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향약의 성립"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본문2: 2.유향소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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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TagSpage|86-1}}鄕約이라 함은 文字 스스로가 表示함과 같이 鄕里 間의 約束이니, 즉 各 鄕里의 住民들이 서로 도와주며 서로 꾸지즈면서 和睦한 生活을 하여 가자는 自治 精神의 發露에서 由來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鄕約의 싹(芽)은 原始 社會의 住民들 사히에서도 이미 움트기 시작하여 애초에는 外敵(他 部族 及 猛獸 等) 侵犯에 對한 共同 防禦 等의 形式으로 나타났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하고저 하는 鄕約은 그러한 아득한 옛적의 것이 아니라, 所謂 歷史時代에 들어온 後, 文字上{{TagPage|87-1}} 記錄하게 된 鄕約이다. 즉 朝鮮에 있어서 自治團體 組織으로서의 鄕約이 어느 때 어떠한 經路를 밟어 成立하게 되였는가 함을 밝힘이 本稿의 目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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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번={{TagSpage|87-2}}朝鮮에 있어서 鄕約이 實施하게 된 것은 普通 李朝 中葉에 이르러 趙光祖의 唱說에 비롯하여 李滉(退溪) 李珥(栗谷) 等 名儒의 實踐躬行에서 거의 完成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 以前 이미 이러한 鄕約이 세워질 만한 터전은 닦어저 있었으며 씨는 뿌려저 싹은 움트기 시작하였든 것이다. 즉 진작 李朝 國初부터 이미 一種의 地方自治團體로서 留鄕所와 같은 것이 設置되여 있었으며, 또 鄕約의 根源이라고 할 宋나라의 呂氏鄕約이 朱子學에 힙쓸이어 朝鮮 안에 들어와 있었든 것이다. 자세한 것은 以下 論述하려니와, 이 두 가지의 事實은 큰 줄거리 힘이 되여, 마츰내 朝鮮에도 鄕約을 세우게 하였든 것이다. 特히 後者인 呂氏鄕約은 그 自體로보다도 朱子에 依하야 增損된 所謂 「朱子增損呂氏鄕約」의 形式으로 朝鮮에 輸入된 것이매, 朱子學을 根幹으로 한 儒敎로써 國家 統治의 根本 精神으로 삼든 李氏 朝鮮에 있어서는 그것은 當然히 採用되여야 할 것이였으며, 朱子를 崇慕하는 儒林들 사히에서는 진작부터 遵奉하여 왔든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儒敎 文化가 바야흐로 무르녹고 있든 李朝 中宗때에 이르러 露骨的으로 表面化하여 위선 呂氏鄕約의 實施를 보고, 이어서 朝鮮的 鄕約의 成立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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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번={{TagSpage|87-3}}朝鮮鄕約에 對한 從來의 論述로서는 富永文一氏의 「件時の朝鮮に於ける自治の萌芽鄕約の一班」과 高橋亨 博士의 「栗谷先生と鄕約」(以上 二文은 朝鮮總督府 學務局 社會課 發行 「社會敎化資料」 第一輯 所載)과 松田甲氏의 「李朝時代の鄕約」(續日鮮史話 第三編 所載)과 같은 것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大概 鄕約의 紹介에 끝였을 따름이요, 朝鮮에 있어서 어찌하야 鄕約이 成立케 되였는가 하는 歷史的 背景을 밝히지는 않었다. 歷史學은 그것이 어떠하였든가 하는 것을 報告함이 目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어찌하야 그러{{TagPage|88-1}}케 되지 않으면 아니되였는가 하는 因果關係를 밝힘이 使命이니만치, 나는 이러한 見地에서 以下 鄕約 成立의 顚末을 더듬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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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향약이라 함은 문자 스스로가 표시함과 같이 향리 간의 약속이니, 즉 각 향리의 주민들이 서로 도와주며 서로 꾸짖으면서 화목한 생활을 하여 가자는 자치 정신의 발로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향약의 싹(芽)은 원시 사회의 주민들 사이에서도 이미 움트기 시작하여 애초에는 외적(다른 부족 및 맹수 등) 침범에 대한 공동 방어 등의 형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향약은 그러한 아득한 옛적의 것이 아니라, 소위 역사시대에 들어온 후, 문자상 기록하게 된 향약이다. 즉 조선에 있어서 자치단체 조직으로서의 향약이 어느 때 어떠한 경로를 밟아 성립하게 되었는가 함을 밝힘이 본고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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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번=조선에 있어서 향약이 실시하게 된 것은 보통 이조(李朝) 중엽에 이르러 조광조의 창설에 비롯하여 {{TagPerson|[[이황]]}}(퇴계) {{TagPerson|[[이이]]}}(율곡) 등 명유(名儒)의 실천궁행에서 거의 완성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이전 이미 이러한 향약이 세워질 만한 터전은 닦아져 있었으며 씨는 뿌려져 싹은 움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즉 진작 이조 국초(國初)부터 이미 일종의 지방자치단체로서 유향소와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또 향약의 근원이라고 할 송나라의 여씨향약이 주자학에 휩쓸려 조선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에서 논술하려니와, 이 두 가지의 사실은 큰 줄거리 힘이 되어, 마침내 조선에도 향약을 세우게 하였던 것이다. 특히 후자인 여씨향약은 그 자체로보다도 주자에 의하여 증손(增損)된 소위 ‘주자증손여씨향약’의 형식으로 조선에 수입된 것이니, 주자학을 근간으로 한 유교로써 국가 통치의 근본 정신으로 삼던 이씨(李氏) 조선에 있어서는 그것은 당연히 채용되어야 할 것이었으며, {{TagPerson|[[주자]]}}를 숭모하는 유림들 사이에서는 진작부터 준봉(遵奉)하여 왔던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교 문화가 바야흐로 무르녹고 있던 이조 {{TagPerson|[[중종]]}} 때에 이르러 노골적으로 표면화하여 우선 여씨향약의 실시를 보고, 이어서 조선적 향약의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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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번=조선향약에 대한 종래의 논술로서는 도미나가 후미카즈(富永文一)씨의 {{TagArticle|[[「件時の朝鮮に於ける自治の萌芽鄕約の一班」]]}}과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박사의 {{TagArticle|[[「栗谷先生と鄕約」]]}}(이상 두 개의 글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 발행 {{TagJournal|[[「사회교화자료」]]}}{{TagVolume|[[「사회교화자료」 1|1]]}} 소재)과 마츠다 코우(松田甲)씨의 {{TagArticle|[[「李朝時代の鄕約」]]}}({{TagJournal|[[속일선사화]]}}{{TagVolume|[[속일선사화 3|3]]}} 소재)과 같은 것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대개 향약의 소개에 그쳤을 따름이요, 조선에 있어서 어찌하여 향약이 성립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배경을 밝히지는 않았다. 역사학은 그것이 어떠하였던가 하는 것을 보고함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어찌하여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아니되었는가 하는 인과관계를 밝힘이 사명이니만큼, 나는 이러한 견지에서 아래에서 향약 성립의 전말을 더듬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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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번={{TagSpage|88-2}}留鄕所의 由來를 밝힘에는 먼저 그것이 어떠한 것이였든가 하는 것부터 論하여야 하겠다. 留鄕所의 性質 乃至 組織에 關하여는 李朝 世宗 十年 六月에 留鄕所를 復設하였을 때 내린 {{TagRef|1}}「留鄕所(復設磨鍊)節目」<ref>鄕憲 卷一, 留鄕所節目條.</ref>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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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번={{TagSpage|88-3}}<blockquote no="01">一 留鄕所品官 府以上五人 郡四人 縣三人 爲等如差定爲乎矣 令京在所擇定<br/>一 留鄕所設立本意段 專爲紏察惡吏 以正鄕風爲白去乙 品官等不顧本意 假仗權威 反爲作 弊 今後乙良 所在官守令及京在所 嚴加痛禁 必有犯罪者 報觀察使 科罪這這改差</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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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번={{TagSpage|88-4}}라는 二條目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그것의 大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留鄕所의 設立 本意는 地方의 惡吏를 紏察하야써 鄕風을 바르게 함에 있었든 것이다. 이곳에서 惡吏라 함은 所謂 元惡鄕吏를 이름이니, 監司 守令 下의 屬僚로서 直接 百姓과 接觸하야 最下級의 行政事務를 擔當하는 鄕吏(胥吏)들이 때로는 中央政府로부터 派遣된 方伯 守令 以上의 實權을 잡어 受賂 收斂 冒民 私利 等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弊害를 防備하기 爲하야 經國大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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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번={{TagSpage|88-5}}<blockquote no="02">{{TagRef|2}}元惡鄕吏 許人陳告 亦許本官京在所告司憲府 推効科罪 犯徒者永屬本道殘驛吏 犯流者永屬他殘驛吏 守令知而不擧劾</blockquote>{{TagPage|89-1}}者 以制書有違律論<ref>經國大典 卷之五 刑典, 元惡鄕吏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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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번={{TagSpage|89-2}}과 같은 刑律을 規定하야, 各 官 京在所 及 守令들로 하여금 監視케 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成文律로서의 經國大典이 全部 遵用케 된 李朝 成宗 以後의 일이다. 그러면 그 以前에 있어서는 이러한 鄕吏의 跋扈를 어찌하야 懲罸하였든가. 그것은 달음이 아니라 이곳에서 말하고저 하는 바와 같은 留鄕所를 設置케 하야, 鄕里의 有力者들로 하여금 그들 鄕吏의 惡行을 紏察케 하였든 것이다. 즉 李朝 國初 아즉 法典이 完成되기 前에는 地方의 品官 數名으로 하여금 留鄕所를 組織하게 하야, 元惡鄕吏의 發惡에 備하는 一方 鄕間風俗을 敦厚하게 하야 行政紏察 及 地方自治의 任務를 띄게 하였다. 前揭 留鄕所 節目에도 明記한 바와 같이 府 以上은 五人 郡은 四人 縣은 三人의 品官을 各京在所가 擇定하야, 그들로 하여금 留鄕所를 設置케 하였다. 이곳에서 品官이라 함은 中宗實錄에 {{TagRef|3}}「鄕中士類 謂之品官」<ref>中宗實錄 卷四十五, 第一張, 十七年 六月 丙子朔條.</ref>이라 하였음과 같이 官을 罷하고 歸鄕하였거나, 或은 애초부터 鄕里에 있어 努力을 갖게 된 兩班 階級으로 後世에 이른바 儒林과 같은 것이였을 것이며, 京在所라 함은 各 地方에 生活의 根據를 둔 中央官吏(兩班) 中에서 選擇하야 組織된 한 개의 團體니, 이를테면 留鄕所의 京城 出張所 乃至 監視所와 같은 것이였다. 그러므로 以下 留鄕所의 由來를 論함에는 必然的으로 京在所에도 言及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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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6번={{TagSpage|89-3}}그러면 이러한 留鄕所는 어느 때부터 設置되여 있었든가. 므릇 最下級의 行政機構로서의 鄕吏의 制度가 이미 高麗 初期부터 거의 整備되여 있었드니만치, 그들 鄕吏(戶長이라 稱함)의 職權濫用의 弊風도 그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 鄕吏의 跋扈를 막기 爲한 檢察機關을 두게 된 것도 그때부터이였었으니, 高麗 太祖가 그 十八年에 來降한 新羅 末 王 金傅로 하여금 慶州 事審官이 되게 하야 副戶長 以下의 官職을 살게 한 것이 그것이다. 勿論 이 事審官은 王建 太祖가 그의 敵對者이든 新羅 王 金傅를 厚히 待接하야, 그로 하여금 그의 故士인 慶州의 監督官이 되여 從來의 體面을 多{{TagPage|90-1}}少라도 維持케 하야, 新興國인 高麗에 對한 敵愾心을 없이 하도록 하고저 함에서 울어나온 職制일 것이나, 이것은 얼마 아니가서 諸功臣에게도 주게 되여, 그들은 各其 本州 事審官이 되여 그 地方의 鄕吏를 檢察하며 鄕風을 紏正케 되였다. 事審官에 對하야는 좀 더 詳細히 論述할 겨를이 없으므로 이곳에서는 省略하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였든가는 忠肅王 五年 五月에 내린 敎文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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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7번={{TagSpage|90-2}}<blockquote no="03">{{TagRef|4}}事審官之設本爲宗主人民 甄別流品 均平賦役 表正風俗 今則不然 廣占公田 多匿民戶 若小有差役 例收祿轉 則吏之上京者 敢於私門 決杖徵銅 還取祿轉 擅作威福 有害於鄕 無補於國已 盡革罷 其所匿田戶 推刷復舊<ref>高麗史 卷七十五, 選舉三 銓法, 事審官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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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8번={{TagSpage|90-3}}라고 있으므로써 그의 大略을 짐작할 수 있으니, 즉 政府는 本官을 設定함으로써, 直接 官治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도와 風俗을 바르게 하며, 地方 土豪을 取締케 하였든 것이다. 그리고 各 州의 事審官의 數는 成宗 十五年에 五百丁 以上 州는 四員 三百丁 以上 州는 三員 工 以下 州는 二員으로 制定하였으니, 모든 것이 李朝의 留鄕所와 비슷하다. 前揭 敎文에도 明示한 바와 같이 이 事審官은 高麗 末葉에 이르러 여러가지의 弊害를 짓게 되여, 數次 國令으로써 그의 革罷를 命하여 왔으나 끝々내 잘 施行되지 못하고, 貴族 政治 時代이든 當時에 있어서는 地方에 盤據한 貴族 權豪들이 各自 事審官이라 冒稱하야 地方行政을 左右하였든 것이다. 이러한 地方 貴族 權豪의 特權 行爲가 곧 王朝가 바뀌인 李朝에 드러와서는 所謂 留鄕所의 形態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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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9번={{TagSpage|90-4}}事審官과 아울러 이곳에서 한마듸 말하여 둘 것은 高麗의 {{ruby|其人|○○}}의 制이다. 其人이라 함은 高麗史에 {{TagRef|5}}「國初選鄕吏子弟 爲質於京 且備顧問其鄕之事 謂之其人」<ref>同上 其人條.</ref>이라 하였음과 같이, 王建 太祖가 半島 天下를 다스리게 됨에, 地方鄕吏의 跋扈 謀叛을 두려워하야, 그들의 子弟를 볼모로 서울에 잡어두고 各 鄕里의 事情을 顧問함에 備코저 하는 制度이니, 이를테{{TagPage|91-1}}면 鄕吏의 跋扈를 牽制하려는 消極的 手段이였다. 그러나 이 其人은 一方 中央政府의 地方에 對한 政策의 機密을 뒤저내는 수도 있었을 것이니, 이 點으로 보면 其人은 鄕吏의 密偵으로 그들의 被犯됨을 앞서서 막은 者라고도 볼 수 있다. 이 其人의 制도 李朝에 끼친바 影響이 莫大하야, 勿論 그의 階級과 內容을 달리하지만 京在所의 出現을 보게 하였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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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0번={{TagSpage|91-2}}이와 같이 高麗朝에 있어서는 鄕吏의 跋扈를 制壓하야 鄕風을 바르게 하고저 事審官 及 其人의 制를 設定하였으나, 王氏의 뒤를 이어 새 나라를 세운 李氏 朝鮮에 있어서는 그러면 어찌하야 地方에 頑强히 버티고 있는 鄕吏들의 勢力을 抑制하려 하였든가. 그것은 우에서도 잠간 말한 바와 같이 地方의 有力者(兩班)들로 하여금 留鄕所를 設置케 하야 惡吏檢察의 任務를 履行케 하였든 것이다. 留鄕所의 設置에 對하야는 增補文獻備考에는 簡單히 <cite no="01">「國初置郡縣留鄕所 旋罷尋復」<cite>이라 하야, 그것이 李朝 初期에 設置되였다고 하였으나, 가장 根本 史料인 李朝 初期 諸王의 實錄을 뒤저보아도 그의 明確한 年代를 잡어내지 못하였음은 遺憾이다. 그러나 李朝 第三代王인 太宗 六年 六月 丁卯에 司憲府 大司 憲許應 等이 上獻한 務時七條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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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1번={{TagSpage|91-3}}<blockquote no="04">{{TagRef|6}}其四 州郡縣各有守令 鄕愿好事之徒 置留鄕所 無時群聚 話毁守令 進退人物 侵漁百姓 甚於滑吏 乞皆革去 以除積弊<ref>太宗實錄 卷十一, 第二十九張, 丙戌 六年 六月 丁卯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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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2번={{TagSpage|91-4}}라는 一條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때 以前부터 留鄕所가 設置되여 있었든 것은 事實이다. 그리고 이 上䟽 條文에 依하면 留鄕所는 國家 政府로부터 國令으로써 設置를 命한 것이 아니라, 地方郡縣의 有志 人士들이 自發的으로 組織한 團體인 듯하다. 이 條文은 留鄕所의 弊害를 認定하야 그것의 革去를 上請한 것이였으므로, 그의 組織 人員을 <cite no="02">「鄕愿好事之徒」</cite>라 하야 鄕曲에 숨은 僞善 君子처럼 取扱하였으나, 그實 이러한 自治團體를 結成할 만한 資格을 가진 者는 적어도 그 地{{TagPage|92-1}}方의 德望 있는 先覺者들로 所謂 品官이라 일컷는 바와 같은 兩班階級의 分子이였을 것이다. 이러한 鄕曲의 士類들은 오랜 옛적부터 그 地方에 자리를 잡고 權勢를 부리게 되여, 마츰내는 留鄕所와 같은 自治團體를 自進하야 結成케 된 것이니, 그의 淵源은 적어도 高麗朝에 溯及할 수 있다. 즉 高麗 末葉에 이르러 鄕吏檢察 及 鄕風斜正의 任務를 띈 事審官의 制를 罷革하게 됨에, 鄕里에서 權勢를 부리든 貴族 兩班들은 이에 應치 아니하고 國憲을 無視하면서 私的으로 事審官과 비슷한 機關을 組織하게 되였으니, 이것은 곧 留鄕所의 母胎이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留鄕所는 高麗朝 事審官의 遺風으로 麗末에 이미 地方的으로나마 結成되여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 鄕吏를 살피고 鄕俗을 바르게 하고저 하는 것과 같은 좋은 意味의 機關이 李朝 開國 以來 不過 十五年이 못되여 弊害를 이르키게 되여 太宗 六年에 이르러 그것의 革去를 䟽請하여 왔음과 같은 것은 그의 根據가 이미 퍽 오래였음을 如實히 證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留鄕所는 麗末에 있어서 어는 程度까지 完成되여 (勿論 그때부터 留鄕所라는 名稱을 붙였는지는 疑問이나) 이것이 李朝에 드러와 儒敎的 文治政策에 依하야 좀 더 組織化하고 普遍化하였다고 본다. 當時 大小 品官들로 하여금 各 鄕里에 定住하야 굳은 根據를 잡게 한 史實을 들면, 太祖 七年 二月 癸巳에 慶尙道 觀察使 李至가 上書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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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3번={{TagSpage|92-2}}<blockquote no="05">{{TagRef|7}}道內大小品官 名載居京之籍者 往還之際 馬多困斃 今復有令 刻日赴京 故有傾家買馬者 臣竊謂 當今無事之時 誠宜務農養兵 以備不虞 今若督責赴京 使人馬困耗 農事失時 殊爲未便 況本道前年失農 裹糧亦難 除孝廉茂才 可備擢用外 限今年 各安其鄕 務農養兵<ref>太祖實錄 卷十三, 第五張, 七年 二月 癸巳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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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4번={{TagSpage|92-3}}이라 하야 李太祖가 即位하매 前朝來 京鄕에 흩어저 있는 大小의 官吏들을 鎭撫 歸服케 하고저 하여, 그들로 하여금 京城에 在籍케 하야 每年 一次式 朝覲하게 한 것을 一時 停止시키자고 上請한 일이다. 이곳에서 大小 品官이라 함은 두 말할 것도 없{{TagPage|93-1}}이 李朝에 들어와서 급작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前朝來 權勢를 잡고 있는 大小의 官吏(兩班)들이였을 것이며, 그들은 新興 李氏 國家에 對하야 한 개의 威脅的 存在이였다. 그러므로 李太祖는 即位하자마자 곧 그들 大小 品官을 京城에 在籍케 하야 謀叛의 機會를 없이 하도록 每年 一次式 參覲하는 形式을 取케 하였으나, 이와 같이 大小의 品官들이 頻繁히 京鄕을 徃還함을 따라 그들 사히에는 相互의 親睦을 도으며 努力을 펴게 할 어떠한 形式의 組織團體가 自然的으로 發生케 되였으니 그것의 鄕里에서 나타난 것이 留鄕所요, 京城에서 結成된 것이 京在所이였었다. 留鄕所 及 京在所가 어느 때 設置되였는가 하는 年代를 的確히 比定하기는 困難하나, 已述한 바와 같이 이미 麗末에 있어서 鄕里에 退居한 士類들 사히에는 留鄕所와 비슷한 어떠한 團體가 組織되여 있었으며, 李朝 開國 後에는 地方에 本據를 둔 中央政府 官吏들 사히에 京在所라는 團體가 結成되여 年代가 바뀌는 동안에 後者는 國家 政府의 指示를 받어 前者를 좀 더 組織化하야 마츰내 留鄕所라는 名稱을 붙이게 하야 鄕吏를 糾察케 하는 一方, 兩者는 서로 緊密한 連絡을 取하야 中央政權을 牽制하는 勢力을 잡게 되였든 것이다. 前揭한 世宗 十年의 留鄕所 節目 中에 「留鄕所品官은 京在所가 擇定한다」 하는 것은 這間의 消息을 如實히 傳하는 것이나, 이것은 一方 中央政府가 地方에 흩어저 있는 貴族 兩班을 統率하야 不意의 事變을 未然에 防備코저 하는 意圖도 包含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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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5번={{TagSpage|93-2}}이와 같이 하야 李朝 建國과 아울러 留鄕所 及 京在所가 出現하였으나 이것들이 좀 더 組織化하고 普遍化하게 된 것은 國家로부터 鄕里 敎化의 政策을 積極的으로 實施케 한 以後의 일이다. 李朝 初期에 있어서 鄕風을 敦厚케 하고저 實施를 命한 가장 有名한 일은 太祖 親製의 鄕憲條目의 頒布이다. 李太祖는 새 나라의 님금으로 半島에 居臨하자 그 二年 九月 丙辰에는 그의 發祥地인 和寧府를 永興府로 改稱하고, 또 漢나라 高祖의 낳은 故鄕의 일홈을 본떠, 그의 生育하든 鄕村을 豐沛鄕{{TagPage|94-1}}이라 命名하야, 新興 國王으로서의 自己의 出生地를 美化 尊稱하는 一方, 그 七年 四月에 이르러는 親히 咸興에 擧動하야 下記하는 바와 같은 鄕憲條目 四十一條를 親制하며, 다시 그곳 宗室인 孝寧大君 補로 하여금 이것을 增補케 하여, 補의 制定한 善目 二十一條 惡目 三十五條 都合 五十六條와 아울러 이것을 그의 鄕邑에 頒布하야 實施하기를 命하였다. 太祖가 親히 制定한 憲目 四十一條는 大略 六綱으로 나뉘어 五綱은 各 八條를 包含하고 一綱은 一條로 되였으니 以下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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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6번={{TagSpage|94-2}}<blockquote no="06">一 部民告訐者 妻妾相關者 妻族不明者 族屬通奸者 操弄官長者 身犯奸盜者 婦女失行者 濁亂家門者 右八條永爲削籍事<br/>一 偷罪受刑者 非理好訟者 收歛作弊者 陰毀族親者 陰毀本所者 陰毀同列者 汚染鄕風者 胥吏爾予者 右八條限己身損徒事<br/>一 疎薄正妻者 賤人交結者 長立訟庭者 訟事退步者 同列相關者 衣冠不正者 不明外戚者土主外論者 右八條永爲棄身事<br/>一 凌慢齒上者 恃富輕貧者 凌蔑齒下者 恃强凌弱者 不顧本所者 僉親埋沒者 鄕叅不合者 吝貪殘列者 右八條當身不用而勿棄子孫事<br/>一 己身傭役者 詰友擧痕者 齒上據坐者 座中戲弄者 富而不通者 貧而驕强者 愚以責人者 强以責人者 右八條朞年損徒而元日招辭懲罪役受宴赦身事年少者未許座而罰四十度後許本座事<br/>一 元非治鄕之人 內外無咎 有志懸望 有操行卓異者 僉議叅鄕許入事 限朞損者 改過則還入時 招辭捧上 齊馬首 間年高者 降三座 年少者末座 行罰禮後 還本座 限半期損者 降一等依例施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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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7번={{TagSpage|95-1}}그리고 孝寧大君 補는 前記 太祖親製 憲目 外에 다시 善目 二十一條와 惡目 三十五條를 制定하야 前者를 補增하였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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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8번={{TagSpage|95-2}}<blockquote no="07">父母孝養 土主尊敬 夫妻和順 男女有別 少長有序 朋友有信 喪祭誠敬 隣里和同 敬老慈幼 學書通古 患難相救 婚姻相助 臨亂執節 官事勤儉 受人寄托 持身廉謹 見善必行 聞過必改 務農節用 田畔相讓 學書習武<br/>右二十一條善目<br/>父母不孝 疎薄正妻 妻妾背夫 土主不敬 男女無別 朋友不信 兄弟不和 隣里不睦 患難不救 竊人妻妾 婚姻不助 盜賊害物 喪祭不謹 官員欺罔 官事不勤 寄托不受 無故闕防 好訴行讒 旅師弄權 妓生作妾 爭鬬相殘 奸吏作弊 賄賂于請 以强凌弱 以少凌長 賤人結友 以賤凌貴 行己無恥 以惡凌善 憑公營私 冠服無章 田畔相侵 知非謬擧 挾私論人 惰農虛費<br/>右三十五條惡目</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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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9번={{TagSpage|95-3}}이라 하야 太祖親製의 鄕憲目 四十一條와 孝寧大君 補의 增製한 鄕憲五十六條는 太祖 七年 四月 八日에 이르러 <cite no="03">「豐沛邑鄕錄案」</cite>이라는 名目으로 成册케 되여, 以後 그 地方에서 遵奉 實施하게 되었으나, 그때 孝寧大君 補가 지은 「璿鄕憲目序」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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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0번={{TagSpage|95-4}}<blockquote no="08">{{TagRef|8}}太祖之經營 未滿三禩 化家爲國 而改本鄕邑曰永興豐沛之館 而周之豳邰漢之豐沛鄕故 戊寅夏四月八日 臣愚至誠奉 旨著書憲目曰豐沛邑鄕錄案 實邑之重器 紀綱之先務也 誰不敬歟 誰不重歟 誰不施乎 以此案義正法然後 傳旨據召 沛邑鄕才子士池士善孔聖裔元月春三人等授案侍駕 催率之還鄕 以一無違案正式之法 左之于書 以此意 頒置列邑 永{{TagPage|96-1}}久遵行事幸甚幸甚<ref>鄕憲 卷一, 璿鄕憲目序.</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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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1번={{TagSpage|96-2}}이라 하야 이 鄕憲이 그 地方에 있어서는 邑의 重器며 紀綱의 先務가 될 것을 期하였다. 이 鄕憲은 곧 咸興 地方에 頒布되여 實施하도록 하였을 것이나, 그 후 太宗 九年에 이르러는 孝寧大君 補를 비롯하야 元勳있는 宗戚과 德望이 隆著한 者 五十六人(例하면 右議政 崔潤德 靑海伯 李之蘭 生員 李興陽 幼學 金叔孫 等)으로써 豐沛鄕 座目을 組織하야 이 鄕憲의 實施를 督勵케 하였다. 즉 이 鄕憲을 鄕間에 잘 施行하도록 指導하며 督勵하는 機關으로서는 品官으로써 組織된 座目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 座目은 곧 앞서 말한바 留鄕所의 品官과 同質의 것이므로, 따라서 兩者는 容易히 結合하야 前者는 後者의 存在로 因하야 널리 遵奉 實施되고, 後者는 前者의 徹底한 實行에서 結成될 可能性이 많었든 것이다. 前揭 「璿鄕憲目序」 中에도 <cite no="04">「以此意 頒置列邑 永久遵行」</cite>이라는 文句가 있으므로 보아, 이 鄕憲은 비단 咸興 地方에만 實施하게 하고 한 것이 아니라, 널리 全道 列邑에도 頒置하야 遵行케 하고저 한 것이 애초의 意圖이였으니, 만약 그것이 처음의 理想대로만 實行되였다 하면, 그것은 國初부터 組織되여 있든 留鄕所에 依하야 容易히 採用되여 鄕吏를 糾察하고 鄕風을 糾正하는 데 準據가 되였을 것이며, 從來 留鄕所가 없든 곳에서는 이 鄕憲의 遵行을 契機로 하야 鄕里品官들을 結束시켜 한 개의 自治團體를 組織케 하여 留鄕所의 地方化를 結果하였을 것이다. 鄕憲의 內容을 檢討함은 장황하여지므로 이곳에서는 省略하나 그것이 後世 鄕約의 根本 綱目인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의 四綱目과 相合되는 點이 많음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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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2번={{TagSpage|96-3}}上述한 바와 같은 모든 條件이 서로 엉크러져서 李朝 初期 社會에 留鄕所라는 獨特한機關을 產出하게 하였으나, 이 留鄕所는 己述한 바와 같이 太宗 六年 六月 丁卯에 이르러 大司憲 許應 等의 上策에 依하여 革去될 運命에 逢着하였다. 이때 王{{TagPage|97-1}}도 議政府의 擬議를 얻어 이 罷革案에 從하였으나, 事實上 어느 程度까지 實行되였는지는 疑問이다. 설사 國令으로써 徹底한 革去를 命하였다 하드라도, 그것은 外面上의 일에 끌었을 것이요, 實質上에 있어서는 地方에 頑强히 버티고 있는 品官의 勢力이 없어지지 않는 限, 留鄕所의 原態도 자취를 감추지는 않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國家는 留鄕所 革去令의 無意味함을 깨닷고 이로부터 二十三年 後인 世宗 十月 六日에 이르러는 留鄕所의 復設을 命하였다. 그때 올인 禮曹의 啓目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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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3번={{TagSpage|97-2}}<blockquote no="09">奉承傳 各道各官留鄕所復設爲乎矣 因緣作弊品官乙良 痛繩以法爲只爲 禮曹傳致爲良如敎乎等乙用良 向前留鄕所作弊禁防節目乙磨鍊 啓目後錄爲去乎使內何如</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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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4번={{TagSpage|97-3}}라고 있어, 當時 國家도 留鄕所의 作弊를 宛然히 知察하면서도 事勢不得已 그것의 復設을 磨鍊치 아니치 못하게 된 것 같으니, 이것은 留鄕所의 絕對한 威勢에 牽制되여 一時의 國令으로서는 左右할배 못됨을 알고, 그나마 그의 存續을 利用하야 惡吏를 糾察하고 鄕風을 바르게 하고저 하는 爲政者의 窮策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注目할 것은 從來 何等의 制限도 없든 留鄕所 品官의 員數를 府 以上은 五人 郡은 四人 縣은 三人으로 定하고, 또 그들의 監督機關으로 各 官守令 及 京在所를 選定한 일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 없이 國初부터 地方士類들 사히에 私的으로 設置된 留鄕所를 中央政治機關化하야, 그들의 頑固한 勢力을 削減하고 彈壓하야,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行政糾察 地方自治의 任勢만을 履行케 하고저 한 政策의 結果이다. 즉 留鄕所는 累說한 바와 같이 國初에는 다못 地方士類들 사히에 私的으로 組織된 한 개의 自治機關에 지나지 않았었으나, 이것이 世宗朝에 이르러 모든 文物制度가 完備되고 組織化함을 따라 行政機構의 하나로 編入되여 規律化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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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5번={{TagSpage|98-1}}世宗朝에 이르러 留鄕所의 復設을 國令으로써 全國에 命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留鄕所의 普遍化를 꾀한 것이니, 이로써 留鄕所는 全國 各地에 設置됨을 보게 되고 이것은 世祖朝에 이르러 政治史上 重大한 役割을 하게까지 되였다. 즉 世祖 十二年에 咸吉道(咸鏡道) 地方에서 所謂 李施愛亂이라는 謀叛事件이 일어나게 되자, 이 留鄕所는 애초에는 本 叛亂을 誘導하는 重要한 原動力이 되게 되고, 나종에는 이것을 鎭定하는 有力한 統制力이 되게 되었다. 李施愛는 元來 吉州人으로 會寧 節制使까지 지내다가 遭喪하야 故鄕에 退居하든 中, 其弟 施合과 더부러 不動를 꾀하야 世祖 十二年 五月에 이르러 드디여 叛族를 휘날리며 節度使 康孝文을 撲殺한 것을 비롯하야 咸吉道 觀察使 申淝 及 各 邑 守令 等을 殺害하야 短時日 동안에 咸興 以北의 州郡을 糾合케 되였다. 李施愛가 叛亂을 이르킨 主要 原因은 世祖 王의 不義의 即位와 他道人을 本道 方伯 及 守令으로 任함을 反對함에 있었으나, 그의 陰謀가 그다지 짧은 사히에 咸鏡 一道를 風靡할 만치 큰 成果를 거두게 된 것은 그가 休職官吏의 結合體인 留鄕所를 좋도록 利用한 까닭이다. 즉 李施愛는 叛亂을 일으키자 곧 咸興 北靑 等地의 留鄕所에 移文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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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6번={{TagSpage|98-2}}<blockquote no="10">{{TagRef|9}}新觀察使申㴐 乃亂臣叔舟之子 亦是姦黨 彼若徵兵 可卽殺之<br/>康孝文 軍官玄得利供辭云 孝文與黃起崐申叔舟韓明澮等 謀反領兵 出兵北靑已被誅殺 但慮起崐自知其罪 聚兵構亂 故移文北靑留鄕所 使之追捕 况申㴐亦是姦黨 如有徵兵之事 須即剪除 且徵定平以南諸邑兵 設伏於閑曠之地 侍令<ref>世祖實錄 卷四十二, 第二十一張, 十二年 五月 戊子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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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7번={{TagSpage|98-3}}이라 하야 地方의 有力者인 留鄕品官들의 同意 及 援助를 얻어 그의 謀反을 有利하게 展開하도록 하였다. 從來 地方의 實權을 잡고 權勢를 부려오든 留鄕品官들은 李朝 開國 以來의 中央集權主義에 依한 專制政治에 反感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에 無條件으로 附和雷同하야 마침내 큰일을 저즐러 놓았으나, 그 후 얼마 아니되여 中央政府의 敎書와 出兵으로 말미아마 歸{{TagPage|99-1}}服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當時 中央政府로부터 諸邑 留鄕品官들에게 내린 敎書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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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8번={{TagSpage|99-2}}<blockquote no="11">{{TagRef|10}}李施愛詐稱有密旨 殺害康孝文黃起崐申㴐及守令軍官等 爾等曉諭軍民 使明知順逆 捕施愛待龜城君浚處置<br/>諭咸興留鄕所 李施愛反狀明白 誑誘汝等 汝等何故 從逆賊殺王人 此古今大惡 天地鬼神之所不容 今已遣龜城君浚摠 四道兵件討 予親將大兵繼之 尙慮汝等脅從 不知眞僞 若大兵一加 玉石俱焚 姑令浚按兵不動 以待駕至 先遣諭書 曉諭利害 使汝等終不陷於賊黨 汝等猶不改悟 執迷不返則予必屠城礁類無道矣 汝等如欲更生 其速放尹子雲捕李施愛 以贖前過 飜禍爲福<ref>同上 卷四十二, 第十九―二十二張, 十二年 五月 丁亥及戊子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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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9번={{TagSpage|99-3}}이라고 있으니, 이와 같이 中央政府가 逆賊을 武力으로써 討伐하기 前에 敎諭로써 鎭平코저 한 것은 地方에 盤據한 留鄕品官들의 努力을 몹시 두려워하야, 그들을 平和的으로 鎭撫하야 悔改하게 함으로써 叛逆者의 頭魁인 李施愛 一黨을 가장 效果的으로 掃蕩코저 한 것에 不過하다. 地方의 留鄕品官들은 이러한 國家의 敎書에 終始 不聽할 수 없어, 咸興 留鄕品官 尹克儉 等 十四人은 署名한 事目을 올리는 同時에 回啓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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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0번={{TagSpage|99-4}}<blockquote no="12">{{TagRef|11}}民心未知順逆 一信李施愛之言 臣開諭百端 群疑少解 然尙疑浚及許琮爲賊 臣懇惻譬曉 皆曰然則 汝通施愛 速令來謁 臣遂通書 又欲釋尹子雲 偕來反覆開諭不聽<ref>同上 卷四十二, 第二十八―二十九張, 十二年 五月 癸巳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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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1번={{TagSpage|99-5}}이라고 하야 民情의 頑梗함을 上達하야, 留鄕所의 無能함을 自訴하게 되여, 國家로 하여금 그의 廢革을 論議하게까지 하였다. 즉 一說에는 留鄕所는 李施愛亂의 突發 後 國令으로써 革去되였다고 傳하나, 正確한 史料를 얻지 못한 나로서는 이를 確論키 어려우며, 當時 咸吉道 節度使 許琮의 啓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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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2번={{TagSpage|99-6}}<blockquote no="13">{{TagRef|12}}諸邑留鄕所 承施愛移文 凡言姦黨者 雖守令或殺或囚 臣意以爲留鄕所之事 亦未爲非 凡謀反者 人得而誅之 道內無{{TagPage|100-1}}節度使觀察使 唯聽施愛之語 彼云某是姦黨 則孰有致意哉 臣於所經諸邑招留鄕所 以此意面諭之 且曰施愛移文終雖無實 汝等有何罪焉 反覆告諭 然未知實聽與否<ref>同上 卷四十二, 第二十五張, 十二年 五月 壬辰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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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3번={{TagSpage|100-2}}라고 있어 留鄕所의 非를 否定하고, 또 翌 十三年 二月에는 世祖 親히 溫陽 行宮에 幸하야 留鄕所 掌務 殺害의 獄事를 議한 것으로 보아 世祖王時에 全國的으로 留鄕所의 廢止를 命하였는지도 疑問이다. 설사 世祖 때에 留鄕所의 革去를 命하였다 하드라도 그것은 極히 表面的인 法上의 일에 끄쳤을 것이요, 內容에 있어서는 잘 實行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東北 方面 留鄕所의 頑强한 勢力은 己述한 바와 같이 太祖時에 實施한 鄕憲에서 由來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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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4번={{TagSpage|100-3}}留鄕所는 이와 같이 世祖朝에 이르러 이미 地方의 有力한 勢力團體로 化하야 政治的 動亂의 中心 機關이 되게 되였으나, 그 후 이러한 弊風은 漸漸 甚하여저 成宗 二十一年 十一月 戊戌의 司諫 權景祐의 上啓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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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5번={{TagSpage|100-4}}<blockquote no="14">{{TagRef|13}}國家設立留鄕所者 欲使糾正鄕風也 今之留鄕品官 不務糾正風俗 徒事立威鄕曲 以濟其私 非徒無益 適足爲害 請革之<ref>成宗實錄 卷二百四十七, 第十二張, 二十一年 十一月 戊戌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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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6번={{TagSpage|100-5}}라고 있어 留鄕所가 鄕風糾正의 本義를 버서나 立威의 機關으로 變하여젔음을 論하야 그의 罷革을 請하였다. 成宗은 領事 洪應의 提議에 좇아 世祖朝 革去 後 復設하였음이 不久하다 하야 遽革을 許치 않었으니, 이로써 以後 留鄕所는 더욱 勢力을 펴게 되여, 成宗 二十五年 五月 乙巳에는 慶尙道 泗川 留鄕所 曹敬武 等이 縣學 訓導 吳璟의 留任運動을 일으켜 觀察使 李克均을 通하야 王께 勳啓케 하야, 從來의 任務인 鄕吏檢察에서 한거름 나와 學官의 罷任에까지 容喙케 되였다. 增補文獻備考를 보면 이보다 몬저 成宗 二十年 春에 留鄕所를 改革하야 鄕正을 세워 年老하고 德望이 높은 者를 座首라 稱하고 그 次가는 者를 別監이라 稱하야, 州府는 五員 郡은 四員 縣은 三員으로 定하되 鄕中의 文學才行이 具備한 者를 擇한다 하였으니, 이것도 上述한 바와 같은 留鄕所의 弊害를 하고저 한 爲政者의 考案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點으로 보와 成宗朝에{{TagPage|101-1}} 留鄕所를 復設하였다 함은 그 實인즉 留鄕所의 頹落을 憂慮하야 役員을 更迭함으로써 鄕風糾正의 任務를 嚴行케 하고저 함에 지나지 않었을 것이다. 成宗 二十五年에 作한 弘文館 校理 權五福의 {{TagRef|14}}醴泉鄕射堂記<ref>權五福의 睡軒詩集, 卷之三, 鄕射堂記.</ref>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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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7번={{TagSpage|101-2}}<blockquote no="15">我殿下即位之戊申 令所在復立留鄕所 有座首別監焉 推年德高者 謂之座首 其次稱別監 糾管一鄕風俗 所員府四人郡 三縣二 吾鄕郡也 尹侯季殷權侯推爲別監 而家君爲座首</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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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8번={{TagSpage|101-3}}라고 있어 留鄕所 員數가 前記 人數보다 一人式 不足하나, 이것은 別問題로 돌리고 이로써 座首는 一人으로 留鄕所의 最高 指導者이며 別監은 府 郡 縣에 따라 四人 三人 二人식으로 座首를 補助하야 鄕風糾正의 任務를 擔當하는 者임을 알 수 있다. 이 座首 別監의 任期 等에 對하야는 詳細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이 制度는 京在所 及 後述하는 司馬所에서도 그대로 採用되여 그들의 頭領을 모다 座首라고 稱하게 되였다. 그리고 醴泉鄕射堂記에는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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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9번={{TagSpage|101-4}}<blockquote no="16">今之留鄕所 即古黨正之遺意也 鄕有頑嚚自恣不孝悌不睦不姻不任恤者 此堂得以議之 史有包藏奸慝憑假城社侵漁百姓者 此堂得以議之 推周官三物之敎 行汝南月朝之評 以礪一鄕之風俗者 亦莫不於堂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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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0번={{TagSpage|101-5}}이라 있고, 金馹孫의 {{TagRef|15}}金海會老堂記<ref>金馹孫의 濯纓集 卷之三, 會老堂記.</ref>에도 大略 同樣의 記事가 있는 것으로 보아, 留鄕所는 漸漸 自治組織化하여 가 後世의 이른바 鄕約의 精神과 相近하여 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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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1번={{TagSpage|101-6}}李朝의 모든 文物制度가 成宗 以後 弛緩하여 갔음과 같이 留鄕所도 이때부터 더욱 腐敗하여가기 시작하야, 留鄕所는 漸次 鄕風糾管의 本意를 잊어바려 오로지 野心을 품은 惡輩의 集合所로 變하여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成宗 後 燕山君이 即位하자 그 元年 五月 庚戌에는 忠淸道 都事 金馹孫이 곧 謹條利病 二十六事를 上䟽하야, 그 一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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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2번={{TagSpage|101-7}}<blockquote no="17">{{TagRef|16}}責留鄕以礪風俗 國家於留鄕 建革不一議者紛紛 而先王卒置之者 以其窮村僻鄕 監司守令所不及知之 善惡皆得以糾{{TagPage|102-1}}擧也 有古閭師族師之遺意焉 今但與邑吏爲敵 發摘其弘 徴贖以拚一遊耳 其於鄕風 邈然無正 且鄕射鄕飲養老等禮所 以別淑慝 而成禮俗也 著在令甲 而俗吏慢不擧行 臣願三年之後 以此等事責留鄕 以時告守令而行之 凡一鄕之人無問貴賤 孝友睦姻 一善可記者齒之 其惡者不齒 善之大者 告守令報監司以旌 異之惡之大者 亦報監司 用周制移遂移郊之法 如干名敎 但犯杖以上 皆充入居 勒令入居 只取富實元無一罪 何惜有罪者乎 憲府督責京在所 交察鄕風 鄭員有不擧職者 則痛治 亦化民成俗之一端也<ref>燕山君日記 卷五, 第三十三張, 元年 五月 庚戌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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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3번={{TagSpage|102-2}}라고 하야 頽落된 留鄕所를 更生하야 鄕風糾正의 任務를 다하게 하고저 監督者인 監司守令 及 京在所로 하여금 그들을 督責케 하기를 請하였다. 이 獻策이 곧 採用되였는지는 不明하나, 何如튼 留鄕所의 退廢가 오랜 歲月을 거듭하는 동안에 비저진 일이니많지 이러한 一時의 案策으로 쉽게 挽回되였을가 싶지 않어, 燕山君 四年 八月 癸酉에 柳子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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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4번={{TagSpage|102-3}}<blockquote no="18">{{TagRef|17}}南原咸陽皆臣本貫 故臣親見之 生員進士別立一所 名曰司馬 私相聚集 群飲橫議 於人吏少有不愜 輒鞭撻 留鄕品官 多是老劣 故一邑人吏蔑視留鄕所 反附司馬所 其弊不貲 爲守令者 非徒不能禁之 反給奴婢 以典其所殖穀貨 國家所設留鄕之外 又有此輩私立一所 甚不可……如此之風 宜痛革 請下書八道監司 凡所謂司馬所 一切革罷<ref>同上 卷三十一, 第二張, 四年 八月 癸酉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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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5번={{TagSpage|102-4}}라고 啓한 바와 같이 留鄕所는 오로지 老劣한 隱退者의 巢窟로 化하여저 가고 이것을 代身하야 司馬所라는 것이 出現케 되였든 것이다. 司馬所는 上記文에도 明示한 바와 같이 地方의 生員 進士들로써 組織된 한 개의 儒林(兩班)團體니, 이것은 儒敎文化가 바야흐로 무르녹고 있는 當時에 있어서 新進學徒들 사히에 必然的으로 組織되여야 할 性質의 것으로, 그의 出現은 老劣한 先輩들의 集合所인 留鄕所를 壓倒하였을 뿐더러 無能한 爲政者들에게도 큰 威脅的 存在이였었다. 그러므로 戊午史禍라는 前古未曾有의 儒林虐殺 事件을 일으키게 한 奸臣 柳子光은 事件 發生 即後 如上의 上啓를 하야 儒林團體를{{TagPage|103-1}} 消滅케 하고저 하였으나, 儒敎를 遵奉하는 李朝 社會에서는 儒林이 없어지지 않는 限 그의 理想은 實現되지 못하였을 것 같어, 以後도 依然 司馬所는 存續하야 有形無形 여러가지의 影響을 李朝文化史上에 끼치게 되여, 宣祖 即位年인 丁卯年 十月에 柳希春이 中央官吏로 擢用되여 出鄕하려 할 지음에도, 恩津縣 司馬所에서 金田漑 生員 金爕 徐景福 崔應參 等 九人이 設酌하야 {{TagRef|18}}送別宴을 베푸렀다 한다.<ref>柳希春의 眉巖日記草 第一册(朝鮮史料叢刊 第八 第十九頁) 丁卯 十月 十七日條.</ref> 이리하야 留鄕所는 司馬所의 出現으로 말미아마 衰退하지 아니치 못할 運命에 逢着하야 그는 漸次 鄕風糾正의 本分을 버서나 民吏를 侵害함으로써 私利를 채우고저 하는 奸惡한 士類의 集合所나 或은 京鄕을 往來하는 官吏의 寄宿所로 變하여지고 말어, 燕山居 六年 九月 己卯의 掌令 申叔根의 上言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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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6번={{TagSpage|103-2}}<blockquote no="19">{{TagRef|19}}各官設留鄕所 京中設京在所 以正風俗今各官吏到京 則多辦食物饋 京在所人員不如意 輒加侵虐……如此弊風 皆可革<ref>燕山君日記 卷三十九, 第五張, 六年 九月 己卯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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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7번={{TagSpage|103-3}}이라고 있어 留鄕所의 京城 出張所인 京在所가 上京한 地方官吏에게 侵害됨을 論하였다. 이러한 弊害가 續出함을 따라 留鄕所의 廢止論도 時時로 擡頭하게 되여, 中宗 十二年 十二月 戊午에는 西所 入直 正兵 崔淑澄이 數條의 時務策을 上䟽하야 그 一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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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8번={{TagSpage|103-4}}<blockquote no="20">{{TagRef|20}}各官設立留鄕所京在所者 將以糾正一鄕風俗也 今者非徒不正風俗 而人吏被侵 不無流亡之弊 請於蘇復之間 罷京姑在留鄕所<ref>中宗實錄 卷三十一, 第十二張, 十二年 十二月 戊午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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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9번={{TagSpage|103-5}}라고 하야 留鄕所 京在所의 罷革을 上請하였다. 그러나 이 時務策도 王의 嘉納으로 一時施行을 傳命하기는 하였으나 理想대로 잘 實行되지 못한 것 같이, 以後도 留鄕所 京在所는 依然 存續하야, 宣祖 即位年인 丁卯 十月 十九日에는 恩津에 移配되여 있든 柳希春이 中央官吏로 榮轉케 되매 當邑 留鄕品官 前 座首 孫薔 僉使 趙珝 座首 徐秩 等 十人이 東軒에서 餞送{{TagPage|104-1}}宴을 베풀렀다 하며, 翌年 戊辰 三月 十二日에는 柳希春 自身이 司諫의 官職으로서 潭陽 京在所의 座首를 兼하였다 하며, 同年 五月 一日에는 柳希春이 潭陽 留鄕所의 座首를 崔希尹으로 {{TagRef|21}}決定하였다고 한다.<ref>柳希春의 眉巖日記草 第一册(朝鮮史料叢刊 第八 第二十頁) 丁卯 十月 十九日條 及 同册 戊辰 三月 十二日條(第一百五十三頁) 同 第二册 戊辰 五月初 一日(第二百十四―二百十五頁).</ref> 그 후로 留鄕所 京在所의 罷去論은 朝臣 間에 主唱되여, 宣祖 元年 五月 十一日에는 掌令 李憲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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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0번={{TagSpage|104-2}}<blockquote no="21">京在所 所以正風俗也 今無識不義之徒 責賂於郡邑之吏 人不能堪 請罷京在所</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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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1번={{TagSpage|104-3}}라고 進言하매, 司諫 柳希春은 곧 이것을 辯明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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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2번={{TagSpage|104-4}}<blockquote no="22">李憲國所言 請罷京在所 蓋見不義作弊之人 慣疾而有是說耳 祖宗朝設立留鄕所 以正風俗 糾察元惡鄕吏也 設立京在所者 所以檢擧關通留鄕所也 留鄕所非其人 則作弊爲民害 甚於京在所 然惡此等之爲害而遂廢之 則是惡水之不潔遂 窒之以出也 其爲矯枉過直甚矣 莫若令守令 察留鄕所之不法 司憲府 察留鄕京在二所之不法 無使縱恣 斯爲得中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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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3번={{TagSpage|104-5}}라고 {{TagRef|22}}進言하야<ref>同上 第二册 戊辰 五月 十一日條(第二百二十六頁).</ref> 守令 及 司憲府로 하여금 二所를 監察케 하므로써 그의 頹廢를 防止하기를 主張하였다. 이리하야 留鄕所 京在所는 李朝 中期 以後에도 尙存하야 半島社會史上 重大한 役割을 하게 되였으나, 그의 末路가 어찌 되였는가 함은 이곳에서 檢討할 겨를이 없으므로 省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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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4번={{TagSpage|104-6}}以上 論述하여 온 바와 같이 留鄕所는 李朝 上半期를 通하야 行政糾察 及 自治團體로서의 面目을 表面上으로라도 維持하여 왔으나, 끝으로 結論的으로 한마듸 말하여 둘 것은 李朝 中期 初에 이르러 留鄕所가 不振狀態에 빠지자 그를 回復하야 風俗糾正의 任務를 完全히 하게 하고저, 그로 하여금 呂氏鄕約을 遵奉하야 實施하게 한 일이다. 즉 中宗 十四年 七月 己酉에 叅贊官 韓忠이 啓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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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5번={{TagSpage|104-7}}<blockquote no="23">前日 小學已頒給內外官矣 今呂氏鄕約亦可皆給 請並分給於外方留鄕所何如</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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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6번={{TagSpage|105-1}}라고 하매, 王도 곧 이에 賛成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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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7번={{TagSpage|105-2}}<blockquote no="24">呂氏鄕約者 本爲民也 當如所啓</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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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8번={{TagSpage|105-3}}라고 하자, 다시 韓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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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9번={{TagSpage|105-4}}<blockquote no="25">京城之中 亦有妨里 必爲鄕約矣 此冊令五部官 分給于各洞約正何如</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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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60번={{TagSpage|105-5}}라고 {{TagRef|23}}進言하야<ref>中宗實錄 卷三十六, 第四十六―四十七張, 十四年 七月 己酉條.</ref> 呂氏鄕約을 外方 留鄕所 及 京城 五部 各 洞 約正에게 分給하야 이것을 實施하게 하므로써 自治組織을 더욱 굳게 하고저 하였다. 王도 無條件으로 이에 賛同하여 「可之」라 하여 全國 各地 留鄕所 及 京城 五部 各 洞에 呂氏鄕約을 頒布케 하야 쓰러져 가고 있든 留鄕所를 다시 붓잡게 하였으니, 以上 鄕約 實施의 前提로서의 留鄕所의 由來를 累累히 論述하여 왔음도 無意味한 일은 아닐 것이다.
  
|목차2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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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번=유향소의 유래를 밝힘에는 먼저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부터 논해야 하겠다. 유향소의 성질 내지 조직에 관하여는 이조 {{TagPerson|[[세종]]}} 10년 6월에 유향소를 복설하였을 때 내린 {{TagRefT|1}}{{TagArticle|[[「유향소(복설마련)절목」]]}}<ref group="a">{{TagBook|[[향헌]]}} 권1, 유향소절목조.</ref> 중에
|목차2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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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blockquote no="01">一 留鄕所品官 府以上五人 郡四人 縣三人 爲等如差定爲乎矣 令京在所擇定<br/>一 留鄕所設立本意段 專爲紏察惡吏 以正鄕風爲白去乙 品官等不顧本意 假仗權威 反爲作 弊 今後乙良 所在官守令及京在所 嚴加痛禁 必有犯罪者 報觀察使 科罪這這改差</blockquote>
|목차2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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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번=라는 두 조목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그것의 대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유향소의 설립 본의는 지방의 악리(惡吏)를 두찰(紏察)하여 향풍을 바르게 함에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악리라 함은 소위 원악향리(元惡鄕吏)를 이르는 것이니, 감사 수령 아래의 속료로서 직접 백성과 접촉하여 최하급의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향리(서리)들이 때로는 중앙정부로부터 파견된 방백 수령 이상의 실권을 잡아 수뢰 수렴 모민 사리 등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폐해를 방비하기 위하여 {{TagBook|[[경국대전]]}}에도
|목차2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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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번=<blockquote no="02">{{TagRefT|2}}元惡鄕吏 許人陳告 亦許本官京在所告司憲府 推効科罪 犯徒者永屬本道殘驛吏 犯流者永屬他殘驛吏 守令知而不擧劾</blockquote>{{TagPage|89-1}}者 以制書有違律論<ref group="a">{{TagBook|[[경국대전]]}} 권지5 형전, 원악향리조.</ref>
|목차2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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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번=과 같은 형률을 규정하여, 각 관 경재소 및 수령들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문율로서의 {{TagBook|[[경국대전]]}}이 전부 준용하게 된 이조 {{TagPerson|[[성종]]}} 이후의 일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 있어서는 이러한 향리의 발호(跋扈)를 어찌하여 징벌하였던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같은 유향소를 설치하게 하여, 향리의 유력자들로 하여금 그들 향리(鄕吏)의 악행을 두찰하게 하였던 것이다. 즉 이조 국초 아직 법전이 완성되기 전에는 지방의 품관 수명으로 하여금 유향소를 조직하게 하여, 원악향리의 발악에 대비하는 한편 향간풍속(鄕間風俗)을 돈후하게 하여 행정두찰 및 지방자치의 임무를 띠게 하였다. 앞서 든 유향소 절목에도 명기한 바와 같이 부(府) 이상은 5인 군은 4인 현은 3인의 품관을 각 경재소가 택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유향소를 설치하게 하였다. 이곳에서 품관이라 함은 {{TagBook|[[중종실록]]}}에 {{TagRefT|3}}「鄕中士類 謂之品官」<ref group="a">{{TagBook|[[중종실록]]}} 권45, 제1장, 17년 6월 병자삭조.</ref>이라 하였음과 같이 관을 파하고 귀향하였거나, 혹은 애초부터 향리에 있어 노력을 갖게 된 양반 계급으로 후세에 이른바 유림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며, 경재소라 함은 각 지방에 생활의 근거를 둔 중앙관리(양반) 중에서 선택하여 조직된 한 개의 단체니, 이를테면 유향소의 경성 출장소 내지 감시소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유향소의 유래를 논함에는 필연적으로 경재소에도 언급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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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6번=그러면 이러한 유향소는 어느 때부터 설치되어 있었던가. 무릇 최하급의 행정기구로서의 향리의 제도가 이미 고려 초기부터 거의 정비되어 있었던 만큼, 그들 향리(호장이라 칭함)의 직권남용의 폐풍도 그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향리의 발호를 막기 위한 검찰기관을 두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었으니, 고려 {{TagPerson|[[태조]]}}가 그 18년에 내항한 신라 말 왕 {{TagPerson|[[김부]]}}로 하여금 경주 사심관이 되게 하여 부호장 이하의 관직을 살게 한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 사심관은 왕건 {{TagPerson|[[태조]]}}가 그의 적대자이던 신라 왕 {{TagPerson|[[김부]]}}를 후하게 대접하여, 그로 하여금 그의 고사(故士)인 경주의 감독관이 되어 종래의 체면을 다소라도 유지하게 하여, 신흥국인 고려에 대한 적개심을 없애도록 하고자 함에서 우러나온 직제일 것이나, 이것은 얼마 안 가서 모든 공신에게도 주게 되어, 그들은 각기 본주(本州) 사심관이 되어 그 지방의 향리를 검찰하며 향풍을 두정(紏正)하게 되었다. 사심관에 대하여는 좀 더 상세히 논술할 겨를이 없으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하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는 {{TagPerson|[[충숙왕]]}} 5년 5월에 내린 교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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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7번=<blockquote no="03">{{TagRefT|4}}事審官之設本爲宗主人民 甄別流品 均平賦役 表正風俗 今則不然 廣占公田 多匿民戶 若小有差役 例收祿轉 則吏之上京者 敢於私門 決杖徵銅 還取祿轉 擅作威福 有害於鄕 無補於國已 盡革罷 其所匿田戶 推刷復舊<ref group="a">{{TagBook|[[고려사]]}} 권75, 선거3 전법, 사심관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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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8번=라고 있음으로써 그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으니, 즉 정부는 본관을 설정함으로써, 직접 관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도와 풍속을 바르게 하며, 지방 토호을 취체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각 주의 사심관의 수는 {{TagPerson|[[성종]]}} 15년에 5백정 이상 주는 4원 3백정 이상 주는 3원 공(工) 이하 주는 2원으로 제정하였으니, 모든 것이 이조의 유향소와 비슷하다. 앞서 든 교문에도 명시한 바와 같이 이 사심관은 고려 말엽에 이르러 여러가지의 폐해를 짓게 되어, 수차 국령으로써 그의 혁파를 명하여 왔으나 끝끝내 잘 시행되지 못하고, 귀족 정치 시대이던 당시에 있어서는 지방에 반거한 귀족 권호(權豪)들이 각자 사심관이라 모칭하야 지방행정을 좌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방 귀족 권호의 특권 행위가 곧 왕조가 바뀐 이조에 들어와서는 소위 유향소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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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9번=사심관과 아울러 이곳에서 한마디 말하여 둘 것은 고려의 {{ruby|기인|○○}}의 제(制)이다. 기인이라 함은 고려사에 {{TagRefT|5}}「國初選鄕吏子弟 爲質於京 且備顧問其鄕之事 謂之其人」<ref group="a">{{TagBook|[[고려사]]}} 기인조.</ref>이라 하였음과 같이, 왕건 {{TagPerson|[[태조]]}}가 반도 천하를 다스리게 되니, 지방향리의 발호 모반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자제를 볼모로 서울에 잡아두고 각 향리의 사정을 고문함에 대비하고자 하는 제도이니, 이를테면 향리의 발호를 견제하려는 소극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기인은 한편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정책의 기밀을 뒤져내는 수도 있었을 것이니, 이 점으로 보면 기인은 향리의 밀정으로 그들의 피범(被犯)됨을 앞서서 막은 자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기인의 제도 이조에 끼친바 영향이 막대하여, 물론 그의 계급과 내용을 달리하지만 경재소의 출현을 보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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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0번=이와 같이 고려조(朝)에 있어서는 향리의 발호를 제압하여 향풍을 바르게 하고자 사심관 및 기인의 제를 설정하였으나, 왕씨의 뒤를 이어 새 나라를 세운 이씨 조선에 있어서는 그러면 어찌하여 지방에 완강히 버티고 있는 향리들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던가. 그것은 위에서도 잠깐 말한 바와 같이 지방의 유력자(양반)들로 하여금 유향소를 설치하게 하여 악리검찰의 임무를 이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유향소의 설치에 대하여는 {{TagBook|[[증보문헌비고]]}}에는 간단히 <cite no="01">“國初置郡縣留鄕所 旋罷尋復”</cite>이라 하여, 그것이 이조 초기에 설치되었다고 하였으나, 가장 근본 사료인 이조 초기 제왕의 실록을 뒤져보아도 그의 명확한 연대를 잡아내지 못하였음은 유감이다. 그러나 이조 제3대왕인 {{TagPerson|[[태종]]}} 6년 6월 정묘에 사헌부 대사헌 허응 등이 상헌(上獻)한 무시7조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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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1번=<blockquote no="04">{{TagRefT|6}}其四 州郡縣各有守令 鄕愿好事之徒 置留鄕所 無時群聚 話毁守令 進退人物 侵漁百姓 甚於滑吏 乞皆革去 以除積弊<ref group="a">{{TagBook|[[태종실록]]}} 권11, 제27장, 병술 6년 6월 정묘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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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2번=라는 하나의 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때 이전부터 유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상소 조문에 의하면 유향소는 국가 정부로부터 국령으로써 설치를 명한 것이 아니라, 지방군현의 유지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인 듯하다. 이 조문은 유향소의 폐해를 인정하여 그것의 혁거를 상청(上請)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조직 인원을 <cite no="02">“鄕愿好事之徒”</cite>라 하여 향곡에 숨은 위선 군자처럼 취급하였으나, 그 실(實) 이러한 자치단체를 결성할 만한 자격을 가진 자는 적어도 그 지방의 덕망 있는 선각자들로 소위 품관이라 일컫는 바와 같은 양반계급의 분자였을 것이다. 이러한 향곡의 사류(士類)들은 오랜 옛적부터 그 지방에 자리를 잡고 권세를 부리게 되어, 마침내는 유향소와 같은 자치단체를 자진하여 결성하게 된 것이니, 그의 연원은 적어도 고려조(朝)에 소급할 수 있다. 즉 고려 말엽에 이르러 향리검찰 및 향풍사정의 임무를 띤 사심관의 제를 파혁하게 되니, 향리에서 권세를 부리던 귀족 양반들은 이에 응하지 아니하고 국헌을 무시하면서 사적으로 사심관과 비슷한 기관을 조직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유향소의 모태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향소는 고려조(朝) 사심관의 유풍으로 고려 말에 이미 지방적으로나마 결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 향리를 살피고 향속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좋은 의미의 기관이 이조 개국 이래 불과 15년이 못되어 폐해를 일으키게 되어 태종 6년에 이르러 그것의 혁거를 소청하여 왔음과 같은 것은 그의 근거가 이미 퍽 오래였음을 여실히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유향소는 고려 말에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완성되어 (물론 그때부터 유향소라는 명칭을 붙였는지는 의문이나) 이것이 이조에 들어와 유교적 문치정책에 의하여 좀 더 조직화하고 보편화하였다고 본다. 당시 대소 품관들로 하여금 각 향리에 정주하여 굳은 근거를 잡게 한 사실을 들면, {{TagPerson|[[태조]]}} 7년 2월 계사에 경상도 관찰사 {{TagPerson|[[이지]]}}(李至)가 상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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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3번=<blockquote no="05">{{TagRefT|7}}道內大小品官 名載居京之籍者 往還之際 馬多困斃 今復有令 刻日赴京 故有傾家買馬者 臣竊謂 當今無事之時 誠宜務農養兵 以備不虞 今若督責赴京 使人馬困耗 農事失時 殊爲未便 況本道前年失農 裹糧亦難 除孝廉茂才 可備擢用外 限今年 各安其鄕 務農養兵<ref group="a">{{TagBook|[[태조실록]]}} 권13, 제5장, 7년 2월 계사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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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4번=이라 하여 {{TagPerson|[[태조]]}}가 즉위하니 예전에 일찍부터 경향(京鄕)에 흩어져 있는 대소의 관리들을 진무 귀복하게 하고자 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성에 재적하게 하여 매년 1차씩 조근(朝覲)하게 한 것을 일시 정지시키자고 상청한 일이다. 이곳에서 대소 품관이라 함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조에 들어와서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일찍부터 권세를 잡고 있는 대소의 관리(양반)들이었을 것이며, 그들은 신흥 이씨 국가에 대하여 한 개의 위협적 존재였다. 그러므로 {{TagPerson|[[태조]]}}는 즉위하자마자 곧 그들 대소 품관을 경성에 재적하게 하여 모반의 기회를 없이 하도록 매년 1차씩 참근(參覲)하는 형식을 취하게 하였으나, 이와 같이 대소의 품관들이 빈번히 경향(京鄕)을 왕환(徃還)함을 따라 그들 사이에는 상호의 친목을 도우며 노력을 펴게 할 어떠한 형식의 조직단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의 향리에서 나타난 것이 유향소요, 경성에서 결성된 것이 경재소였었다. 유향소 및 경재소가 어느 때 설치되었는가 하는 연대를 적확히 비정(比定)하기는 곤란하나,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이미 고려 말에 있어서 향리에 퇴거한 사류들 사이에는 유향소와 비슷한 어떠한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조 개국 후에는 지방에 본거를 둔 중앙정부 관리들 사이에 경재소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연대가 바뀌는 동안에 후자는 국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전자를 좀 더 조직화하여 마침내 유향소라는 명칭을 붙이게 하여 향리를 규찰하게 하는 한편, 양자는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중앙정권을 견제하는 세력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든 세종 10년의 유향소 절목 중에 ‘유향소 품관은 경재소가 택정한다’ 하는 것은 저간의 소식을 여실히 전하는 것이나, 이것은 한편 중앙정부가 지방에 흩어져 있는 귀족 양반을 통솔하여 불의의 사변을 미연에 방비하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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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5번=이와 같이 하여 이조 건국과 아울러 유향소 및 경재소가 출현하였으나 이것들이 좀 더 조직화하고 보편화하게 된 것은 국가로부터 향리 교화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게 한 이후의 일이다. 이조 초기에 있어서 향풍을 돈후하게 하고자 실시를 명한 가장 유명한 일은 {{TagPerson|[[태조]]}} 친제의 향헌조목의 반포이다. {{TagPerson|[[태조]]}}는 새 나라의 임금으로 반도에 거림(居臨)하자 그 2년 9월 병진에는 그의 발상지인 화령부를 영흥부로 개칭하고, 또 한나라 {{TagPerson|[[고조]]}}가 낳은 고향의 이름을 본떠, 그의 생육하던 향촌을 풍패향(豐沛鄕)이라 명명하여, 신흥 국왕으로서의 자기의 출생지를 미화 존칭하는 한편, 그 7년 4월에 이르러는 친히 함흥에 거동하여 아래에 기록하는 바와 같은 {{TagArticle|[[향헌조목]]}}41조를 친제(親制)하며, 다시 그곳 종실인 {{TagPerson|[[효령대군]]}} 보(補)로 하여금 이것을 증보하게 하여, {{TagPerson|[[효령대군]]}}이 제정한 선목 21조 악목 35조 도합 56조와 아울러 이것을 그의 향읍에 반포하여 실시하기를 명하였다. {{TagPerson|[[태조]]}}가 친히 제정한 헌목 41조는 대략 6강으로 나누어 5강은 각 8조를 포함하고 1강은 1조로 되었으니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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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6번=<blockquote no="06">一 部民告訐者 妻妾相關者 妻族不明者 族屬通奸者 操弄官長者 身犯奸盜者 婦女失行者 濁亂家門者 右八條永爲削籍事<br/>一 偷罪受刑者 非理好訟者 收歛作弊者 陰毀族親者 陰毀本所者 陰毀同列者 汚染鄕風者 胥吏爾予者 右八條限己身損徒事<br/>一 疎薄正妻者 賤人交結者 長立訟庭者 訟事退步者 同列相關者 衣冠不正者 不明外戚者土主外論者 右八條永爲棄身事<br/>一 凌慢齒上者 恃富輕貧者 凌蔑齒下者 恃强凌弱者 不顧本所者 僉親埋沒者 鄕叅不合者 吝貪殘列者 右八條當身不用而勿棄子孫事<br/>一 己身傭役者 詰友擧痕者 齒上據坐者 座中戲弄者 富而不通者 貧而驕强者 愚以責人者 强以責人者 右八條朞年損徒而元日招辭懲罪役受宴赦身事年少者未許座而罰四十度後許本座事<br/>一 元非治鄕之人 內外無咎 有志懸望 有操行卓異者 僉議叅鄕許入事 限朞損者 改過則還入時 招辭捧上 齊馬首 間年高者 降三座 年少者末座 行罰禮後 還本座 限半期損者 降一等依例施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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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7번=그리고 {{TagPerson|[[효령대군]]}}보(補)는 앞서 쓴 태조 친제 헌목 외에 다시 선목 21조와 악목 35조를 제정하여 전자를 보증하였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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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8번=<blockquote no="07">父母孝養 土主尊敬 夫妻和順 男女有別 少長有序 朋友有信 喪祭誠敬 隣里和同 敬老慈幼 學書通古 患難相救 婚姻相助 臨亂執節 官事勤儉 受人寄托 持身廉謹 見善必行 聞過必改 務農節用 田畔相讓 學書習武<br/>右二十一條善目<br/>父母不孝 疎薄正妻 妻妾背夫 土主不敬 男女無別 朋友不信 兄弟不和 隣里不睦 患難不救 竊人妻妾 婚姻不助 盜賊害物 喪祭不謹 官員欺罔 官事不勤 寄托不受 無故闕防 好訴行讒 旅師弄權 妓生作妾 爭鬬相殘 奸吏作弊 賄賂于請 以强凌弱 以少凌長 賤人結友 以賤凌貴 行己無恥 以惡凌善 憑公營私 冠服無章 田畔相侵 知非謬擧 挾私論人 惰農虛費<br/>우(右) 35조 악목</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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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9번=이라 하여 {{TagPerson|[[태조]]}}친제의 향헌목 41조와 {{TagPerson|[[효령대군]]}}보(補)가 증제한 향헌 56조는 {{TagPerson|[[태조]]}}7년 4월 8일에 이르러 <cite no="03">“豐沛邑鄕錄案”</cite>이라는 명목으로 성책하게 되어, 이후 그 지방에서 준봉 실시하게 되었으나, 그때 {{TagPerson|[[효령대군]]}}보(補)가 지은 {{TagArticle|[[「선향헌목서」]]}}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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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0번=<blockquote no="08">{{TagRefT|8}}太祖之經營 未滿三禩 化家爲國 而改本鄕邑曰永興豐沛之館 而周之豳邰漢之豐沛鄕故 戊寅夏四月八日 臣愚至誠奉 旨著書憲目曰豐沛邑鄕錄案 實邑之重器 紀綱之先務也 誰不敬歟 誰不重歟 誰不施乎 以此案義正法然後 傳旨據召 沛邑鄕才子士池士善孔聖裔元月春三人等授案侍駕 催率之還鄕 以一無違案正式之法 左之于書 以此意 頒置列邑 永 久遵行事幸甚幸甚<ref group="a">{{TagBook|[[향헌]]}}권1, 선향헌목서.</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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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1번=이라 하여 이 {{TagBook|[[향헌]]}}이 그 지방에 있어서는 읍의 중기(重器)며 기강의 선무가 될 것을 기(期)하였다. 이 {{TagBook|[[향헌]]}}은 곧 함흥 지방에 반포되어 실시하도록 하였을 것이나, 그 후 {{TagPerson|[[태종]]}}9년에 이르러는 {{TagPerson|[[효령대군]]}} 보(補)를 비롯하여 원훈 있는 종척과 덕망이 융저(隆著)한 자 56인(예를 들면 우의정 {{TagPerson|[[최윤덕]]}} 청해백 {{TagPerson|[[이지란]]}} 생원 {{TagPerson|[[이흥양]]}} 유학 {{TagPerson|[[김숙손]]}} 등)으로써 풍패향 좌목을 조직하여 이 향헌의 실시를 독려하게 하였다. 즉 이 향헌을 향간에 잘 시행하도록 지도하며 독려하는 기관으로서는 품관으로써 조직된 좌목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 좌목은 곧 앞서 말한바 유향소의 품관과 동질의 것이므로, 따라서 양자는 용이하게 결합하여 전자는 후자의 존재로 인하여 널리 준봉 실시되고, 후자는 전자의 철저한 실행에서 결성될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다. 앞서 든 {{TagArticle|[[「선향헌목서」]]}} 중에도 <cite no="04">“以此意 頒置列邑 永久遵行”</cite>이라는 문구가 있음으로 보아, 이 {{TagBook|[[향헌]]}}은 비단 함흥 지방에만 실시하게 하고 한 것이 아니라, 널리 전체 도(道) 여러 고을에도 반치(頒置)하여 준행하게 하고자 한 것이 애초의 의도였으니, 만약 그것이 처음의 이상대로만 실행되었다 하면, 그것은 국초(國初)부터 조직되어 있던 유향소에 의하여 용이하게 채용되어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규정(糾正)하는 데 준거가 되었을 것이며, 종래 유향소가 없던 곳에서는 이 {{TagBook|[[향헌]]}}의 준행을 계기로 하여 향리품관들을 결속시켜 한 개의 자치단체를 조직케 하여 유향소의 지방화를 결과하였을 것이다. {{TagBook|[[향헌]]}}의 내용을 검토함은 장황하여지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하나 그것이 후세 향약의 근본 강목인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4강목과 상합되는 점이 많음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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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2번=상술한 바와 같은 모든 조건이 서로 엉클어져서 이조 초기 사회에 유향소라는 독특한기관을 산출하게 하였으나, 이 유향소는 이미 논한 바와 같이 태종 6년 6월 정묘에 이르러 대사헌 {{TagPerson|[[허응]]}}등의 상책에 의하여 혁거될 운명에 봉착하였다. 이때 왕도 의정부의 의의(擬議)를 얻어 이 파혁안에 종(從)하였으나, 사실상 어느 정도까지 실행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설사 국령으로써 철저한 혁거를 명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외면상의 일에 끌었을 것이요, 실질상에 있어서는 지방에 완강히 버티고 있는 품관의 세력이 없어지지 않는 한, 유향소의 원태(原態)도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유향소 혁거령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이로부터 23년 후인 {{TagPerson|[[세종]]}}10월 6일에 이르러는 유향소의 복설을 명하였다. 그때 올린 {{TagPerson|[[예조]]}}의 계목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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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3번=<blockquote no="09">奉承傳 各道各官留鄕所復設爲乎矣 因緣作弊品官乙良 痛繩以法爲只爲 禮曹傳致爲良如敎乎等乙用良 向前留鄕所作弊禁防節目乙磨鍊 啓目後錄爲去乎使內何如</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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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4번=라고 있어, 당시 국가도 유향소의 작폐를 완연히 지찰(知察)하면서도 사세부득이 그것의 복설을 마련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 것 같으니, 이것은 유향소의 절대한 위세에 견제되어 일시의 국령으로서는 좌우할 바 못됨을 알고, 그나마 그의 존속을 이용하여 악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위정자의 궁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종래 하등의 제한도 없던 유향소 품관의 원수(員數)를 부(府) 이상은 5인 군은 4인 현은 3인으로 정하고, 또 그들의 감독기관으로 각 관수령 및 경재소를 선정한 일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 없이 국초부터 지방사류들 사이에 사적으로 설치된 유향소를 중앙정치기관화하여, 그들의 완고한 세력을 삭감하고 탄압하여,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행정규찰 지방자치의 임세(任勢)만을 이행하게 하고자 한 정책의 결과이다. 즉 유향소는 거듭 논한 바와 같이 국초에는 다못 지방사류들 사이에 사적으로 조직된 한 개의 자치기관에 지나지 않았었으나, 이것이 {{TagPerson|[[세종]]}}조(朝)에 이르러 모든 문물제도가 완비되고 조직화함을 따라 행정기구의 하나로 편입되어 규율화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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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5번={{TagPerson|[[세종]]}}조(朝)에 이르러 유향소의 복설을 국령으로써 전국에 명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향소의 보편화를 꾀한 것이니, 이로써 유향소는 전국 각지에 설치됨을 보게 되고 이것은 {{TagPerson|[[세조]]}}조(朝)에 이르러 정치사(政治史)상 중대한 역할을 하게까지 되었다. 즉 세조 12년에 함길도(함경도) 지방에서 소위 {{TagEvent|[[이시애난]]}}(亂)이라는 모반사건이 일어나게 되자, 이 유향소는 애초에는 본(本) 반란을 유도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게 되고, 나중에는 이것을 진정하는 유력한 통제력이 되게 되었다. {{TagPerson|[[이시애]]}}는 원래 길주인으로 회령 절제사까지 지내다가 조상(遭喪)하여 고향에 퇴거하던 중, 동생 {{TagPerson|[[시합]]}}(施合)과 더불어 부동을 꾀하여 {{TagPerson|[[세조]]}}12년 5월에 이르러 드디어 반주(叛族)를 휘날리며 절제사 {{TagPerson|[[강효문]]}}(康孝文)을 박살한 것을 비롯하여 함길도 관찰사 {{TagPerson|[[신비]]}}(申淝) 및 각 읍 수령 등을 살해하여 짧은 시일 동안에 함흥 이북의 주현을 규합하게 되었다. {{TagPerson|[[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킨 주요 원인은 {{TagPerson|[[세조]]}}왕의 불의의 즉위와 다른 도 사람을 본도 방백 및 수령으로 임함을 반대함에 있었으나, 그의 음모가 그다지 짧은 사이에 함경 1도를 풍미할 만큼 큰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은 그가 휴직관리의 결합체인 유향소를 좋도록 이용한 까닭이다. 즉 {{TagPerson|[[이시애]]}}는 반란을 일으키자 곧 함흥 북청 등지의 유향소에 이문(移文)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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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6번=<blockquote no="10">{{TagRefT|9}}新觀察使申㴐 乃亂臣叔舟之子 亦是姦黨 彼若徵兵 可卽殺之<br/>康孝文 軍官玄得利供辭云 孝文與黃起崐申叔舟韓明澮等 謀反領兵 出兵北靑已被誅殺 但慮起崐自知其罪 聚兵構亂 故移文北靑留鄕所 使之追捕 况申㴐亦是姦黨 如有徵兵之事 須即剪除 且徵定平以南諸邑兵 設伏於閑曠之地 侍令<ref group="a">{{TagBook|[[세조실록]]}}권42, 제21장, 12년 5월 무자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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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7번=이라 하여 지방의 유력자인 유향품관들의 동의 및 원조를 얻어 그의 모반을 유리하게 전개하도록 하였다. 종래 지방의 실권을 잡고 권세를 부려오던 유향품관들은 이조 개국 이래의 중앙집권주의에 의한 전제정치에 반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에 무조건으로 부화뇌동하여 마침내 큰일을 저질러 놓았으나, 그 후 얼마 아니되어 중앙정부의 교서와 출병으로 말미암아 귀복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당시 중앙정부로부터 여러 고을 유향품관들에게 내린 교서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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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8번=<blockquote no="11">{{TagRefT|10}}李施愛詐稱有密旨 殺害康孝文黃起崐申㴐及守令軍官等 爾等曉諭軍民 使明知順逆 捕施愛待龜城君浚處置<br/>諭咸興留鄕所 李施愛反狀明白 誑誘汝等 汝等何故 從逆賊殺王人 此古今大惡 天地鬼神之所不容 今已遣龜城君浚摠 四道兵件討 予親將大兵繼之 尙慮汝等脅從 不知眞僞 若大兵一加 玉石俱焚 姑令浚按兵不動 以待駕至 先遣諭書 曉諭利害 使汝等終不陷於賊黨 汝等猶不改悟 執迷不返則予必屠城礁類無道矣 汝等如欲更生 其速放尹子雲捕李施愛 以贖前過 飜禍爲福<ref group="a">{{TagBook|[[세조실록]]}}권42, 제19―22장, 12년 5월 정해 及 무자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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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9번=이라고 있으니, 이와 같이 중앙정부가 역적을 무력으로써 토벌하기 전에 교유로써 진평하고자 한 것은 지방에 반거한 유향품관들의 노력을 몹시 두려워하여, 그들을 평화적으로 진무하여 회개하게 함으로써 반역자의 두괴인 {{TagPerson|[[이시애]]}}일당을 가장 효과적으로 소탕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 지방의 유향품관들은 이러한 국가의 교서에 종시 불청할 수 없어, 함흥 유향품관 {{TagPerson|[[윤극검]]}}등 14인은 서명한 사목(事目)을 올리는 동시에 회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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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0번=<blockquote no="12">{{TagRefT|11}}民心未知順逆 一信李施愛之言 臣開諭百端 群疑少解 然尙疑浚及許琮爲賊 臣懇惻譬曉 皆曰然則 汝通施愛 速令來謁 臣遂通書 又欲釋尹子雲 偕來反覆開諭不聽<ref group="a">{{TagBook|[[세조실록]]}}권42, 제28―29장, 12년 5월 계사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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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1번=이라고 하여 민정의 완경(頑梗)함을 상달(上達)하여, 유향소의 무능함을 자소(自訴)하게 되어, 국가로 하여금 그의 폐혁을 논의하게까지 하였다. 즉 일설에는 유향소는 {{TagEvent|[[이시애난]]}}의 돌발 후 국령으로써 혁거되었다고 전하나, 정확한 사료를 얻지 못한 나로서는 이를 확론하기 어려우며, 당시 함길도 절도사 {{TagPerson|[[허종]]}}(許琮)의 계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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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2번=<blockquote no="13">{{TagRefT|12}}諸邑留鄕所 承施愛移文 凡言姦黨者 雖守令或殺或囚 臣意以爲留鄕所之事 亦未爲非 凡謀反者 人得而誅之 道內無節度使觀察使 唯聽施愛之語 彼云某是姦黨 則孰有致意哉 臣於所經諸邑招留鄕所 以此意面諭之 且曰施愛移文終雖無實 汝等有何罪焉 反覆告諭 然未知實聽與否<ref group="a">{{TagBook|[[세조실록]]}}권42, 제25장, 12년 5월 임진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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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3번=라고 있어 유향소의 비(非)를 부정하고, 또 다음 해 13년 2월에는 {{TagPerson|[[세조]]}}친히 온양 행궁에 행(幸)하여 유향소 장무 살해의 옥사를 의논한 것으로 보아 세조 왕 때에 전국적으로 유향소의 폐지를 명하였는지도 의문이다. 설사 세조 때에 유향소의 혁거를 명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표면적인 법상의 일에 그쳤을 것이요, 내용에 있어서는 잘 실행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동북 방면 유향소의 완강한 세력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태조 때에 실시한 향헌에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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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4번=유향소는 이와 같이 {{TagPerson|[[세조]]}}조(朝)에 이르러 이미 지방의 유력한 세력단체로 되어 정치적 동란의 중심 기관이 되게 되었으나, 그 후 이러한 폐풍은 점점 심해져 {{TagPerson|[[성종]]}}21년 11월 무술의 사간 {{TagPerson|[[권경우]]}}(權景祐)의 상계(上啓)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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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5번=<blockquote no="14">{{TagRefT|13}}國家設立留鄕所者 欲使糾正鄕風也 今之留鄕品官 不務糾正風俗 徒事立威鄕曲 以濟其私 非徒無益 適足爲害 請革之<ref group="a">{{TagBook|[[성종실록]]}}권247, 제12장, 21년 11월 무술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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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6번=라고 있어 유향소가 향풍규정의 본의를 벗어나 입위(立威)의 기관으로 변했음을 논하여 그의 파혁을 청하였다. {{TagPerson|[[성종]]}}은 영사 {{TagPerson|[[홍응]]}}(洪應)의 제의에 좇아 {{TagPerson|[[세조]]}}조(朝) 혁거 후 복설하였음이 불구(不久)하다 하여 거혁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로써 이후 유향소는 더욱 세력을 펴게 되어, {{TagPerson|[[성종]]}}25년 5월 을사에는 경상도 사천 유향소 {{TagPerson|[[조경무]]}}(曹敬武) 등이 현학 훈도 오경의 유임운동을 일으켜 관찰사 {{TagPerson|[[이극군]]}}을 통하여 왕께 훈계하게 하여, 종래의 임무인 향리검찰에서 한걸음 나와 학관의 파임에까지 용훼하게 되었다. {{TagBook|[[증보문헌비고]]}}를 보면 이보다 먼저 {{TagPerson|[[성종]]}}20년 봄에 유향소를 개혁하여 향정을 세워 연로하고 덕망이 높은 자를 좌수라 칭하고 그 다음 가는 자를 별감이라 칭하여, 주부(州府)는 5원 군은 4원 현은 3원으로 정하되 향중의 문학재행이 구비한 자를 택한다 하였으니, 이것도 상술한 바와 같은 유향소의 폐해를 하고자 한 위정자의 고안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점으로 보아 {{TagPerson|[[성종]]}}조(朝)에 유향소를 복설하였다 함은 그 실인즉 유향소의 퇴락을 우려하여 역원을 경질함으로써 향풍규정의 임무를 엄행(嚴行)하게 하고자 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TagPerson|[[성종]]}}25년에 지은 홍문관 교리 {{TagPerson|[[권오복]]}}의 {{TagArticle|[[예천향사당기]]}}<ref group="a">{{TagPerson|[[권오복]]}}의 {{TagBook|[[수헌시집]]}}, 권지3, 향사당기.</ref>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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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7번=<blockquote no="15">我殿下即位之戊申 令所在復立留鄕所 有座首別監焉 推年德高者 謂之座首 其次稱別監 糾管一鄕風俗 所員府四人郡 三縣二 吾鄕郡也 尹侯季殷權侯推爲別監 而家君爲座首</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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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8번=라고 있어 유향소 사람 수가 앞서 쓴 인수보다 1인씩 부족하나, 이것은 별문제로 돌리고 이로써 좌수는 1인으로 유향소의 최고 지도자이며 별감은 부 군 현에 따라 4인 3인 2인씩으로 좌수를 보조하여 향풍규정의 임무를 담당하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이 좌수 별감의 임기 등에 대하여는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이 제도는 경재소 및 후술하는 사마소에서도 그대로 채용되어 그들의 두령을 모두 좌수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TagArticle|[[예천향사당기]]}}에는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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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9번=<blockquote no="16">今之留鄕所 即古黨正之遺意也 鄕有頑嚚自恣不孝悌不睦不姻不任恤者 此堂得以議之 史有包藏奸慝憑假城社侵漁百姓者 此堂得以議之 推周官三物之敎 行汝南月朝之評 以礪一鄕之風俗者 亦莫不於堂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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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0번=이라 있고, {{TagPerson|[[김일손]]}}의 {{TagRefT|15}}金海會老堂記<ref group="a">{{TagPerson|[[김일손]]}}의 {{TagBook|[[탁영집]]}}권지3, 회로당기.</ref>에도 대략 동양(同樣)의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유향소는 점점 자치조직화하여 가 후세의 이른바 향약의 정신과 상근(相近)하여 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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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1번=이조의 모든 문물제도가 성종 이후 이완하여 갔음과 같이 유향소도 이때부터 더욱 부패하여가기 시작하여, 유향소는 점차 향풍규관의 본의를 잊어버려 오로지 야심을 품은 악의 무리의 집합소로 변하여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TagPerson|[[성종]]}}후 {{TagPerson|[[연산군]]}}이 즉위하자 그 원년 5월 경술에는 충청도 도사(都事) {{TagPerson|[[김일손]]}}이 곧 근조이병(謹條利病) 26사(事)를 상소하여, 그 1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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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2번=<blockquote no="17">{{TagRefT|16}}責留鄕以礪風俗 國家於留鄕 建革不一議者紛紛 而先王卒置之者 以其窮村僻鄕 監司守令所不及知之 善惡皆得以糾{{TagPage|102-1}}擧也 有古閭師族師之遺意焉 今但與邑吏爲敵 發摘其弘 徴贖以拚一遊耳 其於鄕風 邈然無正 且鄕射鄕飲養老等禮所 以別淑慝 而成禮俗也 著在令甲 而俗吏慢不擧行 臣願三年之後 以此等事責留鄕 以時告守令而行之 凡一鄕之人無問貴賤 孝友睦姻 一善可記者齒之 其惡者不齒 善之大者 告守令報監司以旌 異之惡之大者 亦報監司 用周制移遂移郊之法 如干名敎 但犯杖以上 皆充入居 勒令入居 只取富實元無一罪 何惜有罪者乎 憲府督責京在所 交察鄕風 鄭員有不擧職者 則痛治 亦化民成俗之一端也<ref group="a">{{TagBook|[[연산군일기]]}}권5, 제33장, 원년 5월 경술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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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3번=라고 하여 퇴락된 유향소를 갱생하여 향풍규정의 임무를 다하게 하고자 감독자인 감사수령 및 경재소로 하여금 그들을 독책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 헌책이 곧 채용되었는지는 불명하나, 하여튼 유향소의 퇴폐가 오랜 세월을 거듭하는 동안에 빚어진 일이니만큼 이러한 일시의 안책(案策)으로 쉽게 만회되었을까 싶지 않아, 연산군 4년 8월 계유에 {{TagPerson|[[유자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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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4번=<blockquote no="18">{{TagRefT|17}}南原咸陽皆臣本貫 故臣親見之 生員進士別立一所 名曰司馬 私相聚集 群飲橫議 於人吏少有不愜 輒鞭撻 留鄕品官 多是老劣 故一邑人吏蔑視留鄕所 反附司馬所 其弊不貲 爲守令者 非徒不能禁之 反給奴婢 以典其所殖穀貨 國家所設留鄕之外 又有此輩私立一所 甚不可……如此之風 宜痛革 請下書八道監司 凡所謂司馬所 一切革罷<ref group="a">{{TagBook|[[연산군일기]]}}권31, 제2장, 4년 8월 계유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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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5번=라고 계(啓)한 바와 같이 유향소는 오로지 노렬(老劣)한 은퇴자의 소굴로 변해 가고 이것을 대신하여 사마소라는 것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마소는 위의 인용문에도 명시한 바와 같이 지방의 생원 진사들로써 조직된 한 개의 유림(양반)단체니, 이것은 유교문화가 바야흐로 무르녹고 있는 당시에 있어서 신진학도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조직되어야 할 성질의 것으로, 그의 출현은 노렬한 선배들의 집합소인 유향소를 압도하였을 뿐더러 무능한 위정자들에게도 큰 위협적 존재였었다. 그러므로 {{TagEvent|[[무오사화]]}}라는 전고미증유의 유림학살 사건을 일으키게 한 간신 {{TagPerson|[[유자광]]}}은 사건 발생 직후 여하의 상계를 하여 유림단체를 소멸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유교를 준봉하는 이조 사회에서는 유림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하였을 것 같아, 이후도 의연 사마소는 존속하여 유형무형 여러가지의 영향을 이조문화사(史)상에 끼치게 되어, {{TagPerson|[[선조]]}} 즉위년인 정묘년 10월에 {{TagPerson|[[유희춘]]}}이 중앙관리로 탁용되어 출향하려 할 즈음에도, 은진현 사마소에서 {{TagPerson|[[김전개]]}}생원 {{TagPerson|[[김섭]]}}{{TagPerson|[[서경복]]}}{{TagPerson|[[최응삼]]}}등 9인이 설작(設酌)하여 {{TagRefT|18}}송별연을 베풀었다 한다.<ref group="a">{{TagPerson|[[유희춘]]}}의 미암일기초 제1책({{TagBook|[[조선사료총간]]}}제8 제19쪽) 정묘 10월 17일조.</ref> 이리하여 유향소는 사마소의 출현으로 말미암마 쇠퇴하지 아니치 못할 운명에 봉착하여 그는 점차 향풍규정의 본분을 벗어나 민리(民吏)를 침해함으로써 사리를 채우고자 하는 간악한 사류의 집합소나 혹은 경향(京鄕)을 왕래하는 관리의 기숙소로 변하고 말아, {{TagPerson|[[연산군]]}}6년 9월 기묘의 장령 {{TagPerson|[[신숙근]]}}의 상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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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6번=<blockquote no="19">{{TagRefT|19}}各官設留鄕所 京中設京在所 以正風俗今各官吏到京 則多辦食物饋 京在所人員不如意 輒加侵虐……如此弊風 皆可革<ref group="a">{{TagBook|[[연산군일기]]}}권39, 제5장, 6년 9월 기묘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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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7번=이라고 있어 유향소의 경성 출장소인 경재소가 상경한 지방관리에게 침해됨을 논하였다. 이러한 폐해가 속출함을 따라 유향소의 폐지론도 시시로 대두하게 되어, {{TagPerson|[[중종]]}}12년 12월 무오에는 서소 입직 정병 {{TagPerson|[[최숙징]]}}이 여러 조(條)의 시무책을 상소하여 그 1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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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8번=<blockquote no="20">{{TagRefT|20}}各官設立留鄕所京在所者 將以糾正一鄕風俗也 今者非徒不正風俗 而人吏被侵 不無流亡之弊 請於蘇復之間 罷京姑在留鄕所<ref group="a">{{TagBook|[[중종실록]]}}권31, 제12장, 12년 12월 무오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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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9번=라고 하여 유향소 경재소의 파혁을 상청하였다. 그러나 이 시무책도 왕의 가납(嘉納)으로 일시시행을 전명하기는 하였으나 이상대로 잘 실행되지 못한 것 같이, 이후도 유향소 경재소는 의연 존속하여, {{TagPerson|[[선조]]}}즉위년인 정묘 10월 19일에는 은진에 이배(移配)되어 있던 {{TagPerson|[[유희춘]]}}이 중앙관리로 영전하게 되니 당읍 유향품관 전 좌수 손장 첨사 조후 좌수 서질 등 10인이 동헌에서 전송연을 베풀었다 하며, 익년 무진 3월 12일에는 {{TagPerson|[[유희춘]]}}자신이 사간의 관직으로서 담양 경재소의 좌수를 겸하였다 하며, 같은 해 5월 1일에는 {{TagPerson|[[유희춘]]}}이 담양 유향소의 좌수를 {{TagPerson|[[최희윤]]}}으로 {{TagRefT|21}}결정하였다고 한다.<ref group="a">{{TagPerson|[[유희춘]]}}의 {{TagBook|[[미암일기초]]}}제1책({{TagBook|[[조선사료총간]]}}제8 제20쪽) 정묘 10월 19일조 및 {{TagBook|[[미암일기초]]}}무진 3월 12일조(제153쪽) {{TagBook|[[미암일기초]]}}제2책 무진 5월초 1일(제214―215쪽).</ref> 그 후로 유향소 경재소의 파거론(罷去論)은 조신 간에 주창되어, {{TagPerson|[[선조]]}}원년 5월 11일에는 장령 {{TagPerson|[[이헌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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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0번=<blockquote no="21">京在所 所以正風俗也 今無識不義之徒 責賂於郡邑之吏 人不能堪 請罷京在所</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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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1번=라고 진언하니, 사간 {{TagPerson|[[유희춘]]}}은 곧 이것을 변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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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2번=<blockquote no="22">李憲國所言 請罷京在所 蓋見不義作弊之人 慣疾而有是說耳 祖宗朝設立留鄕所 以正風俗 糾察元惡鄕吏也 設立京在所者 所以檢擧關通留鄕所也 留鄕所非其人 則作弊爲民害 甚於京在所 然惡此等之爲害而遂廢之 則是惡水之不潔遂 窒之以出也 其爲矯枉過直甚矣 莫若令守令 察留鄕所之不法 司憲府 察留鄕京在二所之不法 無使縱恣 斯爲得中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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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3번=라고 {{TagRefT|22}}진언하여<ref group="a">{{TagBook|[[미암일기초]]}}제2책 무진 5월 11일조(제226쪽).</ref> 수령 및 사헌부로 하여금 2소를 감찰하게 함으로써 그의 퇴폐를 방지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유향소 경재소는 이조 중기 이후에도 상존하여 반도사회사(史)상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나, 그의 말로가 어찌 되었는가 함은 이곳에서 검토할 겨를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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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4번=이상 논술하여 온 바와 같이 유향소는 이조 상반기를 통하여 행정규찰 및 자치단체로서의 면목을 표면상으로라도 유지하여 왔으나, 끝으로 결론적으로 한마디 말하여 둘 것은 이조 중기 초에 이르러 유향소가 부진상태에 빠지자 그를 회복하여 풍속규정의 임무를 완전히 하게 하고자, 그로 하여금 여씨향약을 준봉하여 실시하게 한 일이다. 즉 {{TagPerson|[[중종]]}}14년 7월 기유에 참찬관 {{TagPerson|[[한충]]}}이 계(啓)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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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5번=<blockquote no="23">前日 小學已頒給內外官矣 今呂氏鄕約亦可皆給 請並分給於外方留鄕所何如</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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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6번=라고 하니, 왕도 곧 이에 찬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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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7번=<blockquote no="24">呂氏鄕約者 本爲民也 當如所啓</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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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8번=라고 하자, 다시 {{TagPerson|[[한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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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9번=<blockquote no="25">京城之中 亦有妨里 必爲鄕約矣 此冊令五部官 分給于各洞約正何如</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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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60번=라고 {{TagRefT|23}}진언하여<ref group="a">{{TagBook|[[중종실록]]}} 권36, 제46―47장, 14년 7월 기유조.</ref> 여씨향약을 외방 유향소 및 경성 5부 각 동 약정에게 분급하여 이것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자치조직을 더욱 굳게 하고자 하였다. 왕도 무조건으로 이에 찬동하여 ‘가지(可之)’라 하여 전국 각지 유향소 및 경성 5부 각 동에 여씨향약을 반포하게 하여 쓰러져 가고 있던 유향소를 다시 붙잡게 하였으니, 이상 향약 실시의 전제로서의 유향소의 유래를 누누히 논술하여 왔음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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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3.여민향약의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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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3.여씨향약의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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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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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TagSpage|107-1}}呂氏鄕約이 朝鮮에서 實施하게 된 由來를 밝힘에는 먼저 그것이 어떠한 것이였든가 하는 것부터 論할 必要가 있다. 呂氏鄕約이라 함은 宋나라 때 藍田에 살든 呂氏 門中에서 그 鄕里를 敎導하기 爲하야 세운 約束을 일컬음이니, 이것은 곧 支那에 있어서의 鄕約의 始初라고 傳하여 온다. 呂氏 門中에는 特히 大忠 一防 大鈞 大臨 等의 四兄弟가 있어 모다 道學으로써 當世에 일흠이 높았다 하니, 이러한 것은 마츰내 그들로 하여금 鄕約을 세워 一族 門中은 勿論 鄕中 全體를 敎化 善導하게 하였든 것이다. 呂氏鄕約의 根本 骨子만을 따서 쓰며 다음과 같다.
|목차3원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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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TagSpage|107-2}}<blockquote no="26">凡同約者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有善則書于籍 有過若違約者亦書之 三犯而行罰 不俊者絕之</blockquote>
|목차3원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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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TagSpage|107-3}}이 呂氏鄕約은 같은 宋나라 때 사람인 朱熹에 依하야 加減 增補되여 더욱 完整한 形態를 가추게 되였으니, 後世에 이른바 「朱子增損呂氏鄕約」은 곧 그것이다. 朱子의 增損한 呂氏鄕約도 勿論 前揭 呂氏鄕約의 根本 綱領을 主幹으로 하야 이것을 더 한층 詳細히 規定한 것에 지나지 않었으니, 그것의 根本 條目을 들면 다음과 같다.
|목차3원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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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TagSpage|107-4}}<blockquote no="27">凡鄕之約四 一曰德業相勸 二曰過失相規 三曰禮俗相交 四曰患難相恤 衆推有齒德者一人 爲都約正 有學行者二人副之 約中月輪一人 爲直月<sup>都副正不與之</sup> 置三籍 凡願入約者 書于一籍 過失可觀者 書于一籍 直月掌之 月終則以告于約正 而授于其次<br/>{{ruby|德業相勸|●●●●}}{{TagPage|108}}<br/>德謂見善必行 聞過必改 能治其身 能治其家 能事父兄 能教子弟 能御童僕 能肅政教 能事長上 能睦親故 能擇交遊 能守廉介 能廣施惠 能取寄託 能救患難 能導人爲善 能規人過失 能爲人謀事 能爲衆集事 能解鬪爭 能決是非 能興利除害 能居官擧職<br/>業謂居家則事父兄 敦子弟 待妻妾 在外則事長上 接朋友 敎後生 御僮僕 至于讀書 治田 營家 濟物 畏法令 謹租賦 好禮樂射御書類之類 皆可爲之 非此之類 皆爲無益<br/>右件德業 同約之人 各自進修互相勸勉 會集之日 相與推擧其能者 書于籍 以警勵其不能者<br/>{{ruby|過失相規|●●●●}}<br/>過失謂犯義之過六 犯約之過四 不修之過五<br/>犯義之過 一曰酗博鬪訟 二曰行止踰違 三曰行不恭遜 四曰言不忠信 五曰造言誣毀 六曰營私太甚<br/>犯約之過 一曰德業不相勸 二曰過失不相規 三曰禮俗不相成 四曰患難不相恤 不修之過 一曰交非其人 二曰游戲怠惰 三曰動作無儀 四曰臨事不恪 五曰用度 不節<br/>右件過失 同約之人 各自省察互相規戒 小則密規之 大則衆戒之 不聽則會集之日 直月以告于約正 約正以義理誨諭之 謝過請改則書于籍以俟 其爭辨不服 與終不能改者 皆聽其出約<br/>{{ruby|禮俗相交|●●●●}}<br/>禮俗之交 一曰尊幼輩行 二曰造請拜揖 三曰請召送迎 四曰慶弔贈遺<br/>尊幼輩行凡五等 曰尊者 曰長者 曰敵者 曰少者 曰幼者{{TagPage|109}}<br/>造請拜揖凡三條 〇曰凡少者於尊者長者 歲首冬至四孟月朔 辭見賀謝 皆爲禮見 此外候問起居質疑白事及赴請召皆爲燕見 尊者受謁不報 長者歲首冬至具牓子報之 如其服餘 令子弟以己名牓子代行 凡敵者歲首冬至辭見賀謝相往還 凡尊者長者無事 而至少者幼者之家惟所服 〇曰凡見尊者長者 門外下馬俟於外 次乃通名 主人使將命者 先出迎客 客趨入至廡間 主人出降階 客趨進主人揖之升堂 禮見四拜而後坐 燕見不拜 則主人送于廡下 若命之上馬 則三辭許則揖而 退出大門 乃上馬不許則從其命 凡見敵者門外下馬 使人通名 俟于廡下或廳側 禮見則再拜 退則主人詩就階上馬 凡少者以下則先遣人通名 主人具衣冠以俟 客入門下馬則趨出迎揖升堂來 報禮則再拜 謝退則就階上馬 〇曰凡遇尊長於道 皆徒行則趨進揖 尊長與之言則對 不則立於道側以俟 尊長己過 乃揖而行 或皆乘馬 於尊者則回避之 於長者則立馬道側 揖之俟過 乃揖而行 若己徒行而尊長乘馬則回避之 若己乘馬而尊長徒行望見 則下馬前揖 己避亦然 過旣遠乃上馬 若尊長令上馬則固辭 遇敵者皆乘馬則分道相揖而過 彼徒行而不及避則下馬揖之 過則上馬 遇少者以下皆乘馬 彼不及避則揖之而過 彼徒行不及避則下馬揖之<br/>請召迎送凡四條 〇曰凡請尊長飲食 親往投書 旣來赴 明日親往謝之 召敵者以書簡 明日交使相謝 召少者用客目 明日客親往謝 〇曰凡聚會皆鄕人 則坐以齒 若有親則別叙 若有他客有爵者則坐以爵 若有以異爵者 雖鄕人亦不以齒 若特請召或迎勞出餞 皆以專召者爲上客 如婚禮則姻爲上客 皆不以齒爲序 〇曰凡燕集初坐別設卓子於兩楹間 置大盃於其上 主人降席立於卓東西向 上客亦降席立於卓西東向 主人取盃親洗 上客辭 主人置盃卓子上 親執酒斟之 以器授執事者 遂執盃以獻上客 上客受之復置卓子上 主人西向再拜 上客東向再拜 興取酒東向跪祭 遂飲以盃授賛者遂拜 主人答拜 上客酢主人如前儀 主人乃獻樂賓如前儀 唯獻酒不拜 若婚會姻家爲上客 則雖少亦答其拜 〇曰凡有遠出遠{{TagPage|110-1}}歸者 則迎送之 少者幼者不過五里敵者不過三里 各期會於一處 拜揖如禮有飲食則就飲食之 少者以下俟其旣歸 又至其家省之<br/>慶弔遺凡四條 〇曰凡同約有吉事則慶之 有凶事則弔之 每家只家長一人與同約者 俱往其書問亦如之 若家長有故或與所憂弔者 不相接則其次者當之 〇曰凡慶禮如常儀有贈物 或其家力有不足則同約爲之 借助器用及爲營幹 凡弔禮聞其初喪未易服 則率同約者 深而往哭弔之 且助其凡百經營之事 主人旣成服則相率素幞頭素襴衫素帶 具洒果食物而往奠之 及葬又相率致贈 俟發引則素服而送之 及卒哭及小祥及大祥皆常服弔之 〇曰凡喪家不可具酒衣服 以待弔客弔客亦不可受 〇曰凡聞所知之喪或遠不能往 則遣使致食 就外次衣弔服再拜哭而送之 過朞年則不哭 情重則哭其墓<br/>右禮俗相交之事 直月主之 有期日者爲之 期日當糾集者督其違慢 凡不如約者 以告于約正而詰之 且書于籍<br/>{{ruby|患難相恤|●●●●}}<br/>患難之事七 一曰水火 二曰盜賊 三曰疾病 四曰死喪 五曰孤弱 六曰誣枉 七日貧乏<br/>右患難相恤之事 凡有當救恤者 其家告于約正 急則同約之近者爲之告約正命直月徧告之 且爲之斜集而程督之 凡同約者財物器用車馬人僕皆有無相假若不急之用及有所妨者 則不必借 可借而不借及踰期不還及損壞借物者 論如犯約之過 書于籍 隣里或有緩急雖非同約 而先聞知者 亦當救助 或不能救助則爲之告于同約而謀之 有能如此者則亦書其善於籍 以告鄕人</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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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번={{TagSpage|110-2}}朱子大全(卷七十四)에 실인 增損呂氏鄕約은 前記 各 條目에 더욱 詳細한 註釋이 부쳐있으나 이 根本 條目만으로라도 朱子의 增損한 呂氏鄕約의 大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으므로 이곳에서는 그의 註釋을 詳記함을 省略한다. 何如튼{{TagPage|111-1}} 이 朱子增損呂氏鄕約은 그의 理學과 아울러 以後의 支那 社會에 끼친바 影響이 莫大하야 特히 朱子學을 國是로 遵奉하든 明朝에 이르러는 이 朱子增損呂氏鄕約은 鄕約 實施의 準則이 되게 되여, 明 太祖도 即位 初에 이미 이에 準據하야 鄕約을 세워 國中 每二三百戶式을 連하야 會를 모두게 하야 約正 一人 副約正 二人을 두어 鄕約을 實施하게 하였든 것이다. 즉 支那에 있어서의 鄕約은 明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國令으로써 實施를 命하게 되여 가장 理想的으로 實行케 되였든 것이니, 이것은 廷하야 後繼國이든 淸나라에는 말할 것도 없고 當時 兄弟國으로 親交가 두텁든 朝鮮國에도 影響을 끼치게 되여 從來 이따에 없든 鄕約을 하로 밥비 實施하게 하였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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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6번={{TagSpage|111-2}}朝鮮에서 鄕約을 實施함에 當하야 우선 그의 先驅로서 呂氏鄕約을 施行하였다 함은 앞에서도 잠간 말한 바 있었거니와, 이곳에서 呂氏鄕約이라 함은 그 實인즉 朱子增損呂氏鄕約을 가리침이였든 것이다. 朱子의 增損한 呂氏鄕約은 이미 高麗末 李朝 初期에 朱子學이 輸入됨을 따라 朱子性理大全에 包含되여 半島 內에도 傳來되여 있었을 것이나, 그때에는 아즉 實施함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야 李朝 建國 後 一世紀를 훨신 지나 儒敎文化가 바야흐로 무르녹어저, 朱子學의 全部門이 完全히 이따에서 咀嚼 吟味되여 짐을 따라 朱子增損呂氏鄕約도 널리 高價로 認識케 되여, 마츰내 中宗때에 이르러 識者 間에 敎化 振興上 이것을 實施할 것을 論議하는 者 續出하게 되였다. 즉 中宗 十二年 六月에는 벌서 慶尙道 成陽縣 儒生인 金仁範이 上疏하야 呂氏鄕約을 遵行하야써 風俗을 變케 하기를 請하였다. 이때 王은 政府에 傳敎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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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7번={{TagSpage|111-3}}<blockquote no="28">{{TagRef|1}}予觀咸陽儒生金仁範上䟽 以草野寒生 傷嘆人心日偷風俗日惡 欲變薄俗而回唐虞之治 其志亦可嘉也 近來人心風俗之非 予亦憂慮 不知畢竟當何如也⋯⋯⋯鄕等勿以爲布衣之親言 而講論移風易俗之方 上下交勵 使人心歸厚風俗反朴 上有忠厚之風 下無愁嘆之聲 不亦美乎<ref>中宗實錄 卷二十八, 第二十三張, 十二年 六月 甲戌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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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8번={{TagSpage|112-1}}라고 하야 그의 卓論을 嘉納하야 上䟽대로 呂氏鄕約을 施行하게 하기를 政府에 問議하였다. 政府도 이에 應하야 同年 七月 庚辰에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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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9번={{TagSpage|112-2}}<blockquote no="29">{{TagRef|2}}臣等見金仁範上䟽 其意至美 而上敎亦當 此事令下人行之 則想必有樂爲者 令該曹行移于八道 勸諭下人使之遵行可也 若人心風俗不美之事 則臣等亦每講論而欲矯之 但當自然漸摩 非可以法條能行於一朝也<ref>中宗實錄 卷二十八, 第二十八張, 十二年 七月 庚辰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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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0번={{TagSpage|112-3}}라고 上啓하야 上敎에 쫓아 禮曹로 하여금 呂氏鄕約을 八道에 行移케 하기를 論하였으며, 王도 이에 知道라 하야 잘 實行하기를 命하였다. 그러나 同月 己亥에 이르러 禮曹는 政府에 報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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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1번={{TagSpage|112-4}}<blockquote no="30">小學正俗 已令多數印出 廣布中外 呂氏鄕約是小學中一事 不必別令擧行 請勿擧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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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2번={{TagSpage|112-5}}이라 하야 呂氏鄕約이 小學 中의 一事에 지나지 않으므로 多數의 小學을 廣布한 今日에 있어서 다시 呂氏鄕約을 廣布할 必要가 없다 하야 그의 行移를 中止케 하기를 請하였으나, 政府는 다시 啓目을 올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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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3번={{TagSpage|112-6}}<blockquote no="31">呂氏鄕約雖載小學 若不曉諭別令擧行 則視爲尋常 徒爲文具 令各道監司廣布何如</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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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4번={{TagSpage|112-7}}라고 하야 各 道 監司로 하여금 呂氏鄕約을 廣布케 하기를 論하야 王의 允許를 얻었다. 이리하야 呂氏鄕約은 中宗 十二年 七月 以後 中央政府의 命令으로 各 地方長官에 依하야 印出 廣布케 되였으니, 이로써 從來 朱子性理大全 속의 一部로서 極히 狹小한 一部 識者 間에만 알려져 있든 呂氏鄕約(朱子增損呂氏鄕約)은 完全한 單行本으로 世間에 出現케 되여 널리 流行케 되였다. 特히 慶尙道에서는 中宗 十二年 三月 庚寅에 本道 觀察使로 任命된 金安國에 依하야 곧 이 呂氏鄕約이 印頒되야 化民成俗에 寄與하는 바 적지 않었다 한다. 金安國은 中宗 十二年 三月부터 同 十三年 三月까지 滿 一箇年 間 慶尙道의 方伯으로 在任하야, 그동안 呂氏鄕約은 勿論 童蒙須知 等 書를 刊行하야 鄕曲 敎導에 盡力하는바 多大하였었으나, 다{{TagPage|113-1}}시 中央官吏로 召還됨에 이르러는 中宗 十三年 四月 朔己巳에 同知中樞府事의 職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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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5번={{TagSpage|113-2}}<blockquote no="32">臣爲慶尙道觀察使 其道人心風俗弊乃極 兮者上方有志於轉移風俗 故臣欲體至意變革頑風 而竊思其要 取古人之書 可以善俗者 詳加諺解頒道內以教之 此等書冊臣有志修撰 而第緣事務煩劇 未遑詳悉 錯誤必多 今方別設撰集廳 印出文籍 此等書使之更加讎校 印頒八道 則於率勵風化庶有小益也 如呂氏鄕約正俗等書 乃敦厚風俗之書也 鄕約雖載於性理大全而無註解 遐方之人未易通曉 故臣乃詳其諺解 使人接目便解 正俗亦飜以諺字 如農書蠶書乃衣食之大政 故世宗朝飜以俚語 開刊八道 今亦頗致意務本之事 故臣亦加諺解 如二倫行實臣前爲承旨時 請開刋 如三綱之重 雖愚夫愚 婦皆知之 至於朋友兄弟之倫 凡常之人或有不知 故臣依三綱行實撰類以之 如辟瘟方則⋯⋯⋯臣亦加諺解以刋 至如瘡疹方會 已飜譯開刋⋯⋯⋯願依成宗朝廣頒救急簡易方例 多印廣布</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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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6번={{TagSpage|113-3}}라고 上啓하야, 自己가 이미 詳細한 諺解를 부처 둔 呂氏鄕約 正俗 農書 蠶書와 二倫行實 三綱行實 辟瘟方則 瘡疹方會 等書를 開刊 廣行케 하기를 上請하였다. 王도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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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7번={{TagSpage|113-4}}<blockquote no="33">{{TagRef|3}}卿在其道 盡心於學校 轉移風俗之事 予聞之嘉美 又復撰此書以敎之 此書皆有關於風敎 其下撰集廳 開刋廣行<ref>中宗實錄 卷三十二, 第四十二―四十三張, 十三年 四月 己巳朔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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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8번={{TagSpage|113-5}}이라고 傳旨하야 그의 特志를 讃嘉하야 撰集廳으로 하여금 此等書를 開刊 廣布케 하였다. 이에 이르러 從來 朱子性理大全 속에서 拔取되야 純 漢字의 單行本으로 印布케 되였든 呂氏鄕約은 다시 한 거름을 나가 이따의 말로 註釋를 부친 所謂 諺解本으로 世間에 廣行케 되였으니, 이로써 呂氏鄕約은 어느 僻鄕의 匹夫에게까지라도 容易히 理解케 되여 그의 普遍化를 가저오게 되였다. 當時 諺解 頒布한 呂氏鄕約이 어떠한 것이였든가는 그의 殘本을 得見치 못한 나로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와 비슷하게 亦是 이따에서 純 漢字로 註釋을 加하야 印頒한 {{TagRef|4}}朱子增損呂氏鄕約<ref>畏友 李仁榮 兄 所藏 「朱子增損呂氏鄕約」.</ref>이 있다. 이 漢字 註釋{{TagPage|114-1}} 呂氏鄕約이 어느 때 印頒되였는지는 考證할 記事가 없으므로 正確히 論定키는 어려우나, 그 註譯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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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9번={{TagSpage|114-2}}<blockquote no="34">衆推一人有齒者<sup>年高有德行者</sup> 爲都約正<sup>約中之長也如今之留鄕座首</sup> 有學行者<sup>有學術操行者</sup> 二人副之<sup>如今之留鄕別監</sup> 約中月輪一人 爲直月<sup>如今之有司掌務每月輪定之</sup> (細字註譯)</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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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0번={{TagSpage|114-3}}라고 있으므로 보아 留鄕所가 隆盛하든 李朝 中葉 以前에 印布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註譯에서 鄕約의 都約正 副約正 直月 等의 役員을 各各 이따 留鄕所의 座首 別監 有司 掌務 等과 같다고 하였음은 前節에서도 異說한 바와 같이 鄕約이 留鄕所와 同義의 것임과, 前者가 後者에서 由來하고 이의 存在로 말미암아 容易히 實施되게 되였음을 雄辯으로 證明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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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1번={{TagSpage|114-4}}이와 같이 하야 朱子增損呂氏鄕約은 朝鮮에 輸入된 後 다시 漢字 及 諺文으로써 註譯된 二種의 單行本으로 累次 刊行되여 널리 八道 各 邑에 廣布케 되였으니, 이로써 呂氏鄕約은 以後 地方 有志 人士에 依하야 地方的으로나마 잘 實施되게 되였다. 그 一例를 들면 中宗 十三年 九月 壬寅에 叅贊官 趙光祖가 上言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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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2번={{TagSpage|114-5}}<blockquote no="35">臣聞溫陽人善行鄕約 若善行鄕約則固美矣⋯⋯⋯行鄕約之邑 如壓良爲賊拒扞官債之納 如此等事皆己未見 前者金安國爲慶尙道監司時 乃終令行之 其時仍興鬪狠 盖始初故然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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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3번={{TagSpage|114-6}}라 하고, 同月 辛亥에 大司憲 金淨이 上言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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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4번={{TagSpage|114-7}}<blockquote no="36">臣於外方 見呂氏鄕約大有關於敎化 前此兄弟不和者知悔而和 然悖逆者改而順 人皆知而行之 則厚倫成俗之道豈少補哉 然鄕曲小民不知朝廷之意 而以爲監司一時之令 故皆曰今監司遆去 則止之云 雖守令亦或莫之知也 當申諭此意 使知朝廷軫念之意可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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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5번={{TagSpage|115-1}}라 하고, 翌 十四年 四月 戊辰에도 領事 申用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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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6번={{TagSpage|115-2}}<blockquote no="37">臣頗聞行鄕約之處 則詞訟亦止 風俗漸美</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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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7번={{TagSpage|115-3}}{{TagRef|5}}라고 上言한 것과 같은 것은 그것이다.<ref>中宗實錄 卷三十四, 第四十三張, 十三年 九月 壬寅條. 同 卷三十四, 第四十五張, 辛亥條. 同 卷三十五, 第五十七張, 十四年 四月 戊辰條.</ref> 이때 王은 領事 鄭光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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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8번={{TagSpage|115-4}}<blockquote no="38">鄕約好則好矣 然聚徒而所爲不善 則邑宰之勢反爲弱矣 所當審戒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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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9번={{TagSpage|115-5}}라고 하였음에도 不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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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0번={{TagSpage|115-6}}<blockquote no="39">雖美事而其實不存 則不可 故凡事循名責實可也<br/>呂氏鄕約行之則美矣 大抵敎化之宣 皆在監司 而朝廷之意亦豈不知乎 在監司盡力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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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1번={{TagSpage|115-7}}라고 傳하야 呂氏鄕約의 徹抵한 施行을 八道 監司에게 更命하였다. 이로써 呂氏鄕約은 八道 各地에 널리 頒布케 되여 鄕曲敎化上 功獻하는 바 적지 않게 되였으나, 다시 中宗 十四年 七月 己酉에 이르러는 前節에서도 言한 바와 같이 叅贊官 韓忠의 上啓에 依하야 從來 廢落되여 있든 留鄕所를 再興시켜 化民成俗에 盡力하게 하고저 外方 留鄕所 及 京城 各 洞 約正에게 呂氏鄕約을 分給케 하였다. 이리하야 呂氏鄕約은 京鄕을 莫論하고 잘 遵行된 것 같어, 中宗 十四年 七月 丁巳의 侍講官 李延慶의 上言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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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2번={{TagSpage|115-8}}<blockquote no="40">臣在外方見鄕約果速於美俗矣 人性本善以善事指導之 則自再易化 若得善人以爲約正 則足以變習俗 而人皆樂趨於善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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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3번={{TagSpage|115-9}}라고 있고, 叅贊官 韓忠의 上言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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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4번={{TagSpage|115-10}}<blockquote no="41">臣家在淸州 與忠州相距不遠 忠淸一道 鄕約勝於他道 而忠州爲最於道內 其初爲約者 乃校理李延慶也 此人爲約正以{{TagPage|116-1}}導率之 故稱最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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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5번={{TagSpage|116-2}}{{TagRef|6}}이라고 있어 忠淸道에서 특히 呂氏鄕約이 잘 實施되였음을 말하고 있다.<ref>中宗實錄 卷三十六, 第五十一―五十二張, 十四年 七月 丁巳條.</ref> 그러나 그 후 몇 달 아니 되여 同 十四年 十一月에 己卯士禍라는 一大 士類 慘害事變이 이러나, 趙光祖를 爲始한 新進 政治家 及 學者들 七十餘人이 慘禍를 입게 됨에 이르러, 이 鄕約 實施의 運動도 表面上 一切 中絕케 되였다. 그러므로 中宗 十九年 十月에 犯罪事件이 頻發하자, 史臣은 이것을 評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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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6번={{TagSpage|116-3}}<blockquote no="42">{{TagRef|7}}項者朝廷崇小學之敎 又印頒呂氏鄕約 使中外遵行之 鄕約雖非帝王化民之術 其亦有類於成周讀法敎民之意 爲善者興起 而惡者畏憚自己 自己卯年以後 此等一切廢弛 父兄戒子弟不得挾小學書 人倫不明風俗大毀<ref>中宗實錄 卷五十二, 第五張, 十九年 十月 甲午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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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7번={{TagSpage|116-4}}라고 하야 鄕約을 廢止한 것이 그 重要 原囚임을 傳하고 있다. 이로 보면 己卯士禍 後 鄕約은 國令으로써 廢止를 命한 것 같으나, 그 實 法令대로 徹底히 實行되였는지도 疑問이며, 設使 徹底한 實行을 强要하였드라 하드라도 從來에 理想的으로 鄕約을 遵行하여 오든 곳에서는 潛行的으로라도 鄕約의 根本精神만은 遵奉하여 왔을 것이다. 中宗도 그 晚年인 三十八年 七月 乙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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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8번={{TagSpage|116-5}}<blockquote no="43">近來物論及䟽章 皆以小學鄕約之事爲言 已卯年爲小學鄕約者 徒尙其文而不務其實 故其弊至於以下居上以賤陵貴 而無可觀之道矣 其後欲矯其弊而不用也 非以小學之書爲非而棄之也 然小學明人倫之書也 常時典講時並講事 後日合坐議于大臣以啓</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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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9번={{TagSpage|116-6}}라고 政院에 傳敎하고, 同年 十月 戊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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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0번={{TagSpage|116-7}}<blockquote no="44">近觀諫院上䟽 鄕射鄕飮鄕約等事皆載法條 而近者京外不擧行云 今更申明當否 令三公議啓</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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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1번={{TagSpage|116-8}}라고 傳敎하야 大臣들에게 鄕約 等事를 申明하기를 命하였으며, 다시 同年 十一月 辛丑朔에는 左相 洪彥弼 等이 議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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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2번={{TagSpage|117-1}}<blockquote no="45">呂氏鄕約其勸善禁非之意 行於一鄕果爲美矣 朝廷自有政令 不可擧其鄕約而施之於國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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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3번={{TagSpage|117-2}}{{TagRef|8}}라고 하였음에 對하야 王도 知道라고 答하야 呂氏鄕約을 國內에 實施케 하였다.<ref>中宗實錄 卷百一, 第十三張, 三十八年 七月 乙丑條. 同 卷百一, 第三十五張, 同 十月 戊戌條. 同 卷百一, 第四十張, 同 十一月 辛丑朔條.</ref> 이때 呂氏鄕約이 國令으로써 復行케 되였는지는 疑問이니, 何如튼 中宗 中期 以後 實施를 廢止케 하였든 呂氏鄕約을 다시 施行케 하자고 한 當時의 社會精神만은 크게 注目할 일이니 이것은 未久에 朝鮮的 鄕約이 出現하게 될 重要 動力이였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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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4번={{TagSpage|117-3}}그 후 明宗朝에 이르러도 呂氏鄕約 施行의 論이 일러나, 明宗 元年 八月 甲午에는 侍講官 周世鵬이 上言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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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5번={{TagSpage|117-4}}<blockquote no="46">{{TagRef|9}}先王朝以呂民鄕約行之於窮村僻巷 則小民享有感化 而向善去惡 但朝廷之上亦欲行之 而當時之人 多不務小學之實 而或詭異其衣服 或推遷於功名 遺其本而務其末 漸成弊習 故先王廢之 此乃呂氏所以用之於鄕曲者 於朝廷之上則自有禮法 不必行之 村巷之民雖同天理而王化未及 若行是約 則不爲無益矣<ref>明宗實錄 卷四, 第二十五張, 元年 八月 甲午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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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6번={{TagSpage|117-5}}라고 하야 村巷 間에만 呂氏鄕約을 實施하게 하기를 上請하였다. 當時 垂簾의 政을 보든 慈殿大王妃는 이것을 議論하기 爲하야 同月 丁未에 三公을 賓廳에 會케 하야, 傳敎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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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7번={{TagSpage|117-6}}<blockquote no="47">{{TagRef|10}}周世鵬所啓鄕約事 依趙光祖時事 反爲有弊 如鄕村結契 使之患難相救何如 其議啓<ref>明宗實錄 卷四, 第三十一張, 元年 八月 丁未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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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8번={{TagSpage|117-7}}라고 하야 鄕約을 施行케 하는 代身에 鄕民 서로 結契하야 患難相救케 함이 何如하냐고 下問하였다. 이에 領相 尹仁鏡 等은 곧 回啓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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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9번={{TagSpage|117-8}}<blockquote no="48">鄕約固是美事 但外方必有善人可爲約長者 而後可以行之 外方其何能盡得之乎 如欲自行者 則行之可矣 自朝廷別爲 立法而行移則爲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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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0번={{TagSpage|117-9}}이라고 하야 地方 善行人에게 放任하야 自發的으로 鄕約을 實施하게 하기를 論하매, 慈殿도 知道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TagPage|118-1}} 吾人의 特히 注意할 배는 鄕約을 民間 自治者에 一任하야 善行케 하자는 것과, 鄕約의 代物로 契를 結케 하자고 한 것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呂氏鄕約을 强制的으로 施行케 하느니보다 各 地方에 따라 그 地方에 適應한 契約을 設定케 하자는 것으로, 後世 朝鮮的 鄕約 成立의 重要한 時代的 背景을 이룬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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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여씨향약이 조선에서 실시하게 된 유래를 밝힘에는 먼저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부터 논할 필요가 있다. 여씨향약이라 함은 송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씨 문중에서 그 향리를 교도하기 위하여 세운 약속을 일컬음이니, 이것은 곧 지나에 있어서의 향약의 시초라고 전하여 온다. 여씨 문중에는 특히 대충 일방 대균 대림 등의 4형제가 있어 모두 도학으로써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하니, 이러한 것은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향약을 세워 일족 문중은 물론 향중 전체를 교화 선도하게 하였던 것이다. 여씨향약의 근본 골자만을 따서 쓰며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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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blockquote no="26">凡同約者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有善則書于籍 有過若違約者亦書之 三犯而行罰 不俊者絕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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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이 여씨향약은 같은 송나라 때 사람인 {{TagPerson|[[주희]]}}에 의하여 가감 증보되어 더욱 완정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니, 후세에 이른바 ‘주자증손여씨향약’은 곧 그것이다. 주자의 증손한 여씨향약도 물론 앞서 든 여씨향약의 근본 강령을 주간으로 하여 이것을 더 한층 상세히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것의 근본 조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목차3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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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blockquote no="27">凡鄕之約四 一曰德業相勸 二曰過失相規 三曰禮俗相交 四曰患難相恤 衆推有齒德者一人 爲都約正 有學行者二人副之 約中月輪一人 爲直月<sup>都副正不與之</sup> 置三籍 凡願入約者 書于一籍 過失可觀者 書于一籍 直月掌之 月終則以告于約正 而授于其次<br/>{{ruby|德業相勸|●●●●}}{{TagPage|108}}<br/>德謂見善必行 聞過必改 能治其身 能治其家 能事父兄 能教子弟 能御童僕 能肅政教 能事長上 能睦親故 能擇交遊 能守廉介 能廣施惠 能取寄託 能救患難 能導人爲善 能規人過失 能爲人謀事 能爲衆集事 能解鬪爭 能決是非 能興利除害 能居官擧職<br/>業謂居家則事父兄 敦子弟 待妻妾 在外則事長上 接朋友 敎後生 御僮僕 至于讀書 治田 營家 濟物 畏法令 謹租賦 好禮樂射御書類之類 皆可爲之 非此之類 皆爲無益<br/>右件德業 同約之人 各自進修互相勸勉 會集之日 相與推擧其能者 書于籍 以警勵其不能者<br/>{{ruby|過失相規|●●●●}}<br/>過失謂犯義之過六 犯約之過四 不修之過五<br/>犯義之過 一曰酗博鬪訟 二曰行止踰違 三曰行不恭遜 四曰言不忠信 五曰造言誣毀 六曰營私太甚<br/>犯約之過 一曰德業不相勸 二曰過失不相規 三曰禮俗不相成 四曰患難不相恤 不修之過 一曰交非其人 二曰游戲怠惰 三曰動作無儀 四曰臨事不恪 五曰用度 不節<br/>右件過失 同約之人 各自省察互相規戒 小則密規之 大則衆戒之 不聽則會集之日 直月以告于約正 約正以義理誨諭之 謝過請改則書于籍以俟 其爭辨不服 與終不能改者 皆聽其出約<br/>{{ruby|禮俗相交|●●●●}}<br/>禮俗之交 一曰尊幼輩行 二曰造請拜揖 三曰請召送迎 四曰慶弔贈遺<br/>尊幼輩行凡五等 曰尊者 曰長者 曰敵者 曰少者 曰幼者{{TagPage|109}}<br/>造請拜揖凡三條 〇曰凡少者於尊者長者 歲首冬至四孟月朔 辭見賀謝 皆爲禮見 此外候問起居質疑白事及赴請召皆爲燕見 尊者受謁不報 長者歲首冬至具牓子報之 如其服餘 令子弟以己名牓子代行 凡敵者歲首冬至辭見賀謝相往還 凡尊者長者無事 而至少者幼者之家惟所服 〇曰凡見尊者長者 門外下馬俟於外 次乃通名 主人使將命者 先出迎客 客趨入至廡間 主人出降階 客趨進主人揖之升堂 禮見四拜而後坐 燕見不拜 則主人送于廡下 若命之上馬 則三辭許則揖而 退出大門 乃上馬不許則從其命 凡見敵者門外下馬 使人通名 俟于廡下或廳側 禮見則再拜 退則主人詩就階上馬 凡少者以下則先遣人通名 主人具衣冠以俟 客入門下馬則趨出迎揖升堂來 報禮則再拜 謝退則就階上馬 〇曰凡遇尊長於道 皆徒行則趨進揖 尊長與之言則對 不則立於道側以俟 尊長己過 乃揖而行 或皆乘馬 於尊者則回避之 於長者則立馬道側 揖之俟過 乃揖而行 若己徒行而尊長乘馬則回避之 若己乘馬而尊長徒行望見 則下馬前揖 己避亦然 過旣遠乃上馬 若尊長令上馬則固辭 遇敵者皆乘馬則分道相揖而過 彼徒行而不及避則下馬揖之 過則上馬 遇少者以下皆乘馬 彼不及避則揖之而過 彼徒行不及避則下馬揖之<br/>請召迎送凡四條 〇曰凡請尊長飲食 親往投書 旣來赴 明日親往謝之 召敵者以書簡 明日交使相謝 召少者用客目 明日客親往謝 〇曰凡聚會皆鄕人 則坐以齒 若有親則別叙 若有他客有爵者則坐以爵 若有以異爵者 雖鄕人亦不以齒 若特請召或迎勞出餞 皆以專召者爲上客 如婚禮則姻爲上客 皆不以齒爲序 〇曰凡燕集初坐別設卓子於兩楹間 置大盃於其上 主人降席立於卓東西向 上客亦降席立於卓西東向 主人取盃親洗 上客辭 主人置盃卓子上 親執酒斟之 以器授執事者 遂執盃以獻上客 上客受之復置卓子上 主人西向再拜 上客東向再拜 興取酒東向跪祭 遂飲以盃授賛者遂拜 主人答拜 上客酢主人如前儀 主人乃獻樂賓如前儀 唯獻酒不拜 若婚會姻家爲上客 則雖少亦答其拜 〇曰凡有遠出遠{{TagPage|110-1}}歸者 則迎送之 少者幼者不過五里敵者不過三里 各期會於一處 拜揖如禮有飲食則就飲食之 少者以下俟其旣歸 又至其家省之<br/>慶弔遺凡四條 〇曰凡同約有吉事則慶之 有凶事則弔之 每家只家長一人與同約者 俱往其書問亦如之 若家長有故或與所憂弔者 不相接則其次者當之 〇曰凡慶禮如常儀有贈物 或其家力有不足則同約爲之 借助器用及爲營幹 凡弔禮聞其初喪未易服 則率同約者 深而往哭弔之 且助其凡百經營之事 主人旣成服則相率素幞頭素襴衫素帶 具洒果食物而往奠之 及葬又相率致贈 俟發引則素服而送之 及卒哭及小祥及大祥皆常服弔之 〇曰凡喪家不可具酒衣服 以待弔客弔客亦不可受 〇曰凡聞所知之喪或遠不能往 則遣使致食 就外次衣弔服再拜哭而送之 過朞年則不哭 情重則哭其墓<br/>右禮俗相交之事 直月主之 有期日者爲之 期日當糾集者督其違慢 凡不如約者 以告于約正而詰之 且書于籍<br/>{{ruby|患難相恤|●●●●}}<br/>患難之事七 一曰水火 二曰盜賊 三曰疾病 四曰死喪 五曰孤弱 六曰誣枉 七日貧乏<br/>右患難相恤之事 凡有當救恤者 其家告于約正 急則同約之近者爲之告約正命直月徧告之 且爲之斜集而程督之 凡同約者財物器用車馬人僕皆有無相假若不急之用及有所妨者 則不必借 可借而不借及踰期不還及損壞借物者 論如犯約之過 書于籍 隣里或有緩急雖非同約 而先聞知者 亦當救助 或不能救助則爲之告于同約而謀之 有能如此者則亦書其善於籍 以告鄕人</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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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번={{TagBook|[[주자대전]]}}(권74)에 실린 증손여씨향약은 앞서 쓴 각 조목에 더욱 상세한 주석이 붙어있으나 이 근본 조목만으로라도 주자의 증손한 여씨향약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으므로 이곳에서는 그의 주석을 상기(詳記)함을 생략한다. 하여튼 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은 그의 이학(理學)과 아울러 이후의 지나 사회에 끼친바 영향이 막대하여 특히 주자학을 국시로 준봉하던 명조(朝)에 이르러는 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은 향약 실시의 준칙이 되게 되어, 명 태조도 즉위 초에 이미 이에 준거하여 향약을 세워 국중 매2, 300호씩을 연(連)하여 회(會)를 모으게 하여 약정 1인 부약정 2인을 두어 향약을 실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즉 지나에 있어서의 향약은 명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국령으로써 실시를 명하게 되어 가장 이상적으로 실행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은 정(廷)하여 후계국(後繼國)이던 청나라에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형제국으로 친교가 두텁던 조선국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종래 이 땅에 없던 향약을 하루 바삐 실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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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6번=조선에서 향약을 실시함에 당하여 우선 그의 선구로서 여씨향약을 시행하였다 함은 앞에서도 잠깐 말한 바 있었거니와, 이곳에서 여씨향약이라 함은 그 실인즉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가리킴이었던 것이다. 주자의 증손한 여씨향약은 이미 고려말 이조 초기에 주자학이 수입됨을 따라 주자성리대전에 포함되어 반도 내에도 전래되어 있었을 것이나, 그때에는 아직 실시함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조 건국 후 1세기를 훨씬 지나 유교문화가 바야흐로 무르녹아져, 주자학의 전부문이 완전히 이 땅에서 저작(咀嚼) 음미되어 짐을 따라 주자증손여씨향약도 널리 고가(高價)로 인식하게 되어, 마침내 {{TagPerson|[[중종]]}} 때에 이르러 식자 사이에 교화 진흥상 이것을 실시할 것을 논의하는 자 속출하게 되었다. 즉 {{TagPerson|[[중종]]}} 12년 6월에는 벌써 경상도 성양현 유생인 {{TagPerson|[[김인범]]}}이 상소하여 여씨향약을 준행하여써 풍속을 변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왕은 정부에 전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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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7번=<blockquote no="28">{{TagRefT|1}}予觀咸陽儒生金仁範上䟽 以草野寒生 傷嘆人心日偷風俗日惡 欲變薄俗而回唐虞之治 其志亦可嘉也 近來人心風俗之非 予亦憂慮 不知畢竟當何如也⋯⋯⋯鄕等勿以爲布衣之親言 而講論移風易俗之方 上下交勵 使人心歸厚風俗反朴 上有忠厚之風 下無愁嘆之聲 不亦美乎<ref group="a">{{TagBook|[[중종실록]]}} 권28, 제23장, 12년 6월 갑술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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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8번=라고 하여 그의 탁론을 가납(嘉納)하여 상소대로 여씨향약을 시행하게 하기를 정부에 문의하였다. 정부도 이에 응하여 같은 해 7월 경진에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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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9번=<blockquote no="29">{{TagRefT|2}}臣等見金仁範上䟽 其意至美 而上敎亦當 此事令下人行之 則想必有樂爲者 令該曹行移于八道 勸諭下人使之遵行可也 若人心風俗不美之事 則臣等亦每講論而欲矯之 但當自然漸摩 非可以法條能行於一朝也<ref group="a">{{TagBook|[[중종실록]]}} 권28, 제28장, 12년 7월 경진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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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0번=라고 상계하여 상교(上敎)에 좇아 예조로 하여금 여씨향약을 8도에 행이(行移)하게 하기를 논하였으며, 왕도 이에 지도(知道)라 하여 잘 실행하기를 명하였다. 그러나 같은 달 기해에 이르러 {{TagPerson|[[예조]]}}는 정부에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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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1번=<blockquote no="30">小學正俗 已令多數印出 廣布中外 呂氏鄕約是小學中一事 不必別令擧行 請勿擧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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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2번=이라 하여 여씨향약이 소학 중의 일사(一事)에 지나지 않으므로 다수의 소학을 광포한 금일에 있어서 다시 여씨향약을 광포할 필요가 없다 하여 그의 행이를 중지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정부는 다시 계목을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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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3번=<blockquote no="31">呂氏鄕約雖載小學 若不曉諭別令擧行 則視爲尋常 徒爲文具 令各道監司廣布何如</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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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4번=라고 하여 각 도 감사로 하여금 여씨향약을 광포하게 하기를 논하여 왕의 윤허를 얻었다. 이리하여 여씨향약은 중종 12년 7월 이후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각 지방장관에 의하여 인출 광포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종래 주자성리대전 속의 일부로서 극히 협소한 일부 식자 사이에만 알려져 있던 여씨향약(주자증손여씨향약)은 완전한 단행본으로 세간에 출현하게 되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TagPerson|[[중종]]}} 12년 3월 경인에 본도 관찰사로 임명된 {{TagPerson|[[김안국]]}}에 의하여 곧 이 여씨향약이 인반(印頒)되어 화민성속에 기여하는 바 적지 않았다 한다. 김안국은 중종 12년 3월부터 같은 왕 13년 3월까지 만 1개년 간 경상도의 방백으로 재임하여, 그동안 여씨향약은 물론 동몽수지 등 책을 간행하여 향곡 교도에 진력하는바 다대하였었으나, 다시 중앙관리로 소환됨에 이르러는 {{TagPerson|[[중종]]}} 13년 4월 삭기사에 동지중추부사의 직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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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5번=<blockquote no="32">臣爲慶尙道觀察使 其道人心風俗弊乃極 兮者上方有志於轉移風俗 故臣欲體至意變革頑風 而竊思其要 取古人之書 可以善俗者 詳加諺解頒道內以教之 此等書冊臣有志修撰 而第緣事務煩劇 未遑詳悉 錯誤必多 今方別設撰集廳 印出文籍 此等書使之更加讎校 印頒八道 則於率勵風化庶有小益也 如呂氏鄕約正俗等書 乃敦厚風俗之書也 鄕約雖載於性理大全而無註解 遐方之人未易通曉 故臣乃詳其諺解 使人接目便解 正俗亦飜以諺字 如農書蠶書乃衣食之大政 故世宗朝飜以俚語 開刊八道 今亦頗致意務本之事 故臣亦加諺解 如二倫行實臣前爲承旨時 請開刋 如三綱之重 雖愚夫愚 婦皆知之 至於朋友兄弟之倫 凡常之人或有不知 故臣依三綱行實撰類以之 如辟瘟方則⋯⋯⋯臣亦加諺解以刋 至如瘡疹方會 已飜譯開刋⋯⋯⋯願依成宗朝廣頒救急簡易方例 多印廣布</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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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6번=라고 상계하여, 자기가 이미 상세한 언해를 붙여 둔 여씨향약 정속 농서 잠서와 이륜행실 삼강행실 벽온방칙 참진방회 등 책을 개간 광행하게 하기를 상청하였다. 왕도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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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7번=<blockquote no="33">{{TagRefT|3}}卿在其道 盡心於學校 轉移風俗之事 予聞之嘉美 又復撰此書以敎之 此書皆有關於風敎 其下撰集廳 開刋廣行<ref group="a">{{TagBook|[[중종실록]]}} 권32, 제42―43장, 13년 4월 기사삭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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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8번=이라고 전지하여 그의 특지를 찬가(讃嘉)하여 찬집청으로 하여금 이 책들을 개간 광포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종래 주자성리대전 속에서 발취되어 순 한자의 단행본으로 인포하게 되었던 여씨향약은 다시 한 걸음을 나가 이 땅의 말로 주해를 붙인 소위 언해본으로 세간에 광행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여씨향약은 어느 벽향의 필부에게까지라도 용이하게 이해시키게 되어 그의 보편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 언해 반포한 여씨향약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는 그의 잔본을 득견하지 못한 나로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와 비슷하게 역시 이 땅에서 순 한자로 주석을 더하여 인반한 {{TagRefT|4}}주자증손여씨향약<ref group="a">외우 {{TagPerson|[[이인영]]}} 형 소장 ‘주자증손여씨향약’.</ref>이 있다. 이 한자 주석 여씨향약이 어느 때 인반되었는지는 고증할 기사가 없으므로 정확히 논정하기는 어려우나, 그 주역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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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9번=<blockquote no="34">衆推一人有齒者<sup>年高有德行者</sup> 爲都約正<sup>約中之長也如今之留鄕座首</sup> 有學行者<sup>有學術操行者</sup> 二人副之<sup>如今之留鄕別監</sup> 約中月輪一人 爲直月<sup>如今之有司掌務每月輪定之</sup> (細字註譯)</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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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0번=라고 있음으로 보아 유향소가 융성하던 이조 중엽 이전에 인포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주역에서 향약의 도약정 부약정 직월 등의 역원을 각각 이 땅 유향소의 좌수 별감 유사 장무 등과 같다고 하였음은 앞 절에서도 이설(異說)한 바와 같이 향약이 유향소와 동의의 것임과, 전자가 후자에서 유래하고 이의 존재로 말미암아 용이하게 실시되게 되었음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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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1번=이와 같이 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은 조선에 수입된 후 다시 한자 및 언문으로써 주역된 2종의 단행본으로 누차 간행되어 널리 8도 각 읍에 광포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여씨향약은 이후 지방 유지 인사에 의하여 지방적으로나마 잘 실시되게 되었다. 그 일례를 들면 {{TagPerson|[[중종]]}} 13년 9월 임인에 참찬관 {{TagPerson|[[조광조]]}}가 상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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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2번=<blockquote no="35">臣聞溫陽人善行鄕約 若善行鄕約則固美矣⋯⋯⋯行鄕約之邑 如壓良爲賊拒扞官債之納 如此等事皆己未見 前者金安國爲慶尙道監司時 乃終令行之 其時仍興鬪狠 盖始初故然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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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3번=라 하고, 같은 달 신해에 대사헌 {{TagPerson|[[김정]]}}이 상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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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4번=<blockquote no="36">臣於外方 見呂氏鄕約大有關於敎化 前此兄弟不和者知悔而和 然悖逆者改而順 人皆知而行之 則厚倫成俗之道豈少補哉 然鄕曲小民不知朝廷之意 而以爲監司一時之令 故皆曰今監司遆去 則止之云 雖守令亦或莫之知也 當申諭此意 使知朝廷軫念之意可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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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5번=라 하고, 다음 해 14년 4월 무진에도 영사 {{TagPerson|[[신용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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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6번=<blockquote no="37">臣頗聞行鄕約之處 則詞訟亦止 風俗漸美</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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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7번={{TagRefT|5}}라고 상언한 것과 같은 것은 그것이다.<ref group="a">{{TagBook|[[중종실록]]}} 권34, 제43장, 13년 9월 임인조. {{TagBook|[[중종실록]]}} 권34, 제45장, 신해조. {{TagBook|[[중종실록]]}} 권35, 제57장, 14년 4월 무진조.</ref> 이때 왕은 영사 {{TagPerson|[[정광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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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8번=<blockquote no="38">鄕約好則好矣 然聚徒而所爲不善 則邑宰之勢反爲弱矣 所當審戒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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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9번=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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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0번=<blockquote no="39">雖美事而其實不存 則不可 故凡事循名責實可也<br/>呂氏鄕約行之則美矣 大抵敎化之宣 皆在監司 而朝廷之意亦豈不知乎 在監司盡力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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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1번=라고 전하여 여씨향약의 철저한 시행을 8도 감사에게 갱명하였다. 이로써 여씨향약은 8도 각지에 널리 반포하게 되어 향곡교화상 공헌하는 바 적지 않게 되었으나, 다시 {{TagPerson|[[중종]]}} 14년 7월 기유에 이르러는 앞 절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참찬관 {{TagPerson|[[한충]]}}의 상계에 의하여 종래 폐락되어 있던 유향소를 재흥시켜 화민성속에 진력하게 하고자 외방 유향소 및 경성 각 동 약정에게 여씨향약을 분급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여씨향약은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잘 준행된 것 같아, {{TagPerson|[[중종]]}} 14년 7월 정사의 시강관 {{TagPerson|[[이연경]]}}의 상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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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2번=<blockquote no="40">臣在外方見鄕約果速於美俗矣 人性本善以善事指導之 則自再易化 若得善人以爲約正 則足以變習俗 而人皆樂趨於善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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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3번=라고 있고, 참찬관 {{TagPerson|[[한충]]}}의 상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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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4번=<blockquote no="41">臣家在淸州 與忠州相距不遠 忠淸一道 鄕約勝於他道 而忠州爲最於道內 其初爲約者 乃校理李延慶也 此人爲約正以導率之 故稱最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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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5번={{TagRefT|6}}이라고 있어 충청도에서 특히 여씨향약이 잘 실시되었음을 말하고 있다.<ref group="a">{{TagBook|[[중종실록]]}} 권36, 제51―52장, 14년 7월 정사조.</ref> 그러나 그 후 몇 달 안 되어 {{TagPerson|[[중종]]}} 14년 11월에 {{TagEvent|[[기묘사화]]}}라는 일대 사류 참해사변이 이러나, {{TagPerson|[[조광조]]}}를 위시한 신진 정치가 및 학자들 70여인이 참화를 입게 됨에 이르러, 이 향약 실시의 운동도 표면상 일절 중절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TagPerson|[[중종]]}} 19년 10월에 범죄사건이 빈발하자, 사신은 이것을 평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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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6번=<blockquote no="42">{{TagRefT|7}}項者朝廷崇小學之敎 又印頒呂氏鄕約 使中外遵行之 鄕約雖非帝王化民之術 其亦有類於成周讀法敎民之意 爲善者興起 而惡者畏憚自己 自기묘年이후 此等一切廢弛 父兄戒子弟不得挾小學書 人倫不明風俗大毀<ref group="a">{{TagBook|[[중종실록]]}} 권52, 제5장, 19년 10월 갑오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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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7번=라고 하여 향약을 폐지한 것이 그 중요 원인임을 전하고 있다. 이로 보면 기묘사화 후 향약은 국령으로써 폐지를 명한 것 같으나, 그 실은 법령대로 철저히 실행되었는지도 의문이며, 설사 철저한 실행을 강요하였다 하더라도 종래에 이상적으로 향약을 준행하여 오던 곳에서는 잠행적으로라도 향약의 근본정신만은 준봉하여 왔을 것이다. {{TagPerson|[[중종]]}}도 그 만년인 38년 7월 을축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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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8번=<blockquote no="43">近來物論及䟽章 皆以小學鄕約之事爲言 已卯年爲小學鄕約者 徒尙其文而不務其實 故其弊至於以下居上以賤陵貴 而無可觀之道矣 其後欲矯其弊而不用也 非以小學之書爲非而棄之也 然小學明人倫之書也 常時典講時並講事 後日合坐議于大臣以啓</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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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9번=라고 정원에 전교하고, 같은 해 10월 무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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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0번=<blockquote no="44">近觀諫院上䟽 鄕射鄕飮鄕約等事皆載法條 而近者京外不擧行云 今更申明當否 令三公議啓</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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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1번=라고 전교하여 대신들에게 향약 등사를 신명하기를 명하였으며, 다시 같은 해 11월 신축조에는 좌상 {{TagPerson|[[홍언필]]}} 등이 의논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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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2번=<blockquote no="45">呂氏鄕約其勸善禁非之意 行於一鄕果爲美矣 朝廷自有政令 不可擧其鄕約而施之於國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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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3번={{TagRefT|8}}라고 하였음에 대하여 왕도 지도(知道)라고 답하여 여씨향약을 국내에 실시하게 하였다.<ref group="a">{{TagBook|[[중종실록]]}} 권101, 제13장, 38년 7월 을축조. {{TagBook|[[중종실록]]}} 권101, 제35장, 같은 해 10월 무술조. {{TagBook|[[중종실록]]}} 권101, 제40장, 같은 해 11월 신축삭조.</ref> 이때 여씨향약이 국령으로써 복행(復行)하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니, 하여튼 중종 중기 이후 실시를 폐지하게 하였던 여씨향약을 다시 시행케 하자고 한 당시의 사회정신만은 크게 주목할 일이니 이것은 미구에 조선적 향약이 출현하게 될 중요 동력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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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4번=그 후 {{TagPerson|[[명종]]}}조(朝)에 이르러도 여씨향약 시행의 논의가 일어나, {{TagPerson|[[명종]]}} 원년 8월 갑오에는 시강관 {{TagPerson|[[주세붕]]}}이 상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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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5번=<blockquote no="46">{{TagRefT|9}}先王朝以呂民鄕約行之於窮村僻巷 則小民享有感化 而向善去惡 但朝廷之上亦欲行之 而當時之人 多不務小學之實 而或詭異其衣服 或推遷於功名 遺其本而務其末 漸成弊習 故先王廢之 此乃呂氏所以用之於鄕曲者 於朝廷之上則自有禮法 不必行之 村巷之民雖同天理而王化未及 若行是約 則不爲無益矣<ref group="a">{{TagBook|[[명종실록]]}} 권4, 제25장, 원년 8월 갑오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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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6번=라고 하여 촌항 사이에만 여씨향약을 실시하게 하기를 상청하였다. 당시 수렴의 정(政)을 보던 자전대왕비는 이것을 의논하기 위하여 같은 달 정미에 삼공을 빈청에 모이게 하여, 전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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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7번=<blockquote no="47">{{TagRefT|10}}周世鵬所啓鄕約事 依趙光祖時事 反爲有弊 如鄕村結契 使之患難相救何如 其議啓<ref group="a">{{TagBook|[[명종실록]]}} 권4, 제31장, 원년 8월 정미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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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8번=라고 하여 향약을 시행하게 하는 대신에 향민 서로 결계하여 환난상구하게 함이 어떠하냐고 하문(下問)하였다. 이에 영상 {{TagPerson|[[윤인경]]}} 등은 곧 회계(回啓)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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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9번=<blockquote no="48">鄕約固是美事 但外方必有善人可爲約長者 而後可以行之 外方其何能盡得之乎 如欲自行者 則行之可矣 自朝廷別爲 立法而行移則爲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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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0번=이라고 하여 지방 선행인에게 방임하여 자발적으로 향약을 실시하게 하기를 논하니, 자전도 지도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우리의 특히 주의할 바는 향약을 민간 자치자에 일임하여 선행하게 하자는 것과, 향약의 대물로 계(契)를 결성하게 하자고 한 것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여씨향약을 강제적으로 시행케 하느니보다 각 지방에 따라 그 지방에 적응한 계약을 설정하게 하자는 것으로, 후세 조선적 향약 성립의 중요한 시대적 배경을 이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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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번={{TagSpage|119-1}}朝鮮에 있어서 鄕約이 成立되기 以前의 社會 狀態가 어떠하였었든가는 以上 論述하여 온 바로도 大略 짐작할 수 있으나 要컨대 朝鮮에서 鄕約이 成立하게 된 것은 이미 李朝 初期부터 一種의 鄕約과 같은 鄕憲이 領布되여 地方 士類의 團體인 留鄕所에 依하야 實行이 督勵되여 있었음과, 또 呂氏鄕約이 傳來되여 널리 遵行케 된 데서 由來한다. 呂氏鄕約은 中宗 十二年 以後 數次 國令으로써 施行을 强制하였으므로 地方的으로는 잘 實施한 곳도 있었으나, 이것을 全般的으로 볼 때는 그리 좋은 効果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 理由로는 時代와 國情이 相異한 이 땅에서 멀리 宋나라 呂氏의 理想이 그대로 實現될 理가 萬無하였었으니, 이곳에 朝鮮的 鄕約 成立의 根據가 있었든 것이다. 즉 朱子學을 唯一無二의 準則으로 遵奉하든 朝鮮國이면서도 朱子에 依하야 增損된 呂氏鄕約을 그대로 이따에서 實施함에는 여러가지의 矛盾과 難關에 逢着케 되였든 것이니, 이러한 點에 먼저 着眼하야 이 나라 各 地方에 適合한 鄕約을 세우지 않으면 않이 되겠다 하는 것을 先覺한 이는 實로 朝鮮儒學史上의 二大 巨星이라고 일컷는 李退溪 李栗谷 두분이였다. 朝鮮의 鄕約은 退溪 栗谷 二人의 制定에서 비로소 完成하게 되였든 것이니, 以下 그의 大略을 紹介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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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번=조선에 있어서 향약이 성립되기 이전의 사회 상태가 어떠하였었던가는 이상 논술하여 온 바로도 대략 짐작할 수 있으나 요컨대 조선에서 향약이 성립하게 된 것은 이미 이조 초기부터 일종의 향약과 같은 향헌이 영포되어 지방 사류의 단체인 유향소에 의하여 실행이 독려되어 있었음과, 또 여씨향약이 전래되어 널리 준행하게 된 데서 유래한다. 여씨향약은 중종 12년 이후 수차 국령으로써 시행을 강제하였으므로 지방적으로는 잘 실시한 곳도 있었으나, 이것을 전반적으로 볼 때는 그리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 이유로는 시대와 국정이 상이한 이 땅에서 멀리 송나라 여씨의 이상이 그대로 실현될 리가 만무하였었으니, 이곳에 조선적 향약 성립의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즉 주자학을 유일무이의 준칙으로 준봉하던 조선국이면서도 주자에 의하여 증손된 여씨향약을 그대로 이 땅에서 실시함에는 여러가지의 모순과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러한 점에 먼저 착안하여 이 나라 각 지방에 적합한 향약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것을 선각한 이는 실로 조선유학사(史)상의 2대 거성이라고 일컫는 {{TagPerson|[[이황]]}} {{TagPerson|[[이이]]}} 두분이었다. 조선의 향약은 {{TagPerson|[[이황]]}} {{TagPerson|[[이이]]}} 2인의 제정에서 비로소 완성하게 되었던 것이니, 아래에서 그의 대략을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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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1: (1)이퇴계의 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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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1번={{TagSpage|119-2}}이것은 李退溪(滉)가 그의 鄕里인 慶尙道 禮安에 退居하야 明宗 十一年 十二月에 草한 鄕約이니, 世稱 禮安鄕約이라고 한다. 李退溪는 周知하는 바와 같이 朝鮮의 朱子라고까지 崇尙되는 大學者이였으나, 一方 그는 中宗 二十九年부터 宣祖 初年까지 前後 三十餘年 間 官界에 出入하였으며 其間 前後 無慮 十五六次에 亘하야 公務 及 辭退로 京鄕을 往來하였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頻繁히 京鄕을 往來하는 동안에 地方 敎化 制度의 未盡함을 切感한 때도 時時로 있었을 것이며, 特히 中宗{{TagPage|120-1}} 二十八年에는 일즉이 慶尙道 觀察使로서 呂氏鄕約 實施에 盡力하든 金安國을 驪州에서 會見하였으니, 그의 이러한 經歷은 마츰내 그로 하여금 鄕約을 制定케 하였든 것이다. 李退溪가 이 鄕約을 草한 經路는 그의 {{TagRef|1}}「鄕立約條序」<ref>退溪先生文集 卷之四十二, 鄕立約條序.</ref> 中의 詳細히 記하여 있으나, 그 中에서도 分明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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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2번={{TagSpage|120-2}}<blockquote no="49">今之留鄕 即古鄕大夫之遺意也 得人則一鄕肅然 匪人則一鄕解體 而況鄕俗之間 遠於王靈 好惡相攻 强弱相軋 使孝悌忠信之道 或尼而不行 則棄禮義捐廉恥日甚 流而爲夷狄禽獸之歸 此實王政之大患也 而其紏正之責 乃歸之鄕所 鳴呼其亦重矣 吾鄕雖壤地編小 素號文獻之邦 儒先輩出 羽儀王朝者 前後接踵 觀感薰陶 鄕風最美 頃年以來 運値不淑 達尊諸公相繼逝沒 然猶有故家遺範文義蔚然 以是相率而爲善國豈不可也 奈何人心無恒習俗漸訛 淸芬罕聞而葉芽間作 玆不防遏 厥終將無所不至矣 故崇政知事聾巖先生 患是然也 嘗欲爲之立約條 以厲風俗 鄭重而未及焉 于今知事諸胤 方居喪境內 滉亦守病田間 鄕丈皆欲令我輩數人 遂成先生之志 委責甚至 辭不獲己 乃相與商議而擧其梗槪如此 復以偏示鄕人而審可否 然後乃定 庶幾期行於久遠而無弊也 或者以不先立敎而徒用罰爲疑 是固然矣 然而孝悌忠信 原於降衷秉彛之性 加之以國家說庠序以教之 無非勸導之方 奚待於我輩別立條耶</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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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3번={{TagSpage|120-3}}라고 하야 當時까지도 留鄕所가 鄕風紏正의 責任을 擔當하여 왔음과, 留鄕所의 廢落을 보매 先輩의 遺志를 繼하야 約條를 立하게 된 것을 傳하고 있다. 즉 李退溪가 이 約條를 立하게 된 것도 決코 그 自身의 創意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先輩 李賢補의 遺志를 받어 鄕丈의 勸告로 李賢補의 諸子와 더부러 商議하야 立條한 것에 지나지 않었다. 李賢補(號 聾巖)는 李退溪와 同鄕의 人으로 그보다 三十四歲나 先輩며, 燕山君朝 以來 官路에 出仕하야 京鄕 各官을 歷任한 後 中宗 三十七年에 骸骨을 乞하야 鄕里에 退居하야 明宗 十年에 享年 八十九歲로 卒去하기까지 鄕里 敎化에 盡力하였다. 李賢補는 그의{{TagPage|121-1}} 文集에도 與退溪書 答退溪書가 多數 揭載되여 있는 바로 보아 李退溪의 先輩로 恒常 그를 指導하며 親交를 매저 서로 切磋琢磨하든 배가 있었는 것 같어, 明宗 十年 五月에 李賢補가 疾革하야 重態에 이르매 李退溪는 곧 徃候하야 時事를 痛泣하였다 한다. 이러한 兩人의 關係는 마츰내 그들로 하여금 鄕約을 立한게 하였든 것이다. 前記한 바와 같이 李賢補는 晚年에 辭官하야 十四年 間 鄕里에 退居하였으니, 그동안 그가 鄕里 敎化에 盡力하야 鄕風을 紏正하기 爲하야 約條를 立하고저 한 것은 있었을 만한 일이다. 前揭 「鄕立約條序」 中에도 <cite no="05">「故崇政知事聾巖先生 患是然也 嘗欲爲之立約條 以厲風俗 鄭重而未及焉」</cite>이라고 하였음과 같이 李賢補는 生前 中에 約條를 立하고저 하였으나 鄭重하야 未及하고 終世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李退溪가 이것을 完成하였든 것이다. 李退溪는 親交가 두텁든 先輩의 遺志를 奉承하야 그가 죽은 翌年인 明宗 十一年 十二月에 服喪으로 歸鄕하여 있든 李賢補의 諸子와 相議하여 마츰내 約條를 立하여, 이것을 널리 鄕人에게 徧示하야 可否를 審議한 後 成文하였다 한다. 李退溪의 立한 約條의 全文을 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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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4번={{TagSpage|121-2}}<blockquote no="50">{{ruby|禮安鄕約|○○○○}}<br/>父母不順者<sup>不孝之罪邦有常刑故姑舉其次</sup><br/>兄弟相閱者<sup>兄曲弟直均罰兄直弟曲止罰弟曲直相半兄輕弟重</sup><br/>家道悖亂者<sup>夫妻歐罵黜其正妻(妻悍逆者減等)男女無別嫡妾倒置以妾爲妻以孽爲適適不撫孽孽反陵適</sup><br/>事涉官府有關鄕風者<br/>妄作威勢擾官行私者<br/>鄕長陵辱者{{TagPage|122}}<br/>守身嬬婦誘脅汚奸者<br/>已上極罰 上中下<br/>親戚不睦者<br/>正妻疏薄者<sup>棲有罪者減等</sup><br/>隣里不知者<br/>儕輩相毆罵者<br/>不顧廉恥汚壞士風者<br/>恃强陵弱侵奪起爭者<br/>無賴結黨多行狂悖者<br/>公私聚會是非官政者<br/>造言構虛陷人罪累者<br/>患難力及坐視不救者<br/>受官差仕憑公作弊者<br/>婚姻喪祭無故過時者<br/>不有執綱不從鄕令者<br/>不休鄕論反懷仇怨者{{TagPage|123-1}}<br/>執綱徇私冒入鄕參者<br/>舊官餞亭無故不參者<br/>己上中罰 上中下<br/>公會晚到者<br/>紊坐失儀者<br/>座中喧爭者<br/>空坐退便者<br/>無故先出者<br/>己上下罰 上中下<br/>元惡鄕吏 人吏民間作弊者 貢物使濯徵價物者 庶人陵萬士族者</blockquote>
|목차4-1원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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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원문5번={{TagSpage|123-2}}李退溪의 立한 約條는 이와 같이 極罰 中罰 下罰의 三大 項目으로 나누어 各 項目을 通하야 過失을 懲罰하는 條目을 列擧하였음에 끄쳤다. 그리고 各 項目을 上中下의 等級으로 分別하였으나, 이에 對한 具體的 治罰 方法을 明記치 않었음은 不充分한 點이 있으며, 끝으로 元惡鄕吏 等 四條目을 附記하였으되, 이亦 如何한 懲罰을 與하는지 詳細치 않다. 이러한 點으로 보아 李退溪의 約條는 그리 完備된 것이 않인 것 같으나, 이것은 退溪先生 文集에서 坂書한 것이므로 李退溪 自身이 制定한 것보다 多少의 落脫이 있었음에서 由來하였는지도 몰으겠다. 何如튼 前揭 「鄕立約條序」에도 <cite no="06">「或者以不先立敎而徒 用罰爲疑 是固然矣 然而孝悌忠信原於降衷秉彝之性 加之以國家設庠序以敎之 無非勸導之方 奚待於我輩別立條耶」</cite>라고{{TagPage|124-1}} 하였음과 같이, 李退溪는 過失을 治罰하는 것만을 主眼으로 하야 立條하고, 其他 立敎禮俗 等의 件은 學校敎育에서 勸導할 것을 期하였다. 따라서 李退溪의 約條는 朱子增損呂氏鄕約과는 全然 關係가 없었고, 呂氏鄕約의 四大綱目인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中 特히 過失相規만을 重視하야 東方의 家族制度를 中心 삼아 鄕土에 適應하게 約條를 한 것 같다. 이 點은 第二節에서 論한 李太祖 親製의 鄕憲條目과 相似하니, 李退溪의 約條는 支那鄕約의 影響을 받은 배 그리 없고, 前記 李太祖 親製의 鄕憲條目과 같이 온전히 이 鄕土에 適應케 하기 僞하야 制定된 純 朝鮮的 鄕約으로 家族制度를 中心 하야 過失을 相規함으로써 家風 乃至 鄕風을 美化 敦厚케 하고저 한 것이다. 이리하야 純 朝鮮的 鄕約이 成立되였으나, 李退溪의 年譜에 依하면 <cite no="07">”先生草約 因事不果行”</cite>이라 하야 當時 이 約條가 實行되지 못하였음을 傳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李退溪가 生存하든 當時의 일일 뿐이요, 그가 死去하야 그의 學統 門閥이 嶺南 各地에서 隆盛함을 따라 後世 이 約條는 呂氏鄕約과 아울러 各地에서 採用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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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1번=이것은 {{TagPerson|[[이황]]}}이 그의 향리인 경상도 예안에 퇴거하여 명종 11년 12월에 기초한 향약이니, 세칭 예안향약이라고 한다. {{TagPerson|[[이황]]}}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의 {{TagPerson|[[주자]]}}라고까지 숭상되는 대학자였으나, 한편 그는 {{TagPerson|[[중종]]}} 29년부터 선조 초년까지 전후 30여년 간 관계(官界)에 출입하였으며 기간 전후 무려 15, 6차에 이어 공무 및 사퇴로 경향(京鄕)을 왕래하였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빈번히 경향을 왕래하는 동안에 지방 교화 제도의 미진함을 절감한 때도 때때로 있었을 것이며, 특히 {{TagPerson|[[중종]]}} 28년에는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로서 여씨향약 실시에 진력하던 {{TagPerson|[[김안국]]}}을 여주에서 회견하였으니, 그의 이러한 경력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향약을 제정하게 하였던 것이다. {{TagPerson|[[이황]]}}이 이 향약을 기초한 경로는 그의 {{TagRefT|1}}’향립약조서’<ref group="a">{{TagBook|[[퇴계선생문집]]}} 권지42, 향립약조서.</ref> 중의 상세히 쓰여 있으나, 그 중에서도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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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2번=<blockquote no="49">今之留鄕 即古鄕大夫之遺意也 得人則一鄕肅然 匪人則一鄕解體 而況鄕俗之間 遠於王靈 好惡相攻 强弱相軋 使孝悌忠信之道 或尼而不行 則棄禮義捐廉恥日甚 流而爲夷狄禽獸之歸 此實王政之大患也 而其紏正之責 乃歸之鄕所 鳴呼其亦重矣 吾鄕雖壤地編小 素號文獻之邦 儒先輩出 羽儀王朝者 前後接踵 觀感薰陶 鄕風最美 頃年以來 運値不淑 達尊諸公相繼逝沒 然猶有故家遺範文義蔚然 以是相率而爲善國豈不可也 奈何人心無恒習俗漸訛 淸芬罕聞而葉芽間作 玆不防遏 厥終將無所不至矣 故崇政知事聾巖先生 患是然也 嘗欲爲之立約條 以厲風俗 鄭重而未及焉 于今知事諸胤 方居喪境內 滉亦守病田間 鄕丈皆欲令我輩數人 遂成先生之志 委責甚至 辭不獲己 乃相與商議而擧其梗槪如此 復以偏示鄕人而審可否 然後乃定 庶幾期行於久遠而無弊也 或者以不先立敎而徒用罰爲疑 是固然矣 然而孝悌忠信 原於降衷秉彛之性 加之以國家說庠序以教之 無非勸導之方 奚待於我輩別立條耶</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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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3번=라고 하여 당시까지도 유향소가 향풍두정의 책임을 담당하여 왔음과, 유향소의 폐락을 보니 선배의 유지(遺志)를 이어 약조를 세우게 된 것을 전하고 있다. 즉 {{TagPerson|[[이황]]}}이 이 약조를 세우게 된 것도 결코 그 자신의 창의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선배 {{TagPerson|[[이현보]]}}의 유지를 받아 향장(鄕丈)의 권고로 {{TagPerson|[[이현보]]}}의 제자와 더불어 상의하여 입조(立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TagPerson|[[이현보]]}}(호 농암)는 {{TagPerson|[[이황]]}}과 동향의 사람으로 그보다 34세나 선배며, {{TagPerson|[[연산군]]}}조(朝) 이래 관로에 출사하여 경향(京鄕) 각 관을 역임한 후 중종 37년에 해골을 걸(乞)하여 향리에 퇴거하여 명종 10에 향년 89세로 졸거하기까지 향리 교화에 진력하였다. {{TagPerson|[[이현보]]}}는 그의 문집에도 {{TagArticle|[[여퇴계서]]}}(與退溪書) {{TagArticle|[[답퇴계서]]}}(答退溪書)가 다수 게재되어 있는 바로 보아 {{TagPerson|[[이황]]}}의 선배로 항상 그를 지도하며 친교를 맺어 서로 절차탁마하던 바가 있었는 것 같아, {{TagPerson|[[명종]]}} 10년 5월에 {{TagPerson|[[이현보]]}}가 질극하여 중태에 이르니 {{TagPerson|[[이황]]}}은 곧 왕후하여 시사를 통읍하였다 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향약을 세우게 하였던 것이다. 앞서 쓴 바와 같이 {{TagPerson|[[이현보]]}}는 만년에 사관(辭官)하여 14년 간 향리에 퇴거하였으니, 그동안 그가 향리 교화에 진력하여 향풍을 두정하기 위하여 약조를 세우고자 한 것은 있었을 만한 일이다. 앞서 든 ‘향립약조서’ 중에도 <cite no="05">“故崇政知事聾巖先生 患是然也 嘗欲爲之立約條 以厲風俗 鄭重而未及焉”</cite>이라고 하였음과 같이 {{TagPerson|[[이현보]]}}는 생전 중에 약조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정중하여 미급하고 종세(終世)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TagPerson|[[이황]]}}이 이것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퇴계는 친교가 두텁던 선배의 유지를 봉승하여 그가 죽은 익년인 {{TagPerson|[[명종]]}} 11년 12월에 복상으로 귀향하여 있던 {{TagPerson|[[이현보]]}}의 제자와 상의하여 마침내 약조를 세워, 이것을 널리 향인에게 편시(徧示)하여 옳고 그름을 심의한 후 성문하였다 한다. {{TagPerson|[[이황]]}}이 세운 약조의 전문을 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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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4번=<blockquote no="50">{{ruby|禮安鄕約|○○○○}}<br/>父母不順者<sup>不孝之罪邦有常刑故姑舉其次</sup><br/>兄弟相閱者<sup>兄曲弟直均罰兄直弟曲止罰弟曲直相半兄輕弟重</sup><br/>家道悖亂者<sup>夫妻歐罵黜其正妻(妻悍逆者減等)男女無別嫡妾倒置以妾爲妻以孽爲適適不撫孽孽反陵適</sup><br/>事涉官府有關鄕風者<br/>妄作威勢擾官行私者<br/>鄕長陵辱者<br/>守身嬬婦誘脅汚奸者<br/>已上極罰 上中下<br/>親戚不睦者<br/>正妻疏薄者<sup>棲有罪者減等</sup><br/>隣里不知者<br/>儕輩相毆罵者<br/>不顧廉恥汚壞士風者<br/>恃强陵弱侵奪起爭者<br/>無賴結黨多行狂悖者<br/>公私聚會是非官政者<br/>造言構虛陷人罪累者<br/>患難力及坐視不救者<br/>受官差仕憑公作弊者<br/>婚姻喪祭無故過時者<br/>不有執綱不從鄕令者<br/>不休鄕論反懷仇怨者<br/>執綱徇私冒入鄕參者<br/>舊官餞亭無故不參者<br/>己上中罰 上中下<br/>公會晚到者<br/>紊坐失儀者<br/>座中喧爭者<br/>空坐退便者<br/>無故先出者<br/>己上下罰 上中下<br/>元惡鄕吏 人吏民間作弊者 貢物使濯徵價物者 庶人陵萬士族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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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1해독문5번={{TagPerson|[[이황]]}}이 세운 약조는 이와 같이 극벌(極罰) 중벌(中罰) 하벌(下罰)의 3대 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을 통하여 과실을 징벌하는 조목을 열거하였음에 그쳤다. 그리고 각 항목을 상중하의 등급으로 분별하였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 치벌(治罰) 방법을 명기하지 않았음은 불충분한 점이 있으며, 끝으로 원악향리 등 네 조목을 부기하였으되, 이 또한 어떠한 징벌을 여(與)하는지 상세하지 않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TagPerson|[[이황]]}}의 약조는 그리 완비된 것이 아닌 것 같으나, 이것은 {{TagBook|[[퇴계선생문집]]}}에서 판서한 것이므로 {{TagPerson|[[이황]]}} 자신이 제정한 것보다 다소의 낙탈(落脫)이 있었음에서 유래하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앞서 든 ‘향립약조서’에도 <cite no="06">“或者以不先立敎而徒 用罰爲疑 是固然矣 然而孝悌忠信原於降衷秉彝之性 加之以國家設庠序以敎之 無非勸導之方 奚待於我輩別立條耶”</cite>라고 하였음과 같이, {{TagPerson|[[이황]]}}은 과실을 치벌하는 것만을 주안으로 하여 입조하고, 기타 입교예속(立敎禮俗) 등의 건(件)은 학교교육에서 권도할 것을 기하였다. 따라서 {{TagPerson|[[이황]]}}의 약조는 주자증손여씨향약과는 전연 관계가 없었고, 여씨향약의 4대강목인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중 특히 과실상규만을 중시하여 동방의 가족제도를 중심 삼아 향토에 적응하게 약조를 한 것 같다. 이 점은 제2절에서 논한 이{{TagPerson|[[태조]]}} 친제(親製)의 향헌조목과 상사(相似)하니, {{TagPerson|[[이황]]}}의 약조는 지나향약의 영향을 받은 바 그리 없고, 앞서 쓴 이{{TagPerson|[[태조]]}} 친제의 향헌조목과 같이 온전히 이 향토에 적응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순 조선적 향약으로 가족제도를 중심 하여 과실을 상규함으로써 국풍 내지 향풍을 미화 돈후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리하여 순 조선적 향약이 성립되었으나, {{TagPerson|[[이황]]}}의 연보에 의하면 <cite no="07">“先生草約 因事不果行”</cite>이라 하여 당시 이 약조가 실행되지 못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TagPerson|[[이황]]}}이 생존하던 당시의 일일 뿐이요, 그가 사거하여 그의 학통 문벌이 영남 각지에서 융성함을 따라 후세 이 약조는 여씨향약과 아울러 각지에서 채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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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2: (2)이율곡의 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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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2: (2)이율곡의 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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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번={{TagSpage|124-2}}李栗谷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李退溪와 아울러 李朝 五百年 間에 가장 高名한 學者이였었으나, 그도 李退溪와 같이 鄕約을 立定하였다. 李栗谷은 隱遁主義的 學者이든 李退溪보다는 좀 더 積極的이요 行政的 手腕을 가춘 政治家 兼 學者이였드니만치, 그의 立定한 鄕約도 質的으로나 量的으로나 李退溪의 그것보다는 훨신 卓越한 것이였다. 李栗谷은 後述하는 바와 같이 一生을 鄕約과 關聯하야 始終하였다 하여도 過言이 않일 만치 靑年 時代로부터 壯年 時代에 이르기까지 前後 數次 鄕約을 立定하야 鄕里敎導에 盡力하였으므로, 後世 鄕約이라 하면 곧 李栗谷을 聯想하게까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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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2번={{TagSpage|124-3}}李栗谷은 李退溪보다 三十五歲 年下의 後輩로서 항상 그를 先輩로 尊信하야, 그가 二十三歲이든 明宗 十三年 春에는{{TagPage|125-1}} 星州로부터 江陵으로 向하든 道中, 우정 當時 禮安 陶山에 退棲하든 李退溪를 訪謁하야 二日 間을 머물르면서 學說을 講論하였다 한다. 이 明宗 十三年은 李退溪가 禮安鄕約을 立定한 明宗 十一年과 僅 二年을 隔하니, 當時 兩人이 交結하든 사히에 李栗谷은 李退溪의 立定한 禮安鄕約을 得見하였거나, 이에 對한 談話를 得聞하였을 것이다. 萬若 나의 推測이 容許된다면 李栗谷의 鄕約에 對한 識見은 이때부터 더욱 豐富하여졌을 것이면, 그의 鄕約 立定의 動機로 實로 이때에 있었든 것이 않인가 한다. 이리하야 李栗谷은 明宗朝에는 坡州鄕約에 序文을 作하고, 宣祖朝에 入하야는 淸州 西原鄕約을 立定한 것을 비롯하야 海州鄕約 海州一鄕約束 等을 立定하야 鄕里 敎化에 貢獻하는 배 多大하였다. 以下 李栗谷이 關聯한 鄕約에 對하야 略說하고, 그의 立定의 代表的인 鄕約으로 西原鄕約과 海州一鄕約束을 列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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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3번={{TagSpage|125-2}}李栗谷이 最初로 鄕約과 關係하게 된 것은 그가 明宗朝에 坡州鄕約에 序文을 記한 일이니, 이 坡州鄕約은 明宗 十五年에 坡州郡守로 된 邊協이 呂氏鄕約을 模倣하야 立法한 것이였다. 當時 李栗谷이 撰한 {{TagRef|2}}「坡州鄕約序」<ref>栗谷先生全書 卷之十三, 坡州鄕約序.</ref>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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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4번={{TagSpage|125-3}}<blockquote no="51">坡山廁兩京之間 寔王化所先之地也 歲庚申春 官以聖旨布告郡邑 令修鄕約 是年冬某郡邊公協來守是邦 好古樂善 心與事會 乃頒令于境內 且屬一鄕父老使之敎導 禮義成歸于正 鄕有長者 議于衆而復于公曰 鄕約之設匪今伊始作 輟不恒有具無實 良由里各爲約 不統于州 有憝罔懲 因人廢法 若使鄕統其里里承于鄕 且以中正兼掌鄕議 則約行不泥 庶不中廢 公以爲然 於是採一鄕之論 做呂氏鄕約而立法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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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5번={{TagSpage|125-4}}이라고 있어 明宗 十五年 庚申 春에 國家로부터 鄕約의 修行을 命하매, 同年 冬에 本郡 郡守로 來任한 邊協이 奉命하야 境內에 鄕約을 頒布하는 一方, 鄕長들의 意見을 받어들려서 一鄕의 論을 主로 參酌하야 呂氏鄕約을 본떠 그 地方에 適應한 鄕約을 立定하였다 한다. 이로 보면 明宗 十五年 以後 坡州 地方에서도 鄕俗에 適應한 鄕約이 立定되여 施行케 된 것 같으{{TagPage|126-1}}나, 當時 邊協이 立定한 鄕約이 今日 傳하지 않으므로, 그의 詳細한 內容을 알 수 없음은 遺憾이다. 何如間 이 坡州鄕約은 前記한 明宗 十一年 立定의 禮安鄕約과 아울러 支那의 呂氏鄕約을 盲目的으로 運用하려 하는 데서 出生하든 여러가지의 矛盾을 없이하기 爲하야 이 國土에 適應한 鄕約을 세우고저 하는 地方的 要求에서 出生한 一種의 朝鮮的 鄕約으로 特히 注目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種類의 鄕約은 今日 文獻上으로는 傳하지 않으나 當時 鄕約을 理想的으로 施行하든 地方에서는 各其 地方的 事情에 應하야 立定되여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李栗谷은 이 鄕約이 坡州 境內에서 施行케 됨에 對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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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6번={{TagSpage|126-2}}<blockquote no="52">鳴呼此邦之得邊公一幸也 鄕有二三長者 承公之命 經始立約者二幸也 如是而坡人草偃于風樂爲良民 上勤下順者三幸也 有此三幸也而無老於文辭 可楊其美者惜乎</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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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7번={{TagSpage|126-3}}라고 評하야 坡州 郡民이 三幸을 得하였음을 稱讃하고, 끝으로 當時 二十五六歲에 不過하든 薄學한 自己가 序文을 草하게 된 것은 可惜한 일이다 하고 謙遜한 뜻을 表하였다. 이 坡州鄕約이 年代的으로 어느 해 完成되였는지는 明確하게 論定하기 어려우나, 邊協이 郡守로 赴任하든 明宗 十五年이나 그 翌年이였음은 疑心할 배 없으며, 따라서 李栗谷이 序文을 撰한 것도 이때를 前後하였을 것이다. 邊協은 國朝人物志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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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8번={{TagSpage|126-4}}<blockquote no="53">{{TagRef|3}}爲坡州牧時 訪栗谷李珥 講論周易啓蒙 頗有不得之妙<ref>國朝人物志 中 一七一頁, 邊協傳.</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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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9번={{TagSpage|126-5}}라고 記載한 바와 같이 坡州郡守 時에 公暇를 타서 자조 李栗谷을 訪問하야 學術을 講論하였다 하니, 李栗谷이 本 序文을 草하게 된 由來도 이러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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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0번={{TagSpage|126-6}}李栗谷은 그 후 明宗 十九年에 壯元及第로 文科 出身하야 一躍 戶曹 佐郞이라는 官職에 就任하게 된 것을 비롯하야 以{{TagPage|127-1}}後 數年 間 京職에 留任하다가, 一時 家事 及 身病으로 江陵 海州 坡州 等地에 退居한 後 宣祖 四年 六月에 淸州牧使로 轉任케 되였다. 李栗谷은 淸州牧使로 任地에 赴任하자 곳 當年에 鄕約을 撰하야 州民을 敎化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西原鄕約이다. 그가 이 鄕約을 立撰한 經路는 그의 著 西原鄕約 {{TagRef|4}}「立議」<ref>栗谷先生全書 卷之十六, 西原鄕約의 「立議」.</ref>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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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1번={{TagSpage|127-2}}<blockquote no="54">余以迂儒叨守大邑 不閑政務 固多疵累 惟是化民成俗之志惓惓不已 玆與鄕中父老商議導迪之力 鄕人皆以爲莫如申明鄕約 蓋此邑自李使君增榮始申鄕約 厥後李公遴因而損益之 規模可觀 第恨李公還朝 鄕人意沮 竟爲文具 余承二侯之躅 遂採前規 參以呂氏鄕約 煩者簡之 疎者密之 更爲條約 雖不敢自謂得中 而勸懲之術庶幾無大滲漏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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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2번={{TagSpage|127-3}}라고 있으므로써 大略 알 수 있다. 즉 李栗谷이 本 鄕約을 立定하게 된 것도 決코 그의 創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本 州에 來守한 李增榮 李遴 二侯의 遺業을 承하야 이것을 完成한 것에 지나지 않었다. 李增榮 李遴 兩人이 各各 어느 때 淸州牧使로 來任하였든지는 이제 明確히 考定키 어려우나, 李遴은 明宗 四年에 文科 登第하였다 하니, 그가 本 州에 來任한 것도 勿論 明宗 四年 以後의 일일 것이며, 나의 생각으로는 二公은 李栗谷이 赴任하기 即前의 本 州의 主宰이였었든 것 같다. 忠州 淸州를 中心으로 한 忠淸道 地方은 前節에서도 論한 바와 같이 中宗朝來鄕約이 比較的 잘 施行된 곳이였었으니, 이러한 地方에 來主한 그들이 地方 民心에 追從하야 鄕約을 申明하고 전한 것은 當然한 일이다. 이리하야 李增榮은 本州에 來任하자 鄕約의 施行을 命하고 그 뒤를 이어 爲宰한 李遴도 前者를 더욱 損益하야 新鄕約을 세워 實施코저 하였으나 還朝케 되여 未及하였다 한다. 當時 李增榮 李遴이 立定 實施한 鄕約이 어떠한 것이였든가는 오늘날 알 길이 없으나, 그것이 呂氏鄕約과는 多少 色彩를 달리 한 鄕土的 特色을 띤 鄕約이였음은 前記 「立議」文만으로도 大略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은 마츰내 李栗谷에 依하야 採用되여 西原鄕約이 되였든 것이다. 李栗谷은 이 兩人 制定의 前規를 主로{{TagPage|128-1}} 採用하고 副로 呂氏鄕約을 參酌하야 宣祖 四年 秋에 西原鄕約을 立定하였으나, 그의 이러한 行爲는 그 自身의 該博한 知識에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요, 一方 前記 坡州郡守 邊協 及 本淸州牧使 李增榮 李遴들의 行蹟을 模倣하야 地方官으로서의 任務를 가장 잘 履行코저 한 데서 由來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李栗谷은 宣祖 四年 六月에 淸州牧師로 赴任하자 二三月 後인 同年 秋에는 벌서 鄕約을 立하야 敎化에 盡力하였든 것이니, 그의 立定한 西原鄕約의 條目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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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3번={{TagSpage|128-2}}<blockquote no="55">{{ruby|西原鄕約|○○○○}}<br/>置都契長四人<br/>每掌內各置契長一人<sup>淸州二十五掌內也</sup><br/>童蒙訓誨一人<br/>色掌一人<sup>色掌別檢勿論良賤擇勤幹向善者爲之</sup><br/>每里各置別撿<br/>一置善惡籍 以昭勸戒 所謂善者 能孝父母 能友兄弟 能治家政<sup>內外齊整</sup> 能睦親故 能和鄰里 能以儒行持身 能以義訓子弟 能守廉介 能廣施惠 能勤學問 能謹租賦 能遵約令 能與人有信 能導人爲善 能解人爭鬪 能救人患難 能伸人寃枉 能辦人曲直之類 所謂惡者 不孝不慈不友不悌不敬師傳 夫婦無別 疎薄正妻 朋反無信 臨喪不哀 不敬祀事 崇信異端 輕蔑禮法 好作淫祀 族類不睦 鄰里不和 少陵長賤陵貴 縱酒賭博 好訟喜鬪 恃强凌弱 造言誣毀 不謹租賦 不畏法令 營私太甚 挾妓宴飮 怠惰廢事之類 有司色掌別撿掌其籍 隨所聞從實記之<br/>一四孟朔擇無故之日 掌內同約者皆會講信{{TagPage|129}}<br/>一里中有喪 色掌別撿奔告有司 同約之人各出米一升空石一葉賻之<sup>或貧竆不能賻者許以身役</sup> 氷葬時各出壯丁一各助之 士族役多則專軍給之 役少則折半給之 其餘不役人數收米各一升給之<br/>一凡干喪事 聚會時母得設杯盤飲酒 犯者以輕蔑禮法論<br/>一凡有家故不得已遷葬者 具由告官 若惑於風水得已不已及過期不葬者以崇信異端論<br/>一年壯處女貧甚過時未嫁者 報官給資裝 約中亦隨宜扶助<br/>一有遇闔家病患廢棄農事者 里中各出力耕耘以助<br/>一年三十以下非文非武者 皆令讀小學孝經童子習等書 不讀者論罰<br/>一民間凡有爭訟者 皆就契長有司辨其曲直 契長有司開諭曲者以止其訟 契長有司若不能獨斷 則通于約中 士類會議<sup>他員會者滿三員則論議可也</sup> 分釋開諭 曲直明著而曲者猶不止 則以非理好訟論<sup>重則即治其罪輕則書于惡籍</sup> 若目鄉中不能目斷 則聽其告官<br/>一笞四十以下則契長有司自斷 過此則報官<br/>一官吏官奴等周行閭里求請作弊者及勸農色掌等村民侵嘖者 一一摘發報官治罪 一草竊穿窬者 摘發治罪<br/>一無故屠牛者治罪 若有不得己之故 宰殺則具由告契長<br/>一無罪之人橫被誣枉 將受刑戮 則同約連各報官伸理<br/>一憚於修飾不欲參約 或違約作過終不悛改者 報官治罪後黜鄉<br/>一犯罪須即治者 不待四孟之會 隨宜論罰<br/>一凡報官之事 若非四孟之會 則通于約中諸員 他員滿三員 然後商議報官<sup>他員皆署契長特署有司與他列署</sup>{{TagPage|130-1}}<br/>一都契長一年一度會各面契長有同于一處議約法<br/>一契長有司若有憑公營私不明不正者 都契長報官駁改色掌別撿則各掌內契長有司糾察其失 甚者改之<br/>一都契長若有報官之事 則不時相通聚會<sup>四人內二人參會則報官</sup><br/>一各掌內契長與鄕所相通時用關子 通于都契長則用牒呈 都契長則不與鄉所通文字</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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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4번={{TagSpage|130-2}}李栗谷의 立定한 西原鄕約은 이와 같이 呂氏鄕約과는 大端히 條目의 內容을 달리한 것이였으니, 이 點은 前記한 太祖의 鄕憲條目과 李退溪의 禮安鄕約과 한가지로 共通되는 것이며, 支那의 模倣으로 始終하든 當時이면서도 朱子의 增損한 呂氏鄕約을 그대로 이따에서 實施함에는 各種의 支障이 生케 되여 이 나라 風俗에 適合한 鄕約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치 못하게 되였든 當時의 社會 狀態를 如實히 證明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鄕約에서 特히 注目되는 것은 鄕約의 役員을 契長 有司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呂氏鄕約의 約正 直月에 該當하는 것으로 明宗 初年에도 發論한 바와 같이 朝鮮에 呂氏鄕約을 施行하게 하는 대신에 契를 매지게 하자 하든 當時 社會의 實情에 適合하도록 鄕約을 세운 데서 由來한 것이라고 본다. 이 鄕約을 呂氏鄕約과 對照하여 보면 呂氏鄕約 中의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二綱目만을 主眼으로 하야 編成한 感이 있으니, 이것은 李退溪의 禮安鄕約과 한가지로 朝鮮鄕約의 特色이라 할 것이며, 禮安鄕約에서 一步를 進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鄕約에는 朱子增損呂氏鄕約의 「集會讀約之禮」를 본떠 「鄕會讀約法」을 規定하야 每年 四孟朔(正 四·七·十月)에 約員을 一席에 會合케 하야 鄕約의 趣旨를 開諭하는 順序 方法을 附記한 것이 있으나, 이곳에서는 支離하여지므로 詳記함을 省略한다. 다만 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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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5번={{TagSpage|130-3}}<blockquote no="56">色掌以善惡籍遍示諸位 諸位中或所聞各異 則更與商議歸一 覽畢有司起揖 爲善者出 庶人以下則色掌揖出 設別座于{{TagPage|131-1}}前 衆皆推獎且加勸勉 又招僞惡者 輕則切責使改 改行然後爻其籍 重則隨宜論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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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6번={{TagSpage|131-2}}이라고 하였음은 未詳하나마 善惡者를 賞罰하는 方法을 傳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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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7번={{TagSpage|131-3}}李栗谷은 이와 같이 宣祖 四年에 淸州牧使로 赴任하야 西原鄕約을 세워 鄕里敎導에 努力하였으나, 그 翌年 三月에는 病으로 辭任하고 入京하야, 以後 數年 間 京鄕의 顯職을 歷任하다가 中央에서 東西 朋黨의 軋轢이 점점 甚하여지자 이것을 調停코자 斡旋하야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매 드디여 모든 것을 淸算하고 宣祖 十年에 海州 石潭에 退居하였다. 李栗谷은 宣祖 十年 正月에 石潭에 도라가자 우선 宗族을 會하야 同居戒辭를 諺文으로 作하야 庶母 伯婢 及 諸兄 弟子姪 等이 同炊하는 사히에 직힐 準則을 세워, 一家族 內의 禮義凡節을 嚴히 하는 一方, 鄕人 有志와 商議하야 鄕約을 立定하야 州民敎導에 餘生을 받히였다. {{TagRef|5}}當時 李栗谷이 立定한 鄕約類는 海州鄕約을 비롯하야 社倉契約束 海州一鄕約束 等의 三種이다.<ref>栗谷先生全書 卷之十六, 海州鄕約, 社倉契約束, 海州一鄕約束.</ref> 그 中 海州鄕約은 序言 格인 立約凡例 十九條만이 地方的 事情을 加味한 것이고, 그 外의 本條目은 大部分이 朱子增損呂氏鄕約을 그대로 따다가 多少의 增補를 行한 것이며, 社倉契約束도 立約凡例 十五條와 社倉法 十一條만을 除하면 根本의 條目은 前者 同樣 呂氏鄕約을 根幹으로 하야 契의 根本精神인 患難相恤과 過失相規의 兩綱目을 더욱 詳細히 規定한 것이다. 그리고 海州鄕約은 海州邑을 中心으로 한 地方을 爲하야 세운 鄕約으로 그의 會集讀約 같은 것도 海州 邑內 文憲書院에서 行하였으며, 社倉契約束도 李栗谷의 妻家의 所在地인 海州 野頭村을 爲하야 立한 것으로 그의 講信儀(讀約會)는 臨時 帳幕 下에서 行하였다 하니, 이로 보면 이 두 鄕約은 모다 一部 局限地에만 施行코저 한 狹義의 鄕約이며, 따라서 兩者는 極히 近似한 點이 많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이 두 鄕約에 對하야 詳記함을 略하고, 좀 더 廣範圍의 鄕約인 海州一鄕約束을 代表的으로 例記하야 參考에 供코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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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8번={{TagSpage|132-1}}<blockquote no="57">{{ruby|海州一鄉約束|●●●●●●}}<br/>擇鄉中一人差鄉憲 又以二人爲副憲 凡一鄉公事鄉憲副憲主之 又以鄉所一員爲一鄉有司<sup>鄉憲非有故句遞副憲有司則周年相遞</sup> 凡出回文聚會事有司掌之<sup>稟于鄕憲</sup> 回文使鄉所使令分東西周示 勿令遲滯鄉所闕望服時<sup>鄕所限二周年乃遞非有實病則勿許辭免</sup> 必一鄉齊會 每員各薦一人<sup>若二員闕則各薦二人三員闕則各薦三人三十以上薦別監五十以上薦座首</sup> 書其名于小單子 下書擧者之名 著名<sup>六品以上朝官五十以上則只著不書名</sup> 皆呈于鄉憲<sup>限四寸勿薦若婚姻四寸 勿避若薦者衆所共知不合之人則論罰</sup> 鄕憲受之列書被薦者之名 以擧者多少爲次<sup>若一人而薦多則書于首其餘薦之多少爲次</sup> 旣畢置于座前 使一鄉會員從下就座前圈之<sup>勿圈于隱處圈時不許相避</sup> 以圈多者三人備三望若圈同則以薦者多少定其次 若二員闕而一時望報 則以圈多二人爲二首望 次者二人爲副望 末望準此若三員闕而一時若出則亦依此例 以圈多者三人爲三首望餘皆倣此 會議時雖有故不得往參 單子則不可不呈 春秋講信慶賀外 凡公事會集時 皆著白衣 雖有服人皆來參<br/>凡一鄉約束有四 一曰德業相勸 二曰德失相規 三曰禮俗相交 四曰患難相恤 凡善惡之表表著異者書于善籍惡籍 改過則爻之<br/>所謂{{ruby|德業相勸|●●●●}}者 一鄉之人相勉爲善 父慈子孝兄友弟恭 夫婦相敬 長幼有序 朋反有信 睦族交鄰 溫恭自持 愛人濟物 毋吝財利 毋好爭訟 租賦必謹 小民勿侵等事謂之德業 若有能行此件事表表卓異者則旣書于善籍 且報于官以致轉達于朝 其次則書于籍以俟進德<br/>所謂{{ruby|過失相規|●●●●}}者 鄉人有過失則同列隨所聞規戒之 不聽則告于鄉憲副憲共戒之 猶不悛則施罰 罰有四等 損徒者書于惡籍<br/>上罪損徒<sup>若改過則許設謝筵磐用五果以上湯用三色以上參會者滿十員以上則許解損</sup>{{TagPage|133}}<br/>次上罪齊馬首亦依解損例會客滿十員然後乃受<br/>右解損謝筵則主人自定期日 齊馬首則鄉憲有司定日 若鄉中先生有德位可尊之人及年七十以上員 則主人躬進以請其餘則出回文普請 主人奴自持回文 周告無有所漏<br/>中罰滿座面責<sup>面責時必喩以戒敕之言</sup><br/>下罰酒一盆別味一色春秋講信或無時會集時進呈 若有小過不至受罰者 則隨時論議罰以巨觥<br/>父不愛子使不得所者 兄弟不盡友悌之道者 溺愛姬妾疎薄無罪正妻者 干求鄉任潜行請託者 朋友族屬通姦淫女者 以少陵長至於詬辱者 非理好訟者 非毀一鄉公論者 營私圖利侵小民山僧者 造作虛言構陷同類者 鄰里親戚不睦者 留鄉所及監官憑公營私者 收糴時私受賄賂害及生民汚毀鄉風者 私用公儲之物者<br/>右用上罰<br/>會中縱酒失儀者 乘忿爭辨不受規戒者 凡有鄉會不能趂出回文後時者 持身不謹被人笑侮者 凡會集時託故不參者 無故不參且不具由呈單者 以私忿擅自毆打官人者 貢賦徭役公債拒不備納者 不能謹藏公債之物因致減縮者 以非義干請于吏輩者 非齋宮而私護山寺以占己利者 收糴時不能撿察多受不實之縠減縮斗數者<br/>右用以上罰<br/>會集時衣冠不如法者<sup>凡鄉會及城主前非朝官不得著驄笠 非堂上不得著貂皮耳掩凡會集時講信及致賀則皆著紅團領</sup> 不出賻紙及收合米者 凡有任之人不能察其所任者 不行鄉中約束者 乘忿罵詈同列者<br/>右用中罰{{TagPage|134}}<br/>會集時晚到者<sup>行禮坐定後追到者皆爲晚到</sup> 威儀不整喧笑自恣者 不告出入者 官門及上二衙前騎馬過者<br/>右用下罰<br/>右四罰之外 如有父母不孝 兄弟不和 淫穢亂倫 所行悖戾等事 及謀害土主者黜鄉 鄉人共棄絕之 若與黜鄉之人相通對 語者則損徒 鄉中之人雖不參鄉案 若有作悖理之人 侵漁小民山僧等 爲閭里之害則先以理曉譬之 使之改過 不聽則僉 議使鄉所告官治罪<br/>凡有過失行罰之後 猶不悛改依前自放者損徒 損徒之後終不悔過 反生忿怨詬辱一鄉者鄉<br/>凡有過失未行罰而又作過則從重行罰 罰同則加一等施罰<br/>凡年八十以上雖有過失無罰 七十以上有過失則皆減一等 而若面責則使子弟代受其責 無子弟則臨時論議笞奴<br/>所謂{{ruby|禮俗相交|●●●●}}者條列如左<br/>春秋講信時 各持壺果齊會公處 講約法有服人則不得參焉 若鄉憲有故不參則副憲只讀約法 中罰以下告于尊長僉議施罰 次上罰以上皆不得僉議 須(缺)更爲會集 以白衣齊會以決論議<br/>城主出官翌日鄉員一齊聚會 具長剌禮見再拜 遞去時各持壺果餞別于路上 亦具長剌 在官時有慶則賀 有喪則弔 用白團領皆具長剌齊會 歲時齊會具長剌例會于正月初三日<br/>右城主僉謁之禮 雖遭服之人須以白團領或玉色白帶來參<sup>賀禮則雖遭服人參則難著吉服</sup> 惟期大功未葬前緦小功未成服前不參<sup>喪在一家則雖緦必於葬後得參</sup><br/>衙童看慰事鄉所次知 行於三月之內{{TagPage|135}}<br/>鄉員有年滿七十歲者<sup>八十九十亦然</sup> 登科者筮仕者生員進士入格者 則各持壼果齊會公處賀之 有服者不參 雖有故不參亦備送壼果<br/>凡會集時有故不參者 必使奴子具由呈狀 不得回文內託故俱不得倩他人呈狀<sup>衆所共知抱宿疾不能參會者雖不呈單子不論罰</sup><br/>有子女婦事則出回文 各收合米一升 送助其費<br/>凡年滿七十以上者異爵者篤志學業者 只春秋講信 城主延餞外其他凡會集時 任意來參 雖不參無罰<br/>鄉吏輩於歲時 具長單子列書吏名 差記官周行 歲謁于鄉員年七十以上及鄉憲副憲異爵者與曾經鄉任之家 鄉所糾撿不出 歲後五日除前公狀<br/>所謂{{ruby|患難相恤|●●●●}}者條列如左<br/>鄉員四喪<sup>父母己妻</sup>初喪時 出回文各收合米一升送于其家 且送賻紙十卷 永葬時若當身喪則有司預先收合米一升 精備壼饌餅果 會葬所致奠後 祭饌饋役人<sup>米則勿論東西皆合而會奠則分東西往會</sup> 每於春秋講信時 各收常紙一卷 有司藏之 以爲賻紙<sup>年滿七十以上者 異爵時任鄕憲副憲鄕所勿出賻紙</sup> 若逢水火盜賊盡蕩家產者 則各收合米一升送于其家<br/>曾經鄉任者依前例 別賻其喪別定 有司掌之<br/>曾經鄉憲副憲者 依曾經鄉任例 別賻其喪<br/>鄉員以非罪將受刑戮者 僉議立庭呈單子救解之 如有民寃關重者 亦僉議立庭 有司掌出回文 鄉所專掌糾撿吏民風俗 若有鄉吏書員輩官屬汎濫用事作弊民間 及陵辱品官者 則告官治罪 可治罪而不治者 則鄉所有罪 若城主不信鄉所之言 而吏輩官屬之罪關重 則一鄉齊會立庭請罪{{TagPage|136}}<br/>可參鄉員者 於會集時薦擧通問可否<sup>依前例收合可否字</sup> 以爲可入然後許入<sup>若遇三不則不能入若衆所共知可入而非自己願入以公議勒入者則勿問可否</sup> 除後入禮<br/>凡收合米升致賻周急等事旣畢 有司須以回文及答狀 呈于衆會處<br/>凡春秋講信時及致賀時 雖用妓樂勿對舞挾對<br/>凡鄉吏書員官人等若品官前或無禮或陵辱 則品官具書單子送呈于鄉所 則所員會議罪犯輕重 笞罰後告于鄉憲 若所員棄置不論罪 則鄉會時所員致罰事<br/>凡留鄉所員辭狀及人吏等有關罪狀 報京在所及報牧官治罪 公事所員不敢自斷 稟于鄉憲 成公事報狀事<br/>鄉吏中選擇淸謹吏 置簿勸善 上戶長吏房必以淸謹者備望差定 若有他歧輕〿得者 勿許行公事<br/>凡鄉吏書員官人等善惡籍置簿冊 春秋講信時進呈事 鄉所由明檢擧事<br/>凡一鄉品官喪事時 收合賻米及賻紙等物專人輸送後 同宅答狀這這送于鄉憲 覽後卽還 推藏于鄉所 後日鄉會時進呈事<br/>鄉會讀約法<br/>凡遮日鋪陳器皿等皆鄉所掌之 有司尤宜早進排設 旣會之後鄉憲先就北壁南向立 座首以下及副憲就前北向行再拜禮鄉憲答拜<sup>若座首年滿七十則與滿七十者同時行禮</sup> 畢有司引七十以上尊者及異爵者皆就筵東向立 鄉憲以下西向立 相對再拜 訖皆就北壁 鄉憲居東 七十以上尊者異爵者居西東上 鄉所以下姑避筵外 於是鄉員以次俱進皆北向立<sup>員多則作重行</sup>再拜 鄉憲尊者異爵者答拜 訖鄉員皆就西壁轉作南行立定 鄉所副憲就東壁以齒序立 與鄉員一時再拜 訖依所立之位定坐 訖副憲抗聲讀約束 坐〿皆拱手整容以聽或相咨 講論旣訖 若有可議事則會議處置 副憲隨所聞善惡之事 告于鄉憲論議 鄉憲亦告所聞 北壁員有可告之事則招 曹司傳語以下員皆親自出位以告 議事畢乃設酌 一座無敢喧譁失儀 酌罷四座一時起立相向再拜後 肅揖{{TagPage|137-1}}以次皆出 鄉憲若不參會 則七十者異爵者先就北壁 鄕所副憲就前北向再拜 七十者異爵者答拜 餘儀上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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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원문19번={{TagSpage|137-2}}李栗谷이 立定한 海州一鄕約束은 以上과 같아였으니, 이 鄕約에서 特히 注目되는 것은 그의 鄕約이 靑年 時代의 그것(西原鄕約)보다는 훨신 進步하야 主로 呂氏鄕約의 四大 綱目을 根幹으로 하야 立條하였음이다. 이것은 海州鄕約 社倉契約束에서도 同樣으로 볼 수 있는 바이나, 이 鄕約은 前二者보다는 훨신 簡略化하야 盲目的으로 朱子增損呂氏鄕約의 細目을 襲用하려 하지 않고 呂氏鄕約의 四大 綱目을 採用하면서도 그의 各 條目은 그 地方 實情에 適應하도록 規定하고저 한 努力이 歷歷히 나타낫다. 이곳에서 이 鄕約의 各 條目을 累累히 檢討함은 避하고저 하나, 누구나 이 鄕約의 條目을 一瞥할 때 느끼는 바는 四大 綱領 中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二綱領에 關한 條目이 더욱 詳細히 規定되여 있음과, 特히 過失相規의 各 條目은 李退溪의 禮安鄕約에 본떠 上罰 次上罰 中罰 下罰에 分等하야 規定하였음이다. 이것은 累說한 바와 같이 鄕約 그 自體를 朝鮮化하려 하야 비록 그의 骨子는 呂氏鄕約에서 取한다 하드라도 實際 內容의 條目만은 이 땅 風俗 民情에 根據를 두고 規定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하는 現實的 必要感에서 由來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끝으로 이 鄕約에서 注目되는 것은 鄕約이 完全히 留鄕所와 結合하야 鄕風斜正의 任務를 더욱 忠實히 發揮하게 된 것이다. 己述한 바와 같이 留鄕所는 李朝 初期 以來 鄕風糾正의 唯一한 機關으로 鄕約의 先驅를 이른 것이였었으나, 이것이 이때에 이르러 鄕約을 受入하야 그의 細密한 條目을 遵用함으로써 鄕民敎導에 新紀元을 作하게 되였으니, 以上 留鄉所의 由來부터 縷說하여 온 理由도 明白하여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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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번={{TagPerson|[[이이]]}}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퇴계와 아울러 이조 5백년 간에 가장 고명(高名)한 학자였었으나, 그도 {{TagPerson|[[이황]]}}과 같이 향약을 입정(立定)하였다. {{TagPerson|[[이이]]}}는 은둔주의적 학자이던 {{TagPerson|[[이황]]}}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요 행정적 수완을 갖춘 정치가 겸 학자였던 만큼, 그의 입정한 향약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TagPerson|[[이황]]}}의 그것보다는 훨씬 탁월한 것이었다. {{TagPerson|[[이이]]}}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일생을 향약과 관련하여 시종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청년 시대로부터 장년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후 수차 향약을 입정하여 향리교도에 진력하였으므로, 후세 향약이라 하면 곧 {{TagPerson|[[이이]]}}를 연상하게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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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2번={{TagPerson|[[이이]]}}는 {{TagPerson|[[이황]]}}보다 35세 연하의 후배로서 항상 그를 선배로 존신(尊信)하여, 그가 23세이던 {{TagPerson|[[명종]]}} 13년 봄에는 성주로부터 강릉으로 향하든 도중, 우정 당시 예안 도산에 퇴서(退棲)하던 {{TagPerson|[[이황]]}}을 방알(訪謁)하여 2일 간을 머무르면서 학설을 강론하였다 한다. 이 {{TagPerson|[[명종]]}} 13년은 {{TagPerson|[[이황]]}}이 예안향약을 입정한 {{TagPerson|[[명종]]}} 11년과 거의 2년을 격(隔)하니, 당시 두 사람이 교결하던 사이에 {{TagPerson|[[이이]]}}는 {{TagPerson|[[이황]]}}의 입정한 예안향약을 득견하였거나, 이에 대한 담화를 득문하였을 것이다. 만약 나의 추측이 용허된다면 {{TagPerson|[[이이]]}}의 향약에 대한 식견은 이때부터 더욱 풍부하여졌을 것이면, 그의 향약 입정의 동기로 실로 이때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리하여 {{TagPerson|[[이이]]}}는 {{TagPerson|[[명종]]}}조(朝)에는 파주향약에 서문을 짓고, {{TagPerson|[[선조]]}}조(朝)에 들어서는 청주 서원향약을 입정한 것을 비롯하여 해주향약 해주일향약속 등을 입정하여 향리 교화에 공헌하는 바 다대하였다. 아래에서는 {{TagPerson|[[이이]]}}가 관련한 향약에 대하여 약설하고, 그의 입정의 대표적인 향약으로 서원향약과 해주일향약속을 열기(列記)하려 한다.
|목차4-2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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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3번={{TagPerson|[[이이]]}}가 최초로 향약과 관계하게 된 것은 그가 {{TagPerson|[[명종]]}}조(朝)에 파주향약에 서문을 쓴 일이니, 이 파주향약은 {{TagPerson|[[명종]]}} 15년에 파주군수로 된 {{TagPerson|[[변협]]}}(邊協)이 여씨향약을 모방하여 입법한 것이었다. 당시 {{TagPerson|[[이이]]}}가 지은 {{TagRefT|2}}「파주향약서」<ref group="a">{{TagBook|[[율곡선생전집]]}} 권지13, 파주향약서.</ref>중에는
|목차4-2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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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4번=<blockquote no="51">坡山廁兩京之間 寔王化所先之地也 歲庚申春 官以聖旨布告郡邑 令修鄕約 是年冬某郡邊公協來守是邦 好古樂善 心與事會 乃頒令于境內 且屬一鄕父老使之敎導 禮義成歸于正 鄕有長者 議于衆而復于公曰 鄕約之設匪今伊始作 輟不恒有具無實 良由里各爲約 不統于州 有憝罔懲 因人廢法 若使鄕統其里里承于鄕 且以中正兼掌鄕議 則約行不泥 庶不中廢 公以爲然 於是採一鄕之論 做呂氏鄕約而立法焉</blockquote>
|목차4-2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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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5번=이라고 있어 {{TagPerson|[[명종]]}} 15년 경신 봄에 국가로부터 향약의 수행을 명하니, 같은 해 겨울에 본군 군수로 내임한 {{TagPerson|[[변협]]}}이 봉명하여 경내에 향약을 반포하는 한편, 향장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일향의 논을 주로 참작하여 여씨향약을 본떠 그 지방에 적응한 향약을 입정하였다 한다. 이로 보면 {{TagPerson|[[명종]]}} 15년 이후 파주 지방에서도 향속에 적응한 향약이 입정되어 시행하게 된 것 같으나, 당시 {{TagPerson|[[변협]]}}이 입정한 향약이 오늘날 전하지 않으므로, 그의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음은 유감이다. 하여간 이 파주향약은 앞서 쓴 {{TagPerson|[[명종]]}} 11년 입정의 예안향약과 아울러 지나의 여씨향약을 맹목적으로 운용하려 하는 데서 출생하던 여러가지의 모순을 없애기 위하여 이 국토에 적응한 향약을 세우고자 하는 지방적 요구에서 출생한 일종의 조선적 향약으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향약은 오늘날 문헌상으로는 전하지 않으나 당시 향약을 이상적으로 시행하던 지방에서는 각기 지방적 사정에 응하여 입정되어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TagPerson|[[이이]]}}는 이 향약이 파주 경내에서 시행하게 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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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6번=<blockquote no="52">鳴呼此邦之得邊公一幸也 鄕有二三長者 承公之命 經始立約者二幸也 如是而坡人草偃于風樂爲良民 上勤下順者三幸也 有此三幸也而無老於文辭 可楊其美者惜乎</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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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7번=라고 평하여 파주 군민이 3행을 득하였음을 칭찬하고, 끝으로 당시 25, 6세에 불과하던 박학한 자기가 서문을 기초하게 된 것은 가석(可惜)한 일이다 하고 겸손한 뜻을 표하였다. 이 파주향약이 연대적으로 어느 해 완성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논정하기 어려우나, {{TagPerson|[[변협]]}}이 군수로 부임하던 {{TagPerson|[[명종]]}} 15년이나 그 익년이었음은 의심할 바 없으며, 따라서 이율곡이 서문을 지은 것도 이때를 전후하였을 것이다. {{TagPerson|[[변협]]}}은 {{TagBook|[[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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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8번=<blockquote no="53">{{TagRefT|3}}爲坡州牧時 訪栗谷李珥 講論周易啓蒙 頗有不得之妙<ref group="a">{{TagBook|[[국조인물지]]}} 중 171쪽, 변협전.</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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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9번=라고 기재한 바와 같이 파주군수 때에 공가(公暇)를 타서 자주 {{TagPerson|[[이이]]}}를 방문하여 학술을 강론하였다 하니, {{TagPerson|[[이이]]}}가 본 서문을 기초하게 된 유래도 이러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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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0번={{TagPerson|[[이이]]}}는 그 후 {{TagPerson|[[명종]]}} 19년에 장원급제로 문과 출신하여 일약 호조 좌랑이라는 관직에 취임하게 된 것을 비롯하여 이후 수년 간 경직(京職)에 유임하다가, 일시 가사 및 신병으로 강릉 해주 파주 등지에 퇴거한 후 {{TagPerson|[[선조]]}}4년 6월에 청주목사로 전임하게 되었다. {{TagPerson|[[이이]]}}는 청주목사로 임지에 부임하자 곧 당년에 향약을 지어 주민을 교화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서원향약이다. 그가 이 향약을 입찬(立撰)한 경로는 그의 저(著) 서원향약 {{TagRefT|4}}‘입의’<ref group="a">{{TagBook|[[율곡선생전집]]}} 권지16, 서원향약의 ‘입의’.</ref>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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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1번=<blockquote no="54">余以迂儒叨守大邑 不閑政務 固多疵累 惟是化民成俗之志惓惓不已 玆與鄕中父老商議導迪之力 鄕人皆以爲莫如申明鄕約 蓋此邑自李使君增榮始申鄕約 厥後李公遴因而損益之 規模可觀 第恨李公還朝 鄕人意沮 竟爲文具 余承二侯之躅 遂採前規 參以呂氏鄕約 煩者簡之 疎者密之 更爲條約 雖不敢自謂得中 而勸懲之術庶幾無大滲漏矣</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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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2번=라고 있음으로써 대략 알 수 있다. 즉 {{TagPerson|[[이이]]}}가 본 향약을 입정하게 된 것도 결코 그의 창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본 주에 내수(來守)한 {{TagPerson|[[이증영]]}} {{TagPerson|[[이린]]}} 두 후(侯)의 유업을 이어 이것을 완성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TagPerson|[[이증영]]}} {{TagPerson|[[이린]]}} 두 사람이 각각 어느 때 청주목사로 내임하였던지는 이제 명확히 고정하기 어려우나, {{TagPerson|[[이린]]}}은 {{TagPerson|[[명종]]}} 4년에 문과 등제하였다 하니, 그가 본 주에 내임한 것도 물론 {{TagPerson|[[명종]]}} 4년 이후의 일일 것이며, 나의 생각으로는 두 공(公)은 {{TagPerson|[[이이]]}}가 부임하기 직전의 본 주의 주재였었던 것 같다. 충주 청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방은 앞 절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중종조래향약이 비교적 잘 시행된 곳이었었으니, 이러한 지방에 내주(來主)한 그들이 지방 민심에 추종하여 향약을 신명하고 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리하여 {{TagPerson|[[이증영]]}}은 본 주에 내임하자 향약의 시행을 명하고 그 뒤를 이어 위재(爲宰)한 {{TagPerson|[[이린]]}}도 전자를 더욱 손익하여 새로운 향약을 세워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환조하게 되어 미급하였다 한다. 당시 {{TagPerson|[[이증영]]}} {{TagPerson|[[이린]]}}이 입정 실시한 향약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는 오늘날 알 길이 없으나, 그것이 여씨향약과는 다소 색채를 달리 한 향토적 특색을 띤 향약이었음은 앞서 쓴 ‘입의’ 글만으로도 대략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은 마침내 {{TagPerson|[[이이]]}}에 의하여 채용되어 서원향약이 되었던 것이다. {{TagPerson|[[이이]]}}는 이 두 사람 제정의 전규(前規)를 주로 채용하고 부(副)로 여씨향약을 참작하여 {{TagPerson|[[선조]]}} 4년 가을에 서원향약을 입정하였으나, 그의 이러한 행위는 그 자신의 해박한 지식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요, 한편 앞서 쓴 파주군수 {{TagPerson|[[변협]]}} 및 본 청주목사 {{TagPerson|[[이증영]]}} {{TagPerson|[[이린]]}}들의 행적을 모방하여 지방관으로서의 임무를 가장 잘 이행하고자 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TagPerson|[[이이]]}}는 {{TagPerson|[[선조]]}} 4년 6월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자 2, 3월 후인 같은 해 가을에는 벌써 향약을 세워 교화에 진력하였던 것이니, 그의 입정한 서원향약의 조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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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3번=<blockquote no="55">{{ruby|西原鄕約|○○○○}}<br/>置都契長四人<br/>每掌內各置契長一人<sup>淸州二十五掌內也</sup><br/>童蒙訓誨一人<br/>色掌一人<sup>色掌別檢물론良賤擇勤幹向善者爲之</sup><br/>每里各置別撿<br/>一置善惡籍 以昭勸戒 所謂善者 能孝父母 能友兄弟 能治家政<sup>內外齊整</sup> 能睦親故 能和鄰里 能以儒行持身 能以義訓子弟 能守廉介 能廣施惠 能勤學問 能謹租賦 能遵約令 能與人有信 能導人爲善 能解人爭鬪 能救人患難 能伸人寃枉 能辦人曲直之類 所謂惡者 不孝不慈不友不悌不敬師傳 夫婦無別 疎薄正妻 朋反無信 臨喪不哀 不敬祀事 崇信異端 輕蔑禮法 好作淫祀 族類不睦 鄰里不和 少陵長賤陵貴 縱酒賭博 好訟喜鬪 恃强凌弱 造言誣毀 不謹租賦 不畏法令 營私太甚 挾妓宴飮 怠惰廢事之類 有司色掌別撿掌其籍 隨所聞從實記之<br/>一四孟朔擇無故之日 掌內同約者皆會講信<br/>一里中有喪 色掌別撿奔告有司 同約之人各出米一升空石一葉賻之<sup>或貧竆不能賻者許以身役</sup> 氷葬時各出壯丁一各助之 士族役多則專軍給之 役少則折半給之 其餘不役人數收米各一升給之<br/>一凡干喪事 聚會時母得設杯盤飲酒 犯者以輕蔑禮法論<br/>一凡有家故不得已遷葬者 具由告官 若惑於風水得已不已及過期不葬者以崇信異端論<br/>一年壯處女貧甚過時未嫁者 報官給資裝 約中亦隨宜扶助<br/>一有遇闔家病患廢棄農事者 里中各出力耕耘以助<br/>一年三十以下非文非武者 皆令讀小學孝經童子習等書 不讀者論罰<br/>一民間凡有爭訟者 皆就契長有司辨其曲直 契長有司開諭曲者以止其訟 契長有司若不能獨斷 則通于約中 士類會議<sup>他員會者滿三員則論議可也</sup> 分釋開諭 曲直明著而曲者猶不止 則以非理好訟論<sup>重則即治其罪輕則書于惡籍</sup> 若目鄉中不能目斷 則聽其告官<br/>一笞四十以下則契長有司自斷 過此則報官<br/>一官吏官奴等周行閭里求請作弊者及勸農色掌等村民侵嘖者 一一摘發報官治罪 一草竊穿窬者 摘發治罪<br/>一無故屠牛者治罪 若有不得己之故 宰殺則具由告契長<br/>一無罪之人橫被誣枉 將受刑戮 則同約連各報官伸理<br/>一憚於修飾不欲參約 或違約作過終不悛改者 報官治罪後黜鄉<br/>一犯罪須即治者 不待四孟之會 隨宜論罰<br/>一凡報官之事 若非四孟之會 則通于約中諸員 他員滿三員 然後商議報官<sup>他員皆署契長特署有司與他列署</sup><br/>一都契長一年一度會各面契長有同于一處議約法<br/>一契長有司若有憑公營私不明不正者 都契長報官駁改色掌別撿則各掌內契長有司糾察其失 甚者改之<br/>一都契長若有報官之事 則不時相通聚會<sup>四人內二人參會則報官</sup><br/>一各掌內契長與鄕所相通時用關子 通于都契長則用牒呈 都契長則不與鄉所通文字</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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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4번={{TagPerson|[[이이]]}}의 입정한 서원향약은 이와 같이 여씨향약과는 대단히 조목의 내용을 달리한 것이었으니, 이 점은 앞서 쓴 {{TagPerson|[[태조]]}}의 향헌조목과 {{TagPerson|[[이황]]}}의 예안향약과 한가지로 공통되는 것이며, 지나의 모방으로 시종하던 당시이면서도 주자의 증손한 여씨향약을 그대로 이 땅에서 실시함에는 각종의 지장이 생기게 되어 이 나라 풍속에 적합한 향약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치 못하게 되었던 당시의 사회 상태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향약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약의 역원을 계장 유사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여씨향약의 약정 직월에 해당하는 것으로 {{TagPerson|[[명종]]}} 초년에도 발론한 바와 같이 조선에 여씨향약을 시행하게 하는 대신에 계를 맺게 하자 하던 당시 사회의 실정에 적합하도록 향약을 세운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이 향약을 여씨향약과 대조하여 보면 여씨향약 중의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두 강목만을 주안으로 하여 편성한 감이 있으니, 이것은 {{TagPerson|[[이황]]}}의 예안향약과 한가지로 조선향약의 특색이라 할 것이며, 예안향약에서 한걸음을 나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향약에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집회독약지례’를 본떠 ‘향회독약법’을 규정하여 매년 사맹삭(정 4·7·10월)에 약원(約員)을 한 자리에 회합하게 하여 향약의 취지를 개유(開諭)하는 순서 방법을 부기한 것이 있으나, 이곳에서는 지리하여지므로 상기(詳記)함을 생략한다. 다만 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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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5번=<blockquote no="56">色掌以善惡籍遍示諸位 諸位中或所聞各異 則更與商議歸一 覽畢有司起揖 爲善者出 庶人以下則色掌揖出 設別座于前 衆皆推獎且加勸勉 又招僞惡者 輕則切責使改 改行然後爻其籍 重則隨宜論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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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6번=이라고 하였음은 미상하나마 선악자를 상벌하는 방법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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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7번={{TagPerson|[[이이]]}}는 이와 같이 {{TagPerson|[[선조]]}} 4년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서원향약을 세워 향리교도에 노력하였으나, 그 익년 3월에는 병으로 사임하고 입경하여, 이후 수년 간 경향(京鄕)의 현직(顯職)을 역임하다가 중앙에서 동서 붕당의 알력이 점점 심해지자 이것을 조정하고자 알선하여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니 드디어 모든 것을 청산하고 {{TagPerson|[[선조]]}} 10년에 해주 석담에 퇴거하였다. {{TagPerson|[[이이]]}}는 {{TagPerson|[[선조]]}} 10년 정월에 석담에 돌아가자 우선 종족(宗族)을 모아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언문으로 지어 서모 백비 및 제형 제자질 등이 동취(同炊)하는 사이에 지킬 준칙을 세워, 일가족 내의 예의범절을 엄히 하는 한편, 향인 유지와 상의하여 향약을 입정하여 주민교도에 여생을 바쳤다. {{TagRefT|5}}당시 {{TagPerson|[[이이]]}}가 입정한 향약류(類)는 해주향약을 비롯하여 사창계약속 해주일향약속 등의 3종이다.<ref group="a">{{TagBook|[[율곡선생전집]]}} 권지16, 해주향약, 사창계약속, 해주일향약속.</ref> 그 중 해주향약은 서언 격인 입향범례 19조만이 지방적 사정을 가미한 것이고, 그 외의 본 조목은 대부분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그대로 따다가 다소의 증보를 행한 것이며, 사창계약속도 입약범례 15조와 사창법 11조만을 제하면 근본의 조목은 전자 동양(同樣) 여씨향약을 근간으로 하여 계의 근본정신인 환난상휼과 과실상규의 두 강목을 더욱 상세히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해주향약은 해주읍을 중심으로 한 지방을 위하여 세운 향약으로 그의 회집독약 같은 것도 해주 읍내 문헌서원에서 행하였으며, 사창계약속도 {{TagPerson|[[이이]]}}의 처가의 소재지인 해주 야두촌(野頭村)을 위하여 세운 것으로 그의 강신의(독약회)는 임시 장막 아래에서 행하였다 하니, 이로 보면 이 두 향약은 모두 일부 국한지에만 시행하고자 한 협의의 향약이며, 따라서 양자는 극히 근사한 점이 많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이 두 향약에 대하여 상기(詳記)함을 생략하고, 좀 더 광범위의 향약인 해주일향약속을 대표적으로 예기하여 참고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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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8번=<blockquote no="57">{{ruby|海州一鄉約束|●●●●●●}}<br/>擇鄉中一人差鄉憲 又以二人爲副憲 凡一鄉公事鄉憲副憲主之 又以鄉所一員爲一鄉有司<sup>鄉憲非有故句遞副憲有司則周年相遞</sup> 凡出回文聚會事有司掌之<sup>稟于鄕憲</sup> 回文使鄉所使令分東西周示 勿令遲滯鄉所闕望服時<sup>鄕所限二周年乃遞非有實病則勿許辭免</sup> 必一鄉齊會 每員各薦一人<sup>若二員闕則各薦二人三員闕則各薦三人三十以上薦別監五十以上薦座首</sup> 書其名于小單子 下書擧者之名 著名<sup>六品以上朝官五十以上則只著不書名</sup> 皆呈于鄉憲<sup>限四寸勿薦若婚姻四寸 勿避若薦者衆所共知不合之人則論罰</sup> 鄕憲受之列書被薦者之名 以擧者多少爲次<sup>若一人而薦多則書于首其餘薦之多少爲次</sup> 旣畢置于座前 使一鄉會員從下就座前圈之<sup>勿圈于隱處圈時不許相避</sup> 以圈多者三人備三望若圈同則以薦者多少定其次 若二員闕而一時望報 則以圈多二人爲二首望 次者二人爲副望 末望準此若三員闕而一時若出則亦依此例 以圈多者三人爲三首望餘皆倣此 會議時雖有故不得往參 單子則不可不呈 春秋講信慶賀外 凡公事會集時 皆著白衣 雖有服人皆來參<br/>凡一鄉約束有四 一曰德業相勸 二曰德失相規 三曰禮俗相交 四曰患難相恤 凡善惡之表表著異者書于善籍惡籍 改過則爻之<br/>所謂{{ruby|德業相勸|●●●●}}者 一鄉之人相勉爲善 父慈子孝兄友弟恭 夫婦相敬 長幼有序 朋反有信 睦族交鄰 溫恭自持 愛人濟物 毋吝財利 毋好爭訟 租賦必謹 小民勿侵等事謂之德業 若有能行此件事表表卓異者則旣書于善籍 且報于官以致轉達于朝 其次則書于籍以俟進德<br/>所謂{{ruby|過失相規|●●●●}}者 鄉人有過失則同列隨所聞規戒之 不聽則告于鄉憲副憲共戒之 猶不悛則施罰 罰有四等 損徒者書于惡籍<br/>上罪損徒<sup>若改過則許設謝筵磐用五果以上湯用三色以上參會者滿十員以上則許解損</sup><br/>次上罪齊馬首亦依解損例會客滿十員然後乃受<br/>右解損謝筵則主人自定期日 齊馬首則鄉憲有司定日 若鄉中先生有德位可尊之人及年七十以上員 則主人躬進以請其餘則出回文普請 主人奴自持回文 周告無有所漏<br/>中罰滿座面責<sup>面責時必喩以戒敕之言</sup><br/>下罰酒一盆別味一色春秋講信或無時會集時進呈 若有小過不至受罰者 則隨時論議罰以巨觥<br/>父不愛子使不得所者 兄弟不盡友悌之道者 溺愛姬妾疎薄無罪正妻者 干求鄉任潜行請託者 朋友族屬通姦淫女者 以少陵長至於詬辱者 非理好訟者 非毀一鄉公論者 營私圖利侵小民山僧者 造作虛言構陷同類者 鄰里親戚不睦者 留鄉所及監官憑公營私者 收糴時私受賄賂害及生民汚毀鄉風者 私用公儲之物者<br/>右用上罰<br/>會中縱酒失儀者 乘忿爭辨不受規戒者 凡有鄉會不能趂出回文後時者 持身不謹被人笑侮者 凡會集時託故不參者 無故不參且不具由呈單者 以私忿擅自毆打官人者 貢賦徭役公債拒不備納者 不能謹藏公債之物因致減縮者 以非義干請于吏輩者 非齋宮而私護山寺以占己利者 收糴時不能撿察多受不實之縠減縮斗數者<br/>右用以上罰<br/>會集時衣冠不如法者<sup>凡鄉會及城主前非朝官不得著驄笠 非堂上不得著貂皮耳掩凡會集時講信及致賀則皆著紅團領</sup> 不出賻紙及收合米者 凡有任之人不能察其所任者 不行鄉中約束者 乘忿罵詈同列者<br/>右用中罰<br/>會集時晚到者<sup>行禮坐定後追到者皆爲晚到</sup> 威儀不整喧笑自恣者 不告出入者 官門及上二衙前騎馬過者<br/>右用下罰<br/>右四罰之外 如有父母不孝 兄弟不和 淫穢亂倫 所行悖戾等事 及謀害土主者黜鄉 鄉人共棄絕之 若與黜鄉之人相通對 語者則損徒 鄉中之人雖不參鄉案 若有作悖理之人 侵漁小民山僧等 爲閭里之害則先以理曉譬之 使之改過 不聽則僉 議使鄉所告官治罪<br/>凡有過失行罰之後 猶不悛改依前自放者損徒 損徒之後終不悔過 反生忿怨詬辱一鄉者鄉<br/>凡有過失未行罰而又作過則從重行罰 罰同則加一等施罰<br/>凡年八十以上雖有過失無罰 七十以上有過失則皆減一等 而若面責則使子弟代受其責 無子弟則臨時論議笞奴<br/>所謂{{ruby|禮俗相交|●●●●}}者條列如左<br/>春秋講信時 各持壺果齊會公處 講約法有服人則不得參焉 若鄉憲有故不參則副憲只讀約法 中罰以下告于尊長僉議施罰 次上罰以上皆不得僉議 須(缺)更爲會集 以白衣齊會以決論議<br/>城主出官翌日鄉員一齊聚會 具長剌禮見再拜 遞去時各持壺果餞別于路上 亦具長剌 在官時有慶則賀 有喪則弔 用白團領皆具長剌齊會 歲時齊會具長剌例會于正月初三日<br/>右城主僉謁之禮 雖遭服之人須以白團領或玉色白帶來參<sup>賀禮則雖遭服人參則難著吉服</sup> 惟期大功未葬前緦小功未成服前不參<sup>喪在一家則雖緦必於葬後得參</sup><br/>衙童看慰事鄉所次知 行於三月之內<br/>鄉員有年滿七十歲者<sup>八十九十亦然</sup> 登科者筮仕者生員進士入格者 則各持壼果齊會公處賀之 有服者不參 雖有故不參亦備送壼果<br/>凡會集時有故不參者 必使奴子具由呈狀 不得回文內託故俱不得倩他人呈狀<sup>衆所共知抱宿疾不能參會者雖不呈單子不論罰</sup><br/>有子女婦事則出回文 各收合米一升 送助其費<br/>凡年滿七十以上者異爵者篤志學業者 只春秋講信 城主延餞外其他凡會集時 任意來參 雖不參無罰<br/>鄉吏輩於歲時 具長單子列書吏名 差記官周行 歲謁于鄉員年七十以上及鄉憲副憲異爵者與曾經鄉任之家 鄉所糾撿不出 歲後五日除前公狀<br/>所謂{{ruby|患難相恤|●●●●}}者條列如左<br/>鄉員四喪<sup>父母己妻</sup>初喪時 出回文各收合米一升送于其家 且送賻紙十卷 永葬時若當身喪則有司預先收合米一升 精備壼饌餅果 會葬所致奠後 祭饌饋役人<sup>米則물론東西皆合而會奠則分東西往會</sup> 每於春秋講信時 各收常紙一卷 有司藏之 以爲賻紙<sup>年滿七十以上者 異爵時任鄕憲副憲鄕所勿出賻紙</sup> 若逢水火盜賊盡蕩家產者 則各收合米一升送于其家<br/>曾經鄉任者依前例 別賻其喪別定 有司掌之<br/>曾經鄉憲副憲者 依曾經鄉任例 別賻其喪<br/>鄉員以非罪將受刑戮者 僉議立庭呈單子救解之 如有民寃關重者 亦僉議立庭 有司掌出回文 鄉所專掌糾撿吏民風俗 若有鄉吏書員輩官屬汎濫用事作弊民間 及陵辱品官者 則告官治罪 可治罪而不治者 則鄉所有罪 若城主不信鄉所之言 而吏輩官屬之罪關重 則一鄉齊會立庭請罪<br/>可參鄉員者 於會集時薦擧通問可否<sup>依前例收合可否字</sup> 以爲可入然後許入<sup>若遇三不則不能入若衆所共知可入而非自己願入以公議勒入者則勿問可否</sup> 除後入禮<br/>凡收合米升致賻周急等事旣畢 有司須以回文及答狀 呈于衆會處<br/>凡春秋講信時及致賀時 雖用妓樂勿對舞挾對<br/>凡鄉吏書員官人等若品官前或無禮或陵辱 則品官具書單子送呈于鄉所 則所員會議罪犯輕重 笞罰後告于鄉憲 若所員棄置不論罪 則鄉會時所員致罰事<br/>凡留鄉所員辭狀及人吏等有關罪狀 報京在所及報牧官治罪 公事所員不敢自斷 稟于鄉憲 成公事報狀事<br/>鄉吏中選擇淸謹吏 置簿勸善 上戶長吏房必以淸謹者備望差定 若有他歧輕〿得者 勿許行公事<br/>凡鄉吏書員官人等善惡籍置簿冊 春秋講信時進呈事 鄉所由明檢擧事<br/>凡一鄉品官喪事時 收合賻米及賻紙等物專人輸送後 同宅答狀這這送于鄉憲 覽後卽還 推藏于鄉所 後日鄉會時進呈事<br/>鄉會讀約法<br/>凡遮日鋪陳器皿等皆鄉所掌之 有司尤宜早進排設 旣會之後鄉憲先就北壁南向立 座首以下及副憲就前北向行再拜禮鄉憲答拜<sup>若座首年滿七十則與滿七十者同時行禮</sup> 畢有司引七十以上尊者及異爵者皆就筵東向立 鄉憲以下西向立 相對再拜 訖皆就北壁 鄉憲居東 七十以上尊者異爵者居西東上 鄉所以下姑避筵外 於是鄉員以次俱進皆北向立<sup>員多則作重行</sup>再拜 鄉憲尊者異爵者答拜 訖鄉員皆就西壁轉作南行立定 鄉所副憲就東壁以齒序立 與鄉員一時再拜 訖依所立之位定坐 訖副憲抗聲讀約束 坐〿皆拱手整容以聽或相咨 講論旣訖 若有可議事則會議處置 副憲隨所聞善惡之事 告于鄉憲論議 鄉憲亦告所聞 北壁員有可告之事則招 曹司傳語以下員皆親自出位以告 議事畢乃設酌 一座無敢喧譁失儀 酌罷四座一時起立相向再拜後 肅揖以次皆出 鄉憲若不參會 則七十者異爵者先就北壁 鄕所副憲就前北向再拜 七十者異爵者答拜 餘儀上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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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2해독문19번={{TagPerson|[[이이]]}}가 입정한 해주일향약속은 이상과 같았으니, 이 향약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의 향약이 청년 시대의 그것(서원향약)보다는 훨씬 진보하여 주로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근간으로 하여 입조(立條)하였음이다. 이것은 해주향약 사창계약속에서도 동양(同樣)으로 볼 수 있는 바이나, 이 향약은 앞선 두 자보다는 훨씬 간략화하여 맹목적으로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세목을 습용(襲用)하려 하지 않고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채용하면서도 그의 각 조목은 그 지방 실정에 적응하도록 규정하고자 한 노력이 역력히 나타났다. 이곳에서 이 향약의 각 조목을 누누히 검토함은 피하고자 하나, 누구나 이 향약의 조목을 일별할 때 느끼는 바는 4대 강령 중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두 강령에 관한 조목이 더욱 상세히 규정되어 있음과, 특히 과실상규의 각 조목은 이퇴계의 예안향약에 본떠 상벌(上罰) 차상벌(次上罰) 중벌(中罰) 하벌(下罰)에 분등하여 규정하였음이다. 이것은 거듭 논한 바와 같이 향약 그 자체를 조선화하려 하여 비록 그의 골자는 여씨향약에서 취한다 하더라도 실제 내용의 조목만은 이 땅 풍속 민정에 근거를 두고 규정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하는 현실적 필요감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끝으로 이 향약에서 주목되는 것은 향약이 완전히 유향소와 결합하여 향풍규정의 임무를 더욱 충실히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유향소는 이조 초기 이래 향풍규정의 유일한 기관으로 향약의 선구를 이른 것이었었으나, 이것이 이때에 이르러 향약을 수입하여 그의 세밀한 조목을 준용함으로써 향민교도에 신기원을 짓게 되었으니, 이상 유향소의 유래부터 누설(縷說)하여 온 이유도 명백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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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번={{TagSpage|138-1}}以上 粗雜하나마 朝鮮에 있어서 鄕約이 어떠한 經路를 밟어 成立하게 되였는가 하는 것을 더듬어 온 셈이다. 要컨대 朝鮮에서 鄕約이 成立하게 된 것은 李朝 初期 以來 實施하여 온 太祖親製의 鄕憲條目 及 留鄕所에 依한 地方自治 等이 主動力이 되여, 이에 支那로부터 傳來한 呂氏鄕約이 큰 刺戟을 주어, 마츰내 從來 內部的으로만 흐르고 있든 民間自治의 精神을 鄕約이라는 形式으로 表面化하야 民衆으로 하여금 容易히 追從케 한 데서 結果하였다. 이리하야 李退溪의 禮安鄕約을 비롯하야 坡州鄕約 西原鄕約 海州鄕約 社倉契約束 海州一鄕約束 等의 鄕約이 接踵하야 出現케 되였든 것이나 이 各地의 鄉約을 通하야 一貫한 精神은 비록 그 中 一部는 呂氏鄕約의 骨子를 形式上으로라도 採用하였다 하드라도 實質上 內容에 있어서는 當時 朝鮮 實社會의 가장 緊急한 事項을 條目化하고저 한 것이다. 이 點으로 보아 이 各地의 鄕約은 李朝 中期 當時의 朝鮮 社會 狀態를 그려낸 縮圖라고도 볼 수 있다.
|목차5원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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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번={{TagSpage|138-2}}그러면 이와 같이 成立한 各地의 鄕約은 以後 朝鮮 社會에 어떠한 影響을 주었든가. 이에 對하야는 아즉 充分한 調査를 行하지 못하였으므로 詳論키를 避하나, 何如間 朝鮮 社會에서 가장 卓越한 儒宗으로 崇敬하든 李退溪 李栗谷 兩賢의 製定한{{TagPage|139-1}} 것이니 만치 그의 後世에 끼친 影響도 偉大하였었다. 簡單히 例를 들면 李退溪의 鄕約은 後世 嶺南 儒林界에서 널리 遵奉되여 豐山 金氏 河回 柳氏 尙州 柳氏 同 鄭氏 晋州 林氏 等 門中에서 이 鄕約을 施行하고, 特히 英祖朝에는 退溪 學統의 嫡傳인 崔興遠(百弗庵)에 依하야 達成郡 夫仁洞에서 洞約이 實施되자, 이 洞約에서는 呂氏鄕約과 아울러 이 退溪의 鄕約을 採用하야 四大 綱目 中 過失相規는 오로지 退溪鄕約을 適用하였다 한다. 李栗谷의 鄕約은 當初부터 敎化上 큰 効果를 거두게 되여 그의 年譜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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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번={{TagSpage|139-2}}<blockquote no="58">{{TagRef|1}}海俗初甚渝薄 自是以後文風不變禮俗成習 雖邨裏愚氓亦知感化 或有棄妻數十年好合如初者 又有庶人老者喪弟服衰哀 痛過常問之 皆曰此李監司之敎也<ref>朝鮮陞廡儒賢年表 所載 栗谷先生 年譜.</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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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번={{TagSpage|139-3}}라고 하였음과 같으나, 그 後 그의 鄕約도 黃海道 地方은 勿論 嶺南 各地 儒林界에서 널리 採用하게 되였다 한다. 特히 忠淸道 地方에서는 栗谷의 學閥이 隆盛하든 곳이니 만치 그의 鄕約이 널리 施行케 되여, 肅宗朝의 名臣 宋時烈도 晚年에는 淸州 華陽洞에 退居하야 栗谷鄕約에 模倣하야 鄕約을 實施하였다 하며, 其他 懷德 宋氏 魯城 尹氏 連山 金氏 柿田 成氏 等 門中에서도 宋時烈의 指揮로 鄕約을 行하였다 한다. 그리고 英祖 二十三年에는 忠淸道 報恩郡守 金弘得이 郡內에 鄕約을 施行케 하고저 「鄕約條目」을 立定 頒布하였는대, 이 鄕約 條目도 그 約文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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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번={{TagSpage|139-4}}<blockquote no="59">右一依栗谷先生西原鄉約 而其間叅以邑風略加損益 此下又以栗谷海州及社倉用罰等法抄錄之 以爲施罰之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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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번={{TagSpage|139-5}}라고 있는 바와 같이 全혀 栗谷의 鄕約을 運用하였든 것이다. 이리하야 朝鮮의 鄕約은 肅宗 以後 英祖 正祖 時에 이르러 政府의 獎勵 及 地方人士의 率先躬行에 依하야 地方的으로나마 잘 施行되게 되였으나, 李朝 末葉에 이르러 政治的 紛亂을 거듭함에 따라 沈滯하기 시작하야 甲午改革 以後 表面上 潛影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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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번={{TagSpage|140-1}}끝으로 李朝 末葉에 實際로 施行하든 鄕約(洞約)의 一二의 例를 列擧하야 鄕約의 末路를 推察코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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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8번={{TagSpage|140-2}}<blockquote no="60">{{ruby|鄉約節目|○○○○}}<sup>施行 處及年代가 未詳하나 筆者의 考證으로는 西曆 一八五〇年代에 淸州 地方에서 施行하든 것인가 한다. 筆者 所藏이다</sup><br/>一德業相勸<br/>孝父母敬長上愛兄弟敎子孫睦親黨和隣里 正家以禮 交友有信 立心必忠直 行已必恭謹 見善必行 開過必改 又如讀 書治田好禮樂射御書數 勤工商 畏法令 謹租賦之類<br/>右件德業同約之人各自進修 互相勸勉 會集之日 相與推擧其能者書于籍以勵其不能者<br/>一過失相規<br/>不順父母<sup>不孝之罪邦有常刑此擧其次</sup> 不友兄弟 家道乖亂<sup>夫妻毆罵男女無別嫡庶無分之別</sup> 親戚不睦 隣里不和 侮慢齒德 詬罵儕輩 侵暴孤寡 喪葬不謹 祭祀不敬 又如縱酒 雜技喜鬪好訟 言語不實 誣毀他人 輕蔑禮法 行已無恥 不畏法令 妄交匪人 崇信異端 知過不改之類<br/>右件過失同約之人各自省察 互相規戒 小則規之 大則衆戒之 不聽則會集之日直月以告于約正 約正以義理誨諭之 謝過請改則書于籍以俟其改 爭辨不服與不能改者論罰 輕則黜座 重則黜籍<br/>凡有主事廢忌者 公會後時者 紊座喧譁者 空座退便者並有責罰<br/>一禮俗相交<br/>尊幼輩行 造請揖拜 請召送迎 慶弔贈遺之類<br/>小節目追後磨練{{TagPage|141}}<br/>一患難相恤<br/>患難相恤之事曰水火<sup>近則遣人及時救之甚則親往多率人救之</sup> 曰盜賊<sup>自各洞各里五家作統統首則勿拘班常擇勤實人主之五家內若有盜賊統首摘發以告洞約長約治之甚者逐黜境外有屈强不服者洞約長以告都約所甚者施以一律大者十一面合力逐捕</sup> 曰疾病<sup>小則 遣人問之大則隣里扞力以助其耕耘</sup> 曰死喪<sup>助力幹辨賻賵借貸</sup> 曰孤弱<sup>孤遺無依者擇其親屬之忠幹者爲之區處或擇人敎之爲求婚婚貧者協力濟之</sup> 日誣枉<sup>有爲人誣枉不能自伸者勢可以聞於官府則爲言之可以救解則以解之 曰貧乏</sup><br/>右患難相恤之事 凡有當救恤者其家告于約正 急則約中之近者爲之告約正 令直月偏告且爲之糾集而程督之<br/>一每歲四孟朔初旬日 鄉約正各於其鄉會集講約<br/>一每歲春秋都副約正會鄉約正以下諸員講于學中<br/>一都約正有故則副約正以下亦可會集行禮<br/>一流寓士夫居其地亦許入約<br/>一凡在士列而憚於檢束拒不入約者告官鄉<br/>未盡條件追後磨練<br/>{{ruby|淸風瑞雲洞洞楔座目|○○○○○○○○○}}<sup>(今忠北堤川郡, 光緒十一年十月作, 筆者所藏)</sup><br/>節目<br/>一楔日每年以十月十六日完定事<br/>禮俗相規<br/>一若有不孝不悌者損逃出洞事{{TagPage|142}}<br/>一若有以下犯上與以少凌長者損逃事<br/>一上員中無經界以臆勒下則衆會呼失事<br/>一無論上下如有是非則自洞中正經界核卞事<br/>一如有嘉行者洞稧日施賞事<br/>一如有醜行者洞稧日當罸事<br/>一上員中如有婿喪大事各相扶助事<br/>一下員中如有四喪大事自楔中錢伍兩出給事<br/>一無論上下員願爲出稧者持本錢出給事<br/>一下員中酗酒者無論男女笞十度收贖一兩事<br/>一上員中酗酒者齊會呼失事<br/>一上員雜技者收贈二兩齊會呼失事<br/>一下員雜技者笞二十度收贖二兩事<br/>一雜技接主者笞三十度收贖三兩事<br/>患難相救<br/>一無論上下如有瘟疾家則自洞中齊會出幕後共扶作農事<br/>一無論上下無罪橫厄陷於危地則一洞齊出救濟事{{TagPage|143-1}}<br/>一用錢人有保後出給事<br/>一隨稧息利以補洞物事<br/>一債員中如有難捧之弊則雖至收家一族期於捧出事<br/>又節目<br/>一執綱周年交遞事<br/>一中任周年改差事<br/>一洞長所任周年改差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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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9번={{TagSpage|143-2}}以上 二種은 모다 西曆 一八五〇年代 前後에 實施하든 것으로 前者는 鄕約 節目이며 後者는 洞稧이였었으나, 이 兩者를 比較하여 볼 때 누구나 直觀的으로 知覺할 수 있는 것은 兩者가 至極히 近似함이다. 즉 前者는 呂氏鄕約의 四大 綱目을 採用하기는 하였으나 그 中의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에 屬한 條目이 가장 詳細히 規定되여 鄕約의 主要 部分을 成하고 있고, 後者는 오로지 禮俗相規와 患難相救의 兩 綱目으로만 規定되였으며 그 中의 禮俗相規는 過失相規와 禮俗相交가 相半하는 것으로 오히려 過失相規의 該當하는 條目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 이 點으로 미루어 보면 朝鮮의 鄕約 乃至 洞約洞稧의 根本精神은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二綱目에 있었든 것이 않인가 한다. 이 外에 筆者는 忠淸道 延豐郡 柳山洞에서 一九〇〇年頃에 實施하든 柳山洞約을 藏하고 있으나, 이 洞約도 前記 鄕約 條目 同樣으로 四大 綱目 中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條目을 더욱 詳細히 定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朝鮮의 鄕約은 李退溪 李栗谷에 이르러 形式上으로 가장 完備한 條文이 成立하게 되였으나, 後世 이것을 實際的으로 施行함에 當하야는 여러가지의 矛盾과 衝突이 生케 되여, 드디여 그의 煩雜{{TagPage|144-1}}한 細目은 버리고 鄕民의 日常生活上 가장 緊急한 綱目인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各 條目만을 遵用하야 鄕風美化 相互扶助의 精神을 發揮하고저 한 것이 아닌가 한다. 勿論 이것은 地方에 따라 달을 것이나 原則的으로 李栗谷이 定한 바와 같은 細密한 鄕約을 規定 或은 採用할 수 없는 곳에서는 前記한 바와 같은 簡略한 鄕約 條目을 立定하야 實施하였을 것이니 이것은 곳 鄕約의 地方的 簡略化를 意味하는 것으로 大規模의 鄕約을 實施할 수 없는 地方에서는 小規模의 鄕約인 洞約 洞稧가 出現하였든 것이다. 즉 李朝 末葉에 있어서의 朝鮮의 鄕約은 前擧한 바와 같은 鄕約 條目 洞約 洞稧의 形態로 簡略化하야 施行케 되였다고 볼 수 있으니, 이것은 곳 現今도 殘存하야 婚姻契 初喪契와 같은 形態로 流行하고 있는 所謂 「契」의 精神으로 還元하였음을 雄辯으로 證明하는 것이 않일가. 契가 朝鮮에서 어느 때 成立하였는지는 이제 速斷키 어려우나 이미 太宗實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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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0번={{TagSpage|144-2}}<blockquote no="61">{{TagRef|2}}凡我同里之人各遵禮法毋侍力凌辱 違者先共制之 然後經官 或貧無可膽周給其家 三年不立不使與會 其婚姻喪葬有乏 隨力相助 如不從衆及犯奸詐僞一切非僞之人並不許入會<ref>太宗實錄 卷二十七 第四張, 十四年 正月 癸巳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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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1번={{TagSpage|144-3}}라고 있어 里社의 法을 實施하기를 上請한 배 있으니 相當이 오래였음은 事實이며, 己述한 바와 같이 明宗 時에는 國家로부터 鄕約 實施를 前提로 鄕村에 結契케 하기를 命한 적도 있다. (끝) (一三, 三, 四)
  
|목차5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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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번=이상 조잡하나마 조선에 있어서 향약이 어떠한 경로를 밟아 성립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더듬어 온 셈이다. 요컨대 조선에서 향약이 성립하게 된 것은 이조 초기 이래 실시하여 온 태조친제의 향헌조목 및 유향소에 의한 지방자치 등이 주동력이 되어, 이에 지나로부터 전래한 여씨향약이 큰 자극을 주어, 마침내 종래 내부적으로만 흐르고 있던 민간자치의 정신을 향약이라는 형식으로 표면화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용이하게 추종하게 한 데서 결과하였다. 이리하여 {{TagPerson|[[이황]]}}의 예안향약을 비롯하여 파주향약 서원향약 해주향약 사창계약속 해주일향약속 등의 향약이 접종(接踵)하여 출현케 되었던 것이나 이 각지의 향약을 통하여 일관한 정신은 비록 그 중 일부는 여씨향약의 골자를 형식상으로라도 채용하였다 하더라도 실질상 내용에 있어서는 당시 조선 실사회의 가장 긴급한 사항을 조목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점으로 보아 이 각지의 향약은 이조 중기 당시의 조선 사회 상태를 그려낸 축도라고도 볼 수 있다.
|목차5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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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번=그러면 이와 같이 성립한 각지의 향약은 이후 조선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던가. 이에 대하여는 아직 충분한 조사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상론(詳論)하기를 피하나, 하여간 조선 사회에서 가장 탁월한 유종(儒宗)으로 숭경하던 {{TagPerson|[[이황]]}} {{TagPerson|[[이이]]}} 두 현(賢)의 제정한 것인 만큼 그의 후세에 끼친 영향도 위대하였었다. 간단히 예를 들면 {{TagPerson|[[이황]]}}의 향약은 후세 영남 유림계에서 널리 준봉되어 풍산 김씨 하동 유씨 상주 유씨 같은 곳 정씨 진주 임씨 등 문중에서 이 향약을 시행하고, 특히 {{TagPerson|[[영조]]}}조(朝)에는 {{TagPerson|[[이황]]}} 학통의 적전(嫡傳)인 {{TagPerson|[[최흥원]]}}(백불암)에 의하여 달성군 부인동에서 동약이 실시되자, 이 동약에서는 여씨향약과 아울러 이 {{TagPerson|[[이황]]}}의 향약을 채용하여 4대 강목 중 과실상규는 오로지 퇴계향약을 적용하였다 한다. {{TagPerson|[[이이]]}}의 향약은 당초부터 교화상 큰 효과를 거두게 되어 그의 연보에도
|목차5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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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번=<blockquote no="58">{{TagRefT|1}}海俗初甚渝薄 自是이후文風不變禮俗成習 雖邨裏愚氓亦知感化 或有棄妻數十年好合如初者 又有庶人老者喪弟服衰哀 痛過常問之 皆曰此李監司之敎也<ref group="a">{{TagBook|[[조선승무유현연표]]}} 소재 율곡선생 연보.</ref></blockquote>
|목차5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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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번=라고 하였음과 같으나, 그 후 그의 향약도 황해도 지방은 물론 영남 각지 유림계에서 널리 채용하게 되었다 한다. 특히 충청도 지방에서는 {{TagPerson|[[이이]]}}의 학벌이 융성하던 곳이니 만큼 그의 향약이 널리 시행케 되어, {{TagPerson|[[숙종]]}}조(朝)의 명신(名臣) {{TagPerson|[[송시열]]}}도 만년에는 청주 화양동에 퇴거하여 율곡향약에 모방하여 향약을 실시하였다 하며, 기타 회덕 송씨 노성 윤씨 연산 김씨 시전 성씨 등 문중에서도 {{TagPerson|[[송시열]]}}의 지휘로 향약을 행하였다 한다. 그리고 {{TagPerson|[[영조]]}}23년에는 충청도 보은군수 {{TagPerson|[[김홍득]]}}이 군내에 향약을 시행하게 하고자 ‘향약조목’을 입정 반포하였는데, 이 향약 조목도 그 약문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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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번=<blockquote no="59">右一依栗谷先生西原鄉約 而其間叅以邑風略加損益 此下又以栗谷海州及社倉用罰等法抄錄之 以爲施罰之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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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번=라고 있는 바와 같이 전혀 {{TagPerson|[[이이]]}}의 향약을 운용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의 향약은 {{TagPerson|[[숙종]]}} 이후 {{TagPerson|[[영조]]}} {{TagPerson|[[정조]]}} 때에 이르러 정부의 장려 및 지방인사의 솔선궁행에 의하여 지방적으로나마 잘 시행되게 되었으나, 이조 말엽에 이르러 정치적 분란을 거듭함에 따라 침체하기 시작하여 {{TagEvent|[[갑오개혁]]}} 이후 표면상 잠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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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번=끝으로 이조 말엽에 실제로 시행하던 향약(동약)의 한둘의 예를 열거하여 향약의 말로를 추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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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8번=<blockquote no="60">{{ruby|鄉約節目|○○○○}}<sup>施行 處及年代가 未詳하나 筆者의 考證으로는 西曆 一八五〇年代에 淸州 地方에서 施行하든 것인가 한다. 筆者 所藏이다</sup><br/>一德業相勸<br/>孝父母敬長上愛兄弟敎子孫睦親黨和隣里 正家以禮 交友有信 立心必忠直 行已必恭謹 見善必行 開過必改 又如讀 書治田好禮樂射御書數 勤工商 畏法令 謹租賦之類<br/>右件德業同約之人各自進修 互相勸勉 會集之日 相與推擧其能者書于籍以勵其不能者<br/>一過失相規<br/>不順父母<sup>不孝之罪邦有常刑此擧其次</sup> 不友兄弟 家道乖亂<sup>夫妻毆罵男女無別嫡庶無分之別</sup> 親戚不睦 隣里不和 侮慢齒德 詬罵儕輩 侵暴孤寡 喪葬不謹 祭祀不敬 又如縱酒 雜技喜鬪好訟 言語不實 誣毀他人 輕蔑禮法 行已無恥 不畏法令 妄交匪人 崇信異端 知過不改之類<br/>右件過失同約之人各自省察 互相規戒 小則規之 大則衆戒之 不聽則會集之日直月以告于約正 約正以義理誨諭之 謝過請改則書于籍以俟其改 爭辨不服與不能改者論罰 輕則黜座 重則黜籍<br/>凡有主事廢忌者 公會後時者 紊座喧譁者 空座退便者並有責罰<br/>一禮俗相交<br/>尊幼輩行 造請揖拜 請召送迎 慶弔贈遺之類<br/>小節目追後磨練{{TagPage|141}}<br/>一患難相恤<br/>患難相恤之事曰水火<sup>近則遣人及時救之甚則親往多率人救之</sup> 曰盜賊<sup>自各洞各里五家作統統首則勿拘班常擇勤實人主之五家內若有盜賊統首摘發以告洞約長約治之甚者逐黜境外有屈强不服者洞約長以告都約所甚者施以一律大者十一面合力逐捕</sup> 曰疾病<sup>小則 遣人問之大則隣里扞力以助其耕耘</sup> 曰死喪<sup>助力幹辨賻賵借貸</sup> 曰孤弱<sup>孤遺無依者擇其親屬之忠幹者爲之區處或擇人敎之爲求婚婚貧者協力濟之</sup> 日誣枉<sup>有爲人誣枉不能自伸者勢可以聞於官府則爲言之可以救解則以解之 曰貧乏</sup><br/>右患難相恤之事 凡有當救恤者其家告于約正 急則約中之近者爲之告約正 令直月偏告且爲之糾集而程督之<br/>一每歲四孟朔初旬日 鄉約正各於其鄉會集講約<br/>一每歲春秋都副約正會鄉約正以下諸員講于學中<br/>一都約正有故則副約正以下亦可會集行禮<br/>一流寓士夫居其地亦許入約<br/>一凡在士列而憚於檢束拒不入約者告官鄉<br/>未盡條件追後磨練<br/>{{ruby|淸風瑞雲洞洞楔座目|○○○○○○○○○}}<sup>(今忠北堤川郡, 光緒十一年十月作, 筆者所藏)</sup><br/>節目<br/>一楔日每年以十月十六日完定事<br/>禮俗相規<br/>一若有不孝不悌者損逃出洞事{{TagPage|142}}<br/>一若有以下犯上與以少凌長者損逃事<br/>一上員中無經界以臆勒下則衆會呼失事<br/>一無論上下如有是非則自洞中正經界核卞事<br/>一如有嘉行者洞稧日施賞事<br/>一如有醜行者洞稧日當罸事<br/>一上員中如有婿喪大事各相扶助事<br/>一下員中如有四喪大事自楔中錢伍兩出給事<br/>一無論上下員願爲出稧者持本錢出給事<br/>一下員中酗酒者無論男女笞十度收贖一兩事<br/>一上員中酗酒者齊會呼失事<br/>一上員雜技者收贈二兩齊會呼失事<br/>一下員雜技者笞二十度收贖二兩事<br/>一雜技接主者笞三十度收贖三兩事<br/>患難相救<br/>一無論上下如有瘟疾家則自洞中齊會出幕後共扶作農事<br/>一無論上下無罪橫厄陷於危地則一洞齊出救濟事{{TagPage|143-1}}<br/>一用錢人有保後出給事<br/>一隨稧息利以補洞物事<br/>一債員中如有難捧之弊則雖至收家一族期於捧出事<br/>又節目<br/>一執綱周年交遞事<br/>一中任周年改差事<br/>一洞長所任周年改差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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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9번=이상 2종은 모두 서력 1850년대 전후에 실시하던 것으로 전자는 향약 절목이며 후자는 동계였었으나, 이 양자를 비교하여 볼 때 누구나 직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양자가 지극히 근사함이다. 즉 전자는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채용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의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에 속한 조목이 가장 상세히 규정되어 향약의 주요 부분을 갖추고 있고, 후자는 오로지 예속상규와 환난상휼의 양 강목으로만 규정되었으며 그 중의 예속상규는 과실상규와 예속상교가 상반(相半)하는 것으로 오히려 과실상규의 해당하는 조목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 이 점으로 미루어 보면 조선의 향약 내지 동약 동계의 근본정신은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두 강목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외에 필자는 충청도 연풍군 유산동에서 1900년경에 실시하던 유산동약을 장(藏)하고 있으나, 이 동약도 앞서 쓴 향약 조목 동양으로 4대 강목 중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조목을 더욱 상세히 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조선의 향약은 {{TagPerson|[[이황]]}} {{TagPerson|[[이이]]}}에 이르러 형식상으로 가장 완비한 조문이 성립하게 되었으나, 후세 이것을 실제적으로 시행함에 당하여는 여러가지의 모순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드디어 그의 번잡한 세목은 버리고 향민의 일상생활상 가장 긴급한 강목인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각 조목만을 준용하여 향풍미화 상호부조의 정신을 발휘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것은 지방에 따라 다를 것이나 원칙적으로 {{TagPerson|[[이이]]}}가 정한 바와 같은 세밀한 향약을 규정 혹은 채용할 수 없는 곳에서는 앞서 쓴 바와 같은 간략한 향약 조목을 입정하여 실시하였을 것이니 이것은 곳 향약의 지방적 간략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규모의 향약을 실시할 수 없는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향약인 동약 동계가 출현하였던 것이다. 즉 이조 말엽에 있어서의 조선의 향약은 앞서 든 바와 같은 향약 조목 동약 동계 의 형태로 간략화하여 시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이것은 곳 현금도 잔존하여 혼인계 초상계와 같은 형태로 유행하고 있는 소위 ‘계’의 정신으로 환원하였음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계가 조선에서 어느 때 성립하였는지는 이제 속단하기 어려우나 이미 {{TagBook|[[태종실록]]}}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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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0번=<blockquote no="61">{{TagRefT|2}}凡我同里之人各遵禮法毋侍力凌辱 違者先共制之 然後經官 或貧無可膽周給其家 三年不立不使與會 其婚姻喪葬有乏 隨力相助 如不從衆及犯奸詐僞一切非僞之人並不許入會<ref group="a">{{TagBook|[[태종실록]]}} 권27 제4장, 14년 정월 계사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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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1번=라고 있어 이사(里社)의 법을 실시하기를 상청한 바 있으니 상당히 오래였음은 사실이며, 이미 논한 바와 같이 {{TagPerson|[[명종]]}} 때에는 국가로부터 향약 실시를 전제로 향촌에 결계(結契)하게 하기를 명한 적도 있다. (끝) (1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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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8일 (목) 12:0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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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향약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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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鄕約의 成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9 발행기관
저자 유홍렬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8년07월
시작쪽 86쪽 종료쪽 144쪽 전체쪽 59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머리말


향약이라 함은 문자 스스로가 표시함과 같이 향리 간의 약속이니, 즉 각 향리의 주민들이 서로 도와주며 서로 꾸짖으면서 화목한 생활을 하여 가자는 자치 정신의 발로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향약의 싹(芽)은 원시 사회의 주민들 사이에서도 이미 움트기 시작하여 애초에는 외적(다른 부족 및 맹수 등) 침범에 대한 공동 방어 등의 형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향약은 그러한 아득한 옛적의 것이 아니라, 소위 역사시대에 들어온 후, 문자상 기록하게 된 향약이다. 즉 조선에 있어서 자치단체 조직으로서의 향약이 어느 때 어떠한 경로를 밟아 성립하게 되었는가 함을 밝힘이 본고의 목적이다.
쪽수▶P86-1鄕約이라 함은 文字 스스로가 表示함과 같이 鄕里 間의 約束이니, 즉 各 鄕里의 住民들이 서로 도와주며 서로 꾸지즈면서 和睦한 生活을 하여 가자는 自治 精神의 發露에서 由來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鄕約의 싹(芽)은 原始 社會의 住民들 사히에서도 이미 움트기 시작하여 애초에는 外敵(他 部族 及 猛獸 等) 侵犯에 對한 共同 防禦 等의 形式으로 나타났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하고저 하는 鄕約은 그러한 아득한 옛적의 것이 아니라, 所謂 歷史時代에 들어온 後, 文字上▶P87-1 記錄하게 된 鄕約이다. 즉 朝鮮에 있어서 自治團體 組織으로서의 鄕約이 어느 때 어떠한 經路를 밟어 成立하게 되였는가 함을 밝힘이 本稿의 目的이다.
조선에 있어서 향약이 실시하게 된 것은 보통 이조(李朝) 중엽에 이르러 조광조의 창설에 비롯하여 이황인물(퇴계) 이이인물(율곡) 등 명유(名儒)의 실천궁행에서 거의 완성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이전 이미 이러한 향약이 세워질 만한 터전은 닦아져 있었으며 씨는 뿌려져 싹은 움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즉 진작 이조 국초(國初)부터 이미 일종의 지방자치단체로서 유향소와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또 향약의 근원이라고 할 송나라의 여씨향약이 주자학에 휩쓸려 조선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에서 논술하려니와, 이 두 가지의 사실은 큰 줄거리 힘이 되어, 마침내 조선에도 향약을 세우게 하였던 것이다. 특히 후자인 여씨향약은 그 자체로보다도 주자에 의하여 증손(增損)된 소위 ‘주자증손여씨향약’의 형식으로 조선에 수입된 것이니, 주자학을 근간으로 한 유교로써 국가 통치의 근본 정신으로 삼던 이씨(李氏) 조선에 있어서는 그것은 당연히 채용되어야 할 것이었으며, 주자인물를 숭모하는 유림들 사이에서는 진작부터 준봉(遵奉)하여 왔던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교 문화가 바야흐로 무르녹고 있던 이조 중종인물 때에 이르러 노골적으로 표면화하여 우선 여씨향약의 실시를 보고, 이어서 조선적 향약의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쪽수▶P87-2朝鮮에 있어서 鄕約이 實施하게 된 것은 普通 李朝 中葉에 이르러 趙光祖의 唱說에 비롯하여 李滉(退溪) 李珥(栗谷) 等 名儒의 實踐躬行에서 거의 完成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 以前 이미 이러한 鄕約이 세워질 만한 터전은 닦어저 있었으며 씨는 뿌려저 싹은 움트기 시작하였든 것이다. 즉 진작 李朝 國初부터 이미 一種의 地方自治團體로서 留鄕所와 같은 것이 設置되여 있었으며, 또 鄕約의 根源이라고 할 宋나라의 呂氏鄕約이 朱子學에 힙쓸이어 朝鮮 안에 들어와 있었든 것이다. 자세한 것은 以下 論述하려니와, 이 두 가지의 事實은 큰 줄거리 힘이 되여, 마츰내 朝鮮에도 鄕約을 세우게 하였든 것이다. 特히 後者인 呂氏鄕約은 그 自體로보다도 朱子에 依하야 增損된 所謂 「朱子增損呂氏鄕約」의 形式으로 朝鮮에 輸入된 것이매, 朱子學을 根幹으로 한 儒敎로써 國家 統治의 根本 精神으로 삼든 李氏 朝鮮에 있어서는 그것은 當然히 採用되여야 할 것이였으며, 朱子를 崇慕하는 儒林들 사히에서는 진작부터 遵奉하여 왔든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儒敎 文化가 바야흐로 무르녹고 있든 李朝 中宗때에 이르러 露骨的으로 表面化하여 위선 呂氏鄕約의 實施를 보고, 이어서 朝鮮的 鄕約의 成立을 보게 된 것이다.
조선향약에 대한 종래의 논술로서는 도미나가 후미카즈(富永文一)씨의 「件時の朝鮮に於ける自治の萌芽鄕約の一班」원고과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박사의 「栗谷先生と鄕約」원고(이상 두 개의 글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 발행 「사회교화자료」학술지1권호 소재)과 마츠다 코우(松田甲)씨의 「李朝時代の鄕約」원고(속일선사화학술지3권호 소재)과 같은 것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대개 향약의 소개에 그쳤을 따름이요, 조선에 있어서 어찌하여 향약이 성립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배경을 밝히지는 않았다. 역사학은 그것이 어떠하였던가 하는 것을 보고함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어찌하여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아니되었는가 하는 인과관계를 밝힘이 사명이니만큼, 나는 이러한 견지에서 아래에서 향약 성립의 전말을 더듬어 보려 한다.
쪽수▶P87-3朝鮮鄕約에 對한 從來의 論述로서는 富永文一氏의 「件時の朝鮮に於ける自治の萌芽鄕約の一班」과 高橋亨 博士의 「栗谷先生と鄕約」(以上 二文은 朝鮮總督府 學務局 社會課 發行 「社會敎化資料」 第一輯 所載)과 松田甲氏의 「李朝時代の鄕約」(續日鮮史話 第三編 所載)과 같은 것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大概 鄕約의 紹介에 끝였을 따름이요, 朝鮮에 있어서 어찌하야 鄕約이 成立케 되였는가 하는 歷史的 背景을 밝히지는 않었다. 歷史學은 그것이 어떠하였든가 하는 것을 報告함이 目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어찌하야 그러▶P88-1케 되지 않으면 아니되였는가 하는 因果關係를 밝힘이 使命이니만치, 나는 이러한 見地에서 以下 鄕約 成立의 顚末을 더듬어 보려 한다.




































본문2: 2.유향소의 유래


유향소의 유래를 밝힘에는 먼저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부터 논해야 하겠다. 유향소의 성질 내지 조직에 관하여는 이조 세종인물 10년 6월에 유향소를 복설하였을 때 내린 현대문주1▶「유향소(복설마련)절목」원고[a 1] 중에
쪽수▶P88-2留鄕所의 由來를 밝힘에는 먼저 그것이 어떠한 것이였든가 하는 것부터 論하여야 하겠다. 留鄕所의 性質 乃至 組織에 關하여는 李朝 世宗 十年 六月에 留鄕所를 復設하였을 때 내린 원문주1▶「留鄕所(復設磨鍊)節目」[1] 中에

一 留鄕所品官 府以上五人 郡四人 縣三人 爲等如差定爲乎矣 令京在所擇定
一 留鄕所設立本意段 專爲紏察惡吏 以正鄕風爲白去乙 品官等不顧本意 假仗權威 反爲作 弊 今後乙良 所在官守令及京在所 嚴加痛禁 必有犯罪者 報觀察使 科罪這這改差

쪽수▶P88-3

一 留鄕所品官 府以上五人 郡四人 縣三人 爲等如差定爲乎矣 令京在所擇定
一 留鄕所設立本意段 專爲紏察惡吏 以正鄕風爲白去乙 品官等不顧本意 假仗權威 反爲作 弊 今後乙良 所在官守令及京在所 嚴加痛禁 必有犯罪者 報觀察使 科罪這這改差

라는 두 조목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그것의 대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유향소의 설립 본의는 지방의 악리(惡吏)를 두찰(紏察)하여 향풍을 바르게 함에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악리라 함은 소위 원악향리(元惡鄕吏)를 이르는 것이니, 감사 수령 아래의 속료로서 직접 백성과 접촉하여 최하급의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향리(서리)들이 때로는 중앙정부로부터 파견된 방백 수령 이상의 실권을 잡아 수뢰 수렴 모민 사리 등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폐해를 방비하기 위하여 경국대전서적에도
쪽수▶P88-4라는 二條目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그것의 大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留鄕所의 設立 本意는 地方의 惡吏를 紏察하야써 鄕風을 바르게 함에 있었든 것이다. 이곳에서 惡吏라 함은 所謂 元惡鄕吏를 이름이니, 監司 守令 下의 屬僚로서 直接 百姓과 接觸하야 最下級의 行政事務를 擔當하는 鄕吏(胥吏)들이 때로는 中央政府로부터 派遣된 方伯 守令 以上의 實權을 잡어 受賂 收斂 冒民 私利 等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弊害를 防備하기 爲하야 經國大典에도

현대문주2▶元惡鄕吏 許人陳告 亦許本官京在所告司憲府 推効科罪 犯徒者永屬本道殘驛吏 犯流者永屬他殘驛吏 守令知而不擧劾

▶P89-1者 以制書有違律論[a 2]
쪽수▶P88-5

원문주2▶元惡鄕吏 許人陳告 亦許本官京在所告司憲府 推効科罪 犯徒者永屬本道殘驛吏 犯流者永屬他殘驛吏 守令知而不擧劾

▶P89-1者 以制書有違律論[2]
과 같은 형률을 규정하여, 각 관 경재소 및 수령들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문율로서의 경국대전서적이 전부 준용하게 된 이조 성종인물 이후의 일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 있어서는 이러한 향리의 발호(跋扈)를 어찌하여 징벌하였던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같은 유향소를 설치하게 하여, 향리의 유력자들로 하여금 그들 향리(鄕吏)의 악행을 두찰하게 하였던 것이다. 즉 이조 국초 아직 법전이 완성되기 전에는 지방의 품관 수명으로 하여금 유향소를 조직하게 하여, 원악향리의 발악에 대비하는 한편 향간풍속(鄕間風俗)을 돈후하게 하여 행정두찰 및 지방자치의 임무를 띠게 하였다. 앞서 든 유향소 절목에도 명기한 바와 같이 부(府) 이상은 5인 군은 4인 현은 3인의 품관을 각 경재소가 택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유향소를 설치하게 하였다. 이곳에서 품관이라 함은 중종실록서적현대문주3▶「鄕中士類 謂之品官」[a 3]이라 하였음과 같이 관을 파하고 귀향하였거나, 혹은 애초부터 향리에 있어 노력을 갖게 된 양반 계급으로 후세에 이른바 유림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며, 경재소라 함은 각 지방에 생활의 근거를 둔 중앙관리(양반) 중에서 선택하여 조직된 한 개의 단체니, 이를테면 유향소의 경성 출장소 내지 감시소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유향소의 유래를 논함에는 필연적으로 경재소에도 언급하여야 하겠다.
쪽수▶P89-2과 같은 刑律을 規定하야, 各 官 京在所 及 守令들로 하여금 監視케 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成文律로서의 經國大典이 全部 遵用케 된 李朝 成宗 以後의 일이다. 그러면 그 以前에 있어서는 이러한 鄕吏의 跋扈를 어찌하야 懲罸하였든가. 그것은 달음이 아니라 이곳에서 말하고저 하는 바와 같은 留鄕所를 設置케 하야, 鄕里의 有力者들로 하여금 그들 鄕吏의 惡行을 紏察케 하였든 것이다. 즉 李朝 國初 아즉 法典이 完成되기 前에는 地方의 品官 數名으로 하여금 留鄕所를 組織하게 하야, 元惡鄕吏의 發惡에 備하는 一方 鄕間風俗을 敦厚하게 하야 行政紏察 及 地方自治의 任務를 띄게 하였다. 前揭 留鄕所 節目에도 明記한 바와 같이 府 以上은 五人 郡은 四人 縣은 三人의 品官을 各京在所가 擇定하야, 그들로 하여금 留鄕所를 設置케 하였다. 이곳에서 品官이라 함은 中宗實錄에 원문주3▶「鄕中士類 謂之品官」[3]이라 하였음과 같이 官을 罷하고 歸鄕하였거나, 或은 애초부터 鄕里에 있어 努力을 갖게 된 兩班 階級으로 後世에 이른바 儒林과 같은 것이였을 것이며, 京在所라 함은 各 地方에 生活의 根據를 둔 中央官吏(兩班) 中에서 選擇하야 組織된 한 개의 團體니, 이를테면 留鄕所의 京城 出張所 乃至 監視所와 같은 것이였다. 그러므로 以下 留鄕所의 由來를 論함에는 必然的으로 京在所에도 言及하여야 하겠다.
그러면 이러한 유향소는 어느 때부터 설치되어 있었던가. 무릇 최하급의 행정기구로서의 향리의 제도가 이미 고려 초기부터 거의 정비되어 있었던 만큼, 그들 향리(호장이라 칭함)의 직권남용의 폐풍도 그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향리의 발호를 막기 위한 검찰기관을 두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었으니, 고려 태조인물가 그 18년에 내항한 신라 말 왕 김부인물로 하여금 경주 사심관이 되게 하여 부호장 이하의 관직을 살게 한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 사심관은 왕건 태조인물가 그의 적대자이던 신라 왕 김부인물를 후하게 대접하여, 그로 하여금 그의 고사(故士)인 경주의 감독관이 되어 종래의 체면을 다소라도 유지하게 하여, 신흥국인 고려에 대한 적개심을 없애도록 하고자 함에서 우러나온 직제일 것이나, 이것은 얼마 안 가서 모든 공신에게도 주게 되어, 그들은 각기 본주(本州) 사심관이 되어 그 지방의 향리를 검찰하며 향풍을 두정(紏正)하게 되었다. 사심관에 대하여는 좀 더 상세히 논술할 겨를이 없으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하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는 충숙왕인물 5년 5월에 내린 교문에
쪽수▶P89-3그러면 이러한 留鄕所는 어느 때부터 設置되여 있었든가. 므릇 最下級의 行政機構로서의 鄕吏의 制度가 이미 高麗 初期부터 거의 整備되여 있었드니만치, 그들 鄕吏(戶長이라 稱함)의 職權濫用의 弊風도 그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 鄕吏의 跋扈를 막기 爲한 檢察機關을 두게 된 것도 그때부터이였었으니, 高麗 太祖가 그 十八年에 來降한 新羅 末 王 金傅로 하여금 慶州 事審官이 되게 하야 副戶長 以下의 官職을 살게 한 것이 그것이다. 勿論 이 事審官은 王建 太祖가 그의 敵對者이든 新羅 王 金傅를 厚히 待接하야, 그로 하여금 그의 故士인 慶州의 監督官이 되여 從來의 體面을 多▶P90-1少라도 維持케 하야, 新興國인 高麗에 對한 敵愾心을 없이 하도록 하고저 함에서 울어나온 職制일 것이나, 이것은 얼마 아니가서 諸功臣에게도 주게 되여, 그들은 各其 本州 事審官이 되여 그 地方의 鄕吏를 檢察하며 鄕風을 紏正케 되였다. 事審官에 對하야는 좀 더 詳細히 論述할 겨를이 없으므로 이곳에서는 省略하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였든가는 忠肅王 五年 五月에 내린 敎文에

현대문주4▶事審官之設本爲宗主人民 甄別流品 均平賦役 表正風俗 今則不然 廣占公田 多匿民戶 若小有差役 例收祿轉 則吏之上京者 敢於私門 決杖徵銅 還取祿轉 擅作威福 有害於鄕 無補於國已 盡革罷 其所匿田戶 推刷復舊[a 4]

쪽수▶P90-2

원문주4▶事審官之設本爲宗主人民 甄別流品 均平賦役 表正風俗 今則不然 廣占公田 多匿民戶 若小有差役 例收祿轉 則吏之上京者 敢於私門 決杖徵銅 還取祿轉 擅作威福 有害於鄕 無補於國已 盡革罷 其所匿田戶 推刷復舊[4]

라고 있음으로써 그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으니, 즉 정부는 본관을 설정함으로써, 직접 관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도와 풍속을 바르게 하며, 지방 토호을 취체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각 주의 사심관의 수는 성종인물 15년에 5백정 이상 주는 4원 3백정 이상 주는 3원 공(工) 이하 주는 2원으로 제정하였으니, 모든 것이 이조의 유향소와 비슷하다. 앞서 든 교문에도 명시한 바와 같이 이 사심관은 고려 말엽에 이르러 여러가지의 폐해를 짓게 되어, 수차 국령으로써 그의 혁파를 명하여 왔으나 끝끝내 잘 시행되지 못하고, 귀족 정치 시대이던 당시에 있어서는 지방에 반거한 귀족 권호(權豪)들이 각자 사심관이라 모칭하야 지방행정을 좌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방 귀족 권호의 특권 행위가 곧 왕조가 바뀐 이조에 들어와서는 소위 유향소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쪽수▶P90-3라고 있으므로써 그의 大略을 짐작할 수 있으니, 즉 政府는 本官을 設定함으로써, 直接 官治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도와 風俗을 바르게 하며, 地方 土豪을 取締케 하였든 것이다. 그리고 各 州의 事審官의 數는 成宗 十五年에 五百丁 以上 州는 四員 三百丁 以上 州는 三員 工 以下 州는 二員으로 制定하였으니, 모든 것이 李朝의 留鄕所와 비슷하다. 前揭 敎文에도 明示한 바와 같이 이 事審官은 高麗 末葉에 이르러 여러가지의 弊害를 짓게 되여, 數次 國令으로써 그의 革罷를 命하여 왔으나 끝々내 잘 施行되지 못하고, 貴族 政治 時代이든 當時에 있어서는 地方에 盤據한 貴族 權豪들이 各自 事審官이라 冒稱하야 地方行政을 左右하였든 것이다. 이러한 地方 貴族 權豪의 特權 行爲가 곧 王朝가 바뀌인 李朝에 드러와서는 所謂 留鄕所의 形態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심관과 아울러 이곳에서 한마디 말하여 둘 것은 고려의 기인(○○)의 제(制)이다. 기인이라 함은 고려사에 현대문주5▶「國初選鄕吏子弟 爲質於京 且備顧問其鄕之事 謂之其人」[a 5]이라 하였음과 같이, 왕건 태조인물가 반도 천하를 다스리게 되니, 지방향리의 발호 모반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자제를 볼모로 서울에 잡아두고 각 향리의 사정을 고문함에 대비하고자 하는 제도이니, 이를테면 향리의 발호를 견제하려는 소극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기인은 한편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정책의 기밀을 뒤져내는 수도 있었을 것이니, 이 점으로 보면 기인은 향리의 밀정으로 그들의 피범(被犯)됨을 앞서서 막은 자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기인의 제도 이조에 끼친바 영향이 막대하여, 물론 그의 계급과 내용을 달리하지만 경재소의 출현을 보게 하였던 것이다.
쪽수▶P90-4事審官과 아울러 이곳에서 한마듸 말하여 둘 것은 高麗의 其人(○○)의 制이다. 其人이라 함은 高麗史에 원문주5▶「國初選鄕吏子弟 爲質於京 且備顧問其鄕之事 謂之其人」[5]이라 하였음과 같이, 王建 太祖가 半島 天下를 다스리게 됨에, 地方鄕吏의 跋扈 謀叛을 두려워하야, 그들의 子弟를 볼모로 서울에 잡어두고 各 鄕里의 事情을 顧問함에 備코저 하는 制度이니, 이를테▶P91-1면 鄕吏의 跋扈를 牽制하려는 消極的 手段이였다. 그러나 이 其人은 一方 中央政府의 地方에 對한 政策의 機密을 뒤저내는 수도 있었을 것이니, 이 點으로 보면 其人은 鄕吏의 密偵으로 그들의 被犯됨을 앞서서 막은 者라고도 볼 수 있다. 이 其人의 制도 李朝에 끼친바 影響이 莫大하야, 勿論 그의 階級과 內容을 달리하지만 京在所의 出現을 보게 하였든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조(朝)에 있어서는 향리의 발호를 제압하여 향풍을 바르게 하고자 사심관 및 기인의 제를 설정하였으나, 왕씨의 뒤를 이어 새 나라를 세운 이씨 조선에 있어서는 그러면 어찌하여 지방에 완강히 버티고 있는 향리들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던가. 그것은 위에서도 잠깐 말한 바와 같이 지방의 유력자(양반)들로 하여금 유향소를 설치하게 하여 악리검찰의 임무를 이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유향소의 설치에 대하여는 증보문헌비고서적에는 간단히 “國初置郡縣留鄕所 旋罷尋復”이라 하여, 그것이 이조 초기에 설치되었다고 하였으나, 가장 근본 사료인 이조 초기 제왕의 실록을 뒤져보아도 그의 명확한 연대를 잡아내지 못하였음은 유감이다. 그러나 이조 제3대왕인 태종인물 6년 6월 정묘에 사헌부 대사헌 허응 등이 상헌(上獻)한 무시7조 중에
쪽수▶P91-2이와 같이 高麗朝에 있어서는 鄕吏의 跋扈를 制壓하야 鄕風을 바르게 하고저 事審官 及 其人의 制를 設定하였으나, 王氏의 뒤를 이어 새 나라를 세운 李氏 朝鮮에 있어서는 그러면 어찌하야 地方에 頑强히 버티고 있는 鄕吏들의 勢力을 抑制하려 하였든가. 그것은 우에서도 잠간 말한 바와 같이 地方의 有力者(兩班)들로 하여금 留鄕所를 設置케 하야 惡吏檢察의 任務를 履行케 하였든 것이다. 留鄕所의 設置에 對하야는 增補文獻備考에는 簡單히 「國初置郡縣留鄕所 旋罷尋復」이라 하야, 그것이 李朝 初期에 設置되였다고 하였으나, 가장 根本 史料인 李朝 初期 諸王의 實錄을 뒤저보아도 그의 明確한 年代를 잡어내지 못하였음은 遺憾이다. 그러나 李朝 第三代王인 太宗 六年 六月 丁卯에 司憲府 大司 憲許應 等이 上獻한 務時七條 中에

현대문주6▶其四 州郡縣各有守令 鄕愿好事之徒 置留鄕所 無時群聚 話毁守令 進退人物 侵漁百姓 甚於滑吏 乞皆革去 以除積弊[a 6]

쪽수▶P91-3

원문주6▶其四 州郡縣各有守令 鄕愿好事之徒 置留鄕所 無時群聚 話毁守令 進退人物 侵漁百姓 甚於滑吏 乞皆革去 以除積弊[6]

라는 하나의 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때 이전부터 유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상소 조문에 의하면 유향소는 국가 정부로부터 국령으로써 설치를 명한 것이 아니라, 지방군현의 유지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인 듯하다. 이 조문은 유향소의 폐해를 인정하여 그것의 혁거를 상청(上請)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조직 인원을 “鄕愿好事之徒”라 하여 향곡에 숨은 위선 군자처럼 취급하였으나, 그 실(實) 이러한 자치단체를 결성할 만한 자격을 가진 자는 적어도 그 지방의 덕망 있는 선각자들로 소위 품관이라 일컫는 바와 같은 양반계급의 분자였을 것이다. 이러한 향곡의 사류(士類)들은 오랜 옛적부터 그 지방에 자리를 잡고 권세를 부리게 되어, 마침내는 유향소와 같은 자치단체를 자진하여 결성하게 된 것이니, 그의 연원은 적어도 고려조(朝)에 소급할 수 있다. 즉 고려 말엽에 이르러 향리검찰 및 향풍사정의 임무를 띤 사심관의 제를 파혁하게 되니, 향리에서 권세를 부리던 귀족 양반들은 이에 응하지 아니하고 국헌을 무시하면서 사적으로 사심관과 비슷한 기관을 조직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유향소의 모태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향소는 고려조(朝) 사심관의 유풍으로 고려 말에 이미 지방적으로나마 결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 향리를 살피고 향속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좋은 의미의 기관이 이조 개국 이래 불과 15년이 못되어 폐해를 일으키게 되어 태종 6년에 이르러 그것의 혁거를 소청하여 왔음과 같은 것은 그의 근거가 이미 퍽 오래였음을 여실히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유향소는 고려 말에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완성되어 (물론 그때부터 유향소라는 명칭을 붙였는지는 의문이나) 이것이 이조에 들어와 유교적 문치정책에 의하여 좀 더 조직화하고 보편화하였다고 본다. 당시 대소 품관들로 하여금 각 향리에 정주하여 굳은 근거를 잡게 한 사실을 들면, 태조인물 7년 2월 계사에 경상도 관찰사 이지인물(李至)가 상서하여,
쪽수▶P91-4라는 一條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때 以前부터 留鄕所가 設置되여 있었든 것은 事實이다. 그리고 이 上䟽 條文에 依하면 留鄕所는 國家 政府로부터 國令으로써 設置를 命한 것이 아니라, 地方郡縣의 有志 人士들이 自發的으로 組織한 團體인 듯하다. 이 條文은 留鄕所의 弊害를 認定하야 그것의 革去를 上請한 것이였으므로, 그의 組織 人員을 「鄕愿好事之徒」라 하야 鄕曲에 숨은 僞善 君子처럼 取扱하였으나, 그實 이러한 自治團體를 結成할 만한 資格을 가진 者는 적어도 그 地▶P92-1方의 德望 있는 先覺者들로 所謂 品官이라 일컷는 바와 같은 兩班階級의 分子이였을 것이다. 이러한 鄕曲의 士類들은 오랜 옛적부터 그 地方에 자리를 잡고 權勢를 부리게 되여, 마츰내는 留鄕所와 같은 自治團體를 自進하야 結成케 된 것이니, 그의 淵源은 적어도 高麗朝에 溯及할 수 있다. 즉 高麗 末葉에 이르러 鄕吏檢察 及 鄕風斜正의 任務를 띈 事審官의 制를 罷革하게 됨에, 鄕里에서 權勢를 부리든 貴族 兩班들은 이에 應치 아니하고 國憲을 無視하면서 私的으로 事審官과 비슷한 機關을 組織하게 되였으니, 이것은 곧 留鄕所의 母胎이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留鄕所는 高麗朝 事審官의 遺風으로 麗末에 이미 地方的으로나마 結成되여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 鄕吏를 살피고 鄕俗을 바르게 하고저 하는 것과 같은 좋은 意味의 機關이 李朝 開國 以來 不過 十五年이 못되여 弊害를 이르키게 되여 太宗 六年에 이르러 그것의 革去를 䟽請하여 왔음과 같은 것은 그의 根據가 이미 퍽 오래였음을 如實히 證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留鄕所는 麗末에 있어서 어는 程度까지 完成되여 (勿論 그때부터 留鄕所라는 名稱을 붙였는지는 疑問이나) 이것이 李朝에 드러와 儒敎的 文治政策에 依하야 좀 더 組織化하고 普遍化하였다고 본다. 當時 大小 品官들로 하여금 各 鄕里에 定住하야 굳은 根據를 잡게 한 史實을 들면, 太祖 七年 二月 癸巳에 慶尙道 觀察使 李至가 上書하야,

현대문주7▶道內大小品官 名載居京之籍者 往還之際 馬多困斃 今復有令 刻日赴京 故有傾家買馬者 臣竊謂 當今無事之時 誠宜務農養兵 以備不虞 今若督責赴京 使人馬困耗 農事失時 殊爲未便 況本道前年失農 裹糧亦難 除孝廉茂才 可備擢用外 限今年 各安其鄕 務農養兵[a 7]

쪽수▶P92-2

원문주7▶道內大小品官 名載居京之籍者 往還之際 馬多困斃 今復有令 刻日赴京 故有傾家買馬者 臣竊謂 當今無事之時 誠宜務農養兵 以備不虞 今若督責赴京 使人馬困耗 農事失時 殊爲未便 況本道前年失農 裹糧亦難 除孝廉茂才 可備擢用外 限今年 各安其鄕 務農養兵[7]

이라 하여 태조인물가 즉위하니 예전에 일찍부터 경향(京鄕)에 흩어져 있는 대소의 관리들을 진무 귀복하게 하고자 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성에 재적하게 하여 매년 1차씩 조근(朝覲)하게 한 것을 일시 정지시키자고 상청한 일이다. 이곳에서 대소 품관이라 함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조에 들어와서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일찍부터 권세를 잡고 있는 대소의 관리(양반)들이었을 것이며, 그들은 신흥 이씨 국가에 대하여 한 개의 위협적 존재였다. 그러므로 태조인물는 즉위하자마자 곧 그들 대소 품관을 경성에 재적하게 하여 모반의 기회를 없이 하도록 매년 1차씩 참근(參覲)하는 형식을 취하게 하였으나, 이와 같이 대소의 품관들이 빈번히 경향(京鄕)을 왕환(徃還)함을 따라 그들 사이에는 상호의 친목을 도우며 노력을 펴게 할 어떠한 형식의 조직단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의 향리에서 나타난 것이 유향소요, 경성에서 결성된 것이 경재소였었다. 유향소 및 경재소가 어느 때 설치되었는가 하는 연대를 적확히 비정(比定)하기는 곤란하나,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이미 고려 말에 있어서 향리에 퇴거한 사류들 사이에는 유향소와 비슷한 어떠한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조 개국 후에는 지방에 본거를 둔 중앙정부 관리들 사이에 경재소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연대가 바뀌는 동안에 후자는 국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전자를 좀 더 조직화하여 마침내 유향소라는 명칭을 붙이게 하여 향리를 규찰하게 하는 한편, 양자는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중앙정권을 견제하는 세력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든 세종 10년의 유향소 절목 중에 ‘유향소 품관은 경재소가 택정한다’ 하는 것은 저간의 소식을 여실히 전하는 것이나, 이것은 한편 중앙정부가 지방에 흩어져 있는 귀족 양반을 통솔하여 불의의 사변을 미연에 방비하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쪽수▶P92-3이라 하야 李太祖가 即位하매 前朝來 京鄕에 흩어저 있는 大小의 官吏들을 鎭撫 歸服케 하고저 하여, 그들로 하여금 京城에 在籍케 하야 每年 一次式 朝覲하게 한 것을 一時 停止시키자고 上請한 일이다. 이곳에서 大小 品官이라 함은 두 말할 것도 없▶P93-1이 李朝에 들어와서 급작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前朝來 權勢를 잡고 있는 大小의 官吏(兩班)들이였을 것이며, 그들은 新興 李氏 國家에 對하야 한 개의 威脅的 存在이였다. 그러므로 李太祖는 即位하자마자 곧 그들 大小 品官을 京城에 在籍케 하야 謀叛의 機會를 없이 하도록 每年 一次式 參覲하는 形式을 取케 하였으나, 이와 같이 大小의 品官들이 頻繁히 京鄕을 徃還함을 따라 그들 사히에는 相互의 親睦을 도으며 努力을 펴게 할 어떠한 形式의 組織團體가 自然的으로 發生케 되였으니 그것의 鄕里에서 나타난 것이 留鄕所요, 京城에서 結成된 것이 京在所이였었다. 留鄕所 及 京在所가 어느 때 設置되였는가 하는 年代를 的確히 比定하기는 困難하나, 已述한 바와 같이 이미 麗末에 있어서 鄕里에 退居한 士類들 사히에는 留鄕所와 비슷한 어떠한 團體가 組織되여 있었으며, 李朝 開國 後에는 地方에 本據를 둔 中央政府 官吏들 사히에 京在所라는 團體가 結成되여 年代가 바뀌는 동안에 後者는 國家 政府의 指示를 받어 前者를 좀 더 組織化하야 마츰내 留鄕所라는 名稱을 붙이게 하야 鄕吏를 糾察케 하는 一方, 兩者는 서로 緊密한 連絡을 取하야 中央政權을 牽制하는 勢力을 잡게 되였든 것이다. 前揭한 世宗 十年의 留鄕所 節目 中에 「留鄕所品官은 京在所가 擇定한다」 하는 것은 這間의 消息을 如實히 傳하는 것이나, 이것은 一方 中央政府가 地方에 흩어저 있는 貴族 兩班을 統率하야 不意의 事變을 未然에 防備코저 하는 意圖도 包含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이조 건국과 아울러 유향소 및 경재소가 출현하였으나 이것들이 좀 더 조직화하고 보편화하게 된 것은 국가로부터 향리 교화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게 한 이후의 일이다. 이조 초기에 있어서 향풍을 돈후하게 하고자 실시를 명한 가장 유명한 일은 태조인물 친제의 향헌조목의 반포이다. 태조인물는 새 나라의 임금으로 반도에 거림(居臨)하자 그 2년 9월 병진에는 그의 발상지인 화령부를 영흥부로 개칭하고, 또 한나라 고조인물가 낳은 고향의 이름을 본떠, 그의 생육하던 향촌을 풍패향(豐沛鄕)이라 명명하여, 신흥 국왕으로서의 자기의 출생지를 미화 존칭하는 한편, 그 7년 4월에 이르러는 친히 함흥에 거동하여 아래에 기록하는 바와 같은 향헌조목원고41조를 친제(親制)하며, 다시 그곳 종실인 효령대군인물 보(補)로 하여금 이것을 증보하게 하여, 효령대군인물이 제정한 선목 21조 악목 35조 도합 56조와 아울러 이것을 그의 향읍에 반포하여 실시하기를 명하였다. 태조인물가 친히 제정한 헌목 41조는 대략 6강으로 나누어 5강은 각 8조를 포함하고 1강은 1조로 되었으니 아래와 같다.
쪽수▶P93-2이와 같이 하야 李朝 建國과 아울러 留鄕所 及 京在所가 出現하였으나 이것들이 좀 더 組織化하고 普遍化하게 된 것은 國家로부터 鄕里 敎化의 政策을 積極的으로 實施케 한 以後의 일이다. 李朝 初期에 있어서 鄕風을 敦厚케 하고저 實施를 命한 가장 有名한 일은 太祖 親製의 鄕憲條目의 頒布이다. 李太祖는 새 나라의 님금으로 半島에 居臨하자 그 二年 九月 丙辰에는 그의 發祥地인 和寧府를 永興府로 改稱하고, 또 漢나라 高祖의 낳은 故鄕의 일홈을 본떠, 그의 生育하든 鄕村을 豐沛鄕▶P94-1이라 命名하야, 新興 國王으로서의 自己의 出生地를 美化 尊稱하는 一方, 그 七年 四月에 이르러는 親히 咸興에 擧動하야 下記하는 바와 같은 鄕憲條目 四十一條를 親制하며, 다시 그곳 宗室인 孝寧大君 補로 하여금 이것을 增補케 하여, 補의 制定한 善目 二十一條 惡目 三十五條 都合 五十六條와 아울러 이것을 그의 鄕邑에 頒布하야 實施하기를 命하였다. 太祖가 親히 制定한 憲目 四十一條는 大略 六綱으로 나뉘어 五綱은 各 八條를 包含하고 一綱은 一條로 되였으니 以下와 같다.

一 部民告訐者 妻妾相關者 妻族不明者 族屬通奸者 操弄官長者 身犯奸盜者 婦女失行者 濁亂家門者 右八條永爲削籍事
一 偷罪受刑者 非理好訟者 收歛作弊者 陰毀族親者 陰毀本所者 陰毀同列者 汚染鄕風者 胥吏爾予者 右八條限己身損徒事
一 疎薄正妻者 賤人交結者 長立訟庭者 訟事退步者 同列相關者 衣冠不正者 不明外戚者土主外論者 右八條永爲棄身事
一 凌慢齒上者 恃富輕貧者 凌蔑齒下者 恃强凌弱者 不顧本所者 僉親埋沒者 鄕叅不合者 吝貪殘列者 右八條當身不用而勿棄子孫事
一 己身傭役者 詰友擧痕者 齒上據坐者 座中戲弄者 富而不通者 貧而驕强者 愚以責人者 强以責人者 右八條朞年損徒而元日招辭懲罪役受宴赦身事年少者未許座而罰四十度後許本座事
一 元非治鄕之人 內外無咎 有志懸望 有操行卓異者 僉議叅鄕許入事 限朞損者 改過則還入時 招辭捧上 齊馬首 間年高者 降三座 年少者末座 行罰禮後 還本座 限半期損者 降一等依例施行

쪽수▶P94-2

一 部民告訐者 妻妾相關者 妻族不明者 族屬通奸者 操弄官長者 身犯奸盜者 婦女失行者 濁亂家門者 右八條永爲削籍事
一 偷罪受刑者 非理好訟者 收歛作弊者 陰毀族親者 陰毀本所者 陰毀同列者 汚染鄕風者 胥吏爾予者 右八條限己身損徒事
一 疎薄正妻者 賤人交結者 長立訟庭者 訟事退步者 同列相關者 衣冠不正者 不明外戚者土主外論者 右八條永爲棄身事
一 凌慢齒上者 恃富輕貧者 凌蔑齒下者 恃强凌弱者 不顧本所者 僉親埋沒者 鄕叅不合者 吝貪殘列者 右八條當身不用而勿棄子孫事
一 己身傭役者 詰友擧痕者 齒上據坐者 座中戲弄者 富而不通者 貧而驕强者 愚以責人者 强以責人者 右八條朞年損徒而元日招辭懲罪役受宴赦身事年少者未許座而罰四十度後許本座事
一 元非治鄕之人 內外無咎 有志懸望 有操行卓異者 僉議叅鄕許入事 限朞損者 改過則還入時 招辭捧上 齊馬首 間年高者 降三座 年少者末座 行罰禮後 還本座 限半期損者 降一等依例施行

그리고 효령대군인물보(補)는 앞서 쓴 태조 친제 헌목 외에 다시 선목 21조와 악목 35조를 제정하여 전자를 보증하였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쪽수▶P95-1그리고 孝寧大君 補는 前記 太祖親製 憲目 外에 다시 善目 二十一條와 惡目 三十五條를 制定하야 前者를 補增하였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父母孝養 土主尊敬 夫妻和順 男女有別 少長有序 朋友有信 喪祭誠敬 隣里和同 敬老慈幼 學書通古 患難相救 婚姻相助 臨亂執節 官事勤儉 受人寄托 持身廉謹 見善必行 聞過必改 務農節用 田畔相讓 學書習武
右二十一條善目
父母不孝 疎薄正妻 妻妾背夫 土主不敬 男女無別 朋友不信 兄弟不和 隣里不睦 患難不救 竊人妻妾 婚姻不助 盜賊害物 喪祭不謹 官員欺罔 官事不勤 寄托不受 無故闕防 好訴行讒 旅師弄權 妓生作妾 爭鬬相殘 奸吏作弊 賄賂于請 以强凌弱 以少凌長 賤人結友 以賤凌貴 行己無恥 以惡凌善 憑公營私 冠服無章 田畔相侵 知非謬擧 挾私論人 惰農虛費
우(右) 35조 악목

쪽수▶P95-2

父母孝養 土主尊敬 夫妻和順 男女有別 少長有序 朋友有信 喪祭誠敬 隣里和同 敬老慈幼 學書通古 患難相救 婚姻相助 臨亂執節 官事勤儉 受人寄托 持身廉謹 見善必行 聞過必改 務農節用 田畔相讓 學書習武
右二十一條善目
父母不孝 疎薄正妻 妻妾背夫 土主不敬 男女無別 朋友不信 兄弟不和 隣里不睦 患難不救 竊人妻妾 婚姻不助 盜賊害物 喪祭不謹 官員欺罔 官事不勤 寄托不受 無故闕防 好訴行讒 旅師弄權 妓生作妾 爭鬬相殘 奸吏作弊 賄賂于請 以强凌弱 以少凌長 賤人結友 以賤凌貴 行己無恥 以惡凌善 憑公營私 冠服無章 田畔相侵 知非謬擧 挾私論人 惰農虛費
右三十五條惡目

이라 하여 태조인물친제의 향헌목 41조와 효령대군인물보(補)가 증제한 향헌 56조는 태조인물7년 4월 8일에 이르러 “豐沛邑鄕錄案”이라는 명목으로 성책하게 되어, 이후 그 지방에서 준봉 실시하게 되었으나, 그때 효령대군인물보(補)가 지은 「선향헌목서」원고에 의하면
쪽수▶P95-3이라 하야 太祖親製의 鄕憲目 四十一條와 孝寧大君 補의 增製한 鄕憲五十六條는 太祖 七年 四月 八日에 이르러 「豐沛邑鄕錄案」이라는 名目으로 成册케 되여, 以後 그 地方에서 遵奉 實施하게 되었으나, 그때 孝寧大君 補가 지은 「璿鄕憲目序」에 依하면

현대문주8▶太祖之經營 未滿三禩 化家爲國 而改本鄕邑曰永興豐沛之館 而周之豳邰漢之豐沛鄕故 戊寅夏四月八日 臣愚至誠奉 旨著書憲目曰豐沛邑鄕錄案 實邑之重器 紀綱之先務也 誰不敬歟 誰不重歟 誰不施乎 以此案義正法然後 傳旨據召 沛邑鄕才子士池士善孔聖裔元月春三人等授案侍駕 催率之還鄕 以一無違案正式之法 左之于書 以此意 頒置列邑 永 久遵行事幸甚幸甚[a 8]

쪽수▶P95-4

원문주8▶太祖之經營 未滿三禩 化家爲國 而改本鄕邑曰永興豐沛之館 而周之豳邰漢之豐沛鄕故 戊寅夏四月八日 臣愚至誠奉 旨著書憲目曰豐沛邑鄕錄案 實邑之重器 紀綱之先務也 誰不敬歟 誰不重歟 誰不施乎 以此案義正法然後 傳旨據召 沛邑鄕才子士池士善孔聖裔元月春三人等授案侍駕 催率之還鄕 以一無違案正式之法 左之于書 以此意 頒置列邑 永▶P96-1久遵行事幸甚幸甚[8]

이라 하여 이 향헌서적이 그 지방에 있어서는 읍의 중기(重器)며 기강의 선무가 될 것을 기(期)하였다. 이 향헌서적은 곧 함흥 지방에 반포되어 실시하도록 하였을 것이나, 그 후 태종인물9년에 이르러는 효령대군인물 보(補)를 비롯하여 원훈 있는 종척과 덕망이 융저(隆著)한 자 56인(예를 들면 우의정 최윤덕인물 청해백 이지란인물 생원 이흥양인물 유학 김숙손인물 등)으로써 풍패향 좌목을 조직하여 이 향헌의 실시를 독려하게 하였다. 즉 이 향헌을 향간에 잘 시행하도록 지도하며 독려하는 기관으로서는 품관으로써 조직된 좌목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 좌목은 곧 앞서 말한바 유향소의 품관과 동질의 것이므로, 따라서 양자는 용이하게 결합하여 전자는 후자의 존재로 인하여 널리 준봉 실시되고, 후자는 전자의 철저한 실행에서 결성될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다. 앞서 든 「선향헌목서」원고 중에도 “以此意 頒置列邑 永久遵行”이라는 문구가 있음으로 보아, 이 향헌서적은 비단 함흥 지방에만 실시하게 하고 한 것이 아니라, 널리 전체 도(道) 여러 고을에도 반치(頒置)하여 준행하게 하고자 한 것이 애초의 의도였으니, 만약 그것이 처음의 이상대로만 실행되었다 하면, 그것은 국초(國初)부터 조직되어 있던 유향소에 의하여 용이하게 채용되어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규정(糾正)하는 데 준거가 되었을 것이며, 종래 유향소가 없던 곳에서는 이 향헌서적의 준행을 계기로 하여 향리품관들을 결속시켜 한 개의 자치단체를 조직케 하여 유향소의 지방화를 결과하였을 것이다. 향헌서적의 내용을 검토함은 장황하여지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하나 그것이 후세 향약의 근본 강목인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4강목과 상합되는 점이 많음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쪽수▶P96-2이라 하야 이 鄕憲이 그 地方에 있어서는 邑의 重器며 紀綱의 先務가 될 것을 期하였다. 이 鄕憲은 곧 咸興 地方에 頒布되여 實施하도록 하였을 것이나, 그 후 太宗 九年에 이르러는 孝寧大君 補를 비롯하야 元勳있는 宗戚과 德望이 隆著한 者 五十六人(例하면 右議政 崔潤德 靑海伯 李之蘭 生員 李興陽 幼學 金叔孫 等)으로써 豐沛鄕 座目을 組織하야 이 鄕憲의 實施를 督勵케 하였다. 즉 이 鄕憲을 鄕間에 잘 施行하도록 指導하며 督勵하는 機關으로서는 品官으로써 組織된 座目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 座目은 곧 앞서 말한바 留鄕所의 品官과 同質의 것이므로, 따라서 兩者는 容易히 結合하야 前者는 後者의 存在로 因하야 널리 遵奉 實施되고, 後者는 前者의 徹底한 實行에서 結成될 可能性이 많었든 것이다. 前揭 「璿鄕憲目序」 中에도 「以此意 頒置列邑 永久遵行」이라는 文句가 있으므로 보아, 이 鄕憲은 비단 咸興 地方에만 實施하게 하고 한 것이 아니라, 널리 全道 列邑에도 頒置하야 遵行케 하고저 한 것이 애초의 意圖이였으니, 만약 그것이 처음의 理想대로만 實行되였다 하면, 그것은 國初부터 組織되여 있든 留鄕所에 依하야 容易히 採用되여 鄕吏를 糾察하고 鄕風을 糾正하는 데 準據가 되였을 것이며, 從來 留鄕所가 없든 곳에서는 이 鄕憲의 遵行을 契機로 하야 鄕里品官들을 結束시켜 한 개의 自治團體를 組織케 하여 留鄕所의 地方化를 結果하였을 것이다. 鄕憲의 內容을 檢討함은 장황하여지므로 이곳에서는 省略하나 그것이 後世 鄕約의 根本 綱目인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의 四綱目과 相合되는 點이 많음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상술한 바와 같은 모든 조건이 서로 엉클어져서 이조 초기 사회에 유향소라는 독특한기관을 산출하게 하였으나, 이 유향소는 이미 논한 바와 같이 태종 6년 6월 정묘에 이르러 대사헌 허응인물등의 상책에 의하여 혁거될 운명에 봉착하였다. 이때 왕도 의정부의 의의(擬議)를 얻어 이 파혁안에 종(從)하였으나, 사실상 어느 정도까지 실행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설사 국령으로써 철저한 혁거를 명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외면상의 일에 끌었을 것이요, 실질상에 있어서는 지방에 완강히 버티고 있는 품관의 세력이 없어지지 않는 한, 유향소의 원태(原態)도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유향소 혁거령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이로부터 23년 후인 세종인물10월 6일에 이르러는 유향소의 복설을 명하였다. 그때 올린 예조인물의 계목에도
쪽수▶P96-3上述한 바와 같은 모든 條件이 서로 엉크러져서 李朝 初期 社會에 留鄕所라는 獨特한機關을 產出하게 하였으나, 이 留鄕所는 己述한 바와 같이 太宗 六年 六月 丁卯에 이르러 大司憲 許應 等의 上策에 依하여 革去될 運命에 逢着하였다. 이때 王▶P97-1도 議政府의 擬議를 얻어 이 罷革案에 從하였으나, 事實上 어느 程度까지 實行되였는지는 疑問이다. 설사 國令으로써 徹底한 革去를 命하였다 하드라도, 그것은 外面上의 일에 끌었을 것이요, 實質上에 있어서는 地方에 頑强히 버티고 있는 品官의 勢力이 없어지지 않는 限, 留鄕所의 原態도 자취를 감추지는 않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國家는 留鄕所 革去令의 無意味함을 깨닷고 이로부터 二十三年 後인 世宗 十月 六日에 이르러는 留鄕所의 復設을 命하였다. 그때 올인 禮曹의 啓目에도

奉承傳 各道各官留鄕所復設爲乎矣 因緣作弊品官乙良 痛繩以法爲只爲 禮曹傳致爲良如敎乎等乙用良 向前留鄕所作弊禁防節目乙磨鍊 啓目後錄爲去乎使內何如

쪽수▶P97-2

奉承傳 各道各官留鄕所復設爲乎矣 因緣作弊品官乙良 痛繩以法爲只爲 禮曹傳致爲良如敎乎等乙用良 向前留鄕所作弊禁防節目乙磨鍊 啓目後錄爲去乎使內何如

라고 있어, 당시 국가도 유향소의 작폐를 완연히 지찰(知察)하면서도 사세부득이 그것의 복설을 마련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 것 같으니, 이것은 유향소의 절대한 위세에 견제되어 일시의 국령으로서는 좌우할 바 못됨을 알고, 그나마 그의 존속을 이용하여 악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위정자의 궁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종래 하등의 제한도 없던 유향소 품관의 원수(員數)를 부(府) 이상은 5인 군은 4인 현은 3인으로 정하고, 또 그들의 감독기관으로 각 관수령 및 경재소를 선정한 일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 없이 국초부터 지방사류들 사이에 사적으로 설치된 유향소를 중앙정치기관화하여, 그들의 완고한 세력을 삭감하고 탄압하여,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행정규찰 지방자치의 임세(任勢)만을 이행하게 하고자 한 정책의 결과이다. 즉 유향소는 거듭 논한 바와 같이 국초에는 다못 지방사류들 사이에 사적으로 조직된 한 개의 자치기관에 지나지 않았었으나, 이것이 세종인물조(朝)에 이르러 모든 문물제도가 완비되고 조직화함을 따라 행정기구의 하나로 편입되어 규율화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쪽수▶P97-3라고 있어, 當時 國家도 留鄕所의 作弊를 宛然히 知察하면서도 事勢不得已 그것의 復設을 磨鍊치 아니치 못하게 된 것 같으니, 이것은 留鄕所의 絕對한 威勢에 牽制되여 一時의 國令으로서는 左右할배 못됨을 알고, 그나마 그의 存續을 利用하야 惡吏를 糾察하고 鄕風을 바르게 하고저 하는 爲政者의 窮策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注目할 것은 從來 何等의 制限도 없든 留鄕所 品官의 員數를 府 以上은 五人 郡은 四人 縣은 三人으로 定하고, 또 그들의 監督機關으로 各 官守令 及 京在所를 選定한 일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 없이 國初부터 地方士類들 사히에 私的으로 設置된 留鄕所를 中央政治機關化하야, 그들의 頑固한 勢力을 削減하고 彈壓하야,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行政糾察 地方自治의 任勢만을 履行케 하고저 한 政策의 結果이다. 즉 留鄕所는 累說한 바와 같이 國初에는 다못 地方士類들 사히에 私的으로 組織된 한 개의 自治機關에 지나지 않았었으나, 이것이 世宗朝에 이르러 모든 文物制度가 完備되고 組織化함을 따라 行政機構의 하나로 編入되여 規律化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세종인물조(朝)에 이르러 유향소의 복설을 국령으로써 전국에 명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향소의 보편화를 꾀한 것이니, 이로써 유향소는 전국 각지에 설치됨을 보게 되고 이것은 세조인물조(朝)에 이르러 정치사(政治史)상 중대한 역할을 하게까지 되었다. 즉 세조 12년에 함길도(함경도) 지방에서 소위 이시애난사건(亂)이라는 모반사건이 일어나게 되자, 이 유향소는 애초에는 본(本) 반란을 유도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게 되고, 나중에는 이것을 진정하는 유력한 통제력이 되게 되었다. 이시애인물는 원래 길주인으로 회령 절제사까지 지내다가 조상(遭喪)하여 고향에 퇴거하던 중, 동생 시합인물(施合)과 더불어 부동을 꾀하여 세조인물12년 5월에 이르러 드디어 반주(叛族)를 휘날리며 절제사 강효문인물(康孝文)을 박살한 것을 비롯하여 함길도 관찰사 신비인물(申淝) 및 각 읍 수령 등을 살해하여 짧은 시일 동안에 함흥 이북의 주현을 규합하게 되었다. 이시애인물가 반란을 일으킨 주요 원인은 세조인물왕의 불의의 즉위와 다른 도 사람을 본도 방백 및 수령으로 임함을 반대함에 있었으나, 그의 음모가 그다지 짧은 사이에 함경 1도를 풍미할 만큼 큰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은 그가 휴직관리의 결합체인 유향소를 좋도록 이용한 까닭이다. 즉 이시애인물는 반란을 일으키자 곧 함흥 북청 등지의 유향소에 이문(移文)하여,
쪽수▶P98-1世宗朝에 이르러 留鄕所의 復設을 國令으로써 全國에 命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留鄕所의 普遍化를 꾀한 것이니, 이로써 留鄕所는 全國 各地에 設置됨을 보게 되고 이것은 世祖朝에 이르러 政治史上 重大한 役割을 하게까지 되였다. 즉 世祖 十二年에 咸吉道(咸鏡道) 地方에서 所謂 李施愛亂이라는 謀叛事件이 일어나게 되자, 이 留鄕所는 애초에는 本 叛亂을 誘導하는 重要한 原動力이 되게 되고, 나종에는 이것을 鎭定하는 有力한 統制力이 되게 되었다. 李施愛는 元來 吉州人으로 會寧 節制使까지 지내다가 遭喪하야 故鄕에 退居하든 中, 其弟 施合과 더부러 不動를 꾀하야 世祖 十二年 五月에 이르러 드디여 叛族를 휘날리며 節度使 康孝文을 撲殺한 것을 비롯하야 咸吉道 觀察使 申淝 及 各 邑 守令 等을 殺害하야 短時日 동안에 咸興 以北의 州郡을 糾合케 되였다. 李施愛가 叛亂을 이르킨 主要 原因은 世祖 王의 不義의 即位와 他道人을 本道 方伯 及 守令으로 任함을 反對함에 있었으나, 그의 陰謀가 그다지 짧은 사히에 咸鏡 一道를 風靡할 만치 큰 成果를 거두게 된 것은 그가 休職官吏의 結合體인 留鄕所를 좋도록 利用한 까닭이다. 즉 李施愛는 叛亂을 일으키자 곧 咸興 北靑 等地의 留鄕所에 移文하야,

현대문주9▶新觀察使申㴐 乃亂臣叔舟之子 亦是姦黨 彼若徵兵 可卽殺之
康孝文 軍官玄得利供辭云 孝文與黃起崐申叔舟韓明澮等 謀反領兵 出兵北靑已被誅殺 但慮起崐自知其罪 聚兵構亂 故移文北靑留鄕所 使之追捕 况申㴐亦是姦黨 如有徵兵之事 須即剪除 且徵定平以南諸邑兵 設伏於閑曠之地 侍令[a 9]

쪽수▶P98-2

원문주9▶新觀察使申㴐 乃亂臣叔舟之子 亦是姦黨 彼若徵兵 可卽殺之
康孝文 軍官玄得利供辭云 孝文與黃起崐申叔舟韓明澮等 謀反領兵 出兵北靑已被誅殺 但慮起崐自知其罪 聚兵構亂 故移文北靑留鄕所 使之追捕 况申㴐亦是姦黨 如有徵兵之事 須即剪除 且徵定平以南諸邑兵 設伏於閑曠之地 侍令[9]

이라 하여 지방의 유력자인 유향품관들의 동의 및 원조를 얻어 그의 모반을 유리하게 전개하도록 하였다. 종래 지방의 실권을 잡고 권세를 부려오던 유향품관들은 이조 개국 이래의 중앙집권주의에 의한 전제정치에 반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에 무조건으로 부화뇌동하여 마침내 큰일을 저질러 놓았으나, 그 후 얼마 아니되어 중앙정부의 교서와 출병으로 말미암아 귀복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당시 중앙정부로부터 여러 고을 유향품관들에게 내린 교서를 보면
쪽수▶P98-3이라 하야 地方의 有力者인 留鄕品官들의 同意 及 援助를 얻어 그의 謀反을 有利하게 展開하도록 하였다. 從來 地方의 實權을 잡고 權勢를 부려오든 留鄕品官들은 李朝 開國 以來의 中央集權主義에 依한 專制政治에 反感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에 無條件으로 附和雷同하야 마침내 큰일을 저즐러 놓았으나, 그 후 얼마 아니되여 中央政府의 敎書와 出兵으로 말미아마 歸▶P99-1服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當時 中央政府로부터 諸邑 留鄕品官들에게 내린 敎書를 보면

현대문주10▶李施愛詐稱有密旨 殺害康孝文黃起崐申㴐及守令軍官等 爾等曉諭軍民 使明知順逆 捕施愛待龜城君浚處置
諭咸興留鄕所 李施愛反狀明白 誑誘汝等 汝等何故 從逆賊殺王人 此古今大惡 天地鬼神之所不容 今已遣龜城君浚摠 四道兵件討 予親將大兵繼之 尙慮汝等脅從 不知眞僞 若大兵一加 玉石俱焚 姑令浚按兵不動 以待駕至 先遣諭書 曉諭利害 使汝等終不陷於賊黨 汝等猶不改悟 執迷不返則予必屠城礁類無道矣 汝等如欲更生 其速放尹子雲捕李施愛 以贖前過 飜禍爲福[a 10]

쪽수▶P99-2

원문주10▶李施愛詐稱有密旨 殺害康孝文黃起崐申㴐及守令軍官等 爾等曉諭軍民 使明知順逆 捕施愛待龜城君浚處置
諭咸興留鄕所 李施愛反狀明白 誑誘汝等 汝等何故 從逆賊殺王人 此古今大惡 天地鬼神之所不容 今已遣龜城君浚摠 四道兵件討 予親將大兵繼之 尙慮汝等脅從 不知眞僞 若大兵一加 玉石俱焚 姑令浚按兵不動 以待駕至 先遣諭書 曉諭利害 使汝等終不陷於賊黨 汝等猶不改悟 執迷不返則予必屠城礁類無道矣 汝等如欲更生 其速放尹子雲捕李施愛 以贖前過 飜禍爲福[10]

이라고 있으니, 이와 같이 중앙정부가 역적을 무력으로써 토벌하기 전에 교유로써 진평하고자 한 것은 지방에 반거한 유향품관들의 노력을 몹시 두려워하여, 그들을 평화적으로 진무하여 회개하게 함으로써 반역자의 두괴인 이시애인물일당을 가장 효과적으로 소탕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 지방의 유향품관들은 이러한 국가의 교서에 종시 불청할 수 없어, 함흥 유향품관 윤극검인물등 14인은 서명한 사목(事目)을 올리는 동시에 회계하여
쪽수▶P99-3이라고 있으니, 이와 같이 中央政府가 逆賊을 武力으로써 討伐하기 前에 敎諭로써 鎭平코저 한 것은 地方에 盤據한 留鄕品官들의 努力을 몹시 두려워하야, 그들을 平和的으로 鎭撫하야 悔改하게 함으로써 叛逆者의 頭魁인 李施愛 一黨을 가장 效果的으로 掃蕩코저 한 것에 不過하다. 地方의 留鄕品官들은 이러한 國家의 敎書에 終始 不聽할 수 없어, 咸興 留鄕品官 尹克儉 等 十四人은 署名한 事目을 올리는 同時에 回啓하야

현대문주11▶民心未知順逆 一信李施愛之言 臣開諭百端 群疑少解 然尙疑浚及許琮爲賊 臣懇惻譬曉 皆曰然則 汝通施愛 速令來謁 臣遂通書 又欲釋尹子雲 偕來反覆開諭不聽[a 11]

쪽수▶P99-4

원문주11▶民心未知順逆 一信李施愛之言 臣開諭百端 群疑少解 然尙疑浚及許琮爲賊 臣懇惻譬曉 皆曰然則 汝通施愛 速令來謁 臣遂通書 又欲釋尹子雲 偕來反覆開諭不聽[11]

이라고 하여 민정의 완경(頑梗)함을 상달(上達)하여, 유향소의 무능함을 자소(自訴)하게 되어, 국가로 하여금 그의 폐혁을 논의하게까지 하였다. 즉 일설에는 유향소는 이시애난사건의 돌발 후 국령으로써 혁거되었다고 전하나, 정확한 사료를 얻지 못한 나로서는 이를 확론하기 어려우며, 당시 함길도 절도사 허종인물(許琮)의 계서에
쪽수▶P99-5이라고 하야 民情의 頑梗함을 上達하야, 留鄕所의 無能함을 自訴하게 되여, 國家로 하여금 그의 廢革을 論議하게까지 하였다. 즉 一說에는 留鄕所는 李施愛亂의 突發 後 國令으로써 革去되였다고 傳하나, 正確한 史料를 얻지 못한 나로서는 이를 確論키 어려우며, 當時 咸吉道 節度使 許琮의 啓書에

현대문주12▶諸邑留鄕所 承施愛移文 凡言姦黨者 雖守令或殺或囚 臣意以爲留鄕所之事 亦未爲非 凡謀反者 人得而誅之 道內無節度使觀察使 唯聽施愛之語 彼云某是姦黨 則孰有致意哉 臣於所經諸邑招留鄕所 以此意面諭之 且曰施愛移文終雖無實 汝等有何罪焉 反覆告諭 然未知實聽與否[a 12]

쪽수▶P99-6

원문주12▶諸邑留鄕所 承施愛移文 凡言姦黨者 雖守令或殺或囚 臣意以爲留鄕所之事 亦未爲非 凡謀反者 人得而誅之 道內無▶P100-1節度使觀察使 唯聽施愛之語 彼云某是姦黨 則孰有致意哉 臣於所經諸邑招留鄕所 以此意面諭之 且曰施愛移文終雖無實 汝等有何罪焉 反覆告諭 然未知實聽與否[12]

라고 있어 유향소의 비(非)를 부정하고, 또 다음 해 13년 2월에는 세조인물친히 온양 행궁에 행(幸)하여 유향소 장무 살해의 옥사를 의논한 것으로 보아 세조 왕 때에 전국적으로 유향소의 폐지를 명하였는지도 의문이다. 설사 세조 때에 유향소의 혁거를 명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표면적인 법상의 일에 그쳤을 것이요, 내용에 있어서는 잘 실행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동북 방면 유향소의 완강한 세력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태조 때에 실시한 향헌에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쪽수▶P100-2라고 있어 留鄕所의 非를 否定하고, 또 翌 十三年 二月에는 世祖 親히 溫陽 行宮에 幸하야 留鄕所 掌務 殺害의 獄事를 議한 것으로 보아 世祖王時에 全國的으로 留鄕所의 廢止를 命하였는지도 疑問이다. 설사 世祖 때에 留鄕所의 革去를 命하였다 하드라도 그것은 極히 表面的인 法上의 일에 끄쳤을 것이요, 內容에 있어서는 잘 實行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東北 方面 留鄕所의 頑强한 勢力은 己述한 바와 같이 太祖時에 實施한 鄕憲에서 由來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유향소는 이와 같이 세조인물조(朝)에 이르러 이미 지방의 유력한 세력단체로 되어 정치적 동란의 중심 기관이 되게 되었으나, 그 후 이러한 폐풍은 점점 심해져 성종인물21년 11월 무술의 사간 권경우인물(權景祐)의 상계(上啓)에도
쪽수▶P100-3留鄕所는 이와 같이 世祖朝에 이르러 이미 地方의 有力한 勢力團體로 化하야 政治的 動亂의 中心 機關이 되게 되였으나, 그 후 이러한 弊風은 漸漸 甚하여저 成宗 二十一年 十一月 戊戌의 司諫 權景祐의 上啓에도

현대문주13▶國家設立留鄕所者 欲使糾正鄕風也 今之留鄕品官 不務糾正風俗 徒事立威鄕曲 以濟其私 非徒無益 適足爲害 請革之[a 13]

쪽수▶P100-4

원문주13▶國家設立留鄕所者 欲使糾正鄕風也 今之留鄕品官 不務糾正風俗 徒事立威鄕曲 以濟其私 非徒無益 適足爲害 請革之[13]

라고 있어 유향소가 향풍규정의 본의를 벗어나 입위(立威)의 기관으로 변했음을 논하여 그의 파혁을 청하였다. 성종인물은 영사 홍응인물(洪應)의 제의에 좇아 세조인물조(朝) 혁거 후 복설하였음이 불구(不久)하다 하여 거혁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로써 이후 유향소는 더욱 세력을 펴게 되어, 성종인물25년 5월 을사에는 경상도 사천 유향소 조경무인물(曹敬武) 등이 현학 훈도 오경의 유임운동을 일으켜 관찰사 이극군인물을 통하여 왕께 훈계하게 하여, 종래의 임무인 향리검찰에서 한걸음 나와 학관의 파임에까지 용훼하게 되었다. 증보문헌비고서적를 보면 이보다 먼저 성종인물20년 봄에 유향소를 개혁하여 향정을 세워 연로하고 덕망이 높은 자를 좌수라 칭하고 그 다음 가는 자를 별감이라 칭하여, 주부(州府)는 5원 군은 4원 현은 3원으로 정하되 향중의 문학재행이 구비한 자를 택한다 하였으니, 이것도 상술한 바와 같은 유향소의 폐해를 하고자 한 위정자의 고안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점으로 보아 성종인물조(朝)에 유향소를 복설하였다 함은 그 실인즉 유향소의 퇴락을 우려하여 역원을 경질함으로써 향풍규정의 임무를 엄행(嚴行)하게 하고자 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종인물25년에 지은 홍문관 교리 권오복인물예천향사당기원고[a 14]에는
쪽수▶P100-5라고 있어 留鄕所가 鄕風糾正의 本義를 버서나 立威의 機關으로 變하여젔음을 論하야 그의 罷革을 請하였다. 成宗은 領事 洪應의 提議에 좇아 世祖朝 革去 後 復設하였음이 不久하다 하야 遽革을 許치 않었으니, 이로써 以後 留鄕所는 더욱 勢力을 펴게 되여, 成宗 二十五年 五月 乙巳에는 慶尙道 泗川 留鄕所 曹敬武 等이 縣學 訓導 吳璟의 留任運動을 일으켜 觀察使 李克均을 通하야 王께 勳啓케 하야, 從來의 任務인 鄕吏檢察에서 한거름 나와 學官의 罷任에까지 容喙케 되였다. 增補文獻備考를 보면 이보다 몬저 成宗 二十年 春에 留鄕所를 改革하야 鄕正을 세워 年老하고 德望이 높은 者를 座首라 稱하고 그 次가는 者를 別監이라 稱하야, 州府는 五員 郡은 四員 縣은 三員으로 定하되 鄕中의 文學才行이 具備한 者를 擇한다 하였으니, 이것도 上述한 바와 같은 留鄕所의 弊害를 하고저 한 爲政者의 考案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點으로 보와 成宗朝에▶P101-1 留鄕所를 復設하였다 함은 그 實인즉 留鄕所의 頹落을 憂慮하야 役員을 更迭함으로써 鄕風糾正의 任務를 嚴行케 하고저 함에 지나지 않었을 것이다. 成宗 二十五年에 作한 弘文館 校理 權五福의 원문주14▶醴泉鄕射堂記[14]에는

我殿下即位之戊申 令所在復立留鄕所 有座首別監焉 推年德高者 謂之座首 其次稱別監 糾管一鄕風俗 所員府四人郡 三縣二 吾鄕郡也 尹侯季殷權侯推爲別監 而家君爲座首

쪽수▶P101-2

我殿下即位之戊申 令所在復立留鄕所 有座首別監焉 推年德高者 謂之座首 其次稱別監 糾管一鄕風俗 所員府四人郡 三縣二 吾鄕郡也 尹侯季殷權侯推爲別監 而家君爲座首

라고 있어 유향소 사람 수가 앞서 쓴 인수보다 1인씩 부족하나, 이것은 별문제로 돌리고 이로써 좌수는 1인으로 유향소의 최고 지도자이며 별감은 부 군 현에 따라 4인 3인 2인씩으로 좌수를 보조하여 향풍규정의 임무를 담당하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이 좌수 별감의 임기 등에 대하여는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이 제도는 경재소 및 후술하는 사마소에서도 그대로 채용되어 그들의 두령을 모두 좌수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천향사당기원고에는 다시
쪽수▶P101-3라고 있어 留鄕所 員數가 前記 人數보다 一人式 不足하나, 이것은 別問題로 돌리고 이로써 座首는 一人으로 留鄕所의 最高 指導者이며 別監은 府 郡 縣에 따라 四人 三人 二人식으로 座首를 補助하야 鄕風糾正의 任務를 擔當하는 者임을 알 수 있다. 이 座首 別監의 任期 等에 對하야는 詳細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이 制度는 京在所 及 後述하는 司馬所에서도 그대로 採用되여 그들의 頭領을 모다 座首라고 稱하게 되였다. 그리고 醴泉鄕射堂記에는 다시

今之留鄕所 即古黨正之遺意也 鄕有頑嚚自恣不孝悌不睦不姻不任恤者 此堂得以議之 史有包藏奸慝憑假城社侵漁百姓者 此堂得以議之 推周官三物之敎 行汝南月朝之評 以礪一鄕之風俗者 亦莫不於堂焉

쪽수▶P101-4

今之留鄕所 即古黨正之遺意也 鄕有頑嚚自恣不孝悌不睦不姻不任恤者 此堂得以議之 史有包藏奸慝憑假城社侵漁百姓者 此堂得以議之 推周官三物之敎 行汝南月朝之評 以礪一鄕之風俗者 亦莫不於堂焉

이라 있고, 김일손인물현대문주15▶金海會老堂記[a 15]에도 대략 동양(同樣)의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유향소는 점점 자치조직화하여 가 후세의 이른바 향약의 정신과 상근(相近)하여 갔음을 알 수 있다.
쪽수▶P101-5이라 있고, 金馹孫의 원문주15▶金海會老堂記[15]에도 大略 同樣의 記事가 있는 것으로 보아, 留鄕所는 漸漸 自治組織化하여 가 後世의 이른바 鄕約의 精神과 相近하여 갔음을 알 수 있다.
이조의 모든 문물제도가 성종 이후 이완하여 갔음과 같이 유향소도 이때부터 더욱 부패하여가기 시작하여, 유향소는 점차 향풍규관의 본의를 잊어버려 오로지 야심을 품은 악의 무리의 집합소로 변하여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종인물연산군인물이 즉위하자 그 원년 5월 경술에는 충청도 도사(都事) 김일손인물이 곧 근조이병(謹條利病) 26사(事)를 상소하여, 그 1조에서
쪽수▶P101-6李朝의 모든 文物制度가 成宗 以後 弛緩하여 갔음과 같이 留鄕所도 이때부터 더욱 腐敗하여가기 시작하야, 留鄕所는 漸次 鄕風糾管의 本意를 잊어바려 오로지 野心을 품은 惡輩의 集合所로 變하여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成宗 後 燕山君이 即位하자 그 元年 五月 庚戌에는 忠淸道 都事 金馹孫이 곧 謹條利病 二十六事를 上䟽하야, 그 一條에서

현대문주16▶責留鄕以礪風俗 國家於留鄕 建革不一議者紛紛 而先王卒置之者 以其窮村僻鄕 監司守令所不及知之 善惡皆得以糾▶P102-1擧也 有古閭師族師之遺意焉 今但與邑吏爲敵 發摘其弘 徴贖以拚一遊耳 其於鄕風 邈然無正 且鄕射鄕飲養老等禮所 以別淑慝 而成禮俗也 著在令甲 而俗吏慢不擧行 臣願三年之後 以此等事責留鄕 以時告守令而行之 凡一鄕之人無問貴賤 孝友睦姻 一善可記者齒之 其惡者不齒 善之大者 告守令報監司以旌 異之惡之大者 亦報監司 用周制移遂移郊之法 如干名敎 但犯杖以上 皆充入居 勒令入居 只取富實元無一罪 何惜有罪者乎 憲府督責京在所 交察鄕風 鄭員有不擧職者 則痛治 亦化民成俗之一端也[a 16]

쪽수▶P101-7

원문주16▶責留鄕以礪風俗 國家於留鄕 建革不一議者紛紛 而先王卒置之者 以其窮村僻鄕 監司守令所不及知之 善惡皆得以糾▶P102-1擧也 有古閭師族師之遺意焉 今但與邑吏爲敵 發摘其弘 徴贖以拚一遊耳 其於鄕風 邈然無正 且鄕射鄕飲養老等禮所 以別淑慝 而成禮俗也 著在令甲 而俗吏慢不擧行 臣願三年之後 以此等事責留鄕 以時告守令而行之 凡一鄕之人無問貴賤 孝友睦姻 一善可記者齒之 其惡者不齒 善之大者 告守令報監司以旌 異之惡之大者 亦報監司 用周制移遂移郊之法 如干名敎 但犯杖以上 皆充入居 勒令入居 只取富實元無一罪 何惜有罪者乎 憲府督責京在所 交察鄕風 鄭員有不擧職者 則痛治 亦化民成俗之一端也[16]

라고 하여 퇴락된 유향소를 갱생하여 향풍규정의 임무를 다하게 하고자 감독자인 감사수령 및 경재소로 하여금 그들을 독책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 헌책이 곧 채용되었는지는 불명하나, 하여튼 유향소의 퇴폐가 오랜 세월을 거듭하는 동안에 빚어진 일이니만큼 이러한 일시의 안책(案策)으로 쉽게 만회되었을까 싶지 않아, 연산군 4년 8월 계유에 유자광인물
쪽수▶P102-2라고 하야 頽落된 留鄕所를 更生하야 鄕風糾正의 任務를 다하게 하고저 監督者인 監司守令 及 京在所로 하여금 그들을 督責케 하기를 請하였다. 이 獻策이 곧 採用되였는지는 不明하나, 何如튼 留鄕所의 退廢가 오랜 歲月을 거듭하는 동안에 비저진 일이니많지 이러한 一時의 案策으로 쉽게 挽回되였을가 싶지 않어, 燕山君 四年 八月 癸酉에 柳子光이

현대문주17▶南原咸陽皆臣本貫 故臣親見之 生員進士別立一所 名曰司馬 私相聚集 群飲橫議 於人吏少有不愜 輒鞭撻 留鄕品官 多是老劣 故一邑人吏蔑視留鄕所 反附司馬所 其弊不貲 爲守令者 非徒不能禁之 反給奴婢 以典其所殖穀貨 國家所設留鄕之外 又有此輩私立一所 甚不可……如此之風 宜痛革 請下書八道監司 凡所謂司馬所 一切革罷[a 17]

쪽수▶P102-3

원문주17▶南原咸陽皆臣本貫 故臣親見之 生員進士別立一所 名曰司馬 私相聚集 群飲橫議 於人吏少有不愜 輒鞭撻 留鄕品官 多是老劣 故一邑人吏蔑視留鄕所 反附司馬所 其弊不貲 爲守令者 非徒不能禁之 反給奴婢 以典其所殖穀貨 國家所設留鄕之外 又有此輩私立一所 甚不可……如此之風 宜痛革 請下書八道監司 凡所謂司馬所 一切革罷[17]

라고 계(啓)한 바와 같이 유향소는 오로지 노렬(老劣)한 은퇴자의 소굴로 변해 가고 이것을 대신하여 사마소라는 것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마소는 위의 인용문에도 명시한 바와 같이 지방의 생원 진사들로써 조직된 한 개의 유림(양반)단체니, 이것은 유교문화가 바야흐로 무르녹고 있는 당시에 있어서 신진학도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조직되어야 할 성질의 것으로, 그의 출현은 노렬한 선배들의 집합소인 유향소를 압도하였을 뿐더러 무능한 위정자들에게도 큰 위협적 존재였었다. 그러므로 무오사화사건라는 전고미증유의 유림학살 사건을 일으키게 한 간신 유자광인물은 사건 발생 직후 여하의 상계를 하여 유림단체를 소멸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유교를 준봉하는 이조 사회에서는 유림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하였을 것 같아, 이후도 의연 사마소는 존속하여 유형무형 여러가지의 영향을 이조문화사(史)상에 끼치게 되어, 선조인물 즉위년인 정묘년 10월에 유희춘인물이 중앙관리로 탁용되어 출향하려 할 즈음에도, 은진현 사마소에서 김전개인물생원 김섭인물서경복인물최응삼인물등 9인이 설작(設酌)하여 현대문주18▶송별연을 베풀었다 한다.[a 18] 이리하여 유향소는 사마소의 출현으로 말미암마 쇠퇴하지 아니치 못할 운명에 봉착하여 그는 점차 향풍규정의 본분을 벗어나 민리(民吏)를 침해함으로써 사리를 채우고자 하는 간악한 사류의 집합소나 혹은 경향(京鄕)을 왕래하는 관리의 기숙소로 변하고 말아, 연산군인물6년 9월 기묘의 장령 신숙근인물의 상언에도
쪽수▶P102-4라고 啓한 바와 같이 留鄕所는 오로지 老劣한 隱退者의 巢窟로 化하여저 가고 이것을 代身하야 司馬所라는 것이 出現케 되였든 것이다. 司馬所는 上記文에도 明示한 바와 같이 地方의 生員 進士들로써 組織된 한 개의 儒林(兩班)團體니, 이것은 儒敎文化가 바야흐로 무르녹고 있는 當時에 있어서 新進學徒들 사히에 必然的으로 組織되여야 할 性質의 것으로, 그의 出現은 老劣한 先輩들의 集合所인 留鄕所를 壓倒하였을 뿐더러 無能한 爲政者들에게도 큰 威脅的 存在이였었다. 그러므로 戊午史禍라는 前古未曾有의 儒林虐殺 事件을 일으키게 한 奸臣 柳子光은 事件 發生 即後 如上의 上啓를 하야 儒林團體를▶P103-1 消滅케 하고저 하였으나, 儒敎를 遵奉하는 李朝 社會에서는 儒林이 없어지지 않는 限 그의 理想은 實現되지 못하였을 것 같어, 以後도 依然 司馬所는 存續하야 有形無形 여러가지의 影響을 李朝文化史上에 끼치게 되여, 宣祖 即位年인 丁卯年 十月에 柳希春이 中央官吏로 擢用되여 出鄕하려 할 지음에도, 恩津縣 司馬所에서 金田漑 生員 金爕 徐景福 崔應參 等 九人이 設酌하야 원문주18▶送別宴을 베푸렀다 한다.[18] 이리하야 留鄕所는 司馬所의 出現으로 말미아마 衰退하지 아니치 못할 運命에 逢着하야 그는 漸次 鄕風糾正의 本分을 버서나 民吏를 侵害함으로써 私利를 채우고저 하는 奸惡한 士類의 集合所나 或은 京鄕을 往來하는 官吏의 寄宿所로 變하여지고 말어, 燕山居 六年 九月 己卯의 掌令 申叔根의 上言에도

현대문주19▶各官設留鄕所 京中設京在所 以正風俗今各官吏到京 則多辦食物饋 京在所人員不如意 輒加侵虐……如此弊風 皆可革[a 19]

쪽수▶P103-2

원문주19▶各官設留鄕所 京中設京在所 以正風俗今各官吏到京 則多辦食物饋 京在所人員不如意 輒加侵虐……如此弊風 皆可革[19]

이라고 있어 유향소의 경성 출장소인 경재소가 상경한 지방관리에게 침해됨을 논하였다. 이러한 폐해가 속출함을 따라 유향소의 폐지론도 시시로 대두하게 되어, 중종인물12년 12월 무오에는 서소 입직 정병 최숙징인물이 여러 조(條)의 시무책을 상소하여 그 1조에서
쪽수▶P103-3이라고 있어 留鄕所의 京城 出張所인 京在所가 上京한 地方官吏에게 侵害됨을 論하였다. 이러한 弊害가 續出함을 따라 留鄕所의 廢止論도 時時로 擡頭하게 되여, 中宗 十二年 十二月 戊午에는 西所 入直 正兵 崔淑澄이 數條의 時務策을 上䟽하야 그 一條에서

현대문주20▶各官設立留鄕所京在所者 將以糾正一鄕風俗也 今者非徒不正風俗 而人吏被侵 不無流亡之弊 請於蘇復之間 罷京姑在留鄕所[a 20]

쪽수▶P103-4

원문주20▶各官設立留鄕所京在所者 將以糾正一鄕風俗也 今者非徒不正風俗 而人吏被侵 不無流亡之弊 請於蘇復之間 罷京姑在留鄕所[20]

라고 하여 유향소 경재소의 파혁을 상청하였다. 그러나 이 시무책도 왕의 가납(嘉納)으로 일시시행을 전명하기는 하였으나 이상대로 잘 실행되지 못한 것 같이, 이후도 유향소 경재소는 의연 존속하여, 선조인물즉위년인 정묘 10월 19일에는 은진에 이배(移配)되어 있던 유희춘인물이 중앙관리로 영전하게 되니 당읍 유향품관 전 좌수 손장 첨사 조후 좌수 서질 등 10인이 동헌에서 전송연을 베풀었다 하며, 익년 무진 3월 12일에는 유희춘인물자신이 사간의 관직으로서 담양 경재소의 좌수를 겸하였다 하며, 같은 해 5월 1일에는 유희춘인물이 담양 유향소의 좌수를 최희윤인물으로 현대문주21▶결정하였다고 한다.[a 21] 그 후로 유향소 경재소의 파거론(罷去論)은 조신 간에 주창되어, 선조인물원년 5월 11일에는 장령 이헌국인물
쪽수▶P103-5라고 하야 留鄕所 京在所의 罷革을 上請하였다. 그러나 이 時務策도 王의 嘉納으로 一時施行을 傳命하기는 하였으나 理想대로 잘 實行되지 못한 것 같이, 以後도 留鄕所 京在所는 依然 存續하야, 宣祖 即位年인 丁卯 十月 十九日에는 恩津에 移配되여 있든 柳希春이 中央官吏로 榮轉케 되매 當邑 留鄕品官 前 座首 孫薔 僉使 趙珝 座首 徐秩 等 十人이 東軒에서 餞送▶P104-1宴을 베풀렀다 하며, 翌年 戊辰 三月 十二日에는 柳希春 自身이 司諫의 官職으로서 潭陽 京在所의 座首를 兼하였다 하며, 同年 五月 一日에는 柳希春이 潭陽 留鄕所의 座首를 崔希尹으로 원문주21▶決定하였다고 한다.[21] 그 후로 留鄕所 京在所의 罷去論은 朝臣 間에 主唱되여, 宣祖 元年 五月 十一日에는 掌令 李憲國이

京在所 所以正風俗也 今無識不義之徒 責賂於郡邑之吏 人不能堪 請罷京在所

쪽수▶P104-2

京在所 所以正風俗也 今無識不義之徒 責賂於郡邑之吏 人不能堪 請罷京在所

라고 진언하니, 사간 유희춘인물은 곧 이것을 변명하여
쪽수▶P104-3라고 進言하매, 司諫 柳希春은 곧 이것을 辯明하야

李憲國所言 請罷京在所 蓋見不義作弊之人 慣疾而有是說耳 祖宗朝設立留鄕所 以正風俗 糾察元惡鄕吏也 設立京在所者 所以檢擧關通留鄕所也 留鄕所非其人 則作弊爲民害 甚於京在所 然惡此等之爲害而遂廢之 則是惡水之不潔遂 窒之以出也 其爲矯枉過直甚矣 莫若令守令 察留鄕所之不法 司憲府 察留鄕京在二所之不法 無使縱恣 斯爲得中矣

쪽수▶P104-4

李憲國所言 請罷京在所 蓋見不義作弊之人 慣疾而有是說耳 祖宗朝設立留鄕所 以正風俗 糾察元惡鄕吏也 設立京在所者 所以檢擧關通留鄕所也 留鄕所非其人 則作弊爲民害 甚於京在所 然惡此等之爲害而遂廢之 則是惡水之不潔遂 窒之以出也 其爲矯枉過直甚矣 莫若令守令 察留鄕所之不法 司憲府 察留鄕京在二所之不法 無使縱恣 斯爲得中矣

라고 현대문주22▶진언하여[a 22] 수령 및 사헌부로 하여금 2소를 감찰하게 함으로써 그의 퇴폐를 방지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유향소 경재소는 이조 중기 이후에도 상존하여 반도사회사(史)상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나, 그의 말로가 어찌 되었는가 함은 이곳에서 검토할 겨를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쪽수▶P104-5라고 원문주22▶進言하야[22] 守令 及 司憲府로 하여금 二所를 監察케 하므로써 그의 頹廢를 防止하기를 主張하였다. 이리하야 留鄕所 京在所는 李朝 中期 以後에도 尙存하야 半島社會史上 重大한 役割을 하게 되였으나, 그의 末路가 어찌 되였는가 함은 이곳에서 檢討할 겨를이 없으므로 省略한다.
이상 논술하여 온 바와 같이 유향소는 이조 상반기를 통하여 행정규찰 및 자치단체로서의 면목을 표면상으로라도 유지하여 왔으나, 끝으로 결론적으로 한마디 말하여 둘 것은 이조 중기 초에 이르러 유향소가 부진상태에 빠지자 그를 회복하여 풍속규정의 임무를 완전히 하게 하고자, 그로 하여금 여씨향약을 준봉하여 실시하게 한 일이다. 즉 중종인물14년 7월 기유에 참찬관 한충인물이 계(啓)하여
쪽수▶P104-6以上 論述하여 온 바와 같이 留鄕所는 李朝 上半期를 通하야 行政糾察 及 自治團體로서의 面目을 表面上으로라도 維持하여 왔으나, 끝으로 結論的으로 한마듸 말하여 둘 것은 李朝 中期 初에 이르러 留鄕所가 不振狀態에 빠지자 그를 回復하야 風俗糾正의 任務를 完全히 하게 하고저, 그로 하여금 呂氏鄕約을 遵奉하야 實施하게 한 일이다. 즉 中宗 十四年 七月 己酉에 叅贊官 韓忠이 啓하야

前日 小學已頒給內外官矣 今呂氏鄕約亦可皆給 請並分給於外方留鄕所何如

쪽수▶P104-7

前日 小學已頒給內外官矣 今呂氏鄕約亦可皆給 請並分給於外方留鄕所何如

라고 하니, 왕도 곧 이에 찬성하여
쪽수▶P105-1라고 하매, 王도 곧 이에 賛成하야

呂氏鄕約者 本爲民也 當如所啓

쪽수▶P105-2

呂氏鄕約者 本爲民也 當如所啓

라고 하자, 다시 한충인물
쪽수▶P105-3라고 하자, 다시 韓忠이

京城之中 亦有妨里 必爲鄕約矣 此冊令五部官 分給于各洞約正何如

쪽수▶P105-4

京城之中 亦有妨里 必爲鄕約矣 此冊令五部官 分給于各洞約正何如

라고 현대문주23▶진언하여[a 23] 여씨향약을 외방 유향소 및 경성 5부 각 동 약정에게 분급하여 이것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자치조직을 더욱 굳게 하고자 하였다. 왕도 무조건으로 이에 찬동하여 ‘가지(可之)’라 하여 전국 각지 유향소 및 경성 5부 각 동에 여씨향약을 반포하게 하여 쓰러져 가고 있던 유향소를 다시 붙잡게 하였으니, 이상 향약 실시의 전제로서의 유향소의 유래를 누누히 논술하여 왔음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쪽수▶P105-5라고 원문주23▶進言하야[23] 呂氏鄕約을 外方 留鄕所 及 京城 五部 各 洞 約正에게 分給하야 이것을 實施하게 하므로써 自治組織을 더욱 굳게 하고저 하였다. 王도 無條件으로 이에 賛同하여 「可之」라 하여 全國 各地 留鄕所 及 京城 五部 各 洞에 呂氏鄕約을 頒布케 하야 쓰러져 가고 있든 留鄕所를 다시 붓잡게 하였으니, 以上 鄕約 實施의 前提로서의 留鄕所의 由來를 累累히 論述하여 왔음도 無意味한 일은 아닐 것이다.










본문3: 3.여씨향약의 실시


여씨향약이 조선에서 실시하게 된 유래를 밝힘에는 먼저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부터 논할 필요가 있다. 여씨향약이라 함은 송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씨 문중에서 그 향리를 교도하기 위하여 세운 약속을 일컬음이니, 이것은 곧 지나에 있어서의 향약의 시초라고 전하여 온다. 여씨 문중에는 특히 대충 일방 대균 대림 등의 4형제가 있어 모두 도학으로써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하니, 이러한 것은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향약을 세워 일족 문중은 물론 향중 전체를 교화 선도하게 하였던 것이다. 여씨향약의 근본 골자만을 따서 쓰며 다음과 같다.
쪽수▶P107-1呂氏鄕約이 朝鮮에서 實施하게 된 由來를 밝힘에는 먼저 그것이 어떠한 것이였든가 하는 것부터 論할 必要가 있다. 呂氏鄕約이라 함은 宋나라 때 藍田에 살든 呂氏 門中에서 그 鄕里를 敎導하기 爲하야 세운 約束을 일컬음이니, 이것은 곧 支那에 있어서의 鄕約의 始初라고 傳하여 온다. 呂氏 門中에는 特히 大忠 一防 大鈞 大臨 等의 四兄弟가 있어 모다 道學으로써 當世에 일흠이 높았다 하니, 이러한 것은 마츰내 그들로 하여금 鄕約을 세워 一族 門中은 勿論 鄕中 全體를 敎化 善導하게 하였든 것이다. 呂氏鄕約의 根本 骨子만을 따서 쓰며 다음과 같다.

凡同約者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有善則書于籍 有過若違約者亦書之 三犯而行罰 不俊者絕之

쪽수▶P107-2

凡同約者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有善則書于籍 有過若違約者亦書之 三犯而行罰 不俊者絕之

이 여씨향약은 같은 송나라 때 사람인 주희인물에 의하여 가감 증보되어 더욱 완정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니, 후세에 이른바 ‘주자증손여씨향약’은 곧 그것이다. 주자의 증손한 여씨향약도 물론 앞서 든 여씨향약의 근본 강령을 주간으로 하여 이것을 더 한층 상세히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것의 근본 조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쪽수▶P107-3이 呂氏鄕約은 같은 宋나라 때 사람인 朱熹에 依하야 加減 增補되여 더욱 完整한 形態를 가추게 되였으니, 後世에 이른바 「朱子增損呂氏鄕約」은 곧 그것이다. 朱子의 增損한 呂氏鄕約도 勿論 前揭 呂氏鄕約의 根本 綱領을 主幹으로 하야 이것을 더 한층 詳細히 規定한 것에 지나지 않었으니, 그것의 根本 條目을 들면 다음과 같다.

凡鄕之約四 一曰德業相勸 二曰過失相規 三曰禮俗相交 四曰患難相恤 衆推有齒德者一人 爲都約正 有學行者二人副之 約中月輪一人 爲直月都副正不與之 置三籍 凡願入約者 書于一籍 過失可觀者 書于一籍 直月掌之 月終則以告于約正 而授于其次
德業相勸(●●●●)▶P108
德謂見善必行 聞過必改 能治其身 能治其家 能事父兄 能教子弟 能御童僕 能肅政教 能事長上 能睦親故 能擇交遊 能守廉介 能廣施惠 能取寄託 能救患難 能導人爲善 能規人過失 能爲人謀事 能爲衆集事 能解鬪爭 能決是非 能興利除害 能居官擧職
業謂居家則事父兄 敦子弟 待妻妾 在外則事長上 接朋友 敎後生 御僮僕 至于讀書 治田 營家 濟物 畏法令 謹租賦 好禮樂射御書類之類 皆可爲之 非此之類 皆爲無益
右件德業 同約之人 各自進修互相勸勉 會集之日 相與推擧其能者 書于籍 以警勵其不能者
過失相規(●●●●)
過失謂犯義之過六 犯約之過四 不修之過五
犯義之過 一曰酗博鬪訟 二曰行止踰違 三曰行不恭遜 四曰言不忠信 五曰造言誣毀 六曰營私太甚
犯約之過 一曰德業不相勸 二曰過失不相規 三曰禮俗不相成 四曰患難不相恤 不修之過 一曰交非其人 二曰游戲怠惰 三曰動作無儀 四曰臨事不恪 五曰用度 不節
右件過失 同約之人 各自省察互相規戒 小則密規之 大則衆戒之 不聽則會集之日 直月以告于約正 約正以義理誨諭之 謝過請改則書于籍以俟 其爭辨不服 與終不能改者 皆聽其出約
禮俗相交(●●●●)
禮俗之交 一曰尊幼輩行 二曰造請拜揖 三曰請召送迎 四曰慶弔贈遺
尊幼輩行凡五等 曰尊者 曰長者 曰敵者 曰少者 曰幼者▶P109
造請拜揖凡三條 〇曰凡少者於尊者長者 歲首冬至四孟月朔 辭見賀謝 皆爲禮見 此外候問起居質疑白事及赴請召皆爲燕見 尊者受謁不報 長者歲首冬至具牓子報之 如其服餘 令子弟以己名牓子代行 凡敵者歲首冬至辭見賀謝相往還 凡尊者長者無事 而至少者幼者之家惟所服 〇曰凡見尊者長者 門外下馬俟於外 次乃通名 主人使將命者 先出迎客 客趨入至廡間 主人出降階 客趨進主人揖之升堂 禮見四拜而後坐 燕見不拜 則主人送于廡下 若命之上馬 則三辭許則揖而 退出大門 乃上馬不許則從其命 凡見敵者門外下馬 使人通名 俟于廡下或廳側 禮見則再拜 退則主人詩就階上馬 凡少者以下則先遣人通名 主人具衣冠以俟 客入門下馬則趨出迎揖升堂來 報禮則再拜 謝退則就階上馬 〇曰凡遇尊長於道 皆徒行則趨進揖 尊長與之言則對 不則立於道側以俟 尊長己過 乃揖而行 或皆乘馬 於尊者則回避之 於長者則立馬道側 揖之俟過 乃揖而行 若己徒行而尊長乘馬則回避之 若己乘馬而尊長徒行望見 則下馬前揖 己避亦然 過旣遠乃上馬 若尊長令上馬則固辭 遇敵者皆乘馬則分道相揖而過 彼徒行而不及避則下馬揖之 過則上馬 遇少者以下皆乘馬 彼不及避則揖之而過 彼徒行不及避則下馬揖之
請召迎送凡四條 〇曰凡請尊長飲食 親往投書 旣來赴 明日親往謝之 召敵者以書簡 明日交使相謝 召少者用客目 明日客親往謝 〇曰凡聚會皆鄕人 則坐以齒 若有親則別叙 若有他客有爵者則坐以爵 若有以異爵者 雖鄕人亦不以齒 若特請召或迎勞出餞 皆以專召者爲上客 如婚禮則姻爲上客 皆不以齒爲序 〇曰凡燕集初坐別設卓子於兩楹間 置大盃於其上 主人降席立於卓東西向 上客亦降席立於卓西東向 主人取盃親洗 上客辭 主人置盃卓子上 親執酒斟之 以器授執事者 遂執盃以獻上客 上客受之復置卓子上 主人西向再拜 上客東向再拜 興取酒東向跪祭 遂飲以盃授賛者遂拜 主人答拜 上客酢主人如前儀 主人乃獻樂賓如前儀 唯獻酒不拜 若婚會姻家爲上客 則雖少亦答其拜 〇曰凡有遠出遠▶P110-1歸者 則迎送之 少者幼者不過五里敵者不過三里 各期會於一處 拜揖如禮有飲食則就飲食之 少者以下俟其旣歸 又至其家省之
慶弔遺凡四條 〇曰凡同約有吉事則慶之 有凶事則弔之 每家只家長一人與同約者 俱往其書問亦如之 若家長有故或與所憂弔者 不相接則其次者當之 〇曰凡慶禮如常儀有贈物 或其家力有不足則同約爲之 借助器用及爲營幹 凡弔禮聞其初喪未易服 則率同約者 深而往哭弔之 且助其凡百經營之事 主人旣成服則相率素幞頭素襴衫素帶 具洒果食物而往奠之 及葬又相率致贈 俟發引則素服而送之 及卒哭及小祥及大祥皆常服弔之 〇曰凡喪家不可具酒衣服 以待弔客弔客亦不可受 〇曰凡聞所知之喪或遠不能往 則遣使致食 就外次衣弔服再拜哭而送之 過朞年則不哭 情重則哭其墓
右禮俗相交之事 直月主之 有期日者爲之 期日當糾集者督其違慢 凡不如約者 以告于約正而詰之 且書于籍
患難相恤(●●●●)
患難之事七 一曰水火 二曰盜賊 三曰疾病 四曰死喪 五曰孤弱 六曰誣枉 七日貧乏
右患難相恤之事 凡有當救恤者 其家告于約正 急則同約之近者爲之告約正命直月徧告之 且爲之斜集而程督之 凡同約者財物器用車馬人僕皆有無相假若不急之用及有所妨者 則不必借 可借而不借及踰期不還及損壞借物者 論如犯約之過 書于籍 隣里或有緩急雖非同約 而先聞知者 亦當救助 或不能救助則爲之告于同約而謀之 有能如此者則亦書其善於籍 以告鄕人

쪽수▶P107-4

凡鄕之約四 一曰德業相勸 二曰過失相規 三曰禮俗相交 四曰患難相恤 衆推有齒德者一人 爲都約正 有學行者二人副之 約中月輪一人 爲直月都副正不與之 置三籍 凡願入約者 書于一籍 過失可觀者 書于一籍 直月掌之 月終則以告于約正 而授于其次
德業相勸(●●●●)▶P108
德謂見善必行 聞過必改 能治其身 能治其家 能事父兄 能教子弟 能御童僕 能肅政教 能事長上 能睦親故 能擇交遊 能守廉介 能廣施惠 能取寄託 能救患難 能導人爲善 能規人過失 能爲人謀事 能爲衆集事 能解鬪爭 能決是非 能興利除害 能居官擧職
業謂居家則事父兄 敦子弟 待妻妾 在外則事長上 接朋友 敎後生 御僮僕 至于讀書 治田 營家 濟物 畏法令 謹租賦 好禮樂射御書類之類 皆可爲之 非此之類 皆爲無益
右件德業 同約之人 各自進修互相勸勉 會集之日 相與推擧其能者 書于籍 以警勵其不能者
過失相規(●●●●)
過失謂犯義之過六 犯約之過四 不修之過五
犯義之過 一曰酗博鬪訟 二曰行止踰違 三曰行不恭遜 四曰言不忠信 五曰造言誣毀 六曰營私太甚
犯約之過 一曰德業不相勸 二曰過失不相規 三曰禮俗不相成 四曰患難不相恤 不修之過 一曰交非其人 二曰游戲怠惰 三曰動作無儀 四曰臨事不恪 五曰用度 不節
右件過失 同約之人 各自省察互相規戒 小則密規之 大則衆戒之 不聽則會集之日 直月以告于約正 約正以義理誨諭之 謝過請改則書于籍以俟 其爭辨不服 與終不能改者 皆聽其出約
禮俗相交(●●●●)
禮俗之交 一曰尊幼輩行 二曰造請拜揖 三曰請召送迎 四曰慶弔贈遺
尊幼輩行凡五等 曰尊者 曰長者 曰敵者 曰少者 曰幼者▶P109
造請拜揖凡三條 〇曰凡少者於尊者長者 歲首冬至四孟月朔 辭見賀謝 皆爲禮見 此外候問起居質疑白事及赴請召皆爲燕見 尊者受謁不報 長者歲首冬至具牓子報之 如其服餘 令子弟以己名牓子代行 凡敵者歲首冬至辭見賀謝相往還 凡尊者長者無事 而至少者幼者之家惟所服 〇曰凡見尊者長者 門外下馬俟於外 次乃通名 主人使將命者 先出迎客 客趨入至廡間 主人出降階 客趨進主人揖之升堂 禮見四拜而後坐 燕見不拜 則主人送于廡下 若命之上馬 則三辭許則揖而 退出大門 乃上馬不許則從其命 凡見敵者門外下馬 使人通名 俟于廡下或廳側 禮見則再拜 退則主人詩就階上馬 凡少者以下則先遣人通名 主人具衣冠以俟 客入門下馬則趨出迎揖升堂來 報禮則再拜 謝退則就階上馬 〇曰凡遇尊長於道 皆徒行則趨進揖 尊長與之言則對 不則立於道側以俟 尊長己過 乃揖而行 或皆乘馬 於尊者則回避之 於長者則立馬道側 揖之俟過 乃揖而行 若己徒行而尊長乘馬則回避之 若己乘馬而尊長徒行望見 則下馬前揖 己避亦然 過旣遠乃上馬 若尊長令上馬則固辭 遇敵者皆乘馬則分道相揖而過 彼徒行而不及避則下馬揖之 過則上馬 遇少者以下皆乘馬 彼不及避則揖之而過 彼徒行不及避則下馬揖之
請召迎送凡四條 〇曰凡請尊長飲食 親往投書 旣來赴 明日親往謝之 召敵者以書簡 明日交使相謝 召少者用客目 明日客親往謝 〇曰凡聚會皆鄕人 則坐以齒 若有親則別叙 若有他客有爵者則坐以爵 若有以異爵者 雖鄕人亦不以齒 若特請召或迎勞出餞 皆以專召者爲上客 如婚禮則姻爲上客 皆不以齒爲序 〇曰凡燕集初坐別設卓子於兩楹間 置大盃於其上 主人降席立於卓東西向 上客亦降席立於卓西東向 主人取盃親洗 上客辭 主人置盃卓子上 親執酒斟之 以器授執事者 遂執盃以獻上客 上客受之復置卓子上 主人西向再拜 上客東向再拜 興取酒東向跪祭 遂飲以盃授賛者遂拜 主人答拜 上客酢主人如前儀 主人乃獻樂賓如前儀 唯獻酒不拜 若婚會姻家爲上客 則雖少亦答其拜 〇曰凡有遠出遠▶P110-1歸者 則迎送之 少者幼者不過五里敵者不過三里 各期會於一處 拜揖如禮有飲食則就飲食之 少者以下俟其旣歸 又至其家省之
慶弔遺凡四條 〇曰凡同約有吉事則慶之 有凶事則弔之 每家只家長一人與同約者 俱往其書問亦如之 若家長有故或與所憂弔者 不相接則其次者當之 〇曰凡慶禮如常儀有贈物 或其家力有不足則同約爲之 借助器用及爲營幹 凡弔禮聞其初喪未易服 則率同約者 深而往哭弔之 且助其凡百經營之事 主人旣成服則相率素幞頭素襴衫素帶 具洒果食物而往奠之 及葬又相率致贈 俟發引則素服而送之 及卒哭及小祥及大祥皆常服弔之 〇曰凡喪家不可具酒衣服 以待弔客弔客亦不可受 〇曰凡聞所知之喪或遠不能往 則遣使致食 就外次衣弔服再拜哭而送之 過朞年則不哭 情重則哭其墓
右禮俗相交之事 直月主之 有期日者爲之 期日當糾集者督其違慢 凡不如約者 以告于約正而詰之 且書于籍
患難相恤(●●●●)
患難之事七 一曰水火 二曰盜賊 三曰疾病 四曰死喪 五曰孤弱 六曰誣枉 七日貧乏
右患難相恤之事 凡有當救恤者 其家告于約正 急則同約之近者爲之告約正命直月徧告之 且爲之斜集而程督之 凡同約者財物器用車馬人僕皆有無相假若不急之用及有所妨者 則不必借 可借而不借及踰期不還及損壞借物者 論如犯約之過 書于籍 隣里或有緩急雖非同約 而先聞知者 亦當救助 或不能救助則爲之告于同約而謀之 有能如此者則亦書其善於籍 以告鄕人

주자대전서적(권74)에 실린 증손여씨향약은 앞서 쓴 각 조목에 더욱 상세한 주석이 붙어있으나 이 근본 조목만으로라도 주자의 증손한 여씨향약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으므로 이곳에서는 그의 주석을 상기(詳記)함을 생략한다. 하여튼 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은 그의 이학(理學)과 아울러 이후의 지나 사회에 끼친바 영향이 막대하여 특히 주자학을 국시로 준봉하던 명조(朝)에 이르러는 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은 향약 실시의 준칙이 되게 되어, 명 태조도 즉위 초에 이미 이에 준거하여 향약을 세워 국중 매2, 300호씩을 연(連)하여 회(會)를 모으게 하여 약정 1인 부약정 2인을 두어 향약을 실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즉 지나에 있어서의 향약은 명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국령으로써 실시를 명하게 되어 가장 이상적으로 실행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은 정(廷)하여 후계국(後繼國)이던 청나라에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형제국으로 친교가 두텁던 조선국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종래 이 땅에 없던 향약을 하루 바삐 실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쪽수▶P110-2朱子大全(卷七十四)에 실인 增損呂氏鄕約은 前記 各 條目에 더욱 詳細한 註釋이 부쳐있으나 이 根本 條目만으로라도 朱子의 增損한 呂氏鄕約의 大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으므로 이곳에서는 그의 註釋을 詳記함을 省略한다. 何如튼▶P111-1 이 朱子增損呂氏鄕約은 그의 理學과 아울러 以後의 支那 社會에 끼친바 影響이 莫大하야 特히 朱子學을 國是로 遵奉하든 明朝에 이르러는 이 朱子增損呂氏鄕約은 鄕約 實施의 準則이 되게 되여, 明 太祖도 即位 初에 이미 이에 準據하야 鄕約을 세워 國中 每二三百戶式을 連하야 會를 모두게 하야 約正 一人 副約正 二人을 두어 鄕約을 實施하게 하였든 것이다. 즉 支那에 있어서의 鄕約은 明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國令으로써 實施를 命하게 되여 가장 理想的으로 實行케 되였든 것이니, 이것은 廷하야 後繼國이든 淸나라에는 말할 것도 없고 當時 兄弟國으로 親交가 두텁든 朝鮮國에도 影響을 끼치게 되여 從來 이따에 없든 鄕約을 하로 밥비 實施하게 하였든 것이다.
조선에서 향약을 실시함에 당하여 우선 그의 선구로서 여씨향약을 시행하였다 함은 앞에서도 잠깐 말한 바 있었거니와, 이곳에서 여씨향약이라 함은 그 실인즉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가리킴이었던 것이다. 주자의 증손한 여씨향약은 이미 고려말 이조 초기에 주자학이 수입됨을 따라 주자성리대전에 포함되어 반도 내에도 전래되어 있었을 것이나, 그때에는 아직 실시함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조 건국 후 1세기를 훨씬 지나 유교문화가 바야흐로 무르녹아져, 주자학의 전부문이 완전히 이 땅에서 저작(咀嚼) 음미되어 짐을 따라 주자증손여씨향약도 널리 고가(高價)로 인식하게 되어, 마침내 중종인물 때에 이르러 식자 사이에 교화 진흥상 이것을 실시할 것을 논의하는 자 속출하게 되었다. 즉 중종인물 12년 6월에는 벌써 경상도 성양현 유생인 김인범인물이 상소하여 여씨향약을 준행하여써 풍속을 변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왕은 정부에 전교하여
쪽수▶P111-2朝鮮에서 鄕約을 實施함에 當하야 우선 그의 先驅로서 呂氏鄕約을 施行하였다 함은 앞에서도 잠간 말한 바 있었거니와, 이곳에서 呂氏鄕約이라 함은 그 實인즉 朱子增損呂氏鄕約을 가리침이였든 것이다. 朱子의 增損한 呂氏鄕約은 이미 高麗末 李朝 初期에 朱子學이 輸入됨을 따라 朱子性理大全에 包含되여 半島 內에도 傳來되여 있었을 것이나, 그때에는 아즉 實施함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야 李朝 建國 後 一世紀를 훨신 지나 儒敎文化가 바야흐로 무르녹어저, 朱子學의 全部門이 完全히 이따에서 咀嚼 吟味되여 짐을 따라 朱子增損呂氏鄕約도 널리 高價로 認識케 되여, 마츰내 中宗때에 이르러 識者 間에 敎化 振興上 이것을 實施할 것을 論議하는 者 續出하게 되였다. 즉 中宗 十二年 六月에는 벌서 慶尙道 成陽縣 儒生인 金仁範이 上疏하야 呂氏鄕約을 遵行하야써 風俗을 變케 하기를 請하였다. 이때 王은 政府에 傳敎하야

현대문주1▶予觀咸陽儒生金仁範上䟽 以草野寒生 傷嘆人心日偷風俗日惡 欲變薄俗而回唐虞之治 其志亦可嘉也 近來人心風俗之非 予亦憂慮 不知畢竟當何如也⋯⋯⋯鄕等勿以爲布衣之親言 而講論移風易俗之方 上下交勵 使人心歸厚風俗反朴 上有忠厚之風 下無愁嘆之聲 不亦美乎[a 24]

쪽수▶P111-3

원문주1▶予觀咸陽儒生金仁範上䟽 以草野寒生 傷嘆人心日偷風俗日惡 欲變薄俗而回唐虞之治 其志亦可嘉也 近來人心風俗之非 予亦憂慮 不知畢竟當何如也⋯⋯⋯鄕等勿以爲布衣之親言 而講論移風易俗之方 上下交勵 使人心歸厚風俗反朴 上有忠厚之風 下無愁嘆之聲 不亦美乎[24]

라고 하여 그의 탁론을 가납(嘉納)하여 상소대로 여씨향약을 시행하게 하기를 정부에 문의하였다. 정부도 이에 응하여 같은 해 7월 경진에 이르러
쪽수▶P112-1라고 하야 그의 卓論을 嘉納하야 上䟽대로 呂氏鄕約을 施行하게 하기를 政府에 問議하였다. 政府도 이에 應하야 同年 七月 庚辰에 이르러

현대문주2▶臣等見金仁範上䟽 其意至美 而上敎亦當 此事令下人行之 則想必有樂爲者 令該曹行移于八道 勸諭下人使之遵行可也 若人心風俗不美之事 則臣等亦每講論而欲矯之 但當自然漸摩 非可以法條能行於一朝也[a 25]

쪽수▶P112-2

원문주2▶臣等見金仁範上䟽 其意至美 而上敎亦當 此事令下人行之 則想必有樂爲者 令該曹行移于八道 勸諭下人使之遵行可也 若人心風俗不美之事 則臣等亦每講論而欲矯之 但當自然漸摩 非可以法條能行於一朝也[25]

라고 상계하여 상교(上敎)에 좇아 예조로 하여금 여씨향약을 8도에 행이(行移)하게 하기를 논하였으며, 왕도 이에 지도(知道)라 하여 잘 실행하기를 명하였다. 그러나 같은 달 기해에 이르러 예조인물는 정부에 알려
쪽수▶P112-3라고 上啓하야 上敎에 쫓아 禮曹로 하여금 呂氏鄕約을 八道에 行移케 하기를 論하였으며, 王도 이에 知道라 하야 잘 實行하기를 命하였다. 그러나 同月 己亥에 이르러 禮曹는 政府에 報하야

小學正俗 已令多數印出 廣布中外 呂氏鄕約是小學中一事 不必別令擧行 請勿擧行

쪽수▶P112-4

小學正俗 已令多數印出 廣布中外 呂氏鄕約是小學中一事 不必別令擧行 請勿擧行

이라 하여 여씨향약이 소학 중의 일사(一事)에 지나지 않으므로 다수의 소학을 광포한 금일에 있어서 다시 여씨향약을 광포할 필요가 없다 하여 그의 행이를 중지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정부는 다시 계목을 올려
쪽수▶P112-5이라 하야 呂氏鄕約이 小學 中의 一事에 지나지 않으므로 多數의 小學을 廣布한 今日에 있어서 다시 呂氏鄕約을 廣布할 必要가 없다 하야 그의 行移를 中止케 하기를 請하였으나, 政府는 다시 啓目을 올리여

呂氏鄕約雖載小學 若不曉諭別令擧行 則視爲尋常 徒爲文具 令各道監司廣布何如

쪽수▶P112-6

呂氏鄕約雖載小學 若不曉諭別令擧行 則視爲尋常 徒爲文具 令各道監司廣布何如

라고 하여 각 도 감사로 하여금 여씨향약을 광포하게 하기를 논하여 왕의 윤허를 얻었다. 이리하여 여씨향약은 중종 12년 7월 이후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각 지방장관에 의하여 인출 광포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종래 주자성리대전 속의 일부로서 극히 협소한 일부 식자 사이에만 알려져 있던 여씨향약(주자증손여씨향약)은 완전한 단행본으로 세간에 출현하게 되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중종인물 12년 3월 경인에 본도 관찰사로 임명된 김안국인물에 의하여 곧 이 여씨향약이 인반(印頒)되어 화민성속에 기여하는 바 적지 않았다 한다. 김안국은 중종 12년 3월부터 같은 왕 13년 3월까지 만 1개년 간 경상도의 방백으로 재임하여, 그동안 여씨향약은 물론 동몽수지 등 책을 간행하여 향곡 교도에 진력하는바 다대하였었으나, 다시 중앙관리로 소환됨에 이르러는 중종인물 13년 4월 삭기사에 동지중추부사의 직으로서
쪽수▶P112-7라고 하야 各 道 監司로 하여금 呂氏鄕約을 廣布케 하기를 論하야 王의 允許를 얻었다. 이리하야 呂氏鄕約은 中宗 十二年 七月 以後 中央政府의 命令으로 各 地方長官에 依하야 印出 廣布케 되였으니, 이로써 從來 朱子性理大全 속의 一部로서 極히 狹小한 一部 識者 間에만 알려져 있든 呂氏鄕約(朱子增損呂氏鄕約)은 完全한 單行本으로 世間에 出現케 되여 널리 流行케 되였다. 特히 慶尙道에서는 中宗 十二年 三月 庚寅에 本道 觀察使로 任命된 金安國에 依하야 곧 이 呂氏鄕約이 印頒되야 化民成俗에 寄與하는 바 적지 않었다 한다. 金安國은 中宗 十二年 三月부터 同 十三年 三月까지 滿 一箇年 間 慶尙道의 方伯으로 在任하야, 그동안 呂氏鄕約은 勿論 童蒙須知 等 書를 刊行하야 鄕曲 敎導에 盡力하는바 多大하였었으나, 다▶P113-1시 中央官吏로 召還됨에 이르러는 中宗 十三年 四月 朔己巳에 同知中樞府事의 職으로서

臣爲慶尙道觀察使 其道人心風俗弊乃極 兮者上方有志於轉移風俗 故臣欲體至意變革頑風 而竊思其要 取古人之書 可以善俗者 詳加諺解頒道內以教之 此等書冊臣有志修撰 而第緣事務煩劇 未遑詳悉 錯誤必多 今方別設撰集廳 印出文籍 此等書使之更加讎校 印頒八道 則於率勵風化庶有小益也 如呂氏鄕約正俗等書 乃敦厚風俗之書也 鄕約雖載於性理大全而無註解 遐方之人未易通曉 故臣乃詳其諺解 使人接目便解 正俗亦飜以諺字 如農書蠶書乃衣食之大政 故世宗朝飜以俚語 開刊八道 今亦頗致意務本之事 故臣亦加諺解 如二倫行實臣前爲承旨時 請開刋 如三綱之重 雖愚夫愚 婦皆知之 至於朋友兄弟之倫 凡常之人或有不知 故臣依三綱行實撰類以之 如辟瘟方則⋯⋯⋯臣亦加諺解以刋 至如瘡疹方會 已飜譯開刋⋯⋯⋯願依成宗朝廣頒救急簡易方例 多印廣布

쪽수▶P113-2

臣爲慶尙道觀察使 其道人心風俗弊乃極 兮者上方有志於轉移風俗 故臣欲體至意變革頑風 而竊思其要 取古人之書 可以善俗者 詳加諺解頒道內以教之 此等書冊臣有志修撰 而第緣事務煩劇 未遑詳悉 錯誤必多 今方別設撰集廳 印出文籍 此等書使之更加讎校 印頒八道 則於率勵風化庶有小益也 如呂氏鄕約正俗等書 乃敦厚風俗之書也 鄕約雖載於性理大全而無註解 遐方之人未易通曉 故臣乃詳其諺解 使人接目便解 正俗亦飜以諺字 如農書蠶書乃衣食之大政 故世宗朝飜以俚語 開刊八道 今亦頗致意務本之事 故臣亦加諺解 如二倫行實臣前爲承旨時 請開刋 如三綱之重 雖愚夫愚 婦皆知之 至於朋友兄弟之倫 凡常之人或有不知 故臣依三綱行實撰類以之 如辟瘟方則⋯⋯⋯臣亦加諺解以刋 至如瘡疹方會 已飜譯開刋⋯⋯⋯願依成宗朝廣頒救急簡易方例 多印廣布

라고 상계하여, 자기가 이미 상세한 언해를 붙여 둔 여씨향약 정속 농서 잠서와 이륜행실 삼강행실 벽온방칙 참진방회 등 책을 개간 광행하게 하기를 상청하였다. 왕도 이에
쪽수▶P113-3라고 上啓하야, 自己가 이미 詳細한 諺解를 부처 둔 呂氏鄕約 正俗 農書 蠶書와 二倫行實 三綱行實 辟瘟方則 瘡疹方會 等書를 開刊 廣行케 하기를 上請하였다. 王도 이에

현대문주3▶卿在其道 盡心於學校 轉移風俗之事 予聞之嘉美 又復撰此書以敎之 此書皆有關於風敎 其下撰集廳 開刋廣行[a 26]

쪽수▶P113-4

원문주3▶卿在其道 盡心於學校 轉移風俗之事 予聞之嘉美 又復撰此書以敎之 此書皆有關於風敎 其下撰集廳 開刋廣行[26]

이라고 전지하여 그의 특지를 찬가(讃嘉)하여 찬집청으로 하여금 이 책들을 개간 광포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종래 주자성리대전 속에서 발취되어 순 한자의 단행본으로 인포하게 되었던 여씨향약은 다시 한 걸음을 나가 이 땅의 말로 주해를 붙인 소위 언해본으로 세간에 광행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여씨향약은 어느 벽향의 필부에게까지라도 용이하게 이해시키게 되어 그의 보편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 언해 반포한 여씨향약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는 그의 잔본을 득견하지 못한 나로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와 비슷하게 역시 이 땅에서 순 한자로 주석을 더하여 인반한 현대문주4▶주자증손여씨향약[a 27]이 있다. 이 한자 주석 여씨향약이 어느 때 인반되었는지는 고증할 기사가 없으므로 정확히 논정하기는 어려우나, 그 주역 중에
쪽수▶P113-5이라고 傳旨하야 그의 特志를 讃嘉하야 撰集廳으로 하여금 此等書를 開刊 廣布케 하였다. 이에 이르러 從來 朱子性理大全 속에서 拔取되야 純 漢字의 單行本으로 印布케 되였든 呂氏鄕約은 다시 한 거름을 나가 이따의 말로 註釋를 부친 所謂 諺解本으로 世間에 廣行케 되였으니, 이로써 呂氏鄕約은 어느 僻鄕의 匹夫에게까지라도 容易히 理解케 되여 그의 普遍化를 가저오게 되였다. 當時 諺解 頒布한 呂氏鄕約이 어떠한 것이였든가는 그의 殘本을 得見치 못한 나로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와 비슷하게 亦是 이따에서 純 漢字로 註釋을 加하야 印頒한 원문주4▶朱子增損呂氏鄕約[27]이 있다. 이 漢字 註釋▶P114-1 呂氏鄕約이 어느 때 印頒되였는지는 考證할 記事가 없으므로 正確히 論定키는 어려우나, 그 註譯 中에

衆推一人有齒者年高有德行者 爲都約正約中之長也如今之留鄕座首 有學行者有學術操行者 二人副之如今之留鄕別監 約中月輪一人 爲直月如今之有司掌務每月輪定之 (細字註譯)

쪽수▶P114-2

衆推一人有齒者年高有德行者 爲都約正約中之長也如今之留鄕座首 有學行者有學術操行者 二人副之如今之留鄕別監 約中月輪一人 爲直月如今之有司掌務每月輪定之 (細字註譯)

라고 있음으로 보아 유향소가 융성하던 이조 중엽 이전에 인포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주역에서 향약의 도약정 부약정 직월 등의 역원을 각각 이 땅 유향소의 좌수 별감 유사 장무 등과 같다고 하였음은 앞 절에서도 이설(異說)한 바와 같이 향약이 유향소와 동의의 것임과, 전자가 후자에서 유래하고 이의 존재로 말미암아 용이하게 실시되게 되었음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쪽수▶P114-3라고 있으므로 보아 留鄕所가 隆盛하든 李朝 中葉 以前에 印布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註譯에서 鄕約의 都約正 副約正 直月 等의 役員을 各各 이따 留鄕所의 座首 別監 有司 掌務 等과 같다고 하였음은 前節에서도 異說한 바와 같이 鄕約이 留鄕所와 同義의 것임과, 前者가 後者에서 由來하고 이의 存在로 말미암아 容易히 實施되게 되였음을 雄辯으로 證明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은 조선에 수입된 후 다시 한자 및 언문으로써 주역된 2종의 단행본으로 누차 간행되어 널리 8도 각 읍에 광포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여씨향약은 이후 지방 유지 인사에 의하여 지방적으로나마 잘 실시되게 되었다. 그 일례를 들면 중종인물 13년 9월 임인에 참찬관 조광조인물가 상언하여
쪽수▶P114-4이와 같이 하야 朱子增損呂氏鄕約은 朝鮮에 輸入된 後 다시 漢字 及 諺文으로써 註譯된 二種의 單行本으로 累次 刊行되여 널리 八道 各 邑에 廣布케 되였으니, 이로써 呂氏鄕約은 以後 地方 有志 人士에 依하야 地方的으로나마 잘 實施되게 되였다. 그 一例를 들면 中宗 十三年 九月 壬寅에 叅贊官 趙光祖가 上言하야

臣聞溫陽人善行鄕約 若善行鄕約則固美矣⋯⋯⋯行鄕約之邑 如壓良爲賊拒扞官債之納 如此等事皆己未見 前者金安國爲慶尙道監司時 乃終令行之 其時仍興鬪狠 盖始初故然也

쪽수▶P114-5

臣聞溫陽人善行鄕約 若善行鄕約則固美矣⋯⋯⋯行鄕約之邑 如壓良爲賊拒扞官債之納 如此等事皆己未見 前者金安國爲慶尙道監司時 乃終令行之 其時仍興鬪狠 盖始初故然也

라 하고, 같은 달 신해에 대사헌 김정인물이 상언하여
쪽수▶P114-6라 하고, 同月 辛亥에 大司憲 金淨이 上言하야

臣於外方 見呂氏鄕約大有關於敎化 前此兄弟不和者知悔而和 然悖逆者改而順 人皆知而行之 則厚倫成俗之道豈少補哉 然鄕曲小民不知朝廷之意 而以爲監司一時之令 故皆曰今監司遆去 則止之云 雖守令亦或莫之知也 當申諭此意 使知朝廷軫念之意可也

쪽수▶P114-7

臣於外方 見呂氏鄕約大有關於敎化 前此兄弟不和者知悔而和 然悖逆者改而順 人皆知而行之 則厚倫成俗之道豈少補哉 然鄕曲小民不知朝廷之意 而以爲監司一時之令 故皆曰今監司遆去 則止之云 雖守令亦或莫之知也 當申諭此意 使知朝廷軫念之意可也

라 하고, 다음 해 14년 4월 무진에도 영사 신용개인물
쪽수▶P115-1라 하고, 翌 十四年 四月 戊辰에도 領事 申用漑가

臣頗聞行鄕約之處 則詞訟亦止 風俗漸美

쪽수▶P115-2

臣頗聞行鄕約之處 則詞訟亦止 風俗漸美

현대문주5▶라고 상언한 것과 같은 것은 그것이다.[a 28] 이때 왕은 영사 정광필인물
쪽수▶P115-3원문주5▶라고 上言한 것과 같은 것은 그것이다.[28] 이때 王은 領事 鄭光弼이

鄕約好則好矣 然聚徒而所爲不善 則邑宰之勢反爲弱矣 所當審戒也

쪽수▶P115-4

鄕約好則好矣 然聚徒而所爲不善 則邑宰之勢反爲弱矣 所當審戒也

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쪽수▶P115-5라고 하였음에도 不拘하고

雖美事而其實不存 則不可 故凡事循名責實可也
呂氏鄕約行之則美矣 大抵敎化之宣 皆在監司 而朝廷之意亦豈不知乎 在監司盡力耳

쪽수▶P115-6

雖美事而其實不存 則不可 故凡事循名責實可也
呂氏鄕約行之則美矣 大抵敎化之宣 皆在監司 而朝廷之意亦豈不知乎 在監司盡力耳

라고 전하여 여씨향약의 철저한 시행을 8도 감사에게 갱명하였다. 이로써 여씨향약은 8도 각지에 널리 반포하게 되어 향곡교화상 공헌하는 바 적지 않게 되었으나, 다시 중종인물 14년 7월 기유에 이르러는 앞 절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참찬관 한충인물의 상계에 의하여 종래 폐락되어 있던 유향소를 재흥시켜 화민성속에 진력하게 하고자 외방 유향소 및 경성 각 동 약정에게 여씨향약을 분급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여씨향약은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잘 준행된 것 같아, 중종인물 14년 7월 정사의 시강관 이연경인물의 상언에도
쪽수▶P115-7라고 傳하야 呂氏鄕約의 徹抵한 施行을 八道 監司에게 更命하였다. 이로써 呂氏鄕約은 八道 各地에 널리 頒布케 되여 鄕曲敎化上 功獻하는 바 적지 않게 되였으나, 다시 中宗 十四年 七月 己酉에 이르러는 前節에서도 言한 바와 같이 叅贊官 韓忠의 上啓에 依하야 從來 廢落되여 있든 留鄕所를 再興시켜 化民成俗에 盡力하게 하고저 外方 留鄕所 及 京城 各 洞 約正에게 呂氏鄕約을 分給케 하였다. 이리하야 呂氏鄕約은 京鄕을 莫論하고 잘 遵行된 것 같어, 中宗 十四年 七月 丁巳의 侍講官 李延慶의 上言에도

臣在外方見鄕約果速於美俗矣 人性本善以善事指導之 則自再易化 若得善人以爲約正 則足以變習俗 而人皆樂趨於善矣

쪽수▶P115-8

臣在外方見鄕約果速於美俗矣 人性本善以善事指導之 則自再易化 若得善人以爲約正 則足以變習俗 而人皆樂趨於善矣

라고 있고, 참찬관 한충인물의 상언에도
쪽수▶P115-9라고 있고, 叅贊官 韓忠의 上言에도

臣家在淸州 與忠州相距不遠 忠淸一道 鄕約勝於他道 而忠州爲最於道內 其初爲約者 乃校理李延慶也 此人爲約正以導率之 故稱最焉

쪽수▶P115-10

臣家在淸州 與忠州相距不遠 忠淸一道 鄕約勝於他道 而忠州爲最於道內 其初爲約者 乃校理李延慶也 此人爲約正以▶P116-1導率之 故稱最焉

현대문주6▶이라고 있어 충청도에서 특히 여씨향약이 잘 실시되었음을 말하고 있다.[a 29] 그러나 그 후 몇 달 안 되어 중종인물 14년 11월에 기묘사화사건라는 일대 사류 참해사변이 이러나, 조광조인물를 위시한 신진 정치가 및 학자들 70여인이 참화를 입게 됨에 이르러, 이 향약 실시의 운동도 표면상 일절 중절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종인물 19년 10월에 범죄사건이 빈발하자, 사신은 이것을 평하여
쪽수▶P116-2원문주6▶이라고 있어 忠淸道에서 특히 呂氏鄕約이 잘 實施되였음을 말하고 있다.[29] 그러나 그 후 몇 달 아니 되여 同 十四年 十一月에 己卯士禍라는 一大 士類 慘害事變이 이러나, 趙光祖를 爲始한 新進 政治家 及 學者들 七十餘人이 慘禍를 입게 됨에 이르러, 이 鄕約 實施의 運動도 表面上 一切 中絕케 되였다. 그러므로 中宗 十九年 十月에 犯罪事件이 頻發하자, 史臣은 이것을 評하야

현대문주7▶項者朝廷崇小學之敎 又印頒呂氏鄕約 使中外遵行之 鄕約雖非帝王化民之術 其亦有類於成周讀法敎民之意 爲善者興起 而惡者畏憚自己 自기묘年이후 此等一切廢弛 父兄戒子弟不得挾小學書 人倫不明風俗大毀[a 30]

쪽수▶P116-3

원문주7▶項者朝廷崇小學之敎 又印頒呂氏鄕約 使中外遵行之 鄕約雖非帝王化民之術 其亦有類於成周讀法敎民之意 爲善者興起 而惡者畏憚自己 自己卯年以後 此等一切廢弛 父兄戒子弟不得挾小學書 人倫不明風俗大毀[30]

라고 하여 향약을 폐지한 것이 그 중요 원인임을 전하고 있다. 이로 보면 기묘사화 후 향약은 국령으로써 폐지를 명한 것 같으나, 그 실은 법령대로 철저히 실행되었는지도 의문이며, 설사 철저한 실행을 강요하였다 하더라도 종래에 이상적으로 향약을 준행하여 오던 곳에서는 잠행적으로라도 향약의 근본정신만은 준봉하여 왔을 것이다. 중종인물도 그 만년인 38년 7월 을축에는
쪽수▶P116-4라고 하야 鄕約을 廢止한 것이 그 重要 原囚임을 傳하고 있다. 이로 보면 己卯士禍 後 鄕約은 國令으로써 廢止를 命한 것 같으나, 그 實 法令대로 徹底히 實行되였는지도 疑問이며, 設使 徹底한 實行을 强要하였드라 하드라도 從來에 理想的으로 鄕約을 遵行하여 오든 곳에서는 潛行的으로라도 鄕約의 根本精神만은 遵奉하여 왔을 것이다. 中宗도 그 晚年인 三十八年 七月 乙丑에는

近來物論及䟽章 皆以小學鄕約之事爲言 已卯年爲小學鄕約者 徒尙其文而不務其實 故其弊至於以下居上以賤陵貴 而無可觀之道矣 其後欲矯其弊而不用也 非以小學之書爲非而棄之也 然小學明人倫之書也 常時典講時並講事 後日合坐議于大臣以啓

쪽수▶P116-5

近來物論及䟽章 皆以小學鄕約之事爲言 已卯年爲小學鄕約者 徒尙其文而不務其實 故其弊至於以下居上以賤陵貴 而無可觀之道矣 其後欲矯其弊而不用也 非以小學之書爲非而棄之也 然小學明人倫之書也 常時典講時並講事 後日合坐議于大臣以啓

라고 정원에 전교하고, 같은 해 10월 무술에도
쪽수▶P116-6라고 政院에 傳敎하고, 同年 十月 戊戌에도

近觀諫院上䟽 鄕射鄕飮鄕約等事皆載法條 而近者京外不擧行云 今更申明當否 令三公議啓

쪽수▶P116-7

近觀諫院上䟽 鄕射鄕飮鄕約等事皆載法條 而近者京外不擧行云 今更申明當否 令三公議啓

라고 전교하여 대신들에게 향약 등사를 신명하기를 명하였으며, 다시 같은 해 11월 신축조에는 좌상 홍언필인물 등이 의논하여
쪽수▶P116-8라고 傳敎하야 大臣들에게 鄕約 等事를 申明하기를 命하였으며, 다시 同年 十一月 辛丑朔에는 左相 洪彥弼 等이 議하야

呂氏鄕約其勸善禁非之意 行於一鄕果爲美矣 朝廷自有政令 不可擧其鄕約而施之於國也

쪽수▶P117-1

呂氏鄕約其勸善禁非之意 行於一鄕果爲美矣 朝廷自有政令 不可擧其鄕約而施之於國也

현대문주8▶라고 하였음에 대하여 왕도 지도(知道)라고 답하여 여씨향약을 국내에 실시하게 하였다.[a 31] 이때 여씨향약이 국령으로써 복행(復行)하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니, 하여튼 중종 중기 이후 실시를 폐지하게 하였던 여씨향약을 다시 시행케 하자고 한 당시의 사회정신만은 크게 주목할 일이니 이것은 미구에 조선적 향약이 출현하게 될 중요 동력이였던 것이다.
쪽수▶P117-2원문주8▶라고 하였음에 對하야 王도 知道라고 答하야 呂氏鄕約을 國內에 實施케 하였다.[31] 이때 呂氏鄕約이 國令으로써 復行케 되였는지는 疑問이니, 何如튼 中宗 中期 以後 實施를 廢止케 하였든 呂氏鄕約을 다시 施行케 하자고 한 當時의 社會精神만은 크게 注目할 일이니 이것은 未久에 朝鮮的 鄕約이 出現하게 될 重要 動力이였든 것이다.
그 후 명종인물조(朝)에 이르러도 여씨향약 시행의 논의가 일어나, 명종인물 원년 8월 갑오에는 시강관 주세붕인물이 상언하여
쪽수▶P117-3그 후 明宗朝에 이르러도 呂氏鄕約 施行의 論이 일러나, 明宗 元年 八月 甲午에는 侍講官 周世鵬이 上言하야

현대문주9▶先王朝以呂民鄕約行之於窮村僻巷 則小民享有感化 而向善去惡 但朝廷之上亦欲行之 而當時之人 多不務小學之實 而或詭異其衣服 或推遷於功名 遺其本而務其末 漸成弊習 故先王廢之 此乃呂氏所以用之於鄕曲者 於朝廷之上則自有禮法 不必行之 村巷之民雖同天理而王化未及 若行是約 則不爲無益矣[a 32]

쪽수▶P117-4

원문주9▶先王朝以呂民鄕約行之於窮村僻巷 則小民享有感化 而向善去惡 但朝廷之上亦欲行之 而當時之人 多不務小學之實 而或詭異其衣服 或推遷於功名 遺其本而務其末 漸成弊習 故先王廢之 此乃呂氏所以用之於鄕曲者 於朝廷之上則自有禮法 不必行之 村巷之民雖同天理而王化未及 若行是約 則不爲無益矣[32]

라고 하여 촌항 사이에만 여씨향약을 실시하게 하기를 상청하였다. 당시 수렴의 정(政)을 보던 자전대왕비는 이것을 의논하기 위하여 같은 달 정미에 삼공을 빈청에 모이게 하여, 전교하여
쪽수▶P117-5라고 하야 村巷 間에만 呂氏鄕約을 實施하게 하기를 上請하였다. 當時 垂簾의 政을 보든 慈殿大王妃는 이것을 議論하기 爲하야 同月 丁未에 三公을 賓廳에 會케 하야, 傳敎하야

현대문주10▶周世鵬所啓鄕約事 依趙光祖時事 反爲有弊 如鄕村結契 使之患難相救何如 其議啓[a 33]

쪽수▶P117-6

원문주10▶周世鵬所啓鄕約事 依趙光祖時事 反爲有弊 如鄕村結契 使之患難相救何如 其議啓[33]

라고 하여 향약을 시행하게 하는 대신에 향민 서로 결계하여 환난상구하게 함이 어떠하냐고 하문(下問)하였다. 이에 영상 윤인경인물 등은 곧 회계(回啓)하여
쪽수▶P117-7라고 하야 鄕約을 施行케 하는 代身에 鄕民 서로 結契하야 患難相救케 함이 何如하냐고 下問하였다. 이에 領相 尹仁鏡 等은 곧 回啓하야

鄕約固是美事 但外方必有善人可爲約長者 而後可以行之 外方其何能盡得之乎 如欲自行者 則行之可矣 自朝廷別爲 立法而行移則爲難

쪽수▶P117-8

鄕約固是美事 但外方必有善人可爲約長者 而後可以行之 外方其何能盡得之乎 如欲自行者 則行之可矣 自朝廷別爲 立法而行移則爲難

이라고 하여 지방 선행인에게 방임하여 자발적으로 향약을 실시하게 하기를 논하니, 자전도 지도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우리의 특히 주의할 바는 향약을 민간 자치자에 일임하여 선행하게 하자는 것과, 향약의 대물로 계(契)를 결성하게 하자고 한 것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여씨향약을 강제적으로 시행케 하느니보다 각 지방에 따라 그 지방에 적응한 계약을 설정하게 하자는 것으로, 후세 조선적 향약 성립의 중요한 시대적 배경을 이룬 것이었다.
쪽수▶P117-9이라고 하야 地方 善行人에게 放任하야 自發的으로 鄕約을 實施하게 하기를 論하매, 慈殿도 知道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P118-1 吾人의 特히 注意할 배는 鄕約을 民間 自治者에 一任하야 善行케 하자는 것과, 鄕約의 代物로 契를 結케 하자고 한 것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呂氏鄕約을 强制的으로 施行케 하느니보다 各 地方에 따라 그 地方에 適應한 契約을 設定케 하자는 것으로, 後世 朝鮮的 鄕約 成立의 重要한 時代的 背景을 이룬 것이였다.


近觀諫院上䟽 鄕射鄕飮鄕約等事皆載法條 而近者京外不擧行云 今更申明當否 令三公議啓

쪽수▶P116-7

近觀諫院上䟽 鄕射鄕飮鄕約等事皆載法條 而近者京外不擧行云 今更申明當否 令三公議啓

라고 전교하여 대신들에게 향약 등사를 신명하기를 명하였으며, 다시 같은 해 11월 신축조에는 좌상 홍언필인물 등이 의논하여
쪽수▶P116-8라고 傳敎하야 大臣들에게 鄕約 等事를 申明하기를 命하였으며, 다시 同年 十一月 辛丑朔에는 左相 洪彥弼 等이 議하야

呂氏鄕約其勸善禁非之意 行於一鄕果爲美矣 朝廷自有政令 不可擧其鄕約而施之於國也

쪽수▶P117-1

呂氏鄕約其勸善禁非之意 行於一鄕果爲美矣 朝廷自有政令 不可擧其鄕約而施之於國也

현대문주8▶라고 하였음에 대하여 왕도 지도(知道)라고 답하여 여씨향약을 국내에 실시하게 하였다.[a 31] 이때 여씨향약이 국령으로써 복행(復行)하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니, 하여튼 중종 중기 이후 실시를 폐지하게 하였던 여씨향약을 다시 시행케 하자고 한 당시의 사회정신만은 크게 주목할 일이니 이것은 미구에 조선적 향약이 출현하게 될 중요 동력이였던 것이다.
쪽수▶P117-2원문주8▶라고 하였음에 對하야 王도 知道라고 答하야 呂氏鄕約을 國內에 實施케 하였다.[31] 이때 呂氏鄕約이 國令으로써 復行케 되였는지는 疑問이니, 何如튼 中宗 中期 以後 實施를 廢止케 하였든 呂氏鄕約을 다시 施行케 하자고 한 當時의 社會精神만은 크게 注目할 일이니 이것은 未久에 朝鮮的 鄕約이 出現하게 될 重要 動力이였든 것이다.
그 후 명종인물조(朝)에 이르러도 여씨향약 시행의 논의가 일어나, 명종인물 원년 8월 갑오에는 시강관 주세붕인물이 상언하여
쪽수▶P117-3그 후 明宗朝에 이르러도 呂氏鄕約 施行의 論이 일러나, 明宗 元年 八月 甲午에는 侍講官 周世鵬이 上言하야

현대문주9▶先王朝以呂民鄕約行之於窮村僻巷 則小民享有感化 而向善去惡 但朝廷之上亦欲行之 而當時之人 多不務小學之實 而或詭異其衣服 或推遷於功名 遺其本而務其末 漸成弊習 故先王廢之 此乃呂氏所以用之於鄕曲者 於朝廷之上則自有禮法 不必行之 村巷之民雖同天理而王化未及 若行是約 則不爲無益矣[a 32]

쪽수▶P117-4

원문주9▶先王朝以呂民鄕約行之於窮村僻巷 則小民享有感化 而向善去惡 但朝廷之上亦欲行之 而當時之人 多不務小學之實 而或詭異其衣服 或推遷於功名 遺其本而務其末 漸成弊習 故先王廢之 此乃呂氏所以用之於鄕曲者 於朝廷之上則自有禮法 不必行之 村巷之民雖同天理而王化未及 若行是約 則不爲無益矣[32]

라고 하여 촌항 사이에만 여씨향약을 실시하게 하기를 상청하였다. 당시 수렴의 정(政)을 보던 자전대왕비는 이것을 의논하기 위하여 같은 달 정미에 삼공을 빈청에 모이게 하여, 전교하여
쪽수▶P117-5라고 하야 村巷 間에만 呂氏鄕約을 實施하게 하기를 上請하였다. 當時 垂簾의 政을 보든 慈殿大王妃는 이것을 議論하기 爲하야 同月 丁未에 三公을 賓廳에 會케 하야, 傳敎하야

현대문주10▶周世鵬所啓鄕約事 依趙光祖時事 反爲有弊 如鄕村結契 使之患難相救何如 其議啓[a 33]

쪽수▶P117-6

원문주10▶周世鵬所啓鄕約事 依趙光祖時事 反爲有弊 如鄕村結契 使之患難相救何如 其議啓[33]

라고 하여 향약을 시행하게 하는 대신에 향민 서로 결계하여 환난상구하게 함이 어떠하냐고 하문(下問)하였다. 이에 영상 윤인경인물 등은 곧 회계(回啓)하여
쪽수▶P117-7라고 하야 鄕約을 施行케 하는 代身에 鄕民 서로 結契하야 患難相救케 함이 何如하냐고 下問하였다. 이에 領相 尹仁鏡 等은 곧 回啓하야

鄕約固是美事 但外方必有善人可爲約長者 而後可以行之 外方其何能盡得之乎 如欲自行者 則行之可矣 自朝廷別爲 立法而行移則爲難

쪽수▶P117-8

鄕約固是美事 但外方必有善人可爲約長者 而後可以行之 外方其何能盡得之乎 如欲自行者 則行之可矣 自朝廷別爲 立法而行移則爲難

이라고 하여 지방 선행인에게 방임하여 자발적으로 향약을 실시하게 하기를 논하니, 자전도 지도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우리의 특히 주의할 바는 향약을 민간 자치자에 일임하여 선행하게 하자는 것과, 향약의 대물로 계(契)를 결성하게 하자고 한 것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여씨향약을 강제적으로 시행케 하느니보다 각 지방에 따라 그 지방에 적응한 계약을 설정하게 하자는 것으로, 후세 조선적 향약 성립의 중요한 시대적 배경을 이룬 것이었다.
쪽수▶P117-9이라고 하야 地方 善行人에게 放任하야 自發的으로 鄕約을 實施하게 하기를 論하매, 慈殿도 知道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P118-1 吾人의 特히 注意할 배는 鄕約을 民間 自治者에 一任하야 善行케 하자는 것과, 鄕約의 代物로 契를 結케 하자고 한 것이니,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呂氏鄕約을 强制的으로 施行케 하느니보다 各 地方에 따라 그 地方에 適應한 契約을 設定케 하자는 것으로, 後世 朝鮮的 鄕約 成立의 重要한 時代的 背景을 이룬 것이였다.






































































본문4: 4.향약의 성립

조선에 있어서 향약이 성립되기 이전의 사회 상태가 어떠하였었던가는 이상 논술하여 온 바로도 대략 짐작할 수 있으나 요컨대 조선에서 향약이 성립하게 된 것은 이미 이조 초기부터 일종의 향약과 같은 향헌이 영포되어 지방 사류의 단체인 유향소에 의하여 실행이 독려되어 있었음과, 또 여씨향약이 전래되어 널리 준행하게 된 데서 유래한다. 여씨향약은 중종 12년 이후 수차 국령으로써 시행을 강제하였으므로 지방적으로는 잘 실시한 곳도 있었으나, 이것을 전반적으로 볼 때는 그리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 이유로는 시대와 국정이 상이한 이 땅에서 멀리 송나라 여씨의 이상이 그대로 실현될 리가 만무하였었으니, 이곳에 조선적 향약 성립의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즉 주자학을 유일무이의 준칙으로 준봉하던 조선국이면서도 주자에 의하여 증손된 여씨향약을 그대로 이 땅에서 실시함에는 여러가지의 모순과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러한 점에 먼저 착안하여 이 나라 각 지방에 적합한 향약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것을 선각한 이는 실로 조선유학사(史)상의 2대 거성이라고 일컫는 이황인물 이이인물 두분이었다. 조선의 향약은 이황인물 이이인물 2인의 제정에서 비로소 완성하게 되었던 것이니, 아래에서 그의 대략을 소개하려 한다.
쪽수▶P119-1朝鮮에 있어서 鄕約이 成立되기 以前의 社會 狀態가 어떠하였었든가는 以上 論述하여 온 바로도 大略 짐작할 수 있으나 要컨대 朝鮮에서 鄕約이 成立하게 된 것은 이미 李朝 初期부터 一種의 鄕約과 같은 鄕憲이 領布되여 地方 士類의 團體인 留鄕所에 依하야 實行이 督勵되여 있었음과, 또 呂氏鄕約이 傳來되여 널리 遵行케 된 데서 由來한다. 呂氏鄕約은 中宗 十二年 以後 數次 國令으로써 施行을 强制하였으므로 地方的으로는 잘 實施한 곳도 있었으나, 이것을 全般的으로 볼 때는 그리 좋은 効果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 理由로는 時代와 國情이 相異한 이 땅에서 멀리 宋나라 呂氏의 理想이 그대로 實現될 理가 萬無하였었으니, 이곳에 朝鮮的 鄕約 成立의 根據가 있었든 것이다. 즉 朱子學을 唯一無二의 準則으로 遵奉하든 朝鮮國이면서도 朱子에 依하야 增損된 呂氏鄕約을 그대로 이따에서 實施함에는 여러가지의 矛盾과 難關에 逢着케 되였든 것이니, 이러한 點에 먼저 着眼하야 이 나라 各 地方에 適合한 鄕約을 세우지 않으면 않이 되겠다 하는 것을 先覺한 이는 實로 朝鮮儒學史上의 二大 巨星이라고 일컷는 李退溪 李栗谷 두분이였다. 朝鮮의 鄕約은 退溪 栗谷 二人의 制定에서 비로소 完成하게 되였든 것이니, 以下 그의 大略을 紹介하려 한다.














































본문4-1: (1)이퇴계의 향약


이것은 이황인물이 그의 향리인 경상도 예안에 퇴거하여 명종 11년 12월에 기초한 향약이니, 세칭 예안향약이라고 한다. 이황인물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의 주자인물라고까지 숭상되는 대학자였으나, 한편 그는 중종인물 29년부터 선조 초년까지 전후 30여년 간 관계(官界)에 출입하였으며 기간 전후 무려 15, 6차에 이어 공무 및 사퇴로 경향(京鄕)을 왕래하였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빈번히 경향을 왕래하는 동안에 지방 교화 제도의 미진함을 절감한 때도 때때로 있었을 것이며, 특히 중종인물 28년에는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로서 여씨향약 실시에 진력하던 김안국인물을 여주에서 회견하였으니, 그의 이러한 경력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향약을 제정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황인물이 이 향약을 기초한 경로는 그의 현대문주1▶’향립약조서’[a 34] 중의 상세히 쓰여 있으나, 그 중에서도 분명히
쪽수▶P119-2이것은 李退溪(滉)가 그의 鄕里인 慶尙道 禮安에 退居하야 明宗 十一年 十二月에 草한 鄕約이니, 世稱 禮安鄕約이라고 한다. 李退溪는 周知하는 바와 같이 朝鮮의 朱子라고까지 崇尙되는 大學者이였으나, 一方 그는 中宗 二十九年부터 宣祖 初年까지 前後 三十餘年 間 官界에 出入하였으며 其間 前後 無慮 十五六次에 亘하야 公務 及 辭退로 京鄕을 往來하였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頻繁히 京鄕을 往來하는 동안에 地方 敎化 制度의 未盡함을 切感한 때도 時時로 있었을 것이며, 特히 中宗▶P120-1 二十八年에는 일즉이 慶尙道 觀察使로서 呂氏鄕約 實施에 盡力하든 金安國을 驪州에서 會見하였으니, 그의 이러한 經歷은 마츰내 그로 하여금 鄕約을 制定케 하였든 것이다. 李退溪가 이 鄕約을 草한 經路는 그의 원문주1▶「鄕立約條序」[34] 中의 詳細히 記하여 있으나, 그 中에서도 分明히

今之留鄕 即古鄕大夫之遺意也 得人則一鄕肅然 匪人則一鄕解體 而況鄕俗之間 遠於王靈 好惡相攻 强弱相軋 使孝悌忠信之道 或尼而不行 則棄禮義捐廉恥日甚 流而爲夷狄禽獸之歸 此實王政之大患也 而其紏正之責 乃歸之鄕所 鳴呼其亦重矣 吾鄕雖壤地編小 素號文獻之邦 儒先輩出 羽儀王朝者 前後接踵 觀感薰陶 鄕風最美 頃年以來 運値不淑 達尊諸公相繼逝沒 然猶有故家遺範文義蔚然 以是相率而爲善國豈不可也 奈何人心無恒習俗漸訛 淸芬罕聞而葉芽間作 玆不防遏 厥終將無所不至矣 故崇政知事聾巖先生 患是然也 嘗欲爲之立約條 以厲風俗 鄭重而未及焉 于今知事諸胤 方居喪境內 滉亦守病田間 鄕丈皆欲令我輩數人 遂成先生之志 委責甚至 辭不獲己 乃相與商議而擧其梗槪如此 復以偏示鄕人而審可否 然後乃定 庶幾期行於久遠而無弊也 或者以不先立敎而徒用罰爲疑 是固然矣 然而孝悌忠信 原於降衷秉彛之性 加之以國家說庠序以教之 無非勸導之方 奚待於我輩別立條耶

쪽수▶P120-2

今之留鄕 即古鄕大夫之遺意也 得人則一鄕肅然 匪人則一鄕解體 而況鄕俗之間 遠於王靈 好惡相攻 强弱相軋 使孝悌忠信之道 或尼而不行 則棄禮義捐廉恥日甚 流而爲夷狄禽獸之歸 此實王政之大患也 而其紏正之責 乃歸之鄕所 鳴呼其亦重矣 吾鄕雖壤地編小 素號文獻之邦 儒先輩出 羽儀王朝者 前後接踵 觀感薰陶 鄕風最美 頃年以來 運値不淑 達尊諸公相繼逝沒 然猶有故家遺範文義蔚然 以是相率而爲善國豈不可也 奈何人心無恒習俗漸訛 淸芬罕聞而葉芽間作 玆不防遏 厥終將無所不至矣 故崇政知事聾巖先生 患是然也 嘗欲爲之立約條 以厲風俗 鄭重而未及焉 于今知事諸胤 方居喪境內 滉亦守病田間 鄕丈皆欲令我輩數人 遂成先生之志 委責甚至 辭不獲己 乃相與商議而擧其梗槪如此 復以偏示鄕人而審可否 然後乃定 庶幾期行於久遠而無弊也 或者以不先立敎而徒用罰爲疑 是固然矣 然而孝悌忠信 原於降衷秉彛之性 加之以國家說庠序以教之 無非勸導之方 奚待於我輩別立條耶

라고 하여 당시까지도 유향소가 향풍두정의 책임을 담당하여 왔음과, 유향소의 폐락을 보니 선배의 유지(遺志)를 이어 약조를 세우게 된 것을 전하고 있다. 즉 이황인물이 이 약조를 세우게 된 것도 결코 그 자신의 창의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선배 이현보인물의 유지를 받아 향장(鄕丈)의 권고로 이현보인물의 제자와 더불어 상의하여 입조(立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현보인물(호 농암)는 이황인물과 동향의 사람으로 그보다 34세나 선배며, 연산군인물조(朝) 이래 관로에 출사하여 경향(京鄕) 각 관을 역임한 후 중종 37년에 해골을 걸(乞)하여 향리에 퇴거하여 명종 10에 향년 89세로 졸거하기까지 향리 교화에 진력하였다. 이현보인물는 그의 문집에도 여퇴계서원고(與退溪書) 답퇴계서원고(答退溪書)가 다수 게재되어 있는 바로 보아 이황인물의 선배로 항상 그를 지도하며 친교를 맺어 서로 절차탁마하던 바가 있었는 것 같아, 명종인물 10년 5월에 이현보인물가 질극하여 중태에 이르니 이황인물은 곧 왕후하여 시사를 통읍하였다 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향약을 세우게 하였던 것이다. 앞서 쓴 바와 같이 이현보인물는 만년에 사관(辭官)하여 14년 간 향리에 퇴거하였으니, 그동안 그가 향리 교화에 진력하여 향풍을 두정하기 위하여 약조를 세우고자 한 것은 있었을 만한 일이다. 앞서 든 ‘향립약조서’ 중에도 “故崇政知事聾巖先生 患是然也 嘗欲爲之立約條 以厲風俗 鄭重而未及焉”이라고 하였음과 같이 이현보인물는 생전 중에 약조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정중하여 미급하고 종세(終世)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이황인물이 이것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퇴계는 친교가 두텁던 선배의 유지를 봉승하여 그가 죽은 익년인 명종인물 11년 12월에 복상으로 귀향하여 있던 이현보인물의 제자와 상의하여 마침내 약조를 세워, 이것을 널리 향인에게 편시(徧示)하여 옳고 그름을 심의한 후 성문하였다 한다. 이황인물이 세운 약조의 전문을 들면 다음과 같다.
쪽수▶P120-3라고 하야 當時까지도 留鄕所가 鄕風紏正의 責任을 擔當하여 왔음과, 留鄕所의 廢落을 보매 先輩의 遺志를 繼하야 約條를 立하게 된 것을 傳하고 있다. 즉 李退溪가 이 約條를 立하게 된 것도 決코 그 自身의 創意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先輩 李賢補의 遺志를 받어 鄕丈의 勸告로 李賢補의 諸子와 더부러 商議하야 立條한 것에 지나지 않었다. 李賢補(號 聾巖)는 李退溪와 同鄕의 人으로 그보다 三十四歲나 先輩며, 燕山君朝 以來 官路에 出仕하야 京鄕 各官을 歷任한 後 中宗 三十七年에 骸骨을 乞하야 鄕里에 退居하야 明宗 十年에 享年 八十九歲로 卒去하기까지 鄕里 敎化에 盡力하였다. 李賢補는 그의▶P121-1 文集에도 與退溪書 答退溪書가 多數 揭載되여 있는 바로 보아 李退溪의 先輩로 恒常 그를 指導하며 親交를 매저 서로 切磋琢磨하든 배가 있었는 것 같어, 明宗 十年 五月에 李賢補가 疾革하야 重態에 이르매 李退溪는 곧 徃候하야 時事를 痛泣하였다 한다. 이러한 兩人의 關係는 마츰내 그들로 하여금 鄕約을 立한게 하였든 것이다. 前記한 바와 같이 李賢補는 晚年에 辭官하야 十四年 間 鄕里에 退居하였으니, 그동안 그가 鄕里 敎化에 盡力하야 鄕風을 紏正하기 爲하야 約條를 立하고저 한 것은 있었을 만한 일이다. 前揭 「鄕立約條序」 中에도 「故崇政知事聾巖先生 患是然也 嘗欲爲之立約條 以厲風俗 鄭重而未及焉」이라고 하였음과 같이 李賢補는 生前 中에 約條를 立하고저 하였으나 鄭重하야 未及하고 終世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李退溪가 이것을 完成하였든 것이다. 李退溪는 親交가 두텁든 先輩의 遺志를 奉承하야 그가 죽은 翌年인 明宗 十一年 十二月에 服喪으로 歸鄕하여 있든 李賢補의 諸子와 相議하여 마츰내 約條를 立하여, 이것을 널리 鄕人에게 徧示하야 可否를 審議한 後 成文하였다 한다. 李退溪의 立한 約條의 全文을 들면 다음과 같다.

禮安鄕約(○○○○)
父母不順者不孝之罪邦有常刑故姑舉其次
兄弟相閱者兄曲弟直均罰兄直弟曲止罰弟曲直相半兄輕弟重
家道悖亂者夫妻歐罵黜其正妻(妻悍逆者減等)男女無別嫡妾倒置以妾爲妻以孽爲適適不撫孽孽反陵適
事涉官府有關鄕風者
妄作威勢擾官行私者
鄕長陵辱者
守身嬬婦誘脅汚奸者
已上極罰 上中下
親戚不睦者
正妻疏薄者棲有罪者減等
隣里不知者
儕輩相毆罵者
不顧廉恥汚壞士風者
恃强陵弱侵奪起爭者
無賴結黨多行狂悖者
公私聚會是非官政者
造言構虛陷人罪累者
患難力及坐視不救者
受官差仕憑公作弊者
婚姻喪祭無故過時者
不有執綱不從鄕令者
不休鄕論反懷仇怨者
執綱徇私冒入鄕參者
舊官餞亭無故不參者
己上中罰 上中下
公會晚到者
紊坐失儀者
座中喧爭者
空坐退便者
無故先出者
己上下罰 上中下
元惡鄕吏 人吏民間作弊者 貢物使濯徵價物者 庶人陵萬士族者

쪽수▶P121-2

禮安鄕約(○○○○)
父母不順者不孝之罪邦有常刑故姑舉其次
兄弟相閱者兄曲弟直均罰兄直弟曲止罰弟曲直相半兄輕弟重
家道悖亂者夫妻歐罵黜其正妻(妻悍逆者減等)男女無別嫡妾倒置以妾爲妻以孽爲適適不撫孽孽反陵適
事涉官府有關鄕風者
妄作威勢擾官行私者
鄕長陵辱者▶P122
守身嬬婦誘脅汚奸者
已上極罰 上中下
親戚不睦者
正妻疏薄者棲有罪者減等
隣里不知者
儕輩相毆罵者
不顧廉恥汚壞士風者
恃强陵弱侵奪起爭者
無賴結黨多行狂悖者
公私聚會是非官政者
造言構虛陷人罪累者
患難力及坐視不救者
受官差仕憑公作弊者
婚姻喪祭無故過時者
不有執綱不從鄕令者
不休鄕論反懷仇怨者▶P123-1
執綱徇私冒入鄕參者
舊官餞亭無故不參者
己上中罰 上中下
公會晚到者
紊坐失儀者
座中喧爭者
空坐退便者
無故先出者
己上下罰 上中下
元惡鄕吏 人吏民間作弊者 貢物使濯徵價物者 庶人陵萬士族者

이황인물이 세운 약조는 이와 같이 극벌(極罰) 중벌(中罰) 하벌(下罰)의 3대 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을 통하여 과실을 징벌하는 조목을 열거하였음에 그쳤다. 그리고 각 항목을 상중하의 등급으로 분별하였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 치벌(治罰) 방법을 명기하지 않았음은 불충분한 점이 있으며, 끝으로 원악향리 등 네 조목을 부기하였으되, 이 또한 어떠한 징벌을 여(與)하는지 상세하지 않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이황인물의 약조는 그리 완비된 것이 아닌 것 같으나, 이것은 퇴계선생문집서적에서 판서한 것이므로 이황인물 자신이 제정한 것보다 다소의 낙탈(落脫)이 있었음에서 유래하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앞서 든 ‘향립약조서’에도 “或者以不先立敎而徒 用罰爲疑 是固然矣 然而孝悌忠信原於降衷秉彝之性 加之以國家設庠序以敎之 無非勸導之方 奚待於我輩別立條耶”라고 하였음과 같이, 이황인물은 과실을 치벌하는 것만을 주안으로 하여 입조하고, 기타 입교예속(立敎禮俗) 등의 건(件)은 학교교육에서 권도할 것을 기하였다. 따라서 이황인물의 약조는 주자증손여씨향약과는 전연 관계가 없었고, 여씨향약의 4대강목인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중 특히 과실상규만을 중시하여 동방의 가족제도를 중심 삼아 향토에 적응하게 약조를 한 것 같다. 이 점은 제2절에서 논한 이태조인물 친제(親製)의 향헌조목과 상사(相似)하니, 이황인물의 약조는 지나향약의 영향을 받은 바 그리 없고, 앞서 쓴 이태조인물 친제의 향헌조목과 같이 온전히 이 향토에 적응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순 조선적 향약으로 가족제도를 중심 하여 과실을 상규함으로써 국풍 내지 향풍을 미화 돈후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리하여 순 조선적 향약이 성립되었으나, 이황인물의 연보에 의하면 “先生草約 因事不果行”이라 하여 당시 이 약조가 실행되지 못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황인물이 생존하던 당시의 일일 뿐이요, 그가 사거하여 그의 학통 문벌이 영남 각지에서 융성함을 따라 후세 이 약조는 여씨향약과 아울러 각지에서 채용하게 되었다.
쪽수▶P123-2李退溪의 立한 約條는 이와 같이 極罰 中罰 下罰의 三大 項目으로 나누어 各 項目을 通하야 過失을 懲罰하는 條目을 列擧하였음에 끄쳤다. 그리고 各 項目을 上中下의 等級으로 分別하였으나, 이에 對한 具體的 治罰 方法을 明記치 않었음은 不充分한 點이 있으며, 끝으로 元惡鄕吏 等 四條目을 附記하였으되, 이亦 如何한 懲罰을 與하는지 詳細치 않다. 이러한 點으로 보아 李退溪의 約條는 그리 完備된 것이 않인 것 같으나, 이것은 退溪先生 文集에서 坂書한 것이므로 李退溪 自身이 制定한 것보다 多少의 落脫이 있었음에서 由來하였는지도 몰으겠다. 何如튼 前揭 「鄕立約條序」에도 「或者以不先立敎而徒 用罰爲疑 是固然矣 然而孝悌忠信原於降衷秉彝之性 加之以國家設庠序以敎之 無非勸導之方 奚待於我輩別立條耶」라고▶P124-1 하였음과 같이, 李退溪는 過失을 治罰하는 것만을 主眼으로 하야 立條하고, 其他 立敎禮俗 等의 件은 學校敎育에서 勸導할 것을 期하였다. 따라서 李退溪의 約條는 朱子增損呂氏鄕約과는 全然 關係가 없었고, 呂氏鄕約의 四大綱目인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中 特히 過失相規만을 重視하야 東方의 家族制度를 中心 삼아 鄕土에 適應하게 約條를 한 것 같다. 이 點은 第二節에서 論한 李太祖 親製의 鄕憲條目과 相似하니, 李退溪의 約條는 支那鄕約의 影響을 받은 배 그리 없고, 前記 李太祖 親製의 鄕憲條目과 같이 온전히 이 鄕土에 適應케 하기 僞하야 制定된 純 朝鮮的 鄕約으로 家族制度를 中心 하야 過失을 相規함으로써 家風 乃至 鄕風을 美化 敦厚케 하고저 한 것이다. 이리하야 純 朝鮮的 鄕約이 成立되였으나, 李退溪의 年譜에 依하면 ”先生草約 因事不果行”이라 하야 當時 이 約條가 實行되지 못하였음을 傳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李退溪가 生存하든 當時의 일일 뿐이요, 그가 死去하야 그의 學統 門閥이 嶺南 各地에서 隆盛함을 따라 後世 이 約條는 呂氏鄕約과 아울러 各地에서 採用케 되였다.
































본문4-2: (2)이율곡의 향약


이이인물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퇴계와 아울러 이조 5백년 간에 가장 고명(高名)한 학자였었으나, 그도 이황인물과 같이 향약을 입정(立定)하였다. 이이인물는 은둔주의적 학자이던 이황인물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요 행정적 수완을 갖춘 정치가 겸 학자였던 만큼, 그의 입정한 향약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이황인물의 그것보다는 훨씬 탁월한 것이었다. 이이인물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일생을 향약과 관련하여 시종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청년 시대로부터 장년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후 수차 향약을 입정하여 향리교도에 진력하였으므로, 후세 향약이라 하면 곧 이이인물를 연상하게까지 되었다.
쪽수▶P124-2李栗谷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李退溪와 아울러 李朝 五百年 間에 가장 高名한 學者이였었으나, 그도 李退溪와 같이 鄕約을 立定하였다. 李栗谷은 隱遁主義的 學者이든 李退溪보다는 좀 더 積極的이요 行政的 手腕을 가춘 政治家 兼 學者이였드니만치, 그의 立定한 鄕約도 質的으로나 量的으로나 李退溪의 그것보다는 훨신 卓越한 것이였다. 李栗谷은 後述하는 바와 같이 一生을 鄕約과 關聯하야 始終하였다 하여도 過言이 않일 만치 靑年 時代로부터 壯年 時代에 이르기까지 前後 數次 鄕約을 立定하야 鄕里敎導에 盡力하였으므로, 後世 鄕約이라 하면 곧 李栗谷을 聯想하게까지 되였다.
이이인물이황인물보다 35세 연하의 후배로서 항상 그를 선배로 존신(尊信)하여, 그가 23세이던 명종인물 13년 봄에는 성주로부터 강릉으로 향하든 도중, 우정 당시 예안 도산에 퇴서(退棲)하던 이황인물을 방알(訪謁)하여 2일 간을 머무르면서 학설을 강론하였다 한다. 이 명종인물 13년은 이황인물이 예안향약을 입정한 명종인물 11년과 거의 2년을 격(隔)하니, 당시 두 사람이 교결하던 사이에 이이인물이황인물의 입정한 예안향약을 득견하였거나, 이에 대한 담화를 득문하였을 것이다. 만약 나의 추측이 용허된다면 이이인물의 향약에 대한 식견은 이때부터 더욱 풍부하여졌을 것이면, 그의 향약 입정의 동기로 실로 이때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리하여 이이인물명종인물조(朝)에는 파주향약에 서문을 짓고, 선조인물조(朝)에 들어서는 청주 서원향약을 입정한 것을 비롯하여 해주향약 해주일향약속 등을 입정하여 향리 교화에 공헌하는 바 다대하였다. 아래에서는 이이인물가 관련한 향약에 대하여 약설하고, 그의 입정의 대표적인 향약으로 서원향약과 해주일향약속을 열기(列記)하려 한다.
쪽수▶P124-3李栗谷은 李退溪보다 三十五歲 年下의 後輩로서 항상 그를 先輩로 尊信하야, 그가 二十三歲이든 明宗 十三年 春에는▶P125-1 星州로부터 江陵으로 向하든 道中, 우정 當時 禮安 陶山에 退棲하든 李退溪를 訪謁하야 二日 間을 머물르면서 學說을 講論하였다 한다. 이 明宗 十三年은 李退溪가 禮安鄕約을 立定한 明宗 十一年과 僅 二年을 隔하니, 當時 兩人이 交結하든 사히에 李栗谷은 李退溪의 立定한 禮安鄕約을 得見하였거나, 이에 對한 談話를 得聞하였을 것이다. 萬若 나의 推測이 容許된다면 李栗谷의 鄕約에 對한 識見은 이때부터 더욱 豐富하여졌을 것이면, 그의 鄕約 立定의 動機로 實로 이때에 있었든 것이 않인가 한다. 이리하야 李栗谷은 明宗朝에는 坡州鄕約에 序文을 作하고, 宣祖朝에 入하야는 淸州 西原鄕約을 立定한 것을 비롯하야 海州鄕約 海州一鄕約束 等을 立定하야 鄕里 敎化에 貢獻하는 배 多大하였다. 以下 李栗谷이 關聯한 鄕約에 對하야 略說하고, 그의 立定의 代表的인 鄕約으로 西原鄕約과 海州一鄕約束을 列記하려 한다.
이이인물가 최초로 향약과 관계하게 된 것은 그가 명종인물조(朝)에 파주향약에 서문을 쓴 일이니, 이 파주향약은 명종인물 15년에 파주군수로 된 변협인물(邊協)이 여씨향약을 모방하여 입법한 것이었다. 당시 이이인물가 지은 현대문주2▶「파주향약서」[a 35]중에는
쪽수▶P125-2李栗谷이 最初로 鄕約과 關係하게 된 것은 그가 明宗朝에 坡州鄕約에 序文을 記한 일이니, 이 坡州鄕約은 明宗 十五年에 坡州郡守로 된 邊協이 呂氏鄕約을 模倣하야 立法한 것이였다. 當時 李栗谷이 撰한 원문주2▶「坡州鄕約序」[35]中에는

坡山廁兩京之間 寔王化所先之地也 歲庚申春 官以聖旨布告郡邑 令修鄕約 是年冬某郡邊公協來守是邦 好古樂善 心與事會 乃頒令于境內 且屬一鄕父老使之敎導 禮義成歸于正 鄕有長者 議于衆而復于公曰 鄕約之設匪今伊始作 輟不恒有具無實 良由里各爲約 不統于州 有憝罔懲 因人廢法 若使鄕統其里里承于鄕 且以中正兼掌鄕議 則約行不泥 庶不中廢 公以爲然 於是採一鄕之論 做呂氏鄕約而立法焉

쪽수▶P125-3

坡山廁兩京之間 寔王化所先之地也 歲庚申春 官以聖旨布告郡邑 令修鄕約 是年冬某郡邊公協來守是邦 好古樂善 心與事會 乃頒令于境內 且屬一鄕父老使之敎導 禮義成歸于正 鄕有長者 議于衆而復于公曰 鄕約之設匪今伊始作 輟不恒有具無實 良由里各爲約 不統于州 有憝罔懲 因人廢法 若使鄕統其里里承于鄕 且以中正兼掌鄕議 則約行不泥 庶不中廢 公以爲然 於是採一鄕之論 做呂氏鄕約而立法焉

이라고 있어 명종인물 15년 경신 봄에 국가로부터 향약의 수행을 명하니, 같은 해 겨울에 본군 군수로 내임한 변협인물이 봉명하여 경내에 향약을 반포하는 한편, 향장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일향의 논을 주로 참작하여 여씨향약을 본떠 그 지방에 적응한 향약을 입정하였다 한다. 이로 보면 명종인물 15년 이후 파주 지방에서도 향속에 적응한 향약이 입정되어 시행하게 된 것 같으나, 당시 변협인물이 입정한 향약이 오늘날 전하지 않으므로, 그의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음은 유감이다. 하여간 이 파주향약은 앞서 쓴 명종인물 11년 입정의 예안향약과 아울러 지나의 여씨향약을 맹목적으로 운용하려 하는 데서 출생하던 여러가지의 모순을 없애기 위하여 이 국토에 적응한 향약을 세우고자 하는 지방적 요구에서 출생한 일종의 조선적 향약으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향약은 오늘날 문헌상으로는 전하지 않으나 당시 향약을 이상적으로 시행하던 지방에서는 각기 지방적 사정에 응하여 입정되어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이인물는 이 향약이 파주 경내에서 시행하게 됨에 대하여
쪽수▶P125-4이라고 있어 明宗 十五年 庚申 春에 國家로부터 鄕約의 修行을 命하매, 同年 冬에 本郡 郡守로 來任한 邊協이 奉命하야 境內에 鄕約을 頒布하는 一方, 鄕長들의 意見을 받어들려서 一鄕의 論을 主로 參酌하야 呂氏鄕約을 본떠 그 地方에 適應한 鄕約을 立定하였다 한다. 이로 보면 明宗 十五年 以後 坡州 地方에서도 鄕俗에 適應한 鄕約이 立定되여 施行케 된 것 같으▶P126-1나, 當時 邊協이 立定한 鄕約이 今日 傳하지 않으므로, 그의 詳細한 內容을 알 수 없음은 遺憾이다. 何如間 이 坡州鄕約은 前記한 明宗 十一年 立定의 禮安鄕約과 아울러 支那의 呂氏鄕約을 盲目的으로 運用하려 하는 데서 出生하든 여러가지의 矛盾을 없이하기 爲하야 이 國土에 適應한 鄕約을 세우고저 하는 地方的 要求에서 出生한 一種의 朝鮮的 鄕約으로 特히 注目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種類의 鄕約은 今日 文獻上으로는 傳하지 않으나 當時 鄕約을 理想的으로 施行하든 地方에서는 各其 地方的 事情에 應하야 立定되여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李栗谷은 이 鄕約이 坡州 境內에서 施行케 됨에 對하야

鳴呼此邦之得邊公一幸也 鄕有二三長者 承公之命 經始立約者二幸也 如是而坡人草偃于風樂爲良民 上勤下順者三幸也 有此三幸也而無老於文辭 可楊其美者惜乎

쪽수▶P126-2

鳴呼此邦之得邊公一幸也 鄕有二三長者 承公之命 經始立約者二幸也 如是而坡人草偃于風樂爲良民 上勤下順者三幸也 有此三幸也而無老於文辭 可楊其美者惜乎

라고 평하여 파주 군민이 3행을 득하였음을 칭찬하고, 끝으로 당시 25, 6세에 불과하던 박학한 자기가 서문을 기초하게 된 것은 가석(可惜)한 일이다 하고 겸손한 뜻을 표하였다. 이 파주향약이 연대적으로 어느 해 완성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논정하기 어려우나, 변협인물이 군수로 부임하던 명종인물 15년이나 그 익년이었음은 의심할 바 없으며, 따라서 이율곡이 서문을 지은 것도 이때를 전후하였을 것이다. 변협인물국조인물지서적(國朝人物志)에도
쪽수▶P126-3라고 評하야 坡州 郡民이 三幸을 得하였음을 稱讃하고, 끝으로 當時 二十五六歲에 不過하든 薄學한 自己가 序文을 草하게 된 것은 可惜한 일이다 하고 謙遜한 뜻을 表하였다. 이 坡州鄕約이 年代的으로 어느 해 完成되였는지는 明確하게 論定하기 어려우나, 邊協이 郡守로 赴任하든 明宗 十五年이나 그 翌年이였음은 疑心할 배 없으며, 따라서 李栗谷이 序文을 撰한 것도 이때를 前後하였을 것이다. 邊協은 國朝人物志에도

현대문주3▶爲坡州牧時 訪栗谷李珥 講論周易啓蒙 頗有不得之妙[a 36]

쪽수▶P126-4

원문주3▶爲坡州牧時 訪栗谷李珥 講論周易啓蒙 頗有不得之妙[36]

라고 기재한 바와 같이 파주군수 때에 공가(公暇)를 타서 자주 이이인물를 방문하여 학술을 강론하였다 하니, 이이인물가 본 서문을 기초하게 된 유래도 이러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쪽수▶P126-5라고 記載한 바와 같이 坡州郡守 時에 公暇를 타서 자조 李栗谷을 訪問하야 學術을 講論하였다 하니, 李栗谷이 本 序文을 草하게 된 由來도 이러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이이인물는 그 후 명종인물 19년에 장원급제로 문과 출신하여 일약 호조 좌랑이라는 관직에 취임하게 된 것을 비롯하여 이후 수년 간 경직(京職)에 유임하다가, 일시 가사 및 신병으로 강릉 해주 파주 등지에 퇴거한 후 선조인물4년 6월에 청주목사로 전임하게 되었다. 이이인물는 청주목사로 임지에 부임하자 곧 당년에 향약을 지어 주민을 교화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서원향약이다. 그가 이 향약을 입찬(立撰)한 경로는 그의 저(著) 서원향약 현대문주4▶‘입의’[a 37] 중에
쪽수▶P126-6李栗谷은 그 후 明宗 十九年에 壯元及第로 文科 出身하야 一躍 戶曹 佐郞이라는 官職에 就任하게 된 것을 비롯하야 以▶P127-1後 數年 間 京職에 留任하다가, 一時 家事 及 身病으로 江陵 海州 坡州 等地에 退居한 後 宣祖 四年 六月에 淸州牧使로 轉任케 되였다. 李栗谷은 淸州牧使로 任地에 赴任하자 곳 當年에 鄕約을 撰하야 州民을 敎化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西原鄕約이다. 그가 이 鄕約을 立撰한 經路는 그의 著 西原鄕約 원문주4▶「立議」[37] 中에

余以迂儒叨守大邑 不閑政務 固多疵累 惟是化民成俗之志惓惓不已 玆與鄕中父老商議導迪之力 鄕人皆以爲莫如申明鄕約 蓋此邑自李使君增榮始申鄕約 厥後李公遴因而損益之 規模可觀 第恨李公還朝 鄕人意沮 竟爲文具 余承二侯之躅 遂採前規 參以呂氏鄕約 煩者簡之 疎者密之 更爲條約 雖不敢自謂得中 而勸懲之術庶幾無大滲漏矣

쪽수▶P127-2

余以迂儒叨守大邑 不閑政務 固多疵累 惟是化民成俗之志惓惓不已 玆與鄕中父老商議導迪之力 鄕人皆以爲莫如申明鄕約 蓋此邑自李使君增榮始申鄕約 厥後李公遴因而損益之 規模可觀 第恨李公還朝 鄕人意沮 竟爲文具 余承二侯之躅 遂採前規 參以呂氏鄕約 煩者簡之 疎者密之 更爲條約 雖不敢自謂得中 而勸懲之術庶幾無大滲漏矣

라고 있음으로써 대략 알 수 있다. 즉 이이인물가 본 향약을 입정하게 된 것도 결코 그의 창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본 주에 내수(來守)한 이증영인물 이린인물 두 후(侯)의 유업을 이어 이것을 완성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증영인물 이린인물 두 사람이 각각 어느 때 청주목사로 내임하였던지는 이제 명확히 고정하기 어려우나, 이린인물명종인물 4년에 문과 등제하였다 하니, 그가 본 주에 내임한 것도 물론 명종인물 4년 이후의 일일 것이며, 나의 생각으로는 두 공(公)은 이이인물가 부임하기 직전의 본 주의 주재였었던 것 같다. 충주 청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방은 앞 절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중종조래향약이 비교적 잘 시행된 곳이었었으니, 이러한 지방에 내주(來主)한 그들이 지방 민심에 추종하여 향약을 신명하고 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리하여 이증영인물은 본 주에 내임하자 향약의 시행을 명하고 그 뒤를 이어 위재(爲宰)한 이린인물도 전자를 더욱 손익하여 새로운 향약을 세워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환조하게 되어 미급하였다 한다. 당시 이증영인물 이린인물이 입정 실시한 향약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는 오늘날 알 길이 없으나, 그것이 여씨향약과는 다소 색채를 달리 한 향토적 특색을 띤 향약이었음은 앞서 쓴 ‘입의’ 글만으로도 대략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은 마침내 이이인물에 의하여 채용되어 서원향약이 되었던 것이다. 이이인물는 이 두 사람 제정의 전규(前規)를 주로 채용하고 부(副)로 여씨향약을 참작하여 선조인물 4년 가을에 서원향약을 입정하였으나, 그의 이러한 행위는 그 자신의 해박한 지식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요, 한편 앞서 쓴 파주군수 변협인물 및 본 청주목사 이증영인물 이린인물들의 행적을 모방하여 지방관으로서의 임무를 가장 잘 이행하고자 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이인물선조인물 4년 6월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자 2, 3월 후인 같은 해 가을에는 벌써 향약을 세워 교화에 진력하였던 것이니, 그의 입정한 서원향약의 조목은 다음과 같다.
쪽수▶P127-3라고 있으므로써 大略 알 수 있다. 즉 李栗谷이 本 鄕約을 立定하게 된 것도 決코 그의 創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本 州에 來守한 李增榮 李遴 二侯의 遺業을 承하야 이것을 完成한 것에 지나지 않었다. 李增榮 李遴 兩人이 各各 어느 때 淸州牧使로 來任하였든지는 이제 明確히 考定키 어려우나, 李遴은 明宗 四年에 文科 登第하였다 하니, 그가 本 州에 來任한 것도 勿論 明宗 四年 以後의 일일 것이며, 나의 생각으로는 二公은 李栗谷이 赴任하기 即前의 本 州의 主宰이였었든 것 같다. 忠州 淸州를 中心으로 한 忠淸道 地方은 前節에서도 論한 바와 같이 中宗朝來鄕約이 比較的 잘 施行된 곳이였었으니, 이러한 地方에 來主한 그들이 地方 民心에 追從하야 鄕約을 申明하고 전한 것은 當然한 일이다. 이리하야 李增榮은 本州에 來任하자 鄕約의 施行을 命하고 그 뒤를 이어 爲宰한 李遴도 前者를 더욱 損益하야 新鄕約을 세워 實施코저 하였으나 還朝케 되여 未及하였다 한다. 當時 李增榮 李遴이 立定 實施한 鄕約이 어떠한 것이였든가는 오늘날 알 길이 없으나, 그것이 呂氏鄕約과는 多少 色彩를 달리 한 鄕土的 特色을 띤 鄕約이였음은 前記 「立議」文만으로도 大略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은 마츰내 李栗谷에 依하야 採用되여 西原鄕約이 되였든 것이다. 李栗谷은 이 兩人 制定의 前規를 主로▶P128-1 採用하고 副로 呂氏鄕約을 參酌하야 宣祖 四年 秋에 西原鄕約을 立定하였으나, 그의 이러한 行爲는 그 自身의 該博한 知識에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요, 一方 前記 坡州郡守 邊協 及 本淸州牧使 李增榮 李遴들의 行蹟을 模倣하야 地方官으로서의 任務를 가장 잘 履行코저 한 데서 由來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李栗谷은 宣祖 四年 六月에 淸州牧師로 赴任하자 二三月 後인 同年 秋에는 벌서 鄕約을 立하야 敎化에 盡力하였든 것이니, 그의 立定한 西原鄕約의 條目은 다음과 같다.

西原鄕約(○○○○)
置都契長四人
每掌內各置契長一人淸州二十五掌內也
童蒙訓誨一人
色掌一人色掌別檢물론良賤擇勤幹向善者爲之
每里各置別撿
一置善惡籍 以昭勸戒 所謂善者 能孝父母 能友兄弟 能治家政內外齊整 能睦親故 能和鄰里 能以儒行持身 能以義訓子弟 能守廉介 能廣施惠 能勤學問 能謹租賦 能遵約令 能與人有信 能導人爲善 能解人爭鬪 能救人患難 能伸人寃枉 能辦人曲直之類 所謂惡者 不孝不慈不友不悌不敬師傳 夫婦無別 疎薄正妻 朋反無信 臨喪不哀 不敬祀事 崇信異端 輕蔑禮法 好作淫祀 族類不睦 鄰里不和 少陵長賤陵貴 縱酒賭博 好訟喜鬪 恃强凌弱 造言誣毀 不謹租賦 不畏法令 營私太甚 挾妓宴飮 怠惰廢事之類 有司色掌別撿掌其籍 隨所聞從實記之
一四孟朔擇無故之日 掌內同約者皆會講信
一里中有喪 色掌別撿奔告有司 同約之人各出米一升空石一葉賻之或貧竆不能賻者許以身役 氷葬時各出壯丁一各助之 士族役多則專軍給之 役少則折半給之 其餘不役人數收米各一升給之
一凡干喪事 聚會時母得設杯盤飲酒 犯者以輕蔑禮法論
一凡有家故不得已遷葬者 具由告官 若惑於風水得已不已及過期不葬者以崇信異端論
一年壯處女貧甚過時未嫁者 報官給資裝 約中亦隨宜扶助
一有遇闔家病患廢棄農事者 里中各出力耕耘以助
一年三十以下非文非武者 皆令讀小學孝經童子習等書 不讀者論罰
一民間凡有爭訟者 皆就契長有司辨其曲直 契長有司開諭曲者以止其訟 契長有司若不能獨斷 則通于約中 士類會議他員會者滿三員則論議可也 分釋開諭 曲直明著而曲者猶不止 則以非理好訟論重則即治其罪輕則書于惡籍 若目鄉中不能目斷 則聽其告官
一笞四十以下則契長有司自斷 過此則報官
一官吏官奴等周行閭里求請作弊者及勸農色掌等村民侵嘖者 一一摘發報官治罪 一草竊穿窬者 摘發治罪
一無故屠牛者治罪 若有不得己之故 宰殺則具由告契長
一無罪之人橫被誣枉 將受刑戮 則同約連各報官伸理
一憚於修飾不欲參約 或違約作過終不悛改者 報官治罪後黜鄉
一犯罪須即治者 不待四孟之會 隨宜論罰
一凡報官之事 若非四孟之會 則通于約中諸員 他員滿三員 然後商議報官他員皆署契長特署有司與他列署
一都契長一年一度會各面契長有同于一處議約法
一契長有司若有憑公營私不明不正者 都契長報官駁改色掌別撿則各掌內契長有司糾察其失 甚者改之
一都契長若有報官之事 則不時相通聚會四人內二人參會則報官
一各掌內契長與鄕所相通時用關子 通于都契長則用牒呈 都契長則不與鄉所通文字

쪽수▶P128-2

西原鄕約(○○○○)
置都契長四人
每掌內各置契長一人淸州二十五掌內也
童蒙訓誨一人
色掌一人色掌別檢勿論良賤擇勤幹向善者爲之
每里各置別撿
一置善惡籍 以昭勸戒 所謂善者 能孝父母 能友兄弟 能治家政內外齊整 能睦親故 能和鄰里 能以儒行持身 能以義訓子弟 能守廉介 能廣施惠 能勤學問 能謹租賦 能遵約令 能與人有信 能導人爲善 能解人爭鬪 能救人患難 能伸人寃枉 能辦人曲直之類 所謂惡者 不孝不慈不友不悌不敬師傳 夫婦無別 疎薄正妻 朋反無信 臨喪不哀 不敬祀事 崇信異端 輕蔑禮法 好作淫祀 族類不睦 鄰里不和 少陵長賤陵貴 縱酒賭博 好訟喜鬪 恃强凌弱 造言誣毀 不謹租賦 不畏法令 營私太甚 挾妓宴飮 怠惰廢事之類 有司色掌別撿掌其籍 隨所聞從實記之
一四孟朔擇無故之日 掌內同約者皆會講信▶P129
一里中有喪 色掌別撿奔告有司 同約之人各出米一升空石一葉賻之或貧竆不能賻者許以身役 氷葬時各出壯丁一各助之 士族役多則專軍給之 役少則折半給之 其餘不役人數收米各一升給之
一凡干喪事 聚會時母得設杯盤飲酒 犯者以輕蔑禮法論
一凡有家故不得已遷葬者 具由告官 若惑於風水得已不已及過期不葬者以崇信異端論
一年壯處女貧甚過時未嫁者 報官給資裝 約中亦隨宜扶助
一有遇闔家病患廢棄農事者 里中各出力耕耘以助
一年三十以下非文非武者 皆令讀小學孝經童子習等書 不讀者論罰
一民間凡有爭訟者 皆就契長有司辨其曲直 契長有司開諭曲者以止其訟 契長有司若不能獨斷 則通于約中 士類會議他員會者滿三員則論議可也 分釋開諭 曲直明著而曲者猶不止 則以非理好訟論重則即治其罪輕則書于惡籍 若目鄉中不能目斷 則聽其告官
一笞四十以下則契長有司自斷 過此則報官
一官吏官奴等周行閭里求請作弊者及勸農色掌等村民侵嘖者 一一摘發報官治罪 一草竊穿窬者 摘發治罪
一無故屠牛者治罪 若有不得己之故 宰殺則具由告契長
一無罪之人橫被誣枉 將受刑戮 則同約連各報官伸理
一憚於修飾不欲參約 或違約作過終不悛改者 報官治罪後黜鄉
一犯罪須即治者 不待四孟之會 隨宜論罰
一凡報官之事 若非四孟之會 則通于約中諸員 他員滿三員 然後商議報官他員皆署契長特署有司與他列署▶P130-1
一都契長一年一度會各面契長有同于一處議約法
一契長有司若有憑公營私不明不正者 都契長報官駁改色掌別撿則各掌內契長有司糾察其失 甚者改之
一都契長若有報官之事 則不時相通聚會四人內二人參會則報官
一各掌內契長與鄕所相通時用關子 通于都契長則用牒呈 都契長則不與鄉所通文字

이이인물의 입정한 서원향약은 이와 같이 여씨향약과는 대단히 조목의 내용을 달리한 것이었으니, 이 점은 앞서 쓴 태조인물의 향헌조목과 이황인물의 예안향약과 한가지로 공통되는 것이며, 지나의 모방으로 시종하던 당시이면서도 주자의 증손한 여씨향약을 그대로 이 땅에서 실시함에는 각종의 지장이 생기게 되어 이 나라 풍속에 적합한 향약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치 못하게 되었던 당시의 사회 상태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향약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약의 역원을 계장 유사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여씨향약의 약정 직월에 해당하는 것으로 명종인물 초년에도 발론한 바와 같이 조선에 여씨향약을 시행하게 하는 대신에 계를 맺게 하자 하던 당시 사회의 실정에 적합하도록 향약을 세운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이 향약을 여씨향약과 대조하여 보면 여씨향약 중의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두 강목만을 주안으로 하여 편성한 감이 있으니, 이것은 이황인물의 예안향약과 한가지로 조선향약의 특색이라 할 것이며, 예안향약에서 한걸음을 나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향약에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집회독약지례’를 본떠 ‘향회독약법’을 규정하여 매년 사맹삭(정 4·7·10월)에 약원(約員)을 한 자리에 회합하게 하여 향약의 취지를 개유(開諭)하는 순서 방법을 부기한 것이 있으나, 이곳에서는 지리하여지므로 상기(詳記)함을 생략한다. 다만 그 중에서
쪽수▶P130-2李栗谷의 立定한 西原鄕約은 이와 같이 呂氏鄕約과는 大端히 條目의 內容을 달리한 것이였으니, 이 點은 前記한 太祖의 鄕憲條目과 李退溪의 禮安鄕約과 한가지로 共通되는 것이며, 支那의 模倣으로 始終하든 當時이면서도 朱子의 增損한 呂氏鄕約을 그대로 이따에서 實施함에는 各種의 支障이 生케 되여 이 나라 風俗에 適合한 鄕約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치 못하게 되였든 當時의 社會 狀態를 如實히 證明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鄕約에서 特히 注目되는 것은 鄕約의 役員을 契長 有司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呂氏鄕約의 約正 直月에 該當하는 것으로 明宗 初年에도 發論한 바와 같이 朝鮮에 呂氏鄕約을 施行하게 하는 대신에 契를 매지게 하자 하든 當時 社會의 實情에 適合하도록 鄕約을 세운 데서 由來한 것이라고 본다. 이 鄕約을 呂氏鄕約과 對照하여 보면 呂氏鄕約 中의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二綱目만을 主眼으로 하야 編成한 感이 있으니, 이것은 李退溪의 禮安鄕約과 한가지로 朝鮮鄕約의 特色이라 할 것이며, 禮安鄕約에서 一步를 進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鄕約에는 朱子增損呂氏鄕約의 「集會讀約之禮」를 본떠 「鄕會讀約法」을 規定하야 每年 四孟朔(正 四·七·十月)에 約員을 一席에 會合케 하야 鄕約의 趣旨를 開諭하는 順序 方法을 附記한 것이 있으나, 이곳에서는 支離하여지므로 詳記함을 省略한다. 다만 그 中에서

色掌以善惡籍遍示諸位 諸位中或所聞各異 則更與商議歸一 覽畢有司起揖 爲善者出 庶人以下則色掌揖出 設別座于前 衆皆推獎且加勸勉 又招僞惡者 輕則切責使改 改行然後爻其籍 重則隨宜論罰

쪽수▶P130-3

色掌以善惡籍遍示諸位 諸位中或所聞各異 則更與商議歸一 覽畢有司起揖 爲善者出 庶人以下則色掌揖出 設別座于▶P131-1前 衆皆推獎且加勸勉 又招僞惡者 輕則切責使改 改行然後爻其籍 重則隨宜論罰

이라고 하였음은 미상하나마 선악자를 상벌하는 방법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131-2이라고 하였음은 未詳하나마 善惡者를 賞罰하는 方法을 傳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이인물는 이와 같이 선조인물 4년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서원향약을 세워 향리교도에 노력하였으나, 그 익년 3월에는 병으로 사임하고 입경하여, 이후 수년 간 경향(京鄕)의 현직(顯職)을 역임하다가 중앙에서 동서 붕당의 알력이 점점 심해지자 이것을 조정하고자 알선하여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니 드디어 모든 것을 청산하고 선조인물 10년에 해주 석담에 퇴거하였다. 이이인물선조인물 10년 정월에 석담에 돌아가자 우선 종족(宗族)을 모아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언문으로 지어 서모 백비 및 제형 제자질 등이 동취(同炊)하는 사이에 지킬 준칙을 세워, 일가족 내의 예의범절을 엄히 하는 한편, 향인 유지와 상의하여 향약을 입정하여 주민교도에 여생을 바쳤다. 현대문주5▶당시 이이인물가 입정한 향약류(類)는 해주향약을 비롯하여 사창계약속 해주일향약속 등의 3종이다.[a 38] 그 중 해주향약은 서언 격인 입향범례 19조만이 지방적 사정을 가미한 것이고, 그 외의 본 조목은 대부분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그대로 따다가 다소의 증보를 행한 것이며, 사창계약속도 입약범례 15조와 사창법 11조만을 제하면 근본의 조목은 전자 동양(同樣) 여씨향약을 근간으로 하여 계의 근본정신인 환난상휼과 과실상규의 두 강목을 더욱 상세히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해주향약은 해주읍을 중심으로 한 지방을 위하여 세운 향약으로 그의 회집독약 같은 것도 해주 읍내 문헌서원에서 행하였으며, 사창계약속도 이이인물의 처가의 소재지인 해주 야두촌(野頭村)을 위하여 세운 것으로 그의 강신의(독약회)는 임시 장막 아래에서 행하였다 하니, 이로 보면 이 두 향약은 모두 일부 국한지에만 시행하고자 한 협의의 향약이며, 따라서 양자는 극히 근사한 점이 많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이 두 향약에 대하여 상기(詳記)함을 생략하고, 좀 더 광범위의 향약인 해주일향약속을 대표적으로 예기하여 참고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쪽수▶P131-3李栗谷은 이와 같이 宣祖 四年에 淸州牧使로 赴任하야 西原鄕約을 세워 鄕里敎導에 努力하였으나, 그 翌年 三月에는 病으로 辭任하고 入京하야, 以後 數年 間 京鄕의 顯職을 歷任하다가 中央에서 東西 朋黨의 軋轢이 점점 甚하여지자 이것을 調停코자 斡旋하야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매 드디여 모든 것을 淸算하고 宣祖 十年에 海州 石潭에 退居하였다. 李栗谷은 宣祖 十年 正月에 石潭에 도라가자 우선 宗族을 會하야 同居戒辭를 諺文으로 作하야 庶母 伯婢 及 諸兄 弟子姪 等이 同炊하는 사히에 직힐 準則을 세워, 一家族 內의 禮義凡節을 嚴히 하는 一方, 鄕人 有志와 商議하야 鄕約을 立定하야 州民敎導에 餘生을 받히였다. 원문주5▶當時 李栗谷이 立定한 鄕約類는 海州鄕約을 비롯하야 社倉契約束 海州一鄕約束 等의 三種이다.[38] 그 中 海州鄕約은 序言 格인 立約凡例 十九條만이 地方的 事情을 加味한 것이고, 그 外의 本條目은 大部分이 朱子增損呂氏鄕約을 그대로 따다가 多少의 增補를 行한 것이며, 社倉契約束도 立約凡例 十五條와 社倉法 十一條만을 除하면 根本의 條目은 前者 同樣 呂氏鄕約을 根幹으로 하야 契의 根本精神인 患難相恤과 過失相規의 兩綱目을 더욱 詳細히 規定한 것이다. 그리고 海州鄕約은 海州邑을 中心으로 한 地方을 爲하야 세운 鄕約으로 그의 會集讀約 같은 것도 海州 邑內 文憲書院에서 行하였으며, 社倉契約束도 李栗谷의 妻家의 所在地인 海州 野頭村을 爲하야 立한 것으로 그의 講信儀(讀約會)는 臨時 帳幕 下에서 行하였다 하니, 이로 보면 이 두 鄕約은 모다 一部 局限地에만 施行코저 한 狹義의 鄕約이며, 따라서 兩者는 極히 近似한 點이 많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이 두 鄕約에 對하야 詳記함을 略하고, 좀 더 廣範圍의 鄕約인 海州一鄕約束을 代表的으로 例記하야 參考에 供코저 한다.

海州一鄉約束(●●●●●●)
擇鄉中一人差鄉憲 又以二人爲副憲 凡一鄉公事鄉憲副憲主之 又以鄉所一員爲一鄉有司鄉憲非有故句遞副憲有司則周年相遞 凡出回文聚會事有司掌之稟于鄕憲 回文使鄉所使令分東西周示 勿令遲滯鄉所闕望服時鄕所限二周年乃遞非有實病則勿許辭免 必一鄉齊會 每員各薦一人若二員闕則各薦二人三員闕則各薦三人三十以上薦別監五十以上薦座首 書其名于小單子 下書擧者之名 著名六品以上朝官五十以上則只著不書名 皆呈于鄉憲限四寸勿薦若婚姻四寸 勿避若薦者衆所共知不合之人則論罰 鄕憲受之列書被薦者之名 以擧者多少爲次若一人而薦多則書于首其餘薦之多少爲次 旣畢置于座前 使一鄉會員從下就座前圈之勿圈于隱處圈時不許相避 以圈多者三人備三望若圈同則以薦者多少定其次 若二員闕而一時望報 則以圈多二人爲二首望 次者二人爲副望 末望準此若三員闕而一時若出則亦依此例 以圈多者三人爲三首望餘皆倣此 會議時雖有故不得往參 單子則不可不呈 春秋講信慶賀外 凡公事會集時 皆著白衣 雖有服人皆來參
凡一鄉約束有四 一曰德業相勸 二曰德失相規 三曰禮俗相交 四曰患難相恤 凡善惡之表表著異者書于善籍惡籍 改過則爻之
所謂德業相勸(●●●●)者 一鄉之人相勉爲善 父慈子孝兄友弟恭 夫婦相敬 長幼有序 朋反有信 睦族交鄰 溫恭自持 愛人濟物 毋吝財利 毋好爭訟 租賦必謹 小民勿侵等事謂之德業 若有能行此件事表表卓異者則旣書于善籍 且報于官以致轉達于朝 其次則書于籍以俟進德
所謂過失相規(●●●●)者 鄉人有過失則同列隨所聞規戒之 不聽則告于鄉憲副憲共戒之 猶不悛則施罰 罰有四等 損徒者書于惡籍
上罪損徒若改過則許設謝筵磐用五果以上湯用三色以上參會者滿十員以上則許解損
次上罪齊馬首亦依解損例會客滿十員然後乃受
右解損謝筵則主人自定期日 齊馬首則鄉憲有司定日 若鄉中先生有德位可尊之人及年七十以上員 則主人躬進以請其餘則出回文普請 主人奴自持回文 周告無有所漏
中罰滿座面責面責時必喩以戒敕之言
下罰酒一盆別味一色春秋講信或無時會集時進呈 若有小過不至受罰者 則隨時論議罰以巨觥
父不愛子使不得所者 兄弟不盡友悌之道者 溺愛姬妾疎薄無罪正妻者 干求鄉任潜行請託者 朋友族屬通姦淫女者 以少陵長至於詬辱者 非理好訟者 非毀一鄉公論者 營私圖利侵小民山僧者 造作虛言構陷同類者 鄰里親戚不睦者 留鄉所及監官憑公營私者 收糴時私受賄賂害及生民汚毀鄉風者 私用公儲之物者
右用上罰
會中縱酒失儀者 乘忿爭辨不受規戒者 凡有鄉會不能趂出回文後時者 持身不謹被人笑侮者 凡會集時託故不參者 無故不參且不具由呈單者 以私忿擅自毆打官人者 貢賦徭役公債拒不備納者 不能謹藏公債之物因致減縮者 以非義干請于吏輩者 非齋宮而私護山寺以占己利者 收糴時不能撿察多受不實之縠減縮斗數者
右用以上罰
會集時衣冠不如法者凡鄉會及城主前非朝官不得著驄笠 非堂上不得著貂皮耳掩凡會集時講信及致賀則皆著紅團領 不出賻紙及收合米者 凡有任之人不能察其所任者 不行鄉中約束者 乘忿罵詈同列者
右用中罰
會集時晚到者行禮坐定後追到者皆爲晚到 威儀不整喧笑自恣者 不告出入者 官門及上二衙前騎馬過者
右用下罰
右四罰之外 如有父母不孝 兄弟不和 淫穢亂倫 所行悖戾等事 及謀害土主者黜鄉 鄉人共棄絕之 若與黜鄉之人相通對 語者則損徒 鄉中之人雖不參鄉案 若有作悖理之人 侵漁小民山僧等 爲閭里之害則先以理曉譬之 使之改過 不聽則僉 議使鄉所告官治罪
凡有過失行罰之後 猶不悛改依前自放者損徒 損徒之後終不悔過 反生忿怨詬辱一鄉者鄉
凡有過失未行罰而又作過則從重行罰 罰同則加一等施罰
凡年八十以上雖有過失無罰 七十以上有過失則皆減一等 而若面責則使子弟代受其責 無子弟則臨時論議笞奴
所謂禮俗相交(●●●●)者條列如左
春秋講信時 各持壺果齊會公處 講約法有服人則不得參焉 若鄉憲有故不參則副憲只讀約法 中罰以下告于尊長僉議施罰 次上罰以上皆不得僉議 須(缺)更爲會集 以白衣齊會以決論議
城主出官翌日鄉員一齊聚會 具長剌禮見再拜 遞去時各持壺果餞別于路上 亦具長剌 在官時有慶則賀 有喪則弔 用白團領皆具長剌齊會 歲時齊會具長剌例會于正月初三日
右城主僉謁之禮 雖遭服之人須以白團領或玉色白帶來參賀禮則雖遭服人參則難著吉服 惟期大功未葬前緦小功未成服前不參喪在一家則雖緦必於葬後得參
衙童看慰事鄉所次知 行於三月之內
鄉員有年滿七十歲者八十九十亦然 登科者筮仕者生員進士入格者 則各持壼果齊會公處賀之 有服者不參 雖有故不參亦備送壼果
凡會集時有故不參者 必使奴子具由呈狀 不得回文內託故俱不得倩他人呈狀衆所共知抱宿疾不能參會者雖不呈單子不論罰
有子女婦事則出回文 各收合米一升 送助其費
凡年滿七十以上者異爵者篤志學業者 只春秋講信 城主延餞外其他凡會集時 任意來參 雖不參無罰
鄉吏輩於歲時 具長單子列書吏名 差記官周行 歲謁于鄉員年七十以上及鄉憲副憲異爵者與曾經鄉任之家 鄉所糾撿不出 歲後五日除前公狀
所謂患難相恤(●●●●)者條列如左
鄉員四喪父母己妻初喪時 出回文各收合米一升送于其家 且送賻紙十卷 永葬時若當身喪則有司預先收合米一升 精備壼饌餅果 會葬所致奠後 祭饌饋役人米則물론東西皆合而會奠則分東西往會 每於春秋講信時 各收常紙一卷 有司藏之 以爲賻紙年滿七十以上者 異爵時任鄕憲副憲鄕所勿出賻紙 若逢水火盜賊盡蕩家產者 則各收合米一升送于其家
曾經鄉任者依前例 別賻其喪別定 有司掌之
曾經鄉憲副憲者 依曾經鄉任例 別賻其喪
鄉員以非罪將受刑戮者 僉議立庭呈單子救解之 如有民寃關重者 亦僉議立庭 有司掌出回文 鄉所專掌糾撿吏民風俗 若有鄉吏書員輩官屬汎濫用事作弊民間 及陵辱品官者 則告官治罪 可治罪而不治者 則鄉所有罪 若城主不信鄉所之言 而吏輩官屬之罪關重 則一鄉齊會立庭請罪
可參鄉員者 於會集時薦擧通問可否依前例收合可否字 以爲可入然後許入若遇三不則不能入若衆所共知可入而非自己願入以公議勒入者則勿問可否 除後入禮
凡收合米升致賻周急等事旣畢 有司須以回文及答狀 呈于衆會處
凡春秋講信時及致賀時 雖用妓樂勿對舞挾對
凡鄉吏書員官人等若品官前或無禮或陵辱 則品官具書單子送呈于鄉所 則所員會議罪犯輕重 笞罰後告于鄉憲 若所員棄置不論罪 則鄉會時所員致罰事
凡留鄉所員辭狀及人吏等有關罪狀 報京在所及報牧官治罪 公事所員不敢自斷 稟于鄉憲 成公事報狀事
鄉吏中選擇淸謹吏 置簿勸善 上戶長吏房必以淸謹者備望差定 若有他歧輕〿得者 勿許行公事
凡鄉吏書員官人等善惡籍置簿冊 春秋講信時進呈事 鄉所由明檢擧事
凡一鄉品官喪事時 收合賻米及賻紙等物專人輸送後 同宅答狀這這送于鄉憲 覽後卽還 推藏于鄉所 後日鄉會時進呈事
鄉會讀約法
凡遮日鋪陳器皿等皆鄉所掌之 有司尤宜早進排設 旣會之後鄉憲先就北壁南向立 座首以下及副憲就前北向行再拜禮鄉憲答拜若座首年滿七十則與滿七十者同時行禮 畢有司引七十以上尊者及異爵者皆就筵東向立 鄉憲以下西向立 相對再拜 訖皆就北壁 鄉憲居東 七十以上尊者異爵者居西東上 鄉所以下姑避筵外 於是鄉員以次俱進皆北向立員多則作重行再拜 鄉憲尊者異爵者答拜 訖鄉員皆就西壁轉作南行立定 鄉所副憲就東壁以齒序立 與鄉員一時再拜 訖依所立之位定坐 訖副憲抗聲讀約束 坐〿皆拱手整容以聽或相咨 講論旣訖 若有可議事則會議處置 副憲隨所聞善惡之事 告于鄉憲論議 鄉憲亦告所聞 北壁員有可告之事則招 曹司傳語以下員皆親自出位以告 議事畢乃設酌 一座無敢喧譁失儀 酌罷四座一時起立相向再拜後 肅揖以次皆出 鄉憲若不參會 則七十者異爵者先就北壁 鄕所副憲就前北向再拜 七十者異爵者答拜 餘儀上同

쪽수▶P132-1

海州一鄉約束(●●●●●●)
擇鄉中一人差鄉憲 又以二人爲副憲 凡一鄉公事鄉憲副憲主之 又以鄉所一員爲一鄉有司鄉憲非有故句遞副憲有司則周年相遞 凡出回文聚會事有司掌之稟于鄕憲 回文使鄉所使令分東西周示 勿令遲滯鄉所闕望服時鄕所限二周年乃遞非有實病則勿許辭免 必一鄉齊會 每員各薦一人若二員闕則各薦二人三員闕則各薦三人三十以上薦別監五十以上薦座首 書其名于小單子 下書擧者之名 著名六品以上朝官五十以上則只著不書名 皆呈于鄉憲限四寸勿薦若婚姻四寸 勿避若薦者衆所共知不合之人則論罰 鄕憲受之列書被薦者之名 以擧者多少爲次若一人而薦多則書于首其餘薦之多少爲次 旣畢置于座前 使一鄉會員從下就座前圈之勿圈于隱處圈時不許相避 以圈多者三人備三望若圈同則以薦者多少定其次 若二員闕而一時望報 則以圈多二人爲二首望 次者二人爲副望 末望準此若三員闕而一時若出則亦依此例 以圈多者三人爲三首望餘皆倣此 會議時雖有故不得往參 單子則不可不呈 春秋講信慶賀外 凡公事會集時 皆著白衣 雖有服人皆來參
凡一鄉約束有四 一曰德業相勸 二曰德失相規 三曰禮俗相交 四曰患難相恤 凡善惡之表表著異者書于善籍惡籍 改過則爻之
所謂德業相勸(●●●●)者 一鄉之人相勉爲善 父慈子孝兄友弟恭 夫婦相敬 長幼有序 朋反有信 睦族交鄰 溫恭自持 愛人濟物 毋吝財利 毋好爭訟 租賦必謹 小民勿侵等事謂之德業 若有能行此件事表表卓異者則旣書于善籍 且報于官以致轉達于朝 其次則書于籍以俟進德
所謂過失相規(●●●●)者 鄉人有過失則同列隨所聞規戒之 不聽則告于鄉憲副憲共戒之 猶不悛則施罰 罰有四等 損徒者書于惡籍
上罪損徒若改過則許設謝筵磐用五果以上湯用三色以上參會者滿十員以上則許解損▶P133
次上罪齊馬首亦依解損例會客滿十員然後乃受
右解損謝筵則主人自定期日 齊馬首則鄉憲有司定日 若鄉中先生有德位可尊之人及年七十以上員 則主人躬進以請其餘則出回文普請 主人奴自持回文 周告無有所漏
中罰滿座面責面責時必喩以戒敕之言
下罰酒一盆別味一色春秋講信或無時會集時進呈 若有小過不至受罰者 則隨時論議罰以巨觥
父不愛子使不得所者 兄弟不盡友悌之道者 溺愛姬妾疎薄無罪正妻者 干求鄉任潜行請託者 朋友族屬通姦淫女者 以少陵長至於詬辱者 非理好訟者 非毀一鄉公論者 營私圖利侵小民山僧者 造作虛言構陷同類者 鄰里親戚不睦者 留鄉所及監官憑公營私者 收糴時私受賄賂害及生民汚毀鄉風者 私用公儲之物者
右用上罰
會中縱酒失儀者 乘忿爭辨不受規戒者 凡有鄉會不能趂出回文後時者 持身不謹被人笑侮者 凡會集時託故不參者 無故不參且不具由呈單者 以私忿擅自毆打官人者 貢賦徭役公債拒不備納者 不能謹藏公債之物因致減縮者 以非義干請于吏輩者 非齋宮而私護山寺以占己利者 收糴時不能撿察多受不實之縠減縮斗數者
右用以上罰
會集時衣冠不如法者凡鄉會及城主前非朝官不得著驄笠 非堂上不得著貂皮耳掩凡會集時講信及致賀則皆著紅團領 不出賻紙及收合米者 凡有任之人不能察其所任者 不行鄉中約束者 乘忿罵詈同列者
右用中罰▶P134
會集時晚到者行禮坐定後追到者皆爲晚到 威儀不整喧笑自恣者 不告出入者 官門及上二衙前騎馬過者
右用下罰
右四罰之外 如有父母不孝 兄弟不和 淫穢亂倫 所行悖戾等事 及謀害土主者黜鄉 鄉人共棄絕之 若與黜鄉之人相通對 語者則損徒 鄉中之人雖不參鄉案 若有作悖理之人 侵漁小民山僧等 爲閭里之害則先以理曉譬之 使之改過 不聽則僉 議使鄉所告官治罪
凡有過失行罰之後 猶不悛改依前自放者損徒 損徒之後終不悔過 反生忿怨詬辱一鄉者鄉
凡有過失未行罰而又作過則從重行罰 罰同則加一等施罰
凡年八十以上雖有過失無罰 七十以上有過失則皆減一等 而若面責則使子弟代受其責 無子弟則臨時論議笞奴
所謂禮俗相交(●●●●)者條列如左
春秋講信時 各持壺果齊會公處 講約法有服人則不得參焉 若鄉憲有故不參則副憲只讀約法 中罰以下告于尊長僉議施罰 次上罰以上皆不得僉議 須(缺)更爲會集 以白衣齊會以決論議
城主出官翌日鄉員一齊聚會 具長剌禮見再拜 遞去時各持壺果餞別于路上 亦具長剌 在官時有慶則賀 有喪則弔 用白團領皆具長剌齊會 歲時齊會具長剌例會于正月初三日
右城主僉謁之禮 雖遭服之人須以白團領或玉色白帶來參賀禮則雖遭服人參則難著吉服 惟期大功未葬前緦小功未成服前不參喪在一家則雖緦必於葬後得參
衙童看慰事鄉所次知 行於三月之內▶P135
鄉員有年滿七十歲者八十九十亦然 登科者筮仕者生員進士入格者 則各持壼果齊會公處賀之 有服者不參 雖有故不參亦備送壼果
凡會集時有故不參者 必使奴子具由呈狀 不得回文內託故俱不得倩他人呈狀衆所共知抱宿疾不能參會者雖不呈單子不論罰
有子女婦事則出回文 各收合米一升 送助其費
凡年滿七十以上者異爵者篤志學業者 只春秋講信 城主延餞外其他凡會集時 任意來參 雖不參無罰
鄉吏輩於歲時 具長單子列書吏名 差記官周行 歲謁于鄉員年七十以上及鄉憲副憲異爵者與曾經鄉任之家 鄉所糾撿不出 歲後五日除前公狀
所謂患難相恤(●●●●)者條列如左
鄉員四喪父母己妻初喪時 出回文各收合米一升送于其家 且送賻紙十卷 永葬時若當身喪則有司預先收合米一升 精備壼饌餅果 會葬所致奠後 祭饌饋役人米則勿論東西皆合而會奠則分東西往會 每於春秋講信時 各收常紙一卷 有司藏之 以爲賻紙年滿七十以上者 異爵時任鄕憲副憲鄕所勿出賻紙 若逢水火盜賊盡蕩家產者 則各收合米一升送于其家
曾經鄉任者依前例 別賻其喪別定 有司掌之
曾經鄉憲副憲者 依曾經鄉任例 別賻其喪
鄉員以非罪將受刑戮者 僉議立庭呈單子救解之 如有民寃關重者 亦僉議立庭 有司掌出回文 鄉所專掌糾撿吏民風俗 若有鄉吏書員輩官屬汎濫用事作弊民間 及陵辱品官者 則告官治罪 可治罪而不治者 則鄉所有罪 若城主不信鄉所之言 而吏輩官屬之罪關重 則一鄉齊會立庭請罪▶P136
可參鄉員者 於會集時薦擧通問可否依前例收合可否字 以爲可入然後許入若遇三不則不能入若衆所共知可入而非自己願入以公議勒入者則勿問可否 除後入禮
凡收合米升致賻周急等事旣畢 有司須以回文及答狀 呈于衆會處
凡春秋講信時及致賀時 雖用妓樂勿對舞挾對
凡鄉吏書員官人等若品官前或無禮或陵辱 則品官具書單子送呈于鄉所 則所員會議罪犯輕重 笞罰後告于鄉憲 若所員棄置不論罪 則鄉會時所員致罰事
凡留鄉所員辭狀及人吏等有關罪狀 報京在所及報牧官治罪 公事所員不敢自斷 稟于鄉憲 成公事報狀事
鄉吏中選擇淸謹吏 置簿勸善 上戶長吏房必以淸謹者備望差定 若有他歧輕〿得者 勿許行公事
凡鄉吏書員官人等善惡籍置簿冊 春秋講信時進呈事 鄉所由明檢擧事
凡一鄉品官喪事時 收合賻米及賻紙等物專人輸送後 同宅答狀這這送于鄉憲 覽後卽還 推藏于鄉所 後日鄉會時進呈事
鄉會讀約法
凡遮日鋪陳器皿等皆鄉所掌之 有司尤宜早進排設 旣會之後鄉憲先就北壁南向立 座首以下及副憲就前北向行再拜禮鄉憲答拜若座首年滿七十則與滿七十者同時行禮 畢有司引七十以上尊者及異爵者皆就筵東向立 鄉憲以下西向立 相對再拜 訖皆就北壁 鄉憲居東 七十以上尊者異爵者居西東上 鄉所以下姑避筵外 於是鄉員以次俱進皆北向立員多則作重行再拜 鄉憲尊者異爵者答拜 訖鄉員皆就西壁轉作南行立定 鄉所副憲就東壁以齒序立 與鄉員一時再拜 訖依所立之位定坐 訖副憲抗聲讀約束 坐〿皆拱手整容以聽或相咨 講論旣訖 若有可議事則會議處置 副憲隨所聞善惡之事 告于鄉憲論議 鄉憲亦告所聞 北壁員有可告之事則招 曹司傳語以下員皆親自出位以告 議事畢乃設酌 一座無敢喧譁失儀 酌罷四座一時起立相向再拜後 肅揖▶P137-1以次皆出 鄉憲若不參會 則七十者異爵者先就北壁 鄕所副憲就前北向再拜 七十者異爵者答拜 餘儀上同

이이인물가 입정한 해주일향약속은 이상과 같았으니, 이 향약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의 향약이 청년 시대의 그것(서원향약)보다는 훨씬 진보하여 주로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근간으로 하여 입조(立條)하였음이다. 이것은 해주향약 사창계약속에서도 동양(同樣)으로 볼 수 있는 바이나, 이 향약은 앞선 두 자보다는 훨씬 간략화하여 맹목적으로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세목을 습용(襲用)하려 하지 않고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채용하면서도 그의 각 조목은 그 지방 실정에 적응하도록 규정하고자 한 노력이 역력히 나타났다. 이곳에서 이 향약의 각 조목을 누누히 검토함은 피하고자 하나, 누구나 이 향약의 조목을 일별할 때 느끼는 바는 4대 강령 중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두 강령에 관한 조목이 더욱 상세히 규정되어 있음과, 특히 과실상규의 각 조목은 이퇴계의 예안향약에 본떠 상벌(上罰) 차상벌(次上罰) 중벌(中罰) 하벌(下罰)에 분등하여 규정하였음이다. 이것은 거듭 논한 바와 같이 향약 그 자체를 조선화하려 하여 비록 그의 골자는 여씨향약에서 취한다 하더라도 실제 내용의 조목만은 이 땅 풍속 민정에 근거를 두고 규정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하는 현실적 필요감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끝으로 이 향약에서 주목되는 것은 향약이 완전히 유향소와 결합하여 향풍규정의 임무를 더욱 충실히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유향소는 이조 초기 이래 향풍규정의 유일한 기관으로 향약의 선구를 이른 것이었었으나, 이것이 이때에 이르러 향약을 수입하여 그의 세밀한 조목을 준용함으로써 향민교도에 신기원을 짓게 되었으니, 이상 유향소의 유래부터 누설(縷說)하여 온 이유도 명백해졌을 것이다.
쪽수▶P137-2李栗谷이 立定한 海州一鄕約束은 以上과 같아였으니, 이 鄕約에서 特히 注目되는 것은 그의 鄕約이 靑年 時代의 그것(西原鄕約)보다는 훨신 進步하야 主로 呂氏鄕約의 四大 綱目을 根幹으로 하야 立條하였음이다. 이것은 海州鄕約 社倉契約束에서도 同樣으로 볼 수 있는 바이나, 이 鄕約은 前二者보다는 훨신 簡略化하야 盲目的으로 朱子增損呂氏鄕約의 細目을 襲用하려 하지 않고 呂氏鄕約의 四大 綱目을 採用하면서도 그의 各 條目은 그 地方 實情에 適應하도록 規定하고저 한 努力이 歷歷히 나타낫다. 이곳에서 이 鄕約의 各 條目을 累累히 檢討함은 避하고저 하나, 누구나 이 鄕約의 條目을 一瞥할 때 느끼는 바는 四大 綱領 中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二綱領에 關한 條目이 더욱 詳細히 規定되여 있음과, 特히 過失相規의 各 條目은 李退溪의 禮安鄕約에 본떠 上罰 次上罰 中罰 下罰에 分等하야 規定하였음이다. 이것은 累說한 바와 같이 鄕約 그 自體를 朝鮮化하려 하야 비록 그의 骨子는 呂氏鄕約에서 取한다 하드라도 實際 內容의 條目만은 이 땅 風俗 民情에 根據를 두고 規定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하는 現實的 必要感에서 由來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끝으로 이 鄕約에서 注目되는 것은 鄕約이 完全히 留鄕所와 結合하야 鄕風斜正의 任務를 더욱 忠實히 發揮하게 된 것이다. 己述한 바와 같이 留鄕所는 李朝 初期 以來 鄕風糾正의 唯一한 機關으로 鄕約의 先驅를 이른 것이였었으나, 이것이 이때에 이르러 鄕約을 受入하야 그의 細密한 條目을 遵用함으로써 鄕民敎導에 新紀元을 作하게 되였으니, 以上 留鄉所의 由來부터 縷說하여 온 理由도 明白하여졌을 것이다.

























본문5: 5.막음말


이상 조잡하나마 조선에 있어서 향약이 어떠한 경로를 밟아 성립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더듬어 온 셈이다. 요컨대 조선에서 향약이 성립하게 된 것은 이조 초기 이래 실시하여 온 태조친제의 향헌조목 및 유향소에 의한 지방자치 등이 주동력이 되어, 이에 지나로부터 전래한 여씨향약이 큰 자극을 주어, 마침내 종래 내부적으로만 흐르고 있던 민간자치의 정신을 향약이라는 형식으로 표면화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용이하게 추종하게 한 데서 결과하였다. 이리하여 이황인물의 예안향약을 비롯하여 파주향약 서원향약 해주향약 사창계약속 해주일향약속 등의 향약이 접종(接踵)하여 출현케 되었던 것이나 이 각지의 향약을 통하여 일관한 정신은 비록 그 중 일부는 여씨향약의 골자를 형식상으로라도 채용하였다 하더라도 실질상 내용에 있어서는 당시 조선 실사회의 가장 긴급한 사항을 조목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점으로 보아 이 각지의 향약은 이조 중기 당시의 조선 사회 상태를 그려낸 축도라고도 볼 수 있다.
쪽수▶P138-1以上 粗雜하나마 朝鮮에 있어서 鄕約이 어떠한 經路를 밟어 成立하게 되였는가 하는 것을 더듬어 온 셈이다. 要컨대 朝鮮에서 鄕約이 成立하게 된 것은 李朝 初期 以來 實施하여 온 太祖親製의 鄕憲條目 及 留鄕所에 依한 地方自治 等이 主動力이 되여, 이에 支那로부터 傳來한 呂氏鄕約이 큰 刺戟을 주어, 마츰내 從來 內部的으로만 흐르고 있든 民間自治의 精神을 鄕約이라는 形式으로 表面化하야 民衆으로 하여금 容易히 追從케 한 데서 結果하였다. 이리하야 李退溪의 禮安鄕約을 비롯하야 坡州鄕約 西原鄕約 海州鄕約 社倉契約束 海州一鄕約束 等의 鄕約이 接踵하야 出現케 되였든 것이나 이 各地의 鄉約을 通하야 一貫한 精神은 비록 그 中 一部는 呂氏鄕約의 骨子를 形式上으로라도 採用하였다 하드라도 實質上 內容에 있어서는 當時 朝鮮 實社會의 가장 緊急한 事項을 條目化하고저 한 것이다. 이 點으로 보아 이 各地의 鄕約은 李朝 中期 當時의 朝鮮 社會 狀態를 그려낸 縮圖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성립한 각지의 향약은 이후 조선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던가. 이에 대하여는 아직 충분한 조사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상론(詳論)하기를 피하나, 하여간 조선 사회에서 가장 탁월한 유종(儒宗)으로 숭경하던 이황인물 이이인물 두 현(賢)의 제정한 것인 만큼 그의 후세에 끼친 영향도 위대하였었다. 간단히 예를 들면 이황인물의 향약은 후세 영남 유림계에서 널리 준봉되어 풍산 김씨 하동 유씨 상주 유씨 같은 곳 정씨 진주 임씨 등 문중에서 이 향약을 시행하고, 특히 영조인물조(朝)에는 이황인물 학통의 적전(嫡傳)인 최흥원인물(백불암)에 의하여 달성군 부인동에서 동약이 실시되자, 이 동약에서는 여씨향약과 아울러 이 이황인물의 향약을 채용하여 4대 강목 중 과실상규는 오로지 퇴계향약을 적용하였다 한다. 이이인물의 향약은 당초부터 교화상 큰 효과를 거두게 되어 그의 연보에도
쪽수▶P138-2그러면 이와 같이 成立한 各地의 鄕約은 以後 朝鮮 社會에 어떠한 影響을 주었든가. 이에 對하야는 아즉 充分한 調査를 行하지 못하였으므로 詳論키를 避하나, 何如間 朝鮮 社會에서 가장 卓越한 儒宗으로 崇敬하든 李退溪 李栗谷 兩賢의 製定한▶P139-1 것이니 만치 그의 後世에 끼친 影響도 偉大하였었다. 簡單히 例를 들면 李退溪의 鄕約은 後世 嶺南 儒林界에서 널리 遵奉되여 豐山 金氏 河回 柳氏 尙州 柳氏 同 鄭氏 晋州 林氏 等 門中에서 이 鄕約을 施行하고, 特히 英祖朝에는 退溪 學統의 嫡傳인 崔興遠(百弗庵)에 依하야 達成郡 夫仁洞에서 洞約이 實施되자, 이 洞約에서는 呂氏鄕約과 아울러 이 退溪의 鄕約을 採用하야 四大 綱目 中 過失相規는 오로지 退溪鄕約을 適用하였다 한다. 李栗谷의 鄕約은 當初부터 敎化上 큰 効果를 거두게 되여 그의 年譜에도

현대문주1▶海俗初甚渝薄 自是이후文風不變禮俗成習 雖邨裏愚氓亦知感化 或有棄妻數十年好合如初者 又有庶人老者喪弟服衰哀 痛過常問之 皆曰此李監司之敎也[a 39]

쪽수▶P139-2

원문주1▶海俗初甚渝薄 自是以後文風不變禮俗成習 雖邨裏愚氓亦知感化 或有棄妻數十年好合如初者 又有庶人老者喪弟服衰哀 痛過常問之 皆曰此李監司之敎也[39]

라고 하였음과 같으나, 그 후 그의 향약도 황해도 지방은 물론 영남 각지 유림계에서 널리 채용하게 되었다 한다. 특히 충청도 지방에서는 이이인물의 학벌이 융성하던 곳이니 만큼 그의 향약이 널리 시행케 되어, 숙종인물조(朝)의 명신(名臣) 송시열인물도 만년에는 청주 화양동에 퇴거하여 율곡향약에 모방하여 향약을 실시하였다 하며, 기타 회덕 송씨 노성 윤씨 연산 김씨 시전 성씨 등 문중에서도 송시열인물의 지휘로 향약을 행하였다 한다. 그리고 영조인물23년에는 충청도 보은군수 김홍득인물이 군내에 향약을 시행하게 하고자 ‘향약조목’을 입정 반포하였는데, 이 향약 조목도 그 약문 중에
쪽수▶P139-3라고 하였음과 같으나, 그 後 그의 鄕約도 黃海道 地方은 勿論 嶺南 各地 儒林界에서 널리 採用하게 되였다 한다. 特히 忠淸道 地方에서는 栗谷의 學閥이 隆盛하든 곳이니 만치 그의 鄕約이 널리 施行케 되여, 肅宗朝의 名臣 宋時烈도 晚年에는 淸州 華陽洞에 退居하야 栗谷鄕約에 模倣하야 鄕約을 實施하였다 하며, 其他 懷德 宋氏 魯城 尹氏 連山 金氏 柿田 成氏 等 門中에서도 宋時烈의 指揮로 鄕約을 行하였다 한다. 그리고 英祖 二十三年에는 忠淸道 報恩郡守 金弘得이 郡內에 鄕約을 施行케 하고저 「鄕約條目」을 立定 頒布하였는대, 이 鄕約 條目도 그 約文 中에

右一依栗谷先生西原鄉約 而其間叅以邑風略加損益 此下又以栗谷海州及社倉用罰等法抄錄之 以爲施罰之例

쪽수▶P139-4

右一依栗谷先生西原鄉約 而其間叅以邑風略加損益 此下又以栗谷海州及社倉用罰等法抄錄之 以爲施罰之例

라고 있는 바와 같이 전혀 이이인물의 향약을 운용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의 향약은 숙종인물 이후 영조인물 정조인물 때에 이르러 정부의 장려 및 지방인사의 솔선궁행에 의하여 지방적으로나마 잘 시행되게 되었으나, 이조 말엽에 이르러 정치적 분란을 거듭함에 따라 침체하기 시작하여 갑오개혁사건 이후 표면상 잠영하게 되었다.
쪽수▶P139-5라고 있는 바와 같이 全혀 栗谷의 鄕約을 運用하였든 것이다. 이리하야 朝鮮의 鄕約은 肅宗 以後 英祖 正祖 時에 이르러 政府의 獎勵 及 地方人士의 率先躬行에 依하야 地方的으로나마 잘 施行되게 되였으나, 李朝 末葉에 이르러 政治的 紛亂을 거듭함에 따라 沈滯하기 시작하야 甲午改革 以後 表面上 潛影케 되였다.
끝으로 이조 말엽에 실제로 시행하던 향약(동약)의 한둘의 예를 열거하여 향약의 말로를 추찰하고자 한다.
쪽수▶P140-1끝으로 李朝 末葉에 實際로 施行하든 鄕約(洞約)의 一二의 例를 列擧하야 鄕約의 末路를 推察코저 한다.

鄉約節目(○○○○)施行 處及年代가 未詳하나 筆者의 考證으로는 西曆 一八五〇年代에 淸州 地方에서 施行하든 것인가 한다. 筆者 所藏이다
一德業相勸
孝父母敬長上愛兄弟敎子孫睦親黨和隣里 正家以禮 交友有信 立心必忠直 行已必恭謹 見善必行 開過必改 又如讀 書治田好禮樂射御書數 勤工商 畏法令 謹租賦之類
右件德業同約之人各自進修 互相勸勉 會集之日 相與推擧其能者書于籍以勵其不能者
一過失相規
不順父母不孝之罪邦有常刑此擧其次 不友兄弟 家道乖亂夫妻毆罵男女無別嫡庶無分之別 親戚不睦 隣里不和 侮慢齒德 詬罵儕輩 侵暴孤寡 喪葬不謹 祭祀不敬 又如縱酒 雜技喜鬪好訟 言語不實 誣毀他人 輕蔑禮法 行已無恥 不畏法令 妄交匪人 崇信異端 知過不改之類
右件過失同約之人各自省察 互相規戒 小則規之 大則衆戒之 不聽則會集之日直月以告于約正 約正以義理誨諭之 謝過請改則書于籍以俟其改 爭辨不服與不能改者論罰 輕則黜座 重則黜籍
凡有主事廢忌者 公會後時者 紊座喧譁者 空座退便者並有責罰
一禮俗相交
尊幼輩行 造請揖拜 請召送迎 慶弔贈遺之類
小節目追後磨練▶P141
一患難相恤
患難相恤之事曰水火近則遣人及時救之甚則親往多率人救之 曰盜賊自各洞各里五家作統統首則勿拘班常擇勤實人主之五家內若有盜賊統首摘發以告洞約長約治之甚者逐黜境外有屈强不服者洞約長以告都約所甚者施以一律大者十一面合力逐捕 曰疾病小則 遣人問之大則隣里扞力以助其耕耘 曰死喪助力幹辨賻賵借貸 曰孤弱孤遺無依者擇其親屬之忠幹者爲之區處或擇人敎之爲求婚婚貧者協力濟之 日誣枉有爲人誣枉不能自伸者勢可以聞於官府則爲言之可以救解則以解之 曰貧乏
右患難相恤之事 凡有當救恤者其家告于約正 急則約中之近者爲之告約正 令直月偏告且爲之糾集而程督之
一每歲四孟朔初旬日 鄉約正各於其鄉會集講約
一每歲春秋都副約正會鄉約正以下諸員講于學中
一都約正有故則副約正以下亦可會集行禮
一流寓士夫居其地亦許入約
一凡在士列而憚於檢束拒不入約者告官鄉
未盡條件追後磨練
淸風瑞雲洞洞楔座目(○○○○○○○○○)(今忠北堤川郡, 光緒十一年十月作, 筆者所藏)
節目
一楔日每年以十月十六日完定事
禮俗相規
一若有不孝不悌者損逃出洞事▶P142
一若有以下犯上與以少凌長者損逃事
一上員中無經界以臆勒下則衆會呼失事
一無論上下如有是非則自洞中正經界核卞事
一如有嘉行者洞稧日施賞事
一如有醜行者洞稧日當罸事
一上員中如有婿喪大事各相扶助事
一下員中如有四喪大事自楔中錢伍兩出給事
一無論上下員願爲出稧者持本錢出給事
一下員中酗酒者無論男女笞十度收贖一兩事
一上員中酗酒者齊會呼失事
一上員雜技者收贈二兩齊會呼失事
一下員雜技者笞二十度收贖二兩事
一雜技接主者笞三十度收贖三兩事
患難相救
一無論上下如有瘟疾家則自洞中齊會出幕後共扶作農事
一無論上下無罪橫厄陷於危地則一洞齊出救濟事▶P143-1
一用錢人有保後出給事
一隨稧息利以補洞物事
一債員中如有難捧之弊則雖至收家一族期於捧出事
又節目
一執綱周年交遞事
一中任周年改差事
一洞長所任周年改差事

쪽수▶P140-2

鄉約節目(○○○○)施行 處及年代가 未詳하나 筆者의 考證으로는 西曆 一八五〇年代에 淸州 地方에서 施行하든 것인가 한다. 筆者 所藏이다
一德業相勸
孝父母敬長上愛兄弟敎子孫睦親黨和隣里 正家以禮 交友有信 立心必忠直 行已必恭謹 見善必行 開過必改 又如讀 書治田好禮樂射御書數 勤工商 畏法令 謹租賦之類
右件德業同約之人各自進修 互相勸勉 會集之日 相與推擧其能者書于籍以勵其不能者
一過失相規
不順父母不孝之罪邦有常刑此擧其次 不友兄弟 家道乖亂夫妻毆罵男女無別嫡庶無分之別 親戚不睦 隣里不和 侮慢齒德 詬罵儕輩 侵暴孤寡 喪葬不謹 祭祀不敬 又如縱酒 雜技喜鬪好訟 言語不實 誣毀他人 輕蔑禮法 行已無恥 不畏法令 妄交匪人 崇信異端 知過不改之類
右件過失同約之人各自省察 互相規戒 小則規之 大則衆戒之 不聽則會集之日直月以告于約正 約正以義理誨諭之 謝過請改則書于籍以俟其改 爭辨不服與不能改者論罰 輕則黜座 重則黜籍
凡有主事廢忌者 公會後時者 紊座喧譁者 空座退便者並有責罰
一禮俗相交
尊幼輩行 造請揖拜 請召送迎 慶弔贈遺之類
小節目追後磨練▶P141
一患難相恤
患難相恤之事曰水火近則遣人及時救之甚則親往多率人救之 曰盜賊自各洞各里五家作統統首則勿拘班常擇勤實人主之五家內若有盜賊統首摘發以告洞約長約治之甚者逐黜境外有屈强不服者洞約長以告都約所甚者施以一律大者十一面合力逐捕 曰疾病小則 遣人問之大則隣里扞力以助其耕耘 曰死喪助力幹辨賻賵借貸 曰孤弱孤遺無依者擇其親屬之忠幹者爲之區處或擇人敎之爲求婚婚貧者協力濟之 日誣枉有爲人誣枉不能自伸者勢可以聞於官府則爲言之可以救解則以解之 曰貧乏
右患難相恤之事 凡有當救恤者其家告于約正 急則約中之近者爲之告約正 令直月偏告且爲之糾集而程督之
一每歲四孟朔初旬日 鄉約正各於其鄉會集講約
一每歲春秋都副約正會鄉約正以下諸員講于學中
一都約正有故則副約正以下亦可會集行禮
一流寓士夫居其地亦許入約
一凡在士列而憚於檢束拒不入約者告官鄉
未盡條件追後磨練
淸風瑞雲洞洞楔座目(○○○○○○○○○)(今忠北堤川郡, 光緒十一年十月作, 筆者所藏)
節目
一楔日每年以十月十六日完定事
禮俗相規
一若有不孝不悌者損逃出洞事▶P142
一若有以下犯上與以少凌長者損逃事
一上員中無經界以臆勒下則衆會呼失事
一無論上下如有是非則自洞中正經界核卞事
一如有嘉行者洞稧日施賞事
一如有醜行者洞稧日當罸事
一上員中如有婿喪大事各相扶助事
一下員中如有四喪大事自楔中錢伍兩出給事
一無論上下員願爲出稧者持本錢出給事
一下員中酗酒者無論男女笞十度收贖一兩事
一上員中酗酒者齊會呼失事
一上員雜技者收贈二兩齊會呼失事
一下員雜技者笞二十度收贖二兩事
一雜技接主者笞三十度收贖三兩事
患難相救
一無論上下如有瘟疾家則自洞中齊會出幕後共扶作農事
一無論上下無罪橫厄陷於危地則一洞齊出救濟事▶P143-1
一用錢人有保後出給事
一隨稧息利以補洞物事
一債員中如有難捧之弊則雖至收家一族期於捧出事
又節目
一執綱周年交遞事
一中任周年改差事
一洞長所任周年改差事

이상 2종은 모두 서력 1850년대 전후에 실시하던 것으로 전자는 향약 절목이며 후자는 동계였었으나, 이 양자를 비교하여 볼 때 누구나 직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양자가 지극히 근사함이다. 즉 전자는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채용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의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에 속한 조목이 가장 상세히 규정되어 향약의 주요 부분을 갖추고 있고, 후자는 오로지 예속상규와 환난상휼의 양 강목으로만 규정되었으며 그 중의 예속상규는 과실상규와 예속상교가 상반(相半)하는 것으로 오히려 과실상규의 해당하는 조목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 이 점으로 미루어 보면 조선의 향약 내지 동약 동계의 근본정신은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두 강목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외에 필자는 충청도 연풍군 유산동에서 1900년경에 실시하던 유산동약을 장(藏)하고 있으나, 이 동약도 앞서 쓴 향약 조목 동양으로 4대 강목 중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조목을 더욱 상세히 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조선의 향약은 이황인물 이이인물에 이르러 형식상으로 가장 완비한 조문이 성립하게 되었으나, 후세 이것을 실제적으로 시행함에 당하여는 여러가지의 모순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드디어 그의 번잡한 세목은 버리고 향민의 일상생활상 가장 긴급한 강목인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각 조목만을 준용하여 향풍미화 상호부조의 정신을 발휘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것은 지방에 따라 다를 것이나 원칙적으로 이이인물가 정한 바와 같은 세밀한 향약을 규정 혹은 채용할 수 없는 곳에서는 앞서 쓴 바와 같은 간략한 향약 조목을 입정하여 실시하였을 것이니 이것은 곳 향약의 지방적 간략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규모의 향약을 실시할 수 없는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향약인 동약 동계가 출현하였던 것이다. 즉 이조 말엽에 있어서의 조선의 향약은 앞서 든 바와 같은 향약 조목 동약 동계 의 형태로 간략화하여 시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이것은 곳 현금도 잔존하여 혼인계 초상계와 같은 형태로 유행하고 있는 소위 ‘계’의 정신으로 환원하였음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계가 조선에서 어느 때 성립하였는지는 이제 속단하기 어려우나 이미 태종실록서적에도
쪽수▶P143-2以上 二種은 모다 西曆 一八五〇年代 前後에 實施하든 것으로 前者는 鄕約 節目이며 後者는 洞稧이였었으나, 이 兩者를 比較하여 볼 때 누구나 直觀的으로 知覺할 수 있는 것은 兩者가 至極히 近似함이다. 즉 前者는 呂氏鄕約의 四大 綱目을 採用하기는 하였으나 그 中의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에 屬한 條目이 가장 詳細히 規定되여 鄕約의 主要 部分을 成하고 있고, 後者는 오로지 禮俗相規와 患難相救의 兩 綱目으로만 規定되였으며 그 中의 禮俗相規는 過失相規와 禮俗相交가 相半하는 것으로 오히려 過失相規의 該當하는 條目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 이 點으로 미루어 보면 朝鮮의 鄕約 乃至 洞約洞稧의 根本精神은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二綱目에 있었든 것이 않인가 한다. 이 外에 筆者는 忠淸道 延豐郡 柳山洞에서 一九〇〇年頃에 實施하든 柳山洞約을 藏하고 있으나, 이 洞約도 前記 鄕約 條目 同樣으로 四大 綱目 中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條目을 더욱 詳細히 定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朝鮮의 鄕約은 李退溪 李栗谷에 이르러 形式上으로 가장 完備한 條文이 成立하게 되였으나, 後世 이것을 實際的으로 施行함에 當하야는 여러가지의 矛盾과 衝突이 生케 되여, 드디여 그의 煩雜▶P144-1한 細目은 버리고 鄕民의 日常生活上 가장 緊急한 綱目인 過失相規와 患難相恤의 各 條目만을 遵用하야 鄕風美化 相互扶助의 精神을 發揮하고저 한 것이 아닌가 한다. 勿論 이것은 地方에 따라 달을 것이나 原則的으로 李栗谷이 定한 바와 같은 細密한 鄕約을 規定 或은 採用할 수 없는 곳에서는 前記한 바와 같은 簡略한 鄕約 條目을 立定하야 實施하였을 것이니 이것은 곳 鄕約의 地方的 簡略化를 意味하는 것으로 大規模의 鄕約을 實施할 수 없는 地方에서는 小規模의 鄕約인 洞約 洞稧가 出現하였든 것이다. 즉 李朝 末葉에 있어서의 朝鮮의 鄕約은 前擧한 바와 같은 鄕約 條目 洞約 洞稧의 形態로 簡略化하야 施行케 되였다고 볼 수 있으니, 이것은 곳 現今도 殘存하야 婚姻契 初喪契와 같은 形態로 流行하고 있는 所謂 「契」의 精神으로 還元하였음을 雄辯으로 證明하는 것이 않일가. 契가 朝鮮에서 어느 때 成立하였는지는 이제 速斷키 어려우나 이미 太宗實錄에도

현대문주2▶凡我同里之人各遵禮法毋侍力凌辱 違者先共制之 然後經官 或貧無可膽周給其家 三年不立不使與會 其婚姻喪葬有乏 隨力相助 如不從衆及犯奸詐僞一切非僞之人並不許入會[a 40]

쪽수▶P144-2

원문주2▶凡我同里之人各遵禮法毋侍力凌辱 違者先共制之 然後經官 或貧無可膽周給其家 三年不立不使與會 其婚姻喪葬有乏 隨力相助 如不從衆及犯奸詐僞一切非僞之人並不許入會[40]

라고 있어 이사(里社)의 법을 실시하기를 상청한 바 있으니 상당히 오래였음은 사실이며,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명종인물 때에는 국가로부터 향약 실시를 전제로 향촌에 결계(結契)하게 하기를 명한 적도 있다. (끝) (13, 3, 4)
쪽수▶P144-3라고 있어 里社의 法을 實施하기를 上請한 배 있으니 相當이 오래였음은 事實이며, 己述한 바와 같이 明宗 時에는 國家로부터 鄕約 實施를 前提로 鄕村에 結契케 하기를 命한 적도 있다. (끝) (一三, 三, 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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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鄕憲 卷一, 留鄕所節目條.
  2. 經國大典 卷之五 刑典, 元惡鄕吏條.
  3. 中宗實錄 卷四十五, 第一張, 十七年 六月 丙子朔條.
  4. 高麗史 卷七十五, 選舉三 銓法, 事審官條.
  5. 同上 其人條.
  6. 太宗實錄 卷十一, 第二十九張, 丙戌 六年 六月 丁卯條.
  7. 太祖實錄 卷十三, 第五張, 七年 二月 癸巳條.
  8. 鄕憲 卷一, 璿鄕憲目序.
  9. 世祖實錄 卷四十二, 第二十一張, 十二年 五月 戊子條.
  10. 同上 卷四十二, 第十九―二十二張, 十二年 五月 丁亥及戊子條.
  11. 同上 卷四十二, 第二十八―二十九張, 十二年 五月 癸巳條.
  12. 同上 卷四十二, 第二十五張, 十二年 五月 壬辰條.
  13. 成宗實錄 卷二百四十七, 第十二張, 二十一年 十一月 戊戌條.
  14. 權五福의 睡軒詩集, 卷之三, 鄕射堂記.
  15. 金馹孫의 濯纓集 卷之三, 會老堂記.
  16. 燕山君日記 卷五, 第三十三張, 元年 五月 庚戌條.
  17. 同上 卷三十一, 第二張, 四年 八月 癸酉條.
  18. 柳希春의 眉巖日記草 第一册(朝鮮史料叢刊 第八 第十九頁) 丁卯 十月 十七日條.
  19. 燕山君日記 卷三十九, 第五張, 六年 九月 己卯條.
  20. 中宗實錄 卷三十一, 第十二張, 十二年 十二月 戊午條.
  21. 柳希春의 眉巖日記草 第一册(朝鮮史料叢刊 第八 第二十頁) 丁卯 十月 十九日條 及 同册 戊辰 三月 十二日條(第一百五十三頁) 同 第二册 戊辰 五月初 一日(第二百十四―二百十五頁).
  22. 同上 第二册 戊辰 五月 十一日條(第二百二十六頁).
  23. 中宗實錄 卷三十六, 第四十六―四十七張, 十四年 七月 己酉條.
  24. 中宗實錄 卷二十八, 第二十三張, 十二年 六月 甲戌條.
  25. 中宗實錄 卷二十八, 第二十八張, 十二年 七月 庚辰條.
  26. 中宗實錄 卷三十二, 第四十二―四十三張, 十三年 四月 己巳朔條.
  27. 畏友 李仁榮 兄 所藏 「朱子增損呂氏鄕約」.
  28. 中宗實錄 卷三十四, 第四十三張, 十三年 九月 壬寅條. 同 卷三十四, 第四十五張, 辛亥條. 同 卷三十五, 第五十七張, 十四年 四月 戊辰條.
  29. 中宗實錄 卷三十六, 第五十一―五十二張, 十四年 七月 丁巳條.
  30. 中宗實錄 卷五十二, 第五張, 十九年 十月 甲午條.
  31. 中宗實錄 卷百一, 第十三張, 三十八年 七月 乙丑條. 同 卷百一, 第三十五張, 同 十月 戊戌條. 同 卷百一, 第四十張, 同 十一月 辛丑朔條.
  32. 明宗實錄 卷四, 第二十五張, 元年 八月 甲午條.
  33. 明宗實錄 卷四, 第三十一張, 元年 八月 丁未條.
  34. 退溪先生文集 卷之四十二, 鄕立約條序.
  35. 栗谷先生全書 卷之十三, 坡州鄕約序.
  36. 國朝人物志 中 一七一頁, 邊協傳.
  37. 栗谷先生全書 卷之十六, 西原鄕約의 「立議」.
  38. 栗谷先生全書 卷之十六, 海州鄕約, 社倉契約束, 海州一鄕約束.
  39. 朝鮮陞廡儒賢年表 所載 栗谷先生 年譜.
  40. 太宗實錄 卷二十七 第四張, 十四年 正月 癸巳條.






현대문주


  1. 향헌서적 권1, 유향소절목조.
  2. 경국대전서적 권지5 형전, 원악향리조.
  3. 중종실록서적 권45, 제1장, 17년 6월 병자삭조.
  4. 고려사서적 권75, 선거3 전법, 사심관조.
  5. 고려사서적 기인조.
  6. 태종실록서적 권11, 제27장, 병술 6년 6월 정묘조.
  7. 태조실록서적 권13, 제5장, 7년 2월 계사조.
  8. 향헌서적권1, 선향헌목서.
  9. 세조실록서적권42, 제21장, 12년 5월 무자조.
  10. 세조실록서적권42, 제19―22장, 12년 5월 정해 及 무자조.
  11. 세조실록서적권42, 제28―29장, 12년 5월 계사조.
  12. 세조실록서적권42, 제25장, 12년 5월 임진조.
  13. 성종실록서적권247, 제12장, 21년 11월 무술조.
  14. 권오복인물수헌시집서적, 권지3, 향사당기.
  15. 김일손인물탁영집서적권지3, 회로당기.
  16. 연산군일기서적권5, 제33장, 원년 5월 경술조.
  17. 연산군일기서적권31, 제2장, 4년 8월 계유조.
  18. 유희춘인물의 미암일기초 제1책(조선사료총간서적제8 제19쪽) 정묘 10월 17일조.
  19. 연산군일기서적권39, 제5장, 6년 9월 기묘조.
  20. 중종실록서적권31, 제12장, 12년 12월 무오조.
  21. 유희춘인물미암일기초서적제1책(조선사료총간서적제8 제20쪽) 정묘 10월 19일조 및 미암일기초서적무진 3월 12일조(제153쪽) 미암일기초서적제2책 무진 5월초 1일(제214―215쪽).
  22. 미암일기초서적제2책 무진 5월 11일조(제226쪽).
  23. 중종실록서적 권36, 제46―47장, 14년 7월 기유조.
  24. 중종실록서적 권28, 제23장, 12년 6월 갑술조.
  25. 중종실록서적 권28, 제28장, 12년 7월 경진조.
  26. 중종실록서적 권32, 제42―43장, 13년 4월 기사삭조.
  27. 외우 이인영인물 형 소장 ‘주자증손여씨향약’.
  28. 중종실록서적 권34, 제43장, 13년 9월 임인조. 중종실록서적 권34, 제45장, 신해조. 중종실록서적 권35, 제57장, 14년 4월 무진조.
  29. 중종실록서적 권36, 제51―52장, 14년 7월 정사조.
  30. 중종실록서적 권52, 제5장, 19년 10월 갑오조.
  31. 중종실록서적 권101, 제13장, 38년 7월 을축조. 중종실록서적 권101, 제35장, 같은 해 10월 무술조. 중종실록서적 권101, 제40장, 같은 해 11월 신축삭조.
  32. 명종실록서적 권4, 제25장, 원년 8월 갑오조.
  33. 명종실록서적 권4, 제31장, 원년 8월 정미조.
  34. 퇴계선생문집서적 권지42, 향립약조서.
  35. 율곡선생전집서적 권지13, 파주향약서.
  36. 국조인물지서적 중 171쪽, 변협전.
  37. 율곡선생전집서적 권지16, 서원향약의 ‘입의’.
  38. 율곡선생전집서적 권지16, 해주향약, 사창계약속, 해주일향약속.
  39. 조선승무유현연표서적 소재 율곡선생 연보.
  40. 태종실록서적 권27 제4장, 14년 정월 계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