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초기 국역편성의 기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본문2: 2.전법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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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1번={{TagSpage|12-3}}<blockquote no="4">{{TagRef|2}}受田品官 全爲居京城 衛王室 載在六典 無識之徒 不顧立法之意 累年在外 以致衛虛疎 又憑受田 不肯應當外方軍役 本府會受敎旨以禁之 顧乃不長成法 只求自便 切見 外方侍衛軍·騎船軍·未受一畝之田 尙且長年從軍 受田品官則{{TagPage|13-1}}於京於外 一無所從 實爲不當 (下略) <ref>太宗實錄, 六年 五月 壬戌條 </ref></blockquote>
 
|목차2원문11번={{TagSpage|12-3}}<blockquote no="4">{{TagRef|2}}受田品官 全爲居京城 衛王室 載在六典 無識之徒 不顧立法之意 累年在外 以致衛虛疎 又憑受田 不肯應當外方軍役 本府會受敎旨以禁之 顧乃不長成法 只求自便 切見 外方侍衛軍·騎船軍·未受一畝之田 尙且長年從軍 受田品官則{{TagPage|13-1}}於京於外 一無所從 實爲不當 (下略) <ref>太宗實錄, 六年 五月 壬戌條 </ref></blockquote>
 
|목차2원문12번={{TagSpage|13-2}}이라 하였으니, 良人軍 中의 絕對 多數인 侍衛軍·騎船軍이 開國의 瞬間부터 一畝의 田地도 折受되지 못했든 것이다. 良人이 이렿거든, 그 以下의 身分層인 身良役賤·賤人 中의 立從者는 科田法의 明文이 없을지라도 自明한 바 있을 것이다. 따라서 李朝 初期의 所謂 兵士라는 大部分의 人民은 軍田의 折受에 叅與치 못하고 <cite no="03">『未受一畝之田』</cite>한 者이었음을 推論할 수 있다. 或은 所謂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들추어, 一般 兵士의 貧困을 斷定하기 躊躇할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科田法 創定의 不徹底性과 實際와 名目과의 乖離를 살피지 못하면 잘못일 것이다. 우리는 太宗 三年 六月 司諫院의 田制 調整에 關한 意見 中에서 이러한 實例를 볼 수 있다.
 
|목차2원문12번={{TagSpage|13-2}}이라 하였으니, 良人軍 中의 絕對 多數인 侍衛軍·騎船軍이 開國의 瞬間부터 一畝의 田地도 折受되지 못했든 것이다. 良人이 이렿거든, 그 以下의 身分層인 身良役賤·賤人 中의 立從者는 科田法의 明文이 없을지라도 自明한 바 있을 것이다. 따라서 李朝 初期의 所謂 兵士라는 大部分의 人民은 軍田의 折受에 叅與치 못하고 <cite no="03">『未受一畝之田』</cite>한 者이었음을 推論할 수 있다. 或은 所謂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들추어, 一般 兵士의 貧困을 斷定하기 躊躇할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科田法 創定의 不徹底性과 實際와 名目과의 乖離를 살피지 못하면 잘못일 것이다. 우리는 太宗 三年 六月 司諫院의 田制 調整에 關한 意見 中에서 이러한 實例를 볼 수 있다.
|목차2원문13번={{TagSpage|13-3}}<blockquote no="5">{{TagRef|3}}公私賤隸·巫覡·娼妓·工商·僧尼·賣卜盲人等 身及子孫 不許受田 此誠萬世之令典也 今者 公私賤隸 濫受土田 以亂成法 十有七人 其所受之田 揔六百九十餘結 (下略)<ref>同 三年 六月 乙亥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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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3번={{TagSpage|13-3}}<blockquote no="5">{{TagRef|3}}公私賤隸·巫覡·娼妓·工商·僧尼·賣卜盲人等 身及子孫 不許受田 此誠萬世之令典也 今者 公私賤隸 濫受土田 以亂成法 十有七人 其所受之田 揔六百九十餘結 (下略)<ref>同, 三年 六月 乙亥條</ref></blockquote>
 
|목차2원문14번={{TagSpage|13-4}}科田法의 名目으로 하는 바와 實際와의 乖離는 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深谷氏는 科田法의 名目으로 하는 바를 詳細히 分析하야 저 三個의 土地支配 形態를 抽出하였으나, 吾人은 이것으로서 當時의 土地 所有 關係의 全部라 하지는 못한다. 이 社會에 있어서 名目으로 하는 바에만 忠實하다가는 드디여 眞理를 찾지 못하리라. 太宗 六年, 左政丞 河崙의 民弊에 關한 一節에
 
|목차2원문14번={{TagSpage|13-4}}科田法의 名目으로 하는 바와 實際와의 乖離는 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深谷氏는 科田法의 名目으로 하는 바를 詳細히 分析하야 저 三個의 土地支配 形態를 抽出하였으나, 吾人은 이것으로서 當時의 土地 所有 關係의 全部라 하지는 못한다. 이 社會에 있어서 名目으로 하는 바에만 忠實하다가는 드디여 眞理를 찾지 못하리라. 太宗 六年, 左政丞 河崙의 民弊에 關한 一節에
|목차2원문15번={{TagSpage|13-5}}<blockquote no="6">{{TagRef|4}}又品官 鄕吏 廣占土田 招納流亡 並作半收 其弊甚於私田 私田一結 只收二石 並作一結 多取十餘石 (下略)<ref>同 六年 十一月 己卯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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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5번={{TagSpage|13-5}}<blockquote no="6">{{TagRef|4}}又品官 鄕吏 廣占土田 招納流亡 並作半收 其弊甚於私田 私田一結 只收二石 並作一結 多取十餘石 (下略)<ref>同, 六年 十一月 己卯條</ref></blockquote>
 
|목차2원문16번={{TagSpage|14-1}}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並作의 傾向은 이 글에서 벌서 暗示되여 있는 것처럼, 所謂 農庄이라는 科田法의 趣旨에 逆行하는 契機의 發展에 따라 더욱 甚하여저 갔을 것이다. 李朝 初期의 農庄이 어떠한 過程을 걸어갔는가는 靑丘學叢, 第十七號 所載, 周藤吉之氏의 論文에서 大概 그 {{TagRef|5}}輪廓만이라도 斟酌할 수 있을 것이다.<ref>靑丘學叢, 第十七號 所載 周藤吉三氏 論文 「麗末鮮初に於ける農莊について」에 依하면, <cite no="04">「鮮初の農莊は, 太祖·太宗頃に漸く少く, 世宗より世祖に至り漸次發達し, 成宗頃になると, 非常なる發達を遂げた」</cite>라는 말이 보인다.</ref> 이 並作이라는 것은 따라서 또 하나의 土地支配 形態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이 『並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라고 할 만한 것이야말로 李朝 初期의 土地所有의 크다란 숨은 存在가 아니었든가. 이러한 『並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라고 할 만한 것은 그 田主와 他人 間에 成立하는 것이요, 그것이 田主와 그가 所有하는 私賤과의 間에 成立하는 關係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듯 當時의 土地 所有의 內容은 具體的으로는 네 가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所有라는 槪念과는 本質的으로 判異한 것이었다. 이러한 土地 所有에 對한 質的인 差異와 또 그것의 量的인 差異가 이 社會에 있어서, 人民의 富의 差異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未受一畝之田」하는 一般 兵士는 果然 質的으로 또 量的으로 어떻게 하야 土地에 緊縛되어 있었을까. 이 社會에 있어서 주장된 生產手段인 土地에 對한 質的인 또 量的인 差異가 고대로 戶에 編成에 當하야 多岐한 制限을 주었고, 또 이것이야말로 이 社會의 複雜無雙한 身分 制限의 基礎를 이루웠든 것이다.
 
|목차2원문16번={{TagSpage|14-1}}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並作의 傾向은 이 글에서 벌서 暗示되여 있는 것처럼, 所謂 農庄이라는 科田法의 趣旨에 逆行하는 契機의 發展에 따라 더욱 甚하여저 갔을 것이다. 李朝 初期의 農庄이 어떠한 過程을 걸어갔는가는 靑丘學叢, 第十七號 所載, 周藤吉之氏의 論文에서 大概 그 {{TagRef|5}}輪廓만이라도 斟酌할 수 있을 것이다.<ref>靑丘學叢, 第十七號 所載 周藤吉三氏 論文 「麗末鮮初に於ける農莊について」에 依하면, <cite no="04">「鮮初の農莊は, 太祖·太宗頃に漸く少く, 世宗より世祖に至り漸次發達し, 成宗頃になると, 非常なる發達を遂げた」</cite>라는 말이 보인다.</ref> 이 並作이라는 것은 따라서 또 하나의 土地支配 形態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이 『並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라고 할 만한 것이야말로 李朝 初期의 土地所有의 크다란 숨은 存在가 아니었든가. 이러한 『並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라고 할 만한 것은 그 田主와 他人 間에 成立하는 것이요, 그것이 田主와 그가 所有하는 私賤과의 間에 成立하는 關係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듯 當時의 土地 所有의 內容은 具體的으로는 네 가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所有라는 槪念과는 本質的으로 判異한 것이었다. 이러한 土地 所有에 對한 質的인 差異와 또 그것의 量的인 差異가 이 社會에 있어서, 人民의 富의 差異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未受一畝之田」하는 一般 兵士는 果然 質的으로 또 量的으로 어떻게 하야 土地에 緊縛되어 있었을까. 이 社會에 있어서 주장된 生產手段인 土地에 對한 質的인 또 量的인 差異가 고대로 戶에 編成에 當하야 多岐한 制限을 주었고, 또 이것이야말로 이 社會의 複雜無雙한 身分 制限의 基礎를 이루웠든 것이다.
 
|목차2원문17번={{TagSpage|14-2}}租와 賦와 貢은 當時의 國家의 人民에 對한 收取의 三大 部門으로, 田以出租하고 戶以出賦라 하야 戶라는 것은 賦라는 直接的 勞力 收取의 法制的인 單位로 되어 있었다. 恭讓王 三年의 田制改革(科田法 創{{TagPage|15-1}}定)을 契機로 하야 새로운 複雜한 土地 所有 關係 밑에 成立된 이 社會의 戶라는 것은 如何한 實情에 있었든가. 上述한바 土地 所有의 檢討는 中外의 兵役에 當할 人民의 富의 不均衡을 結論지웠다. 또 具體的인 一例에서, 그 耕作者에는 더욱 不利한 土地 所有의 또 하나의 型을 抽出하였다. 如何튼 이 社會에 있어서의 富의 不均衡은 벌서 太祖 元年 九月, 都評議使司에 依하야 엉성하나마 戶를 通하야 그 實情을 보여주고 있다.
 
|목차2원문17번={{TagSpage|14-2}}租와 賦와 貢은 當時의 國家의 人民에 對한 收取의 三大 部門으로, 田以出租하고 戶以出賦라 하야 戶라는 것은 賦라는 直接的 勞力 收取의 法制的인 單位로 되어 있었다. 恭讓王 三年의 田制改革(科田法 創{{TagPage|15-1}}定)을 契機로 하야 새로운 複雜한 土地 所有 關係 밑에 成立된 이 社會의 戶라는 것은 如何한 實情에 있었든가. 上述한바 土地 所有의 檢討는 中外의 兵役에 當할 人民의 富의 不均衡을 結論지웠다. 또 具體的인 一例에서, 그 耕作者에는 더욱 不利한 土地 所有의 또 하나의 型을 抽出하였다. 如何튼 이 社會에 있어서의 富의 不均衡은 벌서 太祖 元年 九月, 都評議使司에 依하야 엉성하나마 戶를 通하야 그 實情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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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2번={{TagSpage|16-1}}<blockquote no="9">{{TagRef|8}}戶曹啓 各道各官戶籍 以田五十結 爲大戶 三十結以上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差等差役 京中五部 則以間架爲定 四十間以上 爲大戶 三十間以上 爲中戶 十間以上 爲小戶 五間以上 爲殘戶 四間以下 爲殘殘戶 差等戶籍施行<ref>世宗實錄, 十七年 三月 戊寅條</ref></blockquote>
 
|목차2원문22번={{TagSpage|16-1}}<blockquote no="9">{{TagRef|8}}戶曹啓 各道各官戶籍 以田五十結 爲大戶 三十結以上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差等差役 京中五部 則以間架爲定 四十間以上 爲大戶 三十間以上 爲中戶 十間以上 爲小戶 五間以上 爲殘戶 四間以下 爲殘殘戶 差等戶籍施行<ref>世宗實錄, 十七年 三月 戊寅條</ref></blockquote>
 
|목차2원문23번={{TagSpage|16-2}}여기에는 私賤은 심에 들어있을 理 없고,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는 公賤·身良役賤·良人·兩班을 概括한 것이려니와, 그 所謂 田結이라는 것이 如何한 質의 것인가, 『收租權』에 基한 것인가, 或은 『耕作權』 또 『並作權』에 基한 것인가 確實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田結의 量的인 差異에서 오는 戶의 差等은 또한 그 田結 所有 內容의 質的인 差異를 內包하는 것일 것이며, 그 戶의 主人公 되는 사람의 身分을 反映하고 있으리라 함은 冒險이 아닐 줄 생각한다. 그리고 이 戶曹의 啓는 所謂 聽許를 얻었다는 明文이 없지마는, 이대로 實施되였다는 것은 翌年 七月, 江原道 監司의 啓에 依하야 알 수 있다. 同時에 그 道에 있어서는 所謂 殘殘戶의 絕對的 多數임을 볼 수 있다.
 
|목차2원문23번={{TagSpage|16-2}}여기에는 私賤은 심에 들어있을 理 없고,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는 公賤·身良役賤·良人·兩班을 概括한 것이려니와, 그 所謂 田結이라는 것이 如何한 質의 것인가, 『收租權』에 基한 것인가, 或은 『耕作權』 또 『並作權』에 基한 것인가 確實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田結의 量的인 差異에서 오는 戶의 差等은 또한 그 田結 所有 內容의 質的인 差異를 內包하는 것일 것이며, 그 戶의 主人公 되는 사람의 身分을 反映하고 있으리라 함은 冒險이 아닐 줄 생각한다. 그리고 이 戶曹의 啓는 所謂 聽許를 얻었다는 明文이 없지마는, 이대로 實施되였다는 것은 翌年 七月, 江原道 監司의 啓에 依하야 알 수 있다. 同時에 그 道에 있어서는 所謂 殘殘戶의 絕對的 多數임을 볼 수 있다.
|목차2원문24번={{TagSpage|16-3}}<blockquote no="10">{{TagRef|9}}今定諸道戶籍 五十結以上 爲大戶 二(三?)十結以上 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 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然 此道二十六官 民戶摠一萬一千五百三十有八 其中大戶十 中戶七十一 小戶一千六百四十一 殘月二千四十三 殘殘戶七千七百七十三 地狹民少 而嶺西 則山田所出倍於正田 嶺外 則又有魚鹽之利 若以他道成籍 分定差役 則非唯定役爲難 勞逸不均 今後道內戶籍 以二十結以下 十結以上 爲中戶 六結以上 爲小戶 四結以上 爲殘戶 三結以下 爲殘殘戶 從之<ref>同 十八年 七月 壬戌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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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4번={{TagSpage|16-3}}<blockquote no="10">{{TagRef|9}}今定諸道戶籍 五十結以上 爲大戶 二(三?)十結以上 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 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然 此道二十六官 民戶摠一萬一千五百三十有八 其中大戶十 中戶七十一 小戶一千六百四十一 殘月二千四十三 殘殘戶七千七百七十三 地狹民少 而嶺西 則山田所出倍於正田 嶺外 則又有魚鹽之利 若以他道成籍 分定差役 則非唯定役爲難 勞逸不均 今後道內戶籍 以二十結以下 十結以上 爲中戶 六結以上 爲小戶 四結以上 爲殘戶 三結以下 爲殘殘戶 從之<ref>同, 十八年 七月 壬戌條</ref></blockquote>
 
|목차2원문25번={{TagSpage|17-1}}由來, 江原道란 데는 天下의 貧道로서, 그는 그 道의 生產力이 他道에 미치지 몯하는 데에서 根本的인 理由를 찾겠지마는, 常識的으로는 富戶가 적은 데에 그 貧道인 所以가 있으므로, 貧戶가 많다고 하야 貧道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江原道 監司의 말을 기다리지 않드래도 自明한 일이다. 富道라고 하는 慶尙道는 貧戶가 적어서 富道이었든 것은 아니다. 實로 下三道라는 데는 富戶의 淵藪이었든 同時에 貧戶의 巢窟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江原道에 있어서의 殘殘戶의 絕對的 多數는 드디어 全國的인 殘殘戶의 多數的 存在를 演繹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殘殘戶란 土地支配에 對하야 質的으로나 量的으로 나 貧弱한 것이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李朝 初期에 있어서의 所謂 「單寒」한 軍戶의 本質的인 條件을 이루는 것이었고, 또 이 「單寒」한 데에서야말로 奉足이라는 것이 주워지는 所以가 있었든 것이다.
 
|목차2원문25번={{TagSpage|17-1}}由來, 江原道란 데는 天下의 貧道로서, 그는 그 道의 生產力이 他道에 미치지 몯하는 데에서 根本的인 理由를 찾겠지마는, 常識的으로는 富戶가 적은 데에 그 貧道인 所以가 있으므로, 貧戶가 많다고 하야 貧道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江原道 監司의 말을 기다리지 않드래도 自明한 일이다. 富道라고 하는 慶尙道는 貧戶가 적어서 富道이었든 것은 아니다. 實로 下三道라는 데는 富戶의 淵藪이었든 同時에 貧戶의 巢窟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江原道에 있어서의 殘殘戶의 絕對的 多數는 드디어 全國的인 殘殘戶의 多數的 存在를 演繹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殘殘戶란 土地支配에 對하야 質的으로나 量的으로 나 貧弱한 것이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李朝 初期에 있어서의 所謂 「單寒」한 軍戶의 本質的인 條件을 이루는 것이었고, 또 이 「單寒」한 데에서야말로 奉足이라는 것이 주워지는 所以가 있었든 것이다.
  
 
|목차2해독문1번=이조초기의 전법은 공양왕 3년에 창정된 소위 과전법에 의하여, 최후의 결정을 보았던 것은 주지되는 사실이다. 고려사 권78, 지(志)권 제32, 식화1에 보이는바 공양왕 3년 5월, 도평의사사의 상언에 의하여 창정된 과전법의 세목은, 전제 개혁론자들의 종래 창도하여 온 것의 실천인 점에 있어서, 그것은 물론 고려말 대토지 사유와 전연 대척적인 것이었다. 즉 대토지 사유에 의한 이 사회의 근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의 분배의 불균형을 타파한 것에, 그의 최대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전법의 창정에 의하여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권력적 간섭과, 그 분배의 균형이 꾀하여 졌던 것이다. 이하, 이 과전법의 세목 중에서 수속·상속·벌칙 등을 쟁하하고, 직접 이 분배와 소유에 관한 항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목차2해독문1번=이조초기의 전법은 공양왕 3년에 창정된 소위 과전법에 의하여, 최후의 결정을 보았던 것은 주지되는 사실이다. 고려사 권78, 지(志)권 제32, 식화1에 보이는바 공양왕 3년 5월, 도평의사사의 상언에 의하여 창정된 과전법의 세목은, 전제 개혁론자들의 종래 창도하여 온 것의 실천인 점에 있어서, 그것은 물론 고려말 대토지 사유와 전연 대척적인 것이었다. 즉 대토지 사유에 의한 이 사회의 근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의 분배의 불균형을 타파한 것에, 그의 최대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전법의 창정에 의하여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권력적 간섭과, 그 분배의 균형이 꾀하여 졌던 것이다. 이하, 이 과전법의 세목 중에서 수속·상속·벌칙 등을 쟁하하고, 직접 이 분배와 소유에 관한 항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목차2해독문2번=<blockquote no="02">一. 拘收公私徃年田籍 盡行檢覆 覈其眞僞 因舊損益 以定陵寢·倉庫·宮司·軍資寺 及寺院·外官職田·廪給田·鄕·津·驛吏·軍匠·雜色之田<br/>一. 京畿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第一科, 自在內大君 至門下侍中 一{{TagPage|7-1}}百五十結 (中略) 第十八科 權務散職 十結<br/>一. 外方王室之藩 宜置軍田 以餋軍士 東西兩界 依舊充軍需 六道閑良官吏 不論資品高下 隨其本田多少 各給軍田十結, 或 五結.<br/>一. 軍·鄉吏及諸有役人 如有死亡無後者 逃避本役者 赴京從仕者則 代其役者 遞受其田<br/>一. 今後 凡稱私田 其主雖有罪犯 不許沒爲公田<br/>一.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倡妓·僧尼等人 身及子孫 不許受田<br/>一.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糓三十斗 此外有橫歛者 以曮論<br/>一. 除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外 凡有田者 皆納稅 水田一結 白米二斗 旱田一結 黃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br/>一. 田主奪田客所耕田 一負至五負 笞二十 每五負 加一等 罪至杖八十 職牒不收 一結以上 其丁許人遞受<br/>一. 佃客 母得將所耕田 擅賣·擅興別戶之人 如有死亡·移徒·戶絕者 多占餘田 故令荒蕪者 其田聽從田主住意區處</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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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blockquote no="02">一. 拘收公私徃年田籍 盡行檢覆 覈其眞僞 因舊損益 以定陵寢·倉庫·宮司·軍資寺 及寺院·外官職田·廪給田·鄕·津·驛吏·軍匠·雜色之田<br/>一. 京畿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第一科, 自在內大君 至門下侍中 一百五十結 (中略) 第十八科 權務散職 十結<br/>一. 外方王室之藩 宜置軍田 以餋軍士 東西兩界 依舊充軍需 六道閑良官吏 不論資品高下 隨其本田多少 各給軍田十結, 或 五結.<br/>一. 軍·鄉吏及諸有役人 如有死亡無後者 逃避本役者 赴京從仕者則 代其役者 遞受其田<br/>一. 今後 凡稱私田 其主雖有罪犯 不許沒爲公田<br/>一.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倡妓·僧尼等人 身及子孫 不許受田<br/>一.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糓三十斗 此外有橫歛者 以曮論<br/>一. 除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外 凡有田者 皆納稅 水田一結 白米二斗 旱田一結 黃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br/>一. 田主奪田客所耕田 一負至五負 笞二十 每五負 加一等 罪至杖八十 職牒不收 一結以上 其丁許人遞受<br/>一. 佃客 母得將所耕田 擅賣·擅興別戶之人 如有死亡·移徒·戶絕者 多占餘田 故令荒蕪者 其田聽從田主住意區處</blockquote>
 
|목차2해독문3번=과전법의 창정은 종래의 대토지 사유의 양기(揚棄)인 점에 있어서 사전의 공전화는 물론, 그의 분배가 대형의 토지 사유에서 소형의 토지 소유로 변하였다는 것에 최대 안목이 있다는 것은 상술한 바이다. 앞서 든 과전법의 세목에 의하면 경기에 있어서만 사전이 인정될 뿐으로, 명목은 여하튼 중앙 권력이 미치기 쉬운 거리에 두었고, 지방 6도에서도 {{ruby|수기사전다소|●●●●●●}}하여 10결 혹은 5결의 사전이 군전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면 또 이러한 토지 분배에 있어서 소유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TagRefT|1}}우선, 이에 대하여 신진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씨에게 들어보기로 하자.<ref group="a">사학잡지 제50편 제5호 제6호 소재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씨 논문 「鮮初の土地制度 一斑」</ref> 그의 의견은 대개 이러하였다.
 
|목차2해독문3번=과전법의 창정은 종래의 대토지 사유의 양기(揚棄)인 점에 있어서 사전의 공전화는 물론, 그의 분배가 대형의 토지 사유에서 소형의 토지 소유로 변하였다는 것에 최대 안목이 있다는 것은 상술한 바이다. 앞서 든 과전법의 세목에 의하면 경기에 있어서만 사전이 인정될 뿐으로, 명목은 여하튼 중앙 권력이 미치기 쉬운 거리에 두었고, 지방 6도에서도 {{ruby|수기사전다소|●●●●●●}}하여 10결 혹은 5결의 사전이 군전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면 또 이러한 토지 분배에 있어서 소유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TagRefT|1}}우선, 이에 대하여 신진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씨에게 들어보기로 하자.<ref group="a">사학잡지 제50편 제5호 제6호 소재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씨 논문 「鮮初の土地制度 一斑」</ref> 그의 의견은 대개 이러하였다.
 
|목차2해독문4번=전국의 전지는 그 전종의 여하를 물문하고, 국가의 권력적 간섭을 받게 되니, 곧 국가는 전국의 전지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이러므로 전국의 전지는 모두가 공전이요, 뿐만 아니라,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을 제외한 모든 전지는 국가에 대하여 납세의 의무를 지고 수전자(受田者)의 전인 공신전과 같은 것은 납세의 의무까지도 지지 않는 전지라 하더라도 국가를 이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므로 그냥 사전이 아니라 ‘공전 중의 사전’이라. 국가는 전지에 대하여 수세·수조의 이중 수취를 행하는데, 그 중에는 면세의 전지도 있고, 과전·군전·공신전 등(수전자의 전)에 대하여는 국가는 수조하지 않으니 이들이 곧 ‘공전 중의 사전’인 것이다. 나머지의 전지는 국가 직속의 전지로서 특제한 자 외 납세·납조라는 이중의 지대를 국가에 대하여 지불하므로 그들은 ‘공전 중의 공전’이라 할 수 있다. 또 수전자의 전인 경우에는 수전자는 그의 전지에 대하여 국가 대신에 전객(佃客)에게서 수조를 할 수 있으니, 곧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전주는 전객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하여 천매·천여하지를 못하니 전객은 그 토지에 대하여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같은 한 조각의 전지를 들어 그것의 소유 관계의 내용을 살핀다면 국가·전주·전객의 3요소가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위와 같은 3개의 지배 형태를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차2해독문4번=전국의 전지는 그 전종의 여하를 물문하고, 국가의 권력적 간섭을 받게 되니, 곧 국가는 전국의 전지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이러므로 전국의 전지는 모두가 공전이요, 뿐만 아니라,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을 제외한 모든 전지는 국가에 대하여 납세의 의무를 지고 수전자(受田者)의 전인 공신전과 같은 것은 납세의 의무까지도 지지 않는 전지라 하더라도 국가를 이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므로 그냥 사전이 아니라 ‘공전 중의 사전’이라. 국가는 전지에 대하여 수세·수조의 이중 수취를 행하는데, 그 중에는 면세의 전지도 있고, 과전·군전·공신전 등(수전자의 전)에 대하여는 국가는 수조하지 않으니 이들이 곧 ‘공전 중의 사전’인 것이다. 나머지의 전지는 국가 직속의 전지로서 특제한 자 외 납세·납조라는 이중의 지대를 국가에 대하여 지불하므로 그들은 ‘공전 중의 공전’이라 할 수 있다. 또 수전자의 전인 경우에는 수전자는 그의 전지에 대하여 국가 대신에 전객(佃客)에게서 수조를 할 수 있으니, 곧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전주는 전객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하여 천매·천여하지를 못하니 전객은 그 토지에 대하여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같은 한 조각의 전지를 들어 그것의 소유 관계의 내용을 살핀다면 국가·전주·전객의 3요소가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위와 같은 3개의 지배 형태를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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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TagSpage|18-1}}前者에 말한 바와도 같이 一般 軍人의 經濟的 地盤이 薄弱한 데다가, 그 중 特別한 者를 除外하고는, 祿俸米의 官船에도 叅與치 못하고, 그 立役의 期間 中의 費用은 모도 다 自辨이었다. 이런 것은 國家에서 지우는 큰 賦役에 있어서는 共通한 現象으로 正軍이 立役하는 데 對하야 그 役에 當치 않는 남어지의 사람으로서 奉足을 삼아, 이에 對한 費用을 調辨케 하였다. 世宗實錄에 奉足에 關한 이런 說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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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TagSpage|18-2}}<blockquote no="11">{{TagRef|1}}凡正一名 給餘丁 使之出財力 以助正丁 國俗謂之奉足<ref>世宗實錄, 二年 正月 乙巳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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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TagSpage|18-3}}奉足은 助丁, 또는 管下(永安道), 人祿(濟州島)이라고도 하니 이는 人丁에 對하야 부를 때요, 戶로써, 이런 일에 當케 할 때는 이를 奉足戶 또는 助戶라고 한다. 그레고 軍役에 있어서는 戶首라고 하야 그 戶의 長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이에 當하고, 奉足은 그에게 引率되는 남어지의 人丁이 當하게 되였었다. 이러한 일은 勿論 戶籍의 手段을 비러서 처음 實行할 수 있었다. 그리고 國役負擔의 單位로서의 戶는 前節 所論한 바와 같은 經濟的인 基礎 條件 때문에 多數한 人丁을 擁할 큰 戶도 있고, 不成戶와 같은 그 自身 單獨으로는 立役이 不可能한 戶도 있었다. 前者에 關하야 우리는 이러한 實例를 본다.
|목차3원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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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TagSpage|19-1}}<blockquote no="12">{{TagRef|2}}(上略) 各官大小人民等 家產排置 衣食各備人 數多率居 稱爲一戶者 勿令除出 仍舊完接<ref>太宗實錄, 八年 十一月 丁卯條</ref> (下路)</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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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번={{TagSpage|19-2}}이러한 數個의 살림을 包含하는 큰 戶도 있는 一方에 不成戶, 無家戶와 같은 貧戶가 있음을 닞어서는 안 될 것이다. 後者와 같은 境遇에는 그 自身 單獨으로 立役이 不可能함으로, 「三家爲一戶」·「五丁爲一戶」 乃至는 「三丁爲一戶」라는 統合한 法制的 範疇로서의 戶에 依하야 兵役 其他 隨時의 役에 當케 하였다. 이러한 意味의 戶는 이 社會에 있어서처럼, 殘殘戶와 같은 單寒한 戶가 絕對的 多數로 存在하는 境遇에는 立役의 單位로서의 戶의 거진 大部分을 占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三家爲一戶」하자는 論議는 저 有名한 太祖 「安邊之策」에서 벌서 보이는 바로 「三丁爲一戶」라는 것과 本質的도 何等 다름이 없는 것이다. 前節 引用文 中의 <cite no="05">「不成戶를 幷三戶하야 爲一戶」</cite>라는 말도 또한 같은 것이다. 「幷三戶」의 戶는 한 「살림」이란 뜻일 것이고, 「爲一戶」의 戶는 이 法制的인 範疇로서의 戶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大概 三家로써 一戶를 맨든다는 等의 일은, 저 單寒한 戶의 境遇이므로, 이에는 成人 男子인 丁이 둘式이나 셋式이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하야, 兵役의 單位로서의 戶는 富戶인 境遇에는 그 自身 單獨으로 한낱의 單位가 되는 것이지만, 絕對的 多數인 貧戶의 境遇에는 「五丁爲一戶」 乃至는 「三丁爲一戶」와 같은 法制的인 單位로서의 戶가 한낱의 單位가 되는 것이 通例이다. 따라서 正軍인 戶首는 그 집의 家長이요, 奉足은 그 집의 率丁인 境遇도 있고(富戶), 이런 意味를 떠나서 戶首와 奉足과의 關係가 成立하는 境遇도 있을 것이다. (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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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6번={{TagSpage|20-1}}軍役이 그의 身分 制限에 依하야 한낱 恩賞도 되고 또는 한낱 苦役도 된다는 것을 前述하였다. 身分이라는 것은 그 社會에 있어서 生產手段인 土地의 支配와 또 量的인 分配에 依하야 決定되는 以上, 身分에 있어서의 煩𤨏한 差等은 고대로 戶라는 것의 煩𤨏한 差等에 反映되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身分的 制限은 諸色 軍人의 戶首와 奉足과의 關係를 如何히 決定하였는가. 그것이 한 個의 榮譽인 兵役은 富戶에 依하야 지워지는 것은 勿論, 그것이 戶首에 依하야 立役되였다는 것 또한 再論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의 賦役인 때, 그것은 戶首된 者—貧戶를 모아 法制的으로 만든 戶의—에 依하야, 곧 그 중에 그래도 나은 者에 依하야 立役되지 않는 境遇도 있다. 良人의 兵役 中에서는 가장 賤役이요 苦役이든 船軍에서 우리는 이러한 實例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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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7번={{TagSpage|20-2}}<blockquote no="13">{{TagRef|3}}刑曹啓報恩船軍孫於火 旣殺其戶首金厚律 (下略)<ref>世宗實錄, 八年 十月 己丑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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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8번={{TagSpage|20-3}}即, 戶首와 正軍과의 乘離한 境遇인데 이런 일은 實로 이에서 그치지는 아니하였다. 奉足이 正軍에 代身하야 立役한다는 것, 곧 所謂 代立이라는 것은 나종엔 드디여 官許되여저 가는 것이었다. 또 公賤인 選上奴라든지 轉運奴에 이르러서는 『三丁爲一戶』하야, 戶首와 奉足을 定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戶首가 正軍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役이 身分線을 조차 賤化함을 따라 戶首와 正軍과의 關係가 乘離하였저 갔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原則的으로는, 一般 兵役에 있어서는 戶首=正軍이라는 關係가 正常的이다. 그렇기 때문에 正常한 戶首와 奉足과의 關係에 었어서는, 戶首=正軍에{{TagPage|21-1}} 對하야 그의 奉足은 財産上, 身分上, 戶首보다 못한 사람으로써 이에 當케 하였든 것이다. 太宗 四年 六月, 甲士 以下의 諸色軍人에 對하야 奉足을 給付할 제의 規定을 보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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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9번={{TagSpage|21-2}}<blockquote no="14">{{TagRef|4}}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都<ref>太宗實錄, 四年 六月 壬戌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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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0번={{TagSpage|21-3}}그레고, 良人 兵士의 奉足은 奴婢와 率丁이 많은 大戶인 境遇에는, 그것의 發給을 必要로 하지 않지만은, 「三丁爲一戶」라든가 하는 法制的인 戶인 境遇에는 原則的으로 良人으로써 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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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1번={{TagSpage|21-4}}<blockquote no="15">{{TagRef|5}}左參賛姜孟卿 將本府議曰 軍士助丁 皆用良民 (下略)<ref>世祖實錄, 元年 九月 丙子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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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2번={{TagSpage|21-5}}같은 良人으로써 奉足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사람을 正軍=戶首로 하고, 또는 奉足으로 하느냐에 對하야는, 「試取」에 入格한 者를 「才」라 하야 이를 戶首=正軍으로 하고, 不入格者로서 「不才」라 하야 奉足에 充한다는 原則 上의 形式的인 差別이 있기는 하지만, 우에 引用한 記事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戶首와 奉足과의 사이에는 財產上 身分上의 規約이 임이 存在하는 것이고, 一方 그 自身 單獨으로 立役이 可能한 戶도 있고 特殊한 法制的인 戶도 있고 하야, 다 같이 그 안에서 戶首와 奉足을 뽑아낸다는 實情에 비추워, 이러한 「才」 「不才」의 差別과 같은 것은 不可能에 屬하는 일이다. 世祖實錄, 十四年 六月 丙午條에 「正軍 奉足의 才·不才 顚倒」하였음을 곧히자는 論議가 보이는데, 이는 이 間의 消息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戶首와 奉足 間의 關係에 있어서, 奉足의 正軍=戶首에게 對하야 支拂할 財力의 一定한 額이 없더니 睿宗 元年 三月에 이르러 처음 이의 設定을 보게 되였다. 實錄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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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3번={{TagSpage|22-1}}<blockquote no="16">{{TagRef|6}}兵曹據慶尙北道節度使啓本啓 諸色軍士助丁 助役價錢 無定數 故每於番上時 侵奪助丁 綿布八九匹 因而破產 或至逃散 其弊不貲 請今後番上時 除自願備馬 或隨從者外 近道三日程 則人二匹 遠道則 四匹備給 其仍濫徵者 許助丁自告 京中本曹 外方節度使 隨即推論 依軍令 杖九十 極邊充軍 以杜冒濫之弊 幷諭他道從之<ref>睿宗實錄, 元年 三月 甲午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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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4번={{TagSpage|22-2}}이러한 助丁의 正軍에 對하야 支拂할 財力의 公定 價格이 云爲되는 것은, 勿論 저 法制的인 戶, 即 單寒한 살림의 묵굼인 戶에 있어서요 그것이 大戶인 境遇는 勿論 아닐 것이다. 웨 그러냐 하면 大戶인 境遇에는 奉足으로서 或은 奉足의 代身으로서 주워지는 所謂 率丁 乃至 奴婢가 많음으로 그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公定 價格論이 問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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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5번={{TagSpage|22-3}}開國 以來, 諸色軍人에 對하야 奉足이 如何한 比例로 給付되였든가는 일즉이 騎船軍戶에 對한 「三丁爲一戶」 原則에 依하야 엿볼 수 있다. 곧, 一丁은 正軍=戶首요, 二丁은 率丁=奉足, 船軍이라는 것이 苦役이라 良人의 最下層에 依하야 지워지는 것이매, 이 境遇에 丁이라는 것은 單寒한 그들로서는 戶라 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레고, 各種 軍人에 對하야 一時로 그의 奉足의 定額이 決定된 것은 太宗 四年 六月이었다. 開國 後 最初의 일로, 世祖 十年 兵役 負擔의 單位가 「戶」 代身에 「保」로 옮어 갈 때까지, 그 사이에 조곰한 變動은 있기는 하였지만 奉足 定額의 原則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實錄에서 이에 關한 記事를 記錄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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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6번={{TagSpage|22-4}}<blockquote no="17">命各道各官 分其民戶貧富強弱 以給助戶 議政府啓 外方民戶 富强者 多得助戶 而貧富者 反不得助戶 流移失所 軍{{TagPage|23-1}}額日減 願各道差等詳定<br/>一. 甲士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一戶 六七結以上 不給<br/>一. 侍衛牌 完山子弟牌 一二結以下給奉足二戶 三四結以下 給奉足一戶 五六結以上 不給<br/>一. 騎船軍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給奉足一戶 七八結以上 自立一領 十五結以上 自立二領<br/>一. 鎭屬軍 及吹鍊軍鐵所干 一二結以上者 戶三四結以上 不給<br/>一. 守城軍及日守兩班 止用三四結以下者 不許用五六結以上者 亦不給奉足<br/>一. 各司吏典·隊長·隊副·丁·皂隸·都府外·守公·軍器監別軍·速毛赤·吹螺赤·一二結以下 給奉足一戶 三四結以上 不給<br/>一. 鄉吏·一二結以下 給同類奉足一戶 四結以上 不給<br/>一. 公衙丘陵·院主・津尺同<br/>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者 上項奉足定給外 各色有常役者 俱不給奉足(註4와 같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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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7번={{TagSpage|23-2}}여기서 吾人은 奉足의 給付에 있어서의 身分의 反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別侍衛·內禁衛와 또 貴族 軍人에 對한 記事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임이 助戶의 도움을 빌지 않드래도, 많은 率丁을 그 戶內에 가지는 大戶의 主人公인지라, 그 戶의 戶首로서 그의 榮譽로운 立役에 當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奉足으로서의 助丁이 그의 戶 밖에서 주워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上記 여러{{TagPage|24-1}} 軍人─院主 津尺까지 軍人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院主 노릇·津尺 노릇이 그들의 國家에 對하야 저야 할 役이기 때문에─이 奉足 不給의 限度의 差異를 그들 軍人의 가지는 富의 스스로인 反映일 것이며, 그 各種의 軍人 中에 있어서의 絕對的 多數는 그 奉足 發給의 最大 限度 以下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奉足戶에 關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勿論이다. 例하면 <cite no="06">「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cite>라 할 때, 一般의 田地를 가지지 못하는 奉足의 大多數임을 演繹하는 것은 잘못일까. 우의 記事는 大戶나 殘殘戶나 區別치 않고 또 그의 土地에 對한 質的인 區別도 考慮치 않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서 그것에서부터 戶라고는 하기 어려운 殘殘戶 乃至는 不成戶의 絕對的 多數인 것을 前節의 證明을 빌지 않드래도 斷定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히 하야 그 編成한 結果는 어떠하였을까. 單寒한 戶首의 戶에다가 單寒한 奉足의 戶를 合算한들 그것은 큰 一戶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우의 記事가 비록 戶로써 單位를 삼었다고 한들, 이러한 實情에 있는 限, 大部分 「三丁一戶」라든가 「五丁一戶」라든가 하는 丁 單位와 別다른 差異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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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8번={{TagSpage|24-2}}慶尙道地理志, 道內時居條에 依하면 各色 軍人에 對한 奉足 給付의 單位는 丁을 標準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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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9번={{TagSpage|24-3}}<blockquote no="18">別牌⋯八一六名⋯奉足⋯三,九四七名<br/>佳衛⋯二,一二〇名⋯奉足⋯九,八九五名{{TagPage|25-1}}<br/>營鎭屬⋯二,二六一名⋯奉足⋯六,一〇七名<br/>守城軍⋯一,二二三名⋯奉足⋯二,三六二名<br/>騎船⋯一五,九四一名⋯奉足⋯二六,〇七一名<br/>雜色⋯一六,五七四名⋯奉足⋯四七,四六二名<br/>計⋯正軍 三九,九三五名⋯奉足⋯一〇三,八四四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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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0번={{TagSpage|25-2}}이 중 騎船軍은 正軍一에 對하야 奉足 二丁을 넘고 있으나, 三丁 一戶라는 原則은 終始 不變이라고 생각되고, 일즉이 太祖實錄, 七年 秋九月 壬午條, 恭靖王의 敎旨에서도 이를 强調하고 있다. 騎船軍의 이러한 「三丁一戶」 原則은 世祖의 保法에 이르러 事實上 「四丁一戶」로 하게 되였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甲士·別侍衛와 같은 것도 助丁發給에 있어서 丁을 單位로 하고 있다. 世祖實錄에서 이것을 보면 左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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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1번={{TagSpage|25-3}}<blockquote no="19">{{TagRef|7}}一、甲士·別侍衛 奴婢·土田數少者 無助丁 而番上宿衛爲難 故給助丁三人 然而敬差官等 不覈奴婢土田之數 例給助丁三人 軍士內 自占良民 以爲已奴 多般侵虐 雖富實軍士 因緣請托 皆受助丁 一家三人 俱出供役 民力敷 不因而流亡 請令諸邑守令 更考所耕及奴婢多少 若<br/>所耕五結以下 奴婢十口以下 給助丁三人<br/>所耕七結以下 奴婢十二口以下 給二人{{TagPage|26-1}}<br/>所耕十結以下 奴婢十五口以下 給一人<ref>世祖實錄, 四年 十一月 癸已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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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2번={{TagSpage|26-3}}<blockquote no="20">{{TagRef|8}}一. 二丁爲一保<br/>一. 田五結淮一丁<br/>一. 有三保 奉一保者曰甲士 有二保 奉一保者曰騎正兵·吹牒赤 有一保奉一保者曰平虜衛·破敵衛·近仗·別軍·步正兵·大平簫·騎船軍 有獨保者曰 烽燧軍·防牌·攝六十<br/>一. 奴子淮奉足數者 不給他丁<br/>一. 書雲·醫·律·譯權知及生徒·重監·速毛赤·諸色諸員·司僕養馬·理馬·畫員·齋郎·樂工·舞工·諸司吏典·書員·百戶·蟬匠·都府外·皂隸·守工·所由·杖首·喝道·牧子·津尺·水夫·院主 同居族親中三人以下 勿定他役 諸邑·諸驛日守·醫·律學·書員 同居族親中 一人毋定他役<ref>同, 十年 十月 乙未條</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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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3번={{TagSpage|27-1}}即, 一般 良人에 對하야는 保라는 말을 쓰고, 남어지의 身良役賤의 立役者에 對하야는 兵士로서 取扱하였으면서도 그 役賤인 까닭으로써, 保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고 兩者 中 어떤 것을 勿問하고 詳細히 이를 볼 것 같으면, 甲士의 『八丁一戶』로부터, 防牌의 『二丁一戶』 乃至 日守의 「二丁一戶」이라고 바꾸워 말할 수도 있으니, 우리는 여기서 最下 國役 負擔 單位의 構成人員의 數的인 低下를 보지 않는가. 그래도, 保의 新設은 從來의 戶라는 家族的인 單位를 人丁本位로 改革할 수 있었다고도 보이리라. 이 點이 자짓하면 當時의 大家族主義라고나 할 만한 것을 破壞하는 傾向을 가젔었다. 더욱이 田結과 奴婢로서 人丁에 淮한다는 것은 當時에 있어서는 큰 波汶을 던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一般兵士 中의 比較的 上部에 處하는 사람들에 關해서만 있을 수 있는 일임은 勿論이니, 우에서 본 바와 같이 一般兵士의 單寒한 꼴은 그를 그대로 두든 或은 保를 새로 만들든 그다지 影響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는 者에게 있어서는 이 奴婢·田結이 準丁과 또 하나의 問題인 保人의 率丁을 어떻게 處分하느냐 하는 두 가지로 保法 設定 以來 異論이 續出하야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었다. 經國大典, 兵典, 給保條에 依하면, 奴婢·田結로써 人丁에 淮한다는 말이 없으니 大典의 完成 當時까지 大體의 決定을 보았든 것이다. 그러나 保人 率丁의 給付 與否에 關하야는 不斷히 까다라움이 생기었지만, 여 러가지로 曲折을 겪은 후 成宗 二十四年 十二月에 이르러 保人에게 그의 率丁을 給付하도록 即, 保人의 率丁은 他役에 徵發치 않도록 作定되였다. 實錄에 이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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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4번={{TagSpage|28-1}}<blockquote no="21">{{TagRef|9}}兵曹啓 前此本曹啓曰 請勿給保人率丁 而從洪應議率丁過二丁者 押出一丁 別作軍丁 臣等以謂甲士 保人四人也 各率二丁 則一戶之人 多率十餘 我國地編民少 正軍未得充數 請大典 勿給保入率丁命議于領敦寧以上 尹弼商·盧思煩議 保人率丁閑丁 出處無由 雖欲定 終難施行 何如 李克培議 (略) 從弼商等議<ref>成宗實錄, 二十四年 十二月 丙寅條</ref></blockquote>|목차3원문2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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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6번={{TagSpage|28-2}}이에 이르러 다시 保라는 것이 從來의 戶와 何等의 다름이 없어졌다는 것, 곧 그것은 人丁만을 單位로 하자 하여도 實地로는 不可能하였다는 데에 原因이 있다. 共同體的인 또 血族的인 엉킴으로써 얽힌 戶라는 것을 世祖의 峻嚴함으로도 부시기가 어려웠든 것이다. 적어도 이 兵曹의 意見에 좇으면 甲士의 한 戶는 人丁 十餘人을 擁하는 것, 그것이 곧 한사람 甲士의 保이었든 것이다. 그리고 保法의 設定 後, 正軍은 保人에게서 얼마만한 財力을 徵하였든가. 經國大典에서 우리는 이러한 記事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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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7번={{TagSpage|28-3}}<blockquote no="22">{{TagRef|10}}濫收保人雜物者(一人每朔母 過綿布一匹) 違法役使者 井切隣以軍令論 當身降爲保<ref>經國大典, 兵典 給保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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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8번={{TagSpage|28-4}}이러한 무시무시한 禁令에도 不拘하고 實地로는 그렇게 簡單하지는 않었다. 이에 關하야 一例만을 들기로 하자. 成宗 二十四年 三月, 左副承旨 鄭誠謹은 經筵에서 이와 같이 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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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9번={{TagSpage|28-5}}<blockquote no="23">{{TagRef|11}}大典 軍士保人 每朔毋過綿布一匹 而臣爲海州牧使 番上軍士點考時 有一人手持綿布七八匹 跪而笑曰 我爲軍士保人 二朔給綿布七匹 戶首猶以爲少 而杖之 此專是營繕煩而役苦 代之者倍取其直 保人盡賣財產而給之 役民不可不節也<ref>成宗實錄, 二十四年 三月 壬辰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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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전자에 말한 바와도 같이 일반 군인의 경제적 지반이 박약한 데다가, 그 중 특별한 자를 제외하고는, 녹봉미(祿俸米)의 관선(官船)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그 입역의 기간 중의 비용은 모두 다 자변(自辨)이었다. 이런 것은 국가에서 지우는 큰 부역에 있어서는 공통한 현상으로 정군이 입역하는 데 대하여 그 역에 해당하지 않는 나머지의 사람으로서 봉족을 삼아, 이에 대한 비용을 조변(調辨)하게 하였다. 세종실록에 봉족에 관한 이런 설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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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blockquote no="11">{{TagRefT|1}}凡正一名 給餘丁 使之出財力 以助正丁 國俗謂之奉足<ref group="a">세종실록, 2년 정월 을사조</ref></blockquote>
|목차3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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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봉족은 조정(助丁), 또는 관하(영안도), 인록(제주도)이라고도 하니 이는 인정에 대하여 부를 때요, 호로써, 이런 일에 당하게 할 때는 이를 봉족호 또는 조호(助戶)라고 한다. 그리고 군역에 있어서는 호수(戶首)라고 하여 그 호의 장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이에 당하고, 봉족은 그에게 인솔되는 나머지의 인정이 당하게 되었었다. 이러한 일은 물론 호적의 수단을 빌려서 처음 실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역부담의 단위로서의 호는 전 절에서 논한 바와 같은 경제적인 기초 조건 때문에 다수한 인정을 옹(擁)할 큰 호도 있고, 불성호와 같은 그 자신 단독으로는 입역이 불가능한 호도 있었다. 전자에 관하여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본다.
|목차3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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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blockquote no="12">{{TagRefT|2}}(上略) 各官大小인민等 家產排置 衣食各備人 數多率居 稱爲一戶者 勿令除出 仍舊完接<ref group="a">태종실록, 8년 11월 정묘조</ref>(下路)</blockquote>
|목차3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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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번=이러한 수개(數個)의 살림을 포함하는 큰 호도 있는 일방에 불성호, 무가호와 같은 빈호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자와 같은 경우에는 그 자신 단독으로 입역이 불가능하므로, ‘3가위1호’·’5정위1호’ 내지는 ‘3정위1호’라는 통합한 법제적 범주로서의 호에 의하여 병역 기타 수시의 역에 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의미의 호는 이 사회에 있어서처럼, 천천호와 같은 단한한 호가 절대적 다수로 존재하는 경우에는 입역의 단위로서의 호의 거진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3가위1호’하자는 논의는 저 유명한 태조 ‘안변지책’에서 벌써 보이는 바로 ‘3정위1호’라는 것과 본질적도 하등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앞 절 인용문 중의 <cite no="05">“불성호를 병3호하여 위1호”</cite>라는 말도 또한 같은 것이다. ‘병3호’의 호는 한 ‘살림’이란 뜻일 것이고, ‘위1호’의 호는 이 법제적인 범주로서의 호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대개 3가로써 1호를 만든다는 등의 일은, 저 단한한 호의 경우이므로, 이에는 성인 남자인 정(丁)이 둘씩이나 셋씩이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하여, 병역의 단위로서의 호는 부호인 경우에는 그 자신 단독으로 한낱의 단위가 되는 것이지만, 절대적 다수인 빈호의 경우에는 ‘5정위1호’ 내지는 ‘3정위1호’와 같은 법제적인 단위로서의 호가 한낱의 단위가 되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정군인 호수는 그 집의 가장이요, 봉족은 그 집의 솔정인 경우도 있고(부호), 이런 의미를 떠나서 호수와 봉족과의 관계가 성립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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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6번=군역이 그의 신분 제한에 의하여 한낱 은상(恩賞)도 되고 또는 한낱 고역도 된다는 것을 앞서 논하였다. 신분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 있어서 생산수단인 토지의 지배와 또 양적인 분배에 의하여 결정되는 이상, 신분에 있어서의 번쇄한 차등은 그대로 호라는 것의 번쇄한 차등에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신분적 제한은 제색 군인의 호수와 봉족과의 관계를 여하히 결정하였는가. 그것이 한 개의 영예인 병역은 부호에 의하여 지워지는 것은 물론, 그것이 호수에 의하여 입역되었다는 것 또한 재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의 부역인 때, 그것은 호수된 자—빈호를 모아 법제적으로 만든 호의—에 의하여, 곧 그 중에 그래도 나은 자에 의하여 입역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양인의 병역 중에서는 가장 천역이요 고역이든 선군에서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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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7번=<blockquote no="13">{{TagRefT|3}}刑曹啓報恩船軍孫於火 旣殺其戶首金厚律 (下略)<ref group="a">세종실록, 8년 10월 기축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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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8번=즉, 호수와 정군과의 승리(乘離)한 경우인데 이런 일은 실로 이에서 그치지는 아니하였다. 봉족이 정군에 대신하여 입역한다는 것, 곧 소위 대입(代立)이라는 것은 나중엔 드디어 관허되어져 가는 것이었다. 또 공천인 선상노라든지 전운노에 이르러서는 ‘3정위1호’하여, 호수와 봉족을 정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호수가 정군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역이 신분선을 좇아 천화(賤化)함을 따라 호수와 정군과의 관계가 승리(乘離)하여져 갔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일반 병역에 있어서는 호수=정군이라는 관계가 정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한 호수와 봉족과의 관계에 었어서는, 호수=정군에 대하여 그의 봉족은 재산상, 신분상, 호수보다 못한 사람으로써 이에 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태종 4년 6월, 갑사 아래의 제색군인에 대하여 봉족을 급부할 때의 규정을 보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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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9번=<blockquote no="14">{{TagRefT|4}}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都<ref group="a">태종실록, 4년 6월 임술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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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0번=그리고, 양인 병사의 봉족은 노비와 솔정이 많은 대호인 경우에는, 그것의 발급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은, ‘3정위1호’라든가 하는 법제적인 호인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양인으로써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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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1번=<blockquote no="15">{{TagRefT|5}}左參賛姜孟卿 將本府議曰 軍士助丁 皆用良民 (下略)<ref group="a">세조실록, 원년 9월 병자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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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2번=같은 양인으로써 봉족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사람을 정군=호수로 하고, 또는 봉족으로 하느냐에 대하여는, ‘시취’에 입격한 자를 ‘재(才)’라 하여 이를 호수=정군으로 하고, 불입격자로서 ‘불재(不才)’라 하여 봉족에 충한다는 원칙상의 형식적인 차별이 있기는 하지만, 위에 인용한 기사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호수와 봉족과의 사이에는 재산상 신분상의 규약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일방 그 자신 단독으로 입역이 가능한 호도 있고 특수한 법제적인 호도 있고 하여, 다 같이 그 안에서 호수와 봉족을 뽑아낸다는 사정에 비추어, 이러한 ‘재’ ‘불재’의 차별과 같은 것은 불가능에 속하는 일이다. 세조실록, 14년 6월 병오조에 ‘정군 봉족의 재·불재 전도’하였음을 고치자는 논의가 보이는데, 이는 이 때의 소식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호수와 봉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 봉족의 정군=호수에게 대하여 지불할 재력의 일정한 액(額)이 없더니 예종 원년 3월에 이르러 처음 이의 설정(設定)을 보게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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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3번=<blockquote no="16">{{TagRefT|6}}兵曹據慶尙北道節度使啓本啓 諸色軍士助丁 助役價錢 無定數 故每於番上時 侵奪助丁 綿布八九匹 因而破產 或至逃散 其弊不貲 請今後番上時 除自願備馬 或隨從者外 近道三日程 則人二匹 遠道則 四匹備給 其仍濫徵者 許助丁自告 京中本曹 外方節度使 隨即推論 依軍令 杖九十 極邊充軍 以杜冒濫之弊 幷諭他道從之<ref group="a">예종실록, 원년 3월 갑오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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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4번=이러한 조정의 정군에 대하여 지불할 재력의 공정(公定) 가격이 운위되는 것은, 물론 저 법제적인 호, 즉 단한한 살림의 묶음인 호에 있어서요 그것이 대호인 경우는 물론 아닐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대호인 경우에는 봉족으로서 혹은 봉족의 대신으로서 주어지는 소위 솔정 내지 노비가 많음으로 그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공정 가격론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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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5번=개국 이래, 제색군인에 대하여 봉족이 여하한 비례로 급부되었던가는 일즉이 기선군호에 대한 ‘3정위1호’ 원칙에 의하여 엿볼 수 있다. 곧, 1정은 정군=호수요, 3정은 솔정=봉족, 선군이라는 것이 고역이라 양인의 최하층에 의하여 지워지는 것이니, 이 경우에 정이라는 것은 단한한 그들로서는 호라 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각종 군인에 대하여 일시로 그의 봉족의 정액이 결정된 것은 태종 4년 6월이었다. 개국 후 최초의 일로, 세조 10년 병역 부담의 단위가 ‘호’ 대신에 ‘보’(保)로 옮아 갈 때까지, 그 사이에 조그마한 변동은 있기는 하였지만 봉족 정액의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실록에서 이에 관한 기사를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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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6번=<blockquote no="17">命各道各官 分其民戶貧富強弱 以給助戶 議政府啓 外方民戶 富强者 多得助戶 而貧富者 反不得助戶 流移失所 軍額日減 願各道差等詳定<br/>一. 甲士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一戶 六七結以上 不給<br/>一. 侍衛牌 完山子弟牌 一二結以下給奉足二戶 三四結以下 給奉足一戶 五六結以上 不給<br/>一. 騎船軍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給奉足一戶 七八結以上 自立一領 十五結以上 自立二領<br/>一. 鎭屬軍 及吹鍊軍鐵所干 一二結以上者 戶三四結以上 不給<br/>一. 守城軍及日守兩班 止用三四結以下者 不許用五六結以上者 亦不給奉足<br/>一. 各司吏典·隊長·隊副·丁·皂隸·都府外·守公·軍器監別軍·速毛赤·吹螺赤·一二結以下 給奉足一戶 三四結以上 不給<br/>一. 鄉吏·一二結以下 給同類奉足一戶 四結以上 不給<br/>一. 公衙丘陵·院主・津尺同<br/>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者 上項奉足定給外 各色有常役者 俱不給奉足(각주4와 같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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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7번=여기서 우리는 봉족의 급부에 있어서의 신분의 반영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별시위·내금위와 또 귀족 군인에 대한 기사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이미 조호의 도움을 빌지 않더라도, 많은 솔정을 그 호 내에 가지는 대호의 주인공인지라, 그 호의 호수로서 그의 영예로운 입역에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족으로서의 조정이 그의 호 밖에서 주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 쓴 여러 군인─원주 진척까지 군인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원주 노릇·진척 노릇이 그들의 국가에 대하여 저야 할 역이기 때문에─이 봉족 불급의 한도의 차이를 그들 군인의 가지는 부의 스스로인 반영일 것이며, 그 각종의 군인 중에 있어서의 절대적 다수는 그 봉족 발급의 최대 한도 이하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봉족호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물론이다. 예를 들면 <cite no="06">“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cite>라 할 때, 일반의 전지를 가지지 못하는 봉족의 대다수임을 연역하는 것은 잘못일까. 위의 기사는 대호나 천천호나 구별치 않고 또 그의 토지에 대한 질적인 구별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그것에서부터 호라고는 하기 어려운 천천호 내지는 불성호의 절대적 다수인 것을 앞 절의 설명을 빌지 않더라도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 편성한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단한한 호수의 호에다가 단한한 봉족의 호를 합산한들 그것은 큰 1호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위의 기사가 비록 호로써 단위를 삼았다고 한들, 이러한 실정에 있는 한, 대부분 ‘3정1호’라든가 ‘5정1호’라든가 하는 정 단위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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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8번=경상도지리지, 도내시거조에 의하면 각색 군인에 대한 봉족 급부의 단위는 정을 표준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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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9번=<blockquote no="18">별패⋯816명⋯봉족⋯3,947명<br/>가위⋯2,120명⋯봉족⋯9,895명<br/>영진속⋯2,261명⋯봉족⋯6,107명<br/>수성군⋯1,223명⋯봉족⋯2,362명<br/>기선⋯15,941명⋯봉족⋯26,071명<br/>잡색⋯16,574명⋯봉족⋯47,462명<br/>계⋯정군 39,935명⋯봉족⋯103,844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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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0번=이 중 기선군은 정군一에 대하여 봉족 2정을 넘고 있으나, 3정 1호라는 원칙은 종시 불변이라고 생각되고, 일찍이 태조실록, 7년 가을 9월 임오조, 공정왕의 교지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기선군의 이러한 ‘3정1호’ 원칙은 세조의 보법(保法)에 이르러 사실상 ‘4정1호’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갑사·별시위와 같은 것도 조정 발급에 있어서 정을 단위로 하고 있다. 세조실록에서 이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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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1번=<blockquote no="19">{{TagRefT|7}}一、甲士·別시위 奴婢·土田數少者 無助丁 而番上宿衛爲難 故給助丁三人 然而敬差官等 不覈奴婢土田之數 例給助丁三人 軍士內 自占良民 以爲已奴 多般侵虐 雖富實軍士 因緣請托 皆受助丁 一家三人 俱出供役 民力敷 不因而流亡 請令諸邑守令 更考所耕及奴婢多少 若<br/>所耕五結以下 奴婢十口以下 給助丁三人<br/>所耕七結以下 奴婢十二口以下 給二人<br/>所耕十結以下 奴婢十五口以下 給一人<ref group="a">세조실록, 4년 11월 계사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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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2번=별시위라는 양인 병사의 최상층의 부류에게까지 조정을 주기에 이르른 것은 앞 절에도 한 차례 말한 바와 같이, 저 차츰 발전의 길을 취한 농장에 의한 일반 인민의 궁핍화라는 일반적 원인 외에, 그 정액의 증가에 의한 별시위 자체의 질적 저하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세조 1대(一代) 동안은 실로 군액 확장으로써 종시하였었는데, 그가 새로 취한 방법이 종래의 ‘호’를 그만두고 곧 ‘보’라는 것을 신설하였던 것이다. 이에 관한 것은 세조 10년 10월, 하3도에 군적사가 하향할 때에 휴행(携行)한 사목 중에 상세한 규정이 실려 있다. 이를 적기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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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3번=<blockquote no="20">{{TagRefT|8}}一. 二丁爲一保<br/>一. 田五結淮一丁<br/>一. 有三保 奉一保者曰甲士 有二保 奉一保者曰騎正兵·吹牒赤 有一保奉一保者曰平虜衛·破敵衛·近仗·別軍·步正兵·大平簫·騎船軍 有獨保者曰 烽燧軍·防牌·攝六十<br/>一. 奴子淮奉足數者 不給他丁<br/>一. 書雲·醫·律·譯權知及生徒·重監·速毛赤·諸色諸員·司僕養馬·理馬·畫員·齋郎·樂工·舞工·諸司吏典·書員·百戶·蟬匠·都府外·皂隸·守工·所由·杖首·喝道·牧子·津尺·水夫·院主 同居族親中三人以下 勿定他役 諸邑·諸驛日守·醫·律學·書員 同居族親中 一人毋定他役<ref group="a">같은 책 10년 10월 을미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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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4번=즉, 일반 양인에 대하여는 보라는 말을 쓰고, 나머지의 신량역천의 입역자에 대하여는 병사로서 취급하였으면서도 그 역천인 까닭으로써, 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양자 중 어떤 것을 물문하고 상세히 이를 볼 것 같으면, 갑사의 ‘8정1호’로부터, 방패의 ‘2정1호’ 내지 일수의 ‘2정1호’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으니, 우리는 여기서 최하 국역 부담 단위의 구성인원의 수적인 저하를 보지 않는가. 그래도, 보의 신설은 종래의 호라는 가족적인 단위를 인정본위로 개혁할 수 있었다고도 보이리라. 이 점이 자칫하면 당시의 대가족주의라고나 할 만한 것을 파괴하는 경향을 가졌었다. 더욱이 전결과 노비로서 인정에 회(淮)한다는 것은 당시에 있어서는 큰 파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일반병사 중의 비교적 상부에 처하는 사람들에 관해서만 있을 수 있는 일임은 물론이니,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일반병사의 단한한 꼴은 그를 그대로 두든 혹은 보를 새로 만들든 그다지 영향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 노비·전결이 준정(準丁)과 또 하나의 문제인 보인(保人)의 솔정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하는 두 가지로 보법 설정 이래 이론(異論)이 속출하여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었다. 경국대전, 병전, 급보조에 의하면, 노비·전결로써 인정에 회한다는 말이 없으니 대전의 완성 당시까지 대체의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보인 솔정의 급부 여부에 관하여는 부단히 까다로움이 생겼지만, 여러가지로 곡절을 겪은 후 성종 24년 12월에 이르러 보인에게 그의 솔정을 급부하도록 즉, 보인의 솔정은 다른 역에 징발치 않도록 직장되었다. 실록에 이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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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5번=<blockquote no="21">{{TagRefT|9}}兵曹啓 前此本曹啓曰 請勿給保人率丁 而從洪應議率丁過二丁者 押出一丁 別作軍丁 臣等以謂甲士 保人四人也 各率二丁 則一戶之人 多率十餘 我國地編民少 正軍未得充數 請大典 勿給保入率丁命議于領敦寧以上 尹弼商·盧思煩議 保人率丁閑丁 出處無由 雖欲定 終難施行 何如 李克培議 (略) 從弼商等議<ref group="a">성종실록, 24년 12월 병인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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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6번=이에 이르러 다시 보라는 것이 종래의 호와 하등의 다름이 없어졌다는 것, 곧 그것은 인정만을 단위로 하자 하여도 실지로는 불가능하였다는 데에 원인이 있다. 공동체적인 또 혈족적인 엉킴으로써 얽힌 호라는 것을 세조의 준엄함으로도 부시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적어도 이 병조의 의견에 좇으면 갑사의 한 호는 인정 10여인을 옹(擁)하는 것, 그것이 곧 한사람 갑사의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보법의 설정 후, 정군은 보인에게서 얼마만한 재력을 징하였던가. 경국대전에서 우리는 이러한 기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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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7번=<blockquote no="22">{{TagRefT|10}}濫收保人雜物者(一人每朔母 過綿布一匹) 違法役使者 井切隣以軍令論 當身降爲保<ref group="a">경국대전, 병전 급보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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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8번=이러한 무시무시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실지로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이에 관하여 일례만을 들기로 하자. 성종 24년 3월, 좌부승지 정성근은 경연에서 이와 같이 계(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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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9번=<blockquote no="23">{{TagRefT|11}}大典 軍士保人 每朔毋過綿布一匹 而臣爲海州牧使 番上軍士點考時 有一人手持綿布七八匹 跪而笑曰 我爲軍士保人 二朔給綿布七匹 戶首猶以爲少 而杖之 此專是營繕煩而役苦 代之者倍取其直 保人盡賣財產而給之 役民不可不節也<ref group="a">성종실록, 24년 3월 임진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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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번={{TagSpage|29-1}}當時의 國家가 戶籍의 修錄에 가진 힘을 다 쓰는 것은 單純히 國內의 人口에 對하야 알고자 함이라는 理由에 因함은 아니고, 그 人口 中에서 人丁을 抽出하야 이로써 兵役 其他의 徭役에 當하게 하고자 하는 現實的 要求에 基因한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그 人口 中에서는 少數의 支配者群과 大多數의 被支配群을 一區分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것에 있어서의 戶籍의 役割은 마치 軍人이 된다는 것이 그러한 것처럼 名譽의 說明書도 되었을 터이고, 또 賦役 負擔의 臺帳도 되였을 터이라는 것은 前者 一言한 바 있었다. 그레{{TagPage|30-1}}고 戶籍과 軍籍과는 不可分의 關係에 있어 前者는 後者의 地盤이 되고, 後者는 前者를 떠나서는 거진 그의 成立이 不可能하였다. 世祖 八年 五月, 戶籍 畢修 後, 國王의 諭書 中에 이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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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번={{TagSpage|30-2}}<blockquote no="24">{{TagRef|1}}前此 敬差官等 戶籍已畢 據此分壯弱 籍軍丁<ref>世祖實錄, 八年 五月 乙未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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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번={{TagSpage|30-3}}이라 하였으니, 軍籍이라는 것이 戶籍을 根據로 하야, 그 안에서 그럴 듯한 者를 軍人으로써 錄籍하는 次例가 보여진다. 十六歲 以上, 六十 以下의 人丁된 者 중 私民이 아닌 者를 除하고는 모도가 天下의 公民인지라, 成人 男子로서 立役하여야 한다는 것, 또 그의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 具體的인 一兵士가 되느냐 或은 奉足이 되느냐는 것은 임의 畧述한 바이었거니와, 身體의 故障 特別한 事情이 있는 者의 免役 規定이 經國大典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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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번={{TagSpage|30-4}}<blockquote no="25">{{TagRef|2}}軍士 年滿六十者 篤疾 廢疾者(篤疾 惡疾·癲狂·兩目盲·二肢折也 廢疾 痴·啞侏儒·腰折·一肢折也 痴病行貌·侏儒短貌) 並免役 〇有篤疾·廢疾·或年七十以上親者 一子 九十以上者 諸子免役 (子亡者孫一人 無親孫則 外孫免役 居京軍士 留防軍士及忠順衛·正兵 獨子外勿免)<ref>經國大典, 兵典免役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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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5번={{TagSpage|30-5}}後者의 規定은 侍丁이라 하야 免役되는 者로서, 開國 以來, 그의 免役에 關하야 變改함이 없었으나 그 중 軍士로 있다가 親老하야 免役을 받은 者는 睿宗實錄 元年 四月 辛未條에 依하면 <cite no="07">「凡軍士 親老給侍丁者 非永免其役 故侍丁己稱忠孝衛 成籍 歲一 點閱」</cite>라 하야 그들은 따로이 取扱받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同年 十二月에 이르러 除隊된 者도 이 侍丁과 같은 各各 一種의 現役兵的인 性質을 띠이게 되였다. 實錄의 記事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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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6번={{TagSpage|31-1}}<blockquote no="26">{{TagRef|3}}傳旨兵曹曰 六十除軍者 侍丁除軍者 並皆閑遊 無補於國 萬有不虞 不可不使 別設兩衛 老除者 稱老壯衛 侍丁者 稱忠孝衛 常時不與軍役 唯歲 一點考<ref>睿宗實錄, 元年 十二月 癸丑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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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7번={{TagSpage|31-2}}於是乎, 모든 人丁은 所謂 篤疾·廢疾者를 除하고는 戶籍에 錄籍되는 以上 軍籍에도 錄籍되였을 것이다. 그리고 軍籍이 처음 國王께 上達된 것은 太祖 二年 五月로서, 太祖實錄, 同年 同月 庚午條에 依하면, <cite no="08">「京畿左右·楊·廣·慶尙·全羅·西海·交州·江陵 凡八道馬步兵 及騎船軍 揔二十萬八百餘人 子弟及鄕·驛吏諸有役者 十萬五百餘人」</cite>이라 하였으니, 軍籍은 戶籍을 前提로 하는 것이므로, 그 以前에 全國의 戶籍이 되여 있었으리라 想像할 수 있다. 그리고 戶籍은 三年에 한 번 變改되는 것으로, 그 原本은 京城에 있어서는 漢城府, 地方에 있어서는 本道·本邑에 各一本式, 또 戶曹에 있어서 一本을 갖후는 것이다. 經國大典, 戶典·戶籍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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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8번={{TagSpage|31-3}}<blockquote no="27">每三年 改戶籍 藏於本曹·漢城府·本道·本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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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9번={{TagSpage|31-4}}이라 하야, 戶籍 藏置에 關한 右文兩만으로는 마치 外方의 戶籍을 漢城府에서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事實은 그렇지 않고, 外方의 戶籍은 本邑·本道·戶曹에 있어서 各一本式을 藏置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即 世祖 七年 七月, 各道에 派遣된 戶籍 敬差官의 携行事目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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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0번={{TagSpage|31-5}}<blockquote no="28">{{TagRef|4}}一. 戶籍成三件 藏于本邑·監司營·戶曹<ref>世祖實錄, 七年 七月 壬戌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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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1번={{TagSpage|31-6}}라 하야 外方 戶籍에는 漢城府에 關與치 않었든 것이다. 이렇듯 戶籍은 中外의 官衙에서 藏置할 뿐만{{TagPage|32-1}} 아니라, 各人은 各其 戶에 一本을 藏置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兩班에 있어서는 그 榮譽의 證明書이고, 良人에게는 그의 賤人 아님에 對한 證明書이나, 一般 賤民에게 있어서는 그가 所謂 「隱漏丁口」가 아니라는 證明書가 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人民에 下付되는 戶籍의 形式이 實錄에 처음 보이는 것은, 世宗實錄, 十年 五月 癸未條, 戶曹의 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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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2번={{TagSpage|32-2}}<blockquote no="29">各人戶口 京中漢城府 外方各官守令 據其狀告 成給 其規式 則某年號月日 戶口 淮府在某年成籍戶口帳內 某部某坊第幾里 外方某面某里佳 某職 姓名 年甲 本貫 四祖 率居子息某某 奴婢某某等 給者 漢城府 外方 某州縣 僉署周挾 改字及有無横書踏印 一本粘連立案 一本給狀告戶首 母令疊給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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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3번={{TagSpage|32-3}}이렇듯, 이는 오늘날의 戶籍謄本과 原本과의 關係에 酷似하다. 即, 戶首의 申告에 依하야 內容이 記載되고, 그것은 그대로 「粘連」하야 原本인 戶口案이 되는 것이었다. 勿論, 一般 良人 以上의 身分者에게 交付되는 謄本의 形式으로 經國大典, 戶口式條 所載의 그것과 大差없다. 이를 並記하야 써 그 內容을 檢討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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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4번={{TagSpage|32-4}}<blockquote no="30">戶 某部某坊第幾里(外則稱某 面某里) 住某職 姓名 年甲 本貫 四祖 妻某氏 年甲 本貫 四祖(宗親錄自己職術, 妻四祖, 儀賓綠自己職術・四祖, 尙某主, 庶人錄自己及妻 四祖, 庶人不知 四祖, 不須盡錄 率居子女某某 年甲(女壻則幷錄本貫,) 奴婢雇工某某 年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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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5번={{TagSpage|32-5}}前節에서 吾人은 戶라는 것에 對하야, 그것이 一律視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다. 또 다시 戶의 編成이 大戶이든 法制的으로 맨드러 졌는 戶이든 그것이 血族的인 또 共同體的인 朝鮮의 農村生活을{{TagPage|33-1}} 基調로 한 것임도 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形式으로써 編成되는 戶라는 것의 實情은 어떠하였든가. 살림사리를 따로이 한다드래도, 그것이 一戶안에 編入되는 것에 對하야는 前記한 바 있었거니와, 또 世宗 二十二年 二月, 國王의 傳旨 中에는 本國의 風俗이라 하야 이러한 描寫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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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6번={{TagSpage|33-2}}<blockquote no="31">{{TagRef|5}}(上略) 或曰 本國風俗 有子壻多者 出贅而結蘆於家園之內 苟使守令 密察磨勘 以增戶口 爲等第 則破家還徙 必不得聊生矣 (下略) <ref>世宗實錄, 二十二年 二月 丙辰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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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7번={{TagSpage|33-3}}이것은 勿論, 富戶 乃至는 大戶에 關한 일로서 살림사리를 따로이 한다고 하드래도, 그것이 血族的으로 이어저 있을 때 이는 一戶로 보아졌든 것이다. 梁誠之는 이 現象에 關하야 地域的인 分布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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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8번={{TagSpage|33-4}}<blockquote no="32">{{TagRef|6}}(上略) 今 本朝戶口之法 不明 江原·黃海·平安道 多以一丁爲一戶 慶尙·全羅道及咸吉道六鎭 或有數十人 爲一戶 而京畿·忠淸道 不至甚濫 江原·黃海 山郡之民 流亡失業 以一戶 供前日數戶之役 日以彫弊 慶尙·全羅沿海之郡 豪滑之家 外爲一門 內置數家 如或刷之 乘船入海 至有奴歐本主者 平時 則富者免 而貧者常代其勞 軍興 則素 不係籍 必皆逃竄 俱不可也 (下略)<ref>世祖實錄, 三年 三月 戊寅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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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9번={{TagSpage|33-5}}「刷之」한다는 것은 그 戶 안에 隱沒하야 아즉 錄籍되지 않는 者를, 兵役에 當케 하기 爲하야 戶籍에 修錄하는 것이므로, 그꽤하는 바는 成人 男子인 「丁」이요, 梁誠之의 恨歎하는 「數十人爲一戶」이라는 것도 數十人의 丁이 一戶안에 隱沒하야 立役치 않는다는 것이다. 慶尙道·全羅道 及 六鎭에 이러한 「豪猾之{{TagPage|34-1}}家」가 아무리 많이 存在한다고 한들, 이것으로써 금방 그렇지 못한 「單寒」 「善良」한 戶의 絕對的 多數를 否定할 수는 없다. 梁氏는 이러한 「豪猾之家」에 對한 對策을 이어서 말하고 있으나 그 안에서 偶然히도 當時에 있어서의 法制的 課役範疇로서의 戶에 言及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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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0번={{TagSpage|34-2}}<blockquote no="33">乞, 今後京都漢城府 外方八道 申明戶口之法 不論尊卑·老少男女 皆置戶口 無者科罪 其士族率居奴婢及與父母同居者外 每三丁爲一戶 而三年一考之 漏一丁者 五家及監考管領 悉徙邊 (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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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1번={{TagSpage|34-3}}即, 「三丁으로서 一戶로 삼자」는 것은 그 中의 一丁으로써 戶首=正軍을 삼고, 남어지 二丁으로써 그 奉足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方法은 當時의 絕對的 多數를 占하는 殘殘戶라 하는 貧戶에 있어서는 임이 實施되고 있든 터로, 이것을 所謂 豪猾之家에게까지 施行하자고 하는 것이다. 前記 戶籍의 形式에 보이는 率居 人丁인 奴婢·雇工·婢夫와 같은 것은, 그 戶가 그러한 人丁을 많이 가지는 富戶인 境遇에는 그 自身 單獨으로 立役이 可能하므로 戶籍 안에서 奉足의 記載를 不必要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率居 人丁이 없는 戶에 있어서는 確實히 奉足 人丁의 記載를 그 戶안에서 볼 수 있고, 이러한 法制的인 戶와 아울러 戶籍은 當時의 一般 公民의 絕對的 多數를 占하고 있었을 것이다. 世宗 三十二年 十月, 刑曹判書 趙憲의 騎船軍 苦役에 關한 上書에 對한 議政府 議內의 一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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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2번={{TagSpage|34-4}}<blockquote no="34">{{TagRef|7}}元典節該 騎船各戶 出斂及雜凡差役 一減完護條 令不從守令及奸吏等 以王旨不從論罪 其戶內子壻及奉足定給人外 挾持漏戶 當差他役 申明擧行 (下略) <ref>世宗實錄, 三十二年 十月 庚辰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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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3번={{TagSpage|35-1}}元典은 原典·元六典이라고도 불리우는 經濟六典일 것이다. 그 奉足으로 指定된 人丁이 그 戶 안의 子壻와 同一視되여 있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戶가 하낱 兵役負擔의 單位이기 때문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戶籍은 고대로 軍籍이 되였을 것이다. 또 前記 戶口式에 보이는 「某職」條에는 一般 兵士에 있어서는 그의 「某色軍士」임이 적힐 터이고, 「本貫」과 「四祖」의 條에는 그로 하여금 某色軍士가 되게 한 身分的 制限이 記載될 것이므로, 戶籍은 고대로 軍籍인 同時에, 이것이야말로 그를 軍人되게 하는 가장 具體的인 手段이었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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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4번={{TagSpage|35-2}}戶籍이 同時에 軍籍이라는 것은 그의 所持者 側에서 그것의 役割의 方面을 볼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으나, 國家의 兵員 動員이라는 技術的 立場에서 보면 또한 스스로 달러야 하는 것이었었다. 그것은 前記한 바와 같이 個人이 가지는 戶籍은 그대로 粘連하야 官廳 保管의 戶口臺帳인 戶口案이 되지마는, 軍案은 戶口案 그대로서는 人丁인 成人 男子 以外의 挾雜物을 석거 있기 때문에 이것을 整理하야 그 안에서 人丁을 抽出하여야 한다. 經國大典, 兵典成籍의 條에 이러한 規定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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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5번={{TagSpage|35-3}}<blockquote no="35">京 外軍丁 每六年成籍(京則五部 外則各其節度使 濟州三邑則 節制使成籍) 送本曹藏之(觀察使道, 主鎭, 臣鄭, 諸鎭, 亦藏一件) 本曹揔數啓開〇每三年 各牧場牧子則 兵馬節度使 睹邑吏·驛吏則 觀察使成籍 並各藏之(青坡·盧原兩驛 吏則本曹成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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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6번={{TagSpage|35-4}}軍籍이 곧 戶籍이라고 強調하면서 軍籍은 人丁抽出의 手段으로서의 戶籍을 根據로 하야 成立한다는 것은 이 軍案의 境遇에 있어서다. 大概, 六年만큼式 成籍되고 中外의 軍門에 藏置되는 軍案은 저{{TagPage|36-1}} 三年만큼式 成籍되여 中外의 官衙에 保管되는 戶籍(또한 同時에 軍籍)을 粘連하야 맨드는 戶口案에 依하야 그의 必要로 하는 人丁을 抽出 整理한 것이었다. 그리고 後者는 戶曹·監司營, 本邑에 藏置됨에 그치나, 前者는 啓聞한다 함은, 제절로 前者의 重要性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에 錄籍되는 者의 全 人民 中의 精髓임에 依하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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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7번={{TagSpage|36-2}}그리고 上記 元典의 規定은 經國大典의 編纂 當時까지 施行되였다고 볼 것이고, 이 經國大典의 戶口式에 저 法制的 範疇로서의 戶에 對한 何等의 規式을 보지 못함은 한 가지 疑問을 吾人에게 던지는 것이다. 곧 奉足 定給人의 記載를 보지 몯하는 것이다. 그것은 保法의 設定이 戶라는 것의 法制的인 面을 얼마만큼 變改시킨 까닭이리라. 곧 戶 單位에서 保 單位로 變하였으므로, 그 自身 立役이 不可能한 戶라도 戶籍 內에 奉足 定給人을 記載하는 것은 벌서 不必要하게 되였든 까닭이다. 따라서 이 點에 있어서 保法은 從來의 戶籍=軍籍의 關係를 乘離하였다고도 볼 수 있고, 保人이 戶首인 正軍과 함께 一個의 兵役 負擔 單位로서 記載되는 것은 저 中外 軍門에 藏置되는 軍案에 있어서 뿐이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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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8번={{TagSpage|36-3}}그러나 一方에 있어서는 이 點을 除하고는 從來의 戶籍法은 고대로 存置되었는 것을 닞어서는 안 된다. 從來의 그것에 依하면 大戶에서 殘殘戶에 이르기까지 兵役의 單位로 되여 있고, 그 貧弱한 者에 네려감을 따라 人丁의 不足을 招來함으로 그 不足한 者에 限하야 同類를 合처서 奉足으로 定給되였었다. 그러나 保法에 依하면 二丁을 ᅳ保로 하야, 그 兵種에 따라 奉足으로 주워지는 것의 保數가 定하여{{TagPage|37}}저 있다. 於是乎에 從來에 그것과는 달리 一種의 不合理를 生成하게 되었으니 即, 大戶에 있어서는 그 定額 以上의 人丁을 가질 수 없게 되는 一方에 奴子도 田結도 淮丁되여 事實上 奉足數의 大削減을 받게 되였든 것으로서 獨保와 같은 것도 또한 그의 完聚를 遂하기가 困難하였든 것이다. 即, 原則的으로 말하면 奉足의 定額이 그 戶內에 가지는 人丁數 以上이면 괸찮치마는 그것이 人丁數 以下인 境遇에는 남어지의 수를 딴 데 빼아끼게 되어 그 戶를 破壞하는 수도 生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梁誠之는 「三丁爲一保」論을 여러 번 主張하였지만 大典 編纂 後 「二丁一保」의 原則은 變改되지 않었었다. 要컨데 保法의 新設은 戶籍과 軍籍과의 關係를 乘離하고, 이 일은 戶籍 內에 있는 三丁一戶에서 二丁一保로 變하야 事實上의 兵役 負擔 單位의 增加, 따라서 戶의 兵役 負擔 單位로서의 意義의 喪失을 齎來하고, 加之하야, 「奴子」 「田結」도 淮丁하고 二丁一保의 原則은 兵役 負擔 單位의 負擔 增加를 招來하였든 것이다. 保法의 設定 强行은 「隱漏丁口」의 出現을 促하는 點에 있어서도 世祖의 軍額 擴張의 基礎가 되였든 것이다.
  
|목차4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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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번=당시의 국가가 호적의 수록에 갖은 힘을 다 쓰는 것은 단순히 국내의 인구에 대하여 알고자 함이라는 이유에 인함은 아니고, 그 인구 중에서 인정을 추출하여 이로써 병역 기타의 요역에 당하게 하고자 하는 현실적 요구에 기인한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그 인구 중에서는 소수의 지배자군과 대다수의 피지배군을 일구분(一區分)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것에 있어서의 호적의 역할은 마치 군인이 된다는 것이 그러한 것처럼 명예의 설명서도 되었을 터이고, 또 부역 부담의 대장도 되었을 터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었다. 그리고 호적과 군적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전자는 후자의 지반이 되고, 후자는 전자를 떠나서는 거진 그의 성립이 불가능하였다. 세조 8년 5월, 호적 필수 후, 국왕의 유서 중에 이르기를,
|목차4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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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번=<blockquote no="24">{{TagRefT|1}}前此 敬差官等 戶籍已畢 據此分壯弱 籍軍丁<ref group="a">세조실록, 8년 5월 을미조</ref></blockquote>
|목차4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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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번=이라 하였으니, 군적이라는 것이 호적을 근거로 하여, 그 안에서 그럴 듯한 자를 군인으로써 녹적(錄籍)하는 차례가 보여진다. 16세 이상, 60 이하의 인정된 자 중 사민이 아닌 자를 제하고는 모두가 천하의 공민인지라, 성인 남자로서 입역하여야 한다는 것, 또 그의 신분적 제한에 있어서 구체적인 하나의 병사가 되느냐 혹은 봉족이 되느냐는 것은 이미 약술한 바 있거니와, 신체의 고장 특별한 사정이 있는 자의 면역 규정이 경국대전에 보인다.
|목차4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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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번=<blockquote no="25">{{TagRefT|2}}軍士 年滿六十者 篤疾 廢疾者(篤疾 惡疾·癲狂·兩目盲·二肢折也 廢疾 痴·啞侏儒·腰折·一肢折也 痴病行貌·侏儒短貌) 並免役 〇有篤疾·廢疾·或年七十以上親者 一子 九十以上者 諸子免役 (子亡者孫一人 無親孫則 外孫免役 居京軍士 留防軍士及忠順衛·正兵 獨子外勿免)<ref group="a">경국대전, 병전면역조</ref></blockquote>
|목차4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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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5번=후자의 규정은 시정(侍丁)이라 하여 면역되는 자로서, 개국 이래, 그의 면역에 관하여 변개함이 없었으나 그 중 군사로 있다가 친로하여 면역을 받은 자는 예종실록 원년 4월 신미조에 의하면 <cite no="07">“凡軍士 親老給侍丁者 非永免其役 故侍丁己稱忠孝衛 成籍 歲一 點閱”</cite>라 하여 그들은 따로 취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이르러 제대된 자도 이 시정과 같은 각각 일종의 현역병적인 성질을 띠게 되었다. 실록의 기사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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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6번=<blockquote no="26">{{TagRefT|3}}傳旨兵曹曰 六十除軍者 侍丁除軍者 並皆閑遊 無補於國 萬有不虞 不可不使 別設兩衛 老除者 稱老壯衛 侍丁者 稱忠孝衛 常時不與軍役 唯歲 一點考<ref group="a">예종실록, 원년 12월 계축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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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7번=이제야, 모든 인정은 소위 독질·폐질자를 제하고는 호적에 녹적되는 이상 군적에도 녹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적이 처음 국왕께 상달된 것은 태조 2년 5월로서, 태조실록, 같은 해 같은 달 경오조에 의하면, <cite no="08">“京畿左右·楊·廣·慶尙·全羅·西海·交州·江陵 凡八道馬步兵 及騎船軍 揔二十萬八百餘人 子弟及鄕·驛吏諸有役者 十萬五百餘人”</cite>이라 하였으니, 군적은 호적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그 이전에 전국의 호적이 되어 있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호적은 3년에 한 번 변개되는 것으로, 그 원본은 경성에 있어서는 한성부, 지방에 있어서는 본도·본읍에 각 1본씩, 또 호조에 있어서 1본을 갖추는 것이다. 경국대전, 호전·호적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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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8번=<blockquote no="27">每三年 改戶籍 藏於本曹·漢城府·本道·本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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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9번=이라 하여, 호적 장치(藏置)에 관한 위의 두 글만으로는 마치 외방의 호적을 한성부에서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외방의 호적은 본읍·본도·호조에 있어서 각 1본씩을 장치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즉 세조 7년 7월, 각 도에 파견된 호적 경차관의 휴행사목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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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0번=<blockquote no="28">{{TagRefT|4}}一. 戶籍成三件 藏于本邑·監司營·戶曹<ref group="a">세조실록, 7년 7월 임술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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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1번=라 하여 외방 호적에는 한성부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호적은 중외의 관아에서 장치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사람은 각기 호에 1본을 장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양반에 있어서는 그 영예의 증명서이고, 양인에게는 그의 천인 아님에 대한 설명서이나, 일반 천민에게 있어서는 그가 소위 ‘은루정구’가 아니라는 설명서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인민에 하부되는 호적의 형식이 실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세종실록, 10년 5월 계미조, 호조의 계(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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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2번=<blockquote no="29">各人戶口 京中漢城府 外方各官守令 據其狀告 成給 其規式 則某年號月日 戶口 淮府在某年成籍戶口帳內 某部某坊第幾里 外方某面某里佳 某職 姓名 年甲 本貫 四祖 率居子息某某 奴婢某某等 給者 漢城府 外方 某州縣 僉署周挾 改字及有無横書踏印 一本粘連立案 一本給狀告戶首 母令疊給 從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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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3번=이렇듯, 이는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원본과의 관계에 혹사하다. 즉, 호수의 신고에 의하여 내용이 기재되고, 그것은 그대로 ‘점련’하여 원본인 호구안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일반 양인 이상의 신분자에게 교부되는 등본의 형식으로 경국대전, 호구식조 소재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이를 병기하여 그 내용을 검토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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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4번=<blockquote no="30">戶 某部某坊第幾里(外則稱某 面某里) 住某職 姓名 年甲 本貫 四祖 妻某氏 年甲 本貫 四祖(宗親錄自己職術, 妻四祖, 儀賓綠自己職術・四祖, 尙某主, 庶人錄自己及妻 四祖, 庶人不知 四祖, 不須盡錄 率居子女某某 年甲(女壻則幷錄本貫,) 奴婢雇工某某 年甲</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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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5번=앞 절에서 우리는 호라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일률시(一律視)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다. 또 다시 호의 편성이 대호이든 법제적으로 만들어진 호이든 그것이 혈족적인 또 공동체적인 조선의 농촌생활을 기조로 한 것임도 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형식으로써 편성되는 호라는 것의 실정은 어떠하였던가. 살림살이를 따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1호안에 편입되는 것에 대하여는 앞서 논한 바 있었거니와, 또 세종 22년 2월, 국왕의 전지 중에는 본국의 풍속이라 하여 이러한 묘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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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6번=<blockquote no="31">{{TagRefT|5}}(上略) 或曰 本國風俗 有子壻多者 出贅而結蘆於家園之內 苟使守令 密察磨勘 以增戶口 爲等第 則破家還徙 必不得聊生矣 (下略)<ref group="a">세종실록, 22년 2월 병진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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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7번=이것은 물론, 부호 내지는 대호에 관한 일로서 살림살이를 따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혈족적으로 이어져 있을 때 이는 1호로 보아졌던 것이다. 양성지는 이 현상에 관하여 지역적인 분포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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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8번=<blockquote no="32">{{TagRefT|6}}(上略) 今 本朝戶口之法 不明 江原·黃海·平安道 多以一丁爲一戶 慶尙·全羅道及咸吉道六鎭 或有數十人 爲一戶 而京畿·忠淸道 不至甚濫 江原·黃海 山郡之民 流亡失業 以一戶 供前日數戶之役 日以彫弊 慶尙·全羅沿海之郡 豪滑之家 外爲一門 內置數家 如或刷之 乘船入海 至有奴歐本主者 平時 則富者免 而貧者常代其勞 軍興 則素 不係籍 必皆逃竄 俱不可也 (下略)<ref group="a">세조실록, 3년 3월 무인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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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9번=‘쇄지’한다는 것은 그 호 안에 은몰하여 아직 녹적되지 않는 자를, 병역에 당하게 하기 위하여 호적에 수록하는 것이므로, 그 꾀하는 바는 성인 남자인 ‘정’이요, 양성지의 한탄하는 ‘수십인위1호’라는 것도 수십인의 정이 1호안에 은몰하여 입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상도·전라도 및 육진에 이러한 ‘호활지가’가 아무리 많이 존재한다고 한들, 이것으로써 금방 그렇지 못한 ‘단한’ ‘선량’한 호의 절대적 다수를 부정할 수는 없다. 양씨는 이러한 ‘호활지가’에 대한 대책을 이어서 말하고 있으나 그 안에서 우연히도 당시에 있어서의 법제적 과역범주로서의 호에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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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0번=<blockquote no="33">乞, 今後京都漢城府 外方八道 申明戶口之法 不論尊卑·老少男女 皆置戶口 無者科罪 其士族率居奴婢及與父母同居者外 每三丁爲一戶 而三年一考之 漏一丁者 五家及監考管領 悉徙邊 (下略)</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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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1번=즉, ‘3정으로서 1호로 삼자’는 것은 그 중의 1정으로써 호수=정군을 삼고, 나머지 2정으로써 그 봉족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의 절대적 다수를 점하는 천천호라 하는 빈호에 있어서는 이미 실시되고 있던 터로, 이것을 소위 호활지가에게까지 시행하자고 하는 것이다. 앞에 적힌 호적의 형식에 보이는 솔거 인정인 노비·고공·비부와 같은 것은, 그 호가 그러한 인정을 많이 가지는 부호인 경우에는 그 자신 단독으로 입역이 가능하므로 호적 안에서 봉족의 기재를 불필요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솔거 인정이 없는 호에 있어서는 확실히 봉족 인정의 기재를 그 호안에서 볼 수 있고, 이러한 법제적인 호와 아울러 호적은 당시의 일반 공민의 절대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종 32년 10월, 형조판서 조헌의 기선군 고역에 관한 상서에 대한 의정부 의내의 일구(一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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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2번=<blockquote no="34">{{TagRefT|7}}元典節該 騎船各戶 出斂及雜凡差役 一減完護조 令不從守令及奸吏等 以王旨不從論罪 其戶內子壻及奉足定給人外 挾持漏戶 當差他役 申明擧行 (下略) <ref group="a">세종실록, 32년 10월 경진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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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3번=원전(元典)은 원전(原典)·원육전(元六典)이라고도 불리는 경제육전일 것이다. 그 봉족으로 지정된 인정이 그 호 안의 자서(子壻)와 동일시되어 있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호가 하낱 병역부담의 단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호적은 고대로 군적이 되었을 것이다. 또 앞에 적힌 호구식에 보이는 ‘모직’조에는 일반 병사에 있어서는 그의 ‘모색군사’임이 적힐 터이고, ‘본관’과 ‘사조’의 조에는 그로 하여금 모색군사가 되게 한 신분적 제한이 기재될 것이므로, 호적은 그대로 군적인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그를 군인되게 하는 가장 구체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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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4번=호적이 동시에 군적이라는 것은 그의 소지자 측에서 그것의 역할의 방면을 볼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으나, 국가의 병원 동원이라는 기술적 입장에서 보면 또한 스스로 달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앞에 쓴 바와 같이 개인이 가지는 호적은 그대로 점련하여 관청 보관의 호구대장인 호구안이 되지만, 군안은 호구안 그대로서는 인정인 성인 남자 이외의 협잡물을 섞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정리하여 그 안에서 인정을 추출하여야 한다. 경국대전, 병전성적의 조에 이러한 규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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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5번=<blockquote no="35">京 外軍丁 每六年成籍(京則五部 外則各其節度使 濟州三邑則 節制使成籍) 送本曹藏之(觀察使道, 主鎭, 臣鄭, 諸鎭, 亦藏一件) 本曹揔數啓開〇每三年 各牧場牧子則 兵馬節度使 睹邑吏·驛吏則 觀察使成籍 並各藏之(青坡·盧原兩驛 吏則本曹成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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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6번=군적이 곧 호적이라고 강조하면서 군적은 인정추출의 수단으로서의 호적을 근거로 하여 성립한다는 것은 이 군안의 경우에 있어서다. 대개, 6년만큼씩 성적(成籍)되고 중외의 군문에 장치되는 군안은 저 3년만큼씩 성적되어 중외의 관아에 보관되는 호적(또한 동시에 군적)을 점련하여 만드는 호구안에 의하여 그의 필요로 하는 인정을 추출 정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호조·감사영, 본읍에 장치됨에 그치나, 전자는 계문한다 함은, 저절로 전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에 녹적되는 자의 전 인민 중의 정수임에 의하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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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7번=그리고 위에 쓰인 원전의 규정은 경국대전의 편찬 당시까지 시행되었다고 볼 것이고, 이 경국대전의 호구식에 저 법제적 범주로서의 호에 대한 하등의 규식을 보지 못함은 한 가지 의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다. 곧 봉족 정급인의 기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법의 설정이 호라는 것의 법제적인 면을 얼마만큼 변개시킨 까닭이리라. 곧 호 단위에서 보 단위로 변하였으므로, 그 자신 입역이 불가능한 호라도 호적 내에 봉족 정급인을 기재하는 것은 벌써 불필요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 보법은 종래의 호적=군적의 관계를 승리(乘離)하였다고도 볼 수 있고, 보인이 호수인 정군과 함께 일개의 병역 부담 단위로서 기재되는 것은 저 중외 군문에 장치되는 군안에 있어서 뿐이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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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8번=그러나 일방에 있어서는 이 점을 제하고는 종래의 호적법은 그대로 존치되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종래의 그것에 의하면 대호에서 천천호에 이르기까지 병역의 단위로 되어 있고, 그 빈약한 자에 내려감을 따라 인정의 부족을 초래하므로 그 부족한 자에 한하여 동류를 합쳐서 봉족으로 정급되었었다. 그러나 보법에 의하면 2정을 1보로 하여, 그 병종에 따라 봉족으로 주어지는 것의 보 수(數)가 정해져 있다. 이제야 종래에 그것과는 달리 일종의 불합리를 생성하게 되었으니 즉, 대호에 있어서는 그 정액 이상의 인정을 가질 수 없게 되는 일방에 노자(奴子)도 전결도 회정(淮丁)되어 사실상 봉족 수의 대삭감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서 독보(獨保)와 같은 것도 또한 그의 완취를 이루기가 곤란하였던 것이다. 즉, 원칙적으로 말하면 봉족의 정액이 그 호 내에 가지는 인정 수 이상이면 괜찮치만 그것이 인정 수 이하인 경우에는 나머지의 수를 딴 데 빼앗기게 되어 그 호를 파괴하는 수도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양성지는 ‘3정위1보’론을 여러 번 주장하였지만 대전 편찬 후 ‘2정1보’의 원칙은 변개되지 않았었다. 요컨대 보법의 신설은 호적과 군적과의 관계를 승리(乘離)하고, 이 일은 호적 내에 있는 3정1호에서 2정1보로 변하여 사실상의 병역 부담 단위의 증가, 따라서 호의 병역 부담 단위로서의 의의의 상실을 재래(齎來)하고, 가지(加之)하여, ‘노자’ ‘전결’도 회정하고 2정1보의 원칙은 병역 부담 단위의 부담 증가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보법의 설정 강행은 ‘은루정구’의 출현을 재촉하는 점에 있어서도 세조의 군액 확장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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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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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번={{TagSpage|38-1}}李朝에 드러와 軍額의 具體的인 數字는 太祖實錄 二年 五月 庚午條에 보이는 것이 最初로서, 그것에 依하면, 압서 倭寇 討伐에 向하였든 八節制使 中에서 南誾·朴葳·陳乙瑞 等의 三人으로 하여금, 倭寇의 退却과 同時에, 고대로 慶尙·楊廣·全羅의 三道에 各各 籍軍의 目的으로 머물르게 하고, 남어지 諸道에는 그 곧의 按廉使를 시켜 點軍하야 그 結果를 이때에 이르러 上聞하였다고 보이므로, 이 數字는 高麗史 卷八十二志 卷第三十五, 兵一, 兵制, 恭讓王 三年條 <cite no="09">「七月都堂啓, 請籍水陸軍丁, 仍帶號牌」</cite>라는 것과는 直按 關係 없을 것이다. 그리고 太祖 二年의 數字는 이러하였다.
|목차5원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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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번={{TagSpage|38-2}}<blockquote no="36">京畿左右·楊廣·慶尙·全羅西海·交州·江陵·凡八道馬步兵及騎船軍 摠二十萬八百餘人 子弟及鄕·驛吏 睹有役 者十萬五百餘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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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번={{TagSpage|38-3}}即, 合計 三十萬一千三百餘人이 되는데, 前者인 二十萬八百餘人은 所謂 正規兵이라고 할 만한 것이고 後者인 十萬五百餘人은 雜色軍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또 이 數字에는 西北·東北 兩界의 軍額이 計算되지 않었음애도 不拘하고 그것이 太宗 四年 四月의 京畿道를 除外한 全國의 口數 三十二萬二千七百七{{TagPage|39-1}}十六에 接近하고 있음에 비취여 그 數字 中에는 正軍 乃至 正丁뿐 아니라, 그의 奉足도 合算한 것이 있음을 생각케 한다. 太宗實錄에는 前後 두 번 全國의 戶口의 數字가 보인다. 即, 前記 四年 四月 乙未條와 六年 十月 丙辰條에서다. 只今, 이것을 左記하고, 다시 慶尙道 地理志 及 世宗實錄 地理志에 보이는 戶口의 數를 批判함으로써, 口數라는 것이 곧 兵丁인 人丁의 數이라는 것, 또 그 안에는 正軍=(戶首)와 奉足=(率丁)을 合算한 것임을 證明하고, 더 나아가 그 戶라는 것의 性格을 또 한 번 다른 角度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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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4번={{TagSpage|39-2}}<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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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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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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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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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京畿</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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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忠淸</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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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慶尙</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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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全羅</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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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豐海</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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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江原</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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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東北</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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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西北</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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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總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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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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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太宗 四年 四月</td>
|목차5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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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戶</td>
|목차5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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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목차5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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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九,五六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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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四八,九九二</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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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五,七〇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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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四,一七〇</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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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五,八七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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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一,三一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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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七,七八八</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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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五三,四〇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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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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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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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太宗 四年 四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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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口</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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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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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四四,四七六</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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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九八,九一五</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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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九,一五〇</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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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九,四四〇</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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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九,二三八</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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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八,二三八</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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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五二,八七二</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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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二二,七八六</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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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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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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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太宗 六年 十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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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戶</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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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〇,七二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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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九,五六〇</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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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四八,九九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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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五,七一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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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四,一七〇</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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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五,八七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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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一,三一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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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三,八九〇</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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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八〇,一四六</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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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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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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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太宗 六年 十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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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口</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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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八,一三八</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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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四四,四七六</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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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九八,九一五</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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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九,一六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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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九,四四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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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九,二二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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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八,六八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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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六二,三二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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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七〇,三六五</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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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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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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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5번={{TagSpage|39-3}}即, 前者에 있어서의 口는 後者에 있어서 丁으로 되여 있는데, 그 數字가 大體로 一致하고 있음에 依하야 口는 곧 丁임이 容易히 알어진다. 이 일은 當時에 있어서는 戶口 計算의 一般的인 原則이라고 생각되고, 그것은 軍籍은 經國大典에도 보이는 바와 가치 開國 以來 上聞되는 것이요, 實際의 人口 數를 나타내는 戶籍은 上聞되지 않는 까닭에 因함일 것이다. 이러므로 當時의 記錄에 보이는 口數는 고대{{TagPage|40-1}}로 兵丁인 人丁의 數字이다. 따라서 慶尙道 地理志의 各宦戶口條에 보이는 女子의 數가 世宗實錄 地理志에 이르러 모조리 없어지고 男子의 數만이 口數에 計算되여 있는 것은 오히려 當然한 일이라 할 것이다. 成人 男子 以外의 女子와 老弱者도 그것이 戶籍에 記錄되는 限, 戶口 數에 들 만도 하겠것만, 이들은 入算되지 못하였다. 또, 一般 公民이 아닌 私賤 같은 것도 世祖 때에 이르러 奴子 淮丁의 規定이 生겨서 처음 口數에 들어갔든 것이다. 世宗實錄 地理志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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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6번={{TagSpage|40-2}}<blockquote no="37">{{TagRef|1}}本朝人口之法 不明 錄于籍者 僅十之一二 國家每欲正之 重失人心 因循至今 故各道各官人口之數 止此 他道皆然<ref>世宗實錄, 地理志, 京畿都觀察, 戶口田結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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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7번={{TagSpage|40-3}}라 하였으니, 이 意見은 實際 全人口에 對한 것이 아니고 兵士인 人丁에 對한 意見이다. 實錄 地理志 編者로 八道 地理志에서 實錄 地理志를 編纂할 때 故意로 女子의 數字를 빼버리었으므로, 그의 人口라는 것은, 곧 成人 男子인 人丁임에 틀림없다. 이런 意味의 人口는 世宗實錄 地理志에 이르러 全體的으로 增加하고 있다. 只今 이를 戶數와 並記하여 둘추워 보면 다음과 같은데, 各 道別 計算와 各官히 計算이 조곰 相異하므로 兩者를 並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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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8번={{TagSpage|40-4}}<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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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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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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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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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京畿</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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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忠淸</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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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慶尙</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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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全羅</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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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黃海</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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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江原</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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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平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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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咸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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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合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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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
<tr>
 +
<td>各 道別</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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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戶</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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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〇,八八二</td>
 +
<td>二四,一七〇</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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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四二,二二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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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四,〇七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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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三,五一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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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一,〇八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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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四一,一六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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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四,七三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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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〇一,八五三</td>
 +
</tr>   
 +
 
 +
<tr>
 +
<td>各 道別</td>
 +
<td>口</td>
 +
<td>五〇,三五二</td>
 +
<td>一〇〇,七九〇</td>
 +
<td>七一三,七五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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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九四,二四八</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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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七一,八九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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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九,〇〇九</td>
 +
<td>一〇五,四四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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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六六,九七六</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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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六九二,四七五</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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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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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各 官別</td>
 +
<td>戶</td>
 +
<td>二〇,八九六</td>
 +
<td>二四,一六一</td>
 +
<td>四二,二二七</td>
 +
<td>二四,〇九三</td>
 +
<td>二三,五一二</td>
 +
<td>一一,〇八三</td>
 +
<td>三七,一三五</td>
 +
<td>一四,七三九</td>
 +
<td>二〇二,三四九</td>
 +
</tr>   
 +
 
 +
<tr>
 +
<td>各 官別</td>
 +
<td>口</td>
 +
<td>五〇,三五二</td>
 +
<td>一〇〇,七九〇</td>
 +
<td>一七一,七八七</td>
 +
<td>九四,七九七</td>
 +
<td>七一,八九九</td>
 +
<td>二九,〇三九</td>
 +
<td>一一一,五四一</td>
 +
<td>六六,九七八</td>
 +
<td>六九三,四三八</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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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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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9번={{TagSpage|41-2}}(京五部·城底十里, 留後司는 除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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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0번={{TagSpage|41-3}}口라는 것이 곧 兵丁인 人丁이라 함은 위에 말하였거니와, 이것은 世宗實錄 地理志의 基本이 된 八道 地理志의 殘存 一部인 慶尙道 地理志의 記事에 依하야 다시금 明瞭하여 질 것이다. 또 이들 所謂 口라는 것이 어떻게 排分되였는가도 後者에 依하야 볼 수 있으니 다음과 같다. 慶尙道 地理志 道內時居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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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1번={{TagSpage|41-4}}<blockquote no="38">一. 道內時居四萬一千三百二十戶, 人丁十九萬一千七百十九內<br/>別牌: 八百十六 奉足: 三千九百四十七<br/>侍衛: 二千一百二十 奉足: 七千八百九十五<br/>營鎭屬: 二千二百六十一 奉足: 六千一百七<br/>守城軍: 一千二百一十三 奉足: 二千三百六十二<br/>騎舡: 一萬五千九百四十一 奉足: 三萬六千七十一<br/>雜色: 一萬六千五百七十四 奉足: 四萬七千四百六十二<br/>(計正軍三萬八千九百二十五 奉足: 十萬三千八百五十四){{TagPage|42-1}}<br/>(都計: 十四萬二千七百七十九<br/>上京從仕人員老弱五萬一千九百四十)<br/>括孤內筆者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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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2번={{TagSpage|42-2}}이라고 하였으니, 곧 上京 從仕 人員 中의 壯丁을 除하면은 남어지 모든 壯丁이 別牌 以下의 正軍이 되여 있거나 或은 그 奉足으로 定하여저 있다. 그리고 人丁이 原則的으로 兵丁이었다는 것은, 그 人丁 十九萬一千七百十九名 中에, 十四萬二千七百七十九名이라는 大多數가 正軍 或은 奉足의 어떤 쪽으로 되여 있다는 것, 또 兩者의 距離가 여기서는 五萬人에 가까웁지마는 慶尙道 地理志의 各 官別 計算에 依하면 二萬人밖에 안 된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으려니와, 또 하나 重大한 原因을 둘 수 있다. 上表에 依하면 諸色軍人 中 五種의 兵士밖에 들지 않고 남어지의 甲士라든가 別侍衛라든가 또 그들보다 더 나은 身分層의 兵士는 上京하여 立役하면 遞兒職이라도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이 上京 從仕 人員에다가 넣은 것이다. 이들이 또 이 五萬 乃至는 二萬의 數 안에 이들의 奉足 部隊와 함께 包含되여 있는 것은 勿論이다. 또 이 二萬人의 差異로서 人丁의 兵丁임을 否定한다면 그는 當時에 있어서의 慶尙道의 特殊性을 沒却하는 者다. 같은 慶尙道 地理志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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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3번={{TagSpage|42-3}}<blockquote no="39">{{TagRef|2}}道內俗尚大概 重禮讓 崇質儉 崇文好武 務農桑 不事工商 繁華富庶 甲諸他道 名門右族 滿於朝廷<ref>慶尙道 地理志, 道內俗尙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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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4번={{TagSpage|42-4}}이라 하였으니, 實로 慶尙道는 兵役을 免除 當하는 名門 右族의 淵藪요, 그러면서도 그 人丁의 大多{{TagPage|43-1}}數가 兵丁이었든 것이다. 하물며 他道에 있어서랴. 그리고 慶尙道 地理志 道內時居條에는 四萬一千三百二十戶라 하였으나, 이것을 道內 各 官別로 計算한다면, 三萬九千二百九十二戶라, 左右間 上記 正軍 小計 三萬八千九百二十五에 甚히 가까웁다. 前述한 바와 같이 兵役負擔은 戶를 單位로 하야 施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兵役을 負擔하지 않는 名門 右族을 除外하면은, 남어지는 모도가 軍戶이었든 것이다. 그러므로 戶의 數字는 그 道에 있어서의 正軍의 數字를 大體로 말할 것이고, 口의 數字는 그 戶를 構成하는 正軍과 奉足을 合算한 것이라는 것을 斷定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上記 太宗 一代 間의 두 번의 戶口 數와 아울러 世宗實錄 地理志의 그것 中, 戶는 正軍을 口는 正軍과 奉足을 合算한 것 곧 全 兵丁 數를 나타내는 것으로 當時에 있어서의 全國 軍額의 二面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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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5번={{TagSpage|43-2}}雜色軍은 前記 慶尙道 地理志 記事에 依하면 그의 奉足과 더부러 所謂 諸色軍人 中의 最大多數를 占하고 있다. 그 어떠한 것을 가르처 雜色軍이라 하는가는 本論에 詳述할 바 아니지만, 이 雜色軍을 世宗實錄 地理志에 이르러서는 軍人의 數字에 넣지를 않고 있다. 거기에는 그것은 名目 上의 軍人 以外의 모든 人丁을 가르침이라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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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6번={{TagSpage|43-3}}<blockquote no="40">{{TagRef|3}}雜色軍 盡拍土丁爲兵 故不幷錄 餘州倣此<ref>世宗實錄, 地理志, 京畿都 觀察船軍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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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7번={{TagSpage|43-4}}라 한 것이 곧 그것이다. 이제 世宗實錄 地理志에서 이 雜色軍과 아울러 모든 正軍의 奉足을 뺀 數字를 적으면 左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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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8번={{TagSpage|44-1}}<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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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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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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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京畿</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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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忠淸</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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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慶尙</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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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全羅</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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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黃海</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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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江原</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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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平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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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咸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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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合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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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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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各 道別</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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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19번={{TagSpage|44-2}}(濟州島 馬步兵 三,三六六名 除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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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0번={{TagSpage|44-3}}前揭 世宗實錄 地理志의 全國 人丁 數는 거진 七十萬 그 中의 約 十萬人이 名實相伴하는 軍人이고, 그 남어지의 六十萬은 所謂 上京 從仕 員人이던지 或 雜色軍이고 또는 그들의 奉足 部隊이었다. 그리고 雜色軍이라던가 또 奉足 部隊라 하는 것도 그들이 兵制의 組織 內에서 그들에게 相當하는 立役의 義務를 지는 者이므로 그들을 所謂 軍人과 區別지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上記 九萬五千餘名의 數字만으로써 當時 軍丁의 全部라고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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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1번={{TagSpage|44-4}}却說, 戶籍이라는 것은 前述한 바와 같이 人民으로부터의 狀申에 依하는 것이고, 軍案은 이를 基本으로 하야 成立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 作定된 人丁에 對한 數字를 前提로 하는 것이었으니 世宗 五年 五月 李稷의 陳言에 依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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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2번={{TagSpage|44-5}}<blockquote no="41">{{TagRef|4}}外方軍籍 隨其殘盛 平均定額 以供國役 乃常法也 <ref>同, 五年 五月 丁未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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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3번={{TagSpage|44-6}}다시 말하면, 그 地方에 對하야 適當하다고 認定되는 定額이 미리 위에서부터 定하여저 있었든 것이{{TagPage|45-1}}다. 따라서 그 人丁 抄出의 手段으로서의 軍籍=戶籍이 반듯이 살림 乃至 집을 標準으로 하지 않었든 法制的인 原因이라고 할 만한 것을 여기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또, 前記 兩個의 地理志에 있어서의 各 道別의 計算과 各 官別의 그것의 誤差가 있는 것도 이에 原因할 것이라. 이러한 위에서 定하여지는 定額은 六年에 한 번 軍籍이 改修된다고 하드래도, 容易히 變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世宗 十一年 閏四月, 軍籍에 關한 各品陳言에 依하면 그 以前에는 軍籍이 三年마다 한 번式 改成되였을 때의 말로 이러한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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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4번={{TagSpage|45-2}}<blockquote no="42">{{TagRef|5}}前此 每三年一改軍籍 但修改年老有故者而已 若船軍之慣船上 侍衛鎭牌之能射御者 苟無其故 皆仍本役 今也不然 改籍之際 守令不自親執 委諸胥吏 雖元定侍衛·鎭牌 若富强行賄 則移于歌役 (下略)<ref>同, 十年 閏四月 己丑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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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5번={{TagSpage|45-3}}이렇게 軍籍을 改修한다는 것이 <cite no="10">「但修改年老有故者而己」</cite>로서 何等 軍額에 對한 우에서의 定額을 變改하는 것이 아님은 軍籍이 六年에 한번式 改成하기로 되어서도 變함이 없었다. 이에 關하야는 上記 引用文이 스스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世祖 七年 以降의 軍額 擴張에 이르러서는 地方 所在의 戶籍을 上送시킨다는 斷乎한 態度가 要請되였든 것이다. 世祖 七年, 諭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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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6번={{TagSpage|45-4}}<blockquote no="43">{{TagRef|6}}諭諸道觀察使曰 我國戶籍不明 隱漏甚多 每欲檢括大正 而因仍不行 實違大體 今遣朝官 大刷成籍 若前戶籍軍籍 仍置于邑則 官吏必因仍前籍 不肯改正 積年因循之弊 必不能革 本營所藏 視自封識 並寫日月 勿發馬 以各邑 人馬上送<ref>世祖實錄, 七年 七月 壬戌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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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7번={{TagSpage|45-5}}이라 하야 아울러 諸道 都節制使와 處置使에 諭하니, 이러한 準備 아래에 이 諭書가 發送되는 그날로{{TagPage|46-1}} 咸鏡道를 除한 七道에 各各 戶籍 軍籍 改正의 敬差官이 發向되였다. 그들의 目的으로 하는 바는 다시 말할 것 없이 隱丁의 檢括과 이에 좇는 戶의 增加에 있었다. 그 携行事目 中의 주장된 것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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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8번={{TagSpage|46-2}}<blockquote no="44">一. 睹道戶籍 用號牌案 錄戶首率丁 其廣作長籬 就籬內 別構家舍 稱爲一家者 刷出作戶<br/>一. 單寒人 無依所托 或爲人雇工 或爲婢夫 寄寓者 拘於良人 別立一戶 必至逃散 作率丁例<br/>一. 諸邑 諸營鎭 額外螺匠 日守書員 醫·律與諸色人等 額外助丁及濫占人口 並錄戶籍<br/>一. 巨戶隱占丁口 限十一月 許戶首及當身自首 其限內不首者 全家徙邊 許人陳告 壯丁十口以上陳告者 元有職者超一資 資窮者 從自願 子婿弟姪中賞職 無職者 亦依上項例 賤人限三年 除雜役(註6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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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29번={{TagSpage|46-3}}이렇게 하고 나서, 翌年 五月 癸卯에, 忠淸·全羅·慶尙道 軍籍 都巡察使를 보내게 되는데, 그 {{TagRef|7}}目的은 <cite no="11">「前者敬差官等, 所成戶籍, 親審民丁壯弱, 定軍役」</cite>하는 데에 있었다.<ref>同, 八年 五月 癸未條</ref> 下三道에만 이 都巡察使를 보내기 始作한 것은 七年에 敬差官 派遣에 依하야 가장 많이 軍丁 數의 變化를 받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 結果, 얼마만한 人丁이 按括되고 戶가 增加되였는가. 世祖 十一年 八月, 梁誠之의 上書에 依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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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0번={{TagSpage|46-4}}<blockquote no="45">{{TagRef|8}}一. 實軍額 蓋兵貴乎精 不在乎多 今國家推刷軍戶 忠淸道二萬戶 今爲十一萬戶 慶尙道四萬戶 今爲三十萬戶 以二道推之 他道皆然 然分定軍額之時 姦吏以壯者爲奉足 弱者爲戶首 以實者爲病 病者爲實 無馬者爲騎, 有馬者爲步{{TagPage|47-1}} 假如一戶 以他人爲奉足 而子枝爲他人奉足 或以西村人 爲東村人奉足 東村人 爲西村人奉足如此弄法 諾道皆然<ref>同, 十年 八月 壬午朔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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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1번={{TagSpage|47-2}}即, 이러한 尨大한 軍籍의 增加에는 무었보다도 當時에 있어서의 血族的인 또 共同體的이라 하는 農村의 性格을 破壞한다는 것이 숨어있었다. 그러므로, 同年 十月 下三道로 向한 軍籍使의 携行事目에 처음 보이는 保法의 新設은 이 矛盾을 얼마간 除去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임이 얻어놓은 創痍가 낫지 몯하였음은 前述한바 保人 率丁 問題가 그것이다. 그리고 世祖의 軍額 擴張의 具體的인 數字가 보이는 것은 成宗實錄, 元年 二月 己卯條에 보이는 第一次 軍額 整理를 할 때이다. 前記한 바와 같이 世祖는 下三道를 除한 諸道에는 아즉 그 擴張이 끝나기 前에 別世하였고, 成宗은 即位와 함께 임이 整理 곧 減額을 斷行하였든 것이다. 이 第一次 整理의 定額과 밑 그 舊額 即 世祖 軍額의 擴張 結果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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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2번={{TagSpage|47-3}}<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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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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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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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京畿</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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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忠淸</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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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全羅</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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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慶尙</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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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江原</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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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黃海</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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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平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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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永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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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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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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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舊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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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六,三七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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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三,三八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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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三,六二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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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三,八七〇</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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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三三八</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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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六,一〇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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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三,五〇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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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九,〇九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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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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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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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新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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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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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九五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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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九五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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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九五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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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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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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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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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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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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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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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定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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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六,三七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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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一,四二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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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一,六八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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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一,九一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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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三三八</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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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六,一〇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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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三,五〇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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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九,〇九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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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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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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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3번={{TagSpage|47-4}}右表 兵額의 內容은 別侍衛·甲士·破敵衛·隊卒·彭排·內禁衛·鷹揚衛·彎强隊·壯勇隊·正兵 等의 所謂 正軍으로서, 그들의 奉足은 勿論이요 雜色軍과 騎船軍의 正軍도 奉足도 除外되여 있다. 右表{{TagPage|48-1}}에 依하야 慶尙道를 取例하면 前記 世宗實錄 地理志의 雜色軍을 除한 正軍의 數는 約 二萬二千, 그 中에서 騎船軍 正軍 一萬五千을 除하면 約 七千이 남는다. 이 數字가 世祖朝의 軍額 擴張으로 一躍 二萬三千으로 되였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增加는 勿論 下三道에 가장 甚하고 남어지 諸道에 있어서는 그다지 그렇지도 않다. 그러므로 다음 成宗實錄, 三年 二月 戊寅條에 보이는 第二次 減額에 있어서는 下三道만이 對象으로 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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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4번={{TagSpage|48-2}}<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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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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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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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忠淸</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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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全羅</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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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慶尙</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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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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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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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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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八六〇</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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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九四五</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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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八九五</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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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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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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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定</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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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八,五八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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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二七,七三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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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一九,〇一五</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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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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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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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원문35번={{TagSpage|48-3}}成宗의 두 번에 亘하는 減額은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고 그 減額論에 對한 弁明的인 것에 不過하다. 그리고 그의 末年에 이르기까지 이 數字는 變함이 없었다. 上記의 二表는 各 道別로 抽記한 것에 不過하고, 實錄에는 各 官에 指定된 定額된 數字가 있으나 煩𤨏하므로 이를 省略하였다. 이렇게 定額이 決定된 뒤 變함이 없었든 것은 그 理由로 여러가지를 헤아릴 수 있으나 우리는 먼저, 저 保法의 創定이라는 것의 意義를 닞어서는 안 될 줄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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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번=이조에 들어와 군액의 구체적인 숫자는 태조실록 2년 5월 경오조에 보이는 것이 최초로서, 그것에 의하면, 앞서 왜구 토벌에 향하였던 팔절제사(八節制使) 중에서 남은·박위·진을서 등의 3인으로 하여금, 왜구의 퇴각과 동시에, 그대로 경상·양광·전라의 3도에 각각 적군(籍軍)의 목적으로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 제도에는 그 곳의 안렴사를 시켜 점군(點軍)하여 그 결과를 이때에 이르러 상문(上聞)하였다고 보이므로, 이 숫자는 고려사 권82지 권제35, 병1, 병제, 공양왕 3년조 <cite no="09">“七月都堂啓, 請籍水陸軍丁, 仍帶號牌”</cite>라는 것과는 직접 관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태조 2년의 숫자는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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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번=<blockquote no="36">京畿左右·楊廣·慶尙·全羅西海·交州·江陵·凡八道馬步兵及騎船軍 摠二十萬八百餘人 子弟及鄕·驛吏 睹有役 者十萬五百餘人</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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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번=즉, 합계 30만1천3백여인이 되는데, 전자인 20만8백여인은 소위 정규병이라고 할 만한 것이고 후자인 10만5백여인은 잡색군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또 이 숫자에는 서북·동북 양계의 군액이 합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태종 4년 4월의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구의 수(數) 32만2천7백76에 접근하고 있음에 비취여 그 숫자 중에는 정군 내지 정정뿐 아니라, 그의 봉족도 합산한 것이 있음을 생각케 한다. 태종실록에는 전후 두 번 전국의 호구의 숫자가 보인다. 즉, 앞서 쓴 4년 4월 을미조와 6년 10월 병진조에서다. 지금, 이것을 좌기(左記)하고, 다시 경상도 지리지 및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이는 호구의 수를 비판함으로써, 구의 수(數)라는 것이 곧 병정인 인정의 수라는 것, 또 그 안에는 정군=(호수)와 봉족=(솔정)을 합산한 것임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 호라는 것의 성격을 또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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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4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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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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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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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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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경기</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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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충청</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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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경상</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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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전라</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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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풍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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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강원</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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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동북</td>
 +
<td>서북</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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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총계</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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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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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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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태종 4년 4월</td>
 +
<td>호</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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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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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9,561</td>
 +
<td>48,992</td>
 +
<td>15,703</td>
 +
<td>14,170</td>
 +
<td>15,879</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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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1,311</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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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7,788</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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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53,404</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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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
<tr>
 +
<td>태종 4년 4월</td>
 +
<td>구</td>
 +
<td></td>
 +
<td>44,476</td>
 +
<td>98,915</td>
 +
<td>39,150</td>
 +
<td>29,440</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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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9,238</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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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8,238</td>
 +
<td>52,872</td>
 +
<td>322,786</td>
 +
</tr>   
 +
     
 +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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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태종 6년 10월</td>
 +
<td>호</td>
 +
<td>20,729</td>
 +
<td>19,560</td>
 +
<td>48,993</td>
 +
<td>15,714</td>
 +
<td>14,170</td>
 +
<td>15,879</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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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1,311</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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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33,890</td>
 +
<td>180,146</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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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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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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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태종 6년 10월</td>
 +
<td>구</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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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38,138</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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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44,476</td>
 +
<td>98,915</td>
 +
<td>39,167</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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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9,441</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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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9,224</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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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8,683</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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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62,321</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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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370,365</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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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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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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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5번=즉, 전자에 있어서의 구는 후자에 있어서 정으로 되어 있는데, 그 숫자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음에 의하여 구는 곧 정임이 용이하게 알게 된다. 이 일은 당시에 있어서는 호구 계산의 일반적인 원칙이라고 생각되고, 그것은 군적은 경국대전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개국 이래 상문되는 것이요, 실제의 인구 수를 나타내는 호적은 상문되지 않는 까닭에 인함일 것이다. 이러므로 당시의 기록에 보이는 구의 수(數)는 그대로 병정인 인정의 숫자이다. 따라서 경상도 지리지의 각환(各宦)호구조에 보이는 여자의 수가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르러 모조리 없어지고 남자의 수만이 구의 수(數)에 계산되어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성인 남자 이외의 여자와 노약자도 그것이 호적에 기록되는 한, 호구 수에 들 만도 하겠건만, 이들은 입산(入算)되지 못하였다. 또, 일반 공민이 아닌 사천 같은 것도 세조 때에 이르러 노자 회정(淮丁)의 규정이 생겨서 처음 구의 수에 들어갔던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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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6번=<blockquote no="37">{{TagRefT|1}}本朝人口之法 不明 錄于籍者 僅十之一二 국가每欲正之 重失人心 因循至今 故各道各官人口之數 止此 他道皆然<ref group="a">세종실록, 지리지, 경기도관찰, 호구전결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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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7번=라 하였으니, 이 의견은 실제 전인구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병사인 인정에 대한 의견이다. 실록 지리지 편자로 8도 지리지에서 실록 지리지를 편찬할 때 고의로 여자의 숫자를 빼렸으므로, 그의 인구라는 것은, 곧 성인 남자인 인정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의 인구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르러 전체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지금 이를 호의 수(數)와 병기하여 둘춰 보면 다음과 같은데, 각 도별 계산와 각 관의 계산이 조금 상이하므로 양자를 병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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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8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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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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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
<td></td>
 +
<td>경기</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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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충청</td>
 +
<td>경상</td>
 +
<td>전라</td>
 +
<td>황해</td>
 +
<td>강원</td>
 +
<td>평안</td>
 +
<td>함길</td>
 +
<td>합계</td>
 +
</tr>               
 +
 
 +
<tr>
 +
<td>각 도별</td>
 +
<td>호</td>
 +
<td>20,882</td>
 +
<td>24,170</td>
 +
<td>42,227</td>
 +
<td>24,073</td>
 +
<td>23,511</td>
 +
<td>11,084</td>
 +
<td>41,167</td>
 +
<td>14,739</td>
 +
<td>201,853</td>
 +
</tr>   
 +
 
 +
<tr>
 +
<td>각 도별</td>
 +
<td>구</td>
 +
<td>50,352</td>
 +
<td>100,790</td>
 +
<td>713,759</td>
 +
<td>94,248</td>
 +
<td>71,897</td>
 +
<td>29,009</td>
 +
<td>105,444</td>
 +
<td>66,976</td>
 +
<td>692,475</td>
 +
</tr>   
 +
 
 +
<tr>
 +
<td>각 관별</td>
 +
<td>호</td>
 +
<td>20,896</td>
 +
<td>24,161</td>
 +
<td>42,227</td>
 +
<td>24,093</td>
 +
<td>23,512</td>
 +
<td>11,083</td>
 +
<td>37,135</td>
 +
<td>14,739</td>
 +
<td>202,349</td>
 +
</tr>   
 +
 
 +
<tr>
 +
<td>각 관별</td>
 +
<td>구</td>
 +
<td>50,352</td>
 +
<td>100,790</td>
 +
<td>171,787</td>
 +
<td>94,797</td>
 +
<td>71,899</td>
 +
<td>29,039</td>
 +
<td>111,541</td>
 +
<td>66,978</td>
 +
<td>693,438</td>
 +
</tr>   
 +
 
 +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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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9번=(경5부·성저10리, 유후사는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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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0번=구(口)라는 것이 곧 병정인 인정이라 함은 위에 말하였거니와, 이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본이 된 8도 지리지의 잔존 1부인 경상도 지리지의 기사에 의하여 다시금 명료해질 것이다. 또 이들 소위 구라는 것이 어떻게 배분되었는가도 후자에 의하여 볼 수 있으니 다음과 같다. 경상도 지리지 도내시거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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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1번=<blockquote no="38">一. 道內時居四萬一千三百二十戶, 人丁十九萬一千七百十九內<br/>別牌: 八百十六 奉足: 三千九百四十七<br/>侍衛: 二千一百二十 奉足: 七千八百九十五<br/>營鎭屬: 二千二百六十一 奉足: 六千一百七<br/>守城軍: 一千二百一十三 奉足: 二千三百六十二<br/>騎舡: 一萬五千九百四十一 奉足: 三萬六千七十一<br/>雜色: 一萬六千五百七十四 奉足: 四萬七千四百六十二<br/>(計正軍三萬八千九百二十五 奉足: 十萬三千八百五十四){{TagPage|42-1}}<br/>(都計: 十四萬二千七百七十九<br/>上京從仕人員老弱五萬一千九百四十)<br/>括孤內筆者責</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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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2번=이라고 하였으니, 곧 상경 종사 인구 중의 장정을 제하면 나머지 모든 장정이 별패 이하의 정군이 되어 있거나 혹은 그 봉족으로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인정이 원칙적으로 병정이었다는 것은, 그 인정 19만1천7백19명 중에, 14만2천7백79명이라는 대다수가 정군 혹은 봉족의 어떤 쪽으로 되어 있다는 것, 또 양자의 거리가 여기서는 5만인에 가깝지만 경상도 지리지의 각 관별 계산에 의하면 2만인밖에 안 된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거니와, 또 하나 중대한 원인을 둘 수 있다. 위의 표에 의하면 제색군인 중 5종의 병사밖에 들지 않고 나머지의 갑사라든가 별시위라든가 또 그들보다 더 나은 신분층의 병사는 상경하여 입역하면 체아직(遞兒職)이라도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이 상경 종사 인구에다가 넣은 것이다. 이들이 또 이 5만 내지는 2만의 수 안에 이들의 봉족 부대와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또 이 2만인의 차이로서 인정의 병정임을 부정한다면 그는 당시에 있어서의 경상도의 특수성을 몰각하는 자다. 같은 경상도 지리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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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3번=<blockquote no="39">{{TagRefT|2}}道內俗尚大概 重禮讓 崇質儉 崇文好武 務農桑 不事工商 繁華富庶 甲諸他道 名門右族 滿於朝廷<ref group="a">경상도 지리지, 도내속상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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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4번=이라 하였으니, 실로 경상도는 병역을 면제 당하는 명문 우족(右族)의 연수(淵藪)요, 그러면서도 그 인정의 대다수가 병정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다른 도에 있어서랴. 그리고 경상도 지리지 도내시거조에는 4만1천3백20호라 하였으나, 이것을 도 안의 각 관별로 계산한다면, 3만9천2백92호라, 좌우간 위에 쓰인 정군 소계(小計) 3만8천9백25에 심히 가깝다. 전술한 바와 같이 병역부담은 호를 단위로 하여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병역을 부담하지 않는 명문 우족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가 군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의 숫자는 그 도에 있어서의 정군의 숫자를 대체로 말할 것이고, 구의 숫자는 그 호를 구성하는 정군과 봉족을 합산한 것이라는 것을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에 쓰인 태종 1대 사이의 두 번의 호구 수와 아울러 세종실록 지리지의 그것 중, 호는 정군을 구는 정군과 봉족을 합산한 것 곧 전 병정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당시에 있어서의 전국 군액의 두 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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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5번=잡색군은 위에 쓰인 경상도 지리지 기사에 의하면 그의 봉족과 더불어 소위 제색군인 중의 최대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 어떠한 것을 가리켜 잡색군이라 하는가는 본론에 상술할 바 아니지만, 이 잡색군을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르러서는 군인의 숫자에 넣지를 않고 있다. 거기에는 그것은 명목상의 군인 이외의 모든 인정을 가리킴이라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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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6번=<blockquote no="40">{{TagRefT|3}}雜色軍 盡拍土丁爲兵 故不幷錄 餘州倣此 <ref group="a">세종실록, 지리지, 경기도 관찰선군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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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7번=라 한 것이 곧 그것이다. 이제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이 잡색군과 아울러 모든 정군의 봉족을 뺀 숫자를 적으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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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8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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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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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
<td>경기</td>
 +
<td>충청</td>
 +
<td>경상</td>
 +
<td>전라</td>
 +
<td>황해</td>
 +
<td>강원</td>
 +
<td>평안</td>
 +
<td>함길</td>
 +
<td>합계</td>
 +
</tr>               
 +
 
 +
<tr>
 +
<td>각 도별</td>
 +
<td>5,605</td>
 +
<td>11,846</td>
 +
<td>22,441</td>
 +
<td>15,384</td>
 +
<td>9,027</td>
 +
<td>3,696</td>
 +
<td>21,210</td>
 +
<td>5,957</td>
 +
<td>95,166</td>
 +
</tr>   
 +
 
 +
<tr>
 +
<td>각 관별</td>
 +
<td>5,678</td>
 +
<td>11,824</td>
 +
<td>22,441</td>
 +
<td>14,728</td>
 +
<td>8,846</td>
 +
<td>3,696</td>
 +
<td>22,671</td>
 +
<td>5,957</td>
 +
<td>95,841</td>
 +
</tr>   
 +
 
 +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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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19번=(제주도 마보병 3,366명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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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0번=앞서 든 세종실록 지리지의 전국 인정 수는 거진 70만 그 중의 약 10만인이 명실상반(名實相伴)하는 군인이고, 그 나머지의 60만은 소위 상경 종사 원인이든지 혹 잡색군이고 또는 그들의 봉족 부대였다. 그리고 잡색군이라든가 또 봉족 부대라 하는 것도 그들이 병제의 조직 내에서 그들에게 상당하는 입역의 의무를 지는 자이므로 그들을 소위 군인과 구별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 쓰인 9만5천여명의 숫자만으로써 당시 군정의 전부라고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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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1번=각설하고, 호적이라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인민으로부터의 상신(狀申)에 의하는 것이고, 군안은 이를 기본으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 작정(作定)된 인정에 대한 숫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으니 세종 5년 5월 이직의 진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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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2번=<blockquote no="41">{{TagRefT|4}}外方軍籍 隨其殘盛 平均定額 以供國役 乃常法也 <ref group="a">같은 책 5년 5월 정미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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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3번=다시 말하면, 그 지방에 대하여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정액이 미리 위에서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인정 초출의 수단으로서의 군적=호적이 반드시 살림 내지 집을 표준으로 하지 않았든 법제적인 원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여기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또, 위에 쓰인 2개의 지리지에 있어서의 각 도별의 계산과 각 관별의 그것의 오차가 있는 것도 이에 원인(原因)할 것이라. 이러한 위에서 정해지는 정액은 6년에 한 번 군적이 개수(改修)된다고 하더라도, 용이하게 변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세종 11년 윤4월, 군적에 관한 각품진언(各品陳言)에 의하면 그 이전에는 군적이 3년마다 한 번씩 개성(改成)되었을 때의 말로 이러한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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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4번=<blockquote no="42">{{TagRefT|5}}前此 每三年一改軍籍 但修改年老有故者而已 若船軍之慣船上 侍衛鎭牌之能射御者 苟無其故 皆仍本役 今也不然 改籍之際 守令不自親執 委諸胥吏 雖元定侍衛·鎭牌 若富强行賄 則移于歌役 (下略)<ref group="a">같은 책 10년 윤4월 기축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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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5번=이렇게 군적을 개수한다는 것이 <cite no="10">“但修改年老有故者而己”</cite>로서 하등 군액에 대한 위에서의 정액을 변개하는 것이 아님은 군적이 6년에 한번씩 개성하기로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이에 관하여는 위에 쓰인 인용문이 스스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조 7년 이후의 군액 확장에 이르러서는 지방 소재의 호적을 상송(上送)시킨다는 단호한 태도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세조 7년, 유서(諭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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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6번=<blockquote no="43">{{TagRefT|6}}諭諸道觀察使曰 我國戶籍不明 隱漏甚多 每欲檢括大正 而因仍不行 實違大體 今遣朝官 大刷成籍 若前戶籍軍籍 仍置于邑則 官吏必因仍前籍 不肯改正 積年因循之弊 必不能革 本營所藏 視自封識 並寫日月 勿發馬 以各邑 人馬上送<ref group="a">세조실록, 7년 7월 임술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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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7번=이라 하여 아울러 제도 도절제사와 처치사에 유(諭)하니, 이러한 준비 아래에 이 유서가 발송되는 그날로 함경도를 제한 7도에 각각 호적 군적 개정의 경차관이 발향(發向)되었다. 그들의 목적으로 하는 바는 다시 말할 것 없이 은정(隱丁)의 검괄(檢括)과 이에 좇는 호의 증가에 있었다. 그 휴행사목 중의 주장된 것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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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8번=<blockquote no="44">一. 睹道戶籍 用號牌案 錄戶首率丁 其廣作長籬 就籬內 別構家舍 稱爲一家者 刷出作戶<br/>一. 單寒人 無依所托 或爲人雇工 或爲婢夫 寄寓者 拘於良人 別立一戶 必至逃散 作率丁例<br/>一. 諸邑 諸營鎭 額外螺匠 日守書員 醫·律與諸色人等 額外助丁及濫占人口 並錄戶籍<br/>一. 巨戶隱占丁口 限十一月 許戶首及當身自首 其限內不首者 全家徙邊 許人陳告 壯丁十口以上陳告者 元有職者超一資 資窮者 從自願 子婿弟姪中賞職 無職者 亦依上項例 賤人限三年 除雜役(각주6과 같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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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29번=이렇게 하고 나서, 익년 5월 계묘에, 충청·전라·경상도 군적 도순찰사를 보내게 되는데, 그 {{TagRefT|7}}목적은 <cite no="11">“前者敬差官等, 所成戶籍, 親審民丁壯弱, 定軍役”</cite>하는 데에 있었다.<ref group="a">같은 책 8년 5월 계미조</ref> 하3도에만 이 도순찰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7년에 경차관 파견에 의하여 가장 많이 군정 수의 변화를 받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 얼마만한 인정이 안괄(按括)되고 호가 증가되었는가. 세조 11년 8월, 양성지의 상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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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0번=<blockquote no="45">{{TagRefT|8}}一. 實軍額 蓋兵貴乎精 不在乎多 今國家推刷軍戶 忠淸道二萬戶 今爲十一萬戶 慶尙道四萬戶 今爲三十萬戶 以二道推之 他道皆然 然分定軍額之時 姦吏以壯者爲奉足 弱者爲戶首 以實者爲病 病者爲實 無馬者爲騎, 有馬者爲步 假如一戶 以他人爲奉足 而子枝爲他人奉足 或以西村人 爲東村人奉足 東村人 爲西村人奉足如此弄法 諾道皆然<ref group="a">같은 책 10년 8월 임오삭조</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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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1번={{TagSpage|47-2}}즉, 이러한 방대한 군적의 증가에는 무엇보다도 당시에 있어서의 혈족적인 또 공동체적이라 하는 농촌의 성격을 파괴한다는 것이 숨어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해 10월 하3도로 향한 군적사의 휴행사목에 처음 보이는 보법의 신설은 이 모순을 얼마간 제거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얻어놓은 창이(創痍)가 낫지 못하였음은 전술한바 보인 솔정 문제가 그것이다. 그리고 세조의 군액 확장의 구체적인 숫자가 보이는 것은 성종실록, 원년 2월 기묘조에 보이는 제1차 군액 정리를 할 때이다. 앞서 쓴 바와 같이 세조는 하3도를 제한 제도에는 아직 그 확장이 끝나기 전에 별세하였고, 성종은 즉위와 함께 이미 정리 곧 감액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 제1차 정리의 정액과 및 그 구액(舊額) 즉 세조 군액의 확장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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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2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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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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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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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경기</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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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충청</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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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전라</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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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경상</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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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강원</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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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황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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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평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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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영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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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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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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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구액(舊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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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6,373</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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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3,384</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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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33,629</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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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3,870</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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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338</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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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6,103</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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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3,504</td>
 +
<td>9,091</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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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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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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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신감(新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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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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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954</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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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953</td>
 +
<td>1,953</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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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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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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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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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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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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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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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정액(定額)</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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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6,373</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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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1,421</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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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31,689</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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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1,917</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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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338</td>
 +
<td>6,103</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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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3,504</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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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9,091</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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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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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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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3번=위의 표 병액의 내용은 별시위·갑사·파적위·대졸·팽배·내금위·응양위·만강대·장용대·정병 등의 소위 정군으로서, 그들의 봉족은 물론이요 잡색군과 기선군의 정군도 봉족도 제외되어 있다. 위의 표에 의하여 경상도를 취하여 예를 들면 앞서 쓴 세종실록 지리지의 잡색군을 제한 정군의 수는 약 2만2천, 그 중에서 기선군 정군 1만5천을 제하면 약 7천이 남는다. 이 숫자가 세조 조(朝)의 군액 확장으로 일약 2만3천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증가는 물론 하3도에 가장 심하고 나머지 제도에 있어서는 그다지 그렇지도 않다. 그러므로 다음 성종실록, 3년 2월 무인조에 보이는 제2차 감액에 있어서는 하3도만이 대상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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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4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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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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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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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충청</td>
 +
<td>전라</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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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경상</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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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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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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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감(減)</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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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860</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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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3,945</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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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895</td>
 +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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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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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정(定)</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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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8,581</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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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27,731</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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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9,015</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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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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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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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5해독문35번=성종의 두 번에 걸친 감액은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고 그 감액론에 대한 변명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이 숫자는 변함이 없었다. 위에 쓰인 두 표는 각 도별로 추기(抽記)한 것에 불과하고, 실록에는 각 관에 지정된된 정액된 숫자가 있으나 번쇄하므로 이를 생략하였다. 이렇게 정액이 결정된 뒤 변함이 없었던 것은 그 이유로 여러가지를 헤아릴 수 있으나 우리는 먼저, 저 보법의 창정이라는 것의 의의를 잊어서는 안 될 줄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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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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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원문1번={{TagSpage|49-1}}우리는 以上에 있어서 李朝 初期의 軍丁이 어디서 供給받었으며 또 어떻게 供給되었든가에 對하여 若干의 考察을 하여 왔다. 戶라는 것은 兵役負擔의 單位인 同時에 實로 朝鮮 初期의 兵制가 디디고 서는 社會的 地盤이었든 것이다. 科田法의 創定에서 始作되는 李氏 朝鮮朝는 前朝 高麗가 그의 初期에 가졌었든 府兵을 또 한번 가지게 되였다. 그것은 임의 본 바 大土地 私有의 抑壓과 이에서 오는 小型의 土地 支配 乃至는 土地 所有를 基盤으로 하는 公民의 多量 生產이 齎來되였기 때문이었다. 戶가 이 우에서 特異한 方法으로 짜졌든 것이었다. 그러나 李氏 朝가 成立하자부터 그배안에 內包하였든 大土地 私有라는 逆行的 契機는 날이 갈사록 大規模化해 갔다. 임금이 바뀔 적마다 느러가는 功臣의 數, 그들에게{{TagPage|50-1}} 주워지는 私田, 太宗 十七年 七月에 定하여 진 私田의 三分之一를 下三道에 折給한 일, 이러한 것을 所謂 合法的인 것이려니와 또 地方 豪族의 兼併을 우리는 닞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듯 鮮初의 農庄은 느러가는 一方이었다. 여기서 生기는 投託과 遊離는 저러한 府兵制度에 어떠한 影響을 주웠을 것인가. 드디어 우리는 詳論으로 기다리지 않고라도 朝鮮 初 府兵制 成立의 本質的 條件을 理解하는 同時에 그의 崩壞의 條件조차 제절로 理解하는 것이다. 늘어가는 農庄, 줄어가는 公民, 이 間에서 鮮初 兵制로 하여곰 또 한 번 生氣를 띠우게 한 것이 곧 저 兩班에 不人氣한 世祖의 保法이었다. 保法에 있어서는 田結, 奴婢의 淮丁이라는 것이 있지 않었든가. 또 그의 隱丁 撿括의 追及 强行이 이에 步調를 맞후웠든 것이다. 그러나 이 保法이라는 새 옷이 果然 兵士의 「單寒」을 미울 만한 것이었든가. 病的으로 붓기만한 兵額의 整理를 다시금 始作하지 아니치 못하는 理由가 곧 그것을 說明하여 줄 것이지만, 또 歷史의 움즉임과 同時에 生기는 「代立」의 現象이 成宗때부터 顯著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大概, 이 社會의 基本的인 矛盾의 發達 곧 農庄의 發達과 相映하는 兵制 內의 矛盾의 擡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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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번=우리는 이상에 있어서 이조초기의 군정이 어디서 공급받았으며 또 어떻게 공급되었든가에 대하여 약간의 고찰을 하여 왔다. 호라는 것은 병역부담의 단위인 동시에 실로 조선 초기의 병제가 딛고 서는 사회적 지반이었던 것이다. 과전법의 창정에서 시작되는 이씨 조선조는 전조(前朝) 고려가 그의 초기에 가졌었던 부병을 또 한번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본 바 대토지 사유의 억압과 이에서 오는 소형의 토지 지배 내지는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공민의 다량 생산이 재래(齎來)되었기 때문이었다. 호가 이 위에서 특이한 방법으로 짜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씨 조(朝)가 성립하자부터 그배안에 내포하였던 대토지 사유라는 역행적 계기는 날이 갈수록 대규모화해 갔다. 임금이 바뀔 적마다 늘어가는 공신의 수, 그들에게 주어지는 사전, 태종 17년 7월에 정해진 사전의 3분지1을 하3도에 절급한 일, 이러한 것을 소위 합법적인 것이려니와 또 지방 호족의 겸병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듯 조선 초의 농장은 늘어가는 일방(一方)이었다. 여기서 생기는 투탁(投託)과 유리(遊離)는 저러한 부병제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 것인가. 드디어 우리는 상론으로 기다리지 않더라도 조선 초 부병제 성립의 본질적 조건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의 붕괴의 조건조차 저절로 이해하는 것이다. 늘어가는 농장, 줄어가는 공민, 이 사이에서 조선 초 병제로 하여금 또 한 번 생기를 띠게 한 것이 곧 저 양반에 불인기(不人氣)한 세조의 보법이었다. 보법에 있어서는 전결, 노비의 회정(淮丁)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던가. 또 그의 은정 검괄(撿括)의 추급 강행이 이에 보조를 맞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보법이라는 새 옷이 과연 병사의 ‘단한’을 매울 만한 것이었던가. 병적으로 붓기만한 병액의 정리를 다시금 시작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이유가 곧 그것을 설명하여 줄 것이지만, 또 역사의 움직임과 동시에 생기는 ‘대립’의 현상이 성종때부터 현저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대개, 이 사회의 기본적인 모순의 발달 곧 농장의 발달과 상영(相映)하는 병제 내의 모순의 대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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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9일 (화) 20:3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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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초기 국역편성의 기저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李朝初期 國役編成의 基底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4 발행기관
저자 김석형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6월
시작쪽 1쪽 종료쪽 50쪽 전체쪽 50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머리말


국가가 인민에 대하여 그의 직접적인 노동력을 수취한다는 것, 곧 부역이라는 것은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여 구성되는 봉건적 국가의 한 징표로서 주지되는 사실이다. 국가 재정의 운용이 현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봉건적 국가는, 봉쇄적이요 개개로 고립한 일반적 자연경제에 제한되는 것이므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부문의 요구를 충당하려면, 인민을 직접 징발, 사역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소(大小)의 토목 영선에는 물론이요, 이조초기와 같아서는, 궁중의 잡역과 병기 집물의 제조까지도 직접 인민을 징발하여 이에 당하게 하였고, 그뿐 아니라 자염, 목부, 조세의 조전, 도기, 자기의 제조 등에도, 모두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조선조 초기의 인민이 지는 국역은 실로 많기도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역은 지방 관아에서 지방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또 중앙에서 국가 전체의 목적 아래에서 필요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줄 안다. 경국대전 호전 요부조에 “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이라 한 것은 전자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해당 조 말미의 세주(細註)에 “京城底十里, 皆京役”이라 한 것으로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지방적 국역은 그것이 여하한 사적 과정을 밟아 왔든, 후자의 전체적 국역이라고 할 만한 것에 비하면, 소규모의 것이었고 지방에 따라 또한 사정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본론에 있어서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다. 후자인 전체적 국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일시적인 것, 예를 들면 한성도시건설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출전 같은 것과 항구적인 것과를 구별할 수 있으니, 본론의 이른바 국역이라는 것은, 곧, 이 전체적인 국역 중에서도 항구적인 것을 가리킨 것이다.
쪽수▶P1-1國家가 人民에 對하여 그의 直接的인 勞働力을 收取한다는 것, 곧 賦役이라는 것은 一般的 自然經▶P2濟를 土臺로 하여 構成되는 封建的 國家의 한 徵表로서 周知되는 事實이다. 國家 財政의 運用이 現代의 그것과 根本的으로 相異한 封建的 國家는, 封鎻的이요 個個로 孤立한 一般的 自然經濟에 制限되는 것이므로 勞働力을 必要로 하는 모든 部門의 要求를 充當할랴면, 人民을 直接 徵發, 使役하는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大小의 土木 營繕에는 勿論이요, 李朝 初期와 같아서는, 宮中의 雜役과 兵器 什物의 製造에까지도 直接 人民을 徵發하여 이에 當케 하였고, 그뿐 아니라 煮塩, 牧夫, 租稅의 漕轉, 陶器, 磁器의 製造 等에도, 凡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朝鮮朝 初期의 人民이 지는 國役은 實로 많기도 많었든 것이다. 이러한 國役은 地方 官衙에서 地方的으로 必要로 하는 것과, 또 中央에서 國家 全體의 目的 아래에에서 必要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大別할 수 있을 줄 안다. 經國大典 戶典 徭賦條에 「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이라 한 것은 前者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該條 末尾의 細註에 「京城底十里, 皆京役」이라 한 것으로도 自明한 事實이다. 이러한 地方的 國役은 그것이 如何한 史的 過程을 밟어왔든, 後者의 全體的 國役이라고 할 만한 것에 比하면, 小規模의 것이었고 地方에 딿아 또한 事情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本論에 있어서는 건다리지 않기로 한다. 後者인 全體的 國役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一時的인 것, 例하면 漢城都市建設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出戰 같은 것과 恒久的인 것과를 區別할 수 있으니, 本論의 이른바 國役이라는 것은, 곧, 이 全體的인 國役 中에서도 恒久的인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국역에 대하여는 경국대전에도 별다른 규정이 없으니, 그것은 곧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이 노동부대가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초기의 병제가 소위 부병제라 하여 국민개병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였고, 신분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모든 인민의 활동을 규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국민개병의 원칙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위에 말한 노동부대가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제공되는 것도 이러한 신분을 토대로 한 개병주의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양반의 자손이 져야 하는 병역은 갑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천인이 져야 하는 병역은 괭이와 삽을 드는 노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병역이 아니라, 당시의 국역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세종실록 10년 8월 임오조에 보이는 양성지의 의견은 차간(此間)의 소식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쪽수▶P3-1이러한 意味의 國役에 對하여는 經國大典에도 別다른 規定이 없으니, 그것은 곧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이 勞働部隊가 提供되기 때문이었다. 朝鮮朝 初期의 兵制가 所謂 府兵制라 하야 國民皆兵主義의 原則에 立脚하였고, 身分이라는 것이 그 社會의 모든 人民의 活動을 規定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國民皆兵의 原則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判異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에 말한 勞働部隊가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提供되는 것도 이러한 身分을 土臺로 한 皆兵主義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兩班의 子孫이 저야 하는 兵役은 甲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賤人이 저야 하는 兵役은 굉이와 삽을 드는 勞働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軍役이라는 것은 單純한 兵役이 아니라, 當時의 國役의 根幹을 이루웠든 것이다. 世宗實錄 十年 八月 壬午條에 보이는 梁誠之의 意見은 此間의 消息을 端的으로 말하고 있다.

(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

쪽수▶P3-2

(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

양성지의 이 열거가 당시의 제색군인을 모두 망라한 것이냐 아니냐는 고사하고라도, 그가 제색군인을 역목(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병종론(兵種論)에 의하면 오늘날의 기술적인 병종과는 판이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당시의 병종이 신분에 제한되어 결정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역군이라든가 사명군이라 하는 범주를 번상군이라든가 보군이라든가 하는 범주와 같은 가치에 있어서 논하였으나, 후자는 기술적인 것이었으므로 사령, 역군과 동일시될 성질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병종론에서 선군을 빼었고 또 역군인 대졸과 공천 중에서도 선상노를 불문에 부쳤다. 사령인 섭(攝)60도 번상군이요 보군이었다. 그의 병종론에 소루(疎漏)한 감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신분을 토대로 하여 병종을 논한 데에 그의 탁견이 보인다. 대개, 당시에 있어서 병종을 구분하는 것은 신분이었고, 또한 반대로 군역(국역)의 부담에 있어서 다시 그의 신분은 세분화되었으니, 예를 들면,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방패는 활과 칼 대신에 괭이와 삽을 드는, 병역 아닌 역군이라는 병역을 졌으며, 또한 그가 역군인 방패라는 병역을 지는 데에서, 그의 신분은 신량역천 중의 세분화된 방패라는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병사라는 것은 적어도 조선조 초기에 있어서는 단순한 기술상의 병사가 아니라 그 사회 구성 관계에 있어서의 신분의 운명적인 존재상이었던 것이다.
쪽수▶P3-3梁誠之의 이 列擧가 當時의 諸色軍人을 總히 網羅한 것이냐 아니냐는 姑捨하고라도, 그가 諸色軍人을 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兵種論에 依하면 오늘날쪽수▶P4-1의 技術的인 兵種과는 判異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當時의 兵種이 身分에 制限되여 決定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役軍이라든가 使命軍이라 하는 範疇를 番上軍이라든가 步軍이라든가 하는 範疇와 같은 價値에 있어서 論하였으나, 後者는 技術的인 것이었으므로 使令, 役軍과 同一視될 性質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兵種論에서 船軍을 빼었고 또 役軍인 隊卒과 公賤 中에서도 選上奴를 不問에 붙였다. 使令인 攝六十도 番上軍이요 步軍이었다. 그의 兵種論에 疎漏한 憾이 없지 않지만, 大體로 身分을 土臺로 하여 兵種을 論한 데에 그의 卓見이 보인다. 大概, 當時에 있어서 兵種을 區分하는 것은 身分이었고, 또한 反對로 軍役(國役)의 負擔에 있어서 다시 그의 身分은 細分化되였으니, 例하면, 身良役賤의 身分이었기 때문에 防牌는 활과 칼 代身에 굉이와 삽을 드는, 兵役 아닌 役軍이라는 兵役을 졌으며, 또한 그가 役軍인 防牌라는 兵役을 지는 데에서, 그의 身分은 身良役賤 中의 細分化된 防牌라는 身分이 되었든 것이다. 兵士라는 것은 적어도 朝鮮朝 初期에 있어서는 單純한 技術 上의 兵士가 아니라 그 社會 構成 關係에 있어서의 身分의 運命的인 存在相이었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병사는 당시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는 국가 재정의 특이한 운용에 의하여, 또 한번 윤색을 받게 되니, 당시의 병제 조직의 해부는 이 두 가지의 요소를 실마리로 하여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신분의 구현이었던 이 이조초기의 인민은 법제적인 호구법에 의하여 편성되고 조직되어, 국가에 대한 여러가지 부담을 졌다. 병역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병사는 이 호구법의 수단에 의하여 처음 전 인민층에서 추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추출된 병사는 그의 신분적 제한에 있어서 ‘성색’되었고, 국가는 이를 제가 가지는 특이한 방법으로서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추출 편성되는 병사는, 또 다시 서반 관료 조직의 일원으로서 편입되어, 처음 구체적인 병사가 되었던 지라, 이 두 가지 과정에 의하여 처음, 단순한 인정(人丁)은 일개의 전문적인 병사가 되니, 전자의 과정은 후자의 그것의 토대요, 후자의 그것은 전자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본론에 있어서는 군역의 조직의 근본을 이루는 이 호구법에서 그치기로 한다.
쪽수▶P4-2이러한 意味의 兵士는 當時 一般的 自然經濟를 土臺로 하는 國家 財政의 特異한 運用에 依하야, 또 한번 潤色을 받게 되니, 當時의 兵制 組織의 解剖는 이 두 가지의 要素를 실마리로 하야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身分의 具現이었든 이 李朝 初期의 人民은 法制的인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組織되여, 國家에 對한 여러가지 負擔을 젔다. 兵役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兵▶P5-1士는 이戶口法의 手段에 依하야 처음 全 人民層에서 抽出되였든 것이다. 이렇게 하야 抽出된 兵士는 그의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 「成色」되였고, 國家는 이를 제가 가지는 特異한 方法으로서 組織하였든 것이다. 이렇듯 抽出 編成되는 兵士는, 또 다시 西班 官僚 組織의 一員으로서 編入되여, 처음 具體的인 兵士가 되였든 지라, 이 두 가지 過程에 依하야 처음, 單純한 人丁은 一個의 專門的인 兵士가 되니, 前者의 過程은 後者의 그것의 土臺요, 後者의 그것은 前者의 當然한 結果이지마는, 本論에 있어서는 軍役의 組織의 根本을 이루는 이 戶口法에서 그치기로 한다.
호구법이라는 것이 당시에 있어서의 신분 제도에 의존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호구법이야말로 그 신분 제도를 강화하는 관건이었던 것이다. 곧 호적이라는 것이 그의 신분에 따라서, 특권의 증명서도 되고 병역의 대장도 되는 것이었다. 이조초기의 전 인민이 호구법에 의하여 편성되고, 인정이 이에 의하여 추출되고, 이렇듯 추출된 인정 중에서 또 군인인 정정(正丁)이 다시 추출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형식 중에는, 고려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중국(특히 당)에 배운 바도 많았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허무한 시간적 또는 공간적 관계에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본론의 취재할 문제는 당시 사회의 구성 관계에서 인과 지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형식적인 인연이 그다지 중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시의 호적이 여하히 중국식을 빌렸고, 고려의 형식에 배웠다고 하더래도, 당시의 독특한 사회 구성 관계를 몰각한다면, 그는 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회득(會得)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이, 군역과 호구법을 논한다는 제일보(一步)에서 당시의 전법을 논하게 된 것이다. 대개, 호구의 편성에 당면하여 이에 본질적인 제한을 줄 것은 그의 토지에 대한 소유 관계이기 때문이다.
쪽수▶P5-2戶口法이라는 것이 當時에 있어서의 身分 制度에 依存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戶口法이야말로 그 身分 制度를 强化하는 關鍵이었든 것이다. 곧 戶籍이라는 것이 그의 身分에 따라서, 特權의 證明書도 되고 兵役의 臺帳도 되는 것이었다. 李朝 初期의 全 人民이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人丁이 이에 依하야 抽出되고, 이렇듯 抽出된 人丁 中에서 또 軍人인 正丁이 다시 抽出되는 이러한 過程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形式 中에는, 高麗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中國(特히 唐)에 배운 바도 많었겠지만, 吾人은 이러한 虛無한 時間的 또는 空間的 關係에 言及치 않으랴 한다. 그것은 本論의 取材할 問題는 當時 社會의 構成 關係에서 因果 지워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形式的인 因緣이 그다지 重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當時의 戶籍이 如何히 中國式을 빌었고, 高麗의 形式에 배웠다고 하드래도, 當時의 獨特한 社會 構成 關係를 沒却한다면, 그는 이에 對하야 아모것도 會得치 몯할 것이▶P6-1다. 이렇듯이, 軍役과 戶口法을 論한다는 第一步에서 當時의 田法을 論하게 된 것이다. 大概, 戶口의 編成에 當面하야 이에 本質的인 制限을 줄 것은 그의 土地에 對한 所有 關係이기 때문이다.


































본문2: 2.전법과 호


이조초기의 전법은 공양왕 3년에 창정된 소위 과전법에 의하여, 최후의 결정을 보았던 것은 주지되는 사실이다. 고려사 권78, 지(志)권 제32, 식화1에 보이는바 공양왕 3년 5월, 도평의사사의 상언에 의하여 창정된 과전법의 세목은, 전제 개혁론자들의 종래 창도하여 온 것의 실천인 점에 있어서, 그것은 물론 고려말 대토지 사유와 전연 대척적인 것이었다. 즉 대토지 사유에 의한 이 사회의 근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의 분배의 불균형을 타파한 것에, 그의 최대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전법의 창정에 의하여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권력적 간섭과, 그 분배의 균형이 꾀하여 졌던 것이다. 이하, 이 과전법의 세목 중에서 수속·상속·벌칙 등을 쟁하하고, 직접 이 분배와 소유에 관한 항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쪽수▶P6-2李朝 初期의 田法은 恭讓王 三年에 創定된 所謂 科田法에 依하야, 最後의 決定을 보았든 것은 周知되는 事實이다. 高麗史 卷七十八, 志卷 第三十二, 食貨一에 보여지는바 恭讓王 三年 五月, 都評議使司의 上言에 依하야 創定된 科田法의 細目은, 田制 改革論者들의 從來 唱導하여 온 것의 實踐인 點에 있어서, 그것은 勿論 麗末 大土地 私有와 全然 對蹠的인 것이었다. 即 大土地 私有에 依한 이 社會의 根本的인 生產手段인 土地의 分配의 不均衡을 打破한 것에, 그의 最大 眼目이 있었든 것이다. 이 科田法의 創定에 依하야 土地 所有에 對한 國家의 權力的 干涉과, 그 分配의 均衡이 꽤하여 졌든 것이다. 以下, 이 科田法의 細目 中에서 手續·相續·罰則 等을 除外하고, 直接 이 分配와 所有에 關한 項目을 들면 如左하다.

一. 拘收公私徃年田籍 盡行檢覆 覈其眞僞 因舊損益 以定陵寢·倉庫·宮司·軍資寺 及寺院·外官職田·廪給田·鄕·津·驛吏·軍匠·雜色之田
一. 京畿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第一科, 自在內大君 至門下侍中 一百五十結 (中略) 第十八科 權務散職 十結
一. 外方王室之藩 宜置軍田 以餋軍士 東西兩界 依舊充軍需 六道閑良官吏 不論資品高下 隨其本田多少 各給軍田十結, 或 五結.
一. 軍·鄉吏及諸有役人 如有死亡無後者 逃避本役者 赴京從仕者則 代其役者 遞受其田
一. 今後 凡稱私田 其主雖有罪犯 不許沒爲公田
一.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倡妓·僧尼等人 身及子孫 不許受田
一.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糓三十斗 此外有橫歛者 以曮論
一. 除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外 凡有田者 皆納稅 水田一結 白米二斗 旱田一結 黃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一. 田主奪田客所耕田 一負至五負 笞二十 每五負 加一等 罪至杖八十 職牒不收 一結以上 其丁許人遞受
一. 佃客 母得將所耕田 擅賣·擅興別戶之人 如有死亡·移徒·戶絕者 多占餘田 故令荒蕪者 其田聽從田主住意區處

쪽수▶P6-3

一. 拘收公私徃年田籍 盡行檢覆 覈其眞僞 因舊損益 以定陵寢·倉庫·宮司·軍資寺 及寺院·外官職田·廪給田·鄕·津·驛吏·軍匠·雜色之田
一. 京畿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第一科, 自在內大君 至門下侍中 一▶P7-1百五十結 (中略) 第十八科 權務散職 十結
一. 外方王室之藩 宜置軍田 以餋軍士 東西兩界 依舊充軍需 六道閑良官吏 不論資品高下 隨其本田多少 各給軍田十結, 或 五結.
一. 軍·鄉吏及諸有役人 如有死亡無後者 逃避本役者 赴京從仕者則 代其役者 遞受其田
一. 今後 凡稱私田 其主雖有罪犯 不許沒爲公田
一.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倡妓·僧尼等人 身及子孫 不許受田
一.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糓三十斗 此外有橫歛者 以曮論
一. 除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外 凡有田者 皆納稅 水田一結 白米二斗 旱田一結 黃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一. 田主奪田客所耕田 一負至五負 笞二十 每五負 加一等 罪至杖八十 職牒不收 一結以上 其丁許人遞受
一. 佃客 母得將所耕田 擅賣·擅興別戶之人 如有死亡·移徒·戶絕者 多占餘田 故令荒蕪者 其田聽從田主住意區處

과전법의 창정은 종래의 대토지 사유의 양기(揚棄)인 점에 있어서 사전의 공전화는 물론, 그의 분배가 대형의 토지 사유에서 소형의 토지 소유로 변하였다는 것에 최대 안목이 있다는 것은 상술한 바이다. 앞서 든 과전법의 세목에 의하면 경기에 있어서만 사전이 인정될 뿐으로, 명목은 여하튼 중앙 권력이 미치기 쉬운 거리에 두었고, 지방 6도에서도 수기사전다소(●●●●●●)하여 10결 혹은 5결의 사전이 군전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면 또 이러한 토지 분배에 있어서 소유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현대문주1▶우선, 이에 대하여 신진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씨에게 들어보기로 하자.[a 1] 그의 의견은 대개 이러하였다.
쪽수▶P7-2科田法의 創定은 從來의 大土地 私有의 揚棄인 點에 있어서 私田의 公田化는 勿論, 그의 分配가 大型의 土地 私有에서 小型의 土地 所有로 變하였다는 것에 最大 眼目이 있다는 것은 上述한 바이다. 前揭 科田法의 細目에 依하면 京畿에 있어서만 私田이 認定될 뿐으로, 名目은 如何튼 中央 權力이 미치기 쉬운 距離에 두었고, 地方 六道에서도 隨其私田多少(●●●●●●)하야 十結 或은 五結의 私田이 軍田으로서 認定▶P8-1받었다. 그러면 또 이러한 土地 分配에 있어서 所有 關係는 어떠하였든가. 원문주1▶于先, 이에 對하야 新進 深谷敏鐵氏에게 들어보기로 하자.[1] 그의 意見은 大概 이러하였다.
전국의 전지는 그 전종의 여하를 물문하고, 국가의 권력적 간섭을 받게 되니, 곧 국가는 전국의 전지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이러므로 전국의 전지는 모두가 공전이요, 뿐만 아니라,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을 제외한 모든 전지는 국가에 대하여 납세의 의무를 지고 수전자(受田者)의 전인 공신전과 같은 것은 납세의 의무까지도 지지 않는 전지라 하더라도 국가를 이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므로 그냥 사전이 아니라 ‘공전 중의 사전’이라. 국가는 전지에 대하여 수세·수조의 이중 수취를 행하는데, 그 중에는 면세의 전지도 있고, 과전·군전·공신전 등(수전자의 전)에 대하여는 국가는 수조하지 않으니 이들이 곧 ‘공전 중의 사전’인 것이다. 나머지의 전지는 국가 직속의 전지로서 특제한 자 외 납세·납조라는 이중의 지대를 국가에 대하여 지불하므로 그들은 ‘공전 중의 공전’이라 할 수 있다. 또 수전자의 전인 경우에는 수전자는 그의 전지에 대하여 국가 대신에 전객(佃客)에게서 수조를 할 수 있으니, 곧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전주는 전객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하여 천매·천여하지를 못하니 전객은 그 토지에 대하여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같은 한 조각의 전지를 들어 그것의 소유 관계의 내용을 살핀다면 국가·전주·전객의 3요소가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위와 같은 3개의 지배 형태를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쪽수▶P8-2全國의 田地는 그 田種의 如何를 勿問하고, 國家의 權力的 干涉을 받게 되니, 곧 國家는 全國의 田地에 對하야 「處分 管理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한다. 이러므로 全國의 田地는 모다가 公田이요, 뿐만 아니라, 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을 除外한 모든 田地는 國家에 對하야 納稅의 義務를 지고 受田者의 田인 功臣田과 같은 것은 納稅의 義務까지도 지지 않는 田地라 하드래도 國家를 이에 對하야 「處分 管理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하므로 그냥 私田이 아니라 「公田 中의 私田」이라. 國家는 田地에 對하야 收稅·收租의 二重 收取를 行하는데, 그 中에는 免稅의 田地도 있고, 科田·軍田·功臣田 等(受田者의 田)에 對하야는 國家는 收租치 않으니 이들이 곧 「公田 中의 私田」인 것이다,. 남어지의 田地는 國家 直屬의 田地로서 特除한 者 外 納稅·納租라는 二種의 地代를 國家에 對하야 支拂하므로 그들은 「公田 中의 公田」이라 할 수 있다. 또 受田者의 田인 境遇에는 受田者는 그의 田地에 對하야 國家 代身에 佃客에게서 收租를 할 수 있으니, 곧 「收租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한다. 田主는 佃客이 耕作하는 土地에 對하야 擅賣·擅與하지를 못하니 佃客은 그 土地에 對하야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같은 한 조각의 田地를 들어 그것의 所有 關係의 內容을 살핀다면 國家·田主·佃客의 三要素가 그를 支配하고 있어서, 如上 三個의 支配 形態를 抽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과전법의 창정은 대형의 토지 사유를 소형의 토지 공유(후카야씨의 말대로 토지분배라고 할까)로 바꾸어 놓았으니, 곧 과전법의 본질적인 두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쓰인 과전법의 세목에 의하면 경기에 있어서만 150결 이하의 사전이 용인되고 그것은 그의 명목으로 하는 바가 어떠하였든 국가 권력의 가장 미치기 쉬운 거리에다가 둔 것으로, 외방 6도에는 10결 내지 5결의 사전이 군전이라는 명목 아래에 용치되었을 뿐이었다. 이 군전은 위에 쓰인 세목에 의하면 외방 6도에 있는 것으로서 경기라든지 양계에 있어서는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양계 또는 경기에 시위왕실하는 병사가 있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니, 곧 군전을 받은 자는 반드시 시위왕실할 의무가 있더라도 반대로 시위왕실하는 자가 반드시 군전의 절수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전이라는 것은 소형의 ‘공전 중의 사전’으로서 전세만을 국가에 지불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군전은 수기본전다소(●●●●●●)하여 절수되었던 것이라, 일반 군인이 가지고 있는 곧 생활의 지반으로 하고 있는 전지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군전은 군인 중의 특수한 부류—수전패—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그들은 경기와 양계를 제한 지방에서 소형의 ‘공전 중의 사전’인 10결 혹 5결을 ‘수조권’에 기초하여 ‘지배’하는 자였다. 나머지의 군인은 귀족 양반의 출신을 별문제로 하고는 군전의 절수를 받지 못하고, 그들의 생활 지반은 ‘공전 중의 공전’이었고 위에 쓰인 세목에 보이는 전객이었던 것이다. 즉, ‘군향리 및 제유역인’의 전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그들은 납세·납조를 하여야 하고,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하는 자였다. 따라서 경기와 양계에 군전이 없다고 함은 이 공전 중의 사전으로서의 군전을 말함이요, 이러한 군인전이라고나 할 공전 중의 공전은 전국적으로 편재하였다고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군인과 향리와 기타 유역인이 전국적으로 편재하고 또 군인전이라고나 할 것의 소유 관계의 내용이 상술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이렇듯 군인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납조함으로써 그의 전객을 소작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조(租)라는 것이 1결 20석(2백두)에 대하여 30두, 2석이라는 10분의 1이라는 것은 그들 전객을 오히려 오늘날의 자작농에 견줄 수 있게 한다.
쪽수▶P9-1이렇듯, 科田法의 創定은 大型의 土地 私有를 小型의 土地 公有(深谷氏의 말대로 土地支配라고 할까)로 바꾸워 놓았으니, 곧 科田法의 本質的인 二面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上記 科田法의 細目에 依하면 京畿에 있어서만 百五十結 以下의 私田이 容認되고 그것은 그의 名目으로 하는 바가 어떠하였든 國家 權力의 가장 미치기 쉬운 距離에다가 둔 것으로, 外方 六道에는 十結 乃至 五結의 私田이 軍田이라는 名目 下에 容置되였을 뿐이었다. 이 軍田은 上記 細目에 依하면 外方 六道에 있는 것으로서 京畿라든지 兩界에 있어서는 그의 存在를 否定하고 있다. 그러나 兩界 또는 京畿에 侍衛 王室하는 兵士가 있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니, 곧 軍田을 받은 者는 반듯이 侍衛 王室할 義務가 있드래도 反對로 侍衛 王室하는 者가 반다시 軍田의 折受者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軍田이라는 것은 小型의 「公田 中의 私田」으로서 田稅만을 國家에 支拂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軍田은 隨其本田多少(●●●●●●)하야 折受되였든 것이라, 一般 軍人이 가지고 있는 곧 生活의 地盤으로 하고 있는 田地와는 區別되어야 하는 것이다. 軍田은 軍人 中의 特殊한 部類—受田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그들은 京畿와 兩界를 除한 地方에서 小型의 「公田 中의 私田」인 十結 或 五結을 「收租權」에 基하야 「支配」하는 者이었다. 남어지의 軍人은 貴族 兩班의 出身을 別問題로 하고는 軍田의 折受를 받지 못하고, 그들의 生活 地盤은 「公田 中의 公田」이었고 上記 細目에 보이는 佃客이었든 것이다. 即, 「軍鄕吏 及 諸有役人」의 田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그들은 納稅·納租를 하여야 하고,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하는 者이었다. 따라서 京畿와 兩界에 軍田이 없다고 함▶P10-1은 이 公田 中의 私田으로서의 軍田을 말함이요, 이러한 軍人田이라고나 할 公田 中의 公田은 全國的으로 遍在하였다고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軍人과 鄕吏와 其他 有役人이 全國的으로 遍在하고 또 軍人田이라고나 할 것의 所有 關係의 內容이 上述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이렇듯 軍人田이라고 할 만한 것은 納租함으로써 그의 佃客을 小作人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租라는 것이 一結 二十石(二百斗)에 對하야 三十斗, 二石이라는 十分之一이라는 것은 그들 佃客을 오히려 오늘날의 自作農에 견줄 수 있게 한다.
당시의 병제가 디디고 서는 기초는 토지 소유 관계뿐만은 아니었다. 봉건적 사회라는것은 신분제라는 질긴 제한이 그의 주장된 징표를 이루는 것으로서, 병제는 또한 이 신분적 제한을 기초로 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대체 신분이라는 것은 단순한 특권, 혹은 전통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기본 조건에 기초한 계급이라는 것의 법률적인 현상 형태겠으며, 병제가 디디고 서는 또 하나의 기초인 신분적 제한은 병제와 전제와의 관계와 독립하여 따로 병제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병제와 전제와의 관계의 중간적 계기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토지 제도는 직접 병종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신분 제한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당시의 군인은 그 신분에 의하여 병종의 결정되고, 또 이 병종이라는 것이 그의 신분을 다시 한 번 세분화시키는 것이었다. 선군은 양인이라 하였지만 또 선군이라는 양인 중의 한 신분층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0-2當時의 兵制가 디디고 서는 基礎는 土地 所有 關係뿐만은 아니었다. 封建的 社會라는것은 身分制라는 질긴 制限이 그의 주장된 徵表를 이루는 것으로서, 兵制는 또한 이 身分的 制限을 基礎로 하지 아니치 몯하였다. 大體 身分이라는 것은 單純한 特權, 或은 傳統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經濟的인 基本 條件에 基礎한 階級이라는 것의 法律的인 現象 形態이겠으며, 兵制가 디디고 서는 또 하나의 基礎인 身分的 制限은 兵制와 田制와의 關係와 獨立하여 따로이 兵制와 關係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兵制와 田制와의 關係의 中間的 契機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土地 制度는 直接 兵種과 關係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身分 制限을 通過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當時의 軍人은 그 身分에 依하야 兵種의 決定되고, 또 이 兵種이라는 것이 그의 身分을 다시 한 번 細分化시키는 것이었다. 船軍은 良人이라야 하였지마는 또 船軍이라는 良人 中의 한 身分層이 있었든 것이다.
당시의 신분층을 크게 나누어 귀족 양반과 양인과 천인, 또 양인과 천인의 중간층인 신량역천, 이 네 개의 기본층으로 나눌 수 있으니 그중 신량역천에 대하여는 세종실록, 원년 5월 경오조에,
쪽수▶P10-3當時의 身分層을 크게 나누어 貴族 兩班과 良人과 賤人, 또 良人과 賤人의 中間層인 身良役賤, 이▶P11-1 네 個의 基本層으로 나눌 수 있으니 그중 身良役賤에 對하야는 世宗實錄, 元年 五月 庚午條에,

國俗 以身良役賤者 或稱干 或稱尺

쪽수▶P11-2

國俗 以身良役賤者 或稱干 或稱尺

이라 하여 흔히 소위 간척의 무리라는 것이 곧 그들이다. 그들은 양인이면서도 국가에 의하여 천인이 질 역을 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분은 또 어떠한 경제적인 기본 조건에 서서 있었던가, 위의 과전법에 의하면,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와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볼 수 있었으니, 수조자인 전주와 경작자인 전객을 구별할 수 있었다. 전주는 국가 제(諸)기관과 사원을 제하고는 공신전·과전·군전의 절수자의 일군이었고, 그들은 소위 양반귀족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객이라는 것에는 ‘군·향리 내지 제유역인’으로서, 거기에는 양인과 신량역천과 천인이 넓게 포함되고 있다. 그 중 ‘공사천구·공상·매복맹인·무격·창기·승니 등인(等人)’은 ‘신(身) 및 자손’이 ‘불허수전’이므로, 이들 천인 무리는 양인과 신량역천과 더불어 토지에 대하여 ‘경작권에 기초한 지배’는 할 수 있으나, 양인처럼 수전하여 즉 수조자로서의 출세를 바랄 수 없는 자였다. 양인은 자유민으로서 사환(仕宦)하여 양반이 될 수 있으므로 법제적으로는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인 ‘수전’에도 참여할 수 있는 신분층이요, 또 천인은 국가 또—공천—개인에—사천—그 인격을 소유되는 자로서, 후자인 사천은 승려와 더불어 사민이므로 국역을 직접으로 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공천 중에서도 납공노비와 선상노비를 가릴 수 있어서, 선상은 다른 신분층과 같이 국역에 직접 당하는 자요 납공은 그 대신에 공을 바치는 자이다. 이러한 특별한 자를 제한 모든 신분층은 모두 다 군(국)역을 졌지만 거기에는 병역이라는 이름은 같으나 벼슬로서의 병역도 있었고 한 천역으로서의 병역도 있었으니, 그것은 모두가 다 이 신분적 제한의 당연소치(●●●●)였다. 또 위에도 한 차례 말한 바와 같이 그가 무슨 병역을 지느냐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신분이 제한할 것이고, 한 번 어떠한 병종이 되고 보면 그것이 곧 그의 더 자세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병종은 바로 그것이 신분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쪽수▶P11-3이라 하야 흔이 所謂 干尺의 徒라는 것이 곧 그들이다. 그들은 良人이면서도 國家에 依하야 賤人이 질 役을 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身分은 또 어떠한 經濟的인 基本 條件에 서서 있었든가, 우의 科田法에 依하면, 『收租權에 基한 土地支配』와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볼 수 있었으니, 收租者인 田主와 耕作者인 佃客을 區別할 수 있었다. 田主는 國家 諸機關과 寺院을 除하고는 功臣田·科田·軍田의 折受者의 一群이었고, 그들은 所謂 兩班貴族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佃客이라는 것에는 『軍·鄉吏 及 諸有役人』으로서, 거기에는 良人과 身良役賤과 賤人이 넓이 包含되고 있다. 그 중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娼妓·僧尼 等人』은 『身 及 子孫』이 『不許受田』이므로, 이들 賤人 群은 良人과 身良役賤과 더부러 土地에 對하야 『耕作權에 基한 支配』는 할 수 있으나, 良人처럼 受田하야 即 收租者로서의 出世를 바랄 수 없는 者이었다. 良人은 自由民으로서 仕宦하야 兩班이 될 수 있으므로 法制的으로는 『收租權에 基한 土地支配』인 『受田』에도 叅與할 수 있는 身分層이요, 또 賤人은 國家 또—公賤—個人에—私賤—그 人格을 所有되는 者로서, 後者인 私賤은 僧侶와 더부러 私民이므로 國役을 直接으로 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公賤 中에서도 納貢奴婢와 選上奴婢를 가릴 수 있어서, 選上은 다른 身分層과 같이 國役에 直接 當하는 者요 納貢은 그 代身에 貢을 바치는 者이다. 이러한 特別한 者를 除한 모▶P12-1든 身分層은 모도 다 軍(國)役을 졌지만 거기에는 兵役이라는 일홈은 같으나 벼슬로서의 兵役도 있었고 한 賤役으로서의 兵役도 있었으니, 그것은 모도가 다 이 身分的 制限의 當然所致이었다. 또 우에도 一言한 바와 같이 그가 무슨 兵役을 지느냐는 것은 그의 基本的인 身分이 制限할 것이고, 한 번 어떠한 兵種이 되고 보면 그것이 곧 그의 더 仔細한 身分이 되였기 때문에 當時의 兵種은 바로 그것이 身分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국역과 토지 소유와의 관계가 신분적 제한이라는 중간 다리를 거쳐서 맺어지는 것이므로, 이에 이르러 우리는 임이 이들 병종의 복잡다기할 토지 소유 내용을 추상할 수 있거니와, 다시 나아가 당시의 일반 양인 병사만을 살피어 보더라도, 위에 해석한 과전법의 내용을 저 후카야씨처럼 개괄적으로만 검토하기에 그침을 망설이게 할 것이다. 군전의 절수자는 ‘시위왕실’할 의무가 있더라도 ‘시위왕실’하는 자가 반드시 군전 절수자가 아님은 상술한 바거니와, 일반 병사는 고사하고 양인의 토지의 수조권에 대해서는 법제적으로는 권리가 있으나, 예를 들면 정병의 시위패라는 것은 무수전패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국가의 이에 대한 전지 절수는 처음부터 고려될 바 아니었다. 태종 6년 5월, 수전품관의 시위의 법을 신명할 때 의정부는 계(啓)하여
쪽수▶P12-2이와 같이 國役과 土地 所有와의 關係가 身分的 制限이라는 中間 다리를 거치어서 맺히여 지는 것이므로, 이에 이르러 吾人은 임이 이들 兵種의 複雜多岐할 土地 所有 內容을 推想할 수 있거니와, 다시 나아가 當時의 一般 良人 兵士만을 살피어 본다드래도, 우에 解釋한 科田法의 內容을 저 深谷氏처럼 概括的으로만 檢討하기에 그침을 망서리게 할 것이다. 軍田의 折受者는 『侍衛王室』할 義務가 있드래도 『侍衛王室』하는 者가 반듯이 軍田 折受者가 아님은 上述한 바이어니와, 一般 兵士는 姑捨하고 良人의 土地의 收租權에 對해서는 法制的으로는 權利가 있으나, 例하면 正兵의 侍衛牌라는 것은 無受田牌에도 드러가지 못하고, 國家의 이에 對한 田地 折受는 처음부터 顧慮될 바 아니었다. 太宗 六年 五月, 受田品官의 侍衛의 法을 申明할새 議政府는 啓하야

현대문주2▶受田品官 全爲居京城 衛王室 載在六典 無識之徒 不顧立法之意 累年在外 以致衛虛疎 又憑受田 不肯應當外方軍役 本府會受敎旨以禁之 顧乃不長成法 只求自便 切見 外方侍衛軍·騎船軍·未受一畝之田 尙且長年從軍 受田品官則於京於外 一無所從 實爲不當 (下略) [a 2]

쪽수▶P12-3

원문주2▶受田品官 全爲居京城 衛王室 載在六典 無識之徒 不顧立法之意 累年在外 以致衛虛疎 又憑受田 不肯應當外方軍役 本府會受敎旨以禁之 顧乃不長成法 只求自便 切見 外方侍衛軍·騎船軍·未受一畝之田 尙且長年從軍 受田品官則▶P13-1於京於外 一無所從 實爲不當 (下略) [2]

이라 하였으니, 양인군 중의 절대 다수인 시위군·기선군이 개국의 순간부터 일무(一畝)의 전지도 절수되지 못했든 것이다. 양인이 이렇거든, 그 이하의 신분층인 신량역천·천인 중의 입종자(立從者)는 과전법의 명문이 없을지라도 자명한 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조초기의 소위 병사라는 대부분의 인민은 군전의 절수에 참여하지 못하고 “未受一畝之田”한 자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혹은 소위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들추어, 일반 병사의 빈곤을 단정하기 주저할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과전법 창정의 불철저성과 실제와 명목과의 괴리를 살피지 못하면 잘못일 것이다. 우리는 태종 3년 6월 사간원의 전제 조정에 관한 의견 중에서 이러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쪽수▶P13-2이라 하였으니, 良人軍 中의 絕對 多數인 侍衛軍·騎船軍이 開國의 瞬間부터 一畝의 田地도 折受되지 못했든 것이다. 良人이 이렿거든, 그 以下의 身分層인 身良役賤·賤人 中의 立從者는 科田法의 明文이 없을지라도 自明한 바 있을 것이다. 따라서 李朝 初期의 所謂 兵士라는 大部分의 人民은 軍田의 折受에 叅與치 못하고 『未受一畝之田』한 者이었음을 推論할 수 있다. 或은 所謂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들추어, 一般 兵士의 貧困을 斷定하기 躊躇할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科田法 創定의 不徹底性과 實際와 名目과의 乖離를 살피지 못하면 잘못일 것이다. 우리는 太宗 三年 六月 司諫院의 田制 調整에 關한 意見 中에서 이러한 實例를 볼 수 있다.

현대문주3▶公私賤隸·巫覡·娼妓·工商·僧尼·賣卜盲人等 身及子孫 不許受田 此誠萬世之令典也 今者 公私賤隸 濫受土田 以亂成法 十有七人 其所受之田 揔六百九十餘結 (下略)[a 3]

쪽수▶P13-3

원문주3▶公私賤隸·巫覡·娼妓·工商·僧尼·賣卜盲人等 身及子孫 不許受田 此誠萬世之令典也 今者 公私賤隸 濫受土田 以亂成法 十有七人 其所受之田 揔六百九十餘結 (下略)[3]

과전법의 명목으로 하는 바와 실제와의 괴리는 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후카야씨는 과전법의 명목으로 하는 바를 상세히 분석하여 저 3개의 토지분배 형태를 추출하였으나, 우리는 이것으로서 당시의 토지 소유 관계의 전부라 하지는 못한다. 이 사회에 있어서 명목으로 하는 바에만 충실하다가는 드디어 진리를 찾지 못하리라. 태종 6년, 좌정승 하윤의 민폐에 관한 일절(一節)에
쪽수▶P13-4科田法의 名目으로 하는 바와 實際와의 乖離는 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深谷氏는 科田法의 名目으로 하는 바를 詳細히 分析하야 저 三個의 土地支配 形態를 抽出하였으나, 吾人은 이것으로서 當時의 土地 所有 關係의 全部라 하지는 못한다. 이 社會에 있어서 名目으로 하는 바에만 忠實하다가는 드디여 眞理를 찾지 못하리라. 太宗 六年, 左政丞 河崙의 民弊에 關한 一節에

현대문주4▶又品官 鄕吏 廣占土田 招納流亡 並作半收 其弊甚於私田 私田一結 只收二石 並作一結 多取十餘石 (下略)[a 4]

쪽수▶P13-5

원문주4▶又品官 鄕吏 廣占土田 招納流亡 並作半收 其弊甚於私田 私田一結 只收二石 並作一結 多取十餘石 (下略)[4]

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병작의 경향은 이 글에서 벌써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소위 농장이라는 과전법의 취지에 역행하는 계기의 발전에 따라 더욱 심해져 갔을 것이다. 이조초기의 농장이 어떠한 과정을 걸어갔는가는 청구학총, 제17호 소재, 스도 요시유키(周藤吉之)씨의 논문에서 대개 그 현대문주5▶윤곽만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a 5] 이 병작이라는 것은 따라서 또 하나의 토지분배 형태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이 ‘병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라고 할 만한 것이야말로 이조초기의 토지 소유의 커다란 숨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이러한 ‘병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전주와 타인 간에 성립하는 것이요, 그것이 전주와 그가 소유하는 사천과의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듯 당시의 토지 소유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네 가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소유라는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판이한 것이었다. 이러한 토지 소유에 대한 질적인 차이와 또 그것의 양적인 차이가 이 사회에 있어서, 인민의 부(富)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미수일무지전(未受一畝之田)’하는 일반 병사는 과연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어떻게 하여 토지에 긴박되어 있었을까. 이 사회에 있어서 주장된 생산수단인 토지에 대한 질적인 또 양적인 차이가 그대로 호에 편성에 당하여 다기한 제한을 주었고, 또 이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복잡무쌍한 신분 제한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쪽수▶P14-1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並作의 傾向은 이 글에서 벌서 暗示되여 있는 것처럼, 所謂 農庄이라는 科田法의 趣旨에 逆行하는 契機의 發展에 따라 더욱 甚하여저 갔을 것이다. 李朝 初期의 農庄이 어떠한 過程을 걸어갔는가는 靑丘學叢, 第十七號 所載, 周藤吉之氏의 論文에서 大概 그 원문주5▶輪廓만이라도 斟酌할 수 있을 것이다.[5] 이 並作이라는 것은 따라서 또 하나의 土地支配 形態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이 『並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라고 할 만한 것이야말로 李朝 初期의 土地所有의 크다란 숨은 存在가 아니었든가. 이러한 『並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라고 할 만한 것은 그 田主와 他人 間에 成立하는 것이요, 그것이 田主와 그가 所有하는 私賤과의 間에 成立하는 關係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듯 當時의 土地 所有의 內容은 具體的으로는 네 가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所有라는 槪念과는 本質的으로 判異한 것이었다. 이러한 土地 所有에 對한 質的인 差異와 또 그것의 量的인 差異가 이 社會에 있어서, 人民의 富의 差異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未受一畝之田」하는 一般 兵士는 果然 質的으로 또 量的으로 어떻게 하야 土地에 緊縛되어 있었을까. 이 社會에 있어서 주장된 生產手段인 土地에 對한 質的인 또 量的인 差異가 고대로 戶에 編成에 當하야 多岐한 制限을 주었고, 또 이것이야말로 이 社會의 複雜無雙한 身分 制限의 基礎를 이루웠든 것이다.
조(租)와 부(賦)와 공(貢)은 당시의 국가의 인민에 대한 수취의 3대 부문으로, 전이출조(田以出租)하고 호이출부(戶以出賦)라 하여 호라는 것은 부라는 직접적 노력 수취의 법제적인 단위로 되어 있었다. 공양왕 3년의 전제개혁(과전법 창정)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복잡한 토지 소유 관계 밑에 성립된 이 사회의 호라는 것은 여하한 실정에 있었던가. 상술한바 토지 소유의 검토는 중외의 병역에 당할 인민의 부의 불균형을 결론지었다. 또 구체적인 일례에서, 그 경작자에는 더욱 불리한 토지 소유의 또 하나의 형(型)을 추출하였다. 여하튼 이 사회에 있어서의 부의 불균형은 벌써 태조 원년 9월, 도평의사사에 의하여 엉성하나마 호를 통하여 그 실정을 보여주고 있다.
쪽수▶P14-2租와 賦와 貢은 當時의 國家의 人民에 對한 收取의 三大 部門으로, 田以出租하고 戶以出賦라 하야 戶라는 것은 賦라는 直接的 勞力 收取의 法制的인 單位로 되어 있었다. 恭讓王 三年의 田制改革(科田法 創▶P15-1定)을 契機로 하야 새로운 複雜한 土地 所有 關係 밑에 成立된 이 社會의 戶라는 것은 如何한 實情에 있었든가. 上述한바 土地 所有의 檢討는 中外의 兵役에 當할 人民의 富의 不均衡을 結論지웠다. 또 具體的인 一例에서, 그 耕作者에는 더욱 不利한 土地 所有의 또 하나의 型을 抽出하였다. 如何튼 이 社會에 있어서의 富의 不均衡은 벌서 太祖 元年 九月, 都評議使司에 依하야 엉성하나마 戶를 通하야 그 實情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문주6▶一. 民丁 自十六歲 至六十歲當役 十丁以上爲大戶 五丁以上爲中戶 四丁以下爲小戶 計丁籍民 如有徭役 大月出一名 中戶井二 出一名 小戶井三 出一名 以均其役 若有流亡者 問其所以 尤加憐恤 務令完聚[a 6]

쪽수▶P15-2

원문주6▶一. 民丁 自十六歲 至六十歲當役 十丁以上爲大戶 五丁以上爲中戶 四丁以下爲小戶 計丁籍民 如有徭役 大月出一名 中戶井二 出一名 小戶井三 出一名 以均其役 若有流亡者 問其所以 尤加憐恤 務令完聚[6]

16세 이상으로써 성년이 되어 한 사람 분의 부담을 지고, 60세에 이르러 면역된다는 것은 이래 병역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이 기사의 대호·중호·소호가 인정의 다수로써 표준 삼은 것은 동시에 그 부를 표준 삼은 것과 다름 없으니, 태종 6년 11월에 경기를 제외한 지방의 호의 등급을 상호·중호·하호·불성호의 4등급으로 정할 때에 표준을 보면 알 수 있다.
쪽수▶P15-3十六歲 以上으로써 成年이 되여 한 사람 分의 負擔을 지고, 六十歲에 이르러 免役된다는 것은 爾來 兵役에 있어서도 變함이 없었다. 이 記事의 大戶·中戶·小戶가 人丁의 多數로써 標準 삼은 것은 同時에 그 富를 標準 삼은 것과 다름 없으니, 太宗 六年 十一月에 京畿를 除外한 地方의 戶의 等級을 上戶·中戶·下戶·不成戶의 四等級으로 定할 때에 標準을 보면 알 수 있다.

현대문주7▶議政府定煙戶米之法 以聞 京中 (中略) 外方 則有田十五結 男女十五日以上 爲上戶 田十結 男女十口以上 爲中戶田五結 男女五日以上 爲下戶 田一結 男女一二口 爲不成戶 幷三戶月爲一戶 (下略)[a 7]

쪽수▶P15-4

원문주7▶議政府定煙戶米之法 以聞 京中 (中略) 外方 則有田十五結 男女十五日以上 爲上戶 田十結 男女十口以上 爲中戶田五結 男女五日以上 爲下戶 田一結 男女一二口 爲不成戶 幷三戶月爲一戶 (下略)[7]

그런데, 세종 17년 3월에 이르러서는 호의 등급이 다시 5분(五分)되었다. 즉 대호·중호·소호·천호·천천호의 5등급이 바로 그것인데, 대개 부의 불균형의 발전의 결과일 것이다.
쪽수▶P15-5그런데, 世宗 十七年 三月에 이르러서는 戶의 等級이 다시 五分되였다. 即 大戶·中戶·小戶·殘戶·殘殘戶의 五等級이 바로 그것인데, 大概 富의 不均衡의 發展의 結果일 것이다.

현대문주8▶戶曹啓 各道各官戶籍 以田五十結 爲大戶 三十結以上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差等差役 京中五部 則以間架爲定 四十間以上 爲大戶 三十間以上 爲中戶 十間以上 爲小戶 五間以上 爲殘戶 四間以下 爲殘殘戶 差等戶籍施行[a 8]

쪽수▶P16-1

원문주8▶戶曹啓 各道各官戶籍 以田五十結 爲大戶 三十結以上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差等差役 京中五部 則以間架爲定 四十間以上 爲大戶 三十間以上 爲中戶 十間以上 爲小戶 五間以上 爲殘戶 四間以下 爲殘殘戶 差等戶籍施行[8]

여기에는 사천은 심에 들어있을 리 없고, 신분적 제한에 있어서는 공천·신량역천·양인·양반을 개괄한 것이려니와, 그 소위 전결이라는 것이 여하한 질의 것인가, ‘수조권’에 기초한 것인가, 혹은 ‘경작권’ 또 ‘병작권’에 기초한 것인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전결의 양적인 차이에서 오는 호의 차등은 또한 그 전결 소유 내용의 질적인 차이를 내포하는 것일 것이며, 그 호의 주인공 되는 사람의 신분을 반영하고 있으리라 함은 모험이 아닐 줄 생각한다. 그리고 이 호조의 계(啓)는 소위 청허(聽許)를 얻었다는 명문(明文)이 없지만, 이대로 실시되었다는 것은 익년 7월, 강원도 감사의 계(啓)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동시에 그 도(道)에 있어서는 소위 천천호의 절대적 다수임을 볼 수 있다.
쪽수▶P16-2여기에는 私賤은 심에 들어있을 理 없고,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는 公賤·身良役賤·良人·兩班을 概括한 것이려니와, 그 所謂 田結이라는 것이 如何한 質의 것인가, 『收租權』에 基한 것인가, 或은 『耕作權』 또 『並作權』에 基한 것인가 確實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田結의 量的인 差異에서 오는 戶의 差等은 또한 그 田結 所有 內容의 質的인 差異를 內包하는 것일 것이며, 그 戶의 主人公 되는 사람의 身分을 反映하고 있으리라 함은 冒險이 아닐 줄 생각한다. 그리고 이 戶曹의 啓는 所謂 聽許를 얻었다는 明文이 없지마는, 이대로 實施되였다는 것은 翌年 七月, 江原道 監司의 啓에 依하야 알 수 있다. 同時에 그 道에 있어서는 所謂 殘殘戶의 絕對的 多數임을 볼 수 있다.

현대문주9▶今定諸道戶籍 五十結以上 爲大戶 二(三?)十結以上 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 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然 此道二十六官 民戶摠一萬一千五百三十有八 其中大戶十 中戶七十一 小戶一千六百四十一 殘月二千四十三 殘殘戶七千七百七十三 地狹民少 而嶺西 則山田所出倍於正田 嶺外 則又有魚鹽之利 若以他道成籍 分定差役 則非唯定役爲難 勞逸不均 今後道內戶籍 以二十結以下 十結以上 爲中戶 六結以上 爲小戶 四結以上 爲殘戶 三結以下 爲殘殘戶 從之[a 9]

쪽수▶P16-3

원문주9▶今定諸道戶籍 五十結以上 爲大戶 二(三?)十結以上 爲中戶 十結以上 爲小戶 六結以上 爲殘戶 五結以下 爲殘殘戶 以爲定式 然 此道二十六官 民戶摠一萬一千五百三十有八 其中大戶十 中戶七十一 小戶一千六百四十一 殘月二千四十三 殘殘戶七千七百七十三 地狹民少 而嶺西 則山田所出倍於正田 嶺外 則又有魚鹽之利 若以他道成籍 分定差役 則非唯定役爲難 勞逸不均 今後道內戶籍 以二十結以下 十結以上 爲中戶 六結以上 爲小戶 四結以上 爲殘戶 三結以下 爲殘殘戶 從之[9]

유래, 강원도라는 데는 천하의 빈도(貧道)로서, 그는 그 도의 생산력이 다른 도에 미치지 못하는 데에서 근본적인 이유를 찾겠지만, 상식적으로는 부호가 적은 데에 그 빈도인 까닭이 있으므로, 빈호가 많다고 하여 빈도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강원도 감사의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자명한 일이다. 부도(富道)라고 하는 경상도는 빈호가 적어서 부도였던 것은 아니다. 실로 하3도라는 데는 부호의 연수(淵藪)였던 동시에 빈호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강원도에 있어서의 천천호의 절대적 다수는 드디어 전국적인 천천호의 다수적 존재를 연역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천천호란 토지분배에 대하여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빈약한 것이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이조초기에 있어서의 소위 ‘단한’한 군호의 본질적인 조건을 이루는 것이었고, 또 이 ‘단한’한 데에서야말로 봉족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7-1由來, 江原道란 데는 天下의 貧道로서, 그는 그 道의 生產力이 他道에 미치지 몯하는 데에서 根本的인 理由를 찾겠지마는, 常識的으로는 富戶가 적은 데에 그 貧道인 所以가 있으므로, 貧戶가 많다고 하야 貧道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江原道 監司의 말을 기다리지 않드래도 自明한 일이다. 富道라고 하는 慶尙道는 貧戶가 적어서 富道이었든 것은 아니다. 實로 下三道라는 데는 富戶의 淵藪이었든 同時에 貧戶의 巢窟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江原道에 있어서의 殘殘戶의 絕對的 多數는 드디어 全國的인 殘殘戶의 多數的 存在를 演繹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殘殘戶란 土地支配에 對하야 質的으로나 量的으로 나 貧弱한 것이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李朝 初期에 있어서의 所謂 「單寒」한 軍戶의 本質的인 條件을 이루는 것이었고, 또 이 「單寒」한 데에서야말로 奉足이라는 것이 주워지는 所以가 있었든 것이다.



























본문3: 3.호수와 봉족


전자에 말한 바와도 같이 일반 군인의 경제적 지반이 박약한 데다가, 그 중 특별한 자를 제외하고는, 녹봉미(祿俸米)의 관선(官船)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그 입역의 기간 중의 비용은 모두 다 자변(自辨)이었다. 이런 것은 국가에서 지우는 큰 부역에 있어서는 공통한 현상으로 정군이 입역하는 데 대하여 그 역에 해당하지 않는 나머지의 사람으로서 봉족을 삼아, 이에 대한 비용을 조변(調辨)하게 하였다. 세종실록에 봉족에 관한 이런 설명이 있다.
쪽수▶P18-1前者에 말한 바와도 같이 一般 軍人의 經濟的 地盤이 薄弱한 데다가, 그 중 特別한 者를 除外하고는, 祿俸米의 官船에도 叅與치 못하고, 그 立役의 期間 中의 費用은 모도 다 自辨이었다. 이런 것은 國家에서 지우는 큰 賦役에 있어서는 共通한 現象으로 正軍이 立役하는 데 對하야 그 役에 當치 않는 남어지의 사람으로서 奉足을 삼아, 이에 對한 費用을 調辨케 하였다. 世宗實錄에 奉足에 關한 이런 說明이 있다.

현대문주1▶凡正一名 給餘丁 使之出財力 以助正丁 國俗謂之奉足[a 10]

쪽수▶P18-2

원문주1▶凡正一名 給餘丁 使之出財力 以助正丁 國俗謂之奉足[10]

봉족은 조정(助丁), 또는 관하(영안도), 인록(제주도)이라고도 하니 이는 인정에 대하여 부를 때요, 호로써, 이런 일에 당하게 할 때는 이를 봉족호 또는 조호(助戶)라고 한다. 그리고 군역에 있어서는 호수(戶首)라고 하여 그 호의 장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이에 당하고, 봉족은 그에게 인솔되는 나머지의 인정이 당하게 되었었다. 이러한 일은 물론 호적의 수단을 빌려서 처음 실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역부담의 단위로서의 호는 전 절에서 논한 바와 같은 경제적인 기초 조건 때문에 다수한 인정을 옹(擁)할 큰 호도 있고, 불성호와 같은 그 자신 단독으로는 입역이 불가능한 호도 있었다. 전자에 관하여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본다.
쪽수▶P18-3奉足은 助丁, 또는 管下(永安道), 人祿(濟州島)이라고도 하니 이는 人丁에 對하야 부를 때요, 戶로써, 이런 일에 當케 할 때는 이를 奉足戶 또는 助戶라고 한다. 그레고 軍役에 있어서는 戶首라고 하야 그 戶의 長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이에 當하고, 奉足은 그에게 引率되는 남어지의 人丁이 當하게 되였었다. 이러한 일은 勿論 戶籍의 手段을 비러서 처음 實行할 수 있었다. 그리고 國役負擔의 單位로서의 戶는 前節 所論한 바와 같은 經濟的인 基礎 條件 때문에 多數한 人丁을 擁할 큰 戶도 있고, 不成戶와 같은 그 自身 單獨으로는 立役이 不可能한 戶도 있었다. 前者에 關하야 우리는 이러한 實例를 본다.

현대문주2▶(上略) 各官大小인민等 家產排置 衣食各備人 數多率居 稱爲一戶者 勿令除出 仍舊完接[a 11](下路)

쪽수▶P19-1

원문주2▶(上略) 各官大小人民等 家產排置 衣食各備人 數多率居 稱爲一戶者 勿令除出 仍舊完接[11] (下路)

이러한 수개(數個)의 살림을 포함하는 큰 호도 있는 일방에 불성호, 무가호와 같은 빈호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자와 같은 경우에는 그 자신 단독으로 입역이 불가능하므로, ‘3가위1호’·’5정위1호’ 내지는 ‘3정위1호’라는 통합한 법제적 범주로서의 호에 의하여 병역 기타 수시의 역에 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의미의 호는 이 사회에 있어서처럼, 천천호와 같은 단한한 호가 절대적 다수로 존재하는 경우에는 입역의 단위로서의 호의 거진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3가위1호’하자는 논의는 저 유명한 태조 ‘안변지책’에서 벌써 보이는 바로 ‘3정위1호’라는 것과 본질적도 하등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앞 절 인용문 중의 “불성호를 병3호하여 위1호”라는 말도 또한 같은 것이다. ‘병3호’의 호는 한 ‘살림’이란 뜻일 것이고, ‘위1호’의 호는 이 법제적인 범주로서의 호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대개 3가로써 1호를 만든다는 등의 일은, 저 단한한 호의 경우이므로, 이에는 성인 남자인 정(丁)이 둘씩이나 셋씩이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하여, 병역의 단위로서의 호는 부호인 경우에는 그 자신 단독으로 한낱의 단위가 되는 것이지만, 절대적 다수인 빈호의 경우에는 ‘5정위1호’ 내지는 ‘3정위1호’와 같은 법제적인 단위로서의 호가 한낱의 단위가 되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정군인 호수는 그 집의 가장이요, 봉족은 그 집의 솔정인 경우도 있고(부호), 이런 의미를 떠나서 호수와 봉족과의 관계가 성립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빈호)
쪽수▶P19-2이러한 數個의 살림을 包含하는 큰 戶도 있는 一方에 不成戶, 無家戶와 같은 貧戶가 있음을 닞어서는 안 될 것이다. 後者와 같은 境遇에는 그 自身 單獨으로 立役이 不可能함으로, 「三家爲一戶」·「五丁爲一戶」 乃至는 「三丁爲一戶」라는 統合한 法制的 範疇로서의 戶에 依하야 兵役 其他 隨時의 役에 當케 하였다. 이러한 意味의 戶는 이 社會에 있어서처럼, 殘殘戶와 같은 單寒한 戶가 絕對的 多數로 存在하는 境遇에는 立役의 單位로서의 戶의 거진 大部分을 占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三家爲一戶」하자는 論議는 저 有名한 太祖 「安邊之策」에서 벌서 보이는 바로 「三丁爲一戶」라는 것과 本質的도 何等 다름이 없는 것이다. 前節 引用文 中의 「不成戶를 幷三戶하야 爲一戶」라는 말도 또한 같은 것이다. 「幷三戶」의 戶는 한 「살림」이란 뜻일 것이고, 「爲一戶」의 戶는 이 法制的인 範疇로서의 戶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大概 三家로써 一戶를 맨든다는 等의 일은, 저 單寒한 戶의 境遇이므로, 이에는 成人 男子인 丁이 둘式이나 셋式이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하야, 兵役의 單位로서의 戶는 富戶인 境遇에는 그 自身 單獨으로 한낱의 單位가 되는 것이지만, 絕對的 多數인 貧戶의 境遇에는 「五丁爲一戶」 乃至는 「三丁爲一戶」와 같은 法制的인 單位로서의 戶가 한낱의 單位가 되는 것이 通例이다. 따라서 正軍인 戶首는 그 집의 家長이요, 奉足은 그 집의 率丁인 境遇도 있고(富戶), 이런 意味를 떠나서 戶首와 奉足과의 關係가 成立하는 境遇도 있을 것이다. (빈호)
군역이 그의 신분 제한에 의하여 한낱 은상(恩賞)도 되고 또는 한낱 고역도 된다는 것을 앞서 논하였다. 신분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 있어서 생산수단인 토지의 지배와 또 양적인 분배에 의하여 결정되는 이상, 신분에 있어서의 번쇄한 차등은 그대로 호라는 것의 번쇄한 차등에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신분적 제한은 제색 군인의 호수와 봉족과의 관계를 여하히 결정하였는가. 그것이 한 개의 영예인 병역은 부호에 의하여 지워지는 것은 물론, 그것이 호수에 의하여 입역되었다는 것 또한 재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의 부역인 때, 그것은 호수된 자—빈호를 모아 법제적으로 만든 호의—에 의하여, 곧 그 중에 그래도 나은 자에 의하여 입역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양인의 병역 중에서는 가장 천역이요 고역이든 선군에서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본다.
쪽수▶P20-1軍役이 그의 身分 制限에 依하야 한낱 恩賞도 되고 또는 한낱 苦役도 된다는 것을 前述하였다. 身分이라는 것은 그 社會에 있어서 生產手段인 土地의 支配와 또 量的인 分配에 依하야 決定되는 以上, 身分에 있어서의 煩𤨏한 差等은 고대로 戶라는 것의 煩𤨏한 差等에 反映되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身分的 制限은 諸色 軍人의 戶首와 奉足과의 關係를 如何히 決定하였는가. 그것이 한 個의 榮譽인 兵役은 富戶에 依하야 지워지는 것은 勿論, 그것이 戶首에 依하야 立役되였다는 것 또한 再論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의 賦役인 때, 그것은 戶首된 者—貧戶를 모아 法制的으로 만든 戶의—에 依하야, 곧 그 중에 그래도 나은 者에 依하야 立役되지 않는 境遇도 있다. 良人의 兵役 中에서는 가장 賤役이요 苦役이든 船軍에서 우리는 이러한 實例를 본다.

현대문주3▶刑曹啓報恩船軍孫於火 旣殺其戶首金厚律 (下略)[a 12]

쪽수▶P20-2

원문주3▶刑曹啓報恩船軍孫於火 旣殺其戶首金厚律 (下略)[12]

즉, 호수와 정군과의 승리(乘離)한 경우인데 이런 일은 실로 이에서 그치지는 아니하였다. 봉족이 정군에 대신하여 입역한다는 것, 곧 소위 대입(代立)이라는 것은 나중엔 드디어 관허되어져 가는 것이었다. 또 공천인 선상노라든지 전운노에 이르러서는 ‘3정위1호’하여, 호수와 봉족을 정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호수가 정군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역이 신분선을 좇아 천화(賤化)함을 따라 호수와 정군과의 관계가 승리(乘離)하여져 갔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일반 병역에 있어서는 호수=정군이라는 관계가 정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한 호수와 봉족과의 관계에 었어서는, 호수=정군에 대하여 그의 봉족은 재산상, 신분상, 호수보다 못한 사람으로써 이에 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태종 4년 6월, 갑사 아래의 제색군인에 대하여 봉족을 급부할 때의 규정을 보면 이러하다.
쪽수▶P20-3即, 戶首와 正軍과의 乘離한 境遇인데 이런 일은 實로 이에서 그치지는 아니하였다. 奉足이 正軍에 代身하야 立役한다는 것, 곧 所謂 代立이라는 것은 나종엔 드디여 官許되여저 가는 것이었다. 또 公賤인 選上奴라든지 轉運奴에 이르러서는 『三丁爲一戶』하야, 戶首와 奉足을 定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戶首가 正軍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役이 身分線을 조차 賤化함을 따라 戶首와 正軍과의 關係가 乘離하였저 갔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原則的으로는, 一般 兵役에 있어서는 戶首=正軍이라는 關係가 正常的이다. 그렇기 때문에 正常한 戶首와 奉足과의 關係에 었어서는, 戶首=正軍에▶P21-1 對하야 그의 奉足은 財産上, 身分上, 戶首보다 못한 사람으로써 이에 當케 하였든 것이다. 太宗 四年 六月, 甲士 以下의 諸色軍人에 對하야 奉足을 給付할 제의 規定을 보면 이러하다.

현대문주4▶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都[a 13]

쪽수▶P21-2

원문주4▶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都[13]

그리고, 양인 병사의 봉족은 노비와 솔정이 많은 대호인 경우에는, 그것의 발급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은, ‘3정위1호’라든가 하는 법제적인 호인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양인으로써 주어졌다.
쪽수▶P21-3그레고, 良人 兵士의 奉足은 奴婢와 率丁이 많은 大戶인 境遇에는, 그것의 發給을 必要로 하지 않지만은, 「三丁爲一戶」라든가 하는 法制的인 戶인 境遇에는 原則的으로 良人으로써 주워졌다.

현대문주5▶左參賛姜孟卿 將本府議曰 軍士助丁 皆用良民 (下略)[a 14]

쪽수▶P21-4

원문주5▶左參賛姜孟卿 將本府議曰 軍士助丁 皆用良民 (下略)[14]

같은 양인으로써 봉족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사람을 정군=호수로 하고, 또는 봉족으로 하느냐에 대하여는, ‘시취’에 입격한 자를 ‘재(才)’라 하여 이를 호수=정군으로 하고, 불입격자로서 ‘불재(不才)’라 하여 봉족에 충한다는 원칙상의 형식적인 차별이 있기는 하지만, 위에 인용한 기사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호수와 봉족과의 사이에는 재산상 신분상의 규약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일방 그 자신 단독으로 입역이 가능한 호도 있고 특수한 법제적인 호도 있고 하여, 다 같이 그 안에서 호수와 봉족을 뽑아낸다는 사정에 비추어, 이러한 ‘재’ ‘불재’의 차별과 같은 것은 불가능에 속하는 일이다. 세조실록, 14년 6월 병오조에 ‘정군 봉족의 재·불재 전도’하였음을 고치자는 논의가 보이는데, 이는 이 때의 소식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호수와 봉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 봉족의 정군=호수에게 대하여 지불할 재력의 일정한 액(額)이 없더니 예종 원년 3월에 이르러 처음 이의 설정(設定)을 보게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쪽수▶P21-5같은 良人으로써 奉足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사람을 正軍=戶首로 하고, 또는 奉足으로 하느냐에 對하야는, 「試取」에 入格한 者를 「才」라 하야 이를 戶首=正軍으로 하고, 不入格者로서 「不才」라 하야 奉足에 充한다는 原則 上의 形式的인 差別이 있기는 하지만, 우에 引用한 記事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戶首와 奉足과의 사이에는 財產上 身分上의 規約이 임이 存在하는 것이고, 一方 그 自身 單獨으로 立役이 可能한 戶도 있고 特殊한 法制的인 戶도 있고 하야, 다 같이 그 안에서 戶首와 奉足을 뽑아낸다는 實情에 비추워, 이러한 「才」 「不才」의 差別과 같은 것은 不可能에 屬하는 일이다. 世祖實錄, 十四年 六月 丙午條에 「正軍 奉足의 才·不才 顚倒」하였음을 곧히자는 論議가 보이는데, 이는 이 間의 消息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戶首와 奉足 間의 關係에 있어서, 奉足의 正軍=戶首에게 對하야 支拂할 財力의 一定한 額이 없더니 睿宗 元年 三月에 이르러 처음 이의 設定을 보게 되였다. 實錄에 依하면,

현대문주6▶兵曹據慶尙北道節度使啓本啓 諸色軍士助丁 助役價錢 無定數 故每於番上時 侵奪助丁 綿布八九匹 因而破產 或至逃散 其弊不貲 請今後番上時 除自願備馬 或隨從者外 近道三日程 則人二匹 遠道則 四匹備給 其仍濫徵者 許助丁自告 京中本曹 外方節度使 隨即推論 依軍令 杖九十 極邊充軍 以杜冒濫之弊 幷諭他道從之[a 15]

쪽수▶P22-1

원문주6▶兵曹據慶尙北道節度使啓本啓 諸色軍士助丁 助役價錢 無定數 故每於番上時 侵奪助丁 綿布八九匹 因而破產 或至逃散 其弊不貲 請今後番上時 除自願備馬 或隨從者外 近道三日程 則人二匹 遠道則 四匹備給 其仍濫徵者 許助丁自告 京中本曹 外方節度使 隨即推論 依軍令 杖九十 極邊充軍 以杜冒濫之弊 幷諭他道從之[15]

이러한 조정의 정군에 대하여 지불할 재력의 공정(公定) 가격이 운위되는 것은, 물론 저 법제적인 호, 즉 단한한 살림의 묶음인 호에 있어서요 그것이 대호인 경우는 물론 아닐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대호인 경우에는 봉족으로서 혹은 봉족의 대신으로서 주어지는 소위 솔정 내지 노비가 많음으로 그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공정 가격론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쪽수▶P22-2이러한 助丁의 正軍에 對하야 支拂할 財力의 公定 價格이 云爲되는 것은, 勿論 저 法制的인 戶, 即 單寒한 살림의 묵굼인 戶에 있어서요 그것이 大戶인 境遇는 勿論 아닐 것이다. 웨 그러냐 하면 大戶인 境遇에는 奉足으로서 或은 奉足의 代身으로서 주워지는 所謂 率丁 乃至 奴婢가 많음으로 그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公定 價格論이 問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국 이래, 제색군인에 대하여 봉족이 여하한 비례로 급부되었던가는 일즉이 기선군호에 대한 ‘3정위1호’ 원칙에 의하여 엿볼 수 있다. 곧, 1정은 정군=호수요, 3정은 솔정=봉족, 선군이라는 것이 고역이라 양인의 최하층에 의하여 지워지는 것이니, 이 경우에 정이라는 것은 단한한 그들로서는 호라 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각종 군인에 대하여 일시로 그의 봉족의 정액이 결정된 것은 태종 4년 6월이었다. 개국 후 최초의 일로, 세조 10년 병역 부담의 단위가 ‘호’ 대신에 ‘보’(保)로 옮아 갈 때까지, 그 사이에 조그마한 변동은 있기는 하였지만 봉족 정액의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실록에서 이에 관한 기사를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22-3開國 以來, 諸色軍人에 對하야 奉足이 如何한 比例로 給付되였든가는 일즉이 騎船軍戶에 對한 「三丁爲一戶」 原則에 依하야 엿볼 수 있다. 곧, 一丁은 正軍=戶首요, 二丁은 率丁=奉足, 船軍이라는 것이 苦役이라 良人의 最下層에 依하야 지워지는 것이매, 이 境遇에 丁이라는 것은 單寒한 그들로서는 戶라 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레고, 各種 軍人에 對하야 一時로 그의 奉足의 定額이 決定된 것은 太宗 四年 六月이었다. 開國 後 最初의 일로, 世祖 十年 兵役 負擔의 單位가 「戶」 代身에 「保」로 옮어 갈 때까지, 그 사이에 조곰한 變動은 있기는 하였지만 奉足 定額의 原則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實錄에서 이에 關한 記事를 記錄하면 다음과 같다.

命各道各官 分其民戶貧富強弱 以給助戶 議政府啓 外方民戶 富强者 多得助戶 而貧富者 反不得助戶 流移失所 軍額日減 願各道差等詳定
一. 甲士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一戶 六七結以上 不給
一. 侍衛牌 完山子弟牌 一二結以下給奉足二戶 三四結以下 給奉足一戶 五六結以上 不給
一. 騎船軍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給奉足一戶 七八結以上 自立一領 十五結以上 自立二領
一. 鎭屬軍 及吹鍊軍鐵所干 一二結以上者 戶三四結以上 不給
一. 守城軍及日守兩班 止用三四結以下者 不許用五六結以上者 亦不給奉足
一. 各司吏典·隊長·隊副·丁·皂隸·都府外·守公·軍器監別軍·速毛赤·吹螺赤·一二結以下 給奉足一戶 三四結以上 不給
一. 鄉吏·一二結以下 給同類奉足一戶 四結以上 不給
一. 公衙丘陵·院主・津尺同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者 上項奉足定給外 各色有常役者 俱不給奉足(각주4와 같다)

쪽수▶P22-4

命各道各官 分其民戶貧富強弱 以給助戶 議政府啓 外方民戶 富强者 多得助戶 而貧富者 反不得助戶 流移失所 軍▶P23-1額日減 願各道差等詳定
一. 甲士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一戶 六七結以上 不給
一. 侍衛牌 完山子弟牌 一二結以下給奉足二戶 三四結以下 給奉足一戶 五六結以上 不給
一. 騎船軍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給奉足一戶 七八結以上 自立一領 十五結以上 自立二領
一. 鎭屬軍 及吹鍊軍鐵所干 一二結以上者 戶三四結以上 不給
一. 守城軍及日守兩班 止用三四結以下者 不許用五六結以上者 亦不給奉足
一. 各司吏典·隊長·隊副·丁·皂隸·都府外·守公·軍器監別軍·速毛赤·吹螺赤·一二結以下 給奉足一戶 三四結以上 不給
一. 鄉吏·一二結以下 給同類奉足一戶 四結以上 不給
一. 公衙丘陵·院主・津尺同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者 上項奉足定給外 各色有常役者 俱不給奉足(註4와 같다)

여기서 우리는 봉족의 급부에 있어서의 신분의 반영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별시위·내금위와 또 귀족 군인에 대한 기사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이미 조호의 도움을 빌지 않더라도, 많은 솔정을 그 호 내에 가지는 대호의 주인공인지라, 그 호의 호수로서 그의 영예로운 입역에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족으로서의 조정이 그의 호 밖에서 주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 쓴 여러 군인─원주 진척까지 군인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원주 노릇·진척 노릇이 그들의 국가에 대하여 저야 할 역이기 때문에─이 봉족 불급의 한도의 차이를 그들 군인의 가지는 부의 스스로인 반영일 것이며, 그 각종의 군인 중에 있어서의 절대적 다수는 그 봉족 발급의 최대 한도 이하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봉족호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물론이다. 예를 들면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라 할 때, 일반의 전지를 가지지 못하는 봉족의 대다수임을 연역하는 것은 잘못일까. 위의 기사는 대호나 천천호나 구별치 않고 또 그의 토지에 대한 질적인 구별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그것에서부터 호라고는 하기 어려운 천천호 내지는 불성호의 절대적 다수인 것을 앞 절의 설명을 빌지 않더라도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 편성한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단한한 호수의 호에다가 단한한 봉족의 호를 합산한들 그것은 큰 1호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위의 기사가 비록 호로써 단위를 삼았다고 한들, 이러한 실정에 있는 한, 대부분 ‘3정1호’라든가 ‘5정1호’라든가 하는 정 단위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쪽수▶P23-2여기서 吾人은 奉足의 給付에 있어서의 身分의 反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別侍衛·內禁衛와 또 貴族 軍人에 對한 記事를 보지 못함은, 그들은 임이 助戶의 도움을 빌지 않드래도, 많은 率丁을 그 戶內에 가지는 大戶의 主人公인지라, 그 戶의 戶首로서 그의 榮譽로운 立役에 當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奉足으로서의 助丁이 그의 戶 밖에서 주워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上記 여러▶P24-1 軍人─院主 津尺까지 軍人으로 친 것은 옳은 일이다. 院主 노릇·津尺 노릇이 그들의 國家에 對하야 저야 할 役이기 때문에─이 奉足 不給의 限度의 差異를 그들 軍人의 가지는 富의 스스로인 反映일 것이며, 그 各種의 軍人 中에 있어서의 絕對的 多數는 그 奉足 發給의 最大 限度 以下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奉足戶에 關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勿論이다. 例하면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給以下者」라 할 때, 一般의 田地를 가지지 못하는 奉足의 大多數임을 演繹하는 것은 잘못일까. 우의 記事는 大戶나 殘殘戶나 區別치 않고 또 그의 土地에 對한 質的인 區別도 考慮치 않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서 그것에서부터 戶라고는 하기 어려운 殘殘戶 乃至는 不成戶의 絕對的 多數인 것을 前節의 證明을 빌지 않드래도 斷定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히 하야 그 編成한 結果는 어떠하였을까. 單寒한 戶首의 戶에다가 單寒한 奉足의 戶를 合算한들 그것은 큰 一戶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따라서 우의 記事가 비록 戶로써 單位를 삼었다고 한들, 이러한 實情에 있는 限, 大部分 「三丁一戶」라든가 「五丁一戶」라든가 하는 丁 單位와 別다른 差異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경상도지리지, 도내시거조에 의하면 각색 군인에 대한 봉족 급부의 단위는 정을 표준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쪽수▶P24-2慶尙道地理志, 道內時居條에 依하면 各色 軍人에 對한 奉足 給付의 單位는 丁을 標準으로 하고 있다. 이를 들면 이러하다.

별패⋯816명⋯봉족⋯3,947명
가위⋯2,120명⋯봉족⋯9,895명
영진속⋯2,261명⋯봉족⋯6,107명
수성군⋯1,223명⋯봉족⋯2,362명
기선⋯15,941명⋯봉족⋯26,071명
잡색⋯16,574명⋯봉족⋯47,462명
계⋯정군 39,935명⋯봉족⋯103,844명

쪽수▶P24-3

別牌⋯八一六名⋯奉足⋯三,九四七名
佳衛⋯二,一二〇名⋯奉足⋯九,八九五名▶P25-1
營鎭屬⋯二,二六一名⋯奉足⋯六,一〇七名
守城軍⋯一,二二三名⋯奉足⋯二,三六二名
騎船⋯一五,九四一名⋯奉足⋯二六,〇七一名
雜色⋯一六,五七四名⋯奉足⋯四七,四六二名
計⋯正軍 三九,九三五名⋯奉足⋯一〇三,八四四名

이 중 기선군은 정군一에 대하여 봉족 2정을 넘고 있으나, 3정 1호라는 원칙은 종시 불변이라고 생각되고, 일찍이 태조실록, 7년 가을 9월 임오조, 공정왕의 교지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기선군의 이러한 ‘3정1호’ 원칙은 세조의 보법(保法)에 이르러 사실상 ‘4정1호’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갑사·별시위와 같은 것도 조정 발급에 있어서 정을 단위로 하고 있다. 세조실록에서 이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쪽수▶P25-2이 중 騎船軍은 正軍一에 對하야 奉足 二丁을 넘고 있으나, 三丁 一戶라는 原則은 終始 不變이라고 생각되고, 일즉이 太祖實錄, 七年 秋九月 壬午條, 恭靖王의 敎旨에서도 이를 强調하고 있다. 騎船軍의 이러한 「三丁一戶」 原則은 世祖의 保法에 이르러 事實上 「四丁一戶」로 하게 되였다. 그리고 世祖 때에 이르러서는 甲士·別侍衛와 같은 것도 助丁發給에 있어서 丁을 單位로 하고 있다. 世祖實錄에서 이것을 보면 左와 같다.

현대문주7▶一、甲士·別시위 奴婢·土田數少者 無助丁 而番上宿衛爲難 故給助丁三人 然而敬差官等 不覈奴婢土田之數 例給助丁三人 軍士內 自占良民 以爲已奴 多般侵虐 雖富實軍士 因緣請托 皆受助丁 一家三人 俱出供役 民力敷 不因而流亡 請令諸邑守令 更考所耕及奴婢多少 若
所耕五結以下 奴婢十口以下 給助丁三人
所耕七結以下 奴婢十二口以下 給二人
所耕十結以下 奴婢十五口以下 給一人[a 16]

쪽수▶P25-3

원문주7▶一、甲士·別侍衛 奴婢·土田數少者 無助丁 而番上宿衛爲難 故給助丁三人 然而敬差官等 不覈奴婢土田之數 例給助丁三人 軍士內 自占良民 以爲已奴 多般侵虐 雖富實軍士 因緣請托 皆受助丁 一家三人 俱出供役 民力敷 不因而流亡 請令諸邑守令 更考所耕及奴婢多少 若
所耕五結以下 奴婢十口以下 給助丁三人
所耕七結以下 奴婢十二口以下 給二人▶P26-1
所耕十結以下 奴婢十五口以下 給一人[16]

별시위라는 양인 병사의 최상층의 부류에게까지 조정을 주기에 이르른 것은 앞 절에도 한 차례 말한 바와 같이, 저 차츰 발전의 길을 취한 농장에 의한 일반 인민의 궁핍화라는 일반적 원인 외에, 그 정액의 증가에 의한 별시위 자체의 질적 저하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세조 1대(一代) 동안은 실로 군액 확장으로써 종시하였었는데, 그가 새로 취한 방법이 종래의 ‘호’를 그만두고 곧 ‘보’라는 것을 신설하였던 것이다. 이에 관한 것은 세조 10년 10월, 하3도에 군적사가 하향할 때에 휴행(携行)한 사목 중에 상세한 규정이 실려 있다. 이를 적기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26-3

원문주8▶一. 二丁爲一保
一. 田五結淮一丁
一. 有三保 奉一保者曰甲士 有二保 奉一保者曰騎正兵·吹牒赤 有一保奉一保者曰平虜衛·破敵衛·近仗·別軍·步正兵·大平簫·騎船軍 有獨保者曰 烽燧軍·防牌·攝六十
一. 奴子淮奉足數者 不給他丁
一. 書雲·醫·律·譯權知及生徒·重監·速毛赤·諸色諸員·司僕養馬·理馬·畫員·齋郎·樂工·舞工·諸司吏典·書員·百戶·蟬匠·都府外·皂隸·守工·所由·杖首·喝道·牧子·津尺·水夫·院主 同居族親中三人以下 勿定他役 諸邑·諸驛日守·醫·律學·書員 同居族親中 一人毋定他役[17]

현대문주8▶一. 二丁爲一保
一. 田五結淮一丁
一. 有三保 奉一保者曰甲士 有二保 奉一保者曰騎正兵·吹牒赤 有一保奉一保者曰平虜衛·破敵衛·近仗·別軍·步正兵·大平簫·騎船軍 有獨保者曰 烽燧軍·防牌·攝六十
一. 奴子淮奉足數者 不給他丁
一. 書雲·醫·律·譯權知及生徒·重監·速毛赤·諸色諸員·司僕養馬·理馬·畫員·齋郎·樂工·舞工·諸司吏典·書員·百戶·蟬匠·都府外·皂隸·守工·所由·杖首·喝道·牧子·津尺·水夫·院主 同居族親中三人以下 勿定他役 諸邑·諸驛日守·醫·律學·書員 同居族親中 一人毋定他役[a 17]

쪽수▶P27-1即, 一般 良人에 對하야는 保라는 말을 쓰고, 남어지의 身良役賤의 立役者에 對하야는 兵士로서 取扱하였으면서도 그 役賤인 까닭으로써, 保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고 兩者 中 어떤 것을 勿問하고 詳細히 이를 볼 것 같으면, 甲士의 『八丁一戶』로부터, 防牌의 『二丁一戶』 乃至 日守의 「二丁一戶」이라고 바꾸워 말할 수도 있으니, 우리는 여기서 最下 國役 負擔 單位의 構成人員의 數的인 低下를 보지 않는가. 그래도, 保의 新設은 從來의 戶라는 家族的인 單位를 人丁本位로 改革할 수 있었다고도 보이리라. 이 點이 자짓하면 當時의 大家族主義라고나 할 만한 것을 破壞하는 傾向을 가젔었다. 더욱이 田結과 奴婢로서 人丁에 淮한다는 것은 當時에 있어서는 큰 波汶을 던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一般兵士 中의 比較的 上部에 處하는 사람들에 關해서만 있을 수 있는 일임은 勿論이니, 우에서 본 바와 같이 一般兵士의 單寒한 꼴은 그를 그대로 두든 或은 保를 새로 만들든 그다지 影響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는 者에게 있어서는 이 奴婢·田結이 準丁과 또 하나의 問題인 保人의 率丁을 어떻게 處分하느냐 하는 두 가지로 保法 設定 以來 異論이 續出하야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었다. 經國大典, 兵典, 給保條에 依하면, 奴婢·田結로써 人丁에 淮한다는 말이 없으니 大典의 完成 當時까지 大體의 決定을 보았든 것이다. 그러나 保人 率丁의 給付 與否에 關하야는 不斷히 까다라움이 생기었지만, 여 러가지로 曲折을 겪은 후 成宗 二十四年 十二月에 이르러 保人에게 그의 率丁을 給付하도록 即, 保人의 率丁은 他役에 徵發치 않도록 作定되였다. 實錄에 이렇게 보인다.
즉, 일반 양인에 대하여는 보라는 말을 쓰고, 나머지의 신량역천의 입역자에 대하여는 병사로서 취급하였으면서도 그 역천인 까닭으로써, 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양자 중 어떤 것을 물문하고 상세히 이를 볼 것 같으면, 갑사의 ‘8정1호’로부터, 방패의 ‘2정1호’ 내지 일수의 ‘2정1호’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으니, 우리는 여기서 최하 국역 부담 단위의 구성인원의 수적인 저하를 보지 않는가. 그래도, 보의 신설은 종래의 호라는 가족적인 단위를 인정본위로 개혁할 수 있었다고도 보이리라. 이 점이 자칫하면 당시의 대가족주의라고나 할 만한 것을 파괴하는 경향을 가졌었다. 더욱이 전결과 노비로서 인정에 회(淮)한다는 것은 당시에 있어서는 큰 파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일반병사 중의 비교적 상부에 처하는 사람들에 관해서만 있을 수 있는 일임은 물론이니,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일반병사의 단한한 꼴은 그를 그대로 두든 혹은 보를 새로 만들든 그다지 영향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 노비·전결이 준정(準丁)과 또 하나의 문제인 보인(保人)의 솔정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하는 두 가지로 보법 설정 이래 이론(異論)이 속출하여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었다. 경국대전, 병전, 급보조에 의하면, 노비·전결로써 인정에 회한다는 말이 없으니 대전의 완성 당시까지 대체의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보인 솔정의 급부 여부에 관하여는 부단히 까다로움이 생겼지만, 여러가지로 곡절을 겪은 후 성종 24년 12월에 이르러 보인에게 그의 솔정을 급부하도록 즉, 보인의 솔정은 다른 역에 징발치 않도록 직장되었다. 실록에 이렇게 보인다.
쪽수▶P28-1

원문주9▶兵曹啓 前此本曹啓曰 請勿給保人率丁 而從洪應議率丁過二丁者 押出一丁 別作軍丁 臣等以謂甲士 保人四人也 各率二丁 則一戶之人 多率十餘 我國地編民少 正軍未得充數 請大典 勿給保入率丁命議于領敦寧以上 尹弼商·盧思煩議 保人率丁閑丁 出處無由 雖欲定 終難施行 何如 李克培議 (略) 從弼商等議[18]

현대문주9▶兵曹啓 前此本曹啓曰 請勿給保人率丁 而從洪應議率丁過二丁者 押出一丁 別作軍丁 臣等以謂甲士 保人四人也 各率二丁 則一戶之人 多率十餘 我國地編民少 正軍未得充數 請大典 勿給保入率丁命議于領敦寧以上 尹弼商·盧思煩議 保人率丁閑丁 出處無由 雖欲定 終難施行 何如 李克培議 (略) 從弼商等議[a 18]

이에 이르러 다시 보라는 것이 종래의 호와 하등의 다름이 없어졌다는 것, 곧 그것은 인정만을 단위로 하자 하여도 실지로는 불가능하였다는 데에 원인이 있다. 공동체적인 또 혈족적인 엉킴으로써 얽힌 호라는 것을 세조의 준엄함으로도 부시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적어도 이 병조의 의견에 좇으면 갑사의 한 호는 인정 10여인을 옹(擁)하는 것, 그것이 곧 한사람 갑사의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보법의 설정 후, 정군은 보인에게서 얼마만한 재력을 징하였던가. 경국대전에서 우리는 이러한 기사를 볼 수 있다.
쪽수▶P28-2이에 이르러 다시 保라는 것이 從來의 戶와 何等의 다름이 없어졌다는 것, 곧 그것은 人丁만을 單位로 하자 하여도 實地로는 不可能하였다는 데에 原因이 있다. 共同體的인 또 血族的인 엉킴으로써 얽힌 戶라는 것을 世祖의 峻嚴함으로도 부시기가 어려웠든 것이다. 적어도 이 兵曹의 意見에 좇으면 甲士의 한 戶는 人丁 十餘人을 擁하는 것, 그것이 곧 한사람 甲士의 保이었든 것이다. 그리고 保法의 設定 後, 正軍은 保人에게서 얼마만한 財力을 徵하였든가. 經國大典에서 우리는 이러한 記事를 볼 수 있다.

현대문주10▶濫收保人雜物者(一人每朔母 過綿布一匹) 違法役使者 井切隣以軍令論 當身降爲保[a 19]

쪽수▶P28-3

원문주10▶濫收保人雜物者(一人每朔母 過綿布一匹) 違法役使者 井切隣以軍令論 當身降爲保[19]

이러한 무시무시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실지로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이에 관하여 일례만을 들기로 하자. 성종 24년 3월, 좌부승지 정성근은 경연에서 이와 같이 계(啓)하고 있다.
쪽수▶P28-4이러한 무시무시한 禁令에도 不拘하고 實地로는 그렇게 簡單하지는 않었다. 이에 關하야 一例만을 들기로 하자. 成宗 二十四年 三月, 左副承旨 鄭誠謹은 經筵에서 이와 같이 啓하고 있다.

현대문주11▶大典 軍士保人 每朔毋過綿布一匹 而臣爲海州牧使 番上軍士點考時 有一人手持綿布七八匹 跪而笑曰 我爲軍士保人 二朔給綿布七匹 戶首猶以爲少 而杖之 此專是營繕煩而役苦 代之者倍取其直 保人盡賣財產而給之 役民不可不節也[a 20]

쪽수▶P28-5

원문주11▶大典 軍士保人 每朔毋過綿布一匹 而臣爲海州牧使 番上軍士點考時 有一人手持綿布七八匹 跪而笑曰 我爲軍士保人 二朔給綿布七匹 戶首猶以爲少 而杖之 此專是營繕煩而役苦 代之者倍取其直 保人盡賣財產而給之 役民不可不節也[20]























































































본문4: 4.호적과 군적


당시의 국가가 호적의 수록에 갖은 힘을 다 쓰는 것은 단순히 국내의 인구에 대하여 알고자 함이라는 이유에 인함은 아니고, 그 인구 중에서 인정을 추출하여 이로써 병역 기타의 요역에 당하게 하고자 하는 현실적 요구에 기인한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그 인구 중에서는 소수의 지배자군과 대다수의 피지배군을 일구분(一區分)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것에 있어서의 호적의 역할은 마치 군인이 된다는 것이 그러한 것처럼 명예의 설명서도 되었을 터이고, 또 부역 부담의 대장도 되었을 터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었다. 그리고 호적과 군적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전자는 후자의 지반이 되고, 후자는 전자를 떠나서는 거진 그의 성립이 불가능하였다. 세조 8년 5월, 호적 필수 후, 국왕의 유서 중에 이르기를,
쪽수▶P29-1當時의 國家가 戶籍의 修錄에 가진 힘을 다 쓰는 것은 單純히 國內의 人口에 對하야 알고자 함이라는 理由에 因함은 아니고, 그 人口 中에서 人丁을 抽出하야 이로써 兵役 其他의 徭役에 當하게 하고자 하는 現實的 要求에 基因한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그 人口 中에서는 少數의 支配者群과 大多數의 被支配群을 一區分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것에 있어서의 戶籍의 役割은 마치 軍人이 된다는 것이 그러한 것처럼 名譽의 說明書도 되었을 터이고, 또 賦役 負擔의 臺帳도 되였을 터이라는 것은 前者 一言한 바 있었다. 그레▶P30-1고 戶籍과 軍籍과는 不可分의 關係에 있어 前者는 後者의 地盤이 되고, 後者는 前者를 떠나서는 거진 그의 成立이 不可能하였다. 世祖 八年 五月, 戶籍 畢修 後, 國王의 諭書 中에 이라기를,

현대문주1▶前此 敬差官等 戶籍已畢 據此分壯弱 籍軍丁[a 21]

쪽수▶P30-2

원문주1▶前此 敬差官等 戶籍已畢 據此分壯弱 籍軍丁[21]

이라 하였으니, 군적이라는 것이 호적을 근거로 하여, 그 안에서 그럴 듯한 자를 군인으로써 녹적(錄籍)하는 차례가 보여진다. 16세 이상, 60 이하의 인정된 자 중 사민이 아닌 자를 제하고는 모두가 천하의 공민인지라, 성인 남자로서 입역하여야 한다는 것, 또 그의 신분적 제한에 있어서 구체적인 하나의 병사가 되느냐 혹은 봉족이 되느냐는 것은 이미 약술한 바 있거니와, 신체의 고장 특별한 사정이 있는 자의 면역 규정이 경국대전에 보인다.
쪽수▶P30-3이라 하였으니, 軍籍이라는 것이 戶籍을 根據로 하야, 그 안에서 그럴 듯한 者를 軍人으로써 錄籍하는 次例가 보여진다. 十六歲 以上, 六十 以下의 人丁된 者 중 私民이 아닌 者를 除하고는 모도가 天下의 公民인지라, 成人 男子로서 立役하여야 한다는 것, 또 그의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 具體的인 一兵士가 되느냐 或은 奉足이 되느냐는 것은 임의 畧述한 바이었거니와, 身體의 故障 特別한 事情이 있는 者의 免役 規定이 經國大典에 보인다.

현대문주2▶軍士 年滿六十者 篤疾 廢疾者(篤疾 惡疾·癲狂·兩目盲·二肢折也 廢疾 痴·啞侏儒·腰折·一肢折也 痴病行貌·侏儒短貌) 並免役 〇有篤疾·廢疾·或年七十以上親者 一子 九十以上者 諸子免役 (子亡者孫一人 無親孫則 外孫免役 居京軍士 留防軍士及忠順衛·正兵 獨子外勿免)[a 22]

쪽수▶P30-4

원문주2▶軍士 年滿六十者 篤疾 廢疾者(篤疾 惡疾·癲狂·兩目盲·二肢折也 廢疾 痴·啞侏儒·腰折·一肢折也 痴病行貌·侏儒短貌) 並免役 〇有篤疾·廢疾·或年七十以上親者 一子 九十以上者 諸子免役 (子亡者孫一人 無親孫則 外孫免役 居京軍士 留防軍士及忠順衛·正兵 獨子外勿免)[22]

후자의 규정은 시정(侍丁)이라 하여 면역되는 자로서, 개국 이래, 그의 면역에 관하여 변개함이 없었으나 그 중 군사로 있다가 친로하여 면역을 받은 자는 예종실록 원년 4월 신미조에 의하면 “凡軍士 親老給侍丁者 非永免其役 故侍丁己稱忠孝衛 成籍 歲一 點閱”라 하여 그들은 따로 취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이르러 제대된 자도 이 시정과 같은 각각 일종의 현역병적인 성질을 띠게 되었다. 실록의 기사는 이러하다.
쪽수▶P30-5後者의 規定은 侍丁이라 하야 免役되는 者로서, 開國 以來, 그의 免役에 關하야 變改함이 없었으나 그 중 軍士로 있다가 親老하야 免役을 받은 者는 睿宗實錄 元年 四月 辛未條에 依하면 「凡軍士 親老給侍丁者 非永免其役 故侍丁己稱忠孝衛 成籍 歲一 點閱」라 하야 그들은 따로이 取扱받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同年 十二月에 이르러 除隊된 者도 이 侍丁과 같은 各各 一種의 現役兵的인 性質을 띠이게 되였다. 實錄의 記事는 이러하다.

현대문주3▶傳旨兵曹曰 六十除軍者 侍丁除軍者 並皆閑遊 無補於國 萬有不虞 不可不使 別設兩衛 老除者 稱老壯衛 侍丁者 稱忠孝衛 常時不與軍役 唯歲 一點考[a 23]

쪽수▶P31-1

원문주3▶傳旨兵曹曰 六十除軍者 侍丁除軍者 並皆閑遊 無補於國 萬有不虞 不可不使 別設兩衛 老除者 稱老壯衛 侍丁者 稱忠孝衛 常時不與軍役 唯歲 一點考[23]

이제야, 모든 인정은 소위 독질·폐질자를 제하고는 호적에 녹적되는 이상 군적에도 녹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적이 처음 국왕께 상달된 것은 태조 2년 5월로서, 태조실록, 같은 해 같은 달 경오조에 의하면, “京畿左右·楊·廣·慶尙·全羅·西海·交州·江陵 凡八道馬步兵 及騎船軍 揔二十萬八百餘人 子弟及鄕·驛吏諸有役者 十萬五百餘人”이라 하였으니, 군적은 호적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그 이전에 전국의 호적이 되어 있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호적은 3년에 한 번 변개되는 것으로, 그 원본은 경성에 있어서는 한성부, 지방에 있어서는 본도·본읍에 각 1본씩, 또 호조에 있어서 1본을 갖추는 것이다. 경국대전, 호전·호적조에
쪽수▶P31-2於是乎, 모든 人丁은 所謂 篤疾·廢疾者를 除하고는 戶籍에 錄籍되는 以上 軍籍에도 錄籍되였을 것이다. 그리고 軍籍이 처음 國王께 上達된 것은 太祖 二年 五月로서, 太祖實錄, 同年 同月 庚午條에 依하면, 「京畿左右·楊·廣·慶尙·全羅·西海·交州·江陵 凡八道馬步兵 及騎船軍 揔二十萬八百餘人 子弟及鄕·驛吏諸有役者 十萬五百餘人」이라 하였으니, 軍籍은 戶籍을 前提로 하는 것이므로, 그 以前에 全國의 戶籍이 되여 있었으리라 想像할 수 있다. 그리고 戶籍은 三年에 한 번 變改되는 것으로, 그 原本은 京城에 있어서는 漢城府, 地方에 있어서는 本道·本邑에 各一本式, 또 戶曹에 있어서 一本을 갖후는 것이다. 經國大典, 戶典·戶籍條에

每三年 改戶籍 藏於本曹·漢城府·本道·本邑

쪽수▶P31-3

每三年 改戶籍 藏於本曹·漢城府·本道·本邑

이라 하여, 호적 장치(藏置)에 관한 위의 두 글만으로는 마치 외방의 호적을 한성부에서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외방의 호적은 본읍·본도·호조에 있어서 각 1본씩을 장치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즉 세조 7년 7월, 각 도에 파견된 호적 경차관의 휴행사목에 의하면,
쪽수▶P31-4이라 하야, 戶籍 藏置에 關한 右文兩만으로는 마치 外方의 戶籍을 漢城府에서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事實은 그렇지 않고, 外方의 戶籍은 本邑·本道·戶曹에 있어서 各一本式을 藏置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即 世祖 七年 七月, 各道에 派遣된 戶籍 敬差官의 携行事目에 依하면,

현대문주4▶一. 戶籍成三件 藏于本邑·監司營·戶曹[a 24]

쪽수▶P31-5

원문주4▶一. 戶籍成三件 藏于本邑·監司營·戶曹[24]

라 하여 외방 호적에는 한성부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호적은 중외의 관아에서 장치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사람은 각기 호에 1본을 장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양반에 있어서는 그 영예의 증명서이고, 양인에게는 그의 천인 아님에 대한 설명서이나, 일반 천민에게 있어서는 그가 소위 ‘은루정구’가 아니라는 설명서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인민에 하부되는 호적의 형식이 실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세종실록, 10년 5월 계미조, 호조의 계(啓)이다.
쪽수▶P31-6라 하야 外方 戶籍에는 漢城府에 關與치 않었든 것이다. 이렇듯 戶籍은 中外의 官衙에서 藏置할 뿐만▶P32-1 아니라, 各人은 各其 戶에 一本을 藏置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兩班에 있어서는 그 榮譽의 證明書이고, 良人에게는 그의 賤人 아님에 對한 證明書이나, 一般 賤民에게 있어서는 그가 所謂 「隱漏丁口」가 아니라는 證明書가 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人民에 下付되는 戶籍의 形式이 實錄에 처음 보이는 것은, 世宗實錄, 十年 五月 癸未條, 戶曹의 啓이다.

各人戶口 京中漢城府 外方各官守令 據其狀告 成給 其規式 則某年號月日 戶口 淮府在某年成籍戶口帳內 某部某坊第幾里 外方某面某里佳 某職 姓名 年甲 本貫 四祖 率居子息某某 奴婢某某等 給者 漢城府 外方 某州縣 僉署周挾 改字及有無横書踏印 一本粘連立案 一本給狀告戶首 母令疊給 從之

쪽수▶P32-2

各人戶口 京中漢城府 外方各官守令 據其狀告 成給 其規式 則某年號月日 戶口 淮府在某年成籍戶口帳內 某部某坊第幾里 外方某面某里佳 某職 姓名 年甲 本貫 四祖 率居子息某某 奴婢某某等 給者 漢城府 外方 某州縣 僉署周挾 改字及有無横書踏印 一本粘連立案 一本給狀告戶首 母令疊給 從之

이렇듯, 이는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원본과의 관계에 혹사하다. 즉, 호수의 신고에 의하여 내용이 기재되고, 그것은 그대로 ‘점련’하여 원본인 호구안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일반 양인 이상의 신분자에게 교부되는 등본의 형식으로 경국대전, 호구식조 소재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이를 병기하여 그 내용을 검토하기로 하자.
쪽수▶P32-3이렇듯, 이는 오늘날의 戶籍謄本과 原本과의 關係에 酷似하다. 即, 戶首의 申告에 依하야 內容이 記載되고, 그것은 그대로 「粘連」하야 原本인 戶口案이 되는 것이었다. 勿論, 一般 良人 以上의 身分者에게 交付되는 謄本의 形式으로 經國大典, 戶口式條 所載의 그것과 大差없다. 이를 並記하야 써 그 內容을 檢討하기로 하자.

戶 某部某坊第幾里(外則稱某 面某里) 住某職 姓名 年甲 本貫 四祖 妻某氏 年甲 本貫 四祖(宗親錄自己職術, 妻四祖, 儀賓綠自己職術・四祖, 尙某主, 庶人錄自己及妻 四祖, 庶人不知 四祖, 不須盡錄 率居子女某某 年甲(女壻則幷錄本貫,) 奴婢雇工某某 年甲

쪽수▶P32-4

戶 某部某坊第幾里(外則稱某 面某里) 住某職 姓名 年甲 本貫 四祖 妻某氏 年甲 本貫 四祖(宗親錄自己職術, 妻四祖, 儀賓綠自己職術・四祖, 尙某主, 庶人錄自己及妻 四祖, 庶人不知 四祖, 不須盡錄 率居子女某某 年甲(女壻則幷錄本貫,) 奴婢雇工某某 年甲

앞 절에서 우리는 호라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일률시(一律視)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다. 또 다시 호의 편성이 대호이든 법제적으로 만들어진 호이든 그것이 혈족적인 또 공동체적인 조선의 농촌생활을 기조로 한 것임도 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형식으로써 편성되는 호라는 것의 실정은 어떠하였던가. 살림살이를 따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1호안에 편입되는 것에 대하여는 앞서 논한 바 있었거니와, 또 세종 22년 2월, 국왕의 전지 중에는 본국의 풍속이라 하여 이러한 묘사가 보인다.
쪽수▶P32-5前節에서 吾人은 戶라는 것에 對하야, 그것이 一律視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다. 또 다시 戶의 編成이 大戶이든 法制的으로 맨드러 졌는 戶이든 그것이 血族的인 또 共同體的인 朝鮮의 農村生活을▶P33-1 基調로 한 것임도 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形式으로써 編成되는 戶라는 것의 實情은 어떠하였든가. 살림사리를 따로이 한다드래도, 그것이 一戶안에 編入되는 것에 對하야는 前記한 바 있었거니와, 또 世宗 二十二年 二月, 國王의 傳旨 中에는 本國의 風俗이라 하야 이러한 描寫가 보인다.

현대문주5▶(上略) 或曰 本國風俗 有子壻多者 出贅而結蘆於家園之內 苟使守令 密察磨勘 以增戶口 爲等第 則破家還徙 必不得聊生矣 (下略)[a 25]

쪽수▶P33-2

원문주5▶(上略) 或曰 本國風俗 有子壻多者 出贅而結蘆於家園之內 苟使守令 密察磨勘 以增戶口 爲等第 則破家還徙 必不得聊生矣 (下略) [25]

이것은 물론, 부호 내지는 대호에 관한 일로서 살림살이를 따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혈족적으로 이어져 있을 때 이는 1호로 보아졌던 것이다. 양성지는 이 현상에 관하여 지역적인 분포를 말하고 있다.
쪽수▶P33-3이것은 勿論, 富戶 乃至는 大戶에 關한 일로서 살림사리를 따로이 한다고 하드래도, 그것이 血族的으로 이어저 있을 때 이는 一戶로 보아졌든 것이다. 梁誠之는 이 現象에 關하야 地域的인 分布를 말하고 있다.

현대문주6▶(上略) 今 本朝戶口之法 不明 江原·黃海·平安道 多以一丁爲一戶 慶尙·全羅道及咸吉道六鎭 或有數十人 爲一戶 而京畿·忠淸道 不至甚濫 江原·黃海 山郡之民 流亡失業 以一戶 供前日數戶之役 日以彫弊 慶尙·全羅沿海之郡 豪滑之家 外爲一門 內置數家 如或刷之 乘船入海 至有奴歐本主者 平時 則富者免 而貧者常代其勞 軍興 則素 不係籍 必皆逃竄 俱不可也 (下略)[a 26]

쪽수▶P33-4

원문주6▶(上略) 今 本朝戶口之法 不明 江原·黃海·平安道 多以一丁爲一戶 慶尙·全羅道及咸吉道六鎭 或有數十人 爲一戶 而京畿·忠淸道 不至甚濫 江原·黃海 山郡之民 流亡失業 以一戶 供前日數戶之役 日以彫弊 慶尙·全羅沿海之郡 豪滑之家 外爲一門 內置數家 如或刷之 乘船入海 至有奴歐本主者 平時 則富者免 而貧者常代其勞 軍興 則素 不係籍 必皆逃竄 俱不可也 (下略)[26]

‘쇄지’한다는 것은 그 호 안에 은몰하여 아직 녹적되지 않는 자를, 병역에 당하게 하기 위하여 호적에 수록하는 것이므로, 그 꾀하는 바는 성인 남자인 ‘정’이요, 양성지의 한탄하는 ‘수십인위1호’라는 것도 수십인의 정이 1호안에 은몰하여 입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상도·전라도 및 육진에 이러한 ‘호활지가’가 아무리 많이 존재한다고 한들, 이것으로써 금방 그렇지 못한 ‘단한’ ‘선량’한 호의 절대적 다수를 부정할 수는 없다. 양씨는 이러한 ‘호활지가’에 대한 대책을 이어서 말하고 있으나 그 안에서 우연히도 당시에 있어서의 법제적 과역범주로서의 호에 언급하고 있다.
쪽수▶P33-5「刷之」한다는 것은 그 戶 안에 隱沒하야 아즉 錄籍되지 않는 者를, 兵役에 當케 하기 爲하야 戶籍에 修錄하는 것이므로, 그꽤하는 바는 成人 男子인 「丁」이요, 梁誠之의 恨歎하는 「數十人爲一戶」이라는 것도 數十人의 丁이 一戶안에 隱沒하야 立役치 않는다는 것이다. 慶尙道·全羅道 及 六鎭에 이러한 「豪猾之▶P34-1家」가 아무리 많이 存在한다고 한들, 이것으로써 금방 그렇지 못한 「單寒」 「善良」한 戶의 絕對的 多數를 否定할 수는 없다. 梁氏는 이러한 「豪猾之家」에 對한 對策을 이어서 말하고 있으나 그 안에서 偶然히도 當時에 있어서의 法制的 課役範疇로서의 戶에 言及하고 있다.

乞, 今後京都漢城府 外方八道 申明戶口之法 不論尊卑·老少男女 皆置戶口 無者科罪 其士族率居奴婢及與父母同居者外 每三丁爲一戶 而三年一考之 漏一丁者 五家及監考管領 悉徙邊 (下略)

쪽수▶P34-2

乞, 今後京都漢城府 外方八道 申明戶口之法 不論尊卑·老少男女 皆置戶口 無者科罪 其士族率居奴婢及與父母同居者外 每三丁爲一戶 而三年一考之 漏一丁者 五家及監考管領 悉徙邊 (下略)

즉, ‘3정으로서 1호로 삼자’는 것은 그 중의 1정으로써 호수=정군을 삼고, 나머지 2정으로써 그 봉족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의 절대적 다수를 점하는 천천호라 하는 빈호에 있어서는 이미 실시되고 있던 터로, 이것을 소위 호활지가에게까지 시행하자고 하는 것이다. 앞에 적힌 호적의 형식에 보이는 솔거 인정인 노비·고공·비부와 같은 것은, 그 호가 그러한 인정을 많이 가지는 부호인 경우에는 그 자신 단독으로 입역이 가능하므로 호적 안에서 봉족의 기재를 불필요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솔거 인정이 없는 호에 있어서는 확실히 봉족 인정의 기재를 그 호안에서 볼 수 있고, 이러한 법제적인 호와 아울러 호적은 당시의 일반 공민의 절대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종 32년 10월, 형조판서 조헌의 기선군 고역에 관한 상서에 대한 의정부 의내의 일구(一句)에,
쪽수▶P34-3即, 「三丁으로서 一戶로 삼자」는 것은 그 中의 一丁으로써 戶首=正軍을 삼고, 남어지 二丁으로써 그 奉足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方法은 當時의 絕對的 多數를 占하는 殘殘戶라 하는 貧戶에 있어서는 임이 實施되고 있든 터로, 이것을 所謂 豪猾之家에게까지 施行하자고 하는 것이다. 前記 戶籍의 形式에 보이는 率居 人丁인 奴婢·雇工·婢夫와 같은 것은, 그 戶가 그러한 人丁을 많이 가지는 富戶인 境遇에는 그 自身 單獨으로 立役이 可能하므로 戶籍 안에서 奉足의 記載를 不必要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率居 人丁이 없는 戶에 있어서는 確實히 奉足 人丁의 記載를 그 戶안에서 볼 수 있고, 이러한 法制的인 戶와 아울러 戶籍은 當時의 一般 公民의 絕對的 多數를 占하고 있었을 것이다. 世宗 三十二年 十月, 刑曹判書 趙憲의 騎船軍 苦役에 關한 上書에 對한 議政府 議內의 一句에,

현대문주7▶元典節該 騎船各戶 出斂及雜凡差役 一減完護조 令不從守令及奸吏等 以王旨不從論罪 其戶內子壻及奉足定給人外 挾持漏戶 當差他役 申明擧行 (下略) [a 27]

쪽수▶P34-4

원문주7▶元典節該 騎船各戶 出斂及雜凡差役 一減完護條 令不從守令及奸吏等 以王旨不從論罪 其戶內子壻及奉足定給人外 挾持漏戶 當差他役 申明擧行 (下略) [27]

원전(元典)은 원전(原典)·원육전(元六典)이라고도 불리는 경제육전일 것이다. 그 봉족으로 지정된 인정이 그 호 안의 자서(子壻)와 동일시되어 있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호가 하낱 병역부담의 단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호적은 고대로 군적이 되었을 것이다. 또 앞에 적힌 호구식에 보이는 ‘모직’조에는 일반 병사에 있어서는 그의 ‘모색군사’임이 적힐 터이고, ‘본관’과 ‘사조’의 조에는 그로 하여금 모색군사가 되게 한 신분적 제한이 기재될 것이므로, 호적은 그대로 군적인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그를 군인되게 하는 가장 구체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쪽수▶P35-1元典은 原典·元六典이라고도 불리우는 經濟六典일 것이다. 그 奉足으로 指定된 人丁이 그 戶 안의 子壻와 同一視되여 있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戶가 하낱 兵役負擔의 單位이기 때문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戶籍은 고대로 軍籍이 되였을 것이다. 또 前記 戶口式에 보이는 「某職」條에는 一般 兵士에 있어서는 그의 「某色軍士」임이 적힐 터이고, 「本貫」과 「四祖」의 條에는 그로 하여금 某色軍士가 되게 한 身分的 制限이 記載될 것이므로, 戶籍은 고대로 軍籍인 同時에, 이것이야말로 그를 軍人되게 하는 가장 具體的인 手段이었든 것이다.
호적이 동시에 군적이라는 것은 그의 소지자 측에서 그것의 역할의 방면을 볼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으나, 국가의 병원 동원이라는 기술적 입장에서 보면 또한 스스로 달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앞에 쓴 바와 같이 개인이 가지는 호적은 그대로 점련하여 관청 보관의 호구대장인 호구안이 되지만, 군안은 호구안 그대로서는 인정인 성인 남자 이외의 협잡물을 섞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정리하여 그 안에서 인정을 추출하여야 한다. 경국대전, 병전성적의 조에 이러한 규정이 보인다.
쪽수▶P35-2戶籍이 同時에 軍籍이라는 것은 그의 所持者 側에서 그것의 役割의 方面을 볼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으나, 國家의 兵員 動員이라는 技術的 立場에서 보면 또한 스스로 달러야 하는 것이었었다. 그것은 前記한 바와 같이 個人이 가지는 戶籍은 그대로 粘連하야 官廳 保管의 戶口臺帳인 戶口案이 되지마는, 軍案은 戶口案 그대로서는 人丁인 成人 男子 以外의 挾雜物을 석거 있기 때문에 이것을 整理하야 그 안에서 人丁을 抽出하여야 한다. 經國大典, 兵典成籍의 條에 이러한 規定이 보인다.

京 外軍丁 每六年成籍(京則五部 外則各其節度使 濟州三邑則 節制使成籍) 送本曹藏之(觀察使道, 主鎭, 臣鄭, 諸鎭, 亦藏一件) 本曹揔數啓開〇每三年 各牧場牧子則 兵馬節度使 睹邑吏·驛吏則 觀察使成籍 並各藏之(青坡·盧原兩驛 吏則本曹成籍)

쪽수▶P35-3

京 外軍丁 每六年成籍(京則五部 外則各其節度使 濟州三邑則 節制使成籍) 送本曹藏之(觀察使道, 主鎭, 臣鄭, 諸鎭, 亦藏一件) 本曹揔數啓開〇每三年 各牧場牧子則 兵馬節度使 睹邑吏·驛吏則 觀察使成籍 並各藏之(青坡·盧原兩驛 吏則本曹成籍,)

군적이 곧 호적이라고 강조하면서 군적은 인정추출의 수단으로서의 호적을 근거로 하여 성립한다는 것은 이 군안의 경우에 있어서다. 대개, 6년만큼씩 성적(成籍)되고 중외의 군문에 장치되는 군안은 저 3년만큼씩 성적되어 중외의 관아에 보관되는 호적(또한 동시에 군적)을 점련하여 만드는 호구안에 의하여 그의 필요로 하는 인정을 추출 정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호조·감사영, 본읍에 장치됨에 그치나, 전자는 계문한다 함은, 저절로 전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에 녹적되는 자의 전 인민 중의 정수임에 의하는 것일 거다.
쪽수▶P35-4軍籍이 곧 戶籍이라고 強調하면서 軍籍은 人丁抽出의 手段으로서의 戶籍을 根據로 하야 成立한다는 것은 이 軍案의 境遇에 있어서다. 大概, 六年만큼式 成籍되고 中外의 軍門에 藏置되는 軍案은 저▶P36-1 三年만큼式 成籍되여 中外의 官衙에 保管되는 戶籍(또한 同時에 軍籍)을 粘連하야 맨드는 戶口案에 依하야 그의 必要로 하는 人丁을 抽出 整理한 것이었다. 그리고 後者는 戶曹·監司營, 本邑에 藏置됨에 그치나, 前者는 啓聞한다 함은, 제절로 前者의 重要性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에 錄籍되는 者의 全 人民 中의 精髓임에 依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위에 쓰인 원전의 규정은 경국대전의 편찬 당시까지 시행되었다고 볼 것이고, 이 경국대전의 호구식에 저 법제적 범주로서의 호에 대한 하등의 규식을 보지 못함은 한 가지 의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다. 곧 봉족 정급인의 기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법의 설정이 호라는 것의 법제적인 면을 얼마만큼 변개시킨 까닭이리라. 곧 호 단위에서 보 단위로 변하였으므로, 그 자신 입역이 불가능한 호라도 호적 내에 봉족 정급인을 기재하는 것은 벌써 불필요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 보법은 종래의 호적=군적의 관계를 승리(乘離)하였다고도 볼 수 있고, 보인이 호수인 정군과 함께 일개의 병역 부담 단위로서 기재되는 것은 저 중외 군문에 장치되는 군안에 있어서 뿐이리라고 생각된다.
쪽수▶P36-2그리고 上記 元典의 規定은 經國大典의 編纂 當時까지 施行되였다고 볼 것이고, 이 經國大典의 戶口式에 저 法制的 範疇로서의 戶에 對한 何等의 規式을 보지 못함은 한 가지 疑問을 吾人에게 던지는 것이다. 곧 奉足 定給人의 記載를 보지 몯하는 것이다. 그것은 保法의 設定이 戶라는 것의 法制的인 面을 얼마만큼 變改시킨 까닭이리라. 곧 戶 單位에서 保 單位로 變하였으므로, 그 自身 立役이 不可能한 戶라도 戶籍 內에 奉足 定給人을 記載하는 것은 벌서 不必要하게 되였든 까닭이다. 따라서 이 點에 있어서 保法은 從來의 戶籍=軍籍의 關係를 乘離하였다고도 볼 수 있고, 保人이 戶首인 正軍과 함께 一個의 兵役 負擔 單位로서 記載되는 것은 저 中外 軍門에 藏置되는 軍案에 있어서 뿐이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방에 있어서는 이 점을 제하고는 종래의 호적법은 그대로 존치되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종래의 그것에 의하면 대호에서 천천호에 이르기까지 병역의 단위로 되어 있고, 그 빈약한 자에 내려감을 따라 인정의 부족을 초래하므로 그 부족한 자에 한하여 동류를 합쳐서 봉족으로 정급되었었다. 그러나 보법에 의하면 2정을 1보로 하여, 그 병종에 따라 봉족으로 주어지는 것의 보 수(數)가 정해져 있다. 이제야 종래에 그것과는 달리 일종의 불합리를 생성하게 되었으니 즉, 대호에 있어서는 그 정액 이상의 인정을 가질 수 없게 되는 일방에 노자(奴子)도 전결도 회정(淮丁)되어 사실상 봉족 수의 대삭감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서 독보(獨保)와 같은 것도 또한 그의 완취를 이루기가 곤란하였던 것이다. 즉, 원칙적으로 말하면 봉족의 정액이 그 호 내에 가지는 인정 수 이상이면 괜찮치만 그것이 인정 수 이하인 경우에는 나머지의 수를 딴 데 빼앗기게 되어 그 호를 파괴하는 수도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양성지는 ‘3정위1보’론을 여러 번 주장하였지만 대전 편찬 후 ‘2정1보’의 원칙은 변개되지 않았었다. 요컨대 보법의 신설은 호적과 군적과의 관계를 승리(乘離)하고, 이 일은 호적 내에 있는 3정1호에서 2정1보로 변하여 사실상의 병역 부담 단위의 증가, 따라서 호의 병역 부담 단위로서의 의의의 상실을 재래(齎來)하고, 가지(加之)하여, ‘노자’ ‘전결’도 회정하고 2정1보의 원칙은 병역 부담 단위의 부담 증가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보법의 설정 강행은 ‘은루정구’의 출현을 재촉하는 점에 있어서도 세조의 군액 확장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쪽수▶P36-3그러나 一方에 있어서는 이 點을 除하고는 從來의 戶籍法은 고대로 存置되었는 것을 닞어서는 안 된다. 從來의 그것에 依하면 大戶에서 殘殘戶에 이르기까지 兵役의 單位로 되여 있고, 그 貧弱한 者에 네려감을 따라 人丁의 不足을 招來함으로 그 不足한 者에 限하야 同類를 合처서 奉足으로 定給되였었다. 그러나 保法에 依하면 二丁을 ᅳ保로 하야, 그 兵種에 따라 奉足으로 주워지는 것의 保數가 定하여▶P37저 있다. 於是乎에 從來에 그것과는 달리 一種의 不合理를 生成하게 되었으니 即, 大戶에 있어서는 그 定額 以上의 人丁을 가질 수 없게 되는 一方에 奴子도 田結도 淮丁되여 事實上 奉足數의 大削減을 받게 되였든 것으로서 獨保와 같은 것도 또한 그의 完聚를 遂하기가 困難하였든 것이다. 即, 原則的으로 말하면 奉足의 定額이 그 戶內에 가지는 人丁數 以上이면 괸찮치마는 그것이 人丁數 以下인 境遇에는 남어지의 수를 딴 데 빼아끼게 되어 그 戶를 破壞하는 수도 生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梁誠之는 「三丁爲一保」論을 여러 번 主張하였지만 大典 編纂 後 「二丁一保」의 原則은 變改되지 않었었다. 要컨데 保法의 新設은 戶籍과 軍籍과의 關係를 乘離하고, 이 일은 戶籍 內에 있는 三丁一戶에서 二丁一保로 變하야 事實上의 兵役 負擔 單位의 增加, 따라서 戶의 兵役 負擔 單位로서의 意義의 喪失을 齎來하고, 加之하야, 「奴子」 「田結」도 淮丁하고 二丁一保의 原則은 兵役 負擔 單位의 負擔 增加를 招來하였든 것이다. 保法의 設定 强行은 「隱漏丁口」의 出現을 促하는 點에 있어서도 世祖의 軍額 擴張의 基礎가 되였든 것이다.
































본문5: 5.군액 개관


이조에 들어와 군액의 구체적인 숫자는 태조실록 2년 5월 경오조에 보이는 것이 최초로서, 그것에 의하면, 앞서 왜구 토벌에 향하였던 팔절제사(八節制使) 중에서 남은·박위·진을서 등의 3인으로 하여금, 왜구의 퇴각과 동시에, 그대로 경상·양광·전라의 3도에 각각 적군(籍軍)의 목적으로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 제도에는 그 곳의 안렴사를 시켜 점군(點軍)하여 그 결과를 이때에 이르러 상문(上聞)하였다고 보이므로, 이 숫자는 고려사 권82지 권제35, 병1, 병제, 공양왕 3년조 “七月都堂啓, 請籍水陸軍丁, 仍帶號牌”라는 것과는 직접 관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태조 2년의 숫자는 이러하였다.
쪽수▶P38-1李朝에 드러와 軍額의 具體的인 數字는 太祖實錄 二年 五月 庚午條에 보이는 것이 最初로서, 그것에 依하면, 압서 倭寇 討伐에 向하였든 八節制使 中에서 南誾·朴葳·陳乙瑞 等의 三人으로 하여금, 倭寇의 退却과 同時에, 고대로 慶尙·楊廣·全羅의 三道에 各各 籍軍의 目的으로 머물르게 하고, 남어지 諸道에는 그 곧의 按廉使를 시켜 點軍하야 그 結果를 이때에 이르러 上聞하였다고 보이므로, 이 數字는 高麗史 卷八十二志 卷第三十五, 兵一, 兵制, 恭讓王 三年條 「七月都堂啓, 請籍水陸軍丁, 仍帶號牌」라는 것과는 直按 關係 없을 것이다. 그리고 太祖 二年의 數字는 이러하였다.

京畿左右·楊廣·慶尙·全羅西海·交州·江陵·凡八道馬步兵及騎船軍 摠二十萬八百餘人 子弟及鄕·驛吏 睹有役 者十萬五百餘人

쪽수▶P38-2

京畿左右·楊廣·慶尙·全羅西海·交州·江陵·凡八道馬步兵及騎船軍 摠二十萬八百餘人 子弟及鄕·驛吏 睹有役 者十萬五百餘人

즉, 합계 30만1천3백여인이 되는데, 전자인 20만8백여인은 소위 정규병이라고 할 만한 것이고 후자인 10만5백여인은 잡색군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또 이 숫자에는 서북·동북 양계의 군액이 합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태종 4년 4월의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구의 수(數) 32만2천7백76에 접근하고 있음에 비취여 그 숫자 중에는 정군 내지 정정뿐 아니라, 그의 봉족도 합산한 것이 있음을 생각케 한다. 태종실록에는 전후 두 번 전국의 호구의 숫자가 보인다. 즉, 앞서 쓴 4년 4월 을미조와 6년 10월 병진조에서다. 지금, 이것을 좌기(左記)하고, 다시 경상도 지리지 및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이는 호구의 수를 비판함으로써, 구의 수(數)라는 것이 곧 병정인 인정의 수라는 것, 또 그 안에는 정군=(호수)와 봉족=(솔정)을 합산한 것임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 호라는 것의 성격을 또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쪽수▶P38-3即, 合計 三十萬一千三百餘人이 되는데, 前者인 二十萬八百餘人은 所謂 正規兵이라고 할 만한 것이고 後者인 十萬五百餘人은 雜色軍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또 이 數字에는 西北·東北 兩界의 軍額이 計算되지 않었음애도 不拘하고 그것이 太宗 四年 四月의 京畿道를 除外한 全國의 口數 三十二萬二千七百七▶P39-1十六에 接近하고 있음에 비취여 그 數字 中에는 正軍 乃至 正丁뿐 아니라, 그의 奉足도 合算한 것이 있음을 생각케 한다. 太宗實錄에는 前後 두 번 全國의 戶口의 數字가 보인다. 即, 前記 四年 四月 乙未條와 六年 十月 丙辰條에서다. 只今, 이것을 左記하고, 다시 慶尙道 地理志 及 世宗實錄 地理志에 보이는 戶口의 數를 批判함으로써, 口數라는 것이 곧 兵丁인 人丁의 數이라는 것, 또 그 안에는 正軍=(戶首)와 奉足=(率丁)을 合算한 것임을 證明하고, 더 나아가 그 戶라는 것의 性格을 또 한 번 다른 角度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풍해 강원 동북 서북 총계
태종 4년 4월 19,561 48,992 15,703 14,170 15,879 11,311 27,788 153,404
태종 4년 4월 44,476 98,915 39,150 29,440 29,238 28,238 52,872 322,786
태종 6년 10월 20,729 19,560 48,993 15,714 14,170 15,879 11,311 33,890 180,146
태종 6년 10월 38,138 44,476 98,915 39,167 29,441 29,224 28,683 62,321 370,365
쪽수▶P39-2
京畿 忠淸 慶尙 全羅 豐海 江原 東北 西北 總計
太宗 四年 四月 一九,五六一 四八,九九二 一五,七〇三 一四,一七〇 一五,八七九 一一,三一一 二七,七八八 一五三,四〇四
太宗 四年 四月 四四,四七六 九八,九一五 三九,一五〇 二九,四四〇 二九,二三八 二八,二三八 五二,八七二 三二二,七八六
太宗 六年 十月 二〇,七二九 一九,五六〇 四八,九九三 一五,七一四 一四,一七〇 一五,八七九 一一,三一一 三三,八九〇 一八〇,一四六
太宗 六年 十月 三八,一三八 四四,四七六 九八,九一五 三九,一六七 二九,四四一 二九,二二四 二八,六八三 六二,三二一 三七〇,三六五
즉, 전자에 있어서의 구는 후자에 있어서 정으로 되어 있는데, 그 숫자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음에 의하여 구는 곧 정임이 용이하게 알게 된다. 이 일은 당시에 있어서는 호구 계산의 일반적인 원칙이라고 생각되고, 그것은 군적은 경국대전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개국 이래 상문되는 것이요, 실제의 인구 수를 나타내는 호적은 상문되지 않는 까닭에 인함일 것이다. 이러므로 당시의 기록에 보이는 구의 수(數)는 그대로 병정인 인정의 숫자이다. 따라서 경상도 지리지의 각환(各宦)호구조에 보이는 여자의 수가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르러 모조리 없어지고 남자의 수만이 구의 수(數)에 계산되어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성인 남자 이외의 여자와 노약자도 그것이 호적에 기록되는 한, 호구 수에 들 만도 하겠건만, 이들은 입산(入算)되지 못하였다. 또, 일반 공민이 아닌 사천 같은 것도 세조 때에 이르러 노자 회정(淮丁)의 규정이 생겨서 처음 구의 수에 들어갔던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쪽수▶P39-3即, 前者에 있어서의 口는 後者에 있어서 丁으로 되여 있는데, 그 數字가 大體로 一致하고 있음에 依하야 口는 곧 丁임이 容易히 알어진다. 이 일은 當時에 있어서는 戶口 計算의 一般的인 原則이라고 생각되고, 그것은 軍籍은 經國大典에도 보이는 바와 가치 開國 以來 上聞되는 것이요, 實際의 人口 數를 나타내는 戶籍은 上聞되지 않는 까닭에 因함일 것이다. 이러므로 當時의 記錄에 보이는 口數는 고대▶P40-1로 兵丁인 人丁의 數字이다. 따라서 慶尙道 地理志의 各宦戶口條에 보이는 女子의 數가 世宗實錄 地理志에 이르러 모조리 없어지고 男子의 數만이 口數에 計算되여 있는 것은 오히려 當然한 일이라 할 것이다. 成人 男子 以外의 女子와 老弱者도 그것이 戶籍에 記錄되는 限, 戶口 數에 들 만도 하겠것만, 이들은 入算되지 못하였다. 또, 一般 公民이 아닌 私賤 같은 것도 世祖 때에 이르러 奴子 淮丁의 規定이 生겨서 처음 口數에 들어갔든 것이다. 世宗實錄 地理志에

현대문주1▶本朝人口之法 不明 錄于籍者 僅十之一二 국가每欲正之 重失人心 因循至今 故各道各官人口之數 止此 他道皆然[a 28]

쪽수▶P40-2

원문주1▶本朝人口之法 不明 錄于籍者 僅十之一二 國家每欲正之 重失人心 因循至今 故各道各官人口之數 止此 他道皆然[28]

라 하였으니, 이 의견은 실제 전인구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병사인 인정에 대한 의견이다. 실록 지리지 편자로 8도 지리지에서 실록 지리지를 편찬할 때 고의로 여자의 숫자를 빼렸으므로, 그의 인구라는 것은, 곧 성인 남자인 인정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의 인구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르러 전체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지금 이를 호의 수(數)와 병기하여 둘춰 보면 다음과 같은데, 각 도별 계산와 각 관의 계산이 조금 상이하므로 양자를 병기한다.
쪽수▶P40-3라 하였으니, 이 意見은 實際 全人口에 對한 것이 아니고 兵士인 人丁에 對한 意見이다. 實錄 地理志 編者로 八道 地理志에서 實錄 地理志를 編纂할 때 故意로 女子의 數字를 빼버리었으므로, 그의 人口라는 것은, 곧 成人 男子인 人丁임에 틀림없다. 이런 意味의 人口는 世宗實錄 地理志에 이르러 全體的으로 增加하고 있다. 只今 이를 戶數와 並記하여 둘추워 보면 다음과 같은데, 各 道別 計算와 各官히 計算이 조곰 相異하므로 兩者를 並記한다.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평안 함길 합계
각 도별 20,882 24,170 42,227 24,073 23,511 11,084 41,167 14,739 201,853
각 도별 50,352 100,790 713,759 94,248 71,897 29,009 105,444 66,976 692,475
각 관별 20,896 24,161 42,227 24,093 23,512 11,083 37,135 14,739 202,349
각 관별 50,352 100,790 171,787 94,797 71,899 29,039 111,541 66,978 693,438
쪽수▶P40-4
京畿 忠淸 慶尙 全羅 黃海 江原 平安 咸吉 合計
各 道別 二〇,八八二 二四,一七〇 四二,二二七 二四,〇七三 二三,五一一 一一,〇八四 四一,一六七 一四,七三九 二〇一,八五三
各 道別 五〇,三五二 一〇〇,七九〇 七一三,七五九 九四,二四八 七一,八九七 二九,〇〇九 一〇五,四四四 六六,九七六 六九二,四七五
各 官別 二〇,八九六 二四,一六一 四二,二二七 二四,〇九三 二三,五一二 一一,〇八三 三七,一三五 一四,七三九 二〇二,三四九
各 官別 五〇,三五二 一〇〇,七九〇 一七一,七八七 九四,七九七 七一,八九九 二九,〇三九 一一一,五四一 六六,九七八 六九三,四三八
(경5부·성저10리, 유후사는 제외)
쪽수▶P41-2(京五部·城底十里, 留後司는 除外)
구(口)라는 것이 곧 병정인 인정이라 함은 위에 말하였거니와, 이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본이 된 8도 지리지의 잔존 1부인 경상도 지리지의 기사에 의하여 다시금 명료해질 것이다. 또 이들 소위 구라는 것이 어떻게 배분되었는가도 후자에 의하여 볼 수 있으니 다음과 같다. 경상도 지리지 도내시거조에,
쪽수▶P41-3口라는 것이 곧 兵丁인 人丁이라 함은 위에 말하였거니와, 이것은 世宗實錄 地理志의 基本이 된 八道 地理志의 殘存 一部인 慶尙道 地理志의 記事에 依하야 다시금 明瞭하여 질 것이다. 또 이들 所謂 口라는 것이 어떻게 排分되였는가도 後者에 依하야 볼 수 있으니 다음과 같다. 慶尙道 地理志 道內時居條에,

一. 道內時居四萬一千三百二十戶, 人丁十九萬一千七百十九內
別牌: 八百十六 奉足: 三千九百四十七
侍衛: 二千一百二十 奉足: 七千八百九十五
營鎭屬: 二千二百六十一 奉足: 六千一百七
守城軍: 一千二百一十三 奉足: 二千三百六十二
騎舡: 一萬五千九百四十一 奉足: 三萬六千七十一
雜色: 一萬六千五百七十四 奉足: 四萬七千四百六十二
(計正軍三萬八千九百二十五 奉足: 十萬三千八百五十四)▶P42-1
(都計: 十四萬二千七百七十九
上京從仕人員老弱五萬一千九百四十)
括孤內筆者責

쪽수▶P41-4

一. 道內時居四萬一千三百二十戶, 人丁十九萬一千七百十九內
別牌: 八百十六 奉足: 三千九百四十七
侍衛: 二千一百二十 奉足: 七千八百九十五
營鎭屬: 二千二百六十一 奉足: 六千一百七
守城軍: 一千二百一十三 奉足: 二千三百六十二
騎舡: 一萬五千九百四十一 奉足: 三萬六千七十一
雜色: 一萬六千五百七十四 奉足: 四萬七千四百六十二
(計正軍三萬八千九百二十五 奉足: 十萬三千八百五十四)▶P42-1
(都計: 十四萬二千七百七十九
上京從仕人員老弱五萬一千九百四十)
括孤內筆者責

이라고 하였으니, 곧 상경 종사 인구 중의 장정을 제하면 나머지 모든 장정이 별패 이하의 정군이 되어 있거나 혹은 그 봉족으로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인정이 원칙적으로 병정이었다는 것은, 그 인정 19만1천7백19명 중에, 14만2천7백79명이라는 대다수가 정군 혹은 봉족의 어떤 쪽으로 되어 있다는 것, 또 양자의 거리가 여기서는 5만인에 가깝지만 경상도 지리지의 각 관별 계산에 의하면 2만인밖에 안 된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거니와, 또 하나 중대한 원인을 둘 수 있다. 위의 표에 의하면 제색군인 중 5종의 병사밖에 들지 않고 나머지의 갑사라든가 별시위라든가 또 그들보다 더 나은 신분층의 병사는 상경하여 입역하면 체아직(遞兒職)이라도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이 상경 종사 인구에다가 넣은 것이다. 이들이 또 이 5만 내지는 2만의 수 안에 이들의 봉족 부대와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또 이 2만인의 차이로서 인정의 병정임을 부정한다면 그는 당시에 있어서의 경상도의 특수성을 몰각하는 자다. 같은 경상도 지리지에
쪽수▶P42-2이라고 하였으니, 곧 上京 從仕 人員 中의 壯丁을 除하면은 남어지 모든 壯丁이 別牌 以下의 正軍이 되여 있거나 或은 그 奉足으로 定하여저 있다. 그리고 人丁이 原則的으로 兵丁이었다는 것은, 그 人丁 十九萬一千七百十九名 中에, 十四萬二千七百七十九名이라는 大多數가 正軍 或은 奉足의 어떤 쪽으로 되여 있다는 것, 또 兩者의 距離가 여기서는 五萬人에 가까웁지마는 慶尙道 地理志의 各 官別 計算에 依하면 二萬人밖에 안 된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으려니와, 또 하나 重大한 原因을 둘 수 있다. 上表에 依하면 諸色軍人 中 五種의 兵士밖에 들지 않고 남어지의 甲士라든가 別侍衛라든가 또 그들보다 더 나은 身分層의 兵士는 上京하여 立役하면 遞兒職이라도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이 上京 從仕 人員에다가 넣은 것이다. 이들이 또 이 五萬 乃至는 二萬의 數 안에 이들의 奉足 部隊와 함께 包含되여 있는 것은 勿論이다. 또 이 二萬人의 差異로서 人丁의 兵丁임을 否定한다면 그는 當時에 있어서의 慶尙道의 特殊性을 沒却하는 者다. 같은 慶尙道 地理志에

현대문주2▶道內俗尚大概 重禮讓 崇質儉 崇文好武 務農桑 不事工商 繁華富庶 甲諸他道 名門右族 滿於朝廷[a 29]

쪽수▶P42-3

원문주2▶道內俗尚大概 重禮讓 崇質儉 崇文好武 務農桑 不事工商 繁華富庶 甲諸他道 名門右族 滿於朝廷[29]

이라 하였으니, 실로 경상도는 병역을 면제 당하는 명문 우족(右族)의 연수(淵藪)요, 그러면서도 그 인정의 대다수가 병정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다른 도에 있어서랴. 그리고 경상도 지리지 도내시거조에는 4만1천3백20호라 하였으나, 이것을 도 안의 각 관별로 계산한다면, 3만9천2백92호라, 좌우간 위에 쓰인 정군 소계(小計) 3만8천9백25에 심히 가깝다. 전술한 바와 같이 병역부담은 호를 단위로 하여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병역을 부담하지 않는 명문 우족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가 군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의 숫자는 그 도에 있어서의 정군의 숫자를 대체로 말할 것이고, 구의 숫자는 그 호를 구성하는 정군과 봉족을 합산한 것이라는 것을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에 쓰인 태종 1대 사이의 두 번의 호구 수와 아울러 세종실록 지리지의 그것 중, 호는 정군을 구는 정군과 봉족을 합산한 것 곧 전 병정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당시에 있어서의 전국 군액의 두 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쪽수▶P42-4이라 하였으니, 實로 慶尙道는 兵役을 免除 當하는 名門 右族의 淵藪요, 그러면서도 그 人丁의 大多▶P43-1數가 兵丁이었든 것이다. 하물며 他道에 있어서랴. 그리고 慶尙道 地理志 道內時居條에는 四萬一千三百二十戶라 하였으나, 이것을 道內 各 官別로 計算한다면, 三萬九千二百九十二戶라, 左右間 上記 正軍 小計 三萬八千九百二十五에 甚히 가까웁다. 前述한 바와 같이 兵役負擔은 戶를 單位로 하야 施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兵役을 負擔하지 않는 名門 右族을 除外하면은, 남어지는 모도가 軍戶이었든 것이다. 그러므로 戶의 數字는 그 道에 있어서의 正軍의 數字를 大體로 말할 것이고, 口의 數字는 그 戶를 構成하는 正軍과 奉足을 合算한 것이라는 것을 斷定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上記 太宗 一代 間의 두 번의 戶口 數와 아울러 世宗實錄 地理志의 그것 中, 戶는 正軍을 口는 正軍과 奉足을 合算한 것 곧 全 兵丁 數를 나타내는 것으로 當時에 있어서의 全國 軍額의 二面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잡색군은 위에 쓰인 경상도 지리지 기사에 의하면 그의 봉족과 더불어 소위 제색군인 중의 최대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 어떠한 것을 가리켜 잡색군이라 하는가는 본론에 상술할 바 아니지만, 이 잡색군을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르러서는 군인의 숫자에 넣지를 않고 있다. 거기에는 그것은 명목상의 군인 이외의 모든 인정을 가리킴이라 하였으니,
쪽수▶P43-2雜色軍은 前記 慶尙道 地理志 記事에 依하면 그의 奉足과 더부러 所謂 諸色軍人 中의 最大多數를 占하고 있다. 그 어떠한 것을 가르처 雜色軍이라 하는가는 本論에 詳述할 바 아니지만, 이 雜色軍을 世宗實錄 地理志에 이르러서는 軍人의 數字에 넣지를 않고 있다. 거기에는 그것은 名目 上의 軍人 以外의 모든 人丁을 가르침이라 하였으니,

현대문주3▶雜色軍 盡拍土丁爲兵 故不幷錄 餘州倣此 [a 30]

쪽수▶P43-3

원문주3▶雜色軍 盡拍土丁爲兵 故不幷錄 餘州倣此[30]

라 한 것이 곧 그것이다. 이제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이 잡색군과 아울러 모든 정군의 봉족을 뺀 숫자를 적으면 아래와 같다.
쪽수▶P43-4라 한 것이 곧 그것이다. 이제 世宗實錄 地理志에서 이 雜色軍과 아울러 모든 正軍의 奉足을 뺀 數字를 적으면 左와 같다.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평안 함길 합계
각 도별 5,605 11,846 22,441 15,384 9,027 3,696 21,210 5,957 95,166
각 관별 5,678 11,824 22,441 14,728 8,846 3,696 22,671 5,957 95,841
쪽수▶P44-1
京畿 忠淸 慶尙 全羅 黃海 江原 平安 咸吉 合計
各 道別 五,六〇五 一一,八四六 二二,四四一 一五,三八四 九,〇二七 三,六九六 二一,二一〇 五,九五七 九五,一六六
各 官別 五,六七八 一一,八二四 二二,四四一 一四,七二八 八,八四六 三,六九六 二二,六七一 五,九五七 九五,八四一
(제주도 마보병 3,366명 제외)
쪽수▶P44-2(濟州島 馬步兵 三,三六六名 除外)
앞서 든 세종실록 지리지의 전국 인정 수는 거진 70만 그 중의 약 10만인이 명실상반(名實相伴)하는 군인이고, 그 나머지의 60만은 소위 상경 종사 원인이든지 혹 잡색군이고 또는 그들의 봉족 부대였다. 그리고 잡색군이라든가 또 봉족 부대라 하는 것도 그들이 병제의 조직 내에서 그들에게 상당하는 입역의 의무를 지는 자이므로 그들을 소위 군인과 구별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 쓰인 9만5천여명의 숫자만으로써 당시 군정의 전부라고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쪽수▶P44-3前揭 世宗實錄 地理志의 全國 人丁 數는 거진 七十萬 그 中의 約 十萬人이 名實相伴하는 軍人이고, 그 남어지의 六十萬은 所謂 上京 從仕 員人이던지 或 雜色軍이고 또는 그들의 奉足 部隊이었다. 그리고 雜色軍이라던가 또 奉足 部隊라 하는 것도 그들이 兵制의 組織 內에서 그들에게 相當하는 立役의 義務를 지는 者이므로 그들을 所謂 軍人과 區別지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上記 九萬五千餘名의 數字만으로써 當時 軍丁의 全部라고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각설하고, 호적이라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인민으로부터의 상신(狀申)에 의하는 것이고, 군안은 이를 기본으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 작정(作定)된 인정에 대한 숫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으니 세종 5년 5월 이직의 진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44-4却說, 戶籍이라는 것은 前述한 바와 같이 人民으로부터의 狀申에 依하는 것이고, 軍案은 이를 基本으로 하야 成立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 作定된 人丁에 對한 數字를 前提로 하는 것이었으니 世宗 五年 五月 李稷의 陳言에 依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문주4▶外方軍籍 隨其殘盛 平均定額 以供國役 乃常法也 [a 31]

쪽수▶P44-5

원문주4▶外方軍籍 隨其殘盛 平均定額 以供國役 乃常法也 [31]

다시 말하면, 그 지방에 대하여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정액이 미리 위에서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인정 초출의 수단으로서의 군적=호적이 반드시 살림 내지 집을 표준으로 하지 않았든 법제적인 원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여기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또, 위에 쓰인 2개의 지리지에 있어서의 각 도별의 계산과 각 관별의 그것의 오차가 있는 것도 이에 원인(原因)할 것이라. 이러한 위에서 정해지는 정액은 6년에 한 번 군적이 개수(改修)된다고 하더라도, 용이하게 변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세종 11년 윤4월, 군적에 관한 각품진언(各品陳言)에 의하면 그 이전에는 군적이 3년마다 한 번씩 개성(改成)되었을 때의 말로 이러한 것이 보인다.
쪽수▶P44-6다시 말하면, 그 地方에 對하야 適當하다고 認定되는 定額이 미리 위에서부터 定하여저 있었든 것이▶P45-1다. 따라서 그 人丁 抄出의 手段으로서의 軍籍=戶籍이 반듯이 살림 乃至 집을 標準으로 하지 않었든 法制的인 原因이라고 할 만한 것을 여기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또, 前記 兩個의 地理志에 있어서의 各 道別의 計算과 各 官別의 그것의 誤差가 있는 것도 이에 原因할 것이라. 이러한 위에서 定하여지는 定額은 六年에 한 번 軍籍이 改修된다고 하드래도, 容易히 變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世宗 十一年 閏四月, 軍籍에 關한 各品陳言에 依하면 그 以前에는 軍籍이 三年마다 한 번式 改成되였을 때의 말로 이러한 것이 보인다.

현대문주5▶前此 每三年一改軍籍 但修改年老有故者而已 若船軍之慣船上 侍衛鎭牌之能射御者 苟無其故 皆仍本役 今也不然 改籍之際 守令不自親執 委諸胥吏 雖元定侍衛·鎭牌 若富强行賄 則移于歌役 (下略)[a 32]

쪽수▶P45-2

원문주5▶前此 每三年一改軍籍 但修改年老有故者而已 若船軍之慣船上 侍衛鎭牌之能射御者 苟無其故 皆仍本役 今也不然 改籍之際 守令不自親執 委諸胥吏 雖元定侍衛·鎭牌 若富强行賄 則移于歌役 (下略)[32]

이렇게 군적을 개수한다는 것이 “但修改年老有故者而己”로서 하등 군액에 대한 위에서의 정액을 변개하는 것이 아님은 군적이 6년에 한번씩 개성하기로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이에 관하여는 위에 쓰인 인용문이 스스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조 7년 이후의 군액 확장에 이르러서는 지방 소재의 호적을 상송(上送)시킨다는 단호한 태도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세조 7년, 유서(諭書)에
쪽수▶P45-3이렇게 軍籍을 改修한다는 것이 「但修改年老有故者而己」로서 何等 軍額에 對한 우에서의 定額을 變改하는 것이 아님은 軍籍이 六年에 한번式 改成하기로 되어서도 變함이 없었다. 이에 關하야는 上記 引用文이 스스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世祖 七年 以降의 軍額 擴張에 이르러서는 地方 所在의 戶籍을 上送시킨다는 斷乎한 態度가 要請되였든 것이다. 世祖 七年, 諭書에

현대문주6▶諭諸道觀察使曰 我國戶籍不明 隱漏甚多 每欲檢括大正 而因仍不行 實違大體 今遣朝官 大刷成籍 若前戶籍軍籍 仍置于邑則 官吏必因仍前籍 不肯改正 積年因循之弊 必不能革 本營所藏 視自封識 並寫日月 勿發馬 以各邑 人馬上送[a 33]

쪽수▶P45-4

원문주6▶諭諸道觀察使曰 我國戶籍不明 隱漏甚多 每欲檢括大正 而因仍不行 實違大體 今遣朝官 大刷成籍 若前戶籍軍籍 仍置于邑則 官吏必因仍前籍 不肯改正 積年因循之弊 必不能革 本營所藏 視自封識 並寫日月 勿發馬 以各邑 人馬上送[33]

이라 하여 아울러 제도 도절제사와 처치사에 유(諭)하니, 이러한 준비 아래에 이 유서가 발송되는 그날로 함경도를 제한 7도에 각각 호적 군적 개정의 경차관이 발향(發向)되었다. 그들의 목적으로 하는 바는 다시 말할 것 없이 은정(隱丁)의 검괄(檢括)과 이에 좇는 호의 증가에 있었다. 그 휴행사목 중의 주장된 것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쪽수▶P45-5이라 하야 아울러 諸道 都節制使와 處置使에 諭하니, 이러한 準備 아래에 이 諭書가 發送되는 그날로▶P46-1 咸鏡道를 除한 七道에 各各 戶籍 軍籍 改正의 敬差官이 發向되였다. 그들의 目的으로 하는 바는 다시 말할 것 없이 隱丁의 檢括과 이에 좇는 戶의 增加에 있었다. 그 携行事目 中의 주장된 것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一. 睹道戶籍 用號牌案 錄戶首率丁 其廣作長籬 就籬內 別構家舍 稱爲一家者 刷出作戶
一. 單寒人 無依所托 或爲人雇工 或爲婢夫 寄寓者 拘於良人 別立一戶 必至逃散 作率丁例
一. 諸邑 諸營鎭 額外螺匠 日守書員 醫·律與諸色人等 額外助丁及濫占人口 並錄戶籍
一. 巨戶隱占丁口 限十一月 許戶首及當身自首 其限內不首者 全家徙邊 許人陳告 壯丁十口以上陳告者 元有職者超一資 資窮者 從自願 子婿弟姪中賞職 無職者 亦依上項例 賤人限三年 除雜役(각주6과 같다)

쪽수▶P46-2

一. 睹道戶籍 用號牌案 錄戶首率丁 其廣作長籬 就籬內 別構家舍 稱爲一家者 刷出作戶
一. 單寒人 無依所托 或爲人雇工 或爲婢夫 寄寓者 拘於良人 別立一戶 必至逃散 作率丁例
一. 諸邑 諸營鎭 額外螺匠 日守書員 醫·律與諸色人等 額外助丁及濫占人口 並錄戶籍
一. 巨戶隱占丁口 限十一月 許戶首及當身自首 其限內不首者 全家徙邊 許人陳告 壯丁十口以上陳告者 元有職者超一資 資窮者 從自願 子婿弟姪中賞職 無職者 亦依上項例 賤人限三年 除雜役(註6과 같다)

이렇게 하고 나서, 익년 5월 계묘에, 충청·전라·경상도 군적 도순찰사를 보내게 되는데, 그 현대문주7▶목적은 “前者敬差官等, 所成戶籍, 親審民丁壯弱, 定軍役”하는 데에 있었다.[a 34] 하3도에만 이 도순찰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7년에 경차관 파견에 의하여 가장 많이 군정 수의 변화를 받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 얼마만한 인정이 안괄(按括)되고 호가 증가되었는가. 세조 11년 8월, 양성지의 상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쪽수▶P46-3이렇게 하고 나서, 翌年 五月 癸卯에, 忠淸·全羅·慶尙道 軍籍 都巡察使를 보내게 되는데, 그 원문주7▶目的은 「前者敬差官等, 所成戶籍, 親審民丁壯弱, 定軍役」하는 데에 있었다.[34] 下三道에만 이 都巡察使를 보내기 始作한 것은 七年에 敬差官 派遣에 依하야 가장 많이 軍丁 數의 變化를 받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 結果, 얼마만한 人丁이 按括되고 戶가 增加되였는가. 世祖 十一年 八月, 梁誠之의 上書에 依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문주8▶一. 實軍額 蓋兵貴乎精 不在乎多 今國家推刷軍戶 忠淸道二萬戶 今爲十一萬戶 慶尙道四萬戶 今爲三十萬戶 以二道推之 他道皆然 然分定軍額之時 姦吏以壯者爲奉足 弱者爲戶首 以實者爲病 病者爲實 無馬者爲騎, 有馬者爲步 假如一戶 以他人爲奉足 而子枝爲他人奉足 或以西村人 爲東村人奉足 東村人 爲西村人奉足如此弄法 諾道皆然[a 35]

쪽수▶P46-4

원문주8▶一. 實軍額 蓋兵貴乎精 不在乎多 今國家推刷軍戶 忠淸道二萬戶 今爲十一萬戶 慶尙道四萬戶 今爲三十萬戶 以二道推之 他道皆然 然分定軍額之時 姦吏以壯者爲奉足 弱者爲戶首 以實者爲病 病者爲實 無馬者爲騎, 有馬者爲步▶P47-1 假如一戶 以他人爲奉足 而子枝爲他人奉足 或以西村人 爲東村人奉足 東村人 爲西村人奉足如此弄法 諾道皆然[35]

쪽수▶P47-2즉, 이러한 방대한 군적의 증가에는 무엇보다도 당시에 있어서의 혈족적인 또 공동체적이라 하는 농촌의 성격을 파괴한다는 것이 숨어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해 10월 하3도로 향한 군적사의 휴행사목에 처음 보이는 보법의 신설은 이 모순을 얼마간 제거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얻어놓은 창이(創痍)가 낫지 못하였음은 전술한바 보인 솔정 문제가 그것이다. 그리고 세조의 군액 확장의 구체적인 숫자가 보이는 것은 성종실록, 원년 2월 기묘조에 보이는 제1차 군액 정리를 할 때이다. 앞서 쓴 바와 같이 세조는 하3도를 제한 제도에는 아직 그 확장이 끝나기 전에 별세하였고, 성종은 즉위와 함께 이미 정리 곧 감액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 제1차 정리의 정액과 및 그 구액(舊額) 즉 세조 군액의 확장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쪽수▶P47-2即, 이러한 尨大한 軍籍의 增加에는 무었보다도 當時에 있어서의 血族的인 또 共同體的이라 하는 農村의 性格을 破壞한다는 것이 숨어있었다. 그러므로, 同年 十月 下三道로 向한 軍籍使의 携行事目에 처음 보이는 保法의 新設은 이 矛盾을 얼마간 除去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임이 얻어놓은 創痍가 낫지 몯하였음은 前述한바 保人 率丁 問題가 그것이다. 그리고 世祖의 軍額 擴張의 具體的인 數字가 보이는 것은 成宗實錄, 元年 二月 己卯條에 보이는 第一次 軍額 整理를 할 때이다. 前記한 바와 같이 世祖는 下三道를 除한 諸道에는 아즉 그 擴張이 끝나기 前에 別世하였고, 成宗은 即位와 함께 임이 整理 곧 減額을 斷行하였든 것이다. 이 第一次 整理의 定額과 밑 그 舊額 即 世祖 軍額의 擴張 結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평안 영안
구액(舊額) 6,373 23,384 33,629 23,870 2,338 6,103 13,504 9,091
신감(新減) 1,954 1,953 1,953
정액(定額) 6,373 21,421 31,689 21,917 2,338 6,103 13,504 9,091
쪽수▶P47-3
京畿 忠淸 全羅 慶尙 江原 黃海 平安 永安
舊額 六,三七三 二三,三八四 三三,六二九 二三,八七〇 二,三三八 六,一〇三 一三,五〇四 九,〇九一
新減 一,九五四 一,九五三 一,九五三
定額 六,三七三 二一,四二一 三一,六八九 二一,九一七 二,三三八 六,一〇三 一三,五〇四 九,〇九一
위의 표 병액의 내용은 별시위·갑사·파적위·대졸·팽배·내금위·응양위·만강대·장용대·정병 등의 소위 정군으로서, 그들의 봉족은 물론이요 잡색군과 기선군의 정군도 봉족도 제외되어 있다. 위의 표에 의하여 경상도를 취하여 예를 들면 앞서 쓴 세종실록 지리지의 잡색군을 제한 정군의 수는 약 2만2천, 그 중에서 기선군 정군 1만5천을 제하면 약 7천이 남는다. 이 숫자가 세조 조(朝)의 군액 확장으로 일약 2만3천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증가는 물론 하3도에 가장 심하고 나머지 제도에 있어서는 그다지 그렇지도 않다. 그러므로 다음 성종실록, 3년 2월 무인조에 보이는 제2차 감액에 있어서는 하3도만이 대상으로 되어 있다.
쪽수▶P47-4右表 兵額의 內容은 別侍衛·甲士·破敵衛·隊卒·彭排·內禁衛·鷹揚衛·彎强隊·壯勇隊·正兵 等의 所謂 正軍으로서, 그들의 奉足은 勿論이요 雜色軍과 騎船軍의 正軍도 奉足도 除外되여 있다. 右表▶P48-1에 依하야 慶尙道를 取例하면 前記 世宗實錄 地理志의 雜色軍을 除한 正軍의 數는 約 二萬二千, 그 中에서 騎船軍 正軍 一萬五千을 除하면 約 七千이 남는다. 이 數字가 世祖朝의 軍額 擴張으로 一躍 二萬三千으로 되였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增加는 勿論 下三道에 가장 甚하고 남어지 諸道에 있어서는 그다지 그렇지도 않다. 그러므로 다음 成宗實錄, 三年 二月 戊寅條에 보이는 第二次 減額에 있어서는 下三道만이 對象으로 되여 있다.
충청 전라 경상
감(減) 2,860 3,945 2,895
정(定) 18,581 27,731 19,015
쪽수▶P48-2
忠淸 全羅 慶尙
二,八六〇 三,九四五 二,八九五
一八,五八一 二七,七三一 一九,〇一五
성종의 두 번에 걸친 감액은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고 그 감액론에 대한 변명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이 숫자는 변함이 없었다. 위에 쓰인 두 표는 각 도별로 추기(抽記)한 것에 불과하고, 실록에는 각 관에 지정된된 정액된 숫자가 있으나 번쇄하므로 이를 생략하였다. 이렇게 정액이 결정된 뒤 변함이 없었던 것은 그 이유로 여러가지를 헤아릴 수 있으나 우리는 먼저, 저 보법의 창정이라는 것의 의의를 잊어서는 안 될 줄로 생각한다.
쪽수▶P48-3成宗의 두 번에 亘하는 減額은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고 그 減額論에 對한 弁明的인 것에 不過하다. 그리고 그의 末年에 이르기까지 이 數字는 變함이 없었다. 上記의 二表는 各 道別로 抽記한 것에 不過하고, 實錄에는 各 官에 指定된 定額된 數字가 있으나 煩𤨏하므로 이를 省略하였다. 이렇게 定額이 決定된 뒤 變함이 없었든 것은 그 理由로 여러가지를 헤아릴 수 있으나 우리는 먼저, 저 保法의 創定이라는 것의 意義를 닞어서는 안 될 줄로 생각한다.





























본문6: 6.맺는말


우리는 이상에 있어서 이조초기의 군정이 어디서 공급받았으며 또 어떻게 공급되었든가에 대하여 약간의 고찰을 하여 왔다. 호라는 것은 병역부담의 단위인 동시에 실로 조선 초기의 병제가 딛고 서는 사회적 지반이었던 것이다. 과전법의 창정에서 시작되는 이씨 조선조는 전조(前朝) 고려가 그의 초기에 가졌었던 부병을 또 한번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본 바 대토지 사유의 억압과 이에서 오는 소형의 토지 지배 내지는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공민의 다량 생산이 재래(齎來)되었기 때문이었다. 호가 이 위에서 특이한 방법으로 짜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씨 조(朝)가 성립하자부터 그배안에 내포하였던 대토지 사유라는 역행적 계기는 날이 갈수록 대규모화해 갔다. 임금이 바뀔 적마다 늘어가는 공신의 수, 그들에게 주어지는 사전, 태종 17년 7월에 정해진 사전의 3분지1을 하3도에 절급한 일, 이러한 것을 소위 합법적인 것이려니와 또 지방 호족의 겸병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듯 조선 초의 농장은 늘어가는 일방(一方)이었다. 여기서 생기는 투탁(投託)과 유리(遊離)는 저러한 부병제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 것인가. 드디어 우리는 상론으로 기다리지 않더라도 조선 초 부병제 성립의 본질적 조건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의 붕괴의 조건조차 저절로 이해하는 것이다. 늘어가는 농장, 줄어가는 공민, 이 사이에서 조선 초 병제로 하여금 또 한 번 생기를 띠게 한 것이 곧 저 양반에 불인기(不人氣)한 세조의 보법이었다. 보법에 있어서는 전결, 노비의 회정(淮丁)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던가. 또 그의 은정 검괄(撿括)의 추급 강행이 이에 보조를 맞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보법이라는 새 옷이 과연 병사의 ‘단한’을 매울 만한 것이었던가. 병적으로 붓기만한 병액의 정리를 다시금 시작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이유가 곧 그것을 설명하여 줄 것이지만, 또 역사의 움직임과 동시에 생기는 ‘대립’의 현상이 성종때부터 현저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대개, 이 사회의 기본적인 모순의 발달 곧 농장의 발달과 상영(相映)하는 병제 내의 모순의 대두일 것이다.
쪽수▶P49-1우리는 以上에 있어서 李朝 初期의 軍丁이 어디서 供給받었으며 또 어떻게 供給되었든가에 對하여 若干의 考察을 하여 왔다. 戶라는 것은 兵役負擔의 單位인 同時에 實로 朝鮮 初期의 兵制가 디디고 서는 社會的 地盤이었든 것이다. 科田法의 創定에서 始作되는 李氏 朝鮮朝는 前朝 高麗가 그의 初期에 가졌었든 府兵을 또 한번 가지게 되였다. 그것은 임의 본 바 大土地 私有의 抑壓과 이에서 오는 小型의 土地 支配 乃至는 土地 所有를 基盤으로 하는 公民의 多量 生產이 齎來되였기 때문이었다. 戶가 이 우에서 特異한 方法으로 짜졌든 것이었다. 그러나 李氏 朝가 成立하자부터 그배안에 內包하였든 大土地 私有라는 逆行的 契機는 날이 갈사록 大規模化해 갔다. 임금이 바뀔 적마다 느러가는 功臣의 數, 그들에게▶P50-1 주워지는 私田, 太宗 十七年 七月에 定하여 진 私田의 三分之一를 下三道에 折給한 일, 이러한 것을 所謂 合法的인 것이려니와 또 地方 豪族의 兼併을 우리는 닞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듯 鮮初의 農庄은 느러가는 一方이었다. 여기서 生기는 投託과 遊離는 저러한 府兵制度에 어떠한 影響을 주웠을 것인가. 드디어 우리는 詳論으로 기다리지 않고라도 朝鮮 初 府兵制 成立의 本質的 條件을 理解하는 同時에 그의 崩壞의 條件조차 제절로 理解하는 것이다. 늘어가는 農庄, 줄어가는 公民, 이 間에서 鮮初 兵制로 하여곰 또 한 번 生氣를 띠우게 한 것이 곧 저 兩班에 不人氣한 世祖의 保法이었다. 保法에 있어서는 田結, 奴婢의 淮丁이라는 것이 있지 않었든가. 또 그의 隱丁 撿括의 追及 强行이 이에 步調를 맞후웠든 것이다. 그러나 이 保法이라는 새 옷이 果然 兵士의 「單寒」을 미울 만한 것이었든가. 病的으로 붓기만한 兵額의 整理를 다시금 始作하지 아니치 못하는 理由가 곧 그것을 說明하여 줄 것이지만, 또 歷史의 움즉임과 同時에 生기는 「代立」의 現象이 成宗때부터 顯著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大概, 이 社會의 基本的인 矛盾의 發達 곧 農庄의 發達과 相映하는 兵制 內의 矛盾의 擡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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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史學雜誌 第五十編 第五號 第六號 所載 深谷敏鐵氏 論文 「鮮初の土地制度 一斑」
  2. 太宗實錄, 六年 五月 壬戌條
  3. 同, 三年 六月 乙亥條
  4. 同, 六年 十一月 己卯條
  5. 靑丘學叢, 第十七號 所載 周藤吉三氏 論文 「麗末鮮初に於ける農莊について」에 依하면, 「鮮初の農莊は, 太祖·太宗頃に漸く少く, 世宗より世祖に至り漸次發達し, 成宗頃になると, 非常なる發達を遂げた」라는 말이 보인다.
  6. 太祖實錄, 元年 九月 壬寅條
  7. 太宗實錄, 六年 十一月 癸酉條
  8. 世宗實錄, 十七年 三月 戊寅條
  9. 同, 十八年 七月 壬戌條
  10. 世宗實錄, 二年 正月 乙巳條
  11. 太宗實錄, 八年 十一月 丁卯條
  12. 世宗實錄, 八年 十月 己丑條
  13. 太宗實錄, 四年 六月 壬戌條
  14. 世祖實錄, 元年 九月 丙子條
  15. 睿宗實錄, 元年 三月 甲午條
  16. 世祖實錄, 四年 十一月 癸已條
  17. 同, 十年 十月 乙未條
  18. 成宗實錄, 二十四年 十二月 丙寅條
  19. 經國大典, 兵典 給保條
  20. 成宗實錄, 二十四年 三月 壬辰條
  21. 世祖實錄, 八年 五月 乙未條
  22. 經國大典, 兵典免役條
  23. 睿宗實錄, 元年 十二月 癸丑條
  24. 世祖實錄, 七年 七月 壬戌條
  25. 世宗實錄, 二十二年 二月 丙辰條
  26. 世祖實錄, 三年 三月 戊寅條
  27. 世宗實錄, 三十二年 十月 庚辰條
  28. 世宗實錄, 地理志, 京畿都觀察, 戶口田結條
  29. 慶尙道 地理志, 道內俗尙條
  30. 世宗實錄, 地理志, 京畿都 觀察船軍條
  31. 同, 五年 五月 丁未條
  32. 同, 十年 閏四月 己丑條
  33. 世祖實錄, 七年 七月 壬戌條
  34. 同, 八年 五月 癸未條
  35. 同, 十年 八月 壬午朔條






현대문주


  1. 사학잡지 제50편 제5호 제6호 소재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씨 논문 「鮮初の土地制度 一斑」
  2. 태종실록, 6년 5월 임술조
  3. 같은 책 3년 6월 을해조
  4. 같은 책 6년 11월 기묘조
  5. 청구학총, 제17호 소재 스도 요시유키씨 논문 「麗末鮮初に於ける農莊について」에 의하면, “鮮初の農莊は, 太祖·太宗頃に漸く少く, 世宗より世祖に至り漸次發達し, 成宗頃になると, 非常なる發達を遂げた”라는 말이 보인다.
  6. 태조실록, 원년 9월 임인조
  7. 태종실록, 6년 11월 계유조
  8. 세종실록, 17년 3월 무인조
  9. 같은 책 18년 7월 임술조
  10. 세종실록, 2년 정월 을사조
  11. 태종실록, 8년 11월 정묘조
  12. 세종실록, 8년 10월 기축조
  13. 태종실록, 4년 6월 임술조
  14. 세조실록, 원년 9월 병자조
  15. 예종실록, 원년 3월 갑오조
  16. 세조실록, 4년 11월 계사조
  17. 같은 책 10년 10월 을미조
  18. 성종실록, 24년 12월 병인조
  19. 경국대전, 병전 급보조
  20. 성종실록, 24년 3월 임진조
  21. 세조실록, 8년 5월 을미조
  22. 경국대전, 병전면역조
  23. 예종실록, 원년 12월 계축조
  24. 세조실록, 7년 7월 임술조
  25. 세종실록, 22년 2월 병진조
  26. 세조실록, 3년 3월 무인조
  27. 세종실록, 32년 10월 경진조
  28.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도관찰, 호구전결조
  29. 경상도 지리지, 도내속상조
  30.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도 관찰선군조
  31. 같은 책 5년 5월 정미조
  32. 같은 책 10년 윤4월 기축조
  33. 세조실록, 7년 7월 임술조
  34. 같은 책 8년 5월 계미조
  35. 같은 책 10년 8월 임오삭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