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복제도의 연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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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 {{TagSpage|1}}喪服의 制度는 元來 死者 即 喪者에 對한 服者의 親疎遠近 關係와 家族的 社會的 尊卑의 地位身分에 依하야 等級의 差異를 表示한 것인대, 二等級的 差異가 이른바 斬衰・齊衰・大功・小功・緦麻의 五等級으로 되어있는 까닭에 喪服制度를 곧 五服制度라고도 함은 우리가 널리 잘 아는 바이어니와, 이 五服의 等級이 무엇을 標準하고 무슨 根據에 依하야 構成된 것이냐 함은 그다지 明瞭하지 않다. 文公家禮에 依하면 「斬不緝也 凡衣裳旁及下際 皆不縫纖」이라 하고, 「齊緝也 凡衣裳 旁及下際 皆緝」이라 하야 服裝의 末端을 緝 또는 不緝하는 것으로써 最重한 斬衰의 服裝과 齊衰 以下의 服裝과를 區別하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等級의 差異가 服裝製作 上의 方法에 依據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여기에 이 製作上 方法의 差異가 웨다만 斬齊 二服에 限하야 表示되였느냐 하면 거기에는 한 개의 疑問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TagPage|2-1}}다. 또 文公家禮에 依하면 斬衰는 「用極鹿生麻布爲之」라 하고 齊衰는 「用比斬衰次等鹿生布」라 하고, 漸次로 大功은 齊衰에 比하야, 또 小功은 大功에 比하야 稍熟細布를 使用하고 網麻는 極細熟布를 使用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等級의 差異가 服裝의 資料 即 織布의 精粗 及 生熟에 依據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이 織布의 精粗의 差異가 웨 大功 小功 縮麻에 限하야 表示되였으며 웨 緝不緝의 區分原理 以外에 또 이런 區分 標準이 制定되였느냐 함에는 또한 疑問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如何間 製作上으로나 資料上으로나 精粗의 差異는 共通하야, 重服일수록 粗略하여서 手工이 輕減되여 있는 것만은 看取하기에 容易한 葬實이다. 그리하야 이 事實은 一方으로 服者가 異常時에 處할 만큼 非生產的인 生活樣式의 自然한 表現이라 하겠고, 他方으로 喪中의 喪裝이 平常時와 特異함을 要하는 呪術宗敎的 意味를 가진 것이라고 보기에 足한 것이다. 무릇 喪葬에 關한 諸多儀式 節次가 死靈에 對한 禁忌 即 禳禍招福의 原始宗敎的 意味를 가지고 있음은 널리 諸民族間에 遍在한 民俗이어니와, 喪服이 또한 死靈에 對한 恐怖와 死의 感染에 對한 恐懼에 公本된 것이라 함은 一般 宗敎民族學者의 認定한 바이다,(2) 그러면 이러한 呪術宗敎的 意味가 어찌하야 上記한바 五服의 名稱에는 表示되지 않엇는가 하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事情이 있을 것이나, 儀禮 以外의 諸多 支那 古文獻에는 亦是 이러한 呪術宗敎的 意味를 表示한 五服의 名稱을 發見할 수 있는 것이다. 一般으로 第二級报인 齊衰는 儀禮喪服篇에 「疏衰裳齊」라 하였으니, 이 齊는 곧 齊正 齊等 齊整 等의 意味로 服裝의 製作上 그 緣을 縫紡하야 齊一히 한다는 것을 表示함은 上記한 바와 같다, 그런데 論語 孟子 荀子 等의 典籍에는 어데나 다 齋衰로 되여있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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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번= {{TagSpage|2-2}} 見齋衰者 雖狎必變 (論語鄕黨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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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번= {{TagSpage|2-3}} 三年之喪 齋疏之服 (孟子滕文公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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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번= {{TagSpage|3-1}} 三年之喪 稱情而立文 所以爲至痛極也 齋戒苴枚 居廬食粥 席薪枕槐 所以爲至痛飾也(荀子 禮論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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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5번= {{TagSpage|3-2}} 이제 이 齋의 宇義를 보건대 곧 齋戒 齋日 齋忌 等에 보다싶이 禁忌를 意味한 것이니 이것은 正히 喪服의 呪術宗敎的 意味를 表示한 것이 分明하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齊衰란 것은 元來 齋衰이던 것이 齋齊의 音形이 相似한 所致로 齋衰라 하게 된 것이라 하겠고 또 이것을 疏衰라 하였음은 일즉 鄭玄의 注한 바 「疏猶如屬」이라 함과 같이 齋忌의 服을 平時의 服에 比하야 疏粗한 布로써 製作한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면 웨 이 齊衰에 限하야 喪服 本來의 原始宗敎的 意味를 表示하였을가 하면 그것은 곧 喪服의 始原的 形熊에 있서서 이 齊衰服이 가장 中心的인 것인 까닭이라고 보겠고 民俗의 變遷 範鬣의 發展에 따라서 其他 諸 等級의 服으로 分化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喪服의 等級이 그 原始的 形態에 있어서 이미 五等級으로 整然하게 紙織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니, 支那 古文獻 中에 喪葬의 禮가 此絞的 詳述하여 있는 荀子의 禮論篇에는 斬衰와 大功의 二等級이 記載되지 않었음은 곧 이러한 事實을 明證한 것이겠다. 이세 이러한 根據의 立脚하야 異灣의 新進 郭明昆이란 이는 儀禮의 五成의 組織이 後代의 加作이요 아마도 孟筍 以後의 時代에 當時의 貝俗으로 되어있는 齊衰 小功 緦麻의 三服에 對하야 斬衰와 大功을 齊衰와 小功의 우에 添加한 것이라고 하였으니,(3) 이제 儀禮에 對한 史的 考證의 是非는 筆者로서 論斷키 難한 問題이나. 如何間 五服의 組織이 禮敎文化의 發展에 따라서 漸次로 成立된 것이요 上古 時代로부터 完備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은 正當한 見解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미 考察한 바와 같이 荀子의 禮論 中에는 오즉 三等級의 喪服밖에는 制定된 바가 없으니 衣服의 制度는 必然코 孟荀 危後의 時代에 制定된 것이라고 推測함은 그다지 큰 誤謬가 아닐 것이요 이 五服의 制度가 確立함은 喪服의 習俗이 한갓 禮敎에 限定되지 않고 法制로 確定된 以後의 史實이라고 보는 것도 當然한 일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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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6번= {{TagSpage|4-1}} 그러나 엇젯든 이 五服制度는 禮制로서 또한 法制로서 中國文化를 閃節힌지 이미 長久한 歲月을 가젔으니, 따라서 그 發捉過程에 있어서 發展過程에 있어서, 그 原始宗敎的 意味는 不識間에 喪失되고 다만 製作上 또는 資料上의 等級만이 五服의 名稱에 殘存된 것이겠고 이 五服의 制度는 그대로 朝鮮 日本에 傳播하야 이른바 大家族 制度의 基礎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喪裝의 輕重 喪期의 長短 喪服者의 身分關係의 部門에 宜하야 五服의 構造 原理를 探究하려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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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 喪服(상복)의 제도는 원래 死者(사자) 즉 喪者(상자)에 대한 服者(복자)의 親疎遠近(친소원근) 관계와 가족적 사회적 尊卑(존비)의 지위 신분에 의하여 등급의 차이를 표시한 것인데, 그 등급적 차이가 이른바 斬衰(참최)・齊衰(자최)・大功(대공)・小功(소공)・緦麻(시마)의 오등급으로 되어있는 까닭에 상복제도를 곧 오복제도라고도 함은 우리가 널리 잘 아는 바이어니와, 이 五服(오복)의 등급이 무엇을 표준하고 무슨 근거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냐 함은 그다지 명료하지 않다. 文公家禮(문공가례)에 의하면 「斬不緝也 凡衣裳旁及下際 皆不縫纖」이라 하고, 「齊緝也 凡衣裳 旁及下際 皆緝」이라 하여 服裝(복장)의 末端(말단)을 緝(집) 또는 不緝(불집)하는 것으로써 最重(최중)한 참최의 복장과 자최 이하의 복장과를 구별하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등급의 차이가 복장제작 상의 방법에 의거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여기에 이 제작상 방법의 차이가 왜 다만 斬齊(참자) 2복에 한하여 표시되었느냐 하면 거기에는 한 개의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문공가례에 의하면 참최는 「用極鹿生麻布爲之」라 하고 자최는 「用比斬衰次等鹿生布」라 하고, 점차로 대공은 자최에 비하여, 또 소공은 대공에 비하여 稍熟細布(초숙세포)를 사용하고 시마는 極細熟布(극세숙포)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등급의 차이가 복장의 자료 즉 織布(직포)의 精粗(정조) 및 生熟(생숙)에 의거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이 직포의 정조의 차이가 왜 대공 소공 시마에 한하여 표시되었으며 왜 緝不緝(집불집)의 구분 원리 이외에 또 이런 구분 표준이 제정되었느냐 함에는 또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여하간 제작상으로나 자료상으로나 정조의 차이는 공통하여, 重服(중복)일수록 粗略(조약)하여서 수공이 경감되어 있는 것만은 간취하기에 용이한 葬實(장실)이다. 그리하여 이 사실은 일방으로 복자가 이상 시에 처할 만큼 비생산적인 생활양식의 자연한 표현이라 하겠고, 他方(타방)으로 상중의 상장이 평상시와 특이함을 요하는 주술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보기에 족한 것이다. 무릇 상장에 관한 諸多儀式(제다의식) 절차가 死靈(사령)에 대한 금기 즉 禳禍招福(양화초복)의 원시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널리 제민족간에 편재한 민속이어니와, 상복이 또한 사령에 대한 공포와 죽음의 感染(감염)에 대한 恐懼(공구)에 公本(공본)된 것이라 함은 일반 종교민족학자의 인정한 바이다,(2) 그러면 이러한 주술종교적 의미가 어찌하여 상기한바 오복의 명칭에는 표시되지 않엇는가 하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것이나, 의례 이외의 諸多(제다) 지나 고문헌에는 역시 이러한 주술종교적 의미를 표시한 오복의 명칭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으로 제2등급인 자최는 의례상복편에 「疏衰裳齊」라 하였으니, 이 齊(자)는 곧 齊正(자정) 齊等(자등) 齊整(자정) 등의 의미로 복장의 제작상 그 緣(연)을 縫紡(봉방)하여 齊一(제일)히 한다는 것을 표시함은 상기한 바와 같다, 그런데 論語(논어) 孟子(맹자) 荀子(순자) 등의 전적에는 어디나 다 자최로 되여있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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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번= 見齋衰者 雖狎必變 (論語鄕黨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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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번= 三年之喪 齋疏之服 (孟子滕文公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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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번= 三年之喪 稱情而立文 所以爲至痛極也 齋戒苴枚 居廬食粥 席薪枕槐 所以爲至痛飾也(荀子 禮論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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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5번= 이제 이 齋(자)의 宇義(자의)를 보건대 곧 齋戒(재계) 齋日(재일) 齋忌(재기) 등에 보다시피 금기를 의미한 것이니 이것은 正(정)히 喪服의 주술종교적 의미를 표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자최란 것은 원래 齋衰(재최)이던 것이 齋齊(재제)의 음형이 相似(상사)한 소치로 齋衰(재최)라 하게 된 것이라 하겠고 또 이것을 疏衰(소최)라 하였음은 일찍 鄭玄(정현)의 注(주)한 바 「疏猶如屬」이라 함과 같이 齋忌(재기)의 복을 평시의 복에 비하여 疏粗(소조)한 布(포)로써 제작한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면 왜 이 자최에 한하여 상복 본래의 원시종교적 의미를 표시하였을까 하면 그것은 곧 상복의 시원적 형태에 있서서 이 자최복이 가장 중심적인 것인 까닭이라고 보겠고 민속의 변천 範鬣(범렵)의 발전에 따라서 기타 제 등급의 복으로 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상복의 등급이 그 원시적 형태에 있어서 이미 오등급으로 정연하게 紙織(지직)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니, 지나 고문헌 중에 상장의 예가 비교적 상술하여 있는 순자의 禮論篇(예ᄚᅩᆫ편)에는 참최와 대공의 이등급이 기재되지 않았음은 곧 이러한 사실을 明證(명증)한 것이겠다. 이세 이러한 근거의 입각하여 異灣(이ᄆᆘᆫ)의 신진 郭明昆(곽명곤)이란 이는 의례의 五成(오성)의 조직이 후대의 加作(가작)이요 아마도 孟筍(맹순) 이후의 시대에 당시의 貝俗(패속)으로 되어있는 자최 소공 시마의 3복에 대하여 참최와 대공을 자최와 소공의 위에 첨가한 것이라고 하였으니,(3) 이제 의례에 대한 사적 고증의 시비는 필자로서 論斷(논단)키 어려운 문제이나. 여하간 오복의 조직이 예교문화의 발전에 따라서 점차로 성립된 것이요 상고 시대로부터 완비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은 정당한 견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순자의 예론 중에는 오직 삼등급의 상복 밖에는 제정된 바가 없으니 의복의 제도는 필연코 맹순 이후의 시대에 제정된 것이라고 추측함은 그다지 큰 오류가 아닐 것이요 이 오복의 제도가 확립함은 상복의 습속이 한갓 예교에 한정되지 않고 법제로 확정된 이후의 사실이라고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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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6번= 그러나 어쨌든 이 오복제도는 예제로서 또한 법제로서 중국문화를 ■節(■절)한지 이미 장구한 세월을 가졌으니, 따라서 그 발전 과정에 있어서, 그 원시종교적 의미는 불식간에 상실되고 다만 제작상 또는 자료상의 등급만이 오복의 명칭에 잔존된 것이겠고 이 오복의 제도는 그대로 조선 일본에 전파하여 이른바 대가족 제도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상장의 경중 喪期(상기)의 장단 상복자의 신분관계의 부문에 의하여 오복의 구조 원리를 탐구하려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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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번= {{TagSpage|4-2}}喪裝에 關하야 于先 그 資料가 웨 麻布로 되여있느냐 함에는 무슨 根據가 있을 듯하다. 一般으로 喪服이 呪術宗敎的 意義를 가지고 있는 限, 常用服과 다를 것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그 織物의 種類까지 常用服의 그것과 다른 것을 取하였는가 어뗜가 함은 儀禮喪服制의 制定된 當時의 支那民俗을 分明히 하기 前에 어떠타고 말하기 難한 일이다. 다만 이 麻布란 것은 東洋民俗의 衣服地로서 使用하게 된지 그 起原이 相當히 長久한 일이지만 그것을 特히 喪服用으로 한 것은 比牧的 粗大한 布類란 것이 重喪일수록 粗大한 織布임을 보아 分明한 일이요, 또 그 布色이 粗惡하게 보인 까닭인가 생{{TagPage|5-1}}각 된다. 織布의 粗大함을 使用함은 곧 加工이 僅少한 까닭이요 手工이 僅少한 것을 使用함은 非生産的 喪期에 잇는 裝服者로서 生活上 必然한 經濟的 要求에 依한 것이라 하겠다, 그럼으로 織物의 精粗를 區別하는 데는 紡織上의 升을 標準하고 斬衰 三升 齊衰 四升・五升・六升 大功 七升・八升・九升 小功 十一升・十二升 緦麻 十五升 等의 等級이 喪服記에 規定되여 있다. 또 服色으로 말하면 一般으로 白色・黑色・暗靑色이 使用되고 原則上으로는 廉價하고 平凡한 織物의 自然色이 使用된 것은 널리 諸民族에 잇는 習俗이다.(1) 그러나 喪服을 呪術宗敎的 見地에서 볼 때 死靈에 對한 禁忌의 表示틀 麻布요, 가튼 醜惡한 色으로써 함은 또한 原始宗敎的 要求에 依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經濟的 及 宗敎的 要求에 基因한 織布의 精粗와 服色의 美醜는 또한 喪布의 使用에 當하야 生熟의 區別에도 表示되여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家禮애 依하면 斬衰엔 極麤生布, 齊衰엔 次麤生布, 期엔 次等生布, 大功엔 稍麤熟布, 小功엔 稍細熟布, 總엔 極細熟布를 使用하도록 規定되여 있다. 即麤生布는 紡織이 粗大하고 色彩가 醜惡함으로 重喪에 用하고, 熟細布는 이에 反함으로 輕喪에 用하야 等級의差異를 表示한 것이다. 이러한 差異는 또한 喪裝의 一部分인 終帶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即 斬衰엔 苴麻 即有子麻, 齊衰 以下엔 某麻 即 無子麻, 總엔 熟麻가 使用된다. 儀禮 喪服篇에 依하면 斬衰章傳에 「苴経者 麻之有賞也 宜経大精 左本在下 去五分一 以爲帶」라 하였고, 齊衰章傳에 「牡麻者某麻也」라 하였으니, 이 直麻는 雌麻로 牡麻에 比하야 粗惡하고, 某麻는 雄麻로 苴麻에 比하야 精美함으로 因하야 斬齊 二者에 配當된 것이 明白하다. 일즉히 鄭玄의 註에 「苴麻者其貌苴 以爲経 服重者尙靂惡」이라 함은 곧 이러한 點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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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번= {{TagSpage|5-2}}다음에 喪裝의 諸部分을 보건대 가장 主要한 것은 勿論 衰裳이다. 衰는 元來 縗로 作하야 上衣를 말하고, 裳은 곧 下衣를 말한 것이다. 衰衣에는 前面으로 보아서 項部(濶中 또는 闕中)에 領(또는 加領)이있고 肩部에 適(辟領)이 있고 胸部(當心{{TagPage|6-1}}處)에 衰가 있고 後而으로 보아서 背部에 負板이 있으니, 제각금 規定된 寸法에 따라 布片을 附添한 것이다. 그러면 大體 이러한 것이 무엇을 意味하고 무엇에 由來한 것인가 하면, 或은 實效 上의 要求에 依한 것, 或은 禁의 意味를 表示한 것, 或은 常用服과의 差異를 指示한 것 等이려니와, 當初에 喪服이 制作될 當時의 支那服이 어떤 것이던가를 明白히 알기 前에는 이것을 어떠하다고 確言하기 어렵다. 그 中에 負极과 가튼 것은 葬儀 以前에 限하야 所用된 것을 보면 原始民俗에 있어서 服者 自身이 喪者의 屍體를 背負치야 運搬하는데 實用되였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肩部의 適과 負板과 胸部의 衰는 大功 以下에 所用되지 않은 것을 보면 喪의 輕重을 表示하기 爲하야 添加한 것임은 分明하다. 그뿐아니라 衰衣의 着服上으로 보아 喪의 輕重에 따라서 ■을 달리하는 것이니, 即 斬衰엔 前掩 其後 齊衰엔 後掩 其前이라는 規定이다. 이에 對하야 裳衣로 말하면 그 長短을 適宜히 하야 六幅 또는 七幅 十二幅 等 禮書의 度定이 一様하지 않다. 이 衰裳의 製作에 關하야 特히 注意할만한 것은 衣端을 縫緝하는 데 向內 向外의 差異가 있다는 것이다, 即 家禮註에 「衣縫向外 裳縫向内」라 하였으며 衣 即 衰衣만은 五服의 어느 境遇에나 다 向外로 된 것이 特色이다. 엇잿든 그것은 服者의 不吉을象徵하고 따라서 平常服과의 差異를 表示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야 이 衰裳의 內服으로 申衣란 것이 있으니 中單衣 또는 常用의 周衣와 恰似한 것이요 衰衣보다는 稍細布를 用하야 그 邊端을 다 縫緝한 것이다. 이 外에 冠・首純・孝巾・腰耗・絞帶・行纏・履 等이 있고, 또 婦女에 限하야 竹釵・蓋頭가 있으니 그 製法은 禮書에 따라 差異가 있거니와 그 原形은 大差가없을 것이다, 이제 四禮便覽에 依하야 喪裝 一般의 製作法을 大略 擧示하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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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번= {{TagSpage|6-2}} 一, 衰衣. 用布二幅 其長四尺六寸 中屈下垂 前後各長二尺三寸 除縫餘一寸則長一尺二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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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번= {{TagSpage|6-3}} ① 辟領. 兩肩上巾血處四寸之卜, 而疊後兩某左右幅各裁入四寸訖 分招所栽者向外 各加而肩上 只爲左有適 即辟領 旣{{TagPage|7-1}}摺所裁者向外 其前後左右虛處各四寸 即濶中也 大功以下 無辟領 其分摺向外者如诃去之 以後兩票聯合背後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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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번= {{TagSpage|7-2}} ② 袂. 用布二幅各長四尺六寸 中屈之 縫聯於外身之左右 又縫合其下際除縫餘一寸則亦各二尺二寸 又於袂端縫合其下 一尺爲方袂 留其二寸 一寸爲袂口 即枇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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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6번= {{TagSpage|7-3}} ③ 加領. 別用布長一尺六寸許闊八寸許縱摺而中分之 其下一半兩端各裁斷方四寸 際去不用 只裕中間八寸以加後之闢中 從項上分左右對摺向前垂下 以加於前濶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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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7번= {{TagSpage|7-4}} ④ 袷. 即加於領裏者 用布一條 長一尺六寸許 廣一尺四寸 分作三條 二條疊縫於領 以加於範闊中 一條换拓爲二重 加於後闊中 並加領 乃三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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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8번= {{TagSpage|7-5}} ⑤ 帶下. 用縱布廣一尺一寸 上屬於衣橫繞於腰 以腰之濶狹爲度除縫餘 一寸則高一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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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9번= {{TagSpage|7-6}} ⑥ 袵. 用 布二幅 各長三尺五寸 每幅上於左旁一尺之下 裁入六寸 下於右旁 一尺之上 亦裁人 六寸 便於劃處 相望斜裁 以廣頭向上疊之 血邊在外交峡 垂之如燕尾狀 齋綴於衣兩旁腋下 斬衰前掩其後 齊衰以下役袍其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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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0번= {{TagSpage|7-7}} ⑦ 衰. 用布長六寸廣四寸 綴於衣外衿之前當心處 大功以下不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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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1번= {{TagSpage|7-8}} ⑧ 負板, 用而方尺八寸 綴於領下 當背龍之 大功時下不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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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2번= {{TagSpage|7-9}} ⑨ 衣聲. 四即小帶 二各綴於內外衿旁 一綴於衣外右处下 一綴於衣沖左建下 使相掩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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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3번= {{TagSpage|7-10}} 二, 裳. 用布七幅 長短隨宜縫含爲前三後四 每縫除左右縫餘各一寸 前後不連 每幅作三輒 其輒則於每幅上頭 用指提起小許 摺向右又提起小許摺向左 兩相擄著 用線綴住而空其中 以爲輒 相揍在外 與幅巾輒不同 如是者三 又以布一條 廣四五寸 縱摺之 繼前後七幅 而前後相當處 疊複小許而夾縫之 約圍於腰 又交掩小許 兩端有小帶 後帶短向前 前帶{{TagPage|8-1}}長向後 使重圍而相結於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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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4번= {{TagSpage|8-2}} 三, 冠. 用厚紙糊爲材 廣五寸二分半 裏以布 布升比衰稍細 三年之喪 鍛而勿灰 蕃以下 用灰銀  裝積爲三梁 其法從一方 針七分半之外 又中摺七分半爲梁 如是者凡三 所餘又七分半 裝積之則爲廣三寸 或以廣五寸二分半之材 分識作七以第二分 第四分 第六分中摺之 爲梁則如法而大功以上皆向右 小功以下皆向左 用線縱縫其梁 長足跨頂前後 斩衰以麻繩爲武 齊衰以下用布 夾縫廣一寸許 從額上約之 至項後交向前 各至耳邊結之 垂其餘爲纓 使結於題下 屈冠兩頭 入武內 向外反屈之 縫於武 所謂外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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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5번= {{TagSpage|8-3}} 四, 孝巾. 用以承冠者 其制用布衷首 合縫在後之中 摺其兩方 藏在案 縫合其上 從前後望少如方冠 俗稱頭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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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6번= {{TagSpage|8-4}} 五, 中衣. 用以郁衰服者 用布用熟同衰服 布升衰梢細 那即渺舟 斬衰亦以布緣邊 或用中單衣 制如俗(周遮衣)袂端不圓殺 袂端及衿裔末 皆緣之 一名汗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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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7번= {{TagSpage|8-5}} 五, 首絰. 用以加於冠上者 用麻兩股相交 其大斬衰九寸 齊衰七寸二分 大功五寸七分 小功四寸六分 纏三寸五分. 斬衰麻本在左從額前向右圍之 以其末加本上而繫之 齊衰以下 麻本在右 從簽刖向左圍之 以其未繫於本下. 斬衰以麻繩爲櫻而垂之 結於願下 齊衰以下 用布 小功以下 無纓 中殡七月 亦無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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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8번= {{TagSpage|8-6}} 六, 腰経. 巾以申束絞帶上者 用麻兩股相交 五分首耗去一 以爲腰統 其圍斬衰七寸二分 齊衰五寸七分 大功四寸六分 小功三寸五分 綱二寸八分 其長中取圍腰而相結處左右 各綴小帶 以備固結斬衰用麻繩 齊衰以下用布 絰和交之卜左右 各散垂三尺不絞 至卒哭後絞之 年五十以上者及小功以下及婦人 不散垂 初即絞之 亦垂三尺 兩頭用麻繩結之 使不解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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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9번= {{TagSpage|9-1}} 七, 絞帶. 散膏用以束於腰経下者 斬衰用麻纖一條 長十八九尺 中屈之 爲兩股各一尺餘 結合於张予然後合其餘 順目相糾 四脚積而相重 即三重四胰 其大較小於腰経 通長八九尺 圍腰從左 過後至前 乃以其右端 穿彊子而反揷於右 齊衰以下 用布廣四寸許夾縫之爲二寸 大功小功總以此較狹 皆屈其右端尺許 用線綴住以爲张 布外各如其冠 生熟各如其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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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0번= {{TagSpage|9-2}} 七, 行糰. 家禮所謂勒帛 小學所謂縛袴 禮雖不見於喪服 今人皆用布爲之 固不可廢 升布當如中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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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1번= {{TagSpage|9-3}} 八, 履. 斬衰菅履 齊衰疎履 不杖麻履 齊衰三月與大功繩履 小功以不吉履無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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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2번= {{TagSpage|9-4}} 九, 蓋頭. 用以障身者 用布稍細者 凡三幅長與身齊或五尺 數斯不緝邊 齊衰緝邊 今俗羅兀其遺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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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3번= {{TagSpage|9-5}} 이 外에 童子服이 있으니 그 體制는 長者의 그것과 다름이 없거니와 冠巾首経이 없는 것이 特色이요, 또 侍者服 妾婢服의 制定이 있으니 前者는 生布衣로 俗制의 直領 或은 中單衣와 恰似하며 後者는 生布 背子를 用함이 特色이다. 또 共通 資料인 麻布는 喪의 輕重에 따라 生熟 屬細의 差異가 있음은 旣述한 바와 같거니와 経帶에 用한 麻 亦是 差異가 있으니 斬衰에는 苴麻 即有子麻를 用하고 齊衰 以下에는 桌麻 即無子麻를 用하고 總에는 熟麻를 用한다는規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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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4번= {{TagSpage|9-6}} 이 外에 喪裝의 一部로서 看過할 수 없는 것은 技이다 所謂 孝杖은 斬衰엔 竹杖이요 齊衰엔 桐杖인대 桐이 없으면 柳를 用한 것이 一般이니 이것은 禮記 喪服小記에 「苴杖竹也 削杖桐也」라는 原則에 依한 것이겠다. 그러면 웨 이 竹과 桐이 使用되였느냐 함에는 그 起原을 一考할 만한 일이다. 元來 喪裝 그것이 呪術宗敎的 意義를 가지고 있음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이 孝杖이란 것도 惡靈을 驅逐하고 邪魔를 鎭撫하는 一種의 呪具(talisman)라고 볼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竹과 相이 特히 死靈을 鎭撫하는 呪刀을 가진 것으로 본 까닭이였던지? 이제 잠간 文獻을 參考하건대 苟子에는 齊衰苴杖이라 할 뿐이요 斬衰와 杖에 對하야 아무런 規定이 없는대 이 點으로 보아서 이미 말한 바 郭明昆이란 이는 斬{{Tagpage|10-1}}衰가 齊衰에서 派生함과 갈이 削杖이 苴杖에서 派生한 것이라 하야 이와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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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5번= {{TagSpage|10-2}}  儀禮喪服篇의 作者는 齊衰에 對하야 斬衰를 생각해낸 것 같이 苴杖에 對하야 削杖을 생각해 낸 것인가 한다. 或은 斬과 削은 같은 觀念聯合의 心理에서 構成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가. 그리하야 新案의 斬衰에 從來의 苴杖을 配當하였음으로 從來의 齊衰에 新案의 削杖을 配當한 것 같다 云云(2) (譯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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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6번= {{TagSpage|10-3}} 그렇다면 웨 新案의 斬衰에 新案의 削杖을 配當치않고 오히려 從來의 齊衰에 新案의 削杖을 配當하였는가에 對하야 한 疑問이 생기는 것이다. 儀禮 喪服篇이 그가 말한 바와 같이 後代의 加作인지 아닌지는 筆者 容易히 論斷하기 어려운 問題이지만 이 點에 關하야는 그의 設明에 前後 矛盾을 늣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는 在杖을 苴麻 即 雌麻로 製作한 것이 그 原始的 形態라고 推斷하였으나, 여기에 또한 疑問이 없지 않다. 元來 雌麻를 苴麻라 함은 이미 鄭玄의 注한 바와 같이 그 色容이 癖惡한 까닭이요 따라서 直杖의 苴는 다만 粗惡한 것을 意味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즉 日本學者 湖村・桂五十郞氏의 註釋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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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7번= {{TagSpage|10-4}} 苴는 黯이다. 喪中 憂痛의 極에 貌가 蒼黯하다는 뜻으로 因하야 苴杖이라 한 것이다.(3) (譯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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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8번= {{TagSpage|10-5}}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苴杖은 苴色의 竹으로 製作한 杖이라고 보겠거니와, 特히 竹으로써 呪具를 삼는 것은 무슨 動因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듯건대 現今 毫灣에 있어도 父喪엔 竹을 用하고 母喪엔 旃瀆木을 用한다고 한다. 다만 孝杖의 原始的 形態를 呪具로 볼테이면 杖에 意味가 있을 것이요 그 枝의 種類를 擇한 것은 그 社會環境의 便宜 如何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中國이나 臺灣 또는 朝鮮에서는 이 竹이 適當하다고 본 까닭일 것이다 勿論 이 孝杖이란 것을 呪術宗敎的 意味로 본 것도 應當이려니와 또 當喪한 最近親으로서 哀痛이 極한 所致로 身體를 支持하는데 所用있다는{{Tagpage|11-1}} 實效的 要求에도 起因함을 看過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야 竹杖과 削杖을 區別하였음은 「大圓地方」이라는 觀念과 交天母地라는 觀念이 聯合하야 斬衰와 齊衰에 配當한 것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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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9번= {{TagSpage|11-2}} 以上으로써 當喪 卽時의 喪裝 一般에 關하야 槪觀하였거니와, 또 喪期의 遷移에 따라 漸々 喪裝이 變헤감을 看過하여서는 안될것이다. 大抵 喪期의 經過에 따라 次々로 常服에 歸還하게 됨은 自然한 經路일 것이다. 이제 그 變服의 經路를 보건대 朞年 以下는 一回로써 足한 것이나 三年喪인 境遇에는, 小祥・大祥・禪의 三期를 劃하아 變異한다. 먼저 小祥에는 練服으로變 하되 冠巾衰裳을 조곰 精細한 練布로 製作한다. 또 負板・適・琴는 그대로 두지만 男子는 首絰을 去하고 婦人은 腰紅을 去한다 그 代로 葛紅(俗稱총올치)을 使用한다. 喪禮備要에「應服作者改吉服 然猶盡其月 不服金珠錦繍紅紫」라 함은 朞年喪에 一週年을 지나면 一切 素衣로 變服할 것을 말한 것이요 四禮便覺에 「按家禮 只云 陳練服而無某服不練之文 正服不練 雖是蹄說 旣練液中衣 不練衰裳 則上下表夷其不相稱 並練衰裳 恐得宜」 라 함은 三年喪엔 小祥에 練服으로 變함을 말한 것이다. 或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期를 當하야 縫緝하지 않고 두엇든 斬衰裳을 縫緝한다 하나, 또 다른 사람은 斬衰終三年不緝이라야 새로 縫糾치 않은 것을 禮의 原則으로 삼는다. 士儀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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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0번= {{TagSpage|11-3}} 按喪服斬衰傳 斬不褂也 此必終三年 無變者也 若於小祥緝 不易以布帶 則與齊衰何別乎.(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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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였으니, 斬不緝이 原則일 것이요 麻繩의 絞帶도 또한 그대로 持續할 것이라 한다. 다음에 大祥엔 또한 練服으로 變하되 檀弓에 「祥而縞」라 하였으니, 続는 卽 純白이요 服裝은 一 切白色으로 된다. 士儀에 依하면 白布笠・布綱巾(白綿絲爲領又以爲圏子)・白布直領・白布帶叩麻靴를 用하고, 婦人도 또한 白衣裳을 着用한 것이라 하엿다. 마주막으로 禮祭(大祥後約一個月內)엔 禪服으로 變하되 譲布笠・讓布帶・矗駿綱巾(黑色)・擧布衫・熟麻靴(또는 皂靴) 等 一切 黯色{{Tagpage|12-1}}을 用하고 特히 婦人은 玉色(淡靑色)을 用함이 士儀의 規定이다. 譲은 說文에 淺靑黑이라 하였고, 淺黑이면 灰色이 되고 淺靑이면 玉色이 되니 朝鮮에 있어서 前者는 男子에 後者는 女子에 常用된 것이겠다. 禮記間傳에 「禪而纖」이라 하고 그 註에 「黑經白緯」라 하였으니, 이것은 곧 器과 恰似한 것이라고 보겠다. 士儀에 「按東俗無黑經白緯者 只用麻布 淡黑染之以代用而惟笠與帶爲然矣」라 함에 보다싶이 一般으로 朝鮮에는 淡黑 即 灰色이 常用服色이라 보겠고 畢竟 禰에 이르러 吉服 即 常服으로 變함을 아는 것이다. 또 한가지 喪人의 外出用으로 朝鮮 固有한것은 所謂 方笠이란 것이 있으니, 그 形大와 竹製인 것임은 우리가 周知한 바어니와, 士儀에 「按高麗之時代一言以上 皆着黑章方笠 吏胥着白方笠 聞其制古也 後世爲喪者之服也」라 함에 依하면 元來는 喪服用이 아닌 것이 分明하고, 이것을 喪人用으로 삼은 것은 服中의 喪人이 몸소 罪人으로 自處하야 他人에 接함을 避하는 觀念에서 始作된 것이라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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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1번= {{TagSpage|12-2}} 이제 上記의 禮論으로 보건대 小祥 時에 비로소 白色服을 用한 것 같이 보이나 朝鮮에 있어서 喪中의 日常用服은 喪의 當初부터 白色服임은 一般의 習俗이요 萬若 不幸하야 喪이 連續한 境遇에는 白衣가 相當히 長期限을 通하야 繼續 됨은 우리의 잘 아는 바이다. 그럼으로 因하야 朝鮮 白衣의 習俗은 혼이 이 喪服制에 基因한 것으로 說明하려 함도 無理가 아닌 일이라 하겠다. 卽 이에 關하야 通說에 依하면 明宗 乙丑 以後로 國恤이 連續하야 一般 人民으로 하여금 國喪을 勵行케 하고 따라서 素衣를 着用케 함으로 因하야 累次의 白衣禁制가 있었음에 不拘하고 드디어 白衣의 俗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芝峯 李捽光의 說에 依하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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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2번= {{TagSpage|12-3}} 東方之人 雖曰好着冃衣 然有禁制 故先王朝猶有白衣禁亂 士人無識者出入亦穿紅衣直領 余幼時及見之 蓋嘉靖乙丑以後 累經國恤 乃着素衣 遂之風俗今則紅直領絕無 而擧國皆衣素 華人笑之(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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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3번= {{TagSpage|13-1}} 라 하엿고, 또 이와 가튼 意見으로 文獻備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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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4번= {{TagSpage|13-2}} 肅宗十七年 申白衣之禁 國法元有禁白衣之制 自明宗乙丑以後 累經國恤 仍着素衣 此爲華人听笑.(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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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5번= {{TagSpage|13-3}} 라고 傳하였다. 그러나 設或 明宗 乙丑 以來 國喪의 繼續으로 因하야 素衣가 獎勵되였다 할지라도 벌서 그 以前에 白衣의 俗이 널리 있었다는 것을 明宗 乙丑 以前의 白衣禁制의 事實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經國大典의 刑典禁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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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6번= {{TagSpage|13-4}} 大小人員用紅衣白色表衣, 白笠紅粘者 酒器外金銀 靑畫白磁器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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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7번= {{TagSpage|13-5}} 라 하였고 그 註에 「正兵庶人白色衣勿禁」이라 한 것을 보면 李朝의 初期에도 白衣의 俗이 一 般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이 白衣의 禁制가 國家의 法令으로서 頒布하게 되였던가를 살피건대 服色으로써 官民上下의 別을 分明히 하자는 데 根據한 것 같다. 일즉 鄭道傳이 上書로써 服色을 統制하자는데 비롯하야 太祖 戊寅 七年 六月 登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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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8번= {{TagSpage|13-6}} 憲司上言 先王衣之制 尊卑有等 正間之色不可紊也 我國家上下服用 尙未有章 願自今進上服  用皆正色 凡男女黃色・灰色・航素之衣 一皆禁斷 上允之.(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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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9번= {{TagSpage|13-7}} 라 한 것이 그 發端인 듯하고 또 그 裡面에는 民間의 衣服이 奢侈에 흐름이 있을 것을 禁斷하려는 意思도 있었을 것이니 婦女의 服制에 黑羅帽・由箱裙 等을 禁止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어 世祖 丙子 二年 三月 丙申에 集賢殿直提學 梁誠之의 上疏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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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0번= {{TagSpage|13-8}} 一定服色 盖服色之定 所以辨上下 一風俗不可不嚴也 元人尙白 大明尙黑 以至日本尙靑 皆有一定之制焉 吾東方朝冠公服 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 任用雜色甚爲鄙俚 乞依公服制度 堂上官以上爲一色 六品以上爲一色 流品員成衆{{Tagpage|14-1}}官 衣冠子弟爲一色 諸衛軍士爲一色 京外良人史胥爲一色 京外良吏胥爲一色 公私賤口工匠爲一色 以此依品漸次穿着 或締用一色 以齊國俗.(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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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1번= {{TagSpage|14-2}} 이라 하였으니, 服色制定을 一層 더 徹底히 하야 階級의 表示를 分明히 하자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白衣의 俗은 如前히 存續한 것은 事實이다. 그러면 어찌 그리도 强靱한 힘으로써 白衣의 俗이 存續하였느냐 하면 己往 李捽光의 說과 같이 明宗 乙丑 以後의 國恤로 因한 것이라고도 하겠거니와, 그보다 더 根源的인 原因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벌서 高麗時代에도 白衣의 俗이 一般的이였든 것을 보아서 알 것이요 또한 高麗 末葉에 五行圖讖思想으로써 白衣의 禁制가 있었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即 忠烈王 元年 六月에 大司局의 上言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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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2번= {{TagSpage|14-3}} 大司局言 東方木位 色當尙靑而白者金之色也 國人自着戎服 多視以白紆衣 木制於金之象也  請禁白色服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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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3번= {{TagSpage|14-4}} 라 함이 그것이다. 勿論 이 五行圖讖思想으로서의 說明은 迷信에 不過한 것일 것이나 그것은 高麗 民間의 心理를 捕捉하기에 足한 信念이었든 것이요, 또 그 反面에는 白衣의 俗이 一般的이였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또 高麗 以前에 遡及하야 三國時代로 보건대 舊唐書에 新羅의 風俗을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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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4번= {{TagSpage|14-5}} 其風俗刑法衣服與高一句麗百濟略同 而朝服尙白.(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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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5번= {{TagSpage|14-6}} 이라 하고, 高句麗의 俗을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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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6번= {{TagSpage|14-7}} 衣裳服飾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斷.(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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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7번= {{TagSpage|14-8}} 이라 하였으니, 그 記錄이 中國人의 觀察에 依한 것이요, 또한 簡短한 것이나마, 大槪 그 一般을 窺知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가티 보건대 朝鮮 民族은 上古 時代로 부터 尙白의 俗을 이루었든 것이요, 그 淵源이 久遠한 일인 만큼 明宗 乙丑 以{{Tagpage|15}}後 國恤에 基因한다는 李眸光의 說을 그대로 首肯할 수 없음은 이미 城大敎授 烏山喜一 氏의 說破함과 갈다. 그러나 한번 더 도리켜 본다면 本來가 白衣의 俗으로 律續하던 中 一層 이것을 深厚하게 되고 다시 戀改 할 수 없게 된 것은 歷代의 國恤로 因한 國喪보다도 오히려民間의 禮俗이 漸次로 一般化하야 喪服의 制度가 勵行하게 됨에 따라 服中의 白衣가 不識中 通堂用으로 되었다는 것이 그 副因으로서 老慮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勿論 그 裡面에는 染色術이 發達되지 못하고 色衣를 容易히 求調할 수 없을만큰 經濟的 條件이 不許한 것도 考慮할 것이려니와, 喪中에 있는 服人의 不生產的이요 不社交的인 生活形態에서 自然히 發生된 習俗이 傳統的인 白衣의 俗을 一層 더 強靱하게 存續케 한 것이라고 볼만한 일이다.
  
|목차2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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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번= 상장에 관하여 우선 그 자료가 왜 麻布(마포)로 되어 있느냐 함에는 무슨 근거가 있을 듯하다. 일반으로 상복이 주술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한, 상용복과 다를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그 직물의 종류까지 상용복의 그것과 다른 것을 취하였는가 어뗜가 함은 의례 상복제의 제정된 당시의 지나 민속을 분명히 하기 전에 어떻다고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 마포란 것은 동양민속의 의복지로서 사용하게 된 지 그 기원이 상당히 장구한 일이지만 그것을 특히 상복용으로 한 것은 비교적 粗大(조대)한 布(포)류란 것이 중상일수록 조대한 직포임을 보아 분명한 일이요, 또 그 布色(포색)이 조악하게 보인 까닭인가 생각 된다. 직포의 조대함을 사용함은 곧 가공이 근소한 까닭이요 수공이 근소한 것을 사용함은 비생산적 상기에 있는 裝服者(장복자)로서 생활상 필연한 경제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그럼으로 직물의 정조를 구별하는 데는 방직상의 升(승)을 표준하고 참최 3승 자최 4승・5승・6승 대공 7승・8승・9승 소공 11승・12승 시마 15승 등의 등급이 상복기에 규정되어 있다. 또 복색으로 말하면 일반으로 백색・흑색・암청색이 사용되고 원칙상으로는 廉價(염가)하고 평범한 직물의 자연색이 사용된 것은 널리 제민족에 잇는 습속이다.(1) 그러나 상복을 주술종교적 견지에서 볼 때 사령에 대한 금기의 표시를 마포요, 같은 추악한 색으로써 함은 또한 원시종교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경제적 및 종교적 요구에 기인한 직포의 정조와 복색의 미추는 또한 상포의 사용에 당하여 생숙의 구별에도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례에 의하면 자최엔 極麤生布(극추생포), 참최엔 次麤生布(차추생포), 期(기)엔 次等生布(차등생포), 대공엔 稍麤熟布(초추숙포), 소공엔 稍細熟布(초세숙포), 시마엔 極細熟布(극세숙포)를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즉 麤生布(추생포)는 방직이 조대하고 색채가 추악함으로 중상에 용하고, 숙세포는 이에 반함으로 경상에 용하여 등급의 차이를 표시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또한 상장의 일부분인 終帶(종대)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즉 참최엔 苴麻(저마) 즉 有子麻(유자마), 자최 이하엔 某麻(모마) 즉 無子麻(무자마), 시마엔 熟麻(숙마)가 사용된다. 의례 상복편에 의하면 斬衰章傳(참최장전)에 「苴経者 麻之有賞也 宜経大精 左本在下 去五分一 以爲帶」라 하였고, 齊衰章傳(자최장전)에 「牡麻者某麻也」라 하였으니, 이 直麻(직마)는 雌麻(자마)로 某麻(모마)에 비하여 조악하고, 모마는 雄麻(웅마)로 苴麻(저마)에 비하여 精美(정미)함으로 인하여 참자 2자에 배당된 것이 명백하다. 일찍히 정현의 주에 「苴麻者其貌苴 以爲経 服重者尙靂惡」이라 함은 곧 이러한 점을 말한 것이다.
|목차2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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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 다음에 상장의 제부분을 보건대 가장 주요한 것은 물론 衰裳(최상)이다. 衰(최)는 원래 縗(최)로 作(작)하여 상의를 말하고, 裳(상)은 곧 하의를 말한 것이다. 衰衣(최의)에는 전면으로 보아서 項部(항부, 濶中(활중) 또는 闕中(궐중))에 領(령, 또는 加領(가령))이 있고 肩部(견부)에 適(적, 辟領(피령))이 있고 흉부(當心處, 당심처)에 최가 있고 後而(후이)으로 보아서 背部(배부)에 負板(부판)이 있으니, 제각기 규정된 寸法(촌법)에 따라 布片(포편)을 附添(부첨)한 것이다. 그러면 대체 이러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에 유래한 것인가 하면, 혹은 실효 상의 요구에 의한 것, 혹은 금의 의미를 표시한 것, 혹은 상용복과의 차이를 지시한 것 등이려니와, 당초에 상복이 제작될 당시의 지나복이 어떤 것이던가를 명백히 알기 전에는 이것을 어떠하다고 확언하기 어렵다. 그 중에 부겁과 같은 것은 葬儀(장의) 이전에 한하여 所用(소용)된 것을 보면 원시민속에 있어서 복자 자신이 상자의 시체를 背負(배부)치야 운반하는데 실용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견부의 적과 부판과 흉부의 최는 대공 이하에 소용되지 않은 것을 보면 상의 경중을 표시하기 위하여 첨가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 뿐 아니라 최의의 착복상으로 보아 상의 경중에 따라서 ■을 달리하는 것이니, 즉 참최엔 前掩(전엄) 其後(기후) 자최엔 後掩(후엄) 其前(기전)이라는 규정이다. 이에 대하여 裳衣(상의)로 말하면 그 장단을 適宜(적의)히 하여 6폭 또는 7폭 12폭 등 예서의 度定(탁정)이 一様(일양)하지 않다. 이 衰裳(최상)의 제작에 관하여 특히 주의할 만한 것은 衣端(의단)을 縫緝(봉집)하는 데 向內(향내) 向外(향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가례 주에 「衣縫向外 裳縫向内」라 하였으며 의 즉 衰衣(상의)만은 오복의 어느 경우에나 다 향외로 된 것이 특색이다. 어쨌든 그것은 복자의 불길을 상징하고 따라서 평상복과의 차이를 표시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衰裳(최상)의 내복으로 申衣(신의)란 것이 있으니 中單衣(중단의) 또는 상용의 周衣(주의)와 흡사한 것이요 衰衣(상의)보다는 稍細布(초세포)를 用(용)하여 그 邊端(변단)을 다 봉집한 것이다. 이 외에 冠(관)・首純(수순)・孝巾(효건)・腰耗(요모)・絞帶(교대)・行纏(행전)・履(리) 등이 있고, 또 婦女(부녀)에 한하여 竹釵(죽채)・蓋頭(개두)가 있으니 그 製法(제법)은 예서에 따라 차이가 있거니와 그 원형은 大差(대차)가 없을 것이다, 이제 四禮便覽(사례편람)에 의하여 상장 일반의 제작법을 대략 擧示(거시)하면 이러하다
|목차2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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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번= 一, 衰衣. 用布二幅 其長四尺六寸 中屈下垂 前後各長二尺三寸 除縫餘一寸則長一尺二寸.
|목차2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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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번= ① 辟領. 兩肩上巾血處四寸之卜, 而疊後兩某左右幅各裁入四寸訖 分招所栽者向外 各加而肩上 只爲左有適 即辟領 旣摺所裁者向外 其前後左右虛處各四寸 即濶中也 大功以下 無辟領 其分摺向外者如诃去之 以後兩票聯合背後縫.
|목차2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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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번= ② 袂. 用布二幅各長四尺六寸 中屈之 縫聯於外身之左右 又縫合其下際除縫餘一寸則亦各二尺二寸 又於袂端縫合其下 一尺爲方袂 留其二寸 一寸爲袂口 即枇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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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6번= ③ 加領. 別用布長一尺六寸許闊八寸許縱摺而中分之 其下一半兩端各裁斷方四寸 際去不用 只裕中間八寸以加後之闢中 從項上分左右對摺向前垂下 以加於前濶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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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7번= ④ 袷. 即加於領裏者 用布一條 長一尺六寸許 廣一尺四寸 分作三條 二條疊縫於領 以加於範闊中 一條换拓爲二重 加於後闊中 並加領 乃三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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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8번= ⑤ 帶下. 用縱布廣一尺一寸 上屬於衣橫繞於腰 以腰之濶狹爲度除縫餘 一寸則高一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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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9번= ⑥ 袵. 用 布二幅 各長三尺五寸 每幅上於左旁一尺之下 裁入六寸 下於右旁 一尺之上 亦裁人 六寸 便於劃處 相望斜裁 以廣頭向上疊之 血邊在外交峡 垂之如燕尾狀 齋綴於衣兩旁腋下 斬衰前掩其後 齊衰以下役袍其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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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0번= ⑦ 衰. 用布長六寸廣四寸 綴於衣外衿之前當心處 大功以下不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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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1번= ⑧ 負板, 用而方尺八寸 綴於領下 當背龍之 大功時下不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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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2번= ⑨ 衣聲. 四即小帶 二各綴於內外衿旁 一綴於衣外右处下 一綴於衣沖左建下 使相掩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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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3번= 二, 裳. 用布七幅 長短隨宜縫含爲前三後四 每縫除左右縫餘各一寸 前後不連 每幅作三輒 其輒則於每幅上頭 用指提起小許 摺向右又提起小許摺向左 兩相擄著 用線綴住而空其中 以爲輒 相揍在外 與幅巾輒不同 如是者三 又以布一條 廣四五寸 縱摺之 繼前後七幅 而前後相當處 疊複小許而夾縫之 約圍於腰 又交掩小許 兩端有小帶 後帶短向前 前帶長向後 使重圍而相結於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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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4번= 三, 冠. 用厚紙糊爲材 廣五寸二分半 裏以布 布升比衰稍細 三年之喪 鍛而勿灰 蕃以下 用灰銀  裝積爲三梁 其法從一方 針七分半之外 又中摺七分半爲梁 如是者凡三 所餘又七分半 裝積之則爲廣三寸 或以廣五寸二分半之材 分識作七以第二分 第四分 第六分中摺之 爲梁則如法而大功以上皆向右 小功以下皆向左 用線縱縫其梁 長足跨頂前後 斩衰以麻繩爲武 齊衰以下用布 夾縫廣一寸許 從額上約之 至項後交向前 各至耳邊結之 垂其餘爲纓 使結於題下 屈冠兩頭 入武內 向外反屈之 縫於武 所謂外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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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5번= 四, 孝巾. 用以承冠者 其制用布衷首 合縫在後之中 摺其兩方 藏在案 縫合其上 從前後望少如方冠 俗稱頭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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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6번= 五, 中衣. 用以郁衰服者 用布用熟同衰服 布升衰梢細 那即渺舟 斬衰亦以布緣邊 或用中單衣 制如俗(周遮衣)袂端不圓殺 袂端及衿裔末 皆緣之 一名汗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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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7번= 五, 首絰. 用以加於冠上者 用麻兩股相交 其大斬衰九寸 齊衰七寸二分 大功五寸七分 小功四寸六分 纏三寸五分. 斬衰麻本在左從額前向右圍之 以其末加本上而繫之 齊衰以下 麻本在右 從簽刖向左圍之 以其未繫於本下. 斬衰以麻繩爲櫻而垂之 結於願下 齊衰以下 用布 小功以下 無纓 中殡七月 亦無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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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8번= 六, 腰経. 巾以申束絞帶上者 用麻兩股相交 五分首耗去一 以爲腰統 其圍斬衰七寸二分 齊衰五寸七分 大功四寸六分 小功三寸五分 綱二寸八分 其長中取圍腰而相結處左右 各綴小帶 以備固結斬衰用麻繩 齊衰以下用布 絰和交之卜左右 各散垂三尺不絞 至卒哭後絞之 年五十以上者及小功以下及婦人 不散垂 初即絞之 亦垂三尺 兩頭用麻繩結之 使不解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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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9번= 七, 絞帶. 散膏用以束於腰経下者 斬衰用麻纖一條 長十八九尺 中屈之 爲兩股各一尺餘 結合於张予然後合其餘 順目相糾 四脚積而相重 即三重四胰 其大較小於腰経 通長八九尺 圍腰從左 過後至前 乃以其右端 穿彊子而反揷於右 齊衰以下 用布廣四寸許夾縫之爲二寸 大功小功總以此較狹 皆屈其右端尺許 用線綴住以爲张 布外各如其冠 生熟各如其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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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0번= 七, 行糰. 家禮所謂勒帛 小學所謂縛袴 禮雖不見於喪服 今人皆用布爲之 固不可廢 升布當如中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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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1번= 八, 履. 斬衰菅履 齊衰疎履 不杖麻履 齊衰三月與大功繩履 小功以不吉履無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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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2번= 九, 蓋頭. 用以障身者 用布稍細者 凡三幅長與身齊或五尺 數斯不緝邊 齊衰緝邊 今俗羅兀其遺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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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3번= 이 외에 童子服(동자복)이 있으니 그 체제는 長者(장자)의 그것과 다름이 없거니와 冠巾(관건)首経(수경)이 없는 것이 특색이요, 또 侍者服(대자복) 妾婢服(첩비복)의 제정이 있으니 전자는 生布衣(생포의)로 俗制(속제)의 直領(직령) 혹은 中單衣(중단의)와 흡사하며 후자는 생포 背子(배자)를 用(용)함이 특색이다. 또 공통 자료인 마포는 상의 경중에 따라 생숙 麤細(추세)의 차이가 있음은 기술한 바와 같거니와 経帶(경대)에 용한 마 역시 차이가 있으니 참최에는 저마 즉 유자마를 용하고 자최 이하에는 모마 즉 무자마를 용하고 총에는 숙마를 용한다는 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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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4번=  이 외에 상장의 일부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杖(장)이다 소위 苴杖(저장)은 참최엔 竹杖(죽장)이요 자최엔 桐杖(동장)인대 桐(동)이 없으면 柳(유)를 용한 것이 일반이니 이것은 예기 喪服小記(상복소기)에 「苴杖竹也 削杖桐也」라는 원칙에 의한 것이겠다. 그러면 왜 이 죽과 동이 사용되었느냐 함에는 그 기원을 一考(일고)할 만한 일이다. 원래 상장 그것이 주술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이 효장이란 것도 악령을 구축하고 邪魔(사마)를 진무하는 일종의 呪具(주구, talisman)라고 볼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죽과 동이 특히 사령을 진무하는 呪刀(주도)을 가진 것으로 본 까닭이였던지? 이제 잠깐 문헌을 참고하건대 순자에는 齊衰苴杖(자최저장)이라 할 뿐이요 참최와 장에 대하여 아무런 규정이 없는데 이 점으로 보아서 이미 말한 바 곽명곤이란 이는 참최가 자최에서 파생함과 갈이 削杖(삭장)이 저장에서 파생한 것이라 하여 이와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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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5번=  의례 상복편의 作者(작자)는 자최에 대하여 참최를 생각해낸 것 같이 저장에 대하여 삭장을 생각해 낸 것인가 한다. 혹은 斬(참)과 削(삭)은 같은 관념 연합의 심리에서 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리하여 新案(신안)의 참최에 종래의 저장을 배당하였음으로 종래의 자최에 신안의 삭장을 배당한 것 같다 운운(2) (譯原文, 역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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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6번= 그렇다면 왜 新案(신안)의 참최에 신안의 삭장을 배당치않고 오히려 종래의 자최에 신안의 삭장을 배당하였는가에 대하여 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의례 상복편이 그가 말한 바와 같이 후대의 가작인지 아닌지는 필자 용이히 논단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이 점에 관하여는 그의 설명에 전후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는 삭장을 저마 즉 雌麻(자마)로 제작한 것이 그 원시적 형태라고 推斷(추단)하였으나, 여기에 또한 의문이 없지 않다. 원래 자마를 저마라 함은 이미 정현의 주한 바와 같이 그 色容(색용)이 癖惡(벽악)한 까닭이요 따라서 저장直의 저는 다만 조악한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찍 일본학자 湖村(호촌)・桂五十郞(계오십랑) 씨의 주석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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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7번= 저는 黯(암)이다. 상중 憂痛(우통)의 극에 貌(모)가 蒼黯(창암)하다는 뜻으로 인하여 저장이라 한 것이다.(3) (譯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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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8번=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저장은 苴色(저색)의 죽으로 제작한 장이라고 보겠거니와, 특히 죽으로써 주구를 삼는 것은 무슨 동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듣건대 현금 臺灣(대만)에 있어도 父喪(부상)엔 죽을 용하고 母喪(모상)엔 旃瀆木(전독목)을 용한다고 한다. 다만 孝杖(효장)의 원시적 형태를 주구로 볼테이면 장에 의미가 있을 것이요 그 장의 종류를 택한 것은 그 사회환경의 편의 여하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중국이나 대만 또는 조선에서는 이 죽이 적당하다고 본 까닭일 것이다 물론 이 효장이란 것을 주술종교적 의미로 본 것도 응당이려니와 또 當喪(당상)한 最近親(최근친)으로서 애통이 극한 소치로 신체를 지지하는데 所用(소용)있다는 실효적 요구에도 기인함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죽장과 삭장을 구별하였음은 「大圓地方」이라는 관념과 父天母地(부천모지)라는 관념이 연합하여 참최와 자최에 배당한 것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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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9번= 이상으로써 當喪(당상) 즉시의 상장 일반에 관하여 개관하였거니와, 또 상기의 遷移(천이)에 따라 점점 상장이 변해 감을 간과하여서는 안될것이다. 대저 상기의 경과에 따라 차차로 상복에 귀환하게 됨은 자연한 경로일 것이다. 이제 그 變服(변복)의 경로를 보건대 朞年(기년) 이하는 일회로써 족한 것이나 삼년상인 경우에는, 小祥(소상)・大祥(대상)・禪(선)의 3기를 획하아 변이한다. 먼저 소상에는 練服(연복)으로 변하되 冠巾衰裳(관건쇠상)을 조금 精細(정세)한 練布(연포)로 제작한다. 또 부판・適(적)・琴(금)는 그대로 두지만 남자는 首絰(수질)을 去(거)하고 부인은 腰紅(요홍)을 거한다 그 대로 葛紅(갈혹, 속칭 총올치)을 사용한다. 喪禮備要(상례비요)에 「應服作者改吉服 然猶盡其月 不服金珠錦繍紅紫」라 함은 기년상에 1주년을 지나면 일절 素衣(소의)로 변복할 것을 말한 것이요 사례편람에 「按家禮 只云 陳練服而無某服不練之文 正服不練 雖是蹄說 旣練液中衣 不練衰裳 則上下表夷其不相稱 並練衰裳 恐得宜」 라 함은 삼년상엔 소상에 연복으로 변함을 말한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기를 당하여 봉집하지 않고 두었던 참쇠상을 봉집한다 하나, 또 다른 사람은 斬衰終三年不緝(참최종삼년불집)이라야 새로 봉집치 않은 것을 예의 원칙으로 삼는다. 士儀(사의)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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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0번= 按喪服斬衰傳 斬不褂也 此必終三年 無變者也 若於小祥緝 不易以布帶 則與齊衰何別乎.(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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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였으니, 斬不緝(참불집)이 원칙일 것이요 麻繩(마승)의 교대도 또한 그대로 지속할 것이라 한다. 다음에 대상엔 또한 연복으로 변하되 檀弓(단궁)에 「祥而縞」라 하였으니, 縞(호)는 즉 순백이요 복장은 일절 백색으로 된다. 사의에 의하면 白布笠(백포립)・布綱巾(포강건, 白綿絲爲領又以爲圏子(백면사위령우이위권자))・白布直領(백포직령)・白布帶叩麻靴(백포대고마화)를 용하고, 부인도 또한 白衣裳(백의상)을 착용한 것이라 하엿다. 마지막으로 례제(대상 후 약 1개월 내)엔 禪服(선복)으로 변하되 譲布笠(양포립)・讓布帶(양포대)・矗駿綱巾(촉준강건, 흑색)・擧布衫(거포삼)・熟麻靴(숙마화, 또는 皂靴(조화)) 등 일절 암색을 용하고 특히 부인은 옥색(담청색)을 용함이 사의의 규정이다. 譲(양)은 說文(설문)에 淺靑黑(천청흑)이라 하였고, 淺黑(천흑)이면 회색이 되고 淺靑(천청)이면 옥색이 되니 조선에 있어서 전자는 남자에 후자는 여자에 상용된 것이겠다. 禮記聞傳(예기문전)에 「禪而纖」이라 하고 그 주에 「黑經白緯」라 하였으니, 이것은 곧 器(기)과 흡사한 것이라고 보겠다. 사의에 「按東俗無黑經白緯者 只用麻布 淡黑染之以代用而惟笠與帶爲然矣」라 함에 보다시피 일반으로 조선에는 담흑 즉 회색이 상용복색이라 보겠고 필경 선에 이르러 吉服(길복) 즉 常服(상복)으로 변함을 아는 것이다. 또 한가지 상인의 외출용으로 조선 고유한 것은 소위 方笠(방립)이란 것이 있으니, 그 形大(형대)와 竹製(죽제)인 것임은 우리가 주지한 바어니와, 사의에 「按高麗之時代一言以上 皆着黑章方笠 吏胥着白方笠 聞其制古也 후세爲喪者之服也」라 함에 의하면 원래는 상복용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이것을 喪人用(상인용)으로 삼은 것은 복중의 상인이 몸소 죄인으로 자처하여 타인에 접함을 피하는 관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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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1번= 이제 상기의 예론으로 보건대 소상 시에 비로소 백색복을 용한 것 같이 보이나 조선에 있어서 상중의 일상용복은 상의 당초부터 백색복임은 일반의 습속이요 만약 불행하여 상이 연속한 경우에는 백의가 상당히 장기한을 통하여 계속 됨은 우리의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인하여 조선 백의의 습속은 혼이 이 상복제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려 함도 무리가 아닌 일이라 하겠다. 즉 이에 관하여 통설에 의하면 明宗(명종) 을축 이후로 국휼이 연속하여 일반 인민으로 하여금 국상을 勵行(여행)케 하고 따라서 素衣(소의)를 착용케 함으로 인하여 누차의 백의 금제가 있었음에 불구하고 드디어 백의의 속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芝峯(지봉) 李捽光(이수광)의 설에 의하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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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2번= 東方之人 雖曰好着冃衣 然有禁制 故先王朝猶有白衣禁亂 士人無識者出入亦穿紅衣直領 余幼時及見之 蓋嘉靖乙丑以後 累經國恤 乃着素衣 遂之風俗今則紅直領絕無 而擧國皆衣素 華人笑之(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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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3번= 라 하였고, 또 이와 같은 의견으로 文獻備考(문헌비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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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4번= 肅宗十七年 申白衣之禁 國法元有禁白衣之制 自明宗乙丑以後 累經國恤 仍着素衣 此爲華人听笑.(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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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5번= 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설혹 명종 을축 이래 국상의 계속으로 인하여 소의가 장려되었다 할지라도 벌서 그 이전에 백의의 속이 널리 있었다는 것을 명종 을축 이전의 백의 금제의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經國大典(경국대전)의 刑典(형전) 禁條(금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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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6번= 大小人員用紅衣白色表衣, 白笠紅粘者 酒器外金銀 靑畫白磁器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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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7번= 라 하였고 그 주에 「正兵庶人白色衣勿禁」이라 한 것을 보면 이조의 초기에도 백의의 속이 一 반적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이 백의의 금제가 국가의 법령으로서 반포하게 되었던가를 살피건대 복색으로써 관민상하의 별을 분명히 하자는 데 근거한 것 같다. 일찍 鄭道傳(정도전)이 上書(상서)로써 복색을 통제하자는데 비롯하여 太祖(태조) 무인 7년 6월 계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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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8번= 憲司上言 先王衣之制 尊卑有等 正間之色不可紊也 我國家上下服用 尙未有章 願自今進上服  用皆正色 凡男女黃色・灰色・航素之衣 一皆禁斷 上允之.(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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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9번= 라 한 것이 그 발단인 듯하고 또 그 이면에는 민간의 의복이 사치에 흐름이 있을 것을 금단하려는 의사도 있었을 것이니 부녀의 복제에 黑羅帽(흑라모)・由箱裙(유상군) 등을 금지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어 世祖(세조) 병자 2년 3월 병신에 集賢殿直提學(집현전직제학) 梁誠之(양성지)의 上疏(상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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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0번= 一定服色 盖服色之定 所以辨上下 一風俗不可不嚴也 元人尙白 大明尙黑 以至日本尙靑 皆有一定之制焉 吾東方朝冠公服 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 任用雜色甚爲鄙俚 乞依公服制度 堂上官以上爲一色 六品以上爲一色 流品員成衆官 衣冠子弟爲一色 諸衛軍士爲一色 京外良人史胥爲一色 京外良吏胥爲一色 公私賤口工匠爲一色 以此依品漸次穿着 或締用一色 以齊國俗.(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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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1번= 이라 하였으니, 복색 제정을 일층 더 철저히 하여 계급의 표시를 분명히 하자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의의 속은 여전히 존속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어찌 그리도 강인한 힘으로써 백의의 속이 존속하였느냐 하면 기왕 이졸광의 설과 같이 명종 을축 이후의 국휼로 인한 것이라고도 하겠거니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벌서 고려시대에도 백의의 속이 일반적이였던 것을 보아서 알 것이요 또한 고려 말엽에 五行圖讖(오행도참)사상으로써 백의의 금제가 있었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즉 忠烈王(충렬왕) 원년 6월에 大司局(대사국)의 상언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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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2번= 大司局言 東方木位 色當尙靑而白者金之色也 國人自着戎服 多視以白紆衣 木制於金之象也  請禁白色服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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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3번= 라 함이 그것이다. 물론 이 오행도참사상으로서의 설명은 미신에 불과한 것일 것이나 그것은 고려 민간의 심리를 포착하기에 족한 신념이었던 것이요, 또 그 반면에는 백의의 속이 일반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또 고려 이전에 소급하여 삼국시대로 보건대 舊唐書(구당서)에 신라의 풍속을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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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4번= 其風俗刑法衣服與高一句麗百濟略同 而朝服尙白.(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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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5번= 이라 하고, 고구려의 속을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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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6번= 衣裳服飾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斷.(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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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7번= 이라 하였으니, 그 기록이 중국인의 관찰에 의한 것이요, 또한 간단한 것이나마, 대개 그 일반을 窺知(규지)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보건대 조선 민족은 상고 시대로부터 尙白(상백)의 속을 이루었던 것이요, 그 연원이 구원한 일인 만큼 명종 을축 이후 국휼에 기인한다는 이수광의 설을 그대로 수긍할 수 없음은 이미 城大(성대)교수 烏山喜一(오산희일) 씨의 설파함과 갈다. 그러나 한번 더 돌이켜 본다면 본래가 백의의 속으로 律續(율속)하던 중 일층 이것을 深厚(심후)하게 되고 다시 변개 할 수 없게 된 것은 역대의 국휼로 인한 국상보다도 오히려 민간의 예속이 점차로 일반화하여 상복의 제도가 勵行(여행)하게 됨에 따라 복중의 백의가 불식 중 통상용으로 되었다는 것이 그 副因(부인)으로서 고려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염색술이 발달되지 못하고 色衣(색의)를 용이히 求調(구조)할 수 없을만큰 경제적 조건이 불허한 것도 고려할 것이려니와, 상중에 있는 복인의 불생산적이요 불사교적인 생활형태에서 자연히 발생된 습속이 전통적인 백의의 속을 일층 더 강인하게 존속케 한 것이라고 볼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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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 {{TagSpage|16-1}}喪服期限은 그 等級的 差異가 喪裝과 함께 五服制度의 基本要素를 일움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갈거니와, 이제 等級을 말하건대 三年 一年 九月 七月 五月 三月의 六種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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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 {{TagSpage|16-2}} [[파일:김두헌 오복제도-1.png|가운데|4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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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 {{TagSpage|16-3}} 即 喪期의 最短한 것은 三月이요 最長한 것은 三年인대, 이 三年이란 것은 滿三年이 아니고 實은 滞二箇年에 該當한 것이다. 儀禮 士虞篇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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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 {{TagSpage|16-4}} 期而小祥 又期而大祥 中尤而禪 是月也占祭 猶未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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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번= {{TagSpage|16-5}} 라 함은 이 三年喪期를 말한 것인대, 鄭玄의 註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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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6번= {{TagSpage|17-1}} 中猶間也 禪祭名也 與大祥間一月 自我至此二十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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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7번= {{TagSpage|17-2}} 이라 하였으니, 即 滿二十七箇月의 期間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나 이 二十七月이라는 것도 禮論家에 依하야서는 二說을 달리한 바 있으나, 王肅은 依禮 士虞篇에 있는바 『中月而禪』이라는 것을 月中而禪이라고 解釋하였으니, 이것을 鄭玄의 說에 比하면 一箇月이 減小하게 된 것이요, 家禮에는 鄭去의 說에 從하여 있으나 朱子 自身은 그의 母祝夫人을 爲하야 二十六月喪에 服하였고, 唐의 王无感 淸의 毛奇齡은 三年을 三箇年으로 解釋하야 三十六月로 할 것이라 하였고, 苟子 禮論篇과 白虎通喪服條에는 二十五月로 되어있는 等 그 說이 一定치 않다. 朝鮮에서는 一般으로 家禮에 從하야 二十七月 說을 取하여 왔다. 그리하야 이 二十七月에는 그 中에 閏月을 算入치 안키로 되여있다. 그러면 어떠한 根據에 依하야 閏月을 計算에 너치않은가에 對하야서는 禮論家의 여러가지 說明이 있는 듯하나, 要컨대 喪期를 規定限度 以內로 短縮식히지 않으려하는 孝哀의 情에 依한 것이라 한다. 일즉이 李朝 仁祖時代의 禮論家 愚伏・鄭經世의 註釋에 「數閃未免 欲急之嫌」이라 함은 곧 이러한 點을 말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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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8번= {{TagSpage|17-3}} 그러면 果然 엇더한 根據에 依하야 이 最高喪인 三年喪이란 것이 制定된 것이며, 또 이에 準하야 以下五級의 期限이 그와 같이 制定되였는가를 禮說에 依하야 살펴보자. 禮記 三年問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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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9번= {{TagSpage|17-4}} 三年之喪何也 曰稱情而立文 因以飾群 別親疏貴賤之節 而弗可損益也 故曰無易之道也. (中略) 凡生犬地恐間者 有血氣之屬 必有知 有知之屬莫不知 愛其類. (中略) 故有血氣之屬者 莫知於人 故人於其親也 至死無窮 將山夫患邪淫之人與 則彼朝死而夕忘之 然而從之 則是曾禽獸之不若也 夫焉相與群居而不亂乎 將由夫修飾之君子與 則三年之喪 二十五月而畢 若厠之過隙 然而遂之 則工無窮也 故先王爵爲之 立中制節 童使足以成文理则釋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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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0번= {{TagSpage|18-1}} 라 하였으니, 三年의 喪은 即 哀痛의 情을 儀式에 表示한 것이요, 萬若 知情意를 所有한 社會的 存在로서의 人間이 그 哀情을 表示한 形式을 가추우지 못하면 곧 禽獸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또한 그 哀痛의 情을 그대로 放任한다면 곧 그 生業을 다할수 없게 될 것임으로써, 聖人이 이것을 參酌하야 小人과 가티 輕薄함에 기우치지 않고 또한 君子와 가티 制限이 없이 哀痛함에 흐르지 않고 오즉 그 中道를 取하야 制定한 것이라는 見解이다. 이것은 荀子의 禮論篇 中의 三年喪條에 잇는 見解와 같거니와 三年喪이란 것을 中道로서 取한것은 自然法則에 準한 것이라 하는 것이다. 卽 同書 同篇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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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1번= {{TagSpage|18-2}} 然則何以分之 曰至親以期斷 是何也 曰天地則己易矣 四時則徧矣 其在宇宙者 莫不更始也 故先王策以此象之也 然則三年何也 曰加隆焉 案使倍之 故再期也 由九月以下何也 曰案使不及也 故三年以爲隆 緦麻小功 以爲殺 期九月以爲間 上取蒙於天 下取法於地 中取於人 人所以群居和一之理盡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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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2번= {{TagSpage|18-3}} 라 하였으니, 即 宇宙 自然의 根本 原理에 基準하야 四季 一循의 現象에 따라 滿一年으로써 回生의 意味를 表示하고 特히 至親인 父母에 限하여는 이것을 倍하야 再期 即 二周年이라는 期限을 制定한 것이요 그 以下의 等分은 九箇月을 中間으로 삼아 天地人 三才의 理에 據하야 制定한 것이라는 것이요 이와 같은 것이 오로지 先王의 制定으로써 絕對視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荀子의 說 中에는 一種 儒敎哲學者流의 獨斷的 解釋이 있을 뿐이요 그 原始的 意味를 차질수 없으나 그러나 이러케 喪期의 制定을 至極히 尊嚴한 것으로 말한 것은 禮敎의 本覧的 一 要求에 依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다. 그리하야 이 五等分에 配定된 親疎의 關係는 原則上 이와 같이 規定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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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3번= {{TagSpage|18-4}} 三年, 父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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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4번= {{TagSpage|18-5}} 一年, 祖父母・伯叔父母・兄弟姊妹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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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5번= {{TagSpage|18-6}} 九月, 從兄弟姊妹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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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6번= {{TagSpage|19-1}} 五月, 從祖父母・再從兄弟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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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7번= {{TagSpage|19-2}} 三月, 族曾祖父母・三從兄弟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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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8번= {{TagSpage|19-3}} 이 原則에 準하야 其他 家族과 親族에까지 等分이 制定되였을 것이요, 또한 時代에 變還에 따라 그 等分이 複雜 多岐하게 變異되였을 것이다. 父母에 對하여서는 元來 다름이 없을 것이나, 母에 對하여는 父의 生存하는 境遇에 限하야 期年喪을 取하였으니, 禮記 雜記에 「碁之喪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禅」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것이다. 그러면 父의 生存하는 동안 母에 對하야 特히 期年制를 取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것은 다음에 說明하려 하나, 如何間 祖父母 妻・衆子・長子婦 等의 近親도 亦是 이 期年制를 取하게 된 섬이다. 그러나 妻・衆子・長子婦는 卑屬의 地位에 있고 祖父母는・尊屬의 地位에 있음으로 이 尊卑를 區別하기 爲하야 尊屬인 祖父母에 限하야 母에 對함과 가티 齊衰期年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 두 境遇를 區別하기 爲하야 母의 境遇에는 杖期라 하고 祖父母의 境遇에는 不杖期라고 規定하였다. 祖父母가 尊屬으로서 齊衰라 하니, 曾祖父母・高祖父母도 또한 齊衰의 中에 든 것이나, 다만 祖의 遠近에 依하야 差別이 생기게 되야 結局 齊衰에는 여러 等級이 包含하게 된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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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9번= {{TagSpage|19-4}} [[파일:김두헌 오복제도-2.png|가운데|4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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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0번= {{TagSpage|19-5}} 祖에 對하야서는 大槪 이러한 差等이 原則이나, 特히 그 例外로 父卒한 境遇에 子孫은 曾祖父와 高祖父에 對하야 斬{{TagPage|20-1}}衰三年을 服期로 삼으니, 이것은 곧 嫡々 繼承을 至極히 尊重視한 까닭이다. 그리고 보면 期即 一週年 以上의 喪은 喪期 全體로 보아 相當히 重要한 것이겠으니, 父母喪을 除하고는 一 週年의 喪期를 要함은 本宗으로 보아 祖父母・伯叔父母・姑・兄弟姊妹・衆子女・長子婦・姪及姪女・長孫・長曾孫・長玄孫・同居繼父 等이요 妻爲夫黨으로 보아 長子婦・女及 衆子・姪及姪女 等이요 妾爲夫君族으로 보아 父母・女君・子等이요 出嫁女爲本宗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요 人後者爲本生親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니, 親族으로서는 가장 近親關係에 있음을 알 수 잇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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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1번= {{TagSpage|20-2}} 家禮에 依하면 喪人의 葬式 以後에 喪中의 祭禮로서 七段階의 祭祀를 要한 것이니, 虞祭・卒哭・祖祭・小祥・大祥・禪祭 吉祭가 그것이요 吉祭로써 完全히 喪期를 終了한다. 勿論 이七回의 祭禮가 모든 等級의 喪全般에 通用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喪期의 服에까지 適用된 것이냐 함은 禮典에 明瞭한 規定이 없다. 原則上으로 보아 小祥은 期 大祥은 再期인 것이요「爲父母・妻・長子禪疏 妻爲夫亦禪」이라는 規定이 있고 吉祭는 禪祭의 翌日 吉辰을 卜하야 行하되 是月에 時祭가 있으면 祭行치 않은 境遇가 있으니, 이 七回의 祭祀를 全部 要한 坡服은 父母・祖父母・妻・長子妻爲夫를 비롯하야 大槪 期年 以上의 尊屬親에 及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大槪 이러한 政階의 祭禮는 무슨 意味를 가진 것일가? 虞祭는 葬後 最初의 祭禮인데 그 本義는 慰靈에 있을 것이요 死靈의 處所 方位 時等의 觀念이 招福 禳災에 깊은 關係가 있다는 原始的 信仰에서 나온 것이겠다.(1) 그럼으로 葬後吉辰을 擇하야 初虞 再虞 三虞를 要하되 一次 以上은 반드시 魂帛을 持來한 後 家中에서 祭行할 것이라 한다. 卒哭으로 말하면 葬後 約 一箇月 後에 行한 것으로 되여있다. 元來 이 哭은 病人이 絕命하자 「擧哀男女哭瓣無數」라 하야 哀哭慟哭함을 禮儀로 삼어 文公家禮에도 「哭盡哀 乃代哭 不絕聲」이라 하여 「無時哭」이라 하야 哭婢와 같은 奇形的인 習俗을 이루게 되였다. 勿論 이 哀哭이란 것이 近親의 死別에 對한 自然表現의 人間哀{{TagPage|21-1}}情이거니와 長久한 時日의 慣習은 오히려 野卑喧騷에 흘러 現代의 識者로 하요금 懒忌의 感을 갓개 함에는 좀 더 깊이 省察하지 않으면 안될 問題가 되엿다. 일즉이 雅亭・李德懋의 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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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2번= {{TagSpage|21-2}} 哭聲勿促欲喘也 勿緩欲欠也 勿太文而節也 勿太野而呼也 勿如吼如嘶 駭人聽間以招婦妾童孺之諛笑 東俗喪主哭音 連呼哀吿 外曾祖朴孝靖公曾曰 連呼二音 只出喉舌 自然問歇不如哀々 一音直出心 仲傷痛而無所泊也.(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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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3번= {{TagSpage|21-3}} 라 하야 哭의 方法을 指示하엿고 事神의 暫間에는 一段 哭을 中止할 것으로 하고 婦女의 非禮를 酵戒하였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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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4번= {{TagSpage|21-4}} 凡忌祭進酌 闔門必止哭肅靜 欲其神乏煩也 婦人不識禮意當其時也 或冇不止哭者 雖使止之而位哭不己 豈事神之禮 類多此習改之可也.(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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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5번= {{TagSpage|21-5}} 라 함은 適時의 哭을 必要로 한 것이니, 따라서 當然히 하여야 할 哭을 하지 않은 境遇에는 또한 이것을 不孝不順이라 하야 「居喪婦女自取便安 朝夕哭二時上典 或不預者有之 孝順乏道亡矣」라 하였으니 結局 哭이란 것이 禮의 不可避한 것을 功實히 說破함이다. 생각컨대 禮의 起原과 本質에 關하야 批判的 識見을 갓지 못하고 오즉 聖人의 遗制라 하야 無條件하고 信奉하든 禮論家의 說明일만큼 別로히 雅亭의 見識을 오늘날 非難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當初에 이 哭의 發生論的 起原을 차자본다 하면 아마도 死靈에 對한 禁忌의 殘跡이라 하겠다. 大槪 原始民族의 信仰으로서 花靈에 對하야 大聲叫號하며 或은 散髮하며-平時에 散髮한 民族은 反對로 結髮하며 或은 舞踊을 하는 等 여러가지 儀式이 있었든 것이다.(4) 即 이러한 儀式으로써 禳災拂禍의 信仰을 이루었든 것이니 禮記 奔喪篇에 依하면 「又哭盡哀」니 「哭成 踊」이니 「括髮祖成踊」이니 「成踊盡哀」니 하는 等의 文句가 있음은 곧 이러한 原始的 形態의 禮儀化된 것인가 생각되는 것이다. 如何間 이 哭이 禮儀로서 不可避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無期限하고 繼續할 수는 없는 일이니 따라서 適當한 時{{TagPage|22-1}}期를 定하야 哭을 撤하되 爾來로는 哭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오즉 朝夕의 上食과 朔望의 奠祀에 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야 그 時期로 말하면 葬後 約一箇月을 原則으로 삼는대 或時 葬式이 數日을 要한 境遇에는 더 遷延된 수도 있음은 陶庵・李繹의 말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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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6번= {{TagSpage|22-2}} 近俗無貴賤 皆三月而葬 而古禮惟大夫三月 士則逾月 假令人死於晦間而葬於來旬前 則謂之逾月者苟也 若此者三月 而後當行卒哭 大抵所謂逾月者 必過三卜日可也.(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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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7번= {{TagSpage|22-3}} 이 時期에는 아직 死人의 近親間에는 飲食과 居處에 禁制가 있어 喪主 及 兄弟는 疏食飲水 菜果不食庶化木枕의 規定이 있으니 그것은 곧 死靈에 對한 禁忌의 觀念이 深刻한 까닭이다. 다만 成服의 時에 散祭하엿든 服裝의 部分을 一切 絞結할 것이라 하니 漸次 平常服으로 變하는 階段을 表示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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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8번= {{TagSpage|22-4}} 祔祭는 卒哭의 翌日에 新神主틀 祠堂에 奉祝하야 祖靈에 合浦하는 禮임은 勿論이어니와 特히 神主合祔에 關하야 一考할 것은곧 昭穆의 序로 配置하는 點이다. 이 昭穆의 序置로써 諸神主는 一堂에 群坐하야 祐祭의 境遇에는 그대로 祭行하게 된다. 中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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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9번= {{TagSpage|22-5}} 凡廟主在本阙之室中 皆束向 及其怡於奴範之室中 則惟太祖東向自如而爲最尊之位 群廟之位入乎此者 皆列於北牖而南向 群廟之入乎此者 皆列於南牖而北向 南向者取其向明 故謂之昭 北向者取其深遠 故謂之穆 葢群廟之列 則左爲昭而右爲穆 祐祭位則北爲昭而南爲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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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0번= {{TagSpage|22-6}} 라 함은 昭穆 一般을 叙述한 것이요 特히 朝制와 密接한 關係를 가진 것으로 說明한 것이다. 從來로 이 昭穆의 原義를 여기에 보다싶이 大漑는 南明北暗에 因한 것이라 하고 或은 이 明暗의 關係에 陰場의 思想을 結合하야 「昭居左爲陽 穆居{{TagPage|23-1}}右爲陰一(鄭玄, 禮記集說 卷三十)이라 하고, 或은 「葢取子々孫々 引無極之誼 昭穆字當用紹繆 繆猶績也一(毛際盛, 說文述誼)라 하야 昭穆은 本來 紹繆의 變한 것으로 子々孫々 繼承無極함을 말한 것이라하는 等, 그 說이 多様하다. 或者는 또 이것을 父昭子穆으로 생각하는 境遇도있으나 이것은 全然 認識 不足에서 나온 一 吳見이니 말할 것도 업거니와 이러한 說明의 可否는 姑捨하고 如何間 神位의 配置는 父子의 連續世代를 取하지 않고 祖孫의 隔世同祉를 取하야 이것을 通則으로 삼어 왓는 것이니 따라서 旁親을 雄班으로서 合祀한 境遇에도 「伯叔祖父母褶于高祖 伯叔父母褂于曾祖 妻若兄弟若 兄弟之妻樹于祖 子姪(子婦・姪婦同)祔于父 皆西向」이라 하야, 그 序立을 整然히 한다. 이와 같이 群神主의 順序를 尊重히 함은 要컨대 長幼親疎의 秩序를 嚴守하야 祭祀에 그 倫序의 關係를 明白히 하려는 데 있을 것이니 禮記의 祭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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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1번= {{TagSpage|23-2}} 夫祭有昭穆 昭穆者所以別父子長幼親疎之序而無亂也 是故有事於大廟則群昭群穆咸在 而不失其倫此之謂親疎之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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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2번= {{TagSpage|23-3}} 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이 倫序를 要求하는대 어찌하야 特히 隔世同祔의 方法을 取하였을가에 對하여는 그 始原的 意義가 어디잇는가를 考察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關하야 近者에 廣島女理舛大學敎授 加藤常賢 氏가 該博한 考證으로써 滋味잇는 硏究를 이룬 바 잇다. 加藤 教授는 現存未開民族間에 흔이 보이는 婚姻階級(marriage-class)의 習俗을 參考하야 昭穆의 起原을 곧 여기에 求하려는 것이다. 婚姻階級이라는 것은 即 原始民族의 토-템 組織에 依하야 族外婚(exogamy)이 嚴然하게 存在한 것인대 이러한 婚姻關係로 因하야 生乎하게 되는 境遇에는 男系 또는 女系의 間接 繼承이 되야結局 階級名이 間接繼承으로 됨으로 여기에 現存 文化社會에는 볼 수 업는 獨特한 形態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特殊한 婚姻關係와 社會組織은 일즉히 Frazer가 「오—스트라리아 民族 間에 祥細한 硏究를 한 것은 이미 學界에서 널리 아는 바이다.(7) 이제 이러한 結婚階級은 곧 隔世的同次階級 即 子孫의 同班階級이 되고 父子의 異{{TagPage|24}}班階級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隔世同班인 昭穆制度의 起原이라는 것이요 結婚階級의 制度는 「오—스트라리아」와 가튼 低級民族에 現存한 것을 보면 이 結婚階級 制度를 起原으로하는 昭穆 制度도 原始時代에 淵源한 것이리라는 것이 加藤 敎授의 見解이다. 그러나 이說明에는 根本的인 先決 問題가 아즉 證明되지 않은 點에 있어서 運命的인 誤謬을 犯하였으니 따라서 그 說明에 牽强附會의 點이 없지 않은 것이다. 先次로 原始的 社會組織인 토-템 信仰과 族外婚에 依한 이른바 結婚階級 制度란 것이 古代 支那民族 間에도 嚴然히 存在하였다는 證明을 要하는 것이니 이 點에 對하야 形式論理學 上의 先決問題 要求(Peritio Principle)의 誤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스트라리아」 民族에 있는 結婚組織이 모든 原始 民族에 다 存在하엿다고 할 수 없는 일이요-「아에리칸인디만」에는 全然 이러한 結婚階級의 組織이 現存치 않고 「메라네시아」에도 그다지 整然하지 않다-또한 中國의 原始社會에 그러한 組織이 嚴然하였다는 定說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不拘하고 昭穆制度의 起原을 엉뚱한 現存 未開民族의 特殊 婚姻關係에 찾고 따라서 昭穆의 制度를 그대로 中國의 古代 原始時代에 淵源함이라 하니, 이것은 또한 家族制度의 發展史上으로 보아 首旨할 수 없는 일이다. 大抵 昭穆制度는 大家族 制度의 發展過程에서 家族成員의 倫序에 對한 觀念이 和當히 發達된 文化期의 所序이라고 보는 것이 올치 않을가 한다. 따라서 倫序와 道義 觀念에 基因한 昭穆制度라는 것을 原始 家族時代에 淵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이 昭穆의 制度를 어떠한 由來에 依한 것이라고 볼 것인가 함에 對하야 筆者는 아주 쉽게 이와 가티 생각하려는 것이다 即 그것은 現實的인 大家族 生活上에 要求된 倫序觀念의 延長이라고. 本來 大家族의 生活에는 그 成員의 統制가 至極히 必要한 것이요 그러기爲하야 家長의 權限을 强化하는 同時에 家族成員의 服從과 秩序 維持가 要求되는 것이다 父親을 嚴君이라 하야 絕對 尊嚴視하는 것이 子의 義務로 되야 있는 反面에 父가 生存 中에 白己의 子息은 家{{TagPage|25-1}}長인 父의 孫으로서 家族成員이 되고 따라서 祖孫間에는 特別한 親密이 생겨 父子의 間에는 日常 近接의 機會를 갖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祖孫의 間에는 至極 密接 親近한 關係를 이루게된 것이니 이러한 點은 父子 間에 食卓을 갈이 못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지 못 함에 對하야 祖孫間에는 食卓을 같이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는 習俗을 보아 잘 알만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現實生活의 習俗과 觀念이 그대로 死後의 神主位間에 延長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自然스러운 婦結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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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3번= {{TagSpage|25-2}} 祔祭에 關聯하야 昭穆에 對한 說明이 너무 길게 되였으나 喪期의 變遷에 따라 段階的으로 行하는 祭祀-祭禮라 하기보다 오히려 喪禮의 順序에 關하야 다시 本問題로 들어가 보건대 卒哭과 祔祭 後에는 小祥大祥이 가장 重要한 것임은 우리의 周知한 바이니 이제 詳細한 考察을省略하거니와, 禪祭・吉祭(元來 吉祭는 家禮에 없는 것인데 特히 喪禮備要에는 吉禮를 採用하야 禪祭 外에 또 規定한 것인 듯 하다)를 맛추기까지 漸次 平當服으로 變遷한 것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다. 이에 關하야 栗谷의 擊蒙要訣 居喪儀條에 이러한 過程을 說明한 바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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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4번= {{TagSpage|25-3}} 凡三年之喪 古禮則廢祭 而朱子曰 古人居喪 衰麻之衣 不釋於身 哭泣之聲 不絕於口 其出入居處衣服飮食 皆與平日 絕異故 宗廟之祭雖廢 而幽明之間兩無憾焉 今人居喪與古人異 而廢此一事 恐有所未安 朱子之言 如此故 未葬前 準禮廢祭 而卒哭後則 於四時節祀及忌祭墓祭 使服輕者行薦而饌品減於常時 只一獻可也 朱予喪中 以墨衰薦于廟 今人以俗制服當墨衰 若無服輕者則喪人恐可以俗制喪服行祀 朞大功 則葬後 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未葬前時祭可廢 忌祭墓祭略行如上儀 總小功則成服前廢祭 雖忌日亦下可行 成服後 則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服中時祀 當以玄冠素服黑帶行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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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5번= {{TagSpage|26-1}} 라 함이 그 一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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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6번= {{TagSpage|26-2}} 喪中의 期限에는 服裝의 制定이 重要함은 勿論이어니와, 또 여러 가지 禁制가 있으니 自身 及 父母의 無朞以上喪이라야 冠婚의 儀를 이룰 수 있다 하야 婚姻關係의 必須條件이 되어있고 居喪 不樂이라 하야 歌舞議樂을 禁하고 飮食・居處・言語・對人關係에 있어 禁止의 條件이 多多하다 禮記間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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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7번= {{TagSpage|26-3}} 斬衰三日不食 齊衰二日不食 大功三不食 小功緦麻再不食 土與歛焉則壹不食 故父母之喪 旣殯食粥 朝一溢米 暮一溢米 齊衰之喪 疏食水飮 不食菜果 大功之喪 不食醯醬 小功緦麻 不飮醴酒 此哀之發於飮食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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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8번= {{TagSpage|26-4}} 라 함은 飮食의 禁制요 또한 期限의 變遷에 따라서 變動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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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9번= {{TagSpage|26-5}} 父母之喪 旣虞卒哭 疏食水飮 不食菜果 則期而小祥食菜果 又期而大祥有醯醬 中月而禪 禪而飮醴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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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0번= {{TagSpage|26-6}} 라는 段階的 差異를 이룬다. 또 居處에 關하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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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1번= {{TagSpage|26-7}}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言語 對人關係에 對하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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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2번= {{TagSpage|26-8}}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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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3번= {{TagSpage|26-9}} 이라 하고 最低等級의 喪에까지도 哭의 規定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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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4번= {{TagSpage|26-10}}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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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5번= {{TagSpage|26-11}} 라는 等々 우리의 理解에 困難할만큼 諸多 禁制가 規定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禁制의 發生的 起原을 찾는다면 元來 呪{{TagPage|27-1}}術宗敎的 禁忌의 觀念에 基本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禮敎로서는 다만 哀의 表示 孝의 至道라고 說하여 있을 뿐이다. 禮敎란 것은 本來 한 權威性을 가지고 民衆에 臨한것이니, 一般人으로서는 至極히 實行難인 것임은 勿論일 것이다. 이에 關하야 이러한 逸話가 禮記에 傳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나라 어떤 사람이 大祥의 祭禮를 아츰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歌舞歡樂함을 보고 子路가 그 非禮至極함을 非難嘲笑함에 對하야 孔子는 오히려 子路를 責望하였으니, 孔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無理가 아님을 理解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孔子는 予路의 外出한 後 다른 門人들에 말하기를 長期의 喪制를 잘 遵守하였으나 아즉 더 一個月만 지나면 完全히 居喪의 儀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야 禮敎의 尊重視할 것을 教示하었다 한다. 그러나 禮敎 그대로가 實行되기는 誰某를 勿論하고 困難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禮敎에 있어서도 一定한 期限을 經한 後 正規의 喪服에서 一段 輕服으로 減하는 制度 即 受服을 制定하였으니, 儀禮喪服經 大功章에 이러한 規定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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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6번= {{TagSpage|27-2}}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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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7번= {{TagSpage|27-3}} 이라 하니 이 受服의 規定은 大功에 關한 것이요 大功殮章과 齊衰三月章에는 分明히 無受라 하였고 斬衰章에나 齊衰章에는 아무런 規定 없는 것을 보면, 受服이란 것이 五服 全體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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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8번= {{TagSpage|27-4}} 以上의 外에 喪期에 關하여는 重喪의 問題 (除服의 順序는 先滿先除 後滿後除를 原則으로한다.) 月日의 計算問題 重様된 祭祀의 站後問題 等이 있거니와, 이러한 問題는 여기에 省略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制度에 關하야 잠간 考察하겠다. 喪을 當한 境遇에는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禁制가 있을만큼 一定한 期限에 業務를 中斷치 않으면 안됨으로 公職에 있는 者에 對하야 一定한 休暇를 給與하는 일이 國家 法制 上으로 規定되였는 것이다. 이 給暇의 原則으로{{TagPage|28-1}} 말하면 亦是 等級的 差異가 有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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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9번= {{TagSpage|28-2}} [[파일:김두헌 오복제도-3.png|가운데|4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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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0번= {{TagSpage|28-3}} 로 되여있다.(8) 給暇로 말하면 當喪의 境遇뿐만 아니라 大小祥・禪祭・忌祭・時祭・改葬의 境遇에도 數十日 乃至 數日이 歷代의 法典에 制定되여 있으니 말하자면 今日의 官公吏服務規定에 不過한 것이나 그것이 國家의 法制上 重要視되였음은 社會의 組織이 大家族 制度에 基本하야 先祖 崇拜의 觀念이 尊重된 까닭이다. 이러한 給暇制度가 朝鮮에 있어서는 일즉 五服制度가 高麗 初에 傳來함에 따라 始作한 것이니 成宗 四年에 처음으로 制定하야 數次의 改正이 歷代를 通하야 繼續되고 李朝 時代에 또한 그런 것이 史實에 歷然한 바이다.
  
|목차3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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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 상복 기한은 그 등급적 차이가 상장과 함께 오복제도의 기본 요소를 이룸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갈거니와, 이제 등급을 말하건대 3년 1년 9월 7월 5월 3월의 6종이 있다 하겠다.
|목차3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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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 [[파일:김두헌 오복제도-1.png|가운데|450px]]
|목차3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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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 즉 상기의 최단한 것은 3월이요 最長한 것은 3년인대, 이 3년이란 것은 만3년이 아니고 실은 만2개년에 해당한 것이다. 의례 士虞篇(사우편)에
|목차3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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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 期而小祥 又期而大祥 中尤而禪 是月也占祭 猶未配.
|목차3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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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번= 라 함은 이 삼년상기를 말한 것인데, 정현의 주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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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6번= 中猶間也 禪祭名也 與大祥間一月 自我至此二十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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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7번= 이라 하였으니, 즉 만27개월의 기간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나 이 27월이라는 것도 禮論家(예ᄚᅩᆫ가)에 의하여서는 2설을 달리한 바 있으나, 王肅(왕숙)은 의례 사우편에 있는바 『中月而禪』이라는 것을 月中而禪(월중이선)이라고 해석하였으니, 이것을 정현의 설에 비하면 1개월이 감소하게 된 것이요, 가례에는 정현의 설에 從(종)하여 있으나 朱子(주자) 자신은 그의 모 祝夫人(축부인)을 위하여 26월 상에 복하였고, 唐(당)의 王无感(왕무감) 淸(청)의 毛奇齡(모기령)은 3년을 3개년으로 해석하여 36월로 할 것이라 하였고, 순자 예론편과 白虎通喪服條(백호통상복조)에는 25월로 되어있는 등 그 설이 일정치 않다. 조선에서는 일반으로 가례에 종하여 27월 설을 취하여 왔다. 그리하여 이 27월에는 그 중에 윤월을 산입치 안키로 되여있다. 그러면 어떠한 근거에 의하여 윤월을 계산에 넣지 않은가에 대하여서는 예론가의 여러가지 설명이 있는 듯하나, 요컨대 상기를 규정 한도 이내로 단축시키지 않으려하는 孝哀(효애)의 정에 의한 것이라 한다. 일찍이 이조 仁祖(인조) 시대의 예론가 愚伏(우복)・鄭經世(정경세)의 주석에 「數閃未免 欲急之嫌」이라 함은 곧 이러한 점을 말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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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8번= 그러면 과연 어떠한 근거에 의하여 이 최고상인 3년상이란 것이 제정된 것이며, 또 이에 준하여 이하 오급의 기한이 그와 같이 제정되었는가를 예설에 의하여 살펴보자. 예기 三年問(삼년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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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9번= 三年之喪何也 曰稱情而立文 因以飾群 別親疏貴賤之節 而弗可損益也 故曰無易之道也. (中略) 凡生犬地恐間者 有血氣之屬 必有知 有知之屬莫不知 愛其類. (中略) 故有血氣之屬者 莫知於人 故人於其親也 至死無窮 將山夫患邪淫之人與 則彼朝死而夕忘之 然而從之 則是曾禽獸之不若也 夫焉相與群居而不亂乎 將由夫修飾之君子與 則三年之喪 二十五月而畢 若厠之過隙 然而遂之 則工無窮也 故先王爵爲之 立中制節 童使足以成文理则釋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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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0번= 라 하였으니, 3년의 상은 즉 애통의 정을 의식에 표시한 것이요, 만약 知情意(지정의)를 소유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哀情(애정)을 표시한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곧 금수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또한 그 애통의 정을 그대로 방임한다면 곧 그 생업을 다할 수 없게 될 것임으로써, 聖人(성인)이 이것을 참작하여 小人(소인)과 같이 경박함에 기우치지 않고 또한 君子(군자)와 같이 제한이 없이 애통함에 흐르지 않고 오직 그 중도를 취하여 제정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것은 순자의 예론편 중의 삼년상조에 있는 견해와 같거니와 삼년상이란 것을 중도로서 취한 것은 자연법칙에 준한 것이라 하는 것이다. 즉 동서 동편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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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1번= 然則何以分之 曰至親以期斷 是何也 曰天地則己易矣 四時則徧矣 其在宇宙者 莫不更始也 故先王策以此象之也 然則三年何也 曰加隆焉 案使倍之 故再期也 由九月以下何也 曰案使不及也 故三年以爲隆 緦麻小功 以爲殺 期九月以爲間 上取蒙於天 下取法於地 中取於人 人所以群居和一之理盡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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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2번= 라 하였으니, 즉 우주 자연의 근본 원리에 기준하여 사계 一循(일순)의 현상에 따라 만1년으로써 회생의 의미를 표시하고 특히 至親(지친)인 부모에 한하여는 이것을 배하여 再期(재기) 즉 2주년이라는 기한을 제정한 것이요 그 이하의 등분은 9개월을 중간으로 삼아 천지인 三才(삼재)의 理(이)에 거하여 제정한 것이라는 것이요 이와 같은 것이 오로지 선왕의 제정으로써 절대시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순자의 설 중에는 일종 유교철학자 류의 독단적 해석이 있을 뿐이요 그 원시적 의미를 찾을 수 없으나 그러나 이렇게 상기의 제정을 지극히 존엄한 것으로 말한 것은 예교의 본질적 일 요구에 의한 것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이 오등분에 배정된 친소의 관계는 원칙상 이와 같이 규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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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3번= 3년,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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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4번= 1년, 조부모・백숙부모・형제자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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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5번= 9월, 從(종)형제자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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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6번= 5월, 從(종)조부모・再從(재종)형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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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7번= 3월, 族從(족종)증조부모・三從(삼종)형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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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8번= 이 원칙에 준하여 기타 가족과 친족에까지 등분이 제정되었을 것이요, 또한 시대에 변환에 따라 그 등분이 복잡 다기하게 변이되었을 것이다. 부모에 대하여서는 원래 다름이 없을 것이나, 모에 대하여는 부의 생존하는 경우에 한하여 기년상을 취하였으니, 예기 雜記(잡기)에 「碁之喪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禅」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것이다. 그러면 부의 생존하는 동안 모에 대하여 특히 기년제를 취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것은 다음에 설명하려 하나, 여하간 조부모 처・衆子(중자)・長子婦(장자부) 등의 近親(근친)도 역시 이 기년제를 취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처・중자・장자부는 卑屬(비속)의 지위에 있고 조부모는・존속의 지위에 있으므로 이 존비를 구별하기 위하여 존속인 조부모에 한하여 모에 대함과 같이 齊衰(자최) 기년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 두 경우를 구별하기 위하여 모의 경우에는 杖期(장기)라 하고 조부모의 경우에는 不杖期(불장기)라고 규정하였다. 조부모가 존속으로서 齊衰(자최)라 하니, 증조부모・고조부모도 또한 齊衰(자최)의 중에 든 것이나, 다만 조의 원근에 의하여 차별이 생기게 되어 결국 자최에는 여러 등급이 포함하게 된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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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9번= [[파일:김두헌 오복제도-2.png|가운데|4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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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0번= 祖(조)에 대하여서는 대개 이러한 차등이 원칙이나, 특히 그 예외로 父卒(부졸)한 경우에 자손은 증조부와 고조부에 대하여 斬衰(참최) 3년을 服期(복기)로 삼으니, 이것은 곧 嫡々(적적) 계승을 지극히 존중시한 까닭이다. 그리고 보면 期(기) 즉 1주년 이상의 상은 상기 전체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것이겠으니, 부모상을 제하고는 1주년의 상기를 요함은 本宗(본종)으로 보아 조부모・백숙부모・姑(고)・형제자매・衆子女(중자녀)・장자부・姪及姪女(질급질녀)・長孫(장손)・長曾孫(장증손)・長玄孫(장현손)・同居繼父(동거계부) 등이요 妻爲夫黨(처위부당)으로 보아 장자부・女及衆子(여급중자)・姪及姪女(질급질녀) 등이요 妾爲夫君族(첩위부군족)으로 보아 부모・女君(여군)・子(자) 등이요 出嫁女爲本宗(출가녀위본종)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부모급조부모) 등이요 人後者爲本生親(인후자위본생친)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부모급조부모) 등이니, 친족으로서는 가장 근친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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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1번= 가례에 의하면 상인의 葬式(장식) 이후에 상중의 제례로서 7단계의 제사를 요한 것이니, 虞祭(우제)・卒哭(졸곡)・祖祭(조제)・小祥(소상)・大祥(대상)・禪祭(선제)・吉祭(길제)가 그것이요 길제로써 완전히 상기를 종료한다. 물론 이 7회의 제례가 모든 등급의 상 전반에 통용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상기의 복에까지 적용된 것이냐 함은 禮典(예전)에 명료한 규정이 없다. 원칙상으로 보아 소상은 期(기) 대상은 再期(재기)인 것이요 「爲父母・妻・長子禪疏 妻爲夫亦禪」이라는 규정이 있고 길제는 선제의 익일 吉辰(길진)을 卜(복)하여 행하되 是月(시월)에 時祭(시제)가 있으면 祭行(제행)치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 7회의 제사를 전부 요한 피복은 부모・조부모・처・長子妻爲夫(장자처위부)를 비롯하여 대개 기년 이상의 존속친에 及(급)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대개 이러한 政階(정계)의 제례는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일가? 우제는 葬後(장후) 최초의 제례인데 그 본의는 慰靈(위령)에 있을 것이요 사령의 처소 방위 시등의 관념이 招福(초복) 禳災(양재)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원시적 신앙에서 나온 것이겠다.(1) 그럼으로 장후 길진을 택하여 初虞(초우) 再虞(재우) 三虞(삼후)를 요하되 일차 이상은 반드시 魂帛(혼백)을 持來(지래)한 후 家中(가중)에서 祭行(제행)할 것이라 한다. 졸곡으로 말하면 장후 약 1개월 후에 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이 哭(곡)은 病人(병인)이 절명하자 「擧哀男女哭瓣無數」라 하여 哀哭慟哭(애곡통곡)함을 예의로 삼아 문공가례에도 「哭盡哀 乃代哭 不絕聲」이라 하여 「無時哭」이라 하여 哭婢(곡비)와 같은 기형적인 습속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이 哀哭(애곡)이란 것이 근친의 사별에 대한 자연 표현의 인간 哀情(애정)이거니와 장구한 시일의 관습은 오히려 野卑喧騷(야비훤소)에 흘러 현대의 식자로 하여금 懒忌(나기)의 감을 갖게 함에는 좀 더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가 되었다. 일찍이 雅亭(아정)・李德懋(이덕무)의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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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2번= 哭聲勿促欲喘也 勿緩欲欠也 勿太文而節也 勿太野而呼也 勿如吼如嘶 駭人聽間以招婦妾童孺之諛笑 東俗喪主哭音 連呼哀吿 外曾祖朴孝靖公曾曰 連呼二音 只出喉舌 自然問歇不如哀々 一音直出心 仲傷痛而無所泊也.(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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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3번= 라 하여 곡의 방법을 지시하였고 事神(사신)의 暫間(잠간)에는 일단 곡을 중지할 것으로 하고 부녀의 非禮(비례)를 酵戒(효계)하였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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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4번= 凡忌祭進酌 闔門必止哭肅靜 欲其神乏煩也 婦人不識禮意當其時也 或冇不止哭者 雖使止之而位哭不己 豈事神之禮 類多此習改之可也.(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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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5번= 라 함은 適時(적시)의 곡을 필요로 한 것이니, 따라서 당연히 하여야 할 곡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또한 이것을 不孝不順(불효불순)이라 하여 「居喪婦女自取便安 朝夕哭二時上典 或不預者有之 孝順乏道亡矣」라 하였으니 결국 곡이란 것이 예의 불가피한 것을 功實(공실)히 설파함이다. 생각컨대 예의 기원과 본질에 관하여 비판적 식견을 갖지 못하고 오직 성인의 유제라 하여 무조건하고 신봉하던 예론가의 설명일만큼 별로히 아정의 견식을 오늘날 비난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초에 이 곡의 발생론적 기원을 찾아본다 하면 아마도 사령에 대한 금기의 殘跡(잔적)이라 하겠다. 대개 원시민족의 신앙으로서 花靈(화령)에 대하여 大聲叫號(대성규호)하며 혹은 산발하며-평시에 산발한 민족은 반대로 結髮(결발)하며 혹은 舞踊(무용)을 하는 등 여러가지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4) 즉 이러한 의식으로써 禳災拂禍(양재불화)의 신앙을 이루었던 것이니 예기 奔喪篇(장상편)에 의하면 「又哭盡哀」니 「哭成踊」이니 「括髮祖成踊」이니 「成踊盡哀」니 하는 등의 문구가 있음은 곧 이러한 원시적 형태의 예의화된 것인가 생각되는 것이다. 여하간 이 곡이 예의로서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무기한하고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니 따라서 적당한 시기를 정하여 곡을 撤(철)하되 이내로는 곡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오직 朝夕(조석)의 上食(상식)과 朔望(삭망)의 奠祀(전사)에 한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기로 말하면 장후 약 1개월을 원칙으로 삼는데 혹시 葬式(장식)이 수일을 요한 경우에는 더 遷延(천연)된 수도 있음은 陶庵(도암)・李繹(이역)의 말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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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6번= 近俗無貴賤 皆三月而葬 而古禮惟大夫三月 士則逾月 假令人死於晦間而葬於來旬前 則謂之逾月者苟也 若此者三月 而後當行卒哭 大抵所謂逾月者 必過三卜日可也.(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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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7번= 이 시기에는 아직 死人(사인)의 근친 간에는 음식과 거처에 금제가 있어 상주 및 형제는 疏食飲水 菜果不食庶化木枕의 규정이 있으니 그것은 곧 사령에 대한 금기의 관념이 심각한 까닭이다. 다만 成服(성복)의 때에 散祭(산제)하였던 복장의 부분을 일절 絞結(교결)할 것이라 하니 점차 평상복으로 변하는 階段(계단)을 표시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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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8번= 祔祭(부제)는 졸곡의 익일에 新神主(신신주)를 祠堂(사당)에 奉祝(봉축)하여 祖靈(조령)에 合附(합부)하는 예임은 물론이어니와 특히 신주 합부에 관하여 일고할 것은 곧 昭穆(소목)의 序(서)로 배치하는 점이다. 이 소목의 序置(서치)로써 제신주는 一堂(일당)에 群坐(군좌)하여 祐祭(우제)의 경우에는 그대로 제행하게 된다. 中庸(중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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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9번= 凡廟主在本阙之室中 皆束向 及其怡於奴範之室中 則惟太祖東向自如而爲最尊之位 群廟之位入乎此者 皆列於北牖而南向 群廟之入乎此者 皆列於南牖而北向 南向者取其向明 故謂之昭 北向者取其深遠 故謂之穆 葢群廟之列 則左爲昭而右爲穆 祐祭位則北爲昭而南爲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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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0번= 라 함은 소목 일반을 서술한 것이요 특히 朝制(조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종래로 이 소목의 原義(원의)를 여기에 보다시피 대개는 南明北暗(남명북암)에 인한 것이라 하고 혹은 이 명암의 관계에 음양의 사상을 결합하여 「昭居左爲陽 穆居右爲陰一(정현, 예기집설 권30)이라 하고, 혹은 「葢取子々孫々 引無極之誼 昭穆字當用紹繆 繆猶績也一(毛際盛(모제성), 說文述誼(설문술의))라 하여 소목은 본래 紹繆(소무)의 변한 것으로 子々孫々 繼承無極함을 말한 것이라 하는 등, 그 설이 다양하다. 혹자는 또 이것을 父昭子穆(부소자목)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은 전연 인식 부족에서 나온 일 吳見(오견)이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러한 설명의 가부는 고사하고 여하간 神位(신위)의 배치는 부자의 연속세대를 취하지 않고 祖孫(조손)의 隔世同祉(격세동지)를 취하여 이것을 通則(통칙)으로 삼아 왔는 것이니 따라서 旁親(방친)을 雄班(웅반)으로서 합사한 경우에도 「伯叔祖父母褶于高祖 伯叔父母褂于曾祖 妻若兄弟若 兄弟之妻樹于祖 子姪(子婦・姪婦同)祔于父 皆西向」이라 하여, 그 序立(서립)을 정연히 한다. 이와 같이 群(군)신주의 순서를 존중히 함은 요컨대 長幼親疎(장유친소)의 질서를 엄수하여 제사에 그 倫序(윤서)의 관계를 명백히 하려는 데 있을 것이니 예기의 祭統(제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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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1번= 夫祭有昭穆 昭穆者所以別父子長幼親疎之序而無亂也 是故有事於大廟則群昭群穆咸在 而不失其倫此之謂親疎之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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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2번= 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이 윤서를 요구하는데 어찌하여 특히 隔世同祔(격세동부)의 방법을 취하였을까에 대하여는 그 시원적 의의가 어디있는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하여 近者(근자)에 廣島文理科大學(광도문리과대학) 교수 加藤常賢(가등상현) 씨가 해박한 고증으로써 자미있는 연구를 이룬 바 있다. 가등 교수는 현존 미개 민족간에 흔히 보이는 婚姻階級(혼인계급, marriage-class)의 습속을 참고하여 소목의 기원을 곧 여기에 구하려는 것이다. 혼인계급이라는 것은 즉 원시민족의 토-템 조직에 의하여 族外婚(족외혼, exogamy)이 엄연하게 존재한 것인데 이러한 혼인관계로 인하여 生子(생자)하게 되는 경우에는 남계 또는 여계의 간접 계승이 되어 결국 계급명이 간접 계승으로 됨으로 여기에 현존 문화사회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혼인관계와 사회조직은 일찍히 Frazer가 「오—스트라리아 민족 간에 상세한 연구를 한 것은 이미 학계에서 널리 아는 바이다.(7) 이제 이러한 결혼계급은 곧 隔世的(격세적) 同次(동차) 계급 즉 자손의 同班階級(동반계급)이 되고 부자의 異班階級(이반계급)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격세동반인 소목제도의 기원이라는 것이요 결혼계급의 제도는 「오—스트라리아」와 가튼 저급 민족에 현존한 것을 보면 이 결혼계급 제도를 기원으로 하는 소목 제도도 원시시대에 연원한 것이리라는 것이 가등 교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근본적인 선결 문제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점에 있어서 운명적인 오류을 범하였으니 따라서 그 설명에 견강부회의 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先次(선차)로 원시적 사회조직인 토-템 신앙과 족외혼에 의한 이른바 결혼계급 제도란 것이 고대 지나민족 간에도 엄연히 존재하였다는 증명을 요하는 것이니 이 점에 대하여 형식논리학 상의 선결문제 요구(Peritio Principle)의 오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스트라리아」 민족에 있는 결혼조직이 모든 원시 민족에 다 존재하였다고 할 수 없는 일이요-「아에리칸인디만」에는 전연 이러한 결혼계급의 조직이 현존치 않고 「메라네시아」에도 그다지 정연하지 않다-또한 중국의 원시사회에 그러한 조직이 엄연하였다는 정설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목제도의 기원을 엉뚱한 현존 미개 민족의 특수 혼인관계에 찾고 따라서 소목의 제도를 그대로 중국의 고대 원시시대에 연원함이라 하니, 이것은 또한 가족제도의 발전사 상으로 보아 수긍할 수 없는 일이다. 대저 소목제도는 대가족 제도의 발전 과정에서 가족성원의 倫序(윤서)에 대한 관념이 和當(화당)히 발달된 문화기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윤서와 도의 관념에 기인한 소목제도라는 것을 원시 가족시대에 연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이 소목의 제도를 어떠한 유래에 의한 것이라고 볼 것인가 함에 대하여 필자는 아주 쉽게 이와 같이 생각하려는 것이다 즉 그것은 현실적인 대가족 생활 상에 요구된 윤서 관념의 연장이라고. 본래 대가족의 생활에는 그 성원의 통제가 지극히 필요한 것이요 그러기 위하여 가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가족성원의 복종과 질서 유지가 要求되는 것이다. 父親(부친)을 嚴君(엄군)이라 하여 절대 존엄시하는 것이 子(자)의 의무로 되어있는 반면에 부가 생존 중에 자기의 자식은 가장인 부의 손으로서 가족성원이 되고 따라서 祖孫(조손)간에는 특별한 친밀이 생겨 부자의 간에는 일상 근접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조손의 간에는 지극 밀접 친근한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니 이러한 점은 부자 간에 식탁을 갈이 못하고 유희 오락을 같이 더불어하지 못 함에 대하여 조손 간에는 식탁을 같이하고 유희 오락을 같이 더불어하는 습속을 보아 잘 알만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현실생활의 습속과 관념이 그대로 사후의 神主位(신주위)간에 연장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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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3번= 祔祭(부제)에 관련하여 소목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길게 되었으나 喪期(상기)의 변천에 따라 단계적으로 행하는 제사-祭禮(제례)라 하기보다 오히려 喪禮(상례)의 순서에 관하여 다시 본문제로 들어가 보건대 졸곡과 부제 후에는 소상, 대상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우리의 주지한 바이니 이제 상세한 고찰을 생략하거니와, 선제・길제(원래 길제는 가례에 없는 것인데 특히 상례비요에는 길례를 채용하여 선제 외에 또 규정한 것인 듯하다)를 맞추기까지 점차 평상복으로 변천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에 관하여 栗谷(율곡)의 擊蒙要訣(격몽요결) 居喪儀條(거상의조)에 이러한 과정을 설명한 바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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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4번= 凡三年之喪 古禮則廢祭 而朱子曰 古人居喪 衰麻之衣 不釋於身 哭泣之聲 不絕於口 其出入居處衣服飮食 皆與平日 絕異故 宗廟之祭雖廢 而幽明之間兩無憾焉 今人居喪與古人異 而廢此一事 恐有所未安 朱子之言 如此故 未葬前 準禮廢祭 而卒哭後則 於四時節祀及忌祭墓祭 使服輕者行薦而饌品減於常時 只一獻可也 朱予喪中 以墨衰薦于廟 今人以俗制服當墨衰 若無服輕者則喪人恐可以俗制喪服行祀 朞大功 則葬後 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未葬前時祭可廢 忌祭墓祭略行如上儀 總小功則成服前廢祭 雖忌日亦下可行 成服後 則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服中時祀 當以玄冠素服黑帶行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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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5번= 라 함이 그 일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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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6번= 상중의 기한에는 복장의 제정이 중요함은 물론이어니와, 또 여러 가지 금제가 있으니 자신 및 부모의 無朞(무기) 이상 喪(상)이라야 冠婚(관혼)의 儀(의)를 이룰 수 있다 하여 혼인관계의 필수조건이 되어있고 居喪(거상) 不樂(불악)이라 하여 가무 환락을 금하고 음식・거처・언어・대인관계에 있어 금지의 조건이 다다하다 禮記間傳(예기간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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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7번= 斬衰三日不食 齊衰二日不食 大功三不食 小功緦麻再不食 土與歛焉則壹不食 故父母之喪 旣殯食粥 朝一溢米 暮一溢米 齊衰之喪 疏食水飮 不食菜果 大功之喪 不食醯醬 小功緦麻 不飮醴酒 此哀之發於飮食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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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8번= 라 함은 음식의 금제요 또한 기한의 변천에 따라서 변동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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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9번= 父母之喪 旣虞卒哭 疏食水飮 不食菜果 則期而小祥食菜果 又期而大祥有醯醬 中月而禪 禪而飮醴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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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0번= 라는 단계적 차이를 이룬다. 또 거처에 관하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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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1번=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언어 대인관계에 대하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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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2번=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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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3번= 이라 하고 최저등급의 상에까지도 곡의 규정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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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4번=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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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5번= 라는 등등 우리의 이해에 곤란할 만큼 諸多(제다) 금제가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금제의 발생적 기원을 찾는다면 원래 주술종교적 금기의 관념에 기본한 것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예교로서는 다만 哀(애)의 표시 효의 至道(지도)라고 설하여 있을 뿐이다. 예교란 것은 본래 한 권위성을 가지고 민중에 임한 것이니, 일반인으로서는 지극히 실행난인 것임은 물론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 이러한 일화가 예기에 전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노)나라 어떤 사람이 대상의 제례를 아침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가무 환락함을 보고 子路(자로)가 그 비례 지극함을 비난 조소함에 대하여 孔子(공자)는 오히려 자로를 책망하였으니, 공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무리가 아님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외출한 후 다른 문인들에 말하기를 장기의 상제를 잘 준수하였으나 아직 더 1개월만 지나면 완전히 居喪(거상)의 儀(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예교의 존중시할 것을 교시하었다 한다. 그러나 예교 그대로가 실행되기는 誰某(수모)를 물론하고 곤란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예교에 있어서도 일정한 기한을 지난 후 정규의 상복에서 일단 輕服(경복)으로 감하는 제도 즉 受服(수복)을 제정하였으니, 의례 喪服經(상복경) 大功章(대공장)에 이러한 규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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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6번=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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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7번= 이라 하니 이 수복의 규정은 대공에 관한 것이요 大功殮章(대공렴장)과 齊衰三月章(자최삼월장)에는 분명히 無受(무수)라 하였고 斬衰章(참최장)에나 齊衰章(자최장)에는 아무런 규정 없는 것을 보면, 수복이란 것이 오복 전체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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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8번= 이상의 외에 상기에 관하여는 重喪(중상)의 문제 (除服(제복)의 순서는 先滿先除(선만선제) 後滿後除(후만후제)를 원칙으로한다.) 월일의 계산 문제 重様(중양)된 제사의 站後(참후)문제 등이 있거니와, 이러한 문제는 여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상가)제도에 관하여 잠깐 고찰하겠다. 상을 당한 경우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금제가 있을만큼 일정한 기한에 업무를 중단치 않으면 안되므로 공직에 있는 자에 대하여 일정한 휴가를 급여하는 일이 국가 법제 상으로 규정되었는 것이다. 이 給暇(급가)의 원칙으로 말하면 역시 등급적 차이가 有(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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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9번= [[파일:김두헌 오복제도-3.png|가운데|4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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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0번= 로 되어있다.(8) 급가로 말하면 當喪(당상)의 경우뿐만 아니라 大小祥(대소상)・禪祭(선제)・忌祭(기제)・時祭(시제)・改葬(개장)의 경우에도 수십일 내지 수일이 역대의 법전에 제정되어 있으니 말하자면 금일의 官公吏服務規定(관공리복무규정)에 불과한 것이나 그것이 국가의 법제上 중요시되었음은 사회의 조직이 대가족 제도에 기본하여 선조 숭배의 관념이 존중된 까닭이다. 이러한 급가제도가 조선에 있어서는 일찍 오복제도가 고려 초에 전래함에 따라 시작한 것이니 성종 4년에 처음으로 제정하여 수차의 개정이 역대를 통하여 계속되고 이조 시대에 또한 그런 것이 사실에 歷然(역연)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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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번= {{TagSpage|29-1}} 以上은 服裝과 喪期에 關하야 考察하였지만, 이제는 服者에 關하야 考察하게다. 生者 即 服者가 死者 卽 喪者에 對한 親疎尊卑의 關係와 家族間의 身分 地位와는 喪服制度를 構成하는 重要한 原理이니, 여기에서 우리는 大家族 組職의 大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即 構造原理에 있어서 大家族 制度의 根本精神인 男系中心・嫡庶의 別・長有의偷序・夫主婦從・一夫多妻・妻妾의 別・女子의 出嫁・養子相續 等々의 問題를 차질 수 있는 것이다. 禮記大傳에 喪服組職의 根本 原理로 볼만한 것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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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번= {{TagSpage|29-2}} 服術有六 一曰親親 二曰尊尊 三曰名名 四曰出入 五曰長幼 六曰從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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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번= {{TagSpage|29-3}} 이란 것이 그것인대, 그 表明이 너무나 簡略하야 그 本義를 알기에 어려우나, 大槪 이러한 意義로 볼 수 있을 것이다. 親親이라 함은 父母를 最近親으로 삼고 妻子兄弟伯叔에 及함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비롯하야 親疎關係를 이루어 直統으로는 上下四代에 이르고 旁系同父에서同高祖에 이르기까지 漸次로 疎하게 되야 喪服의 重輕을 構成한 것이니 禮記 喪服小記에 「親親 以三爲五 以五爲丸 上殺下殺 旁殺而親畢矣」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함이겠다. 尊尊이라 함은君雇最尊으로 삼고 公卿大夫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元來 儀禮에 制定하여 있는 襄服制는 政治的 身分關係도 또한 配當의{{TagPage|30-1}} 原理로 삼어 君臣及君民關係는 勿論이요 君의 父祖妻子에까지 이른 것이니, 이것은 곧 國家論上에 重要한 意味를 가진 것이다, 名名이라 함은 家族間의 尊卑에 따라 二名分地位를 말한 것이요 出入이라 함은 女子의 出嫁在室을 말함이요 長幼는 成人과 幼年의 倫序를 말한 것인대, 一說에는 旁親屬의 尊者를 爲한 服를 長이라 하고 또 그 卑者를 爲한 服를 幼라고 하나, 그 本義는 勿論 前者에 있을 것이다. 最后로 從服이라 함은 以上 五原則에 比하야 例外의 境過을 말한 것이니 禮記大傳에 依하면 大槪 六種類가 있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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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번= {{TagSpage|30-2}} 從服有六冇屬從 冇徒從 有從有服而無服 有從無服而冇服 有從重而輕 有從輕而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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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5번= {{TagSpage|30-3}} 이라는 것이다. 屬從이라 함은 그 親屬에 따라 그 黨을 爲하야 服함을 말한 것이니, 例컨대 子가 母에 따라 母黨을 服하고 妻가 夫에 따라 夫黨을 爲하야 服함과 같다. 또 徒從이라 함은 그 親屬이 아니면서 그 黨을 爲하야 服함을 말한 것이니. 例컨대 臣이 君에 따라 君黨을  爲하아 服하고, 또 妻가 夫黨을 爲하며 妾이 女君黨을 爲하며 庶子가 君母의 父母를 爲하며 子가 母의 君母를 爲하야 服한 것과 같다. 有從有服而無服이라 함은 公子의 妻가 그 本生父母를 爲하야 期年의 喪을 服함에 對하야 公子는 그 君의 까닭으로 外房外姐의 喪을 服하지 못한 境遇요 有從無服而有服이라 함은 妻가 夫의 昆弟를 爲하야 服하나, 그 娣姒를 爲하야  服하지 못한 境遇이다, 而從車而輕이라 함은 妻가 그 本生父母을 爲하야 期年의 喪을 服함은 用함에 對하야 夫가 妻의 父母를 爲하야 三月의 喪을 服함은 輕하다는 것이요 有從輕而重이 라 함은 公子가 君의 까닭으로 그 母를 爲하야 練冠함은 輕함에 對하야 公主의 妻는 그 母를 爲하야 期年의 喪을 澈함은 重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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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6번= {{TagSpage|30-4}} 이러한 原則에 基本하야 正服・加服・義服・降服의 四種이 成立한다. 正服은 곧 正服의 服으로 血旅中心의 正統에{{TagPage|31-1}} 用한 것이요 他 三者는 이것에 準하야 派生한 것이다. 即 加服은 父卒함으로 因하야 子孫이 祖父母・曾祖父母・高祖父母을 爲하야 三年喪을 服한 것이니 承重으로 因하야 父의 代로 服을 追加한 것이다, 다만 이 境遇에 男子尊屬과 女子尊屬을 同等級으로 하는 수도 있고 異等級으로 하는 수가 있어 禮論과 時代 法制에 依하야 相違가 있는 듯하다.(1) 義服은 本來 血族關係가 없이 다만 義理의 闔係로써 服한 境遇를 말한 것이다, 例컨대 妻爲夫・妾爲君・夫爲妻・子爲生母外諸母夫爲妻父母・爲女媒 等과 같다. 降服은 本來 血族 關係者또는 外族親이 出嫁함으로 因하야 服을 輕減한 境遇를 말한 것이니, 例컨대 父卒母嫁, 姑・姉妹・姪女適人, 姨・外甥女適人 等과 같다. 이러한 派生的인 服은 大家族 統率의 必要上 正服에 準하야 漸次로 追加 發展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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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7번= {{TagSpage|31-2}} 이제 服者 等級의 全組織을 圖示하야 그 根本意義를 個別的으로 分折 考察할가 한다. (別紙圖表參照)(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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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8번= {{TagSpage|31-3}} ① 父母의 喪은 元來가 三年으로서 同様의 喪을 服할 것은 勿論이나, 特히 斬齊의 別이 있음은 父系中心의 家長制에 있어서 必然的 歸結이라 할 수 있거니와, 特히 父在爲母의 境遇에 限하여는 期年喪올 服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男尊女服의 觀念에서 나은 것은 아닐 것이요 이러한 關係에 基因된 것인가 생각한다. 即 父의 生存時에는 母喪이나마 父가 主祭者가 된 것임으로 事實上으로는 夫의 妻에 對한 喪 即 期年喪이 適用된 것이겠다. 그러므로 父卒하여서는 自己가 主祭者가 됨으로 母 亦是 三年喪을 服하게 될 것이니, 士儀의 規定한 바에 依하면 「父母偕喪 雖在一日之內 若父先卒 則服母三年」이라 하였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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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9번= {{TagSpage|31-4}} ② 卑屬親에 있어서 子와 子婦・兄弟와 兄弟妻・姪과 姪妻・孫과 孫妻의 間에는 男女의 別에 依하야 等級的 差異가 있음에 對하야 子와女・兄弟와 姉妹・姪과 姪女・孫과 孫女의 間에는 男女의 別에 依하야 아무런 差等이 없으니, 이것은 곧 父{{TagPage|32-1}}系的 血族 中心의 觀念에 依한 것이다. 그러므로 女子는 出嫁 後에도 本生 親家族을 爲하야 喪을 服하되, 境遇에 比하야 減服이 되고, 또 本生家의 家族은 出嫁한 姑母와 姉妹틀 爲하야 降服이 適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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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0번= {{TagSpage|32-2}} ③ 父母가 特히 長子를 爲하야 各自 斬齊三年을 服하고 庶子 即 衆子틀 爲하야 期年을 服함은, 嫡々 繼承을 尊重히 하고 先祖 崇拜를 厚히 하는 까닭이요, 長子와 衆子의 差別은 生存 時와 다름이 없으니, 그것은 곧 長子相續權制(primogeniture-system)와 密接 不離의 關係를 가진 것이겠다. 그러므로 衆子는 嫡孫과 갈이 同級의 木杖期요 衆孫은 嫡孫과 달라 大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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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1번= {{TagSpage|32-3}} ④ 本宗의 未成年者에 對하여는 特히 痛服이란 것이 있어 長殤(自十六歲至十九歲) 中殤(自十二歲至十五歲) 下殤(自八歲至十一歲)의 三種으로 되였으니. 年齡의 差異에 依하야 喪의 等級이 있음은 自然한 歸結이거니와, 未成年의 子姪에게까지도 喪制의 規定을 必要로 한것은, 祖先 崇拜의 觀念에 基本한 家系存續의 要求로 因하야 王孫을 重要視한 까닭이다. 따라서 長殤일수록 重喪임은 家系存續의 可能性을 더 마니 가지고 잇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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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2번= {{TagSpage|32-4}} ⑤ 養子로 말하면 儀禮 喪服章에 「人後者爲所後父斬衰三年」이라 하야 養父는 親父와 다름이없이 斬衰喪을 服하고 오히려 本生父틀 爲하야 齊衰가 杖期로 降服하며, 養家의 家族에 對하야, 全然히 嫡子와 가튼 義務가 있으나 다른 本生 親屬을 爲하여서는 正服보다 一等을 降服하니, 이것은 勿論 家系存績의 要求에 基因한 養子制度를 重要視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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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3번= {{TagSpage|32-5}} ⑥ 夫婦關係에 있어서는 妻가 夫를 爲하야 斬衰三年을 服함에 對하야 夫가 妻틀 爲하야 齊衰期年을 服함은 妻에 對한 夫權의 强力을 意味하는 것이요, 妻틀 爲하야서는 長子틀 爲하는 것보다도 輕服인 것은 家族의 構成에 夫婦가 中心이 아니고 父子가 中心이 된 것을 表示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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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4번= {{TagSpage|32-6}} ⑦ 妾은, 夫君을 爲하야 斬衰 三年喪율 服함이 妻가 夫를 爲한 境遇와 다름이 없으나, 夫가 妾을 爲하여서는 有子의{{TagPage|33-1}} 妾에 限하야 繩麻三月喪을 服하고-儀禮喪服篇에 「大夫爲貴妾 雖無子冇服」이라 함은 特殊한 境遇이거니와-妾이 女君을 爲하야 齊衰不杖期(婦가 舅姑에 對한 服과 同等)를 服함에 對하야 女君이 妾올 爲하여서는 無服으로 되였고 또 妾은 夫君의 親族을 爲하야 狹小한 範圍에 限하며, 夫君은 妾의 親族을 爲하야 無服이니, 이러한 것은 妾이란 것이 元來 家系存續을 目的한 子를 얻기 爲하야 存在한 附屬的 家族成員인 까닭이요, 따라서 妻妾의 身分地位에 差別이 있음을 잘 말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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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5번= {{TagSpage|33-2}} ⑧ 一般으로 男系血族 中心인 것은 以上에 말한 바와 같거니와, 宗族男親 傍系에 있어서는 그 等級의 配置가 大槪 이러한 原理에 基本되여있다. 첫재로는 共同 始祖에 對하야 自己와 同一한 世代에 있는 傍系親屬은 自己와 同行列이 되고 그 遠近에 따라 規則的으로 等級이 配列되였으니, 即 兄弟는 期・從兄弟는 大功・冉從兄弟는 小功・二從兄弟는 緦麻로 된다. 다음으로 共同 始祖에 對하야 自己와 다른 世代에 있는 傍系親屬은 共同 始祖의 遠近에 따라 分類되였으니, 即 高祖系에 屬한 從曾祖父・再從祖父・冉從伯叔父는 三從兄弟와 같이 緦麻를 服하고, 曾祖係에 屬한 從祖父 從伯叔父는 再從兄弟와 같이 小功을 服하고 祖父系에 屬한 傍系親屬은 伯叔父・從兄弟・從姪・再從孫의 尊卑에 順序하야 期・大功・小功・緦麻를 服한다. 이와 같이 直系親屬이 傍系親屬에 對하야 重服으로써 優越的 地位에 있음은 곧 大小宗族 間의 倫序를 要求함에 基因한 것이요, 畢竟 尊祖敬宗의 觀念에서 나온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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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6번= {{TagSpage|33-3}} ⑨ 外族親 即 母黨에 對하야는 外祖父母・外叔父母・姨母를 爲하야 겨우 小功을 服하고 그 外의 喪服範圍는 至極히 狹小한 것이니, 이것은 原始的 母系的 母權制의 領域에서 全然 脫離하야 父系的 父權制(Patrilineal Patripotesal System)로 된 것을 表示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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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7번= {{TagSpage|34-1}} ⑩ 妻族에 對하야 보건대 妻는 夫黨을 爲하야 거반 夫에 準한 喪을 服하지만, 夫는 妻父母틀 爲하야 겨우 緯麻를 服하니, 이것은 온전히 嫁娶制(Patriocal System)에 依한 夫權家族의 形態를 表示함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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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8번= {{TagSpage|34-2}} ⑪ 兄弟와 兄弟妻의 間 即 嫂叔間에는 相互 無服이요, (無服이 原則이나 家禮를 비롯하야 朝鮮의 禮書와 法典에는 小功으로 되여있다) 母黨에 있어서 母의 姉妹 即 姨母를 爲하야 小功을 服하고 母의 兄弟 即 舅를 爲하야 紀麻를 服하야 女重男輕으로 되어있고 또 夫黨에 있어서 伯叔父母를 爲하야 大功을 服하고, 姪及姪女을 爲하야 期를 服하야 卑重尊輕으로 되어있으며, 兄弟行列(即 兄弟小功⋅從兄弟緦麻⋅再從兄弟無)보다도 姪行列(即 姪期⋅從姪小功⋅再從姪緦麻)의 服이 重하게 되어 있으니 이러한 것은 本宗에 있어서의 親等關係와 같이 正規의 順序를 갓지 못하니, 이것은 아마도 原始的인 婚姻形態 또는 家族組織의 殘體가 混同된 것이라고 봍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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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9번= {{TagSpage|34-3}} ⑫ 三父八母服은 圖示하지 않었으니, 이것을 여기에 表示하면 大槪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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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0번= {{TagSpage|34-4}} 同居繼父 不杖期 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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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1번= {{TagSpage|34-5}} 不同居繼父 齊衰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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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2번= {{TagSpage|34-6}} 元不同居繼父 無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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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3번= {{TagSpage|34-7}} 嫡母 齊衰 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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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4번= {{TagSpage|34-8}} 繼母 齊衰 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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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5번= {{TagSpage|34-9}} 養毋 齊衰 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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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6번= {{TagSpage|34-10}} 嫁母 齊衰杖期 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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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7번= {{TagSpage|34-11}} 出母 齊衰杖期 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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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8번= {{TagSpage|34-12}} 乳母 緦麻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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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9번= {{TagSpage|35-1}} 庶母 緦麻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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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0번= {{TagSpage|35-2}} 慈母 齊衰 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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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1번= {{TagSpage|35-3}} 이 三父八母의 服制는 本來 喪服의 組織이 父系的 父權制와 嫁娶制의 原理에 基礎함으로 因하야 된 것이 勿論이다. 그러므로 繼父를 爲하여서는 同居不同居에 따라 不杖期와 再衰三月에 服하나 繼母, 養母・慈母를 爲하여서는 嫡母와 同等級의 齊衰三年喪틀 服한 것이요, 따라서 嫁母・出母를 爲하여서는 齊衰杖期에 不過하게 된다. 이에 對하야 庶母는 乳母와 함께 總 三月에 不過함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이 嫡庶의 別 妻妾의 別이 嚴然함에 依한 것이다. 妾制를 公然히 必要로 삼는 社會組織에 있어서 妾의 地位가 至極히 卑賊視됨은 矛盾의 現象이라고 하겠으나, 如何間 一般 禮書의 規定에는 「土爲庶母」 또는 「庶子爲父後者爲其母」의 境遇에는 겨우 總 三月로 規定되여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 「庶子爲其後者爲其母」라 함은 妾腹의 子로서 相續人이 될지라도 그 生母인 妾母에 對한 것이니, 여기에는 오즉 父系存續이 重要視되고 母子 血族의 關係는 全然 無視되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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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2번= {{TagSpage|35-4}} 以上으로써 喪服制의 服者 關係를 大略 分折 考察하였거니와,(4) 要컨대 이러한 組織으로써 大小宗族을 結合하고 共同 先祖의 祭祀로써 同族親和의 觀念을 厚히 하는 것이다. 일즉히 中國에 있어서는 九族⋅五宗⋅五服⋅六親 等의 말로써 이것을 表示하였다. 그리하야 五服의 關係者는 그대로 親族의 一團으로 보게 되였다. 그러나 祥細히 考察한다면 五服者의 範圍는 그대로 親族의 範圍와 致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從來로 朝鮮에 있어서 오늘에 通用하는 親族이란 맡은 없고 親屬 또는 宗族이라하야 特히 宗은 宗族親을 表示하고 戚은 姻戚 또는 外戚이라는 것과 같이 婚姻關係로 因하야 된 親戚을 말함은 中國에 있어서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이 族 또는 戚은 五服者의 範圍보다 廣汎한 것 같다 喪{{TagPage|36-1}}服의 가장 輕한것은 緦麻임으로 五服者에 限하야서는 가장 遠親을 爲하야 服함은 勿論이지만, 또 그밖에 祖免親이란 것이 있음을 보아 알 일이다. 「四世緦麻服之窮也五世祖免」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從高祖父母・再從曾祖父母・再從曾大姑・三從祖父母・三從大姑・三從伯叔父母・三從姑 四從兄弟姉妹는 곧 本宗親屬으로서의 祖免親이다. 一般으로 이것을 緦麻 以上의 有服親에 對하야 無服親이라 한다. 이 無服親은 또한 母族 即 外威妻族 出嫁族에도 잇다. 即 外威에 있어서는 外曾祖父母外從姪及姪女 姨從姪及姪女 外再從兄兄弟姉妹 從姨姪及姪女가 그것이요, 妻族에 있어서는 妻祖父母..妻外祖父母 妻伯叔父母 妻姑母 妻兄弟及妻 妻姉妹 妻姪及姪女가 그것이요, 出嫁族에 있어서는 姑母夫姉妹夫 內從姪及姪女 外會孫及孫女가 그것이다. 勿論 親族의 範圍는 各自國家의 法制에 依하야 그 差異가 多大하다. 現今 日本 民法에는 自然血族 配偶者姻族 準血族으로써 親族을 삼고, 特히 血族은 六親等以內 姻族은, 三親等 以內에 限한다. 朝鮮의 從來 慣習은 血族十寸 準 血族一寸 配偶者 及 準配偶者 無寸 姻族九寸 姻族配偶者 三寸에 及한다. 이미 李朝 六典에 있어서는 明律에 準하야 制定하였고 最後의 法典인 刑法大典에는 親屬을 本宗 及 異姓의 有服親가 祖免親의 三類로 分하아 그 範圍를 規定하였다. 그러나 一般 慣習으로는 大槪 五服親을 親族의 範圍로 삼는 것은 우리의 周知한 바이다.
  
|목차4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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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번= 이상은 복장과 상기에 관하여 고찰하였지만, 이제는 服者(복자)에 관하여 고찰하게다. 생자 즉 복자가 사자 즉 상자에 대한 친소 존비의 관계와 가족 간의 신분 지위와는 상복제도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이니, 여기에서 우리는 대가족 조직의 대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구조 원리에 있어서 대가족 제도의 근본정신인 남계중심・적서의 별・장유의 유서・夫主婦從(부주부종)・일부다처・妻妾(처첩)의 별・여자의 出嫁(출가)・養子相續(양자상속) 등등의 문제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예기 大傳(대전)에 상복 조직의 근본 원리로 볼만한 것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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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번= 服術有六 一曰親親 二曰尊尊 三曰名名 四曰出入 五曰長幼 六曰從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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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번= 이란 것이 그것인대, 그 표명이 너무나 간략하여 그 본의를 알기에 어려우나, 대개 이러한 의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친친이라 함은 부모를 최근친으로 삼고 처자 형제 伯叔(백숙)에 미침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비롯하여 친소 관계를 이루어 직통으로는 상하 4대에 이르고 방계 同父(동부)에서 동 高祖(고조)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疎(소)하게 되야 상복의 重輕(중경)을 구성한 것이니 예기 喪服小記(상복소기)에 「親親 以三爲五 以五爲丸 上殺下殺 旁殺而親畢矣」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함이겠다. 尊尊(존존)이라 함은 君雇(군고) 최존으로 삼고 公卿大夫(공경대부)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원래 의례에 제정하여 있는 襄服制(양복제)는 정치적 신분관계도 또한 배당의 원리로 삼아 군신 및 군민 관계는 물론이요 군의 父祖妻子(부조처자)에까지 이른 것이니, 이것은 곧 국가론상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名名(명명)이라 함은 가족 간의 존비에 따라 그 명분 지위를 말한 것이요 출입이라 함은 여자의 出嫁在室(출가재실)을 말함이요 장유는 성인과 유년의 윤서를 말한 것인데, 일설에는 旁親屬(방친속)의 존자를 위한 복를 장이라 하고 또 그 卑者(비자)를 위한 복를 幼(유)라고 하나, 그 본의는 물론 전자에 있을 것이다. 최후로 從服(종복)이라 함은 이상 5원칙에 비하여 예외의 경우을 말한 것이니 예기 대전에 의하면 대개 6종류가 있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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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번= 從服有六冇屬從 冇徒從 有從有服而無服 有從無服而冇服 有從重而輕 有從輕而重.
|목차4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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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5번= 이라는 것이다. 屬從(속종)이라 함은 그 친속에 따라 그 黨(당)을 위하여 服(복)함을 말한 것이니, 예컨대 자가 모에 따라 母黨(모당)을 복하고 처가 夫(부)에 따라 夫黨(부당)을 위하여 복함과 같다. 또 徒從(도종)이라 함은 그 친속이 아니면서 그 당을 위하여 복함을 말한 것이니. 예컨대 신이 군에 따라 君黨(군당)을 위하여 복하고, 또 처가 夫黨(부당)을 위하며 妾(첩)이 女君黨(여군당)을 위하며 庶子(서자)가 君母(군모)의 父母(부모)를 위하며 자가 모의 君母(군모)를 위하여 복한 것과 같다. 有從有服而無服(유종유복이무복)이라 함은 公子(공자)의 처가 그 本生父母(본생부모)를 위하여 기년의 상을 복함에 대하여 공자는 그 군의 까닭으로 外房外姐(외방외조)의 상을 복하지 못한 경우요 有從無服而有服(유종무복이유복)이라 함은 처가 夫(부)의 昆弟(곤제)를 위하여 복하나, 그 자매를 위하여 복하지 못한 경우이다, 而從重而輕(이종중이경)이라 함은 처가 그 본생부모를 위하여 기년의 상을 복함은 用(용)함에 대하여 夫(부)가 처의 부모를 위하여 3월의 상을 복함은 輕(경)하다는 것이요 有從輕而重(유종경이중)이라 함은 公子(공자)가 군의 까닭으로 그 모를 위하여 練冠(연관)함은 輕(경)함에 대하여 公主(공주)의 처는 그 모를 위하여 기년의 상을 澈(철)함은 중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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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6번= 이러한 원칙에 기본하여 正服(정복)・加服(가복)・義服(의복)・降服(항복)의 4종이 성립한다. 정복은 곧 정복의 복으로 혈족 중심의 정통에 용한 것이요 타 3자는 이것에 준하여 파생한 것이다. 즉 가복은 父卒(부졸)함으로 인하여 자손이 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을 위하여 3년상을 복한 것이니 承重(승중)으로 인하여 부의 代(대)로 복을 추가한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 남자존속과 여자존속을 동 등급으로 하는 수도 있고 異(이) 등급으로 하는 수가 있어 예론과 시대 법제에 의하여 相違(상위)가 있는 듯하다.(1) 義服(의복)은 본래 혈족 관계가 없이 다만 의리의 관계로써 복한 경우를 말한 것이다, 예컨대 妻爲夫(처위부)・妾爲君(첩위군)・夫爲妻(부위처)・子爲生母外諸母夫爲妻父母(자위생모외제모부위처부모)・爲女媒(위녀모) 등과 같다. 降服(항복)은 본래 혈족 관계자 또는 外族親(외족친)이 출가함으로 인하여 복을 경감한 경우를 말한 것이니, 예컨대 父卒母嫁(부졸모가), 姑(고)・자매・姪女適人(질녀적인), 姨(이)・外甥女適人(외생녀적인) 등과 같다. 이러한 파생적인 복은 대가족 통솔의 필요상 정복에 준하여 점차로 추가 발전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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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7번= 이제 복자 등급의 전 조직을 도시하여 그 근본 의의를 개별적으로 분절 고찰할까 한다. (별지 도표 참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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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8번= ① 부모의 상은 원래가 3년으로서 同様(동양)의 상을 복할 것은 물론이나, 특히 斬齊(참자)의 별이 있음은 부계 중심의 가장제에 있어서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거니와, 특히 父在爲母(부재위모)의 경우에 한하여는 기년상올 복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남존여복의 관념에서 나은 것은 아닐 것이요 이러한 관계에 기인된 것인가 생각한다. 즉 부의 생존 시에는 모상이나마 부가 主祭者(주제자)가 된 것임으로 사실상으로는 부의 처에 대한 상 즉 기년상이 적용된 것이겠다. 그러므로 부졸하여서는 자기가 주제자가 됨으로 모 역시 3년상을 복하게 될 것이니, 士儀(사의)의 규정한 바에 의하면 「父母偕喪 雖在一日之內 若父先卒 則服母三年」이라 하였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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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9번= ② 卑屬親(비속친)에 있어서 자와 子婦(자부)・형제와 형제처・질과 姪妻(질처)・손과 孫妻(손처)의 간에는 남녀의 별에 의하여 등급적 차이가 있음에 대하여 자와 녀・형제와 자매・질과 질녀・손과 손녀의 간에는 남녀의 별에 의하여 아무런 차등이 없으니, 이것은 곧 부계적 혈족 중심의 관념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출가 후에도 본생 친가족을 위하여 상을 복하되, 경우에 비하여 減服(감복)이 되고, 또 본생가의 가족은 출가한 姑母(고모)와 자매를 위하여 항복이 적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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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0번= ③ 부모가 특히 장자를 위하여 각자 斬齊(참자) 3년을 복하고 서자 즉 衆子(중자)를 위하여 기년을 복함은, 적적 계승을 존중히 하고 선조 숭배를 후히 하는 까닭이요, 장자와 중자의 차별은 생존 시와 다름이 없으니, 그것은 곧 장자상속권제(primogeniture-system)와 밀접 不離(불리)의 관계를 가진 것이겠다. 그러므로 중자는 적손과 갈이 동급의 木杖期(목장기)요 衆孫(중손)은 嫡孫(적손)과 달라 대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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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1번= ④ 本宗(본종)의 미성년자에 대하여는 특히 痛服(통복)이란 것이 있어 長殤(장상, 自十六歲至十九歲) 中殤(중상, 自十二歲至十五歲) 下殤(하상, 自八歲至十一歲)의 3종으로 되었으니. 연령의 차이에 의하여 상의 등급이 있음은 자연한 귀결이거니와, 미성년의 子姪(자질)에게까지도 상제의 규정을 필요로 한 것은, 祖先(조선) 숭배의 관념에 기본한 가계존속의 요구로 인하여 자손을 중요시한 까닭이다. 따라서 장상일수록 重喪(중상)임은 가계 존속의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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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2번= ⑤ 양자로 말하면 의례 상복장에 「人後者爲所後父斬衰三年」이라 하여 養父(양부)는 親父(친부)와 다름이 없이 斬衰喪(참최상)을 복하고 오히려 본생부를 위하여 자최가 장기로 항복하며, 양가의 가족에 대하여, 전연히 적자와 같은 義務가 있으나 다른 본생 친속을 위하여서는 정복보다 일등을 항복하니, 이것은 물론 가계존속의 요구에 기인한 양자제도를 중요시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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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3번= ⑥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처가 부를 위하여 참최 3년을 복함에 대하여 부가 처를 위하여 자최 기년을 복함은 처에 대한 부권의 강력을 의미하는 것이요, 처를 위하여서는 장자를 위하는 것보다도 輕服(경복)인 것은 가족의 구성에 부부가 중심이 아니고 부자가 중심이 된 것을 표시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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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4번= ⑦ 첩은, 夫君(부군)을 위하여 참최 3년상을 복함이 처가 부를 위한 경우와 다름이 없으나, 부가 첩을 위하여서는 有子(유자)의 첩에 한하여 緦麻(시마) 3월상을 복하고-의례 상복편에 「大夫爲貴妾 雖無子冇服」이라 함은 특수한 경우이거니와-첩이 女君(여군)을 위하여 자최 不杖期(불장기, 婦(부)가 舅姑(구고)에 대한 복과 동등)를 복함에 대하여 여군이 첩을 위하여서는 無服(무복)으로 되었고 또 첩은 부군의 친족을 위하여 협소한 범위에 한하며, 부군은 첩의 친족을 위하여 무복이니, 이러한 것은 첩이란 것이 원래 가계존속을 목적한 子(자)를 얻기 위하여 존재한 부속적 가족 성원인 까닭이요, 따라서 처첩의 신분지위에 차별이 있음을 잘 말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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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5번= ⑧ 일반으로 남계혈족 중심인 것은 이상에 말한 바와 같거니와, 종족 男親(남친) 방계에 있어서는 그 등급의 배치가 대개 이러한 원리에 기본되어 있다. 첫째로는 공동 시조에 대하여 자기와 동일한 세대에 있는 방계 친속은 자기와 동항렬이 되고 그 원근에 따라 규칙적으로 등급이 배열되었으니, 즉 형제는 기・종형제는 대공・재종형제는 소공・이종형제는 시마로 된다. 다음으로 공동 시조에 대하여 자기와 다른 세대에 있는 방계친속은 공동 시조의 원근에 따라 분류되었으니, 즉 高祖系(고조계)에 속한 從曾祖父(종증부모)・再從祖父(재종조부)・冉從伯叔父(재종백숙부)는 三從兄弟(삼종형제)와 같이 시마를 복하고, 曾祖係(증조계)에 속한 從祖父(종조부) 從伯叔父(종백숙부)는 再從兄弟(재종형제)와 같이 소공을 복하고 조부계에 속한 방계친속은 伯叔父(백숙부)・종형제・종질・재종손의 존비에 순서하여 기・대공・소공・시마를 복한다. 이와 같이 직계친속이 방계친속에 대하여 重服(중복)으로써 우월적 지위에 있음은 곧 대소종족 간의 윤서를 요구함에 기인한 것이요, 필경 尊祖敬宗(존조경종)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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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6번= ⑨ 外族親(외족친) 즉 母黨(모당)에 대하여는 외조부모・외숙부모・이모를 위하여 겨우 소공을 복하고 그 외의 상복 범위는 지극히 협소한 것이니, 이것은 원시적 모계적 모권제의 영역에서 전연 탈이하여 부계적 부권제(Patrilineal Patripotesal System)로 된 것을 표시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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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7번= ⑩ 처족에 대하여 보건대 처는 夫黨(부당)을 위하여 거반 부에 준한 상을 복하지만, 부는 처부모를 위하여 겨우 시마를 복하니, 이것은 온전히 嫁娶制(가취제, Patriocal System)에 의한 부권가족의 형태를 표시함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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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8번= ⑪ 형제와 형제처의 간 즉 嫂叔間(수숙간)에는 상호 무복이요, (무복이 원칙이나 가례를 비롯하여 조선의 예서와 법전에는 소공으로 되어있다) 모당에 있어서 모의 자매 즉 이모를 위하여 소공을 복하고 모의 형제 즉 舅(구)를 위하여 시마를 복하여 女重男輕(여중남경)으로 되어있고 또 부당에 있어서 伯叔父母(백숙부모)를 위하여 대공을 복하고, 姪及姪女(질급질녀)을 위하여 기를 복하여 卑重尊輕(비중존경)으로 되어있으며, 형제 항렬(즉 형제 소공⋅종형제 시마⋅재종형제 무)보다도 질 항렬(즉 질 기⋅종질 소공⋅재종질 시마)의 복이 중하게 되어 있으니 이러한 것은 본종에 있어서의 친등 관계와 같이 정규의 순서를 갖지 못하니, 이것은 아마도 원시적인 혼인형태 또는 가족조직의 殘體(잔체)가 혼동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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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9번= ⑫ 三父八母服(삼부팔모복)은 도시하지 않았으니, 이것을 여기에 표시하면 대개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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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0번= 同居繼父(동거계부) 不杖期(불장기)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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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1번= 不同居繼父(불동거계부) 자최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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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2번= 元不同居繼父(원불동거계부) 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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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3번= 嫡母(적모) 자최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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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4번= 繼母(계모) 자최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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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5번= 養母(양모) 자최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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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6번= 嫁母(가모) 자최杖期(장기)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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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7번= 出母(출모) 자최杖期 (장기)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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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8번= 乳母(유모) 시마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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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9번= 庶母(서모) 시마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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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0번= 慈母(자모) 자최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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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1번= 이 三父八母(삼부팔모)의 복제는 본래 상복의 조직이 부계적 부권제와 嫁娶制(가취제)의 원리에 기초함으로 인하여 된 것이 물론이다. 그러므로 계부를 위하여서는 同居不同居(동거불동거)에 따라 不杖期(불장기)와 再衰(재최)3월에 복하나 계모, 양모・자모를 위하여서는 적모와 동 등급의 자최 삼년상을 복한 것이요, 따라서 가모・출모를 위하여서는 자최 杖期(장기)에 불과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서모는 유모와 함께 총 3월에 불과함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적서의 별 처첩의 별이 엄연함에 의한 것이다. 첩제를 공연히 필요로 삼는 사회조직에 있어서 첩의 지위가 지극히 비천시됨은 모순의 현상이라고 하겠으나, 여하간 일반 예서의 규정에는 「土爲庶母」 또는 「庶子爲父後者爲其母」의 경우에는 겨우 총 3월로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 「庶子爲其後者爲其母」라 함은 妾腹(첩복)의 자로서 상속인이 될지라도 그 생모인 妾母(첩모)에 대한 것이니, 여기에는 오직 부계존속이 중요시되고 모자 혈족의 관계는 전연 무시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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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2번= 이상으로써 상복제의 복자 관계를 대략 분석 고찰하였거니와,(4) 요컨대 이러한 조직으로써 대소종족을 결합하고 공동 선조의 제사로써 동족친화의 관념을 후히 하는 것이다. 일찍이 중국에 있어서는 9족⋅5종⋅5복⋅6친 등의 말로써 이것을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오복의 관계자는 그대로 친족의 一團(일단)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상세히 고찰한다면 오복자의 범위는 그대로 친족의 범위와 致(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종래로 조선에 있어서 오늘에 통용하는 친족이란 맡은 없고 친속 또는 종족이라 하여 특히 宗(종)은 宗族親(종족친)을 표시하고 戚(척)은 姻戚(인척) 또는 外戚(외척)이라는 것과 같이 혼인관계로 인하여 된 친척을 말함은 중국에 있어서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이 族(족) 또는 戚(척)은 오복자의 범위보다 광범한 것 같다 상복의 가장 輕(경)한 것은 시마이므로 오복자에 한하여서는 가장 원친을 위하여 복함은 물론이지만, 또 그밖에 祖免親(조면친)이란 것이 있음을 보아 알 일이다. 「四世緦麻服之窮也五世祖免」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從高祖父母(종고조부모)・再從曾祖父母(재종증조부모)・再從曾大姑(재종증대고)・三從祖父母(삼종조부모)・三從大姑(삼종대고)・三從伯叔父母(삼종백숙부모)・三從姑(삼종고) 四從兄弟姉妹(사종형제자매)는 곧 本宗(본종) 친속으로서의 조면친이다. 일반으로 이것을 시마 이상의 有服親(유복친)에 대하여 無服親(무복친)이라 한다. 이 무복친은 또한 母族(모족) 즉 외척 처족 출가족에도 있다. 즉 외척에 있어서는 外曾祖父母外從姪及姪女(외증조부모외종질급질녀) 姨從姪及姪女(이종질급질녀) 外再從兄兄弟姉妹(외재종형형제자매) 從姨姪及姪女(종이질급질녀)가 그것이요, 처족에 있어서는 妻祖父母(妻祖父母) 妻外祖父母(처외조부모) 妻伯叔父母(처백숙부모) 妻姑母(처고모) 妻兄弟及妻(처형제급처) 妻姉妹(처자매) 妻姪及姪女(처질급질녀)가 그것이요, 출가족에 있어서는 姑母夫姉妹夫(고모부자매부) 內從姪及姪女(내종질급질녀) 外會孫及孫女(외회손급손녀)가 그것이다. 물론 친족의 범위는 각자 국가의 법제에 의하여 그 차이가 다대하다. 현금 일본 민법에는 자연혈족 배우자姻族(인족) 준혈족으로써 친족을 삼고, 특히 혈족은 6친등 이내 인족은, 3친등 이내에 한한다. 조선의 종래 관습은 혈족 10촌 준 혈족 1촌 배우자 및 준배우자 무촌 인족 9촌 인족배우자 3촌에 及(급)한다. 이미 이조 六典(육전)에 있어서는 明律(명률)에 준하여 제정하였고 최후의 법전인 刑法大典(형법대전)에는 친속을 本宗(본종) 및 異姓(이성)의 有服親(유복친)가 조면친의 삼류로 分(분)하여 그 범위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일반 관습으로는 대개 오복친을 친족의 범위로 삼는 것은 우리의 주지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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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번= {{TagSpage|37-1}} 五服의 制度가 朝鲜에 있어서 어느 時期에 確立한 것인가를 明言하기 難하나, 推察컨대 法制上 唐律을 採用함에 始作할 것이요, 더욱히 喪祭의 禮가 民間에 普及된 것은 高麗末葉에 文公家禮가 傳來한 後 鄭圃隱이 率先勵行함에 始作한 것이라 하겠으니. 家廟制의 創始에 關한 成俔의 言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잇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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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번= {{TagSpage|37-2}} 君子將營宮室 必光岡堂 以奉先世神主 此朱文公家禮也 自三國高麗以來 專奉釋氏 家廟之制不明 士大夫皆不以禮祀先 自冊隱鄭文忠公 倡明道學 嚴立祭祀之儀 然後家家立祠堂 始傳家舍於嫡嗣始重嫡庶之分 無子者必取族子以爲嗣國家大亨 用孟月 士大夫時亨用四仲月是有序也.(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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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번= {{TagSpage|37-3}} 五服의 制度와 不可分離의 關係롤 가지고 잇는 이 家廟의 制定이 果然 鄭圃隱에 始作한 것이냐 하면, 거기에는 多少 疑問이 있으나, 如何間 文獻上으로 뚜렷히 傳來한 바는 成俔의 見解와 같다. 그뿐 아니라 恭讓王 二年 二月에 鄭圃隱의 建言에 依하야 大夫士 庶人의 祭祀에 關한 禮制가 詳細히 規定된 것은 高麗史의 禮志에 明瞭하니(2) 畢竟 高麗 末期에 이르러{{TagPage|38-1}} 漸次로 喪祭의 禮俗이 重要視 되었은 것을 다음의 記錄으로써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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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번= {{TagSpage|38-2}} (上略) 右务于祭法 宣今中外遵守 以成般俗 其中有人情 事勢不便者不妳拘宗法 其見存族長奉神主主祠 其餘嫡衆子孫並於其家與祭 衆子孫所生父母各作神主 祭於其家 致齋如常儀 三年六月乙己 命申行家廟之制.(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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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번= {{TagSpage|38-3}} 따라서 萬若 喪祭의 禮制에 違反한 者에 對하여서는 刑罰을 加하야 嚴重히 取締하기로 되었든 것이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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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번= {{TagSpage|38-4}} 聞父冊喪若夫喪 忘哀作樂雜戯徒一年. 釋服從吉徒三年. 匿不擧哀流二千里. 詐稱祖父母⋅父母死以求暇及有所避徒三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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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번= {{TagSpage|38-5}} 이라 規定하였으니, 居喪에 謹愼치 않은 者 服制에 遂守치 않은 者 當喪을 詐稱하야 求暇하는 者 等은 國法에 處하였든 것이다. 그 中에도 이 當喪하야 給暇한 點에 關하야는 特히 仕官으로서 重要한 일이므로 일즉 成宗 四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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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8번= {{TagSpage|38-6}} 凡五服聞喪 暇三分分之二 布剰日入暇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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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9번= {{TagSpage|38-7}} 이라는 喪中給暇制度를 規定하였었다. 그뿐 아니라 父母의 忌日에도 給暇를 制定하였으니, 벌서 景宗 六年 十二月에 制父母忌日 依書儀一日兩宵給暇라 하였고 祖父母・妻・妻父母・外祖父母의 大小祥 또는 忌日에도 一日兩宵의 給暇를 制定하였으며 或은 任官의 京鄕에 依하야 或은 官位의 品階에 依하야 或은 文武官의 差異에 依하야-暇令 恭讓王 四年에는 軍官에게 三年喪을 除하였음과 같이-制定한 것이 高麗史 禮志에 歷然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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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0번= {{TagSpage|38-8}} 이와가티 祭祀와 함께 喪服에 關하야 國家의 法制로서 重要視하게 되였으나, 이른바 五服制度가 좀 더 整然히 規定됨은 恭讓王 三年 五月에 明律에 進함에 始作한 것 같다. 元來 이五服制度뿐만이 아니라 中國의 禮敎를 朝鮮에 適用함에 當하여서는 적지않은 難關을 격것든  것이다. 例컨대 親迎의 禮家廟의 制가 그리하였으며 喪服制가 또한 그리하였으{{TagPage|39-1}}니 그 中에 가장 重喪인 三年喪의 實行에 對하여서는 朝野의 識者 間에 相當한 物議가 있었든 것이다. 이미 五百餘年의 歲月을 지난 오늘에 있어서는 三年喪이란 것이 不拔히 成俗으로 되어 있으나, 이 三年喪을 逾用할 當初를 생각한다면 習俗의 慣性이 實로 强敏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즉히 恭愍王 六年에 諫官 李精이 三年喪을 勵行하도특 請함에 王은 이에 應하였으나, 고것이 上下實行難을 看破함이였든지 同九年에 三年制틀 除하고 百日로써 脫衰의 期로 삼기로 하였었다. 이에 對하야 判秘書監事 李文据이 上疏하야 다시 三年喪制를 適用하도록 請하였으나 王은 이것을 採用하지 않고 말었다. 그러므로 이 동안에는 百日喪이 最高喪으로 되었든 것이다. 그 後로 恭讓王 三年에 이르러 明律에 準하야 服制틀 規定하였다. 그러나 또 이러한 條件이 附加되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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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1번= {{TagSpage|39-2}} 唯外祖父母・妻父母服 與伯叔同 無後者以三歲前遺棄小兒冒姓付籍者 即同己子 共以同宗之子親近爲先構後者 亦許行服三年之喪 天下之通喪 自今許終其制 其中關係國家要務必合起復者 啓明取旨奪情起復 大小軍官及不許丁憂者止行百日喪 其父母喪二十五月內 每月行朔望祭 至十三月初忌日 行小祥祭二十五月第二忌日 行大祥祭 二十七月晦行禪祭 二十八月一月始服吉服 嬰三年內不許娶婦及宴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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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2번= {{TagSpage|39-3}} 이러한 附加條件뿐만 아니라 이 때의 五服制定이 明律의 그것에 比하야 多少 簡略된 點도 잇거니와, 글지라도 그 實行이 民間에까지 普及될 수는 없었던 것은, 大略 推测에 남음이 있을 것이요, 李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튼것을 文獻上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即 李朝의 初期 定宗 元年 己卯 春正月에 門下府는 學生 文珠双라는 者가 그의 父親喪을 當하야 三年喪을 實行치 않고 겨우 一年을 지나 娶妻하엿다는 일로 그롤 處罰하도록 大王에게 力請하였던일이 있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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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3번= {{TagSpage|39-4}} 初門下府上書曰 三年之喪天下之通義 前朝之季禮制頹壊 人心衰薄 百日即吉 飮酒嶼肉 男女婚姻 無所不爲 今國家{{TagPage|40-1}} 復行三年之喪 明存著令 學生文珠奴 其父承渡之喪 甫踰年 共諸兄皆制中 而先自釋服 娶都承旨李文和之女 以于成憲 其母權氏稱有內旨 其罪己不得而治矣 然亦豈不終制而在妻家乎 伏惟命還共家 伸終其制 自今以後 三年之內欲行嫁娶 黃緣取旨者 痛行經理.(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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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4번= {{TagSpage|40-2}} 이에 對하야 定宗은 文珠奴틀 罰하기를 不許하고 다만 이 機會에 際하야 「今後自除抑喪者糾理」라는 程度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하야 門下府는 再疏에 이르러 「願依前日所申以正風俗」이라 하고 꿋꿋내 그의 罪를 糾彈하엿든 것이다. 이것으로써 三年喪의 勵行이 法政上 如何히 重要한 問題이엿든가틀 알 것이요 또한 三年喪制가 如何히 實行難인 禮制이엿든가틀 窺知할 수 있는 것이다. 또 太宗 三 年癸末 夏四月 司諫院에서 時務數條틀 舉示하야 上疏한 中 喪服에 關한 事項, 五箇條를 指摘하였으니 또한 이러한 事情을 如實히 傳한 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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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5번= {{TagSpage|40-3}} 今三年之喪 自公卿士大夫悉遵其制 然而未久 間有未備者焉 古者婦女喪服 除出嫁者爲本宗減一等外與男于同也 今三年之裏 男子皆從本服 而婦女尙循前期之弊 皆以百日爲限而釋服或子服喪 方居衰経而爲榷母者 纔過百日釋服改嫁 恬不爲愧 男女喪服之不同 初若小失 而其流之弊 至於如此 可勝歎哉 此末備者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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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6번= {{TagSpage|40-4}} 古者大喪之服 男女無異也 其在無朝婦女則不服麤布 然而笠帽當甲生麤布 故其服斬喪之跡可見也 今婦女出入非有唯 不着斬衰之服 至於贫帽亦用細熟苧布 間有貧賤者 依舊用麤布則富者笑之 故亦皆勉爲 凡禮之變 皆起於微 若此不革 精恐婦女斬衰之服 亦將變爲緦麻矣 此其末備者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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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7번= {{TagSpage|40-5}} 古者居父母之喪者 蔬食水飮杖而後起 若過喪葬不得己之事 非騎馬不能行 故乘撲馬布裏鞍轡之文 載於禮書 今人徃々飮酒食稻 無異平者 則其氣力不須杖矣 乃因乘撲馬之丈 不因喪事而乘肥馬 奔馳朝路者有之 此未備者三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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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8번= {{TagSpage|41-1}} 文公家證菖同母異父之兄弟姉妹 正服小功五月 今此條不嚴六典 此未備者四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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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9번= {{TagSpage|41-2}} 文公家體爲庶母之乳養已者 服小功五月 爲乳母緦麻三月 然則乳母雖非父妾有服明矣, 今六典內釋乳母曰 父妾之乳响者則是乳母 心父妾而後有服 其非父妾者無服也. (中略) 此未備者五也.(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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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0번= {{TagSpage|41-3}} 이러한 上疏률 大王은 嘉納하야 法規로 制定하였으니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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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1번= {{TagSpage|41-4}} 一, 女子의 服으로서 父母・舅姑・夫의 喪에는 宗室과 士大夫의 집을 莫論하고 百日釋服치 않고 文公家禮에 依하야 三年喪을 服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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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2번= {{TagSpage|41-5}} 二, 喪의 服裝으로서 笠帽及長衫은 다 生麤布로써하고 苧布를 一切 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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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3번= {{TagSpage|41-6}} 三, 男子로서 斬衰服한 者는 一且緩急의 境遇라 할지라도 騎馬를 乘用하야 朝路에 參入할 수 업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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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4번= {{TagSpage|41-7}} 四, 同母異父의 兄弟姉妹는 小功을 服할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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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5번= {{TagSpage|41-8}} 五, 乳母는 父妾이 아닐지라도 緦麻 三月을 服할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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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6번= {{TagSpage|41-9}} 等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文公家禮 基準하야 中國의 禮制를 徹底히 實行하도톡 相當히 細密한 點에까지 國家法制를 이루게 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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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7번= {{TagSpage|41-10}} 服制와 聯關하야 祖先祭祀의 禮를 또한 漸次로 重要視하게 되였으니, 太祖 元年 九月 壬寅 都評議使司 裴克廉・趙浚 等이 二十二箇條의 施政問題를 上言한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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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8번= {{TagSpage|41-11}} 自公卿至于下士 皆立家廟 以祭先代 底人祭於其寢云々. 凡主喪者父母在殯 朝夕臨祭母得出外.(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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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9번= {{TagSpage|41-12}} 라 하엿스며, 同 六年 四月 丁未에는 諫官의 上書에 또한 그 勵行을 力說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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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0번= {{TagSpage|42-1}} 一定都之初首建宗廟以奉時祀 以薦時物報本之誠 無所不然 而四時之亨 每 命大臣以攝行 願自今除無時薦新之外 四時大亨 必須親裸以明奉先之禮 以報本之誠 一士大夫家廟之制 己有著令 而專尙浮屠 語事鬼神 曾不立廟 敢有違令者 尙循舊弊者 令憲司糾理 (中略) 上兪允施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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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1번= {{TagSpage|42-2}} 이라 한 것이 그것이니, 太祖의 敎旨 第四條에 冠婚喪祭를 敦厚하게 하라는 項目이 있음도 無理가 아니엿다. 여기에도 「專尙浮屠韻事鬼神」이라 함에 보다시피 아즉 佛敎의 歸依하 巫姿의 信仰이 相當한 勢力을 가젔음으로 因하야 先祭祀의 禮敎를 實行하기 難하얏슴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太宗 十二年 夏五月 戊子 漢城府의 施政方針 三事를 陳述한 中에 家廟制를 職行치 않은 者를 糾理키로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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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2번= {{TagSpage|42-3}} 其一家廟之設 己有著令 士大夫廣占家基 崇峻堂寢 不曾立廟 殊無報本之意 乞令承重者 限今年畢立祠堂 違者移文 憲司料理.(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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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3번= {{TagSpage|42-4}} 다 하엿고, 世宗 二年 十一月 辛未에는 一倒를 文公家禮에 依하고 佛事를 痛禁하며 中外의 官吏로 하여금 家廟時亨의 制에 從하지 않는 者들을 論罪키로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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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4번= {{TagSpage|42-5}} 禮曹啓 元續六典內 各年判旨中外官吏 或不奉行 其不奉行條件 謹錄以聞 請申明舉行 違者論罪云々(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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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5번= {{TagSpage|42-6}} 이라 하였으니, 士大夫 間에도 아즉 家廟制가 實行難이였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民間에는 더욱히 實行難이였을 것이니. 成宗 三年 六月의 傳旨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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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6번= {{TagSpage|42-7}} 曹司憲府曰 在世宗朝 從文公家禮 令士大夫立家廟 庶人立淨室 祭以四仲朔 令此制陵夷士大夫不立家廟 甚者不作神主代以斥摭 士大夫尙爾 況庶人乎 宜加檢察 以警其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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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7번= {{TagSpage|43-1}} 라 함으로써 알 일이다. 여긔 「代以紙錢」이라한 紙錢은 即 紙錢(笺)의 謂로-牋과 錢이 音形共似하야 淚用된 것인 듯-今日의 紙榜이란 것이니 이는 이미 高麗朝로부터 民間에 流行되여, 내려오든 習俗이였다. 如何間 民庶에 있어서도 撤次로 禮敎에 從하여 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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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8번= {{TagSpage|43-2}} 그런대 또 한가지 看過할 수 없는 것은 先祖 祭祀의 世代에 關하야 現下 우리의 周知한 바 上下를 勿論하고 四代祖에 及한 것이나, 이것은 中國 禮制의 實行 當初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即 先祖奉祀의 世代는 品階 即 社會的 階級에 依하야 差異가 있으니, 벌서 李朝 國初의 法典에 規定된 바이였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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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9번= {{TagSpage|43-3}} 文武官六品以上三代 七品以下二代 庶人止考妣.(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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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0번= {{TagSpage|43-4}} 란 것이 그것이요, 庶人은 考妣의 奉祀에 限한 것이였다. 그러면 어찌하야 또 언제부터 朝鮮에 있어서는 上下를 勿論하고 四代祖를 奉祀하게 되었느냐 하면, 大槪는 李朝初葉 以來로 禮敎文化가 漸次 民衆化함에 따라 民衆이 上曆階級의 生活形式을 模倣하는 中 不知不識 間에 그리된 것이겠고 特히 朱子學의 影響에 依함이 크다할 것이다. 卽 朱子의 말에 「高祖有服 不可不祭」라 함에 對하야 禮敎를 崇尙하는 學者들이 이것을 實踐하도록 主張함에 始作한 것인가 한다. 文獻備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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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1번= {{TagSpage|43-5}} 金長生曰 祭三代 雖時王之制 然程朱询謂高祖有服 不可不祭 我東諸賢 皆祭四代.(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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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2번= {{TagSpage|43-6}} 라 함은 곳 이러한 事情을 말한 것이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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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3번= {{TagSpage|43-7}} 이와 같이 하야 文公家禮에 基準한 禮敎의 徹底는 國家의 法制로서 이미 重要한 文化要素를 이룬 것임으로 碩學鴻儒는 勿論이요 적어도 儒學을 學修한 者는 家禮를 硏究하는 傾向이 顯殊하게 되었다. 이윽고 朝鮮의 禮論은 非常한{{TagPage|44-1}} 發達을 이루게 되였으니, 이제 李朝 年間의 顯著한 禮論家와 그 著述을 擧示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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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4번= {{TagSpage|44-2}} 晦齋・李彥迪 奉先雜儀 明宗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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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5번= {{TagSpage|44-3}} 退溪・李  滉 退溪喪祭體問答 明・宣祖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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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6번= {{TagSpage|44-4}} 高峯・奇大升 高峯集禮論篇 宣祖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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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7번= {{TagSpage|44-5}} 栗谷・李珥 擊蒙要訣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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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8번= {{TagSpage|44-6}} 芝山・曹好益 家禮考證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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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9번= {{TagSpage|44-7}} 沙溪・金長生 家禮輯覽 孝宗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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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0번= {{TagSpage|44-8}} 市南・兪  榮 家禮源流 肅宗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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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1번= {{TagSpage|44-9}} 申義慶 撰 金長生 修 喪禮備要 仁祖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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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2번= {{TagSpage|44-10}} 尤庵・宋時烈 左庵經禮問答 肅宗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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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3번= {{TagSpage|44-11}} 明齋・尹  拯 明齋疑禮問答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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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4번= {{TagSpage|44-12}} 退修齋・申逝 疑禮類說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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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5번= {{TagSpage|44-13}} 南溪・朴世采 南溪熊說(此外에 六禮疑輯・三禮矣・家禮要解 等이 있음)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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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6번= {{TagSpage|44-14}} 星湖・李  瀷 星湖僿說禮論篇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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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7번= {{TagSpage|44-15}} 陶庵・李  繹 四禮便覽 英祖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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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8번= {{TagSpage|44-16}} 硏經齋・成海應 硏經齋全集禮論篇 正宗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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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9번= {{TagSpage|45-1}} 某山・丁若鏞 喪禮四箋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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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0번= {{TagSpage|45-2}} 東巖・柳長源 常變通攷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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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1번= {{TagSpage|45-3}} 雅亭・李德憲 士小節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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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2번= {{TagSpage|45-4}} 性齋・許  傳 士儀 李太王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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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3번= {{TagSpage|45-5}} 이 中에 許傳의 土儀는 가장 完備한 것이요, 民間에 가장 普及된 것은 喪禮備要와 四禮便覽일 것이나, 이러한 禮論 中에 各自 四色黨의 派閥이 있음은 決코 看過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元來 이와 같이 禮書가 叢出함은 禮論에 關한 解釋의 相違가 攻爭과 關聯하야 政界學界의 一大問題로 됨에 依한 것이다. 이 禮論的 政爭의 問題는 우리가 널리 잘 아다시피 일즉히 孝宗時代에 始作한 것이니, 이제 그 經路를 大略 孝察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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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4번= {{TagSpage|45-6}} 李朝 十九代 孝宗大王이 在位 十年에 昇遐하자 그 父王 仁祖의 繼妃로 아즉 在世하였든 慈懿大妃 趙氏의 服할 바 喪에 關하야 爲政의 耍路에 있는 當局者 間에, 그 意見이 兩立하게 되였다. 即 一說에는 三年喪을 服할 것이라 하고 또 一說에는 朞年喪을 服할 것이라는 것이다. 儀禮 斬衰章에 依하면 母는 嫡長子틀 爲하야 斬衰 三年喪을 服할 것으로 規定되여 있는 데, 儀禮 喪服章疎에 依하면 設或 大統을 權承한 人에 對하여서 일지라도 三年喪을 服하지 아니하여도 좋다는 境遇가 있으니, 孝宗大王은 곧 이러한 境遇에 該當하다는 것이 그 一說이다. 即 孝宗은 倫序로 보아 第二子임으로 趙大妃는 朞年喪을 服할 것이라는 것이니, 이 說을 取한 이는 孝宗 一代롤 通하야 重用되였든 要人이며 當代의 碩學인 尤庵・朱時烈이요, 이와 和合한 碩領은 그의 同鄕同宗인 同春・宋浚吉이였다. 이에 對하야 儀禮 斬衰章疎에 第一子 死하면 適妻所生의 第二長子를 立하야 곧 長子로 삼을 것을 規定하였음에 조차, 孝宗大王은 곧 이 境遇에 該當함으로 趙大妃는 三年{{TagPage|46-1}} 喪을 服할 것이라 하는 것이니, 이 說를 主張한 이는 때마츰 政權失墜의 不遇에 處한 南人의碩領 尹鐫요 이와 和合한 在朝의 人物은 掌令 許穆이였다. 이제 이 兩立의 見解는 朝鮮 要人을 通하야 바야흐로 黨派가 深刻하여 오든 南西 二派에 分立하야 이것을 採擇할 爲政 當局의 閣僚는 容易히 處決할 수가 없었든 것이니, 實錄에 傳한바 經路는 大略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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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5번= {{TagSpage|46-1}} 顯宗元年己亥五月乙丑 禮曹又 達 成懿王大妃爲 大行大王喪服制 不載於五禮儀 或云當服三年 或云當服朞年 末有可以攻據者 請議于大臣 王世子下令曰兩賛善一體問議 領敦寧府事李景爽・領議政鄭太和・延陽府院君李時白・左議政沈之源・原平府院君元斗杓・完南府院君李厚源以爲古禮雖不能暁解放之 時王之制似當碁年之服 吏曹判書宋時列・右參賛宋浚吉以爲古今禮律旣有異同 旁王乏制尤難輕議 而諸大臣旣以時王之判爲議 臣等不敢更容他說 王世子下令曰 依議初 大喪出而議禮者 各持其說 或有言 王大妃於大行大王喪當服次長子三年者 或有言當服爲君新之 斬者主爲君 斬者前持平尹鐫之說也.(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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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6번= {{TagSpage|46-2}} 이와 같이 孝宗에 對한 趙大妃의 喪服과 같은 것으로 말하면 禮論에 確定한 바가 없는데, 趙大妃는 己徃 嫡長子底顯世于(諱溼)의 死에 當한야 斬衰三年喪을 服하였고, 事實上 孝宗은 第二長子인 만큼, 一年喪說를 取할만도 하려니와, 孝宗욱 元來 次子이지만 이미 嫡次長子로서 大統을 繼承하였고 또 趙大妃와 孝宗과는 母子의 關係에 있다 할지라도 君臣關係에 있었음으로 爲君斬衰三年이라는 原理에 비추어보면 實로 三年喪說을 取할말만도 하니, 그 兩者 擇一이 難處하였든 것이다. 이때에 領議政 鄭太和는 마지 못하야 宋時烈에게 그 一年說의 根據에 關한 說明을 要求함에 宋時烈은 곧 이러한 理由로써 對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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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7번= {{TagSpage|47-1}} 禮有之自天子以至士大夫 長子死而次適立則其服亦與長子同 而其下又有四棟之說 以爲庶子承重則不服三年 以古禮言之 次逋亦庶子也 上下之說 自相矛盾如此 又無先儒定論 可据以爲訂者  將不可取此而捨彼矣.(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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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8번= {{TagSpage|47-2}} 이 四種이라 함은 「亦正亦體」 「正而不體」 「體而不正」 「不正不體」의 境遇를 말한 것이다. 「亦正亦體」는 嫡長子가 繼承하야 血統上으로나 倫序上으로나 正當한 境遇요 「不正不體」는 庶孫이 繼承하야 血統上으로나 倫序上으로나 正當치 못한 境遇이니 이 두 境遇는 그다지 問題될 것이 없다. 그런데, 「正而不體」는 嫡長孫이 繼承하야 血統上으로는 正當하나 倫序上으로는  不正當한 境遇요 「體而不正」 庶子 即 次子가 繼承하야 倫序上으로는 正當하나 血統上으로는 不正當한 境遇이니, 따라서 이 두 境遇에는 多少 問題가 있는 것인데, 이것을 仁祖에 關하야 말하자면 昭顯之子는 「正而不醴」요 孝宗은 「體而不正」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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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9번= {{TagSpage|47-3}} [[파일:김두헌 오복제도-4.png|가운데|4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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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0번= {{TagSpage|47-4}} 그러고 보면 孝宗은 仁宗의 大統을 權承하였다 할지라도 庶子 即 次子임으로 趙大妃는 그 喪을 朞年으로 하야 足하다는 것이 時烈의 持論이였다. 이러한 尤庵의 說明을 듯자 領議政 鄭太和는 그 理論에 對하야 異議가 없었는 듯하나, 孝宗에 對하야서나 또 昭顯의 嫡子에 對하야서나 大義名分上 이것을 不正 또는 不體라 함이 不當하다 생각하였음으로 다만 李朝 傳來의 實際에 參照하야 父子에 對한 朞年服을 趙大妃의 境遇에 取하랴고 하였든 것이다. 即 實錄에 記載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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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1번= {{TagSpage|47-5}} 太和大驚搖手止之曰 禮雖如此 昭顯全有子 誰敢以此說爲議禮之證乎 禮經奧儀 吾固昧々 國朝以來 父於子喪皆服朞{{TagPage|48-1}} 年鲁聞之矣 吾意欲用 國制耳.(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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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2번= {{TagSpage|48-2}} 라 함이 그 經路이였다. 鄭太和는 本來 言寡謹愼의 人物인지라 몸소 領議政의 地位에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自進하야 極極的인 主張함이 없이 다만 다른 閣僚의 意見을 聽取하야 고요히 이것을 實行에 옴기려 하였든 것이다. 顯宗도 亦是 太和의 意見에 從하야 朞年說을 取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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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3번= {{TagSpage|48-3}} 이에 對하야 三年喪을 主張하는 便에서는 反對의 소리를 높이하고 儀禮註疏를 引用하야 朞年說의 非를 難하야 이것을 上疏함이 數回에 이르렀다. 參議 尹鐫는 儀禮 斬衰章에 「賈疏所謂第一子死 取適妻所生第二長子立之 亦名畏子」라 함을 引用하야 第二子라 할지라도 嫡長子가 이미 死하고 大統을 機承하는 以上 長子라 하여도 조흘 것이니, 趙大妃는 곧 斬衰 三年喪을 服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掌令 許穆이 이에 賛成하야 詳細한 禮論을 陳述하야 上疏하였으니 그 一端을 보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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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4번= {{TagSpage|48-4}} (前略) 儀禮註疏喪服章父爲長子傳曰何以三年也 正體於上 又乃將所傳重也 鄭玄曰不言嫡子通上下也 釋曰言長子則通上下之號 惟據大夫士 不通夫子諸侯 亦言立嫡以長子 欲見嫡淒所生皆存嫡子 第一子死也 則嫡妻所生第二長子立之 亦名長子 (中略) 齊衰章母爲長子註曰子爲母齊衰  母爲之不得過於子爲己故亦齊衰也 傳曰何以三年也 父之所不降 母亦不敢降也 鄭玄曰不敢以己之尊 降祖薦之正體也 適々相承謂之正體 乃謂爲三年 衆壬承統者同 立庶子爲後謂之能而不正  不得爲三年妾子故也 (中略) 夫以三年之喪爲父 父至尊也 爲君君至尊也 爲長子重其當祖禰之正體而又 以其將代己爲 宗廟主也 今孝考於大王大妃 旣爲嫡子 而又踐祚即位 當正體之尊 而其服則與體而不正 不得三年者等 臣不知依所據也 (中赂) 請令禮官儒臣追正喪服之失.(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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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5번= {{TagSpage|49-1}} 要컨대 許穆의 意見은 孝宗의 第二子이지만 血統上 嫡子요 이미 王位를 繼承하여 있음으로 正體之尊으로서 嫡長子와 다름이 없이 볼 것이요 따라서 禮論을 考慮하야 祖禰를 爲하고 宗廟를 當하야 斬衰三年喪을 服할 것이라는 主張이다. 그리하야 儀禮註疏에 「立庶于爲後 謂之體而不正 不得爲三年」이라 함은 이 庶子란 것이 妾子를 말함에 不過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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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6번= {{TagSpage|49-2}} 그러면 萬若 許穆의 說에 依할진대 第一子死하면 다시 第二子를 爲하야 또 第二子가 死하면 第三子를 爲하야 第四子 第五子에 까지라도 重疊하야 斬衰三年喪을 服하게 될 것이다. 果然 이 點을 들어 左參賛 宋浚吉의 反駁이 이러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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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7번= {{TagSpage|49-3}} 若如穆之說 則設令大夫士適妻所生有餘子 而第一子死其父爲之服三年 第二子死其父又服三年 不幸而第三死 第四第五死皆爲之服三年 竊恐禮意決不如此也.(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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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8번= {{TagSpage|49-4}} 그뿐 아니라 許穆은 儀禮註疏의 庶子라는 것을 妾子의 謂라고 보고, 따라서 妾子에 關하여서는 朞年服이라도 足하다는데 對하야 宋浚吉은 그럴 것이 決코 아니라 이 庶子란 것을 衆子로 볼 것이라 하야 「註疏旣明 第二嫡子以下 通謂庶子之義 而共下文謂體而不正 即庶子爲後者也」라 하였으니, 要컨대 趙大妃의 碁年說이 可하다는 것이다. 이에 對하야 許穆은 詳細한 喪服圖를 添附하야 또 長文의 上疏를 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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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9번= {{TagSpage|49-5}} (前略) 臣所言者 立嫡以長之義也 所以爲長子三年者 以正體於上 又以其傳重也 第一子死而立嫡妻所生第二長子亦長子 而其服在斬衰三年條則所謂旣爲第一子服斬 則爲第二長子不服三年之文 經傳不見 自一子至於五六而皆服三年之喩 臣不知其所謂也 所重者爲繼祖轎之正體也 非爲第一子斬也 喪服傳註曰 嫡妻所生皆名嫡子 又曰嫡妻所生第二長子是衆子 又曰庶子妾子之號 有舉衆子而言者 五服圖 爲長子斬衰三年爲衆于不杖卷是也 擧衆子則庶子在焉 衆子長于之弟及妾于 女于在室亦謂之衆子 未能遠別也 有擧庶子而言者 庶子不得爲長子三年是也 擧庶于而衆子在焉 以{{TagPage|50-1}}遠別於長子故 與妾子同號也 嫡子庶子未嘗同號 盖以喪服傳言之 大夫之嫡子服大夫之服 大夫之庶子 爲大夫則爲其父母服冷夫服 大夫降其庶子 嫡子庶子其分不亂如此至於雖承重 不得三年注 有嫡子庶孫庶子嫡孫之別 一嫡一庶且甚明白 嫡妻所生 不曰皆名嫡子乎 不得三年之爾 則禮經所謂爲長子斬衰三年者爲第一子乎 爲正體傳重乎 孝考以仁祖繼統之嫡子 旣以承宗廟而君一國矣.(23) (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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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80번= {{TagSpage|50-2}} 即 許穆의 主張한 바는 假令 第二子 第三子라 할지라도 大統을 繼承한 以上 이것을 尊重히 함은 祖爾의 正體를 繼承한 까닭임으로 父 또는 母가 斬衰喪을 服할 것은 決코 嫡長子에 限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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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81번= {{TagSpage|50-3}} 이 兩說에 對立은 각기 一理一非를 가지고 있어 그 曲直을 決定하기 難함에 드디어 顯宗은 國朝의 前例에 準할 것이라 하야 春秋舘 禮官으로 하여금 江華・山城・五臺山에 있는 實錄을 參照 考證케 하였고, 畢竟 朞年說에 落着하고 말었다. 그러나 이 對立의 禮論은 政爭의 渦中에 問題되야 꿏임이 없었으니 맛츰내 肅宗 即位의 年 十二月 十八日 失意에 싸였던 南人의 一派 南天漢 等이 合啓하야 時烈의 服制論은 孝宗을 仁祖의 庶子 即 妾子라 한 것이라고 上疏함에 肅宗의 裁可틀 얻었으니, 이로써 朞年說排擊運動이 功을 이루게 되였다. 이에 對하야 北人의 黨派인 四學儒生 李世弼 等은 「己亥以後 蓄憾怨時之輩 以儀禮一疑 自以爲難得之 奇貨 累進凶疏 欲售好奸云々」의 上疏로써 對抗하였으나 아무런 効果틀 얻지 못하고 宋時烈을 비롯하야 西人 一派의 失勢의 端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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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82번= {{TagSpage|50-4}} 勿論 이러한 經過가 政爭의 渦中에 생긴 일이거니와 喪服制에 關한 一 問題가 이같이 社會의 表面上에 擴大하였음은 禮論이 얼마나 重要한 文化 要素이엿던가를 잘 말한 것이라 하겟다. 如何間 이러한 政爭이 생긴 以來로 적어도 兩班階級에 있어서 禮論上 그 黨色을 明白히 함이 至極必要한 일이였고 따라서 儒者 間에는 禮敎의 研究가 大端히 盛하게 되였던{{TagPage|51-1}} 것이다.
  
|목차5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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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번= 오복의 제도가 조선에 있어서 어느 시기에 확립한 것인가를 명언하기 어려우나, 추찰컨대 법제상 당률을 채용함에 시작할 것이요, 더욱히 상제의 예가 민간에 보급된 것은 고려 말엽에 문공가례가 전래한 후 鄭圃隱(정포은)이 솔선勵行(여행)함에 시작한 것이라 하겠으니. 家廟制(가묘제)의 창시에 관한 成俔(성현)의 말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잇는 일이다.
|목차5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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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번= 君子將營宮室 必光岡堂 以奉先世神主 此朱文公家禮也 自三國高麗以來 專奉釋氏 家廟之制不明 士大夫皆不以禮祀先 自冊隱鄭文忠公 倡明道學 嚴立祭祀之儀 然後家家立祠堂 始傳家舍於嫡嗣始重嫡庶之分 無子者必取族子以爲嗣國家大亨 用孟月 士大夫時亨用四仲月是有序也.(1)
|목차5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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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번= 오복의 제도와 불가분리의 관계롤 가지고 있는 이 家廟(가묘)의 제정이 과연 정포은에 시작한 것이냐 하면, 거기에는 다소 의문이 있으나, 여하간 문헌상으로 뚜렷히 전래한 바는 성현의 견해와 같다. 그뿐 아니라 恭讓王(공양왕) 2년 2월에 정포은의 建言(건언)에 의하여 대부사 서인의 제사에 관한 예제가 상세히 규정된 것은 고려사의 예지에 명료하니(2) 필경 고려 말기에 이르러 점차로 喪祭(상제)의 예속이 중요시 되었은 것을 다음의 기록으로써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목차5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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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번= (上略) 右务于祭法 宣今中外遵守 以成般俗 其中有人情 事勢不便者不妳拘宗法 其見存族長奉神主主祠 其餘嫡衆子孫並於其家與祭 衆子孫所生父母各作神主 祭於其家 致齋如常儀 三年六月乙己 命申行家廟之制.(3)
|목차5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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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번= 따라서 만약 상제의 예제에 위반한 자에 대하여서는 형벌을 가하여 엄중히 取締(취체)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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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번= 聞父冊喪若夫喪 忘哀作樂雜戯徒一年. 釋服從吉徒三年. 匿不擧哀流二千里. 詐稱祖父母⋅父母死以求暇及有所避徒三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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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번= 이라 규정하였으니, 居喪(거상)에 근신치 않은 자 복제에 遂守(수수)치 않은 자 當喪(당상)을 사칭하여 求暇(구가)하는 자 등은 국법에 처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도 이 당상하여 급가한 점에 관하여는 특히 仕官(사관)으로서 중요한 일이므로 일찍 성종 3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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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8번= 凡五服聞喪 暇三分分之二 布剰日入暇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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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9번= 이라는 상중 급가제도를 규정하였었다. 그뿐 아니라 부모의 기일에도 급가를 제정하였으니, 벌서 景宗(경종) 6년 12월에 制父母忌日 依書儀一日兩宵給暇라 하였고 조부모・처・처부모・외조부모의 대소상 또는 기일에도 一日兩宵(일일양소)의 급가를 제정하였으며 혹은 임관의 京鄕(경향)에 의하여 혹은 官位(관위)의 품계에 의하여 혹은 문무관의 차이에 의하여-가령 공양왕 4년에는 군관에게 3년상을 제하였음과 같이-제정한 것이 고려사 예지에 역연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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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0번= 이와 같이 제사와 함께 상복에 관하여 국가의 법제로서 중요시하게 되었으나, 이른바 오복제도가 좀 더 정연히 규정됨은 공양왕 3년 5월에 明律(명률)에 進(진)함에 시작한 것 같다. 원래 이 오복제도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예교를 조선에 적용함에 당하여서는 적지않은 난관을 겪었던 것이다. 예컨대 親迎(친영)의 예 가묘의 제가 그리하였으며 상복제가 또한 그리하였으니 그 중에 가장 重喪(중상)인 3년상의 실행에 대하여서는 조야의 식자 간에 상당한 물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500여 년의 세월을 지난 오늘에 있어서는 3년상이란 것이 不拔(부발)히 成俗(성속)으로 되어 있으나, 이 3년상을 逾用(유용)할 당초를 생각한다면 습속의 관성이 실로 强敏(강민)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恭愍王(공민왕) 6년에 諫官(간관) 李精(이정)이 3년상을 勵行(여행)하도록 청함에 왕은 이에 응하였으나, 그것이 上下實行難(상하행실난)을 간파함이였던지 동 9년에 3년제를 제하고 100일로써 脫衰(탈최)의 기로 삼기로 하였었다. 이에 대하여 判秘書監事(판비서감사) 李文据(이문거)이 상소하여 다시 3년상제를 적용하도록 청하였으나 왕은 이것을 채용하지 않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 동안에는 100일상이 최고상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공양왕 3년에 이르러 명률에 준하여 복제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또 이러한 조건이 부가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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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1번= 唯外祖父母・妻父母服 與伯叔同 無後者以三歲前遺棄小兒冒姓付籍者 即同己子 共以同宗之子親近爲先構後者 亦許行服三年之喪 天下之通喪 自今許終其制 其中關係國家要務必合起復者 啓明取旨奪情起復 大小軍官及不許丁憂者止行百日喪 其父母喪二十五月內 每月行朔望祭 至十三月初忌日 行小祥祭二十五月第二忌日 行大祥祭 二十七月晦行禪祭 二十八月一月始服吉服 嬰三年內不許娶婦及宴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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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2번= 이러한 부가 조건뿐만 아니라 이 때의 오복제정이 명률의 그것에 비하여 다소 간략된 점도 잇거니와, 글지라도 그 실행이 민간에까지 보급될 수는 없었던 것은, 대략 추측에 남음이 있을 것이요, 이조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렇던 것을 문헌상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조의 초기 정종 원년 기묘 춘정월에 門下府(문하부)는 학생 文珠奴(문주노)라는 자가 그의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실행치 않고 겨우 1년을 지나 娶妻(취처)하였다는 일로 그를 처벌하도록 대왕에게 力請(역청)하였던일이 있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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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3번= 初門下府上書曰 三年之喪天下之通義 前朝之季禮制頹壊 人心衰薄 百日即吉 飮酒嶼肉 男女婚姻 無所不爲 今國家復行三年之喪 明存著令 學生文珠奴 其父承渡之喪 甫踰年 共諸兄皆制中 而先自釋服 娶都承旨李文和之女 以于成憲 其母權氏稱有內旨 其罪己不得而治矣 然亦豈不終制而在妻家乎 伏惟命還共家 伸終其制 自今以後 三年之內欲行嫁娶 黃緣取旨者 痛行經理.(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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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4번= 이에 대하여 정종은 문주노틀 벌하기를 불허하고 다만 이 기회에 際(제)하여 「今後自除抑喪者糾理」라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하부는 再疏(재소)에 이르러 「願依前日所申以正風俗」이라 하고 끝끝내 그의 죄를 규탄하였던 것이다. 이것으로써 3년상의 勵行(여행)이 법정상 如何(여하)히 중요한 문제였던가를 알 것이요 또한 3년상제가 如何(여하)히 실행난인 예제이었던가를 窺知(규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태종 3년 계미 하4월 司諫院(사역원)에서 시무 數條(수조)를 거시하여 상소한 중 상복에 관한 사항, 5개조를 지적하였으니 또한 이러한 사정을 여실히 전한 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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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5번= 今三年之喪 自公卿士大夫悉遵其制 然而未久 間有未備者焉 古者婦女喪服 除出嫁者爲本宗減一等外與男于同也 今三年之裏 男子皆從本服 而婦女尙循前期之弊 皆以百日爲限而釋服或子服喪 方居衰経而爲榷母者 纔過百日釋服改嫁 恬不爲愧 男女喪服之不同 初若小失 而其流之弊 至於如此 可勝歎哉 此末備者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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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6번= 古者大喪之服 男女無異也 其在無朝婦女則不服麤布 然而笠帽當甲生麤布 故其服斬喪之跡可見也 今婦女出入非有唯 不着斬衰之服 至於贫帽亦用細熟苧布 間有貧賤者 依舊用麤布則富者笑之 故亦皆勉爲 凡禮之變 皆起於微 若此不革 精恐婦女斬衰之服 亦將變爲緦麻矣 此其末備者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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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7번= 古者居父母之喪者 蔬食水飮杖而後起 若過喪葬不得己之事 非騎馬不能行 故乘撲馬布裏鞍轡之文 載於禮書 今人徃々飮酒食稻 無異平者 則其氣力不須杖矣 乃因乘撲馬之丈 不因喪事而乘肥馬 奔馳朝路者有之 此未備者三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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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8번= 文公家證菖同母異父之兄弟姉妹 正服小功五月 今此條不嚴六典 此未備者四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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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9번= 文公家體爲庶母之乳養已者 服小功五月 爲乳母緦麻三月 然則乳母雖非父妾有服明矣, 今六典內釋乳母曰 父妾之乳响者則是乳母 心父妾而後有服 其非父妾者無服也. (中略) 此未備者五也.(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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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0번= 이러한 상소를 대왕은 嘉納(가납)하여 법규로 제정하였으니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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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1번= 1, 여자의 복으로서 부모・舅姑(구고)・부의 상에는 종실과 사대부의 집을 막론하고 100일 釋服(석복)치 않고 문공가례에 의하여 3년상을 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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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번= 2, 상의 복장으로서 笠帽(입모) 및 長衫(장삼)은 다 生麤布(생추포)로써하고 苧布(저포)를 일절 금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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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3번= 3, 남자로서 斬衰(참최) 복한 자는 一且緩急(일차완급)의 경우라 할지라도 기마를 승용하여 朝路(조로)에 參入(참입)할 수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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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4번= 4, 同母異父(동모이부)의 형제자매는 소공을 복할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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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5번= 5, 유모는 부첩이 아닐지라도 시마 3월을 복할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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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6번=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문공가례 기준하여 중국의 예제를 철저히 실행하도록 상당히 세밀한 점에까지 국가 법제를 이루게 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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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7번= 복제와 연관하여 祖先(조선) 제사의 예를 또한 점차로 중요시하게 되었으니, 태조 원년 9월 임인 都評議使司(도평의사사) 裴克廉(배극렴)・趙浚(조준) 등이 22개조의 시정 문제를 상언한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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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8번= 自公卿至于下士 皆立家廟 以祭先代 底人祭於其寢云々. 凡主喪者父母在殯 朝夕臨祭母得出外.(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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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9번= 라 하였으며, 동 6년 4월 정미에는 간관의 상서에 또한 그 勵行(여행)을 역설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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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0번= 一定都之初首建宗廟以奉時祀 以薦時物報本之誠 無所不然 而四時之亨 每 命大臣以攝行 願自今除無時薦新之外 四時大亨 必須親裸以明奉先之禮 以報本之誠 一士大夫家廟之制 己有著令 而專尙浮屠 語事鬼神 曾不立廟 敢有違令者 尙循舊弊者 令憲司糾理 (中略) 上兪允施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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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1번= 이라 한 것이 그것이니, 태조의 교지 제4조에 관혼상제를 돈후하게 하라는 항목이 있음도 무리가 아니였다. 여기에도 「專尙浮屠韻事鬼神」이라 함에 보다시피 아직 불교의 귀의하 巫姿(무자)의 신앙이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므로 인하여 先祭祀(선제사)의 예교를 실행하기 難(난)하였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태종 12년 하5월 무자 漢城府(한성부)의 시정방침 3사를 진술한 중에 가묘제를 職行(직행)치 않은 자를 糾理(규리)키로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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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2번= 其一家廟之設 己有著令 士大夫廣占家基 崇峻堂寢 不曾立廟 殊無報本之意 乞令承重者 限今年畢立祠堂 違者移文 憲司料理.(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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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3번= 다 하였고, 세종 2년 11월 신미에는 一倒(일도)를 문공가례에 의하고 불사를 통금하며 중외의 관리로 하여금 가묘 時亨(시형)의 제에 종하지 않는 자들을 논죄키로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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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4번= 禮曹啓 元續六典內 各年判旨中外官吏 或不奉行 其不奉行條件 謹錄以聞 請申明舉行 違者論罪云々(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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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5번= 이라 하였으니, 사대부 간에도 아직 가묘제가 실행난이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간에는 더욱이 실행난이었을 것이니. 성종 3년 6월의 傳旨(전지)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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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6번= 曹司憲府曰 在世宗朝 從文公家禮 令士大夫立家廟 庶人立淨室 祭以四仲朔 令此制陵夷士大夫不立家廟 甚者不作神主代以斥摭 士大夫尙爾 況庶人乎 宜加檢察 以警其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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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7번= 라 함으로써 알 일이다. 여기 「代以紙錢」이라한 紙錢(지전)은 즉 지전(笺, 전)의 이름으로-牋(전)과 錢(전)이 음형 共似(공사)하여 淚用(누용)된 것인 듯-금일의 紙榜(지방)이란 것이니 이는 이미 고려조로부터 민간에 유행되어, 내려오던 습속이었다. 여하간 民庶(민서)에 있어서도 撤次(철차)로 예교에 從(종)하여 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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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8번= 그런대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선조 제사의 세대에 관하여 現下(현하) 우리의 주지한 바 상하를 물론하고 4대조에 미친 것이나, 이것은 중국 예제의 실행 당초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선조 봉사의 세대는 품계 즉 사회적 계급에 의하여 차이가 있으니, 벌써 이조 국초의 법전에 규정된 바이였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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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9번= 文武官六品以上三代 七品以下二代 庶人止考妣.(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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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0번= 란 것이 그것이요, 庶人(서인)은 考妣(고비)의 봉사에 한한 것이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또 언제부터 조선에 있어서는 상하를 물론하고 4대조를 봉사하게 되었느냐 하면, 대개는 이조 초엽 이래로 예교 문화가 점차 민중화함에 따라 민중이 상류 계급의 생활형식을 모방하는 중 부지불식 간에 그리된 것이겠고 특히 주자학의 영향에 의함이 크다할 것이다. 즉 주자의 말에 「高祖有服 不可不祭」라 함에 대하여 예교를 숭상하는 학자들이 이것을 실천하도록 주장함에 시작한 것인가 한다. 문헌비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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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1번= 金長生曰 祭三代 雖時王之制 然程朱询謂高祖有服 不可不祭 我東諸賢 皆祭四代.(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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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2번= 라 함은 곧 이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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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3번= 이와 같이 하여 문공가례에 기준한 예교의 철저는 국가의 법제로서 이미 중요한 문화요소를 이룬 것임으로 석학 鴻儒(홍유)는 물론이요 적어도 유학을 學修(학수)한 자는 가례를 연구하는 경향이 顯殊(현수)하게 되었다. 이윽고 조선의 예론은 비상한 발달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제 이조 연간의 현저한 예론가와 그 저술을 거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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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4번= 晦齋(회재)・李彥迪(이언적) 奉先雜儀(봉선잡의) 명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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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5번= 退溪(퇴계)・李  滉(이  황) 退溪喪祭禮問答(퇴계상제례문답) 명・선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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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6번= 高峯(고봉)・奇大升(기대승) 高峯集禮論篇(고봉집례론편) 선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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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7번= 栗谷(율곡)・李  珥(이  이) 擊蒙要訣(격몽요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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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8번= 芝山(지산)・曹好益(조호익) 家禮考證(가례고증)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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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9번= 沙溪(사계)・金長生(김장생) 家禮輯覽(가례집람) 효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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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0번= 市南(시남)・兪  榮(유  영) 家禮源流(가례원류) 숙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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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1번= 申義慶 撰(신의경 찬) 金長生 修(김장생 수) 喪禮備要(상례비요) 인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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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2번= 尤庵(우암)・宋時烈(송시열) 左庵經禮問答(우암경례문답) 숙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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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3번= 明齋(명재)・尹  拯(윤  증) 明齋疑禮問答(명재의례문답)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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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4번= 退修齋(퇴수재)・申逝(신서) 疑禮類說(의례유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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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5번= 南溪(남계)・朴世采(박세채) 南溪熊說(남계웅설, 이 외에 六禮疑輯(육례의집)・三禮矣(삼례의)・家禮要解(가례요해) 등이 있음)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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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6번= 星湖(성호)・李  瀷(이  익) 星湖僿說禮論篇(성호사설예론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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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7번= 陶庵(도암)・李  繹(이  역) 四禮便覽(사례편람)   영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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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8번= 硏經齋(연경재)・成海應(성해응) 硏經齋全集禮論篇(연경재전집례론편) 정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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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9번= 茶山(다산)・丁若鏞(정약용) 喪禮四箋(상례사전)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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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0번= 東巖(동암)・柳長源(유장원) 常變通攷(상변통고)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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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1번= 雅亭(아정)・李德憲(이덕헌) 士小節(사소절)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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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2번= 性齋(성재)・許  傳(허  전) 士儀(사의) 이태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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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3번= 이 중에 허전의 사의는 가장 완비한 것이요, 민간에 가장 보급된 것은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일 것이나, 이러한 예론 중에 각자 4색당의 파벌이 있음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원래 이와 같이 예서가 叢出(총출)함은 예론에 관한 해석의 相違(상위)가 정쟁과 관련하여 정계학계의 일대 문제로 됨에 의한 것이다. 이 예론적 정쟁의 문제는 우리가 널리 잘 알다시피 일찍이 효종 시대에 시작한 것이니, 이제 그 경로를 대략 고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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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4번= 이조 19대 효종대왕이 재위 10년에 승하하자 그 부왕 인조의 繼妃(계비)로 아직 在世(재세)하였던 慈懿大妃(자의대비) 趙氏(조씨)의 복할 바 상에 관하여 爲政(위정)의 耍路(요로)에 있는 당국자 간에, 그 의견이 양립하게 되었다. 즉 일설에는 3년상을 복할 것이라 하고 또 일설에는 기년상을 복할 것이라는 것이다. 의례 참최장에 의하면 모는 嫡長子(적장자)를 위하여 참최 3년상을 복할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의례 喪服章疎(상복장소)에 의하면 설혹 大統(대통)을 權承(권승)한 사람에 대하여서 일지라도 3년상을 복하지 아니하여도 좋다는 경우가 있으니, 효종대왕은 곧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 일설이다. 즉 효종은 윤서로 보아 제2자임으로 趙大妃(조대비)는 기년상을 복할 것이라는 것이니, 이 설을 취한 이는 효종 일대를 통하여 중용되었던 요인이며 당대의 석학인 우암・송시열이요, 이와 화합한 碩領(석령)은 그의 同鄕同宗(동향동종)인 同春(동춘)・宋浚吉(송준길)이었다. 이에 대하여 의례 斬衰章疎(참최장소)에 제1자 死(사)하면 適妻(적처) 소생의 제2장자를 立(입)하여 곧 장자로 삼을 것을 규정하였음에 조차, 효종대왕은 곧 이 경우에 해당함으로 조대비는 3년상을 복할 것이라 하는 것이니, 이 설를 주장한 이는 때마침 정권 실추의 불우에 처한 남인의석령 尹鑴(윤휴)요 이와 화합한 在朝(재조)의 인물은 掌令(장령) 許穆(허목)이였다. 이제 이 양립의 견해는 조선 요인을 통하여 바야흐로 당파가 심각하여 오던 南西(남서) 2파에 분립하여 이것을 채택할 위정 당국의 각료는 용이히 처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니, 실록에 전한 바 경로는 대략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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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5번= 顯宗元年己亥五月乙丑 禮曹又 達 成懿王大妃爲 大行大王喪服制 不載於五禮儀 或云當服三年 或云當服朞年 末有可以攻據者 請議于大臣 王世子下令曰兩賛善一體問議 領敦寧府事李景爽・領議政鄭太和・延陽府院君李時白・左議政沈之源・原平府院君元斗杓・完南府院君李厚源以爲古禮雖不能暁解放之 時王之制似當碁年之服 吏曹判書宋時列・右參賛宋浚吉以爲古今禮律旣有異同 旁王乏制尤難輕議 而諸大臣旣以時王之判爲議 臣等不敢更容他說 王世子下令曰 依議初 大喪出而議禮者 各持其說 或有言 王大妃於大行大王喪當服次長子三年者 或有言當服爲君新之 斬者主爲君 斬者前持平尹鐫之說也.(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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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6번= 이와 같이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상복과 같은 것으로 말하면 예론에 확정한 바가 없는데, 조대비는 기왕 적장자 昭顯世子(소현세자)(휘(왕))의 死(사)에 당하여 참최 3년상을 복하였고, 사실상 효종은 제2장자인 만큼, 일년상설을 취할만도 하려니와, 효종은 원래 차자이지만 이미 嫡次長子(적차장자)로서 대통을 계승하였고 또 조대비와 효종과는 모자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君臣關係(군신관계)에 있었음으로 爲君(위군) 참최 3년이라는 원리에 비추어보면 실로 3년상설을 취할말만도 하니, 그 양자 택일이 난처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領議政(영의정) 鄭太和(정태화)는 마지 못하여 송시열에게 그 1년설의 근거에 관한 설명을 요구함에 송시열은 곧 이러한 이유로써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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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7번= 禮有之自天子以至士大夫 長子死而次適立則其服亦與長子同 而其下又有四棟之說 以爲庶子承重則不服三年 以古禮言之 次逋亦庶子也 上下之說 自相矛盾如此 又無先儒定論 可据以爲訂者  將不可取此而捨彼矣.(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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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8번= 이 4종이라 함은 「亦正亦體(역정역체)」 「正而不體(정이불체)」 「體而不正(체이부정)」 「不正不體(부정불체)」의 경우를 말한 것이다. 「亦正亦體(역정역체)」는 적장자가 계승하여 혈통상으로나 윤서상으로나 정당한 경우요 「부정불체」는 庶孫(서손)이 계승하여 혈통상으로나 윤서상으로나 정당치 못한 경우이니 이 두 경우는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정이불체」는 적장손이 계승하여 혈통상으로는 정당하나 윤서상으로는 부정당한 경우요 「체이부정」 서자 즉 차자가 계승하여 윤서상으로는 정당하나 혈통상으로는 부정당한 경우이니, 따라서 이 두 경우에는 다소 문제가 있는 것인데, 이것을 인조에 관하여 말하자면 소현세자는 「정이불체」요 효종은 「체이부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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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9번= [[파일:김두헌 오복제도-4.png|가운데|4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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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0번= 그러고 보면 효종은 인종의 대통을 權承(권승)하였다 할지라도 서자 즉 차자임으로 조대비는 그 상을 기년으로 하여 족하다는 것이 시열의 지론이였다. 이러한 우암의 설명을 듣자 영의정 정태화는 그 이론에 대하여 이의가 없었는 듯하나, 효종에 대하여서나 또 소현의 적자에 대하여서나 대의명분상 이것을 不正(부정) 또는 不體(불체)라 함이 부당하다 생각하였으므로 다만 이조 전래의 실제에 참조하여 부자에 대한 기년복을 조대비의 경우에 취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즉 실록에 기재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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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1번= 太和大驚搖手止之曰 禮雖如此 昭顯全有子 誰敢以此說爲議禮之證乎 禮經奧儀 吾固昧々 國朝以來 父於子喪皆服朞年鲁聞之矣 吾意欲用 國制耳.(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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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2번= 라 함이 그 경로이었다. 정태화는 본래 言寡謹愼(언과근신)의 인물인지라 몸소 영의정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자진하여 極極的(극극적)인 주장함이 없이 다만 다른 각료의 의견을 청취하여 고요히 이것을 실행에 옮기려 하였던 것이다. 현종도 역시 태화의 의견에 從(종)하여 기년설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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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3번= 이에 대하여 3년상을 주장하는 편에서는 반대의 소리를 높이하고 儀禮註疏(의례주소)를 인용하여 기년설의 非(비)를 難(난)하여 이것을 상소함이 수회에 이르렀다. 參議(참의) 윤휴는 의례 참최장에 「賈疏所謂第一子死 取適妻所生第二長子立之 亦名畏子」라 함을 인용하여 제2자라 할지라도 적장자가 이미 死(사)하고 대통을 계승하는 이상 장자라 하여도 좋을 것이니, 조대비는 곧 참최 3년상을 복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장령 허목이 이에 찬성하여 상세한 예론을 진술하여 상소하였으니 그 일단을 보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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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4번= (前略) 儀禮註疏喪服章父爲長子傳曰何以三年也 正體於上 又乃將所傳重也 鄭玄曰不言嫡子通上下也 釋曰言長子則通上下之號 惟據大夫士 不通夫子諸侯 亦言立嫡以長子 欲見嫡淒所生皆存嫡子 第一子死也 則嫡妻所生第二長子立之 亦名長子 (中略) 齊衰章母爲長子註曰子爲母齊衰  母爲之不得過於子爲己故亦齊衰也 傳曰何以三年也 父之所不降 母亦不敢降也 鄭玄曰不敢以己之尊 降祖薦之正體也 適々相承謂之正體 乃謂爲三年 衆壬承統者同 立庶子爲後謂之能而不正  不得爲三年妾子故也 (中略) 夫以三年之喪爲父 父至尊也 爲君君至尊也 爲長子重其當祖禰之正體而又 以其將代己爲 宗廟主也 今孝考於大王大妃 旣爲嫡子 而又踐祚即位 當正體之尊 而其服則與體而不正 不得三年者等 臣不知依所據也 (中赂) 請令禮官儒臣追正喪服之失.(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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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5번= 요컨대 허목의 의견은 효종의 제2자이지만 혈통상 적자요 이미 왕위를 계승하여 있으므로 正體之尊(정체지존)으로서 적장자와 다름이 없이 볼 것이요 따라서 예론을 고려하여 祖禰(조예)를 위하고 宗廟(종묘)를 당하여 참최 3년상을 복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의례주소에 「立庶于爲後 謂之體而不正 不得爲三年」이라 함은 이 서자란 것이 妾子(첩자)를 말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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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6번= 그러면 만약 허목의 설에 의할진대 제1자 死(사)하면 다시 제2자를 위하여 또 제2자가 死(사)하면 제3자를 위하여 제4자 제5자에 까지라도 중첩하여 참최 3년상을 복하게 될 것이다. 과연 이 점을 들어 左參賛(좌참찬) 송준길의 반박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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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7번= 若如穆之說 則設令大夫士適妻所生有餘子 而第一子死其父爲之服三年 第二子死其父又服三年 不幸而第三死 第四第五死皆爲之服三年 竊恐禮意決不如此也.(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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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8번= 그뿐 아니라 허목은 의례주소의 서자라는 것을 첩자의 이름라고 보고, 따라서 첩자에 관하여서는 기년복이라도 족하다는데 대하여 송준길은 그럴 것이 결코 아니라 이 서자란 것을 衆子(중자)로 볼 것이라 하여 「註疏旣明 第二嫡子以下 通謂庶子之義 而共下文謂體而不正 即庶子爲後者也」라 하였으니, 요컨대 조대비의 기년설이 가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허목은 상세한 상복도를 첨부하여 또 장문의 상소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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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9번= (前略) 臣所言者 立嫡以長之義也 소이爲長子三年者 以正體於上 又以其傳重也 第一子死而立嫡妻所生第二長子亦長子 而其服在斬衰三年條則所謂旣爲第一子服斬 則爲第二長子不服三年之文 經傳不見 自一子至於五六而皆服三年之喩 臣不知其所謂也 所重者爲繼祖轎之正體也 非爲第一子斬也 喪服傳註曰 嫡妻所生皆名嫡子 又曰嫡妻所生第二長子是衆子 又曰庶子妾子之號 有舉衆子而言者 五服圖 爲長子斬衰三年爲衆于不杖卷是也 擧衆子則庶子在焉 衆子長于之弟及妾于 女于在室亦謂之衆子 未能遠別也 有擧庶子而言者 庶子不得爲長子三年是也 擧庶于而衆子在焉 以遠別於長子故 與妾子同號也 嫡子庶子未嘗同號 盖以喪服傳言之 大夫之嫡子服大夫之服 大夫之庶子 爲大夫則爲其父母服冷夫服 大夫降其庶子 嫡子庶子其分不亂如此至於雖承重 不得三年注 有嫡子庶孫庶子嫡孫之別 一嫡一庶且甚明白 嫡妻所生 不曰皆名嫡子乎 不得三年之爾 則禮經所謂爲長子斬衰三年者爲第一子乎 爲正體傳重乎 孝考以仁祖繼統之嫡子 旣以承宗廟而君一國矣.(23) (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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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80번= 즉 허목의 주장한 바는 가령 제2자 제3자라 할지라도 대통을 계승한 이상 이것을 존중히 함은 祖爾(조예)의 正體(정체)를 계승한 까닭이므로 부 또는 모가 참최상을 복할 것은 결코 적장자에 한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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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81번= 이 양설에 대립은 각기 一理一非(일리일비)를 가지고 있어 그 곡직을 결정하기 難(난)함에 드디어 현종은 국조의 전례에 준할 것이라 하여 春秋舘(춘추관) 禮官(예관)으로 하여금 江華(강화)・山城(산성)・五臺山(오대산)에 있는 실록을 참조 고증케 하였고, 필경 기년설에 落着(낙착)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대립의 예론은 정쟁의 와중에 문제되어 그침이 없었으니 마침내 숙종 즉위의 해 12월 18일 실의에 싸였던 남인의 일파 南天漢(남천한) 등이 合啓(합계)하여 시열의 服制論(복제론)은 효종을 인조의 서자 즉 첩자라 한 것이라고 상소함에 숙종의 재가를 얻었으니, 이로써 기년설 배격운동이 공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북인의 당파인 四學儒生(사학유생) 李世弼(이세필) 등은 「己亥以後 蓄憾怨時之輩 以儀禮一疑 自以爲難得之 奇貨 累進凶疏 欲售好奸云々」의 상소로써 대항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고 송시열을 비롯하여 서인 일파의 失勢(실세)의 端(단)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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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82번= 물론 이러한 경과가 정쟁의 와중에 생긴 일이거니와 상복제에 관한 한 문제가 이같이 사회의 표면상에 확대하였음은 예론이 얼마나 중요한 문화 요소이었던가를 잘 말한 것이라 하겠다. 여하간 이러한 정쟁이 생긴 이래로 적어도 양반계급에 있어서 예론상 그 당색을 명백히 함이 지극 필요한 일이었고 따라서 유자 간에는 예교의 연구가 대단히 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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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번= {{TagSpage|52}} 어떠한 社會를 勿論하고 그 文化의 初期에 있어서는 一般으로 外的規制로써 生活行動의 規範을 삼은 것이니, 이것이 곧 風習이요 이러한 風習의 威力은 高度의 文化民族에 있어서도 또한 볼 수 있는 일이다. 希臘의 ethos, 羅馬의 mores, 獨逸의 sitte, 英國의 customs, 支那의 禮儀가 곧 그것이요 이들은 一種의 行爲法으로서 是非의 判斷을 包含하고 安寧 秩序의 標識을 指示한다. 따라서 이에 背反할 때는 그 社會 全般의 非難을 바들뿐 아니라 個人의 不幸을 齎來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sumner 敎授는 mores이 槪念을 規定하되, 眞理와 正善의 要素가 安寧의 原理로 될 때 風習은 다른 一面을 現出하야 推論을 產出할 수 있으며 새로운 形相으로 發展하야 그 積極的 影響을 個人과 社會에 주게 된 것이라 하였으니 風習은 곧 社會의 統制力을 가진 것이 分明하다. 그러면 이 風習이란 것이 어디 起源하느냐 하면 그것은 勿論 複雜한 原因으로 된 것이라 할 것이다. 人類의 原始的 需要와 本能에 依하야 喚起된 活勤으로서 그 成敗에 對한 賛否로 因하야 된 것도 있을 것이요 或은 어떤 卓越한 行動의 性質이 群集의 感情에 符合하야, 드디여 한 輿論을 形成함{{TagPage|53-1}}으로써 된 것도 있을 것이요 或은 本來 아무런 意味도 없든 行動이 不識間에 一定한 意味틀 갓게 되야 儀式을 이룬 것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은 社會生活上 全然히 自然的으로 發生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對하야 君主・族長・父老의 命令에서 나온 것도 있을것이요 或은 聖賢・僧侶・卜者・ 醫夫・師傅의 敎訓 乃至 模範에서 나온 것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은 比較的 人爲的 原因에 依한 것이라 하겠다. 이같이 하야 日常의 生活上 또는 人生의 重要한 時期 또는 事件에 對하야 生起한 風習은 慣習・傳統・風俗・民俗・禮儀 等々의 形態로서 社會統制의 威壓力을 가지게 된다. 이른바 禮敎文化는 本來 爲政者의 命令이나 聖賢의 敎訓에 依하야 人爲的으로 形成된 것인 만큼 統制的 威力이 强大한 것이요 따라서 그 階級性을 認定하기에 足한 것이니, 支那의 禮制는 곧 그 顯殊한 表現이라 할 것이다. 일즉 孔夫子의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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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2번= {{TagSpage|53-2}} 禮先王以承天之道 以治人之情 故失之者死得之者生 (中略) 禮必本於天 殽於地 列於鬼神 達於喪祭射御冠昏朝聘 故聖人以禮示之 故天下國家可得而正也.(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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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3번= {{TagSpage|53-3}} 라 하였으니 곧 禮란 것은 先王 聖哲이 天地自然의 道理에 準則하야 一定한 儀則을 設하였음으로써 民衆은 이에 絶對로 遵守하여야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左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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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4번= {{TagSpage|53-4}} 夫禮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 天地之經而民實則之 則天之明 因地之賢.(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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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5번= {{TagSpage|53-5}} 이라 하였음은 亦是 禮의 尊嚴性을 말한 것이니, 이에 이르러서는 風習이 高度의 道德的 規範에까지 發展한 것이겠다. 이러한 根據에서 禮로써 社會的 規範을 삼고 道徳의 基礎 原理를 삼은 顯殊한 實例는 곧 荀子의 禮論에 볼 수 있을 것이다. 荀子 禮論篇의 劈頭에 禮의 起原을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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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6번= {{TagSpage|53-6}} 禮起於何也 曰人生而有欲 欲而不得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即亂 亂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TagPage|54-1}}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使欲必不窮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待而長 是禮之所記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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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7번= {{TagSpage|54-2}} 라 하였으니 그는 本來 人性의 惡觀에 立脚하야 사람의 欲望을 制限하고 相互 爭奪이 업도록 禮儀틀 創定하야 이것으로써 行爲의 規範을 삼으려 하는 것이다. 이제 그의 性惡觀에 對한, 是非는 여기에 말할 것 업거니와 如何間 사람의 自然的 欲情을 規制하려는 것을 禮의 本質로 삼은 것을 알겠고 이와 같이 風習을 道德的 規範으로 삼아 至極 尊貴한 範圍에 及한 것은 支那 禮敎文化의 窮極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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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8번= {{TagSpage|54-3}} 그러나 社會의 風習은 오즉 聖賢의 創制함에 局限한 것이 아니요 人類의 社會 生活上 여러가지 原因에 依하야 自然 發生한 것이 있음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어느 社會를 勿論하고 文化發展의 初期에 있어서는 內面的 普遍的 原理로써 各人의 行爲를 規制함이 없고 오즉 共同 生活上에 適應할 만한 行爲로서 當時에 가장 必要한 또는 便宜한 것을 具體化하야 社會秩序를 求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風習은 한갓 道德的 作用에 궃이지 않고 一切 文物制度를 包含한 法律의 作用을 한 것이니, 國家의 法制는 本來 이 風習에서 分化된 것이 明睽한 일인 것이다. 이제 잠간 Sumner 敎授의 見解를 듯건대 모든 制度와 法律은 mores에서 產出한 것이라 한다.(5) 即 風習은 社會人의 利害關係에 參與한 事實 及 行爲의 世界를 整頓한 것이요 모든 制度는 어떤 것을 勿論하고 언제든지 이 風習에서 發生한 것이다. 立法上의 諸規定이 또한 그런 것이니 未開社會의 統制力은 即 風習과 禁忌에서 發生한 것이나 오즉 一般에 알리어지지 않고 그것이 드디어 成文法으로 된 것이다. 『마누』 法典이나 『유스티니아』 法典을 비롯하야 어느 法典이나 다 그런 것에 不過하다. 그러므로 法制가 强制力을 가초우기 爲하여서는 반드서 그 風習과 一致한 것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보건대 果然 風習이란 것은 宗敎 道德 法律의 分化되지 않는 狀態에 있는 社會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道德과 法律이 嚴然히 分化되{{TagPage|55-1}}여있는 文化社會에 있어서도 決코 度外視할 수 없는 것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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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9번= {{TagSpage|55-2}} 支那의 禮敎文化의 發展은 자못 이러한 事實을 잘 말한 것이겠다. 일즉 唐虞 三代로 비롯하야 周代에 이르러서는 禮典이 곧 文化의 中心을 形成하였고, 社會文化의 發展에 따라 漢代에 이르러서는 漸次 法典이 重要되였으니, 이러한 禮法 分化의 過渡 時期에 處한 것이 바야흐로 荷子와 管子의 思想이라 하겠다. 荀子에 「人之命在天 國之命在禮 君人者 隆禮尊賢而王 重法愛民而覇 (天論篇)라 하며 「由士以上 則必以禮樂節之 衆庶百姓則必以法數制之」(富國篇) 라 함은 禮治의 反面에 法治의 必要함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야 荷子의 門人이던 管子는 「法天下之至道也」(明法篇)라 하야 法治至上主義를 取하였으나, 그 反面에는 「民知禮而未知務 然後布法以任力」(五輔篇)이라 하며 「人心悍也 故爲之 法由禮出」(樞言篇)이라 하야 禮의 重要함을 認定한 것이였다. 이른바 「禮刑其初一物出褸入刑」이라 함은 國家制度의 完備에 따라 漸次로 法刑을 嚴히 할 것을 말한 것이요 곧 禮法의 分化過程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點으로 보아서 일즉히 故 穂積陳重 博士는 國家統治의 發展過程을 말하되 社會 形成의 第一期는 곧 禮로써 統制力의 全部로 삼은 禮治 時代요, 그 第二期는 禮治를 主로 하면서 政治的 組織의 漸次 具備함으로 因하야 法治를 從으로 하는 時代요, 第三期는 法治 時代로서 國權擴張에 따라 法의 範域을 擴大케 하는 것이라 하니,(6) 禮法 分化의 發展形態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오, 모든 法制가 또한 禮典에 淵源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支那文化史上에 보건대 周禮 禮記 儀禮의 三禮典에 制定한 바 天地鬼神宗廟의 祭禮 天子 諸候 卿大夫 士庶人의爵錄 班位 職司 民級 封域 及 貢租 敎育 聽訟 斷獄 養老 賑恤 等은 公法의 淵源이 되고, 冠 婚 喪 葬 祭 父子 夫婦 親戚關係 等은 公法의 由來가 되고 特히 祭祀禮 朝覲禮는 憲法, 行政法의 始原이 되고, 士冠禮 士昏禮는 民法의 端緖가 되고 聘問禮는 國際法의 萌芽를 이루는 等 這般의 消息을 잘 傳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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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0번= {{TagSpage|56-1}} 그러므로 그 始原的인 風習이란 것은 그 統制의 範圍가 至極히 廣汎한 것이요 古代에 있어서는 親屬 家族 主從長幼의 社會的 關係는 勿論이요 冠婚葬祭射御燕樂을 비롯하야 衣服 飮食 器具 容貌 進退 等 一切生活現象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支配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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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1번= {{TagSpage|56-2}} 그러나 文化의 發展과 人智의 發達에 따라 社會生活의 漸次로 複雜함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行爲를 機械的으로 外部的으로 制御하기는 어렵게 될 것이다. 따라서 禮敎의 範圍는 漸次로 減少해 갈 것은 勿論이다. 일즉 支那 上代의 禮典은 唐代에이르러 律 令 格 式의 法制를 이루고 겨우 吉禮 賓禮 軍禮 嘉禮 凶禮 等 五禮의 制度로 되고만 것이였다. 即 이에 이르러 生活 行爲의 規範은 外的規制에 꿎이지 않고 漸次로 內的 規範을 把持하게 되야 風習은 비로소 道德과 分岐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일즉이 Tufts 敎授는 人類의 道德思想의 發達에 關하야 말하되 群集道德에서 個人道德 即 風習에서 良心으로 發展한 것이요 이러한 過渡期를 形成하는 社會的 動因를 드러 經濟的 努力 科學 及 藝術의 進步 軍事上의 勢力 宗敎上의 勢力 心理的作用 等々을 指摘하였으니,(7) 果然 複雜한 社會的 變動으로 因하야 오즉 風習으로만 生活規範으로 삼을 수 없게 될 것이요, 또한 合理的 批判 精神에 依하야 風習은 改變하게 될 것은 否認치 못할 事實일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風習이란 것은 本來가 情操에 基本한 信念의 要素를 가진 特性으로 因하야 社會의 裡面에 潜在 存續하야 道德觀念과 法律制度의 變遷과 並行치 않고 그대로 文化的 殘滓으로서 低迷하는 것이 許多한 일이다. 이에 이르러서 風習은 아무런 統制力을 갓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生活力을 蠶食하야 드디여 社會全體의 動力을 喪夫케 하는 것이니, 여기에 風習에 對한 考察 硏究의 重要性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風習의 形態로 된 『禮俗󰡕은 決코 道德的 規範을 表示한 『禮』 그것과 同一視할 바가 아닌 것이다. 이것을 耍컨대 禮俗의 變遷은 社會生活上 必然한 要求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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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2번= {{TagSpage|57}} 생각건대 支那의 禮敎文化가 朝鮮에 傳來한지 이미 오랜 일이요, 特히 이른바 五禮의 敎則으로써 治世의 大本을 삼었음은 朝鮮 文化史上에 看過할 수 없는 일이요, 唐律과 明律은 곧 麗朝 以來로 李朝 法制의 基礎을 이루었음은 髙麗史 禮志와 李朝 六典에 歷然한 事實이오, 麗末에 傳來한 文公家禮는 거이 李朝 年間의 不可缺한 民族 生活 規範이 된 것은 우리의 周知의 事實이다. 그리하야 그 文化上 貢獻은 또한 적지 않은 것이었음을 否認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 禮敎文化의 全般에 關하여는 여기에 말할 것 없거니와, 다만 五服制度에 限하야만 보건대 于先 宗家를 中心으로 血緣的 團結을 厚히 하야 親族 糾合의 果를 이루고 族內 道德을 重히 하야 同族相親의 德을 樹立하였다. 그러나 그 反面에는 民族의 團結力을 弱하게 하고 國家의 統制力을 薄하게 함을 看過하지 못할 것이다. 實로 血緣的 團體의 强함에 比하야 地緣的 團體의 弱함은 朝鮮 社會의 한 特色일 것이다 李朝의 政治는 바야흐로 全州 李氏를 一族으로 執權의 中心을 삼고 그 姻戚의 拔扈를 附隨하는 閥族政治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하야 이 執權勢力에 參與하는 兩班은 또한 閥族 中心으로 形成되고 따라서 人材 登庸의 길은 閉絕된 것이였다. 그뿐 아니라 上層 階級의 禮敎는 드디여 下府 階級의 無理한 模倣을 이르키어 그 弊端은 일즉부터 識者의 注意한 바가 되었었다. 星湖 李瀷은 이에 關한 先覺者의 一人이니, 그는 無官의 正庶가 함부루 鄕相의 風奢를 模倣하야 經濟生活에 破綻을 이르킴을 警戒하고 庶人 家禮의 制定을 主唱하였음은 實學올 尊尙하는 그로서 當然한 歸結이였다. 星湖僿說 經史篇 經書門에 「猶守家禮而不動何裁 家禮不過居憂寒泉一時所著 未及完成 而旋爲童行所偷」라 함은 無條件하고 未文家禮를 墨守하던 諸多禮論家에 比하야 一大卓見이였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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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3번= 大抵 禮制 全般은 姑捨하고 그 一部分인 五服制度 尊重의 理由는 大家旅 制度의 存續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時代의 進展에 따라 이미 大家族 制度의 存續은 危機에 臨한지 오래다.  商工業의 發達에 따라온 大資本主義 經濟組織을 비롯하{{TagPage|58-1}}야 基督敎 思想의 普及과 個人主義 思想의 傳來로 因하야 大家族制度 崩壞의 氣運은 濃厚하게 되엿다. 그럼에 따라 冠婚喪祭에 關한 禮俗의 變改는 識者의 必然的 要求로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야흐로 西洋 文化의 潮流에 따라 그 要求의 趟勢는 相當히 急遠度로 進展하게 됨은은 掘者의 이미 周知한 바이다. 그 顯殊한 一例로는 數年 前에 佐翁 尹教昊 先生을 中心으로 識者의 集合이 되야 中央振興會를 組織하고 禮節改善運動을 이르키었으니, 그 決議文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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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4번= {{TagSpage|58-2}} 近來婚喪祭宴 其他交際應酬에 繁文虛禮의 弊風이 날로 甚하야 吾人의 實生活에 밋친 바 害毒이 莫大하다. 此際에 이것을 徹底히 調査 硏究하야 그 弊害를 除去하는 同時에 時代에 不合한 禮節은 이것을 革正하야 넓이 社會의 公議로써 現代生活에 適應한 規範을 確立하고 그 實行普及을 期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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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5번= {{TagSpage|58-3}} 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바야흐로 時代의 必要的 要求을 그대로 表示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禮節의 細目에 關하야는 仔細한 規定을 樹立하지 못하야 民衆은 그 就할 바에 彷徨하는 感이없지 않었단 것이다. 이러한 時期에 際하야 總督府 學務局에서는 昭和 九年 十一月 十一日에 儀禮準則을 制定 發布하였음은 바야흐로 그 時期를 얻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나. 그 內容에 있어서는 아즉도 未及함이 있음을 認定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內容 全般에 關하여는 여기에 함부로 批判 是非할 바가 못되거니와 大體로보아 冠禮를 除한 從來의 四體便覽을 現代語로 簡單化하는데 지나감이 없는 것이다. 于先 喪禮에 있어서 服装으로 말하면 屈巾 制服 絰 帶 杖 履 方笠 等을 除한 從來의 喪服 外에 喪章을 制定하야 時代服裝에 適用하도록 하엿고, 喪期에 있어서는 喪期와 服期을 區分하고 居喪儀를 簡單하게 한 外에 從來의 그대로를 襲用하기로 되었고, 服者關係는 全然 그대로 通用하게 되였으니, 根本的으로 이러튼 革新을 보지 못한 것이다. 畢竟 이 服者關係를 從來 그대로 制定함은 얼마나한 實行上 物果를 얻을가 疑問될 것이나 如何間 이것을 準則으로 삼은 것은 곧 大家{{TagPage|59-1}}族制度의 存續을 本意로 삼은 것이 分明한 것이다. 그러나 從來의 大家族制度 存續의 與否는 오즉 儀禮의 規範으로써만 될 것이 아니요 社會制度 그것에 있을 것이요 特히 經濟組織의 形態에 依存할 것이니 여기에 歷史的 必然性은 全然 度外視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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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번= 어떠한 사회를 물론하고 그 문화의 초기에 있어서는 일반으로 외적규제로써 생활행동의 규범을 삼은 것이니, 이것이 곧 풍습이요 이러한 풍습의 위력은 고도의 문화민족에 있어서도 또한 볼 수 있는 일이다. 希臘(희랍)의 ethos, 羅馬(라마)의 mores, 獨逸(독일)의 sitte, 英國(영국)의 customs, 지나의 예의가 곧 그것이요 이들은 일종의 행위법으로서 시비의 판단을 포함하고 안녕 질서의 표식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에 배반할 때는 그 사회 전반의 비난을 받을뿐 아니라 개인의 불행을 齎來(재래)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sumner 교수는 mores이 개념을 규정하되, 진리와 正善(정선)의 요소가 안녕의 원리로 될 때 풍습은 다른 일면을 현출하여 추론을 산출할 수 있으며 새로운 형상으로 발전하여 그 적극적 영향을 개인과 사회에 주게 된 것이라 하였으니 풍습은 곧 사회의 통제력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 풍습이란 것이 어디 기원하느냐 하면 그것은 물론 복잡한 원인으로 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인류의 원시적 수요와 본능에 의하여 환기된 활동으로서 그 성패에 대한 賛否(찬부)로 인하여 된 것도 있을 것이요 혹은 어떤 탁월한 행동의 성질이 군집의 감정에 부합하여, 드디어 한 여론을 형성하므로써 된 것도 있을 것이요 혹은 본래 아무런 의미도 없든 행동이 불식간에 일정한 의미를 갖게 되어 의식을 이룬 것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은 사회생활상 전연히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하여 군주・족장・父老(부로)의 명령에서 나온 것도 있을 것이요 혹은 성현・승려・卜者(복자)・ 醫夫(의부)・師傅(사부)의 교훈 내지 모범에서 나온 것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은 비교적 인위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이같이 하여 일상의 생활상 또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 또는 사건에 대하여 生起(생기)한 풍습은 관습・전통・풍속・민속・예의 등등의 형태로서 사회통제의 위압력을 가지게 된다. 이른바 예교문화는 본래 위정자의 명령이나 성현의 교훈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인 만큼 통제적 위력이 강대한 것이요 따라서 그 계급성을 인정하기에 족한 것이니, 지나의 예제는 곧 그 현수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일찍 孔夫子(공부자)의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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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2번= 禮先王以承天之道 以治人之情 故失之者死得之者生 (中略) 禮必本於天 殽於地 列於鬼神 達於喪祭射御冠昏朝聘 故聖人以禮示之 故天下國家可得而正也.(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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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3번= 라 하였으니 곧 예란 것은 선왕 聖哲(성철)이 천지자연의 도리에 準則(준칙)하여 일정한 儀則(의칙)을 설하였음으로써 민중은 이에 절대로 준수하여야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左傳(좌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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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4번= 夫禮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 天地之經而民實則之 則天之明 因地之賢.(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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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5번= 이라 하였음은 역시 예의 존엄성을 말한 것이니, 이에 이르러서는 풍습이 고도의 도덕적 규범에까지 발전한 것이겠다. 이러한 근거에서 예로써 사회적 규범을 삼고 도덕의 기초 원리를 삼은 현수한 실례는 곧 순자의 예론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순자 예론편의 벽두에 예의 기원을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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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6번= 禮起於何也 曰人生而有欲 欲而不得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即亂 亂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使欲必不窮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待而長 是禮之所記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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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7번= 라 하였으니 그는 본래 인성의 惡觀(악관)에 입각하여 사람의 욕망을 제한하고 상호 쟁탈이 없도록 예의틀 創定(창정)하여 이것으로써 행위의 규범을 삼으려 하는 것이다. 이제 그의 성악관에 대한, 시비는 여기에 말할 것 없거니와 여하간 사람의 자연적 욕정을 규제하려는 것을 예의 본질로 삼은 것을 알겠고 이와 같이 풍습을 도덕적 규범으로 삼아 지극 존귀한 범위에 及(급)한 것은 지나 예교 문화의 궁극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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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8번= 그러나 사회의 풍습은 오직 성현의 창제함에 국한한 것이 아니요 인류의 사회 생활상 여러가지 원인에 의하여 자연 발생한 것이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어느 사회를 물론하고 문화발전의 초기에 있어서는 내면적 보편적 원리로써 各人(각인)의 행위를 규제함이 없고 오직 공동 생활상에 적응할 만한 행위로서 당시에 가장 필요한 또는 편의한 것을 구체화하여 사회질서를 구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풍습은 한갓 도덕적 작용에 그치지 않고 일절 문물제도를 포함한 법률의 작용을 한 것이니, 국가의 법제는 본래 이 풍습에서 분화된 것이 명료한 일인 것이다. 이제 잠깐 Sumner 교수의 견해를 듣건대 모든 제도와 법률은 mores에서 산출한 것이라 한다.(5) 즉 풍습은 사회인의 이해관계에 참여한 사실 및 행위의 세계를 정돈한 것이요 모든 제도는 어떤 것을 물론하고 언제든지 이 풍습에서 발생한 것이다. 입법 상의 제 규정이 또한 그런 것이니 미개사회의 통제력은 즉 풍습과 금기에서 발생한 것이나 오직 일반에 알리어지지 않고 그것이 드디어 성문법으로 된 것이다. 『마누』 법전이나 『유스티니아』 법전을 비롯하여 어느 법전이나 다 그런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법제가 강제력을 갖추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그 풍습과 일치한 것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보건대 과연 풍습이란 것은 종교 도덕 법률의 분화되지 않는 상태에 있는 사회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도덕과 법률이 엄연히 분화되어있는 문화사회에 있어서도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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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9번= 지나의 예교문화의 발전은 자못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한 것이겠다. 일찍 唐虞(당우) 삼대로 비롯하여 周代(주대)에 이르러서는 예전이 곧 문화의 중심을 형성하였고, 사회문화의 발전에 따라 한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법전이 중요되었으니, 이러한 예법 분화의 과도 시기에 처한 것이 바야흐로 순자와 管子(관자)의 사상이라 하겠다. 순자에 「人之命在天 國之命在禮 君人者 隆禮尊賢而王 重法愛民而覇 (天論篇, 천론편)라 하며 「由士以上 則必以禮樂節之 衆庶百姓則必以法數制之」(富國篇, 국부편) 라 함은 예치의 반면에 법치의 필요함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순자의 문인이던 관자는 「法天下之至道也」(明法篇, 명법편)라 하여 법치지상주의를 취하였으나, 그 반면에는 「民知禮而未知務 然後布法以任力」(五輔篇, 오보편)이라 하며 「人心悍也 故爲之 法由禮出」(樞言篇, 추언편)이라 하여 예의 중요함을 인정한 것이였다. 이른바 「禮刑其初一物出褸入刑」이라 함은 국가제도의 완비에 따라 점차로 법형을 엄히 할 것을 말한 것이요 곧 예법의 분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서 일찍이 고 穂積陳重(수적진중) 박사는 국가통치의 발전과정을 말하되 사회 형성의 제1기는 곧 예로써 통제력의 전부로 삼은 예치 시대요, 그 제2기는 예치를 주로 하면서 정치적 조직의 점차 구비함으로 인하여 법치를 從(종)으로 하는 시대요, 제3기는 법치 시대로서 국권 확장에 따라 법의 範域(범역)을 확대케 하는 것이라 하니,(6) 예법 분화의 발전 형태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오, 모든 법제가 또한 예전에 연원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지나문화사상에 보건대 周禮(주례) 예기 의례의 3예전에 제정한 바 천지 귀신 종묘의 제례 천자 제후 경대부 사서인의 爵錄(작록) 班位(반위) 職司(직사) 民級(민급) 封域(봉역) 및 貢租(공조) 교육 聽訟(ᅎᅥᆼ송) 斷獄(단옥) 양로 진휼 등은 公法(공법)의 연원이 되고, 관 혼 상 장 제 부자 부부 친척 관계 등은 공법의 유래가 되고 특히 祭祀禮(제사례) 朝覲禮(조근례)는 헌법, 행정법의 始原(시원)이 되고, 士冠禮(사관례) 士昏禮(사혼례)는 민법의 단서가 되고 聘問禮(빙문례)는 국제법의 맹아를 이루는 등 저반의 소식을 잘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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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0번= 그러므로 그 시원적인 풍습이란 것은 그 통제의 범위가 지극히 광범한 것이요 고대에 있어서는 친속 가족 주종 장유의 사회적 관계는 물론이요 冠婚葬祭射御燕樂(관혼장제사어연락)을 비롯하여 의복 음식 기구 용모 진퇴 등 일체 생활 현상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지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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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1번= 그러나 문화의 발전과 인지의 발달에 따라 사회생활의 점차로 복잡함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행위를 기계적으로 외부적으로 제어하기는 어렵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예교의 범위는 점차로 감소해 갈 것은 물론이다. 일찍 지나 상대의 예전은 唐代(당대)에이르러 律令格式(율령격식)의 법제를 이루고 겨우 吉禮(길례) 賓禮(빈례) 軍禮(군례) 嘉禮(가례) 凶禮(흉례) 등 오례의 제도로 되고만 것이었다. 즉 이에 이르러 생활 행위의 규범은 외적 규제에 그치지 않고 점차로 내적 규범을 把持(파지)하게 되야 풍습은 비로소 도덕과 분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일찍이 Tufts 교수는 인류의 도덕 사상의 발달에 관하여 말하되 군집 도덕에서 개인 도덕 즉 풍습에서 양심으로 발전한 것이요 이러한 과도기를 형성하는 사회적 동인를 들어 경제적 노력 과학 및 예술의 진보 군사상의 세력 종교상의 세력 심리적 작용 등등을 지적하였으니,(7) 과연 복잡한 사회적 변동으로 인하여 오직 풍습으로만 생활규범으로 삼을 수 없게 될 것이요, 또한 합리적 비판 정신에 의하여 풍습은 개변하게 될 것은 부인치 못할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습이란 것은 본래가 情操(정조)에 기본한 신념의 요소를 가진 특성으로 인하여 사회의 이면에 잠재 존속하여 도덕관념과 법률제도의 변천과 병행치 않고 그대로 문화적 잔재로서 低迷(저미)하는 것이 허다한 일이다. 이에 이르러서 풍습은 아무런 통제력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생활력을 잠식하여 드디어 사회 전체의 동력을 상실케 하는 것이니, 여기에 풍습에 대한 고찰 연구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풍습의 형태로 된 『예속󰡕은 결코 도덕적 규범을 표시한 『예』 그것과 동일시할 바가 아닌 것이다. 이것을 요컨대 예속의 변천은 사회생활상 필연한 요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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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2번= 생각건대 지나의 예교문화가 조선에 전래한 지 이미 오랜 일이요, 특히 이른바 오례의 교칙으로써 치세의 대본을 삼었음은 조선 문화사상에 간과할 수 없는 일이요, 당률과 명률은 곧 여조 이래로 이조 법제의 기초를 이루었음은 고려사 예지와 이조 육전에 歷然(역연)한 사실이오, 여말에 전래한 문공가례는 거의 이조 연간의 불가결한 민족 생활 규범이 된 것은 우리의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문화상 공헌은 또한 적지 않은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예교문화의 전반에 관하여는 여기에 말할 것 없거니와, 다만 오복제도에 한하여만 보건대 우선 종가를 중심으로 혈연적 단결을 후히 하여 친족 규합의 果(과)를 이루고 족내 도덕을 중히 하여 동족 상친의 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 반면에는 민족의 단결력을 약하게 하고 국가의 통제력을 박하게 함을 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실로 혈연적 단체의 강함에 비하여 地緣的(지연적) 단체의 약함은 조선 사회의 한 특색일 것이다. 이조의 정치는 바야흐로 전주 이씨를 일족으로 집권의 중심을 삼고 그 인척의 拔扈(발호)를 부수하는 閥族(벌족)정치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집권세력에 참여하는 양반은 또한 벌족 중심으로 형성되고 따라서 인재 등용의 길은 閉絕(폐절)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상층 계급의 예교는 드디어 하부 계급의 무리한 모방을 일으키어 그 폐단은 일찍부터 식자의 주의한 바가 되었었다. 성호 이익은 이에 관한 선각자의 일인이니, 그는 無官(무관)의 正庶(정서)가 함부로 鄕相(향상)의 風奢(풍사)를 모방하여 경제생활에 파탄을 일으킴을 경계하고 庶人(서인) 가례의 제정을 주창하였음은 실학올 尊尙(존상)하는 그로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성호사설 經史篇(경사편) 經書門(경서문)에 「猶守家禮而不動何裁 家禮不過居憂寒泉一時所著 未及完成 而旋爲童行所偷」라 함은 무조건하고 未文家禮(미문가례)를 墨守(묵수)하던 諸多(제다) 예론가에 비하여 일대 탁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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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3번= 대저 예제 전반은 고사하고 그 일부분인 오복제도 존중의 이유는 대가족 제도의 존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진전에 따라 이미 대가족 제도의 존속은 위기에 임한지 오래다.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온 대자본주의 경제조직을 비롯하야 기독교 사상의 보급과 개인주의 사상의 전래로 인하여 대가족 제도 붕괴의 기운은 농후하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관혼상제에 관한 예속의 변개는 식자의 필연적 요구로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야흐로 서양 문화의 조류에 따라 그 요구의 추세는 상당히 급격도로 진전하게 됨은 掘者(굴자)의 이미 주지한 바이다. 그 顯殊(현수)한 일례로는 수년 전에 佐翁(좌옹) 尹教昊(윤치호) 선생을 중심으로 식자의 집합이 되어 中央振興會(중앙진흥회)를 조직하고 禮節改善運動(예절개선운동)을 일으켰으니, 그 결의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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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4번= 근래 婚喪祭宴(혼상제연) 기타 交際應酬(교제응수)에 繁文虛禮(번문허례)의 폐풍이 날로 심하여 吾人(오인)의 실생활에 미친 바 해독이 막대하다. 이 때에 이것을 철저히 조사 연구하여 그 폐해를 제거하는 동시에 시대에 불합한 예절은 이것을 革正(혁정)하여 넓이 사회의 공의로써 현대 생활에 적응한 규범을 확립하고 그 실행 보급을 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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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5번= 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바야흐로 시대의 필요적 요구를 그대로 표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예절의 세목에 관하여는 자세한 규정을 수립하지 못하여 민중은 그 취할 바에 방황하는 감이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際(제)하여 총독부 學務局(학무국)에서는 昭和(소화) 9년 11월 11일 儀禮準則(의례준칙)을 제정 발포하였음은 바야흐로 그 시기를 얻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아직도 미급함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내용 전반에 관하여는 여기에 함부로 비판 시비할 바가 못되거니와 대체로 보아 관례를 제한 종래의 사체편람을 현대어로 간단화하는데 지나감이 없는 것이다. 우선 상례에 있어서 복장으로 말하면 屈巾(굴건) 制服(제복) 絰(질) 帶(대) 杖(장) 履(리) 方笠(방립) 등을 제한 종래의 상복 외에 喪章(상장)을 제정하여 시대 복장에 적용하도록 하였고, 상기에 있어서는 상기와 복기을 구분하고 居喪儀(거상의)를 간단하게 한 외에 종래의 그대로를 襲用(습용)하기로 되었고, 복자관계는 전연 그대로 통용하게 되었으니, 근본적으로 이렇든 혁신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필경 이 복자 관계를 종래 그대로 제정함은 얼마나한 실행상 物果(물과)를 얻을까 의문될 것이나 여하간 이것을 준칙으로 삼은 것은 곧 대가족 제도의 존속을 본의로 삼은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종래의 대가족 제도 존속의 여부는 오직 의례의 규범으로써만 될 것이 아니요 사회제도 그것에 있을 것이요 특히 경제조직의 형태에 의존할 것이니 여기에 역사적 필연성은 전연 도외시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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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7일 (목) 10:3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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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제도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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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五服制度의 硏究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5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김두헌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07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59쪽 전체쪽 059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喪服(상복)의 제도는 원래 死者(사자) 즉 喪者(상자)에 대한 服者(복자)의 親疎遠近(친소원근) 관계와 가족적 사회적 尊卑(존비)의 지위 신분에 의하여 등급의 차이를 표시한 것인데, 그 등급적 차이가 이른바 斬衰(참최)・齊衰(자최)・大功(대공)・小功(소공)・緦麻(시마)의 오등급으로 되어있는 까닭에 상복제도를 곧 오복제도라고도 함은 우리가 널리 잘 아는 바이어니와, 이 五服(오복)의 등급이 무엇을 표준하고 무슨 근거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냐 함은 그다지 명료하지 않다. 文公家禮(문공가례)에 의하면 「斬不緝也 凡衣裳旁及下際 皆不縫纖」이라 하고, 「齊緝也 凡衣裳 旁及下際 皆緝」이라 하여 服裝(복장)의 末端(말단)을 緝(집) 또는 不緝(불집)하는 것으로써 最重(최중)한 참최의 복장과 자최 이하의 복장과를 구별하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등급의 차이가 복장제작 상의 방법에 의거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여기에 이 제작상 방법의 차이가 왜 다만 斬齊(참자) 2복에 한하여 표시되었느냐 하면 거기에는 한 개의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문공가례에 의하면 참최는 「用極鹿生麻布爲之」라 하고 자최는 「用比斬衰次等鹿生布」라 하고, 점차로 대공은 자최에 비하여, 또 소공은 대공에 비하여 稍熟細布(초숙세포)를 사용하고 시마는 極細熟布(극세숙포)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등급의 차이가 복장의 자료 즉 織布(직포)의 精粗(정조) 및 生熟(생숙)에 의거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이 직포의 정조의 차이가 왜 대공 소공 시마에 한하여 표시되었으며 왜 緝不緝(집불집)의 구분 원리 이외에 또 이런 구분 표준이 제정되었느냐 함에는 또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여하간 제작상으로나 자료상으로나 정조의 차이는 공통하여, 重服(중복)일수록 粗略(조약)하여서 수공이 경감되어 있는 것만은 간취하기에 용이한 葬實(장실)이다. 그리하여 이 사실은 일방으로 복자가 이상 시에 처할 만큼 비생산적인 생활양식의 자연한 표현이라 하겠고, 他方(타방)으로 상중의 상장이 평상시와 특이함을 요하는 주술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보기에 족한 것이다. 무릇 상장에 관한 諸多儀式(제다의식) 절차가 死靈(사령)에 대한 금기 즉 禳禍招福(양화초복)의 원시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널리 제민족간에 편재한 민속이어니와, 상복이 또한 사령에 대한 공포와 죽음의 感染(감염)에 대한 恐懼(공구)에 公本(공본)된 것이라 함은 일반 종교민족학자의 인정한 바이다,(2) 그러면 이러한 주술종교적 의미가 어찌하여 상기한바 오복의 명칭에는 표시되지 않엇는가 하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것이나, 의례 이외의 諸多(제다) 지나 고문헌에는 역시 이러한 주술종교적 의미를 표시한 오복의 명칭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으로 제2등급인 자최는 의례상복편에 「疏衰裳齊」라 하였으니, 이 齊(자)는 곧 齊正(자정) 齊等(자등) 齊整(자정) 등의 의미로 복장의 제작상 그 緣(연)을 縫紡(봉방)하여 齊一(제일)히 한다는 것을 표시함은 상기한 바와 같다, 그런데 論語(논어) 孟子(맹자) 荀子(순자) 등의 전적에는 어디나 다 자최로 되여있다, 즉
쪽수▶P1喪服의 制度는 元來 死者 即 喪者에 對한 服者의 親疎遠近 關係와 家族的 社會的 尊卑의 地位身分에 依하야 等級의 差異를 表示한 것인대, 二等級的 差異가 이른바 斬衰・齊衰・大功・小功・緦麻의 五等級으로 되어있는 까닭에 喪服制度를 곧 五服制度라고도 함은 우리가 널리 잘 아는 바이어니와, 이 五服의 等級이 무엇을 標準하고 무슨 根據에 依하야 構成된 것이냐 함은 그다지 明瞭하지 않다. 文公家禮에 依하면 「斬不緝也 凡衣裳旁及下際 皆不縫纖」이라 하고, 「齊緝也 凡衣裳 旁及下際 皆緝」이라 하야 服裝의 末端을 緝 또는 不緝하는 것으로써 最重한 斬衰의 服裝과 齊衰 以下의 服裝과를 區別하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等級의 差異가 服裝製作 上의 方法에 依據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여기에 이 製作上 方法의 差異가 웨다만 斬齊 二服에 限하야 表示되였느냐 하면 거기에는 한 개의 疑問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P2-1다. 또 文公家禮에 依하면 斬衰는 「用極鹿生麻布爲之」라 하고 齊衰는 「用比斬衰次等鹿生布」라 하고, 漸次로 大功은 齊衰에 比하야, 또 小功은 大功에 比하야 稍熟細布를 使用하고 網麻는 極細熟布를 使用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等級의 差異가 服裝의 資料 即 織布의 精粗 及 生熟에 依據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이 織布의 精粗의 差異가 웨 大功 小功 縮麻에 限하야 表示되였으며 웨 緝不緝의 區分原理 以外에 또 이런 區分 標準이 制定되였느냐 함에는 또한 疑問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如何間 製作上으로나 資料上으로나 精粗의 差異는 共通하야, 重服일수록 粗略하여서 手工이 輕減되여 있는 것만은 看取하기에 容易한 葬實이다. 그리하야 이 事實은 一方으로 服者가 異常時에 處할 만큼 非生產的인 生活樣式의 自然한 表現이라 하겠고, 他方으로 喪中의 喪裝이 平常時와 特異함을 要하는 呪術宗敎的 意味를 가진 것이라고 보기에 足한 것이다. 무릇 喪葬에 關한 諸多儀式 節次가 死靈에 對한 禁忌 即 禳禍招福의 原始宗敎的 意味를 가지고 있음은 널리 諸民族間에 遍在한 民俗이어니와, 喪服이 또한 死靈에 對한 恐怖와 死의 感染에 對한 恐懼에 公本된 것이라 함은 一般 宗敎民族學者의 認定한 바이다,(2) 그러면 이러한 呪術宗敎的 意味가 어찌하야 上記한바 五服의 名稱에는 表示되지 않엇는가 하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事情이 있을 것이나, 儀禮 以外의 諸多 支那 古文獻에는 亦是 이러한 呪術宗敎的 意味를 表示한 五服의 名稱을 發見할 수 있는 것이다. 一般으로 第二級报인 齊衰는 儀禮喪服篇에 「疏衰裳齊」라 하였으니, 이 齊는 곧 齊正 齊等 齊整 等의 意味로 服裝의 製作上 그 緣을 縫紡하야 齊一히 한다는 것을 表示함은 上記한 바와 같다, 그런데 論語 孟子 荀子 等의 典籍에는 어데나 다 齋衰로 되여있다, 即
見齋衰者 雖狎必變 (論語鄕黨篇)
쪽수▶P2-2 見齋衰者 雖狎必變 (論語鄕黨篇)
三年之喪 齋疏之服 (孟子滕文公篇)
쪽수▶P2-3 三年之喪 齋疏之服 (孟子滕文公篇)
三年之喪 稱情而立文 所以爲至痛極也 齋戒苴枚 居廬食粥 席薪枕槐 所以爲至痛飾也(荀子 禮論篇)
쪽수▶P3-1 三年之喪 稱情而立文 所以爲至痛極也 齋戒苴枚 居廬食粥 席薪枕槐 所以爲至痛飾也(荀子 禮論篇)
이제 이 齋(자)의 宇義(자의)를 보건대 곧 齋戒(재계) 齋日(재일) 齋忌(재기) 등에 보다시피 금기를 의미한 것이니 이것은 正(정)히 喪服의 주술종교적 의미를 표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자최란 것은 원래 齋衰(재최)이던 것이 齋齊(재제)의 음형이 相似(상사)한 소치로 齋衰(재최)라 하게 된 것이라 하겠고 또 이것을 疏衰(소최)라 하였음은 일찍 鄭玄(정현)의 注(주)한 바 「疏猶如屬」이라 함과 같이 齋忌(재기)의 복을 평시의 복에 비하여 疏粗(소조)한 布(포)로써 제작한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면 왜 이 자최에 한하여 상복 본래의 원시종교적 의미를 표시하였을까 하면 그것은 곧 상복의 시원적 형태에 있서서 이 자최복이 가장 중심적인 것인 까닭이라고 보겠고 민속의 변천 範鬣(범렵)의 발전에 따라서 기타 제 등급의 복으로 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상복의 등급이 그 원시적 형태에 있어서 이미 오등급으로 정연하게 紙織(지직)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니, 지나 고문헌 중에 상장의 예가 비교적 상술하여 있는 순자의 禮論篇(예ᄚᅩᆫ편)에는 참최와 대공의 이등급이 기재되지 않았음은 곧 이러한 사실을 明證(명증)한 것이겠다. 이세 이러한 근거의 입각하여 異灣(이ᄆᆘᆫ)의 신진 郭明昆(곽명곤)이란 이는 의례의 五成(오성)의 조직이 후대의 加作(가작)이요 아마도 孟筍(맹순) 이후의 시대에 당시의 貝俗(패속)으로 되어있는 자최 소공 시마의 3복에 대하여 참최와 대공을 자최와 소공의 위에 첨가한 것이라고 하였으니,(3) 이제 의례에 대한 사적 고증의 시비는 필자로서 論斷(논단)키 어려운 문제이나. 여하간 오복의 조직이 예교문화의 발전에 따라서 점차로 성립된 것이요 상고 시대로부터 완비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은 정당한 견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순자의 예론 중에는 오직 삼등급의 상복 밖에는 제정된 바가 없으니 의복의 제도는 필연코 맹순 이후의 시대에 제정된 것이라고 추측함은 그다지 큰 오류가 아닐 것이요 이 오복의 제도가 확립함은 상복의 습속이 한갓 예교에 한정되지 않고 법제로 확정된 이후의 사실이라고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3-2 이제 이 齋의 宇義를 보건대 곧 齋戒 齋日 齋忌 等에 보다싶이 禁忌를 意味한 것이니 이것은 正히 喪服의 呪術宗敎的 意味를 表示한 것이 分明하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齊衰란 것은 元來 齋衰이던 것이 齋齊의 音形이 相似한 所致로 齋衰라 하게 된 것이라 하겠고 또 이것을 疏衰라 하였음은 일즉 鄭玄의 注한 바 「疏猶如屬」이라 함과 같이 齋忌의 服을 平時의 服에 比하야 疏粗한 布로써 製作한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면 웨 이 齊衰에 限하야 喪服 本來의 原始宗敎的 意味를 表示하였을가 하면 그것은 곧 喪服의 始原的 形熊에 있서서 이 齊衰服이 가장 中心的인 것인 까닭이라고 보겠고 民俗의 變遷 範鬣의 發展에 따라서 其他 諸 等級의 服으로 分化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喪服의 等級이 그 原始的 形態에 있어서 이미 五等級으로 整然하게 紙織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니, 支那 古文獻 中에 喪葬의 禮가 此絞的 詳述하여 있는 荀子의 禮論篇에는 斬衰와 大功의 二等級이 記載되지 않었음은 곧 이러한 事實을 明證한 것이겠다. 이세 이러한 根據의 立脚하야 異灣의 新進 郭明昆이란 이는 儀禮의 五成의 組織이 後代의 加作이요 아마도 孟筍 以後의 時代에 當時의 貝俗으로 되어있는 齊衰 小功 緦麻의 三服에 對하야 斬衰와 大功을 齊衰와 小功의 우에 添加한 것이라고 하였으니,(3) 이제 儀禮에 對한 史的 考證의 是非는 筆者로서 論斷키 難한 問題이나. 如何間 五服의 組織이 禮敎文化의 發展에 따라서 漸次로 成立된 것이요 上古 時代로부터 完備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은 正當한 見解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미 考察한 바와 같이 荀子의 禮論 中에는 오즉 三等級의 喪服밖에는 制定된 바가 없으니 衣服의 制度는 必然코 孟荀 危後의 時代에 制定된 것이라고 推測함은 그다지 큰 誤謬가 아닐 것이요 이 五服의 制度가 確立함은 喪服의 習俗이 한갓 禮敎에 限定되지 않고 法制로 確定된 以後의 史實이라고 보는 것도 當然한 일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오복제도는 예제로서 또한 법제로서 중국문화를 ■節(■절)한지 이미 장구한 세월을 가졌으니, 따라서 그 발전 과정에 있어서, 그 원시종교적 의미는 불식간에 상실되고 다만 제작상 또는 자료상의 등급만이 오복의 명칭에 잔존된 것이겠고 이 오복의 제도는 그대로 조선 일본에 전파하여 이른바 대가족 제도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상장의 경중 喪期(상기)의 장단 상복자의 신분관계의 부문에 의하여 오복의 구조 원리를 탐구하려한다.(4)
쪽수▶P4-1 그러나 엇젯든 이 五服制度는 禮制로서 또한 法制로서 中國文化를 閃節힌지 이미 長久한 歲月을 가젔으니, 따라서 그 發捉過程에 있어서 發展過程에 있어서, 그 原始宗敎的 意味는 不識間에 喪失되고 다만 製作上 또는 資料上의 等級만이 五服의 名稱에 殘存된 것이겠고 이 五服의 制度는 그대로 朝鮮 日本에 傳播하야 이른바 大家族 制度의 基礎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喪裝의 輕重 喪期의 長短 喪服者의 身分關係의 部門에 宜하야 五服의 構造 原理를 探究하려한다.(4)


































본문2: 2


상장에 관하여 우선 그 자료가 왜 麻布(마포)로 되어 있느냐 함에는 무슨 근거가 있을 듯하다. 일반으로 상복이 주술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한, 상용복과 다를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그 직물의 종류까지 상용복의 그것과 다른 것을 취하였는가 어뗜가 함은 의례 상복제의 제정된 당시의 지나 민속을 분명히 하기 전에 어떻다고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 마포란 것은 동양민속의 의복지로서 사용하게 된 지 그 기원이 상당히 장구한 일이지만 그것을 특히 상복용으로 한 것은 비교적 粗大(조대)한 布(포)류란 것이 중상일수록 조대한 직포임을 보아 분명한 일이요, 또 그 布色(포색)이 조악하게 보인 까닭인가 생각 된다. 직포의 조대함을 사용함은 곧 가공이 근소한 까닭이요 수공이 근소한 것을 사용함은 비생산적 상기에 있는 裝服者(장복자)로서 생활상 필연한 경제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그럼으로 직물의 정조를 구별하는 데는 방직상의 升(승)을 표준하고 참최 3승 자최 4승・5승・6승 대공 7승・8승・9승 소공 11승・12승 시마 15승 등의 등급이 상복기에 규정되어 있다. 또 복색으로 말하면 일반으로 백색・흑색・암청색이 사용되고 원칙상으로는 廉價(염가)하고 평범한 직물의 자연색이 사용된 것은 널리 제민족에 잇는 습속이다.(1) 그러나 상복을 주술종교적 견지에서 볼 때 사령에 대한 금기의 표시를 마포요, 같은 추악한 색으로써 함은 또한 원시종교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경제적 및 종교적 요구에 기인한 직포의 정조와 복색의 미추는 또한 상포의 사용에 당하여 생숙의 구별에도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례에 의하면 자최엔 極麤生布(극추생포), 참최엔 次麤生布(차추생포), 期(기)엔 次等生布(차등생포), 대공엔 稍麤熟布(초추숙포), 소공엔 稍細熟布(초세숙포), 시마엔 極細熟布(극세숙포)를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즉 麤生布(추생포)는 방직이 조대하고 색채가 추악함으로 중상에 용하고, 숙세포는 이에 반함으로 경상에 용하여 등급의 차이를 표시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또한 상장의 일부분인 終帶(종대)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즉 참최엔 苴麻(저마) 즉 有子麻(유자마), 자최 이하엔 某麻(모마) 즉 無子麻(무자마), 시마엔 熟麻(숙마)가 사용된다. 의례 상복편에 의하면 斬衰章傳(참최장전)에 「苴経者 麻之有賞也 宜経大精 左本在下 去五分一 以爲帶」라 하였고, 齊衰章傳(자최장전)에 「牡麻者某麻也」라 하였으니, 이 直麻(직마)는 雌麻(자마)로 某麻(모마)에 비하여 조악하고, 모마는 雄麻(웅마)로 苴麻(저마)에 비하여 精美(정미)함으로 인하여 참자 2자에 배당된 것이 명백하다. 일찍히 정현의 주에 「苴麻者其貌苴 以爲経 服重者尙靂惡」이라 함은 곧 이러한 점을 말한 것이다.
쪽수▶P4-2喪裝에 關하야 于先 그 資料가 웨 麻布로 되여있느냐 함에는 무슨 根據가 있을 듯하다. 一般으로 喪服이 呪術宗敎的 意義를 가지고 있는 限, 常用服과 다를 것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그 織物의 種類까지 常用服의 그것과 다른 것을 取하였는가 어뗜가 함은 儀禮喪服制의 制定된 當時의 支那民俗을 分明히 하기 前에 어떠타고 말하기 難한 일이다. 다만 이 麻布란 것은 東洋民俗의 衣服地로서 使用하게 된지 그 起原이 相當히 長久한 일이지만 그것을 特히 喪服用으로 한 것은 比牧的 粗大한 布類란 것이 重喪일수록 粗大한 織布임을 보아 分明한 일이요, 또 그 布色이 粗惡하게 보인 까닭인가 생▶P5-1각 된다. 織布의 粗大함을 使用함은 곧 加工이 僅少한 까닭이요 手工이 僅少한 것을 使用함은 非生産的 喪期에 잇는 裝服者로서 生活上 必然한 經濟的 要求에 依한 것이라 하겠다, 그럼으로 織物의 精粗를 區別하는 데는 紡織上의 升을 標準하고 斬衰 三升 齊衰 四升・五升・六升 大功 七升・八升・九升 小功 十一升・十二升 緦麻 十五升 等의 等級이 喪服記에 規定되여 있다. 또 服色으로 말하면 一般으로 白色・黑色・暗靑色이 使用되고 原則上으로는 廉價하고 平凡한 織物의 自然色이 使用된 것은 널리 諸民族에 잇는 習俗이다.(1) 그러나 喪服을 呪術宗敎的 見地에서 볼 때 死靈에 對한 禁忌의 表示틀 麻布요, 가튼 醜惡한 色으로써 함은 또한 原始宗敎的 要求에 依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經濟的 及 宗敎的 要求에 基因한 織布의 精粗와 服色의 美醜는 또한 喪布의 使用에 當하야 生熟의 區別에도 表示되여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家禮애 依하면 斬衰엔 極麤生布, 齊衰엔 次麤生布, 期엔 次等生布, 大功엔 稍麤熟布, 小功엔 稍細熟布, 總엔 極細熟布를 使用하도록 規定되여 있다. 即麤生布는 紡織이 粗大하고 色彩가 醜惡함으로 重喪에 用하고, 熟細布는 이에 反함으로 輕喪에 用하야 等級의差異를 表示한 것이다. 이러한 差異는 또한 喪裝의 一部分인 終帶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即 斬衰엔 苴麻 即有子麻, 齊衰 以下엔 某麻 即 無子麻, 總엔 熟麻가 使用된다. 儀禮 喪服篇에 依하면 斬衰章傳에 「苴経者 麻之有賞也 宜経大精 左本在下 去五分一 以爲帶」라 하였고, 齊衰章傳에 「牡麻者某麻也」라 하였으니, 이 直麻는 雌麻로 牡麻에 比하야 粗惡하고, 某麻는 雄麻로 苴麻에 比하야 精美함으로 因하야 斬齊 二者에 配當된 것이 明白하다. 일즉히 鄭玄의 註에 「苴麻者其貌苴 以爲経 服重者尙靂惡」이라 함은 곧 이러한 點을 말한 것이다.
다음에 상장의 제부분을 보건대 가장 주요한 것은 물론 衰裳(최상)이다. 衰(최)는 원래 縗(최)로 作(작)하여 상의를 말하고, 裳(상)은 곧 하의를 말한 것이다. 衰衣(최의)에는 전면으로 보아서 項部(항부, 濶中(활중) 또는 闕中(궐중))에 領(령, 또는 加領(가령))이 있고 肩部(견부)에 適(적, 辟領(피령))이 있고 흉부(當心處, 당심처)에 최가 있고 後而(후이)으로 보아서 背部(배부)에 負板(부판)이 있으니, 제각기 규정된 寸法(촌법)에 따라 布片(포편)을 附添(부첨)한 것이다. 그러면 대체 이러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에 유래한 것인가 하면, 혹은 실효 상의 요구에 의한 것, 혹은 금의 의미를 표시한 것, 혹은 상용복과의 차이를 지시한 것 등이려니와, 당초에 상복이 제작될 당시의 지나복이 어떤 것이던가를 명백히 알기 전에는 이것을 어떠하다고 확언하기 어렵다. 그 중에 부겁과 같은 것은 葬儀(장의) 이전에 한하여 所用(소용)된 것을 보면 원시민속에 있어서 복자 자신이 상자의 시체를 背負(배부)치야 운반하는데 실용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견부의 적과 부판과 흉부의 최는 대공 이하에 소용되지 않은 것을 보면 상의 경중을 표시하기 위하여 첨가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 뿐 아니라 최의의 착복상으로 보아 상의 경중에 따라서 ■을 달리하는 것이니, 즉 참최엔 前掩(전엄) 其後(기후) 자최엔 後掩(후엄) 其前(기전)이라는 규정이다. 이에 대하여 裳衣(상의)로 말하면 그 장단을 適宜(적의)히 하여 6폭 또는 7폭 12폭 등 예서의 度定(탁정)이 一様(일양)하지 않다. 이 衰裳(최상)의 제작에 관하여 특히 주의할 만한 것은 衣端(의단)을 縫緝(봉집)하는 데 向內(향내) 向外(향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가례 주에 「衣縫向外 裳縫向内」라 하였으며 의 즉 衰衣(상의)만은 오복의 어느 경우에나 다 향외로 된 것이 특색이다. 어쨌든 그것은 복자의 불길을 상징하고 따라서 평상복과의 차이를 표시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衰裳(최상)의 내복으로 申衣(신의)란 것이 있으니 中單衣(중단의) 또는 상용의 周衣(주의)와 흡사한 것이요 衰衣(상의)보다는 稍細布(초세포)를 用(용)하여 그 邊端(변단)을 다 봉집한 것이다. 이 외에 冠(관)・首純(수순)・孝巾(효건)・腰耗(요모)・絞帶(교대)・行纏(행전)・履(리) 등이 있고, 또 婦女(부녀)에 한하여 竹釵(죽채)・蓋頭(개두)가 있으니 그 製法(제법)은 예서에 따라 차이가 있거니와 그 원형은 大差(대차)가 없을 것이다, 이제 四禮便覽(사례편람)에 의하여 상장 일반의 제작법을 대략 擧示(거시)하면 이러하다
쪽수▶P5-2다음에 喪裝의 諸部分을 보건대 가장 主要한 것은 勿論 衰裳이다. 衰는 元來 縗로 作하야 上衣를 말하고, 裳은 곧 下衣를 말한 것이다. 衰衣에는 前面으로 보아서 項部(濶中 또는 闕中)에 領(또는 加領)이있고 肩部에 適(辟領)이 있고 胸部(當心▶P6-1處)에 衰가 있고 後而으로 보아서 背部에 負板이 있으니, 제각금 規定된 寸法에 따라 布片을 附添한 것이다. 그러면 大體 이러한 것이 무엇을 意味하고 무엇에 由來한 것인가 하면, 或은 實效 上의 要求에 依한 것, 或은 禁의 意味를 表示한 것, 或은 常用服과의 差異를 指示한 것 等이려니와, 當初에 喪服이 制作될 當時의 支那服이 어떤 것이던가를 明白히 알기 前에는 이것을 어떠하다고 確言하기 어렵다. 그 中에 負极과 가튼 것은 葬儀 以前에 限하야 所用된 것을 보면 原始民俗에 있어서 服者 自身이 喪者의 屍體를 背負치야 運搬하는데 實用되였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肩部의 適과 負板과 胸部의 衰는 大功 以下에 所用되지 않은 것을 보면 喪의 輕重을 表示하기 爲하야 添加한 것임은 分明하다. 그뿐아니라 衰衣의 着服上으로 보아 喪의 輕重에 따라서 ■을 달리하는 것이니, 即 斬衰엔 前掩 其後 齊衰엔 後掩 其前이라는 規定이다. 이에 對하야 裳衣로 말하면 그 長短을 適宜히 하야 六幅 또는 七幅 十二幅 等 禮書의 度定이 一様하지 않다. 이 衰裳의 製作에 關하야 特히 注意할만한 것은 衣端을 縫緝하는 데 向內 向外의 差異가 있다는 것이다, 即 家禮註에 「衣縫向外 裳縫向内」라 하였으며 衣 即 衰衣만은 五服의 어느 境遇에나 다 向外로 된 것이 特色이다. 엇잿든 그것은 服者의 不吉을象徵하고 따라서 平常服과의 差異를 表示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야 이 衰裳의 內服으로 申衣란 것이 있으니 中單衣 또는 常用의 周衣와 恰似한 것이요 衰衣보다는 稍細布를 用하야 그 邊端을 다 縫緝한 것이다. 이 外에 冠・首純・孝巾・腰耗・絞帶・行纏・履 等이 있고, 또 婦女에 限하야 竹釵・蓋頭가 있으니 그 製法은 禮書에 따라 差異가 있거니와 그 原形은 大差가없을 것이다, 이제 四禮便覽에 依하야 喪裝 一般의 製作法을 大略 擧示하면 이러하다
一, 衰衣. 用布二幅 其長四尺六寸 中屈下垂 前後各長二尺三寸 除縫餘一寸則長一尺二寸.
쪽수▶P6-2 一, 衰衣. 用布二幅 其長四尺六寸 中屈下垂 前後各長二尺三寸 除縫餘一寸則長一尺二寸.
① 辟領. 兩肩上巾血處四寸之卜, 而疊後兩某左右幅各裁入四寸訖 分招所栽者向外 各加而肩上 只爲左有適 即辟領 旣摺所裁者向外 其前後左右虛處各四寸 即濶中也 大功以下 無辟領 其分摺向外者如诃去之 以後兩票聯合背後縫.
쪽수▶P6-3 ① 辟領. 兩肩上巾血處四寸之卜, 而疊後兩某左右幅各裁入四寸訖 分招所栽者向外 各加而肩上 只爲左有適 即辟領 旣▶P7-1摺所裁者向外 其前後左右虛處各四寸 即濶中也 大功以下 無辟領 其分摺向外者如诃去之 以後兩票聯合背後縫.
② 袂. 用布二幅各長四尺六寸 中屈之 縫聯於外身之左右 又縫合其下際除縫餘一寸則亦各二尺二寸 又於袂端縫合其下 一尺爲方袂 留其二寸 一寸爲袂口 即枇也.
쪽수▶P7-2 ② 袂. 用布二幅各長四尺六寸 中屈之 縫聯於外身之左右 又縫合其下際除縫餘一寸則亦各二尺二寸 又於袂端縫合其下 一尺爲方袂 留其二寸 一寸爲袂口 即枇也.
③ 加領. 別用布長一尺六寸許闊八寸許縱摺而中分之 其下一半兩端各裁斷方四寸 際去不用 只裕中間八寸以加後之闢中 從項上分左右對摺向前垂下 以加於前濶中.
쪽수▶P7-3 ③ 加領. 別用布長一尺六寸許闊八寸許縱摺而中分之 其下一半兩端各裁斷方四寸 際去不用 只裕中間八寸以加後之闢中 從項上分左右對摺向前垂下 以加於前濶中.
④ 袷. 即加於領裏者 用布一條 長一尺六寸許 廣一尺四寸 分作三條 二條疊縫於領 以加於範闊中 一條换拓爲二重 加於後闊中 並加領 乃三重也.
쪽수▶P7-4 ④ 袷. 即加於領裏者 用布一條 長一尺六寸許 廣一尺四寸 分作三條 二條疊縫於領 以加於範闊中 一條换拓爲二重 加於後闊中 並加領 乃三重也.
⑤ 帶下. 用縱布廣一尺一寸 上屬於衣橫繞於腰 以腰之濶狹爲度除縫餘 一寸則高一尺
쪽수▶P7-5 ⑤ 帶下. 用縱布廣一尺一寸 上屬於衣橫繞於腰 以腰之濶狹爲度除縫餘 一寸則高一尺
⑥ 袵. 用 布二幅 各長三尺五寸 每幅上於左旁一尺之下 裁入六寸 下於右旁 一尺之上 亦裁人 六寸 便於劃處 相望斜裁 以廣頭向上疊之 血邊在外交峡 垂之如燕尾狀 齋綴於衣兩旁腋下 斬衰前掩其後 齊衰以下役袍其前.
쪽수▶P7-6 ⑥ 袵. 用 布二幅 各長三尺五寸 每幅上於左旁一尺之下 裁入六寸 下於右旁 一尺之上 亦裁人 六寸 便於劃處 相望斜裁 以廣頭向上疊之 血邊在外交峡 垂之如燕尾狀 齋綴於衣兩旁腋下 斬衰前掩其後 齊衰以下役袍其前.
⑦ 衰. 用布長六寸廣四寸 綴於衣外衿之前當心處 大功以下不用
쪽수▶P7-7 ⑦ 衰. 用布長六寸廣四寸 綴於衣外衿之前當心處 大功以下不用
⑧ 負板, 用而方尺八寸 綴於領下 當背龍之 大功時下不用
쪽수▶P7-8 ⑧ 負板, 用而方尺八寸 綴於領下 當背龍之 大功時下不用
⑨ 衣聲. 四即小帶 二各綴於內外衿旁 一綴於衣外右处下 一綴於衣沖左建下 使相掩結
쪽수▶P7-9 ⑨ 衣聲. 四即小帶 二各綴於內外衿旁 一綴於衣外右处下 一綴於衣沖左建下 使相掩結
二, 裳. 用布七幅 長短隨宜縫含爲前三後四 每縫除左右縫餘各一寸 前後不連 每幅作三輒 其輒則於每幅上頭 用指提起小許 摺向右又提起小許摺向左 兩相擄著 用線綴住而空其中 以爲輒 相揍在外 與幅巾輒不同 如是者三 又以布一條 廣四五寸 縱摺之 繼前後七幅 而前後相當處 疊複小許而夾縫之 約圍於腰 又交掩小許 兩端有小帶 後帶短向前 前帶長向後 使重圍而相結於前
쪽수▶P7-10 二, 裳. 用布七幅 長短隨宜縫含爲前三後四 每縫除左右縫餘各一寸 前後不連 每幅作三輒 其輒則於每幅上頭 用指提起小許 摺向右又提起小許摺向左 兩相擄著 用線綴住而空其中 以爲輒 相揍在外 與幅巾輒不同 如是者三 又以布一條 廣四五寸 縱摺之 繼前後七幅 而前後相當處 疊複小許而夾縫之 約圍於腰 又交掩小許 兩端有小帶 後帶短向前 前帶▶P8-1長向後 使重圍而相結於前
三, 冠. 用厚紙糊爲材 廣五寸二分半 裏以布 布升比衰稍細 三年之喪 鍛而勿灰 蕃以下 用灰銀 裝積爲三梁 其法從一方 針七分半之外 又中摺七分半爲梁 如是者凡三 所餘又七分半 裝積之則爲廣三寸 或以廣五寸二分半之材 分識作七以第二分 第四分 第六分中摺之 爲梁則如法而大功以上皆向右 小功以下皆向左 用線縱縫其梁 長足跨頂前後 斩衰以麻繩爲武 齊衰以下用布 夾縫廣一寸許 從額上約之 至項後交向前 各至耳邊結之 垂其餘爲纓 使結於題下 屈冠兩頭 入武內 向外反屈之 縫於武 所謂外畢.
쪽수▶P8-2 三, 冠. 用厚紙糊爲材 廣五寸二分半 裏以布 布升比衰稍細 三年之喪 鍛而勿灰 蕃以下 用灰銀 裝積爲三梁 其法從一方 針七分半之外 又中摺七分半爲梁 如是者凡三 所餘又七分半 裝積之則爲廣三寸 或以廣五寸二分半之材 分識作七以第二分 第四分 第六分中摺之 爲梁則如法而大功以上皆向右 小功以下皆向左 用線縱縫其梁 長足跨頂前後 斩衰以麻繩爲武 齊衰以下用布 夾縫廣一寸許 從額上約之 至項後交向前 各至耳邊結之 垂其餘爲纓 使結於題下 屈冠兩頭 入武內 向外反屈之 縫於武 所謂外畢.
四, 孝巾. 用以承冠者 其制用布衷首 合縫在後之中 摺其兩方 藏在案 縫合其上 從前後望少如方冠 俗稱頭巾.
쪽수▶P8-3 四, 孝巾. 用以承冠者 其制用布衷首 合縫在後之中 摺其兩方 藏在案 縫合其上 從前後望少如方冠 俗稱頭巾.
五, 中衣. 用以郁衰服者 用布用熟同衰服 布升衰梢細 那即渺舟 斬衰亦以布緣邊 或用中單衣 制如俗(周遮衣)袂端不圓殺 袂端及衿裔末 皆緣之 一名汗衫.
쪽수▶P8-4 五, 中衣. 用以郁衰服者 用布用熟同衰服 布升衰梢細 那即渺舟 斬衰亦以布緣邊 或用中單衣 制如俗(周遮衣)袂端不圓殺 袂端及衿裔末 皆緣之 一名汗衫.
五, 首絰. 用以加於冠上者 用麻兩股相交 其大斬衰九寸 齊衰七寸二分 大功五寸七分 小功四寸六分 纏三寸五分. 斬衰麻本在左從額前向右圍之 以其末加本上而繫之 齊衰以下 麻本在右 從簽刖向左圍之 以其未繫於本下. 斬衰以麻繩爲櫻而垂之 結於願下 齊衰以下 用布 小功以下 無纓 中殡七月 亦無櫻
쪽수▶P8-5 五, 首絰. 用以加於冠上者 用麻兩股相交 其大斬衰九寸 齊衰七寸二分 大功五寸七分 小功四寸六分 纏三寸五分. 斬衰麻本在左從額前向右圍之 以其末加本上而繫之 齊衰以下 麻本在右 從簽刖向左圍之 以其未繫於本下. 斬衰以麻繩爲櫻而垂之 結於願下 齊衰以下 用布 小功以下 無纓 中殡七月 亦無櫻
六, 腰経. 巾以申束絞帶上者 用麻兩股相交 五分首耗去一 以爲腰統 其圍斬衰七寸二分 齊衰五寸七分 大功四寸六分 小功三寸五分 綱二寸八分 其長中取圍腰而相結處左右 各綴小帶 以備固結斬衰用麻繩 齊衰以下用布 絰和交之卜左右 各散垂三尺不絞 至卒哭後絞之 年五十以上者及小功以下及婦人 不散垂 初即絞之 亦垂三尺 兩頭用麻繩結之 使不解散.
쪽수▶P8-6 六, 腰経. 巾以申束絞帶上者 用麻兩股相交 五分首耗去一 以爲腰統 其圍斬衰七寸二分 齊衰五寸七分 大功四寸六分 小功三寸五分 綱二寸八分 其長中取圍腰而相結處左右 各綴小帶 以備固結斬衰用麻繩 齊衰以下用布 絰和交之卜左右 各散垂三尺不絞 至卒哭後絞之 年五十以上者及小功以下及婦人 不散垂 初即絞之 亦垂三尺 兩頭用麻繩結之 使不解散.
七, 絞帶. 散膏用以束於腰経下者 斬衰用麻纖一條 長十八九尺 中屈之 爲兩股各一尺餘 結合於张予然後合其餘 順目相糾 四脚積而相重 即三重四胰 其大較小於腰経 通長八九尺 圍腰從左 過後至前 乃以其右端 穿彊子而反揷於右 齊衰以下 用布廣四寸許夾縫之爲二寸 大功小功總以此較狹 皆屈其右端尺許 用線綴住以爲张 布外各如其冠 生熟各如其服.
쪽수▶P9-1 七, 絞帶. 散膏用以束於腰経下者 斬衰用麻纖一條 長十八九尺 中屈之 爲兩股各一尺餘 結合於张予然後合其餘 順目相糾 四脚積而相重 即三重四胰 其大較小於腰経 通長八九尺 圍腰從左 過後至前 乃以其右端 穿彊子而反揷於右 齊衰以下 用布廣四寸許夾縫之爲二寸 大功小功總以此較狹 皆屈其右端尺許 用線綴住以爲张 布外各如其冠 生熟各如其服.
七, 行糰. 家禮所謂勒帛 小學所謂縛袴 禮雖不見於喪服 今人皆用布爲之 固不可廢 升布當如中衣.
쪽수▶P9-2 七, 行糰. 家禮所謂勒帛 小學所謂縛袴 禮雖不見於喪服 今人皆用布爲之 固不可廢 升布當如中衣.
八, 履. 斬衰菅履 齊衰疎履 不杖麻履 齊衰三月與大功繩履 小功以不吉履無絢.
쪽수▶P9-3 八, 履. 斬衰菅履 齊衰疎履 不杖麻履 齊衰三月與大功繩履 小功以不吉履無絢.
九, 蓋頭. 用以障身者 用布稍細者 凡三幅長與身齊或五尺 數斯不緝邊 齊衰緝邊 今俗羅兀其遺意.
쪽수▶P9-4 九, 蓋頭. 用以障身者 用布稍細者 凡三幅長與身齊或五尺 數斯不緝邊 齊衰緝邊 今俗羅兀其遺意.
이 외에 童子服(동자복)이 있으니 그 체제는 長者(장자)의 그것과 다름이 없거니와 冠巾(관건)首経(수경)이 없는 것이 특색이요, 또 侍者服(대자복) 妾婢服(첩비복)의 제정이 있으니 전자는 生布衣(생포의)로 俗制(속제)의 直領(직령) 혹은 中單衣(중단의)와 흡사하며 후자는 생포 背子(배자)를 用(용)함이 특색이다. 또 공통 자료인 마포는 상의 경중에 따라 생숙 麤細(추세)의 차이가 있음은 기술한 바와 같거니와 経帶(경대)에 용한 마 역시 차이가 있으니 참최에는 저마 즉 유자마를 용하고 자최 이하에는 모마 즉 무자마를 용하고 총에는 숙마를 용한다는 규정이다.
쪽수▶P9-5 이 外에 童子服이 있으니 그 體制는 長者의 그것과 다름이 없거니와 冠巾首経이 없는 것이 特色이요, 또 侍者服 妾婢服의 制定이 있으니 前者는 生布衣로 俗制의 直領 或은 中單衣와 恰似하며 後者는 生布 背子를 用함이 特色이다. 또 共通 資料인 麻布는 喪의 輕重에 따라 生熟 屬細의 差異가 있음은 旣述한 바와 같거니와 経帶에 用한 麻 亦是 差異가 있으니 斬衰에는 苴麻 即有子麻를 用하고 齊衰 以下에는 桌麻 即無子麻를 用하고 總에는 熟麻를 用한다는規定이다
이 외에 상장의 일부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杖(장)이다 소위 苴杖(저장)은 참최엔 竹杖(죽장)이요 자최엔 桐杖(동장)인대 桐(동)이 없으면 柳(유)를 용한 것이 일반이니 이것은 예기 喪服小記(상복소기)에 「苴杖竹也 削杖桐也」라는 원칙에 의한 것이겠다. 그러면 왜 이 죽과 동이 사용되었느냐 함에는 그 기원을 一考(일고)할 만한 일이다. 원래 상장 그것이 주술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이 효장이란 것도 악령을 구축하고 邪魔(사마)를 진무하는 일종의 呪具(주구, talisman)라고 볼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죽과 동이 특히 사령을 진무하는 呪刀(주도)을 가진 것으로 본 까닭이였던지? 이제 잠깐 문헌을 참고하건대 순자에는 齊衰苴杖(자최저장)이라 할 뿐이요 참최와 장에 대하여 아무런 규정이 없는데 이 점으로 보아서 이미 말한 바 곽명곤이란 이는 참최가 자최에서 파생함과 갈이 削杖(삭장)이 저장에서 파생한 것이라 하여 이와 같이 말하였다.
쪽수▶P9-6 이 外에 喪裝의 一部로서 看過할 수 없는 것은 技이다 所謂 孝杖은 斬衰엔 竹杖이요 齊衰엔 桐杖인대 桐이 없으면 柳를 用한 것이 一般이니 이것은 禮記 喪服小記에 「苴杖竹也 削杖桐也」라는 原則에 依한 것이겠다. 그러면 웨 이 竹과 桐이 使用되였느냐 함에는 그 起原을 一考할 만한 일이다. 元來 喪裝 그것이 呪術宗敎的 意義를 가지고 있음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이 孝杖이란 것도 惡靈을 驅逐하고 邪魔를 鎭撫하는 一種의 呪具(talisman)라고 볼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竹과 相이 特히 死靈을 鎭撫하는 呪刀을 가진 것으로 본 까닭이였던지? 이제 잠간 文獻을 參考하건대 苟子에는 齊衰苴杖이라 할 뿐이요 斬衰와 杖에 對하야 아무런 規定이 없는대 이 點으로 보아서 이미 말한 바 郭明昆이란 이는 斬틀:Tagpage衰가 齊衰에서 派生함과 갈이 削杖이 苴杖에서 派生한 것이라 하야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의례 상복편의 作者(작자)는 자최에 대하여 참최를 생각해낸 것 같이 저장에 대하여 삭장을 생각해 낸 것인가 한다. 혹은 斬(참)과 削(삭)은 같은 관념 연합의 심리에서 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리하여 新案(신안)의 참최에 종래의 저장을 배당하였음으로 종래의 자최에 신안의 삭장을 배당한 것 같다 운운(2) (譯原文, 역원문)
쪽수▶P10-2 儀禮喪服篇의 作者는 齊衰에 對하야 斬衰를 생각해낸 것 같이 苴杖에 對하야 削杖을 생각해 낸 것인가 한다. 或은 斬과 削은 같은 觀念聯合의 心理에서 構成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가. 그리하야 新案의 斬衰에 從來의 苴杖을 配當하였음으로 從來의 齊衰에 新案의 削杖을 配當한 것 같다 云云(2) (譯原文)
그렇다면 왜 新案(신안)의 참최에 신안의 삭장을 배당치않고 오히려 종래의 자최에 신안의 삭장을 배당하였는가에 대하여 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의례 상복편이 그가 말한 바와 같이 후대의 가작인지 아닌지는 필자 용이히 논단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이 점에 관하여는 그의 설명에 전후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는 삭장을 저마 즉 雌麻(자마)로 제작한 것이 그 원시적 형태라고 推斷(추단)하였으나, 여기에 또한 의문이 없지 않다. 원래 자마를 저마라 함은 이미 정현의 주한 바와 같이 그 色容(색용)이 癖惡(벽악)한 까닭이요 따라서 저장直의 저는 다만 조악한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찍 일본학자 湖村(호촌)・桂五十郞(계오십랑) 씨의 주석에 의하면
쪽수▶P10-3 그렇다면 웨 新案의 斬衰에 新案의 削杖을 配當치않고 오히려 從來의 齊衰에 新案의 削杖을 配當하였는가에 對하야 한 疑問이 생기는 것이다. 儀禮 喪服篇이 그가 말한 바와 같이 後代의 加作인지 아닌지는 筆者 容易히 論斷하기 어려운 問題이지만 이 點에 關하야는 그의 設明에 前後 矛盾을 늣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는 在杖을 苴麻 即 雌麻로 製作한 것이 그 原始的 形態라고 推斷하였으나, 여기에 또한 疑問이 없지 않다. 元來 雌麻를 苴麻라 함은 이미 鄭玄의 注한 바와 같이 그 色容이 癖惡한 까닭이요 따라서 直杖의 苴는 다만 粗惡한 것을 意味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즉 日本學者 湖村・桂五十郞氏의 註釋에 依하면
저는 黯(암)이다. 상중 憂痛(우통)의 극에 貌(모)가 蒼黯(창암)하다는 뜻으로 인하여 저장이라 한 것이다.(3) (譯原文)
쪽수▶P10-4 苴는 黯이다. 喪中 憂痛의 極에 貌가 蒼黯하다는 뜻으로 因하야 苴杖이라 한 것이다.(3) (譯原文)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저장은 苴色(저색)의 죽으로 제작한 장이라고 보겠거니와, 특히 죽으로써 주구를 삼는 것은 무슨 동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듣건대 현금 臺灣(대만)에 있어도 父喪(부상)엔 죽을 용하고 母喪(모상)엔 旃瀆木(전독목)을 용한다고 한다. 다만 孝杖(효장)의 원시적 형태를 주구로 볼테이면 장에 의미가 있을 것이요 그 장의 종류를 택한 것은 그 사회환경의 편의 여하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중국이나 대만 또는 조선에서는 이 죽이 적당하다고 본 까닭일 것이다 물론 이 효장이란 것을 주술종교적 의미로 본 것도 응당이려니와 또 當喪(당상)한 最近親(최근친)으로서 애통이 극한 소치로 신체를 지지하는데 所用(소용)있다는 실효적 요구에도 기인함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죽장과 삭장을 구별하였음은 「大圓地方」이라는 관념과 父天母地(부천모지)라는 관념이 연합하여 참최와 자최에 배당한 것인가 한다.
쪽수▶P10-5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苴杖은 苴色의 竹으로 製作한 杖이라고 보겠거니와, 特히 竹으로써 呪具를 삼는 것은 무슨 動因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듯건대 現今 毫灣에 있어도 父喪엔 竹을 用하고 母喪엔 旃瀆木을 用한다고 한다. 다만 孝杖의 原始的 形態를 呪具로 볼테이면 杖에 意味가 있을 것이요 그 枝의 種類를 擇한 것은 그 社會環境의 便宜 如何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中國이나 臺灣 또는 朝鮮에서는 이 竹이 適當하다고 본 까닭일 것이다 勿論 이 孝杖이란 것을 呪術宗敎的 意味로 본 것도 應當이려니와 또 當喪한 最近親으로서 哀痛이 極한 所致로 身體를 支持하는데 所用있다는틀:Tagpage 實效的 要求에도 起因함을 看過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야 竹杖과 削杖을 區別하였음은 「大圓地方」이라는 觀念과 交天母地라는 觀念이 聯合하야 斬衰와 齊衰에 配當한 것인가 한다.
이상으로써 當喪(당상) 즉시의 상장 일반에 관하여 개관하였거니와, 또 상기의 遷移(천이)에 따라 점점 상장이 변해 감을 간과하여서는 안될것이다. 대저 상기의 경과에 따라 차차로 상복에 귀환하게 됨은 자연한 경로일 것이다. 이제 그 變服(변복)의 경로를 보건대 朞年(기년) 이하는 일회로써 족한 것이나 삼년상인 경우에는, 小祥(소상)・大祥(대상)・禪(선)의 3기를 획하아 변이한다. 먼저 소상에는 練服(연복)으로 변하되 冠巾衰裳(관건쇠상)을 조금 精細(정세)한 練布(연포)로 제작한다. 또 부판・適(적)・琴(금)는 그대로 두지만 남자는 首絰(수질)을 去(거)하고 부인은 腰紅(요홍)을 거한다 그 대로 葛紅(갈혹, 속칭 총올치)을 사용한다. 喪禮備要(상례비요)에 「應服作者改吉服 然猶盡其月 不服金珠錦繍紅紫」라 함은 기년상에 1주년을 지나면 일절 素衣(소의)로 변복할 것을 말한 것이요 사례편람에 「按家禮 只云 陳練服而無某服不練之文 正服不練 雖是蹄說 旣練液中衣 不練衰裳 則上下表夷其不相稱 並練衰裳 恐得宜」 라 함은 삼년상엔 소상에 연복으로 변함을 말한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기를 당하여 봉집하지 않고 두었던 참쇠상을 봉집한다 하나, 또 다른 사람은 斬衰終三年不緝(참최종삼년불집)이라야 새로 봉집치 않은 것을 예의 원칙으로 삼는다. 士儀(사의)에 의하면
쪽수▶P11-2 以上으로써 當喪 卽時의 喪裝 一般에 關하야 槪觀하였거니와, 또 喪期의 遷移에 따라 漸々 喪裝이 變헤감을 看過하여서는 안될것이다. 大抵 喪期의 經過에 따라 次々로 常服에 歸還하게 됨은 自然한 經路일 것이다. 이제 그 變服의 經路를 보건대 朞年 以下는 一回로써 足한 것이나 三年喪인 境遇에는, 小祥・大祥・禪의 三期를 劃하아 變異한다. 먼저 小祥에는 練服으로變 하되 冠巾衰裳을 조곰 精細한 練布로 製作한다. 또 負板・適・琴는 그대로 두지만 男子는 首絰을 去하고 婦人은 腰紅을 去한다 그 代로 葛紅(俗稱총올치)을 使用한다. 喪禮備要에「應服作者改吉服 然猶盡其月 不服金珠錦繍紅紫」라 함은 朞年喪에 一週年을 지나면 一切 素衣로 變服할 것을 말한 것이요 四禮便覺에 「按家禮 只云 陳練服而無某服不練之文 正服不練 雖是蹄說 旣練液中衣 不練衰裳 則上下表夷其不相稱 並練衰裳 恐得宜」 라 함은 三年喪엔 小祥에 練服으로 變함을 말한 것이다. 或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期를 當하야 縫緝하지 않고 두엇든 斬衰裳을 縫緝한다 하나, 또 다른 사람은 斬衰終三年不緝이라야 새로 縫糾치 않은 것을 禮의 原則으로 삼는다. 士儀에 依하면
按喪服斬衰傳 斬不褂也 此必終三年 無變者也 若於小祥緝 不易以布帶 則與齊衰何別乎.(4) 라 하였으니, 斬不緝(참불집)이 원칙일 것이요 麻繩(마승)의 교대도 또한 그대로 지속할 것이라 한다. 다음에 대상엔 또한 연복으로 변하되 檀弓(단궁)에 「祥而縞」라 하였으니, 縞(호)는 즉 순백이요 복장은 일절 백색으로 된다. 사의에 의하면 白布笠(백포립)・布綱巾(포강건, 白綿絲爲領又以爲圏子(백면사위령우이위권자))・白布直領(백포직령)・白布帶叩麻靴(백포대고마화)를 용하고, 부인도 또한 白衣裳(백의상)을 착용한 것이라 하엿다. 마지막으로 례제(대상 후 약 1개월 내)엔 禪服(선복)으로 변하되 譲布笠(양포립)・讓布帶(양포대)・矗駿綱巾(촉준강건, 흑색)・擧布衫(거포삼)・熟麻靴(숙마화, 또는 皂靴(조화)) 등 일절 암색을 용하고 특히 부인은 옥색(담청색)을 용함이 사의의 규정이다. 譲(양)은 說文(설문)에 淺靑黑(천청흑)이라 하였고, 淺黑(천흑)이면 회색이 되고 淺靑(천청)이면 옥색이 되니 조선에 있어서 전자는 남자에 후자는 여자에 상용된 것이겠다. 禮記聞傳(예기문전)에 「禪而纖」이라 하고 그 주에 「黑經白緯」라 하였으니, 이것은 곧 器(기)과 흡사한 것이라고 보겠다. 사의에 「按東俗無黑經白緯者 只用麻布 淡黑染之以代用而惟笠與帶爲然矣」라 함에 보다시피 일반으로 조선에는 담흑 즉 회색이 상용복색이라 보겠고 필경 선에 이르러 吉服(길복) 즉 常服(상복)으로 변함을 아는 것이다. 또 한가지 상인의 외출용으로 조선 고유한 것은 소위 方笠(방립)이란 것이 있으니, 그 形大(형대)와 竹製(죽제)인 것임은 우리가 주지한 바어니와, 사의에 「按高麗之時代一言以上 皆着黑章方笠 吏胥着白方笠 聞其制古也 후세爲喪者之服也」라 함에 의하면 원래는 상복용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이것을 喪人用(상인용)으로 삼은 것은 복중의 상인이 몸소 죄인으로 자처하여 타인에 접함을 피하는 관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보겠다.
쪽수▶P11-3 按喪服斬衰傳 斬不褂也 此必終三年 無變者也 若於小祥緝 不易以布帶 則與齊衰何別乎.(4) 라 하였으니, 斬不緝이 原則일 것이요 麻繩의 絞帶도 또한 그대로 持續할 것이라 한다. 다음에 大祥엔 또한 練服으로 變하되 檀弓에 「祥而縞」라 하였으니, 続는 卽 純白이요 服裝은 一 切白色으로 된다. 士儀에 依하면 白布笠・布綱巾(白綿絲爲領又以爲圏子)・白布直領・白布帶叩麻靴를 用하고, 婦人도 또한 白衣裳을 着用한 것이라 하엿다. 마주막으로 禮祭(大祥後約一個月內)엔 禪服으로 變하되 譲布笠・讓布帶・矗駿綱巾(黑色)・擧布衫・熟麻靴(또는 皂靴) 等 一切 黯色틀:Tagpage을 用하고 特히 婦人은 玉色(淡靑色)을 用함이 士儀의 規定이다. 譲은 說文에 淺靑黑이라 하였고, 淺黑이면 灰色이 되고 淺靑이면 玉色이 되니 朝鮮에 있어서 前者는 男子에 後者는 女子에 常用된 것이겠다. 禮記間傳에 「禪而纖」이라 하고 그 註에 「黑經白緯」라 하였으니, 이것은 곧 器과 恰似한 것이라고 보겠다. 士儀에 「按東俗無黑經白緯者 只用麻布 淡黑染之以代用而惟笠與帶爲然矣」라 함에 보다싶이 一般으로 朝鮮에는 淡黑 即 灰色이 常用服色이라 보겠고 畢竟 禰에 이르러 吉服 即 常服으로 變함을 아는 것이다. 또 한가지 喪人의 外出用으로 朝鮮 固有한것은 所謂 方笠이란 것이 있으니, 그 形大와 竹製인 것임은 우리가 周知한 바어니와, 士儀에 「按高麗之時代一言以上 皆着黑章方笠 吏胥着白方笠 聞其制古也 後世爲喪者之服也」라 함에 依하면 元來는 喪服用이 아닌 것이 分明하고, 이것을 喪人用으로 삼은 것은 服中의 喪人이 몸소 罪人으로 自處하야 他人에 接함을 避하는 觀念에서 始作된 것이라고 보겠다.
이제 상기의 예론으로 보건대 소상 시에 비로소 백색복을 용한 것 같이 보이나 조선에 있어서 상중의 일상용복은 상의 당초부터 백색복임은 일반의 습속이요 만약 불행하여 상이 연속한 경우에는 백의가 상당히 장기한을 통하여 계속 됨은 우리의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인하여 조선 백의의 습속은 혼이 이 상복제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려 함도 무리가 아닌 일이라 하겠다. 즉 이에 관하여 통설에 의하면 明宗(명종) 을축 이후로 국휼이 연속하여 일반 인민으로 하여금 국상을 勵行(여행)케 하고 따라서 素衣(소의)를 착용케 함으로 인하여 누차의 백의 금제가 있었음에 불구하고 드디어 백의의 속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芝峯(지봉) 李捽光(이수광)의 설에 의하건대
쪽수▶P12-2 이제 上記의 禮論으로 보건대 小祥 時에 비로소 白色服을 用한 것 같이 보이나 朝鮮에 있어서 喪中의 日常用服은 喪의 當初부터 白色服임은 一般의 習俗이요 萬若 不幸하야 喪이 連續한 境遇에는 白衣가 相當히 長期限을 通하야 繼續 됨은 우리의 잘 아는 바이다. 그럼으로 因하야 朝鮮 白衣의 習俗은 혼이 이 喪服制에 基因한 것으로 說明하려 함도 無理가 아닌 일이라 하겠다. 卽 이에 關하야 通說에 依하면 明宗 乙丑 以後로 國恤이 連續하야 一般 人民으로 하여금 國喪을 勵行케 하고 따라서 素衣를 着用케 함으로 因하야 累次의 白衣禁制가 있었음에 不拘하고 드디어 白衣의 俗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芝峯 李捽光의 說에 依하건대
東方之人 雖曰好着冃衣 然有禁制 故先王朝猶有白衣禁亂 士人無識者出入亦穿紅衣直領 余幼時及見之 蓋嘉靖乙丑以後 累經國恤 乃着素衣 遂之風俗今則紅直領絕無 而擧國皆衣素 華人笑之(5)
쪽수▶P12-3 東方之人 雖曰好着冃衣 然有禁制 故先王朝猶有白衣禁亂 士人無識者出入亦穿紅衣直領 余幼時及見之 蓋嘉靖乙丑以後 累經國恤 乃着素衣 遂之風俗今則紅直領絕無 而擧國皆衣素 華人笑之(5)
라 하였고, 또 이와 같은 의견으로 文獻備考(문헌비고)에
쪽수▶P13-1 라 하엿고, 또 이와 가튼 意見으로 文獻備考에
肅宗十七年 申白衣之禁 國法元有禁白衣之制 自明宗乙丑以後 累經國恤 仍着素衣 此爲華人听笑.(6)
쪽수▶P13-2 肅宗十七年 申白衣之禁 國法元有禁白衣之制 自明宗乙丑以後 累經國恤 仍着素衣 此爲華人听笑.(6)
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설혹 명종 을축 이래 국상의 계속으로 인하여 소의가 장려되었다 할지라도 벌서 그 이전에 백의의 속이 널리 있었다는 것을 명종 을축 이전의 백의 금제의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經國大典(경국대전)의 刑典(형전) 禁條(금조)에
쪽수▶P13-3 라고 傳하였다. 그러나 設或 明宗 乙丑 以來 國喪의 繼續으로 因하야 素衣가 獎勵되였다 할지라도 벌서 그 以前에 白衣의 俗이 널리 있었다는 것을 明宗 乙丑 以前의 白衣禁制의 事實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經國大典의 刑典禁條에
大小人員用紅衣白色表衣, 白笠紅粘者 酒器外金銀 靑畫白磁器者
쪽수▶P13-4 大小人員用紅衣白色表衣, 白笠紅粘者 酒器外金銀 靑畫白磁器者
라 하였고 그 주에 「正兵庶人白色衣勿禁」이라 한 것을 보면 이조의 초기에도 백의의 속이 一 반적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이 백의의 금제가 국가의 법령으로서 반포하게 되었던가를 살피건대 복색으로써 관민상하의 별을 분명히 하자는 데 근거한 것 같다. 일찍 鄭道傳(정도전)이 上書(상서)로써 복색을 통제하자는데 비롯하여 太祖(태조) 무인 7년 6월 계유에
쪽수▶P13-5 라 하였고 그 註에 「正兵庶人白色衣勿禁」이라 한 것을 보면 李朝의 初期에도 白衣의 俗이 一 般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이 白衣의 禁制가 國家의 法令으로서 頒布하게 되였던가를 살피건대 服色으로써 官民上下의 別을 分明히 하자는 데 根據한 것 같다. 일즉 鄭道傳이 上書로써 服色을 統制하자는데 비롯하야 太祖 戊寅 七年 六月 登酉에
憲司上言 先王衣之制 尊卑有等 正間之色不可紊也 我國家上下服用 尙未有章 願自今進上服 用皆正色 凡男女黃色・灰色・航素之衣 一皆禁斷 上允之.(7)
쪽수▶P13-6 憲司上言 先王衣之制 尊卑有等 正間之色不可紊也 我國家上下服用 尙未有章 願自今進上服 用皆正色 凡男女黃色・灰色・航素之衣 一皆禁斷 上允之.(7)
라 한 것이 그 발단인 듯하고 또 그 이면에는 민간의 의복이 사치에 흐름이 있을 것을 금단하려는 의사도 있었을 것이니 부녀의 복제에 黑羅帽(흑라모)・由箱裙(유상군) 등을 금지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어 世祖(세조) 병자 2년 3월 병신에 集賢殿直提學(집현전직제학) 梁誠之(양성지)의 上疏(상소)에
쪽수▶P13-7 라 한 것이 그 發端인 듯하고 또 그 裡面에는 民間의 衣服이 奢侈에 흐름이 있을 것을 禁斷하려는 意思도 있었을 것이니 婦女의 服制에 黑羅帽・由箱裙 等을 禁止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어 世祖 丙子 二年 三月 丙申에 集賢殿直提學 梁誠之의 上疏에
一定服色 盖服色之定 所以辨上下 一風俗不可不嚴也 元人尙白 大明尙黑 以至日本尙靑 皆有一定之制焉 吾東方朝冠公服 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 任用雜色甚爲鄙俚 乞依公服制度 堂上官以上爲一色 六品以上爲一色 流品員成衆官 衣冠子弟爲一色 諸衛軍士爲一色 京外良人史胥爲一色 京外良吏胥爲一色 公私賤口工匠爲一色 以此依品漸次穿着 或締用一色 以齊國俗.(8)
쪽수▶P13-8 一定服色 盖服色之定 所以辨上下 一風俗不可不嚴也 元人尙白 大明尙黑 以至日本尙靑 皆有一定之制焉 吾東方朝冠公服 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 任用雜色甚爲鄙俚 乞依公服制度 堂上官以上爲一色 六品以上爲一色 流品員成衆틀:Tagpage官 衣冠子弟爲一色 諸衛軍士爲一色 京外良人史胥爲一色 京外良吏胥爲一色 公私賤口工匠爲一色 以此依品漸次穿着 或締用一色 以齊國俗.(8)
이라 하였으니, 복색 제정을 일층 더 철저히 하여 계급의 표시를 분명히 하자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의의 속은 여전히 존속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어찌 그리도 강인한 힘으로써 백의의 속이 존속하였느냐 하면 기왕 이졸광의 설과 같이 명종 을축 이후의 국휼로 인한 것이라고도 하겠거니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벌서 고려시대에도 백의의 속이 일반적이였던 것을 보아서 알 것이요 또한 고려 말엽에 五行圖讖(오행도참)사상으로써 백의의 금제가 있었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즉 忠烈王(충렬왕) 원년 6월에 大司局(대사국)의 상언이 있었으니
쪽수▶P14-2 이라 하였으니, 服色制定을 一層 더 徹底히 하야 階級의 表示를 分明히 하자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白衣의 俗은 如前히 存續한 것은 事實이다. 그러면 어찌 그리도 强靱한 힘으로써 白衣의 俗이 存續하였느냐 하면 己往 李捽光의 說과 같이 明宗 乙丑 以後의 國恤로 因한 것이라고도 하겠거니와, 그보다 더 根源的인 原因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벌서 高麗時代에도 白衣의 俗이 一般的이였든 것을 보아서 알 것이요 또한 高麗 末葉에 五行圖讖思想으로써 白衣의 禁制가 있었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即 忠烈王 元年 六月에 大司局의 上言이 있었으니
大司局言 東方木位 色當尙靑而白者金之色也 國人自着戎服 多視以白紆衣 木制於金之象也 請禁白色服從之
쪽수▶P14-3 大司局言 東方木位 色當尙靑而白者金之色也 國人自着戎服 多視以白紆衣 木制於金之象也 請禁白色服從之
라 함이 그것이다. 물론 이 오행도참사상으로서의 설명은 미신에 불과한 것일 것이나 그것은 고려 민간의 심리를 포착하기에 족한 신념이었던 것이요, 또 그 반면에는 백의의 속이 일반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또 고려 이전에 소급하여 삼국시대로 보건대 舊唐書(구당서)에 신라의 풍속을 말하되
쪽수▶P14-4 라 함이 그것이다. 勿論 이 五行圖讖思想으로서의 說明은 迷信에 不過한 것일 것이나 그것은 高麗 民間의 心理를 捕捉하기에 足한 信念이었든 것이요, 또 그 反面에는 白衣의 俗이 一般的이였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또 高麗 以前에 遡及하야 三國時代로 보건대 舊唐書에 新羅의 風俗을 말하되
其風俗刑法衣服與高一句麗百濟略同 而朝服尙白.(10)
쪽수▶P14-5 其風俗刑法衣服與高一句麗百濟略同 而朝服尙白.(10)
이라 하고, 고구려의 속을 말하되
쪽수▶P14-6 이라 하고, 高句麗의 俗을 말하되
衣裳服飾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斷.(11)
쪽수▶P14-7 衣裳服飾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斷.(11)
이라 하였으니, 그 기록이 중국인의 관찰에 의한 것이요, 또한 간단한 것이나마, 대개 그 일반을 窺知(규지)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보건대 조선 민족은 상고 시대로부터 尙白(상백)의 속을 이루었던 것이요, 그 연원이 구원한 일인 만큼 명종 을축 이후 국휼에 기인한다는 이수광의 설을 그대로 수긍할 수 없음은 이미 城大(성대)교수 烏山喜一(오산희일) 씨의 설파함과 갈다. 그러나 한번 더 돌이켜 본다면 본래가 백의의 속으로 律續(율속)하던 중 일층 이것을 深厚(심후)하게 되고 다시 변개 할 수 없게 된 것은 역대의 국휼로 인한 국상보다도 오히려 민간의 예속이 점차로 일반화하여 상복의 제도가 勵行(여행)하게 됨에 따라 복중의 백의가 불식 중 통상용으로 되었다는 것이 그 副因(부인)으로서 고려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염색술이 발달되지 못하고 色衣(색의)를 용이히 求調(구조)할 수 없을만큰 경제적 조건이 불허한 것도 고려할 것이려니와, 상중에 있는 복인의 불생산적이요 불사교적인 생활형태에서 자연히 발생된 습속이 전통적인 백의의 속을 일층 더 강인하게 존속케 한 것이라고 볼만한 일이다.
쪽수▶P14-8 이라 하였으니, 그 記錄이 中國人의 觀察에 依한 것이요, 또한 簡短한 것이나마, 大槪 그 一般을 窺知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가티 보건대 朝鮮 民族은 上古 時代로 부터 尙白의 俗을 이루었든 것이요, 그 淵源이 久遠한 일인 만큼 明宗 乙丑 以틀:Tagpage後 國恤에 基因한다는 李眸光의 說을 그대로 首肯할 수 없음은 이미 城大敎授 烏山喜一 氏의 說破함과 갈다. 그러나 한번 더 도리켜 본다면 本來가 白衣의 俗으로 律續하던 中 一層 이것을 深厚하게 되고 다시 戀改 할 수 없게 된 것은 歷代의 國恤로 因한 國喪보다도 오히려民間의 禮俗이 漸次로 一般化하야 喪服의 制度가 勵行하게 됨에 따라 服中의 白衣가 不識中 通堂用으로 되었다는 것이 그 副因으로서 老慮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勿論 그 裡面에는 染色術이 發達되지 못하고 色衣를 容易히 求調할 수 없을만큰 經濟的 條件이 不許한 것도 考慮할 것이려니와, 喪中에 있는 服人의 不生產的이요 不社交的인 生活形態에서 自然히 發生된 習俗이 傳統的인 白衣의 俗을 一層 더 強靱하게 存續케 한 것이라고 볼만한 일이다.
















본문3: 3


상복 기한은 그 등급적 차이가 상장과 함께 오복제도의 기본 요소를 이룸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갈거니와, 이제 등급을 말하건대 3년 1년 9월 7월 5월 3월의 6종이 있다 하겠다.
쪽수▶P16-1喪服期限은 그 等級的 差異가 喪裝과 함께 五服制度의 基本要素를 일움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갈거니와, 이제 等級을 말하건대 三年 一年 九月 七月 五月 三月의 六種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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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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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상기의 최단한 것은 3월이요 最長한 것은 3년인대, 이 3년이란 것은 만3년이 아니고 실은 만2개년에 해당한 것이다. 의례 士虞篇(사우편)에
쪽수▶P16-3 即 喪期의 最短한 것은 三月이요 最長한 것은 三年인대, 이 三年이란 것은 滿三年이 아니고 實은 滞二箇年에 該當한 것이다. 儀禮 士虞篇에
期而小祥 又期而大祥 中尤而禪 是月也占祭 猶未配.
쪽수▶P16-4 期而小祥 又期而大祥 中尤而禪 是月也占祭 猶未配.
라 함은 이 삼년상기를 말한 것인데, 정현의 주에 의하면
쪽수▶P16-5 라 함은 이 三年喪期를 말한 것인대, 鄭玄의 註에 依하면
中猶間也 禪祭名也 與大祥間一月 自我至此二十七月.
쪽수▶P17-1 中猶間也 禪祭名也 與大祥間一月 自我至此二十七月.
이라 하였으니, 즉 만27개월의 기간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나 이 27월이라는 것도 禮論家(예ᄚᅩᆫ가)에 의하여서는 2설을 달리한 바 있으나, 王肅(왕숙)은 의례 사우편에 있는바 『中月而禪』이라는 것을 月中而禪(월중이선)이라고 해석하였으니, 이것을 정현의 설에 비하면 1개월이 감소하게 된 것이요, 가례에는 정현의 설에 從(종)하여 있으나 朱子(주자) 자신은 그의 모 祝夫人(축부인)을 위하여 26월 상에 복하였고, 唐(당)의 王无感(왕무감) 淸(청)의 毛奇齡(모기령)은 3년을 3개년으로 해석하여 36월로 할 것이라 하였고, 순자 예론편과 白虎通喪服條(백호통상복조)에는 25월로 되어있는 등 그 설이 일정치 않다. 조선에서는 일반으로 가례에 종하여 27월 설을 취하여 왔다. 그리하여 이 27월에는 그 중에 윤월을 산입치 안키로 되여있다. 그러면 어떠한 근거에 의하여 윤월을 계산에 넣지 않은가에 대하여서는 예론가의 여러가지 설명이 있는 듯하나, 요컨대 상기를 규정 한도 이내로 단축시키지 않으려하는 孝哀(효애)의 정에 의한 것이라 한다. 일찍이 이조 仁祖(인조) 시대의 예론가 愚伏(우복)・鄭經世(정경세)의 주석에 「數閃未免 欲急之嫌」이라 함은 곧 이러한 점을 말한 것이겠다.
쪽수▶P17-2 이라 하였으니, 即 滿二十七箇月의 期間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나 이 二十七月이라는 것도 禮論家에 依하야서는 二說을 달리한 바 있으나, 王肅은 依禮 士虞篇에 있는바 『中月而禪』이라는 것을 月中而禪이라고 解釋하였으니, 이것을 鄭玄의 說에 比하면 一箇月이 減小하게 된 것이요, 家禮에는 鄭去의 說에 從하여 있으나 朱子 自身은 그의 母祝夫人을 爲하야 二十六月喪에 服하였고, 唐의 王无感 淸의 毛奇齡은 三年을 三箇年으로 解釋하야 三十六月로 할 것이라 하였고, 苟子 禮論篇과 白虎通喪服條에는 二十五月로 되어있는 等 그 說이 一定치 않다. 朝鮮에서는 一般으로 家禮에 從하야 二十七月 說을 取하여 왔다. 그리하야 이 二十七月에는 그 中에 閏月을 算入치 안키로 되여있다. 그러면 어떠한 根據에 依하야 閏月을 計算에 너치않은가에 對하야서는 禮論家의 여러가지 說明이 있는 듯하나, 要컨대 喪期를 規定限度 以內로 短縮식히지 않으려하는 孝哀의 情에 依한 것이라 한다. 일즉이 李朝 仁祖時代의 禮論家 愚伏・鄭經世의 註釋에 「數閃未免 欲急之嫌」이라 함은 곧 이러한 點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근거에 의하여 이 최고상인 3년상이란 것이 제정된 것이며, 또 이에 준하여 이하 오급의 기한이 그와 같이 제정되었는가를 예설에 의하여 살펴보자. 예기 三年問(삼년문)에
쪽수▶P17-3 그러면 果然 엇더한 根據에 依하야 이 最高喪인 三年喪이란 것이 制定된 것이며, 또 이에 準하야 以下五級의 期限이 그와 같이 制定되였는가를 禮說에 依하야 살펴보자. 禮記 三年問에
三年之喪何也 曰稱情而立文 因以飾群 別親疏貴賤之節 而弗可損益也 故曰無易之道也. (中略) 凡生犬地恐間者 有血氣之屬 必有知 有知之屬莫不知 愛其類. (中略) 故有血氣之屬者 莫知於人 故人於其親也 至死無窮 將山夫患邪淫之人與 則彼朝死而夕忘之 然而從之 則是曾禽獸之不若也 夫焉相與群居而不亂乎 將由夫修飾之君子與 則三年之喪 二十五月而畢 若厠之過隙 然而遂之 則工無窮也 故先王爵爲之 立中制節 童使足以成文理则釋之矣
쪽수▶P17-4 三年之喪何也 曰稱情而立文 因以飾群 別親疏貴賤之節 而弗可損益也 故曰無易之道也. (中略) 凡生犬地恐間者 有血氣之屬 必有知 有知之屬莫不知 愛其類. (中略) 故有血氣之屬者 莫知於人 故人於其親也 至死無窮 將山夫患邪淫之人與 則彼朝死而夕忘之 然而從之 則是曾禽獸之不若也 夫焉相與群居而不亂乎 將由夫修飾之君子與 則三年之喪 二十五月而畢 若厠之過隙 然而遂之 則工無窮也 故先王爵爲之 立中制節 童使足以成文理则釋之矣
라 하였으니, 3년의 상은 즉 애통의 정을 의식에 표시한 것이요, 만약 知情意(지정의)를 소유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哀情(애정)을 표시한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곧 금수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또한 그 애통의 정을 그대로 방임한다면 곧 그 생업을 다할 수 없게 될 것임으로써, 聖人(성인)이 이것을 참작하여 小人(소인)과 같이 경박함에 기우치지 않고 또한 君子(군자)와 같이 제한이 없이 애통함에 흐르지 않고 오직 그 중도를 취하여 제정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것은 순자의 예론편 중의 삼년상조에 있는 견해와 같거니와 삼년상이란 것을 중도로서 취한 것은 자연법칙에 준한 것이라 하는 것이다. 즉 동서 동편에 의하면
쪽수▶P18-1 라 하였으니, 三年의 喪은 即 哀痛의 情을 儀式에 表示한 것이요, 萬若 知情意를 所有한 社會的 存在로서의 人間이 그 哀情을 表示한 形式을 가추우지 못하면 곧 禽獸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또한 그 哀痛의 情을 그대로 放任한다면 곧 그 生業을 다할수 없게 될 것임으로써, 聖人이 이것을 參酌하야 小人과 가티 輕薄함에 기우치지 않고 또한 君子와 가티 制限이 없이 哀痛함에 흐르지 않고 오즉 그 中道를 取하야 制定한 것이라는 見解이다. 이것은 荀子의 禮論篇 中의 三年喪條에 잇는 見解와 같거니와 三年喪이란 것을 中道로서 取한것은 自然法則에 準한 것이라 하는 것이다. 卽 同書 同篇에 依하면
然則何以分之 曰至親以期斷 是何也 曰天地則己易矣 四時則徧矣 其在宇宙者 莫不更始也 故先王策以此象之也 然則三年何也 曰加隆焉 案使倍之 故再期也 由九月以下何也 曰案使不及也 故三年以爲隆 緦麻小功 以爲殺 期九月以爲間 上取蒙於天 下取法於地 中取於人 人所以群居和一之理盡矣.
쪽수▶P18-2 然則何以分之 曰至親以期斷 是何也 曰天地則己易矣 四時則徧矣 其在宇宙者 莫不更始也 故先王策以此象之也 然則三年何也 曰加隆焉 案使倍之 故再期也 由九月以下何也 曰案使不及也 故三年以爲隆 緦麻小功 以爲殺 期九月以爲間 上取蒙於天 下取法於地 中取於人 人所以群居和一之理盡矣.
라 하였으니, 즉 우주 자연의 근본 원리에 기준하여 사계 一循(일순)의 현상에 따라 만1년으로써 회생의 의미를 표시하고 특히 至親(지친)인 부모에 한하여는 이것을 배하여 再期(재기) 즉 2주년이라는 기한을 제정한 것이요 그 이하의 등분은 9개월을 중간으로 삼아 천지인 三才(삼재)의 理(이)에 거하여 제정한 것이라는 것이요 이와 같은 것이 오로지 선왕의 제정으로써 절대시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순자의 설 중에는 일종 유교철학자 류의 독단적 해석이 있을 뿐이요 그 원시적 의미를 찾을 수 없으나 그러나 이렇게 상기의 제정을 지극히 존엄한 것으로 말한 것은 예교의 본질적 일 요구에 의한 것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이 오등분에 배정된 친소의 관계는 원칙상 이와 같이 규정되어 있다.
쪽수▶P18-3 라 하였으니, 即 宇宙 自然의 根本 原理에 基準하야 四季 一循의 現象에 따라 滿一年으로써 回生의 意味를 表示하고 特히 至親인 父母에 限하여는 이것을 倍하야 再期 即 二周年이라는 期限을 制定한 것이요 그 以下의 等分은 九箇月을 中間으로 삼아 天地人 三才의 理에 據하야 制定한 것이라는 것이요 이와 같은 것이 오로지 先王의 制定으로써 絕對視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荀子의 說 中에는 一種 儒敎哲學者流의 獨斷的 解釋이 있을 뿐이요 그 原始的 意味를 차질수 없으나 그러나 이러케 喪期의 制定을 至極히 尊嚴한 것으로 말한 것은 禮敎의 本覧的 一 要求에 依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다. 그리하야 이 五等分에 配定된 親疎의 關係는 原則上 이와 같이 規定되여 있다.
3년, 부모.
쪽수▶P18-4 三年, 父母.
1년, 조부모・백숙부모・형제자매 등.
쪽수▶P18-5 一年, 祖父母・伯叔父母・兄弟姊妹等.
9월, 從(종)형제자매 등.
쪽수▶P18-6 九月, 從兄弟姊妹等.
5월, 從(종)조부모・再從(재종)형제 등.
쪽수▶P19-1 五月, 從祖父母・再從兄弟等.
3월, 族從(족종)증조부모・三從(삼종)형제 등.
쪽수▶P19-2 三月, 族曾祖父母・三從兄弟等.
이 원칙에 준하여 기타 가족과 친족에까지 등분이 제정되었을 것이요, 또한 시대에 변환에 따라 그 등분이 복잡 다기하게 변이되었을 것이다. 부모에 대하여서는 원래 다름이 없을 것이나, 모에 대하여는 부의 생존하는 경우에 한하여 기년상을 취하였으니, 예기 雜記(잡기)에 「碁之喪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禅」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것이다. 그러면 부의 생존하는 동안 모에 대하여 특히 기년제를 취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것은 다음에 설명하려 하나, 여하간 조부모 처・衆子(중자)・長子婦(장자부) 등의 近親(근친)도 역시 이 기년제를 취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처・중자・장자부는 卑屬(비속)의 지위에 있고 조부모는・존속의 지위에 있으므로 이 존비를 구별하기 위하여 존속인 조부모에 한하여 모에 대함과 같이 齊衰(자최) 기년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 두 경우를 구별하기 위하여 모의 경우에는 杖期(장기)라 하고 조부모의 경우에는 不杖期(불장기)라고 규정하였다. 조부모가 존속으로서 齊衰(자최)라 하니, 증조부모・고조부모도 또한 齊衰(자최)의 중에 든 것이나, 다만 조의 원근에 의하여 차별이 생기게 되어 결국 자최에는 여러 등급이 포함하게 된다. 즉
쪽수▶P19-3 이 原則에 準하야 其他 家族과 親族에까지 等分이 制定되였을 것이요, 또한 時代에 變還에 따라 그 等分이 複雜 多岐하게 變異되였을 것이다. 父母에 對하여서는 元來 다름이 없을 것이나, 母에 對하여는 父의 生存하는 境遇에 限하야 期年喪을 取하였으니, 禮記 雜記에 「碁之喪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禅」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것이다. 그러면 父의 生存하는 동안 母에 對하야 特히 期年制를 取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것은 다음에 說明하려 하나, 如何間 祖父母 妻・衆子・長子婦 等의 近親도 亦是 이 期年制를 取하게 된 섬이다. 그러나 妻・衆子・長子婦는 卑屬의 地位에 있고 祖父母는・尊屬의 地位에 있음으로 이 尊卑를 區別하기 爲하야 尊屬인 祖父母에 限하야 母에 對함과 가티 齊衰期年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 두 境遇를 區別하기 爲하야 母의 境遇에는 杖期라 하고 祖父母의 境遇에는 不杖期라고 規定하였다. 祖父母가 尊屬으로서 齊衰라 하니, 曾祖父母・高祖父母도 또한 齊衰의 中에 든 것이나, 다만 祖의 遠近에 依하야 差別이 생기게 되야 結局 齊衰에는 여러 等級이 包含하게 된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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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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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조)에 대하여서는 대개 이러한 차등이 원칙이나, 특히 그 예외로 父卒(부졸)한 경우에 자손은 증조부와 고조부에 대하여 斬衰(참최) 3년을 服期(복기)로 삼으니, 이것은 곧 嫡々(적적) 계승을 지극히 존중시한 까닭이다. 그리고 보면 期(기) 즉 1주년 이상의 상은 상기 전체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것이겠으니, 부모상을 제하고는 1주년의 상기를 요함은 本宗(본종)으로 보아 조부모・백숙부모・姑(고)・형제자매・衆子女(중자녀)・장자부・姪及姪女(질급질녀)・長孫(장손)・長曾孫(장증손)・長玄孫(장현손)・同居繼父(동거계부) 등이요 妻爲夫黨(처위부당)으로 보아 장자부・女及衆子(여급중자)・姪及姪女(질급질녀) 등이요 妾爲夫君族(첩위부군족)으로 보아 부모・女君(여군)・子(자) 등이요 出嫁女爲本宗(출가녀위본종)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부모급조부모) 등이요 人後者爲本生親(인후자위본생친)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부모급조부모) 등이니, 친족으로서는 가장 근친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쪽수▶P19-5 祖에 對하야서는 大槪 이러한 差等이 原則이나, 特히 그 例外로 父卒한 境遇에 子孫은 曾祖父와 高祖父에 對하야 斬▶P20-1衰三年을 服期로 삼으니, 이것은 곧 嫡々 繼承을 至極히 尊重視한 까닭이다. 그리고 보면 期即 一週年 以上의 喪은 喪期 全體로 보아 相當히 重要한 것이겠으니, 父母喪을 除하고는 一 週年의 喪期를 要함은 本宗으로 보아 祖父母・伯叔父母・姑・兄弟姊妹・衆子女・長子婦・姪及姪女・長孫・長曾孫・長玄孫・同居繼父 等이요 妻爲夫黨으로 보아 長子婦・女及 衆子・姪及姪女 等이요 妾爲夫君族으로 보아 父母・女君・子等이요 出嫁女爲本宗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요 人後者爲本生親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니, 親族으로서는 가장 近親關係에 있음을 알 수 잇는 것이다.
가례에 의하면 상인의 葬式(장식) 이후에 상중의 제례로서 7단계의 제사를 요한 것이니, 虞祭(우제)・卒哭(졸곡)・祖祭(조제)・小祥(소상)・大祥(대상)・禪祭(선제)・吉祭(길제)가 그것이요 길제로써 완전히 상기를 종료한다. 물론 이 7회의 제례가 모든 등급의 상 전반에 통용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상기의 복에까지 적용된 것이냐 함은 禮典(예전)에 명료한 규정이 없다. 원칙상으로 보아 소상은 期(기) 대상은 再期(재기)인 것이요 「爲父母・妻・長子禪疏 妻爲夫亦禪」이라는 규정이 있고 길제는 선제의 익일 吉辰(길진)을 卜(복)하여 행하되 是月(시월)에 時祭(시제)가 있으면 祭行(제행)치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 7회의 제사를 전부 요한 피복은 부모・조부모・처・長子妻爲夫(장자처위부)를 비롯하여 대개 기년 이상의 존속친에 及(급)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대개 이러한 政階(정계)의 제례는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일가? 우제는 葬後(장후) 최초의 제례인데 그 본의는 慰靈(위령)에 있을 것이요 사령의 처소 방위 시등의 관념이 招福(초복) 禳災(양재)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원시적 신앙에서 나온 것이겠다.(1) 그럼으로 장후 길진을 택하여 初虞(초우) 再虞(재우) 三虞(삼후)를 요하되 일차 이상은 반드시 魂帛(혼백)을 持來(지래)한 후 家中(가중)에서 祭行(제행)할 것이라 한다. 졸곡으로 말하면 장후 약 1개월 후에 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이 哭(곡)은 病人(병인)이 절명하자 「擧哀男女哭瓣無數」라 하여 哀哭慟哭(애곡통곡)함을 예의로 삼아 문공가례에도 「哭盡哀 乃代哭 不絕聲」이라 하여 「無時哭」이라 하여 哭婢(곡비)와 같은 기형적인 습속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이 哀哭(애곡)이란 것이 근친의 사별에 대한 자연 표현의 인간 哀情(애정)이거니와 장구한 시일의 관습은 오히려 野卑喧騷(야비훤소)에 흘러 현대의 식자로 하여금 懒忌(나기)의 감을 갖게 함에는 좀 더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가 되었다. 일찍이 雅亭(아정)・李德懋(이덕무)의 말에
쪽수▶P20-2 家禮에 依하면 喪人의 葬式 以後에 喪中의 祭禮로서 七段階의 祭祀를 要한 것이니, 虞祭・卒哭・祖祭・小祥・大祥・禪祭 吉祭가 그것이요 吉祭로써 完全히 喪期를 終了한다. 勿論 이七回의 祭禮가 모든 等級의 喪全般에 通用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喪期의 服에까지 適用된 것이냐 함은 禮典에 明瞭한 規定이 없다. 原則上으로 보아 小祥은 期 大祥은 再期인 것이요「爲父母・妻・長子禪疏 妻爲夫亦禪」이라는 規定이 있고 吉祭는 禪祭의 翌日 吉辰을 卜하야 行하되 是月에 時祭가 있으면 祭行치 않은 境遇가 있으니, 이 七回의 祭祀를 全部 要한 坡服은 父母・祖父母・妻・長子妻爲夫를 비롯하야 大槪 期年 以上의 尊屬親에 及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大槪 이러한 政階의 祭禮는 무슨 意味를 가진 것일가? 虞祭는 葬後 最初의 祭禮인데 그 本義는 慰靈에 있을 것이요 死靈의 處所 方位 時等의 觀念이 招福 禳災에 깊은 關係가 있다는 原始的 信仰에서 나온 것이겠다.(1) 그럼으로 葬後吉辰을 擇하야 初虞 再虞 三虞를 要하되 一次 以上은 반드시 魂帛을 持來한 後 家中에서 祭行할 것이라 한다. 卒哭으로 말하면 葬後 約 一箇月 後에 行한 것으로 되여있다. 元來 이 哭은 病人이 絕命하자 「擧哀男女哭瓣無數」라 하야 哀哭慟哭함을 禮儀로 삼어 文公家禮에도 「哭盡哀 乃代哭 不絕聲」이라 하여 「無時哭」이라 하야 哭婢와 같은 奇形的인 習俗을 이루게 되였다. 勿論 이 哀哭이란 것이 近親의 死別에 對한 自然表現의 人間哀▶P21-1情이거니와 長久한 時日의 慣習은 오히려 野卑喧騷에 흘러 現代의 識者로 하요금 懒忌의 感을 갓개 함에는 좀 더 깊이 省察하지 않으면 안될 問題가 되엿다. 일즉이 雅亭・李德懋의 言에
哭聲勿促欲喘也 勿緩欲欠也 勿太文而節也 勿太野而呼也 勿如吼如嘶 駭人聽間以招婦妾童孺之諛笑 東俗喪主哭音 連呼哀吿 外曾祖朴孝靖公曾曰 連呼二音 只出喉舌 自然問歇不如哀々 一音直出心 仲傷痛而無所泊也.(2)
쪽수▶P21-2 哭聲勿促欲喘也 勿緩欲欠也 勿太文而節也 勿太野而呼也 勿如吼如嘶 駭人聽間以招婦妾童孺之諛笑 東俗喪主哭音 連呼哀吿 外曾祖朴孝靖公曾曰 連呼二音 只出喉舌 自然問歇不如哀々 一音直出心 仲傷痛而無所泊也.(2)
라 하여 곡의 방법을 지시하였고 事神(사신)의 暫間(잠간)에는 일단 곡을 중지할 것으로 하고 부녀의 非禮(비례)를 酵戒(효계)하였다. 즉
쪽수▶P21-3 라 하야 哭의 方法을 指示하엿고 事神의 暫間에는 一段 哭을 中止할 것으로 하고 婦女의 非禮를 酵戒하였다. 即
凡忌祭進酌 闔門必止哭肅靜 欲其神乏煩也 婦人不識禮意當其時也 或冇不止哭者 雖使止之而位哭不己 豈事神之禮 類多此習改之可也.(3)
쪽수▶P21-4 凡忌祭進酌 闔門必止哭肅靜 欲其神乏煩也 婦人不識禮意當其時也 或冇不止哭者 雖使止之而位哭不己 豈事神之禮 類多此習改之可也.(3)
라 함은 適時(적시)의 곡을 필요로 한 것이니, 따라서 당연히 하여야 할 곡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또한 이것을 不孝不順(불효불순)이라 하여 「居喪婦女自取便安 朝夕哭二時上典 或不預者有之 孝順乏道亡矣」라 하였으니 결국 곡이란 것이 예의 불가피한 것을 功實(공실)히 설파함이다. 생각컨대 예의 기원과 본질에 관하여 비판적 식견을 갖지 못하고 오직 성인의 유제라 하여 무조건하고 신봉하던 예론가의 설명일만큼 별로히 아정의 견식을 오늘날 비난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초에 이 곡의 발생론적 기원을 찾아본다 하면 아마도 사령에 대한 금기의 殘跡(잔적)이라 하겠다. 대개 원시민족의 신앙으로서 花靈(화령)에 대하여 大聲叫號(대성규호)하며 혹은 산발하며-평시에 산발한 민족은 반대로 結髮(결발)하며 혹은 舞踊(무용)을 하는 등 여러가지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4) 즉 이러한 의식으로써 禳災拂禍(양재불화)의 신앙을 이루었던 것이니 예기 奔喪篇(장상편)에 의하면 「又哭盡哀」니 「哭成踊」이니 「括髮祖成踊」이니 「成踊盡哀」니 하는 등의 문구가 있음은 곧 이러한 원시적 형태의 예의화된 것인가 생각되는 것이다. 여하간 이 곡이 예의로서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무기한하고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니 따라서 적당한 시기를 정하여 곡을 撤(철)하되 이내로는 곡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오직 朝夕(조석)의 上食(상식)과 朔望(삭망)의 奠祀(전사)에 한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기로 말하면 장후 약 1개월을 원칙으로 삼는데 혹시 葬式(장식)이 수일을 요한 경우에는 더 遷延(천연)된 수도 있음은 陶庵(도암)・李繹(이역)의 말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있다.
쪽수▶P21-5 라 함은 適時의 哭을 必要로 한 것이니, 따라서 當然히 하여야 할 哭을 하지 않은 境遇에는 또한 이것을 不孝不順이라 하야 「居喪婦女自取便安 朝夕哭二時上典 或不預者有之 孝順乏道亡矣」라 하였으니 結局 哭이란 것이 禮의 不可避한 것을 功實히 說破함이다. 생각컨대 禮의 起原과 本質에 關하야 批判的 識見을 갓지 못하고 오즉 聖人의 遗制라 하야 無條件하고 信奉하든 禮論家의 說明일만큼 別로히 雅亭의 見識을 오늘날 非難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當初에 이 哭의 發生論的 起原을 차자본다 하면 아마도 死靈에 對한 禁忌의 殘跡이라 하겠다. 大槪 原始民族의 信仰으로서 花靈에 對하야 大聲叫號하며 或은 散髮하며-平時에 散髮한 民族은 反對로 結髮하며 或은 舞踊을 하는 等 여러가지 儀式이 있었든 것이다.(4) 即 이러한 儀式으로써 禳災拂禍의 信仰을 이루었든 것이니 禮記 奔喪篇에 依하면 「又哭盡哀」니 「哭成 踊」이니 「括髮祖成踊」이니 「成踊盡哀」니 하는 等의 文句가 있음은 곧 이러한 原始的 形態의 禮儀化된 것인가 생각되는 것이다. 如何間 이 哭이 禮儀로서 不可避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無期限하고 繼續할 수는 없는 일이니 따라서 適當한 時▶P22-1期를 定하야 哭을 撤하되 爾來로는 哭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오즉 朝夕의 上食과 朔望의 奠祀에 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야 그 時期로 말하면 葬後 約一箇月을 原則으로 삼는대 或時 葬式이 數日을 要한 境遇에는 더 遷延된 수도 있음은 陶庵・李繹의 말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있다.
近俗無貴賤 皆三月而葬 而古禮惟大夫三月 士則逾月 假令人死於晦間而葬於來旬前 則謂之逾月者苟也 若此者三月 而後當行卒哭 大抵所謂逾月者 必過三卜日可也.(5)
쪽수▶P22-2 近俗無貴賤 皆三月而葬 而古禮惟大夫三月 士則逾月 假令人死於晦間而葬於來旬前 則謂之逾月者苟也 若此者三月 而後當行卒哭 大抵所謂逾月者 必過三卜日可也.(5)
이 시기에는 아직 死人(사인)의 근친 간에는 음식과 거처에 금제가 있어 상주 및 형제는 疏食飲水 菜果不食庶化木枕의 규정이 있으니 그것은 곧 사령에 대한 금기의 관념이 심각한 까닭이다. 다만 成服(성복)의 때에 散祭(산제)하였던 복장의 부분을 일절 絞結(교결)할 것이라 하니 점차 평상복으로 변하는 階段(계단)을 표시한 것이겠다.
쪽수▶P22-3 이 時期에는 아직 死人의 近親間에는 飲食과 居處에 禁制가 있어 喪主 及 兄弟는 疏食飲水 菜果不食庶化木枕의 規定이 있으니 그것은 곧 死靈에 對한 禁忌의 觀念이 深刻한 까닭이다. 다만 成服의 時에 散祭하엿든 服裝의 部分을 一切 絞結할 것이라 하니 漸次 平常服으로 變하는 階段을 表示한 것이겠다.
祔祭(부제)는 졸곡의 익일에 新神主(신신주)를 祠堂(사당)에 奉祝(봉축)하여 祖靈(조령)에 合附(합부)하는 예임은 물론이어니와 특히 신주 합부에 관하여 일고할 것은 곧 昭穆(소목)의 序(서)로 배치하는 점이다. 이 소목의 序置(서치)로써 제신주는 一堂(일당)에 群坐(군좌)하여 祐祭(우제)의 경우에는 그대로 제행하게 된다. 中庸(중용)에
쪽수▶P22-4 祔祭는 卒哭의 翌日에 新神主틀 祠堂에 奉祝하야 祖靈에 合浦하는 禮임은 勿論이어니와 特히 神主合祔에 關하야 一考할 것은곧 昭穆의 序로 配置하는 點이다. 이 昭穆의 序置로써 諸神主는 一堂에 群坐하야 祐祭의 境遇에는 그대로 祭行하게 된다. 中庸에
凡廟主在本阙之室中 皆束向 及其怡於奴範之室中 則惟太祖東向自如而爲最尊之位 群廟之位入乎此者 皆列於北牖而南向 群廟之入乎此者 皆列於南牖而北向 南向者取其向明 故謂之昭 北向者取其深遠 故謂之穆 葢群廟之列 則左爲昭而右爲穆 祐祭位則北爲昭而南爲穆也.
쪽수▶P22-5 凡廟主在本阙之室中 皆束向 及其怡於奴範之室中 則惟太祖東向自如而爲最尊之位 群廟之位入乎此者 皆列於北牖而南向 群廟之入乎此者 皆列於南牖而北向 南向者取其向明 故謂之昭 北向者取其深遠 故謂之穆 葢群廟之列 則左爲昭而右爲穆 祐祭位則北爲昭而南爲穆也.
라 함은 소목 일반을 서술한 것이요 특히 朝制(조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종래로 이 소목의 原義(원의)를 여기에 보다시피 대개는 南明北暗(남명북암)에 인한 것이라 하고 혹은 이 명암의 관계에 음양의 사상을 결합하여 「昭居左爲陽 穆居右爲陰一(정현, 예기집설 권30)이라 하고, 혹은 「葢取子々孫々 引無極之誼 昭穆字當用紹繆 繆猶績也一(毛際盛(모제성), 說文述誼(설문술의))라 하여 소목은 본래 紹繆(소무)의 변한 것으로 子々孫々 繼承無極함을 말한 것이라 하는 등, 그 설이 다양하다. 혹자는 또 이것을 父昭子穆(부소자목)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은 전연 인식 부족에서 나온 일 吳見(오견)이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러한 설명의 가부는 고사하고 여하간 神位(신위)의 배치는 부자의 연속세대를 취하지 않고 祖孫(조손)의 隔世同祉(격세동지)를 취하여 이것을 通則(통칙)으로 삼아 왔는 것이니 따라서 旁親(방친)을 雄班(웅반)으로서 합사한 경우에도 「伯叔祖父母褶于高祖 伯叔父母褂于曾祖 妻若兄弟若 兄弟之妻樹于祖 子姪(子婦・姪婦同)祔于父 皆西向」이라 하여, 그 序立(서립)을 정연히 한다. 이와 같이 群(군)신주의 순서를 존중히 함은 요컨대 長幼親疎(장유친소)의 질서를 엄수하여 제사에 그 倫序(윤서)의 관계를 명백히 하려는 데 있을 것이니 예기의 祭統(제통)에
쪽수▶P22-6 라 함은 昭穆 一般을 叙述한 것이요 特히 朝制와 密接한 關係를 가진 것으로 說明한 것이다. 從來로 이 昭穆의 原義를 여기에 보다싶이 大漑는 南明北暗에 因한 것이라 하고 或은 이 明暗의 關係에 陰場의 思想을 結合하야 「昭居左爲陽 穆居▶P23-1右爲陰一(鄭玄, 禮記集說 卷三十)이라 하고, 或은 「葢取子々孫々 引無極之誼 昭穆字當用紹繆 繆猶績也一(毛際盛, 說文述誼)라 하야 昭穆은 本來 紹繆의 變한 것으로 子々孫々 繼承無極함을 말한 것이라하는 等, 그 說이 多様하다. 或者는 또 이것을 父昭子穆으로 생각하는 境遇도있으나 이것은 全然 認識 不足에서 나온 一 吳見이니 말할 것도 업거니와 이러한 說明의 可否는 姑捨하고 如何間 神位의 配置는 父子의 連續世代를 取하지 않고 祖孫의 隔世同祉를 取하야 이것을 通則으로 삼어 왓는 것이니 따라서 旁親을 雄班으로서 合祀한 境遇에도 「伯叔祖父母褶于高祖 伯叔父母褂于曾祖 妻若兄弟若 兄弟之妻樹于祖 子姪(子婦・姪婦同)祔于父 皆西向」이라 하야, 그 序立을 整然히 한다. 이와 같이 群神主의 順序를 尊重히 함은 要컨대 長幼親疎의 秩序를 嚴守하야 祭祀에 그 倫序의 關係를 明白히 하려는 데 있을 것이니 禮記의 祭統에
夫祭有昭穆 昭穆者所以別父子長幼親疎之序而無亂也 是故有事於大廟則群昭群穆咸在 而不失其倫此之謂親疎之殺也.
쪽수▶P23-2 夫祭有昭穆 昭穆者所以別父子長幼親疎之序而無亂也 是故有事於大廟則群昭群穆咸在 而不失其倫此之謂親疎之殺也.
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이 윤서를 요구하는데 어찌하여 특히 隔世同祔(격세동부)의 방법을 취하였을까에 대하여는 그 시원적 의의가 어디있는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하여 近者(근자)에 廣島文理科大學(광도문리과대학) 교수 加藤常賢(가등상현) 씨가 해박한 고증으로써 자미있는 연구를 이룬 바 있다. 가등 교수는 현존 미개 민족간에 흔히 보이는 婚姻階級(혼인계급, marriage-class)의 습속을 참고하여 소목의 기원을 곧 여기에 구하려는 것이다. 혼인계급이라는 것은 즉 원시민족의 토-템 조직에 의하여 族外婚(족외혼, exogamy)이 엄연하게 존재한 것인데 이러한 혼인관계로 인하여 生子(생자)하게 되는 경우에는 남계 또는 여계의 간접 계승이 되어 결국 계급명이 간접 계승으로 됨으로 여기에 현존 문화사회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혼인관계와 사회조직은 일찍히 Frazer가 「오—스트라리아 민족 간에 상세한 연구를 한 것은 이미 학계에서 널리 아는 바이다.(7) 이제 이러한 결혼계급은 곧 隔世的(격세적) 同次(동차) 계급 즉 자손의 同班階級(동반계급)이 되고 부자의 異班階級(이반계급)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격세동반인 소목제도의 기원이라는 것이요 결혼계급의 제도는 「오—스트라리아」와 가튼 저급 민족에 현존한 것을 보면 이 결혼계급 제도를 기원으로 하는 소목 제도도 원시시대에 연원한 것이리라는 것이 가등 교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근본적인 선결 문제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점에 있어서 운명적인 오류을 범하였으니 따라서 그 설명에 견강부회의 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先次(선차)로 원시적 사회조직인 토-템 신앙과 족외혼에 의한 이른바 결혼계급 제도란 것이 고대 지나민족 간에도 엄연히 존재하였다는 증명을 요하는 것이니 이 점에 대하여 형식논리학 상의 선결문제 요구(Peritio Principle)의 오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스트라리아」 민족에 있는 결혼조직이 모든 원시 민족에 다 존재하였다고 할 수 없는 일이요-「아에리칸인디만」에는 전연 이러한 결혼계급의 조직이 현존치 않고 「메라네시아」에도 그다지 정연하지 않다-또한 중국의 원시사회에 그러한 조직이 엄연하였다는 정설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목제도의 기원을 엉뚱한 현존 미개 민족의 특수 혼인관계에 찾고 따라서 소목의 제도를 그대로 중국의 고대 원시시대에 연원함이라 하니, 이것은 또한 가족제도의 발전사 상으로 보아 수긍할 수 없는 일이다. 대저 소목제도는 대가족 제도의 발전 과정에서 가족성원의 倫序(윤서)에 대한 관념이 和當(화당)히 발달된 문화기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윤서와 도의 관념에 기인한 소목제도라는 것을 원시 가족시대에 연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이 소목의 제도를 어떠한 유래에 의한 것이라고 볼 것인가 함에 대하여 필자는 아주 쉽게 이와 같이 생각하려는 것이다 즉 그것은 현실적인 대가족 생활 상에 요구된 윤서 관념의 연장이라고. 본래 대가족의 생활에는 그 성원의 통제가 지극히 필요한 것이요 그러기 위하여 가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가족성원의 복종과 질서 유지가 要求되는 것이다. 父親(부친)을 嚴君(엄군)이라 하여 절대 존엄시하는 것이 子(자)의 의무로 되어있는 반면에 부가 생존 중에 자기의 자식은 가장인 부의 손으로서 가족성원이 되고 따라서 祖孫(조손)간에는 특별한 친밀이 생겨 부자의 간에는 일상 근접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조손의 간에는 지극 밀접 친근한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니 이러한 점은 부자 간에 식탁을 갈이 못하고 유희 오락을 같이 더불어하지 못 함에 대하여 조손 간에는 식탁을 같이하고 유희 오락을 같이 더불어하는 습속을 보아 잘 알만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현실생활의 습속과 관념이 그대로 사후의 神主位(신주위)간에 연장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23-3 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이 倫序를 要求하는대 어찌하야 特히 隔世同祔의 方法을 取하였을가에 對하여는 그 始原的 意義가 어디잇는가를 考察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關하야 近者에 廣島女理舛大學敎授 加藤常賢 氏가 該博한 考證으로써 滋味잇는 硏究를 이룬 바 잇다. 加藤 教授는 現存未開民族間에 흔이 보이는 婚姻階級(marriage-class)의 習俗을 參考하야 昭穆의 起原을 곧 여기에 求하려는 것이다. 婚姻階級이라는 것은 即 原始民族의 토-템 組織에 依하야 族外婚(exogamy)이 嚴然하게 存在한 것인대 이러한 婚姻關係로 因하야 生乎하게 되는 境遇에는 男系 또는 女系의 間接 繼承이 되야結局 階級名이 間接繼承으로 됨으로 여기에 現存 文化社會에는 볼 수 업는 獨特한 形態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特殊한 婚姻關係와 社會組織은 일즉히 Frazer가 「오—스트라리아 民族 間에 祥細한 硏究를 한 것은 이미 學界에서 널리 아는 바이다.(7) 이제 이러한 結婚階級은 곧 隔世的同次階級 即 子孫의 同班階級이 되고 父子의 異▶P24班階級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隔世同班인 昭穆制度의 起原이라는 것이요 結婚階級의 制度는 「오—스트라리아」와 가튼 低級民族에 現存한 것을 보면 이 結婚階級 制度를 起原으로하는 昭穆 制度도 原始時代에 淵源한 것이리라는 것이 加藤 敎授의 見解이다. 그러나 이說明에는 根本的인 先決 問題가 아즉 證明되지 않은 點에 있어서 運命的인 誤謬을 犯하였으니 따라서 그 說明에 牽强附會의 點이 없지 않은 것이다. 先次로 原始的 社會組織인 토-템 信仰과 族外婚에 依한 이른바 結婚階級 制度란 것이 古代 支那民族 間에도 嚴然히 存在하였다는 證明을 要하는 것이니 이 點에 對하야 形式論理學 上의 先決問題 要求(Peritio Principle)의 誤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스트라리아」 民族에 있는 結婚組織이 모든 原始 民族에 다 存在하엿다고 할 수 없는 일이요-「아에리칸인디만」에는 全然 이러한 結婚階級의 組織이 現存치 않고 「메라네시아」에도 그다지 整然하지 않다-또한 中國의 原始社會에 그러한 組織이 嚴然하였다는 定說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不拘하고 昭穆制度의 起原을 엉뚱한 現存 未開民族의 特殊 婚姻關係에 찾고 따라서 昭穆의 制度를 그대로 中國의 古代 原始時代에 淵源함이라 하니, 이것은 또한 家族制度의 發展史上으로 보아 首旨할 수 없는 일이다. 大抵 昭穆制度는 大家族 制度의 發展過程에서 家族成員의 倫序에 對한 觀念이 和當히 發達된 文化期의 所序이라고 보는 것이 올치 않을가 한다. 따라서 倫序와 道義 觀念에 基因한 昭穆制度라는 것을 原始 家族時代에 淵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이 昭穆의 制度를 어떠한 由來에 依한 것이라고 볼 것인가 함에 對하야 筆者는 아주 쉽게 이와 가티 생각하려는 것이다 即 그것은 現實的인 大家族 生活上에 要求된 倫序觀念의 延長이라고. 本來 大家族의 生活에는 그 成員의 統制가 至極히 必要한 것이요 그러기爲하야 家長의 權限을 强化하는 同時에 家族成員의 服從과 秩序 維持가 要求되는 것이다 父親을 嚴君이라 하야 絕對 尊嚴視하는 것이 子의 義務로 되야 있는 反面에 父가 生存 中에 白己의 子息은 家▶P25-1長인 父의 孫으로서 家族成員이 되고 따라서 祖孫間에는 特別한 親密이 생겨 父子의 間에는 日常 近接의 機會를 갖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祖孫의 間에는 至極 密接 親近한 關係를 이루게된 것이니 이러한 點은 父子 間에 食卓을 갈이 못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지 못 함에 對하야 祖孫間에는 食卓을 같이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는 習俗을 보아 잘 알만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現實生活의 習俗과 觀念이 그대로 死後의 神主位間에 延長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自然스러운 婦結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祔祭(부제)에 관련하여 소목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길게 되었으나 喪期(상기)의 변천에 따라 단계적으로 행하는 제사-祭禮(제례)라 하기보다 오히려 喪禮(상례)의 순서에 관하여 다시 본문제로 들어가 보건대 졸곡과 부제 후에는 소상, 대상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우리의 주지한 바이니 이제 상세한 고찰을 생략하거니와, 선제・길제(원래 길제는 가례에 없는 것인데 특히 상례비요에는 길례를 채용하여 선제 외에 또 규정한 것인 듯하다)를 맞추기까지 점차 평상복으로 변천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에 관하여 栗谷(율곡)의 擊蒙要訣(격몽요결) 居喪儀條(거상의조)에 이러한 과정을 설명한 바 있으니
쪽수▶P25-2 祔祭에 關聯하야 昭穆에 對한 說明이 너무 길게 되였으나 喪期의 變遷에 따라 段階的으로 行하는 祭祀-祭禮라 하기보다 오히려 喪禮의 順序에 關하야 다시 本問題로 들어가 보건대 卒哭과 祔祭 後에는 小祥大祥이 가장 重要한 것임은 우리의 周知한 바이니 이제 詳細한 考察을省略하거니와, 禪祭・吉祭(元來 吉祭는 家禮에 없는 것인데 特히 喪禮備要에는 吉禮를 採用하야 禪祭 外에 또 規定한 것인 듯 하다)를 맛추기까지 漸次 平當服으로 變遷한 것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다. 이에 關하야 栗谷의 擊蒙要訣 居喪儀條에 이러한 過程을 說明한 바 있으니
凡三年之喪 古禮則廢祭 而朱子曰 古人居喪 衰麻之衣 不釋於身 哭泣之聲 不絕於口 其出入居處衣服飮食 皆與平日 絕異故 宗廟之祭雖廢 而幽明之間兩無憾焉 今人居喪與古人異 而廢此一事 恐有所未安 朱子之言 如此故 未葬前 準禮廢祭 而卒哭後則 於四時節祀及忌祭墓祭 使服輕者行薦而饌品減於常時 只一獻可也 朱予喪中 以墨衰薦于廟 今人以俗制服當墨衰 若無服輕者則喪人恐可以俗制喪服行祀 朞大功 則葬後 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未葬前時祭可廢 忌祭墓祭略行如上儀 總小功則成服前廢祭 雖忌日亦下可行 成服後 則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服中時祀 當以玄冠素服黑帶行之.
쪽수▶P25-3 凡三年之喪 古禮則廢祭 而朱子曰 古人居喪 衰麻之衣 不釋於身 哭泣之聲 不絕於口 其出入居處衣服飮食 皆與平日 絕異故 宗廟之祭雖廢 而幽明之間兩無憾焉 今人居喪與古人異 而廢此一事 恐有所未安 朱子之言 如此故 未葬前 準禮廢祭 而卒哭後則 於四時節祀及忌祭墓祭 使服輕者行薦而饌品減於常時 只一獻可也 朱予喪中 以墨衰薦于廟 今人以俗制服當墨衰 若無服輕者則喪人恐可以俗制喪服行祀 朞大功 則葬後 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未葬前時祭可廢 忌祭墓祭略行如上儀 總小功則成服前廢祭 雖忌日亦下可行 成服後 則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服中時祀 當以玄冠素服黑帶行之.
라 함이 그 일단이다.
쪽수▶P26-1 라 함이 그 一端이다.
상중의 기한에는 복장의 제정이 중요함은 물론이어니와, 또 여러 가지 금제가 있으니 자신 및 부모의 無朞(무기) 이상 喪(상)이라야 冠婚(관혼)의 儀(의)를 이룰 수 있다 하여 혼인관계의 필수조건이 되어있고 居喪(거상) 不樂(불악)이라 하여 가무 환락을 금하고 음식・거처・언어・대인관계에 있어 금지의 조건이 다다하다 禮記間傳(예기간전)에
쪽수▶P26-2 喪中의 期限에는 服裝의 制定이 重要함은 勿論이어니와, 또 여러 가지 禁制가 있으니 自身 及 父母의 無朞以上喪이라야 冠婚의 儀를 이룰 수 있다 하야 婚姻關係의 必須條件이 되어있고 居喪 不樂이라 하야 歌舞議樂을 禁하고 飮食・居處・言語・對人關係에 있어 禁止의 條件이 多多하다 禮記間傳에
斬衰三日不食 齊衰二日不食 大功三不食 小功緦麻再不食 土與歛焉則壹不食 故父母之喪 旣殯食粥 朝一溢米 暮一溢米 齊衰之喪 疏食水飮 不食菜果 大功之喪 不食醯醬 小功緦麻 不飮醴酒 此哀之發於飮食者也.
쪽수▶P26-3 斬衰三日不食 齊衰二日不食 大功三不食 小功緦麻再不食 土與歛焉則壹不食 故父母之喪 旣殯食粥 朝一溢米 暮一溢米 齊衰之喪 疏食水飮 不食菜果 大功之喪 不食醯醬 小功緦麻 不飮醴酒 此哀之發於飮食者也.
라 함은 음식의 금제요 또한 기한의 변천에 따라서 변동이 있어서
쪽수▶P26-4 라 함은 飮食의 禁制요 또한 期限의 變遷에 따라서 變動이 있어서
父母之喪 旣虞卒哭 疏食水飮 不食菜果 則期而小祥食菜果 又期而大祥有醯醬 中月而禪 禪而飮醴酒.
쪽수▶P26-5 父母之喪 旣虞卒哭 疏食水飮 不食菜果 則期而小祥食菜果 又期而大祥有醯醬 中月而禪 禪而飮醴酒.
라는 단계적 차이를 이룬다. 또 거처에 관하여는
쪽수▶P26-6 라는 段階的 差異를 이룬다. 또 居處에 關하여는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언어 대인관계에 대하여는
쪽수▶P26-7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言語 對人關係에 對하야는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쪽수▶P26-8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이라 하고 최저등급의 상에까지도 곡의 규정이 있어
쪽수▶P26-9 이라 하고 最低等級의 喪에까지도 哭의 規定이 있어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쪽수▶P26-10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라는 등등 우리의 이해에 곤란할 만큼 諸多(제다) 금제가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금제의 발생적 기원을 찾는다면 원래 주술종교적 금기의 관념에 기본한 것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예교로서는 다만 哀(애)의 표시 효의 至道(지도)라고 설하여 있을 뿐이다. 예교란 것은 본래 한 권위성을 가지고 민중에 임한 것이니, 일반인으로서는 지극히 실행난인 것임은 물론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 이러한 일화가 예기에 전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노)나라 어떤 사람이 대상의 제례를 아침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가무 환락함을 보고 子路(자로)가 그 비례 지극함을 비난 조소함에 대하여 孔子(공자)는 오히려 자로를 책망하였으니, 공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무리가 아님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외출한 후 다른 문인들에 말하기를 장기의 상제를 잘 준수하였으나 아직 더 1개월만 지나면 완전히 居喪(거상)의 儀(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예교의 존중시할 것을 교시하었다 한다. 그러나 예교 그대로가 실행되기는 誰某(수모)를 물론하고 곤란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예교에 있어서도 일정한 기한을 지난 후 정규의 상복에서 일단 輕服(경복)으로 감하는 제도 즉 受服(수복)을 제정하였으니, 의례 喪服經(상복경) 大功章(대공장)에 이러한 규정이 있다.
쪽수▶P26-11 라는 等々 우리의 理解에 困難할만큼 諸多 禁制가 規定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禁制의 發生的 起原을 찾는다면 元來 呪▶P27-1術宗敎的 禁忌의 觀念에 基本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禮敎로서는 다만 哀의 表示 孝의 至道라고 說하여 있을 뿐이다. 禮敎란 것은 本來 한 權威性을 가지고 民衆에 臨한것이니, 一般人으로서는 至極히 實行難인 것임은 勿論일 것이다. 이에 關하야 이러한 逸話가 禮記에 傳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나라 어떤 사람이 大祥의 祭禮를 아츰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歌舞歡樂함을 보고 子路가 그 非禮至極함을 非難嘲笑함에 對하야 孔子는 오히려 子路를 責望하였으니, 孔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無理가 아님을 理解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孔子는 予路의 外出한 後 다른 門人들에 말하기를 長期의 喪制를 잘 遵守하였으나 아즉 더 一個月만 지나면 完全히 居喪의 儀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야 禮敎의 尊重視할 것을 教示하었다 한다. 그러나 禮敎 그대로가 實行되기는 誰某를 勿論하고 困難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禮敎에 있어서도 一定한 期限을 經한 後 正規의 喪服에서 一段 輕服으로 減하는 制度 即 受服을 制定하였으니, 儀禮喪服經 大功章에 이러한 規定이 있다.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쪽수▶P27-2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이라 하니 이 수복의 규정은 대공에 관한 것이요 大功殮章(대공렴장)과 齊衰三月章(자최삼월장)에는 분명히 無受(무수)라 하였고 斬衰章(참최장)에나 齊衰章(자최장)에는 아무런 규정 없는 것을 보면, 수복이란 것이 오복 전체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쪽수▶P27-3 이라 하니 이 受服의 規定은 大功에 關한 것이요 大功殮章과 齊衰三月章에는 分明히 無受라 하였고 斬衰章에나 齊衰章에는 아무런 規定 없는 것을 보면, 受服이란 것이 五服 全體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상의 외에 상기에 관하여는 重喪(중상)의 문제 (除服(제복)의 순서는 先滿先除(선만선제) 後滿後除(후만후제)를 원칙으로한다.) 월일의 계산 문제 重様(중양)된 제사의 站後(참후)문제 등이 있거니와, 이러한 문제는 여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상가)제도에 관하여 잠깐 고찰하겠다. 상을 당한 경우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금제가 있을만큼 일정한 기한에 업무를 중단치 않으면 안되므로 공직에 있는 자에 대하여 일정한 휴가를 급여하는 일이 국가 법제 상으로 규정되었는 것이다. 이 給暇(급가)의 원칙으로 말하면 역시 등급적 차이가 有(유)하여
쪽수▶P27-4 以上의 外에 喪期에 關하여는 重喪의 問題 (除服의 順序는 先滿先除 後滿後除를 原則으로한다.) 月日의 計算問題 重様된 祭祀의 站後問題 等이 있거니와, 이러한 問題는 여기에 省略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制度에 關하야 잠간 考察하겠다. 喪을 當한 境遇에는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禁制가 있을만큼 一定한 期限에 業務를 中斷치 않으면 안됨으로 公職에 있는 者에 對하야 一定한 休暇를 給與하는 일이 國家 法制 上으로 規定되였는 것이다. 이 給暇의 原則으로▶P28-1 말하면 亦是 等級的 差異가 有하야
김두헌 오복제도-3.png
쪽수▶P28-2
김두헌 오복제도-3.png
로 되어있다.(8) 급가로 말하면 當喪(당상)의 경우뿐만 아니라 大小祥(대소상)・禪祭(선제)・忌祭(기제)・時祭(시제)・改葬(개장)의 경우에도 수십일 내지 수일이 역대의 법전에 제정되어 있으니 말하자면 금일의 官公吏服務規定(관공리복무규정)에 불과한 것이나 그것이 국가의 법제上 중요시되었음은 사회의 조직이 대가족 제도에 기본하여 선조 숭배의 관념이 존중된 까닭이다. 이러한 급가제도가 조선에 있어서는 일찍 오복제도가 고려 초에 전래함에 따라 시작한 것이니 성종 4년에 처음으로 제정하여 수차의 개정이 역대를 통하여 계속되고 이조 시대에 또한 그런 것이 사실에 歷然(역연)한 바이다.
쪽수▶P28-3 로 되여있다.(8) 給暇로 말하면 當喪의 境遇뿐만 아니라 大小祥・禪祭・忌祭・時祭・改葬의 境遇에도 數十日 乃至 數日이 歷代의 法典에 制定되여 있으니 말하자면 今日의 官公吏服務規定에 不過한 것이나 그것이 國家의 法制上 重要視되였음은 社會의 組織이 大家族 制度에 基本하야 先祖 崇拜의 觀念이 尊重된 까닭이다. 이러한 給暇制度가 朝鮮에 있어서는 일즉 五服制度가 高麗 初에 傳來함에 따라 始作한 것이니 成宗 四年에 처음으로 制定하야 數次의 改正이 歷代를 通하야 繼續되고 李朝 時代에 또한 그런 것이 史實에 歷然한 바이다.


라는 단계적 차이를 이룬다. 또 거처에 관하여는
쪽수▶P26-6 라는 段階的 差異를 이룬다. 또 居處에 關하여는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언어 대인관계에 대하여는
쪽수▶P26-7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言語 對人關係에 對하야는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쪽수▶P26-8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이라 하고 최저등급의 상에까지도 곡의 규정이 있어
쪽수▶P26-9 이라 하고 最低等級의 喪에까지도 哭의 規定이 있어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쪽수▶P26-10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라는 등등 우리의 이해에 곤란할 만큼 諸多(제다) 금제가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금제의 발생적 기원을 찾는다면 원래 주술종교적 금기의 관념에 기본한 것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예교로서는 다만 哀(애)의 표시 효의 至道(지도)라고 설하여 있을 뿐이다. 예교란 것은 본래 한 권위성을 가지고 민중에 임한 것이니, 일반인으로서는 지극히 실행난인 것임은 물론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 이러한 일화가 예기에 전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노)나라 어떤 사람이 대상의 제례를 아침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가무 환락함을 보고 子路(자로)가 그 비례 지극함을 비난 조소함에 대하여 孔子(공자)는 오히려 자로를 책망하였으니, 공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무리가 아님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외출한 후 다른 문인들에 말하기를 장기의 상제를 잘 준수하였으나 아직 더 1개월만 지나면 완전히 居喪(거상)의 儀(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예교의 존중시할 것을 교시하었다 한다. 그러나 예교 그대로가 실행되기는 誰某(수모)를 물론하고 곤란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예교에 있어서도 일정한 기한을 지난 후 정규의 상복에서 일단 輕服(경복)으로 감하는 제도 즉 受服(수복)을 제정하였으니, 의례 喪服經(상복경) 大功章(대공장)에 이러한 규정이 있다.
쪽수▶P26-11 라는 等々 우리의 理解에 困難할만큼 諸多 禁制가 規定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禁制의 發生的 起原을 찾는다면 元來 呪▶P27-1術宗敎的 禁忌의 觀念에 基本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禮敎로서는 다만 哀의 表示 孝의 至道라고 說하여 있을 뿐이다. 禮敎란 것은 本來 한 權威性을 가지고 民衆에 臨한것이니, 一般人으로서는 至極히 實行難인 것임은 勿論일 것이다. 이에 關하야 이러한 逸話가 禮記에 傳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나라 어떤 사람이 大祥의 祭禮를 아츰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歌舞歡樂함을 보고 子路가 그 非禮至極함을 非難嘲笑함에 對하야 孔子는 오히려 子路를 責望하였으니, 孔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無理가 아님을 理解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孔子는 予路의 外出한 後 다른 門人들에 말하기를 長期의 喪制를 잘 遵守하였으나 아즉 더 一個月만 지나면 完全히 居喪의 儀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야 禮敎의 尊重視할 것을 教示하었다 한다. 그러나 禮敎 그대로가 實行되기는 誰某를 勿論하고 困難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禮敎에 있어서도 一定한 期限을 經한 後 正規의 喪服에서 一段 輕服으로 減하는 制度 即 受服을 制定하였으니, 儀禮喪服經 大功章에 이러한 規定이 있다.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쪽수▶P27-2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이라 하니 이 수복의 규정은 대공에 관한 것이요 大功殮章(대공렴장)과 齊衰三月章(자최삼월장)에는 분명히 無受(무수)라 하였고 斬衰章(참최장)에나 齊衰章(자최장)에는 아무런 규정 없는 것을 보면, 수복이란 것이 오복 전체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쪽수▶P27-3 이라 하니 이 受服의 規定은 大功에 關한 것이요 大功殮章과 齊衰三月章에는 分明히 無受라 하였고 斬衰章에나 齊衰章에는 아무런 規定 없는 것을 보면, 受服이란 것이 五服 全體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상의 외에 상기에 관하여는 重喪(중상)의 문제 (除服(제복)의 순서는 先滿先除(선만선제) 後滿後除(후만후제)를 원칙으로한다.) 월일의 계산 문제 重様(중양)된 제사의 站後(참후)문제 등이 있거니와, 이러한 문제는 여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상가)제도에 관하여 잠깐 고찰하겠다. 상을 당한 경우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금제가 있을만큼 일정한 기한에 업무를 중단치 않으면 안되므로 공직에 있는 자에 대하여 일정한 휴가를 급여하는 일이 국가 법제 상으로 규정되었는 것이다. 이 給暇(급가)의 원칙으로 말하면 역시 등급적 차이가 有(유)하여
쪽수▶P27-4 以上의 外에 喪期에 關하여는 重喪의 問題 (除服의 順序는 先滿先除 後滿後除를 原則으로한다.) 月日의 計算問題 重様된 祭祀의 站後問題 等이 있거니와, 이러한 問題는 여기에 省略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制度에 關하야 잠간 考察하겠다. 喪을 當한 境遇에는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禁制가 있을만큼 一定한 期限에 業務를 中斷치 않으면 안됨으로 公職에 있는 者에 對하야 一定한 休暇를 給與하는 일이 國家 法制 上으로 規定되였는 것이다. 이 給暇의 原則으로▶P28-1 말하면 亦是 等級的 差異가 有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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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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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되어있다.(8) 급가로 말하면 當喪(당상)의 경우뿐만 아니라 大小祥(대소상)・禪祭(선제)・忌祭(기제)・時祭(시제)・改葬(개장)의 경우에도 수십일 내지 수일이 역대의 법전에 제정되어 있으니 말하자면 금일의 官公吏服務規定(관공리복무규정)에 불과한 것이나 그것이 국가의 법제上 중요시되었음은 사회의 조직이 대가족 제도에 기본하여 선조 숭배의 관념이 존중된 까닭이다. 이러한 급가제도가 조선에 있어서는 일찍 오복제도가 고려 초에 전래함에 따라 시작한 것이니 성종 4년에 처음으로 제정하여 수차의 개정이 역대를 통하여 계속되고 이조 시대에 또한 그런 것이 사실에 歷然(역연)한 바이다.
쪽수▶P28-3 로 되여있다.(8) 給暇로 말하면 當喪의 境遇뿐만 아니라 大小祥・禪祭・忌祭・時祭・改葬의 境遇에도 數十日 乃至 數日이 歷代의 法典에 制定되여 있으니 말하자면 今日의 官公吏服務規定에 不過한 것이나 그것이 國家의 法制上 重要視되였음은 社會의 組織이 大家族 制度에 基本하야 先祖 崇拜의 觀念이 尊重된 까닭이다. 이러한 給暇制度가 朝鮮에 있어서는 일즉 五服制度가 高麗 初에 傳來함에 따라 始作한 것이니 成宗 四年에 처음으로 制定하야 數次의 改正이 歷代를 通하야 繼續되고 李朝 時代에 또한 그런 것이 史實에 歷然한 바이다.






































































본문4: 4


이상은 복장과 상기에 관하여 고찰하였지만, 이제는 服者(복자)에 관하여 고찰하게다. 생자 즉 복자가 사자 즉 상자에 대한 친소 존비의 관계와 가족 간의 신분 지위와는 상복제도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이니, 여기에서 우리는 대가족 조직의 대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구조 원리에 있어서 대가족 제도의 근본정신인 남계중심・적서의 별・장유의 유서・夫主婦從(부주부종)・일부다처・妻妾(처첩)의 별・여자의 出嫁(출가)・養子相續(양자상속) 등등의 문제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예기 大傳(대전)에 상복 조직의 근본 원리로 볼만한 것이 있으니
쪽수▶P29-1 以上은 服裝과 喪期에 關하야 考察하였지만, 이제는 服者에 關하야 考察하게다. 生者 即 服者가 死者 卽 喪者에 對한 親疎尊卑의 關係와 家族間의 身分 地位와는 喪服制度를 構成하는 重要한 原理이니, 여기에서 우리는 大家族 組職의 大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即 構造原理에 있어서 大家族 制度의 根本精神인 男系中心・嫡庶의 別・長有의偷序・夫主婦從・一夫多妻・妻妾의 別・女子의 出嫁・養子相續 等々의 問題를 차질 수 있는 것이다. 禮記大傳에 喪服組職의 根本 原理로 볼만한 것이 있으니
服術有六 一曰親親 二曰尊尊 三曰名名 四曰出入 五曰長幼 六曰從服.
쪽수▶P29-2 服術有六 一曰親親 二曰尊尊 三曰名名 四曰出入 五曰長幼 六曰從服.
이란 것이 그것인대, 그 표명이 너무나 간략하여 그 본의를 알기에 어려우나, 대개 이러한 의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친친이라 함은 부모를 최근친으로 삼고 처자 형제 伯叔(백숙)에 미침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비롯하여 친소 관계를 이루어 직통으로는 상하 4대에 이르고 방계 同父(동부)에서 동 高祖(고조)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疎(소)하게 되야 상복의 重輕(중경)을 구성한 것이니 예기 喪服小記(상복소기)에 「親親 以三爲五 以五爲丸 上殺下殺 旁殺而親畢矣」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함이겠다. 尊尊(존존)이라 함은 君雇(군고) 최존으로 삼고 公卿大夫(공경대부)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원래 의례에 제정하여 있는 襄服制(양복제)는 정치적 신분관계도 또한 배당의 원리로 삼아 군신 및 군민 관계는 물론이요 군의 父祖妻子(부조처자)에까지 이른 것이니, 이것은 곧 국가론상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名名(명명)이라 함은 가족 간의 존비에 따라 그 명분 지위를 말한 것이요 출입이라 함은 여자의 出嫁在室(출가재실)을 말함이요 장유는 성인과 유년의 윤서를 말한 것인데, 일설에는 旁親屬(방친속)의 존자를 위한 복를 장이라 하고 또 그 卑者(비자)를 위한 복를 幼(유)라고 하나, 그 본의는 물론 전자에 있을 것이다. 최후로 從服(종복)이라 함은 이상 5원칙에 비하여 예외의 경우을 말한 것이니 예기 대전에 의하면 대개 6종류가 있다. 즉
쪽수▶P29-3 이란 것이 그것인대, 그 表明이 너무나 簡略하야 그 本義를 알기에 어려우나, 大槪 이러한 意義로 볼 수 있을 것이다. 親親이라 함은 父母를 最近親으로 삼고 妻子兄弟伯叔에 及함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비롯하야 親疎關係를 이루어 直統으로는 上下四代에 이르고 旁系同父에서同高祖에 이르기까지 漸次로 疎하게 되야 喪服의 重輕을 構成한 것이니 禮記 喪服小記에 「親親 以三爲五 以五爲丸 上殺下殺 旁殺而親畢矣」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함이겠다. 尊尊이라 함은君雇最尊으로 삼고 公卿大夫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元來 儀禮에 制定하여 있는 襄服制는 政治的 身分關係도 또한 配當의▶P30-1 原理로 삼어 君臣及君民關係는 勿論이요 君의 父祖妻子에까지 이른 것이니, 이것은 곧 國家論上에 重要한 意味를 가진 것이다, 名名이라 함은 家族間의 尊卑에 따라 二名分地位를 말한 것이요 出入이라 함은 女子의 出嫁在室을 말함이요 長幼는 成人과 幼年의 倫序를 말한 것인대, 一說에는 旁親屬의 尊者를 爲한 服를 長이라 하고 또 그 卑者를 爲한 服를 幼라고 하나, 그 本義는 勿論 前者에 있을 것이다. 最后로 從服이라 함은 以上 五原則에 比하야 例外의 境過을 말한 것이니 禮記大傳에 依하면 大槪 六種類가 있다. 即
從服有六冇屬從 冇徒從 有從有服而無服 有從無服而冇服 有從重而輕 有從輕而重.
쪽수▶P30-2 從服有六冇屬從 冇徒從 有從有服而無服 有從無服而冇服 有從重而輕 有從輕而重.
이라는 것이다. 屬從(속종)이라 함은 그 친속에 따라 그 黨(당)을 위하여 服(복)함을 말한 것이니, 예컨대 자가 모에 따라 母黨(모당)을 복하고 처가 夫(부)에 따라 夫黨(부당)을 위하여 복함과 같다. 또 徒從(도종)이라 함은 그 친속이 아니면서 그 당을 위하여 복함을 말한 것이니. 예컨대 신이 군에 따라 君黨(군당)을 위하여 복하고, 또 처가 夫黨(부당)을 위하며 妾(첩)이 女君黨(여군당)을 위하며 庶子(서자)가 君母(군모)의 父母(부모)를 위하며 자가 모의 君母(군모)를 위하여 복한 것과 같다. 有從有服而無服(유종유복이무복)이라 함은 公子(공자)의 처가 그 本生父母(본생부모)를 위하여 기년의 상을 복함에 대하여 공자는 그 군의 까닭으로 外房外姐(외방외조)의 상을 복하지 못한 경우요 有從無服而有服(유종무복이유복)이라 함은 처가 夫(부)의 昆弟(곤제)를 위하여 복하나, 그 자매를 위하여 복하지 못한 경우이다, 而從重而輕(이종중이경)이라 함은 처가 그 본생부모를 위하여 기년의 상을 복함은 用(용)함에 대하여 夫(부)가 처의 부모를 위하여 3월의 상을 복함은 輕(경)하다는 것이요 有從輕而重(유종경이중)이라 함은 公子(공자)가 군의 까닭으로 그 모를 위하여 練冠(연관)함은 輕(경)함에 대하여 公主(공주)의 처는 그 모를 위하여 기년의 상을 澈(철)함은 중하다는 것이다.
쪽수▶P30-3 이라는 것이다. 屬從이라 함은 그 親屬에 따라 그 黨을 爲하야 服함을 말한 것이니, 例컨대 子가 母에 따라 母黨을 服하고 妻가 夫에 따라 夫黨을 爲하야 服함과 같다. 또 徒從이라 함은 그 親屬이 아니면서 그 黨을 爲하야 服함을 말한 것이니. 例컨대 臣이 君에 따라 君黨을 爲하아 服하고, 또 妻가 夫黨을 爲하며 妾이 女君黨을 爲하며 庶子가 君母의 父母를 爲하며 子가 母의 君母를 爲하야 服한 것과 같다. 有從有服而無服이라 함은 公子의 妻가 그 本生父母를 爲하야 期年의 喪을 服함에 對하야 公子는 그 君의 까닭으로 外房外姐의 喪을 服하지 못한 境遇요 有從無服而有服이라 함은 妻가 夫의 昆弟를 爲하야 服하나, 그 娣姒를 爲하야 服하지 못한 境遇이다, 而從車而輕이라 함은 妻가 그 本生父母을 爲하야 期年의 喪을 服함은 用함에 對하야 夫가 妻의 父母를 爲하야 三月의 喪을 服함은 輕하다는 것이요 有從輕而重이 라 함은 公子가 君의 까닭으로 그 母를 爲하야 練冠함은 輕함에 對하야 公主의 妻는 그 母를 爲하야 期年의 喪을 澈함은 重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기본하여 正服(정복)・加服(가복)・義服(의복)・降服(항복)의 4종이 성립한다. 정복은 곧 정복의 복으로 혈족 중심의 정통에 용한 것이요 타 3자는 이것에 준하여 파생한 것이다. 즉 가복은 父卒(부졸)함으로 인하여 자손이 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을 위하여 3년상을 복한 것이니 承重(승중)으로 인하여 부의 代(대)로 복을 추가한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 남자존속과 여자존속을 동 등급으로 하는 수도 있고 異(이) 등급으로 하는 수가 있어 예론과 시대 법제에 의하여 相違(상위)가 있는 듯하다.(1) 義服(의복)은 본래 혈족 관계가 없이 다만 의리의 관계로써 복한 경우를 말한 것이다, 예컨대 妻爲夫(처위부)・妾爲君(첩위군)・夫爲妻(부위처)・子爲生母外諸母夫爲妻父母(자위생모외제모부위처부모)・爲女媒(위녀모) 등과 같다. 降服(항복)은 본래 혈족 관계자 또는 外族親(외족친)이 출가함으로 인하여 복을 경감한 경우를 말한 것이니, 예컨대 父卒母嫁(부졸모가), 姑(고)・자매・姪女適人(질녀적인), 姨(이)・外甥女適人(외생녀적인) 등과 같다. 이러한 파생적인 복은 대가족 통솔의 필요상 정복에 준하여 점차로 추가 발전한 것일 것이다.
쪽수▶P30-4 이러한 原則에 基本하야 正服・加服・義服・降服의 四種이 成立한다. 正服은 곧 正服의 服으로 血旅中心의 正統에▶P31-1 用한 것이요 他 三者는 이것에 準하야 派生한 것이다. 即 加服은 父卒함으로 因하야 子孫이 祖父母・曾祖父母・高祖父母을 爲하야 三年喪을 服한 것이니 承重으로 因하야 父의 代로 服을 追加한 것이다, 다만 이 境遇에 男子尊屬과 女子尊屬을 同等級으로 하는 수도 있고 異等級으로 하는 수가 있어 禮論과 時代 法制에 依하야 相違가 있는 듯하다.(1) 義服은 本來 血族關係가 없이 다만 義理의 闔係로써 服한 境遇를 말한 것이다, 例컨대 妻爲夫・妾爲君・夫爲妻・子爲生母外諸母夫爲妻父母・爲女媒 等과 같다. 降服은 本來 血族 關係者또는 外族親이 出嫁함으로 因하야 服을 輕減한 境遇를 말한 것이니, 例컨대 父卒母嫁, 姑・姉妹・姪女適人, 姨・外甥女適人 等과 같다. 이러한 派生的인 服은 大家族 統率의 必要上 正服에 準하야 漸次로 追加 發展한 것일 것이다.
이제 복자 등급의 전 조직을 도시하여 그 근본 의의를 개별적으로 분절 고찰할까 한다. (별지 도표 참조)(2)
쪽수▶P31-2 이제 服者 等級의 全組織을 圖示하야 그 根本意義를 個別的으로 分折 考察할가 한다. (別紙圖表參照)(2)
① 부모의 상은 원래가 3년으로서 同様(동양)의 상을 복할 것은 물론이나, 특히 斬齊(참자)의 별이 있음은 부계 중심의 가장제에 있어서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거니와, 특히 父在爲母(부재위모)의 경우에 한하여는 기년상올 복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남존여복의 관념에서 나은 것은 아닐 것이요 이러한 관계에 기인된 것인가 생각한다. 즉 부의 생존 시에는 모상이나마 부가 主祭者(주제자)가 된 것임으로 사실상으로는 부의 처에 대한 상 즉 기년상이 적용된 것이겠다. 그러므로 부졸하여서는 자기가 주제자가 됨으로 모 역시 3년상을 복하게 될 것이니, 士儀(사의)의 규정한 바에 의하면 「父母偕喪 雖在一日之內 若父先卒 則服母三年」이라 하였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쪽수▶P31-3 ① 父母의 喪은 元來가 三年으로서 同様의 喪을 服할 것은 勿論이나, 特히 斬齊의 別이 있음은 父系中心의 家長制에 있어서 必然的 歸結이라 할 수 있거니와, 特히 父在爲母의 境遇에 限하여는 期年喪올 服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男尊女服의 觀念에서 나은 것은 아닐 것이요 이러한 關係에 基因된 것인가 생각한다. 即 父의 生存時에는 母喪이나마 父가 主祭者가 된 것임으로 事實上으로는 夫의 妻에 對한 喪 即 期年喪이 適用된 것이겠다. 그러므로 父卒하여서는 自己가 主祭者가 됨으로 母 亦是 三年喪을 服하게 될 것이니, 士儀의 規定한 바에 依하면 「父母偕喪 雖在一日之內 若父先卒 則服母三年」이라 하였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② 卑屬親(비속친)에 있어서 자와 子婦(자부)・형제와 형제처・질과 姪妻(질처)・손과 孫妻(손처)의 간에는 남녀의 별에 의하여 등급적 차이가 있음에 대하여 자와 녀・형제와 자매・질과 질녀・손과 손녀의 간에는 남녀의 별에 의하여 아무런 차등이 없으니, 이것은 곧 부계적 혈족 중심의 관념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출가 후에도 본생 친가족을 위하여 상을 복하되, 경우에 비하여 減服(감복)이 되고, 또 본생가의 가족은 출가한 姑母(고모)와 자매를 위하여 항복이 적용된 것이다.
쪽수▶P31-4 ② 卑屬親에 있어서 子와 子婦・兄弟와 兄弟妻・姪과 姪妻・孫과 孫妻의 間에는 男女의 別에 依하야 等級的 差異가 있음에 對하야 子와女・兄弟와 姉妹・姪과 姪女・孫과 孫女의 間에는 男女의 別에 依하야 아무런 差等이 없으니, 이것은 곧 父▶P32-1系的 血族 中心의 觀念에 依한 것이다. 그러므로 女子는 出嫁 後에도 本生 親家族을 爲하야 喪을 服하되, 境遇에 比하야 減服이 되고, 또 本生家의 家族은 出嫁한 姑母와 姉妹틀 爲하야 降服이 適用된 것이다.
③ 부모가 특히 장자를 위하여 각자 斬齊(참자) 3년을 복하고 서자 즉 衆子(중자)를 위하여 기년을 복함은, 적적 계승을 존중히 하고 선조 숭배를 후히 하는 까닭이요, 장자와 중자의 차별은 생존 시와 다름이 없으니, 그것은 곧 장자상속권제(primogeniture-system)와 밀접 不離(불리)의 관계를 가진 것이겠다. 그러므로 중자는 적손과 갈이 동급의 木杖期(목장기)요 衆孫(중손)은 嫡孫(적손)과 달라 대공이다.
쪽수▶P32-2 ③ 父母가 特히 長子를 爲하야 各自 斬齊三年을 服하고 庶子 即 衆子틀 爲하야 期年을 服함은, 嫡々 繼承을 尊重히 하고 先祖 崇拜를 厚히 하는 까닭이요, 長子와 衆子의 差別은 生存 時와 다름이 없으니, 그것은 곧 長子相續權制(primogeniture-system)와 密接 不離의 關係를 가진 것이겠다. 그러므로 衆子는 嫡孫과 갈이 同級의 木杖期요 衆孫은 嫡孫과 달라 大功이다.
④ 本宗(본종)의 미성년자에 대하여는 특히 痛服(통복)이란 것이 있어 長殤(장상, 自十六歲至十九歲) 中殤(중상, 自十二歲至十五歲) 下殤(하상, 自八歲至十一歲)의 3종으로 되었으니. 연령의 차이에 의하여 상의 등급이 있음은 자연한 귀결이거니와, 미성년의 子姪(자질)에게까지도 상제의 규정을 필요로 한 것은, 祖先(조선) 숭배의 관념에 기본한 가계존속의 요구로 인하여 자손을 중요시한 까닭이다. 따라서 장상일수록 重喪(중상)임은 가계 존속의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쪽수▶P32-3 ④ 本宗의 未成年者에 對하여는 特히 痛服이란 것이 있어 長殤(自十六歲至十九歲) 中殤(自十二歲至十五歲) 下殤(自八歲至十一歲)의 三種으로 되였으니. 年齡의 差異에 依하야 喪의 等級이 있음은 自然한 歸結이거니와, 未成年의 子姪에게까지도 喪制의 規定을 必要로 한것은, 祖先 崇拜의 觀念에 基本한 家系存續의 要求로 因하야 王孫을 重要視한 까닭이다. 따라서 長殤일수록 重喪임은 家系存續의 可能性을 더 마니 가지고 잇는 까닭이다.
⑤ 양자로 말하면 의례 상복장에 「人後者爲所後父斬衰三年」이라 하여 養父(양부)는 親父(친부)와 다름이 없이 斬衰喪(참최상)을 복하고 오히려 본생부를 위하여 자최가 장기로 항복하며, 양가의 가족에 대하여, 전연히 적자와 같은 義務가 있으나 다른 본생 친속을 위하여서는 정복보다 일등을 항복하니, 이것은 물론 가계존속의 요구에 기인한 양자제도를 중요시한 까닭이다.
쪽수▶P32-4 ⑤ 養子로 말하면 儀禮 喪服章에 「人後者爲所後父斬衰三年」이라 하야 養父는 親父와 다름이없이 斬衰喪을 服하고 오히려 本生父틀 爲하야 齊衰가 杖期로 降服하며, 養家의 家族에 對하야, 全然히 嫡子와 가튼 義務가 있으나 다른 本生 親屬을 爲하여서는 正服보다 一等을 降服하니, 이것은 勿論 家系存績의 要求에 基因한 養子制度를 重要視한 까닭이다.
⑥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처가 부를 위하여 참최 3년을 복함에 대하여 부가 처를 위하여 자최 기년을 복함은 처에 대한 부권의 강력을 의미하는 것이요, 처를 위하여서는 장자를 위하는 것보다도 輕服(경복)인 것은 가족의 구성에 부부가 중심이 아니고 부자가 중심이 된 것을 표시한 것이라 하겠다.
쪽수▶P32-5 ⑥ 夫婦關係에 있어서는 妻가 夫를 爲하야 斬衰三年을 服함에 對하야 夫가 妻틀 爲하야 齊衰期年을 服함은 妻에 對한 夫權의 强力을 意味하는 것이요, 妻틀 爲하야서는 長子틀 爲하는 것보다도 輕服인 것은 家族의 構成에 夫婦가 中心이 아니고 父子가 中心이 된 것을 表示한 것이라 하겠다.
⑦ 첩은, 夫君(부군)을 위하여 참최 3년상을 복함이 처가 부를 위한 경우와 다름이 없으나, 부가 첩을 위하여서는 有子(유자)의 첩에 한하여 緦麻(시마) 3월상을 복하고-의례 상복편에 「大夫爲貴妾 雖無子冇服」이라 함은 특수한 경우이거니와-첩이 女君(여군)을 위하여 자최 不杖期(불장기, 婦(부)가 舅姑(구고)에 대한 복과 동등)를 복함에 대하여 여군이 첩을 위하여서는 無服(무복)으로 되었고 또 첩은 부군의 친족을 위하여 협소한 범위에 한하며, 부군은 첩의 친족을 위하여 무복이니, 이러한 것은 첩이란 것이 원래 가계존속을 목적한 子(자)를 얻기 위하여 존재한 부속적 가족 성원인 까닭이요, 따라서 처첩의 신분지위에 차별이 있음을 잘 말한 것이겠다.
쪽수▶P32-6 ⑦ 妾은, 夫君을 爲하야 斬衰 三年喪율 服함이 妻가 夫를 爲한 境遇와 다름이 없으나, 夫가 妾을 爲하여서는 有子의▶P33-1 妾에 限하야 繩麻三月喪을 服하고-儀禮喪服篇에 「大夫爲貴妾 雖無子冇服」이라 함은 特殊한 境遇이거니와-妾이 女君을 爲하야 齊衰不杖期(婦가 舅姑에 對한 服과 同等)를 服함에 對하야 女君이 妾올 爲하여서는 無服으로 되였고 또 妾은 夫君의 親族을 爲하야 狹小한 範圍에 限하며, 夫君은 妾의 親族을 爲하야 無服이니, 이러한 것은 妾이란 것이 元來 家系存續을 目的한 子를 얻기 爲하야 存在한 附屬的 家族成員인 까닭이요, 따라서 妻妾의 身分地位에 差別이 있음을 잘 말한 것이겠다.
⑧ 일반으로 남계혈족 중심인 것은 이상에 말한 바와 같거니와, 종족 男親(남친) 방계에 있어서는 그 등급의 배치가 대개 이러한 원리에 기본되어 있다. 첫째로는 공동 시조에 대하여 자기와 동일한 세대에 있는 방계 친속은 자기와 동항렬이 되고 그 원근에 따라 규칙적으로 등급이 배열되었으니, 즉 형제는 기・종형제는 대공・재종형제는 소공・이종형제는 시마로 된다. 다음으로 공동 시조에 대하여 자기와 다른 세대에 있는 방계친속은 공동 시조의 원근에 따라 분류되었으니, 즉 高祖系(고조계)에 속한 從曾祖父(종증부모)・再從祖父(재종조부)・冉從伯叔父(재종백숙부)는 三從兄弟(삼종형제)와 같이 시마를 복하고, 曾祖係(증조계)에 속한 從祖父(종조부) 從伯叔父(종백숙부)는 再從兄弟(재종형제)와 같이 소공을 복하고 조부계에 속한 방계친속은 伯叔父(백숙부)・종형제・종질・재종손의 존비에 순서하여 기・대공・소공・시마를 복한다. 이와 같이 직계친속이 방계친속에 대하여 重服(중복)으로써 우월적 지위에 있음은 곧 대소종족 간의 윤서를 요구함에 기인한 것이요, 필경 尊祖敬宗(존조경종)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겠다.
쪽수▶P33-2 ⑧ 一般으로 男系血族 中心인 것은 以上에 말한 바와 같거니와, 宗族男親 傍系에 있어서는 그 等級의 配置가 大槪 이러한 原理에 基本되여있다. 첫재로는 共同 始祖에 對하야 自己와 同一한 世代에 있는 傍系親屬은 自己와 同行列이 되고 그 遠近에 따라 規則的으로 等級이 配列되였으니, 即 兄弟는 期・從兄弟는 大功・冉從兄弟는 小功・二從兄弟는 緦麻로 된다. 다음으로 共同 始祖에 對하야 自己와 다른 世代에 있는 傍系親屬은 共同 始祖의 遠近에 따라 分類되였으니, 即 高祖系에 屬한 從曾祖父・再從祖父・冉從伯叔父는 三從兄弟와 같이 緦麻를 服하고, 曾祖係에 屬한 從祖父 從伯叔父는 再從兄弟와 같이 小功을 服하고 祖父系에 屬한 傍系親屬은 伯叔父・從兄弟・從姪・再從孫의 尊卑에 順序하야 期・大功・小功・緦麻를 服한다. 이와 같이 直系親屬이 傍系親屬에 對하야 重服으로써 優越的 地位에 있음은 곧 大小宗族 間의 倫序를 要求함에 基因한 것이요, 畢竟 尊祖敬宗의 觀念에서 나온 것이겠다.
⑨ 外族親(외족친) 즉 母黨(모당)에 대하여는 외조부모・외숙부모・이모를 위하여 겨우 소공을 복하고 그 외의 상복 범위는 지극히 협소한 것이니, 이것은 원시적 모계적 모권제의 영역에서 전연 탈이하여 부계적 부권제(Patrilineal Patripotesal System)로 된 것을 표시한 것이겠다.
쪽수▶P33-3 ⑨ 外族親 即 母黨에 對하야는 外祖父母・外叔父母・姨母를 爲하야 겨우 小功을 服하고 그 外의 喪服範圍는 至極히 狹小한 것이니, 이것은 原始的 母系的 母權制의 領域에서 全然 脫離하야 父系的 父權制(Patrilineal Patripotesal System)로 된 것을 表示한 것이겠다.
⑩ 처족에 대하여 보건대 처는 夫黨(부당)을 위하여 거반 부에 준한 상을 복하지만, 부는 처부모를 위하여 겨우 시마를 복하니, 이것은 온전히 嫁娶制(가취제, Patriocal System)에 의한 부권가족의 형태를 표시함이겠다.
쪽수▶P34-1 ⑩ 妻族에 對하야 보건대 妻는 夫黨을 爲하야 거반 夫에 準한 喪을 服하지만, 夫는 妻父母틀 爲하야 겨우 緯麻를 服하니, 이것은 온전히 嫁娶制(Patriocal System)에 依한 夫權家族의 形態를 表示함이겠다.
⑪ 형제와 형제처의 간 즉 嫂叔間(수숙간)에는 상호 무복이요, (무복이 원칙이나 가례를 비롯하여 조선의 예서와 법전에는 소공으로 되어있다) 모당에 있어서 모의 자매 즉 이모를 위하여 소공을 복하고 모의 형제 즉 舅(구)를 위하여 시마를 복하여 女重男輕(여중남경)으로 되어있고 또 부당에 있어서 伯叔父母(백숙부모)를 위하여 대공을 복하고, 姪及姪女(질급질녀)을 위하여 기를 복하여 卑重尊輕(비중존경)으로 되어있으며, 형제 항렬(즉 형제 소공⋅종형제 시마⋅재종형제 무)보다도 질 항렬(즉 질 기⋅종질 소공⋅재종질 시마)의 복이 중하게 되어 있으니 이러한 것은 본종에 있어서의 친등 관계와 같이 정규의 순서를 갖지 못하니, 이것은 아마도 원시적인 혼인형태 또는 가족조직의 殘體(잔체)가 혼동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쪽수▶P34-2 ⑪ 兄弟와 兄弟妻의 間 即 嫂叔間에는 相互 無服이요, (無服이 原則이나 家禮를 비롯하야 朝鮮의 禮書와 法典에는 小功으로 되여있다) 母黨에 있어서 母의 姉妹 即 姨母를 爲하야 小功을 服하고 母의 兄弟 即 舅를 爲하야 紀麻를 服하야 女重男輕으로 되어있고 또 夫黨에 있어서 伯叔父母를 爲하야 大功을 服하고, 姪及姪女을 爲하야 期를 服하야 卑重尊輕으로 되어있으며, 兄弟行列(即 兄弟小功⋅從兄弟緦麻⋅再從兄弟無)보다도 姪行列(即 姪期⋅從姪小功⋅再從姪緦麻)의 服이 重하게 되어 있으니 이러한 것은 本宗에 있어서의 親等關係와 같이 正規의 順序를 갓지 못하니, 이것은 아마도 原始的인 婚姻形態 또는 家族組織의 殘體가 混同된 것이라고 봍 수밖에 없는 일이다.
⑫ 三父八母服(삼부팔모복)은 도시하지 않았으니, 이것을 여기에 표시하면 대개 이러하다.
쪽수▶P34-3 ⑫ 三父八母服은 圖示하지 않었으니, 이것을 여기에 表示하면 大槪 이러하다.
同居繼父(동거계부) 不杖期(불장기) 1년
쪽수▶P34-4 同居繼父 不杖期 一年
不同居繼父(불동거계부) 자최 3월
쪽수▶P34-5 不同居繼父 齊衰 三月
元不同居繼父(원불동거계부) 무복
쪽수▶P34-6 元不同居繼父 無服
嫡母(적모) 자최 3년
쪽수▶P34-7 嫡母 齊衰 三年
繼母(계모) 자최 3년
쪽수▶P34-8 繼母 齊衰 三年
養母(양모) 자최 3년
쪽수▶P34-9 養毋 齊衰 三年
嫁母(가모) 자최杖期(장기) 1년
쪽수▶P34-10 嫁母 齊衰杖期 一年
出母(출모) 자최杖期 (장기) 1년
쪽수▶P34-11 出母 齊衰杖期 一年
乳母(유모) 시마 3월
쪽수▶P34-12 乳母 緦麻 三月
庶母(서모) 시마 3월
쪽수▶P35-1 庶母 緦麻 三月
慈母(자모) 자최 3년
쪽수▶P35-2 慈母 齊衰 三年
이 三父八母(삼부팔모)의 복제는 본래 상복의 조직이 부계적 부권제와 嫁娶制(가취제)의 원리에 기초함으로 인하여 된 것이 물론이다. 그러므로 계부를 위하여서는 同居不同居(동거불동거)에 따라 不杖期(불장기)와 再衰(재최)3월에 복하나 계모, 양모・자모를 위하여서는 적모와 동 등급의 자최 삼년상을 복한 것이요, 따라서 가모・출모를 위하여서는 자최 杖期(장기)에 불과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서모는 유모와 함께 총 3월에 불과함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적서의 별 처첩의 별이 엄연함에 의한 것이다. 첩제를 공연히 필요로 삼는 사회조직에 있어서 첩의 지위가 지극히 비천시됨은 모순의 현상이라고 하겠으나, 여하간 일반 예서의 규정에는 「土爲庶母」 또는 「庶子爲父後者爲其母」의 경우에는 겨우 총 3월로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 「庶子爲其後者爲其母」라 함은 妾腹(첩복)의 자로서 상속인이 될지라도 그 생모인 妾母(첩모)에 대한 것이니, 여기에는 오직 부계존속이 중요시되고 모자 혈족의 관계는 전연 무시되어 있는 것이다.
쪽수▶P35-3 이 三父八母의 服制는 本來 喪服의 組織이 父系的 父權制와 嫁娶制의 原理에 基礎함으로 因하야 된 것이 勿論이다. 그러므로 繼父를 爲하여서는 同居不同居에 따라 不杖期와 再衰三月에 服하나 繼母, 養母・慈母를 爲하여서는 嫡母와 同等級의 齊衰三年喪틀 服한 것이요, 따라서 嫁母・出母를 爲하여서는 齊衰杖期에 不過하게 된다. 이에 對하야 庶母는 乳母와 함께 總 三月에 不過함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이 嫡庶의 別 妻妾의 別이 嚴然함에 依한 것이다. 妾制를 公然히 必要로 삼는 社會組織에 있어서 妾의 地位가 至極히 卑賊視됨은 矛盾의 現象이라고 하겠으나, 如何間 一般 禮書의 規定에는 「土爲庶母」 또는 「庶子爲父後者爲其母」의 境遇에는 겨우 總 三月로 規定되여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 「庶子爲其後者爲其母」라 함은 妾腹의 子로서 相續人이 될지라도 그 生母인 妾母에 對한 것이니, 여기에는 오즉 父系存續이 重要視되고 母子 血族의 關係는 全然 無視되여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상복제의 복자 관계를 대략 분석 고찰하였거니와,(4) 요컨대 이러한 조직으로써 대소종족을 결합하고 공동 선조의 제사로써 동족친화의 관념을 후히 하는 것이다. 일찍이 중국에 있어서는 9족⋅5종⋅5복⋅6친 등의 말로써 이것을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오복의 관계자는 그대로 친족의 一團(일단)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상세히 고찰한다면 오복자의 범위는 그대로 친족의 범위와 致(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종래로 조선에 있어서 오늘에 통용하는 친족이란 맡은 없고 친속 또는 종족이라 하여 특히 宗(종)은 宗族親(종족친)을 표시하고 戚(척)은 姻戚(인척) 또는 外戚(외척)이라는 것과 같이 혼인관계로 인하여 된 친척을 말함은 중국에 있어서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이 族(족) 또는 戚(척)은 오복자의 범위보다 광범한 것 같다 상복의 가장 輕(경)한 것은 시마이므로 오복자에 한하여서는 가장 원친을 위하여 복함은 물론이지만, 또 그밖에 祖免親(조면친)이란 것이 있음을 보아 알 일이다. 「四世緦麻服之窮也五世祖免」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從高祖父母(종고조부모)・再從曾祖父母(재종증조부모)・再從曾大姑(재종증대고)・三從祖父母(삼종조부모)・三從大姑(삼종대고)・三從伯叔父母(삼종백숙부모)・三從姑(삼종고) 四從兄弟姉妹(사종형제자매)는 곧 本宗(본종) 친속으로서의 조면친이다. 일반으로 이것을 시마 이상의 有服親(유복친)에 대하여 無服親(무복친)이라 한다. 이 무복친은 또한 母族(모족) 즉 외척 처족 출가족에도 있다. 즉 외척에 있어서는 外曾祖父母外從姪及姪女(외증조부모외종질급질녀) 姨從姪及姪女(이종질급질녀) 外再從兄兄弟姉妹(외재종형형제자매) 從姨姪及姪女(종이질급질녀)가 그것이요, 처족에 있어서는 妻祖父母(妻祖父母) 妻外祖父母(처외조부모) 妻伯叔父母(처백숙부모) 妻姑母(처고모) 妻兄弟及妻(처형제급처) 妻姉妹(처자매) 妻姪及姪女(처질급질녀)가 그것이요, 출가족에 있어서는 姑母夫姉妹夫(고모부자매부) 內從姪及姪女(내종질급질녀) 外會孫及孫女(외회손급손녀)가 그것이다. 물론 친족의 범위는 각자 국가의 법제에 의하여 그 차이가 다대하다. 현금 일본 민법에는 자연혈족 배우자姻族(인족) 준혈족으로써 친족을 삼고, 특히 혈족은 6친등 이내 인족은, 3친등 이내에 한한다. 조선의 종래 관습은 혈족 10촌 준 혈족 1촌 배우자 및 준배우자 무촌 인족 9촌 인족배우자 3촌에 及(급)한다. 이미 이조 六典(육전)에 있어서는 明律(명률)에 준하여 제정하였고 최후의 법전인 刑法大典(형법대전)에는 친속을 本宗(본종) 및 異姓(이성)의 有服親(유복친)가 조면친의 삼류로 分(분)하여 그 범위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일반 관습으로는 대개 오복친을 친족의 범위로 삼는 것은 우리의 주지한 바이다.
쪽수▶P35-4 以上으로써 喪服制의 服者 關係를 大略 分折 考察하였거니와,(4) 要컨대 이러한 組織으로써 大小宗族을 結合하고 共同 先祖의 祭祀로써 同族親和의 觀念을 厚히 하는 것이다. 일즉히 中國에 있어서는 九族⋅五宗⋅五服⋅六親 等의 말로써 이것을 表示하였다. 그리하야 五服의 關係者는 그대로 親族의 一團으로 보게 되였다. 그러나 祥細히 考察한다면 五服者의 範圍는 그대로 親族의 範圍와 致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從來로 朝鮮에 있어서 오늘에 通用하는 親族이란 맡은 없고 親屬 또는 宗族이라하야 特히 宗은 宗族親을 表示하고 戚은 姻戚 또는 外戚이라는 것과 같이 婚姻關係로 因하야 된 親戚을 말함은 中國에 있어서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이 族 또는 戚은 五服者의 範圍보다 廣汎한 것 같다 喪▶P36-1服의 가장 輕한것은 緦麻임으로 五服者에 限하야서는 가장 遠親을 爲하야 服함은 勿論이지만, 또 그밖에 祖免親이란 것이 있음을 보아 알 일이다. 「四世緦麻服之窮也五世祖免」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從高祖父母・再從曾祖父母・再從曾大姑・三從祖父母・三從大姑・三從伯叔父母・三從姑 四從兄弟姉妹는 곧 本宗親屬으로서의 祖免親이다. 一般으로 이것을 緦麻 以上의 有服親에 對하야 無服親이라 한다. 이 無服親은 또한 母族 即 外威妻族 出嫁族에도 잇다. 即 外威에 있어서는 外曾祖父母外從姪及姪女 姨從姪及姪女 外再從兄兄弟姉妹 從姨姪及姪女가 그것이요, 妻族에 있어서는 妻祖父母..妻外祖父母 妻伯叔父母 妻姑母 妻兄弟及妻 妻姉妹 妻姪及姪女가 그것이요, 出嫁族에 있어서는 姑母夫姉妹夫 內從姪及姪女 外會孫及孫女가 그것이다. 勿論 親族의 範圍는 各自國家의 法制에 依하야 그 差異가 多大하다. 現今 日本 民法에는 自然血族 配偶者姻族 準血族으로써 親族을 삼고, 特히 血族은 六親等以內 姻族은, 三親等 以內에 限한다. 朝鮮의 從來 慣習은 血族十寸 準 血族一寸 配偶者 及 準配偶者 無寸 姻族九寸 姻族配偶者 三寸에 及한다. 이미 李朝 六典에 있어서는 明律에 準하야 制定하였고 最後의 法典인 刑法大典에는 親屬을 本宗 及 異姓의 有服親가 祖免親의 三類로 分하아 그 範圍를 規定하였다. 그러나 一般 慣習으로는 大槪 五服親을 親族의 範圍로 삼는 것은 우리의 周知한 바이다.






























본문5: 5


오복의 제도가 조선에 있어서 어느 시기에 확립한 것인가를 명언하기 어려우나, 추찰컨대 법제상 당률을 채용함에 시작할 것이요, 더욱히 상제의 예가 민간에 보급된 것은 고려 말엽에 문공가례가 전래한 후 鄭圃隱(정포은)이 솔선勵行(여행)함에 시작한 것이라 하겠으니. 家廟制(가묘제)의 창시에 관한 成俔(성현)의 말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잇는 일이다.
쪽수▶P37-1 五服의 制度가 朝鲜에 있어서 어느 時期에 確立한 것인가를 明言하기 難하나, 推察컨대 法制上 唐律을 採用함에 始作할 것이요, 더욱히 喪祭의 禮가 民間에 普及된 것은 高麗末葉에 文公家禮가 傳來한 後 鄭圃隱이 率先勵行함에 始作한 것이라 하겠으니. 家廟制의 創始에 關한 成俔의 言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잇는 일이다.
2, 상의 복장으로서 笠帽(입모) 및 長衫(장삼)은 다 生麤布(생추포)로써하고 苧布(저포)를 일절 금할 것.
쪽수▶P37-2 君子將營宮室 必光岡堂 以奉先世神主 此朱文公家禮也 自三國高麗以來 專奉釋氏 家廟之制不明 士大夫皆不以禮祀先 自冊隱鄭文忠公 倡明道學 嚴立祭祀之儀 然後家家立祠堂 始傳家舍於嫡嗣始重嫡庶之分 無子者必取族子以爲嗣國家大亨 用孟月 士大夫時亨用四仲月是有序也.(1)
오복의 제도와 불가분리의 관계롤 가지고 있는 이 家廟(가묘)의 제정이 과연 정포은에 시작한 것이냐 하면, 거기에는 다소 의문이 있으나, 여하간 문헌상으로 뚜렷히 전래한 바는 성현의 견해와 같다. 그뿐 아니라 恭讓王(공양왕) 2년 2월에 정포은의 建言(건언)에 의하여 대부사 서인의 제사에 관한 예제가 상세히 규정된 것은 고려사의 예지에 명료하니(2) 필경 고려 말기에 이르러 점차로 喪祭(상제)의 예속이 중요시 되었은 것을 다음의 기록으로써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쪽수▶P37-3 五服의 制度와 不可分離의 關係롤 가지고 잇는 이 家廟의 制定이 果然 鄭圃隱에 始作한 것이냐 하면, 거기에는 多少 疑問이 있으나, 如何間 文獻上으로 뚜렷히 傳來한 바는 成俔의 見解와 같다. 그뿐 아니라 恭讓王 二年 二月에 鄭圃隱의 建言에 依하야 大夫士 庶人의 祭祀에 關한 禮制가 詳細히 規定된 것은 高麗史의 禮志에 明瞭하니(2) 畢竟 高麗 末期에 이르러▶P38-1 漸次로 喪祭의 禮俗이 重要視 되었은 것을 다음의 記錄으로써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上略) 右务于祭法 宣今中外遵守 以成般俗 其中有人情 事勢不便者不妳拘宗法 其見存族長奉神主主祠 其餘嫡衆子孫並於其家與祭 衆子孫所生父母各作神主 祭於其家 致齋如常儀 三年六月乙己 命申行家廟之制.(3)
쪽수▶P38-2 (上略) 右务于祭法 宣今中外遵守 以成般俗 其中有人情 事勢不便者不妳拘宗法 其見存族長奉神主主祠 其餘嫡衆子孫並於其家與祭 衆子孫所生父母各作神主 祭於其家 致齋如常儀 三年六月乙己 命申行家廟之制.(3)
따라서 만약 상제의 예제에 위반한 자에 대하여서는 형벌을 가하여 엄중히 取締(취체)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即
쪽수▶P38-3 따라서 萬若 喪祭의 禮制에 違反한 者에 對하여서는 刑罰을 加하야 嚴重히 取締하기로 되었든 것이다. 即
聞父冊喪若夫喪 忘哀作樂雜戯徒一年. 釋服從吉徒三年. 匿不擧哀流二千里. 詐稱祖父母⋅父母死以求暇及有所避徒三年.(4)
쪽수▶P38-4 聞父冊喪若夫喪 忘哀作樂雜戯徒一年. 釋服從吉徒三年. 匿不擧哀流二千里. 詐稱祖父母⋅父母死以求暇及有所避徒三年.(4)
이라 규정하였으니, 居喪(거상)에 근신치 않은 자 복제에 遂守(수수)치 않은 자 當喪(당상)을 사칭하여 求暇(구가)하는 자 등은 국법에 처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도 이 당상하여 급가한 점에 관하여는 특히 仕官(사관)으로서 중요한 일이므로 일찍 성종 3년에
쪽수▶P38-5 이라 規定하였으니, 居喪에 謹愼치 않은 者 服制에 遂守치 않은 者 當喪을 詐稱하야 求暇하는 者 等은 國法에 處하였든 것이다. 그 中에도 이 當喪하야 給暇한 點에 關하야는 特히 仕官으로서 重要한 일이므로 일즉 成宗 四年에
凡五服聞喪 暇三分分之二 布剰日入暇限.(5)
쪽수▶P38-6 凡五服聞喪 暇三分分之二 布剰日入暇限.(5)
이라는 상중 급가제도를 규정하였었다. 그뿐 아니라 부모의 기일에도 급가를 제정하였으니, 벌서 景宗(경종) 6년 12월에 制父母忌日 依書儀一日兩宵給暇라 하였고 조부모・처・처부모・외조부모의 대소상 또는 기일에도 一日兩宵(일일양소)의 급가를 제정하였으며 혹은 임관의 京鄕(경향)에 의하여 혹은 官位(관위)의 품계에 의하여 혹은 문무관의 차이에 의하여-가령 공양왕 4년에는 군관에게 3년상을 제하였음과 같이-제정한 것이 고려사 예지에 역연하다.(6)
쪽수▶P38-7 이라는 喪中給暇制度를 規定하였었다. 그뿐 아니라 父母의 忌日에도 給暇를 制定하였으니, 벌서 景宗 六年 十二月에 制父母忌日 依書儀一日兩宵給暇라 하였고 祖父母・妻・妻父母・外祖父母의 大小祥 또는 忌日에도 一日兩宵의 給暇를 制定하였으며 或은 任官의 京鄕에 依하야 或은 官位의 品階에 依하야 或은 文武官의 差異에 依하야-暇令 恭讓王 四年에는 軍官에게 三年喪을 除하였음과 같이-制定한 것이 高麗史 禮志에 歷然하다.(6)
唯外祖父母・妻父母服 與伯叔同 無後者以三歲前遺棄小兒冒姓付籍者 即同己子 共以同宗之子親近爲先構後者 亦許行服三年之喪 天下之通喪 自今許終其制 其中關係國家要務必合起復者 啓明取旨奪情起復 大小軍官及不許丁憂者止行百日喪 其父母喪二十五月內 每月行朔望祭 至十三月初忌日 行小祥祭二十五月第二忌日 行大祥祭 二十七月晦行禪祭 二十八月一月始服吉服 嬰三年內不許娶婦及宴飮.
쪽수▶P39-2 唯外祖父母・妻父母服 與伯叔同 無後者以三歲前遺棄小兒冒姓付籍者 即同己子 共以同宗之子親近爲先構後者 亦許行服三年之喪 天下之通喪 自今許終其制 其中關係國家要務必合起復者 啓明取旨奪情起復 大小軍官及不許丁憂者止行百日喪 其父母喪二十五月內 每月行朔望祭 至十三月初忌日 行小祥祭二十五月第二忌日 行大祥祭 二十七月晦行禪祭 二十八月一月始服吉服 嬰三年內不許娶婦及宴飮.
이러한 부가 조건뿐만 아니라 이 때의 오복제정이 명률의 그것에 비하여 다소 간략된 점도 잇거니와, 글지라도 그 실행이 민간에까지 보급될 수는 없었던 것은, 대략 추측에 남음이 있을 것이요, 이조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렇던 것을 문헌상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조의 초기 정종 원년 기묘 춘정월에 門下府(문하부)는 학생 文珠奴(문주노)라는 자가 그의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실행치 않고 겨우 1년을 지나 娶妻(취처)하였다는 일로 그를 처벌하도록 대왕에게 力請(역청)하였던일이 있엇다.
쪽수▶P39-3 이러한 附加條件뿐만 아니라 이 때의 五服制定이 明律의 그것에 比하야 多少 簡略된 點도 잇거니와, 글지라도 그 實行이 民間에까지 普及될 수는 없었던 것은, 大略 推测에 남음이 있을 것이요, 李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튼것을 文獻上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即 李朝의 初期 定宗 元年 己卯 春正月에 門下府는 學生 文珠双라는 者가 그의 父親喪을 當하야 三年喪을 實行치 않고 겨우 一年을 지나 娶妻하엿다는 일로 그롤 處罰하도록 大王에게 力請하였던일이 있엇다.
初門下府上書曰 三年之喪天下之通義 前朝之季禮制頹壊 人心衰薄 百日即吉 飮酒嶼肉 男女婚姻 無所不爲 今國家復行三年之喪 明存著令 學生文珠奴 其父承渡之喪 甫踰年 共諸兄皆制中 而先自釋服 娶都承旨李文和之女 以于成憲 其母權氏稱有內旨 其罪己不得而治矣 然亦豈不終制而在妻家乎 伏惟命還共家 伸終其制 自今以後 三年之內欲行嫁娶 黃緣取旨者 痛行經理.(8)
쪽수▶P39-4 初門下府上書曰 三年之喪天下之通義 前朝之季禮制頹壊 人心衰薄 百日即吉 飮酒嶼肉 男女婚姻 無所不爲 今國家▶P40-1 復行三年之喪 明存著令 學生文珠奴 其父承渡之喪 甫踰年 共諸兄皆制中 而先自釋服 娶都承旨李文和之女 以于成憲 其母權氏稱有內旨 其罪己不得而治矣 然亦豈不終制而在妻家乎 伏惟命還共家 伸終其制 自今以後 三年之內欲行嫁娶 黃緣取旨者 痛行經理.(8)
이에 대하여 정종은 문주노틀 벌하기를 불허하고 다만 이 기회에 際(제)하여 「今後自除抑喪者糾理」라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하부는 再疏(재소)에 이르러 「願依前日所申以正風俗」이라 하고 끝끝내 그의 죄를 규탄하였던 것이다. 이것으로써 3년상의 勵行(여행)이 법정상 如何(여하)히 중요한 문제였던가를 알 것이요 또한 3년상제가 如何(여하)히 실행난인 예제이었던가를 窺知(규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태종 3년 계미 하4월 司諫院(사역원)에서 시무 數條(수조)를 거시하여 상소한 중 상복에 관한 사항, 5개조를 지적하였으니 또한 이러한 사정을 여실히 전한 바 있는 것이다.
쪽수▶P40-2 이에 對하야 定宗은 文珠奴틀 罰하기를 不許하고 다만 이 機會에 際하야 「今後自除抑喪者糾理」라는 程度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하야 門下府는 再疏에 이르러 「願依前日所申以正風俗」이라 하고 꿋꿋내 그의 罪를 糾彈하엿든 것이다. 이것으로써 三年喪의 勵行이 法政上 如何히 重要한 問題이엿든가틀 알 것이요 또한 三年喪制가 如何히 實行難인 禮制이엿든가틀 窺知할 수 있는 것이다. 또 太宗 三 年癸末 夏四月 司諫院에서 時務數條틀 舉示하야 上疏한 中 喪服에 關한 事項, 五箇條를 指摘하였으니 또한 이러한 事情을 如實히 傳한 바 있는 것이다.
今三年之喪 自公卿士大夫悉遵其制 然而未久 間有未備者焉 古者婦女喪服 除出嫁者爲本宗減一等外與男于同也 今三年之裏 男子皆從本服 而婦女尙循前期之弊 皆以百日爲限而釋服或子服喪 方居衰経而爲榷母者 纔過百日釋服改嫁 恬不爲愧 男女喪服之不同 初若小失 而其流之弊 至於如此 可勝歎哉 此末備者一也.
쪽수▶P40-3 今三年之喪 自公卿士大夫悉遵其制 然而未久 間有未備者焉 古者婦女喪服 除出嫁者爲本宗減一等外與男于同也 今三年之裏 男子皆從本服 而婦女尙循前期之弊 皆以百日爲限而釋服或子服喪 方居衰経而爲榷母者 纔過百日釋服改嫁 恬不爲愧 男女喪服之不同 初若小失 而其流之弊 至於如此 可勝歎哉 此末備者一也.
古者大喪之服 男女無異也 其在無朝婦女則不服麤布 然而笠帽當甲生麤布 故其服斬喪之跡可見也 今婦女出入非有唯 不着斬衰之服 至於贫帽亦用細熟苧布 間有貧賤者 依舊用麤布則富者笑之 故亦皆勉爲 凡禮之變 皆起於微 若此不革 精恐婦女斬衰之服 亦將變爲緦麻矣 此其末備者二也.
쪽수▶P40-4 古者大喪之服 男女無異也 其在無朝婦女則不服麤布 然而笠帽當甲生麤布 故其服斬喪之跡可見也 今婦女出入非有唯 不着斬衰之服 至於贫帽亦用細熟苧布 間有貧賤者 依舊用麤布則富者笑之 故亦皆勉爲 凡禮之變 皆起於微 若此不革 精恐婦女斬衰之服 亦將變爲緦麻矣 此其末備者二也.
古者居父母之喪者 蔬食水飮杖而後起 若過喪葬不得己之事 非騎馬不能行 故乘撲馬布裏鞍轡之文 載於禮書 今人徃々飮酒食稻 無異平者 則其氣力不須杖矣 乃因乘撲馬之丈 不因喪事而乘肥馬 奔馳朝路者有之 此未備者三也.
쪽수▶P40-5 古者居父母之喪者 蔬食水飮杖而後起 若過喪葬不得己之事 非騎馬不能行 故乘撲馬布裏鞍轡之文 載於禮書 今人徃々飮酒食稻 無異平者 則其氣力不須杖矣 乃因乘撲馬之丈 不因喪事而乘肥馬 奔馳朝路者有之 此未備者三也.
文公家證菖同母異父之兄弟姉妹 正服小功五月 今此條不嚴六典 此未備者四也.
쪽수▶P41-1 文公家證菖同母異父之兄弟姉妹 正服小功五月 今此條不嚴六典 此未備者四也.
文公家體爲庶母之乳養已者 服小功五月 爲乳母緦麻三月 然則乳母雖非父妾有服明矣, 今六典內釋乳母曰 父妾之乳响者則是乳母 心父妾而後有服 其非父妾者無服也. (中略) 此未備者五也.(9)
쪽수▶P41-2 文公家體爲庶母之乳養已者 服小功五月 爲乳母緦麻三月 然則乳母雖非父妾有服明矣, 今六典內釋乳母曰 父妾之乳响者則是乳母 心父妾而後有服 其非父妾者無服也. (中略) 此未備者五也.(9)
이러한 상소를 대왕은 嘉納(가납)하여 법규로 제정하였으니 즉
쪽수▶P41-3 이러한 上疏률 大王은 嘉納하야 法規로 制定하였으니 即
1, 여자의 복으로서 부모・舅姑(구고)・부의 상에는 종실과 사대부의 집을 막론하고 100일 釋服(석복)치 않고 문공가례에 의하여 3년상을 복할 것.
쪽수▶P41-4 一, 女子의 服으로서 父母・舅姑・夫의 喪에는 宗室과 士大夫의 집을 莫論하고 百日釋服치 않고 文公家禮에 依하야 三年喪을 服할 것.
3, 남자로서 斬衰(참최) 복한 자는 一且緩急(일차완급)의 경우라 할지라도 기마를 승용하여 朝路(조로)에 參入(참입)할 수 없을 것
쪽수▶P41-6 三, 男子로서 斬衰服한 者는 一且緩急의 境遇라 할지라도 騎馬를 乘用하야 朝路에 參入할 수 업슬 것
4, 同母異父(동모이부)의 형제자매는 소공을 복할 수 있을 것.
쪽수▶P41-7 四, 同母異父의 兄弟姉妹는 小功을 服할 수 있을 것.
5, 유모는 부첩이 아닐지라도 시마 3월을 복할가.(10)
쪽수▶P41-8 五, 乳母는 父妾이 아닐지라도 緦麻 三月을 服할가.(10)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문공가례 기준하여 중국의 예제를 철저히 실행하도록 상당히 세밀한 점에까지 국가 법제를 이루게 되엿다.
쪽수▶P41-9 等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文公家禮 基準하야 中國의 禮制를 徹底히 實行하도톡 相當히 細密한 點에까지 國家法制를 이루게 되엿다.
복제와 연관하여 祖先(조선) 제사의 예를 또한 점차로 중요시하게 되었으니, 태조 원년 9월 임인 都評議使司(도평의사사) 裴克廉(배극렴)・趙浚(조준) 등이 22개조의 시정 문제를 상언한 중에
쪽수▶P41-10 服制와 聯關하야 祖先祭祀의 禮를 또한 漸次로 重要視하게 되였으니, 太祖 元年 九月 壬寅 都評議使司 裴克廉・趙浚 等이 二十二箇條의 施政問題를 上言한 中에
自公卿至于下士 皆立家廟 以祭先代 底人祭於其寢云々. 凡主喪者父母在殯 朝夕臨祭母得出外.(11)
쪽수▶P41-11 自公卿至于下士 皆立家廟 以祭先代 底人祭於其寢云々. 凡主喪者父母在殯 朝夕臨祭母得出外.(11)
라 하였으며, 동 6년 4월 정미에는 간관의 상서에 또한 그 勵行(여행)을 역설하였으니
쪽수▶P41-12 라 하엿스며, 同 六年 四月 丁未에는 諫官의 上書에 또한 그 勵行을 力說하였으니
一定都之初首建宗廟以奉時祀 以薦時物報本之誠 無所不然 而四時之亨 每 命大臣以攝行 願自今除無時薦新之外 四時大亨 必須親裸以明奉先之禮 以報本之誠 一士大夫家廟之制 己有著令 而專尙浮屠 語事鬼神 曾不立廟 敢有違令者 尙循舊弊者 令憲司糾理 (中略) 上兪允施行.(12)
쪽수▶P42-1 一定都之初首建宗廟以奉時祀 以薦時物報本之誠 無所不然 而四時之亨 每 命大臣以攝行 願自今除無時薦新之外 四時大亨 必須親裸以明奉先之禮 以報本之誠 一士大夫家廟之制 己有著令 而專尙浮屠 語事鬼神 曾不立廟 敢有違令者 尙循舊弊者 令憲司糾理 (中略) 上兪允施行.(12)
이라 한 것이 그것이니, 태조의 교지 제4조에 관혼상제를 돈후하게 하라는 항목이 있음도 무리가 아니였다. 여기에도 「專尙浮屠韻事鬼神」이라 함에 보다시피 아직 불교의 귀의하 巫姿(무자)의 신앙이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므로 인하여 先祭祀(선제사)의 예교를 실행하기 難(난)하였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태종 12년 하5월 무자 漢城府(한성부)의 시정방침 3사를 진술한 중에 가묘제를 職行(직행)치 않은 자를 糾理(규리)키로 하여
쪽수▶P42-2 이라 한 것이 그것이니, 太祖의 敎旨 第四條에 冠婚喪祭를 敦厚하게 하라는 項目이 있음도 無理가 아니엿다. 여기에도 「專尙浮屠韻事鬼神」이라 함에 보다시피 아즉 佛敎의 歸依하 巫姿의 信仰이 相當한 勢力을 가젔음으로 因하야 先祭祀의 禮敎를 實行하기 難하얏슴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太宗 十二年 夏五月 戊子 漢城府의 施政方針 三事를 陳述한 中에 家廟制를 職行치 않은 者를 糾理키로 하야
其一家廟之設 己有著令 士大夫廣占家基 崇峻堂寢 不曾立廟 殊無報本之意 乞令承重者 限今年畢立祠堂 違者移文 憲司料理.(13)
쪽수▶P42-3 其一家廟之設 己有著令 士大夫廣占家基 崇峻堂寢 不曾立廟 殊無報本之意 乞令承重者 限今年畢立祠堂 違者移文 憲司料理.(13)
다 하였고, 세종 2년 11월 신미에는 一倒(일도)를 문공가례에 의하고 불사를 통금하며 중외의 관리로 하여금 가묘 時亨(시형)의 제에 종하지 않는 자들을 논죄키로 하여
쪽수▶P42-4 다 하엿고, 世宗 二年 十一月 辛未에는 一倒를 文公家禮에 依하고 佛事를 痛禁하며 中外의 官吏로 하여금 家廟時亨의 制에 從하지 않는 者들을 論罪키로 하야
禮曹啓 元續六典內 各年判旨中外官吏 或不奉行 其不奉行條件 謹錄以聞 請申明舉行 違者論罪云々(14)
쪽수▶P42-5 禮曹啓 元續六典內 各年判旨中外官吏 或不奉行 其不奉行條件 謹錄以聞 請申明舉行 違者論罪云々(14)
이라 하였으니, 사대부 간에도 아직 가묘제가 실행난이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간에는 더욱이 실행난이었을 것이니. 성종 3년 6월의 傳旨(전지)에 의하면
쪽수▶P42-6 이라 하였으니, 士大夫 間에도 아즉 家廟制가 實行難이였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民間에는 더욱히 實行難이였을 것이니. 成宗 三年 六月의 傳旨에 依하면
曹司憲府曰 在世宗朝 從文公家禮 令士大夫立家廟 庶人立淨室 祭以四仲朔 令此制陵夷士大夫不立家廟 甚者不作神主代以斥摭 士大夫尙爾 況庶人乎 宜加檢察 以警其餘.(15)
쪽수▶P42-7 曹司憲府曰 在世宗朝 從文公家禮 令士大夫立家廟 庶人立淨室 祭以四仲朔 令此制陵夷士大夫不立家廟 甚者不作神主代以斥摭 士大夫尙爾 況庶人乎 宜加檢察 以警其餘.(15)
라 함으로써 알 일이다. 여기 「代以紙錢」이라한 紙錢(지전)은 즉 지전(笺, 전)의 이름으로-牋(전)과 錢(전)이 음형 共似(공사)하여 淚用(누용)된 것인 듯-금일의 紙榜(지방)이란 것이니 이는 이미 고려조로부터 민간에 유행되어, 내려오던 습속이었다. 여하간 民庶(민서)에 있어서도 撤次(철차)로 예교에 從(종)하여 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쪽수▶P43-1 라 함으로써 알 일이다. 여긔 「代以紙錢」이라한 紙錢은 即 紙錢(笺)의 謂로-牋과 錢이 音形共似하야 淚用된 것인 듯-今日의 紙榜이란 것이니 이는 이미 高麗朝로부터 民間에 流行되여, 내려오든 習俗이였다. 如何間 民庶에 있어서도 撤次로 禮敎에 從하여 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대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선조 제사의 세대에 관하여 現下(현하) 우리의 주지한 바 상하를 물론하고 4대조에 미친 것이나, 이것은 중국 예제의 실행 당초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선조 봉사의 세대는 품계 즉 사회적 계급에 의하여 차이가 있으니, 벌써 이조 국초의 법전에 규정된 바이였다. 즉
쪽수▶P43-2 그런대 또 한가지 看過할 수 없는 것은 先祖 祭祀의 世代에 關하야 現下 우리의 周知한 바 上下를 勿論하고 四代祖에 及한 것이나, 이것은 中國 禮制의 實行 當初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即 先祖奉祀의 世代는 品階 即 社會的 階級에 依하야 差異가 있으니, 벌서 李朝 國初의 法典에 規定된 바이였다. 即
文武官六品以上三代 七品以下二代 庶人止考妣.(16)
쪽수▶P43-3 文武官六品以上三代 七品以下二代 庶人止考妣.(16)
란 것이 그것이요, 庶人(서인)은 考妣(고비)의 봉사에 한한 것이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또 언제부터 조선에 있어서는 상하를 물론하고 4대조를 봉사하게 되었느냐 하면, 대개는 이조 초엽 이래로 예교 문화가 점차 민중화함에 따라 민중이 상류 계급의 생활형식을 모방하는 중 부지불식 간에 그리된 것이겠고 특히 주자학의 영향에 의함이 크다할 것이다. 즉 주자의 말에 「高祖有服 不可不祭」라 함에 대하여 예교를 숭상하는 학자들이 이것을 실천하도록 주장함에 시작한 것인가 한다. 문헌비고에
쪽수▶P43-4 란 것이 그것이요, 庶人은 考妣의 奉祀에 限한 것이였다. 그러면 어찌하야 또 언제부터 朝鮮에 있어서는 上下를 勿論하고 四代祖를 奉祀하게 되었느냐 하면, 大槪는 李朝初葉 以來로 禮敎文化가 漸次 民衆化함에 따라 民衆이 上曆階級의 生活形式을 模倣하는 中 不知不識 間에 그리된 것이겠고 特히 朱子學의 影響에 依함이 크다할 것이다. 卽 朱子의 말에 「高祖有服 不可不祭」라 함에 對하야 禮敎를 崇尙하는 學者들이 이것을 實踐하도록 主張함에 始作한 것인가 한다. 文獻備考에
金長生曰 祭三代 雖時王之制 然程朱询謂高祖有服 不可不祭 我東諸賢 皆祭四代.(17)
쪽수▶P43-5 金長生曰 祭三代 雖時王之制 然程朱询謂高祖有服 不可不祭 我東諸賢 皆祭四代.(17)
라 함은 곧 이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겟다.
쪽수▶P43-6 라 함은 곳 이러한 事情을 말한 것이겟다.
이와 같이 하여 문공가례에 기준한 예교의 철저는 국가의 법제로서 이미 중요한 문화요소를 이룬 것임으로 석학 鴻儒(홍유)는 물론이요 적어도 유학을 學修(학수)한 자는 가례를 연구하는 경향이 顯殊(현수)하게 되었다. 이윽고 조선의 예론은 비상한 발달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제 이조 연간의 현저한 예론가와 그 저술을 거시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43-7 이와 같이 하야 文公家禮에 基準한 禮敎의 徹底는 國家의 法制로서 이미 重要한 文化要素를 이룬 것임으로 碩學鴻儒는 勿論이요 적어도 儒學을 學修한 者는 家禮를 硏究하는 傾向이 顯殊하게 되었다. 이윽고 朝鮮의 禮論은 非常한▶P44-1 發達을 이루게 되였으니, 이제 李朝 年間의 顯著한 禮論家와 그 著述을 擧示하면 다음과 같다.
晦齋(회재)・李彥迪(이언적) 奉先雜儀(봉선잡의) 명종시
쪽수▶P44-2 晦齋・李彥迪 奉先雜儀 明宗時
退溪(퇴계)・李 滉(이 황) 退溪喪祭禮問答(퇴계상제례문답) 명・선조시
쪽수▶P44-3 退溪・李 滉 退溪喪祭體問答 明・宣祖時
高峯(고봉)・奇大升(기대승) 高峯集禮論篇(고봉집례론편) 선조시
쪽수▶P44-4 高峯・奇大升 高峯集禮論篇 宣祖時
栗谷(율곡)・李 珥(이 이) 擊蒙要訣(격몽요결) 동상
쪽수▶P44-5 栗谷・李珥 擊蒙要訣 同上
芝山(지산)・曹好益(조호익) 家禮考證(가례고증) 동상
쪽수▶P44-6 芝山・曹好益 家禮考證 同上
沙溪(사계)・金長生(김장생) 家禮輯覽(가례집람) 효종시
쪽수▶P44-7 沙溪・金長生 家禮輯覽 孝宗時
市南(시남)・兪 榮(유 영) 家禮源流(가례원류) 숙종시
쪽수▶P44-8 市南・兪 榮 家禮源流 肅宗時
申義慶 撰(신의경 찬) 金長生 修(김장생 수) 喪禮備要(상례비요) 인조시
쪽수▶P44-9 申義慶 撰 金長生 修 喪禮備要 仁祖時
尤庵(우암)・宋時烈(송시열) 左庵經禮問答(우암경례문답) 숙종시
쪽수▶P44-10 尤庵・宋時烈 左庵經禮問答 肅宗時
란 것이 그것이요, 庶人(서인)은 考妣(고비)의 봉사에 한한 것이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또 언제부터 조선에 있어서는 상하를 물론하고 4대조를 봉사하게 되었느냐 하면, 대개는 이조 초엽 이래로 예교 문화가 점차 민중화함에 따라 민중이 상류 계급의 생활형식을 모방하는 중 부지불식 간에 그리된 것이겠고 특히 주자학의 영향에 의함이 크다할 것이다. 즉 주자의 말에 「高祖有服 不可不祭」라 함에 대하여 예교를 숭상하는 학자들이 이것을 실천하도록 주장함에 시작한 것인가 한다. 문헌비고에
쪽수▶P43-4 란 것이 그것이요, 庶人은 考妣의 奉祀에 限한 것이였다. 그러면 어찌하야 또 언제부터 朝鮮에 있어서는 上下를 勿論하고 四代祖를 奉祀하게 되었느냐 하면, 大槪는 李朝初葉 以來로 禮敎文化가 漸次 民衆化함에 따라 民衆이 上曆階級의 生活形式을 模倣하는 中 不知不識 間에 그리된 것이겠고 特히 朱子學의 影響에 依함이 크다할 것이다. 卽 朱子의 말에 「高祖有服 不可不祭」라 함에 對하야 禮敎를 崇尙하는 學者들이 이것을 實踐하도록 主張함에 始作한 것인가 한다. 文獻備考에
金長生曰 祭三代 雖時王之制 然程朱询謂高祖有服 不可不祭 我東諸賢 皆祭四代.(17)
쪽수▶P43-5 金長生曰 祭三代 雖時王之制 然程朱询謂高祖有服 不可不祭 我東諸賢 皆祭四代.(17)
라 함은 곧 이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겟다.
쪽수▶P43-6 라 함은 곳 이러한 事情을 말한 것이겟다.
이와 같이 하여 문공가례에 기준한 예교의 철저는 국가의 법제로서 이미 중요한 문화요소를 이룬 것임으로 석학 鴻儒(홍유)는 물론이요 적어도 유학을 學修(학수)한 자는 가례를 연구하는 경향이 顯殊(현수)하게 되었다. 이윽고 조선의 예론은 비상한 발달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제 이조 연간의 현저한 예론가와 그 저술을 거시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43-7 이와 같이 하야 文公家禮에 基準한 禮敎의 徹底는 國家의 法制로서 이미 重要한 文化要素를 이룬 것임으로 碩學鴻儒는 勿論이요 적어도 儒學을 學修한 者는 家禮를 硏究하는 傾向이 顯殊하게 되었다. 이윽고 朝鮮의 禮論은 非常한▶P44-1 發達을 이루게 되였으니, 이제 李朝 年間의 顯著한 禮論家와 그 著述을 擧示하면 다음과 같다.
晦齋(회재)・李彥迪(이언적) 奉先雜儀(봉선잡의) 명종시
쪽수▶P44-2 晦齋・李彥迪 奉先雜儀 明宗時
退溪(퇴계)・李 滉(이 황) 退溪喪祭禮問答(퇴계상제례문답) 명・선조시
쪽수▶P44-3 退溪・李 滉 退溪喪祭體問答 明・宣祖時
高峯(고봉)・奇大升(기대승) 高峯集禮論篇(고봉집례론편) 선조시
쪽수▶P44-4 高峯・奇大升 高峯集禮論篇 宣祖時
栗谷(율곡)・李 珥(이 이) 擊蒙要訣(격몽요결) 동상
쪽수▶P44-5 栗谷・李珥 擊蒙要訣 同上
芝山(지산)・曹好益(조호익) 家禮考證(가례고증) 동상
쪽수▶P44-6 芝山・曹好益 家禮考證 同上
沙溪(사계)・金長生(김장생) 家禮輯覽(가례집람) 효종시
쪽수▶P44-7 沙溪・金長生 家禮輯覽 孝宗時
市南(시남)・兪 榮(유 영) 家禮源流(가례원류) 숙종시
쪽수▶P44-8 市南・兪 榮 家禮源流 肅宗時
申義慶 撰(신의경 찬) 金長生 修(김장생 수) 喪禮備要(상례비요) 인조시
쪽수▶P44-9 申義慶 撰 金長生 修 喪禮備要 仁祖時
尤庵(우암)・宋時烈(송시열) 左庵經禮問答(우암경례문답) 숙종시
쪽수▶P44-10 尤庵・宋時烈 左庵經禮問答 肅宗時
明齋(명재)・尹 拯(윤 증) 明齋疑禮問答(명재의례문답) 동상
쪽수▶P44-11 明齋・尹 拯 明齋疑禮問答 同上
退修齋(퇴수재)・申逝(신서) 疑禮類說(의례유설) 동상
쪽수▶P44-12 退修齋・申逝 疑禮類說 同上
南溪(남계)・朴世采(박세채) 南溪熊說(남계웅설, 이 외에 六禮疑輯(육례의집)・三禮矣(삼례의)・家禮要解(가례요해) 등이 있음) 동상
쪽수▶P44-13 南溪・朴世采 南溪熊說(此外에 六禮疑輯・三禮矣・家禮要解 等이 있음) 同上
星湖(성호)・李 瀷(이 익) 星湖僿說禮論篇(성호사설예론편) 동상
쪽수▶P44-14 星湖・李 瀷 星湖僿說禮論篇 同上
陶庵(도암)・李 繹(이 역) 四禮便覽(사례편람) 영조시
쪽수▶P44-15 陶庵・李 繹 四禮便覽 英祖時
硏經齋(연경재)・成海應(성해응) 硏經齋全集禮論篇(연경재전집례론편) 정종시
쪽수▶P44-16 硏經齋・成海應 硏經齋全集禮論篇 正宗時
茶山(다산)・丁若鏞(정약용) 喪禮四箋(상례사전) 동상
쪽수▶P45-1 某山・丁若鏞 喪禮四箋 同上
東巖(동암)・柳長源(유장원) 常變通攷(상변통고) 동상
쪽수▶P45-2 東巖・柳長源 常變通攷 同上
雅亭(아정)・李德憲(이덕헌) 士小節(사소절) 동상
쪽수▶P45-3 雅亭・李德憲 士小節 同上
性齋(성재)・許 傳(허 전) 士儀(사의) 이태왕시
쪽수▶P45-4 性齋・許 傳 士儀 李太王時
이 중에 허전의 사의는 가장 완비한 것이요, 민간에 가장 보급된 것은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일 것이나, 이러한 예론 중에 각자 4색당의 파벌이 있음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원래 이와 같이 예서가 叢出(총출)함은 예론에 관한 해석의 相違(상위)가 정쟁과 관련하여 정계학계의 일대 문제로 됨에 의한 것이다. 이 예론적 정쟁의 문제는 우리가 널리 잘 알다시피 일찍이 효종 시대에 시작한 것이니, 이제 그 경로를 대략 고찰하려 한다.
쪽수▶P45-5 이 中에 許傳의 土儀는 가장 完備한 것이요, 民間에 가장 普及된 것은 喪禮備要와 四禮便覽일 것이나, 이러한 禮論 中에 各自 四色黨의 派閥이 있음은 決코 看過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元來 이와 같이 禮書가 叢出함은 禮論에 關한 解釋의 相違가 攻爭과 關聯하야 政界學界의 一大問題로 됨에 依한 것이다. 이 禮論的 政爭의 問題는 우리가 널리 잘 아다시피 일즉히 孝宗時代에 始作한 것이니, 이제 그 經路를 大略 孝察하려 한다.
이조 19대 효종대왕이 재위 10년에 승하하자 그 부왕 인조의 繼妃(계비)로 아직 在世(재세)하였던 慈懿大妃(자의대비) 趙氏(조씨)의 복할 바 상에 관하여 爲政(위정)의 耍路(요로)에 있는 당국자 간에, 그 의견이 양립하게 되었다. 즉 일설에는 3년상을 복할 것이라 하고 또 일설에는 기년상을 복할 것이라는 것이다. 의례 참최장에 의하면 모는 嫡長子(적장자)를 위하여 참최 3년상을 복할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의례 喪服章疎(상복장소)에 의하면 설혹 大統(대통)을 權承(권승)한 사람에 대하여서 일지라도 3년상을 복하지 아니하여도 좋다는 경우가 있으니, 효종대왕은 곧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 일설이다. 즉 효종은 윤서로 보아 제2자임으로 趙大妃(조대비)는 기년상을 복할 것이라는 것이니, 이 설을 취한 이는 효종 일대를 통하여 중용되었던 요인이며 당대의 석학인 우암・송시열이요, 이와 화합한 碩領(석령)은 그의 同鄕同宗(동향동종)인 同春(동춘)・宋浚吉(송준길)이었다. 이에 대하여 의례 斬衰章疎(참최장소)에 제1자 死(사)하면 適妻(적처) 소생의 제2장자를 立(입)하여 곧 장자로 삼을 것을 규정하였음에 조차, 효종대왕은 곧 이 경우에 해당함으로 조대비는 3년상을 복할 것이라 하는 것이니, 이 설를 주장한 이는 때마침 정권 실추의 불우에 처한 남인의석령 尹鑴(윤휴)요 이와 화합한 在朝(재조)의 인물은 掌令(장령) 許穆(허목)이였다. 이제 이 양립의 견해는 조선 요인을 통하여 바야흐로 당파가 심각하여 오던 南西(남서) 2파에 분립하여 이것을 채택할 위정 당국의 각료는 용이히 처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니, 실록에 전한 바 경로는 대략 이러하다.
쪽수▶P45-6 李朝 十九代 孝宗大王이 在位 十年에 昇遐하자 그 父王 仁祖의 繼妃로 아즉 在世하였든 慈懿大妃 趙氏의 服할 바 喪에 關하야 爲政의 耍路에 있는 當局者 間에, 그 意見이 兩立하게 되였다. 即 一說에는 三年喪을 服할 것이라 하고 또 一說에는 朞年喪을 服할 것이라는 것이다. 儀禮 斬衰章에 依하면 母는 嫡長子틀 爲하야 斬衰 三年喪을 服할 것으로 規定되여 있는 데, 儀禮 喪服章疎에 依하면 設或 大統을 權承한 人에 對하여서 일지라도 三年喪을 服하지 아니하여도 좋다는 境遇가 있으니, 孝宗大王은 곧 이러한 境遇에 該當하다는 것이 그 一說이다. 即 孝宗은 倫序로 보아 第二子임으로 趙大妃는 朞年喪을 服할 것이라는 것이니, 이 說을 取한 이는 孝宗 一代롤 通하야 重用되였든 要人이며 當代의 碩學인 尤庵・朱時烈이요, 이와 和合한 碩領은 그의 同鄕同宗인 同春・宋浚吉이였다. 이에 對하야 儀禮 斬衰章疎에 第一子 死하면 適妻所生의 第二長子를 立하야 곧 長子로 삼을 것을 規定하였음에 조차, 孝宗大王은 곧 이 境遇에 該當함으로 趙大妃는 三年▶P46-1 喪을 服할 것이라 하는 것이니, 이 說를 主張한 이는 때마츰 政權失墜의 不遇에 處한 南人의碩領 尹鐫요 이와 和合한 在朝의 人物은 掌令 許穆이였다. 이제 이 兩立의 見解는 朝鮮 要人을 通하야 바야흐로 黨派가 深刻하여 오든 南西 二派에 分立하야 이것을 採擇할 爲政 當局의 閣僚는 容易히 處決할 수가 없었든 것이니, 實錄에 傳한바 經路는 大略 이러하다.
顯宗元年己亥五月乙丑 禮曹又 達 成懿王大妃爲 大行大王喪服制 不載於五禮儀 或云當服三年 或云當服朞年 末有可以攻據者 請議于大臣 王世子下令曰兩賛善一體問議 領敦寧府事李景爽・領議政鄭太和・延陽府院君李時白・左議政沈之源・原平府院君元斗杓・完南府院君李厚源以爲古禮雖不能暁解放之 時王之制似當碁年之服 吏曹判書宋時列・右參賛宋浚吉以爲古今禮律旣有異同 旁王乏制尤難輕議 而諸大臣旣以時王之判爲議 臣等不敢更容他說 王世子下令曰 依議初 大喪出而議禮者 各持其說 或有言 王大妃於大行大王喪當服次長子三年者 或有言當服爲君新之 斬者主爲君 斬者前持平尹鐫之說也.(18)
쪽수▶P46-1 顯宗元年己亥五月乙丑 禮曹又 達 成懿王大妃爲 大行大王喪服制 不載於五禮儀 或云當服三年 或云當服朞年 末有可以攻據者 請議于大臣 王世子下令曰兩賛善一體問議 領敦寧府事李景爽・領議政鄭太和・延陽府院君李時白・左議政沈之源・原平府院君元斗杓・完南府院君李厚源以爲古禮雖不能暁解放之 時王之制似當碁年之服 吏曹判書宋時列・右參賛宋浚吉以爲古今禮律旣有異同 旁王乏制尤難輕議 而諸大臣旣以時王之判爲議 臣等不敢更容他說 王世子下令曰 依議初 大喪出而議禮者 各持其說 或有言 王大妃於大行大王喪當服次長子三年者 或有言當服爲君新之 斬者主爲君 斬者前持平尹鐫之說也.(18)
이와 같이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상복과 같은 것으로 말하면 예론에 확정한 바가 없는데, 조대비는 기왕 적장자 昭顯世子(소현세자)(휘(왕))의 死(사)에 당하여 참최 3년상을 복하였고, 사실상 효종은 제2장자인 만큼, 일년상설을 취할만도 하려니와, 효종은 원래 차자이지만 이미 嫡次長子(적차장자)로서 대통을 계승하였고 또 조대비와 효종과는 모자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君臣關係(군신관계)에 있었음으로 爲君(위군) 참최 3년이라는 원리에 비추어보면 실로 3년상설을 취할말만도 하니, 그 양자 택일이 난처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領議政(영의정) 鄭太和(정태화)는 마지 못하여 송시열에게 그 1년설의 근거에 관한 설명을 요구함에 송시열은 곧 이러한 이유로써 대답하였다.
쪽수▶P46-2 이와 같이 孝宗에 對한 趙大妃의 喪服과 같은 것으로 말하면 禮論에 確定한 바가 없는데, 趙大妃는 己徃 嫡長子底顯世于(諱溼)의 死에 當한야 斬衰三年喪을 服하였고, 事實上 孝宗은 第二長子인 만큼, 一年喪說를 取할만도 하려니와, 孝宗욱 元來 次子이지만 이미 嫡次長子로서 大統을 繼承하였고 또 趙大妃와 孝宗과는 母子의 關係에 있다 할지라도 君臣關係에 있었음으로 爲君斬衰三年이라는 原理에 비추어보면 實로 三年喪說을 取할말만도 하니, 그 兩者 擇一이 難處하였든 것이다. 이때에 領議政 鄭太和는 마지 못하야 宋時烈에게 그 一年說의 根據에 關한 說明을 要求함에 宋時烈은 곧 이러한 理由로써 對答하였다.
禮有之自天子以至士大夫 長子死而次適立則其服亦與長子同 而其下又有四棟之說 以爲庶子承重則不服三年 以古禮言之 次逋亦庶子也 上下之說 自相矛盾如此 又無先儒定論 可据以爲訂者 將不可取此而捨彼矣.(19)
쪽수▶P47-1 禮有之自天子以至士大夫 長子死而次適立則其服亦與長子同 而其下又有四棟之說 以爲庶子承重則不服三年 以古禮言之 次逋亦庶子也 上下之說 自相矛盾如此 又無先儒定論 可据以爲訂者 將不可取此而捨彼矣.(19)
이 4종이라 함은 「亦正亦體(역정역체)」 「正而不體(정이불체)」 「體而不正(체이부정)」 「不正不體(부정불체)」의 경우를 말한 것이다. 「亦正亦體(역정역체)」는 적장자가 계승하여 혈통상으로나 윤서상으로나 정당한 경우요 「부정불체」는 庶孫(서손)이 계승하여 혈통상으로나 윤서상으로나 정당치 못한 경우이니 이 두 경우는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정이불체」는 적장손이 계승하여 혈통상으로는 정당하나 윤서상으로는 부정당한 경우요 「체이부정」 서자 즉 차자가 계승하여 윤서상으로는 정당하나 혈통상으로는 부정당한 경우이니, 따라서 이 두 경우에는 다소 문제가 있는 것인데, 이것을 인조에 관하여 말하자면 소현세자는 「정이불체」요 효종은 「체이부정」이라는 것이다.
쪽수▶P47-2 이 四種이라 함은 「亦正亦體」 「正而不體」 「體而不正」 「不正不體」의 境遇를 말한 것이다. 「亦正亦體」는 嫡長子가 繼承하야 血統上으로나 倫序上으로나 正當한 境遇요 「不正不體」는 庶孫이 繼承하야 血統上으로나 倫序上으로나 正當치 못한 境遇이니 이 두 境遇는 그다지 問題될 것이 없다. 그런데, 「正而不體」는 嫡長孫이 繼承하야 血統上으로는 正當하나 倫序上으로는 不正當한 境遇요 「體而不正」 庶子 即 次子가 繼承하야 倫序上으로는 正當하나 血統上으로는 不正當한 境遇이니, 따라서 이 두 境遇에는 多少 問題가 있는 것인데, 이것을 仁祖에 關하야 말하자면 昭顯之子는 「正而不醴」요 孝宗은 「體而不正」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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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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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효종은 인종의 대통을 權承(권승)하였다 할지라도 서자 즉 차자임으로 조대비는 그 상을 기년으로 하여 족하다는 것이 시열의 지론이였다. 이러한 우암의 설명을 듣자 영의정 정태화는 그 이론에 대하여 이의가 없었는 듯하나, 효종에 대하여서나 또 소현의 적자에 대하여서나 대의명분상 이것을 不正(부정) 또는 不體(불체)라 함이 부당하다 생각하였으므로 다만 이조 전래의 실제에 참조하여 부자에 대한 기년복을 조대비의 경우에 취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즉 실록에 기재한 바
쪽수▶P47-4 그러고 보면 孝宗은 仁宗의 大統을 權承하였다 할지라도 庶子 即 次子임으로 趙大妃는 그 喪을 朞年으로 하야 足하다는 것이 時烈의 持論이였다. 이러한 尤庵의 說明을 듯자 領議政 鄭太和는 그 理論에 對하야 異議가 없었는 듯하나, 孝宗에 對하야서나 또 昭顯의 嫡子에 對하야서나 大義名分上 이것을 不正 또는 不體라 함이 不當하다 생각하였음으로 다만 李朝 傳來의 實際에 參照하야 父子에 對한 朞年服을 趙大妃의 境遇에 取하랴고 하였든 것이다. 即 實錄에 記載한 바





본문6: 6


어떠한 사회를 물론하고 그 문화의 초기에 있어서는 일반으로 외적규제로써 생활행동의 규범을 삼은 것이니, 이것이 곧 풍습이요 이러한 풍습의 위력은 고도의 문화민족에 있어서도 또한 볼 수 있는 일이다. 希臘(희랍)의 ethos, 羅馬(라마)의 mores, 獨逸(독일)의 sitte, 英國(영국)의 customs, 지나의 예의가 곧 그것이요 이들은 일종의 행위법으로서 시비의 판단을 포함하고 안녕 질서의 표식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에 배반할 때는 그 사회 전반의 비난을 받을뿐 아니라 개인의 불행을 齎來(재래)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sumner 교수는 mores이 개념을 규정하되, 진리와 正善(정선)의 요소가 안녕의 원리로 될 때 풍습은 다른 일면을 현출하여 추론을 산출할 수 있으며 새로운 형상으로 발전하여 그 적극적 영향을 개인과 사회에 주게 된 것이라 하였으니 풍습은 곧 사회의 통제력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 풍습이란 것이 어디 기원하느냐 하면 그것은 물론 복잡한 원인으로 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인류의 원시적 수요와 본능에 의하여 환기된 활동으로서 그 성패에 대한 賛否(찬부)로 인하여 된 것도 있을 것이요 혹은 어떤 탁월한 행동의 성질이 군집의 감정에 부합하여, 드디어 한 여론을 형성하므로써 된 것도 있을 것이요 혹은 본래 아무런 의미도 없든 행동이 불식간에 일정한 의미를 갖게 되어 의식을 이룬 것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은 사회생활상 전연히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하여 군주・족장・父老(부로)의 명령에서 나온 것도 있을 것이요 혹은 성현・승려・卜者(복자)・ 醫夫(의부)・師傅(사부)의 교훈 내지 모범에서 나온 것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은 비교적 인위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이같이 하여 일상의 생활상 또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 또는 사건에 대하여 生起(생기)한 풍습은 관습・전통・풍속・민속・예의 등등의 형태로서 사회통제의 위압력을 가지게 된다. 이른바 예교문화는 본래 위정자의 명령이나 성현의 교훈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인 만큼 통제적 위력이 강대한 것이요 따라서 그 계급성을 인정하기에 족한 것이니, 지나의 예제는 곧 그 현수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일찍 孔夫子(공부자)의 말에
쪽수▶P52 어떠한 社會를 勿論하고 그 文化의 初期에 있어서는 一般으로 外的規制로써 生活行動의 規範을 삼은 것이니, 이것이 곧 風習이요 이러한 風習의 威力은 高度의 文化民族에 있어서도 또한 볼 수 있는 일이다. 希臘의 ethos, 羅馬의 mores, 獨逸의 sitte, 英國의 customs, 支那의 禮儀가 곧 그것이요 이들은 一種의 行爲法으로서 是非의 判斷을 包含하고 安寧 秩序의 標識을 指示한다. 따라서 이에 背反할 때는 그 社會 全般의 非難을 바들뿐 아니라 個人의 不幸을 齎來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sumner 敎授는 mores이 槪念을 規定하되, 眞理와 正善의 要素가 安寧의 原理로 될 때 風習은 다른 一面을 現出하야 推論을 產出할 수 있으며 새로운 形相으로 發展하야 그 積極的 影響을 個人과 社會에 주게 된 것이라 하였으니 風習은 곧 社會의 統制力을 가진 것이 分明하다. 그러면 이 風習이란 것이 어디 起源하느냐 하면 그것은 勿論 複雜한 原因으로 된 것이라 할 것이다. 人類의 原始的 需要와 本能에 依하야 喚起된 活勤으로서 그 成敗에 對한 賛否로 因하야 된 것도 있을 것이요 或은 어떤 卓越한 行動의 性質이 群集의 感情에 符合하야, 드디여 한 輿論을 形成함▶P53-1으로써 된 것도 있을 것이요 或은 本來 아무런 意味도 없든 行動이 不識間에 一定한 意味틀 갓게 되야 儀式을 이룬 것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은 社會生活上 全然히 自然的으로 發生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對하야 君主・族長・父老의 命令에서 나온 것도 있을것이요 或은 聖賢・僧侶・卜者・ 醫夫・師傅의 敎訓 乃至 模範에서 나온 것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은 比較的 人爲的 原因에 依한 것이라 하겠다. 이같이 하야 日常의 生活上 또는 人生의 重要한 時期 또는 事件에 對하야 生起한 風習은 慣習・傳統・風俗・民俗・禮儀 等々의 形態로서 社會統制의 威壓力을 가지게 된다. 이른바 禮敎文化는 本來 爲政者의 命令이나 聖賢의 敎訓에 依하야 人爲的으로 形成된 것인 만큼 統制的 威力이 强大한 것이요 따라서 그 階級性을 認定하기에 足한 것이니, 支那의 禮制는 곧 그 顯殊한 表現이라 할 것이다. 일즉 孔夫子의 말에
禮先王以承天之道 以治人之情 故失之者死得之者生 (中略) 禮必本於天 殽於地 列於鬼神 達於喪祭射御冠昏朝聘 故聖人以禮示之 故天下國家可得而正也.(3)
쪽수▶P53-2 禮先王以承天之道 以治人之情 故失之者死得之者生 (中略) 禮必本於天 殽於地 列於鬼神 達於喪祭射御冠昏朝聘 故聖人以禮示之 故天下國家可得而正也.(3)
라 하였으니 곧 예란 것은 선왕 聖哲(성철)이 천지자연의 도리에 準則(준칙)하여 일정한 儀則(의칙)을 설하였음으로써 민중은 이에 절대로 준수하여야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左傳(좌전)에
쪽수▶P53-3 라 하였으니 곧 禮란 것은 先王 聖哲이 天地自然의 道理에 準則하야 一定한 儀則을 設하였음으로써 民衆은 이에 絶對로 遵守하여야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左傳에
夫禮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 天地之經而民實則之 則天之明 因地之賢.(4)
쪽수▶P53-4 夫禮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 天地之經而民實則之 則天之明 因地之賢.(4)
이라 하였음은 역시 예의 존엄성을 말한 것이니, 이에 이르러서는 풍습이 고도의 도덕적 규범에까지 발전한 것이겠다. 이러한 근거에서 예로써 사회적 규범을 삼고 도덕의 기초 원리를 삼은 현수한 실례는 곧 순자의 예론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순자 예론편의 벽두에 예의 기원을 말하되
쪽수▶P53-5 이라 하였음은 亦是 禮의 尊嚴性을 말한 것이니, 이에 이르러서는 風習이 高度의 道德的 規範에까지 發展한 것이겠다. 이러한 根據에서 禮로써 社會的 規範을 삼고 道徳의 基礎 原理를 삼은 顯殊한 實例는 곧 荀子의 禮論에 볼 수 있을 것이다. 荀子 禮論篇의 劈頭에 禮의 起原을 말하되
禮起於何也 曰人生而有欲 欲而不得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即亂 亂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使欲必不窮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待而長 是禮之所記也
쪽수▶P53-6 禮起於何也 曰人生而有欲 欲而不得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即亂 亂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P54-1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使欲必不窮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待而長 是禮之所記也
라 하였으니 그는 본래 인성의 惡觀(악관)에 입각하여 사람의 욕망을 제한하고 상호 쟁탈이 없도록 예의틀 創定(창정)하여 이것으로써 행위의 규범을 삼으려 하는 것이다. 이제 그의 성악관에 대한, 시비는 여기에 말할 것 없거니와 여하간 사람의 자연적 욕정을 규제하려는 것을 예의 본질로 삼은 것을 알겠고 이와 같이 풍습을 도덕적 규범으로 삼아 지극 존귀한 범위에 及(급)한 것은 지나 예교 문화의 궁극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쪽수▶P54-2 라 하였으니 그는 本來 人性의 惡觀에 立脚하야 사람의 欲望을 制限하고 相互 爭奪이 업도록 禮儀틀 創定하야 이것으로써 行爲의 規範을 삼으려 하는 것이다. 이제 그의 性惡觀에 對한, 是非는 여기에 말할 것 업거니와 如何間 사람의 自然的 欲情을 規制하려는 것을 禮의 本質로 삼은 것을 알겠고 이와 같이 風習을 道德的 規範으로 삼아 至極 尊貴한 範圍에 及한 것은 支那 禮敎文化의 窮極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풍습은 오직 성현의 창제함에 국한한 것이 아니요 인류의 사회 생활상 여러가지 원인에 의하여 자연 발생한 것이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어느 사회를 물론하고 문화발전의 초기에 있어서는 내면적 보편적 원리로써 各人(각인)의 행위를 규제함이 없고 오직 공동 생활상에 적응할 만한 행위로서 당시에 가장 필요한 또는 편의한 것을 구체화하여 사회질서를 구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풍습은 한갓 도덕적 작용에 그치지 않고 일절 문물제도를 포함한 법률의 작용을 한 것이니, 국가의 법제는 본래 이 풍습에서 분화된 것이 명료한 일인 것이다. 이제 잠깐 Sumner 교수의 견해를 듣건대 모든 제도와 법률은 mores에서 산출한 것이라 한다.(5) 즉 풍습은 사회인의 이해관계에 참여한 사실 및 행위의 세계를 정돈한 것이요 모든 제도는 어떤 것을 물론하고 언제든지 이 풍습에서 발생한 것이다. 입법 상의 제 규정이 또한 그런 것이니 미개사회의 통제력은 즉 풍습과 금기에서 발생한 것이나 오직 일반에 알리어지지 않고 그것이 드디어 성문법으로 된 것이다. 『마누』 법전이나 『유스티니아』 법전을 비롯하여 어느 법전이나 다 그런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법제가 강제력을 갖추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그 풍습과 일치한 것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보건대 과연 풍습이란 것은 종교 도덕 법률의 분화되지 않는 상태에 있는 사회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도덕과 법률이 엄연히 분화되어있는 문화사회에 있어서도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쪽수▶P54-3 그러나 社會의 風習은 오즉 聖賢의 創制함에 局限한 것이 아니요 人類의 社會 生活上 여러가지 原因에 依하야 自然 發生한 것이 있음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어느 社會를 勿論하고 文化發展의 初期에 있어서는 內面的 普遍的 原理로써 各人의 行爲를 規制함이 없고 오즉 共同 生活上에 適應할 만한 行爲로서 當時에 가장 必要한 또는 便宜한 것을 具體化하야 社會秩序를 求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風習은 한갓 道德的 作用에 궃이지 않고 一切 文物制度를 包含한 法律의 作用을 한 것이니, 國家의 法制는 本來 이 風習에서 分化된 것이 明睽한 일인 것이다. 이제 잠간 Sumner 敎授의 見解를 듯건대 모든 制度와 法律은 mores에서 產出한 것이라 한다.(5) 即 風習은 社會人의 利害關係에 參與한 事實 及 行爲의 世界를 整頓한 것이요 모든 制度는 어떤 것을 勿論하고 언제든지 이 風習에서 發生한 것이다. 立法上의 諸規定이 또한 그런 것이니 未開社會의 統制力은 即 風習과 禁忌에서 發生한 것이나 오즉 一般에 알리어지지 않고 그것이 드디어 成文法으로 된 것이다. 『마누』 法典이나 『유스티니아』 法典을 비롯하야 어느 法典이나 다 그런 것에 不過하다. 그러므로 法制가 强制力을 가초우기 爲하여서는 반드서 그 風習과 一致한 것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보건대 果然 風習이란 것은 宗敎 道德 法律의 分化되지 않는 狀態에 있는 社會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道德과 法律이 嚴然히 分化되▶P55-1여있는 文化社會에 있어서도 決코 度外視할 수 없는 것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지나의 예교문화의 발전은 자못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한 것이겠다. 일찍 唐虞(당우) 삼대로 비롯하여 周代(주대)에 이르러서는 예전이 곧 문화의 중심을 형성하였고, 사회문화의 발전에 따라 한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법전이 중요되었으니, 이러한 예법 분화의 과도 시기에 처한 것이 바야흐로 순자와 管子(관자)의 사상이라 하겠다. 순자에 「人之命在天 國之命在禮 君人者 隆禮尊賢而王 重法愛民而覇 (天論篇, 천론편)라 하며 「由士以上 則必以禮樂節之 衆庶百姓則必以法數制之」(富國篇, 국부편) 라 함은 예치의 반면에 법치의 필요함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순자의 문인이던 관자는 「法天下之至道也」(明法篇, 명법편)라 하여 법치지상주의를 취하였으나, 그 반면에는 「民知禮而未知務 然後布法以任力」(五輔篇, 오보편)이라 하며 「人心悍也 故爲之 法由禮出」(樞言篇, 추언편)이라 하여 예의 중요함을 인정한 것이였다. 이른바 「禮刑其初一物出褸入刑」이라 함은 국가제도의 완비에 따라 점차로 법형을 엄히 할 것을 말한 것이요 곧 예법의 분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서 일찍이 고 穂積陳重(수적진중) 박사는 국가통치의 발전과정을 말하되 사회 형성의 제1기는 곧 예로써 통제력의 전부로 삼은 예치 시대요, 그 제2기는 예치를 주로 하면서 정치적 조직의 점차 구비함으로 인하여 법치를 從(종)으로 하는 시대요, 제3기는 법치 시대로서 국권 확장에 따라 법의 範域(범역)을 확대케 하는 것이라 하니,(6) 예법 분화의 발전 형태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오, 모든 법제가 또한 예전에 연원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지나문화사상에 보건대 周禮(주례) 예기 의례의 3예전에 제정한 바 천지 귀신 종묘의 제례 천자 제후 경대부 사서인의 爵錄(작록) 班位(반위) 職司(직사) 民級(민급) 封域(봉역) 및 貢租(공조) 교육 聽訟(ᅎᅥᆼ송) 斷獄(단옥) 양로 진휼 등은 公法(공법)의 연원이 되고, 관 혼 상 장 제 부자 부부 친척 관계 등은 공법의 유래가 되고 특히 祭祀禮(제사례) 朝覲禮(조근례)는 헌법, 행정법의 始原(시원)이 되고, 士冠禮(사관례) 士昏禮(사혼례)는 민법의 단서가 되고 聘問禮(빙문례)는 국제법의 맹아를 이루는 등 저반의 소식을 잘 전하는 것이다.
쪽수▶P55-2 支那의 禮敎文化의 發展은 자못 이러한 事實을 잘 말한 것이겠다. 일즉 唐虞 三代로 비롯하야 周代에 이르러서는 禮典이 곧 文化의 中心을 形成하였고, 社會文化의 發展에 따라 漢代에 이르러서는 漸次 法典이 重要되였으니, 이러한 禮法 分化의 過渡 時期에 處한 것이 바야흐로 荷子와 管子의 思想이라 하겠다. 荀子에 「人之命在天 國之命在禮 君人者 隆禮尊賢而王 重法愛民而覇 (天論篇)라 하며 「由士以上 則必以禮樂節之 衆庶百姓則必以法數制之」(富國篇) 라 함은 禮治의 反面에 法治의 必要함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야 荷子의 門人이던 管子는 「法天下之至道也」(明法篇)라 하야 法治至上主義를 取하였으나, 그 反面에는 「民知禮而未知務 然後布法以任力」(五輔篇)이라 하며 「人心悍也 故爲之 法由禮出」(樞言篇)이라 하야 禮의 重要함을 認定한 것이였다. 이른바 「禮刑其初一物出褸入刑」이라 함은 國家制度의 完備에 따라 漸次로 法刑을 嚴히 할 것을 말한 것이요 곧 禮法의 分化過程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點으로 보아서 일즉히 故 穂積陳重 博士는 國家統治의 發展過程을 말하되 社會 形成의 第一期는 곧 禮로써 統制力의 全部로 삼은 禮治 時代요, 그 第二期는 禮治를 主로 하면서 政治的 組織의 漸次 具備함으로 因하야 法治를 從으로 하는 時代요, 第三期는 法治 時代로서 國權擴張에 따라 法의 範域을 擴大케 하는 것이라 하니,(6) 禮法 分化의 發展形態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오, 모든 法制가 또한 禮典에 淵源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支那文化史上에 보건대 周禮 禮記 儀禮의 三禮典에 制定한 바 天地鬼神宗廟의 祭禮 天子 諸候 卿大夫 士庶人의爵錄 班位 職司 民級 封域 及 貢租 敎育 聽訟 斷獄 養老 賑恤 等은 公法의 淵源이 되고, 冠 婚 喪 葬 祭 父子 夫婦 親戚關係 等은 公法의 由來가 되고 特히 祭祀禮 朝覲禮는 憲法, 行政法의 始原이 되고, 士冠禮 士昏禮는 民法의 端緖가 되고 聘問禮는 國際法의 萌芽를 이루는 等 這般의 消息을 잘 傳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원적인 풍습이란 것은 그 통제의 범위가 지극히 광범한 것이요 고대에 있어서는 친속 가족 주종 장유의 사회적 관계는 물론이요 冠婚葬祭射御燕樂(관혼장제사어연락)을 비롯하여 의복 음식 기구 용모 진퇴 등 일체 생활 현상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지배한 것이었다.
쪽수▶P56-1 그러므로 그 始原的인 風習이란 것은 그 統制의 範圍가 至極히 廣汎한 것이요 古代에 있어서는 親屬 家族 主從長幼의 社會的 關係는 勿論이요 冠婚葬祭射御燕樂을 비롯하야 衣服 飮食 器具 容貌 進退 等 一切生活現象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支配한 것이였다.
그러나 문화의 발전과 인지의 발달에 따라 사회생활의 점차로 복잡함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행위를 기계적으로 외부적으로 제어하기는 어렵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예교의 범위는 점차로 감소해 갈 것은 물론이다. 일찍 지나 상대의 예전은 唐代(당대)에이르러 律令格式(율령격식)의 법제를 이루고 겨우 吉禮(길례) 賓禮(빈례) 軍禮(군례) 嘉禮(가례) 凶禮(흉례) 등 오례의 제도로 되고만 것이었다. 즉 이에 이르러 생활 행위의 규범은 외적 규제에 그치지 않고 점차로 내적 규범을 把持(파지)하게 되야 풍습은 비로소 도덕과 분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일찍이 Tufts 교수는 인류의 도덕 사상의 발달에 관하여 말하되 군집 도덕에서 개인 도덕 즉 풍습에서 양심으로 발전한 것이요 이러한 과도기를 형성하는 사회적 동인를 들어 경제적 노력 과학 및 예술의 진보 군사상의 세력 종교상의 세력 심리적 작용 등등을 지적하였으니,(7) 과연 복잡한 사회적 변동으로 인하여 오직 풍습으로만 생활규범으로 삼을 수 없게 될 것이요, 또한 합리적 비판 정신에 의하여 풍습은 개변하게 될 것은 부인치 못할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습이란 것은 본래가 情操(정조)에 기본한 신념의 요소를 가진 특성으로 인하여 사회의 이면에 잠재 존속하여 도덕관념과 법률제도의 변천과 병행치 않고 그대로 문화적 잔재로서 低迷(저미)하는 것이 허다한 일이다. 이에 이르러서 풍습은 아무런 통제력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생활력을 잠식하여 드디어 사회 전체의 동력을 상실케 하는 것이니, 여기에 풍습에 대한 고찰 연구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풍습의 형태로 된 『예속󰡕은 결코 도덕적 규범을 표시한 『예』 그것과 동일시할 바가 아닌 것이다. 이것을 요컨대 예속의 변천은 사회생활상 필연한 요구일 것이다.
쪽수▶P56-2 그러나 文化의 發展과 人智의 發達에 따라 社會生活의 漸次로 複雜함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行爲를 機械的으로 外部的으로 制御하기는 어렵게 될 것이다. 따라서 禮敎의 範圍는 漸次로 減少해 갈 것은 勿論이다. 일즉 支那 上代의 禮典은 唐代에이르러 律 令 格 式의 法制를 이루고 겨우 吉禮 賓禮 軍禮 嘉禮 凶禮 等 五禮의 制度로 되고만 것이였다. 即 이에 이르러 生活 行爲의 規範은 外的規制에 꿎이지 않고 漸次로 內的 規範을 把持하게 되야 風習은 비로소 道德과 分岐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일즉이 Tufts 敎授는 人類의 道德思想의 發達에 關하야 말하되 群集道德에서 個人道德 即 風習에서 良心으로 發展한 것이요 이러한 過渡期를 形成하는 社會的 動因를 드러 經濟的 努力 科學 及 藝術의 進步 軍事上의 勢力 宗敎上의 勢力 心理的作用 等々을 指摘하였으니,(7) 果然 複雜한 社會的 變動으로 因하야 오즉 風習으로만 生活規範으로 삼을 수 없게 될 것이요, 또한 合理的 批判 精神에 依하야 風習은 改變하게 될 것은 否認치 못할 事實일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風習이란 것은 本來가 情操에 基本한 信念의 要素를 가진 特性으로 因하야 社會의 裡面에 潜在 存續하야 道德觀念과 法律制度의 變遷과 並行치 않고 그대로 文化的 殘滓으로서 低迷하는 것이 許多한 일이다. 이에 이르러서 風習은 아무런 統制力을 갓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生活力을 蠶食하야 드디여 社會全體의 動力을 喪夫케 하는 것이니, 여기에 風習에 對한 考察 硏究의 重要性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風習의 形態로 된 『禮俗󰡕은 決코 道德的 規範을 表示한 『禮』 그것과 同一視할 바가 아닌 것이다. 이것을 耍컨대 禮俗의 變遷은 社會生活上 必然한 要求일 것이다.
생각건대 지나의 예교문화가 조선에 전래한 지 이미 오랜 일이요, 특히 이른바 오례의 교칙으로써 치세의 대본을 삼었음은 조선 문화사상에 간과할 수 없는 일이요, 당률과 명률은 곧 여조 이래로 이조 법제의 기초를 이루었음은 고려사 예지와 이조 육전에 歷然(역연)한 사실이오, 여말에 전래한 문공가례는 거의 이조 연간의 불가결한 민족 생활 규범이 된 것은 우리의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문화상 공헌은 또한 적지 않은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예교문화의 전반에 관하여는 여기에 말할 것 없거니와, 다만 오복제도에 한하여만 보건대 우선 종가를 중심으로 혈연적 단결을 후히 하여 친족 규합의 果(과)를 이루고 족내 도덕을 중히 하여 동족 상친의 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 반면에는 민족의 단결력을 약하게 하고 국가의 통제력을 박하게 함을 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실로 혈연적 단체의 강함에 비하여 地緣的(지연적) 단체의 약함은 조선 사회의 한 특색일 것이다. 이조의 정치는 바야흐로 전주 이씨를 일족으로 집권의 중심을 삼고 그 인척의 拔扈(발호)를 부수하는 閥族(벌족)정치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집권세력에 참여하는 양반은 또한 벌족 중심으로 형성되고 따라서 인재 등용의 길은 閉絕(폐절)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상층 계급의 예교는 드디어 하부 계급의 무리한 모방을 일으키어 그 폐단은 일찍부터 식자의 주의한 바가 되었었다. 성호 이익은 이에 관한 선각자의 일인이니, 그는 無官(무관)의 正庶(정서)가 함부로 鄕相(향상)의 風奢(풍사)를 모방하여 경제생활에 파탄을 일으킴을 경계하고 庶人(서인) 가례의 제정을 주창하였음은 실학올 尊尙(존상)하는 그로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성호사설 經史篇(경사편) 經書門(경서문)에 「猶守家禮而不動何裁 家禮不過居憂寒泉一時所著 未及完成 而旋爲童行所偷」라 함은 무조건하고 未文家禮(미문가례)를 墨守(묵수)하던 諸多(제다) 예론가에 비하여 일대 탁견이었던 것이다.
쪽수▶P57 생각건대 支那의 禮敎文化가 朝鮮에 傳來한지 이미 오랜 일이요, 特히 이른바 五禮의 敎則으로써 治世의 大本을 삼었음은 朝鮮 文化史上에 看過할 수 없는 일이요, 唐律과 明律은 곧 麗朝 以來로 李朝 法制의 基礎을 이루었음은 髙麗史 禮志와 李朝 六典에 歷然한 事實이오, 麗末에 傳來한 文公家禮는 거이 李朝 年間의 不可缺한 民族 生活 規範이 된 것은 우리의 周知의 事實이다. 그리하야 그 文化上 貢獻은 또한 적지 않은 것이었음을 否認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 禮敎文化의 全般에 關하여는 여기에 말할 것 없거니와, 다만 五服制度에 限하야만 보건대 于先 宗家를 中心으로 血緣的 團結을 厚히 하야 親族 糾合의 果를 이루고 族內 道德을 重히 하야 同族相親의 德을 樹立하였다. 그러나 그 反面에는 民族의 團結力을 弱하게 하고 國家의 統制力을 薄하게 함을 看過하지 못할 것이다. 實로 血緣的 團體의 强함에 比하야 地緣的 團體의 弱함은 朝鮮 社會의 한 特色일 것이다 李朝의 政治는 바야흐로 全州 李氏를 一族으로 執權의 中心을 삼고 그 姻戚의 拔扈를 附隨하는 閥族政治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하야 이 執權勢力에 參與하는 兩班은 또한 閥族 中心으로 形成되고 따라서 人材 登庸의 길은 閉絕된 것이였다. 그뿐 아니라 上層 階級의 禮敎는 드디여 下府 階級의 無理한 模倣을 이르키어 그 弊端은 일즉부터 識者의 注意한 바가 되었었다. 星湖 李瀷은 이에 關한 先覺者의 一人이니, 그는 無官의 正庶가 함부루 鄕相의 風奢를 模倣하야 經濟生活에 破綻을 이르킴을 警戒하고 庶人 家禮의 制定을 主唱하였음은 實學올 尊尙하는 그로서 當然한 歸結이였다. 星湖僿說 經史篇 經書門에 「猶守家禮而不動何裁 家禮不過居憂寒泉一時所著 未及完成 而旋爲童行所偷」라 함은 無條件하고 未文家禮를 墨守하던 諸多禮論家에 比하야 一大卓見이였든 것이다.
대저 예제 전반은 고사하고 그 일부분인 오복제도 존중의 이유는 대가족 제도의 존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진전에 따라 이미 대가족 제도의 존속은 위기에 임한지 오래다.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온 대자본주의 경제조직을 비롯하야 기독교 사상의 보급과 개인주의 사상의 전래로 인하여 대가족 제도 붕괴의 기운은 농후하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관혼상제에 관한 예속의 변개는 식자의 필연적 요구로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야흐로 서양 문화의 조류에 따라 그 요구의 추세는 상당히 급격도로 진전하게 됨은 掘者(굴자)의 이미 주지한 바이다. 그 顯殊(현수)한 일례로는 수년 전에 佐翁(좌옹) 尹教昊(윤치호) 선생을 중심으로 식자의 집합이 되어 中央振興會(중앙진흥회)를 조직하고 禮節改善運動(예절개선운동)을 일으켰으니, 그 결의문에
大抵 禮制 全般은 姑捨하고 그 一部分인 五服制度 尊重의 理由는 大家旅 制度의 存續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時代의 進展에 따라 이미 大家族 制度의 存續은 危機에 臨한지 오래다. 商工業의 發達에 따라온 大資本主義 經濟組織을 비롯하▶P58-1야 基督敎 思想의 普及과 個人主義 思想의 傳來로 因하야 大家族制度 崩壞의 氣運은 濃厚하게 되엿다. 그럼에 따라 冠婚喪祭에 關한 禮俗의 變改는 識者의 必然的 要求로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야흐로 西洋 文化의 潮流에 따라 그 要求의 趟勢는 相當히 急遠度로 進展하게 됨은은 掘者의 이미 周知한 바이다. 그 顯殊한 一例로는 數年 前에 佐翁 尹教昊 先生을 中心으로 識者의 集合이 되야 中央振興會를 組織하고 禮節改善運動을 이르키었으니, 그 決議文에
근래 婚喪祭宴(혼상제연) 기타 交際應酬(교제응수)에 繁文虛禮(번문허례)의 폐풍이 날로 심하여 吾人(오인)의 실생활에 미친 바 해독이 막대하다. 이 때에 이것을 철저히 조사 연구하여 그 폐해를 제거하는 동시에 시대에 불합한 예절은 이것을 革正(혁정)하여 넓이 사회의 공의로써 현대 생활에 적응한 규범을 확립하고 그 실행 보급을 기함.
쪽수▶P58-2 近來婚喪祭宴 其他交際應酬에 繁文虛禮의 弊風이 날로 甚하야 吾人의 實生活에 밋친 바 害毒이 莫大하다. 此際에 이것을 徹底히 調査 硏究하야 그 弊害를 除去하는 同時에 時代에 不合한 禮節은 이것을 革正하야 넓이 社會의 公議로써 現代生活에 適應한 規範을 確立하고 그 實行普及을 期함.
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바야흐로 시대의 필요적 요구를 그대로 표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예절의 세목에 관하여는 자세한 규정을 수립하지 못하여 민중은 그 취할 바에 방황하는 감이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際(제)하여 총독부 學務局(학무국)에서는 昭和(소화) 9년 11월 11일 儀禮準則(의례준칙)을 제정 발포하였음은 바야흐로 그 시기를 얻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아직도 미급함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내용 전반에 관하여는 여기에 함부로 비판 시비할 바가 못되거니와 대체로 보아 관례를 제한 종래의 사체편람을 현대어로 간단화하는데 지나감이 없는 것이다. 우선 상례에 있어서 복장으로 말하면 屈巾(굴건) 制服(제복) 絰(질) 帶(대) 杖(장) 履(리) 方笠(방립) 등을 제한 종래의 상복 외에 喪章(상장)을 제정하여 시대 복장에 적용하도록 하였고, 상기에 있어서는 상기와 복기을 구분하고 居喪儀(거상의)를 간단하게 한 외에 종래의 그대로를 襲用(습용)하기로 되었고, 복자관계는 전연 그대로 통용하게 되었으니, 근본적으로 이렇든 혁신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필경 이 복자 관계를 종래 그대로 제정함은 얼마나한 실행상 物果(물과)를 얻을까 의문될 것이나 여하간 이것을 준칙으로 삼은 것은 곧 대가족 제도의 존속을 본의로 삼은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종래의 대가족 제도 존속의 여부는 오직 의례의 규범으로써만 될 것이 아니요 사회제도 그것에 있을 것이요 특히 경제조직의 형태에 의존할 것이니 여기에 역사적 필연성은 전연 도외시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쪽수▶P58-3 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바야흐로 時代의 必要的 要求을 그대로 表示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禮節의 細目에 關하야는 仔細한 規定을 樹立하지 못하야 民衆은 그 就할 바에 彷徨하는 感이없지 않었단 것이다. 이러한 時期에 際하야 總督府 學務局에서는 昭和 九年 十一月 十一日에 儀禮準則을 制定 發布하였음은 바야흐로 그 時期를 얻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나. 그 內容에 있어서는 아즉도 未及함이 있음을 認定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內容 全般에 關하여는 여기에 함부로 批判 是非할 바가 못되거니와 大體로보아 冠禮를 除한 從來의 四體便覽을 現代語로 簡單化하는데 지나감이 없는 것이다. 于先 喪禮에 있어서 服装으로 말하면 屈巾 制服 絰 帶 杖 履 方笠 等을 除한 從來의 喪服 外에 喪章을 制定하야 時代服裝에 適用하도록 하엿고, 喪期에 있어서는 喪期와 服期을 區分하고 居喪儀를 簡單하게 한 外에 從來의 그대로를 襲用하기로 되었고, 服者關係는 全然 그대로 通用하게 되였으니, 根本的으로 이러튼 革新을 보지 못한 것이다. 畢竟 이 服者關係를 從來 그대로 制定함은 얼마나한 實行上 物果를 얻을가 疑問될 것이나 如何間 이것을 準則으로 삼은 것은 곧 大家▶P59-1族制度의 存續을 本意로 삼은 것이 分明한 것이다. 그러나 從來의 大家族制度 存續의 與否는 오즉 儀禮의 規範으로써만 될 것이 아니요 社會制度 그것에 있을 것이요 特히 經濟組織의 形態에 依存할 것이니 여기에 歷史的 必然性은 全然 度外視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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