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군 문제 관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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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 사군철폐의 내적 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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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인영
 
|저자=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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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일자= 1940년 8월 10일
 
|게재연월= 194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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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 {{TagSpage|2-1}}李朝 初期에 있어서의 六鎭(慶興·慶源·穩城·鍾城·會寧·富寧) 開拓과 四郡(茂昌·閭延·虞芮·慈城) 設置가 朝鮮 北方 發展史上 重要한 位置를 차지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現今 平安北道 慈城·厚昌 兩郡에 該當하는 四郡 地方은 設置된 지 얼마 안 되어 端宗 三年 乙亥({{TagRef|1}}世祖元年,<ref>睿宗實錄 卷六, 元年 七月 戊子條에 「傳于春秋館曰 今繼鑑廳 以丙子稱世祖元年 春秋館以乙亥稱元年何如 同知事梁誠之等啓曰世祖卽位於乙亥年 若此年不稱元 恐涉魯山 謹考世記大全 亦以乙亥稱元年 上曰然」이라 하고, 同癸巳 條申叔舟말에 「魯山禪而 世祖卽位 當以即位之年爲紀元」이라 하였는데, 世祖實錄이 乙亥年을 元年으로 한 데 對하여, 國朝寶鑑 其他는 翌年丙子로써 世祖 元年을 삼었다. 本稿에는 世祖實錄에 依하여 乙亥를 元年으로 하였다.</ref> 明景泰 六年, 1453A.D.) 먼저 虞芮·閭延·茂昌 三郡이 撤廢되고 이어서 世祖 五年에는 慈城郡까지도 撤廢되여 그 住民들은 全部 江界와 龜城으로 移住하고 말었는데 그後 이地方 「廢四郡」이라고 불러온 것은 이미 著名한 事實이다. 이 廢四郡에 關한 硏究로서는 일즉 津田左右吉 博士가 {{TagRef|2}}「鮮初に於ける鴨綠江上流地方の領土」<ref>津田左右吉 博士 著, 朝鮮歷史地理 第二卷, 이五五―三六〇頁.</ref>라는 題目 下에 若干 論述한 바 있었고 또 故 瀨野馬熊 氏 {{TagRef|3}}「朝鮮廢四郡考」<ref>東洋學報 第十三卷 第一號‧第三號. 潮野馬熊 遺稿 二五三―三六〇頁.</ref>라는 論文이 있는바 特히 後者는 前者가 利用할 機會를 얻지 못한 李朝實錄 邑誌 等을 參照해 가지고 먼저 四郡의 郡治와 疆域에 關한 詳細한 地理的 考證하고 다음에 四郡設置로부터 撤廢에 이르는 그間의 事情을 論述한 力作이다. 그러나 廢四郡에 關한 諸問題는 이것을 全面的으로 觀察할 때 今日까지의 硏究는 極少한 그 一部分의 究明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津田 博士나 瀨野 氏의 硏究에 있어서도 {{TagPage|3-1}}나는 이를 다시 한번 檢討할 必要를 늣기고 있는 이만치 數年 前 이 問題에 關한 新史料 元永胄日記와 李汝節手本(震檀學會藏硏經齋全集所收)이 出現하자 {{TagRef|4}}從來의 四郡地名 考證에 對한 批判과 아울러 若干의 卑見을 發表한 바 있었다.<ref>拙稿 「鮮初廢四郡地理考」(靑丘學叢 第二十九號·第三十號).</ref> 本 小稿에있어서는 世祖朝에 四郡을 撤廢한 原因에 就하여 果然 從來의 見解가 그 歷史的 事件의 眞相을 把撮한 것인가 아닌가를 再吟味하는 同時에 또한 나의 見解를 陳述코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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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번= {{TagSpage|3-2}}李朝가 太祖의 建國 以來 定宗·太宗을 거처 第四代 世宗 末年에 이르는 約 六十年 동안에 前朝 高麗의 疆域 以外인 咸鏡道와 境界가 確實치 않든 鴨綠江 上流地方을 開拓하여 鴨綠江과 豆滿江의 自然的 境界에까지 國土를 擴張하고 거기에 六鎭과 四郡을 두게 된 것은 무릇 네 가지 觀點에서 이를 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北方 發展이라는 欲求는 적어도 高麗 建國 以來 培養되여 온 朝鮮社會의 理想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大元帝國이 衰亡하고 明國의 新勢力이 아직 遼東方面에 確立치 못하였다는 時代的 背景을 가지고 進行된 것이며, 셋째로는 高麗 恭愍王朝에 東北面 兵馬使 柳仁雨로 하여금 元나라 雙城摠管府(咸鏡南道 永興)를 奪取케 함으로써 始作된 國土擴張 策의 歸結인 것이며, 넷째로는 太祖가 東北面(咸鏡道) 出身인 것과 世宗이 積極的 進取的 政策 敢行한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면 世祖朝에 이르러 咸鏡道 六鎭 方面에있어서는 別다른 變化가 없었음에도 不拘하고 鴨綠江 上流地方의 四郡을 撤廢하였음은 어떠한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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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번= {{TagSpage|4-1}}四郡이라는 名稱은 이것을 官制上으로 볼 때 반다시 正當한 것은 아니다. 慈城과 虞芮는 設置로부터 撤廢까지 終始 郡으로서 一貫하였지만은 閭延은 世宗 十七年 郡으로부터 都護府가되고 茂昌은 그 設置로부터 二年을 經過한 世宗 二十四年에 처음으로 縣에서 郡으로 陞格하였다. 그러므로 撤廢 當時로 말하면 一府三郡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便宜上 이러한 時間的 官制上 觀念을 버리고 從來의 常識的 官制上 名稱에 좃차 어떤 것이나 다 郡 或은 邑이라고 하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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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 이조 초기에 있어서의 육진(경흥·경원·온성·종성·회령·부령) 개척과 사군(무창·여연·우예·자성) 설치가 조선 북방 발전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오늘날 평안북도 자성·후창 양군에 해당하는 사군 지방은 설치된 지 얼마 안 되어 {{TagPerson|[[단종]]}} 3년 을해({{TagRefT|1}}{{TagPerson|[[세조]]}} 원년,<ref group="a">{{TagBook|[[예종실록]]}} 권6, 원년 7월 무자조에 “傳于春秋館曰 今繼鑑廳 以丙子稱世祖元年 春秋館以乙亥稱元年何如 同知事梁誠之等啓曰世祖卽位於乙亥年 若此年不稱元 恐涉魯山 謹考世記大全 亦以乙亥稱元年 上曰然”이라 하고, 같은 해 계사조 {{TagPerson|[[신숙주]]}} 말에 “魯山禪而 世祖卽位 當以即位之年爲紀元”이라 하였는데, {{TagBook|[[세조실록]]}}가 을해년을 원년으로 한 데 대하여, {{TagBook|[[국조보감]]}} 기타는 다음 해 병자로써 {{TagPerson|[[세조]]}} 원년을 삼었다. 본고에는 {{TagBook|[[세조실록]]}}에 의하여 을해를 원년으로 하였다.</ref> 명 경태 6년, 1453A.D.) 먼저 우예·여연·무창 3군이 철폐되고 이어서 {{TagPerson|[[세조]]}} 5년에는 자성군까지도 철폐되어 그 주민들은 전부 강계와 구성으로 이주하고 말았는데 그 후 이 지방을 ‘폐사군’이라고 불러온 것은 이미 저명한 사실이다. 이 폐사군에 관한 연구로서는 일직 {{TagPerson|[[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박사가 {{TagRefT|2}}「{{TagArticle|[[鮮初に於ける鴨綠江上流地方の領土]]}}」<ref group="a">{{TagPerson|[[진전좌우길]]}} 박사 지음, {{TagBook|[[조선역사지리]]}} 제2권, 255―360쪽.</ref>라는 제목 하에 약간 논술한 바 있었고 또 고 {{TagPerson|[[뢰야마웅]]}}(瀨野馬熊) 씨 {{TagRefT|3}}「{{TagArticle|[[조선폐사군고]]}}」<ref group="a">{{TagJournal|[[동양학보]]}} {{TagVolume|[[동양학보 13-1|제13권 제1호]]}}‧{{TagVolume|[[동양학보 13-3|제3호]]}}. {{TagPerson|[[뢰야마웅]]}} 유고 253―360쪽.</ref>라는 논문이 있는바 특히 후자는 전자가 이용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조실록 읍지 등을 참조해 가지고 먼저 사군의 군치와 강역에 관한 상세한 지리적 고증하고 다음에 사군 설치로부터 철폐에 이르는 그간의 사정을 논술한 역작이다. 그러나 폐사군에 관한 문제는 이것을 전면적으로 관찰할 때 오늘까지의 연구는 극소한 그 일부분의 구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TagPerson|[[진전좌우길|진전]]}} 박사나 {{TagPerson|[[뢰야마웅|뢰야]]}} 씨의 연구에 있어서도 나는 이를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이만치 수년 전 이 문제에 관한 신사료 {{TagPerson|[[원영주]]}}(元永胄) 일기와 {{TagPerson|[[이여절]]}}(李汝節) 수본({{TagInstitution|[[진단학회]]}} 소장 {{TagBook|[[연경재전집]]}} 수록)이 출현하자 {{TagRefT|4}}종래의 사군 지명 고증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약간의 비견을 발표한 바 있었다.<ref group="a">졸고 「{{TagArticle|[[선초폐사군지리고]]}}」({{TagJournal|[[청구학총]]}} {{TagVolume|[[청구학총 29-30|제29호·제30호]]}}).</ref> 본 소고에 있어서는 {{TagPerson|[[세조]]}}조에 사군을 철폐한 원인에 대하여 과연 종래의 견해가 그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파촬(把撮)한 것인가 아닌가를 재음미하는 동시에 또한 나의 견해를 진술코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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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번= 이조가 {{TagPerson|[[이성계|태조]]}}의 건국 이래  {{TagPerson|[[정종]]}}·{{TagPerson|[[태종]]}}을 거처 제4대 {{TagPerson|[[세종]]}} 말년에 이르는 약 60년 동안에 전조 고려의 강역 이외인 함경도와 경계가 확실치 않던 압록강 상류지방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의 자연적 경계에까지 국토를 확장하고 거기에 육진과 사군을 두게 된 것은 무릇 네 가지 관점에서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북방 발전이라는 욕구는 적어도 고려 건국 이래 배양되어 온 조선사회의 이상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대원제국이 쇠망하고 명국의 새 세력이 아직 요동 방면에 확립치 못하였다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진행된 것이며, 셋째로는 고려 {{TagPerson|[[공민왕]]}}조에 동북면 병마사 {{TagPerson|[[유인우]]}}로 하여금 원나라 쌍성총관부(함경남도 영흥)를 탈취케 함으로써 시작된 국토확장책의 귀결인 것이며, 넷째로는 {{TagPerson|[[이성계|태조]]}}가 동북면(함경도) 출신인 것과 {{TagPerson|[[세종]]}}이 적극적 진취적 정책을 감행한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면 {{TagPerson|[[세조]]}}조에 이르러 함경도 육진 방면에 있어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압록강 상류 지방의 사군을 철폐하였음은 어떠한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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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번= 사군이라는 명칭은 이것을 관제상으로 볼 때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자성과 우예는 설치로부터 철폐까지 종시 군으로서 일관하였지만 여연은 {{TagPerson|[[세종]]}} 17년 군으로부터 도호부가 되고 무창은 그 설치로부터 2년을 경과한 {{TagPerson|[[세종]]}} 24년에 처음으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므로 철폐 당시로 말하면 일부삼군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이러한 시간적 관제상 관념을 버리고 종래의 상식적 관제상 명칭에 좇아 어떤 것이나 다 군 혹은 읍이라고 하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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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번= {{TagSpage|4-2}}四郡撤廢의 先驅는 端宗 三年 四月 慈城郡을 除外한 閭延·茂昌·虞芮 三郡의 撤廢로서 이는 世祖가 即{{TagPage|5-1}}位하기 三個月 前의 일이었다. 그러나 端宗 元年 世祖(當時의 首陽大君)는 安平大君 以下 領議政 皇甫仁 左議政 金宗瑞 等 反對黨을 一掃하고 李澄玉의 叛亂을 平定한 後 中外兵馬都統使가되여 內外의 實權은 벌서 世祖 一派의 手中에 있었든 때로서 虞芮 以北 三郡 撤廢論은 勿論 世祖 一派의 意圖에서 나왔든 것이다. 端宗實錄 卷十四, 三年 四月 戊子(十四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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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번= {{TagSpage|5-2}}<blockquote no="02">平安道都體察使朴從愚啓 臣巡審江邊諸邑諸口子 虞·閭延·茂昌則本邑軍士甚少 故都節制使以南道軍士臨時抄定往戍 有弊無益 當竝所屬諸堡革罷 其軍資義倉米穀分給慈城 江界之民 至秋各於其邑收納 江界乃後門巨鎭 且陳荒田地千餘結 古龜州乃賊路要衝 城基東西北三面據險 城內多水泉 又有可耕之地數千餘結 若復置守令 因古基築城設關 則可與義州·江界鼎足而峙, 相爲掎角控制賊路, 當以虞芮之民徙處江界 閭·茂昌之民……至是 都統府·議政府堂上·六曹判書以上同議啓 平安道江邊諸邑諸口子因革 竝依都體察使所啓施行 龜州四面疆域 令觀察使審定 令吏曹擇慈祥勤儉人爲守令 其新徙之民 限五年 蠲免徭役 其所貸義倉之穀 三年後 收納龜州虞芮之民徙居江界者 亦依此施行 且三邑之民 不可置之度外 宜令慈城郡時遣兵探候 江界節制使 亦一年兩度巡察 從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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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번= {{TagSpage|5-3}}라 하였다. 이에 依하면 平安道 體察使 朴從愚가 鴨綠江 沿岸의 諸邑·諸口子(萬戶를 둔 小城堡)를 巡審한 結果 虞芮·閭延·茂昌 三邑은 各各 그 邑軍士의 數가 매우 저거서 清川江 以南의 (平安)南道軍士를 臨時로 抄出하여 三邑을 직하게 한 까닭으로 有弊無益하다고 論하였음으로 이를 다시 都摠府·議政府의 堂上官 及 六曹判書들로 하여금 審議케 하여 드디어 朴從愚의 意見과 같이 三邑을 撤廢하고 虞芮 住民을 江{{TagPage|6-1}}界로 閭延·茂昌 住民을 古龜州로 移住시키기로 決定하였든 것이다. 三邑撤廢에 對한 善後策에 關하여는 後日 다시 言及코자 하거니와 如何間 三邑撤廢는 平安道 都體察使 朴從愚의 啟에 依한 것이며 그 主要한 理由가 本邑軍士의 數가 매우 저거서 南道軍士가 往戍함에는 弊害가 많을 뿐이라는 點에 있었든 것만은 事實이다. 그런데 平安道 都體察使 朴從愚의 派遣은 前前年 端宗 元年 十一月 檢討官 梁誠之의 啟에 依한 것으로서 그 派遣의 確實한 時日은 알 수 없으나 端宗實錄 卷九, 元年 十一月 甲寅條에는 다음과 같은 記事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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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번= {{TagSpage|6-2}}<blockquote no="03">檢討官梁誠之 於經筵啓曰 今平安長城之役雖罷 閭延·茂昌·虞芮等郡隔在江邊 南道軍士越大嶺而戍守 人馬俱疲盡賣田産, 因而逃散 流入遼潘者甚多 雖棄三邑 大江限帶 我之封疆如舊 乞撤三邑之戍 以慈城爲界 以休南民 以固邦本 命議于政府 啓曰 臣等亦知有此弊 然不可以一儒之言撤邊備 請遣大臣看審 然後定之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往審便否 從愚亦以誠之之言爲然 卽罷三邑 時邊人謂 復三年不罷 則兵民將自潰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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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번= {{TagSpage|6-3}}檢討官 梁誠之가 閭延·茂昌·虞芮 等 三郡撤廢을 主張한 理由은 大略 두 가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閭延 等 三郡은 鴨綠江邊에 따루 떠러저 있음으로 世宗朝 以來 鴨綠江 沿岸 處處에 女眞人의 侵入을 맛기 爲하여 莫大한 經費와 人夫를 써가며 役事 中이든 長城(或 行城이라고도 함) 築造는 이를 이미 停止하였다고 하드래도 三邑戌守에는 南道軍士가 狄踰嶺·麻田嶺같은 大嶺을 넘어서 가야만 되는 故로 人馬 共히 疲勞하고 그 까닭에 平安道 人民 中에는 田產을 팔고 滿洲 方面으로 流入하는 者가 많다는 것이 한 가{{TagPage|7}}지 理由이며, 둘째로 三邑을 撤廢하드래도 鴨綠江이 가루질려 있음으로 國土는 조금도 滅縮되는 일이 없이 如舊하다는 것이 또 한 가지 理由이었다. 그러므로 三邑의 戊守를 撤廢함으로써 人民의 勞苦를 덜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梁誠之의 主唱에 對하여 議政府도 亦 同感이었으나 處理를 慎重히 하기爲하여 雲城府院君 朴從愚를 平安道 都體察使에 任命하고 다시 한번 三邑의 事情을 審察케 하였든 것이다.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 云云 以下는 端宗實錄 編纂者의 말이지만 當時 邊人들이 復三年에 撤罷치 않으면 兵民이 自潰하리라 하였다는 것을보면 四郡地方의 維持가 얼마나 困難하였든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四郡地方 防戍의 辛苦는 端宗朝에 처음 생긴 일은 아니었다. 太宗朝의 閭延郡 設置 以來 世宗朝의 四郡整備에있어서 가지가지 困難을 맛보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것으로 四郡地方의 地形이 깊이 滿洲 方面에 斗入하여 있을 뿐 아니라 山岳이 重疊하여 交通이 不便하고 土地가 肥沃치 못한 이만치 軍士의 派遣과 軍糧運搬에 있어서 적지 않은 苦心를 要하였든 것이다. 그러므로 世宗朝에 있어서도 벌서부터 廷中에는 이 方面 防備의 改革 主張한 사람도 없지 않었으나 進取的인 世宗은 斷然 그러한 意見을 물러 치고 祖宗의 彊域은 決코 退縮치 못하리라는 自覺 下에 오히려 積極的 施設을 敢行하여 왔었다. 世宗의 이러한 積極的 政策에 對하여서는 瀨野 氏도 前揭 論文 中에서 論述한 바 있음으로 여기서는 거듭 呶呶 發明치 않기로하나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注意를 要하는 點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世宗朝에 있어서는 四郡 中의 어떤 한 郡일지라도 그 全郡을 들어서 撤廢을 主張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니 當時{{TagPage|8-1}}防戍의 困難을 들어서 改廢을 論한 것은 다만 鴨綠江 沿邊 一二口子(城堡)에 關한 것뿐이었다. 아직껏 世宗朝에 있어서는 三郡 乃至 一郡 全體를 撤廢하자는 議論은 없었든 것이다. 이 點은 特히 注目할 바이다. 그러면 一郡 乃至 數郡 存廢 問題가 發生한 最初는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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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6번= {{TagSpage|8-2}}虞芮 以北 三郡 存廢 問題가 議論케 된 最初는 文宗이 即位한 해 八月이었다. 그 顚末에 關한 記錄은 文宗實錄 卷三, 即位 八月 丁酉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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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7번= {{TagSpage|8-3}}<blockquote no="04">召河·南智·金宗瑞·鄭甲孫等, 議革平安道沿邊不緊各口子萬戶及軍兵 僉曰 平安道沿邊 不緊各口子頗多 自虞芮至茂昌各官各口子 徙入江邊 土地褊少塉薄 民不聊生 南道各官防戍軍士 亦皆因此疲弊 固無利益 其弊甚鉅 宜皆革罷 以慈城爲界 今此深入設關防 實非萬世長策 自朝至日昃 堅執其議 上頗然之 令左承旨鄭而漢 與大臣更議 仍出兩界沿邊地圖以示之 而漢啓曰 臣爲都體察使皇甫仁從事官 巡行兩界 已十年矣 沿邊郡邑關防排置之事 仁一依世宗布置之策 爲之耳 我世宗以高世之見創物之智 明見萬里 備邊之事無不洞照 兩界沿邊要害之處 大城小堡星羅碁市 前後相望 邊警息矣 聖謨洋洋 豈至今日遽忍革之哉 雖不得闢國 其可蹙祖宗封疆乎 雖寸土 不可蹙也 諸大臣曰 虞芮以上 今雖革罷 限以鴨綠大江 彼人不得入居于此 固非蹙地之例也 上曰 世宗已曾布置之事 何不議其固守之策 而反獻革罷之議乎 事遂寢</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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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8번= {{TagSpage|8-4}}이때 重臣級에 있든 河演·南智·金宗瑞·鄭甲孫 等의 虞芮 以北 三郡을 撤廢하자는 理由를 볼진대 이 亦是 地理的으로는 三郡이 敵地에 斗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土地가 椿薄하여 百姓이 살기 어려운 것, 軍事{{TagPage|9}}的으로는 (平安)南道 各邑의 軍士가 防戍往還에있어서 弊害가 많은것, 또 虞芮 以北 三郡을 撤廢하더라도 鴨綠江을 끼고 있음으로 女眞人이 거기에 入居치 못할 것으로 그 地方이 우러 國土임에는 變함이 없다는 等이었다. 이러한 理由를 들어서 그들은 終日 三郡의 廢止을 主張하였음으로 文宗도 처음 는 그럴듯이 생각하고 都承旨 鄭而漢 等에게 命하여 西北兩界沿邊地圖까지 내주어 다시 議論케 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일즉 都體察使 皇甫仁의 從事官으로써 北方 開拓에 從事한 일이 있는 鄭而漢은 北境의 邊備가 오로지 世宗大王의 聖謨에서 나온 것을 力說하여 비록 國土를 널리지는 못할지언정 엇지 祖宗의 封疆을 주릴 수야 있겠는가 하는 世宗의 積極的 方針 그것을 그대로 다시 主唱함에 이르러 文宗도 일측 世宗大王이 布置한 일인데 엇지 그 固守策 議論치 않고 도로혀 廢止策을 主張하는가 하여 드디어 三郡撤廢의 意見을 물리치고 말었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우리의 注意를 이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죽 世宗朝에 있어서 咸鏡道 六鎭 開拓에 가장 큰 功勞를 남긴 金宗瑞 그이가 이때 三郡 撤廢를 主唱한 中의 한 사람인 點이다. 世宗 十五年(明宣德八年) 吾音會(今 會寧)의 斡朶里族 建州左衛 酋長 童猛哥帖木兒과 그 長子 權豆(管豆)는 當時 開原 方面으로부터 南下한 嫌眞 兀狄哈族의 酋長 楊木塔兀에게 被殺된 事件은 東北面(咸鏡道) 開拓에 있어서 一大 轉換期가 되였든 것으로서 이 機會를 利用하여 朝鮮서는 女眞族의 驅逐과 北境 擴張에 積極的 政策를 取하게 되였거니와 이때 世宗이 咸吉道 觀察使로써 重用한 이는 實로 金宗瑞 그이었다. 爾來 金宗瑞가 世宗의 積極的 政策를 받들어 六鎭 開拓에 盡力하{{TagPage|10}}였음은 다같이 아는 事實로 世宗도 {{TagRef|5}}「雖有寡人 若無宗瑞 不足以辦此事 雖有宗瑞 若無寡人 不足以主此事」<ref>海東野言 卷一, 世宗紀. 國朝名臣錄 卷十三.</ref>라고까지 하였다고 傳한다. 六鎭 開拓과 三郡 橄廢―이는 서로 矛盾되는 積極 消極의 對立이다. 如何한 緣由로 世宗을 받들어 咸鏡道 方面에있어서는 積極策을 取하여 온 金宗瑞가 이때 平安道 方面에 있어서는 消極策를 主張하였는가. {{TagRef|6}}「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보담 앞서 世宗 三十二年 正月 平安道 兵馬 都節制使로써 鴨綠江 沿岸行城(長城)築 造役의 停止를 請하였고<ref>世宗實錄 卷一百十, 三十二年 正月 壬寅.</ref> {{TagRef|7}}同年(文宗 即位 後) 七月에는 虞芮·泰日·滿浦 等 三萬戶의 撤廢를 主唱한 바도 있었으니<ref>文宗實錄 卷二, 卽位 七月 戊午.</ref> 이를 如何히 解釋할 것인가. 瀨野 氏는 四郡 維持의 困難과 이에 對한 世宗·文宗의 苦心을 指摘한 後에 {{TagRef|8}}「さて四郡廢棄說が世祖の時に至つてかく急に實行さるしに至つたのは, どういふ譯であるかと云ふに, 畢竟, 此の時には廷臣等の説が既に悉く廢棄に一致して居たのと, 世祖は北邊經營に開して世宗のやうな進取的意見を抱持して居なかったのと, 王の果斷な性質とに因るであらうが, 又一方から見ると世祖の即位が大體辛辣な手段を用ひて端宗から王位を無理に捥ぎ取ったのであるから, 廷臣中には成三問等六臣のやうな<sup>註略</sup> 又宗室には錦城大君瑜の如き<sup>註略</sup>非常手段を用ひて端宗の位を復せんと企つる人々もあり, 鮮廷の内外にはそんな邊疆問題よりも當面の内治を先にせねばならぬといふ立場にあつたからであるやうに思はれる.」<ref>東洋學報 第十三卷, 五二二―五二三頁.</ref> 云云이라 하여 世祖朝에 이르러 갑자기 四郡廢棄를 實行케 된 理由를 (1) 廷臣의 意見 一致,  (2) 世祖가 北邊經營에 關하여 進取的 意見을 안 가졌든 것, (3) 世祖 即位의 果斷性, (4) 世祖 即位의 事情이 纂奪인 만치 邊境 問題보담도 內治에 置重하는 政{{TagPage|11-1}}策을 取하게 된 것 等 멧가지를 들었다. 毋論 世祖가 北邊經營에 進取的이 아니었다는 데 對하여는 나는 딴 見解를 가지고 있지만 大體로 常識的인 點에 있어서 이러한 見解도 妥當치 않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見解만으로서 充分할 것인가. 四郡撤廢에는 앞서 指摘해 둔 金宗瑞 그이에 對한 疑問의 解釋과 아울러 좀 더 根本的인 理由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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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9번= {{TagSpage|11-2}}如何튼 以上과 같은 從來의 見解은 마단 四郡撤廢의 內的 原因을 指摘하였음에 不過한 것으로서 그것만으로서는 四郡撤廢의 事情 充分히 理解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러한 內的 素因 以外에 外的 導因이 存在하여 外的 導因은 內的인 그것보담도 오히려 重且大하게 생각되는 까닭이다. {{TagRef|9}}우리 朝鮮과 女眞人과의 關係는 經濟的 交涉이 圓滿히 進行하는 限에 있어서 거기에는 別다른 軍事的 政治的 事件은 생기지 않는 것이 普通이다.<ref>拙稿 「鮮初女真貿易考」(震檀學報 第八卷) 參照.</ref> 그러면 그 外的 導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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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번= 사군철폐의 선구는 {{TagPerson|[[단종]]}} 3년 4월 자성군을 제외한 여연·무창·우예 삼군의 철폐로서 이는 {{TagPerson|[[세조]]}}가 즉위하기 3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TagPerson|[[단종]]}} 원년 {{TagPerson|[[세조]]}}(당시의 수양대군)는 {{TagPerson|[[안평대군]]}} 이하 영의정 {{TagPerson|[[황보인]]}}, 좌의정 {{TagPerson|[[김종서]]}} 등 반대당을 일소하고 {{TagPerson|[[이징옥]]}}의 반란을 평정한 후 중외 병마도통사가 되어 내외의 실권은 벌서 {{TagPerson|[[세조]]}} 일파의 수중에 있었던 때로서 우예 이북 삼군철폐론은 물론 {{TagPerson|[[세조]]}} 일파의 의도에서 나왔던 것이다. {{TagBook|[[단종실록]]}} 권14, 3년 4월 무자(14일)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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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 <blockquote no="02">平安道都體察使朴從愚啓 臣巡審江邊諸邑諸口子 虞·閭延·茂昌則本邑軍士甚少 故都節制使以南道軍士臨時抄定往戍 有弊無益 當竝所屬諸堡革罷 其軍資義倉米穀分給慈城 江界之民 至秋各於其邑收納 江界乃後門巨鎭 且陳荒田地千餘結 古龜州乃賊路要衝 城基東西北三面據險 城內多水泉 又有可耕之地數千餘結 若復置守令 因古基築城設關 則可與義州·江界鼎足而峙, 相爲掎角控制賊路, 當以虞芮之民徙處江界 閭·茂昌之民……至是 都統府·議政府堂上·六曹判書以上同議啓 平安道江邊諸邑諸口子因革 竝依都體察使所啓施行 龜州四面疆域 令觀察使審定 令吏曹擇慈祥勤儉人爲守令 其新徙之民 限五年 蠲免徭役 其所貸義倉之穀 三年後 收納龜州虞芮之民徙居江界者 亦依此施行 且三邑之民 不可置之度外 宜令慈城郡時遣兵探候 江界節制使 亦一年兩度巡察 從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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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번= 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평안도 체찰사 {{TagPerson|[[박종우]]}}가 압록강 연안의 모든 읍·구자(만호를 둔 작은 성과 요새)를 돌아다니며 살핀 결과 우예·여연·무창 3읍은 각각 그 읍 군사의 수가 매우 적어서 청천강 이남의 (평안)남도 군사를 임시로 초출하여 삼읍을 지키게 한 까닭으로 유폐무익하다고 논하였으므로 이를 다시 도총부·의정부의 당상관 내지 육조판서들로 하여금 심의케 하여 드디어 {{TagPerson|[[박종우]]}}의 의견과 같이 3읍을 철폐하고 우예 주민을 강계로 여연·무창 주민을 옛 구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삼읍철폐에 대한 선후책에 관하여는 후일 다시 언급코자 하거니와 여하간 삼읍철폐는 평안도 도체찰사 {{TagPerson|[[박종우]]}}의 계에 의한 것이며 그 주요한 이유가 본읍 군사의 수가 매우 적어서 남도 군사가 왕래하며 지키기에는 폐해가 많을 뿐이라는 점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평안도 도체찰사 {{TagPerson|[[박종우]]}}의 파견은 전전년 {{TagPerson|[[단종]]}} 원년 11월 검토관 {{TagPerson|[[양성지]]}}(梁誠之)의 계에 의한 것으로서 그 파견의 확실한 시일은 알 수 없으나 {{TagBook|[[단종실록]]}} 권9, 원년 11월 갑인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목차2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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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번= <blockquote no="03">檢討官梁誠之 於經筵啓曰 今平安長城之役雖罷 閭延·茂昌·虞芮等郡隔在江邊 南道軍士越大嶺而戍守 人馬俱疲盡賣田産, 因而逃散 流入遼潘者甚多 雖棄三邑 大江限帶 我之封疆如舊 乞撤三邑之戍 以慈城爲界 以休南民 以固邦本 命議于政府 啓曰 臣等亦知有此弊 然不可以一儒之言撤邊備 請遣大臣看審 然後定之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往審便否 從愚亦以誠之之言爲然 卽罷三邑 時邊人謂 復三年不罷 則兵民將自潰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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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번= 검토관 {{TagPerson|[[양성지]]}}가 여연·무창·우예 등 삼군철폐를 주장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여연 등 삼군은 압록강변에 따로 떨어져 있으므로 {{TagPerson|[[세종]]}}조 이래 압록강 연안 곳곳에 여진인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막대한 경비와 인부를 써가며 역사 중이던 장성(혹 행성이라고도 함) 축조는 이를 이미 정지하였다고 하더라도 삼읍 수수(戍守)는 남도 군사가 적유령·마전령 같은 큰 고개를 넘어서 가야만 되는 고로 사람과 말이 공히 피로하고 그 까닭에 평안도 인민 중에는 전산(田產)을 팔고 만주 방면으로 유입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며, 둘째로 삼읍을 철폐하더래도 압록강이 가로질러 있으므로 국토는 조금도 멸축되는 일이 없이 옛과 같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러므로 삼읍의 수수(戍守)를 철폐함으로써 인민의 로고를 덜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TagPerson|[[양성지]]}}의 주창에 대하여 의정부도 역시 동감이었으나 처리를 신중히 하기 위하여 운성부원군 {{TagPerson|[[박종우]]}}를 평안도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다시 한번 삼읍의 사정을 심찰케 하였던 것이다. <cite no="01">“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cite> 운운 이하는 {{TagBook|[[단종실록]]}} 편찬자의 말이지만 당시 변인(邊人)들이 복3년에 철파치 않으면 병사와 인민들이 스스로 무너지리라 하였다는 것을 보면 사군 지방의 유지가 얼마나 곤란하였든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군지방 국경 수비의 어려움은 {{TagPerson|[[단종]]}}조에 처음 생긴 일은 아니었다. {{TagPerson|[[태종]]}}조의 여연군 설치 이래 {{TagPerson|[[세종]]}}조의 사군정비에 있어서 가지가지 곤란을 맛보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것으로 사군지방의 지형이 깊이 만주 방면에 두입(斗入)하여 있을 뿐 아니라 산악이 중첩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토지가 비옥치 못한 이만치 군사의 파견과 군량 운반에 있어서 적지 않은 고심을 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TagPerson|[[세종]]}}조에 있어서도 벌써부터 정중에는 이 방면 방비의 개혁을 주장한 사람도 없지 않었으나 진취적인 {{TagPerson|[[세종]]}}은 단연 그러한 의견을 물리치고 조종의 강역은 결코 퇴축(退縮)치 못하리라는 자각 하에 오히려 적극적 시설을 감행하여 왔었다. {{TagPerson|[[세종]]}}의 이러한 적극적 정책에 대하여서는 {{TagPerson|[[뢰야마웅|뢰야]]}} 씨도 전게 논문 중에서 논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거듭 노노히 발명치 않기로 하나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注意를 要하는 點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世宗朝에 있어서는 사군 중의 어떤 한 군일지라도 그 전 군을 들어서 철폐를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니 당시방수의 곤란을 들어서 개폐을 논한 것은 다만 압록강 연변 1, 2구자(성보)에 관한 것뿐이었다. 아직껏 {{TagPerson|[[세종]]}}에 있어서는 삼군 내지 일군 전체를 철폐하자는 의론은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주목할 바이다. 그러면 일군 내지 수군 존폐 문제가 발생한 최초는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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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6번= 우예 이북 삼군 존폐 문제가 의논케 된 최초는 {{TagPerson|[[문종]]}}이 즉위한 해 8월이었다. 그 전말에 관한 기록은 {{TagBook|[[문종실록]]}} 권3, 즉위 8월 정유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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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7번= <blockquote no="04">召河·南智·金宗瑞·鄭甲孫等, 議革平安道沿邊不緊各口子萬戶及軍兵 僉曰 平安道沿邊 不緊各口子頗多 自虞芮至茂昌各官各口子 徙入江邊 土地褊少塉薄 民不聊生 南道各官防戍軍士 亦皆因此疲弊 固無利益 其弊甚鉅 宜皆革罷 以慈城爲界 今此深入設關防 實非萬世長策 自朝至日昃 堅執其議 上頗然之 令左承旨鄭而漢 與大臣更議 仍出兩界沿邊地圖以示之 而漢啓曰 臣爲都體察使皇甫仁從事官 巡行兩界 已十年矣 沿邊郡邑關防排置之事 仁一依世宗布置之策 爲之耳 我世宗以高世之見創物之智 明見萬里 備邊之事無不洞照 兩界沿邊要害之處 大城小堡星羅碁市 前後相望 邊警息矣 聖謨洋洋 豈至今日遽忍革之哉 雖不得闢國 其可蹙祖宗封疆乎 雖寸土 不可蹙也 諸大臣曰 虞芮以上 今雖革罷 限以鴨綠大江 彼人不得入居于此 固非蹙地之例也 上曰 世宗已曾布置之事 何不議其固守之策 而反獻革罷之議乎 事遂寢</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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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8번= 이때 중신급에 있던 {{TagPerson|[[하연]]}}·{{TagPerson|[[남지]]}}·{{TagPerson|[[김종서]]}}·{{TagPerson|[[정갑손]]}} 등의 우예 이북 삼군을 철폐하자는 이유를 볼진대 이 역시 지리적으로는 삼군이 적지에 튀어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춘박(椿薄)하여 백성이 살기 어려운 것, 군사적으로는 (평안)남도 각읍의 군사가 방수왕환(防戍往還)에 있어서 폐해가 많은 것, 또 우예 이북 삼군을 철폐하더라도 압록강을 끼고 있음으로 여진인이 거기에 입거치 못할 것으로 그 지방이 우리 국토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등이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서 그들은 종일 삼군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므로 {{TagPerson|[[문종]]}}도 처음 는 그럴듯이 생각하고 도승지 {{TagPerson|[[정이한]]}} 등에게 명하여 서북양계연변지도까지 내주어 다시 의논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 도체찰사 {{TagPerson|[[황보인]]}}의 종사관으로서 북방 개척에 종사한 일이 있는 {{TagPerson|[[정이한]]}}은 북경의 변비가 오로지 {{TagPerson|[[세종|세종대왕]]}}의 성모(聖謨)에서 나온 것을 역설하여 비록 국토를 넓히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조종의 봉강(封疆)을 줄일 수야 있겠는가 하는 {{TagPerson|[[세종]]}}의 적극적 방침 그것을 그대로 다시 주창함에 이르러 문종도 일직 {{TagPerson|[[세종|세종대왕]]}}이 포치(布置)한 일인데 어찌 그 고수책을 의론치 않고 도리어 폐지책을 주장하는가 하여 드디어 삼군철폐의 의견을 물리치고 말었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우리의 주의를 이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찍 {{TagPerson|[[세종]]}}조에 있어서 함경도 육진 개척에 가장 큰 공로를 남긴 {{TagPerson|[[김종서]]}} 그이가 이때 삼군 철폐를 주창한 중의 한 사람인 점이다. {{TagPerson|[[세종]]}} 15년(명 선덕 8년) 오음회(지금 회령)의 알타이족 건주좌위 추장 {{TagPerson|[[동맹가첩목아]]}}와 그 맏아들 {{TagPerson|[[권두]]}}(權豆(관두(管豆)))는 당시 개원 방면으로부터 남하한 혐진 올적합족의 추장 {{TagPerson|[[양목탑올]]}}에게 피살된 사건은 동북면(함경도) 개척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가 되었던 것으로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서는 여진족의 구축과 북경 확장에 적극적 정책을 취하게 되었거니와 이때 {{TagPerson|[[세종]]}}이 함길도 관찰사로서 중용한 이는 실로 {{TagPerson|[[김종서]]}} 그이었다. 이래 {{TagPerson|[[김종서]]}}가 {{TagPerson|[[세종]]}}의 적극적 정책을 받들어 육진 개척에 진력하였음은 다같이 아는 사실로 {{TagPerson|[[세종]]}}도 {{TagRefT|5}}<cite no="02">“雖有寡人 若無宗瑞 不足以辦此事 雖有宗瑞 若無寡人 不足以主此事”</cite><ref group="a">{{TagBook|[[해동야언]]}} 권1, 세종기. {{TagBook|[[국조명신록]]}} 권13.</ref>라고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육진 개척과 삼군 철폐―이는 서로 모순되는 적극 소극의 대립이다. 어떠한 연유로 {{TagPerson|[[세종]]}}을 받들어 함경도 방면에 있어서는 적극책을 취하여 온 {{TagPerson|[[김종서]]}}가 이때 평안도 방면에 있어서는 소극책를 주장하였는가. {{TagRefT|6}}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보담 앞서 {{TagPerson|[[세종]]}} 32년 정월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로서 압록강 연안 행성(장성) 축조역의 정지를 청하였고<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10, 32년 정월 임인.</ref> {{TagRefT|7}}같은 해({{TagPerson|[[문종]]}} 즉위 후) 7월에는 우예·태일·만포 등 삼만호의 철폐를 주창한 바도 있었으니<ref group="a">{{TagBook|[[문종실록]]}} 권2, 즉위 7월 무오.</ref>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TagPerson|[[뢰야마웅|뢰야]]}} 씨는 사군 유지의 곤란과 이에 대한 {{TagPerson|[[세종]]}}·{{TagPerson|[[문종]]}}의 고심을 지적한 후에 {{TagRefT|8}}<cite no="03">“さて四郡廢棄說が世祖の時に至つてかく急に實行さるしに至つたのは, どういふ譯であるかと云ふに, 畢竟, 此の時には廷臣等の説が既に悉く廢棄に一致して居たのと, 世祖は北邊經營に開して世宗のやうな進取的意見を抱持して居なかったのと, 王の果斷な性質とに因るであらうが, 又一方から見ると世祖の即位が大體辛辣な手段を用ひて端宗から王位を無理に捥ぎ取ったのであるから, 廷臣中には成三問等六臣のやうな<sup>註略</sup>又宗室には錦城大君瑜の如き<sup>註略</sup>非常手段を用ひて端宗の位を復せんと企つる人々もあり, 鮮廷の内外にはそんな邊疆問題よりも當面の内治を先にせねばならぬといふ立場にあつたからであるやうに思はれる.”</cite><ref group="a">東洋學報 第十三卷, 五二二―五二三頁.</ref> 운운이라 하여 {{TagPerson|[[세조]]}}조에 이르러 갑자기 사군 폐기를 실행케 된 이유를 (1) 정신의 의견 일치, (2) {{TagPerson|[[세조]]}}가 북변 경영에 관하여 진취적 의견을 안 가졌던 것, (3) {{TagPerson|[[세조]]}} 즉위의 과단성, (4) {{TagPerson|[[세조]]}} 즉위의 사정이 찬탈인 만치 변경 문제보다도 내치에 치중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 것 등 몇 가지를 들었다. 물론 {{TagPerson|[[세조]]}}가 북변 경영에 진취적이 아니었다는 데 대하여는 나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상식적인 점에 있어서 이러한 견해도 타당치 않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만으로서 충분할 것인가. 사군철폐에는 앞서 지적해 둔 {{TagPerson|[[김종서]]}} 그이에 대한 의문의 해석과 아울러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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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9번= 여하튼 이상과 같은 종래의 견해는 마단 사군철폐의 내적 원인을 지적하였음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만으로서는 사군철폐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러한 내적 소인 이외에 외적 도인이 존재하여 외적 도인은 내적인 그것보다도 오히려 중차대하게 생각되는 까닭이다. {{TagRefT|9}}우리 조선과 여진인과의 관계는 경제적 교섭이 원만히 진행하는 한에 있어서 거기에는 별다른 군사적 정치적 사건은 생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ref group="a">졸고 「{{TagArticle|[[선초여진무역고]]}}」({{TagJournal|[[진단학보]]}} {{TagVolume|[[진단학보 8|제8권]]}}) 참조.</ref> 그러면 그 외적 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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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3일 (토) 22:18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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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군 문제 관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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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廢四郡問題管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인영 역자 집필일자 1940년 8월 10일 게재연월 1941년 3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34쪽 전체쪽 034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澄玉父前中樞全生 年九十八 聞二子被召 置酒前二子而飮之曰 予年近百歲 位入樞府 身享二宰樞榮養 國家以爾等爲有用 同時徵召 願努力王事 勿以予老爲念 予人事已盡 死復何恨 執盞起舞而歌 聞者壯其志 而嘉李氏有子也
세종실록서적 권125, 31년 8월 기유조―

쪽수▶P1-1

澄玉父前中樞全生 年九十八 聞二子被召 置酒前二子而飮之曰 予年近百歲 位入樞府 身享二宰樞榮養 國家以爾等爲有用 同時徵召 願努力王事 勿以予老爲念 予人事已盡 死復何恨 執盞起舞而歌 聞者壯其志 而嘉李氏有子也
世宗實錄서적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八月 已酉條―






본문


본문1: 서언


이조 초기에 있어서의 육진(경흥·경원·온성·종성·회령·부령) 개척과 사군(무창·여연·우예·자성) 설치가 조선 북방 발전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오늘날 평안북도 자성·후창 양군에 해당하는 사군 지방은 설치된 지 얼마 안 되어 단종인물 3년 을해(현대문주1▶세조인물 원년,[a 1] 명 경태 6년, 1453A.D.) 먼저 우예·여연·무창 3군이 철폐되고 이어서 세조인물 5년에는 자성군까지도 철폐되어 그 주민들은 전부 강계와 구성으로 이주하고 말았는데 그 후 이 지방을 ‘폐사군’이라고 불러온 것은 이미 저명한 사실이다. 이 폐사군에 관한 연구로서는 일직 진전좌우길인물(津田左右吉) 박사가 현대문주2▶鮮初に於ける鴨綠江上流地方の領土원고[a 2]라는 제목 하에 약간 논술한 바 있었고 또 고 뢰야마웅인물(瀨野馬熊) 씨 현대문주3▶조선폐사군고원고[a 3]라는 논문이 있는바 특히 후자는 전자가 이용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조실록 읍지 등을 참조해 가지고 먼저 사군의 군치와 강역에 관한 상세한 지리적 고증하고 다음에 사군 설치로부터 철폐에 이르는 그간의 사정을 논술한 역작이다. 그러나 폐사군에 관한 문제는 이것을 전면적으로 관찰할 때 오늘까지의 연구는 극소한 그 일부분의 구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진전인물 박사나 뢰야인물 씨의 연구에 있어서도 나는 이를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이만치 수년 전 이 문제에 관한 신사료 원영주인물(元永胄) 일기와 이여절인물(李汝節) 수본(진단학회기관 소장 연경재전집서적 수록)이 출현하자 현대문주4▶종래의 사군 지명 고증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약간의 비견을 발표한 바 있었다.[a 4] 본 소고에 있어서는 세조인물조에 사군을 철폐한 원인에 대하여 과연 종래의 견해가 그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파촬(把撮)한 것인가 아닌가를 재음미하는 동시에 또한 나의 견해를 진술코자 하는 바이다.
쪽수▶P2-1李朝 初期에 있어서의 六鎭(慶興·慶源·穩城·鍾城·會寧·富寧) 開拓과 四郡(茂昌·閭延·虞芮·慈城) 設置가 朝鮮 北方 發展史上 重要한 位置를 차지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現今 平安北道 慈城·厚昌 兩郡에 該當하는 四郡 地方은 設置된 지 얼마 안 되어 端宗 三年 乙亥(원문주1▶世祖元年,[1] 明景泰 六年, 1453A.D.) 먼저 虞芮·閭延·茂昌 三郡이 撤廢되고 이어서 世祖 五年에는 慈城郡까지도 撤廢되여 그 住民들은 全部 江界와 龜城으로 移住하고 말었는데 그後 이地方 「廢四郡」이라고 불러온 것은 이미 著名한 事實이다. 이 廢四郡에 關한 硏究로서는 일즉 津田左右吉 博士가 원문주2▶「鮮初に於ける鴨綠江上流地方の領土」[2]라는 題目 下에 若干 論述한 바 있었고 또 故 瀨野馬熊 氏 원문주3▶「朝鮮廢四郡考」[3]라는 論文이 있는바 特히 後者는 前者가 利用할 機會를 얻지 못한 李朝實錄 邑誌 等을 參照해 가지고 먼저 四郡의 郡治와 疆域에 關한 詳細한 地理的 考證하고 다음에 四郡設置로부터 撤廢에 이르는 그間의 事情을 論述한 力作이다. 그러나 廢四郡에 關한 諸問題는 이것을 全面的으로 觀察할 때 今日까지의 硏究는 極少한 그 一部分의 究明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津田 博士나 瀨野 氏의 硏究에 있어서도 ▶P3-1나는 이를 다시 한번 檢討할 必要를 늣기고 있는 이만치 數年 前 이 問題에 關한 新史料 元永胄日記와 李汝節手本(震檀學會藏硏經齋全集所收)이 出現하자 원문주4▶從來의 四郡地名 考證에 對한 批判과 아울러 若干의 卑見을 發表한 바 있었다.[4] 本 小稿에있어서는 世祖朝에 四郡을 撤廢한 原因에 就하여 果然 從來의 見解가 그 歷史的 事件의 眞相을 把撮한 것인가 아닌가를 再吟味하는 同時에 또한 나의 見解를 陳述코자 하는 바이다.
이조가 태조인물의 건국 이래 정종인물·태종인물을 거처 제4대 세종인물 말년에 이르는 약 60년 동안에 전조 고려의 강역 이외인 함경도와 경계가 확실치 않던 압록강 상류지방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의 자연적 경계에까지 국토를 확장하고 거기에 육진과 사군을 두게 된 것은 무릇 네 가지 관점에서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북방 발전이라는 욕구는 적어도 고려 건국 이래 배양되어 온 조선사회의 이상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대원제국이 쇠망하고 명국의 새 세력이 아직 요동 방면에 확립치 못하였다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진행된 것이며, 셋째로는 고려 공민왕인물조에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인물로 하여금 원나라 쌍성총관부(함경남도 영흥)를 탈취케 함으로써 시작된 국토확장책의 귀결인 것이며, 넷째로는 태조인물가 동북면(함경도) 출신인 것과 세종인물이 적극적 진취적 정책을 감행한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면 세조인물조에 이르러 함경도 육진 방면에 있어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압록강 상류 지방의 사군을 철폐하였음은 어떠한 까닭인가.
쪽수▶P3-2李朝가 太祖의 建國 以來 定宗·太宗을 거처 第四代 世宗 末年에 이르는 約 六十年 동안에 前朝 高麗의 疆域 以外인 咸鏡道와 境界가 確實치 않든 鴨綠江 上流地方을 開拓하여 鴨綠江과 豆滿江의 自然的 境界에까지 國土를 擴張하고 거기에 六鎭과 四郡을 두게 된 것은 무릇 네 가지 觀點에서 이를 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北方 發展이라는 欲求는 적어도 高麗 建國 以來 培養되여 온 朝鮮社會의 理想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大元帝國이 衰亡하고 明國의 新勢力이 아직 遼東方面에 確立치 못하였다는 時代的 背景을 가지고 進行된 것이며, 셋째로는 高麗 恭愍王朝에 東北面 兵馬使 柳仁雨로 하여금 元나라 雙城摠管府(咸鏡南道 永興)를 奪取케 함으로써 始作된 國土擴張 策의 歸結인 것이며, 넷째로는 太祖가 東北面(咸鏡道) 出身인 것과 世宗이 積極的 進取的 政策 敢行한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면 世祖朝에 이르러 咸鏡道 六鎭 方面에있어서는 別다른 變化가 없었음에도 不拘하고 鴨綠江 上流地方의 四郡을 撤廢하였음은 어떠한 까닭인가.
사군이라는 명칭은 이것을 관제상으로 볼 때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자성과 우예는 설치로부터 철폐까지 종시 군으로서 일관하였지만 여연은 세종인물 17년 군으로부터 도호부가 되고 무창은 그 설치로부터 2년을 경과한 세종인물 24년에 처음으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므로 철폐 당시로 말하면 일부삼군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이러한 시간적 관제상 관념을 버리고 종래의 상식적 관제상 명칭에 좇아 어떤 것이나 다 군 혹은 읍이라고 하여둔다.
쪽수▶P4-1四郡이라는 名稱은 이것을 官制上으로 볼 때 반다시 正當한 것은 아니다. 慈城과 虞芮는 設置로부터 撤廢까지 終始 郡으로서 一貫하였지만은 閭延은 世宗 十七年 郡으로부터 都護府가되고 茂昌은 그 設置로부터 二年을 經過한 世宗 二十四年에 처음으로 縣에서 郡으로 陞格하였다. 그러므로 撤廢 當時로 말하면 一府三郡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便宜上 이러한 時間的 官制上 觀念을 버리고 從來의 常識的 官制上 名稱에 좃차 어떤 것이나 다 郡 或은 邑이라고 하여둔다.




































본문2: 사군철폐의 내적 소인


사군철폐의 선구는 단종인물 3년 4월 자성군을 제외한 여연·무창·우예 삼군의 철폐로서 이는 세조인물가 즉위하기 3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단종인물 원년 세조인물(당시의 수양대군)는 안평대군인물 이하 영의정 황보인인물, 좌의정 김종서인물 등 반대당을 일소하고 이징옥인물의 반란을 평정한 후 중외 병마도통사가 되어 내외의 실권은 벌서 세조인물 일파의 수중에 있었던 때로서 우예 이북 삼군철폐론은 물론 세조인물 일파의 의도에서 나왔던 것이다. 단종실록서적 권14, 3년 4월 무자(14일)조에
쪽수▶P4-2四郡撤廢의 先驅는 端宗 三年 四月 慈城郡을 除外한 閭延·茂昌·虞芮 三郡의 撤廢로서 이는 世祖가 即▶P5-1位하기 三個月 前의 일이었다. 그러나 端宗 元年 世祖(當時의 首陽大君)는 安平大君 以下 領議政 皇甫仁 左議政 金宗瑞 等 反對黨을 一掃하고 李澄玉의 叛亂을 平定한 後 中外兵馬都統使가되여 內外의 實權은 벌서 世祖 一派의 手中에 있었든 때로서 虞芮 以北 三郡 撤廢論은 勿論 世祖 一派의 意圖에서 나왔든 것이다. 端宗實錄 卷十四, 三年 四月 戊子(十四日)條에

平安道都體察使朴從愚啓 臣巡審江邊諸邑諸口子 虞·閭延·茂昌則本邑軍士甚少 故都節制使以南道軍士臨時抄定往戍 有弊無益 當竝所屬諸堡革罷 其軍資義倉米穀分給慈城 江界之民 至秋各於其邑收納 江界乃後門巨鎭 且陳荒田地千餘結 古龜州乃賊路要衝 城基東西北三面據險 城內多水泉 又有可耕之地數千餘結 若復置守令 因古基築城設關 則可與義州·江界鼎足而峙, 相爲掎角控制賊路, 當以虞芮之民徙處江界 閭·茂昌之民……至是 都統府·議政府堂上·六曹判書以上同議啓 平安道江邊諸邑諸口子因革 竝依都體察使所啓施行 龜州四面疆域 令觀察使審定 令吏曹擇慈祥勤儉人爲守令 其新徙之民 限五年 蠲免徭役 其所貸義倉之穀 三年後 收納龜州虞芮之民徙居江界者 亦依此施行 且三邑之民 不可置之度外 宜令慈城郡時遣兵探候 江界節制使 亦一年兩度巡察 從之

쪽수▶P5-2

平安道都體察使朴從愚啓 臣巡審江邊諸邑諸口子 虞·閭延·茂昌則本邑軍士甚少 故都節制使以南道軍士臨時抄定往戍 有弊無益 當竝所屬諸堡革罷 其軍資義倉米穀分給慈城 江界之民 至秋各於其邑收納 江界乃後門巨鎭 且陳荒田地千餘結 古龜州乃賊路要衝 城基東西北三面據險 城內多水泉 又有可耕之地數千餘結 若復置守令 因古基築城設關 則可與義州·江界鼎足而峙, 相爲掎角控制賊路, 當以虞芮之民徙處江界 閭·茂昌之民……至是 都統府·議政府堂上·六曹判書以上同議啓 平安道江邊諸邑諸口子因革 竝依都體察使所啓施行 龜州四面疆域 令觀察使審定 令吏曹擇慈祥勤儉人爲守令 其新徙之民 限五年 蠲免徭役 其所貸義倉之穀 三年後 收納龜州虞芮之民徙居江界者 亦依此施行 且三邑之民 不可置之度外 宜令慈城郡時遣兵探候 江界節制使 亦一年兩度巡察 從之

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평안도 체찰사 박종우인물가 압록강 연안의 모든 읍·구자(만호를 둔 작은 성과 요새)를 돌아다니며 살핀 결과 우예·여연·무창 3읍은 각각 그 읍 군사의 수가 매우 적어서 청천강 이남의 (평안)남도 군사를 임시로 초출하여 삼읍을 지키게 한 까닭으로 유폐무익하다고 논하였으므로 이를 다시 도총부·의정부의 당상관 내지 육조판서들로 하여금 심의케 하여 드디어 박종우인물의 의견과 같이 3읍을 철폐하고 우예 주민을 강계로 여연·무창 주민을 옛 구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삼읍철폐에 대한 선후책에 관하여는 후일 다시 언급코자 하거니와 여하간 삼읍철폐는 평안도 도체찰사 박종우인물의 계에 의한 것이며 그 주요한 이유가 본읍 군사의 수가 매우 적어서 남도 군사가 왕래하며 지키기에는 폐해가 많을 뿐이라는 점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평안도 도체찰사 박종우인물의 파견은 전전년 단종인물 원년 11월 검토관 양성지인물(梁誠之)의 계에 의한 것으로서 그 파견의 확실한 시일은 알 수 없으나 단종실록서적 권9, 원년 11월 갑인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쪽수▶P5-3라 하였다. 이에 依하면 平安道 體察使 朴從愚가 鴨綠江 沿岸의 諸邑·諸口子(萬戶를 둔 小城堡)를 巡審한 結果 虞芮·閭延·茂昌 三邑은 各各 그 邑軍士의 數가 매우 저거서 清川江 以南의 (平安)南道軍士를 臨時로 抄出하여 三邑을 직하게 한 까닭으로 有弊無益하다고 論하였음으로 이를 다시 都摠府·議政府의 堂上官 及 六曹判書들로 하여금 審議케 하여 드디어 朴從愚의 意見과 같이 三邑을 撤廢하고 虞芮 住民을 江▶P6-1界로 閭延·茂昌 住民을 古龜州로 移住시키기로 決定하였든 것이다. 三邑撤廢에 對한 善後策에 關하여는 後日 다시 言及코자 하거니와 如何間 三邑撤廢는 平安道 都體察使 朴從愚의 啟에 依한 것이며 그 主要한 理由가 本邑軍士의 數가 매우 저거서 南道軍士가 往戍함에는 弊害가 많을 뿐이라는 點에 있었든 것만은 事實이다. 그런데 平安道 都體察使 朴從愚의 派遣은 前前年 端宗 元年 十一月 檢討官 梁誠之의 啟에 依한 것으로서 그 派遣의 確實한 時日은 알 수 없으나 端宗實錄 卷九, 元年 十一月 甲寅條에는 다음과 같은 記事가 있다.

檢討官梁誠之 於經筵啓曰 今平安長城之役雖罷 閭延·茂昌·虞芮等郡隔在江邊 南道軍士越大嶺而戍守 人馬俱疲盡賣田産, 因而逃散 流入遼潘者甚多 雖棄三邑 大江限帶 我之封疆如舊 乞撤三邑之戍 以慈城爲界 以休南民 以固邦本 命議于政府 啓曰 臣等亦知有此弊 然不可以一儒之言撤邊備 請遣大臣看審 然後定之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往審便否 從愚亦以誠之之言爲然 卽罷三邑 時邊人謂 復三年不罷 則兵民將自潰矣

쪽수▶P6-2

檢討官梁誠之 於經筵啓曰 今平安長城之役雖罷 閭延·茂昌·虞芮等郡隔在江邊 南道軍士越大嶺而戍守 人馬俱疲盡賣田産, 因而逃散 流入遼潘者甚多 雖棄三邑 大江限帶 我之封疆如舊 乞撤三邑之戍 以慈城爲界 以休南民 以固邦本 命議于政府 啓曰 臣等亦知有此弊 然不可以一儒之言撤邊備 請遣大臣看審 然後定之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往審便否 從愚亦以誠之之言爲然 卽罷三邑 時邊人謂 復三年不罷 則兵民將自潰矣

검토관 양성지인물가 여연·무창·우예 등 삼군철폐를 주장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여연 등 삼군은 압록강변에 따로 떨어져 있으므로 세종인물조 이래 압록강 연안 곳곳에 여진인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막대한 경비와 인부를 써가며 역사 중이던 장성(혹 행성이라고도 함) 축조는 이를 이미 정지하였다고 하더라도 삼읍 수수(戍守)는 남도 군사가 적유령·마전령 같은 큰 고개를 넘어서 가야만 되는 고로 사람과 말이 공히 피로하고 그 까닭에 평안도 인민 중에는 전산(田產)을 팔고 만주 방면으로 유입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며, 둘째로 삼읍을 철폐하더래도 압록강이 가로질러 있으므로 국토는 조금도 멸축되는 일이 없이 옛과 같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러므로 삼읍의 수수(戍守)를 철폐함으로써 인민의 로고를 덜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양성지인물의 주창에 대하여 의정부도 역시 동감이었으나 처리를 신중히 하기 위하여 운성부원군 박종우인물를 평안도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다시 한번 삼읍의 사정을 심찰케 하였던 것이다.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 운운 이하는 단종실록서적 편찬자의 말이지만 당시 변인(邊人)들이 복3년에 철파치 않으면 병사와 인민들이 스스로 무너지리라 하였다는 것을 보면 사군 지방의 유지가 얼마나 곤란하였든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군지방 국경 수비의 어려움은 단종인물조에 처음 생긴 일은 아니었다. 태종인물조의 여연군 설치 이래 세종인물조의 사군정비에 있어서 가지가지 곤란을 맛보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것으로 사군지방의 지형이 깊이 만주 방면에 두입(斗入)하여 있을 뿐 아니라 산악이 중첩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토지가 비옥치 못한 이만치 군사의 파견과 군량 운반에 있어서 적지 않은 고심을 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인물조에 있어서도 벌써부터 정중에는 이 방면 방비의 개혁을 주장한 사람도 없지 않었으나 진취적인 세종인물은 단연 그러한 의견을 물리치고 조종의 강역은 결코 퇴축(退縮)치 못하리라는 자각 하에 오히려 적극적 시설을 감행하여 왔었다. 세종인물의 이러한 적극적 정책에 대하여서는 뢰야인물 씨도 전게 논문 중에서 논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거듭 노노히 발명치 않기로 하나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注意를 要하는 點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世宗朝에 있어서는 사군 중의 어떤 한 군일지라도 그 전 군을 들어서 철폐를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니 당시방수의 곤란을 들어서 개폐을 논한 것은 다만 압록강 연변 1, 2구자(성보)에 관한 것뿐이었다. 아직껏 세종인물에 있어서는 삼군 내지 일군 전체를 철폐하자는 의론은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주목할 바이다. 그러면 일군 내지 수군 존폐 문제가 발생한 최초는 언제인가.
쪽수▶P6-3檢討官 梁誠之가 閭延·茂昌·虞芮 等 三郡撤廢을 主張한 理由은 大略 두 가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閭延 等 三郡은 鴨綠江邊에 따루 떠러저 있음으로 世宗朝 以來 鴨綠江 沿岸 處處에 女眞人의 侵入을 맛기 爲하여 莫大한 經費와 人夫를 써가며 役事 中이든 長城(或 行城이라고도 함) 築造는 이를 이미 停止하였다고 하드래도 三邑戌守에는 南道軍士가 狄踰嶺·麻田嶺같은 大嶺을 넘어서 가야만 되는 故로 人馬 共히 疲勞하고 그 까닭에 平安道 人民 中에는 田產을 팔고 滿洲 方面으로 流入하는 者가 많다는 것이 한 가▶P7지 理由이며, 둘째로 三邑을 撤廢하드래도 鴨綠江이 가루질려 있음으로 國土는 조금도 滅縮되는 일이 없이 如舊하다는 것이 또 한 가지 理由이었다. 그러므로 三邑의 戊守를 撤廢함으로써 人民의 勞苦를 덜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梁誠之의 主唱에 對하여 議政府도 亦 同感이었으나 處理를 慎重히 하기爲하여 雲城府院君 朴從愚를 平安道 都體察使에 任命하고 다시 한번 三邑의 事情을 審察케 하였든 것이다.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 云云 以下는 端宗實錄 編纂者의 말이지만 當時 邊人들이 復三年에 撤罷치 않으면 兵民이 自潰하리라 하였다는 것을보면 四郡地方의 維持가 얼마나 困難하였든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四郡地方 防戍의 辛苦는 端宗朝에 처음 생긴 일은 아니었다. 太宗朝의 閭延郡 設置 以來 世宗朝의 四郡整備에있어서 가지가지 困難을 맛보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것으로 四郡地方의 地形이 깊이 滿洲 方面에 斗入하여 있을 뿐 아니라 山岳이 重疊하여 交通이 不便하고 土地가 肥沃치 못한 이만치 軍士의 派遣과 軍糧運搬에 있어서 적지 않은 苦心를 要하였든 것이다. 그러므로 世宗朝에 있어서도 벌서부터 廷中에는 이 方面 防備의 改革 主張한 사람도 없지 않었으나 進取的인 世宗은 斷然 그러한 意見을 물러 치고 祖宗의 彊域은 決코 退縮치 못하리라는 自覺 下에 오히려 積極的 施設을 敢行하여 왔었다. 世宗의 이러한 積極的 政策에 對하여서는 瀨野 氏도 前揭 論文 中에서 論述한 바 있음으로 여기서는 거듭 呶呶 發明치 않기로하나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注意를 要하는 點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世宗朝에 있어서는 四郡 中의 어떤 한 郡일지라도 그 全郡을 들어서 撤廢을 主張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니 當時▶P8-1防戍의 困難을 들어서 改廢을 論한 것은 다만 鴨綠江 沿邊 一二口子(城堡)에 關한 것뿐이었다. 아직껏 世宗朝에 있어서는 三郡 乃至 一郡 全體를 撤廢하자는 議論은 없었든 것이다. 이 點은 特히 注目할 바이다. 그러면 一郡 乃至 數郡 存廢 問題가 發生한 最初는 언제인가.
우예 이북 삼군 존폐 문제가 의논케 된 최초는 문종인물이 즉위한 해 8월이었다. 그 전말에 관한 기록은 문종실록서적 권3, 즉위 8월 정유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쪽수▶P8-2虞芮 以北 三郡 存廢 問題가 議論케 된 最初는 文宗이 即位한 해 八月이었다. 그 顚末에 關한 記錄은 文宗實錄 卷三, 即位 八月 丁酉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召河·南智·金宗瑞·鄭甲孫等, 議革平安道沿邊不緊各口子萬戶及軍兵 僉曰 平安道沿邊 不緊各口子頗多 自虞芮至茂昌各官各口子 徙入江邊 土地褊少塉薄 民不聊生 南道各官防戍軍士 亦皆因此疲弊 固無利益 其弊甚鉅 宜皆革罷 以慈城爲界 今此深入設關防 實非萬世長策 自朝至日昃 堅執其議 上頗然之 令左承旨鄭而漢 與大臣更議 仍出兩界沿邊地圖以示之 而漢啓曰 臣爲都體察使皇甫仁從事官 巡行兩界 已十年矣 沿邊郡邑關防排置之事 仁一依世宗布置之策 爲之耳 我世宗以高世之見創物之智 明見萬里 備邊之事無不洞照 兩界沿邊要害之處 大城小堡星羅碁市 前後相望 邊警息矣 聖謨洋洋 豈至今日遽忍革之哉 雖不得闢國 其可蹙祖宗封疆乎 雖寸土 不可蹙也 諸大臣曰 虞芮以上 今雖革罷 限以鴨綠大江 彼人不得入居于此 固非蹙地之例也 上曰 世宗已曾布置之事 何不議其固守之策 而反獻革罷之議乎 事遂寢

쪽수▶P8-3

召河·南智·金宗瑞·鄭甲孫等, 議革平安道沿邊不緊各口子萬戶及軍兵 僉曰 平安道沿邊 不緊各口子頗多 自虞芮至茂昌各官各口子 徙入江邊 土地褊少塉薄 民不聊生 南道各官防戍軍士 亦皆因此疲弊 固無利益 其弊甚鉅 宜皆革罷 以慈城爲界 今此深入設關防 實非萬世長策 自朝至日昃 堅執其議 上頗然之 令左承旨鄭而漢 與大臣更議 仍出兩界沿邊地圖以示之 而漢啓曰 臣爲都體察使皇甫仁從事官 巡行兩界 已十年矣 沿邊郡邑關防排置之事 仁一依世宗布置之策 爲之耳 我世宗以高世之見創物之智 明見萬里 備邊之事無不洞照 兩界沿邊要害之處 大城小堡星羅碁市 前後相望 邊警息矣 聖謨洋洋 豈至今日遽忍革之哉 雖不得闢國 其可蹙祖宗封疆乎 雖寸土 不可蹙也 諸大臣曰 虞芮以上 今雖革罷 限以鴨綠大江 彼人不得入居于此 固非蹙地之例也 上曰 世宗已曾布置之事 何不議其固守之策 而反獻革罷之議乎 事遂寢

이때 중신급에 있던 하연인물·남지인물·김종서인물·정갑손인물 등의 우예 이북 삼군을 철폐하자는 이유를 볼진대 이 역시 지리적으로는 삼군이 적지에 튀어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춘박(椿薄)하여 백성이 살기 어려운 것, 군사적으로는 (평안)남도 각읍의 군사가 방수왕환(防戍往還)에 있어서 폐해가 많은 것, 또 우예 이북 삼군을 철폐하더라도 압록강을 끼고 있음으로 여진인이 거기에 입거치 못할 것으로 그 지방이 우리 국토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등이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서 그들은 종일 삼군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므로 문종인물도 처음 는 그럴듯이 생각하고 도승지 정이한인물 등에게 명하여 서북양계연변지도까지 내주어 다시 의논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 도체찰사 황보인인물의 종사관으로서 북방 개척에 종사한 일이 있는 정이한인물은 북경의 변비가 오로지 세종대왕인물의 성모(聖謨)에서 나온 것을 역설하여 비록 국토를 넓히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조종의 봉강(封疆)을 줄일 수야 있겠는가 하는 세종인물의 적극적 방침 그것을 그대로 다시 주창함에 이르러 문종도 일직 세종대왕인물이 포치(布置)한 일인데 어찌 그 고수책을 의론치 않고 도리어 폐지책을 주장하는가 하여 드디어 삼군철폐의 의견을 물리치고 말었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우리의 주의를 이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찍 세종인물조에 있어서 함경도 육진 개척에 가장 큰 공로를 남긴 김종서인물 그이가 이때 삼군 철폐를 주창한 중의 한 사람인 점이다. 세종인물 15년(명 선덕 8년) 오음회(지금 회령)의 알타이족 건주좌위 추장 동맹가첩목아인물와 그 맏아들 권두인물(權豆(관두(管豆)))는 당시 개원 방면으로부터 남하한 혐진 올적합족의 추장 양목탑올인물에게 피살된 사건은 동북면(함경도) 개척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가 되었던 것으로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서는 여진족의 구축과 북경 확장에 적극적 정책을 취하게 되었거니와 이때 세종인물이 함길도 관찰사로서 중용한 이는 실로 김종서인물 그이었다. 이래 김종서인물세종인물의 적극적 정책을 받들어 육진 개척에 진력하였음은 다같이 아는 사실로 세종인물현대문주5▶“雖有寡人 若無宗瑞 不足以辦此事 雖有宗瑞 若無寡人 不足以主此事”[a 5]라고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육진 개척과 삼군 철폐―이는 서로 모순되는 적극 소극의 대립이다. 어떠한 연유로 세종인물을 받들어 함경도 방면에 있어서는 적극책을 취하여 온 김종서인물가 이때 평안도 방면에 있어서는 소극책를 주장하였는가. 현대문주6▶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보담 앞서 세종인물 32년 정월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로서 압록강 연안 행성(장성) 축조역의 정지를 청하였고[a 6] 현대문주7▶같은 해(문종인물 즉위 후) 7월에는 우예·태일·만포 등 삼만호의 철폐를 주창한 바도 있었으니[a 7]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뢰야인물 씨는 사군 유지의 곤란과 이에 대한 세종인물·문종인물의 고심을 지적한 후에 현대문주8▶“さて四郡廢棄說が世祖の時に至つてかく急に實行さるしに至つたのは, どういふ譯であるかと云ふに, 畢竟, 此の時には廷臣等の説が既に悉く廢棄に一致して居たのと, 世祖は北邊經營に開して世宗のやうな進取的意見を抱持して居なかったのと, 王の果斷な性質とに因るであらうが, 又一方から見ると世祖の即位が大體辛辣な手段を用ひて端宗から王位を無理に捥ぎ取ったのであるから, 廷臣中には成三問等六臣のやうな註略又宗室には錦城大君瑜の如き註略非常手段を用ひて端宗の位を復せんと企つる人々もあり, 鮮廷の内外にはそんな邊疆問題よりも當面の内治を先にせねばならぬといふ立場にあつたからであるやうに思はれる.”[a 8] 운운이라 하여 세조인물조에 이르러 갑자기 사군 폐기를 실행케 된 이유를 (1) 정신의 의견 일치, (2) 세조인물가 북변 경영에 관하여 진취적 의견을 안 가졌던 것, (3) 세조인물 즉위의 과단성, (4) 세조인물 즉위의 사정이 찬탈인 만치 변경 문제보다도 내치에 치중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 것 등 몇 가지를 들었다. 물론 세조인물가 북변 경영에 진취적이 아니었다는 데 대하여는 나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상식적인 점에 있어서 이러한 견해도 타당치 않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만으로서 충분할 것인가. 사군철폐에는 앞서 지적해 둔 김종서인물 그이에 대한 의문의 해석과 아울러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쪽수▶P8-4이때 重臣級에 있든 河演·南智·金宗瑞·鄭甲孫 等의 虞芮 以北 三郡을 撤廢하자는 理由를 볼진대 이 亦是 地理的으로는 三郡이 敵地에 斗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土地가 椿薄하여 百姓이 살기 어려운 것, 軍事▶P9的으로는 (平安)南道 各邑의 軍士가 防戍往還에있어서 弊害가 많은것, 또 虞芮 以北 三郡을 撤廢하더라도 鴨綠江을 끼고 있음으로 女眞人이 거기에 入居치 못할 것으로 그 地方이 우러 國土임에는 變함이 없다는 等이었다. 이러한 理由를 들어서 그들은 終日 三郡의 廢止을 主張하였음으로 文宗도 처음 는 그럴듯이 생각하고 都承旨 鄭而漢 等에게 命하여 西北兩界沿邊地圖까지 내주어 다시 議論케 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일즉 都體察使 皇甫仁의 從事官으로써 北方 開拓에 從事한 일이 있는 鄭而漢은 北境의 邊備가 오로지 世宗大王의 聖謨에서 나온 것을 力說하여 비록 國土를 널리지는 못할지언정 엇지 祖宗의 封疆을 주릴 수야 있겠는가 하는 世宗의 積極的 方針 그것을 그대로 다시 主唱함에 이르러 文宗도 일측 世宗大王이 布置한 일인데 엇지 그 固守策 議論치 않고 도로혀 廢止策을 主張하는가 하여 드디어 三郡撤廢의 意見을 물리치고 말었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우리의 注意를 이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죽 世宗朝에 있어서 咸鏡道 六鎭 開拓에 가장 큰 功勞를 남긴 金宗瑞 그이가 이때 三郡 撤廢를 主唱한 中의 한 사람인 點이다. 世宗 十五年(明宣德八年) 吾音會(今 會寧)의 斡朶里族 建州左衛 酋長 童猛哥帖木兒과 그 長子 權豆(管豆)는 當時 開原 方面으로부터 南下한 嫌眞 兀狄哈族의 酋長 楊木塔兀에게 被殺된 事件은 東北面(咸鏡道) 開拓에 있어서 一大 轉換期가 되였든 것으로서 이 機會를 利用하여 朝鮮서는 女眞族의 驅逐과 北境 擴張에 積極的 政策를 取하게 되였거니와 이때 世宗이 咸吉道 觀察使로써 重用한 이는 實로 金宗瑞 그이었다. 爾來 金宗瑞가 世宗의 積極的 政策를 받들어 六鎭 開拓에 盡力하▶P10였음은 다같이 아는 事實로 世宗도 원문주5▶「雖有寡人 若無宗瑞 不足以辦此事 雖有宗瑞 若無寡人 不足以主此事」[5]라고까지 하였다고 傳한다. 六鎭 開拓과 三郡 橄廢―이는 서로 矛盾되는 積極 消極의 對立이다. 如何한 緣由로 世宗을 받들어 咸鏡道 方面에있어서는 積極策을 取하여 온 金宗瑞가 이때 平安道 方面에 있어서는 消極策를 主張하였는가. 원문주6▶「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보담 앞서 世宗 三十二年 正月 平安道 兵馬 都節制使로써 鴨綠江 沿岸行城(長城)築 造役의 停止를 請하였고[6] 원문주7▶同年(文宗 即位 後) 七月에는 虞芮·泰日·滿浦 等 三萬戶의 撤廢를 主唱한 바도 있었으니[7] 이를 如何히 解釋할 것인가. 瀨野 氏는 四郡 維持의 困難과 이에 對한 世宗·文宗의 苦心을 指摘한 後에 원문주8▶「さて四郡廢棄說が世祖の時に至つてかく急に實行さるしに至つたのは, どういふ譯であるかと云ふに, 畢竟, 此の時には廷臣等の説が既に悉く廢棄に一致して居たのと, 世祖は北邊經營に開して世宗のやうな進取的意見を抱持して居なかったのと, 王の果斷な性質とに因るであらうが, 又一方から見ると世祖の即位が大體辛辣な手段を用ひて端宗から王位を無理に捥ぎ取ったのであるから, 廷臣中には成三問等六臣のやうな註略 又宗室には錦城大君瑜の如き註略非常手段を用ひて端宗の位を復せんと企つる人々もあり, 鮮廷の内外にはそんな邊疆問題よりも當面の内治を先にせねばならぬといふ立場にあつたからであるやうに思はれる.」[8] 云云이라 하여 世祖朝에 이르러 갑자기 四郡廢棄를 實行케 된 理由를 (1) 廷臣의 意見 一致, (2) 世祖가 北邊經營에 關하여 進取的 意見을 안 가졌든 것, (3) 世祖 即位의 果斷性, (4) 世祖 即位의 事情이 纂奪인 만치 邊境 問題보담도 內治에 置重하는 政▶P11-1策을 取하게 된 것 等 멧가지를 들었다. 毋論 世祖가 北邊經營에 進取的이 아니었다는 데 對하여는 나는 딴 見解를 가지고 있지만 大體로 常識的인 點에 있어서 이러한 見解도 妥當치 않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見解만으로서 充分할 것인가. 四郡撤廢에는 앞서 指摘해 둔 金宗瑞 그이에 對한 疑問의 解釋과 아울러 좀 더 根本的인 理由가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상과 같은 종래의 견해는 마단 사군철폐의 내적 원인을 지적하였음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만으로서는 사군철폐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러한 내적 소인 이외에 외적 도인이 존재하여 외적 도인은 내적인 그것보다도 오히려 중차대하게 생각되는 까닭이다. 현대문주9▶우리 조선과 여진인과의 관계는 경제적 교섭이 원만히 진행하는 한에 있어서 거기에는 별다른 군사적 정치적 사건은 생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a 9] 그러면 그 외적 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쪽수▶P11-2如何튼 以上과 같은 從來의 見解은 마단 四郡撤廢의 內的 原因을 指摘하였음에 不過한 것으로서 그것만으로서는 四郡撤廢의 事情 充分히 理解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러한 內的 素因 以外에 外的 導因이 存在하여 外的 導因은 內的인 그것보담도 오히려 重且大하게 생각되는 까닭이다. 원문주9▶우리 朝鮮과 女眞人과의 關係는 經濟的 交涉이 圓滿히 進行하는 限에 있어서 거기에는 別다른 軍事的 政治的 事件은 생기지 않는 것이 普通이다.[9] 그러면 그 外的 導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3: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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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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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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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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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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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睿宗實錄 卷六, 元年 七月 戊子條에 「傳于春秋館曰 今繼鑑廳 以丙子稱世祖元年 春秋館以乙亥稱元年何如 同知事梁誠之等啓曰世祖卽位於乙亥年 若此年不稱元 恐涉魯山 謹考世記大全 亦以乙亥稱元年 上曰然」이라 하고, 同癸巳 條申叔舟말에 「魯山禪而 世祖卽位 當以即位之年爲紀元」이라 하였는데, 世祖實錄이 乙亥年을 元年으로 한 데 對하여, 國朝寶鑑 其他는 翌年丙子로써 世祖 元年을 삼었다. 本稿에는 世祖實錄에 依하여 乙亥를 元年으로 하였다.
  2. 津田左右吉 博士 著, 朝鮮歷史地理 第二卷, 이五五―三六〇頁.
  3. 東洋學報 第十三卷 第一號‧第三號. 潮野馬熊 遺稿 二五三―三六〇頁.
  4. 拙稿 「鮮初廢四郡地理考」(靑丘學叢 第二十九號·第三十號).
  5. 海東野言 卷一, 世宗紀. 國朝名臣錄 卷十三.
  6. 世宗實錄 卷一百十, 三十二年 正月 壬寅.
  7. 文宗實錄 卷二, 卽位 七月 戊午.
  8. 東洋學報 第十三卷, 五二二―五二三頁.
  9. 拙稿 「鮮初女真貿易考」(震檀學報 第八卷) 參照.






현대문주


  1. 예종실록서적 권6, 원년 7월 무자조에 “傳于春秋館曰 今繼鑑廳 以丙子稱世祖元年 春秋館以乙亥稱元年何如 同知事梁誠之等啓曰世祖卽位於乙亥年 若此年不稱元 恐涉魯山 謹考世記大全 亦以乙亥稱元年 上曰然”이라 하고, 같은 해 계사조 신숙주인물 말에 “魯山禪而 世祖卽位 當以即位之年爲紀元”이라 하였는데, 세조실록서적가 을해년을 원년으로 한 데 대하여, 국조보감서적 기타는 다음 해 병자로써 세조인물 원년을 삼었다. 본고에는 세조실록서적에 의하여 을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2. 진전좌우길인물 박사 지음, 조선역사지리서적 제2권, 255―360쪽.
  3. 동양학보학술지 제13권 제1호권호제3호권호. 뢰야마웅인물 유고 253―360쪽.
  4. 졸고 「선초폐사군지리고원고」(청구학총학술지 제29호·제30호권호).
  5. 해동야언서적 권1, 세종기. 국조명신록서적 권13.
  6. 세종실록서적 권110, 32년 정월 임인.
  7. 문종실록서적 권2, 즉위 7월 무오.
  8. 東洋學報 第十三卷, 五二二―五二三頁.
  9. 졸고 「선초여진무역고원고」(진단학보학술지 제8권권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