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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번= ‘진단(震檀)’을 칭호로 한 본 학회 및 학보의 창립, 창간의 때에 이르러, ‘진단’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출처 의의 및 기타를 고찰하여 봄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친숙하지 못한 궁벽한 혐이 있음에 있어서랴.
 
|해독문1번= ‘진단(震檀)’을 칭호로 한 본 학회 및 학보의 창립, 창간의 때에 이르러, ‘진단’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출처 의의 및 기타를 고찰하여 봄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친숙하지 못한 궁벽한 혐이 있음에 있어서랴.
|해독문2번= ‘진단’이란 말이─물론 우리가 창조한 말이 아닌 이상, 상당한 출처와 유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처음으로 보인 현전한 문헌을 들면, 조선 태종 9년 {{TagPerson|[[권근(權近)]]}}(양촌(陽村))이 찬(撰)한 {{TagLocation|[[건원릉(태조)]]}} 신도비문(神道碑文)을 헤아리지 아니할 수 없다. 거기에 즉 이러한 일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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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번= ‘진단’이란 말이─물론 우리가 창조한 말이 아닌 이상, 상당한 출처와 유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처음으로 보인 현전한 문헌을 들면, 조선 {{TagPerson|[[태종]]}} 9년 {{TagPerson|[[권근(權近)]]}}(양촌(陽村))이 찬(撰)한 건원릉({{TagPerson|[[태조]]}}) 신도비문(神道碑文)을 헤아리지 아니할 수 없다. 거기에 즉 이러한 일절이 실려 있다.
 
|해독문3번= <blockquote no="01">書雲觀舊藏秘記 有{{ruby|九變震檀之圖|●●●●●●}} 建木得子  {{ruby|朝鮮即震檀之說|●●●●●●●}} 出自數千載之前 由今乃驗</blockquote>
 
|해독문3번= <blockquote no="01">書雲觀舊藏秘記 有{{ruby|九變震檀之圖|●●●●●●}} 建木得子  {{ruby|朝鮮即震檀之說|●●●●●●●}} 出自數千載之前 由今乃驗</blockquote>
|해독문4번= 이것은 특히 실제의 비문과 및 이를 전재한 {{TagBook|[[동문선]]}}(권100, 20) {{TagBook|[[조선금석총람]]}}(권하, 207호) 등에 의한 바이나, 단 (주의할 것은) {{TagBook|[[양촌집]]}} 및 {{TagBook|[[동국여지승람]]}}(양주 건원릉 조(條)) 소재의 같은 비문에는 이 경우에 오직 <cite no="01">“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自檀君之世而已有 歷數千載 由今乃驗”</cite>이라 하여, 전자와 이동상략(異同詳略)의 차이가 있는 동시에 정작 중요한 ‘진단’ 2자가 여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의 비문과 양촌집(내지 승람) 소재의 같은 비문 사이에는 이 이외에도 이러한 이동상략의 차이가 있는 구절이 다소 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고구(考究)한 바에 의하면, 후자 즉 양촌집 및 승람<sup>승람의 것은 양촌집의 것을 전재한 것인 듯</sup> 소재의 비문은 태조가 승하한 해인 태종 8년에 지은 찬자(撰者) 당초의 작(초고) 그대로의 것 같고, 전자 즉 실제의 비문(내지 동문선 등 소재의 비문)은 각석입비(刻石立碑)의 해인 다음 해 9년 봄에 자수 관계 및 기타의 사정으로 원문에 대하여 다소의 수정을 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위에 있는 일절만은 개수문(改修文)이 원문보다 도리어 자세한 듯한 감이 있지만, 그 외의 것은 전자가 후자에 비하여 훨씬 축약되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sup>잡지 {{TagJournal|[[「조선」]]}}(언문) 제171호 소게의 졸고 {{TagArticle|[[「조선 태조의 개국과 당시의 도참설」]]}} 참조</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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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4번= 이것은 특히 실제의 비문과 및 이를 전재한 {{TagBook|[[동문선]]}}(권100, 20) {{TagBook|[[조선금석총람]]}}(권하, 207호) 등에 의한 바이나, 단 (주의할 것은) {{TagBook|[[양촌집]]}} 및 {{TagBook|[[동국여지승람]]}}(양주 건원릉 조(條)) 소재의 같은 비문에는 이 경우에 오직 <cite no="01">“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自檀君之世而已有 歷數千載 由今乃驗”</cite>이라 하여, 전자와 이동상략(異同詳略)의 차이가 있는 동시에 정작 중요한 ‘진단’ 2자가 여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의 비문과 {{TagBook|[[양촌집]]}}(내지 {{TagBook|[[동국여지승람|승람]]}}) 소재의 같은 비문 사이에는 이 이외에도 이러한 이동상략의 차이가 있는 구절이 다소 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고구(考究)한 바에 의하면, 후자 즉 {{TagBook|[[양촌집]]}} {{TagBook|[[동국여지승람|승람]]}}<sup>{{TagBook|[[동국여지승람|승람]]}}의 것은 {{TagBook|[[양촌집]]}}의 것을 전재한 것인 듯</sup> 소재의 비문은 {{TagPerson|[[태조]]}}가 승하한 해인 {{TagPerson|[[태종]]}} 8년에 지은 찬자(撰者) 당초의 작(초고) 그대로의 것 같고, 전자 즉 실제의 비문(내지 동문선 등 소재의 비문)은 각석입비(刻石立碑)의 해인 다음 해 9년 봄에 자수 관계 및 기타의 사정으로 원문에 대하여 다소의 수정을 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위에 있는 일절만은 개수문(改修文)이 원문보다 도리어 자세한 듯한 감이 있지만, 그 외의 것은 전자가 후자에 비하여 훨씬 축약되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sup>잡지 {{TagJournal|[[조선]]}}(언문) {{TagVolume|[[조선 171|제171호]]}} 소게의 졸고 {{TagArticle|[[조선 태조의 개국과 당시의 도참설]]}}참조</sup>
|해독문5번= 그리하여 우리는 이 개수된 비문에 의하여 비로소 ‘진단’이라는 단어를 보게 된 것으로, 다시 거기 의하면 ‘진단’은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즉 조선의 별칭으로 당시 {{TagInstitution|[[서운관(書雲觀)]]}}<sup>천문, 지리, 음양, 측후를 맡음</sup> 소장의 옛 비기 중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란 서가 있고, 또 거기에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참설이 보인다는 것이다. 「구변진단지도」는 물론 금일에는 전하여 오지 않는 책이나, 이를 약칭하여 ‘구변도’ 혹는 ‘구변도국’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그 책 이름의 뜻은 진단(조선)의 판국이 아홉 번 변한다는─즉 조선의 왕조 변혁(입국건도(立國建都))이 9회에 이른다는─것이며, 그 소위 ‘건목득자’ 즉 ‘십팔자(十八子)’의 설은 이성인(李姓人)이 구변도 중의 일인이 되어, 장차 입국건도하리라는 참설로서 조선 태조 이씨의 득국이 이에 응하였다는 것이다.‘구변도’에 관한 말은 용비어천가 제15장에도 보이어 그 주에 <cite no="02">“九變圖局 {{ruby|神誌|●●}}所撰圖讖之名也 言東國 歷代定都 凡九變其局 並言本朝受命建都之事”</cite>라고 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구변도는 {{TagPerson|[[신지(神誌)]]}}란 사람이 찬한 것으로 전해져 왔던 것이 분명하며 또 (구변각(九變脚)이 과연 신지가 찬한 것인지? 다음에 말할 바와 같이 하나의 의문이지만) 여기 소위 신지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같은 책 제16장 대주에 <cite no="03">“高麗肅宗時 衛尉丞正金謂磾 上書謂遷都漢陽 用{{ruby|神誌|●●}}道詵圖讖也”</cite>라 한 신지와 또 그 소주에 <cite no="04">“{{ruby|神誌|●●}} 檀君時人 世號神誌仙人”</cite><sup>〿〿의 응제시주에도 이와 같은 설이 있음</sup>이라 한 신지 기인에 틀림없으니, 앞서 언급한 비문 중에 권근이 <cite no="05">“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ruby|自檀君之世而已有|●●●●●●●●}}”</cite>(원문)라 혹은 <cite no="06">“朝鮮即震檀之說 {{ruby|出自數千載之前|●●●●●●●}}”</cite>(수정문)이라 함은 다 이와 같은─구변(진단)권의 찬자 신지가 단군 때 사람이란─옛 전설에 의하여 내린 말이었을 것이다. 신지가 단군 시대의 인물이라 함과, 조선 즉 진단의 설 및 십팔자의 설이, 단군 시대부터 이미 있었다고 함은 공히 원래 황탄무계의 설로, 거기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지만, 고려 숙종 때의 술사인 {{TagPerson|[[김위제(金謂磾)]]}}가 남경건도(南京建都)를 청하는 상서 중에 신지의 비사란 것을 인용한 것은 고려사 같은 인전(人傳)에 징(徵)하여 더욱 분명한 사실인즉, 신지는 적어도 고려 숙종 조 이전의 인물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실상은 고려 이전 혹은 고구려 시대의 사람으로 저 양(梁)의 {{TagPerson|[[보지(寶誌)]]}}와 나말의 {{TagPerson|[[도선(道詵)]]}}과 같이 음양도참에 신통하여 세호(世號) 신지선인(神誌仙人)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단 그가 저작한 것이라 하는 신지비사니 구변진단지도니 하는 참서로 고려 시대 내지 국초에 유행하던 것의 내용이 과연 신지의 저작에 관계된 것인지? 이는 일대 의문이다. 설령 그중에 신지의 원작이 몇 부분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후인의 추가, 개조, 윤색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당시에 성행하던 도선의 종종의 비기와 같이 그중에도 구변진단지도는 전부가 고려인의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보이는 소위 ‘건목득자’ 즉 ‘십팔자’의 참설은 그 기원이 지나에 있어서는 비록 육조시대의 (위에 말한) 양의 보지에서 시작되어 수당대에 성행하던 설이지만, 반도에 있어서는 고려 중엽에 비로소 성행하여, (말엽에까지 미친 것인데) 특히 인종(고려 제17대) 초에 국구(國舅) {{TagPerson|[[이자겸(李資謙)]]}}이 이 십팔자참에 의하여 불궤(不軌)를 도(圖)하려고까지 하였던 것은 저명한 사실이니, 이는 대개 구변(진단)도의 십팔자참이 영향을 끼친 바라고 추측할 수 있은즉,<sup>앞의 글, 졸고 「조선 태조의 개국과 당시의 도참설」을 참조함이 가능함</sup> 구변진단지도는 실상 그 이씨의 발흥<sup>이 이씨의 발기는 이미 문종 순종 때로부터였다</sup> 초나 조금 그 전에 조작된 것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아직 더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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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5번= 그리하여 우리는 이 개수된 비문에 의하여 비로소 ‘진단’이라는 단어를 보게 된 것으로, 다시 거기 의하면 ‘진단’은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즉 조선의 별칭으로 당시 {{TagInstitution|[[서운관(書雲觀)]]}}<sup>천문, 지리, 음양, 측후를 맡음</sup> 소장의 옛 비기 중에 「{{TagBook|[[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란 책이 있고, 또 거기에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참설이 보인다는 것이다. 「{{TagBook|[[구변진단지도]]}}」는 물론 금일에는 전하여 오지 않는 책이나, 이를 약칭하여 ‘구변도’ 혹는 ‘구변도국’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그 책 이름의 뜻은 진단(조선)의 판국이 아홉 번 변한다는─즉 조선의 왕조 변혁(입국건도(立國建都))이 9회에 이른다는─것이며, 그 소위 ‘건목득자’ 즉 ‘십팔자(十八子)’의 설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구변도 중의 일인이 되어, 장차 입국건도하리라는 참설로서 조선 태조 이씨의 득국이 이에 응하였다는 것이다. ‘구변도’에 관한 말은 {{TagBook|[[용비어천가]]}} 제15장에도 보이어 그 주에 <cite no="02">“九變圖局 {{ruby|神誌|●●}}所撰圖讖之名也 言東國 歷代定都 凡九變其局 並言本朝受命建都之事”</cite>라고 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구변도는 {{TagPerson|[[신지]]}}(神誌)란 사람이 찬한 것으로 전해져 왔던 것이 분명하며 또 (구변각(九變脚)이 과연 {{TagPerson|[[신지]]}}가 찬한 것인지? 다음에 말할 바와 같이 하나의 의문이지만) 여기 소위 {{TagPerson|[[신지]]}}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TagBook|[[용비어천가|같은 책]]}} 제16장 대주에 <cite no="03">“高麗肅宗時 衛尉丞正金謂磾 上書謂遷都漢陽 用{{ruby|神誌|●●}}道詵圖讖也”</cite>라 한 {{TagPerson|[[신지]]}}와 또 그 소주에 <cite no="04">“{{ruby|神誌|●●}} 檀君時人 世號神誌仙人”</cite><sup>〿〿의 응제시주에도 이와 같은 설이 있음</sup>이라 한 신지 기인에 틀림없으니, 앞서 언급한 비문 중에 {{TagPerson|[[권근(權近)]]}}이 <cite no="05">“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ruby|自檀君之世而已有|●●●●●●●●}}”</cite>(원문)라 혹은 <cite no="06">“朝鮮即震檀之說 {{ruby|出自數千載之前|●●●●●●●}}”</cite>(수정문)이라 함은 다 이와 같은─구변(진단)권의 찬자 {{TagPerson|[[신지]]}}가 {{TagPerson|[[단군]]}} 때 사람이란─옛 전설에 의하여 내린 말이었을 것이다. {{TagPerson|[[신지]]}}가 {{TagPerson|[[단군]]}} 시대의 인물이라 함과, 조선 즉 진단의 설 및 십팔자의 설이, {{TagPerson|[[단군]]}} 시대부터 이미 있었다고 함은 공히 원래 황탄무계의 설로, 거기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지만, 고려 {{TagPerson|[[숙종]]}} 때의 술사인 {{TagPerson|[[김위제(金謂磾)]]}}가 남경건도(南京建都)를 청하는 상서 중에 {{TagPerson|[[신지]]}}의 비사란 것을 인용한 것은 {{TagBook|[[고려사]]}} 같은 인전(人傳)에 징(徵)하여 더욱 분명한 사실인즉, {{TagPerson|[[신지]]}}는 적어도 고려 {{TagPerson|[[숙종]]}} 조 이전의 인물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실상은 고려 이전 혹은 고구려 시대의 사람으로 저 양(梁)의 {{TagPerson|[[보지]]}}(寶誌)와 나말의 {{TagPerson|[[도선]]}}(道詵)과 같이 음양도참에 신통하여 세호(世號) 신지선인(神誌仙人)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단 그가 저작한 것이라 하는 {{TagBook|[[신지비사]]}}니 {{TagBook|[[구변진단지도]]}}니 하는 참서로 고려 시대 내지 국초에 유행하던 것의 내용이 과연 신지의 저작에 관계된 것인지? 이는 일대 의문이다. 설령 그중에 {{TagPerson|[[신지]]}}의 원작이 몇 부분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후인의 추가, 개조, 윤색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당시에 성행하던 {{TagPerson|[[도선]]}}의 종종의 비기와 같이 그중에도 {{TagBook|[[구변진단지도]]}}는 전부가 고려인의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보이는 소위 ‘건목득자’ 즉 ‘십팔자’의 참설은 그 기원이 지나에 있어서는 비록 육조시대의 (위에 말한) 양의 보지에서 시작되어 수당대에 성행하던 설이지만, 반도에 있어서는 고려 중엽에 비로소 성행하여, (말엽에까지 미친 것인데) 특히 {{TagPerson|[[인종]]}}(고려 제17대) 초에 국구(國舅) {{TagPerson|[[이자겸]]}}(李資謙)이 이 십팔자참에 의하여 불궤(不軌)를 도(圖)하려고까지 하였던 것은 저명한 사실이니, 이는 대개 구변(진단)도의 십팔자참이 영향을 끼친 바라고 추측할 수 있은즉,<sup>앞의 글, 졸고 「{{TagArticle|[[조선 태조의 개국과 당시의 도참설]]}}」을 참조함이 가능함</sup>{{TagBook|[[구변진단지도]]}}는 실상 그 이씨의 발흥<sup>이 이씨의 발기는 이미 {{TagPerson|[[문종]]}}, {{TagPerson|[[숙종]]}} 때로부터였다</sup> 초나 조금 그 전에 조작된 것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아직 더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독문6번= 지엽의 논이지만, 신지비사에 관하여는 {{TagBook|[[삼국유사]]}}(3권) 「보장봉로(寶藏奉老)」의 조에 고구려 대신 개소문(蓋蘇文)에 관한 주 가운데 <cite no="07">“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 序並注 則蘇文 乃職名 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cite>라고 한 일절이 보이는데, 여기에 소위 신지비사라는 책과 주를 냈다는 소문대영홍(蘇文大英弘)이란 어떤 사람인지? 이것을 소문과 대영홍의 두 사람으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위 유사의 설과 같이 소문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관직명으로 볼는지 또 혹은 그것이 위의 주(注)에서 인용한 전설같이 문인(文人)소영홍의 와오(訛誤)가 아닌지 공히 알 수가 없으나, 소문을 관직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암만해도 알 수 없는 설 같고, 또 소문, 대영홍을 두 사람으로 보는 것도 문세상(文勢上) 우습고, 그렇다고 곧 이를 소문 대영홍으로 고쳐볼 수도 없는 것인즉, 이에 관하여는 아직 보류해 둘 수밖에 별 도리가 없으나, 대영홍이란 사람이 신지비사와 관계가 있던 인물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대영홍은 역시 추측이지만, 고려의 발해 귀화인이나 혹은 그 자손이 아니었든가 한다. 그러면 신지비사란 책은 실상 이 책과 주를 냈다는 대영홍의 조작인지도 모르며, 더 한걸음 나아가, 구변진단지도도 그이의 손에 된 것일는지 모르겟다. 그러나 역시 후고를 요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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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6번= 지엽의 논이지만, {{TagBook|[[신지비사]]}}에 관하여는 {{TagBook|[[삼국유사]]}}(3권) 보장봉로(寶藏奉老)조에 고구려 대신 {{TagPerson|[[연개소문|개소문]]}}(蓋蘇文)에 관한 주 가운데 <cite no="07">“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 序並注 則蘇文 乃職名 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cite>라고 한 일절이 보이는데, 여기에 소위 {{TagBook|[[신지비사]]}}라는 책과 주를 냈다는 소문대영홍(蘇文大英弘)이란 어떤 사람인지? 이것을 소문과 대영홍의 두 사람으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위 유사의 설과 같이 소문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관직명으로 볼는지 또 혹은 그것이 위의 주(注)에서 인용한 전설같이 문인(文人)소영홍의 와오(訛誤)가 아닌지 공히 알 수가 없으나, 소문을 관직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암만해도 알 수 없는 설 같고, 또 소문, 대영홍을 두 사람으로 보는 것도 문세상(文勢上) 우습고, 그렇다고 곧 이를 소문 대영홍으로 고쳐볼 수도 없는 것인즉, 이에 관하여는 아직 보류해 둘 수밖에 별 도리가 없으나, 대영홍이란 사람이 {{TagBook|[[신지비사]]}}와 관계가 있던 인물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대영홍은 역시 추측이지만, 고려의 발해 귀화인이나 혹은 그 자손이 아니었든가 한다. 그러면 {{TagBook|[[신지비사]]}}란 책은 실상 이 책과 주를 냈다는 대영홍의 조작인지도 모르며, 더 한걸음 나아가, {{TagBook|[[구변진단지도]]}}도 그이의 손에 된 것일는지 모르겟다. 그러나 역시 후고를 요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해독문7번= 그런데 정작 진단이란 원(元) 어의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하여 조선을 별칭하는 명사가 되었는지 여기에 관하여 (다음에)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해독문7번= 그런데 정작 진단이란 원(元) 어의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하여 조선을 별칭하는 명사가 되었는지 여기에 관하여 (다음에)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해독문8번= 필자는 ‘진단’ 2자를 비문에서 볼 때 이미 직각적으로 진단은 즉 진단(震旦)이리라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는 누구나 진단(震旦)을 기억하는 이에게는 쉽게 연상될 것이다. {{TagBook|[[고려사]]}}(123권) 백승현전(白勝賢傳) 같은 사람의 참설 중에 <cite no="08">“三韓變爲震旦大國來朝矣</cite>”라 한 것을 보면, 고려 시대에는 진단(震檀)이라고 아니하고, 보통대로 진단(震旦)이라고 쓰고 불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국초 {{TagInstitution|[[서운관]]}} 소장의 구(고려) 비기인 구변진단지국의 진단(震檀)도 실상, 원서에는 진단(震旦)으로 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면 저 비문에는 왜 진단(震旦)을 진단(震檀)으로 고쳤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태조의 후위(後諱)가 단(旦)이므로, 단(旦)자를 피하기 위하여 (비문 찬자가) 비로소 단(檀)자를 대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세조선에서는 진단(震旦)을 혹은 진조(震朝)로 쓰고 부르는 이도 있었지만, 그 이유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해독문8번= 필자는 ‘진단’ 2자를 비문에서 볼 때 이미 직각적으로 진단은 즉 진단(震旦)이리라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는 누구나 진단(震旦)을 기억하는 이에게는 쉽게 연상될 것이다. {{TagBook|[[고려사]]}}(123권) 백승현전(白勝賢傳) 같은 사람의 참설 중에 <cite no="08">“三韓變爲震旦大國來朝矣</cite>”라 한 것을 보면, 고려 시대에는 진단(震檀)이라고 아니하고, 보통대로 진단(震旦)이라고 쓰고 불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국초 {{TagInstitution|[[서운관]]}} 소장의 구(고려) 비기인 구변진단지국의 진단(震檀)도 실상, 원서에는 진단(震旦)으로 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면 저 비문에는 왜 진단(震旦)을 진단(震檀)으로 고쳤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태조의 후위(後諱)가 단(旦)이므로, 단(旦)자를 피하기 위하여 (비문 찬자가) 비로소 단(檀)자를 대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세조선에서는 진단(震旦)을 혹은 진조(震朝)로 쓰고 부르는 이도 있었지만, 그 이유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해독문9번= 진단(震旦)은 원래 ‘지나(支那)’(혹은 지나(脂那), 지나(至那))란 말과 한가지 중국을 지칭하는 산스크리트어 이름(梵語名)에 대한 음역으로 불교에 관한 전적 중에 많이 보이는 이름이니, 그 음역이 본시 일정하지 아니하여, 진단(震旦) 외에 진단(眞旦), 진단(振旦), 진단(眞丹), 전단(旃丹), 신단(神丹) 등의 역칭이 있다. 그러나 진단(震旦)이라고 함이 가장 오래되고 널리 쓰는 말이다. 이 산스크리트어 이름의 역은 이미 동진(東晋) 시대에 시작된 듯하니, 동진세의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의 역한 {{TagBook|[[관정경(灌頂經)]]}}(6권)과, 같은 동진세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를 역한 {{TagBook|[[화엄경(華嚴經)]]}}(29권)과 또 {{TagBook|[[대집경(大集經)]]}}(45권) 등의 책에 이미 진단(震旦)(혹은 진단(眞旦))의 이름이 보여 있다. (지나(支那), 지나(脂那), 지나(至那)라는 말은 수당 시대 그 용례를 보기 비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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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9번= 진단(震旦)은 원래 ‘지나(支那)’(혹은 지나(脂那), 지나(至那))란 말과 한가지 중국을 지칭하는 산스크리트어 이름(梵語名)에 대한 음역으로 불교에 관한 전적 중에 많이 보이는 이름이니, 그 음역이 본시 일정하지 아니하여, 진단(震旦) 외에 진단(眞旦), 진단(振旦), 진단(眞丹), 전단(旃丹), 신단(神丹) 등의 역칭이 있다. 그러나 진단(震旦)이라고 함이 가장 오래되고 널리 쓰는 말이다. 이 산스크리트어 이름의 역은 이미 동진(東晋) 시대에 시작된 듯하니, 동진세의 {{TagPerson|[[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가 옮긴 {{TagBook|[[관정경(灌頂經)]]}}(6권)과, 같은 동진세의 {{TagPerson|[[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가 옮긴 {{TagBook|[[화엄경(華嚴經)]]}}(29권)과 또 {{TagBook|[[대집경(大集經)]]}}(45권) 등의 책에 이미 진단(震旦)(혹은 진단(眞旦))의 이름이 보여 있다. (지나(支那), 지나(脂那), 지나(至那)라는 말은 수당 시대 그 용례를 보기 비롯한 것이다)
 
|해독문10번= 그러면 중국을 지칭하는 진단(震旦)의 원 어의가 무엇이냐 함이 문제인데, 여기에 대하여는 대개 설이 세 가지가 있다.
 
|해독문10번= 그러면 중국을 지칭하는 진단(震旦)의 원 어의가 무엇이냐 함이 문제인데, 여기에 대하여는 대개 설이 세 가지가 있다.
 
|해독문11번= (1)은 일출지방설(日出地方說)이니, {{TagBook|[[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 3권(제국(諸國)편) 진단(震旦) 조에 인한 임법사(琳法師)의 설에 <cite no="09">“東方屬震  是日出之方 故云震旦”</cite>이라 함과 또 거기에 인용된 {{TagBook|[[루탄경(樓炭經)]]}}에 <cite no="10">“葱河以東 名爲震且 以日初出 耀於東隅 故得名也”</cite>라고 함이 그것이다.  
 
|해독문11번= (1)은 일출지방설(日出地方說)이니, {{TagBook|[[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 3권(제국(諸國)편) 진단(震旦) 조에 인한 임법사(琳法師)의 설에 <cite no="09">“東方屬震  是日出之方 故云震旦”</cite>이라 함과 또 거기에 인용된 {{TagBook|[[루탄경(樓炭經)]]}}에 <cite no="10">“葱河以東 名爲震且 以日初出 耀於東隅 故得名也”</cite>라고 함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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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3번= (3)은 진지설(秦地說)이니, 이는 근래 동서 학자가 함께 주장하고 있는 설로 진(震)은 진(秦)(Cin)의 전음(轉音)이요, 단(旦)은 범어 Sthana(주지(住地)라는 뜻)의 대음으로 진단(震旦)은 Cinisthana(진인(秦人)의 주지)의 와전이라고 하는 설이다. 즉 지나란 말의 유래와 같이 진(秦)의 시황제가 나라 안을 한데 합쳐 그 여위(餘威)가 외국에 미침으로부터 진의 음을 특히 취한 것이라고 한다.
 
|해독문13번= (3)은 진지설(秦地說)이니, 이는 근래 동서 학자가 함께 주장하고 있는 설로 진(震)은 진(秦)(Cin)의 전음(轉音)이요, 단(旦)은 범어 Sthana(주지(住地)라는 뜻)의 대음으로 진단(震旦)은 Cinisthana(진인(秦人)의 주지)의 와전이라고 하는 설이다. 즉 지나란 말의 유래와 같이 진(秦)의 시황제가 나라 안을 한데 합쳐 그 여위(餘威)가 외국에 미침으로부터 진의 음을 특히 취한 것이라고 한다.
 
|해독문14번= 위 세 가지 설 중 제1의 일출지방설은 단지 ‘진단(震旦)’이란 한자에 얽매인 오해이므로 일고의 가치가 없고, 제2의 사유국설은 진단(震旦)의 음이 산스크리트어 진다나(振多那) 즉 Cintana(사유라는 뜻)와 근사함으로 인하여 내린 천견(淺見)인즉, 역시 취할 가치가 없으며, 오직 제3설인 진인주지설은 가장 합리적이라 동서 학자 간에 널리 통행되는 설이므로, 나도 또한 이에 찬동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해독문14번= 위 세 가지 설 중 제1의 일출지방설은 단지 ‘진단(震旦)’이란 한자에 얽매인 오해이므로 일고의 가치가 없고, 제2의 사유국설은 진단(震旦)의 음이 산스크리트어 진다나(振多那) 즉 Cintana(사유라는 뜻)와 근사함으로 인하여 내린 천견(淺見)인즉, 역시 취할 가치가 없으며, 오직 제3설인 진인주지설은 가장 합리적이라 동서 학자 간에 널리 통행되는 설이므로, 나도 또한 이에 찬동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해독문15번= 이렇게 중국을 지칭한 ‘진단(震旦)’의 이름이 또 (굴러서) 어느 때 어떤 의미로 조선을 별칭하게도 되었는가 함에 대하여는 참고할 문헌이 거의 끊어져, 적확히 논명할 수는 없으나, 대개 이러한(필자의 상식에 의한) 천착은 용허될 줄로 안다. ─진단(震旦)이라는 명칭이 불전에서 나온 만큼 반도인의 이에 대한 주의도 불교계에서 먼저 되었을 것은 물론이요, 그것이 특히 해동의 옛 비기 중에 많이 나타난 것을 보면 이 이름을 최초로 조선에 적용하기는 부도음양가(승려도참가)에서 비롯한 것 같으며, 또 부도음양의 설은 신라통일 시대로부터 유행하던 것인즉, 조선 즉 진단의 설도 실상 그동안에 배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원래 음양도참가란 그 참설 중에 나타나는 인명, 지명 및 그 내용을 극히 은휘적(隱諱的)으로 신비하게 표시하기를 좋아하여, 혹은 파자(파획) 식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혹은 비슷한 음, 비슷한 뜻의 다른 글자를 빌려와 참설(대언)을 짓는 것이 보통이니 진단(震旦)이야말로 비교적 널리 알지 못하는 궁벽한 칭호로, 또 그 한자적 음의에 있어서 대동방<sup>금일의 만선을 포함한 당의의 조선</sup>을 비칭(秘稱)하는 참위가의 적〿한 글자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반도에는 진번(眞番), 진국(辰國), 진위(辰韓), 진변(辰弁)이라는 명칭을 가진 부락국가 혹은 합중 부락국가가 있었고, 북방 고구려의 후인 발해국도 처음에 진(震)(혹은 진(振))국이라고 이름한 일이 있으니, 이들 진(眞), 진(辰)(혹 (振))은 그 근본적 어의는 어떻든─자음상 저(지나 대국을 지칭하는) 진단(震旦)의 진과 전혀 일치하여 진단(震旦)으로써 참위가 이상의 대조선에 대한 별명을 삼기에 적당한 것이 그 하나며, 또 진단(震旦)의 순한자적 의의가 역시 동방일출지(東方日出地)의 뜻을 가졌다고 하는 ‘조선’과 흡사하여 전자를 후자에 전부(轉附)할 수 있는 것이 그 하나이다. 더욱 부도음양가는 진단(震旦)의 출처가 불전에 있는 까닭으로 해서 무엇보다 먼저 이를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말 군웅의 한 사람인 {{TagPerson|[[궁예]]}}가 처음 송악에 도읍을 정할 때 국호를 일시 마진(摩震)이라고 하였던 것은 저명한 사실이어니와, 이것이야말로 진단(震旦)을 정식의 국호로 이용한 유일의 사실(史實)이라고 할 수 있는 동시에 나말 참위가의 사상에 영향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진(摩震)은 나의 해석으로는 마하진단(摩訶震旦, Maha Cinisthana) 즉 대진단(大震旦)의 약칭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마하(摩訶)는 산스크리트어로 ‘대(大)’의 뜻이니, 이는 마치 인도에서 대지나를 ‘마하지나국’이라고 ({{TagBook|[[대당서역기]]}} 5권 참고)함과 같다. {{TagPerson|[[궁예]]}}는 승려 출신으로 참위설의 대혹신자(大惑信者)였으므로 당시 부도음양가의 설을 흡입하기에 가장 적의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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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5번= 이렇게 중국을 지칭한 ‘진단(震旦)’의 이름이 또 (굴러서) 어느 때 어떤 의미로 조선을 별칭하게도 되었는가 함에 대하여는 참고할 문헌이 거의 끊어져, 적확히 논명할 수는 없으나, 대개 이러한(필자의 상식에 의한) 천착은 용허될 줄로 안다. ─진단(震旦)이라는 명칭이 불전에서 나온 만큼 반도인의 이에 대한 주의도 불교계에서 먼저 되었을 것은 물론이요, 그것이 특히 해동의 옛 비기 중에 많이 나타난 것을 보면 이 이름을 최초로 조선에 적용하기는 부도음양가(승려도참가)에서 비롯한 것 같으며, 또 부도음양의 설은 신라통일 시대로부터 유행하던 것인즉, 조선 즉 진단의 설도 실상 그동안에 배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원래 음양도참가란 그 참설 중에 나타나는 인명, 지명 및 그 내용을 극히 은휘적(隱諱的)으로 신비하게 표시하기를 좋아하여, 혹은 파자(파획) 식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혹은 비슷한 음, 비슷한 뜻의 다른 글자를 빌려와 참설(대언)을 짓는 것이 보통이니 진단(震旦)이야말로 비교적 널리 알지 못하는 궁벽한 칭호로, 또 그 한자적 음의에 있어서 대동방<sup>오늘날의 만선을 포함한 당의의 조선</sup>을 비칭(秘稱)하는 참위가의 적〿한 글자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반도에는 진번(眞番), 진국(辰國), 진위(辰韓), 진변(辰弁)이라는 명칭을 가진 부락국가 혹은 합중 부락국가가 있었고, 북방 고구려의 후인 발해국도 처음에 진(震)(혹은 진(振))국이라고 이름한 일이 있으니, 이들 진(眞), 진(辰)(혹 (振))은 그 근본적 어의는 어떻든─자음상 저(지나 대국을 지칭하는) 진단(震旦)의 진과 전혀 일치하여 진단(震旦)으로써 참위가 이상의 대조선에 대한 별명을 삼기에 적당한 것이 그 하나며, 또 진단(震旦)의 순한자적 의의가 역시 동방일출지(東方日出地)의 뜻을 가졌다고 하는 ‘조선’과 흡사하여 전자를 후자에 전부(轉附)할 수 있는 것이 그 하나이다. 더욱 부도음양가는 진단(震旦)의 출처가 불전에 있는 까닭으로 해서 무엇보다 먼저 이를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말 군웅의 한 사람인 {{TagPerson|[[궁예]]}}가 처음 송악에 도읍을 정할 때 국호를 일시 마진(摩震)이라고 하였던 것은 저명한 사실이어니와, 이것이야말로 진단(震旦)을 정식의 국호로 이용한 유일의 사실(史實)이라고 할 수 있는 동시에 나말 참위가의 사상에 영향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진(摩震)은 나의 해석으로는 마하진단(摩訶震旦, Maha Cinisthana) 즉 대진단(大震旦)의 약칭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마하(摩訶)는 산스크리트어로 ‘대(大)’의 뜻이니, 이는 마치 인도에서 대지나를 ‘마하지나국’이라고 ({{TagBook|[[대당서역기]]}} 5권 참고)함과 같다. {{TagPerson|[[궁예]]}}는 승려 출신으로 참위설의 대혹신자(大惑信者)였으므로 당시 부도음양가의 설을 흡입하기에 가장 적의하였을 것이다.
|해독문16번= 이상 서술한 바를 요약하면, ‘진단(震檀)’은 즉 진단(震旦)으로서 ‘단(旦)’이 조선 태조의 후위(後諱)와 맞닿으므로, 본조에서는 그 대신 ‘단(檀)’자를 쓴 것에 불과하거니와, 반도에서 진단(震旦)의 명칭을 이용하기는 나대의 승려, 참가에서 위(緯) 비롯하여, 궁예왕에 이르러 특히 국호로 채용하고, 그 후 고려를 통하여 국초에 이르기까지 비기 중에 오히려 그 이름이 전하여 온 것이다. 조선인의 취한 진단(震旦)의 의의는 고대 인도인이 취한 그것과는 달라, 특히 금일의 만주 외 반도를 포함한 지역의 (말하자면) 해동대국의 칭호로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취한 의의는 또 이거와도 달라 비교적 광범한 뜻을 가졌으니, 우리는 회칙이 이미 언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목적하는 연구의 범위가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 제국(諸國)을 포괄한 이상, 진단(震旦)을 협의로 취하지 않고 광의로 거의 동양과 같은 뜻으로 취한 것을 끝으로 일러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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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6번= 이상 서술한 바를 요약하면, ‘진단(震檀)’은 즉 진단(震旦)으로서 ‘단(旦)’이 조선 태조의 후위(後諱)와 맞닿으므로, 본조에서는 그 대신 ‘단(檀)’자를 쓴 것에 불과하거니와, 반도에서 진단(震旦)의 명칭을 이용하기는 나대의 승려, 참가에서 위(緯) 비롯하여, {{TagPerson|[[궁예]]}}왕에 이르러 특히 국호로 채용하고, 그 후 고려를 통하여 국초에 이르기까지 비기 중에 오히려 그 이름이 전하여 온 것이다. 조선인의 취한 진단(震旦)의 의의는 고대 인도인이 취한 그것과는 달라, 특히 금일의 만주 외 반도를 포함한 지역의 (말하자면) 해동대국의 칭호로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취한 의의는 또 이거와도 달라 비교적 광범한 뜻을 가졌으니, 우리는 회칙이 이미 언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목적하는 연구의 범위가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 제국(諸國)을 포괄한 이상, 진단(震旦)을 협의로 취하지 않고 광의로 거의 동양과 같은 뜻으로 취한 것을 끝으로 일러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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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5일 (금) 13:3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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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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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震檀辨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4년11월
시작쪽 167쪽 종료쪽 174쪽 전체쪽 008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진단(震檀)’을 칭호로 한 본 학회 및 학보의 창립, 창간의 때에 이르러, ‘진단’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출처 의의 및 기타를 고찰하여 봄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친숙하지 못한 궁벽한 혐이 있음에 있어서랴.
쪽수▶P167-1「震檀」을 稱號로 한 本 學會 及 學報의 創立 創刊의 際에 當하야, 「震檀」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出處 意義 및 其他를 考察하여 봄은 決코 無意味한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一般 世人에게 널리 親熟하지 못한 窮僻한 嫌이 있음에 있어서랴.
‘진단’이란 말이─물론 우리가 창조한 말이 아닌 이상, 상당한 출처와 유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처음으로 보인 현전한 문헌을 들면, 조선 태종인물 9년 권근(權近)인물(양촌(陽村))이 찬(撰)한 건원릉(태조인물) 신도비문(神道碑文)을 헤아리지 아니할 수 없다. 거기에 즉 이러한 일절이 실려 있다.
쪽수▶P167-2「震檀」이란 語가─勿論 吾人의 創造語가 아닌 以上、相當한 出處와 由來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니와, 그것이─처음으로 보인 現傳한 文獻을 들면, 朝鮮 太宗 九年 權近(陽村)의 撰한 健元陵(太祖) 神道碑文을 推치 아니 할 수 없다. 거기에 即 이러한 一節이 실려 있다.

書雲觀舊藏秘記 有九變震檀之圖(●●●●●●) 建木得子 朝鮮即震檀之說(●●●●●●●) 出自數千載之前 由今乃驗

쪽수▶P167-3

書雲觀舊藏秘記 有九變震檀之圖(●●●●●●) 建木得子 朝鮮即震檀之說(●●●●●●●) 出自數千載之前 由今乃驗

이것은 특히 실제의 비문과 및 이를 전재한 동문선서적(권100, 20) 조선금석총람서적(권하, 207호) 등에 의한 바이나, 단 (주의할 것은) 양촌집서적동국여지승람서적(양주 건원릉 조(條)) 소재의 같은 비문에는 이 경우에 오직 “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自檀君之世而已有 歷數千載 由今乃驗”이라 하여, 전자와 이동상략(異同詳略)의 차이가 있는 동시에 정작 중요한 ‘진단’ 2자가 여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의 비문과 양촌집서적(내지 승람서적) 소재의 같은 비문 사이에는 이 이외에도 이러한 이동상략의 차이가 있는 구절이 다소 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고구(考究)한 바에 의하면, 후자 즉 양촌집서적승람서적승람서적의 것은 양촌집서적의 것을 전재한 것인 듯 소재의 비문은 태조인물가 승하한 해인 태종인물 8년에 지은 찬자(撰者) 당초의 작(초고) 그대로의 것 같고, 전자 즉 실제의 비문(내지 동문선 등 소재의 비문)은 각석입비(刻石立碑)의 해인 다음 해 9년 봄에 자수 관계 및 기타의 사정으로 원문에 대하여 다소의 수정을 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위에 있는 일절만은 개수문(改修文)이 원문보다 도리어 자세한 듯한 감이 있지만, 그 외의 것은 전자가 후자에 비하여 훨씬 축약되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잡지 「조선학술지」(언문) 제171호권호 소게의 졸고 「조선 태조의 개국과 당시의 도참설원고」 참조
쪽수▶P167-3이것은 特히 實際의 碑文과 및 이를 轉載한 東文選(卷百 二十) 朝鮮金石總覽(卷下, 二○七號) 等에 依한 바이나, 但 (注意할 것은) 陽村集 及 東國輿地勝覽(楊州 健元陵 條) 所載의 同 碑文에는 이 境遇에 單히 「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自檀君之世而已有 歷數千載 由今乃驗」이라 하야, 前者와 異同詳略의 差가 있는 同時에 정작 重要한 「震檀」 二字가 여기에는 全혀 보여있지 않다. 實際의 碑文과 陽村集(乃至 勝覽) 所載의 同 碑文 사이에는 이 以外에도 이▶P168-1러한 異同詳略의 差가 있는 句節이 多少 있는데, 그 理由는 나의 考究한 바에 依하면, 後者 即 陽村集 及 勝覽(勝覽의것은 陽村集의 것을 轉載한 것인 듯) 所載의 碑文은 太祖 昇遐의 歲인 太宗 八年에 지은 撰者 當初의 作(草稿) 그대로의 것 같고, 前者 即 實際의 碑文 (乃至 東文選 等 所載의 碑文)은 刻石立碑의 年인 翌 九年 春에 字數 關係 및 其他의 事情으로 原文에 就하야 多少의 修正을 加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勿論 위에 있는 一節만은 改修文이 原文보다 도리어 仔細한 듯한 感이 있지만, 其外의 것은 前者가 後者에 比하야 훨신 縮略되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雜誌 「朝鮮」(諺文)第百七十一號 所揭의 拙稿 「朝鮮 太祖의 開國과 當時의 圖讖說」 參照)
그리하여 우리는 이 개수된 비문에 의하여 비로소 ‘진단’이라는 단어를 보게 된 것으로, 다시 거기 의하면 ‘진단’은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즉 조선의 별칭으로 당시 서운관(書雲觀)기관천문, 지리, 음양, 측후를 맡음 소장의 옛 비기 중에 「구변진단지도서적(九變震檀之圖)」란 책이 있고, 또 거기에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참설이 보인다는 것이다. 「구변진단지도서적」는 물론 금일에는 전하여 오지 않는 책이나, 이를 약칭하여 ‘구변도’ 혹는 ‘구변도국’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그 책 이름의 뜻은 진단(조선)의 판국이 아홉 번 변한다는─즉 조선의 왕조 변혁(입국건도(立國建都))이 9회에 이른다는─것이며, 그 소위 ‘건목득자’ 즉 ‘십팔자(十八子)’의 설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구변도 중의 일인이 되어, 장차 입국건도하리라는 참설로서 조선 태조 이씨의 득국이 이에 응하였다는 것이다. ‘구변도’에 관한 말은 용비어천가서적 제15장에도 보이어 그 주에 “九變圖局 神誌(●●)所撰圖讖之名也 言東國 歷代定都 凡九變其局 並言本朝受命建都之事”라고 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구변도는 신지인물(神誌)란 사람이 찬한 것으로 전해져 왔던 것이 분명하며 또 (구변각(九變脚)이 과연 신지인물가 찬한 것인지? 다음에 말할 바와 같이 하나의 의문이지만) 여기 소위 신지인물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같은 책서적 제16장 대주에 “高麗肅宗時 衛尉丞正金謂磾 上書謂遷都漢陽 用神誌(●●)道詵圖讖也”라 한 신지인물와 또 그 소주에 神誌(●●) 檀君時人 世號神誌仙人”〿〿의 응제시주에도 이와 같은 설이 있음이라 한 신지 기인에 틀림없으니, 앞서 언급한 비문 중에 권근(權近)인물“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自檀君之世而已有(●●●●●●●●)(원문)라 혹은 “朝鮮即震檀之說 出自數千載之前(●●●●●●●)(수정문)이라 함은 다 이와 같은─구변(진단)권의 찬자 신지인물단군인물 때 사람이란─옛 전설에 의하여 내린 말이었을 것이다. 신지인물단군인물 시대의 인물이라 함과, 조선 즉 진단의 설 및 십팔자의 설이, 단군인물 시대부터 이미 있었다고 함은 공히 원래 황탄무계의 설로, 거기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지만, 고려 숙종인물 때의 술사인 김위제(金謂磾)인물가 남경건도(南京建都)를 청하는 상서 중에 신지인물의 비사란 것을 인용한 것은 고려사서적 같은 인전(人傳)에 징(徵)하여 더욱 분명한 사실인즉, 신지인물는 적어도 고려 숙종인물 조 이전의 인물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실상은 고려 이전 혹은 고구려 시대의 사람으로 저 양(梁)의 보지인물(寶誌)와 나말의 도선인물(道詵)과 같이 음양도참에 신통하여 세호(世號) 신지선인(神誌仙人)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단 그가 저작한 것이라 하는 신지비사서적구변진단지도서적니 하는 참서로 고려 시대 내지 국초에 유행하던 것의 내용이 과연 신지의 저작에 관계된 것인지? 이는 일대 의문이다. 설령 그중에 신지인물의 원작이 몇 부분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후인의 추가, 개조, 윤색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당시에 성행하던 도선인물의 종종의 비기와 같이 그중에도 구변진단지도서적는 전부가 고려인의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보이는 소위 ‘건목득자’ 즉 ‘십팔자’의 참설은 그 기원이 지나에 있어서는 비록 육조시대의 (위에 말한) 양의 보지에서 시작되어 수당대에 성행하던 설이지만, 반도에 있어서는 고려 중엽에 비로소 성행하여, (말엽에까지 미친 것인데) 특히 인종인물(고려 제17대) 초에 국구(國舅) 이자겸인물(李資謙)이 이 십팔자참에 의하여 불궤(不軌)를 도(圖)하려고까지 하였던 것은 저명한 사실이니, 이는 대개 구변(진단)도의 십팔자참이 영향을 끼친 바라고 추측할 수 있은즉,앞의 글, 졸고 「조선 태조의 개국과 당시의 도참설원고」을 참조함이 가능함구변진단지도서적는 실상 그 이씨의 발흥이 이씨의 발기는 이미 문종인물, 숙종인물 때로부터였다 초나 조금 그 전에 조작된 것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아직 더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쪽수▶P168-2그리하여 吾人은 이 改修된 碑文에 依하여 비로소 「震檀」의 語를 보게 된 것이어니와, 다시 거기 依하면 「震檀」은 朝鮮의 謂로, 即 朝鮮의 別稱으로 當時 書雲觀(天文 地理 陰陽 測候을 司함) 所藏의 舊 秘記 中에 「九變震檀之圖」란 書가 있고, 또 거기에 建木得子의 讖說이 보여있다는 것이다. 「九變震檀之圖」는 勿論 今日에는 傳하여 오지 않는 冊이나, 이를 略稱하야 「九變圖」 或는 「九變圖局」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그 書名의 義는 震檀(朝鮮)의 版局이 아홉 번 變한다는─即 朝鮮의 王朝變革(立國建都)이 九回에 及한다는─것이며, 그 所謂 「建木得子」 即 「十八子」의 設은 李姓人이 九變圖中의 一人이 되어, 장차 立國建都하리라는 讖說로서 朝鮮 太祖 李氏의 得國이 이에 應하였다는 것이다. 「九變圖」에 關한 말은 龍飛御天歌 第十五章에도 보이어 그 注에 「九變圖局 神誌(●●)所撰圖讖之名也 言東國 歷代定都 凡九變其局 並言本朝受命建都之事」라고 하였는데, 이에 依하면, 九變圖는 神誌란 사람의 所撰으로 傳稱한 것이 分明하며 또 (九變脚가 果然 神誌 所撰의 것인지? 다음에 말할 바와 같이 一 疑問이지만) 여기 所謂 神誌는▶P169-1 어떤 사람이냐 하면, 同書 第十六章 大注에 「高麗肅宗時 衛尉丞正金謂磾 上書謂遷都漢陽 用神誌(●●)道詵圖讖也」라 한 神誌와 又其 小註에 「神誌(●●) 檀君時人 世號神誌(●●)仙人」(〿〿의 應製詩注에도 이와 같은 設이 있음)이라 한 神誌 其人에 틀림없으니, 前記 碑文中에 權近이 「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自檀君之世而已有(●●●●●●●●)」(原文)라 或은 「朝鮮即震檀之說 出自數千載之前(●●●●●●●)」(修正文)이라 함은 다 이와 같은─九變(震檀)圏의 撰者 神誌가 檀君時人이란─舊 傳說에 依하야 내린 말이었을 것이다. 神誌가 檀君 時代의 人物이라 함과, 朝鮮 即 震檀의 設 및 十八子의 說이, 檀君 時代로부터 이미 있었다고 함은 共히 元來 荒誕無稽의 說로, 거기에는 귀를 기울일 必要가 없지만, 高麗 肅宗時의 術士인 金謂磾가 南京建都를 請하는 上書 中에 神誌의 秘詞란 것을 引用한 것은 高麗史 同 人傳에 徵하야 더욱 分明한 事實인즉, 神誌는 적어도 高麗 肅宗 朝 以前의 人物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實相은 高麗 以前 혹은 高句麗 時代의 人으로 저 梁의 寶誌와 羅末의 道詵과 같이 陰陽圖讖에 神通하야 世號 神誌仙人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但 그 所著라고 하는 神誌秘詞니 九變震檀之圖니 하는 讖書로 高麗時代 乃至 國初에 流行하던 것의 內容이 果然 神誌 所作에 係한 것인지? 이는 一大 疑問이다. 設令 그中에 神誌의 原作이 몇 部分 있다고 하더라도, 大部分는 後人의 追加 改造 潤色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當時에 盛行하던 道詵의 種種의 秘記와 같이 其中에도 九變震檀之圖는 全部가 高麗人의 造作이 아닌가 하는 疑心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보인 所謂 「建木得子」 即 「十八子」의 讖說은 그 起源이 支那에 있어서는 비록 六朝時代의 (위에 말한) 梁의 寶誌에서 始作되어 隋唐代에 盛行하던 說이지만, 半島에 있어서는 高麗 中葉에 비로소 盛行하야, (末葉에까지 미친 것인데) 特히 仁宗(高麗 第十七代) 初에▶P170-1 國舅 李資謙이 이 十八子讖에 依하야 不軌를 圖하려고까지 하였던 것은 著名한 事實이니, 이는 대개 九變(震檀)圖의 十八子識의 影響한 배라고 推測할 수 있슨즉, (前記 拙稿 「朝鮮 太祖의 開國과 當時의 圖讖說」을 參照함이 可함) 九變震檀之圖는 實相 그 李氏의 勃興(이 李氏의 渤其은 이미 文宗 順宗 時로부터였다) 初나 조금 그 前에 造作된 것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에 對하여는 아직 더 考慮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엽의 논이지만, 신지비사서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서적(3권) 보장봉로(寶藏奉老)의 조에 고구려 대신 개소문인물(蓋蘇文)에 관한 주 가운데 “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 序並注 則蘇文 乃職名 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라고 한 일절이 보이는데, 여기에 소위 신지비사서적라는 책과 주를 냈다는 소문대영홍(蘇文大英弘)이란 어떤 사람인지? 이것을 소문과 대영홍의 두 사람으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위 유사의 설과 같이 소문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관직명으로 볼는지 또 혹은 그것이 위의 주(注)에서 인용한 전설같이 문인(文人)소영홍의 와오(訛誤)가 아닌지 공히 알 수가 없으나, 소문을 관직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암만해도 알 수 없는 설 같고, 또 소문, 대영홍을 두 사람으로 보는 것도 문세상(文勢上) 우습고, 그렇다고 곧 이를 소문 대영홍으로 고쳐볼 수도 없는 것인즉, 이에 관하여는 아직 보류해 둘 수밖에 별 도리가 없으나, 대영홍이란 사람이 신지비사서적와 관계가 있던 인물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대영홍은 역시 추측이지만, 고려의 발해 귀화인이나 혹은 그 자손이 아니었든가 한다. 그러면 신지비사서적란 책은 실상 이 책과 주를 냈다는 대영홍의 조작인지도 모르며, 더 한걸음 나아가, 구변진단지도서적도 그이의 손에 된 것일는지 모르겟다. 그러나 역시 후고를 요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쪽수▶P170-2枝葉의 論이지만, 神誌秘詞에 關하여는 三國遺事(卷三)「寶藏奉老」의 條에 高句麗 大臣 蓋蘇文에 關한 注 가운대 「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 序並注 則蘇文 乃職名 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라고 한 一節이 보이는데, 여기에 所謂 神誌秘詞의 序와 注를 냈다는 蘇文大英弘이란 어떤 사람인지? 이것이 蘇文과 大英弘의 二人으로 解할 것인지, 或은 右 遺事의 設과 같이 蘇文은 人名이 아니라 官職名으로 볼는지 또 或은 그것이 右注 所引의 傳說같이 文人蘇英弘의 訛誤가 아닌지 共히 未詳하나, 蘇文을 官職名으로 解하는 것은 암만해도 알 수 없는 設 같고, 또 蘇文 大英弘을 二人으로 보는 것도 文勢上 우습고, 그렇다고 곧 이를 蘇文 大英弘으로 고쳐볼 수도 없는 것인즉, 이에 關하여는 아직 保留해둘 수밖에 別道理가 없으나, 大英弘이란 사람이 神誌秘詞와 關係가 있던 人物임은 再言을 不待할 것이며, 大英弘은 亦是 推測이지만, 高麗의 渤海 歸化人이나 乃至 그 子孫이 아니었든가 한다. 그러면 神誌秘詞란 書는 實相 이 序와 注를 냈다는 大英弘의 造作인지도 모르며, 더 한걸음 나아가, 九變震檀之圖도 그이의 손에 된 것일는지 모르겟다. 그러나 亦是 後考를 要할 問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진단이란 원(元) 어의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하여 조선을 별칭하는 명사가 되었는지 여기에 관하여 (다음에) 생각해 보려고 한다.
쪽수▶P171-1그런데 정작 震檀이란 원(元) 語義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하야 朝鮮을 別稱하는 名詞가 되었는지 여기에 關하야 (다음에)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필자는 ‘진단’ 2자를 비문에서 볼 때 이미 직각적으로 진단은 즉 진단(震旦)이리라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는 누구나 진단(震旦)을 기억하는 이에게는 쉽게 연상될 것이다. 고려사서적(123권) 백승현전(白勝賢傳) 같은 사람의 참설 중에 “三韓變爲震旦大國來朝矣”라 한 것을 보면, 고려 시대에는 진단(震檀)이라고 아니하고, 보통대로 진단(震旦)이라고 쓰고 불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국초 서운관기관 소장의 구(고려) 비기인 구변진단지국의 진단(震檀)도 실상, 원서에는 진단(震旦)으로 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면 저 비문에는 왜 진단(震旦)을 진단(震檀)으로 고쳤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태조의 후위(後諱)가 단(旦)이므로, 단(旦)자를 피하기 위하여 (비문 찬자가) 비로소 단(檀)자를 대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세조선에서는 진단(震旦)을 혹은 진조(震朝)로 쓰고 부르는 이도 있었지만, 그 이유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쪽수▶P171-2筆者는 「震檀」 二字를 碑文에서 볼 때 이미 直覺的으로 震檀은 即 震旦이리라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는 누구나 震旦을 記憶하는 이에게는 容易히 聯想될 것이다. 高麗史(券百二十三) 白勝賢傳 同人의 讖說 中에 「三韓變爲震旦大國來朝矣」라 한 것을 보면, 高麗 時代에는 震檀이라고 아니하고, 普通대로 震旦이라고 書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同時에 國初 書雲觀 所藏의 舊(高麗) 秘記인 九變震檀之國의 震檀도 實相, 原書에는 震旦으로 되었었으리라고 推測된다. 그러면 저 碑文에는 웨 震旦을 震檀으로 고쳤느냐 하는 疑問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亦 是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朝鮮 太祖의 後諱가 旦이므로, 旦字를 避하기 爲하야 (碑文 撰者가) 비로소 檀字를 代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近世朝鮮에서는 震旦을 或은 震朝로 書稱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 理由는 亦是 마찬가지이다.
진단(震旦)은 원래 ‘지나(支那)’(혹은 지나(脂那), 지나(至那))란 말과 한가지 중국을 지칭하는 산스크리트어 이름(梵語名)에 대한 음역으로 불교에 관한 전적 중에 많이 보이는 이름이니, 그 음역이 본시 일정하지 아니하여, 진단(震旦) 외에 진단(眞旦), 진단(振旦), 진단(眞丹), 전단(旃丹), 신단(神丹) 등의 역칭이 있다. 그러나 진단(震旦)이라고 함이 가장 오래되고 널리 쓰는 말이다. 이 산스크리트어 이름의 역은 이미 동진(東晋) 시대에 시작된 듯하니, 동진세의 백시리밀다라인물(帛尸梨蜜多羅)가 옮긴 관정경(灌頂經)서적(6권)과, 같은 동진세의 불타발타라인물(佛駄跋陀羅)가 옮긴 화엄경(華嚴經)서적(29권)과 또 대집경(大集經)서적(45권) 등의 책에 이미 진단(震旦)(혹은 진단(眞旦))의 이름이 보여 있다. (지나(支那), 지나(脂那), 지나(至那)라는 말은 수당 시대 그 용례를 보기 비롯한 것이다)
쪽수▶P171-3震旦은 元來 「支那」(一云 脂那, 至那)란 말과 한가지 中國 指稱하는 梵語名에 對한 音譯으로 佛敎에 關한 典籍 中에 많이 보이는 이름이니, 그 音譯이 本是 一定하지 아니하야, 震旦 外에 眞旦 振旦 眞丹 旃丹 神丹 等의 譯稱이 있다. 그러나 震旦이라고 함이 가장 오래되고 널리 쓰는 말이다. 이 梵名의 譯은 이미 東晋時代 始作된 듯하니, 東晉世의 帛尸梨蜜多羅의 譯한 灌頂經(卷六)과, 같은 東晉世의 佛駄跋陀羅의 譯한 華嚴經(卷二十 九)과 또 大集經(卷四十 五) 等 書에 이미 震旦(成은 眞旦)의 名이 보여 있다. (支那 脂那 至那의 稱은 隋唐時代 그 用例를 보기▶P172-1 비롯한 것이다)
그러면 중국을 지칭하는 진단(震旦)의 원 어의가 무엇이냐 함이 문제인데, 여기에 대하여는 대개 설이 세 가지가 있다.
쪽수▶P172-2그러면 中國을 指稱하는 震旦의 원 語義가 무엇이냐 함이 問題인데, 여기에 對하여는 대개 設이 세 가지가 있다.
(1)은 일출지방설(日出地方說)이니, 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서적 3권(제국(諸國)편) 진단(震旦) 조에 인한 임법사(琳法師)의 설에 “東方屬震 是日出之方 故云震旦”이라 함과 또 거기에 인용된 루탄경(樓炭經)서적“葱河以東 名爲震且 以日初出 耀於東隅 故得名也”라고 함이 그것이다.
쪽수▶P172-3(一)은 日出地方說이니, 翻譯名義集 卷三(諸國篇) 震旦條에 引한 琳法師의 說에 「東方屬震 是日出之方 故云震旦」이라 함과 또 거기에 引用된 樓炭經에 「葱河以東 名爲震且 以日初出 耀於東隅 故得名也」라고 함이 그것이다.
(2)는 사유국설(思惟國說)이니, 혜원(慧苑) 음의(音義)서적 하권에 진단(震旦)에 대하여 “此翻爲思惟 以其國人多所思慮 多所制作 故以爲名 即今 漢國是也”라고 함이 그것이다.
쪽수▶P172-4(二)는 思惟國說이니, 慧苑音義 卷下에 震旦에 對하야 「此翻爲思惟 以其國人多所思慮 多所制作 故以爲名 即今 漢國是也」라고 함이 그것이다.
(3)은 진지설(秦地說)이니, 이는 근래 동서 학자가 함께 주장하고 있는 설로 진(震)은 진(秦)(Cin)의 전음(轉音)이요, 단(旦)은 범어 Sthana(주지(住地)라는 뜻)의 대음으로 진단(震旦)은 Cinisthana(진인(秦人)의 주지)의 와전이라고 하는 설이다. 즉 지나란 말의 유래와 같이 진(秦)의 시황제가 나라 안을 한데 합쳐 그 여위(餘威)가 외국에 미침으로부터 진의 음을 특히 취한 것이라고 한다.
쪽수▶P172-5(三)은 秦地說이니, 이는 近來 東西 學者의 共唱하는 說로 震은 秦(Cin)의 轉音이요, 旦은 梵語 Sthana(住地의 義)의 對音으로 震旦은 Cinisthana(秦人의 住地)의 訛轉이라고 하는 說이다. 即 支那란 語의 由來와 같이 秦의 始皇帝가 海內를 一統하야 그 餘威가 外國에 미침으로부터 秦의 音을 特히 取한 것이라고 한다.
위 세 가지 설 중 제1의 일출지방설은 단지 ‘진단(震旦)’이란 한자에 얽매인 오해이므로 일고의 가치가 없고, 제2의 사유국설은 진단(震旦)의 음이 산스크리트어 진다나(振多那) 즉 Cintana(사유라는 뜻)와 근사함으로 인하여 내린 천견(淺見)인즉, 역시 취할 가치가 없으며, 오직 제3설인 진인주지설은 가장 합리적이라 동서 학자 간에 널리 통행되는 설이므로, 나도 또한 이에 찬동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쪽수▶P172-6右 三說 中 第一의 日出地方說은 단지 「震旦」이란 漢字에 拘泥된 誤解이므로 一顧의 價値가 없고, 第二의 思惟國說은 震旦의 音이 梵語 振多那 即 Cintana(思惟의 義)와 近似하므로 因하야 내린 淺見인즉, 亦是 取할 價値가 없으며, 오직 第三說인 秦人住地說은 가장 合理的이라 東西 學者 間에 널리 通行되는 說이므로, 나도 또한 이에 賛同하야 마지않는 바이다.
이렇게 중국을 지칭한 ‘진단(震旦)’의 이름이 또 (굴러서) 어느 때 어떤 의미로 조선을 별칭하게도 되었는가 함에 대하여는 참고할 문헌이 거의 끊어져, 적확히 논명할 수는 없으나, 대개 이러한(필자의 상식에 의한) 천착은 용허될 줄로 안다. ─진단(震旦)이라는 명칭이 불전에서 나온 만큼 반도인의 이에 대한 주의도 불교계에서 먼저 되었을 것은 물론이요, 그것이 특히 해동의 옛 비기 중에 많이 나타난 것을 보면 이 이름을 최초로 조선에 적용하기는 부도음양가(승려도참가)에서 비롯한 것 같으며, 또 부도음양의 설은 신라통일 시대로부터 유행하던 것인즉, 조선 즉 진단의 설도 실상 그동안에 배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원래 음양도참가란 그 참설 중에 나타나는 인명, 지명 및 그 내용을 극히 은휘적(隱諱的)으로 신비하게 표시하기를 좋아하여, 혹은 파자(파획) 식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혹은 비슷한 음, 비슷한 뜻의 다른 글자를 빌려와 참설(대언)을 짓는 것이 보통이니 진단(震旦)이야말로 비교적 널리 알지 못하는 궁벽한 칭호로, 또 그 한자적 음의에 있어서 대동방오늘날의 만선을 포함한 당의의 조선을 비칭(秘稱)하는 참위가의 적〿한 글자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반도에는 진번(眞番), 진국(辰國), 진위(辰韓), 진변(辰弁)이라는 명칭을 가진 부락국가 혹은 합중 부락국가가 있었고, 북방 고구려의 후인 발해국도 처음에 진(震)(혹은 진(振))국이라고 이름한 일이 있으니, 이들 진(眞), 진(辰)(혹 (振))은 그 근본적 어의는 어떻든─자음상 저(지나 대국을 지칭하는) 진단(震旦)의 진과 전혀 일치하여 진단(震旦)으로써 참위가 이상의 대조선에 대한 별명을 삼기에 적당한 것이 그 하나며, 또 진단(震旦)의 순한자적 의의가 역시 동방일출지(東方日出地)의 뜻을 가졌다고 하는 ‘조선’과 흡사하여 전자를 후자에 전부(轉附)할 수 있는 것이 그 하나이다. 더욱 부도음양가는 진단(震旦)의 출처가 불전에 있는 까닭으로 해서 무엇보다 먼저 이를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말 군웅의 한 사람인 궁예인물가 처음 송악에 도읍을 정할 때 국호를 일시 마진(摩震)이라고 하였던 것은 저명한 사실이어니와, 이것이야말로 진단(震旦)을 정식의 국호로 이용한 유일의 사실(史實)이라고 할 수 있는 동시에 나말 참위가의 사상에 영향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진(摩震)은 나의 해석으로는 마하진단(摩訶震旦, Maha Cinisthana) 즉 대진단(大震旦)의 약칭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마하(摩訶)는 산스크리트어로 ‘대(大)’의 뜻이니, 이는 마치 인도에서 대지나를 ‘마하지나국’이라고 (대당서역기서적 5권 참고)함과 같다. 궁예인물는 승려 출신으로 참위설의 대혹신자(大惑信者)였으므로 당시 부도음양가의 설을 흡입하기에 가장 적의하였을 것이다.
쪽수▶P173-1이렇게 中國을 指稱한 「震旦」의 名이 또 (굴러서) 어느 때 어떤 意味로 朝鮮을 別稱하게도 되었는가 함에 對하여는 可考할 文獻이 거의 끊어저, 的確히 論明할 수는 없으나, 대개 이러한(筆者의 常識에 依한) 穿鑿은 容許될 줄로 안다. ─震旦의 稱이 佛典에서 나온이만치 半島人의 이에 對한 注意도 佛敎界에서 먼저 되었을 것은 勿論이요, 그것이 特히 海東의 古 秘記 中에 많이 나타난 것을 보면 이 이름을 最初로 朝鮮에 適用하기는 浮屠陰陽家(僧侶圖讖家)에서 비롯한 것 같으며, 또 浮屠陰陽의 說은 新羅一統 時代로부터 流行하던 것인즉, 朝鮮即震旦의 說도 實相 其間에 胚胎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元來 陰陽圖讖家란 그 讖設 中에 나타나는 人名 地名 및 그 內容을 極히 隱諱的으로 神秘하게 表示하기를 좋아하야, 或은 破字(破劃)式으로 或은 象徵的으로 或은 類音類義의 他字를 借來하야 讚說(大言)을 作이 普通이니 震旦이야말로 比較的 널리 알지 못하는 窮僻한 稱號로, 또 그 漢字的 音義에 있어서 大東方(今日의 滿鮮을 包含한 當義의 朝鮮)을 秘稱하는 讖緯家의 適〿한 글자라고 할 수 있다. 古代 半島에는 眞番 辰國 辰韓 辰弁의 稱을 가진 部落國家 或은 合衆 部落國家가 있었고, 北方 高句麗의 後인 渤海國도 처음에 震(或 云 振)國이라고 이름한 일이 있으니, 이들 眞 辰 (或 振)은 그 根本的 語義는 何如했든─字音上 저(支那 大國을 指稱하는) 震旦의 震과 全혀 一致하야 震旦으로써 讖緯家 理想의 大朝鮮에 對한 別名을 삼기에 適當한 것이 그 하나며, 또 震旦의 純漢字的 意義가 亦是 東方日出地의 뜻을 가젔다고 하는 「朝鮮」과 恰似하야 前者를 後者에 轉附할 수 있는 것이 그 하나이다. 더욱 浮屠陰陽家는 震旦의 出處가 佛典에 있는 까닭으로 해서 무엇보다 먼저 이를 擇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羅末 群雄의 一人인 弓裔가 처음 松岳에 都할 때에 國號를 一時 摩震이라고 하▶P174-1였던 것은 著名한 事實이어니와, 이것이야말로 震旦을 正式의 國號로 利用한 惟一의 史實이라고 할 수 있는 同時에 羅末 讖緯家의 思想에 影響된 것이 아닌가 한다. 摩震은 나의 解釋으로는 摩訶震旦(Maha Cinisthana) 即 大震旦의 略稱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摩訶는 梵語로 「大」의 義니, 이는 마치 印度에서 大支那를 「摩訶至那國」이라고 (大唐西域記 卷五 參考)함과 같다. 弓裔는 僧侶 出身으로 讖緯說의 大惑信者였으므로 當時 浮屠陰陽家의 說을 吸入하기에 가장 適宜하였을 것이다.
이상 서술한 바를 요약하면, ‘진단(震檀)’은 즉 진단(震旦)으로서 ‘단(旦)’이 조선 태조의 후위(後諱)와 맞닿으므로, 본조에서는 그 대신 ‘단(檀)’자를 쓴 것에 불과하거니와, 반도에서 진단(震旦)의 명칭을 이용하기는 나대의 승려, 참가에서 위(緯) 비롯하여, 궁예인물왕에 이르러 특히 국호로 채용하고, 그 후 고려를 통하여 국초에 이르기까지 비기 중에 오히려 그 이름이 전하여 온 것이다. 조선인의 취한 진단(震旦)의 의의는 고대 인도인이 취한 그것과는 달라, 특히 금일의 만주 외 반도를 포함한 지역의 (말하자면) 해동대국의 칭호로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취한 의의는 또 이거와도 달라 비교적 광범한 뜻을 가졌으니, 우리는 회칙이 이미 언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목적하는 연구의 범위가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 제국(諸國)을 포괄한 이상, 진단(震旦)을 협의로 취하지 않고 광의로 거의 동양과 같은 뜻으로 취한 것을 끝으로 일러두는 바이다.
쪽수▶P174-2以上 說述한 바를 要約하면, 「震檀」은 即 震旦으로서 「旦」이 朝鮮 太祖의 後諱와 觸하므로, 本朝에서는 그 대신 「檀」字를 用한 것에 不過하거니와, 半島에서 震旦의 稱을 利用하기는 羅代의 僧侶 讖家에서 緯 비롯하야, 弓裔王에 이르러 特히 國號로 採用하고, 그 후 高麗를 通하야 國初에 이르기까지 秘記 中에 오히려 그 이름이 傳하여온 것이다. 朝鮮人의 取한 震旦의 意義는 古代 印度人의 取한 그것과는 달라, 特히 今日의 滿洲외 半島를 包含한 地域의 (말하자면) 海東大國의 稱呼로 取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今日 吾人의 取한 意義는 또 이거와도 달라 比較的 廣汎한 뜻을 가젔나니, 吾人은 會則이 이미 言明한 바와 같이 吾人의 目的하는 研究의 範圍가 朝鮮 中心으로 하야 隣近 諸國을 包括한 以上, 震旦을 狹義로 取하지 않고 廣義로 거의 東洋과 같은 뜻으로 取한 것을 끝으로 一言하여 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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