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SNU24-1)"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잔글 (김지선님이 최창익 문서를 넘겨주기를 만들지 않고 최창익(SNU24-1) 문서로 이동했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
<html>
 +
<head>
 +
<meta name="robots" content="noindex">
 +
</head>
 +
</html>
 
{{글상자|
 
{{글상자|
 
|내용=<center><big>'''👩🏻‍🏫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분류:2024-1 BigData(SNU)|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 작성했습니다.'''</big></center>
 
|내용=<center><big>'''👩🏻‍🏫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분류:2024-1 BigData(SNU)|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 작성했습니다.'''</big></center>

2024년 10월 23일 (수) 18:07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 작성했습니다.


인물(Person) 목록으로 이동하기



최창익(崔昌益)
Choi Chang-ik.jpg
출처 : 위키백과
 
한글명 최창익 한자명 崔昌益 영문명 Choi Chang ik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896년 몰년 1957년 출신지 조선 함경도 온성 남양면 전공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 조선로동당 고문 겸 당무위원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중국으로 유학하여 북경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20년대에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아 활동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참여하였습니다. 남조선로동당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며 남한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46년 북으로 월북하여 북한 정치에 참여하였습니다. 북한 내각의 주요 직책을 맡으며 활동했습니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습니다.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숙청되었습니다. 1957년경, 숙청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구체적인 사망 경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1]


생애


생애 초반

최창익은 1896년 함경북도 온성(穩城) 남양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일이 한동안 전해지지 않은 이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반당 종파분자로 숙청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언급 금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근처의 신식 소학교에 들어갔고, 1917년 경성부로 올라가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기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 3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그 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2]


일본 유학 생활

그 뒤 세이소쿠 영어학교기관(正則英語學校)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기관(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했고, 일본유학중 학우회단체(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대학을 나온 후 비밀리에 조선에 잠입 충청남도 강경, 전북특별자치도 전주, 옥구, 군산 등지에서 신문물의 존재와 사회주의, 평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순회강연을 하다가 일시 조선총독부 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23년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 참여하였으며, 그해 7월 암태도 소작 쟁의가 발생하자 이를 지지하였다. 7월 12일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는 최창익인물, 김영엽인물 등 연사들이 암태도 소작인들을 성원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같은 해 10월 이른바 노동대회사건에 연루되어 이시완인물(李時琓), 강택진인물(姜宅鎭), 장일환인물(張日煥)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헌병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풀려나기도 하였다. 1924년초 만주에 갔다가 1924년 4월 21일 조직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해 12월 다시 입국하여 경성공산주의청년회의 별동조직인 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3]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활동

1925년 2월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1925년 모스크바 국제공산당대회에 서울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돌아오던 길에 만주 영안현공간(寧安縣)에 내려 김좌진인물(金佐鎭), 김종진인물, 김진익인물, 김혁인물(金赫) 등이 만든 신민부단체(新民府)에 가담하였다가 1925년 10월 탈퇴하고 열차편으로 귀국했다. 그해 10월 서울청년회 신민부 가담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 한빈인물(韓斌), 이경호인물(李京鎬), 이영인물(李英) 등과 함께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1926년 신민부 단원 박두희인물(朴斗熙) 등과 함께 소련에서 열리는 공산주의자 회의에 신민부 접근대표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어 블라디보스토크공간에 파견되었으며, 김영만인물(金榮萬)과 함께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 대하여 화요파 조선공산당은 비정통, 총의에 의해 열린 당이 아니니 승인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로 하였다. 그해 11월 모스크바 대학교기관에서 변증법을 연구하였다. 1928년 2월 경성부에서 조선인 통합 공산당 조직을 결성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검거된 통일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6년 동안 투옥되었다. 1934년 석방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의 주변을 감시하였다. 1934년 12월 좌파 성향의 출판사 신건설사 사건으로 경성부 삼청동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탈옥, 1935년 1월초 중국으로 망명한다.[4]





연구


무장 독립 운동

이 해부터 김원봉인물의 조선의용대단체에 가담하였고, 동시에 조선민족혁명당단체에 동참하여 함께 활동하였으다. 그러나 김규식인물 등과 불화하였다. 1936년 6월 최창익 등 50여 명은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한다고 선포하고 조선청년전위동맹단체을 창건하고, 최창익이 위원장이 되었다. 그해 전위동맹 본부를 한커우공간(漢口) 옮겼다. 전위동맹에서 활동할 무렵 그는 이건우인물(李建宇)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37년에는 운암 김성숙인물 등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단체을 결성하여 연대하였다. 그 뒤 1938년 5월 다시 충칭공간으로 돌아가 김원봉이 조직한 재무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으나, 전위동맹 조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협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대일선전전에 주력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는 부르주아와 결탁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원봉과 의사충돌 뒤 결별하고 화북으로 가게 된다. 망명생활 중 그는 최창석, 최창순, 최동우, 이건우, 최태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였다. 1938년 10월 중국의 무한(武漢)이 일본군에 함락된 뒤 전시복무단의 일부를 이끌고 연안공간으로 가서 '청년연합회' 조직에 참가한다.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하다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충칭을 떠났다.[5]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최창익 Institution: 일본 와세다 대학교 A takesCourseAt B
Person: 최창익 Institution: 학우회 A isMemberOf B
Person: 최창익 Group: 조선의용대 A isMemberOf B



Timeline


Timline Google Spreadsheet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위키백과online, 위키백과.
  2. 위키백과online, 위키백과.
  3. 위키백과online, 위키백과.
  4. 위키백과online, 위키백과.
  5. 위키백과online,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