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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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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 朝鮮塔婆의 硏究(二)
 
|원제목= 朝鮮塔婆의 硏究(二)
 
|학술지= 진단학보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
+
|수록권호= 10
 
|발행기관= 진단학회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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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유섭
 
|역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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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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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연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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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연월= 1939년 4월
 
|시작쪽=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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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쪽=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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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번= {{TagSpage|60-2}}前稿에서 나는 朝鮮 石塔의 發生 原因으로, 一曰 建築 材料의 生産 經濟의 關係, 二曰 手法工技의 難易 問題, 三曰 願成供納의 時急  問題, 四曰 保存時日의 長久永續 問題 等, 諸般 外面的 理由를 羅列하였지만, 이러한 外面的 動機 以外에 다시 그 內面的 動機를 보더라도 爲先 {{TagRef|2}}敎理上, 大小와 및 材料에 何等의 制限과 差別이 없었던 듯하며 <ref>造塔功德經 一節에 「爾時 世尊告觀世音菩薩言 善男子 若此現在諸天眾等及未來世一切眾生 隨所在方 未有塔處 能於其中建立之者 其狀高妙 出過三界 乃至至小如菴羅果 所有表刹 上至梵天 乃至至小猶如針等 所有輪蓋覆彼大千 乃至小猶如棗葉 於彼塔內 藏掩如來所有舍利髮牙髭爪 下至一分 或置如來所有法藏十二部經 下至於一四句偈 其人功德 如彼梵天 命終之後生於梵世 於彼壽盡生五淨居 與彼諸天等 無有異」라 하였고 또 毗婆娑論 一節에는「若入起大塔 如來轉法輪處 若人取小石為塔 其福德 等前大塔 所爲尊 故若爲如 來大梵 起大塔 或起小塔 以所爲同 故其福無量」云云이라 있다.</ref>, 또 造型的 意味에서 보더라도 塔婆는 要컨댄 {{TagRef|3}}<cite no="01">『封樹遺靈 扁針法藏 冀表河砂之德 庶酬塵却之勢』</cite><ref>造塔功德經 序.</ref>키 爲한 記念的 建物(Monumentalische Architektur)이라 印度 自體에 있어서도 原始 塔婆는 모두 內部가 充塞된 塊體 建物(Massen Bau)임을 볼때 內塞된 塊體 建物의 樣式을 畢竟코 잡고 나선 朝鮮의 石塔이야말로 結局은 原意의 塔婆로 回歸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即 이 點에서도 內塞된 塊體로서의 石造 塔婆(이곳에 內塞이라함은 內室 樣式의 空間을 갖지 아니한 것을 뜻함이니 舍利를 兩菘키 爲한 塔身의 蟒穴은 問題가 아니다)가 盛行될 原因이 있다 하겠다. 勿論 이 點만은 혹 讀者─있어 朝鮮 石塔의 發生 原因도 될 수 없거니와 促進시킨 根機도 될 수 없다고 反對할 사람이 있으리라. 그 反對의 理由는 반드시 이러하리라─{{TagRef|4}}卽 朝鮮의 一般 石塔이 그 結果에 있어선 비록 內塞된 塊體 建物이라하나 그 外樣에 나타난 全般的 特色은 끝끝내 內空 形式을 固執한 <ref>神尾弌春 著 契丹佛教文化史考 第三項.</ref> 中華 傳統의 木造 塔婆 樣式을 模倣함에 汲汲하여 甚至於 塔身의 門戶櫶窓의 彫飾까지도 이러한 意欲을 表示하여있고, 印度古塔의, 事實로 內塞된 塊體 樣式이란 僧侶의 墓塔 形式(特히 石鍾形式) 以外에 朝鮮의 一般 石塔에선 볼 수 없는 點이 아니냐고─勿論 이것은 事實다운 理由일 뿐 아니라 筆者 역시 知悉하고 있는 바이며, 筆者가 또 朝鮮 石塔의 出發을 짓고 있는 것으로 認定하고 있는 谷山의 廢彌勒寺 石塔까지도 眞實로 곧 內空된 木造 塔婆 樣式을 그대로 直譯하고 있는 것이매 이 事實에 何等 反對는 없으나, 그렇다고하여 이것이 朝鮮 石塔의 發生의 動機, 促進의 動機가 아{{TagPage|61-1}}니 되었으리라고도 反對할 수 없는 것으로 믿나니, 왜 그러냐하면 朝鮮 石塔婆가 事實에 있어 저 內空된 木造 塔婆의 形式을 再現함에서 出發하였고, 또 再現함에서 發展되었다 하더라도 塔婆 그 自體가 가지고 있는 歷史的 社會的 性格이라든지 敎理上 內面的 性格이라든지 作家의 意識 無意識 乃至 要求 不要求를 無視하고 造型的인 것으로의 藝術 類型上, 塔婆는 한 개의 "記念的인 것"에 뻔한 것이고 보매, 時代가 意識했건 못했건 藝術的 原則이 그곳에도 있었는 것으로 認定치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다. 塔婆가 高度로 높아지는 것도 敎理上으론 "積聚의 功德"의 所致라 說明할 수 있겠지만, 藝術 原 則으로 말하면 그것이 "記念的인 것"인 까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點에서 볼제 塔婆나 Obalisque나 Pyramid나 紀功碑 等이 다름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해서 木造 塔婆에서 石造 塔婆로 넘어가매 그 必然性을 볼 수 있는 것이요 (塼造 塔婆로 넘어버리지 못한 것은 오직 生産經濟 關係로 돌릴 수 있다)石造 塔婆로 넘고보매 다시 內塞된 塊體 建物로 急變될 수 있는 것도 理解되는 것이라 하겠다.
 
|목차1원문2번= {{TagSpage|60-2}}前稿에서 나는 朝鮮 石塔의 發生 原因으로, 一曰 建築 材料의 生産 經濟의 關係, 二曰 手法工技의 難易 問題, 三曰 願成供納의 時急  問題, 四曰 保存時日의 長久永續 問題 等, 諸般 外面的 理由를 羅列하였지만, 이러한 外面的 動機 以外에 다시 그 內面的 動機를 보더라도 爲先 {{TagRef|2}}敎理上, 大小와 및 材料에 何等의 制限과 差別이 없었던 듯하며 <ref>造塔功德經 一節에 「爾時 世尊告觀世音菩薩言 善男子 若此現在諸天眾等及未來世一切眾生 隨所在方 未有塔處 能於其中建立之者 其狀高妙 出過三界 乃至至小如菴羅果 所有表刹 上至梵天 乃至至小猶如針等 所有輪蓋覆彼大千 乃至小猶如棗葉 於彼塔內 藏掩如來所有舍利髮牙髭爪 下至一分 或置如來所有法藏十二部經 下至於一四句偈 其人功德 如彼梵天 命終之後生於梵世 於彼壽盡生五淨居 與彼諸天等 無有異」라 하였고 또 毗婆娑論 一節에는「若入起大塔 如來轉法輪處 若人取小石為塔 其福德 等前大塔 所爲尊 故若爲如 來大梵 起大塔 或起小塔 以所爲同 故其福無量」云云이라 있다.</ref>, 또 造型的 意味에서 보더라도 塔婆는 要컨댄 {{TagRef|3}}<cite no="01">『封樹遺靈 扁針法藏 冀表河砂之德 庶酬塵却之勢』</cite><ref>造塔功德經 序.</ref>키 爲한 記念的 建物(Monumentalische Architektur)이라 印度 自體에 있어서도 原始 塔婆는 모두 內部가 充塞된 塊體 建物(Massen Bau)임을 볼때 內塞된 塊體 建物의 樣式을 畢竟코 잡고 나선 朝鮮의 石塔이야말로 結局은 原意의 塔婆로 回歸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即 이 點에서도 內塞된 塊體로서의 石造 塔婆(이곳에 內塞이라함은 內室 樣式의 空間을 갖지 아니한 것을 뜻함이니 舍利를 兩菘키 爲한 塔身의 蟒穴은 問題가 아니다)가 盛行될 原因이 있다 하겠다. 勿論 이 點만은 혹 讀者─있어 朝鮮 石塔의 發生 原因도 될 수 없거니와 促進시킨 根機도 될 수 없다고 反對할 사람이 있으리라. 그 反對의 理由는 반드시 이러하리라─{{TagRef|4}}卽 朝鮮의 一般 石塔이 그 結果에 있어선 비록 內塞된 塊體 建物이라하나 그 外樣에 나타난 全般的 特色은 끝끝내 內空 形式을 固執한 <ref>神尾弌春 著 契丹佛教文化史考 第三項.</ref> 中華 傳統의 木造 塔婆 樣式을 模倣함에 汲汲하여 甚至於 塔身의 門戶櫶窓의 彫飾까지도 이러한 意欲을 表示하여있고, 印度古塔의, 事實로 內塞된 塊體 樣式이란 僧侶의 墓塔 形式(特히 石鍾形式) 以外에 朝鮮의 一般 石塔에선 볼 수 없는 點이 아니냐고─勿論 이것은 事實다운 理由일 뿐 아니라 筆者 역시 知悉하고 있는 바이며, 筆者가 또 朝鮮 石塔의 出發을 짓고 있는 것으로 認定하고 있는 谷山의 廢彌勒寺 石塔까지도 眞實로 곧 內空된 木造 塔婆 樣式을 그대로 直譯하고 있는 것이매 이 事實에 何等 反對는 없으나, 그렇다고하여 이것이 朝鮮 石塔의 發生의 動機, 促進의 動機가 아{{TagPage|61-1}}니 되었으리라고도 反對할 수 없는 것으로 믿나니, 왜 그러냐하면 朝鮮 石塔婆가 事實에 있어 저 內空된 木造 塔婆의 形式을 再現함에서 出發하였고, 또 再現함에서 發展되었다 하더라도 塔婆 그 自體가 가지고 있는 歷史的 社會的 性格이라든지 敎理上 內面的 性格이라든지 作家의 意識 無意識 乃至 要求 不要求를 無視하고 造型的인 것으로의 藝術 類型上, 塔婆는 한 개의 "記念的인 것"에 뻔한 것이고 보매, 時代가 意識했건 못했건 藝術的 原則이 그곳에도 있었는 것으로 認定치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다. 塔婆가 高度로 높아지는 것도 敎理上으론 "積聚의 功德"의 所致라 說明할 수 있겠지만, 藝術 原 則으로 말하면 그것이 "記念的인 것"인 까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點에서 볼제 塔婆나 Obalisque나 Pyramid나 紀功碑 等이 다름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해서 木造 塔婆에서 石造 塔婆로 넘어가매 그 必然性을 볼 수 있는 것이요 (塼造 塔婆로 넘어버리지 못한 것은 오직 生産經濟 關係로 돌릴 수 있다)石造 塔婆로 넘고보매 다시 內塞된 塊體 建物로 急變될 수 있는 것도 理解되는 것이라 하겠다.
 
|목차1원문3번= {{TagSpage|61-2}}이리하여 朝鮮 石塔婆는 發生되었고 또 發展되었나니, 그러면 어떠한 樣式的 系列을 이룸으로써 展開되었는가를 우리는 이로부터 章을 바꾸어 考察할까한다.  
 
|목차1원문3번= {{TagSpage|61-2}}이리하여 朝鮮 石塔婆는 發生되었고 또 發展되었나니, 그러면 어떠한 樣式的 系列을 이룸으로써 展開되었는가를 우리는 이로부터 章을 바꾸어 考察할까한다.  
|목차1원문4번= {{TagSpage|62}}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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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번= {{TagSpage|62}}[[파일:고유섭 조선탑파2-1.png|가운데|500px]]
  
|목차1해독문1번= 필자는 전고의 제 1항에서 조선의 목조 탑파 건물을 말하였고, 제 2항에서 조선의 전조 탑파 건물을 말하였다. 다시 이어 이곳에서 조선의 석조 탑파를 말하려 하거니와, 전고와 이 속고와의 사이엔 어언 1년 이상 근 2년이란 간격이 생겨, 생각하면 짧은 기간인 듯하나 그 간에 부여군 내의 읍군수리와 규암면외리에서는 희귀한 백제 사적이 발굴되어 학계의 일경이틀 끼친 중, 특히 군수리사지에선 목조 탑파의 기지와 불보살의 발견이 있어, 조선에 흔치 아니한 {{TagRefT|1}}목조 탑파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한 바 있었고<ref group="a">조선고적연구회 발행 소화 11년 도고적조사보고 참조</ref>, 작년 11월 중순에 들어 필자가 경주에 놀다가 그곳 동호의 모우로부터 칠곡 동명송림사에서 괴조 5중탑을 목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조 탑파에도 자료가 늘어가는 것을 느낄 때, 졸고의 이 발표가 너무 급하지 아니하였던가 하고 후회도 하여보았으며, 또다시 내가 이곳에 쓰고 있는 석탑의 문제에 관하여서도 그 자료를 충분히 내 마음껏 수집하였다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앞으로 시일을 기다린다 해도 돌연한 세월만 보낼 뿐이요 소망의 완전한 수집이 기필되리라고는 날이 갈수록 미더움이 넓어지니 불충분한 현상대로나마 소견의 정도를 피력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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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 필자는 전고의 제 1항에서 조선의 목조 탑파 건물을 말하였고, 제 2항에서 조선의 전조 탑파 건물을 말하였다. 다시 이어 이곳에서 조선의 석조 탑파를 말하려 하거니와, 전고와 이 속고와의 사이엔 어언 1년 이상 근 2년이란 간격이 생겨, 생각하면 짧은 기간인 듯하나 그간에 부여군 내의 읍군수리와 규암면 외리에서는 희귀한 백제 사적이 발굴되어 학계의 일경 이틀 끼친 중, 특히 군수리사지에선 목조 탑파의 기지와 불보살의 발견이 있어, 조선에 흔치 않은 {{TagRefT|1}}목조 탑파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한 바 있었고<ref group="a">조선고적연구회 발행 소화 11년 도고적 조사 보고 참조</ref>, 작년 11월 중순에 들어 필자가 경주에 놀다가 그곳 동호의 모우로부터 칠곡 동명송림사에서 괴조 5중탑을 목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조 탑파에도 자료가 늘어가는 것을 느낄 때, 졸고의 이 발표가 너무 급하지 아니하였던가 하고 후회도 하여 보았으며, 또다시 내가 이곳에 쓰고 있는 석탑의 문제에 관하여서도 그 자료를 충분히 내 마음껏 수집하였다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앞으로 시일을 기다린다 해도 돌연한 세월만 보낼 뿐이요 소망의 완전한 수집이 기필되리라고는 날이 갈수록 미더움이 넓어지니 불충분한 현상대로나마 소견의 정도를 피력하자는 것이다.
|목차1해독문2번= 전고에서 나는 조선 석탑의 발생 원인으로, 1. 건축 재료의 생산 경제의 관계, 2. 수법 공기의 난역 문제, 3. 원성공납의 시급 문제, 4. 보존 시일의 장구 영속 문제 등, 제반 외면적 이유를 나열하였지만, 이러한 외면적 동기 이외에 다시 그 내면적 동기를 보더라도 우선 {{TagRefT|2}}교리 상, 대소와 및 재료에 하등의 제한과 차별이 없었던 듯하며<ref group="a">조탑공덕경 일절에 「爾時 世尊告觀世音菩薩言 善男子 若此現在諸天眾等及未來世一切眾生 隨所在方 未有塔處 能於其中建立之者 其狀高妙 出過三界 乃至至小如菴羅果 所有表刹 上至梵天 乃至至小猶如針等 所有輪蓋覆彼大千 乃至小猶如棗葉 於彼塔內 藏掩如來所有舍利髮牙髭爪 下至一分 或置如來所有法藏十二部經 下至於一四句偈 其人功德 如彼梵天 命終之後生於梵世 於彼壽盡生五淨居 與彼諸天等 無有異」라 하였고 또 毗婆娑論 一節에는「若入起大塔 如來轉法輪處 若人取小石為塔 其福德 等前大塔 所爲尊 故若爲如 來大梵 起大塔 或起小塔 以所爲同 故其福無量」운운이라 있다.</ref>, 또 조형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탑파는 요컨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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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번= 전고에서 나는 조선 석탑의 발생 원인으로, 1. 건축 재료의 생산 경제의 관계, 2. 수법 공기의 난역 문제, 3. 원성 공납의 시급 문제, 4. 보존 시일의 장구 영속 문제 등, 제반 외면적 이유를 나열하였지만, 이러한 외면적 동기 이외에 다시 그 내면적 동기를 보더라도 우선 {{TagRefT|2}}교리 상, 대소와 및 재료에 하등의 제한과 차별이 없었던 듯하며<ref group="a">조탑공덕경 일절에 「爾時 世尊告觀世音菩薩言 善男子 若此現在諸天眾等及未來世一切眾生 隨所在方 未有塔處 能於其中建立之者 其狀高妙 出過三界 乃至至小如菴羅果 所有表刹 上至梵天 乃至至小猶如針等 所有輪蓋覆彼大千 乃至小猶如棗葉 於彼塔內 藏掩如來所有舍利髮牙髭爪 下至一分 或置如來所有法藏十二部經 下至於一四句偈 其人功德 如彼梵天 命終之後生於梵世 於彼壽盡生五淨居 與彼諸天等 無有異」라 하였고 또 毗婆娑論 一節에는「若入起大塔 如來轉法輪處 若人取小石為塔 其福德 等前大塔 所爲尊 故若爲如 來大梵 起大塔 或起小塔 以所爲同 故其福無量」운운이라 있다.</ref>, 또 조형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탑파는 요컨댄 {{TagRefT|3}}<cite no="02">『封樹遺靈 扁針法藏 冀表河砂之德 庶酬塵却之勢』</cite><ref group="a">조탑공덕경 서.</ref>키 위한 기념적 건물 (Monumentalische Architektur)이라 인도 자체에 있어서도 원시 탑파는 모두 내부가 충새된 괴체 건물 (Massen Bau)임을 볼 때 내새된 괴체 건물의 양식을 필경코 잡고 나선 조선의 석탑이야말로 결국은 원의의 탑파로 회귀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점에서도 내새된 괴체로서의 석조 탑파 (이곳에 내새이라 함은 내실 양식의 공간을 갖지 아니한 것을 뜻함이니 사리를 양숭키 위한 탑신의 망혈은 문제가 아니다) 가 성행될 원인이 있다 하겠다. 물론 이 점만은 혹 독자─ 있어 조선 석탑의 발생 원인도 될 수 없거니와 촉진시킨 근기도 될 수 없다고 반대할 사람이 있으리라. 그 반대의 이유는 반드시 이러하리라─ {{TagRefT|4}}즉 조선의 일반 석탑이 그 결과에 있어선 비록 내새된 괴체 건물이라 하나 그 외양에 나타난 전반적 특색은 끝끝내 내공 형식을 고집한 <ref group="a">신미일춘(神尾弌春) 저 계단불교문화사고 제 3항.</ref> 중화 전통의 목조 탑파 양식을 모방함에 급급하여 심지어 탑신의 문호헌창의 조식까지도 이러한 의욕을 표시하여 있고, 인도 고탑의, 사실로 내새된 괴체 양식이란 승려의 묘탑 형식 (특히 석종 형식) 이외에 조선의 일반 석탑에선 볼 수 없는 점이 아니냐고─ 물론 이것은 사실다운 이유일 뿐 아니라 필자 역시 지실하고 있는 바이며, 필자가 또 조선 석탑의 출발을 짓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곡산의 폐미륵사 석탑까지도 진실로 곧 내공된 목조 탑파 양식을 그대로 직역하고 있는 것으로 이 사실에 하등 반대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조선 석탑의 발생의 동기, 촉진의 동기가 아니 되었으리라고도 반대할 수 없는 것으로 믿으니, 왜 그러냐 하면 조선 석탑파가 사실에 있어 저 내공된 목조 탑파의 형식을 재현함에서 출발하였고, 또 재현함에서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탑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성격이라든지 교리상 내면적 성격이라든지 작가의 의식 무의식 내지 요구 불요구를 무시하고 조형적인 것으로의 예술 유형상, 탑파는 한 개의 "기념적인 것"에 뻔한 것이고 보며, 시대가 의식했건 못했건 예술적 원칙이 그곳에도 있었던 것으로 인정치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다. 탑파가 고도로 높아지는 것도 교리상으론 "적취의 공덕"의 소치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예술 원칙으로 말하면 그것이 "기념적인 것"인 까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탑파나 Obalisque나 Pyramid나 기공비 등이 다름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해서 목조 탑파에서 석조 탑파로 넘어가매 그 필연성을 볼 수 있는 것이요 (전조 탑파로 넘어버리지 못한 것은 오직 생산 경제 관계로 돌릴 수 있다) 석조 탑파로 넘고 보매 다시 내새된 괴체 건물로 급변될 수 있는 것도 이해되는 것이라 하겠다.
{{TagRefT|3}}<cite no="02">『封樹遺靈 扁針法藏 冀表河砂之德 庶酬塵却之勢』</cite><ref group="a">조탑공덕경 서.</ref>키 위한 기념적 건물(Monumentalische Architektur)이라 인도 자체에 있어서도 원시 탑파는 모두 내부가 충새된 괴체 건물(Massen Bau)임을 볼때 내새된 괴체 건물의 양식을 필경코 잡고 나선 조선의 석탑이야말로 결국은 원의의 탑파로 회귀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점에서도 내새된 괴체로서의 석조 탑파(이곳에 내새이라함은 내실 양식의 공간을 갖지 아니한 것을 뜻함이니 사리를 양숭키 위한 탑신의 망혈은 문제가 아니다)가 성행될 원인이 있다 하겠다. 물론 이 점만은 혹 독자─있어 조선 석탑의 발생 원인도 될 수 없거니와 촉진시킨 근기도 될 수 없다고 반대할 사람이 있으리라. 그 반대의 이유는 반드시 이러하리라─{{TagRefT|4}}즉 조선의 일반 석탑이 그 결과에 있어선 비록 내새된 괴체 건물이라하나 그 외양에 나타난 전반적 특색은 끝끝내 내공 형식을 고집한 <ref group="a">신미일춘(神尾弌春) 저 계단불교문화사고 제 3항.</ref> 중화 전통의 목조 탑파 양식을 모방함에 급급하여 심지어 탑신의 문호헌창의 조식까지도 이러한 의욕을 표시하여있고, 인도고탑의, 사실로 내새된 괴체 양식이란 승려의 묘탑 형식(특히 석종형식) 이외에 조선의 일반 석탑에선 볼 수 없는 점이 아니냐고─물론 이것은 사실다운 이유일 뿐 아니라 필자 역시 지실하고 있는 바이며, 필자가 또 조선 석탑의 출발을 짓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곡산의 폐미륵사 석탑까지도 진실로 곧 내공된 목조 탑파 양식을 그대로 직역하고 있는 것으로 이 사실에 하등 반대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조선 석탑의 발생의 동기, 촉진의 동기가 아니 되었으리라고도 반대할 수 없는 것으로 믿으니, 왜 그러냐 하면 조선 석탑파가 사실에 있어 저 내공된 목조 탑파의 형식을 재현함에서 출발하였고, 또 재현함에서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탑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성격이라든지 교리상 내면적 성격이라든지 작가의 의식 무의식 내지 요구 불요구를 무시하고 조형적인 것으로의 예술 유형상, 탑파는 한 개의 "기념적인 것"에 뻔한 것이고 보며, 시대가 의식했건 못했건 예술적 원칙이 그곳에도 있었던 것으로 인정치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다. 탑파가 고도로 높아지는 것도 교리상으론 "적취의 공덕"의 소치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예술 원 칙으로 말하면 그것이 "기념적인 것"인 까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탑파나 Obalisque나 Pyramid나 기공비 등이 다름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해서 목조 탑파에서 석조 탑파로 넘어가매 그 필연성을 볼 수 있는 것이요 (전조 탑파로 넘어버리지 못한 것은 오직 생산경제 관계로 돌릴 수 있다)석조 탑파로 넘고보매 다시 내새된 괴체 건물로 급변될 수 있는 것도 이해되는 것이라 하겠다.
 
 
|목차1해독문3번= 이리하여 조선 석탑파는 발생되었고 또 발전되었으니, 그러면 어떠한 양식적 계열을 이룸으로써 전개되었는가를 우리는 이로부터 장을 바꾸어 고찰할까 한다.  
 
|목차1해독문3번= 이리하여 조선 석탑파는 발생되었고 또 발전되었으니, 그러면 어떠한 양식적 계열을 이룸으로써 전개되었는가를 우리는 이로부터 장을 바꾸어 고찰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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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번= {{TagSpage|63-1}}一. 朝鮮 石塔樣式의 發生으로부터 그 定型의 成立까지<br/> (1) 朝鮮 石塔樣式의 發生事情과 그 始源樣式들<br/>本稿에서 累述한 바와 같이 朝鮮의 塔婆가 方形 木造 高樓 建物에서 發足되었고 그 樣式이 朝鮮 塔婆 樣式의 根流를 이루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樣式 發展의 順序上 木造 塔婆 樣式을 가장 忠實히 具顯하고 있는 遺構에서 그 時代까지 高古한 것을 認定한다. 前稿에서 朝鮮 石塔婆의 高古한 記錄 例로 金官城 婆娑石塔이란 것과 高句麗 靈塔寺의 石塔이란 것이 三國遺事에 나타나 있음을 말하였으나 現物이 있는 바 아니니 다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現存한 作例 中 가장 高古한 作品으로 定立시킬 수 있는 것은 益山 龍華山 下에 있는 彌勒寺址의 石塔 뿐일까 한다.
 
|목차2원문1번= {{TagSpage|63-1}}一. 朝鮮 石塔樣式의 發生으로부터 그 定型의 成立까지<br/> (1) 朝鮮 石塔樣式의 發生事情과 그 始源樣式들<br/>本稿에서 累述한 바와 같이 朝鮮의 塔婆가 方形 木造 高樓 建物에서 發足되었고 그 樣式이 朝鮮 塔婆 樣式의 根流를 이루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樣式 發展의 順序上 木造 塔婆 樣式을 가장 忠實히 具顯하고 있는 遺構에서 그 時代까지 高古한 것을 認定한다. 前稿에서 朝鮮 石塔婆의 高古한 記錄 例로 金官城 婆娑石塔이란 것과 高句麗 靈塔寺의 石塔이란 것이 三國遺事에 나타나 있음을 말하였으나 現物이 있는 바 아니니 다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現存한 作例 中 가장 高古한 作品으로 定立시킬 수 있는 것은 益山 龍華山 下에 있는 彌勒寺址의 石塔 뿐일까 한다.
|목차2원문2번= {{TagSpage|63-2}}이 彌勒寺址의 遺塔은 現今 朝鮮에 남아있는 石塔으로선 가장 忠實히 木造 塔婆의 樣式을 再現하고있는 唯一의 것이니 지금은 東面 一角만이 남아 있고 다른 三面은 거의 다 헐어졌을 뿐더러 層級도 六層의 東北 一角만이 남아있고 그 우가 모두 없어진 까닭에 形態는 매우 不完全한 것이나 그러나 塔의 樣式은 이만으로써도 十分 理解할 수 있을만치 되어있다. 即 第一로 注目되는 것은 特히 基壇이라 할 만한 基壇을 갖지 아니하고(塔婆의 地盤이 周圍의 地平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토대라 할 것에 끝이고 基壇으로써 부를 만한 것은 못 된다.) 2, 3尺 前後의 距離를 두고서 地産長石이 남아있음이요, 다음에 注目되는 것은 그 屋身의 經營이니 屋身은 一面이 三間壁을 이루었으되 {{TagRef|2-1}}「엔터시스」(Enthusis)」<ref>원문주석1</ref>를 가진 長石柱가 角形 礎石 위에 각기 서 있고 三間壁의 左右兩壁은 地覆地枋 위에선 一小柱로 다시 烟分되어 있으되 中央區만은 楣棖框閾이 제법 模型된 通口가 있어 內部로 通路가 通케 되었으니 이 通門과 通路는 四方이 同一하였을 것으로 平面(Plan)에서 보자면 內部 中心에 四角形 石製 心柱가 있어 이곳에서 正十 {{TagPage|64-1}}字 通路가 交叉되여 外部 四方으로 通케 된 形式이다. 다시 外壁의 列柱 上部에는 額枋과 平板枋이 놓여있고 그 위에 桁間 小壁이 있어 다시 角形 三段의 {{TagRef|2-2}}層級形 「밭임」<ref>원문주석2</ref>이 있어 平薄長大한 屋蓋石을 떠받고 있다. 屋蓋石은 轉角의 尖端에서 多小 輕快히 翻仰되어있고 轉角의 三角 斷面(Section)은 後代 新羅의 諸石塔에서와 같이 뚜렷한 銳角尖端을 이루지 아니하였다. 第二層은 極히 短縮된 三間小壁이(間壁의 名區 안에는下層 左右壁에서와 같은 小柱가 있었는 모양이다) 長臺石 「피임」 위에 놓여있어, 위로 三段層級形 「밭임」을 받고 이 「밭임」으로써 屋蓋石을 또 받고 있다. 同一한 手法의 屋身과 屋蓋石이 重覆되여 三層四層 至于六層하였으되 屋身 「괴임」의 長臺石이 第三層에서부터 重段으로 늘어있고 層段 「밭임」 第五層으로부터 一段이 늘어있으니 이와 같이 塔身 「괴임」과 屋蓋石「밭임」이 上層에서 增加한다는 것은 이 塔로서는 그 瞻仰에 있어 高度의 調和를 얻기 爲한 特別한 配案일 것이로되 筆者는 다른 石塔에서 이와 같은 用意가 表現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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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번= {{TagSpage|63-2}}이 彌勒寺址의 遺塔은 現今 朝鮮에 남아있는 石塔으로선 가장 忠實히 木造 塔婆의 樣式을 再現하고있는 唯一의 것이니 지금은 東面 一角만이 남아 있고 다른 三面은 거의 다 헐어졌을 뿐더러 層級도 六層의 東北 一角만이 남아있고 그 우가 모두 없어진 까닭에 形態는 매우 不完全한 것이나 그러나 塔의 樣式은 이만으로써도 十分 理解할 수 있을만치 되어있다. 即 第一로 注目되는 것은 特히 基壇이라 할 만한 基壇을 갖지 아니하고(塔婆의 地盤이 周圍의 地平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토대라 할 것에 끝이고 基壇으로써 부를 만한 것은 못 된다.) 2, 3尺 前後의 距離를 두고서 地産長石이 남아있음이요, 다음에 注目되는 것은 그 屋身의 經營이니 屋身은 一面이 三間壁을 이루었으되 {{TagRef|2-1}}「엔터시스」(Enthusis)」<ref>「엔터시스」라 함은 桂身의 上下가 음으라들고 배가 부른 形式을 말한다. 朝鮮의 木造 建物은 大槪 이것이 現著히 나타나 있으나 西洋의 建物은 다시 그러치 아니하다. 希臘 初期의 建物에선 이것이 現著히 나타나 있으나, 時代가 나릴수록 이것이 적어짐으로 해서 「엔터시스」의 數量的 變化가 時代를 말하게 된다. 朝鮮의 石塔에선 確實히 이 變化相이 보이고 日本에서 木造 建物에서도 이 變化相이 確實히 보인다.</ref>를 가진 長石柱가 角形 礎石 위에 각기 서 있고 三間壁의 左右兩壁은 地覆地枋 위에선 一小柱로 다시 烟分되어 있으되 中央區만은 楣棖框閾이 제법 模型된 通口가 있어 內部로 通路가 通케 되었으니 이 通門과 通路는 四方이 同一하였을 것으로 平面(Plan)에서 보자면 內部 中心에 四角形 石製 心柱가 있어 이곳에서 正十 {{TagPage|64-1}}字 通路가 交叉되여 外部 四方으로 通케 된 形式이다. 다시 外壁의 列柱 上部에는 額枋과 平板枋이 놓여있고 그 위에 桁間 小壁이 있어 다시 角形 三段의 {{TagRef|2-2}}層級形 「밭임」<ref>層級形 「밭임」이라 함은 日本 建築界에서 말하는 「持送」이다. 朝鮮 木手들은 무엇이라 말하는지 알 수 없고 일찍이 筆者가 〿瓦匠의 한사람에게 물었더니 「방한」이라고 한다기에 音대로 「方限」이라 하여 쓴 적이 있다(東匯日報紙 〿五千號「내자랑파내보배」中 拙稿). 이 筆者의 拙稿 一文(「百濟의 美術」)이 昭和 12年 2月 總督府發行 中等敎育朝鮮語 及 漢文〿本卷之四에 收錄된 적이 있는 關係 上, 이 述語를 그대로 使用코도 싶었으나 確實한 用語를 使用하여 可할 것이지 아직 未審키로 이곳에서는 알기 쉬운 假稱으로 使用하려 한다. </ref>이 있어 平薄長大한 屋蓋石을 떠받고 있다. 屋蓋石은 轉角의 尖端에서 多小 輕快히 翻仰되어있고 轉角의 三角 斷面(Section)은 後代 新羅의 諸石塔에서와 같이 뚜렷한 銳角尖端을 이루지 아니하였다. 第二層은 極히 短縮된 三間小壁이(間壁의 名區 안에는下層 左右壁에서와 같은 小柱가 있었는 모양이다) 長臺石 「피임」 위에 놓여있어, 위로 三段層級形 「밭임」을 받고 이 「밭임」으로써 屋蓋石을 또 받고 있다. 同一한 手法의 屋身과 屋蓋石이 重覆되여 三層四層 至于六層하였으되 屋身 「괴임」의 長臺石이 第三層에서부터 重段으로 늘어있고 層段 「밭임」 第五層으로부터 一段이 늘어있으니 이와 같이 塔身 「괴임」과 屋蓋石「밭임」이 上層에서 增加한다는 것은 이 塔로서는 그 瞻仰에 있어 高度의 調和를 얻기 爲한 特別한 配案일 것이로되 筆者는 다른 石塔에서 이와 같은 用意가 表現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목차2원문3번= {{TagSpage|64-2}}이와 같이 이 塔婆는 純全히 石材로써 造築된 것인만큼 石塔에는 틀림없으나 그러나 그 全體 樣式에 있어서는 우리가 一般히 가지고 있는 石塔의 概念과는 아주 다른 點이 있나니, 이는 마치 慶州 芬皇寺의 塔이 石材로써 造築된 것이라 하나 우리는 그것을 石塔으로서 부를 수 없고 樣式的으론 塼塔의 部類에 編入시키지 아니 할 수 없음과 같아서 이것도 石材를 使用하였달 뿐이지 樣式的으론 곧 純全한 木造 塔婆의 形式임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外形的 樣式뿐에서가 아니라 다시 그 造成 意態에서도 읽을 수 있는 點이니 例컨댄 그 石材의 架構築成의 手法이 다른 諸塔에서 볼 수 있음과 같은 秩序와 整頓이 있는 調用이아니요 아모런 統一 調節의 意思가 없이 다만 한 개의 樣式, ─即 傳來의 木造 塔婆의 樣式을 移模하여 그것을 再現하려함에 汲汲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換言하면 {{ruby|이것은|●●●}} {{ruby|石塔樣式이라는|●●●●●●●}} {{ruby|한|●}} {{ruby|개의|●●}} {{ruby|새로운|●●●}} {{ruby|樣式을|●●●}} {{ruby|내|●}} {{TagPage|65-1}}{{ruby|기|●}} {{ruby|爲한|●●}} {{ruby|創意의|●●●}} {{ruby|造型이|●●●}} {{ruby|아니요|●●●}} {{ruby|다만|●●}} {{ruby|舊來의|●●●}} {{ruby|樣式을|●●●}} {{ruby|忠實히|●●●}} {{ruby|다른|●●}} {{ruby|材料로써|●●●●}} ({{ruby|即|●}} {{ruby|朝鮮에|●●●}} {{ruby|가장|●●}} {{ruby|豊富한|●●●}} {{ruby|石材로서|●●●●}}) {{ruby|飜譯|●●}} ({{ruby|그것도|●●●}} {{ruby|直譯|●●}}) {{ruby|한데|●●}} {{ruby|지나지|●●●}} {{ruby|아니한|●●●}} {{ruby|純模倣的|●●●●}} {{ruby|意味에|●●●}} {{ruby|끝이는|●●●}} {{ruby|作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때 한 가지 問題되는 것은 木造 建物에서 볼 수 없는 屋裏의 層段形「밭임」이지만 이것을 暫時 保留한다면 朝鮮 石塔으로서 木造 塔婆의 樣式을 가장 忠賞히 直譯하고 있는 塔婆는 이 外에 다시 없다. 그러므로 筆者는 樣式的 順次에 있어 이 塔을 爲先 第一位에 둔다.
 
|목차2원문3번= {{TagSpage|64-2}}이와 같이 이 塔婆는 純全히 石材로써 造築된 것인만큼 石塔에는 틀림없으나 그러나 그 全體 樣式에 있어서는 우리가 一般히 가지고 있는 石塔의 概念과는 아주 다른 點이 있나니, 이는 마치 慶州 芬皇寺의 塔이 石材로써 造築된 것이라 하나 우리는 그것을 石塔으로서 부를 수 없고 樣式的으론 塼塔의 部類에 編入시키지 아니 할 수 없음과 같아서 이것도 石材를 使用하였달 뿐이지 樣式的으론 곧 純全한 木造 塔婆의 形式임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外形的 樣式뿐에서가 아니라 다시 그 造成 意態에서도 읽을 수 있는 點이니 例컨댄 그 石材의 架構築成의 手法이 다른 諸塔에서 볼 수 있음과 같은 秩序와 整頓이 있는 調用이아니요 아모런 統一 調節의 意思가 없이 다만 한 개의 樣式, ─即 傳來의 木造 塔婆의 樣式을 移模하여 그것을 再現하려함에 汲汲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換言하면 {{ruby|이것은|●●●}} {{ruby|石塔樣式이라는|●●●●●●●}} {{ruby|한|●}} {{ruby|개의|●●}} {{ruby|새로운|●●●}} {{ruby|樣式을|●●●}} {{ruby|내|●}} {{TagPage|65-1}}{{ruby|기|●}} {{ruby|爲한|●●}} {{ruby|創意의|●●●}} {{ruby|造型이|●●●}} {{ruby|아니요|●●●}} {{ruby|다만|●●}} {{ruby|舊來의|●●●}} {{ruby|樣式을|●●●}} {{ruby|忠實히|●●●}} {{ruby|다른|●●}} {{ruby|材料로써|●●●●}} ({{ruby|即|●}} {{ruby|朝鮮에|●●●}} {{ruby|가장|●●}} {{ruby|豊富한|●●●}} {{ruby|石材로서|●●●●}}) {{ruby|飜譯|●●}} ({{ruby|그것도|●●●}} {{ruby|直譯|●●}}) {{ruby|한데|●●}} {{ruby|지나지|●●●}} {{ruby|아니한|●●●}} {{ruby|純模倣的|●●●●}} {{ruby|意味에|●●●}} {{ruby|끝이는|●●●}} {{ruby|作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때 한 가지 問題되는 것은 木造 建物에서 볼 수 없는 屋裏의 層段形「밭임」이지만 이것을 暫時 保留한다면 朝鮮 石塔으로서 木造 塔婆의 樣式을 가장 忠賞히 直譯하고 있는 塔婆는 이 外에 다시 없다. 그러므로 筆者는 樣式的 順次에 있어 이 塔을 爲先 第一位에 둔다.
|목차2원문4번= {{TagSpage|65-2}}다음에 樣式的으로 이 彌勒塔과 가장 同一한 것으로 알려 있는 것으론 同 益山郡 王宮面 王宮坪에 있는 五重石塔이다.  지금 이 王宮坪塔의 樣式을 보면 第一로 注目되는 것은 그 土臺 樣式으로 그것은 周圍의 地盤에서 이 塔婆만을 爲하여 孤立된 土臺이요 또 이 塔의 重力과 重心의 保障을 爲하여 必要한 臺일 뿐더러 이것은 반드시 石壇 形式을 形成하였던 것으로 推測까지 되는 것이나 지금은 그 石材가 散逸되어 確定的으로 말할 수 없이 되어 있다. 다음에 屋身의 手法을 보건대 {{TagRef|2-3}}第一層屋身은 一面 三枚板石으로 方形이 짜여있으되(全體로는8個 長石으로 짜힌 것이 된다.) 四隅에 太細의 變化(即「엔터시스」)<ref>원문주석3</ref>가 없는 柱形이 彫出되어 있고 屋身엔 다시 1介 柱形이 삭여있어 全體로 二間壁의 意態를 表現하여 있다. 屋蓋石은 三層까지가 八枚板石으로 되어있고 四五層은 四枚板石으로 되어 있으며 三段層級의 「밭임」은 各層이 面枚石으로 째여있다. 二層 以上의 屋身을 形成한 石片 數는 不一하나 一間壁을 表示함에 一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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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번= {{TagSpage|65-2}}다음에 樣式的으로 이 彌勒塔과 가장 同一한 것으로 알려 있는 것으론 同 益山郡 王宮面 王宮坪에 있는 五重石塔이다.  지금 이 王宮坪塔의 樣式을 보면 第一로 注目되는 것은 그 土臺 樣式으로 그것은 周圍의 地盤에서 이 塔婆만을 爲하여 孤立된 土臺이요 또 이 塔의 重力과 重心의 保障을 爲하여 必要한 臺일 뿐더러 이것은 반드시 石壇 形式을 形成하였던 것으로 推測까지 되는 것이나 지금은 그 石材가 散逸되어 確定的으로 말할 수 없이 되어 있다. 다음에 屋身의 手法을 보건대 {{TagRef|2-3}}第一層屋身은 一面 三枚板石으로 方形이 짜여있으되(全體로는8個 長石으로 짜힌 것이 된다.) 四隅에 太細의 變化(即「엔터시스」가 없는 柱形이 彫出되어 있고 屋身엔 다시 1介 柱形이 삭여있어 全體로 二間壁의 意態를 表現하여 있다.<ref group="a">大正 6年度 古蹟調査報告 652頁에 이 屋身이 三間壁으로 되어있는 듯이 報告되어있으나 誤解인 듯하다.</ref> 屋蓋石은 三層까지가 八枚板石으로 되어있고 四五層은 四枚板石으로 되어 있으며 三段層級의 「밭임」은 各層이 面枚石으로 째여있다. 二層 以上의 屋身을 形成한 石片 數는 不一하나 一間壁을 表示함에 一致되어 있다.
 
|목차2원문5번= {{TagSpage|65-3}}이제 우리가 이王宮坪塔과 彌勒塔과를 比較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屋蓋石의 形式과 層段「밭임」의 類似에서 兩者의 氣魄이 同一함을 볼 수 있고 다시 그 外樣의 類似에서 世代(年代가 아니다)의 同一할 것이 推想된다. 實로 누가 否 {{TagPage|66-1}}定하랴 否定할 수 없는 樣式 感情의 類似를 본다. 이것이 누구나 이 兩塔을 時代的으로 同一視케 하는 가장 큰 特點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이 兩塔의 類似함을 우리는 認定할 수 있는 同時에 우리는 다시 이 兩塔 間의 差異를 볼 수 있다. 第一로 王宮坪塔은 彌勒塔에 없는 基壇의 性質에 屬할 높은 基臺를 가졌고, 第二로 初層屋身이 彌勒塔과 같이 木造 塔婆의 三間壁을 忠實히 形成한 것이 아니라 한 塊體로 略式的 凝結을 보였으되 二間의 區別은 實際 木造 塔婆의 構造的 意味를 떠났고, 第三으로 二層 以上의 屋身은 全혀 彌勒塔에서와 같은 끝까지 三間壁을 보이려는 誠意를 버리고 一間壁으로써 公約시켰으며, 第四로 屋身의 各 柱形이 彌勒塔에서와 같이 各個 獨立된 別石으로 忠實히 木造 建物의 柱形에서 볼 수 있는 「엔터시스」를 이루지 않고 壁面石의 끝에 簡單한 便化的 手法으로 柱形의 意態만 보였고, 第五로 屋蓋石과 屋身과의 連接部面의「괴임」이 彌勒塔에서와 같이 別石으로 結構되어 있음이 아니라 다만 便宜的인 造出로만 되었고, 第六으로 段形 「밭임」이 上層으로 갈수록에 何等 그 數爻에 變化가 없을 뿐더러 彌勒塔에서는 三段「밭임」이 一段과 二段의 區別, 四段「밭임」이 二段과 二段의 分離가 있어 아주 統一 意識이 없는데 이 王宮坪塔은 三段이 一體로 凝結되어 形式化의 傾向이 있으며, 最終으로 石村의 利用이 王宮坪塔에선 제법 整齊된 秩序를 갖고 있다 하겠다.  
 
|목차2원문5번= {{TagSpage|65-3}}이제 우리가 이王宮坪塔과 彌勒塔과를 比較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屋蓋石의 形式과 層段「밭임」의 類似에서 兩者의 氣魄이 同一함을 볼 수 있고 다시 그 外樣의 類似에서 世代(年代가 아니다)의 同一할 것이 推想된다. 實로 누가 否 {{TagPage|66-1}}定하랴 否定할 수 없는 樣式 感情의 類似를 본다. 이것이 누구나 이 兩塔을 時代的으로 同一視케 하는 가장 큰 特點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이 兩塔의 類似함을 우리는 認定할 수 있는 同時에 우리는 다시 이 兩塔 間의 差異를 볼 수 있다. 第一로 王宮坪塔은 彌勒塔에 없는 基壇의 性質에 屬할 높은 基臺를 가졌고, 第二로 初層屋身이 彌勒塔과 같이 木造 塔婆의 三間壁을 忠實히 形成한 것이 아니라 한 塊體로 略式的 凝結을 보였으되 二間의 區別은 實際 木造 塔婆의 構造的 意味를 떠났고, 第三으로 二層 以上의 屋身은 全혀 彌勒塔에서와 같은 끝까지 三間壁을 보이려는 誠意를 버리고 一間壁으로써 公約시켰으며, 第四로 屋身의 各 柱形이 彌勒塔에서와 같이 各個 獨立된 別石으로 忠實히 木造 建物의 柱形에서 볼 수 있는 「엔터시스」를 이루지 않고 壁面石의 끝에 簡單한 便化的 手法으로 柱形의 意態만 보였고, 第五로 屋蓋石과 屋身과의 連接部面의「괴임」이 彌勒塔에서와 같이 別石으로 結構되어 있음이 아니라 다만 便宜的인 造出로만 되었고, 第六으로 段形 「밭임」이 上層으로 갈수록에 何等 그 數爻에 變化가 없을 뿐더러 彌勒塔에서는 三段「밭임」이 一段과 二段의 區別, 四段「밭임」이 二段과 二段의 分離가 있어 아주 統一 意識이 없는데 이 王宮坪塔은 三段이 一體로 凝結되어 形式化의 傾向이 있으며, 最終으로 石村의 利用이 王宮坪塔에선 제법 整齊된 秩序를 갖고 있다 하겠다.  
 
|목차2원문6번= {{TagSpage|66-2}}即 이 兩塔의 이러한 異同을 樣式的 見地에서 比較 評價하자면 彌勒塔과 王宮坪塔이 다같이 方形平面의 木造 塔婆 樣式의 再現 形式이면서 彌勒塔은 架構에 置重된 作品이요 王宮坪塔은 凝集結晶으로의 傾向을 보이기 시작한 作品이라 하겠다. 彌勒塔은 純架構的 建築的 階段에 머물러 있고 王宮坪塔은 凝集的 彫刻的 傾向으로 기울어져 있다. 彌勒塔 舊樣式(即 木造 塔婆 樣式)을 忠實히 再現하고 模倣하였기 때문에 全體로 形式上 破端을 보이지 아니한, 即 舊樣式의 末端에 가라앉은 無難된 形式이요, 王宮坪塔은 舊樣式의 羈縡으로부터 벗어나와 새로운 形式을 보이려다가 아직 보이지 {{TagPage|67-1}}못한─即 新形式의 始初에 올라서서 아주 그 理想의 達成을 얻지 못하여 많은 破端을 내인 難色의 作品이다.
 
|목차2원문6번= {{TagSpage|66-2}}即 이 兩塔의 이러한 異同을 樣式的 見地에서 比較 評價하자면 彌勒塔과 王宮坪塔이 다같이 方形平面의 木造 塔婆 樣式의 再現 形式이면서 彌勒塔은 架構에 置重된 作品이요 王宮坪塔은 凝集結晶으로의 傾向을 보이기 시작한 作品이라 하겠다. 彌勒塔은 純架構的 建築的 階段에 머물러 있고 王宮坪塔은 凝集的 彫刻的 傾向으로 기울어져 있다. 彌勒塔 舊樣式(即 木造 塔婆 樣式)을 忠實히 再現하고 模倣하였기 때문에 全體로 形式上 破端을 보이지 아니한, 即 舊樣式의 末端에 가라앉은 無難된 形式이요, 王宮坪塔은 舊樣式의 羈縡으로부터 벗어나와 새로운 形式을 보이려다가 아직 보이지 {{TagPage|67-1}}못한─即 新形式의 始初에 올라서서 아주 그 理想의 達成을 얻지 못하여 많은 破端을 내인 難色의 作品이다.
 
|목차2원문7번= {{TagSpage|67-2}}이리하여 王宮坪塔과 彌勒塔이 서로 같다 하나 같지 아니함을 본다. 같지 않다 하나 그 範疇가 또한 아주 다른 것도 아니다. 같지 않은 듯하되 같고, 같은 듯하되 같지 아니함은 結局에 있어 서로 같은 類型의 範疇에 屬하여, 하나는 樣式史的으로 그 上限에 處하여 있고 다른 하나는 그 下限에 處하여 있는 까닭이다. 이 兩限의 사이에는 勿論 歲月의 差란 것도 끼워있는 것이지만 이 歲月의 差라는것은 그러나 樣式論的으로 이 兩塔만의 比較에서는 나오지 아니하니 우리는 다시 第三의 作品을 끌어올 必要가 있다. 그것은 即 扶餘邑 南에 있는 大唐平百濟塔이란 것이다.
 
|목차2원문7번= {{TagSpage|67-2}}이리하여 王宮坪塔과 彌勒塔이 서로 같다 하나 같지 아니함을 본다. 같지 않다 하나 그 範疇가 또한 아주 다른 것도 아니다. 같지 않은 듯하되 같고, 같은 듯하되 같지 아니함은 結局에 있어 서로 같은 類型의 範疇에 屬하여, 하나는 樣式史的으로 그 上限에 處하여 있고 다른 하나는 그 下限에 處하여 있는 까닭이다. 이 兩限의 사이에는 勿論 歲月의 差란 것도 끼워있는 것이지만 이 歲月의 差라는것은 그러나 樣式論的으로 이 兩塔만의 比較에서는 나오지 아니하니 우리는 다시 第三의 作品을 끌어올 必要가 있다. 그것은 即 扶餘邑 南에 있는 大唐平百濟塔이란 것이다.
|목차2원문8번= {{TagSpage|67-3}}大唐平百濟塔은 우리가 오히려 {{TagRef|2-4}}廢定林寺塔으로 부름이 나을 듯한 것이므로 해서<ref>원문주석4</ref> 앞으로는 定林塔이란 稱號로써 指稱하겠지만 이 亦 王宮塔과 같이 外樣만은 五重石塔에 屬하는 것이나 모든 手法 形式에 있어서는 一見 特異한 形態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爲先 單層基壇도 整然하거니와 基壇底臺石 아래 臺盤石이 끼여있음이 오히려 이 塔으로 하여금 時代를 疑心케 할 만한 用意周到處라 하겠다. 低平廣大한 單層基壇은 中間의 「벌임기둥」이 上促下寬의 形式을 이루었을 뿐으로, 左右 兩邊의 「벌임기둥」은 變化가 없고, 屋身은 全體로 一間 面壁을 構成하였으나 一面壁을 兩枚板石이 形成하고 隅柱는 「엔터시스」가 있는 別製石柱로 形成하고 있다. 第二層 以上의 屋身은 高가 極히 短促되어 隅柱에 特別한 收縮 變化(即 「엔터시스」)가 없이 處決되었으나 間壁의 處理는 初層屋身과 다름이 없고, 다만 四五層에 올라가서 屋身壁이 一石으로 되었을 뿐이다. 二層 以上의 屋身의 「괴임」은 勿論 別石으로 整然히 째워있다. 屋蓋石도 平薄廣大한 板石으로 規則整然하게 째여있으되 四隅轉角의 簷端裏面이 깎여 略干 들리는 듯한 感을 내었을 뿐, 全體는 直線的으로 뻗어 {{TagPage|68-1}}있고 屋蓋〿角은 四注隅棟形式의 突起가 제법 表現되어있다. 屋蓋石의「밭임」은 彌勒塔이나 王宮坪塔에서와 같이 層段形「밭임」이 아니요 長方橫石이 額枋兼平板枋의 意味로 一段 놓이고 그 위에 斜菱形長石이 包作橫面의 意味로 놓이었으니 이는 다른 塔에서 볼 수 없는 獨特한 手法이다. 屋蓋石 第四層까지 囲形으로 째여있고 第五層만이 田字形이며, 斜菱形「밭임」도 初層과 二層이 九石, 三層四層이 四石, 五層이 一石으로 모두 整然히 째워있다. 우리는 이 塔에서 무엇보다도 그 石材 結合에 너무나 整頓됨을 보고 둘째로 그 「밭임」의 特殊形式을 보고 셋째로 그 基壇의 成型的임을 본다. 即 이 塔은 무엇보다도 먼저 彌勒塔과 같이 純全한 木造 塔婆의 形式 그대로 充實히 再現한 것이 아니요 王宮坪塔과 같이 벌써 그 樣式을 公約시켜 써새로운 樣式의 産出을 꾀한 것으로 構式 發展史 上 이것은 彌勒塔에 다음 가는 것으로 設定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細部 手法으로 말하더라도 彌勒塔의 純「架構的」 築造 手法과 定林塔의 「精構的」 手法(例컨댄 定林塔의 斜菱形「밭임」下의 長方石이 全體 四枚로 되었으되 全平面이 四分派된 田字形이라든지 口字形의 配置가 아니라 回形 配置로 서로 엇물리게 되었으니 前者「架構的」이라 形言한다면 後者는「結構的」이라 할 수 있다) 이 發生史的 差異를 또한 말한다 할 수 있다. 이 外에도 部分的 形式, 樣式的 手法 等에서 兩者의 先後를 立證할 要素를 많이 보나, 一一히 擧論치 아니하겠고 以下의 叙述을 따라 漸次 說明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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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8번= {{TagSpage|67-3}}大唐平百濟塔은 우리가 오히려 {{TagRef|2-4}}廢定林寺塔으로 부름이 나을 듯한 것이므로 해서<ref>葛城末治 著 朝鮮金石攷 第 157圓에 依하면 大正 6年 春, 이 塔의 東側에서 <cite no="XX">""</cite>「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勒(??)」이라 陽刻된 瓦片이 發見된 바 있어 이곳이 定林寺 廢址인 것이 推測된다는 意味의 句가 있으니 이로써 보면 高麗朝까지도 燃燈이 不絶하였던 百濟 古刹로 割酌이 된다. 뿐만 아니라 後에 本文에 叙述될 바와 같이 이 塔이 唐人의 建立이 아닌즉 大唐平百濟塔이라 稱함은 不當한 양으로 생각된다. </ref> 앞으로는 定林塔이란 稱號로써 指稱하겠지만 이 亦 王宮塔과 같이 外樣만은 五重石塔에 屬하는 것이나 모든 手法 形式에 있어서는 一見 特異한 形態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爲先 單層基壇도 整然하거니와 基壇底臺石 아래 臺盤石이 끼여있음이 오히려 이 塔으로 하여금 時代를 疑心케 할 만한 用意周到處라 하겠다. 低平廣大한 單層基壇은 中間의 「벌임기둥」이 上促下寬의 形式을 이루었을 뿐으로, 左右 兩邊의 「벌임기둥」은 變化가 없고, 屋身은 全體로 一間 面壁을 構成하였으나 一面壁을 兩枚板石이 形成하고 隅柱는 「엔터시스」가 있는 別製石柱로 形成하고 있다. 第二層 以上의 屋身은 高가 極히 短促되어 隅柱에 特別한 收縮 變化(即 「엔터시스」)가 없이 處決되었으나 間壁의 處理는 初層屋身과 다름이 없고, 다만 四五層에 올라가서 屋身壁이 一石으로 되었을 뿐이다. 二層 以上의 屋身의 「괴임」은 勿論 別石으로 整然히 째워있다. 屋蓋石도 平薄廣大한 板石으로 規則整然하게 째여있으되 四隅轉角의 簷端裏面이 깎여 略干 들리는 듯한 感을 내었을 뿐, 全體는 直線的으로 뻗어 {{TagPage|68-1}}있고 屋蓋〿角은 四注隅棟形式의 突起가 제법 表現되어있다. 屋蓋石의「밭임」은 彌勒塔이나 王宮坪塔에서와 같이 層段形「밭임」이 아니요 長方橫石이 額枋兼平板枋의 意味로 一段 놓이고 그 위에 斜菱形長石이 包作橫面의 意味로 놓이었으니 이는 다른 塔에서 볼 수 없는 獨特한 手法이다. 屋蓋石 第四層까지 囲形으로 째여있고 第五層만이 田字形이며, 斜菱形「밭임」도 初層과 二層이 九石, 三層四層이 四石, 五層이 一石으로 모두 整然히 째워있다. 우리는 이 塔에서 무엇보다도 그 石材 結合에 너무나 整頓됨을 보고 둘째로 그 「밭임」의 特殊形式을 보고 셋째로 그 基壇의 成型的임을 본다. 即 이 塔은 무엇보다도 먼저 彌勒塔과 같이 純全한 木造 塔婆의 形式 그대로 充實히 再現한 것이 아니요 王宮坪塔과 같이 벌써 그 樣式을 公約시켜 써새로운 樣式의 産出을 꾀한 것으로 構式 發展史 上 이것은 彌勒塔에 다음 가는 것으로 設定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細部 手法으로 말하더라도 彌勒塔의 純「架構的」 築造 手法과 定林塔의 「精構的」 手法(例컨댄 定林塔의 斜菱形「밭임」下의 長方石이 全體 四枚로 되었으되 全平面이 四分派된 田字形이라든지 口字形의 配置가 아니라 回形 配置로 서로 엇물리게 되었으니 前者「架構的」이라 形言한다면 後者는「結構的」이라 할 수 있다) 이 發生史的 差異를 또한 말한다 할 수 있다. 이 外에도 部分的 形式, 樣式的 手法 等에서 兩者의 先後를 立證할 要素를 많이 보나, 一一히 擧論치 아니하겠고 以下의 叙述을 따라 漸次 說明될 줄로 믿는다.
 
|목차2원문9번= {{TagSpage|68-2}}그러면 爲先 定林塔이 樣式的으로 彌勒塔의 下風에 든다 하고 다음에 定林塔이 彌勒塔에 대한 順次的 距離와 王宮坪塔이 彌勒塔에 대한 順次的 距離와의 相互差는 어떠한 것일가─即 彌勒塔, 定林塔, 王宮坪塔, 三者의 樣式史的 順位의 問題이다. 이때 筆者는 樣式 發展史的으로보아 定林塔이 王宮坪塔보다 앞선 것으로, 따라서 이 三者의 順次를 定한다{{TagPage|69-1}}면 彌勒塔이 第一位, 定林塔이 第二位, 王宮坪塔이 第三位로 羅立케 된다. 이것은 어떠한 理由에서이냐─이것을 設明하기 爲하여 다음에 우리는 定林塔과 王宮坪塔과의 比較를 꾀하지 아니할 수 없다.
 
|목차2원문9번= {{TagSpage|68-2}}그러면 爲先 定林塔이 樣式的으로 彌勒塔의 下風에 든다 하고 다음에 定林塔이 彌勒塔에 대한 順次的 距離와 王宮坪塔이 彌勒塔에 대한 順次的 距離와의 相互差는 어떠한 것일가─即 彌勒塔, 定林塔, 王宮坪塔, 三者의 樣式史的 順位의 問題이다. 이때 筆者는 樣式 發展史的으로보아 定林塔이 王宮坪塔보다 앞선 것으로, 따라서 이 三者의 順次를 定한다{{TagPage|69-1}}면 彌勒塔이 第一位, 定林塔이 第二位, 王宮坪塔이 第三位로 羅立케 된다. 이것은 어떠한 理由에서이냐─이것을 設明하기 爲하여 다음에 우리는 定林塔과 王宮坪塔과의 比較를 꾀하지 아니할 수 없다.
 
|목차2원문10번= {{TagSpage|69-2}}우리는 이 兩者를 比較할제 무엇보다도 먼저 눈 띄는 것은 그 屋板石들의 平薄廣大한 類似點이지만 그보다도 屋蓋接式의 結構手法이 兩者가 全然 同一한 點이다. 即 九枚板石을 整然히 架構하여 있는 手法의 類似이니 다만 差異가 있다면 定林塔에선 四層까지 同一한 手法으로 되어있는데 王宮坪塔에선 三層까지로 되어있다. 이 架構의 手法은 번대 彌勒塔에서 發生한 것으로 彌勒塔의 四隅轉角石이 그냥 그대로 傅하여지고 中間의 많은 板石이 公約된 形式이니 王宮坪塔에서의 手法은 定林塔으로 아마 公約된 形式을 다시 더 한層 略化시킨 것으로 解釋된다. 定林塔과 王宮坪塔이 屋蓋 形式이 全혀 同一하면서 架構에 草略意思가 벌써 王宮塔에 現著하다. 그뿐 아니라 基壇의 異同은 問題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王宮坪塔에서의 地臺의 秀高함은 定林塔은 基壇의 低平함에 比하여 樣式史的 順位에 있어 뒤떨어짐을 暗示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屋身構成에있어 定林塔은 最終까지 整然한 架構로 되어 있지만 整頓되어 있지 않고 各層 各面이 不一하여 오직 全體의 外樣만을 要約하려는 意思가 濃厚하다. {{ruby|말하자면|●●●●}} {{ruby|定林塔은|●●●●}} {{ruby|彌勒塔의|●●●●}} {{ruby|架構的|●●●}} {{ruby|特質을|●●●}} {{ruby|最大公約數로|●●●●●●}} {{ruby|簡化하려하여|●●●●●●}} {{ruby|그에|●●}} {{ruby|成功하였고|●●●●●}} {{ruby|王宮坪塔은|●●●●●}} {{ruby|이|●}} {{ruby|架構形式의|●●●●●}} {{ruby|完結이라기보다|●●●●●●}} {{ruby|어떻게|●●●}} {{ruby|그곳에서|●●●●}} {{ruby|벗어나서|●●●●}} {{ruby|彫刻的인|●●●●}} {{ruby|凝集形式으로|●●●●●}} {{ruby|넘어설까를|●●●●●}} {{ruby|苦心한|●●●}} {{ruby|作品이라|●●●●}} {{ruby|하겠으니|●●●●}} 이 彫刻的인 意思의 萌芽는 그 塔身의 隅柱가 公式的으로 彫出되어 있는 것과 屋蓋 上部에 屋身 「괴임」이 彫出되어있는 點에서도 넉넉히 읽을 수 있는 點이다. 隅柱의 樣式만해도 定林塔에선 彈力的인 生氣를 띄웠고 王宮坪塔에선 便化的인 頹廢에 떨어졌다. 定林塔의 隅柱는 彌勒塔의 隅柱를 그대로 이어 받았고 王宮坪堵의 隅柱는 그것을 背叛하였다. 定林塔의 隅柱는 舊樣式에 젖어있고, {{TagPage|70-1}}王宮塔의 隅柱 形式은 (비록 藝術的 見地로서 볼제는 아름다웁지 못하지만)新樣式의 形態이다. 萬一에 이 兩塔의 層蓋에서의 저 「밭임」樣式의 相異와 基壇의 相異만 없었더라면 누구나 容易히 定林塔이 彌勒塔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點에서 우리는 容易히 定林塔을 彌勒塔에 다음 두고 王宮坪塔을 定林塔에 다음 두는 것이다. 藝術的 價値로 보아 勿論 定林塔은 王宮坪塔보다 越等한 優位에 있다. 何必 그뿐이랴!─彌勒塔보다도 優位에 있다. 그러나 藝術的 價値의 優劣은 年代의, 時間의 先後를 決定짓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時代의 類型的 藝術的 氣風이란 勿論 藝術的 直觀을 通하여 直覺할 수 있고 또 그로 말미암아 作品의 時代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지만 이는 要컨댄 가장 客觀的인 樣式 그 自體의 科學的  論理的 變化를 把撮한 위에 可能한 것이요, 한갓 藝術的 價値의 優劣만 가지고는 決定짓지 못할 問題라고 믿는다. 即 價値와 歷史는 다른 까닭이다. 藝術的 作品의 史的 考察을 꾀함에 있어 恒常 빠지기 쉬운 것은 이 藝術的 價値의 優劣과, 藝術的 時代性에 關한 性格과 樣式 그 自體의 變化相 等을 甄別치 못하고 雜然된 昏述에서 分別을 꾀하는 誤謬에 있다 하겠다. 即 이 境遇에 있어서 定林塔이 彌勒塔이나 王宮坪塔보다 藝術的 價値에 있어 優位에 있다 하여 그로써 곧 定林塔을 時代的으로도 第一位에 두려는 學者가 없지 않거니와 以上 叙述한 理由에서 이 三塔 이 時代的 性格으로 同一하고 樣式史的으론 彌勒塔─定林塔─王宮坪塔의 順次가 되는 것을 讀者는 理解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三塔 間의 順位를 세운다.
 
|목차2원문10번= {{TagSpage|69-2}}우리는 이 兩者를 比較할제 무엇보다도 먼저 눈 띄는 것은 그 屋板石들의 平薄廣大한 類似點이지만 그보다도 屋蓋接式의 結構手法이 兩者가 全然 同一한 點이다. 即 九枚板石을 整然히 架構하여 있는 手法의 類似이니 다만 差異가 있다면 定林塔에선 四層까지 同一한 手法으로 되어있는데 王宮坪塔에선 三層까지로 되어있다. 이 架構의 手法은 번대 彌勒塔에서 發生한 것으로 彌勒塔의 四隅轉角石이 그냥 그대로 傅하여지고 中間의 많은 板石이 公約된 形式이니 王宮坪塔에서의 手法은 定林塔으로 아마 公約된 形式을 다시 더 한層 略化시킨 것으로 解釋된다. 定林塔과 王宮坪塔이 屋蓋 形式이 全혀 同一하면서 架構에 草略意思가 벌써 王宮塔에 現著하다. 그뿐 아니라 基壇의 異同은 問題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王宮坪塔에서의 地臺의 秀高함은 定林塔은 基壇의 低平함에 比하여 樣式史的 順位에 있어 뒤떨어짐을 暗示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屋身構成에있어 定林塔은 最終까지 整然한 架構로 되어 있지만 整頓되어 있지 않고 各層 各面이 不一하여 오직 全體의 外樣만을 要約하려는 意思가 濃厚하다. {{ruby|말하자면|●●●●}} {{ruby|定林塔은|●●●●}} {{ruby|彌勒塔의|●●●●}} {{ruby|架構的|●●●}} {{ruby|特質을|●●●}} {{ruby|最大公約數로|●●●●●●}} {{ruby|簡化하려하여|●●●●●●}} {{ruby|그에|●●}} {{ruby|成功하였고|●●●●●}} {{ruby|王宮坪塔은|●●●●●}} {{ruby|이|●}} {{ruby|架構形式의|●●●●●}} {{ruby|完結이라기보다|●●●●●●}} {{ruby|어떻게|●●●}} {{ruby|그곳에서|●●●●}} {{ruby|벗어나서|●●●●}} {{ruby|彫刻的인|●●●●}} {{ruby|凝集形式으로|●●●●●}} {{ruby|넘어설까를|●●●●●}} {{ruby|苦心한|●●●}} {{ruby|作品이라|●●●●}} {{ruby|하겠으니|●●●●}} 이 彫刻的인 意思의 萌芽는 그 塔身의 隅柱가 公式的으로 彫出되어 있는 것과 屋蓋 上部에 屋身 「괴임」이 彫出되어있는 點에서도 넉넉히 읽을 수 있는 點이다. 隅柱의 樣式만해도 定林塔에선 彈力的인 生氣를 띄웠고 王宮坪塔에선 便化的인 頹廢에 떨어졌다. 定林塔의 隅柱는 彌勒塔의 隅柱를 그대로 이어 받았고 王宮坪堵의 隅柱는 그것을 背叛하였다. 定林塔의 隅柱는 舊樣式에 젖어있고, {{TagPage|70-1}}王宮塔의 隅柱 形式은 (비록 藝術的 見地로서 볼제는 아름다웁지 못하지만)新樣式의 形態이다. 萬一에 이 兩塔의 層蓋에서의 저 「밭임」樣式의 相異와 基壇의 相異만 없었더라면 누구나 容易히 定林塔이 彌勒塔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點에서 우리는 容易히 定林塔을 彌勒塔에 다음 두고 王宮坪塔을 定林塔에 다음 두는 것이다. 藝術的 價値로 보아 勿論 定林塔은 王宮坪塔보다 越等한 優位에 있다. 何必 그뿐이랴!─彌勒塔보다도 優位에 있다. 그러나 藝術的 價値의 優劣은 年代의, 時間의 先後를 決定짓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時代의 類型的 藝術的 氣風이란 勿論 藝術的 直觀을 通하여 直覺할 수 있고 또 그로 말미암아 作品의 時代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지만 이는 要컨댄 가장 客觀的인 樣式 그 自體의 科學的  論理的 變化를 把撮한 위에 可能한 것이요, 한갓 藝術的 價値의 優劣만 가지고는 決定짓지 못할 問題라고 믿는다. 即 價値와 歷史는 다른 까닭이다. 藝術的 作品의 史的 考察을 꾀함에 있어 恒常 빠지기 쉬운 것은 이 藝術的 價値의 優劣과, 藝術的 時代性에 關한 性格과 樣式 그 自體의 變化相 等을 甄別치 못하고 雜然된 昏述에서 分別을 꾀하는 誤謬에 있다 하겠다. 即 이 境遇에 있어서 定林塔이 彌勒塔이나 王宮坪塔보다 藝術的 價値에 있어 優位에 있다 하여 그로써 곧 定林塔을 時代的으로도 第一位에 두려는 學者가 없지 않거니와 以上 叙述한 理由에서 이 三塔 이 時代的 性格으로 同一하고 樣式史的으론 彌勒塔─定林塔─王宮坪塔의 順次가 되는 것을 讀者는 理解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三塔 間의 順位를 세운다.
|목차2원문11번= {{TagSpage|70-2}}그러나 이곳에 우리가 樣式論的으로보아 가장 重要한 一點을 除外코 論하여 왔으니 그는 即 다름이 아닌 屋蓋의 「밭임」 樣式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稿이 처음서부터 意識的으로 남겨둔 問題로서 故 關野貞 博士가 彌勒塔이나 王宮坪塔 {{TagPage|71-1}}을 論하여 반드시 이 定林塔보다 앞서지 못할 것으로 보려 한 그 所謂 樣式上 問題란 것이(本稿□3□中 引用文參考) 그 具體的 指示點을 筆者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要컨댄 이 「밭임」 樣式에 있을 것 같다. 이것은 朝鮮의 石塔을 云謂하는 學者─ 누구나 반드시 그 層級式 「밭임」樣式을 璣塔 手法에서 出發한 {{TagRef|5}}新羅의 樣式, 新羅에 固有된 特色같이 一般히 論하고 있는 點에서도<ref>원문주석5</ref> 容易히 推測되는 바이다. 即 그들의 意見은 이 層級式「밭임」 樣式이란 元來 塼塔屋蓋에 固有한 것으로, 朝鮮에 있어서의 塼塔의 實在는 善德王 3年에 造成된 芬皇寺의 遺塔에서 비롯하였고, 以後 朝鮮의 諸塔이란 것이 그 中에서도 特히 新羅의 諸作이 모두 이 塼塔屋蓋의 「밭임」樣式을 嚴守하고 있는 點에서 이미 彌勒塔과 王宮塔이 저와 같은 層級式 「밭임」樣式을 가지고 있는 以上 그것은 벌써 新羅 系統의 樣式 範疇안에 屬하는 것이요 따라서 저 芬皇塔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兼하여 勿論 定林塔과의 關係를 벗어나 時代的으로도 그 下風에 드는 것으로 보려는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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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1번= {{TagSpage|70-2}}그러나 이곳에 우리가 樣式論的으로보아 가장 重要한 一點을 除外코 論하여 왔으니 그는 即 다름이 아닌 屋蓋의 「밭임」 樣式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稿이 처음서부터 意識的으로 남겨둔 問題로서 故 關野貞 博士가 彌勒塔이나 王宮坪塔 {{TagPage|71-1}}을 論하여 반드시 이 定林塔보다 앞서지 못할 것으로 보려 한 그 所謂 樣式上 問題란 것이(本稿□3□中 引用文參考) 그 具體的 指示點을 筆者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要컨댄 이 「밭임」 樣式에 있을 것 같다. 이것은 朝鮮의 石塔을 云謂하는 學者─ 누구나 반드시 그 層級式 「밭임」樣式을 璣塔 手法에서 出發한 {{TagRef|2-5}}新羅의 樣式, 新羅에 固有된 特色같이 一般히 論하고 있는 點에서도<ref>石田茂作 「土塔につ就て」 (考古學雜誌 第17號) 藤島亥治郎 博士 「慶州お中心上とせる新羅時代石塔の隷合的硏究」 (建築雜誌 昭和 9年 1月號)</ref> 容易히 推測되는 바이다. 即 그들의 意見은 이 層級式「밭임」 樣式이란 元來 塼塔屋蓋에 固有한 것으로, 朝鮮에 있어서의 塼塔의 實在는 善德王 3年에 造成된 芬皇寺의 遺塔에서 비롯하였고, 以後 朝鮮의 諸塔이란 것이 그 中에서도 特히 新羅의 諸作이 모두 이 塼塔屋蓋의 「밭임」樣式을 嚴守하고 있는 點에서 이미 彌勒塔과 王宮塔이 저와 같은 層級式 「밭임」樣式을 가지고 있는 以上 그것은 벌써 新羅 系統의 樣式 範疇안에 屬하는 것이요 따라서 저 芬皇塔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兼하여 勿論 定林塔과의 關係를 벗어나 時代的으로도 그 下風에 드는 것으로 보려는 것인 듯하다.  
 
|목차2원문12번= {{TagSpage|71-2}}그러나 이러한 見解는 여러가지 修訂과 制限을 받아야 할 것으로 筆者는 생각하는 바이니 新羅의 石塔 樣式 中 그 層級形 「밭임」이 壞塔의 手法에서 由來된 것이요 또 그것이 新羅 石塔의 根幹을 이룬 手法임을 認定함에 筆者는 躊躇치 아니하지만 적어도 이 彌勒塔에서는 이와 같은 觀念으로서는 解決되지 아니하는 여러 點이 있다.  第一로 新羅의 定型的 塔婆들의 屋蓋에선 屋蓋의 簾端과「밭임」과의 물림 사이가 極히 短促되어 있을 뿐더러 「밭임」의 層級數가 初期의 것으로 看儆되어 있는 것은 모두 五級에 限한 數交일 뿐더러 塔身의 各層에 있어 上下가 모두 그 數爻를 같이 하거나 또는 그렇지아니하면 上層에 이를수록 「밭임」의 數爻가 減少되는 것이 原則이나 이 彌勒塔에 있어서는 屋檐과 「밭임」과의 물림이 廣潤할 뿐더러 上層에 오를수록 그 數爻도 增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밭임」의 各高도 新羅 諸石塔에서와 같이 上下가 如一치 아니하다. 이러한 相異는 即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彌勒에서의 「밭임」手法이 塼塔에서의 層蓋「밭임」{{TagPage|72-1}} 手法을 〿〿하지 않고 다만 類型的인 {{ruby|築壞的|●●●}} {{ruby|手法을|●●●}} 應用한 始初 試驗的인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ruby|事實로|●●●}} {{ruby|塼塔에서의|●●●●}} {{ruby|形式이|●●●}} {{ruby|아니오|●●●}} 그 {{ruby|以前와|●●●}} {{ruby|築塼的|●●●}} {{ruby|手法의|●●●}} {{ruby|應用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고 이 築塼 手法의 應用에 대한 着眼은 何必 慶州 芬皇寺 石塔과 같은 模塼塔이 생긴 以後에 新羅人으로 말미암아 試驗되었다거나 或은 試驗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政治的으로 文化的으로 先進이었던 百濟人의 손으로도 着手될 根據가 十分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公州에서 發見된 宋山里의 築塚古墳과 廣州·公州·扶餘 等에 多數한 雜石古墳의 築造樣式이 이미 그 先驅를 이룬 것이요 또 朝鮮 內에서의 그 先驅的 手法을 찾자면 平壤과 및 高句麗의 前 都邑地인 滿洲 通化省 輯安縣 內에 多數한 高句麗 古墳의 天井「밭임」이 이것을 證明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차2원문12번= {{TagSpage|71-2}}그러나 이러한 見解는 여러가지 修訂과 制限을 받아야 할 것으로 筆者는 생각하는 바이니 新羅의 石塔 樣式 中 그 層級形 「밭임」이 壞塔의 手法에서 由來된 것이요 또 그것이 新羅 石塔의 根幹을 이룬 手法임을 認定함에 筆者는 躊躇치 아니하지만 적어도 이 彌勒塔에서는 이와 같은 觀念으로서는 解決되지 아니하는 여러 點이 있다.  第一로 新羅의 定型的 塔婆들의 屋蓋에선 屋蓋의 簾端과「밭임」과의 물림 사이가 極히 短促되어 있을 뿐더러 「밭임」의 層級數가 初期의 것으로 看儆되어 있는 것은 모두 五級에 限한 數交일 뿐더러 塔身의 各層에 있어 上下가 모두 그 數爻를 같이 하거나 또는 그렇지아니하면 上層에 이를수록 「밭임」의 數爻가 減少되는 것이 原則이나 이 彌勒塔에 있어서는 屋檐과 「밭임」과의 물림이 廣潤할 뿐더러 上層에 오를수록 그 數爻도 增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밭임」의 各高도 新羅 諸石塔에서와 같이 上下가 如一치 아니하다. 이러한 相異는 即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彌勒에서의 「밭임」手法이 塼塔에서의 層蓋「밭임」{{TagPage|72-1}} 手法을 〿〿하지 않고 다만 類型的인 {{ruby|築壞的|●●●}} {{ruby|手法을|●●●}} 應用한 始初 試驗的인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ruby|事實로|●●●}} {{ruby|塼塔에서의|●●●●}} {{ruby|形式이|●●●}} {{ruby|아니오|●●●}} 그 {{ruby|以前와|●●●}} {{ruby|築塼的|●●●}} {{ruby|手法의|●●●}} {{ruby|應用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고 이 築塼 手法의 應用에 대한 着眼은 何必 慶州 芬皇寺 石塔과 같은 模塼塔이 생긴 以後에 新羅人으로 말미암아 試驗되었다거나 或은 試驗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政治的으로 文化的으로 先進이었던 百濟人의 손으로도 着手될 根據가 十分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公州에서 發見된 宋山里의 築塚古墳과 廣州·公州·扶餘 等에 多數한 雜石古墳의 築造樣式이 이미 그 先驅를 이룬 것이요 또 朝鮮 內에서의 그 先驅的 手法을 찾자면 平壤과 및 高句麗의 前 都邑地인 滿洲 通化省 輯安縣 內에 多數한 高句麗 古墳의 天井「밭임」이 이것을 證明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차2원문13번= {{TagSpage|72-2}}그러나 다시 또 한번 생각한다면 이 手法은 구태 築塼手法이라는 것을 생각할 必要도 없이 純力學的 物理學的으로 必然히 나올 수 있는 手法이 아닐까. 即 廐幅이 적은 材料로써 空間을 넓혀간다든지 좁혀간다든지 또는 塊體를 쌓아 모은다든지 이어받자면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必然的으로 物理學的 原則에 依해서 나올 수 있는 形式이라고 할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埃及싹카라 (Sakkara)의 段形「피라밑」나 高句麗의 段形方墳이 時代를 달리 하고 地域을 달리 하고 民族을 달리 하고 相互의 影響을 無視하고 생길 수 있었던 것이며 高句麗 封土古墳의 天井의 段形「밭임」 百濟의 彌勒塔의 段形「밭임」이 一은 地下, 一은 地表의 差異를 갖고도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結局 石塔屋裏의 層級形「밭임」이 朝鮮에 塼塔이 생긴 以後의 現象이었다느니보다 그 以前에 벌써 저러한 {{ruby|試驗|●●}}이 있을 수 있었드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이곳에 또 想像까지 곁붙여 이것을 解釋한다면 彌勒塔에서의 「밭임」 形式은 그 手法만이 築塼手法에서 暗示되었달 뿐이지 內在한 意識은 根本的으로 木造 建物의 包(鋪)作意思를 表現코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勿論 이것은 다 {{TagPage|73-1}}른 右塔에서의 「밭임」들도 本意思는 이곳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 諸塔의 「밭임」에서는 木造 建物의 包作面을 迹想시킨다는 것보다도 堀塔에서의 「밭임」形式의 公式化, 移植化라는 것을 굳이 느끼게 함에 比하여 彌勒塔에서의 그것은 包作面을 이내 곧 連想케 한다.(부주 주석) 이것은「발림」의 第一級이 第二第三級과 마로히 厚高로운一石으로 經營된 點에서 이 第一級은 包作의 一部람보다도 오히려 木造 建物에서 額枋 乃至 桁枋을 連想케 하는 點이 많고 (第二 乃至 第四層 間의 屋身에서 이 點을 더욱 切實히 본다) 「밭임」의 第二級과 第三級이 連接된 一石에서 造成된 面에서 重昂 包作의 包作面을 連想케 한다. 第五層 屋身으로부터는 級數가 ᅳ層이 늦어 四級이 되었으며 上下가 兩分되어 있다. 第一級 勿論 额枋 乃至 桁枋의 뜻일 것이요 나머지 三級은 三重䀚包作의 意思일 것이다. 即 屋身의 四層까지는 重昻包作이요 第五層부터는 三重䀚包作으로 瞻仰의 調和美를 꾀하였던 것으로 理解된다. 이러한 手法은 實際 朝鮮에 現在한 報恩 俗離山 法住寺의 五重塔「밭임」은 四重翹頭 乃至 五重劒頭의 包作面을 表示하는 것이라 하여야 하겠지만 그곳에서 받는 樣式感은 直接的이 아니라 間接的인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은 決局 意思와 意思 表現 사이에 間在한 手法─即 塼塔手法의 使然함이 아닌가─그렇다면 新羅诸塔에서의 層級「밭임」 手法을 塼塔手法의 影響下에 된 것으로 解釋하여도 無妨한 것일 것이다. 다만 新羅塔에 대한 이러한 槪念이 彌勒塔에까지 累진다면 우리는 마땅히 警戒하여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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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3번= {{TagSpage|72-2}}그러나 다시 또 한번 생각한다면 이 手法은 구태 築塼手法이라는 것을 생각할 必要도 없이 純力學的 物理學的으로 必然히 나올 수 있는 手法이 아닐까. 即 廐幅이 적은 材料로써 空間을 넓혀간다든지 좁혀간다든지 또는 塊體를 쌓아 모은다든지 이어받자면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必然的으로 物理學的 原則에 依해서 나올 수 있는 形式이라고 할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埃及싹카라 (Sakkara)의 段形「피라밑」나 高句麗의 段形方墳이 時代를 달리 하고 地域을 달리 하고 民族을 달리 하고 相互의 影響을 無視하고 생길 수 있었던 것이며 高句麗 封土古墳의 天井의 段形「밭임」 百濟의 彌勒塔의 段形「밭임」이 一은 地下, 一은 地表의 差異를 갖고도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結局 石塔屋裏의 層級形「밭임」이 朝鮮에 塼塔이 생긴 以後의 現象이었다느니보다 그 以前에 벌써 저러한 {{ruby|試驗|●●}}이 있을 수 있었드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이곳에 또 想像까지 곁붙여 이것을 解釋한다면 彌勒塔에서의 「밭임」 形式은 그 手法만이 築塼手法에서 暗示되었달 뿐이지 內在한 意識은 根本的으로 木造 建物의 包(鋪)作意思를 表現코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勿論 이것은 다 {{TagPage|73-1}}른 右塔에서의 「밭임」들도 本意思는 이곳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 諸塔의 「밭임」에서는 木造 建物의 包作面을 迹想시킨다는 것보다도 堀塔에서의 「밭임」形式의 公式化, 移植化라는 것을 굳이 느끼게 함에 比하여 {{TagRef|附記}}彌勒塔에서의 그것은 包作面을 이내 곧 連想케 한다.<ref>원문부기주석</ref> 이것은「밭임」의 第一級이 第二第三級과 마로히 厚高로운一石으로 經營된 點에서 이 第一級은 包作의 一部람보다도 오히려 木造 建物에서 額枋 乃至 桁枋을 連想케 하는 點이 많고 (第二 乃至 第四層 間의 屋身에서 이 點을 더욱 切實히 본다) 「밭임」의 第二級과 第三級이 連接된 一石에서 造成된 面에서 重昂 包作의 包作面을 連想케 한다. 第五層 屋身으로부터는 級數가 ᅳ層이 늦어 四級이 되었으며 上下가 兩分되어 있다. 第一級 勿論 额枋 乃至 桁枋의 뜻일 것이요 나머지 三級은 三重䀚包作의 意思일 것이다. 即 屋身의 四層까지는 重昻包作이요 第五層부터는 三重䀚包作으로 瞻仰의 調和美를 꾀하였던 것으로 理解된다. 이러한 手法은 實際 朝鮮에 現在한 報恩 俗離山 法住寺의 五重塔「밭임」은 四重翹頭 乃至 五重劒頭의 包作面을 表示하는 것이라 하여야 하겠지만 그곳에서 받는 樣式感은 直接的이 아니라 間接的인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은 決局 意思와 意思 表現 사이에 間在한 手法─即 塼塔手法의 使然함이 아닌가─그렇다면 新羅诸塔에서의 層級「밭임」 手法을 塼塔手法의 影響下에 된 것으로 解釋하여도 無妨한 것일 것이다. 다만 新羅塔에 대한 이러한 槪念이 彌勒塔에까지 累진다면 우리는 마땅히 警戒하여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목차2원문14번= {{TagSpage|73-2}}우리는 彌勒塔에서의 이 本意를 가장 具體的으로 살린 것이 곧 定林塔이라본다. 即 定林塔에서의 最下一級의「밭임」이 곧 彌勒塔에서의 分離된 蚊下一級의 橫枋과 意味를 같이 한 것이며 그 위의 斜菱 「밭임」 곧 彌勒塔에서의 上部二級의 「발 {{TagPage|74-1}}임」形式을 「모디파이」 식혀서 現實的 包作面을 더욱 더 具體的으로 表現한 것이라 보는 바이다. 그럼으로 外見만으로 본다면 定林塔의 「밭임」樣式은 一見 彌勒塔의 「밭임」 樣式과 매우 동떠러진 形式같이 解釋되기 쉬우나 그러나 그 造型意思라는 內面的 意識을 삷혀본다면 定林塔의 「밭임」 形式이야말로 實로 곧 彌勒塔이 表現코자한 本意를 十分 理解하고 眞實히 理解해서 어찌하면 그 本意를 完全히 表示해볼까 하는 極히 同情된 立場에서 表現해진 形式인가 한다. 이 點에서 그 基壇의 發展態를 臨時 除外한다면 어느 塔보다도 이 定林塔이 彌勒塔의 造型意思를 가장 잘 理解하고서 이워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定林塔이 彌勒塔에 가장 가차운 距離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看點을 바꾸어 表現한다면 定林塔이 곧 彌勒塔 完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王宮坪塔은 形式的으론 彌勒塔을 充實히 再現한 것인 듯하나 그러나 結局에 있어선 彌勒塔의 內面的 意思를 何等 闡發시키지 못한 副守的 遵古的 立場에선 枯息된 模倣的 作品이라 할 수 있다.
 
|목차2원문14번= {{TagSpage|73-2}}우리는 彌勒塔에서의 이 本意를 가장 具體的으로 살린 것이 곧 定林塔이라본다. 即 定林塔에서의 最下一級의「밭임」이 곧 彌勒塔에서의 分離된 蚊下一級의 橫枋과 意味를 같이 한 것이며 그 위의 斜菱 「밭임」 곧 彌勒塔에서의 上部二級의 「발 {{TagPage|74-1}}임」形式을 「모디파이」 식혀서 現實的 包作面을 더욱 더 具體的으로 表現한 것이라 보는 바이다. 그럼으로 外見만으로 본다면 定林塔의 「밭임」樣式은 一見 彌勒塔의 「밭임」 樣式과 매우 동떠러진 形式같이 解釋되기 쉬우나 그러나 그 造型意思라는 內面的 意識을 삷혀본다면 定林塔의 「밭임」 形式이야말로 實로 곧 彌勒塔이 表現코자한 本意를 十分 理解하고 眞實히 理解해서 어찌하면 그 本意를 完全히 表示해볼까 하는 極히 同情된 立場에서 表現해진 形式인가 한다. 이 點에서 그 基壇의 發展態를 臨時 除外한다면 어느 塔보다도 이 定林塔이 彌勒塔의 造型意思를 가장 잘 理解하고서 이워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定林塔이 彌勒塔에 가장 가차운 距離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看點을 바꾸어 表現한다면 定林塔이 곧 彌勒塔 完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王宮坪塔은 形式的으론 彌勒塔을 充實히 再現한 것인 듯하나 그러나 結局에 있어선 彌勒塔의 內面的 意思를 何等 闡發시키지 못한 副守的 遵古的 立場에선 枯息된 模倣的 作品이라 할 수 있다.
 
|목차2원문15번= {{TagSpage|74-2}}以上 우리는 彌勒塔과 定林塔과 王宮坪塔의 造型 意思와 造型 價値와 및 樣式的 位次를 設定하였다. 이 三堵은 實로 곧 木造 塔婆의 樣式再模에서 出發하여 石塔으로서의 한새로운 樣式을 形成하려는 意思에 젖어있는, 아니 젖어있다느니보다 그 意思를 처음으로 보인 始源的인 地位에 있는 作品들이라 할 것이다. 始源的 地位라 함은 結局 典型的인 것의 以前의 것임을 뜻하는 것이니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이 三塔의 樣式이 이 三塔에 限하여 끓여있고 그 以上의 展開가 없다가 新羅 中葉 以後 乃至 高麗朝에 들어 이 系統 속에 編入시킬 略干의 例가 생겼을 뿐이요(此項本橋特殊型修參照件) 擧皆의 石塔은 이 三塔 範疇에서 벗어난 것이 많음으로해서 이 三塔의 樣式이 典型的 樣式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朝鮮 石塔의 定形 {{TagPage|75-1}}式은 이 三塔이 示唆만 보였을 뿐 決定을 짓지 못하였고 그곳에는 다른 試驗이 또 하나 있어 비로소 定立될 機運이 熟成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다른 試驗이란 무엇이냐 하면 그는 即 다름 아닌 義城郡 由雲面 塔里洞 盈尼山 下에 있는 五重石塔이다.  
 
|목차2원문15번= {{TagSpage|74-2}}以上 우리는 彌勒塔과 定林塔과 王宮坪塔의 造型 意思와 造型 價値와 및 樣式的 位次를 設定하였다. 이 三堵은 實로 곧 木造 塔婆의 樣式再模에서 出發하여 石塔으로서의 한새로운 樣式을 形成하려는 意思에 젖어있는, 아니 젖어있다느니보다 그 意思를 처음으로 보인 始源的인 地位에 있는 作品들이라 할 것이다. 始源的 地位라 함은 結局 典型的인 것의 以前의 것임을 뜻하는 것이니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이 三塔의 樣式이 이 三塔에 限하여 끓여있고 그 以上의 展開가 없다가 新羅 中葉 以後 乃至 高麗朝에 들어 이 系統 속에 編入시킬 略干의 例가 생겼을 뿐이요(此項本橋特殊型修參照件) 擧皆의 石塔은 이 三塔 範疇에서 벗어난 것이 많음으로해서 이 三塔의 樣式이 典型的 樣式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朝鮮 石塔의 定形 {{TagPage|75-1}}式은 이 三塔이 示唆만 보였을 뿐 決定을 짓지 못하였고 그곳에는 다른 試驗이 또 하나 있어 비로소 定立될 機運이 熟成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다른 試驗이란 무엇이냐 하면 그는 即 다름 아닌 義城郡 由雲面 塔里洞 盈尼山 下에 있는 五重石塔이다.  
|목차2원문16번= {{TagSpage|75-2}}이 塔의 隷屬寺址名은 不明이고 大東輿地圖에 盈尼山 下에 指表된 이것이 이에 該當한 것임으로 筆者는 이것을 盈尼山塔으로 臨時 號稱코자 하는 바이다.單層基壇 위에서 있는 五重石塔으로 特히 그 屋落 形式에 있어 「밭임」 은 勿論이요 屋表까지도 層級段階를 이루어 一見 塼塔의 屋蓋 形式과 全然 同一한 手法을 보이고 있는 데서 항용 模塼 石塔이라는 稱號 아래 불려져 있는 特殊 形式의 塔이다. 基壇은 朝鮮 石塔으로서의 基壇 中 가장 原始的인 形態를 이룬 것이라 할 만한 것으로 基壇만을 比較한다면 우리는 저 扶餘發 定林寺塔보다도 더 高古한 樣式임을 느낄 수 있다. 定林塔엔 基壇臺下 石下에 다시 臺盤 一石이 있고 또 中石의 「밭임기둥」(從此號稱 「撐柱」)이  中間 一柱만 上促下寬의 形式을 이루고 있는데 比하여 盈尼山塔의 基壇은 臺下石이 一枚만 놓여있고 一面 四介撑柱는 모두 上促下寬의 原始 形態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初層屋身과 基壇과의 接觸에 있어 定林塔은 何等의 加工이었는데 比하야 盈尼山塔은 「괴임」一段으로써 이것을 받아있다. 初層屋身 南壁 正心에는 龕室(高一 四二米, 左右間一 一七米, 深七三리, 佐藤島 博士 實測)이 하나 經營되어 있고 門扇은 없어졌으되 門口周圍에는 二重輪郭線이 浮刻되어 있고 下方에는 一段의 闔限石이 놓였을 뿐더러 門樞 左右(日本建築術語則唐居敷)이 놓여있다(이 門 形式은 慶州高仙寺石塔에 傳承된다.) 4介 隅柱는 定林塔에서와 같은 「엔터시스」의 形式을 이루었고 柱頭에 坐斗가 特히 經營되어있음은 다른 어느 石塔에서도 볼 수 없는 手法이다. (慶州 佛國寺 多寶石塔에는 坐斗 形式의 것이 있으나 이와 같이 寫實的 單形坐斗가 아니며 浮圖에서는 많이 볼 수 있으나 浮圖와 이러한 佛塔과는 같이 論할 수 없다.) 壁上 {{TagPage|76-1}}에는 額枋裄枋이 二重으로 놓여 있고 그 위로 段形 「밭임」이 四出하여 屋簷받고 屋簷 위로 다시 段形 「괴임」이 重疊六出하여 屋蓋 形式을 이루었는데 屋簷轉角의 四隅가 略干 屈仰되어 斷面이 三角形을 이룬 것은 新羅 諸塔의 屋簷轉角 形式에 대한 約束이라 할 수 있다. 二層 以上 屋身에는 中間에 다시 一柱가 있어 全體로 二間面을 이루었고 屋蓋는「밭임」이 五段 「괴임」이 六出로 統一되어있다. 露盤까지 남아있고 覆鉢 以上 相輪部가 全部 逸落된 것은 다른 塔婆들에서와 같다. 全高約 32尺의 大塔인 만큼 石材는 定林塔에서와 같이 整頓되지 아니하고 彌勒塔에서와 같이 全體의 樣式만을 構成하기에 汲々하였다. 初層屋身을 單間平面으로 하였음에 不拘하고(第 2層 以上 四間平面(即一面兩間)으로 〿것은 이 塔 自體에 있어 意思의 不統一이며 實際 木造塔에 있어 있을 수 없는 略式的 樣式이다. 〿蓋의 手法은 確實히 塼塔의서의 그것이며 「밭임」의 五段級層은 (初層에선 四段만 確實하고 一段은 左斗와 面을 같이 하엿기 때문에 確實치 아니하나 全體로 亦 五段形式이다) 後代 新羅 石塔의 「밭임」手法에 대한한 範疇를 이루었다. 屋簷輛角의 手法과 함께 初層屋身의 「괴임」形式도 後代 石塔의 初層屋身의「괴임」形式에 대한한 約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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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6번= {{TagSpage|75-2}}이 塔의 隷屬寺址名은 不明이고 大東輿地圖에 盈尼山 下에 指表된 이것이 이에 該當한 것임으로 筆者는 이것을 盈尼山塔으로 臨時 號稱코자 하는 바이다.單層基壇 위에서 있는 五重石塔으로 特히 그 屋落 形式에 있어 「밭임」 은 勿論이요 屋表까지도 層級段階를 이루어 一見 塼塔의 屋蓋 形式과 全然 同一한 手法을 보이고 있는 데서 항용 模塼 石塔이라는 稱號 아래 불려져 있는 特殊 形式의 塔이다. 基壇은 朝鮮 石塔으로서의 基壇 中 가장 原始的인 形態를 이룬 것이라 할 만한 것으로 基壇만을 比較한다면 우리는 저 扶餘發 定林寺塔보다도 더 高古한 樣式임을 느낄 수 있다. 定林塔엔 基壇臺下 石下에 다시 臺盤 一石이 있고 또 中石의 「밭임기둥」(從此號稱 「撐柱」)이  中間 一柱만 上促下寬의 形式을 이루고 있는데 比하여 盈尼山塔의 基壇은 臺下石이 一枚만 놓여있고 一面 四介撑柱는 모두 上促下寬의 原始 形態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TagRef|2-6}}初層屋身과 基壇과의 接觸에 있어 定林塔은 何等의 加工이었는데 比하야 盈尼山塔은 「괴임」一段으로써 이것을 받아있다. 初層屋身 南壁 正心에는 龕室(高一 四二米, 左右間一 一七米, 深七三리, 佐藤島 博士 實測)이<ref>藤島亥治郎 博士 「朝鮮慶尙北道達城郡, 永川郡及び義城郡に於ける新羅時代建築に就いて」(建築雜誌 昭和 9年 2月號) 恭照.</ref> 하나 經營되어 있고 門扇은 없어졌으되 門口周圍에는 二重輪郭線이 浮刻되어 있고 下方에는 一段의 闔限石이 놓였을 뿐더러 門樞 左右(日本建築術語則唐居敷)이 놓여있다(이 門 形式은 慶州高仙寺石塔에 傳承된다.) 4介 隅柱는 定林塔에서와 같은 「엔터시스」의 形式을 이루었고 柱頭에 坐斗가 特히 經營되어있음은 다른 어느 石塔에서도 볼 수 없는 手法이다. (慶州 佛國寺 多寶石塔에는 坐斗 形式의 것이 있으나 이와 같이 寫實的 單形坐斗가 아니며 浮圖에서는 많이 볼 수 있으나 浮圖와 이러한 佛塔과는 같이 論할 수 없다.) 壁上{{TagPage|76-1}}에는 額枋裄枋이 二重으로 놓여 있고 그 위로 段形 「밭임」이 四出하여 屋簷받고 屋簷 위로 다시 段形 「괴임」이 重疊六出하여 屋蓋 形式을 이루었는데 屋簷轉角의 四隅가 略干 屈仰되어 斷面이 三角形을 이룬 것은 新羅 諸塔의 屋簷轉角 形式에 대한 約束이라 할 수 있다. 二層 以上 屋身에는 中間에 다시 一柱가 있어 全體로 二間面을 이루었고 屋蓋는「밭임」이 五段 「괴임」이 六出로 統一되어있다. 露盤까지 남아있고 覆鉢 以上 相輪部가 全部 逸落된 것은 다른 塔婆들에서와 같다. 全高約 32尺의 大塔인 만큼 石材는 定林塔에서와 같이 整頓되지 아니하고 彌勒塔에서와 같이 全體의 樣式만을 構成하기에 汲々하였다. 初層屋身을 單間平面으로 하였음에 不拘하고(第 2層 以上 四間平面(即一面兩間)으로 〿것은 이 塔 自體에 있어 意思의 不統一이며 實際 木造塔에 있어 있을 수 없는 略式的 樣式이다. 〿蓋의 手法은 確實히 塼塔의서의 그것이며 「밭임」의 五段級層은 (初層에선 四段만 確實하고 一段은 左斗와 面을 같이 하엿기 때문에 確實치 아니하나 全體로 亦 五段形式이다) 後代 新羅 石塔의 「밭임」手法에 대한한 範疇를 이루었다. 屋簷輛角의 手法과 함께 初層屋身의 「괴임」形式도 後代 石塔의 初層屋身의「괴임」形式에 대한한 約束이다.[[파일:고유섭 조선탑파2-2.png|가운데|500px]]
 
|목차2원문17번= {{TagSpage|76-2}}이를 통트러 말하면 盈尼山塔 定林塔보다 새로운 形式의 萌芽가 많고 王宮坪塔보다 生動的 氣風에 떠 있다. 地域의 分別을 意識的으로 無視하고 樣式史的으로 줄을 친다면 이 盈尼山塔은 定林塔과 王宮坪塔과의 사이에 둘 수 있다. 지금 朝鮮의 石塔으로 發生史的 意味를 얻고 基壇이 單層 以下의 것으로는 以上에 叙述한 四塔 밖에 없다 (勿論 그 模倣的 作例라든지 塼堵系의 作例는 別 것이다.) 即 朝鮮 石塔의 始派 形式을 이루는 例로서 이 四塔밖에 없나니 그 中에 王宮坪塔 彌勒과 外見 아모런 新味가 없는 데서) 이것을 除外한다면 朝鮮 石塔의 始源 形式 彌勒塔‧定林塔‧盈尼山塔의 三基일 뿐이요 이 三者를 比較한다면 形式의 如一치 아니한 個性을 各塔에서 볼 수 있다(特히 그 屋蓋手法을 두고 말함). 即 모두가 {{TagPage|77-1}}形式의 發生 {{ruby|初|○}}에 處하여 있고 形式{{ruby|決定|○○}}의 地位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이 中에 王宮坪塔은 그들에 追隨하여 樣式成生期의 末席에 參할 뿐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朝鮮 石塔 樣式의 發生 事情을 發展 過程을 볼 수 있지만 그 年代的 位相을 우리는 性急히 決定지으려 하지 말고 다음에 典型的 樣式의 成立을 본 後에 이를 解決시키자.
 
|목차2원문17번= {{TagSpage|76-2}}이를 통트러 말하면 盈尼山塔 定林塔보다 새로운 形式의 萌芽가 많고 王宮坪塔보다 生動的 氣風에 떠 있다. 地域의 分別을 意識的으로 無視하고 樣式史的으로 줄을 친다면 이 盈尼山塔은 定林塔과 王宮坪塔과의 사이에 둘 수 있다. 지금 朝鮮의 石塔으로 發生史的 意味를 얻고 基壇이 單層 以下의 것으로는 以上에 叙述한 四塔 밖에 없다 (勿論 그 模倣的 作例라든지 塼堵系의 作例는 別 것이다.) 即 朝鮮 石塔의 始派 形式을 이루는 例로서 이 四塔밖에 없나니 그 中에 王宮坪塔 彌勒과 外見 아모런 新味가 없는 데서) 이것을 除外한다면 朝鮮 石塔의 始源 形式 彌勒塔‧定林塔‧盈尼山塔의 三基일 뿐이요 이 三者를 比較한다면 形式의 如一치 아니한 個性을 各塔에서 볼 수 있다(特히 그 屋蓋手法을 두고 말함). 即 모두가 {{TagPage|77-1}}形式의 發生 {{ruby|初|○}}에 處하여 있고 形式{{ruby|決定|○○}}의 地位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이 中에 王宮坪塔은 그들에 追隨하여 樣式成生期의 末席에 參할 뿐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朝鮮 石塔 樣式의 發生 事情을 發展 過程을 볼 수 있지만 그 年代的 位相을 우리는 性急히 決定지으려 하지 말고 다음에 典型的 樣式의 成立을 본 後에 이를 解決시키자.
  
|목차2해독문1번= 1. 조선 석탑 양식의 발생으로부터 그 정형의 성립까지<br/> (1) 조선 석탑 양식의 발생 사정과 그 시원 양식들<br/>본고에서 누술한 바와 같이 조선의 탑파가 방형 목조 고루 건물에서 발족되었고 그 양식이 조선 탑파 양식의 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양식 발전의 순서상 목조 탑파 양식을 가장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유구에서 그 시대까지 고고한 것을 인정한다. 전고에서 조선 석탑파의 고고한 기록 예로 금관성 파사석탑이란 것과 고구려 영탑사의 석탑이란 것이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음을 말하였으나 현물이 있는 바 아니니 다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현존한 작례 중 가장 고고한 작품으로 정립시킬 수 있는 것은 익산 용화산 아래에 있는 미륵사지의 석탑 뿐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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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번= 조선 석탑 양식의 발생으로부터 그 정형의 성립까지<br/> (1) 조선 석탑 양식의 발생 사정과 그 시원 양식들<br/> 본고에서 누술한 바와 같이 조선의 탑파가 방형 목조 고루 건물에서 발족되었고 그 양식이 조선 탑파 양식의 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양식 발전의 순서상 목조 탑파 양식을 가장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유구에서 그 시대까지 고고한 것을 인정한다. 전고에서 조선 석탑파의 고고한 기록 예로 금관성 파사석탑이란 것과 고구려 영탑사의 석탑이란 것이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음을 말하였으나, 현물이 있는 바 아니니 다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현존한 작례 중 가장 고고한 작품으로 정립시킬 수 있는 것은 익산 용화산 아래에 있는 미륵사지의 석탑뿐일까 한다..
|목차2해독문2번= 이 미륵사지의 유탑은 현금 조선에 남아있는 석탑으로선 가장 충실히 목조 탑파의 양식을 재현하고있는 유일의 것이니 지금은 동면(東面) 일각만이 남아 있고 다른 삼면은 거의 다 헐어졌을 뿐더러 층급도 육층의 동북 일각만이 남아있고 우가 모두 없어진 까닭에 형태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나 그러나 탑의 양식은 이만으로써도 십분 이해할 수 있을만치 되어있다. 즉 제일로 주목되는 것은 특히 기단이라 할 만한 기단을 갖지 아니하고(탑파의 지반이 주위의 지평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토대라 할 것에 끝이고 기단으로써 부를 만한 것은 못 된다.) 2, 3척 전후의 거리를 두고서 지산장석이 남아있음이요, 다음에 주목되는 것은 그 옥신의 경영이니 옥신은 일면이 삼간벽을 이루었으되 {{TagRefT|2-1}}'엔터시스'(Enthusis)<ref group="a">원문주석1</ref>를 가진 장석주가 각 형 초석 위에 각기 서 있고 삼간벽의 좌우 양벽은 지복지방 위에선 소주 하나로 다시 연분되어 있으되 중앙구만은 미정광역(楣棖框閾)이 제법 모형된 통구가 있어 내부로 통로가 통케 되었으니 이 통문과 통로는 사방이 동일하였을 것으로 평면(Plan)에서 보자면 내부 중심에 사각형 석제 심주가 있어 이곳에서 정십자 통로가 교차되어 외부 사방으로 통케 된 형식이다. 다시 외벽의 열주 상부에는 액방과 평판방이 놓여있고 그 위에 항간 소벽이 있어 다시 각 형 삼단의 {{TagRefT|2-2}}층급형 '밭임'<ref group="a">원문주석2</ref>이 있어 평박장대한 옥개석을 떠받치고 있다. 옥개석은 전각의 첨단에서 다소 경쾌하게 번앙되어있고 전각의 삼각 단면(Section)은 후대 신라의 제석탑에서와 같이 뚜렷한 예각첨단을 이루지 아니하였다. 제2층은 극히 단축된 삼간소벽이(간벽의 명구 안에는하층 좌우벽에서와 같은 소주가 있었는 모양이다) 장대석 '괴임' 위에 놓여있어, 위로 삼단층급형 '밭임'을 받고 이 '밭임'으로써 옥개석을 또 받고 있다. 동일한 수법의 옥신과 옥개석이 중복되여 삼층사층 지우륙층하였으되 옥신 '괴임'의 장대석이 제3층에서부터 중단으로 늘어있고 층단 '밭임' 제 5층으로부터 일단이 늘어있으니 이와 같이 탑신 '괴임'과 옥개석'밭임'상층에서 증가한다는 것은 탑으로서는 그 첨앙에 있어 고도의 조화를 얻기 위한 특별한 배안일 것이로되 필자는 다른 석탑에서 이와 같은 용의가 표현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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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 이 미륵사지의 유탑은 현금 조선에 남아있는 석탑으로선 가장 충실히 목조 탑파의 양식을 재현하고 있는 유일의 것이니, 지금은 동면(東面) 일각만이 남아 있고 다른 삼면은 거의 다 헐어졌을 뿐더러 층급도 육층의 동북 일각만이 남아 있고 위가 모두 없어진 까닭에 형태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나, 그러나 탑의 양식은 이만으로써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만치 되어 있다. 즉 제일로 주목되는 것은 특히 기단이라 할 만한 기단을 갖지 아니하고(탑파의 지반이 주위의 지평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토대라 할 것에 끝이고 기단으로써 부를 만한 것은 못 된다.) 2, 3척 전후의 거리를 두고서 지산장석이 남아 있음이요, 다음에 주목되는 것은 그 옥신의 경영이니 옥신은 일면이 삼간벽을 이루었으되{{TagRefT|2-1}}'엔터시스'(Enthusis)<ref group="a">"엔터시스"라 함은 기둥 몸체의 상하가 움츠러들고 배가 부른 형식을 말한다. 조선의 목조 건물은 대개 이것이 현저히 나타나 있으나, 서양의 건물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 초기의 건물에서는 이것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으나, 시대가 내려갈수록 이것이 줄어들어, "엔터시스"의 수량적 변화가 시대를 반영하게 된다. 조선의 석탑에서도 확실히 이 변화상이 보이고, 일본의 목조 건물에서도 이 변화상이 확실히 드러난다.</ref>를 가진 장석주가 각 형 초석 위에 각기 서 있고 삼간벽의 좌우 양벽은 지복 지방 위에선 소주 하나로 다시 연분되어 있으되 중앙구만은 미정광역(楣棖框閾)이 제법 모형된 통구가 있어 내부로 통로가 통케 되었으니, 이 통문과 통로는 사방이 동일하였을 것으로 평면(Plan)에서 보자면 내부 중심에 사각형 석제 심주가 있어 이곳에서 정십자 통로가 교차되어 외부 사방으로 통케 된 형식이다. 다시 외벽의 열주 상부에는 액방과 평판방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항간 소벽이 있어 다시 각 형 삼단의 {{TagRefT|2-2}}층급형 '밭임'<ref group="a">층급형 "밭임"이라 함은 일본 건축계에서 말하는 "모시도리(持送)"를 뜻한다. 조선 목수들은 이를 무엇이라 부르는지 알 수 없고, 일찍이 필자가 한 기와장이에게 물었더니 "방한"이라고 한다기에 소리 나는 대로 "방한(方限)"이라 하여 쓴 적이 있다(동아일보 5천 호 「내자랑파내보배」 중 졸고). 이 필자의 졸고 한 편(「百濟의 美術」)이 소화 12년 2월, 총독부에서 발행한 중등교육 조선어 및 한문 교본 권 4에 수록된 적이 있는 관계로, 이 술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싶었으나, 확실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 아직 미심하므로 이곳에서는 알기 쉬운 가칭으로 사용하려 한다.</ref>이 있어 평박장대한 옥개석을 떠받치고 있다. 옥개석은 전각의 첨단에서 다소 경쾌하게 번앙되어 있고 전각의 삼각 단면(Section)은 후대 신라의 제석탑에서와 같이 뚜렷한 예각 첨단을 이루지 아니하였다. 제2층은 극히 단축된 삼간소벽이(간벽의 명구 안에는 하층 좌우벽에서와 같은 소주가 있었는 모양이다) 장대석 '괴임' 위에 놓여 있어, 위로 삼단 층급형 '밭임'을 받고 이 '밭임'으로써 옥개석을 또 받고 있다. 동일한 수법의 옥신과 옥개석이 중복되어 삼층 사층 지우륙층 하였으되 옥신 '괴임'의 장대석이 제3층에서부터 중단으로 늘어있고 층단 '밭임'이 제5층으로부터 일단이 늘어 있으니, 이와 같이 탑신 '괴임'과 옥개석 '밭임'이 상층에서 증가한다는 것은 이 탑으로서는 첨앙에 있어 고도의 조화를 얻기 위한 특별한 배안일 것이로되 필자는 다른 석탑에서 이와 같은 용의가 표현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목차2해독문3번= 이와 같이 이 탑파는 순전히 석재로써 조축된 것인 만큼 석탑에는 틀림없으나 그러나 그 전체 양식에 있어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석탑의 개념과는 아주 다른 점이 있으니, 이는 마치 경주 분황사의 탑이 석재로써 조축된 것이라 하나 우리는 그것을 석탑으로서 부를 수 없고 양식적으로는 전탑의 부류에 편입시키지 아니 할 수 없음과 같아서 이것도 석재를 사용하였다 뿐이지 양식적으론 곧 순전한 목조 탑파의 형식임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외형적 양식 뿐에서만이 아니라 다시 그 조성 의태에서도 읽을 수 있는 점이니 예컨대 석재의 가구축성의 수법이 다른 제탑에서 볼 수 있음과 같은 질서와 정돈이 있는 조용이 아니요 아무런 통일 조절의 의사가 없이 다만 한 개의 양식, ─즉 전래의 목조 탑파의 양식을 이모하여 그것을 재현하려 함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언하면 {{ruby|이것은|●●●}} {{ruby|석탑양식이라는|●●●●●●●}} {{ruby|한|●}} {{ruby|개의|●●}} {{ruby|새로운|●●●}} {{ruby|양식을|●●●}} {{ruby|내|●}}{{ruby|기|●}} {{ruby|위한|●●}} {{ruby|창의의|●●●}} {{ruby|조형이|●●●}} {{ruby|아니요|●●●}} {{ruby|다만|●●}} {{ruby|구래의|●●●}} {{ruby|양식을|●●●}} {{ruby|충실히|●●●}} {{ruby|다른|●●}} {{ruby|재료로써|●●●●}} ({{ruby||}} {{ruby|조선에|●●●}} {{ruby|가장|●●}} {{ruby|풍부한|●●●}} {{ruby|석재로서|●●●●}}) {{ruby|번역|●●}} ({{ruby|그것도|●●●}} {{ruby|직역|●●}}) {{ruby|한데|●●}} {{ruby|지나지|●●●}} {{ruby|아니한|●●●}} {{ruby|순모방적|●●●●}} {{ruby|의미에|●●●}} {{ruby|끝이는|●●●}} {{ruby|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때 한가지 문제되는 것은 목조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옥리의 층단형'밭임'이지만 이것을 잠시 보류한다면 조선 석탑으로서 목조 탑파의 양식을 가장 충상히 직역하고 있는 탑파는 이 외에 다시 없다. 그러므로 필자는 양식적 순차에 있어 이 탑을 위선 제 1위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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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번= 이와 같이 이 탑파는 순전히 석재로써 조축된 것인 만큼 석탑에는 틀림없으나, 그러나 그 전체 양식에 있어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석탑의 개념과는 아주 다른 점이 있으니, 이는 마치 경주 분황사의 탑이 석재로써 조축된 것이라 하나, 우리는 그것을 석탑으로서 부를 수 없고 양식적으로는 전탑의 부류에 편입시키지 아니할 수 없음과 같아서, 이것도 석재를 사용하였을 뿐이지 양식적으론 곧 순전한 목조 탑파의 형식임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외형적 양식뿐에서만이 아니라, 다시 그 조성 의태에서도 읽을 수 있는 점이니, 예컨대 그 석재의 가구 축성의 수법이 다른 제탑에서 볼 수 있음과 같은 질서와 정돈이 있는 조용이 아니요, 아무런 통일 조절의 의사가 없이 다만 한 개의 양식, ─ 즉 전래의 목조 탑파의 양식을 이모하여 그것을 재현하려 함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언하면 {{ruby|이것은|●●●}} {{ruby|석탑양식이라는|●●●●●●●}} {{ruby||}} {{ruby|개의|●●}} {{ruby|새로운|●●●}} {{ruby|양식을|●●●}} {{ruby||}}{{ruby||}} {{ruby|위한|●●}} {{ruby|창의의|●●●}} {{ruby|조형이|●●●}} {{ruby|아니요|●●●}} {{ruby|다만|●●}} {{ruby|구래의|●●●}} {{ruby|양식을|●●●}} {{ruby|충실히|●●●}} {{ruby|다른|●●}} {{ruby|재료로써|●●●●}} ({{ruby||}} {{ruby|조선에|●●●}} {{ruby|가장|●●}} {{ruby|풍부한|●●●}} {{ruby|석재로서|●●●●}}) {{ruby|번역|●●}} ({{ruby|그것도|●●●}} {{ruby|직역|●●}}) {{ruby|한데|●●}} {{ruby|지나지|●●●}} {{ruby|아니한|●●●}} {{ruby|순모방적|●●●●}} {{ruby|의미에|●●●}} {{ruby|끝이는|●●●}} {{ruby|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때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은 목조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옥리의 층단형 '밭임'이지만, 이것을 잠시 보류한다면 조선 석탑으로서 목조 탑파의 양식을 가장 충실히 직역하고 있는 탑파는 이 외에 다시 없다. 그러므로 필자는 양식적 순차에 있어 이 탑을 우선 제1위에 둔다.
|목차2해독문4번= 다음에 양식적으로 이 미륵탑과 가장 동일한 것으로 알려 있는 것으론 같은 익산군 왕궁면 왕궁평에 있는 오중석탑이다. 지금 이 왕궁평탑의 양식을 보면 제일로 주목되는 것은 그 토대 양식으로 그것은 주위의 지반에서 이 탑파만을 위하여 고립된 토대이요 또 이 탑의 중력과 중심의 보장을 위하여 필요한 대일 뿐더러 이것은 반드시 석단 형식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측까지 되는 것이나 지금은 그 석재가 산일되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이 되어 있다. 다음에 옥신의 수법을 보건대 {{TagRefT|2-3}}제1층옥신은 일면 삼매판석으로 방형이 짜여있으되(전체로는 8개 장석으로 짜인 것이 된다.) 사우에 태세의 변화(즉 '엔터시스')<ref group="a">해독문주석3</ref>가 없는 주형이 조출되어 있고 옥신엔 다시 1개 주형이 삭여있어 전체로 이간벽의 의태를 표현하여 있다. 옥개석은 삼층까지가 팔매판석으로 되어있고 사오층은 사매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삼단층급의 '밭임'은 각층이 면매석으로 째여있다. 2층 이상의 옥신을 형성한 석편 수는 같지 않으나 일간벽을 표시함에 일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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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번= 다음에 양식적으로 미륵탑과 가장 동일한 것으로 알려 있는 것으로는 같은 익산군 왕궁면 왕궁평에 있는 오중석탑이다. 지금 이 왕궁평탑의 양식을 보면 제일로 주목되는 것은 토대 양식으로, 그것은 주위의 지반에서 이 탑파만을 위하여 고립된 토대이요, 또 이 탑의 중력과 중심의 보장을 위하여 필요한 대일 뿐더러, 이것은 반드시 석단 형식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측까지 되는 것이나 지금은 석재가 산일되어 확정적으로 말할 없게 되어 있다. 다음에 옥신의 수법을 보건대 {{TagRefT|2-3}}제1층 옥신은 일면 삼매 판석으로 방형이 짜여 있되(전체로는 8개 장석으로 짜인 것이 된다.), 사우에 태세의 변화(즉 '엔터시스')<ref group="a">대정 6년도 고적조사보고 652혈에 이 옥신이 삼간벽으로 되어있는 듯이 보고되어있으나 오해인 듯하다.</ref>가 없는 주형이 조출되어 있고, 옥신엔 다시 1개 주형이 삭여 있어 전체로 이간벽의 의태를 표현하고 있다. 옥개석은 삼층까지가 팔매 판석으로 되어 있고, 사오층은 사매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삼단 층급의 '밭임'은 층이 면매석으로 짜여 있다. 2층 이상의 옥신을 형성한 석편 수는 같지 않으나, 일간벽을 표시함에 있어 일치되어 있다.
|목차2해독문5번= 이제 우리가 왕궁평탑과 미륵탑을 비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옥개석의 형식과 층단'밭임'의 유사에서 양자의 기백이 동일함을 볼 수 있고 다시 외양의 유사에서 세대(연대가 아니다)의 동일할 것이 추상된다. 실로 누가 부정하랴 부정할 수 없는 양식 감정의 유사를 본다. 이것이 누구나 이 양 탑을 시대적으로 동일시케 하는 가장 큰 특점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이 양 탑의 유사함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는 동시에 우리는 다시 이 양 탑 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제1로 왕궁평탑은 미륵탑에 없는 기단의 성질에 속할 높은 기대를 가졌고, 제2로 초층옥신이 미륵탑과 같이 목조 탑파의 삼간벽을 충실히 형성한 것이 아니라 한 괴체로 약식적 응결을 보였으되 이간의 구별은 실제 목조 탑파의 구조적 의미를 떠났고, 제3으로 이층 이상의 옥신은 전혀 미륵탑과 같은 끝까지 삼간벽을 보이려는 성의를 버리고 일간벽으로써 공약시켰으며, 제4로 옥신의 주형이 미륵탑에서와 같이 각개 독립된 별석으로 충실히 목조 건물의 주형에서 볼 수있는 '엔터시스'를 이루지 않고 벽면석의 끝에 간단한 편화적 수법으로 주형의 의태만 보였고, 제5로 옥개석과 옥신과의 연접부면의'괴임'미륵탑에서와 같이 별석으로 결구되어 있음이 아니라 다만 편의적인 조출로만 되었고, 제6으로 단형 '밭임'이 상층으로 갈수록 하등 수효에 변화가 없을 뿐더러 미륵탑에서는 삼단'밭임'이 일단과 이단의 구별, 사단'밭임'이단과 이단의 분리가 있어 아주 통일 의식이 없는데 이 왕궁평탑은 삼단이 일체로 응결되어 형식화의 경향이 있으며, 최종으로 석촌의 이용이 왕궁평탑에선 제법 정제된 질서를 갖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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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번= 이제 우리가 왕궁평탑과 미륵탑을 비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옥개석의 형식과 층단 '밭임'의 유사에서 양자의 기백이 동일함을 볼 수 있고, 다시 그 외양의 유사에서 세대(연대가 아니다)의 동일할 것이 추상된다. 실로 누가 부정하랴, 부정할 수 없는 양식 감정의 유사를 본다. 이것이 누구나 양 탑을 시대적으로 동일시케 하는 가장 큰 특점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양 탑의 유사함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는 동시에 우리는 다시 이 양 탑 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제1로, 왕궁평탑은 미륵탑에 없는 기단의 성질에 속할 높은 기대를 가졌고, 제2로, 초층 옥신이 미륵탑과 같이 목조 탑파의 삼간벽을 충실히 형성한 것이 아니라 한 괴체로 약식적 응결을 보였으되, 이간의 구별은 실제 목조 탑파의 구조적 의미를 떠났고, 제3으로, 이층 이상의 옥신은 전혀 미륵탑과 같은 끝까지 삼간벽을 보이려는 성의를 버리고 일간벽으로써 공약시켰으며, 제4로, 옥신의 각 주형이 미륵탑에서와 같이 각개 독립된 별석으로 충실히 목조 건물의 주형에서 볼 수 있는 '엔터시스'를 이루지 않고, 벽면석의 끝에 간단한 편화적 수법으로 주형의 의태만 보였고, 제5로, 옥개석과 옥신과의 연접부면의 '괴임'미륵탑에서와 같이 별석으로 결구되어 있음이 아니라, 다만 편의적인 조출로만 되었고, 제6으로, 단형 '밭임'상층으로 갈수록 하등 그 수효에 변화가 없을 뿐더러 미륵탑에서는 삼단 '밭임'이 일단과 이단의 구별, 사단 '밭임'이단과 이단의 분리가 있어 아주 통일 의식이 없는데, 이 왕궁평탑은 삼단이 일체로 응결되어 형식화의 경향이 있으며, 최종으로 석촌의 이용이 왕궁평탑에선 제법 정제된 질서를 갖고 있다 하겠다.
|목차2해독문6번= 즉 양탑의 이러한 이동을 양식적 견지에서 비교 평가하자면 미륵탑과 왕궁평탑이 다같이 방형평면의 목조 탑파 양식의 재현 형식이면서 미륵탑은 가구에 치중된 작품이요 왕궁평탑은 응집결정으로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작품이라 하겠다. 미륵탑은 순가구적 건축적 계단에 머물러 있고 왕궁평탑은 응집적 조각적 경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미륵탑 구양식(즉 목조 탑파 양식)을 충실히 재현하고 모방하였기 때문에 전체로 형식상 파단을 보이지 아니한, 즉 구양식의 말단에 가라앉은 무난한 형식이요, 왕궁평탑은 구양식의 기재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보이려다가 아직 보이지 못한─즉 신형식의 시초에 올라서서 아주 그 이상의 달성을 얻지 못하여 많은 파단을 내인 난색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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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6번= 즉 이 양탑의 이러한 이동을 양식적 견지에서 비교 평가하자면, 미륵탑과 왕궁평탑이 다 같이 방형 평면의 목조 탑파 양식의 재현 형식이면서, 미륵탑은 가구에 치중된 작품이요, 왕궁평탑은 응집 결정을 보이기 시작한 작품이라 하겠다. 미륵탑은 순가구적 건축적 계단에 머물러 있고, 왕궁평탑은 응집적 조각적 경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미륵탑은 구양식(즉 목조 탑파 양식)을 충실히 재현하고 모방하였기 때문에 전체로 형식상 파단을 보이지 아니한, 즉 구양식의 말단에 가라앉은 무난한 형식이요, 왕궁평탑은 구양식의 기재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보이려다가 아직 보이지 못한─ 즉 신형식의 시초에 올라서서 아주 그 이상의 달성을 얻지 못하여 많은 파단을 내인 난색의 작품이다.
|목차2해독문7번= 이리하여 왕궁평탑과 미륵탑이 서로 같다 하나 같지 아니함을 본다. 같지 않다 하나 그 범주가 또한 아주 다른 것도 아니다. 같지 않은 듯하되 같고, 같은 듯하되 같지 아니함은 결국에 있어 서로 같은 유형의 범주에 속하여, 하나는 양식사적으로 그 상한에 처하여 있고 다른 하나는 그 하한에 처하여 있는 까닭이다. 양 한의 사이에는 물론 세월의 차란 것도 끼워있는 것이지만 세월의 차라는 것은 그러나 양식론적으로 양 탑만의 비교에서는 나오지 아니하니 우리는 다시 제 3의 작품을 끌어올 필요가 있다. 그것은 즉 부여읍 남쪽에 있는 대당평백제탑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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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7번= 이리하여 왕궁평탑과 미륵탑이 서로 같다 하나 같지 아니함을 본다. 같지 않다 하나 범주가 또한 아주 다른 것도 아니다. 같지 않은 듯하되 같고, 같은 듯하되 같지 아니함은 결국에 있어 서로 같은 유형의 범주에 속하여, 하나는 양식사적으로 그 상한에 처하여 있고, 다른 하나는 하한에 처하여 있는 까닭이다. 이 양한의 사이에는 물론 세월의 차란 것도 끼워 있는 것이지만, 이 세월의 차라는 것은 그러나 양식론적으로 이 양탑만의 비교에서는 나오지 아니하니 우리는 다시 제3의 작품을 끌어올 필요가 있다. 그것은 즉 부여읍 남쪽에 있는 대당평백제탑이란 것이다.
|목차2해독문8번= 대당평백제탑은 우리가 오히려 {{TagRefT|2-4}}폐정림사탑으로 부름이 나을 듯한 것이므로 해서<ref group="a">해독문주석4</ref> 앞으로는 정림탑이란 칭호로써 지칭하겠지만 이 역 왕궁탑과 같이 외양만은 오중석탑에 속하는 것이나 모든 수법 형식에 있어서는 일견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선 단층기단도 정연하거니와 기단저대석 아래 대반석이 끼여있음이 오히려 이 탑으로 하여금 시대를 의심케 할 만한 용의주도처라 하겠다. 저평광대한 단층기단은 중간의 '벌임기둥'이 상촉하관의 형식을 이루었을 뿐으로, 좌우 양변의 '벌임기둥'은 변화가 없고, 옥신은 전체로 일간 면벽을 구성하였으나 일면벽을 량매판석이 형성하고 우주는 '엔터시스'가 있는 별제석주로 형성하고 있다. 제이층 이상의 옥신은 고가 극히 단촉되어 우주에 특별한 수축 변화(즉 '엔터시스')가 없이 처결되었으나 간벽의 처리는 초층옥신과 다름이 없고, 다만 사오층에 올라가서 옥신벽이 일석으로 되었을 뿐이다. 이층 이상의 옥신의 '괴임'은 물론 별석으로 정연히 째워있다. 옥개석도 평박광대한 판석으로 규칙정연하게 째여있으되 사우전각의 첨단리면이 깎여약간 들리는 듯한 감을 내었을 뿐, 전체는 직선적으로 뻗어있고 옥개〿각은 사주우동형식의 돌기가 제법 표현되어있다. 옥개석의 '밭임'은 미륵탑이나 왕궁평탑에서와 같이 층단형'밭임'이 아니요 장방횡석이 액방겸평판방의 의미로 일단 놓이고 위에 사릉형 장석이 포작횡면의 의미로 놓이었으니 이는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수법이다. 옥개석 제사층까지 위형으로 째여있고 제오층만이 전자형이며, 사릉형'밭임'도 초층과 이층이 구석, 삼층사층이 사석, 오층이 일석으로 모두 정연히 째워있다. 우리는 이 탑에서 무엇보다도 석재 결합에 너무나 정돈됨을 보고 둘째로 그 '밭임'의 특수형식을 보고 셋째로 그 기단의 성형적임을 본다. 탑은 무엇보다도 먼저 미륵탑과 같이 순전한 목조 탑파의 형식 그대로 충실히 재현한 것이 아니요 왕궁평탑과 같이 벌써 그 양식을 공약시켜 써새로운 양식의 산출을 꾀한 것으로 구식 발전사 상 이것은 미륵탑에 다음 가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세부 수법으로 말하더라도 미륵탑의 순 '가구적' 축조 수법과 정림탑의 '정구적' 수법(예컨대 정림탑의 사릉형'밭임'하의 장방석이 전체 사매로 되었으되 전평면이 사분파된 전자형이라든지 구자형의 배치가 아니라 회형 배치로 서로 엇물리게 되었으니 전자 '가구적'이라 형언한다면 후자는 '결구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발생사적 차이를 또한 말한다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부분적 형식, 양식적 수법 등에서 양자의 선후를 입증할 요소를 많이 보나, 일일이 거론치 아니하겠고 이하의 서술을 따라 점차 설명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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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8번=대당평백제탑은 우리가 오히려 {{TagRefT|2-4}} 폐정림사탑으로 부름이 나을 듯한 것이므로 해서<ref group="a">가쓰라기 마쓰하루가 저술한 조선금석고 제157쪽에 따르면, 대정 6년 봄, 이 탑의 동쪽에서 <cite no="XX">""</cite>「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勒(??)」이라 음각된 와편이 발견된 바 있어, 이곳이 정림사 폐지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미의 구절이 있다. 이로 보아 고려조까지도 연등이 끊이지 않았던 백제 고찰로 간주된다. 뿐만 아니라, 후에 본문에 서술될 바와 같이, 탑이 당나라 사람의 건립이 아닌즉, 대당평백제탑이라 칭함은 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ref> 앞으로는 정림탑이란 칭호로 지칭하겠지만, 이 역시 왕궁탑과 같이 외양만은 오중석탑에 속하는 것이나 모든 수법 형식에 있어서는 일견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선 단층 기단도 정연하거니와 기단 저대석 아래 대반석이 끼여 있음이 오히려 이 탑으로 하여금 시대를 의심케 할 만한 용의주도처라 하겠다. 저평광대한 단층 기단은 중간의 '벌임기둥'이 상촉하관의 형식을 이루었을 뿐으로, 좌우 양변의 '벌임기둥'은 변화가 없고, 옥신은 전체로 일간 면벽을 구성하였으나 일면벽을 량매 판석이 형성하고, 우주는 '엔터시스'가 있는 별제 석주로 형성하고 있다. 제이층 이상의 옥신은 고가 극히 단축되어 우주에 특별한 수축 변화(즉 '엔터시스')가 없이 처결되었으나 간벽의 처리는 초층 옥신과 다름이 없고, 다만 사오층에 올라가서 옥신벽이 일석으로 되었을 뿐이다. 이층 이상의 옥신의 '괴임'은 물론 별석으로 정연히 짜여 있다. 옥개석도 평박광대한 판석으로 규칙 정연하게 짜여 있되 사우 전각의 첨단리면이 깎여 약간 들리는 듯한 감을 내었을 뿐, 전체는 직선적으로 뻗어 있고 옥개〿각은 사주 우동 형식의 돌기가 제법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의 '밭임'은 미륵탑이나 왕궁평탑에서와 같이 층단형 '밭임'아니요 장방 횡석이 액방 겸 평판방의 의미로 일단 놓이고 위에 사릉형 장석이 포작 횡면의 의미로 놓였으니, 이는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수법이다. 옥개석 제사층까지 위형으로 짜여 있고, 제오층만이 전자형이며, 사릉형 '밭임'도 초층과 이층이 구석, 삼층 사층이 사석, 오층이 일석으로 모두 정연히 짜여 있다. 우리는 이 탑에서 무엇보다도 그 석재 결합에 너무나 정돈됨을 보고, 둘째로 그 '밭임'의 특수 형식을 보고, 셋째로 그 기단의 성형적임을 본다. 탑은 무엇보다도 먼저 미륵탑과 같이 순전한 목조 탑파의 형식 그대로 충실히 재현한 것이 아니요, 왕궁평탑과 같이 벌써 그 양식을 공약시켜 새로운 양식의 산출을 꾀한 것으로, 구식 발전사 상 이것은 미륵탑에 다음 가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세부 수법으로 말하더라도 미륵탑의 순 '가구적' 축조 수법과 정림탑의 '정구적' 수법(예컨대 정림탑의 사릉형 '밭임' 하의 장방석이 전체 사매로 되었으되 전평면이 사분파된 전자형이라든지 구자형의 배치가 아니라 회형 배치로 서로 엇물리게 되었으니 전자 '가구적'이라 형언한다면 후자는 '결구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발생사적 차이를 또한 말한다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부분적 형식, 양식적 수법 등에서 양자의 선후를 입증할 요소를 많이 보나, 일일이 거론치 아니하겠고 이하의 서술을 따라 점차 설명될 줄로 믿는다.
|목차2해독문9번= 그러면 우선 정림탑이 양식적으로 미륵탑의 하풍에 든다 하고 다음에 정림탑이 미륵탑에 대한 순차적 거리와 왕궁평탑이 미륵탑에 대한 순차적 거리와의 상호 차는 어떠한 것일가─즉 미륵탑, 정림탑, 왕궁평탑, 삼자의 양식사적 순위의 문제이다. 이때 필자는 양식 발전사적으로 보아 정림탑이 왕궁평탑보다 앞선 것으로, 따라서 이 3자의 순차를 정한다면 미륵탑이 제1위, 정림탑이 제2위, 왕궁평탑이 제3위로 나립하게 된다. 이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이냐─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에 우리는 정림탑과 왕궁평탑과의 비교를 꾀하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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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9번= 그러면 우선 정림탑이 양식적으로 미륵탑의 하풍에 든다 하고, 다음에 정림탑이 미륵탑에 대한 순차적 거리와 왕궁평탑이 미륵탑에 대한 순차적 거리와의 상호 차는 어떠한 것일까─ 즉 미륵탑, 정림탑, 왕궁평탑, 삼자의 양식사적 순위의 문제이다. 이때 필자는 양식 발전사적으로 보아 정림탑이 왕궁평탑보다 앞선 것으로, 따라서 이 3자의 순차를 정한다면 미륵탑이 제1위, 정림탑이 제2위, 왕궁평탑이 제3위로 나립하게 된다. 이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이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에 우리는 정림탑과 왕궁평탑과의 비교를 꾀하지 아니할 수 없다.
|목차2해독문10번= 우리는 양자를 비교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눈 띄는 것은 옥판석들의 평박광대한 유사점이지만 그보다도 옥개접식의 결구수법이 양자가 전연 동일한 점이다. 즉 구매판석을 정연히 가구하여 있는 수법의 유사이니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정림탑에선 사층까지 동일한 수법으로 되어있는데 왕궁평탑에선 삼층까지로 되어있다. 이 가구의 수법은 번대 미륵탑에서 발생한 것으로 미륵탑의 사수전각석이 그냥 그대로 부여지고 중간의 많은 판석이 공약된 형식이니 왕궁평탑에서의 수법은 정림탑으로 아마 공약된 형식을 다시 더 한층 약화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정림탑과 왕궁평탑이 옥개 형식이 전혀 동일하면서 가구에 초약의식가 벌써 왕궁탑에 현저하다. 아니라 기단의 이동은 문제할 수 없다고 치더라도 그래도 왕궁평탑에서의 지대의 수고함은 정림탑은 기단의 저평함에 비하여 양식사적 순위에 있어 뒤떨어짐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옥신구성에있어 정림탑은 최종까지 정연한 가구로 되어 있지만 정돈되어 있지 않고 각층 각면이 일치하지 않아 오직 전체의 외양 만을 요약하려는 의사가 농후하다. {{ruby|말하자면|●●●●}} {{ruby|정림탑은|●●●●}} {{ruby|미륵탑의|●●●●}} {{ruby|가구적|●●●}} {{ruby|특질을|●●●}} {{ruby|최대공약수로|●●●●●●}} {{ruby|간화하려하여|●●●●●●}} {{ruby|그에|●●}} {{ruby|성공하였고|●●●●●}} {{ruby|왕궁평탑은|●●●●●}} {{ruby|이|●}} {{ruby|가구형식의|●●●●●}} {{ruby|완결이라기보다|●●●●●●}} {{ruby|어떻게|●●●}} {{ruby|그곳에서|●●●●}} {{ruby|벗어나서|●●●●}} {{ruby|조각적인|●●●●}} {{ruby|응집형식으로|●●●●●}} {{ruby|넘어설까를|●●●●●}} {{ruby|고심한|●●●}} {{ruby|작품이라|●●●●}} {{ruby|하겠으니|●●●●}} 이 조각적인 의사의 맹아는 그 탑신의 유주가 공식적으로 조출되어 있는 것과 옥개 상부에 옥신 '괴임'이 조출되어있는 점에서도 넉넉히 읽을 수 있는 점이다. 유주의 양식만해도 정림탑에선 탄력적인 생기를 띄웠고 왕궁평탑에선 편화적인 퇴폐에 떨어졌다. 정림탑의 유주는 미륵탑의 유주를 그대로 이어 받았고 왕궁평두의 유주는 그것을 배반하였다. 정림탑의 유주는 구양식에 젖어있고, 왕궁탑의 우주 형식은 (비록 예술적 견지로서 볼제는 아름다웁지 못하지만)신양식의 형태이다. 만일에 이 양탑의 층개에서의 저 「밭임」양식의 상이와 기단의 상이만 없었더라면 누구나 용이하게 정림탑이 미륵탑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용이하게 정림탑을 미륵탑에 다음 두고 왕궁평탑을 정림탑에 다음 두는 것이다. 예술적 가치로 보아 물론 정림탑은 왕궁평탑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다. 하필 그뿐이랴!─미륵탑보다도 우위에 있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의 우열은 연대의, 시간의 선후를 결정짓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시대의 유형적 예술적 기풍이란 물론 예술적 직관을 통하여 직각할 수 있고 또 그로 말미암아 작품의 시대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지만 이는 요컨댄 가장 객관적인 양식 그 자체의 과학적 논리적 변화를 파촬한 위에 가능한 것이요, 한갓 예술적 가치의 우열만 가지고는 결정짓지 못할 문제라고 믿는다. 즉 가치와 역사는 다른 까닭이다. 예술적 작품의 사적 고찰을 꾀함에 있어 항상 빠지기 쉬운 것은 예술적 가치의 우열과, 예술적 시대성에 관한 성격과 양식 자체의 변화상 등을 견별치 못하고 잡연된 혼술에서 분별을 꾀하는 오류에 있다 하겠다. 즉 경우에 있어서 정림탑이 미륵탑이나 왕궁평탑보다 예술적 가치에 있어 우위에 있다 하여 그로써 곧 정림탑을 시대적으로도 제 1위에 두려는 학자가 없지 않거니와 이상 서술한 이유에서 이 세 탑 이 시대적 성격으로 동일하고 양식사적으론 미륵탑─정림탑─왕궁평탑의 순차가 되는 것을 독자는 이해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세 탑 간의 순위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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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0번= 우리는 이 양자를 비교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 옥판석들의 평박광대한 유사점이지만, 그보다도 옥개 접식의 결구 수법이 양자가 전연 동일한 점이다. 즉 구매 판석을 정연히 가구하여 있는 수법의 유사이니,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정림탑에선 사층까지 동일한 수법으로 되어 있는데 왕궁평탑에선 삼층까지로 되어 있다. 이 가구의 수법은 본래 미륵탑에서 발생한 것으로, 미륵탑의 사수 전각석이 그냥 그대로 부여지고 중간의 많은 판석이 공약된 형식이니, 왕궁평탑에서의 수법은 정림탑으로 아마 공약된 형식을 다시 더 한층 약화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정림탑과 왕궁평탑이 옥개 형식이 전혀 동일하면서 가구에 초약 의식이 벌써 왕궁평탑에 현저하다. 그뿐 아니라 기단의 이동은 문제할 수 없다고 치더라도, 그래도 왕궁평탑에서의 지대의 수고함은 정림탑의 기단 저평함에 비하여 양식사적 순위에 있어 뒤떨어짐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옥신 구성에 있어 정림탑은 최종까지 정연한 가구로 되어 있지만, 정돈되어 있지 않고 각층 각면이 일치하지 않아 오직 전체의 외양만을 요약하려는 의사가 농후하다. {{ruby|말하자면|●●●●}} {{ruby|정림탑은|●●●●}} {{ruby|미륵탑의|●●●●}} {{ruby|가구적|●●●}} {{ruby|특질을|●●●}} {{ruby|최대공약수로|●●●●●●}} {{ruby|간화하려하여|●●●●●●}} {{ruby|그에|●●}} {{ruby|성공하였고|●●●●●}} {{ruby|왕궁평탑은|●●●●●}} {{ruby||●}} {{ruby|가구형식의|●●●●●}} {{ruby|완결이라기보다|●●●●●●}} {{ruby|어떻게|●●●}} {{ruby|그곳에서|●●●●}} {{ruby|벗어나서|●●●●}} {{ruby|조각적인|●●●●}} {{ruby|응집형식으로|●●●●●}} {{ruby|넘어설까를|●●●●●}} {{ruby|고심한|●●●}} {{ruby|작품이라|●●●●}} {{ruby|하겠으니|●●●●}}조각적인 의사의 맹아는 탑신의 유주가 공식적으로 조출되어 있는 것과 옥개 상부에 옥신 '괴임'조출되어 있는 점에서도 넉넉히 읽을 수 있는 점이다. 유주의 양식만 해도 정림탑에선 탄력적인 생기를 띠었고, 왕궁평탑에선 편화적인 퇴폐에 떨어졌다. 정림탑의 유주는 미륵탑의 유주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왕궁평탑의 유주는 그것을 배반하였다. 정림탑의 유주는 구양식에 젖어 있고, 왕궁평탑의 유주 형식은 (비록 예술적 견지에서 볼 때는 아름답지 못하지만) 신양식의 형태이다. 만일 양탑의 층개에서의 저 '밭임' 양식의 상이와 기단의 상이만 없었더라면, 누구나 용이하게 정림탑이 미륵탑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용이하게 정림탑을 미륵탑에 다음 두고, 왕궁평탑을 정림탑에 다음 두는 것이다. 예술적 가치로 보아 물론 정림탑은 왕궁평탑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다. 하필 그뿐이랴! ─ 미륵탑보다도 우위에 있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의 우열은 연대의, 시간의 선후를 결정짓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시대의 유형적 예술적 기풍이란 물론 예술적 직관을 통하여 직각할 수 있고, 또 그로 말미암아 작품의 시대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지만, 이는 요컨대 가장 객관적인 양식 자체의 과학적 논리적 변화를 파촬한 위에 가능한 것이요, 한갓 예술적 가치의 우열만 가지고는 결정짓지 못할 문제라고 믿는다. 즉, 가치와 역사는 다른 까닭이다. 예술적 작품의 사적 고찰을 꾀함에 있어 항상 빠지기 쉬운 것은 이 예술적 가치의 우열과 예술적 시대성에 관한 성격과 양식 자체의 변화상 등을 견별하지 못하고 잡연된 혼술에서 분별을 꾀하는 오류에 있다 하겠다. 즉, 이 경우에 있어서 정림탑이 미륵탑이나 왕궁평탑보다 예술적 가치에 있어 우위에 있다 하여 그로써 곧 정림탑을 시대적으로도 제1위에 두려는 학자가 없지 않거니와, 이상 서술한 이유에서 이 세 탑이 시대적 성격으로 동일하고, 양식사적으론 미륵탑─정림탑─왕궁평탑의 순차가 되는 것을 독자는 이해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세 탑 간의 순위를 세운다.
|목차2해독문11번= 그러나 이곳에 우리가 양식론적으로 보아 가장 중요한 일점을 제외하고 논하여 왔으니 그는 즉 다름이 아닌 옥개의 「밭임」 양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본고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남겨둔 문제로서 고 관야정 박사가 미륵탑이나 왕궁평탑을 논하여 반드시 이 정림탑보다 앞서지 못할 것으로 보려 한 그 소위 양식 상 문제란 것이(본고 3장 중 인용문 참고) 그 구체적 지시점을 필자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요컨대 이 「밭임」 양식에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조선의 석탑을 운위하는 학자─ 누구나 반드시 층급식 「밭임」양식을 기탑 수법에서 출발한 {{TagRef|5}}신라의 양식, 신라에 고유 특색같이 일반적으로 논하고 있는 점에서도<ref>원문주석5</ref> 용이하게 추측되는 바이다. 즉 그들의 의견은 이 층급식「밭임」 양식이란 원래 전탑옥개에 고유한 것으로, 조선에 있어서의 전탑의 실재는 선덕왕 3년에 조성된 분황사의 유탑에서 비롯하였고, 이후 조선의 제탑이란 것이 중에서도 특히 신라의 제작이 모두 이 전탑옥개의 「밭임」양식을 엄수하고 있는 점에서 이미 미륵탑과 왕궁탑이 저와 같은 층급식 「밭임」양식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벌써 신라 계통의 양식 범주 안에 속하는 것이요 따라서 저 분황탑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겸하여 물론 정림탑과의 관계를 벗어나 시대적으로도 그 하풍에 드는 것으로 보려는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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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1번= 그러나 이곳에 우리가 양식론적으로 보아 가장 중요한 일점을 제외하고 논하여 왔으니, 그는 즉 다름이 아닌 옥개의 '밭임' 양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본고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남겨 둔 문제로서 고 세키노 다다시 박사가 미륵탑이나 왕궁평탑을 논하여 반드시 정림탑보다 앞서지 못할 것으로 보려 한 소위 양식 상 문제란 것이(본고 3장 중 인용문 참고) 그 구체적 지시점을 필자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요컨대 이 "밭임" 양식에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조선의 석탑을 운위하는 학자─ 누구나 반드시 그 층급식 '밭임' 양식을 기탑 수법에서 출발한 {{TagRefT|2-5}} 신라의 양식, 신라에 고유 특색같이 일반적으로 논하고 있는 점에서도<ref group="a">이시다 시게루 작 「土塔につ就て」 (고고학잡지 제17호) 후지시마 가이지로 박사 「慶州お中心上とせる新羅時代石塔の隷合的硏究」 (건축잡지 소화 9년 1월호)</ref> 용이하게 추측되는 바이다. 즉 그들의 의견은 층급식 "밭임" 양식이란 원래 전탑 옥개에 고유한 것으로, 조선에 있어서의 전탑의 실재는 선덕왕 3년에 조성된 분황사의 유탑에서 비롯하였고, 이후 조선의 제탑이란 것이 그중에서도 특히 신라의 제작이 모두 이 전탑 옥개의 "밭임" 양식을 엄수하고 있는 점에서 이미 미륵탑과 왕궁탑이 저와 같은 층급식 "밭임" 양식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벌써 신라 계통의 양식 범주 안에 속하는 것이요, 따라서 저 분황탑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겸하여 물론 정림탑과의 관계를 벗어나 시대적으로도 그 하풍에 드는 것으로 보려는 것인 듯하다.
|목차2해독문12번=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여러가지 수정과 제한을 받아야 할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니 신라의 석탑 양식 중 그 층급형 '밭임'이 괴탑의 수법에서 유래된 것이요 또 그것이 신라 석탑의 근간을 이룬 수법임을 인정함에 필자는 주저하지 아니하지만 적어도 이 미륵탑에서는 이와 같은 관념으로서는 해결되지 아니하는 여러 점이 있다.  제일로 신라의 정형적 탑파들의 옥개에선 옥개의 염단과'밭임'과의 물림 사이가 극히 단촉되어 있을 뿐더러 '밭임'의 층급수가 초기의 것으로 간경되어 있는 것은 모두 오급에 한한 수교일 뿐더러 탑신의 각층에 있어 상하가 모두 수효를 같이 하거나 또는 그렇지 아니하면 상층에 이를수록 '밭임'의 수효가 감소되는 것이 원칙이나 미륵탑에 있어서는 옥첨과 '밭임'과의 물림이 광윤할 뿐더러 상층에 오를수록 그 수효도 증가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밭임'의 각고도 신라 제석탑에서와 같이 상하가 여일치 아니하다. 이러한 상이는 즉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미륵에서의 '밭임'수법이 전탑에서의 층개'밭임' 수법을 〿〿하지 않고 다만 유형적인 {{ruby|축괴적|●●●}} {{ruby|수법을|●●●}} 응용한 시초 시험적인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ruby|사실로|●●●}} {{ruby|전탑에서의|●●●●}} {{ruby|형식이|●●●}} {{ruby|아니오|●●●}} {{ruby|이전와|●●●}} {{ruby|축전적|●●●}} {{ruby|수법의|●●●}} {{ruby|응용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고 이 축전 수법의 응용에 대한 착안은 하필 경주 분황사 석탑과 같은 모전탑이 생긴 이후에 신라인으로 말미암아 시험되었다거나 혹은 시험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선진이었던 백제인의 손으로도 착수될 근거가 십분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공주에서 발견된 송산리의 축총 고분과 광주·공주·부여 등에 다수한 잡석 고분의 축조 양식이 이미 선구를 이룬 것이요 또 조선 내에서의 그 선구적 수법을 찾자면 평양과 및 고구려의 전 도읍지인 만주 통화성 집안현 내에 다수한 고구려 고분의 천정'밭임'이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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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2번=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여러 가지 수정과 제한을 받아야 할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니, 신라의 석탑 양식 중 층급형 '밭임'이 괴탑의 수법에서 유래된 것이요, 또 그것이 신라 석탑의 근간을 이룬 수법임을 인정함에 필자는 주저하지 아니하지만, 적어도 이 미륵탑에서는 이와 같은 관념으로는 해결되지 아니하는 여러 점이 있다. 제일로, 신라의 정형적 탑파들의 옥개에선 옥개의 염단과 '밭임'과의 물림 사이가 극히 단축되어 있을 뿐더러, '밭임'의 층급수가 초기의 것으로 간경되어 있는 것은 모두 오급에 한한 수교일 뿐더러, 탑신의 각 층에 있어 상하가 모두 수효를 같이 하거나, 또는 그렇지 아니하면 상층에 이를수록 '밭임'의 수효가 감소되는 것이 원칙이나, 이 미륵탑에 있어서는 옥첨과 '밭임'과의 물림이 광윤할 뿐더러 상층에 오를수록 그 수효도 증가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밭임'의 각고도 신라 제석탑에서와 같이 상하가 여일치 아니하다. 이러한 상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미륵탑에서의 '밭임' 수법이 전탑에서의 층개 '밭임' 수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다만 유형적인 {{ruby|축괴적|●●●}} {{ruby|수법을|●●●}} 응용한 시초 시험적인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ruby|사실로|●●●}} {{ruby|전탑에서의|●●●●}} {{ruby|형식이|●●●}} {{ruby|아니오|●●●}} 그 {{ruby|이전와|●●●}} {{ruby|축전적|●●●}} {{ruby|수법의|●●●}} {{ruby|응용이라|●●●●}} 것이다. 그리하고 이 축전 수법의 응용에 대한 착안은 하필 경주 분황사 석탑과 같은 모전탑이 생긴 이후에 신라인으로 말미암아 시험되었다거나, 혹은 시험할 수 있었다고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선진이었던 백제인의 손으로도 착수될 근거가 십분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공주에서 발견된 송산리의 축총 고분과 광주·공주·부여 등에 다수한 잡석 고분의 축조 양식이 이미 그 선구를 이룬 것이요, 또 조선 내에서의 그 선구적 수법을 찾자면, 평양과 및 고구려의 전 도읍지인 만주 통화성 집안현 내에 다수한 고구려 고분의 천정 '밭임'이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차2해독문13번= 그러나 다시 또 한번 생각한다면 이 수법은 구태 축전수법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순력학적 물리학적으로 필연히 나올 수 있는 수법이 아닐까. 즉 구폭이 적은 재료로써 공간을 넓혀간다든지 좁혀간다든지 또는 괴체를 쌓아 모은다든지 이어받자면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필연적으로 물리학적 원칙에 의해서 나올 수 있는 형식이라고 할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애급 싹카라(Sakkara)의 단형'피라미드'나 고구려의 단형 방분이 시대를 달리 하고 지역을 달리 하고 민족을 달리 하고 상호의 영향을 무시하고 생길 수 있었던 것이며 고구려 봉토고분의 천정의 단형'밭임' 백제의 미륵탑의 단형 '밭임'이 하나는 지하, 하나는 지표의 차이를 갖고도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결국 석탑옥리의 층급형'밭임'이 조선에 전탑이 생긴 이후의 현상이었다느니보다 그 이전에 벌써 저러한 {{ruby|시험|●●}}이 있을 수 있었다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이곳에 또 상상까지 곁붙여 이것을 해석한다면 미륵탑에서의 '밭임' 형식은 수법만이 축전수법에서 암시되었다 할 뿐이지 내재한 의식은 근본적으로 목조 건물의 포(포)작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다른 우탑에서의 '밭임'들도 본의사는 이곳에 있는 것이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 제탑의 '밭임'에서는 목조 건물의 포작면을 적상시킨다는 것보다도 굴탑에서의 '밭임' 형식의 공식화, 이식화라는 것을 굳이 느끼게 함에 비하여 미륵탑에서의 그것은 포작면을 이내 곧 연상케 한다.(부주 주석) 이것은 '밭임'의 제일급이 제이제삼급과 마로히 후고로운 일석으로 경영된 점에서 제일급은 포작의 일부람보다도 오히려 목조 건물에서 액방 내지 항방을 연상케 하는 점이 많고 (제이 내지 제사층 간의 옥신에서 점을 더욱 절실히 본다) '밭임'의 제이급과 제삼급이 연접된 일석에서 조성된 면에서 중앙 포작의 포작면을 연상케 한다. 제오층 옥신으로부터는 급수가 한 층이 늦어 사급이 되었으며 상하가 양분되어 있다. 제일급 물론 액방 내지 항방의 뜻일 것이요 나머지 삼급은 삼중앙포작의 의사일 것이다. 즉 옥신의 사층까지는 중앙포작이요 제오층부터는 삼중앙포작으로 첨앙의 조화미를 꾀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수법은 실제 조선에 현재한 보은 속리산 법주사의 오중탑'밭임'은 사중교두 내지 오중검두의 포작면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여야 하겠지만 그곳에서 받는 양식감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것을 어찌할 없다. 이것은 결국 의사와 의사 표현 사이에 간재한 수법─즉 전탑수법의 사연함이 아닌가─그렇다면 신라제탑에서의 층급'밭임' 수법을 전탑수법의 영향 하에 된 것으로 해석하여도 무방한 것일 것이다. 다만 신라탑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미륵탑에까지 누진다면 우리는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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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3번= 그러나 다시 또 한 번 생각한다면 수법은 구태 축전 수법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순 역학적, 물리학적으로 필연히 나올 수 있는 수법이 아닐까. 즉 구폭이 적은 재료로 공간을 넓혀 간다든지 좁혀 간다든지, 또는 괴체를 쌓아 모은다든지 이어받자면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필연적으로 물리학적 원칙에 의해서 나올 수 있는 형식이라고 할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애급 싹카라(Sakkara)의 단형 '피라미드'나 고구려의 단형 방분이 시대를 달리하고, 지역을 달리하고, 민족을 달리하고, 상호의 영향을 무시하고 생길 수 있었던 것이며, 고구려 봉토 고분의 천정의 단형 '밭임', 백제의 미륵탑의 단형 '밭임'이 하나는 지하, 하나는 지표의 차이를 갖고도 나타날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결국 석탑 옥리의 층급형 '밭임'이 조선에 전탑이 생긴 이후의 현상이었다느니보다, 그 이전에 벌써 저러한 {{ruby|시험|●●}}있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이곳에 또 상상까지 곁붙여 이것을 해석한다면 미륵탑에서의 '밭임' 형식은 수법만이 축전 수법에서 암시되었다 할 뿐이지, 내재한 의식은 근본적으로 목조 건물의 포작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다른 우탑에서의 '밭임'들도 본 의사는 이곳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 제탑의 '밭임'에서는 목조 건물의 포작면을 적상시킨다는 것보다도 굴탑에서의 '밭임' 형식의 공식화, 이식화라는 것을 굳이 느끼게 함에 비하여 {{TagRefT|부기}}미륵탑에서의 그것은 포작면을 이내 곧 연상케 한다.<ref group="a">부기해독문각주</ref> 이것은 '밭임'의 제일급이 제이·제삼급과 마로히 후고로운 일석으로 경영된 점에서 이 제일급은 포작의 일부람보다도 오히려 목조 건물에서 액방 내지 항방을 연상케 하는 점이 많고 (제이 내지 제사층 간의 옥신에서 이 점을 더욱 절실히 본다), '밭임'의 제이급과 제삼급이 연접된 일석에서 조성된 면에서 중앙 포작의 포작면을 연상케 한다. 제오층 옥신으로부터는 급수가 한 층이 늦어 사급이 되었으며 상하가 양분되어 있다. 제일급은 물론 액방 내지 항방의 뜻일 것이요, 나머지 삼급은 삼중앙 포작의 의사일 것이다. 즉 옥신의 사층까지는 중앙 포작이요, 제오층부터는 삼중앙 포작으로 첨앙의 조화미를 꾀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수법은 실제 조선에 현재한 보은 속리산 법주사의 오중탑 '밭임'은 사중교두 내지 오중검두의 포작면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여야 하겠지만, 그곳에서 받는 양식감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은 결국 의사와 의사 표현 사이에 간재한 수법─ 즉 전탑 수법의 사연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신라 제탑에서의 층급 '밭임' 수법을 전탑 수법의 영향 하에 된 것으로 해석하여도 무방한 것일 것이다. 다만 신라탑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미륵탑에까지 누진된다면, 우리는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목차2해독문14번= 우리는 미륵탑에서의 본의를 가장 구체적으로 살린 것이 곧 정림탑이라 본다. 즉 정림탑에서의 최하 일급의 '밭임' 이 곧 미륵탑에서의 분리된 문하 일급의 횡방과 의미를 같이 한 것이며 위의 사릉 '밭임' 곧 미륵탑에서의 상부이급의 '밭임' 형식을 '모디파이' 시켜서 현실적 포작면을 더욱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는 바이다. 그러므로 외견만으로 본다면 정림탑의 '밭임' 양식은 일견 미륵탑의 '밭임' 양식과 매우 동떨어진 형식같이 해석되기 쉬우나 그러나 그 조형의사라는 내면적 의식을 살펴본다면 정림탑의 '밭임' 형식이야말로 실로 곧 미륵탑이 표현하고자 한 본의를 십분 이해하고 진실히 이해해서 어찌하면 그 본의를 완전히 표시해볼까 하는 극히 동정된 입장에서 표현해진 형식인가 한다. 이 점에서 그 기단의 발전태를 임시 제외한다면 어느 탑보다도 정림탑이 미륵탑의 조형의사를 가장 잘 이해하고서 이워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림탑이 미륵탑에 가장 가차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간점을 바꾸어 표현한다면 정림탑이 곧 미륵탑 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왕궁평탑은 형식적으론 미륵탑을 충실히 재현한 것인 듯하나 그러나 결국에 있어선 미륵탑의 내면적 의사를 하등 천발시키지 못한 부수적 준고적 입장에선 고식된 모방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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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4번= 우리는 미륵탑에서의 본의를 가장 구체적으로 살린 것이 곧 정림탑이라 본다. , 정림탑에서의 최하 일급의 '밭임'곧 미륵탑에서의 분리된 문하 일급의 횡방과 의미를 같이 한 것이며, 그 위의 사릉 '밭임'이 곧 미륵탑에서의 상부 이급의 '밭임' 형식을 '모디파이' 시켜서 현실적 포작면을 더욱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는 바이다. 그러므로 외견만으로 본다면 정림탑의 '밭임' 양식은 일견 미륵탑의 '밭임' 양식과 매우 동떨어진 형식같이 해석되기 쉬우나, 그러나 그 조형 의사라는 내면적 의식을 살펴본다면 정림탑의 '밭임' 형식이야말로 실로 곧 미륵탑이 표현하고자 한 본의를 십분 이해하고 진실히 이해해서 어찌하면 그 본의를 완전히 표시해볼까 하는 극히 동정된 입장에서 표현된 형식인가 한다. 이 점에서 그 기단의 발전태를 임시 제외한다면, 어느 탑보다도 이 정림탑이 미륵탑의 조형 의사를 가장 잘 이해하고서 이어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림탑이 미륵탑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관점을 바꾸어 표현한다면, 정림탑이 곧 미륵탑 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왕궁평탑은 형식적으로는 미륵탑을 충실히 재현한 것인 듯하나, 그러나 결국에 있어서는 미륵탑의 내면적 의사를 하등 천발시키지 못한 부수적 준고적 입장에서 고식된 모방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목차2해독문15번= 이상 우리는 미륵탑과 정림탑과 왕궁평탑의 조형 의사와 조형 가치와 및 양식적 위차를 설정하였다. 이 삼도은 실로 곧 목조 탑파의 양식재모에서 출발하여 석탑으로서의 한새로운 양식을 형성하려는 의사에 젖어있는, 아니 젖어있다느니보다 그 의사를 처음으로 보인 시원적인 지위에 있는 작품들이라 할 것이다. 시원적 지위라 함은 결국 전형적인 것의 이전의 것임을 뜻하는 것이니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 탑의 양식이 이 세 탑에 한하여 끓여있고 그 이상의 전개가 없다가 신라 중엽 이후 내지 고려조에 들어 이 계통 속에 편입시킬 약간의 예가 생겼을 뿐이요(차항본교특수형수참조건) 거개의 석탑은 이 세 탑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많음으로해서 이 세 탑의 양식이 전형적 양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석탑의 정형식은 이 세 탑이 시사만 보였을 뿐 결정을 짓지 못하였고 그곳에는 다른 시험이 또 하나 있어 비로소 정립될 기운이 숙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시험이란 무엇이냐 하면 그는 다름 아닌 의성군 유운면 탑리동 영니산 하에 있는 오중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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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5번= 이상 우리는 미륵탑과 정림탑과 왕궁평탑의 조형 의사와 조형 가치 및 양식적 위차를 설정하였다. 이 삼도는 실로 곧 목조 탑파의 양식 재모에서 출발하여 석탑으로서의 새로운 양식을 형성하려는 의사에 젖어 있는, 아니 젖어 있다느니보다 그 의사를 처음으로 보인 시원적인 지위에 있는 작품들이라 할 것이다. 시원적 지위라 함은 결국 전형적인 것의 이전의 것임을 뜻하는 것이니,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세 탑의 양식이 세 탑에 한하여 끓여 있고, 그 이상의 전개가 없다가 신라 중엽 이후 내지 고려조에 들어 이 계통 속에 편입시킬 약간의 예가 생겼을 뿐이요(이 항목은 본 탑의 특수한 형태를 참고), 거개의 석탑은 이 세 탑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많음으로 해서 이 세 탑의 양식이 전형적 양식이 될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석탑의 정형식은 세 탑이 시사만 보였을 뿐 결정을 짓지 못하였고, 그곳에는 다른 시험이 또 하나 있어 비로소 정립될 기운이 숙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시험이란 무엇이냐 하면, 그는 즉 다름 아닌 의성군 유운면 탑리동 영니산 하에 있는 오중석탑이다.
|목차2해독문16번= 탑의 예속사지명은 부명이고 대동여지도에 영니산 하에 지표된 이것이 이에 해당한 것임으로 필자는 이것을 영니산탑으로 임시 호칭코자 하는 바이다.단층기단 위에서 있는 오중석탑으로 특히 그 옥락 형식에 있어 '밭임'은 물론이요 옥표까지도 층급단계를 이루어 일견 전탑의 옥개 형식과 전연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는 데서 항용 모전 석탑이라는 칭호 아래 불려져 있는 특수 형식의 탑이다. 기단은 조선 석탑으로서의 기단 중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이룬 것이라 할 만한 것으로 기단만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저 부여발 정림사탑보다도 더 고고한 양식임을 느낄 있다. 정림탑엔 기단대하 석하에 다시 대반 일석이 있고 또 중석의 '밭임기둥'(종차호칭 '탱주')이  중간 일주만 상촉하관의 형식을 이루고 있는데 비하여 영니산탑의 기단은 대하석이 일매만 놓여있고 일면 사개탱주는 모두 상촉하관의 원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초층옥신과 기단과의 접촉에 있어 정림탑은 하등의 가공이었는데 비하야 영니산탑은 '괴임' 일단으로써 이것을 받아있다. 초층옥신 남벽 정심에는 감실(고일 사이미, 좌우간일 일칠미, 심칠삼리, 좌등도 박사 실측)이 하나 경영되어 있고 문선은 없어졌으되 문구주위에는 이중륜곽선이 부각되어 있고 하방에는 일단의 합한석이 놓였을 뿐더러 문추 좌우(일본건축술어칙당거부)놓여있다(문 형식은 경주고선사석탑에 전승된다.) 4개 우주는 정림탑에서와 같은 '엔터시스'의 형식을 이루었고 주두에 좌두가 특히 경영되어있음은 다른 어느 석탑에서도 볼 수 없는 수법이다. (경주 불국사 다보석탑에는 좌두 형식의 것이 있으나 이와 같이 사실적 단형좌두가 아니며 부도에서는 많이 볼 있으나 부도와 이러한 불탑과는 같이 논할 수 없다.) 벽상에는 액방행방이 이중으로 놓여 있고 그 위로 단형 '밭임' 사출하여 옥첨받고 옥첨 위로 다시 단형 '괴임'중첩륙출하여 옥개 형식을 이루었는데 옥첨전각의 사우가 약간 굴앙되어 단면이 삼각형을 이룬 것은 신라 제탑의 옥첨전각 형식에 대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이층 이상 옥신에는 중간에 다시 일주가 있어 전체로 이간면을 이루었고 옥개는'밭임' 이 오단 '괴임'이 육출로 통일되어있다. 노반까지 남아있고 복발 이상 상륜부가 전부 일락된 것은 다른 탑파들에서와 같다. 전고약 32척의 대탑인 만큼 석재는 정림탑에서와 같이 정돈되지 아니하고 미륵탑에서와 같이 전체의 양식만을 구성하기에 급급하였다. 초층옥신을 단간평면으로 하였음에 불구하고(제 2층 이상 사간평면(즉일면양간)으로 〿것은 탑 자체에 있어 의사의 부통일이며 실제 목조탑에 있어 있을 수 없는 약식적 양식이다. 〿개의 수법은 확실히 전탑의서의 그것이며 '밭임' 의 오단급층은 (초층에선 사단만 확실하고 일단은 좌두와 면을 같이 하였기 때문에 확실치 아니하나 전체로 역 오단형식이다) 후대 신라 석탑의 '밭임' 수법에 대한 한 범주를 이루었다. 옥첨 양각의 수법과 함께 초층옥신의 '괴임'형식도 후대 석탑의 초층옥신의 '괴임' 형식에 대한 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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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6번= 이 탑의 예속사지명은 부명이고 대동여지도에 영니산 하에 지표된 이것이 이에 해당한 것임으로 필자는 이것을 영니산탑으로 임시 호칭하고자 하는 바이다. 단층 기단 위에 있는 오중석탑으로, 특히 그 옥락 형식에 있어 '밭임'은 물론이요 옥표까지도 층급 단계를 이루어 일견 전탑의 옥개 형식과 전연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는 데서 항용 모전 석탑이라는 칭호 아래 불려져 있는 특수 형식의 탑이다. 기단은 조선 석탑으로서의 기단 중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이룬 것이라 할 만한 것으로, 기단만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저 부여발 정림사탑보다도 더 고고한 양식임을 느낄 수 있다. 정림탑엔 기단 대하석 하에 다시 대반 일석이 있고 또 중석의 '밭임기둥'(종차 호칭 '탱주')이 중간 일주만 상촉하관의 형식을 이루고 있는데 비하여, 영니산탑의 기단은 대하석이 일매만 놓여 있고, 일면 사개 탱주는 모두 상촉하관의 원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초층 옥신과 기단과의 접촉에 있어 정림탑은 하등의 가공이 없었는데 비하여 영니산탑은 '괴임' 일단으로 이것을 받치고 있다. {{TagRefT|2-6}}초층 옥신 남벽 정심에는 감실(고일 사이미, 좌우 간일 일칠미, 심칠삼리, 사토시마 박사 실측)이<ref group="a">후지시마 가이지로 박사 「朝鮮慶尙北道達城郡, 永川郡及び義城郡に於ける新羅時代建築に就いて」(건축잡지 소화 9년 2월호) 공조.</ref>하나 경영되어 있고, 문선은 없어졌으되 문구 주위에는 이중륜 곽선이 부각되어 있고, 하방에는 일단의 합한석이 놓였을 뿐더러 문추 좌우(일본 건축술어 칙당거부)가 놓여 있다(이 문 형식은 경주 고선사 석탑에 전승된다). 4개 우주는 정림탑에서와 같은 '엔터시스'의 형식을 이루었고, 주두에 좌두가 특히 경영되어 있음은 다른 어느 석탑에서도 볼 수 없는 수법이다. (경주 불국사 다보석탑에는 좌두 형식의 것이 있으나 이와 같이 사실적 단형 좌두가 아니며, 부도에서는 많이 볼 수 있으나 부도와 이러한 불탑과는 같이 논할 수 없다.) 벽상에는 액방 행방이 이중으로 놓여 있고, 그 위로 단형 '밭임'이 사출하여 옥첨을 받치고, 옥첨 위로 다시 단형 '괴임'이 중첩 육출하여 옥개 형식을 이루었는데, 옥첨 전각의 사우가 약간 굴앙되어 단면이 삼각형을 이룬 것은 신라 제탑의 옥첨 전각 형식에 대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이층 이상 옥신에는 중간에 다시 일주가 있어 전체로 이간면을 이루었고, 옥개는 '밭임'이 오단, '괴임'이 육출로 통일되어 있다. 노반까지 남아 있고 복발 이상 상륜부가 전부 일락된 것은 다른 탑파들에서와 같다. 전고 약 32척의 대탑인 만큼 석재는 정림탑에서와 같이 정돈되지 아니하고, 미륵탑에서와 같이 전체의 양식만을 구성하기에 급급하였다. 초층 옥신을 단간 평면으로 하였음에 불구하고(제2층 이상 사간 평면(즉 일면 양간)으로 된 것은 이 탑 자체에 있어 의사의 부통일이며, 실제 목조탑에 있어 있을 수 없는 약식적 양식이다). 옥개의 수법은 확실히 전탑에서의 그것이며, '밭임'의 오단 급층은 (초층에선 사단만 확실하고, 일단은 좌두와 면을 같이 하였기 때문에 확실치 아니하나, 전체로 역 오단 형식이다) 후대 신라 석탑의 '밭임' 수법에 대한 한 범주를 이루었다. 옥첨 양각의 수법과 함께 초층 옥신의 '괴임' 형식도 후대 석탑의 초층 옥신의 '괴임' 형식에 대한 한 약속이다. [[파일:고유섭 조선탑파2-2.png|가운데|500px]]
|목차2해독문17번= 이를 통틀어 말하면 영니산탑 정림탑보다 새로운 형식의 맹아가 많고 왕궁평탑보다 생동적 기풍에 떠 있다. 지역의 분별을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양식사적으로 줄을 친다면 이 영니산탑은 정림탑과 왕궁평탑과의 사이에 둘 수 있다. 지금 조선의 석탑으로 발생사적 의미를 얻고 기단이 단층 이하의 것으로는 이상에 서술한 네 탑 밖에 없다 (물론 그 모방적 작례라든지 전도계의 작례는 별개 것이다.) 즉 조선 석탑의 시파 형식을 이루는 예로서 이 사탑밖에 없으니 그 중에 왕궁평탑 미륵과 외견 아무런 신미가 없는 데서) 이것을 제외한다면 조선 석탑의 시원 형식 미륵탑‧정림탑‧영니산탑의 세 기일 뿐이요 이 세 가지를 비교한다면 형식의 통일되지 아니한 개성을 각 탑에서 볼 수 있다(특히 그 옥개수법을 두고 말함). 즉 모두가 형식의 발생 {{ruby|초|○}}에 처하여 있고 형식{{ruby|결정|○○}}의 지위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이 중에 왕궁평탑은 그들에 추수하여 양식성 생기의 말석에 참할 뿐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조선 석탑 양식의 발생 사정을 발전 과정을 볼 수 있지만 그 연대적 위상을 우리는 성급히 결정지으려 하지 말고 다음에 전형적 양식의 성립을 본 후에 이를 해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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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7번= 이를 통틀어 말하면, 영니산탑은 정림탑보다 새로운 형식의 맹아가 많고, 왕궁평탑보다 생동적 기풍에 떠 있다. 지역의 분별을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양식사적으로 줄을 친다면, 이 영니산탑은 정림탑과 왕궁평탑과의 사이에 둘 수 있다. 지금 조선의 석탑으로 발생사적 의미를 얻고, 기단이 단층 이하의 것으로는 이상에 서술한 네 탑밖에 없다(물론 그 모방적 작례라든지 전도계의 작례는 별개의 것이다). 즉, 조선 석탑의 시파 형식을 이루는 예로서 이 사탑밖에 없으니, 그중에 왕궁평탑은 미륵탑과 외견상 아무런 신미가 없는 데서 이것을 제외한다면, 조선 석탑의 시원 형식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탑의 세 기일 뿐이요, 이 세 가지를 비교한다면 형식의 통일되지 아니한 개성을 각 탑에서 볼 수 있다(특히 그 옥개 수법을 두고 말함). 즉, 모두가 형식의 발생{{ruby|초|○}}에 처하여 있고 형식{{ruby|결정|○○}}의 지위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이 중에 왕궁평탑은 그들에 추수하여 양식성 생기의 말석에 참할 뿐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조선 석탑 양식의 발생 사정과 발전 과정을 볼 수 있지만, 그 연대적 위상을 우리는 성급히 결정지으려 하지 말고, 다음에 전형적 양식의 성립을 본 후에 이를 해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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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 {{TagSpage|77-2}}以上으로써 우리는 朝鮮 石塔의 樣式 始源을 보았다. 그것은 全體로 있어서 木造 塔婆 樣式을 再現하는 데 있으나 石材라는 特別한 材料에서 緣由되는 制限으로 말미암아 部分 形式에 있어 木造 塔婆에 없는 새로운 形式이 案出되었고 또 그것이 定立되기 前까지 여러가지 試驗이 試驗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即 그것은 木造 塔婆 樣式의 充實한 部分的 再現에서 시작되어 漸次 全體 要意의 表現에로 기울어 갔다. 그러는 동안에 實際 木造 建物 그 自體의 發展도 있어 그에 隨伴된 表現 意思도 닯어서 이곳에 한 개의 樣式이 定立되었으니 그는 即 基壇이 重壇으로 上壇은 四介의 撑柱가, 下壇은 五介의 撑柱가 中臺石을 區分하여 있고 底臺覆石에는 上壇中臺를 받기 爲하여 角과 半圓의 {{TagRef|2-7}}「몰딩」(Moulding)<ref>moulding을 日本서는「刳形」으로 飜譯한다. 여러가지로 屈曲진 층도리의 裝飾 曲線形을 말한다. </ref>이있고 上臺覆石에는 初層屋身을 받기 爲하여 重段角形의 「괴임」이 있고 屋身은 全體로 몇 層이든지 간에 一間 平面으로 要約되었고 屋裏階級形「밭임」은 五級 以上 더 있지 아니하며 屋表面은 實際 建物의 注面대로 層折없는 傾斜〿이 되어있고 露盤 以上 相輪部는 擧皆 失落되어 不明한 者가 많으므로 問題되지 아니하나 轉角四隅에는 風鈴이 달렸던 穴痕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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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 {{TagSpage|77-3}}이 基壇의 上臺 形式과 屋裏의 層級 「밭임」은 確實히 盈尼山塔에서 나올 수 있는 形式이었고 屋表의 傾斜 注面은 角度의 差異는 있을망정 彌勒塔 以來의 傳統이며 基壇下臺 形式은 確實히 새로운 樣式이나 石塔 自身의 發展이람보다 當代 實際 建物의 基壇 樣式이었다 할 수 있어, 이 모든 意思를 綜合하면 在來의 試驗的이었던 모든 手法이 集成되어 整頓되였{{TagPage|78}}고 新式의 建築 樣式을 加味하여 完全히 統一된 石塔 樣式으로서의 完體가 成立된 것이다. [[파일:고유섭 조선탑파2-3.png|가운데|500px]]이러한 完全한 例를 우리는 慶州 內東面 暗谷里 浮圖谷高仙寺址에 있는 三重 石塔 一基, 全郡陽北面龍堂里感恩寺址에있는 三重石塔二基, 忠州郡可金 面塔亭里逸名廢寺址에 있는 七重石塔一基, 慶州郡見谷面羅原里逸名廢寺址에 있는 五重石塔 一基에서 본다. 이들 諸塔은 上述한 典型的 形式을 모두 具備하고있는 大作들이다. 特히 이 모든 塔은 이 典型的 形式의 始初에 處하여 있어 樣式的으론 統一되어있다 하나 그 部分 構成에 있어서는 材料의 編成이 古式의 意態를 아직 남기고 있어 隅柱는 別石이요 屋身心 壁이 또 別石이요 屋蓋簷石이 別石이요 屋裏「밭임」이 別石이다. 後代 諸石塔의 傾向을 보건대 部分部分이 單一石으로 統一되는 傾向이 時代가 뒤질수록 濃厚함을 볼 수 있으므로 해서 지금 이곳에든 四基의 石塔 中部分이 單石으로 統一 된 것을 樣式上 뒤진 것이라 둔다면 羅原里 五重塔을 最低에 둘 수 있고 高仙寺址塔과 感恩寺址塔은 屋身의 彫飾有無의 差가 있을 뿐이요, 建築 手法으로선 何等의 差異가 없으므로 兩者를 同一 水準에 둘 수 있고 塔亭里塔은 高仙‧感恩塔과 함께 羅原里塔보다 先行할 것은 事實이나 高仙‧感恩塔과 견주어 先後의 定位를 따지기가 略干 困難하다. 即 塔亭里의 塔은 初層屋身의 構成이 마치 扶餘 定林塔의 屋身 構成과 같이 隅柱가 別石이요 心壁이 兩枚 板石으로 等分히 째여 있고 第二層 以上은 四枚長石을 或 엇물리기도 하고 或 째와물리기도 하여 釜山王宮坪塔에서의 手法과 類似한 點을 남겨 高仙‧感恩塔이 第二層 以上 單石으로 屋身을 統一함보다 古式에 屬하여 있는데, 屋蓋의 手法에 있어서는 高仙‧感恩塔과 같이 立面의 四方中心이 分割되어 있어 兩者間 類似를 보이고 있음에 不拘하고 屋蓋와 屋專「발임」 石이 高仙‧感恩塔과 같이 또 分離되어 前後 八石의 結構意思를 보이지 아니하고서 四石結構의 意思를 보이고 있을뿐더러 六‧七兩層의 屋身屋盎는 모두 單石으로 되어있다. 初層屋身을 받기 爲하여 長塵一石이「괴임」으로 있는 것을 盈尼山塔에 가차운{{TagPage|79-1}}意思라 할진댄 高仙塔의 初層屋身에 龕室 形式을 四面에 模刻하였으되 闔限 左右에 閣峙方石 形式이 彫出되어 있는 것이 또한 저 盈尼山塔의 意思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新樣式과 舊樣式의 交叉가 相覆되어 있는 高仙‧感恩塔과 塔亭里塔과의 先後는 어느 다른 資料가 發見되기 前 말하기 어려운 問題이므로 이는 暫時 保留할 수밖에 없고 또 樣式 上 이러한 相覆 混在는 다같이 過渡的 意味를 가진 等代의 것으로 看儆될 可能性이 있는 것이나 지금은 굳해야 이 問題까지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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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 {{TagSpage|79-2}}何如間 이리하여 우리는 朝鮮 石塔 樣式의 典型的 數例를 얻어 볼 수 있다. 以後 朝鮮의 諸石塔은 特殊한 例外的 作品을 除하고서는 擧皆가 以上 叙述한 諸塔 樣式이 根幹이 되어가지고 千態萬相의 殊別相을 못하고 있음을 본다. 勿論 形式 그 自體만으로서 볼진댄 그리 큰 變化가 없다─따라서 千偏一律의 樣式의 翻復이 있을 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二千偏一律的인 樣式 속에서 時代의 性格이 層이 보여지는 것도 奇異한 現象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 硏究에 있어서 이러한 簡單한 形式 속에서 時代의 性格을 찾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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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 이상으로써 우리는 조선 석탑의 양식 시원을 보았다. 그것은 전체로 있어서 목조 탑파 양식을 재현하는 데 있으나 석재라는 특별한 재료에서 연유되는 제한으로 말미암아 부분 형식에 있어 목조 탑파에 없는 새로운 형식이 안출되었고 또 그것이 정립되기 전까지 여러가지 시험이 시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즉 그것은 목조 탑파 양식의 충실한 부분적 재현에서 시작되어 점차 전체 요의의 표현으로 기울어 갔다. 그러는 동안에 실제 목조 건물 그 자체의 발전도 있어 그에 수반된 표현 의사도 달라서 이곳에 한 개의 양식이 정립되었으니 그는 즉 기단이 중단으로 상단은 4개의 탱주가, 하단은 5개의 탱주가 중대석을 구분하여 있고 저대복석에는 상단중대를 받기 위하여 각과 반원의 {{TagRefT|2-7}}'몰딩'(Moulding)<ref group="a">moulding을 日本서는 "刳形"으로 번역한다. 여러가지로 굴곡진 층도리의 장식 곡선형을 말한다. </ref>이있고 상대복석에는 초층옥신을 받기 위하여 중단각형의 '괴임'이 있고 옥신은 전체로 몇 층이든지 간에 일간 평면으로 요약되었고 옥리계급형 '밭임'은 오급 이상 더 있지 아니하며 옥표면은 실제 건물의 주면대로 층절 없는 경사〿이 되어있고 노반 이상 상륜부는 거개 실락되어 불명한 자가 많으므로 문제되지 아니하나 전각사 위에는 풍령이 달렸던 혈흔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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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 이 기단의 상대 형식과 옥리의 층급 '밭임'은 확실히 영니산탑에서 나올 수 있는 형식이었고 옥표의 경사 주면은 각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미륵탑 이래의 전통이며 기단하대 형식은 확실히 새로운 양식이나 석탑 자신의 발전이람보다 당대 실제 건물의 기단 양식이었다 할 수 있어, 이 모든 의사를 종합하면 재래의 시험적이었던 모든 수법이 집성되어 정돈되었고<<이미지>> 신식의 건축 양식을 가미하여 완전히 통일된 석탑 양식으로서의 완체가 성립된 것이다. [[파일:고유섭 조선탑파2-3.png|가운데|500px]]이러한 완전한 예를 우리는 경주 내동면 암곡리 부도곡고선사지에 있는 삼중 석탑 일기, 전군양북면룡당리감은사지에있는 삼중석탑이기, 충주군가김 면탑정리일명폐사지에 있는 칠중석탑일기, 경주군견곡면라원리일명폐사지에 있는 오중석탑 일기에서 본다. 이들 제탑은 상술한 전형적 형식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대작들이다. 특히 이 모든 탑은 이 전형적 형식의 시초에 처하여 있어 양식적으론 통일되어있다 하나 그 부분 구성에 있어서는 재료의 편성이 고식의 의태를 아직 남기고 있어 우주는 별석이요 옥신심 벽이 또 별석이요 옥개첨석이 별석이요 옥리'밭임'이 별석이다. 후대 제석탑의 경향을 보건대 부분부분이 단일석으로 통일되는 경향이 시대가 뒤질수록 농후함을 볼 수 있으므로 해서 지금 이곳에 든 사기의 석탑 중부분이 단석으로 통일 된 것을 양식상 뒤진 것이라 둔다면 나원리 오중탑을 최저에 둘 수 있고 고선사지탑과 감은사지탑은 옥신의 조식유무의 차가 있을 뿐이요, 건축 수법으로선 하등의 차이가 없으므로 양자를 동일 수준에 둘 수 있고 탑정리탑은 고선‧감은탑과 함께 나원리탑보다 선행할 것은 사실이나 고선‧감은탑과 견주어 선후의 정위를 따지기가 약간 곤란하다. 즉 탑정리의 탑은 초층옥신의 구성이 마치 부여 정림탑의 옥신 구성과 같이 우주가 별석이요 심벽이 양 매 판석으로 등분히 째여 있고 제2층 이상은 사매장석을 혹 엇물리기도 하고 혹 째와물리기도 하여 부산왕궁평탑에서의 수법과 유사한 점을 남겨 고선‧감은탑이 제이층 이상 단석으로 옥신을 통일함보다 고식에 속하여 있는데, 옥개의 수법에 있어서는 고선‧감은탑과 같이 입면의 사방중심이 분할되어 있어 양자 간 유사를 보이고 있음에 불구하고 옥개와 옥전'발임'석이 고선‧감은탑과 같이 또 분리되어 전후 팔석의 결구의사를 보이지 아니하고서 사석결구의 의사를 보이고 있을 뿐더러 육‧칠량층의 옥신옥개는 모두 단석으로 되어있다. 초층옥신을 받기 위하여 장진일석이 '괴임'으로 있는 것을 영니산탑에 가까운 의사라 할 것인데 고선탑의 초층옥신에 감실 형식을 사면에 모각하였으되 합한 좌우에 각치방석 형식이 조출되어 있는 것이 또한 저 영니산탑의 의사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신양식과 구양식의 교차가 상복되어 있는 고선‧감은탑과 탑정리탑과의 선후는 어느 다른 자료가 발견되기 전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이는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고 또 양식 상 이러한 상복 혼재는 다같이 과도적 의미를 가진 등대의 것으로 간경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나 지금은 굳이 이 문제까지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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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 하여간 이리하여 우리는 조선 석탑 양식의 전형적 몇 예를 얻어 볼 수 있다. 이후 조선의 제석탑은 특수한 예외적 작품을 제하고서는 거개가 이상 서술한 제탑 양식이 근간이 되어 천태만상의 수별상을 못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형식 그 자체 만으로 보면 그리 큰 변화가 없다─따라서 천편일률의 양식의 번복이 있을 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천편일률적인 양식 속에서 시대의 성격이 층이 보여지는 것도 기이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간단한 형식 속에서 시대의 성격을 찾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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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번= {{TagSpage|79-3}}우리는 本稿 第一項에서 朝鮮 石塔의 始源 樣式을 말할제 그 世代의 考證이 없이 漠然히 이를 叙述하였고 第二項에 들어 저 始源 樣式으로부터 次生된 典型的 樣式을 말함에 있어 또한 世代의 考證이 없이 純樣式的 問題에서 이를 叙述하였다. 지금 우리가 이 兩項의 問題를 樣式的으로 解決 식히고 將次 第三段으로 問題를 옮겨가려 할제 結論的으로 考察치 아니하면 아니 될 問題로 上來 叙述하여 온 諸塔의 世代 問題를 解決짓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問題를 解決짓기 爲하여 考察의 便宜上 典型的인 것들의 世代 問題로부터 考察하여 들어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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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번= {{TagSpage|80-1}}우리는 典型的 樣式의 範疇 안에 드는 것으로 高仙塔, 感恩塔, 塔亭里塔, 羅原里塔의 四種을 들었다. 이 中의 羅原里塔은 그 隷屬寺址가 不明일 뿐더러 筆者의 寡聞으로서 아직 이렇다 할 만한 參考 資料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는 除外하고(이는 典聖的 塔婆의 發展相을 考察할제 다시 問題하련다) 다음에 堵亭里塔은 그 亦 所屬寺址名은 未審이나 多少의 參考 資料는있다. {{TagRef|2-8}}第一로 「朝鮮の風水」<ref>朝鮮總督府 調査資料</ref> 속에 傳하는 說로 이 地方이 朝鮮의 中央에 處함으로써 國家 鎭護의 意味로 元聖王 2년에 建設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中央塔이라 부른다는 것인데 이 傳說의 出處도 모르겠거니와 元聖王 12年이라면 저 天實 17年(即 景德王 17年)의 建塔 配銘이 있는 元金泉廢葛項寺의 變塔(今移在京城總督府博物舘)보다 37年이나 뒤지는 年數인데 塔婆의 樣式으론 그 葛項塔보다 高古하기 짝이 없으니 이 世代에 關한 說은 믿어지지 아니한다. 古蹟圖譜 4卷에는 이 堵의 附近에서 拾得하였다는 瓦當數種이 있는데 그中에서 1427·1428의 兩種瓦當은 普通三國末期로부叫 新羅統一 初間에 있든 形式으로 考古學 上 定位되어 있는 것이며 또다른 瓦當들도 盛唐의 氣風이 濃厚함으로서 {{TagRef|2-9}}關野貞 博士는 이 塔을 統一 初에 두었다<ref>朝鮮美術史 <br/>朝鮮古蹟圖譜第四解說<br/>大正 3年 9月, 朝鮮古蹟調查略報告<br/>國華 27號</ref>. 저 有名한 建興 5歲在丙辰 云云의 記銘이있는 {{TagRef|2-10}}三尊佛像의 背光이 發見되었다는 說이 있는데<ref>考古學雜誌 大正 14年 6月號 吉田貞吉 博士 論文 中,  今西龍 博士는 이 問題를 輿地勝覽 記錄의 不完全된 것을 取信한 데서 생긴 것으로 問題치 않고 있다 (百濟史硏究29頁)</ref> 이 建興 5年이란 百濟 威德王 43年으로 推定되어 있는 것이지만 이 佛像의 이곳 發見說은 信을 둘 수 없는 것인즉 參考 資料로 引用하기는 困難하다. 그렇다면 좀 漫然된 험이 있으나 關野 博士의 統一初 說이 가장 有力한 推定이 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決定짓기 前에 다음 高仙‧感恩兩塔의 世代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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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번= {{TagSpage|80-2}}廢高仙寺塔은 이미 그 寺名이 알려있고 또 일찍이 이곳에서 {{TagRef|2-11}}元暁法師의 碑片이 發見되어 三國遺事의 記事와 綜合할 때<ref>葛城末治 著 朝鮮金石攷研究 篇</ref> 元曉의 庵房이 이곳에 있었고 <ref>葛城末治 著 朝鮮金石攷研究 篇</ref>}元暁의 入寂이 垂拱 2年(神文王6년 西紀 686) 3月 冊日이었음이 알려진 바 되어 高仙寺의 寺觀은 적어도 이 以前부터 있었던 것이 立證되었으나 寺觀의 存立으로써 곧 塔婆의 實存 年代틀 說明하여 可할 것이냐는 것은 一{{TagPage|81-1}}律로 不可할 것도 아니요 可할 것도 아닌 것으로 그 樣式이 가지고 있는 時代的 氣風과 寺觀 存立의 歷史的 事實이 比等하면 相互 反證할 수 있는 것으로 認定할 수 있으므로 해서 우리는 이 境遇에 形式的 論理에 多少 飛躍이 있다 하더라도 事實로 元曉 住錫 時에 적어도 이 塔이 있었을 것으로 따라  이 塔의 下限이 神文王 6年까지에는 두어져도 可할 것으로 認定된다. 이것은 다음에 올 感恩塔의 考察로부터 더욱 明確히 立澄된다 하겠다. [[파일:고유섭 조선탑파2-4.png|가운데|8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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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번= {{TagSpage|81-2}}<blockquote no="XX">文武王欲鎮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王立 開耀二年畢 排金堂砌下 東 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繞之備 盖遺詔之藏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 見臺</blockquote>라는 句가 있으니 일찍부터 傳하던 寺中古記로서 新羅本記 文武末年條에 「羣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不爲大王石」이라 傅하는 事實과 綜合할 때 創寺의 事實엔 틀림이 없을 것 같다. {{TagRef|2-12}}또 文武王代 시작되어 開耀 2年(神文王 2年)에 畢功하였다는 것도 事實을 事實다웁게 傳하는 年數로 가장 믿음직한 記錄이다<ref>感恩寺는 大鍾川이 東海로 드난 於口, 臺本里 龍堂山 下에 있다. 寺址만 高臺가 되고 門前은 海水가 바로 밀어들 수 있을 만한 地平이 되어있다. 이 寺址는 東西로 길고 南北이 짧다. 따라서 金堂과 雙塔이 거의 一線으로 羅列되어 있고 金堂에는 礎砌가 남았으나 龍穴은 찾을 수 있다. 金堂址에서 東南으로 바로 大王岩이 내다보인다. 利見臺는 찾을 수 없으나 臺本里란 洞名에 依해서 寺後主山에 있었을 것 같다.</ref>. 따라서 이곳 雙塔도 神文王 2年까지는 落成되었을 것이요 그 創始는 不明이나 많이 잡아야 文武王 即位 以前에는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니 이 塔의 成立年數는 文武王 元年으로부터 神文王 2年까지(661─682 AD)에 둘 수 있다. 따라서 樣式上 全여 {{TagPage|82-1}}同一하고 寺觀의 實在 世代가 거의 同一하던 廢高仙寺의 堵도 거의 同代에 둘 수 있게 된다. 兼하여 樣式上 이들과 先後의 地位에 있을 수 있는 塔亭里塔도 等代에 둘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典型的 塔婆의 樣式 成立이 적어도 神文王 3年까지는 그 下腿이 있었던 것이 立證되었다 하겠다. 이는 勿論 高仙塔, 塔亭里塔의 成立 下腿이 感恩塔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感恩塔보다 實際 成立이 앞선다면 朝鮮 石塔의 典型的 樣式의 成立 下限이 神文王 2年보다 좀 앞설 뿐이요 그것이 確實치 못한 以上 最低 限度로 神文王 2年까지는 이下限을 決定할 수 있다는 뜻이다. 萬一에 또 感恩寺塔보다 實際 成立 年數가 뒤진다면 이 典型的 樣式의 成立 下限이 이미 感恩寺塔으로 말미암아 定立된 以上 이 樣式의 傳承 繼窺을 그것이 意味할 뿐 大勢에는 何等 影響됨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朝鮮 石塔의 典型的 樣式의 成立 下腿 爲先 神文王 2年에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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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5번= {{TagSpage|82-2}}이와 같이하여 典型的 樣式의 成立 下腿이 制定되었다면 다음에 올 것은 그上眼 問題라하겠다. 이때 羅原里塔은 典型的 樣式의 低位에 두었고 高仙塔은 樣式上 感恩塔보다 더 올라갈 수 없으니 問題 外이고 塔亭里塔이 感恩塔보다 先行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問題인데 이는 樣式 上으로선 決定되지 아니 함을 前에 말하였으니(筆者 亦 靖亦 이塔은 未調査이기 때문에 確定的 斷案을 나기 어려운 점도 있다) 結局 現狀으로선 이 問題는 解決되지 아니한다 하겠다. 萬一 塔亭里塔이 感恩塔과 等代, 또는 그 아래들 것이라면 問題는 簡單히 決着되고, 따라서 石塔의 典型的 樣式은 大體로 文武王代에 確立된것으로 看做하게 될 것이나 塔亭里塔 對 感恩塔의 關係가 確立되기 前까지는 斷案키 어려운 問題이요 이것은 다음의 問題의 解明을 따라 어느 程度까지 밝혀질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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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6번= {{TagSpage|82-3}}典型的 樣式이 成立되기 前에 始源 樣式이 있었음은 우리가 이미 累述한 바이다. 그 始源 樣式 中에 盈尼山塔은 確實히 {{TagPage|83-1}}그 樣式上 慶州 芬皇寺塔의 下風에 드는 樣式으로, 말하자면 芬皇寺塔의 樣式에서 發展된 形態로 理解할 수 있다. 基壇이 單層으로 低平한 意態와 初層屋身을 괴이기 爲하여 長石을 괴인 意態가 類似할 뿐더러 屋蓋를 上下 다같이 層級段階로써 解決시킨 것은 確實이 芬皇塔의 手法이다. 芬皇塔의 手法이나 그러나 그곳에는 形式이 洗鍊이 있고 手法의 洗鍊이 있다. 或 盈尼山塔의 이 屋蓋 手法을 芬皇塔까지 생각지 않더라도 {{TagRef|2-19}}安東邑 東部洞 法興寺址에 있는<ref>前回 拙稿에서 塼塔을 말할 적에 安東邑 內 新世洞의 七層塼塔이라든지 邑南의 五重塼塔 等에 關하여 그 寺跡을 特히 말치 아니하였지만 그後 「朝鮮の風水」 속에 실린 安東古輿地圖란 것에 依하여 보면 七層塔 所在地는 法興寺, 五層塔 所在地點은 法林寺 等으로 記錄되어있음을 보았고 輿地勝覽에도 兩寺址名이 거의 該當 地點에 있는 듯이 表現되어있다. 即 <cite no="XX">「法興寺在府東」</cite> <cite no="XX">「法林寺在城南」</cite> 等이라 한 것이 그며, 宣祖 41年에 되었다는 安東邑 古誌(永嘉誌)에도 <cite no="XX">「新世里法興寺」</cite>의 句가 있다 하였다. 따라서 筆者는 이것을 安東法興塔, 法林塔 等으로 부를까 한다. 그後 藤島亥治郎 博士의 「朝鮮慶尙北道安東郡及び榮州郡に於りる新羅時代建築に就いて」(建築雜誌 昭和 7年 9月號 第48緝 587號)라는 論文 中에서도 同意向을 보았다. 다만 博士는 輿地勝覽의 記錄만 가지고 곧 推定해버린 모양이다.</ref> 七重塔같은 實際 塼塔으로서의 高古한 例를 效顰한 것으로 생각할 것 같이 말할 사람이 있을른지 모르나 朝鮮서 純塼 造塔으로 高古하다 는 이 塔이 벌써 重層 基壇을 이루었을 뿐더러 그 下層 基壇面에 天部諸像이 彫飾되어 있어 저 盈尼山 塔基壇의 源始的인 것과 比較도 되지 아니하니 우리는 盈尼山塔을 마땅히 芬皇塔에 接近시킴이 可할 것이다. 芬皇塔은 지금 三層뿐이요 盈尼山塔은 五層이니 또 이로써 곧 兩塔의 接近度를 疑心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前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芬皇塔의 現存 層級이 原數의 存續이 아니고 그 以上 더 있던 것이라는 說이 있다면 層數와의 比較는 問題가 아니된다 하겠다. 이리하여 盈尼山塔의 接近을 芬皇塔에 붙인다면 芬皇塔이 成立되었으리라고 믿어지는 芬皇塔 落成 年代 卽 善德王 3年까지에 그 上限을 假定할 수 있다.또 그 下限은 高仙‧感恩塔의 上限을 文武王 即位 元年까지 두었은즉 樣式上 그에 先行하는 이 塔의 下限이라 많이 본대야 文武王代까지 둘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前에 남겨둔 塔亭里塔이 萬一에 感恩塔에 先行된다면 그 年代的 位相은 이 中間에 어느 句節 속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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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7번= {{TagSpage|83-2}} 盈尼山塔의 年代的 範圍를 上記 範圍안에 둔다면 다음에 樣式的으로 이 塔의 次位에 둔 王宮坪塔이 閔題된다. 이 塔의 附近에서는 일찍이 古瓦幾片이 發見된 事實이 있고(古蹟圖譜46405葉) 그 瓦片이 또한 〿〿亭里塔附近에서 發見되었다는 古瓦(古蹟圖譜46407葉 第1427─8號瓦當) 와 共通된 要素가 있으며 또 이 堵에 關하여는 今西龍 博士의 遺著百濟史 硏究附 錄에 「益山舊{{TagPage|84-1}}都探勝の栗」에서의 拔記가 있으니 말하였으되 <blockquote no="XX">일본어인용1</blockquote>이 地方 傳說에 나타난 時代를 超越한 概念들의 羅列, 卽馬韓 高句麗 道詵의 三者를 歷史에 맞게 改正한다면 馬韓은 百濟, 道詵은 逸名僧으로, 또 그 風水의 觀念은 佛力에 依資하여 鎭護 國家의 觀念의 發現으로 解釋하여 百濟末代의 創立으로 解釋되지 않는 바─아니나, 傳說의 改寨을 함부로 하기도 어려운 노릇인즉 이에 依한 推定은 다시 이 以上 할 수 없고 典型的 樣式의 上限을 文武王 初年까지 두는 假說을 採用한다면 樣式 上 이것은 그에 先行되는 것이므로 해서 下限은 그 以前까지, 即 王朝를 두고 말한다면 百濟의 義慈王 末年, 百濟의 社稷이 覆滅되기 前까지 둘 수 있을 것이다 百濟故地에 남아있는 塔으로 高古한 石塔例가 彌勒‧定林 及이 王宮坪塔 外에 다시 없는 것을 보아 軍事的으로 騷亂되기 前에 아마 創建되었던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百濟期의 最後의 作品이 아니었던가. 勿論 이때 우리는 樣式的으론 이에 先行하나 塔身에 顯慶五年 云云의 記銘이 있는 定林塔을 생각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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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8번= {{TagSpage|84-2}}定林塔 第 一層 屋身 及 「밭임」面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은 篆額 下에 <cite no="XX">「顯慶五年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cite>이란 句로부터 始作되어 있는 것으로 世人에 이미 膾炙되어 있는 바이니 다시 더 說明을 必要치 않겠고 다만 이 癸未建이란 句를 그대로 믿는다면 이 塔이 곧 翻慶 5年 即 百濟 義慈王 20年에 百濟를 破滅시키면서 이내 곧 蘇定方의 손으로 말미암아 建立된 塔같이 解釋될 것이나 그러나 簷額에 碑銘이라 해 놓고 結局 그 主體가 碑가 아니고 塔인 것은 碑를 {{TagPage|85}}세우려다 碑를 세우지 않고 寺塔을 그냥 利用한 것으로, 따라서 이 塔은 벌써 그 以前에 建立되어 있던 것으로 解釋된다. 따라서 이것이 百濟期의 塔일 것이 容易히 理解되지마는 이 碑銘이 이 塔身에 새겨져 있는 그事實 自體에 關하여 全般的으로 疑心한다면 이 塔에 關한 世代 問題는 結局 王宮坪塔, 彌勒塔 等과의 相關的 解釋에서 解決되는 수밖에 없다. 筆者가 왜 이곳에 이러한 複雜한 생각을 하느냐 하면 實은 이 碑銘鐫刻에 關하여 疑心하는 學者가 벌써부터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即 다름 아닌 喜田貞吉 博士이니 「大唐平百濟國碑に關する疑問」이라 하여 考古學雜誌 第 15卷 5號에 벌써 이를 疑問視하고 있다. 그 後 博士에게 筆者가 親히 오늘의 그의 意見을 推問하였더니 今日까지도 自己 意見에 變改가 없다 하여왔다. 先輩鄭寅普 氏는 이에 言及한 바는 없었으나 일찍이 東亞日報 紙上에 發表한 「朝鮮의 얼」이란 데서 高麗 〿宗朝代 胡宗旦이란 者가 高麗에 來仕하여 到處의 金石을 碎鎔한 事實을 指摘한 바 있었는데 萬一에 定林塔의 이 碑銘鐫刻이 疑心되는 것이라면 根據는 없는 臆測이나 胡宗旦의 作亂이란 것도 決코 汎然히 볼 것이 아닌 듯하다. 扶餘 陳列館內石槽에 同文의 碑銘이 새겨있는 것도 結局은 作亂의 한 나머지가 아니었을까. 筆者가 이 塔을 平濟塔으로 부르지 않고 定林塔으로 부르려 함은 原寺 名을 쫓아 부르려는 意思도 있거니와 太半은 이 碑銘鐫刻에 疑問이 있는 까닭이라고도 하겠다. 東國輿地勝覽 卷52 順安佛宇法興寺金富軾記 中에 <blockquote no="XX">昔唐太宗皇帝詔 於擧義己來 交兵之處 立寺剎 仍命虞世南 褚遂良等七學士 爲碑銘以紀功德</blockquote>이란 것이 있지만 交兵之處에 立寺刹함은 業障消滅을 爲함이었을 것이요 紀功키 爲하여는 따로히 樹碑에 事實이 있었을 법하되 殺生의 功業을 佛塔에 敢히 記刻한다는 것은 佛法이 方盛하고 佛威가 아직 墮地치 않던 當代 事實로 無嚴한 便에 屬하지 아니 하였을까. 여러가지 未審한 點이 있지만 本論과 乘離되는 問題이니 이 以上 더 逐究치 않겠고 믿{{TagPage|86-1}}고 지나던 定林塔의 世代 參考 資料가 이와 같이 疑問視되어 있다면 定林塔의 世代도 王宮坪塔의 그것과 같이 또다른 關聯에서 考察되지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 問題의 解決을 爲하여 던져진 唯一한 資料는 다름 아닌 彌勒塔이라 하겠으니 樣式上으로 가장 가까운 類型 속에 들어있고 또 비록 傳說이나마 比較的 世代 位相이 近理한 歲次로써 일컬어 있는 것은 이것 뿐인 까닭이다. 即 그는 百濟 武王代 建立으로 傅하여 있는 것이니 筆者는 樣式上이 世代說에 何等 反對할 理由를 갖지 못하고 있으나 그러나 學者 間엔 이를 樣式上 疑心한다는 이도 있으니 우리는 多少 冗 漫된험이 있으나 論理의 進行上 爲先 이곳에 傳說의 本文을 처들고 다음에 그 異說을 說明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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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9번= {{TagSpage|86-2}}이 傳說이라는 것은 본디 三國遺事(권2)로 말미암아 傳해진 것이요 또 東國輿地勝覽(권33 益山)에도 傳해진 것인데 異說을 主張한 學者―(即 關野貞博士) 三國遺事에 依하지 않고 勝覽에 依한 까닭에 多少 設論에 複雜함을 보게 되었고 또 이를 說明하려는 筆者로서는 異說을 主張한 學者의 所據인 勝覽의 記錄을 들어 말함이 可할 듯하게도 생각되지만 勝覽의 記錄은 異說을 主張한 그 論文 中에 原文대로 引用되어 있는 것인즉 重複을 避할겸, 또 傳說의 原文도 紹介할 겸하여 이곳에는 三國遺事에 傅하여 있는 것을 爲先 登載할까 한다.<blockquote no="XX">武王 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br/>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扵京師南池邊 池龍文通而生 小名薯童 噐量難測 常掘薯蕷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 美艷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羣童 羣童親附之 乃作謠 誘羣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TagPage|87}}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王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 薯童曰 可 於是 聚金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 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blockquote>以上 本文에 있어서의 傳說은 이미 今西龍 博士도 指摘한 바와 같이 本來 武康王에 對한 傳說을 三國遺事의 筆者가 任意로 百濟 武王으로 改編한 것이며 또 傳說에는 여러가지 事實이 複合되어있다. 이는 何如間에 지금 塔婆에 대한 問題만을 들어 上述한 것을 疑心한 것으로 關野 博士 說이란 것을 보자 曰, <blockquote no="XX">일본원서인용1</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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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0번= {{TagSpage|90-2}} 原來 이 彌勒塔에 關하여 說을 세운 故關野 博士의 이 意見이 뚜렷한 便이었고 그의 뒤를 받아 彌勒寺址를 踏査하고 彌勒塔을 調査하여 {{TagRef|2-13}}一介의 論文을<ref>朝鮮建築史論 3 (建築雜誌 昭和 5年 5月號)</ref> 세운 藤島 亥治郎 博士는 關野 博士의 이 意見을 徹底히 承認한 것인지 아닌지 매우 模糊한 辯論에 끄쳐 要點을 모르겠는데 大概는 寺址만을 百濟期의 것이요 塔은 後代의, 即 關野 博士가 設定한 世代에 贊同하는듯하고 {{TagRef|2-14}}大原利武氏가<ref>「三國時代の石塔について」 (朝鮮と建築 第10輯 第4號)</ref> 이에 關하여 立論한 바가 있다 하나 定林塔의 世代 問題를 疑心 없이 그 記銘 年代 以前의 것으로 두었을 뿐 아니라 이 彌勒塔을 百濟式이란 概念 안에 包括시켰을 뿐이요 今西龍 博士는 特別한 理由는 붙이지 않고서 이 彌勒塔을 百濟 時代 建造物로 認定한다 하였고(百濟史研究568頁─9頁) 王宮 坪塔도 政治上 百濟時代의 作이 될 수 있는 可能性이 多大하지만 外에 그 前後에 連接하는 時代의 作이 될 수 있는 可能性도 적지 않다 하였다(同書574─ 575頁). 그러나 이 여러 說 中에 論다운 論은 關野 博士 說뿐이니 우리는 지금 이것을 檢討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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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1번= {{TagSpage|90-3}}지금 關野 說에 있어서 가장 그 中心된 理論은 彌勒塔이나 王宮 坪塔은 樣式上 서로 同一한데 王宮坪塔 下에서는 日 {{TagPage|91-1}}本의 飛鳥 時代와 寧業 時代의 初期와의 中間에 相當하는 文儀의 瓦當을 얻었고, 「樣式上」이 兩塔은 定林塔에 先行 할 수 없다는 것이 主가 되어 傳說은 이에 맞도록 改譯 推論된 데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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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2번= {{TagSpage|91-2}}于先 博士가 말한 瓦當 年代에 대하여 보건대 飛鳥 時代란 普通 欽明天皇 13年, 日本에 佛敎가 輸入된 때로부터 孝德天皇 大化 元年, 大化의 改新이란 것이 되기 前까지, 即 新羅 眞興王 13年으로부터 善德女王 14年까지, 寧樂 時代라는 것은 普通 前後 兩期로 나누어 前期라는 것은 {{TagRef|2-15}}大化 改新 後부터 元明天皇 和銅 3年 平安城 奠都까지 即 新羅 善德王 14年으로부터 聖德王 9年까지<ref>時代 區分에 關하여는 學者에 따라 多少의 相違가 있다. 따라서 關野 博士가 말하는 年代는 어떠한 것일지 알 수 없으나 적 어도 飛鳥 時代라는 區分은 이것이 一般的인 것이라 하며, 或은 天智天皇 即位年(新羅 文武王 2年), 또는 그 6年 近江奠都까지(文武王 7年) 따라서 寧樂 前期는 近江奠都 後로부터 元正天皇 養老 7年(新羅 聖德王 22年(까지 두기로 한다고 한다(以上 飛鳥園 發行 日本美術史 資料 解說 1, 2部)</ref>, 이를 좀 늦잡는 設에 依하여 飛鳥 時代를 文武王 7年까지, 寧樂 前期를 聖德王 22年까지 둔다 하더라도 中間期란 어느 때쯤인지─이를 博士가 생각하고 있는 新羅 統一初라 한다 하더라도 이 瓦當에 무슨 記銘이 있는 것이 아니요 또 이 數字歲年에 絶對로 診當한 것이 아니라 이 紋儀 形式의 成立 上限과 存續 下限이 分明치 않은 以上, 이 推定은 大體의 推定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即 이 瓦當의 年代 位相이 틀린다는 것이 아니라 이 瓦當으로써 다른 造型, 即 이 境遇에 있어서 王宮坪堵과 彌勒塔을 推定케 될 때 이러한 推定法은 가장 要心할 問題가 아닐까 한다. 假令 지금 이 王宮坪塔에서의 瓦當과 저 塔亭里塔에서의 瓦當間엔 類似한 點이 있고 塔亭里의 所屬 郡縣, 即 忠州 地方은 {{TagRef|2-16}}일찍이 新羅 版圖에 들었을뿐더러 眞興의 移民<ref>東國輿地勝覽 卷34 忠州牧建置沿革條</ref>, {{TagRef|2-17}}文武의 築城 等<ref>三國史記地理2 中 原京條</ref> 事實이 일찍부터 있었음을 보아 樣式上 塔亭 里塔은 이 文武王代 前後에 두어도 좋겠거니와 王宮坪塔의 所屬 地域은 바로 幾年前까지도 國家를 달리한 百濟의 所屬, 그나마 新羅와 國境에서 멀고 百濟의 國都에서 가장 가까운 距離에 있는 地點인 만큼 範疇가 아직 模棚한 一瓦當의 破片만으로서는 이 塔의 建立 王朝를 그다지 쉬웁게 決定지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博士는 王宮坪塔과 彌勒塔과를 全혀 同一 水平에 두고 論하고 있으나 筆者는 이미 同一 水平에 이를 둘 수 없음을 論證하였고 또다시 博士는 儀式  {{TagPage|92-1}}上 이 兩塔이 定林塔에 앞설 수 없는 것으로 論理를 展開시켰으나 이 點에서 筆者는 그렇지 아니할 것을 立論하였고, 이 設을 세울 적에 博士는 定林塔의 成立이 記銘의 顯慶 5年이란 곳에 있음을 疑心치 아니하고 立論한 모양이나 이 亦 置信할 것이 못 되는 以上, 여기에 立脚한 博士의 意見에는 여러 가지 點으로 보아 難色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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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3번= {{TagSpage|92-2}}뿐만 아니라 傳說의 一部를 報德國 安勝의 事實이 部分的으로 混入된 것이라 認定한다손 치더라도 安勝이 文武王의 王妹를 娶하였다는 文武王 20年 3月로부터 安勝이 京都에 被徵되던 神文王 3年 10月까지 前後 4年 8個月 間, 이 彌勒寺와 같은 巨敞한 經營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또 이 傳說의 主人公인 武康王의 雙陵이란 것은 大正 6年 谷井濟一氏 一行의 發掘 調査로 아마 陵墓의 樣式이 百濟의 王陵이라는 저 扶餘陵山里의 陵墓 形式과 全혀 同一할뿐더러 玄室에서 發見된 木棺 其他 副葬物의 性質이 百濟 末期 造型에 共通性을 갖고 있어 {{TagRef|2-18}}이 雙陵이란 것은 百濟 末期의 어느 王陵으로 看做할 수 있다는 意見이 陳述되어있다<ref>大正 6年度 古蹟調査報告 652頁<br/>朝鮮總督府 博物館 略案內 9頁4<br/>이 遺物은 지금 總督府 博物館에 陳列되어있다.</ref>. 今西龍 博士도 이 點을 念頭에 두고 이 雙陵이 百濟 武王(의 陵)이기도 하지만 徵證을 찾을 수 없고 報德國 關係者의 것인지도 알 수 없으나 勿論 安勝으론 생각되지 아니한다 하였다(安勝은 慶州로 被徵된 까닭에 그 陵墓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이리 볼제 이 傳說 속에는 여러 事實의 混在와 神秘化가 있다손 치더라도 武康王을 百濟 武王으로 改纂한 三國遺事 筆者의 英斷(?)도 過히 허물되지 아니할 것 같다. 百濟는 武王의 子 義慈王으로 말미암아 滅亡되고 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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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4번= {{TagSpage|92-3}}우리는 彌勒塔을 樣式的으로 定林堵에 先行하고 定林塔이 盈尼山塔에 先行하고 盈尼山塔의 上限은 善德王 3年에, 下限 神文王 2年까지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說明하였지만 이에 先行하여 彌勒塔이 傳說대로 武王 代에 成立되었을 것에 何等 無理를 느끼지 않게 된다. 高仙‧感恩塔이 神文王 初에 下限이 있고 塔亭里塔이 {{TagRef|2-20}}文武王代에 大概의 年位가 있 {{TagPage|93-1}}을 수 있다면<ref>이 塔亭里塔이란 것을 筆者는 輿地勝覽 忠州佛宇條에 보이는 金生寺란 것이 아닌가 한다. 勝覽에 <cite no="XX">「金生寺在北津涯」</cite>라 하고 이에 金生에 關한 設이 있고 끝에 <cite no="XX">「生修頭陁行居是寺因以爲名」</cite>이라 있는데 圃隱集 卷2에 送僧歸 金生寺란 것에 <cite no="XX">「縹緲金生寺 潺湲月落灘 去年回使節 半日住歸鞍 花雨講經席 柳風垂釣竿 此身雖輦下 淸夢尙江干」</cite>이라 있는 것이 그 地勢가 近似한 까닭이다. 다만 金生은 景雪 2年(聖德王 10年)生이라 함으로 一見 이 金生寺는 그 以後의 것인 듯이 생각되기도 쉬우나 寺址에서 發見된 古瓦 中에는 이 以前에 屬할 樣式들이 있음으로 보아 寺觀은 일이 그 以前에 있었던 것으로 推測되며 따라 이로써 塔의 年代 等은 推定되지 아니하고 다못 寺址名을 앎에 끝일 따름이다.</ref> 王宮坪塔‧定林塔이 無難히 百濟 末期라는 次位에 놓일 수 있고 따라 盈尼山堵(이것은 王宮坪塔과 定林塔과의 사이에 處할 수 있다 하였다)도 統一 以前期의 新羅의 遺作으로 올려지게 된다. 統一 三國이란 文武王 8年의 事實이다. 以上 推定된 諸 作品의 序와 年限 範圍의 諸相을 表示하면 上表와 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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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5번= {{TagSpage|93-2}} <<표>> 即 上表에서 보는 바와 같이 武王 代에 彌勒塔의 成立을 둔다 하더라도 關野 博士가 掛念한 바와 같이 그것이 반드시 芬皇塔에 先行하는 것을 뜻함이 아니요 (先行된다도 關係치 않은 일이지만), 또 朝鮮 石塔의 樣式이 三國 末期로부터 시작되어 新羅 統一 初까지에 即 7世紀의 約 一世紀 間을 두고 典型的 樣式까지의 成立을 보게 된 것이다. 한 樣式의 發生으로부터 典型 成立까지의 約 一世紀의 四分三이 걸렸다는 것도 當時 文化 發達의 遲速相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거니와 特히 典型的 樣式의 成立이 7世紀 後半, 即 政治的으로도 朝鮮이 完全히 統一된 時期와 該合하며, 그곳에 이르려는 統一的 機運이 先行 樣式에 表現되어있는 等, 無心한 石片에서나마 時代의 動向이 餘蘊없이 읽어진다 하겠다.
  
|목차4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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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번= 우리는 본고 제1항에서 조선 석탑의 시원 양식을 말할 때, 그 세대의 고증이 없이 막연히 이를 서술하였고, 제2항에 들어 저 시원 양식으로부터 차생된 전형적 양식을 말함에 있어 또한 세대의 고증이 없이 순 양식적 문제에서 이를 서술하였다. 지금 우리가 이 양 항의 문제를 양식적으로 해결하고, 장차 제3단으로 문제를 옮겨가려 할 때 결론적으로 고찰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문제로, 상래 서술하여 온 제탑의 세대 문제를 해결 짓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 짓기 위하여 고찰의 편의상 전형적인 것들의 세대 문제로부터 고찰하여 들어갈까 한다.
|목차4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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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번= 우리는 전형적 양식의 범주 안에 드는 것으로 고선탑, 감은탑, 탑정리탑, 나원리탑의 네 종을 들었다. 이 중 나원리탑은 그 예속 사지가 불명일 뿐더러, 필자의 과문으로서 아직 이렇다 할 만한 참고 자료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는 제외하고(이는 전성적 탑파의 발전상을 고찰할 때 다시 문제 삼으련다), 다음에 도정리탑은 그 역시 소속 사지 이름은 미심이나 다소의 참고 자료는 있다. 제일로 {{TagRefT|2-8}}「朝鮮の風水」<ref group="a">조선총독부 조사자료</ref> 속에 전하는 설로 이 지방이 조선의 중앙에 처함으로써 국가 진호의 의미로 원성왕 2년에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탑이라 부른다는 것인데, 이 전설의 출처도 모르겠거니와 원성왕 12년이라면 저 천실 17년(즉 경덕왕 17년)의 건탑 배명이 있는 원김천 폐갈항사의 변탑(현재는 경성총독부박물관에 있다)보다 37년이나 뒤지는 햇수인데, 탑파의 양식으론 그 갈항탑보다 고고하기 짝이 없으니 이 세대에 관한 설은 믿어지지 아니한다. 고적도보 4권에는 이 도의 부근에서 습득하였다는 와당 수종이 있는데, 그중에서 1427·1428의 양종 와당은 보통 삼국 말기로부터 신라 통일 초간에 있던 형식으로 고고학상 정위되어 있는 것이며, 또 다른 와당들도 성당의 기풍이 농후함으로써 {{TagRefT|2-9}}세키노 다다시 박사는 이 탑을 통일 초에 두었다. <ref group="a">조선미술사 <br/>조선고적도보제사해설<br/>대정 3년 9월, 조선고적조사략보고<br/>국화 27호</ref> 저 {{TagRefT|2-10}} 유명한 건흥 5세 재병진 운운의 기명이 있는 삼존불상의 배광이 발견되었다는 설이 있는데<ref group="a">고고학잡지 대정 14년 6월호 길전정길 박사 논문 중, 김서룡 박사는 이 문제를 여지승람 기록의 불완전된 것을 취신한 데서 생긴 것으로 문제치 않고 있다 (백제사연구29혈)</ref>, 이 건흥 5년이란 백제 위덕왕 43년으로 추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이 불상의 이곳 발견설은 믿음을 둘 수 없는 것이니 참고 자료로 인용하기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좀 만연된 험이 있으나, 세키노 박사의 통일 초 설이 가장 유력한 추정이 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결정짓기 전에 다음 고선‧감은 양탑의 세대를 보자.
|목차4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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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번= 폐고선사탑은 이미 그 사명이 알려져 있고, 또 {{TagRefT|2-11}}일찍이 이곳에서 원효 법사의 비편이 발견되어 삼국유사의 기사와 종합할 때 <ref group="a">가쓰라기 스에하루 저 조선금석고연구 편</ref> 원효의 암방이 이곳에 있었고, 원효의 입적이 수공 2년(신문왕 6년, 서기 686년) 3월 책일이었음이 알려진 바 되어, 고선사의 사관은 적어도 이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입증되었으나, 사관의 존립으로써 곧 탑파의 실존 연대를 설명하여 가할 것이냐는 것은 일률로 불가할 것도 아니요, 가할 것도 아닌 것으로, 그 양식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기풍과 사관 존립의 역사적 사실이 비등하면 상호 반증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으므로 해서 우리는 이 경우에 형식적 논리에 다소 비약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로 원효 주석 시에 적어도 이 탑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 이 탑의 하한이 신문왕 6년까지에는 두어져도 가할 것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다음에 올 감은탑의 고찰로부터 더욱 명확히 입증된다 하겠다. [[파일:고유섭 조선탑파2-4.png|가운데|800px]]
|목차4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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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번= 폐감은사 쌍탑은 원래 상술한 여러 탑에 비하여 사찰의 성립 시대가 가장 확실한 유일한 존재로서, 이 탑의 연대 확립은 곧 다른 탑파의 연대 추정에 커다란 좌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삼국유사에 전재된 감은사의 연기에<blockquote no="XX">文武王欲鎮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王立 開耀二年畢 排金堂砌下 東 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繞之備 盖遺詔之藏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 見臺</blockquote> 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는 일찍부터 전하던 사찰의 고기(寺中古記)로서, 신라본기 문무왕 말년조에 <cite no="XX">"羣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不爲大王石"</cite>이라 전하는 사실과 종합할 때, 창사의 사실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다.{{TagRefT|2-12}} 또 문무왕대에 시작되어 개요 2년(신문왕 2년)에 준공되었다는 것도 사실을 사실답게 전하는 연수로 가장 믿음직한 기록이다<ref group="a">감은사는 대종천이 동해로 흘러드는 어귀, 대본리 용당산 아래에 위치한다. 사찰 터는 높은 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 앞은 바닷물이 바로 닿을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한 지형이다. 이 사찰 터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남북으로는 짧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금당과 쌍탑이 거의 일직선으로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금당 자리에는 초석이 남아 있으나, 사찰의 중심부인 용혈은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금당 터에서 동남쪽으로는 대왕암이 바로 보인다. 이견대는 현재 찾을 수 없으나, 대본리라는 마을 이름을 참고할 때 사찰 뒤 주산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ref>. 따라서 이곳 쌍탑도 신문왕 2년까지는 완성되었을 것이며, 그 창시 시점은 불명이나, 많게 잡아도 문무왕 즉위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으니, 이 탑의 성립 연수는 문무왕 원년(661 AD)으로부터 신문왕 2년(682 AD)까지로 둘 수 있다.따라서 양식상 전혀 동일하고 사찰의 실재 시대가 거의 동일하던 폐고선사(廢高仙寺)의 탑도 거의 같은 시대에 둘 수 있게 된다. 겸하여 양식상 이들과 선후의 지위에 있을 수 있는 탑정리탑(塔亭里塔)도 동일한 시대에 둘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형적 탑파의 양식 성립이 적어도 신문왕 3년(683 AD)까지는 하한이 있었던 것이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물론 고선탑(高仙塔), 탑정리탑(塔亭里塔)의 성립 하한이 감은탑(感恩塔)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감은탑보다 실제 성립이 앞섰다면 조선 석탑의 전형적 양식의 성립 하한이 신문왕 2년보다 조금 앞설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확실하지 못한 이상, 최소한 신문왕 2년까지는 이 하한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또 감은사탑보다 실제 성립 연수가 뒤진다면 이 전형적 양식의 성립 하한이 이미 감은사탑으로 말미암아 정립된 이상, 이 양식의 전승과 계승을 그것이 의미할 뿐,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 석탑의 전형적 양식의 성립 하한을 우선 신문왕 2년에 두는 것이다.
|목차4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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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5번= 이와 같이 하여 전형적 양식의 성립 하한(下限)이 제정되었다면, 다음에 올 것은 그 이상의 문제라 하겠다. 이때 나원리탑은 전형적 양식의 저위에 두었고, 고선탑은 양식상 감은탑보다 더 올라갈 수 없으니 문제 외이고, 탑정리탑이 감은탑보다 선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인데, 이는 양식상으로는 결정되지 않음을 전에 말하였으니(필자 역시 탑정리탑은 미조사이기 때문에 확정적 단안을 내기 어려운 점도 있다) 결국 현상으로선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겠다. 만일 탑정리탑이 감은탑과 동대, 또는 그 아래일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히 결속되고, 따라서 석탑의 전형적 양식은 대체로 문무왕대에 확립된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나, 탑정리탑 대 감은탑의 관계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단안하기 어려운 문제이요, 이것은 다음 문제의 해명을 따라 어느 정도까지 밝혀질 것으로 믿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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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6번= 전형적 양식이 성립되기 전에 시원 양식이 있었음은 우리가 이미 누술한 바이다. 그 시원 양식 중에 영니산탑은 확실히 그 양식상 경주 흥왕사탑의 하풍에 드는 양식으로, 말하자면 흥왕사탑의 양식에서 발전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기단이 단층으로 저평한 의태와 초층 옥신을 괴이기 위하여 장석을 괴인 의태가 유사할 뿐더러, 옥개를 상하 다 같이 층급 단계로써 해결시킨 것은 확실히 흥왕탑의 수법이다. 흥왕탑의 수법이나, 그러나 그곳에는 형식이 세련되고 수법의 세련이 있다. 혹 영니산탑의 이 옥개 수법을 흥왕탑까지 생각지 않더라도 {{TagRefT|2-19}}안동읍 동부동 법흥사지에 있는<ref group="a"> 전회 졸고에서 전탑을 말할 적에 안동읍 내 신세동의 칠층 전탑이라든지 읍남의 오중 전탑 등에 관하여 그 사찰 터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후 조선의 풍수 속에 실린 안동 고여지도란 것에 의하면, 칠층탑 소재지는 법흥사, 오층탑 소재지는 법림사 등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았고, 여지승람에도 두 사지의 이름이 거의 해당 지점에 있는 듯이 표현되어 있다. 즉, <cite no="XX">"法興寺在府東"</cite> <cite no="XX">"法林寺在城南"</cite> 등으로 기록한 것이며, 선조 41년에 편찬된 안동읍 고지(영가지)에도<cite no="XX">"新世里法興寺"</cite>라는 구절이 있다 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것을 안동 법흥탑, 법림탑 등으로 부를까 한다. 그 후 등도 기지로 박사의 「朝鮮慶尙北道安東郡及び榮州郡に於りる新羅時代建築に就いて」(건축잡지 소화 7년 9월호 제48집 587호)라는 논문 중에서도 같은 방향성을 보았다. 다만 박사는 여지승람의 기록만 가지고 곧바로 추정해버린 모양이다.</ref> 칠중탑 같은 실제 전탑으로서의 고풍한 예를 효배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라 말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나, 조선에서 순전 조탑으로 고풍하다는 이 탑이 벌써 중층 기단을 이루었을 뿐더러, 그 하층 기단면에 천부 여러 상이 조식되어 있어 저 영니산 탑 기단의 원시적인 것과 비교도 되지 아니하니, 우리는 영니산탑을 마땅히 흥왕탑에 접근시킴이 가능할 것이다. 흥왕탑은 지금 삼층뿐이요, 영니산탑은 오층이니, 또 이로써 곧 두 탑의 접근도를 의심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전회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흥왕탑의 현존 층급이 원수의 존속이 아니고 그 이상 더 있던 것이라는 설이 있다면 층수와의 비교는 문제가 아니 된다 하겠다. 이리하여 영니산탑의 접근을 흥왕탑에 붙인다면, 흥왕탑이 성립되었으리라 믿어지는 흥왕탑 낙성 연대 즉 선덕왕 3년까지에 그 상한을 가정할 수 있다. 또 그 하한은 고선‧감은탑의 상한을 문무왕 즉위 원년까지 두었은즉, 양식상 그에 선행하는 이 탑의 하한이라 많이 본다면 문무왕대까지 둘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에 남겨둔 탑정리탑이 만일 감은탑에 선행된다면, 그 연대적 위상은 이 중간의 어느 구절 속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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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7번= 영척산탑의 연대적 범위를 상기 범위 안에 둔다면, 다음에 양식적으로 이 탑의 차위에 둔 왕궁평탑이 민제된다. 이 탑의 부근에서는 일찍이 과와 몇 조각이 발견된 사실이 있고(고적도보 46405 잎), 그 와조각이 또한 영척산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고와(고적도보 46407 잎)와 공통된 요소가 있으며, 또 이 담에 관하여는 김서룡 박사의 유저 유저 백제사 연구부록에 「益山舊都探勝の栗」에서의 발기가 있으니 말하였으되 <blockquote no="XX">일본어인용문1</blockquote> 이 지방 전설에 나타난 시대를 초월한 개념들의 나열, 즉 마한, 고구려, 도선의 세 가지를 역사에 맞게 개정한다면, 마한은 백제, 도선은 일명승으로, 또 그 풍수의 관념은 불력에 의지하여 진호 국가의 관념의 발현으로 해석하여 백제 말대의 창립으로 해석되지 않는 바─아니나, 전설의 개채를 함부로 하기도 어려운 노릇인즉, 이에 의한 추정은 다시 이 이상 할 수 없고, 전형적 양식의 상한을 문무왕 초년까지 두는 가설을 채용한다면, 양식상 이것은 그에 선행되는 것이므로 해서 하한은 그 이전까지, 즉 왕조를 두고 말한다면 백제 의자왕 말년, 백제의 사직이 복멸되기 전까지 둘 수 있을 것이다. 백제 고지에 남아 있는 탑으로 고고한 석탑례가 미륵‧정림급이 왕궁평탑 외에 다시 없는 것을 보아, 군사적으로 소란해지기 전에 아마 창건된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백제기의 최후의 작품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때 우리는 양식적으로는 이에 선행하나, 탑신에 현경 5년 운운의 기명이 있는 정림탑을 생각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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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8번= 정림탑 제 일층 옥신 급 「밭임」면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은 전액 하에 <cite no="XX">「顯慶五年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cite>이란 구로부터 시작되어 있는 것으로 세인에 이미 회자되어 있는 바이니, 다시 더 설명을 필요치 않겠고 다만 이 계미건이란 구를 그대로 믿는다면, 이 탑이 곧 번경 5년, 즉 백제 의자왕 20년에 백제를 파멸시키면서 이내 곧 소정방의 손으로 말미암아 건립된 탑같이 해석될 것이나, 그러나 첨액에 비명이라 해 놓고 결국 그 주체가 비가 아니고 탑인 것은 비를 세우려다 비를 세우지 않고 사탑을 그냥 이용한 것으로, 따라서 이 탑은 벌써 그 이전에 건립되어 있던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것이 백제기의 탑일 것이 용이하게 이해되지만, 이 비명이 이 탑신에 새겨져 있는 그 사실 자체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의심한다면, 이 탑에 관한 세대 문제는 결국 왕궁평탑, 미륵탑 등과의 상관적 해석에서 해결되는 수밖에 없다. 필자가 왜 이곳에 이러한 복잡한 생각을 하느냐 하면, 실은 이 비명 전각에 관하여 의심하는 학자가 벌써부터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즉 다름 아닌 희전정길 박사이니<cite no="XX">"大唐平百濟國碑に關する疑問"</cite>이라 하여 고고학잡지 제15권 5호에 벌써 이를 의문시하고 있다. 그 후 박사에게 필자가 친히 오늘의 그의 의견을 추문하였더니, 금일까지도 자기 의견에 변개가 없다 하여왔다. 선배 정인보 씨는 이에 언급한 바는 없었으나, 일찍이 동아일보 지상에 발표한 「조선의 얼」이란 데서 고려 종조대 호종단이란 자가 고려에 내사하여 도처의 금석을 쇄용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었는데, 만일에 정림탑의 이 비명 전각이 의심되는 것이라면 근거는 없는 억측이나, 호종단의 작란이란 것도 결코 범연히 볼 것이 아닌 듯하다. 부여 진열관 내 석조에 동문의 비명이 새겨 있는 것도 결국은 작란의 한 나머지가 아니었을까. 필자가 이 탑을 평제탑으로 부르지 않고 정림탑으로 부르려 함은 원사 명을 쫓아 부르려는 의사도 있거니와, 태반은 이 비명 전각에 의문이 있는 까닭이라고도 하겠다. 동국여지승람 권52 순안불우 법흥사 김부식기 중에 <blockquote no="XX">昔唐太宗皇帝詔 於擧義己來 交兵之處 立寺剎 仍命虞世南 褚遂良等七學士 爲碑銘以紀功德</blockquote>이란 것이 있지만, 교병지처에 입사찰함은 업장 소멸을 위함이었을 것이요, 기공하기 위해서는 따로 수비의 사실이 있었을 법하되, 살생의 공업을 불탑에 감히 기각한다는 것은 불법이 방성하고 불위가 아직 타지하지 않던 당대의 사실로 무엄한 편에 속하지 아니하였을까. 여러 가지 미심한 점이 있지만 본론과 승리되는 문제이니, 이 이상 더 쫓지 않겠고, 믿고 지나던 정림탑의 세대 참고 자료가 이와 같이 의문시되어 있다면, 정림탑의 세대도 왕궁평탑의 그것과 같이 또 다른 관련에서 고찰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던져진 유일한 자료는 다름 아닌 미륵탑이라 하겠으니, 양식상으로 가장 가까운 유형 속에 들어 있고, 또 비록 전설이나마 비교적 세대 위상이 근리한 세차로 일컬어 있는 것은 이것뿐인 까닭이다. 즉, 그는 백제 무왕대 건립으로 부하여 있는 것이니, 필자는 양식상의 세대설에 하등 반대할 이유를 갖지 못하고 있으나, 그러나 학자 간엔 이를 양식상 의심한다는 이도 있으니, 우리는 다소 만연된 험이 있으나 논리의 진행상 위선 이곳에 전설의 본문을 처들고, 다음에 그 이설을 설명할까 한다.
==='''본문5: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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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9번= 이 전설이라는 것은 본디 삼국유사(권2)로 말미암아 전해진 것이요, 또 동국여지승람(권33 익산)에도 전해진 것인데, 이설을 주장한 학자―(즉 세키노 다다시 박사)가 삼국유사에 의하지 않고 승람에 의한 까닭에 다소 설론에 복잡함을 보게 되었고, 또 이를 설명하려는 필자로서는 이설을 주장한 학자의 소거인 승람의 기록을 들어 말함이 가할 듯하게도 생각되지만, 승람의 기록은 이설을 주장한 그 논문 중에 원문대로 인용되어 있는 것이므로, 중복을 피할 겸, 또 전설의 원문도 소개할 겸하여 이곳에는 삼국유사에 부하여 있는 것을 우선 등재할까 한다.<blockquote no="XX">武王 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br/>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扵京師南池邊 池龍文通而生 小名薯童 噐量難測 常掘薯蕷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 美艷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羣童 羣童親附之 乃作謠 誘羣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王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 薯童曰 可 於是 聚金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 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blockquote>이상 본문에 있어서의 전설은 이미 김서룡 박사도 지적한 바와 같이, 본래 무강왕에 대한 전설을 삼국유사의 필자가 임의로 백제 무왕으로 개편한 것이며, 또 전설에는 여러 가지 사실이 복합되어 있다. 이는 하여간에 지금 탑파에 대한 문제만을 들어 상술한 것을 의심한 것으로, 세키노 박사 설이란 것을 보자.  왈,<blockquote no="XX">일본원서인용1</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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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0번= 원래 이 미륵탑에 관하여 설을 세운 관야 박사의 이 의견이 뚜렷한 편이었고, 그의 뒤를 받아 미륵사지를 답사하고 미륵탑을 조사하여 {{TagRefT|2-13}}한 편의 논문을<ref group="a">조선건축사론 3 (건축잡지 소화 5년 5월호)</ref> 세운 등도 기지로 박사는 관야 박사의 이 의견을 철저히 승인한 것인지 아닌지 매우 모호한 변론에 그쳐 요점을 모르겠는데, 대개는 사지만을 백제기의 것이고, 탑은 후대의, 즉 관야 박사가 설정한 세대에 찬동하는 듯하고, {{TagRefT|2-14}}다이하라 도시타케 씨가<ref group="a">「三國時代の石塔について」 (조선건축 제10집 제4호)</ref> 이에 관하여 입론한 바가 있다 하나, 정림탑의 세대 문제를 의심 없이 그 기명 연대 이전의 것으로 두었을 뿐 아니라, 이 미륵탑을 백제식이란 개념 안에 포함시켰을 뿐이다. 이마니시 류 박사는 특별한 이유는 붙이지 않고서 이 미륵탑을 백제시대 건조물로 인정한다 하였고(백제사연구 568쪽─9쪽), 왕궁평탑도 정치상 백제시대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지만, 외에 그 전후에 연결하는 시대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였다(동서 574─575쪽). 그러나 이 여러 설 중에 논리다운 논리는 관야 박사 설뿐이니, 우리는 지금 이것을 검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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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1번= 지금 관야 설에 있어서 가장 중심된 이론은 미륵탑이나 왕궁평탑은 양식상 서로 동일한데, 왕궁평탑 아래에서는 일본의 아스카 시대와 영업 시대 초기와의 중간에 해당하는 문양의 와당을 얻었고, '양식상' 이 두 탑은 정림탑에 선행할 수 없다는 것이 주가 되어 전설은 이에 맞도록 개역 추론된 데 지나지 않는다.
|목차5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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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2번= 우선 박사가 말한 와당 연대에 대하여 보건대, 아스카 시대란 보통 흠명천황 13년, 일본에 불교가 수입된 때로부터 효덕천황 대화 원년, 대화의 개신이란 것이 되기 전까지, 즉 신라 진흥왕 13년으로부터 선덕여왕 14년까지를 말한다. 영락 시대라는 것은 보통 전후 양기로 나누어, 전기라는 것은 {{TagRefT|2-15}}대화 개신 후부터 원명천황 화동 3년, 평안성 천도까지, 즉 신라 선덕왕 14년으로부터 성덕왕 9년까지를 말한다<ref group="a">시대 구분에 관하여는 학자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관야 박사가 말하는 연대는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스카 시대라는 구분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하며, 혹은 덴지 천황 즉위년(신라 문무왕 2년), 또는 그 6년, 오미 천도까지(문무왕 7년)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에 따라, 영락 전기는 오미 천도 이후부터 원정 천황 요로 7년(신라 성덕왕 22년)까지로 두기로 한다고 한다(이상 아스카엔 발행 일본미술사 자료 해설 1, 2부).</ref>. 이를 좀 늦잡는 설에 의하여 아스카 시대를 문무왕 7년까지, 영락 전기를 성덕왕 22년까지 둔다 하더라도 중간기란 어느 때쯤인지─이를 박사가 생각하고 있는 신라 통일 초라 한다 하더라도 이 와당에 무슨 기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이 숫자 세월에 절대로 일치하는 것도 아니라, 이 문양 형식의 성립 상한과 존속 하한이 분명치 않은 이상, 이 추정은 대체적인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즉, 이 와당의 연대 위상이 틀린다는 것이 아니라, 이 와당으로써 다른 조형, 즉 이 경우에 있어서 왕궁평탑과 미륵탑을 추정하게 될 때, 이러한 추정법은 가장 주의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한다. 가령 지금 이 왕궁평탑에서의 와당과 저 탑정리탑에서의 와당 간에 유사한 점이 있고, 탑정리의 소속 군현, 즉 충주 지방은 {{TagRefT|2-16}}일찍이 신라 판도에 들었을뿐더러, 진흥의 이민<ref group="a">동국여지승람 권34 충주목건치연혁조</ref>, {{TagRefT|2-17}}문무의 축성 등<ref group="a">삼국사기지리2 중 원경조</ref> 사실이 일찍부터 있었음을 보아 양식상 탑정리탑은 이 문무왕대 전후에 두어도 좋겠거니와, 왕궁평탑의 소속 지역은 바로 몇 년 전까지도 국가를 달리한 백제의 소속으로, 그나마 신라와 국경에서 멀고, 백제의 국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점인 만큼, 범주가 아직 모호한 한 조각 와당의 파편만으로서는 이 탑의 건립 왕조를 그다지 쉽게 결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사는 왕궁평탑과 미륵탑을 전혀 동일한 수준에 두고 논하고 있으나, 필자는 이미 동일한 수준에 이를 둘 수 없음을 논증하였고, 또다시 박사는 양식상 이 두 탑이 정림탑에 앞설 수 없는 것으로 논리를 전개시켰으나, 이 점에서 필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입론하였고, 이 설을 세울 적에 박사는 정림탑의 성립이 기명의 현경 5년이라는 곳에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입론한 모양이나, 이것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이상, 여기에 입각한 박사의 의견에는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난색이 있는 것이다.
|목차5원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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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3번= 뿐만 아니라, 전설의 일부를 보덕국 안승의 사실이 부분적으로 혼입된 것이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안승이 문무왕의 왕妹를 취한 문무왕 20년 3월로부터 안승이 경주에 소환되던 신문왕 3년 10월까지 전후 4년 8개월 동안 이 미륵사와 같은 거대한 경영이 이루어졌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이 전설의 주인공인 무강왕의 쌍릉이란 것은 대정 6년, 다니이 게이이치 일행의 발굴 조사로 아마 능묘의 양식이 백제의 왕릉이라는 저 부여 능산리의 능묘 형식과 전혀 동일할 뿐더러, 현실에서 발견된 목관 및 기타 부장물의 성질이 백제 말기의 조형에 공통성을 갖고 있어 {{TagRefT|2-18}}이 쌍릉이란 것은 백제 말기의 어느 왕릉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진술되어 있다<ref group="a">대정 6년도 고적 조사 보고 652쪽<br/> 조선총독부 박물관 약안내 9쪽 4<br/> 이 유물은 지금 총독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ref>. 이마니시 류 박사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쌍릉이 백제 무왕의 능이기도 하지만 증거를 찾을 수 없고 보덕국 관계자의 것인지도 알 수 없으나, 물론 안승은 아닐 것이라 하였다(안승은 경주로 소환된 까닭에 그 능묘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이처럼 볼 때, 이 전설 속에는 여러 사실의 혼재와 신비화가 있다 하더라도, 무강왕을 백제 무왕으로 개찬한 삼국유사 필자의 판단(?)도 지나치게 허물되지 않을 것 같다. 백제는 무왕의 아들 의자왕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말지 않았던가?
|목차5원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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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4번= 우리는 미륵탑을 양식적으로 정림탑에 선행하고, 정림탑이 영니산탑에 선행하며, 영니산탑의 상한은 선덕왕 3년에, 하한은 신문왕 2년까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였지만, 이에 앞서 미륵탑이 전설대로 무왕 대에 성립되었을 것에 어떠한 무리를 느끼지 않게 된다. 고선‧감은탑이 신문왕 초에 하한이 있고, 탑정리탑이 {{TagRefT|20}}문무왕 대에 대개의 연위가 있을 수 있다면<ref group="a">이 탑정리탑이란 것을 필자는 여지승람 충주불우조에 보이는 금생사란 것이 아닌가 한다. 승람에 <cite no="XX">"金生寺在北津涯"</cite>라 하고, 이에 금생에 관한 설이 있으며 끝에 <cite no="XX">"生修頭陁行居是寺因以爲名"</cite>라고 있는데, 포은집 권2에 송승귀 금생사란 제목 아래 <cite no="XX">"縹緲金生寺 潺湲月落灘 去年回使節 半日住歸鞍 花雨講經席 柳風垂釣竿 此身雖輦下 淸夢尙江干"</cite>라 하는 구절이 있어 그 지세가 유사한 까닭이다. 다만 금생은 경설 2년(성덕왕 10년)에 태어났다 함으로, 언뜻 이 금생사는 그 이후의 것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사지에서 발견된 고와 중에는 이 이전에 속할 양식들이 있음으로 보아, 사찰은 이미 그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이로써 탑의 연대 등은 추정되지 않고 다만 사지명을 알게 되는 데에 그친다.</ref>, 왕궁평탑‧정림탑이 무난히 백제 말기라는 차위에 놓일 수 있고, 따라서 영니산탑(이것은 왕궁평탑과 정림탑 사이에 처할 수 있다 하였다)도 통일 이전 시기의 신라의 유작으로 올려지게 된다. 통일 삼국이란 문무왕 8년의 사실이다. 이상의 추정된 여러 작품의 순서와 연한 범위의 여러 사항을 표시하면 위 표와 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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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5번= <<표>> 즉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왕 대에 미륵탑의 성립을 둔다 하더라도, 관야 박사가 우려한 바와 같이 그것이 반드시 분황탑에 선행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선행하더라도 관계치 않은 일이지만), 또한 조선 석탑의 양식이 삼국 말기로부터 시작되어 신라 통일 초까지, 즉 7세기의 약 1세기 동안을 두고 전형적 양식까지의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한 양식의 발생으로부터 전형적 성립까지 약 1세기의 4분의 3이 걸렸다는 것도 당시 문화 발달의 속도와 완급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거니와, 특히 전형적 양식의 성립이 7세기 후반, 즉 정치적으로도 조선이 완전히 통일된 시기와 부합하며, 그곳에 이르려는 통일적 기운이 선행 양식에 표현되어 있는 점 등에서, 무심한 돌 조각에서나마 시대의 동향이 여운 없이 읽어진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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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5일 (월) 01:5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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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탑파의 연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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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塔婆의 硏究(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0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9년 4월
시작쪽 59쪽 종료쪽 99쪽 전체쪽 41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三. 石造婆塔


필자는 전고의 제 1항에서 조선의 목조 탑파 건물을 말하였고, 제 2항에서 조선의 전조 탑파 건물을 말하였다. 다시 이어 이곳에서 조선의 석조 탑파를 말하려 하거니와, 전고와 이 속고와의 사이엔 어언 1년 이상 근 2년이란 간격이 생겨, 생각하면 짧은 기간인 듯하나 그간에 부여군 내의 읍군수리와 규암면 외리에서는 희귀한 백제 사적이 발굴되어 학계의 일경 이틀 끼친 중, 특히 군수리사지에선 목조 탑파의 기지와 불보살의 발견이 있어, 조선에 흔치 않은 현대문주1▶목조 탑파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한 바 있었고[a 1], 작년 11월 중순에 들어 필자가 경주에 놀다가 그곳 동호의 모우로부터 칠곡 동명송림사에서 괴조 5중탑을 목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조 탑파에도 자료가 늘어가는 것을 느낄 때, 졸고의 이 발표가 너무 급하지 아니하였던가 하고 후회도 하여 보았으며, 또다시 내가 이곳에 쓰고 있는 석탑의 문제에 관하여서도 그 자료를 충분히 내 마음껏 수집하였다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앞으로 시일을 기다린다 해도 돌연한 세월만 보낼 뿐이요 소망의 완전한 수집이 기필되리라고는 날이 갈수록 미더움이 넓어지니 불충분한 현상대로나마 소견의 정도를 피력하자는 것이다.
쪽수▶P59筆者는 前稿의 第一項에서 朝鮮의 木造 塔婆 建物을 말하였고, 第二項에서 朝鮮의 塼造 塔婆 建物을 말하였다. 다시 이여 이곳에서 朝鮮의 石造 塔婆를 말하려 하거니와, 前稿와 이 續稿와의 사이엔 於焉 1年 以上 近 2年이란 間隔이 생겨, 생각하면 짧은 期間인 듯하나 그 간에 扶餘郡 內의 邑軍守里와 窺岩面外里에서는 稀貴한 百濟 寺跡이 發掘되여 學界의 一驚異틀 끼친 中, 特히 軍守里寺址예선 木造 塔婆의 基地와 佛菩薩의 發見이 있어, 朝鮮에 흔치 아니한 원문주1▶ 木造 塔婆 研究에 一新資料를 提供한 바 있었고[1], 昨年 11月 中旬에 들어 筆者가 慶州에 놀다가 그곳 同好의 某友로부터 漆谷 東明松林寺에서 壞造 5重塔을 目睹하였다는 逍息을 듣고 塼造 塔婆에도 資料가 불어가는 것을 느낄 때, 拙稿의 이 發表가 너무 急하지 아니하였던가하고 後悔도 하여보았으며, 또다시 내가 이곳에 쓰고 있는 石塔의 問題에 關하여서도 그 資料를 充分히 내 마음껏 蒐集하였다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앞으로 時日을 기다린대야 突然한 歲月만 보낼 뿐이요 所望의 完全한 蒐集이 期必되리라고는 날이 갈수록에 믿어움이 넓어지매 不充分한 現狀대로나마 所見의 程度를 披攊 ▶P60-1하자는 것이다.
전고에서 나는 조선 석탑의 발생 원인으로, 1. 건축 재료의 생산 경제의 관계, 2. 수법 공기의 난역 문제, 3. 원성 공납의 시급 문제, 4. 보존 시일의 장구 영속 문제 등, 제반 외면적 이유를 나열하였지만, 이러한 외면적 동기 이외에 다시 그 내면적 동기를 보더라도 우선 현대문주2▶교리 상, 대소와 및 재료에 하등의 제한과 차별이 없었던 듯하며[a 2], 또 조형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탑파는 요컨댄 현대문주3▶『封樹遺靈 扁針法藏 冀表河砂之德 庶酬塵却之勢』[a 3]키 위한 기념적 건물 (Monumentalische Architektur)이라 인도 자체에 있어서도 원시 탑파는 모두 내부가 충새된 괴체 건물 (Massen Bau)임을 볼 때 내새된 괴체 건물의 양식을 필경코 잡고 나선 조선의 석탑이야말로 결국은 원의의 탑파로 회귀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점에서도 내새된 괴체로서의 석조 탑파 (이곳에 내새이라 함은 내실 양식의 공간을 갖지 아니한 것을 뜻함이니 사리를 양숭키 위한 탑신의 망혈은 문제가 아니다) 가 성행될 원인이 있다 하겠다. 물론 이 점만은 혹 독자─ 있어 조선 석탑의 발생 원인도 될 수 없거니와 촉진시킨 근기도 될 수 없다고 반대할 사람이 있으리라. 그 반대의 이유는 반드시 이러하리라─ 현대문주4▶즉 조선의 일반 석탑이 그 결과에 있어선 비록 내새된 괴체 건물이라 하나 그 외양에 나타난 전반적 특색은 끝끝내 내공 형식을 고집한 [a 4] 중화 전통의 목조 탑파 양식을 모방함에 급급하여 심지어 탑신의 문호헌창의 조식까지도 이러한 의욕을 표시하여 있고, 인도 고탑의, 사실로 내새된 괴체 양식이란 승려의 묘탑 형식 (특히 석종 형식) 이외에 조선의 일반 석탑에선 볼 수 없는 점이 아니냐고─ 물론 이것은 사실다운 이유일 뿐 아니라 필자 역시 지실하고 있는 바이며, 필자가 또 조선 석탑의 출발을 짓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곡산의 폐미륵사 석탑까지도 진실로 곧 내공된 목조 탑파 양식을 그대로 직역하고 있는 것으로 이 사실에 하등 반대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조선 석탑의 발생의 동기, 촉진의 동기가 아니 되었으리라고도 반대할 수 없는 것으로 믿으니, 왜 그러냐 하면 조선 석탑파가 사실에 있어 저 내공된 목조 탑파의 형식을 재현함에서 출발하였고, 또 재현함에서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탑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성격이라든지 교리상 내면적 성격이라든지 작가의 의식 무의식 내지 요구 불요구를 무시하고 조형적인 것으로의 예술 유형상, 탑파는 한 개의 "기념적인 것"에 뻔한 것이고 보며, 시대가 의식했건 못했건 예술적 원칙이 그곳에도 있었던 것으로 인정치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다. 탑파가 고도로 높아지는 것도 교리상으론 "적취의 공덕"의 소치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예술 원칙으로 말하면 그것이 "기념적인 것"인 까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탑파나 Obalisque나 Pyramid나 기공비 등이 다름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해서 목조 탑파에서 석조 탑파로 넘어가매 그 필연성을 볼 수 있는 것이요 (전조 탑파로 넘어버리지 못한 것은 오직 생산 경제 관계로 돌릴 수 있다) 석조 탑파로 넘고 보매 다시 내새된 괴체 건물로 급변될 수 있는 것도 이해되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60-2前稿에서 나는 朝鮮 石塔의 發生 原因으로, 一曰 建築 材料의 生産 經濟의 關係, 二曰 手法工技의 難易 問題, 三曰 願成供納의 時急 問題, 四曰 保存時日의 長久永續 問題 等, 諸般 外面的 理由를 羅列하였지만, 이러한 外面的 動機 以外에 다시 그 內面的 動機를 보더라도 爲先 원문주2▶敎理上, 大小와 및 材料에 何等의 制限과 差別이 없었던 듯하며 [2], 또 造型的 意味에서 보더라도 塔婆는 要컨댄 원문주3▶『封樹遺靈 扁針法藏 冀表河砂之德 庶酬塵却之勢』[3]키 爲한 記念的 建物(Monumentalische Architektur)이라 印度 自體에 있어서도 原始 塔婆는 모두 內部가 充塞된 塊體 建物(Massen Bau)임을 볼때 內塞된 塊體 建物의 樣式을 畢竟코 잡고 나선 朝鮮의 石塔이야말로 結局은 原意의 塔婆로 回歸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即 이 點에서도 內塞된 塊體로서의 石造 塔婆(이곳에 內塞이라함은 內室 樣式의 空間을 갖지 아니한 것을 뜻함이니 舍利를 兩菘키 爲한 塔身의 蟒穴은 問題가 아니다)가 盛行될 原因이 있다 하겠다. 勿論 이 點만은 혹 讀者─있어 朝鮮 石塔의 發生 原因도 될 수 없거니와 促進시킨 根機도 될 수 없다고 反對할 사람이 있으리라. 그 反對의 理由는 반드시 이러하리라─원문주4▶卽 朝鮮의 一般 石塔이 그 結果에 있어선 비록 內塞된 塊體 建物이라하나 그 外樣에 나타난 全般的 特色은 끝끝내 內空 形式을 固執한 [4] 中華 傳統의 木造 塔婆 樣式을 模倣함에 汲汲하여 甚至於 塔身의 門戶櫶窓의 彫飾까지도 이러한 意欲을 表示하여있고, 印度古塔의, 事實로 內塞된 塊體 樣式이란 僧侶의 墓塔 形式(特히 石鍾形式) 以外에 朝鮮의 一般 石塔에선 볼 수 없는 點이 아니냐고─勿論 이것은 事實다운 理由일 뿐 아니라 筆者 역시 知悉하고 있는 바이며, 筆者가 또 朝鮮 石塔의 出發을 짓고 있는 것으로 認定하고 있는 谷山의 廢彌勒寺 石塔까지도 眞實로 곧 內空된 木造 塔婆 樣式을 그대로 直譯하고 있는 것이매 이 事實에 何等 反對는 없으나, 그렇다고하여 이것이 朝鮮 石塔의 發生의 動機, 促進의 動機가 아▶P61-1니 되었으리라고도 反對할 수 없는 것으로 믿나니, 왜 그러냐하면 朝鮮 石塔婆가 事實에 있어 저 內空된 木造 塔婆의 形式을 再現함에서 出發하였고, 또 再現함에서 發展되었다 하더라도 塔婆 그 自體가 가지고 있는 歷史的 社會的 性格이라든지 敎理上 內面的 性格이라든지 作家의 意識 無意識 乃至 要求 不要求를 無視하고 造型的인 것으로의 藝術 類型上, 塔婆는 한 개의 "記念的인 것"에 뻔한 것이고 보매, 時代가 意識했건 못했건 藝術的 原則이 그곳에도 있었는 것으로 認定치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다. 塔婆가 高度로 높아지는 것도 敎理上으론 "積聚의 功德"의 所致라 說明할 수 있겠지만, 藝術 原 則으로 말하면 그것이 "記念的인 것"인 까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點에서 볼제 塔婆나 Obalisque나 Pyramid나 紀功碑 等이 다름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해서 木造 塔婆에서 石造 塔婆로 넘어가매 그 必然性을 볼 수 있는 것이요 (塼造 塔婆로 넘어버리지 못한 것은 오직 生産經濟 關係로 돌릴 수 있다)石造 塔婆로 넘고보매 다시 內塞된 塊體 建物로 急變될 수 있는 것도 理解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리하여 조선 석탑파는 발생되었고 또 발전되었으니, 그러면 어떠한 양식적 계열을 이룸으로써 전개되었는가를 우리는 이로부터 장을 바꾸어 고찰할까 한다.
쪽수▶P61-2이리하여 朝鮮 石塔婆는 發生되었고 또 發展되었나니, 그러면 어떠한 樣式的 系列을 이룸으로써 展開되었는가를 우리는 이로부터 章을 바꾸어 考察할까한다.
고유섭 조선탑파2-1.png
쪽수▶P62
고유섭 조선탑파2-1.png



































본문2: 1-1. 朝鮮 石塔樣式의 發生事情과 그 始源樣式들


조선 석탑 양식의 발생으로부터 그 정형의 성립까지
(1) 조선 석탑 양식의 발생 사정과 그 시원 양식들
본고에서 누술한 바와 같이 조선의 탑파가 방형 목조 고루 건물에서 발족되었고 그 양식이 조선 탑파 양식의 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양식 발전의 순서상 목조 탑파 양식을 가장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유구에서 그 시대까지 고고한 것을 인정한다. 전고에서 조선 석탑파의 고고한 기록 예로 금관성 파사석탑이란 것과 고구려 영탑사의 석탑이란 것이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음을 말하였으나, 현물이 있는 바 아니니 다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현존한 작례 중 가장 고고한 작품으로 정립시킬 수 있는 것은 익산 용화산 아래에 있는 미륵사지의 석탑뿐일까 한다..
쪽수▶P63-1一. 朝鮮 石塔樣式의 發生으로부터 그 定型의 成立까지
(1) 朝鮮 石塔樣式의 發生事情과 그 始源樣式들
本稿에서 累述한 바와 같이 朝鮮의 塔婆가 方形 木造 高樓 建物에서 發足되었고 그 樣式이 朝鮮 塔婆 樣式의 根流를 이루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樣式 發展의 順序上 木造 塔婆 樣式을 가장 忠實히 具顯하고 있는 遺構에서 그 時代까지 高古한 것을 認定한다. 前稿에서 朝鮮 石塔婆의 高古한 記錄 例로 金官城 婆娑石塔이란 것과 高句麗 靈塔寺의 石塔이란 것이 三國遺事에 나타나 있음을 말하였으나 現物이 있는 바 아니니 다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現存한 作例 中 가장 高古한 作品으로 定立시킬 수 있는 것은 益山 龍華山 下에 있는 彌勒寺址의 石塔 뿐일까 한다.
이 미륵사지의 유탑은 현금 조선에 남아있는 석탑으로선 가장 충실히 목조 탑파의 양식을 재현하고 있는 유일의 것이니, 지금은 동면(東面) 일각만이 남아 있고 다른 삼면은 거의 다 헐어졌을 뿐더러 층급도 육층의 동북 일각만이 남아 있고 그 위가 모두 없어진 까닭에 형태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나, 그러나 탑의 양식은 이만으로써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만치 되어 있다. 즉 제일로 주목되는 것은 특히 기단이라 할 만한 기단을 갖지 아니하고(탑파의 지반이 주위의 지평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토대라 할 것에 끝이고 기단으로써 부를 만한 것은 못 된다.) 2, 3척 전후의 거리를 두고서 지산장석이 남아 있음이요, 다음에 주목되는 것은 그 옥신의 경영이니 옥신은 일면이 삼간벽을 이루었으되현대문주2-1▶'엔터시스'(Enthusis)[a 5]를 가진 장석주가 각 형 초석 위에 각기 서 있고 삼간벽의 좌우 양벽은 지복 지방 위에선 소주 하나로 다시 연분되어 있으되 중앙구만은 미정광역(楣棖框閾)이 제법 모형된 통구가 있어 내부로 통로가 통케 되었으니, 이 통문과 통로는 사방이 동일하였을 것으로 평면(Plan)에서 보자면 내부 중심에 사각형 석제 심주가 있어 이곳에서 정십자 통로가 교차되어 외부 사방으로 통케 된 형식이다. 다시 외벽의 열주 상부에는 액방과 평판방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항간 소벽이 있어 다시 각 형 삼단의 현대문주2-2▶층급형 '밭임'[a 6]이 있어 평박장대한 옥개석을 떠받치고 있다. 옥개석은 전각의 첨단에서 다소 경쾌하게 번앙되어 있고 전각의 삼각 단면(Section)은 후대 신라의 제석탑에서와 같이 뚜렷한 예각 첨단을 이루지 아니하였다. 제2층은 극히 단축된 삼간소벽이(간벽의 명구 안에는 하층 좌우벽에서와 같은 소주가 있었는 모양이다) 장대석 '괴임' 위에 놓여 있어, 위로 삼단 층급형 '밭임'을 받고 이 '밭임'으로써 옥개석을 또 받고 있다. 동일한 수법의 옥신과 옥개석이 중복되어 삼층 사층 지우륙층 하였으되 옥신 '괴임'의 장대석이 제3층에서부터 중단으로 늘어있고 층단 '밭임'이 제5층으로부터 일단이 늘어 있으니, 이와 같이 탑신 '괴임'과 옥개석 '밭임'이 상층에서 증가한다는 것은 이 탑으로서는 그 첨앙에 있어 고도의 조화를 얻기 위한 특별한 배안일 것이로되 필자는 다른 석탑에서 이와 같은 용의가 표현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쪽수▶P63-2이 彌勒寺址의 遺塔은 現今 朝鮮에 남아있는 石塔으로선 가장 忠實히 木造 塔婆의 樣式을 再現하고있는 唯一의 것이니 지금은 東面 一角만이 남아 있고 다른 三面은 거의 다 헐어졌을 뿐더러 層級도 六層의 東北 一角만이 남아있고 그 우가 모두 없어진 까닭에 形態는 매우 不完全한 것이나 그러나 塔의 樣式은 이만으로써도 十分 理解할 수 있을만치 되어있다. 即 第一로 注目되는 것은 特히 基壇이라 할 만한 基壇을 갖지 아니하고(塔婆의 地盤이 周圍의 地平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토대라 할 것에 끝이고 基壇으로써 부를 만한 것은 못 된다.) 2, 3尺 前後의 距離를 두고서 地産長石이 남아있음이요, 다음에 注目되는 것은 그 屋身의 經營이니 屋身은 一面이 三間壁을 이루었으되 원문주2-1▶「엔터시스」(Enthusis)」[5]를 가진 長石柱가 角形 礎石 위에 각기 서 있고 三間壁의 左右兩壁은 地覆地枋 위에선 一小柱로 다시 烟分되어 있으되 中央區만은 楣棖框閾이 제법 模型된 通口가 있어 內部로 通路가 通케 되었으니 이 通門과 通路는 四方이 同一하였을 것으로 平面(Plan)에서 보자면 內部 中心에 四角形 石製 心柱가 있어 이곳에서 正十 ▶P64-1字 通路가 交叉되여 外部 四方으로 通케 된 形式이다. 다시 外壁의 列柱 上部에는 額枋과 平板枋이 놓여있고 그 위에 桁間 小壁이 있어 다시 角形 三段의 원문주2-2▶層級形 「밭임」[6]이 있어 平薄長大한 屋蓋石을 떠받고 있다. 屋蓋石은 轉角의 尖端에서 多小 輕快히 翻仰되어있고 轉角의 三角 斷面(Section)은 後代 新羅의 諸石塔에서와 같이 뚜렷한 銳角尖端을 이루지 아니하였다. 第二層은 極히 短縮된 三間小壁이(間壁의 名區 안에는下層 左右壁에서와 같은 小柱가 있었는 모양이다) 長臺石 「피임」 위에 놓여있어, 위로 三段層級形 「밭임」을 받고 이 「밭임」으로써 屋蓋石을 또 받고 있다. 同一한 手法의 屋身과 屋蓋石이 重覆되여 三層四層 至于六層하였으되 屋身 「괴임」의 長臺石이 第三層에서부터 重段으로 늘어있고 層段 「밭임」 第五層으로부터 一段이 늘어있으니 이와 같이 塔身 「괴임」과 屋蓋石「밭임」이 上層에서 增加한다는 것은 이 塔로서는 그 瞻仰에 있어 高度의 調和를 얻기 爲한 特別한 配案일 것이로되 筆者는 다른 石塔에서 이와 같은 用意가 表現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이 탑파는 순전히 석재로써 조축된 것인 만큼 석탑에는 틀림없으나, 그러나 그 전체 양식에 있어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석탑의 개념과는 아주 다른 점이 있으니, 이는 마치 경주 분황사의 탑이 석재로써 조축된 것이라 하나, 우리는 그것을 석탑으로서 부를 수 없고 양식적으로는 전탑의 부류에 편입시키지 아니할 수 없음과 같아서, 이것도 석재를 사용하였을 뿐이지 양식적으론 곧 순전한 목조 탑파의 형식임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외형적 양식뿐에서만이 아니라, 다시 그 조성 의태에서도 읽을 수 있는 점이니, 예컨대 그 석재의 가구 축성의 수법이 다른 제탑에서 볼 수 있음과 같은 질서와 정돈이 있는 조용이 아니요, 아무런 통일 조절의 의사가 없이 다만 한 개의 양식, ─ 즉 전래의 목조 탑파의 양식을 이모하여 그것을 재현하려 함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언하면 이것은(●●●) 석탑양식이라는(●●●●●●●) () 개의(●●) 새로운(●●●) 양식을(●●●) ()() 위한(●●) 창의의(●●●) 조형이(●●●) 아니요(●●●) 다만(●●) 구래의(●●●) 양식을(●●●) 충실히(●●●) 다른(●●) 재료로써(●●●●) (() 조선에(●●●) 가장(●●) 풍부한(●●●) 석재로서(●●●●)) 번역(●●) (그것도(●●●) 직역(●●)) 한데(●●) 지나지(●●●) 아니한(●●●) 순모방적(●●●●) 의미에(●●●) 끝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때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은 목조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옥리의 층단형 '밭임'이지만, 이것을 잠시 보류한다면 조선 석탑으로서 목조 탑파의 양식을 가장 충실히 직역하고 있는 탑파는 이 외에 다시 없다. 그러므로 필자는 양식적 순차에 있어 이 탑을 우선 제1위에 둔다.
쪽수▶P64-2이와 같이 이 塔婆는 純全히 石材로써 造築된 것인만큼 石塔에는 틀림없으나 그러나 그 全體 樣式에 있어서는 우리가 一般히 가지고 있는 石塔의 概念과는 아주 다른 點이 있나니, 이는 마치 慶州 芬皇寺의 塔이 石材로써 造築된 것이라 하나 우리는 그것을 石塔으로서 부를 수 없고 樣式的으론 塼塔의 部類에 編入시키지 아니 할 수 없음과 같아서 이것도 石材를 使用하였달 뿐이지 樣式的으론 곧 純全한 木造 塔婆의 形式임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外形的 樣式뿐에서가 아니라 다시 그 造成 意態에서도 읽을 수 있는 點이니 例컨댄 그 石材의 架構築成의 手法이 다른 諸塔에서 볼 수 있음과 같은 秩序와 整頓이 있는 調用이아니요 아모런 統一 調節의 意思가 없이 다만 한 개의 樣式, ─即 傳來의 木造 塔婆의 樣式을 移模하여 그것을 再現하려함에 汲汲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換言하면 이것은(●●●) 石塔樣式이라는(●●●●●●●) () 개의(●●) 새로운(●●●) 樣式을(●●●) () ▶P65-1() 爲한(●●) 創意의(●●●) 造型이(●●●) 아니요(●●●) 다만(●●) 舊來의(●●●) 樣式을(●●●) 忠實히(●●●) 다른(●●) 材料로써(●●●●) (() 朝鮮에(●●●) 가장(●●) 豊富한(●●●) 石材로서(●●●●)) 飜譯(●●) (그것도(●●●) 直譯(●●)) 한데(●●) 지나지(●●●) 아니한(●●●) 純模倣的(●●●●) 意味에(●●●) 끝이는(●●●) 作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때 한 가지 問題되는 것은 木造 建物에서 볼 수 없는 屋裏의 層段形「밭임」이지만 이것을 暫時 保留한다면 朝鮮 石塔으로서 木造 塔婆의 樣式을 가장 忠賞히 直譯하고 있는 塔婆는 이 外에 다시 없다. 그러므로 筆者는 樣式的 順次에 있어 이 塔을 爲先 第一位에 둔다.
다음에 양식적으로 이 미륵탑과 가장 동일한 것으로 알려 있는 것으로는 같은 익산군 왕궁면 왕궁평에 있는 오중석탑이다. 지금 이 왕궁평탑의 양식을 보면 제일로 주목되는 것은 그 토대 양식으로, 그것은 주위의 지반에서 이 탑파만을 위하여 고립된 토대이요, 또 이 탑의 중력과 중심의 보장을 위하여 필요한 대일 뿐더러, 이것은 반드시 석단 형식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측까지 되는 것이나 지금은 그 석재가 산일되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다음에 옥신의 수법을 보건대 현대문주2-3▶제1층 옥신은 일면 삼매 판석으로 방형이 짜여 있되(전체로는 8개 장석으로 짜인 것이 된다.), 사우에 태세의 변화(즉 '엔터시스')[a 7]가 없는 주형이 조출되어 있고, 옥신엔 다시 1개 주형이 삭여 있어 전체로 이간벽의 의태를 표현하고 있다. 옥개석은 삼층까지가 팔매 판석으로 되어 있고, 사오층은 사매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삼단 층급의 '밭임'은 각 층이 면매석으로 짜여 있다. 2층 이상의 옥신을 형성한 석편 수는 같지 않으나, 일간벽을 표시함에 있어 일치되어 있다.
쪽수▶P65-2다음에 樣式的으로 이 彌勒塔과 가장 同一한 것으로 알려 있는 것으론 同 益山郡 王宮面 王宮坪에 있는 五重石塔이다. 지금 이 王宮坪塔의 樣式을 보면 第一로 注目되는 것은 그 土臺 樣式으로 그것은 周圍의 地盤에서 이 塔婆만을 爲하여 孤立된 土臺이요 또 이 塔의 重力과 重心의 保障을 爲하여 必要한 臺일 뿐더러 이것은 반드시 石壇 形式을 形成하였던 것으로 推測까지 되는 것이나 지금은 그 石材가 散逸되어 確定的으로 말할 수 없이 되어 있다. 다음에 屋身의 手法을 보건대 원문주2-3▶第一層屋身은 一面 三枚板石으로 方形이 짜여있으되(全體로는8個 長石으로 짜힌 것이 된다.) 四隅에 太細의 變化(即「엔터시스」가 없는 柱形이 彫出되어 있고 屋身엔 다시 1介 柱形이 삭여있어 全體로 二間壁의 意態를 表現하여 있다.[a 8] 屋蓋石은 三層까지가 八枚板石으로 되어있고 四五層은 四枚板石으로 되어 있으며 三段層級의 「밭임」은 各層이 面枚石으로 째여있다. 二層 以上의 屋身을 形成한 石片 數는 不一하나 一間壁을 表示함에 一致되어 있다.
이제 우리가 이 왕궁평탑과 미륵탑을 비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옥개석의 형식과 층단 '밭임'의 유사에서 양자의 기백이 동일함을 볼 수 있고, 다시 그 외양의 유사에서 세대(연대가 아니다)의 동일할 것이 추상된다. 실로 누가 부정하랴, 부정할 수 없는 양식 감정의 유사를 본다. 이것이 누구나 이 양 탑을 시대적으로 동일시케 하는 가장 큰 특점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이 양 탑의 유사함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는 동시에 우리는 다시 이 양 탑 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제1로, 왕궁평탑은 미륵탑에 없는 기단의 성질에 속할 높은 기대를 가졌고, 제2로, 초층 옥신이 미륵탑과 같이 목조 탑파의 삼간벽을 충실히 형성한 것이 아니라 한 괴체로 약식적 응결을 보였으되, 이간의 구별은 실제 목조 탑파의 구조적 의미를 떠났고, 제3으로, 이층 이상의 옥신은 전혀 미륵탑과 같은 끝까지 삼간벽을 보이려는 성의를 버리고 일간벽으로써 공약시켰으며, 제4로, 옥신의 각 주형이 미륵탑에서와 같이 각개 독립된 별석으로 충실히 목조 건물의 주형에서 볼 수 있는 '엔터시스'를 이루지 않고, 벽면석의 끝에 간단한 편화적 수법으로 주형의 의태만 보였고, 제5로, 옥개석과 옥신과의 연접부면의 '괴임'이 미륵탑에서와 같이 별석으로 결구되어 있음이 아니라, 다만 편의적인 조출로만 되었고, 제6으로, 단형 '밭임'이 상층으로 갈수록 하등 그 수효에 변화가 없을 뿐더러 미륵탑에서는 삼단 '밭임'이 일단과 이단의 구별, 사단 '밭임'이 이단과 이단의 분리가 있어 아주 통일 의식이 없는데, 이 왕궁평탑은 삼단이 일체로 응결되어 형식화의 경향이 있으며, 최종으로 석촌의 이용이 왕궁평탑에선 제법 정제된 질서를 갖고 있다 하겠다.
쪽수▶P65-3이제 우리가 이王宮坪塔과 彌勒塔과를 比較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屋蓋石의 形式과 層段「밭임」의 類似에서 兩者의 氣魄이 同一함을 볼 수 있고 다시 그 外樣의 類似에서 世代(年代가 아니다)의 同一할 것이 推想된다. 實로 누가 否 ▶P66-1定하랴 否定할 수 없는 樣式 感情의 類似를 본다. 이것이 누구나 이 兩塔을 時代的으로 同一視케 하는 가장 큰 特點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이 兩塔의 類似함을 우리는 認定할 수 있는 同時에 우리는 다시 이 兩塔 間의 差異를 볼 수 있다. 第一로 王宮坪塔은 彌勒塔에 없는 基壇의 性質에 屬할 높은 基臺를 가졌고, 第二로 初層屋身이 彌勒塔과 같이 木造 塔婆의 三間壁을 忠實히 形成한 것이 아니라 한 塊體로 略式的 凝結을 보였으되 二間의 區別은 實際 木造 塔婆의 構造的 意味를 떠났고, 第三으로 二層 以上의 屋身은 全혀 彌勒塔에서와 같은 끝까지 三間壁을 보이려는 誠意를 버리고 一間壁으로써 公約시켰으며, 第四로 屋身의 各 柱形이 彌勒塔에서와 같이 各個 獨立된 別石으로 忠實히 木造 建物의 柱形에서 볼 수 있는 「엔터시스」를 이루지 않고 壁面石의 끝에 簡單한 便化的 手法으로 柱形의 意態만 보였고, 第五로 屋蓋石과 屋身과의 連接部面의「괴임」이 彌勒塔에서와 같이 別石으로 結構되어 있음이 아니라 다만 便宜的인 造出로만 되었고, 第六으로 段形 「밭임」이 上層으로 갈수록에 何等 그 數爻에 變化가 없을 뿐더러 彌勒塔에서는 三段「밭임」이 一段과 二段의 區別, 四段「밭임」이 二段과 二段의 分離가 있어 아주 統一 意識이 없는데 이 王宮坪塔은 三段이 一體로 凝結되어 形式化의 傾向이 있으며, 最終으로 石村의 利用이 王宮坪塔에선 제법 整齊된 秩序를 갖고 있다 하겠다.
즉 이 양탑의 이러한 이동을 양식적 견지에서 비교 평가하자면, 미륵탑과 왕궁평탑이 다 같이 방형 평면의 목조 탑파 양식의 재현 형식이면서, 미륵탑은 가구에 치중된 작품이요, 왕궁평탑은 응집 결정을 보이기 시작한 작품이라 하겠다. 미륵탑은 순가구적 건축적 계단에 머물러 있고, 왕궁평탑은 응집적 조각적 경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미륵탑은 구양식(즉 목조 탑파 양식)을 충실히 재현하고 모방하였기 때문에 전체로 형식상 파단을 보이지 아니한, 즉 구양식의 말단에 가라앉은 무난한 형식이요, 왕궁평탑은 구양식의 기재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보이려다가 아직 보이지 못한─ 즉 신형식의 시초에 올라서서 아주 그 이상의 달성을 얻지 못하여 많은 파단을 내인 난색의 작품이다.
쪽수▶P66-2即 이 兩塔의 이러한 異同을 樣式的 見地에서 比較 評價하자면 彌勒塔과 王宮坪塔이 다같이 方形平面의 木造 塔婆 樣式의 再現 形式이면서 彌勒塔은 架構에 置重된 作品이요 王宮坪塔은 凝集結晶으로의 傾向을 보이기 시작한 作品이라 하겠다. 彌勒塔은 純架構的 建築的 階段에 머물러 있고 王宮坪塔은 凝集的 彫刻的 傾向으로 기울어져 있다. 彌勒塔 舊樣式(即 木造 塔婆 樣式)을 忠實히 再現하고 模倣하였기 때문에 全體로 形式上 破端을 보이지 아니한, 即 舊樣式의 末端에 가라앉은 無難된 形式이요, 王宮坪塔은 舊樣式의 羈縡으로부터 벗어나와 새로운 形式을 보이려다가 아직 보이지 ▶P67-1못한─即 新形式의 始初에 올라서서 아주 그 理想의 達成을 얻지 못하여 많은 破端을 내인 難色의 作品이다.
이리하여 왕궁평탑과 미륵탑이 서로 같다 하나 같지 아니함을 본다. 같지 않다 하나 그 범주가 또한 아주 다른 것도 아니다. 같지 않은 듯하되 같고, 같은 듯하되 같지 아니함은 결국에 있어 서로 같은 유형의 범주에 속하여, 하나는 양식사적으로 그 상한에 처하여 있고, 다른 하나는 그 하한에 처하여 있는 까닭이다. 이 양한의 사이에는 물론 세월의 차란 것도 끼워 있는 것이지만, 이 세월의 차라는 것은 그러나 양식론적으로 이 양탑만의 비교에서는 나오지 아니하니 우리는 다시 제3의 작품을 끌어올 필요가 있다. 그것은 즉 부여읍 남쪽에 있는 대당평백제탑이란 것이다.
쪽수▶P67-2이리하여 王宮坪塔과 彌勒塔이 서로 같다 하나 같지 아니함을 본다. 같지 않다 하나 그 範疇가 또한 아주 다른 것도 아니다. 같지 않은 듯하되 같고, 같은 듯하되 같지 아니함은 結局에 있어 서로 같은 類型의 範疇에 屬하여, 하나는 樣式史的으로 그 上限에 處하여 있고 다른 하나는 그 下限에 處하여 있는 까닭이다. 이 兩限의 사이에는 勿論 歲月의 差란 것도 끼워있는 것이지만 이 歲月의 差라는것은 그러나 樣式論的으로 이 兩塔만의 比較에서는 나오지 아니하니 우리는 다시 第三의 作品을 끌어올 必要가 있다. 그것은 即 扶餘邑 南에 있는 大唐平百濟塔이란 것이다.
대당평백제탑은 우리가 오히려 현대문주2-4▶ 폐정림사탑으로 부름이 나을 듯한 것이므로 해서[a 9] 앞으로는 정림탑이란 칭호로 지칭하겠지만, 이 역시 왕궁탑과 같이 외양만은 오중석탑에 속하는 것이나 모든 수법 형식에 있어서는 일견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선 단층 기단도 정연하거니와 기단 저대석 아래 대반석이 끼여 있음이 오히려 이 탑으로 하여금 시대를 의심케 할 만한 용의주도처라 하겠다. 저평광대한 단층 기단은 중간의 '벌임기둥'이 상촉하관의 형식을 이루었을 뿐으로, 좌우 양변의 '벌임기둥'은 변화가 없고, 옥신은 전체로 일간 면벽을 구성하였으나 일면벽을 량매 판석이 형성하고, 우주는 '엔터시스'가 있는 별제 석주로 형성하고 있다. 제이층 이상의 옥신은 고가 극히 단축되어 우주에 특별한 수축 변화(즉 '엔터시스')가 없이 처결되었으나 간벽의 처리는 초층 옥신과 다름이 없고, 다만 사오층에 올라가서 옥신벽이 일석으로 되었을 뿐이다. 이층 이상의 옥신의 '괴임'은 물론 별석으로 정연히 짜여 있다. 옥개석도 평박광대한 판석으로 규칙 정연하게 짜여 있되 사우 전각의 첨단리면이 깎여 약간 들리는 듯한 감을 내었을 뿐, 전체는 직선적으로 뻗어 있고 옥개〿각은 사주 우동 형식의 돌기가 제법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의 '밭임'은 미륵탑이나 왕궁평탑에서와 같이 층단형 '밭임'이 아니요 장방 횡석이 액방 겸 평판방의 의미로 일단 놓이고 그 위에 사릉형 장석이 포작 횡면의 의미로 놓였으니, 이는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수법이다. 옥개석 제사층까지 위형으로 짜여 있고, 제오층만이 전자형이며, 사릉형 '밭임'도 초층과 이층이 구석, 삼층 사층이 사석, 오층이 일석으로 모두 정연히 짜여 있다. 우리는 이 탑에서 무엇보다도 그 석재 결합에 너무나 정돈됨을 보고, 둘째로 그 '밭임'의 특수 형식을 보고, 셋째로 그 기단의 성형적임을 본다. 즉 이 탑은 무엇보다도 먼저 미륵탑과 같이 순전한 목조 탑파의 형식 그대로 충실히 재현한 것이 아니요, 왕궁평탑과 같이 벌써 그 양식을 공약시켜 새로운 양식의 산출을 꾀한 것으로, 구식 발전사 상 이것은 미륵탑에 다음 가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세부 수법으로 말하더라도 미륵탑의 순 '가구적' 축조 수법과 정림탑의 '정구적' 수법(예컨대 정림탑의 사릉형 '밭임' 하의 장방석이 전체 사매로 되었으되 전평면이 사분파된 전자형이라든지 구자형의 배치가 아니라 회형 배치로 서로 엇물리게 되었으니 전자 '가구적'이라 형언한다면 후자는 '결구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발생사적 차이를 또한 말한다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부분적 형식, 양식적 수법 등에서 양자의 선후를 입증할 요소를 많이 보나, 일일이 거론치 아니하겠고 이하의 서술을 따라 점차 설명될 줄로 믿는다.
쪽수▶P67-3大唐平百濟塔은 우리가 오히려 원문주2-4▶廢定林寺塔으로 부름이 나을 듯한 것이므로 해서[7] 앞으로는 定林塔이란 稱號로써 指稱하겠지만 이 亦 王宮塔과 같이 外樣만은 五重石塔에 屬하는 것이나 모든 手法 形式에 있어서는 一見 特異한 形態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爲先 單層基壇도 整然하거니와 基壇底臺石 아래 臺盤石이 끼여있음이 오히려 이 塔으로 하여금 時代를 疑心케 할 만한 用意周到處라 하겠다. 低平廣大한 單層基壇은 中間의 「벌임기둥」이 上促下寬의 形式을 이루었을 뿐으로, 左右 兩邊의 「벌임기둥」은 變化가 없고, 屋身은 全體로 一間 面壁을 構成하였으나 一面壁을 兩枚板石이 形成하고 隅柱는 「엔터시스」가 있는 別製石柱로 形成하고 있다. 第二層 以上의 屋身은 高가 極히 短促되어 隅柱에 特別한 收縮 變化(即 「엔터시스」)가 없이 處決되었으나 間壁의 處理는 初層屋身과 다름이 없고, 다만 四五層에 올라가서 屋身壁이 一石으로 되었을 뿐이다. 二層 以上의 屋身의 「괴임」은 勿論 別石으로 整然히 째워있다. 屋蓋石도 平薄廣大한 板石으로 規則整然하게 째여있으되 四隅轉角의 簷端裏面이 깎여 略干 들리는 듯한 感을 내었을 뿐, 全體는 直線的으로 뻗어 ▶P68-1있고 屋蓋〿角은 四注隅棟形式의 突起가 제법 表現되어있다. 屋蓋石의「밭임」은 彌勒塔이나 王宮坪塔에서와 같이 層段形「밭임」이 아니요 長方橫石이 額枋兼平板枋의 意味로 一段 놓이고 그 위에 斜菱形長石이 包作橫面의 意味로 놓이었으니 이는 다른 塔에서 볼 수 없는 獨特한 手法이다. 屋蓋石 第四層까지 囲形으로 째여있고 第五層만이 田字形이며, 斜菱形「밭임」도 初層과 二層이 九石, 三層四層이 四石, 五層이 一石으로 모두 整然히 째워있다. 우리는 이 塔에서 무엇보다도 그 石材 結合에 너무나 整頓됨을 보고 둘째로 그 「밭임」의 特殊形式을 보고 셋째로 그 基壇의 成型的임을 본다. 即 이 塔은 무엇보다도 먼저 彌勒塔과 같이 純全한 木造 塔婆의 形式 그대로 充實히 再現한 것이 아니요 王宮坪塔과 같이 벌써 그 樣式을 公約시켜 써새로운 樣式의 産出을 꾀한 것으로 構式 發展史 上 이것은 彌勒塔에 다음 가는 것으로 設定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細部 手法으로 말하더라도 彌勒塔의 純「架構的」 築造 手法과 定林塔의 「精構的」 手法(例컨댄 定林塔의 斜菱形「밭임」下의 長方石이 全體 四枚로 되었으되 全平面이 四分派된 田字形이라든지 口字形의 配置가 아니라 回形 配置로 서로 엇물리게 되었으니 前者「架構的」이라 形言한다면 後者는「結構的」이라 할 수 있다) 이 發生史的 差異를 또한 말한다 할 수 있다. 이 外에도 部分的 形式, 樣式的 手法 等에서 兩者의 先後를 立證할 要素를 많이 보나, 一一히 擧論치 아니하겠고 以下의 叙述을 따라 漸次 說明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우선 정림탑이 양식적으로 미륵탑의 하풍에 든다 하고, 다음에 정림탑이 미륵탑에 대한 순차적 거리와 왕궁평탑이 미륵탑에 대한 순차적 거리와의 상호 차는 어떠한 것일까─ 즉 미륵탑, 정림탑, 왕궁평탑, 삼자의 양식사적 순위의 문제이다. 이때 필자는 양식 발전사적으로 보아 정림탑이 왕궁평탑보다 앞선 것으로, 따라서 이 3자의 순차를 정한다면 미륵탑이 제1위, 정림탑이 제2위, 왕궁평탑이 제3위로 나립하게 된다. 이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이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에 우리는 정림탑과 왕궁평탑과의 비교를 꾀하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68-2그러면 爲先 定林塔이 樣式的으로 彌勒塔의 下風에 든다 하고 다음에 定林塔이 彌勒塔에 대한 順次的 距離와 王宮坪塔이 彌勒塔에 대한 順次的 距離와의 相互差는 어떠한 것일가─即 彌勒塔, 定林塔, 王宮坪塔, 三者의 樣式史的 順位의 問題이다. 이때 筆者는 樣式 發展史的으로보아 定林塔이 王宮坪塔보다 앞선 것으로, 따라서 이 三者의 順次를 定한다▶P69-1면 彌勒塔이 第一位, 定林塔이 第二位, 王宮坪塔이 第三位로 羅立케 된다. 이것은 어떠한 理由에서이냐─이것을 設明하기 爲하여 다음에 우리는 定林塔과 王宮坪塔과의 比較를 꾀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양자를 비교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 옥판석들의 평박광대한 유사점이지만, 그보다도 옥개 접식의 결구 수법이 양자가 전연 동일한 점이다. 즉 구매 판석을 정연히 가구하여 있는 수법의 유사이니,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정림탑에선 사층까지 동일한 수법으로 되어 있는데 왕궁평탑에선 삼층까지로 되어 있다. 이 가구의 수법은 본래 미륵탑에서 발생한 것으로, 미륵탑의 사수 전각석이 그냥 그대로 부여지고 중간의 많은 판석이 공약된 형식이니, 왕궁평탑에서의 수법은 정림탑으로 아마 공약된 형식을 다시 더 한층 약화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정림탑과 왕궁평탑이 옥개 형식이 전혀 동일하면서 가구에 초약 의식이 벌써 왕궁평탑에 현저하다. 그뿐 아니라 기단의 이동은 문제할 수 없다고 치더라도, 그래도 왕궁평탑에서의 지대의 수고함은 정림탑의 기단 저평함에 비하여 양식사적 순위에 있어 뒤떨어짐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옥신 구성에 있어 정림탑은 최종까지 정연한 가구로 되어 있지만, 정돈되어 있지 않고 각층 각면이 일치하지 않아 오직 전체의 외양만을 요약하려는 의사가 농후하다. 말하자면(●●●●) 정림탑은(●●●●) 미륵탑의(●●●●) 가구적(●●●) 특질을(●●●) 최대공약수로(●●●●●●) 간화하려하여(●●●●●●) 그에(●●) 성공하였고(●●●●●) 왕궁평탑은(●●●●●) () 가구형식의(●●●●●) 완결이라기보다(●●●●●●)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서(●●●●) 조각적인(●●●●) 응집형식으로(●●●●●) 넘어설까를(●●●●●) 고심한(●●●) 작품이라(●●●●) 하겠으니(●●●●)이 조각적인 의사의 맹아는 그 탑신의 유주가 공식적으로 조출되어 있는 것과 옥개 상부에 옥신 '괴임'이 조출되어 있는 점에서도 넉넉히 읽을 수 있는 점이다. 유주의 양식만 해도 정림탑에선 탄력적인 생기를 띠었고, 왕궁평탑에선 편화적인 퇴폐에 떨어졌다. 정림탑의 유주는 미륵탑의 유주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왕궁평탑의 유주는 그것을 배반하였다. 정림탑의 유주는 구양식에 젖어 있고, 왕궁평탑의 유주 형식은 (비록 예술적 견지에서 볼 때는 아름답지 못하지만) 신양식의 형태이다. 만일 이 양탑의 층개에서의 저 '밭임' 양식의 상이와 기단의 상이만 없었더라면, 누구나 용이하게 정림탑이 미륵탑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용이하게 정림탑을 미륵탑에 다음 두고, 왕궁평탑을 정림탑에 다음 두는 것이다. 예술적 가치로 보아 물론 정림탑은 왕궁평탑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다. 하필 그뿐이랴! ─ 미륵탑보다도 우위에 있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의 우열은 연대의, 시간의 선후를 결정짓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시대의 유형적 예술적 기풍이란 물론 예술적 직관을 통하여 직각할 수 있고, 또 그로 말미암아 작품의 시대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지만, 이는 요컨대 가장 객관적인 양식 그 자체의 과학적 논리적 변화를 파촬한 위에 가능한 것이요, 한갓 예술적 가치의 우열만 가지고는 결정짓지 못할 문제라고 믿는다. 즉, 가치와 역사는 다른 까닭이다. 예술적 작품의 사적 고찰을 꾀함에 있어 항상 빠지기 쉬운 것은 이 예술적 가치의 우열과 예술적 시대성에 관한 성격과 양식 그 자체의 변화상 등을 견별하지 못하고 잡연된 혼술에서 분별을 꾀하는 오류에 있다 하겠다. 즉, 이 경우에 있어서 정림탑이 미륵탑이나 왕궁평탑보다 예술적 가치에 있어 우위에 있다 하여 그로써 곧 정림탑을 시대적으로도 제1위에 두려는 학자가 없지 않거니와, 이상 서술한 이유에서 이 세 탑이 시대적 성격으로 동일하고, 양식사적으론 미륵탑─정림탑─왕궁평탑의 순차가 되는 것을 독자는 이해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세 탑 간의 순위를 세운다.
쪽수▶P69-2우리는 이 兩者를 比較할제 무엇보다도 먼저 눈 띄는 것은 그 屋板石들의 平薄廣大한 類似點이지만 그보다도 屋蓋接式의 結構手法이 兩者가 全然 同一한 點이다. 即 九枚板石을 整然히 架構하여 있는 手法의 類似이니 다만 差異가 있다면 定林塔에선 四層까지 同一한 手法으로 되어있는데 王宮坪塔에선 三層까지로 되어있다. 이 架構의 手法은 번대 彌勒塔에서 發生한 것으로 彌勒塔의 四隅轉角石이 그냥 그대로 傅하여지고 中間의 많은 板石이 公約된 形式이니 王宮坪塔에서의 手法은 定林塔으로 아마 公約된 形式을 다시 더 한層 略化시킨 것으로 解釋된다. 定林塔과 王宮坪塔이 屋蓋 形式이 全혀 同一하면서 架構에 草略意思가 벌써 王宮塔에 現著하다. 그뿐 아니라 基壇의 異同은 問題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王宮坪塔에서의 地臺의 秀高함은 定林塔은 基壇의 低平함에 比하여 樣式史的 順位에 있어 뒤떨어짐을 暗示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屋身構成에있어 定林塔은 最終까지 整然한 架構로 되어 있지만 整頓되어 있지 않고 各層 各面이 不一하여 오직 全體의 外樣만을 要約하려는 意思가 濃厚하다. 말하자면(●●●●) 定林塔은(●●●●) 彌勒塔의(●●●●) 架構的(●●●) 特質을(●●●) 最大公約數로(●●●●●●) 簡化하려하여(●●●●●●) 그에(●●) 成功하였고(●●●●●) 王宮坪塔은(●●●●●) () 架構形式의(●●●●●) 完結이라기보다(●●●●●●)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서(●●●●) 彫刻的인(●●●●) 凝集形式으로(●●●●●) 넘어설까를(●●●●●) 苦心한(●●●) 作品이라(●●●●) 하겠으니(●●●●) 이 彫刻的인 意思의 萌芽는 그 塔身의 隅柱가 公式的으로 彫出되어 있는 것과 屋蓋 上部에 屋身 「괴임」이 彫出되어있는 點에서도 넉넉히 읽을 수 있는 點이다. 隅柱의 樣式만해도 定林塔에선 彈力的인 生氣를 띄웠고 王宮坪塔에선 便化的인 頹廢에 떨어졌다. 定林塔의 隅柱는 彌勒塔의 隅柱를 그대로 이어 받았고 王宮坪堵의 隅柱는 그것을 背叛하였다. 定林塔의 隅柱는 舊樣式에 젖어있고, ▶P70-1王宮塔의 隅柱 形式은 (비록 藝術的 見地로서 볼제는 아름다웁지 못하지만)新樣式의 形態이다. 萬一에 이 兩塔의 層蓋에서의 저 「밭임」樣式의 相異와 基壇의 相異만 없었더라면 누구나 容易히 定林塔이 彌勒塔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點에서 우리는 容易히 定林塔을 彌勒塔에 다음 두고 王宮坪塔을 定林塔에 다음 두는 것이다. 藝術的 價値로 보아 勿論 定林塔은 王宮坪塔보다 越等한 優位에 있다. 何必 그뿐이랴!─彌勒塔보다도 優位에 있다. 그러나 藝術的 價値의 優劣은 年代의, 時間의 先後를 決定짓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時代의 類型的 藝術的 氣風이란 勿論 藝術的 直觀을 通하여 直覺할 수 있고 또 그로 말미암아 作品의 時代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지만 이는 要컨댄 가장 客觀的인 樣式 그 自體의 科學的 論理的 變化를 把撮한 위에 可能한 것이요, 한갓 藝術的 價値의 優劣만 가지고는 決定짓지 못할 問題라고 믿는다. 即 價値와 歷史는 다른 까닭이다. 藝術的 作品의 史的 考察을 꾀함에 있어 恒常 빠지기 쉬운 것은 이 藝術的 價値의 優劣과, 藝術的 時代性에 關한 性格과 樣式 그 自體의 變化相 等을 甄別치 못하고 雜然된 昏述에서 分別을 꾀하는 誤謬에 있다 하겠다. 即 이 境遇에 있어서 定林塔이 彌勒塔이나 王宮坪塔보다 藝術的 價値에 있어 優位에 있다 하여 그로써 곧 定林塔을 時代的으로도 第一位에 두려는 學者가 없지 않거니와 以上 叙述한 理由에서 이 三塔 이 時代的 性格으로 同一하고 樣式史的으론 彌勒塔─定林塔─王宮坪塔의 順次가 되는 것을 讀者는 理解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三塔 間의 順位를 세운다.
그러나 이곳에 우리가 양식론적으로 보아 가장 중요한 일점을 제외하고 논하여 왔으니, 그는 즉 다름이 아닌 옥개의 '밭임' 양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본고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남겨 둔 문제로서 고 세키노 다다시 박사가 미륵탑이나 왕궁평탑을 논하여 반드시 이 정림탑보다 앞서지 못할 것으로 보려 한 그 소위 양식 상 문제란 것이(본고 3장 중 인용문 참고) 그 구체적 지시점을 필자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요컨대 이 "밭임" 양식에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조선의 석탑을 운위하는 학자─ 누구나 반드시 그 층급식 '밭임' 양식을 기탑 수법에서 출발한 현대문주2-5▶ 신라의 양식, 신라에 고유 특색같이 일반적으로 논하고 있는 점에서도[a 10] 용이하게 추측되는 바이다. 즉 그들의 의견은 이 층급식 "밭임" 양식이란 원래 전탑 옥개에 고유한 것으로, 조선에 있어서의 전탑의 실재는 선덕왕 3년에 조성된 분황사의 유탑에서 비롯하였고, 이후 조선의 제탑이란 것이 그중에서도 특히 신라의 제작이 모두 이 전탑 옥개의 "밭임" 양식을 엄수하고 있는 점에서 이미 미륵탑과 왕궁탑이 저와 같은 층급식 "밭임" 양식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벌써 신라 계통의 양식 범주 안에 속하는 것이요, 따라서 저 분황탑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겸하여 물론 정림탑과의 관계를 벗어나 시대적으로도 그 하풍에 드는 것으로 보려는 것인 듯하다.
쪽수▶P70-2그러나 이곳에 우리가 樣式論的으로보아 가장 重要한 一點을 除外코 論하여 왔으니 그는 即 다름이 아닌 屋蓋의 「밭임」 樣式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稿이 처음서부터 意識的으로 남겨둔 問題로서 故 關野貞 博士가 彌勒塔이나 王宮坪塔 ▶P71-1을 論하여 반드시 이 定林塔보다 앞서지 못할 것으로 보려 한 그 所謂 樣式上 問題란 것이(本稿□3□中 引用文參考) 그 具體的 指示點을 筆者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要컨댄 이 「밭임」 樣式에 있을 것 같다. 이것은 朝鮮의 石塔을 云謂하는 學者─ 누구나 반드시 그 層級式 「밭임」樣式을 璣塔 手法에서 出發한 원문주2-5▶新羅의 樣式, 新羅에 固有된 特色같이 一般히 論하고 있는 點에서도[8] 容易히 推測되는 바이다. 即 그들의 意見은 이 層級式「밭임」 樣式이란 元來 塼塔屋蓋에 固有한 것으로, 朝鮮에 있어서의 塼塔의 實在는 善德王 3年에 造成된 芬皇寺의 遺塔에서 비롯하였고, 以後 朝鮮의 諸塔이란 것이 그 中에서도 特히 新羅의 諸作이 모두 이 塼塔屋蓋의 「밭임」樣式을 嚴守하고 있는 點에서 이미 彌勒塔과 王宮塔이 저와 같은 層級式 「밭임」樣式을 가지고 있는 以上 그것은 벌써 新羅 系統의 樣式 範疇안에 屬하는 것이요 따라서 저 芬皇塔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兼하여 勿論 定林塔과의 關係를 벗어나 時代的으로도 그 下風에 드는 것으로 보려는 것인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여러 가지 수정과 제한을 받아야 할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니, 신라의 석탑 양식 중 그 층급형 '밭임'이 괴탑의 수법에서 유래된 것이요, 또 그것이 신라 석탑의 근간을 이룬 수법임을 인정함에 필자는 주저하지 아니하지만, 적어도 이 미륵탑에서는 이와 같은 관념으로는 해결되지 아니하는 여러 점이 있다. 제일로, 신라의 정형적 탑파들의 옥개에선 옥개의 염단과 '밭임'과의 물림 사이가 극히 단축되어 있을 뿐더러, '밭임'의 층급수가 초기의 것으로 간경되어 있는 것은 모두 오급에 한한 수교일 뿐더러, 탑신의 각 층에 있어 상하가 모두 그 수효를 같이 하거나, 또는 그렇지 아니하면 상층에 이를수록 '밭임'의 수효가 감소되는 것이 원칙이나, 이 미륵탑에 있어서는 옥첨과 '밭임'과의 물림이 광윤할 뿐더러 상층에 오를수록 그 수효도 증가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밭임'의 각고도 신라 제석탑에서와 같이 상하가 여일치 아니하다. 이러한 상이는 즉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미륵탑에서의 '밭임' 수법이 전탑에서의 층개 '밭임' 수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다만 유형적인 축괴적(●●●) 수법을(●●●) 응용한 시초 시험적인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사실로(●●●) 전탑에서의(●●●●) 형식이(●●●) 아니오(●●●)이전와(●●●) 축전적(●●●) 수법의(●●●) 응용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고 이 축전 수법의 응용에 대한 착안은 하필 경주 분황사 석탑과 같은 모전탑이 생긴 이후에 신라인으로 말미암아 시험되었다거나, 혹은 시험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선진이었던 백제인의 손으로도 착수될 근거가 십분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공주에서 발견된 송산리의 축총 고분과 광주·공주·부여 등에 다수한 잡석 고분의 축조 양식이 이미 그 선구를 이룬 것이요, 또 조선 내에서의 그 선구적 수법을 찾자면, 평양과 및 고구려의 전 도읍지인 만주 통화성 집안현 내에 다수한 고구려 고분의 천정 '밭임'이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쪽수▶P71-2그러나 이러한 見解는 여러가지 修訂과 制限을 받아야 할 것으로 筆者는 생각하는 바이니 新羅의 石塔 樣式 中 그 層級形 「밭임」이 壞塔의 手法에서 由來된 것이요 또 그것이 新羅 石塔의 根幹을 이룬 手法임을 認定함에 筆者는 躊躇치 아니하지만 적어도 이 彌勒塔에서는 이와 같은 觀念으로서는 解決되지 아니하는 여러 點이 있다. 第一로 新羅의 定型的 塔婆들의 屋蓋에선 屋蓋의 簾端과「밭임」과의 물림 사이가 極히 短促되어 있을 뿐더러 「밭임」의 層級數가 初期의 것으로 看儆되어 있는 것은 모두 五級에 限한 數交일 뿐더러 塔身의 各層에 있어 上下가 모두 그 數爻를 같이 하거나 또는 그렇지아니하면 上層에 이를수록 「밭임」의 數爻가 減少되는 것이 原則이나 이 彌勒塔에 있어서는 屋檐과 「밭임」과의 물림이 廣潤할 뿐더러 上層에 오를수록 그 數爻도 增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밭임」의 各高도 新羅 諸石塔에서와 같이 上下가 如一치 아니하다. 이러한 相異는 即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彌勒에서의 「밭임」手法이 塼塔에서의 層蓋「밭임」▶P72-1 手法을 〿〿하지 않고 다만 類型的인 築壞的(●●●) 手法을(●●●) 應用한 始初 試驗的인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事實로(●●●) 塼塔에서의(●●●●) 形式이(●●●) 아니오(●●●)以前와(●●●) 築塼的(●●●) 手法의(●●●) 應用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고 이 築塼 手法의 應用에 대한 着眼은 何必 慶州 芬皇寺 石塔과 같은 模塼塔이 생긴 以後에 新羅人으로 말미암아 試驗되었다거나 或은 試驗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政治的으로 文化的으로 先進이었던 百濟人의 손으로도 着手될 根據가 十分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公州에서 發見된 宋山里의 築塚古墳과 廣州·公州·扶餘 等에 多數한 雜石古墳의 築造樣式이 이미 그 先驅를 이룬 것이요 또 朝鮮 內에서의 그 先驅的 手法을 찾자면 平壤과 및 高句麗의 前 都邑地인 滿洲 通化省 輯安縣 內에 多數한 高句麗 古墳의 天井「밭임」이 이것을 證明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또 한 번 생각한다면 이 수법은 구태 축전 수법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순 역학적, 물리학적으로 필연히 나올 수 있는 수법이 아닐까. 즉 구폭이 적은 재료로 공간을 넓혀 간다든지 좁혀 간다든지, 또는 괴체를 쌓아 모은다든지 이어받자면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필연적으로 물리학적 원칙에 의해서 나올 수 있는 형식이라고 할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애급 싹카라(Sakkara)의 단형 '피라미드'나 고구려의 단형 방분이 시대를 달리하고, 지역을 달리하고, 민족을 달리하고, 상호의 영향을 무시하고 생길 수 있었던 것이며, 고구려 봉토 고분의 천정의 단형 '밭임', 백제의 미륵탑의 단형 '밭임'이 하나는 지하, 하나는 지표의 차이를 갖고도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결국 석탑 옥리의 층급형 '밭임'이 조선에 전탑이 생긴 이후의 현상이었다느니보다, 그 이전에 벌써 저러한 시험(●●)이 있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이곳에 또 상상까지 곁붙여 이것을 해석한다면 미륵탑에서의 '밭임' 형식은 그 수법만이 축전 수법에서 암시되었다 할 뿐이지, 내재한 의식은 근본적으로 목조 건물의 포작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다른 우탑에서의 '밭임'들도 본 의사는 이곳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 제탑의 '밭임'에서는 목조 건물의 포작면을 적상시킨다는 것보다도 굴탑에서의 '밭임' 형식의 공식화, 이식화라는 것을 굳이 느끼게 함에 비하여 현대문주부기▶미륵탑에서의 그것은 포작면을 이내 곧 연상케 한다.[a 11] 이것은 '밭임'의 제일급이 제이·제삼급과 마로히 후고로운 일석으로 경영된 점에서 이 제일급은 포작의 일부람보다도 오히려 목조 건물에서 액방 내지 항방을 연상케 하는 점이 많고 (제이 내지 제사층 간의 옥신에서 이 점을 더욱 절실히 본다), '밭임'의 제이급과 제삼급이 연접된 일석에서 조성된 면에서 중앙 포작의 포작면을 연상케 한다. 제오층 옥신으로부터는 급수가 한 층이 늦어 사급이 되었으며 상하가 양분되어 있다. 제일급은 물론 액방 내지 항방의 뜻일 것이요, 나머지 삼급은 삼중앙 포작의 의사일 것이다. 즉 옥신의 사층까지는 중앙 포작이요, 제오층부터는 삼중앙 포작으로 첨앙의 조화미를 꾀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수법은 실제 조선에 현재한 보은 속리산 법주사의 오중탑 '밭임'은 사중교두 내지 오중검두의 포작면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여야 하겠지만, 그곳에서 받는 양식감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은 결국 의사와 의사 표현 사이에 간재한 수법─ 즉 전탑 수법의 사연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신라 제탑에서의 층급 '밭임' 수법을 전탑 수법의 영향 하에 된 것으로 해석하여도 무방한 것일 것이다. 다만 신라탑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미륵탑에까지 누진된다면, 우리는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쪽수▶P72-2그러나 다시 또 한번 생각한다면 이 手法은 구태 築塼手法이라는 것을 생각할 必要도 없이 純力學的 物理學的으로 必然히 나올 수 있는 手法이 아닐까. 即 廐幅이 적은 材料로써 空間을 넓혀간다든지 좁혀간다든지 또는 塊體를 쌓아 모은다든지 이어받자면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必然的으로 物理學的 原則에 依해서 나올 수 있는 形式이라고 할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埃及싹카라 (Sakkara)의 段形「피라밑」나 高句麗의 段形方墳이 時代를 달리 하고 地域을 달리 하고 民族을 달리 하고 相互의 影響을 無視하고 생길 수 있었던 것이며 高句麗 封土古墳의 天井의 段形「밭임」 百濟의 彌勒塔의 段形「밭임」이 一은 地下, 一은 地表의 差異를 갖고도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結局 石塔屋裏의 層級形「밭임」이 朝鮮에 塼塔이 생긴 以後의 現象이었다느니보다 그 以前에 벌써 저러한 試驗(●●)이 있을 수 있었드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이곳에 또 想像까지 곁붙여 이것을 解釋한다면 彌勒塔에서의 「밭임」 形式은 그 手法만이 築塼手法에서 暗示되었달 뿐이지 內在한 意識은 根本的으로 木造 建物의 包(鋪)作意思를 表現코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勿論 이것은 다 ▶P73-1른 右塔에서의 「밭임」들도 本意思는 이곳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 諸塔의 「밭임」에서는 木造 建物의 包作面을 迹想시킨다는 것보다도 堀塔에서의 「밭임」形式의 公式化, 移植化라는 것을 굳이 느끼게 함에 比하여 원문주附記▶彌勒塔에서의 그것은 包作面을 이내 곧 連想케 한다.[9] 이것은「밭임」의 第一級이 第二第三級과 마로히 厚高로운一石으로 經營된 點에서 이 第一級은 包作의 一部람보다도 오히려 木造 建物에서 額枋 乃至 桁枋을 連想케 하는 點이 많고 (第二 乃至 第四層 間의 屋身에서 이 點을 더욱 切實히 본다) 「밭임」의 第二級과 第三級이 連接된 一石에서 造成된 面에서 重昂 包作의 包作面을 連想케 한다. 第五層 屋身으로부터는 級數가 ᅳ層이 늦어 四級이 되었으며 上下가 兩分되어 있다. 第一級 勿論 额枋 乃至 桁枋의 뜻일 것이요 나머지 三級은 三重䀚包作의 意思일 것이다. 即 屋身의 四層까지는 重昻包作이요 第五層부터는 三重䀚包作으로 瞻仰의 調和美를 꾀하였던 것으로 理解된다. 이러한 手法은 實際 朝鮮에 現在한 報恩 俗離山 法住寺의 五重塔「밭임」은 四重翹頭 乃至 五重劒頭의 包作面을 表示하는 것이라 하여야 하겠지만 그곳에서 받는 樣式感은 直接的이 아니라 間接的인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은 決局 意思와 意思 表現 사이에 間在한 手法─即 塼塔手法의 使然함이 아닌가─그렇다면 新羅诸塔에서의 層級「밭임」 手法을 塼塔手法의 影響下에 된 것으로 解釋하여도 無妨한 것일 것이다. 다만 新羅塔에 대한 이러한 槪念이 彌勒塔에까지 累진다면 우리는 마땅히 警戒하여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우리는 미륵탑에서의 이 본의를 가장 구체적으로 살린 것이 곧 정림탑이라 본다. 즉, 정림탑에서의 최하 일급의 '밭임'이 곧 미륵탑에서의 분리된 문하 일급의 횡방과 의미를 같이 한 것이며, 그 위의 사릉 '밭임'이 곧 미륵탑에서의 상부 이급의 '밭임' 형식을 '모디파이' 시켜서 현실적 포작면을 더욱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는 바이다. 그러므로 외견만으로 본다면 정림탑의 '밭임' 양식은 일견 미륵탑의 '밭임' 양식과 매우 동떨어진 형식같이 해석되기 쉬우나, 그러나 그 조형 의사라는 내면적 의식을 살펴본다면 정림탑의 '밭임' 형식이야말로 실로 곧 미륵탑이 표현하고자 한 본의를 십분 이해하고 진실히 이해해서 어찌하면 그 본의를 완전히 표시해볼까 하는 극히 동정된 입장에서 표현된 형식인가 한다. 이 점에서 그 기단의 발전태를 임시 제외한다면, 어느 탑보다도 이 정림탑이 미륵탑의 조형 의사를 가장 잘 이해하고서 이어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림탑이 미륵탑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관점을 바꾸어 표현한다면, 정림탑이 곧 미륵탑 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왕궁평탑은 형식적으로는 미륵탑을 충실히 재현한 것인 듯하나, 그러나 결국에 있어서는 미륵탑의 내면적 의사를 하등 천발시키지 못한 부수적 준고적 입장에서 고식된 모방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쪽수▶P73-2우리는 彌勒塔에서의 이 本意를 가장 具體的으로 살린 것이 곧 定林塔이라본다. 即 定林塔에서의 最下一級의「밭임」이 곧 彌勒塔에서의 分離된 蚊下一級의 橫枋과 意味를 같이 한 것이며 그 위의 斜菱 「밭임」 곧 彌勒塔에서의 上部二級의 「발 ▶P74-1임」形式을 「모디파이」 식혀서 現實的 包作面을 더욱 더 具體的으로 表現한 것이라 보는 바이다. 그럼으로 外見만으로 본다면 定林塔의 「밭임」樣式은 一見 彌勒塔의 「밭임」 樣式과 매우 동떠러진 形式같이 解釋되기 쉬우나 그러나 그 造型意思라는 內面的 意識을 삷혀본다면 定林塔의 「밭임」 形式이야말로 實로 곧 彌勒塔이 表現코자한 本意를 十分 理解하고 眞實히 理解해서 어찌하면 그 本意를 完全히 表示해볼까 하는 極히 同情된 立場에서 表現해진 形式인가 한다. 이 點에서 그 基壇의 發展態를 臨時 除外한다면 어느 塔보다도 이 定林塔이 彌勒塔의 造型意思를 가장 잘 理解하고서 이워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定林塔이 彌勒塔에 가장 가차운 距離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看點을 바꾸어 表現한다면 定林塔이 곧 彌勒塔 完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王宮坪塔은 形式的으론 彌勒塔을 充實히 再現한 것인 듯하나 그러나 結局에 있어선 彌勒塔의 內面的 意思를 何等 闡發시키지 못한 副守的 遵古的 立場에선 枯息된 模倣的 作品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우리는 미륵탑과 정림탑과 왕궁평탑의 조형 의사와 조형 가치 및 양식적 위차를 설정하였다. 이 삼도는 실로 곧 목조 탑파의 양식 재모에서 출발하여 석탑으로서의 새로운 양식을 형성하려는 의사에 젖어 있는, 아니 젖어 있다느니보다 그 의사를 처음으로 보인 시원적인 지위에 있는 작품들이라 할 것이다. 시원적 지위라 함은 결국 전형적인 것의 이전의 것임을 뜻하는 것이니,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 탑의 양식이 이 세 탑에 한하여 끓여 있고, 그 이상의 전개가 없다가 신라 중엽 이후 내지 고려조에 들어 이 계통 속에 편입시킬 약간의 예가 생겼을 뿐이요(이 항목은 본 탑의 특수한 형태를 참고), 거개의 석탑은 이 세 탑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많음으로 해서 이 세 탑의 양식이 전형적 양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석탑의 정형식은 이 세 탑이 시사만 보였을 뿐 결정을 짓지 못하였고, 그곳에는 다른 시험이 또 하나 있어 비로소 정립될 기운이 숙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다른 시험이란 무엇이냐 하면, 그는 즉 다름 아닌 의성군 유운면 탑리동 영니산 하에 있는 오중석탑이다.
쪽수▶P74-2以上 우리는 彌勒塔과 定林塔과 王宮坪塔의 造型 意思와 造型 價値와 및 樣式的 位次를 設定하였다. 이 三堵은 實로 곧 木造 塔婆의 樣式再模에서 出發하여 石塔으로서의 한새로운 樣式을 形成하려는 意思에 젖어있는, 아니 젖어있다느니보다 그 意思를 처음으로 보인 始源的인 地位에 있는 作品들이라 할 것이다. 始源的 地位라 함은 結局 典型的인 것의 以前의 것임을 뜻하는 것이니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이 三塔의 樣式이 이 三塔에 限하여 끓여있고 그 以上의 展開가 없다가 新羅 中葉 以後 乃至 高麗朝에 들어 이 系統 속에 編入시킬 略干의 例가 생겼을 뿐이요(此項本橋特殊型修參照件) 擧皆의 石塔은 이 三塔 範疇에서 벗어난 것이 많음으로해서 이 三塔의 樣式이 典型的 樣式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朝鮮 石塔의 定形 ▶P75-1式은 이 三塔이 示唆만 보였을 뿐 決定을 짓지 못하였고 그곳에는 다른 試驗이 또 하나 있어 비로소 定立될 機運이 熟成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다른 試驗이란 무엇이냐 하면 그는 即 다름 아닌 義城郡 由雲面 塔里洞 盈尼山 下에 있는 五重石塔이다.
이 탑의 예속사지명은 부명이고 대동여지도에 영니산 하에 지표된 이것이 이에 해당한 것임으로 필자는 이것을 영니산탑으로 임시 호칭하고자 하는 바이다. 단층 기단 위에 있는 오중석탑으로, 특히 그 옥락 형식에 있어 '밭임'은 물론이요 옥표까지도 층급 단계를 이루어 일견 전탑의 옥개 형식과 전연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는 데서 항용 모전 석탑이라는 칭호 아래 불려져 있는 특수 형식의 탑이다. 기단은 조선 석탑으로서의 기단 중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이룬 것이라 할 만한 것으로, 기단만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저 부여발 정림사탑보다도 더 고고한 양식임을 느낄 수 있다. 정림탑엔 기단 대하석 하에 다시 대반 일석이 있고 또 중석의 '밭임기둥'(종차 호칭 '탱주')이 중간 일주만 상촉하관의 형식을 이루고 있는데 비하여, 영니산탑의 기단은 대하석이 일매만 놓여 있고, 일면 사개 탱주는 모두 상촉하관의 원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초층 옥신과 기단과의 접촉에 있어 정림탑은 하등의 가공이 없었는데 비하여 영니산탑은 '괴임' 일단으로 이것을 받치고 있다. 현대문주2-6▶초층 옥신 남벽 정심에는 감실(고일 사이미, 좌우 간일 일칠미, 심칠삼리, 사토시마 박사 실측)이[a 12]하나 경영되어 있고, 문선은 없어졌으되 문구 주위에는 이중륜 곽선이 부각되어 있고, 하방에는 일단의 합한석이 놓였을 뿐더러 문추 좌우(일본 건축술어 칙당거부)가 놓여 있다(이 문 형식은 경주 고선사 석탑에 전승된다). 4개 우주는 정림탑에서와 같은 '엔터시스'의 형식을 이루었고, 주두에 좌두가 특히 경영되어 있음은 다른 어느 석탑에서도 볼 수 없는 수법이다. (경주 불국사 다보석탑에는 좌두 형식의 것이 있으나 이와 같이 사실적 단형 좌두가 아니며, 부도에서는 많이 볼 수 있으나 부도와 이러한 불탑과는 같이 논할 수 없다.) 벽상에는 액방 행방이 이중으로 놓여 있고, 그 위로 단형 '밭임'이 사출하여 옥첨을 받치고, 옥첨 위로 다시 단형 '괴임'이 중첩 육출하여 옥개 형식을 이루었는데, 옥첨 전각의 사우가 약간 굴앙되어 단면이 삼각형을 이룬 것은 신라 제탑의 옥첨 전각 형식에 대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이층 이상 옥신에는 중간에 다시 일주가 있어 전체로 이간면을 이루었고, 옥개는 '밭임'이 오단, '괴임'이 육출로 통일되어 있다. 노반까지 남아 있고 복발 이상 상륜부가 전부 일락된 것은 다른 탑파들에서와 같다. 전고 약 32척의 대탑인 만큼 석재는 정림탑에서와 같이 정돈되지 아니하고, 미륵탑에서와 같이 전체의 양식만을 구성하기에 급급하였다. 초층 옥신을 단간 평면으로 하였음에 불구하고(제2층 이상 사간 평면(즉 일면 양간)으로 된 것은 이 탑 자체에 있어 의사의 부통일이며, 실제 목조탑에 있어 있을 수 없는 약식적 양식이다). 옥개의 수법은 확실히 전탑에서의 그것이며, '밭임'의 오단 급층은 (초층에선 사단만 확실하고, 일단은 좌두와 면을 같이 하였기 때문에 확실치 아니하나, 전체로 역 오단 형식이다) 후대 신라 석탑의 '밭임' 수법에 대한 한 범주를 이루었다. 옥첨 양각의 수법과 함께 초층 옥신의 '괴임' 형식도 후대 석탑의 초층 옥신의 '괴임' 형식에 대한 한 약속이다.
고유섭 조선탑파2-2.png
쪽수▶P75-2이 塔의 隷屬寺址名은 不明이고 大東輿地圖에 盈尼山 下에 指表된 이것이 이에 該當한 것임으로 筆者는 이것을 盈尼山塔으로 臨時 號稱코자 하는 바이다.單層基壇 위에서 있는 五重石塔으로 特히 그 屋落 形式에 있어 「밭임」 은 勿論이요 屋表까지도 層級段階를 이루어 一見 塼塔의 屋蓋 形式과 全然 同一한 手法을 보이고 있는 데서 항용 模塼 石塔이라는 稱號 아래 불려져 있는 特殊 形式의 塔이다. 基壇은 朝鮮 石塔으로서의 基壇 中 가장 原始的인 形態를 이룬 것이라 할 만한 것으로 基壇만을 比較한다면 우리는 저 扶餘發 定林寺塔보다도 더 高古한 樣式임을 느낄 수 있다. 定林塔엔 基壇臺下 石下에 다시 臺盤 一石이 있고 또 中石의 「밭임기둥」(從此號稱 「撐柱」)이 中間 一柱만 上促下寬의 形式을 이루고 있는데 比하여 盈尼山塔의 基壇은 臺下石이 一枚만 놓여있고 一面 四介撑柱는 모두 上促下寬의 原始 形態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원문주2-6▶初層屋身과 基壇과의 接觸에 있어 定林塔은 何等의 加工이었는데 比하야 盈尼山塔은 「괴임」一段으로써 이것을 받아있다. 初層屋身 南壁 正心에는 龕室(高一 四二米, 左右間一 一七米, 深七三리, 佐藤島 博士 實測)이[10] 하나 經營되어 있고 門扇은 없어졌으되 門口周圍에는 二重輪郭線이 浮刻되어 있고 下方에는 一段의 闔限石이 놓였을 뿐더러 門樞 左右(日本建築術語則唐居敷)이 놓여있다(이 門 形式은 慶州高仙寺石塔에 傳承된다.) 4介 隅柱는 定林塔에서와 같은 「엔터시스」의 形式을 이루었고 柱頭에 坐斗가 特히 經營되어있음은 다른 어느 石塔에서도 볼 수 없는 手法이다. (慶州 佛國寺 多寶石塔에는 坐斗 形式의 것이 있으나 이와 같이 寫實的 單形坐斗가 아니며 浮圖에서는 많이 볼 수 있으나 浮圖와 이러한 佛塔과는 같이 論할 수 없다.) 壁上▶P76-1에는 額枋裄枋이 二重으로 놓여 있고 그 위로 段形 「밭임」이 四出하여 屋簷받고 屋簷 위로 다시 段形 「괴임」이 重疊六出하여 屋蓋 形式을 이루었는데 屋簷轉角의 四隅가 略干 屈仰되어 斷面이 三角形을 이룬 것은 新羅 諸塔의 屋簷轉角 形式에 대한 約束이라 할 수 있다. 二層 以上 屋身에는 中間에 다시 一柱가 있어 全體로 二間面을 이루었고 屋蓋는「밭임」이 五段 「괴임」이 六出로 統一되어있다. 露盤까지 남아있고 覆鉢 以上 相輪部가 全部 逸落된 것은 다른 塔婆들에서와 같다. 全高約 32尺의 大塔인 만큼 石材는 定林塔에서와 같이 整頓되지 아니하고 彌勒塔에서와 같이 全體의 樣式만을 構成하기에 汲々하였다. 初層屋身을 單間平面으로 하였음에 不拘하고(第 2層 以上 四間平面(即一面兩間)으로 〿것은 이 塔 自體에 있어 意思의 不統一이며 實際 木造塔에 있어 있을 수 없는 略式的 樣式이다. 〿蓋의 手法은 確實히 塼塔의서의 그것이며 「밭임」의 五段級層은 (初層에선 四段만 確實하고 一段은 左斗와 面을 같이 하엿기 때문에 確實치 아니하나 全體로 亦 五段形式이다) 後代 新羅 石塔의 「밭임」手法에 대한한 範疇를 이루었다. 屋簷輛角의 手法과 함께 初層屋身의 「괴임」形式도 後代 石塔의 初層屋身의「괴임」形式에 대한한 約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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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틀어 말하면, 영니산탑은 정림탑보다 새로운 형식의 맹아가 많고, 왕궁평탑보다 생동적 기풍에 떠 있다. 지역의 분별을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양식사적으로 줄을 친다면, 이 영니산탑은 정림탑과 왕궁평탑과의 사이에 둘 수 있다. 지금 조선의 석탑으로 발생사적 의미를 얻고, 기단이 단층 이하의 것으로는 이상에 서술한 네 탑밖에 없다(물론 그 모방적 작례라든지 전도계의 작례는 별개의 것이다). 즉, 조선 석탑의 시파 형식을 이루는 예로서 이 사탑밖에 없으니, 그중에 왕궁평탑은 미륵탑과 외견상 아무런 신미가 없는 데서 이것을 제외한다면, 조선 석탑의 시원 형식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탑의 세 기일 뿐이요, 이 세 가지를 비교한다면 형식의 통일되지 아니한 개성을 각 탑에서 볼 수 있다(특히 그 옥개 수법을 두고 말함). 즉, 모두가 형식의 발생()에 처하여 있고 형식결정(○○)의 지위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이 중에 왕궁평탑은 그들에 추수하여 양식성 생기의 말석에 참할 뿐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조선 석탑 양식의 발생 사정과 발전 과정을 볼 수 있지만, 그 연대적 위상을 우리는 성급히 결정지으려 하지 말고, 다음에 전형적 양식의 성립을 본 후에 이를 해결하자.
쪽수▶P76-2이를 통트러 말하면 盈尼山塔 定林塔보다 새로운 形式의 萌芽가 많고 王宮坪塔보다 生動的 氣風에 떠 있다. 地域의 分別을 意識的으로 無視하고 樣式史的으로 줄을 친다면 이 盈尼山塔은 定林塔과 王宮坪塔과의 사이에 둘 수 있다. 지금 朝鮮의 石塔으로 發生史的 意味를 얻고 基壇이 單層 以下의 것으로는 以上에 叙述한 四塔 밖에 없다 (勿論 그 模倣的 作例라든지 塼堵系의 作例는 別 것이다.) 即 朝鮮 石塔의 始派 形式을 이루는 例로서 이 四塔밖에 없나니 그 中에 王宮坪塔 彌勒과 外見 아모런 新味가 없는 데서) 이것을 除外한다면 朝鮮 石塔의 始源 形式 彌勒塔‧定林塔‧盈尼山塔의 三基일 뿐이요 이 三者를 比較한다면 形式의 如一치 아니한 個性을 各塔에서 볼 수 있다(特히 그 屋蓋手法을 두고 말함). 即 모두가 ▶P77-1形式의 發生 ()에 處하여 있고 形式決定(○○)의 地位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이 中에 王宮坪塔은 그들에 追隨하여 樣式成生期의 末席에 參할 뿐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朝鮮 石塔 樣式의 發生 事情을 發展 過程을 볼 수 있지만 그 年代的 位相을 우리는 性急히 決定지으려 하지 말고 다음에 典型的 樣式의 成立을 본 後에 이를 解決시키자.































본문3: 1-2. 始源樣式으로부터 典型的 樣式의 發生


이상으로써 우리는 조선 석탑의 양식 시원을 보았다. 그것은 전체로 있어서 목조 탑파 양식을 재현하는 데 있으나 석재라는 특별한 재료에서 연유되는 제한으로 말미암아 부분 형식에 있어 목조 탑파에 없는 새로운 형식이 안출되었고 또 그것이 정립되기 전까지 여러가지 시험이 시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즉 그것은 목조 탑파 양식의 충실한 부분적 재현에서 시작되어 점차 전체 요의의 표현으로 기울어 갔다. 그러는 동안에 실제 목조 건물 그 자체의 발전도 있어 그에 수반된 표현 의사도 달라서 이곳에 한 개의 양식이 정립되었으니 그는 즉 기단이 중단으로 상단은 4개의 탱주가, 하단은 5개의 탱주가 중대석을 구분하여 있고 저대복석에는 상단중대를 받기 위하여 각과 반원의 현대문주2-7▶'몰딩'(Moulding)[a 13]이있고 상대복석에는 초층옥신을 받기 위하여 중단각형의 '괴임'이 있고 옥신은 전체로 몇 층이든지 간에 일간 평면으로 요약되었고 옥리계급형 '밭임'은 오급 이상 더 있지 아니하며 옥표면은 실제 건물의 주면대로 층절 없는 경사〿이 되어있고 노반 이상 상륜부는 거개 실락되어 불명한 자가 많으므로 문제되지 아니하나 전각사 위에는 풍령이 달렸던 혈흔들이 남아있다.
쪽수▶P77-2以上으로써 우리는 朝鮮 石塔의 樣式 始源을 보았다. 그것은 全體로 있어서 木造 塔婆 樣式을 再現하는 데 있으나 石材라는 特別한 材料에서 緣由되는 制限으로 말미암아 部分 形式에 있어 木造 塔婆에 없는 새로운 形式이 案出되었고 또 그것이 定立되기 前까지 여러가지 試驗이 試驗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即 그것은 木造 塔婆 樣式의 充實한 部分的 再現에서 시작되어 漸次 全體 要意의 表現에로 기울어 갔다. 그러는 동안에 實際 木造 建物 그 自體의 發展도 있어 그에 隨伴된 表現 意思도 닯어서 이곳에 한 개의 樣式이 定立되었으니 그는 即 基壇이 重壇으로 上壇은 四介의 撑柱가, 下壇은 五介의 撑柱가 中臺石을 區分하여 있고 底臺覆石에는 上壇中臺를 받기 爲하여 角과 半圓의 원문주2-7▶「몰딩」(Moulding)[11]이있고 上臺覆石에는 初層屋身을 받기 爲하여 重段角形의 「괴임」이 있고 屋身은 全體로 몇 層이든지 간에 一間 平面으로 要約되었고 屋裏階級形「밭임」은 五級 以上 더 있지 아니하며 屋表面은 實際 建物의 注面대로 層折없는 傾斜〿이 되어있고 露盤 以上 相輪部는 擧皆 失落되어 不明한 者가 많으므로 問題되지 아니하나 轉角四隅에는 風鈴이 달렸던 穴痕들이 남아있다.
이 기단의 상대 형식과 옥리의 층급 '밭임'은 확실히 영니산탑에서 나올 수 있는 형식이었고 옥표의 경사 주면은 각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미륵탑 이래의 전통이며 기단하대 형식은 확실히 새로운 양식이나 석탑 자신의 발전이람보다 당대 실제 건물의 기단 양식이었다 할 수 있어, 이 모든 의사를 종합하면 재래의 시험적이었던 모든 수법이 집성되어 정돈되었고<<이미지>> 신식의 건축 양식을 가미하여 완전히 통일된 석탑 양식으로서의 완체가 성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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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완전한 예를 우리는 경주 내동면 암곡리 부도곡고선사지에 있는 삼중 석탑 일기, 전군양북면룡당리감은사지에있는 삼중석탑이기, 충주군가김 면탑정리일명폐사지에 있는 칠중석탑일기, 경주군견곡면라원리일명폐사지에 있는 오중석탑 일기에서 본다. 이들 제탑은 상술한 전형적 형식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대작들이다. 특히 이 모든 탑은 이 전형적 형식의 시초에 처하여 있어 양식적으론 통일되어있다 하나 그 부분 구성에 있어서는 재료의 편성이 고식의 의태를 아직 남기고 있어 우주는 별석이요 옥신심 벽이 또 별석이요 옥개첨석이 별석이요 옥리'밭임'이 별석이다. 후대 제석탑의 경향을 보건대 부분부분이 단일석으로 통일되는 경향이 시대가 뒤질수록 농후함을 볼 수 있으므로 해서 지금 이곳에 든 사기의 석탑 중부분이 단석으로 통일 된 것을 양식상 뒤진 것이라 둔다면 나원리 오중탑을 최저에 둘 수 있고 고선사지탑과 감은사지탑은 옥신의 조식유무의 차가 있을 뿐이요, 건축 수법으로선 하등의 차이가 없으므로 양자를 동일 수준에 둘 수 있고 탑정리탑은 고선‧감은탑과 함께 나원리탑보다 선행할 것은 사실이나 고선‧감은탑과 견주어 선후의 정위를 따지기가 약간 곤란하다. 즉 탑정리의 탑은 초층옥신의 구성이 마치 부여 정림탑의 옥신 구성과 같이 우주가 별석이요 심벽이 양 매 판석으로 등분히 째여 있고 제2층 이상은 사매장석을 혹 엇물리기도 하고 혹 째와물리기도 하여 부산왕궁평탑에서의 수법과 유사한 점을 남겨 고선‧감은탑이 제이층 이상 단석으로 옥신을 통일함보다 고식에 속하여 있는데, 옥개의 수법에 있어서는 고선‧감은탑과 같이 입면의 사방중심이 분할되어 있어 양자 간 유사를 보이고 있음에 불구하고 옥개와 옥전'발임'석이 고선‧감은탑과 같이 또 분리되어 전후 팔석의 결구의사를 보이지 아니하고서 사석결구의 의사를 보이고 있을 뿐더러 육‧칠량층의 옥신옥개는 모두 단석으로 되어있다. 초층옥신을 받기 위하여 장진일석이 '괴임'으로 있는 것을 영니산탑에 가까운 의사라 할 것인데 고선탑의 초층옥신에 감실 형식을 사면에 모각하였으되 합한 좌우에 각치방석 형식이 조출되어 있는 것이 또한 저 영니산탑의 의사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신양식과 구양식의 교차가 상복되어 있는 고선‧감은탑과 탑정리탑과의 선후는 어느 다른 자료가 발견되기 전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이는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고 또 양식 상 이러한 상복 혼재는 다같이 과도적 의미를 가진 등대의 것으로 간경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나 지금은 굳이 이 문제까지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쪽수▶P77-3이 基壇의 上臺 形式과 屋裏의 層級 「밭임」은 確實히 盈尼山塔에서 나올 수 있는 形式이었고 屋表의 傾斜 注面은 角度의 差異는 있을망정 彌勒塔 以來의 傳統이며 基壇下臺 形式은 確實히 새로운 樣式이나 石塔 自身의 發展이람보다 當代 實際 建物의 基壇 樣式이었다 할 수 있어, 이 모든 意思를 綜合하면 在來의 試驗的이었던 모든 手法이 集成되어 整頓되였▶P78고 新式의 建築 樣式을 加味하여 完全히 統一된 石塔 樣式으로서의 完體가 成立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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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完全한 例를 우리는 慶州 內東面 暗谷里 浮圖谷高仙寺址에 있는 三重 石塔 一基, 全郡陽北面龍堂里感恩寺址에있는 三重石塔二基, 忠州郡可金 面塔亭里逸名廢寺址에 있는 七重石塔一基, 慶州郡見谷面羅原里逸名廢寺址에 있는 五重石塔 一基에서 본다. 이들 諸塔은 上述한 典型的 形式을 모두 具備하고있는 大作들이다. 特히 이 모든 塔은 이 典型的 形式의 始初에 處하여 있어 樣式的으론 統一되어있다 하나 그 部分 構成에 있어서는 材料의 編成이 古式의 意態를 아직 남기고 있어 隅柱는 別石이요 屋身心 壁이 또 別石이요 屋蓋簷石이 別石이요 屋裏「밭임」이 別石이다. 後代 諸石塔의 傾向을 보건대 部分部分이 單一石으로 統一되는 傾向이 時代가 뒤질수록 濃厚함을 볼 수 있으므로 해서 지금 이곳에든 四基의 石塔 中部分이 單石으로 統一 된 것을 樣式上 뒤진 것이라 둔다면 羅原里 五重塔을 最低에 둘 수 있고 高仙寺址塔과 感恩寺址塔은 屋身의 彫飾有無의 差가 있을 뿐이요, 建築 手法으로선 何等의 差異가 없으므로 兩者를 同一 水準에 둘 수 있고 塔亭里塔은 高仙‧感恩塔과 함께 羅原里塔보다 先行할 것은 事實이나 高仙‧感恩塔과 견주어 先後의 定位를 따지기가 略干 困難하다. 即 塔亭里의 塔은 初層屋身의 構成이 마치 扶餘 定林塔의 屋身 構成과 같이 隅柱가 別石이요 心壁이 兩枚 板石으로 等分히 째여 있고 第二層 以上은 四枚長石을 或 엇물리기도 하고 或 째와물리기도 하여 釜山王宮坪塔에서의 手法과 類似한 點을 남겨 高仙‧感恩塔이 第二層 以上 單石으로 屋身을 統一함보다 古式에 屬하여 있는데, 屋蓋의 手法에 있어서는 高仙‧感恩塔과 같이 立面의 四方中心이 分割되어 있어 兩者間 類似를 보이고 있음에 不拘하고 屋蓋와 屋專「발임」 石이 高仙‧感恩塔과 같이 또 分離되어 前後 八石의 結構意思를 보이지 아니하고서 四石結構의 意思를 보이고 있을뿐더러 六‧七兩層의 屋身屋盎는 모두 單石으로 되어있다. 初層屋身을 받기 爲하여 長塵一石이「괴임」으로 있는 것을 盈尼山塔에 가차운▶P79-1意思라 할진댄 高仙塔의 初層屋身에 龕室 形式을 四面에 模刻하였으되 闔限 左右에 閣峙方石 形式이 彫出되어 있는 것이 또한 저 盈尼山塔의 意思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新樣式과 舊樣式의 交叉가 相覆되어 있는 高仙‧感恩塔과 塔亭里塔과의 先後는 어느 다른 資料가 發見되기 前 말하기 어려운 問題이므로 이는 暫時 保留할 수밖에 없고 또 樣式 上 이러한 相覆 混在는 다같이 過渡的 意味를 가진 等代의 것으로 看儆될 可能性이 있는 것이나 지금은 굳해야 이 問題까지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하여간 이리하여 우리는 조선 석탑 양식의 전형적 몇 예를 얻어 볼 수 있다. 이후 조선의 제석탑은 특수한 예외적 작품을 제하고서는 거개가 이상 서술한 제탑 양식이 근간이 되어 천태만상의 수별상을 못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형식 그 자체 만으로 보면 그리 큰 변화가 없다─따라서 천편일률의 양식의 번복이 있을 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천편일률적인 양식 속에서 시대의 성격이 층이 보여지는 것도 기이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간단한 형식 속에서 시대의 성격을 찾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쪽수▶P79-2何如間 이리하여 우리는 朝鮮 石塔 樣式의 典型的 數例를 얻어 볼 수 있다. 以後 朝鮮의 諸石塔은 特殊한 例外的 作品을 除하고서는 擧皆가 以上 叙述한 諸塔 樣式이 根幹이 되어가지고 千態萬相의 殊別相을 못하고 있음을 본다. 勿論 形式 그 自體만으로서 볼진댄 그리 큰 變化가 없다─따라서 千偏一律의 樣式의 翻復이 있을 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二千偏一律的인 樣式 속에서 時代의 性格이 層이 보여지는 것도 奇異한 現象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 硏究에 있어서 이러한 簡單한 形式 속에서 時代의 性格을 찾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본문4: 1-3. 以上兩樣式의 年代觀


우리는 본고 제1항에서 조선 석탑의 시원 양식을 말할 때, 그 세대의 고증이 없이 막연히 이를 서술하였고, 제2항에 들어 저 시원 양식으로부터 차생된 전형적 양식을 말함에 있어 또한 세대의 고증이 없이 순 양식적 문제에서 이를 서술하였다. 지금 우리가 이 양 항의 문제를 양식적으로 해결하고, 장차 제3단으로 문제를 옮겨가려 할 때 결론적으로 고찰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문제로, 상래 서술하여 온 제탑의 세대 문제를 해결 짓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 짓기 위하여 고찰의 편의상 전형적인 것들의 세대 문제로부터 고찰하여 들어갈까 한다.
쪽수▶P79-3우리는 本稿 第一項에서 朝鮮 石塔의 始源 樣式을 말할제 그 世代의 考證이 없이 漠然히 이를 叙述하였고 第二項에 들어 저 始源 樣式으로부터 次生된 典型的 樣式을 말함에 있어 또한 世代의 考證이 없이 純樣式的 問題에서 이를 叙述하였다. 지금 우리가 이 兩項의 問題를 樣式的으로 解決 식히고 將次 第三段으로 問題를 옮겨가려 할제 結論的으로 考察치 아니하면 아니 될 問題로 上來 叙述하여 온 諸塔의 世代 問題를 解決짓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問題를 解決짓기 爲하여 考察의 便宜上 典型的인 것들의 世代 問題로부터 考察하여 들어갈까 한다.
우리는 전형적 양식의 범주 안에 드는 것으로 고선탑, 감은탑, 탑정리탑, 나원리탑의 네 종을 들었다. 이 중 나원리탑은 그 예속 사지가 불명일 뿐더러, 필자의 과문으로서 아직 이렇다 할 만한 참고 자료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는 제외하고(이는 전성적 탑파의 발전상을 고찰할 때 다시 문제 삼으련다), 다음에 도정리탑은 그 역시 소속 사지 이름은 미심이나 다소의 참고 자료는 있다. 제일로 현대문주2-8▶「朝鮮の風水」[a 14] 속에 전하는 설로 이 지방이 조선의 중앙에 처함으로써 국가 진호의 의미로 원성왕 2년에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탑이라 부른다는 것인데, 이 전설의 출처도 모르겠거니와 원성왕 12년이라면 저 천실 17년(즉 경덕왕 17년)의 건탑 배명이 있는 원김천 폐갈항사의 변탑(현재는 경성총독부박물관에 있다)보다 37년이나 뒤지는 햇수인데, 탑파의 양식으론 그 갈항탑보다 고고하기 짝이 없으니 이 세대에 관한 설은 믿어지지 아니한다. 고적도보 4권에는 이 도의 부근에서 습득하였다는 와당 수종이 있는데, 그중에서 1427·1428의 양종 와당은 보통 삼국 말기로부터 신라 통일 초간에 있던 형식으로 고고학상 정위되어 있는 것이며, 또 다른 와당들도 성당의 기풍이 농후함으로써 현대문주2-9▶세키노 다다시 박사는 이 탑을 통일 초에 두었다. [a 15]현대문주2-10▶ 유명한 건흥 5세 재병진 운운의 기명이 있는 삼존불상의 배광이 발견되었다는 설이 있는데[a 16], 이 건흥 5년이란 백제 위덕왕 43년으로 추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이 불상의 이곳 발견설은 믿음을 둘 수 없는 것이니 참고 자료로 인용하기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좀 만연된 험이 있으나, 세키노 박사의 통일 초 설이 가장 유력한 추정이 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결정짓기 전에 다음 고선‧감은 양탑의 세대를 보자.
쪽수▶P80-1우리는 典型的 樣式의 範疇 안에 드는 것으로 高仙塔, 感恩塔, 塔亭里塔, 羅原里塔의 四種을 들었다. 이 中의 羅原里塔은 그 隷屬寺址가 不明일 뿐더러 筆者의 寡聞으로서 아직 이렇다 할 만한 參考 資料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는 除外하고(이는 典聖的 塔婆의 發展相을 考察할제 다시 問題하련다) 다음에 堵亭里塔은 그 亦 所屬寺址名은 未審이나 多少의 參考 資料는있다. 원문주2-8▶第一로 「朝鮮の風水」[12] 속에 傳하는 說로 이 地方이 朝鮮의 中央에 處함으로써 國家 鎭護의 意味로 元聖王 2년에 建設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中央塔이라 부른다는 것인데 이 傳說의 出處도 모르겠거니와 元聖王 12年이라면 저 天實 17年(即 景德王 17年)의 建塔 配銘이 있는 元金泉廢葛項寺의 變塔(今移在京城總督府博物舘)보다 37年이나 뒤지는 年數인데 塔婆의 樣式으론 그 葛項塔보다 高古하기 짝이 없으니 이 世代에 關한 說은 믿어지지 아니한다. 古蹟圖譜 4卷에는 이 堵의 附近에서 拾得하였다는 瓦當數種이 있는데 그中에서 1427·1428의 兩種瓦當은 普通三國末期로부叫 新羅統一 初間에 있든 形式으로 考古學 上 定位되어 있는 것이며 또다른 瓦當들도 盛唐의 氣風이 濃厚함으로서 원문주2-9▶關野貞 博士는 이 塔을 統一 初에 두었다[13]. 저 有名한 建興 5歲在丙辰 云云의 記銘이있는 원문주2-10▶三尊佛像의 背光이 發見되었다는 說이 있는데[14] 이 建興 5年이란 百濟 威德王 43年으로 推定되어 있는 것이지만 이 佛像의 이곳 發見說은 信을 둘 수 없는 것인즉 參考 資料로 引用하기는 困難하다. 그렇다면 좀 漫然된 험이 있으나 關野 博士의 統一初 說이 가장 有力한 推定이 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決定짓기 前에 다음 高仙‧感恩兩塔의 世代를 보자.
폐고선사탑은 이미 그 사명이 알려져 있고, 또 현대문주2-11▶일찍이 이곳에서 원효 법사의 비편이 발견되어 삼국유사의 기사와 종합할 때 [a 17] 원효의 암방이 이곳에 있었고, 원효의 입적이 수공 2년(신문왕 6년, 서기 686년) 3월 책일이었음이 알려진 바 되어, 고선사의 사관은 적어도 이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입증되었으나, 사관의 존립으로써 곧 탑파의 실존 연대를 설명하여 가할 것이냐는 것은 일률로 불가할 것도 아니요, 가할 것도 아닌 것으로, 그 양식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기풍과 사관 존립의 역사적 사실이 비등하면 상호 반증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으므로 해서 우리는 이 경우에 형식적 논리에 다소 비약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로 원효 주석 시에 적어도 이 탑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 이 탑의 하한이 신문왕 6년까지에는 두어져도 가할 것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다음에 올 감은탑의 고찰로부터 더욱 명확히 입증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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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80-2廢高仙寺塔은 이미 그 寺名이 알려있고 또 일찍이 이곳에서 원문주2-11▶元暁法師의 碑片이 發見되어 三國遺事의 記事와 綜合할 때[15] 元曉의 庵房이 이곳에 있었고 [16]}元暁의 入寂이 垂拱 2年(神文王6년 西紀 686) 3月 冊日이었음이 알려진 바 되어 高仙寺의 寺觀은 적어도 이 以前부터 있었던 것이 立證되었으나 寺觀의 存立으로써 곧 塔婆의 實存 年代틀 說明하여 可할 것이냐는 것은 一▶P81-1律로 不可할 것도 아니요 可할 것도 아닌 것으로 그 樣式이 가지고 있는 時代的 氣風과 寺觀 存立의 歷史的 事實이 比等하면 相互 反證할 수 있는 것으로 認定할 수 있으므로 해서 우리는 이 境遇에 形式的 論理에 多少 飛躍이 있다 하더라도 事實로 元曉 住錫 時에 적어도 이 塔이 있었을 것으로 따라 이 塔의 下限이 神文王 6年까지에는 두어져도 可할 것으로 認定된다. 이것은 다음에 올 感恩塔의 考察로부터 더욱 明確히 立澄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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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감은사 쌍탑은 원래 상술한 여러 탑에 비하여 사찰의 성립 시대가 가장 확실한 유일한 존재로서, 이 탑의 연대 확립은 곧 다른 탑파의 연대 추정에 커다란 좌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삼국유사에 전재된 감은사의 연기에

文武王欲鎮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王立 開耀二年畢 排金堂砌下 東 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繞之備 盖遺詔之藏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 見臺

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는 일찍부터 전하던 사찰의 고기(寺中古記)로서, 신라본기 문무왕 말년조에 "羣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不爲大王石"이라 전하는 사실과 종합할 때, 창사의 사실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다.현대문주2-12▶ 또 문무왕대에 시작되어 개요 2년(신문왕 2년)에 준공되었다는 것도 사실을 사실답게 전하는 연수로 가장 믿음직한 기록이다[a 18]. 따라서 이곳 쌍탑도 신문왕 2년까지는 완성되었을 것이며, 그 창시 시점은 불명이나, 많게 잡아도 문무왕 즉위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으니, 이 탑의 성립 연수는 문무왕 원년(661 AD)으로부터 신문왕 2년(682 AD)까지로 둘 수 있다.따라서 양식상 전혀 동일하고 사찰의 실재 시대가 거의 동일하던 폐고선사(廢高仙寺)의 탑도 거의 같은 시대에 둘 수 있게 된다. 겸하여 양식상 이들과 선후의 지위에 있을 수 있는 탑정리탑(塔亭里塔)도 동일한 시대에 둘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형적 탑파의 양식 성립이 적어도 신문왕 3년(683 AD)까지는 하한이 있었던 것이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물론 고선탑(高仙塔), 탑정리탑(塔亭里塔)의 성립 하한이 감은탑(感恩塔)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감은탑보다 실제 성립이 앞섰다면 조선 석탑의 전형적 양식의 성립 하한이 신문왕 2년보다 조금 앞설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확실하지 못한 이상, 최소한 신문왕 2년까지는 이 하한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또 감은사탑보다 실제 성립 연수가 뒤진다면 이 전형적 양식의 성립 하한이 이미 감은사탑으로 말미암아 정립된 이상, 이 양식의 전승과 계승을 그것이 의미할 뿐,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 석탑의 전형적 양식의 성립 하한을 우선 신문왕 2년에 두는 것이다.
쪽수▶P81-2

文武王欲鎮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王立 開耀二年畢 排金堂砌下 東 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繞之備 盖遺詔之藏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 見臺

라는 句가 있으니 일찍부터 傳하던 寺中古記로서 新羅本記 文武末年條에 「羣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不爲大王石」이라 傅하는 事實과 綜合할 때 創寺의 事實엔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원문주2-12▶또 文武王代 시작되어 開耀 2年(神文王 2年)에 畢功하였다는 것도 事實을 事實다웁게 傳하는 年數로 가장 믿음직한 記錄이다[17]. 따라서 이곳 雙塔도 神文王 2年까지는 落成되었을 것이요 그 創始는 不明이나 많이 잡아야 文武王 即位 以前에는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니 이 塔의 成立年數는 文武王 元年으로부터 神文王 2年까지(661─682 AD)에 둘 수 있다. 따라서 樣式上 全여 ▶P82-1同一하고 寺觀의 實在 世代가 거의 同一하던 廢高仙寺의 堵도 거의 同代에 둘 수 있게 된다. 兼하여 樣式上 이들과 先後의 地位에 있을 수 있는 塔亭里塔도 等代에 둘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典型的 塔婆의 樣式 成立이 적어도 神文王 3年까지는 그 下腿이 있었던 것이 立證되었다 하겠다. 이는 勿論 高仙塔, 塔亭里塔의 成立 下腿이 感恩塔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感恩塔보다 實際 成立이 앞선다면 朝鮮 石塔의 典型的 樣式의 成立 下限이 神文王 2年보다 좀 앞설 뿐이요 그것이 確實치 못한 以上 最低 限度로 神文王 2年까지는 이下限을 決定할 수 있다는 뜻이다. 萬一에 또 感恩寺塔보다 實際 成立 年數가 뒤진다면 이 典型的 樣式의 成立 下限이 이미 感恩寺塔으로 말미암아 定立된 以上 이 樣式의 傳承 繼窺을 그것이 意味할 뿐 大勢에는 何等 影響됨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朝鮮 石塔의 典型的 樣式의 成立 下腿 爲先 神文王 2年에 두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전형적 양식의 성립 하한(下限)이 제정되었다면, 다음에 올 것은 그 이상의 문제라 하겠다. 이때 나원리탑은 전형적 양식의 저위에 두었고, 고선탑은 양식상 감은탑보다 더 올라갈 수 없으니 문제 외이고, 탑정리탑이 감은탑보다 선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인데, 이는 양식상으로는 결정되지 않음을 전에 말하였으니(필자 역시 탑정리탑은 미조사이기 때문에 확정적 단안을 내기 어려운 점도 있다) 결국 현상으로선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겠다. 만일 탑정리탑이 감은탑과 동대, 또는 그 아래일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히 결속되고, 따라서 석탑의 전형적 양식은 대체로 문무왕대에 확립된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나, 탑정리탑 대 감은탑의 관계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단안하기 어려운 문제이요, 이것은 다음 문제의 해명을 따라 어느 정도까지 밝혀질 것으로 믿어진다.
쪽수▶P82-2이와 같이하여 典型的 樣式의 成立 下腿이 制定되었다면 다음에 올 것은 그上眼 問題라하겠다. 이때 羅原里塔은 典型的 樣式의 低位에 두었고 高仙塔은 樣式上 感恩塔보다 더 올라갈 수 없으니 問題 外이고 塔亭里塔이 感恩塔보다 先行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問題인데 이는 樣式 上으로선 決定되지 아니 함을 前에 말하였으니(筆者 亦 靖亦 이塔은 未調査이기 때문에 確定的 斷案을 나기 어려운 점도 있다) 結局 現狀으로선 이 問題는 解決되지 아니한다 하겠다. 萬一 塔亭里塔이 感恩塔과 等代, 또는 그 아래들 것이라면 問題는 簡單히 決着되고, 따라서 石塔의 典型的 樣式은 大體로 文武王代에 確立된것으로 看做하게 될 것이나 塔亭里塔 對 感恩塔의 關係가 確立되기 前까지는 斷案키 어려운 問題이요 이것은 다음의 問題의 解明을 따라 어느 程度까지 밝혀질 것으로 믿어진다.
전형적 양식이 성립되기 전에 시원 양식이 있었음은 우리가 이미 누술한 바이다. 그 시원 양식 중에 영니산탑은 확실히 그 양식상 경주 흥왕사탑의 하풍에 드는 양식으로, 말하자면 흥왕사탑의 양식에서 발전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기단이 단층으로 저평한 의태와 초층 옥신을 괴이기 위하여 장석을 괴인 의태가 유사할 뿐더러, 옥개를 상하 다 같이 층급 단계로써 해결시킨 것은 확실히 흥왕탑의 수법이다. 흥왕탑의 수법이나, 그러나 그곳에는 형식이 세련되고 수법의 세련이 있다. 혹 영니산탑의 이 옥개 수법을 흥왕탑까지 생각지 않더라도 현대문주2-19▶안동읍 동부동 법흥사지에 있는[a 19] 칠중탑 같은 실제 전탑으로서의 고풍한 예를 효배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라 말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나, 조선에서 순전 조탑으로 고풍하다는 이 탑이 벌써 중층 기단을 이루었을 뿐더러, 그 하층 기단면에 천부 여러 상이 조식되어 있어 저 영니산 탑 기단의 원시적인 것과 비교도 되지 아니하니, 우리는 영니산탑을 마땅히 흥왕탑에 접근시킴이 가능할 것이다. 흥왕탑은 지금 삼층뿐이요, 영니산탑은 오층이니, 또 이로써 곧 두 탑의 접근도를 의심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전회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흥왕탑의 현존 층급이 원수의 존속이 아니고 그 이상 더 있던 것이라는 설이 있다면 층수와의 비교는 문제가 아니 된다 하겠다. 이리하여 영니산탑의 접근을 흥왕탑에 붙인다면, 흥왕탑이 성립되었으리라 믿어지는 흥왕탑 낙성 연대 즉 선덕왕 3년까지에 그 상한을 가정할 수 있다. 또 그 하한은 고선‧감은탑의 상한을 문무왕 즉위 원년까지 두었은즉, 양식상 그에 선행하는 이 탑의 하한이라 많이 본다면 문무왕대까지 둘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에 남겨둔 탑정리탑이 만일 감은탑에 선행된다면, 그 연대적 위상은 이 중간의 어느 구절 속에 들 것이다.
쪽수▶P82-3典型的 樣式이 成立되기 前에 始源 樣式이 있었음은 우리가 이미 累述한 바이다. 그 始源 樣式 中에 盈尼山塔은 確實히 ▶P83-1그 樣式上 慶州 芬皇寺塔의 下風에 드는 樣式으로, 말하자면 芬皇寺塔의 樣式에서 發展된 形態로 理解할 수 있다. 基壇이 單層으로 低平한 意態와 初層屋身을 괴이기 爲하여 長石을 괴인 意態가 類似할 뿐더러 屋蓋를 上下 다같이 層級段階로써 解決시킨 것은 確實이 芬皇塔의 手法이다. 芬皇塔의 手法이나 그러나 그곳에는 形式이 洗鍊이 있고 手法의 洗鍊이 있다. 或 盈尼山塔의 이 屋蓋 手法을 芬皇塔까지 생각지 않더라도 원문주2-19▶安東邑 東部洞 法興寺址에 있는[18] 七重塔같은 實際 塼塔으로서의 高古한 例를 效顰한 것으로 생각할 것 같이 말할 사람이 있을른지 모르나 朝鮮서 純塼 造塔으로 高古하다 는 이 塔이 벌써 重層 基壇을 이루었을 뿐더러 그 下層 基壇面에 天部諸像이 彫飾되어 있어 저 盈尼山 塔基壇의 源始的인 것과 比較도 되지 아니하니 우리는 盈尼山塔을 마땅히 芬皇塔에 接近시킴이 可할 것이다. 芬皇塔은 지금 三層뿐이요 盈尼山塔은 五層이니 또 이로써 곧 兩塔의 接近度를 疑心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前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芬皇塔의 現存 層級이 原數의 存續이 아니고 그 以上 더 있던 것이라는 說이 있다면 層數와의 比較는 問題가 아니된다 하겠다. 이리하여 盈尼山塔의 接近을 芬皇塔에 붙인다면 芬皇塔이 成立되었으리라고 믿어지는 芬皇塔 落成 年代 卽 善德王 3年까지에 그 上限을 假定할 수 있다.또 그 下限은 高仙‧感恩塔의 上限을 文武王 即位 元年까지 두었은즉 樣式上 그에 先行하는 이 塔의 下限이라 많이 본대야 文武王代까지 둘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前에 남겨둔 塔亭里塔이 萬一에 感恩塔에 先行된다면 그 年代的 位相은 이 中間에 어느 句節 속에 들 것이다.
영척산탑의 연대적 범위를 상기 범위 안에 둔다면, 다음에 양식적으로 이 탑의 차위에 둔 왕궁평탑이 민제된다. 이 탑의 부근에서는 일찍이 과와 몇 조각이 발견된 사실이 있고(고적도보 46405 잎), 그 와조각이 또한 영척산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고와(고적도보 46407 잎)와 공통된 요소가 있으며, 또 이 담에 관하여는 김서룡 박사의 유저 유저 백제사 연구부록에 「益山舊都探勝の栗」에서의 발기가 있으니 말하였으되

일본어인용문1

이 지방 전설에 나타난 시대를 초월한 개념들의 나열, 즉 마한, 고구려, 도선의 세 가지를 역사에 맞게 개정한다면, 마한은 백제, 도선은 일명승으로, 또 그 풍수의 관념은 불력에 의지하여 진호 국가의 관념의 발현으로 해석하여 백제 말대의 창립으로 해석되지 않는 바─아니나, 전설의 개채를 함부로 하기도 어려운 노릇인즉, 이에 의한 추정은 다시 이 이상 할 수 없고, 전형적 양식의 상한을 문무왕 초년까지 두는 가설을 채용한다면, 양식상 이것은 그에 선행되는 것이므로 해서 하한은 그 이전까지, 즉 왕조를 두고 말한다면 백제 의자왕 말년, 백제의 사직이 복멸되기 전까지 둘 수 있을 것이다. 백제 고지에 남아 있는 탑으로 고고한 석탑례가 미륵‧정림급이 왕궁평탑 외에 다시 없는 것을 보아, 군사적으로 소란해지기 전에 아마 창건된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백제기의 최후의 작품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때 우리는 양식적으로는 이에 선행하나, 탑신에 현경 5년 운운의 기명이 있는 정림탑을 생각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쪽수▶P83-2 盈尼山塔의 年代的 範圍를 上記 範圍안에 둔다면 다음에 樣式的으로 이 塔의 次位에 둔 王宮坪塔이 閔題된다. 이 塔의 附近에서는 일찍이 古瓦幾片이 發見된 事實이 있고(古蹟圖譜46405葉) 그 瓦片이 또한 〿〿亭里塔附近에서 發見되었다는 古瓦(古蹟圖譜46407葉 第1427─8號瓦當) 와 共通된 要素가 있으며 또 이 堵에 關하여는 今西龍 博士의 遺著百濟史 硏究附 錄에 「益山舊▶P84-1都探勝の栗」에서의 拔記가 있으니 말하였으되

일본어인용1

이 地方 傳說에 나타난 時代를 超越한 概念들의 羅列, 卽馬韓 高句麗 道詵의 三者를 歷史에 맞게 改正한다면 馬韓은 百濟, 道詵은 逸名僧으로, 또 그 風水의 觀念은 佛力에 依資하여 鎭護 國家의 觀念의 發現으로 解釋하여 百濟末代의 創立으로 解釋되지 않는 바─아니나, 傳說의 改寨을 함부로 하기도 어려운 노릇인즉 이에 依한 推定은 다시 이 以上 할 수 없고 典型的 樣式의 上限을 文武王 初年까지 두는 假說을 採用한다면 樣式 上 이것은 그에 先行되는 것이므로 해서 下限은 그 以前까지, 即 王朝를 두고 말한다면 百濟의 義慈王 末年, 百濟의 社稷이 覆滅되기 前까지 둘 수 있을 것이다 百濟故地에 남아있는 塔으로 高古한 石塔例가 彌勒‧定林 及이 王宮坪塔 外에 다시 없는 것을 보아 軍事的으로 騷亂되기 前에 아마 創建되었던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百濟期의 最後의 作品이 아니었던가. 勿論 이때 우리는 樣式的으론 이에 先行하나 塔身에 顯慶五年 云云의 記銘이 있는 定林塔을 생각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정림탑 제 일층 옥신 급 「밭임」면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은 전액 하에 「顯慶五年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이란 구로부터 시작되어 있는 것으로 세인에 이미 회자되어 있는 바이니, 다시 더 설명을 필요치 않겠고 다만 이 계미건이란 구를 그대로 믿는다면, 이 탑이 곧 번경 5년, 즉 백제 의자왕 20년에 백제를 파멸시키면서 이내 곧 소정방의 손으로 말미암아 건립된 탑같이 해석될 것이나, 그러나 첨액에 비명이라 해 놓고 결국 그 주체가 비가 아니고 탑인 것은 비를 세우려다 비를 세우지 않고 사탑을 그냥 이용한 것으로, 따라서 이 탑은 벌써 그 이전에 건립되어 있던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것이 백제기의 탑일 것이 용이하게 이해되지만, 이 비명이 이 탑신에 새겨져 있는 그 사실 자체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의심한다면, 이 탑에 관한 세대 문제는 결국 왕궁평탑, 미륵탑 등과의 상관적 해석에서 해결되는 수밖에 없다. 필자가 왜 이곳에 이러한 복잡한 생각을 하느냐 하면, 실은 이 비명 전각에 관하여 의심하는 학자가 벌써부터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즉 다름 아닌 희전정길 박사이니"大唐平百濟國碑に關する疑問"이라 하여 고고학잡지 제15권 5호에 벌써 이를 의문시하고 있다. 그 후 박사에게 필자가 친히 오늘의 그의 의견을 추문하였더니, 금일까지도 자기 의견에 변개가 없다 하여왔다. 선배 정인보 씨는 이에 언급한 바는 없었으나, 일찍이 동아일보 지상에 발표한 「조선의 얼」이란 데서 고려 종조대 호종단이란 자가 고려에 내사하여 도처의 금석을 쇄용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었는데, 만일에 정림탑의 이 비명 전각이 의심되는 것이라면 근거는 없는 억측이나, 호종단의 작란이란 것도 결코 범연히 볼 것이 아닌 듯하다. 부여 진열관 내 석조에 동문의 비명이 새겨 있는 것도 결국은 작란의 한 나머지가 아니었을까. 필자가 이 탑을 평제탑으로 부르지 않고 정림탑으로 부르려 함은 원사 명을 쫓아 부르려는 의사도 있거니와, 태반은 이 비명 전각에 의문이 있는 까닭이라고도 하겠다. 동국여지승람 권52 순안불우 법흥사 김부식기 중에

昔唐太宗皇帝詔 於擧義己來 交兵之處 立寺剎 仍命虞世南 褚遂良等七學士 爲碑銘以紀功德

이란 것이 있지만, 교병지처에 입사찰함은 업장 소멸을 위함이었을 것이요, 기공하기 위해서는 따로 수비의 사실이 있었을 법하되, 살생의 공업을 불탑에 감히 기각한다는 것은 불법이 방성하고 불위가 아직 타지하지 않던 당대의 사실로 무엄한 편에 속하지 아니하였을까. 여러 가지 미심한 점이 있지만 본론과 승리되는 문제이니, 이 이상 더 쫓지 않겠고, 믿고 지나던 정림탑의 세대 참고 자료가 이와 같이 의문시되어 있다면, 정림탑의 세대도 왕궁평탑의 그것과 같이 또 다른 관련에서 고찰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던져진 유일한 자료는 다름 아닌 미륵탑이라 하겠으니, 양식상으로 가장 가까운 유형 속에 들어 있고, 또 비록 전설이나마 비교적 세대 위상이 근리한 세차로 일컬어 있는 것은 이것뿐인 까닭이다. 즉, 그는 백제 무왕대 건립으로 부하여 있는 것이니, 필자는 양식상의 세대설에 하등 반대할 이유를 갖지 못하고 있으나, 그러나 학자 간엔 이를 양식상 의심한다는 이도 있으니, 우리는 다소 만연된 험이 있으나 논리의 진행상 위선 이곳에 전설의 본문을 처들고, 다음에 그 이설을 설명할까 한다.
쪽수▶P84-2定林塔 第 一層 屋身 及 「밭임」面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은 篆額 下에 「顯慶五年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이란 句로부터 始作되어 있는 것으로 世人에 이미 膾炙되어 있는 바이니 다시 더 說明을 必要치 않겠고 다만 이 癸未建이란 句를 그대로 믿는다면 이 塔이 곧 翻慶 5年 即 百濟 義慈王 20年에 百濟를 破滅시키면서 이내 곧 蘇定方의 손으로 말미암아 建立된 塔같이 解釋될 것이나 그러나 簷額에 碑銘이라 해 놓고 結局 그 主體가 碑가 아니고 塔인 것은 碑를 ▶P85세우려다 碑를 세우지 않고 寺塔을 그냥 利用한 것으로, 따라서 이 塔은 벌써 그 以前에 建立되어 있던 것으로 解釋된다. 따라서 이것이 百濟期의 塔일 것이 容易히 理解되지마는 이 碑銘이 이 塔身에 새겨져 있는 그事實 自體에 關하여 全般的으로 疑心한다면 이 塔에 關한 世代 問題는 結局 王宮坪塔, 彌勒塔 等과의 相關的 解釋에서 解決되는 수밖에 없다. 筆者가 왜 이곳에 이러한 複雜한 생각을 하느냐 하면 實은 이 碑銘鐫刻에 關하여 疑心하는 學者가 벌써부터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即 다름 아닌 喜田貞吉 博士이니 「大唐平百濟國碑に關する疑問」이라 하여 考古學雜誌 第 15卷 5號에 벌써 이를 疑問視하고 있다. 그 後 博士에게 筆者가 親히 오늘의 그의 意見을 推問하였더니 今日까지도 自己 意見에 變改가 없다 하여왔다. 先輩鄭寅普 氏는 이에 言及한 바는 없었으나 일찍이 東亞日報 紙上에 發表한 「朝鮮의 얼」이란 데서 高麗 〿宗朝代 胡宗旦이란 者가 高麗에 來仕하여 到處의 金石을 碎鎔한 事實을 指摘한 바 있었는데 萬一에 定林塔의 이 碑銘鐫刻이 疑心되는 것이라면 根據는 없는 臆測이나 胡宗旦의 作亂이란 것도 決코 汎然히 볼 것이 아닌 듯하다. 扶餘 陳列館內石槽에 同文의 碑銘이 새겨있는 것도 結局은 作亂의 한 나머지가 아니었을까. 筆者가 이 塔을 平濟塔으로 부르지 않고 定林塔으로 부르려 함은 原寺 名을 쫓아 부르려는 意思도 있거니와 太半은 이 碑銘鐫刻에 疑問이 있는 까닭이라고도 하겠다. 東國輿地勝覽 卷52 順安佛宇法興寺金富軾記 中에

昔唐太宗皇帝詔 於擧義己來 交兵之處 立寺剎 仍命虞世南 褚遂良等七學士 爲碑銘以紀功德

이란 것이 있지만 交兵之處에 立寺刹함은 業障消滅을 爲함이었을 것이요 紀功키 爲하여는 따로히 樹碑에 事實이 있었을 법하되 殺生의 功業을 佛塔에 敢히 記刻한다는 것은 佛法이 方盛하고 佛威가 아직 墮地치 않던 當代 事實로 無嚴한 便에 屬하지 아니 하였을까. 여러가지 未審한 點이 있지만 本論과 乘離되는 問題이니 이 以上 더 逐究치 않겠고 믿▶P86-1고 지나던 定林塔의 世代 參考 資料가 이와 같이 疑問視되어 있다면 定林塔의 世代도 王宮坪塔의 그것과 같이 또다른 關聯에서 考察되지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 問題의 解決을 爲하여 던져진 唯一한 資料는 다름 아닌 彌勒塔이라 하겠으니 樣式上으로 가장 가까운 類型 속에 들어있고 또 비록 傳說이나마 比較的 世代 位相이 近理한 歲次로써 일컬어 있는 것은 이것 뿐인 까닭이다. 即 그는 百濟 武王代 建立으로 傅하여 있는 것이니 筆者는 樣式上이 世代說에 何等 反對할 理由를 갖지 못하고 있으나 그러나 學者 間엔 이를 樣式上 疑心한다는 이도 있으니 우리는 多少 冗 漫된험이 있으나 論理의 進行上 爲先 이곳에 傳說의 本文을 처들고 다음에 그 異說을 說明할까 한다.
이 전설이라는 것은 본디 삼국유사(권2)로 말미암아 전해진 것이요, 또 동국여지승람(권33 익산)에도 전해진 것인데, 이설을 주장한 학자―(즉 세키노 다다시 박사)가 삼국유사에 의하지 않고 승람에 의한 까닭에 다소 설론에 복잡함을 보게 되었고, 또 이를 설명하려는 필자로서는 이설을 주장한 학자의 소거인 승람의 기록을 들어 말함이 가할 듯하게도 생각되지만, 승람의 기록은 이설을 주장한 그 논문 중에 원문대로 인용되어 있는 것이므로, 중복을 피할 겸, 또 전설의 원문도 소개할 겸하여 이곳에는 삼국유사에 부하여 있는 것을 우선 등재할까 한다.

武王 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扵京師南池邊 池龍文通而生 小名薯童 噐量難測 常掘薯蕷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 美艷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羣童 羣童親附之 乃作謠 誘羣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王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 薯童曰 可 於是 聚金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 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이상 본문에 있어서의 전설은 이미 김서룡 박사도 지적한 바와 같이, 본래 무강왕에 대한 전설을 삼국유사의 필자가 임의로 백제 무왕으로 개편한 것이며, 또 전설에는 여러 가지 사실이 복합되어 있다. 이는 하여간에 지금 탑파에 대한 문제만을 들어 상술한 것을 의심한 것으로, 세키노 박사 설이란 것을 보자. 왈,

일본원서인용1

쪽수▶P86-2이 傳說이라는 것은 본디 三國遺事(권2)로 말미암아 傳해진 것이요 또 東國輿地勝覽(권33 益山)에도 傳해진 것인데 異說을 主張한 學者―(即 關野貞博士) 三國遺事에 依하지 않고 勝覽에 依한 까닭에 多少 設論에 複雜함을 보게 되었고 또 이를 說明하려는 筆者로서는 異說을 主張한 學者의 所據인 勝覽의 記錄을 들어 말함이 可할 듯하게도 생각되지만 勝覽의 記錄은 異說을 主張한 그 論文 中에 原文대로 引用되어 있는 것인즉 重複을 避할겸, 또 傳說의 原文도 紹介할 겸하여 이곳에는 三國遺事에 傅하여 있는 것을 爲先 登載할까 한다.

武王 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扵京師南池邊 池龍文通而生 小名薯童 噐量難測 常掘薯蕷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 美艷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羣童 羣童親附之 乃作謠 誘羣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P87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王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 薯童曰 可 於是 聚金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 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以上 本文에 있어서의 傳說은 이미 今西龍 博士도 指摘한 바와 같이 本來 武康王에 對한 傳說을 三國遺事의 筆者가 任意로 百濟 武王으로 改編한 것이며 또 傳說에는 여러가지 事實이 複合되어있다. 이는 何如間에 지금 塔婆에 대한 問題만을 들어 上述한 것을 疑心한 것으로 關野 博士 說이란 것을 보자 曰,

일본원서인용1

원래 이 미륵탑에 관하여 설을 세운 관야 박사의 이 의견이 뚜렷한 편이었고, 그의 뒤를 받아 미륵사지를 답사하고 미륵탑을 조사하여 현대문주2-13▶한 편의 논문을[a 20] 세운 등도 기지로 박사는 관야 박사의 이 의견을 철저히 승인한 것인지 아닌지 매우 모호한 변론에 그쳐 요점을 모르겠는데, 대개는 사지만을 백제기의 것이고, 탑은 후대의, 즉 관야 박사가 설정한 세대에 찬동하는 듯하고, 현대문주2-14▶다이하라 도시타케 씨가[a 21] 이에 관하여 입론한 바가 있다 하나, 정림탑의 세대 문제를 의심 없이 그 기명 연대 이전의 것으로 두었을 뿐 아니라, 이 미륵탑을 백제식이란 개념 안에 포함시켰을 뿐이다. 이마니시 류 박사는 특별한 이유는 붙이지 않고서 이 미륵탑을 백제시대 건조물로 인정한다 하였고(백제사연구 568쪽─9쪽), 왕궁평탑도 정치상 백제시대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지만, 외에 그 전후에 연결하는 시대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였다(동서 574─575쪽). 그러나 이 여러 설 중에 논리다운 논리는 관야 박사 설뿐이니, 우리는 지금 이것을 검토해보자.
쪽수▶P90-2 原來 이 彌勒塔에 關하여 說을 세운 故關野 博士의 이 意見이 뚜렷한 便이었고 그의 뒤를 받아 彌勒寺址를 踏査하고 彌勒塔을 調査하여 원문주2-13▶一介의 論文을[19] 세운 藤島 亥治郎 博士는 關野 博士의 이 意見을 徹底히 承認한 것인지 아닌지 매우 模糊한 辯論에 끄쳐 要點을 모르겠는데 大概는 寺址만을 百濟期의 것이요 塔은 後代의, 即 關野 博士가 設定한 世代에 贊同하는듯하고 원문주2-14▶大原利武氏가[20] 이에 關하여 立論한 바가 있다 하나 定林塔의 世代 問題를 疑心 없이 그 記銘 年代 以前의 것으로 두었을 뿐 아니라 이 彌勒塔을 百濟式이란 概念 안에 包括시켰을 뿐이요 今西龍 博士는 特別한 理由는 붙이지 않고서 이 彌勒塔을 百濟 時代 建造物로 認定한다 하였고(百濟史研究568頁─9頁) 王宮 坪塔도 政治上 百濟時代의 作이 될 수 있는 可能性이 多大하지만 外에 그 前後에 連接하는 時代의 作이 될 수 있는 可能性도 적지 않다 하였다(同書574─ 575頁). 그러나 이 여러 說 中에 論다운 論은 關野 博士 說뿐이니 우리는 지금 이것을 檢討해보자.
지금 관야 설에 있어서 가장 중심된 이론은 미륵탑이나 왕궁평탑은 양식상 서로 동일한데, 왕궁평탑 아래에서는 일본의 아스카 시대와 영업 시대 초기와의 중간에 해당하는 문양의 와당을 얻었고, '양식상' 이 두 탑은 정림탑에 선행할 수 없다는 것이 주가 되어 전설은 이에 맞도록 개역 추론된 데 지나지 않는다.
쪽수▶P90-3지금 關野 說에 있어서 가장 그 中心된 理論은 彌勒塔이나 王宮 坪塔은 樣式上 서로 同一한데 王宮坪塔 下에서는 日 ▶P91-1本의 飛鳥 時代와 寧業 時代의 初期와의 中間에 相當하는 文儀의 瓦當을 얻었고, 「樣式上」이 兩塔은 定林塔에 先行 할 수 없다는 것이 主가 되어 傳說은 이에 맞도록 改譯 推論된 데 지나지 않는다.
우선 박사가 말한 와당 연대에 대하여 보건대, 아스카 시대란 보통 흠명천황 13년, 일본에 불교가 수입된 때로부터 효덕천황 대화 원년, 대화의 개신이란 것이 되기 전까지, 즉 신라 진흥왕 13년으로부터 선덕여왕 14년까지를 말한다. 영락 시대라는 것은 보통 전후 양기로 나누어, 전기라는 것은 현대문주2-15▶대화 개신 후부터 원명천황 화동 3년, 평안성 천도까지, 즉 신라 선덕왕 14년으로부터 성덕왕 9년까지를 말한다[a 22]. 이를 좀 늦잡는 설에 의하여 아스카 시대를 문무왕 7년까지, 영락 전기를 성덕왕 22년까지 둔다 하더라도 중간기란 어느 때쯤인지─이를 박사가 생각하고 있는 신라 통일 초라 한다 하더라도 이 와당에 무슨 기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이 숫자 세월에 절대로 일치하는 것도 아니라, 이 문양 형식의 성립 상한과 존속 하한이 분명치 않은 이상, 이 추정은 대체적인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즉, 이 와당의 연대 위상이 틀린다는 것이 아니라, 이 와당으로써 다른 조형, 즉 이 경우에 있어서 왕궁평탑과 미륵탑을 추정하게 될 때, 이러한 추정법은 가장 주의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한다. 가령 지금 이 왕궁평탑에서의 와당과 저 탑정리탑에서의 와당 간에 유사한 점이 있고, 탑정리의 소속 군현, 즉 충주 지방은 현대문주2-16▶일찍이 신라 판도에 들었을뿐더러, 진흥의 이민[a 23], 현대문주2-17▶문무의 축성 등[a 24] 사실이 일찍부터 있었음을 보아 양식상 탑정리탑은 이 문무왕대 전후에 두어도 좋겠거니와, 왕궁평탑의 소속 지역은 바로 몇 년 전까지도 국가를 달리한 백제의 소속으로, 그나마 신라와 국경에서 멀고, 백제의 국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점인 만큼, 범주가 아직 모호한 한 조각 와당의 파편만으로서는 이 탑의 건립 왕조를 그다지 쉽게 결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사는 왕궁평탑과 미륵탑을 전혀 동일한 수준에 두고 논하고 있으나, 필자는 이미 동일한 수준에 이를 둘 수 없음을 논증하였고, 또다시 박사는 양식상 이 두 탑이 정림탑에 앞설 수 없는 것으로 논리를 전개시켰으나, 이 점에서 필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입론하였고, 이 설을 세울 적에 박사는 정림탑의 성립이 기명의 현경 5년이라는 곳에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입론한 모양이나, 이것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이상, 여기에 입각한 박사의 의견에는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난색이 있는 것이다.
쪽수▶P91-2于先 博士가 말한 瓦當 年代에 대하여 보건대 飛鳥 時代란 普通 欽明天皇 13年, 日本에 佛敎가 輸入된 때로부터 孝德天皇 大化 元年, 大化의 改新이란 것이 되기 前까지, 即 新羅 眞興王 13年으로부터 善德女王 14年까지, 寧樂 時代라는 것은 普通 前後 兩期로 나누어 前期라는 것은 원문주2-15▶大化 改新 後부터 元明天皇 和銅 3年 平安城 奠都까지 即 新羅 善德王 14年으로부터 聖德王 9年까지[21], 이를 좀 늦잡는 設에 依하여 飛鳥 時代를 文武王 7年까지, 寧樂 前期를 聖德王 22年까지 둔다 하더라도 中間期란 어느 때쯤인지─이를 博士가 생각하고 있는 新羅 統一初라 한다 하더라도 이 瓦當에 무슨 記銘이 있는 것이 아니요 또 이 數字歲年에 絶對로 診當한 것이 아니라 이 紋儀 形式의 成立 上限과 存續 下限이 分明치 않은 以上, 이 推定은 大體의 推定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即 이 瓦當의 年代 位相이 틀린다는 것이 아니라 이 瓦當으로써 다른 造型, 即 이 境遇에 있어서 王宮坪堵과 彌勒塔을 推定케 될 때 이러한 推定法은 가장 要心할 問題가 아닐까 한다. 假令 지금 이 王宮坪塔에서의 瓦當과 저 塔亭里塔에서의 瓦當間엔 類似한 點이 있고 塔亭里의 所屬 郡縣, 即 忠州 地方은 원문주2-16▶일찍이 新羅 版圖에 들었을뿐더러 眞興의 移民[22], 원문주2-17▶文武의 築城 等[23] 事實이 일찍부터 있었음을 보아 樣式上 塔亭 里塔은 이 文武王代 前後에 두어도 좋겠거니와 王宮坪塔의 所屬 地域은 바로 幾年前까지도 國家를 달리한 百濟의 所屬, 그나마 新羅와 國境에서 멀고 百濟의 國都에서 가장 가까운 距離에 있는 地點인 만큼 範疇가 아직 模棚한 一瓦當의 破片만으로서는 이 塔의 建立 王朝를 그다지 쉬웁게 決定지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博士는 王宮坪塔과 彌勒塔과를 全혀 同一 水平에 두고 論하고 있으나 筆者는 이미 同一 水平에 이를 둘 수 없음을 論證하였고 또다시 博士는 儀式 ▶P92-1上 이 兩塔이 定林塔에 앞설 수 없는 것으로 論理를 展開시켰으나 이 點에서 筆者는 그렇지 아니할 것을 立論하였고, 이 設을 세울 적에 博士는 定林塔의 成立이 記銘의 顯慶 5年이란 곳에 있음을 疑心치 아니하고 立論한 모양이나 이 亦 置信할 것이 못 되는 以上, 여기에 立脚한 博士의 意見에는 여러 가지 點으로 보아 難色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설의 일부를 보덕국 안승의 사실이 부분적으로 혼입된 것이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안승이 문무왕의 왕妹를 취한 문무왕 20년 3월로부터 안승이 경주에 소환되던 신문왕 3년 10월까지 전후 4년 8개월 동안 이 미륵사와 같은 거대한 경영이 이루어졌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이 전설의 주인공인 무강왕의 쌍릉이란 것은 대정 6년, 다니이 게이이치 일행의 발굴 조사로 아마 능묘의 양식이 백제의 왕릉이라는 저 부여 능산리의 능묘 형식과 전혀 동일할 뿐더러, 현실에서 발견된 목관 및 기타 부장물의 성질이 백제 말기의 조형에 공통성을 갖고 있어 현대문주2-18▶이 쌍릉이란 것은 백제 말기의 어느 왕릉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진술되어 있다[a 25]. 이마니시 류 박사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쌍릉이 백제 무왕의 능이기도 하지만 증거를 찾을 수 없고 보덕국 관계자의 것인지도 알 수 없으나, 물론 안승은 아닐 것이라 하였다(안승은 경주로 소환된 까닭에 그 능묘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이처럼 볼 때, 이 전설 속에는 여러 사실의 혼재와 신비화가 있다 하더라도, 무강왕을 백제 무왕으로 개찬한 삼국유사 필자의 판단(?)도 지나치게 허물되지 않을 것 같다. 백제는 무왕의 아들 의자왕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말지 않았던가?
쪽수▶P92-2뿐만 아니라 傳說의 一部를 報德國 安勝의 事實이 部分的으로 混入된 것이라 認定한다손 치더라도 安勝이 文武王의 王妹를 娶하였다는 文武王 20年 3月로부터 安勝이 京都에 被徵되던 神文王 3年 10月까지 前後 4年 8個月 間, 이 彌勒寺와 같은 巨敞한 經營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또 이 傳說의 主人公인 武康王의 雙陵이란 것은 大正 6年 谷井濟一氏 一行의 發掘 調査로 아마 陵墓의 樣式이 百濟의 王陵이라는 저 扶餘陵山里의 陵墓 形式과 全혀 同一할뿐더러 玄室에서 發見된 木棺 其他 副葬物의 性質이 百濟 末期 造型에 共通性을 갖고 있어 원문주2-18▶이 雙陵이란 것은 百濟 末期의 어느 王陵으로 看做할 수 있다는 意見이 陳述되어있다[24]. 今西龍 博士도 이 點을 念頭에 두고 이 雙陵이 百濟 武王(의 陵)이기도 하지만 徵證을 찾을 수 없고 報德國 關係者의 것인지도 알 수 없으나 勿論 安勝으론 생각되지 아니한다 하였다(安勝은 慶州로 被徵된 까닭에 그 陵墓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이리 볼제 이 傳說 속에는 여러 事實의 混在와 神秘化가 있다손 치더라도 武康王을 百濟 武王으로 改纂한 三國遺事 筆者의 英斷(?)도 過히 허물되지 아니할 것 같다. 百濟는 武王의 子 義慈王으로 말미암아 滅亡되고 마지 않았던가?
우리는 미륵탑을 양식적으로 정림탑에 선행하고, 정림탑이 영니산탑에 선행하며, 영니산탑의 상한은 선덕왕 3년에, 하한은 신문왕 2년까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였지만, 이에 앞서 미륵탑이 전설대로 무왕 대에 성립되었을 것에 어떠한 무리를 느끼지 않게 된다. 고선‧감은탑이 신문왕 초에 하한이 있고, 탑정리탑이 현대문주20▶문무왕 대에 대개의 연위가 있을 수 있다면[a 26], 왕궁평탑‧정림탑이 무난히 백제 말기라는 차위에 놓일 수 있고, 따라서 영니산탑(이것은 왕궁평탑과 정림탑 사이에 처할 수 있다 하였다)도 통일 이전 시기의 신라의 유작으로 올려지게 된다. 통일 삼국이란 문무왕 8년의 사실이다. 이상의 추정된 여러 작품의 순서와 연한 범위의 여러 사항을 표시하면 위 표와 같아진다.
쪽수▶P92-3우리는 彌勒塔을 樣式的으로 定林堵에 先行하고 定林塔이 盈尼山塔에 先行하고 盈尼山塔의 上限은 善德王 3年에, 下限 神文王 2年까지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說明하였지만 이에 先行하여 彌勒塔이 傳說대로 武王 代에 成立되었을 것에 何等 無理를 느끼지 않게 된다. 高仙‧感恩塔이 神文王 初에 下限이 있고 塔亭里塔이 원문주2-20▶文武王代에 大概의 年位가 있 ▶P93-1을 수 있다면[25] 王宮坪塔‧定林塔이 無難히 百濟 末期라는 次位에 놓일 수 있고 따라 盈尼山堵(이것은 王宮坪塔과 定林塔과의 사이에 處할 수 있다 하였다)도 統一 以前期의 新羅의 遺作으로 올려지게 된다. 統一 三國이란 文武王 8年의 事實이다. 以上 推定된 諸 作品의 序와 年限 範圍의 諸相을 表示하면 上表와 같아진다.
<<표>> 즉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왕 대에 미륵탑의 성립을 둔다 하더라도, 관야 박사가 우려한 바와 같이 그것이 반드시 분황탑에 선행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선행하더라도 관계치 않은 일이지만), 또한 조선 석탑의 양식이 삼국 말기로부터 시작되어 신라 통일 초까지, 즉 7세기의 약 1세기 동안을 두고 전형적 양식까지의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한 양식의 발생으로부터 전형적 성립까지 약 1세기의 4분의 3이 걸렸다는 것도 당시 문화 발달의 속도와 완급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거니와, 특히 전형적 양식의 성립이 7세기 후반, 즉 정치적으로도 조선이 완전히 통일된 시기와 부합하며, 그곳에 이르려는 통일적 기운이 선행 양식에 표현되어 있는 점 등에서, 무심한 돌 조각에서나마 시대의 동향이 여운 없이 읽어진다 하겠다.
쪽수▶P93-2 <<표>> 即 上表에서 보는 바와 같이 武王 代에 彌勒塔의 成立을 둔다 하더라도 關野 博士가 掛念한 바와 같이 그것이 반드시 芬皇塔에 先行하는 것을 뜻함이 아니요 (先行된다도 關係치 않은 일이지만), 또 朝鮮 石塔의 樣式이 三國 末期로부터 시작되어 新羅 統一 初까지에 即 7世紀의 約 一世紀 間을 두고 典型的 樣式까지의 成立을 보게 된 것이다. 한 樣式의 發生으로부터 典型 成立까지의 約 一世紀의 四分三이 걸렸다는 것도 當時 文化 發達의 遲速相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거니와 特히 典型的 樣式의 成立이 7世紀 後半, 即 政治的으로도 朝鮮이 完全히 統一된 時期와 該合하며, 그곳에 이르려는 統一的 機運이 先行 樣式에 表現되어있는 等, 無心한 石片에서나마 時代의 動向이 餘蘊없이 읽어진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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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朝鮮古蹟研究會 發行 昭和 11年 度古蹟調査報告 參照
  2. 造塔功德經 一節에 「爾時 世尊告觀世音菩薩言 善男子 若此現在諸天眾等及未來世一切眾生 隨所在方 未有塔處 能於其中建立之者 其狀高妙 出過三界 乃至至小如菴羅果 所有表刹 上至梵天 乃至至小猶如針等 所有輪蓋覆彼大千 乃至小猶如棗葉 於彼塔內 藏掩如來所有舍利髮牙髭爪 下至一分 或置如來所有法藏十二部經 下至於一四句偈 其人功德 如彼梵天 命終之後生於梵世 於彼壽盡生五淨居 與彼諸天等 無有異」라 하였고 또 毗婆娑論 一節에는「若入起大塔 如來轉法輪處 若人取小石為塔 其福德 等前大塔 所爲尊 故若爲如 來大梵 起大塔 或起小塔 以所爲同 故其福無量」云云이라 있다.
  3. 造塔功德經 序.
  4. 神尾弌春 著 契丹佛教文化史考 第三項.
  5. 「엔터시스」라 함은 桂身의 上下가 음으라들고 배가 부른 形式을 말한다. 朝鮮의 木造 建物은 大槪 이것이 現著히 나타나 있으나 西洋의 建物은 다시 그러치 아니하다. 希臘 初期의 建物에선 이것이 現著히 나타나 있으나, 時代가 나릴수록 이것이 적어짐으로 해서 「엔터시스」의 數量的 變化가 時代를 말하게 된다. 朝鮮의 石塔에선 確實히 이 變化相이 보이고 日本에서 木造 建物에서도 이 變化相이 確實히 보인다.
  6. 層級形 「밭임」이라 함은 日本 建築界에서 말하는 「持送」이다. 朝鮮 木手들은 무엇이라 말하는지 알 수 없고 일찍이 筆者가 〿瓦匠의 한사람에게 물었더니 「방한」이라고 한다기에 音대로 「方限」이라 하여 쓴 적이 있다(東匯日報紙 〿五千號「내자랑파내보배」中 拙稿). 이 筆者의 拙稿 一文(「百濟의 美術」)이 昭和 12年 2月 總督府發行 中等敎育朝鮮語 及 漢文〿本卷之四에 收錄된 적이 있는 關係 上, 이 述語를 그대로 使用코도 싶었으나 確實한 用語를 使用하여 可할 것이지 아직 未審키로 이곳에서는 알기 쉬운 假稱으로 使用하려 한다.
  7. 葛城末治 著 朝鮮金石攷 第 157圓에 依하면 大正 6年 春, 이 塔의 東側에서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勒(??)」이라 陽刻된 瓦片이 發見된 바 있어 이곳이 定林寺 廢址인 것이 推測된다는 意味의 句가 있으니 이로써 보면 高麗朝까지도 燃燈이 不絶하였던 百濟 古刹로 割酌이 된다. 뿐만 아니라 後에 本文에 叙述될 바와 같이 이 塔이 唐人의 建立이 아닌즉 大唐平百濟塔이라 稱함은 不當한 양으로 생각된다.
  8. 石田茂作 「土塔につ就て」 (考古學雜誌 第17號) 藤島亥治郎 博士 「慶州お中心上とせる新羅時代石塔の隷合的硏究」 (建築雜誌 昭和 9年 1月號)
  9. 원문부기주석
  10. 藤島亥治郎 博士 「朝鮮慶尙北道達城郡, 永川郡及び義城郡に於ける新羅時代建築に就いて」(建築雜誌 昭和 9年 2月號) 恭照.
  11. moulding을 日本서는「刳形」으로 飜譯한다. 여러가지로 屈曲진 층도리의 裝飾 曲線形을 말한다.
  12. 朝鮮總督府 調査資料
  13. 朝鮮美術史
    朝鮮古蹟圖譜第四解說
    大正 3年 9月, 朝鮮古蹟調查略報告
    國華 27號
  14. 考古學雜誌 大正 14年 6月號 吉田貞吉 博士 論文 中, 今西龍 博士는 이 問題를 輿地勝覽 記錄의 不完全된 것을 取信한 데서 생긴 것으로 問題치 않고 있다 (百濟史硏究29頁)
  15. 葛城末治 著 朝鮮金石攷研究 篇
  16. 葛城末治 著 朝鮮金石攷研究 篇
  17. 感恩寺는 大鍾川이 東海로 드난 於口, 臺本里 龍堂山 下에 있다. 寺址만 高臺가 되고 門前은 海水가 바로 밀어들 수 있을 만한 地平이 되어있다. 이 寺址는 東西로 길고 南北이 짧다. 따라서 金堂과 雙塔이 거의 一線으로 羅列되어 있고 金堂에는 礎砌가 남았으나 龍穴은 찾을 수 있다. 金堂址에서 東南으로 바로 大王岩이 내다보인다. 利見臺는 찾을 수 없으나 臺本里란 洞名에 依해서 寺後主山에 있었을 것 같다.
  18. 前回 拙稿에서 塼塔을 말할 적에 安東邑 內 新世洞의 七層塼塔이라든지 邑南의 五重塼塔 等에 關하여 그 寺跡을 特히 말치 아니하였지만 그後 「朝鮮の風水」 속에 실린 安東古輿地圖란 것에 依하여 보면 七層塔 所在地는 法興寺, 五層塔 所在地點은 法林寺 等으로 記錄되어있음을 보았고 輿地勝覽에도 兩寺址名이 거의 該當 地點에 있는 듯이 表現되어있다. 即 「法興寺在府東」 「法林寺在城南」 等이라 한 것이 그며, 宣祖 41年에 되었다는 安東邑 古誌(永嘉誌)에도 「新世里法興寺」의 句가 있다 하였다. 따라서 筆者는 이것을 安東法興塔, 法林塔 等으로 부를까 한다. 그後 藤島亥治郎 博士의 「朝鮮慶尙北道安東郡及び榮州郡に於りる新羅時代建築に就いて」(建築雜誌 昭和 7年 9月號 第48緝 587號)라는 論文 中에서도 同意向을 보았다. 다만 博士는 輿地勝覽의 記錄만 가지고 곧 推定해버린 모양이다.
  19. 朝鮮建築史論 3 (建築雜誌 昭和 5年 5月號)
  20. 「三國時代の石塔について」 (朝鮮と建築 第10輯 第4號)
  21. 時代 區分에 關하여는 學者에 따라 多少의 相違가 있다. 따라서 關野 博士가 말하는 年代는 어떠한 것일지 알 수 없으나 적 어도 飛鳥 時代라는 區分은 이것이 一般的인 것이라 하며, 或은 天智天皇 即位年(新羅 文武王 2年), 또는 그 6年 近江奠都까지(文武王 7年) 따라서 寧樂 前期는 近江奠都 後로부터 元正天皇 養老 7年(新羅 聖德王 22年(까지 두기로 한다고 한다(以上 飛鳥園 發行 日本美術史 資料 解說 1, 2部)
  22. 東國輿地勝覽 卷34 忠州牧建置沿革條
  23. 三國史記地理2 中 原京條
  24. 大正 6年度 古蹟調査報告 652頁
    朝鮮總督府 博物館 略案內 9頁4
    이 遺物은 지금 總督府 博物館에 陳列되어있다.
  25. 이 塔亭里塔이란 것을 筆者는 輿地勝覽 忠州佛宇條에 보이는 金生寺란 것이 아닌가 한다. 勝覽에 「金生寺在北津涯」라 하고 이에 金生에 關한 設이 있고 끝에 「生修頭陁行居是寺因以爲名」이라 있는데 圃隱集 卷2에 送僧歸 金生寺란 것에 「縹緲金生寺 潺湲月落灘 去年回使節 半日住歸鞍 花雨講經席 柳風垂釣竿 此身雖輦下 淸夢尙江干」이라 있는 것이 그 地勢가 近似한 까닭이다. 다만 金生은 景雪 2年(聖德王 10年)生이라 함으로 一見 이 金生寺는 그 以後의 것인 듯이 생각되기도 쉬우나 寺址에서 發見된 古瓦 中에는 이 以前에 屬할 樣式들이 있음으로 보아 寺觀은 일이 그 以前에 있었던 것으로 推測되며 따라 이로써 塔의 年代 等은 推定되지 아니하고 다못 寺址名을 앎에 끝일 따름이다.






현대문주


  1. 조선고적연구회 발행 소화 11년 도고적 조사 보고 참조
  2. 조탑공덕경 일절에 「爾時 世尊告觀世音菩薩言 善男子 若此現在諸天眾等及未來世一切眾生 隨所在方 未有塔處 能於其中建立之者 其狀高妙 出過三界 乃至至小如菴羅果 所有表刹 上至梵天 乃至至小猶如針等 所有輪蓋覆彼大千 乃至小猶如棗葉 於彼塔內 藏掩如來所有舍利髮牙髭爪 下至一分 或置如來所有法藏十二部經 下至於一四句偈 其人功德 如彼梵天 命終之後生於梵世 於彼壽盡生五淨居 與彼諸天等 無有異」라 하였고 또 毗婆娑論 一節에는「若入起大塔 如來轉法輪處 若人取小石為塔 其福德 等前大塔 所爲尊 故若爲如 來大梵 起大塔 或起小塔 以所爲同 故其福無量」운운이라 있다.
  3. 조탑공덕경 서.
  4. 신미일춘(神尾弌春) 저 계단불교문화사고 제 3항.
  5. "엔터시스"라 함은 기둥 몸체의 상하가 움츠러들고 배가 부른 형식을 말한다. 조선의 목조 건물은 대개 이것이 현저히 나타나 있으나, 서양의 건물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 초기의 건물에서는 이것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으나, 시대가 내려갈수록 이것이 줄어들어, "엔터시스"의 수량적 변화가 시대를 반영하게 된다. 조선의 석탑에서도 확실히 이 변화상이 보이고, 일본의 목조 건물에서도 이 변화상이 확실히 드러난다.
  6. 층급형 "밭임"이라 함은 일본 건축계에서 말하는 "모시도리(持送)"를 뜻한다. 조선 목수들은 이를 무엇이라 부르는지 알 수 없고, 일찍이 필자가 한 기와장이에게 물었더니 "방한"이라고 한다기에 소리 나는 대로 "방한(方限)"이라 하여 쓴 적이 있다(동아일보 5천 호 「내자랑파내보배」 중 졸고). 이 필자의 졸고 한 편(「百濟의 美術」)이 소화 12년 2월, 총독부에서 발행한 중등교육 조선어 및 한문 교본 권 4에 수록된 적이 있는 관계로, 이 술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싶었으나, 확실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 아직 미심하므로 이곳에서는 알기 쉬운 가칭으로 사용하려 한다.
  7. 대정 6년도 고적조사보고 652혈에 이 옥신이 삼간벽으로 되어있는 듯이 보고되어있으나 오해인 듯하다.
  8. 大正 6年度 古蹟調査報告 652頁에 이 屋身이 三間壁으로 되어있는 듯이 報告되어있으나 誤解인 듯하다.
  9. 가쓰라기 마쓰하루가 저술한 조선금석고 제157쪽에 따르면, 대정 6년 봄, 이 탑의 동쪽에서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勒(??)」이라 음각된 와편이 발견된 바 있어, 이곳이 정림사 폐지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미의 구절이 있다. 이로 보아 고려조까지도 연등이 끊이지 않았던 백제 고찰로 간주된다. 뿐만 아니라, 후에 본문에 서술될 바와 같이, 이 탑이 당나라 사람의 건립이 아닌즉, 대당평백제탑이라 칭함은 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10. 이시다 시게루 작 「土塔につ就て」 (고고학잡지 제17호) 후지시마 가이지로 박사 「慶州お中心上とせる新羅時代石塔の隷合的硏究」 (건축잡지 소화 9년 1월호)
  11. 부기해독문각주
  12. 후지시마 가이지로 박사 「朝鮮慶尙北道達城郡, 永川郡及び義城郡に於ける新羅時代建築に就いて」(건축잡지 소화 9년 2월호) 공조.
  13. moulding을 日本서는 "刳形"으로 번역한다. 여러가지로 굴곡진 층도리의 장식 곡선형을 말한다.
  14.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15. 조선미술사
    조선고적도보제사해설
    대정 3년 9월, 조선고적조사략보고
    국화 27호
  16. 고고학잡지 대정 14년 6월호 길전정길 박사 논문 중, 김서룡 박사는 이 문제를 여지승람 기록의 불완전된 것을 취신한 데서 생긴 것으로 문제치 않고 있다 (백제사연구29혈)
  17. 가쓰라기 스에하루 저 조선금석고연구 편
  18. 감은사는 대종천이 동해로 흘러드는 어귀, 대본리 용당산 아래에 위치한다. 사찰 터는 높은 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 앞은 바닷물이 바로 닿을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한 지형이다. 이 사찰 터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남북으로는 짧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금당과 쌍탑이 거의 일직선으로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금당 자리에는 초석이 남아 있으나, 사찰의 중심부인 용혈은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금당 터에서 동남쪽으로는 대왕암이 바로 보인다. 이견대는 현재 찾을 수 없으나, 대본리라는 마을 이름을 참고할 때 사찰 뒤 주산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9. 전회 졸고에서 전탑을 말할 적에 안동읍 내 신세동의 칠층 전탑이라든지 읍남의 오중 전탑 등에 관하여 그 사찰 터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후 조선의 풍수 속에 실린 안동 고여지도란 것에 의하면, 칠층탑 소재지는 법흥사, 오층탑 소재지는 법림사 등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았고, 여지승람에도 두 사지의 이름이 거의 해당 지점에 있는 듯이 표현되어 있다. 즉, "法興寺在府東" "法林寺在城南" 등으로 기록한 것이며, 선조 41년에 편찬된 안동읍 고지(영가지)에도"新世里法興寺"라는 구절이 있다 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것을 안동 법흥탑, 법림탑 등으로 부를까 한다. 그 후 등도 기지로 박사의 「朝鮮慶尙北道安東郡及び榮州郡に於りる新羅時代建築に就いて」(건축잡지 소화 7년 9월호 제48집 587호)라는 논문 중에서도 같은 방향성을 보았다. 다만 박사는 여지승람의 기록만 가지고 곧바로 추정해버린 모양이다.
  20. 조선건축사론 3 (건축잡지 소화 5년 5월호)
  21. 「三國時代の石塔について」 (조선건축 제10집 제4호)
  22. 시대 구분에 관하여는 학자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관야 박사가 말하는 연대는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스카 시대라는 구분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하며, 혹은 덴지 천황 즉위년(신라 문무왕 2년), 또는 그 6년, 오미 천도까지(문무왕 7년)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에 따라, 영락 전기는 오미 천도 이후부터 원정 천황 요로 7년(신라 성덕왕 22년)까지로 두기로 한다고 한다(이상 아스카엔 발행 일본미술사 자료 해설 1, 2부).
  23. 동국여지승람 권34 충주목건치연혁조
  24. 삼국사기지리2 중 원경조
  25. 대정 6년도 고적 조사 보고 652쪽
    조선총독부 박물관 약안내 9쪽 4
    이 유물은 지금 총독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26. 이 탑정리탑이란 것을 필자는 여지승람 충주불우조에 보이는 금생사란 것이 아닌가 한다. 승람에 "金生寺在北津涯"라 하고, 이에 금생에 관한 설이 있으며 끝에 "生修頭陁行居是寺因以爲名"라고 있는데, 포은집 권2에 송승귀 금생사란 제목 아래 "縹緲金生寺 潺湲月落灘 去年回使節 半日住歸鞍 花雨講經席 柳風垂釣竿 此身雖輦下 淸夢尙江干"라 하는 구절이 있어 그 지세가 유사한 까닭이다. 다만 금생은 경설 2년(성덕왕 10년)에 태어났다 함으로, 언뜻 이 금생사는 그 이후의 것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사지에서 발견된 고와 중에는 이 이전에 속할 양식들이 있음으로 보아, 사찰은 이미 그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이로써 탑의 연대 등은 추정되지 않고 다만 사지명을 알게 되는 데에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