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학인의 조선문학에 대한 태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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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0번= {{TagSpage|103-3}}伏開頃者 李克墩爲慶尙監司 李宗準爲都事時 將所刊酉陽雜俎 唐宋時話 遺山樂府及破閑集 補閑集 太平 通戴等書以獻 旣 命藏之內府 旋下唐宋詩話 破閑 補 閑等集 令臣等略註歷代年號人物出處以進 臣等竊惟 帝王之學 當潜心經史以講究修齊治平之要 治亂失得 之跡耳 外此皆無益於治道 而有妨於聖學 克墩等豈不 知雜俎詩話等書 爲恠誕不經之說 浮華戲劇之詞 而必 進於上者 知殿下留意於詩學而中之也 人主所尙 趨之 者衆 克墩尙爾 况媒進者乎 若此依誕戲劇之書 殿下 當如淫聲美色而遠之
 
|원문10번= {{TagSpage|103-3}}伏開頃者 李克墩爲慶尙監司 李宗準爲都事時 將所刊酉陽雜俎 唐宋時話 遺山樂府及破閑集 補閑集 太平 通戴等書以獻 旣 命藏之內府 旋下唐宋詩話 破閑 補 閑等集 令臣等略註歷代年號人物出處以進 臣等竊惟 帝王之學 當潜心經史以講究修齊治平之要 治亂失得 之跡耳 外此皆無益於治道 而有妨於聖學 克墩等豈不 知雜俎詩話等書 爲恠誕不經之說 浮華戲劇之詞 而必 進於上者 知殿下留意於詩學而中之也 人主所尙 趨之 者衆 克墩尙爾 况媒進者乎 若此依誕戲劇之書 殿下 當如淫聲美色而遠之
 
|원문11번= {{TagSpage|103-4}}라 하였다. 거의 詩話, 雜書類를 淫聲美色에 比하야 이를 警戒하고 있다. 勿論 이것은 一種 脫線的 文學蔑視論이라 하여야 하겠으나, 그러나 이러한 態度도 相當히 널리 또 깊이 뿌리박힌 듯하야 지금도 아직 古漢學者 間에는 文學 即 所謂 詞章學을 輕視하는 風이 있다.
 
|원문11번= {{TagSpage|103-4}}라 하였다. 거의 詩話, 雜書類를 淫聲美色에 比하야 이를 警戒하고 있다. 勿論 이것은 一種 脫線的 文學蔑視論이라 하여야 하겠으나, 그러나 이러한 態度도 相當히 널리 또 깊이 뿌리박힌 듯하야 지금도 아직 古漢學者 間에는 文學 即 所謂 詞章學을 輕視하는 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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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2번= {{TagSpage|103-5}}그러나 이에 對하야 文學派의 學者는 어떻던가 하면 그들은 文學者인 만큼 大端히 그 態度가 달랐었다. 그들을 一一히 列擧하기는 어려우니까 여기서는 金春澤의 說을 紹介하야 보면 그는 먼저 程伊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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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3번= {{TagSpage|103-6}}一, 古之學者 惟務義情性 今之爲文者 專務悅人<br/>二, 人見六經 便謂聖人作文 不知聖人撼發胸中所蘊 自 成交耳<br/>三, 游夏何嘗秉筆 學爲詞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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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4번= {{TagSpage|103-7}}이라는 말에 明快한 反駁을 加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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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5번= {{TagSpage|103-8}}愚謂 聖人何嘗不作文 惟不養性 而只作文 則不可 且{{TagPage|104-1}}作文 豈是與養性之事 判然背馳者 聖莫過於伊尹傅說周公 而訓命及七月詩 不可謂不作文 又不可謂不悅人 所謂務悅人 有公私是非 若伊傅周公之務悅人 乃欲以感動人主 非如後來欲竊科第者比 而今觀其文 豈是率然攄發而成者 其必秉筆易藁 無疑也 且如周公苟欲使成王 知稼穡之艱則 招致一田夫 朝夕道說 豈不詳悉 或周公自爲道說於咨嗟吁咈之間 有何不可 而必爲詩 令瞽誦之  其欲悅人 庸有旣哉 想春日遲遲 采蘩祁祁等語尤能以感動成王矣 動人之道 言之不足而有文 文之不足而有樂 盖文者 居於言語音樂之間 苟曰聖人不作文則 樂亦不作矣 至如游夏之檀弓樂記  觀其製作之體 豈可曰不秉筆而學哉 伊川此言 似乎過高 不然則以文詞非其所好故然耶 朱子劇好古詩楚辭 不惟好之 盖嘗倣而爲之 頗有似之者 朱子固亦秉筆之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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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6번= {{TagSpage|104-2}}라 하였다. 그는 또 달아 여러 가지 實例를 들어 반다시 作文이 不可치 않다는 것을 主張하였으나 結局 文學의 尊重論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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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7번= {{TagSpage|104-3}}이와 같이 漢學者라 할지라도 벌서 理學派와 文學派間에 있어 文學에 對한 態度를 달리하고 있으나, 그러나 孔子도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라 極讃하여 있으니까 理學者에 있어서도 空然히 文學을 輕視할 수는 없는 것이다. 元來 文學은 經學에 本하야 性情의 眞으로부터 攄發하여야 될 것이니까 그 根本 意味에 있어서는 또한 이를 認하고 또 讃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거기에 警戒할 바는 文學이 文學自身을 爲한 文學이 되지 않을 것인대 이 點은 文學派의 學者에 있어서도 亦是 틀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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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8번= {{TagSpage|104-4}}따라서 文學中에도 小說類의 所謂 軟文學은 特別한 警戒를 받어 왔던 것이니 朴燕岩 같은 이도 小說을 썼음으로 一部世俗學者로부터 僞學의 學者라는 評을 받었거니와 沈𨫃라는 이는 小說에 對하야 모진 筆鋒으로 그 著 「松泉筆譚」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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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9번= {{TagSpage|104-4}}稗官小說 自漢唐以來代有之 如搜神等書 語多慌愧 而文頗雅馴 其他諸種間 亦有實事 可以補史家之闕遺 備詞場之採綴者 至於水滸傳 西遊記之屬 雖用意新巧 命辭環奇 別是一種文字 非上所稱諸書之例也 明人劇賞之 加以俗尙輕薄波蕩 輒贋作一副說話 以售於{{TagPage|105-1}}世 大抵皆演成史傳 無非男女交歡事也 演史出而正史 事蹟汨亂 男女之事及多淫媒 尤非壯士所可近眼 而近 來人 鮮篤實 喜以此等小說作 爲消寂遺日之資 甚可 歡也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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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0번= {{TagSpage|105-2}}이라 하였다. 漢字漢文으로 表記된 것이라도 그것이 小說이라면 그러한 特別한 警戒를 받어 왔거든, 하물며 漢學者의 눈에는 文字같이도 보이지 않는 諺文小說에 있어서는 거의 말할 必要조차 없으나, 洪直弼은 또 그著 梅山雜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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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1번= {{TagSpage|105-3}}吾東士大夫閩門之行極正 三代之所未有 無愧漢書所 云婦人貞信之稱 而近世大防漸壞 往往有不忍言者 寔由世教衰 禮不興行以致然耳 若是者 何以當華人所贊 禮樂之邦 仁義之國哉 東俗教女子以諺而不以文 是故 生不聞聖哲成訓 既不識三綱五常之爲重 至若諺稗 皆是淫褻不經之說 而婦人不知都出於虛贋 認以惇史 其反道悖德 咸從此出 自朝家嚴禁諺碑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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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2번= {{TagSpage|105-4}}이라 하야 諺文小說은 마땅히 法律로써 이것을 嚴禁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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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3번= {{TagSpage|105-5}}小說에 對한 理解가 너무나 不足하고 그 論調가 또 너무나 壯烈한데 對하야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으나, 이는 要컨댄 小說이 그 文은 軟弱하고 그 實은 荒唐無稽할 뿐 아니라 늘 男女交歡之事로 하기 때문에 世道를 害하고 利益함이 없어 性情의 眞으로부터 攄發한 正當한 文學에 違反된다는 것이다. 創作인 以上 正史의 事蹟과 다를 것도 判然한 일이고 또 人生의 산生活을 描寫하는 小說이라면, 男子가 나오고 女子가 나올 것도 不得已한 既定事實이라 하여야 될 것을, 이것을 먼저 認識하지 못한다면 본대 그 말에 傾注할 必要조차 없지마는, 그래도 옛적 漢學者의 小說에 對한 一部的 態度라 하야 들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 紹介하게 된 沈𨫃라던지 洪直弼이라던지 하는 이들은 比較的 近代의 人物들이란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 朝鮮小說의 發達이 비록 늦었다 하드라도 李朝中葉에는 相當히 그 作品이 나왔었고 李朝初葉에도 벌서 傳奇體的 小說의 出現이 있었건만, 어찌하야 末期에서야 비로소 그 對한 態度를 表示하게 되었는가. 생각컨댄 이것도 外來文化의 한 影響이라 하지 않을 수 없{{TagPage|106-1}}을 듯하니, 李期는 國初以來 朱子學으로 墻壁을 싸고 모든 精神文化는 글로서 醇化되여 왔었다하여 可할 것이나 鄰邦支那에서는 明末濟初에 亙하야 文藝學이 大盛하고 더욱이 淸朝에 와서는 實是學이 勃興하여 왔었다. 文化上 언제든지 그 影響을 받지 않고는 마지않는 支那와 朝鮮과의 關係인만큼 淸朝의 熟爛한 文化는 곧 朝鮮에 影響하야 李朝 英正時代에는 洪水가 밀어오듯이 淸朝實是學이 移入하여 오고, 달아서 文藝學이 掩襲하여 왔었다. 여기에 沈滯하였든 朝鮮學界는 새로운 힘을 얻어 再燃하야 可히 文藝의 復興時代를 演出하였다 함은 一般史 家의 共認하는 바이나, 文學界에 있어서도 그 影響이 또한 적지 않었으니 漢學者間 小說을 云云한 것도 其實은 이 時代에 와서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前이라 하면 그야말로 視而不見하는 態度를 固執하여 왔던 것이다. 따라서 小說이 正史를 汨亂하게 風紀를 紊亂하게 한다고 이르는 만큼도 漢學者의 小說에 對한 態度는 消極的이나마 얼마큼 關心을 가지었다고 하여야 하겠으니, 비록 攻駁을 한다 하드라도 읽지 않고는 하지 못할 것이어던, 그 읽은 것만이라도 그 以前에 比하면 그들의 思想에 一大變革을 일으킨 것이고 小說文學 對하야는 새로운 認識을 가저왔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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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4번= {{TagSpage|106-2}}다음에야 詩歌에 對하야 보면 詩는 天機의 顯現한 바라 하야 支那에서도 特히 尊重되었었고, 歌도 또한 詩에 다음 갈 것으로 더욱이 歌없는 自然에 나와 王政의 得失과 風俗의 隆替를 竊視할 수 있는 것이라 하야, 일즉부터 그 採集의 方法까지 講究되었던 것이다. 그런대 朝鮮學者는 朝鲜의 詩歌를 보는 눈이 어두워 世宗朝에 朴堧이 詩歌의 價値를 絶叫하고, 여러 번 朝議에 그 採集을 提唱하였으나 그에 應하는 사람이 別로 없었다. 또 中宗朝에 元繼蔡라는 이가 亦是 朴堧과 同樣의 意見을 朝議에 내었으나 이것 또한 有耶無耶로 되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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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5번= {{TagSpage|106-3}}그러나 詩歌는 小說과 性質이 크게 달라 이를 小說 同樣으로 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李朝의 學者는 이것을 어떻게 보았느냐하면 申象村은 「詩餘」라 하는 말을 빌어 說明하였다. 지금 그의 말을 引用하야 보면 그는 詩餘序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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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6번= {{TagSpage|107-1}}余旣歸田 世固棄我 而我且惓於世故矣 顧平昔榮顯 已糠粃土葺 惟遇物諷詠則 有馮婦下車之病 有所會心 輒形詩章 而有餘繼 以方言而腔之 而記之以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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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7번= {{TagSpage|107-2}}이라 하였다. 即 이 意味는 老後 田園에서 自適할 때 마침 詩興이 일어나면 詩章의 形式을 빌어 이를 表現하여 보거니와 그래도 아직 興이 未盡하고 餘韻이 남으면 그 때에는 朝鮮말로서 歌의 形式에 읊어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詩餘라 하는 말을 借用하였는데, 詩餘는 본시 唐人의 歌詞의 異稱으로, 혹은 長短句라고도 하야 역시 詩의 餘韻이란 意味에서 由來된 用語니, 蜀中詩話에 「唐人長短句 時之餘也」라고 하였다. 그러나 象村의 所謂詩餘는 支那式의 歌詞를 意味한 것이 아니라 朝鮮의 詩歌를 말한 것임은 勿論이다. 이것은 생각컨댄 漢詩는 支那의 詩로서 萬若 朝鮮사람이 일로서 詩를 짓는다 하면 암만하여도 가슴 가운대 일어나는 鬱憤을 다시 漢語에 飜譯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詩가 詩인 가장 重大한 點은 그 內容에 그 形式이 있을 일이다. 그래서 申象村과 같은 大文豪, 即 形式만의 漢詩를 짓들 않고 詩의 眞髓에 깊이 들어간 申象村에 있어서는 벌서 漢詩만으로는 時興 폐기에 滿足하지 않고, 朝鮮語에 依하야 또 다시 읊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朝鮮의 詩歌를 詩餘라 하였으나 그 實은 「詩粹」라 하여 可할 것이다. 即 胸中의 詩興을 漢詩로 짓고 지어서 表現하여도 그 정말 純粹한 興이야 漢詩로서는 到底히 表現하여 낼 수 없고 朝鮮말로서야 그를 表現하야 얻을 수 있다면 암만하여도 「詩粹」라 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일즉이 退溪도 著 陶山十二曲序文에 이와 비슷한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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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8번= {{TagSpage|107-3}}老人素不解音律 而猶知厭聞世俗之樂 閃閑居養疾之餘 凡有感於情性者 每發於詩 然今之詩 異於古之詩 可詠而不可歌也 如欲歌之 必綴以俚俗之語 蓋國俗音節 所有不得不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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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9번= {{TagSpage|107-4}}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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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30번= {{TagSpage|107-5}}이와 같이 朝鮮사람으로서 정말 다운 詩다운 詩를 쓸랴면 아무래도 朝鮮의 詩歌가 아니고는  滿足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金西浦는 西浦漫筆에서 다음과 같은 名言을 發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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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31번= {{TagSpage|108-1}}人心之發於口者爲言 言之有節奏者爲歌詩文賦 四方 之言雖不同 荀有能言者 各因其言而節奏 則皆足以動 天地通鬼神 不獨中華也 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假令十分相似 只是鸚鵡之人言而閭巷間樵童汲婦 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同日而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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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32번= {{TagSpage|108-2}}이라고. 即 朝鮮사람이 漢文을 배워 漢文를 짓는다 하지마는 된 것은 一種 鸚鵡의 사람말 흉내에 지나지 못하고, 그보다는 차라리 閭間의 樵童, 汲婦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정말  詩의 價値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 對하여는 그의 從孫 北軒에 있어서도 亦是 같었으니 그 散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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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33번= {{TagSpage|108-3}}東人成效古人爲歌詞 而所辨惟四聲 其中淸濁虛實則 昧然不知 何與中華樂律相合哉 其以東國言語爲之者 不論共自合於東國樂律與否 就其辭意 或多悠揚婉切 眞可以動人聽感人心者 不惟勝於效古之歌詞 其視詩文諸作 又不啻過之 無他眞與假之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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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34번= {{TagSpage|108-4}}라 하야 바로 朝鮮의 詩歌를 詩의 眞이라 하고, 漢詩를 그에 對하야 詩의 假라 하였다. 우리로 보아 가장 切實한 말일 줄 생각하나, 이는 要컨대 詩歌는 다른 文學과도 달라 日常 內容만이 아니라 形式을 主張하는 文學인 때문에 그런 것이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漢語는 우리의 말과는 根本的으로 그 系統과 또 그 形態를 달리하야 우리들의 微妙한 感情을 如實히 表現함에는 거의 不適當한 말이다. 따라서 漢學者의 朝鮮詩歌에 對한 態度는 제절로 小說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過去에 우리 學界에는 西浦와  北軒이 많지 않았으며, 또 그들이라 할지라도 그 全體思想에 있어서는 亦是 朝鮮文學은 늘 第二次的 地位에 있어 얼마큼 그에 對하야 理解와 同情을 가젔는 데에 지나지 못하였음을 나는 慨嘆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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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35번= {{TagSpage|108-5}}以上 朝鮮小說과 詩歌에 對한 李朝漢學者의 態度를 簡單히 一瞥하였으나 一言으로 그 結論을 말한다면 小說에 對하여는 全然 價値를 理解하지 못하였고, 詩歌에 對하여는 比較的 그 理解가 두터웠으나 아즉 그 態度가 極히 消極的이여서 全혀 詩餘的으로 取扱하여 온 것이 事實이{{TagPage|109-1}}다. 勿論 이것은 李朝學人 全體의 意思를 表示한 말이라고는 아즉 할 수 없으나 그러나 그들의 大部分이 가지고 있는 態度란 것은 속일 수 없는 事實이니, 여기 따라 그들의 朝鮮文學上 活躍이란 것도 제절로 明確한 일이고, 또 直接間接으로 이것이 朝鮮文學上에 어떠한 影響을 끼첬을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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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36번= {{TagSpage|109-2}}(附記) 이 小考는 筆者가 昨年十一月二十日 城大朝鮮語文學會 主催 講演會에서 發表하였든 바의 一部를 整理한 것이다.
  
|해독문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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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번= 여기서 학인(學人)이라 하는 것은 물론 문자 그대로 학문하는 사람 즉 학자를 의미하는 말이 되겠으나 그러나 종래 우리들의 선배는 오늘날 우리들이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널리 일반으로 학문을 할 줄 아는 사람 혹은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에까지 그 내용을 확장하여 써왔다. 또 옛날사람들은 학문이라면 곧 한학(漢學)을 의미하였고,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조선문학(朝鮮文學) 따위는 학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를 것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 학인이라 하는 것은 한학을 전공하고 또 널리 학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에 쓰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들이 조선문학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여 왔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거니와,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조선의 한문학과 조선문학과의 관계를 간단히 말하여 두려한다.
|해독문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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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번= 대체로 조선문학이라면 이것이 학문연구의 대상이 되여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이전에는 그리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의의라든지 혹은 그가 가지고 있는 연구의 범위란 것도 충분히 논란되지 않은 채 오늘에 남아 있는 듯하나, 더욱이 이와 한문학과의 관계 같은 것은 앞으로 조선문학을 체계세우는 데에 있어서 극히 중대한 문제이면서도 실로 그 견해가 확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여기 말하려는 데는 얼마큼 독단이 있다는 것을 미리 양해하여 주기를 바라거니와, 조선은 오랜 옛적부터 한문화(漢文化)에 접촉하여 그 문자를 배우고 글을 배워왔었다. 그런데 조선의 고유문자인 언문(諺文)은 그보다 훨씬 후대 곧 이조에 들어와서 비로소 발명되었으니까 이것이 발명되기 전은 물론이고 발명된 이후라 할지라도 사상감정의 중요한 발표는 주장 한자한문에 의하여 되어 왔었다. 그러고도 그에 대하여는 조금도 이국문자시 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정확한 글 표준적 발표 기관이라고, 확신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 조선에 발달한 한문학에 대한 한 결코 대안화(對岸火)를 보듯이 냉대할 수 없고 도리어 그 기분으로 보아 그냥 조선문학이 될 듯도 하다.
|해독문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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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3번= 그러나 또 입장을 바꾸어서 조선문학으로부터 생각하여 보면 조선문학은 어디까지든지 조선의 문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조선어로 표현된 것이 아니면 이를 조선문학이라 인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조선에서 발달하였다는 한문학이라 할지라도 당연히 조선문학의 영역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한문은 조선에 일찍이 문자 없는 시대에 들어와서 조선 사람에게 애용되었을 뿐 아니라 내종(乃終)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자국문시 되어버려 기다(幾多)의 작품을 산출하고 그것이 한문으로 표기되었건만 순조선문보다도 더 잘 조선인의 사상감정생활을 표현하여 왔음을 생각할 때, 한문학을 조선문학으로부터 제거하기에는 얼마큼 주저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 하여 곧 한문학 즉 조선문학이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조선문학은 조선의 문학인 이상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영역을 보지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공연히 자기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머지않아 자기를 그 와해의 운명에 던짐과 같아서 문화라든지 문학에 대한 의식이 전연 옛날과 달라진 오늘에 있어서도 한문학 조선문학 중에 넣는다는 것은 일고(一顧)의 가치가 없는 우론에 지나지 못하겠거니와 그러나 지나간 과거의 문학시대 즉 아직 한문학을 자국문학과 동양시(同樣視)하던 시대의 한문학은 감히 이것을 조선문학의 일부분이라고 보는 것은 관계가 없을 듯하다. 이를 좀 더 사세(些細)히 말하면 조선에 있어서 조선사람 손에 의하여 발달되어 온 한문학은 조선문학의 시가, 소설, 동양으로 그 일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한문학 즉 조선문학이라든지 조선문학 즉 한문학이라는 것이 아니라 한문학은 조선문학의 일부분이 되어서 큰 조선문학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해독문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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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4번= 실로 독단무모한 생각일지 모르나 나는 대강 이러한 입장에서 조선문학을 생각하여 보고자한다. 그러나 이 논문에 있어서 조선문학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광의미의 조선문학이 아니고 훨씬 좁은 의미의 조선문학, 즉 조선어로 표기된 순조선문학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이 점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해독문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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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5번= 그러면 일로부터 본론에 들어가서 이조 언문이 제정된 이래 그 문학에 대하여 한학 전공의 학인들이 여하한 태도로 임하였는가를 말하고자 하나, 언문을 제정하던 그 당시의 일반적 사회는 지나문화에 상당히 침윤하여 벌써 새로 제작된 언문에 대하여는 그다지 기대를 갖지 않았던 것이다. 기대인커녕 그 중에는 도리어 불필요시하는 자도 있었으니 저 {{TagPerson|[[최만리]]}}가 {{TagPerson|[[세종대왕]]}}께 언문반포의 반대 상주(上奏)를 하였다는 것은 벌서 너무도 유명한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그 일인의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도리어 그들 그 당시 여론의 일부분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듯이 나에게는 생각되나, 기실 일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세종대왕이 언문을 반포하여 극력(極力) 그 사용을 장려하시었으나 그 효과는 별로 나타나지 않고 세상은 그냥 한문제일주의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학인들의 조선문학에 대한 태도는 일언으로 말하면 냉담하였다 할 수밖에 없었거니와 그러나 학인이라 할지라도 거기는 또 이학(理學)을 주로 하는 학인과 문학을 주로 하는 학인에 나뉠 것이니 그들의 사이에도 제절로 그 태도가 달랐을 것도 부득이하였다.
|해독문6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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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6번= 원래 이학자라 하면 문학에 대하여는 그다지 이해를 가지지 못한 듯하여 {{TagPerson|[[율곡]]}}과 같은 대학자도 그 편저인 {{TagBook|[[「정언묘선(精言妙選)」]]}} 서문에
|해독문7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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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7번= <blockquote no="01">詩雖非學者能事 亦所以吟詠性情 宣暢淸和以滌胸中之滓穢 則亦存省之一助</blockquote>
|해독문8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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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8번= 라 하였다. 즉 시(詩)라는 것은 학자가 너무 좋아할 바는 아니나, 그것이 {{TagPerson|[[공자]]}}의 소위 사무사(思無邪)의 작(作)인 것 같으면 그를 음영(吟詠)하여 지중(智中)의 재예(滓穢)를 씻어 바리는 일도 있어 유익하나 그렇지 않으면 학문을 방해할 따름이고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해독문9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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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9번= 율곡의 이 생각은 거의 이학자의 일반적 생각이라 하여도 옳으나, 그러나 이것이 일보를 오(誤)하면 문학의 경시론(輕視論) 문학의 배척론(排斥論)에까지도 이르기가 쉬우니, 일례를 들면 성종조에 {{TagPerson|[[김심(金諶)]]}}이란 사람이 있는데 이이는 당시 홍문관 부제학에 있어 당시 경상도감사 {{TagPerson|[[이극돈(李克墩)]]}}이 {{TagBook|[[유양잡조(酉陽雜俎)]]}}, {{TagBook|[[당송시화(唐宋詩話)]]}}, {{TagBook|[[유산악부(遺山樂府)]]}}, {{TagBook|[[파한집(破閑集)]]}}, {{TagBook|[[보한집(補閑集)]]}}, {{TagBook|[[태평통직(太平通職)]]}} 등의 서를 간행하여 국왕께 헌상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차자(箚子)를 올린 것이 실록에 보인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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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0번= <blockquote no="02">伏開頃者 李克墩爲慶尙監司 李宗準爲都事時 將所刊酉陽雜俎 唐宋時話 遺山樂府及破閑集 補閑集 太平 通戴等書以獻 旣 命藏之內府 旋下唐宋詩話 破閑 補 閑等集 令臣等略註歷代年號人物出處以進 臣等竊惟 帝王之學 當潜心經史以講究修齊治平之要 治亂失得 之跡耳 外此皆無益於治道 而有妨於聖學 克墩等豈不 知雜俎詩話等書 爲恠誕不經之說 浮華戲劇之詞 而必 進於上者 知殿下留意於詩學而中之也 人主所尙 趨之 者衆 克墩尙爾 况媒進者乎 若此依誕戲劇之書 殿下 當如淫聲美色而遠之</blockquote>
|해독문1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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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1번= 라 하였다. 거의 시화(詩話), 잡서류(雜書類)를 음성미색(淫聲美色)에 비하여 이를 경계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일종 탈선적 문학멸시론이라 하여야 하겠으나, 그러나 이러한 태도도 상당히 널리 또 깊이 뿌리박힌 듯하여 지금도 아직 옛 한학자 간에는 문학 즉 소위 사장학(詞章學)을 경시하는 풍이 있다.
|해독문1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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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2번= 그러나 이에 대하여 문학파(文學派)의 학자는 어떻던가 하면 그들은 문학자인 만큼 대단히 그 태도가 달랐었다. 그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려우니까 여기서는 {{TagPerson|[[김춘택(金春澤)]]}}의 설을 소개하여 보면 그는 먼저 {{TagPerson|[[정이천(程伊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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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3번= <blockquote no="03">一, 古之學者 惟務義情性 今之爲文者 專務悅人<br/>二, 人見六經 便謂聖人作文 不知聖人撼發胸中所蘊 自 成交耳<br/>三, 游夏何嘗秉筆 學爲詞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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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4번= 이라는 말에 명쾌한 반박을 더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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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5번= <blockquote no="04">愚謂 聖人何嘗不作文 惟不養性 而只作文 則不可 且(→104)作文 豈是與養性之事 判然背馳者 聖莫過於伊尹傅說周公 而訓命及七月詩 不可謂不作文 又不可謂不悅人 所謂務悅人 有公私是非 若伊傅周公之務悅人 乃欲以感動人主 非如後來欲竊科第者比 而今觀其文 豈是率然攄發而成者 其必秉筆易藁 無疑也 且如周公苟欲使成王 知稼穡之艱則 招致一田夫 朝夕道說 豈不詳悉 或周公自爲道說於咨嗟吁咈之間 有何不可 而必爲詩 令瞽誦之  其欲悅人 庸有旣哉 想春日遲遲 采蘩祁祁等語尤能以感動成王矣 動人之道 言之不足而有文 文之不足而有樂 盖文者 居於言語音樂之間 苟曰聖人不作文則 樂亦不作矣 至如游夏之檀弓樂記  觀其製作之體 豈可曰不秉筆而學哉 伊川此言 似乎過高 不然則以文詞非其所好故然耶 朱子劇好古詩楚辭 不惟好之 盖嘗倣而爲之 頗有似之者 朱子固亦秉筆之人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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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6번= 라 하였다. 그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반드시 작문이 불가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문학의 존중론(尊重論)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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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7번= 이와 같이 한학자라 할지라도 벌써 이학파와 문학파 간에 있어 문학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고 있으나, 그러나 공자도 <cite no="01">"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cite>라 극찬하여 있으니까 이학자에 있어서도 공연히 문학을 경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래 문학은 경학(經學)에 기초하여 성정(性情)의 진(眞)으로부터 터발(攄發)하여야 될 것이니까 그 근본 의미에 있어서는 또한 이를 인하고 또 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거기에 경계할 바는 문학이 문학 자신을 위한 문학이 되지 않을 것인데 이 점은 문학파의 학자에 있어서도 역시 틀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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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8번= 따라서 문학 중에도 소설류의 소위 연문학(軟文學)은 특별한 경계를 받아 왔던 것이니 {{TagPerson|[[박연암(朴燕岩)]]}} 같은 이도 소설을 썼으므로 일부 세속학자로부터 위학(僞學)의 학자라는 평을 받았거니와 심재(沈梓)라는 이는 소설에 대하여 모진 필봉으로 그 저 {{TagBook|[[「송천필담(松泉筆譚)」]]}}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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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9번= <blockquote no="05">稗官小說 自漢唐以來代有之 如搜神等書 語多慌愧 而文頗雅馴 其他諸種間 亦有實事 可以補史家之闕遺 備詞場之採綴者 至於水滸傳 西遊記之屬 雖用意新巧 命辭環奇 別是一種文字 非上所稱諸書之例也 明人劇賞之 加以俗尙輕薄波蕩 輒贋作一副說話 以售於世 大抵皆演成史傳 無非男女交歡事也 演史出而正史 事蹟汨亂 男女之事及多淫媒 尤非壯士所可近眼 而近 來人 鮮篤實 喜以此等小說作 爲消寂遺日之資 甚可 歡也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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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0번= 이라 하였다. 한자한문으로 표기된 것이라도 그것이 소설이라면 그러한 특별한 경계를 받아 왔거든, 하물며 한학자의 눈에는 문자같이도 보이지 않는 언문소설에 있어서는 거의 말할 필요조차 없으나, {{TagPerson|[[홍직필(洪直弼)]]}}은 또 그 저 {{TagBook|[[「매산잡식(梅山雜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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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1번= <blockquote no="06">吾東士大夫閩門之行極正 三代之所未有 無愧漢書所 云婦人貞信之稱 而近世大防漸壞 往往有不忍言者 寔由世教衰 禮不興行以致然耳 若是者 何以當華人所贊 禮樂之邦 仁義之國哉 東俗教女子以諺而不以文 是故 生不聞聖哲成訓 既不識三綱五常之爲重 至若諺稗 皆是淫褻不經之說 而婦人不知都出於虛贋 認以惇史 其反道悖德 咸從此出 自朝家嚴禁諺碑 云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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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2번= 이라 하여 언문소설은 마땅히 법률로써 이것을 엄금(嚴禁)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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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3번= 소설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하고 그 논조가 또 너무나 장렬한데 대하여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으나, 이는 요컨대 소설이 그 문(文)은 연약하고 그 실(實)은 황당무계할 뿐 아니라 늘 남녀 교환지사로 하기 때문에 세도(世道)를 해하고 이익함이 없어 성정의 진으로부터 터발한 정당한 문학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창작인 이상 정사(正史)의 사적(事蹟)과 다를 것도 판연한 일이고 또 인생의 산생활을 묘사하는 소설이라면, 남자가 나오고 여자가 나올 것도 부득이한 기정사실이라 하여야 될 것을, 이것을 먼저 인식하지 못한다면 본대 그 말에 경주(傾注)할 필요조차 없지마는, 그래도 옛적 한학자의 소설에 대한 일부적 태도라 하여 들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 소개하게 된 심재라든지 홍직필이라든지 하는 이들은 비교적 근대의 인물들이란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 조선소설의 발달이 비록 늦었다 하더라도 이조 중엽에는 상당히 그 작품이 나왔었고 이조 초엽에도 벌써 전기체적 소설의 출현이 있었건만, 어찌하여 말기에서야 비로소 그 대한 태도를 표시하게 되었는가. 생각컨대 이것도 외래문화의 한 영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니, 이기(李期)는 국초 이래 주자학으로 장벽을 싸고 모든 정신문화는 글로서 순화되어 왔었다하여 옳을 것이나 인방(鄰邦) 지나(支那)에서는 명말제초에 선(亙)하여 문예학(文藝學)이 대성하고 더욱이 청조에 와서는 실시학(實是學)이 발흥하여 왔었다. 문화상 언제든지 그 영향을 받지 않고는 마지않는 지나와 조선과의 관계인만큼 청조의 숙란(熟爛)한 문화는 곧 조선에 영향하여 이조 영정시대에는 홍수가 밀어오듯이 청조실시학이 이입하여 오고, 따라서 문예학이 엄습하여 왔었다. 여기에 침체하였던 조선학계는 새로운 힘을 얻어 재연(再燃)하여 가히 문예의 부흥시대를 연출(演出)하였다 함은 일반 사가(史家)의 공인하는 바이나, 문학계에 있어서도 그 영향이 또한 적지 않았으니 한학자 간 소설을 운운한 것도 기실은 이 시대에 와서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전이라 하면 그야말로 시이불견(視而不見)하는 태도를 고집하여 왔던 것이다. 따라서 소설이 정사(正史)를 곤란하게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고 이르는 만큼도 한학자의 소설에 대한 태도는 소극적이나마 얼마큼 관심을 가지었다고 하여야 하겠으니, 비록 공박을 한다 하더라도 읽지 않고는 하지 못할 것이거든, 그 읽은 것만이라도 그 이전에 비하면 그들의 사상에 일대변혁을 일으킨 것이고 소설문학 대하여는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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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4번= 다음에야 시가(詩歌)에 대하여 보면 시는 천기의 현현한 바라 하여 지나에서도 특히 존중되었었고, 가도 또한 시에 다음 갈 것으로 더욱이 가없는 자연에 나와 왕정의 득실과 풍속의 융체를 절시(竊視)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일찍부터 그 채집의 방법까지 강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학자는 조선의 시가를 보는 눈이 어두워 세종조에 {{TagPerson|[[박연(朴堧)]]}}이 시가의 가치를 절규하고, 여러 번 조의(朝議)에 그 채집을 제창하였으나 그에 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또 중종조에 {{TagPerson|[[원계채(元繼蔡)]]}}라는 이가 역시 박연과 동양(同樣)의 의견을 조의에 내었으나 이것 또한 유야무야로 되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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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5번= 그러나 시가는 소설과 성질이 크게 달라 이를 소설 동양으로 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조의 학자는 이것을 어떻게 보았느냐하면 {{TagPerson|[[신상촌(申象村)]]}}은 '시여(詩餘)'라 하는 말을 빌려 설명하였다. 지금 그의 말을 인용하여 보면 그는 시여(詩餘) 서(序)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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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6번= <blockquote no="07">余旣歸田 世固棄我 而我且惓於世故矣 顧平昔榮顯 已糠粃土葺 惟遇物諷詠則 有馮婦下車之病 有所會心 輒形詩章 而有餘繼 以方言而腔之 而記之以諺</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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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7번= 이라 하였다. 즉 이 의미는 노후 전원에서 자적할 때 마침 시흥(詩興)이 일어나면 시장(詩章)의 형식을 빌려 이를 표현하여 보거니와 그래도 아직 흥이 미진하고 여운이 남으면 그 때에는 조선말로서 가(歌)의 형식에 읊어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여라 하는 말을 차용하였는데, 시여는 본시 당인(唐人)의 가사(歌詞)의 이칭으로, 혹은 장단구(長短句)라고도 하여 역시 시의 여운이란 의미에서 유래된 용어니, 촉중시화(蜀中錡話)에 <cite no="02">"唐人長短句 時之餘也"</cite>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촌의 소위 시여는 지나식의 가사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시가를 말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것은 생각컨대 한시(漢詩)는 지나의 시로서 만약 조선사람이 이로써 시를 짓는다 하면 암만하여도 가슴 가운데 일어나는 울분을 다시 한어에 번역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가 시인 가장 중대한 점은 그 내용에 그 형식이 있을 일이다. 그래서 신상촌과 같은 대문호, 즉 형식만의 한시를 짓들 않고 시의 진수에 깊이 들어간 신상촌에 있어서는 벌써 한시만으로는 시흥 폐기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어에 의하여 또 다시 읊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조선의 시가를 시여라 하였으나 그 실은 '시수(詩粹)'라 하여 옳을 것이다. 즉 흉중의 시흥을 한시로 짓고 지어서 표현하여도 그 정말 순수한 흥이야 한시로서는 도저히 표현하여 낼 수 없고 조선말로서야 그를 표현하여 얻을 수 있다면 암만하여도 '시수'라 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일찍이 {{TagPerson|[[퇴계(退溪)]]}}도 저 {{TagBook|[[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서문에 이와 비슷한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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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8번= <blockquote no="08">老人素不解音律 而猶知厭聞世俗之樂 閃閑居養疾之餘 凡有感於情性者 每發於詩 然今之詩 異於古之詩 可詠而不可歌也 如欲歌之 必綴以俚俗之語 蓋國俗音節 所有不得不然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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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9번=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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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30번= 이와 같이 조선사람으로서 정말 다운 시다운 시를 쓰려면 아무래도 조선의 시가가 아니고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TagPerson|[[김서포(金西浦)]]}}는 {{TagBook|[[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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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31번= <blockquote no="09">人心之發於口者爲言 言之有節奏者爲歌詩文賦 四方 之言雖不同 荀有能言者 各因其言而節奏 則皆足以動 天地通鬼神 不獨中華也 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假令十分相似 只是鸚鵡之人言而閭巷間樵童汲婦 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同日而論</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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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32번= 이라고. 즉 조선사람이 한문을 배워 한문을 짓는다 하지만 된 것은 일종의 앵무의 사람말 흉내에 지나지 못하고, 그보다는 차라리 여간(閭間)의 초동(樵童), 급부(汲婦)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정말 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 대하여는 그의 종손 {{TagPerson|[[북헌(北軒)]]}}에 있어서도 역시 같았으니 그 산고(散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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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33번= <blockquote no="10">東人成效古人爲歌詞 而所辨惟四聲 其中淸濁虛實則 昧然不知 何與中華樂律相合哉 其以東國言語爲之者 不論共自合於東國樂律與否 就其辭意 或多悠揚婉切 眞可以動人聽感人心者 不惟勝於效古之歌詞 其視詩文諸作 又不啻過之 無他眞與假之分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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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34번= 라 하여 바로 조선의 시가를 시의 진(眞)이라 하고, 한시를 그에 대하여 시의 가(假)라 하였다. 우리로 보아 가장 절실한 말일 줄 생각하나, 이는 요컨대 시가는 다른 문학과도 달라 일상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을 주장하는 문학인 때문에 그런 것이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한어(漢語)는 우리의 말과는 근본적으로 그 계통과 또 그 형태를 달리하여 우리들의 미묘한 감정을 여실히 표현함에는 거의 부적당한 말이다. 따라서 한학자의 조선시가에 대한 태도는 저절로 소설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과거에 우리 학계에는 서포와 북헌이 많지 않았으며, 또 그들이라 할지라도 그 전체 사상에 있어서는 역시 조선문학은 늘 제이차적 지위에 있어 얼마큼 그에 대하여 이해와 동정을 가졌던 데에 지나지 못하였음을 나는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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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35번= 이상 조선소설과 시가에 대한 이조 한학자의 태도를 간단히 일별하였으나 일언으로 그 결론을 말한다면 소설에 대하여는 전연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시가에 대하여는 비교적 그 이해가 두터웠으나 아직 그 태도가 극히 소극적이어서 전혀 시여적(詩餘的)으로 취급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이조학인 전체의 의사를 표시한 말이라고는 아직 할 수 없으나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태도란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니, 여기 따라 그들의 조선문학상 활약이란 것도 저절로 명확한 일이고, 또 직접간접으로 이것이 조선문학 상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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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36번= (부기) 이 소고는 필자가 작년 11월 20일 성대조선어문학회 주최 강연회에서 발표하였던 바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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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5일 (토) 16:5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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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학인의 조선문학에 대한 태도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李朝學人의 朝鮮文學에 對한 態度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0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조윤제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9년 3
시작쪽 100쪽 종료쪽 109쪽 전체쪽 010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문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여기서 학인(學人)이라 하는 것은 물론 문자 그대로 학문하는 사람 즉 학자를 의미하는 말이 되겠으나 그러나 종래 우리들의 선배는 오늘날 우리들이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널리 일반으로 학문을 할 줄 아는 사람 혹은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에까지 그 내용을 확장하여 써왔다. 또 옛날사람들은 학문이라면 곧 한학(漢學)을 의미하였고,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조선문학(朝鮮文學) 따위는 학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를 것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 학인이라 하는 것은 한학을 전공하고 또 널리 학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에 쓰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들이 조선문학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여 왔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거니와,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조선의 한문학과 조선문학과의 관계를 간단히 말하여 두려한다.
쪽수▶P100-1여기서 學人이라 하는 것은 物論 文字 그대로 學問하는 사람 即 學者를 意味하는 말이 되겠으나 그러나 從來 우리들의 先輩는 오늘날 우리들이 意味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널리 一般으로 學問을 할 줄 아는 사람 或은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에까지 그 內容을 擴張하야 써왔다. 또 옛날사람들은 學問이라면 곧 漢學을 意味하였고,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朝鮮文學 따위는 學問의 範疇에 들어가지 않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 學人이라 하는 것은 漢學을 專攻하고 또 널리 學問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意味에 쓰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들이 朝鮮文學에 對하야 어떠한 態度를 取하야 왔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거니와, 먼저 本論에 들어가기 前에 잠깐 朝鮮의 漢文學과 朝鮮文學과의 關係를 簡單히 말하여 두려한다.
대체로 조선문학이라면 이것이 학문연구의 대상이 되여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이전에는 그리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의의라든지 혹은 그가 가지고 있는 연구의 범위란 것도 충분히 논란되지 않은 채 오늘에 남아 있는 듯하나, 더욱이 이와 한문학과의 관계 같은 것은 앞으로 조선문학을 체계세우는 데에 있어서 극히 중대한 문제이면서도 실로 그 견해가 확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여기 말하려는 데는 얼마큼 독단이 있다는 것을 미리 양해하여 주기를 바라거니와, 조선은 오랜 옛적부터 한문화(漢文化)에 접촉하여 그 문자를 배우고 글을 배워왔었다. 그런데 조선의 고유문자인 언문(諺文)은 그보다 훨씬 후대 곧 이조에 들어와서 비로소 발명되었으니까 이것이 발명되기 전은 물론이고 발명된 이후라 할지라도 사상감정의 중요한 발표는 주장 한자한문에 의하여 되어 왔었다. 그러고도 그에 대하여는 조금도 이국문자시 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정확한 글 표준적 발표 기관이라고, 확신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 조선에 발달한 한문학에 대한 한 결코 대안화(對岸火)를 보듯이 냉대할 수 없고 도리어 그 기분으로 보아 그냥 조선문학이 될 듯도 하다.
쪽수▶P100-2大體로 朝鮮文學이라면 이것이 學問硏究의 對象이 되여 專門的으로 硏究하는 學者도 以前에는 그리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에 對한 意義라던지 或은 그가 가지고 있는 硏究의 範圍란것도 充分히 論難되지 않은 채 오늘에 남어 있는듯하나, 더욱이 이와 漢文學과의 關係같은 것은 앞으로 朝鮮文學을 體系세우는 데에 있어서 極히 重大한 問題이면서도 實로 그 見解가 確定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여기 말하려는 데는 얼마큼 獨斷이 있다는 것을 미리 諒解하여 주기를 바라거니와, 朝鮮은 오랜▶P101-1 옛적부터 漢文化에 接觸하야 그 文字를 배우고 글을 배워왔었다. 그런데 朝鮮의 固有文字인 諺文은 그보다 훨씬 後代 곧 李朝에 들어와서 비로소 發明되었으니까 이것이 發明되기 前은 勿論이고 發明된 以後라 할지라도 思想感情의 重要한 發表는 主張 漢字漢文에 依하야 되여 왔었다. 그러고도 그에 對하여는 조금도 異國文字視하들않고 도로혀 그를 正確한 글 標準的 發表機關이라고, 確信하여 왔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 朝鮮에 發達한 漢文學에 對한限 決코 對岸火를 보듯이 冷待할 수 없고 도로혀 그 氣分으로 보아 그냥 朝鮮文學이 될 듯도 하다.
그러나 또 입장을 바꾸어서 조선문학으로부터 생각하여 보면 조선문학은 어디까지든지 조선의 문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조선어로 표현된 것이 아니면 이를 조선문학이라 인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조선에서 발달하였다는 한문학이라 할지라도 당연히 조선문학의 영역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한문은 조선에 일찍이 문자 없는 시대에 들어와서 조선 사람에게 애용되었을 뿐 아니라 내종(乃終)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자국문시 되어버려 기다(幾多)의 작품을 산출하고 그것이 한문으로 표기되었건만 순조선문보다도 더 잘 조선인의 사상감정생활을 표현하여 왔음을 생각할 때, 한문학을 조선문학으로부터 제거하기에는 얼마큼 주저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 하여 곧 한문학 즉 조선문학이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조선문학은 조선의 문학인 이상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영역을 보지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공연히 자기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머지않아 자기를 그 와해의 운명에 던짐과 같아서 문화라든지 문학에 대한 의식이 전연 옛날과 달라진 오늘에 있어서도 한문학 조선문학 중에 넣는다는 것은 일고(一顧)의 가치가 없는 우론에 지나지 못하겠거니와 그러나 지나간 과거의 문학시대 즉 아직 한문학을 자국문학과 동양시(同樣視)하던 시대의 한문학은 감히 이것을 조선문학의 일부분이라고 보는 것은 관계가 없을 듯하다. 이를 좀 더 사세(些細)히 말하면 조선에 있어서 조선사람 손에 의하여 발달되어 온 한문학은 조선문학의 시가, 소설, 동양으로 그 일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한문학 즉 조선문학이라든지 조선문학 즉 한문학이라는 것이 아니라 한문학은 조선문학의 일부분이 되어서 큰 조선문학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쪽수▶P101-2그러나 또 立場을 바꾸어서 朝鮮文學으로부터 생각하야 보면 朝鮮文學은 어디까지든지 朝鮮의 文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即 朝鮮語로 表現된 것이 아니면 이를 朝鮮文學이라 認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朝鮮에서 發達하였다는 漢文學이라 할지라도 當然히 朝鮮文學의 領域에서 除去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便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漢文은 朝鮮에 일즉이 文字없는 時代에 들어와서 朝鮮사람에게 愛用되었을 뿐 아니라 乃終에는 一點의 疑心도 없이 自國文視 되어버려 幾多의 作品을 産出하고 그것이 漢文으로 表記되었건만 純朝鮮文보다도 더 잘 朝鮮人의 思想感情生活을 表現하여 왔음을 생각할 때, 漢文學을 朝鮮文學으로부터 除去하기에는 얼마큼 躊躇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하야 곧 漢文學即朝鮮文學이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朝鮮文學은 朝鮮의 文學인 以上 어디까지든지 自己의 領域을 保持할 必要가 있다고 믿는다. 空然히 自己의 領域을 넓히는 것은 멀지 않어 自己를 그 瓦解의 運命에 던짐과 같아서 文化라든지 文學에 對한 意識이 全然 옛날과 달라진 오늘에 있어서도 漢文學 朝鮮文學 中에 넣는다는 것은 一顧의 價値가 없는 愚論에 지나지 못하겠거니와 그러나 지나간 過去의 文學時代 即 아즉 漢文學을 自國文學과 同樣視하든 時代의 漢文學은 敢히 이것을 朝鮮文學의 一部分이라고 보는 것은 關係가 없을 듯하다. 이를 좀 더 些細히 말하면 朝鮮에 있어서 朝鮮사람 손에 依하야 發達되여 온 漢文學은 朝鮮文學의 詩歌, 小說, 同樣▶P102-1으로 그 一部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即 漢文學即朝鮮文學이라던지 朝鮮文學即漢文學이라는 것이 아니라 漢文學은 朝鮮文學의 一部分이 되여서 큰 朝鮮文學을 構成한다는 것이다.
실로 독단무모한 생각일지 모르나 나는 대강 이러한 입장에서 조선문학을 생각하여 보고자한다. 그러나 이 논문에 있어서 조선문학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광의미의 조선문학이 아니고 훨씬 좁은 의미의 조선문학, 즉 조선어로 표기된 순조선문학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이 점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쪽수▶P102-2實로 獨斷無謀한 생각일지 모르나 나는 大綱 이러한 立場에서 朝鮮文學을 생각하여 보고자한다. 그러나 이 論文에 있어서 朝鮮文學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廣意味의 朝鮮文學이 아니고 훨신 좁은 意味의 朝鮮文學, 即 朝鮮語로 表記된 純朝鮮文學을 意味하는 것이니까 이 點에 誤解없기를 바란다.
그러면 일로부터 본론에 들어가서 이조 언문이 제정된 이래 그 문학에 대하여 한학 전공의 학인들이 여하한 태도로 임하였는가를 말하고자 하나, 언문을 제정하던 그 당시의 일반적 사회는 지나문화에 상당히 침윤하여 벌써 새로 제작된 언문에 대하여는 그다지 기대를 갖지 않았던 것이다. 기대인커녕 그 중에는 도리어 불필요시하는 자도 있었으니 저 최만리인물세종대왕인물께 언문반포의 반대 상주(上奏)를 하였다는 것은 벌서 너무도 유명한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그 일인의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도리어 그들 그 당시 여론의 일부분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듯이 나에게는 생각되나, 기실 일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세종대왕이 언문을 반포하여 극력(極力) 그 사용을 장려하시었으나 그 효과는 별로 나타나지 않고 세상은 그냥 한문제일주의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학인들의 조선문학에 대한 태도는 일언으로 말하면 냉담하였다 할 수밖에 없었거니와 그러나 학인이라 할지라도 거기는 또 이학(理學)을 주로 하는 학인과 문학을 주로 하는 학인에 나뉠 것이니 그들의 사이에도 제절로 그 태도가 달랐을 것도 부득이하였다.
쪽수▶P102-3그러면 일로부터 本論에 들어가서 李朝諺文이 制定된 以來 그 文學에 對하야 漢學專攻의 學人들이 如何한 態度로 臨하였는가를 말하고자 하나, 諺文을 制定하던 그 當時의 一般的社會는 支那文化에 相當히 浸潤하야 벌서 새로 制作된 諺文에 對하여는 그다지 期待를 갖지 않었던 것이다. 期待인커냥 그 중에는 도로혀 不必要視하는 者도 있었으니 저 崔萬理가 世宗大王께 諺文頒布의 反對上奏를 하였다는 것은 벌서 너무도 有名한 이야기꺼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單純한 그 一人의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도로혀 그들 그 當時 輿論의 一部分이라 보는 것이 妥當할 듯이 나에게는 생각되나, 其實 一部의 反對를 물리치고 世宗大王이 諺文을 頒布하야 極力 그 使用을 獎勵하시었으나 그 効果는 別로 나타나지 않고 世上은 그냥 漢文第一主義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學人들의 朝鮮文學에 對한 態度는 一言으로 말하면 冷談하였다 할 수밖에 없었거니와 그러나 學人이라 할지라도 거기는 또 理學을 主로 하는 學人과 文學을 主로 하는 學人에 난훌 것이니 그들의 사이에도 제절로 그 態度가 달렀을 것도 不得已하였다.
원래 이학자라 하면 문학에 대하여는 그다지 이해를 가지지 못한 듯하여 율곡인물과 같은 대학자도 그 편저인 「정언묘선(精言妙選)」서적 서문에
쪽수▶P102-4元來 理學者라하면 文學에 對하여는 그다지 理解를 가지지 못한 듯하야 栗谷과 같은 大學者도 그 編著인 「精言妙選」 序文에

詩雖非學者能事 亦所以吟詠性情 宣暢淸和以滌胸中之滓穢 則亦存省之一助

쪽수▶P102-5詩雖非學者能事 亦所以吟詠性情 宣暢淸和以滌胸中之滓穢 則亦存省之一助
라 하였다. 즉 시(詩)라는 것은 학자가 너무 좋아할 바는 아니나, 그것이 공자인물의 소위 사무사(思無邪)의 작(作)인 것 같으면 그를 음영(吟詠)하여 지중(智中)의 재예(滓穢)를 씻어 바리는 일도 있어 유익하나 그렇지 않으면 학문을 방해할 따름이고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쪽수▶P102-6라 하였다. 即 詩라는 것은 學者가 너머 좋아할 바는 아니나, 그것이 孔子의 所謂 思無邪의 作인 것 같으면 그를▶P103-1吟詠하야 智中의 滓穢를 씻어 바리는 일도 있어 有益하나 그렇지 않으면 學問을 妨害할 따름이고 利益이 없다는 것이다.
율곡의 이 생각은 거의 이학자의 일반적 생각이라 하여도 옳으나, 그러나 이것이 일보를 오(誤)하면 문학의 경시론(輕視論) 문학의 배척론(排斥論)에까지도 이르기가 쉬우니, 일례를 들면 성종조에 김심(金諶)인물이란 사람이 있는데 이이는 당시 홍문관 부제학에 있어 당시 경상도감사 이극돈(李克墩)인물유양잡조(酉陽雜俎)서적, 당송시화(唐宋詩話)서적, 유산악부(遺山樂府)서적, 파한집(破閑集)서적, 보한집(補閑集)서적, 태평통직(太平通職)서적 등의 서를 간행하여 국왕께 헌상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차자(箚子)를 올린 것이 실록에 보인다. 즉
쪽수▶P103-2栗谷의 이 생각은 거의 理學者의 一般的 생각이라 하여도 可하나, 그러나 이것이 一步를 誤하면 文學의 輕視論 文學의 排斥論에까지도 이르기가 쉬우니, 一例를 들면 成宗朝에 金諶이란 사람이 있는데 이이는 當時 弘文館 副提學에 있어 當時 慶尙道監司 李克墩이 酉陽雜俎, 唐 宋詩話, 遺山樂府, 破閑集, 補閑集, 太平通職 等의 書를 刊行하야 國王께 獻上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箚子를 올린 것이 實錄에 보인다. 即

伏開頃者 李克墩爲慶尙監司 李宗準爲都事時 將所刊酉陽雜俎 唐宋時話 遺山樂府及破閑集 補閑集 太平 通戴等書以獻 旣 命藏之內府 旋下唐宋詩話 破閑 補 閑等集 令臣等略註歷代年號人物出處以進 臣等竊惟 帝王之學 當潜心經史以講究修齊治平之要 治亂失得 之跡耳 外此皆無益於治道 而有妨於聖學 克墩等豈不 知雜俎詩話等書 爲恠誕不經之說 浮華戲劇之詞 而必 進於上者 知殿下留意於詩學而中之也 人主所尙 趨之 者衆 克墩尙爾 况媒進者乎 若此依誕戲劇之書 殿下 當如淫聲美色而遠之

쪽수▶P103-3伏開頃者 李克墩爲慶尙監司 李宗準爲都事時 將所刊酉陽雜俎 唐宋時話 遺山樂府及破閑集 補閑集 太平 通戴等書以獻 旣 命藏之內府 旋下唐宋詩話 破閑 補 閑等集 令臣等略註歷代年號人物出處以進 臣等竊惟 帝王之學 當潜心經史以講究修齊治平之要 治亂失得 之跡耳 外此皆無益於治道 而有妨於聖學 克墩等豈不 知雜俎詩話等書 爲恠誕不經之說 浮華戲劇之詞 而必 進於上者 知殿下留意於詩學而中之也 人主所尙 趨之 者衆 克墩尙爾 况媒進者乎 若此依誕戲劇之書 殿下 當如淫聲美色而遠之
라 하였다. 거의 시화(詩話), 잡서류(雜書類)를 음성미색(淫聲美色)에 비하여 이를 경계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일종 탈선적 문학멸시론이라 하여야 하겠으나, 그러나 이러한 태도도 상당히 널리 또 깊이 뿌리박힌 듯하여 지금도 아직 옛 한학자 간에는 문학 즉 소위 사장학(詞章學)을 경시하는 풍이 있다.
쪽수▶P103-4라 하였다. 거의 詩話, 雜書類를 淫聲美色에 比하야 이를 警戒하고 있다. 勿論 이것은 一種 脫線的 文學蔑視論이라 하여야 하겠으나, 그러나 이러한 態度도 相當히 널리 또 깊이 뿌리박힌 듯하야 지금도 아직 古漢學者 間에는 文學 即 所謂 詞章學을 輕視하는 風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문학파(文學派)의 학자는 어떻던가 하면 그들은 문학자인 만큼 대단히 그 태도가 달랐었다. 그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려우니까 여기서는 김춘택(金春澤)인물의 설을 소개하여 보면 그는 먼저 정이천(程伊川)인물
쪽수▶P103-5그러나 이에 對하야 文學派의 學者는 어떻던가 하면 그들은 文學者인 만큼 大端히 그 態度가 달랐었다. 그들을 一一히 列擧하기는 어려우니까 여기서는 金春澤의 說을 紹介하야 보면 그는 먼저 程伊川의

一, 古之學者 惟務義情性 今之爲文者 專務悅人
二, 人見六經 便謂聖人作文 不知聖人撼發胸中所蘊 自 成交耳
三, 游夏何嘗秉筆 學爲詞章

쪽수▶P103-6一, 古之學者 惟務義情性 今之爲文者 專務悅人
二, 人見六經 便謂聖人作文 不知聖人撼發胸中所蘊 自 成交耳
三, 游夏何嘗秉筆 學爲詞章
이라는 말에 명쾌한 반박을 더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쪽수▶P103-7이라는 말에 明快한 反駁을 加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愚謂 聖人何嘗不作文 惟不養性 而只作文 則不可 且(→104)作文 豈是與養性之事 判然背馳者 聖莫過於伊尹傅說周公 而訓命及七月詩 不可謂不作文 又不可謂不悅人 所謂務悅人 有公私是非 若伊傅周公之務悅人 乃欲以感動人主 非如後來欲竊科第者比 而今觀其文 豈是率然攄發而成者 其必秉筆易藁 無疑也 且如周公苟欲使成王 知稼穡之艱則 招致一田夫 朝夕道說 豈不詳悉 或周公自爲道說於咨嗟吁咈之間 有何不可 而必爲詩 令瞽誦之 其欲悅人 庸有旣哉 想春日遲遲 采蘩祁祁等語尤能以感動成王矣 動人之道 言之不足而有文 文之不足而有樂 盖文者 居於言語音樂之間 苟曰聖人不作文則 樂亦不作矣 至如游夏之檀弓樂記 觀其製作之體 豈可曰不秉筆而學哉 伊川此言 似乎過高 不然則以文詞非其所好故然耶 朱子劇好古詩楚辭 不惟好之 盖嘗倣而爲之 頗有似之者 朱子固亦秉筆之人也

쪽수▶P103-8愚謂 聖人何嘗不作文 惟不養性 而只作文 則不可 且▶P104-1作文 豈是與養性之事 判然背馳者 聖莫過於伊尹傅說周公 而訓命及七月詩 不可謂不作文 又不可謂不悅人 所謂務悅人 有公私是非 若伊傅周公之務悅人 乃欲以感動人主 非如後來欲竊科第者比 而今觀其文 豈是率然攄發而成者 其必秉筆易藁 無疑也 且如周公苟欲使成王 知稼穡之艱則 招致一田夫 朝夕道說 豈不詳悉 或周公自爲道說於咨嗟吁咈之間 有何不可 而必爲詩 令瞽誦之 其欲悅人 庸有旣哉 想春日遲遲 采蘩祁祁等語尤能以感動成王矣 動人之道 言之不足而有文 文之不足而有樂 盖文者 居於言語音樂之間 苟曰聖人不作文則 樂亦不作矣 至如游夏之檀弓樂記 觀其製作之體 豈可曰不秉筆而學哉 伊川此言 似乎過高 不然則以文詞非其所好故然耶 朱子劇好古詩楚辭 不惟好之 盖嘗倣而爲之 頗有似之者 朱子固亦秉筆之人也
라 하였다. 그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반드시 작문이 불가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문학의 존중론(尊重論)이었었다.
쪽수▶P104-2라 하였다. 그는 또 달아 여러 가지 實例를 들어 반다시 作文이 不可치 않다는 것을 主張하였으나 結局 文學의 尊重論이었었다.
이와 같이 한학자라 할지라도 벌써 이학파와 문학파 간에 있어 문학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고 있으나, 그러나 공자도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라 극찬하여 있으니까 이학자에 있어서도 공연히 문학을 경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래 문학은 경학(經學)에 기초하여 성정(性情)의 진(眞)으로부터 터발(攄發)하여야 될 것이니까 그 근본 의미에 있어서는 또한 이를 인하고 또 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거기에 경계할 바는 문학이 문학 자신을 위한 문학이 되지 않을 것인데 이 점은 문학파의 학자에 있어서도 역시 틀림은 없었다.
쪽수▶P104-3이와 같이 漢學者라 할지라도 벌서 理學派와 文學派間에 있어 文學에 對한 態度를 달리하고 있으나, 그러나 孔子도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라 極讃하여 있으니까 理學者에 있어서도 空然히 文學을 輕視할 수는 없는 것이다. 元來 文學은 經學에 本하야 性情의 眞으로부터 攄發하여야 될 것이니까 그 根本 意味에 있어서는 또한 이를 認하고 또 讃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거기에 警戒할 바는 文學이 文學自身을 爲한 文學이 되지 않을 것인대 이 點은 文學派의 學者에 있어서도 亦是 틀림은 없었다.
따라서 문학 중에도 소설류의 소위 연문학(軟文學)은 특별한 경계를 받아 왔던 것이니 박연암(朴燕岩)인물 같은 이도 소설을 썼으므로 일부 세속학자로부터 위학(僞學)의 학자라는 평을 받았거니와 심재(沈梓)라는 이는 소설에 대하여 모진 필봉으로 그 저 「송천필담(松泉筆譚)」서적 중에
쪽수▶P104-4따라서 文學中에도 小說類의 所謂 軟文學은 特別한 警戒를 받어 왔던 것이니 朴燕岩 같은 이도 小說을 썼음으로 一部世俗學者로부터 僞學의 學者라는 評을 받었거니와 沈𨫃라는 이는 小說에 對하야 모진 筆鋒으로 그 著 「松泉筆譚」 中에

稗官小說 自漢唐以來代有之 如搜神等書 語多慌愧 而文頗雅馴 其他諸種間 亦有實事 可以補史家之闕遺 備詞場之採綴者 至於水滸傳 西遊記之屬 雖用意新巧 命辭環奇 別是一種文字 非上所稱諸書之例也 明人劇賞之 加以俗尙輕薄波蕩 輒贋作一副說話 以售於世 大抵皆演成史傳 無非男女交歡事也 演史出而正史 事蹟汨亂 男女之事及多淫媒 尤非壯士所可近眼 而近 來人 鮮篤實 喜以此等小說作 爲消寂遺日之資 甚可 歡也 云云

쪽수▶P104-4稗官小說 自漢唐以來代有之 如搜神等書 語多慌愧 而文頗雅馴 其他諸種間 亦有實事 可以補史家之闕遺 備詞場之採綴者 至於水滸傳 西遊記之屬 雖用意新巧 命辭環奇 別是一種文字 非上所稱諸書之例也 明人劇賞之 加以俗尙輕薄波蕩 輒贋作一副說話 以售於▶P105-1世 大抵皆演成史傳 無非男女交歡事也 演史出而正史 事蹟汨亂 男女之事及多淫媒 尤非壯士所可近眼 而近 來人 鮮篤實 喜以此等小說作 爲消寂遺日之資 甚可 歡也 云云
이라 하였다. 한자한문으로 표기된 것이라도 그것이 소설이라면 그러한 특별한 경계를 받아 왔거든, 하물며 한학자의 눈에는 문자같이도 보이지 않는 언문소설에 있어서는 거의 말할 필요조차 없으나, 홍직필(洪直弼)인물은 또 그 저 「매산잡식(梅山雜識)」서적
쪽수▶P105-2이라 하였다. 漢字漢文으로 表記된 것이라도 그것이 小說이라면 그러한 特別한 警戒를 받어 왔거든, 하물며 漢學者의 눈에는 文字같이도 보이지 않는 諺文小說에 있어서는 거의 말할 必要조차 없으나, 洪直弼은 또 그著 梅山雜識에

吾東士大夫閩門之行極正 三代之所未有 無愧漢書所 云婦人貞信之稱 而近世大防漸壞 往往有不忍言者 寔由世教衰 禮不興行以致然耳 若是者 何以當華人所贊 禮樂之邦 仁義之國哉 東俗教女子以諺而不以文 是故 生不聞聖哲成訓 既不識三綱五常之爲重 至若諺稗 皆是淫褻不經之說 而婦人不知都出於虛贋 認以惇史 其反道悖德 咸從此出 自朝家嚴禁諺碑 云云

쪽수▶P105-3吾東士大夫閩門之行極正 三代之所未有 無愧漢書所 云婦人貞信之稱 而近世大防漸壞 往往有不忍言者 寔由世教衰 禮不興行以致然耳 若是者 何以當華人所贊 禮樂之邦 仁義之國哉 東俗教女子以諺而不以文 是故 生不聞聖哲成訓 既不識三綱五常之爲重 至若諺稗 皆是淫褻不經之說 而婦人不知都出於虛贋 認以惇史 其反道悖德 咸從此出 自朝家嚴禁諺碑 云云
이라 하여 언문소설은 마땅히 법률로써 이것을 엄금(嚴禁)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쪽수▶P105-4이라 하야 諺文小說은 마땅히 法律로써 이것을 嚴禁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소설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하고 그 논조가 또 너무나 장렬한데 대하여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으나, 이는 요컨대 소설이 그 문(文)은 연약하고 그 실(實)은 황당무계할 뿐 아니라 늘 남녀 교환지사로 하기 때문에 세도(世道)를 해하고 이익함이 없어 성정의 진으로부터 터발한 정당한 문학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창작인 이상 정사(正史)의 사적(事蹟)과 다를 것도 판연한 일이고 또 인생의 산생활을 묘사하는 소설이라면, 남자가 나오고 여자가 나올 것도 부득이한 기정사실이라 하여야 될 것을, 이것을 먼저 인식하지 못한다면 본대 그 말에 경주(傾注)할 필요조차 없지마는, 그래도 옛적 한학자의 소설에 대한 일부적 태도라 하여 들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 소개하게 된 심재라든지 홍직필이라든지 하는 이들은 비교적 근대의 인물들이란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 조선소설의 발달이 비록 늦었다 하더라도 이조 중엽에는 상당히 그 작품이 나왔었고 이조 초엽에도 벌써 전기체적 소설의 출현이 있었건만, 어찌하여 말기에서야 비로소 그 대한 태도를 표시하게 되었는가. 생각컨대 이것도 외래문화의 한 영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니, 이기(李期)는 국초 이래 주자학으로 장벽을 싸고 모든 정신문화는 글로서 순화되어 왔었다하여 옳을 것이나 인방(鄰邦) 지나(支那)에서는 명말제초에 선(亙)하여 문예학(文藝學)이 대성하고 더욱이 청조에 와서는 실시학(實是學)이 발흥하여 왔었다. 문화상 언제든지 그 영향을 받지 않고는 마지않는 지나와 조선과의 관계인만큼 청조의 숙란(熟爛)한 문화는 곧 조선에 영향하여 이조 영정시대에는 홍수가 밀어오듯이 청조실시학이 이입하여 오고, 따라서 문예학이 엄습하여 왔었다. 여기에 침체하였던 조선학계는 새로운 힘을 얻어 재연(再燃)하여 가히 문예의 부흥시대를 연출(演出)하였다 함은 일반 사가(史家)의 공인하는 바이나, 문학계에 있어서도 그 영향이 또한 적지 않았으니 한학자 간 소설을 운운한 것도 기실은 이 시대에 와서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전이라 하면 그야말로 시이불견(視而不見)하는 태도를 고집하여 왔던 것이다. 따라서 소설이 정사(正史)를 곤란하게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고 이르는 만큼도 한학자의 소설에 대한 태도는 소극적이나마 얼마큼 관심을 가지었다고 하여야 하겠으니, 비록 공박을 한다 하더라도 읽지 않고는 하지 못할 것이거든, 그 읽은 것만이라도 그 이전에 비하면 그들의 사상에 일대변혁을 일으킨 것이고 소설문학 대하여는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쪽수▶P105-5小說에 對한 理解가 너무나 不足하고 그 論調가 또 너무나 壯烈한데 對하야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으나, 이는 要컨댄 小說이 그 文은 軟弱하고 그 實은 荒唐無稽할 뿐 아니라 늘 男女交歡之事로 하기 때문에 世道를 害하고 利益함이 없어 性情의 眞으로부터 攄發한 正當한 文學에 違反된다는 것이다. 創作인 以上 正史의 事蹟과 다를 것도 判然한 일이고 또 人生의 산生活을 描寫하는 小說이라면, 男子가 나오고 女子가 나올 것도 不得已한 既定事實이라 하여야 될 것을, 이것을 먼저 認識하지 못한다면 본대 그 말에 傾注할 必要조차 없지마는, 그래도 옛적 漢學者의 小說에 對한 一部的 態度라 하야 들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 紹介하게 된 沈𨫃라던지 洪直弼이라던지 하는 이들은 比較的 近代의 人物들이란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 朝鮮小說의 發達이 비록 늦었다 하드라도 李朝中葉에는 相當히 그 作品이 나왔었고 李朝初葉에도 벌서 傳奇體的 小說의 出現이 있었건만, 어찌하야 末期에서야 비로소 그 對한 態度를 表示하게 되었는가. 생각컨댄 이것도 外來文化의 한 影響이라 하지 않을 수 없▶P106-1을 듯하니, 李期는 國初以來 朱子學으로 墻壁을 싸고 모든 精神文化는 글로서 醇化되여 왔었다하여 可할 것이나 鄰邦支那에서는 明末濟初에 亙하야 文藝學이 大盛하고 더욱이 淸朝에 와서는 實是學이 勃興하여 왔었다. 文化上 언제든지 그 影響을 받지 않고는 마지않는 支那와 朝鮮과의 關係인만큼 淸朝의 熟爛한 文化는 곧 朝鮮에 影響하야 李朝 英正時代에는 洪水가 밀어오듯이 淸朝實是學이 移入하여 오고, 달아서 文藝學이 掩襲하여 왔었다. 여기에 沈滯하였든 朝鮮學界는 새로운 힘을 얻어 再燃하야 可히 文藝의 復興時代를 演出하였다 함은 一般史 家의 共認하는 바이나, 文學界에 있어서도 그 影響이 또한 적지 않었으니 漢學者間 小說을 云云한 것도 其實은 이 時代에 와서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前이라 하면 그야말로 視而不見하는 態度를 固執하여 왔던 것이다. 따라서 小說이 正史를 汨亂하게 風紀를 紊亂하게 한다고 이르는 만큼도 漢學者의 小說에 對한 態度는 消極的이나마 얼마큼 關心을 가지었다고 하여야 하겠으니, 비록 攻駁을 한다 하드라도 읽지 않고는 하지 못할 것이어던, 그 읽은 것만이라도 그 以前에 比하면 그들의 思想에 一大變革을 일으킨 것이고 小說文學 對하야는 새로운 認識을 가저왔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음에야 시가(詩歌)에 대하여 보면 시는 천기의 현현한 바라 하여 지나에서도 특히 존중되었었고, 가도 또한 시에 다음 갈 것으로 더욱이 가없는 자연에 나와 왕정의 득실과 풍속의 융체를 절시(竊視)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일찍부터 그 채집의 방법까지 강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학자는 조선의 시가를 보는 눈이 어두워 세종조에 박연(朴堧)인물이 시가의 가치를 절규하고, 여러 번 조의(朝議)에 그 채집을 제창하였으나 그에 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또 중종조에 원계채(元繼蔡)인물라는 이가 역시 박연과 동양(同樣)의 의견을 조의에 내었으나 이것 또한 유야무야로 되고 말았었다.
쪽수▶P106-2다음에야 詩歌에 對하야 보면 詩는 天機의 顯現한 바라 하야 支那에서도 特히 尊重되었었고, 歌도 또한 詩에 다음 갈 것으로 더욱이 歌없는 自然에 나와 王政의 得失과 風俗의 隆替를 竊視할 수 있는 것이라 하야, 일즉부터 그 採集의 方法까지 講究되었던 것이다. 그런대 朝鮮學者는 朝鲜의 詩歌를 보는 눈이 어두워 世宗朝에 朴堧이 詩歌의 價値를 絶叫하고, 여러 번 朝議에 그 採集을 提唱하였으나 그에 應하는 사람이 別로 없었다. 또 中宗朝에 元繼蔡라는 이가 亦是 朴堧과 同樣의 意見을 朝議에 내었으나 이것 또한 有耶無耶로 되고 말았었다.
그러나 시가는 소설과 성질이 크게 달라 이를 소설 동양으로 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조의 학자는 이것을 어떻게 보았느냐하면 신상촌(申象村)인물은 '시여(詩餘)'라 하는 말을 빌려 설명하였다. 지금 그의 말을 인용하여 보면 그는 시여(詩餘) 서(序)에
쪽수▶P106-3그러나 詩歌는 小說과 性質이 크게 달라 이를 小說 同樣으로 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李朝의 學者는 이것을 어떻게 보았느냐하면 申象村은 「詩餘」라 하는 말을 빌어 說明하였다. 지금 그의 말을 引用하야 보면 그는 詩餘序에

余旣歸田 世固棄我 而我且惓於世故矣 顧平昔榮顯 已糠粃土葺 惟遇物諷詠則 有馮婦下車之病 有所會心 輒形詩章 而有餘繼 以方言而腔之 而記之以諺

쪽수▶P107-1余旣歸田 世固棄我 而我且惓於世故矣 顧平昔榮顯 已糠粃土葺 惟遇物諷詠則 有馮婦下車之病 有所會心 輒形詩章 而有餘繼 以方言而腔之 而記之以諺
이라 하였다. 즉 이 의미는 노후 전원에서 자적할 때 마침 시흥(詩興)이 일어나면 시장(詩章)의 형식을 빌려 이를 표현하여 보거니와 그래도 아직 흥이 미진하고 여운이 남으면 그 때에는 조선말로서 가(歌)의 형식에 읊어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여라 하는 말을 차용하였는데, 시여는 본시 당인(唐人)의 가사(歌詞)의 이칭으로, 혹은 장단구(長短句)라고도 하여 역시 시의 여운이란 의미에서 유래된 용어니, 촉중시화(蜀中錡話)에 "唐人長短句 時之餘也"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촌의 소위 시여는 지나식의 가사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시가를 말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것은 생각컨대 한시(漢詩)는 지나의 시로서 만약 조선사람이 이로써 시를 짓는다 하면 암만하여도 가슴 가운데 일어나는 울분을 다시 한어에 번역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가 시인 가장 중대한 점은 그 내용에 그 형식이 있을 일이다. 그래서 신상촌과 같은 대문호, 즉 형식만의 한시를 짓들 않고 시의 진수에 깊이 들어간 신상촌에 있어서는 벌써 한시만으로는 시흥 폐기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어에 의하여 또 다시 읊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조선의 시가를 시여라 하였으나 그 실은 '시수(詩粹)'라 하여 옳을 것이다. 즉 흉중의 시흥을 한시로 짓고 지어서 표현하여도 그 정말 순수한 흥이야 한시로서는 도저히 표현하여 낼 수 없고 조선말로서야 그를 표현하여 얻을 수 있다면 암만하여도 '시수'라 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일찍이 퇴계(退溪)인물도 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서적 서문에 이와 비슷한 말로
쪽수▶P107-2이라 하였다. 即 이 意味는 老後 田園에서 自適할 때 마침 詩興이 일어나면 詩章의 形式을 빌어 이를 表現하여 보거니와 그래도 아직 興이 未盡하고 餘韻이 남으면 그 때에는 朝鮮말로서 歌의 形式에 읊어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詩餘라 하는 말을 借用하였는데, 詩餘는 본시 唐人의 歌詞의 異稱으로, 혹은 長短句라고도 하야 역시 詩의 餘韻이란 意味에서 由來된 用語니, 蜀中詩話에 「唐人長短句 時之餘也」라고 하였다. 그러나 象村의 所謂詩餘는 支那式의 歌詞를 意味한 것이 아니라 朝鮮의 詩歌를 말한 것임은 勿論이다. 이것은 생각컨댄 漢詩는 支那의 詩로서 萬若 朝鮮사람이 일로서 詩를 짓는다 하면 암만하여도 가슴 가운대 일어나는 鬱憤을 다시 漢語에 飜譯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詩가 詩인 가장 重大한 點은 그 內容에 그 形式이 있을 일이다. 그래서 申象村과 같은 大文豪, 即 形式만의 漢詩를 짓들 않고 詩의 眞髓에 깊이 들어간 申象村에 있어서는 벌서 漢詩만으로는 時興 폐기에 滿足하지 않고, 朝鮮語에 依하야 또 다시 읊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朝鮮의 詩歌를 詩餘라 하였으나 그 實은 「詩粹」라 하여 可할 것이다. 即 胸中의 詩興을 漢詩로 짓고 지어서 表現하여도 그 정말 純粹한 興이야 漢詩로서는 到底히 表現하여 낼 수 없고 朝鮮말로서야 그를 表現하야 얻을 수 있다면 암만하여도 「詩粹」라 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일즉이 退溪도 著 陶山十二曲序文에 이와 비슷한 말로

老人素不解音律 而猶知厭聞世俗之樂 閃閑居養疾之餘 凡有感於情性者 每發於詩 然今之詩 異於古之詩 可詠而不可歌也 如欲歌之 必綴以俚俗之語 蓋國俗音節 所有不得不然也

쪽수▶P107-3老人素不解音律 而猶知厭聞世俗之樂 閃閑居養疾之餘 凡有感於情性者 每發於詩 然今之詩 異於古之詩 可詠而不可歌也 如欲歌之 必綴以俚俗之語 蓋國俗音節 所有不得不然也
라 하였다.
쪽수▶P107-4라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사람으로서 정말 다운 시다운 시를 쓰려면 아무래도 조선의 시가가 아니고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서포(金西浦)인물서포만필(西浦漫筆)서적에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발표하였다.
쪽수▶P107-5이와 같이 朝鮮사람으로서 정말 다운 詩다운 詩를 쓸랴면 아무래도 朝鮮의 詩歌가 아니고는 滿足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金西浦는 西浦漫筆에서 다음과 같은 名言을 發表하였다.

人心之發於口者爲言 言之有節奏者爲歌詩文賦 四方 之言雖不同 荀有能言者 各因其言而節奏 則皆足以動 天地通鬼神 不獨中華也 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假令十分相似 只是鸚鵡之人言而閭巷間樵童汲婦 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同日而論

쪽수▶P108-1人心之發於口者爲言 言之有節奏者爲歌詩文賦 四方 之言雖不同 荀有能言者 各因其言而節奏 則皆足以動 天地通鬼神 不獨中華也 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假令十分相似 只是鸚鵡之人言而閭巷間樵童汲婦 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同日而論
이라고. 즉 조선사람이 한문을 배워 한문을 짓는다 하지만 된 것은 일종의 앵무의 사람말 흉내에 지나지 못하고, 그보다는 차라리 여간(閭間)의 초동(樵童), 급부(汲婦)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정말 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 대하여는 그의 종손 북헌(北軒)인물에 있어서도 역시 같았으니 그 산고(散藁)에
쪽수▶P108-2이라고. 即 朝鮮사람이 漢文을 배워 漢文를 짓는다 하지마는 된 것은 一種 鸚鵡의 사람말 흉내에 지나지 못하고, 그보다는 차라리 閭間의 樵童, 汲婦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정말 詩의 價値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 對하여는 그의 從孫 北軒에 있어서도 亦是 같었으니 그 散藁에

東人成效古人爲歌詞 而所辨惟四聲 其中淸濁虛實則 昧然不知 何與中華樂律相合哉 其以東國言語爲之者 不論共自合於東國樂律與否 就其辭意 或多悠揚婉切 眞可以動人聽感人心者 不惟勝於效古之歌詞 其視詩文諸作 又不啻過之 無他眞與假之分也

쪽수▶P108-3東人成效古人爲歌詞 而所辨惟四聲 其中淸濁虛實則 昧然不知 何與中華樂律相合哉 其以東國言語爲之者 不論共自合於東國樂律與否 就其辭意 或多悠揚婉切 眞可以動人聽感人心者 不惟勝於效古之歌詞 其視詩文諸作 又不啻過之 無他眞與假之分也
라 하여 바로 조선의 시가를 시의 진(眞)이라 하고, 한시를 그에 대하여 시의 가(假)라 하였다. 우리로 보아 가장 절실한 말일 줄 생각하나, 이는 요컨대 시가는 다른 문학과도 달라 일상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을 주장하는 문학인 때문에 그런 것이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한어(漢語)는 우리의 말과는 근본적으로 그 계통과 또 그 형태를 달리하여 우리들의 미묘한 감정을 여실히 표현함에는 거의 부적당한 말이다. 따라서 한학자의 조선시가에 대한 태도는 저절로 소설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과거에 우리 학계에는 서포와 북헌이 많지 않았으며, 또 그들이라 할지라도 그 전체 사상에 있어서는 역시 조선문학은 늘 제이차적 지위에 있어 얼마큼 그에 대하여 이해와 동정을 가졌던 데에 지나지 못하였음을 나는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쪽수▶P108-4라 하야 바로 朝鮮의 詩歌를 詩의 眞이라 하고, 漢詩를 그에 對하야 詩의 假라 하였다. 우리로 보아 가장 切實한 말일 줄 생각하나, 이는 要컨대 詩歌는 다른 文學과도 달라 日常 內容만이 아니라 形式을 主張하는 文學인 때문에 그런 것이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漢語는 우리의 말과는 根本的으로 그 系統과 또 그 形態를 달리하야 우리들의 微妙한 感情을 如實히 表現함에는 거의 不適當한 말이다. 따라서 漢學者의 朝鮮詩歌에 對한 態度는 제절로 小說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過去에 우리 學界에는 西浦와 北軒이 많지 않았으며, 또 그들이라 할지라도 그 全體思想에 있어서는 亦是 朝鮮文學은 늘 第二次的 地位에 있어 얼마큼 그에 對하야 理解와 同情을 가젔는 데에 지나지 못하였음을 나는 慨嘆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 조선소설과 시가에 대한 이조 한학자의 태도를 간단히 일별하였으나 일언으로 그 결론을 말한다면 소설에 대하여는 전연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시가에 대하여는 비교적 그 이해가 두터웠으나 아직 그 태도가 극히 소극적이어서 전혀 시여적(詩餘的)으로 취급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이조학인 전체의 의사를 표시한 말이라고는 아직 할 수 없으나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태도란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니, 여기 따라 그들의 조선문학상 활약이란 것도 저절로 명확한 일이고, 또 직접간접으로 이것이 조선문학 상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쪽수▶P108-5以上 朝鮮小說과 詩歌에 對한 李朝漢學者의 態度를 簡單히 一瞥하였으나 一言으로 그 結論을 말한다면 小說에 對하여는 全然 價値를 理解하지 못하였고, 詩歌에 對하여는 比較的 그 理解가 두터웠으나 아즉 그 態度가 極히 消極的이여서 全혀 詩餘的으로 取扱하여 온 것이 事實이▶P109-1다. 勿論 이것은 李朝學人 全體의 意思를 表示한 말이라고는 아즉 할 수 없으나 그러나 그들의 大部分이 가지고 있는 態度란 것은 속일 수 없는 事實이니, 여기 따라 그들의 朝鮮文學上 活躍이란 것도 제절로 明確한 일이고, 또 直接間接으로 이것이 朝鮮文學上에 어떠한 影響을 끼첬을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부기) 이 소고는 필자가 작년 11월 20일 성대조선어문학회 주최 강연회에서 발표하였던 바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쪽수▶P109-2(附記) 이 小考는 筆者가 昨年十一月二十日 城大朝鮮語文學會 主催 講演會에서 發表하였든 바의 一部를 整理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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