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1)"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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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TagSpage|2-1}}中末期의 高麗는 可謂 內亂 外寇로 終始된 觀이 있다 할지니, 特히 內亂 中에도 妙淸의 西京叛亂과 鄭仲夫 一派의 武夫의 亂과 本槁에서 論述하려는 三別抄亂이 가장 그 著名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三大 亂은 어느 것이나 그의 由來가 자못 複雜多端한 만큼 政治 社會 乃至 思想上에 끼친바 影響이 實로 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三者에 나아가 槪括的으로 살펴보면 後者 即 三別抄亂은 前 二者 即 妙淸 鄭仲夫의 亂에 比하야 자못 그 趣를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妙淸 鄭仲夫의 亂은 內部的 運動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三別抄亂은 複雜한 內部的 事情 以外에 外部 壓力에 對한 一種의 反撥運動이었다. 그리하야 그의 結果에 있어서도 內部에 끼친바 影響보다도 國內에 뻐더드는 外力의 消長에 至大한 關係를 가진 것이다. 다시 縱으로 이 三大亂의 裡面에 흐르는 潮流를 살펴보면 妙淸一派로 말미암어 나타난 高麗人의 自我的 精神은 다시 林衍 裴仲孫 等의 排蒙思想으로 出現되였으며 鄭仲夫 一派로 말미암어 馴致된 武士 專橫의 氣勢는 三別抄의 動向에 指針이 되였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脉絡을 추워보면 三別抄亂은 妙淸 鄭仲夫 兩亂의 潮流가 合致된 데에서 出現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吾人은 中末期 高麗에 있어 對內對外의 政治的 動向과 그에 關한 思潮의 對流 形態를 溯究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목차1원문1번={{TagSpage|2-1}}中末期의 高麗는 可謂 內亂 外寇로 終始된 觀이 있다 할지니, 特히 內亂 中에도 妙淸의 西京叛亂과 鄭仲夫 一派의 武夫의 亂과 本槁에서 論述하려는 三別抄亂이 가장 그 著名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三大 亂은 어느 것이나 그의 由來가 자못 複雜多端한 만큼 政治 社會 乃至 思想上에 끼친바 影響이 實로 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三者에 나아가 槪括的으로 살펴보면 後者 即 三別抄亂은 前 二者 即 妙淸 鄭仲夫의 亂에 比하야 자못 그 趣를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妙淸 鄭仲夫의 亂은 內部的 運動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三別抄亂은 複雜한 內部的 事情 以外에 外部 壓力에 對한 一種의 反撥運動이었다. 그리하야 그의 結果에 있어서도 內部에 끼친바 影響보다도 國內에 뻐더드는 外力의 消長에 至大한 關係를 가진 것이다. 다시 縱으로 이 三大亂의 裡面에 흐르는 潮流를 살펴보면 妙淸一派로 말미암어 나타난 高麗人의 自我的 精神은 다시 林衍 裴仲孫 等의 排蒙思想으로 出現되였으며 鄭仲夫 一派로 말미암어 馴致된 武士 專橫의 氣勢는 三別抄의 動向에 指針이 되였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脉絡을 추워보면 三別抄亂은 妙淸 鄭仲夫 兩亂의 潮流가 合致된 데에서 出現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吾人은 中末期 高麗에 있어 對內對外의 政治的 動向과 그에 關한 思潮의 對流 形態를 溯究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목차1해독문1번=중말기의 고려는 가위 내란 외구로 종시된 관이 있다 할지니, 특히 내란 중에도 묘청의 서경반란과 정중부 일파의 무부(武夫)의 난과 본고에서 논술하려는 삼별초난이 가장 그 저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3대 난은 어느 것이나 그의 유래가 자못 복잡다단한 만큼 정치 사회 내지 사상상(上)에 끼친바 영향이 실로 다대(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3자에 나아가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후자 즉 삼별초난은 전 2자 즉 묘청 정중부의 난에 비하여 자못 그 뜻을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묘청 정중부의 난은 내부적 운동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삼별초난은 복잡한 내부적 사정 이외에 외부 압력에 대한 일종의 반발운동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결과에 있어서도 내부에 끼친바 영향보다도 국내에 뻗어드는 외력의 소장(消長)에 지대한 관계를 가진 것이다. 다시 종(縱)으로 이 3대 난의 이면에 흐르는 조류를 살펴보면 묘청 일파로 말미암아 나타난 고려인의 자아적 정신은 다시 임연 배중손 등의 배몽(排蒙)사상으로 출현되었으며 정중부 일파로 말미암아 순치된 무사 전횡의 기세는 삼별초의 동향에 지침이 되었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맥락을 추려보면 삼별초난은 묘청 정중부 양 난의 조류가 합치된 데에서 출현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말기 고려에 있어 대내대외의 정치적 동향과 그에 관한 사조의 대류 형태를 소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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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번={{TagSpage|3-3}}이라 한 것이 別抄에 關한 最初의 記事이다. 이는 明宗 四年에 元帥 奇卓誠이 西京에 叛據한 趙位寵을 討伐할 때에 崔忠獻이 別抄都令으로 選補되였다는 것이어니와, 이에 關하야 崔忠獻 墓誌(朝鮮金石總覽 上 四四二頁)에는
 
|목차2원문3번={{TagSpage|3-3}}이라 한 것이 別抄에 關한 最初의 記事이다. 이는 明宗 四年에 元帥 奇卓誠이 西京에 叛據한 趙位寵을 討伐할 때에 崔忠獻이 別抄都令으로 選補되였다는 것이어니와, 이에 關하야 崔忠獻 墓誌(朝鮮金石總覽 上 四四二頁)에는
 
|목차2원문4번={{TagSpage|3-4}}<blockquote no="02">大定甲午<sup>〇明宗四年</sup> 盜起西都 推轂元帥 授鉞徂征 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 擧公爲都令 以當一面 陷陣却敵 登陴先入 遂克戡定</blockquote>
 
|목차2원문4번={{TagSpage|3-4}}<blockquote no="02">大定甲午<sup>〇明宗四年</sup> 盜起西都 推轂元帥 授鉞徂征 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 擧公爲都令 以當一面 陷陣却敵 登陴先入 遂克戡定</blockquote>
|목차2원문5번={{TagSpage|3-5}}이라 하였다. 前擧 高麗史의 記事에는 槪稱的으로 다만 別抄로 쓰여있으나 이 墓誌는 特히 個人의 行蹟을 主로 한 만큼 보담 자세히 戰鋒別抄라 하야 別抄의 種別과 그의 任務를 記存한 것이 吾人의 注意를 끄는 바이다. 이 戰鋒別抄에 關{{TagPage|4-1}}한 上下 記事를 通하야 보면 池內宏博士도 대개 類似한 見解를 내렸거니와(史學雜誌 第三十七編 第九號 所載, 池內博士 「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 戰鋒別抄는 一種의 決死的 先鋒隊 또는 決死的 游擊隊와 같이 活動하던 特選 兵隊의 稱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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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5번={{TagSpage|3-5}}이라 하였다. 前擧 高麗史의 記事에는 槪稱的으로 다만 別抄로 쓰여있으나 이 墓誌는 特히 個人의 行蹟을 主로 한 만큼 보담 자세히 戰鋒別抄라 하야 別抄의 種別과 그의 任務를 記存한 것이 吾人의 注意를 끄는 바이다. 이 戰鋒別抄에 關{{TagPage|4-1}}한 上下 記事를 通하야 보면 池內宏博士도 대개 類似한 見解를 내렸거니와(史學雜誌 第三十七編 第九號 所載, 池內博士 「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 戰鋒別抄는 一種의 決死的 先鋒隊 또는 決死的 游擊隊와 같이 活動하던 特選 兵隊의 稱이었던 듯하다. 다시 別抄에 關하야 高麗史節要(卷十四) 高宗 三年 九月條에
|목차2원문6번={{TagSpage|4-2}}다시 別抄에 關하야 高麗史節要(卷十四) 高宗 三年 九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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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6번={{TagSpage|4-2}}<blockquote no="03">三軍 各發別抄一百 神騎四十人 行至朝陽(〇价川) 阿爾川邊 與契丹兵戰 云云</blockquote>
|목차2원문7번={{TagSpage|4-3}}<blockquote no="03">三軍 各發別抄一百 神騎四十人 行至朝陽(〇价川) 阿爾川邊 與契丹兵戰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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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7번={{TagSpage|4-3}}이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高宗 三年에 遼東의 契丹(大遼收國)이 侵寇할새 이것을 防制키 爲하야 三軍 即 中軍(盧元純의 引率한) 右軍(吳應夫) 後軍(金就勵)이 出動하였을 때에 三軍은 먼저 別抄와 神騎로써 敵兵에 當케 한 것이다. 일로 보면 當時 三軍은 神騎(神騎에 關하야는 아래에서 論할 터)와 別抄로써 前哨隊 또는 游擊隊와 같이 活動케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 三軍의 別抄도 또한 前擧 崔忠獻의 戰鋒別抄와 같은 것으로 推斷되는 바이다.
|목차2원문8번={{TagSpage|4-4}}이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高宗 三年에 遼東의 契丹(大遼收國)이 侵寇할새 이것을 防制키 爲하야 三軍 即 中軍(盧元純의 引率한) 右軍(吳應夫) 後軍(金就勵)이 出動하였을 때에 三軍은 먼저 別抄와 神騎로써 敵兵에 當케 한 것이다. 일로 보면 當時 三軍은 神騎(神騎에 關하야는 아래에서 論할 터)와 別抄로써 前哨隊 또는 游擊隊와 같이 活動케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 三軍의 別抄도 또한 前擧 崔忠獻의 戰鋒別抄와 같은 것으로 推斷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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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8번={{TagSpage|4-4}}別抄는 元來 本軍에 對한 「特選兵隊」의 稱으로서 軍事 行動에 際하야 特히 勇敢한 兵卒을 뽑아 臨時的으로 編成된 것이 그의 本 面目이였던 듯하다. 前擧 崔忠獻의 戰鋒別抄에 關한 記事를 비롯하야 益齋亂藁(六)에 보이는 金就礪行軍記에 依하면 前擧 三軍이 別抄를 先遺한 것을 가르처 <cite no="01">「三軍各選精銳 禦之」</cite>라 하였다. 益齋의 이 記事에는 다만 <cite no="02">「精銳를 뽑았다」</cite> 하야 別抄라는 名稱이 보이지 아니하나 이에 依하야 當時 三軍의 別抄는 本軍으로부터 精銳分子를 뽑아 編成된 것만은 알 수가 있다. 다시 別抄의 意味에 있어서는 그의 名稱 自體로도 또한 理解할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別抄의 「別」은 이미 肅宗朝에 尹瓘이 創設한 別武班(아래에서 論述할 터)의 別과 같이 「普通」에 對한 「特別」의 意로 쓴 것임은 張皇한 說明을 기다릴 것도 없는 바이며, {{TagRef|1}}別抄의 「抄」는 빼일(쵸)로 訓하였을 것으로서<ref>金麟厚 百聯抄解(華巖書院 版本이니 이 版은 河西의 筆蹟을 그대로 刻한 것이라는 說이 있음)에 「百聯抄解」를 「온갓 글귀 {{ruby|ᄲᅡ|○}}사긴 거시라」고 訓하였음.</ref> 選取 또는 {{ruby|略取|○○}}의 意로 쓰였던 것으로 믿는다. 다시 高麗史 上에 나아가 軍事에 關한 抄字의 用例를 몇 가지 드러보면 <cite no="03">「抄僧爲軍」</cite>(高麗{{TagPage|5-1}}史 卷八十一, 兵志一) <cite no="04">「各道{{ruby|抄|○}}軍使等 {{ruby|抄|○}}閑良子弟」</cite> <cite no=”05”>「元帥於原定別抄外 又{{ruby|抄|○}}煙戶軍 又抄別軍」</cite> <cite no=”06”>「加定各道元帥 分遣{{ruby|抄|○}}軍」</cite>(幷仝上) 等 句에 보이는 「抄」는 選取의 意로 쓰인 것들이며, 朝鮮朝에 드러서도 各種의 別抄와 抄軍의 稱이 最近世에까지 있었던 것으로서 別抄軍 駕前別抄 壯抄 新抄槍手 精抄軍 等의 名稱이 보이나니(增補文轍 備考兵考), 이것들도 모다 選取의 意로서 「抄」를 부치게 된 것임은 <cite no="07">「別抄軍 本摠戎廳束伍中 抄選而別其號者也」</cite>(全書卷百十兵考二)라는 精抄軍에 關한 解說을 가지고도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朝鮮朝에 이르러서도 各種 抄軍의 名稱이 보이거니와 이는 前朝의 것을 蹈襲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목차2원문9번={{TagSpage|4-5}}別抄는 元來 本軍에 對한 「特選兵隊」의 稱으로서 軍事 行動에 際하야 特히 勇敢한 兵卒을 뽑아 臨時的으로 編成된 것이 그의 本 面目이였던 듯하다. 前擧 崔忠獻의 戰鋒別抄에 關한 記事를 비롯하야 益齋亂藁(六)에 보이는 金就礪行軍記에 依하면 前擧 三軍이 別抄를 先遺한 것을 가르처 <cite no="01">「三軍各選精銳 禦之」</cite>라 하였다. 益齋의 이 記事에는 다만 <cite no="02">「精銳를 뽑았다」</cite> 하야 別抄라는 名稱이 보이지 아니하나 이에 依하야 當時 三軍의 別抄는 本軍으로부터 精銳分子를 뽑아 編成된 것만은 알 수가 있다. 다시 別抄의 意味에 있어서는 그의 名稱 自體로도 또한 理解할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別抄의 「別」은 이미 肅宗朝에 尹瓘이 創設한 別武班(아래에서 論述할 터)의 別과 같이 「普通」에 對한 「特別」의 意로 쓴 것임은 張皇한 說明을 기다릴 것도 없는 바이며, {{TagRef|1}}別抄의 「抄」는 빼일(쵸)로 訓하였을 것으로서<ref>金麟厚 百聯抄解(華巖書院 版本이니 이 版은 河西의 筆蹟을 그대로 刻한 것이라는 說이 있음)에 「百聯抄解」를 「온갓 글귀 {{ruby|ᄲᅡ|○}}사긴 거시라」고 訓하였음.</ref> 選取 또는 {{ruby|略取|○○}}의 意로 쓰였던 것으로 믿는다. 다시 高麗史 上에 나아가 軍事에 關한 抄字의 用例를 몇 가지 드러보면 <cite no="03">「抄僧爲軍」</cite>(高麗{{TagPage|5-1}}史 卷八十一, 兵志一) <cite no="04">「各道{{ruby|抄|○}}軍使等 {{ruby|抄|○}}閑良子弟」</cite> <cite no=”05”>「元帥於原定別抄外 又{{ruby|抄|○}}煙戶軍 又抄別軍」</cite> <cite no=”06”>「加定各道元帥 分遣{{ruby|抄|○}}軍」</cite>(幷仝上) 等 句에 보이는 「抄」는 選取의 意로 쓰인 것들이며, 朝鮮朝에 드러서도 各種의 別抄와 抄軍의 稱이 最近世에까지 있었던 것으로서 別抄軍 駕前別抄 壯抄 新抄槍手 精抄軍 等의 名稱이 보이나니(增補文轍 備考兵考), 이것들도 모다 選取의 意로서 「抄」를 부치게 된 것임은 <cite no="07">「別抄軍 本摠戎廳束伍中 抄選而別其號者也」</cite>(全書卷百十兵考二)라는 精抄軍에 關한 解說을 가지고도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朝鮮朝에 이르러서도 各種 抄軍의 名稱이 보이거니와 이는 前朝의 것을 蹈襲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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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9번={{TagSpage|5-2}}要컨대 高麗의 別抄(軍)는 特選兵隊의 稱인 것은 以上의 論述한 것으로서 대개 究明되였을 줄로 생각하거니와, 다시 한거름 나아가 三別抄 또는 一般 別抄 出現의 必然性과 그의 意義를 밝히려는 意味 아래에서 먼저 中末期에 이르기까지의 高麗兵制의 沿革을 槪察할 必要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高麗의 兵制는 대개 唐의 府(府衛)兵制에 依倣한 것이니 高麗史(卷八十三) 百官志(三) 州縣軍條에
|목차2원문10번={{TagSpage|5-2}}要컨대 高麗의 別抄(軍)는 特選兵隊의 稱인 것은 以上의 論述한 것으로서 대개 究明되였을 줄로 생각하거니와, 다시 한거름 나아가 三別抄 또는 一般 別抄 出現의 必然性과 그의 意義를 밝히려는 意味 아래에서 먼저 中末期에 이르기까지의 高麗兵制의 沿革을 槪察할 必要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高麗의 兵制는 대개 唐의 府(府衛)兵制에 依倣한 것이니 高麗史(卷八十三) 百官志(三) 州縣軍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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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0번={{TagSpage|5-3}}<blockquote no="04">高麗兵制 大抵皆做唐之府術 云云</blockquote>
|목차2원문11번={{TagSpage|5-3}}<blockquote no="04">高麗兵制 大抵皆做唐之府術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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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1번={{TagSpage|5-4}}이라 하였고, 또 同志(二) 西班條에
|목차2원문12번={{TagSpage|5-4}}이라 하였고, 또 同志(二) 西班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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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2번={{TagSpage|5-5}}<blockquote no="05">二年<sup>(〇太祖)</sup> 置六衛 穆宗五年 備置六衛職員 後置鷹揚龍虎二軍 在六衛之上 後又設重房 使二軍六衛上大將軍 皆會焉毅 明以降 武臣用事 重房之權 益重</blockquote>
|목차2원문13번={{TagSpage|5-5}}<blockquote no="05">二年(〇太祖) 置六衛 穆宗五年 備置六衛職員 後置鷹揚龍虎二軍 在六衛之上 後又設重房 使二軍六衛上大將軍 皆會焉毅 明以降 武臣用事 重房之權 益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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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3번={{TagSpage|5-6}}이라 하였다. 대개 太祖 二年에 唐의 府兵制에 依倣하야 六衛(左右衛 神虎衛 興威衛 金吾衛 監門衛)가 設置되였고 다시 穆宗 五年에 이르러 六衛의 官制가 完備되였으며, 그 後에 다시 應揚龍虎의 二軍을 六衛의 우에 두웠고 (二軍六衛{{TagPage|6-1}}를 幷稱하야 八衛라고도 함) 또 뒤에 二軍六衛의 首腦들로써 (一般宰樞도 𠫵列하였으나)重房(軍機 邊事를 議決하던 軍事的 機關)을 設置하였으나 毅宗 明宗時에 이르러 武官(鄭仲夫 崔忠獻 等)이 專橫함에 미처 國家의 軍事上 最高機關인 重房이 그들의 幕府로 化하야 國權을 專擅케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應揚龍虎二軍 및 重房의 設置는 果然 어느 時代에 屬한 것인지 上引文의 <cite no="08">「後置⋯⋯」</cite> <cite no="09">「後又設⋯⋯」</cite> 等의 寞然한 記事로는 推斷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其他 다른 史料에도 또한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는 바이다.
|목차2원문14번={{TagSpage|5-6}}이라 하였다. 대개 太祖 二年에 唐의 府兵制에 依倣하야 六衛(左右衛 神虎衛 興威衛 金吾衛 監門衛)가 設置되였고 다시 穆宗 五年에 이르러 六衛의 官制가 完備되였으며, 그 後에 다시 應揚龍虎의 二軍을 六衛의 우에 두웠고 (二軍六衛{{Tagpage|6-1}}를 幷稱하야 八衛라고도 함) 또 뒤에 二軍六衛의 首腦들로써 (一般宰樞도 𠫵列하였으나)重房(軍機 邊事를 議決하던 軍事的 機關)을 設置하였으나 毅宗 明宗時에 이르러 武官(鄭仲夫 崔忠獻 等)이 專橫함에 미처 國家의 軍事上 最高機關인 重房이 그들의 幕府로 化하야 國權을 專擅케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應揚龍虎二軍 및 重房의 設置는 果然 어느 時代에 屬한 것인지 上引文의 <cite no="08">「後置⋯⋯」</cite> <cite no="09">「後又設⋯⋯」</cite> 等의 寞然한 記事로는 推斷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其他 다른 史料에도 또한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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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4번={{TagSpage|6-2}}어쨋던 二軍六衛는 太祖로부터 穆宗에 걸처 整備된 兵制인 것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어니와 地方軍에 있어서는 <cite no="10">「高麗兵制 大抵皆倣唐之府衛 則兵之散在州縣者 意亦皆屬乎六衛 非六衛外 別有州縣軍也 然無可考 姑以此目之」</cite>(高麗史卷八十三兵志三州縣軍序)라 하야 州縣軍의 隸屬系統에 關하야는 的確한 資料가 남어있지 아니하였던 것으로서 高麗史 編者도 다만 推論에 끌이고 말었으나, 元來 府兵制 自體로 보와 邊方要地의 鎭戌軍은 勿論이어니와 各州縣에 散在한 所謂 州縣軍도 대개 六衛에 屬하였을 것으로 推斷하여도 좋을 듯하다.
|목차2원문15번={{TagSpage|6-2}}어쨋던 二軍六衛는 太祖로부터 穆宗에 걸처 整備된 兵制인 것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어니와 地方軍에 있어서는 <cite no="10">「高麗兵制 大抵皆倣唐之府衛 則兵之散在州縣者 意亦皆屬乎六衛 非六衛外 別有州縣軍也 然無可考 姑以此目之」</cite>(高麗史卷八十三兵志三州縣軍序)라 하야 州縣軍의 隸屬系統에 關하야는 的確한 資料가 남어있지 아니하였던 것으로서 高麗史 編者도 다만 推論에 끌이고 말었으나, 元來 府兵制 自體로 보와 邊方要地의 鎭戌軍은 勿論이어니와 各州縣에 散在한 所謂 州縣軍도 대개 六衛에 屬하였을 것으로 推斷하여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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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5번={{TagSpage|6-3}}그러나 太祖 以來 整備된 高麗의 軍制는 時日의 經過를 따러 漸次로 解弛하야 文宗時에 이르러서는 발서 紊亂의 兆에 現著하였으니
|목차2원문16번={{TagSpage|6-3}}그러나 太祖 以來 整備된 高麗의 軍制는 時日의 經過를 따러 漸次로 解弛하야 文宗時에 이르러서는 발서 紊亂의 兆에 現著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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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6번={{TagSpage|6-4}}<blockquote no="06">二十五年(〇文宗) 六月 制日 近聞 諸衛軍人 亡命者 甚多 是由執事不公 富强者 托勢以免 貧窮者 獨受其勞 衣食乏絕 而略無休息 云云</blockquote>(仝書卷八十一 兵志一)
|목차2원문17번={{TagSpage|6-4}}<blockquote no="06">二十五年(〇文宗) 六月 制日 近聞 諸衛軍人 亡命者 甚多 是由執事不公 富强者 托勢以免 貧窮者 獨受其勞 衣食乏絕 而略無休息 云云</blockquote>(仝書卷八十一 兵志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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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7번={{TagSpage|6-5}}이라 한 記事로 보면 文宗 때에 이르러 兵制 紊亂의 原因으로 ①軍人으로서 逃亡하는 者가 많이 생기며 ②富强한 者는 勢力을 利用하야 兵役을 免하고 貧窮한 者만이 그에 當함으로 貧窮한 그들은 쉬일 틈이 없으되 衣食의 絕乏을 보게 되{{TagPage|7-1}}여 兵力의 低劣하여 진 것을 提示한 것이니, 이때부터 高麗의 府衛兵은 質과 量에 있어 자못 貧弱케 된 것이다. 그리하야 이 結果는 드듸어 外敵 防禦와 治安 維持에 特殊軍團의 出現을 促進식힘에 이르렀다.
|목차2원문18번={{TagSpage|6-5}}이라 한 記事로 보면 文宗 때에 이르러 兵制 紊亂의 原因으로 ①軍人으로서 逃亡하는 者가 많이 생기며 ②富强한 者는 勢力을 利用하야 兵役을 免하고 貧窮한 者만이 그에 當함으로 貧窮한 그들은 쉬일 틈이 없으되 衣食의 絕乏을 보게 되{{Tagpage|7-1}}여 兵力의 低劣하여 진 것을 提示한 것이니, 이때부터 高麗의 府衛兵은 質과 量에 있어 자못 貧弱케 된 것이다. 그리하야 이 結果는 드듸어 外敵 防禦와 治安 維持에 特殊軍團의 出現을 促進식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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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8번={{TagSpage|7-2}}다음 肅宗朝 尹瓘의 建議에 依하여 創設된 別武班에 關하여 살펴보면 高麗史(卷九十六)尹瓘傳에
|목차2원문19번={{TagSpage|7-2}}다음 肅宗朝 尹瓘의 建議에 依하여 創設된 別武班에 關하여 살펴보면 高麗史(卷九十六)尹瓘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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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9번={{TagSpage|7-3}}<blockquote no="07">奏曰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於是 建議 始立別武班 自文武散官吏胥 至于商賈僕隷及州府郡縣 凡有馬者爲神騎 無馬者爲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等軍 年二十以上男子非擧子 皆屬神步 西班與諸鎭府軍人 四時訓錬 又選僧徒 爲降魔軍 遂鍊兵畜穀 以圖再擧</blockquote>
|목차2원문20번={{TagSpage|7-3}}<blockquote no="07">奏曰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於是 建議 始立別武班 自文武散官吏胥 至于商賈僕隷及州府郡縣 凡有馬者爲神騎 無馬者爲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等軍 年二十以上男子非擧子 皆屬神步 西班與諸鎭府軍人 四時訓錬 又選僧徒 爲降魔軍 遂鍊兵畜穀 以圖再擧</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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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0번={{TagSpage|7-4}}라 하였다. 肅宗 九年에 東北의 强敵인 東女眞의 侵入을 防禦할새 尹瓘 같은 이도 처음에는 林幹의 失敗한 뒤를 이어 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東女眞에 當하였다가 또한 兵力의 多大한 損失을 보게 되였다. 그리하야 그는 朝廷에 建白하여 別武班을 組織한 것이니 尹瓘은 먼저 그의 失敗의 原因으로서 <cite no="11">「敵騎我步」</cite>를 들었다. 元來 步兵만으로는 騎兵에 當키 어려운 것으로서 當時 그러한 쓰린 經驗을 맛본 尹瓘은 새로히 神騎軍이라는 騎兵隊를 組織하는 同時에 步兵에 있어서는 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 等 各種으로써 特別軍制를 定하고 別로히 佾徒로써 降魔軍이라는 것을 組織하였으니 이와 같이 步兵에까지 別制를 세운 것은 疑心할 것도 없이 綏弛 衰弱한 在來 兵制의 補强策에서 나온 것이다.
|목차2원문21번={{TagSpage|7-4}}라 하였다. 肅宗 九年에 東北의 强敵인 東女眞의 侵入을 防禦할새 尹瓘 같은 이도 처음에는 林幹의 失敗한 뒤를 이어 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東女眞에 當하였다가 또한 兵力의 多大한 損失을 보게 되였다. 그리하야 그는 朝廷에 建白하여 別武班을 組織한 것이니 尹瓘은 먼저 그의 失敗의 原因으로서 <cite no="11">「敵騎我步」</cite>를 들었다. 元來 步兵만으로는 騎兵에 當키 어려운 것으로서 當時 그러한 쓰린 經驗을 맛본 尹瓘은 새로히 神騎軍이라는 騎兵隊를 組織하는 同時에 步兵에 있어서는 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 等 各種으로써 特別軍制를 定하고 別로히 佾徒로써 降魔軍이라는 것을 組織하였으니 이와 같이 步兵에까지 別制를 세운 것은 疑心할 것도 없이 綏弛 衰弱한 在來 兵制의 補强策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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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1번={{TagSpage|7-5}}이 別武班이라는 特別軍團은 後日(睿宗時) 尹瓘의 女眞征伐에 成功한 基礎가 되였으며 女眞征伐에 많은 效果를 거두웠던 것이니 <cite no="12">「逮至肅宗 東女眞構釁 於是 銳意桿禦 日事鍊兵 遂置別武班⋯⋯⋯是雖不合古制 然亦用之一時 而收功有足稱者」</cite> (仝書 卷八十一 兵志一)라 한 記事로도 推察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別武班은 東女眞에 對한 攻防을 目標로 하야 생긴 것인 만큼 二軍六衛의 正規 兵制와 같이 制度로서의 永續性이 적은 것으로서 얼마 아니되여 崩解하였던 것으로 믿나니{{TagPage|8-1}} 前擧 <cite no="13">「亦用之一時 而收功」</cite>이라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中에도 오직 神騎軍만은 그의 活動이 高宗 未年까지 자조 史上에 나타나 보이나니 元來 이 特殊 騎兵隊인 神騎軍(神騎班이라는 稱도 있으니 이 神騎班의 班도 別武班의 班에서 무더 온 듯함)은 高麗 兵力의 缺陷을 補足하야써 大陸 強敵(女眞 契丹 蒙古)의 勁騎에 對하게 되었으므로 그의 必要와 効果가 他班의 比가 아니였을 것으로서 後代에까지 存置된 것이 아닐가 한다.
|목차2원문22번={{TagSpage|7-5}}이 別武班이라는 特別軍團은 後日(睿宗時) 尹瓘의 女眞征伐에 成功한 基礎가 되였으며 女眞征伐에 많은 效果를 거두웠던 것이니 <cite no="12">「逮至肅宗 東女眞構釁 於是 銳意桿禦 日事鍊兵 遂置別武班⋯⋯⋯是雖不合古制 然亦用之一時 而收功有足稱者」</cite> (仝書 卷八十一 兵志一)라 한 記事로도 推察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別武班은 東女眞에 對한 攻防을 目標로 하야 생긴 것인 만큼 二軍六衛의 正規 兵制와 같이 制度로서의 永續性이 적은 것으로서 얼마 아니되여 崩解하였던 것으로 믿나니{{Tagpage|8-1}} 前擧 <cite no="13">「亦用之一時 而收功」</cite>이라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中에도 오직 神騎軍만은 그의 活動이 高宗 未年까지 자조 史上에 나타나 보이나니 元來 이 特殊 騎兵隊인 神騎軍(神騎班이라는 稱도 있으니 이 神騎班의 班도 別武班의 班에서 무더 온 듯함)은 高麗 兵力의 缺陷을 補足하야써 大陸 強敵(女眞 契丹 蒙古)의 勁騎에 對하게 되었으므로 그의 必要와 効果가 他班의 比가 아니였을 것으로서 後代에까지 存置된 것이 아닐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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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2번={{TagSpage|8-2}}그러나 一面에 있어 在來의 府兵制는 그의 內容이 비록 虛弱하여졌다 할지라도 그의 體制는 依然히 高麗末까지 存續되였으니, 恭讓王 元年 二月 諫官이 府兵을 論한 上䟽 가운대에
|목차2원문23번={{TagSpage|8-2}}그러나 一面에 있어 在來의 府兵制는 그의 內容이 비록 虛弱하여졌다 할지라도 그의 體制는 依然히 高麗末까지 存續되였으니, 恭讓王 元年 二月 諫官이 府兵을 論한 上䟽 가운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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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3번={{TagSpage|8-3}}<blockquote no="08">我太祖 設府兵 令軍簿司典馬攝之政 身彩武藝備完者 得與其選 是以 將得其人 卒伍精强 近年以來 入仕多門 兵政一壞 或拘於都目 或出於請謁 不問老幼才否 而授之 於是 襁褓幼子工商奴隷 無尺寸之功 坐耗天祿 一有緩急 將何以用之 甚非先王設兵之意也 願令精選勇略兼備者 以代尸祿之輩 云云(高麗史 卷八十一 兵志一)</blockquote>
|목차2원문24번={{TagSpage|8-3}}<blockquote no="08">我太祖 設府兵 令軍簿司典馬攝之政 身彩武藝備完者 得與其選 是以 將得其人 卒伍精强 近年以來 入仕多門 兵政一壞 或拘於都目 或出於請謁 不問老幼才否 而授之 於是 襁褓幼子工商奴隷 無尺寸之功 坐耗天祿 一有緩急 將何以用之 甚非先王設兵之意也 願令精選勇略兼備者 以代尸祿之輩 云云</blockquote> (高麗史 卷八十一 兵志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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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4번={{TagSpage|8-4}}이라 한 記事의 一例로도 這間의 消息을 넉々히 였볼 수 있을 줄로 믿는다.
|목차2원문25번={{TagSpage|8-4}}이라 한 記事의 一例로도 這間의 消息을 넉々히 였볼 수 있을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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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5번={{TagSpage|8-5}}以上에서 高麗 初期로부터 中末頃에 걸처서의 兵制의 變遷과 그의 傾向을 대개 概述하였거니와 毅宗 明宗時에 이르러는 兵權이 武臣의 손에 도라가고 그에 따러 武士의 專橫時代가 馴致되었다. <cite no="14">「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 悍將勁卒 皆屬私家」</cite>(仝書 兵志序)라 한 것은 그 事情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政柄과 兵權이 武臣의 손에 드러가 所謂 武士專橫時가 始作되기는 毅宗時 鄭仲夫의 亂으로부터서의 일이다. 그리하야 三別抄라는 特殊兵隊도 이러한 時代에 出現한 것이니 이에서 吾人은 다시 武士專橫時代가 馴致되기까지의 經路를 따저 三別抄와의 關係를 밝힐 必要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목차2원문26번={{TagSpage|8-5}}以上에서 高麗 初期로부터 中末頃에 걸처서의 兵制의 變遷과 그의 傾向을 대개 概述하였거니와 毅宗 明宗時에 이르러는 兵權이 武臣의 손에 도라가고 그에 따러 武士의 專橫時代가 馴致되었다. <cite no="14">「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 悍將勁卒 皆屬私家」</cite>(仝書 兵志序)라 한 것은 그 事情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政柄과 兵權이 武臣의 손에 드러가 所謂 武士專橫時가 始作되기는 毅宗時 鄭仲夫의 亂으로부터서의 일이다. 그리하야 三別抄라는 特殊兵隊도 이러한 時代에 出現한 것이니 이에서 吾人은 다시 武士專橫時代가 馴致되기까지의 經路를 따저 三別抄와의 關係를 밝힐 必要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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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6번={{TagSpage|9-1}}{{TagRef|2}}高麗에는 이미 毅宗에 앞서 仁宗 때로부터 下剋上의 風이 자못 行하야 權臣(李資謙 拓俊京 等)의 橫暴과 內亂(妙淸의)의 迸發로 因하야 王權이 式微하였고 다시 毅宗에 이르러서는 王의 縱恣 游逸의 放蕩한 行動은 政治와 綱紀를 極度로 壞亂케 하였으며 이에 따러 人民의 困苦는 자못 悲慘한 光景을 나타내였다.<ref>毅宗의 游幸宴樂과 人民의 苦痛에 關하야 몇 가지 例를 들면 高麗史 卷十八 毅宗世家 二十一年 三月條에 「辛酉 王微行 至金身窟 設羅漢齋 還玄化寺 與李公升許洪材覺倪等 泛舟衆美亭南池 酣飮極歡 先是 淸寧齋南麓 構丁字閣 扁曰 衆美亭 亭之南澗 築土石貯水 岸上作茅亭 鳧鴈蘆葦 宛如江湖之狀 泛舟其中 令小僮棹歌漁唱 以恣遊觀之樂 初作亭 役卒私齎糧 一卒貧甚 不能自給 役徒共分飯一匙 食之 一日 其妻具食來餉 且曰 宜召所親共之 卒曰 家貧何以備辦將私於人 而得之乎 豈竊人所有乎 妻曰 貌醜誰與私 性拙安能盜 但剪髮買來耳 因示其首 卒嗚咽不能食 聞者悲之」라 하였고 同 四月條에 「又泛舟亭南浦 沿流上下 相與唱和 至夜乃罷 亭在板積窯 初因窯亭而營之 內有殿曰 延興 南有澗盤回左右 植松竹花草其閒 又有茅亭草樓 凡七 有額者四 曰靈德亭壽御堂鮮碧齋玉竿亭 橋曰錦花 門曰水德 其御船 飾以錦繡 假錦爲帆 以爲流連之樂 窮奢極麗 勞民費財 凡三年而成」이라 하였다.</ref> 그 우에 當時 高麗에는 右文政治의 結果로서 文武의 差別이 생겨 武臣은 文官의 下風에 서게 되였다. 元來 國家의 干城인 武士는 直接 軍卒의 指揮에 當하고 있는 만큼 實際的 勢力은 섯부른 文官의 比가 아니니 文武의 差別이 비록 右文政治에서 나온 風習의 所致라 하나 이에 對하야 武士의 心中에는 본대 釋然히 알배가 아니다. 그리하야 一旦 文武統御의 道를 일케 되면 鬱積했던 武夫의 感情이 一時에 爆發할 것은 避키 어려운 事勢라 할 것이다. 毅宗 二十四年에 이러난 鄭仲夫 一派의 武士의 大叛亂은 實로 이러한 動機에서 이러난 것이니, 當時 그들 武士는 <cite no="15">「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cite>(高麗史 卷百二十八 鄭仲夫傳)이라 하야 前부터 君寵과 地位를 팡패로 武夫를 凌辱하던 文官과 宦寺는 勿論, 文冠을 머리에 언진 者까지 一綱打盡格으로 誅滅하고 드듸어 毅宗의 癈弑와 明宗의 擁立을 쉽사리 行하야 武士의 天下를 咄嗟間에 뀌며내였고, 明宗 三年 八月에 일어난 金甫當의 與兵事件으로 말미암어 武士의 勢力은 더욱 鞏固케 되여 모든 {{TagRef|3}}國權은 完全히 武士의 手中에 들게 되었다.<ref>同書 卷十九 明宗 三年 八月條에 「庚辰東北面兵馬使諫議大夫金甫當 起兵於東界 欲討鄭仲夫李義方 復立前王 東北面知兵馬事韓彦國 擧兵應之」 同 九月條에 「癸卵 安北都護府 執送甫當等 李義方殺之於市 凡文臣一切誅戮」 同 十月條에 「自三京四都護八牧 以至郡縣館驛之任 竝用武人」이라 하였다.</ref> (鄭仲夫亂에 關하야는 下節에서 다시 論述할 터)
|목차2원문27번={{TagSpage|9-1}}{{TagRef|2}}高麗에는 이미 毅宗에 앞서 仁宗 때로부터 下剋上의 風이 자못 行하야 權臣(李資謙 拓俊京 等)의 橫暴과 內亂(妙淸의)의 迸發로 因하야 王權이 式微하였고 다시 毅宗에 이르러서는 王의 縱恣 游逸의 放蕩한 行動은 政治와 綱紀를 極度로 壞亂케 하였으며 이에 따러 人民의 困苦는 자못 悲慘한 光景을 나타내였다.<ref></ref> 그 우에 當時 高麗에는 右文政治의 結果로서 文武의 差別이 생겨 武臣은 文官의 下風에 서게 되였다. 元來 國家의 干城인 武士는 直接 軍卒의 指揮에 當하고 있는 만큼 實際的 勢力은 섯부른 文官의 比가 아니니 文武의 差別이 비록 右文政治에서 나온 風習의 所致라 하나 이에 對하야 武士의 心中에는 본대 釋然히 알배가 아니다. 그리하야 一旦 文武統御의 道를 일케 되면 鬱積했던 武夫의 感情이 一時에 爆發할 것은 避키 어려운 事勢라 할 것이다. 毅宗 二十四年에 이러난 鄭仲夫 一派의 武士의 大叛亂은 實로 이러한 動機에서 이러난 것이니, 當時 그들 武士는 <cite no="15">「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cite>(高麗史 卷百二十八 鄭仲夫傳)이라 하야 前부터 君寵과 地位를 팡패로 武夫를 凌辱하던 文官과 宦寺는 勿論, 文冠을 머리에 언진 者까지 一綱打盡格으로 誅滅하고 드듸어 毅宗의 癈弑와 明宗의 擁立을 쉽사리 行하야 武士의 天下를 咄嗟間에 뀌며내였고, 明宗 三年 八月에 일어난 金甫當의 與兵事件으로 말미암어 武士의 勢力은 더욱 鞏固케 되여 모든 {{TagRef|3}}國權은 完全히 武士의 手中에 들게 되었다.<ref></ref> (鄭仲夫亂에 關하야는 下節에서 다시 論述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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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7번={{TagSpage|9-2}}이와 같이 文官이 꺽구러지고 武士의 專橫時代가 되매 政權의 爭奪은 다시 武臣들 사이에 이러나게 되였으며 그들의 武器는 말할 것도 없이 兵力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야 前擧 <cite no="16">「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cite>라 한 記事와 같이 當時 國軍은 대개 專橫武臣의 爪牙로 化함에 이르렀거니와 그러나 旣述한 바와 같이 國軍은 이미 腐敗 無力한 우에 武將 權臣輩는 各自의 位勢 保持와 政權 爭奪에 獨自의 勢力 背景이 必要케 되었던 것이니 이에서 所謂 私兵이 出現할 것도 必然한{{TagSpage|10-1}} 理勢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목차2원문28번={{TagSpage|9-2}}이와 같이 文官이 꺽구러지고 武士의 專橫時代가 되매 政權의 爭奪은 다시 武臣들 사이에 이러나게 되였으며 그들의 武器는 말할 것도 없이 兵力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야 前擧 <cite no="16">「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cite>라 한 記事와 같이 當時 國軍은 대개 專橫武臣의 爪牙로 化함에 이르렀거니와 그러나 旣述한 바와 같이 國軍은 이미 腐敗 無力한 우에 武將 權臣輩는 各自의 位勢 保持와 政權 爭奪에 獨自의 勢力 背景이 必要케 되었던 것이니 이에서 所謂 私兵이 出現할 것도 必然한{{TagSpage|10-1}} 理勢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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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8번={{TagSpage|10-2}}私兵에 있어서는 明宗 九年에 將軍 慶大升이 鄭仲夫 一黨을 뭇지른 뒤에 不平武士와 여러 政敵에 備키 爲하야 勇士 百數十人을 招募하야 所謂 長枕大被로써 門下에 留養하고 都房이라 號하였다.(高麗史 卷白七十五 慶大升傳) 이것이 武臣의 私兵으로 처음 나타나는 記事어니와 그러나 이밖에 當時 武將勢家의 家兵으로서 看過치 못할 것은 所謂 그들의 門客家僮이라는 것이니 李義旼 一族 崔忠獻 一族과 및 朴晋材 等의 門客家僮은 모다 {{TagRef|4}}家兵으로서 活動하였다.<ref>同書 卷百二十八 李義旼傳에 「九年(明宗)慶大升 誅仲夫 朝士詣闕賀 大升曰 弑君者尙在 焉用賀爲 義旼聞之大懼 聚勇士于家以備之 又聞大升都房人 謀害所忌 益懼 乃於里巷 樹大門以警夜 號爲閭門 京城坊里 皆效而樹之………二十六年 至榮(〇義旼의 子) 爲將軍 奪崔忠粹家鵓鴿 忠粹怒 遂告兄忠獻 欲誅義旼父子 忠獻然之 義旼適在彌陀山別墅 忠獻等往殺之 梟首于市 時 至純爲大將軍 至光(〇義旼의 子)爲將軍 聞變 率家僮 戰于路 至純見忠獻等多助 自揣不勝 與至光遁走」라 하였고, 同書 卷百二十九 崔忠獻傳에 「先是有人帖匿名牓云將軍朴晉材 謀去舅崔忠獻 由是 兩家構隙 至是 晉材爲大將軍 {{ruby|門客|○○}}幾於忠獻 而率皆勇悍 晉材 恨門客除官者少 常怏々不平 酒酣輒言 忠獻無狀 且自謂若無忠獻 可專國柄 欲圖之 流言曰 舅氏有無君心 每語門客曰寧無一日之榮乎 云云」이라 하였다.</ref> 元來 武臣의 門客家僮이 家兵의 起原이 되였을 것은 內藤雋輔氏도 이미 指摘한 바어니와 (靑丘學叢 第十五號 同氏 「高麗兵制管見」)이 또한 自然의 理勢라 할 것이니 慶大升의 {{ruby|都房|○○}}은 그의 門客家僮에게 부친 特別 名稱에 不過한 것이며, 崔忠獻 一族의 「門客家僮」이 자조 「家兵」으로 混稱된 것도 이러한 關係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목차2원문29번={{TagSpage|10-2}}私兵에 있어서는 明宗 九年에 將軍 慶大升이 鄭仲夫 一黨을 뭇지른 뒤에 不平武士와 여러 政敵에 備키 爲하야 勇士 百數十人을 招募하야 所謂 長枕大被로써 門下에 留養하고 都房이라 號하였다.(高麗史 卷白七十五 慶大升傳) 이것이 武臣의 私兵으로 처음 나타나는 記事어니와 그러나 이밖에 當時 武將勢家의 家兵으로서 看過치 못할 것은 所謂 그들의 門客家僮이라는 것이니 李義旼 一族 崔忠獻 一族과 및 朴晋材 等의 門客家僮은 모다 {{TagRef|4}}家兵으로서 活動하였다.<ref></ref> 元來 武臣의 門客家僮이 家兵의 起原이 되였을 것은 內藤雋輔氏도 이미 指摘한 바어니와 (靑丘學叢 第十五號 同氏 「高麗兵制管見」)이 또한 自然의 理勢라 할 것이니 慶大升의 {{ruby|都房|○○}}은 그의 門客家僮에게 부친 特別 名稱에 不過한 것이며, 崔忠獻 一族의 「門客家僮」이 자조 「家兵」으로 混稱된 것도 이러한 關係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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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9번={{TagSpage|10-3}}이 같은 武將權臣의 家兵은 崔忠獻 一族에 이르러 더욱 盛하야 國軍을 凌駕하리 만큼 되였었으니 崔忠獻의 侍從門客은 거의 三千人이었다는 記事를 비롯하야(高麗史 崔忠獻傳) 高宗 三年에 契丹(遼東의)이 侵入할 때에 我兵 中에 驍勇한 者는 거의 崔忠獻 父子<sup>(崔忠獻의 子 崔瑀)</sup>의 門客이요 官軍은 모다 老弱嬴卒임으로 그를 點檢하던 元帥도 勇氣가 풀렸다 하며(高麗史節要 卷一四 高宗 三年十一月條, 高麗史 卷一百三 趙沖傳) 同年 十二月에 崔忠獻이 家兵을 檢閱할새 左梗里로부터 右梗里에 이르기까지 數重으로 列을 지어 二三里에 뺏치었고 崔瑀<sup>(後名의 怡)</sup>의 家兵은 選地橋로부터 梨嶺을 지나 崇仁門에 이르렀다(高麗史節要 仝上 十二月條)는 몇 가지 例로도 그의 槪况을 推察할 수가 있다.
|목차2원문30번={{TagSpage|10-3}}이 같은 武將權臣의 家兵은 崔忠獻 一族에 이르러 더욱 盛하야 國軍을 凌駕하리 만큼 되였었으니 崔忠獻의 侍從門客은 거의 三千人이었다는 記事를 비롯하야(高麗史 崔忠獻傳) 高宗 三年에 契丹(遼東의)이 侵入할 때에 我兵 中에 驍勇한 者는 거의 崔忠獻 父子(崔忠獻의 子 崔瑀)의 門客이요 官軍은 모다 老弱嬴卒임으로 그를 點檢하던 元帥도 勇氣가 풀렸다 하며(高麗史節要 卷一四 高宗 三年十一月條, 高麗史 卷一百三 趙沖傳) 同年 十二月에 崔忠獻이 家兵을 檢閱할새 左梗里로부터 右梗里에 이르기까지 數重으로 列을 지어 二三里에 뺏치었고 崔瑀(後名의 怡)의 家兵은 選地橋로부터 梨嶺을 지나 崇仁門에 이르렀다(高麗史節要 仝上 十二月條)는 몇 가지 例로도 그의 槪况을 推察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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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0번={{TagSpage|10-4}}崔氏 一族의 家兵은 이와 같이 大規模로 擴張됨을 따러 그의 機構도 漸次 組織化되였으니 高麗史 崔忠獻傳에
|목차2원문31번={{TagSpage|10-4}}崔氏 一族의 家兵은 이와 같이 大規模로 擴張됨을 따러 그의 機構도 漸次 組織化되였으니 高麗史 崔忠獻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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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1번={{TagSpage|10-5}}<blockquote no="09">忠獻 自知縱恣 恐其變生不測 凡文武官閑良軍卒强有力者 皆招致 分爲六番 更日直宿其家 號都房 其出入 合番擁衛{{TagPage|11-1}}如赴戰鬪焉</blockquote>
|목차2원문32번={{TagSpage|10-5}}<blockquote no="09">忠獻 自知縱恣 恐其變生不測 凡文武官閑良軍卒强有力者 皆招致 分爲六番 更日直宿其家 號都房 其出入 合番擁衛{{Tagpage|11-1}}如赴戰鬪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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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2번={{TagSpage|11-2}}이 하였다. 이 崔忠獻의 都房은 그의 組織 動機가 前擧 慶大升의 그것과 全혀 同一한 것으로서 慶大升의 都房制를 踏襲한 것일지나 다만 崔忠獻의 都房은 六隊로 나누워 날을 定하야 六番 宿衛케 하였음으로 六番都房 또는 都房六番의 稱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特히 崔忠獻이 出入할 때에는 都房六番 全體가 擁護하야 마치 戰陣에 나가는 것과 같이 威勢가 森嚴하였던 것이니 慶大升의 都房에 比하야 그 規模와 組織이 자못 擴張되고 緻密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崔怡의 執權時代에 이르러서는 都房이 內外의 二部로 分化된 外에 馬別抄라는 特別 騎兵隊와 書房三番이라는 {{TagRef|5}}特殊宿衛가 設置되었으며<ref>馬別抄는 都房과 同一하게 움지기었음으로 언제던지 都房 馬別抄가 升舉되고 있으며 또 高麗史節要 卷十五 高宗 十六年 十一月條에 「崔瑀閱家兵 都房馬別抄 鞍馬衣服弓劍兵甲 甚侈美 分五軍習戰」이라 한 記事로도 馬別抄가 崔瑀 家兵의 騎兵隊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都房三番도 崔瑀가 組織한 것이니 高麗史 崔忠獻傳 附怡傳에 「怡門客 多當代名儒 分爲三番 遞宿書房」이라 하였다. 이 書房三番은 자조 都房과 가치 宿衛에 當하였으며 林惟茂 때에도 書房三番의 制를 踏襲하야 宿衛로서 使用하였으니 同書 卷百三十 林衍傳에 「惟茂(〇林衍의 子) 集 都房六番 自衛其家 使惟栶 領書房三番 衛惟茂家 爲外援」이라 하였다.</ref> {{TagRef|6}}다시 崔沆에 이르러서는 都房이 三十六番으로 組織이 擴大되였다.<ref>前擧 崔忠獻傳 附沆傳에 「沆死 殿前崔良白 秘不發喪 按劒叱侍婢勿哭 與仁烈謀  以沆言 傳于門客 大將軍崔瑛蔡楨及能等 會夜別抄神義軍書房三番都房三十六番擁衛乃發喪 云云」이라고 하였다. 都房三十六番이라는 것은 이 때에 처음으로 뵈이나니, 崔沆이 죽은 뒤에 臨時로 編成된 것으로는 뵈여지지 아니함으로써 崔沆의 執權時代에 이미 三十六番으로 都房을 改編한 것으로 생각한다.</ref> 이와 같은 武將 權臣의 家兵宿衛인 都房 乃至 書房의 制는 最後로 林惟茂 때에까지 踏襲되였던 것이니 일로 보면 當時 政權을 싸고 軋轢과 爭奪을 일삼던 武將 權臣에 있어 家兵의 存在가 얼마나 必要不可缺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목차2원문33번={{TagSpage|11-2}}이 하였다. 이 崔忠獻의 都房은 그의 組織 動機가 前擧 慶大升의 그것과 全혀 同一한 것으로서 慶大升의 都房制를 踏襲한 것일지나 다만 崔忠獻의 都房은 六隊로 나누워 날을 定하야 六番 宿衛케 하였음으로 六番都房 또는 都房六番의 稱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特히 崔忠獻이 出入할 때에는 都房六番 全體가 擁護하야 마치 戰陣에 나가는 것과 같이 威勢가 森嚴하였던 것이니 慶大升의 都房에 比하야 그 規模와 組織이 자못 擴張되고 緻密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崔怡의 執權時代에 이르러서는 都房이 內外의 二部로 分化된 外에 馬別抄라는 特別 騎兵隊와 書房三番이라는 {{TagRef|5}}特殊宿衛가 設置되었으며<ref></ref> {{TagRef|6}}다시 崔沆에 이르러서는 都房이 三十六番으로 組織이 擴大되였다.<ref></ref> 이와 같은 武將 權臣의 家兵宿衛인 都房 乃至 書房의 制는 最後로 林惟茂 때에까지 踏襲되였던 것이니 일로 보면 當時 政權을 싸고 軋轢과 爭奪을 일삼던 武將 權臣에 있어 家兵의 存在가 얼마나 必要不可缺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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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3번={{TagSpage|11-3}}要컨대 毅宗 明宗 以後 武士의 跋扈時期에 있어 武將 權臣은 各々 家兵을 私蓄하야 서로 政權 爭奪을 일삼으며 國王의 廢立도 任意로 行하게 되매 政治와 綱紀의 壊亂은 極度에 達하였다. 이에 따러 地方에는 不逞輩의 叛亂과 草賊의 跳梁이 各處에서 井發하며 都城 附近에도 {{TagRef|7}}盜窃이 자못 盛行하고<ref>三別抄가 組織된 高宗時代 前半期에서도 高宗 四年의 一年間 國内 騒亂 狀態에 關하야 重要한 몇 가지 例를 들면 高麗史節要 卷十五 高宗 四年 正月條에 「全羅抄軍別監洪傅報 全州軍旣發 而中路擅還作亂 殺逐州長吏 云云」 同條에 「振威縣人令同正李將大直長同正李唐必 乘國家有事(丹兵入寇) 乃與同縣人別將同正金禮 謀不軌 嘯聚徒衆 劫奪縣令符印 發倉賑貸 村落飢民多附 移牒旁郡 自稱靖國兵馬使 號義兵 云云」 同 六月條에 「崔光秀據城(〇平壞城)作亂 自稱句高(〇疑二字倒錯)麗興復兵馬使金吾衛攝上將軍 署置僚佐 召募精銳 傳檄北界諸城 云云」 同 三月條에 「盗發純陵」이라 하였다.</ref> 公私奴隷의 무리까지 恐怖할 만한 {{TagRef|8}}陰謀를 劃策하였다.<ref>高麗史 崔忠獻傳에 「私僮萬積等六人 樵北山 招集公私奴隷 謀曰 國家自庚癸以來 朱紫多起於賤隷 將相寧有種乎 時來則可爲也 吾輩安能勞筋骨 困於捶楚之下 諸奴皆然之 剪黃紙數千 皆鈒丁字 爲識約曰  吾輩自興國寺步廊 至毬庭 一時群集鼓噪 則在內宦者 必應之 官奴等誅鋤於內 吾徒蜂起城中 先殺崔忠獻等 仍各格殺其主焚賤籍 使三韓無賤人 則公卿將相 吾輩皆得爲之矣 及期皆集 以衆不滿數百 恐不濟事 更約會普濟寺 云云」이라 하였다.</ref> 이와 같이 治安과 秩序가 紊亂하였고 그 우에 契丹의 뒤를 이어 强敵 蒙古의 壓力을 받게 됨에 이르러 當時 府兵은 이미 綏弛된 지 오랜 지라 外寇內患에 當키 어려웠던 것이니 이러한 情勢 아래에서 權臣 崔瑀의 손에 依하야 特殊兵團이 創設된 것이니 이것이 所謂 三別抄다.
|목차2원문34번={{TagSpage|11-3}}要컨대 毅宗 明宗 以後 武士의 跋扈時期에 있어 武將 權臣은 各々 家兵을 私蓄하야 서로 政權 爭奪을 일삼으며 國王의 廢立도 任意로 行하게 되매 政治와 綱紀의 壊亂은 極度에 達하였다. 이에 따러 地方에는 不逞輩의 叛亂과 草賊의 跳梁이 各處에서 井發하며 都城 附近에도 {{TagRef|7}}盜窃이 자못 盛行하고<ref></ref> 公私奴隷의 무리까지 恐怖할 만한 {{TagRef|8}}陰謀를 劃策하였다.<ref></ref> 이와 같이 治安과 秩序가 紊亂하였고 그 우에 契丹의 뒤를 이어 强敵 蒙古의 壓力을 받게 됨에 이르러 當時 府兵은 이미 綏弛된 지 오랜 지라 外寇內患에 當키 어려웠던 것이니 이러한 情勢 아래에서 權臣 崔瑀의 손에 依하야 特殊兵團이 創設된 것이니 이것이 所謂 三別抄다.
 
  
|목차2해독문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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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번={{TagPerson|[[삼별초]]}}는 {{TagPerson|[[고종]]}} 때에 {{TagPerson|[[최우]]}}<sup>(후명은 이(怡))</sup>의 손에 의하여 조직된 야별초가 좌우별초로 분화한 것에 신의군을 더하여 일컬은 것이니 (삼별초의 종별에 관하여는 아래 절에서 갱술할 터이나) 이 삼별초를 고찰함에 있어서는 먼저 이전부터 나타나 보이는 별초(군)에 대하여 상고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원래 야별초 좌우별초 삼별초 등의 명칭은 그 자체가 재래 별초의 칭에 ‘야’ ‘좌’ ‘우’ 또는 ‘삼’의 수식어가 〿터 특별명칭으로 된 것임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라고 믿는 바이니 만일 그렇다면 양자 사이에 어느 정도까지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먼저 재래 별초에 나아가 살펴보면 {{TagBook|[[고려사]]}}(권129) 최충헌전에
|목차2해독문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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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blockquote no="01">明宗四年 元帥奇卓誠 擊趙位寵 聞忠獻勇敢 選補別抄都令</blockquote>
|목차2해독문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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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번=이라 한 것이 별초에 관한 최초의 기사이다. 이는 {{TagPerson|[[명종]]}} 4년에 원수 {{TagPerson|[[기탁성]]}}이 서경에 반거(叛據)한 {{TagPerson|[[조위총]]}}을 토벌할 때에 {{TagPerson|[[최충헌]]}}이 별초도령으로 선보(選補)되었다는 것이어니와, 이에 관하여 {{TagPerson|[[최충헌]]}} 묘지({{TagBook|[[조선금석총람]]}} 상 442쪽)에는
|목차2해독문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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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번=<blockquote no="02">大定甲午<sup>〇明宗四年</sup> 盜起西都 推轂元帥 授鉞徂征 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 擧公爲都令 以當一面 陷陣却敵 登陴先入 遂克戡定</blockquote>
|목차2해독문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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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5번=이라 하였다. 앞서 든 {{TagBook|[[고려사]]}}의 기사에는 개칭적(槪稱的)으로 다만 별초로 쓰여있으나 이 묘지는 특히 개인의 행적을 주로 한 만큼 보다 자세히 전봉별초라 하여 별초의 종별과 그의 임무를 기재한 것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바이다. 이 전봉별초에 관한 상하 기사를 통하여 보면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박사도 대개 유사한 견해를 내렸거니와({{TagJournal|[[사학잡지]]}}{{TagVolume|[[사학잡지 37-9|37-9]]}} 제37편 제9호 소재,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 {{TagArticle|[[「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 전봉별초는 일종의 결사적 선봉대 또는 결사적 유격대와 같이 활동하던 특선 병대의 칭이었던 듯하다. 다시 별초에 관하여 {{TagBook|[[고려사절요]]}}(권14) 고종 3년 9월조에
|목차2해독문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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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6번=<blockquote no="03">三軍 各發別抄一百 神騎四十人 行至朝陽(〇价川) 阿爾川邊 與契丹兵戰 云云</blockquote>
|목차2해독문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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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7번=이라 한 기사가 보이니, 이는 {{TagPerson|[[고종]]}} 3년에 요동의 글단(契丹)(대요수국)이 침구(侵寇)할 때 이것을 방제(防制)하기 위하여 3군 즉 중군({{TagPerson|[[노원순]]}}의 인솔한) 우군({{TagPerson|[[오응부]]}}) 후군({{TagPerson|[[김취려]]}})이 출동하였을 때에 3군은 먼저 별초와 신기(神騎)로써 적병에 당케 한 것이다. 일로 보면 당시 3군은 신기(신기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논할 터)와 별초로써 전초대 또는 유격대와 같이 활동케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 3군의 별초도 또한 앞서 든 {{TagPerson|[[최충헌]]}}의 전봉별초와 같은 것으로 추단되는 바이다.
|목차2해독문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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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8번=별초는 원래 본군에 대한 ‘특선병대’의 칭으로서 군사 행동에 제하여 특히 용감한 병졸을 뽑아 임시적으로 편성된 것이 그의 본 면목이었던 듯하다. 앞서 든 {{TagPerson|[[최충헌]]}}의 전봉별초에 관한 기사를 비롯하여 {{TagBook|[[익재난고]]}}(6)에 보이는 김취려행군기에 의하면 앞서 든 3군이 별초를 선수(先遺)한 것을 가리켜 <cite no="01">“三軍各選精銳 禦之”</cite>라 하였다. {{TagPerson|[[이제현]]}}의 이 기사에는 다만 <cite no="02">“정예를 뽑았다”</cite> 하여 별초라는 명칭이 보이지 아니하나 이에 의하여 당시 3군의 별초는 본군으로부터 정예분자를 뽑아 편성된 것만은 알 수가 있다. 다시 별초의 의미에 있어서는 그의 명칭 자체로도 또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별초의 ‘별’은 이미 {{TagPerson|[[숙종]]}} 조에 {{TagPerson|[[윤관]]}}이 창설한 별무반(아래에서 논술할 터)의 별과 같이 ‘보통’에 대한 ‘특별’의 뜻으로 쓴 것임은 장황한 설명을 기다릴 것도 없는 바이며, {{TagRefT|1}}별초의 ‘초’는 빼일(쵸)로 훈(訓)하였을 것으로서<ref group="a">{{TagPerson|[[김인후]]}} {{TagBook|[[백련초해]]}}(화암서원 판본이니 이 판은 하서의 필적을 그대로 새긴 것이라는 설이 있음)에 「백련초해」를 「온갓 글귀 {{ruby|ᄲᅡ|○}}사긴 거시라」고 훈(訓)하였음.</ref> 선취 또는 {{ruby|약취|○○}}의 뜻으로 쓰였던 것으로 믿는다. 다시 {{TagBook|[[고려사]]}} 상에 나아가 군사에 관한 초 자(字)의 용례를 몇 가지 들어보면 <cite no="03">“抄僧爲軍”</cite>(고려사 권81, 병지1) <cite no="04">“各道{{ruby|抄|○}}軍使等 {{ruby|抄|○}}閑良子弟”</cite> <cite no=”05”>“元帥於原定別抄外 又{{ruby|抄|○}}煙戶軍 又抄別軍”</cite> <cite no=”06”>“加定各道元帥 分遣{{ruby|抄|○}}軍”</cite>(병동상(幷仝上)) 등 구(句)에 보이는 ‘초’는 선취의 뜻으로 쓰인 것들이며, 조선 조에 들어서도 각종의 별초와 초군의 칭이 최근세에까지 있었던 것으로서 별초군 가전별초 장초 신초창수 정초군 등의 명칭이 보이니<sup>(增補文轍 備考兵考)</sup>, 이것들도 모두 선취의 뜻으로서 ‘초’를 붙이게 된 것임은 <cite no="07">“別抄軍 本摠戎廳束伍中 抄選而別其號者也”</cite>(앞의 책 권110 병고2)라는 정초구에 관한 해설을 가지고도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조선 조에 이르러서도 각종 초군의 명칭이 보이거니와 이는 전 조의 것을 도습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목차2해독문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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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9번=요컨대 고려의 별초(군)는 특선병대의 칭인 것은 이상의 논술한 것으로서 대개 구명되었을 줄로 생각하거니와, 다시 한걸음 나아가 삼별초 또는 일반 별초 출현의 필연성과 그의 의의를 밝히려는 의미 아래에서 먼저 중말기에 이르기까지의 고려병제 연혁을 개찰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의 병제는 대개 당의 부(부위)병제에 의방(依倣)한 것이니 {{TagBook|[[고려사]]}}(권83) 백관지(3) 주현군조에
|목차2해독문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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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0번=<blockquote no="04">高麗兵制 大抵皆做唐之府術 云云</blockquote>
|목차2해독문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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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1번=이라 하였고, 또 같은 지(2) 서반조에
|목차2해독문1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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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2번=<blockquote no="05">二年<sup>(〇太祖)</sup> 置六衛 穆宗五年 備置六衛職員 後置鷹揚龍虎二軍 在六衛之上 後又設重房 使二軍六衛上大將軍 皆會焉毅 明以降 武臣用事 重房之權 益重</blockquote>
|목차2해독문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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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3번=이라 하였다. 대개 {{TagPerson|[[태조]]}} 2년에 당의 부병제에 의방하여 6위(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감문위)가 설치되었고 다시 목종 5년에 이르러 6위의 관제가 완비되었으며, 그 후에 다시 응양용호의 2군을 6위의 위에 두었고 (2군6위를 병칭하여 8위라고도 함) 또 뒤에 2군6위의 수뇌들로써 (일반 재추도 참열(𠫵列)였으나)중방(군기 변사를 의결하던 군사적 기관)을 설치하였으나 {{TagPerson|[[의종]]}} {{TagPerson|[[명종]]}} 때에 이르러 무관({{TagPerson|[[정중부]]}} {{TagPerson|[[최충헌]]}} 등)이 전횡함에 미처 국가의 군사상 최고기관인 중방이 그들의 막부로 되어 국권을 전천(專擅)하게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응양용호 2군 및 중방의 설치는 과연 어느 시대에 속한 것인지 위의 인용문의 <cite no="08">“後置⋯⋯”</cite> <cite no="09">“後又設⋯⋯”</cite> 등의 막연한 기사로는 추단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기타 다른 사료에도 또한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는 바이다.
|목차2해독문1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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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4번=어쨌든 2군6위는 {{TagPerson|[[태조]]}}로부터 {{TagPerson|[[목종]]}}에 걸쳐 정비된 병제인 것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거니와 지방군에 있어서는 <cite no="10">“高麗兵制 大抵皆倣唐之府衛 則兵之散在州縣者 意亦皆屬乎六衛 非六衛外 別有州縣軍也 然無可考 姑以此目之”</cite>({{TagBook|[[고려사]]}} 권83 병지3 주현군서)라 하여 주현군의 예속계통에 관하여는 적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아니하였던 것으로서 {{TagBook|[[고려사]]}} 편자도 다만 추론에 그치고 말았으나, 원래 부병제 자체로 보아 변방 요지의 진수군(鎭戌軍)은 물론이어니와 각 주현에 산재한 소위 주현군도 대개 6위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단하여도 좋을 듯하다.
|목차2해독문1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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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5번=그러나 {{TagPerson|[[태조]]}} 이래 정비된 고려의 군제는 후일의 경과를 따라 점차로 해이하여 {{TagPerson|[[문종]]}} 때에 이르러서는 벌써 문란의 조(兆)에 현저하였으니
|목차2해독문1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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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6번=<blockquote no="06">二十五年(〇文宗) 六月 制日 近聞 諸衛軍人 亡命者 甚多 是由執事不公 富强者 托勢以免 貧窮者 獨受其勞 衣食乏絕 而略無休息 云云</blockquote>(같은 책 권81 병지1)
|목차2해독문1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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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7번=이라 한 기사로 보면 문종 때에 이르러 병제 문란의 원인으로 ①군인으로서 도망하는 자가 많이 생기며 ②부강한 자는 세력을 이용하여 병역을 면하고 빈궁한 자만이 그에 당하므로 빈궁한 그들은 쉬일 틈이 없으되 의식(衣食)의 절핍을 보게 되어 병력의 저열하여 진 것을 제시한 것이니, 이때부터 고려의 부위병은 질과 양에 있어 자못 빈약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결과는 드디어 외적 방어와 치안 유지에 특수군단의 출현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
|목차2해독문1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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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8번=다음 {{TagPerson|[[숙종]]}} 조 {{TagPerson|[[윤관]]}}의 건의에 의하여 창설된 별무반에 관하여 살펴보면 고려사(권96) 윤관전에
|목차2해독문1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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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9번=<blockquote no="07">奏曰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於是 建議 始立別武班 自文武散官吏胥 至于商賈僕隷及州府郡縣 凡有馬者爲神騎 無馬者爲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等軍 年二十以上男子非擧子 皆屬神步 西班與諸鎭府軍人 四時訓錬 又選僧徒 爲降魔軍 遂鍊兵畜穀 以圖再擧</blockquote>
|목차2해독문2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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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0번=라 하였다. {{TagPerson|[[숙종]]}} 9년에 동북의 강적인 동여진의 침입을 방어할 때 {{TagPerson|[[윤관]]}} 같은 이도 처음에는 {{TagPerson|[[임간]]}}의 실패한 뒤를 이어 동북면행영병마도통으로 동여진에 당하였다가 또한 병력의 다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정에 건백(建白)하여 별무반을 조직한 것이니 {{TagPerson|[[윤관]]}}은 먼저 그의 실패의 원인으로서 <cite no="11">“敵騎我步”</cite>를 들었다. 원래 보병만으로는 기병에 당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당시 그러한 쓰린 경험을 맛본 {{TagPerson|[[윤관]]}}은 새로 신기군이라는 기병대를 조직하는 동시에 보병에 있어서는 신보 도탕 경궁 정노 발화 등 각 종으로써 특별군제를 정하고 별로 일도(佾徒)로써 항마군이라는 것을 조직하였으니 이와 같이 보병에까지 별제를 세운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수이(綏弛) 쇠약한 재래 병제의 보강책에서 나온 것이다.
|목차2해독문2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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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1번=이 별무반이라는 특별군단은 후일({{TagPerson|[[예종]]}} 때) {{TagPerson|[[윤관]]}}의 여진정벌에 성공한 기초가 되었으며 여진정벌에 많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니 <cite no="12">“逮至肅宗 東女眞構釁 於是 銳意桿禦 日事鍊兵 遂置別武班⋯⋯⋯是雖不合古制 然亦用之一時 而收功有足稱者”</cite>(같은 책 권81 병지1)라 한 기사로도 추찰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별무반은 동여진에 대한 공방을 목표로 하여 생긴 것인 만큼 2군6위의 정규 병제와 같이 제도로서의 영속성이 적은 것으로서 얼마 안 되어 붕해(崩解)하였던 것으로 믿나니 앞서 든 <cite no="13">“亦用之一時 而收功”</cite>이라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오직 신기군만은 그의 활동이 고종 말년까지 자주 역사 상에 나타나 보이니 원래 이 특수 기병대인 신기군(신기반이라는 칭도 있으니 이 신기반의 반(班)도 별무반의 반(班)에서 묻어 온 듯함)은 고려 병력의 결함을 보족(補足)하여 대륙 강적(여진 글단 몽고)의 경기(勁騎)에 대하게 되었으므로 그의 필요와 효과가 다른 반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으로서 후대에까지 존치된 것이 아닐까 한다.
|목차2해독문2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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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2번=그러나 일면에 있어 재래의 부병제는 그의 내용이 비록 허약하여졌다 할지라도 그의 체제는 의연히 고려말까지 존속되었으니, {{TagPerson|[[공양왕]]}} 원년 2월 간관(諫官)이 부병을 논한 상소 가운데에
|목차2해독문2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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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3번=<blockquote no="08">我太祖 設府兵 令軍簿司典馬攝之政 身彩武藝備完者 得與其選 是以 將得其人 卒伍精强 近年以來 入仕多門 兵政一壞 或拘於都目 或出於請謁 不問老幼才否 而授之 於是 襁褓幼子工商奴隷 無尺寸之功 坐耗天祿 一有緩急 將何以用之 甚非先王設兵之意也 願令精選勇略兼備者 以代尸祿之輩 云云({{TagBook|[[고려사]]}} 권81 병지1)</blockquote>
|목차2해독문2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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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4번=이라 한 기사의 일례로도 저간의 소식을 넉넉히 엿볼 수 있을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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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5번=이상에서 고려 초기로부터 중말경에 걸쳐서의 병제의 변천과 그의 경향을 대개 개술하였거니와 {{TagPerson|[[의종]]}} {{TagPerson|[[명종]]}} 때에 이르러는 병권이 무신의 손에 돌아가고 그에 따라 무사의 전횡시대가 순치(馴致)되었다. <cite no="14">“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 悍將勁卒 皆屬私家”</cite>(같은 책 병지서)라 한 것은 그 사정을 가리킨 것이어니와 정병과 병권이 무신의 손에 들어가 소위 무사전횡 시대가 시작되기는 의종 때 {{TagPerson|[[정중부]]}}의 난으로부터서의 일이다. 그리하여 삼별초라는 특수병대도 이러한 시대에 출현한 것이니 이에서 우리는 다시 무사전횡시대가 순치되기까지의 경로를 따져 삼별초와의 관계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목차2해독문2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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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6번={{TagRefT|2}}고려에는 이미 {{TagPerson|[[의종]]}}에 앞서 {{TagPerson|[[인종]]}} 때로부터 하극상의 바람이 자못 행하여 권신({{TagPerson|[[이자겸]]}} {{TagPerson|[[척준경]]}} 등)의 횡포과 내란({{TagPerson|[[묘청]]}}의)의 병발(迸發)로 인하여 왕권이 식미(式微)하였고 다시 의종에 이르러서는 왕의 종자(縱恣) 유일(游逸)의 방탕한 행동은 정치와 강기(綱紀)를 극도로 괴란케 하였으며 이에 따라 인민의 곤고는 자못 비참한 광경을 나타내었다.<ref group="a">{{TagPerson|[[의종]]}}의 유행연악과 인민의 고통에 관하여 몇 가지 예를 들면 {{TagBook|[[고려사]]}} 권18 의종세가 21년 3월조에 「辛酉 王微行 至金身窟 設羅漢齋 還玄化寺 與李公升許洪材覺倪等 泛舟衆美亭南池 酣飮極歡 先是 淸寧齋南麓 構丁字閣 扁曰 衆美亭 亭之南澗 築土石貯水 岸上作茅亭 鳧鴈蘆葦 宛如江湖之狀 泛舟其中 令小僮棹歌漁唱 以恣遊觀之樂 初作亭 役卒私齎糧 一卒貧甚 不能自給 役徒共分飯一匙 食之 一日 其妻具食來餉 且曰 宜召所親共之 卒曰 家貧何以備辦將私於人 而得之乎 豈竊人所有乎 妻曰 貌醜誰與私 性拙安能盜 但剪髮買來耳 因示其首 卒嗚咽不能食 聞者悲之」라 하였고 同 四월조에 「又泛舟亭南浦 沿流上下 相與唱和 至夜乃罷 亭在板積窯 初因窯亭而營之 內有殿曰 延興 南有澗盤回左右 植松竹花草其閒 又有茅亭草樓 凡七 有額者四 曰靈德亭壽御堂鮮碧齋玉竿亭 橋曰錦花 門曰水德 其御船 飾以錦繡 假錦爲帆 以爲流連之樂 窮奢極麗 勞民費財 凡三年而成」이라 하였다.</ref> 그 위에 당시 고려에는 우문정치의 결과로서 문무의 차별이 생겨 무신은 문관의 하풍에 서게 되었다. 원래 국가의 간성(干城)인 무사는 직접 군졸의 지휘에 당하고 있는 만큼 실제적 세력은 섣부른 문관에 비할 바가 아니니 문무의 차별이 비록 우문정치에서 나온 풍습의 소치라 하나 이에 대하여 무사의 중심에는 본대 석연히 알 배가 아니다. 그리하여 일단 문무통어의 길을 잃게 되면 울적했던 무부(武夫)의 감정이 일시에 폭발할 것은 피하기 어려운 사세(事勢)라 할 것이다. 의종 34년에 일어난 {{TagPerson|[[정중부]]}} 일파의 무사의 대반란은 실로 이러한 동기에서 일어난 것이니, 당시 그들 무사는 <cite no="15">“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cite>({{TagBook|[[고려사]]}} 권128 정중부전)이라 하여 전부터 군총과 지위를 방패로 무부를 능욕하던 문관과 환시(宦寺)는 물론, 문관을 머리에 얹은 자까지 일강타진(一綱打盡) 격으로 주멸(誅滅)하고 드디어 {{TagPerson|[[의종]]}}의 폐시(癈弑)와 {{TagPerson|[[명종]]}}의 옹립을 쉽사리 행하여 무사의 천하를 돌차간에 꾸며내었고, {{TagPerson|[[명종]]}} 3년 8월에 일어난 {{TagPerson|[[A]]}}김보당의 {{TagEvent|[[여병사건]]}}으로 말미암아 무사의 세력은 더욱 공고하게 되어 모든 {{TagRefT|3}}국권은 완전히 무사의 수중에 들게 되었다.<ref group="a">같은 책 권19 {{TagPerson|[[명종]]}} 3년 8월조에 「庚辰東北面兵馬使諫議大夫金甫當 起兵於東界 欲討鄭仲夫李義方 復立前王 東北面知兵馬事韓彦國 擧兵應之」 같은 책 9월조에 「癸卵 安北都護府 執送甫當等 李義方殺之於市 凡文臣一切誅戮」 같은 책 10월조에 「自三京四都護八牧 以至郡縣館驛之任 竝用武人」이라 하였다.</ref> ({{TagEvent|[[정중부난]]}}에 관하여는 아래 절에서 다시 논술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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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7번=이와 같이 문관이 거꾸러지고 무사의 전횡시대가 됨에 정권의 쟁탈은 다시 무신들 사이에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들의 무기는 말할 것도 없이 병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든 <cite no="16">“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cite>라 한 기사와 같이 당시 국군은 대개 전횡무신의 조아(爪牙)로 변함에 이르렀거니와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국군은 이미 부패 무력한 위에 무장 권신 무리는 각자의 위세 보지(保持)와 정권 쟁탈에 독자의 세력 배경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에서 소위 사병이 출현할 것도 필연한 이세(理勢)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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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8번=사병에 있어서는 {{TagPerson|[[명종]]}} 9년에 장군 {{TagPerson|[[경대승]]}}이 {{TagPerson|[[정중부]]}} 일당을 무찌른 뒤에 불평무사와 여러 정적에 준비하기 위하여 용사(勇士) 백수십인을 초모(招募)하여 소위 장침대피로써 문하에 유양(留養)하고 도방이라 이름 지었다.({{TagBook|[[고려사]]}} 권175 경대승전) 이것이 무신의 사병으로 처음 나타나는 기사거니와 그러나 이밖에 당시 무장세가의 가병(家兵)으로서 간과하지 못할 것은 소위 그들의 문객가동(門客家僮)이라는 것이니 {{TagPerson|[[이의민]]}} 일족 {{TagPerson|[[최충헌]]}} 일족과 및 {{TagPerson|[[박진재]]}} 등의 문객가동은 모두 {{TagRefT|4}}가병으로서 활동하였다.<ref group="a">같은 책 권128 이의민전에 「九年(明宗)慶大升 誅仲夫 朝士詣闕賀 大升曰 弑君者尙在 焉用賀爲 義旼聞之大懼 聚勇士于家以備之 又聞大升都房人 謀害所忌 益懼 乃於里巷 樹大門以警夜 號爲閭門 京城坊里 皆效而樹之⋯⋯二十六年 至榮(〇義旼의 子) 爲將軍 奪崔忠粹家鵓鴿 忠粹怒 遂告兄忠獻 欲誅義旼父子 忠獻然之 義旼適在彌陀山別墅 忠獻等往殺之 梟首于市 時 至純爲大將軍 至光(〇의민의 아들)爲將軍 聞變 率家僮 戰于路 至純見忠獻等多助 自揣不勝 與至光遁走」라 하였고, 같은 책 권129 최충헌전에 「先是有人帖匿名牓云將軍朴晉材 謀去舅崔忠獻 由是 兩家構隙 至是 晉材爲大將軍 {{ruby|門客|○○}}幾於忠獻 而率皆勇悍 晉材 恨門客除官者少 常怏々不平 酒酣輒言 忠獻無狀 且自謂若無忠獻 可專國柄 欲圖之 流言曰 舅氏有無君心 每語門客曰寧無一日之榮乎 云云」이라 하였다.</ref> 원래 무신의 문객가동이 가병의 기원이 되었을 것은 나이토우 슌슈케(內藤雋輔)씨도 이미 지적한 바거니와 ({{TagJournal|[[청구학총]]}}{{TagVolume|[[청구학총 15|15]]}} 같은 이 {{TagArticle|[[「고려병제관견」]]}})이 또한 자연의 이세라 할 것이니 {{TagPerson|[[경대승]]}}의 {{ruby|도방|○○}}은 그의 문객가동에게 붙인 특별 명칭에 불과한 것이며, {{TagPerson|[[최충헌]]}} 일족의 ‘문객가동’이 자주 ‘가병’으로 혼칭된 것도 이러한 관계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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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9번=이 같은 무장권신의 가병은 {{TagPerson|[[최충헌]]}} 일족에 이르러 더욱 성하여 국군을 능가하리 만큼 되었으니 {{TagPerson|[[최충헌]]}}의 시종문객은 거의 3천 인이었다는 기사를 비롯하여({{TagBook|[[고려사]]}} 최충헌전) {{TagPerson|[[고종]]}} 3년에 글단(요동의)이 침입할 때에 아병(我兵) 중에 효용(驍勇)한 자는 거의 {{TagPerson|[[최충헌]]}} 부자<sup>(최충헌의 아들 {{TagPerson|[[최우]]}})</sup>의 문객이요 관군은 모두 노약영졸(老弱嬴卒)이므로 그를 점검하던 원사(元帥)도 용기가 풀렸다 하며({{TagBook|[[고려사절요]]}} 권14 고종 3년 11월조, {{TagBook|[[고려사]]}} 권103 조충전) 같은 해 12월에 {{TagPerson|[[최충헌]]}}이 가병을 검열할 때 좌경리(左梗里)로부터 우경리(右梗里)에 이르기까지 수중으로 열을 지어 23리에 뻗쳤고 {{TagPerson|[[최우]]}}<sup>(후명의 이)</sup>의 가병은 선지교로부터 이령(梨嶺)을 지나 숭인문에 이르렀다({{TagBook|[[고려사절요]]}} 위의 책 12월조)는 몇 가지 예로도 그의 개황(槪况)을 추찰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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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0번=최씨 일족의 가병은 이와 같이 대규모로 확장됨을 따라 그의 기구도 점차 조직화되었으니 {{TagBook|[[고려사]]}} 최충헌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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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1번=<blockquote no="09">忠獻 自知縱恣 恐其變生不測 凡文武官閑良軍卒强有力者 皆招致 分爲六番 更日直宿其家 號都房 其出入 合番擁衛如赴戰鬪焉</blockquote>
|목차2해독문3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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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2번=이 하였다. 이 {{TagPerson|[[최충헌]]}}의 도방은 그의 조직 동기가 앞서 든 {{TagPerson|[[경대승]]}}의 그것과 全혀 同一한 것으로서 {{TagPerson|[[경대승]]}}의 도방제를 답습한 것일지나 다만 {{TagPerson|[[최충헌]]}}의 도방은 6대로 나누어 날을 정하여 6번 숙위하게 하였음으로 육번도방 또는 도방육번의 칭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특히 {{TagPerson|[[최충헌]]}}이 출입할 때에는 도방육번 전체가 옹호하여 마치 전진에 나가는 것과 같이 위세가 삼엄하였던 것이니 {{TagPerson|[[경대승]]}}의 도방에 비하여 그 규모와 조직이 자못 확장되고 치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TagPerson|[[최이]]}}의 집권시대에 이르러서는 도방이 내외의 2부로 분화된 외에 마별초라는 특별 기병대와 서방삼번이라는 {{TagRefT|5}}특수숙위가 설치되었으며<ref group="a">마별초는 도방과 동일하게 움직였으므로 언제든지 도방 마별초가 승거되고 있으며 또 {{TagBook|[[고려사절요]]}} 권15 고종 16년 11월조에 「崔瑀閱家兵 都房馬別抄 鞍馬衣服弓劍兵甲 甚侈美 分五軍習戰」이라 한 기사로도 마별초가 {{TagPerson|[[최우]]}} 가병의 기병대였음을 알 수 있으며 도방삼번도 {{TagPerson|[[최우]]}}가 조직한 것이니 {{TagBook|[[고려사]]}} 최충헌전 부이전에 「怡門客 多當代名儒 分爲三番 遞宿書房」이라 하였다. 이 서방삼번은 자주 도방과 같이 숙위에 당하였으며 임유무 때에도 서방삼번의 제를 답습하여 숙위로서 사용(使用)하였으니 같은 책 권130 임연전에 「惟茂(〇임연의 아들) 集 都房六番 自衛其家 使惟栶 領書房三番 衛惟茂家 爲外援」이라 하였다.</ref> {{TagRefT|6}}다시 최항에 이르러서는 도방이 36번으로 조직이 확대되었다.<ref group="a">앞서 든 최충헌전 부항전에 「沆死 殿前崔良白 秘不發喪 按劒叱侍婢勿哭 與仁烈謀  以沆言 傳于門客 大將軍崔瑛蔡楨及能等 會夜別抄神義軍書房三番都房三十六番擁衛乃發喪 云云」이라고 하였다. 도방36번이라는 것은 이 때에 처음으로 보이니, {{TagPerson|[[최항]]}}이 죽은 뒤에 임시로 편성된 것으로는 보여지지 아니함으로써 {{TagPerson|[[최항]]}}의 집권시대에 이미 36번으로 도방을 개편한 것으로 생각한다.</ref> 이와 같은 무장 권신의 가병숙우인 도방 내지 서방의 제(制)는 최후로 {{TagPerson|[[임유무]]}} 때에까지 답습되었던 것이니 이로 보면 당시 정권을 싸고 알력과 쟁탈을 일삼던 무장 권신에 있어 가병의 존재가 얼마나 필요불가결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목차2해독문3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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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3번=요컨대 {{TagPerson|[[의종]]}} {{TagPerson|[[명종]]}} 이후 무사의 발호시기에 있어 무장 권신은 각각 가병을 사축(私蓄)하여 서로 정권 쟁탈을 일삼으며 국왕의 폐위도 임의로 행하게 되니 정치와 강기의 괴난(壊亂)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에는 불량배의 반란과 초적(草賊)의 도량이 각처에서 병발(幷發)하며 도성 부근에도 {{TagRefT|7}}도절(盜窃)이 자못 성행하고<ref group="a">삼별초가 조직된 {{TagPerson|[[고종]]}} 시대 전반기에서도 고종 4년의 1년간 국내 소란 상태에 관하여 중요한 몇 가지 예를 들면 {{TagBook|[[고려사절요]]}} 권15 고종 4년 5월조에 「全羅抄軍別監洪傅報 全州軍旣發 而中路擅還作亂 殺逐州長吏 云云」 같은 조에 「振威縣人令同正李將大直長同正李唐必 乘國家有事(丹兵入寇) 乃與同縣人別將同正金禮 謀不軌 嘯聚徒衆 劫奪縣令符印 發倉賑貸 村落飢民多附 移牒旁郡 自稱靖國兵馬使 號義兵 云云」 같은 책 6월조에 「崔光秀據城(〇平壞城)作亂 自稱句高(〇疑二字倒錯)麗興復兵馬使金吾衛攝上將軍 署置僚佐 召募精銳 傳檄北界諸城 云云」 같은 책 3월조에 「盗發純陵」이라 하였다.</ref> 공사노예의 무리까지 공포할 만한 {{TagRefT|8}}음모를 획책하였다.<ref group="a">{{TagBook|[[고려사]]}} 최충헌전에 「私僮萬積等六人 樵北山 招集公私奴隷 謀曰 國家自庚癸以來 朱紫多起於賤隷 將相寧有種乎 時來則可爲也 吾輩安能勞筋骨 困於捶楚之下 諸奴皆然之 剪黃紙數千 皆鈒丁字 爲識約曰  吾輩自興國寺步廊 至毬庭 一時群集鼓噪 則在內宦者 必應之 官奴等誅鋤於內 吾徒蜂起城中 先殺崔忠獻等 仍各格殺其主焚賤籍 使三韓無賤人 則公卿將相 吾輩皆得爲之矣 及期皆集 以衆不滿數百 恐不濟事 更約會普濟寺 云云」이라 하였다.</ref> 이와 같이 치안과 질서가 문란하였고 그 위에 글단의 뒤를 이어 강적 몽고의 압력을 받게 됨에 이르러 당시 부병은 이미 수이(綏弛)된 지 오랜 지라 외구내환(外寇內患)에 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니 이러한 정세 아래에서 권신 {{TagPerson|[[최우]]}}의 손에 의하여 특수병단이 창설된 것이니 이것이 소위 삼별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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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3.삼별초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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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TagSpage|13}}(생략) 되지 못한다-그러나 稷山 舊邑에서 直北 約 8~9里 되는 곳에 ‘都下里’(혹은 都監里ㆍ忠南 天安郡 成歡面)란 里名과 都下里에서 西北 약 6里되는 곳 즉 安城川 合流處에 ‘安宮{{TagPage|14-1}}里’(或云宮里ㆍ同上)란 里名과 其外 同川 流域인 振威郡 芙蓉面의 ‘坪宮里’(一云 上宮里) ‘新宮里’(一云 下宮里) 등의 里名이 있는 것은 크게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들 洞里에서 아직 그럴듯한 遺跡과 遺物은 發見하지 못하였지만, 그 里名은 必然 尋常하지 않은 久遠한 由來와 歷史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속히 말하면, 稷山 舊邑의 北 安城川 流域은 等地를 國都로 삼던 어느 時代 즉 辰國時代 내지 正統인 馬韓時代의 宮闕都市가 있던 곳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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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TagSpage|14-1}}三別抄의 起原에 關하야 먼저 高麗史에 依하면
|목차3원문2번={{TagSpage|14-2}} [[파일:이병도 삼한-1.png|가운데|4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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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TagSpage|14-2}}<blockquote no="10">初 崔瑀 憂國中多盜 聚勇士 每夜巡行禁暴 因名夜別抄 及盜起諸道 分遣別抄 以捕之 其軍茜衆 遂分爲左右 又以國人自蒙古逃還者 爲一部 號神義 是爲三別抄(卷八十一, 兵志[一]五軍條)</blockquote>
|목차3원문3번={{TagSpage|14-3}}그리하여 그러한(都字 宮字 붙은) 里名이 傳稱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최근 物故한 中樞院 囑託 大原利武氏도 일찍이 이 地名에 注意를 拂하여 同 地域을 馬韓時代의 都邑 所在地로 推定한 일이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意見과 전혀 一致하며, 오직 나는 馬韓時代뿐만 아니라, 그 以前 辰國時代로부터의{{TagPage|15-1}}都闕 소재지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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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TagSpage|14-3}}라 하였다. 夜別抄는 처음에 權臣 崔瑀가 國中<sup>(主로 都城을 가르친 것인 듯함)</sup>에 盜賊이 많음으로 그것을 禁緝키 爲하야 勇士를 모아 夜巡케 한 것이 그의 始初이며, 및 國內 各地에도 盜窃이 盛行하매 亦是 夜別抄를 派遣하야 追捕에 當케 하야 그의 數가 甚히 늘었음으로 드듸어 左右 {{TagRef|9}}二部 即 左別抄 右別抄<ref>高麗史節要(卷十七) 高宗 四十五年 三月條에 依하면 柳璥 金仁俊 等이 三別抄를 움지겨 崔竩를 베힌 記事의 다음에 「王御康安殿 百官陳賀 如新卽位 禮畢出 朴松庇金仁俊又率諸功臣左右別抄神義軍都房等 入殿庭羅拜 呼萬歲 云云」(高麗史 世家 高宗 四十五年 三月條에도 同一한 記事가 뵈임)이라 하였으니 當時 夜別抄를 左別抄 右別抄라 稱하였음을 알 수 있음.</ref>로 나뉘게 되였고, 또 國人으로서 蒙古軍의 捕虜가 되였다가 逃還한 者를 모아 神義(軍)이라는 一部隊를 編成하야 左右 兩別抄에 神義軍을 合하야 三別抄라 稱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對하야 다시 元高麗紀事에(國學文庫第四拾參編) 나아가 살펴보면 中統(至元의 誤인 듯) 七年 六月 一日條에
|목차3원문4번=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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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TagSpage|14-4}}<blockquote no="11">植<sup>(〇 高麗 元宗의 諱植을 이와 같이 쓴 것임)</sup> 遣人報 有先自天朝逃來一翼軍 與高麗兩翼軍叛 盖植族承化公 以三別抄軍叛也</blockquote>
|목차3원문5번=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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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번={{TagSpage|14-5}}라 하야 三別抄의 種別을 蒙古로부터 逃還한 一翼軍과 高麗의 兩翼軍이라 하였으며, 또 同書 至元 九年 正月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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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6번={{TagSpage|14-6}}<blockquote no="12">是月 特進上柱國高麗世子愖<sup>(後日 忠烈王의 初諱諶을 이와 같이 쓴 것임)</sup> 狀言 林衍之能擅權倔強者 專以左邊右邊及神義軍等三別抄故也{{TagPage|15-1}}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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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7번={{TagSpage|15-2}}이라 하였다. 左邊右邊軍은 上文의 兩 翼軍에 該當한 것으로서 左右別抄를 가르친 것이며 上文의 <cite no="17">「自天朝逃來一翼軍」</cite>은 正히 神義軍을 說明한 것이니 高麗史의 記事와 一致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元來 元高麗紀事는 高麗史 또는 高麗史節要 等 本國 側 記錄과 대개 合致함은 吾人의 注意를 끄는 바이어니와 特히 三別抄의 亂은 蒙古와 至大한 關係가 있는 만큼 그에 關한 該書의 記事도 매우 確實性을 가진 것으로서 本國 側 記事와 거의 一致되는 것은 偶然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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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8번={{TagSpage|15-3}}그러나 三別抄의 種別에 있어서는 또한 前擧 兩種의 記事와 자못 趣를 달리하는 解說이 있으니, 益齋 李齊賢의 櫟翁稗說(前集二)에 三別抄를 註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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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9번={{TagSpage|15-4}}<blockquote no="13">權臣 募驍勇之士 養以自衛 日神義軍 日馬別抄 日夜別抄 所謂三別抄</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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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0번={{TagSpage|15-5}}라 하였다. 이 註는 益齋 自身이 달어 논 것으로 생각되거니와 三別抄의 種別을 神義軍 馬別抄 夜別抄라 하야 左右 兩別抄의 代로 馬別抄 夜別抄를 드렀다. 이는 前擧 兩種 史乘의 記事와 틀릴 뿐만 아니라 公兵인 三別抄(三別抄의 公私辨은 次節에서 試할 터)에 對하야 崔瑀의 家兵인 馬別抄를 든다는 것은(註五 參照) 吾人의 首肯키 어려운 바이니, 생각컨대 益齋는 三別抄가 革罷된 지 十七八年 後에 出生한 이로서 다시 亂藁 等을 著述하기까지에는 그동안 數十 年의 時間的 間隔이 노여 있는 것이며, 三別抄는 오래동안 馬別抄 都房 等 權臣의 家兵과 같이 權臣들에게 利用되였던 만큼 三別抄와 馬別抄는 混同되기도 쉬었을 것으로, 或 이와 같이 兩者를 混同하는 그릇된 傳聞에 依據하야 된 것이 아닐런가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池內宏博士도 言及한 바와 같이 益齋의 이 註는 본대 馬別抄에 關한 記事로서 馬別抄를 三別抄{{TagPage|16-1}}의 一로 넛는 同時에 그대로 三別抄에 附合한 것으로도 解釋되는 바이다.(前擧 史學雜誌叅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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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1번={{TagSpage|16-2}}以上으로써 夜別抄의 出現 動機와 三別抄의 種別을 알 수 있거니와, 다시 그의 起原 年代에 關하야 살펴보면 前擧 高麗史 兵志의 記事에는 다만 崔瑀의 組織한 것으로 보일 뿐이니, 元來 崔瑀의 執權 時代는 高宗 六年으로부터 同 三十六年에 亘하야 約 三十年 동안이었음으로 夜別抄는 果然 어느 年代에 出現한 것인지 자못 漠然하다. 그러나 夜別抄의 名稱이 年代 우에 나타나기는 高宗 十九年 六月에 夜別抄 指諭 金世沖이 江華遷都에 反對하였다는 記事에서(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九年 六月條 高麗史 崔忠獻傳 怡傳) 비롯한 거이니, 일로 보면 夜別抄는 高宗 六年 頃으로부터 同 十九年 사이에 組織된 것마는 疑心치 못할 事實이다. 그리고 夜別抄가 左右二部로 나눈 것과 神義軍의 組織이 어느 때에 屬한 것인지 또한 探究할 必要가 있을 줄로 믿는다. 神義軍의 名稱은 高宗 四十四年 閏四月에 崔沆(崔瑀의 子)이 죽고 그의 子 崔竩가 가러들 때에 夜別抄 神義軍과 및 書房三番 都房三十六番으로써 晝夜로 擁衛하였다(高麗史 卷二十四 高宗 四十四年 閔月條 同書 崔忠獻傳 附竩傳)는 記事에서 처음 나타나 보이며, 高宗 四十五年 三月에 柳璥 金仁俊<sup>(後名은 俊)</sup> 等이 崔竩를 베힐 때에 三別抄를 利用하였음으로 「左右別抄 神義軍」 等 三別抄의 種別과 三別抄라는 名稱이 그때에 처음 보인다.(註九 叅照) 일로 보면 神義軍의 出現은 夜別抄가 左右로 나눈 것보담 앞섰던 것도 같으나 左右別抄는 後에도 자조 夜別抄라는 前名으로 通稱되였음으로 兩者의 先後를 確然히 判斷키가 困難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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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2번={{TagSpage|16-3}}생각건대 高宗 十八年 以後 約 三十年에 亘한 蒙古의 侵寇 中에도 崔沆의 執權 時代에 當하는 高宗 四十年頃의 也窟의 侵入과 同 四十一年頃의 車羅大의 侵入이 第一 殘暴하야 {{TagRef|10}}被據者와 逃還者가 道路에 絡繹하였다 하니<ref>高麗史 卷二十四 高宗 四十二年 四月條에 「兵荒 骸骨蔽野 被據人民 逃入京城者 絡繹不絕 都兵馬使 日給米一升救之 然死者無算」이라 하였다.</ref> 蒙古로부터 逃還한 者로써 組織되었다는 神義軍은 이 무렵에 出現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그리고 神義軍을 別抄의 一種으로 치게 된 것{{TagPage|17-1}}은 아마 蒙古로부터 逃還한 者 가운대에서 驍勇한 者를 選取하아 組織한 것으로서 府兵에 對한 特殊 兵隊라는 意味에서 나온 것이 아닐런가 한다. 이와 같이 神義軍의 組織된 動機는 全혀 藥古에 對한 軍事的 必要에서 나온 것임으로 夜別抄의 그것과 자못 그 趣를 달리하는 바이며 이에 따러 神義軍의 任務는 主로 國防에 있던 것으로서 대개 軍事行動에 있어 夜別抄와 呼應 聯結하야 共同動作을 取하던 것으로 보인다. {{TagRef|11}}그리고 高宗 末頃의 高麗에는 永年에 亘하야 外寇의 侵略을 받는 同時에 饑荒으로 말미암어 民情이 騷然하야 都城 闕內에까지 盜賊이 恣行하였다.<ref>同書 同卷 高宗 四十年 十二月條에 「盜發厚容二陵」 同 四十三年 九月條에 「盜發康宗陵」 同年 十二月 甲寅에 「盜入太子府 窃玉冊緣飾 金銀彩帛」이라 하였다. 이 몇 가지 例를 가지고도 高宗 末頃의 國內 狀況을 推察할 수가 있다.</ref> 이와 같은 外寇內患으로 因하야 當時 麗廷에서는 兵力의 充實에 힘을 기우렸으니 高宗 三十九年 八月에 <cite no="18">”設充實都監點閱閑人白丁 充補各領軍隊(高麗史兵志二)”</cite>라는 記事로 알 수 있거니와 夜別抄를 擴充하야 左右 兩別抄로 나눈 것도 아마 이때의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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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3번={{TagSpage|17-2}}다음 三別抄에 앞서 나타난 別抄의 起原을 考究하여 보면 旣述한 바와 같이 別抄의 名稱이 明宗 四年에 崔忠獻으로 말미암어 처음 나타나 보이나 別抄의 制가 그때에 비로소 생긴 것도 아니었던 듯하니, 이 崔忠獻의 戰鋒別抄는 夜別抄와 같이 各色 別抄의 一種으로서 亦是 別抄로부터 派生된 特殊 名稱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야 別抄의 起原에 있어서는 멀리 前擧한 尹瓘의 別武班에까지 溯及치 아니치 못할 것으로 臆測하는 바이니 元來 別武班은 軍事行動에 있어 虛弱한 府兵에 對하야 特殊 組織으로서 생겨난 兵團이다. 그러나 이것도 尹瓘의 女眞 征服 以後에는 얼마 아니하야 崩壞되였을 것이라고 이미 論斷하였거니와 그 後 契丹(遼東의) 防禦와 內亂(西京 趙位寵) 鎭壓 等 軍事行動에 際하야 特殊 兵隊로서 이러난 것이 實로 別抄이었다. 일로 보면 別武班과 別抄는 그의 出現 動機나 性質이 자못 類似할 뿐만 아니라 名稱에 있어서도 또한 近似한 바가 있나니, 要컨대 別抄는 別武班의 制에서 무더 나온 것이 아닐런가 한다. 그리하야 前擧 <cite no="19">「三軍各{{TagPage|18-1}}發別抄一百 神騎四十」</cite>이라 하야 別抄(步兵) 神騎(別武班 制의 騎兵)를 並擧한 것도 偶然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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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4번={{TagSpage|18-2}}軍制에 있어 이러한 例는 그 뒤에도 자조 차저볼 수 있는 것이니 麗末의 補充軍도 亦是 府兵의 虛弱을 {{TagRef|12}}補充하려는 데에서 생긴 것이며<ref>同書 卷八十一 兵志一 辛禑 十年 八月條에 「鷹揚軍上護軍李茂上言 府兵虛弱 請選諸道閑良子弟 號補充軍 以實府兵 從之」라 하였다.</ref> 朝鮮朝에 드러서도 訓鍊別隊 別案軍과 같은 것이 또한 그러한 動機에서 나타난 것이니 朝鮮軍制變遷의 {{TagRef|13}}動態를 보여주는 바이다.<ref>增補文獻備考 卷百十六 兵考八에 「顯宗十年 新設訓鍊別隊 時都監軍兵 有名無實 徒費國廩 (中略) 宋時烈 請依御營軍制 改設新軍 而革罷訓鍊都監」이라 하였고 同書 卷百十 兵考二 純祖 二十年에 「擇有根着明戶籍者 以補不足 名日別案軍」이라 하였다.</ref> 그리고 特히 이러한 兵隊에 限하야 「別」 字가 많이 붙는 것도 別抄 解釋에 對하야 한 가지 暗示를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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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5번={{TagSpage|18-3}}以上에서 論述해 온 것으로써 推考해보면 夜別抄는 在來 別抄의 制에 依하야 特히 盜賊을 禁緝하는 夜巡의 任務를 띄고 出現한 兵隊인 만큼 「夜巡의 別抄」라는 意味에서 夜別抄의 名稱도 붙게 된 것인 듯하다. {{TagRefT|14}}府兵의 虛弱은 直接 都城 治安에 莫大한 影響을 끼치던 것으로서 夜別抄와 類似한 組織도 일직부터 생겼었으니 毅宗時의 內巡檢과 明宗時의 衛國 抄猛班 等<ref>高麗史 卷八十二 兵志二 毅宗 二十一年條에 「自是 選取驍勇者 號内巡檢 分爲兩番 常着紫衣 持弓劍 分立仗外 不避雨雪 夜則巡警達曙」라 하였고 同志 明宗 五年 十一月條에 「時因西征 衛卒乏少 加發四百人 號衛國抄猛班 皆持劒乾. 環衛毬庭」이라 하였다.</ref>이 그의 著例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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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6번={{TagSpage|18-4}}엇젯던 都城의 治安 維持의 必要에 應하야 이러난 夜別抄는 一般 別抄와 달러 처음붙어 常設的 獨立機構를 가추웠으며, 다시 國內의 盜窃이 盛하고 蒙古의 侵寇가 激甚함을 따러 그의 機構가 擴張되고 그의 任務는 神義軍과 같이 다시 國防에까지 뻐쳐짐에 이른 것이다. (三別抄의 軍事的 活動은 次節에서 論할 터) 元來 軍事와 警察의 別이 確然치 못한 時代에는 兵士의 任務도 兩 方面에 넘나드는 것이 普通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別抄軍制의 發展을 約束하는 것이다.
  
|목차3해독문1번=테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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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삼별초의 기원에 관하여 먼저 {{TagBook|[[고려사]]}}에 의하면
|목차3해독문2번=[[파일:이병도 삼한-1.png|가운데|4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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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blockquote no="10">初 崔瑀 憂國中多盜 聚勇士 每夜巡行禁暴 因名夜別抄 及盜起諸道 分遣別抄 以捕之 其軍茜衆 遂分爲左右 又以國人自蒙古逃還者 爲一部 號神義 是爲三別抄(卷八十一, 兵志[一]五軍條)</blockquote>
|목차3해독문3번=테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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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라 하였다. 야별초는 처음에 권신 {{TagPerson|[[최우]]}}가 국중<sup>(주로 도성을 가리킨 것인 듯함)</sup>에 도적이 많음으로 그것을 금집(禁緝)하기 위하여 용사를 모아 야순(夜巡)하게 한 것이 그의 시초이며, 및 국내 각지에도 도절이 성행하니 역시 야별초를 파견하여 추포(追捕)에 당하게 하여 그의 수가 심히 늘었음으로 드디어 좌우 {{TagRefT|9}}2부 즉 좌별초 우별초<ref group="a">{{TagBook|[[고려사절요]]}}(권17) 고종 45년 3월조에 의하면 {{TagPerson|[[류경]]}} {{TagPerson|[[김인준]]}} 등이 삼별초를 움직여 {{TagPerson|[[최의]]}}를 벤 기사의 다음에 「王御康安殿 百官陳賀 如新卽位 禮畢出 朴松庇金仁俊又率諸功臣左右別抄神義軍都房等 入殿庭羅拜 呼萬歲 云云」({{TagBook|[[고려사]]}} 세가 고종 45년 3월조에도 동일한 기사가 보임)이라 하였으니 당시 야별초를 좌별초 우별초라 칭하였음을 알 수 있음.</ref>로 나뉘게 되었고, 또 국인으로서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도환(逃還)한 자를 모아 신의(군)이라는 1부대를 편성하여 좌우 양별초에 신의군을 합하여 삼별초라 칭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시 {{TagBook|[[원고려기사]]}}에({{TagBook|[[국학문고]]}} 제4습참편) 나아가 살펴보면 중통(지원의 오기인 듯) 7년 6월 1일조에
|목차3해독문4번=테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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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blockquote no="11">植<sup>(〇 고려 원종의 휘식을 이와 같이 쓴 것임)</sup> 遣人報 有先自天朝逃來一翼軍 與高麗兩翼軍叛 盖植族承化公 以三別抄軍叛也</blockquote>
|목차3해독문5번=테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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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번=라 하여 삼별초의 종별을 몽고로부터 도환한 일익군과 고려의 양익군이라 하였으며, 또 같은 책 지원 9년 5월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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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6번=<blockquote no="12">是月 特進上柱國高麗世子愖<sup>(후일 충렬왕의 초휘심을 이와 같이 쓴 것임)</sup> 狀言 林衍之能擅權倔強者 專以左邊右邊及神義軍等三別抄故也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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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7번=이라 하였다. 좌변우변군은 위의 글의 양 익군에 해당한 것으로서 좌우별초를 가리킨 것이며 위의 글의 <cite no="17">“自天朝逃來一翼軍”</cite>은 정히 신의군을 설명한 것이니 고려사의 기사와 일치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래 {{TagBook|[[원고려기사]]}}는 {{TagBook|[[고려사]]}} 또는 {{TagBook|[[고려사절요]]}} 등 본국 측 기록과 대개 합치함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바거니와 특히 삼별초의 난은 몽고와 지대한 관계가 있는 만큼 그에 관한 해서(該書)의 기사도 매우 확실성을 가진 것으로서 본국 측 기사와 거의 일치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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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8번=그러나 삼별초의 종별에 있어서는 또한 앞서 든 양종의 기사와 자못 뜻을 달리하는 해설이 있으니, 익재 {{TagPerson|[[이제현]]}}의 {{TagBook|[[역옹패설]]}}(전집2)에 삼별초를 주(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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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9번=<blockquote no="13">權臣 募驍勇之士 養以自衛 日神義軍 日馬別抄 日夜別抄 所謂三別抄</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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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0번=라 하였다. 이 주석은 {{TagPerson|[[이제현]]}} 자신이 달아 놓은 것으로 생각되거니와 삼별초의 종별을 신의군 마별초 야별초라 하여 좌우 양별초의 대(代)로 마별초 야별초를 들었다. 이는 앞서 든 양종 사승의 기사와 틀릴 뿐만 아니라 공병인 삼별초(삼별초의 공사변(辨)은 다음 절에서 살펴 볼 터)에 대하여 {{TagPerson|[[최우]]}}의 가병인 마별초를 든다는 것은(주5 참조) 우리의 수긍하기 어려운 바이니, 생각컨대 {{TagPerson|[[이제현]]}}는 삼별초가 혁파된 지 17-18년 후에 출생한 이로서 다시 난고(亂藁) 등을 저술하기까지에는 그동안 십수 년의 시간적 간격이 놓여 있는 것이며, 삼별초는 오랫동안 마별초 도방 등 권신의 가병과 같이 권신들에게 이용되었던 만큼 삼별초와 마별초는 혼동되기도 쉬었을 것으로, 혹 이와 같이 양자를 혼동하는 그릇된 전문(傳聞)에 의거하여 된 것이 아닐는지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도 언급한 바와 같이 {{TagPerson|[[이제현]]}}의 이 주석은 본대 마별초에 관한 기사로서 마별초를 삼별초의 1로 넣는 동시에 그대로 삼별초에 부합한 것으로도 해석되는 바이다.(앞서 든 {{TagBook|[[사학잡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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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1번=이상으로써 야별초의 출현 동기와 삼별초의 종별을 알 수 있거니와, 다시 그의 기원 연대에 관하여 살펴보면 앞서 든 고려사 병지의 기사에는 다만 {{TagPerson|[[최우]]}}의 조직한 것으로 보일 뿐이니, 원래 {{TagPerson|[[최우]]}}의 집권 시대는 {{TagPerson|[[고종]]}} 6년으로부터 같은 왕 36년에 걸쳐 약 30년 동안이었으므로 야별초는 과연 어느 연대에 출현한 것인지 자못 막연하다. 그러나 야별초의 명칭이 연대 위에 나타나기는 {{TagPerson|[[고종]]}} 19년 6월에 야별초 지유(指諭) {{TagPerson|[[최세충]]}}이 강화천도에 반대하였다는 기사에서({{TagBook|[[고려사절요]]}} 권16 고종 19년 6월조 {{TagBook|[[고려사]]}} 최충헌전 이전) 비롯한 거이니, 이로 보면 야별초는 {{TagPerson|[[고종]]}} 6년 경으로부터 같은 왕 19년 사이에 조직된 것만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다. 그리고 야별초가 좌우2부로 나눈 것과 신의군의 조직이 어느 때에 속한 것인지 이 또한 탐구할 필요가 있을 줄로 믿는다. 신의군의 명칭은 {{TagPerson|[[고종]]}} 44년 윤4월에 {{TagPerson|[[최항]]}}({{TagPerson|[[최우]]}}의 아들)이 죽고 그의 아들 {{TagPerson|[[최의]]}}가 가러들 때에 야별초 신의군과 및 서방삼번 도방36번으로써 주야로 옹위하였다({{TagBook|[[고려사]]}} 권24 고종 44년 민월조 같은 책 최충헌전 부의전)는 기사에서 처음 나타나 보이며, {{TagPerson|[[고종]]}} 45년 3월에 {{TagPerson|[[류경]]}} {{TagPerson|[[김인준]]}}<sup>(후명은 준)</sup> 등이 {{TagPerson|[[최의]]}}를 벨 때에 삼별초를 이용하였으므로 ‘좌우별초 신의군’ 등 삼별초의 종별과 삼별초라는 명칭이 그때에 처음 보인다.(주9 참조) 이로 보면 신의군의 출현은 야별초가 좌우로 나눈 것보다 앞섰던 것도 같으나 좌우별초는 그 후에도 자주 야별초라는 전명(前名)으로 통칭되었으므로 양자의 선후를 확연히 판단하기가 곤란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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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2번=생각건대 {{TagPerson|[[고종]]}} 18년 이후 약 30년에 걸친 몽고의 침구 중에도 {{TagPerson|[[최항]]}}의 집권 시대에 당하는 {{TagPerson|[[고종]]}} 40년경의 야굴(也窟)의 침입과 같은 왕 41년경의 차라대(車羅大)의 침입이 제일 잔포(殘暴)하여 {{TagRefT|10}}피거자(被據者)와 도환자(逃還者)가 도로에 낙역하였다 하니<ref group="a">{{TagBook|[[고려사]]}} 권24 고종 42년 4월조에 「兵荒 骸骨蔽野 被據人民 逃入京城者 絡繹不絕 都兵馬使 日給米一升救之 然死者無算」이라 하였다.</ref> 몽고로부터 도환한 자로써 조직되었다는 신의군은 이 무렵에 출현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그리고 신의군을 별초의 일종으로 치게 된 것은 아마 몽고로부터 도환한 자 가운데에서 효용한 자를 선취하아 조직한 것으로서 부병에 대한 특수 병대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 아닐는가 한다. 이와 같이 신의군의 조직된 동기는 전혀 약고(藥古)에 대한 군사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므로 야별초의 그것과 자못 그 뜻을 달리하는 바이며 이에 따라 신의군의 임무는 주로 국방에 있던 것으로서 대개 군사 행동에 있어 야별초와 호응 연결하여 공동동작을 취하던 것으로 보인다. {{TagRefT|11}}그리고 {{TagPerson|[[고종]]}} 말경의 고려에는 영년에 걸쳐 외구(外寇)의 침략을 받는 동시에 기황으로 말미암아 민정이 소연(騷然)하여 도성 궐내에까지 도적이 자행하였다.<ref group="a">같은 책 같은 권 고종 40년 12월조에 「盜發厚容二陵」 같은 왕 43년 9월조에 「盜發康宗陵」 같은 해 12월 갑인에 「盜入太子府 窃玉冊緣飾 金銀彩帛」이라 하였다. 이 몇 가지 예를 가지고도 {{TagPerson|[[고종]]}} 말경의 국내 상황을 추찰할 수가 있다.</ref> 이와 같은 외구내환으로 인하여 당시 여정(麗廷)에서는 병력의 충실에 힘을 기울였으니 {{TagPerson|[[고종]]}} 39년 8월에 <cite no="18">“設充實都監點閱閑人白丁 充補各領軍隊({{TagBook|[[고려사]]}} 병지2)”</cite>라는 기사로 알 수 있거니와 야별초를 확충하여 좌우 양별초로 나눈 것도 아마 이때의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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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3번=다음 삼별초에 앞서 나타난 별초의 기원을 고구하여 보면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별초의 명칭이 명종 4년에 {{TagPerson|[[최충헌]]}}으로 말미암아 처음 나타나 보이나 별초의 제(制)가 그때에 비로소 생긴 것도 아니었던 듯하니, 이 {{TagPerson|[[최충헌]]}}의 전봉별초는 야별초와 같이 각색 별초의 일종으로서 역시 별초로부터 파생된 특수 명칭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별초의 기원에 있어서는 멀리 앞서 든 {{TagPerson|[[윤관]]}}의 별무반에까지 소급하지 아니하지 못할 것으로 억측하는 바이니 원래 별무반은 군사 행동에 있어 허약한 부병에 대하여 특수 조직으로서 생겨난 병단이다. 그러나 이것도 {{TagPerson|[[윤관]]}}의 여진 정복 이후에는 얼마 아니하여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이미 논단(論斷)하였거니와 그 후 글단(요동의) 방어와 내란(서경 {{TagPerson|[[조위총]]}}) 진압 등 군사 행동에 이어 특수 병대로서 일어난 것이 실로 별초였다. 이로 보면 별무반과 별초는 그의 출현 동기나 성질이 자못 유사할 뿐만 아니라 명칭에 있어서도 또한 근사한 바가 있으니, 요컨대 별초는 별무반의 제에서 묻어 나온 것이 아닐는가 한다. 그리하여 앞서 든 <cite no="19">“三軍各發別抄一百 神騎四十”</cite>이라 하여 별초(보병) 신기(별무반 제의 기병)를 병거(並擧)한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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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4번=군제에 있어 이러한 예는 그 뒤에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니 여말의 보충군도 역시 부병의 허약을 {{TagRefT|12}}보충하려는 데에서 생긴 것이며<ref group="a">같은 책 권81 병지1 신우 10년 8월조에 「鷹揚軍上護軍李茂上言 府兵虛弱 請選諸道閑良子弟 號補充軍 以實府兵 從之」라 하였다.</ref> 조선 조에 들어서도 훈련별대 별안군과 같은 것이 또한 그러한 동기에서 나타난 것이니 조선 군제 변천의 {{TagRefT|13}}동태를 보여주는 바이다.<ref group="a">{{TagBook|[[증보문헌비고]]}} 권116 병고8에 「顯宗十年 新設訓鍊別隊 時都監軍兵 有名無實 徒費國廩 (中略) 宋時烈 請依御營軍制 改設新軍 而革罷訓鍊都監」이라 하였고 같은 책 권110 병고2 순조 20년에 「擇有根着明戶籍者 以補不足 名日別案軍」이라 하였다.</ref> 그리고 특히 이러한 병대에 한하여 ‘별’ 자가 많이 붙는 것도 별초 해석에 대하여 한 가지 암시를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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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5번=이상에서 논술해 온 것으로써 추고해보면 야별초는 재래 별초의 제에 의하여 특히 도적을 금집하는 야순의 임무를 띠고 출현한 병대인 만큼 ‘야순의 별초’라는 의미에서 야별초의 명칭도 붙게 된 것인 듯하다. {{TagRefT|14}}부병의 허약은 직접 도성 치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것으로서 야별초와 유사한 조직도 일찍부터 생겼었으니 {{TagPerson|[[의종]]}} 때의 내순검과 {{TagPerson|[[명종]]}} 때의 위국 초맹반 등<ref group="a">{{TagBook|[[고려사]]}} 권82 병지2 의종 21년조에 「自是 選取驍勇者 號内巡檢 分爲兩番 常着紫衣 持弓劍 分立仗外 不避雨雪 夜則巡警達曙」라 하였고 같은 곳 명종 5년 11월조에 「時因西征 衛卒乏少 加發四百人 號衛國抄猛班 皆持劒乾. 環衛毬庭」이라 하였다.</ref>이 그의 분명한 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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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6번=어쨌든 도성의 치안 유지의 필요에 응하여 일어난 야별초는 일반 별초와 달라 처음부터 상설적 독립기구를 갖추었으며, 다시 국내의 도절이 성하고 몽고의 침구가 격심함을 따라 그의 기구가 확장되고 그의 임무는 신의군과 같이 다시 국방에까지 뻗쳐짐에 이른 것이다. (삼별초의 군사적 활동은 다음 절에서 논할 터) 원래 군사와 경찰의 별(別)이 확연치 못한 시대에는 병사의 임무도 양 방면에 넘나드는 것이 보통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별초군제의 발전을 약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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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제목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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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4.삼별초의 직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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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번=辰國은 저 朝鮮(樂浪) 眞番 臨屯의 諸部族과 한 가지 古代 半島內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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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번={{TagSpage|19-1}}三別抄의 職能을 闡明하는 것은 三別抄 그 自體에 對해서는 勿論 三別抄亂에 對한 理解를 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나니 이러한 意味에서 三別抄의 實際的 行動을 드러 그의 性能을 歸納코저 하는 바이다. 吾人은 먼저 三別抄의 構成要{{TagPage|20-1}}件으로부터 살펴보면 驍勇한 者로써 構成된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特色으로 생각한다.
|목차4원문2번=一國으로 일찍이 中國에 알려진 著名한 나라이어니와, 辰國의 名이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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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번={{TagSpage|20-2}}처음 夜別抄가 組織될 때에 「聚{{ruby|勇士|○○}}每夜巡行禁暴」<sup>(旣擧)</sup>라 하야 「勇士」를 條件으로 하였으며 辛禑 三年 七月 開城府狀에는
|목차4원문3번=上에 나타나기는 이미 󰡔史記󰡕, 󰡔漢書󰡕의 朝鮮傳에서부터이다. 󰡔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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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번={{TagSpage|20-3}}<blockquote no="14">我國家夜別抄三番 皆步卒有{{ruby|勇力|○○}}者也 近年以來 倭賊 深入陸地 弱馬窮民 强稱馬兵 (中略) 如遇長槍利劒 摧鋒挫銳之寇 無所措手 多致喪亡 誠可痛也 云云(高麗史兵志一)</blockquote>
|목차4원문4번=書󰡕 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史記󰡕 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다시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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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번={{TagSpage|20-4}}이라 하야 麗末에 〿寇의 侵害를 바들 때에 開城府에서는 昔日 夜別抄三番(三別抄를 가르친 것)이 勇力者로써 編成된 것을 드러 當時 國軍의 嬴弱함을 痛歎한 것이다. 그 밖에 <cite no="20">「自毅明以後 權臣執命 驍軍銳卒 盡屬三別抄」(增補文献備考 卷百九 兵考一) </cite>라 記事로 보와도 三別抄는 驍勇한 者로써 된 것임을 알 수 있거니와 이러한 것은 다만 三別抄뿐만 아니라 在來 別抄에서도 또한 차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에서 이미 論擧한 바와 가치 <cite no="21">「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cite>라 한 것과 高宗 二十四年에 金慶孫이 羅州에서 草賊李延年 擊滅할 때에 別抄됨직한 者 三十餘人을 募聚하야 賊衆을 擊破한 것(高麗史 卷百三 金慶孫傳)으로도 勇力 果敢한 者라야 別抄가 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목차4원문5번=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修辭上의 異同과 添削이 있음은 別問題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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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5번={{TagSpage|20-5}}다음 三別抄의 實際的 活動에 나아가 살펴보면 대개 軍事와 警察에 넘나드렀던 것이니 中世에 있어 대개 軍兵이 捕盜 禁暴에 當하였음은 그의 例가 許多함으로서 怪異히 녁일 것이 없는 바이다. 以下 멧 가지 方面에 亘하야 이러한 三別抄의 活動을 具體的으로 추워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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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6번={{TagSpage|20-6}}① 捕盜 禁暴 刑獄 夜別抄는 우에서도 累述한 배와 가치 捕盜 禁暴이 그의 出現 動機가 되었던 만큼 都城을 中心으로도 各 地方에까지 活動하야 相當한 成績을 나타낸 것은 <cite no="22">「及盜起諸道 分遣別抄 以捕之 其軍甚衆 云云」</cite>이라는 記事로 推察할 수가 있으며 禁暴에 關하야 그의 一例를 들면 高麗史(卷二十六) 元宗 五年 五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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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7번={{TagSpage|21-1}}<blockquote no="15">初 橫川民屎加大 有八子一壻 居山谷間 九人漁獵以生 洪橫人<sup>(〇洪川橫川)</sup> 疾之 訴於道內巡行夜別抄指揮 請捕之至其家 會九人出獵 惟取父母妻子 盡殺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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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8번={{TagSpage|21-2}}라 하였다. 夜別抄가 屎加大 等을 죽인 것은 본대 屎加大의 一族이 山間에 橫行하며 橫暴한 行動을 敢行하야 橫川 洪川 兩 郡民을 恐怖케 하였던 것으로서 兩 郡民의 告訴를 接한 夜別抄는 結局 그와 가치 斷乎한 處置를 取한 것이 아닐런가 臆測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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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9번={{TagSpage|21-3}}그리고 一面에 있어 夜別抄는 刑獄 鞠囚의 任에도 當하였던 것이니 同書(卷三十五) 元宗 元年 正月 庚寅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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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0번={{TagSpage|21-4}}<blockquote no="16">囚叛人金守磾父西京副留守金軾於夜別抄所</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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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1번={{TagSpage|21-5}}라 하였고 同書(卷百二十二) 宋吉儒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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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2번={{TagSpage|21-6}}<blockquote no="17">宋吉儒 性貪酷便佞 起於卒伍 高종 때 諂事崔沆爲夜別抄指諭 每鞫囚 必縳兩手母指 懸梁架又合繫兩足母指 縋以大石 去地不尺餘 熾炭其下 使兩人立左右 交杖腰膂 囚不勝毒 輒誣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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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3번={{TagSpage|21-7}}이라 한 것으로 明白히 알 수 있는 것이다. 捕盜 禁暴 等 警察行動에 當하던 夜別抄의 職務 範圍는 다시 刑獄 鞫囚에까지 미처 갈 것은 必然的 趨勢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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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4번={{TagSpage|21-8}}② {{ruby|都城의|○○○}} {{ruby|守衛와|○○○}} {{ruby|親衛隊的|○○○○}} {{ruby|任務|○○}} 이에 關하야 高麗史節要(卷十七) 高宗 四十年 十一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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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5번={{TagSpage|21-9}}<blockquote no="18">王 度江 迎于昇天新闕 夜別抄八十人 衷甲以從</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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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6번={{TagSpage|21-10}}이라 하였다. 이는 高宗이 蒙古 使者를 마지하려 江華로부터 昇天府로 건너 갈 때의 일이며 그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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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7번={{TagSpage|21-11}}<blockquote no="19">太孫<sup>(〇後日의 忠烈王)</sup> 與諸王文武百僚卒三別抄精鋭 出梯浦 迎駕(高麗史 卷二十五, 元宗 元年 三月 壬午條)</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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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8번={{TagSpage|22-1}}라한 記事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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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19번={{TagSpage|22-2}}<blockquote no="20">樞密院副便韓就等六人 率夜別抄 迎駕于義州(仝上 元宗 五年 十二月 丙午條)</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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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0번={{TagSpage|22-3}}라 한 것은 모다 元宗이 蒙古로부터 還國할 때의 일로서 三別抄가 王駕 마지에 자조 當한 것이다. 京都의 治安 警察에 從事하면 夜別抄 또는 三別抄는 高宗 末頃에 이르러 禁衛軍 또는 親衛隊로도 活動한 것이며 또 都城의 守衛에도 夜別抄가 使用되였으니 同書(卷二十四) 高宗 四十一年 八月 癸酉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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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1번={{TagSpage|22-4}}<blockquote no="21">慶尙全羅三道 各遺夜別抄八十人 守衛京城</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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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2번={{TagSpage|22-5}}이라 하였다. 이것은 當時 蒙古兵이 近畿에까지 자조 出沒함으로 다시 夜別抄를 地方으로부터 增募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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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3번={{TagSpage|22-6}}③ {{ruby|軍隊로서의|○○○○○}} {{ruby|活動과|○○○}} {{ruby|任務|○○}} 夜別抄의 軍事的 活動은 蒙古의 侵寇로부터 始作되였다. {{TagRef|15}}蒙古의 侵入은 高宗 十八年 撒禮塔의 入寇를 비롯하야 約 二十年 동안 繼續한 것이니<ref>高宗 十八年 撒禮塔의 第一次 侵入, 그 翌年의 第二次 侵入, 同 二十二年 唐古의 第三次 侵入, 同 三十四年 阿母侃의 第四次 同 四十年 也窟의 第五次, 同 四十一年 車羅大의 侵入 等이 가장 著名한 것이다.</ref> 夜別抄와 蒙古兵과의 衝突은 高宗 二十二年 九月에 夜別抄 都令 李裕貞의 出戰이 最初의 것이어니와 그의 軍事上 實蹟에 나아가 살펴보면 高麗史(卷二十三) 高宗 二十二年 十月 辛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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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4번={{TagSpage|22-7}}<blockquote no="22">夜別抄 與砥平縣人 夜擊蒙兵 殺獲甚多 取馬驢來</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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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5번={{TagSpage|22-8}}이라 하였으며 同 二十三年 七月 辛酉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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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6번={{TagSpage|22-9}}<blockquote no="23">蒙兵 至价川 京別抄<sup>(地方에 分遺된 야별초를 가르친 것이니 地方별초와 區別키 위하여 부친 것)</sup> 校尉希景 价川中郞將明俊等 伏兵夾擊 殺傷頗多 取鞍馬 弓矢衣服等物</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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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7번={{TagSpage|22-10}}이라 하였다. 三別抄는 대개 夜襲 伏兵 夾擊 等 戰法으로써 寡數로 衆敵에 當한 例가 許多하니, 이는 明白히 游擊戰術로써 遠來한 敵을 괴롭게 하야 敵으로 하여금 酬應에 疲勞케 하던 것으로서 所謂 께렐라 戰術에 該當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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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8번={{TagSpage|23-1}}一面에 있어 夜別抄는 偵察隊 또는 前衛隊와도 가치 活動하였던 것으로 믿나니 同書(卷二十三) 高宗 二十三年 八月 己酉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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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29번={{TagSpage|23-2}}<blockquote no="24">夜別抄指諭李林壽朴仁傑 各卒一百餘人 分向蒙古屯所</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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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0번={{TagSpage|23-3}}라 보이고 또 前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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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1번={{TagSpage|23-4}}<blockquote no="25">初 横川民屎加大 有八子一壻 (中略) 惟取父母妻子 盡殺之 於是 九人諜讐 遂起爲盜 至忠淸道 夜涉簞淺 疑爲狄兵<sup>〇蒙兵</sup> 朝野驚擾 使夜別抄探之 乃知</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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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2번={{TagSpage|23-5}}라 하였다. 夜別抄 指諭 李林壽 等이 各々 百餘의 部衆을 引率하고 蒙兵 屯所에 向한 것이라던지 橫川賊을 蒙古兵으로 誤認하야 夜別抄로써 偵察케 한 것으로 보면 夜別抄는 때로 偵察隊 或은 前衛隊로서 活動한 자추를 차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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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3번={{TagSpage|23-6}}夜別抄의 軍事行動에 關하야 끝으로 臆測의 一端을 드러 보고저 하나니 即 夜別抄는 때로 便衣隊와 같이 活動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林衍이 元宗을 擅廢한 뒤에 當時 蒙古에 건너갓다가 還國하던 太子<sup>(後日의 忠烈王)</sup>를 中路에서 捉致(?)코저 하야 夜別抄 二十人을 미리 國境에 埋伏식힌 것을(高麗史 卷百三十 林衍傳) 가지고 보면 林衍의 이와 같은 陰謀는 元來 國人과 蒙古의 耳目을 避하야 秘密히 行한 것인 만큼 普通 軍兵은 使用치 못하였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夜別抄는 本來 裝東에 있어 대개 便服輕裝을 하였던 것이 아닐런가 생각되는 바이니 前擧 <cite no="23">「夜別抄八十人 衷甲以從」</cite>이라 한 記事로 보면 이는 高宗이 蒙古의 使者를 보기 爲하야 江都에서 昇天府로 건너갈 때의 일로서 特히 夜別抄가 「衷甲」을 하고 딸케 된 것은 王의 身邊을 嚴重히 護衛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따러서 夜別抄는 대개 甲鎧를 가추지 아니하고 輕裝으로서 活動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바이다. 이러한 臆測에 또 한 가지 暗示를 주는 것은 前擧 毅宗時에 編成된 內巡檢이{{TagPage|24-1}} 紫衣를 입었다는 記事다. 이에 依하야 內巡檢 夜別抄와 같은 特殊 兵隊가 반드시 普通 軍兵과 服色裝束을 같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는 事例가 없음을 알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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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4번={{TagSpage|24-2}}다시 이러한 臆測을 根據로 하야 高宗 末頃의 三別抄의 對蒙 軍事活動을 溯察하여 보면 二十餘年에 亘한 蒙古의 侵寇는 高宗 四十年頃에 드러 더욱 酷毒하였다. 그러므로 高麗에서는 할 수 없이 漸々 和議에 기우러지게 되였으나 一面에 있어서는 아직도 抵抗을 繼續하야 可謂 一面求和 一面抵抗의 狀態이었다. (當時 高麗에는 和戰 兩派의 主强이 對立된 關係도 있을 것이나) 그리하야 當時 蒙古兵을 各處에서 遊擊한 것은 거의 三別抄 또는 地方別抄요 府衛兵은 可謂 影子를 감추웠으리 만큼 된 것이 吾人의 注意를 끄는 바이다. 當時 府衛兵이 비록 衰徵하였다 하나 外敵 防禦에 全然 無用의 것으로 化하였으리라고는 믿어지々 아니하는 바이니 蒙古 侵入의 初期에 있어서의 活潑턴 府衛兵의 活動으로도 推斷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特히 高宗 末頃에 이르러 三別抄의 活動만이 活潑케 된 데 對하야 다만 三別抄가 强銳하였기 때문이라는 簡單한 解釋으로는 不足한 感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그의 裡面에는 또한 「델리케-트」한 外交關係가 潜在한 것이 아니였을까 한다. 卽 三別抄는 때와 場所에 따러 便衣隊와 같은 活動을 하여 온 것으로서 形式上 正規的인 府衛兵보다도 民兵으로 「카무ᅋᅮ라지」되기 쉬운 까닭에 和議에 있어 蒙古 側에 口實을 적게 하는 同時에 蒙古를 괴럽혀 側面으로 牽制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도 臆測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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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5번={{TagSpage|24-3}}要컨대 蒙古 侵寇에 際하야 三別抄는 虛弱한 府兵의 補強的 軍團이었음으로 隨時 隨處에 多角的 職能을 發揮케 된 것이니 特殊 起原을 가진 三別抄의 發展相을 또한 이러한 點에서도 차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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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6번={{TagSpage|24-4}}以上으로써 三別抄의 職能을 槪察해 보았거니와 다음에는 州縣別抄에 나아가 簡單한 考察을 試코저 한다. 州縣別抄{{TagPage|25-1}} 卽 地方別抄는 京外別抄 또는 外別抄라고도 하나니 이것은 京別抄(三別抄)에 對한 名稱이다. 地方別抄로는 {{TagRef|16}}慶州別抄<ref>慶州別抄는 高麗史(卷五十七)地理志二 東京條에 「神宗五年東京夜別抄 云云」으로 보이나 이것은 都城의 夜別抄보다도 훨신 앞서는 것으로서 夜別抄의 名稱이 慶州에서 먼저 나타난 셈이 되나니 池內宏博士도 이미 論斷한 바와 같이 그릇된 所傳에서 나온 것인지(高麗の 三別抄について) 그렇지 아니하면 特히 慶州와 같은 主要 地方의 別抄의 任務는 都城의 夜別抄와 類似함으로 그에 依倣하야 慶州別抄도 東京夜別抄라는 別稱이 붙게 된 것이 아닐런가 한다.</ref>가 가장 史上에 먼저 나타나 보이나니 高麗史(卷二十一) 神宗 五年 十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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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7번={{TagSpage|25-2}}<blockquote no="26">{{TagRef|17}}慶州別抄軍 與永州 素有隙 是月 乃引雲門賊 及符仁桐華兩寺僧徒 攻永州 云云<ref>雲門賊의 雲門은 山名이니 雲門山은 慶州 淸道 사이에 있다. 雲門賊은 高麗史(卷二十) 明宗 二十三年 七月條에 依하면 그의 首魁 金沙彌가 雲門에 據하야 州縣을 標掠하기 始作한 것으로서 오래동안 朝廷과 官軍을 괴롭혔다.</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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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8번={{TagSpage|25-3}}이라 하였다. 慶州別抄軍이 본대 永州로 더부러 틈이 있었다는 것으로써 미루워 보면 그것이 神宗 五年 以前부터 있었던 것으로 解釋되며 이 밖에 蒙古 侵寇 時代에 이르러는 多種多樣의 州縣別抄가 나타나 뵈인다. 그의 例를 들면 都護(安此)別抄 渭州別抄 泰州別抄 扶寧別抄 牛峯別抄 喬桐別抄 登州別抄 大府島別抄 忠州別抄 北界別抄 等을 헤일 수 있으며 이러한 地方別抄 가운대에 忠州와 같은 곳에는 兩班으로 組織된 兩班別抄와 奴隷雜類로 된 奴軍雜類別抄의 區別도 있었다.(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九年 正月條) 그리하야 地方別抄와 蒙古兵과의 衝突은 이미 第一次 撒禮塔의 侵入 擎頭부터 이러났으니 高宗 十八年 九月에 有名한 龜州激戰에서 朴犀 金慶孫을 도와 蒙古의 大兵을 물리친 것이 그의 {{TagRef|18}}最初 衝突이었다.<ref>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八年條에 「蒙兵 至龜州 兵馬使朴犀 及朔州分道將軍金仲溫 靜州分道將軍金慶孫 與渭泰州守令等 各率兵會龜州 (中略) 都護別抄及渭泰州別抄二百五十餘人 分守三面 云云」이라 하였다.</ref> {{TagRef|19}}그리고 地方別抄의 戰法과 戰績은 대개 三別抄의 그것과 달음이 없이 游擊과 奇襲으로써 蒙古軍을 괴롭혔음은<ref>州縣別抄의 戰績에 關하야 멫 가지 例를 들면 高麗史(卷二十四) 高宗 四十年 六月 丙子條에 「喬桐別抄 伏兵平州城外 夜入虜營 擊殺甚衆 校尉張子邦 持短兵 手殺屯長二十餘人」 同四十三年 四月 庚辰條에 「大府島別抄 夜出仁州境 蘇來山下 擊走蒙兵百餘人」 同 四十五年 十月條에 「忠州別抄 設伏朴達峴 狙擊蒙兵 奪所據人物牛馬兵仗」이라 하였다.</ref> 吾人의 興味를 끌런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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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39번={{TagSpage|25-4}}州縣軍 가운대에도 慶州와 같은 大都 重鎭에는 地方을 따러 治安의 必要上 平時에도 別抄를 둔 곳도 있었던 것 같으나 그 外에 大部分의 州縣別抄는 外敵의 侵入과 地方動亂에 備키 爲하야 隨時 隨處에 必要에 依하야 組織된 것으로 믿나니 前擧 各種의 州縣別抄는 蒙古 侵寇에 依하야 史上에 나타난 것인 듯하니 金慶孫이 李延年을 擊破할 때에 臨時로 募聚한 別抄라던지 扶寧別抄 全公烈이 本來 醫業擧人으로서 別抄가 되여 蒙兵을 邀擧하야 그 功으로서 本業으로 入仕하였다(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二十三年 十月 癸丑條)는 것은 모다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一時的 必要에 依하야 隨時로 나타난 州{{TagPage|26-1}}縣別抄는 前記 崔忠獻의 戰鋒別抄와 契丹에 對한 三軍의 別抄와 같이 또한 變亂의 終熄에 따러 解除가 될 것도 推斷할 수가 있는 것으로서 池內宏 博士의 見解에 贊同하는 바어니와 (前擧 「高麗の 三別抄について」 叅照) <cite no="24">「我國百姓 有事則爲軍 無事則爲農 故軍民一致」</cite>(高麗史 兵志一)라는 記事도 이러한 事情을 가르친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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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0번={{TagSpage|26-2}}다시 各種의 別抄에 對하야 概察해보면 崔忠獻의 戰鋒別抄와 契丹 防禦 時의 三軍의 別抄는 獨立的 兵隊라는 것보다도 府衛兵에 屬한 臨時編成의 特別 兵隊이었을 것은 우에서도 論한 바어니와 州縣에 있어서도 亦是 府兵의 虛弱으로 因하야 軍事的 必要에서 일어난 것이나 그의 行動은 대개 獨自性을 가진 것으로서 動亂과 外寇을 防制하야 地方의 保衛가 그의 任務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三別抄와 州縣別抄와의 關係에 있어서는 그것을 推斷할 만한 資料가 적음을 遺憾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都領 校尉 等 {{TagRef|20}}指揮官職은 兩者가 서로 類似한 것이며<ref>州縣別抄의 指揮官職에 있어서는 上擧를 喬桐別抄 {{ruby|校尉|○○}}와 밋 北界別抄 都令(同書 卷二十五 元宗 即位之年 七月條) 等이 보이며 三別抄의 都領 等 職은 原文 三別抄 所屬條에서 述할 터임.</ref>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에 있어서도 兩者 即 京別抄와 京外別抄가 서로 呼應하야 活動하였을 것은 대개 推斷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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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1번={{TagSpage|26-3}}끝으로 三別抄의 所屬 問題에 나아가 簡單한 考察을 試하고 本節을 맺을가 한다. 三別抄의 所屬 問題 即 三別抄가 公兵이었는가 또는 都房 馬別抄와 같이 權臣의 私兵이었는가 이 三別抄의 公私 區別이야말로 三別抄와 및 三別抄亂을 究明하고 理解하는 데에 重大한 關係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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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2번={{TagSpage|26-4}}元來 三別抄는 權臣 崔氏 一族(瑀, 沆)으로 말미암어 組織된 것이며 그 우에 또한 歷代權臣에게 利用됨에 이르렀으니 高宗 四十五年에 柳璥 金(仁)俊 等이 崔竩<sup>(崔瑀의 孫)</sup>를 誅滅할 때나 元宗 九年에 林衍이 金(仁)俊을 베힐 때 또는 同十年에 林衍이 國王의 廢立을 擅行할 때나 그 다음 宋松禮가 林惟茂<sup>(衍의 子)</sup>를 誅戮할 때에 主로 三別抄의 힘을 비러 그들의 目的을 達하게 되였으며 그 뿐만 아니라 三別抄는 權臣의 家兵인 都房 馬別抄와 같이 權臣의 爪牙가 되여 때로{{TagPage|27-1}} 그들의 護衛와 邸宅 警衛의 任에도 當하였다.(高麗史 兵志 及 崔忠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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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3번={{TagSpage|27-2}}이와 같이 三別抄는 때로 都房 馬別抄와 한 가지로 權臣들에게 利用되였음으로 一見 私兵과 같이 뵈이기도 하나니 前擧 李益齋도 三別抄를 私兵과 같이 解釋한 것은 이러한 點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元來 武將 權臣의 跋扈時代에는 國軍도 대개 그들의 爪牙로 化함은 在來로 그의 例가 許外한 것이니 三別抄에 있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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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4번={{TagSpage|27-3}}<blockquote no="27">權臣執柄 以爲爪牙 厚其俸祿 或施私恩 又籍罪人之財 而給之 故權臣頥指氣使 爭先劾力(高麗史 兵志一)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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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5번={{TagSpage|27-4}}이라 한 記事로써 這間의 事由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歷代 權臣은 여러가지 私恩을 베푸러 그것을 利用하기에 努力한 結果—私兵 같으면 일부러 私恩을 베프렀다는 것이 史上에 씨여질 까닭도 없겠으나—三別抄의 行動은 때로 都房 馬別抄와 區別치 못할 마큼 混同된 것이 當時의 實情이였던 듯하다. 旣擧 高宗 二十二年에 最初로 蒙古兵과 衝突한 夜別抄의 指揮者 李裕貞은 「崔瑀都房夜別抄都領」이었다. 일로 보면 李裕貞은 崔瑀의 都房에 屬하는 同時에 夜別抄의 都領을 兼한 것으로 解釋되나니 이는 崔瑀가 夜別抄를 利用하려는 目的으로 짐짓 自己 都房에 屬한 者를 가려 夜別抄 都領에 任命하였던 것 같으나 何如間 三別抄에는 公私 兩役이 混淆하던 것은 事實이었었으니 이에 따러 三別抄의 公私區別 이 또한 問題일 것이다. 그러나 三別抄가 權臣들에게 利用된 것은 理勢의 어찌할 수 없는 바로서 이러한 一面的 現象만 가지고 그것을 都房 馬別抄와 같이 私兵으로 看做하여서는 아니될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러한 見地에서 以下로 三別抄와 都房 馬別抄와를 簡單히 몇 가지 事類에 나누워 比較하야써 兩者의 公私의 別를 밝혀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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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6번={{TagSpage|27-5}}① 兩者는 {{ruby|組織動機|○○○○}}에 있어 발서 公私의 別이 判異하였던 것이니 夜別抄는 捕盜 禁暴 等 國內의 保安 維指를 目的으로 하야 일어난 것이나 都房 馬別抄는 權臣들이 自己의 身邊과 一族의 不測한 禍를 憂慮하야 自護手段으로서 組織한 것이{{TagPage|28-1}}며 ② 三別抄에 있어서는 旣述한 바와 같이 金(仁)俊이 崔竩를 베힐 때나 林衍이 金(仁)俊을, 宋松禮가 林惟茂를 베힐 때에 例外 없이 三別抄의 힘을 비러 「쿠-데타」를 行하였으나 都房에 이르러서는 우선 熙宗 七年 十二月에 宮中에서 催忠獻을 誅去하려 할 때에 都房六番이 赴救한(高麗史節要 卷十四 熙宗 七月 十二月條) 一例로도 그의 行動이 私兵의 範圍에 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要컨대 三別抄는 元來 公兵이었음으로 政變에 利用될 性質이 多分으로 包含되였음에 反하야 都房 馬別抄는 私兵이기 때문에 特別한 境遇를 除하고는 乙이 甲의 私兵을 利用키가 困難하였던 것이다. ③ 外敵(蒙古) 防禦에 있어 都房 馬別抄의 活動은 거의 차저 볼 수가 없음에 反하야 旣述한 바와 같이 三別抄만은 州縣別抄와 같이 그의 活動이 매우 活潑하였으며 三別抄는 다시 都城의 守衛와 親衛隊的 任務를 兼行하였으나 都房 馬別抄에 있어서는 그러한 例를 얻어볼 수가 없는 것으로서 兩者의 行動은 이와 같이 顯著한 差異가 있는 것이다. ④ 軍隊的 機構에 있어 三別抄는 都領 指諭 校尉 等 國家 官制에 依한 指揮者가 配置되였으나 都房 夜別抄에는 그러한 稱號가 보이지 아니한다. ⑤ 그 뿐만 아니라 旣擧 辛禑 三年 開城府狀에 <cite no="26">「我國夜別抄三番 皆步卒 有勇力者也 云云」</cite>이라 한 記事로도 夜別抄三番(三別抄)이 公軍으로서 後世에까지 알려진 것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니 만일 夜別抄三番이 私兵이라면 當時 國軍의 衰弱을 前提로 하야 軍制 刷新을 目的으로 한 開城府의 上狀에 私兵의 例를 드는 것은 無意味하기도 甚한 까닭이다. 그 우에 高麗史 兵志에도 三別抄의 沿革은 자못 자세히 나타나 보이나 都房 馬別抄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또한 三別抄는 公軍이요 都房 馬別抄는 私兵이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을 줄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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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원문47번={{TagSpage|28-2}}以上에서 叙述한 것으로써 三別抄의 職能과 그에 따러 三別抄의 本質이 대개 究明되였을 줄로 믿거니와 이러한 三別抄의 性能이야말로 三別抄의 動向과 및 三別抄亂에 緊密한 脉絡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는 바이다.
  
|목차4해독문1번=테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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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번=삼별초의 직능을 천명하는 것은 삼별초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물론 삼별초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이러한 의미에서 삼별초의 실제적 행동을 들어 그의 성능을 귀납하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는 먼저 삼별초의 구성요건으로부터 살펴보면 효용한 자로써 구성된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특색으로 생각한다.
|목차4해독문2번=테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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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번=처음 야별초가 조직될 때에 「聚{{ruby|勇士|○○}}每夜巡行禁暴」<sup>(이미 인용함)</sup>라 하여 ‘勇士’를 조건으로 하였으며 {{TagPerson|[[신우]]}} 3년 7월 개성부장에는
|목차4해독문3번=테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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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번=<blockquote no="14">我國家夜別抄三番 皆步卒有{{ruby|勇力|○○}}者也 近年以來 倭賊 深入陸地 弱馬窮民 强稱馬兵 (中略) 如遇長槍利劒 摧鋒挫銳之寇 無所措手 多致喪亡 誠可痛也 云云(高麗史兵志一)</blockquote>
|목차4해독문4번=테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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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번=이라 하여 여말에 〿구의 침해를 받을 때에 개성부에서는 석일(昔日) 야별초삼번(삼별초를 가리킨 것)이 용력자로써 편성된 것을 들어 당시 국군의 영약함을 통탄한 것이다. 그 밖에 <cite no="20">“自毅明以後 權臣執命 {{ruby|驍軍銳卒|○○}} 盡屬三別抄”({{TagBook|[[증보문헌비고]]}} 권109 병고1)</cite>라 한 기사로 보아도 삼별초는 효용한 자로써 된 것임을 알 수 있거니와 이러한 것은 다만 삼별초뿐만 아니라 재래 별초에서도 또한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논거한 바와 같이 <cite no="21">“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cite>라 한 것과 {{TagPerson|[[고종]]}} 24년에 {{TagPerson|[[김경손]]}}이 나주에서 초적 이연년 격멸할 때에 별초됨직한 자 30여 인을 모취(募聚)하여 적중(賊衆)을 격파한 것({{TagBook|[[고려사]]}} 권103 김경손전)으로도 용력 과감한 자라야 별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목차4해독문5번=테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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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5번=다음 삼별초의 실제적 활동에 나아가 살펴보면 대개 군사와 경찰에 넘나들었던 것이니 중세에 있어 대개 군병이 포도 금폭에 당하였음은 그의 예가 허다함으로써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는 바이다. 이하 몇 가지 방면에 뻗쳐 이러한 삼별초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추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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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6번=① 포도 금폭 형옥 야별초는 위에서도 누술한 바와 같이 포도 금폭이 그의 출현 동기가 되었던 만큼 도성을 중심으로도 각 지방에까지 활동하여 상당한 성적을 나타낸 것은 <cite no="22">“及盜起諸道 分遣別抄 以捕之 其軍甚衆 云云”</cite>이라는 기사로 추찰할 수가 있으며 금폭에 관하여 그의 일례를 들면 {{TagBook|[[고려사]]}}(권26) 원종 5년 5월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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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7번=<blockquote no="15">初 橫川民屎加大 有八子一壻 居山谷間 九人漁獵以生 洪橫人<sup>(〇洪川橫川)</sup> 疾之 訴於道內巡行夜別抄指揮 請捕之至其家 會九人出獵 惟取父母妻子 盡殺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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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8번=라 하였다. 야별초가 {{TagPerson|[[시가대]]}}(屎加大) 등을 죽인 것은 본대 시가대의 일족이 산간에 횡행하며 횡포한 행동을 감행하여 횡천 홍천 양 군민을 공포케 하였던 것으로서 양 군민의 고소를 접한 야별초는 결국 그와 같이 단호한 처치를 취한 것이 아닐는가 억측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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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9번=그리고 일면에 있어 야별초는 형옥(刑獄) 국수(鞠囚)의 임(任)에도 당하였던 것이니 같은 책(권35) 원종 원년 정월 경인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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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0번=<blockquote no="16">囚叛人金守磾父西京副留守金軾於夜別抄所</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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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1번=라 하였고 같은 책(권122) 송길유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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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2번=<blockquote no="17">宋吉儒 性貪酷便佞 起於卒伍 高종 때 諂事崔沆爲夜別抄指諭 每鞫囚 必縳兩手母指 懸梁架又合繫兩足母指 縋以大石 去地不尺餘 熾炭其下 使兩人立左右 交杖腰膂 囚不勝毒 輒誣服</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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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3번=이라 한 것으로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포도 금폭 등 경찰행동에 당하던 야별초의 직무 범위는 다시 형옥 국수에까지 미처 갈 것은 필연적 추세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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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4번=② {{ruby|都城의|○○○}} {{ruby|守衛와|○○○}} {{ruby|親衛隊的|○○○○}} {{ruby|任務|○○}} 이에 관하여 {{TagBook|[[고려사절요]]}}(권17) 고종 40년 11월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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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5번=<blockquote no="18">王 度江 迎于昇天新闕 夜別抄八十人 衷甲以從</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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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6번=이라 하였다. 이는 {{TagPerson|[[고종]]}}이 몽고 사자(使者)를 맞이하려 강화로부터 승천부로 건너 갈 때의 일이며 그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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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7번=<blockquote no="19">太孫<sup>(〇후일의 충렬왕)</sup> 與諸王文武百僚卒三別抄精鋭 出梯浦 迎駕({{TagBook|[[고려사]]}} 권25, 원종 원년 3월 임오조)</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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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8번=라한 기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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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19번=<blockquote no="20">樞密院副便韓就等六人 率夜別抄 迎駕于義州(仝上 元宗 五年 十二月 丙午條)</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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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0번=라 한 것은 모두 {{TagPerson|[[원종]]}}이 몽고로부터 환국할 때의 일로서 삼별초가 왕가(王駕) 맞이에 자주 당한 것이다. 경도의 치안 경찰에 종사하면 야별초 또는 삼별초는 {{TagPerson|[[고종]]}} 말경에 이르러 금위군 또는 친위대로도 활동한 것이며 또 도성의 수위에도 야별초가 사용되었으니 같은 책(권24) 고종 41년 8월 계유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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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1번=<blockquote no="21">慶尙全羅三道 各遺夜別抄八十人 守衛京城</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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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2번=이라 하였다. 이것은 당시 몽고병이 근기(近畿)에까지 자주 출몰함으로 다시 야별초를 지방으로부터 증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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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3번=③ {{ruby|軍隊로서의|○○○○○}} {{ruby|活動과|○○○}} {{ruby|任務|○○}} 야별초의 군사적 활동은 몽고의 침구로부터 시작되었다. {{TagRefT|15}}몽고의 침입은 고종 18년 {{TagPerson|[[살리타이]]}}(撒禮塔)의 입구(入寇)를 비롯하여 약 20년 동안 계속한 것이니<ref group="a">{{TagPerson|[[고종]]}} 18년 {{TagPerson|[[살리타이]]}}의 제1차 침입, 그 익년의 제2차 침입, 같은 왕 22년 {{TagPerson|[[당고]]}}의 제3차 침입, 같은 왕 34년 {{TagPerson|[[아모간]]}}의 제4차 같은 왕 40년 {{TagPerson|[[야굴]]}}의 제5차, 같은 왕 41년 {{TagPerson|[[차라대]]}}의 침입 등이 가장 저명한 것이다.</ref> 야별초와 몽고병과의 충돌은 {{TagPerson|[[고종]]}} 22년 9월에 야별초 도령 {{TagPerson|[[이유정]]}}의 출전이 최초의 것이어니와 그의 군사상 실적에 나아가 살펴보면 {{TagBook|[[고려사]]}}(권23) 고종 22년 10월 신해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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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4번=<blockquote no="22">夜別抄 與砥平縣人 夜擊蒙兵 殺獲甚多 取馬驢來</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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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5번=이라 하였으며 같은 왕 23년 7월 신유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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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6번=<blockquote no="23">蒙兵 至价川 京別抄<sup>(지방에 분유된 야별초를 가리킨 것이니 지방별초와 구별하기 위하여 붙인 것)</sup> 校尉希景 价川中郞將明俊等 伏兵夾擊 殺傷頗多 取鞍馬 弓矢衣服等物</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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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7번=이라 하였다. 삼별초는 대개 야습 복병 협격 등 전법으로써 과수(寡數)로 중적에 당한 예가 허다하니, 이는 명백히 유격전술로써 원래한 적을 괴롭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수응에 피로하게 하던 것으로서 소위 께렐라 전술에 해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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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8번=일면에 있어 야별초는 정찰대 또는 전위대와도 같이 활동하였던 것으로 믿으니 같은 책(권23) 고종 23년 8월 기유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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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29번=<blockquote no="24">夜別抄指諭李林壽朴仁傑 各卒一百餘人 分向蒙古屯所</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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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0번=라 보이고 또 앞서 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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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1번=<blockquote no="25">初 横川民屎加大 有八子一壻 (中略) 惟取父母妻子 盡殺之 於是 九人諜讐 遂起爲盜 至忠淸道 夜涉簞淺 疑爲狄兵<sup>〇蒙兵</sup> 朝野驚擾 使夜別抄探之 乃知</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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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2번=라 하였다. 야별초 {{TagPerson|[[지유]]}} {{TagPerson|[[이임수]]}} 등이 각각 100여의 부중을 인솔하고 몽병 둔소에 향한 것이라든지 횡천적을 몽고병으로 오인하여 야별초로써 정찰케 한 것으로 보면 야별초는 때로 정찰대 혹은 전위대로서 활동한 자취를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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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3번=야별초의 군사 행동에 관하여 끝으로 억측의 일단을 들어 보고자 하니 즉 야별초는 때로 편의대와 같이 활동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TagPerson|[[임연]]}}이 {{TagPerson|[[원종]]}}을 천폐한 뒤에 당시 몽고에 건너갔다가 환국하던 태자<sup>(후일의 {{TagPerson|[[충렬왕]]}})</sup>를 중로(中路)에서 착치(?)하고자 하여 야별초 20인을 미리 국경에 매복시킨 것을({{TagBook|[[고려사]]}} 권130 임연전) 가지고 보면 {{TagPerson|[[임연]]}}의 이와 같은 음모는 원래 국인과 몽고의 이목을 피하여 비밀히 행한 것인 만큼 보통 군병은 사용치 못하였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야별초는 본래 장동(裝東)에 있어 대개 편복경장을 하였던 것이 아닐는지 생각되는 바이니 앞서 든 <cite no="23">“夜別抄八十人 衷甲以從”</cite>이라 한 기사로 보면 이는 {{TagPerson|[[고종]]}}이 몽고의 사자(使者)를 보기 위하여 강도에서 승천부로 건너갈 때의 일로서 특히 야별초가 ‘충갑(衷甲)’을 하고 따르게 된 것은 왕의 신변을 엄중히 호위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따라서 야별초는 대개 갑개(甲鎧)를 갖추지 아니하고 경장으로서 활동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바이다. 이러한 억측에 또 한 가지 암시를 주는 것은 앞서 든 {{TagPerson|[[의종]]}} 때에 편성된 내순검이 자의(紫衣)를 입었다는 기사다. 이에 의하여 내순검 야별초와 같은 특수 병대가 반드시 보통 군병과 복색장속을 같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는 사례가 없음을 알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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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4번=다시 이러한 억측을 근거로 하여 고종 말경의 삼별초의 대몽 군사활동을 소찰(溯察)하여 보면 20여년에 걸친 몽고의 침구는 {{TagPerson|[[고종]]}} 40년경에 들어 더욱 혹독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할 수 없이 점점 화의(和議)에 기울어지게 되었으나 일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저항을 계속하여 가위 일면구화 일면저항의 상태였다. (당시 고려에는 화전 양파의 주강(主强)이 대립된 관계도 있을 것이나) 그리하여 당시 몽고병을 각처에서 유격한 것은 거의 삼별초 또는 지방별초요 부위병은 가위 영자(影子)를 감추웠으리 만큼 된 것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바이다. 당시 부위병이 비록 쇠징(衰徵)하였다 하나 외적 방어에 전연 무용의 것으로 되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아니하는 바이니 몽고 침입의 초기에 있어서의 활발하던 부위병의 활동으로도 추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TagPerson|[[고종]]}} 말경에 이르러 삼별초의 활동만이 활발하게 된 데 대하여 다만 삼별초가 강예(强銳)하였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해석으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그의 이면에는 또한 ‘델리케트’한 외교관계가 잠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즉 삼별초는 때와 장소에 따라 편의대와 같은 활동을 하여 온 것으로서 형식상 정규적인 부위병보다도 민병으로 ‘카모플라쥬’되기 쉬운 까닭에 화의에 있어 몽고 측에 구실을 적게 하는 동시에 몽고를 괴롭혀 측면으로 견제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도 억측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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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5번=요컨대 몽고 침구에 제하여 삼별초는 허약한 부병의 보강적 군단이었음으로 수시 수처에 다용적 직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니 특수 기원을 가진 삼별초의 발전상을 또한 이러한 점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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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6번=이상으로써 삼별초의 직능을 개찰(槪察)해 보았거니와 다음에는 주현별초에 나아가 간단한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주현별초 즉 지방별초는 경외별초 또는 외별초라고도 하니 이것은 경별초(삼별초)에 대한 명칭이다. 지방별초로는 {{TagRefT|16}}경주별초<ref group="a">경주별초는 {{TagBook|[[고려사]]}}(권57)지리지3 동경조에 「神宗五年東京夜別抄 云云」으로 보이나 이것은 도성의 야별초보다도 훨씬 앞서는 것으로서 야별초의 명칭이 경주에서 먼저 나타난 셈이 되니 이케우지 히로시 박사도 이미 논단한 바와 같이 그릇된 소전에서 나온 것인지(高麗の 三別抄について) 그렇지 아니하면 특히 경주와 같은 주요 지방의 별초의 임무는 도성의 야별초와 유사하므로 그에 의방하여 경주별초도 동경야별초라는 별칭이 붙게 된 것이 아닐는지 한다.</ref>가 가장 역사 상에 먼저 나타나 보이니 {{TagBook|[[고려사]]}}(권21) 신종 5년 10월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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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7번=<blockquote no="26">{{TagRefT|17}}慶州別抄軍 與永州 素有隙 是月 乃引雲門賊 及符仁桐華兩寺僧徒 攻永州 云云<ref group="a">운문적의 운문은 산명이니 운문산은 경주 청도 사이에 있다. 운문적은 {{TagBook|[[고려사]]}}(권20) 명종 23년 7월조에 의하면 그의 수괴 {{TagPerson|[[김사미]]}}가 운문에 근거하여 주현을 표략하기 시작한 것으로서 오랫동안 조정과 관군을 괴롭혔다.</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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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8번=이라 하였다. 경주별초군이 본대 영주로 더불어 틈이 있었다는 것으로써 미루어 보면 그것이 신종 5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며 이 밖에 몽고 침구 시대에 이르러는 다종다양의 주현별초가 나타나 보인다. 그의 예를 들면 도호(안차)별초 위주별초 태주별초 부령별초 우봉별초 교동별초 등주별초 대부도별초 충주별초 북계별초 등을 셀 수 있으며 이러한 지방별초 가운데에 충주와 같은 곳에는 양반으로 조직된 양반별초와 노예잡류로 된 노군잡류별초의 구별도 있었다.({{TagBook|[[고려사절요]]}} 권16 고종 19년 정월조) 그리하여 지방별초와 몽고병과의 충돌은 이미 제1차 {{TagPerson|[[살리타이]]}}의 침입 경두(擎頭)부터 일어났으니 {{TagPerson|[[고종]]}} 18년 9월에 유명한 {{TagEvent|[[귀주격전]]}}에서 {{TagPerson|[[박서]]}} {{TagPerson|[[김경손]]}}을 도와 몽고의 대병을 물리친 것이 그의 {{TagRefT|18}}최초 충돌이었다.<ref group="a">{{TagBook|[[고려사절요]]}} 권16 고종 18년조에 「蒙兵 至龜州 兵馬使朴犀 及朔州分道將軍金仲溫 靜州分道將軍金慶孫 與渭泰州守令等 各率兵會龜州 (中略) 都護別抄及渭泰州別抄二百五十餘人 分守三面 云云」이라 하였다.</ref> {{TagRefT|19}}그리고 지방별초의 전법과 전적은 대개 삼별초의 그것과 다름이 없이 유격과 기습으로써 몽고군을 괴롭혔음은<ref group="a">주현별초의 전적에 관하여 몇 가지 예를 들면 {{TagBook|[[고려사]]}}(권24) 고종 40년 6월 병자조에 「喬桐別抄 伏兵平州城外 夜入虜營 擊殺甚衆 校尉張子邦 持短兵 手殺屯長二十餘人」 同四十三年 四月 庚辰條에 「大府島別抄 夜出仁州境 蘇來山下 擊走蒙兵百餘人」 같은 왕 45년 10월조에 「忠州別抄 設伏朴達峴 狙擊蒙兵 奪所據人物牛馬兵仗」이라 하였다.</ref> 우리의 흥미를 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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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39번=주현군 가운데에도 경주와 같은 대도 중진에는 지방을 따라 치안의 필요상 평시에도 별초를 둔 곳도 있었던 것 같으나 그 외에 대부분의 주현별초는 외적의 침입과 지방동란에 대비하기 위하여 수시 수처에 필요에 의하여 조직된 것으로 믿으니 앞서 든 각종의 주현별초는 몽고 침구에 의하여 역사상에 나타난 것인 듯하니 {{TagPerson|[[김경손]]}}이 이연년을 격파할 때에 임시로 모취한 별초라든지 부령별초 전공렬이 본래 의업거인으로서 별초가 되여 몽병을 요거(邀擧)하여 그 공으로서 본업으로 입사하였다({{TagBook|[[고려사]]}} 권23 고종 23년 10월 계축조)는 것은 모두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시적 필요에 의하여 수시로 나타난 주현별초는 앞서 쓴 {{TagPerson|[[최충헌]]}}의 전봉별초와 글단에 대한 3군의 별초와 같이 또한 변란의 종식에 따라 해제가 될 것도 추단할 수가 있는 것으로서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의 견해에 찬동하는 바거니와 (앞서 든 {{TagArticle|[[「高麗の 三別抄について」]]}} 참조) <cite no="24">“我國百姓 有事則爲軍 無事則爲農 故軍民一致”</cite>({{TagBook|[[고려사]]}} 병지1)라는 기사도 이러한 사정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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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0번=다시 각종의 별초에 대하여 개찰해보면 {{TagPerson|[[최충헌]]}}의 전봉별초와 글단 방어 때의 3군의 별초는 독립적 병대라는 것보다도 부위병에 속한 임시편성의 특별 병대였을 것은 위에서도 논한 바거니와 주현에 있어서도 역시 부병의 허약으로 인하여 군사적 필요에서 일어난 것이나 그의 행동은 대개 독자성을 가진 것으로서 동란과 외구를 방제하여 지방의 보위가 그의 임무였던 듯하다. 그리고 삼별초와 주현별초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추단할 만한 자료가 적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도령 교위 등 {{TagRefT|20}}지휘관직은 양자가 서로 유사한 것이며<ref group="a">주현별초의 지휘관직에 있어서는 위에서 든 교동별초 {{ruby|교위|○○}}와 및 북계별초 도령(같은 책 권25 원종 즉위지년 7월조) 등이 보이며 삼별초의 도령 등 직은 원문 삼별초 소속조에서 말할 터임.</ref> 몽고병을 방어하는 데에 있어서도 양자 즉 경별초와 경외별초가 서로 호응하여 활동하였을 것은 대개 추단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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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1번=끝으로 삼별초의 소속 문제에 나아가 간단한 고찰을 시도하고 본절을 맺을까 한다. 삼별초의 소속 문제 즉 삼별초가 공병이었는가 또는 도방 마별초와 같이 권신의 사병이었는가 이 삼별초의 공사 구별이야말로 삼별초와 및 삼별초난을 구명하고 이해하는 데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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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2번=원래 삼별초는 권신 최씨 일족(우, 항)으로 말미암아 조직된 것이며 그 위에 또한 역대권신에게 이용됨에 이르렀으니 고종 45년에 {{TagPerson|[[유경]]}} {{TagPerson|[[김(인)준]]}} 등이 최의<sup>({{TagPerson|[[최우]]}}의 손자)</sup>를 주멸(誅滅)할 때나 {{TagPerson|[[원종]]}} 9년에 {{TagPerson|[[임연]]}}이 {{TagPerson|[[김(인)준]]}}을 벨 때 또는 같은 왕 10년에 {{TagPerson|[[임연]]}}이 국왕의 폐위을 천행할 때나 그 다음 {{TagPerson|[[송송례]]}}가 {{TagPerson|[[임유무]]}}<sup>({{TagPerson|[[임연]]}}의 아들)</sup>를 주륙(誅戮)할 때에 주로 삼별초의 힘을 빌려 그들의 목적을 달하게 되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삼별초는 권신의 가병인 도방 마별초와 같이 권신의 조아가 되어 때로 그들의 호위와 저택 경위의 임무에도 당하였다.({{TagBook|[[고려사]]}} 병지 및 최충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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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3번=이와 같이 삼별초는 때로 도방 마별초와 한 가지로 권신들에게 이용되었으므로 일견 사병과 같이 보이기도 하니 앞서 든 이익재도 삼별초를 사병과 같이 해석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원래 무장 권신의 발호시대에는 국군도 대개 그들의 조아로 변함은 재래로 그의 예가 허다한 것이니 삼별초에 있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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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4번=<blockquote no="27">權臣執柄 以爲爪牙 厚其俸祿 或施私恩 又籍罪人之財 而給之 故權臣頥指氣使 爭先劾力({{TagBook|[[고려사]]}} 병지1)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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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5번=이라 한 기사로써 저간의 사유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역대 권신은 여러가지 사은을 베풀어 그것을 이용하기에 노력한 결과—사병 같으면 일부러 사은을 베풀었다는 것이 역사상에 쓰일 까닭도 없겠으나—삼별초의 행동은 때로 도방 마별초와 구별치 못할 만큼 혼동된 것이 당시의 실정이였던 듯하다. 이미 든 {{TagPerson|[[고종]]}} 22년에 최초로 몽고병과 충돌한 야별초의 지휘자 {{TagPerson|[[이유정]]}}은 <cite no="25">“崔瑀都房夜別抄都領”</cite>이었다. 이로 보면 {{TagPerson|[[이유정]]}}은 {{TagPerson|[[최우]]}}의 도방에 속하는 동시에 야별초의 도령을 겸한 것으로 해석되니 이는 {{TagPerson|[[최우]]}}가 야별초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짐짓 자기 도방에 속한 자를 가려 야별초 도령에 임명하였던 것 같으나 하여간 삼별초에는 공사 양역이 혼효(混淆)하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이에 따러 삼별초의 공사구별 이 또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삼별초가 권신들에게 이용된 것은 이세의 어찌할 수 없는 바로서 이러한 일면적 현상만 가지고 그것을 도방 마별초와 같이 사병으로 간주하여서는 아니될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러한 견지에서 아래에서 삼별초와 도방 마별초와를 간단히 몇 가지 사류(事類)에 나누어 비교하여 양자의 공사의 구별을 밝혀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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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6번=① 양자는{{ruby|조직동기|○○○○}}에 있어 벌써 공사의 구별이 판이하였던 것이니 야별초는 포도 금폭 등 국내의 보안 유지를 목적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나 도방 마별초는 권신들이 자기의 신변과 일족의 불측한 화를 우려하여 자호수단으로서 조직한 것이며 ② 삼별초에 있어서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TagPerson|[[김(인)준]]}}이 최의를 벨 때나 {{TagPerson|[[임연]]}}이 {{TagPerson|[[김(인)준]]}}을, {{TagPerson|[[송송례]]}}가 {{TagPerson|[[임유무]]}}를 벨 때에 예외 없이 삼별초의 힘을 빌려 ‘쿠데타’를 행하였으나 도방에 이르러서는 우선 {{TagPerson|[[희종]]}} 7년 12월에 궁중에서 {{TagPerson|[[최충헌]]}}을 주거(誅去)하려 할 때에 도방육답이 부구(赴救)한({{TagBook|[[고려사절요]]}} 권14 희종 7월 12월조) 일례로도 그의 행동이 사병의 범위에 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삼별초는 원래 공병이었으므로 정변에 이용될 성질이 다분으로 포함되었음에 반하여 도방 마별초는 사병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을이 갑의 사병을 이용하기가 곤란하였던 것이다. ③ 외적(몽고) 방어에 있어 도방 마별초의 활동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음에 반하여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삼별초만은 주현별초와 같이 그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삼별초는 다시 도성의 수위와 친위대적 임무를 겸행하였으나 도방 마별초에 있어서는 그러한 예를 얻어볼 수가 없는 것으로서 양자의 행동은 이와 같이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④ 군대적 기구에 있어 삼별초는 도령 지유 교위 등 국가 관제에 의한 지휘자가 배치되었으나 도방 야별초에는 그러한 칭호가 보이지 아니한다. 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든 {{TagPerson|[[신우]]}} 3년 개성부장에 <cite no="26">“我國夜別抄三番 皆步卒 有勇力者也 云云”</cite>이라 한 기사로도 야별초삼번(삼별초)이 공군으로서 후세에까지 알려진 것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니 만일 야별초삼번이 사병이라면 당시 국군의 쇠약을 전제로 하여 군제 쇄신을 목적으로 한 개성부의 상장에 사병의 예를 드는 것은 무의미하기도 심한 까닭이다. 그 위에 {{TagBook|[[고려사]]}} 병지에도 삼별초의 연혁은 자못 자세히 나타나 보이나 도방 마별초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또한 삼별초는 공군이요 도방 마별초는 사병이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을 줄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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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4해독문47번=이상에서 서술한 것으로써 삼별초의 직능과 그에 따러 삼별초의 본질이 대개 구명되었을 줄로 믿거니와 이러한 삼별초의 성능이야말로 삼별초의 동향과 및 삼별초난에 긴밀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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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6일 (화) 17:0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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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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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1)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9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8년07월
시작쪽 1쪽 종료쪽 29쪽 전체쪽 29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서언


중말기의 고려는 가위 내란 외구로 종시된 관이 있다 할지니, 특히 내란 중에도 묘청인물서경반란사건정중부인물 일파의 무부의 난사건과 본고에서 논술하려는 삼별초난사건이 가장 그 저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3대 난은 어느 것이나 그의 유래가 자못 복잡다단한 만큼 정치 사회 내지 사상상(上)에 끼친바 영향이 실로 다대(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3자에 나아가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후자 즉 삼별초난사건은 전 2자 즉 묘청인물 정중부인물의 난에 비하여 자못 그 뜻을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묘청인물 정중부인물의 난은 내부적 운동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삼별초난사건은 복잡한 내부적 사정 이외에 외부 압력에 대한 일종의 반발운동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결과에 있어서도 내부에 끼친바 영향보다도 국내에 뻗어드는 외력의 소장(消長)에 지대한 관계를 가진 것이다. 다시 종(縱)으로 이 3대 난의 이면에 흐르는 조류를 살펴보면 묘청인물 일파로 말미암아 나타난 고려인의 자아적 정신은 다시 임연인물 배중손인물 등의 배몽(排蒙)사상으로 출현되었으며 정중부인물 일파로 말미암아 순치된 무사 전횡의 기세는 삼별초의 동향에 지침이 되었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맥락을 추려보면 삼별초난사건묘청인물정중부인물 양 난의 조류가 합치된 데에서 출현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말기 고려에 있어 대내대외의 정치적 동향과 그에 관한 사조의 대류 형태를 소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쪽수▶P2-1中末期의 高麗는 可謂 內亂 外寇로 終始된 觀이 있다 할지니, 特히 內亂 中에도 妙淸의 西京叛亂과 鄭仲夫 一派의 武夫의 亂과 本槁에서 論述하려는 三別抄亂이 가장 그 著名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三大 亂은 어느 것이나 그의 由來가 자못 複雜多端한 만큼 政治 社會 乃至 思想上에 끼친바 影響이 實로 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三者에 나아가 槪括的으로 살펴보면 後者 即 三別抄亂은 前 二者 即 妙淸 鄭仲夫의 亂에 比하야 자못 그 趣를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妙淸 鄭仲夫의 亂은 內部的 運動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三別抄亂은 複雜한 內部的 事情 以外에 外部 壓力에 對한 一種의 反撥運動이었다. 그리하야 그의 結果에 있어서도 內部에 끼친바 影響보다도 國內에 뻐더드는 外力의 消長에 至大한 關係를 가진 것이다. 다시 縱으로 이 三大亂의 裡面에 흐르는 潮流를 살펴보면 妙淸一派로 말미암어 나타난 高麗人의 自我的 精神은 다시 林衍 裴仲孫 等의 排蒙思想으로 出現되였으며 鄭仲夫 一派로 말미암어 馴致된 武士 專橫의 氣勢는 三別抄의 動向에 指針이 되였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脉絡을 추워보면 三別抄亂은 妙淸 鄭仲夫 兩亂의 潮流가 合致된 데에서 出現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吾人은 中末期 高麗에 있어 對內對外의 政治的 動向과 그에 關한 思潮의 對流 形態를 溯究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문2: 2.고려병제의 변천과 삼별초


삼별초인물고종인물 때에 최우인물(후명은 이(怡))의 손에 의하여 조직된 야별초가 좌우별초로 분화한 것에 신의군을 더하여 일컬은 것이니 (삼별초의 종별에 관하여는 아래 절에서 갱술할 터이나) 이 삼별초를 고찰함에 있어서는 먼저 이전부터 나타나 보이는 별초(군)에 대하여 상고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원래 야별초 좌우별초 삼별초 등의 명칭은 그 자체가 재래 별초의 칭에 ‘야’ ‘좌’ ‘우’ 또는 ‘삼’의 수식어가 〿터 특별명칭으로 된 것임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라고 믿는 바이니 만일 그렇다면 양자 사이에 어느 정도까지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먼저 재래 별초에 나아가 살펴보면 고려사서적(권129) 최충헌전에
쪽수▶P3-1三別抄는 高宗時에 崔瑀(後名은 怡)의 손에 依하야 組織된 夜別抄가 左右別抄로 分化한 것에 神義軍을 加하야 일커른 것이니 (三別抄의 種別에 關하야는 下節에서 更述할 터이나) 이 三別抄를 考察함에 있어서는 먼저 以前부터 나타나 보이는 別抄(軍)에 對하야 상고치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元來 夜別抄 左右別抄 三別抄 等의 名稱은 그 自體가 在來 別抄의 稱에 「夜」 「左」 「右」 또는 「三」의 修飾語가 〿터 特殊名稱으로 된 것임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라고 믿는 바이니 만일 그러타면 兩者 사이에 어느 程度까지 關聯性이 있을 것으로 推測되는 바이다. 이러한 意味에서 먼저 在來 別抄에 나아가 살펴보면 高麗史(卷百二十九) 崔忠獻傳에

明宗四年 元帥奇卓誠 擊趙位寵 聞忠獻勇敢 選補別抄都令

쪽수▶P3-2

明宗四年 元帥奇卓誠 擊趙位寵 聞忠獻勇敢 選補別抄都令

이라 한 것이 별초에 관한 최초의 기사이다. 이는 명종인물 4년에 원수 기탁성인물이 서경에 반거(叛據)한 조위총인물을 토벌할 때에 최충헌인물이 별초도령으로 선보(選補)되었다는 것이어니와, 이에 관하여 최충헌인물 묘지(조선금석총람서적 상 442쪽)에는
쪽수▶P3-3이라 한 것이 別抄에 關한 最初의 記事이다. 이는 明宗 四年에 元帥 奇卓誠이 西京에 叛據한 趙位寵을 討伐할 때에 崔忠獻이 別抄都令으로 選補되였다는 것이어니와, 이에 關하야 崔忠獻 墓誌(朝鮮金石總覽 上 四四二頁)에는

大定甲午〇明宗四年 盜起西都 推轂元帥 授鉞徂征 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 擧公爲都令 以當一面 陷陣却敵 登陴先入 遂克戡定

쪽수▶P3-4

大定甲午〇明宗四年 盜起西都 推轂元帥 授鉞徂征 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 擧公爲都令 以當一面 陷陣却敵 登陴先入 遂克戡定

이라 하였다. 앞서 든 고려사서적의 기사에는 개칭적(槪稱的)으로 다만 별초로 쓰여있으나 이 묘지는 특히 개인의 행적을 주로 한 만큼 보다 자세히 전봉별초라 하여 별초의 종별과 그의 임무를 기재한 것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바이다. 이 전봉별초에 관한 상하 기사를 통하여 보면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박사도 대개 유사한 견해를 내렸거니와(사학잡지학술지37-9권호 제37편 제9호 소재,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 「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원고) 전봉별초는 일종의 결사적 선봉대 또는 결사적 유격대와 같이 활동하던 특선 병대의 칭이었던 듯하다. 다시 별초에 관하여 고려사절요서적(권14) 고종 3년 9월조에
쪽수▶P3-5이라 하였다. 前擧 高麗史의 記事에는 槪稱的으로 다만 別抄로 쓰여있으나 이 墓誌는 特히 個人의 行蹟을 主로 한 만큼 보담 자세히 戰鋒別抄라 하야 別抄의 種別과 그의 任務를 記存한 것이 吾人의 注意를 끄는 바이다. 이 戰鋒別抄에 關▶P4-1한 上下 記事를 通하야 보면 池內宏博士도 대개 類似한 見解를 내렸거니와(史學雜誌 第三十七編 第九號 所載, 池內博士 「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 戰鋒別抄는 一種의 決死的 先鋒隊 또는 決死的 游擊隊와 같이 活動하던 特選 兵隊의 稱이었던 듯하다. 다시 別抄에 關하야 高麗史節要(卷十四) 高宗 三年 九月條에

三軍 各發別抄一百 神騎四十人 行至朝陽(〇价川) 阿爾川邊 與契丹兵戰 云云

쪽수▶P4-2

三軍 各發別抄一百 神騎四十人 行至朝陽(〇价川) 阿爾川邊 與契丹兵戰 云云

이라 한 기사가 보이니, 이는 고종인물 3년에 요동의 글단(契丹)(대요수국)이 침구(侵寇)할 때 이것을 방제(防制)하기 위하여 3군 즉 중군(노원순인물의 인솔한) 우군(오응부인물) 후군(김취려인물)이 출동하였을 때에 3군은 먼저 별초와 신기(神騎)로써 적병에 당케 한 것이다. 일로 보면 당시 3군은 신기(신기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논할 터)와 별초로써 전초대 또는 유격대와 같이 활동케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 3군의 별초도 또한 앞서 든 최충헌인물의 전봉별초와 같은 것으로 추단되는 바이다.
쪽수▶P4-3이라 한 記事가 보이나니, 이는 高宗 三年에 遼東의 契丹(大遼收國)이 侵寇할새 이것을 防制키 爲하야 三軍 即 中軍(盧元純의 引率한) 右軍(吳應夫) 後軍(金就勵)이 出動하였을 때에 三軍은 먼저 別抄와 神騎로써 敵兵에 當케 한 것이다. 일로 보면 當時 三軍은 神騎(神騎에 關하야는 아래에서 論할 터)와 別抄로써 前哨隊 또는 游擊隊와 같이 活動케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 三軍의 別抄도 또한 前擧 崔忠獻의 戰鋒別抄와 같은 것으로 推斷되는 바이다.
별초는 원래 본군에 대한 ‘특선병대’의 칭으로서 군사 행동에 제하여 특히 용감한 병졸을 뽑아 임시적으로 편성된 것이 그의 본 면목이었던 듯하다. 앞서 든 최충헌인물의 전봉별초에 관한 기사를 비롯하여 익재난고서적(6)에 보이는 김취려행군기에 의하면 앞서 든 3군이 별초를 선수(先遺)한 것을 가리켜 “三軍各選精銳 禦之”라 하였다. 이제현인물의 이 기사에는 다만 “정예를 뽑았다” 하여 별초라는 명칭이 보이지 아니하나 이에 의하여 당시 3군의 별초는 본군으로부터 정예분자를 뽑아 편성된 것만은 알 수가 있다. 다시 별초의 의미에 있어서는 그의 명칭 자체로도 또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별초의 ‘별’은 이미 숙종인물 조에 윤관인물이 창설한 별무반(아래에서 논술할 터)의 별과 같이 ‘보통’에 대한 ‘특별’의 뜻으로 쓴 것임은 장황한 설명을 기다릴 것도 없는 바이며, 현대문주1▶별초의 ‘초’는 빼일(쵸)로 훈(訓)하였을 것으로서[a 1] 선취 또는 약취(○○)의 뜻으로 쓰였던 것으로 믿는다. 다시 고려사서적 상에 나아가 군사에 관한 초 자(字)의 용례를 몇 가지 들어보면 “抄僧爲軍”(고려사 권81, 병지1) “各道()軍使等 ()閑良子弟” “元帥於原定別抄外 又()煙戶軍 又抄別軍” “加定各道元帥 分遣()軍”(병동상(幷仝上)) 등 구(句)에 보이는 ‘초’는 선취의 뜻으로 쓰인 것들이며, 조선 조에 들어서도 각종의 별초와 초군의 칭이 최근세에까지 있었던 것으로서 별초군 가전별초 장초 신초창수 정초군 등의 명칭이 보이니(增補文轍 備考兵考), 이것들도 모두 선취의 뜻으로서 ‘초’를 붙이게 된 것임은 “別抄軍 本摠戎廳束伍中 抄選而別其號者也”(앞의 책 권110 병고2)라는 정초구에 관한 해설을 가지고도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조선 조에 이르러서도 각종 초군의 명칭이 보이거니와 이는 전 조의 것을 도습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쪽수▶P4-4別抄는 元來 本軍에 對한 「特選兵隊」의 稱으로서 軍事 行動에 際하야 特히 勇敢한 兵卒을 뽑아 臨時的으로 編成된 것이 그의 本 面目이였던 듯하다. 前擧 崔忠獻의 戰鋒別抄에 關한 記事를 비롯하야 益齋亂藁(六)에 보이는 金就礪行軍記에 依하면 前擧 三軍이 別抄를 先遺한 것을 가르처 「三軍各選精銳 禦之」라 하였다. 益齋의 이 記事에는 다만 「精銳를 뽑았다」 하야 別抄라는 名稱이 보이지 아니하나 이에 依하야 當時 三軍의 別抄는 本軍으로부터 精銳分子를 뽑아 編成된 것만은 알 수가 있다. 다시 別抄의 意味에 있어서는 그의 名稱 自體로도 또한 理解할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別抄의 「別」은 이미 肅宗朝에 尹瓘이 創設한 別武班(아래에서 論述할 터)의 別과 같이 「普通」에 對한 「特別」의 意로 쓴 것임은 張皇한 說明을 기다릴 것도 없는 바이며, 원문주1▶別抄의 「抄」는 빼일(쵸)로 訓하였을 것으로서[1] 選取 또는 略取(○○)의 意로 쓰였던 것으로 믿는다. 다시 高麗史 上에 나아가 軍事에 關한 抄字의 用例를 몇 가지 드러보면 「抄僧爲軍」(高麗▶P5-1史 卷八十一, 兵志一) 「各道()軍使等 ()閑良子弟」 「元帥於原定別抄外 又()煙戶軍 又抄別軍」 「加定各道元帥 分遣()軍」(幷仝上) 等 句에 보이는 「抄」는 選取의 意로 쓰인 것들이며, 朝鮮朝에 드러서도 各種의 別抄와 抄軍의 稱이 最近世에까지 있었던 것으로서 別抄軍 駕前別抄 壯抄 新抄槍手 精抄軍 等의 名稱이 보이나니(增補文轍 備考兵考), 이것들도 모다 選取의 意로서 「抄」를 부치게 된 것임은 「別抄軍 本摠戎廳束伍中 抄選而別其號者也」(全書卷百十兵考二)라는 精抄軍에 關한 解說을 가지고도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朝鮮朝에 이르러서도 各種 抄軍의 名稱이 보이거니와 이는 前朝의 것을 蹈襲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요컨대 고려의 별초(군)는 특선병대의 칭인 것은 이상의 논술한 것으로서 대개 구명되었을 줄로 생각하거니와, 다시 한걸음 나아가 삼별초 또는 일반 별초 출현의 필연성과 그의 의의를 밝히려는 의미 아래에서 먼저 중말기에 이르기까지의 고려병제 연혁을 개찰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의 병제는 대개 당의 부(부위)병제에 의방(依倣)한 것이니 고려사서적(권83) 백관지(3) 주현군조에
쪽수▶P5-2要컨대 高麗의 別抄(軍)는 特選兵隊의 稱인 것은 以上의 論述한 것으로서 대개 究明되였을 줄로 생각하거니와, 다시 한거름 나아가 三別抄 또는 一般 別抄 出現의 必然性과 그의 意義를 밝히려는 意味 아래에서 먼저 中末期에 이르기까지의 高麗兵制의 沿革을 槪察할 必要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高麗의 兵制는 대개 唐의 府(府衛)兵制에 依倣한 것이니 高麗史(卷八十三) 百官志(三) 州縣軍條에

高麗兵制 大抵皆做唐之府術 云云

쪽수▶P5-3

高麗兵制 大抵皆做唐之府術 云云

이라 하였고, 또 같은 지(2) 서반조에
쪽수▶P5-4이라 하였고, 또 同志(二) 西班條에

二年(〇太祖) 置六衛 穆宗五年 備置六衛職員 後置鷹揚龍虎二軍 在六衛之上 後又設重房 使二軍六衛上大將軍 皆會焉毅 明以降 武臣用事 重房之權 益重

쪽수▶P5-5

二年(〇太祖) 置六衛 穆宗五年 備置六衛職員 後置鷹揚龍虎二軍 在六衛之上 後又設重房 使二軍六衛上大將軍 皆會焉毅 明以降 武臣用事 重房之權 益重

이라 하였다. 대개 태조인물 2년에 당의 부병제에 의방하여 6위(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감문위)가 설치되었고 다시 목종 5년에 이르러 6위의 관제가 완비되었으며, 그 후에 다시 응양용호의 2군을 6위의 위에 두었고 (2군6위를 병칭하여 8위라고도 함) 또 뒤에 2군6위의 수뇌들로써 (일반 재추도 참열(𠫵列)였으나)중방(군기 변사를 의결하던 군사적 기관)을 설치하였으나 의종인물 명종인물 때에 이르러 무관(정중부인물 최충헌인물 등)이 전횡함에 미처 국가의 군사상 최고기관인 중방이 그들의 막부로 되어 국권을 전천(專擅)하게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응양용호 2군 및 중방의 설치는 과연 어느 시대에 속한 것인지 위의 인용문의 “後置⋯⋯” “後又設⋯⋯” 등의 막연한 기사로는 추단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기타 다른 사료에도 또한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는 바이다.
쪽수▶P5-6이라 하였다. 대개 太祖 二年에 唐의 府兵制에 依倣하야 六衛(左右衛 神虎衛 興威衛 金吾衛 監門衛)가 設置되였고 다시 穆宗 五年에 이르러 六衛의 官制가 完備되였으며, 그 後에 다시 應揚龍虎의 二軍을 六衛의 우에 두웠고 (二軍六衛▶P6-1를 幷稱하야 八衛라고도 함) 또 뒤에 二軍六衛의 首腦들로써 (一般宰樞도 𠫵列하였으나)重房(軍機 邊事를 議決하던 軍事的 機關)을 設置하였으나 毅宗 明宗時에 이르러 武官(鄭仲夫 崔忠獻 等)이 專橫함에 미처 國家의 軍事上 最高機關인 重房이 그들의 幕府로 化하야 國權을 專擅케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應揚龍虎二軍 및 重房의 設置는 果然 어느 時代에 屬한 것인지 上引文의 「後置⋯⋯」 「後又設⋯⋯」 等의 寞然한 記事로는 推斷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其他 다른 史料에도 또한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는 바이다.
어쨌든 2군6위는 태조인물로부터 목종인물에 걸쳐 정비된 병제인 것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거니와 지방군에 있어서는 “高麗兵制 大抵皆倣唐之府衛 則兵之散在州縣者 意亦皆屬乎六衛 非六衛外 別有州縣軍也 然無可考 姑以此目之”(고려사서적 권83 병지3 주현군서)라 하여 주현군의 예속계통에 관하여는 적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아니하였던 것으로서 고려사서적 편자도 다만 추론에 그치고 말았으나, 원래 부병제 자체로 보아 변방 요지의 진수군(鎭戌軍)은 물론이어니와 각 주현에 산재한 소위 주현군도 대개 6위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단하여도 좋을 듯하다.
쪽수▶P6-2어쨋던 二軍六衛는 太祖로부터 穆宗에 걸처 整備된 兵制인 것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어니와 地方軍에 있어서는 「高麗兵制 大抵皆倣唐之府衛 則兵之散在州縣者 意亦皆屬乎六衛 非六衛外 別有州縣軍也 然無可考 姑以此目之」(高麗史卷八十三兵志三州縣軍序)라 하야 州縣軍의 隸屬系統에 關하야는 的確한 資料가 남어있지 아니하였던 것으로서 高麗史 編者도 다만 推論에 끌이고 말었으나, 元來 府兵制 自體로 보와 邊方要地의 鎭戌軍은 勿論이어니와 各州縣에 散在한 所謂 州縣軍도 대개 六衛에 屬하였을 것으로 推斷하여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태조인물 이래 정비된 고려의 군제는 후일의 경과를 따라 점차로 해이하여 문종인물 때에 이르러서는 벌써 문란의 조(兆)에 현저하였으니
쪽수▶P6-3그러나 太祖 以來 整備된 高麗의 軍制는 時日의 經過를 따러 漸次로 解弛하야 文宗時에 이르러서는 발서 紊亂의 兆에 現著하였으니

二十五年(〇文宗) 六月 制日 近聞 諸衛軍人 亡命者 甚多 是由執事不公 富强者 托勢以免 貧窮者 獨受其勞 衣食乏絕 而略無休息 云云

(같은 책 권81 병지1)
쪽수▶P6-4

二十五年(〇文宗) 六月 制日 近聞 諸衛軍人 亡命者 甚多 是由執事不公 富强者 托勢以免 貧窮者 獨受其勞 衣食乏絕 而略無休息 云云

(仝書卷八十一 兵志一)
이라 한 기사로 보면 문종 때에 이르러 병제 문란의 원인으로 ①군인으로서 도망하는 자가 많이 생기며 ②부강한 자는 세력을 이용하여 병역을 면하고 빈궁한 자만이 그에 당하므로 빈궁한 그들은 쉬일 틈이 없으되 의식(衣食)의 절핍을 보게 되어 병력의 저열하여 진 것을 제시한 것이니, 이때부터 고려의 부위병은 질과 양에 있어 자못 빈약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결과는 드디어 외적 방어와 치안 유지에 특수군단의 출현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
쪽수▶P6-5이라 한 記事로 보면 文宗 때에 이르러 兵制 紊亂의 原因으로 ①軍人으로서 逃亡하는 者가 많이 생기며 ②富强한 者는 勢力을 利用하야 兵役을 免하고 貧窮한 者만이 그에 當함으로 貧窮한 그들은 쉬일 틈이 없으되 衣食의 絕乏을 보게 되▶P7-1여 兵力의 低劣하여 진 것을 提示한 것이니, 이때부터 高麗의 府衛兵은 質과 量에 있어 자못 貧弱케 된 것이다. 그리하야 이 結果는 드듸어 外敵 防禦와 治安 維持에 特殊軍團의 出現을 促進식힘에 이르렀다.
다음 숙종인물윤관인물의 건의에 의하여 창설된 별무반에 관하여 살펴보면 고려사(권96) 윤관전에
쪽수▶P7-2다음 肅宗朝 尹瓘의 建議에 依하여 創設된 別武班에 關하여 살펴보면 高麗史(卷九十六)尹瓘傳에

奏曰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於是 建議 始立別武班 自文武散官吏胥 至于商賈僕隷及州府郡縣 凡有馬者爲神騎 無馬者爲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等軍 年二十以上男子非擧子 皆屬神步 西班與諸鎭府軍人 四時訓錬 又選僧徒 爲降魔軍 遂鍊兵畜穀 以圖再擧

쪽수▶P7-3

奏曰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於是 建議 始立別武班 自文武散官吏胥 至于商賈僕隷及州府郡縣 凡有馬者爲神騎 無馬者爲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等軍 年二十以上男子非擧子 皆屬神步 西班與諸鎭府軍人 四時訓錬 又選僧徒 爲降魔軍 遂鍊兵畜穀 以圖再擧

라 하였다. 숙종인물 9년에 동북의 강적인 동여진의 침입을 방어할 때 윤관인물 같은 이도 처음에는 임간인물의 실패한 뒤를 이어 동북면행영병마도통으로 동여진에 당하였다가 또한 병력의 다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정에 건백(建白)하여 별무반을 조직한 것이니 윤관인물은 먼저 그의 실패의 원인으로서 “敵騎我步”를 들었다. 원래 보병만으로는 기병에 당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당시 그러한 쓰린 경험을 맛본 윤관인물은 새로 신기군이라는 기병대를 조직하는 동시에 보병에 있어서는 신보 도탕 경궁 정노 발화 등 각 종으로써 특별군제를 정하고 별로 일도(佾徒)로써 항마군이라는 것을 조직하였으니 이와 같이 보병에까지 별제를 세운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수이(綏弛) 쇠약한 재래 병제의 보강책에서 나온 것이다.
쪽수▶P7-4라 하였다. 肅宗 九年에 東北의 强敵인 東女眞의 侵入을 防禦할새 尹瓘 같은 이도 처음에는 林幹의 失敗한 뒤를 이어 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東女眞에 當하였다가 또한 兵力의 多大한 損失을 보게 되였다. 그리하야 그는 朝廷에 建白하여 別武班을 組織한 것이니 尹瓘은 먼저 그의 失敗의 原因으로서 「敵騎我步」를 들었다. 元來 步兵만으로는 騎兵에 當키 어려운 것으로서 當時 그러한 쓰린 經驗을 맛본 尹瓘은 새로히 神騎軍이라는 騎兵隊를 組織하는 同時에 步兵에 있어서는 神步 跳蕩 梗弓 精弩 發火 等 各種으로써 特別軍制를 定하고 別로히 佾徒로써 降魔軍이라는 것을 組織하였으니 이와 같이 步兵에까지 別制를 세운 것은 疑心할 것도 없이 綏弛 衰弱한 在來 兵制의 補强策에서 나온 것이다.
이 별무반이라는 특별군단은 후일(예종인물 때) 윤관인물의 여진정벌에 성공한 기초가 되었으며 여진정벌에 많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니 “逮至肅宗 東女眞構釁 於是 銳意桿禦 日事鍊兵 遂置別武班⋯⋯⋯是雖不合古制 然亦用之一時 而收功有足稱者”(같은 책 권81 병지1)라 한 기사로도 추찰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별무반은 동여진에 대한 공방을 목표로 하여 생긴 것인 만큼 2군6위의 정규 병제와 같이 제도로서의 영속성이 적은 것으로서 얼마 안 되어 붕해(崩解)하였던 것으로 믿나니 앞서 든 “亦用之一時 而收功”이라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오직 신기군만은 그의 활동이 고종 말년까지 자주 역사 상에 나타나 보이니 원래 이 특수 기병대인 신기군(신기반이라는 칭도 있으니 이 신기반의 반(班)도 별무반의 반(班)에서 묻어 온 듯함)은 고려 병력의 결함을 보족(補足)하여 대륙 강적(여진 글단 몽고)의 경기(勁騎)에 대하게 되었으므로 그의 필요와 효과가 다른 반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으로서 후대에까지 존치된 것이 아닐까 한다.
쪽수▶P7-5이 別武班이라는 特別軍團은 後日(睿宗時) 尹瓘의 女眞征伐에 成功한 基礎가 되였으며 女眞征伐에 많은 效果를 거두웠던 것이니 「逮至肅宗 東女眞構釁 於是 銳意桿禦 日事鍊兵 遂置別武班⋯⋯⋯是雖不合古制 然亦用之一時 而收功有足稱者」 (仝書 卷八十一 兵志一)라 한 記事로도 推察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別武班은 東女眞에 對한 攻防을 目標로 하야 생긴 것인 만큼 二軍六衛의 正規 兵制와 같이 制度로서의 永續性이 적은 것으로서 얼마 아니되여 崩解하였던 것으로 믿나니▶P8-1 前擧 「亦用之一時 而收功」이라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中에도 오직 神騎軍만은 그의 活動이 高宗 未年까지 자조 史上에 나타나 보이나니 元來 이 特殊 騎兵隊인 神騎軍(神騎班이라는 稱도 있으니 이 神騎班의 班도 別武班의 班에서 무더 온 듯함)은 高麗 兵力의 缺陷을 補足하야써 大陸 強敵(女眞 契丹 蒙古)의 勁騎에 對하게 되었으므로 그의 必要와 効果가 他班의 比가 아니였을 것으로서 後代에까지 存置된 것이 아닐가 한다.
그러나 일면에 있어 재래의 부병제는 그의 내용이 비록 허약하여졌다 할지라도 그의 체제는 의연히 고려말까지 존속되었으니, 공양왕인물 원년 2월 간관(諫官)이 부병을 논한 상소 가운데에
쪽수▶P8-2그러나 一面에 있어 在來의 府兵制는 그의 內容이 비록 虛弱하여졌다 할지라도 그의 體制는 依然히 高麗末까지 存續되였으니, 恭讓王 元年 二月 諫官이 府兵을 論한 上䟽 가운대에

我太祖 設府兵 令軍簿司典馬攝之政 身彩武藝備完者 得與其選 是以 將得其人 卒伍精强 近年以來 入仕多門 兵政一壞 或拘於都目 或出於請謁 不問老幼才否 而授之 於是 襁褓幼子工商奴隷 無尺寸之功 坐耗天祿 一有緩急 將何以用之 甚非先王設兵之意也 願令精選勇略兼備者 以代尸祿之輩 云云(고려사서적 권81 병지1)

쪽수▶P8-3

我太祖 設府兵 令軍簿司典馬攝之政 身彩武藝備完者 得與其選 是以 將得其人 卒伍精强 近年以來 入仕多門 兵政一壞 或拘於都目 或出於請謁 不問老幼才否 而授之 於是 襁褓幼子工商奴隷 無尺寸之功 坐耗天祿 一有緩急 將何以用之 甚非先王設兵之意也 願令精選勇略兼備者 以代尸祿之輩 云云(高麗史 卷八十一 兵志一)

이라 한 기사의 일례로도 저간의 소식을 넉넉히 엿볼 수 있을 줄로 믿는다.
쪽수▶P8-4이라 한 記事의 一例로도 這間의 消息을 넉々히 였볼 수 있을 줄로 믿는다.
이상에서 고려 초기로부터 중말경에 걸쳐서의 병제의 변천과 그의 경향을 대개 개술하였거니와 의종인물 명종인물 때에 이르러는 병권이 무신의 손에 돌아가고 그에 따라 무사의 전횡시대가 순치(馴致)되었다. “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 悍將勁卒 皆屬私家”(같은 책 병지서)라 한 것은 그 사정을 가리킨 것이어니와 정병과 병권이 무신의 손에 들어가 소위 무사전횡 시대가 시작되기는 의종 때 정중부인물의 난으로부터서의 일이다. 그리하여 삼별초라는 특수병대도 이러한 시대에 출현한 것이니 이에서 우리는 다시 무사전횡시대가 순치되기까지의 경로를 따져 삼별초와의 관계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8-5以上에서 高麗 初期로부터 中末頃에 걸처서의 兵制의 變遷과 그의 傾向을 대개 概述하였거니와 毅宗 明宗時에 이르러는 兵權이 武臣의 손에 도라가고 그에 따러 武士의 專橫時代가 馴致되었다. 「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 悍將勁卒 皆屬私家」(仝書 兵志序)라 한 것은 그 事情을 가르친 것이어니와 政柄과 兵權이 武臣의 손에 드러가 所謂 武士專橫時가 始作되기는 毅宗時 鄭仲夫의 亂으로부터서의 일이다. 그리하야 三別抄라는 特殊兵隊도 이러한 時代에 出現한 것이니 이에서 吾人은 다시 武士專橫時代가 馴致되기까지의 經路를 따저 三別抄와의 關係를 밝힐 必要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현대문주2▶고려에는 이미 의종인물에 앞서 인종인물 때로부터 하극상의 바람이 자못 행하여 권신(이자겸인물 척준경인물 등)의 횡포과 내란(묘청인물의)의 병발(迸發)로 인하여 왕권이 식미(式微)하였고 다시 의종에 이르러서는 왕의 종자(縱恣) 유일(游逸)의 방탕한 행동은 정치와 강기(綱紀)를 극도로 괴란케 하였으며 이에 따라 인민의 곤고는 자못 비참한 광경을 나타내었다.[a 2] 그 위에 당시 고려에는 우문정치의 결과로서 문무의 차별이 생겨 무신은 문관의 하풍에 서게 되었다. 원래 국가의 간성(干城)인 무사는 직접 군졸의 지휘에 당하고 있는 만큼 실제적 세력은 섣부른 문관에 비할 바가 아니니 문무의 차별이 비록 우문정치에서 나온 풍습의 소치라 하나 이에 대하여 무사의 중심에는 본대 석연히 알 배가 아니다. 그리하여 일단 문무통어의 길을 잃게 되면 울적했던 무부(武夫)의 감정이 일시에 폭발할 것은 피하기 어려운 사세(事勢)라 할 것이다. 의종 34년에 일어난 정중부인물 일파의 무사의 대반란은 실로 이러한 동기에서 일어난 것이니, 당시 그들 무사는 “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고려사서적 권128 정중부전)이라 하여 전부터 군총과 지위를 방패로 무부를 능욕하던 문관과 환시(宦寺)는 물론, 문관을 머리에 얹은 자까지 일강타진(一綱打盡) 격으로 주멸(誅滅)하고 드디어 의종인물의 폐시(癈弑)와 명종인물의 옹립을 쉽사리 행하여 무사의 천하를 돌차간에 꾸며내었고, 명종인물 3년 8월에 일어난 A인물김보당의 여병사건사건으로 말미암아 무사의 세력은 더욱 공고하게 되어 모든 현대문주3▶국권은 완전히 무사의 수중에 들게 되었다.[a 3] (정중부난사건에 관하여는 아래 절에서 다시 논술할 터)
쪽수▶P9-1원문주2▶高麗에는 이미 毅宗에 앞서 仁宗 때로부터 下剋上의 風이 자못 行하야 權臣(李資謙 拓俊京 等)의 橫暴과 內亂(妙淸의)의 迸發로 因하야 王權이 式微하였고 다시 毅宗에 이르러서는 王의 縱恣 游逸의 放蕩한 行動은 政治와 綱紀를 極度로 壞亂케 하였으며 이에 따러 人民의 困苦는 자못 悲慘한 光景을 나타내였다.[2] 그 우에 當時 高麗에는 右文政治의 結果로서 文武의 差別이 생겨 武臣은 文官의 下風에 서게 되였다. 元來 國家의 干城인 武士는 直接 軍卒의 指揮에 當하고 있는 만큼 實際的 勢力은 섯부른 文官의 比가 아니니 文武의 差別이 비록 右文政治에서 나온 風習의 所致라 하나 이에 對하야 武士의 心中에는 본대 釋然히 알배가 아니다. 그리하야 一旦 文武統御의 道를 일케 되면 鬱積했던 武夫의 感情이 一時에 爆發할 것은 避키 어려운 事勢라 할 것이다. 毅宗 二十四年에 이러난 鄭仲夫 一派의 武士의 大叛亂은 實로 이러한 動機에서 이러난 것이니, 當時 그들 武士는 「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高麗史 卷百二十八 鄭仲夫傳)이라 하야 前부터 君寵과 地位를 팡패로 武夫를 凌辱하던 文官과 宦寺는 勿論, 文冠을 머리에 언진 者까지 一綱打盡格으로 誅滅하고 드듸어 毅宗의 癈弑와 明宗의 擁立을 쉽사리 行하야 武士의 天下를 咄嗟間에 뀌며내였고, 明宗 三年 八月에 일어난 金甫當의 與兵事件으로 말미암어 武士의 勢力은 더욱 鞏固케 되여 모든 원문주3▶國權은 完全히 武士의 手中에 들게 되었다.[3] (鄭仲夫亂에 關하야는 下節에서 다시 論述할 터)
이와 같이 문관이 거꾸러지고 무사의 전횡시대가 됨에 정권의 쟁탈은 다시 무신들 사이에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들의 무기는 말할 것도 없이 병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든 “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라 한 기사와 같이 당시 국군은 대개 전횡무신의 조아(爪牙)로 변함에 이르렀거니와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국군은 이미 부패 무력한 위에 무장 권신 무리는 각자의 위세 보지(保持)와 정권 쟁탈에 독자의 세력 배경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에서 소위 사병이 출현할 것도 필연한 이세(理勢)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9-2이와 같이 文官이 꺽구러지고 武士의 專橫時代가 되매 政權의 爭奪은 다시 武臣들 사이에 이러나게 되였으며 그들의 武器는 말할 것도 없이 兵力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야 前擧 「毅明以後 權臣執命 兵柄下移」라 한 記事와 같이 當時 國軍은 대개 專橫武臣의 爪牙로 化함에 이르렀거니와 그러나 旣述한 바와 같이 國軍은 이미 腐敗 無力한 우에 武將 權臣輩는 各自의 位勢 保持와 政權 爭奪에 獨自의 勢力 背景이 必要케 되었던 것이니 이에서 所謂 私兵이 出現할 것도 必然한쪽수▶P10-1 理勢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사병에 있어서는 명종인물 9년에 장군 경대승인물정중부인물 일당을 무찌른 뒤에 불평무사와 여러 정적에 준비하기 위하여 용사(勇士) 백수십인을 초모(招募)하여 소위 장침대피로써 문하에 유양(留養)하고 도방이라 이름 지었다.(고려사서적 권175 경대승전) 이것이 무신의 사병으로 처음 나타나는 기사거니와 그러나 이밖에 당시 무장세가의 가병(家兵)으로서 간과하지 못할 것은 소위 그들의 문객가동(門客家僮)이라는 것이니 이의민인물 일족 최충헌인물 일족과 및 박진재인물 등의 문객가동은 모두 현대문주4▶가병으로서 활동하였다.[a 4] 원래 무신의 문객가동이 가병의 기원이 되었을 것은 나이토우 슌슈케(內藤雋輔)씨도 이미 지적한 바거니와 (청구학총학술지15권호 같은 이 「고려병제관견」원고)이 또한 자연의 이세라 할 것이니 경대승인물도방(○○)은 그의 문객가동에게 붙인 특별 명칭에 불과한 것이며, 최충헌인물 일족의 ‘문객가동’이 자주 ‘가병’으로 혼칭된 것도 이러한 관계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쪽수▶P10-2私兵에 있어서는 明宗 九年에 將軍 慶大升이 鄭仲夫 一黨을 뭇지른 뒤에 不平武士와 여러 政敵에 備키 爲하야 勇士 百數十人을 招募하야 所謂 長枕大被로써 門下에 留養하고 都房이라 號하였다.(高麗史 卷白七十五 慶大升傳) 이것이 武臣의 私兵으로 처음 나타나는 記事어니와 그러나 이밖에 當時 武將勢家의 家兵으로서 看過치 못할 것은 所謂 그들의 門客家僮이라는 것이니 李義旼 一族 崔忠獻 一族과 및 朴晋材 等의 門客家僮은 모다 원문주4▶家兵으로서 活動하였다.[4] 元來 武臣의 門客家僮이 家兵의 起原이 되였을 것은 內藤雋輔氏도 이미 指摘한 바어니와 (靑丘學叢 第十五號 同氏 「高麗兵制管見」)이 또한 自然의 理勢라 할 것이니 慶大升의 都房(○○)은 그의 門客家僮에게 부친 特別 名稱에 不過한 것이며, 崔忠獻 一族의 「門客家僮」이 자조 「家兵」으로 混稱된 것도 이러한 關係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이 같은 무장권신의 가병은 최충헌인물 일족에 이르러 더욱 성하여 국군을 능가하리 만큼 되었으니 최충헌인물의 시종문객은 거의 3천 인이었다는 기사를 비롯하여(고려사서적 최충헌전) 고종인물 3년에 글단(요동의)이 침입할 때에 아병(我兵) 중에 효용(驍勇)한 자는 거의 최충헌인물 부자(최충헌의 아들 최우인물)의 문객이요 관군은 모두 노약영졸(老弱嬴卒)이므로 그를 점검하던 원사(元帥)도 용기가 풀렸다 하며(고려사절요서적 권14 고종 3년 11월조, 고려사서적 권103 조충전) 같은 해 12월에 최충헌인물이 가병을 검열할 때 좌경리(左梗里)로부터 우경리(右梗里)에 이르기까지 수중으로 열을 지어 23리에 뻗쳤고 최우인물(후명의 이)의 가병은 선지교로부터 이령(梨嶺)을 지나 숭인문에 이르렀다(고려사절요서적 위의 책 12월조)는 몇 가지 예로도 그의 개황(槪况)을 추찰할 수가 있다.
쪽수▶P10-3이 같은 武將權臣의 家兵은 崔忠獻 一族에 이르러 더욱 盛하야 國軍을 凌駕하리 만큼 되였었으니 崔忠獻의 侍從門客은 거의 三千人이었다는 記事를 비롯하야(高麗史 崔忠獻傳) 高宗 三年에 契丹(遼東의)이 侵入할 때에 我兵 中에 驍勇한 者는 거의 崔忠獻 父子(崔忠獻의 子 崔瑀)의 門客이요 官軍은 모다 老弱嬴卒임으로 그를 點檢하던 元帥도 勇氣가 풀렸다 하며(高麗史節要 卷一四 高宗 三年十一月條, 高麗史 卷一百三 趙沖傳) 同年 十二月에 崔忠獻이 家兵을 檢閱할새 左梗里로부터 右梗里에 이르기까지 數重으로 列을 지어 二三里에 뺏치었고 崔瑀(後名의 怡)의 家兵은 選地橋로부터 梨嶺을 지나 崇仁門에 이르렀다(高麗史節要 仝上 十二月條)는 몇 가지 例로도 그의 槪况을 推察할 수가 있다.
최씨 일족의 가병은 이와 같이 대규모로 확장됨을 따라 그의 기구도 점차 조직화되었으니 고려사서적 최충헌전에
쪽수▶P10-4崔氏 一族의 家兵은 이와 같이 大規模로 擴張됨을 따러 그의 機構도 漸次 組織化되였으니 高麗史 崔忠獻傳에

忠獻 自知縱恣 恐其變生不測 凡文武官閑良軍卒强有力者 皆招致 分爲六番 更日直宿其家 號都房 其出入 合番擁衛如赴戰鬪焉

쪽수▶P10-5

忠獻 自知縱恣 恐其變生不測 凡文武官閑良軍卒强有力者 皆招致 分爲六番 更日直宿其家 號都房 其出入 合番擁衛▶P11-1如赴戰鬪焉

이 하였다. 이 최충헌인물의 도방은 그의 조직 동기가 앞서 든 경대승인물의 그것과 全혀 同一한 것으로서 경대승인물의 도방제를 답습한 것일지나 다만 최충헌인물의 도방은 6대로 나누어 날을 정하여 6번 숙위하게 하였음으로 육번도방 또는 도방육번의 칭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특히 최충헌인물이 출입할 때에는 도방육번 전체가 옹호하여 마치 전진에 나가는 것과 같이 위세가 삼엄하였던 것이니 경대승인물의 도방에 비하여 그 규모와 조직이 자못 확장되고 치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최이인물의 집권시대에 이르러서는 도방이 내외의 2부로 분화된 외에 마별초라는 특별 기병대와 서방삼번이라는 현대문주5▶특수숙위가 설치되었으며[a 5] 현대문주6▶다시 최항에 이르러서는 도방이 36번으로 조직이 확대되었다.[a 6] 이와 같은 무장 권신의 가병숙우인 도방 내지 서방의 제(制)는 최후로 임유무인물 때에까지 답습되었던 것이니 이로 보면 당시 정권을 싸고 알력과 쟁탈을 일삼던 무장 권신에 있어 가병의 존재가 얼마나 필요불가결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쪽수▶P11-2이 하였다. 이 崔忠獻의 都房은 그의 組織 動機가 前擧 慶大升의 그것과 全혀 同一한 것으로서 慶大升의 都房制를 踏襲한 것일지나 다만 崔忠獻의 都房은 六隊로 나누워 날을 定하야 六番 宿衛케 하였음으로 六番都房 또는 都房六番의 稱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特히 崔忠獻이 出入할 때에는 都房六番 全體가 擁護하야 마치 戰陣에 나가는 것과 같이 威勢가 森嚴하였던 것이니 慶大升의 都房에 比하야 그 規模와 組織이 자못 擴張되고 緻密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崔怡의 執權時代에 이르러서는 都房이 內外의 二部로 分化된 外에 馬別抄라는 特別 騎兵隊와 書房三番이라는 원문주5▶特殊宿衛가 設置되었으며[5] 원문주6▶다시 崔沆에 이르러서는 都房이 三十六番으로 組織이 擴大되였다.[6] 이와 같은 武將 權臣의 家兵宿衛인 都房 乃至 書房의 制는 最後로 林惟茂 때에까지 踏襲되였던 것이니 일로 보면 當時 政權을 싸고 軋轢과 爭奪을 일삼던 武將 權臣에 있어 家兵의 存在가 얼마나 必要不可缺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의종인물 명종인물 이후 무사의 발호시기에 있어 무장 권신은 각각 가병을 사축(私蓄)하여 서로 정권 쟁탈을 일삼으며 국왕의 폐위도 임의로 행하게 되니 정치와 강기의 괴난(壊亂)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에는 불량배의 반란과 초적(草賊)의 도량이 각처에서 병발(幷發)하며 도성 부근에도 현대문주7▶도절(盜窃)이 자못 성행하고[a 7] 공사노예의 무리까지 공포할 만한 현대문주8▶음모를 획책하였다.[a 8] 이와 같이 치안과 질서가 문란하였고 그 위에 글단의 뒤를 이어 강적 몽고의 압력을 받게 됨에 이르러 당시 부병은 이미 수이(綏弛)된 지 오랜 지라 외구내환(外寇內患)에 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니 이러한 정세 아래에서 권신 최우인물의 손에 의하여 특수병단이 창설된 것이니 이것이 소위 삼별초다.
쪽수▶P11-3要컨대 毅宗 明宗 以後 武士의 跋扈時期에 있어 武將 權臣은 各々 家兵을 私蓄하야 서로 政權 爭奪을 일삼으며 國王의 廢立도 任意로 行하게 되매 政治와 綱紀의 壊亂은 極度에 達하였다. 이에 따러 地方에는 不逞輩의 叛亂과 草賊의 跳梁이 各處에서 井發하며 都城 附近에도 원문주7▶盜窃이 자못 盛行하고[7] 公私奴隷의 무리까지 恐怖할 만한 원문주8▶陰謀를 劃策하였다.[8] 이와 같이 治安과 秩序가 紊亂하였고 그 우에 契丹의 뒤를 이어 强敵 蒙古의 壓力을 받게 됨에 이르러 當時 府兵은 이미 綏弛된 지 오랜 지라 外寇內患에 當키 어려웠던 것이니 이러한 情勢 아래에서 權臣 崔瑀의 손에 依하야 特殊兵團이 創設된 것이니 이것이 所謂 三別抄다.























본문3: 3.삼별초의 기원


삼별초의 기원에 관하여 먼저 고려사서적에 의하면
쪽수▶P14-1三別抄의 起原에 關하야 먼저 高麗史에 依하면

初 崔瑀 憂國中多盜 聚勇士 每夜巡行禁暴 因名夜別抄 及盜起諸道 分遣別抄 以捕之 其軍茜衆 遂分爲左右 又以國人自蒙古逃還者 爲一部 號神義 是爲三別抄(卷八十一, 兵志[一]五軍條)

쪽수▶P14-2

初 崔瑀 憂國中多盜 聚勇士 每夜巡行禁暴 因名夜別抄 及盜起諸道 分遣別抄 以捕之 其軍茜衆 遂分爲左右 又以國人自蒙古逃還者 爲一部 號神義 是爲三別抄(卷八十一, 兵志[一]五軍條)

라 하였다. 야별초는 처음에 권신 최우인물가 국중(주로 도성을 가리킨 것인 듯함)에 도적이 많음으로 그것을 금집(禁緝)하기 위하여 용사를 모아 야순(夜巡)하게 한 것이 그의 시초이며, 및 국내 각지에도 도절이 성행하니 역시 야별초를 파견하여 추포(追捕)에 당하게 하여 그의 수가 심히 늘었음으로 드디어 좌우 현대문주9▶2부 즉 좌별초 우별초[a 9]로 나뉘게 되었고, 또 국인으로서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도환(逃還)한 자를 모아 신의(군)이라는 1부대를 편성하여 좌우 양별초에 신의군을 합하여 삼별초라 칭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시 원고려기사서적에(국학문고서적 제4습참편) 나아가 살펴보면 중통(지원의 오기인 듯) 7년 6월 1일조에
쪽수▶P14-3라 하였다. 夜別抄는 처음에 權臣 崔瑀가 國中(主로 都城을 가르친 것인 듯함)에 盜賊이 많음으로 그것을 禁緝키 爲하야 勇士를 모아 夜巡케 한 것이 그의 始初이며, 및 國內 各地에도 盜窃이 盛行하매 亦是 夜別抄를 派遣하야 追捕에 當케 하야 그의 數가 甚히 늘었음으로 드듸어 左右 원문주9▶二部 即 左別抄 右別抄[9]로 나뉘게 되였고, 또 國人으로서 蒙古軍의 捕虜가 되였다가 逃還한 者를 모아 神義(軍)이라는 一部隊를 編成하야 左右 兩別抄에 神義軍을 合하야 三別抄라 稱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對하야 다시 元高麗紀事에(國學文庫第四拾參編) 나아가 살펴보면 中統(至元의 誤인 듯) 七年 六月 一日條에

(〇 고려 원종의 휘식을 이와 같이 쓴 것임) 遣人報 有先自天朝逃來一翼軍 與高麗兩翼軍叛 盖植族承化公 以三別抄軍叛也

쪽수▶P14-4

(〇 高麗 元宗의 諱植을 이와 같이 쓴 것임) 遣人報 有先自天朝逃來一翼軍 與高麗兩翼軍叛 盖植族承化公 以三別抄軍叛也

라 하여 삼별초의 종별을 몽고로부터 도환한 일익군과 고려의 양익군이라 하였으며, 또 같은 책 지원 9년 5월조에는
쪽수▶P14-5라 하야 三別抄의 種別을 蒙古로부터 逃還한 一翼軍과 高麗의 兩翼軍이라 하였으며, 또 同書 至元 九年 正月條에는

是月 特進上柱國高麗世子愖(후일 충렬왕의 초휘심을 이와 같이 쓴 것임) 狀言 林衍之能擅權倔強者 專以左邊右邊及神義軍等三別抄故也 云云

쪽수▶P14-6

是月 特進上柱國高麗世子愖(後日 忠烈王의 初諱諶을 이와 같이 쓴 것임) 狀言 林衍之能擅權倔強者 專以左邊右邊及神義軍等三別抄故也▶P15-1 云云

이라 하였다. 좌변우변군은 위의 글의 양 익군에 해당한 것으로서 좌우별초를 가리킨 것이며 위의 글의 “自天朝逃來一翼軍”은 정히 신의군을 설명한 것이니 고려사의 기사와 일치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원고려기사서적고려사서적 또는 고려사절요서적 등 본국 측 기록과 대개 합치함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바거니와 특히 삼별초의 난은 몽고와 지대한 관계가 있는 만큼 그에 관한 해서(該書)의 기사도 매우 확실성을 가진 것으로서 본국 측 기사와 거의 일치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쪽수▶P15-2이라 하였다. 左邊右邊軍은 上文의 兩 翼軍에 該當한 것으로서 左右別抄를 가르친 것이며 上文의 「自天朝逃來一翼軍」은 正히 神義軍을 說明한 것이니 高麗史의 記事와 一致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元來 元高麗紀事는 高麗史 또는 高麗史節要 等 本國 側 記錄과 대개 合致함은 吾人의 注意를 끄는 바이어니와 特히 三別抄의 亂은 蒙古와 至大한 關係가 있는 만큼 그에 關한 該書의 記事도 매우 確實性을 가진 것으로서 本國 側 記事와 거의 一致되는 것은 偶然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삼별초의 종별에 있어서는 또한 앞서 든 양종의 기사와 자못 뜻을 달리하는 해설이 있으니, 익재 이제현인물역옹패설서적(전집2)에 삼별초를 주(註)하여
쪽수▶P15-3그러나 三別抄의 種別에 있어서는 또한 前擧 兩種의 記事와 자못 趣를 달리하는 解說이 있으니, 益齋 李齊賢의 櫟翁稗說(前集二)에 三別抄를 註하야

權臣 募驍勇之士 養以自衛 日神義軍 日馬別抄 日夜別抄 所謂三別抄

쪽수▶P15-4

權臣 募驍勇之士 養以自衛 日神義軍 日馬別抄 日夜別抄 所謂三別抄

라 하였다. 이 주석은 이제현인물 자신이 달아 놓은 것으로 생각되거니와 삼별초의 종별을 신의군 마별초 야별초라 하여 좌우 양별초의 대(代)로 마별초 야별초를 들었다. 이는 앞서 든 양종 사승의 기사와 틀릴 뿐만 아니라 공병인 삼별초(삼별초의 공사변(辨)은 다음 절에서 살펴 볼 터)에 대하여 최우인물의 가병인 마별초를 든다는 것은(주5 참조) 우리의 수긍하기 어려운 바이니, 생각컨대 이제현인물는 삼별초가 혁파된 지 17-18년 후에 출생한 이로서 다시 난고(亂藁) 등을 저술하기까지에는 그동안 십수 년의 시간적 간격이 놓여 있는 것이며, 삼별초는 오랫동안 마별초 도방 등 권신의 가병과 같이 권신들에게 이용되었던 만큼 삼별초와 마별초는 혼동되기도 쉬었을 것으로, 혹 이와 같이 양자를 혼동하는 그릇된 전문(傳聞)에 의거하여 된 것이 아닐는지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제현인물의 이 주석은 본대 마별초에 관한 기사로서 마별초를 삼별초의 1로 넣는 동시에 그대로 삼별초에 부합한 것으로도 해석되는 바이다.(앞서 든 사학잡지서적 참조)
쪽수▶P15-5라 하였다. 이 註는 益齋 自身이 달어 논 것으로 생각되거니와 三別抄의 種別을 神義軍 馬別抄 夜別抄라 하야 左右 兩別抄의 代로 馬別抄 夜別抄를 드렀다. 이는 前擧 兩種 史乘의 記事와 틀릴 뿐만 아니라 公兵인 三別抄(三別抄의 公私辨은 次節에서 試할 터)에 對하야 崔瑀의 家兵인 馬別抄를 든다는 것은(註五 參照) 吾人의 首肯키 어려운 바이니, 생각컨대 益齋는 三別抄가 革罷된 지 十七八年 後에 出生한 이로서 다시 亂藁 等을 著述하기까지에는 그동안 數十 年의 時間的 間隔이 노여 있는 것이며, 三別抄는 오래동안 馬別抄 都房 等 權臣의 家兵과 같이 權臣들에게 利用되였던 만큼 三別抄와 馬別抄는 混同되기도 쉬었을 것으로, 或 이와 같이 兩者를 混同하는 그릇된 傳聞에 依據하야 된 것이 아닐런가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池內宏博士도 言及한 바와 같이 益齋의 이 註는 본대 馬別抄에 關한 記事로서 馬別抄를 三別抄▶P16-1의 一로 넛는 同時에 그대로 三別抄에 附合한 것으로도 解釋되는 바이다.(前擧 史學雜誌叅照)
이상으로써 야별초의 출현 동기와 삼별초의 종별을 알 수 있거니와, 다시 그의 기원 연대에 관하여 살펴보면 앞서 든 고려사 병지의 기사에는 다만 최우인물의 조직한 것으로 보일 뿐이니, 원래 최우인물의 집권 시대는 고종인물 6년으로부터 같은 왕 36년에 걸쳐 약 30년 동안이었으므로 야별초는 과연 어느 연대에 출현한 것인지 자못 막연하다. 그러나 야별초의 명칭이 연대 위에 나타나기는 고종인물 19년 6월에 야별초 지유(指諭) 최세충인물이 강화천도에 반대하였다는 기사에서(고려사절요서적 권16 고종 19년 6월조 고려사서적 최충헌전 이전) 비롯한 거이니, 이로 보면 야별초는 고종인물 6년 경으로부터 같은 왕 19년 사이에 조직된 것만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다. 그리고 야별초가 좌우2부로 나눈 것과 신의군의 조직이 어느 때에 속한 것인지 이 또한 탐구할 필요가 있을 줄로 믿는다. 신의군의 명칭은 고종인물 44년 윤4월에 최항인물(최우인물의 아들)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인물가 가러들 때에 야별초 신의군과 및 서방삼번 도방36번으로써 주야로 옹위하였다(고려사서적 권24 고종 44년 민월조 같은 책 최충헌전 부의전)는 기사에서 처음 나타나 보이며, 고종인물 45년 3월에 류경인물 김인준인물(후명은 준) 등이 최의인물를 벨 때에 삼별초를 이용하였으므로 ‘좌우별초 신의군’ 등 삼별초의 종별과 삼별초라는 명칭이 그때에 처음 보인다.(주9 참조) 이로 보면 신의군의 출현은 야별초가 좌우로 나눈 것보다 앞섰던 것도 같으나 좌우별초는 그 후에도 자주 야별초라는 전명(前名)으로 통칭되었으므로 양자의 선후를 확연히 판단하기가 곤란한 바이다.
쪽수▶P16-2以上으로써 夜別抄의 出現 動機와 三別抄의 種別을 알 수 있거니와, 다시 그의 起原 年代에 關하야 살펴보면 前擧 高麗史 兵志의 記事에는 다만 崔瑀의 組織한 것으로 보일 뿐이니, 元來 崔瑀의 執權 時代는 高宗 六年으로부터 同 三十六年에 亘하야 約 三十年 동안이었음으로 夜別抄는 果然 어느 年代에 出現한 것인지 자못 漠然하다. 그러나 夜別抄의 名稱이 年代 우에 나타나기는 高宗 十九年 六月에 夜別抄 指諭 金世沖이 江華遷都에 反對하였다는 記事에서(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九年 六月條 高麗史 崔忠獻傳 怡傳) 비롯한 거이니, 일로 보면 夜別抄는 高宗 六年 頃으로부터 同 十九年 사이에 組織된 것마는 疑心치 못할 事實이다. 그리고 夜別抄가 左右二部로 나눈 것과 神義軍의 組織이 어느 때에 屬한 것인지 이 또한 探究할 必要가 있을 줄로 믿는다. 神義軍의 名稱은 高宗 四十四年 閏四月에 崔沆(崔瑀의 子)이 죽고 그의 子 崔竩가 가러들 때에 夜別抄 神義軍과 및 書房三番 都房三十六番으로써 晝夜로 擁衛하였다(高麗史 卷二十四 高宗 四十四年 閔月條 同書 崔忠獻傳 附竩傳)는 記事에서 처음 나타나 보이며, 高宗 四十五年 三月에 柳璥 金仁俊(後名은 俊) 等이 崔竩를 베힐 때에 三別抄를 利用하였음으로 「左右別抄 神義軍」 等 三別抄의 種別과 三別抄라는 名稱이 그때에 처음 보인다.(註九 叅照) 일로 보면 神義軍의 出現은 夜別抄가 左右로 나눈 것보담 앞섰던 것도 같으나 左右別抄는 그 後에도 자조 夜別抄라는 前名으로 通稱되였음으로 兩者의 先後를 確然히 判斷키가 困難한 바이다.
생각건대 고종인물 18년 이후 약 30년에 걸친 몽고의 침구 중에도 최항인물의 집권 시대에 당하는 고종인물 40년경의 야굴(也窟)의 침입과 같은 왕 41년경의 차라대(車羅大)의 침입이 제일 잔포(殘暴)하여 현대문주10▶피거자(被據者)와 도환자(逃還者)가 도로에 낙역하였다 하니[a 10] 몽고로부터 도환한 자로써 조직되었다는 신의군은 이 무렵에 출현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그리고 신의군을 별초의 일종으로 치게 된 것은 아마 몽고로부터 도환한 자 가운데에서 효용한 자를 선취하아 조직한 것으로서 부병에 대한 특수 병대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 아닐는가 한다. 이와 같이 신의군의 조직된 동기는 전혀 약고(藥古)에 대한 군사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므로 야별초의 그것과 자못 그 뜻을 달리하는 바이며 이에 따라 신의군의 임무는 주로 국방에 있던 것으로서 대개 군사 행동에 있어 야별초와 호응 연결하여 공동동작을 취하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문주11▶그리고 고종인물 말경의 고려에는 영년에 걸쳐 외구(外寇)의 침략을 받는 동시에 기황으로 말미암아 민정이 소연(騷然)하여 도성 궐내에까지 도적이 자행하였다.[a 11] 이와 같은 외구내환으로 인하여 당시 여정(麗廷)에서는 병력의 충실에 힘을 기울였으니 고종인물 39년 8월에 “設充實都監點閱閑人白丁 充補各領軍隊(고려사서적 병지2)”라는 기사로 알 수 있거니와 야별초를 확충하여 좌우 양별초로 나눈 것도 아마 이때의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16-3생각건대 高宗 十八年 以後 約 三十年에 亘한 蒙古의 侵寇 中에도 崔沆의 執權 時代에 當하는 高宗 四十年頃의 也窟의 侵入과 同 四十一年頃의 車羅大의 侵入이 第一 殘暴하야 원문주10▶被據者와 逃還者가 道路에 絡繹하였다 하니[10] 蒙古로부터 逃還한 者로써 組織되었다는 神義軍은 이 무렵에 出現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그리고 神義軍을 別抄의 一種으로 치게 된 것▶P17-1은 아마 蒙古로부터 逃還한 者 가운대에서 驍勇한 者를 選取하아 組織한 것으로서 府兵에 對한 特殊 兵隊라는 意味에서 나온 것이 아닐런가 한다. 이와 같이 神義軍의 組織된 動機는 全혀 藥古에 對한 軍事的 必要에서 나온 것임으로 夜別抄의 그것과 자못 그 趣를 달리하는 바이며 이에 따러 神義軍의 任務는 主로 國防에 있던 것으로서 대개 軍事行動에 있어 夜別抄와 呼應 聯結하야 共同動作을 取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문주11▶그리고 高宗 末頃의 高麗에는 永年에 亘하야 外寇의 侵略을 받는 同時에 饑荒으로 말미암어 民情이 騷然하야 都城 闕內에까지 盜賊이 恣行하였다.[11] 이와 같은 外寇內患으로 因하야 當時 麗廷에서는 兵力의 充實에 힘을 기우렸으니 高宗 三十九年 八月에 ”設充實都監點閱閑人白丁 充補各領軍隊(高麗史兵志二)”라는 記事로 알 수 있거니와 夜別抄를 擴充하야 左右 兩別抄로 나눈 것도 아마 이때의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다음 삼별초에 앞서 나타난 별초의 기원을 고구하여 보면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별초의 명칭이 명종 4년에 최충헌인물으로 말미암아 처음 나타나 보이나 별초의 제(制)가 그때에 비로소 생긴 것도 아니었던 듯하니, 이 최충헌인물의 전봉별초는 야별초와 같이 각색 별초의 일종으로서 역시 별초로부터 파생된 특수 명칭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별초의 기원에 있어서는 멀리 앞서 든 윤관인물의 별무반에까지 소급하지 아니하지 못할 것으로 억측하는 바이니 원래 별무반은 군사 행동에 있어 허약한 부병에 대하여 특수 조직으로서 생겨난 병단이다. 그러나 이것도 윤관인물의 여진 정복 이후에는 얼마 아니하여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이미 논단(論斷)하였거니와 그 후 글단(요동의) 방어와 내란(서경 조위총인물) 진압 등 군사 행동에 이어 특수 병대로서 일어난 것이 실로 별초였다. 이로 보면 별무반과 별초는 그의 출현 동기나 성질이 자못 유사할 뿐만 아니라 명칭에 있어서도 또한 근사한 바가 있으니, 요컨대 별초는 별무반의 제에서 묻어 나온 것이 아닐는가 한다. 그리하여 앞서 든 “三軍各發別抄一百 神騎四十”이라 하여 별초(보병) 신기(별무반 제의 기병)를 병거(並擧)한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쪽수▶P17-2다음 三別抄에 앞서 나타난 別抄의 起原을 考究하여 보면 旣述한 바와 같이 別抄의 名稱이 明宗 四年에 崔忠獻으로 말미암어 처음 나타나 보이나 別抄의 制가 그때에 비로소 생긴 것도 아니었던 듯하니, 이 崔忠獻의 戰鋒別抄는 夜別抄와 같이 各色 別抄의 一種으로서 亦是 別抄로부터 派生된 特殊 名稱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야 別抄의 起原에 있어서는 멀리 前擧한 尹瓘의 別武班에까지 溯及치 아니치 못할 것으로 臆測하는 바이니 元來 別武班은 軍事行動에 있어 虛弱한 府兵에 對하야 特殊 組織으로서 생겨난 兵團이다. 그러나 이것도 尹瓘의 女眞 征服 以後에는 얼마 아니하야 崩壞되였을 것이라고 이미 論斷하였거니와 그 後 契丹(遼東의) 防禦와 內亂(西京 趙位寵) 鎭壓 等 軍事行動에 際하야 特殊 兵隊로서 이러난 것이 實로 別抄이었다. 일로 보면 別武班과 別抄는 그의 出現 動機나 性質이 자못 類似할 뿐만 아니라 名稱에 있어서도 또한 近似한 바가 있나니, 要컨대 別抄는 別武班의 制에서 무더 나온 것이 아닐런가 한다. 그리하야 前擧 「三軍各▶P18-1發別抄一百 神騎四十」이라 하야 別抄(步兵) 神騎(別武班 制의 騎兵)를 並擧한 것도 偶然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군제에 있어 이러한 예는 그 뒤에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니 여말의 보충군도 역시 부병의 허약을 현대문주12▶보충하려는 데에서 생긴 것이며[a 12] 조선 조에 들어서도 훈련별대 별안군과 같은 것이 또한 그러한 동기에서 나타난 것이니 조선 군제 변천의 현대문주13▶동태를 보여주는 바이다.[a 13] 그리고 특히 이러한 병대에 한하여 ‘별’ 자가 많이 붙는 것도 별초 해석에 대하여 한 가지 암시를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쪽수▶P18-2軍制에 있어 이러한 例는 그 뒤에도 자조 차저볼 수 있는 것이니 麗末의 補充軍도 亦是 府兵의 虛弱을 원문주12▶補充하려는 데에서 생긴 것이며[12] 朝鮮朝에 드러서도 訓鍊別隊 別案軍과 같은 것이 또한 그러한 動機에서 나타난 것이니 朝鮮軍制變遷의 원문주13▶動態를 보여주는 바이다.[13] 그리고 特히 이러한 兵隊에 限하야 「別」 字가 많이 붙는 것도 別抄 解釋에 對하야 한 가지 暗示를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에서 논술해 온 것으로써 추고해보면 야별초는 재래 별초의 제에 의하여 특히 도적을 금집하는 야순의 임무를 띠고 출현한 병대인 만큼 ‘야순의 별초’라는 의미에서 야별초의 명칭도 붙게 된 것인 듯하다. 현대문주14▶부병의 허약은 직접 도성 치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것으로서 야별초와 유사한 조직도 일찍부터 생겼었으니 의종인물 때의 내순검과 명종인물 때의 위국 초맹반 등[a 14]이 그의 분명한 예라 할 것이다.
쪽수▶P18-3以上에서 論述해 온 것으로써 推考해보면 夜別抄는 在來 別抄의 制에 依하야 特히 盜賊을 禁緝하는 夜巡의 任務를 띄고 出現한 兵隊인 만큼 「夜巡의 別抄」라는 意味에서 夜別抄의 名稱도 붙게 된 것인 듯하다. 현대문주14▶府兵의 虛弱은 直接 都城 治安에 莫大한 影響을 끼치던 것으로서 夜別抄와 類似한 組織도 일직부터 생겼었으니 毅宗時의 內巡檢과 明宗時의 衛國 抄猛班 等[14]이 그의 著例라 할 것이다.
어쨌든 도성의 치안 유지의 필요에 응하여 일어난 야별초는 일반 별초와 달라 처음부터 상설적 독립기구를 갖추었으며, 다시 국내의 도절이 성하고 몽고의 침구가 격심함을 따라 그의 기구가 확장되고 그의 임무는 신의군과 같이 다시 국방에까지 뻗쳐짐에 이른 것이다. (삼별초의 군사적 활동은 다음 절에서 논할 터) 원래 군사와 경찰의 별(別)이 확연치 못한 시대에는 병사의 임무도 양 방면에 넘나드는 것이 보통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별초군제의 발전을 약속하는 것이다.
쪽수▶P18-4엇젯던 都城의 治安 維持의 必要에 應하야 이러난 夜別抄는 一般 別抄와 달러 처음붙어 常設的 獨立機構를 가추웠으며, 다시 國內의 盜窃이 盛하고 蒙古의 侵寇가 激甚함을 따러 그의 機構가 擴張되고 그의 任務는 神義軍과 같이 다시 國防에까지 뻐쳐짐에 이른 것이다. (三別抄의 軍事的 活動은 次節에서 論할 터) 元來 軍事와 警察의 別이 確然치 못한 時代에는 兵士의 任務도 兩 方面에 넘나드는 것이 普通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別抄軍制의 發展을 約束하는 것이다.





























































































본문4: 4.삼별초의 직능


삼별초의 직능을 천명하는 것은 삼별초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물론 삼별초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이러한 의미에서 삼별초의 실제적 행동을 들어 그의 성능을 귀납하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는 먼저 삼별초의 구성요건으로부터 살펴보면 효용한 자로써 구성된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특색으로 생각한다.
쪽수▶P19-1三別抄의 職能을 闡明하는 것은 三別抄 그 自體에 對해서는 勿論 三別抄亂에 對한 理解를 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나니 이러한 意味에서 三別抄의 實際的 行動을 드러 그의 性能을 歸納코저 하는 바이다. 吾人은 먼저 三別抄의 構成要▶P20-1件으로부터 살펴보면 驍勇한 者로써 構成된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特色으로 생각한다.
처음 야별초가 조직될 때에 「聚勇士(○○)每夜巡行禁暴」(이미 인용함)라 하여 ‘勇士’를 조건으로 하였으며 신우인물 3년 7월 개성부장에는
쪽수▶P20-2처음 夜別抄가 組織될 때에 「聚勇士(○○)每夜巡行禁暴」(旣擧)라 하야 「勇士」를 條件으로 하였으며 辛禑 三年 七月 開城府狀에는

我國家夜別抄三番 皆步卒有勇力(○○)者也 近年以來 倭賊 深入陸地 弱馬窮民 强稱馬兵 (中略) 如遇長槍利劒 摧鋒挫銳之寇 無所措手 多致喪亡 誠可痛也 云云(高麗史兵志一)

쪽수▶P20-3

我國家夜別抄三番 皆步卒有勇力(○○)者也 近年以來 倭賊 深入陸地 弱馬窮民 强稱馬兵 (中略) 如遇長槍利劒 摧鋒挫銳之寇 無所措手 多致喪亡 誠可痛也 云云(高麗史兵志一)

이라 하여 여말에 〿구의 침해를 받을 때에 개성부에서는 석일(昔日) 야별초삼번(삼별초를 가리킨 것)이 용력자로써 편성된 것을 들어 당시 국군의 영약함을 통탄한 것이다. 그 밖에 “自毅明以後 權臣執命 驍軍銳卒(○○) 盡屬三別抄”(증보문헌비고서적 권109 병고1)라 한 기사로 보아도 삼별초는 효용한 자로써 된 것임을 알 수 있거니와 이러한 것은 다만 삼별초뿐만 아니라 재래 별초에서도 또한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논거한 바와 같이 “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라 한 것과 고종인물 24년에 김경손인물이 나주에서 초적 이연년 격멸할 때에 별초됨직한 자 30여 인을 모취(募聚)하여 적중(賊衆)을 격파한 것(고려사서적 권103 김경손전)으로도 용력 과감한 자라야 별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쪽수▶P20-4이라 하야 麗末에 〿寇의 侵害를 바들 때에 開城府에서는 昔日 夜別抄三番(三別抄를 가르친 것)이 勇力者로써 編成된 것을 드러 當時 國軍의 嬴弱함을 痛歎한 것이다. 그 밖에 「自毅明以後 權臣執命 驍軍銳卒 盡屬三別抄」(增補文献備考 卷百九 兵考一) 라 한 記事로 보와도 三別抄는 驍勇한 者로써 된 것임을 알 수 있거니와 이러한 것은 다만 三別抄뿐만 아니라 在來 別抄에서도 또한 차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에서 이미 論擧한 바와 가치 「選勇口奮不顧生者 結爲戰鋒別抄」라 한 것과 高宗 二十四年에 金慶孫이 羅州에서 草賊李延年 擊滅할 때에 別抄됨직한 者 三十餘人을 募聚하야 賊衆을 擊破한 것(高麗史 卷百三 金慶孫傳)으로도 勇力 果敢한 者라야 別抄가 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삼별초의 실제적 활동에 나아가 살펴보면 대개 군사와 경찰에 넘나들었던 것이니 중세에 있어 대개 군병이 포도 금폭에 당하였음은 그의 예가 허다함으로써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는 바이다. 이하 몇 가지 방면에 뻗쳐 이러한 삼별초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추려보면
쪽수▶P20-5다음 三別抄의 實際的 活動에 나아가 살펴보면 대개 軍事와 警察에 넘나드렀던 것이니 中世에 있어 대개 軍兵이 捕盜 禁暴에 當하였음은 그의 例가 許多함으로서 怪異히 녁일 것이 없는 바이다. 以下 멧 가지 方面에 亘하야 이러한 三別抄의 活動을 具體的으로 추워보면
① 포도 금폭 형옥 야별초는 위에서도 누술한 바와 같이 포도 금폭이 그의 출현 동기가 되었던 만큼 도성을 중심으로도 각 지방에까지 활동하여 상당한 성적을 나타낸 것은 “及盜起諸道 分遣別抄 以捕之 其軍甚衆 云云”이라는 기사로 추찰할 수가 있으며 금폭에 관하여 그의 일례를 들면 고려사서적(권26) 원종 5년 5월조에
쪽수▶P20-6① 捕盜 禁暴 刑獄 夜別抄는 우에서도 累述한 배와 가치 捕盜 禁暴이 그의 出現 動機가 되었던 만큼 都城을 中心으로도 各 地方에까지 活動하야 相當한 成績을 나타낸 것은 「及盜起諸道 分遣別抄 以捕之 其軍甚衆 云云」이라는 記事로 推察할 수가 있으며 禁暴에 關하야 그의 一例를 들면 高麗史(卷二十六) 元宗 五年 五月條에

初 橫川民屎加大 有八子一壻 居山谷間 九人漁獵以生 洪橫人(〇洪川橫川) 疾之 訴於道內巡行夜別抄指揮 請捕之至其家 會九人出獵 惟取父母妻子 盡殺之

쪽수▶P21-1

初 橫川民屎加大 有八子一壻 居山谷間 九人漁獵以生 洪橫人(〇洪川橫川) 疾之 訴於道內巡行夜別抄指揮 請捕之至其家 會九人出獵 惟取父母妻子 盡殺之

라 하였다. 야별초가 시가대인물(屎加大) 등을 죽인 것은 본대 시가대의 일족이 산간에 횡행하며 횡포한 행동을 감행하여 횡천 홍천 양 군민을 공포케 하였던 것으로서 양 군민의 고소를 접한 야별초는 결국 그와 같이 단호한 처치를 취한 것이 아닐는가 억측되는 바이다.
쪽수▶P21-2라 하였다. 夜別抄가 屎加大 等을 죽인 것은 본대 屎加大의 一族이 山間에 橫行하며 橫暴한 行動을 敢行하야 橫川 洪川 兩 郡民을 恐怖케 하였던 것으로서 兩 郡民의 告訴를 接한 夜別抄는 結局 그와 가치 斷乎한 處置를 取한 것이 아닐런가 臆測되는 바이다.
그리고 일면에 있어 야별초는 형옥(刑獄) 국수(鞠囚)의 임(任)에도 당하였던 것이니 같은 책(권35) 원종 원년 정월 경인조에
쪽수▶P21-3그리고 一面에 있어 夜別抄는 刑獄 鞠囚의 任에도 當하였던 것이니 同書(卷三十五) 元宗 元年 正月 庚寅條에

囚叛人金守磾父西京副留守金軾於夜別抄所

쪽수▶P21-4

囚叛人金守磾父西京副留守金軾於夜別抄所

라 하였고 같은 책(권122) 송길유전에
쪽수▶P21-5라 하였고 同書(卷百二十二) 宋吉儒傳에

宋吉儒 性貪酷便佞 起於卒伍 高종 때 諂事崔沆爲夜別抄指諭 每鞫囚 必縳兩手母指 懸梁架又合繫兩足母指 縋以大石 去地不尺餘 熾炭其下 使兩人立左右 交杖腰膂 囚不勝毒 輒誣服

쪽수▶P21-6

宋吉儒 性貪酷便佞 起於卒伍 高종 때 諂事崔沆爲夜別抄指諭 每鞫囚 必縳兩手母指 懸梁架又合繫兩足母指 縋以大石 去地不尺餘 熾炭其下 使兩人立左右 交杖腰膂 囚不勝毒 輒誣服

이라 한 것으로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포도 금폭 등 경찰행동에 당하던 야별초의 직무 범위는 다시 형옥 국수에까지 미처 갈 것은 필연적 추세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21-7이라 한 것으로 明白히 알 수 있는 것이다. 捕盜 禁暴 等 警察行動에 當하던 夜別抄의 職務 範圍는 다시 刑獄 鞫囚에까지 미처 갈 것은 必然的 趨勢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都城의(○○○) 守衛와(○○○) 親衛隊的(○○○○) 任務(○○) 이에 관하여 고려사절요서적(권17) 고종 40년 11월조에
쪽수▶P21-8都城의(○○○) 守衛와(○○○) 親衛隊的(○○○○) 任務(○○) 이에 關하야 高麗史節要(卷十七) 高宗 四十年 十一月條에

王 度江 迎于昇天新闕 夜別抄八十人 衷甲以從

쪽수▶P21-9

王 度江 迎于昇天新闕 夜別抄八十人 衷甲以從

이라 하였다. 이는 고종인물이 몽고 사자(使者)를 맞이하려 강화로부터 승천부로 건너 갈 때의 일이며 그 다음에는
쪽수▶P21-10이라 하였다. 이는 高宗이 蒙古 使者를 마지하려 江華로부터 昇天府로 건너 갈 때의 일이며 그 다음에는

太孫(〇후일의 충렬왕) 與諸王文武百僚卒三別抄精鋭 出梯浦 迎駕(고려사서적 권25, 원종 원년 3월 임오조)

쪽수▶P21-11

太孫(〇後日의 忠烈王) 與諸王文武百僚卒三別抄精鋭 出梯浦 迎駕(高麗史 卷二十五, 元宗 元年 三月 壬午條)

라한 기사와
쪽수▶P22-1라한 記事와

樞密院副便韓就等六人 率夜別抄 迎駕于義州(仝上 元宗 五年 十二月 丙午條)

쪽수▶P22-2

樞密院副便韓就等六人 率夜別抄 迎駕于義州(仝上 元宗 五年 十二月 丙午條)

라 한 것은 모두 원종인물이 몽고로부터 환국할 때의 일로서 삼별초가 왕가(王駕) 맞이에 자주 당한 것이다. 경도의 치안 경찰에 종사하면 야별초 또는 삼별초는 고종인물 말경에 이르러 금위군 또는 친위대로도 활동한 것이며 또 도성의 수위에도 야별초가 사용되었으니 같은 책(권24) 고종 41년 8월 계유조에
쪽수▶P22-3라 한 것은 모다 元宗이 蒙古로부터 還國할 때의 일로서 三別抄가 王駕 마지에 자조 當한 것이다. 京都의 治安 警察에 從事하면 夜別抄 또는 三別抄는 高宗 末頃에 이르러 禁衛軍 또는 親衛隊로도 活動한 것이며 또 都城의 守衛에도 夜別抄가 使用되였으니 同書(卷二十四) 高宗 四十一年 八月 癸酉條에

慶尙全羅三道 各遺夜別抄八十人 守衛京城

쪽수▶P22-4

慶尙全羅三道 各遺夜別抄八十人 守衛京城

이라 하였다. 이것은 당시 몽고병이 근기(近畿)에까지 자주 출몰함으로 다시 야별초를 지방으로부터 증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쪽수▶P22-5이라 하였다. 이것은 當時 蒙古兵이 近畿에까지 자조 出沒함으로 다시 夜別抄를 地方으로부터 增募한 것으로 생각된다.
軍隊로서의(○○○○○) 活動과(○○○) 任務(○○) 야별초의 군사적 활동은 몽고의 침구로부터 시작되었다. 현대문주15▶몽고의 침입은 고종 18년 살리타이인물(撒禮塔)의 입구(入寇)를 비롯하여 약 20년 동안 계속한 것이니[a 15] 야별초와 몽고병과의 충돌은 고종인물 22년 9월에 야별초 도령 이유정인물의 출전이 최초의 것이어니와 그의 군사상 실적에 나아가 살펴보면 고려사서적(권23) 고종 22년 10월 신해조에
쪽수▶P22-6軍隊로서의(○○○○○) 活動과(○○○) 任務(○○) 夜別抄의 軍事的 活動은 蒙古의 侵寇로부터 始作되였다. 원문주15▶蒙古의 侵入은 高宗 十八年 撒禮塔의 入寇를 비롯하야 約 二十年 동안 繼續한 것이니[15] 夜別抄와 蒙古兵과의 衝突은 高宗 二十二年 九月에 夜別抄 都令 李裕貞의 出戰이 最初의 것이어니와 그의 軍事上 實蹟에 나아가 살펴보면 高麗史(卷二十三) 高宗 二十二年 十月 辛亥條에

夜別抄 與砥平縣人 夜擊蒙兵 殺獲甚多 取馬驢來

쪽수▶P22-7

夜別抄 與砥平縣人 夜擊蒙兵 殺獲甚多 取馬驢來

이라 하였으며 같은 왕 23년 7월 신유조에는
쪽수▶P22-8이라 하였으며 同 二十三年 七月 辛酉條에는

蒙兵 至价川 京別抄(지방에 분유된 야별초를 가리킨 것이니 지방별초와 구별하기 위하여 붙인 것) 校尉希景 价川中郞將明俊等 伏兵夾擊 殺傷頗多 取鞍馬 弓矢衣服等物

쪽수▶P22-9

蒙兵 至价川 京別抄(地方에 分遺된 야별초를 가르친 것이니 地方별초와 區別키 위하여 부친 것) 校尉希景 价川中郞將明俊等 伏兵夾擊 殺傷頗多 取鞍馬 弓矢衣服等物

이라 하였다. 삼별초는 대개 야습 복병 협격 등 전법으로써 과수(寡數)로 중적에 당한 예가 허다하니, 이는 명백히 유격전술로써 원래한 적을 괴롭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수응에 피로하게 하던 것으로서 소위 께렐라 전술에 해당한 것이다.
쪽수▶P22-10이라 하였다. 三別抄는 대개 夜襲 伏兵 夾擊 等 戰法으로써 寡數로 衆敵에 當한 例가 許多하니, 이는 明白히 游擊戰術로써 遠來한 敵을 괴롭게 하야 敵으로 하여금 酬應에 疲勞케 하던 것으로서 所謂 께렐라 戰術에 該當한 것이다.
일면에 있어 야별초는 정찰대 또는 전위대와도 같이 활동하였던 것으로 믿으니 같은 책(권23) 고종 23년 8월 기유조에
쪽수▶P23-1一面에 있어 夜別抄는 偵察隊 또는 前衛隊와도 가치 活動하였던 것으로 믿나니 同書(卷二十三) 高宗 二十三年 八月 己酉條에

夜別抄指諭李林壽朴仁傑 各卒一百餘人 分向蒙古屯所

쪽수▶P23-2

夜別抄指諭李林壽朴仁傑 各卒一百餘人 分向蒙古屯所

라 보이고 또 앞서 든
쪽수▶P23-3라 보이고 또 前擧

初 横川民屎加大 有八子一壻 (中略) 惟取父母妻子 盡殺之 於是 九人諜讐 遂起爲盜 至忠淸道 夜涉簞淺 疑爲狄兵〇蒙兵 朝野驚擾 使夜別抄探之 乃知

쪽수▶P23-4

初 横川民屎加大 有八子一壻 (中略) 惟取父母妻子 盡殺之 於是 九人諜讐 遂起爲盜 至忠淸道 夜涉簞淺 疑爲狄兵〇蒙兵 朝野驚擾 使夜別抄探之 乃知

라 하였다. 야별초 지유인물 이임수인물 등이 각각 100여의 부중을 인솔하고 몽병 둔소에 향한 것이라든지 횡천적을 몽고병으로 오인하여 야별초로써 정찰케 한 것으로 보면 야별초는 때로 정찰대 혹은 전위대로서 활동한 자취를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쪽수▶P23-5라 하였다. 夜別抄 指諭 李林壽 等이 各々 百餘의 部衆을 引率하고 蒙兵 屯所에 向한 것이라던지 橫川賊을 蒙古兵으로 誤認하야 夜別抄로써 偵察케 한 것으로 보면 夜別抄는 때로 偵察隊 或은 前衛隊로서 活動한 자추를 차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야별초의 군사 행동에 관하여 끝으로 억측의 일단을 들어 보고자 하니 즉 야별초는 때로 편의대와 같이 활동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임연인물원종인물을 천폐한 뒤에 당시 몽고에 건너갔다가 환국하던 태자(후일의 충렬왕인물)를 중로(中路)에서 착치(?)하고자 하여 야별초 20인을 미리 국경에 매복시킨 것을(고려사서적 권130 임연전) 가지고 보면 임연인물의 이와 같은 음모는 원래 국인과 몽고의 이목을 피하여 비밀히 행한 것인 만큼 보통 군병은 사용치 못하였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야별초는 본래 장동(裝東)에 있어 대개 편복경장을 하였던 것이 아닐는지 생각되는 바이니 앞서 든 “夜別抄八十人 衷甲以從”이라 한 기사로 보면 이는 고종인물이 몽고의 사자(使者)를 보기 위하여 강도에서 승천부로 건너갈 때의 일로서 특히 야별초가 ‘충갑(衷甲)’을 하고 따르게 된 것은 왕의 신변을 엄중히 호위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따라서 야별초는 대개 갑개(甲鎧)를 갖추지 아니하고 경장으로서 활동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바이다. 이러한 억측에 또 한 가지 암시를 주는 것은 앞서 든 의종인물 때에 편성된 내순검이 자의(紫衣)를 입었다는 기사다. 이에 의하여 내순검 야별초와 같은 특수 병대가 반드시 보통 군병과 복색장속을 같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는 사례가 없음을 알 수도 있는 것이다.
쪽수▶P23-6夜別抄의 軍事行動에 關하야 끝으로 臆測의 一端을 드러 보고저 하나니 即 夜別抄는 때로 便衣隊와 같이 活動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林衍이 元宗을 擅廢한 뒤에 當時 蒙古에 건너갓다가 還國하던 太子(後日의 忠烈王)를 中路에서 捉致(?)코저 하야 夜別抄 二十人을 미리 國境에 埋伏식힌 것을(高麗史 卷百三十 林衍傳) 가지고 보면 林衍의 이와 같은 陰謀는 元來 國人과 蒙古의 耳目을 避하야 秘密히 行한 것인 만큼 普通 軍兵은 使用치 못하였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夜別抄는 本來 裝東에 있어 대개 便服輕裝을 하였던 것이 아닐런가 생각되는 바이니 前擧 「夜別抄八十人 衷甲以從」이라 한 記事로 보면 이는 高宗이 蒙古의 使者를 보기 爲하야 江都에서 昇天府로 건너갈 때의 일로서 特히 夜別抄가 「衷甲」을 하고 딸케 된 것은 王의 身邊을 嚴重히 護衛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따러서 夜別抄는 대개 甲鎧를 가추지 아니하고 輕裝으로서 活動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바이다. 이러한 臆測에 또 한 가지 暗示를 주는 것은 前擧 毅宗時에 編成된 內巡檢이▶P24-1 紫衣를 입었다는 記事다. 이에 依하야 內巡檢 夜別抄와 같은 特殊 兵隊가 반드시 普通 軍兵과 服色裝束을 같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는 事例가 없음을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이러한 억측을 근거로 하여 고종 말경의 삼별초의 대몽 군사활동을 소찰(溯察)하여 보면 20여년에 걸친 몽고의 침구는 고종인물 40년경에 들어 더욱 혹독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할 수 없이 점점 화의(和議)에 기울어지게 되었으나 일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저항을 계속하여 가위 일면구화 일면저항의 상태였다. (당시 고려에는 화전 양파의 주강(主强)이 대립된 관계도 있을 것이나) 그리하여 당시 몽고병을 각처에서 유격한 것은 거의 삼별초 또는 지방별초요 부위병은 가위 영자(影子)를 감추웠으리 만큼 된 것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바이다. 당시 부위병이 비록 쇠징(衰徵)하였다 하나 외적 방어에 전연 무용의 것으로 되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아니하는 바이니 몽고 침입의 초기에 있어서의 활발하던 부위병의 활동으로도 추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고종인물 말경에 이르러 삼별초의 활동만이 활발하게 된 데 대하여 다만 삼별초가 강예(强銳)하였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해석으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그의 이면에는 또한 ‘델리케트’한 외교관계가 잠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즉 삼별초는 때와 장소에 따라 편의대와 같은 활동을 하여 온 것으로서 형식상 정규적인 부위병보다도 민병으로 ‘카모플라쥬’되기 쉬운 까닭에 화의에 있어 몽고 측에 구실을 적게 하는 동시에 몽고를 괴롭혀 측면으로 견제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도 억측되는 바이다.
쪽수▶P24-2다시 이러한 臆測을 根據로 하야 高宗 末頃의 三別抄의 對蒙 軍事活動을 溯察하여 보면 二十餘年에 亘한 蒙古의 侵寇는 高宗 四十年頃에 드러 더욱 酷毒하였다. 그러므로 高麗에서는 할 수 없이 漸々 和議에 기우러지게 되였으나 一面에 있어서는 아직도 抵抗을 繼續하야 可謂 一面求和 一面抵抗의 狀態이었다. (當時 高麗에는 和戰 兩派의 主强이 對立된 關係도 있을 것이나) 그리하야 當時 蒙古兵을 各處에서 遊擊한 것은 거의 三別抄 또는 地方別抄요 府衛兵은 可謂 影子를 감추웠으리 만큼 된 것이 吾人의 注意를 끄는 바이다. 當時 府衛兵이 비록 衰徵하였다 하나 外敵 防禦에 全然 無用의 것으로 化하였으리라고는 믿어지々 아니하는 바이니 蒙古 侵入의 初期에 있어서의 活潑턴 府衛兵의 活動으로도 推斷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特히 高宗 末頃에 이르러 三別抄의 活動만이 活潑케 된 데 對하야 다만 三別抄가 强銳하였기 때문이라는 簡單한 解釋으로는 不足한 感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그의 裡面에는 또한 「델리케-트」한 外交關係가 潜在한 것이 아니였을까 한다. 卽 三別抄는 때와 場所에 따러 便衣隊와 같은 活動을 하여 온 것으로서 形式上 正規的인 府衛兵보다도 民兵으로 「카무ᅋᅮ라지」되기 쉬운 까닭에 和議에 있어 蒙古 側에 口實을 적게 하는 同時에 蒙古를 괴럽혀 側面으로 牽制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도 臆測되는 바이다.
요컨대 몽고 침구에 제하여 삼별초는 허약한 부병의 보강적 군단이었음으로 수시 수처에 다용적 직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니 특수 기원을 가진 삼별초의 발전상을 또한 이러한 점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쪽수▶P24-3要컨대 蒙古 侵寇에 際하야 三別抄는 虛弱한 府兵의 補強的 軍團이었음으로 隨時 隨處에 多角的 職能을 發揮케 된 것이니 特殊 起原을 가진 三別抄의 發展相을 또한 이러한 點에서도 차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삼별초의 직능을 개찰(槪察)해 보았거니와 다음에는 주현별초에 나아가 간단한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주현별초 즉 지방별초는 경외별초 또는 외별초라고도 하니 이것은 경별초(삼별초)에 대한 명칭이다. 지방별초로는 현대문주16▶경주별초[a 16]가 가장 역사 상에 먼저 나타나 보이니 고려사서적(권21) 신종 5년 10월조에
쪽수▶P24-4以上으로써 三別抄의 職能을 槪察해 보았거니와 다음에는 州縣別抄에 나아가 簡單한 考察을 試코저 한다. 州縣別抄▶P25-1 卽 地方別抄는 京外別抄 또는 外別抄라고도 하나니 이것은 京別抄(三別抄)에 對한 名稱이다. 地方別抄로는 원문주16▶慶州別抄[16]가 가장 史上에 먼저 나타나 보이나니 高麗史(卷二十一) 神宗 五年 十月條에

현대문주17▶慶州別抄軍 與永州 素有隙 是月 乃引雲門賊 及符仁桐華兩寺僧徒 攻永州 云云[a 17]

쪽수▶P25-2

원문주17▶慶州別抄軍 與永州 素有隙 是月 乃引雲門賊 及符仁桐華兩寺僧徒 攻永州 云云[17]

이라 하였다. 경주별초군이 본대 영주로 더불어 틈이 있었다는 것으로써 미루어 보면 그것이 신종 5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며 이 밖에 몽고 침구 시대에 이르러는 다종다양의 주현별초가 나타나 보인다. 그의 예를 들면 도호(안차)별초 위주별초 태주별초 부령별초 우봉별초 교동별초 등주별초 대부도별초 충주별초 북계별초 등을 셀 수 있으며 이러한 지방별초 가운데에 충주와 같은 곳에는 양반으로 조직된 양반별초와 노예잡류로 된 노군잡류별초의 구별도 있었다.(고려사절요서적 권16 고종 19년 정월조) 그리하여 지방별초와 몽고병과의 충돌은 이미 제1차 살리타이인물의 침입 경두(擎頭)부터 일어났으니 고종인물 18년 9월에 유명한 귀주격전사건에서 박서인물 김경손인물을 도와 몽고의 대병을 물리친 것이 그의 현대문주18▶최초 충돌이었다.[a 18] 현대문주19▶그리고 지방별초의 전법과 전적은 대개 삼별초의 그것과 다름이 없이 유격과 기습으로써 몽고군을 괴롭혔음은[a 19] 우리의 흥미를 끄는 바이다.
쪽수▶P25-3이라 하였다. 慶州別抄軍이 본대 永州로 더부러 틈이 있었다는 것으로써 미루워 보면 그것이 神宗 五年 以前부터 있었던 것으로 解釋되며 이 밖에 蒙古 侵寇 時代에 이르러는 多種多樣의 州縣別抄가 나타나 뵈인다. 그의 例를 들면 都護(安此)別抄 渭州別抄 泰州別抄 扶寧別抄 牛峯別抄 喬桐別抄 登州別抄 大府島別抄 忠州別抄 北界別抄 等을 헤일 수 있으며 이러한 地方別抄 가운대에 忠州와 같은 곳에는 兩班으로 組織된 兩班別抄와 奴隷雜類로 된 奴軍雜類別抄의 區別도 있었다.(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九年 正月條) 그리하야 地方別抄와 蒙古兵과의 衝突은 이미 第一次 撒禮塔의 侵入 擎頭부터 이러났으니 高宗 十八年 九月에 有名한 龜州激戰에서 朴犀 金慶孫을 도와 蒙古의 大兵을 물리친 것이 그의 원문주18▶最初 衝突이었다.[18] 원문주19▶그리고 地方別抄의 戰法과 戰績은 대개 三別抄의 그것과 달음이 없이 游擊과 奇襲으로써 蒙古軍을 괴롭혔음은[19] 吾人의 興味를 끌런 바이다.
주현군 가운데에도 경주와 같은 대도 중진에는 지방을 따라 치안의 필요상 평시에도 별초를 둔 곳도 있었던 것 같으나 그 외에 대부분의 주현별초는 외적의 침입과 지방동란에 대비하기 위하여 수시 수처에 필요에 의하여 조직된 것으로 믿으니 앞서 든 각종의 주현별초는 몽고 침구에 의하여 역사상에 나타난 것인 듯하니 김경손인물이 이연년을 격파할 때에 임시로 모취한 별초라든지 부령별초 전공렬이 본래 의업거인으로서 별초가 되여 몽병을 요거(邀擧)하여 그 공으로서 본업으로 입사하였다(고려사서적 권23 고종 23년 10월 계축조)는 것은 모두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시적 필요에 의하여 수시로 나타난 주현별초는 앞서 쓴 최충헌인물의 전봉별초와 글단에 대한 3군의 별초와 같이 또한 변란의 종식에 따라 해제가 될 것도 추단할 수가 있는 것으로서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의 견해에 찬동하는 바거니와 (앞서 든 「高麗の 三別抄について」원고 참조) “我國百姓 有事則爲軍 無事則爲農 故軍民一致”(고려사서적 병지1)라는 기사도 이러한 사정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한다.
쪽수▶P25-4州縣軍 가운대에도 慶州와 같은 大都 重鎭에는 地方을 따러 治安의 必要上 平時에도 別抄를 둔 곳도 있었던 것 같으나 그 外에 大部分의 州縣別抄는 外敵의 侵入과 地方動亂에 備키 爲하야 隨時 隨處에 必要에 依하야 組織된 것으로 믿나니 前擧 各種의 州縣別抄는 蒙古 侵寇에 依하야 史上에 나타난 것인 듯하니 金慶孫이 李延年을 擊破할 때에 臨時로 募聚한 別抄라던지 扶寧別抄 全公烈이 本來 醫業擧人으로서 別抄가 되여 蒙兵을 邀擧하야 그 功으로서 本業으로 入仕하였다(高麗史 卷二十三 高宗 二十三年 十月 癸丑條)는 것은 모다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一時的 必要에 依하야 隨時로 나타난 州▶P26-1縣別抄는 前記 崔忠獻의 戰鋒別抄와 契丹에 對한 三軍의 別抄와 같이 또한 變亂의 終熄에 따러 解除가 될 것도 推斷할 수가 있는 것으로서 池內宏 博士의 見解에 贊同하는 바어니와 (前擧 「高麗の 三別抄について」 叅照) 「我國百姓 有事則爲軍 無事則爲農 故軍民一致」(高麗史 兵志一)라는 記事도 이러한 事情을 가르친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각종의 별초에 대하여 개찰해보면 최충헌인물의 전봉별초와 글단 방어 때의 3군의 별초는 독립적 병대라는 것보다도 부위병에 속한 임시편성의 특별 병대였을 것은 위에서도 논한 바거니와 주현에 있어서도 역시 부병의 허약으로 인하여 군사적 필요에서 일어난 것이나 그의 행동은 대개 독자성을 가진 것으로서 동란과 외구를 방제하여 지방의 보위가 그의 임무였던 듯하다. 그리고 삼별초와 주현별초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추단할 만한 자료가 적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도령 교위 등 현대문주20▶지휘관직은 양자가 서로 유사한 것이며[a 20] 몽고병을 방어하는 데에 있어서도 양자 즉 경별초와 경외별초가 서로 호응하여 활동하였을 것은 대개 추단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쪽수▶P26-2다시 各種의 別抄에 對하야 概察해보면 崔忠獻의 戰鋒別抄와 契丹 防禦 時의 三軍의 別抄는 獨立的 兵隊라는 것보다도 府衛兵에 屬한 臨時編成의 特別 兵隊이었을 것은 우에서도 論한 바어니와 州縣에 있어서도 亦是 府兵의 虛弱으로 因하야 軍事的 必要에서 일어난 것이나 그의 行動은 대개 獨自性을 가진 것으로서 動亂과 外寇을 防制하야 地方의 保衛가 그의 任務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三別抄와 州縣別抄와의 關係에 있어서는 그것을 推斷할 만한 資料가 적음을 遺憾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都領 校尉 等 원문주20▶指揮官職은 兩者가 서로 類似한 것이며[20]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에 있어서도 兩者 即 京別抄와 京外別抄가 서로 呼應하야 活動하였을 것은 대개 推斷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끝으로 삼별초의 소속 문제에 나아가 간단한 고찰을 시도하고 본절을 맺을까 한다. 삼별초의 소속 문제 즉 삼별초가 공병이었는가 또는 도방 마별초와 같이 권신의 사병이었는가 이 삼별초의 공사 구별이야말로 삼별초와 및 삼별초난을 구명하고 이해하는 데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쪽수▶P26-3끝으로 三別抄의 所屬 問題에 나아가 簡單한 考察을 試하고 本節을 맺을가 한다. 三別抄의 所屬 問題 即 三別抄가 公兵이었는가 또는 都房 馬別抄와 같이 權臣의 私兵이었는가 이 三別抄의 公私 區別이야말로 三別抄와 및 三別抄亂을 究明하고 理解하는 데에 重大한 關係가 있는 것이다.
원래 삼별초는 권신 최씨 일족(우, 항)으로 말미암아 조직된 것이며 그 위에 또한 역대권신에게 이용됨에 이르렀으니 고종 45년에 유경인물 김(인)준인물 등이 최의(최우인물의 손자)를 주멸(誅滅)할 때나 원종인물 9년에 임연인물김(인)준인물을 벨 때 또는 같은 왕 10년에 임연인물이 국왕의 폐위을 천행할 때나 그 다음 송송례인물임유무인물(임연인물의 아들)를 주륙(誅戮)할 때에 주로 삼별초의 힘을 빌려 그들의 목적을 달하게 되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삼별초는 권신의 가병인 도방 마별초와 같이 권신의 조아가 되어 때로 그들의 호위와 저택 경위의 임무에도 당하였다.(고려사서적 병지 및 최충헌전)
쪽수▶P26-4元來 三別抄는 權臣 崔氏 一族(瑀, 沆)으로 말미암어 組織된 것이며 그 우에 또한 歷代權臣에게 利用됨에 이르렀으니 高宗 四十五年에 柳璥 金(仁)俊 等이 崔竩(崔瑀의 孫)를 誅滅할 때나 元宗 九年에 林衍이 金(仁)俊을 베힐 때 또는 同十年에 林衍이 國王의 廢立을 擅行할 때나 그 다음 宋松禮가 林惟茂(衍의 子)를 誅戮할 때에 主로 三別抄의 힘을 비러 그들의 目的을 達하게 되였으며 그 뿐만 아니라 三別抄는 權臣의 家兵인 都房 馬別抄와 같이 權臣의 爪牙가 되여 때로▶P27-1 그들의 護衛와 邸宅 警衛의 任에도 當하였다.(高麗史 兵志 及 崔忠獻傳)
이와 같이 삼별초는 때로 도방 마별초와 한 가지로 권신들에게 이용되었으므로 일견 사병과 같이 보이기도 하니 앞서 든 이익재도 삼별초를 사병과 같이 해석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원래 무장 권신의 발호시대에는 국군도 대개 그들의 조아로 변함은 재래로 그의 예가 허다한 것이니 삼별초에 있어서도
쪽수▶P27-2이와 같이 三別抄는 때로 都房 馬別抄와 한 가지로 權臣들에게 利用되였음으로 一見 私兵과 같이 뵈이기도 하나니 前擧 李益齋도 三別抄를 私兵과 같이 解釋한 것은 이러한 點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元來 武將 權臣의 跋扈時代에는 國軍도 대개 그들의 爪牙로 化함은 在來로 그의 例가 許外한 것이니 三別抄에 있어서도

權臣執柄 以爲爪牙 厚其俸祿 或施私恩 又籍罪人之財 而給之 故權臣頥指氣使 爭先劾力(고려사서적 병지1)

쪽수▶P27-3

權臣執柄 以爲爪牙 厚其俸祿 或施私恩 又籍罪人之財 而給之 故權臣頥指氣使 爭先劾力(高麗史 兵志一)

이라 한 기사로써 저간의 사유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역대 권신은 여러가지 사은을 베풀어 그것을 이용하기에 노력한 결과—사병 같으면 일부러 사은을 베풀었다는 것이 역사상에 쓰일 까닭도 없겠으나—삼별초의 행동은 때로 도방 마별초와 구별치 못할 만큼 혼동된 것이 당시의 실정이였던 듯하다. 이미 든 고종인물 22년에 최초로 몽고병과 충돌한 야별초의 지휘자 이유정인물“崔瑀都房夜別抄都領”이었다. 이로 보면 이유정인물최우인물의 도방에 속하는 동시에 야별초의 도령을 겸한 것으로 해석되니 이는 최우인물가 야별초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짐짓 자기 도방에 속한 자를 가려 야별초 도령에 임명하였던 것 같으나 하여간 삼별초에는 공사 양역이 혼효(混淆)하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이에 따러 삼별초의 공사구별 이 또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삼별초가 권신들에게 이용된 것은 이세의 어찌할 수 없는 바로서 이러한 일면적 현상만 가지고 그것을 도방 마별초와 같이 사병으로 간주하여서는 아니될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러한 견지에서 아래에서 삼별초와 도방 마별초와를 간단히 몇 가지 사류(事類)에 나누어 비교하여 양자의 공사의 구별을 밝혀볼까 한다.
쪽수▶P27-4이라 한 記事로써 這間의 事由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歷代 權臣은 여러가지 私恩을 베푸러 그것을 利用하기에 努力한 結果—私兵 같으면 일부러 私恩을 베프렀다는 것이 史上에 씨여질 까닭도 없겠으나—三別抄의 行動은 때로 都房 馬別抄와 區別치 못할 마큼 混同된 것이 當時의 實情이였던 듯하다. 旣擧 高宗 二十二年에 最初로 蒙古兵과 衝突한 夜別抄의 指揮者 李裕貞은 「崔瑀都房夜別抄都領」이었다. 일로 보면 李裕貞은 崔瑀의 都房에 屬하는 同時에 夜別抄의 都領을 兼한 것으로 解釋되나니 이는 崔瑀가 夜別抄를 利用하려는 目的으로 짐짓 自己 都房에 屬한 者를 가려 夜別抄 都領에 任命하였던 것 같으나 何如間 三別抄에는 公私 兩役이 混淆하던 것은 事實이었었으니 이에 따러 三別抄의 公私區別 이 또한 問題일 것이다. 그러나 三別抄가 權臣들에게 利用된 것은 理勢의 어찌할 수 없는 바로서 이러한 一面的 現象만 가지고 그것을 都房 馬別抄와 같이 私兵으로 看做하여서는 아니될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러한 見地에서 以下로 三別抄와 都房 馬別抄와를 簡單히 몇 가지 事類에 나누워 比較하야써 兩者의 公私의 別를 밝혀볼까 한다.
① 양자는조직동기(○○○○)에 있어 벌써 공사의 구별이 판이하였던 것이니 야별초는 포도 금폭 등 국내의 보안 유지를 목적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나 도방 마별초는 권신들이 자기의 신변과 일족의 불측한 화를 우려하여 자호수단으로서 조직한 것이며 ② 삼별초에 있어서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김(인)준인물이 최의를 벨 때나 임연인물김(인)준인물을, 송송례인물임유무인물를 벨 때에 예외 없이 삼별초의 힘을 빌려 ‘쿠데타’를 행하였으나 도방에 이르러서는 우선 희종인물 7년 12월에 궁중에서 최충헌인물을 주거(誅去)하려 할 때에 도방육답이 부구(赴救)한(고려사절요서적 권14 희종 7월 12월조) 일례로도 그의 행동이 사병의 범위에 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삼별초는 원래 공병이었으므로 정변에 이용될 성질이 다분으로 포함되었음에 반하여 도방 마별초는 사병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을이 갑의 사병을 이용하기가 곤란하였던 것이다. ③ 외적(몽고) 방어에 있어 도방 마별초의 활동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음에 반하여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삼별초만은 주현별초와 같이 그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삼별초는 다시 도성의 수위와 친위대적 임무를 겸행하였으나 도방 마별초에 있어서는 그러한 예를 얻어볼 수가 없는 것으로서 양자의 행동은 이와 같이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④ 군대적 기구에 있어 삼별초는 도령 지유 교위 등 국가 관제에 의한 지휘자가 배치되었으나 도방 야별초에는 그러한 칭호가 보이지 아니한다. 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든 신우인물 3년 개성부장에 “我國夜別抄三番 皆步卒 有勇力者也 云云”이라 한 기사로도 야별초삼번(삼별초)이 공군으로서 후세에까지 알려진 것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니 만일 야별초삼번이 사병이라면 당시 국군의 쇠약을 전제로 하여 군제 쇄신을 목적으로 한 개성부의 상장에 사병의 예를 드는 것은 무의미하기도 심한 까닭이다. 그 위에 고려사서적 병지에도 삼별초의 연혁은 자못 자세히 나타나 보이나 도방 마별초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또한 삼별초는 공군이요 도방 마별초는 사병이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을 줄로 생각한다.
쪽수▶P27-5① 兩者는 組織動機(○○○○)에 있어 발서 公私의 別이 判異하였던 것이니 夜別抄는 捕盜 禁暴 等 國內의 保安 維指를 目的으로 하야 일어난 것이나 都房 馬別抄는 權臣들이 自己의 身邊과 一族의 不測한 禍를 憂慮하야 自護手段으로서 組織한 것이▶P28-1며 ② 三別抄에 있어서는 旣述한 바와 같이 金(仁)俊이 崔竩를 베힐 때나 林衍이 金(仁)俊을, 宋松禮가 林惟茂를 베힐 때에 例外 없이 三別抄의 힘을 비러 「쿠-데타」를 行하였으나 都房에 이르러서는 우선 熙宗 七年 十二月에 宮中에서 催忠獻을 誅去하려 할 때에 都房六番이 赴救한(高麗史節要 卷十四 熙宗 七月 十二月條) 一例로도 그의 行動이 私兵의 範圍에 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要컨대 三別抄는 元來 公兵이었음으로 政變에 利用될 性質이 多分으로 包含되였음에 反하야 都房 馬別抄는 私兵이기 때문에 特別한 境遇를 除하고는 乙이 甲의 私兵을 利用키가 困難하였던 것이다. ③ 外敵(蒙古) 防禦에 있어 都房 馬別抄의 活動은 거의 차저 볼 수가 없음에 反하야 旣述한 바와 같이 三別抄만은 州縣別抄와 같이 그의 活動이 매우 活潑하였으며 三別抄는 다시 都城의 守衛와 親衛隊的 任務를 兼行하였으나 都房 馬別抄에 있어서는 그러한 例를 얻어볼 수가 없는 것으로서 兩者의 行動은 이와 같이 顯著한 差異가 있는 것이다. ④ 軍隊的 機構에 있어 三別抄는 都領 指諭 校尉 等 國家 官制에 依한 指揮者가 配置되였으나 都房 夜別抄에는 그러한 稱號가 보이지 아니한다. ⑤ 그 뿐만 아니라 旣擧 辛禑 三年 開城府狀에 「我國夜別抄三番 皆步卒 有勇力者也 云云」이라 한 記事로도 夜別抄三番(三別抄)이 公軍으로서 後世에까지 알려진 것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니 만일 夜別抄三番이 私兵이라면 當時 國軍의 衰弱을 前提로 하야 軍制 刷新을 目的으로 한 開城府의 上狀에 私兵의 例를 드는 것은 無意味하기도 甚한 까닭이다. 그 우에 高麗史 兵志에도 三別抄의 沿革은 자못 자세히 나타나 보이나 都房 馬別抄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또한 三別抄는 公軍이요 都房 馬別抄는 私兵이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을 줄로 생각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것으로써 삼별초의 직능과 그에 따러 삼별초의 본질이 대개 구명되었을 줄로 믿거니와 이러한 삼별초의 성능이야말로 삼별초의 동향과 및 삼별초난에 긴밀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는 바이다.
쪽수▶P28-2以上에서 叙述한 것으로써 三別抄의 職能과 그에 따러 三別抄의 本質이 대개 究明되였을 줄로 믿거니와 이러한 三別抄의 性能이야말로 三別抄의 動向과 및 三別抄亂에 緊密한 脉絡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는 바이다.



다시 각종의 별초에 대하여 개찰해보면 최충헌인물의 전봉별초와 글단 방어 때의 3군의 별초는 독립적 병대라는 것보다도 부위병에 속한 임시편성의 특별 병대였을 것은 위에서도 논한 바거니와 주현에 있어서도 역시 부병의 허약으로 인하여 군사적 필요에서 일어난 것이나 그의 행동은 대개 독자성을 가진 것으로서 동란과 외구를 방제하여 지방의 보위가 그의 임무였던 듯하다. 그리고 삼별초와 주현별초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추단할 만한 자료가 적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도령 교위 등 현대문주20▶지휘관직은 양자가 서로 유사한 것이며[a 20] 몽고병을 방어하는 데에 있어서도 양자 즉 경별초와 경외별초가 서로 호응하여 활동하였을 것은 대개 추단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쪽수▶P26-2다시 各種의 別抄에 對하야 概察해보면 崔忠獻의 戰鋒別抄와 契丹 防禦 時의 三軍의 別抄는 獨立的 兵隊라는 것보다도 府衛兵에 屬한 臨時編成의 特別 兵隊이었을 것은 우에서도 論한 바어니와 州縣에 있어서도 亦是 府兵의 虛弱으로 因하야 軍事的 必要에서 일어난 것이나 그의 行動은 대개 獨自性을 가진 것으로서 動亂과 外寇을 防制하야 地方의 保衛가 그의 任務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三別抄와 州縣別抄와의 關係에 있어서는 그것을 推斷할 만한 資料가 적음을 遺憾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都領 校尉 等 원문주20▶指揮官職은 兩者가 서로 類似한 것이며[20] 蒙古兵을 防禦하는 데에 있어서도 兩者 即 京別抄와 京外別抄가 서로 呼應하야 活動하였을 것은 대개 推斷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끝으로 삼별초의 소속 문제에 나아가 간단한 고찰을 시도하고 본절을 맺을까 한다. 삼별초의 소속 문제 즉 삼별초가 공병이었는가 또는 도방 마별초와 같이 권신의 사병이었는가 이 삼별초의 공사 구별이야말로 삼별초와 및 삼별초난을 구명하고 이해하는 데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쪽수▶P26-3끝으로 三別抄의 所屬 問題에 나아가 簡單한 考察을 試하고 本節을 맺을가 한다. 三別抄의 所屬 問題 即 三別抄가 公兵이었는가 또는 都房 馬別抄와 같이 權臣의 私兵이었는가 이 三別抄의 公私 區別이야말로 三別抄와 및 三別抄亂을 究明하고 理解하는 데에 重大한 關係가 있는 것이다.
원래 삼별초는 권신 최씨 일족(우, 항)으로 말미암아 조직된 것이며 그 위에 또한 역대권신에게 이용됨에 이르렀으니 고종 45년에 유경인물 김(인)준인물 등이 최의(최우인물의 손자)를 주멸(誅滅)할 때나 원종인물 9년에 임연인물김(인)준인물을 벨 때 또는 같은 왕 10년에 임연인물이 국왕의 폐위을 천행할 때나 그 다음 송송례인물임유무인물(임연인물의 아들)를 주륙(誅戮)할 때에 주로 삼별초의 힘을 빌려 그들의 목적을 달하게 되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삼별초는 권신의 가병인 도방 마별초와 같이 권신의 조아가 되어 때로 그들의 호위와 저택 경위의 임무에도 당하였다.(고려사서적 병지 및 최충헌전)
쪽수▶P26-4元來 三別抄는 權臣 崔氏 一族(瑀, 沆)으로 말미암어 組織된 것이며 그 우에 또한 歷代權臣에게 利用됨에 이르렀으니 高宗 四十五年에 柳璥 金(仁)俊 等이 崔竩(崔瑀의 孫)를 誅滅할 때나 元宗 九年에 林衍이 金(仁)俊을 베힐 때 또는 同十年에 林衍이 國王의 廢立을 擅行할 때나 그 다음 宋松禮가 林惟茂(衍의 子)를 誅戮할 때에 主로 三別抄의 힘을 비러 그들의 目的을 達하게 되였으며 그 뿐만 아니라 三別抄는 權臣의 家兵인 都房 馬別抄와 같이 權臣의 爪牙가 되여 때로▶P27-1 그들의 護衛와 邸宅 警衛의 任에도 當하였다.(高麗史 兵志 及 崔忠獻傳)
이와 같이 삼별초는 때로 도방 마별초와 한 가지로 권신들에게 이용되었으므로 일견 사병과 같이 보이기도 하니 앞서 든 이익재도 삼별초를 사병과 같이 해석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원래 무장 권신의 발호시대에는 국군도 대개 그들의 조아로 변함은 재래로 그의 예가 허다한 것이니 삼별초에 있어서도
쪽수▶P27-2이와 같이 三別抄는 때로 都房 馬別抄와 한 가지로 權臣들에게 利用되였음으로 一見 私兵과 같이 뵈이기도 하나니 前擧 李益齋도 三別抄를 私兵과 같이 解釋한 것은 이러한 點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元來 武將 權臣의 跋扈時代에는 國軍도 대개 그들의 爪牙로 化함은 在來로 그의 例가 許外한 것이니 三別抄에 있어서도

權臣執柄 以爲爪牙 厚其俸祿 或施私恩 又籍罪人之財 而給之 故權臣頥指氣使 爭先劾力(고려사서적 병지1)

쪽수▶P27-3

權臣執柄 以爲爪牙 厚其俸祿 或施私恩 又籍罪人之財 而給之 故權臣頥指氣使 爭先劾力(高麗史 兵志一)

이라 한 기사로써 저간의 사유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역대 권신은 여러가지 사은을 베풀어 그것을 이용하기에 노력한 결과—사병 같으면 일부러 사은을 베풀었다는 것이 역사상에 쓰일 까닭도 없겠으나—삼별초의 행동은 때로 도방 마별초와 구별치 못할 만큼 혼동된 것이 당시의 실정이였던 듯하다. 이미 든 고종인물 22년에 최초로 몽고병과 충돌한 야별초의 지휘자 이유정인물“崔瑀都房夜別抄都領”이었다. 이로 보면 이유정인물최우인물의 도방에 속하는 동시에 야별초의 도령을 겸한 것으로 해석되니 이는 최우인물가 야별초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짐짓 자기 도방에 속한 자를 가려 야별초 도령에 임명하였던 것 같으나 하여간 삼별초에는 공사 양역이 혼효(混淆)하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이에 따러 삼별초의 공사구별 이 또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삼별초가 권신들에게 이용된 것은 이세의 어찌할 수 없는 바로서 이러한 일면적 현상만 가지고 그것을 도방 마별초와 같이 사병으로 간주하여서는 아니될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러한 견지에서 아래에서 삼별초와 도방 마별초와를 간단히 몇 가지 사류(事類)에 나누어 비교하여 양자의 공사의 구별을 밝혀볼까 한다.
쪽수▶P27-4이라 한 記事로써 這間의 事由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歷代 權臣은 여러가지 私恩을 베푸러 그것을 利用하기에 努力한 結果—私兵 같으면 일부러 私恩을 베프렀다는 것이 史上에 씨여질 까닭도 없겠으나—三別抄의 行動은 때로 都房 馬別抄와 區別치 못할 마큼 混同된 것이 當時의 實情이였던 듯하다. 旣擧 高宗 二十二年에 最初로 蒙古兵과 衝突한 夜別抄의 指揮者 李裕貞은 「崔瑀都房夜別抄都領」이었다. 일로 보면 李裕貞은 崔瑀의 都房에 屬하는 同時에 夜別抄의 都領을 兼한 것으로 解釋되나니 이는 崔瑀가 夜別抄를 利用하려는 目的으로 짐짓 自己 都房에 屬한 者를 가려 夜別抄 都領에 任命하였던 것 같으나 何如間 三別抄에는 公私 兩役이 混淆하던 것은 事實이었었으니 이에 따러 三別抄의 公私區別 이 또한 問題일 것이다. 그러나 三別抄가 權臣들에게 利用된 것은 理勢의 어찌할 수 없는 바로서 이러한 一面的 現象만 가지고 그것을 都房 馬別抄와 같이 私兵으로 看做하여서는 아니될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러한 見地에서 以下로 三別抄와 都房 馬別抄와를 簡單히 몇 가지 事類에 나누워 比較하야써 兩者의 公私의 別를 밝혀볼까 한다.
① 양자는조직동기(○○○○)에 있어 벌써 공사의 구별이 판이하였던 것이니 야별초는 포도 금폭 등 국내의 보안 유지를 목적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나 도방 마별초는 권신들이 자기의 신변과 일족의 불측한 화를 우려하여 자호수단으로서 조직한 것이며 ② 삼별초에 있어서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김(인)준인물이 최의를 벨 때나 임연인물김(인)준인물을, 송송례인물임유무인물를 벨 때에 예외 없이 삼별초의 힘을 빌려 ‘쿠데타’를 행하였으나 도방에 이르러서는 우선 희종인물 7년 12월에 궁중에서 최충헌인물을 주거(誅去)하려 할 때에 도방육답이 부구(赴救)한(고려사절요서적 권14 희종 7월 12월조) 일례로도 그의 행동이 사병의 범위에 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삼별초는 원래 공병이었으므로 정변에 이용될 성질이 다분으로 포함되었음에 반하여 도방 마별초는 사병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을이 갑의 사병을 이용하기가 곤란하였던 것이다. ③ 외적(몽고) 방어에 있어 도방 마별초의 활동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음에 반하여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삼별초만은 주현별초와 같이 그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삼별초는 다시 도성의 수위와 친위대적 임무를 겸행하였으나 도방 마별초에 있어서는 그러한 예를 얻어볼 수가 없는 것으로서 양자의 행동은 이와 같이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④ 군대적 기구에 있어 삼별초는 도령 지유 교위 등 국가 관제에 의한 지휘자가 배치되었으나 도방 야별초에는 그러한 칭호가 보이지 아니한다. 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든 신우인물 3년 개성부장에 “我國夜別抄三番 皆步卒 有勇力者也 云云”이라 한 기사로도 야별초삼번(삼별초)이 공군으로서 후세에까지 알려진 것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니 만일 야별초삼번이 사병이라면 당시 국군의 쇠약을 전제로 하여 군제 쇄신을 목적으로 한 개성부의 상장에 사병의 예를 드는 것은 무의미하기도 심한 까닭이다. 그 위에 고려사서적 병지에도 삼별초의 연혁은 자못 자세히 나타나 보이나 도방 마별초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또한 삼별초는 공군이요 도방 마별초는 사병이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을 줄로 생각한다.
쪽수▶P27-5① 兩者는 組織動機(○○○○)에 있어 발서 公私의 別이 判異하였던 것이니 夜別抄는 捕盜 禁暴 等 國內의 保安 維指를 目的으로 하야 일어난 것이나 都房 馬別抄는 權臣들이 自己의 身邊과 一族의 不測한 禍를 憂慮하야 自護手段으로서 組織한 것이▶P28-1며 ② 三別抄에 있어서는 旣述한 바와 같이 金(仁)俊이 崔竩를 베힐 때나 林衍이 金(仁)俊을, 宋松禮가 林惟茂를 베힐 때에 例外 없이 三別抄의 힘을 비러 「쿠-데타」를 行하였으나 都房에 이르러서는 우선 熙宗 七年 十二月에 宮中에서 催忠獻을 誅去하려 할 때에 都房六番이 赴救한(高麗史節要 卷十四 熙宗 七月 十二月條) 一例로도 그의 行動이 私兵의 範圍에 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要컨대 三別抄는 元來 公兵이었음으로 政變에 利用될 性質이 多分으로 包含되였음에 反하야 都房 馬別抄는 私兵이기 때문에 特別한 境遇를 除하고는 乙이 甲의 私兵을 利用키가 困難하였던 것이다. ③ 外敵(蒙古) 防禦에 있어 都房 馬別抄의 活動은 거의 차저 볼 수가 없음에 反하야 旣述한 바와 같이 三別抄만은 州縣別抄와 같이 그의 活動이 매우 活潑하였으며 三別抄는 다시 都城의 守衛와 親衛隊的 任務를 兼行하였으나 都房 馬別抄에 있어서는 그러한 例를 얻어볼 수가 없는 것으로서 兩者의 行動은 이와 같이 顯著한 差異가 있는 것이다. ④ 軍隊的 機構에 있어 三別抄는 都領 指諭 校尉 等 國家 官制에 依한 指揮者가 配置되였으나 都房 夜別抄에는 그러한 稱號가 보이지 아니한다. ⑤ 그 뿐만 아니라 旣擧 辛禑 三年 開城府狀에 「我國夜別抄三番 皆步卒 有勇力者也 云云」이라 한 記事로도 夜別抄三番(三別抄)이 公軍으로서 後世에까지 알려진 것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니 만일 夜別抄三番이 私兵이라면 當時 國軍의 衰弱을 前提로 하야 軍制 刷新을 目的으로 한 開城府의 上狀에 私兵의 例를 드는 것은 無意味하기도 甚한 까닭이다. 그 우에 高麗史 兵志에도 三別抄의 沿革은 자못 자세히 나타나 보이나 都房 馬別抄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또한 三別抄는 公軍이요 都房 馬別抄는 私兵이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을 줄로 생각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것으로써 삼별초의 직능과 그에 따러 삼별초의 본질이 대개 구명되었을 줄로 믿거니와 이러한 삼별초의 성능이야말로 삼별초의 동향과 및 삼별초난에 긴밀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는 바이다.
쪽수▶P28-2以上에서 叙述한 것으로써 三別抄의 職能과 그에 따러 三別抄의 本質이 대개 究明되였을 줄로 믿거니와 이러한 三別抄의 性能이야말로 三別抄의 動向과 및 三別抄亂에 緊密한 脉絡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는 바이다.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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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金麟厚 百聯抄解(華巖書院 版本이니 이 版은 河西의 筆蹟을 그대로 刻한 것이라는 說이 있음)에 「百聯抄解」를 「온갓 글귀 ᄲᅡ()사긴 거시라」고 訓하였음.
  2. 毅宗의 游幸宴樂과 人民의 苦痛에 關하야 몇 가지 例를 들면 高麗史 卷十八 毅宗世家 二十一年 三月條에 「辛酉 王微行 至金身窟 設羅漢齋 還玄化寺 與李公升許洪材覺倪等 泛舟衆美亭南池 酣飮極歡 先是 淸寧齋南麓 構丁字閣 扁曰 衆美亭 亭之南澗 築土石貯水 岸上作茅亭 鳧鴈蘆葦 宛如江湖之狀 泛舟其中 令小僮棹歌漁唱 以恣遊觀之樂 初作亭 役卒私齎糧 一卒貧甚 不能自給 役徒共分飯一匙 食之 一日 其妻具食來餉 且曰 宜召所親共之 卒曰 家貧何以備辦將私於人 而得之乎 豈竊人所有乎 妻曰 貌醜誰與私 性拙安能盜 但剪髮買來耳 因示其首 卒嗚咽不能食 聞者悲之」라 하였고 同 四月條에 「又泛舟亭南浦 沿流上下 相與唱和 至夜乃罷 亭在板積窯 初因窯亭而營之 內有殿曰 延興 南有澗盤回左右 植松竹花草其閒 又有茅亭草樓 凡七 有額者四 曰靈德亭壽御堂鮮碧齋玉竿亭 橋曰錦花 門曰水德 其御船 飾以錦繡 假錦爲帆 以爲流連之樂 窮奢極麗 勞民費財 凡三年而成」이라 하였다.
  3. 同書 卷十九 明宗 三年 八月條에 「庚辰東北面兵馬使諫議大夫金甫當 起兵於東界 欲討鄭仲夫李義方 復立前王 東北面知兵馬事韓彦國 擧兵應之」 同 九月條에 「癸卵 安北都護府 執送甫當等 李義方殺之於市 凡文臣一切誅戮」 同 十月條에 「自三京四都護八牧 以至郡縣館驛之任 竝用武人」이라 하였다.
  4. 同書 卷百二十八 李義旼傳에 「九年(明宗)慶大升 誅仲夫 朝士詣闕賀 大升曰 弑君者尙在 焉用賀爲 義旼聞之大懼 聚勇士于家以備之 又聞大升都房人 謀害所忌 益懼 乃於里巷 樹大門以警夜 號爲閭門 京城坊里 皆效而樹之………二十六年 至榮(〇義旼의 子) 爲將軍 奪崔忠粹家鵓鴿 忠粹怒 遂告兄忠獻 欲誅義旼父子 忠獻然之 義旼適在彌陀山別墅 忠獻等往殺之 梟首于市 時 至純爲大將軍 至光(〇義旼의 子)爲將軍 聞變 率家僮 戰于路 至純見忠獻等多助 自揣不勝 與至光遁走」라 하였고, 同書 卷百二十九 崔忠獻傳에 「先是有人帖匿名牓云將軍朴晉材 謀去舅崔忠獻 由是 兩家構隙 至是 晉材爲大將軍 門客(○○)幾於忠獻 而率皆勇悍 晉材 恨門客除官者少 常怏々不平 酒酣輒言 忠獻無狀 且自謂若無忠獻 可專國柄 欲圖之 流言曰 舅氏有無君心 每語門客曰寧無一日之榮乎 云云」이라 하였다.
  5. 馬別抄는 都房과 同一하게 움지기었음으로 언제던지 都房 馬別抄가 升舉되고 있으며 또 高麗史節要 卷十五 高宗 十六年 十一月條에 「崔瑀閱家兵 都房馬別抄 鞍馬衣服弓劍兵甲 甚侈美 分五軍習戰」이라 한 記事로도 馬別抄가 崔瑀 家兵의 騎兵隊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都房三番도 崔瑀가 組織한 것이니 高麗史 崔忠獻傳 附怡傳에 「怡門客 多當代名儒 分爲三番 遞宿書房」이라 하였다. 이 書房三番은 자조 都房과 가치 宿衛에 當하였으며 林惟茂 때에도 書房三番의 制를 踏襲하야 宿衛로서 使用하였으니 同書 卷百三十 林衍傳에 「惟茂(〇林衍의 子) 集 都房六番 自衛其家 使惟栶 領書房三番 衛惟茂家 爲外援」이라 하였다.
  6. 前擧 崔忠獻傳 附沆傳에 「沆死 殿前崔良白 秘不發喪 按劒叱侍婢勿哭 與仁烈謀 以沆言 傳于門客 大將軍崔瑛蔡楨及能等 會夜別抄神義軍書房三番都房三十六番擁衛乃發喪 云云」이라고 하였다. 都房三十六番이라는 것은 이 때에 처음으로 뵈이나니, 崔沆이 죽은 뒤에 臨時로 編成된 것으로는 뵈여지지 아니함으로써 崔沆의 執權時代에 이미 三十六番으로 都房을 改編한 것으로 생각한다.
  7. 三別抄가 組織된 高宗時代 前半期에서도 高宗 四年의 一年間 國内 騒亂 狀態에 關하야 重要한 몇 가지 例를 들면 高麗史節要 卷十五 高宗 四年 正月條에 「全羅抄軍別監洪傅報 全州軍旣發 而中路擅還作亂 殺逐州長吏 云云」 同條에 「振威縣人令同正李將大直長同正李唐必 乘國家有事(丹兵入寇) 乃與同縣人別將同正金禮 謀不軌 嘯聚徒衆 劫奪縣令符印 發倉賑貸 村落飢民多附 移牒旁郡 自稱靖國兵馬使 號義兵 云云」 同 六月條에 「崔光秀據城(〇平壞城)作亂 自稱句高(〇疑二字倒錯)麗興復兵馬使金吾衛攝上將軍 署置僚佐 召募精銳 傳檄北界諸城 云云」 同 三月條에 「盗發純陵」이라 하였다.
  8. 高麗史 崔忠獻傳에 「私僮萬積等六人 樵北山 招集公私奴隷 謀曰 國家自庚癸以來 朱紫多起於賤隷 將相寧有種乎 時來則可爲也 吾輩安能勞筋骨 困於捶楚之下 諸奴皆然之 剪黃紙數千 皆鈒丁字 爲識約曰 吾輩自興國寺步廊 至毬庭 一時群集鼓噪 則在內宦者 必應之 官奴等誅鋤於內 吾徒蜂起城中 先殺崔忠獻等 仍各格殺其主焚賤籍 使三韓無賤人 則公卿將相 吾輩皆得爲之矣 及期皆集 以衆不滿數百 恐不濟事 更約會普濟寺 云云」이라 하였다.
  9. 高麗史節要(卷十七) 高宗 四十五年 三月條에 依하면 柳璥 金仁俊 等이 三別抄를 움지겨 崔竩를 베힌 記事의 다음에 「王御康安殿 百官陳賀 如新卽位 禮畢出 朴松庇金仁俊又率諸功臣左右別抄神義軍都房等 入殿庭羅拜 呼萬歲 云云」(高麗史 世家 高宗 四十五年 三月條에도 同一한 記事가 뵈임)이라 하였으니 當時 夜別抄를 左別抄 右別抄라 稱하였음을 알 수 있음.
  10. 高麗史 卷二十四 高宗 四十二年 四月條에 「兵荒 骸骨蔽野 被據人民 逃入京城者 絡繹不絕 都兵馬使 日給米一升救之 然死者無算」이라 하였다.
  11. 同書 同卷 高宗 四十年 十二月條에 「盜發厚容二陵」 同 四十三年 九月條에 「盜發康宗陵」 同年 十二月 甲寅에 「盜入太子府 窃玉冊緣飾 金銀彩帛」이라 하였다. 이 몇 가지 例를 가지고도 高宗 末頃의 國內 狀況을 推察할 수가 있다.
  12. 同書 卷八十一 兵志一 辛禑 十年 八月條에 「鷹揚軍上護軍李茂上言 府兵虛弱 請選諸道閑良子弟 號補充軍 以實府兵 從之」라 하였다.
  13. 增補文獻備考 卷百十六 兵考八에 「顯宗十年 新設訓鍊別隊 時都監軍兵 有名無實 徒費國廩 (中略) 宋時烈 請依御營軍制 改設新軍 而革罷訓鍊都監」이라 하였고 同書 卷百十 兵考二 純祖 二十年에 「擇有根着明戶籍者 以補不足 名日別案軍」이라 하였다.
  14. 高麗史 卷八十二 兵志二 毅宗 二十一年條에 「自是 選取驍勇者 號内巡檢 分爲兩番 常着紫衣 持弓劍 分立仗外 不避雨雪 夜則巡警達曙」라 하였고 同志 明宗 五年 十一月條에 「時因西征 衛卒乏少 加發四百人 號衛國抄猛班 皆持劒乾. 環衛毬庭」이라 하였다.
  15. 高宗 十八年 撒禮塔의 第一次 侵入, 그 翌年의 第二次 侵入, 同 二十二年 唐古의 第三次 侵入, 同 三十四年 阿母侃의 第四次 同 四十年 也窟의 第五次, 同 四十一年 車羅大의 侵入 等이 가장 著名한 것이다.
  16. 慶州別抄는 高麗史(卷五十七)地理志二 東京條에 「神宗五年東京夜別抄 云云」으로 보이나 이것은 都城의 夜別抄보다도 훨신 앞서는 것으로서 夜別抄의 名稱이 慶州에서 먼저 나타난 셈이 되나니 池內宏博士도 이미 論斷한 바와 같이 그릇된 所傳에서 나온 것인지(高麗の 三別抄について) 그렇지 아니하면 特히 慶州와 같은 主要 地方의 別抄의 任務는 都城의 夜別抄와 類似함으로 그에 依倣하야 慶州別抄도 東京夜別抄라는 別稱이 붙게 된 것이 아닐런가 한다.
  17. 雲門賊의 雲門은 山名이니 雲門山은 慶州 淸道 사이에 있다. 雲門賊은 高麗史(卷二十) 明宗 二十三年 七月條에 依하면 그의 首魁 金沙彌가 雲門에 據하야 州縣을 標掠하기 始作한 것으로서 오래동안 朝廷과 官軍을 괴롭혔다.
  18. 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八年條에 「蒙兵 至龜州 兵馬使朴犀 及朔州分道將軍金仲溫 靜州分道將軍金慶孫 與渭泰州守令等 各率兵會龜州 (中略) 都護別抄及渭泰州別抄二百五十餘人 分守三面 云云」이라 하였다.
  19. 州縣別抄의 戰績에 關하야 멫 가지 例를 들면 高麗史(卷二十四) 高宗 四十年 六月 丙子條에 「喬桐別抄 伏兵平州城外 夜入虜營 擊殺甚衆 校尉張子邦 持短兵 手殺屯長二十餘人」 同四十三年 四月 庚辰條에 「大府島別抄 夜出仁州境 蘇來山下 擊走蒙兵百餘人」 同 四十五年 十月條에 「忠州別抄 設伏朴達峴 狙擊蒙兵 奪所據人物牛馬兵仗」이라 하였다.
  20. 州縣別抄의 指揮官職에 있어서는 上擧를 喬桐別抄 校尉(○○)와 밋 北界別抄 都令(同書 卷二十五 元宗 即位之年 七月條) 等이 보이며 三別抄의 都領 等 職은 原文 三別抄 所屬條에서 述할 터임.






현대문주


  1. 김인후인물 백련초해서적(화암서원 판본이니 이 판은 하서의 필적을 그대로 새긴 것이라는 설이 있음)에 「백련초해」를 「온갓 글귀 ᄲᅡ()사긴 거시라」고 훈(訓)하였음.
  2. 의종인물의 유행연악과 인민의 고통에 관하여 몇 가지 예를 들면 고려사서적 권18 의종세가 21년 3월조에 「辛酉 王微行 至金身窟 設羅漢齋 還玄化寺 與李公升許洪材覺倪等 泛舟衆美亭南池 酣飮極歡 先是 淸寧齋南麓 構丁字閣 扁曰 衆美亭 亭之南澗 築土石貯水 岸上作茅亭 鳧鴈蘆葦 宛如江湖之狀 泛舟其中 令小僮棹歌漁唱 以恣遊觀之樂 初作亭 役卒私齎糧 一卒貧甚 不能自給 役徒共分飯一匙 食之 一日 其妻具食來餉 且曰 宜召所親共之 卒曰 家貧何以備辦將私於人 而得之乎 豈竊人所有乎 妻曰 貌醜誰與私 性拙安能盜 但剪髮買來耳 因示其首 卒嗚咽不能食 聞者悲之」라 하였고 同 四월조에 「又泛舟亭南浦 沿流上下 相與唱和 至夜乃罷 亭在板積窯 初因窯亭而營之 內有殿曰 延興 南有澗盤回左右 植松竹花草其閒 又有茅亭草樓 凡七 有額者四 曰靈德亭壽御堂鮮碧齋玉竿亭 橋曰錦花 門曰水德 其御船 飾以錦繡 假錦爲帆 以爲流連之樂 窮奢極麗 勞民費財 凡三年而成」이라 하였다.
  3. 같은 책 권19 명종인물 3년 8월조에 「庚辰東北面兵馬使諫議大夫金甫當 起兵於東界 欲討鄭仲夫李義方 復立前王 東北面知兵馬事韓彦國 擧兵應之」 같은 책 9월조에 「癸卵 安北都護府 執送甫當等 李義方殺之於市 凡文臣一切誅戮」 같은 책 10월조에 「自三京四都護八牧 以至郡縣館驛之任 竝用武人」이라 하였다.
  4. 같은 책 권128 이의민전에 「九年(明宗)慶大升 誅仲夫 朝士詣闕賀 大升曰 弑君者尙在 焉用賀爲 義旼聞之大懼 聚勇士于家以備之 又聞大升都房人 謀害所忌 益懼 乃於里巷 樹大門以警夜 號爲閭門 京城坊里 皆效而樹之⋯⋯二十六年 至榮(〇義旼의 子) 爲將軍 奪崔忠粹家鵓鴿 忠粹怒 遂告兄忠獻 欲誅義旼父子 忠獻然之 義旼適在彌陀山別墅 忠獻等往殺之 梟首于市 時 至純爲大將軍 至光(〇의민의 아들)爲將軍 聞變 率家僮 戰于路 至純見忠獻等多助 自揣不勝 與至光遁走」라 하였고, 같은 책 권129 최충헌전에 「先是有人帖匿名牓云將軍朴晉材 謀去舅崔忠獻 由是 兩家構隙 至是 晉材爲大將軍 門客(○○)幾於忠獻 而率皆勇悍 晉材 恨門客除官者少 常怏々不平 酒酣輒言 忠獻無狀 且自謂若無忠獻 可專國柄 欲圖之 流言曰 舅氏有無君心 每語門客曰寧無一日之榮乎 云云」이라 하였다.
  5. 마별초는 도방과 동일하게 움직였으므로 언제든지 도방 마별초가 승거되고 있으며 또 고려사절요서적 권15 고종 16년 11월조에 「崔瑀閱家兵 都房馬別抄 鞍馬衣服弓劍兵甲 甚侈美 分五軍習戰」이라 한 기사로도 마별초가 최우인물 가병의 기병대였음을 알 수 있으며 도방삼번도 최우인물가 조직한 것이니 고려사서적 최충헌전 부이전에 「怡門客 多當代名儒 分爲三番 遞宿書房」이라 하였다. 이 서방삼번은 자주 도방과 같이 숙위에 당하였으며 임유무 때에도 서방삼번의 제를 답습하여 숙위로서 사용(使用)하였으니 같은 책 권130 임연전에 「惟茂(〇임연의 아들) 集 都房六番 自衛其家 使惟栶 領書房三番 衛惟茂家 爲外援」이라 하였다.
  6. 앞서 든 최충헌전 부항전에 「沆死 殿前崔良白 秘不發喪 按劒叱侍婢勿哭 與仁烈謀 以沆言 傳于門客 大將軍崔瑛蔡楨及能等 會夜別抄神義軍書房三番都房三十六番擁衛乃發喪 云云」이라고 하였다. 도방36번이라는 것은 이 때에 처음으로 보이니, 최항인물이 죽은 뒤에 임시로 편성된 것으로는 보여지지 아니함으로써 최항인물의 집권시대에 이미 36번으로 도방을 개편한 것으로 생각한다.
  7. 삼별초가 조직된 고종인물 시대 전반기에서도 고종 4년의 1년간 국내 소란 상태에 관하여 중요한 몇 가지 예를 들면 고려사절요서적 권15 고종 4년 5월조에 「全羅抄軍別監洪傅報 全州軍旣發 而中路擅還作亂 殺逐州長吏 云云」 같은 조에 「振威縣人令同正李將大直長同正李唐必 乘國家有事(丹兵入寇) 乃與同縣人別將同正金禮 謀不軌 嘯聚徒衆 劫奪縣令符印 發倉賑貸 村落飢民多附 移牒旁郡 自稱靖國兵馬使 號義兵 云云」 같은 책 6월조에 「崔光秀據城(〇平壞城)作亂 自稱句高(〇疑二字倒錯)麗興復兵馬使金吾衛攝上將軍 署置僚佐 召募精銳 傳檄北界諸城 云云」 같은 책 3월조에 「盗發純陵」이라 하였다.
  8. 고려사서적 최충헌전에 「私僮萬積等六人 樵北山 招集公私奴隷 謀曰 國家自庚癸以來 朱紫多起於賤隷 將相寧有種乎 時來則可爲也 吾輩安能勞筋骨 困於捶楚之下 諸奴皆然之 剪黃紙數千 皆鈒丁字 爲識約曰 吾輩自興國寺步廊 至毬庭 一時群集鼓噪 則在內宦者 必應之 官奴等誅鋤於內 吾徒蜂起城中 先殺崔忠獻等 仍各格殺其主焚賤籍 使三韓無賤人 則公卿將相 吾輩皆得爲之矣 及期皆集 以衆不滿數百 恐不濟事 更約會普濟寺 云云」이라 하였다.
  9. 고려사절요서적(권17) 고종 45년 3월조에 의하면 류경인물 김인준인물 등이 삼별초를 움직여 최의인물를 벤 기사의 다음에 「王御康安殿 百官陳賀 如新卽位 禮畢出 朴松庇金仁俊又率諸功臣左右別抄神義軍都房等 入殿庭羅拜 呼萬歲 云云」(고려사서적 세가 고종 45년 3월조에도 동일한 기사가 보임)이라 하였으니 당시 야별초를 좌별초 우별초라 칭하였음을 알 수 있음.
  10. 고려사서적 권24 고종 42년 4월조에 「兵荒 骸骨蔽野 被據人民 逃入京城者 絡繹不絕 都兵馬使 日給米一升救之 然死者無算」이라 하였다.
  11. 같은 책 같은 권 고종 40년 12월조에 「盜發厚容二陵」 같은 왕 43년 9월조에 「盜發康宗陵」 같은 해 12월 갑인에 「盜入太子府 窃玉冊緣飾 金銀彩帛」이라 하였다. 이 몇 가지 예를 가지고도 고종인물 말경의 국내 상황을 추찰할 수가 있다.
  12. 같은 책 권81 병지1 신우 10년 8월조에 「鷹揚軍上護軍李茂上言 府兵虛弱 請選諸道閑良子弟 號補充軍 以實府兵 從之」라 하였다.
  13. 증보문헌비고서적 권116 병고8에 「顯宗十年 新設訓鍊別隊 時都監軍兵 有名無實 徒費國廩 (中略) 宋時烈 請依御營軍制 改設新軍 而革罷訓鍊都監」이라 하였고 같은 책 권110 병고2 순조 20년에 「擇有根着明戶籍者 以補不足 名日別案軍」이라 하였다.
  14. 고려사서적 권82 병지2 의종 21년조에 「自是 選取驍勇者 號内巡檢 分爲兩番 常着紫衣 持弓劍 分立仗外 不避雨雪 夜則巡警達曙」라 하였고 같은 곳 명종 5년 11월조에 「時因西征 衛卒乏少 加發四百人 號衛國抄猛班 皆持劒乾. 環衛毬庭」이라 하였다.
  15. 고종인물 18년 살리타이인물의 제1차 침입, 그 익년의 제2차 침입, 같은 왕 22년 당고인물의 제3차 침입, 같은 왕 34년 아모간인물의 제4차 같은 왕 40년 야굴인물의 제5차, 같은 왕 41년 차라대인물의 침입 등이 가장 저명한 것이다.
  16. 경주별초는 고려사서적(권57)지리지3 동경조에 「神宗五年東京夜別抄 云云」으로 보이나 이것은 도성의 야별초보다도 훨씬 앞서는 것으로서 야별초의 명칭이 경주에서 먼저 나타난 셈이 되니 이케우지 히로시 박사도 이미 논단한 바와 같이 그릇된 소전에서 나온 것인지(高麗の 三別抄について) 그렇지 아니하면 특히 경주와 같은 주요 지방의 별초의 임무는 도성의 야별초와 유사하므로 그에 의방하여 경주별초도 동경야별초라는 별칭이 붙게 된 것이 아닐는지 한다.
  17. 운문적의 운문은 산명이니 운문산은 경주 청도 사이에 있다. 운문적은 고려사서적(권20) 명종 23년 7월조에 의하면 그의 수괴 김사미인물가 운문에 근거하여 주현을 표략하기 시작한 것으로서 오랫동안 조정과 관군을 괴롭혔다.
  18. 고려사절요서적 권16 고종 18년조에 「蒙兵 至龜州 兵馬使朴犀 及朔州分道將軍金仲溫 靜州分道將軍金慶孫 與渭泰州守令等 各率兵會龜州 (中略) 都護別抄及渭泰州別抄二百五十餘人 分守三面 云云」이라 하였다.
  19. 주현별초의 전적에 관하여 몇 가지 예를 들면 고려사서적(권24) 고종 40년 6월 병자조에 「喬桐別抄 伏兵平州城外 夜入虜營 擊殺甚衆 校尉張子邦 持短兵 手殺屯長二十餘人」 同四十三年 四月 庚辰條에 「大府島別抄 夜出仁州境 蘇來山下 擊走蒙兵百餘人」 같은 왕 45년 10월조에 「忠州別抄 設伏朴達峴 狙擊蒙兵 奪所據人物牛馬兵仗」이라 하였다.
  20. 주현별초의 지휘관직에 있어서는 위에서 든 교동별초 교위(○○)와 및 북계별초 도령(같은 책 권25 원종 즉위지년 7월조) 등이 보이며 삼별초의 도령 등 직은 원문 삼별초 소속조에서 말할 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