수세는 제군이 염려하는 것 같이 번쇄한 것은 결코 아니다.<br/>{{ruby|제3으로|○○○○}}, 병역·부역의 부과는 하필 종래의 1결기허에 고집할 것 없이 새로 정하는 세액의 다과에 의하여 적당히 부과하면 그만 아니냐.</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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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2해독문22번=4. 동과 수조에 의한 각 등전의 실적<br/>6등전을 다 57묘로 1결을 정하여 가지고, 이에 의하여, 2와 같이 수세액을 각각 달리 한다면, 비단 절목이 번쇄해질 뿐 아니라, 사전절급·병역·부역 부담 등에 관하여 산계가 심번(甚煩)함을 미면하리니, 전례에 의하여 결부의 광협을 각각 다르게 정하여 가지고, 동과 수조를 행하기로 한다. 그러면 여하한 세액을 기준으로 하여 결부의 광협을 정할 것인가. 만일 6등전 1결의 7두 5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 1결은 57묘가 될 것이나, 1등전의 1결이 너머 좁아진다. 동리(同理)로 1등전 1결의 30두를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윤집궐중(允執厥中)하여 {{ruby|20두동과|○○○○○}}로써 결의 적을 정하기로 한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br/>1등전1결 38·0묘(57(묘):30(두)=x(묘): 20(두). x=38묘 etc.<br/>2등전1결 44·7<br/>3등전1결 54·2<br/>4등전1결 69·0<br/>5등전1결 95·0<br/>6등전1결 152·0
 
|목차3-2해독문22번=4. 동과 수조에 의한 각 등전의 실적<br/>6등전을 다 57묘로 1결을 정하여 가지고, 이에 의하여, 2와 같이 수세액을 각각 달리 한다면, 비단 절목이 번쇄해질 뿐 아니라, 사전절급·병역·부역 부담 등에 관하여 산계가 심번(甚煩)함을 미면하리니, 전례에 의하여 결부의 광협을 각각 다르게 정하여 가지고, 동과 수조를 행하기로 한다. 그러면 여하한 세액을 기준으로 하여 결부의 광협을 정할 것인가. 만일 6등전 1결의 7두 5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 1결은 57묘가 될 것이나, 1등전의 1결이 너머 좁아진다. 동리(同理)로 1등전 1결의 30두를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윤집궐중(允執厥中)하여 {{ruby|20두동과|○○○○○}}로써 결의 적을 정하기로 한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br/>1등전1결 38·0묘(57(묘):30(두)=x(묘): 20(두). x=38묘 etc.<br/>2등전1결 44·7<br/>3등전1결 54·2<br/>4등전1결 69·0<br/>5등전1결 95·0<br/>6등전1결 152·0
 
|목차3-2해독문23번=5. 연분9등에 의한 모든 등전1결의 세액<br/>상상년 20두 상중년 18두<br/>상하년 16두 중상년 14두<br/>중중년 12두 중하년 10두<br/>하상년 8두 하중년 6두<br/>하하년 4두<br/> (상중년=상상년 20두×0.9=18두. etc.)
 
|목차3-2해독문23번=5. 연분9등에 의한 모든 등전1결의 세액<br/>상상년 20두 상중년 18두<br/>상하년 16두 중상년 14두<br/>중중년 12두 중하년 10두<br/>하상년 8두 하중년 6두<br/>하하년 4두<br/> (상중년=상상년 20두×0.9=18두. etc.)
|목차3-2해독문24번=6. 각 등전의 일량 전척<br/>각 등전은 다 그 {{ruby|양전척|○○○}} 100척4방으로 1결을 삼는다. 따라서 각 양전척의 주척에 의한 장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br/>1등전척 주척 4척7촌7분<br/>2등전척 주척 5척1촌6분<br/>3등전척 주척 5척7촌0분<br/>4등전척 주척 6척4촌3분<br/>5등전척 주척 7척5촌5분<br/>6등전척 주척 9척5촌5분<br/>주1. 경묘법에는 주척5척4방위1보, 240보위1묘인 고로 1묘는 6000평방주척이다. 따라서 1-등전척=√16000(평방주척)×38(묘)÷100=4.77주척이 된다. 여개방차)<br/>2. 이에 각 등전척의 실장을 곡척으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1주척은 곡0·66척).<br/>1등전척 곡3·148척<br/>2등전척 곡3·419척<br/>3등전척 곡3·762척<br/>4등전척 곡4・344척<br/>5등전척 곡4·983척<br/>6등전척 곡6·303척<br/>다시 이 곡척 수에 의하여 각 등전1결의 실적을 평수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각 등전1결은 각 그 양전척의 100척평방이요, 1평은 물론 곡6척평방이다.)<br/>1등전1결 2,753·1평<br/>2등전1결 3,346·7평<br/>3등전1결 3,931·9평<br/>4등전1결 4,723·5평<br/>5등전1결 6,897・3평<br/>6등전1결 11,035·5평<br/>3. 세종 조(朝) 소정(所定) 주척은 이미 쓴 바와 같이 곡6촌6분이나, 후에 그 장이 늘어나서, 반계수록(권2)에 <cite no="11">「今量田尺所用周尺<sup>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sup></cite>이라 하고 그려 놓은 주척은 그 장이 곡7촌이나 되니, 이것은 인조 12 갑술년 이후에 늘어난 것이다. (문헌비고 권142 참조) 따라서 갑술 이후의 척장과 결적에는 다소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니 주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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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2해독문24번=6. 각 등전의 일량 전척<br/>각 등전은 다 그 {{ruby|양전척|○○○}} 100척4방으로 1결을 삼는다. 따라서 각 양전척의 주척에 의한 장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br/>1등전척 주척 4척7촌7분<br/>2등전척 주척 5척1촌6분<br/>3등전척 주척 5척7촌0분<br/>4등전척 주척 6척4촌3분<br/>5등전척 주척 7척5촌5분<br/>6등전척 주척 9척5촌5분<br/>주1. 경묘법에는 주척5척4방위1보, 240보위1묘인 고로 1묘는 6000평방주척이다. 따라서 1-등전척=√16000(평방주척)×38(묘)÷100=4.77주척이 된다. 여개방차)<br/>2. 이에 각 등전척의 실장을 곡척으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1주척은 곡0·66척).<br/>1등전척 곡3·148척<br/>2등전척 곡3·419척<br/>3등전척 곡3·762척<br/>4등전척 곡4・344척<br/>5등전척 곡4·983척<br/>6등전척 곡6·303척<br/>다시 이 곡척 수에 의하여 각 등전1결의 실적을 평수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각 등전1결은 각 그 양전척의 100척평방이요, 1평은 물론 곡6척평방이다.)<br/>1등전1결 2,753·1평<br/>2등전1결 3,346·7평<br/>3등전1결 3,931·9평<br/>4등전1결 4,723·5평<br/>5등전1결 6,897・3평<br/>6등전1결 11,035·5평<br/>3. 세종 조(朝) 소정(所定) 주척은 이미 쓴 바와 같이 곡6촌6분이나, 후에 그 장이 늘어나서, 반계수록(권2)에 <cite no="12">“今量田尺所用周尺<sup>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sup></cite>이라 하고 그려 놓은 주척은 그 장이 곡7촌이나 되니, 이것은 인조 12 갑술년 이후에 늘어난 것이다. (문헌비고 권142 참조) 따라서 갑술 이후의 척장과 결적에는 다소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니 주의하기 바란다.
 
|목차3-2해독문25번=7. 결부속파(結負束把)<br/>결부속파의 이름은 종래와 같이 한다. 1결위100부, 一부위10속, 1속위10파, 고로 결부속파와 새로운 양전척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br/>1결 10,000평방양전척<br/>1부 100평방양전척<br/>1속 10평방양전척<br/>1파 1평방양전척<br/>또 1자5결의 제(制)는 옛 방식에 의한다.<br/>(이상 1 및 2는 전적과 세액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의 논리적 과정이요 법의 표면에는 3, 4, 5, 6, 7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목차3-2해독문25번=7. 결부속파(結負束把)<br/>결부속파의 이름은 종래와 같이 한다. 1결위100부, 一부위10속, 1속위10파, 고로 결부속파와 새로운 양전척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br/>1결 10,000평방양전척<br/>1부 100평방양전척<br/>1속 10평방양전척<br/>1파 1평방양전척<br/>또 1자5결의 제(制)는 옛 방식에 의한다.<br/>(이상 1 및 2는 전적과 세액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의 논리적 과정이요 법의 표면에는 3, 4, 5, 6, 7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목차3-2해독문26번=8. 모든 위전의 이동<br/>전적 개정에 반(伴)하여 공사의 모든 위전의 급부액에 당연히 이동이 생길 것이나, 이는 우선 옛 액에 의하여 단수(端數)를 붙여 급(給)해 두기로 한다.
 
|목차3-2해독문26번=8. 모든 위전의 이동<br/>전적 개정에 반(伴)하여 공사의 모든 위전의 급부액에 당연히 이동이 생길 것이나, 이는 우선 옛 액에 의하여 단수(端數)를 붙여 급(給)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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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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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1번={{TagSpage|129-3}}① 田積 整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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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2번={{TagSpage|129-4}}田積 改定의 다음에 오는 것은 諸位田 整理에 關한 問題다. 貢法 定着의 翌年인 二十七年 七月 乙酉에 議政府·六曹의 上啓에 依하야 舊田積과 新田積과의 差異에 말미암아 當然이 생기는바 公私 諸位田의 盈(過) 縮(不足)은 或은 國庫에 移屬하고 或은 新規 補給하고 또 從來 折給額이 區々不定하든 것은 此를 一定하기로 하였다. 또 從來 그 額이 一定하든 것 中에서 이 지음에 一律로 減額한 것도 있다. 다시 어떤 種類의 位田은 全然 革除하기로 하였다. 要컨댄 田制의 全般에 亘하야 面目이 一新하게 된 것이다. 第一의 過不足의 添削을 한 것은 驛田<sup>(郵驛에 對한 給田)</sup>이요, 第二의 折給額을 一定한 것은 鄕校位田<sup>(鄕校에 對한 給田)</sup>·州縣衙祿田<sup>(守令의 俸祿田)</sup>·公須田(地方官廳의 用度田)·院田(行旅投宿所院에 對한 給田) 等이요, 第三의 一律減額을 한 것은 渡田<sup>(大河의 指定 渡津에 對한 給田)</sup>·站田<sup>(水運을 맡는 水站에 對한 給田)</sup> 等이다. 그리고 第四의 全然 革除해버린 것은 各司公廨田<sup>(中央 各 官廳에 折給되여 있든 點心費用田)</sup>을 비롯하야 諸祭位田<sup>(全州 慶基殿(太祖眞殿)·社稷 祭位田·文宣王 祭位田·祀典 所載 諸嶽·海·瀆·山·川·城隍 祭位田 等)</sup>·人吏位田<sup>(鄕吏에 對한 給田)</sup>·瓦匠田<sup>(東·西窰瓦匠에 對한 給田)</sup>・宗廟干田<sup>(宗廟所屬于(凡役賤者總謂之干)에 對한 給田)</sup>·奉常寺 祭壇直田<sup>(祭祀 及 議謚를 掌하는 奉常寺의 祭壇直이에 對한 給田)</sup>·水軍田<sup>(紅曄·喬河에 配置되었든 特別 水軍에 對한 給田)</sup> 等이다<sup>(以上 諸位田의 本質과, 및 그들에 對한 處理 諸方法의 各其 理由에 對하여는, 다시 詳論을 하여야 처음으로 事態가 밝아질 것이로되, 本論의 主流가 아닌 故로 割愛한다)</sup>. 그런데 以上 四箇의 處理 方法 中, 第四의 全然 革除는 無難이 直時 實行할 수가 있었을 것이나, 他 三方法에 依한 것은 어느 것이나 正確히 此를 實行하랴면 其地方의, 新法에 依한 一般的 量田 結果를 기다려야 할 것이요, 또 事實 各 道의 量田은 後述할 것과 같이 極히 綏慢히 實行된 것인 故로, 此等 新規定의 正確한 適用은 相當한 時日을 要한 것이다. 더욱이 驛田·衙祿田·公須田 等 巨額에 達하는 位田의 處理는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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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3번={{TagSpage|129-5}}以上 諸位田 處理 外에 또 남은 것은 科田<sup>(朝館에 對한 給田)</sup>·功臣田<sup>(功臣 及 其子孫에 對한 給田)</sup>에 對한 問題일 것인데, 此兩種田은 다{{TagPage|130-1}} 京畿 內에 存在하는 것인 故로, 其整理는 京畿의 一般的 量田<sup>(世祖 七年 次項 參照)</sup> 結果를 기다린 後에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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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4번={{TagSpage|130-2}}②「稅」의 處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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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5번={{TagSpage|130-3}}科田法에 依하야 規定된, 國家가 科田을 爲始하야 諸私田에서 一結二斗씩 徵收하는 {{ruby|稅|○}}는</sup>(처음 {{ruby|租|○}}와 {{ruby|稅|○}}를 區別하여 使用하든 때의 本來의 意味에 있어서의 稅. 第一節 緒頭 參照)</sup>, 新法에 있어서는 如何이 處理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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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6번={{TagSpage|130-4}}二十七年 七月 乙酉의 決定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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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7번={{TagSpage|130-5}}<blockquote no="19">一. 前此一結 定稅三斗<sup>(筆者曰, 三斗之間, 恐脫十字)</sup> 各品科田 及外方各位私田 則一結二斗 今一結極數 改定二十斗 而稅米豆 從本稅之數計除 其一結二斗仍舊.</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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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8번={{TagSpage|130-6}}라고 하였다. 此規定은 다음과 같이 解釋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即 新法에 있어서는 田積도 變更되였고, 또 一結當 收稅額도 三十斗에서 二十斗로 變更이 되였지마는, 私田稅 一結二斗는 此를 變更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야 一結의 收稅 「極數」 二十斗<sup>(年分 上々年의 一結當 收稅額이니, 一結의 最高 收稅額)</sup>인 「本稅」<sup>(即, 私田法의 所謂 租)</sup>에 對하야 私田稅 二斗로 하고, 本稅가 年分에 依하야 減額되는 데 타라 私田稅도 此를 「計除」(「減額」)하기로 한다. 即 本稅 二十斗에 對하야 私田稅 二斗, 本稅 十八斗에 對하야 私田稅 一斗 八升 等으로. 그런데 本稅 對 私田稅 間의 規定도 田積 整理 問題와 같이 京畿 內에 一般的으로 新貢法이 適用된 後에야 實行된 것은 勿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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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9번={{TagSpage|130-7}}그리고 여기서 暫間 밝혀 둘 것은, 科田法에 있어서는 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 外의 모든 田에서 이 私田稅를 받게 되여 있었는데, 其後 幾多의 變遷을 겪어 結局 經國大典에서는 織田<sup>(科田의 後身이니, 現職 官僚에 對한 給田)</sup>과 寺田<sup>(寺院에 許容된 私田)</sup>만이 이 稅를 바치기로 되여 있다.
  
|목차4-1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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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1번=① 전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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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2번=전적 개정의 다음에 오는 것은 모든 위전 정리에 관한 문제다. 공법 정착의 익년인 27년 7월 을유에 의정부·육조의 상계에 의하여 옛 전적과 새 전적과의 차이에 말미암아 당연히 생기는바 공사 모든 위전의 영(과) 축(부족)은 혹은 국고에 이속하고 혹은 신규 보급하고 또 종래 절급액이 구구부정하던 것은 이를 일정하기로 하였다. 또 종래 그 액이 일정하던 것 중에서 이 즈음에 일률로 감액한 것도 있다. 다시 어떤 종류의 위전은 전연 혁제하기로 하였다. 요컨대 전제의 전반에 이르러 면목이 일신하게 된 것이다. 제1의 과부족의 첨삭을 한 것은 역전<sup>(우역에 대한 급전)</sup>이요, 제2의 절급액을 일정한 것은 향교위전<sup>(향교에 대한 급전)</sup>·주현아록전<sup>(수령의 봉록전)</sup>·공수전(지방관청의 용도전)·원전(행려 투숙소원에 대한 급전) 등이요, 제3의 일률 감액을 한 것은 도전<sup>(대하의 지정 도진에 대한 급전)</sup>·참전<sup>(수운을 맡는 수참에 대한 급전)</sup> 등이다. 그리고 제4의 전연 혁제해버린 것은 각사 공해전<sup>(중앙 각 관청에 절급되어 있던 점심비용전)</sup>을 비롯하여 모든 제위전<sup>(전주 경기전(태조 진전)·사직 제위전·문선왕 제위전·사전 소재 모든 악·해·독·산·천·성황 제위전 등)</sup>·인리 위전<sup>(향리에 대한 급전)</sup>·와장전<sup>(동·서요 와장에 대한 급전)</sup>・종묘 한전<sup>(종묘 소속 한(범역천자 총위지한)에 대한 급전)</sup>·봉상사 제단직전<sup>(제사 및 의시(議謚)를 장(掌)하는 봉상사의 제단직에 대한 급전)</sup>·수군전<sup>(홍엽·교하에 배치되었던 특별 수군에 대한 급전)</sup> 등이다<sup>(이상 모든 위전의 본질과, 및 그들에 대한 처리 제방법의 각기 이유에 대하여는, 다시 상론을 하여야 처음으로 사태가 밝아질 것이지만, 본론의 주류가 아닌 고로 할애한다)</sup>. 그런데 이상 4개의 처리 방법 중, 제4의 전연 혁제는 무난히 즉시 실행할 수가 있었을 것이나, 다른 세 방법에 의한 것은 어느 것이나 정확히 이를 실행하려면 그 지방의, 신법에 의한 일반적 양전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요, 또 사실 각 도의 양전은 후술할 것과 같이 극히 수많이 실행된 것인 고로, 이들 새 규정의 정확한 적용은 상당한 시일을 요한 것이다. 더욱이 역전·아록전·공수전 등 거액에 달하는 위전의 처리는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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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3번=이상 모든 위전 처리 외에 또 남은 것은 과전<sup>(조관(朝館)에 대한 급전)</sup>·공신전<sup>(공신 및 그 자손에 대한 급전)</sup>에 대한 문제일 것인데, 이 두 종의 전은 다 경기 내에 존재하는 것인 고로, 그 정리는 경기의 일반적 양전<sup>(세조 7년 아래 항목 참조)</sup> 결과를 기다린 후에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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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4번=② ‘세’의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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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5번=과전법에 의하여 규정된, 국가가 과전을 위시하여 모든 사전에서 1결2두씩 징수하는 {{ruby|세|○}}는</sup>(처음 {{ruby|조|○}}와 {{ruby|세|○}}를 구별하여 사용하던 때의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세. 제1절 서두 참조)</sup>, 신법에 있어서는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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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6번=27년 7월 을유의 결정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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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7번=<blockquote no="19">一. 前此一結 定稅三斗<sup>(筆者曰, 三斗之間, 恐脫十字)</sup> 各品科田 及外方各位私田 則一結二斗 今一結極數 改定二十斗 而稅米豆 從本稅之數計除 其一結二斗仍舊.</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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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8번=라고 하였다. 이 규정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신법에 있어서는 전적도 변경되었고, 또 1결당 수세액도 30두에서 20두로 변경이 되었지만, 사전세 1결2두는 이를 변경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결의 수세 ‘극수’ 20두<sup>(연분 상상년의 1결당 수세액이니, 1결의 최고 수세액)</sup>인 ‘본세’<sup>(즉, 사전법의 소위 조)</sup>에 대하여 사전세 2두로 하고, 본세가 연분에 의하여 감액되는 데 따라 사전세도 이를 ‘계제’(‘감액’)하기로 한다. 즉 본세 20두에 대하여 사전세 2두, 본세 18두에 대하여 사전세 1두 8승 等으로. 그런데 본세 대 사전세 간의 규정도 전적 정리 문제와 같이 경기 내에 일반적으로 새 공법이 적용된 후에야 실행된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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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9번=그리고 여기서 잠깐 밝혀 둘 것은, 과전법에 있어서는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 외의 모든 전에서 이 사전세를 받게 되어 있었는데, 그 후 기다의 변천을 겪어 결국 경국대전에서는 직전<sup>(과전의 후신이니, 현직 관료에 대한 급전)</sup>과 사전<sup>(사원에 허용된 사전)</sup>만이 이 세를 바치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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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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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번={{TagSpage|130-9}}二十六年 十一月 戊子 新貢法이 發布되고, 同月 庚子에 都巡察使 鄭麟趾가 下三道 六縣의 田品等第와 量田의 結果를 報告하였음으로 新貢法은 第一着으로 此六縣에 實施되였다. 이어 諸他 郡縣에도 漸次 敬差官을 派遣하야 等第와 量田을 하고, 或 일부러 敬差官을 派하지 않드라도 其官 守令이 無時로 此를 續行하야 漸次 新貢法을 實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等第·量田이란 實踐的으로는 相當한 困難을 同伴하는 것인 外에, 敬差官을 派하게 되면 그들에 對한 供億이 굉장이 많고, 또 守令이 한 사람으로{{TagPage|131-1}}서 其管內의 等第를 行하는 것도 容易한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虎狼 狐狸에도 比할 品官·胥吏들에게 마낄 수도 없는 것이다. 此等諸 事情에 依하야 等第·量田은 荏苒歲月을 虛費하게 되니, 따라서 一般的인 新貢法 實施도 極히 長年月을 要하게 되였다. 勿論 新貢法을 實施함에는 {{ruby|田品等第|○○○○}}만 하면, 舊田案과의 比較에 依하야 爲先 現在額 그대로 新六等田法에 依한 田積을 各其 算出할 수가 있는 것이니, 따라서 {{ruby|量田|○○}}은 당장 絕對 必要한 일은 아니지마는, 新稅法과 같은 劃期的인 大事業을 斷行함에는, 될 수 있는 대로 正確할 것을 希求하였고, 또 此法 實施의 實際 過程도 大槪 이에 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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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2번={{TagSpage|131-2}}爲先 三十年 七月<sup>(實錄 戊戌條)</sup>부터 三十二年 二月<sup>(實錄 乙酉條)</sup>에 亘하야 全羅道의 田品等第가 끝난 故로 此地에 新貢法을 適用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야 全羅道는 諸道 中에서 가장 먼첨 新貢法으로 드러갔다. 그 後 諸道의 等第·量田은 累次 發說·計劃되었으나, 凶作·諸大事業의 續出에 依하야, 어느 것이나 다 廷期되여 버리고 마렀다<sup>(等第·量田의 執行은 農民에 莫大한 負擔을 課하는 것임에 想到하라). 이제 此等의 支離한 過程을 一々이 叙述하는 煩을 避하고, 오로지 그 遂行의 結果만을 記한다. 世祖 六年에는 京畿의 田品等第를 終了하였다<sup>(實錄 十一月 壬午條)</sup>. 이어 翌 七年에는 同道의 量田, 八年에는 忠淸道, 九年에는 慶尙道의 量田(勿論 新六等法에 依한 等第를 兼하야)을 各々 着手하야<sup>(成宗實錄 二十一年 六月 丙午條 參照)</sup>, 다 不遠한 時日에 完了되여, 此等地에 新貢法을 敷衍하였다. 此三道의 新法 實施는 世祖 十一年 初까지에는 完了되였든 모양이다.<sup>(實錄 二月 壬午條)</sup> 이 앞서 八年에는 全羅道의 量田도 遂行하였다<sup>(成宗實錄 二十一年 六月 丙午條 參照). 여기서 暫間 注意를 喚起하기 爲하야 되푸리하야 둘 것은 世祖 七年頃까지 全羅道는 新貢法의 六等收稅法에, 京畿·忠淸·慶尙의 三道는 舊貢法의 三等收稅法에 屬하였든 것이다. 그리고 全羅·京畿·忠淸·慶尙의 四道가 新貢法으로 드러간 以後에도 江原·黃海·平安·永安의 四道는 아직 舊損實法에 停滯되여 있었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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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3번={{TagSpage|131-3}}그 後 成宗 二年에는 黃海道의 量田을 終了하야 同道에 貢法을 實施하고<sup>(實錄 四月 辛未條 十一月 壬子條, 三年 五月 壬寅條 參照)</sup>, 同 四年에서 六年에 걸처 江原道의 量田을 行하야 此에 貢法을 適用{{TagPage|132-1}}하였다<sup>(實錄 四年 六月 戊辰 七年 十月 癸酉條)</sup>. 十七年에는 平安道의 量田을 行하야 十八年부터 同道에 貢法을 實施하였다<sup>(實錄 十七年 十月 丙子條, 十八年 九月 癸卯條 參照)</sup>. 永安道(咸鏡道)는 가장 늦어, 十九年에서 二十年에 걸처 量田을 하고, 二十年부터 貢法을 實施하게 되니<sup>(實錄 十九年 八月 辛亥條, 同 十一月 戊辰條, 二十年 正月 庚午條)</sup>, 於是乎 八道의 貢法 實施가 完了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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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4번={{TagSpage|132-2}}回顧컨댄 新貢法은 世宗 二十七年 下三道 六縣의 實施를 濫觴으로 하야, 世宗 末까지에 全羅道, 世祖 末까지에 京畿·下三道, 成宗 末까지에 全道에 퍼졌다. 世宗 二十六年의 貢法 發布에서 成宗 二十年의 完成까지에 四十五箇年이오 世宗 十九年의 舊貢法 開始부텀은 五十二箇年, 다시 世宗 十二年의 貢法 試問에서 起算하면 實로 五十九箇年의 時日을 要하였다. 新貢法의 實施가 이 같이 遷延된 理由로서, 此에 必要한 等第·量田이 實踐上 非常한 困難을 同伴하는 것과, 또 이를 遂行함에는 人民의 莫大한 負擔을 要하였든 것은 이미 말한 바이다. 다시 黃海·江原·平安·永安의 四道의 貢法이 特히 늦인 데는 特殊한 事情이 存在하였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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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5번={{TagSpage|132-3}}처음 世宗 十二年 貢法 試問이 있었을 때에 平安·江原·咸吉의 三道는 거의 다 不賛成이었고, 黃海道는 忠淸道와 함께 不賛成이 훨신 많았다. 四道는 一般的으로 農地의 自然的 條件이 不良한 까닭에 稅額의 一定한 貢法에 大概 反對한 것이다. 特히 此等諸道에는 休閑을 要하는 山田이 많기 때문에 定額稅인 貢法에는 더욱이 不適當한 것이였다. 勿論 貢法에, 起陳에 對한 的量이 法制上 存在하지마는, 實際로 農民에게까지 그 恩惠가 미치기는 大端이 困難한 일이다. 此等四道 貢法 實施의 計劃에 對하야 提出되는 反對論의 諸上疏는 늘 이 點을 들어 强調하는 것이었다<sup>(成宗 二年 十一月 壬子 大司諫 成俊啓, 七年 十月 癸酉 江原道 觀察使啓, 十七年 十月 丙子 領經筵事 洪應啓, 同 己卯 平安道 觀察使啓 等)</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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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6번={{TagSpage|132-4}}就中 兩界의 量田·貢法이 가장 늦인 데는 다시 깊은 原因이 있었다. 元來 高麗 恭讓王 元年의 量田<sup>(第一節 量田 參照)</sup>은 兩界에까지는 미치지 몯하였고, 또 李朝로 드러와 太宗 五年에 처음 全國的 量田을 始作하였을 때에도, 兩界는 가장 늦어 太宗 十三年에 이르러 겨우 實行되는 形便이었다<sup>(太宗實錄 十三年 正月 丁亥條)</sup>. 그 理由는, 兩界는 원래 山田이 많{{TagPage|133-1}}고, 따라서 休閑地가 많어, 量田할 나위가 없다는 것도 있었지마는, 他方 兩界에는 土豪群의 努力이 大盛하야 中央의 威令이 徹底하지 몯하야 量田 같은 中央 集權的 行爲에 對하야 頑强히 反對한 때문이다. 此地方의 土豪들은 尨大한 數의 土地 農奴를 私有하야 恒常 中央政權에 背馳하는 傾向을 가지고 있었든 것이다. 世祖 十三年 咸吉道에서 일어난 所謂 李施愛亂이라는 것은, 이 地方 土豪群의 指揮 下에 이러난 農民叛亂으로, 反中央運動의 한 箇의 顯著한 爆發이지마는, 그 後에도 길이 이런 傾向이 持續되고 있었다. 成宗 八年 十一月 乙亥 大司憲 李繼孫의 上言 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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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7번={{TagSpage|133-2}}<blockquote no="20">且 兩界之田 經界不正 豪强者 田連阡陌 而不納租稅 貧窮者只占尺寸之地面 徵納倍於他人 國家將欲量田定稅 而因民怨咨 且止 云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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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8번={{TagSpage|133-3}}이라든지, 同 十五年 七月 庚戌 知事許琮의 啓 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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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9번={{TagSpage|133-4}}<blockquote no="21">(前略) 彼道(永安道)人心本頑愚 易生疑惑 今若量田 必相驚駭 恐有後悔 云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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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0번={{TagSpage|133-5}}이라든지는, 어느 것이나 다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다. 이리하야 平安·永安의 量田은 太宗 十三年 以後 모다 七十餘年을 經한, 成宗 十七年·十九年에 이르러 처음 되고 貢法도 또한 이에 쫓아 施行된 것이다.
  
|목차4-2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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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번=26년 11월 무자 신공법이 발포되고, 같은 달 경자에 도순찰사 정인지가 하3도 6현의 전품등제와 양전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므로 신공법은 제1착으로 이 6현에 실시되었다. 이어 모든 다른 군현에도 점차 경차관을 파견하여 등제와 양전을 하고, 혹 일부러 경차관을 파하지 않더라도 그 관 수령이 무시로 이를 속행하여 점차 신공법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등제·양전이란 실천적으로는 상당한 곤란을 동반하는 것인 외에, 경차관을 파하게 되면 그들에 대한 공억(供億)이 굉장히 많고, 또 수령이 한 사람으로서 그 관내의 등제를 행하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호랑 호리에도 비할 품관·서리들에게 맡길 수도 없는 것이다. 이들 모든 사정에 의하여 등제·양전은 임염세월을 허비하게 되니, 따라서 일반적인 신공법 실시도 극히 긴 연월(年月)을 요하게 되었다. 물론 신공법을 실시함에는 {{ruby|전품등제|○○○○}}만 하면, 옛 전안과의 비교에 의하여 우선 현재액 그대로 새 6등전법에 의한 전적을 각기 산출할 수가 있는 것이니, 따라서 {{ruby|양전|○○}}은 당장 절대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새 세법과 같은 획기적인 대사업을 단행함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할 것을 희구하였고, 또 이 법 실시의 실제 과정도 대개 이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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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2번=우선 30년 7월<sup>(실록 무술조)</sup>부터 32년 2월<sup>(실록 을유조)</sup>에 이르러 전라도의 전품등제가 끝난 고로 이 지방에 신공법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전라도는 모든 도 중에서 가장 먼저 신공법으로 들어갔다. 그 후 모든 도의 등제·양전은 누차 발설·계획되었으나, 흉작·제대(諸大)사업의 속출에 의하여, 어느 것이나 다 정기(廷期)되어 버리고 말았다<sup>(등제·양전의 집행은 농민에 막대한 부담을 부과하는 것임에 상도하라). 이제 이들의 지리한 과정을 일일이 서술하는 번(煩)을 피하고, 오로지 그 수행의 결과만을 적는다. 세조 6년에는 경기의 전품등제를 종료하였다<sup>(실록 11월 임오조)</sup>. 이어 익 7년에는 같은 도의 양전, 8년에는 충청도, 9年에는 경상도의 양전(물론 신6등법에 의한 등제를 겸하여)을 각각 착수하여<sup>(성종실록 21년 6월 병오조 참조)</sup>, 다 불원한 시일에 완료되어, 이들 지역에 신공법을 부연(敷衍)하였다. 이 3도의 신법 실시는 세조 11년 초까지에는 완료되었던 모양이다.<sup>(실록 2월 임오조)</sup> 이 앞서 8년에는 전라도의 양전도 수행하였다<sup>(성종실록 21년 6월 병오조 참조). 여기서 잠깐 주의를 환기하기 위하여 되풀이하여 둘 것은 세조 7년경까지 전라도는 신공법의 6등 수세법에, 경기·충청·경상의 3도는 옛 공법의 3등 수세법에 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라·경기·충청·경상의 4도가 신공법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강원·황해·평안·영안의 4도는 아직 옛 손실법에 정체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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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3번=그 후 성종 2년에는 황해도의 양전을 종료하여 같은 도에 공법을 실시하고<sup>(실록 4월 신미조 11월 임자조, 3년 5월 임인조 참조)</sup>, 같은 왕 4년에서 6년에 걸쳐 강원도의 양전을 행하여 이에 공법을 적용하였다<sup>(실록 4년 6월 무진 7년 10월 계유조)</sup>. 17년에는 평안도의 양전을 행하여 18年부터 같은 도에 공법을 실시하였다<sup>(실록 17년 10월 병자조, 18년 9월 계묘조 참조)</sup>. 영안도(함경도)는 가장 늦어, 19년에서 20년에 걸쳐 양전을 하고, 20년부터 공법을 실시하게 되니<sup>(실록 19년 8월 신해조, 같은 해 11월 무진조, 20년 정월 경오조)</sup>, 이제야 8도의 공법 실시가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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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4번=회고하건대 신공법은 세종 27년 하3도 6현의 실시를 남상으로 하여, 세종 말까지에 전라도, 세조 말까지에 경기·하3도, 성종 말까지에 모든 도에 퍼졌다. 세종 26년의 공법 발포에서 성종 20년의 완성까지에 45개년이요 세종 19년의 옛 공법 개시부터는 52개년, 다시 세종 12년의 공법 시문에서 기산하면 실로 59개년의 시일을 요하였다. 신공법의 실시가 이 같이 천연(遷延)된 이유로서, 이에 필요한 등제·양전이 실천상 상당한 곤란을 동반하는 것과, 또 이를 수행함에는 인민의 막대한 부담을 요하였던 것은 이미 말한 바이다. 다시 황해·강원·평안·영안의 4도의 공법이 특히 늦은 데는 특수한 사정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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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5번=처음 세종 12년 공법 시문이 있었을 때에 평안·강원·함길의 3도는 거의 다 불찬성이었고, 황해도는 충청도와 함께 불찬성이 훨씬 많았다. 4도는 일반적으로 농지의 자연적 조건이 불량한 까닭에 세액의 일정한 공법에 대개 반대한 것이다. 특히 이들 모든 도에는 휴간을 요하는 산전이 많기 때문에 정액세인 공법에는 더욱이 부적당한 것이었다. 물론 공법에, 기진에 대한 적량(的量)이 법제상 존재하지만, 실제로 농민에게까지 그 은혜가 미치기는 대단히 곤란한 일이다. 이들 4도 공법 실시의 계획에 대하여 제출되는 반대론의 모든 상소는 늘 이 점을 들어 강조하는 것이었다<sup>(성종 2년 11월 임자 대사간 성준계(啓), 7년 10월 계유 강원도 관찰사계(啓), 17년 10월 병자 영경연사 홍응계(啓), 같은 해 기묘 평안도 관찰사계 등)</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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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6번=특히 양계의 양전·공법이 가장 늦은 데는 다시 깊은 원인이 있었다. 원래 고려 공양왕 원년의 양전<sup>(제1절 양전 참조)</sup>은 양계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고, 또 이조로 들어와 태종 5년에 처음 전국적 양전을 시작하였을 때에도, 양계는 가장 늦어 태종 13년에 이르러 겨우 실행되는 형편이었다<sup>(태종실록 13년 정월 정해조)</sup>. 그 이유는, 양계는 원래 산전이 많고, 따라서 휴한지가 많아, 양전할 나위가 없다는 것도 있었지만, 다른 방면 양계에는 토포군의 노력이 대성하여 중앙의 위령이 철저하지 못하여 양전 같은 중앙 집권적 행위에 대하여 완강히 반대한 때문이다. 이 지방의 토호들은 방대한 수의 토지 농노를 사유하여 항상 중앙정권에 배치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조 13년 함길도에서 일어난 소위 이시애난(亂)이라는 것은, 이 지방 토호 무리의 지휘 하에 일어난 농민반란으로, 반중앙운동의 한 개의 현저한 폭발이지만, 그 후에도 길게 이런 경향이 지속되고 있었다. 성종 8년 11월 을해 대사헌 이계손의 상언 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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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7번=<blockquote no="20">且 兩界之田 經界不正 豪强者 田連阡陌 而不納租稅 貧窮者只占尺寸之地面 徵納倍於他人 國家將欲量田定稅 而因民怨咨 且止 云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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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8번=이라든지, 같은 왕 15년 7월 경술 지사 허종의 계 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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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9번=<blockquote no="21">(前略) 彼道(영안道)人心本頑愚 易生疑惑 今若量田 必相驚駭 恐有後悔 云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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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0번=이라든지는, 어느 것이나 다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평안·영안의 양전은 태종 13년 이후 모두 70여년을 경(經)한, 성종 17년·19년에 이르러 처음 되고 공법도 또한 이에 좇아 시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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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3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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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3원문1번={{TagSpage|133-6}}貢法에 依하면, 九等 年分의 施行單位는 {{ruby|一邑|○○}}이었다. 그러나 勿論 一邑 內에도 豊凶의 差는 相當이 있는 것이니, 端宗 二年 八月 丁未에 이르러 一邑 單位를 疎漏타 하야, 고처 {{ruby|面單位|○○○}}로 하였다. 即 一邑之內에서 四面<sup>(東·西·南·北)</sup>과 邑內를 區別하야 都合 五種의 年分을 定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後에는, 다시 此를 細分하야 {{ruby|庫員單位|○○○○}}로 하자는 議가 이러났다. 「庫員」이란 <cite no="13">「俗以田之所在謂庫」</cite>로<sup>(成宗實錄 六年 四月 辛丑條)</sup>, 即 山川으로 區劃된, 거의 同一한 自然的 條件을 가진 土地의 一集團을 가르키는 것이다. 世祖 三年 八月 甲午 從來의 面等第를 粗타 하고, 戶曹에 傳旨하야 「分山野定稅」(即 庫員等第)하도록 하였으나, 後에 이는 거의 古損實法에 類한 것이라 하야 反對를 當한 故로, 實施되지 몯하였다. 成宗 六年 四月 辛丑에 다시 庫員等第 可否의 論이 이러났으나, 此亦 否決되여버렸다. 그 後 同 二十二年{{TagPage|134-1}} 京畿의 地에 이를 實施한 일이 있으나<sup>(實錄 八月 壬戌條)</sup>, 그 結果는 좋지 몯하였다. 即 이 해 敬差官 鄭誠謹의 報告에 依하면, 庫員等第에 依하야 巨室豪民의 田은 其等第가 가볍게 되고, 無告貧民의 田은 비록 災傷田이라도 거의 免稅되지 몯하였든 것이다. 結局 年分은 面等第로서 金科玉條를 삼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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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3원문2번={{TagSpage|134-2}}다음에 年分 決定의 實狀을 一瞥하기로 하자. 法에는 守令이 親히 管內의 田을 巡視하야 一面의 中庸을 取하야 가지고 年分을 査定하기로 되여있으나, 事實 이렇게 奇特한 守令은 거의 없고, 大概는 勸農·里正<sup>(今日의 組合長 區長 等에 該當)</sup>에게 마껴버리는데, 그들이 適當한 年分을 定해 오면, 守令은 蔽論하고 一等을 올려버린다. 上司로부터는 늘 過輕하다고 叱責을 받는 까닭이다. 守令의 報告가 監司에게 到達하면, 監司는 또 無條件으로 一等을 올려버리고, 다시 그것이 戶曹로 가면, 戶曹는 또 덮어놓고 一等을 올린다. 이리하야 假令 처음에 中々年이었든 것이면, 나종에는 上中年으로 落着되여 버리는 것이 例였다. 成宗 九年 十一月 辛巳 戶曹에 傳旨하야 道政을 委任한 監司를 疑心하야 一等을 올리는 等의 일이 없도록 命하였으나, 이것으로 因하야 年分 加重의 事實이 變하지 안 할 것은 勿論이다.
  
|목차4-3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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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3해독문1번=공법에 의하면, 9등 연분의 시행단위는 {{ruby|1읍|○○}}이었다. 그러나 물론 1읍 내에도 풍흉의 차는 상당히 있는 것이니, 단종 2년 8월 정미에 이르러 1읍 단위를 소루(疎漏)하다 하여, 고쳐 {{ruby|면단위|○○○}}로 하였다. 즉 1읍 내에서 4면<sup>(동·서·남·북)</sup>과 읍내를 구별하여 도합 5종의 연분을 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다시 이를 세분하여 {{ruby|고원단위|○○○○}}로 하자는 의(議)가 일어났다. ‘고원’이란 <cite no="13">”俗以田之所在謂庫”</cite>로<sup>(성종실록 6년 4월 신축조)</sup>, 즉 산천으로 구획된, 거의 동일한 자연적 조건을 가진 토지의 한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조 3년 8월 갑오 종래의 면등제를 좋다 하고, 호조에 전지하여 ‘분산야정세(分山野定稅)’(즉 고원등제)하도록 하였으나, 후에 이는 거의 옛 손실법에 유(類)한 것이라 하여 반대를 땅한 고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성종 6년 4월 신축에 다시 고원등제 가부의 논이 일어났으나, 이 역시 부결되어버렸다. 그 후 같은 왕 22년 경기의 땅에 이를 실시한 일이 있으나<sup>(실록 8월 임술조)</sup>, 그 결과는 좋지 못하였다. 즉 이 해 경차관 정성근의 보고에 의하면, 고원등제에 의하여 거실호민(巨室豪民)의 전은 그 등제가 가볍게 되고, 무고빈민(無告貧民)의 전은 비록 재상전이라도 거의 면세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연분은 면등제로서 금과옥조를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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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3해독문2번=다음에 연분 결정의 실상을 일별하기로 하자. 법에는 수령이 친히 관내의 전을 순시하여 1면의 중용을 취하여 가지고 연분을 사정하기로 되어있으나, 사실 이렇게 기특한 수령은 거의 없고, 대개는 권농·이정<sup>(금일의 조합장 구장 등에 해당)</sup>에게 맡겨버리는데, 그들이 적당한 연분을 정해 오면, 수령은 폐론(蔽論)하고 1등을 올려버린다. 상사로부터는 늘 과경(過輕)하다고 질책을 받는 까닭이다. 수령의 보고가 감사에게 도달하면, 감사는 또 무조건으로 1등을 올려버리고, 다시 그것이 호조로 가면, 호조는 또 덮어놓고 1등을 올린다. 이리하여 가령 처음에 중중년이었던 것이면, 나중에는 상중년으로 낙착되어 버리는 것이 예였다. 성종 9년 11월 신사 호조에 전지하여 도정을 위임한 감사를 의심하여 1등을 올리는 등의 일이 없도록 명하였으나, 이것으로 인하여 연분 가중의 사실이 변하지 안 할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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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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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1번={{TagSpage|134-4}}貢法에 陳荒田·沈沒田·災傷田의 減免之制가 規定되여 있다. 이 減免之制는 新貢法 發布 即時, 新貢法 施行 地方은 勿論이오, 아직 舊貢法이 施行되는 地方에도 即時 適用하기로 하였다<sup>(世宗實錄 二十八年 六月 庚子條 參照)</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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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2번={{TagSpage|134-5}}먼저 災傷田에 關한 것을 보면 災傷 連伏 十結에 미처야 처음 減免하기로 되여 있다. 이것은 如何한 結果를 招來할 것인가. 十結의 土地를 十家가 耕作할 境遇에는(事實 거의 大多數의 農民이 一結 以下의 零細地를 耕作하고 있었지마는), 九家九結의 災傷이 있더라도 一家一結의 稔實 때문에, 남어지 九家가 이에 끌려서 免稅가 되지 몯한다. 또 十結을 一人이 耕作할 境遇에는, 九結의 損傷이 있더라도 一弊의 稔實 때문에, 남어지 九結의 稅도 免除가 되지 안는다. 이 弊를 緩和하기 爲하야 世宗 二十八年 六月 庚子에 免稅單位를 十結에서 五結로 내리키{{TagPage|135-1}}었다. 그러나 五結이라고 하드라도 零細한 農耕을 營爲하는 農民들에게는 이 減免의 恩典이 浹洽되지 몯할 것은 事實이다. 그래서 文宗 庚午<sup>(世宗 三十二年)</sup>十月 丁丑에 다시 連伏 五結의 法을 變하고, {{ruby|災傷過半田|○○○○○}}으로써 減免單位를 삼게 하였다. 이는 經國大典 戶典收稅條에 그 細目이 실려 있는 것과 같이, <cite no="14">「災傷五分 以下는 不問하고, 六分에 이르면 六分의 免稅, 七分에 이르면 七分의 免稅로 하야써 九分에 미치는 것」</cit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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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3번={{TagSpage|135-2}}法은 漸々 細微하야저서 善美에 가까워지는 것 같으나 그 實際는 如何하였을까. 世宗 二十八年 六月 甲寅 集賢殿 直提學 李季甸의 上書에 依하면, 事態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一邑의 守令은 四面에서 沓至하는 作者의 災傷 陳告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諸他 報告文書의 期日의 切迫과, 使命 迎送의 煩에 이끌려, 勿論 一々이 遍閱할 餘暇가 없다. 小縣의 守令이 尙然하거든 況且 大邑의 官이랴. 勢不得已 吏胥를 派遣하게 된다. 吏胥는 任情高下하야 限界를 이저버린다. 所謂 「親審」의 不可能함이 一邑의 守令에 있어 尙然하니, 況監司리요, 又況 敬差官이리요. 또 同年 七月 戊辰 成均主簿 李甫欽의 上書에 依하면 이러하다. 守令은 左右間에 災傷報告書라는 것을 作成하야 監司에게 提出한다. 監司는 다시 「審覈을 加하야」 戶曹에 報하고, 戶曹는 此를 上啓한다. 啓는 다시 議政府로 나려온다. 政府는 談論 數日 後에 처음으로 吏曹에 移關하야 敬差官을 任命케 된다. 敬差官은 다시 治裝 數日 後에 出發케 된다. 敬差官은 다시 數日을 經하야 나려온다. 때는 十月도 旣望이 지났으니 許多한 災傷田畓을 一々이 親審할 수가 있을 것인가. 其間 農民은 前에 守令이 檢査해 간 것을 믿고, 牛馬料나 하려고 죄다 藁草를 刈取해 버리고, 또 明年을 爲하야 秋耕을 해버렸다. 敬差官은 와서 叱咜하야, <cite no="15">「已刈且耕 眞僞難辨」</cite>이라 하고, 죄다 實田으로 計算해버린다. 形便이 大綱 이러하니, 後에 經國大典<sup>(戶曹收稅條)</sup>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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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4번={{TagSpage|135-3}}<blockquote no="22">勸農 八月望前 告守令 觀察使 十月望前 啓聞</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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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5번={{TagSpage|135-4}}이라는 規定이 실렸다 한들 무슨 大端한 效果가 있을 것인가. 事實 守令이 一々이 勸農의 말을 聽從하야 監司에게 報告하지도 않을 것이요, 또 設令 監司 敬差官이 온{{TagPage|136-1}}다 할지라도, 그것은 一々이 田을 巡見하러 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는 술 먹기 爲해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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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6번={{TagSpage|136-2}}다음 陳荒田에 關하야 一言한다. 陳荒田은 貢法에 依하면, 正田의 境遇에는 起耕을 獎勵하는 意味에서 起陳을 不問하고 收稅하기로 되여 있으며, 續田의 境遇에는 時耕으로써 收稅하기로 되여 있다. 이 까닭에 正田은 理由의 如何를 不問하고 收稅되는 것은 勿論이려니와, 事實은 續田이라도 거의 陳荒에 對한 免稅를 받지 몯하는 것이 例였다. 그것은 陳荒田의 免稅가 災傷田의 境遇와 같이 그 手續이 極히 煩鎻하였든 때문만이 아니라, 또 世宗 三十年에 從來 各 邑의 書員·色吏들이 혹은 起를 陳이라 하야 中間의 橫領을 하든 風에 鑑戒하야, 새로 立法하야 今後 觀察使가 守令의 殿最<sup>(一年에 二期니 守令의 期內 成績을 上中下 三等으로 區分하여 中央에 報告하는 것)</sup>를 行할 때에는 그 耕地의 起陳을 重視하야 加耕이 많은 자를 上等으로 하고, 無加減者를 中等으로, 減者를 下等으로 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守令들은 이에 怯이 나서, 累歲의 陳荒田도 이를 報告하는 일이 없었든 것이다(墾田의 多少에 依하야 守令의 殿最를 三等으로 區分하는 것은, 이미 太祖 三年 四月 庚申의 立法에서 이를 볼 수가 있으나, 其後 本法의 實行은 衰退하여젔든 模樣이다). 이 때문에 土地가 瘠薄하야 거의 隔年으로 休閑을 要하는 土地라든지, 또는 死喪 疾病으로 因하야 不得已 休閑을 한 土地도 一律로 收稅되는 것이 常例였다. 端宗 元年 十一月 辛巳에 此를 糾正하야, 全羅道 正田 內에 休閑의 頻度가 높은 것은 이를 續田에 編入케 하고, 또 慶尙·忠淸道의 瘠薄으로 因하야 陳荒된 田은 事實에 即하야 될 수 있는 대로 免稅시키기 爲하야 觀察使·敬差官 等을 再動員한 일이 있지마는, 勿論 實效가 正確히 또 길이 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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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7번={{TagSpage|136-3}}陳荒田의 免稅를 妨碍하는 다른 原因도 또 있다. 貢法에서는, 正田은 起陳을 不問하고 收稅하기로 되여 있으나, 元來 正田의 全部가 所謂 「每年 起耕할 수 있는 땅」이 아니고, 때々로 休閑을 해야 할 만한 田을 억지로 正田에 編入한 것도 있으며, 또 貧困·疾病·流離 等의 不得已한 事情에 依하야 陳荒하게 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不拘하고, 여기서 無條件으로 收稅하는 것은, 苛酷한 일{{TagPage|137-1}}일 뿐더러 또 困難한 일이었다. 因하야 後에 法을 變하야, {{ruby|비록|○○}} {{ruby|正田이라도|○○○○○}} {{ruby|一田|○○}} {{ruby|全部가|○○○}} {{ruby|陳荒한|○○○}} {{ruby|境遇에는|○○○○}} {{ruby|免稅|○○}}하기로 하였다. 이 變法의 年代는 未詳하나, 世祖實錄 四年 正月 丙子條에 此에 關한 事實이 보여 있는 것으로 推察하면, 必然 端宗 元年 乃至 世祖 三年 間의 일에 屬할 것이다. 그리고 이 條項은 또 經國大典에도 拾錄되여 있다<sup>(戶曹收稅條)</sup>. 그러나 이 全陳田 免稅法의 發動을 完全이 阻害하는 것에 太祖 元典 以來 다음의 一文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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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8번={{TagSpage|137-2}}<blockquote no="23">疾病不能耕種者 令隣里及族人相助耕種 勿令失時(太祖 三年 四月 庚申의 立法).</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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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9번={{TagSpage|137-3}}即 疾病으로 因하야 陳荒할 憂慮가 있는 境遇에는, 隣里 族親으로 하여금 代耕케 하라는 것이다. 이 條項의 存在에 依하야, 事實 不得已한 事情 때문에 陳荒한 田에 對하야도, 守令은 作者의 陳荒 申告를 受理할 수가 없었다. 或 此를 受理하야 監司에까지 報告하는 者가 있다 하드라도 監司는 언제든지 이 條項을 防牌로 하고, 報告를 默殺하는 것이었다. 이런 事情으로 말미암아, 正田의 陳荒 免稅 같은 것은 거의 實行을 同伴할 수 없는 一片의 空文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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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10번={{TagSpage|137-4}}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當時 「無田之民이 거의 十分之三」이나 되는 耕地 不足 時節에 어찌하야 이 같이 많이 陳荒田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世祖 四年 正月 丙子 平山都 護府使 鄭次恭의 上書는 이를 說明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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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11번={{TagSpage|137-5}}<blockquote no="24">臣竊以爲 我國壤地褊小 無田之民 幾乎十分之三 有田者 有故而不能耕種 則隣里族親 並耕而分 乃民間常事也 若果膏腴之地 豈有陳荒之理哉 草木暢茂 沙石磽确 不堪耕種 而亦令收稅 下民之怨 蓋深於此 云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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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12번={{TagSpage|137-6}}即 無田의 民으로서도 오히려 隣人의 陳荒地를 耕作하야, 그 收穫을 平分하야써 父母 妻子를 奉率하고, 써 租稅를 負擔하랴고 하지 안는 것이다. 이것은 結局 當時의 農業生產力 아래서는 그 土地의 生產力이 起耕의 限界에까지 到達치 몯하는 瘠薄한 田을 意味하는 것에 不外하다. 이런 田을 덮어놓고 몰밀어서 所謂 正田 中에 編入하였다는 것은 한 箇 暴行에 가까운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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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13번={{TagSpage|137-7}}<blockquote no="25">因病未耕全陳田 啓定租稅(大典戶典收稅條)<br/>病戶田 令族親及隣里耕耘 勿使陳荒(同務農條)</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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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원문14번={{TagSpage|138-1}}右 二條는 後에 經國大典 中에 兩者 相對하야 登載되여 있는데, 때々로 爲政者들은 此二條의 運用을 如何이 加減하였을까. 그것은 아마 此를 適用하는 地位에 있는 上下 一聯의 官吏의 質에도 依存하였을 것이나, 보담 많이 此를 適用받는 地位에 있는 土地 耕作者의 힘에 依存하였을 것이다.
  
|목차4-4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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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1번=공법에 진황전·침몰전·재상전의 감면지제가 규정되어 있다. 이 감면지제는 신공법 발포 즉시, 신공법 시행 지방은 물론이요, 아직 옛 공법이 시행되는 지방에도 즉시 적용하기로 하였다<sup>(세종실록 28년 6월 경자조 참조)</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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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2번=먼저 재상전에 관한 것을 보면 재상 연복(連伏) 10결에 미쳐야 처음 감면하기로 되어 있다. 이것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10결의 토지를 10가(家)가 경작할 경우에는(사실 거의 대다수의 농민이 1결 이하의 영세지(地)를 경작하고 있었지만), 9가9결의 재상이 있더라도 1가1결의 임실(稔實) 때문에, 나머지 9가가 이에 끌려서 면세가 되지 못한다. 또 10결을 1인이 경작할 경우에는, 9결의 손상이 있더라도 1폐의 임실 때문에, 나머지 9결의 세도 면제가 되지 않는다. 이 폐를 완화하기 위하여 세종 28년 6월 경자에 면세단위를 10결에서 5결로 내렸었다. 그러나 5결이라고 하더라도 영세한 농경을 영위하는 농민들에게는 이 감세의 은전(恩典)이 협흡되지 못할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문종 경오<sup>(세종 32年)</sup>10월 정축에 다시 연복 5결의 법을 변하고, {{ruby|재상과반전|○○○○○}}으로써 감세단위를 삼게 하였다. 이는 경국대전 호전수세조에 그 세목이 실려 있는 것과 같이, <cite no="14">“재상5분 이하는 불문하고, 6분에 이르면 6분의 면세, 7분에 이르면 7분의 면세로 하여써 9분에 미치는 것”</cit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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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3번=법은 점점 세미해져서 선미(善美)에 가까워지는 것 같으나 그 실제는 어떠하였을까. 세종 28년 6월 갑인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의 상서에 의하면, 사태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1읍의 수령은 4면에서 답지(沓至)하는 작자의 재상 진고(陳告)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모든 땅 보고문서의 기일의 절박과, 사명 영송 의 번(煩)에 이끌려, 물론 일일이 편열(遍閱)할 여가가 없다. 소현(小縣)의 수령이 상연(尙然)하거든 더구나 대읍(大邑)의 관이랴. 세부득이 이서를 파견하게 된다. 이서는 임정고하(任情高下)하여 한계를 잊어버린다. 소위 ‘친심’의 불가능함이 1읍의 수령에 있어 상연하니, 하물며 감사리요, 하물며 경차관이리요. 또 같은 해 7월 무진 성균주부 이보흠의 상서에 의하면 이러하다. 수령은 좌우간에 재상보고서라는 것을 작성하여 감사에게 제출한다. 감사는 다시 ‘심핵을 가하여’ 호조에 보고하고, 호조는 이를 상계한다. 계는 다시 의정부로 내려온다. 정부는 담론 수일 후에 처음으로 이조에 이관하여 경차관을 임명하게 된다. 경차관은 다시 치장 수일 후에 출발하게 된다. 경차관은 다시 수일을 경하여 내려온다. 때는 10월도 기망(旣望)이 지났으니 허다한 재상전답을 일일이 친심할 수가 있을 것인가. 기간 농민은 전에 수령이 검사해 간 것을 믿고, 우마료(牛馬料)나 하려고 죄다 고초를 예취해 버리고, 또 명년을 위하여 추경을 해버렸다. 경차관은 와서 질타하여, <cite no="15">“已刈且耕 眞僞難辨”</cite>이라 하고, 죄다 실전(實田)으로 계산해버린다. 형편이 대강 이러하니, 후에 경국대전<sup>(호조수세전)</sup>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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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4번=<blockquote no="22">勸農 八月望前 告守令 觀察使 十月望前 啓聞</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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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5번=이라는 규정이 실렸다 한들 무슨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인가. 사실 수령이 일일이 권농의 말을 청종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지도 않을 것이요, 또 설령 감사 경차관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일이 전을 순견하러 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는 술 먹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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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6번=다음 진황전에 관하여 말하겠다. 진황전은 공법에 의하면, 정전의 경우에는 기경을 장려하는 의미에서 기진을 불문하고 수세하기로 되어 있으며, 속전의 경우에는 시경(時耕)으로써 수세하기로 되어 있다. 이 까닭에 정전은 이유의 여하를 불문하고 수세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실은 속전이라도 거의 진황에 대한 면세를 받지 못하는 것이 예였다. 그것은 진황전의 면세가 재상전의 경우와 같이 그 수속이 극히 번쇄하였든 때문만이 아니라, 또 세종 30년에 종래 각 읍의 서원·색리들이 혹은 기(起)를 진(陳)이라 하여 중간의 횡령을 하던 바람에 감계하여, 새로 입법하여 금후 관찰사가 수령의 전최<sup>(1년에 2기니 수령의 기내 성적을 상 중 하 3등으로 구분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것)</sup>를 행할 때에는 그 경지(耕地)의 기진을 중시하여 가경이 많은 자를 상등으로 하고, 무가감자를 중등으로, 감자를 하등으로 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수령들은 이에 겁이 나서, 여러 해의 진황전도 이를 보고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간전의 다소에 의하여 수령의 전최를 3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미 태조 3년 4월 경신의 입법에서 이를 볼 수가 있으나, 그 후 본법의 실행은 쇠퇴해졌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토지가 척박하여 거의 격년으로 휴한을 요하는 토지라든지, 또는 사상 질병으로 인하여 부득이 휴한을 한 토지도 일률로 수세되는 것이 상례였다. 단종 원년 11월 신사에 이를 규정하여, 전라도 정전 내에 휴한의 빈도가 높은 것은 이를 속전에 편입하게 하고, 또 경상·충청도의 척박으로 인하여 진황된 전은 사실에 즉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면세시키기 위하여 관찰사·경차관 등을 재동원한 일이 있지만, 물론 실효가 정확히 또 길이 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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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7번=진황전의 면세를 방해하는 다른 원인도 또 있다. 공법에서는, 정전은 기진을 불문하고 수세하기로 되어 있으나, 원래 정전의 전부가 소위 ‘매년 기경할 수 있는 땅’이 아니고, 때때로 휴한을 해야 할 만한 전을 억지로 정전에 편입한 것도 있으며, 또 빈곤·질병·유리 등의 부득이한 사정에 의하여 진황하게 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무조건으로 수세하는 것은, 가혹한 일일 뿐더러 또 곤란한 일이었다. 인하여 후에 법을 변하여, {{ruby|비록|○○}} {{ruby|정전이라도|○○○○○}} {{ruby|1전|○○}} {{ruby|전부가|○○○}} {{ruby|진황한|○○○}} {{ruby|경우에는|○○○○}} {{ruby|면세|○○}}하기로 하였다. 이 변법의 연대는 미상하나, 세조실록 4年 정월 병자조에 이에 관한 사실이 보여 있는 것으로 추찰하면, 필연 단종 원년 내지 세조 3년 간의 일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이 조항은 또 경국대전에도 습록(拾錄)되어 있다<sup>(호조수세조)</sup>. 그러나 이 전진전 면세법의 발동을 완전히 조해(阻害)하는 것에 태조 원전 이래 다음의 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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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8번=<blockquote no="23">疾病不能耕種者 令隣里及族人相助耕種 勿令失時(태조 3년 4월 경신의 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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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9번=즉 질병으로 인하여 진황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이웃 동네 족친으로 하여금 대경(代耕)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 조항의 존재에 의하여, 사실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진황한 전에 대하여도, 수령은 작자의 진황 신고를 수리할 수가 없었다. 혹 이를 수리하여 감사에까지 보고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감사는 언제든지 이 조항을 방패로 하고, 보고를 묵살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정전의 진황 면세 같은 것은 거의 실행을 동반할 수 없는 일편의 공문(空文)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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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10번=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당시 ‘무전지민(無田之民)이 거의 10분의 3’이나 되는 경지 부족 시절에 어찌하여 이 같이 많이 진황전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세조 4년 정월 병자 평산도 호부사 정차공의 상서는 이를 설명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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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11번=<blockquote no="24">臣竊以爲 我國壤地褊小 無田之民 幾乎十分之三 有田者 有故而不能耕種 則隣里族親 並耕而分 乃民間常事也 若果膏腴之地 豈有陳荒之理哉 草木暢茂 沙石磽确 不堪耕種 而亦令收稅 下民之怨 蓋深於此 云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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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12번=즉 무전의 백성으로서도 오히려 이웃의 진황지를 경작하여, 그 수확을 평분(平分)하여써 부모 처자를 봉솔하고, 써 조세를 부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당시의 농업생산력 아래서는 그 토지의 생산력이 기경의 한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척박한 전을 의미하는 것에 불외(不外)하다. 이런 전을 덮어놓고 몰밀어서 소위 정전 중에 편입하였다는 것은 한 개 폭행에 가까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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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13번=<blockquote no="25">因病未耕全陳田 啓定租稅(大典戶典收稅條)<br/>病戶田 令族親及隣里耕耘 勿使陳荒(同務農條)</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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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4해독문14번=위의 2조는 후에 경국대전 중에 양자 상대하여 등재되어 있는데, 때때로 위정자들은 이 2조의 운용을 어떻게 가감하였을까. 그것은 아마 이를 적용하는 지위에 있는 상하 일련의 관리의 질(質)에도 의존하였을 것이나, 보다 많이 이를 적용받는 지위에 있는 토지 경작자의 힘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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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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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번={{TagSpage|138-2}}이제까지의 叙述이 그 對象의 性質上 多少 錯雜함을 未免한 것 같으니, 다시 그 理解를 便케 하기 爲하여 貢法을 그 主流에 沿하여 槪括的으로 論하여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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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번={{TagSpage|138-3}}먼저 其沿革을 槪觀하자. 世宗 十二年, 從來의 損實收稅法이 其弊多端함에 鑑戒하여, 一結當 十斗의 定額稅法을 布하고자 하여, 其便否를 廟議 及 八道의 官民에게 무렀다. 可否의 數는 거의 伯仲하였으나, 王은 이로 因하여 貢法 實現의 可能性 如何에 對하여 어느 程度의 示唆를 받게 되였다. 後에 다시 硏究를 거듭하여 其十九年에는 全國 土地를 三等에 난호아 그들에게 各各 從來의 三等田의 區分을 配當하여 써 一結 最高 二十斗 最低 十二斗의 定額稅를 課하기로 立法하였다. 이어 翌 二十年부터 慶尙·全羅의 一部에 本法을 實施하였다. 다시 二十二年에는 本法에 修正을 加하여 從來의 三等道의 內部에 다시 三等官의 區分을 設하여 亦是 一結 最高 二十斗부터 最低 十二斗에 이르는 定額稅를 課하기로 하고 同年부터 慶尙·全羅의 全部, 다시 二十三年부터 忠淸道 全部를 此法으로 包攝케 되였다. 그리고 京畿는 二十六年부터 此法으로 律케 되니, 以上은 말하자면 貢法 施行의 第一次 段階이었다. 그러나 此法의 內部에는 幾多의 技術的 缺陷을 包藏하고 있었으니 即 第一로 田의 三等級 區分, 이에 딸는 三等尺 量田法, 第二로 田品에 있어서의 三等道 三等官主義, 第三으로 豊凶의 無視 等. 이에 二十五年 十月부터 翌 二十六年 十一月까지에 舊貢法에 다시 改革을 加하여 田分六等·同科收租·年分九等 及 減免 等의 法을 確立케 되였다. 이에 따라 六等田 各 一結의 實積, 六等田 量田尺의 기리도 決定되었다. 立法과 함께 下三道의 六縣{{TagPage|139-1}}은 此法을 適用되고, 이어 全羅道는 世宗 三十二年부터 京畿·忠淸·慶尙의 各 道는 世祖八年 乃至 十一年頃까지에 다 舊貢法에서 新貢法으로 넘어갔다. 黃海·江原·平安·永安의 各 道는 各各 成宗 二年·六年·十八年·二十年으로써 從來의 損實法에서 一躍 新貢法으로 드러갔다. 世宗 二十六年에 定着한 貢法은 其後 細目에 있어서는 多少의 修正 變更을 보았으나, 其{{ruby|原則|○○}}에 있어서는 秋毫도 變치 않고 李朝의 末期에 及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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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번={{TagSpage|139-2}}다음에 吾人은 貢法을 舊損實法과 比較하면서, 其特徵으로 하는 바를 概括的으로 論할까 한다. 損實法의 三等田稅의 無標準性(大綱 어림은 있지마는 極히 粗雜한 것이다)에서 貢法의 六等田의 精密性 及 生產力 準據性 等에 移行한 것은, 確實이 合理的인 改革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제 新舊 田結의 面積 及 稅額의 關係를 좀 더 仔細히 檢討하여 보자. 貢法에 있어서는 田分六等이요, 그 分等의 {{ruby|準據|○○}}는 그들의 生產力(五十七畝地 一等田 上々年 米 四十石, 六等田 米 十石 等)에 있는 것은 勿論이나, {{ruby|그|○}} {{ruby|實踐上의|○○○○}} {{ruby|指針|○○}}은 前後를 通하여 世宗 二十五年 十一月 丙辰 下三道 田分等第때의 節目이었다<sup>(第三節, 一, ③, 甲(가) 參照)</sup>. 但 當時는 田分五等이었지마는 其後 田分六等의 第六等田은 前의 第五等田의 分化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前後에 大差가 없다. 그리고 이 田品等第의 實踐上의 指針은 훨신 나중 孝宗 四年 所定의 「田制詳定所 遵守 條畫」 속에까지도 거의 고대로 옴겨젔다. 舊三等田에서 新六等田으로의 再編成의 關係는 世宗 二十五年의 田品 節目과 같어, 舊上中田은 全部 新一二等田·舊下等田은 大部分 新一二三等田으로 化하였다. 그리고 新四五六等田으로 된 것은 할 수 없는 惡田들뿐이니 그리 많지 않다. 特히 此傾向은 下三道에 있어 顯著하니, 下三道에는 四等 以下 田이 稀罕하다(이에 對하여는 茶山의 牧民心書도 言及하였지마는). 그리고 新四等 以下로 된 것은 차라리 舊 「山田」<sup>(다음의 山田에 關한 註를 參照)</sup>으로부터 化成한 것이 大部分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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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번={{TagSpage|139-3}}以上 所述의 關係를 念頭에 두고, 新舊 田 一結의 實積의 增減 如何를 考慮하여 보자. 新舊 田 一結의 地積은 左表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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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번={{TagSpage|140-1}}<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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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舊 三等田一結의 實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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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新 六等田一結의 實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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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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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上等田 二五·四畝<br/>中等田 三九·九畝<br/>下等田 五七·六畝<br/>山田(註 參照)<br/>山下田 一一五·二畝<br/>山腰田 一七二·八畝<br/>山上田 一二三〇·四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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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等田 三八·〇畝<br/>二等田 四四·七畝<br/>三等田 五四·二畝<br/>四等田 六九·〇畝<br/>五等田 九五·〇畝<br/>六等田 一五二·〇畝<br/>.</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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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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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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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번={{TagSpage|140-2}}(註) 舊三等田의 實積이 各々 表 中 所揭와 같은 것은 旣述한 바이다<sup>(第一節 參照)</sup>. 「山田」에 對하여는 多少 說明을 要할까 한다. 世系實錄 二十七年 七月 乙酉條에<br/><blockquote no="26">議政府據戶曹呈申, 今田制改詳定事 及可革條件, 磨勘後錄 (中畧) 一.前此田品 限以三等故 {{ruby|山上|○○}}·{{ruby|山腰|○○}}·{{ruby|山下之田|○○○○}} {{ruby|比常田倍數計之|○○○○○○○}} 今三等之下 又加三等假令以山上田爲六等則 以前十結五十五卜之地 今爲一結 其地甚濶 旦下三道 雖山上田 或不用倍數 其法不一 上項山田 今除倍數之法 從其田結卜元數 隨其</blockquote><br/>라고 보인다. 由是觀之컨댄, 舊法에는 山田을 特히 不生產的인 것으로 생각하고, 山下·山腰·山上田 各 一結의 地積은, 平地 下等田一結의 地積五七·六畝를 遞加하야, 各々 一一五·二畝, 一七二·八畝, 二三〇·四畝 等으로 하였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且說 議政府 上言의 意味는, <cite no="16">「今後도 萬一 舊法을 본받아 山田을 量한다고 하면, 山下·山腰·山上田 各 一結은 平地 六等田一結 一五二畝를 遞加하야, 各々 三〇四畝, 四五六畝, 六〇八畝 等이 되여, 結局 新山上田은 六〇八畝니, 此는 舊平地 下等田十結五十五卜의 地積과 같은 것이라.(57.6畝×10.55=607.68畝) 其地가 甚濶하니, 新法에 있어서는 此山田 遞加法을 變하고, 平地田에 准하여 分等 測量하자」</cite>는 것이다. 上言은 聽從되니, 新法에서는 山田의 特別取扱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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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번={{TagSpage|140-3}}{{ruby|舊上等田|○○○○}}은 二五·四畝에서 大部分은 新一等田三八·〇畝 小部分은 다시 新二等田四四·七畝로 化成하여, {{ruby|크게|○○}} {{ruby|擴大되었다|○○○○○}}. {{ruby|舊中等田|○○○○}}은 三九·九畝에서 新一二等의 三八·〇畝, 四四·七畝로 化成하여, {{ruby|別로|○○}} {{ruby|增減이|○○○}} {{ruby|없다|○○}}. 그러나 上中二種田은 本來 極少數니, 掛齒할 것이 몯된다. 다만 {{ruby|舊下等田|○○○○}}一結五七·六畝가 大部分 化하여 新一二三等{{TagPage|141-1}}의 三八·〇畝, 四四·七畝, 五四·二畝가 되었다면 此는 {{ruby|大端한|○○○}} {{ruby|面積減縮|○○○○}}이다. 勿論 舊下田에서 新四五等 以下로 落下하여 田積을 넓힌 것이 있겠으나, 이것은 또한 少數다. 다시 {{ruby|山田|○○}}이 本來의 一一五·二畝, 一七二·八畝, 二三〇·四畝 等에서 化하여 新四等 以下의 六九·〇畝, 九五·〇畝, 一五二·〇畝 等이 되였다면, 此亦是 {{ruby|全般的인|○○○○}} {{ruby|減縮을|○○○}} 意味하는 것이다. 以上 諸化成 中에서 가장 큰 重量을 갖는 것은, 勿論 舊下等田이 新一二三等田으로 된 化成이다. 以上의 諸事實에 依하여 吾人은 무엇을 結論하는가. 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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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8번={{TagSpage|141-2}}<blockquote no="27">「{{ruby|新一結의|○○○○}} {{ruby|地積은|○○○}} {{ruby|大體로|○○○}} {{ruby|舊一結의|○○○○}} {{ruby|地積보담|○○○○}} {{ruby|크게|○○}} {{ruby|縮少되였다|○○○○○}}」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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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9번={{TagSpage|141-3}}但 舊一結의 地稅는 最高 三十斗요 新一結의 地稅는 最高 二十斗로서, 各々 年次에 依하여 蠲減이 있다. 그러면 一結 地積의 減少와 또 一結 最高 收稅額의 低下는 綜合的으로 어떤 結果를 낳을 것인가. 世宗 二十六年 八月<sup>(實錄 庚午條 參照)</sup>, 忠淸道 淸安·庇仁 二縣에 新貢法에 依한 田品이 等第되고(勿論 此年 八月에는 新貢法은 아직 一般的으로 頒布는 되지 않었으나, 其以前에 內部的으로는 벌써 法도 決定되어 있었고, 또 此法에 依하여 二縣은 田品도 거의 等第되어 있었다), 이 等第에 依하여 將次 行할 稅額이 調定되었는데, 이 兩縣의 各 年分의 調定稅額과 過去 數箇年 間의 實收稅額과를 比較 表示하면 다음과 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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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0번={{TagSpage|141-4}}(가) 淸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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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1번={{TagSpage|141-5}}<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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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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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九年分 調定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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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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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過去 五箇年 實收稅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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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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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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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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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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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年分</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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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調定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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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年次</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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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實收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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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備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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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
<tr>
 +
<td>上々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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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八一四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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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世宗 二十一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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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〇〇三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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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十一年, 二十二年은 損實法 施行年 二十二年, 二十四年, 二十五年은 舊貢法 施行年인데, 其中 二十五年은 大凶作으로 因하여 特히 蠲減을 받은 해다.</td>
 +
</tr>   
 +
 
 +
<tr>
 +
<td>上中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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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四五七石</td>
 +
<td>同 二十二年</td>
 +
<td>一,五一五石</td>
 +
<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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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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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上下年</td>
 +
<td>三,〇七三石</td>
 +
<td>同 二十三年</td>
 +
<td>二,五六〇石</td>
 +
<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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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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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
 +
<td>中上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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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六八九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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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 二十四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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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三五八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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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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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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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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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中々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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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三〇四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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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 二十五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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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一九四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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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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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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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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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中下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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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九二〇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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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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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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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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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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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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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下上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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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五三六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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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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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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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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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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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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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下中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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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一五二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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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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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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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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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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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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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下々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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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七六八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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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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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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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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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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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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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2번={{TagSpage|142-1}}(나) 庇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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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3번={{TagSpage|142-2}}<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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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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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九年分 調定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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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
<td>過去 五箇年 實收稅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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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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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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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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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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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年分</td>
 +
<td>調定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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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年次</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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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實收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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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備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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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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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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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上々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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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二二五石</td>
 +
<td>世宗 二十年</td>
 +
<td>七九〇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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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十年, 二十一年, 二十二年은 損實法 施行年, 二十三年, 二十四年은 舊貢法 施行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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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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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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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上中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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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〇〇二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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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 二十一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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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二〇〇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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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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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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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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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上下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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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七八〇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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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 二十二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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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九二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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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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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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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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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中上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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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五五七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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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 二十三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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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三三六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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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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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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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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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中々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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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三三五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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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 二十四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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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三五九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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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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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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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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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中下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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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一一二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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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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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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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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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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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下上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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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八九〇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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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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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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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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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下中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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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六六七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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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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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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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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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下々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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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四四五石</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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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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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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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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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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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4번={{TagSpage|142-3}}右 二表에서 吾人은 다음과 같은 事實을 看取할 수가 있다. 即 淸安縣에서는 損實法에서 舊貢法으로 드러오면서 收稅額은 大膨脹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 新貢法의 調定額에 比하면, 그 中上年·中々年·下中年 等의 稅額밖에 안 된다. 더욱이 損實法 時의 稅額으로 말하면 新貢法의 下上年·下中年 以下의 稅額에 不過하다. 庇仁縣에 있어서도, 損實法에서 貢法으로 옮아가면서 稅額은 漸次 增加하여 損實法 時의 稅額은 新貢法의 下上年·中下年·下々年 以下의 稅額, 舊貢法 時의 稅額은 新貢法 中中年의 稅額에 該當한다. 무릇 新貢法에서 上々으로부터 下々에 이르는 九等年分을 作定한 以上 이 政府의 收斂 精神의 常識으로 보더라도 대개 年分을 中々 以下로 놓기는 드물 것이오, 또 事實 年分 査定이 下司에서 上司의 손으로 옮아갈 동안에 漸漸 혹이 붙어가는 것이 常例인즉 年分은 如干한 凶年이 아니고는 大概 中上 乃至 上中에 落着된 모양이다. 結局 新貢法은 損實法에 比하면 勿論이요 舊貢法에 比하여도 相當한 增稅를 意味하게 되는 것이다. 二十六年 八月 庚午, 王이 前記 二縣 新稅 調定額과 過去 五箇年 間 實收稅額과의 對比를 보고 述한 意見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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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5번={{TagSpage|142-4}}<blockquote no="28">予以謂 高麗之法 或三四分取一 或五六分取一 其剝民甚矣 {{ruby|然近年|○○○}} {{ruby|官吏損實太疎|○○○○○○}} {{ruby|至於數十而稅一|○○○○○○○}} {{ruby|習於人心|○○○○}} {{ruby|今此新法|○○○○}} {{ruby|雖以先王他一之法爲定|○○○○○○○○○○}}<sup>(事實은 二十而稅一)</sup>, {{ruby|愚民豈得盡知之|○○○○○○○}} 今觀二州所出之數 疑於太重 將與大臣更議之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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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6번={{TagSpage|143-1}}이라고 보여 있으니, {{ruby|貢法이란|○○○○}} {{ruby|원래|○○}} {{ruby|增稅하기|○○○○}} {{ruby|爲한|○○}} {{ruby|立法|○○}}이었다(但 損實 때에 國庫 收入이 적었던 것은 農民의 負擔이 僅少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損實法과 同在하는 諸中 間 搾取의 舞臺이었던 것은 勿論이다). 王에게 此二縣의 稅額을 多少 減縮하려는 意思가 있었고, 또 어느 程度까지 그 意思는 實現되었겠지마는 左右間에 新法이 巨額의 增稅를 招來하는 것은 다루지 몯할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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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7번={{TagSpage|143-2}}大綱 以上 所述에 依하여 吾人은 다음의 結論을 얻는다. 即 {{ruby|貢法實施에|○○○○○}} {{ruby|依하여|○○○}} {{ruby|一結의|○○○}} {{ruby|實積은|○○○}} {{ruby|舊에|○○}} {{ruby|比하여|○○○}} {{ruby|자못|○○}} {{ruby|縮小하고|○○○○}}, {{ruby|이에|○○}} {{ruby|쫓아|○○}} {{ruby|一結의|○○○}} {{ruby|最高|○○}} {{ruby|收稅額은|○○○○}} {{ruby|조금|○○}} {{ruby|低下하였으나|○○○○○○}} {{ruby|結局|○○}} {{ruby|一縣의|○○○}} {{ruby|總稅額은|○○○○}} {{ruby|巨額의|○○○}} {{ruby|增加를|○○○}} {{ruby|보이고|○○○}}, {{ruby|따라서|○○○}} {{ruby|또|○}} {{ruby|前後|○○}} {{ruby|同一地積의|○○○○○}} {{ruby|收稅實額은|○○○○○}} {{ruby|舊에|○○}} {{ruby|比하여|○○○}} {{ruby|크게|○○}} {{ruby|增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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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8번={{TagSpage|143-3}}何如間에 世宗朝의 貢法 創定은 量田의 發展과 諸位田의 整理와 함께 國家機構의 强化上으로 보아 合理的·中央集權的인 改革을 遂行한 것으로 吾人은 여기서 이 封建 政府의 運勢 上昇의 過程을 看取할 수가 있다. 또 他方 農民 側에서 이것을 볼지라도, 合法的으로는 相當한 增稅가 되었지마는, 其反面에 非合法的인 諸負擔을 幾分輕滅한 데 있어서 進步的인 改革이라고 아니할 수는 없다. 勿論 未久에 新法 自體 內에서 別個의 墮落이 싹트는 것이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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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번=이제까지의 서술이 그 대상의 성질상 다소 착잡함을 미면한 것 같으니, 다시 그 이해를 편하게 하기 위하여 공법을 그 주류에 따라 개괄적으로 논하여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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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번=먼저 그 연혁을 개관하자. 세종 12년, 종래의 손실수세법이 그 폐가 다단함에 감계하여, 1결당 10두의 정액세법을 펴고자 하여, 그 편부(便否)를 묘의 및 8도의 관민에게 물었다. 가부의 수는 거의 백중하였으나, 왕은 이로 인하여 공법 실현의 가능성 여하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시사를 받게 되었다. 후에 다시 연구를 거듭하여 그 19년에는 전국 토지를 3등에 나누어 그들에게 각각 종래의 3등전의 구분을 배당하여써 1결 최고 20두 최저 12두의 정액세를 부과하기로 입법하였다. 이어 익 20년부터 경상·전라의 일부에 본법을 실시하였다. 다시 22년에는 본법에 수정을 가하여 종래의 3등도의 내부에 다시 3등관의 구분을 세워 역시 1결 최고 20두부터 최저 12두에 이르는 정액세를 부과하기로 하고 같은 해부터 경상·전라의 전부, 다시 23년부터 충청도 전부를 이 법으로 포섭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는 26년부터 이 법으로 율하게 되니, 이상은 말하자면 공법 시행의 제1차 단계였다. 그러나 이 법의 내부에는 기다(幾多)의 기술적 결함을 포장하고 있었으니 즉 제1로 전의 3등급 구분, 이에 딸는 3등척 양전법, 제2로 전품에 있어서의 3등도 3등관주의, 제3으로 풍흉의 무시 등. 이에 25년 10월부터 익 26년 11월까지에 옛 공법에 다시 개혁을 가하여 전분6등·동과 수조·연분9등 및 감면 등의 법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6등전 각 1결의 실적, 6등전 양전척의 길이도 결정되었다. 입법과 함께 하3도의 6현은 이 법을 적용되고, 이어 전라도는 세종 32년부터 경기·충청·경상의 각 도는 세조8년 내지 11년경까지에 다 옛 공법에서 신공법으로 넘어갔다. 황해·강원·평안·영안의 각 도는 각각 성종 2년·6년·18년·20년으로써 종래의 손실법에서 일약 신공법으로 들어갔다. 세종 26년에 정착한 공법은 그 후 세목에 있어서는 다소의 수정 변경을 보았으나, 그 {{ruby|원칙|○○}}에 있어서는 추호도 변치 않고 이조의 말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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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번=다음에 우리는 공법을 옛 손실법과 비교하면서, 그 특징으로 하는 바를 개괄적으로 논할까 한다. 손실법의 3등전세의 무표준성(대강 어림은 있지만 극히 조잡한 것이다)에서 공법의 6등전의 정밀성 및 생산력 준거성 등에 이행한 것은, 확실히 합리적인 개혁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제 신구 전결의 면적 및 세액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검토하여 보자. 공법에 있어서는 전분6등이요, 그 분등의 {{ruby|준거|○○}}는 그들의 생산력(57묘지 1등전 상상년 미(米) 40석, 6등전 미 10석 등)에 있는 것은 물론이나, {{ruby|그|○}} {{ruby|실천상의|○○○○}} {{ruby|지침|○○}}은 전후를 통하여 세종 25년 11월 병진 하3도 전분등제때의 절목이었다<sup>(제3절, 1, ③, 갑(가) 참조)</sup>. 단 당시는 전분5등이었지만 그 후 전분6등의 제6등전은 전의 제5등전의 분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전후에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 전품등제의 실천상의 지침은 훨씬 나중 효종 4년 소정(所定)의 ‘전제상정소 준수 조서’ 속에까지도 거의 그대로 옮겨졌다. 옛 3등전에서 새 6등전으로의 재편성의 관계는 세종 25년의 전품 절목과 같아, 옛 상중전은 전부 새 12등전·옛 하등전은 대부분 새 123등전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새 456등전으로 된 것은 할 수 없는 악전들뿐이니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이 경향은 하3도에 있어 현저하니, 하3도에는 4등 이하 전이 희한하다(이에 대하여는 다산의 목민심서도 언급하였지만). 그리고 새 4등 이하로 된 것은 차라리 옛 ‘산전’<sup>(다음의 산전에 관한 주석을 참조)</sup>으로부터 화성(化成)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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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번=이상 소술(所述)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신구 전 1결의 실적의 증감 여하를 고려하여 보자. 신구 전 1결의 지적은 아래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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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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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구 3등전1결의 실적</td>
 +
<td>신 6등전1결의 실적</td>
 +
</tr>               
 +
 
 +
<tr>
 +
<td>상등전 25·4묘<br/>중등전 39·9묘<br/>하등전 57·6묘<br/>산전(각주 참조)<br/>산하전 115·2묘<br/>산요전 172·8묘<br/>산상전 1230·4묘</td>
 +
<td>1등전 38·0묘<br/>2등전 44·7묘<br/>3등전 54·2묘<br/>4등전 69·0묘<br/>5등전 95·0묘<br/>6등전 152·0묘<br/>.</td>
 +
</tr> 
 +
 
 +
</table>
 +
|목차5해독문6번=(주석) 옛 3등전의 실적이 각각 표 중 소게(所揭)와 같은 것은 이미 쓴 바이다<sup>(제1절 참조)</sup>. ‘산전’에 대하여는 다소 설명을 요할까 한다. 세계실록 27년 7월 을유조에<br/><blockquote no="26">議政府據戶曹呈申, 今田制改詳定事 及可革條件, 磨勘後錄 (中畧) 一.前此田品 限以三等故 {{ruby|山上|○○}}·{{ruby|山腰|○○}}·{{ruby|山下之田|○○○○}} {{ruby|比常田倍數計之|○○○○○○○}} 今三等之下 又加三等假令以山上田爲六等則 以前十結五十五卜之地 今爲一結 其地甚濶 旦下三道 雖山上田 或不用倍數 其法不一 上項山田 今除倍數之法 從其田結卜元數 隨其</blockquote><br>라고 보인다. 유시관지(由是觀之)하건대, 옛 법에는 산전을 특히 불생산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산하·산요·산상전 각 1결의 지적은, 평지 하등전1결의 지적57·6묘를 체가하여, 각각 115·2묘, 172·8묘, 230·4묘 등으로 하였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차설(且說) 의정부 상언의 의미는, <cite no="16">“금후도 만일 옛 법을 본받아 산전을 양(量)한다고 하면, 산하·산요·산상전 각 1결은 평지 6등전1결 152묘를 체가하여, 각각 304묘, 456묘, 608묘 등이 되어, 결국 새 산상전은 608묘니, 이는 옛 평지 하등전10결55점의 지적과 같은 것이라.(57.6묘×10.55=607.68묘) 그 땅이 심활하니, 신법에 있어서는 이 산전 체가법을 변하고, 평지전에 준하여 분등 측량하자”</cite>는 것이다. 상언은 청종되니, 신법에서는 산전의 특별취급이 없어졌다.
 +
|목차5해독문7번={{ruby|구상등전|○○○○}}은 25·4묘에서 대부분은 신(新)1등전38·0묘 대부분은 다시 신2등전44·7묘로 화성하여, {{ruby|크게|○○}} {{ruby|확대되었다|○○○○○}}. {{ruby|구중등전|○○○○}}은 39·9묘에서 신12등의 38·〇묘, 44·7묘로 화성하여, {{ruby|별로|○○}} {{ruby|증감이|○○○}} {{ruby|없다|○○}}. 그러나 상중2종전은 본래 극소수니, 괘치(掛齒)할 것이 못된다. 다만 {{ruby|구하등전|○○○○}}1결57·6묘가 대부분 변하여 신123등의 38·0묘, 44·7묘, 54·2묘가 되었다면 이는 {{ruby|대단한|○○○}} {{ruby|면적감축|○○○○}}이다. 물론 구하전에서 신45등 이하로 낙하하여 전적을 넓힌 것이 있겠으나, 이것은 또한 소수다. 다시 {{ruby|산전|○○}}이 본래의 115·2묘, 172·8묘, 230·4묘 등에서 변하여 신4등 이하의 69·0묘, 95·0묘, 152·0묘 等이 되었다면, 이 역시 {{ruby|전반적인|○○○○}} {{ruby|감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 모든 화성 중에서 가장 큰 중량을 갖는 것은, 물론 구하등전이 신123등전으로 된 화성이다. 이상의 모든 사실에 의하여 우리는 무엇을 결론하는가. 왈,
 +
|목차5해독문8번=<blockquote no="27">”{{ruby|신1결의|○○○○}} {{ruby|지적은|○○○}} {{ruby|대체로|○○○}} {{ruby|구1결의|○○○○}} {{ruby|지적보다|○○○○}} {{ruby|크게|○○}} {{ruby|축소되었다|○○○○○}}”고.</blockquote>
 +
|목차5해독문9번=단 구1결의 지세(地稅)는 최고 30두요 신1결의 지세는 최고 20두로서, 각각 연차에 의하여 견감이 있다. 그러면 1결 지적의 감소와 또 1결 최고 수세액의 저하는 종합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세종 26년 8월<sup>(실록 경오조 참조)</sup>, 충청도 청안·비인 2현에 신공법에 의한 전품이 등제되고(물론 이 해 8월에는 신공법은 아직 일반적으로 반포는 되지 않았으나, 그 이전에 내부적으로는 벌써 법도 결정되어 있었고, 또 이 법에 의하여 2현은 전품도 거의 등제되어 있었다), 이 등제에 의하여 장차 행할 세액이 조정되었는데, 이 두 현의 각 연분의 조정세액과 과거 수개년 간의 실수세액과를 비교 표시하면 다음과 같았다.
 +
|목차5해독문10번=(가) 청안현
 +
|목차5해독문11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
<td>9년분 조정액</td>
 +
<td></td>
 +
<td>과거 5개년 실수세액</td>
 +
<td></td>
 +
<td></td>
 +
</tr>   
 +
 
 +
<tr>
 +
<td>연분</td>
 +
<td>조정액</td>
 +
<td>연차</td>
 +
<td>실수액</td>
 +
<td>비고</td>
 +
</tr>   
 +
 
 +
<tr>
 +
<td>상상년</td>
 +
<td>3,814석</td>
 +
<td>세종 21년</td>
 +
<td>1,003석</td>
 +
<td>21년, 22년은 손실법 시행년 22년, 24년, 25년은 구(舊)공법 시행년인데, 그 중 25년은 대흉작으로 인하여 특히 견감을 받은 해다.</td>
 +
</tr>   
 +
 
 +
<tr>
 +
<td>상중년</td>
 +
<td>3,457석</td>
 +
<td>세종 22년</td>
 +
<td>1,515석</td>
 +
<td></td>
 +
</tr>   
 +
 
 +
<tr>
 +
<td>상하년</td>
 +
<td>3,073석</td>
 +
<td>세종 23년</td>
 +
<td>2,560석</td>
 +
<td></td>
 +
</tr>   
 +
 
 +
<tr>
 +
<td>중상년</td>
 +
<td>2,689석</td>
 +
<td>세종 24년</td>
 +
<td>2,358석</td>
 +
<td></td>
 +
</tr>   
 +
 
 +
<tr>
 +
<td>중중년</td>
 +
<td>2,304석</td>
 +
<td>세종 25년</td>
 +
<td>1,194석</td>
 +
<td></td>
 +
</tr>   
 +
 +
<tr>
 +
<td>중하년</td>
 +
<td>1,920석</td>
 +
<td></td>
 +
<td></td>
 +
<td></td>
 +
</tr>   
 +
 +
<tr>
 +
<td>하상년</td>
 +
<td>1,536석</td>
 +
<td></td>
 +
<td></td>
 +
<td></td>
 +
</tr>   
 +
 +
<tr>
 +
<td>하중년</td>
 +
<td>1,152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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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
<td></td>
 +
<td></td>
 +
</tr>   
 +
 +
<tr>
 +
<td>하하년</td>
 +
<td>768석</td>
 +
<td></td>
 +
<td></td>
 +
<td></td>
 +
</tr>   
 +
 
 +
</table>
 +
|목차5해독문12번=(나) 비인현
 +
|목차5해독문13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
<td>9년분 조정액</td>
 +
<td></td>
 +
<td>과거 5개년 실수세액</td>
 +
<td></td>
 +
<td></td>
 +
</tr>   
 +
 
 +
<tr>
 +
<td>연분</td>
 +
<td>조정액</td>
 +
<td>연차</td>
 +
<td>실수액</td>
 +
<td>비고</td>
 +
</tr>   
 +
 
 +
<tr>
 +
<td>상상년</td>
 +
<td>2,225석</td>
 +
<td>세종 20년</td>
 +
<td>790석</td>
 +
<td>20년, 21년, 22년은 손실법 시행년, 23년, 24년은 구(舊)공법 시행년.</td>
 +
</tr>   
 +
 
 +
<tr>
 +
<td>상중년</td>
 +
<td>2,002석</td>
 +
<td>세종 21년</td>
 +
<td>1,200석</td>
 +
<td></td>
 +
</tr>   
 +
 
 +
<tr>
 +
<td>상하년</td>
 +
<td>1,780석</td>
 +
<td>세종 22년</td>
 +
<td>292석</td>
 +
<td></td>
 +
</tr>   
 +
 
 +
<tr>
 +
<td>중상년</td>
 +
<td>1,557석</td>
 +
<td>세종 23년</td>
 +
<td>1,336석</td>
 +
<td></td>
 +
</tr>   
  
|목차5해독문1번= @
+
<tr>
 +
<td>중중년</td>
 +
<td>1,335석</td>
 +
<td>세종 24년</td>
 +
<td>1,359석</td>
 +
<td></td>
 +
</tr>   
 +
 +
<tr>
 +
<td>중하년</td>
 +
<td>1,112석</td>
 +
<td></td>
 +
<td></td>
 +
<td></td>
 +
</tr>   
 +
 +
<tr>
 +
<td>하상년</td>
 +
<td>890석</td>
 +
<td></td>
 +
<td></td>
 +
<td></td>
 +
</tr>   
 +
 +
<tr>
 +
<td>하중년</td>
 +
<td>667석</td>
 +
<td></td>
 +
<td></td>
 +
<td></td>
 +
</tr>   
 +
 +
<tr>
 +
<td>하하년</td>
 +
<td>445석</td>
 +
<td></td>
 +
<td></td>
 +
<td></td>
 +
</tr>   
 +
 
 +
</table>
 +
|목차5해독문14번=위의 두 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취할 수가 있다. 즉 청안현에서는 손실법에서 구공법으로 들어오면서 수세액은 대팽창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 신공법의 조정액에 비하면, 그 중상년·중중년·하중년 등의 세액밖에 안 된다. 더욱이 손실법 때의 세액으로 말하면 신공법의 하상년·하중년 이하의 세액에 불과하다. 비인현에 있어서도, 손실법에서 공법으로 옮아가면서 세액은 점차 증가하여 손실법 때의 세액은 신공법의 하상년·중하년·하하년 이하의 세액, 구공법 때의 세액은 신공법 중중년의 세액에 해당한다. 무릇 신공법에서 상상으로부터 하하에 이르는 9등연분을 작정한 이상 이 정부의 수렴 정신의 상식으로 보더라도 대개 연분을 중중 이하로 놓기는 드물 것이요, 또 사실 연분 사정이 하사에서 상사의 손으로 옮아갈 동안에 점점 혹이 붙어가는 것이 상례인즉 연분은 여간한 흉년이 아니고는 대개 중상 내지 상중에 낙착된 모양이다. 결국 신공법은 손실법에 비하면 물론이요 구공법에 비하여도 상당한 증세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26년 8월 경오, 왕이 앞서 든 두 현의 신(新)세 조정액과 과거 5개년 간 실수세액과의 대비를 보고 술한 의견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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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5번=<blockquote no="28">予以謂 高麗之法 或三四分取一 或五六分取一 其剝民甚矣 {{ruby|然近年|○○○}} {{ruby|官吏損實太疎|○○○○○○}} {{ruby|至於數十而稅一|○○○○○○○}} {{ruby|習於人心|○○○○}} {{ruby|今此新法|○○○○}} {{ruby|雖以先王他一之法爲定|○○○○○○○○○○}}<sup>(사실은 二十而稅一)</sup>, {{ruby|愚民豈得盡知之|○○○○○○○}} 今觀二州所出之數 疑於太重 將與大臣更議之 云云</blockquote>
 +
|목차5해독문16번=이라고 보여 있으니, {{ruby|공법이란|○○○○}} {{ruby|원래|○○}} {{ruby|증세하기|○○○○}} {{ruby|위한|○○}} {{ruby|입법|○○}}이었다(단 손실 때에 국고 수입이 적었던 것은 농민의 부담이 근소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손실법과 동재(同在)하는 제(諸)중간 착취의 무대였던 것은 물론이다). 왕에게 이 두 현의 세액을 다소 감축하려는 의사가 있었고, 또 어느 정도까지 그 의사는 실현되었겠지만 좌우간에 신법이 거액의 증세를 초래하는 것은 다루지 못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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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7번=대강 이상 소술(所述)에 의하여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얻는다. 즉 {{ruby|공법실시에|○○○○○}} {{ruby|의하여|○○○}} {{ruby|1결의|○○○}} {{ruby|실적은|○○○}} {{ruby|구에|○○}} {{ruby|비하여|○○○}} {{ruby|자못|○○}} {{ruby|축소하고|○○○○}}, {{ruby|이에|○○}} {{ruby|좇아|○○}} {{ruby|1결의|○○○}} {{ruby|최고|○○}} {{ruby|수세액은|○○○○}} {{ruby|조금|○○}} {{ruby|저하하였으나|○○○○○○}} {{ruby|결국|○○}} {{ruby|1현의|○○○}} {{ruby|총세액은|○○○○}} {{ruby|거액의|○○○}} {{ruby|증가를|○○○}} {{ruby|보이고|○○○}}, {{ruby|따라서|○○○}} {{ruby|또|○}} {{ruby|전후|○○}} {{ruby|동일지적의|○○○○○}} {{ruby|수세실액은|○○○○○}} {{ruby|구에|○○}} {{ruby|비하여|○○○}} {{ruby|크게|○○}} {{ruby|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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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8번=하여간에 세종 조(朝)의 공법 창정은 양전의 발전과 모든 위전의 정리와 함께 국가기구의 강화상으로 보아 합리적·중앙집권적인 개혁을 수행한 것으로 우리는 여기서 이 봉건 정부의 운세 상승의 과정을 간취할 수가 있다. 또 다른 방면으로 농민 측에서 이것을 볼지라도, 합법적으로는 상당한 증세가 되었지만, 그 반면에 비합법적인 제부담을 기분 경멸한 데 있어서 진보적인 개혁이라고 아니할 수는 없다. 물론 미구에 신법 자체 내에서 별개의 타락이 싹트는 것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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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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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번={{TagSpage|143-4}}前節까지에서 吾人 粗雜하나마 本論 主題의 目的을 다하였다고 생각하나, 더욱이 貢法의 初意와 實際에 關한 認識을 돕는 限에 있어, 貢法 其後의 發展과 後人의 이에 對한 褒貶의 蹤跡을 一瞥하기로 한다.
 +
|목차6원문2번={{TagSpage|143-5}}元來 貢法은 純理的으로만 본다면 田分=結負=稅額法이든지, 年分法이든지, 災傷法이든지 다 理路가 整然하여 別로 缺陷을 發見할 수가 없는 制度이다. 그렇나 此를 實際로 行하기로 말하면 莫大한 障碍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먼첨 {{ruby|田分|○○}}으로 말하면, 원 標準도 있고 實踐의 準則도 있는 것이지마는, 第一 이를 行하는 許多한 官吏의 頭腦를 統一하기가 어려우니, 이에 伴하는 混亂은 壬辰 以後 더욱이 甚하여저서, 磻溪隨錄(卷之一)에 말한 것과 같이 量田官吏가 다 各々 제뜻대로 하기 때문에 湖南의 一等이 嶺南의 一等과 다르고, 此邑의 六等이 彼邑의 六等과 달라, 四方 州郡 同等之田의 土品 厚薄이 懸殊하게 되여 버리는 것은 오히려 自然의 歸結이었다. 다음 {{ruby|年分|○○}}으로 말하면, 壬辰 以前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定式대로 한 模樣이나, 壬辰 以後에 이르러서는 紀綱이 紊亂하여지는 한便, 貢物雜役의 新稅가 雨後竹筍 같이 簇出하여 正稅를 멀리 凌過하게 되니 形便이 正稅의 年分을 定式대로 九等을 놓을 수가 없게 되였다. 그래서 年分이라면 金穰大熟과 靑空大殺을 勿論하고 그만 依例히 下々年 一結四斗를 놓게 되여 이것이 不文法이 되여 버리니 年分法은 有其名而無其實하게 되였다. 正稅는 四斗지마는 雜稅가 부푸러 오르고 또 田結의 漏縮이 많어지며, 거기에 中間官吏의 籠絡이 드러끼어, 上下相欺, 一大 난장판을 現出하니, 隨錄(卷之六)의 말하는 바에 依하면, 나라에 事爲가 없고 守宰가 稍廉할 境遇에는 一結稅課가 少不下二三十斗요, 그렇지 안 할 境遇에는 多至七八十斗요, 더욱이 京畿와 西北은 甚하여 一結稅百斗에 達하는 者가 있었다 한다. 다음 {{ruby|災傷法|○○○}}으로 말하면, 원 年分은 一般을 規定하고 災傷은 特殊를 規定하는 것이지마는 年分과 災傷은 其勢가 相半하기 쉬운 것이라, 年分이 依例이 下々年을 높게 된 後에도 如前이 災傷을 論하게 되니 結局 疊減이 되여 버린다. 이리하여 給災를 한즉 國庫의 歲入이 全然 없어지니(國庫歲入의 全無는 農民負擔의 全無가 아니라 中間官吏의 全收를 意味하는 것이다), 이에 焦燥하여 덮어놓고 不給災하는 해도 있게 되니, 被災의 小民이 논드렁을 안고 우는 것이었다(隨錄 卷之一). 所謂 貢法도 이 地境에 이르면 滄桑之變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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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3번={{TagSpage|144-2}}貢法은 다시 時間과 함께 無限이 變하여 갔다. 위선 仁祖 十二 甲戌年 以後 六等量田尺法을 煩冗타 하여 廢棄하고 量田은 {{ruby|원一等尺|○○○○}} {{ruby|한|○}} {{ruby|가지만|○○○}} 가지고 實測한 後, 一等田은 그 數대로 施行하고, 二等·三等·四等·五等·六等田은 各々 一等田結 數에다 八五空一(〇·六五〇一)·七空一一(〇·七〇一一)·五五空七(〇・五五〇七)·單四(〇·四)・二五(〇·二五) 等을 乘하여 各其 結數로 하게 되였다. 그 理由는 원
 +
|목차6원문4번={{TagSpage|145-1}}(一等田畝 數) (二等田畝 數)<br/>38 ÷ 44.7 = 0.8501⋯⋯<br/>38 ÷ 54.2 = 0.7011⋯⋯<br/>38 ÷ 69 = 0,5507⋯⋯<br/>38 ÷ 95 = 0.4000<br/>38 ÷ 152 = 0.2500
 +
|목차6원문5번={{TagSpage|145-2}}이니만치, 前後 同一의 算法이다. 但 田積이 一結 以下일 時는 簡略하게 二等 八五・三等 七〇·四等 五五·五等 單四·六等 二五로 하기로 한다. 八五·七〇·五五·單四·二五等의 整然한 算術級數는 원 稅制 創定 時에 五十七畝六等田 上々年 收量米 四〇, 三四, 三八, 二三, 一六, 一〇石 等의 算術級數에 淵源한 것이오, 따라서 거기서 算出한 六等田의 畝數 三八, 四四·七, 五四·二, 六九·九五, 一五二 等은 한 箇의 調和級數를 이루는 것이오, 다시 거기서 算出한 六等尺의 周尺數 四·七七, 五·一八, 五·七〇, 六·四三, 七·五五, 九·五五 等은 이 調和級數의 平方根의 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異常한 일의 한 가지는, 茶山이 原六等田尺과 結積을 論할 때에(經世遺表 卷六), {{ruby|그|○}} {{ruby|出處를|○○○}} {{ruby|번연이|○○○}} {{ruby|알면서|○○○}}, 不注意하게도 <cite no="17">「原六等田尺과 結積은 未知此法이 何所據而如是也로다, 求之以平比例<sup>(算術級數)</sup>而不合하고 求之以差比例<sup>(幾何級數)</sup>而不合하고, 求之以三分損一之例(亦幾何級數也)而不合하니 斯何法也오」</cite>라고 打駁을 하였다. 그렇면서 甲戌 以後의 二等八五 云々法은 許可하여, 結局 <cite no="18">「前法은 必 高麗荒亂之世의 流來之法而 國初搶攘에 未及是正한 것」</cite>이라 하고, <cite no="19">「後法은 至我 仁祖大王 甲戌 六年 하여 始改하니, 其法이 於戲盛矣로다.」</cite> 해버렸으니, 이 亦 그의 千慮一失에 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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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6번={{TagSpage|145-3}}遮莫 六種尺 並用에 奸吏의 容奸이 드러 끼이기 쉬운 것은 勿論이려니와, 그렇면 一種尺 專用은 그 効果가 어떠할가. 孝宗 四年 頒布遵守冊<sup>(前出)</sup>에는, 二等田尺으로 測量한 結數를 二等田 以下로 換算할 때의 換算表가 드러있고, 또 그보담 二十年 前인 仁祖 甲戌에 單尺法을 始作할 그때부터 應當 그런 것이 있었겠지마는, 實際 畦畔에 설 때에는 亦是 相當한 加減乘除를 必要로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土地測量法 그 自體가 當時의 田氓에게는 한 不可解의 妖術이었다―事實은 簡單한 것이지마는. 또 그 簡單이라는 것이 許多한 混亂을 産出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隨錄{{TagPage|146-1}}(卷六)의 말과 같이 乘除加減之法은 當官者 自體가 다 살피지 몯하는 것이니, 하물며 田氓이리오. 官이 다 살피지 몯하고, 다 알지 몯한즉, 胥吏가 容奸을 한다. 이에 賄賂 請托과 漏落 欺隱의 弊가 그 極에 達하여 結負가 無紀하고 賦稅가 不均하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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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7번={{TagSpage|146-2}}壬辰 以後에 年分은 依例이 下々를 놓게 되였다는 것은 旣述하였거니와, 漸々 나려와 英正 間에 이른즉, 이것이 거의 完全이 化石化하여, 田稅 即 一結四斗라고까지 되여 버렸다. 그러다가 或 어떤 地方이 한 번 下中年 六斗, 下上年 八斗(그 以上은 絕對로 올라가지 않는다)를 놓이게 되면 이것이 그만 또 化石化한다. 그래서 結局 田分이({{ruby|年分|○○}}이 아니고 {{ruby|田分|○○}}이) 三等이 되여 버려 {{ruby|下下田|○○○}}·{{ruby|下中田|○○○}}·{{ruby|下上田|○○○}}의 名目이 나게 되었다. 即 田分과 年分이 完全이 混同되여, 一般 農民은 勿論이려니와 胥吏·官員까지도 田分·年分의 別을 確實이 把掘하는 者가 적게 되니, 可히 抱腹絕倒할 일이다. 茶山은 이 狀態를 形容하여, <cite no="20">「田等年分이 牽連爲法하니 拕泥帶水하고 似粥如飯이라」</cite> 하였는데<sup>(遺表 卷七)</sup>正히 그러하다. 結局 英祖 二十年에 續大典을 編成할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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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8번={{TagSpage|146-3}}<blockquote no="29">凡一結. 收田稅四斗.<sup>凡田畓下之中以上收稅. 不在此限(戶典收稅條.)</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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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9번={{TagSpage|146-4}}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條文의 大文은 茶山이 指摘한 것과 같이 그 外面을 보면 一結四斗란 恒率인 것 같기도 하나, 其裏面을 드려다 보면 凶年을 가르친 것이니, 其書法이 模糊 不明하다. 또 註의 下之中 以上이란, 其外面을 보면 田等 같기도 하나, 其裏面을 드려다 보면 年分을 가르친 것이니, 其書法이 또한 模糊 不明하다. 기왕이면 下中六斗·下上八斗로 乃至 上々二十斗까지를 備書하여야 할 것이지 어찌 不在此限으로 흐려버리는가. 이 模糊한 곳에 또 官吏의 容奸이 붙는 것이다. 經國大典의 田分六等·年分九等은 여기 와서는 산 듯 죽은 듯하다. 法의 條文으로는 天下의 珍品이나, 그 事情을 알고 보면, 그 苦衷을 可히 推察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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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0번={{TagSpage|146-5}}東方의 聖主와 賢相이 考古參今하여 가지고, 萬世不刊之法으로 지었다는 法이 어찌 百數十 年을 지나지 안 하여 이렇게 悲慘한 物件이 되었을가. 그 原因을 쉽사리 所謂{{TagPage|147-1}} 龍蛇之變으로만 돌려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壬辰을 前後하여 所謂 昏朝라는 것이 하나씩 있으니, 罪를 거기에나 돌려버릴 것인가. 그렇나 昏朝는 언제든지 「反正」된 것이니 責任을 이에 轉嫁할 수는 없다. 이 問題는 難題니 暫間 그 答을 保留하기로 하더라도, 何如間에 制度와 背馳되는 現實이, 구태여 昏朝와 外寇를 기다리지 않고, 벌써 立法과 同時에 생겼다는 것만은 不可誣의 事實이다. 그렇면 이 不合理의 認知와 그에 對한 反正의 思想도 當然이 일즉부터 있었을 것이다. 다만 磻溪와 茶山 같은 이의 呼訴는 顯著한 것이 있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果然 그들의 識見은 透澈하고 詞情은 悽惋한 것이 있으나, 그들이 간 後에 李朝 末까지 百年 或 數百 年 동안에 生前에 冊을 많이 읽었다고, 그들의 白骨이 執義도 되고 提學도 되고 한 일은 있으나, 그들이 平生을 두고 애를 태우든 일은, 그로 하여 논드렁 하나 어떻게 變하고 田稅가 한말 어떻게 되였다는 일은 있지 아니하였다. 워낙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이 唾棄하고 罵倒한 그 法도 본대는 名 君賢臣이 風雲際會하여 善美를 다하여 만들었다는 法이었으니, 한때는 「賢明한 頭腦」들의 謳歌를 받든 것이다. 그렇면 李朝 世宗大王에 이르러 처음 이 社會에 「良法」이라는 것이 出現한 것인가. 그것도 그렇지 않다. 世宗朝의 君臣이 이를 唾棄하고, 거기서 「良法」을 만드러 낸 그 「惡法」도 高麗朝 臣僚의 말에 依하면 麗 太祖가 龍興하여 <cite no="21">『仁政은 必自經界始하니 首正經界하여야겠다』</cite>고 하여 지은 것이오, 그 後 聖祖 聖宗이 繼志 通事하여 發展시키었다는 「良法」이었다. 이렇게 無限이 보아 올라가면 「良法」과 「惡法」의 分揀이 甚히 朦隴하여진다. 그렇다고 해서 「法은 社會의 進步를 따라서 當然이 變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는, 행여나 생각지 말라. 磻溪나 茶山이 天地 間 最上法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名案」을 거기서 啓示를 받은 그 法이 벌써 三千年 前의 周公의 法이 아니냐. 麗 太祖와 東方 堯舜의 遺法이 或大桀小桀도 되고 或大貊小貊도 되며, 大賢 磻溪 茶山의 抱負가 容納되지 안 하는 것을 보면 「制度」나 「頭腦」는 結局 本源的이오 自律性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賢明한 制度나 頭腦는 是認하고 謳歌하고 嘆息은 할지언정, 事物을 創造하고 決定하는 것은 아니었{{TagPage|148-1}}다. 오히려 創造하고 決定하는 것은, 人間의 {{ruby|貪慾한|○○○}} {{ruby|胃膓|○○}}과 이에 따라 움지기는 {{ruby|放縱한|○○○}} {{ruby|손|○}}이었다. 設令 十世宗 百磻溪 千茶山이 한꺼번에 쏟아젔던들 이 胃膓과 손을 어찌하였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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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1번={{TagSpage|148-2}}수다한 듯하나 한 가지만 더 蛇足을 붙이자. 世宗이나 磻溪나 茶山을 勿論하고, 이들의 改革案의 主點은 異積인 結負를 廢하고 同積인 頃畝를 行하자는 데 있는데, 頃畝法을 行한다고 해서, 地球上에 絕對不動의 極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事實 同面積主義를 쓴 日本·中國·西洋 等에서는 法定 一尺長은 같으면서 事實은 地方과 境遇에 따라, 非合法的으로 尺의 實長이 二割, 三割, 乃至 倍, 倍의 倍나 伸縮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sup>藤田元春 著 尺度綜考 六一―八二頁</sup>. 勿論 尺의 伸縮 過程과 그 結果의 意味하는 것은 萬邦이 다 다르겠지마는. 이렇게 되면 朝鮮과 같이 애초에 隨等異尺을 한 데나, 日本 中國과 같이 法만으로는 各等同尺을 한 데나, 過히 優劣을 論할 수가 없게 된다. 吁! 世宗 磻溪 茶山은 이 말을 드르면 반드시 愕然하리라. 하나 要컨댄 制度와 頭腦의 貧困을 意味하는 以外의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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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2번={{TagSpage|148-3}}附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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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3번={{TagSpage|148-4}}從來에 李朝田稅制度를 論한 것에 河合弘民·和田一郞 兩 博士의 著述이 있으나, 各其 說而不盡한 것이 있으며, 또 이들은 田稅 諸規定의 表面的 記述을 主로 한 故로 諸要素 間의 脈絡이 貫通치 몯하였다. 이에 拙稿는 딴에는 이를 是正하여 모든 要素을 한 줄로 뀌여 보랴고 努力한 것이다. 그리고 最近에 中樞院에서 「朝鮮田制考」라는 一篇이 나와서 亦是 同 問題를 取扱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前記 兩 博士의 것을 改惡한 感이 不無하다. 讀者는 널리 參考하기 바란다. (五, 五校)
  
|목차6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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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번=앞 절까지에서 우리 조잡하나마 본론 주제의 목적을 다하였다고 생각하나, 더욱이 공법의 초의(初意)와 실제에 관한 인식을 돕는 한에 있어, 공법 이후의 발전과 후인(後人)의 이에 대한 포폄의 종적을 일별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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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2번=원래 공법은 순리적으로만 본다면 전분=결부=세액법이든지, 연분법이든지, 재상법이든지 다 이로(理路)가 정연하여 별로 결함을 발견할 수가 없는 제도이다. 그러나 이를 실제로 행하기로 말하면 막대한 장애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먼저 {{ruby|전분|○○}}으로 말하면, 원 표준도 있고 실천의 준칙도 있는 것이지만, 제일 이를 행하는 허다한 관리의 두뇌를 통일하기가 어려우니, 이에 반(伴)하는 혼란은 임진 이후 더욱이 심해져서, 반계수록(권지1)에 말한 것과 같이 양전 관리가 다 각각 제뜻대로 하기 때문에 호남의 1등이 영남의 1등과 다르고, 이 읍의 6등이 저 읍의 6등과 달라, 4방 주현 동등지전(同等之田)의 토품 후박(厚薄)이 현수(懸殊)하게 되어 버리는 것은 오히려 자연의 귀결이었다. 다음 {{ruby|연분|○○}}으로 말하면, 임진 이전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정식대로 한 모양이나, 임진 이후에 이르러서는 기강이 문란해지는 한현, 공물잡역의 신(新)세가 우후죽순 같이 족출(簇出)하여 정세를 멀리 능과(凌過)하게 되니 형편이 정세의 연분을 정식대로 9등을 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연분이라면 금양대숙(金穰大熟)과 청공대살(靑空大殺)을 물론하고 그만 의례 하하년 1결4두를 놓게 되어 이것이 불문법이 되어 버리니 연분법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정세는 4두지만 잡세가 부풀어 오르고 또 전결의 누축(漏縮)이 많아지며, 거기에 중간관리의 농락이 들어 끼어, 상하상기(上下相欺), 일대 난장판을 현출하니, 수록(권지6)의 말하는 바에 의하면, 나라에 사위(事爲)가 없고 수재가 초렴(稍廉)할 경우에는 1결 세과(稅課)가 소(少)불하230두요,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다지(多至)780두요, 더욱이 경기와 서북은 심하여 1결세 100두에 달하는 자가 있었다 한다. 다음 {{ruby|재상법|○○○}}으로 말하면, 원 연분은 일반을 규정하고 재상은 특수를 규정하는 것이지만 연분과 재상은 기세가 상반(相半)하기 쉬운 것이라, 연분이 의례 하하년을 높게 된 후에도 여전히 재상을 논하게 되니 결국 첩감(疊減)이 되어 버린다. 이리하여 급재를 한즉 국고의 세입이 전연 없어지니(국고세입의 전무는 농민부담의 전무가 아니라 중앙관리의 전수(全收)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초조하여 덮어놓고 불급재하는 해도 있게 되니, 피재(被災)의 소민(小民)이 논두렁을 안고 우는 것이었다(수록 권지1). 소위 공법도 이 지경에 이르면 창상지변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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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3번=공법은 다시 시간과 함께 무한히 변하여 갔다. 우선 인조 12 갑술년 이후 6등양전척법을 번용(煩冗)하다 하여 폐기하고 양전은 {{ruby|원1등척|○○○○}} {{ruby|한|○}} {{ruby|가지만|○○○}} 가지고 실측한 후, 1등전은 그 수대로 시행하고, 2등·3등·4등·5등·6등전은 각각 1등전결 수에다 85공(空)1(0·6501)·7공(空)11(0·7011)·55공(空)7(0・5507)·단4(0·4)・25(0·25) 등을 승하여 각기 결수로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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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4번=(1등전묘 수) (2등전묘 수)<br/>38 ÷ 44.7 = 0.8501⋯⋯<br/>38 ÷ 54.2 = 0.7011⋯⋯<br/>38 ÷ 69 = 0,5507⋯⋯<br/>38 ÷ 95 = 0.4000<br/>38 ÷ 152 = 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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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5번=인 만큼, 전후 동일의 산법이다. 단 전적이 1결 이하일 때는 간략하게 2등 85・3등 70·4등 55·5등 단(單)4· 6등 25로 하기로 한다. 85·70·55·단4·25등의 정연한 산술급수는 원 세제(稅制) 창정 때에 57묘6등전 상상년 수량미 40, 34, 38, 23, 16, 10석 등의 산술급수에 연원한 것이요, 따라서 거기서 산출한 6등전의 묘 수 38, 44·7, 54·2, 69·95, 152 등은 한 개의 조화급수를 이루는 것이요, 다시 거기서 산출한 6등척의 주척 수 4·77, 5·18, 5·70, 6·43, 7·55, 9·55 등은 이 조화급수의 평방근의 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일의 한 가지는, 다산이 원(原)6등전척과 결적을 논할 때에(경세유표 권6), {{ruby|그|○}} {{ruby|출처를|○○○}} {{ruby|번연히|○○○}} {{ruby|알면서|○○○}}, 부주의하게도 <cite no="17">“원 6등전척과 결적은 미지 이 법이 何所據而如是也로다, 求之以平比例<sup>(산술급수)</sup>而不合하고 求之以差比例<sup>(기하급수)</sup>而不合하고, 求之以三分損一之例(亦幾何級數也)而不合하니 斯何法也오”</cite>라고 타박을 하였다. 그러면서 갑술 이후의 2등85 운운법은 허가하여, 결국 <cite no="18">“전 법은 必 高麗荒亂之世의 流來之法而 國初搶攘에 未及是正한 것”</cite>이라 하고, <cite no="19">“후 법은 至我 仁祖大王 갑술 6년 하여 始改하니, 이 법이 於戲盛矣로다.”</cite> 해버렸으니, 이 또한 그의 천려일실에 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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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6번=차막(遮莫) 6종척 병용에 간리의 용간(容奸)이 들어 끼기 쉬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러면 1종척 전용은 그 효과가 어떠할까. 효종 4년 반포준수책<sup>(전출)</sup>에는, 2등전척으로 측량한 결수를 2등전 이하로 환산할 때의 환산표가 들어있고, 또 그보다 20년 전인 인조 갑술에 단척법을 시작할 그때부터 응당 그런 것이 있었겠지만, 실제 휴반(畦畔)에 설 때에는 역시 상당한 가감승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지측량법 그 자체가 당시의 전맹(田氓)에게는 한 불가해의 요술이었다―사실은 간단한 것이지만. 또 그 간단이라는 것이 허다한 혼란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수록(권6)의 말과 같이 승제가감지법은 당관자(當官者) 자체가 다 살피지 못하는 것이니, 하물며 전맹이리요. 관이 다 살피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한즉, 서리가 용간을 한다. 이에 회뢰(賄賂) 청탁과 누락 기은(欺隱)의 폐가 그 극에 달하여 결부가 무기(無紀)하고 부세(賦稅)가 불균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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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7번=임진 이후에 연분은 의례 하하를 놓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논하였거니와, 점점 내려와 영정(英正) 사이에 이른즉, 이것이 거의 완전히 화석화하여, 전세 즉 1결4두라고까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혹 어떤 지방이 한 번 하중년 6두, 하상년 8두(그 이상은 절대로 올라가지 않는다)를 놓이게 되면 이것이 그만 또 화석화한다. 그래서 결국 전분이({{ruby|연분|○○}}이 아니고 {{ruby|전분|○○}}이) 3등이 되어 버려 {{ruby|하하전|○○○}}·{{ruby|하중전|○○○}}·{{ruby|하상전|○○○}}의 명목이 나게 되었다. 즉 전분과 연분이 완전히 혼동되어, 일반 농민은 물론이거니와 서리·관원까지도 전분·연분의 별(別)을 확실히 파굴하는 자가 적게 되니, 가히 포복절도할 일이다. 다산은 이 상태를 형용하여, <cite no="20">“田等年分이 牽連爲法하니 拕泥帶水하고 似粥如飯이라”</cite> 하였는데<sup>(유표 권7)</sup>정히 그러하다. 결국 영조 20년에 속대전을 편성할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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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8번=<blockquote no="29">凡一結. 收田稅四斗.<sup>凡田畓下之中以上收稅. 不在此限(戶典收稅條.)</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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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9번=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문의 대문(大文)은 다산이 지적한 것과 같이 그 외면을 보면 1결4두란 항솔(恒率)인 것 같기도 하나,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흉년을 가리킨 것이니, 그 서법이 모호 불명하다. 또 주석의 하지중(下之中) 이상이란, 그 외면을 보면 전등 같기도 하나,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연분을 가리킨 것이니, 그 서법이 또한 모호 불명하다. 기왕이면 하중6두·하상8두로 내지 상상20두까지를 비서(備書)해야 할 것이지 어찌 부재차한으로 흐려버리는가. 이 모호한 곳에 또 관리의 용간이 붙는 것이다. 경국대전의 전분6등·연분9등은 여기 와서는 산 듯 죽은 듯하다. 법의 조문으로는 천하의 진품이나, 그 사정을 알고 보면, 그 고충을 가히 추찰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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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0번=동방의 성주와 현상(賢相)이 고고참금(考古參今)하여 가지고, 만세불간지법(萬世不刊之法)으로 지었다는 법이 어찌 백수십 년을 지나지 않아 이렇게 비참한 물건이 되었을까. 그 원인을 쉽사리 소위 용사지변으로만 돌려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임진을 전후하여 소위 혼조라는 것이 하나씩 있으니, 죄를 거기에나 돌려버릴 것인가. 그러나 혼조는 언제든지 ‘반정’된 것이니 책임을 이에 전가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난제니 잠깐 그 답을 보류하기로 하더라도, 하여간에 제도와 배치되는 현실이, 구태여 혼조와 외구를 기다리지 않고, 벌써 입법과 동시에 생겼다는 것만은 불가무(不可誣)의 사실이다. 그러면 이 불합리의 인지와 그에 대한 반정의 사상도 당연히 일찍부터 있었을 것이다. 다만 반계와 다산 같은 이의 호소는 현저한 것이 있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과연 그들의 식견은 투철하고 사정은 처완(悽惋)한 것이 있으나, 그들이 간 후에 이조 말까지 100년 혹 수백 년 동안에 전생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그들의 백골이 집의(執義)도 되고 제학(提學)도 되고 한 일은 있으나, 그들이 평생을 두고 애를 태우던 일은, 그로 하여 논두렁 하나 어떻게 변하고 전세가 한말 어떻게 되었다는 일은 있지 아니하였다. 워낙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이 타기(唾棄)하고 매도한 그 법도 본대는 각 군 현 신이 풍운제회(風雲際會(하여 선미를 다하여 만들었다는 법이었으니, 한때는 ‘현명한 두뇌’들의 구가를 받던 것이다. 그러면 이조 세종대왕에 이르러 처음 이 사회에 ‘양법’이라는 것이 출현한 것인가. 그것도 그렇지 않다. 세종 조(朝)의 군신이 이를 타기하고, 거기서 ‘양법’을 만들어 낸 그 ‘악법’도 고려 조(朝) 신료의 말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용흥(龍興)하여 <cite no="21">“仁政은 必自經界始하니 首正經界하여야겠다”</cite>고 하여 지은 것이요, 그 후 성조 성종이 계지 통사하여 발전시켰다는 ‘양법’이었다. 이렇게 무한히 보아 올라가면 ‘양법’과 ‘악법’의 분간이 심히 몽롱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법은 사회의 진보를 따라서 당연히 변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는, 행여나 생각지 말라. 반계나 다산이 천지 간 최상법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명안’(名案)을 거기서 계시를 받은 그 법이 벌써 3천년 전의 주공(周公)의 법이 아니냐. 고려 태조와 동방 요순의 유법(遺法)이 혹 대걸소걸(大桀小桀)도 되고 혹 대맥소맥(大貊小貊)도 되며, 대현 반계 다산의 포부가 용납되지 않는 것을 보면 ‘제도’나 ‘두뇌’는 결국 본원적이요 자율성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현명한 제도나 두뇌는 시인하고 구가하고 탄식은 할지언정, 사물을 창조하고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창조하고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ruby|탐욕한|○○○}} {{ruby|위장|○○}}과 이에 따라 움직이는 {{ruby|방종한|○○○}} {{ruby|손|○}}이었다. 설령 열 세종 백 반계 천 다산이 한꺼번에 쏟아젔던들 이 위장과 손을 어찌하였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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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1번=수다한 듯하나 한 가지만 더 사족을 붙이자. 세종이나 반계나 다산을 물론하고, 이들의 개혁안의 주점(主點)은 이적(異積)인 결부를 폐하고 동적(同積)인 경묘를 행하자는 데 있는데, 경묘법을 행한다고 해서, 지구상에 절대부동의 극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사실 동면적주의를 쓴 일본·중국·서양 등에서는 법정(法定) 1척장은 같으면서 사실은 지방과 경우에 따라, 비합법적으로 척의 실장이 2할, 3할, 내지 배(倍), 배의 배나 신축(伸縮)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sup>모토하루 후지타(藤田元春) 저 척도종고(尺度綜考) 61―82쪽</sup>. 물론 척의 신축 과정과 그 결과의 의미하는 것은 만방이 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되면 조선과 같이 애초에 수등이척(隨等異尺)을 한 데나, 일본 중국과 같이 법만으로는 각등동척(各等同尺)을 한 데나, 과히 우열을 논할 수가 없게 된다. 우(吁)! 세종 반계 다산은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악연(愕然)하리라. 하나 요컨대 제도와 두뇌의 빈곤을 의미하는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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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2번=부기(附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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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3번=종래에 이조전세제도를 논한 것에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이치로 와다(和田一郞) 양 박사의 저술이 있으나, 각기 설이부진(說而不盡)한 것이 있으며, 또 이들은 전세 제규정의 표면적 기술을 주로 한 고로 제요소 간의 맥락이 관통하지 못하였다. 이에 졸고는 딴에는 이를 시정하여 모든 요소를 한 줄로 꿰어 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중추원에서 「조선전제고」라는 한 편이 나와서 역시 같은 문제를 취급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앞서 든 양 박사의 것을 개악한 감이 불무하다. 독자는 널리 참고하기 바란다. (5, 5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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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5일 (월) 20:0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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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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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李朝田稅制度의 成立過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14 발행기관
저자 박시형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6월
시작쪽 96쪽 종료쪽 148쪽 전체쪽 53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이 소편의 목적은, 이조가 전 조(朝) 고려의 퇴폐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한 개의 새로운 전제(田制)를 확립한 제공작 중, 특히 전세제도에 관한 것에 대하여, 그 확립의 전말과 제도의 내용을 구명하는 데 있다. 대개 이조의 전세제도는 태조가 자신의 권력으로써 고려 공양왕 3년에 발포한 과전법에 의하여 잠정적인 편법을 발견하였고, 그 후 태종 조(朝)의 다소의 수정을 거쳐, 마침내 세종 조(朝)에 이르러 결정적인 대변혁을 거쳐 가지고, 세조 이후 경국대전에 등재되어, 그 이후 길이 만세불역지법(萬世不易之法)으로 시행하려던 것이니 이 소편의 당면적인 토구(討究)의 대상은 즉 경국대전 소재 전세관계 제조문의 내면적인 해석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96-1이 小篇의 目的은, 李朝가 前朝 高麗의 頹廢된 土地制度를 改革하야 한 箇의 새로운 田制를 確立한 諸工作中, 特히 田稅制度에 關한 것에 對하야, 그 確立의 顚末과 制度의 內容을 究明하는 데 있다. 大概 李朝의 田稅制度는 太祖가 自身의 權力으로써 高麗 恭讓王 三年에 發布한 科田法에 依하야 暫定的인 便法을 發見하얐고, 그 後 太宗朝의 多少의 修正을 거처, 마침내 世宗朝에 이르러 決定的인 大變革을 거처 가지고, 世祖 以後 經國大典에 登載되여, 厥後 기리 萬世不易之法으로 施行하랴든 것이니 이 小篇의 當面的인 討究의 對象은 即 經國大典 所載 田稅關係 諸條文의 內面的인 解釋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본문


본문1: 1.공법 이전의 수세법


이조 최초의 전조에 관한 법제는 고려 공양왕 3년에 발포된 소위 ‘과전법’ 중의 다음과 같은 하나의 조가 주문이 되어 있다.
쪽수▶P96-2李朝 最初의 田租에 關한 法制는 高麗 恭讓王 三年에 發布된 所謂「科田法」 中의 次揭 一條가 主文이 되어 있다.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穀三十斗(○○○○○) 此外有橫斂者 以臟論고려사 권78 식화지

쪽수▶P97-1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穀三十斗(○○○○○) 此外有橫斂者 以臟論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

위의 조는 세종 조(朝)의 공법이 시행되기까지 유효하는 법이니, 이에 대하여 차례대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쪽수▶P97-2右一條는 世宗朝의 貢法이 施行되기까지 有效하는 法이니, 이에 對하야 逐次 解釋을 試코자 한다.
위의 조의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잠깐 해혹을 하여 둘 것이 있다. 즉 과전법 중, 위에 든 전조(○○)에 관한 규정에 계속하여,
쪽수▶P97-3右條의 解釋에 드러가기 前에 여기서 暫間 解惑을 하야 둘 것이 있다.即 科田法 中, 右揭 田租(○○)에 關한 規定에 繼續하여,

除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外 凡有田者皆納() 水田一結 白米二斗 早田一結 黄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쪽수▶P97-4

除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外 凡有田者皆納() 水田一結 白米二斗 早田一結 黄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이라는 조가 있는데, 이것은 전세(○○)에 관한 규정이다. 그러면 조(租)와 세(稅)는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면, ()는 국가가 직접 수납하는 공과로 1결에 30두씩 마련이요, 이에 대한 ()는 능침·창고·궁사·공해 소속의 일반 공전과 공신전이라는 특별한 사전과를 제외한 일절의 전 즉 과전·직전·별사전·군전 등의 모든 사전과, 향·진·역·관 등의 모든 외역전과의 소유자(점유자)가 그들에게 사급된 수화전 혹은 경작전의 소득 중에서 국가에 납부하는 바, 감축된(○○○) ()로 1결에 2두씩 마련이다. 따라서 일반 공전은 조 이외에 다시 세를 바치는 것은 없다. 국가에서 조를 수납하는 전과 세를 수납하는 전은 최초부터 구별되어 있다. 환언하면 조는 일반 전에 대한 본래의 공과요, 세는 특정한 사인에게 수조권 또는 경작권을 부여한 전에 대하여 국가가 전연 이를 방임하지 않고 그들의 수입의 일부를 갈라서 거두는, 말하자면 감축된 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초에는 조와 세의 이름을 명확히 구분하였으나 후에는 점점 ‘조’자를 사용하지 않고 종래의 조도 ‘세’라고 칭하게 되었다. 물론 경국대전 등에는 ‘조’자를 일절 사용하지 안 하였다. 양자는 본질적으로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인 이상 두 용어의 통일은 조금도 불가가 없었던 것이다. 이 소편에 있어 ‘조’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러한 의미의 용어니 독자는 이를 살피기 바란다.
쪽수▶P97-5이라는 一條가 있는데, 이것은 田稅(○○)에 關한 規定이다. 그러면 租와 稅는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면, ()는 國家가 直接 收納하는 公課로 一結에 三十斗씩 마련이요, 此에 對한 ()는 陵寢·倉庫·宮司·公廨所屬의 一般 公田과 功臣田이라는 特別한 私田과를 除外한 一切의 田 即 科田·職田·別賜田·軍田 等의 諸私田과, 鄕·津·驛·舘 等의 諸外役田과의 所有者(占有者)가 그들에게 賜給된 收和田 或은 耕作田의 所得 中에서 國家에 納付하는 바, 減縮된(○○○) ()로 一結에 二 斗式 마련이다. 따라서 一般公田은 租以 外에 다시 稅를 바치는 것은 없다. 國家에서 租를 收納하는 田과 稅를 收納하는 田은 最初부터 區別되여 있다. 換言하면 租는 一般 田에 對한 本來의 公課요, 稅는 特定한 私人에게 收租權 又는 耕作權을 賦與한 田에 對하야 國家가 全然 此를 放任하지 않고 그들의 收入의 一部를 갈라서 거두는, 말하자면 減縮된 租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最初에는 租와 稅의 名을 明確히 區分하얐으나 後에는 漸々 「租」字를 使用하지 않고 從來의 租도 「稅」라고 稱하게 되였다. 勿論 經國大典 等에는「租」字를 一切 使用하지 안 하였다. 兩者는 本質的으로 何等의 差異가 없는 것인 以上 두 用語의 統一은 조금도 不可가 없었던 것이다. 이 小篇에 있어 「稅」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러한 意味의 用語니 讀者는 이를 諒하기 바란다.


































본문1-1: (1)양전법


과전법 조문에 1결 30두라 하였으니, 먼저 ‘결’로 따지는 양전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쪽수▶P97-6科田法 條文에 一結 三十斗라 하얐으니, 먼저 「結」로 따지는 量田法을 說明할 必要가 있다.
①양전척⋯⋯양전(전지 측량)의 기초가 되는 양전척(○○○)의 제도는 고려 조(朝)에서 이조로 그냥 인계된 것인데 세종실록 12년 8월 무인조에
쪽수▶P97-7①量田尺⋯⋯量田(田地測量)의 基礎가 되는 量田尺(○○○)의 制▶P98-1度는 高麗朝에서 李朝로 그냥 引繼된 것인데 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에

惣制河演上言 自前朝 只以上中下三等定制 將農夫手 二指計十 爲上田尺 二指計五 三指計五 爲中田尺 三指計十 爲下田尺

쪽수▶P98-2

惣制河演上言 自前朝 只以上中下三等定制 將農夫手 二指計十 爲上田尺 二指計五 三指計五 爲中田尺 三指計十 爲下田尺

이라 하고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는
쪽수▶P98-3이라 하고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는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 上田尺 二十指 中田尺 二十五指 下田尺 三十指

쪽수▶P98-4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 上田尺 二十指 中田尺 二十五指 下田尺 三十指

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일절의 전은 위선 그 비척(肥瘠)의 차이에 의하여 상 중 하 3등급에 구별된다. 이리하여 이 3종전을 측량하는 양전척은 각각 다르다. 3종 양전척을 결정한 최초의 표준은 정당한 농부의 2지(생각건대 제2지와 제3지였을 것이다)를 밀착하여 그 횡격(橫隔)의 선을 좇아 이를 거듭하기를 열 번한 후 그 전장을 상전척(○○○) 1척으로 하고 같은 법으로 2지를 5도, 3지(생각건대 제2 제3 제4지였을 것이다)를 5도 거듭하여 그 전장을 가지고 중전척(○○○) 1척으로 하고 3지를 10도 거듭하여 하전척(○○○) 1척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3종 척장의 비는 대강 20:25:30=4:5:6이 되는 셈이다.
쪽수▶P98-5라 하였다. 이에 依하면 一切의 田은 위선 그 肥瘠의 差異에 依하야 上中下 三等級에 區別된다. 이리하야 이 三種田을 測量하는 量田尺은 各々 다르다. 三種 量田尺을 決定한 最初의 標準은 正常한 農夫의 二指(생각컨대 第二指와 第三指이었을 것이다)를 密着하야 그 橫隔의 線을 쫓아 此를 거듭하기를 열 번한 후 그 全長을 上田尺(○○○) 一尺으로 하고 同法으로 二指를 五度, 三指(생각컨댄 第二 第三 第四指이었을 것이다)를 五度 거듭하야 그 全長을 가지고 中田尺(○○○) 一尺으로 하고 三指를 十度 거듭하야 下田尺(○○○) 一尺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三種尺長의 比는 大綱 20:25:30=4:5:6이 되는 셈이다.
②결부제⋯⋯상 중 하 3종전의 각 지적법은 다음과 같다. 무릇 지적의 단위를 ()이라 칭하고 결의 100분의 1을 ()라 하고 부의 10분의 1을 ()이라 하고 속의 10분의 1을 ()라 한다. 이 모든 등수법은 거의 고려 조(朝) 이전부터의 원칙인 모양이다. 또 고려 조(朝)의 양전법은 문종 23년의 제정에 의하여 양전척(○○○) 대척을 장1보(○○)라 하고 33보 4방을 지적 1결(○○)로 정하였다고려사 권78. 식화지 전제 경리조. 그런데 실제의 양전에 있어서는 고려말의 현제(現制)로서는 3보 3척 4방을 가지고 1부로 하고 있었다. 이 제(制)에 의하면 1부는 12·25평방보 3.5(보)×2.5(보)=12.25평방보가 되어 1결 1,089평방보 33(법)×33(보)=1089평방법의 100분의 1보다 넓게 된다. 이 실지 측량상의 오차는 아마 문종의 결법 제정 당시부터 그랬을 것인데 산법의 미발달에서 나온 착오인가 한다. 공양왕 원년에 장차 대두할 신 정권에 의하여 전반적인 양전이 실행되었는데 그때도 물론 이 3보3척 4방위 1부의 방법에 의거하여 이조로 넘어 온 것이다. 그러다가 태종 5년에 다시 전국적 양전을 할 때에 이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하여, 1부의 지적을 축소시켜 3보1척8촌(3·3보)4방으로 하였다. 이에 의하여 1부는 10·89평방보 3.3(보)×3.3(보)=10,89평방보가 되어 1결의 100분의 1에 해당하게 되었으나 지방에 종래 실제(○○)행하여져(○○○○) 오던(○○) 1결(○○)의 면적(1부12·25평방보의 100배 1,235평방보)은 상당한 축소를 보게 되어 인민에 대하여는 결국 그만한 증세가 되어 버린 셈이다(1결당 세액은 부동하는 고로). 이에 세종 10년 10월에 이르러 전세 경멸(輕滅)의 의미에서 태종 5년 이래의 신제(新制)를 폐하고 다시 1부는 전과 같이 3보3척 4방으로 하고, 1결을 넓혀 35보 4방으로 하였다. 이리하여 1결은 1,235평방보 35(보)×35(보)=1225평방보가 되어 다시 1부의 100배에 해당하게 되었다세종실록 10년 10월 신사조 참조.
쪽수▶P98-6②結負制⋯⋯上中下 三種田의 各 地積法은 다음과 같다. 무릇 地積의 單位를 ()이라 稱하고 結의 百分之一을 ()라 하고 負의 十分之一을 ()이라 하고 束의 十分之一을 ()라 한다. 이 諸等數法은 거의 高麗朝 以前부터의 原則인 모양이다. 또 高麗朝의 量田法은 文宗 二十三年의 制定에 依하야 量田尺(○○○) 六尺을 長一步(○○)라 하고 三十三步 四方을 地積 一結(○○)로 定하얐다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田制經理條. 그런데 實際의 量田에 있어서는 高麗末의 現制로서는 三步三尺 四方을 가지고 一負로 하고 있었다. 此制에 依하면 一負는 一二·二五平方步 3.5(步)×2.5(步)=12.25平方步가 되여 一結 一, 〇八九平方步 33(法)×33(步)=1089平方法의 百分之一보다 넓게 된다. 이 實地 測量 上의 誤差는 아마 文宗의 結法 制定 當時부터 그랬을 것인데 算法의 未發達에서 나온 錯誤인가 한다. 恭讓王 元年에 將次 擡頭할 新政權에 依하야 全般的인 量田이 實行되였는데 그때도 勿論 이 三步三尺 四方爲 一負의 方法에 依據하야 李朝로 넘어 온 것이다. 그렇다가 太宗 五年에 다시 全國的 量▶P99-1田을 할 때에 이 不合理를 是正하기 爲하야, 一負의 地積을 縮少시켜 三步一尺八寸(三·三步)四方으로 하얐다. 이에 依하야 一負는 1〇·八九平方步 3.3(步)×3.3(步)=10,89平方步가 되여 一結의 百分之一에 該當하게 되였으나 他方에 從來 實際(○○)行하야저(○○○○) 오든(○○) 一結(○○)의 面積(一負一二·二五平方步의 百倍 一,二三五平方步)은 相當한 縮少를 보게 되여 人民에 對하야는 結局 그만한 增稅가 되여 버린 셈이다(一結當 稅額은 不動하는 故로). 이에 世宗 十年 十月에 이르러 田稅輕滅의 意味에서 太宗 五年 以來의 新制를 廢하고 다시 一負는 前과 같이 三步三尺 四方으로 하고, 一結을 넓히어 三十五步 四方으로 하았다. 이리하야 一結은 一,二三五平方步 35(步)×35(步)=1225平方步가 되여 다시 一負의 百倍에 該當하게 되였다世宗實錄 十年 十月 辛巳條 參照.
이 최후의 방법은 세종의 공법 제정 때까지 지속되어 온 것인데 이 법에 의한 상중하(○○○) 3종전(○○○) 각1결의(○○○○) 실적(○○)은 두루 척제에 의한 지나의 경묘법으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았다 한다세종실록 26년 6월 갑신조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
쪽수▶P99-2이 最後의 方法은 世宗의 貢法 制定 때까지 持續되여 온 것인데 此法에 依한 上中下(○○○) 三種田(○○○) 各一結의(○○○○) 實積(○○)은 周尺制에 依한 支那의 頃畝法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았다 한다世宗實錄 二十六年 六月 甲申條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
전별/경묘법 경묘법에 의한 평방척(주척)수 동묘수 면적비 비고: 3등전의 면적비 16:25:36은 3등전척의 장의 비 4:5:6의 자승비에 해당하다.
상전1결 152,568평방척 25·43묘 16
중전1결 239,414평방척 39·90묘 25
하전1결 345,744평방척 57·62묘 36
쪽수▶P99-3
田別/頃畝法 頃畝法에 의한 平方尺(周尺)數 同畝數 面積比 備考: 三等田의 面積比 16:25:36은 三等田尺의 長의 比 4:5:6의 自乘比에 該當하다.
上田一結 一五二,五六八平方尺 二五·四三畝 一六
中田一結 二三九,四一四平方尺 三九·九〇畝 二五
下田一結 三四五,七四四平方尺 五七·六二畝 三六

비고 1. 경묘법에서는 주척 방5척위1보 240보위1묘 100묘위1경이다. 따라서 1묘는 6천평방주척이다세종실록 25년 11월 갑자조.
2. 여기 결부를 경묘로 환산할 때에 사용한 주척(○○)은 그 실장(實長)이 곡척 6촌6분에 해당하니(유형원 반계수록 권2 소재 세종 조(朝) 소정 주척도후세복원자지 및 증보문헌비고 권91 악고도량형조 참조), 이에 의하여 상 중 하 3종전 각 1결의 실적을 척관법 도량형의 평수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다.
상전1결 1,846평강 1,844평
중전1결 2,897평약 2,897평
하전1결 4,184평약 4,182평
(하단의 숫자는 이치로 와다(和田一郎) 박사 저 「조선의 토지제도 및 지세제도 조사보고서」 대정 9년 간 중의 숫자 같은 책 695쪽)
3. 또 상 중 하 3종전의 양전척에 의한 면적과 (3종전이 다 각기 양전척으로 6척위1보 35보 평방위1결, 즉 1결은 210양전척평방 즉 4만4천1백평방척) 주척에 의한 면적(상전은 152,568평방주척 등)과의 관계에 의하여 상 중 하 3종 양전척의 실장을 곡척으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다.
상전척 곡1·228척(0.66곡척×√152568(주척)÷210(양전척)=1.2276곡척etc.)
중전척 곡1·537척
하전척 곡1·848척
이에 3종척의 실장은 2지계10(지폭) 운운의 연원에 부절을 합하듯이 맞는다.
4. 수지척의 성질을 최초에 생각해 본 이는 정다산인데 그는 경세유표(권9 결부고변)에서 수지척을 규정하여 “⋯⋯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라 하였으니 즉 ‘지(指)’라는 것을 ‘뺌’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지를 뺌으로 해석한다면 우리가 본항 모두에 게출(揭出)한바 수지척에 관한 두 가지 자료 중 후자 즉 용비어천가의 20지·25지·30지 설을 설명할 수가 있으나 전자 즉 세종실록에 보이는 하연(河演) 상언의 2지계10 2지계5 3지계5 3지계10 설을 설명할 수가 없을 뿐더러(만일 지(指)를 뺌이라면 2지계10 등의 구차한 표현법을 취할 리가 없다) 3종척의 실장이 너무 길어져서 상전1결 152,568평방주척 등의 실적에 도저히 부합하지 아니하여 그 부당한 것이 적확한즉, 이는 그의 천려일실에 속하는 것이다. 다음에 수지척의 실장을 실제로 계산한 사람은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 박사인데(동문관판, 경제대사서 결부조 참조, 대정 3년 간), 그는 그의 계산 경로를 자세히 밝히지 아니하였으나 여하간에 용비어천가에 실려 있는 상 중 하 3종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와 결부 작성법에 의하여 계산하였다는 것인데 그 결과 1지장곡척1촌3분여(○○○○○○○○○) 즉 1등전척1척장 2척6촌여를 얻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의 자료란 다른 것이 아니니, 3등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는 우리가 앞에서 사용한 것이오 결부 작성법이라는 것은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實績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니 실적 44척1촌위속이라는 말은 실적 441척위1부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실적 4만4천1백척위1결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210척평방위1결(√44100=210) 즉 6척위1보, 35보평방위1결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당연히 우리가 얻은 결과와 부합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박사도 주척장은 곡6촌6분임을 알고 있다(앞서 든 사서 토지제도조 참조). 우리의 계산(○○)에 틀림이 없는 한 박사가 얻은 결과는 오류이다. 그리고 박사는 1지(○○)장곡척1촌3분여를 얻고는 ‘1지’의 처치에 곤란하여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곡1촌3분여에는 당치 않다), “1지란 손가락 두 개의 폭이리라”고 부설(附說)하였으나 거북한 설명이다. 다음 이치로 와다 박사는 고려 결부를 논할 즈음에, 상 중 하 3종전의 평수만 산출하고 (전출. 방법은 3종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에 의하여), 3종수지척의 설명은 불가해라 하여 포기하였다(앞서 든 책 696쪽). 가와이 히로타미 박사의 논문이 계산의 경과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성강고농(盛岡高農) 카가미 야수노수케(鏡保之助) 교수가 다시 수지 척장의 계산을 시도하였는데(성강고등농림학교 창립 25주년 기념논총. 소화 3년 간. 「시대를 달리 한 결부제도 간의 맥락.」), 교수는 계산의 자료를 전혀 문헌비고에 시뢰(是賴)한 지라 같은 책 권148에 공교롭게도 어로지류를 범하여 있는바 세종 25년 찬성 하연 상언 중에 보이는 고려 결부제에 관한 숫자를 무비판하게 써서 계산을 하여(설상가상으로 씨의 계산법이 또한 황당무계하다) 결국 1지장 곡1촌2분7리1수 즉 1등척장2척5촌4분2리를 얻었다. 문헌비고만을 시뢰하였다 하지만 같은 책 중에는 앞서 든 어로차착(魚魯差錯)의 하연 상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 정당한 자료도 있으니 그것은 이조 숙종 35년 평천군 신완의 상소에 보이는 숫자로(같은 책 권142), 역시 용비어천가와 같이 “實績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의 설명법이다. 카가미씨도 한 번은 이 숫자를 들어서 계산을 하여 1지장곡5분9갑5수 즉 상전척장곡1척 2촌9분을 얻었으나 (사실은 우리가 얻은 결과와 당연히 부합하여야 할 것이지만 거기도 계산의 차착이 있어 근사하게밖에 못 되었다.) 박사 가와이 히로타미씨의 1지장1촌3분여에는 대단히 거리가 먼 지라 주장낭패(周章狼狽)하여 평천군소 중의 숫자를 오류라 하여 버리고, 앞서 든 것과 같이 어로차착의 하연 상언 중의 숫자를 취하여 계산한 결과, 우연히 1지장곡1촌2분7리1수를 얻으니 이것은 가와이 박사의 1지에 가까운 지라, 대희하고 다음엔 일보를 나아가 가와이 박사와 자기와의 상이(相異)는 박사의 계산이 부정한 탓이라고 정해 버렸다. 또, 1지장곡1촌2분7리1수를 얻고는 그 결과를 고려 결부법의 다른 요소에 유추하여 새로운 억설을 창조하였으나 본론에는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다급(多及)하지 않는다. 하여간에 수지척의 고구가 종래 이상과 같으므로 그 진의를 몰각할까 저어하여 다소 장황한 서술을 시도한 바이다.

쪽수▶P99-4

備考 一, 頃畝法에서는 周尺 方五尺 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 百畝爲一頃이다. 따라서 一畝는 六千平方周尺이다世宗實錄 二十五年 十一月 甲子條.
二, 여기 結負를 頃畝로 換算할 때에 使用한 周尺(○○)은 그 實長이 曲尺 六寸六分에 該當하니(柳馨遠磻溪隨錄 卷二 所載 世宗朝所定 周尺圖後世復原者也 及 增補文獻備考 卷九十一 樂考度量衡條 參照), 이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田 各 一結의 實積을 尺貫法 度量衡의 坪數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
上田一結 一, 八四六坪强 一, 八四四坪
中田一結 二, 八九七坪弱 二, 八九七坪▶P100-1
下田一結 四, 一八四坪弱 四, 一八二坪
(下段의 數字는 和田一郎博士 著 「朝鮮의 土地制度 及 地稅制度 調査報告書」 大正 九年 刊中의 數字 同書 六九五頁)
三, 또 上中下 三種田의 量田尺에 依한 面積과 (三種田이 다 各其 量田尺으로 六尺爲一步 三十五步 平方爲一結, 即 一結은 二百十量田尺平方 即 四萬四千一百平方尺) 周尺에 依한 面積(上田은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과의 關係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量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
上田尺 曲一·二二八尺(0.66曲尺×√152568(周尺)÷210(量田尺)=1.2276曲尺etc.)
中田尺 曲一·五三七尺
下田尺 曲一·八四八尺
이에 三種尺의 實長은 二指計十(指幅) 云々의 淵源에 符節을 合하듯이 맞는다.
四, 手指尺의 性質을 最初에 생각해 본 이는 丁茶山인데 그는 經世遺表(卷九 結負考辨)에서 手指尺을 規定하야 ⋯⋯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라 하얐으니 即 「指」라는 것을 「뺌」으로 解釋한 것이다. 그러나 指를 뺌으로 解釋한다면 吾人이 本項 冒頭에 揭出한바 手指尺에 關한 두 가지 資料 中 後者 即 龍飛御天歌의 二十指·二十五指·三十指 說을 說明할 수가 있으나 前者 即 世宗實錄에 보이는 河演 上言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 說을 說明할 수가 없을 뿐더러(萬一 指를 뺌이라면 二指計十 等의 苟且한 表現法을 取할 理가 없다) 三種尺의 實長이 너머 기러저서 上田一結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의 實積에 到底히 符合치 아니하야 그 不當한 것이 的確한즉, 이는 그의 千慮一失에 屬하는 것이다. 다음에 手指尺의 實長을 實際로 計算한 사람은 河合弘民 博士인데 (同文館判, 經濟大辭書 結負條 參照, 大正 三年 刊), 그는 그의 計算 經路를 仔細이 밝히지 아니하얐으나 何如間에 龍飛御天歌에 실려 있는 上中下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와 結負▶P101-1 作成法에 依하야 計算하였다는 것인데 그 結果 一指長曲尺一寸三分餘(○○○○○○○○○) 即 一等田尺一尺長 二尺六寸餘를 得하얐다. 그러나 龍飛御天歌의 資料란 딴 것이 아니니, 三等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는 吾人이 前揭 使用한 것이오 結負 作成法이라는 것은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로 叙述되여 있는 것이니 實積 四十四尺一寸爲束이라는 말은 實積 四百四十一尺爲一負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實積 四萬四千一百尺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二百十尺平方爲一結(√44100=210) 即 六尺爲一步, 三十五步平方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當然이 吾人의 得한 結果와 符合하여야 할 것이다. 勿論 博士도 周尺長은 曲六寸六分임을 알고 있다(前揭 辭書 土地制度條 參照). 吾人의 計算(○○)에 틀림이 없는 限 博士의 得한 結果는 誤謬이다. 그리고 博士는 一指(○○)長曲尺一寸三分餘를 得하고는 「一指」의 處置에 困難하야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曲一寸三分餘에는 當치 않다), 「一指란 손가락 두 개의 幅이리라」고 附說하였으나 거북한 說明이다. 다음 和田一郎 博士는 高麗 結負를 論할 지음에, 上中下三種田의 坪數만 算出하고 (前出. 方法은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에 依하야), 三種手指尺의 說明은 不可解라 하야 抛棄하였다(前揭 書 六九六頁). 河合 博士의 論文이 計算의 經過를 밝히지 안 하였음으로 盛岡高農 鏡保之助敎授가 다시 手指尺長의 計算을 試하였는데(盛岡高等農林學校 創立 二十五周年 記念論叢. 昭和 三年 刊. 「時代를 달리 한 結負制度 間의 脈絡.」), 敎授는 計算의 資料를 專혀 文獻 備考에 是賴한 지라 同書 卷百四十八에 工巧롭게도 魚魯之謬를 犯하야 있는바 世宗 二十五年 賛成 河演 上言 中에 보이는 高麗 結負制에 關한 數字를 無批判하게 써서 計算을 하야(雪上加霜으로 氏의 計算法이 亦 荒唐無稽하다) 結局 一指長 曲一寸二分七厘一毛 即 一等▶P102-1尺長二尺五寸四分二厘를 得하였다. 文獻 備考만을 是賴하였다 하지마는 同書 中에는 前記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만 있는 것이 아니라, 亦是 正當한 資料도 있으니 그것은 李朝 肅宗 三十五年 平川君 申琓의 上疏에 보이는 數字로(同書 卷百四十二), 亦是 龍飛御天歌와 같이 「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의 說明法이다. 鏡氏도 한 번은 이 數字를 들어서 計算을 하야 一指長曲五分九厘五毛 即 上田尺長曲一尺 二寸九分을 得하였으나 (事實은 吾人의 得한 結果와 當然이 符合하여야 할 것이지마는 거기도 計算의 差錯이 있어 近似하게밖에 못 되였다.) 博士 河合弘氏의 一指長一寸三分餘에는 大端이 距離가 먼 지라 周章狼狽하야 平川君疏 中의 數字를 誤謬라 하야 버리고, 前記와 같이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 中의 數字를 取하야 計算한 結果, 偶然이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니 이것은 河合 博士의 一指에 가까운 지라, 大喜하고 다음엔 一步를 進하여 河合 博士와 自己와의 相異는 博士의 計算이 不精한 타시라고 定해 버렸다. 또,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고는 그 結果를 高麗 結負法의 他要素에 類推하야 새로운 臆說을 創造하였으나 本論에는 그다지 緊要치 안 하니 多及치 안 한다. 何如間에 手指尺의 考究가 從來 以上과 같음으로 그 眞意을 沒却할가 저어하야 多少 長皇한 叙述을 試한 바이다.

그런데 상 중 하 3종전의 실제 분포 상황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경상·전라도에서는 상전은 1000결 중에 12결 중 전은 100결 중에 12결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는 다 하전이었다. 또 경상·전라 이외의 도에는 상전은 절무하고 1000결 중에 12결의 중전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는 다 하전이었다. 즉 대범하게 말하자면 전국 전은 1결57묘의 획일적인 제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세종실록 12년 8월 무인조)
쪽수▶P102-2그런데 上中下 三種田의 實際 分布 狀況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慶尙·全羅道에서는 上田은 千結 中에 一二結 中 田은 百結 中에 一二結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었다. 또 慶尙·全羅 以外의 道에는 上田은 絕無하고 千結 中에 一二結의 中田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였다. 即 大凡하게 말하자면 全國 田은 一結五十七畝의 劃一的인 制度에 依存하고 있었든 것이다.(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
다음 전분 3등법의 시비를 잠깐 검토하건대 대관절 3종전의 면적비는 16:25:36이요 그것들에서 동액의 조세를 (1결30두) 징수한다 하니 그렇다면 차등 3종전 동일면적의 생산량의 비는 1등전:2등전=25:16과, 2등전:3등전=26:25와의 연비 67:42:30(이 숫자는 후에 말할 바와 같이, 세종이 신양전법을 설정하라고 3종전법의 불합리를 논할 때에 든 숫자인데 그것은 당시 1결세액 30두가 가리키는 수 30을 편의상 하전에 배당하고 작성한 숫자로 개산(槪算)이다.)이 되어야 처음으로 수세의 공평을 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과연 3종양전척의 2지계10 2지계5 3지계5 3지계10과 3종전 동일면적의 수량과의 사이에 이러한 우연적인 신비적인 관계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 전연 생각지 못할 일이다. 실로 3종척의 결정, 따라서 또 그 평방으로 되는 지적(地積)의 결정은 가장 원시적인 자연발생적인 수 관념의 기초 위에 선 것이었다.
쪽수▶P102-3다음 田分 三等法의 是非를 暫間 檢討하건댄 大關切 三種田의 面積比는 16:25:36이오 그것들에서 同額의 租稅를 (一結三十斗) 徵收한다 하니 그렇면 此等 三種田 同一面積의 生產量의 比는 一等田:二等田=25:16과, 二等田:三等田=26:25와의 連比 67:42:30(이 數字▶P103-1는 後에 말할 바와 같이, 世宗이 新量田法을 設定하라고 三種田法의 不合理를 論할 때에 든 數字인데 그것은 當時 一結稅額 三十斗가 가르키는 數 三十을 便宜上 下田에 配當하고 作成한 數字로 槪算이다.)이 되여야 처음으로 收稅의 公平을 期할 수가 있을 것이다. 果然 三種量田尺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과 三種田 同一面積의 收量과의 사이에 이러한 偶然的인 神秘的인 關係가 存在할 수가 있었을가. 全然 생각지 못할 일이다. 實로 三種尺의 決定, 따라서 또 그 平方으로 되는 地積의 決定은 가장 原始的인 自然發生的인 數 觀念의 基礎 우에 선 것이였다.





























본문1-2: (2)수세액


①1결당 수세정액⋯⋯앞서 든 과전법 조문에서 본 것과 같이 전 1결당 수세정액은 공전·사전을 물론하고 수전 1결에는 조미(조미(粗米) 즉 현미) 30두 한전(밭) 1결에는 잡곡 30두다. 이는 상 중 하 3종전에 공통되는 법칙이다. 즉 전의 비척차(肥瘠差)에 의하여 각각 다른 실적으로써 1결을 작성하여 가지고 그것들에서 동액의 징세를 하는 것이니 이를 칭하여 동과수조(○○○○)라 한다. 1결30두라는 세액은 원래 이태조가 전세제도 개혁을 할 때에 고려 말의 혼란 상태를 시정하여 고려 태조의 10분취 1주의를 복구한 것이며(고려사 권78, 신우 14년 7월 조준서 참조) 또 앞서 든 과전법 조문에 “1결30두 이상의 횡렴을 하는 자는 〿으로 논한다” 하였으니 구태여 고려말 수세의 고도 착취적 실상을 새삼스럽게 전색(銓索)하여 보지 않더라도 신법의 세율이 종래의 혼란 상태에 비하여 진보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욱이 새로 대두한 정권의 가장 유력한 인심 수람책(收纜策)의 하나로서 전세 경감이 당연히 생각되었을 것을 추찰컨대 이 새로운 정세율의 의의를 용이하게 규지할 수가 있다.
쪽수▶P103-2①一結當 收稅定額⋯⋯前揭 科田法 條文에서 본 것과 같이 田 一結當 收稅定額은 公田·私田을 勿論하고 水田 一結에는 糙米(粗米 即 玄米) 三十斗 旱田(밭) 一結에는 雜穀 三十斗다. 이는 上中下 三種田에 共通되는 法則이다. 即 田의 肥瘠差에 依하야 各々 다른 實積으로써 一結을 作成하야 가지고 그것들에서 同額의 徵稅를 하는 것이니 此를 稱하야 同科收租(○○○○)라 한다. 一結三十斗라는 稅額은 元來 李太祖가 田稅制度 改革을 할 때에 麗末의 混亂狀態를 是正하야 高麗 太祖의 十分取 一主義를 復舊한 것이며(高麗史 卷七十八, 辛禑 十四年 七月 趙浚書 參照) 또 前揭 科田法 條文에 「一結三十斗 以上의 橫斂을 하는 者는 〿으로 論한다」 하였으니 구태여 麗末 收稅의 高度 搾取的 實狀을 새삼스럽게 銓索하야 보지 않드라도 新法의 稅率이 從來의 混亂 狀態에 比하야 進步的인 役割을 한 것은 疑心할 餘地가 없다. 더욱이 새로 擡頭한 政權의 가장 有力한 人心 收纜策의 하나로서 田稅 輕減이 當然이 생각되였을 것을 推察컨댄 이 新 定稅率의 意義를 容易히 窺知할 수가 있다.
②손실답험법⋯⋯1결30두라는 것은 평상년의 세액이요 불임한 해에는 적당히 감액을 하게 되어 있으니 차소위 손실법(○○○)이요 손과 실을 결정함에는 실지 답사를 요하는 것이니 차소위 답험법(○○○)이라. 손실답험법의 연혁을 보면, 먼저 공양왕 3년에 과전법을 발포하면서 같은 해 5월에 따로 손실답험법을 발포하였으니 그 내용은 고려사 권78 식화지 전제조에
쪽수▶P103-3②損實踏驗法⋯⋯一結三十斗라는 것은 平常年의 稅額이오 不稔한 해에는 適當이 減額을 하게 되여 있으니 此所謂 損實法(○○○)이오 損과 實을 決定함에는 實地 踏査를 要하는 것이니 此所謂 踏驗法(○○○)이라. 損實踏驗法의 沿革을 보면, 먼저 恭讓王 三年에 科田法을 發布하면서 同年 五月에 따로 損實踏驗法을 發布하였으니 그 內容은 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 田制條에

損實法(○○) 十分爲律 損一分減一分租 損二分減二分租 以次准減 損至八分 全除其租 踏驗(○○)則 其官守令審檢 辨報監司 監司差委官更審 監司·首領官又審之 如有踏驗不實者 罪之 各品科田損實則 令其田主 自審收租

쪽수▶P104-1

損實法(○○) 十分爲律 損一分減一分租 損二分減二分租 以次准減 損至八分 全除其租 踏驗(○○)則 其官守令審檢 辨報監司 監司差委官更審 監司·首領官又審之 如有踏驗不實者 罪之 各品科田損實則 令其田主 自審收租

라 하였다. 즉 감수 매 1할에 세(稅) 1할(3두)을 감하여 감수 8할에 이르러 면세한다. 답험은 공전에 있어서는 먼저 그 고을 수령이 이를 행하여 감사에게 보고한다. 감사는 그 보고의 정부(正否)를 감별하는 의미에서 다수의 위관(답험의 임시위원이니 다른 고을의 유향품관 등으로써 이에 충당한다.)을 파견하여 재심하고 다시 감사·수령관(감사의 보좌관)이 친심한다. 과전을 위시한 모든 사전의 답험은 그 전주가 임의로 이를 행하도록 한다. 다음에 태조 2년 경정손실지법은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
쪽수▶P104-2라 하였다. 即 減收 每 一割에 稅 一割(三斗)을 減하야 減收八割에 이르러 免稅한다. 踏驗은 公田에 있어서는 먼첨 그 고을 守令이 此를 行하야 監司에게 報告한다. 監司는 그 報告의 正否을 鑑別하는 意味에서 多數의 委官(踏驗의 臨時委員이니 다른 고을의 留鄕品官 等으로써 此에 充當한다.)을 派遣하야 再審하고 다시 監司·首領官(監司의 補佐官)이 親審한다. 科田을 爲始한 諸私田의 踏驗은 其田主가 任意로 此를 行하도록 한다. 다음에 太祖 二年 更定損實之法은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

一結內損二十負以下者 全收 損三十負以上者 隨其所損負數 減除 以至損七十負 則減七十負租 其餘實數依數收租 揖至八十負者 全除其租 一結不足之田 亦以負數 束數 分數十分 二分損者全收 三分以上損者 隨其所損 分數減除 以至七分損者 減七分 損至八分者全除

쪽수▶P104-3

一結內損二十負以下者 全收 損三十負以上者 隨其所損負數 減除 以至損七十負 則減七十負租 其餘實數依數收租 揖至八十負者 全除其租 一結不足之田 亦以負數 束數 分數十分 二分損者全收 三分以上損者 隨其所損 分數減除 以至七分損者 減七分 損至八分者全除

라 하였다. 공양왕 3년의 손실법과 대동하나 1결 이상 1결 미만의 전을 통하여 2할 이하의 감수를 무시한 것이 주목된다. 답험법은 전과 다름없다. 또 그 다음 태종 조(朝) 경정손실답험법은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
쪽수▶P104-4라 하였다. 恭讓王 三年의 損實法과 大同하나 一結 以上 一結 未滿의 田을 通하야 二割 以下의 減收를 無視한 것이 注目된다. 踏驗法은 前과 다름없다. 또 그 다음 太宗朝 更定損實踏驗法은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

各道田地 擇廉幹品官 換道分差路驗 隨損給損 雖一分實 收一分租 一分損減一分租 其官守令 隨即擲簡 (摘奸) 敬差官出其不意 周行考察 不公踏驗者 罪之

쪽수▶P104-5

各道田地 擇廉幹品官 換道分差路驗 隨損給損 雖一分實 收一分租 一分損減一分租 其官守令 隨即擲簡 (摘奸) 敬差官出其不意 周行考察 不公踏驗者 罪之

라 하였다. 즉 (1)위관을 다른 도의 품관 중에서 임명하여 먼저 이로써 답험을 행하게 할 것 (2)손실은 전과 같이 1할 감수부터 기산(起算)하는 대신 1할 실수(實收)에까지 미칠 것 (3)위관의 답험 결과를 수령이 검복(檢覆)할 것 (4)조정에서 특히 수시 경차관을 임명하여 다시 검사할 것 등이라. 법규상 종래보다 심히 엄격해 진 것을 알겠다. 이 법에 의한 각 손실년의 수세액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104-6라 하였다. 即 (一)委官을 他道 品官 中에서 任命하야 먼첨 此로써 踏驗을 行하게 할 것 (二)損實은 前과 같이 一割 減收부터 起算하는 代身 一割 實收에까지 미칠 것 (三)委官의 踏驗 結果를 守令이 檢覆할 것 (四)朝廷에서 特히 隨時 敬差官을 任命하야 更히 檢査할 것 等이라. 法規上 從來보담 甚히 嚴格해 진 것을 알겠다. 此法에 依한 各 損實年의 收稅額을 表示하면 다음과 같다.

平常年 三〇斗 一割減收年 二七斗
二割減收年 二四斗 三割減收年 二一斗
四割減收年 一八斗 五割減收年 一五斗
六割減收年 一二斗 七割減收年 九斗
八割減收年 六斗 九割減收年 三斗

쪽수▶P104-7

平常年 三〇斗 一割減收年 二七斗
二割減收年 二四斗 三割減收年 二一斗
四割減收年 一八斗 五割減收年 一五斗▶P105-1
六割減收年 一二斗 七割減收年 九斗
八割減收年 六斗 九割減收年 三斗

각설하고 각 손실답험법을 법규상으로 일별한다면 실로 진선진미의 감이 불무(不無)한데 그러면 그 실제는 과연 어떠하였을까. 먼저 공전의 그것을 보자. 우리는 손실답험법 자체가 벌써 모든 결함을 포장하고 있음을 본다. 즉 답험은 거의 전의 일속 일부마다 행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노력상 과연 가능한 일일까. 또 손실법은 감수의 율(率)에 응하여 감세를 한다고 하지마는 그 감수의 율이라는 것이 과연 한 사람이 이를 단정한다면 어떠한 사람도 다시 다룰 여지가 없을 만큼 자명한 것일까. 여기에 무한의 혼란을 야기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쪽수▶P105-2却說 各 損實踏驗法을 法規上으로 一瞥한다면 實로 盡善盡美의 感이 不無한데 그러면 그 實際는 果然 如何하얐을가. 먼첨 公田의 그것을 보자. 吾人은 損實踏驗法 自體가 발서 모든 缺陷을 包藏하고 있음을 본다. 即 踏驗은 거의 田의 一束一負마다 行하게 되여 있는데 此는 勞力上 果然 可能한 일일까. 또 損實法은 減收의 率에 應하야 減稅를 한다고 하지마는 그 減收의 率이라는 것이 果然 한 사람이 此를 斷定한다면 어떠한 사람도 다시 다룰 餘地가 없을 만큼 自明한 것일가. 여기에 無限의 混亂을 惹起할 機會가 있는 것이다.
제일 ‘수령이 친심한다’고 하지만 한 사람의 수령이―그들의 수령으로서의 주요한 임무는 거의 매일 공인·사인의 빈객을 상대로 주연(酒宴)을 베푸는 데 진(盡)한다고 하여도 그리 과언이 아닐 그 수령들이―관내의 전을 친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세불득불(勢不得不) 부하의 향리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전묘에 파견된 향리란 전혀 문자 그대로 들에 놓인 호랑이라 그들의 횡포 낭자(狼籍)는 거의 필설에 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워낙 ‘수령의 친심’을 한다고 해도 사태에 별다름이 없는 것이지만. 또 위관이라는 품관(지방에 반거하는 사족) 출신의 다수한 임시 위원은 무리를 이루어 전야지간을 횡행하게 되는데 그들 역시 그 호오에 좇아 지극히 방자하게 행동한다. 감사·수령관의 검사 같은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요, 또 한 도에 한두 사람의 경차관이 파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또한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대궐을 하직할 때만은 틀림없는 ‘경차관’이었겠지만 한번 전야에 오게 되면 향리·위관과 조금도 가릴 바가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 드디어 백성들은 경차관을 싫어하여 “차라리 황전에서 실세를 바칠지언정 경차관의 낯짝을 보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다(태종실록 3년 9월 정유조). 세종 23년 7월 우의정 신개(申槩)는 그 상소 중에서 당시 아직 하3도 이외의 땅에 현행되고 있던 손실답험법의 실정을 논하여 “위관의 손실답험이 범람이 이심(已甚)이라. 그러고도 주육 지응(접대)의 폐가 심거하다. 서원·산사(다 향리로써 충당한다)는 꾀를 농하며 간(姦)을 사(肆)하고 그 손실을 마감(사정)하는 글은 유를 무라 하며 무를 유라 하고 다를 소라 하며 소를 다라 하고 실전을 은기(隱欺)함이 매 면(1읍에 읍 및 4면이 있다)에 수십결을 불하하며 또 그 관(수령)이 손실답험의 비용이라 칭목(稱目)하고 잡범 무명의 부렴을 하는 것이 원 조세보다 많다.”라고 하였지만(세종실록 23년 7월 기해조) 손실답험이란 대강 이와 같은 것이었다.
쪽수▶P105-3第一 「守令이 親審한다」고 하지마는 한 사람의 守令이―그들의 守令으로서의 主要한 任務는 거의 每日 公人·私人의 賓客을 相對로 酒宴을 베푸는 데 盡한다고 하야도 그리 過言이 아닐 其守令들이―管內의 田을 親審한다는 것은 到底이 不可能한 일이다. 勢不得不 部下의 鄕吏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田畝에 派遣된 鄕吏란 全혀 文字 그대로 들에 놓인 虎狼이라 그들의 橫暴狼籍는 거의 筆舌에 盡치 못하는 것이 있다. 워낙 「守令의 親審」을 한댓자 事態에 別다름이 없는 것이지마는. 또 委官이라는 品官(地方에 蟠踞하는 士族) 出身의 多數한 臨時 委員은 隊를 成하야 田野之間을 橫行하게 되는데 그들 亦是 그 好惡에 쫓아 至極히 放恣하게 行動한다. 監司·首領官의 檢査 같은 것은 事實上 不可能한 일이오, 또 一道에 한두 사람의 敬差官이 派遣되였다고 하드래도 이 亦 事實上 無意味한 일이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大闕을 下直할 때만은 틀림없는 「敬差官」이었겠지마는 한번 田野에 오게 되면 鄕吏·委官과 조금도 가릴 바가 없게 되는 것이 普通이라. 드듸어 百姓들은 敬差官을 싫여하야 「차라리 荒田에서 實稅를 바칠지언정 敬差官의 낱짝을 보기를 願하지 않게」 되였다(太宗實錄 三年 九月 丁酉條). 世宗 二十三年 七月 右議政 申槩는 其上疏 中에서 當時 아직 下三道 以外의 地에 現行되고 있던 損實踏驗法의 實情을 論하여 「委官의 損實踏驗이 泛濫이 已甚이라. 그리고도 酒肉支應(接待)의 弊가 甚巨하다. 書員·算士(다 鄕吏로써 充當한다)는 謀를 弄하며 姦▶P106-1을 肆하고 그 損實을 磨勘(査定)하는 文은 有를 無라 하며 無를 有라 하고 多를 少라 하며 少를 多라 하고 實田을 隱欺함이 每面(一邑에 邑及四面이 있다)에 數十結을 不下하며 또 其官(守令)이 損實踏驗의 費用이라 稱目하고 雜凡無名의 賦斂를 하는 것이 원 租稅보다 많다.」라고 하였지마는(世宗實錄 二十三年 七月 己亥條) 損實踏驗이란 大강 이와 같은 것이었다.
공전의 답험이 벌써 이러하였으니 사전의 그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사전의 답험은 과전법에 의하여 공전의 수급자가 이를 행하게 되었었는데 이 수급자인 부재 지주들은 착취의 재생산을 고려할 여지도 없이 답험을 가혹히 하는 고로 중간에 법을 고쳐 사전도 관에서 답험하기로 하였다. 그러고 보니 전객은 답험(●●)하는 관인과 수조(●●)하는 전주에 대하여 이중 응대를 하게 되어 (답험인 및 수조인에 대하여는 공히 발광적인 응대를 필요하였다) 도리어 파폐할 뿐 아니라 전주측에서는 답험의 관인은 과경(過輕)하다고 줄창 불평을 하였다. 드디어 태종 15년 8월 이후 사전의 전주답험을 복구하였다. 원래 전주답험의 경우에 전주가 가혹한 답험을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때로 전주는 일부러 가을에 답험을 하지 않고 수확 후 동기(冬期) 혹은 명춘에 와서 죄다 실수(實數)로 수조를 해가는 자도 많았다. 이 때문에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답험 여행(勵行)의 령을 신엄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후에 세종 원년 7월에 다시 사전관 답험으로 변경하였는데 그 결과는 위에서 말한 상태를 재현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태종실록, 15년 8월 갑술조, 세종실록, 원년 7월 신유조).
쪽수▶P106-2公田의 踏驗이 벌써 이러하였으니 私田의 그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私田의 踏驗은 科田法에 依하여 公田의 受給者가 此를 行하게 되였었는데 이 受給者인 不在地主들은 搾取의 再生產을 考慮할 餘地도 없이 踏驗을 苛酷히 하는 故로 中間에 法을 고처 私田도 官에서 踏驗하기로 하였다. 그러고 보니 佃客은 踏驗(●●)하는 官人과 收租(●●)하는 田主에 對하여 二重 應待를 하게 되여 (踏驗人 及 收租人에 對하여는 共히 發狂的인 應待를 必要하였다) 도리혀 罷弊할 뿐 아니라 田主側에서는 踏驗의 官人은 過輕하다고 줄창 不平을 하였다. 드듸어 太宗 十五年 八月 以後 私田의 田主踏驗을 復舊하였다. 元來 田主踏驗의 境遇에 田主가 苛酷한 踏驗을 하는 것은 勿論이지마는 때로 田主는 일부러 가을에 踏驗을 하지 않고 收穫 後 冬期 或은 明春에 와서 죄다 實數로 收租를 해가는 者도 많었다. 이 때문에 同年 九月에 이르러 踏驗 勵 行의 令을 申嚴하지 않으면 안 될 地境이었다. 後에 世宗 元年 七月에 다시 私田官 踏驗으로 變更하였는대 그 結果는 上述의 狀態를 再現하는 데 지나지 안 하였다(太宗實錄, 十五年 八月 甲戌條, 世宗實錄, 元年 七月 辛酉條).
이들 손실답험법의 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정액수세법을 수립한 것이 소위 ‘공법’이다.
쪽수▶P106-3此等 損實踏驗法의 弊를 救濟하기 爲하여, 定額收稅法을 樹立한 것이 所謂 「貢法」이다.




























본문2: 2.공법 시행기









































본문2-1: (1)세종 12년의 공법 시문


‘공법’이란 중국 하왕조(朝)에서 행하였다고 전하는 11의 정액전세법이라. 그러나 세종이 제정한 ‘공법’이란 새 법을 창시한 최초의 동기가 소위 공법에 있었을 따름이요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소위 하조(朝)의 공법과 무척 다른 것이 되어버렸으니, 구태여 소위 하조의 공법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양자는 정액세법이라는 하나의 점이 공통하다는 의미에서만 공통한 이름이 허용되는 것인가 한다.
쪽수▶P106-4「貢法」이란 中國 夏王朝에서 行하였다고 傳하는 什一의 定額田稅法이라. 그러나 世宗이 制定한 「貢法」이란 新法을 創始한 最初의 動機가 所謂 貢法에 있었을 다름이요 그 內容에 있어서는 所謂 夏朝의 貢法과 무척 다른 것이 되여버렸으니, 구태여 所謂 夏朝의 貢法을 說▶P107-1明할 必要를 느끼지 안는다. 다만 兩者는 定額稅法이라는 一點이 共通하다는 意味에서만 共通한 이름이 許容되는 것인가 한다.
세종은 일찍이 손실답험법의 폐를 숙지하고 이에 대할 신법을 고구하고 있었다. 세종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찍이 집현전을 창설하여 이 직장의 일부분으로 고금의 전제를 연구시키고 있었는데 마침내 종래 전세법의 교정책을 소위 하조의 공법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실록의 모든 기사에 의하면 왕 자신은 공법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데 반하여, 그의 모든 신료는 고의인지 무능인지 이 신법에 대하여 심히 냉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신하는 왕의 공법에 관한 자문에 대하여 항상 대부분은 반박의 태도를 취하고 왕이 다시 사리를 밝혀서 이를 분별하면 처음으로 ‘상교 윤당이로소이다’하고 대답을 하여 그 무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법 제정은 대부분 왕 자신의 재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과언이 아니다. 공법이 그 발의 이래 20수년을 경하여 처음으로 일반적 실시를 보게 된 까닭도 실로 이러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쪽수▶P107-2世宗은 일직이 損實踏驗法의 弊를 熟知하고 此에 代할 新法을 考究하고 있었다. 世宗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일직이 集賢殿을 創設하여 其職掌의 一部分으로 古今의 典制를 硏究시키고 있었는데 마침내 從來 田稅法의 矯正策을 所謂 夏朝의 貢法에서 求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런데 實錄의 諸記事에 依하면 王 自身은 貢法에 對하여 非常한 關心을 보이고 있는 데 反하여, 그의 諸臣僚는 故意인지 無能인지 此新法에 對하여 甚히 冷淡한 態度를 가지고 있었다. 諸臣은 王의 貢法에 關한 諮問에 對하야 恒常 大部分은 反駁의 態度를 取하고 王이 다시 事理를 밝혀서 此를 辨하면 처음으로 「上敎允當이로소이다」하고 對答을 하야 그 無能을 發揮하고 있는 것이었다. 貢法 制定은 大部分 王 自身의 裁斷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過言이 아니다. 貢法이 그 發議 以來 二十數年을 經하여 처음으로 一般的 實施를 보게 된 까닭도 實로 此間의 事情에 起因하는 것이다.
세종 12년에 왕은 공법에 관한 안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널리 중외에 묻기로 하였다. 이때의 안으로는 종래의 손실답험법을 전폐하고 땅시 실행되고 있던 상 중 하 3종전에서 연(年)의 등부(登否)를 막론하고 일률로 1결10두를 징하자 하는 것이었다. 왕의 하문(下問)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치하였다(실록 8월 무인조).
쪽수▶P107-3世宗 十二年에 王은 貢法에 關한 案을 提示하고 此에 對한 意見을 널리 中外에 묻기로 하였다. 此時의 案으로는 從來의 損實踏驗法을 全廢하고 當時 實行되고 있던 上中下 三種田에서 年의 登否를 莫論하고 一律로 一結十斗를 徴하자 하는 것이었다. 王의 下問은 다음과 같은 結果를 招致하였다(實錄 八月 戊寅條).
도별 인별 찬성 불찬성
경중 2품 이상 관
3품 이하 현직 관
앞과 같은 직관
9
259
443
30
393
117
개성부 품관·촌민 1,123 71
경기도 수령
품관·촌민
29
17,076
5
236
평안도 수령
품관·촌민
6
1,326
36
28,474
황해도 수령
품관·촌민
17
4,454
17
15,601
충청도 수령
품관·촌민
35
6,982
28
14,012
강원도 수령
품관·촌민
5
939
10
6,888
함길도 수령
품관·촌민
3
75
15
7,387
경상도 수령
품관·촌민
55
36,262
16
377
전라도 수령
품관·촌민
42
29,505
14
275
98,657(98,645) 74,149(74,003)
쪽수▶P107-4
道別 人別 賛成 不賛成
京中 二品以上官
三品以下現職官
同前職官

二五九
四四三
三〇
三九三
一一七
開城府 品官·村民 一,一二三 七一
京畿道 守令
品官·村民
二九
一七,〇七六

二三六
平安道 守令
品官·村民

一,三二六
三六
二八,四七四
黃海道 守令
品官·村民
一七
四,四五四
一七
一五,六〇一
忠淸道 守令
品官·村民
三五
六,九八二
二八
一四,〇一二
江原道 守令
品官·村民

九三九
一〇
六,八八八
咸吉道 守令
品官·村民

七五
一五
七,三八七
慶尙道 守令
品官·村民
五五
三六,二六二
一六
三七七
全羅道 守令
品官·村民
四二
二九,五〇五
一四
二七五
九八,六五七(九八,六四五) 七四,一四九(七四,〇〇三)

비고. 각 도의 집계는 찬성 98,645, 불찬성 74,003이 되어야 할 터인데 실록의 계는 각각 98,657 및 74,149로 되어 있다. 아마 각 도 숫자의 기재에 탈루가 있는 모양이다.

쪽수▶P108-2

備考. 各 道의 集計는 賛成 九八,六四五, 不賛成 七四, 〇〇三이 되어야 할 터인데 實錄의 計는 各各 九八,六五七 及 七四,一四九로 되여 있다. 아마 各 道 數字의 記載에 脫漏가 있는 모양이다.

이 시대에 있어 이런 성질의 문제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일반의 민의를 숫자적으로 물었다는 것은 벌써 한 개의 파격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문은 관찰사·수령을 통해서 행해졌는데, 이에 대한 민의의 상달이 사실상 여하한 사정 아래서 구체화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좌우간 이 숫자에 신빙을 두고 보자. 전체를 통하여 찬성은 9만8천여인, 불찬성은 7만4천여인으로, 찬성이 다소 우세이나, 이를 도별로 본다면, 경기·경상·전라 3도는 거의 다 찬성이요, 평안·강원·함길 3도는 거의 다 불찬성이요, 황해·충청 2도는 불찬성파가 찬성파보다 훨씬 우세이다. 그 이유는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대개 최초 3도는 토지생산력이 높아서 1결10두의 정액세는 종래의 손실법보다 유리하다고 생각된 까닭이요, 다음 3도는 정히 그 반대인 까닭이다. 그리고 최후의 2도는, 생산력은 대개 중(中)이나 (혹 최초의 3도와 백중하나), 1결10두의 정액세는 아직 만전을 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불찬성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공법 그것을 일률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요 전국 내의 전을 통하여 절대 무조건으로 1결10두를 징수한다는, 지극히 단순소박한 방법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뜻도 다분히 있었다. 하여간 이번 시문에 의하여 공법에 대한 일반의 호의는 충분히 증명되었다 할 수 있고, 금후로 남은 문제는 차라리 기술적인 개선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쪽수▶P108-3이 時代에 있어 이런 性質의 問題에 對하여 이와 같이 一般의 民意를 數字的으로 무렀다는 것은 벌써 한 箇의 破格的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試問은 觀察使·守令을 通해서 行하여젔는데, 此에 對한 民意의 上達이 事實上 如何한 事情 아래서 具體化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左右間 이 數字에 信憑을 두고 보자. 全體를 通하여 賛成은 九萬八千餘人, 不賛成은 七萬四千餘人으로, 賛成이 多少 優勢이나, 此를 道別로 본다면, 京畿·慶尙·全羅 三道는 거의 다 賛成이요, 平安·江原·咸吉 三道는 거의 다 不賛成이요, 黃海·忠淸 二道는 不賛成派가 賛成派보다 훨신 優勢이다. 그 理由는 容易히 想像할 수 있는 것과 같이 大概 最初 三道는 土地生產力이 높아서 一結十斗의 定額稅는 從來의 損實法보담 有利하다고 생각된 까닭이요, 다음 三道는 正히 그 反對인 까닭이다. 그리고 最後의 二道는, 生產力은 대개 中이나 (或 最初의 三道와 伯仲하나), 一結十斗의 定額稅는 아직 萬全을 期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不賛成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貢法 그것을 一律로 排斥하는 것은 아니요 全國 內의 田을 通하여 絕對 無條件으로 一結十斗를 徵收한다는, 至極히 單純素朴한 方法에 對해서 不滿을 품은 뜻도 多分이 있었다. 何如間 今番試問에 依하여 貢法에 對한 一般의 好意는 充分이 證明되였다 할 수 있고, 今後로 남은 問題는 차라리 技術的인 改善問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전국에 향하여 공법의 찬부를 묻는 동시에, 정신(廷臣)에 대해서도 그 가부의 의논을 징하였다. 가편(可便)의 논을 요약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쪽수▶P109-1그런데 이때 全國에 向하여 貢法의 賛否를 묻는 同時에, 廷臣에 對해서도 그 可否의 議論을 徵하였다. 可便의 論을 要約하면 大概 다음과 같다.
1. 위관·경차관은 흔히 횡포·무능·협활 3자 중의 하나 이상 구유한 자니, 이 폐를 교정함에는 공법만한 것이 없다.
쪽수▶P109-2一. 委官·敬差官은 흔이 橫暴·無能·狹猾 三者 中의 一 以上 具有한 者니, 此弊를 矯正함에는 貢法만한 것이 없다.
2. 공법의 전반적 즉시 실행을 혹 어렵다고 생각하거든 먼저 경기 12주군에 이를 시험하든지, 혹 산간군과 평지군과의 각각 십수 군에 이를 시험하든지 하여, 그 성적을 보고 점차 타(他)에 미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쪽수▶P109-3二. 貢法의 全般的 即時 實行을 或 어렵다고 생각하거던 먼저 京畿 一二州郡에 此를 試驗하든지, 或 山間郡과 平地郡과의 各各 數十 郡에 此를 試驗하든지 하여, 그 成績을 보고 漸次 他에 미치게 하는 것이 如何한가.
3. 공법을 행함에는 종래의 전의 등급을 그대로 하여서는 실행 불가능하니, 차제에 전을 9등으로 나누어 각 등전에 각각 다른 정액세를 매기는 것이 어떠한가.
쪽수▶P109-4三. 貢法을 行함에는 從來의 田의 等級을 그대로 하여서는 實行 不可能하니, 此際에 田을 九等으로 난호아 各 等田에 各各 다른 定額稅를 課하는 것이 如何한가.
이에 대하여 부편(否便)의 이론을 들면 다음의 점들로 요약할 수가 있다.
쪽수▶P109-5이에 對하여 否便의 理論을 들으면 다음의 諸點에 要約할 수가 있다.
1. 생산력이 천차만별한 전국 내 전을 통하여 일률로 정액세 10두를 매긴다는 것은 부당하다. 물론 종래일지라도 상 중 하 3종전에 대하여 1결당 동류의 과세를 해왔지만, 이는 각 1결의 면적에 광협이 있으며, 또 수손급손(손에 따라 세를 감함)인 만큼 하전일지라도 하등의 불편이 없었다. 그런데 공법의 1결10두로 획일한다면, 손(損)하기 쉬운 하전은 항상 그 실수(實收)에 불상당한 고액의 세를 바치게 될 것이다.
쪽수▶P109-6一. 生產力이 千差萬別한 全國 內 田을 通하여 一律로 定額稅 十斗을 課한다는 것은 不當하다. 勿論 從來일지라도 上中下 三種田에 對하여 ᅳ結當 同類의 課稅를 해왔지마는, 此는 各 一結의 面積에 廣狹이 있으며, 또 隨損給損(損에 따라 稅를 減함)이니만치 下田일지라도 何等의 不便이 없었다. 그런데 貢法의 一結十斗로 劃一한다면, 損키 쉬운 下田은 恒常 그 實收에 不相當한 高額의 稅를 바치게 될 것이다.
2. 부민은 많이 양전을 가졌으니 반드시 공법을 환영할 것이요, 빈민은 많이 악전을 가졌으니 반드시 공법을 원망할 것이다. 또 양전이 많은 전라·경상도민은 공법을 좋아할 것이나 다른 도는 다 공법을 싫어할 것이다.
쪽수▶P109-7二. 富民은 많이 良田을 갖었으니 반드시 貢法을 歡迎할 것이요, 貧民은 많이 惡田을 갖었으니 반드시 貢法을 怨望할 것이다. 또 良田이 많은 全羅·慶尙道民은 貢法을 좋와할 것이나 他道는 다 貢法을 실허할 것이다.
3. 1결10두란 손실법에 의하면 6할 이하 감수년의 세액이다. 종래의 예에 징하면 6할 이하 감수년이란 여간하여 없는 것이다. 이제 1결10두로 정액한다면, 국고의 대감수를 면치 못할 것이다.
쪽수▶P109-8三. 一結十斗란 損實法에 依하면 六割 以下 減收年의 稅額이다. 從來의 例에 徵하면 六割 以下 減收年이란 여간하여 없는 것이다. 이제 一結十斗로 定額한다면, 國庫의 大減收를 免치 못할 것이다.
4. 1결10두로 정액한다면 국고가 감수될 뿐 아니라 모든 창고(궁중관계)·공수(지방정청 비용)·아록(지방궁록)·역전 등의 수조도 대감수를 면치 못할 것이니, 세부득이 이들에게 전을 가급하게 될 것이요, 그것은 또 군자전(군비용전)을 할양(割讓)하는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으니, 자연 국방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쪽수▶P109-9四. 一結十斗로 定額한다면 國庫가 減收될 뿐 아니라 諸倉庫(宮中關係)·公須(地方政廳 費用)·衙祿(地方宮祿)·驛田 等의 收租도 大減收를 免치 못할 것이니, 勢不得已 此等에게▶P110-1 田을 加給하게 될 것이요, 그것은 또 軍資田(軍備用田)을 割讓하는 以外에 他道가 없으니, 自然 國防의 危機를 招來하게 된다.
5. 공법을 실시함에는 전을 9등급에 나누어 전국적으로 양전을 한 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쪽수▶P110-2五. 貢法을 實施함에는 田을 九等級에 난호아 全國的으로 量田을 한 後가 아니면 不可能하다.
6. 위관·경차관의 폐는 이를 교정하면 그만이다. 그 인선을 엄하게 하고 그 대우를 개선하면 족하지 않는가.
쪽수▶P110-3六. 委官·敬差官의 弊는 此를 矯正하면 그만이다. 그 人選을 嚴하게 하고 그 待遇를 改善하면 足하지 안는가.
공법 거부론자 중에는 절대 반대의 강경론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의견을 보건대, 대개는 기술상 조탁에 의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었다. 또 공법 찬성론자 중에도 이번의 제안에 새로 다대한 수정을 가한 후에 실시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쪽수▶P110-4貢法 拒否論者 中에는 絕對 反對의 强硬論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意見을 보건댄, 大概는 技術上 彫琢에 依해서 解決될 性質의 것이었다. 또 貢法 賛成論者 中에도 今回의 提案에 새로 多大한 修正을 加한 後에 實施하자는 意見도 있었다.
8도의 찬부 수는 찬성편이 대단히 우세하나, 부편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고, 또 조정의 의논은 부편이 차라리 많았기 때문에 이 기회에 즉시 종래의 법을 폐기하고 공법으로 변경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 문제는 단순히 한 시문으로 돌려 버리고, 세종 18년에 정작 공법 제정을 착수할 때까지 6년 깐 일절 묘의의 표면에는 상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 자신과 집현전을 위시한 일부 신료 간에는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쪽수▶P110-5八道의 賛否 數는 賛成便이 大端이 優勢하나, 否便의 數도 無視할 수 없을 程度이었고, 또 朝廷의 議論은 否便이 차라리 많았기 때문에 이 機會에 即時 從來의 法을 廢棄하고 貢法으로 變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番 問題는 單純이 한 試問으로 돌려 버리고, 世宗 十八年에 정작 貢法 制定을 着手할 때까지 六年 間 一切 廟議의 表面에는 上程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王 自身과 集賢殿을 僞始한 一部 臣僚 間에는 그 硏究가 進行되고 있었든 모양이다.

























본문2-2: (2)세종 18년·19년 간의 공법 논의


실록에 의하면, 세종 18년 5월 정해에 왕은 갑자기 영의정 황희 이하를 불러, 공법의 절목을 의논하게 하였다. 대관절 전 회 공법 시문 실패의 주원인은 어디 있었느냐 하면 전국 내 전에서 전연 획일적으로 1결10두의 정액세를 부과하자 하는 데 있었다. 물론 전에 상 중 하의 3종이 있고, 그들 1결의 면적에는 광협의 차가 있으나, 상중전은 오히려 예외요 전국 내 전은 거의 하전 1종이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그 생산력에 천차만별이 있는 일절의 전에서 획일적으로, 더구나 풍흉을 불문하고 일률로 1결10두를 부과하고자 한 것은 오히려 무모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 회의 실패에 감(鑑)하여 황희 등의 의(議)는 먼저 전의 등급 제정(이를 전품등제(○○○○)라 칭한다)으로 주의를 돌렸다. 가로대
쪽수▶P110-6實錄에 依하면, 世宗 十八年 五月 丁亥에 王은 갑작이 領議政 黃喜 以下를 불러, 貢法의 節目을 議論케 하였다. 大關切 前回 貢法 試問 失敗의 主原因은 어듸 있었느냐 하면 全國內田에서 全然 劃一的으로 一結十斗의 定額稅를 課하자 하는 데 있었다. 勿論 田에 上中下의 三種이 있고, 그들 一結의 面積에는 廣狹의 差가 있으나, 上中田은 오히려 例外요 全國內田은 거의 下田 一種이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그 生產力에 千差萬別이 있는 一切의 田에서 劃一的으로, 더구나 豊凶을 不問하고 一律로 一結十斗를 課하고자 한 것은 오히려 無謀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前回의 失敗에 鑑하여 黃喜 等의 議는 먼저 田의 等級 制定(此를 田品等第(○○○○)라 稱한다)으로 注意를 돌렸다. 가로대

1. 토지생산력의 고하(高下)에 의하여 국내의 도를 3등으로 구분한다. 경상·전라·충청의 남3도를 최고로 간주하여 상등도(○○○)라 하고, 경기·강원·황해의 중3도를 그 다음이라 하여 중등도(○○○)라 하고, 평안·함길의 북2도를 최하라 하여 하등도(○○○)라 한다.
2. 각 등도의 전은 종래의 도행장(토지대장)을 빙거하여 다시 3등급으로 구분한다.
3. 왕년의 손실 수 및 공가 예산액을 참작하여 3등도 3등전의 세액을 각정(各定)한다.

쪽수▶P110-7

一. 土地生產力의 高下에 依하여 國內의 道를 三等으로 區分한다. 慶尙·全羅·忠淸의 南三道를 最高로 看做▶P111-1하여 上等道(○○○)라 하고, 京畿·江原·黃海의 中三道를 그 다음이라 하여 中等道(○○○)라 하고, 平安·咸吉의 北二道를 最下라 하여 下等道(○○○)라 한다.
二. 各 等道의 田은 從來의 導行帳(土地臺帳)을 憑據하여 다시 三等級으로 區分한다.
三. 徃年의 損實數 及 公家 豫算額을 參酌하여 三等道 三等田의 稅額을 各定한다.

고 운운하였다. 왕은 그의 의견을 옳다 하여 이 원칙에 의한 구체안을 작성하도록 윤6월 기묘에 ‘공법상정소’라는 위원회를 설치하게 하였다. 공법상정소의 원안은 10월 정묘에 호조를 거쳐 상계된 후, 다소의 수정을 겪어 익 19년 7월 정유에 중외에 발포하게 되었으니, 요항은 다음과 같다.
쪽수▶P111-2고 云々하였다. 王은 그의 意見을 可하다 하여 이 原則에 依한 具體案을 作成하도록 閏六月 己卯에 「貢法詳定所」라는 委員會를 設置케 하였다. 貢法詳定所의 原案은 十月 丁卯에 戶曹를 거처 上啓된 後, 多少의 修正을 겪어 翌 十九年 七月 丁酉에 中外에 發布하게 되었으니, 要項은 如左하다.
1. 세액
쪽수▶P111-3一. 稅額
상전 1결 중전 1결 하전 1결
상등도(경·전·충) 20두 18두 16두
중등도(경·강·황) 18두 16두 14두
하등도(함·평) 16두 14두 12두
쪽수▶P111-4
上田一結 中田一結 下田一結
上等道(慶·全·忠) 二〇斗 一八斗 一六斗
中等道(京·江·黃) 一八斗 一六斗 一四斗
下等道(成·平) 一六斗 一四斗 一二斗

단 1. 제주도는 지척(地瘠)한 고로 3등전을 구별하지 않고, 일률로 1결10두를 부과한다.
2. 3종전에 다 수전·한전을 구별하여 수전은 조미, 한전은 황두(대두)를 한다.

쪽수▶P111-5

但一. 濟州島는 地瘠한 故로 三等田을 區別치 않고, 一律로 一結十斗를 課한다.
二. 三種田에 다 水田·旱田을 區別하야 水田은 糙米, 旱田은 黃豆(大豆)를 한다.

2. 면세
1전을 전부(○○) 휴경한 경우 및 1척의 소경이 전부(○○) 손실된 경우에 한하여 경작인의 신고에 의하여 수령이 친심한 후 면세한다.
쪽수▶P111-6二. 免稅
一田을 全部(○○) 休耕한 境遇 及 一戶의 所耕이 全部(○○) 損失된 境遇에 限하여 耕作人의 申告에 依하여 守令이 親審한 後 免稅한다.
3. 전의 이동
(가). 원적 소재 수전·한전은 그 후 지목(地目)이 사실상 변경된다 할지라도 개량하기 전에는 그 변경을 인정하지 않고 원적을 좇아 수세한다.
(나). 가경전은 수령이 매 해 친밀하여 전적에 속록한다.
(다). 무고하게 휴경 2개년에 미치는 경우에는 고발인에 이 휴경전을 탈여(奪與)한다.
쪽수▶P111-7三. 田의 移動
(가). 元籍 所載 水田·旱田은 其後 地目이 事實上 變更된다 할지라도 改量하기 前에는 그 變更을 認定치 않고 元籍을 쪼차 收稅한다.
(나). 加耕田은 守令이 每歳 親密하여 田籍에 續錄한다.
(다). 無故이 休耕 二箇年에 及하는 境遇에는 告發人▶P112-1에 其休耕田을 奪與한다.
4. 진손(陳損)의 심험이 부실하며, 가경전을 수시 속록하지 않는 수령은 죄한다.
쪽수▶P112-2四. 陳損의 審驗이 不實하며, 加耕田을 隨時 續錄치 안는 守令은 罪한다.
이 법은 중외에 발포되어, 곧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으나, 마침 공교롭게 세종 19년은 전국적으로 대흉이 들어 소정의 세액을 일률로 강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공법 반대론자들은 이런 기회를 타서 곧 훤훤효효의 논을 일으켰다. 왕은 부득이 8월 을유에 전지하여 공법을 전연 단념하고 종래의 손실법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전지와 함께 발한 왕의 담화는,
쪽수▶P112-3右法은 中外에 發布되여, 곧 實行에 옮길려고 하였으나, 마침 공교롭게 世宗 十九年은 全國的으로 大凶이 들어 所定의 稅額을 一律로 强行할 수가 없게 되였다. 貢法 反對論者들은 이런 機會를 타서 곧 喧々囂々의 論을 이르키였다. 王은 不得已 八月 乙酉에 傳旨하여 貢法을 全然 斷念하고 從來의 損實法을 繼續하기로 하였다. 傳旨와 함께 發한 王의 談話는,

貢法 考古參今 與大臣議定 本欲便於民也 予以否德 在位二十餘年 未甞有一年之豐 連歲凶歉 後世(歲)之豐 亦未必也 此法斷不可行也 然 此法既定 頒于中外 則 後世子孫 必有可行之時云々.

쪽수▶P112-4

貢法 考古參今 與大臣議定 本欲便於民也 予以否德 在位二十餘年 未甞有一年之豐 連歲凶歉 後世(歲)之豐 亦未必也 此法斷不可行也 然 此法既定 頒于中外 則 後世子孫 必有可行之時云々.

이라고 하여, 공법 시행을 후세 자손에게 미루어 버렸으니 오랫동안의 계획은 다시 백척의 심연으로 들어간 셈이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건대, 연(年)의 풍흉에 의하여 공법의 실시 능부(能否)가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곧 소정(所定) 공법의 입법상 결함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쪽수▶P112-5이라고 하여, 貢法 施行을 後世 子孫에게 미루어 버렸으니 오래동안의 計畫은 다시 百尺의 深淵으로 드러간 셈이었다. 그러나 一便 생각컨대, 年의 豐凶에 依하여 貢法의 實施 能否가 決定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곧 所定 貢法의 立法上 缺陷을 暗示하는 것이었다.





























본문2-3: (3)세종 20년에서 25년까지의 시험


익 20년은 다행히 풍년이었다. 전후 근 10년을 두고 연구가 거듭되던 공법은 일시적 사정에 의하여 잠깐 그 시행을 보지 못하고 후세 자손에게 희망을 두었으나, 이런 기회를 타서 다시 묘의에 상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에도 물론 반대자가 많았고, 혹은 공법을 실시함에는 모름지기 왕년과 같이 국민 일반에 자문한 후에 할 것이라 하는 자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도대사자(圖大事者)는 불모어중(不謀於衆)이라 하고 7월 계사에 드디어 결의하여 전년에 반포한 절목에 좇아 먼저 경상·전라의 일부에 이를 시험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실로 공법 실시의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2년 간의 시험기를 지나, 성적은 양호하다고 인정된 고로 22년부터 경상·전라 양도는 일반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실록 5월 기유조)
쪽수▶P112-6翌 二十年은 多幸이 豊年이었다. 前後 近 十年을 두고 硏究가 거듭되든 貢法은 一時的 事情에 依하여 暫間 그 施行을 보지 못하고 後世 子孫에게 希望을 두었으나, 이런 機會를 타서 다시 廟議에 上程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에도 勿論 反對者가 많았고, 或은 貢法을 實施함에는 모름직이 徃年과 같이 國民 一般에 諮問한 後에 할 것이라 하는 者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圖大事者는 不謀於衆이라 하고 七月 癸巳에 드디어 決議하여 前年에 頒布한 節目에 쫓아 먼저 慶尙·全羅의 一部에 此를 試驗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實로 貢法 實施의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二年 間의 試驗期를 지나, 成績은 良好하다고 認定된 故로 二十二年부터 慶尙·全羅 兩道는 一般的으로 貢法의 施行을 보게 되였든 것이다.(實錄 五月 己酉條)
같은 해 8월 기해에 공법의 절목을 다소 수정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쪽수▶P112-7同年 八月 己亥에 貢法의 節目을 多少 修正하였으니, 그 內容은 다음과 같다.
1. 수세액
쪽수▶P112-8一. 收稅額
상·중전 1결 하전 1결
상등도(경상·전라도) 상등관
중등관
하등관
20두
19두
18두
17두
16두
15두
중등도(충청·경기·황해도) 상등관
중등관
하등관
18두
17두
16두
〿15두
14두
13두
하등도(강원·함길·평안도) 상등관
중등관
하등관
17두
16두
15두
14두
13두
12두
쪽수▶P113-1
上·中田一結 下田一結
上等道(慶尙·全羅道) 上等官
中等官
下等官
二〇斗
一九斗
一八斗
一七斗
一六斗
一五斗
中等道(忠淸·京畿·黃海道) 上等官
中等官
下等官
一八斗
一七斗
一六斗
〿一五斗
一四斗
一三斗
下等道(江原·咸吉·平安道) 上等官
中等官
下等官
一七斗
一六斗
一五斗
一四斗
一三斗
一二斗

〿실록에 10두로 적혔으나, 전후 관계로 15두인 것이 자명하다.
주의. 1. 도의 분등법이 19년의 그것보다 일층 자연적 생산력의 차이에 가깝게 되었다.
2. 각 등도 가운데서 다시 그 생산력의 차이에 의하여 3등관의 구별을 세워 절목을 더 정세히 하였다.

쪽수▶P113-2

〿實錄에 1〇斗로 적혔으나, 前後 關係로 一五斗인 것이 自明하다.
注意. 一. 道의 分等法이 十九年의 그것보담 一層 自然的 生產力의 差異에 가깝게 되었다.
二. 各 等道 가운데서 다시 그 生產力의 差異에 依하여 三等官의 區別을 세워 節目을 더 精細히 하였다.

2. 상중전 동액 수세의 변
중전의 세액을 상전의 그것에까지 끌어올렸다. 이것은 상중전은 본 지품의 차이가 불상원(不相遠)할 뿐더러 그 면적의 차이(16~25)가 중하전 간의 그것(25~26)에 비하여 적고, 공법 이전은 물론 동과 수조였었는 고로, 지금 이것을 환원하여도 상관이 없다. 단, 하전은 공법 이전에 면적을 널리 하여 상중전과 동과 수조를 해왔었으나, 암만 하여도 하전은 진손하기 쉬운 것이니, 이는 종래와 같이 상중전과 구별한다.
쪽수▶P113-3二. 上中田 同額 收稅의 辨
中田의 稅額을 上田의 그것에까지 끌어올렸다. 이것은 上中田은 本 地品의 差異가 不相遠할 뿐더러 그 面積의 差異(16~25)가 中下田 間의 그것(25~26)에 比하여 적고, 貢法 以前은 勿論 同科 收租이었었는 故로, 지금 이것을 還元하여도 相關이 없다. 但, 下田은 貢法 以前에 面積을 널리 하여 上中田과 同科 收租를 해왔었으나, 암만 하여도 下田은 陳損키 쉬운 것이니, 이는 從來와 같이 上中田과 區別한다.
3. 휴경전은 진고(陳告)에 의하여 수령이 핵실하고, 일부 기경의 것은 그 기경 수에 한하여 과세한다.
쪽수▶P113-4三. 休耕田은 陳告에 依하여 守令이 覈實하고, 一部 起耕의 것은 그 起耕 數에 限하여 課稅한다.
4. 재상(災傷)의 ‘중소공지처’는 감사의 계문에 의하여 경차관을 파(派)하여 핵실한 후 이 손상분만큼 감세한다.
주의. 이 휴경전, 재상전에 관한 규정은 19년의 것(그 제2조)에 비하여 기분(幾分) 간 완화된 감이 있으나, 이 조항이 실제로 발동을 보기에는 매우 곤란하리라는 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가 있다.
쪽수▶P113-5四. 災傷의 「衆所共知處」는 監司의 啓聞에 依하여 敬差官을 派하여 覈實한 後 其損傷分만큼 減稅한다.
注意. 右 休耕田, 災傷田에 關한 規定은 十九年의 것(其 第二條)에 比하여 幾分 間 緩和된 感이 있으나, 이 條項이 實際로 發動을 보기에는 매우 困難하리라는 것은 容易이 想像할 수가 있다.
5. 기타 조건은 종래의 법에 좇는다.
쪽수▶P113-6五. 其他 條件은 從來의 法에 쫓는다.
이 수정안은 우선 현재 공법이 실시되어 있는 경상·전라의 두 도에 적용되고, 다음 익 26년부터 충청도도 전반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보게 되었다.(실록 7월 을해조)
쪽수▶P113-7이 修正案은 우선 現在 貢法이 實施되여 있는 慶尙·全羅의 兩道에 適用되고, 다음 翌 二十六年부터 忠淸道도 全般的으로 貢法의 施行을 보게 되였다.(實錄 七月 乙亥條)






























본문3: 3.공법 정착






































































































본문3-1: (1)세종 25년 7월부터 익 26년 6월까지―공법의 수정


①종래 공법의 결함
쪽수▶P114-1①從來 貢法의 缺陷
경상·전라 두 도는 그 일부분은 세종 20년부터, 그 전부는 22년부터, 그리고 충청도는 23년부터 각각 공법이 실시되었지만, 그 실시 공법에는 기다의 결함이 포장되어 있었다.
쪽수▶P114-2慶尙·全羅 兩道는 其一部分은 世宗 二十年부터, 其全部는 二十二年부터, 그리고 忠淸道는 二十三年부터 各々 貢法이 實施되였지마는, 그 實施 貢法에는 幾多의 缺陷이 包藏되여 있었다.
제1로 공법은 종래의 전품 3등별주의에 입각되어 있다. 그중 상 중 2종전은 본 1000결에 12결 혹 100결에 12결의 양전인 만큼, 그다지 풍흉이 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이에 부과된 1결20두 내지 15두의 정액세(앞 절 3 참조)는, 공법 이전의 1결30두에 비하면 실로 막대한 경감이었다. 그 대신 하전은 연(年)의 풍흉에 의하여 그 수확이 현저히 좌우되는 만큼, 1결17두 내지 20두의 정액세(위와 같은 절 참조)는 공법 이전에 비하여 오히려 대단한 증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여하한 악전이라도 하등전보다 다시 내려갈 수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23년 7월 기해 우의정 신개의 상소는 저간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경상·전라의 시험 성적을 보면 상중전의 소유자는 공법을 환영하고, 하전의 소유자는 이를 증오하는 것이었다. 상중전의 소유자는 물론 부자요 하전의 소유자는 빈자이다. 다시 각 도의 손실법 때의 최고 수세액과, 공법 실시에 의하여 실현될(○○○) ()과를 비교 표시하면 다음과 같았다.(신(申)의 상소 중의 숫자)단, 경상·전라 두 도의 숫자는 물론 공법 실시에 의하여 이미 실현된(○○○) ()자다.
쪽수▶P114-3第一로 貢法은 從來의 田品 三等別主義에 立脚되어 있다. 그中 上中二種田은 本千結에 一二結 或百結에 一二結의 良田인 만큼, 그다지 豊凶이 있을 理가 없고, 따라서 此에 賦課된 一結二十斗 乃至 十五斗의 定額稅(前節 三叅照)는, 貢法 以前의 一結三十斗에 比하면 實로 莫大한 輕減이었다. 그 대신 下田은 年의 豊凶에 依하여 그 收穫이 顯著이 左右되는 만큼, 一結十七斗 乃至 十二斗의 定額稅(同上 叅照)는 貢法 以前에 比하여 오히려 大端한 增稅를 意味하는 것이었다. 또 如何한 惡田이라도 下等田보담 다시 나려갈 수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二十三年 七月 己亥 右議政 申槩의 上疏는 這問의 消息을 傳하고 있다. 即 그에 依하면 慶尙·全羅의 試驗 成績을 보면 上中田의 所有者는 貢法을 歡迎하고, 下田의 所有者는 此를 憎惡하는 것이었다. 上中田의 所有者는 勿論 富者요 下田의 所有者는 貧者이다. 다시 各 道의 損實法 時의 最高 收稅額과, 貢法 實施에 依하여 實現될(○○○) ()과를 比較 表示하면 다음과 같았다.(申의 疏中의 數字)但, 慶尙·全羅 二道의 數字는 勿論 貢法 實施에 依하여 이미 實現된(○○○) ()字다.
손실법 손실법 공법에 의하여 실현될 액(B) B에서 A를 감한 액(C) A:C
연차 최고 수세액(A)
경상도 세종 16년 169,811 미두병석 257,728 미두병석 87,917 미두병석 53%
전라도 위와 동일 158,184 미두병석 268,986 미두병석 110,803 미두병석 70%
충청도 세종 22년 90,451 미두병석 187,839 미두병석 97,388 미두병석 107%
황해도 위와 동일 41,573 미두병석 143,330 미두병석 101,757 미두병석 245%
강원도 위와 동일 20,099 미두병석 31,407 미두병석 11,308 미두병석 56%
경기도 세종 16년 37,390 미두병석 50,200 미두병석 12,810 미두병석 34%
함길도 세종 22년 29,244 미두병석 56,232 미두병석 26,988 미두병석 92%
평안도 위와 동일 54,746 미두병석 142,339 미두병석 87,583 미두병석 159%
1,138,061 미두병석
쪽수▶P114-4
損實法 損實法 貢法에 依하여 實現될 額(B) B에서 A를 減한 額(C) A:C
年次 最高 收稅額(A)
慶尙道 世宗 十六年 一六九,八一一 米豆幷石 二五七,七二八 米豆幷石 八七,九一七 米豆幷石 五三%
全羅道 仝右 一五八,一八四 米豆幷石 二六八,九八六 米豆幷石 一一〇,八〇三 米豆幷石 七〇%
忠淸道 世宗 二十二年 九〇,四五一 米豆幷石 一八七,八三九 米豆幷石 九七,三八八 米豆幷石 一〇七%
黃海道 仝右 四一,五七三 米豆幷石 一四三,三三〇 米豆幷石 一〇一,七五七 米豆幷石 二四五%
江原道 仝右 二〇,〇九九 米豆幷石 三一,四〇七 米豆幷石 一一,三〇八 米豆幷石 五六%
京畿道 世宗 十六年 三七,三九〇 米豆幷石 五〇,二〇〇 米豆幷石 一二,八一〇 米豆幷石 三四%
咸吉道 世宗 二十二年 二九,二四四 米豆幷石 五六,二三二 米豆幷石 二六,九八八 米豆幷石 九二%
平安道 仝右 五四,七四六 米豆幷石 一四二,三三九 米豆幷石 八七,五九三 米豆幷石 一五九%
一,一三八,〇六一 米豆幷石
즉 공법에 의한 견적액은 손실 때의 최고액보다도 3할4푼 내지 24할5푼의 대증세가 된다. 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종래의 손실법은 극히 자의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또 정세(正稅) 이외에 가진 비합법적 수렴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국고에 바치는 세액은 사실상 항상 5할 이하 감수의 예(제1절, 2, ② 참조)에 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지금 졸연히 거액의 증세를 한다는 것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중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신개는 그 상소 중에서 하등전을 다시 3등으로 구분하여, 종래의 상중전과 합하여 더힙 5등전품제를 제정하기를 주장하게 되었다.
쪽수▶P115-2即 貢法에 依한 見積額은 損實時 最高額보담도 三割四分 乃至 二十四割五分의 大增稅가 된다. 이는 結局 무엇을 意味하는 것인가. 從來의 損實法은 極히 恣意的인 것이라고 하지마는, 그리고 또 正稅 以外에 갖인 非合法的 收斂을 同伴하는 것이라고 하지마는, 國庫에 바치는 稅額은 事實上 恒常 五割 以上 減收의 例(第一節, 二, ② 叅照)에 依하고 있었든 것이다. 그런데다가 至今 卒然이 巨額의 增稅를 한다는 것은, 적어도 表面上으로는 重大한 問題이다. 그래서 申槩는 그 上疏 中에서 下等田을 다시 三等으로 區分하여, 從來의 上中田과 合하여 都合 五等田品制를 制定하기를 主張하게 되였다.
종래 공법의 제2의 결함은 그 전품등제에 있어 3등도 3등관주의를 채용한 일이다. 대체로 말하면 상등도는 중등도에 비하여, 중등도는 하등도에 비하여, 또 상등관은 중등관에 비하여, 중등관은 하등관에 비하여 각각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수한 것을 들어 말하면, 하등도 하등관에도 상등도 상등관의 상전에라도 필적할 전이 있을 것이며, 또 상등도 상등관에도 하등도 하등관의 하전 이하에 속할 만한 전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3등도 3등관주의로 결박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불합리였다.
쪽수▶P115-3從來 貢法의 第二의 缺陷은 其田品等第에 있어 三等道 三等官主義를 採用한 일이다. 大體로 말하면 上等道는 中等道에 比하여, 中等道는 下等道에 比하여, 또 上等官은 中等官에 比하여, 中等官은 下等官에 比하여 各々 높은 生產力을 가지고 있는 것은 事實이지마는, 特殊한 것을 들어 말하면, 下等道 下等官에도 上等道 上等官의 上田에라도 匹敵할 田이 있을 것이며, 또 上等道 上等官에도 下等道 下等官의 下田 以下에 屬할 만한 田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三等道 三等官主義로 結縛해 놓는다는 것은 大端한 不合理였다.
제3의 결함은, 공법은 연(年)의 풍흉을 무시한 점이다. 물론 공법은 손실법의 폐를 구(救)하기 위하여 창안된 것이지만, 연의 풍흉을 일절 무시하고, 일정의 세액을―더군다나 종래 손실 數보담 큰 額을―强要한다는 것은 심히 困難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공법에 있어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연의 풍흉을 작량한다는 것이 요청되었다.
쪽수▶P115-4第三의 缺陷은, 貢法은 年의 豊凶을 無視한 點이다. 勿論 貢法은 損實法의 弊를 救하기 爲하여 創案된 것이지마는, 年의 豊凶을 一切 無視하고, 一定의 稅額을―더군다나 從來 損實 數보담 큰 額을―强要한다는 것은 甚히 困難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貢法에 있어도 어떠한 方法으로든지, 年의 豊凶을 酌量한다는 것이 要請되였다.
②25년 10월 계축의 변혁 하교
쪽수▶P115-5②二十五年 十月 癸丑의 變革 下敎
드디어 하3도 전부에 공법이 실시되어 2개년을 경한 25년 10월 계축에는 그 전 수차회의의 결과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현저한 변혁을 보인 하교(下敎)를 작성 발포하게 되었다.
쪽수▶P115-6드듸어 下三道 全部에 貢法이 實施되여 二箇年을 經한 二十五年 十月 癸丑에는 其前數次會議의 結果를 綜合하▶P116-1여, 다음과 같은 顯著한 變革을 보인 下敎를 作成 發布하게 되였다.
1. 전품은 5등으로 구분하고, 양전은 경묘제에 의한다.
쪽수▶P116-2其一 田品은 五等으로 區分하고, 量田은 頃畝制에 依한다.
전품5등의 이(理)는 앞서 든 신개의 소에 논의된 것과 같다. 또 종래의 양전법은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실적 표준에 의한 것이 아니요 수세 표준에 의한 것이다. 즉 결부제에 있어서는 같은 1결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한 개의 지적(地積)을 표시한다는 것보다 오히려 한 개의 수세 단위를 표시하는 것에 가깝다. 결부제의 결함은 여러가지가 있어, 여기서 구태여 이를 상론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던 면적주의의 경묘법에 비하여 실로 중간적인 간위 착취의 기회가 개입하기 쉬운 것이요, 따라서 납세자인 농민 측에서 보든지 수세자인 국가 자신에서 보든지 결코 합리적인 제도가 아닌 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부법의 폐에 관하여는 유반계반계수록정다산경세유표 등이 통론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왕은 원래 열심한 경묘론자로 이번에 이와 같이 하교에 그 이상을 표시하여, 종래의 계지전척(○○○○)(상중하 3종전척은 원 수지를 표준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을 변하고 새로 주척(○○)에 의한 경묘법으로 양전하기로 하였다.
쪽수▶P116-3田品五等의 理는 前記 申槩의 疏에 論議된 것과 같다. 또 從來의 量田法은 吾人이 旣知하는 바와 같이 實積 標準에 依한 것이 아니요 收稅 標準에 依한 것이다. 即 結負制에 있어서는 같은 一結이라 하드라도 그것은 한 個의 地積을 表示한다는 것보담 오히려 한 箇의 收稅 單位를 表示하는 것에 가깝다. 結負制의 缺陷은 여러가지가 있어, 여기서 구태여 이를 詳論치 않드라도, 그것이 다른 社會에서 行하여지고 있든 面積主義의 頃畝法에 比하여 實로 中間的인 姦僞 搾取의 機會가 介入키 쉬운 것이오, 따라서 納稅者인 農民 側에서 보든지 收稅者인 國家 自身에서 보든지 決코 合理的인 制度가 아닌 것은 容易히 想像할 수가 있는 것이다. (結負法의 弊에 關하여는 柳磻溪磻溪隨錄丁茶山經世遺表 等이 痛論하였으니, 叅考하기 바란다) 王은 元來 熱心한 頃畝論者로 이번에 이와 같이 下敎에 그 理想을 表示하여, 從來의 計指田尺(○○○○)(上中下 三種田尺은 원 手指를 標準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다)을 變하고 새로 周尺(○○)에 依한 頃畝法으로 量田하기로 하였다.
2. 종래의 전품등제에 있어서의 3등도 3등관의 표준을 전폐하고 전품은 모름지기 전국을 통한 한 개의 표준 내에서 5등으로 구분한다.
쪽수▶P116-4其二 從來의 田品等弟에 있어서의 三等道 三等官의 標準을 全廢하고 田品은 모름직이 全國을 通한 한 箇의 標準 內에서 五等으로 區分한다.
이유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쪽수▶P116-5理由는 旣述한 바와 같다.
3. 연분에 상상·상중·상하·중상·중중·중하·하상·하중·하하의 9등을 세운다.
쪽수▶P116-6其三 年分에 上上·上中·上下·中上·中中·中下·下上·下中·下下의 九等을 設한다.
매해 계추에 각 관 수령은 화곡 결실의 상을 심시하여, 수전·한전별로 그 관은 9등 연분의 어느 것에 해당할 것인가를 정하여 감사에 보고하고, 감사는 관내 각 관의 연분을 다시 검핵하고 종합하여 그 도는 어떤 연분인가를 정하여 가지고 호조를 통하여 계문한다. 즉 연분등제는 1도 단위인데, 단 특별한 취급을 요하는 관은 따로 한다.
쪽수▶P116-7每歲 季秋에 各 官 守令은 禾穀 結實의 狀을 審視하야, 水田·旱田別로 其官은 九等 年分의 何者에 該當할 것인가를 定하야 監司에 報告하고, 監司는 管內 各 官의 年分을 다시 檢覈하고 綜合하야 其道는 何年分인가를 定하야 가지고 戶曹를 通하야 啓聞한다. 即 年分等第는 一道 單位인데, 但 特別한 取扱을 要하는 官은 따로 한다.
③제(諸)실천
쪽수▶P116-8③諸實踐
이 같은 10월 계축의 하교에 의하여 다음의 제실천을 하게 되었다.
쪽수▶P116-9右 十月 癸丑의 下敎에 依하야 다음의 諸實踐을 하게 되였다.
갑. 전품등제
쪽수▶P117-1甲. 田品等第
(가) 하3도 전품등제
쪽수▶P117-2(가) 下三道 田品等第
11월 병진에 경차관 28인을 전라·충청·경상 3도에 보내 전품등제를 행하게 하였다. 이번 전품은 5등에 나누기로 되었는데, 그 의거할 절목(요항)은 다음과 같았다.
쪽수▶P117-3十一月 丙辰에 敬差官 二十八人을 全羅·忠淸·慶尙 三道에 보내여 田品等第를 行하게 하였다. 이번 田品은 五等에 나누기로 되였는데, 其依據할 節目(要項)은 다음과 같었다.
1. 종래 하3도의 상중전은 수한년을 물론하고 화곡이 무성한 전으로써 하였다. 그런데 신공법은 9등 연분과 재상을(앞 절 22년 8월 기해 절목 제4조) 작량하게 되어 있으니 종래의 상등 한수전을 모조리 신법의 제1등전으로 하고 종래의 중등 한수전을 모조리 신법의 제2등전으로 한다. 단, 종래의 상중 분등이 부득기중하였던 자는 적당히 짐작하여 혹승(或昇) 혹강(或降)한다.
쪽수▶P117-4一. 從來 下三道의 上中田은 水旱年을 勿論하고 禾糓이 茂盛한 田으로써 하였다. 그런데 新貢法은 九等年分과 災傷을(前節 二十二年 八月 己亥 節目 第四條) 酌量하게 되여 있으니 從來의 上等 旱水田을 모조리 新法의 第一等田으로 하고 從來의 中等 旱水田을 모조리 新法의 第二等田으로 한다. 但, 從來의 上中 分等이 不得其中하였든 者는 適當이 斟酌하야 或昇 或降한다.
2. 종래의 하등수전 내에 수원(水源)은 없더라도 지미(地味)가 고유(膏腴)한 자는 신법의 제1·제2·제3등전에 적의개편한다(종래의 소위 하등전은 연차에 의하여 풍흉이 있는 전이니, 연분·재상의 작량이 없던 옛 공법에 있어서는 당연히 상·중전과 동렬에 넣을 수가 없었으나 신법에 있어서는 이를 작량하게 되어 있으니, 제1·제2등전에 편입하여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또 종래의 하등전 내에 지세가 높고 사토가 상반(相半)한 척전이라도 만일 수원이 있는 것이면 이를 신법의 제2·제3등전에 편입한다.
쪽수▶P117-5二. 從來의 下等水田 內에 水源은 없드라도 地味가 膏腴한 者는 新法의 第一·第二·第三等田에 適宜改編한다(從來의 所謂 下等田은 年次에 依하야 豊凶이 있는 田이니, 年分·災傷의 酌量이 없든 舊貢法에 있어서는 當然이 上·中田과 同列에 넣을 수가 없었으나 新法에 있어서는 此를 酌量하게 되여 있으니, 第一·第二等田에 編入하야도 相關이 없다는 뜻이다). 또 從來의 下等田 內에 地勢가 높고 沙土가 相半한 瘠田이라도 萬一 水源이 있는 것이면 이를 新法의 第二·第三等田에 編入한다.
3. 옛 하등전 내에서 새로운 제3등전에 속하지 못할 전을 새로운 제4등전으로 하고, 다시 사석 척박하여 강원·함길·평안도의 최하 수전에 무이(無異)한 자를 새로운 제5등전으로 한다. 단, 적어도 제방 관개의 편이 있는 곳은, 땅의 비척을 물론하고, 제5등전에는 속하지 못한다.
쪽수▶P117-6三. 舊下等田 內에서 新第三等田에 屬하지 몯할 田을 新第四等田으로 하고, 다시 沙石 瘠薄하야 江原·咸吉·平安道의 最下 水田에 無異한 者를 新第五等田으로 한다. 但, 적어도 堤防 灌漑의 便이 있는 곳은, 地의 肥瘠을 勿論하고, 第五等田에는 屬하지 몯한다.
4. 산전 내에서 산요·산하전이라 할지라도 지미가 풍옥한 자는 다시 적당히 짐작하여 새로운 5등전법에 의하여 율(律)한다(산전에 관하여는 뒤의 제5절 주(註) 참조).
쪽수▶P117-7四. 山田 內에서 山腰·山下田이라 할지라도 地味가 豊沃한 者는 다시 適當이 斟酌하야 新五等田法에 依하야 律한다(山田에 關하야는 後述 第五節註 參照).
여기서 잠깐 각 절목을 검토하기로 하자. 우선 옛 3등전과 새로운 5등전과의 관계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117-8여기서 暫間 各 節目을 檢討하기로 하자. 우선 舊三等田과 新五等田과의 關係를 表示하면 다음과 같다.
박시형 전세제도-1.png
쪽수▶P118-1
박시형 전세제도-1.png
이에 의하여 자명한 바와 같이 하3도에는 여간한 악전이 아니고는 제4·제5등전은 없게 된다. 물론 신개 등이 애초에 전분5등을 주장한 이유라든지, 또 10월 계축의 하교의 정신이라든지는 이런 결과를 얻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연분·재상의 작량이라는 것을 가미하여 정작 실천으로 옮기게 된 이렇게 변질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연분등제라는 것은 매 필전에 개별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요 한 개의 커다란 집단에 대하여 실행되는 것이며, 또 재상에 관한 규정은 후술할 바와 같이 그 발동이 심히 곤란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적지 않은 옛 하등전을 새로운 1·2등으로 개편했다는 것은, 입법상의 한 개의 자가당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18-2右에 依하야 自明한 바와 같이 下三道에는 如干한 惡田이 아니고는 第四·第五等田은 없게 된다. 勿論 申槩 等이 애초에 田分五等을 主張한 理由라든지, 또 十月 癸丑의 下敎의 精神이라든지는 이런 結果를 어들라고 한 것은 아니였지마는, 거기에 年分·災傷의 酌量이라는 것을 加味하야 정작 實踐으로 옮기게 된 이렇게 變質하야 버린 것이다. 그러나 年分等第라는 것은 每筆田에 個別的으로 行하는 것이 아니요 한 個의 커다란 集團에 對하야 實行되는 것이며, 또 災傷에 關한 規定은 後述할 바와 같이 其發動이 甚히 困難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적지 않은 舊下等田을 新一·二等으로 改編했다는 것은, 立法上의 한 個의 自家撞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1 2 3 4의 각 항을 통하여 분등의 규정이 심히 엄격한 위에다가, 경차관 등은 실천에 제하여 많이 상의(上意)에 아유(阿諛)하여 분등을 가혹히 한 고로 중외의 물정이 소연하게 되었다. 인(因)하여 12월 을사 정인지를 도순찰사로 하여 하3도에 파견할 즈음에 여러가지로 신법의 변해를 백성에게 들리게 하는 한편, 경차관 등의 고중(高重) 분등을 경계하는 바가 있었다.
쪽수▶P118-3또 一二三四의 各 項을 通하야 分等의 規定이 甚히 嚴格한 우에다가,敬差官 等은 實踐에 際하야 많이 上意에 阿諛하야 分等을 苛酷히 한 故로 中外의 物情이 騷然하게 되였다. 因하야 十二月 乙巳 鄭麟趾를 都巡察使로 하야 下三道에 派遣할 지음에 여러가지로 新法의 辯解를 百姓에게 들리게 하는 一方, 敬差官 等의 高重 分等을 警戒하는 바가 있었다.
(나) 경기 전품등제
쪽수▶P118-4(나) 京畿 田品等第
원래 전품등제에 일정한 준거가 있는 것이지만, 그 실천은 꽤 루-즈한 것이어서, 개개의 경차관에 의하여 상당한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하3도 전품등제의 진행 중에 여러가지 불평이 있음에 감(鑑)하여, 새로 경기 전품등제를 시작하기 전에, 일을 신중히 하기 위하여 12월 계사, 전제상정소(11월 갑자에 설치되었다) 제조(提調)인 진양대군 유(瑈)(세조)·좌찬성 하연·지중추원사 정인지·호조판서 박종우 등의 중신을 서교에 파견하여 전품등제의 시험을 해보기까지 하였다. 이에 같은 달 병신에 경차관 20인을 경기에 파견하여 등제를 착수하게 하였다. 등제의 절목은 하3도의 것과 동일한 것은 물론이다. 다만 경기 전분의 실천에 있어서는 한 가지 특수한 사정을 상상할 수가 있다. 즉 경기 내에는 대귀족 등의 농장이 많으니 그들은 자가(自家)의 농장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전분을 가볍게 하기를 희망하였을 것이며, 또 그렇게 실행시켰을 것이다. 시대는 훨씬 뒤떨어지지만 정다산은 그 목민심서(전정조)에서 경기 내에 있는 자기 소유 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한 것이 있다.
쪽수▶P118-5元來 田品等第에 一定한 準據가 있는 것이지마는, 그 實踐은 꽤 루-즈한 것이어서, 個個의 敬差官에 依하야 相當한 差異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下三道 田品等第의 進行 中에 여러가지 不平이 있음에 鑑하야, 새로 京畿 田品等第를 始作하기 前에, 일을 愼重히 하기 爲하야 十二月 癸巳, 田制詳定所(十一月 甲子에 設置되였다) 提調인 晉陽大君 瑈(世祖)·左賛成 河演·知中樞院使 鄭麟趾·戶曹判書 朴從愚 等의 重臣을 西郊에 派遣하야 田品等第의 試驗을 해보기까지 하였▶P119-1다. 이에 同月 丙申에 敬差官 二十人을 京畿에 派遣하야 等第를 着手케 하였다. 等第의 節目은 下三道의 것과 同一한 것은 勿論이다. 다만 京畿 田分의 實踐에 있어서는 한 가지 特殊한 事情을 想像할 수가 있다. 即 京畿 內에는 大貴族 等의 農莊이 많으니 그들은 自家의 農庄에는 될 수 있는 대로 田分을 가볍게 하기를 希望하였을 것이며, 또 그렇게 實行시켰을 것이다. 時代는 훨신 뒤떠러지지마는 丁茶山은 그 牧民心書(田政條)에서 京畿 內에 있는 自己 所有 田에 對하야 다음과 같이 述懷한 것이 있다.

余有薄田 在畿內楊根郡 水田七十斗落 한전二十日耕 都只一結 及謫南徼 見水田差沃者 率二十斗落 己爲一結 由是觀之 南方之田(○○○○) 多係一二等(○○○○○) 其瘠薄者爲三四等(○○○○○○○○) 京畿之田(○○○○) 其腴者或入5등(○○○○○○○) 餘皆六等(○○○○) 可知也(○○○) 云云

쪽수▶P119-2

余有薄田 在畿內楊根郡 水田七十斗落 旱田二十日耕 都只一結 及謫南徼 見水田差沃者 率二十斗落 己爲一結 由是觀之 南方之田(○○○○) 多係一二等(○○○○○) 其瘠薄者爲三四等(○○○○○○○○) 京畿之田(○○○○) 其腴者或入五等(○○○○○○○) 餘皆六等(○○○○) 可知也(○○○) 云云

이 중의 “餘皆六等”은 믿기 어려우나, “其腴者或入五等”은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6등전법에 대하여는 뒤에 논함). 대관절 이때 경기전의 심히 가벼운 전분은 사실은 세종 조(朝) 이래의 화석일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비단 경기뿐 아니라 다른 도에 있어서도 전품등제란 그 전의 소유자 여하에 의하여 많이 좌우되는 것임을 알겠다.
쪽수▶P119-3此中의 「餘皆六等」은 信키 어려우나, 「其腴者或入五等」은 首肯할 수 있는 일이다(六等田法에 對하야는 後述). 대관절 此時 京畿田의 甚히 가벼운 田分은 事實은 世宗朝 以來의 化石일 것이다. 일로써 미루어, 非但 京畿뿐 아니라 他道에 있어서도 田品等第란 其田의 所有者 如何에 依하야 많이 左右되는 것임을 알겠다.
그런데 경기에 공법이 실시된 적확한 연차를 나는 불행히(혹 부주의로) 실록에서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전후 관계로 미루어, 본 도에 전품등제가 실행된 25년의 익년인 26년부터인가 한다.
쪽수▶P119-4그런데 京畿에 貢法이 實施된 的確한 年次를 나는 不幸이(或 不注意로) 實錄에서 發見치 몯하였으나, 前後 關係로 미루어, 本道에 田品等第가 實行된 二十五年의 翌年인 二十六年부터인가 한다.
을. 경묘법의 실천
쪽수▶P119-5乙. 頃畝法의 實踐
(가) 양전시험
쪽수▶P119-6(가) 量田試驗
11월 갑자에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진양대군·하연·박종우·정인지 등의 중신을 그 제조로 하였다. 종래의 결부제를 폐하고 새로 경묘법을 수립한 것은 이미 논한 바로, 급속히는 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장차는 전국 전을 이 법에 의하여 개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이에 상정소 사무의 제1착수로, 익 을축일에 하연·정인지 등의 제조와 판서운현사 이순지·주박 박윤창·김담 등(정·이·김 등은 당시의 산학의 대가였다)을 경기 안산군에 파견하여 경묘법에 의한 양전을 시험하게 하였다. 그 사목(절목)은 아래와 같다.
쪽수▶P119-7十一月 甲子에 田制詳定所를 設置하고 晉陽大君·河演·朴從愚·鄭麟趾等의 重臣을 其提調로 하였다. 從來의 結負制를 廢하고 새로 頃畝法을 樹立한 것은 旣述한 바로, 急速히는 行하지 몯한다 하드라도 將次는 全國 田을 此法에 依하야 改量치 안으면 안 될 것이니, 이에 詳定所 事務의 第一着手로, 翌 乙丑日에 河演·鄭麟趾 等의 提調와 判書雲峴事 李純之·注薄 朴允昌·金淡 等(鄭·李·金 等은 當時의 算學의 大家이었다)을 京畿 安山郡에 派遣하야 頃畝法에 依한 量田을 試驗케 하였다. 그 事目(節目)은 如左하다.
1. 주척5()평방위1() 240보위1() 100묘위1()5경위1()
쪽수▶P119-8一. 周尺五()平方爲一() 二百四十步爲一() 百畝爲一()▶P120-1五頃爲一()
2. 산곡 및 능판경측전의 승(시반)이 가장 많은 자는 실적의 20분의 1, 다음으로 많은 자는 30분의 1, 또 다음으로 많은 자는 40분의 1을 각각 감한다. 단 평지는 부재차한이다.
쪽수▶P120-2二. 山谷 及 陵坂傾側田의 塍(時畔)이 가장 많은 者는 實積의 二十分之一, 다음으로 많은 者는 三十分之一, 또 다음으로 많은 者는 四十分之一을 各々 減한다. 但 平地는 不在此限이다.
3. 사처의 가사 기지 및 저(苧)·저(楮)·완전・과원・칠림·죽림 등 적어도 이용하여 수익이 있는 땅은 다른 전의 예에 의하여 모조리 측량한다. 단 공처 및 사원의 기지는 부재차한이다.
쪽수▶P120-3三. 私處의 家舍 基地 及 苧·楮·莞田・菓園・漆林·竹林 等 적어도 利用하야 收益이 있는 地는 他田의 例에 依하야 모조리 測量한다. 但 公處 及 寺院의 基地는 不在此限이다.
(후에 경묘법이 불행하게 되어 조항1은 귀지무용했지만, 2·3은 그대로 후세 양전의 하나의 규준이 된 것은 물론이다)
쪽수▶P120-4(後에 頃畝法이 不行하게 되여 條項一은 歸之無用했지마는, 二·三은 그대로 後世 量田의 一規準이 된 것은 勿論이다)
여기에 잠깐 흥미를 끄는 한 사건은, 안산의 양전이 무사종료하였을 때, 왕은 이 성공을 이순지·김담 등의 산학의 공으로 돌리고, 즉시 집현전에 명하여 역대 산학의 법을 고계하라 하는 등, 세종 조(朝)의 산학에 대한 흥미의 발흥을, 실로 이 양전사업에 연기(緣起)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능히 할 바가 아니요, 다만 유지 군자의 주의를 환기함에 그친다.
쪽수▶P120-5여기에 暫間 興味를 끄는 一事는, 安山의 量田이 無事終了하였을 때,王은 此成功을 李純之·金淡 等의 算學의 功으로 돌리고, 即時 集賢殿에 命하야 歷代 算學의 法을 考啓하라 하는 等, 世宗朝의 算學에 對한 興味의 勃興을, 實로 이 量田事業에 緣起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對한 論議는 筆者의 能히 할 바이 아니요, 다만 有志君子의 注意를 喚起함에 그친다.
(나) 경묘법과 세법
쪽수▶P120-6(나) 頃畝法과 稅法
경묘법은 240보로써 1묘를 삼고, 100묘는 즉 1경이 되는 것이나, 매 보에 수세 계단을 만드는 것은 번쇄에 실(失)하므로, 26년 정월 경오 의정부의 계에 근거하여 24보로 1()을 삼고 10분으로 1묘를 삼아(단수는 사사오입한다), 어느 전은 기묘 기분인가를 정하여 가지고 일정한 세를 징수하게 한다.
쪽수▶P120-7頃畝法은 二百四十步로써 一畝를 삼고, 百畝는 즉 一頃이 되는 것이나, 每步에 收稅階段을 만드는 것은 煩鎻에 失함으로, 二十六年 正月 庚午 議政府의 啓에 據하야 二十四步로 一()을 삼고 十分으로 一畝를 삼어(端數는 四捨五入한다), 某田은 幾畝幾分인가를 定하야 가지고 一定한 稅를 徵收하게 한다.
(다) 환산표의 작성
쪽수▶P120-8(다) 換算表의 作成
경묘법이 제정되었음으로 전국 전은 장차 이 법에 의하여 개량할 것이나, 응급책으로 옛 결부법에 의한 상 중 하 전의 실적을 경묘법의 면적으로 환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각개 전에 즉하여 각 사람이 일일이 계산을 한다면 사섭(事涉) 완만할 뿐 아니라 또 착오의 염려가 있는 고로 정월 경오 의정부의 계에 의하여 옛 어느 등전 기결(畿結) 기부(畿負) 기속(幾束)은 새 기자(幾字) 기경(幾頃) 기묘(幾畝) 기분(幾分)에 해당하는 것인가를 미리 환산하여 표를 만들어 주자소로 하여금 인출 반포하게 하였다.
쪽수▶P120-9頃畝法이 制定되였음으로 全國 田은 장차 이 法에 依하야 改量할 것이나, 應急策으로 舊結負法에 依한 上中下田의 實積을 頃畝法의 面積으로 換算할 必要가 있다. 그러나 各個田에 則하야 各人이 一々이 計算을 한다면 事涉緩慢할 뿐 아니라 또 錯誤의 念慮가 있는 故로 正月 庚午 議政府의 啓에 依하야 舊某 等田 畿結 畿負 幾束은 新 幾字 幾頃 幾畝 幾分에 該當하는 것인가를 미리 換算하야 表를 만들어 鑄字所로 하여금 印出 頒布케 하였다.












본문3-2: (2)세종 26년 6월부터 11월까지―공법의 완성


①폐지 경묘·잉구 결부=전분 6등·동과 수조
쪽수▶P121-1①廢止 頃畝·仍舊 結負=田分 六等·同科 收租
25년 10월 계축 하교의 그 1―결부법을 폐지하여 양전은 실적주의의 경묘법에 의하여 통일하고 다만 전품을 5등으로 나누어서 수조에 계단을 둔다는 원칙과 및 그 후의 제실천은 수구론자들의 시끄러운 반대론을 야기하였다. 그들의 논지를 들으면 다음과 같았다.
쪽수▶P121-2二十五年 十月 癸丑 下敎의 其一―結負法을 廢止하야 量田은 實積主義의 頃畝法에 依하야 統一하고 다만 田品을 五等으로 나누어서 收租에 階段을 둔다는 原則과 및 其後의 諸實踐은 守舊論者들의 시끄러운 反對論을 惹起하였다. 그들의 論旨를 들으면 다음과 같었다.

제1로(○○○), 왕은 결부제를 옛 제도(중화선왕지제)가 아니라 하여 배척하고, 즐겨 경묘법을 채용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옛 제도라 하더라도 백성에 큰 이해가 없고, 다만 일반의 시청을 경해하게 할 뿐이 아니냐. 다음(○○) 경묘법을 채용하면, 5등전의 1단위면적은 다 같은 고로 그들의 세액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연분9등법을 승하면, 도합 59405종의 각이한 세액을 구별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어, 산계 번용(煩冗)하여 간리가 인연위도(因緣爲盜)할 것이다. (), 종래에 병역과 부역은 결부법에 의하여 1결기하라는 표준으로 간단히 부과할 수가 있었으나, 경묘법에 의하여 전분5등으로 세액이 각이하여지면, 병역과 부역의 부과율도 또한 번쇄하여 질 것이다. 경묘법은 이상의 세 결함을 가진 것이니, 재래의 결부법을 좇아 모든 등전의 면적의 광협을 적의 짐작하여 동일 명목의 1결로 하고, 거기다 동과 수조를 하는 것이 좋다. 1결의 세액이 모두 같으면 오직 연분에 의한 차이가 있을 뿐으로 이 법이 극간(極簡)하다.

쪽수▶P121-3

第一로(○○○), 王은 結負制를 古制(中華先王之制)가 아니라 하야 排斥하고, 즐겨 頃畝法을 採用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古制라 하드라도 百姓에 大利害가 없고, 다만 一般의 視聽을 驚駭케 할 뿐이 아니냐. 다음(○○) 頃畝法을 採用하면, 五等田의 一單位面積은 다 같은 故로 그들의 稅額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年分九等法을 乘하면, 都合 五九四十五種의 各異한 稅額을 區別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여, 算計煩冗하야 奸吏가 因緣爲盜할 것이다. (), 從來에 兵役과 賦役은 結負法에 依하야 一結幾何라는 標準으로 簡單이 賦課할 수가 있었으나, 頃畝法에 依하야 田分五等으로 稅額이 各異하야지면, 兵役과 賦役의 賦課率도 또한 煩鎻하야 질 것이다. 頃畝法은 以上의 三缺陷을 가진 것이니, 在來의 結負法을 좇아 諸等田의 面積의 廣狹을 適宜斟酌하야 同一 名目의 一結로 하고, 거기다 同科收租를 하는 것이 좋다. 一結의 稅額이 皆同하면 오직 年分에 依한 差異가 있을 뿐으로 其法이 極簡하다.

【필자는 생각건대 이러한 논자의 경묘법 반대 이유의 하나로, 여기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경묘법 실시에 의하여 당연히 야기될 또 한 가지 혼란이 있다. 그것은 모든 곳의 절급전 특히 과전·공신전·별사전 등 사전의 절급액에 관한 문제다. 종래 이들 사전은 결단위로써 절급되어 있고, 1결당 수세액은 모두 같았던 고로 전주 등은 이들 사전에서 아무 불평이 없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세액을 안심하고 취할 수가 있었으나, 만일 경묘법으로 하여 1결의 전적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세액이 각이하여진다면, 사전의 수급자들은 종래와 같이 불평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돌아오는 세를 취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무한한 혼란이 야기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의 등급에 의하여 사전의 절급액을 가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전제의 근본을 교란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여 경묘제는 이 사회의 봉건관료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귀찮은 물건이었다. 일찍이 유반계는 그 수록(권지1)에 있어서 ()(中國)之頃畝(○○○)主地(○○)(積)하고, ()(朝鮮) 之結負(○○○)主稅(○○)한다”는 것을 논하고, 古今法制(○○○○)指意所分(○○○○)斯可見矣(○○○○)로다”하고 통탄한 일이 있지만, 2 소위 ‘지의(指意)’란, 이 전체로서의 봉건정부 그것의 지의이기 전에, 우선 개인으로서의 봉건관료의 지의였던 것이다.】
쪽수▶P121-4【筆者는 생각컨대 此種論者의 頃畝法 反對 理由의 하나로, 여기는 叙述되여 있지 아니하지만, 頃畝法 實施에 依하야 當然이 惹起될 또 한 가지 混亂이 있다. 그것은 諸處折給田 特히 科田·功臣田·別賜田 等 私田의 折給額에 關한 問題다. 從來 此等私田은 結單位로써 折給되여 있고, 一結當 收稅額은 皆同하였든 故로 田主 等은 此等 私田에서 아모 不平이 없이 自己에게 도라오는 稅額을 安心하고 取할 수가 있었으나, 萬一 頃畝法으로 하야 一結의 田積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稅額이 各異하야진다면, 私田의 受給者들은 從來와 같이 不平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도라오는 稅를 取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無限한 混亂이 惹起될 것은 當然한 일이▶P122-1다. 그렇다고 해서 田의 等級에 依하야 私田의 折給額을 加減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田制의 根本을 攪亂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야 頃畝制는 이 社會의 封建官僚에 對하야 어듸까지든지 귀찮은 物件이었다. 일즉이 柳磻溪는 그 隨錄(卷之一)에 있어서 ()(中國)之頃畝(○○○)主地(○○)(積)하고, ()(朝鮮) 之結負(○○○)主稅(○○)한다」는 것을 論하고, 古今法制(○○○○)指意所分(○○○○)斯可見矣(○○○○)로다」하고 痛歎한 일이 있지마는, 二 所謂 「指意」란, 이 全體로서의 封建政府 그것의 指意이기 前에, 爲先 個人으로서의 封建官僚의 指意이었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쪽수▶P122-2此에 對하야 王은 다음과 같이 反駁하였다.

제1로(○○○) 경묘법이(○○○○) 일정하면(○○○○), 지품의(○○○) 고하를(○○○) 변경할(○○○) 경우에는(○○○○) 다만(○○) () 세액을(○○○) 개정하면(○○○○) 그만이요(○○○○), 양전의(○○○) 수는(○○) 자약하여(○○○○) 하등의(○○○) 변경을(○○○) 받지(○○) 아니한다(○○○○). 그러나(○○○) 만일(○○) 지품에(○○○) 의하여(○○○) 결부를(○○○) 정한다면(○○○○), 지품을(○○○) 변경할(○○○) 때마다(○○○) 자연히(○○○) 결부의(○○○) 수가(○○) 변화를(○○○) 받고(○○), 따라서(○○○) 전제의(○○○) 세포조직인(○○○○○) 자정지제(○○○○)(5결위1자)() 진괴하여(○○○○) 분운하기(○○○○) 짝이(○○) 없으리니(○○○○), 간리는(○○○) 이로(○○) 인연하여(○○○○) 도를(○○) () 것이다(○○○).
땅에 대소가 있어 동과 수조하는 것이 수세상 편리한 것은 제군의 소론과 같으나, 옛성인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행하지 않고 경묘법에 인하여 후세에 수범(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이치가 있었던 까닭이다.
다음(○○), 제군은 경묘법에 의한 수세의 번쇄를 호소하나 손실법 때 일을 생각하면, 당시 전분수조의 절목이야말로 해시(奚啻) 천만하였느냐(축단손실). 그러면 서로 능히 이를 행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신법은 번용하다 하지만 백성은 다만 ‘모든 전은 어느 등전이니 모든 해에는 기두를 납하면 된다’는 것만 외워두면, 간리에게 속을 리가 없다. 하3도에 현행되어 있는 공법(3등전 차과 수세)으로만 보더라도 차과 수세는 제군이 염려하는 것 같이 번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으로(○○○○), 병역·부역의 부과는 하필 종래의 1결기허에 고집할 것 없이 새로 정하는 세액의 다과에 의하여 적당히 부과하면 그만 아니냐.

쪽수▶P122-3

第一로(○○○) 頃畝法이(○○○○) 一定하면(○○○○), 地品의(○○○) 高下를(○○○) 變更할(○○○) 境遇에는(○○○○) 다만(○○) () 稅額을(○○○) 改定하면(○○○○) 그만이요(○○○○), 量田의(○○○) 數는(○○) 自若하야(○○○○) 何等의(○○○) 變更을(○○○) 받지(○○) 아니한다(○○○○). 그러나(○○○) 萬一(○○) 地品에(○○○) 依하야(○○○) 結負를(○○○) 定한다면(○○○○), 地品을(○○○) 變更할(○○○) 때마다(○○○) 自然이(○○○) 結負의(○○○) 數가(○○) 變化를(○○○) 받고(○○), 따라서(○○○) 田制의(○○○) 細胞組織인(○○○○○) 字丁之制(○○○○)(五結爲一字)() 盡壞하야(○○○○) 紛紜하기(○○○○) 짝이(○○) 없으리니(○○○○), 奸吏는(○○○) 이로(○○) 因緣하야(○○○○) 盜를(○○) () 것이다(○○○).
땅에 大小가 있어 同科收租하는 것이 收稅上 便利한 것은 諸君의 所論과 같으나, 古 聖人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理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行치 않고 頃畝法에 因하야 後世에 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理致가 있었든 까닭이다.
다음(○○), 諸君은 頃畝法에 依한 收稅의 煩鎻를 呼訴하나 損實法 때 일을 생각하면, 當時 田分收租의 節目이야말로 奚啻千萬하였느냐(逐段損實). 그러면 서로 能히 이를 行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新法은 煩冗하다 하지마는 民은 다만「吾田은 某等田이니 某等年에는 幾斗를 納하면 된다」는 것만 외여두면, 奸吏에게 속을 理가 없다. 下三道에 現行되여 있는 貢法(三等田 差科 收稅)으로만 보드라도 差科 收稅는 諸君이 念慮하는 것 같이 煩鎻한 것은 決코 아니다.
第三으로(○○○○), 兵役·賦役의 賦課는 何必 從來의 一結幾許에 固執할 것 없이 새로 定하는 稅額의 多寡에 依하야 適當이 賦課하면 그만 아니냐.

【필자는 생각건대 이상은 왕이 그 폐(弊)다단한 결부법을 폐지하고, 그 이상으로 하는 실적주의의 경묘법을 단행하려 한 대문자다. 그러나 그 이상은 후술할 바와 같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드디어 구투(舊套) 그대로 이조 말기에 이르렀으니, 한(恨)된 일이라 하겠다.】
쪽수▶P122-4【筆者는 생각건대 以上은 王이 其弊多端한 結負法을▶P123-1 廢止하고, 그 理想으로 하는 實積主義의 頃畝法을 斷行하려 한 大文字다. 그러나 그 理想은 後述할 바와 같이 實現을 보지 몯하고, 드디어 舊套 그대로 李朝 末期에 及하였으니, 恨된 일이라 하겠다.】
이에 수구론자들은 한 개의 절충안을 내었다.
쪽수▶P123-2이에 守舊論者들은 한 個의 折衷案을 내었다.

임금의 말씀이 지당하나 그러나 법이란 큰 이해(利害)가 없는 한, 종래의 풍속 습관에 좇는 것이 좋으니, 하필 일일이 중국의 법을 본받을 것이 무엇이냐. 또 지유대소(地有大小)하여 동과 수조를 하는 것이 수세상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간편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결부법의 장처(동과 수조의 편)를 남기고 그 단처(결부법의 3등전척은 전연 자의적이오 하등의 규준이 없는 것이다. 제1절, 1, 참조)를 버려 한 개의 절충제도를 세우는 것이 어떠하냐. 즉, 결부제의(○○○○) 동과수조주의는(○○○○○○○) 그냥(○○) 살리고(○○○) 다만(○○) 종래의(○○○) 3등전척을(○○○○○) 버리고(○○○) 주척에(○○○) 의하여(○○○) 새로(○○) 제정할(○○○) 6등전(○○○)(전년 10월 계축 하교에는 전분5등으로 되었었으나, 그 후 최악전은 5등전만 가지고는 율할 수 없으니 새로 제5등전을 2분하여 제5등 밑에 제6등전을 두자는 의논이 일어났다)의 광협을(○○○) 적당히(○○○) 상정하는(○○○○) 것이(○○) 어떠냐(○○○).

쪽수▶P123-3

御說이 至當하나 그러나 法이란 大利害가 없는 限, 從來의 風俗習慣에 좇는 것이 좋으니, 何必 一々이 中國의 法을 본받을 것이 무엇이냐. 또 地有大小하야 同科收租를 하는 것이 收稅上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簡便한 것이다. 然則 이제 結負法의 長處(同科收租의 便)를 남기고 그 短處(結負法의 三等田尺은 全然 恣意的이오 何等의 規準이 없는 것이다. 第一節, 一, 叅照)를 버려 한 個의 折衷制度를 세우는 것이 어떠하냐. 即, 結負制의(○○○○) 同科收租主義는(○○○○○○○) 그냥(○○) 살리고(○○○) 다만(○○) 從來의(○○○) 三等田尺을(○○○○○) 버리고(○○○) 周尺에(○○○) 依하야(○○○) 새로(○○) 制定할(○○○) 六等田(○○○)(前年 十月 癸丑 下敎에는 田分五等으로 되였었으나, 그 後 最惡田은 五等田만 가지고는 律할 수 없으니 새로 第五等田을 二分하야 第五等 밑에 第六等田을 두자는 議論이 이러났다)의 廣狹을(○○○) 適當히(○○○) 詳定하는(○○○○) 것이(○○) 어떠냐(○○○).

왕도 드디어 동과 수조 지상론의 세에 밀려 26년 6월 갑신에 의정부·육조에게 양론을 재음미하도록 전지를 내렸다. 이 회의는 위에 적은 절충론을 채택하였으니, 그 요항은 다음 3개의 조였다.
쪽수▶P123-4王도 드디어 同科收租 至上論의 勢에 밀려 二十六年 六月 甲申에 議政府·六曹에게 兩論을 再吟味하도록 傳旨를 나렸다. 이 會議는 上述의 折衷論을 採擇하였으니, 其要項은 左의 三條이었다.
1. 경묘보법을 고처, 구에(○○) 의하여(○○○) 결부속파로(○○○○○) 한다(○○).
쪽수▶P123-5一. 頃畝步法을 고처, 舊에(○○) 依하야(○○○) 結負束把로(○○○○○) 한다(○○).
2. 이미 정한 5등전 밑에 다시 1등을 설(設)하여 도합 전분6등(○○○○)으로 한다.
쪽수▶P123-6二. 旣定의 五等田 밑에 다시 一等을 設하야 都合 田分六等(○○○○)으로 한다.
3. 그 6등전을 () 주척을(○○○) 써서(○○) 양하고(○○○), 적당히 그 광협을 작량하여 동과수조(○○○○)로 한다.
쪽수▶P123-7三. 其六等田을 () 周尺을(○○○) 써서(○○) 量하고(○○○), 適當히 其廣狹을 酌量하야 同科收租(○○○○)로 한다.
이리하여 이 같은 2원칙―전분6등·동과 수조(1의 ‘결부법’이라는 것과, 3의 ‘동과 수조’라는 것은 동의어다)는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되었다. 여기에서 독자는 자연히 깨닫는 바가 있으리라. 원래 경묘법의 장처는 지적의(○○○) 일정(○○)이라는 데 있는 것이요, 세종대왕의 착목처도 본래 여기에 있었던 것인데, 그 요점은 허울 좋게 경원되어 버리고, 다만 ‘양전은(○○○) 주척을(○○○) 쓴다(○○)’(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다음 항목에서 볼 바와 같이 ‘양전척은(○○○) 주척으로(○○○○) 표준을(○○○) 삼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겨우 그 형해만을 남기게 되었다. 단 그것은 전연 자의적인 옛 3등전척을 구축(驅逐)하여 버리는 데는 공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23-8이리하야 右의 二原則―田分六等·同科收租(一의 「結負法」이라는 것과, 三의 「同科收租」라는 것은 同義語다)는 움직이지 몯할 것으로 되였다. 여기에서 讀者는 自然이 깨닷는 바가 있으리라. 元來 頃畝法의 長處는 地積의(○○○) 一定(○○)이라는 데 있는 것이요, 世宗大王의 着目處도 본래 여기에 있었던 것인데, 그 要點은 허울 좋게 敬遠되여 버리고, 다만 「量田은(○○○) 周尺을(○○○) 쓴다(○○)」(事實 正確히 말하자면, 此는 次項에서 볼 바와 같이 「量田尺은(○○○) 周尺으로(○○○○) 標準을(○○○)▶P124-1 삼는다(○○○)」는 것에 지나지 안는다)는 것으로, 겨우 그 形骸만을 남기게 되었다. 但 그것은 全然 恣意的인 舊三等田尺을 驅逐하여 버리는 데는 功이 있었던 것이다.
②26년 11월 무자 공법 최후의 정착
쪽수▶P124-2②二十六年 十一月 戊子 貢法 最後의 定着
전분6등·동과 수조·연분9등의 원칙이 확정되었으니, 그 구체안을 작성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먼저(○○) 6등전분의(○○○○) 구별은(○○○) 토지의(○○○) 생산력에(○○○○) 표준을(○○○) 두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는 가령 옛 하등전 1결의 면적인 57묘의 땅(제1절 1, 참조)를 취하여 가지고, 이 지적을 가진 최양전 및 최악전의 생산력을 사정하여 양자의 중간에 적당히 6등전을 분배하는 방법을 취한다. 또 이를 위하여는, 7월 신해 전제상정소에 명하여 해당 사항을 각 관의 식리품관 및 노농에 순문하게 하며, 또 각 관 관둔전(지방관청의 용도를 변하는 전)해당 면적지의 과거 5개년 간의 미곡실수량을 조사하게 하였다.
쪽수▶P124-3田分六等·同科收租·年分九等의 原則이 確定되였으니, 그 具體案을 作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먼저(○○) 六等田分의(○○○○) 區別은(○○○) 土地의(○○○) 生產力에(○○○○) 標準을(○○○) 두기로(○○○) 한다(○○). 이를 爲하여는 假令 舊下等田 一結의 面積인 五十七畝의 地(第一節 一, 參照)를 取하여 가지고, 이 地積을 가진 最良田 及 最惡田의 生產力을 查定하여 兩者의 中間에 適當히 六等田을 配分하는 方法을 取한다. 또 이를 爲하여는, 七月 辛亥 田制詳定所에 命하여 該事項을 各官의 識理品官 及老農에 詢問케 하며, 또 各官 官屯田(地方官廳의 用度를 辨하는 田)該面積地의 過去 五箇年 間의 米糓實收量을 調査케 하였다.
다시 8월 정미 김종서·이숙시·정인지 등 전제상정소의 세 대신을 충청도 청안현에 파견하여 (이 때에 왕은 안질을 요양하기 위하여 청주 초수에 행행 중이었던 고로, 그 근방의 땅을 택한 것이다) 화곡 임실 상황에 의하여 토지생산력을 사정하고, 다시 그 결과에 좇아 전품등제를 행하게 하여 금후 전국적으로 행할 전품등제의 규준으로 삼았다. 이 시험등제가 끝난 후에 다시 하3도에 각각 산간군·평원군 하나씩을 택하여―충청도 비인·청안, 경상도 함안·고령, 전라도 고산·광양―거기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청안현 시험등제의 법을 본받아 전분을 등제하고, 또 그 등제에 좇아 양전을 시작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여섯 현의 등제·양전이 거의 끝날 즈음에 전제상정소는 그동안의 논의를 종합하여 11월 무자에 상계하고 왕은 이에 따라 새로 정한 공법을 중외에 반포하게 되었다. 이 새로 정한 공법은 반포와 동시에 우선 위에 적은 여섯 현에 실시하게 되었으니, 공법의 결정판으로, 그 모든 규정은 다음과 같다.
쪽수▶P124-4다시 八月 丁未 金宗瑞·李叔時·鄭麟趾 等 田制詳定所의 三大臣을 忠淸道 淸安縣에 派遣하여 (時에 王은 眼疾을 療養하기 爲하여 淸州 椒水에 行幸 中이었던 故로, 그 近傍의 地를 擇한 것이다) 禾糓 稔實 狀況에 依하여 土地生產力을 査定하고, 다시 그 結果에 좇아 田品等第를 行케 하여 今後 全國的으로 行할 田品等第의 規準으로 삼었다. 이 試驗等第가 끝난 後에 다시 下三道에 各各 山間郡·平原郡 하나씩을 擇하여―忠淸道 庇仁·淸安, 慶尙道 咸安·高靈, 全羅道 高山·光陽―거기에 敬差官을 派遣하여 淸安縣 試驗等第의 法을 본받어 田分을 等第하고, 또 그 等第에 좇아 量田을 始作케 하였다. 이리하여 六縣의 等第·量田이 거의 끝날 지음에 田制詳定所는 其동안의 論議를 綜合하여 十一月 戊子에 上啓하고 王은 이에 從하여 新定貢法을 中外에 頒布하게 되었다. 이 新定貢法은 頒布와 同時에 爲先 上記六縣에 實施하게 되였으니, 貢法의 決定版으로, 그 諸規定은 다음과 같다.
제1 전적과 세액
쪽수▶P124-5第一 田積과 稅額
1. 단위면적의 생산력의 사정
옛 3등전의 면적이란 전연 자의적이었고 따라서 거기서 징수하는 세액이란 극히 부정확한 것이었는 고로(물론 3등전에서 다 그 수량의 10분의 1을 과세한다는 작정은 어렴풋이 있었지마는, 그 작정이란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퍽 막연한 것이었다), 새로 6등전을 구분하여, 각기 생산력에 응하여 세를 징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우선 단위면적에 있어서의 6등전 각개의 수량을 재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 품관 노농에 묻고 관둔전의 수량을 조사하고, 다시 하3도 6현에 시험하여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57묘지(○○○○)(옛 하전1결의 지적) 상상년의(○○○○) 1등 수전의 수량은 벼 80석(미 40석), 6등 수전의 수량은 벼 20석(미 10석)으로 사정한다. 그 동안의 4등을 균분하여 (미 40석-10석)÷5=6석 다음과 같이 한다.
57묘지6등전 상상년의 수량
1등전 미 40석
2등전 34석(이하 6석씩 점감)
3등전 28석
4등전 22석
5등전 16석
6등전 10석
한전은 수전에 준하여 1등전 황두 40석, 2등전 황두 34석 등으로 한다.
쪽수▶P124-6一. 單位面積의 生產力의 査定
舊三等田의 面積이란 全然 恣意的이었고 따라서 거기서 徵收하는 稅額이란 極히 不正確한 것이었는 故로(勿論 三等田에서 다 그 收量의 十分之一을 課稅한다는 작정은 어렴풋이 있었지마는, 그 작정이란 累▶P125-1說한 바와 같이 퍽 漠然한 것이였다), 새로 六等田을 區分하여, 各其 生產力에 應하여 稅를 徵하기로 한다. 그러기 爲하여는 爲先 單位面積에 있어서의 六等田 各箇의 收量을 在定할 必要가 있다. 此를 品官老農에 묻고 官屯田의 收量을 調査하고, 다시 下三道 六縣에 試驗하여 얻은 結果는 다음과 같다. 먼저 五十七畝地(○○○○○)(舊下田一結의 地積) 上々年의(○○○○) 一等水田의 收量은 베八十石(米四十石), 六等水田의 收量은 베二十石(米十石)으로 査定한다. 其間의 四等을 均分하여 (米40石-10石)÷5=6石 다음과 같이 한다.
五十七畝地六等田上々年의 收量
一等田 米四〇石
二等田 三四石(以下 六石식 漸減)
三等田 二八石
四等田 二二石
五等田 一六石
六等田 一〇石
旱田은 水田에 準하여 一等田 黃豆 四十石, 二等田 黃豆 三十四石 等으로 한다.
2. 무릇 세는 수량의 20분지1(○○○○○)을 부과한다.
57묘지 6등전 상상년의 세액
1등전 미 20두 (1석은 15두니, 따라서 30두는 수량 40석의 20분의 1인 2석에 해당한다. 여개방차)
2등전 25두 5승
3등전 21두
4등전 16두 5승
5등전 12두
6등전 7두 5승
쪽수▶P125-2二. 무릇 稅는 收量의 二十分之一(○○○○○)을 課한다.
五十七畝地 六等田 上々年의 稅額
一等田 米三〇斗 (一石은 十五斗니, 따러서 三〇斗는 收量 四十石의 二十分之一인 二石에 該當한다. 餘皆倣比)
二等田 二五斗 五升
三等田 二一斗
四等田 一六斗 五升
五等田 一二斗
六等田 七斗 五升
3. 연분9등
전실위(實爲) 상상년 9분실위 상중년
8분실위 상하년 7분실위 중상년
6분실위 중중년 5분실위 중하년
4분실위 하상년 3분실위 하중년
2분실위 하하년
쪽수▶P125-3三. 年分九等
全實爲 上々年 九分實爲 上中年
八分實爲 上下年 七分實爲 中上年
六分實爲 中々年 五分實爲 中下年
四分實爲 下上年 三分實爲 下中年
二分實爲 下々年
4. 동과 수조에 의한 각 등전의 실적
6등전을 다 57묘로 1결을 정하여 가지고, 이에 의하여, 2와 같이 수세액을 각각 달리 한다면, 비단 절목이 번쇄해질 뿐 아니라, 사전절급·병역·부역 부담 등에 관하여 산계가 심번(甚煩)함을 미면하리니, 전례에 의하여 결부의 광협을 각각 다르게 정하여 가지고, 동과 수조를 행하기로 한다. 그러면 여하한 세액을 기준으로 하여 결부의 광협을 정할 것인가. 만일 6등전 1결의 7두 5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 1결은 57묘가 될 것이나, 1등전의 1결이 너머 좁아진다. 동리(同理)로 1등전 1결의 30두를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윤집궐중(允執厥中)하여 20두동과(○○○○○)로써 결의 적을 정하기로 한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1등전1결 38·0묘(57(묘):30(두)=x(묘): 20(두). x=38묘 etc.
2등전1결 44·7
3등전1결 54·2
4등전1결 69·0
5등전1결 95·0
6등전1결 152·0
쪽수▶P125-4四. 同科收租에 依한 各等田의 實積
六等田을 다 五十七畝로 一結을 定하여 가지고, 이에 依하여, 二와 같이 收稅額을 各々 달리 한다면, 非但▶P126-1 節目이 煩鎻해질 뿐 아니라, 私田折給·兵役·賦役 負擔 等에 關하여 算計가 甚煩함을 未免하리니, 前例에 依하여 結負의 廣狹을 各々 다르게 定하여 가지고, 同科收租를 行하기로 한다. 그러면 如何한 稅額을 基準으로 하여 結負의 廣狹을 定할 것인가. 萬一 六等田 一結의 七斗五升을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 一結은 五十七畝가 될 것이나, 一等田의 一結이 너머 좁아진다. 同理로 一等田 一結의 三十斗를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允執厥中하여 二十斗同科(○○○○○)로써 結의 積을 定하기로 한다. 其結果는 左와 如하다.
一等田一結 三八·〇畝(57(畝):30(斗)=x(畝): 20(斗). x=38畝 etc.
二等田一結 四四·七
三等田一結 五四·二
四等田一結 六九·〇
五等田一結 九五·〇
六等田一結 一五二·〇
5. 연분9등에 의한 모든 등전1결의 세액
상상년 20두 상중년 18두
상하년 16두 중상년 14두
중중년 12두 중하년 10두
하상년 8두 하중년 6두
하하년 4두
(상중년=상상년 20두×0.9=18두. etc.)
쪽수▶P126-2五. 年分九等에 依한 諸等田一結의 稅額
上々年 二〇斗 上中年 一八斗
上下年 一六斗 中上年 一四斗
中々年 一二斗 中下年 一〇斗
下上年 八斗 下中年 六斗
下々年 四斗
(上中年=上々年 20斗×0.9=18斗. etc.)
6. 각 등전의 일량 전척
각 등전은 다 그 양전척(○○○) 100척4방으로 1결을 삼는다. 따라서 각 양전척의 주척에 의한 장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1등전척 주척 4척7촌7분
2등전척 주척 5척1촌6분
3등전척 주척 5척7촌0분
4등전척 주척 6척4촌3분
5등전척 주척 7척5촌5분
6등전척 주척 9척5촌5분
주1. 경묘법에는 주척5척4방위1보, 240보위1묘인 고로 1묘는 6000평방주척이다. 따라서 1-등전척=√16000(평방주척)×38(묘)÷100=4.77주척이 된다. 여개방차)
2. 이에 각 등전척의 실장을 곡척으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1주척은 곡0·66척).
1등전척 곡3·148척
2등전척 곡3·419척
3등전척 곡3·762척
4등전척 곡4・344척
5등전척 곡4·983척
6등전척 곡6·303척
다시 이 곡척 수에 의하여 각 등전1결의 실적을 평수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각 등전1결은 각 그 양전척의 100척평방이요, 1평은 물론 곡6척평방이다.)
1등전1결 2,753·1평
2등전1결 3,346·7평
3등전1결 3,931·9평
4등전1결 4,723·5평
5등전1결 6,897・3평
6등전1결 11,035·5평
3. 세종 조(朝) 소정(所定) 주척은 이미 쓴 바와 같이 곡6촌6분이나, 후에 그 장이 늘어나서, 반계수록(권2)에 “今量田尺所用周尺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이라 하고 그려 놓은 주척은 그 장이 곡7촌이나 되니, 이것은 인조 12 갑술년 이후에 늘어난 것이다. (문헌비고 권142 참조) 따라서 갑술 이후의 척장과 결적에는 다소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니 주의하기 바란다.
쪽수▶P126-3六. 各 等田의 一量田尺
各 等田은 다 其 量田尺(○○○) 一〇〇尺四方으로 一結을 삼는다. 따라서 各量田尺의 周尺에 依한 長은 다음과 같이 定한다.
一等田尺 周尺 四尺七寸七分
二等田尺 周尺 五尺一寸八分
三等田尺 周尺 五尺七寸〇分
四等田尺 周尺 六尺四寸三分
五等田尺 周尺 七尺五寸五分
六等田尺 周尺 九尺五寸五分
註一. 頃畝法에는 周尺五尺四方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인 故로 一畝는 六〇〇〇平方周尺이다. 따라서▶P127-1 1-等田尺=√16000(平方周尺)×38(畝)÷100=4.77周尺이 된다. 餘皆倣此)
二. 이에 各 等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一周尺은 曲〇·六六尺).
一等田尺 曲三·一四八尺
二等田尺 曲三·四一九尺
三等田尺 曲三·七六二尺
四等田尺 曲四・三四四尺
五等田尺 曲四·九八三尺
六等田尺 曲六·三〇三尺
다시 이 曲尺 數에 依하여 各 等田一結의 實積을 坪數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 (各 等田一結은 各 其量田尺의 百尺平方이오, 一坪은 勿論 曲六尺平方이다.)
一等田一結 二,七五三·一坪
二等田一結 三,三四六·七坪
三等田一結 三,九三一·九坪
四等田一結 四,七二三·五坪
五等田一結 六,八九七・三坪
六等田一結 一一,〇三五·五坪
三. 世宗朝 所定周尺은 旣述한 바와 같이 曲六寸六分이나, 後에 其長이 느러나서, 磻溪隨錄(卷二)에 「今量田尺所用周尺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이라 하고 그려 놓은 周尺은 其長이 曲七寸이나 되니, 이것은 仁祖 十二 甲戌年 以後에 느러난 것이다. (文獻備考 卷百四十二 參照) 따라서 甲戌 以後의 尺長과 結積에는 多少의 差異가 生하는 것이니 注意하기 바란다.
7. 결부속파(結負束把)
결부속파의 이름은 종래와 같이 한다. 1결위100부, 一부위10속, 1속위10파, 고로 결부속파와 새로운 양전척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결 10,000평방양전척
1부 100평방양전척
1속 10평방양전척
1파 1평방양전척
또 1자5결의 제(制)는 옛 방식에 의한다.
(이상 1 및 2는 전적과 세액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의 논리적 과정이요 법의 표면에는 3, 4, 5, 6, 7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쪽수▶P127-2七. 結負束把
結負束把의 이름은 從來와 같이 한다. 一結爲百負, 一負爲十束, 一束爲十把, 故로 結負束把와 新量田尺과의 關係는 如左하다.
一結 1〇,〇〇〇平方量田尺
一負 1〇〇平方量田尺
一束 1〇平方量田尺
一把 1平方量田尺
또 一字五結의 制는 舊에 依한다.
(以上 一 及 二는 田積과 稅額을 決定하는 데 있어서의 論理的 過程이오 法의 表面에는 三, 四, 五, 六, 七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勿論이다.)
8. 모든 위전의 이동
전적 개정에 반(伴)하여 공사의 모든 위전의 급부액에 당연히 이동이 생길 것이나, 이는 우선 옛 액에 의하여 단수(端數)를 붙여 급(給)해 두기로 한다.
쪽수▶P127-3八. 諸位田의 移動
田積 改定에 伴하야 公私諸位田의 給付額에 當然이 移動이 生할 것이나, 此는 爲先 舊額에 依하야 端數▶P128-1를 부처 給해 두기로 한다.
제2 연분등제
쪽수▶P128-2第二 年分等第
★9. 각 도 감사의 보고
각 도 감사는 한 해의 풍흉에 의하여 각 읍별로 다시 한전·수전별로, 상상에서 하하에 이르는 연분을 상계한다. ‘모 읍의 수전은 모 등년, 한전은 모 등년’의 형식으로 상상년은 10분실이요, 하하년은 2분실이요, 1분실은 면세한다.
쪽수▶P128-3★九. 各 道 監司의 報告
各道監司는 年의 豊凶에 依하야 各邑別로 다시 旱田·水田別로, 上々에서 下々에 이르는 年分을 上啓한다. 「某邑의 水田은 某等年, 旱田은 某等年」의 形式으로 上々年은 十分實이요, 下々年은 二分實이요, 一分實은 免税한다.
10. 정부의 결정
감사의 상계는 의정부·육조에 내려 의의(擬議)한 뒤, 신문(申聞)하여 연분을 결정한다. 혹 필요를 인식할 때는 정부는 다시 조관을 파견하여 심사한 후 계문하야 연분을 정한다.
쪽수▶P128-4十. 政府의 決定
監司의 上啓는 議政府·六曹에 下하야 擬議한 後, 申聞하야 年分을 決定한다. 或 必要를 認할 時는 政府는 다시 朝官을 派遣하야 審査한 後 啓聞하야 年分을 定한다.
제3 감면지제
쪽수▶P128-5第三 減免之制
★11. 진황전은 면세한다.
전적에 정전(○○)으로 되어있는 것은 다 매년 기경할 만한 땅인데, 나태에 의하여 진황하는 자가 많으니, 이 폐를 제거하기 위하여 정전은 일부 진황과 전부 진황을 불문하고 일률 수세하기로 한다. 단 전적에 속전(○○)으로 되어있는 것은 진황하기 쉬운 땅이니, 진황한 경우에는 수령이 작자의 고장에 의하여 친심한 후 감사에 전보하고, 감사·수령관은 다시 그 수를 핵(覈)하여 계문하고 중앙에서는 다시 조관을 파견하여 심사한 후 면세한다.
쪽수▶P128-6★十一. 陳荒田은 免稅한다.
田籍에 正田(○○)으로 되여있는 것은 다 每年 起耕할 만한 땅인데, 懶怠에 依하야 陳荒하는 者가 많으니, 此弊를 除去하기 爲하야 正田은 一部 陳荒과 全部 陳荒을 不問하고 一律 收稅하기로 한다. 但 田籍에 續田(○○)으로 되여있는 것은 陳荒하기 쉬운 땅이니, 陳荒한 境遇에는 守令이 作者의 告狀에 依하야 親審한 後 監司에 傳報하고, 監司·首領官은 다시 其數를 覈하야 啓聞하고 中央에서는 다시 朝官을 派遣하야 審査한 後 免税한다.
12. 침몰전은 면세한다.
물로 인하여 침몰된 전은 정전·속전을 불문하고 앞의 조 진황전과 같은 수속을 경(經)한 후 면세한다.
쪽수▶P128-7十二. 沈沒田은 免稅한다.
水로 因하야 沈沒된 田은 正田·續田을 不問하고 前條 陳荒田과 같은 手續을 經한 後 免稅한다.
★13. 재상전은 감면한다.
병·충·수·한해 등에 의하여 연복(상접한 땅)10결 이상에 달해 거의 전손(全損)하여 다른 전과 같이 9등연분으로 율할 수 없는 재상전은 진황전과 같은 수속을 경과한 후 감면한다.
쪽수▶P128-8★十三. 災傷田은 減免한다.
病·蟲·水·旱害 等에 依하야 連伏(相接한 地)十結 以上에 亘하야 거의 全損하야 他田과 같이 九等年分으로 律할 수 없는 災傷田은 陳荒田과 같은 手續을 經過한 後 減免한다.
14. 이 진황·침몰·재상전을 수령이 유고하여 친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감사가 차인(差人)하여 심사한다. 만일 수령이 타태하여 친심을 행하지 않는다든지 혹 사실에 반한 보고를 한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이를 엄벌에 처한다.
★표를 지른 것은 후에 다소 수정당한 것이다.
쪽수▶P128-9十四. 右 陳荒·沈沒·災傷田을 守令이 有故하야 親審치 몯하는 境遇에는 監司가 差人하야 審査한다. 萬一 守令이 惰怠하야 親審을 行하지 안는다든지 或 事實에 反한 報告를 한다든지 하는 境遇에는 此를 嚴罰에▶P129-1 處한다.
★表를 지른 것은 後에 多少 修正當한 것이다.


















본문4: 4.공법 정착 이후의 제문제















































본문4-1: (1)제위전에 관한 문제


① 전적 정리
쪽수▶P129-3① 田積 整理
전적 개정의 다음에 오는 것은 모든 위전 정리에 관한 문제다. 공법 정착의 익년인 27년 7월 을유에 의정부·육조의 상계에 의하여 옛 전적과 새 전적과의 차이에 말미암아 당연히 생기는바 공사 모든 위전의 영(과) 축(부족)은 혹은 국고에 이속하고 혹은 신규 보급하고 또 종래 절급액이 구구부정하던 것은 이를 일정하기로 하였다. 또 종래 그 액이 일정하던 것 중에서 이 즈음에 일률로 감액한 것도 있다. 다시 어떤 종류의 위전은 전연 혁제하기로 하였다. 요컨대 전제의 전반에 이르러 면목이 일신하게 된 것이다. 제1의 과부족의 첨삭을 한 것은 역전(우역에 대한 급전)이요, 제2의 절급액을 일정한 것은 향교위전(향교에 대한 급전)·주현아록전(수령의 봉록전)·공수전(지방관청의 용도전)·원전(행려 투숙소원에 대한 급전) 등이요, 제3의 일률 감액을 한 것은 도전(대하의 지정 도진에 대한 급전)·참전(수운을 맡는 수참에 대한 급전) 등이다. 그리고 제4의 전연 혁제해버린 것은 각사 공해전(중앙 각 관청에 절급되어 있던 점심비용전)을 비롯하여 모든 제위전(전주 경기전(태조 진전)·사직 제위전·문선왕 제위전·사전 소재 모든 악·해·독·산·천·성황 제위전 등)·인리 위전(향리에 대한 급전)·와장전(동·서요 와장에 대한 급전)・종묘 한전(종묘 소속 한(범역천자 총위지한)에 대한 급전)·봉상사 제단직전(제사 및 의시(議謚)를 장(掌)하는 봉상사의 제단직에 대한 급전)·수군전(홍엽·교하에 배치되었던 특별 수군에 대한 급전) 등이다(이상 모든 위전의 본질과, 및 그들에 대한 처리 제방법의 각기 이유에 대하여는, 다시 상론을 하여야 처음으로 사태가 밝아질 것이지만, 본론의 주류가 아닌 고로 할애한다). 그런데 이상 4개의 처리 방법 중, 제4의 전연 혁제는 무난히 즉시 실행할 수가 있었을 것이나, 다른 세 방법에 의한 것은 어느 것이나 정확히 이를 실행하려면 그 지방의, 신법에 의한 일반적 양전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요, 또 사실 각 도의 양전은 후술할 것과 같이 극히 수많이 실행된 것인 고로, 이들 새 규정의 정확한 적용은 상당한 시일을 요한 것이다. 더욱이 역전·아록전·공수전 등 거액에 달하는 위전의 처리는 그러하였다.
쪽수▶P129-4田積 改定의 다음에 오는 것은 諸位田 整理에 關한 問題다. 貢法 定着의 翌年인 二十七年 七月 乙酉에 議政府·六曹의 上啓에 依하야 舊田積과 新田積과의 差異에 말미암아 當然이 생기는바 公私 諸位田의 盈(過) 縮(不足)은 或은 國庫에 移屬하고 或은 新規 補給하고 또 從來 折給額이 區々不定하든 것은 此를 一定하기로 하였다. 또 從來 그 額이 一定하든 것 中에서 이 지음에 一律로 減額한 것도 있다. 다시 어떤 種類의 位田은 全然 革除하기로 하였다. 要컨댄 田制의 全般에 亘하야 面目이 一新하게 된 것이다. 第一의 過不足의 添削을 한 것은 驛田(郵驛에 對한 給田)이요, 第二의 折給額을 一定한 것은 鄕校位田(鄕校에 對한 給田)·州縣衙祿田(守令의 俸祿田)·公須田(地方官廳의 用度田)·院田(行旅投宿所院에 對한 給田) 等이요, 第三의 一律減額을 한 것은 渡田(大河의 指定 渡津에 對한 給田)·站田(水運을 맡는 水站에 對한 給田) 等이다. 그리고 第四의 全然 革除해버린 것은 各司公廨田(中央 各 官廳에 折給되여 있든 點心費用田)을 비롯하야 諸祭位田(全州 慶基殿(太祖眞殿)·社稷 祭位田·文宣王 祭位田·祀典 所載 諸嶽·海·瀆·山·川·城隍 祭位田 等)·人吏位田(鄕吏에 對한 給田)·瓦匠田(東·西窰瓦匠에 對한 給田)・宗廟干田(宗廟所屬于(凡役賤者總謂之干)에 對한 給田)·奉常寺 祭壇直田(祭祀 及 議謚를 掌하는 奉常寺의 祭壇直이에 對한 給田)·水軍田(紅曄·喬河에 配置되었든 特別 水軍에 對한 給田) 等이다(以上 諸位田의 本質과, 및 그들에 對한 處理 諸方法의 各其 理由에 對하여는, 다시 詳論을 하여야 처음으로 事態가 밝아질 것이로되, 本論의 主流가 아닌 故로 割愛한다). 그런데 以上 四箇의 處理 方法 中, 第四의 全然 革除는 無難이 直時 實行할 수가 있었을 것이나, 他 三方法에 依한 것은 어느 것이나 正確히 此를 實行하랴면 其地方의, 新法에 依한 一般的 量田 結果를 기다려야 할 것이요, 또 事實 各 道의 量田은 後述할 것과 같이 極히 綏慢히 實行된 것인 故로, 此等 新規定의 正確한 適用은 相當한 時日을 要한 것이다. 더욱이 驛田·衙祿田·公須田 等 巨額에 達하는 位田의 處理는 그러하였다.
이상 모든 위전 처리 외에 또 남은 것은 과전(조관(朝館)에 대한 급전)·공신전(공신 및 그 자손에 대한 급전)에 대한 문제일 것인데, 이 두 종의 전은 다 경기 내에 존재하는 것인 고로, 그 정리는 경기의 일반적 양전(세조 7년 아래 항목 참조) 결과를 기다린 후에 하였을 것이다.
쪽수▶P129-5以上 諸位田 處理 外에 또 남은 것은 科田(朝館에 對한 給田)·功臣田(功臣 及 其子孫에 對한 給田)에 對한 問題일 것인데, 此兩種田은 다▶P130-1 京畿 內에 存在하는 것인 故로, 其整理는 京畿의 一般的 量田(世祖 七年 次項 參照) 結果를 기다린 後에 하였을 것이다.
② ‘세’의 처리
쪽수▶P130-2②「稅」의 處理
과전법에 의하여 규정된, 국가가 과전을 위시하여 모든 사전에서 1결2두씩 징수하는 ()는(처음 ()()를 구별하여 사용하던 때의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세. 제1절 서두 참조), 신법에 있어서는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쪽수▶P130-3科田法에 依하야 規定된, 國家가 科田을 爲始하야 諸私田에서 一結二斗씩 徵收하는 ()는(처음 ()()를 區別하여 使用하든 때의 本來의 意味에 있어서의 稅. 第一節 緒頭 參照), 新法에 있어서는 如何이 處理되었는가.
27년 7월 을유의 결정으로는,
쪽수▶P130-4二十七年 七月 乙酉의 決定으로는,

一. 前此一結 定稅三斗(筆者曰, 三斗之間, 恐脫十字) 各品科田 及外方各位私田 則一結二斗 今一結極數 改定二十斗 而稅米豆 從本稅之數計除 其一結二斗仍舊.

쪽수▶P130-5

一. 前此一結 定稅三斗(筆者曰, 三斗之間, 恐脫十字) 各品科田 及外方各位私田 則一結二斗 今一結極數 改定二十斗 而稅米豆 從本稅之數計除 其一結二斗仍舊.

라고 하였다. 이 규정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신법에 있어서는 전적도 변경되었고, 또 1결당 수세액도 30두에서 20두로 변경이 되었지만, 사전세 1결2두는 이를 변경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결의 수세 ‘극수’ 20두(연분 상상년의 1결당 수세액이니, 1결의 최고 수세액)인 ‘본세’(즉, 사전법의 소위 조)에 대하여 사전세 2두로 하고, 본세가 연분에 의하여 감액되는 데 따라 사전세도 이를 ‘계제’(‘감액’)하기로 한다. 즉 본세 20두에 대하여 사전세 2두, 본세 18두에 대하여 사전세 1두 8승 等으로. 그런데 본세 대 사전세 간의 규정도 전적 정리 문제와 같이 경기 내에 일반적으로 새 공법이 적용된 후에야 실행된 것은 물론이다.
쪽수▶P130-6라고 하였다. 此規定은 다음과 같이 解釋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即 新法에 있어서는 田積도 變更되였고, 또 一結當 收稅額도 三十斗에서 二十斗로 變更이 되였지마는, 私田稅 一結二斗는 此를 變更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야 一結의 收稅 「極數」 二十斗(年分 上々年의 一結當 收稅額이니, 一結의 最高 收稅額)인 「本稅」(即, 私田法의 所謂 租)에 對하야 私田稅 二斗로 하고, 本稅가 年分에 依하야 減額되는 데 타라 私田稅도 此를 「計除」(「減額」)하기로 한다. 即 本稅 二十斗에 對하야 私田稅 二斗, 本稅 十八斗에 對하야 私田稅 一斗 八升 等으로. 그런데 本稅 對 私田稅 間의 規定도 田積 整理 問題와 같이 京畿 內에 一般的으로 新貢法이 適用된 後에야 實行된 것은 勿論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밝혀 둘 것은, 과전법에 있어서는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 외의 모든 전에서 이 사전세를 받게 되어 있었는데, 그 후 기다의 변천을 겪어 결국 경국대전에서는 직전(과전의 후신이니, 현직 관료에 대한 급전)과 사전(사원에 허용된 사전)만이 이 세를 바치기로 되어 있다.
쪽수▶P130-7그리고 여기서 暫間 밝혀 둘 것은, 科田法에 있어서는 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 外의 모든 田에서 이 私田稅를 받게 되여 있었는데, 其後 幾多의 變遷을 겪어 結局 經國大典에서는 織田(科田의 後身이니, 現職 官僚에 對한 給田)과 寺田(寺院에 許容된 私田)만이 이 稅를 바치기로 되여 있다.






























본문4-2: (2)신공법의 적용


26년 11월 무자 신공법이 발포되고, 같은 달 경자에 도순찰사 정인지가 하3도 6현의 전품등제와 양전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므로 신공법은 제1착으로 이 6현에 실시되었다. 이어 모든 다른 군현에도 점차 경차관을 파견하여 등제와 양전을 하고, 혹 일부러 경차관을 파하지 않더라도 그 관 수령이 무시로 이를 속행하여 점차 신공법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등제·양전이란 실천적으로는 상당한 곤란을 동반하는 것인 외에, 경차관을 파하게 되면 그들에 대한 공억(供億)이 굉장히 많고, 또 수령이 한 사람으로서 그 관내의 등제를 행하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호랑 호리에도 비할 품관·서리들에게 맡길 수도 없는 것이다. 이들 모든 사정에 의하여 등제·양전은 임염세월을 허비하게 되니, 따라서 일반적인 신공법 실시도 극히 긴 연월(年月)을 요하게 되었다. 물론 신공법을 실시함에는 전품등제(○○○○)만 하면, 옛 전안과의 비교에 의하여 우선 현재액 그대로 새 6등전법에 의한 전적을 각기 산출할 수가 있는 것이니, 따라서 양전(○○)은 당장 절대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새 세법과 같은 획기적인 대사업을 단행함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할 것을 희구하였고, 또 이 법 실시의 실제 과정도 대개 이에 따른 것이다.
쪽수▶P130-9二十六年 十一月 戊子 新貢法이 發布되고, 同月 庚子에 都巡察使 鄭麟趾가 下三道 六縣의 田品等第와 量田의 結果를 報告하였음으로 新貢法은 第一着으로 此六縣에 實施되였다. 이어 諸他 郡縣에도 漸次 敬差官을 派遣하야 等第와 量田을 하고, 或 일부러 敬差官을 派하지 않드라도 其官 守令이 無時로 此를 續行하야 漸次 新貢法을 實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等第·量田이란 實踐的으로는 相當한 困難을 同伴하는 것인 外에, 敬差官을 派하게 되면 그들에 對한 供億이 굉장이 많고, 또 守令이 한 사람으로▶P131-1서 其管內의 等第를 行하는 것도 容易한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虎狼 狐狸에도 比할 品官·胥吏들에게 마낄 수도 없는 것이다. 此等諸 事情에 依하야 等第·量田은 荏苒歲月을 虛費하게 되니, 따라서 一般的인 新貢法 實施도 極히 長年月을 要하게 되였다. 勿論 新貢法을 實施함에는 田品等第(○○○○)만 하면, 舊田案과의 比較에 依하야 爲先 現在額 그대로 新六等田法에 依한 田積을 各其 算出할 수가 있는 것이니, 따라서 量田(○○)은 당장 絕對 必要한 일은 아니지마는, 新稅法과 같은 劃期的인 大事業을 斷行함에는, 될 수 있는 대로 正確할 것을 希求하였고, 또 此法 實施의 實際 過程도 大槪 이에 딿은 것이다.
우선 30년 7월(실록 무술조)부터 32년 2월(실록 을유조)에 이르러 전라도의 전품등제가 끝난 고로 이 지방에 신공법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전라도는 모든 도 중에서 가장 먼저 신공법으로 들어갔다. 그 후 모든 도의 등제·양전은 누차 발설·계획되었으나, 흉작·제대(諸大)사업의 속출에 의하여, 어느 것이나 다 정기(廷期)되어 버리고 말았다(등제·양전의 집행은 농민에 막대한 부담을 부과하는 것임에 상도하라). 이제 이들의 지리한 과정을 일일이 서술하는 번(煩)을 피하고, 오로지 그 수행의 결과만을 적는다. 세조 6년에는 경기의 전품등제를 종료하였다(실록 11월 임오조). 이어 익 7년에는 같은 도의 양전, 8년에는 충청도, 9年에는 경상도의 양전(물론 신6등법에 의한 등제를 겸하여)을 각각 착수하여(성종실록 21년 6월 병오조 참조), 다 불원한 시일에 완료되어, 이들 지역에 신공법을 부연(敷衍)하였다. 이 3도의 신법 실시는 세조 11년 초까지에는 완료되었던 모양이다.(실록 2월 임오조) 이 앞서 8년에는 전라도의 양전도 수행하였다(성종실록 21년 6월 병오조 참조). 여기서 잠깐 주의를 환기하기 위하여 되풀이하여 둘 것은 세조 7년경까지 전라도는 신공법의 6등 수세법에, 경기·충청·경상의 3도는 옛 공법의 3등 수세법에 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라·경기·충청·경상의 4도가 신공법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강원·황해·평안·영안의 4도는 아직 옛 손실법에 정체되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31-2爲先 三十年 七月(實錄 戊戌條)부터 三十二年 二月(實錄 乙酉條)에 亘하야 全羅道의 田品等第가 끝난 故로 此地에 新貢法을 適用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야 全羅道는 諸道 中에서 가장 먼첨 新貢法으로 드러갔다. 그 後 諸道의 等第·量田은 累次 發說·計劃되었으나, 凶作·諸大事業의 續出에 依하야, 어느 것이나 다 廷期되여 버리고 마렀다(等第·量田의 執行은 農民에 莫大한 負擔을 課하는 것임에 想到하라). 이제 此等의 支離한 過程을 一々이 叙述하는 煩을 避하고, 오로지 그 遂行의 結果만을 記한다. 世祖 六年에는 京畿의 田品等第를 終了하였다(實錄 十一月 壬午條). 이어 翌 七年에는 同道의 量田, 八年에는 忠淸道, 九年에는 慶尙道의 量田(勿論 新六等法에 依한 等第를 兼하야)을 各々 着手하야(成宗實錄 二十一年 六月 丙午條 參照), 다 不遠한 時日에 完了되여, 此等地에 新貢法을 敷衍하였다. 此三道의 新法 實施는 世祖 十一年 初까지에는 完了되였든 모양이다.(實錄 二月 壬午條) 이 앞서 八年에는 全羅道의 量田도 遂行하였다(成宗實錄 二十一年 六月 丙午條 參照). 여기서 暫間 注意를 喚起하기 爲하야 되푸리하야 둘 것은 世祖 七年頃까지 全羅道는 新貢法의 六等收稅法에, 京畿·忠淸·慶尙의 三道는 舊貢法의 三等收稅法에 屬하였든 것이다. 그리고 全羅·京畿·忠淸·慶尙의 四道가 新貢法으로 드러간 以後에도 江原·黃海·平安·永安의 四道는 아직 舊損實法에 停滯되여 있었든 것이다.
그 후 성종 2년에는 황해도의 양전을 종료하여 같은 도에 공법을 실시하고(실록 4월 신미조 11월 임자조, 3년 5월 임인조 참조), 같은 왕 4년에서 6년에 걸쳐 강원도의 양전을 행하여 이에 공법을 적용하였다(실록 4년 6월 무진 7년 10월 계유조). 17년에는 평안도의 양전을 행하여 18年부터 같은 도에 공법을 실시하였다(실록 17년 10월 병자조, 18년 9월 계묘조 참조). 영안도(함경도)는 가장 늦어, 19년에서 20년에 걸쳐 양전을 하고, 20년부터 공법을 실시하게 되니(실록 19년 8월 신해조, 같은 해 11월 무진조, 20년 정월 경오조), 이제야 8도의 공법 실시가 완료되었다.
쪽수▶P131-3그 後 成宗 二年에는 黃海道의 量田을 終了하야 同道에 貢法을 實施하고(實錄 四月 辛未條 十一月 壬子條, 三年 五月 壬寅條 參照), 同 四年에서 六年에 걸처 江原道의 量田을 行하야 此에 貢法을 適用▶P132-1하였다(實錄 四年 六月 戊辰 七年 十月 癸酉條). 十七年에는 平安道의 量田을 行하야 十八年부터 同道에 貢法을 實施하였다(實錄 十七年 十月 丙子條, 十八年 九月 癸卯條 參照). 永安道(咸鏡道)는 가장 늦어, 十九年에서 二十年에 걸처 量田을 하고, 二十年부터 貢法을 實施하게 되니(實錄 十九年 八月 辛亥條, 同 十一月 戊辰條, 二十年 正月 庚午條), 於是乎 八道의 貢法 實施가 完了되였다.
회고하건대 신공법은 세종 27년 하3도 6현의 실시를 남상으로 하여, 세종 말까지에 전라도, 세조 말까지에 경기·하3도, 성종 말까지에 모든 도에 퍼졌다. 세종 26년의 공법 발포에서 성종 20년의 완성까지에 45개년이요 세종 19년의 옛 공법 개시부터는 52개년, 다시 세종 12년의 공법 시문에서 기산하면 실로 59개년의 시일을 요하였다. 신공법의 실시가 이 같이 천연(遷延)된 이유로서, 이에 필요한 등제·양전이 실천상 상당한 곤란을 동반하는 것과, 또 이를 수행함에는 인민의 막대한 부담을 요하였던 것은 이미 말한 바이다. 다시 황해·강원·평안·영안의 4도의 공법이 특히 늦은 데는 특수한 사정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쪽수▶P132-2回顧컨댄 新貢法은 世宗 二十七年 下三道 六縣의 實施를 濫觴으로 하야, 世宗 末까지에 全羅道, 世祖 末까지에 京畿·下三道, 成宗 末까지에 全道에 퍼졌다. 世宗 二十六年의 貢法 發布에서 成宗 二十年의 完成까지에 四十五箇年이오 世宗 十九年의 舊貢法 開始부텀은 五十二箇年, 다시 世宗 十二年의 貢法 試問에서 起算하면 實로 五十九箇年의 時日을 要하였다. 新貢法의 實施가 이 같이 遷延된 理由로서, 此에 必要한 等第·量田이 實踐上 非常한 困難을 同伴하는 것과, 또 이를 遂行함에는 人民의 莫大한 負擔을 要하였든 것은 이미 말한 바이다. 다시 黃海·江原·平安·永安의 四道의 貢法이 特히 늦인 데는 特殊한 事情이 存在하였든 것이다.
처음 세종 12년 공법 시문이 있었을 때에 평안·강원·함길의 3도는 거의 다 불찬성이었고, 황해도는 충청도와 함께 불찬성이 훨씬 많았다. 4도는 일반적으로 농지의 자연적 조건이 불량한 까닭에 세액의 일정한 공법에 대개 반대한 것이다. 특히 이들 모든 도에는 휴간을 요하는 산전이 많기 때문에 정액세인 공법에는 더욱이 부적당한 것이었다. 물론 공법에, 기진에 대한 적량(的量)이 법제상 존재하지만, 실제로 농민에게까지 그 은혜가 미치기는 대단히 곤란한 일이다. 이들 4도 공법 실시의 계획에 대하여 제출되는 반대론의 모든 상소는 늘 이 점을 들어 강조하는 것이었다(성종 2년 11월 임자 대사간 성준계(啓), 7년 10월 계유 강원도 관찰사계(啓), 17년 10월 병자 영경연사 홍응계(啓), 같은 해 기묘 평안도 관찰사계 등).
쪽수▶P132-3처음 世宗 十二年 貢法 試問이 있었을 때에 平安·江原·咸吉의 三道는 거의 다 不賛成이었고, 黃海道는 忠淸道와 함께 不賛成이 훨신 많았다. 四道는 一般的으로 農地의 自然的 條件이 不良한 까닭에 稅額의 一定한 貢法에 大概 反對한 것이다. 特히 此等諸道에는 休閑을 要하는 山田이 많기 때문에 定額稅인 貢法에는 더욱이 不適當한 것이였다. 勿論 貢法에, 起陳에 對한 的量이 法制上 存在하지마는, 實際로 農民에게까지 그 恩惠가 미치기는 大端이 困難한 일이다. 此等四道 貢法 實施의 計劃에 對하야 提出되는 反對論의 諸上疏는 늘 이 點을 들어 强調하는 것이었다(成宗 二年 十一月 壬子 大司諫 成俊啓, 七年 十月 癸酉 江原道 觀察使啓, 十七年 十月 丙子 領經筵事 洪應啓, 同 己卯 平安道 觀察使啓 等).
특히 양계의 양전·공법이 가장 늦은 데는 다시 깊은 원인이 있었다. 원래 고려 공양왕 원년의 양전(제1절 양전 참조)은 양계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고, 또 이조로 들어와 태종 5년에 처음 전국적 양전을 시작하였을 때에도, 양계는 가장 늦어 태종 13년에 이르러 겨우 실행되는 형편이었다(태종실록 13년 정월 정해조). 그 이유는, 양계는 원래 산전이 많고, 따라서 휴한지가 많아, 양전할 나위가 없다는 것도 있었지만, 다른 방면 양계에는 토포군의 노력이 대성하여 중앙의 위령이 철저하지 못하여 양전 같은 중앙 집권적 행위에 대하여 완강히 반대한 때문이다. 이 지방의 토호들은 방대한 수의 토지 농노를 사유하여 항상 중앙정권에 배치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조 13년 함길도에서 일어난 소위 이시애난(亂)이라는 것은, 이 지방 토호 무리의 지휘 하에 일어난 농민반란으로, 반중앙운동의 한 개의 현저한 폭발이지만, 그 후에도 길게 이런 경향이 지속되고 있었다. 성종 8년 11월 을해 대사헌 이계손의 상언 중의
쪽수▶P132-4就中 兩界의 量田·貢法이 가장 늦인 데는 다시 깊은 原因이 있었다. 元來 高麗 恭讓王 元年의 量田(第一節 量田 參照)은 兩界에까지는 미치지 몯하였고, 또 李朝로 드러와 太宗 五年에 처음 全國的 量田을 始作하였을 때에도, 兩界는 가장 늦어 太宗 十三年에 이르러 겨우 實行되는 形便이었다(太宗實錄 十三年 正月 丁亥條). 그 理由는, 兩界는 원래 山田이 많▶P133-1고, 따라서 休閑地가 많어, 量田할 나위가 없다는 것도 있었지마는, 他方 兩界에는 土豪群의 努力이 大盛하야 中央의 威令이 徹底하지 몯하야 量田 같은 中央 集權的 行爲에 對하야 頑强히 反對한 때문이다. 此地方의 土豪들은 尨大한 數의 土地 農奴를 私有하야 恒常 中央政權에 背馳하는 傾向을 가지고 있었든 것이다. 世祖 十三年 咸吉道에서 일어난 所謂 李施愛亂이라는 것은, 이 地方 土豪群의 指揮 下에 이러난 農民叛亂으로, 反中央運動의 한 箇의 顯著한 爆發이지마는, 그 後에도 길이 이런 傾向이 持續되고 있었다. 成宗 八年 十一月 乙亥 大司憲 李繼孫의 上言 中의

且 兩界之田 經界不正 豪强者 田連阡陌 而不納租稅 貧窮者只占尺寸之地面 徵納倍於他人 國家將欲量田定稅 而因民怨咨 且止 云々

쪽수▶P133-2

且 兩界之田 經界不正 豪强者 田連阡陌 而不納租稅 貧窮者只占尺寸之地面 徵納倍於他人 國家將欲量田定稅 而因民怨咨 且止 云々

이라든지, 같은 왕 15년 7월 경술 지사 허종의 계 중의
쪽수▶P133-3이라든지, 同 十五年 七月 庚戌 知事許琮의 啓 中의

(前略) 彼道(영안道)人心本頑愚 易生疑惑 今若量田 必相驚駭 恐有後悔 云々

쪽수▶P133-4

(前略) 彼道(永安道)人心本頑愚 易生疑惑 今若量田 必相驚駭 恐有後悔 云々

이라든지는, 어느 것이나 다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평안·영안의 양전은 태종 13년 이후 모두 70여년을 경(經)한, 성종 17년·19년에 이르러 처음 되고 공법도 또한 이에 좇아 시행된 것이다.
쪽수▶P133-5이라든지는, 어느 것이나 다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다. 이리하야 平安·永安의 量田은 太宗 十三年 以後 모다 七十餘年을 經한, 成宗 十七年·十九年에 이르러 처음 되고 貢法도 또한 이에 쫓아 施行된 것이다.






























본문4-3: (3)연분등제


공법에 의하면, 9등 연분의 시행단위는 1읍(○○)이었다. 그러나 물론 1읍 내에도 풍흉의 차는 상당히 있는 것이니, 단종 2년 8월 정미에 이르러 1읍 단위를 소루(疎漏)하다 하여, 고쳐 면단위(○○○)로 하였다. 즉 1읍 내에서 4면(동·서·남·북)과 읍내를 구별하여 도합 5종의 연분을 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다시 이를 세분하여 고원단위(○○○○)로 하자는 의(議)가 일어났다. ‘고원’이란 ”俗以田之所在謂庫”(성종실록 6년 4월 신축조), 즉 산천으로 구획된, 거의 동일한 자연적 조건을 가진 토지의 한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조 3년 8월 갑오 종래의 면등제를 좋다 하고, 호조에 전지하여 ‘분산야정세(分山野定稅)’(즉 고원등제)하도록 하였으나, 후에 이는 거의 옛 손실법에 유(類)한 것이라 하여 반대를 땅한 고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성종 6년 4월 신축에 다시 고원등제 가부의 논이 일어났으나, 이 역시 부결되어버렸다. 그 후 같은 왕 22년 경기의 땅에 이를 실시한 일이 있으나(실록 8월 임술조), 그 결과는 좋지 못하였다. 즉 이 해 경차관 정성근의 보고에 의하면, 고원등제에 의하여 거실호민(巨室豪民)의 전은 그 등제가 가볍게 되고, 무고빈민(無告貧民)의 전은 비록 재상전이라도 거의 면세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연분은 면등제로서 금과옥조를 삼게 되었다.
쪽수▶P133-6貢法에 依하면, 九等 年分의 施行單位는 一邑(○○)이었다. 그러나 勿論 一邑 內에도 豊凶의 差는 相當이 있는 것이니, 端宗 二年 八月 丁未에 이르러 一邑 單位를 疎漏타 하야, 고처 面單位(○○○)로 하였다. 即 一邑之內에서 四面(東·西·南·北)과 邑內를 區別하야 都合 五種의 年分을 定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後에는, 다시 此를 細分하야 庫員單位(○○○○)로 하자는 議가 이러났다. 「庫員」이란 「俗以田之所在謂庫」(成宗實錄 六年 四月 辛丑條), 即 山川으로 區劃된, 거의 同一한 自然的 條件을 가진 土地의 一集團을 가르키는 것이다. 世祖 三年 八月 甲午 從來의 面等第를 粗타 하고, 戶曹에 傳旨하야 「分山野定稅」(即 庫員等第)하도록 하였으나, 後에 이는 거의 古損實法에 類한 것이라 하야 反對를 當한 故로, 實施되지 몯하였다. 成宗 六年 四月 辛丑에 다시 庫員等第 可否의 論이 이러났으나, 此亦 否決되여버렸다. 그 後 同 二十二年▶P134-1 京畿의 地에 이를 實施한 일이 있으나(實錄 八月 壬戌條), 그 結果는 좋지 몯하였다. 即 이 해 敬差官 鄭誠謹의 報告에 依하면, 庫員等第에 依하야 巨室豪民의 田은 其等第가 가볍게 되고, 無告貧民의 田은 비록 災傷田이라도 거의 免稅되지 몯하였든 것이다. 結局 年分은 面等第로서 金科玉條를 삼게 되였다.
다음에 연분 결정의 실상을 일별하기로 하자. 법에는 수령이 친히 관내의 전을 순시하여 1면의 중용을 취하여 가지고 연분을 사정하기로 되어있으나, 사실 이렇게 기특한 수령은 거의 없고, 대개는 권농·이정(금일의 조합장 구장 등에 해당)에게 맡겨버리는데, 그들이 적당한 연분을 정해 오면, 수령은 폐론(蔽論)하고 1등을 올려버린다. 상사로부터는 늘 과경(過輕)하다고 질책을 받는 까닭이다. 수령의 보고가 감사에게 도달하면, 감사는 또 무조건으로 1등을 올려버리고, 다시 그것이 호조로 가면, 호조는 또 덮어놓고 1등을 올린다. 이리하여 가령 처음에 중중년이었던 것이면, 나중에는 상중년으로 낙착되어 버리는 것이 예였다. 성종 9년 11월 신사 호조에 전지하여 도정을 위임한 감사를 의심하여 1등을 올리는 등의 일이 없도록 명하였으나, 이것으로 인하여 연분 가중의 사실이 변하지 안 할 것은 물론이다.
쪽수▶P134-2다음에 年分 決定의 實狀을 一瞥하기로 하자. 法에는 守令이 親히 管內의 田을 巡視하야 一面의 中庸을 取하야 가지고 年分을 査定하기로 되여있으나, 事實 이렇게 奇特한 守令은 거의 없고, 大概는 勸農·里正(今日의 組合長 區長 等에 該當)에게 마껴버리는데, 그들이 適當한 年分을 定해 오면, 守令은 蔽論하고 一等을 올려버린다. 上司로부터는 늘 過輕하다고 叱責을 받는 까닭이다. 守令의 報告가 監司에게 到達하면, 監司는 또 無條件으로 一等을 올려버리고, 다시 그것이 戶曹로 가면, 戶曹는 또 덮어놓고 一等을 올린다. 이리하야 假令 처음에 中々年이었든 것이면, 나종에는 上中年으로 落着되여 버리는 것이 例였다. 成宗 九年 十一月 辛巳 戶曹에 傳旨하야 道政을 委任한 監司를 疑心하야 一等을 올리는 等의 일이 없도록 命하였으나, 이것으로 因하야 年分 加重의 事實이 變하지 안 할 것은 勿論이다.


































본문4-4: (4)감면지제


공법에 진황전·침몰전·재상전의 감면지제가 규정되어 있다. 이 감면지제는 신공법 발포 즉시, 신공법 시행 지방은 물론이요, 아직 옛 공법이 시행되는 지방에도 즉시 적용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8년 6월 경자조 참조).
쪽수▶P134-4貢法에 陳荒田·沈沒田·災傷田의 減免之制가 規定되여 있다. 이 減免之制는 新貢法 發布 即時, 新貢法 施行 地方은 勿論이오, 아직 舊貢法이 施行되는 地方에도 即時 適用하기로 하였다(世宗實錄 二十八年 六月 庚子條 參照).
먼저 재상전에 관한 것을 보면 재상 연복(連伏) 10결에 미쳐야 처음 감면하기로 되어 있다. 이것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10결의 토지를 10가(家)가 경작할 경우에는(사실 거의 대다수의 농민이 1결 이하의 영세지(地)를 경작하고 있었지만), 9가9결의 재상이 있더라도 1가1결의 임실(稔實) 때문에, 나머지 9가가 이에 끌려서 면세가 되지 못한다. 또 10결을 1인이 경작할 경우에는, 9결의 손상이 있더라도 1폐의 임실 때문에, 나머지 9결의 세도 면제가 되지 않는다. 이 폐를 완화하기 위하여 세종 28년 6월 경자에 면세단위를 10결에서 5결로 내렸었다. 그러나 5결이라고 하더라도 영세한 농경을 영위하는 농민들에게는 이 감세의 은전(恩典)이 협흡되지 못할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문종 경오(세종 32年)10월 정축에 다시 연복 5결의 법을 변하고, 재상과반전(○○○○○)으로써 감세단위를 삼게 하였다. 이는 경국대전 호전수세조에 그 세목이 실려 있는 것과 같이, “재상5분 이하는 불문하고, 6분에 이르면 6분의 면세, 7분에 이르면 7분의 면세로 하여써 9분에 미치는 것”이었다.
쪽수▶P134-5먼저 災傷田에 關한 것을 보면 災傷 連伏 十結에 미처야 처음 減免하기로 되여 있다. 이것은 如何한 結果를 招來할 것인가. 十結의 土地를 十家가 耕作할 境遇에는(事實 거의 大多數의 農民이 一結 以下의 零細地를 耕作하고 있었지마는), 九家九結의 災傷이 있더라도 一家一結의 稔實 때문에, 남어지 九家가 이에 끌려서 免稅가 되지 몯한다. 또 十結을 一人이 耕作할 境遇에는, 九結의 損傷이 있더라도 一弊의 稔實 때문에, 남어지 九結의 稅도 免除가 되지 안는다. 이 弊를 緩和하기 爲하야 世宗 二十八年 六月 庚子에 免稅單位를 十結에서 五結로 내리키▶P135-1었다. 그러나 五結이라고 하드라도 零細한 農耕을 營爲하는 農民들에게는 이 減免의 恩典이 浹洽되지 몯할 것은 事實이다. 그래서 文宗 庚午(世宗 三十二年)十月 丁丑에 다시 連伏 五結의 法을 變하고, 災傷過半田(○○○○○)으로써 減免單位를 삼게 하였다. 이는 經國大典 戶典收稅條에 그 細目이 실려 있는 것과 같이, 「災傷五分 以下는 不問하고, 六分에 이르면 六分의 免稅, 七分에 이르면 七分의 免稅로 하야써 九分에 미치는 것」이었다.
법은 점점 세미해져서 선미(善美)에 가까워지는 것 같으나 그 실제는 어떠하였을까. 세종 28년 6월 갑인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의 상서에 의하면, 사태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1읍의 수령은 4면에서 답지(沓至)하는 작자의 재상 진고(陳告)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모든 땅 보고문서의 기일의 절박과, 사명 영송 의 번(煩)에 이끌려, 물론 일일이 편열(遍閱)할 여가가 없다. 소현(小縣)의 수령이 상연(尙然)하거든 더구나 대읍(大邑)의 관이랴. 세부득이 이서를 파견하게 된다. 이서는 임정고하(任情高下)하여 한계를 잊어버린다. 소위 ‘친심’의 불가능함이 1읍의 수령에 있어 상연하니, 하물며 감사리요, 하물며 경차관이리요. 또 같은 해 7월 무진 성균주부 이보흠의 상서에 의하면 이러하다. 수령은 좌우간에 재상보고서라는 것을 작성하여 감사에게 제출한다. 감사는 다시 ‘심핵을 가하여’ 호조에 보고하고, 호조는 이를 상계한다. 계는 다시 의정부로 내려온다. 정부는 담론 수일 후에 처음으로 이조에 이관하여 경차관을 임명하게 된다. 경차관은 다시 치장 수일 후에 출발하게 된다. 경차관은 다시 수일을 경하여 내려온다. 때는 10월도 기망(旣望)이 지났으니 허다한 재상전답을 일일이 친심할 수가 있을 것인가. 기간 농민은 전에 수령이 검사해 간 것을 믿고, 우마료(牛馬料)나 하려고 죄다 고초를 예취해 버리고, 또 명년을 위하여 추경을 해버렸다. 경차관은 와서 질타하여, “已刈且耕 眞僞難辨”이라 하고, 죄다 실전(實田)으로 계산해버린다. 형편이 대강 이러하니, 후에 경국대전(호조수세전)
쪽수▶P135-2法은 漸々 細微하야저서 善美에 가까워지는 것 같으나 그 實際는 如何하였을까. 世宗 二十八年 六月 甲寅 集賢殿 直提學 李季甸의 上書에 依하면, 事態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一邑의 守令은 四面에서 沓至하는 作者의 災傷 陳告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諸他 報告文書의 期日의 切迫과, 使命 迎送의 煩에 이끌려, 勿論 一々이 遍閱할 餘暇가 없다. 小縣의 守令이 尙然하거든 況且 大邑의 官이랴. 勢不得已 吏胥를 派遣하게 된다. 吏胥는 任情高下하야 限界를 이저버린다. 所謂 「親審」의 不可能함이 一邑의 守令에 있어 尙然하니, 況監司리요, 又況 敬差官이리요. 또 同年 七月 戊辰 成均主簿 李甫欽의 上書에 依하면 이러하다. 守令은 左右間에 災傷報告書라는 것을 作成하야 監司에게 提出한다. 監司는 다시 「審覈을 加하야」 戶曹에 報하고, 戶曹는 此를 上啓한다. 啓는 다시 議政府로 나려온다. 政府는 談論 數日 後에 처음으로 吏曹에 移關하야 敬差官을 任命케 된다. 敬差官은 다시 治裝 數日 後에 出發케 된다. 敬差官은 다시 數日을 經하야 나려온다. 때는 十月도 旣望이 지났으니 許多한 災傷田畓을 一々이 親審할 수가 있을 것인가. 其間 農民은 前에 守令이 檢査해 간 것을 믿고, 牛馬料나 하려고 죄다 藁草를 刈取해 버리고, 또 明年을 爲하야 秋耕을 해버렸다. 敬差官은 와서 叱咜하야, 「已刈且耕 眞僞難辨」이라 하고, 죄다 實田으로 計算해버린다. 形便이 大綱 이러하니, 後에 經國大典(戶曹收稅條)

勸農 八月望前 告守令 觀察使 十月望前 啓聞

쪽수▶P135-3

勸農 八月望前 告守令 觀察使 十月望前 啓聞

이라는 규정이 실렸다 한들 무슨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인가. 사실 수령이 일일이 권농의 말을 청종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지도 않을 것이요, 또 설령 감사 경차관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일이 전을 순견하러 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는 술 먹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쪽수▶P135-4이라는 規定이 실렸다 한들 무슨 大端한 效果가 있을 것인가. 事實 守令이 一々이 勸農의 말을 聽從하야 監司에게 報告하지도 않을 것이요, 또 設令 監司 敬差官이 온▶P136-1다 할지라도, 그것은 一々이 田을 巡見하러 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는 술 먹기 爲해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다음 진황전에 관하여 말하겠다. 진황전은 공법에 의하면, 정전의 경우에는 기경을 장려하는 의미에서 기진을 불문하고 수세하기로 되어 있으며, 속전의 경우에는 시경(時耕)으로써 수세하기로 되어 있다. 이 까닭에 정전은 이유의 여하를 불문하고 수세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실은 속전이라도 거의 진황에 대한 면세를 받지 못하는 것이 예였다. 그것은 진황전의 면세가 재상전의 경우와 같이 그 수속이 극히 번쇄하였든 때문만이 아니라, 또 세종 30년에 종래 각 읍의 서원·색리들이 혹은 기(起)를 진(陳)이라 하여 중간의 횡령을 하던 바람에 감계하여, 새로 입법하여 금후 관찰사가 수령의 전최(1년에 2기니 수령의 기내 성적을 상 중 하 3등으로 구분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것)를 행할 때에는 그 경지(耕地)의 기진을 중시하여 가경이 많은 자를 상등으로 하고, 무가감자를 중등으로, 감자를 하등으로 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수령들은 이에 겁이 나서, 여러 해의 진황전도 이를 보고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간전의 다소에 의하여 수령의 전최를 3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미 태조 3년 4월 경신의 입법에서 이를 볼 수가 있으나, 그 후 본법의 실행은 쇠퇴해졌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토지가 척박하여 거의 격년으로 휴한을 요하는 토지라든지, 또는 사상 질병으로 인하여 부득이 휴한을 한 토지도 일률로 수세되는 것이 상례였다. 단종 원년 11월 신사에 이를 규정하여, 전라도 정전 내에 휴한의 빈도가 높은 것은 이를 속전에 편입하게 하고, 또 경상·충청도의 척박으로 인하여 진황된 전은 사실에 즉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면세시키기 위하여 관찰사·경차관 등을 재동원한 일이 있지만, 물론 실효가 정확히 또 길이 나는 것은 아니다.
쪽수▶P136-2다음 陳荒田에 關하야 一言한다. 陳荒田은 貢法에 依하면, 正田의 境遇에는 起耕을 獎勵하는 意味에서 起陳을 不問하고 收稅하기로 되여 있으며, 續田의 境遇에는 時耕으로써 收稅하기로 되여 있다. 이 까닭에 正田은 理由의 如何를 不問하고 收稅되는 것은 勿論이려니와, 事實은 續田이라도 거의 陳荒에 對한 免稅를 받지 몯하는 것이 例였다. 그것은 陳荒田의 免稅가 災傷田의 境遇와 같이 그 手續이 極히 煩鎻하였든 때문만이 아니라, 또 世宗 三十年에 從來 各 邑의 書員·色吏들이 혹은 起를 陳이라 하야 中間의 橫領을 하든 風에 鑑戒하야, 새로 立法하야 今後 觀察使가 守令의 殿最(一年에 二期니 守令의 期內 成績을 上中下 三等으로 區分하여 中央에 報告하는 것)를 行할 때에는 그 耕地의 起陳을 重視하야 加耕이 많은 자를 上等으로 하고, 無加減者를 中等으로, 減者를 下等으로 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守令들은 이에 怯이 나서, 累歲의 陳荒田도 이를 報告하는 일이 없었든 것이다(墾田의 多少에 依하야 守令의 殿最를 三等으로 區分하는 것은, 이미 太祖 三年 四月 庚申의 立法에서 이를 볼 수가 있으나, 其後 本法의 實行은 衰退하여젔든 模樣이다). 이 때문에 土地가 瘠薄하야 거의 隔年으로 休閑을 要하는 土地라든지, 또는 死喪 疾病으로 因하야 不得已 休閑을 한 土地도 一律로 收稅되는 것이 常例였다. 端宗 元年 十一月 辛巳에 此를 糾正하야, 全羅道 正田 內에 休閑의 頻度가 높은 것은 이를 續田에 編入케 하고, 또 慶尙·忠淸道의 瘠薄으로 因하야 陳荒된 田은 事實에 即하야 될 수 있는 대로 免稅시키기 爲하야 觀察使·敬差官 等을 再動員한 일이 있지마는, 勿論 實效가 正確히 또 길이 나는 것은 아니다.
진황전의 면세를 방해하는 다른 원인도 또 있다. 공법에서는, 정전은 기진을 불문하고 수세하기로 되어 있으나, 원래 정전의 전부가 소위 ‘매년 기경할 수 있는 땅’이 아니고, 때때로 휴한을 해야 할 만한 전을 억지로 정전에 편입한 것도 있으며, 또 빈곤·질병·유리 등의 부득이한 사정에 의하여 진황하게 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무조건으로 수세하는 것은, 가혹한 일일 뿐더러 또 곤란한 일이었다. 인하여 후에 법을 변하여, 비록(○○) 정전이라도(○○○○○) 1전(○○) 전부가(○○○) 진황한(○○○) 경우에는(○○○○) 면세(○○)하기로 하였다. 이 변법의 연대는 미상하나, 세조실록 4年 정월 병자조에 이에 관한 사실이 보여 있는 것으로 추찰하면, 필연 단종 원년 내지 세조 3년 간의 일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이 조항은 또 경국대전에도 습록(拾錄)되어 있다(호조수세조). 그러나 이 전진전 면세법의 발동을 완전히 조해(阻害)하는 것에 태조 원전 이래 다음의 글이 있었다.
쪽수▶P136-3陳荒田의 免稅를 妨碍하는 다른 原因도 또 있다. 貢法에서는, 正田은 起陳을 不問하고 收稅하기로 되여 있으나, 元來 正田의 全部가 所謂 「每年 起耕할 수 있는 땅」이 아니고, 때々로 休閑을 해야 할 만한 田을 억지로 正田에 編入한 것도 있으며, 또 貧困·疾病·流離 等의 不得已한 事情에 依하야 陳荒하게 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不拘하고, 여기서 無條件으로 收稅하는 것은, 苛酷한 일▶P137-1일 뿐더러 또 困難한 일이었다. 因하야 後에 法을 變하야, 비록(○○) 正田이라도(○○○○○) 一田(○○) 全部가(○○○) 陳荒한(○○○) 境遇에는(○○○○) 免稅(○○)하기로 하였다. 이 變法의 年代는 未詳하나, 世祖實錄 四年 正月 丙子條에 此에 關한 事實이 보여 있는 것으로 推察하면, 必然 端宗 元年 乃至 世祖 三年 間의 일에 屬할 것이다. 그리고 이 條項은 또 經國大典에도 拾錄되여 있다(戶曹收稅條). 그러나 이 全陳田 免稅法의 發動을 完全이 阻害하는 것에 太祖 元典 以來 다음의 一文이 있었다.

疾病不能耕種者 令隣里及族人相助耕種 勿令失時(태조 3년 4월 경신의 입법).

쪽수▶P137-2

疾病不能耕種者 令隣里及族人相助耕種 勿令失時(太祖 三年 四月 庚申의 立法).

즉 질병으로 인하여 진황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이웃 동네 족친으로 하여금 대경(代耕)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 조항의 존재에 의하여, 사실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진황한 전에 대하여도, 수령은 작자의 진황 신고를 수리할 수가 없었다. 혹 이를 수리하여 감사에까지 보고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감사는 언제든지 이 조항을 방패로 하고, 보고를 묵살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정전의 진황 면세 같은 것은 거의 실행을 동반할 수 없는 일편의 공문(空文)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쪽수▶P137-3即 疾病으로 因하야 陳荒할 憂慮가 있는 境遇에는, 隣里 族親으로 하여금 代耕케 하라는 것이다. 이 條項의 存在에 依하야, 事實 不得已한 事情 때문에 陳荒한 田에 對하야도, 守令은 作者의 陳荒 申告를 受理할 수가 없었다. 或 此를 受理하야 監司에까지 報告하는 者가 있다 하드라도 監司는 언제든지 이 條項을 防牌로 하고, 報告를 默殺하는 것이었다. 이런 事情으로 말미암아, 正田의 陳荒 免稅 같은 것은 거의 實行을 同伴할 수 없는 一片의 空文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당시 ‘무전지민(無田之民)이 거의 10분의 3’이나 되는 경지 부족 시절에 어찌하여 이 같이 많이 진황전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세조 4년 정월 병자 평산도 호부사 정차공의 상서는 이를 설명하여 준다.
쪽수▶P137-4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當時 「無田之民이 거의 十分之三」이나 되는 耕地 不足 時節에 어찌하야 이 같이 많이 陳荒田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世祖 四年 正月 丙子 平山都 護府使 鄭次恭의 上書는 이를 說明하여 준다.

臣竊以爲 我國壤地褊小 無田之民 幾乎十分之三 有田者 有故而不能耕種 則隣里族親 並耕而分 乃民間常事也 若果膏腴之地 豈有陳荒之理哉 草木暢茂 沙石磽确 不堪耕種 而亦令收稅 下民之怨 蓋深於此 云々

쪽수▶P137-5

臣竊以爲 我國壤地褊小 無田之民 幾乎十分之三 有田者 有故而不能耕種 則隣里族親 並耕而分 乃民間常事也 若果膏腴之地 豈有陳荒之理哉 草木暢茂 沙石磽确 不堪耕種 而亦令收稅 下民之怨 蓋深於此 云々

즉 무전의 백성으로서도 오히려 이웃의 진황지를 경작하여, 그 수확을 평분(平分)하여써 부모 처자를 봉솔하고, 써 조세를 부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당시의 농업생산력 아래서는 그 토지의 생산력이 기경의 한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척박한 전을 의미하는 것에 불외(不外)하다. 이런 전을 덮어놓고 몰밀어서 소위 정전 중에 편입하였다는 것은 한 개 폭행에 가까운 일이었다.
쪽수▶P137-6即 無田의 民으로서도 오히려 隣人의 陳荒地를 耕作하야, 그 收穫을 平分하야써 父母 妻子를 奉率하고, 써 租稅를 負擔하랴고 하지 안는 것이다. 이것은 結局 當時의 農業生產力 아래서는 그 土地의 生產力이 起耕의 限界에까지 到達치 몯하는 瘠薄한 田을 意味하는 것에 不外하다. 이런 田을 덮어놓고 몰밀어서 所謂 正田 中에 編入하였다는 것은 한 箇 暴行에 가까운 일이였다.

因病未耕全陳田 啓定租稅(大典戶典收稅條)
病戶田 令族親及隣里耕耘 勿使陳荒(同務農條)

쪽수▶P137-7

因病未耕全陳田 啓定租稅(大典戶典收稅條)
病戶田 令族親及隣里耕耘 勿使陳荒(同務農條)

위의 2조는 후에 경국대전 중에 양자 상대하여 등재되어 있는데, 때때로 위정자들은 이 2조의 운용을 어떻게 가감하였을까. 그것은 아마 이를 적용하는 지위에 있는 상하 일련의 관리의 질(質)에도 의존하였을 것이나, 보다 많이 이를 적용받는 지위에 있는 토지 경작자의 힘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쪽수▶P138-1右 二條는 後에 經國大典 中에 兩者 相對하야 登載되여 있는데, 때々로 爲政者들은 此二條의 運用을 如何이 加減하였을까. 그것은 아마 此를 適用하는 地位에 있는 上下 一聯의 官吏의 質에도 依存하였을 것이나, 보담 많이 此를 適用받는 地位에 있는 土地 耕作者의 힘에 依存하였을 것이다.




























본문5: 5.공법 개관


이제까지의 서술이 그 대상의 성질상 다소 착잡함을 미면한 것 같으니, 다시 그 이해를 편하게 하기 위하여 공법을 그 주류에 따라 개괄적으로 논하여 보겠다.
쪽수▶P138-2이제까지의 叙述이 그 對象의 性質上 多少 錯雜함을 未免한 것 같으니, 다시 그 理解를 便케 하기 爲하여 貢法을 그 主流에 沿하여 槪括的으로 論하여 보겠다.
먼저 그 연혁을 개관하자. 세종 12년, 종래의 손실수세법이 그 폐가 다단함에 감계하여, 1결당 10두의 정액세법을 펴고자 하여, 그 편부(便否)를 묘의 및 8도의 관민에게 물었다. 가부의 수는 거의 백중하였으나, 왕은 이로 인하여 공법 실현의 가능성 여하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시사를 받게 되었다. 후에 다시 연구를 거듭하여 그 19년에는 전국 토지를 3등에 나누어 그들에게 각각 종래의 3등전의 구분을 배당하여써 1결 최고 20두 최저 12두의 정액세를 부과하기로 입법하였다. 이어 익 20년부터 경상·전라의 일부에 본법을 실시하였다. 다시 22년에는 본법에 수정을 가하여 종래의 3등도의 내부에 다시 3등관의 구분을 세워 역시 1결 최고 20두부터 최저 12두에 이르는 정액세를 부과하기로 하고 같은 해부터 경상·전라의 전부, 다시 23년부터 충청도 전부를 이 법으로 포섭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는 26년부터 이 법으로 율하게 되니, 이상은 말하자면 공법 시행의 제1차 단계였다. 그러나 이 법의 내부에는 기다(幾多)의 기술적 결함을 포장하고 있었으니 즉 제1로 전의 3등급 구분, 이에 딸는 3등척 양전법, 제2로 전품에 있어서의 3등도 3등관주의, 제3으로 풍흉의 무시 등. 이에 25년 10월부터 익 26년 11월까지에 옛 공법에 다시 개혁을 가하여 전분6등·동과 수조·연분9등 및 감면 등의 법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6등전 각 1결의 실적, 6등전 양전척의 길이도 결정되었다. 입법과 함께 하3도의 6현은 이 법을 적용되고, 이어 전라도는 세종 32년부터 경기·충청·경상의 각 도는 세조8년 내지 11년경까지에 다 옛 공법에서 신공법으로 넘어갔다. 황해·강원·평안·영안의 각 도는 각각 성종 2년·6년·18년·20년으로써 종래의 손실법에서 일약 신공법으로 들어갔다. 세종 26년에 정착한 공법은 그 후 세목에 있어서는 다소의 수정 변경을 보았으나, 그 원칙(○○)에 있어서는 추호도 변치 않고 이조의 말기에 이른 것이다.
쪽수▶P138-3먼저 其沿革을 槪觀하자. 世宗 十二年, 從來의 損實收稅法이 其弊多端함에 鑑戒하여, 一結當 十斗의 定額稅法을 布하고자 하여, 其便否를 廟議 及 八道의 官民에게 무렀다. 可否의 數는 거의 伯仲하였으나, 王은 이로 因하여 貢法 實現의 可能性 如何에 對하여 어느 程度의 示唆를 받게 되였다. 後에 다시 硏究를 거듭하여 其十九年에는 全國 土地를 三等에 난호아 그들에게 各各 從來의 三等田의 區分을 配當하여 써 一結 最高 二十斗 最低 十二斗의 定額稅를 課하기로 立法하였다. 이어 翌 二十年부터 慶尙·全羅의 一部에 本法을 實施하였다. 다시 二十二年에는 本法에 修正을 加하여 從來의 三等道의 內部에 다시 三等官의 區分을 設하여 亦是 一結 最高 二十斗부터 最低 十二斗에 이르는 定額稅를 課하기로 하고 同年부터 慶尙·全羅의 全部, 다시 二十三年부터 忠淸道 全部를 此法으로 包攝케 되였다. 그리고 京畿는 二十六年부터 此法으로 律케 되니, 以上은 말하자면 貢法 施行의 第一次 段階이었다. 그러나 此法의 內部에는 幾多의 技術的 缺陷을 包藏하고 있었으니 即 第一로 田의 三等級 區分, 이에 딸는 三等尺 量田法, 第二로 田品에 있어서의 三等道 三等官主義, 第三으로 豊凶의 無視 等. 이에 二十五年 十月부터 翌 二十六年 十一月까지에 舊貢法에 다시 改革을 加하여 田分六等·同科收租·年分九等 及 減免 等의 法을 確立케 되였다. 이에 따라 六等田 各 一結의 實積, 六等田 量田尺의 기리도 決定되었다. 立法과 함께 下三道의 六縣▶P139-1은 此法을 適用되고, 이어 全羅道는 世宗 三十二年부터 京畿·忠淸·慶尙의 各 道는 世祖八年 乃至 十一年頃까지에 다 舊貢法에서 新貢法으로 넘어갔다. 黃海·江原·平安·永安의 各 道는 各各 成宗 二年·六年·十八年·二十年으로써 從來의 損實法에서 一躍 新貢法으로 드러갔다. 世宗 二十六年에 定着한 貢法은 其後 細目에 있어서는 多少의 修正 變更을 보았으나, 其原則(○○)에 있어서는 秋毫도 變치 않고 李朝의 末期에 及한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공법을 옛 손실법과 비교하면서, 그 특징으로 하는 바를 개괄적으로 논할까 한다. 손실법의 3등전세의 무표준성(대강 어림은 있지만 극히 조잡한 것이다)에서 공법의 6등전의 정밀성 및 생산력 준거성 등에 이행한 것은, 확실히 합리적인 개혁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제 신구 전결의 면적 및 세액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검토하여 보자. 공법에 있어서는 전분6등이요, 그 분등의 준거(○○)는 그들의 생산력(57묘지 1등전 상상년 미(米) 40석, 6등전 미 10석 등)에 있는 것은 물론이나, () 실천상의(○○○○) 지침(○○)은 전후를 통하여 세종 25년 11월 병진 하3도 전분등제때의 절목이었다(제3절, 1, ③, 갑(가) 참조). 단 당시는 전분5등이었지만 그 후 전분6등의 제6등전은 전의 제5등전의 분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전후에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 전품등제의 실천상의 지침은 훨씬 나중 효종 4년 소정(所定)의 ‘전제상정소 준수 조서’ 속에까지도 거의 그대로 옮겨졌다. 옛 3등전에서 새 6등전으로의 재편성의 관계는 세종 25년의 전품 절목과 같아, 옛 상중전은 전부 새 12등전·옛 하등전은 대부분 새 123등전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새 456등전으로 된 것은 할 수 없는 악전들뿐이니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이 경향은 하3도에 있어 현저하니, 하3도에는 4등 이하 전이 희한하다(이에 대하여는 다산의 목민심서도 언급하였지만). 그리고 새 4등 이하로 된 것은 차라리 옛 ‘산전’(다음의 산전에 관한 주석을 참조)으로부터 화성(化成)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쪽수▶P139-2다음에 吾人은 貢法을 舊損實法과 比較하면서, 其特徵으로 하는 바를 概括的으로 論할까 한다. 損實法의 三等田稅의 無標準性(大綱 어림은 있지마는 極히 粗雜한 것이다)에서 貢法의 六等田의 精密性 及 生產力 準據性 等에 移行한 것은, 確實이 合理的인 改革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제 新舊 田結의 面積 及 稅額의 關係를 좀 더 仔細히 檢討하여 보자. 貢法에 있어서는 田分六等이요, 그 分等의 準據(○○)는 그들의 生產力(五十七畝地 一等田 上々年 米 四十石, 六等田 米 十石 等)에 있는 것은 勿論이나, () 實踐上의(○○○○) 指針(○○)은 前後를 通하여 世宗 二十五年 十一月 丙辰 下三道 田分等第때의 節目이었다(第三節, 一, ③, 甲(가) 參照). 但 當時는 田分五等이었지마는 其後 田分六等의 第六等田은 前의 第五等田의 分化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前後에 大差가 없다. 그리고 이 田品等第의 實踐上의 指針은 훨신 나중 孝宗 四年 所定의 「田制詳定所 遵守 條畫」 속에까지도 거의 고대로 옴겨젔다. 舊三等田에서 新六等田으로의 再編成의 關係는 世宗 二十五年의 田品 節目과 같어, 舊上中田은 全部 新一二等田·舊下等田은 大部分 新一二三等田으로 化하였다. 그리고 新四五六等田으로 된 것은 할 수 없는 惡田들뿐이니 그리 많지 않다. 特히 此傾向은 下三道에 있어 顯著하니, 下三道에는 四等 以下 田이 稀罕하다(이에 對하여는 茶山의 牧民心書도 言及하였지마는). 그리고 新四等 以下로 된 것은 차라리 舊 「山田」(다음의 山田에 關한 註를 參照)으로부터 化成한 것이 大部分일 것이다.
이상 소술(所述)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신구 전 1결의 실적의 증감 여하를 고려하여 보자. 신구 전 1결의 지적은 아래의 표와 같다.
쪽수▶P139-3以上 所述의 關係를 念頭에 두고, 新舊 田 一結의 實積의 增減 如何를 考慮하여 보자. 新舊 田 一結의 地積은 左表와 같다.
구 3등전1결의 실적 신 6등전1결의 실적
상등전 25·4묘
중등전 39·9묘
하등전 57·6묘
산전(각주 참조)
산하전 115·2묘
산요전 172·8묘
산상전 1230·4묘
1등전 38·0묘
2등전 44·7묘
3등전 54·2묘
4등전 69·0묘
5등전 95·0묘
6등전 152·0묘
.
쪽수▶P140-1
舊 三等田一結의 實積 新 六等田一結의 實積
上等田 二五·四畝
中等田 三九·九畝
下等田 五七·六畝
山田(註 參照)
山下田 一一五·二畝
山腰田 一七二·八畝
山上田 一二三〇·四畝
一等田 三八·〇畝
二等田 四四·七畝
三等田 五四·二畝
四等田 六九·〇畝
五等田 九五·〇畝
六等田 一五二·〇畝
.
(주석) 옛 3등전의 실적이 각각 표 중 소게(所揭)와 같은 것은 이미 쓴 바이다(제1절 참조). ‘산전’에 대하여는 다소 설명을 요할까 한다. 세계실록 27년 7월 을유조에

議政府據戶曹呈申, 今田制改詳定事 及可革條件, 磨勘後錄 (中畧) 一.前此田品 限以三等故 山上(○○)·山腰(○○)·山下之田(○○○○) 比常田倍數計之(○○○○○○○) 今三等之下 又加三等假令以山上田爲六等則 以前十結五十五卜之地 今爲一結 其地甚濶 旦下三道 雖山上田 或不用倍數 其法不一 上項山田 今除倍數之法 從其田結卜元數 隨其


라고 보인다. 유시관지(由是觀之)하건대, 옛 법에는 산전을 특히 불생산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산하·산요·산상전 각 1결의 지적은, 평지 하등전1결의 지적57·6묘를 체가하여, 각각 115·2묘, 172·8묘, 230·4묘 등으로 하였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차설(且說) 의정부 상언의 의미는, “금후도 만일 옛 법을 본받아 산전을 양(量)한다고 하면, 산하·산요·산상전 각 1결은 평지 6등전1결 152묘를 체가하여, 각각 304묘, 456묘, 608묘 등이 되어, 결국 새 산상전은 608묘니, 이는 옛 평지 하등전10결55점의 지적과 같은 것이라.(57.6묘×10.55=607.68묘) 그 땅이 심활하니, 신법에 있어서는 이 산전 체가법을 변하고, 평지전에 준하여 분등 측량하자”는 것이다. 상언은 청종되니, 신법에서는 산전의 특별취급이 없어졌다.
쪽수▶P140-2(註) 舊三等田의 實積이 各々 表 中 所揭와 같은 것은 旣述한 바이다(第一節 參照). 「山田」에 對하여는 多少 說明을 要할까 한다. 世系實錄 二十七年 七月 乙酉條에

議政府據戶曹呈申, 今田制改詳定事 及可革條件, 磨勘後錄 (中畧) 一.前此田品 限以三等故 山上(○○)·山腰(○○)·山下之田(○○○○) 比常田倍數計之(○○○○○○○) 今三等之下 又加三等假令以山上田爲六等則 以前十結五十五卜之地 今爲一結 其地甚濶 旦下三道 雖山上田 或不用倍數 其法不一 上項山田 今除倍數之法 從其田結卜元數 隨其


라고 보인다. 由是觀之컨댄, 舊法에는 山田을 特히 不生產的인 것으로 생각하고, 山下·山腰·山上田 各 一結의 地積은, 平地 下等田一結의 地積五七·六畝를 遞加하야, 各々 一一五·二畝, 一七二·八畝, 二三〇·四畝 等으로 하였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且說 議政府 上言의 意味는, 「今後도 萬一 舊法을 본받아 山田을 量한다고 하면, 山下·山腰·山上田 各 一結은 平地 六等田一結 一五二畝를 遞加하야, 各々 三〇四畝, 四五六畝, 六〇八畝 等이 되여, 結局 新山上田은 六〇八畝니, 此는 舊平地 下等田十結五十五卜의 地積과 같은 것이라.(57.6畝×10.55=607.68畝) 其地가 甚濶하니, 新法에 있어서는 此山田 遞加法을 變하고, 平地田에 准하여 分等 測量하자」는 것이다. 上言은 聽從되니, 新法에서는 山田의 特別取扱이 없어졌다.
구상등전(○○○○)은 25·4묘에서 대부분은 신(新)1등전38·0묘 대부분은 다시 신2등전44·7묘로 화성하여, 크게(○○) 확대되었다(○○○○○). 구중등전(○○○○)은 39·9묘에서 신12등의 38·〇묘, 44·7묘로 화성하여, 별로(○○) 증감이(○○○) 없다(○○). 그러나 상중2종전은 본래 극소수니, 괘치(掛齒)할 것이 못된다. 다만 구하등전(○○○○)1결57·6묘가 대부분 변하여 신123등의 38·0묘, 44·7묘, 54·2묘가 되었다면 이는 대단한(○○○) 면적감축(○○○○)이다. 물론 구하전에서 신45등 이하로 낙하하여 전적을 넓힌 것이 있겠으나, 이것은 또한 소수다. 다시 산전(○○)이 본래의 115·2묘, 172·8묘, 230·4묘 등에서 변하여 신4등 이하의 69·0묘, 95·0묘, 152·0묘 等이 되었다면, 이 역시 전반적인(○○○○) 감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 모든 화성 중에서 가장 큰 중량을 갖는 것은, 물론 구하등전이 신123등전으로 된 화성이다. 이상의 모든 사실에 의하여 우리는 무엇을 결론하는가. 왈,
쪽수▶P140-3舊上等田(○○○○)은 二五·四畝에서 大部分은 新一等田三八·〇畝 小部分은 다시 新二等田四四·七畝로 化成하여, 크게(○○) 擴大되었다(○○○○○). 舊中等田(○○○○)은 三九·九畝에서 新一二等의 三八·〇畝, 四四·七畝로 化成하여, 別로(○○) 增減이(○○○) 없다(○○). 그러나 上中二種田은 本來 極少數니, 掛齒할 것이 몯된다. 다만 舊下等田(○○○○)一結五七·六畝가 大部分 化하여 新一二三等▶P141-1의 三八·〇畝, 四四·七畝, 五四·二畝가 되었다면 此는 大端한(○○○) 面積減縮(○○○○)이다. 勿論 舊下田에서 新四五等 以下로 落下하여 田積을 넓힌 것이 있겠으나, 이것은 또한 少數다. 다시 山田(○○)이 本來의 一一五·二畝, 一七二·八畝, 二三〇·四畝 等에서 化하여 新四等 以下의 六九·〇畝, 九五·〇畝, 一五二·〇畝 等이 되였다면, 此亦是 全般的인(○○○○) 減縮을(○○○) 意味하는 것이다. 以上 諸化成 中에서 가장 큰 重量을 갖는 것은, 勿論 舊下等田이 新一二三等田으로 된 化成이다. 以上의 諸事實에 依하여 吾人은 무엇을 結論하는가. 曰,

신1결의(○○○○) 지적은(○○○) 대체로(○○○) 구1결의(○○○○) 지적보다(○○○○) 크게(○○) 축소되었다(○○○○○)”고.

쪽수▶P141-2

新一結의(○○○○) 地積은(○○○) 大體로(○○○) 舊一結의(○○○○) 地積보담(○○○○) 크게(○○) 縮少되였다(○○○○○)」고.

단 구1결의 지세(地稅)는 최고 30두요 신1결의 지세는 최고 20두로서, 각각 연차에 의하여 견감이 있다. 그러면 1결 지적의 감소와 또 1결 최고 수세액의 저하는 종합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세종 26년 8월(실록 경오조 참조), 충청도 청안·비인 2현에 신공법에 의한 전품이 등제되고(물론 이 해 8월에는 신공법은 아직 일반적으로 반포는 되지 않았으나, 그 이전에 내부적으로는 벌써 법도 결정되어 있었고, 또 이 법에 의하여 2현은 전품도 거의 등제되어 있었다), 이 등제에 의하여 장차 행할 세액이 조정되었는데, 이 두 현의 각 연분의 조정세액과 과거 수개년 간의 실수세액과를 비교 표시하면 다음과 같았다.
쪽수▶P141-3但 舊一結의 地稅는 最高 三十斗요 新一結의 地稅는 最高 二十斗로서, 各々 年次에 依하여 蠲減이 있다. 그러면 一結 地積의 減少와 또 一結 最高 收稅額의 低下는 綜合的으로 어떤 結果를 낳을 것인가. 世宗 二十六年 八月(實錄 庚午條 參照), 忠淸道 淸安·庇仁 二縣에 新貢法에 依한 田品이 等第되고(勿論 此年 八月에는 新貢法은 아직 一般的으로 頒布는 되지 않었으나, 其以前에 內部的으로는 벌써 法도 決定되어 있었고, 또 此法에 依하여 二縣은 田品도 거의 等第되어 있었다), 이 等第에 依하여 將次 行할 稅額이 調定되었는데, 이 兩縣의 各 年分의 調定稅額과 過去 數箇年 間의 實收稅額과를 比較 表示하면 다음과 같었다.
(가) 청안현
쪽수▶P141-4(가) 淸安縣
9년분 조정액 과거 5개년 실수세액
연분 조정액 연차 실수액 비고
상상년 3,814석 세종 21년 1,003석 21년, 22년은 손실법 시행년 22년, 24년, 25년은 구(舊)공법 시행년인데, 그 중 25년은 대흉작으로 인하여 특히 견감을 받은 해다.
상중년 3,457석 세종 22년 1,515석
상하년 3,073석 세종 23년 2,560석
중상년 2,689석 세종 24년 2,358석
중중년 2,304석 세종 25년 1,194석
중하년 1,920석
하상년 1,536석
하중년 1,152석
하하년 768석
쪽수▶P141-5
九年分 調定額 過去 五箇年 實收稅額
年分 調定額 年次 實收額 備考
上々年 三,八一四石 世宗 二十一年 一,〇〇三石 二十一年, 二十二年은 損實法 施行年 二十二年, 二十四年, 二十五年은 舊貢法 施行年인데, 其中 二十五年은 大凶作으로 因하여 特히 蠲減을 받은 해다.
上中年 三,四五七石 同 二十二年 一,五一五石
上下年 三,〇七三石 同 二十三年 二,五六〇石
中上年 二,六八九石 同 二十四年 二,三五八石
中々年 二,三〇四石 同 二十五年 一,一九四石
中下年 一,九二〇石
下上年 一,五三六石
下中年 一,一五二石
下々年 七六八石
(나) 비인현
쪽수▶P142-1(나) 庇仁縣
9년분 조정액 과거 5개년 실수세액
연분 조정액 연차 실수액 비고
상상년 2,225석 세종 20년 790석 20년, 21년, 22년은 손실법 시행년, 23년, 24년은 구(舊)공법 시행년.
상중년 2,002석 세종 21년 1,200석
상하년 1,780석 세종 22년 292석
중상년 1,557석 세종 23년 1,336석
중중년 1,335석 세종 24년 1,359석
중하년 1,112석
하상년 890석
하중년 667석
하하년 445석
쪽수▶P142-2
九年分 調定額 過去 五箇年 實收稅額
年分 調定額 年次 實收額 備考
上々年 二,二二五石 世宗 二十年 七九〇石 二十年, 二十一年, 二十二年은 損實法 施行年, 二十三年, 二十四年은 舊貢法 施行年.
上中年 二,〇〇二石 同 二十一年 一,二〇〇石
上下年 一,七八〇石 同 二十二年 二九二石
中上年 一,五五七石 同 二十三年 一,三三六石
中々年 一,三三五石 同 二十四年 一,三五九石
中下年 一,一一二石
下上年 八九〇石
下中年 六六七石
下々年 四四五石
위의 두 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취할 수가 있다. 즉 청안현에서는 손실법에서 구공법으로 들어오면서 수세액은 대팽창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 신공법의 조정액에 비하면, 그 중상년·중중년·하중년 등의 세액밖에 안 된다. 더욱이 손실법 때의 세액으로 말하면 신공법의 하상년·하중년 이하의 세액에 불과하다. 비인현에 있어서도, 손실법에서 공법으로 옮아가면서 세액은 점차 증가하여 손실법 때의 세액은 신공법의 하상년·중하년·하하년 이하의 세액, 구공법 때의 세액은 신공법 중중년의 세액에 해당한다. 무릇 신공법에서 상상으로부터 하하에 이르는 9등연분을 작정한 이상 이 정부의 수렴 정신의 상식으로 보더라도 대개 연분을 중중 이하로 놓기는 드물 것이요, 또 사실 연분 사정이 하사에서 상사의 손으로 옮아갈 동안에 점점 혹이 붙어가는 것이 상례인즉 연분은 여간한 흉년이 아니고는 대개 중상 내지 상중에 낙착된 모양이다. 결국 신공법은 손실법에 비하면 물론이요 구공법에 비하여도 상당한 증세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26년 8월 경오, 왕이 앞서 든 두 현의 신(新)세 조정액과 과거 5개년 간 실수세액과의 대비를 보고 술한 의견에도,
쪽수▶P142-3右 二表에서 吾人은 다음과 같은 事實을 看取할 수가 있다. 即 淸安縣에서는 損實法에서 舊貢法으로 드러오면서 收稅額은 大膨脹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 新貢法의 調定額에 比하면, 그 中上年·中々年·下中年 等의 稅額밖에 안 된다. 더욱이 損實法 時의 稅額으로 말하면 新貢法의 下上年·下中年 以下의 稅額에 不過하다. 庇仁縣에 있어서도, 損實法에서 貢法으로 옮아가면서 稅額은 漸次 增加하여 損實法 時의 稅額은 新貢法의 下上年·中下年·下々年 以下의 稅額, 舊貢法 時의 稅額은 新貢法 中中年의 稅額에 該當한다. 무릇 新貢法에서 上々으로부터 下々에 이르는 九等年分을 作定한 以上 이 政府의 收斂 精神의 常識으로 보더라도 대개 年分을 中々 以下로 놓기는 드물 것이오, 또 事實 年分 査定이 下司에서 上司의 손으로 옮아갈 동안에 漸漸 혹이 붙어가는 것이 常例인즉 年分은 如干한 凶年이 아니고는 大概 中上 乃至 上中에 落着된 모양이다. 結局 新貢法은 損實法에 比하면 勿論이요 舊貢法에 比하여도 相當한 增稅를 意味하게 되는 것이다. 二十六年 八月 庚午, 王이 前記 二縣 新稅 調定額과 過去 五箇年 間 實收稅額과의 對比를 보고 述한 意見에도,

予以謂 高麗之法 或三四分取一 或五六分取一 其剝民甚矣 然近年(○○○) 官吏損實太疎(○○○○○○) 至於數十而稅一(○○○○○○○) 習於人心(○○○○) 今此新法(○○○○) 雖以先王他一之法爲定(○○○○○○○○○○)(사실은 二十而稅一), 愚民豈得盡知之(○○○○○○○) 今觀二州所出之數 疑於太重 將與大臣更議之 云云

쪽수▶P142-4

予以謂 高麗之法 或三四分取一 或五六分取一 其剝民甚矣 然近年(○○○) 官吏損實太疎(○○○○○○) 至於數十而稅一(○○○○○○○) 習於人心(○○○○) 今此新法(○○○○) 雖以先王他一之法爲定(○○○○○○○○○○)(事實은 二十而稅一), 愚民豈得盡知之(○○○○○○○) 今觀二州所出之數 疑於太重 將與大臣更議之 云云

이라고 보여 있으니, 공법이란(○○○○) 원래(○○) 증세하기(○○○○) 위한(○○) 입법(○○)이었다(단 손실 때에 국고 수입이 적었던 것은 농민의 부담이 근소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손실법과 동재(同在)하는 제(諸)중간 착취의 무대였던 것은 물론이다). 왕에게 이 두 현의 세액을 다소 감축하려는 의사가 있었고, 또 어느 정도까지 그 의사는 실현되었겠지만 좌우간에 신법이 거액의 증세를 초래하는 것은 다루지 못할 사실이다.
쪽수▶P143-1이라고 보여 있으니, 貢法이란(○○○○) 원래(○○) 增稅하기(○○○○) 爲한(○○) 立法(○○)이었다(但 損實 때에 國庫 收入이 적었던 것은 農民의 負擔이 僅少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損實法과 同在하는 諸中 間 搾取의 舞臺이었던 것은 勿論이다). 王에게 此二縣의 稅額을 多少 減縮하려는 意思가 있었고, 또 어느 程度까지 그 意思는 實現되었겠지마는 左右間에 新法이 巨額의 增稅를 招來하는 것은 다루지 몯할 事實이다.
대강 이상 소술(所述)에 의하여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얻는다. 즉 공법실시에(○○○○○) 의하여(○○○) 1결의(○○○) 실적은(○○○) 구에(○○) 비하여(○○○) 자못(○○) 축소하고(○○○○), 이에(○○) 좇아(○○) 1결의(○○○) 최고(○○) 수세액은(○○○○) 조금(○○) 저하하였으나(○○○○○○) 결국(○○) 1현의(○○○) 총세액은(○○○○) 거액의(○○○) 증가를(○○○) 보이고(○○○), 따라서(○○○) () 전후(○○) 동일지적의(○○○○○) 수세실액은(○○○○○) 구에(○○) 비하여(○○○) 크게(○○) 증가하였다(○○○○○).
쪽수▶P143-2大綱 以上 所述에 依하여 吾人은 다음의 結論을 얻는다. 即 貢法實施에(○○○○○) 依하여(○○○) 一結의(○○○) 實積은(○○○) 舊에(○○) 比하여(○○○) 자못(○○) 縮小하고(○○○○), 이에(○○) 쫓아(○○) 一結의(○○○) 最高(○○) 收稅額은(○○○○) 조금(○○) 低下하였으나(○○○○○○) 結局(○○) 一縣의(○○○) 總稅額은(○○○○) 巨額의(○○○) 增加를(○○○) 보이고(○○○), 따라서(○○○) () 前後(○○) 同一地積의(○○○○○) 收稅實額은(○○○○○) 舊에(○○) 比하여(○○○) 크게(○○) 增加하였다(○○○○○).
하여간에 세종 조(朝)의 공법 창정은 양전의 발전과 모든 위전의 정리와 함께 국가기구의 강화상으로 보아 합리적·중앙집권적인 개혁을 수행한 것으로 우리는 여기서 이 봉건 정부의 운세 상승의 과정을 간취할 수가 있다. 또 다른 방면으로 농민 측에서 이것을 볼지라도, 합법적으로는 상당한 증세가 되었지만, 그 반면에 비합법적인 제부담을 기분 경멸한 데 있어서 진보적인 개혁이라고 아니할 수는 없다. 물론 미구에 신법 자체 내에서 별개의 타락이 싹트는 것이지만.
쪽수▶P143-3何如間에 世宗朝의 貢法 創定은 量田의 發展과 諸位田의 整理와 함께 國家機構의 强化上으로 보아 合理的·中央集權的인 改革을 遂行한 것으로 吾人은 여기서 이 封建 政府의 運勢 上昇의 過程을 看取할 수가 있다. 또 他方 農民 側에서 이것을 볼지라도, 合法的으로는 相當한 增稅가 되었지마는, 其反面에 非合法的인 諸負擔을 幾分輕滅한 데 있어서 進步的인 改革이라고 아니할 수는 없다. 勿論 未久에 新法 自體 內에서 別個의 墮落이 싹트는 것이지마는.





































본문6: 6.공법 여론


앞 절까지에서 우리 조잡하나마 본론 주제의 목적을 다하였다고 생각하나, 더욱이 공법의 초의(初意)와 실제에 관한 인식을 돕는 한에 있어, 공법 이후의 발전과 후인(後人)의 이에 대한 포폄의 종적을 일별하기로 한다.
쪽수▶P143-4前節까지에서 吾人 粗雜하나마 本論 主題의 目的을 다하였다고 생각하나, 더욱이 貢法의 初意와 實際에 關한 認識을 돕는 限에 있어, 貢法 其後의 發展과 後人의 이에 對한 褒貶의 蹤跡을 一瞥하기로 한다.
원래 공법은 순리적으로만 본다면 전분=결부=세액법이든지, 연분법이든지, 재상법이든지 다 이로(理路)가 정연하여 별로 결함을 발견할 수가 없는 제도이다. 그러나 이를 실제로 행하기로 말하면 막대한 장애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전분(○○)으로 말하면, 원 표준도 있고 실천의 준칙도 있는 것이지만, 제일 이를 행하는 허다한 관리의 두뇌를 통일하기가 어려우니, 이에 반(伴)하는 혼란은 임진 이후 더욱이 심해져서, 반계수록(권지1)에 말한 것과 같이 양전 관리가 다 각각 제뜻대로 하기 때문에 호남의 1등이 영남의 1등과 다르고, 이 읍의 6등이 저 읍의 6등과 달라, 4방 주현 동등지전(同等之田)의 토품 후박(厚薄)이 현수(懸殊)하게 되어 버리는 것은 오히려 자연의 귀결이었다. 다음 연분(○○)으로 말하면, 임진 이전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정식대로 한 모양이나, 임진 이후에 이르러서는 기강이 문란해지는 한현, 공물잡역의 신(新)세가 우후죽순 같이 족출(簇出)하여 정세를 멀리 능과(凌過)하게 되니 형편이 정세의 연분을 정식대로 9등을 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연분이라면 금양대숙(金穰大熟)과 청공대살(靑空大殺)을 물론하고 그만 의례 하하년 1결4두를 놓게 되어 이것이 불문법이 되어 버리니 연분법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정세는 4두지만 잡세가 부풀어 오르고 또 전결의 누축(漏縮)이 많아지며, 거기에 중간관리의 농락이 들어 끼어, 상하상기(上下相欺), 일대 난장판을 현출하니, 수록(권지6)의 말하는 바에 의하면, 나라에 사위(事爲)가 없고 수재가 초렴(稍廉)할 경우에는 1결 세과(稅課)가 소(少)불하230두요,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다지(多至)780두요, 더욱이 경기와 서북은 심하여 1결세 100두에 달하는 자가 있었다 한다. 다음 재상법(○○○)으로 말하면, 원 연분은 일반을 규정하고 재상은 특수를 규정하는 것이지만 연분과 재상은 기세가 상반(相半)하기 쉬운 것이라, 연분이 의례 하하년을 높게 된 후에도 여전히 재상을 논하게 되니 결국 첩감(疊減)이 되어 버린다. 이리하여 급재를 한즉 국고의 세입이 전연 없어지니(국고세입의 전무는 농민부담의 전무가 아니라 중앙관리의 전수(全收)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초조하여 덮어놓고 불급재하는 해도 있게 되니, 피재(被災)의 소민(小民)이 논두렁을 안고 우는 것이었다(수록 권지1). 소위 공법도 이 지경에 이르면 창상지변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쪽수▶P143-5元來 貢法은 純理的으로만 본다면 田分=結負=稅額法이든지, 年分法이든지, 災傷法이든지 다 理路가 整然하여 別로 缺陷을 發見할 수가 없는 制度이다. 그렇나 此를 實際로 行하기로 말하면 莫大한 障碍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먼첨 田分(○○)으로 말하면, 원 標準도 있고 實踐의 準則도 있는 것이지마는, 第一 이를 行하는 許多한 官吏의 頭腦를 統一하기가 어려우니, 이에 伴하는 混亂은 壬辰 以後 더욱이 甚하여저서, 磻溪隨錄(卷之一)에 말한 것과 같이 量田官吏가 다 各々 제뜻대로 하기 때문에 湖南의 一等이 嶺南의 一等과 다르고, 此邑의 六等이 彼邑의 六等과 달라, 四方 州郡 同等之田의 土品 厚薄이 懸殊하게 되여 버리는 것은 오히려 自然의 歸結이었다. 다음 年分(○○)으로 말하면, 壬辰 以前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定式대로 한 模樣이나, 壬辰 以後에 이르러서는 紀綱이 紊亂하여지는 한便, 貢物雜役의 新稅가 雨後竹筍 같이 簇出하여 正稅를 멀리 凌過하게 되니 形便이 正稅의 年分을 定式대로 九等을 놓을 수가 없게 되였다. 그래서 年分이라면 金穰大熟과 靑空大殺을 勿論하고 그만 依例히 下々年 一結四斗를 놓게 되여 이것이 不文法이 되여 버리니 年分法은 有其名而無其實하게 되였다. 正稅는 四斗지마는 雜稅가 부푸러 오르고 또 田結의 漏縮이 많어지며, 거기에 中間官吏의 籠絡이 드러끼어, 上下相欺, 一大 난장판을 現出하니, 隨錄(卷之六)의 말하는 바에 依하면, 나라에 事爲가 없고 守宰가 稍廉할 境遇에는 一結稅課가 少不下二三十斗요, 그렇지 안 할 境遇에는 多至七八十斗요, 더욱이 京畿와 西北은 甚하여 一結稅百斗에 達하는 者가 있었다 한다. 다음 災傷法(○○○)으로 말하면, 원 年分은 一般을 規定하고 災傷은 特殊를 規定하는 것이지마는 年分과 災傷은 其勢가 相半하기 쉬운 것이라, 年分이 依例이 下々年을 높게 된 後에도 如前이 災傷을 論하게 되니 結局 疊減이 되여 버린다. 이리하여 給災를 한즉 國庫의 歲入이 全然 없어지니(國庫歲入의 全無는 農民負擔의 全無가 아니라 中間官吏의 全收를 意味하는 것이다), 이에 焦燥하여 덮어놓고 不給災하는 해도 있게 되니, 被災의 小民이 논드렁을 안고 우는 것이었다(隨錄 卷之一). 所謂 貢法도 이 地境에 이르면 滄桑之變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공법은 다시 시간과 함께 무한히 변하여 갔다. 우선 인조 12 갑술년 이후 6등양전척법을 번용(煩冗)하다 하여 폐기하고 양전은 원1등척(○○○○) () 가지만(○○○) 가지고 실측한 후, 1등전은 그 수대로 시행하고, 2등·3등·4등·5등·6등전은 각각 1등전결 수에다 85공(空)1(0·6501)·7공(空)11(0·7011)·55공(空)7(0・5507)·단4(0·4)・25(0·25) 등을 승하여 각기 결수로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원
쪽수▶P144-2貢法은 다시 時間과 함께 無限이 變하여 갔다. 위선 仁祖 十二 甲戌年 以後 六等量田尺法을 煩冗타 하여 廢棄하고 量田은 원一等尺(○○○○) () 가지만(○○○) 가지고 實測한 後, 一等田은 그 數대로 施行하고, 二等·三等·四等·五等·六等田은 各々 一等田結 數에다 八五空一(〇·六五〇一)·七空一一(〇·七〇一一)·五五空七(〇・五五〇七)·單四(〇·四)・二五(〇·二五) 等을 乘하여 各其 結數로 하게 되였다. 그 理由는 원
(1등전묘 수) (2등전묘 수)
38 ÷ 44.7 = 0.8501⋯⋯
38 ÷ 54.2 = 0.7011⋯⋯
38 ÷ 69 = 0,5507⋯⋯
38 ÷ 95 = 0.4000
38 ÷ 152 = 0.2500
쪽수▶P145-1(一等田畝 數) (二等田畝 數)
38 ÷ 44.7 = 0.8501⋯⋯
38 ÷ 54.2 = 0.7011⋯⋯
38 ÷ 69 = 0,5507⋯⋯
38 ÷ 95 = 0.4000
38 ÷ 152 = 0.2500
인 만큼, 전후 동일의 산법이다. 단 전적이 1결 이하일 때는 간략하게 2등 85・3등 70·4등 55·5등 단(單)4· 6등 25로 하기로 한다. 85·70·55·단4·25등의 정연한 산술급수는 원 세제(稅制) 창정 때에 57묘6등전 상상년 수량미 40, 34, 38, 23, 16, 10석 등의 산술급수에 연원한 것이요, 따라서 거기서 산출한 6등전의 묘 수 38, 44·7, 54·2, 69·95, 152 등은 한 개의 조화급수를 이루는 것이요, 다시 거기서 산출한 6등척의 주척 수 4·77, 5·18, 5·70, 6·43, 7·55, 9·55 등은 이 조화급수의 평방근의 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일의 한 가지는, 다산이 원(原)6등전척과 결적을 논할 때에(경세유표 권6), () 출처를(○○○) 번연히(○○○) 알면서(○○○), 부주의하게도 “원 6등전척과 결적은 미지 이 법이 何所據而如是也로다, 求之以平比例(산술급수)而不合하고 求之以差比例(기하급수)而不合하고, 求之以三分損一之例(亦幾何級數也)而不合하니 斯何法也오”라고 타박을 하였다. 그러면서 갑술 이후의 2등85 운운법은 허가하여, 결국 “전 법은 必 高麗荒亂之世의 流來之法而 國初搶攘에 未及是正한 것”이라 하고, “후 법은 至我 仁祖大王 갑술 6년 하여 始改하니, 이 법이 於戲盛矣로다.” 해버렸으니, 이 또한 그의 천려일실에 속하는 것이다.
쪽수▶P145-2이니만치, 前後 同一의 算法이다. 但 田積이 一結 以下일 時는 簡略하게 二等 八五・三等 七〇·四等 五五·五等 單四·六等 二五로 하기로 한다. 八五·七〇·五五·單四·二五等의 整然한 算術級數는 원 稅制 創定 時에 五十七畝六等田 上々年 收量米 四〇, 三四, 三八, 二三, 一六, 一〇石 等의 算術級數에 淵源한 것이오, 따라서 거기서 算出한 六等田의 畝數 三八, 四四·七, 五四·二, 六九·九五, 一五二 等은 한 箇의 調和級數를 이루는 것이오, 다시 거기서 算出한 六等尺의 周尺數 四·七七, 五·一八, 五·七〇, 六·四三, 七·五五, 九·五五 等은 이 調和級數의 平方根의 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異常한 일의 한 가지는, 茶山이 原六等田尺과 結積을 論할 때에(經世遺表 卷六), () 出處를(○○○) 번연이(○○○) 알면서(○○○), 不注意하게도 「原六等田尺과 結積은 未知此法이 何所據而如是也로다, 求之以平比例(算術級數)而不合하고 求之以差比例(幾何級數)而不合하고, 求之以三分損一之例(亦幾何級數也)而不合하니 斯何法也오」라고 打駁을 하였다. 그렇면서 甲戌 以後의 二等八五 云々法은 許可하여, 結局 「前法은 必 高麗荒亂之世의 流來之法而 國初搶攘에 未及是正한 것」이라 하고, 「後法은 至我 仁祖大王 甲戌 六年 하여 始改하니, 其法이 於戲盛矣로다.」 해버렸으니, 이 亦 그의 千慮一失에 屬하는 것이다.
차막(遮莫) 6종척 병용에 간리의 용간(容奸)이 들어 끼기 쉬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러면 1종척 전용은 그 효과가 어떠할까. 효종 4년 반포준수책(전출)에는, 2등전척으로 측량한 결수를 2등전 이하로 환산할 때의 환산표가 들어있고, 또 그보다 20년 전인 인조 갑술에 단척법을 시작할 그때부터 응당 그런 것이 있었겠지만, 실제 휴반(畦畔)에 설 때에는 역시 상당한 가감승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지측량법 그 자체가 당시의 전맹(田氓)에게는 한 불가해의 요술이었다―사실은 간단한 것이지만. 또 그 간단이라는 것이 허다한 혼란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수록(권6)의 말과 같이 승제가감지법은 당관자(當官者) 자체가 다 살피지 못하는 것이니, 하물며 전맹이리요. 관이 다 살피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한즉, 서리가 용간을 한다. 이에 회뢰(賄賂) 청탁과 누락 기은(欺隱)의 폐가 그 극에 달하여 결부가 무기(無紀)하고 부세(賦稅)가 불균해지는 것이다.
쪽수▶P145-3遮莫 六種尺 並用에 奸吏의 容奸이 드러 끼이기 쉬운 것은 勿論이려니와, 그렇면 一種尺 專用은 그 効果가 어떠할가. 孝宗 四年 頒布遵守冊(前出)에는, 二等田尺으로 測量한 結數를 二等田 以下로 換算할 때의 換算表가 드러있고, 또 그보담 二十年 前인 仁祖 甲戌에 單尺法을 始作할 그때부터 應當 그런 것이 있었겠지마는, 實際 畦畔에 설 때에는 亦是 相當한 加減乘除를 必要로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土地測量法 그 自體가 當時의 田氓에게는 한 不可解의 妖術이었다―事實은 簡單한 것이지마는. 또 그 簡單이라는 것이 許多한 混亂을 産出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隨錄▶P146-1(卷六)의 말과 같이 乘除加減之法은 當官者 自體가 다 살피지 몯하는 것이니, 하물며 田氓이리오. 官이 다 살피지 몯하고, 다 알지 몯한즉, 胥吏가 容奸을 한다. 이에 賄賂 請托과 漏落 欺隱의 弊가 그 極에 達하여 結負가 無紀하고 賦稅가 不均하여지는 것이다.
임진 이후에 연분은 의례 하하를 놓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논하였거니와, 점점 내려와 영정(英正) 사이에 이른즉, 이것이 거의 완전히 화석화하여, 전세 즉 1결4두라고까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혹 어떤 지방이 한 번 하중년 6두, 하상년 8두(그 이상은 절대로 올라가지 않는다)를 놓이게 되면 이것이 그만 또 화석화한다. 그래서 결국 전분이(연분(○○)이 아니고 전분(○○)이) 3등이 되어 버려 하하전(○○○)·하중전(○○○)·하상전(○○○)의 명목이 나게 되었다. 즉 전분과 연분이 완전히 혼동되어, 일반 농민은 물론이거니와 서리·관원까지도 전분·연분의 별(別)을 확실히 파굴하는 자가 적게 되니, 가히 포복절도할 일이다. 다산은 이 상태를 형용하여, “田等年分이 牽連爲法하니 拕泥帶水하고 似粥如飯이라” 하였는데(유표 권7)정히 그러하다. 결국 영조 20년에 속대전을 편성할 때에는,
쪽수▶P146-2壬辰 以後에 年分은 依例이 下々를 놓게 되였다는 것은 旣述하였거니와, 漸々 나려와 英正 間에 이른즉, 이것이 거의 完全이 化石化하여, 田稅 即 一結四斗라고까지 되여 버렸다. 그러다가 或 어떤 地方이 한 번 下中年 六斗, 下上年 八斗(그 以上은 絕對로 올라가지 않는다)를 놓이게 되면 이것이 그만 또 化石化한다. 그래서 結局 田分이(年分(○○)이 아니고 田分(○○)이) 三等이 되여 버려 下下田(○○○)·下中田(○○○)·下上田(○○○)의 名目이 나게 되었다. 即 田分과 年分이 完全이 混同되여, 一般 農民은 勿論이려니와 胥吏·官員까지도 田分·年分의 別을 確實이 把掘하는 者가 적게 되니, 可히 抱腹絕倒할 일이다. 茶山은 이 狀態를 形容하여, 「田等年分이 牽連爲法하니 拕泥帶水하고 似粥如飯이라」 하였는데(遺表 卷七)正히 그러하다. 結局 英祖 二十年에 續大典을 編成할 때에는,

凡一結. 收田稅四斗.凡田畓下之中以上收稅. 不在此限(戶典收稅條.)

쪽수▶P146-3

凡一結. 收田稅四斗.凡田畓下之中以上收稅. 不在此限(戶典收稅條.)

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문의 대문(大文)은 다산이 지적한 것과 같이 그 외면을 보면 1결4두란 항솔(恒率)인 것 같기도 하나,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흉년을 가리킨 것이니, 그 서법이 모호 불명하다. 또 주석의 하지중(下之中) 이상이란, 그 외면을 보면 전등 같기도 하나,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연분을 가리킨 것이니, 그 서법이 또한 모호 불명하다. 기왕이면 하중6두·하상8두로 내지 상상20두까지를 비서(備書)해야 할 것이지 어찌 부재차한으로 흐려버리는가. 이 모호한 곳에 또 관리의 용간이 붙는 것이다. 경국대전의 전분6등·연분9등은 여기 와서는 산 듯 죽은 듯하다. 법의 조문으로는 천하의 진품이나, 그 사정을 알고 보면, 그 고충을 가히 추찰할 수가 있다.
쪽수▶P146-4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條文의 大文은 茶山이 指摘한 것과 같이 그 外面을 보면 一結四斗란 恒率인 것 같기도 하나, 其裏面을 드려다 보면 凶年을 가르친 것이니, 其書法이 模糊 不明하다. 또 註의 下之中 以上이란, 其外面을 보면 田等 같기도 하나, 其裏面을 드려다 보면 年分을 가르친 것이니, 其書法이 또한 模糊 不明하다. 기왕이면 下中六斗·下上八斗로 乃至 上々二十斗까지를 備書하여야 할 것이지 어찌 不在此限으로 흐려버리는가. 이 模糊한 곳에 또 官吏의 容奸이 붙는 것이다. 經國大典의 田分六等·年分九等은 여기 와서는 산 듯 죽은 듯하다. 法의 條文으로는 天下의 珍品이나, 그 事情을 알고 보면, 그 苦衷을 可히 推察할 수가 있다.
동방의 성주와 현상(賢相)이 고고참금(考古參今)하여 가지고, 만세불간지법(萬世不刊之法)으로 지었다는 법이 어찌 백수십 년을 지나지 않아 이렇게 비참한 물건이 되었을까. 그 원인을 쉽사리 소위 용사지변으로만 돌려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임진을 전후하여 소위 혼조라는 것이 하나씩 있으니, 죄를 거기에나 돌려버릴 것인가. 그러나 혼조는 언제든지 ‘반정’된 것이니 책임을 이에 전가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난제니 잠깐 그 답을 보류하기로 하더라도, 하여간에 제도와 배치되는 현실이, 구태여 혼조와 외구를 기다리지 않고, 벌써 입법과 동시에 생겼다는 것만은 불가무(不可誣)의 사실이다. 그러면 이 불합리의 인지와 그에 대한 반정의 사상도 당연히 일찍부터 있었을 것이다. 다만 반계와 다산 같은 이의 호소는 현저한 것이 있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과연 그들의 식견은 투철하고 사정은 처완(悽惋)한 것이 있으나, 그들이 간 후에 이조 말까지 100년 혹 수백 년 동안에 전생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그들의 백골이 집의(執義)도 되고 제학(提學)도 되고 한 일은 있으나, 그들이 평생을 두고 애를 태우던 일은, 그로 하여 논두렁 하나 어떻게 변하고 전세가 한말 어떻게 되었다는 일은 있지 아니하였다. 워낙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이 타기(唾棄)하고 매도한 그 법도 본대는 각 군 현 신이 풍운제회(風雲際會(하여 선미를 다하여 만들었다는 법이었으니, 한때는 ‘현명한 두뇌’들의 구가를 받던 것이다. 그러면 이조 세종대왕에 이르러 처음 이 사회에 ‘양법’이라는 것이 출현한 것인가. 그것도 그렇지 않다. 세종 조(朝)의 군신이 이를 타기하고, 거기서 ‘양법’을 만들어 낸 그 ‘악법’도 고려 조(朝) 신료의 말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용흥(龍興)하여 “仁政은 必自經界始하니 首正經界하여야겠다”고 하여 지은 것이요, 그 후 성조 성종이 계지 통사하여 발전시켰다는 ‘양법’이었다. 이렇게 무한히 보아 올라가면 ‘양법’과 ‘악법’의 분간이 심히 몽롱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법은 사회의 진보를 따라서 당연히 변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는, 행여나 생각지 말라. 반계나 다산이 천지 간 최상법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명안’(名案)을 거기서 계시를 받은 그 법이 벌써 3천년 전의 주공(周公)의 법이 아니냐. 고려 태조와 동방 요순의 유법(遺法)이 혹 대걸소걸(大桀小桀)도 되고 혹 대맥소맥(大貊小貊)도 되며, 대현 반계 다산의 포부가 용납되지 않는 것을 보면 ‘제도’나 ‘두뇌’는 결국 본원적이요 자율성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현명한 제도나 두뇌는 시인하고 구가하고 탄식은 할지언정, 사물을 창조하고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창조하고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한(○○○) 위장(○○)과 이에 따라 움직이는 방종한(○○○) ()이었다. 설령 열 세종 백 반계 천 다산이 한꺼번에 쏟아젔던들 이 위장과 손을 어찌하였으랴.
쪽수▶P146-5東方의 聖主와 賢相이 考古參今하여 가지고, 萬世不刊之法으로 지었다는 法이 어찌 百數十 年을 지나지 안 하여 이렇게 悲慘한 物件이 되었을가. 그 原因을 쉽사리 所謂▶P147-1 龍蛇之變으로만 돌려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壬辰을 前後하여 所謂 昏朝라는 것이 하나씩 있으니, 罪를 거기에나 돌려버릴 것인가. 그렇나 昏朝는 언제든지 「反正」된 것이니 責任을 이에 轉嫁할 수는 없다. 이 問題는 難題니 暫間 그 答을 保留하기로 하더라도, 何如間에 制度와 背馳되는 現實이, 구태여 昏朝와 外寇를 기다리지 않고, 벌써 立法과 同時에 생겼다는 것만은 不可誣의 事實이다. 그렇면 이 不合理의 認知와 그에 對한 反正의 思想도 當然이 일즉부터 있었을 것이다. 다만 磻溪와 茶山 같은 이의 呼訴는 顯著한 것이 있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果然 그들의 識見은 透澈하고 詞情은 悽惋한 것이 있으나, 그들이 간 後에 李朝 末까지 百年 或 數百 年 동안에 生前에 冊을 많이 읽었다고, 그들의 白骨이 執義도 되고 提學도 되고 한 일은 있으나, 그들이 平生을 두고 애를 태우든 일은, 그로 하여 논드렁 하나 어떻게 變하고 田稅가 한말 어떻게 되였다는 일은 있지 아니하였다. 워낙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이 唾棄하고 罵倒한 그 法도 본대는 名 君賢臣이 風雲際會하여 善美를 다하여 만들었다는 法이었으니, 한때는 「賢明한 頭腦」들의 謳歌를 받든 것이다. 그렇면 李朝 世宗大王에 이르러 처음 이 社會에 「良法」이라는 것이 出現한 것인가. 그것도 그렇지 않다. 世宗朝의 君臣이 이를 唾棄하고, 거기서 「良法」을 만드러 낸 그 「惡法」도 高麗朝 臣僚의 말에 依하면 麗 太祖가 龍興하여 『仁政은 必自經界始하니 首正經界하여야겠다』고 하여 지은 것이오, 그 後 聖祖 聖宗이 繼志 通事하여 發展시키었다는 「良法」이었다. 이렇게 無限이 보아 올라가면 「良法」과 「惡法」의 分揀이 甚히 朦隴하여진다. 그렇다고 해서 「法은 社會의 進步를 따라서 當然이 變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는, 행여나 생각지 말라. 磻溪나 茶山이 天地 間 最上法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名案」을 거기서 啓示를 받은 그 法이 벌써 三千年 前의 周公의 法이 아니냐. 麗 太祖와 東方 堯舜의 遺法이 或大桀小桀도 되고 或大貊小貊도 되며, 大賢 磻溪 茶山의 抱負가 容納되지 안 하는 것을 보면 「制度」나 「頭腦」는 結局 本源的이오 自律性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賢明한 制度나 頭腦는 是認하고 謳歌하고 嘆息은 할지언정, 事物을 創造하고 決定하는 것은 아니었▶P148-1다. 오히려 創造하고 決定하는 것은, 人間의 貪慾한(○○○) 胃膓(○○)과 이에 따라 움지기는 放縱한(○○○) ()이었다. 設令 十世宗 百磻溪 千茶山이 한꺼번에 쏟아젔던들 이 胃膓과 손을 어찌하였으랴.
수다한 듯하나 한 가지만 더 사족을 붙이자. 세종이나 반계나 다산을 물론하고, 이들의 개혁안의 주점(主點)은 이적(異積)인 결부를 폐하고 동적(同積)인 경묘를 행하자는 데 있는데, 경묘법을 행한다고 해서, 지구상에 절대부동의 극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사실 동면적주의를 쓴 일본·중국·서양 등에서는 법정(法定) 1척장은 같으면서 사실은 지방과 경우에 따라, 비합법적으로 척의 실장이 2할, 3할, 내지 배(倍), 배의 배나 신축(伸縮)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모토하루 후지타(藤田元春) 저 척도종고(尺度綜考) 61―82쪽. 물론 척의 신축 과정과 그 결과의 의미하는 것은 만방이 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되면 조선과 같이 애초에 수등이척(隨等異尺)을 한 데나, 일본 중국과 같이 법만으로는 각등동척(各等同尺)을 한 데나, 과히 우열을 논할 수가 없게 된다. 우(吁)! 세종 반계 다산은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악연(愕然)하리라. 하나 요컨대 제도와 두뇌의 빈곤을 의미하는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쪽수▶P148-2수다한 듯하나 한 가지만 더 蛇足을 붙이자. 世宗이나 磻溪나 茶山을 勿論하고, 이들의 改革案의 主點은 異積인 結負를 廢하고 同積인 頃畝를 行하자는 데 있는데, 頃畝法을 行한다고 해서, 地球上에 絕對不動의 極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事實 同面積主義를 쓴 日本·中國·西洋 等에서는 法定 一尺長은 같으면서 事實은 地方과 境遇에 따라, 非合法的으로 尺의 實長이 二割, 三割, 乃至 倍, 倍의 倍나 伸縮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藤田元春 著 尺度綜考 六一―八二頁. 勿論 尺의 伸縮 過程과 그 結果의 意味하는 것은 萬邦이 다 다르겠지마는. 이렇게 되면 朝鮮과 같이 애초에 隨等異尺을 한 데나, 日本 中國과 같이 法만으로는 各等同尺을 한 데나, 過히 優劣을 論할 수가 없게 된다. 吁! 世宗 磻溪 茶山은 이 말을 드르면 반드시 愕然하리라. 하나 要컨댄 制度와 頭腦의 貧困을 意味하는 以外의 아무것도 아니다.
부기(附記)
쪽수▶P148-3附記
종래에 이조전세제도를 논한 것에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이치로 와다(和田一郞) 양 박사의 저술이 있으나, 각기 설이부진(說而不盡)한 것이 있으며, 또 이들은 전세 제규정의 표면적 기술을 주로 한 고로 제요소 간의 맥락이 관통하지 못하였다. 이에 졸고는 딴에는 이를 시정하여 모든 요소를 한 줄로 꿰어 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중추원에서 「조선전제고」라는 한 편이 나와서 역시 같은 문제를 취급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앞서 든 양 박사의 것을 개악한 감이 불무하다. 독자는 널리 참고하기 바란다. (5, 5교)
쪽수▶P148-4從來에 李朝田稅制度를 論한 것에 河合弘民·和田一郞 兩 博士의 著述이 있으나, 各其 說而不盡한 것이 있으며, 또 이들은 田稅 諸規定의 表面的 記述을 主로 한 故로 諸要素 間의 脈絡이 貫通치 몯하였다. 이에 拙稿는 딴에는 이를 是正하여 모든 要素을 한 줄로 뀌여 보랴고 努力한 것이다. 그리고 最近에 中樞院에서 「朝鮮田制考」라는 一篇이 나와서 亦是 同 問題를 取扱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前記 兩 博士의 것을 改惡한 感이 不無하다. 讀者는 널리 參考하기 바란다. (五, 五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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