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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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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2일 (금) 13:5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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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명(한자명)
출처 :
 
한글명 한자명 영문명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몰년 출신지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생애


일본으로 밀항하다

1926년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농고를 나온 그는 한국전쟁 초기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상과대학(현 오사카시립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한국사 연구로 방향을 바꿨다.[1] 강재언은 이와 관련하여 도일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2] 행간을 읽어보면 도일 전 한국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그에게 제주 4.3사건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분단 조국의 한 측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3]



좌익 활동

강재언은 1951년 9월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재일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에서 오사카조선인문화협회(大阪朝鮮人文化協会)에도 소속하면서 문화 활동도 병행했다.[4] 오사카조선인문화협회(당시 회장 김종명<金鐘鳴>)는 해방 직후 탄생하여 재일동포사회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좌익단체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조련)의 산하단체로 재일동포 문화계 인사들의 구심처가 된 곳이다. [5] 강재언이 열성적인 좌익 활동가이었던 것은 모교 오사카상과대학에서 조수 임명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민전 활동에 투신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6] 1953년 4월 강재언은 대학 강단을 뒤로 한 채 도쿄로 이주하여 민전 산하 조선통신사(朝鮮通信社)에서 일하게 되었다. [7]


다케나카와 결혼

일본 정착 후 강재언이 부인 다케나카 에미코(竹中恵美子)와 결혼한 것은 1955년이며 강재언이 좌익진영 활동가로 도쿄에서 재일동포 좌 익단체 민전(民戰,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在日朝鮮統一民主戦線)의 약 칭) 기관지 편집 일에 종사했을 때이다. [8] 지금보다 훨씬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이 거셌던 시대에 다케나카는 강재언을 택함으로 인해 가족 과의 인연을 끊었고 강재언 또한 “식민지시대를 잊었냐”는 가족들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9] 경제학자로 일본 여성노동문제 연구자의 시조가 된 다케나카는 오사카상과대학(현 오사카시립대)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재언과의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10]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민족단체에서 일하던 강재언이 다케나카의 지원 없이 연구활동을 이어나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다케나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는 그의 여러 저작의 사사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1]


제목4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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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