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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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TagSpage|34-1}}三別抄亂은 便宜上 前後 兩期로 나누워 볼 수가 있으니 前期는 即 裴仲孫 盧永禧 等이 中心이 되여 承化侯를 推戴해 가지고 珍島에 入據하야 한 國家의 體制로써 抗戰하던 것이며 後期는 珍島가 攻陷된 後에 金通精 等의 새로운 中心 人物이 出現하야 濟州로 드러가 抗戰을 繼續하던 時期이다. 元來 이 前後의 兩者는 서로 繼續的의 것으로서 그들의 目標와 動向에는 何等의 變化를 차저보기 어려우나 體制上으로 또는 勢力上으로 보면 後者 即 後期에 이르러서는 발서 三別抄의 威勢는 昔日의 觀을 일케 된 것이였다.
 
|목차1원문1번={{TagSpage|34-1}}三別抄亂은 便宜上 前後 兩期로 나누워 볼 수가 있으니 前期는 即 裴仲孫 盧永禧 等이 中心이 되여 承化侯를 推戴해 가지고 珍島에 入據하야 한 國家의 體制로써 抗戰하던 것이며 後期는 珍島가 攻陷된 後에 金通精 等의 새로운 中心 人物이 出現하야 濟州로 드러가 抗戰을 繼續하던 時期이다. 元來 이 前後의 兩者는 서로 繼續的의 것으로서 그들의 目標와 動向에는 何等의 變化를 차저보기 어려우나 體制上으로 또는 勢力上으로 보면 後者 即 後期에 이르러서는 발서 三別抄의 威勢는 昔日의 觀을 일케 된 것이였다.
  
|목차1해독문1번=삼별초난은 편의상 전후 양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으니 전기는 즉 배중손 노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승화후를 추대해 가지고 진도에 입거(入據)하여 한 국가의 체제로써 항전하던 것이며 후기는 진도가 공함된 후에 김통정 등의 새로운 중심 인물이 출현하여 제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하던 시기이다. 원래 이 전후의 양자는 서로 계속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목표와 동향에는 하등의 변화를 찾아보기 어려우나 체제상으로 또는 세력상으로 보면 후자 즉 후기에 이르러서는 벌써 삼별초의 위세는 석일(昔日)의 관(觀)을 잃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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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TagEvent|[[삼별초난]]}}은 편의상 전후 양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으니 전기는 즉 {{TagPerson|[[배중손]]}} {{TagPerson|[[노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승화후를 추대해 가지고 진도에 입거(入據)하여 한 국가의 체제로써 항전하던 것이며 후기는 진도가 공함된 후에 {{TagPerson|[[김통정]]}} 등의 새로운 중심 인물이 출현하여 제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하던 시기이다. 원래 이 전후의 양자는 서로 계속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목표와 동향에는 하등의 변화를 찾아보기 어려우나 체제상으로 또는 세력상으로 보면 후자 즉 후기에 이르러서는 벌써 삼별초의 위세는 석일(昔日)의 관(觀)을 잃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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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번={{TagSpage|35-1}}元宗 十一年 五月 戊辰(二十九日)에 革罷 問題를 契機로 하야 三別抄의 動亂은 디디여 本格化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목차1-1원문2번={{TagSpage|35-1}}元宗 十一年 五月 戊辰(二十九日)에 革罷 問題를 契機로 하야 三別抄의 動亂은 디디여 本格化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목차1-1원문3번={{TagSpage|35-2}}<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목차1-1원문3번={{TagSpage|35-2}}<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목차1-1원문4번={{TagSpage|35-3}}이라 하였다. 이것은 三別抄가 革罷되던 그 翌日인 六月 乙巳(一日)에 이러난 일이어니와 裴仲孫 盧永禧 等이 디디여 表面에 나타나 三別抄를 操縱하야 暴動을 이르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cite no="01">「蒙古兵大至 殺戮人民」</cite>이라 하야 民衆을 激昂 또는 恐動케 하고 다시 <cite no="02">「凡欲輔國者 皆會毬庭」</cite>이라 하야 그들의 目的이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同時에 民心을 오로지 外敵에 向케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云云한 「蒙古兵」은 이미 論한 바와 가치 元宗이 끌고 온 頭輦哥의 蒙古兵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當時 江都의 人民이 이에 應하야 바로 毬庭으로 모혀든 것을 보면 頭輦哥의 蒙古兵의 進入은 高麗의 軍民을 매우 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官民 特히 文武 兩班의 島外 脫出을 嚴重히 禁遏하였나{{TagPage|36}}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勢力의 分散과 要人의 脫走를 防止함과 아울러 島內의 事情의 漏洩됨을 念慮한 까닭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金剛庫 武器를 끄내여 軍卒에게 分與하였다는 것은 武裝의 擴充 强化를 意味하는 바어니와 여기에서 말한 軍卒이라는 것은 다만 三別抄만 가르친 것이 아닌 듯하니 當時 府衛兵은 비록 衰頺하였으나 오히려 國軍의 一部로서 存在하였음으로 생각컨대 三別抄 以外에도 江都에 散在한 府衛兵 또는 奴隸 等(三別抄가 奴隸를 만히 驅去 南下한 것으로 보와)을 糾合하야 武裝을 强制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元來 三別抄는 오랫동안 對蒙 抗戰에 活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와 이때에 비로소 金剛庫 武器로써 武裝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島內의 團束과 防備 計劃을 굳게 하는 한편에 王族이요 또 王室 近親인 {{TagRef|44}承化侯 溫<ref>[[김상기 삼별초-1.png|가운데|1340px]]</ref>을 王으로 擁立하고 官府의 署置와 官員의 任命을 行하야 舊都에 도라간 松京 政府에 對하야 새로운 政府를 세운 것이다. 이는 蒙古에 屈服한 元宗을 國王으로 認치 아니함을 意味하는 것으로서 앞서 林衍의 元宗 擅廢와 그의 軌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抗蒙策을 續行함에는 統制된 國家的 體制가 또한 必要케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李白起와 蒙古에서 보내여 온 回回(註四十五)를 버렸나니 前者 卽 李白起를 버힌 것으로 보면 反對派를 威壓하야 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그들이 애초에 亂을 이르키려 劃策할 때에 李白起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나니 吾人은 이것을 가지고도 三別抄亂이 미리부터 어느 計劃 밑에서 進行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後者 卽 回回를 街上에서 버힌 것은 그들이 斷乎한 對蒙 態度를 다시 國人에게 보{{TagSpage|37-1}}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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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번={{TagSpage|35-3}}이라 하였다. 이것은 三別抄가 革罷되던 그 翌日인 六月 乙巳(一日)에 이러난 일이어니와 裴仲孫 盧永禧 等이 디디여 表面에 나타나 三別抄를 操縱하야 暴動을 이르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cite no="01">「蒙古兵大至 殺戮人民」</cite>이라 하야 民衆을 激昂 또는 恐動케 하고 다시 <cite no="02">「凡欲輔國者 皆會毬庭」</cite>이라 하야 그들의 目的이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同時에 民心을 오로지 外敵에 向케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云云한 「蒙古兵」은 이미 論한 바와 가치 元宗이 끌고 온 頭輦哥의 蒙古兵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當時 江都의 人民이 이에 應하야 바로 毬庭으로 모혀든 것을 보면 頭輦哥의 蒙古兵의 進入은 高麗의 軍民을 매우 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官民 特히 文武 兩班의 島外 脫出을 嚴重히 禁遏하였나{{TagPage|36}}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勢力의 分散과 要人의 脫走를 防止함과 아울러 島內의 事情의 漏洩됨을 念慮한 까닭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金剛庫 武器를 끄내여 軍卒에게 分與하였다는 것은 武裝의 擴充 强化를 意味하는 바어니와 여기에서 말한 軍卒이라는 것은 다만 三別抄만 가르친 것이 아닌 듯하니 當時 府衛兵은 비록 衰頺하였으나 오히려 國軍의 一部로서 存在하였음으로 생각컨대 三別抄 以外에도 江都에 散在한 府衛兵 또는 奴隸 等(三別抄가 奴隸를 만히 驅去 南下한 것으로 보와)을 糾合하야 武裝을 强制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元來 三別抄는 오랫동안 對蒙 抗戰에 活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와 이때에 비로소 金剛庫 武器로써 武裝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島內의 團束과 防備 計劃을 굳게 하는 한편에 王族이요 또 王室 近親인 {{TagRef|44}}承化侯 溫<ref>[[파일: 김상기 삼별초-1.png|가운데|1340px]]</ref>을 王으로 擁立하고 官府의 署置와 官員의 任命을 行하야 舊都에 도라간 松京 政府에 對하야 새로운 政府를 세운 것이다. 이는 蒙古에 屈服한 元宗을 國王으로 認치 아니함을 意味하는 것으로서 앞서 林衍의 元宗 擅廢와 그의 軌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抗蒙策을 續行함에는 統制된 國家的 體制가 또한 必要케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李白起와 蒙古에서 보내여 온 回回<ref>回回는 回紇()人을 가르친 것인지 回回 敎徒를 가르친 것인지 또 回回는 政治的 使命을 띠고 온 것인지 或은 宗敎的 使命을 띠고 온 것인지 硏究를 要할 問題이다.</ref>를 버렸나니 前者 卽 李白起를 버힌 것으로 보면 反對派를 威壓하야 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그들이 애초에 亂을 이르키려 劃策할 때에 李白起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나니 吾人은 이것을 가지고도 三別抄亂이 미리부터 어느 計劃 밑에서 進行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後者 卽 回回를 街上에서 버힌 것은 그들이 斷乎한 對蒙 態度를 다시 國人에게 보{{TagSpage|37-1}}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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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번={{TagSpage|37-2}}裴仲孫 等의 이러한 擧事는 絶對 決心과 覺悟가 없이는 行키 어려운 바로서 이것은 一時的 感情의 激昂에서 突發한 兵變도 아니요 또는 烏合之衆의 暴動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깊은 由來와 歷史的 根據가 있는 것임은 우에서 累述한 바와 같거니와 다시 江都를 손에 너코 敢然히 松京 側과 蒙古를 相對로 이러나게 된 三別抄 側의 戰略的 條件을 차저보면 ① 三別抄는 國軍의 中心이 되여왔음으로 三別抄가 갈러서게 되면 松京 側의 兵力은 甚히 {{TagRef|46}}貧弱한 것으로서<ref>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 六月條에 「以金方慶爲逆賊(〇三別抄를 가르친 것) 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 軍一千餘人 追討三別抄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追討使 金方慶이 겨우 六十餘名의 兵卒을 거느릴 程度로서 三別抄亂 卽後의 松京 側의 兵力이 甚히 貧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同書 元宗 十二年 四·五月條에 依하면 珍島 攻擊에 際하야 京軍을 增派할제 府衛兵이 그 額에 차지 못함으로 文武 散職 白丁 雜色과 및 僧徒를 뽑았으나 五百餘人에 지나지 못하였다.</ref> 蒙古와의 合作이 實現될지라도 三別抄 側으로 보면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던 것 ② 江華는 約 四十年 동안의 首都이었음으로 비록 元宗이 舊京 還都를 表明하였으나 國家의 中心은 아직도 江華이었으며 國家의 蓄積도 이곳에 있고 百宮들은 마짐 燕京으로부터 도라오는 元宗을 마지하며 만히 松京에 건너 갔으나 그들의 妻子들은 依然히 이곳에 남어 있는 狀態이었다. 그럼으로 國家의 蓄積은 그대로 三別抄의 資源이 되는 것이며(下見) 百官의 妻孥를 抑留함은 他日 松京 側을 어느 程度까지 牽制할 수가 있을 법한 것이었다. ③ 그 우에 所謂 「深入海島」는 歷代 抗蒙策에 있어 最高 또는 最後의 計劃으로 되여 온 것으로서 깊이 南方 海中 卽 珍島로 드러가 根據를 定하는 데에도 江都에 集中된 船隻을 驅用하는 것이 最好의 方途가 되였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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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번={{TagSpage|37-3}}다음 三別抄의 南下에 나아가 살펴보면 元來 江都는 塩河(甲串江)를 隔하야 陸地와 指呼의 사이에 있음으로 水戰에 拙劣한 蒙古兵과는 그곳을 根據로 하야 約 四十年 동안 對抗하여 왔으나 元宗이 蒙古와{{TagPage|38-1}} 結托한 以上 情勢는 前에 比하야 크게 變化한 바가 있어 다시 이곳을 根據로 하기는 到底히 不可能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三別抄 側에서는 애초부터 江都를 버리고 다시 南方 海上에 根據地를 求할 것은 넉넉히 推斷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런데 三別抄의 南下에 對하야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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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번={{TagSpage|38-2}}<blockquote no="02">江華守卒 多亡出陸 賊度不能守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 南下</blockquote>
|목차1-1원문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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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8번={{TagSpage|38-3}}라 한 記事가 보이나 이는 當時 松京 側에서 나린 臆測에 不過한 것으로서 그의 南下는 明白히 抗蒙派의 傳統策 또는 豫定 計劃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다. 다시 同傳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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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9번={{TagSpage|38-4}}<blockquote no="03">邦悅(〇判太史局事安邦悅)當還都時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blockquote>
|목차1-1원문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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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0번={{TagSpage|38-5}}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安邦悅이 還都時를 當하야 還都派를 따러 出陸할까 三別抄를 따러 入海할까 去就에 迷惑케 되였음으로 奉恩寺에 奉安한 太祖의 眞影 앞에 나아가 占을 처가지고 決定하였다는 것이다. 일로 보면 三別抄의 南下 計劃은 이미 「還都時」 以前에 定해졌던 것으로 解釋되는바 「還都時」라는 것은 대체 어느 때를 가르친 것인지 五月 二十三日에 還都를 榜示한 때가 아니면 同月 二十七日에 元宗이 燕京으로부터 松京에 도라올제 妃嬪 以下가 모다 江都에서 出陸하던 때를 가르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松京에서는 이미 同月 二十六日에 李仁成을 江華에 보내여 太祖의 眞影을 밧드러 간 {{TagRef|47}}點<ref>高麗史 卷二十六 元宗 十一年 五月 乙丑條 叅照.</ref>을 叅照하야 상고해보면 李仁成으로 말미암어 移安된 太祖의 眞影은 奉恩寺의 것으로 推斷되는 바로서 安邦{{TagPage|39-1}}悅의 占친 것은 二十六日 以前에 屬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그러타면 「還都時」라는 것은 還都를 榜示하던 二十三日을 가르친 것일지니 이와 가치 본다면 三別抄의 南下는 分明히 豫定 計劃이었음도 推斷할 수가 있는 同時에 이러한 計劃이야말로 三別抄로 하여금 大膽한 行動을 取케 한 一大 動機라고도 할지며 이러케 보는 데에서 安邦悅의 占친 意義도 더욱 閳明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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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1번={{TagSpage|39-2}}三別抄의 南下는 高麗史 元宗 十一年 六月 辛未(三日)條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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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2번={{TagSpage|39-3}}<blockquote no="04">剽掠子女財貨 乘舟南下</blockquote>
|목차1-1원문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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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3번={{TagSpage|39-4}}라 하야 動亂이 勃發된 그 再翌日인 六月 三日로 되여 있으나 다시 高麗紀事 至元 七年 六月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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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4번={{TagSpage|39-5}}<blockquote no="05">是日(〇二日)晩 植報 叛兵悉遁去 三日 世子愖(〇諶)報 叛兵劫府庫燒圖籍 逃入海中 行省使人覘江華 島中百姓皆空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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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5번={{TagSpage|39-6}}이라 한 記事와 叅照해보면 當時 三別抄는 江都의 人物 府庫를 휩쓰러 가지고 遷動한 만큼 하로 동안에는 到底히 完了치 못할 것으로서 二日부터 開始되여 三日에 이르러 끝난 것으로 解釋되는 바이며 所謂 그들의 「卷土入海」의 狀況에 關하야는 前擧 裴仲孫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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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6번={{TagSpage|39-7}}<blockquote no="06">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缸破江 舳艫相接 無慮千餘艘 時百官咸出迎王 其妻孥 皆爲賊所掠 慟哭之聲振動天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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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7번={{TagSpage|39-8}}라 한 記事와 元宗 十二年 八月에 蒙古 中書省에 보낸 高麗의 國書 가운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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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8번={{TagSpage|40-1}}<blockquote no="07">又若奴婢 各從其主者也 當其主順命就陸 乃因打疊家産而還江都者 悉被驅者(高麗史 卷二七)</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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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9번={{TagSpage|40-2}}라 한 것으로써 그의 概況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그 反面에 이로 因하야 松京 側에서 바든 打擊은 實로 深刻한 바가 있었다.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一年 六月 乙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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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0번={{TagSpage|40-3}}<blockquote no="08">幸頭輦哥屯所 (〇白州?) 時初出古京 衣冠未備 王及百官 皆以戒服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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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1번={{TagSpage|40-4}}이라 한 것이던지 仝 九月 癸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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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2번={{TagSpage|40-5}}<blockquote no="09">設藏經道場於本闕 王始備法駕 然侍從甚少 樂官未具 文武官多有步行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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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3번={{TagSpage|40-6}}라 한 것으로 보면 人物의 凋殘과 衣冠 器仗의 缺乏된 原因이 江都에서 咫尺인 松京에 還都한 데에 있다는 것보다도 三別抄의 所謂 「卷土人海」에 있었다고 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며 國家의 蓄積도 이로 말미암어 거의 蕩失되였던 것도 <cite no="03">「內外蓄積 去年爲逆賊偷掠無遺」</cite> <cite no="04">「小邦蓄積 方就陸時 悉爲逆賊攘奪」</cite> 等의 {{TagRef|48}}記事로써 넉々히<ref>同書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 丙子 及二月 乙卯條의 蒙古에 보낸 國書 中에 보임.</ref> 想像할 수가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江都를 휩쓸은 三別抄는 디디여 西으로 向하야 鳩下里 附近으로부터 離陸하야 江華 喬桐의 海峽을 시처 南下한 것으로 {{TagRef|49}}解釋되나니<ref>三別抄의 江華 離去의 經路에 關하야는 本文에서 旣擧한 바와 같이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紅破江 舳臚相接 無慮千餘艘」라 하였으나 仇浦와 缸破江의 位置가 今日에 있어서는 자못 不明하다. 그러나 다시 高麗史節要 卷十八 元宗 十一年 三別抄 南下에 關한 記事 中에 「前中書舍人李淑眞 即將尹吉浦 聚奴隷 尾擊餘賊於仇浦 斬五人 至浮落山 臨海耀兵 賊望見恟懼 以爲狄兵己至 遂遁 淑眞與郎中田文胤等封府庫 使人守之 故無賴者 不得肆其姦」이라 한 記事가 보인다. 이 記事를 通하야 보면 李淑眞 尹吉甫 等은 江都로부터 尾擊에 나온 것은 疑心할 餘地가 없거니와 浮落山과 缸破江도 또한 서로 멀리 떠러저 있지 아니하였을 것도 前後 兩 記事를 對照하여 보면 首肯치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浮落山은 今 江華 西北 海岸에 聳立한 別立山이 아닌가 하나니 이는 語音 上으로나 또는 位置 上으로 보와 (「狄兵己至」라는 것은 蒙古兵이 이미 江都에 進入한 것을 意味한 듯한데 이는 三別抄가 西岸으로 빠젔음으로 蒙古兵이 或 鹽河를 건너 東으로부터 江都에 드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인 듯) 이와 같이 推斷하는 바이다. 만일 그렇다면 缸破江은 別立 山下의 江華 喬桐 兩島에 끼여 있는 海峽을 가르친 것이 아닐런지 그리고 仇浦는 지금 鳩下里 附近의 浦口를 가르친 것으로 臆測되는 바이니 鳩下里 鳩上洞이 서로 隣接하여 있어 鳩(구)音의 地名이 겹쳐 있으며 그 우에 이곳은 江都 卽 江華邑과도 平坦한 地帶를 사이에 두고 있음으로 當時 陸地 交通에 있어서도 매우 便利하였을 것으로 믿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리 본다면 前擧 兩 記事와 또는 李淑眞 等의 尾擊 方向 等이 자못 𦝰合되는 듯한 感이 있는 바이다.</ref> 그들이 東으로 塩河를 거치지 아니한 것은 松京 側의 눈을 避하야 追撃의 機會를 주지 아니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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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4번={{TagSpage|40-7}}이 三別抄의 南下 入海에 있어 또 한가지 吾人의 興味를 끌런 바가 있으니, 그것은 곧 讖緯說이 이에도 附會되여 있는 것이다. 前擧 裴仲孫傳의 安邦悅에 關한 記事 가운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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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5번={{TagSpage|41-1}}<blockquote no="10">(前略)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 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 說賊曰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之讖 於此驗矣 遂爲謀主</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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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6번={{TagSpage|41-2}}라 한 것이 보이나니 元來 政治 運動에 圖讖을 利用한 것은 高麗에서도 自來로 그의 例가 許多하거니와 特히 龍孫讖은 鐵圓의 {{TagRef|50}}古鏡讖을<ref>高麗史 卷一 太祖 世家 一, 貞明 四年 三月條에 「唐商客 王昌瑾 忽於市中 見一人狀貌懷偉 鬚髮皓白 頭載古冠 被居士服 左手持三隻捥 右手擎一面古鏡 方一尺許 謂昌瑾曰能買我鏡乎 昌瑾以二斗米買之 (中畧) 昌瑾懸其鏡於市壁 日光斜映 隱隱有細字可讀 其文曰三水中四維下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此謂運滿一三甲 (中畧) 此一龍子三四 遞代相承六甲子 云云」이라 한 것인데 이 古鏡讖은 分明히 高麗 太祖의 膺運을 말한 것으로서 이미 斗溪 李丙燾氏가 論破한 것과 같이 王建 一派의 어느 政治的 意圖에서 造出된 것이라 하겠다. (「朝鮮」 第二百七號 所載 李丙燾氏의 「高麗初期の圖讖及び神秘思想」 叅照)</ref> 비롯하야 李義旼도 이것으로써 {{TagRef|51}}非望을 품게 되였다고 傳하는 바이다.<ref>高麗史 卷百二十八 李義旼傳에 「義旼甞夢紅霓起兩腋間 頗負之 又聞古讖有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之語 十八子乃李字 因懷非望」이라 하였다.</ref> 龍은 元來 帝王을 象徵하는 것으로서 龍孫이라면 王孫의 意로도 解釋할 수 있을 것이나 高麗에서의 龍孫이라는 것은 特殊한 意味가 包含되여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이는 麗室 祖上의 元昌王后(懿祖의 后)에 關한 {{TagRef|52}}龍女傳說<ref>高麗史 高麗 世系條에 元昌王后에 對하야 西海 龍王의 女라는 傳說이 보임.</ref>로부터 나온 것인 듯하거니와 圖讖 以外에도 高麗 王孫에 對한 {{TagRef|53}}龍孫의 稱은 高麗 中末頃을 通하야 世間에 行하였던 것이다.<ref>動安居士行錄 卷第四 賓王錄에 「三韓東海之龍孫(〇元宗의 王子 順安侯琮을 가르친 것) 獲觀盛禮」라 한 文句가 있으니 이는 李承休가 順安侯의 隨員으로 元에 건너갔을 때에 中書省의 饗宴에 謝禮하는 글월 가운대에 보이는 바이며 燃黎室記述 卷一 高麗政亂王業肇基條 所引 閑骨董 記事에 「王(〇禑王)臨刑 謂衆人曰吾王氏 本龍孫也 左脇下 必有三鱗 世爲之表 遂解衣示人 左脇下 果有三鱗 金色大如錢 衆皆驚駭悲働」이라 하였다. 이 說話는 禑王을 辛旽의 子라고 몰아세운 데에 對하야 그의 無據한 것을 辨解하려는 世人의 同情에서 造出된 것인 듯하나 이것도 또한 高麗 王室의 龍孫傳說을 根據로 한 데에 이 說話의 意義가 있는 것이다.</ref> 엇젯던 龍孫은 高麗 王孫을 가르친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cite no="05">「龍孫十二盡」</cite>은 무엇을 意味한 것인가. 이에 對하야는 斗溪 李丙燾氏가 이미 論破한 바와 같이 龍孫은 十二代에 盡絕된다는 意味로 解할 지니 이것은 前擧 古鏡讖의 <cite no="06">「此一龍子三四 遞代相承六甲子」</cite>에서 나온 것이다. 三四는 十二로 六甲子는 三百六十年으로 보고 一世를 三十年으로 헤아린다면 三百六十年은 實로 十二世의 {{TagRef|54}}歷年에 該當하는 것이다.<ref>前擧 李丙燾氏의 「高麗初期の圖讖及び神秘思想」 叅照.</ref> 그런데 高麗 王室의 世次는 龍女傳說을 基準으로 한다면 元昌王后의 子 世祖로부터 元宗까지가 十二世이며 歷年으로는 元宗 十一年이 太祖 卽位로부터 三百五十三年에 (九一八―一二七〇) 當하나니 三別抄의 亂이 이러나던 때는 所謂 三四六甲子說에 近似値를 가즌 것이라 할 것이다. 이는 비록 偶然한 符合이라 할지나 圖讖思想으로 볼 때에는 또한 興味있는 問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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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7번={{TagSpage|42-1}}그 전에 安邦悅의 <cite no="07">「龍孫十二盡 云云」</cite>의 說은 裴仲孫 等이 承化侯를 擁立하는 것과 자못 矛盾된 觀이 있나니, 이는 承化侯도 또한 王族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元來 三別抄의 亂은 承化侯 中心이 아니며 또 讖緯에 나타나는 「龍孫」은 高麗의 王室 宗統을 가르친 것이요 王族 全體를 意味하는 것은 아님으로 承化侯 같이 支族으로부터 새 局面에 出現하는 것은 別問題에 屬한다 할 것이다. {{TagRef|55}}그리고 <cite no="08">「向南作帝京」</cite>은 <cite no="09">「姬龍之後重興」</cite>의 讖과도<ref>高麗史 卷百二十三, 白勝賢傳에 「又奏曰圖讖有姬龍之後重興之說 宜以周康王諱釗字 改御押 從之 旣而 忌高高句麗王釗不 得其死 乃復舊諱」라 하였다. 이는 高麗史節要에 依하면 元宗 五年 六月에 屬한 것이며 다시 同節要 同年 六月條에 依하면 「中郎將白勝賢 因叅政金俊奏曰 親醮塹城 又於三郎城神泥洞 造假闕 親設五星道場 則可寢親朝 (〇蒙古에서 王의 親朝를 要求해왔음) 三韓變爲震旦 大國來朝也 王信之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三郎城과 神泥洞의 假闕에 移御하야 親히 道場을 베푸는 것으로써 外冠의 防遏과 國運의 重興을 招致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思想은 元來 地德衰旺說 다시 말하면 地德이 衰한 松京을 버리고 그것이 旺盛한 곳으로 遷都하면 國軍이 旺盛하리라는 風水說에서 나온 것으로서 「向南作帝京」讖과도 서로 關聯을 갖인 것으로 생각된다.</ref> 서로 表裡가 되는 것으로서 亦是 重興을 意味하는 것이라고 解釋되거니와 元來 <cite no="10">「向南作帝京」</cite>의 讖은 楊州를 南京(今 京城)이라 하야 宮闕을 創造케 된 文宗時代 前後에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文宗이 南京을 세운 것은 所謂 三京說에 依하야 基業 延長을 圖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의 {{TagRef|56}}動機는 亦是 <cite no="11">「三四六甲子」</cite> 讖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ref>高麗史 卷百二十二 金謂彈傳에 依하면 肅宗 元年에 金謂彈가 南京遷都를 奏請한 上書 가운대에 道詵의 踏山歌로 「松城落後向何處⋯⋯漢江魚龍四海通⋯⋯若渡其江作帝京 一席中裂隔漢江」과 또 三角山 明堂記의 「憑三角山作帝京 第九之年四海通」의 句를 드렸다. 일로 보면 「向南作帝京」 讖을 踏山歌와 三角山 明堂記 等에서 무더나온 듯하거니와 이러한 種類의 風水圖讖說은 神秘詞에 보이는 三京說에 關聯을 갖인 것으로서 基業 延長 思想에 根據를 둔 것이다. 그리고 이 地德說이 다시 三四六甲子讖과 結合된 데에서 文宗의 南京 創設을 보게 된 것이 아닐런가 하니 高麗 王統의 世次로는 文宗이 第十一代에 當함으로 三四 卽 十二代說로 본다면 王朝의 運命은 次代에 끝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基業 延長의 方法으로서 南京의 地德을 빌고저 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ref> 그런데 <cite no="12">「向南作帝京」</cite>의 南에 對하야 安邦悅은 南方 海中으로 附會한 것이 자못 吾人의 興味를 끌런 바어니와 特히 踏山歌의 <cite no="13">「若渡其江作帝京 一席中裂隔漢江」(上註 叅照)</cite>은 偶然하게도 當時 松京과 三別抄의 分裂 對立에 好個의 照應이 되는 感이 있으며 이것은 다시 一面에 있어 半存 半亡의 占辭를 解하는 데에도 關聯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 解釋된다. {{TagRef|57}}이러한 類의 風水圖讖說은 高麗에서도 在來로 國家가 騷亂할 때에 만히 이러나던 것으로서 高宗 元宗 時代에도—蒙古의 侵寇가 盛함을 따러—자못 行하였으니<ref>前擧 白勝賢의 奏議로써 元宗 時代의 槪況을 엿볼 수 있으며 다시 高宗時에 올라가 살펴보면 基業 延長의 目的으로써 三郎城과 神泥洞과 밑 摩利山 南(今 興旺里)에 離宮을 創建한 것을 비롯하야 南京 假闕에 御衣를 奉安한 일도 있었으니 高麗史 高宗 世家 二十一年 秋 七月 甲子條에 「遣內侍李白全 奉安御衣于南京假闕 有僧據議云 自扶踈山 分爲左蘇 曰阿思達 是古楊州之地 若於此地 營宮闕而御之 則國祚可延八百年 故有是命」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吾人의 注目을 끌런 것은 江都에 入據한 以後의 離宮 假闕을 세운 地點은 모다 都城(江都)으로부터 南쪽에 있는 點이다. 이것도 또한 「向南作帝京」 類의 圖讖에 基因한 것인 듯하니 當時 江華에 跼蹐되여 出陸이 不可能한 情勢로 보면 江都에 對한 南京은 또한 島內의 南部에 두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로써 보면 當時 圖讖思想에 있어 南方遷都熱이 얼마나 盛하였음을 알 수 있는 同時에 그의 影響은 三別抄의 南下에도 적지 아니하였을지니 安邦悅의 附和한 것도 그의 一例라 할 것이다. 要컨대 當時 이러한 國都의 南遷 運動은 비록 圖讖思想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그의 根本的 動機는 北方 種族의 强壓에 있던 것이 아닌가도 臆測되는 바이다.</ref> 일로 보면 三別抄 側에 또한 이러한 圖讖이 行한 것도 차라리 있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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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8번={{TagSpage|42-2}}② 三別抄의 珍島 入據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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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29번={{TagSpage|43-1}}三別抄가 珍島에 入據하기는 元宗 十一年 八月 十九日(丙戌)이였으니 그들의 江都 出發로부터 七十四日 後의 일이다. 그동안 그들의 行動은 記錄에 잘 나타나 있지 아니함으로 자세히 考究할 수가 없으나 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 六月(十三日 辛巳)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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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0번={{TagSpage|43-2}}<blockquote no="11">以金方慶爲逆賊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一千餘人 追討三別抄 至海中 望見賊船 泊靈興島(〇南陽) 方慶欲擊之 宋萬戶懼止之 賊乃遁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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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1번={{TagSpage|43-3}}이라 한 것으로써 미루워 보면 三別抄는 一路 珍島로 向한 것이 아니라 西海 一帶의 島嶼를 經略하면서 南下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그런데 西南 海島 中에서 特히 珍島를 擇占한 데에는 相當한 根據가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元來 三別抄의 南下한 目的은 앞서 崔瑀의 江華遷都와 그 軌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元宗이 蒙古와 結托한 以上 抗蒙을 續行하려면 南方 海上에 根據를 옴겨가지고 적어도 南部 一帶를 그들의 勢力에 너치 아니할 수가 없는 情勢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條件에 마즐 만한 根據地로는 江華와 같이 陸地에 갓차우면서도 廣濶한 島嶼가 아니면 아니될 것이며 또 特히 三別抄의 侍賴하는 바는 制海에 있음으로 海上 要害의 地를 必要로 하게 되였든 것이다. 이와 같은 條件으로써 본다면 西南 多島海上에 있어 珍島와 같은 곳이 적으리라고 생각되는 바이니 當時 三別抄의 珍島 占據에 對하야 松京 側에서도 果然 悲鳴을 올렸던 것이다. 元宗 十二年 三月에 蒙古에 보낸 圖書 가운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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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2번={{TagSpage|43-4}}<blockquote no="12">慶尙全羅貢賦 皆未得陸輸 必以水運 今逆賊據於珍島 兹乃水程之咽喉 使往來船楫 不得過行(高麗史 卷二十七)</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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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3번={{TagSpage|44-1}}이라 한 것은 這間의 事情을 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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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4번={{TagSpage|44-2}}三別抄가 珍島에 入據한 後 龍藏城을 쌓고 (石築) 宮殿을 크게 營造하야 都城으로서의 施設에 또한 힘을 기우렸던 것으로서 東國輿地勝覽(卷三十七) 珍島古跡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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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5번={{TagSpage|44-3}}<blockquote no="13">龍藏城(在今治東二十五里 石築 周三萬八千七百四十一尺 高五尺 高麗元宗時 三別抄叛 自江華府 入據此島 大營宮殿 金方慶討平之 此其舊基)</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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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6번={{TagSpage|44-4}}라 하였나니 이러한 記事로 보와도 그들의 經綸이 또한 草々치 아니한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珍島를 首都로 한 三別抄의 活動과 勢力은 매우 旺盛한 바가 있었으니 南海 彰善(晉州 屬島) 巨濟 濟州(이에 關해서는 아래에서 更論할 터) 等을 비롯하야 三十餘島가 그들의 海上 王國의 領域이 되었으며 特히 南海에는 그의 中堅 劉存奕이 웅거하야 珍島와 椅角의 勢를 取해 가지고 {{TagRef|58}}南岸 一帶를 식그럽게 하였다.<ref>高麗史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四月 丁巳條 元中書 省移文 中에 「珍島賊黨 虜掠官民 陷沒諸島三十餘所 其力漸盛 云云」이라 하였고 同年 三月에 蒙古에 보낸 國書 가운대에 「況今逆賊 日益蔓延 侵及慶尙道金州密城 加又掠取南海彰善巨濟合浦珍島等處 至於濱海部落 悉皆𣒗奪」이라 하였으며 高麗史節要 卷十九 元宗 十二年 五月條에 「時 賊將劉存奕 據南海縣 摽掠沿海 聞賊遁入耽羅 亦以船八十餘艘 從之」라 하였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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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7번={{TagSpage|44-5}}다시 三別抄의 活動은 陸地에서도 또한 活潑한 바가 있었으니 그들은 먼저 陸地의 民物을 島嶼에 옴겨 抗戰力의 充實을 圖하기에 汲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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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8번={{TagSpage|44-6}}<blockquote no="14">三別抄 入據珍島 侵掠州郡 矯帝旨 令全羅道按察使 督民收穫 徙居海島(高麗史 元宗 世家 十一年 八月 丙戌條)</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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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39번={{TagSpage|44-7}}라 한 記事는 그것을 말하는 바어니와 民物을 海島에 遷徙하는 데에 帝旨를 矯使하였다 하였으니 만일 이 帝旨를 例의 蒙帝의 諭旨로 본다면 解釋하기 자못 困難한 바가 있다. 이는 高麗에서 오래동안 海島에 入據하야 蒙古와 抗戰해 온 歷史的 事實로 보나 또는 當時 「去水就陸」이 兩國 平和의 條件으로 되였던 關係로 보와 아모리 捏造한 것으로 치드라도 말이 成立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생각컨대 當時 三別抄가 承化{{TagPage|45-1}}侯를 推戴하고 있었음으로 或 이 新王을 가르처 帝라 한 것을 그 詔旨를 바든 地方官 輩가 帝라 하니까 例의 蒙帝를 가르친 것으로 錯認한 데에서 <cite no="14">「矯帝旨」</cite>라 한 解釋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前擧 <cite no="15">「向南 作帝京」</cite>의 文句로 보와도 王京이라 하지 아니하고 帝京이라 한 것이 이러한 臆測에 一種의 暗示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三別抄는 다시 長興을 비롯하야 合浦(馬山) 金州(金海) 東萊 等 沿岸 要地는 勿論 깊이 羅州 全州에까지 進攻하였던 것이니 特히 錦城山城(羅州)에서는 七晝夜의 激戰을 行하야 그의 {{TagRef|59}}威力을 떨치기도 하였다.<ref>高麗史節要 卷十八·九 元宗 十一年 九月—十二年 四月條 叅照.</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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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0번={{TagSpage|45-2}}三別抄의 勢力이 이와 같이 떨침을 따러 國內의 人心에 끼친바 影響이 또한 莫大한 바가 있었으니 <cite no="16">「時 三別抄反據珍島 勢甚熾 州郡望風迎降 或往珍島謁見」(高麗史 卷一百三 金應德傳)</cite>이라 한 것과 같이 當時 去就에 炫惑케 된 遠近 州縣에서는 이에 響應하는 者가 續出하야 所謂 望風迎降의 現象을 이루웠으며 또 承化侯를 眞王으로 울어러 往謁하는 者도 있었던 것이다. 다시 이에 對하야 멧 가지 事例를 드러보면 高麗史(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 丙戌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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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1번={{TagSpage|45-3}}<blockquote no="15">密城(〇密陽)郡人方甫, 桂年, 朴平, 朴公, 朴慶純, 慶祺等 嘯聚郡人 將應珍島 乃殺副使 李頤 遂稱攻國兵馬使 移牒郡縣 遣其黨 殺淸道監務林宗(一作崔良梓) 淸道人詐降 飮以酒 醉而殲之 時密城人趙阡 爲一善縣令 賊召阡 約與同叛 阡從之 尋聞其黨 殲於淸道 乃與郡人孫逸謀殺賊魁 按察使李敖(一作李淑眞) 與金州防禦使金晅 慶州判官嚴守安 領兵奄至 阡等斬方甫等降 賊遂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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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2번={{TagSpage|46-1}}이라 한 것으로써 密陽 地方의 動搖 狀態를 였볼 수가 있거니와 이 우에 松京에서도 官奴 崇謙輩가 達魯花赤과 都城 內의 在位者들을 殺害하고 珍島에 往投하려는 陰謀가 이러났으며 이 事件은 다시 大部島(南陽의 屬島)의 叛亂에까지 {{TagRef|60}}影響을 끼쳤던 것이다.<ref>高麗史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 癸巳條에 「官奴崇謙功德等 聚其徒 誅殺達魯花赤及國中在位者 往投珍島 隊正宋思均告變⋯⋯俄而 祗候辛佐宜見閭巷七八人偶語 奔告于 王曰事急矣 時日將暮 宰樞及承宣重房內侍茶房 相顧失色 計無所出 王遣知樞密院事李玄原 上將軍鄭子璵 請救於脫朶兒 脫朶兒與洪茶丘等 會宰樞 捕崇謙等十餘人 按問皆服」이라 하였다. 元來 奴隸輩는 가장 現實에 對하야 不滿을 품고 있는 것으로서 유달리 新天地를 憧憬할 것은 또한 自然의 勢라 할 것이나 特히 蒙古에 對한 敵愾心이 甚한 것은 아래의 大部島의 例와 아울러 생각할 때에 蒙古人의 橫暴에 對한 反感이 一般的으로 높았음을 알 것이며 十餘人의 崇謙의 徒黨에 對한 處置에 松京의 君臣은 서로 狼狽하야 脫朶兒에 求授하리 만큼 都城의 警備가 陳漏하였던 것이다. 다음 大部島의 叛亂에 關하야는 同 二月 辛丑條에 「窄梁防戍蒙古兵 入大部島 侵奪居民 民甚怨之 大部人聞崇謙等起 遂殺蒙古六人以叛」이라 하였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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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3번={{TagSpage|46-2}}한편 이에 對한 松京과 蒙古 側의 動向을 살펴보면 松京 側에서는 六月 十三日(辛巳)에 金方慶으로 逆賊 追討使를 삼어 蒙古軍과 같이 海上으로 追擊케 하고 또 叅知政事 申思佺으로 全羅道 討賊使를 삼어 沿岸 州縣의 防禦에 當케 하였으나 水陸 兩軍이 모다 萎縮하야 떨치지 못하였다. 高麗史 金方慶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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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4번={{TagSpage|46-3}}<blockquote no="16">三別抄叛 驅掠人民 航海而南 王遣叅知政事中思佺 爲追討使 (〇高麗史 元宗 世家 及高麗史節要에는 全羅道 討賊使라 하였음) 又命方慶 領兵六十餘人 與蒙古宋萬戶等兵一千餘人 追討至海中 望見賊船泊靈興島 方慶欲擊 宋萬戶懼止之⋯⋯賊入據珍島 侵掠州郡 思佺不以討賊爲意 或聞之 曰我已爲宰相 破賊成功 復何爲乎 至羅州 聞賊出陸 奔還于京 全州副使李彬 亦棄城逃</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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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5번={{TagSpage|46-4}}라 한 記事는 當松京 側의 兵力이 甚히 貧弱한 것과 將官들의 腐敗 無能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바이니 만일 蒙古와의 合作이 없었으면 松京 側은 처음부터 三別抄에 當키 어려웠던 것을 넉넉히 推想할 수도 있는 바이다. 그 뒤(同年) 九月에 이르러 元宗은 다시 將軍 楊東茂 高汝霖 等을 식혀 舟帥로써 珍島를 進攻케 하고 申思佺에 가름하야 金方慶으로 全羅道 追討使를 삼어 蒙古 元帥阿海로 더부러 進擊케 하였으니 일로부터 金方慶이 統帥의 格으로써 蒙古軍과 같이 珍島 政略에 當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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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6번={{TagSpage|47-1}}當時 蒙古 側에서는 이 亂에 對하야 처음부터 積極的으로 나오게 되였던 것이니 元來 三別抄의 亂은 蒙古에 對하야 二重의 脅威가 되는 까닭이다. 三別抄는 抗蒙을 旗幟로 하야 이러났음으로 모처럼 元宗을 懷柔하야 高麗를 그의 外藩으로 삼으려는 政策에 齟齬가 생기는 우에 蒙帝(世祖)의 宿願인 東征 計劃에 支障이 生하는 것으로서 三別抄가 海上에 抗戰을 繼續하는 동안에는 日本 經畧을 安心하고 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蒙帝는 六月 三日에 三別抄 南下의 報를 接하자 바로 蒙古軍으로써 {{TagRef|61}}追擊케 하였던 것이니<ref>元高麗紀事 中統(至元) 七年 六月 三日條 及 元史高麗傳 叅照.</ref> 이에서 前擧 金方慶이 蒙古의 宋萬戶로 더부러 海上 追擊을 試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蒙古에서는 다시 이것을 契機로 하야 그의 勢力을 積極的으로 高麗에 浸透식히게 되였으니 元高麗紀事 中統(至元) 七年 七月 二十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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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7번={{TagSpage|47-2}}<blockquote no="17">丞相安童等 奉頭輦哥等遣大託忙古䚟 (〇大托克孟古代) 來言 令阿海領軍 一千五百 屯王京 伺察其國中 遂以阿海爲安撫使</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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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8번={{TagSpage|47-3}}라 하였고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一年 七月 辛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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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49번={{TagSpage|47-4}}<blockquote no="18">頭輦哥 遣摠管洪茶丘 巡視全羅慶尙東界三道</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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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0번={{TagSpage|47-5}}라 하였다. 그때에 頭輦哥는 白州(白川)에 留屯하야 大軍으로써 뒤에서 누루며 阿海에게 兵力을 주워 松京에 進出하야 安撫使라는 이름으로 麗廷의 動靜을 監視케 하고 다시 洪茶丘를 식혀 널리 地方의 情況을 伺察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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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1번={{TagSpage|48-1}}이와 같이 高麗에 浸透되기 시작한 蒙古의 勢力은 다시 그의 屯田策으로 말미암어 더욱 確乎한 地盤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들의 屯田 目的은 主로 {{TagRef|62}}東征의 準備에 있었다고 하나<ref>元高麗紀事 中統(至元) 七年 閏十一月條에 「又詔植曰嚮甞遣信使 通問日本 不謂執迷 固難以善言開諭 此卿所知 將經界於彼 勅有司 發卒屯田 爲進取之計 庶免爾他日轉輸之勞」라 하였고 元史兵志(三) 屯田條에 「高麗屯田 世祖至元七年創立 是時東征日本 欲積糧餉爲進取之計」라 하였다.</ref> 一面에 있어 三別抄에 對備하는 {{TagRef|63}}措置가 되는 同時에<ref>三別抄를 平定할 때에 蒙古에서는 屯田兵을 主로 쓰게 되였으며 또 屯田 經畧使 忻都 等이 高麗의 金方慶으로 더부러 征討의 任에 當하였던 것으로도 蒙古의 屯田 設置가 또한 三別抄에 對備하려는 데에도 한 가지 目的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ref> 松京 側에 對하야도 一種의 側面的 牽制가 되는 것이니 蒙古의 屯田은 말하자면 一石三鳥의 策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야 그의 屯田 計劃은 元宗 十一年 十一月 二十五日頃에 決定되여 그 翌年 三月初(三日)에 이르러서는 屯田의 罷止에 對한 高麗의 懇篤한 {{TagRef|64}}交涉에도<ref>高麗史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條 及 同二月條에 屯田를 罷하기를 請하는 國書가 보임.</ref> 不拘하고 忻都 史樞 洪茶丘 等을 命하야 屯田 經畧司를 設置하고 約 五千의 蒙古兵과 約 二千의 洪茶丘의 舊 領民(高麗人戶)으로써 黃州 鳳州(鳳山) 金州(金海) 等處에 {{TagRef|65}}屯田을 實施함에 이르렀다.<ref>元高麗紀事 至元 七年 十一月 二十五日條에 「中書省奏 於高麗 設置屯田經畧司 以忻都史樞 爲鳳州等處經畧使 領軍五千 市田於金州 又令洪茶丘 以舊領民二千屯田 阿刺帖木兒爲副經畧司 總轄之」라 하였는데 特히 洪茶丘의 舊 領民으로 말하면 本來 洪茶丘의 父 洪福源이 高宗 二十年頃에 西京 郎將으로서 蒙古에 叛附하야 北界 四十餘城의 遺民을 익끌고 遼陽 瀋陽(奉天) 等地에 건너가매 蒙古에서는 그를 東京 總管에 任命하야 高麗人戶를 統領케 하는 同時에 高麗 侵畧에 그를 嚮導로서 많이 利用하였고 洪福源에 죽은 後에 그의 子 茶丘가 뒤를 이워 父 職을 承襲하야 遼東(遼陽) 等地의 高麗人戶를 統轄하게 된 것이다. 다시 蒙古의 屯田에 關하야는 元史兵志(三) 高麗 屯田條 及 高麗史 元宗 世家 十二年 三月 丙寅條 叅照.</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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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2번={{TagSpage|48-2}}蒙古에서는 이와 같이 步一步 그의 勢力을 高麗에 扶植식히면서 松京 側과 緊密한 提携 아래에서 三別抄에 當하게 되였다. 元宗 十二年 五月에 麗蒙 聯合軍의 奇襲으로 말미암어 珍島가 攻陷될 때까지 戰果를 살펴보면 대개 勝利는 三別抄 側에 도라갓던 것이니 이제 그의 一二의 著例를 드러보면 高麗史 金方慶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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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3번={{TagSpage|48-3}}<blockquote no="19">{{TagRef|66}}方慶與阿海 屯三堅院 對珍島而陣 賊 於所掠船艦 皆畫怪獸 蔽江照水 動轉如飛 勢不能當每戰 賊軍先鼓譟突進 互勝負 曠日相持 會潘南人洪贊洪機<ref>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條)에 依하면 「潘南人洪賛等自賊中逃還 云云」이라 하였으니 洪賛 等은 珍島로부터 도라온 것이 明白하다.</ref> 讒于阿海曰 方慶孔愉等 陰與賊相通 阿海執而囚之 移牒達魯花赤 達魯花赤令方慶還 與贊等對辨 以參知政事蔡楨代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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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4번={{TagSpage|48-4}}라 하였다. 이 記事로써 吾人은 三別抄의 水上勢力과 作戰이 斷然히 聯合軍을 壓頭하였던 것을 알 수가{{TagPage|49-1}} 있으며 또 聯合 側에서는 失敗를 거듭하야 한갓 時日만 遷延하게 되였음으로 金方慶 같은 人物이 敵과 內通하였다는 讒言으로 被逮까지 되였던 것이다.(元宗 十一年 十一月) 날로 强盛하여 가는 三別抄를 앞에 두고 軍政의 中心 人物인 金方慶을 罷免식히게 된 것은 松京 側의 큰 損失이며 三別抄 討伐 途上의 一大 暗影이였다. 그 後 洪賛 等의 誣告인 것이 明白하게 되며 元宗은 達魯花赤의 諒解를 얻어 그 翌年(閏十一月)에 金方慶에게 上將軍의 職號를 주워 다시 三別抄에 當케 하고 또 萬戶 高乙麻에게 兵 二百을 주워 南方 沿海 地方을 防戍케 하였다. 이에 金方慶은 다시 陣容을 整備해 가지고 翌 十二月 丁巳(二十二日)에 珍島를 向하야 追擊케 되였으니 그때의 戰況에 關하야 다시 前擧 金方慶傳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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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5번={{TagSpage|49-2}}<blockquote no="20">方慶至珍島 賊皆乘船 盛張旗幟 鉦鼓沸海 又於城上 鼓譟大呼 以助聲勢 阿海㤼下船 欲退屯羅州 方慶曰元帥若退 是示弱也 而賊乘勝長驅 誰敢當鋒 (中略) 阿海不敢退 方慶獨帥師攻之 賊以戰艦 逆擊之 官軍皆退 方慶曰決勝在今日 突入賊中 賊圍之 驅迫以去 方慶士卒 殊死戰 矢石俱盡 又皆中矢 不能起 已薄珍島 岸有賊卒 露刃跳入船中 金天祿以短矛刺之 方慶起曰 寧葬魚腹 安能死賊乎 欲投海 衛士許松延許萬之等 挽止之 創者見方慶危急 叫呼復起疾戰 方慶據胡床 指揮士卒 顔色自若 將軍楊東茂 以蒙衝突擊之 賊乃解去 遂潰圍而出</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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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6번={{TagSpage|49-3}}이라 하였다. 이 記事로도 當時 三別抄의 戰鬪力이 優越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러나 金方慶이 孤軍으로써 突進타가 거의 목숨을 일을 뻔한 것은 그의 無謀한 冒險이라는 것보다도 차라리 蒙古 元帥 防海의 法劣에 激忿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阿海의 이러한 懦法 無能으로 말미암어 聯合 側의 軍勢는{{TagPage|50-1}} 더욱 떨치지 못하고 한갓 時日만 遷延케 됨으로 그 翌年(元宗 十二年) 正月에 이르러 高麗 政府에서 蒙古에 交涉한 結果 阿海는 디々여 召還되고 屯田 經畧使忻郁史樞 等이 이에 遞代함에 이르렀다.(三月 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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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7번={{TagSpage|50-2}}三別抄와의 武力 衝突에 있어 도리여 쓰라린 經驗을 맛보고 있던 聯合 側 特히 蒙古에서는 一方으로 三別抄에 向하야 懷柔 工作을 자조 行하기에 이르렀다. 元宗 十一年 十二月에(二十日頃) 員外郞 朴天澍가 蒙使 杜員外와 같이 珍島에 건너가게 되였으니 이는 三別抄에게 주는 元宗의 諭旨와 蒙帝의 書를 傳하야 그들을 懷柔식히려던 것이다. 그런데 朴天澍가 携去한 蒙帝의 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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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8번={{TagSpage|50-3}}<blockquote no="21">近以高麗權臣構亂 乃遣兵東下 唯林衍是問 不意脅從詿誤之人 妄自疑懼 往々逋竄未出 或逃往他境 因爲叛逆 朕之素心 務在輯寧爾邦 詔諭之後 有能自新 復歸本國 其已往之愆 咸當矜釋 其中雖有早曾背主 逃匿爾國中者 亦令安業爲民 不許各主認識 如或不爾 雖 及(高麗史 卷二十六 元宗 十一年 十二月 乙卯條에 보임)</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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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59번={{TagSpage|50-4}}라 한 것인 듯하거니와 이것은 仝月 二十日에 太子(後日의 忠烈王)가 燕京으로부터 도라올 때에 가지고 온 蒙古 圖書 가운대의 하나로서 이것은 元來 三別抄에게 直接 보내는 것이 아니요 元宗에게 보내는 形式을 取하였으나 書面의 內容을 가지고 보면 三別抄에게 보여주려는 意圖에서 지은 것임은 一見에 明瞭히 看取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리고 松京 側에서 蒙使 杜員外를 案同하야 朴天澍를 珍島에 보낸 것도 蒙古 側의 意向을 받어 行한 것임은 高麗史 同上條에 <cite no="17">「王遣員外郞朴天樹 持帝詔 往諭三別抄」</cite>라 한 것으로도 넉々히 推斷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엇젯던 朴天樹 一行이 珍島에 건너가기는 翌年(元宗 十二年) 正月 六日(庚午)이{{TagPage|51-1}}였는데 三別抄 側에서는 碧波亭(郡東 三十里 渡口에 있었음)에서 그의 一行을 宴慰하면서 가만히 二千餘艘의 兵船을 보내여 聯合軍을 攻掠하야 兵船 一隻을 拉致하야 九十餘人을 殺害한 事實이 있었다. 이는 明白히 그들에게는 歸順할 意思가 없다는 것을 表明하는 同時에 聯合軍 側의 放心한 틈을 타가지고 損害를 주려는 데에서 나온 듯하다. 三別抄 側의 態度가 이러함으로 朴天澍는 結局 懷柔 工作에 失敗하고 仝月 二十二日에 도라왔는데 그때에 三別抄에서는 蒙帝의 書는 그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야 朴天澍에게 返却하고 元宗의 諭旨에 對하야는 다만 <cite no="18">「惟命是從」</cite>이라는 儀禮的 回答을 주웠을 뿐이며 {{TagRef|67}}蒙使 杜員外는 그곳에 抑留하고 말었다.<ref>高麗史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 庚午 及 丙戌條 叅照.</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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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0번={{TagSpage|51-2}}그런데 蒙古에서는 또 다시 二月 十日(甲辰)에 呼圖克垈爾(忽都答兒)에게 詔書를 주워 直接 三別抄를 {{TagRef|68}}招諭하기에 이르렀나니<ref>元史 卷七 世祖本紀 至元 八年 二月 甲辰條 叅照.</ref> 이에 앞서 (正月 二十五日) 麗廷에서는 三別抄 招諭 顚末를 報키 爲하야 朴天澍를 蒙廷에 보낸 것으로 미루워 보면 蒙古 側에서는 朴天澍로 因하야 三別抄 側 情況과 特히 앞서 間接으로 보낸 詔書가 返却된 것을 알게 된 結果 直接 交涉을 試하여 보려던 것이 아닌가 한다. (忽都答兒 使行의 結果는 아래에 보임) 蒙古 側에서 이와 같이 至再至三 側面 工作을 行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事情이 있는 것이나 (이에 關하야는 下節 「三別抄에 對한 蒙古 側의 懷柔工作」條 叅照) 그 中에도 水戰에 自信이 없던 것이 主要한 條件이 아닐런가 한다. 當時 三別抄와의 水戰에서 자조 失敗를 받은 지라 冒險的 作戰을 避하려던 것도 事實이었나니 <cite no="19">「高麗安撫使阿哈(〇阿海) 略地珍島 與逆黨遇 多所亡失 中書省臣言 諜知珍島{{TagPage|52-1}} 餘糧將竭 宜乘弱攻之 詔不許 令巡視險要 常爲之備」(元史 世祖本紀 至元 八年 正月 丙戌條)</cite>라 한 것도 這間의 事情을 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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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1번={{TagSpage|52-2}}三別抄 側에 있어서도 이러한 蒙古의 懷柔策을 逆으로 利用하야 老師의 許로써 時日의 遷延을 꾀하던 것이니 元史 世祖本紀 至元 八年 三月 己卯(十六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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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2번={{TagSpage|52-3}}<blockquote no="22">中書省臣言 高麗叛臣裴仲孫 乞諸軍退屯 然後内附 而忻都(〇忻都)未從其請 今願得全羅道以居 直隷朝廷 詔以其飾詞 遷延歳月 不允</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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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3번={{TagSpage|52-4}}이라 하였다. 일로써 三別抄 側이 所謂 內附 條件으로서 諸軍(聯合軍)의 退屯을 要求하고 때로는 全羅道 一帶의 占有를 要求하였던 것을 알 수 있거니와 特히 後者 卽 全羅道를 要求한 것은 呼圖克垈爾의 招撫에 酬應한 것이 아닌가도 臆測되는 바이다. 엇제떤 이러한 要求는 모다 聯合 側의 受諾하기 不可能한 것으로서 蒙帝도 看破한 바와 같이 그들의 遷延策에서 나온 것임은 疑심치 못할 事實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三別抄 側에서는 前擧한 그들의 要求가 拒否되였음에도 不拘하고 同一한 手段을 뒤에까지 反復하였으니 <cite no="20">「追討使金方慶報 珍島賊使人告忻都曰 有密議請官人暫臨小島 忻都曰我不受帝命 何敢入 賊又請具酒殽來饋 許之」(高麗史 元宗 世家 十二年 四月 丁未條)</cite>라 한 記事로써 알 수가 있는 것이다. 交戰 狀態에 있으면서 敵의 元帥 더구나 上國으로 自處하는 蒙古軍의 主將을 堂々하게 招致하려 한 것은 아모리 생각해도 誠意있는 交涉으로는 解釋할 수가 없는 것이니 酒殽의 來饋와 아울러 亦是 遷延策으로써 相對 側을 愚弄한 것으로{{TagPage|53-1}}박게 보여지지 아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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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4번={{TagSpage|53-1}}③ 麗蒙 聯合軍의 珍島 攻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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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5번={{TagSpage|53-2}}三別抄의 勢力이 갈수록 旺盛하야 前述한 바와 같이 聯合軍을 자조 攻破하는 우에 元宗 十二年에 드러 그의 活動은 자못 活潑하야 北은 長興을 筆頭로 하야 東으로는 合浦 金州 東萊 等을 侵略하였으며 이에 따러 人心의 動搖도 자못 甚하야 密城의 方甫 桂年 等의 亂과 官奴 崇謙 等의 陰謀 大部島民의 叛亂 等이 뒤를 이어 이러나는 한편에 珍島에서는 다시 蒙使(杜員外)를 抑留하고 또 聯合 側의 懷柔策을 도리여 利用하야 時日의 遷延을 피하는 等 聯合 側으로 보면 形勢는 자못 猶像를 不許하기에 일으렀다. 珍島 總攻擊의 機運은 이러하야 促成된 것이니 元宗 十二年 四月에 이르러 鳳州(屯田) 經略使요 또 阿海를 가름하야 蒙古軍을 指揮케 된 忻都는 디々여 積極的 攻勢를 取할 것을 主張하였다. 元史 世祖本紀 至元 八年 四月 壬寅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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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6번={{TagSpage|53-3}}<blockquote no="23">高麗鳳州經略司實都 (〇忻都)言 叛臣裴仲孫稽留使命 負固不服 乞與浩爾齊(原作怱林赤)王國昌 分道進討 從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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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7번={{TagSpage|53-4}}라 하였는데 特히 忻都의 分攻策에 나아가 살펴보면 마침 浩爾齊와 王國昌은 元宗 十二年 正月에 蒙帝의 命을 바더 日本에 건너가는 國信使 趙良弼을 護送하야 軍을 익글고 海上에까지 보내준 다음에 그가(國信使) 도라오기를 기다리며 金州 等 處에 {{TagRef|69}}駐屯하고 있던 터임으로<ref>元史 卷百六十七 王國昌傳 及 高麗史 元宗 世家 十二年 正月 己卯條 叅照.</ref> 이것을 利用하야 分道 進撃을 主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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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8번={{TagSpage|54-1}}當時 東征을 急히 하려던 蒙帝는 디々여 懷柔 工作을 斷念하고 忻都의 意見을 조차 四月 十九日에 水寧公 綧의 子 熙, 雍 等(註四十四 叅照)에게 兵四百으로써 赴援케 하고 다시 同月 二十四日에 周介夫를 보내여 軍期를 알림과 同時에 高麗에 向하야 兵員 船隻의 增發을 要求하였다. 高麗史(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四月 丁巳(二十四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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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69번={{TagSpage|54-2}}<blockquote no="24">蒙古遣周夫介來詔曰 據忻都白羊奏請 添遣軍馬 比及暑雨前 討平逆賊 朕以爲 暑雨之前 軍馬未能到彼 卿宜於旁近 簽軍六千人 分附攻取珍島 若事早畢 於卿百姓便益 中書省移文曰 珍島賊黨 虜掠官民 陷沒諸島 三十餘所 其力漸盛 明見虛行調發 不肯實心投拜 便合急攻 以除巨害 若至暑雨時節 卒難收取 除珍島邊見有兵船二百六十艘 令本國添發兵船一百四十艘  更乞增兵 幷力攻賊 其合用軍餉什物 委官盡力供頓 毋致失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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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0번={{TagSpage|54-3}}라 한 것으로 보면 蒙古 側에서는 海島 進攻이 暑雨의 節期에는 더욱 困難함으로 그 前에 速히 行키로 하고 蒙古의 增援軍이 雨期의 前에 到着하기가 不能하리라 하야 高麗에 向해서 六千軍과 또 見有兵船(珍島 對岸의 것인 듯) 二百六十艘 外에 다시 一百四十艘를 增發할 것과 軍餉 什物의 供給 等을 要求해 온 것이다. 이에 高麗에서는 府衛兵을 다시 檢閱하야 蒙古의 要求에 應케 되였던 것이니 同書(卷八十一) 兵志 五軍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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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1번={{TagSpage|54-4}}<blockquote no="25">十二年 (〇元宗) 四月 司空田份 左僕射尹君正等 閱府衛兵 不滿其額 乃井閱文武散職白丁雜色及僧徒 以充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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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2번={{TagSpage|54-5}}라 하였고 同書 元宗 世家 十二年 五月 癸亥朔條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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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3번={{TagSpage|55-1}}<blockquote no="26">脫朶兒(〇達魯花赤) 與宰樞 閱兵于郊 凡五百餘人 其都領指諭 給馬人一匹 軍卒每十人 給馬一匹 及行軍卒 多掠取行人馬 脫朶兒問曰 宰樞子弟無從軍者乎 答云無 脫朶兒乃令宰樞 各出馬給軍官 甲子(〇二日) 加發京軍 及調忠淸 慶尙道軍 以濟師</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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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4번={{TagSpage|55-2}}라 하였다. 當時 衰頹된 府衛兵으로는 所要 軍額에 達치 못하였음으로 文武 散職 白丁 雜色과 僧徒를 徵發한 우에 다시 地方軍까지 調發케 되였으며 騎兵을 主로 하던 蒙古 側에서는 軍馬 徵發에 또한 苦心하던 것이였다. 그리고 松京 側에서는 다시 舟師 三百을 增派하야 {{TagRef|70}}赴援케 하였으니<ref>高麗史 卷八十一 兵志 五軍條 叅照.</ref> 이는 前擧 蒙古의 兵船 要求에 應酬한 것으로 解釋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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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5번={{TagSpage|55-3}}그리하야 麗蒙 聯合軍의 珍島 總攻擊은 同年 五月에 드러 實行에 옴기게 되였으니 前부터 珍島 對岸에서 (三堅院?) 三別抄와 對峙하고 있던 金方慶 忻都 等은 前擧 高麗의 增發軍을 引率하고 南下한 {{TagRef|71}}洪茶丘를 기다려<ref>高麗史節要 卷十九 元宗 十二年 五月條 叅照.</ref> 五月 十五日에 디々여 珍島 總攻擊을 決行함에 이르렀다. 當時 戰況에 對하야 高麗史 金方慶傳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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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6번={{TagSpage|55-4}}<blockquote no="27">方慶與忻都協謀 攻珍島 方慶忻都將中軍 入自碧波亭 永寧公之子熙雍及洪茶丘將左軍 入自獐項 大將軍金錫萬戶高乙麽將右軍 入自東面 摠百餘艘 賊聚碧波亭 欲拒中軍 茶丘先登 縱火挾攻 賊驚潰 趣右軍 右軍懼 欲赴中軍 賊獲二艘 盡殺之 先是 官軍數與賊戰不勝 賊輕之 不設備 及官軍奮擊 賊皆棄妻子遁 其所虜江都士女珍寶及珍島居民 多爲蒙兵所獲 方慶見賊潰追之 獲男女一萬餘人 戰艦數十艘 餘賊走耽羅 方慶入珍島 得米四千石 財寶器仗 悉輸王京 其陷{{TagPage|56-1}}賊良民 皆令復業</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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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77번={{TagSpage|56-2}}이라 하였다. 金方慶이 蒙將 忻都 等으로 더부러 珍島를 進攻할제 聯合軍을 左 右 中 三軍으로 나누워 東 中 西 세 方面으로 敵의 勢를 갈리게 한 것이니 이 {{TagRef|72}}作戰은 그들이 必勝의 計라 하야 미리 蒙帝에게까지 알리웟던 것이다.<ref>元高麗紀事 至元 八年 五月條에 「初忻都史樞洪茶丘 往攻珍島 賊列戰艦於島之北岸 樞曰今兇竪跳梁 未可力爭況夏暑方熾 海氣鬱蒸 弓力緩 卒難爲用 誠因此時 分軍爲三隊 多張旗幟 以爲疑兵 吾與諸軍 潛師以出 直挫其鋒 以趨珍島 破之必矣 遣使以聞 且乞火槍火砲及諸攻戰之具 上從之 旣而 與賊戰大敗 禽斬之」라 하였다.</ref> 이에 對하야 三別抄는 聯合 側의 中軍을 拒敵코저 碧波亭 附近으로 集結할 때에 左翼인 洪茶丘 等이 急히 側面으로 攻擊하야 三別抄 側의 艦船에 火攻을 試하였던 것으로서 三別抄의 戰線이 潰亂케 된 것이다. 當時 蒙古軍은 精銳한 各種의 攻戰 器具를 가즌 우에 火槍과 火碼를 使用하였나니(前註 叅照) 이는 確實히 聯合 側의 制勝에 重要한 原因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三別抄 側에 있어서는 그동안 官軍과 싸워 勝利를 거듭한 結果 디々여 輕敵의 마음이 생겨 防備施設을 等閑히 한 우에 聯合軍의 進擊을 너무나 疎忽히 보왔던 것이니 <cite no="21">「先是 官軍數與賊戰不勝 賊輕之 不設備」</cite>라 한 것과 後日 濟州에 入據한 三別抄가 聯合 側의 招諭使에 對하야 <cite no="22">「爾等嘗遣人珍島 誘我緩其心 引大軍攻破 云云」(下節에서 更綸할 터임)</cite>이라 한 것으로써 這間의 事情을 알 수가 있거니와 이것이 三別抄 敗因의 가장 큰 條件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야 一敗塗地로 三別抄는 珍島를 빼악겻으며 그의 一黨은 디々여 最後의 牙城으로 믿고 있던 耽羅(濟州)로 드러가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을 擊破한 金方慶은 (그들이 끌고 갓던) 男女 萬餘人과 戰艦 數十艘를 捕獲한 우에 島內에 積畜한 糧米 四千石과 財寶 器仗을 거두워 松京으로 搬去하였으며 그 밖에 蒙軍에게 掠取된 (江都의) 士女와 珍寶도 또한 많었던 것으로 보면 當年 珍島의 三別{{TagPage|57-1}}抄의 威勢가 어떠하였음도 推察할 수가 있는 것이다. 聯合 側의 珍島 攻掠이 이와 같이 行할 때에 {{TagRef|73}}左翼 洪茶丘는 第一着으로 承化侯와 그의 子 桓을 베혔으며<ref>高麗史節要 卷十九 元宗 十二年 五月條에 「僞王承化侯溫 永寧公綧母兄也 綧屬凞雍曰 若事捷 當救兄死 茶丘先入 殺溫及其 子桓」이라 하였다.</ref> 裴仲孫도 그 亂中에 죽었던 것으로 解釋되나니 <cite no="23">「與戰戰大敗 禽斬之」(註七十二 叅照)</cite>라 한 것과 三別抄의 殘黨이 濟州에 入據한 뒤로는 그의 일음이 낱아나지 아니하고 金通精이 中心이 되였던 것으로써 推斷할 수가 있는 바이다.
  
|목차1-1해독문1번=원종 11년 5월 무진(29일)에 혁파 문제를 계기로 하여 삼별초의 동란은 드디어 본격화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앞서 든 고려사 배중손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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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번=① 삼별초난의 발발과 그의 남하
|목차1-1해독문2번=<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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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번={{TagPerson|[[원종]]}} 11년 5월 무진(29일)에 혁파 문제를 계기로 하여 삼별초의 동란은 드디어 본격화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앞서 든 {{TagBook|[[고려사]]}}배중손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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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번=<blockquote no="01">(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blockquote>
|목차1-1해독문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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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번=이라 하였다. 이것은 삼별초가 혁파되던 그 다음 날인 6월 을사(1일)에 일어난 일이거니와 {{TagPerson|[[배중손]]}}{{TagPerson|[[노영희]]}}등이 드디어 표면에 나타나 삼별초를 조종하여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cite no="01">“蒙古兵大至 殺戮人民”</cite>이라 하여 민중을 격앙 또는 공동(恐動)하게 하고 다시 <cite no="02">“凡欲輔國者 皆會毬庭”</cite>이라 하여 그들의 목적이 몽고병을 방어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동시에 민심을 오로지 외적에 향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운운한 ‘몽고병’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TagPerson|[[원종]]}}이 끌고 온 {{TagPerson|[[두련가]]}}(頭輦哥)의 몽고병을 가리킨 것이거니와 당시 강도의 인민이 이에 응하여 바로 구정(毬庭)으로 모여든 것을 보면 {{TagPerson|[[두련가]]}}의 몽고병의 진입은 고려의 군민을 매우 날극(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관민 특히 문무 양반의 섬 밖 탈출을 엄중히 금알(禁遏)하였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세력의 분산과 요인(要人)의 탈주를 방지함과 아울러 섬 안의 사정의 누설됨을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금강고(金剛庫) 무기를 꺼내어 군졸에게 분여하였다는 것은 무장의 확충 강화를 의미하는 바거니와 여기에서 말한 군졸이라는 것은 다만 삼별초만 가리킨 것이 아닌 듯하니 당시 부위군은 비록 쇠퇴하였으나 오히려 국군의 일부로서 존재하였음으로 생각건대 삼별초 이외에도 강도에 산재한 부위병 또는 노예 등(삼별초가 노예를 많이 구거(驅去) 남하한 것으로 보아)을 규합하여 무장을 강제한 것이 아닐까 한다. 원래 삼별초는 오랫동안 대몽 항전에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에 비로소 금강고 무기로써 무장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섬 안의 단속과 방비 계획을 굳게 하는 한편에 왕족이요 또 왕실 근친인 {{TagRefT|44}}승화후 온<ref group="a">[[파일: 김상기 삼별초-1.png|가운데|1340px]]</ref>을 왕으로 옹립하고 관부의 서치(署置)와 관원의 임명을 행하여 옛 도읍지에 돌아간 송경 정부에 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운 것이다. 이는 몽고에 굴복한 {{TagPerson|[[원종]]}}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앞서 {{TagPerson|[[임연]]}}의 {{TagPerson|[[원종]]}}천폐와 그의 궤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항몽책을 속행함에는 통제된 국가적 체제가 또한 필요하게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TagPerson|[[이백기]]}}와 몽고에서 보내어 온 {{TagRefT|45}}회회(回回)<ref group="a">회회는 회흘(골)인을 가리킨 것인지 회회 교도를 가리킨 것인지 또 회회는 정치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인지 혹은 종교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인지 연구를 요할 문제이다.</ref>를 버렸나니 전자 즉 {{TagPerson|[[이백기]]}}를 벤 것으로 보면 반대파를 위압하여 이론(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애초에 난을 일으키려 획책할 때에 {{TagPerson|[[이백기]]}}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도 {{TagEvent|[[삼별초난]]}}이 미리부터 어느 계획 밑에서 진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후자 즉 회회를 가상(街上에)서 벤 것은 그들이 단호한 대몽 태도를 다시 국인(國人)에게 보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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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번={{TagPerson|[[배중손]]}} 등의 이러한 거사는 절대 결심과 각오가 없이는 행하기 어려운 바로서 이것은 일시적 감정의 격앙에서 돌발한 병변도 아니요 또는 오합지중의 폭동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깊은 유래와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임은 위에서 거듭 말한 바와 같거니와 다시 강도를 손에 넣고 감연히 송경 측과 몽고를 상대로 일어나게 된 삼별초 측의 전략적 조건을 찾아보면 ① 삼별초는 국군의 중심이 되어왔으므로 삼별초가 갈라서게 되면 송경 측의 병력은 심히 {{TagRefT|46}}빈약한 것으로서<ref group="a">{{TagBook|[[고려사절요]]}}(권18) 원종 11년 6월조에 「以金方慶爲逆賊(〇삼별초를 가리킨 것) 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 軍一千餘人 追討三別抄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추토사 {{TagPerson|[[김방경]]}}이 겨우 60여명의 군졸을 거느릴 정도로서 {{TagEvent|[[삼별초난]]}} 직후의 송경 측의 병력이 심히 빈약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같은 책 원종 12년 5·5월조에 의하면 진도 공격에 제하여 경군(京軍)을 증파할 때 부위병이 그 수에 차지 못하므로 문무 산직 백정 잡색과 및 승도를 뽑았으나 5백여인에 지나지 못하였다.</ref> 몽고와의 합작이 실현될지라도 삼별초 측으로 보면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던 것 ② 강화는 약 40년 동안의 수도였으므로 비록 {{TagPerson|[[원종]]}}이 구경 환도를 표명하였으나 국가의 중심은 아직도 강화였으며 국가의 축적(蓄積)도 이곳에 있고 백궁(百宮)들은 마침 연경으로부터 돌아오는 원종을 맞이하며 많이 송경에 건너 갔으나 그들의 처자들은 의연히 이곳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축적은 그대로 삼별초의 자원이 되는 것이며(아래에서 볼 것임) 백궁의 처노(妻孥)를 억류함은 다른 날 송경 측을 어느 정도까지 견제할 수가 있을 법한 것이었다. ③ 그 위에 소위 ‘심입해도’는 역대 항몽책에 있어 최고 또는 최후의 계획으로 되어 온 것으로서 깊이 남방 해중 즉 진도로 들어가 근거를 정하는 데에도 강도에 집중된 선척을 구용(驅用)하는 것이 최호의 방도가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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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번=다음 삼별초의 남하에 나아가 살펴보면 원래 강도는 염하(갑곶강)를 격(隔)하여 육지와 지호(指呼)의 사이에 있으므로 수전에 졸렬한 몽고병과는 그곳을 근거로 하여 약 40년 동안 대항하여 왔으나 {{TagPerson|[[원종]]}}이 몽고와 결탁한 이상 정세는 전에 비하여 크게 변화한 바가 있어 다시 이곳을 근거로 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별초 측에서는 애초부터 강도를 버리고 다시 남하 해상에 근거지를 구할 것은 넉넉히 추단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런데 삼별초의 남하에 대하여 앞서 든 {{TagBook|[[고려사]]}} 배중손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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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번=<blockquote no="02">江華守卒 多亡出陸 賊度不能守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 南下</blockquote>
|목차1-1해독문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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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8번=라 한 기사가 보이나 이는 당시 송경 측에서 내린 억측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의 남하는 명백히 항몽파의 전통책 또는 예정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다. 다시 같은 전에 의하면
|목차1-1해독문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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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9번=<blockquote no="03">邦悅(〇判太史局事安邦悅)當還都時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blockquote>
|목차1-1해독문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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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0번=라 한 기사가 보이니 이는 {{TagPerson|[[안방열]]}}이 환도 때를 당하여 환도파를 따라 출륙할까 삼별초를 따라 입해할까 거취에 미혹하게 되었으므로 봉은사에 봉안한 {{TagPerson|[[태조]]}}의 진영(眞影) 앞에 나아가 점을 쳐가지고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삼별초의 남하 계획은 이미 ‘환도 때’ 이전에 정해졌던 것으로 해석되는바 ‘환도 때’라는 것은 대체 어느 때를 가리킨 것인지 5월 23일에 환도를 방시한 때가 아니면 같은 달 27일에 {{TagPerson|[[원종]]}}이 연경으로부터 송경에 돌아올 때 비빈 이하가 모두 강도에서 출륙하던 때를 가리킨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송경에서는 이미 같은 달 26일에 {{TagPerson|[[이인성]]}}을 강화에 보내어 {{TagPerson|[[태조]]}}의 진영을 받들어 간 {{TagRefT|47}}점<ref group="a">{{TagBook|[[고려사]]}} 권26 원종 11년 5월 을축조 참조.</ref>을 참조하여 상고해보면 {{TagPerson|[[이인성]]}}으로 말미암아 이안(移安)된 태조의 진영은 봉은사의 것으로 추단되는 바로서 {{TagPerson|[[안방열]]}}의 점친 것은 26일 이전에 속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그렇다면 ‘환도 때’라는 것은 환도를 방시하던 23일을 가리킨 것일지니 이와 같이 본다면 삼별초의 남하는 분명히 예정 계획이었음도 추단할 수가 있는 동시에 이러한 계획이야말로 삼별초로 하여금 대담한 행동을 취하게 한 일대 동기라고도 할 것이며 이렇게 보는 데에서 {{TagPerson|[[안방열]]}}의 점친 의의도 더욱 천명되는 바이다.
|목차1-1해독문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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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1번=삼별초의 남하는 {{TagBook|[[고려사]]}} 원종 11년 6월 신미(3일)조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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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2번=<blockquote no="04">剽掠子女財貨 乘舟南下</blockquote>
|목차1-1해독문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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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3번=라 하여 동란이 발발된 그 이틀 뒤인 6월 3일로 되어 있으나 다시 {{TagBook|[[고려기사]]}} 지원 7년 6월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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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4번=<blockquote no="05">是日(〇二日)晩 植報 叛兵悉遁去 三日 世子愖(〇諶)報 叛兵劫府庫燒圖籍 逃入海中 行省使人覘江華 島中百姓皆空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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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5번=이라 한 기사와 참조해보면 당시 삼별초는 강도의 인물 부고(府庫)를 휩쓸어 가지고 천동한 만큼 하루 동안에는 도저히 완료하지 못할 것으로서 2일부터 개시되어 3일에 이르러 끝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며 소위 그들의 ‘권토입해’의 상황에 관하여는 앞서 든 배중손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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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6번=<blockquote no="06">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缸破江 舳艫相接 無慮千餘艘 時百官咸出迎王 其妻孥 皆爲賊所掠 慟哭之聲振動天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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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7번=라 한 기사와 원종 12년 8월에 몽고 중서성에 보낸 고려의 국서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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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8번=<blockquote no="07">又若奴婢 各從其主者也 當其主順命就陸 乃因打疊家産而還江都者 悉被驅者({{TagBook|[[고려사]]}} 27)</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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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19번=라 한 것으로써 그의 개황(概況)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그 반면에 이로 인하여 송경 측에서 받은 타격은 실로 심각한 바가 있었다. {{TagBook|[[고려사]]}} 원종 세가 11년 6월 을해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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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0번=<blockquote no="08">幸頭輦哥屯所 (〇白州?) 時初出古京 衣冠未備 王及百官 皆以戒服行</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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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1번=이라 한 것이든지 같은 해 9월 계해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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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2번=<blockquote no="09">設藏經道場於本闕 王始備法駕 然侍從甚少 樂官未具 文武官多有步行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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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3번=라 한 것으로 보면 인물의 조잔(凋殘)과 의관 기장의 결핍된 원인이 강도에서 지척인 송경에 환도한 데에 있다는 것보다도 삼별초의 소위 ‘권토입해’에 있었다고 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며 국가의 축적도 이로 말미암아 거의 탕실(蕩失)되었던 것도 <cite no="03">“內外蓄積 去年爲逆賊偷掠無遺”</cite> <cite no="04">“小邦蓄積 方就陸時 悉爲逆賊攘奪”</cite> 등의 {{TagRefT|48}}기사로써 넉넉히<ref group="a">같은 책 권27 원종 12년 정월 병자 및 2월 을묘조의 몽고에 보낸 국서 중에 보임.</ref> 상상할 수가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강도를 휩쓴 삼별초는 드디어 서쪽으로 향하여 구하리 부근으로부터 이륙하여 강화 교동의 해협을 시처 남하한 것으로 {{TagRefT|49}}해석되니<ref group="a">삼별초의 강화 이거(離去)의 경로에 관하여는 본문에서 이미 인용한 바와 같이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紅破江 舳臚相接 無慮千餘艘」라 하였으나 구포와 항파강의 위치가 오늘날에 있어서는 자못 불명하다. 그러나 다시 {{TagBook|[[고려사절요]]}} 권18 원종 11년 삼별초 남하에 관한 기사 중에 「前中書舍人李淑眞 即將尹吉浦 聚奴隷 尾擊餘賊於仇浦 斬五人 至浮落山 臨海耀兵 賊望見恟懼 以爲狄兵己至 遂遁 淑眞與郎中田文胤等封府庫 使人守之 故無賴者 不得肆其姦」이라 한 기사가 보인다. 이 기사를 통하여 보면 {{TagPerson|[[이숙진]]}} {{TagPerson|[[윤길보]]}} 등은 강도로부터 미격에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거니와 부락산과 항파강도 또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였을 것도 전후 양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수긍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부락산은 오늘날 강화 서북 해안에 용립(聳立)한 별립산이 아닌가 하니 이는 어음 상으로나 또는 위치 상으로 보아 (‘적병기지’(狄兵己至)라는 것은 몽고병이 이미 강도에 진입한 것을 의미한 듯한데 이는 삼별초가 서안으로 빠졌으므로 몽고병이 혹 염하를 건너 동으로부터 강도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인 듯) 이와 같이 추단하는 바이다. 만일 그렇다면 항파강은 별립 산하의 강화 교동 두 섬에 끼어 있는 해협을 가리킨 것이 아닐는지 그리고 구포는 지금 구하리 부근의 포구를 가리킨 것으로 억측되는 바이니 구하리 구상동이 서로 인접하여 있어 鳩(구)음의 지명이 겹쳐 있으며 그 위에 이곳은 강도 즉 강화읍과도 평탄한 지대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당시 육지 교통에 있어서도 매우 편리하였을 것으로 믿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리 본다면 앞서 든 양 기사와 또는 {{TagPerson|[[이숙진]]}} 등의 미격 방향 등이 자못 총합(𦝰合)되는 듯한 감이 있는 바이다.</ref> 그들이 동쪽으로 염하를 거치지 아니한 것은 송경 측의 눈을 피하여 추격의 기회를 주지 아니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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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4번=이 삼별초의 남하 입해에 있어 또 한 가지 우리의 흥미를 끄는 바가 있으니, 그것은 곧 참위설이 이에도 부합되어 있는 것이다. 앞서 든 배중손전의 안방열에 관한 기사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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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5번=<blockquote no="10">(前略)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 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 說賊曰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之讖 於此驗矣 遂爲謀主</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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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6번=라 한 것이 보이니 원래 정치 운동에 도참을 이용한 것은 고려에서도 자래(自來)로 그의 예가 허다하거니와 특히 용손참(龍孫讖)은 철원의 {{TagRefT|50}}고경참을<ref group="a">{{TagBook|[[고려사]]}} 권1 태조 세가 1, 정명 4년 3월조에 「唐商客 王昌瑾 忽於市中 見一人狀貌懷偉 鬚髮皓白 頭載古冠 被居士服 左手持三隻捥 右手擎一面古鏡 方一尺許 謂昌瑾曰能買我鏡乎 昌瑾以二斗米買之 (中畧) 昌瑾懸其鏡於市壁 日光斜映 隱隱有細字可讀 其文曰三水中四維下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此謂運滿一三甲 (中畧) 此一龍子三四 遞代相承六甲子 云云」이라 한 것인데 이 고경참은 분명히 고려 태조의 응운(膺運)을 말한 것으로서 이미 두계 {{TagPerson|[[이병도]]}}씨가 논파한 것과 같이 왕건 일파의 어느 정치적 의도에서 조출된 것이라 하겠다. ({{TagJournal|[[「朝鮮」]]}}{{TagVolume|[[「朝鮮」 207|207]]}} 소재 {{TagPerson|[[이병도]]}}씨의 {{TagArticle|[[「高麗初期の圖讖及び神秘思想」]]}} 참조)</ref> 비롯하여 이의민도 이것으로써 {{TagRefT|51}}비망을 품게 되었다고 전하는 바이다.<ref group="a">{{TagBook|[[고려사]]}} 권128 이의민전에 「義旼甞夢紅霓起兩腋間 頗負之 又聞古讖有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之語 十八子乃李字 因懷非望」이라 하였다.</ref> 용은 원래 제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용손이라면 왕손의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나 고려에서의 용손이라는 것은 특수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이는 여실(麗室) 조상의 원창왕후(의조의 왕후)에 관한 {{TagRefT|52}}용녀전설<ref group="a">{{TagBook|[[고려사]]}} 고려 세손조에 원창왕후에 대하여 서해 용왕의 딸이라는 전설이 보임.</ref>로부터 나온 것인 듯하거니와 도참 이외에도 고려 왕손에 대한 {{TagRefT|53}}용손의 칭은 고려 중말경을 통하여 세간에 행하였던 것이다.<ref group="a">{{TagBook|[[동안거사행록]]}} 권제4 빈왕록에 「三韓東海之龍孫(〇원종의 왕자 순안후종을 가리킨 것) 獲觀盛禮」라 한 문구가 있으니 이는 {{TagPerson|[[이승휴]]}}가 {{TagPerson|[[순안후]]}}의 수원(隨員)으로 원에 건너갔을 때에 중서성의 향연에 사례하는 글월 가운데에 보이는 바이며 {{TagBook|[[연려실기술]]}} 권1 고려정란왕업조기조 소인 한골동 기사에 「王(〇禑王)臨刑 謂衆人曰吾王氏 本龍孫也 左脇下 必有三鱗 世爲之表 遂解衣示人 左脇下 果有三鱗 金色大如錢 衆皆驚駭悲働」이라 하였다. 이 설화는 {{TagPerson|[[우왕]]}}을 {{TagPerson|[[신돈]]}}의 아들라고 몰아세운 데에 대하여 그의 무거한 것을 변해하려는 세인의 동정에서 조출된 것인 듯하나 이것도 또한 고려 왕실의 용손전설을 근거로 한 데에 이 설화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ref> 어쨌든 용손은 고려 왕손을 가리킨 것임은 물론이어니와 <cite no="05">“龍孫十二盡”</cite>은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이에 대하여는 두계 {{TagPerson|[[이병도]]}}씨가 이미 논파한 바와 같이 용손은 12대에 진절(盡絕)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것이니 이것은 앞서 든 {{TagPerson|[[고경참]]}}의 <cite no="06">“此一龍子三四 遞代相承六甲子”</cite>에서 나온 것이다. 34는 12로 6갑자는 360년으로 보고 1세를 30년으로 헤아린다면 360년은 실로 12세의 {{TagRefT|54}}역년에 해당하는 것이다.<ref group="a">앞서 든 {{TagPerson|[[이병도]]}}씨의 {{TagArticle|[[「高麗初期の圖讖及び神秘思想」]]}} 참조.</ref> 그런데 고려 왕실의 세차(世次)는 용녀전설을 기준으로 한다면 원창왕후의 아들 {{TagPerson|[[세조]]}}로부터 {{TagPerson|[[원종]]}}까지가 12세이며 역년으로는 {{TagPerson|[[원종]]}} 11년이 {{TagPerson|[[태조]]}} 즉위로부터 353년에 (918―1270) 당하니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던 때는 소위 346갑자설에 근사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이는 비록 우연한 부합이라 할 것이나 도참사상으로 볼 때에는 또한 흥미있는 문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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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7번=그 전에 {{TagPerson|[[안방열]]}}의 <cite no="07">“龍孫十二盡 云云”</cite>의 설은 {{TagPerson|[[배중손]]}} 등이 승화후를 옹립하는 것과 자못 모순된 관이 있으니, 이는 승화후도 또한 왕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삼별초의 난은 승화후 중심이 아니며 또 참위에 나타나는 ‘용손’은 고려의 왕실 종통을 가리킨 것이요 왕족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승화후 같이 지족으로부터 새 국면에 출현하는 것은 별문제에 속한다 할 것이다. {{TagRefT|55}}그리고 <cite no="08">“向南作帝京”</cite>은 <cite no="09">“姬龍之後重興”</cite>의 예언과도<ref group="a">{{TagBook|[[고려사]]}} 권123, 백승현전에 「又奏曰圖讖有姬龍之後重興之說 宜以周康王諱釗字 改御押 從之 旣而 忌高高句麗王釗不 得其死 乃復舊諱」라 하였다. 이는 {{TagBook|[[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원종 5년 6월에 속한 것이며 다시 같은 절요 같은 해 6월조에 의하면 「中郎將白勝賢 因叅政金俊奏曰 親醮塹城 又於三郎城神泥洞 造假闕 親設五星道場 則可寢親朝 (〇몽고에서 왕의 친조를 요구해왔음) 三韓變爲震旦 大國來朝也 王信之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삼랑성과 신니동의 가궐에 이어하여 친히 도장을 베푸는 것으로써 외관의 방알과 국운의 중흥을 초치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원래 지덕쇠왕설 다시 말하면 지덕이 쇠한 송경을 버리고 그것이 왕성한 곳으로 천도하면 국군이 왕성하리라는 풍수설에서 나온 것으로서 「向南作帝京」 예언과도 서로 관련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ref> 서로 표리(表裡)가 되는 것으로서 역시 중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거니와 원래 <cite no="10">“向南作帝京”</cite>의 예언은 양주를 남경(오늘날 경성)이라 하여 궁궐을 창조하게 된 문종시대 전후에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문종이 남경을 세운 것은 소위 삼경설에 의하여 기업 연장을 그리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의 {{TagRefT|56}}동기는 역시 <cite no="11">“三四六甲子”</cite> 예언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ref group="a">{{TagBook|[[고려사]]}}권122 김위탄전에 의하면 {{TagPerson|[[숙종]]}}원년에 {{TagPerson|[[김위탄]]}}이 남경천도를 주청한 상서 가운데에 도선의 답산가로 「松城落後向何處⋯⋯漢江魚龍四海通⋯⋯若渡其江作帝京 一席中裂隔漢江」과 또 삼각산 명당기의 「憑三角山作帝京 第九之年四海通」의 구를 드렸다. 이로 보면 「向南作帝京」 예언을 답산가와 삼각산 명당기 등에서 묻어나온 듯하거니와 이러한 종류의 풍수도참설은 신비사(神秘詞)에 보이는 삼경설에 관련을 가진 것으로서 기업 연장 사상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리고 이 지덕설이 다시 346갑자 예언과 결합된 데에서 {{TagPerson|[[문종]]}}의 남경 창설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 하니 고려 왕통의 세차로는 {{TagPerson|[[문종]]}}이 제11대에 당하므로 34 즉 12대설로 본다면 왕조의 운명은 다음 대에 끝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기업 연장의 방법으로서 남경의 지덕을 빌고자 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ref> 그런데 <cite no="12">“向南作帝京”</cite>의 남에 대하여 {{TagPerson|[[안방열]]}}은 남방 해중으로 부회한 것이 자못 우리의 흥미를 끄는 바거니와 특히 {{TagPerson|[[답산가]]}}의 <cite no="13">“若渡其江作帝京 一席中裂隔漢江”(위의 각주 참조)</cite>은 우연하게도 당시 송경과 삼별초의 분열 대립에 호개(好個)의 조응이 되는 감이 있으며 이것은 다시 일면에 있어 반존 반망의 점사(占辭)를 해석하는 데에도 관련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 해석된다. {{TagRefT|57}}이러한 유의 풍수도참설은 고려에서도 재래로 국가가 소란할 때에 많이 일어나던 것으로서 고종 원종 시대에도—몽고의 침구가 성함을 따라—자못 행하였으니<ref group="a">앞서 든 {{TagPerson|[[백승현]]}}의 주의(奏議)로써 {{TagPerson|[[원종]]}} 시대의 개황을 엿볼 수 있으며 다시 {{TagPerson|[[고종]]}} 때에 올라가 살펴보면 기업 연장의 목적으로써 삼랑성과 신니동과 및 마리산 남쪽(오늘날 흥왕리)에 이궁을 창건한 것을 비롯하여 남경 가궐에 어의를 봉안한 일도 있었으니 {{TagBook|[[고려사]]}} 고종 세가 21년 가을 7월 갑자조에 「遣內侍李白全 奉安御衣于南京假闕 有僧據議云 自扶踈山 分爲左蘇 曰阿思達 是古楊州之地 若於此地 營宮闕而御之 則國祚可延八百年 故有是命」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강도에 입거한 이후의 이궁 가궐을 세운 지점은 모두 도성(강도)으로부터 남쪽에 있는 점이다. 이것도 또한 「向南作帝京」 류의 도참에 기인한 것인 듯하니 당시 강화에 국척(跼蹐)되어 출륙이 불가능한 정세로 보면 강도에 대한 남경은 또한 섬 안의 남부에 두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당시 도참사상에 있어 남방천도열이 얼마나 성하였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그의 영향은 삼별초의 남하에도 적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TagPerson|[[안방열]]}}의 부화한 것도 그의 일례라 할 것이다. 요컨대 당시 이러한 국도의 남천(南遷) 운동은 비록 도참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그의 근본적 동기는 북방 종족의 강압에 있던 것이 아닌가도 억측되는 바이다.</ref> 이로 보면 삼별초 측에 또한 이러한 도참이 행한 것도 차라리 있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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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8번=② 삼별초의 진도 입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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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29번=삼별초가 진도에 입거하기는 원종 11년 8월 19일(병술)이었으니 그들의 강도 출발로부터 74일 후의 일이다. 그동안 그들의 행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지 아니하므로 자세히 고구할 수가 없으나 {{TagBook|[[고려사절요]]}}(권18) 원종 11년 6월(13일 신사)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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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0번=<blockquote no="11">以金方慶爲逆賊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一千餘人 追討三別抄 至海中 望見賊船 泊靈興島(〇南陽) 方慶欲擊之 宋萬戶懼止之 賊乃遁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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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1번=이라 한 것으로써 미루어 보면 삼별초는 일로(一路) 진도로 향한 것이 아니라 서해 일대의 도서(島嶼)를 경략하면서 남하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서남 해도 중에서 특히 진도를 택점(擇占)한 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원래 삼별초의 남하한 목적은 앞서 {{TagPerson|[[최우]]}}의 강화천도와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원종이 몽고와 결탁한 이상 항몽을 속행하려면 남방 해상에 근거를 옮겨가지고 적어도 남부 일대를 그들의 세력에 넣지 아니할 수가 없는 정세였다. 그러면 이러한 조건에 맞을 만한 근거지로는 강화와 같이 육지에 가까우면서도 광활한 도서가 아니면 아니될 것이며 또 특히 삼별초의 시뢰(侍賴)하는 바는 제해에 있음으로 해상 요해의 땅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으로써 본다면 서남 다도해상에 있어 진도와 같은 곳이 적으리라고 생각되는 바이니 당시 삼별초의 진도 점거에 대하여 송경 측에서도 과연 비명을 올렸던 것이다. 원종 12년 3월에 몽고에 보낸 도서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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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2번=<blockquote no="12">慶尙全羅貢賦 皆未得陸輸 必以水運 今逆賊據於珍島 兹乃水程之咽喉 使往來船楫 不得過行({{TagBook|[[고려사]]}}권27)</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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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3번=이라 한 것은 저간의 사정을 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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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4번=삼별초가 진도에 입거한 후 용장성을 쌓고 (석축) 궁전을 크게 영조하여 도성으로서의 시설에 또한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서 {{TagBook|[[동국여지승람]]}}(권37) 진도고적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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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5번=<blockquote no="13">龍藏城(在今治東二十五里 石築 周三萬八千七百四十一尺 高五尺 高麗元宗時 三別抄叛 自江華府 入據此島 大營宮殿 金方慶討平之 此其舊基)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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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6번=라 하였으니 이러한 기사로 보아도 그들의 경륜이 또한 초초(草々)하지 아니한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진도를 수도로 한 삼별초의 활동과 세력은 매우 왕성한 바가 있었으니 남해 창선(진주 속도) 거제 제주(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할 터) 등을 비롯하여 30여도가 그들의 해상 왕국의 영역이 되었으며 특히 남해에는 그의 중견 유존혁이 웅거하여 진도와 의각(椅角)의 세를 취해 가지고 {{TagRefT|58}}남안 일대를 시끄럽게 하였다.<ref group="a">{{TagBook|[[고려사]]}}권27 원종 12년 4월 정사조 원중서성이문(元中書省移文) 중에 「珍島賊黨 虜掠官民 陷沒諸島三十餘所 其力漸盛 云云」이라 하였고 같은 해 3월에 몽고에 보낸 국서 가운데에 「況今逆賊 日益蔓延 侵及慶尙道金州密城 加又掠取南海彰善巨濟合浦珍島等處 至於濱海部落 悉皆𣒗奪」이라 하였으며 {{TagBook|[[고려사절요]]}}권19 원종 12년 5월조에 「時 賊將劉存奕 據南海縣 摽掠沿海 聞賊遁入耽羅 亦以船八十餘艘 從之」라 하였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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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7번=다시 삼별초의 활동은 육지에서도 또한 활발한 바가 있었으니 그들은 먼저 육지의 민물(民物)을 도서에 옮겨 항전력의 충실을 계획하기에 급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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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8번=<blockquote no="14">三別抄 入據珍島 侵掠州郡 矯帝旨 令全羅道按察使 督民收穫 徙居海島({{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11년 8월 병술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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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39번=라 한 기사는 그것을 말하는 바거니와 민물을 해도에 천사(遷徙)하는 데에 제지(帝旨)를 교사(矯使)하였다 하였으니 만일 이 제지를 예의 몽제의 유지(諭旨)로 본다면 해석하기 자못 곤란한 바가 있다. 이는 고려에서 오랫동안 해도에 입거하여 몽고와 항전해 온 역사적 사실로 보나 또는 당시 ‘거수취륙’이 양국 평화의 조건으로 되었던 관계로 보아 아무리 날조한 것으로 치더라도 말이 성립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생각건대 당시 삼별초가 승화후를 추대하고 있었으므로 혹 이 새로운 왕을 가리켜 제(帝)라 한 것을 그 조지를 받은 지방관 무리가 제(帝)라 하니까 예의 몽제를 가리킨 것으로 착인(錯認)한 데에서 <cite no="14">“矯帝旨”</cite>라 한 해석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앞서 든 <cite no="15">“向南 作帝京”</cite>의 문구로 보아도 왕경(王京)이라 하지 아니하고 제경(帝京)이라 한 것이 이러한 억측에 일종의 암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삼별초는 다시 장흥을 비롯하여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등 연안 요지는 물론 깊이 나주 전주에까지 진공(進攻)하였던 것이니 특히 금성산성(나주)에서는 7주야(七晝夜)의 격전을 행하여 그의 {{TagRefT|59}}위력을 떨치기도 하였다.<ref group="a">{{TagBook|[[고려사절요]]}}권18·9 원종 11년 9월—12월 4월조 참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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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0번=삼별초의 세력이 이와 같이 떨침을 따라 국내의 인심에 끼친바 영향이 또한 막대한 바가 있었으니 <cite no="16">“時 三別抄反據珍島 勢甚熾 州郡望風迎降 或往珍島謁見”({{TagBook|[[고려사]]}}권103 김응덕전)</cite>이라 한 것과 같이 당시 거취에 현혹케 된 멀고 가까운 주현에서는 이에 향응하는 자가 속출하여 소위 망풍영강(望風迎降)의 현상을 이루었으며 또 승화후를 진왕으로 우러러 왕알(往謁)하는 자도 있었던 것이다. 다시 이에 대하여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TagBook|[[고려사]]}}(권27) 원종 12년 정월 병술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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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1번=<blockquote no="15">密城(〇密陽)郡人方甫, 桂年, 朴平, 朴公, 朴慶純, 慶祺等 嘯聚郡人 將應珍島 乃殺副使 李頤 遂稱攻國兵馬使 移牒郡縣 遣其黨 殺淸道監務林宗(一作崔良梓) 淸道人詐降 飮以酒 醉而殲之 時密城人趙阡 爲一善縣令 賊召阡 約與同叛 阡從之 尋聞其黨 殲於淸道 乃與郡人孫逸謀殺賊魁 按察使李敖(一作李淑眞) 與金州防禦使金晅 慶州判官嚴守安 領兵奄至 阡等斬方甫等降 賊遂平</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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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2번=이라 한 것으로써 밀양 지방의 동요 상태를 엿볼 수가 있거니와 이 위에 송경에서도 관노 숭겸(崇謙) 무리가 달로화치과 도성 안의 재위자들을 살해하고 진도에 왕두(往投)하려는 음모가 일어났으며 이 사건은 다시 대부도(남양의 속도)의 반란에까지 {{TagRefT|60}}영향을 끼쳤던 것이다.<ref group="a">{{TagBook|[[고려사]]}}권27 원종 12년 정월 계사조에 「官奴崇謙功德等 聚其徒 誅殺達魯花赤及國中在位者 往投珍島 隊正宋思均告變⋯⋯俄而 祗候辛佐宜見閭巷七八人偶語 奔告于 王曰事急矣 時日將暮 宰樞及承宣重房內侍茶房 相顧失色 計無所出 王遣知樞密院事李玄原 上將軍鄭子璵 請救於脫朶兒 脫朶兒與洪茶丘等 會宰樞 捕崇謙等十餘人 按問皆服」이라 하였다. 원래 노예 무리는 가장 현실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 것으로서 유달리 신천지를 동경할 것은 또한 자연의 세라 할 것이나 특히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심한 것은 아래의 대부도의 예와 아울러 생각할 때에 몽고인의 횡포에 대한 반감이 일반적으로 높았음을 알 것이며 10여인의 숭겸(崇謙)의 도당에 대한 처치에 송경의 군신은 서로 낭패하여 {{TagPerson|[[탈타아]]}}(脫朶兒)에 구수(求授)하리 만큼 도성의 경비(警備)가 진루하였던 것이다. 다음 대부도의 반란에 관하여는 같은 해 2월 신축조에 「窄梁防戍蒙古兵 入大部島 侵奪居民 民甚怨之 大部人聞崇謙等起 遂殺蒙古六人以叛」이라 하였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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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3번=한편 이에 대한 송경과 몽고 측의 동향을 살펴보면 송경 측에서는 6월 13일(신사)에 {{TagPerson|[[김방경]]}}으로 역적 추토사를 삼아 몽고군과 같이 해상으로 추격하게 하고 또 참지정사 신사전으로 전라도 토적사를 삼아 연안 주현의 방어에 당하게 하였으나 수륙 양군이 모두 위축하여 떨치지 못하였다. {{TagBook|[[고려사]]}}김방경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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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4번=<blockquote no="16">三別抄叛 驅掠人民 航海而南 王遣叅知政事中思佺 爲追討使 (〇고려사 元宗 世家 及고려사절요에는 全羅道 討賊使라 하였음) 又命方慶 領兵六十餘人 與蒙古宋萬戶等兵一千餘人 追討至海中 望見賊船泊靈興島 方慶欲擊 宋萬戶懼止之⋯⋯賊入據珍島 侵掠州郡 思佺不以討賊爲意 或聞之 曰我已爲宰相 破賊成功 復何爲乎 至羅州 聞賊出陸 奔還于京 全州副使李彬 亦棄城逃</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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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5번=라 한 기사는 당(當)송경 측의 병력이 심히 빈약한 것과 장관들의 부패 무능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바이니 만일 몽고와의 합작이 없었으면 송경 측은 처음부터 삼별초에 당하기 어려웠던 것을 넉넉히 추상할 수도 있는 바이다. 그 뒤(같은 해) 9월에 이르러 원종은 다시 장군 {{TagPerson|[[양동무]]}}{{TagPerson|[[고여림]]}}등을 시켜 주수(舟帥)로써 진도를 진공하게 하고 신사전에 갈음하여 {{TagPerson|[[김방경]]}}으로 전라도 추토사를 삼아 몽고 원수 아해(阿海)로 더불어 진격하게 하였으니 이로부터 김방경이 통수의 격으로써 몽고군과 같이 진도 정략에 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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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6번=당시 몽고 측에서는 이 난에 대하여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니 원래 삼별초의 난은 몽고에 대하여 2종의 협위(脅威)가 되는 까닭이다. 삼별초는 항몽을 기치로 하여 일어났으므로 모처럼 원종을 회유하여 고려를 그의 외번으로 삼으려는 정책에 저어(齟齬)가 생기는 위에 몽제(세조)의 숙원인 동정(東征) 계획에 지장이 발생하는 것으로서 삼별초가 해상에 항전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일본 경략(經畧)을 안심하고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몽제는 6월 3일에 삼별초 남하의 통지를 접하자 바로 몽고군으로써 {{TagRefT|61}}추격하게 하였던 것이니<ref group="a">{{TagBook|[[원고려기사]]}}중통(지원) 7년 6월 3일조 및 원사고려전 참조.</ref> 이에서 앞서 든 김방경이 몽고의 송만호로 더불어 해상 추격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몽고에서는 다시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고려에 침투시키게 되었으니 {{TagBook|[[원고려기사]]}}중통(지원) 7년 7월 20일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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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7번=<blockquote no="17">丞相安童等 奉頭輦哥等遣大託忙古䚟 (〇大托克孟古代) 來言 令阿海領軍 一千五百 屯王京 伺察其國中 遂以阿海爲安撫使</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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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8번=라 하였고 {{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11년 7월 신해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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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49번=<blockquote no="18">頭輦哥 遣摠管洪茶丘 巡視全羅慶尙東界三道</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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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0번=라 하였다. 그때에 {{TagPerson|[[두련가]]}}는 백주(백천)에 유둔(留屯)하여 대군으로써 뒤에서 누르며 아해(阿海)에게 병력을 줘 송경에 진출하여 안무사라는 이름으로 여정(麗廷)의 동정(動靜)을 감시하게 하고 다시 {{TagPerson|[[홍차구]]}}(洪茶丘)를 시켜 널리 지방의 정황을 사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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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1번=이와 같이 고려에 침투되기 시작한 몽고의 세력은 다시 그의 둔전책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호(確乎)한 지반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들의 둔전 목적은 주로 {{TagRefT|62}}동정의 준비에 있었다고 하나<ref group="a">{{TagBook|[[원고려기사]]}}중통(지원) 7년 윤11월조에 「又詔植曰嚮甞遣信使 通問日本 不謂執迷 固難以善言開諭 此卿所知 將經界於彼 勅有司 發卒屯田 爲進取之計 庶免爾他日轉輸之勞」라 하였고 {{TagBook|[[원사병지]]}}(3) 둔전조에 「高麗屯田 世祖至元七年創立 是時東征日本 欲積糧餉爲進取之計」라 하였다.</ref> 일면에 있어 삼별초에 대비하는 {{TagRefT|63}}조치가 되는 동시에<ref group="a">삼별초를 평정할 때에 몽고에서는 둔전병을 주로 쓰게 되었으며 또 둔전 경략사 {{TagPerson|[[흔도]]}}(忻都) 등이 고려의 {{TagPerson|[[김방경]]}}으로 더불어 정토의 임무에 당하였던 것으로도 몽고의 둔전 설치가 또한 삼별초에 대비하려는 데에도 한 가지 목적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ref> 송경 측에 대하여도 일종의 측면적 견제가 되는 것이니 몽고의 둔전은 말하자면 일석이조의 책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둔전 계획은 {{TagPerson|[[원종]]}}11년 11월 25일경에 결정되어 그 익년 3월초(3일)에 이르러서는 둔전의 파지(罷止)에 대한 고려의 간독한 {{TagRefT|64}}교섭에도<ref group="a">{{TagBook|[[고려사]]}}권27 원종 12년 정월조 및 같은 해 2월조에 둔전를 파하기를 청하는 국서가 보임.</ref> 불구하고 {{TagPerson|[[흔도]]}} {{TagPerson|[[사추]]}}{{TagPerson|[[홍다구]]}}등을 명하여 둔전 경략사를 설치하고 약 5천의 몽고병과 약 2천의 {{TagPerson|[[홍다구]]}}의 옛 영민(고려인호)으로써 황주 봉주(봉산) 금주(김해) 등의 곳에 {{TagRefT|65}}둔전을 실시함에 이르렀다.<ref group="a"> {{TagBook|[[원고려기사]]}}지원 7년 11월 25일조에 「中書省奏 於高麗 設置屯田經畧司 以忻都史樞 爲鳳州等處경략사 領軍五千 市田於金州 又令洪茶丘 以舊領民二千屯田 阿刺帖木兒爲副經畧司 總轄之」라 하였는데 특히 {{TagPerson|[[홍다구]]}}의 옛 영민으로 말하면 본래 {{TagPerson|[[홍다구]]}}의 아버지 {{TagPerson|[[홍복원]]}}이 고종 20년경에 서경 낭장(郎將)으로서 몽고에 반부(叛附)하여 북계 40여성의 유민을 이끌고 요양 심양(봉천) 등지에 건너가니 몽고에서는 그를 동경 총관에 임명하여 고려인호를 통령하게 하는 동시에 고려 침략에 그를 향도로서 많이 이용하였고 {{TagPerson|[[홍복원]]}}에 죽은 후에 그의 아들 {{TagPerson|[[홍다구]]}}가 뒤를 이어 아버지 직을 승습하여 요동(요양) 등지의 고려인호를 통할하게 된 것이다. 다시 몽고의 둔전에 관하여는 {{TagBook|[[원사병지]]}}(3) 고려 둔전조 및 고려사 원종 세가 12년 3월 병인조 참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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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2번=몽고에서는 이와 같이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세력을 고려에 부식시키면서 송경 측과 긴밀한 제휴 아래에서 삼별초에 당하게 되었다. 원종 12년 5월에 여몽 연합군의 기습으로 말미암아 진도가 공함될 때까지 전과를 살펴보면 대개 승리는 삼별초 측에 돌아갔던 것이니 이제 그의 한 둘의 저례(著例)를 들어보면 {{TagBook|[[고려사]]}}김방경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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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3번=<blockquote no="19">{{TagRefT|66}}方慶與阿海 屯三堅院 對珍島而陣 賊 於所掠船艦 皆畫怪獸 蔽江照水 動轉如飛 勢不能當每戰 賊軍先鼓譟突進 互勝負 曠日相持 會潘南人洪贊洪機<ref group="a">{{TagBook|[[고려사절요]]}}(권18원종 11년조)에 의하면 「潘南人洪賛等自賊中逃還 云云」이라 하였으니 {{TagPerson|[[홍찬]]}}등은 진도로부터 돌아온 것이 명백하다.</ref> 讒于阿海曰 方慶孔愉等 陰與賊相通 阿海執而囚之 移牒達魯花赤 達魯花赤令方慶還 與贊等對辨 以參知政事蔡楨代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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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4번=라 하였다. 이 기사로써 우리는 삼별초의 수상세력과 작전이 단연히 연합군을 압두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또 연합 측에서는 실패를 거듭하여 한갓 시일만 천연(遷延)하게 되었으므로 {{TagPerson|[[김방경]]}}같은 인물이 적과 내통하였다는 참언(讒言)으로 피체(被逮)까지 되었던 것이다.({{TagPerson|[[원종]]}} 11년 11월) 날로 강성하여 가는 삼별초를 앞에 두고 군정의 중심 인물인 {{TagPerson|[[김방경]]}}을 파면시키게 된 것은 송경 측의 큰 손실이며 삼별초 토벌 도상(途上)의 일대 암영이었다. 그 후 {{TagPerson|[[홍찬]]}}등의 무고인 것이 명백하게 되며 {{TagPerson|[[원종]]}}은 달로화치의 양해를 얻어 그 익년(윤11월)에 {{TagPerson|[[김방경]]}}에게 상장군의 직호(職號)를 주어 다시 삼별초에 당하게 하고 또 만호 {{TagPerson|[[고을마]]}}(高乙麻)에게 병 200을 주어 남방 연해 지방을 방수(防戍)하게 하였다. 이에 {{TagPerson|[[김방경]]}}은 다시 진용을 정비해 가지고 다음날 12월 정사(22일)에 진도를 향하여 추격하게 되었으니 그때의 전황에 관하여 다시 앞서 든 김방경전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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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5번=<blockquote no="20">方慶至珍島 賊皆乘船 盛張旗幟 鉦鼓沸海 又於城上 鼓譟大呼 以助聲勢 阿海㤼下船 欲退屯羅州 方慶曰元帥若退 是示弱也 而賊乘勝長驅 誰敢當鋒 (中略) 阿海不敢退 方慶獨帥師攻之 賊以戰艦 逆擊之 官軍皆退 方慶曰決勝在今日 突入賊中 賊圍之 驅迫以去 方慶士卒 殊死戰 矢石俱盡 又皆中矢 不能起 已薄珍島 岸有賊卒 露刃跳入船中 金天祿以短矛刺之 方慶起曰 寧葬魚腹 安能死賊乎 欲投海 衛士許松延許萬之等 挽止之 創者見方慶危急 叫呼復起疾戰 方慶據胡床 指揮士卒 顔色自若 將軍楊東茂 以蒙衝突擊之 賊乃解去 遂潰圍而出</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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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6번=이라 하였다. 이 기사로도 당시 삼별초의 전투력이 우월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러나 {{TagPerson|[[김방경]]}}이 고군(孤軍)으로써 돌진하다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은 그의 무모한 모험이라는 것보다도 차라리 몽고 원수 {{TagPerson|[[방해]]}}의 법렬(法劣)에 격분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TagPerson|[[방해]]}}의 이러한 나법(懦法) 무능으로 말미암아 연합 측의 군세는 더욱 떨치지 못하고 한갓 시일만 천연하게 됨으로 그 익년(원종 12년) 정월에 이르러 고려 정부에서 몽고에 교섭한 결과 아해는 드디어 소환되고 둔전 경략사 {{TagPerson|[[흔욱]]}}{{TagPerson|[[사추]]}}등이 이에 체대(遞代)함에 이르렀다.(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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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7번=삼별초와의 무력 충돌에 있어 도리어 쓰라린 경험을 맛보고 있던 연합 측 특히 몽고에서는 일방으로 삼별초에 향하여 회유 공작을 자주 행하기에 이르렀다. {{TagPerson|[[원종]]}}11년 12월에(20일경) 원외랑 {{TagPerson|[[박천주]]}}가 몽사 {{TagPerson|[[두원외]]}}와 같이 진도에 건너가게 되었으니 이는 삼별초에게 주는 {{TagPerson|[[원종]]}}의 유지와 몽제의 책을 전하여 그들을 회유시키려던 것이다. 그런데 {{TagPerson|[[박천주]]}}가 휴거(携去)한 몽제의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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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8번=<blockquote no="21">近以高麗權臣構亂 乃遣兵東下 唯林衍是問 不意脅從詿誤之人 妄自疑懼 往々逋竄未出 或逃往他境 因爲叛逆 朕之素心 務在輯寧爾邦 詔諭之後 有能自新 復歸本國 其已往之愆 咸當矜釋 其中雖有早曾背主 逃匿爾國中者 亦令安業爲民 不許各主認識 如或不爾 雖 及({{TagBook|[[고려사]]}}권26 원종 11년 12월 을묘조에 보임)</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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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59번=라 한 것인 듯하거니와 이것은 같은 달 20일에 태자(후일의 {{TagPerson|[[충렬왕]]}})가 연경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가지고 온 몽고 도서 가운데의 하나로서 이것은 원래 삼별초에게 직접 보내는 것이 아니요 {{TagPerson|[[원종]]}}에게 보내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서면의 내용을 가지고 보면 삼별초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지은 것임은 일견에 명료히 간취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리고 송경 측에서 몽사 {{TagPerson|[[두원외]]}}를 안동(案同)하여 {{TagPerson|[[박천주]]}}를 진도에 보낸 것도 몽고 측의 의향을 받아 행한 것임은 {{TagBook|[[고려사]]}}위와 같은 조에 <cite no="17">“王遣員外郞朴天樹 持帝詔 往諭三別抄”</cite>라 한 것으로도 넉넉히 추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TagPerson|[[박천주]]}}일행이 진도에 건너가기는 익년({{TagPerson|[[원종]]}} 12년) 정월 6일(경오)이였는데 삼별초 측에서는 벽파정(군동 30리 도구(渡口)에 있었음)에서 그의 일행을 연위(宴慰)하면서 가만히 2천여소(艘)의 병선을 보내어 연합군을 공략하여 병선 1척을 납치하여 90여인을 살해한 사실이 있었다. 이는 명백히 그들에게는 귀순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명하는 동시에 연합군 측의 방심한 틈을 타가지고 손해를 주려는 데에서 나온 듯하다. 삼별초 측의 태도가 이러하므로 {{TagPerson|[[박천주]]}}는 결국 회유 공작에 실패하고 같은 달 22일에 돌아왔는데 그때에 삼별초에서는 몽제의 책은 그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여 {{TagPerson|[[박천주]]}}에게 반각(返却)하고 {{TagPerson|[[원종]]}}의 유지에 대하여는 다만 <cite no="18">“惟命是從”</cite>이라는 의례적 회답을 주었을 뿐이며 {{TagRefT|67}}몽사 {{TagPerson|[[두원외]]}}는 그곳에 억류하고 말었다.<ref group="a">{{TagBook|[[고려사]]}}권27 원종 12년 정월 경오 및 병술조 참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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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0번=그런데 몽고에서는 또 다시 2월 10일(갑진)에 호도극도이(呼圖克垈爾)({{TagPerson|[[홀도답아]]}})에게 조서를 줘 직접 삼별초를 {{TagRefT|68}}초유하기에 이르렀으니<ref group="a">{{TagBook|[[원사]]}}권7 세조본기 지원 8년 2월 갑진조 참조.</ref> 이에 앞서 (정월 25일) 여정(麗廷)에서는 삼별초 초유 전말을 알리기 위하여 {{TagPerson|[[박천주]]}}를 몽정에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보면 몽고 측에서는 {{TagPerson|[[박천주]]}}로 인하여 삼별초 측 정황과 특히 앞서 간접으로 보낸 조서가 반각된 것을 알게 된 결과 직접 교섭을 시도하여 보려던 것이 아닌가 한다. ({{TagPerson|[[홀도답아]]}}사행(使行)의 결과는 아래에 보임) 몽고 측에서 이와 같이 지재지삼(至再至三) 측면 공작을 행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는 것이나 (이에 관하여는 아래 절 「삼별초에 대한 몽고 측의 회유 공작」조 참조) 그 중에도 수전에 자신이 없던 것이 주요한 조건이 아닐까 한다. 당시 삼별초와의 수전에서 자주 실패를 받은 지라 모험적 작전을 피하려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cite no="19">“高麗安撫使阿哈(〇阿海) 略地珍島 與逆黨遇 多所亡失 中書省臣言 諜知珍島 餘糧將竭 宜乘弱攻之 詔不許 令巡視險要 常爲之備”({{TagBook|[[원사]]}}세조본기 지원 8년 정월 병술조)</cite>라 한 것도 저간의 사정을 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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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1번=삼별초 측에 있어서도 이러한 몽고의 회유책을 역으로 이용하여 노사(老師)의 허락으로써 시일의 천연을 꾀하던 것이니 {{TagBook|[[원사]]}}세조본기 지원 8년 3월 기묘(16일)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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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2번=<blockquote no="22">中書省臣言 高麗叛臣裴仲孫 乞諸軍退屯 然後内附 而忻都(〇忻都)未從其請 今願得全羅道以居 直隷朝廷 詔以其飾詞 遷延歳月 不允</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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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3번=이라 하였다. 이로써 삼별초 측이 소위 내부 조건으로서 제군(연합군)의 퇴둔을 요구하고 때로는 전라도 일대의 점유를 요구하였던 것을 알 수 있거니와 특히 후자 즉 전라도를 요구한 것은 {{TagPerson|[[홀도답아]]}}의 초무(招撫)에 수응한 것이 아닌가도 억측되는 바이다. 어쨌든 이러한 요구는 모두 연합 측의 수락하기 불가능한 것으로서 몽제도 간파한 바와 같이 그들의 천연책에서 나온 것임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삼별초 측에서는 앞서 든 그들의 요구가 거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수단을 뒤에까지 반복하였으니 <cite no="20">“追討使金方慶報 珍島賊使人告忻都曰 有密議請官人暫臨小島 忻都曰我不受帝命 何敢入 賊又請具酒殽來饋 許之”({{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12년 4월 정미조)</cite>라 한 기사로써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교전 상태에 있으면서 적의 원수 더구나 상국(上國)으로 자처하는 몽고군의 주장(主將)을 당당하게 초치하려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성의있는 교섭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는 것이니 주효(酒殽)의 내궤(來饋)와 아울러 역시 천연책으로써 상대 측을 우롱한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아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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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4번=③ 여몽 연합군의 진도 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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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5번=삼별초의 세력이 갈수록 왕성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연합군을 자주 공파하는 위에 원종 12년에 들어 그의 활동은 자못 활발하여 북은 장흥을 필두로 하여 동쪽으로는 합포 금주 동래 등을 침략하였으며 이에 따라 인심의 동요도 자못 심하여 밀성의 {{TagPerson|[[방포]]}}{{TagPerson|[[계년]]}}등의 난과 관노 {{TagPerson|[[숭겸]]}}등의 음모 대부도민의 반란 등이 뒤를 이어 일어나는 한편에 진도에서는 다시 몽사({{TagPerson|[[두원외]]}})를 억류하고 또 연합 측의 회유책을 도리어 이용하여 시일의 천연을 피하는 등 연합 측으로 보면 형세는 자못 유상(猶像)을 불허하기에 이르렀다. 진도 총공격의 기운은 이렇게 촉성된 것이니 {{TagPerson|[[원종]]}}12년 4월에 이르러 봉주(둔전) 경략사요 또 아해를 갈음하여 몽고군을 지휘하게 된 {{TagPerson|[[흔도]]}}는 드디어 적극적 공세를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TagBook|[[원사]]}}세조본기 지원 8년 4월 임인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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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6번=<blockquote no="23">高麗鳳州經略司實都 (〇忻都)言 叛臣裴仲孫稽留使命 負固不服 乞與浩爾齊(原作怱林赤)王國昌 分道進討 從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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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7번=라 하였는데 특히 {{TagPerson|[[흔도]]}}의 분공책에 나아가 살펴보면 마침 {{TagPerson|[[호이제]]}}(浩爾齊)와 {{TagPerson|[[왕국창]]}}(王國昌)은 {{TagPerson|[[원종]]}}12년 정월에 몽제의 명을 받아 일본에 건너가는 국신사 {{TagPerson|[[조양필]]}}(趙良弼)을 호송하여 군을 이끌고 해상에까지 보내준 다음에 그가(국신사)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금주 등 곳에 {{TagRefT|69}}주둔하고 있던 터이므로<ref group="a">{{TagBook|[[원사]]}}권167 왕국창전 및 {{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12년 정월 기묘조 참조.</ref> 이것을 이용하여 분도 진격을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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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8번=당시 동정을 급히 하려던 몽제는 드디어 회유 공작을 단념하고 {{TagPerson|[[흔도]]}}의 의견을 좇아 4월 19일에 영녕공 준의 아들 희, 옹 등(각주 44 참조)에게 병400으로써 부원(赴援)하게 하고 다시 같은 달 24일에 {{TagPerson|[[주개부]]}}(周介夫)를 보내어 군기(軍期)를 알림과 동시에 고려에 향하여 병원(兵員) 선척의 증발을 요구하였다. {{TagBook|[[고려사]]}}(권27) 원종 12년 4월 정사(24일)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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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69번=<blockquote no="24">蒙古遣周夫介來詔曰 據忻都白羊奏請 添遣軍馬 比及暑雨前 討平逆賊 朕以爲 暑雨之前 軍馬未能到彼 卿宜於旁近 簽軍六千人 分附攻取珍島 若事早畢 於卿百姓便益 中書省移文曰 珍島賊黨 虜掠官民 陷沒諸島 三十餘所 其力漸盛 明見虛行調發 不肯實心投拜 便合急攻 以除巨害 若至暑雨時節 卒難收取 除珍島邊見有兵船二百六十艘 令本國添發兵船一百四十艘  更乞增兵 幷力攻賊 其合用軍餉什物 委官盡力供頓 毋致失誤</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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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0번=라 한 것으로 보면 몽고 측에서는 해도 진공(進攻)이 서우(暑雨)의 절기에는 더욱 곤란하므로 그 전에 속히 행하기로 하고 몽고의 증원군이 우기의 전에 도착하기가 불능하리라 하여 고려에 향해서 6천군과 또 견유병선(진도 대안의 것인 듯) 260소(艘) 외에 다시 140소(艘)를 증발할 것과 군향 집물의 공급 등을 요구해 온 것이다. 이에 고려에서는 부위병을 다시 검열하여 몽고의 요구에 응하게 되었던 것이니 같은 책(권81) 병지 5군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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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1번=<blockquote no="25">十二年 (〇元宗) 四月 司空田份 左僕射尹君正等 閱府衛兵 不滿其額 乃井閱文武散職白丁雜色及僧徒 以充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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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2번=라 하였고 같은 책 원종 세가 12년 5월 계해삭조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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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3번=<blockquote no="26">脫朶兒(〇達魯花赤) 與宰樞 閱兵于郊 凡五百餘人 其都領指諭 給馬人一匹 軍卒每十人 給馬一匹 及行軍卒 多掠取行人馬 脫朶兒問曰 宰樞子弟無從軍者乎 答云無 脫朶兒乃令宰樞 各出馬給軍官 甲子(〇二日) 加發京軍 及調忠淸 慶尙道軍 以濟師</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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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4번=라 하였다. 당시 쇠퇴된 부위병으로는 소요 군액에 달하지 못하였으므로 문무 산직 백정 잡색과 승도를 징발한 위에 다시 지방군까지 조발(調發)하게 되었으며 기병을 주로 하던 몽고 측에서는 군마 징발에 또한 고심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송경 측에서는 다시 주사(舟師) 300을 증파하여 {{TagRefT|70}}부원(赴援)하게 하였으니<ref group="a">{{TagBook|[[고려사]]}}권81 병지 5군조 참조.</ref> 이는 앞서 든 몽고의 병선 요구에 응수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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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5번=그리하여 여몽 연합군의 진도 총공격은 같은 해 5월에 들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으니 전부터 진도 대안에서 (삼견원?) 삼별초와 대치하고 있던 {{TagPerson|[[김방경]]}}{{TagPerson|[[흔도]]}}등은 앞서 든 고려의 증발군을 인솔하고 남하한 {{TagRefT|71}}{{TagPerson|[[홍다구]]}}를 기다려<ref group="a">{{TagBook|[[고려사절요]]}}권19 원종 12년 5월조 참조.</ref> 5월 15일에 드디어 진도 총공격을 결행함에 이르렀다. 당시 전황에 대하여 {{TagBook|[[고려사]]}}김방경전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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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6번=<blockquote no="27">方慶與忻都協謀 攻珍島 方慶忻都將中軍 入自碧波亭 永寧公之子熙雍及洪茶丘將左軍 入自獐項 大將軍金錫萬戶高乙麽將右軍 入自東面 摠百餘艘 賊聚碧波亭 欲拒中軍 茶丘先登 縱火挾攻 賊驚潰 趣右軍 右軍懼 欲赴中軍 賊獲二艘 盡殺之 先是 官軍數與賊戰不勝 賊輕之 不設備 及官軍奮擊 賊皆棄妻子遁 其所虜江都士女珍寶及珍島居民 多爲蒙兵所獲 方慶見賊潰追之 獲男女一萬餘人 戰艦數十艘 餘賊走耽羅 方慶入珍島 得米四千石 財寶器仗 悉輸王京 其陷賊良民 皆令復業</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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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해독문77번=이라 하였다. {{TagPerson|[[김방경]]}}이 몽장 {{TagPerson|[[흔도]]}}등으로 더불어 진도를 진공할 때 연합군을 좌 우 중 3군으로 나누어 동 중 서 세 방면으로 적의 세를 갈리게 한 것이니 이 {{TagRefT|72}}작전은 그들이 필승의 계(計)라 하여 미리 몽제에게까지 알렸던 것이다.<ref group="a">{{TagBook|[[원고려기사]]}} 지원 8년 5월조에 「初忻都史樞洪茶丘 往攻珍島 賊列戰艦於島之北岸 樞曰今兇竪跳梁 未可力爭況夏暑方熾 海氣鬱蒸 弓力緩 卒難爲用 誠因此時 分軍爲三隊 多張旗幟 以爲疑兵 吾與諸軍 潛師以出 直挫其鋒 以趨珍島 破之必矣 遣使以聞 且乞火槍火砲及諸攻戰之具 上從之 旣而 與賊戰大敗 禽斬之」라 하였다.</ref> 이에 대하여 삼별초는 연합 측의 중군을 거적(拒敵)하고자 벽파정 부근으로 집결할 때에 좌익(左翼)인 {{TagPerson|[[홍다구]]}}등이 급히 측면으로 공격하여 삼별초 측의 함선에 화공(火攻)을 시도하였던 것으로서 삼별초의 전선이 궤란하게 된 것이다. 당시 몽고군은 정예한 각종의 공전 기구를 갖은 위에 화창과 화마를 사용하였으니(앞의 각주 참조) 이는 확실히 연합 측의 제승(制勝)에 중요한 원인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삼별초 측에 있어서는 그동안 관군과 싸워 승리를 거듭한 결과 드디어 경적(輕敵)의 마음이 생겨 방비시설을 등한히 한 위에 연합군의 진격을 너무나 소홀히 보았던 것이니 <cite no="21">“先是 官軍數與賊戰不勝 賊輕之 不設備”</cite>라 한 것과 후일 제주에 입거한 삼별초가 연합 측의 초유사에 대하여 <cite no="22">“爾等嘗遣人珍島 誘我緩其心 引大軍攻破 云云”(아래 절에서 다시 논할 터임)</cite>이라 한 것으로써 저간의 사정을 알 수가 있거니와 이것이 삼별초 패인의 가장 큰 조건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패도지(一敗塗地)로 삼별초는 진도를 빼앗겼으며 그의 일당은 드디어 최후의 아성(牙城)으로 믿고 있던 탐라(제주)로 들어가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을 격파한 {{TagPerson|[[김방경]]}}은 (그들이 끌고 갔던) 남녀 만여인(人)과 전함 수십소(艘)를 포획한 위에 섬 안에 적축(積畜)한 양미 4천석과 재보(財寶) 기장(器仗)을 거두어 송경으로 반거(搬去)하였으며 그 밖에 몽군에게 약취된 (강도의) 사녀(士女)와 진보(珍寶)도 또한 많았던 것으로 보면 당년(當年) 진도의 삼별초의 위세가 어떠하였음도 추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연합 측의 진도 공략이 이와 같이 행할 때에 {{TagRefT|73}}좌익 {{TagPerson|[[홍다구]]}}는 제1착으로 승화후와 그의 아들 환을 베었으며<ref group="a">{{TagBook|[[고려사절요]]}}권19 원종 12년 5월조에 「僞王承化侯溫 永寧公綧母兄也 綧屬凞雍曰 若事捷 當救兄死 茶丘先入 殺溫及其 子桓」이라 하였다.</ref> {{TagPerson|[[배중손]]}}도 그 난중에 죽었던 것으로 해석되니 <cite no="23">「與戰戰大敗 禽斬之」(각주72 참조)</cite>라 한 것과 삼별초의 잔당이 제주에 입거한 뒤로는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TagPerson|[[김통정]]}}이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써 추단할 수가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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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번={{TagSpage|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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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번={{TagSpage|57-2}}① 三別抄의 濟州 入據와 그의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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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번={{TagSpage|57-3}}濟州는 일직부터 高麗 抗蒙派의 所謂 捲土 入海의 目的地로 되어왔든 만큼 三別抄가 珍島에 入據한 뒤로 松京 側과 三別抄 사이에는 濟州의 攻防戰이 實로 壯烈하였든 것이다. 三別抄가 南으로 나려와 海上에 橫行케 되매 按察使 權晅이 靈岩副使 金須를 식혀 兵二百으로써 濟州를 직히게 하였고 다시 將軍 高汝霖이 兵七十을 거느리고 濟州에 드러가 金須와 같이 防備에 當하고 있었다. 그런데 同年 十一月 初(三日)에 이르러 三別抄의 將 李文京 等이 明月浦(州西)로부터 上陸하야 東濟院(州東 九里)에 陣을 베풀고 防禦軍을 松淡川(州東 十三里)에서 逆擊하야 金須 高汝霖을 비롯하야 全軍을 殲滅하고 水陸 交通의 要地인 朝天浦(州東)에 {{TagRef|74}}웅거케 되였든 것이다.<ref>東國輿地勝覽 卷三十八 濟州古跡條 叅照.</ref> 當時의 戰況이 얼마나 激烈하였음은 다음의 記事로 알 수가 있는 바이니 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 十一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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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번={{TagSpage|57-4}}<blockquote no="28">賊陷濟州 初按察使權晅 遣靈巖副使金須 以兵二百守濟州 又使將軍高汝霖 以兵七十繼之 及賊攻濟州 須汝霖等力戰{{TagPage|58-1}}死之 羅州人陳子和 直入賊中 斬其將郭延壽以出 又入亦如之 士卒喜躍 旣而復入 爲賊所害 賊乘勝 盡殺官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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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4번={{TagSpage|58-2}}이라 하였다. 그 뒤 元宗 十二年 五月에 珍島가 陷落되매 金通精이 三別抄의 殘黨을 거느리고 그들이 最後의 牙城으로 직혀오던 이 濟州島로 드러와 다시 陣容을 整頓하고 氣勢를 振作하기에 이르렀으며 일로부터 金通精이 中心이 된 三別抄의 活動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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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5번={{TagSpage|58-3}}當時 據點을 濟州에 옴기게 된 三別抄는 防備施設에 힘을 기우려 몇 겹의 城柵을 쌓었든 것이니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三年 六月 乙卯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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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6번={{TagSpage|58-4}}<blockquote no="29">時 賊旣入濟州 築內外城 恃其險問 日益猖獗 常出擄掠 濱海簫然</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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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7번={{TagSpage|58-5}}이라 하였다. 그런데 內城에 나아가 살펴보면 東國輿地勝覧(卷三十八) 濟州 古跡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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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8번={{TagSpage|58-6}}<blockquote no="30">缸波頭古城 (在州西四十里 城中有泉 大旱不渴 高麗元宗十二年 遣金方慶 討三別抄於珍島破之 金通精率三別抄 來據貴日村缸波頭里 築此城以拒之 方慶等進攻拔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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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9번={{TagSpage|58-7}}라 하였다. 貴日村은 今 上下 貴里 附近인 듯하며 缸波頭里는 今 外都里 附近이 아닌가 하거니와 이 缸波頭 古城이 實로 三別抄의 內城이었음은 疑心할 餘地가 없는 바이며 外城으로 말하면 州治 西南 三十六里에 있었다는 古土城이 아니었든가 하나니 同書 同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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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0번={{TagSpage|58-8}}<blockquote no="31">古土城<sup>在州西南三十六里 周十五里 三別抄所築 今皆頹圮</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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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1번={{TagSpage|58-9}}라 하였다. 이 古土城은 範圍로 보와 外城인 듯한 우에 그의 位置로 보아도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內城으로부터 四里 쯤 東南으로 둘러 있든 것이 아닐런가 한다. 그밖에 三別抄의 所築으로 傳해지는 {{TagRef|75}}涯月木城은{{TagPage|59-1}} 內城으로부터 西二里許에 있든 것이니<ref>同書 同條 叅照.</ref> 이는 內城과 東西로 對應하야 掎角의 勢를 取하고 있는 것으로 解釋된다. 그리고 內城을 中心으로 하야 沿岸 一帶에 亘하야는 堤防을 蜿蜒히 둘러쌓었든 듯하니 同上 海州 古跡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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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2번={{TagSpage|59-2}}<blockquote no="32">古長城<sup>船懷筆 周三百餘里 高嘅元宗時 三別抄叛據珍島 王遺侍郎 高汝林(〇霖의 誤인 듯)等于耽羅 領兵一千以備之 因箸長城)</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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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3번={{TagSpage|59-3}}이라 하였다. 이 記事로 보면 松京 側의 高汝霖 等이 三別抄를 防備코저 미리 쌓은 것으로 되여있으나 高汝霖이 濟州에 드러가자 얼마 되지 아니하야 {{TagRef|76}}敗歿하였음으로<ref>高汝霖이 濟州에 드러간 것은 그 時日이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나 元宗 十一年 九月 四日(辛丑)에 高汝霖과 楊東茂에게 舟師로써 珍島를 치게 하였다는 高麗史 元宗 世家의 記事로 보면 高汝霖이 濟州에 드러간 것은 일러도 同年 九月 末頃이라 할 것이며 그가 濟州에서 敗歿한 것은 同年 十一月 三日(己亥)임으로 그가 濟州에 留在한 것은 늘잡어도 一個月에 不過한 것이다.</ref> 이와 같은 三百餘里에 亘하는 長城(?)을 쌓을 時間과 餘裕가 없었을 것으로서 이는 分明히 三別抄 側에서 쌓은 것으로 解釋되며 또 이것을 長城이라 하였으나 이는 後人의 誤傳 또는 誤認에서 나온 것으로서 저 江都의 沿岸 堤防과 對照하여 보면 亦是 沿岸의 防備施設서 쌓은 堤防이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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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4번={{TagSpage|59-4}}濟州島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防備施設을 概察하여 보면 規模와 構制에 있어 대개 江都의 그것과 類似한 바가 있는 것으로서 三別抄의 最後의 根據地에 對한 防禦施設이 얼마나 周到하였든가를 알 수가 있거니와 여기에는 또한 防備施設이 踈㴜했든 珍島에서의 쓰린 經驗이 한 가지 動機가 되였든 것으로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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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5번={{TagSpage|59-5}}다시 三別抄가 濟州에 入據한 뒤의 政治的 體制에 나아가 상고해 보면 當時 濟州는 아직도 高麗의 特別 行政區로 되여 있어 星主와 王子가 얼마간 歷史的인 {{TagRef|77}}權威를 가졌든 것이다.<ref>耽羅는 高麗朝에 드러서도 星主 王子를 中心으로 自治 地域으로 되였다가 肅宗 十年에 이르러 耽羅郡을 設置하였고 毅宗 時에 縣令官으로 하야 令尉를 보내여 鎭撫함에 이르러 漸次 中央化되기 시작하였으나 星主와 王子의 職位는 依然히 世襲制로 되여 그의 歷史的 權威와 政治的 勢力은 아직도 얼마간 保持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蒙古에서 日本과 南宋 經畧에 濟州의 地理的 位置의 重要性을 看破하였을 때에 高麗에서는 蒙古의 依囑을 받었음인지 元宗 七年 十二月에 濟州 王子(高麗史 元宗 世家에는 星主라 하였으나 이는 王子의 誤인 듯함) 梁浩가 入京하매 玄錫을 嚮導로 하야 蒙古에 伴行케 한 일도 있음(高麗史 元宗 世家 七年 十二月條 元史 世祖本紀 元四年 正月條 及 耽羅紀年 卷一 元宗 八年條 叅照).</ref> 그런데 이 星主 王子와 三別{{TagPage|60-1}}抄와의 關係에 있어서는 元高麗紀事 至元 十年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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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6번={{TagSpage|60-2}}<blockquote no="33">(洪)茶邱因陳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 可遣招諭 若不從命 則以軍力 擊之不晚⋯⋯訪得通精姪金永等七人 使招通精 通精與本國星主等不從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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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7번={{TagSpage|60-3}}이라 한 것으로 보면 三別抄의 對外 交涉에 星主를 또한 내세웠든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나 다시 同書 耽羅條에 依하면 <cite no="24">「又兼 耽羅國王 曾來朝(至元 四年 正月에 王子 梁浩가 건너간 것을 가르친 것인 듯함)見今叛賊 逐其主 占據城郭 義當先平」</cite>이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前擧한 記事와 자못 矛盾된 것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cite no="25">「逐其主 云云」</cite>이라 한 것은 다만 三別抄가 濟州를 占據하야 實權을 잡고 있는 事實을 主로 하야 敷衍한 것에 不過하다고 解釋하는 것이 妥當할 듯하니 그러면 當時 三別抄 側에서는 星主 王子를 挾制 또는 操縱하야 名分上 本島의 鎭撫와 對外 關係에 利用하였든 것으로 臆測되는 바로서 이는 그들이 擁立한 新王(承化侯)을 잃은 다음에 取한 바 第二段의 手段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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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8번={{TagSpage|60-4}}이와 같이 三別抄는 濟州에 드러가 根據를 다듬으며 다시 그의 威勢를 沿海 一帶에 떨첬든 것이니 그의 活動 槪況을 簡單히 表로써 드러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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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9번={{TagSpage|60-5}}<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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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年代</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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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活動의 概況</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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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備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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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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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元宗 十二年 十一月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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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橫行諸島 將復出陸</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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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濟州에 入據한 後 다시 諸島를 經畧한 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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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十三年 三·四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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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會寧(長興)을 掩襲하야 漕船 四隻을 掠去 海際(成南) 海南에 또 侵掠</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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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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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五月 四日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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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大浦(井邑)에 來襲하야 漕船 十三艘를 掠去</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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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이 三個月에 걸처 奪去한 船隻이 二十 艘般米가 三千二百餘碩, 殺害한 것이 十二人, 驅去한 것이 二十四人이라 함</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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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月 八日</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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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慶尙道 按廉使가 耽羅間諜 二人을 捕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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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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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月 二十日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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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耽津(康津) 會寧(長興)을 크게 焚掠</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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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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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六月 初</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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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別抄의 船 六艘가 安行梁을 지나 北上</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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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松京 惱懼</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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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八月 七日</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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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全羅道 貢米 八百碩을 奪去</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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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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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九月 十三日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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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孤瀾島에 襲來하야 戰艦 六艘를 불사르고 船匠을 殺害하며 造船官 洪州 副使 李行憸과 結城, 藍浦 監務를 拉去</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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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戰艦을 불사르고 船匠 等을 殺害한 것은 分明히 渡海 作戰의 準備를 挫折시키려는 데에서 나온 듯함</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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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十一月 十五日</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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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安南都護府(富川)에 侵入하야 府使 孔愉(앞서 金方慶과 같이 珍島의 三別抄를 攻擊하였음)와 그 妻를 拉去</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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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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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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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合浦에 侵來하야 戰艦 二十艘를 불사르고 蒙古 烽卒 四人을 拉去</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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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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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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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互濟縣에 侵入하야 戰艦 三艘를 불사르고 縣令을 拉去</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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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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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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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別抄의 船이 또 靈興島(南陽)에 來拍하야 近境에 橫行</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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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王이 五十騎를 蒙帥 忻都에게 請하야 宮禁을 宿衛케 하다</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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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十四年 正月 二十三日</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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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別抄의 船 十隻이 樂安郡에 來侵</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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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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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同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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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合浦에 襲來하야 戰艦 三十二艘를 불사르고 蒙古兵 十餘人을 죽이다</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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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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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三月 二十日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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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耽羅(津?)縣에 侵入하야 防守散員 鄭國甫 等 十五人을 죽이고 郎將 吳旦 等 十一人을 拉去</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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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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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0번={{TagSpage|61-2}}이에 依하야 三別抄의 活動 槪況을 짐작할 수가 있거니와 그들의 侵攻 目標는 地方 官吏와 蒙古人 또는 (貢米) 漕運船과 戰艦(當時 蒙古 側에서는 東征의 準備로서 合浦 及 巨濟 等地에서 盛히 戰艦을 建造하고 있었음) 等에 있든 것으로서 생각컨대 여기에는 相對方의 物資를 아서 抗戰의 資源을 기르려는 것과 저편의 戰艦을 부수워 海上 作戰을 不能케 하려든 것 그리고 官員을 殺害 또는 拉去한 것은 그들의 威力을 보{{TagPage|62-1}}이는 同時에 地方의 治安을 어즈렵게 하려는 것 等의 意義가 있는 듯하다. 이러한 點으로 보와 當時 三別抄의 行動은 珍島 入據 時代에 比하야 變함이 없었든 것을 알 수 있으나 다만 濟州에 入據한 後로는 그들의 活動이 대개 海上에 근치고 內陸 奧地에까지 및이지 못한 것은 事實이니 이는 三別抄가 珍島 失敗로 말미암어 그의 勢力이 자못 滅下한 것과 또 그의 根據地가 너머나 陸地와 遠隔한 關係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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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1번={{TagSpage|62-2}}② 三別抄에 對한 蒙古 側의 懷柔 工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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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2번={{TagSpage|62-3}}三別抄의 餘黨이 濟州로 드러간 後 그의 形勢가 또 다시 猖獗하였음은 前節에서 論述한 바와 같거니와 이에 對하야 蒙古 側에서는 武力 行使에 앞서 懷柔 工作을 다시 쓰게 되였든 것이다. 高麗史(卷二十七) 元宗 十三年 五月 甲申(二十七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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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3번={{TagSpage|62-4}}<blockquote no="34">遣閤門副使琴熏如燕上表曰 至仁釋罪 幸開宥於自新 逋賊執迷 猶肆驕而不服 前次承都省奏奉聖旨降宣 差遣濟州招諭使閤門副使琴熏散員李貞 以四月十五日登船發去 値逆風 退泊甫麻島 逆賊金希就吳仁鳳田祐等船四隻 來奪其船 盡執人物 移載于爾船 收擥招諭文字 往告于濟州金通精 而希就等將琴熏等 遂至楸子島 留著看守 旣得廻報 希就等與琴熏等嫚罵曰 爾等嘗遣人珍島 誘我綬其心 引大軍攻破 惟是父母妻子 人情最愛重 悉已驅掠而去 玆乃我輩怨入骨髓者也 今又欲盡滅吾屬而來誘 則爾等固當殄戮無遺 然若爾 則今此事意 誰當往告者 玆用放爾 因給朽毁小舠一隻 老水手一名幷招諭文字送還 其一行內 記官電吏梢工引海等四人 皆殺之 餘外水手十人 亦欲殺之 而牽去 琴熏等盤桓島中 而得水手之脫害者三人 以前月二十九日還來</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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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4번={{TagSpage|63-1}}라 한 자못 자세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에 依하야 同年 三月 九日에 <cite no="26">「以琴熏爲濟州逆賊招諭使」(同書)</cite>라 한 것도 全혀 元(以下는 蒙古를 元으로 씀) 側의 意向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으며 五月 二十七日에 琴熏을 元에 보낸 것은 懷柔 工作에 그와 같이 失敗한 經過를 直接 報告케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三別抄 側에서 琴熏 一行을 濟州에 드리지 아니하고 楸子島에 抑留한 것은 珍島에서의 前鑑에 비추워 애초부터 聯合 側과의 通交를 끄림과 同時에 濟州島 內의 事情이 外部에 漏洩되게 하지 아니하려는 意圖에서 나온 것으로 解釋되며 琴熏 等에 對하야 金希就 等이 嫚罵한 것이라던지 또 그 一行에 對한 迫害와 招諭 文字를 돌려보낸 것 等은 濟州로부터의 𢌞報를 얻은 後의 일인 만큼 모다 金通精의 指揮에 依한 것임은 明白한 事實이다. 그리고 琴熏 一行에 對한 金希就 等의 處斷으로 미루워 보면 當時 三別抄 側의 海上 警備와 믿 本島와의 連絡이 매우 統制 있게 行해지든 것도 알 수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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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5번={{TagSpage|63-2}}이와 같이 元에서는 濟州의 三別抄에 對하야 처음부터 懷柔策을 쓰게 된 것은 앞서 珍島에 對한 工作과 대개 그의 軌를 同一히 하는 바가 있거니와 다시 그의 意義를 追究하여 보면 ① 濟州 進擊은 珍島에 比하야 海上 作戰이 더욱 危險한 것 ② 東征의 關係가 또한 元으로 하여금 그러한 工作을 行케 한 一大 動機라 할 것이다. 元來 東征은 蒙古 側의 宿題로서 그것을 實行하려면 먼저 海上의 敵인 (濟州의) 三別抄를 速하고 또한 穩便하게 處置하지 아니치 못할 것은 말 할 것도 없는 바로서 元高麗紀事(耽羅) 至元 九年 十一月 十五日條에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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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6번={{TagSpage|64-1}}<blockquote no="35">{{TagRef|78}}中書省奏 先奉旨 議耽羅日本事 臣等同樞密院官詢問 有自南國 經由日本來者 耽羅人三名 畫到圖本<ref>元高麗紀事 耽羅條에 「至元 九年 三月 鐵匠高樓等 上黑山耽羅等海道圖本 就中書省圓看過議定」이라 한 記事와 對照해보면 「有自南國 經由日本來者 耽羅人三名 畵到圖本」의 耽羅人은 高樓 等을 가르친 듯하며 따러서 高樓 等은 耽羅人이어떤 것으로 믿는다.</ref> 稱日本太宰府等處 下船之地 俱可下岸 約用軍二三萬 臣等謂若先事日本 未見本國順逆之情 恐有後詞 可先平訖耽羅賊寇⋯⋯⋯上曰行之 至如耽羅歸順不用兵 別亦有調用之處 卿等議合用多少兵力</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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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7번={{TagSpage|64-2}}이라 한 記事에 徵하여도 그의 事情을 看取할 수가 있는 것이다. 元 側에서는 이러한 事由 아래에서 懷柔 工作에 最後까지 努力하였으니 前擧 琴熏 一行의 失敗가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洪茶丘는 다시 金通精의 親族과 黨類를 探索하야 濟州에 보내게 되였다.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三年 八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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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8번={{TagSpage|64-3}}<blockquote no="36">茶丘表陳 金通精之黨 多在王京 可使招之 招而不從 擊之未晩 帝從之 茶丘乃遣通精之姪郞將金贊李邵 賊將吳仁節族桓文伯等五人 使往諭之 通精等不從 留金贊 餘皆殺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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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9번={{TagSpage|64-4}}라 하였고 前擧 元高麗紀事(至元 十年 四月 二十八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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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0번={{TagSpage|64-5}}<blockquote no="37">初承化公旣死 其黨金通精復叛 引軍突入耽羅拒守 (中畧) 茶邱因陳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 可遣招誘 若不從命 則以軍力擊之不晚 事聞 奉旨命茶邱 於全羅道訪得通精姪金永等七人使招通精 通精與本國星主等不從 盡殺使命 惟留永</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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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1번={{TagSpage|64-6}}이라 하였다. 이 두 記事를 對照하여 보면 대개 一致하나 高麗史에는 金通精의 姪을 金賛이라 하였으나 元高麗紀事에는 金永으로 되여 있으며 또 金永을 全羅道에서 訪得하였다 하야 자못 詳細히 적혀 있다. 그런데 金賛과 金永은 全혀 同一人을 異名으로 적은 듯하나 어느 것이 올흔지는 斷定하기가 어려운 바이{{TagPage|65-1}}다. 金通精의 姪이 郎將의 職을 띄웠던 것으로 보면 金通精의 一族은 相當한 名門이엇던것으로 {{TagRef|79}}解釋되거니와<ref>金通精의 姪은 金賛이었는지 또는 金永이었는지 斷定을 나리기 어려우나 高麗史의 金賛은 元宗 八年頃에 蒙使 黑的과 같이 日本에 건너가다가 風濤의 險으로 말미암어 中途에서 돌아오게 된 侍御史 金賛과 或 同一人이나 아닌가 하는 疑心도 일어나게 하며 그 우에 金通精은 夜別抄 指諭 金革精의 一族이 아닌가도 臆測되는 바이니 (金革精은 또 濟州 陷落 後 三別抄의 將으로서 사로잡힌 金革正과 同一人으로도 보임) 作名上으로 보던지 또는 三別抄와의 關係로 보와 어떠한 關聯이 있는 듯하다.</ref> 그의 族黨들은 金通精의 關係로 말미암어 都城에 安住치 못할 것은 넉넉히 想像할 수가 있는 바이다. 생각컨대 當時 都城에 居住하던 그의 族黨들은 地方에 散走하였던 듯하니 이와 같이 본다면 <cite no="27">「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cite>이니 <cite no="28">「通精之黨 多在王京」</cite>이라는 記事는 그가 本來 名族으로서 그리 族黨이 都城에 많이 居住하였던 事實에서 나온 것이며 <cite no="29">「於全羅道訪得通精姪金永等 云云」</cite>은 그의 族黨이 地方으로 散走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TagRef|80}}그리고 濟州에 보낸 人員의 數에 있어서도 史籍에 따러 或은 五人 或은 六人 또 七人으로 씨여 있어<ref>高麗史 元宗 世家와 및 節要에는 五人으로 되여 있으나 元高麗紀事에는 七人으로 또 高麗史 裴仲孫傳에는 六人으로 되여 있다.</ref> 또한 速斷키가 어려운 바이다. 어째던 元 側의 이러한 懷柔 工作은 끝까지 失敗를 거듭한 것이었나니 이에서 元은 디디여 前부터 武力 討伐을 主張하든 {{TagRef|81}}高麗 政府<ref>元高麗紀事 至元 九年 三月條 元의 省 院 臺 等의 奏議中에 「高麗王亦稱 乞上司添力併除耽羅 前者己有表聞」의 記事가 보임.</ref>와 聯合을 굳게 하야 武力으로써 濟州 攻略을 行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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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2번={{TagSpage|65-2}}③ 麗蒙 聯合軍의 濟州 攻陷과 三別抄의 覆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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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3번={{TagSpage|65-3}}懷柔 工作에 失敗를 거듭한 元에서는 디디여 武力 行使로 나오게 될 것도 또한 自然의 勢라 할 것이다. 前擧 元高麗紀事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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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4번={{TagSpage|65-4}}<blockquote no="38">中書省奏 先奉旨 議耽羅日本事⋯⋯⋯臣等謂 若先事日本 未見本國順逆之情 恐有後詞 可先平訖耽羅賊寇⋯⋯上曰察忽(〇洪茶丘)先令人入耽羅 今回未 臣僚奏未回 上曰其人回日 若耽羅歸順 夫復何言 又奏其人回而不歸順 竊恐遲誤軍事 上曰行之 至如耽羅歸順不用兵 別亦有調用之處 卿等議合用多少兵力 回奏臣等約量本處(〇高麗)屯田軍 可{{TagPage|66-1}}摘二千 復於漢軍內選三二千人 船中載馬費力 蒙古軍可少 差高麗國合僉五六千 共一萬餘軍可矣 上曰武衛軍差二千 卿等更議餘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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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5번={{TagSpage|66-2}}라 하였고 다시 元史(本紀 第七) 至元 九年 十一月 己巳(十五日)條에 나아가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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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6번={{TagSpage|66-3}}<blockquote no="39">勅發屯田軍二千 漢軍二千 高麗軍六千 仍益武衛軍二千 征耽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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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7번={{TagSpage|66-4}}라 하였다. 前者의 記事로써 吾人은 東征을 앞두고 元 側이 耽羅 問題에 얼마나 焦燥하였음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다시 動兵에 있어 前後 두 記事를 通하야 보면 그들의 計劃한 動員의 數는 約 一萬二千兵으로서 武術軍 二千을 派遣할 것은 먼저 元主가 即決한 것이며 다시 漢軍 二千과 屯田軍 (特히 鹽州 屯田軍이 이에 當하였던 듯함) 二千과 高麗軍 六千을 調發케 할 것도 同日 中書省에서 議決한 것으로 解釋되는 바이다. 그런데 다시 高麗의 軍額에 나아가 살펴보면 前擧 元 側의 記錄과 高麗史의 <cite no="30">「元以攻討濟州 詔王簽軍六千水手三千」(元宗 世家 十三年 十二月 乙未條)</cite>이라 한 것은 서로 照應되는 바어니와 高麗 政府에서도 前부터 蒙古 側과 合作하야 武力 討伐을 主張하여 온 만큼 元 側의 要求 軍額에 充當하려 諸道에 손을 펼처 軍丁 徵募에 努力한 것은 <cite no="31">「分遺抄軍別監于諸道」(同上 十二月 己亥條)</cite> <cite no="32">「命樞密院副使宋松禮上將軍徐裕點兵」(同上 辛丑條)</cite>이라 한 記事로써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야 高麗의 動員 數는 <cite no="33">「金方慶與忻都茶丘等 以全羅道一百六十艘 水陸兵一萬餘人至耽羅 與賊戰」(同上 元宗 十四年 四月 庚戌條)</cite>이라 한 것과 <cite no="34">「以方慶爲行營中軍兵馬使元帥 遣之 方慶更鍊卒幷水軍萬餘人(〇聯合軍의 總數인 듯함)與忻都茶丘 屯潘南縣 云云」(同上 金方慶傳)</cite>이라 한 것으로 보면 대개 元 側의 要求額에 達{{TagPage|67-1}}하였던 것으로 解釋되나니 三別抄의 南下한 直後의 狀況에 比하야 보면 當時 金方慶의 統率 下에 있던 松京 側의 軍容도 顯著히 整頓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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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8번={{TagSpage|67-2}}{{TagRef|82}}어째던 元에서는 以上과 같이 聯合 兵員의 配定을 세운 다음에 다시 三軍의 部署를 定하고 軍期는 二月 初로부터 三月 中旬의 사이로 定하게 되였던 것이니<ref>元高麗紀事(耽羅) 至元 十年 正月 四日條에 「左丞相奏 臣等與察忽(〇洪茶丘)議 二月初至三月半 征耽羅爲宜 奉聖旨從之 上又曰可令察忽去 張左丞再奏 臣等議征耽羅 將爲長者忻都 第二武衛軍鄭也可拔都兒(〇伊克巴圖로도 쓰나니 그의 本名은 溫임) 第三察忽 亦奉旨準」이라 하였음. 鄭也可 拔都兒에 關하야는 元史 卷百四十五 鄭溫傳 叅照.</ref> 이는 濕熱한 夏節이 오기 前에 海上 進撃을 하려는 것이었다.(上節 珍島 攻陷條 叅照) 이에 呼應하야 高麗에서는 大將軍 金伯鈞으로 慶尙道 水路 防護使에 判閣門事 {{TagRef|83}}李信孫<ref>李信孫은 앞서 三別抄가 擧事할 때에 大將軍 劉存奕과 같이 三別抄 政府의 左右承宣이 되였다가 및 珍島가 陷落되고 三別抄의 餘黨이 濟州에 들어갈 때에 디디여 中途에서 松京으로 還歸하였다(高麗史 裴仲孫傳 叅照).</ref>으로 忠淸道 防護使에 任命하야 濟州를 中間에 두고 東과 西北의 海上 防備를 嚴히 하고(元宗 十四年 二月) 中軍 行營 兵馬元帥 金方慶이 우선 精騎 八百으로써 蒙將 忻都 等과 같이 出征케 되였다.(二月 二十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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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9번={{TagSpage|67-3}}麗蒙 聯合軍은 潘南縣(羅州)에 集結하야 三軍의 部署를 다시 編整하였던 것이다. 中軍을 主로 左右 兩翼에 나누워 敵을 掩擊케 한 것으로서 中軍은 金方慶과 忻都가 指揮에 當케 된 것이니 이러한 作戰은 대개 珍島 攻略 時의 것과 같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야 聯合軍은 얼마 동안 潘南에서 渡海 進攻의 準備와 天候의 順調를 기다리다가 同年 四月 九日頃에 이르러 {{TagRef|84}}進攻을 開始한 듯한데<ref>元高麗紀事(耽羅) 至元 十年 四月 九日條에 「經界畧使忻都史樞及洪茶邱等 率兵船大小計一百令八艘進發」이라 한 것은 潘南에서 海上 進攻을 開始한 것을 가르친 것으로 解釋된다.</ref> 처음에는 風濤로 말미암어 船隻이 많이 漂沒되였었으나 金方慶 等이 뒤를 미러 디디여 冒險的 總攻擊을 敢行하기에 이를었다. 聯合軍은 먼저 楸子島에 건너가 風勢를 가누워 가지고 同月 二十八日에(庚戌) 三軍이 幷進하야 怒濤를 헛치고 不意의 攻擊을 加하게 되었던 것이니 當時의 戰況에 關하야 高麗史 金方慶傳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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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40번={{TagSpage|67-4}}<blockquote no="40">以方慶爲行營中軍兵馬元帥遣之 方慶更鍊卒幷水軍萬餘人 與忻都茶丘 屯潘南縣 將發 諸道戰艦 皆爲風簸蕩 獨以全{{TagPage|68-1}}羅道一百六十艘 次楸子島候風 夜半風急 不知所指 黎明已近耽羅 風濤洶湧 進退失據 方慶仰天太息曰 社稷安危 在此一擧 今日之事 不在我乎 俄而風浪止 中軍入自咸德浦 賊伏兵岩石閒 踴躍大呼以拒之 方慶厲聲 趣諸船並進 隊正高世和挺身 突入賊陣 士卒乘勢爭赴 將軍羅裕將銳兵繼至 殺獲甚衆 左軍戰艦三十艘 自飛揚島 直擣賊壘 賊風靡 走入子城 官軍踰外城入 火矢四發 烟焰漲天 賊衆大亂 有自賊中來投者曰 賊已勢窮謀遁 可急擊之 旣而賊酋金通精 率其徒七十餘人 遁入山中 賊將李順恭曹時適等 肉袒降 方慶麾諸將入子城 士女號哭 方慶曰只誅巨魁耳 汝等勿懼 執其魁金允敘等六人 斬于通街 擒親黨三十五人 分載降衆一千三百餘人而還</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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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41번={{TagSpage|68-2}}이라 하였다. 麗蒙 聯合軍은 險한 風濤를 무릅쓰고 奇襲上陸을 敢行한 것으로 金方慶 等이 指揮하는 中軍은 咸德浦(朝天里)로부터 上陸하야 東으로부터 猛攻을 加하였고 左軍은 飛揚島(州治의 西海上에 있음)로부터 東으로 掩擊하야 三別抄의 本據(缸波頭城)를 直衝하였다. 그리하야 三別抄로 하여금 防禦의 겨를도 없이 瓦解케 한 것은 또한 珍島 攻陷의 例와 類似한 바가 있다. 이리하야 抗蒙 勢力의 最後의 牙城은 디디여 完全히 崩壞가 되었고 金通精의 {{TagRef|85}}自縊<ref>高麗史 元宗 世家 十四年 閏六月 丙辰(六日)條에 「耽羅留鎭將軍宋甫演 得賊魁金通精屍(〇自縊死)以聞 又搜捕賊將 金革正 李寄等 七十餘人 送于茶丘 皆殺之」라 하였다.</ref>과 아울러 三別抄는 歷史上에 終焉을 告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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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번=① 삼별초의 제주 입거와 그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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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번=제주는 일찍부터 고려 항몽파의 소위 권토(捲土) 입해의 목적지로 되어왔던 만큼 삼별초가 진도에 입거한 뒤로 송경 측과 삼별초 사이에는 제주의 공방전이 실로 장렬하였던 것이다. 삼별초가 남쪽으로 내려와 해상에 횡행하게 되니 안찰사 {{TagPerson|[[권단]]}}(權晅)이 영암부사 {{TagPerson|[[김수]]}}(金須)를 시켜 병200으로써 제주를 지키게 하였고 다시 장군 {{TagPerson|[[고여림]]}}(高汝霖)이 병70을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가 {{TagPerson|[[김수]]}}와 같이 방비에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초(3일)에 이르러 삼별초의 장수 {{TagPerson|[[이문경]]}}등이 명월포(주서)로부터 상륙하여 동제원(주동 9리)에 진을 베풀고 방어군을 송담천(주동 13리)에서 역격하여 {{TagPerson|[[김수]]}}{{TagPerson|[[고여림]]}}을 비롯하여 전군을 섬멸하고 수륙 교통의 요지인 조천포(주동)에 {{TagRefT|74}}웅거하게 되었던 것이다.<ref group="a">{{TagBook|[[동국여지승람]]}}권38 제주고적조 참조.</ref> 당시의 전황이 얼마나 격렬하였음은 다음의 기사로 알 수가 있는 바이니 {{TagBook|[[고려사절요]]}}(권18) 원종 11년 11월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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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번=<blockquote no="28">賊陷濟州 初按察使權晅 遣靈巖副使金須 以兵二百守濟州 又使將軍高汝霖 以兵七十繼之 及賊攻濟州 須汝霖等力戰死之 羅州人陳子和 直入賊中 斬其將郭延壽以出 又入亦如之 士卒喜躍 旣而復入 爲賊所害 賊乘勝 盡殺官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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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4번=이라 하였다. 그 뒤 {{TagPerson|[[원종]]}}12년 5월에 진도가 함락되니 {{TagPerson|[[김통정]]}}이 삼별초의 잔당을 거느리고 그들이 최후의 아성(牙城)으로 지켜오던 이 제주도로 들어와 다시 진용을 정돈하고 기세를 진작(振作)하기에 이르렀으며 일로부터 {{TagPerson|[[김통정]]}}이 중심이 된 삼별초의 활동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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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5번=당시 거점을 제주에 옮기게 된 삼별초는 방비시설에 힘을 기울여 몇 겹의 성책을 쌓았던 것이니 {{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13년 6월 을묘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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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6번=<blockquote no="29">時 賊旣入濟州 築內外城 恃其險問 日益猖獗 常出擄掠 濱海簫然</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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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7번=이라 하였다. 그런데 내성에 나아가 살펴보면 {{TagBook|[[동국여지승람]]}}(권38) 제주 고적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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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8번=<blockquote no="30">缸波頭古城 (在州西四十里 城中有泉 大旱不渴 高麗元宗十二年 遣金方慶 討三別抄於珍島破之 金通精率三別抄 來據貴日村缸波頭里 築此城以拒之 方慶等進攻拔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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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9번=라 하였다. 귀일촌(貴日村)은 오늘날 상하 귀리(貴里) 부근인 듯하며 항파두리(缸波頭里)는 오늘날 외도리(外都里) 부근이 아닌가 하거니와 이 항파두 고성이 실로 삼별초의 내성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이며 외성으로 말하면 주치 서남 36리에 있었다는 고토성이 아니었던가 하니 같은 책 같은 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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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0번=<blockquote no="31">古土城<sup>在州西南三十六里 周十五里 三別抄所築 今皆頹圮</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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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1번=라 하였다. 이 고토성은 범위로 보아 외성인 듯한 위에 그의 위치로 보아도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내성으로부터 4리 쯤 동남으로 둘러 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밖에 삼별초의 소축(所築)으로 전해지는 {{TagRefT|75}}애월목성은 내성으로부터 서쪽 2리허(許)에 있던 것이니<ref group="a">같은 책 같은 조 참조.</ref> 이는 내성과 동서로 대응하여 기각(掎角)의 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내성을 중심으로 하여 연안 일대에 뻗은 제방을 완연히 둘러쌓았던 듯하니 위와 같은 책 해주 고적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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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2번=<blockquote no="32">古長城<sup>船懷筆 周三百餘里 高嘅元宗時 三別抄叛據珍島 王遺侍郎 高汝林(〇霖의 誤인 듯)等于耽羅 領兵一千以備之 因箸長城</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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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3번=이라 하였다. 이 기사로 보면 송경 측의 {{TagPerson|[[고여림]]}}등이 삼별초를 방비하고자 미리 쌓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TagPerson|[[고여림]]}}이 제주에 들어가자 얼마 되지 아니하여 {{TagRefT|76}}패몰(敗歿)하였으므로<ref group="a">{{TagPerson|[[고여림]]}}이 제주에 들어간 것은 그 시일이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나 {{TagPerson|[[원종]]}}11년 9월 4일(신축)에 {{TagPerson|[[고여림]]}}과 {{TagPerson|[[양동무]]}}에게 주사(舟師)로써 진도를 치게 하였다는 {{TagBook|[[고려사]]}}원종 세가의 기사로 보면 {{TagPerson|[[고여림]]}}이 제주에 들어간 것은 일러도 같은 해 9월 말경이라 할 것이며 그가 제주에서 패몰한 것은 같은 해 11월 3일(기해)임으로 그가 제주에 유재(留在)한 것은 늦어도 1개월에 불과한 것이다.</ref> 이와 같은 300여리에 걸친 장성(?)을 쌓을 시간과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서 이는 분명히 삼별초 측에서 쌓은 것으로 해석되며 또 이것을 장성이라 하였으나 이는 후인(後人)의 오전(誤傳) 또는 오인에서 나온 것으로서 저 강도의 연안 제방과 대조하여 보면 역시 연안의 방비시설에서 쌓은 제방이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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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4번=제주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방비시설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면 규모와 구제(構制)에 있어 대개 강도의 그것과 유사한 바가 있는 것으로서 삼별초의 최후의 근거지에 대한 방어시설이 얼마나 주도(周到)하였던가를 알 수가 있거니와 여기에는 또한 방비시설이 소편(踈㴜)했던 진도에서의 쓰린 경험이 한 가지 동기가 되었든 것으로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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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5번=다시 삼별초가 제주에 입거한 뒤의 정치적 체제에 나아가 상고해 보면 당시 제주는 아직도 고려의 특별 행정구로 되어 있어 성주와 왕자가 얼마간 역사적인 {{TagRefT|77}}권위를 가졌던 것이다.<ref group="a">탐라는 고려조(朝)에 들어서도 성주 왕자를 중심으로 자치 지역으로 되었다가 {{TagPerson|[[숙종]]}}10년에 이르러 탐라군을 설치하였고 {{TagPerson|[[의종]]}}때에 현령관으로 하여 영위(令尉)를 보내어 진무(鎭撫)함에 이르러 점차 중앙화되기 시작하였으나 성주와 왕자의 직위는 의연히 세습제로 되어 그의 역사적 권위와 정치적 세력은 아직도 얼마간 보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몽고에서 일본과 남송 경략에 제주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간파하였을 때에 고려에서는 몽고의 의촉을 받았음인지 원종 7년 12월에 제주 왕자({{TagBook|[[고려사]]}}원종 세가에는 성주라 하였으나 이는 왕자의 오기인 듯함) {{TagPerson|[[양호]]}}(梁浩)가 입경하니 현석(玄錫)을 향도(嚮導)로 하여 몽고에 반행(伴行)케 한 일도 있음({{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7년 12월조 원사 세조본기 원4년 정월조 및 {{TagBook|[[탐라기년]]}}권1 원종 8년조 참조).</ref> 그런데 이 성주 왕자와 삼별초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TagBook|[[원고려기사]]}}지원 10년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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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6번=<blockquote no="33">(洪)茶邱因陳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 可遣招諭 若不從命 則以軍力 擊之不晚⋯⋯訪得通精姪金永等七人 使招通精 通精與本國星主等不從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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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7번=이라 한 것으로 보면 삼별초의 대외 교섭에 성주를 또한 내세웠던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나 다시 같은 책 탐라조에 의하면 <cite no="24">“又兼 耽羅國王 曾來朝(지원 4년 정월에 왕자 {{TagPerson|[[양호]]}}가 건너간 것을 가리킨 것인 듯함)見今叛賊 逐其主 占據城郭 義當先平”</cite>이라 한 기사가 보이니 이는 앞서 든 기사와 자못 모순된 것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cite no="25">“逐其主 云云”</cite>이라 한 것은 다만 삼별초가 제주를 점거하여 실권을 잡고 있는 사실을 주로 하여 부연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니 그러면 당시 삼별초 측에서는 성주 왕자를 협제(挾制) 또는 조종하여 명분상 본도의 진무와 대외 관계에 이용하였던 것으로 억측되는 바로서 이는 그들이 옹립한 새로운 왕(승화후)을 잃은 다음에 취한 바 제2단의 수단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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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8번=이와 같이 삼별초는 제주에 들어가 근거를 다듬으며 다시 그의 위세를 연해(沿海) 일대에 떨첬던 것이니 그의 활동 개황을 간단히 표로써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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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9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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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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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연대</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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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활동의 개황</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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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비고</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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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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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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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원종 12년 11월경</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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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횡행제도 장봉출륙</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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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제주에 입거한 후 다시 제도를 경략한 것</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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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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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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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3년 3·4월</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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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회령(장흥)을 엄습하여 조선4척을 약거 해제(성남) 해남에 또 침략</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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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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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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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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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5월 4일경</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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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대포(정읍)에 내습하여 조선 23소(艘)를 약거</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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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이 3개월에 걸쳐 탈거한 선척이 20 소반미가 3200여석, 살해한 것이 12인, 구거한 것이 24인이라 함</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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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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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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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같은 달 8일</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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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경상도 안렴사가 탐라간첩 2인을 포착</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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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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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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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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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같은 달 20일경</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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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탐진(강진) 회령(장흥)을 크게 분략</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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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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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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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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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6월 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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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삼별초의 배 6소(艘)가 안행량을 지나 북상</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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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송경 뇌구</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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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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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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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8월 7일</td>
 +
<td>전라도 공미 800석을 탈거</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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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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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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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td>9월 13일경</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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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고란도에 습래하여 전함 6소(艘)를 불사르고 선장을 살해하며 조선관 홍주 부사 이행섬과 결성, 남포 감무를 납거</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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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전함을 불사르고 선장 등을 살해한 것은 분명히 도해 작전의 준비를 좌절시키려는 데에서 나온 듯함</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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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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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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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1월 15일</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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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안남도호부(부천)에 입거하여 부사 공유(앞서 김방경과 같이 진도의 삼별초를 공격하였음)와 그 아내를 납거</td>
 +
<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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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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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td>같은 달</td>
 +
<td>합포에 침래하여 전함 20소(艘)를 불사르고 몽고 봉졸 4인을 납거</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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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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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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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td>같은 달</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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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호제현에 침입하여 전함 3소(艘)를 불사르고 현령을 납거</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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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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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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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td>같은 달</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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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삼별초의 배가 또 영흥도(남양)에 내박(來拍)하여 근경에 횡행</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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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왕이 50기(騎)를 몽사 흔도에게 청하여 궁금(宮禁)을 숙위하게 하다</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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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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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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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4년 정월 23일</td>
 +
<td>삼별초의 배 10척이 낙안군에 내침</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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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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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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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
<td>같은 달</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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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합포에 습래하여 전함 32소(艘)를 불사르고 몽고병 10여인을 죽이다</td>
 +
<td></td>
 +
</t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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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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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3월 20일경</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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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탐라(진?)현에 침입하여 방수산원 정국보 등 15인을 죽이고 낭장(郎將) 오단 등 11인을 납거</td>
 +
<td></td>
 +
</t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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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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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0번=이에 의하여 삼별초의 활동 개황을 짐작할 수가 있거니와 그들의 침공 목표는 지방 관사와 몽고인 또는 (공미) 조윤선과 전함(당시 몽고 측에서는 동정의 준비로서 합포 및 거제 등지에서 성히 전함을 건조하고 있었음) 등에 있던 것으로서 생각건대 여기에는 상대방의 물자를 빼앗아 항전의 자원을 기르려는 것과 저편의 전함을 부수어 해상 작전을 불능하게 하려던 것 그리고 관원을 살해 또는 납거한 것은 그들의 위력을 보이는 동시에 지방의 치안을 어지럽게 하려는 것 등의 의의가 있는 듯하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시 삼별초의 행동은 진도 입거 시대에 비하여 변함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다만 제주에 입거한 후로는 그들의 활동이 대개 해상에 그치고 내륙 오지에까지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 이는 삼별초가 진도 실패로 말미암아 그의 세력이 자못 멸하(滅下)한 것과 또 그의 근거지가 너무나 육지와 원격한 관계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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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1번=② 삼별초에 대한 몽고 측의 회유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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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2번=삼별초의 여당이 제주로 들어간 후 그의 형세가 또 다시 창궐하였음은 앞 절에서 논술한 바와 같거니와 이에 대하여 몽고 측에서는 무력 행사에 앞서 회유 공작을 다시 쓰게 되었던 것이다. {{TagBook|[[고려사]]}}(권27) 원종 13년 5월 갑신(27일)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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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3번=<blockquote no="34">遣閤門副使琴熏如燕上表曰 至仁釋罪 幸開宥於自新 逋賊執迷 猶肆驕而不服 前次承都省奏奉聖旨降宣 差遣濟州招諭使閤門副使琴熏散員李貞 以四月十五日登船發去 値逆風 退泊甫麻島 逆賊金希就吳仁鳳田祐等船四隻 來奪其船 盡執人物 移載于爾船 收擥招諭文字 往告于濟州金通精 而希就等將琴熏等 遂至楸子島 留著看守 旣得廻報 希就等與琴熏等嫚罵曰 爾等嘗遣人珍島 誘我綬其心 引大軍攻破 惟是父母妻子 人情最愛重 悉已驅掠而去 玆乃我輩怨入骨髓者也 今又欲盡滅吾屬而來誘 則爾等固當殄戮無遺 然若爾 則今此事意 誰當往告者 玆用放爾 因給朽毁小舠一隻 老水手一名幷招諭文字送還 其一行內 記官電吏梢工引海等四人 皆殺之 餘外水手十人 亦欲殺之 而牽去 琴熏等盤桓島中 而得水手之脫害者三人 以前月二十九日還來</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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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4번=라 한 자못 자세한 기사가 보이니 이에 의하여 같은 해 3월 9일에 <cite no="26">“以琴熏爲濟州逆賊招諭使”(같은 책)</cite>라 한 것도 전혀 원(아래에서는 몽고를 원으로 씀) 측의 의향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으며 5월 27일에 금훈을 원에 보낸 것은 회유 공작에 그와 같이 실패한 경과를 직접 보고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삼별초 측에서 금훈 일행을 제주에 들이지 아니하고 추자도에 억류한 것은 진도에서의 전감에 비추어 애초부터 연합 측과의 통교를 끄림과 동시에 제주도 내의 사정이 외부에 누설되게 하지 아니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되며 {{TagPerson|[[금훈]]}}등에 대하여 {{TagPerson|[[김희취]]}}등이 만매(嫚罵)한 것이라든지 또 그 일행에 대한 박해와 초유 문자를 돌려보낸 것 등은 제주로부터의 회보(𢌞報)를 얻은 후의 일인 만큼 모두 {{TagPerson|[[김통정]]}}의 지휘에 의한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TagPerson|[[금훈]]}}일행에 대한 {{TagPerson|[[김희취]]}}등의 처단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삼별초 측의 해상 경비와 및 본도와의 연락이 매우 통제 있게 행해지던 것도 알 수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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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5번=이와 같이 원에서는 제주의 삼별초에 대하여 처음부터 회유책을 쓰게 된 것은 앞서 진도에 대한 공작과 대개 그의 궤를 동일히 하는 바가 있거니와 다시 그의 의의를 추구(追究)하여 보면 ① 제주 진격은 진도에 비하여 해상 작전이 더욱 위험한 것 ② 동정의 관계가 또한 원으로 하여금 그러한 공작을 행하게 한 큰 동기라 할 것이다. 원래 동정은 몽고 측의 숙제로서 그것을 실행하려면 먼저 해상의 적인 (제주의) 삼별초를 속(速)하고 또한 온편하게 처치하지 아니하지 못할 것은 말 할 것도 없는 바로서 {{TagBook|[[원고려기사]]}}(탐라) 지원 9년 11월 15일조에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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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6번=<blockquote no="35">{{TagRefT|78}}中書省奏 先奉旨 議耽羅日本事 臣等同樞密院官詢問 有自南國 經由日本來者 耽羅人三名 畫到圖本<ref group="a">{{TagBook|[[원고려기사]]}}탐라조에 「至元 九年 三月 鐵匠高樓等 上黑山耽羅等海道圖本 就中書省圓看過議定」이라 한 기사와 대조해보면 「有自南國 經由日本來者 耽羅人三名 畵到圖本」의 탐라인은 고루 등을 가리킨 듯하며 따라서 고루 등은 탐라인이었던 것으로 믿는다.</ref> 稱日本太宰府等處 下船之地 俱可下岸 約用軍二三萬 臣等謂若先事日本 未見本國順逆之情 恐有後詞 可先平訖耽羅賊寇⋯⋯⋯上曰行之 至如耽羅歸順不用兵 別亦有調用之處 卿等議合用多少兵力</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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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7번=이라 한 기사에 징(徵)하여도 그의 사정을 간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원 측에서는 이러한 사유 아래에서 회유 공작에 최후까지 노력하였으니 앞서 든 {{TagPerson|[[금훈]]}}일행의 실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TagPerson|[[홍다구]]}}는 다시 {{TagPerson|[[김통정]]}}의 친족과 당류를 탐색하여 제주에 보내게 되었다. {{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13년 8월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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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8번=<blockquote no="36">茶丘表陳 金通精之黨 多在王京 可使招之 招而不從 擊之未晩 帝從之 茶丘乃遣通精之姪郞將金贊李邵 賊將吳仁節族桓文伯等五人 使往諭之 通精等不從 留金贊 餘皆殺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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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9번=라 하였고 앞서 든 {{TagBook|[[원고려기사]]}}(지원 10년 4월 28일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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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0번=<blockquote no="37">初承化公旣死 其黨金通精復叛 引軍突入耽羅拒守 (中畧) 茶邱因陳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 可遣招誘 若不從命 則以軍力擊之不晚 事聞 奉旨命茶邱 於全羅道訪得通精姪金永等七人使招通精 通精與本國星主等不從 盡殺使命 惟留永</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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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1번=이라 하였다. 이 두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대개 일치하나 {{TagBook|[[고려사]]}}에는 {{TagPerson|[[김통정]]}}의 조카를 {{TagPerson|[[김찬]]}}이라 하였으나 {{TagBook|[[원고려기사]]}}에는 {{TagPerson|[[김영]]}}으로 되어 있으며 또 {{TagPerson|[[김영]]}}을 전라도에서 방득(訪得)하였다 하여 자못 상세히 적혀 있다. 그런데 {{TagPerson|[[김찬]]}}과 {{TagPerson|[[김영]]}}은 전혀 동일인을 이명(異名)으로 적은 듯하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단정하기가 어려운 바이다. {{TagPerson|[[김통정]]}}의 조카가 낭장의 직을 띠었던 것으로 보면 {{TagPerson|[[김통정]]}}의 일족은 상당한 명문이었던것으로 {{TagRefT|79}}해석되거니와<ref group="a">{{TagPerson|[[김통정]]}}의 조카는 {{TagPerson|[[김찬]]}}이었는지 또는 {{TagPerson|[[김영]]}}이었는지 단정을 내리기 어려우나 {{TagBook|[[고려사]]}}의 {{TagPerson|[[김찬]]}}은 원종 8년경에 몽사 {{TagPerson|[[흑적]]}}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다가 풍도의 험준함으로 말미암아 중도에서 돌아오게 된 시어사 {{TagPerson|[[김찬]]}}과 혹 동일인인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일어나게 하며 그 위에 {{TagPerson|[[김통정]]}}은 야별초 지유 {{TagPerson|[[김혁정]]}}의 일족이 아닌가도 억측되는 바이니 ({{TagPerson|[[김혁정]]}}은 또 제주 함락 후 삼별초의 장군으로서 사로잡힌 {{TagPerson|[[김혁정]]}}(金革正)과 동일인으로도 보임) 작명상으로 보든지 또는 삼별초와의 관계로 보아 어떠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ref> 그의 족당들은 {{TagPerson|[[김통정]]}}의 관계로 말미암아 도성에 안주하지 못할 것은 넉넉히 상상할 수가 있는 바이다. 생각건대 당시 도성에 거주하던 그의 족당들은 지방에 산주(散走)하였던 듯하니 이와 같이 본다면 <cite no="27">“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cite>이니 <cite no="28">“通精之黨 多在王京”</cite>이라는 기사는 그가 본래 명족으로서 그리 족당이 도성에 많이 거주하였던 사실에서 나온 것이며 <cite no="29">“於全羅道訪得通精姪金永等 云云”</cite>은 그의 족당이 지방으로 산주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TagRefT|80}}그리고 제주에 보낸 인원의 수에 있어서도 사적(史籍)에 따라 혹은 5인 혹은 6인 또 7인으로 쓰여 있어<ref group="a">{{TagBook|[[고려사]]}}원종 세가와 및 절요에는 5인으로 되어 있으나 {{TagBook|[[원고려기사]]}}에는 7인으로 또 고려사 배중손전에는 6인으로 되어 있다.</ref> 또한 속단하기가 어려운 바이다. 어쨌든 원 측의 이러한 회유 공작은 끝까지 실패를 거듭한 것이었으니 이에서 원은 드디어 전부터 무력 토벌을 주장하던 {{TagRefT|81}}고려 정부<ref group="a">{{TagBook|[[원고려기사]]}}지원 9년 3월조 원의 성(省) 원(院) 대(臺) 등의 주의(奏議)중에 「高麗王亦稱 乞上司添力併除耽羅 前者己有表聞」의 기사가 보임.</ref>와 연합을 굳게 하여 무력으로써 제주 공략을 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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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2번=③ 여몽 연합군의 제주 공함과 삼별초의 복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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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3번=회유 공작에 실패를 거듭한 원에서는 드디어 무력 행사로 나오게 될 것도 또한 자연의 세라 할 것이다. 앞서 든 {{TagBook|[[원고려기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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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4번=<blockquote no="38">中書省奏 先奉旨 議耽羅日本事⋯⋯⋯臣等謂 若先事日本 未見本國順逆之情 恐有後詞 可先平訖耽羅賊寇⋯⋯上曰察忽(〇洪茶丘)先令人入耽羅 今回未 臣僚奏未回 上曰其人回日 若耽羅歸順 夫復何言 又奏其人回而不歸順 竊恐遲誤軍事 上曰行之 至如耽羅歸順不用兵 別亦有調用之處 卿等議合用多少兵力 回奏臣等約量本處(〇高麗)屯田軍 可摘二千 復於漢軍內選三二千人 船中載馬費力 蒙古軍可少 差高麗國合僉五六千 共一萬餘軍可矣 上曰武衛軍差二千 卿等更議餘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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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5번=라 하였고 다시 {{TagBook|[[원사]]}}(본기 제7) 지원 9년 11월 기사(15일)조에 나아가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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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6번=<blockquote no="39">勅發屯田軍二千 漢軍二千 高麗軍六千 仍益武衛軍二千 征耽羅</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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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7번=라 하였다. 전자의 기사로써 우리는 동정을 앞두고 원 측이 탐라 문제에 얼마나 초조하였음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다시 동병(動兵)에 있어 전후 두 기사를 통하여 보면 그들의 계획한 동원의 수는 약 1만2천병으로서 무술군 2천을 파견할 것은 먼저 원주(元主)가 즉결한 것이며 다시 한군 2천과 둔전군 (특히 염주 둔전군이 이에 당하였던 듯함) 2천과 고려군 6천을 조발하게 할 것도 같은 날 중서성에서 의결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다. 그런데 다시 고려의 군액에 나아가 살펴보면 앞서 든 원 측의 기록과 {{TagBook|[[고려사]]}}의 <cite no="30">“元以攻討濟州 詔王簽軍六千水手三千”</cite>(원종 세가 13년 12월 을미조)이라 한 것은 서로 조응되는 바거니와 고려 정부에서도 전부터 몽고 측과 합작하여 무력 토벌을 주장하여 온 만큼 원 측의 요구 군액에 충당하려 제도에 손을 펼쳐 군정 징모에 노력한 것은 <cite no="31">“分遺抄軍別監于諸道”(위와 같은 왕 12월 기해조)</cite> <cite no="32">“命樞密院副使宋松禮上將軍徐裕點兵”(위와 같은 달 신축조)</cite>이라 한 기사로써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동원 수는 <cite no="33">“金方慶與忻都茶丘等 以全羅道一百六十艘 水陸兵一萬餘人至耽羅 與賊戰”(위와 같은 책 원종 14년 4월 경술조)</cite>이라 한 것과 <cite no="34">“以方慶爲行營中軍兵馬使元帥 遣之 方慶更鍊卒幷水軍萬餘人(〇연합군의 총수인 듯함)與忻都茶丘 屯潘南縣 云云”(위와 같은 책 김방경전)</cite>이라 한 것으로 보면 대개 원 측의 요구액에 달하였던 것으로 해석되니 삼별초의 남하한 직후의 상황에 비하여 보면 당시 {{TagPerson|[[김방경]]}}의 통솔 하에 있던 송경 측의 군용도 현저히 정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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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8번={{TagRefT|82}}어쨌든 원에서는 이상과 같이 연합 병원의 배정을 세운 다음에 다시 3군의 부서를 정하고 군기(軍期)는 3월 초로부터 3월 중순의 사이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니<ref group="a">{{TagBook|[[원고려기사]]}}(탐라) 지원 10년 정월 4일조에 「左丞相奏 臣等與察忽(〇洪茶丘)議 二月初至三月半 征耽羅爲宜 奉聖旨從之 上又曰可令察忽去 張左丞再奏 臣等議征耽羅 將爲長者忻都 第二武衛軍鄭也可拔都兒(〇伊克巴圖로도 쓰니 그의 본명은 온임) 第三察忽 亦奉旨準」이라 하였음. 정야가(鄭也可) 발도아(拔都兒)에 관하여는 {{TagBook|[[원사]]}}권145 정온전 참조.</ref> 이는 습열한 하절(夏節)이 오기 전에 해상 진격을 하려는 것이었다.(위의 절 진도 공함전 참조) 이에 호응하여 고려에서는 대장군 {{TagPerson|[[김백균]]}}으로 경상도 수로 방호사에 판각문사 {{TagRefT|83}}{{TagPerson|[[이신손]]}}<ref group="a">{{TagPerson|[[이신손]]}}은 앞서 삼별초가 거사할 때에 대장군 {{TagPerson|[[유존혁]]}}과 같이 삼별초 정부의 좌우승선이 되었다가 및 진도가 함락되고 삼별초의 여당이 제주에 들어갈 때에 드디어 중도에서 송경으로 환귀하였다({{TagBook|[[고려사]]}}배중손전 참조).</ref>으로 충청도 방호사에 임명하여 제주를 중간에 두고 동과 서북의 해상 방비를 엄히 하고(원종 14년 2월) 중군 행영 병마원사 {{TagPerson|[[김방경]]}}이 우선 정기(精騎) 9백으로써 몽장 {{TagPerson|[[흔도]]}}등과 같이 출정하게 되었다.(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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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9번=여몽 연합군은 반남현(나주)에 집결하여 3군의 부서를 다시 편정(編整)하였던 것이다. 중군을 주로 좌우 양익(兩翼)에 나누어 적을 엄격(掩擊)하게 한 것으로서 중군은 {{TagPerson|[[김방경]]}}과 {{TagPerson|[[흔도]]}}가 지휘에 당하게 된 것이니 이러한 작전은 대개 진도 공략 때의 것과 같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연합군은 얼마 동안 반남에서 도해 진공의 준비와 천후의 순조를 기다리다가 같은 해 4月 9일경에 이르러 {{TagRefT|84}}진공을 개시한 듯한데<ref group="a">{{TagBook|[[원고려기사]]}}(탐라) 지원 10년 4월 9일조에 「經界畧使忻都史樞及洪茶邱等 率兵船大小計一百令八艘進發」이라 한 것은 반남에서 해상 진공을 개시한 것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ref> 처음에는 풍도로 말미암아 선척이 많이 표몰되었었으나 {{TagPerson|[[김방경]]}}등이 뒤를 밀어 드디어 모험적 총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연합군은 먼저 추자도에 건너가 풍세를 가누어 가지고 같은 달 28일에(경술) 3군이 병진하여 노도를 헤치고 불의의 공격을 가하게 되었던 것이니 당시의 전황에 관하여 {{TagBook|[[고려사]]}}김방경전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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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40번=<blockquote no="40">以方慶爲行營中軍兵馬元帥遣之 方慶更鍊卒幷水軍萬餘人 與忻都茶丘 屯潘南縣 將發 諸道戰艦 皆爲風簸蕩 獨以全羅道一百六十艘 次楸子島候風 夜半風急 不知所指 黎明已近耽羅 風濤洶湧 進退失據 方慶仰天太息曰 社稷安危 在此一擧 今日之事 不在我乎 俄而風浪止 中軍入自咸德浦 賊伏兵岩石閒 踴躍大呼以拒之 方慶厲聲 趣諸船並進 隊正高世和挺身 突入賊陣 士卒乘勢爭赴 將軍羅裕將銳兵繼至 殺獲甚衆 左軍戰艦三十艘 自飛揚島 直擣賊壘 賊風靡 走入子城 官軍踰外城入 火矢四發 烟焰漲天 賊衆大亂 有自賊中來投者曰 賊已勢窮謀遁 可急擊之 旣而賊酋金通精 率其徒七十餘人 遁入山中 賊將李順恭曹時適等 肉袒降 方慶麾諸將入子城 士女號哭 方慶曰只誅巨魁耳 汝等勿懼 執其魁金允敘等六人 斬于通街 擒親黨三十五人 分載降衆一千三百餘人而還</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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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41번=이라 하였다. 여몽 연합군은 험한 풍도를 무릅쓰고 기습상륙을 감행한 것으로 {{TagPerson|[[김방경]]}} 등이 지휘하는 중군은 함덕포(조천리)로부터 상륙하여 동으로부터 맹공을 가하였고 좌군은 비양도(주치의 서해상에 있음)로부터 동으로 엄격하여 삼별초의 본거(항파두성)를 직충(直衝)하였다. 그리하여 삼별초로 하여금 방어의 겨를도 없이 와해케 한 것은 또한 진도 공함의 예와 유사한 바가 있다. 이리하여 항몽 세력의 최후의 아성은 드디어 완전히 붕괴가 되었고 {{TagPerson|[[김통정]]}}의 {{TagRefT|85}}자액<ref group="a">{{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14년 윤6월 병진(6일)조에 「耽羅留鎭將軍宋甫演 得賊魁金通精屍(〇自縊死)以聞 又搜捕賊將 金革正 李寄等 七十餘人 送于茶丘 皆殺之」라 하였다.</ref>과 아울러 삼별초는 역사상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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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3원문1번={{TagSpage|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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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3원문1번={{TagSpage|68-3}}끝으로 三別抄의 敗因에 나아가 簡單한 考察을 試하고저 한다. ① 三別抄는 元來 高麗 國軍의 中心勢力으로서 그의 向背는 곧 國運을 左右하리 만큼 되였으며 그 우에 對蒙 抗戰에 있어서도 어느 程度의 自信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松京 側과 蒙古를 相對로 하는 三別抄의 亂이 이러나게 된 主要한 動機{{TagPage|69}}라 할 것이나 當時 國情에 나아가 살펴보면 國民의 多數는 오랬동안 戰亂의 굴렁에 빠젔던 남어지에 名分에 順應하야 元宗의 {{TagRef|86}}和策에 쓸게 되였음<ref>忠烈王과 元 世祖의 公主와의 結婚으로 말미암어 兩國의 平和는 더욱 굳게 되었던 것이니 高麗史 世家 忠烈王 卽位之年 十一月 丁丑條에 「王與公主 同輦入城 父老相慶曰 不圖百年鏑鋒之餘 復見太平」이라 한 記事를 通하야 보면 當時 蒙古와의 和戰에 對한 國民의 動向을 推察할 수가 있다.</ref>은 차라리 自然의 勢라 할 것으로서 三別抄에 響應한 것은 密陽의 方甫 一派와 現實을 咀呪하던 崇謙 等의 奴隷輩 等 二, 三의 例를 除하고는 그다지 많지 못하였다. 이는 國民의 多數가 平和를 熱望하였음을 意味하는 것이며, ② 三別抄가 珍島로 드러간 뒤에 그의 內陸에의 發展이 民心의 歸趨에 制約되여 그다지 活潑치 못한 反面에 松京 側에서는 大義名分을 내세워 가지고 民心을 收拾하는 同時에 各 州縣의 防備를 漸次로 强化케 하였고 또 蒙古와의 合作이 더욱 絜密化하야 特히 蒙古에서는 各地(鳳, 白, 鹽, 金等州)에 屯田制를 베푸러 (蒙古의 屯田은 다만 三別抄를 目標로 한 것이 아니었으나) 三別抄에 對한 壓力은 날을 따러 增强케 되였다. ③ 三別抄는 珍島에 드러간 後에 다만 그의 海上 勢力을 自負하야 海上과 沿岸의 抄掠으로써 資源 獲得의 唯一한 手段을 삼어 苟且히 島內에서 時日을 보내는 한편에 聯合 側의 海上 勢力을 過重히 輕視하야 珍島의 防備까지 陳漏히 한 結果 디디여 珍島를 쉽사리 빼앗긴 것이니 이것이 三別抄의 敗因에 있어 자못 重大한 것이다. 珍島의 陷落으로 말미암어 三別抄는 致命的 打擊을 받었으니 그들의 中心 人物을 거의 다 잃어버렸으며 輜重 畜積은 一朝에 被奪되였다. 그리하야 그의 殘黨이 濟州로 드러간 뒤에는 그의 勢力은 발서 鞭短 不及의 歎을 免치 못한 것으로서 비록 一時에는 沿岸 一帶를 騷然케 한 바가 있었으나 그들은 발서 政治的 意義를 일코 漸次 海寇의 運命에 轉落케 되였다. 그럼으로 珍島 陷落은 三別抄로 하여금 政治的 性能을 일케 한 重大한 事件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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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3원문2번={{TagSpage|70-1}}④ 다시 三別抄와 聯合 側을 軍事上으로 比較해 보면 먼저 兵力에 있어 三別抄는 비록 海上權을 차지하였다 하나 量的으로 보와 聯合 側(特히 濟州 攻略期에 있어서의 松京 側의 兵力은 자못 復興된 觀이 있었음)의 그것에 當키 어려운 外에 武器에 있어서는 더욱이 同日의 語가 되지 못하는 바이다. {{TagRef|87}}蒙古 側에서는 火藥의 武器로서<ref>元 世祖 時에 回回人伊斯瑪音 等이 回回礮를 製作하였다는 것이 元史(卷二百三) 伊斯 瑪音傳에 보인다. 그런데 元來 回回礮에 對하야는 火器라는 說과 抛石機라는 說이 있음으로 元에서 盛히 쓰던 回回礮는 아직 別問題로 하고라도 火槍 火礮 火箭 等 元高麗紀事에 보이는 武器라던지 또 元의 東征 時에 火藥의 武器를 쓴 것으로 보면 三別抄 攻擊 時에 火器를 쓴 것은 疑心치 못할 일이라 할 것이다.</ref> 火槍 火礮 火箭 等 當時에 있어서는 可謂 嶄新 驚異한 것을 썼음으로 弓矢 刀槍 等 在來 武器만 使用하던 三別抄와는 자못 比較가 되지 아니하는 바이니 三別抄가 珍島와 濟州에서 聯合軍의 奇襲攻擊을 받자 迎擊할 사이도 없이 一敗塗地의 慘敗를 입은 데에는 이러한 武器의 關係가 또한 많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목차1-3해독문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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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3해독문1번=끝으로 삼별초의 패인에 나아가 간단한 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① 삼별초는 원래 고려 국군의 중심세력으로서 그의 향배는 곧 국운을 좌우하리 만큼 되었으며 그 위에 대몽 항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자신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송경 측과 몽고를 상대로 하는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된 주요한 동기라 할 것이나 당시 국정에 나아가 살펴보면 국민의 다수는 오랫동안 전란의 구렁에 빠졌던 나머지에 명분에 순응하여 {{TagPerson|[[원종]]}}의 {{TagRefT|86}}화책(和策)에 쓸게 되었음<ref group="a">{{TagPerson|[[충렬왕]]}}과 원 {{TagPerson|[[세조]]}}의 공주와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양국의 평화는 더욱 굳게 되었던 것이니 {{TagBook|[[고려사]]}} 세가 충렬왕 즉위지년 11월 정축조에 「王與公主 同輦入城 父老相慶曰 不圖百年鏑鋒之餘 復見太平」이라 한 기사를 통하여 보면 당시 몽고와의 화전에 대한 국민의 동향을 추찰할 수가 있다.</ref>은 차라리 자연의 세라 할 것으로서 삼별초에 향응한 것은 밀양의 방포 일파와 현실을 저주하던 {{TagPerson|[[숭겸]]}}(崇謙) 등의 노예 무리 등 2, 3의 예를 제하고는 그다지 많지 못하였다. 이는 국민의 다수가 평화를 열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② 삼별초가 진도로 들어간 뒤에 그의 내륙에의 발전이 민심의 귀추에 제약되어 그다지 활발치 못한 반면에 송경 측에서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가지고 민심을 수습하는 동시에 각 주현의 방비를 점차로 강화하게 하였고 또 몽고와의 합작이 더욱 혈밀화(梨密化)하여 특히 몽고에서는 각지(봉, 백, 염, 김 등주(等州))에 둔전제를 베풀어 (몽고의 둔전은 다만 삼별초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으나) 삼별초에 대한 압력은 날을 따라 증강하게 되었다. ③ 삼별초는 진도에 들어간 후에 다만 그의 해상 세력을 자부하여 해상과 연안의 초략(抄掠)으로써 자원 획득의 유일한 수단을 삼아 구차히 섬 안에서 시일을 보내는 한편에 연합 측의 해상 세력을 과중히 경시하여 진도의 방비까지 진루(陳漏)히 한 결과 드디어 진도를 쉽사리 빼앗긴 것이니 이것이 삼별초의 패인에 있어 자못 중대한 것이다. 진도의 함락으로 말미암아 삼별초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으니 그들의 중심 인물을 거의 다 잃어버렸으며 치중 축적(畜積)은 하루 아침에 피탈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잔당이 제주로 들어간 뒤에는 그의 세력은 벌써 편단(鞭短) 불급의 탄(歎)을 면하지 못한 것으로서 비록 일시에는 연안 일대를 소연하게 한 바가 있었으나 그들은 벌써 정치적 의의를 잃고 점차 해구의 운명에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도 함락은 삼별초로 하여금 정치적 성능을 잃게 한 중대한 사건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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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3해독문2번=④ 다시 삼별초와 연합 측을 군사상으로 비교해 보면 먼저 병력에 있어 삼별초는 비록 해상권을 차지하였다 하나 양적으로 보아 연합 측(특히 제주 공략기에 있어서의 송경 측의 병력은 자못 부흥된 관(觀)이 있었음)의 그것에 당하기 어려운 외에 무기에 있어서는 더욱이 동일의 어(語)가 되지 못하는 바이다. {{TagRefT|87}}몽고 측에서는 화약의 무기로서<ref group="a">원 {{TagPerson|[[세조]]}} 때에 회회인 이사(伊斯) 마음(瑪音) 등이 회회포를 제작하였다는 것이 원사(권203) 이사 마음전에 보인다. 그런데 원래 회회포에 대하여는 화기라는 설과 포석기라는 설이 있으므로 원에서 성히 쓰던 회회포는 아직 별문제로 하고라도 화창 화포 화전 등 {{TagBook|[[원고려기사]]}}에 보이는 무기라든지 또 원의 동정 때에 화약의 무기를 쓴 것으로 보면 삼별초 공격 때에 화기를 쓴 것은 의심치 못할 일이라 할 것이다.</ref> 화창 화포 화전 등 당시에 있어서는 가위 참신 경이한 것을 썼으므로 궁시 도창 등 재래 무기만 사용하던 삼별초와는 자못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바이니 삼별초가 진도와 제주에서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자 영격(迎擊)할 사이도 없이 일패도지의 참패를 입은 데에는 이러한 무기의 관계가 또한 많았던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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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번={{TagSpage|70-2}}三別抄는 衰頹한 府衛兵에 가름하야 權臣의 손으로 組織된 爾來 國內의 不安과 外敵의 侵寇로 말미암어 質的 量的의 發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三別抄는 처음부터 權臣 武將에게 操縱되여 안으로는 그들의 政權 專擅 또는 爭奪에 利用되여 一面으로는 私兵과 같은 性質을 띄운 것도 또한 事實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出現 動機와 믿 發展 過程에 있어 歷代 權臣 武將과는 서로 不可分의 關聯을 가즌 데에서 나온 바라고 할지니 이것이야말로 三別抄에게 特殊性을 주게 된 主要한 條件이라 할 것이며 對外 關係로 보면 三別抄의 出現이 마짐 蒙古의 入寇 時代에 當하였음으로 歷代 權臣 武將의 (可謂 傳統的이라 할) 抗蒙 政策{{TagPage|71-1}}에 依하야 三別抄가 主로 抗蒙 戰線에 서서 抗戰을 繼續하여 온 것이니 高麗의 抗蒙史는 그것이 곧 三別抄의 對外 歷史이였다. 이와 같이 보와 온다면 三別抄는 안에 있어서는 權臣과 運命을 같이 하였고 對外 關係로 볼 때에는 그것이 對蒙 抗戰期에 出現하였다가 平和期에 드러 覆滅한 것 다시 말하면 抗蒙에 終始한 것이 또한 偶然한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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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번={{TagSpage|71-2}}다시 三別抄亂에 있어 吾人의 考究를 要하는 것은 그것이 高麗에 끼친바 影響이다. 여기에도 勿論 여러 가지 角度의 視野로써 나누워 볼 수가 있을 것이나 本稿에서는 다만 對內外 關係에 있어 가장 主要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二, 三의 條項을 드러볼까 한다. ① 먼저 對外 關係로부터 살펴보면 앞서 林衍의 擅廢를 契機로 하야 元宗을 디디여 自家의 藥籠中物로 삼고 다시 東征을 앞에 두고 高麗에의 進出에 虎視眈眈턴 蒙主 世祖는 三別抄亂을 機會로 하야 一層 그의 勢力을 高麗에 扶植케 되였으니 그들이 取한 屯田策은 東征과 믿 三別抄 征伐에 準備가 되는 同時에 松京 側도 牽制하려는 一石三鳥의 政策이었다. 그리하야 蒙古 側에서는 松京 側과 完全한 合作 아래에서 珍島와 濟州를 차례로 攻略하야 디디여 뿌리 깊을 抗蒙 勢力을 一掃하는 한편에 高麗 王室과 通婚하야 高麗와 所謂 舅甥國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야 政治 文化에 密接한 交流를 이랏게 하였나니 이것이야말로 朝鮮 外交史上에 새로운 事例를 열은 것이며 한 「에포크」를 그은 것이다. 그리고 三別抄가 覆滅된 後에 濟州가 얼마 동안 그들의 {{TagRef|88}}支配 아래에 드러가게 된 것<ref>元高麗紀事(耽羅) 至元 十年條에 「攻破耽羅賊黨悉平 朝廷於其他 立耽羅招討司 屯鎭邊軍一千七百人 其貢賦 每歲進毛施布百匹 後改爲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 尋又改爲軍民安撫司」라 하였으나 同 三十一年 五月에 高麗에 還屬케 하였다. 그리고 元의 設置한 牧場은 高麗 末頃까지 存續되었었다.</ref>도 三別抄의 關係에서 나온 것이라고 解釋되는 바이다. ② 經濟 方面에 나아가 살펴보면 數十年 동안 國家의 根據地인{{TagPage|72}} 江都의 蓄積은 거의 三別抄의 搬去한 바가 되였으며 그 밖에 海上에서 三別抄에게 被掠된 貢米도 莫大한 數에 達하였다. 다시 蒙古에서는 屯田兵과 牛馬의 糧秼을 高麗에 向하야 辦出케 하였던 것으로서 그의 貪虐 徴索은 可謂 限度가 없을 만큼 되였던 것이니 이에 關한 一例로서 元宗 十一年(庚午)으로부터 同 十三年 四月에 이르기까지의 高麗에서 그들에게 供給한 物資에 關한 數字를 드러보면 <cite no="35">「其庚午年至今年四月晦 已曾應副軍粮十萬九千一百九十九碩六㪷 馬牛料四十三萬二千五碩六㪷 王京館供對使臣米一萬七千一百五十一碩 種子(〇屯田의)一萬五千碩」(高麗史 元宗 世家 十三年 四月 丁巳條에 收載된 元에 보낸 國書에 보임)</cite>이라 하였고 다시 濟州 攻陷에 이르기까지 本國軍에 關한 것은 且置하고 라도 蒙古 軍馬(屯田軍과 믿 新來한 軍馬)에 供給한 粮料는 實로 莫大한 數에 達하였던 것으로서 國庫의 虛謁로 因하야 {{TagRef|89}}收歛의 손은 자조 百官과 人民에게까지 뻐첬던 것이다.<ref>高麗史(卷七十九) 食貨二, 科斂條에 「元宗十二年十一月 以蒙古軍馬久留 府庫匱竭 供給不支 斂馬料于京中 戶二石 民多逃散 乃減一石」 同 十三年 十二月條에 「又斂馬料于各品 三品六石 四區五石 以至微官 收斂有差」 同 十四年 二月條에 「令六 品以上 出酒有差 以餉軍士 六品以下 輸馬料于開城 云云」이라 하였다.</ref> 그리고 濟州 攻陷 後에 麗蒙 兩軍의 濟州 駐屯費와 該州 失業民의 糧料 支給은 實로 巨大한 數에 達하야 當時 高麗 政府에서는 支出할 能力을 일흘 程度이었나니 元宗 十五年 二月 甲子에 元의 中書省에 보낸 高麗의 國書 中에 <cite no="36">「又濟州留守官軍(〇元軍)幷小邦卒一千四百人 七箇月糧料 已支訖 計二千九百四碩 及羅州落後粤魯闊端赤軍粮八千碩 馬料一千三百二十五碩 悉令小邦支給 又於至元十年(〇元宗 十四年)十二月奉省旨 濟州百姓一萬二百二十三人 悉行供給 又比來軍馬糧料 無可營辦 凡歛官民者無算 又年前營造戰艦 至四月大軍入耽羅討賊 至五月晦還 故百姓未得趂時耕作 秋無收穫 又歛官民 始應副 造船巭匠及屯住經行軍馬與濟州百姓等糧料 計四萬餘碩 續有以後 金州全州羅州屯住軍幷濟州軍民糧料 供給實難」{{TagPage|73}}(高麗史 卷二十七)</cite>이라 한 記事가 보인다. 이리하야 當時 高麗의 國家 經濟는 거의 破綻에 瀕하였던 것으로서 御飯米가 闕乏되여 大府(寺) 注簿 等이 徵責에 견디지 못하야 祝髮 逃走한 {{TagRef|90}}事實까지 있었으며<ref>高麗史(卷二十七) 元宗 十三年 八月 庚戌條 叅照.</ref> 人民의 生活도 <cite no="37">「百姓皆食草實木葉 雖有徵索 勢無可爲者」</cite> <cite no="38">「小邦百姓飢困 固不暇恤」(高麗史 元宗 世家 十二年 八月條에 실린 蒙古에 보낸 高麗 國書에 보임)</cite>이라 한 만큼 悲慘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國家 經濟의 窘乏은 그대로 麗朝 末期에 드러가 디디여 私田 兼倂과 아울러 麗朝 崩壞의 一大 經濟的 遠因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cite no="39">「忠穆王元年八月 都評儀使司言 先王設官制祿 一二品三百六十餘石 隨品差等 以至伍尉隊正 莫不淮科數以給 故衣食足給 一切奉公 其後再因兵亂 田野荒廢 貢賦欠乏 倉庫虛謁 宰相之祿不過三十石⋯⋯近來諸功臣權勢之家 冒受賜牌 自稱本田 山川爲標 爭先據執 有違古制 乞依先王制定 京畿八縣土田 更行經理 御分宮司田 鄉更津尺驛子雜口分 位田 考覈元籍 量給兩班軍閑人口分田 元宗十二年以上 公文考覈折給 其餘諸賜給田 幷皆收奪 均給職田 餘田公收租稅 以充國用」(高麗史 卷七十八, 食貨一 科祿田條)</cite>이라 한 것은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어니와 特히 財政 窘乏과 田制 壞亂의 起因을 兵亂에 돌린 것은 吾人의 注意를 끌런 바이며 土地를 經理하는 데에도 元宗 十二年을 標準으로 하야 그 以前의 것은(賜給田) 公文을 考覈하야 折給하고 그 後의 것은 沒收하자 한 것으로 보면 元宗 十二年頃 即 三別抄亂 後에 田制가 크게 문허졌던 것도 알 수 있는 바이다. ③ 다시 三別抄의 沒落은 鄭仲夫亂(庚癸之亂)으로부터 始作된 武士 專擅 또는 武人 政治의 終焉을 지은 것이다. 高麗 中末頃에 나타난 武人 政治는 대개 三期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인데 第一期는 鄭仲夫 李義旼 等의 專橫으로 말미암어 國情이{{TagSpage|74-1}} 甚히 騷亂하였고 또 武人들 사이에는 相剋이 反復되던 (鄭仲夫 慶大升 李義旼 崔忠獻 兄弟 사이의) 時期로서 武人 政治의 所謂 不安定 時代이었으며 第二期는 崔忠獻으로부터 崔誼에 이르기까지 崔氏 四代의 專擅 時代이니 武人 政治가 굳어진 것도 이 時期의 일이며 三別抄의 出現도 또한 이 時期에 屬하는 것이다. 그리고 第三期는 武人 政治의 末期로서 金俊이 崔氏(誼)를 覆滅한 뒤로부터 林衍에 이르기까지 이었다. 이 時代에 드러서는 外部(蒙古)의 壓力이 날로 加해 와 國政을 專擅하던 權臣 武將의 存在를 더욱 困難케 함에 이르렀다. 이에서 權臣 武將들은 그들의 武士的 傳統 精神과 다시 그들의 地位와 權力을 保持하려는 意圖 아래에서 굳세게 抗蒙策을 堅持하여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林衍의 餘黨 裴仲孫 等이 中心이 된 三別抄의 亂은 高麗 武人 政治의 最後를 裝飾하는 一大 活劇으로서 結局 强大한 大陸 勢力에 幕을 닷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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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번=삼별초는 쇠퇴한 부위병에 갈음하여 권신의 손으로 조직된 이래 국내의 불안과 외적의 침구로 말미암아 질적 양적의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삼별초는 처음부터 권신 무장에게 조종되어 안으로는 그들의 정권 전천 또는 쟁탈에 이용되어 일면으로는 사병과 같은 성질을 띤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출현 동기와 및 발전 과정에 있어 역대 권신 무장과는 서로 불가분의 관련을 가진 데에서 나온 바라고 할지니 이것이야말로 삼별초에게 특수성을 주게 된 주요한 조건이라 할 것이며 대외 관계로 보면 삼별초의 출현이 마침 몽고의 입구(入寇) 시대에 당하였으므로 역대 권신 무장의 (가위 전통적이라 할) 항몽 정책에 의하여 삼별초가 주로 항몽 전선에 서서 항전을 계속하여 온 것이니 고려의 항몽사(史)는 그것이 곧 삼별초의 대외 역사였다. 이와 같이 보아 온다면 삼별초는 안에 있어서는 권신과 운명을 같이 하였고 대외 관계로 볼 때에는 그것이 대몽 항전기에 출현하였다가 평화기에 들어 복멸한 것 다시 말하면 항몽에 종시한 것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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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다시 삼별초난에 있어 우리의 고구를 요하는 것은 그것이 고려에 끼친바 영향이다. 여기에도 물론 여러 가지 각도의 시야로써 나누어 볼 수가 있을 것이나 본고에서는 다만 대내외 관계에 있어 가장 주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2, 3의 조항을 들어볼까 한다. ① 먼저 대외 관계로부터 살펴보면 앞서 {{TagPerson|[[임연]]}}의 천폐를 계기로 하여 {{TagPerson|[[원종]]}}을 드디어 자가(自家)의 약롱중물(藥寵中物)로 삼고 다시 동정을 앞에 두고 고려에의 진출에 호시탐탐하던 몽주(蒙主) {{TagPerson|[[세조]]}}는 삼별초난을 기회로 하여 일층 그의 세력을 고려에 부식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취한 둔전책은 동정과 및 삼별초 정벌에 준비가 되는 동시에 송경 측도 견제하려는 일석이조의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몽고 측에서는 송경 측과 완전한 합작 아래에서 진도와 제주를 차례로 공략하여 드디어 뿌리 깊을 항몽 세력을 일소하는 한편에 고려 왕실과 통혼하여 고려와 소위 구생국(舅甥國)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정치 문화에 밀접한 교류를 이랏게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조선 외교사(史)상에 새로운 사례를 여른 것이며 한 ‘에포크’를 그은 것이다. 그리고 삼별초가 복멸된 후에 제주가 얼마 동안 그들의 {{TagRefT|88}}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된 것<ref group="a">{{TagBook|[[원고려기사]]}}(탐라) 지원 10년조에 「攻破耽羅賊黨悉平 朝廷於其他 立耽羅招討司 屯鎭邊軍一千七百人 其貢賦 每歲進毛施布百匹 後改爲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 尋又改爲軍民安撫司」라 하였으나 같은 왕 31년 5월에 고려에 환속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의 설치한 목장은 고려 말경까지 존속되었었다.</ref>도 삼별초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되는 바이다. ② 경제 방면에 나아가 살펴보면 수십년 동안 국가의 근거지인 강도의 축적은 거의 삼별초의 반거(搬去)한 바가 되었으며 그 밖에 해상에서 삼별초에게 피략된 공미(貢米)도 막대한 수에 달하였다. 다시 몽고에서는 둔전병과 우마(牛馬)의 양주(糧秼)를 고려에 향하여 판출하게 하였던 것으로서 그의 탐학 징색은 가위 한도가 없을 만큼 되었던 것이니 이에 관한 일례로서 원종 11년(경오)으로부터 같은 왕 13년 4월에 이르기까지의 고려에서 그들에게 공급한 물자에 관한 숫자를 들어보면 <cite no="35">“其庚午年至今年四月晦 已曾應副軍粮十萬九千一百九十九碩六㪷 馬牛料四十三萬二千五碩六㪷 王京館供對使臣米一萬七千一百五十一碩 種子(〇둔전의)一萬五千碩”({{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13년 4월 정사조에 수재(收載)된 원에 보낸 국서에 보임)</cite>이라 하였고 다시 제주 공함에 이르기까지 본국군에 관한 것은 차치하고 라도 몽고 군마(둔전군과 및 새로 온한 군마)에 공급한 양료(粮料)는 실로 막대한 수에 달하였던 것으로서 국고의 허알(虛謁)로 인하여 {{TagRefT|89}}수감(收歛)의 손은 자주 백관과 인민에게까지 뻗쳤던 것이다.<ref group="a">{{TagBook|[[고려사]]}}(권79) 식화2, 과렴조에 「元宗十二年十一月 以蒙古軍馬久留 府庫匱竭 供給不支 斂馬料于京中 戶二石 民多逃散 乃減一石」 같은 권 13년 12월조에 「又斂馬料于各品 三品六石 四區五石 以至微官 收斂有差」 같은 권 14년 2월조에 「令六 品以上 出酒有差 以餉軍士 六品以下 輸馬料于開城 云云」이라 하였다.</ref> 그리고 제주 공함 후에 여몽 양군의 제주 주둔비(費)와 그 주의 실업민의 양료 지급은 실로 거대한 수에 달하여 당시 고려 정부에서는 지출할 능력을 잃을 정도였으니 {{TagPerson|[[원종]]}}15년 2월 갑자에 원의 중서성에 보낸 고려의 국서 중에 <cite no="36">“又濟州留守官軍(〇元軍)幷小邦卒一千四百人 七箇月糧料 已支訖 計二千九百四碩 及羅州落後粤魯闊端赤軍粮八千碩 馬料一千三百二十五碩 悉令小邦支給 又於至元十年(〇元宗 十四年)十二月奉省旨 濟州百姓一萬二百二十三人 悉行供給 又比來軍馬糧料 無可營辦 凡歛官民者無算 又年前營造戰艦 至四月大軍入耽羅討賊 至五月晦還 故百姓未得趂時耕作 秋無收穫 又歛官民 始應副 造船巭匠及屯住經行軍馬與濟州百姓等糧料 計四萬餘碩 續有以後 金州全州羅州屯住軍幷濟州軍民糧料 供給實難”({{TagBook|[[고려사]]}}권27)</cite>이라 한 기사가 보인다. 이리하여 당시 고려의 국가 경제는 거의 파탄에 가까웠던 것으로서 어반미가 궐핍되어 대부(시) 주부 등이 징책에 견디지 못하여 축발 도주한 {{TagRefT|90}}사실까지 있었으며<ref group="a">{{TagBook|[[고려사]]}}(권27) 원종 13년 8월 경술조 참조.</ref> 인민의 생활도 <cite no="37">“百姓皆食草實木葉 雖有徵索 勢無可爲者”</cite> <cite no="38">“小邦百姓飢困 固不暇恤”({{TagBook|[[고려사]]}}원종 세가 12년 8월조에 실린 몽고에 보낸 고려 국서에 보임)</cite>이라 한 만큼 비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국가 경제의 군핍은 그대로 여조(麗朝) 말기에 들어가 드디어 사전 겸병과 아울러 여조 붕괴의 일대 경제적 원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cite no="39">“忠穆王元年八月 都評儀使司言 先王設官制祿 一二品三百六十餘石 隨品差等 以至伍尉隊正 莫不淮科數以給 故衣食足給 一切奉公 其後再因兵亂 田野荒廢 貢賦欠乏 倉庫虛謁 宰相之祿不過三十石⋯⋯近來諸功臣權勢之家 冒受賜牌 自稱本田 山川爲標 爭先據執 有違古制 乞依先王制定 京畿八縣土田 更行經理 御分宮司田 鄉更津尺驛子雜口分 位田 考覈元籍 量給兩班軍閑人口分田 元宗十二年以上 公文考覈折給 其餘諸賜給田 幷皆收奪 均給職田 餘田公收租稅 以充國用”({{TagBook|[[고려사]]}}권78, 식화1 과록전조</cite>이라 한 것은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거니와 특히 재정 군핍과 전제 괴란의 기인을 병란에 돌린 것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바이며 토지를 경리하는 데에도 원종 12년을 표준으로 하여 그 이전의 것은(사급전) 공문을 고핵(考覈)하여 절급하고 그 후의 것은 몰수하자 한 것으로 보면 {{TagPerson|[[원종]]}}12년경 즉 삼별초난 후에 전제가 크게 무너졌던 것도 알 수 있는 바이다. ③ 다시 삼별초의 몰락은 {{TagEvent|[[정중부난]]}}(경계지란)으로부터 시작된 무사 전천 또는 무인 정치의 종언을 지은 것이다. 고려 중말경에 나타난 무인 정치는 대개 3기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인데 제1기는 {{TagPerson|[[정중부]]}}{{TagPerson|[[이의민]]}}등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국정이 심히 소란하였고 또 무인들 사이에는 상극이 반복되던 ({{TagPerson|[[정중부]]}} {{TagPerson|[[경대승]]}} {{TagPerson|[[이의민]]}} {{TagPerson|[[최충헌]]}}형제 사이의) 시기로서 무인 정치의 소위 불안정 시대였으며 제2기는 {{TagPerson|[[최충헌]]}}으로부터 최의에 이르기까지 최씨 4대의 전천 시대이니 무인 정치가 굳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며 삼별초의 출현도 또한 이 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3기는 무인 정치의 말기로서 {{TagPerson|[[김준]]}}이 최씨(의)를 복멸한 뒤로부터 {{TagPerson|[[임연]]}}에 이르기까지였다. 이 시대에 들어서는 외부(몽고)의 압력이 날로 가해 와 국정을 전천하던 권신 무장의 존재를 더욱 곤란하게 함에 이르렀다. 이에서 권신 무장들은 그들의 무사적 전통 정신과 다시 그들의 지위와 권력을 보지하려는 의도 아래에서 굳세게 항몽책을 견지하여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TagPerson|[[임연]]}}의 여당 {{TagPerson|[[배중손]]}}등이 중심이 된 {{TagEvent|[[삼별초난]]}}은 고려 무인 정치의 최후를 장식하는 일대 활극으로서 결국 강대한 대륙 세력에 막을 닫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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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1번={{TagSpage|74-2}}江都의 位置에 關하야 最近 踏査한 結果로써 本 學報 第十卷 所載 拙稿 中 江華遷都 節에 補遺와 訂正을 加코저 한다. 江都의 宮址와 城郭의 位置에 있어서는 記錄과 口傳이 자못 區區하야 距今 六百七十年 前 約 四十年 동안의 首都의 位置를 찾기에 매우 眩怳한 늣김을 주는 바이다. 江都 宮城의 位置에 나아가 먼저 東國輿地勝覽(卷十二) 江華 古蹟條를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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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2번={{TagSpage|74-3}}<blockquote no="41">高官城<sup>在松岳里 距府東十里 高麗高宗時所築 內外城俱土築</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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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3번={{TagSpage|75-1}}이라 하였다. 이 記事에는 江都의 宮城이 江華 邑治로부터 東 十里 即 江岸에 가차운 (低平한) 地點에 있었던 것으로 되여 있다. 이와 같이 본다면 江都 宮城은 그의 主山 松岳으로부터 너머나 멀리 떠러저 있을 뿐만 아니라 例의 高麗 宮址의 {{TagRef|91}}局相으로 보나<ref>이 問題도 또한 愼重한 硏究를 要하는 것이나 여기에서는 다만 槪觀的으로 본 몇 가지 例를 들면 高麗 宮址의 局相은 開城의 滿月臺를 비롯하야 離宮으로서 江華의 것만 가지고 보와도 三卽城과 및 興旺里 神智洞(智山里)의 宮址는 可謂 例外가 없으리 만큼 모다 山腹에 걸처 몇 段의 (대개 南向) 階段 臺地로 되어 있음.</ref> 守備的 見地로 보와 首肯키 어려운 點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 <cite no="40">「在府東十里說」</cite>은 勝覽의 한 根據가 되였을 世宗實錄 地理志(江華都護府)와 또 高麗史 地理志(江華縣)에도 나타나는 바로서 그의 由來가 또한 없지 아니할 것이며 지금도 江華 人士들은 口傳이라 하야 대개 邑 東南 亭子 山下 一帶를 가르치고 있다. (江華府志古蹟條에도 이와 같이 씨여 있으나) 생각컨대 이러한 在東(또는 東南)說의 根據는 後日에 創建된 어느 離宮 또는 假闕의 {{TagRef|92}}宮城<ref>忠烈王 十六 七年頃에 哈丹의 入寇로 말미암아 王이 江華로 遷居하였을 때에 創建된 長峯 新宮이 或 그 方面에 있던 것이 아닌가 臆測되는 바이다.</ref>이 그 方面에 있었음으로 거기에서 나온 誤傳이나 아닐런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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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4번={{TagSpage|75-2}}그런데 吾人의 觀測한 바에 依하면 江都의 宮址는 治衙의 北 松岳山 南麓에 있는 (李朝의) 行宮 舊基가 곧 그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對한 吾人의 論據로는 ① 地勢와 局相이 開城의 滿月臺와 酷似하며(下擧 江都志에도 이러한 記事가 보임) 또 지금도 몇 段의 階段式舊墟의 形跡이 그 一帶에 남어 있다. ② 舊南門이 지금 鍾閣과 仙源 殉節 碑閣의 {{TagRef|93}}地點에 있다는 것이니<ref>江華府誌城郭條 及 續修補江都志城郭條와 該邑人士의 口傳에 據함.</ref> 일로써 元 城郭의 範圍을 推測할 수가 있거니와 이 舊南門이 本來 府城의 것이라면 此種의 城郭으로는 넘어나 傸隘한 感이 있는 바이다. 생각컨대 이것이야말로 江都 內城에 該當한 것이 아닌가 하나니 元來 江華遷都는 蒼卒間에 行해진 만큼 內城은 다만 宮闕 防衛의 目的으로 宮牆 같이 草草히 쌓었던 것인데 李朝에 드러서도 그것을 府治의 內城과 같이 얼마 동안 利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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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5번={{TagSpage|75-3}}다음 外城으로 말하면 現在 南山으로부터 {{TagRef|94}}大門峴<ref>江華 人士의 말에 依하면 年前治道 工事로 大門峴 고개를 끊을 때에 거기에서 城門의 材料인 巨大한 石材와 鐵鉤 等이 많이 出土되였었다고 한다.</ref>을 거처 神智洞 뒷山으로 하야 東南으로 돌러 있는 土城이 곧 그것으로 생각되나니 江華府志(下) 古蹟條 高麗城址註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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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6번={{TagSpage|76-1}}<blockquote no="42">古傳記云 麗高宗之遷都也 內外城皆土築 外城周一萬六千六十六尺 舊志以長嶺之城門峴 仙源之大門峴 仁政之西門峴當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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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7번={{TagSpage|76-2}}라 하야 舊志의 記事가 引用되여 있다. 舊志에 보이는 外城의 範圍는 아직 別問題로 하고라도 大門峴을 든 것은 매우 叅考가 되는 바이다. 內城과 外城을 이와 같이 擬定한다면 江都의 中城은 位置로나 地勢로 보와 現在 邑城이 곧 그것을 利用하야 修築한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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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8번={{TagSpage|76-3}}江都 宮址에 對한 吾人의 見解는 대개 이러하거니와 다시 이에 關하야 (特히 宮址) 續修增補江都誌(上) 古蹟條 延慶宮註(新增)에 <cite no="41">「今小東門內城峴北岡이오 即近代萬寧殿址似是라 窃觀松岳以南은 惟此一帶上下岡에 多舊址遺墟요 又其地勢與松京之滿月臺邱園으로 爽塏之基恰同이로다」</cite>라 하였다. 이 江都誌의 「新增」條는 近日에 {{TagRef|95}}撰入한 것이어니와<ref>本書는 朴憲用氏가 纂輯한 것으로서 特히 「新增」의 記事는 編纂者가 새로히 修錄한 것이다.</ref> 該書의 高麗 外中城의 位置를 적은 것은 대개 江華府志를 蹈襲한 것으로서 誤謬가 자못 만하야 取할 바가 되지 못하나 特히 江都 宮址를 李朝의 行宮 遺墟 一帶에 擬定한 것은 (高麗의 延慶宮址가 果然 萬寧殿址에 該當하는 與否는 別問題로 하고) 卓見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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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9번={{TagSpage|76-4}}이러한 見地에서 前回 拙稿 江華遷都節 中에서 「江都의 經營과 防備」條의 內城의 註 <cite no="42">「邑治 東 十里 松岳里에 있었음」</cite>을 削去하고 또 外城에 있어서는 <cite no="43">「東北 海岸에 亘하야 쌓았던 듯하다」</cite>를 <cite no="44">「今 南山과 大門峴을 거처 東南 一帶에 돌러 있는 것인 듯하다」</cite>로 訂正하는 바이며 끝으로 이번 江華 踏査에 있어 斗溪 李丙燾 嘉藍 李秉岐 兩 先生의 많은 指示에 對하야 特히 感謝하는 바이다.
  
|목차2-1해독문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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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1번=강도의 위치에 관하여 최근 답사한 결과로써 본 학보 제10권 소재 졸고 중 강화천도 절(節)에 보유와 정정을 더하고자 한다. 강도의 궁터와 성곽의 위치에 있어서는 기록과 구전이 자못 구구(區區)하여 거금 670년 전 약 40년 동안의 수도의 위치를 찾기에 매우 현황(眩怳)한 느낌을 주는 바이다. 강도 궁성의 위치에 나아가 먼저 {{TagBook|[[동국여지승람]]}}(권12) 강화 고적조를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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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2번=<blockquote no="41">高官城<sup>在松岳里 距府東十里 高麗高宗時所築 內外城俱土築</su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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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3번=이라 하였다. 이 기사에는 강도의 궁성이 강화 읍치로부터 동쪽 10리 즉 강안에 가까운 (저평한)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본다면 강도 궁성은 그의 주산(主山) 송악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예의 고려 궁터의 {{TagRefT|91}}국상(局相)으로 보나<ref group="a">이 문제도 또한 신중한 연구를 요하는 것이나 여기에서는 다만 개관적으로 본 몇 가지 예를 들면 고려 궁터의 국상은 개성의 만월대를 비롯하여 이궁(離宮)으로서 강화의 것만 가지고 보아도 3즉성(三卽城)과 및 흥왕리 신지동(지산리)의 궁터는 가위 예외가 없으리 만큼 모두 산복에 걸쳐 몇 단의 (대개 남향) 계단 대지로 되어 있음.</ref> 수비적 견지로 보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 <cite no="40">“在府東十里說”</cite>은 {{TagBook|[[동국여지승람]]}}의 한 근거가 되었을 {{TagBook|[[세종실록]]}}지리지(강화도호부)와 또 {{TagBook|[[고려사]]}}지리지(강화현)에도 나타나는 바로서 그의 유래가 또한 없지 아니할 것이며 지금도 강화 인사들은 구전이라 하여 대개 읍 동남 정자 산하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강화부지고적조에도 이와 같이 쓰여 있으나) 생각건대 이러한 재동(또는 동남)설의 근거는 후일에 창건된 어느 이궁 또는 가궐의 {{TagRefT|92}}궁성<ref group="a">{{TagPerson|[[충렬왕]]}}16, 7년경에 합단(哈丹)의 입구(入寇)로 말미암아 왕이 강화로 천거하였을 때에 창건된 장봉 신궁이 혹 그 방면에 있던 것이 아닌가 억측되는 바이다.</ref>이 그 방면에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나온 오전(誤傳)이나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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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4번=그런데 우리의 관측한 바에 의하면 강도의 궁터는 치아(治衙)의 북쪽 송악산 남록에 있는 (이조의) 행궁 옛터가 곧 그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한 우리의 논거로는 ① 지세와 국상이 개성의 만월대와 혹사(酷似)하며(아래에서 들 강도지에도 이러한 기사가 보임) 또 지금도 몇 단의 계단식 옛터의 형적(形跡)이 그 일대에 남아 있다. ② 옛 남문이 지금 종각과 선원 순절 비각의 {{TagRefT|93}}지점에 있다는 것이니<ref group="a">강화부지성곽조 및 속수보강도지성곽조와 해당 읍의 인사의 구전에 근거함.</ref> 이로써 원 성곽의 범위을 추측할 수가 있거니와 이 옛 남문이 본래 부성(府城)의 것이라면 차종의 성곽으로는 너무나 상애(傸隘)한 감이 있는 바이다. 생각건대 이것이야말로 강도 내성에 해당한 것이 아닌가 하니 원래 강화천도는 창졸간에 행해진 만큼 내성은 다만 궁궐 방위의 목적으로 궁장(宮牆) 같이 초초히 쌓았던 것인데 이조(李朝)에 들어서도 그것을 부치(府治)의 내성과 같이 얼마 동안 이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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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5번=다음 외성으로 말하면 현재 남산으로부터 {{TagRefT|94}}대문현<ref group="a">강화 인사의 말에 의하면 몇 해 전 치도 공사로 대문현 고개를 끊을 때에 거기에서 성문의 재료인 거대한 석재와 철구 등이 많이 출토되었었다고 한다.</ref>을 거쳐 신지동 뒷산으로 하여 동남쪽으로 둘러 있는 토성이 곧 그것으로 생각되니 {{TagBook|[[강화부지]]}}(하) 고적조 고려성지주(註)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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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6번=<blockquote no="42">古傳記云 麗高宗之遷都也 內外城皆土築 外城周一萬六千六十六尺 舊志以長嶺之城門峴 仙源之大門峴 仁政之西門峴當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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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7번=라 하여 옛 지(志)의 기사가 인용되어 있다. 옛 지에 보이는 외성의 범위는 아직 별문제로 하더라도 대문현을 든 것은 매우 참고가 되는 바이다. 내성과 외성을 이와 같이 의정(擬定)한다면 강도의 중성은 위치로나 지세로 보아 현재 읍성이 곧 그것을 이용하여 수축(修築)한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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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8번=강도 궁터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대개 이러하거니와 다시 이에 관하여 (특히 궁터) {{TagBook|[[속수증보강도지]]}}(상) 고적조 연경궁주(신증)에 <cite no="41">“今小東門內城峴北岡이오 即近代萬寧殿址似是라 窃觀松岳以南은 惟此一帶上下岡에 多舊址遺墟요 又其地勢與松京之滿月臺邱園으로 爽塏之基恰同이로다”</cite>라 하였다. 이 강도지의 ‘신증’조는 근일에 {{TagRefT|95}}찬입(撰入)한 것이거니와<ref group="a">이 책은 {{TagPerson|[[박헌용]]}}씨가 찬집한 것으로서 특히 ‘신증’의 기사는 편찬자가 새로 수록한 것이다.</ref> 해당 책의 고려 외중성의 위치를 적은 것은 대개 강화부지(志)를 도습한 것으로서 오류가 자못 많아 취할 바가 되지 못하나 특히 강도 궁터를 이조의 행궁 유허 일대에 의정한 것은 (고려의 연경궁터가 과연 만녕전 터에 해당하는 여부는 별문제로 하고)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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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9번=이러한 견지에서 앞 회 졸고 강화천도절(節) 중에서 ‘강도의 경영과 방비’조의 내성의 주(註) <cite no="42">“읍치 동쪽 10리 송악리에 있었음”</cite>을 삭거(削去)하고 또 외성에 있어서는 <cite no="43">“동북 해안에 걸쳐 쌓았던 듯하다”</cite>를 <cite no="44">“오늘날 남산과 대문현을 거쳐 동남 일대에 돌러 있는 것인 듯하다”</cite>로 정정하는 바이며 끝으로 이번 강화 답사에 있어 두계 {{TagPerson|[[이병도]]}}가람 {{TagPerson|[[이병기]]}}두 선생의 많은 지시에 대하여 특히 감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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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7일 (수) 11:08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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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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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3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3월
시작쪽 34쪽 종료쪽 85쪽 전체쪽 52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6.삼별초난의 경과

삼별초난사건은 편의상 전후 양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으니 전기는 즉 배중손인물 노영희인물 등이 중심이 되어 승화후를 추대해 가지고 진도에 입거(入據)하여 한 국가의 체제로써 항전하던 것이며 후기는 진도가 공함된 후에 김통정인물 등의 새로운 중심 인물이 출현하여 제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하던 시기이다. 원래 이 전후의 양자는 서로 계속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목표와 동향에는 하등의 변화를 찾아보기 어려우나 체제상으로 또는 세력상으로 보면 후자 즉 후기에 이르러서는 벌써 삼별초의 위세는 석일(昔日)의 관(觀)을 잃게 된 것이었다.
쪽수▶P34-1三別抄亂은 便宜上 前後 兩期로 나누워 볼 수가 있으니 前期는 即 裴仲孫 盧永禧 等이 中心이 되여 承化侯를 推戴해 가지고 珍島에 入據하야 한 國家의 體制로써 抗戰하던 것이며 後期는 珍島가 攻陷된 後에 金通精 等의 새로운 中心 人物이 出現하야 濟州로 드러가 抗戰을 繼續하던 時期이다. 元來 이 前後의 兩者는 서로 繼續的의 것으로서 그들의 目標와 動向에는 何等의 變化를 차저보기 어려우나 體制上으로 또는 勢力上으로 보면 後者 即 後期에 이르러서는 발서 三別抄의 威勢는 昔日의 觀을 일케 된 것이였다.





































본문1-1: (1)삼별초난의 전기


① 삼별초난의 발발과 그의 남하
쪽수▶P34-2① 三別抄亂의 勃發과 그의 南下
원종인물 11년 5월 무진(29일)에 혁파 문제를 계기로 하여 삼별초의 동란은 드디어 본격화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앞서 든 고려사서적배중손전에
쪽수▶P35-1元宗 十一年 五月 戊辰(二十九日)에 革罷 問題를 契機로 하야 三別抄의 動亂은 디디여 本格化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

쪽수▶P35-2

(元宗)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曰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華 罷三別抄 (中略) 仲孫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中略)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 尙書左丞李信孫 爲左右承宣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云云

이라 하였다. 이것은 삼별초가 혁파되던 그 다음 날인 6월 을사(1일)에 일어난 일이거니와 배중손인물노영희인물등이 드디어 표면에 나타나 삼별초를 조종하여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蒙古兵大至 殺戮人民”이라 하여 민중을 격앙 또는 공동(恐動)하게 하고 다시 “凡欲輔國者 皆會毬庭”이라 하여 그들의 목적이 몽고병을 방어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동시에 민심을 오로지 외적에 향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운운한 ‘몽고병’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원종인물이 끌고 온 두련가인물(頭輦哥)의 몽고병을 가리킨 것이거니와 당시 강도의 인민이 이에 응하여 바로 구정(毬庭)으로 모여든 것을 보면 두련가인물의 몽고병의 진입은 고려의 군민을 매우 날극(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관민 특히 문무 양반의 섬 밖 탈출을 엄중히 금알(禁遏)하였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세력의 분산과 요인(要人)의 탈주를 방지함과 아울러 섬 안의 사정의 누설됨을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금강고(金剛庫) 무기를 꺼내어 군졸에게 분여하였다는 것은 무장의 확충 강화를 의미하는 바거니와 여기에서 말한 군졸이라는 것은 다만 삼별초만 가리킨 것이 아닌 듯하니 당시 부위군은 비록 쇠퇴하였으나 오히려 국군의 일부로서 존재하였음으로 생각건대 삼별초 이외에도 강도에 산재한 부위병 또는 노예 등(삼별초가 노예를 많이 구거(驅去) 남하한 것으로 보아)을 규합하여 무장을 강제한 것이 아닐까 한다. 원래 삼별초는 오랫동안 대몽 항전에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에 비로소 금강고 무기로써 무장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섬 안의 단속과 방비 계획을 굳게 하는 한편에 왕족이요 또 왕실 근친인 현대문주44▶승화후 온[a 1]을 왕으로 옹립하고 관부의 서치(署置)와 관원의 임명을 행하여 옛 도읍지에 돌아간 송경 정부에 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운 것이다. 이는 몽고에 굴복한 원종인물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앞서 임연인물원종인물천폐와 그의 궤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항몽책을 속행함에는 통제된 국가적 체제가 또한 필요하게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이백기인물와 몽고에서 보내어 온 현대문주45▶회회(回回)[a 2]를 버렸나니 전자 즉 이백기인물를 벤 것으로 보면 반대파를 위압하여 이론(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애초에 난을 일으키려 획책할 때에 이백기인물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도 삼별초난사건이 미리부터 어느 계획 밑에서 진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후자 즉 회회를 가상(街上에)서 벤 것은 그들이 단호한 대몽 태도를 다시 국인(國人)에게 보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쪽수▶P35-3이라 하였다. 이것은 三別抄가 革罷되던 그 翌日인 六月 乙巳(一日)에 이러난 일이어니와 裴仲孫 盧永禧 等이 디디여 表面에 나타나 三別抄를 操縱하야 暴動을 이르킨 것이다. 그들은 먼저 「蒙古兵大至 殺戮人民」이라 하야 民衆을 激昂 또는 恐動케 하고 다시 「凡欲輔國者 皆會毬庭」이라 하야 그들의 目的이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 있음을 밝힘과 同時에 民心을 오로지 外敵에 向케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云云한 「蒙古兵」은 이미 論한 바와 가치 元宗이 끌고 온 頭輦哥의 蒙古兵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當時 江都의 人民이 이에 應하야 바로 毬庭으로 모혀든 것을 보면 頭輦哥의 蒙古兵의 進入은 高麗의 軍民을 매우 剌戟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다음 그들은 官民 特히 文武 兩班의 島外 脫出을 嚴重히 禁遏하였나▶P36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勢力의 分散과 要人의 脫走를 防止함과 아울러 島內의 事情의 漏洩됨을 念慮한 까닭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金剛庫 武器를 끄내여 軍卒에게 分與하였다는 것은 武裝의 擴充 强化를 意味하는 바어니와 여기에서 말한 軍卒이라는 것은 다만 三別抄만 가르친 것이 아닌 듯하니 當時 府衛兵은 비록 衰頺하였으나 오히려 國軍의 一部로서 存在하였음으로 생각컨대 三別抄 以外에도 江都에 散在한 府衛兵 또는 奴隸 等(三別抄가 奴隸를 만히 驅去 南下한 것으로 보와)을 糾合하야 武裝을 强制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元來 三別抄는 오랫동안 對蒙 抗戰에 活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와 이때에 비로소 金剛庫 武器로써 武裝을 하였으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島內의 團束과 防備 計劃을 굳게 하는 한편에 王族이요 또 王室 近親인 원문주44▶承化侯 溫[1]을 王으로 擁立하고 官府의 署置와 官員의 任命을 行하야 舊都에 도라간 松京 政府에 對하야 새로운 政府를 세운 것이다. 이는 蒙古에 屈服한 元宗을 國王으로 認치 아니함을 意味하는 것으로서 앞서 林衍의 元宗 擅廢와 그의 軌를 한 가지 한 것으로도 보이거니와 抗蒙策을 續行함에는 統制된 國家的 體制가 또한 必要케 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시 李白起와 蒙古에서 보내여 온 回回[2]를 버렸나니 前者 卽 李白起를 버힌 것으로 보면 反對派를 威壓하야 異論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그들이 애초에 亂을 이르키려 劃策할 때에 李白起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것을 알 수 있나니 吾人은 이것을 가지고도 三別抄亂이 미리부터 어느 計劃 밑에서 進行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後者 卽 回回를 街上에서 버힌 것은 그들이 斷乎한 對蒙 態度를 다시 國人에게 보쪽수▶P37-1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배중손인물 등의 이러한 거사는 절대 결심과 각오가 없이는 행하기 어려운 바로서 이것은 일시적 감정의 격앙에서 돌발한 병변도 아니요 또는 오합지중의 폭동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깊은 유래와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임은 위에서 거듭 말한 바와 같거니와 다시 강도를 손에 넣고 감연히 송경 측과 몽고를 상대로 일어나게 된 삼별초 측의 전략적 조건을 찾아보면 ① 삼별초는 국군의 중심이 되어왔으므로 삼별초가 갈라서게 되면 송경 측의 병력은 심히 현대문주46▶빈약한 것으로서[a 3] 몽고와의 합작이 실현될지라도 삼별초 측으로 보면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던 것 ② 강화는 약 40년 동안의 수도였으므로 비록 원종인물이 구경 환도를 표명하였으나 국가의 중심은 아직도 강화였으며 국가의 축적(蓄積)도 이곳에 있고 백궁(百宮)들은 마침 연경으로부터 돌아오는 원종을 맞이하며 많이 송경에 건너 갔으나 그들의 처자들은 의연히 이곳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축적은 그대로 삼별초의 자원이 되는 것이며(아래에서 볼 것임) 백궁의 처노(妻孥)를 억류함은 다른 날 송경 측을 어느 정도까지 견제할 수가 있을 법한 것이었다. ③ 그 위에 소위 ‘심입해도’는 역대 항몽책에 있어 최고 또는 최후의 계획으로 되어 온 것으로서 깊이 남방 해중 즉 진도로 들어가 근거를 정하는 데에도 강도에 집중된 선척을 구용(驅用)하는 것이 최호의 방도가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쪽수▶P37-2裴仲孫 等의 이러한 擧事는 絶對 決心과 覺悟가 없이는 行키 어려운 바로서 이것은 一時的 感情의 激昂에서 突發한 兵變도 아니요 또는 烏合之衆의 暴動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깊은 由來와 歷史的 根據가 있는 것임은 우에서 累述한 바와 같거니와 다시 江都를 손에 너코 敢然히 松京 側과 蒙古를 相對로 이러나게 된 三別抄 側의 戰略的 條件을 차저보면 ① 三別抄는 國軍의 中心이 되여왔음으로 三別抄가 갈러서게 되면 松京 側의 兵力은 甚히 원문주46▶貧弱한 것으로서[3] 蒙古와의 合作이 實現될지라도 三別抄 側으로 보면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던 것 ② 江華는 約 四十年 동안의 首都이었음으로 비록 元宗이 舊京 還都를 表明하였으나 國家의 中心은 아직도 江華이었으며 國家의 蓄積도 이곳에 있고 百宮들은 마짐 燕京으로부터 도라오는 元宗을 마지하며 만히 松京에 건너 갔으나 그들의 妻子들은 依然히 이곳에 남어 있는 狀態이었다. 그럼으로 國家의 蓄積은 그대로 三別抄의 資源이 되는 것이며(下見) 百官의 妻孥를 抑留함은 他日 松京 側을 어느 程度까지 牽制할 수가 있을 법한 것이었다. ③ 그 우에 所謂 「深入海島」는 歷代 抗蒙策에 있어 最高 또는 最後의 計劃으로 되여 온 것으로서 깊이 南方 海中 卽 珍島로 드러가 根據를 定하는 데에도 江都에 集中된 船隻을 驅用하는 것이 最好의 方途가 되였을 것으로 믿는다.
다음 삼별초의 남하에 나아가 살펴보면 원래 강도는 염하(갑곶강)를 격(隔)하여 육지와 지호(指呼)의 사이에 있으므로 수전에 졸렬한 몽고병과는 그곳을 근거로 하여 약 40년 동안 대항하여 왔으나 원종인물이 몽고와 결탁한 이상 정세는 전에 비하여 크게 변화한 바가 있어 다시 이곳을 근거로 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별초 측에서는 애초부터 강도를 버리고 다시 남하 해상에 근거지를 구할 것은 넉넉히 추단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런데 삼별초의 남하에 대하여 앞서 든 고려사서적 배중손전에
쪽수▶P37-3다음 三別抄의 南下에 나아가 살펴보면 元來 江都는 塩河(甲串江)를 隔하야 陸地와 指呼의 사이에 있음으로 水戰에 拙劣한 蒙古兵과는 그곳을 根據로 하야 約 四十年 동안 對抗하여 왔으나 元宗이 蒙古와▶P38-1 結托한 以上 情勢는 前에 比하야 크게 變化한 바가 있어 다시 이곳을 根據로 하기는 到底히 不可能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三別抄 側에서는 애초부터 江都를 버리고 다시 南方 海上에 根據地를 求할 것은 넉넉히 推斷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런데 三別抄의 南下에 對하야 前擧 高麗史 裴仲孫傳에

江華守卒 多亡出陸 賊度不能守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 南下

쪽수▶P38-2

江華守卒 多亡出陸 賊度不能守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 南下

라 한 기사가 보이나 이는 당시 송경 측에서 내린 억측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의 남하는 명백히 항몽파의 전통책 또는 예정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다. 다시 같은 전에 의하면
쪽수▶P38-3라 한 記事가 보이나 이는 當時 松京 側에서 나린 臆測에 不過한 것으로서 그의 南下는 明白히 抗蒙派의 傳統策 또는 豫定 計劃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다. 다시 同傳에 依하면

邦悅(〇判太史局事安邦悅)當還都時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

쪽수▶P38-4

邦悅(〇判太史局事安邦悅)當還都時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

라 한 기사가 보이니 이는 안방열인물이 환도 때를 당하여 환도파를 따라 출륙할까 삼별초를 따라 입해할까 거취에 미혹하게 되었으므로 봉은사에 봉안한 태조인물의 진영(眞影) 앞에 나아가 점을 쳐가지고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삼별초의 남하 계획은 이미 ‘환도 때’ 이전에 정해졌던 것으로 해석되는바 ‘환도 때’라는 것은 대체 어느 때를 가리킨 것인지 5월 23일에 환도를 방시한 때가 아니면 같은 달 27일에 원종인물이 연경으로부터 송경에 돌아올 때 비빈 이하가 모두 강도에서 출륙하던 때를 가리킨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송경에서는 이미 같은 달 26일에 이인성인물을 강화에 보내어 태조인물의 진영을 받들어 간 현대문주47▶[a 4]을 참조하여 상고해보면 이인성인물으로 말미암아 이안(移安)된 태조의 진영은 봉은사의 것으로 추단되는 바로서 안방열인물의 점친 것은 26일 이전에 속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그렇다면 ‘환도 때’라는 것은 환도를 방시하던 23일을 가리킨 것일지니 이와 같이 본다면 삼별초의 남하는 분명히 예정 계획이었음도 추단할 수가 있는 동시에 이러한 계획이야말로 삼별초로 하여금 대담한 행동을 취하게 한 일대 동기라고도 할 것이며 이렇게 보는 데에서 안방열인물의 점친 의의도 더욱 천명되는 바이다.
쪽수▶P38-5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安邦悅이 還都時를 當하야 還都派를 따러 出陸할까 三別抄를 따러 入海할까 去就에 迷惑케 되였음으로 奉恩寺에 奉安한 太祖의 眞影 앞에 나아가 占을 처가지고 決定하였다는 것이다. 일로 보면 三別抄의 南下 計劃은 이미 「還都時」 以前에 定해졌던 것으로 解釋되는바 「還都時」라는 것은 대체 어느 때를 가르친 것인지 五月 二十三日에 還都를 榜示한 때가 아니면 同月 二十七日에 元宗이 燕京으로부터 松京에 도라올제 妃嬪 以下가 모다 江都에서 出陸하던 때를 가르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松京에서는 이미 同月 二十六日에 李仁成을 江華에 보내여 太祖의 眞影을 밧드러 간 원문주47▶[4]을 叅照하야 상고해보면 李仁成으로 말미암어 移安된 太祖의 眞影은 奉恩寺의 것으로 推斷되는 바로서 安邦▶P39-1悅의 占친 것은 二十六日 以前에 屬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그러타면 「還都時」라는 것은 還都를 榜示하던 二十三日을 가르친 것일지니 이와 가치 본다면 三別抄의 南下는 分明히 豫定 計劃이었음도 推斷할 수가 있는 同時에 이러한 計劃이야말로 三別抄로 하여금 大膽한 行動을 取케 한 一大 動機라고도 할지며 이러케 보는 데에서 安邦悅의 占친 意義도 더욱 閳明되는 바이다.
삼별초의 남하는 고려사서적 원종 11년 6월 신미(3일)조에 의하면
쪽수▶P39-2三別抄의 南下는 高麗史 元宗 十一年 六月 辛未(三日)條에 依하면

剽掠子女財貨 乘舟南下

쪽수▶P39-3

剽掠子女財貨 乘舟南下

라 하여 동란이 발발된 그 이틀 뒤인 6월 3일로 되어 있으나 다시 고려기사서적 지원 7년 6월조의
쪽수▶P39-4라 하야 動亂이 勃發된 그 再翌日인 六月 三日로 되여 있으나 다시 高麗紀事 至元 七年 六月條의

是日(〇二日)晩 植報 叛兵悉遁去 三日 世子愖(〇諶)報 叛兵劫府庫燒圖籍 逃入海中 行省使人覘江華 島中百姓皆空 云云

쪽수▶P39-5

是日(〇二日)晩 植報 叛兵悉遁去 三日 世子愖(〇諶)報 叛兵劫府庫燒圖籍 逃入海中 行省使人覘江華 島中百姓皆空 云云

이라 한 기사와 참조해보면 당시 삼별초는 강도의 인물 부고(府庫)를 휩쓸어 가지고 천동한 만큼 하루 동안에는 도저히 완료하지 못할 것으로서 2일부터 개시되어 3일에 이르러 끝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며 소위 그들의 ‘권토입해’의 상황에 관하여는 앞서 든 배중손전의
쪽수▶P39-6이라 한 記事와 叅照해보면 當時 三別抄는 江都의 人物 府庫를 휩쓰러 가지고 遷動한 만큼 하로 동안에는 到底히 完了치 못할 것으로서 二日부터 開始되여 三日에 이르러 끝난 것으로 解釋되는 바이며 所謂 그들의 「卷土入海」의 狀況에 關하야는 前擧 裴仲孫傳의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缸破江 舳艫相接 無慮千餘艘 時百官咸出迎王 其妻孥 皆爲賊所掠 慟哭之聲振動天地

쪽수▶P39-7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缸破江 舳艫相接 無慮千餘艘 時百官咸出迎王 其妻孥 皆爲賊所掠 慟哭之聲振動天地

라 한 기사와 원종 12년 8월에 몽고 중서성에 보낸 고려의 국서 가운데에
쪽수▶P39-8라 한 記事와 元宗 十二年 八月에 蒙古 中書省에 보낸 高麗의 國書 가운대에

又若奴婢 各從其主者也 當其主順命就陸 乃因打疊家産而還江都者 悉被驅者(고려사서적 27)

쪽수▶P40-1

又若奴婢 各從其主者也 當其主順命就陸 乃因打疊家産而還江都者 悉被驅者(高麗史 卷二七)

라 한 것으로써 그의 개황(概況)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그 반면에 이로 인하여 송경 측에서 받은 타격은 실로 심각한 바가 있었다. 고려사서적 원종 세가 11년 6월 을해조에
쪽수▶P40-2라 한 것으로써 그의 概況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그 反面에 이로 因하야 松京 側에서 바든 打擊은 實로 深刻한 바가 있었다.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一年 六月 乙亥條에

幸頭輦哥屯所 (〇白州?) 時初出古京 衣冠未備 王及百官 皆以戒服行

쪽수▶P40-3

幸頭輦哥屯所 (〇白州?) 時初出古京 衣冠未備 王及百官 皆以戒服行

이라 한 것이든지 같은 해 9월 계해조에
쪽수▶P40-4이라 한 것이던지 仝 九月 癸亥條에

設藏經道場於本闕 王始備法駕 然侍從甚少 樂官未具 文武官多有步行者

쪽수▶P40-5

設藏經道場於本闕 王始備法駕 然侍從甚少 樂官未具 文武官多有步行者

라 한 것으로 보면 인물의 조잔(凋殘)과 의관 기장의 결핍된 원인이 강도에서 지척인 송경에 환도한 데에 있다는 것보다도 삼별초의 소위 ‘권토입해’에 있었다고 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며 국가의 축적도 이로 말미암아 거의 탕실(蕩失)되었던 것도 “內外蓄積 去年爲逆賊偷掠無遺” “小邦蓄積 方就陸時 悉爲逆賊攘奪” 등의 현대문주48▶기사로써 넉넉히[a 5] 상상할 수가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강도를 휩쓴 삼별초는 드디어 서쪽으로 향하여 구하리 부근으로부터 이륙하여 강화 교동의 해협을 시처 남하한 것으로 현대문주49▶해석되니[a 6] 그들이 동쪽으로 염하를 거치지 아니한 것은 송경 측의 눈을 피하여 추격의 기회를 주지 아니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쪽수▶P40-6라 한 것으로 보면 人物의 凋殘과 衣冠 器仗의 缺乏된 原因이 江都에서 咫尺인 松京에 還都한 데에 있다는 것보다도 三別抄의 所謂 「卷土人海」에 있었다고 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며 國家의 蓄積도 이로 말미암어 거의 蕩失되였던 것도 「內外蓄積 去年爲逆賊偷掠無遺」 「小邦蓄積 方就陸時 悉爲逆賊攘奪」 等의 원문주48▶記事로써 넉々히[5] 想像할 수가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江都를 휩쓸은 三別抄는 디디여 西으로 向하야 鳩下里 附近으로부터 離陸하야 江華 喬桐의 海峽을 시처 南下한 것으로 원문주49▶解釋되나니[6] 그들이 東으로 塩河를 거치지 아니한 것은 松京 側의 눈을 避하야 追撃의 機會를 주지 아니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이 삼별초의 남하 입해에 있어 또 한 가지 우리의 흥미를 끄는 바가 있으니, 그것은 곧 참위설이 이에도 부합되어 있는 것이다. 앞서 든 배중손전의 안방열에 관한 기사 가운데에
쪽수▶P40-7이 三別抄의 南下 入海에 있어 또 한가지 吾人의 興味를 끌런 바가 있으니, 그것은 곧 讖緯說이 이에도 附會되여 있는 것이다. 前擧 裴仲孫傳의 安邦悅에 關한 記事 가운대에

(前略)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 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 說賊曰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之讖 於此驗矣 遂爲謀主

쪽수▶P41-1

(前略)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出陸者也 存者隨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 說賊曰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之讖 於此驗矣 遂爲謀主

라 한 것이 보이니 원래 정치 운동에 도참을 이용한 것은 고려에서도 자래(自來)로 그의 예가 허다하거니와 특히 용손참(龍孫讖)은 철원의 현대문주50▶고경참을[a 7] 비롯하여 이의민도 이것으로써 현대문주51▶비망을 품게 되었다고 전하는 바이다.[a 8] 용은 원래 제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용손이라면 왕손의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나 고려에서의 용손이라는 것은 특수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이는 여실(麗室) 조상의 원창왕후(의조의 왕후)에 관한 현대문주52▶용녀전설[a 9]로부터 나온 것인 듯하거니와 도참 이외에도 고려 왕손에 대한 현대문주53▶용손의 칭은 고려 중말경을 통하여 세간에 행하였던 것이다.[a 10] 어쨌든 용손은 고려 왕손을 가리킨 것임은 물론이어니와 “龍孫十二盡”은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이에 대하여는 두계 이병도인물씨가 이미 논파한 바와 같이 용손은 12대에 진절(盡絕)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것이니 이것은 앞서 든 고경참인물“此一龍子三四 遞代相承六甲子”에서 나온 것이다. 34는 12로 6갑자는 360년으로 보고 1세를 30년으로 헤아린다면 360년은 실로 12세의 현대문주54▶역년에 해당하는 것이다.[a 11] 그런데 고려 왕실의 세차(世次)는 용녀전설을 기준으로 한다면 원창왕후의 아들 세조인물로부터 원종인물까지가 12세이며 역년으로는 원종인물 11년이 태조인물 즉위로부터 353년에 (918―1270) 당하니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던 때는 소위 346갑자설에 근사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이는 비록 우연한 부합이라 할 것이나 도참사상으로 볼 때에는 또한 흥미있는 문제라 할 것이다.
쪽수▶P41-2라 한 것이 보이나니 元來 政治 運動에 圖讖을 利用한 것은 高麗에서도 自來로 그의 例가 許多하거니와 特히 龍孫讖은 鐵圓의 원문주50▶古鏡讖을[7] 비롯하야 李義旼도 이것으로써 원문주51▶非望을 품게 되였다고 傳하는 바이다.[8] 龍은 元來 帝王을 象徵하는 것으로서 龍孫이라면 王孫의 意로도 解釋할 수 있을 것이나 高麗에서의 龍孫이라는 것은 特殊한 意味가 包含되여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이는 麗室 祖上의 元昌王后(懿祖의 后)에 關한 원문주52▶龍女傳說[9]로부터 나온 것인 듯하거니와 圖讖 以外에도 高麗 王孫에 對한 원문주53▶龍孫의 稱은 高麗 中末頃을 通하야 世間에 行하였던 것이다.[10] 엇젯던 龍孫은 高麗 王孫을 가르친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龍孫十二盡」은 무엇을 意味한 것인가. 이에 對하야는 斗溪 李丙燾氏가 이미 論破한 바와 같이 龍孫은 十二代에 盡絕된다는 意味로 解할 지니 이것은 前擧 古鏡讖의 「此一龍子三四 遞代相承六甲子」에서 나온 것이다. 三四는 十二로 六甲子는 三百六十年으로 보고 一世를 三十年으로 헤아린다면 三百六十年은 實로 十二世의 원문주54▶歷年에 該當하는 것이다.[11] 그런데 高麗 王室의 世次는 龍女傳說을 基準으로 한다면 元昌王后의 子 世祖로부터 元宗까지가 十二世이며 歷年으로는 元宗 十一年이 太祖 卽位로부터 三百五十三年에 (九一八―一二七〇) 當하나니 三別抄의 亂이 이러나던 때는 所謂 三四六甲子說에 近似値를 가즌 것이라 할 것이다. 이는 비록 偶然한 符合이라 할지나 圖讖思想으로 볼 때에는 또한 興味있는 問題라 할 것이다.
그 전에 안방열인물“龍孫十二盡 云云”의 설은 배중손인물 등이 승화후를 옹립하는 것과 자못 모순된 관이 있으니, 이는 승화후도 또한 왕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삼별초의 난은 승화후 중심이 아니며 또 참위에 나타나는 ‘용손’은 고려의 왕실 종통을 가리킨 것이요 왕족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승화후 같이 지족으로부터 새 국면에 출현하는 것은 별문제에 속한다 할 것이다. 현대문주55▶그리고 “向南作帝京”“姬龍之後重興”의 예언과도[a 12] 서로 표리(表裡)가 되는 것으로서 역시 중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거니와 원래 “向南作帝京”의 예언은 양주를 남경(오늘날 경성)이라 하여 궁궐을 창조하게 된 문종시대 전후에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문종이 남경을 세운 것은 소위 삼경설에 의하여 기업 연장을 그리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의 현대문주56▶동기는 역시 “三四六甲子” 예언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a 13] 그런데 “向南作帝京”의 남에 대하여 안방열인물은 남방 해중으로 부회한 것이 자못 우리의 흥미를 끄는 바거니와 특히 답산가인물“若渡其江作帝京 一席中裂隔漢江”(위의 각주 참조)은 우연하게도 당시 송경과 삼별초의 분열 대립에 호개(好個)의 조응이 되는 감이 있으며 이것은 다시 일면에 있어 반존 반망의 점사(占辭)를 해석하는 데에도 관련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 해석된다. 현대문주57▶이러한 유의 풍수도참설은 고려에서도 재래로 국가가 소란할 때에 많이 일어나던 것으로서 고종 원종 시대에도—몽고의 침구가 성함을 따라—자못 행하였으니[a 14] 이로 보면 삼별초 측에 또한 이러한 도참이 행한 것도 차라리 있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쪽수▶P42-1그 전에 安邦悅의 「龍孫十二盡 云云」의 說은 裴仲孫 等이 承化侯를 擁立하는 것과 자못 矛盾된 觀이 있나니, 이는 承化侯도 또한 王族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元來 三別抄의 亂은 承化侯 中心이 아니며 또 讖緯에 나타나는 「龍孫」은 高麗의 王室 宗統을 가르친 것이요 王族 全體를 意味하는 것은 아님으로 承化侯 같이 支族으로부터 새 局面에 出現하는 것은 別問題에 屬한다 할 것이다. 원문주55▶그리고 「向南作帝京」「姬龍之後重興」의 讖과도[12] 서로 表裡가 되는 것으로서 亦是 重興을 意味하는 것이라고 解釋되거니와 元來 「向南作帝京」의 讖은 楊州를 南京(今 京城)이라 하야 宮闕을 創造케 된 文宗時代 前後에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文宗이 南京을 세운 것은 所謂 三京說에 依하야 基業 延長을 圖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의 원문주56▶動機는 亦是 「三四六甲子」 讖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13] 그런데 「向南作帝京」의 南에 對하야 安邦悅은 南方 海中으로 附會한 것이 자못 吾人의 興味를 끌런 바어니와 特히 踏山歌의 「若渡其江作帝京 一席中裂隔漢江」(上註 叅照)은 偶然하게도 當時 松京과 三別抄의 分裂 對立에 好個의 照應이 되는 感이 있으며 이것은 다시 一面에 있어 半存 半亡의 占辭를 解하는 데에도 關聯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 解釋된다. 원문주57▶이러한 類의 風水圖讖說은 高麗에서도 在來로 國家가 騷亂할 때에 만히 이러나던 것으로서 高宗 元宗 時代에도—蒙古의 侵寇가 盛함을 따러—자못 行하였으니[14] 일로 보면 三別抄 側에 또한 이러한 圖讖이 行한 것도 차라리 있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② 삼별초의 진도 입거시대
쪽수▶P42-2② 三別抄의 珍島 入據時代
삼별초가 진도에 입거하기는 원종 11년 8월 19일(병술)이었으니 그들의 강도 출발로부터 74일 후의 일이다. 그동안 그들의 행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지 아니하므로 자세히 고구할 수가 없으나 고려사절요서적(권18) 원종 11년 6월(13일 신사)조에
쪽수▶P43-1三別抄가 珍島에 入據하기는 元宗 十一年 八月 十九日(丙戌)이였으니 그들의 江都 出發로부터 七十四日 後의 일이다. 그동안 그들의 行動은 記錄에 잘 나타나 있지 아니함으로 자세히 考究할 수가 없으나 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 六月(十三日 辛巳)條에

以金方慶爲逆賊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一千餘人 追討三別抄 至海中 望見賊船 泊靈興島(〇南陽) 方慶欲擊之 宋萬戶懼止之 賊乃遁 云云

쪽수▶P43-2

以金方慶爲逆賊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一千餘人 追討三別抄 至海中 望見賊船 泊靈興島(〇南陽) 方慶欲擊之 宋萬戶懼止之 賊乃遁 云云

이라 한 것으로써 미루어 보면 삼별초는 일로(一路) 진도로 향한 것이 아니라 서해 일대의 도서(島嶼)를 경략하면서 남하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서남 해도 중에서 특히 진도를 택점(擇占)한 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원래 삼별초의 남하한 목적은 앞서 최우인물의 강화천도와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원종이 몽고와 결탁한 이상 항몽을 속행하려면 남방 해상에 근거를 옮겨가지고 적어도 남부 일대를 그들의 세력에 넣지 아니할 수가 없는 정세였다. 그러면 이러한 조건에 맞을 만한 근거지로는 강화와 같이 육지에 가까우면서도 광활한 도서가 아니면 아니될 것이며 또 특히 삼별초의 시뢰(侍賴)하는 바는 제해에 있음으로 해상 요해의 땅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으로써 본다면 서남 다도해상에 있어 진도와 같은 곳이 적으리라고 생각되는 바이니 당시 삼별초의 진도 점거에 대하여 송경 측에서도 과연 비명을 올렸던 것이다. 원종 12년 3월에 몽고에 보낸 도서 가운데에
쪽수▶P43-3이라 한 것으로써 미루워 보면 三別抄는 一路 珍島로 向한 것이 아니라 西海 一帶의 島嶼를 經略하면서 南下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그런데 西南 海島 中에서 特히 珍島를 擇占한 데에는 相當한 根據가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元來 三別抄의 南下한 目的은 앞서 崔瑀의 江華遷都와 그 軌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元宗이 蒙古와 結托한 以上 抗蒙을 續行하려면 南方 海上에 根據를 옴겨가지고 적어도 南部 一帶를 그들의 勢力에 너치 아니할 수가 없는 情勢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條件에 마즐 만한 根據地로는 江華와 같이 陸地에 갓차우면서도 廣濶한 島嶼가 아니면 아니될 것이며 또 特히 三別抄의 侍賴하는 바는 制海에 있음으로 海上 要害의 地를 必要로 하게 되였든 것이다. 이와 같은 條件으로써 본다면 西南 多島海上에 있어 珍島와 같은 곳이 적으리라고 생각되는 바이니 當時 三別抄의 珍島 占據에 對하야 松京 側에서도 果然 悲鳴을 올렸던 것이다. 元宗 十二年 三月에 蒙古에 보낸 圖書 가운대에

慶尙全羅貢賦 皆未得陸輸 必以水運 今逆賊據於珍島 兹乃水程之咽喉 使往來船楫 不得過行(고려사서적권27)

쪽수▶P43-4

慶尙全羅貢賦 皆未得陸輸 必以水運 今逆賊據於珍島 兹乃水程之咽喉 使往來船楫 不得過行(高麗史 卷二十七)

이라 한 것은 저간의 사정을 말하는 바이다.
쪽수▶P44-1이라 한 것은 這間의 事情을 말하는 바이다.
삼별초가 진도에 입거한 후 용장성을 쌓고 (석축) 궁전을 크게 영조하여 도성으로서의 시설에 또한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서 동국여지승람서적(권37) 진도고적조에
쪽수▶P44-2三別抄가 珍島에 入據한 後 龍藏城을 쌓고 (石築) 宮殿을 크게 營造하야 都城으로서의 施設에 또한 힘을 기우렸던 것으로서 東國輿地勝覽(卷三十七) 珍島古跡條에

龍藏城(在今治東二十五里 石築 周三萬八千七百四十一尺 高五尺 高麗元宗時 三別抄叛 自江華府 入據此島 大營宮殿 金方慶討平之 此其舊基)

쪽수▶P44-3

龍藏城(在今治東二十五里 石築 周三萬八千七百四十一尺 高五尺 高麗元宗時 三別抄叛 自江華府 入據此島 大營宮殿 金方慶討平之 此其舊基)

라 하였으니 이러한 기사로 보아도 그들의 경륜이 또한 초초(草々)하지 아니한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진도를 수도로 한 삼별초의 활동과 세력은 매우 왕성한 바가 있었으니 남해 창선(진주 속도) 거제 제주(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할 터) 등을 비롯하여 30여도가 그들의 해상 왕국의 영역이 되었으며 특히 남해에는 그의 중견 유존혁이 웅거하여 진도와 의각(椅角)의 세를 취해 가지고 현대문주58▶남안 일대를 시끄럽게 하였다.[a 15]
쪽수▶P44-4라 하였나니 이러한 記事로 보와도 그들의 經綸이 또한 草々치 아니한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珍島를 首都로 한 三別抄의 活動과 勢力은 매우 旺盛한 바가 있었으니 南海 彰善(晉州 屬島) 巨濟 濟州(이에 關해서는 아래에서 更論할 터) 等을 비롯하야 三十餘島가 그들의 海上 王國의 領域이 되었으며 特히 南海에는 그의 中堅 劉存奕이 웅거하야 珍島와 椅角의 勢를 取해 가지고 원문주58▶南岸 一帶를 식그럽게 하였다.[15]
다시 삼별초의 활동은 육지에서도 또한 활발한 바가 있었으니 그들은 먼저 육지의 민물(民物)을 도서에 옮겨 항전력의 충실을 계획하기에 급급하였다.
쪽수▶P44-5다시 三別抄의 活動은 陸地에서도 또한 活潑한 바가 있었으니 그들은 먼저 陸地의 民物을 島嶼에 옴겨 抗戰力의 充實을 圖하기에 汲々하였다.

三別抄 入據珍島 侵掠州郡 矯帝旨 令全羅道按察使 督民收穫 徙居海島(고려사서적원종 세가 11년 8월 병술조)

쪽수▶P44-6

三別抄 入據珍島 侵掠州郡 矯帝旨 令全羅道按察使 督民收穫 徙居海島(高麗史 元宗 世家 十一年 八月 丙戌條)

라 한 기사는 그것을 말하는 바거니와 민물을 해도에 천사(遷徙)하는 데에 제지(帝旨)를 교사(矯使)하였다 하였으니 만일 이 제지를 예의 몽제의 유지(諭旨)로 본다면 해석하기 자못 곤란한 바가 있다. 이는 고려에서 오랫동안 해도에 입거하여 몽고와 항전해 온 역사적 사실로 보나 또는 당시 ‘거수취륙’이 양국 평화의 조건으로 되었던 관계로 보아 아무리 날조한 것으로 치더라도 말이 성립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생각건대 당시 삼별초가 승화후를 추대하고 있었으므로 혹 이 새로운 왕을 가리켜 제(帝)라 한 것을 그 조지를 받은 지방관 무리가 제(帝)라 하니까 예의 몽제를 가리킨 것으로 착인(錯認)한 데에서 “矯帝旨”라 한 해석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앞서 든 “向南 作帝京”의 문구로 보아도 왕경(王京)이라 하지 아니하고 제경(帝京)이라 한 것이 이러한 억측에 일종의 암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삼별초는 다시 장흥을 비롯하여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등 연안 요지는 물론 깊이 나주 전주에까지 진공(進攻)하였던 것이니 특히 금성산성(나주)에서는 7주야(七晝夜)의 격전을 행하여 그의 현대문주59▶위력을 떨치기도 하였다.[a 16]
쪽수▶P44-7라 한 記事는 그것을 말하는 바어니와 民物을 海島에 遷徙하는 데에 帝旨를 矯使하였다 하였으니 만일 이 帝旨를 例의 蒙帝의 諭旨로 본다면 解釋하기 자못 困難한 바가 있다. 이는 高麗에서 오래동안 海島에 入據하야 蒙古와 抗戰해 온 歷史的 事實로 보나 또는 當時 「去水就陸」이 兩國 平和의 條件으로 되였던 關係로 보와 아모리 捏造한 것으로 치드라도 말이 成立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생각컨대 當時 三別抄가 承化▶P45-1侯를 推戴하고 있었음으로 或 이 新王을 가르처 帝라 한 것을 그 詔旨를 바든 地方官 輩가 帝라 하니까 例의 蒙帝를 가르친 것으로 錯認한 데에서 「矯帝旨」라 한 解釋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前擧 「向南 作帝京」의 文句로 보와도 王京이라 하지 아니하고 帝京이라 한 것이 이러한 臆測에 一種의 暗示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三別抄는 다시 長興을 비롯하야 合浦(馬山) 金州(金海) 東萊 等 沿岸 要地는 勿論 깊이 羅州 全州에까지 進攻하였던 것이니 特히 錦城山城(羅州)에서는 七晝夜의 激戰을 行하야 그의 원문주59▶威力을 떨치기도 하였다.[16]
삼별초의 세력이 이와 같이 떨침을 따라 국내의 인심에 끼친바 영향이 또한 막대한 바가 있었으니 “時 三別抄反據珍島 勢甚熾 州郡望風迎降 或往珍島謁見”(고려사서적권103 김응덕전)이라 한 것과 같이 당시 거취에 현혹케 된 멀고 가까운 주현에서는 이에 향응하는 자가 속출하여 소위 망풍영강(望風迎降)의 현상을 이루었으며 또 승화후를 진왕으로 우러러 왕알(往謁)하는 자도 있었던 것이다. 다시 이에 대하여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고려사서적(권27) 원종 12년 정월 병술조에
쪽수▶P45-2三別抄의 勢力이 이와 같이 떨침을 따러 國內의 人心에 끼친바 影響이 또한 莫大한 바가 있었으니 「時 三別抄反據珍島 勢甚熾 州郡望風迎降 或往珍島謁見」(高麗史 卷一百三 金應德傳)이라 한 것과 같이 當時 去就에 炫惑케 된 遠近 州縣에서는 이에 響應하는 者가 續出하야 所謂 望風迎降의 現象을 이루웠으며 또 承化侯를 眞王으로 울어러 往謁하는 者도 있었던 것이다. 다시 이에 對하야 멧 가지 事例를 드러보면 高麗史(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 丙戌條에

密城(〇密陽)郡人方甫, 桂年, 朴平, 朴公, 朴慶純, 慶祺等 嘯聚郡人 將應珍島 乃殺副使 李頤 遂稱攻國兵馬使 移牒郡縣 遣其黨 殺淸道監務林宗(一作崔良梓) 淸道人詐降 飮以酒 醉而殲之 時密城人趙阡 爲一善縣令 賊召阡 約與同叛 阡從之 尋聞其黨 殲於淸道 乃與郡人孫逸謀殺賊魁 按察使李敖(一作李淑眞) 與金州防禦使金晅 慶州判官嚴守安 領兵奄至 阡等斬方甫等降 賊遂平

쪽수▶P45-3

密城(〇密陽)郡人方甫, 桂年, 朴平, 朴公, 朴慶純, 慶祺等 嘯聚郡人 將應珍島 乃殺副使 李頤 遂稱攻國兵馬使 移牒郡縣 遣其黨 殺淸道監務林宗(一作崔良梓) 淸道人詐降 飮以酒 醉而殲之 時密城人趙阡 爲一善縣令 賊召阡 約與同叛 阡從之 尋聞其黨 殲於淸道 乃與郡人孫逸謀殺賊魁 按察使李敖(一作李淑眞) 與金州防禦使金晅 慶州判官嚴守安 領兵奄至 阡等斬方甫等降 賊遂平

이라 한 것으로써 밀양 지방의 동요 상태를 엿볼 수가 있거니와 이 위에 송경에서도 관노 숭겸(崇謙) 무리가 달로화치과 도성 안의 재위자들을 살해하고 진도에 왕두(往投)하려는 음모가 일어났으며 이 사건은 다시 대부도(남양의 속도)의 반란에까지 현대문주60▶영향을 끼쳤던 것이다.[a 17]
쪽수▶P46-1이라 한 것으로써 密陽 地方의 動搖 狀態를 였볼 수가 있거니와 이 우에 松京에서도 官奴 崇謙輩가 達魯花赤과 都城 內의 在位者들을 殺害하고 珍島에 往投하려는 陰謀가 이러났으며 이 事件은 다시 大部島(南陽의 屬島)의 叛亂에까지 원문주60▶影響을 끼쳤던 것이다.[17]
한편 이에 대한 송경과 몽고 측의 동향을 살펴보면 송경 측에서는 6월 13일(신사)에 김방경인물으로 역적 추토사를 삼아 몽고군과 같이 해상으로 추격하게 하고 또 참지정사 신사전으로 전라도 토적사를 삼아 연안 주현의 방어에 당하게 하였으나 수륙 양군이 모두 위축하여 떨치지 못하였다. 고려사서적김방경전에
쪽수▶P46-2한편 이에 對한 松京과 蒙古 側의 動向을 살펴보면 松京 側에서는 六月 十三日(辛巳)에 金方慶으로 逆賊 追討使를 삼어 蒙古軍과 같이 海上으로 追擊케 하고 또 叅知政事 申思佺으로 全羅道 討賊使를 삼어 沿岸 州縣의 防禦에 當케 하였으나 水陸 兩軍이 모다 萎縮하야 떨치지 못하였다. 高麗史 金方慶傳에

三別抄叛 驅掠人民 航海而南 王遣叅知政事中思佺 爲追討使 (〇고려사 元宗 世家 及고려사절요에는 全羅道 討賊使라 하였음) 又命方慶 領兵六十餘人 與蒙古宋萬戶等兵一千餘人 追討至海中 望見賊船泊靈興島 方慶欲擊 宋萬戶懼止之⋯⋯賊入據珍島 侵掠州郡 思佺不以討賊爲意 或聞之 曰我已爲宰相 破賊成功 復何爲乎 至羅州 聞賊出陸 奔還于京 全州副使李彬 亦棄城逃

쪽수▶P46-3

三別抄叛 驅掠人民 航海而南 王遣叅知政事中思佺 爲追討使 (〇高麗史 元宗 世家 及高麗史節要에는 全羅道 討賊使라 하였음) 又命方慶 領兵六十餘人 與蒙古宋萬戶等兵一千餘人 追討至海中 望見賊船泊靈興島 方慶欲擊 宋萬戶懼止之⋯⋯賊入據珍島 侵掠州郡 思佺不以討賊爲意 或聞之 曰我已爲宰相 破賊成功 復何爲乎 至羅州 聞賊出陸 奔還于京 全州副使李彬 亦棄城逃

라 한 기사는 당(當)송경 측의 병력이 심히 빈약한 것과 장관들의 부패 무능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바이니 만일 몽고와의 합작이 없었으면 송경 측은 처음부터 삼별초에 당하기 어려웠던 것을 넉넉히 추상할 수도 있는 바이다. 그 뒤(같은 해) 9월에 이르러 원종은 다시 장군 양동무인물고여림인물등을 시켜 주수(舟帥)로써 진도를 진공하게 하고 신사전에 갈음하여 김방경인물으로 전라도 추토사를 삼아 몽고 원수 아해(阿海)로 더불어 진격하게 하였으니 이로부터 김방경이 통수의 격으로써 몽고군과 같이 진도 정략에 당하게 되었다.
쪽수▶P46-4라 한 記事는 當松京 側의 兵力이 甚히 貧弱한 것과 將官들의 腐敗 無能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바이니 만일 蒙古와의 合作이 없었으면 松京 側은 처음부터 三別抄에 當키 어려웠던 것을 넉넉히 推想할 수도 있는 바이다. 그 뒤(同年) 九月에 이르러 元宗은 다시 將軍 楊東茂 高汝霖 等을 식혀 舟帥로써 珍島를 進攻케 하고 申思佺에 가름하야 金方慶으로 全羅道 追討使를 삼어 蒙古 元帥阿海로 더부러 進擊케 하였으니 일로부터 金方慶이 統帥의 格으로써 蒙古軍과 같이 珍島 政略에 當케 되였다.
당시 몽고 측에서는 이 난에 대하여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니 원래 삼별초의 난은 몽고에 대하여 2종의 협위(脅威)가 되는 까닭이다. 삼별초는 항몽을 기치로 하여 일어났으므로 모처럼 원종을 회유하여 고려를 그의 외번으로 삼으려는 정책에 저어(齟齬)가 생기는 위에 몽제(세조)의 숙원인 동정(東征) 계획에 지장이 발생하는 것으로서 삼별초가 해상에 항전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일본 경략(經畧)을 안심하고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몽제는 6월 3일에 삼별초 남하의 통지를 접하자 바로 몽고군으로써 현대문주61▶추격하게 하였던 것이니[a 18] 이에서 앞서 든 김방경이 몽고의 송만호로 더불어 해상 추격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몽고에서는 다시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고려에 침투시키게 되었으니 원고려기사서적중통(지원) 7년 7월 20일조에
쪽수▶P47-1當時 蒙古 側에서는 이 亂에 對하야 처음부터 積極的으로 나오게 되였던 것이니 元來 三別抄의 亂은 蒙古에 對하야 二重의 脅威가 되는 까닭이다. 三別抄는 抗蒙을 旗幟로 하야 이러났음으로 모처럼 元宗을 懷柔하야 高麗를 그의 外藩으로 삼으려는 政策에 齟齬가 생기는 우에 蒙帝(世祖)의 宿願인 東征 計劃에 支障이 生하는 것으로서 三別抄가 海上에 抗戰을 繼續하는 동안에는 日本 經畧을 安心하고 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蒙帝는 六月 三日에 三別抄 南下의 報를 接하자 바로 蒙古軍으로써 원문주61▶追擊케 하였던 것이니[18] 이에서 前擧 金方慶이 蒙古의 宋萬戶로 더부러 海上 追擊을 試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蒙古에서는 다시 이것을 契機로 하야 그의 勢力을 積極的으로 高麗에 浸透식히게 되였으니 元高麗紀事 中統(至元) 七年 七月 二十日條에

丞相安童等 奉頭輦哥等遣大託忙古䚟 (〇大托克孟古代) 來言 令阿海領軍 一千五百 屯王京 伺察其國中 遂以阿海爲安撫使

쪽수▶P47-2

丞相安童等 奉頭輦哥等遣大託忙古䚟 (〇大托克孟古代) 來言 令阿海領軍 一千五百 屯王京 伺察其國中 遂以阿海爲安撫使

라 하였고 고려사서적원종 세가 11년 7월 신해조에
쪽수▶P47-3라 하였고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一年 七月 辛亥條에

頭輦哥 遣摠管洪茶丘 巡視全羅慶尙東界三道

쪽수▶P47-4

頭輦哥 遣摠管洪茶丘 巡視全羅慶尙東界三道

라 하였다. 그때에 두련가인물는 백주(백천)에 유둔(留屯)하여 대군으로써 뒤에서 누르며 아해(阿海)에게 병력을 줘 송경에 진출하여 안무사라는 이름으로 여정(麗廷)의 동정(動靜)을 감시하게 하고 다시 홍차구인물(洪茶丘)를 시켜 널리 지방의 정황을 사찰하게 하였다.
쪽수▶P47-5라 하였다. 그때에 頭輦哥는 白州(白川)에 留屯하야 大軍으로써 뒤에서 누루며 阿海에게 兵力을 주워 松京에 進出하야 安撫使라는 이름으로 麗廷의 動靜을 監視케 하고 다시 洪茶丘를 식혀 널리 地方의 情況을 伺察케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에 침투되기 시작한 몽고의 세력은 다시 그의 둔전책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호(確乎)한 지반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들의 둔전 목적은 주로 현대문주62▶동정의 준비에 있었다고 하나[a 19] 일면에 있어 삼별초에 대비하는 현대문주63▶조치가 되는 동시에[a 20] 송경 측에 대하여도 일종의 측면적 견제가 되는 것이니 몽고의 둔전은 말하자면 일석이조의 책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둔전 계획은 원종인물11년 11월 25일경에 결정되어 그 익년 3월초(3일)에 이르러서는 둔전의 파지(罷止)에 대한 고려의 간독한 현대문주64▶교섭에도[a 21] 불구하고 흔도인물 사추인물홍다구인물등을 명하여 둔전 경략사를 설치하고 약 5천의 몽고병과 약 2천의 홍다구인물의 옛 영민(고려인호)으로써 황주 봉주(봉산) 금주(김해) 등의 곳에 현대문주65▶둔전을 실시함에 이르렀다.[a 22]
쪽수▶P48-1이와 같이 高麗에 浸透되기 시작한 蒙古의 勢力은 다시 그의 屯田策으로 말미암어 더욱 確乎한 地盤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들의 屯田 目的은 主로 원문주62▶東征의 準備에 있었다고 하나[19] 一面에 있어 三別抄에 對備하는 원문주63▶措置가 되는 同時에[20] 松京 側에 對하야도 一種의 側面的 牽制가 되는 것이니 蒙古의 屯田은 말하자면 一石三鳥의 策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야 그의 屯田 計劃은 元宗 十一年 十一月 二十五日頃에 決定되여 그 翌年 三月初(三日)에 이르러서는 屯田의 罷止에 對한 高麗의 懇篤한 원문주64▶交涉에도[21] 不拘하고 忻都 史樞 洪茶丘 等을 命하야 屯田 經畧司를 設置하고 約 五千의 蒙古兵과 約 二千의 洪茶丘의 舊 領民(高麗人戶)으로써 黃州 鳳州(鳳山) 金州(金海) 等處에 원문주65▶屯田을 實施함에 이르렀다.[22]
몽고에서는 이와 같이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세력을 고려에 부식시키면서 송경 측과 긴밀한 제휴 아래에서 삼별초에 당하게 되었다. 원종 12년 5월에 여몽 연합군의 기습으로 말미암아 진도가 공함될 때까지 전과를 살펴보면 대개 승리는 삼별초 측에 돌아갔던 것이니 이제 그의 한 둘의 저례(著例)를 들어보면 고려사서적김방경전에
쪽수▶P48-2蒙古에서는 이와 같이 步一步 그의 勢力을 高麗에 扶植식히면서 松京 側과 緊密한 提携 아래에서 三別抄에 當하게 되였다. 元宗 十二年 五月에 麗蒙 聯合軍의 奇襲으로 말미암어 珍島가 攻陷될 때까지 戰果를 살펴보면 대개 勝利는 三別抄 側에 도라갓던 것이니 이제 그의 一二의 著例를 드러보면 高麗史 金方慶傳에

현대문주66▶方慶與阿海 屯三堅院 對珍島而陣 賊 於所掠船艦 皆畫怪獸 蔽江照水 動轉如飛 勢不能當每戰 賊軍先鼓譟突進 互勝負 曠日相持 會潘南人洪贊洪機[a 23] 讒于阿海曰 方慶孔愉等 陰與賊相通 阿海執而囚之 移牒達魯花赤 達魯花赤令方慶還 與贊等對辨 以參知政事蔡楨代之

쪽수▶P48-3

원문주66▶方慶與阿海 屯三堅院 對珍島而陣 賊 於所掠船艦 皆畫怪獸 蔽江照水 動轉如飛 勢不能當每戰 賊軍先鼓譟突進 互勝負 曠日相持 會潘南人洪贊洪機[23] 讒于阿海曰 方慶孔愉等 陰與賊相通 阿海執而囚之 移牒達魯花赤 達魯花赤令方慶還 與贊等對辨 以參知政事蔡楨代之

라 하였다. 이 기사로써 우리는 삼별초의 수상세력과 작전이 단연히 연합군을 압두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또 연합 측에서는 실패를 거듭하여 한갓 시일만 천연(遷延)하게 되었으므로 김방경인물같은 인물이 적과 내통하였다는 참언(讒言)으로 피체(被逮)까지 되었던 것이다.(원종인물 11년 11월) 날로 강성하여 가는 삼별초를 앞에 두고 군정의 중심 인물인 김방경인물을 파면시키게 된 것은 송경 측의 큰 손실이며 삼별초 토벌 도상(途上)의 일대 암영이었다. 그 후 홍찬인물등의 무고인 것이 명백하게 되며 원종인물은 달로화치의 양해를 얻어 그 익년(윤11월)에 김방경인물에게 상장군의 직호(職號)를 주어 다시 삼별초에 당하게 하고 또 만호 고을마인물(高乙麻)에게 병 200을 주어 남방 연해 지방을 방수(防戍)하게 하였다. 이에 김방경인물은 다시 진용을 정비해 가지고 다음날 12월 정사(22일)에 진도를 향하여 추격하게 되었으니 그때의 전황에 관하여 다시 앞서 든 김방경전에 의하면
쪽수▶P48-4라 하였다. 이 記事로써 吾人은 三別抄의 水上勢力과 作戰이 斷然히 聯合軍을 壓頭하였던 것을 알 수가▶P49-1 있으며 또 聯合 側에서는 失敗를 거듭하야 한갓 時日만 遷延하게 되였음으로 金方慶 같은 人物이 敵과 內通하였다는 讒言으로 被逮까지 되였던 것이다.(元宗 十一年 十一月) 날로 强盛하여 가는 三別抄를 앞에 두고 軍政의 中心 人物인 金方慶을 罷免식히게 된 것은 松京 側의 큰 損失이며 三別抄 討伐 途上의 一大 暗影이였다. 그 後 洪賛 等의 誣告인 것이 明白하게 되며 元宗은 達魯花赤의 諒解를 얻어 그 翌年(閏十一月)에 金方慶에게 上將軍의 職號를 주워 다시 三別抄에 當케 하고 또 萬戶 高乙麻에게 兵 二百을 주워 南方 沿海 地方을 防戍케 하였다. 이에 金方慶은 다시 陣容을 整備해 가지고 翌 十二月 丁巳(二十二日)에 珍島를 向하야 追擊케 되였으니 그때의 戰況에 關하야 다시 前擧 金方慶傳에 依하면

方慶至珍島 賊皆乘船 盛張旗幟 鉦鼓沸海 又於城上 鼓譟大呼 以助聲勢 阿海㤼下船 欲退屯羅州 方慶曰元帥若退 是示弱也 而賊乘勝長驅 誰敢當鋒 (中略) 阿海不敢退 方慶獨帥師攻之 賊以戰艦 逆擊之 官軍皆退 方慶曰決勝在今日 突入賊中 賊圍之 驅迫以去 方慶士卒 殊死戰 矢石俱盡 又皆中矢 不能起 已薄珍島 岸有賊卒 露刃跳入船中 金天祿以短矛刺之 方慶起曰 寧葬魚腹 安能死賊乎 欲投海 衛士許松延許萬之等 挽止之 創者見方慶危急 叫呼復起疾戰 方慶據胡床 指揮士卒 顔色自若 將軍楊東茂 以蒙衝突擊之 賊乃解去 遂潰圍而出

쪽수▶P49-2

方慶至珍島 賊皆乘船 盛張旗幟 鉦鼓沸海 又於城上 鼓譟大呼 以助聲勢 阿海㤼下船 欲退屯羅州 方慶曰元帥若退 是示弱也 而賊乘勝長驅 誰敢當鋒 (中略) 阿海不敢退 方慶獨帥師攻之 賊以戰艦 逆擊之 官軍皆退 方慶曰決勝在今日 突入賊中 賊圍之 驅迫以去 方慶士卒 殊死戰 矢石俱盡 又皆中矢 不能起 已薄珍島 岸有賊卒 露刃跳入船中 金天祿以短矛刺之 方慶起曰 寧葬魚腹 安能死賊乎 欲投海 衛士許松延許萬之等 挽止之 創者見方慶危急 叫呼復起疾戰 方慶據胡床 指揮士卒 顔色自若 將軍楊東茂 以蒙衝突擊之 賊乃解去 遂潰圍而出

이라 하였다. 이 기사로도 당시 삼별초의 전투력이 우월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러나 김방경인물이 고군(孤軍)으로써 돌진하다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은 그의 무모한 모험이라는 것보다도 차라리 몽고 원수 방해인물의 법렬(法劣)에 격분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방해인물의 이러한 나법(懦法) 무능으로 말미암아 연합 측의 군세는 더욱 떨치지 못하고 한갓 시일만 천연하게 됨으로 그 익년(원종 12년) 정월에 이르러 고려 정부에서 몽고에 교섭한 결과 아해는 드디어 소환되고 둔전 경략사 흔욱인물사추인물등이 이에 체대(遞代)함에 이르렀다.(3월 3일)
쪽수▶P49-3이라 하였다. 이 記事로도 當時 三別抄의 戰鬪力이 優越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러나 金方慶이 孤軍으로써 突進타가 거의 목숨을 일을 뻔한 것은 그의 無謀한 冒險이라는 것보다도 차라리 蒙古 元帥 防海의 法劣에 激忿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阿海의 이러한 懦法 無能으로 말미암어 聯合 側의 軍勢는▶P50-1 더욱 떨치지 못하고 한갓 時日만 遷延케 됨으로 그 翌年(元宗 十二年) 正月에 이르러 高麗 政府에서 蒙古에 交涉한 結果 阿海는 디々여 召還되고 屯田 經畧使忻郁史樞 等이 이에 遞代함에 이르렀다.(三月 三日)
삼별초와의 무력 충돌에 있어 도리어 쓰라린 경험을 맛보고 있던 연합 측 특히 몽고에서는 일방으로 삼별초에 향하여 회유 공작을 자주 행하기에 이르렀다. 원종인물11년 12월에(20일경) 원외랑 박천주인물가 몽사 두원외인물와 같이 진도에 건너가게 되었으니 이는 삼별초에게 주는 원종인물의 유지와 몽제의 책을 전하여 그들을 회유시키려던 것이다. 그런데 박천주인물가 휴거(携去)한 몽제의 책은
쪽수▶P50-2三別抄와의 武力 衝突에 있어 도리여 쓰라린 經驗을 맛보고 있던 聯合 側 特히 蒙古에서는 一方으로 三別抄에 向하야 懷柔 工作을 자조 行하기에 이르렀다. 元宗 十一年 十二月에(二十日頃) 員外郞 朴天澍가 蒙使 杜員外와 같이 珍島에 건너가게 되였으니 이는 三別抄에게 주는 元宗의 諭旨와 蒙帝의 書를 傳하야 그들을 懷柔식히려던 것이다. 그런데 朴天澍가 携去한 蒙帝의 書는

近以高麗權臣構亂 乃遣兵東下 唯林衍是問 不意脅從詿誤之人 妄自疑懼 往々逋竄未出 或逃往他境 因爲叛逆 朕之素心 務在輯寧爾邦 詔諭之後 有能自新 復歸本國 其已往之愆 咸當矜釋 其中雖有早曾背主 逃匿爾國中者 亦令安業爲民 不許各主認識 如或不爾 雖 及(고려사서적권26 원종 11년 12월 을묘조에 보임)

쪽수▶P50-3

近以高麗權臣構亂 乃遣兵東下 唯林衍是問 不意脅從詿誤之人 妄自疑懼 往々逋竄未出 或逃往他境 因爲叛逆 朕之素心 務在輯寧爾邦 詔諭之後 有能自新 復歸本國 其已往之愆 咸當矜釋 其中雖有早曾背主 逃匿爾國中者 亦令安業爲民 不許各主認識 如或不爾 雖 及(高麗史 卷二十六 元宗 十一年 十二月 乙卯條에 보임)

라 한 것인 듯하거니와 이것은 같은 달 20일에 태자(후일의 충렬왕인물)가 연경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가지고 온 몽고 도서 가운데의 하나로서 이것은 원래 삼별초에게 직접 보내는 것이 아니요 원종인물에게 보내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서면의 내용을 가지고 보면 삼별초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지은 것임은 일견에 명료히 간취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리고 송경 측에서 몽사 두원외인물를 안동(案同)하여 박천주인물를 진도에 보낸 것도 몽고 측의 의향을 받아 행한 것임은 고려사서적위와 같은 조에 “王遣員外郞朴天樹 持帝詔 往諭三別抄”라 한 것으로도 넉넉히 추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박천주인물일행이 진도에 건너가기는 익년(원종인물 12년) 정월 6일(경오)이였는데 삼별초 측에서는 벽파정(군동 30리 도구(渡口)에 있었음)에서 그의 일행을 연위(宴慰)하면서 가만히 2천여소(艘)의 병선을 보내어 연합군을 공략하여 병선 1척을 납치하여 90여인을 살해한 사실이 있었다. 이는 명백히 그들에게는 귀순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명하는 동시에 연합군 측의 방심한 틈을 타가지고 손해를 주려는 데에서 나온 듯하다. 삼별초 측의 태도가 이러하므로 박천주인물는 결국 회유 공작에 실패하고 같은 달 22일에 돌아왔는데 그때에 삼별초에서는 몽제의 책은 그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여 박천주인물에게 반각(返却)하고 원종인물의 유지에 대하여는 다만 “惟命是從”이라는 의례적 회답을 주었을 뿐이며 현대문주67▶몽사 두원외인물는 그곳에 억류하고 말었다.[a 24]
쪽수▶P50-4라 한 것인 듯하거니와 이것은 仝月 二十日에 太子(後日의 忠烈王)가 燕京으로부터 도라올 때에 가지고 온 蒙古 圖書 가운대의 하나로서 이것은 元來 三別抄에게 直接 보내는 것이 아니요 元宗에게 보내는 形式을 取하였으나 書面의 內容을 가지고 보면 三別抄에게 보여주려는 意圖에서 지은 것임은 一見에 明瞭히 看取할 수가 있는 바이다. 그리고 松京 側에서 蒙使 杜員外를 案同하야 朴天澍를 珍島에 보낸 것도 蒙古 側의 意向을 받어 行한 것임은 高麗史 同上條에 「王遣員外郞朴天樹 持帝詔 往諭三別抄」라 한 것으로도 넉々히 推斷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엇젯던 朴天樹 一行이 珍島에 건너가기는 翌年(元宗 十二年) 正月 六日(庚午)이▶P51-1였는데 三別抄 側에서는 碧波亭(郡東 三十里 渡口에 있었음)에서 그의 一行을 宴慰하면서 가만히 二千餘艘의 兵船을 보내여 聯合軍을 攻掠하야 兵船 一隻을 拉致하야 九十餘人을 殺害한 事實이 있었다. 이는 明白히 그들에게는 歸順할 意思가 없다는 것을 表明하는 同時에 聯合軍 側의 放心한 틈을 타가지고 損害를 주려는 데에서 나온 듯하다. 三別抄 側의 態度가 이러함으로 朴天澍는 結局 懷柔 工作에 失敗하고 仝月 二十二日에 도라왔는데 그때에 三別抄에서는 蒙帝의 書는 그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야 朴天澍에게 返却하고 元宗의 諭旨에 對하야는 다만 「惟命是從」이라는 儀禮的 回答을 주웠을 뿐이며 원문주67▶蒙使 杜員外는 그곳에 抑留하고 말었다.[24]
그런데 몽고에서는 또 다시 2월 10일(갑진)에 호도극도이(呼圖克垈爾)(홀도답아인물)에게 조서를 줘 직접 삼별초를 현대문주68▶초유하기에 이르렀으니[a 25] 이에 앞서 (정월 25일) 여정(麗廷)에서는 삼별초 초유 전말을 알리기 위하여 박천주인물를 몽정에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보면 몽고 측에서는 박천주인물로 인하여 삼별초 측 정황과 특히 앞서 간접으로 보낸 조서가 반각된 것을 알게 된 결과 직접 교섭을 시도하여 보려던 것이 아닌가 한다. (홀도답아인물사행(使行)의 결과는 아래에 보임) 몽고 측에서 이와 같이 지재지삼(至再至三) 측면 공작을 행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는 것이나 (이에 관하여는 아래 절 「삼별초에 대한 몽고 측의 회유 공작」조 참조) 그 중에도 수전에 자신이 없던 것이 주요한 조건이 아닐까 한다. 당시 삼별초와의 수전에서 자주 실패를 받은 지라 모험적 작전을 피하려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高麗安撫使阿哈(〇阿海) 略地珍島 與逆黨遇 多所亡失 中書省臣言 諜知珍島 餘糧將竭 宜乘弱攻之 詔不許 令巡視險要 常爲之備”(원사서적세조본기 지원 8년 정월 병술조)라 한 것도 저간의 사정을 말하는 바이다.
쪽수▶P51-2그런데 蒙古에서는 또 다시 二月 十日(甲辰)에 呼圖克垈爾(忽都答兒)에게 詔書를 주워 直接 三別抄를 원문주68▶招諭하기에 이르렀나니[25] 이에 앞서 (正月 二十五日) 麗廷에서는 三別抄 招諭 顚末를 報키 爲하야 朴天澍를 蒙廷에 보낸 것으로 미루워 보면 蒙古 側에서는 朴天澍로 因하야 三別抄 側 情況과 特히 앞서 間接으로 보낸 詔書가 返却된 것을 알게 된 結果 直接 交涉을 試하여 보려던 것이 아닌가 한다. (忽都答兒 使行의 結果는 아래에 보임) 蒙古 側에서 이와 같이 至再至三 側面 工作을 行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事情이 있는 것이나 (이에 關하야는 下節 「三別抄에 對한 蒙古 側의 懷柔工作」條 叅照) 그 中에도 水戰에 自信이 없던 것이 主要한 條件이 아닐런가 한다. 當時 三別抄와의 水戰에서 자조 失敗를 받은 지라 冒險的 作戰을 避하려던 것도 事實이었나니 「高麗安撫使阿哈(〇阿海) 略地珍島 與逆黨遇 多所亡失 中書省臣言 諜知珍島▶P52-1 餘糧將竭 宜乘弱攻之 詔不許 令巡視險要 常爲之備」(元史 世祖本紀 至元 八年 正月 丙戌條)라 한 것도 這間의 事情을 말하는 바이다.





본문1-2: (2)삼별초난의 후기


① 삼별초의 제주 입거와 그의 활동
쪽수▶P57-2① 三別抄의 濟州 入據와 그의 活動
제주는 일찍부터 고려 항몽파의 소위 권토(捲土) 입해의 목적지로 되어왔던 만큼 삼별초가 진도에 입거한 뒤로 송경 측과 삼별초 사이에는 제주의 공방전이 실로 장렬하였던 것이다. 삼별초가 남쪽으로 내려와 해상에 횡행하게 되니 안찰사 권단인물(權晅)이 영암부사 김수인물(金須)를 시켜 병200으로써 제주를 지키게 하였고 다시 장군 고여림인물(高汝霖)이 병70을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가 김수인물와 같이 방비에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초(3일)에 이르러 삼별초의 장수 이문경인물등이 명월포(주서)로부터 상륙하여 동제원(주동 9리)에 진을 베풀고 방어군을 송담천(주동 13리)에서 역격하여 김수인물고여림인물을 비롯하여 전군을 섬멸하고 수륙 교통의 요지인 조천포(주동)에 현대문주74▶웅거하게 되었던 것이다.[a 26] 당시의 전황이 얼마나 격렬하였음은 다음의 기사로 알 수가 있는 바이니 고려사절요서적(권18) 원종 11년 11월조에
쪽수▶P57-3濟州는 일직부터 高麗 抗蒙派의 所謂 捲土 入海의 目的地로 되어왔든 만큼 三別抄가 珍島에 入據한 뒤로 松京 側과 三別抄 사이에는 濟州의 攻防戰이 實로 壯烈하였든 것이다. 三別抄가 南으로 나려와 海上에 橫行케 되매 按察使 權晅이 靈岩副使 金須를 식혀 兵二百으로써 濟州를 직히게 하였고 다시 將軍 高汝霖이 兵七十을 거느리고 濟州에 드러가 金須와 같이 防備에 當하고 있었다. 그런데 同年 十一月 初(三日)에 이르러 三別抄의 將 李文京 等이 明月浦(州西)로부터 上陸하야 東濟院(州東 九里)에 陣을 베풀고 防禦軍을 松淡川(州東 十三里)에서 逆擊하야 金須 高汝霖을 비롯하야 全軍을 殲滅하고 水陸 交通의 要地인 朝天浦(州東)에 원문주74▶웅거케 되였든 것이다.[26] 當時의 戰況이 얼마나 激烈하였음은 다음의 記事로 알 수가 있는 바이니 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 十一月條에

賊陷濟州 初按察使權晅 遣靈巖副使金須 以兵二百守濟州 又使將軍高汝霖 以兵七十繼之 及賊攻濟州 須汝霖等力戰死之 羅州人陳子和 直入賊中 斬其將郭延壽以出 又入亦如之 士卒喜躍 旣而復入 爲賊所害 賊乘勝 盡殺官軍

쪽수▶P57-4

賊陷濟州 初按察使權晅 遣靈巖副使金須 以兵二百守濟州 又使將軍高汝霖 以兵七十繼之 及賊攻濟州 須汝霖等力戰▶P58-1死之 羅州人陳子和 直入賊中 斬其將郭延壽以出 又入亦如之 士卒喜躍 旣而復入 爲賊所害 賊乘勝 盡殺官軍

이라 하였다. 그 뒤 원종인물12년 5월에 진도가 함락되니 김통정인물이 삼별초의 잔당을 거느리고 그들이 최후의 아성(牙城)으로 지켜오던 이 제주도로 들어와 다시 진용을 정돈하고 기세를 진작(振作)하기에 이르렀으며 일로부터 김통정인물이 중심이 된 삼별초의 활동을 보게 된 것이다.
쪽수▶P58-2이라 하였다. 그 뒤 元宗 十二年 五月에 珍島가 陷落되매 金通精이 三別抄의 殘黨을 거느리고 그들이 最後의 牙城으로 직혀오던 이 濟州島로 드러와 다시 陣容을 整頓하고 氣勢를 振作하기에 이르렀으며 일로부터 金通精이 中心이 된 三別抄의 活動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 거점을 제주에 옮기게 된 삼별초는 방비시설에 힘을 기울여 몇 겹의 성책을 쌓았던 것이니 고려사서적원종 세가 13년 6월 을묘조에
쪽수▶P58-3當時 據點을 濟州에 옴기게 된 三別抄는 防備施設에 힘을 기우려 몇 겹의 城柵을 쌓었든 것이니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三年 六月 乙卯條에

時 賊旣入濟州 築內外城 恃其險問 日益猖獗 常出擄掠 濱海簫然

쪽수▶P58-4

時 賊旣入濟州 築內外城 恃其險問 日益猖獗 常出擄掠 濱海簫然

이라 하였다. 그런데 내성에 나아가 살펴보면 동국여지승람서적(권38) 제주 고적조에
쪽수▶P58-5이라 하였다. 그런데 內城에 나아가 살펴보면 東國輿地勝覧(卷三十八) 濟州 古跡條에

缸波頭古城 (在州西四十里 城中有泉 大旱不渴 高麗元宗十二年 遣金方慶 討三別抄於珍島破之 金通精率三別抄 來據貴日村缸波頭里 築此城以拒之 方慶等進攻拔之)

쪽수▶P58-6

缸波頭古城 (在州西四十里 城中有泉 大旱不渴 高麗元宗十二年 遣金方慶 討三別抄於珍島破之 金通精率三別抄 來據貴日村缸波頭里 築此城以拒之 方慶等進攻拔之)

라 하였다. 귀일촌(貴日村)은 오늘날 상하 귀리(貴里) 부근인 듯하며 항파두리(缸波頭里)는 오늘날 외도리(外都里) 부근이 아닌가 하거니와 이 항파두 고성이 실로 삼별초의 내성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이며 외성으로 말하면 주치 서남 36리에 있었다는 고토성이 아니었던가 하니 같은 책 같은 조에
쪽수▶P58-7라 하였다. 貴日村은 今 上下 貴里 附近인 듯하며 缸波頭里는 今 外都里 附近이 아닌가 하거니와 이 缸波頭 古城이 實로 三別抄의 內城이었음은 疑心할 餘地가 없는 바이며 外城으로 말하면 州治 西南 三十六里에 있었다는 古土城이 아니었든가 하나니 同書 同條에

古土城在州西南三十六里 周十五里 三別抄所築 今皆頹圮

쪽수▶P58-8

古土城在州西南三十六里 周十五里 三別抄所築 今皆頹圮

라 하였다. 이 고토성은 범위로 보아 외성인 듯한 위에 그의 위치로 보아도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내성으로부터 4리 쯤 동남으로 둘러 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밖에 삼별초의 소축(所築)으로 전해지는 현대문주75▶애월목성은 내성으로부터 서쪽 2리허(許)에 있던 것이니[a 27] 이는 내성과 동서로 대응하여 기각(掎角)의 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내성을 중심으로 하여 연안 일대에 뻗은 제방을 완연히 둘러쌓았던 듯하니 위와 같은 책 해주 고적조에
쪽수▶P58-9라 하였다. 이 古土城은 範圍로 보와 外城인 듯한 우에 그의 位置로 보아도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內城으로부터 四里 쯤 東南으로 둘러 있든 것이 아닐런가 한다. 그밖에 三別抄의 所築으로 傳해지는 원문주75▶涯月木城은▶P59-1 內城으로부터 西二里許에 있든 것이니[27] 이는 內城과 東西로 對應하야 掎角의 勢를 取하고 있는 것으로 解釋된다. 그리고 內城을 中心으로 하야 沿岸 一帶에 亘하야는 堤防을 蜿蜒히 둘러쌓었든 듯하니 同上 海州 古跡條에

古長城船懷筆 周三百餘里 高嘅元宗時 三別抄叛據珍島 王遺侍郎 高汝林(〇霖의 誤인 듯)等于耽羅 領兵一千以備之 因箸長城

쪽수▶P59-2

古長城船懷筆 周三百餘里 高嘅元宗時 三別抄叛據珍島 王遺侍郎 高汝林(〇霖의 誤인 듯)等于耽羅 領兵一千以備之 因箸長城)

이라 하였다. 이 기사로 보면 송경 측의 고여림인물등이 삼별초를 방비하고자 미리 쌓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고여림인물이 제주에 들어가자 얼마 되지 아니하여 현대문주76▶패몰(敗歿)하였으므로[a 28] 이와 같은 300여리에 걸친 장성(?)을 쌓을 시간과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서 이는 분명히 삼별초 측에서 쌓은 것으로 해석되며 또 이것을 장성이라 하였으나 이는 후인(後人)의 오전(誤傳) 또는 오인에서 나온 것으로서 저 강도의 연안 제방과 대조하여 보면 역시 연안의 방비시설에서 쌓은 제방이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쪽수▶P59-3이라 하였다. 이 記事로 보면 松京 側의 高汝霖 等이 三別抄를 防備코저 미리 쌓은 것으로 되여있으나 高汝霖이 濟州에 드러가자 얼마 되지 아니하야 원문주76▶敗歿하였음으로[28] 이와 같은 三百餘里에 亘하는 長城(?)을 쌓을 時間과 餘裕가 없었을 것으로서 이는 分明히 三別抄 側에서 쌓은 것으로 解釋되며 또 이것을 長城이라 하였으나 이는 後人의 誤傳 또는 誤認에서 나온 것으로서 저 江都의 沿岸 堤防과 對照하여 보면 亦是 沿岸의 防備施設서 쌓은 堤防이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제주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방비시설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면 규모와 구제(構制)에 있어 대개 강도의 그것과 유사한 바가 있는 것으로서 삼별초의 최후의 근거지에 대한 방어시설이 얼마나 주도(周到)하였던가를 알 수가 있거니와 여기에는 또한 방비시설이 소편(踈㴜)했던 진도에서의 쓰린 경험이 한 가지 동기가 되었든 것으로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쪽수▶P59-4濟州島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防備施設을 概察하여 보면 規模와 構制에 있어 대개 江都의 그것과 類似한 바가 있는 것으로서 三別抄의 最後의 根據地에 對한 防禦施設이 얼마나 周到하였든가를 알 수가 있거니와 여기에는 또한 防備施設이 踈㴜했든 珍島에서의 쓰린 經驗이 한 가지 動機가 되였든 것으로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삼별초가 제주에 입거한 뒤의 정치적 체제에 나아가 상고해 보면 당시 제주는 아직도 고려의 특별 행정구로 되어 있어 성주와 왕자가 얼마간 역사적인 현대문주77▶권위를 가졌던 것이다.[a 29] 그런데 이 성주 왕자와 삼별초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원고려기사서적지원 10년조에
쪽수▶P59-5다시 三別抄가 濟州에 入據한 뒤의 政治的 體制에 나아가 상고해 보면 當時 濟州는 아직도 高麗의 特別 行政區로 되여 있어 星主와 王子가 얼마간 歷史的인 원문주77▶權威를 가졌든 것이다.[29] 그런데 이 星主 王子와 三別▶P60-1抄와의 關係에 있어서는 元高麗紀事 至元 十年條에

(洪)茶邱因陳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 可遣招諭 若不從命 則以軍力 擊之不晚⋯⋯訪得通精姪金永等七人 使招通精 通精與本國星主等不從 云云

쪽수▶P60-2

(洪)茶邱因陳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 可遣招諭 若不從命 則以軍力 擊之不晚⋯⋯訪得通精姪金永等七人 使招通精 通精與本國星主等不從 云云

이라 한 것으로 보면 삼별초의 대외 교섭에 성주를 또한 내세웠던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나 다시 같은 책 탐라조에 의하면 “又兼 耽羅國王 曾來朝(지원 4년 정월에 왕자 양호인물가 건너간 것을 가리킨 것인 듯함)見今叛賊 逐其主 占據城郭 義當先平”이라 한 기사가 보이니 이는 앞서 든 기사와 자못 모순된 것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逐其主 云云”이라 한 것은 다만 삼별초가 제주를 점거하여 실권을 잡고 있는 사실을 주로 하여 부연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니 그러면 당시 삼별초 측에서는 성주 왕자를 협제(挾制) 또는 조종하여 명분상 본도의 진무와 대외 관계에 이용하였던 것으로 억측되는 바로서 이는 그들이 옹립한 새로운 왕(승화후)을 잃은 다음에 취한 바 제2단의 수단이라 할 것이다.
쪽수▶P60-3이라 한 것으로 보면 三別抄의 對外 交涉에 星主를 또한 내세웠든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나 다시 同書 耽羅條에 依하면 「又兼 耽羅國王 曾來朝(至元 四年 正月에 王子 梁浩가 건너간 것을 가르친 것인 듯함)見今叛賊 逐其主 占據城郭 義當先平」이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前擧한 記事와 자못 矛盾된 것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逐其主 云云」이라 한 것은 다만 三別抄가 濟州를 占據하야 實權을 잡고 있는 事實을 主로 하야 敷衍한 것에 不過하다고 解釋하는 것이 妥當할 듯하니 그러면 當時 三別抄 側에서는 星主 王子를 挾制 또는 操縱하야 名分上 本島의 鎭撫와 對外 關係에 利用하였든 것으로 臆測되는 바로서 이는 그들이 擁立한 新王(承化侯)을 잃은 다음에 取한 바 第二段의 手段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삼별초는 제주에 들어가 근거를 다듬으며 다시 그의 위세를 연해(沿海) 일대에 떨첬던 것이니 그의 활동 개황을 간단히 표로써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쪽수▶P60-4이와 같이 三別抄는 濟州에 드러가 根據를 다듬으며 다시 그의 威勢를 沿海 一帶에 떨첬든 것이니 그의 活動 槪況을 簡單히 表로써 드러보면 다음과 같다.
연대 활동의 개황 비고
원종 12년 11월경 횡행제도 장봉출륙 제주에 입거한 후 다시 제도를 경략한 것
13년 3·4월 회령(장흥)을 엄습하여 조선4척을 약거 해제(성남) 해남에 또 침략
5월 4일경 대포(정읍)에 내습하여 조선 23소(艘)를 약거 이 3개월에 걸쳐 탈거한 선척이 20 소반미가 3200여석, 살해한 것이 12인, 구거한 것이 24인이라 함
같은 달 8일 경상도 안렴사가 탐라간첩 2인을 포착
같은 달 20일경 탐진(강진) 회령(장흥)을 크게 분략
6월 초 삼별초의 배 6소(艘)가 안행량을 지나 북상 송경 뇌구
8월 7일 전라도 공미 800석을 탈거
9월 13일경 고란도에 습래하여 전함 6소(艘)를 불사르고 선장을 살해하며 조선관 홍주 부사 이행섬과 결성, 남포 감무를 납거 전함을 불사르고 선장 등을 살해한 것은 분명히 도해 작전의 준비를 좌절시키려는 데에서 나온 듯함
11월 15일 안남도호부(부천)에 입거하여 부사 공유(앞서 김방경과 같이 진도의 삼별초를 공격하였음)와 그 아내를 납거
같은 달 합포에 침래하여 전함 20소(艘)를 불사르고 몽고 봉졸 4인을 납거
같은 달 호제현에 침입하여 전함 3소(艘)를 불사르고 현령을 납거
같은 달 삼별초의 배가 또 영흥도(남양)에 내박(來拍)하여 근경에 횡행 왕이 50기(騎)를 몽사 흔도에게 청하여 궁금(宮禁)을 숙위하게 하다
14년 정월 23일 삼별초의 배 10척이 낙안군에 내침
같은 달 합포에 습래하여 전함 32소(艘)를 불사르고 몽고병 10여인을 죽이다
3월 20일경 탐라(진?)현에 침입하여 방수산원 정국보 등 15인을 죽이고 낭장(郎將) 오단 등 11인을 납거
쪽수▶P60-5
年代 活動의 概況 備考
元宗 十二年 十一月頃 橫行諸島 將復出陸 濟州에 入據한 後 다시 諸島를 經畧한 것
十三年 三·四月 會寧(長興)을 掩襲하야 漕船 四隻을 掠去 海際(成南) 海南에 또 侵掠
五月 四日頃 大浦(井邑)에 來襲하야 漕船 十三艘를 掠去 이 三個月에 걸처 奪去한 船隻이 二十 艘般米가 三千二百餘碩, 殺害한 것이 十二人, 驅去한 것이 二十四人이라 함
同月 八日 慶尙道 按廉使가 耽羅間諜 二人을 捕捉
同月 二十日頃 耽津(康津) 會寧(長興)을 크게 焚掠
六月 初 三別抄의 船 六艘가 安行梁을 지나 北上 松京 惱懼
八月 七日 全羅道 貢米 八百碩을 奪去
九月 十三日頃 孤瀾島에 襲來하야 戰艦 六艘를 불사르고 船匠을 殺害하며 造船官 洪州 副使 李行憸과 結城, 藍浦 監務를 拉去 戰艦을 불사르고 船匠 等을 殺害한 것은 分明히 渡海 作戰의 準備를 挫折시키려는 데에서 나온 듯함
十一月 十五日 安南都護府(富川)에 侵入하야 府使 孔愉(앞서 金方慶과 같이 珍島의 三別抄를 攻擊하였음)와 그 妻를 拉去
同月 合浦에 侵來하야 戰艦 二十艘를 불사르고 蒙古 烽卒 四人을 拉去
同月 互濟縣에 侵入하야 戰艦 三艘를 불사르고 縣令을 拉去
同月 三別抄의 船이 또 靈興島(南陽)에 來拍하야 近境에 橫行 王이 五十騎를 蒙帥 忻都에게 請하야 宮禁을 宿衛케 하다
十四年 正月 二十三日 三別抄의 船 十隻이 樂安郡에 來侵
同月 合浦에 襲來하야 戰艦 三十二艘를 불사르고 蒙古兵 十餘人을 죽이다
三月 二十日頃 耽羅(津?)縣에 侵入하야 防守散員 鄭國甫 等 十五人을 죽이고 郎將 吳旦 等 十一人을 拉去
이에 의하여 삼별초의 활동 개황을 짐작할 수가 있거니와 그들의 침공 목표는 지방 관사와 몽고인 또는 (공미) 조윤선과 전함(당시 몽고 측에서는 동정의 준비로서 합포 및 거제 등지에서 성히 전함을 건조하고 있었음) 등에 있던 것으로서 생각건대 여기에는 상대방의 물자를 빼앗아 항전의 자원을 기르려는 것과 저편의 전함을 부수어 해상 작전을 불능하게 하려던 것 그리고 관원을 살해 또는 납거한 것은 그들의 위력을 보이는 동시에 지방의 치안을 어지럽게 하려는 것 등의 의의가 있는 듯하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시 삼별초의 행동은 진도 입거 시대에 비하여 변함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다만 제주에 입거한 후로는 그들의 활동이 대개 해상에 그치고 내륙 오지에까지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 이는 삼별초가 진도 실패로 말미암아 그의 세력이 자못 멸하(滅下)한 것과 또 그의 근거지가 너무나 육지와 원격한 관계라 할 것이다.
쪽수▶P61-2이에 依하야 三別抄의 活動 槪況을 짐작할 수가 있거니와 그들의 侵攻 目標는 地方 官吏와 蒙古人 또는 (貢米) 漕運船과 戰艦(當時 蒙古 側에서는 東征의 準備로서 合浦 及 巨濟 等地에서 盛히 戰艦을 建造하고 있었음) 等에 있든 것으로서 생각컨대 여기에는 相對方의 物資를 아서 抗戰의 資源을 기르려는 것과 저편의 戰艦을 부수워 海上 作戰을 不能케 하려든 것 그리고 官員을 殺害 또는 拉去한 것은 그들의 威力을 보▶P62-1이는 同時에 地方의 治安을 어즈렵게 하려는 것 等의 意義가 있는 듯하다. 이러한 點으로 보와 當時 三別抄의 行動은 珍島 入據 時代에 比하야 變함이 없었든 것을 알 수 있으나 다만 濟州에 入據한 後로는 그들의 活動이 대개 海上에 근치고 內陸 奧地에까지 및이지 못한 것은 事實이니 이는 三別抄가 珍島 失敗로 말미암어 그의 勢力이 자못 滅下한 것과 또 그의 根據地가 너머나 陸地와 遠隔한 關係라 할 것이다.
② 삼별초에 대한 몽고 측의 회유 공작
쪽수▶P62-2② 三別抄에 對한 蒙古 側의 懷柔 工作
삼별초의 여당이 제주로 들어간 후 그의 형세가 또 다시 창궐하였음은 앞 절에서 논술한 바와 같거니와 이에 대하여 몽고 측에서는 무력 행사에 앞서 회유 공작을 다시 쓰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사서적(권27) 원종 13년 5월 갑신(27일)조에
쪽수▶P62-3三別抄의 餘黨이 濟州로 드러간 後 그의 形勢가 또 다시 猖獗하였음은 前節에서 論述한 바와 같거니와 이에 對하야 蒙古 側에서는 武力 行使에 앞서 懷柔 工作을 다시 쓰게 되였든 것이다. 高麗史(卷二十七) 元宗 十三年 五月 甲申(二十七日)條에

遣閤門副使琴熏如燕上表曰 至仁釋罪 幸開宥於自新 逋賊執迷 猶肆驕而不服 前次承都省奏奉聖旨降宣 差遣濟州招諭使閤門副使琴熏散員李貞 以四月十五日登船發去 値逆風 退泊甫麻島 逆賊金希就吳仁鳳田祐等船四隻 來奪其船 盡執人物 移載于爾船 收擥招諭文字 往告于濟州金通精 而希就等將琴熏等 遂至楸子島 留著看守 旣得廻報 希就等與琴熏等嫚罵曰 爾等嘗遣人珍島 誘我綬其心 引大軍攻破 惟是父母妻子 人情最愛重 悉已驅掠而去 玆乃我輩怨入骨髓者也 今又欲盡滅吾屬而來誘 則爾等固當殄戮無遺 然若爾 則今此事意 誰當往告者 玆用放爾 因給朽毁小舠一隻 老水手一名幷招諭文字送還 其一行內 記官電吏梢工引海等四人 皆殺之 餘外水手十人 亦欲殺之 而牽去 琴熏等盤桓島中 而得水手之脫害者三人 以前月二十九日還來

쪽수▶P62-4

遣閤門副使琴熏如燕上表曰 至仁釋罪 幸開宥於自新 逋賊執迷 猶肆驕而不服 前次承都省奏奉聖旨降宣 差遣濟州招諭使閤門副使琴熏散員李貞 以四月十五日登船發去 値逆風 退泊甫麻島 逆賊金希就吳仁鳳田祐等船四隻 來奪其船 盡執人物 移載于爾船 收擥招諭文字 往告于濟州金通精 而希就等將琴熏等 遂至楸子島 留著看守 旣得廻報 希就等與琴熏等嫚罵曰 爾等嘗遣人珍島 誘我綬其心 引大軍攻破 惟是父母妻子 人情最愛重 悉已驅掠而去 玆乃我輩怨入骨髓者也 今又欲盡滅吾屬而來誘 則爾等固當殄戮無遺 然若爾 則今此事意 誰當往告者 玆用放爾 因給朽毁小舠一隻 老水手一名幷招諭文字送還 其一行內 記官電吏梢工引海等四人 皆殺之 餘外水手十人 亦欲殺之 而牽去 琴熏等盤桓島中 而得水手之脫害者三人 以前月二十九日還來

라 한 자못 자세한 기사가 보이니 이에 의하여 같은 해 3월 9일에 “以琴熏爲濟州逆賊招諭使”(같은 책)라 한 것도 전혀 원(아래에서는 몽고를 원으로 씀) 측의 의향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으며 5월 27일에 금훈을 원에 보낸 것은 회유 공작에 그와 같이 실패한 경과를 직접 보고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삼별초 측에서 금훈 일행을 제주에 들이지 아니하고 추자도에 억류한 것은 진도에서의 전감에 비추어 애초부터 연합 측과의 통교를 끄림과 동시에 제주도 내의 사정이 외부에 누설되게 하지 아니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되며 금훈인물등에 대하여 김희취인물등이 만매(嫚罵)한 것이라든지 또 그 일행에 대한 박해와 초유 문자를 돌려보낸 것 등은 제주로부터의 회보(𢌞報)를 얻은 후의 일인 만큼 모두 김통정인물의 지휘에 의한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금훈인물일행에 대한 김희취인물등의 처단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삼별초 측의 해상 경비와 및 본도와의 연락이 매우 통제 있게 행해지던 것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쪽수▶P63-1라 한 자못 자세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에 依하야 同年 三月 九日에 「以琴熏爲濟州逆賊招諭使」(同書)라 한 것도 全혀 元(以下는 蒙古를 元으로 씀) 側의 意向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으며 五月 二十七日에 琴熏을 元에 보낸 것은 懷柔 工作에 그와 같이 失敗한 經過를 直接 報告케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三別抄 側에서 琴熏 一行을 濟州에 드리지 아니하고 楸子島에 抑留한 것은 珍島에서의 前鑑에 비추워 애초부터 聯合 側과의 通交를 끄림과 同時에 濟州島 內의 事情이 外部에 漏洩되게 하지 아니하려는 意圖에서 나온 것으로 解釋되며 琴熏 等에 對하야 金希就 等이 嫚罵한 것이라던지 또 그 一行에 對한 迫害와 招諭 文字를 돌려보낸 것 等은 濟州로부터의 𢌞報를 얻은 後의 일인 만큼 모다 金通精의 指揮에 依한 것임은 明白한 事實이다. 그리고 琴熏 一行에 對한 金希就 等의 處斷으로 미루워 보면 當時 三別抄 側의 海上 警備와 믿 本島와의 連絡이 매우 統制 있게 行해지든 것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원에서는 제주의 삼별초에 대하여 처음부터 회유책을 쓰게 된 것은 앞서 진도에 대한 공작과 대개 그의 궤를 동일히 하는 바가 있거니와 다시 그의 의의를 추구(追究)하여 보면 ① 제주 진격은 진도에 비하여 해상 작전이 더욱 위험한 것 ② 동정의 관계가 또한 원으로 하여금 그러한 공작을 행하게 한 큰 동기라 할 것이다. 원래 동정은 몽고 측의 숙제로서 그것을 실행하려면 먼저 해상의 적인 (제주의) 삼별초를 속(速)하고 또한 온편하게 처치하지 아니하지 못할 것은 말 할 것도 없는 바로서 원고려기사서적(탐라) 지원 9년 11월 15일조에 보이는
쪽수▶P63-2이와 같이 元에서는 濟州의 三別抄에 對하야 처음부터 懷柔策을 쓰게 된 것은 앞서 珍島에 對한 工作과 대개 그의 軌를 同一히 하는 바가 있거니와 다시 그의 意義를 追究하여 보면 ① 濟州 進擊은 珍島에 比하야 海上 作戰이 더욱 危險한 것 ② 東征의 關係가 또한 元으로 하여금 그러한 工作을 行케 한 一大 動機라 할 것이다. 元來 東征은 蒙古 側의 宿題로서 그것을 實行하려면 먼저 海上의 敵인 (濟州의) 三別抄를 速하고 또한 穩便하게 處置하지 아니치 못할 것은 말 할 것도 없는 바로서 元高麗紀事(耽羅) 至元 九年 十一月 十五日條에 보이는

현대문주78▶中書省奏 先奉旨 議耽羅日本事 臣等同樞密院官詢問 有自南國 經由日本來者 耽羅人三名 畫到圖本[a 30] 稱日本太宰府等處 下船之地 俱可下岸 約用軍二三萬 臣等謂若先事日本 未見本國順逆之情 恐有後詞 可先平訖耽羅賊寇⋯⋯⋯上曰行之 至如耽羅歸順不用兵 別亦有調用之處 卿等議合用多少兵力

쪽수▶P64-1

원문주78▶中書省奏 先奉旨 議耽羅日本事 臣等同樞密院官詢問 有自南國 經由日本來者 耽羅人三名 畫到圖本[30] 稱日本太宰府等處 下船之地 俱可下岸 約用軍二三萬 臣等謂若先事日本 未見本國順逆之情 恐有後詞 可先平訖耽羅賊寇⋯⋯⋯上曰行之 至如耽羅歸順不用兵 別亦有調用之處 卿等議合用多少兵力

이라 한 기사에 징(徵)하여도 그의 사정을 간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원 측에서는 이러한 사유 아래에서 회유 공작에 최후까지 노력하였으니 앞서 든 금훈인물일행의 실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홍다구인물는 다시 김통정인물의 친족과 당류를 탐색하여 제주에 보내게 되었다. 고려사서적원종 세가 13년 8월조에
쪽수▶P64-2이라 한 記事에 徵하여도 그의 事情을 看取할 수가 있는 것이다. 元 側에서는 이러한 事由 아래에서 懷柔 工作에 最後까지 努力하였으니 前擧 琴熏 一行의 失敗가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洪茶丘는 다시 金通精의 親族과 黨類를 探索하야 濟州에 보내게 되였다. 高麗史 元宗 世家 十三年 八月條에

茶丘表陳 金通精之黨 多在王京 可使招之 招而不從 擊之未晩 帝從之 茶丘乃遣通精之姪郞將金贊李邵 賊將吳仁節族桓文伯等五人 使往諭之 通精等不從 留金贊 餘皆殺之.

쪽수▶P64-3

茶丘表陳 金通精之黨 多在王京 可使招之 招而不從 擊之未晩 帝從之 茶丘乃遣通精之姪郞將金贊李邵 賊將吳仁節族桓文伯等五人 使往諭之 通精等不從 留金贊 餘皆殺之.

라 하였고 앞서 든 원고려기사서적(지원 10년 4월 28일조)에
쪽수▶P64-4라 하였고 前擧 元高麗紀事(至元 十年 四月 二十八日條)에

初承化公旣死 其黨金通精復叛 引軍突入耽羅拒守 (中畧) 茶邱因陳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 可遣招誘 若不從命 則以軍力擊之不晚 事聞 奉旨命茶邱 於全羅道訪得通精姪金永等七人使招通精 通精與本國星主等不從 盡殺使命 惟留永

쪽수▶P64-5

初承化公旣死 其黨金通精復叛 引軍突入耽羅拒守 (中畧) 茶邱因陳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 可遣招誘 若不從命 則以軍力擊之不晚 事聞 奉旨命茶邱 於全羅道訪得通精姪金永等七人使招通精 通精與本國星主等不從 盡殺使命 惟留永

이라 하였다. 이 두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대개 일치하나 고려사서적에는 김통정인물의 조카를 김찬인물이라 하였으나 원고려기사서적에는 김영인물으로 되어 있으며 또 김영인물을 전라도에서 방득(訪得)하였다 하여 자못 상세히 적혀 있다. 그런데 김찬인물김영인물은 전혀 동일인을 이명(異名)으로 적은 듯하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단정하기가 어려운 바이다. 김통정인물의 조카가 낭장의 직을 띠었던 것으로 보면 김통정인물의 일족은 상당한 명문이었던것으로 현대문주79▶해석되거니와[a 31] 그의 족당들은 김통정인물의 관계로 말미암아 도성에 안주하지 못할 것은 넉넉히 상상할 수가 있는 바이다. 생각건대 당시 도성에 거주하던 그의 족당들은 지방에 산주(散走)하였던 듯하니 이와 같이 본다면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이니 “通精之黨 多在王京”이라는 기사는 그가 본래 명족으로서 그리 족당이 도성에 많이 거주하였던 사실에서 나온 것이며 “於全羅道訪得通精姪金永等 云云”은 그의 족당이 지방으로 산주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현대문주80▶그리고 제주에 보낸 인원의 수에 있어서도 사적(史籍)에 따라 혹은 5인 혹은 6인 또 7인으로 쓰여 있어[a 32] 또한 속단하기가 어려운 바이다. 어쨌든 원 측의 이러한 회유 공작은 끝까지 실패를 거듭한 것이었으니 이에서 원은 드디어 전부터 무력 토벌을 주장하던 현대문주81▶고려 정부[a 33]와 연합을 굳게 하여 무력으로써 제주 공략을 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쪽수▶P64-6이라 하였다. 이 두 記事를 對照하여 보면 대개 一致하나 高麗史에는 金通精의 姪을 金賛이라 하였으나 元高麗紀事에는 金永으로 되여 있으며 또 金永을 全羅道에서 訪得하였다 하야 자못 詳細히 적혀 있다. 그런데 金賛과 金永은 全혀 同一人을 異名으로 적은 듯하나 어느 것이 올흔지는 斷定하기가 어려운 바이▶P65-1다. 金通精의 姪이 郎將의 職을 띄웠던 것으로 보면 金通精의 一族은 相當한 名門이엇던것으로 원문주79▶解釋되거니와[31] 그의 族黨들은 金通精의 關係로 말미암어 都城에 安住치 못할 것은 넉넉히 想像할 수가 있는 바이다. 생각컨대 當時 都城에 居住하던 그의 族黨들은 地方에 散走하였던 듯하니 이와 같이 본다면 「高麗王京 多有通精親戚」이니 「通精之黨 多在王京」이라는 記事는 그가 本來 名族으로서 그리 族黨이 都城에 많이 居住하였던 事實에서 나온 것이며 「於全羅道訪得通精姪金永等 云云」은 그의 族黨이 地方으로 散走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원문주80▶그리고 濟州에 보낸 人員의 數에 있어서도 史籍에 따러 或은 五人 或은 六人 또 七人으로 씨여 있어[32] 또한 速斷키가 어려운 바이다. 어째던 元 側의 이러한 懷柔 工作은 끝까지 失敗를 거듭한 것이었나니 이에서 元은 디디여 前부터 武力 討伐을 主張하든 원문주81▶高麗 政府[33]와 聯合을 굳게 하야 武力으로써 濟州 攻略을 行하기에 이른 것이다.
③ 여몽 연합군의 제주 공함과 삼별초의 복멸
쪽수▶P65-2③ 麗蒙 聯合軍의 濟州 攻陷과 三別抄의 覆滅
회유 공작에 실패를 거듭한 원에서는 드디어 무력 행사로 나오게 될 것도 또한 자연의 세라 할 것이다. 앞서 든 원고려기사서적
쪽수▶P65-3懷柔 工作에 失敗를 거듭한 元에서는 디디여 武力 行使로 나오게 될 것도 또한 自然의 勢라 할 것이다. 前擧 元高麗紀事에

中書省奏 先奉旨 議耽羅日本事⋯⋯⋯臣等謂 若先事日本 未見本國順逆之情 恐有後詞 可先平訖耽羅賊寇⋯⋯上曰察忽(〇洪茶丘)先令人入耽羅 今回未 臣僚奏未回 上曰其人回日 若耽羅歸順 夫復何言 又奏其人回而不歸順 竊恐遲誤軍事 上曰行之 至如耽羅歸順不用兵 別亦有調用之處 卿等議合用多少兵力 回奏臣等約量本處(〇高麗)屯田軍 可摘二千 復於漢軍內選三二千人 船中載馬費力 蒙古軍可少 差高麗國合僉五六千 共一萬餘軍可矣 上曰武衛軍差二千 卿等更議餘者

쪽수▶P65-4

中書省奏 先奉旨 議耽羅日本事⋯⋯⋯臣等謂 若先事日本 未見本國順逆之情 恐有後詞 可先平訖耽羅賊寇⋯⋯上曰察忽(〇洪茶丘)先令人入耽羅 今回未 臣僚奏未回 上曰其人回日 若耽羅歸順 夫復何言 又奏其人回而不歸順 竊恐遲誤軍事 上曰行之 至如耽羅歸順不用兵 別亦有調用之處 卿等議合用多少兵力 回奏臣等約量本處(〇高麗)屯田軍 可▶P66-1摘二千 復於漢軍內選三二千人 船中載馬費力 蒙古軍可少 差高麗國合僉五六千 共一萬餘軍可矣 上曰武衛軍差二千 卿等更議餘者

라 하였고 다시 원사서적(본기 제7) 지원 9년 11월 기사(15일)조에 나아가 보면
쪽수▶P66-2라 하였고 다시 元史(本紀 第七) 至元 九年 十一月 己巳(十五日)條에 나아가 보면

勅發屯田軍二千 漢軍二千 高麗軍六千 仍益武衛軍二千 征耽羅

쪽수▶P66-3

勅發屯田軍二千 漢軍二千 高麗軍六千 仍益武衛軍二千 征耽羅

라 하였다. 전자의 기사로써 우리는 동정을 앞두고 원 측이 탐라 문제에 얼마나 초조하였음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다시 동병(動兵)에 있어 전후 두 기사를 통하여 보면 그들의 계획한 동원의 수는 약 1만2천병으로서 무술군 2천을 파견할 것은 먼저 원주(元主)가 즉결한 것이며 다시 한군 2천과 둔전군 (특히 염주 둔전군이 이에 당하였던 듯함) 2천과 고려군 6천을 조발하게 할 것도 같은 날 중서성에서 의결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다. 그런데 다시 고려의 군액에 나아가 살펴보면 앞서 든 원 측의 기록과 고려사서적“元以攻討濟州 詔王簽軍六千水手三千”(원종 세가 13년 12월 을미조)이라 한 것은 서로 조응되는 바거니와 고려 정부에서도 전부터 몽고 측과 합작하여 무력 토벌을 주장하여 온 만큼 원 측의 요구 군액에 충당하려 제도에 손을 펼쳐 군정 징모에 노력한 것은 “分遺抄軍別監于諸道”(위와 같은 왕 12월 기해조) “命樞密院副使宋松禮上將軍徐裕點兵”(위와 같은 달 신축조)이라 한 기사로써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동원 수는 “金方慶與忻都茶丘等 以全羅道一百六十艘 水陸兵一萬餘人至耽羅 與賊戰”(위와 같은 책 원종 14년 4월 경술조)이라 한 것과 “以方慶爲行營中軍兵馬使元帥 遣之 方慶更鍊卒幷水軍萬餘人(〇연합군의 총수인 듯함)與忻都茶丘 屯潘南縣 云云”(위와 같은 책 김방경전)이라 한 것으로 보면 대개 원 측의 요구액에 달하였던 것으로 해석되니 삼별초의 남하한 직후의 상황에 비하여 보면 당시 김방경인물의 통솔 하에 있던 송경 측의 군용도 현저히 정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쪽수▶P66-4라 하였다. 前者의 記事로써 吾人은 東征을 앞두고 元 側이 耽羅 問題에 얼마나 焦燥하였음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다시 動兵에 있어 前後 두 記事를 通하야 보면 그들의 計劃한 動員의 數는 約 一萬二千兵으로서 武術軍 二千을 派遣할 것은 먼저 元主가 即決한 것이며 다시 漢軍 二千과 屯田軍 (特히 鹽州 屯田軍이 이에 當하였던 듯함) 二千과 高麗軍 六千을 調發케 할 것도 同日 中書省에서 議決한 것으로 解釋되는 바이다. 그런데 다시 高麗의 軍額에 나아가 살펴보면 前擧 元 側의 記錄과 高麗史의 「元以攻討濟州 詔王簽軍六千水手三千」(元宗 世家 十三年 十二月 乙未條)이라 한 것은 서로 照應되는 바어니와 高麗 政府에서도 前부터 蒙古 側과 合作하야 武力 討伐을 主張하여 온 만큼 元 側의 要求 軍額에 充當하려 諸道에 손을 펼처 軍丁 徵募에 努力한 것은 「分遺抄軍別監于諸道」(同上 十二月 己亥條) 「命樞密院副使宋松禮上將軍徐裕點兵」(同上 辛丑條)이라 한 記事로써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야 高麗의 動員 數는 「金方慶與忻都茶丘等 以全羅道一百六十艘 水陸兵一萬餘人至耽羅 與賊戰」(同上 元宗 十四年 四月 庚戌條)이라 한 것과 「以方慶爲行營中軍兵馬使元帥 遣之 方慶更鍊卒幷水軍萬餘人(〇聯合軍의 總數인 듯함)與忻都茶丘 屯潘南縣 云云」(同上 金方慶傳)이라 한 것으로 보면 대개 元 側의 要求額에 達▶P67-1하였던 것으로 解釋되나니 三別抄의 南下한 直後의 狀況에 比하야 보면 當時 金方慶의 統率 下에 있던 松京 側의 軍容도 顯著히 整頓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문주82▶어쨌든 원에서는 이상과 같이 연합 병원의 배정을 세운 다음에 다시 3군의 부서를 정하고 군기(軍期)는 3월 초로부터 3월 중순의 사이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니[a 34] 이는 습열한 하절(夏節)이 오기 전에 해상 진격을 하려는 것이었다.(위의 절 진도 공함전 참조) 이에 호응하여 고려에서는 대장군 김백균인물으로 경상도 수로 방호사에 판각문사 현대문주83▶이신손인물[a 35]으로 충청도 방호사에 임명하여 제주를 중간에 두고 동과 서북의 해상 방비를 엄히 하고(원종 14년 2월) 중군 행영 병마원사 김방경인물이 우선 정기(精騎) 9백으로써 몽장 흔도인물등과 같이 출정하게 되었다.(2월 20일)
쪽수▶P67-2원문주82▶어째던 元에서는 以上과 같이 聯合 兵員의 配定을 세운 다음에 다시 三軍의 部署를 定하고 軍期는 二月 初로부터 三月 中旬의 사이로 定하게 되였던 것이니[34] 이는 濕熱한 夏節이 오기 前에 海上 進撃을 하려는 것이었다.(上節 珍島 攻陷條 叅照) 이에 呼應하야 高麗에서는 大將軍 金伯鈞으로 慶尙道 水路 防護使에 判閣門事 원문주83▶李信孫[35]으로 忠淸道 防護使에 任命하야 濟州를 中間에 두고 東과 西北의 海上 防備를 嚴히 하고(元宗 十四年 二月) 中軍 行營 兵馬元帥 金方慶이 우선 精騎 八百으로써 蒙將 忻都 等과 같이 出征케 되였다.(二月 二十日)
여몽 연합군은 반남현(나주)에 집결하여 3군의 부서를 다시 편정(編整)하였던 것이다. 중군을 주로 좌우 양익(兩翼)에 나누어 적을 엄격(掩擊)하게 한 것으로서 중군은 김방경인물흔도인물가 지휘에 당하게 된 것이니 이러한 작전은 대개 진도 공략 때의 것과 같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연합군은 얼마 동안 반남에서 도해 진공의 준비와 천후의 순조를 기다리다가 같은 해 4月 9일경에 이르러 현대문주84▶진공을 개시한 듯한데[a 36] 처음에는 풍도로 말미암아 선척이 많이 표몰되었었으나 김방경인물등이 뒤를 밀어 드디어 모험적 총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연합군은 먼저 추자도에 건너가 풍세를 가누어 가지고 같은 달 28일에(경술) 3군이 병진하여 노도를 헤치고 불의의 공격을 가하게 되었던 것이니 당시의 전황에 관하여 고려사서적김방경전에 의하면
쪽수▶P67-3麗蒙 聯合軍은 潘南縣(羅州)에 集結하야 三軍의 部署를 다시 編整하였던 것이다. 中軍을 主로 左右 兩翼에 나누워 敵을 掩擊케 한 것으로서 中軍은 金方慶과 忻都가 指揮에 當케 된 것이니 이러한 作戰은 대개 珍島 攻略 時의 것과 같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야 聯合軍은 얼마 동안 潘南에서 渡海 進攻의 準備와 天候의 順調를 기다리다가 同年 四月 九日頃에 이르러 원문주84▶進攻을 開始한 듯한데[36] 처음에는 風濤로 말미암어 船隻이 많이 漂沒되였었으나 金方慶 等이 뒤를 미러 디디여 冒險的 總攻擊을 敢行하기에 이를었다. 聯合軍은 먼저 楸子島에 건너가 風勢를 가누워 가지고 同月 二十八日에(庚戌) 三軍이 幷進하야 怒濤를 헛치고 不意의 攻擊을 加하게 되었던 것이니 當時의 戰況에 關하야 高麗史 金方慶傳에 依하면

以方慶爲行營中軍兵馬元帥遣之 方慶更鍊卒幷水軍萬餘人 與忻都茶丘 屯潘南縣 將發 諸道戰艦 皆爲風簸蕩 獨以全羅道一百六十艘 次楸子島候風 夜半風急 不知所指 黎明已近耽羅 風濤洶湧 進退失據 方慶仰天太息曰 社稷安危 在此一擧 今日之事 不在我乎 俄而風浪止 中軍入自咸德浦 賊伏兵岩石閒 踴躍大呼以拒之 方慶厲聲 趣諸船並進 隊正高世和挺身 突入賊陣 士卒乘勢爭赴 將軍羅裕將銳兵繼至 殺獲甚衆 左軍戰艦三十艘 自飛揚島 直擣賊壘 賊風靡 走入子城 官軍踰外城入 火矢四發 烟焰漲天 賊衆大亂 有自賊中來投者曰 賊已勢窮謀遁 可急擊之 旣而賊酋金通精 率其徒七十餘人 遁入山中 賊將李順恭曹時適等 肉袒降 方慶麾諸將入子城 士女號哭 方慶曰只誅巨魁耳 汝等勿懼 執其魁金允敘等六人 斬于通街 擒親黨三十五人 分載降衆一千三百餘人而還

쪽수▶P67-4

以方慶爲行營中軍兵馬元帥遣之 方慶更鍊卒幷水軍萬餘人 與忻都茶丘 屯潘南縣 將發 諸道戰艦 皆爲風簸蕩 獨以全▶P68-1羅道一百六十艘 次楸子島候風 夜半風急 不知所指 黎明已近耽羅 風濤洶湧 進退失據 方慶仰天太息曰 社稷安危 在此一擧 今日之事 不在我乎 俄而風浪止 中軍入自咸德浦 賊伏兵岩石閒 踴躍大呼以拒之 方慶厲聲 趣諸船並進 隊正高世和挺身 突入賊陣 士卒乘勢爭赴 將軍羅裕將銳兵繼至 殺獲甚衆 左軍戰艦三十艘 自飛揚島 直擣賊壘 賊風靡 走入子城 官軍踰外城入 火矢四發 烟焰漲天 賊衆大亂 有自賊中來投者曰 賊已勢窮謀遁 可急擊之 旣而賊酋金通精 率其徒七十餘人 遁入山中 賊將李順恭曹時適等 肉袒降 方慶麾諸將入子城 士女號哭 方慶曰只誅巨魁耳 汝等勿懼 執其魁金允敘等六人 斬于通街 擒親黨三十五人 分載降衆一千三百餘人而還

이라 하였다. 여몽 연합군은 험한 풍도를 무릅쓰고 기습상륙을 감행한 것으로 김방경인물 등이 지휘하는 중군은 함덕포(조천리)로부터 상륙하여 동으로부터 맹공을 가하였고 좌군은 비양도(주치의 서해상에 있음)로부터 동으로 엄격하여 삼별초의 본거(항파두성)를 직충(直衝)하였다. 그리하여 삼별초로 하여금 방어의 겨를도 없이 와해케 한 것은 또한 진도 공함의 예와 유사한 바가 있다. 이리하여 항몽 세력의 최후의 아성은 드디어 완전히 붕괴가 되었고 김통정인물현대문주85▶자액[a 37]과 아울러 삼별초는 역사상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쪽수▶P68-2이라 하였다. 麗蒙 聯合軍은 險한 風濤를 무릅쓰고 奇襲上陸을 敢行한 것으로 金方慶 等이 指揮하는 中軍은 咸德浦(朝天里)로부터 上陸하야 東으로부터 猛攻을 加하였고 左軍은 飛揚島(州治의 西海上에 있음)로부터 東으로 掩擊하야 三別抄의 本據(缸波頭城)를 直衝하였다. 그리하야 三別抄로 하여금 防禦의 겨를도 없이 瓦解케 한 것은 또한 珍島 攻陷의 例와 類似한 바가 있다. 이리하야 抗蒙 勢力의 最後의 牙城은 디디여 完全히 崩壞가 되었고 金通精의 원문주85▶自縊[37]과 아울러 三別抄는 歷史上에 終焉을 告하게 되였다.














본문1-3: (3)삼별초의 패인


끝으로 삼별초의 패인에 나아가 간단한 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① 삼별초는 원래 고려 국군의 중심세력으로서 그의 향배는 곧 국운을 좌우하리 만큼 되었으며 그 위에 대몽 항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자신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송경 측과 몽고를 상대로 하는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된 주요한 동기라 할 것이나 당시 국정에 나아가 살펴보면 국민의 다수는 오랫동안 전란의 구렁에 빠졌던 나머지에 명분에 순응하여 원종인물현대문주86▶화책(和策)에 쓸게 되었음[a 38]은 차라리 자연의 세라 할 것으로서 삼별초에 향응한 것은 밀양의 방포 일파와 현실을 저주하던 숭겸인물(崇謙) 등의 노예 무리 등 2, 3의 예를 제하고는 그다지 많지 못하였다. 이는 국민의 다수가 평화를 열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② 삼별초가 진도로 들어간 뒤에 그의 내륙에의 발전이 민심의 귀추에 제약되어 그다지 활발치 못한 반면에 송경 측에서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가지고 민심을 수습하는 동시에 각 주현의 방비를 점차로 강화하게 하였고 또 몽고와의 합작이 더욱 혈밀화(梨密化)하여 특히 몽고에서는 각지(봉, 백, 염, 김 등주(等州))에 둔전제를 베풀어 (몽고의 둔전은 다만 삼별초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으나) 삼별초에 대한 압력은 날을 따라 증강하게 되었다. ③ 삼별초는 진도에 들어간 후에 다만 그의 해상 세력을 자부하여 해상과 연안의 초략(抄掠)으로써 자원 획득의 유일한 수단을 삼아 구차히 섬 안에서 시일을 보내는 한편에 연합 측의 해상 세력을 과중히 경시하여 진도의 방비까지 진루(陳漏)히 한 결과 드디어 진도를 쉽사리 빼앗긴 것이니 이것이 삼별초의 패인에 있어 자못 중대한 것이다. 진도의 함락으로 말미암아 삼별초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으니 그들의 중심 인물을 거의 다 잃어버렸으며 치중 축적(畜積)은 하루 아침에 피탈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잔당이 제주로 들어간 뒤에는 그의 세력은 벌써 편단(鞭短) 불급의 탄(歎)을 면하지 못한 것으로서 비록 일시에는 연안 일대를 소연하게 한 바가 있었으나 그들은 벌써 정치적 의의를 잃고 점차 해구의 운명에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도 함락은 삼별초로 하여금 정치적 성능을 잃게 한 중대한 사건이라 할 것이다.
쪽수▶P68-3끝으로 三別抄의 敗因에 나아가 簡單한 考察을 試하고저 한다. ① 三別抄는 元來 高麗 國軍의 中心勢力으로서 그의 向背는 곧 國運을 左右하리 만큼 되였으며 그 우에 對蒙 抗戰에 있어서도 어느 程度의 自信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松京 側과 蒙古를 相對로 하는 三別抄의 亂이 이러나게 된 主要한 動機▶P69라 할 것이나 當時 國情에 나아가 살펴보면 國民의 多數는 오랬동안 戰亂의 굴렁에 빠젔던 남어지에 名分에 順應하야 元宗의 원문주86▶和策에 쓸게 되였음[38]은 차라리 自然의 勢라 할 것으로서 三別抄에 響應한 것은 密陽의 方甫 一派와 現實을 咀呪하던 崇謙 等의 奴隷輩 等 二, 三의 例를 除하고는 그다지 많지 못하였다. 이는 國民의 多數가 平和를 熱望하였음을 意味하는 것이며, ② 三別抄가 珍島로 드러간 뒤에 그의 內陸에의 發展이 民心의 歸趨에 制約되여 그다지 活潑치 못한 反面에 松京 側에서는 大義名分을 내세워 가지고 民心을 收拾하는 同時에 各 州縣의 防備를 漸次로 强化케 하였고 또 蒙古와의 合作이 더욱 絜密化하야 特히 蒙古에서는 各地(鳳, 白, 鹽, 金等州)에 屯田制를 베푸러 (蒙古의 屯田은 다만 三別抄를 目標로 한 것이 아니었으나) 三別抄에 對한 壓力은 날을 따러 增强케 되였다. ③ 三別抄는 珍島에 드러간 後에 다만 그의 海上 勢力을 自負하야 海上과 沿岸의 抄掠으로써 資源 獲得의 唯一한 手段을 삼어 苟且히 島內에서 時日을 보내는 한편에 聯合 側의 海上 勢力을 過重히 輕視하야 珍島의 防備까지 陳漏히 한 結果 디디여 珍島를 쉽사리 빼앗긴 것이니 이것이 三別抄의 敗因에 있어 자못 重大한 것이다. 珍島의 陷落으로 말미암어 三別抄는 致命的 打擊을 받었으니 그들의 中心 人物을 거의 다 잃어버렸으며 輜重 畜積은 一朝에 被奪되였다. 그리하야 그의 殘黨이 濟州로 드러간 뒤에는 그의 勢力은 발서 鞭短 不及의 歎을 免치 못한 것으로서 비록 一時에는 沿岸 一帶를 騷然케 한 바가 있었으나 그들은 발서 政治的 意義를 일코 漸次 海寇의 運命에 轉落케 되였다. 그럼으로 珍島 陷落은 三別抄로 하여금 政治的 性能을 일케 한 重大한 事件이라 할 것이다.
④ 다시 삼별초와 연합 측을 군사상으로 비교해 보면 먼저 병력에 있어 삼별초는 비록 해상권을 차지하였다 하나 양적으로 보아 연합 측(특히 제주 공략기에 있어서의 송경 측의 병력은 자못 부흥된 관(觀)이 있었음)의 그것에 당하기 어려운 외에 무기에 있어서는 더욱이 동일의 어(語)가 되지 못하는 바이다. 현대문주87▶몽고 측에서는 화약의 무기로서[a 39] 화창 화포 화전 등 당시에 있어서는 가위 참신 경이한 것을 썼으므로 궁시 도창 등 재래 무기만 사용하던 삼별초와는 자못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바이니 삼별초가 진도와 제주에서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자 영격(迎擊)할 사이도 없이 일패도지의 참패를 입은 데에는 이러한 무기의 관계가 또한 많았던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70-1④ 다시 三別抄와 聯合 側을 軍事上으로 比較해 보면 먼저 兵力에 있어 三別抄는 비록 海上權을 차지하였다 하나 量的으로 보와 聯合 側(特히 濟州 攻略期에 있어서의 松京 側의 兵力은 자못 復興된 觀이 있었음)의 그것에 當키 어려운 外에 武器에 있어서는 더욱이 同日의 語가 되지 못하는 바이다. 원문주87▶蒙古 側에서는 火藥의 武器로서[39] 火槍 火礮 火箭 等 當時에 있어서는 可謂 嶄新 驚異한 것을 썼음으로 弓矢 刀槍 等 在來 武器만 使用하던 三別抄와는 자못 比較가 되지 아니하는 바이니 三別抄가 珍島와 濟州에서 聯合軍의 奇襲攻擊을 받자 迎擊할 사이도 없이 一敗塗地의 慘敗를 입은 데에는 이러한 武器의 關係가 또한 많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본문


본문2: 7.결언

삼별초는 쇠퇴한 부위병에 갈음하여 권신의 손으로 조직된 이래 국내의 불안과 외적의 침구로 말미암아 질적 양적의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삼별초는 처음부터 권신 무장에게 조종되어 안으로는 그들의 정권 전천 또는 쟁탈에 이용되어 일면으로는 사병과 같은 성질을 띤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출현 동기와 및 발전 과정에 있어 역대 권신 무장과는 서로 불가분의 관련을 가진 데에서 나온 바라고 할지니 이것이야말로 삼별초에게 특수성을 주게 된 주요한 조건이라 할 것이며 대외 관계로 보면 삼별초의 출현이 마침 몽고의 입구(入寇) 시대에 당하였으므로 역대 권신 무장의 (가위 전통적이라 할) 항몽 정책에 의하여 삼별초가 주로 항몽 전선에 서서 항전을 계속하여 온 것이니 고려의 항몽사(史)는 그것이 곧 삼별초의 대외 역사였다. 이와 같이 보아 온다면 삼별초는 안에 있어서는 권신과 운명을 같이 하였고 대외 관계로 볼 때에는 그것이 대몽 항전기에 출현하였다가 평화기에 들어 복멸한 것 다시 말하면 항몽에 종시한 것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쪽수▶P70-2三別抄는 衰頹한 府衛兵에 가름하야 權臣의 손으로 組織된 爾來 國內의 不安과 外敵의 侵寇로 말미암어 質的 量的의 發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三別抄는 처음부터 權臣 武將에게 操縱되여 안으로는 그들의 政權 專擅 또는 爭奪에 利用되여 一面으로는 私兵과 같은 性質을 띄운 것도 또한 事實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出現 動機와 믿 發展 過程에 있어 歷代 權臣 武將과는 서로 不可分의 關聯을 가즌 데에서 나온 바라고 할지니 이것이야말로 三別抄에게 特殊性을 주게 된 主要한 條件이라 할 것이며 對外 關係로 보면 三別抄의 出現이 마짐 蒙古의 入寇 時代에 當하였음으로 歷代 權臣 武將의 (可謂 傳統的이라 할) 抗蒙 政策▶P71-1에 依하야 三別抄가 主로 抗蒙 戰線에 서서 抗戰을 繼續하여 온 것이니 高麗의 抗蒙史는 그것이 곧 三別抄의 對外 歷史이였다. 이와 같이 보와 온다면 三別抄는 안에 있어서는 權臣과 運命을 같이 하였고 對外 關係로 볼 때에는 그것이 對蒙 抗戰期에 出現하였다가 平和期에 드러 覆滅한 것 다시 말하면 抗蒙에 終始한 것이 또한 偶然한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다시 삼별초난에 있어 우리의 고구를 요하는 것은 그것이 고려에 끼친바 영향이다. 여기에도 물론 여러 가지 각도의 시야로써 나누어 볼 수가 있을 것이나 본고에서는 다만 대내외 관계에 있어 가장 주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2, 3의 조항을 들어볼까 한다. ① 먼저 대외 관계로부터 살펴보면 앞서 임연인물의 천폐를 계기로 하여 원종인물을 드디어 자가(自家)의 약롱중물(藥寵中物)로 삼고 다시 동정을 앞에 두고 고려에의 진출에 호시탐탐하던 몽주(蒙主) 세조인물는 삼별초난을 기회로 하여 일층 그의 세력을 고려에 부식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취한 둔전책은 동정과 및 삼별초 정벌에 준비가 되는 동시에 송경 측도 견제하려는 일석이조의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몽고 측에서는 송경 측과 완전한 합작 아래에서 진도와 제주를 차례로 공략하여 드디어 뿌리 깊을 항몽 세력을 일소하는 한편에 고려 왕실과 통혼하여 고려와 소위 구생국(舅甥國)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정치 문화에 밀접한 교류를 이랏게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조선 외교사(史)상에 새로운 사례를 여른 것이며 한 ‘에포크’를 그은 것이다. 그리고 삼별초가 복멸된 후에 제주가 얼마 동안 그들의 현대문주88▶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된 것[a 40]도 삼별초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되는 바이다. ② 경제 방면에 나아가 살펴보면 수십년 동안 국가의 근거지인 강도의 축적은 거의 삼별초의 반거(搬去)한 바가 되었으며 그 밖에 해상에서 삼별초에게 피략된 공미(貢米)도 막대한 수에 달하였다. 다시 몽고에서는 둔전병과 우마(牛馬)의 양주(糧秼)를 고려에 향하여 판출하게 하였던 것으로서 그의 탐학 징색은 가위 한도가 없을 만큼 되었던 것이니 이에 관한 일례로서 원종 11년(경오)으로부터 같은 왕 13년 4월에 이르기까지의 고려에서 그들에게 공급한 물자에 관한 숫자를 들어보면 “其庚午年至今年四月晦 已曾應副軍粮十萬九千一百九十九碩六㪷 馬牛料四十三萬二千五碩六㪷 王京館供對使臣米一萬七千一百五十一碩 種子(〇둔전의)一萬五千碩”(고려사서적원종 세가 13년 4월 정사조에 수재(收載)된 원에 보낸 국서에 보임)이라 하였고 다시 제주 공함에 이르기까지 본국군에 관한 것은 차치하고 라도 몽고 군마(둔전군과 및 새로 온한 군마)에 공급한 양료(粮料)는 실로 막대한 수에 달하였던 것으로서 국고의 허알(虛謁)로 인하여 현대문주89▶수감(收歛)의 손은 자주 백관과 인민에게까지 뻗쳤던 것이다.[a 41] 그리고 제주 공함 후에 여몽 양군의 제주 주둔비(費)와 그 주의 실업민의 양료 지급은 실로 거대한 수에 달하여 당시 고려 정부에서는 지출할 능력을 잃을 정도였으니 원종인물15년 2월 갑자에 원의 중서성에 보낸 고려의 국서 중에 “又濟州留守官軍(〇元軍)幷小邦卒一千四百人 七箇月糧料 已支訖 計二千九百四碩 及羅州落後粤魯闊端赤軍粮八千碩 馬料一千三百二十五碩 悉令小邦支給 又於至元十年(〇元宗 十四年)十二月奉省旨 濟州百姓一萬二百二十三人 悉行供給 又比來軍馬糧料 無可營辦 凡歛官民者無算 又年前營造戰艦 至四月大軍入耽羅討賊 至五月晦還 故百姓未得趂時耕作 秋無收穫 又歛官民 始應副 造船巭匠及屯住經行軍馬與濟州百姓等糧料 計四萬餘碩 續有以後 金州全州羅州屯住軍幷濟州軍民糧料 供給實難”(고려사서적권27)이라 한 기사가 보인다. 이리하여 당시 고려의 국가 경제는 거의 파탄에 가까웠던 것으로서 어반미가 궐핍되어 대부(시) 주부 등이 징책에 견디지 못하여 축발 도주한 현대문주90▶사실까지 있었으며[a 42] 인민의 생활도 “百姓皆食草實木葉 雖有徵索 勢無可爲者” “小邦百姓飢困 固不暇恤”(고려사서적원종 세가 12년 8월조에 실린 몽고에 보낸 고려 국서에 보임)이라 한 만큼 비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국가 경제의 군핍은 그대로 여조(麗朝) 말기에 들어가 드디어 사전 겸병과 아울러 여조 붕괴의 일대 경제적 원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忠穆王元年八月 都評儀使司言 先王設官制祿 一二品三百六十餘石 隨品差等 以至伍尉隊正 莫不淮科數以給 故衣食足給 一切奉公 其後再因兵亂 田野荒廢 貢賦欠乏 倉庫虛謁 宰相之祿不過三十石⋯⋯近來諸功臣權勢之家 冒受賜牌 自稱本田 山川爲標 爭先據執 有違古制 乞依先王制定 京畿八縣土田 更行經理 御分宮司田 鄉更津尺驛子雜口分 位田 考覈元籍 量給兩班軍閑人口分田 元宗十二年以上 公文考覈折給 其餘諸賜給田 幷皆收奪 均給職田 餘田公收租稅 以充國用”(고려사서적권78, 식화1 과록전조이라 한 것은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거니와 특히 재정 군핍과 전제 괴란의 기인을 병란에 돌린 것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바이며 토지를 경리하는 데에도 원종 12년을 표준으로 하여 그 이전의 것은(사급전) 공문을 고핵(考覈)하여 절급하고 그 후의 것은 몰수하자 한 것으로 보면 원종인물12년경 즉 삼별초난 후에 전제가 크게 무너졌던 것도 알 수 있는 바이다. ③ 다시 삼별초의 몰락은 정중부난사건(경계지란)으로부터 시작된 무사 전천 또는 무인 정치의 종언을 지은 것이다. 고려 중말경에 나타난 무인 정치는 대개 3기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인데 제1기는 정중부인물이의민인물등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국정이 심히 소란하였고 또 무인들 사이에는 상극이 반복되던 (정중부인물 경대승인물 이의민인물 최충헌인물형제 사이의) 시기로서 무인 정치의 소위 불안정 시대였으며 제2기는 최충헌인물으로부터 최의에 이르기까지 최씨 4대의 전천 시대이니 무인 정치가 굳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며 삼별초의 출현도 또한 이 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3기는 무인 정치의 말기로서 김준인물이 최씨(의)를 복멸한 뒤로부터 임연인물에 이르기까지였다. 이 시대에 들어서는 외부(몽고)의 압력이 날로 가해 와 국정을 전천하던 권신 무장의 존재를 더욱 곤란하게 함에 이르렀다. 이에서 권신 무장들은 그들의 무사적 전통 정신과 다시 그들의 지위와 권력을 보지하려는 의도 아래에서 굳세게 항몽책을 견지하여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임연인물의 여당 배중손인물등이 중심이 된 삼별초난사건은 고려 무인 정치의 최후를 장식하는 일대 활극으로서 결국 강대한 대륙 세력에 막을 닫히게 된 것이다.
쪽수▶P71-2다시 三別抄亂에 있어 吾人의 考究를 要하는 것은 그것이 高麗에 끼친바 影響이다. 여기에도 勿論 여러 가지 角度의 視野로써 나누워 볼 수가 있을 것이나 本稿에서는 다만 對內外 關係에 있어 가장 主要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二, 三의 條項을 드러볼까 한다. ① 먼저 對外 關係로부터 살펴보면 앞서 林衍의 擅廢를 契機로 하야 元宗을 디디여 自家의 藥籠中物로 삼고 다시 東征을 앞에 두고 高麗에의 進出에 虎視眈眈턴 蒙主 世祖는 三別抄亂을 機會로 하야 一層 그의 勢力을 高麗에 扶植케 되였으니 그들이 取한 屯田策은 東征과 믿 三別抄 征伐에 準備가 되는 同時에 松京 側도 牽制하려는 一石三鳥의 政策이었다. 그리하야 蒙古 側에서는 松京 側과 完全한 合作 아래에서 珍島와 濟州를 차례로 攻略하야 디디여 뿌리 깊을 抗蒙 勢力을 一掃하는 한편에 高麗 王室과 通婚하야 高麗와 所謂 舅甥國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야 政治 文化에 密接한 交流를 이랏게 하였나니 이것이야말로 朝鮮 外交史上에 새로운 事例를 열은 것이며 한 「에포크」를 그은 것이다. 그리고 三別抄가 覆滅된 後에 濟州가 얼마 동안 그들의 원문주88▶支配 아래에 드러가게 된 것[40]도 三別抄의 關係에서 나온 것이라고 解釋되는 바이다. ② 經濟 方面에 나아가 살펴보면 數十年 동안 國家의 根據地인▶P72 江都의 蓄積은 거의 三別抄의 搬去한 바가 되였으며 그 밖에 海上에서 三別抄에게 被掠된 貢米도 莫大한 數에 達하였다. 다시 蒙古에서는 屯田兵과 牛馬의 糧秼을 高麗에 向하야 辦出케 하였던 것으로서 그의 貪虐 徴索은 可謂 限度가 없을 만큼 되였던 것이니 이에 關한 一例로서 元宗 十一年(庚午)으로부터 同 十三年 四月에 이르기까지의 高麗에서 그들에게 供給한 物資에 關한 數字를 드러보면 「其庚午年至今年四月晦 已曾應副軍粮十萬九千一百九十九碩六㪷 馬牛料四十三萬二千五碩六㪷 王京館供對使臣米一萬七千一百五十一碩 種子(〇屯田의)一萬五千碩」(高麗史 元宗 世家 十三年 四月 丁巳條에 收載된 元에 보낸 國書에 보임)이라 하였고 다시 濟州 攻陷에 이르기까지 本國軍에 關한 것은 且置하고 라도 蒙古 軍馬(屯田軍과 믿 新來한 軍馬)에 供給한 粮料는 實로 莫大한 數에 達하였던 것으로서 國庫의 虛謁로 因하야 원문주89▶收歛의 손은 자조 百官과 人民에게까지 뻐첬던 것이다.[41] 그리고 濟州 攻陷 後에 麗蒙 兩軍의 濟州 駐屯費와 該州 失業民의 糧料 支給은 實로 巨大한 數에 達하야 當時 高麗 政府에서는 支出할 能力을 일흘 程度이었나니 元宗 十五年 二月 甲子에 元의 中書省에 보낸 高麗의 國書 中에 「又濟州留守官軍(〇元軍)幷小邦卒一千四百人 七箇月糧料 已支訖 計二千九百四碩 及羅州落後粤魯闊端赤軍粮八千碩 馬料一千三百二十五碩 悉令小邦支給 又於至元十年(〇元宗 十四年)十二月奉省旨 濟州百姓一萬二百二十三人 悉行供給 又比來軍馬糧料 無可營辦 凡歛官民者無算 又年前營造戰艦 至四月大軍入耽羅討賊 至五月晦還 故百姓未得趂時耕作 秋無收穫 又歛官民 始應副 造船巭匠及屯住經行軍馬與濟州百姓等糧料 計四萬餘碩 續有以後 金州全州羅州屯住軍幷濟州軍民糧料 供給實難」▶P73(高麗史 卷二十七)이라 한 記事가 보인다. 이리하야 當時 高麗의 國家 經濟는 거의 破綻에 瀕하였던 것으로서 御飯米가 闕乏되여 大府(寺) 注簿 等이 徵責에 견디지 못하야 祝髮 逃走한 원문주90▶事實까지 있었으며[42] 人民의 生活도 「百姓皆食草實木葉 雖有徵索 勢無可爲者」 「小邦百姓飢困 固不暇恤」(高麗史 元宗 世家 十二年 八月條에 실린 蒙古에 보낸 高麗 國書에 보임)이라 한 만큼 悲慘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國家 經濟의 窘乏은 그대로 麗朝 末期에 드러가 디디여 私田 兼倂과 아울러 麗朝 崩壞의 一大 經濟的 遠因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忠穆王元年八月 都評儀使司言 先王設官制祿 一二品三百六十餘石 隨品差等 以至伍尉隊正 莫不淮科數以給 故衣食足給 一切奉公 其後再因兵亂 田野荒廢 貢賦欠乏 倉庫虛謁 宰相之祿不過三十石⋯⋯近來諸功臣權勢之家 冒受賜牌 自稱本田 山川爲標 爭先據執 有違古制 乞依先王制定 京畿八縣土田 更行經理 御分宮司田 鄉更津尺驛子雜口分 位田 考覈元籍 量給兩班軍閑人口分田 元宗十二年以上 公文考覈折給 其餘諸賜給田 幷皆收奪 均給職田 餘田公收租稅 以充國用」(高麗史 卷七十八, 食貨一 科祿田條)이라 한 것은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어니와 特히 財政 窘乏과 田制 壞亂의 起因을 兵亂에 돌린 것은 吾人의 注意를 끌런 바이며 土地를 經理하는 데에도 元宗 十二年을 標準으로 하야 그 以前의 것은(賜給田) 公文을 考覈하야 折給하고 그 後의 것은 沒收하자 한 것으로 보면 元宗 十二年頃 即 三別抄亂 後에 田制가 크게 문허졌던 것도 알 수 있는 바이다. ③ 다시 三別抄의 沒落은 鄭仲夫亂(庚癸之亂)으로부터 始作된 武士 專擅 또는 武人 政治의 終焉을 지은 것이다. 高麗 中末頃에 나타난 武人 政治는 대개 三期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인데 第一期는 鄭仲夫 李義旼 等의 專橫으로 말미암어 國情이쪽수▶P74-1 甚히 騷亂하였고 또 武人들 사이에는 相剋이 反復되던 (鄭仲夫 慶大升 李義旼 崔忠獻 兄弟 사이의) 時期로서 武人 政治의 所謂 不安定 時代이었으며 第二期는 崔忠獻으로부터 崔誼에 이르기까지 崔氏 四代의 專擅 時代이니 武人 政治가 굳어진 것도 이 時期의 일이며 三別抄의 出現도 또한 이 時期에 屬하는 것이다. 그리고 第三期는 武人 政治의 末期로서 金俊이 崔氏(誼)를 覆滅한 뒤로부터 林衍에 이르기까지 이었다. 이 時代에 드러서는 外部(蒙古)의 壓力이 날로 加해 와 國政을 專擅하던 權臣 武將의 存在를 더욱 困難케 함에 이르렀다. 이에서 權臣 武將들은 그들의 武士的 傳統 精神과 다시 그들의 地位와 權力을 保持하려는 意圖 아래에서 굳세게 抗蒙策을 堅持하여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林衍의 餘黨 裴仲孫 等이 中心이 된 三別抄의 亂은 高麗 武人 政治의 最後를 裝飾하는 一大 活劇으로서 結局 强大한 大陸 勢力에 幕을 닷치게 된 것이다.







































본문2-1: (1)추보


강도의 위치에 관하여 최근 답사한 결과로써 본 학보 제10권 소재 졸고 중 강화천도 절(節)에 보유와 정정을 더하고자 한다. 강도의 궁터와 성곽의 위치에 있어서는 기록과 구전이 자못 구구(區區)하여 거금 670년 전 약 40년 동안의 수도의 위치를 찾기에 매우 현황(眩怳)한 느낌을 주는 바이다. 강도 궁성의 위치에 나아가 먼저 동국여지승람서적(권12) 강화 고적조를 살펴보면
쪽수▶P74-2江都의 位置에 關하야 最近 踏査한 結果로써 本 學報 第十卷 所載 拙稿 中 江華遷都 節에 補遺와 訂正을 加코저 한다. 江都의 宮址와 城郭의 位置에 있어서는 記錄과 口傳이 자못 區區하야 距今 六百七十年 前 約 四十年 동안의 首都의 位置를 찾기에 매우 眩怳한 늣김을 주는 바이다. 江都 宮城의 位置에 나아가 먼저 東國輿地勝覽(卷十二) 江華 古蹟條를 살펴보면

高官城在松岳里 距府東十里 高麗高宗時所築 內外城俱土築

쪽수▶P74-3

高官城在松岳里 距府東十里 高麗高宗時所築 內外城俱土築

이라 하였다. 이 기사에는 강도의 궁성이 강화 읍치로부터 동쪽 10리 즉 강안에 가까운 (저평한)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본다면 강도 궁성은 그의 주산(主山) 송악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예의 고려 궁터의 현대문주91▶국상(局相)으로 보나[a 43] 수비적 견지로 보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 “在府東十里說”동국여지승람서적의 한 근거가 되었을 세종실록서적지리지(강화도호부)와 또 고려사서적지리지(강화현)에도 나타나는 바로서 그의 유래가 또한 없지 아니할 것이며 지금도 강화 인사들은 구전이라 하여 대개 읍 동남 정자 산하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강화부지고적조에도 이와 같이 쓰여 있으나) 생각건대 이러한 재동(또는 동남)설의 근거는 후일에 창건된 어느 이궁 또는 가궐의 현대문주92▶궁성[a 44]이 그 방면에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나온 오전(誤傳)이나 아닐까 한다.
쪽수▶P75-1이라 하였다. 이 記事에는 江都의 宮城이 江華 邑治로부터 東 十里 即 江岸에 가차운 (低平한) 地點에 있었던 것으로 되여 있다. 이와 같이 본다면 江都 宮城은 그의 主山 松岳으로부터 너머나 멀리 떠러저 있을 뿐만 아니라 例의 高麗 宮址의 원문주91▶局相으로 보나[43] 守備的 見地로 보와 首肯키 어려운 點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 「在府東十里說」은 勝覽의 한 根據가 되였을 世宗實錄 地理志(江華都護府)와 또 高麗史 地理志(江華縣)에도 나타나는 바로서 그의 由來가 또한 없지 아니할 것이며 지금도 江華 人士들은 口傳이라 하야 대개 邑 東南 亭子 山下 一帶를 가르치고 있다. (江華府志古蹟條에도 이와 같이 씨여 있으나) 생각컨대 이러한 在東(또는 東南)說의 根據는 後日에 創建된 어느 離宮 또는 假闕의 원문주92▶宮城[44]이 그 方面에 있었음으로 거기에서 나온 誤傳이나 아닐런가 한다.
그런데 우리의 관측한 바에 의하면 강도의 궁터는 치아(治衙)의 북쪽 송악산 남록에 있는 (이조의) 행궁 옛터가 곧 그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한 우리의 논거로는 ① 지세와 국상이 개성의 만월대와 혹사(酷似)하며(아래에서 들 강도지에도 이러한 기사가 보임) 또 지금도 몇 단의 계단식 옛터의 형적(形跡)이 그 일대에 남아 있다. ② 옛 남문이 지금 종각과 선원 순절 비각의 현대문주93▶지점에 있다는 것이니[a 45] 이로써 원 성곽의 범위을 추측할 수가 있거니와 이 옛 남문이 본래 부성(府城)의 것이라면 차종의 성곽으로는 너무나 상애(傸隘)한 감이 있는 바이다. 생각건대 이것이야말로 강도 내성에 해당한 것이 아닌가 하니 원래 강화천도는 창졸간에 행해진 만큼 내성은 다만 궁궐 방위의 목적으로 궁장(宮牆) 같이 초초히 쌓았던 것인데 이조(李朝)에 들어서도 그것을 부치(府治)의 내성과 같이 얼마 동안 이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쪽수▶P75-2그런데 吾人의 觀測한 바에 依하면 江都의 宮址는 治衙의 北 松岳山 南麓에 있는 (李朝의) 行宮 舊基가 곧 그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對한 吾人의 論據로는 ① 地勢와 局相이 開城의 滿月臺와 酷似하며(下擧 江都志에도 이러한 記事가 보임) 또 지금도 몇 段의 階段式舊墟의 形跡이 그 一帶에 남어 있다. ② 舊南門이 지금 鍾閣과 仙源 殉節 碑閣의 원문주93▶地點에 있다는 것이니[45] 일로써 元 城郭의 範圍을 推測할 수가 있거니와 이 舊南門이 本來 府城의 것이라면 此種의 城郭으로는 넘어나 傸隘한 感이 있는 바이다. 생각컨대 이것이야말로 江都 內城에 該當한 것이 아닌가 하나니 元來 江華遷都는 蒼卒間에 行해진 만큼 內城은 다만 宮闕 防衛의 目的으로 宮牆 같이 草草히 쌓었던 것인데 李朝에 드러서도 그것을 府治의 內城과 같이 얼마 동안 利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음 외성으로 말하면 현재 남산으로부터 현대문주94▶대문현[a 46]을 거쳐 신지동 뒷산으로 하여 동남쪽으로 둘러 있는 토성이 곧 그것으로 생각되니 강화부지서적(하) 고적조 고려성지주(註)에
쪽수▶P75-3다음 外城으로 말하면 現在 南山으로부터 원문주94▶大門峴[46]을 거처 神智洞 뒷山으로 하야 東南으로 돌러 있는 土城이 곧 그것으로 생각되나니 江華府志(下) 古蹟條 高麗城址註에

古傳記云 麗高宗之遷都也 內外城皆土築 外城周一萬六千六十六尺 舊志以長嶺之城門峴 仙源之大門峴 仁政之西門峴當之

쪽수▶P76-1

古傳記云 麗高宗之遷都也 內外城皆土築 外城周一萬六千六十六尺 舊志以長嶺之城門峴 仙源之大門峴 仁政之西門峴當之

라 하여 옛 지(志)의 기사가 인용되어 있다. 옛 지에 보이는 외성의 범위는 아직 별문제로 하더라도 대문현을 든 것은 매우 참고가 되는 바이다. 내성과 외성을 이와 같이 의정(擬定)한다면 강도의 중성은 위치로나 지세로 보아 현재 읍성이 곧 그것을 이용하여 수축(修築)한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쪽수▶P76-2라 하야 舊志의 記事가 引用되여 있다. 舊志에 보이는 外城의 範圍는 아직 別問題로 하고라도 大門峴을 든 것은 매우 叅考가 되는 바이다. 內城과 外城을 이와 같이 擬定한다면 江都의 中城은 位置로나 地勢로 보와 現在 邑城이 곧 그것을 利用하야 修築한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강도 궁터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대개 이러하거니와 다시 이에 관하여 (특히 궁터) 속수증보강도지서적(상) 고적조 연경궁주(신증)에 “今小東門內城峴北岡이오 即近代萬寧殿址似是라 窃觀松岳以南은 惟此一帶上下岡에 多舊址遺墟요 又其地勢與松京之滿月臺邱園으로 爽塏之基恰同이로다”라 하였다. 이 강도지의 ‘신증’조는 근일에 현대문주95▶찬입(撰入)한 것이거니와[a 47] 해당 책의 고려 외중성의 위치를 적은 것은 대개 강화부지(志)를 도습한 것으로서 오류가 자못 많아 취할 바가 되지 못하나 특히 강도 궁터를 이조의 행궁 유허 일대에 의정한 것은 (고려의 연경궁터가 과연 만녕전 터에 해당하는 여부는 별문제로 하고)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쪽수▶P76-3江都 宮址에 對한 吾人의 見解는 대개 이러하거니와 다시 이에 關하야 (特히 宮址) 續修增補江都誌(上) 古蹟條 延慶宮註(新增)에 「今小東門內城峴北岡이오 即近代萬寧殿址似是라 窃觀松岳以南은 惟此一帶上下岡에 多舊址遺墟요 又其地勢與松京之滿月臺邱園으로 爽塏之基恰同이로다」라 하였다. 이 江都誌의 「新增」條는 近日에 원문주95▶撰入한 것이어니와[47] 該書의 高麗 外中城의 位置를 적은 것은 대개 江華府志를 蹈襲한 것으로서 誤謬가 자못 만하야 取할 바가 되지 못하나 特히 江都 宮址를 李朝의 行宮 遺墟 一帶에 擬定한 것은 (高麗의 延慶宮址가 果然 萬寧殿址에 該當하는 與否는 別問題로 하고) 卓見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앞 회 졸고 강화천도절(節) 중에서 ‘강도의 경영과 방비’조의 내성의 주(註) “읍치 동쪽 10리 송악리에 있었음”을 삭거(削去)하고 또 외성에 있어서는 “동북 해안에 걸쳐 쌓았던 듯하다”“오늘날 남산과 대문현을 거쳐 동남 일대에 돌러 있는 것인 듯하다”로 정정하는 바이며 끝으로 이번 강화 답사에 있어 두계 이병도인물가람 이병기인물두 선생의 많은 지시에 대하여 특히 감사하는 바이다.
쪽수▶P76-4이러한 見地에서 前回 拙稿 江華遷都節 中에서 「江都의 經營과 防備」條의 內城의 註 「邑治 東 十里 松岳里에 있었음」을 削去하고 또 外城에 있어서는 「東北 海岸에 亘하야 쌓았던 듯하다」「今 南山과 大門峴을 거처 東南 一帶에 돌러 있는 것인 듯하다」로 訂正하는 바이며 끝으로 이번 江華 踏査에 있어 斗溪 李丙燾 嘉藍 李秉岐 兩 先生의 많은 指示에 對하야 特히 感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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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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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상기 삼별초-1.png
  2. 回回는 回紇(鶻)人을 가르친 것인지 回回 敎徒를 가르친 것인지 또 回回는 政治的 使命을 띠고 온 것인지 或은 宗敎的 使命을 띠고 온 것인지 硏究를 要할 問題이다.
  3. 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 六月條에 「以金方慶爲逆賊(〇三別抄를 가르친 것) 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 軍一千餘人 追討三別抄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追討使 金方慶이 겨우 六十餘名의 兵卒을 거느릴 程度로서 三別抄亂 卽後의 松京 側의 兵力이 甚히 貧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同書 元宗 十二年 四·五月條에 依하면 珍島 攻擊에 際하야 京軍을 增派할제 府衛兵이 그 額에 차지 못함으로 文武 散職 白丁 雜色과 및 僧徒를 뽑았으나 五百餘人에 지나지 못하였다.
  4. 高麗史 卷二十六 元宗 十一年 五月 乙丑條 叅照.
  5. 同書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 丙子 及二月 乙卯條의 蒙古에 보낸 國書 中에 보임.
  6. 三別抄의 江華 離去의 經路에 關하야는 本文에서 旣擧한 바와 같이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紅破江 舳臚相接 無慮千餘艘」라 하였으나 仇浦와 缸破江의 位置가 今日에 있어서는 자못 不明하다. 그러나 다시 高麗史節要 卷十八 元宗 十一年 三別抄 南下에 關한 記事 中에 「前中書舍人李淑眞 即將尹吉浦 聚奴隷 尾擊餘賊於仇浦 斬五人 至浮落山 臨海耀兵 賊望見恟懼 以爲狄兵己至 遂遁 淑眞與郎中田文胤等封府庫 使人守之 故無賴者 不得肆其姦」이라 한 記事가 보인다. 이 記事를 通하야 보면 李淑眞 尹吉甫 等은 江都로부터 尾擊에 나온 것은 疑心할 餘地가 없거니와 浮落山과 缸破江도 또한 서로 멀리 떠러저 있지 아니하였을 것도 前後 兩 記事를 對照하여 보면 首肯치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浮落山은 今 江華 西北 海岸에 聳立한 別立山이 아닌가 하나니 이는 語音 上으로나 또는 位置 上으로 보와 (「狄兵己至」라는 것은 蒙古兵이 이미 江都에 進入한 것을 意味한 듯한데 이는 三別抄가 西岸으로 빠젔음으로 蒙古兵이 或 鹽河를 건너 東으로부터 江都에 드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인 듯) 이와 같이 推斷하는 바이다. 만일 그렇다면 缸破江은 別立 山下의 江華 喬桐 兩島에 끼여 있는 海峽을 가르친 것이 아닐런지 그리고 仇浦는 지금 鳩下里 附近의 浦口를 가르친 것으로 臆測되는 바이니 鳩下里 鳩上洞이 서로 隣接하여 있어 鳩(구)音의 地名이 겹쳐 있으며 그 우에 이곳은 江都 卽 江華邑과도 平坦한 地帶를 사이에 두고 있음으로 當時 陸地 交通에 있어서도 매우 便利하였을 것으로 믿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리 본다면 前擧 兩 記事와 또는 李淑眞 等의 尾擊 方向 等이 자못 𦝰合되는 듯한 感이 있는 바이다.
  7. 高麗史 卷一 太祖 世家 一, 貞明 四年 三月條에 「唐商客 王昌瑾 忽於市中 見一人狀貌懷偉 鬚髮皓白 頭載古冠 被居士服 左手持三隻捥 右手擎一面古鏡 方一尺許 謂昌瑾曰能買我鏡乎 昌瑾以二斗米買之 (中畧) 昌瑾懸其鏡於市壁 日光斜映 隱隱有細字可讀 其文曰三水中四維下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此謂運滿一三甲 (中畧) 此一龍子三四 遞代相承六甲子 云云」이라 한 것인데 이 古鏡讖은 分明히 高麗 太祖의 膺運을 말한 것으로서 이미 斗溪 李丙燾氏가 論破한 것과 같이 王建 一派의 어느 政治的 意圖에서 造出된 것이라 하겠다. (「朝鮮」 第二百七號 所載 李丙燾氏의 「高麗初期の圖讖及び神秘思想」 叅照)
  8. 高麗史 卷百二十八 李義旼傳에 「義旼甞夢紅霓起兩腋間 頗負之 又聞古讖有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之語 十八子乃李字 因懷非望」이라 하였다.
  9. 高麗史 高麗 世系條에 元昌王后에 對하야 西海 龍王의 女라는 傳說이 보임.
  10. 動安居士行錄 卷第四 賓王錄에 「三韓東海之龍孫(〇元宗의 王子 順安侯琮을 가르친 것) 獲觀盛禮」라 한 文句가 있으니 이는 李承休가 順安侯의 隨員으로 元에 건너갔을 때에 中書省의 饗宴에 謝禮하는 글월 가운대에 보이는 바이며 燃黎室記述 卷一 高麗政亂王業肇基條 所引 閑骨董 記事에 「王(〇禑王)臨刑 謂衆人曰吾王氏 本龍孫也 左脇下 必有三鱗 世爲之表 遂解衣示人 左脇下 果有三鱗 金色大如錢 衆皆驚駭悲働」이라 하였다. 이 說話는 禑王을 辛旽의 子라고 몰아세운 데에 對하야 그의 無據한 것을 辨解하려는 世人의 同情에서 造出된 것인 듯하나 이것도 또한 高麗 王室의 龍孫傳說을 根據로 한 데에 이 說話의 意義가 있는 것이다.
  11. 前擧 李丙燾氏의 「高麗初期の圖讖及び神秘思想」 叅照.
  12. 高麗史 卷百二十三, 白勝賢傳에 「又奏曰圖讖有姬龍之後重興之說 宜以周康王諱釗字 改御押 從之 旣而 忌高高句麗王釗不 得其死 乃復舊諱」라 하였다. 이는 高麗史節要에 依하면 元宗 五年 六月에 屬한 것이며 다시 同節要 同年 六月條에 依하면 「中郎將白勝賢 因叅政金俊奏曰 親醮塹城 又於三郎城神泥洞 造假闕 親設五星道場 則可寢親朝 (〇蒙古에서 王의 親朝를 要求해왔음) 三韓變爲震旦 大國來朝也 王信之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三郎城과 神泥洞의 假闕에 移御하야 親히 道場을 베푸는 것으로써 外冠의 防遏과 國運의 重興을 招致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思想은 元來 地德衰旺說 다시 말하면 地德이 衰한 松京을 버리고 그것이 旺盛한 곳으로 遷都하면 國軍이 旺盛하리라는 風水說에서 나온 것으로서 「向南作帝京」讖과도 서로 關聯을 갖인 것으로 생각된다.
  13. 高麗史 卷百二十二 金謂彈傳에 依하면 肅宗 元年에 金謂彈가 南京遷都를 奏請한 上書 가운대에 道詵의 踏山歌로 「松城落後向何處⋯⋯漢江魚龍四海通⋯⋯若渡其江作帝京 一席中裂隔漢江」과 또 三角山 明堂記의 「憑三角山作帝京 第九之年四海通」의 句를 드렸다. 일로 보면 「向南作帝京」 讖을 踏山歌와 三角山 明堂記 等에서 무더나온 듯하거니와 이러한 種類의 風水圖讖說은 神秘詞에 보이는 三京說에 關聯을 갖인 것으로서 基業 延長 思想에 根據를 둔 것이다. 그리고 이 地德說이 다시 三四六甲子讖과 結合된 데에서 文宗의 南京 創設을 보게 된 것이 아닐런가 하니 高麗 王統의 世次로는 文宗이 第十一代에 當함으로 三四 卽 十二代說로 본다면 王朝의 運命은 次代에 끝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基業 延長의 方法으로서 南京의 地德을 빌고저 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14. 前擧 白勝賢의 奏議로써 元宗 時代의 槪況을 엿볼 수 있으며 다시 高宗時에 올라가 살펴보면 基業 延長의 目的으로써 三郎城과 神泥洞과 밑 摩利山 南(今 興旺里)에 離宮을 創建한 것을 비롯하야 南京 假闕에 御衣를 奉安한 일도 있었으니 高麗史 高宗 世家 二十一年 秋 七月 甲子條에 「遣內侍李白全 奉安御衣于南京假闕 有僧據議云 自扶踈山 分爲左蘇 曰阿思達 是古楊州之地 若於此地 營宮闕而御之 則國祚可延八百年 故有是命」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吾人의 注目을 끌런 것은 江都에 入據한 以後의 離宮 假闕을 세운 地點은 모다 都城(江都)으로부터 南쪽에 있는 點이다. 이것도 또한 「向南作帝京」 類의 圖讖에 基因한 것인 듯하니 當時 江華에 跼蹐되여 出陸이 不可能한 情勢로 보면 江都에 對한 南京은 또한 島內의 南部에 두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로써 보면 當時 圖讖思想에 있어 南方遷都熱이 얼마나 盛하였음을 알 수 있는 同時에 그의 影響은 三別抄의 南下에도 적지 아니하였을지니 安邦悅의 附和한 것도 그의 一例라 할 것이다. 要컨대 當時 이러한 國都의 南遷 運動은 비록 圖讖思想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그의 根本的 動機는 北方 種族의 强壓에 있던 것이 아닌가도 臆測되는 바이다.
  15. 高麗史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四月 丁巳條 元中書 省移文 中에 「珍島賊黨 虜掠官民 陷沒諸島三十餘所 其力漸盛 云云」이라 하였고 同年 三月에 蒙古에 보낸 國書 가운대에 「況今逆賊 日益蔓延 侵及慶尙道金州密城 加又掠取南海彰善巨濟合浦珍島等處 至於濱海部落 悉皆𣒗奪」이라 하였으며 高麗史節要 卷十九 元宗 十二年 五月條에 「時 賊將劉存奕 據南海縣 摽掠沿海 聞賊遁入耽羅 亦以船八十餘艘 從之」라 하였다.
  16. 高麗史節要 卷十八·九 元宗 十一年 九月—十二年 四月條 叅照.
  17. 高麗史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 癸巳條에 「官奴崇謙功德等 聚其徒 誅殺達魯花赤及國中在位者 往投珍島 隊正宋思均告變⋯⋯俄而 祗候辛佐宜見閭巷七八人偶語 奔告于 王曰事急矣 時日將暮 宰樞及承宣重房內侍茶房 相顧失色 計無所出 王遣知樞密院事李玄原 上將軍鄭子璵 請救於脫朶兒 脫朶兒與洪茶丘等 會宰樞 捕崇謙等十餘人 按問皆服」이라 하였다. 元來 奴隸輩는 가장 現實에 對하야 不滿을 품고 있는 것으로서 유달리 新天地를 憧憬할 것은 또한 自然의 勢라 할 것이나 特히 蒙古에 對한 敵愾心이 甚한 것은 아래의 大部島의 例와 아울러 생각할 때에 蒙古人의 橫暴에 對한 反感이 一般的으로 높았음을 알 것이며 十餘人의 崇謙의 徒黨에 對한 處置에 松京의 君臣은 서로 狼狽하야 脫朶兒에 求授하리 만큼 都城의 警備가 陳漏하였던 것이다. 다음 大部島의 叛亂에 關하야는 同 二月 辛丑條에 「窄梁防戍蒙古兵 入大部島 侵奪居民 民甚怨之 大部人聞崇謙等起 遂殺蒙古六人以叛」이라 하였다.
  18. 元高麗紀事 中統(至元) 七年 六月 三日條 及 元史高麗傳 叅照.
  19. 元高麗紀事 中統(至元) 七年 閏十一月條에 「又詔植曰嚮甞遣信使 通問日本 不謂執迷 固難以善言開諭 此卿所知 將經界於彼 勅有司 發卒屯田 爲進取之計 庶免爾他日轉輸之勞」라 하였고 元史兵志(三) 屯田條에 「高麗屯田 世祖至元七年創立 是時東征日本 欲積糧餉爲進取之計」라 하였다.
  20. 三別抄를 平定할 때에 蒙古에서는 屯田兵을 主로 쓰게 되였으며 또 屯田 經畧使 忻都 等이 高麗의 金方慶으로 더부러 征討의 任에 當하였던 것으로도 蒙古의 屯田 設置가 또한 三別抄에 對備하려는 데에도 한 가지 目的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21. 高麗史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條 及 同二月條에 屯田를 罷하기를 請하는 國書가 보임.
  22. 元高麗紀事 至元 七年 十一月 二十五日條에 「中書省奏 於高麗 設置屯田經畧司 以忻都史樞 爲鳳州等處經畧使 領軍五千 市田於金州 又令洪茶丘 以舊領民二千屯田 阿刺帖木兒爲副經畧司 總轄之」라 하였는데 特히 洪茶丘의 舊 領民으로 말하면 本來 洪茶丘의 父 洪福源이 高宗 二十年頃에 西京 郎將으로서 蒙古에 叛附하야 北界 四十餘城의 遺民을 익끌고 遼陽 瀋陽(奉天) 等地에 건너가매 蒙古에서는 그를 東京 總管에 任命하야 高麗人戶를 統領케 하는 同時에 高麗 侵畧에 그를 嚮導로서 많이 利用하였고 洪福源에 죽은 後에 그의 子 茶丘가 뒤를 이워 父 職을 承襲하야 遼東(遼陽) 等地의 高麗人戶를 統轄하게 된 것이다. 다시 蒙古의 屯田에 關하야는 元史兵志(三) 高麗 屯田條 及 高麗史 元宗 世家 十二年 三月 丙寅條 叅照.
  23. 高麗史節要(卷十八 元宗 十一年條)에 依하면 「潘南人洪賛等自賊中逃還 云云」이라 하였으니 洪賛 等은 珍島로부터 도라온 것이 明白하다.
  24. 高麗史 卷二十七 元宗 十二年 正月 庚午 及 丙戌條 叅照.
  25. 元史 卷七 世祖本紀 至元 八年 二月 甲辰條 叅照.
  26. 東國輿地勝覽 卷三十八 濟州古跡條 叅照.
  27. 同書 同條 叅照.
  28. 高汝霖이 濟州에 드러간 것은 그 時日이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나 元宗 十一年 九月 四日(辛丑)에 高汝霖과 楊東茂에게 舟師로써 珍島를 치게 하였다는 高麗史 元宗 世家의 記事로 보면 高汝霖이 濟州에 드러간 것은 일러도 同年 九月 末頃이라 할 것이며 그가 濟州에서 敗歿한 것은 同年 十一月 三日(己亥)임으로 그가 濟州에 留在한 것은 늘잡어도 一個月에 不過한 것이다.
  29. 耽羅는 高麗朝에 드러서도 星主 王子를 中心으로 自治 地域으로 되였다가 肅宗 十年에 이르러 耽羅郡을 設置하였고 毅宗 時에 縣令官으로 하야 令尉를 보내여 鎭撫함에 이르러 漸次 中央化되기 시작하였으나 星主와 王子의 職位는 依然히 世襲制로 되여 그의 歷史的 權威와 政治的 勢力은 아직도 얼마간 保持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蒙古에서 日本과 南宋 經畧에 濟州의 地理的 位置의 重要性을 看破하였을 때에 高麗에서는 蒙古의 依囑을 받었음인지 元宗 七年 十二月에 濟州 王子(高麗史 元宗 世家에는 星主라 하였으나 이는 王子의 誤인 듯함) 梁浩가 入京하매 玄錫을 嚮導로 하야 蒙古에 伴行케 한 일도 있음(高麗史 元宗 世家 七年 十二月條 元史 世祖本紀 元四年 正月條 及 耽羅紀年 卷一 元宗 八年條 叅照).
  30. 元高麗紀事 耽羅條에 「至元 九年 三月 鐵匠高樓等 上黑山耽羅等海道圖本 就中書省圓看過議定」이라 한 記事와 對照해보면 「有自南國 經由日本來者 耽羅人三名 畵到圖本」의 耽羅人은 高樓 等을 가르친 듯하며 따러서 高樓 等은 耽羅人이어떤 것으로 믿는다.
  31. 金通精의 姪은 金賛이었는지 또는 金永이었는지 斷定을 나리기 어려우나 高麗史의 金賛은 元宗 八年頃에 蒙使 黑的과 같이 日本에 건너가다가 風濤의 險으로 말미암어 中途에서 돌아오게 된 侍御史 金賛과 或 同一人이나 아닌가 하는 疑心도 일어나게 하며 그 우에 金通精은 夜別抄 指諭 金革精의 一族이 아닌가도 臆測되는 바이니 (金革精은 또 濟州 陷落 後 三別抄의 將으로서 사로잡힌 金革正과 同一人으로도 보임) 作名上으로 보던지 또는 三別抄와의 關係로 보와 어떠한 關聯이 있는 듯하다.
  32. 高麗史 元宗 世家와 및 節要에는 五人으로 되여 있으나 元高麗紀事에는 七人으로 또 高麗史 裴仲孫傳에는 六人으로 되여 있다.
  33. 元高麗紀事 至元 九年 三月條 元의 省 院 臺 等의 奏議中에 「高麗王亦稱 乞上司添力併除耽羅 前者己有表聞」의 記事가 보임.
  34. 元高麗紀事(耽羅) 至元 十年 正月 四日條에 「左丞相奏 臣等與察忽(〇洪茶丘)議 二月初至三月半 征耽羅爲宜 奉聖旨從之 上又曰可令察忽去 張左丞再奏 臣等議征耽羅 將爲長者忻都 第二武衛軍鄭也可拔都兒(〇伊克巴圖로도 쓰나니 그의 本名은 溫임) 第三察忽 亦奉旨準」이라 하였음. 鄭也可 拔都兒에 關하야는 元史 卷百四十五 鄭溫傳 叅照.
  35. 李信孫은 앞서 三別抄가 擧事할 때에 大將軍 劉存奕과 같이 三別抄 政府의 左右承宣이 되였다가 및 珍島가 陷落되고 三別抄의 餘黨이 濟州에 들어갈 때에 디디여 中途에서 松京으로 還歸하였다(高麗史 裴仲孫傳 叅照).
  36. 元高麗紀事(耽羅) 至元 十年 四月 九日條에 「經界畧使忻都史樞及洪茶邱等 率兵船大小計一百令八艘進發」이라 한 것은 潘南에서 海上 進攻을 開始한 것을 가르친 것으로 解釋된다.
  37. 高麗史 元宗 世家 十四年 閏六月 丙辰(六日)條에 「耽羅留鎭將軍宋甫演 得賊魁金通精屍(〇自縊死)以聞 又搜捕賊將 金革正 李寄等 七十餘人 送于茶丘 皆殺之」라 하였다.
  38. 忠烈王과 元 世祖의 公主와의 結婚으로 말미암어 兩國의 平和는 더욱 굳게 되었던 것이니 高麗史 世家 忠烈王 卽位之年 十一月 丁丑條에 「王與公主 同輦入城 父老相慶曰 不圖百年鏑鋒之餘 復見太平」이라 한 記事를 通하야 보면 當時 蒙古와의 和戰에 對한 國民의 動向을 推察할 수가 있다.
  39. 元 世祖 時에 回回人伊斯瑪音 等이 回回礮를 製作하였다는 것이 元史(卷二百三) 伊斯 瑪音傳에 보인다. 그런데 元來 回回礮에 對하야는 火器라는 說과 抛石機라는 說이 있음으로 元에서 盛히 쓰던 回回礮는 아직 別問題로 하고라도 火槍 火礮 火箭 等 元高麗紀事에 보이는 武器라던지 또 元의 東征 時에 火藥의 武器를 쓴 것으로 보면 三別抄 攻擊 時에 火器를 쓴 것은 疑心치 못할 일이라 할 것이다.
  40. 元高麗紀事(耽羅) 至元 十年條에 「攻破耽羅賊黨悉平 朝廷於其他 立耽羅招討司 屯鎭邊軍一千七百人 其貢賦 每歲進毛施布百匹 後改爲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 尋又改爲軍民安撫司」라 하였으나 同 三十一年 五月에 高麗에 還屬케 하였다. 그리고 元의 設置한 牧場은 高麗 末頃까지 存續되었었다.
  41. 高麗史(卷七十九) 食貨二, 科斂條에 「元宗十二年十一月 以蒙古軍馬久留 府庫匱竭 供給不支 斂馬料于京中 戶二石 民多逃散 乃減一石」 同 十三年 十二月條에 「又斂馬料于各品 三品六石 四區五石 以至微官 收斂有差」 同 十四年 二月條에 「令六 品以上 出酒有差 以餉軍士 六品以下 輸馬料于開城 云云」이라 하였다.
  42. 高麗史(卷二十七) 元宗 十三年 八月 庚戌條 叅照.
  43. 이 問題도 또한 愼重한 硏究를 要하는 것이나 여기에서는 다만 槪觀的으로 본 몇 가지 例를 들면 高麗 宮址의 局相은 開城의 滿月臺를 비롯하야 離宮으로서 江華의 것만 가지고 보와도 三卽城과 및 興旺里 神智洞(智山里)의 宮址는 可謂 例外가 없으리 만큼 모다 山腹에 걸처 몇 段의 (대개 南向) 階段 臺地로 되어 있음.
  44. 忠烈王 十六 七年頃에 哈丹의 入寇로 말미암아 王이 江華로 遷居하였을 때에 創建된 長峯 新宮이 或 그 方面에 있던 것이 아닌가 臆測되는 바이다.
  45. 江華府誌城郭條 及 續修補江都志城郭條와 該邑人士의 口傳에 據함.
  46. 江華 人士의 말에 依하면 年前治道 工事로 大門峴 고개를 끊을 때에 거기에서 城門의 材料인 巨大한 石材와 鐵鉤 等이 많이 出土되였었다고 한다.
  47. 本書는 朴憲用氏가 纂輯한 것으로서 特히 「新增」의 記事는 編纂者가 새로히 修錄한 것이다.






현대문주


  1. 김상기 삼별초-1.png
  2. 회회는 회흘(골)인을 가리킨 것인지 회회 교도를 가리킨 것인지 또 회회는 정치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인지 혹은 종교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인지 연구를 요할 문제이다.
  3. 고려사절요서적(권18) 원종 11년 6월조에 「以金方慶爲逆賊(〇삼별초를 가리킨 것) 追討使 領軍六十餘人 同蒙古宋萬戶等 軍一千餘人 追討三別抄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추토사 김방경인물이 겨우 60여명의 군졸을 거느릴 정도로서 삼별초난사건 직후의 송경 측의 병력이 심히 빈약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같은 책 원종 12년 5·5월조에 의하면 진도 공격에 제하여 경군(京軍)을 증파할 때 부위병이 그 수에 차지 못하므로 문무 산직 백정 잡색과 및 승도를 뽑았으나 5백여인에 지나지 못하였다.
  4. 고려사서적 권26 원종 11년 5월 을축조 참조.
  5. 같은 책 권27 원종 12년 정월 병자 및 2월 을묘조의 몽고에 보낸 국서 중에 보임.
  6. 삼별초의 강화 이거(離去)의 경로에 관하여는 본문에서 이미 인용한 바와 같이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至紅破江 舳臚相接 無慮千餘艘」라 하였으나 구포와 항파강의 위치가 오늘날에 있어서는 자못 불명하다. 그러나 다시 고려사절요서적 권18 원종 11년 삼별초 남하에 관한 기사 중에 「前中書舍人李淑眞 即將尹吉浦 聚奴隷 尾擊餘賊於仇浦 斬五人 至浮落山 臨海耀兵 賊望見恟懼 以爲狄兵己至 遂遁 淑眞與郎中田文胤等封府庫 使人守之 故無賴者 不得肆其姦」이라 한 기사가 보인다. 이 기사를 통하여 보면 이숙진인물 윤길보인물 등은 강도로부터 미격에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거니와 부락산과 항파강도 또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였을 것도 전후 양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수긍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부락산은 오늘날 강화 서북 해안에 용립(聳立)한 별립산이 아닌가 하니 이는 어음 상으로나 또는 위치 상으로 보아 (‘적병기지’(狄兵己至)라는 것은 몽고병이 이미 강도에 진입한 것을 의미한 듯한데 이는 삼별초가 서안으로 빠졌으므로 몽고병이 혹 염하를 건너 동으로부터 강도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인 듯) 이와 같이 추단하는 바이다. 만일 그렇다면 항파강은 별립 산하의 강화 교동 두 섬에 끼어 있는 해협을 가리킨 것이 아닐는지 그리고 구포는 지금 구하리 부근의 포구를 가리킨 것으로 억측되는 바이니 구하리 구상동이 서로 인접하여 있어 鳩(구)음의 지명이 겹쳐 있으며 그 위에 이곳은 강도 즉 강화읍과도 평탄한 지대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당시 육지 교통에 있어서도 매우 편리하였을 것으로 믿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리 본다면 앞서 든 양 기사와 또는 이숙진인물 등의 미격 방향 등이 자못 총합(𦝰合)되는 듯한 감이 있는 바이다.
  7. 고려사서적 권1 태조 세가 1, 정명 4년 3월조에 「唐商客 王昌瑾 忽於市中 見一人狀貌懷偉 鬚髮皓白 頭載古冠 被居士服 左手持三隻捥 右手擎一面古鏡 方一尺許 謂昌瑾曰能買我鏡乎 昌瑾以二斗米買之 (中畧) 昌瑾懸其鏡於市壁 日光斜映 隱隱有細字可讀 其文曰三水中四維下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此謂運滿一三甲 (中畧) 此一龍子三四 遞代相承六甲子 云云」이라 한 것인데 이 고경참은 분명히 고려 태조의 응운(膺運)을 말한 것으로서 이미 두계 이병도인물씨가 논파한 것과 같이 왕건 일파의 어느 정치적 의도에서 조출된 것이라 하겠다. (「朝鮮」학술지207권호 소재 이병도인물씨의 「高麗初期の圖讖及び神秘思想」원고 참조)
  8. 고려사서적 권128 이의민전에 「義旼甞夢紅霓起兩腋間 頗負之 又聞古讖有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之語 十八子乃李字 因懷非望」이라 하였다.
  9. 고려사서적 고려 세손조에 원창왕후에 대하여 서해 용왕의 딸이라는 전설이 보임.
  10. 동안거사행록서적 권제4 빈왕록에 「三韓東海之龍孫(〇원종의 왕자 순안후종을 가리킨 것) 獲觀盛禮」라 한 문구가 있으니 이는 이승휴인물순안후인물의 수원(隨員)으로 원에 건너갔을 때에 중서성의 향연에 사례하는 글월 가운데에 보이는 바이며 연려실기술서적 권1 고려정란왕업조기조 소인 한골동 기사에 「王(〇禑王)臨刑 謂衆人曰吾王氏 本龍孫也 左脇下 必有三鱗 世爲之表 遂解衣示人 左脇下 果有三鱗 金色大如錢 衆皆驚駭悲働」이라 하였다. 이 설화는 우왕인물신돈인물의 아들라고 몰아세운 데에 대하여 그의 무거한 것을 변해하려는 세인의 동정에서 조출된 것인 듯하나 이것도 또한 고려 왕실의 용손전설을 근거로 한 데에 이 설화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11. 앞서 든 이병도인물씨의 「高麗初期の圖讖及び神秘思想」원고 참조.
  12. 고려사서적 권123, 백승현전에 「又奏曰圖讖有姬龍之後重興之說 宜以周康王諱釗字 改御押 從之 旣而 忌高高句麗王釗不 得其死 乃復舊諱」라 하였다. 이는 고려사절요서적에 의하면 원종 5년 6월에 속한 것이며 다시 같은 절요 같은 해 6월조에 의하면 「中郎將白勝賢 因叅政金俊奏曰 親醮塹城 又於三郎城神泥洞 造假闕 親設五星道場 則可寢親朝 (〇몽고에서 왕의 친조를 요구해왔음) 三韓變爲震旦 大國來朝也 王信之 云云」이라 한 것으로 보면 삼랑성과 신니동의 가궐에 이어하여 친히 도장을 베푸는 것으로써 외관의 방알과 국운의 중흥을 초치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원래 지덕쇠왕설 다시 말하면 지덕이 쇠한 송경을 버리고 그것이 왕성한 곳으로 천도하면 국군이 왕성하리라는 풍수설에서 나온 것으로서 「向南作帝京」 예언과도 서로 관련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13. 고려사서적권122 김위탄전에 의하면 숙종인물원년에 김위탄인물이 남경천도를 주청한 상서 가운데에 도선의 답산가로 「松城落後向何處⋯⋯漢江魚龍四海通⋯⋯若渡其江作帝京 一席中裂隔漢江」과 또 삼각산 명당기의 「憑三角山作帝京 第九之年四海通」의 구를 드렸다. 이로 보면 「向南作帝京」 예언을 답산가와 삼각산 명당기 등에서 묻어나온 듯하거니와 이러한 종류의 풍수도참설은 신비사(神秘詞)에 보이는 삼경설에 관련을 가진 것으로서 기업 연장 사상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리고 이 지덕설이 다시 346갑자 예언과 결합된 데에서 문종인물의 남경 창설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 하니 고려 왕통의 세차로는 문종인물이 제11대에 당하므로 34 즉 12대설로 본다면 왕조의 운명은 다음 대에 끝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기업 연장의 방법으로서 남경의 지덕을 빌고자 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14. 앞서 든 백승현인물의 주의(奏議)로써 원종인물 시대의 개황을 엿볼 수 있으며 다시 고종인물 때에 올라가 살펴보면 기업 연장의 목적으로써 삼랑성과 신니동과 및 마리산 남쪽(오늘날 흥왕리)에 이궁을 창건한 것을 비롯하여 남경 가궐에 어의를 봉안한 일도 있었으니 고려사서적 고종 세가 21년 가을 7월 갑자조에 「遣內侍李白全 奉安御衣于南京假闕 有僧據議云 自扶踈山 分爲左蘇 曰阿思達 是古楊州之地 若於此地 營宮闕而御之 則國祚可延八百年 故有是命」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강도에 입거한 이후의 이궁 가궐을 세운 지점은 모두 도성(강도)으로부터 남쪽에 있는 점이다. 이것도 또한 「向南作帝京」 류의 도참에 기인한 것인 듯하니 당시 강화에 국척(跼蹐)되어 출륙이 불가능한 정세로 보면 강도에 대한 남경은 또한 섬 안의 남부에 두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당시 도참사상에 있어 남방천도열이 얼마나 성하였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그의 영향은 삼별초의 남하에도 적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안방열인물의 부화한 것도 그의 일례라 할 것이다. 요컨대 당시 이러한 국도의 남천(南遷) 운동은 비록 도참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그의 근본적 동기는 북방 종족의 강압에 있던 것이 아닌가도 억측되는 바이다.
  15. 고려사서적권27 원종 12년 4월 정사조 원중서성이문(元中書省移文) 중에 「珍島賊黨 虜掠官民 陷沒諸島三十餘所 其力漸盛 云云」이라 하였고 같은 해 3월에 몽고에 보낸 국서 가운데에 「況今逆賊 日益蔓延 侵及慶尙道金州密城 加又掠取南海彰善巨濟合浦珍島等處 至於濱海部落 悉皆𣒗奪」이라 하였으며 고려사절요서적권19 원종 12년 5월조에 「時 賊將劉存奕 據南海縣 摽掠沿海 聞賊遁入耽羅 亦以船八十餘艘 從之」라 하였다.
  16. 고려사절요서적권18·9 원종 11년 9월—12월 4월조 참조.
  17. 고려사서적권27 원종 12년 정월 계사조에 「官奴崇謙功德等 聚其徒 誅殺達魯花赤及國中在位者 往投珍島 隊正宋思均告變⋯⋯俄而 祗候辛佐宜見閭巷七八人偶語 奔告于 王曰事急矣 時日將暮 宰樞及承宣重房內侍茶房 相顧失色 計無所出 王遣知樞密院事李玄原 上將軍鄭子璵 請救於脫朶兒 脫朶兒與洪茶丘等 會宰樞 捕崇謙等十餘人 按問皆服」이라 하였다. 원래 노예 무리는 가장 현실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 것으로서 유달리 신천지를 동경할 것은 또한 자연의 세라 할 것이나 특히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심한 것은 아래의 대부도의 예와 아울러 생각할 때에 몽고인의 횡포에 대한 반감이 일반적으로 높았음을 알 것이며 10여인의 숭겸(崇謙)의 도당에 대한 처치에 송경의 군신은 서로 낭패하여 탈타아인물(脫朶兒)에 구수(求授)하리 만큼 도성의 경비(警備)가 진루하였던 것이다. 다음 대부도의 반란에 관하여는 같은 해 2월 신축조에 「窄梁防戍蒙古兵 入大部島 侵奪居民 民甚怨之 大部人聞崇謙等起 遂殺蒙古六人以叛」이라 하였다.
  18. 원고려기사서적중통(지원) 7년 6월 3일조 및 원사고려전 참조.
  19. 원고려기사서적중통(지원) 7년 윤11월조에 「又詔植曰嚮甞遣信使 通問日本 不謂執迷 固難以善言開諭 此卿所知 將經界於彼 勅有司 發卒屯田 爲進取之計 庶免爾他日轉輸之勞」라 하였고 원사병지서적(3) 둔전조에 「高麗屯田 世祖至元七年創立 是時東征日本 欲積糧餉爲進取之計」라 하였다.
  20. 삼별초를 평정할 때에 몽고에서는 둔전병을 주로 쓰게 되었으며 또 둔전 경략사 흔도인물(忻都) 등이 고려의 김방경인물으로 더불어 정토의 임무에 당하였던 것으로도 몽고의 둔전 설치가 또한 삼별초에 대비하려는 데에도 한 가지 목적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21. 고려사서적권27 원종 12년 정월조 및 같은 해 2월조에 둔전를 파하기를 청하는 국서가 보임.
  22. 원고려기사서적지원 7년 11월 25일조에 「中書省奏 於高麗 設置屯田經畧司 以忻都史樞 爲鳳州等處경략사 領軍五千 市田於金州 又令洪茶丘 以舊領民二千屯田 阿刺帖木兒爲副經畧司 總轄之」라 하였는데 특히 홍다구인물의 옛 영민으로 말하면 본래 홍다구인물의 아버지 홍복원인물이 고종 20년경에 서경 낭장(郎將)으로서 몽고에 반부(叛附)하여 북계 40여성의 유민을 이끌고 요양 심양(봉천) 등지에 건너가니 몽고에서는 그를 동경 총관에 임명하여 고려인호를 통령하게 하는 동시에 고려 침략에 그를 향도로서 많이 이용하였고 홍복원인물에 죽은 후에 그의 아들 홍다구인물가 뒤를 이어 아버지 직을 승습하여 요동(요양) 등지의 고려인호를 통할하게 된 것이다. 다시 몽고의 둔전에 관하여는 원사병지서적(3) 고려 둔전조 및 고려사 원종 세가 12년 3월 병인조 참조.
  23. 고려사절요서적(권18원종 11년조)에 의하면 「潘南人洪賛等自賊中逃還 云云」이라 하였으니 홍찬인물등은 진도로부터 돌아온 것이 명백하다.
  24. 고려사서적권27 원종 12년 정월 경오 및 병술조 참조.
  25. 원사서적권7 세조본기 지원 8년 2월 갑진조 참조.
  26. 동국여지승람서적권38 제주고적조 참조.
  27. 같은 책 같은 조 참조.
  28. 고여림인물이 제주에 들어간 것은 그 시일이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나 원종인물11년 9월 4일(신축)에 고여림인물양동무인물에게 주사(舟師)로써 진도를 치게 하였다는 고려사서적원종 세가의 기사로 보면 고여림인물이 제주에 들어간 것은 일러도 같은 해 9월 말경이라 할 것이며 그가 제주에서 패몰한 것은 같은 해 11월 3일(기해)임으로 그가 제주에 유재(留在)한 것은 늦어도 1개월에 불과한 것이다.
  29. 탐라는 고려조(朝)에 들어서도 성주 왕자를 중심으로 자치 지역으로 되었다가 숙종인물10년에 이르러 탐라군을 설치하였고 의종인물때에 현령관으로 하여 영위(令尉)를 보내어 진무(鎭撫)함에 이르러 점차 중앙화되기 시작하였으나 성주와 왕자의 직위는 의연히 세습제로 되어 그의 역사적 권위와 정치적 세력은 아직도 얼마간 보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몽고에서 일본과 남송 경략에 제주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간파하였을 때에 고려에서는 몽고의 의촉을 받았음인지 원종 7년 12월에 제주 왕자(고려사서적원종 세가에는 성주라 하였으나 이는 왕자의 오기인 듯함) 양호인물(梁浩)가 입경하니 현석(玄錫)을 향도(嚮導)로 하여 몽고에 반행(伴行)케 한 일도 있음(고려사서적원종 세가 7년 12월조 원사 세조본기 원4년 정월조 및 탐라기년서적권1 원종 8년조 참조).
  30. 원고려기사서적탐라조에 「至元 九年 三月 鐵匠高樓等 上黑山耽羅等海道圖本 就中書省圓看過議定」이라 한 기사와 대조해보면 「有自南國 經由日本來者 耽羅人三名 畵到圖本」의 탐라인은 고루 등을 가리킨 듯하며 따라서 고루 등은 탐라인이었던 것으로 믿는다.
  31. 김통정인물의 조카는 김찬인물이었는지 또는 김영인물이었는지 단정을 내리기 어려우나 고려사서적김찬인물은 원종 8년경에 몽사 흑적인물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다가 풍도의 험준함으로 말미암아 중도에서 돌아오게 된 시어사 김찬인물과 혹 동일인인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일어나게 하며 그 위에 김통정인물은 야별초 지유 김혁정인물의 일족이 아닌가도 억측되는 바이니 (김혁정인물은 또 제주 함락 후 삼별초의 장군으로서 사로잡힌 김혁정인물(金革正)과 동일인으로도 보임) 작명상으로 보든지 또는 삼별초와의 관계로 보아 어떠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32. 고려사서적원종 세가와 및 절요에는 5인으로 되어 있으나 원고려기사서적에는 7인으로 또 고려사 배중손전에는 6인으로 되어 있다.
  33. 원고려기사서적지원 9년 3월조 원의 성(省) 원(院) 대(臺) 등의 주의(奏議)중에 「高麗王亦稱 乞上司添力併除耽羅 前者己有表聞」의 기사가 보임.
  34. 원고려기사서적(탐라) 지원 10년 정월 4일조에 「左丞相奏 臣等與察忽(〇洪茶丘)議 二月初至三月半 征耽羅爲宜 奉聖旨從之 上又曰可令察忽去 張左丞再奏 臣等議征耽羅 將爲長者忻都 第二武衛軍鄭也可拔都兒(〇伊克巴圖로도 쓰니 그의 본명은 온임) 第三察忽 亦奉旨準」이라 하였음. 정야가(鄭也可) 발도아(拔都兒)에 관하여는 원사서적권145 정온전 참조.
  35. 이신손인물은 앞서 삼별초가 거사할 때에 대장군 유존혁인물과 같이 삼별초 정부의 좌우승선이 되었다가 및 진도가 함락되고 삼별초의 여당이 제주에 들어갈 때에 드디어 중도에서 송경으로 환귀하였다(고려사서적배중손전 참조).
  36. 원고려기사서적(탐라) 지원 10년 4월 9일조에 「經界畧使忻都史樞及洪茶邱等 率兵船大小計一百令八艘進發」이라 한 것은 반남에서 해상 진공을 개시한 것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37. 고려사서적원종 세가 14년 윤6월 병진(6일)조에 「耽羅留鎭將軍宋甫演 得賊魁金通精屍(〇自縊死)以聞 又搜捕賊將 金革正 李寄等 七十餘人 送于茶丘 皆殺之」라 하였다.
  38. 충렬왕인물과 원 세조인물의 공주와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양국의 평화는 더욱 굳게 되었던 것이니 고려사서적 세가 충렬왕 즉위지년 11월 정축조에 「王與公主 同輦入城 父老相慶曰 不圖百年鏑鋒之餘 復見太平」이라 한 기사를 통하여 보면 당시 몽고와의 화전에 대한 국민의 동향을 추찰할 수가 있다.
  39. 세조인물 때에 회회인 이사(伊斯) 마음(瑪音) 등이 회회포를 제작하였다는 것이 원사(권203) 이사 마음전에 보인다. 그런데 원래 회회포에 대하여는 화기라는 설과 포석기라는 설이 있으므로 원에서 성히 쓰던 회회포는 아직 별문제로 하고라도 화창 화포 화전 등 원고려기사서적에 보이는 무기라든지 또 원의 동정 때에 화약의 무기를 쓴 것으로 보면 삼별초 공격 때에 화기를 쓴 것은 의심치 못할 일이라 할 것이다.
  40. 원고려기사서적(탐라) 지원 10년조에 「攻破耽羅賊黨悉平 朝廷於其他 立耽羅招討司 屯鎭邊軍一千七百人 其貢賦 每歲進毛施布百匹 後改爲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 尋又改爲軍民安撫司」라 하였으나 같은 왕 31년 5월에 고려에 환속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의 설치한 목장은 고려 말경까지 존속되었었다.
  41. 고려사서적(권79) 식화2, 과렴조에 「元宗十二年十一月 以蒙古軍馬久留 府庫匱竭 供給不支 斂馬料于京中 戶二石 民多逃散 乃減一石」 같은 권 13년 12월조에 「又斂馬料于各品 三品六石 四區五石 以至微官 收斂有差」 같은 권 14년 2월조에 「令六 品以上 出酒有差 以餉軍士 六品以下 輸馬料于開城 云云」이라 하였다.
  42. 고려사서적(권27) 원종 13년 8월 경술조 참조.
  43. 이 문제도 또한 신중한 연구를 요하는 것이나 여기에서는 다만 개관적으로 본 몇 가지 예를 들면 고려 궁터의 국상은 개성의 만월대를 비롯하여 이궁(離宮)으로서 강화의 것만 가지고 보아도 3즉성(三卽城)과 및 흥왕리 신지동(지산리)의 궁터는 가위 예외가 없으리 만큼 모두 산복에 걸쳐 몇 단의 (대개 남향) 계단 대지로 되어 있음.
  44. 충렬왕인물16, 7년경에 합단(哈丹)의 입구(入寇)로 말미암아 왕이 강화로 천거하였을 때에 창건된 장봉 신궁이 혹 그 방면에 있던 것이 아닌가 억측되는 바이다.
  45. 강화부지성곽조 및 속수보강도지성곽조와 해당 읍의 인사의 구전에 근거함.
  46. 강화 인사의 말에 의하면 몇 해 전 치도 공사로 대문현 고개를 끊을 때에 거기에서 성문의 재료인 거대한 석재와 철구 등이 많이 출토되었었다고 한다.
  47. 이 책은 박헌용인물씨가 찬집한 것으로서 특히 ‘신증’의 기사는 편찬자가 새로 수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