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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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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 {{TagSpage|43}}一<br/>一夫一婦婚은 現下 文明社會에 있어서 가장 널리 實行되여있는 一般的 婚姻 形式일뿐아니라 그것이 또한 人類가 가진바 最高의 理想的 婚姻 形態인 것은 누구나 다 異論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理想的 婚姻 形態에 이르기까지에 人類는 이미 여러 가지 婚姻 樣式을 經驗하고 왔든 것이다. 人間은 모든 물건을 食料로 삼을 수 있는 「汎食者」임과 같이 모든 婚姻의 形式 中에서 生活할 수 있는 「汎食者」라고 어떤 學者는 말하였거니와 實로 人類의 婚姻史는 이러한 事實을 잘 말하고 있다. {{TagRef|1}}이제 婚姻 當事者의 數로 보아서 婚姻 關係를 든다면 大體로 單式과 複式의 二 樣式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f>혼인 당사자의 수로 본 혼인 형태는 복혼에서 단혼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통설이나 그 유형의 분유에 관하여서는 학자에 따라서 다르다. 『뮬라―·리야―』는 난혼, 집단혼, 다부혼, 단일혼으로 분류하고 다처혼을 단일혼 즉 일부일부혼의 선구로 삼는다. (Müller-Leyer, F.. Formen der Ehe, der Famille und Verwandtscbaft. S. 70) 이에 대하야 『엥겔스』는 집단혼, 대우혼, 일부일부혼으로 분류하고 혼인 형식 발달상의 특정한 단계로서의 일부다처제를 인증하지 않았다. (Engels, F..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西雅雄 역, 家族, 私有財産及び國家の起源一○二頁 (岩波문고))(婚姻 當事者의 數로 본 婚姻 形態는 複婚에서 單婚으로 發展한다는 것이 通說이나 그 類形의 分類에 關하여서는 學者에 따라서 다르다. 『뮬라―·리야―』는 亂婚, 集團婚, 多夫婚, 單一婚으로 分類하고 多妻婚을 單一婚 即 一夫一婦婚의 先驅로 삼는다. (Müller-Leyer, F.. Formen der Ehe, der Famille und Verwandtscbaft. S. 70) 이에 對하야 『엥겔스』는 集團婚, 對偶婚, 一夫一婦婚으로 分類하고 婚姻 形式 發達上의 特定한 段階로서의 一夫多妻制를 認證하지 않엇다. (Engels, F..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西雅雄譯, 家族, 私有財産及び國家の起源一○二頁 (岩波文庫))</ref> {{TagRef|2}}單式婚은 곧 一夫一婦婚을 말한 것이겠고 複式婚은 群婚, 多夫一婦婚, 一夫多婦婚 等의 類型을 말한 것인대 그 分布의 狀態는 時代와 民族에 따라서 다른 바가 있다. 元來 婚姻의 形態는 家族의 形態에 依存하야 그것과 不可分離의 官契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것에 關하야서는 일즉 父權家族에 歷史的으로 앞선 母權家族의 存在를 創設{{TagPage|44}}한 『바코―휀』과 家族의 形態는 五階段을 지나 發展하였다고<ref>1, 혈연 가족 2, 프나루아 가족 3, 대우혼 가족 4, 가장제 가족 5, 일부일부제 가족. (Morgan,. Ancient Society. P. 393)(一, 血緣家族 二, 프나루아家族 三, 對偶婚家族 四, 家長制家族 五, 一夫一婦制家族. (Morgan,. Ancient Society. P. 393))</ref> 主張한 『몰간』等이 群婚 乃至 亂婚을 人類가 가진 바 最初의 婚姻 形態라고 提唱하였음을 이어 『엥겔스』가 家族制度에 關한 唯物史觀的 見解를 展開한 以來로 一夫一婦制는 私有財産의 觀念의 成長에 따라 漸次 確立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通說로 되여있다. {{TagRef|3}}그러나 人類의 原始的 婚姻形態는 決코 亂婚 乃至 群婚 形態로써 始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웨스타말크』, 『그롯세』等이 該博한 事實調査에 依하야 喝破하였고 또 近來에는 維納學派의 巨匠 『슈밋트』, 『콮펠스』 等이 文化史的 民俗學的 方法에 依하야 婚姻의 原始的 形態는 곧 一夫一婦婚이였든 것이 人間의 自然的 本質에 基本된 것임을 論證하였다.<ref>Sehmidt. W.. Liebe, Ehe und Familie. Sehmidt und Koppers. Volker und Kultureu.</ref> 이제 이 相反된 學說의 어느 것이 正當하냐함은 우리의 當面의 問題가 아님으로 여기에 對한 評論은 割愛하거니와 무릇 諸多民族이 各自 다른 婚姻 形式을 가지고 있음은 該民族의 文明程度와 特殊事情에 依한 것이라 하겠고 또 어떤 民族에 있어서나 唯一한 婚姻樣式을 가지고 있다 하기보다 오히려 多樣의 婚姻形式이 並存한다는 것이 거반 通例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例컨대 {{TagRef|4}}多夫一婦制<ref>다부일처제의 원인으로서 『웨스타말크』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지적하였다. 1, 양성간의 수의 불균형. 2, 토지에 적응한 인구 제한의 필요. 3, 형제 공동 재산 집중의 요구. 4, 구매혼에 인한 신부의 고가. 5, 유목, 수렵, 군사 등에 인한 부의 장기 출타 등등. (Westermarck, E. The History of Human Marriage, Vol. Ⅲ. P. P. 165-221)(多夫一妻制의 原因으로서 『웨스타말크』는 다음과 같은 條件을 指摘하엿다. 一, 兩性間의 數의 不均衡. 二, 土地에 適應한 人口 制限의 必要. 三, 兄弟 共同 財産 集中의 要求. 四, 購買婚에 因한 新婦의 高價. 五, 遊牧, 狩獵, 軍事 等에 因한 夫의 長期 出他 等々. (Westermarck, E. The History of Human Marriage, Vol. Ⅲ. P. P. 165-221))</ref>는 西藏이나 南印度의 一部에서 實行되고 있으나 거기에는 또한 一夫一婦婚과 一夫多婦婚이 並行하고 있다하며 許多히 一夫多婦婚이 當事로 되여있는 社會에 있어서도 亦是 一夫一婦婚을 正當視하고 있는 것이다. 이 分布 狀態야 어쨋든 이것을 朝鮮에 있어서 보건대 적어도 歷史時代 以來로는 群婚이라던가 多夫一婦婚의 存在를 거이 認證할 수가 없고 오즉 一夫一婦婚制도가 일즉 三韓 以來로 正當한 婚姻 形態로서 確立하였고 그 變態로서 一夫多妻制가 並行하야왔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一夫多妻制의 한 形態라고 볼 수 있는 妾制가 一夫一婦와 어떠한 關係에 있어서 發展하여왔는가를 考察하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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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2번= {{TagSpage|44-2}} 大抵 {{TagRef|5}}一夫多妻制라 하여도 그것에는 몇가지의 類型이 있다.<ref>이것을 동렬적 다처제, 순열적 다처제, 이열적 다처제로 삼분하는 것이 일반이다. (가족제도전집사논편일, 중천선지조, 혼인사개설, 36頁. Müller-Lyer, F.. Formen der Ehe, der Famille und der Verwandtscbaft. 木下史郞 역『婚姻の諸形式』68頁.(이것을 同列的 多妻制, 順列的 多妻制, 異列的 多妻制로 三分하는 것이 一般이다. (家族制度全集史論篇一,中川善之助, 婚姻史槪說, 三六頁. Müller-Lyer, F.. Formen der Ehe, der Famille und der Verwandtscbaft. 木下史郞譯『婚姻の諸形式』六八頁.)</ref> 그中에 가장 原始的인 것은 妻된 多數의 女子가 全然平{{TagPage|45}} 等한 地位에 서서 同一한 待遇를 받은 境遇인대 實際로는 極히 稀少한 多妻形態요 오히려 多妻間에는 어떤 順位가 있는 것이 通常이다. 그리하야 그 順位의 正度가 甚하야저서 그中 一妻만이 特別히 强하게 夫와 結合하고 따라서 가장 높은 地位를 獨占하야 餘他 諸妻는 그보다 劣等한 地位에 있게 될 때 그것은 거반 一夫一妻制와 近似한 形態를 가추우게 된다. 이른바 妾制가 그 形式에 있어서는 分明히 一夫多妻制이면서 實質에 있어서는 어쨋든지 一夫一妻制의 一變態로서 생기게 된 것은 곧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社會와 時代에 따라서는 妻에 對한 妾의 地位가 그다지 甚하게 劣等치 않은 境遇가 있음을 看過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妾制는 이른바 多妻制와 區別하기 難하나 古代 文明 民族에 있어서는 거반 例外없이 存在한 形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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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3번= {{TagSpage|45-2}} 古代 『헤부라이』民族에 있어서는 妻妾의 間에 判然한 區別이 있었으나 數妻間에는 法律的으로 何等 身分의 相違가 없었고 男子가 娶할 수 있는 妻의 數에도 特定한 制限이 없어서 榮華의 王 『소로몬』은 七百의 后妃, 三百의 嬪이 있었다는 傳設이 있고, 長老들은 四, 五妻를 거리는 것이 普通이었다 한다. {{TagRef|6}}그러나 漸次 開明함에 따라 豫言者와 社會輿論의 反對로 多妻制가 漸滅하야⎯ 基督敎 初創時代에도 若干 許認되었으나⎯十一世紀 初期에 이르러서 겨우 消滅되었다 한다.<ref>Bennett, W. H. The Hebrew Family(in Hasting's Dictionary of the Bible. I. P. 843)</ref> {{TagRef|7}}古代 希臘에 있어서는 歷史時代 以來로 一夫一婦制가 確立하였으나 『호―마』時代에는 正妻 外에 戰勝 捕虜에 依한 妾이 數多하였던 것이 『일리야드』, 『오딧세이』에 傳하여있으며 그 全盛時代에도 社會輿論의 非難이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畜妾의 俗이 盛行하였으나 一般으로 妾은 家內 奴隸에서 選出된 者요 따라서 妾子는 家族의 成員이 되지못하야 家祖神의 祭祀나 家産相續에 參與할 權利가 없었던 것이다.<ref>Goodsell, W. . A History of the Family as a social and Educational Institution. P. 95</ref> 古代羅馬에 있어서의 一夫一婦制는 希臘의 그것보다 훨신 嚴格한 것이었으나 畜妾制는 公然히 承認된 制度이였었다.{{TagRef|8}}그것은 始初엔 法的으로 認定을 받지못한 Concu{{TagPage|46}}binatus라는 結合 型式이였는대 社會的 大勢에 依하야 漸次로 法的 承認을 받게 된 것이였다.<ref>Concubinatus라는 말은 희랍의 Pallakē라는 말을 수입하여 된 Paelicatus 또는 Paelex라는 말과 같은 내용을 가진 말인데 그것은 최초엔 계속적 혼인 관계를 맺은 일남일녀의 법외적 결합을 의미하던 것이 내종에는 유처의 남자 결합한 녀자를 가리켜 말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첩제는 충분한 시민권을 가진 동등 계급 남녀의 결합 (Matrimonium justum) 의 법제에 의거할 수 없는 여자와 동거할 경우를 말한 것이니 이를테면 그것은 충분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열등 계급에 있는 남녀의 결합(Matrimoniu-m non justum)을 점차로 합법화한 결혼 형식이다. (Goodsell. W. ibid., P. 121)(Concubinatus라는 말은 希臘의 Pallakē라는 말을 受入하야된 Paelicatus 또는 Paelex라는 말과 같은 內容을 가진 말인대 그것은 최초엔 繼續的 婚姻 關係를 매즌 一男一女의 法外的 結合을 意味하던 것이 乃終에는 有妻의 男子 結合한 女子를 가르처 말하게 되엿다. 엇잿든 이러한 妾制는 充分한 市民權을 가진 同等 階級 男女의 結合 (Matrimonium justum) 의 法制에 依據할 수업는 女子와 同居할 境遇를 말한 것이니 이를테면 그것은 充分한 市民權을 갓지 못한 劣等 階級에 있는 男女의 結合(Matrimoniu-m non justum)을 漸次로 合法化한 結婚 形式이다. (Goodsell. W. ibid., P. 12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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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4번= {{TagSpage|46-2}} 支那의 妾制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즉 周代에는 階級에 따라 妾數의 制限과 名稱의 差別이 制定되야 天子一娶十二女·諸侯一娶九女·大夫一妻二妾·士一妻一妾으로써 原則을 삼고 王妃가 死去하면 媵(妾)을 곧 繼立케하였다. 民間의 畜妾은 公許된 바가 아니였으나 實際上으로 널리 實行되였든 것은 妾이 그 夫를 君이라고 呼稱하였음으로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미 禮制上으로는 妾과 妾子의 喪服關係가 明示되였고 法制上으로도 妻妾에 關한 法規가 制定되였었다. 그러나 제도로서 許認된 畜妾의 根本 要求는 大家族制의 本質인 家系 存續을 爲한 子息을 얻고자 하는 데 있음으로 正妻主義에 立脚한 妻妾의 序를 分明히 한 것은 司會 統制上 切實히 必要한 일이었을 것이니 明律에 制定된 {{TagRef|9}}妻妾失序律<ref>妻妾失序律(明律第六卷戶律婚姻條)<br/>凡以妻爲妾者枚一百 妻在以妾爲妻者枚九十 並改正 若有妻更娶妻者亦枚九十 離異 其民年四十以上無子者 方聽娶妾 違者笞四十</ref>은 곧 그 顯現일 것이다. 그런대 唐律에 있어서는 妾의 身分에 關한 規定이 없음을 볼진대 當時 妾의 階級的 差別이 그다지 重要視되지 않은 것이였든지 알 수 없으나 淸律에 있어서는 거반 明律을 그대로 踏襲하였음에도 不拘하고 特히 妾의 身分의 制限에 關한 條目을 刪除하였음을 보면 當時에는 社會的 地位 如何를 勿論하고 누구던지 畜妾이 一般的이였음으로 이것을 全然 放任한 것이 治世 方針上 必要한 것이라고 본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近來에까지 妾은 곧 假定의 成員으로서 公認되여있었으니 大理院의 判例에 {{TagRef|10}}>「妾은 家族의 一員임으로써 其他家族과 같이 相當한 待遇를 받을 것이라」<ref>大理院判例要旨, 中華民國七年上字九二二號</ref>하였음을 보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日本에 있어서는 明治十三年刑法典의 公布와 함께 畜妾制는 抹殺되였고 明治三十一年 現行 民法 施行 以後 民法上으로도 全然 認定하지 않게 되였으나 그 即時로 畜妾의 事實이 消滅된 것은 아니였다. 最古의 記錄으로는 三國志 魏志 倭人傳에 「其俗 國之大人 皆四五婦 下戶或二三婦 婦不淫 不妬忌」라 하였음에 그것이 多妻制이였든가 畜妾制이였든가를 明言하기 難하나 記紀에 傳한바 天皇의 嫡后 即 皇夫人(オホキサキ)에 對한 『キサ{{TagPage|47}}キ』 또는 『ヒメ』, 嫡妻 即 牟加比女(ムカヒメ)에 對한 『女』, 前妻 即 古那美(コナミ)에 對한 『宇波那通(ウハナリ)』等의 名稱으로써 妾制의 實狀을 알 수 있고 王朝時代에는 法制上으로 明瞭하게 妾을 認定하였다. {{TagRef|11}}大賓律令에는 『妻妾二等親』이라고 明示하야 妻妾이 거이 同等의 地位에 있었으나 妾의 身分은 漸次로 轉落되야 德川時代에 이르러서는 至極히 低劣하였던 것이 明治維新政府가 오히려 妾制를 公認하야 妻妾二人等親의 律을 復古하였던 것은 新興 資本主義 勢力에 隨伴한 畜妾 盛行의 社會 現象을 反映함이였든 것이다.<ref>中川善之助箸 『妻妾論』 四七頁以下. 家族制度全集 史論篇一, 婚姻篇所載 玉城肇氏論文 『妾』 一六三頁以下參照</ref> 그러나 全體的으로 보면 公然한 妾制에서 隱然한 妾制로 變還한 것이 그 發展 過程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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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일<br/>일부일부혼은 현하 문명 사회에 있어서 가장 널리 실행 되어있는 일반적 혼인 형식일 뿐 아니라 그것이 또한 인류가 가진 바 최고의 이상적 혼인 형태인 것은 누구나 다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적 혼인 형태에 이르기까지에 인류는 이미 여러 가지 혼인 양식을 경험하고 왔던 것이다. 인간은 모든 물건을 식료로 삼을 수 있는 「범식자」임과 같이 모든 혼인의 형식 중에서 생활할 수 있는 「범식자」라고 어떤 학자는 말하였거니와 실로 인류의 혼인사는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하고 있다. 이제 혼인 당사자의 수로 보아서 혼인 관계를 든다면 대체로 단식과 복식의 이 양식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식혼은 곧 일부일부혼을 말한 것이겠고 복식혼은 군혼, 다부일부혼, 일부다부혼 등의 유형을 말한 것인데 그 분포의 상태는 시대와 민족에 따라서 다른 바가 있다. 원래 혼인의 형태는 가족의 형태에 의존하야 그것과 부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것에 관하야서는 일즉 부권가족에 역사적으로 앞선 모권가족의 존재를 창설한 『바코―휀』과 가족의 형태는 5계단을 지나 발전하였다고 주장한 『몰간』 등이 군혼 내지 난혼을 인류가 가진 바 최초의 혼인 형태라고 제창하였음을 이어 『엥겔스』가 가족제도에 관한 유물사관적 견해를 전개한 이래로 일부일부제는 사유재산의 관념의 성장에 따라 점차 확립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어있다. 그러나 인류의 원시적 혼인형태는 결코 난혼 내지 군혼 형태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웨스타말크』, 『그롯세』등이 해박한 사실조사에 의하여 갈파하였고 또 근래에는 유납학파의 거장 『슈밋트』, 『콮펠스』 등이 문화사적 민속학적 방법에 의하여 혼인의 원시적 형태는 곧 일부일부혼이였든 것이 인간의 자연적 본질에 기본된 것임을 논증하였다. 이제 이 상반된 학설의 어느 것이 정당하냐함은 우리의 당면의 문제가 아님으로 여기에 대한 평론은 할애하거니와 무릇 제다민족이 각자 다른 혼인 형식을 가지고 있음은 해민족의 문명정도와 특수사정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 또 어떤 민족에 있어서나 유일한 혼인양식을 가지고 있다 하기보다 오히려 다양의 혼인형식이 병존한다는 것이 거반 통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다부일부제는 서장이나 남인도의 일부에서 실행되고 있으나 거기에는 또한 일부일부혼과 일부다부혼이 병행하고 있다하며 허다히 일부다부혼이 당사로 되어있는 사회에 있어서도 역시 일부일부혼을 정당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포 상태야 어쨌든 이것을 조선에 있어서 보건대 적어도 역사시대 이래로는 군혼이라던가 다부일부혼의 존재를 거의 인증할 수가 없고 오직 일부일부혼제도가 일찍 삼한 이래로 정당한 혼인 형태로서 확립하였고 그 변태로서 일부다처제가 병행하여 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일부다처제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첩제가 일부일부와 어떠한 관계에 있어서 발전하여 왔는가를 고찰하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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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2번= 대저 일부다처제라 하여도 그것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그중에 가장 원시적인 것은 처된 다수의 여자가 전연 평등한 지위에 서서 동일한 대우를 받은 경우인데 실제로는 극히 희소한 다처 형태요 오히려 다처 간에는 어떤 순위가 있는 것이 통상이다. 그리하여 그 순위의 정도가 심해저서 그중 일처만이 특별히 강하게 부와 결합하고 따라서 가장 높은 지위를 독점하여 여타 제처는 그보다 열등한 지위에 있게 될 때 그것은 거반 일부일처제와 근사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른바 첩제가 그 형식에 있어서는 분명히 일부다처제이면서 실질에 있어서는 어쨌든지 일부일처제의 일변태로서 생기게 된 것은 곧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회와 시대에 따라서는 처에 대한 첩의 지위가 그다지 심하게 열등치 않은 경우가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첩제는 이른바 다처제와 구별하기 난하나 고대 문명 민족에 있어서는 거반 예외없이 존재한 형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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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3번= 고대 『헤부라이』민족에 있어서는 처첩의 간에 판연한 구별이 있었으나 수처 간에는 법률적으로 하등 신분의 상위가 없었고 남자가 취할 수 있는 처의 수에도 특정한 제한이 없어서 영화의 왕 『소로몬』은 칠백의 후비, 삼백의 빈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고, 장로들은 4, 5처를 거느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다. 그러나 점차 개명함에 따라 예언자와 사회 여론의 반대로 다처제가 점멸하야⎯ 기독교 초창 시대에도 약간 허인되었으나⎯11세기 초기에 이르러서 겨우 소멸 되었다 한다. 고대 희랍에 있어서는 역사시대 이래로 일부일부제가 확립하였으나 『호―마』시대에는 정처 외에 전승 포로에 의한 첩이 수다하였던 것이 『일리야드』, 『오딧세이』에 전하였으며 그 전성시대에도 사회 여론의 비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축첩의 속이 성행하였으나 일반으로 첩은 가내 노예에서 선출된 자요 따라서 첩자는 가족의 성원이 되지 못하여 가조신의 제사나 가산 상속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고대 라마에 있어서의 일부일부제는 희랍의 그것보다 훨씬 엄격한 것이었으나 축첩제는 공연히 승인된 제도였다. 그것은 시초엔 법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Concubinatus라는 결합 형식이었는데 사회적 대세에 의하여 점차로 법적 승인을 받게 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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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4번= 지나의 첩제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찍 주대에는 계급에 따라 첩수의 제한과 명칭의 차별이 제정되어 천자일취십이녀·제후일취구녀·대부일처이첩·사일처일첩으로써 원칙을 삼고 왕비가 사거하면 잉(첩)을 곧 계립케하였다. 민간의 축첩은 공허된 바가 아니었으나 실제 상으로 널리 실행되였던 것은 첩이 그 부를 군이라고 호칭하였음으로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예제 상으로는 첩과 첩자의 상복 관계가 명시되었고 법제상으로도 처첩에 관한 법규가 제정되었다. 그러나 제도로서 허인된 축첩의 근본 요구는 대가족제의 본질인 가계 존속을 위한 자식을 얻고자 하는 데 있음으로 정처주의에 입각한 처첩의 서를 분명히 한 것은 사회 통제상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니 명률에 제정된 처첩실서률은 곧 그 현현일 것이다. 그런대 당률에 있어서는 첩의 신분에 관한 규정이 없음을 볼진대 당시 첩의 계급적 차별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은 것이었던지 알 수 없으나 청률에 있어서는 거반 명률을 그대로 답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첩의 신분의 제한에 관한 조목을 산제하였음을 보면 당시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물론하고 누구든지 축첩이 일반적이었음으로 이것을 전연 방임한 것이 치세 방침상 필요한 것이라고 본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근래에까지 첩은 곧 가정의 성원으로서 공인되어있었으니 대리원의 판례에 「첩은 가족의 일원임으로써 기타가족과 같이 상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하였음을 보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일본에 있어서는 명치13년형법전의 공포와 함께 축첩제는 말살되였고 명치31년 현행 민법 시행 이후 민법상으로도 전연 인정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 즉시로 축첩의 사실이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최고의 기록으로는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其俗 國之大人 皆四五婦 下戶或二三婦 婦不淫 不妬忌」라 하였음에 그것이 다처제였던가 축첩제였던가를 명언하기 난하나 기기에 전한바 천황의 적후 즉 皇夫人(オホキサキ)에 대한 『キサキ』 또는 『ヒメ』, 적처 즉 牟加比女(ムカヒメ)에 대한 『女』, 전처 즉 (コナミ)에 대한 『宇波那通(ウハナリ)』등의 명칭으로써 첩제의 실상을 알 수 있고 왕조시대에는 법제상으로 명료하게 첩을 인정하였다. 대빈률령에는 『妻妾二等親』이라고 명시하여 처첩이 거의 동등의 지위에 있었으나 첩의 신분은 점차로 전락되어 덕천시대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저열하였던 것이 명치유신정부가 오히려 첩제를 공인하여 처첩이인등친의 율을 복고하였던 것은 신흥 자본주의 세력에 수반한 축첩 성행의 사회 현상을 반영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공연한 첩제에서 은연한 첩제로 변환한 것이 그 발전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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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번= {{TagSpage|48}}二<br/>{{TagRef|1}}朝鮮에 있어서는 일즉 三韓時代에 父家長權家族制의 確立과 함께 一夫一妻制가 正常한 婚姻 形式이였든 것은 이미 論及한 바 있거니와 他方으로 또한 一夫多妻制 乃至 蓄妾制가 並行되였던 것을 文獻上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ref>拙稿『朝鮮禮俗의 硏究』叅照(菁丘學叢第二十四號所揭)</ref> 古代 朝鮮{{TagPage|49-1}}의 俗에 『沃沮國小 追於大國之間 遂臣屬句麗 (略) 又送其美女 以為婢妾 遇之如奴僕』{{TagRef|2}} <ref>三國志魏志東沃沮傳</ref>이라 하였으니, 部落 相互間의 鬪爭의 産物로서 婢妾이 盛行하였든 것을 알 수 있고 高句麗大武神王十五年春三月에는 大臣仇都, 速苟, 焚求等三人이 罪를 어더 庶人이 됨에 {{TagRef|3}}『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其所欲』<ref>三國史記券第十四高句麗本紀第二</ref>이라는 記錄을 보면 部落內에 있어서도 權勢에 依하야 妻妾을 掠奪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高句麗의 俗에 {{TagRef|4}}『無牢獄 有罪 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ref>三國志魏志高句麗傳</ref>라 하였고 百濟의 俗에 {{TagRef|5}}『婦人犯姦者 入夫爲婢』<ref>北史券九十四百濟傳</ref>라 하였으니 犯罪者의 妻女 또는 犯姦女 等이 强制的으로 奴婢가 된 것을 傳한 것이나 이러한 境遇에는 大蓋 婢妾으로 되고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大抵 이렇한 事實은 原始的 共産態의 崩壞와 私有財産의 出現에 따라서 생긴 社會 經濟 發展 過程의 必然的 産物이라고 할 수 있으니 婦女가 戰敗의 結果로서 征服者의 婢妾이 된다던가 家族의 犯罪로 因하야 奴婢가 된다던가 또는 富權 階級에 賣却된다던가 하야 거반 財産視된 것은 諸多民族의 古代社會에 널리 볼 수 있는 現象이다. 그리하야 그것은 婦女의 低劣한 地位가 決定的으로 된 最初의 段階를 이루었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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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번= {{TagSpage|49-2}}이러한 過程을 지나 생긴 妾은 漸次로 發展하야 貴族群에게 이른바 奢侈 奴隸의 役割을 하게되였다. 新羅의 王族間에 嚴在하였던 骨品制에 依하면 {{TagRef|6}}「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女 雖娶常爲妾媵」<ref>新唐書新羅傳</ref>이라하였으니 階級的 內婚制가 存在하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妻妾의 地位는 相當한 差等이 있었을 것이나 그들 妾을 王妃와 함께 王侯貴族의 宴席에 參列하였든 模樣이다. 天成二年(A. D 927)丁亥九月 百濟 甄萱의 侵略을 當하야 亡國의 길을 재촉한 新羅의 景哀王이 妃嬪宗戚으로 더부러 鮑石亭에 宴遊하다가 不意의 襲擊을 當한 것은 이미 著名한 史實이거니와 그 記錄의 一端에 {{TagRef|7}}「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匐乞爲奴{{TagPage|50-1}}婢 萱縱兵摽掠公私財物 入處王宫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数人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進校勘 而強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ref>三國遺事券第二, 金傳大王條</ref>이라함을 보면 戰勝에 依한 妻妾의 掠奪의 經路를 엿볼 수 있다. 또 甄萱의 妻妾이 數多하였든 것은 {{TagRef|8}}「萱多妻妾 有子十餘人」<ref>同上後百濟甄萱條</ref>의 記錄으로써 알 수 있고 甄萱의 父 阿慈个 「慈之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라 하였다. 高句麗 琉璃王이 卽位三年冬十月에 王妃 松氏가 薨하자 繼室로서 更娶二女하였는대 그 記錄에 {{TagRef|9}}「一曰禾姬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谷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還 二女爭闘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䇿馬追之 雉姬怒不還」<ref>三國史記高句麗本紀第一琉璃王三年條</ref>이라 하였음을 보면 後娶한 二妻의 間에 地位의 差等이 있었을 듯하나 相互嫉妬가 甚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新羅 文武王 時代에 王의 庶弟 車得公이 緇衣를 입고 琵琶를 들고 마치 居士의 차림으로 地方을 巡行한 일이 있었더니 州使 安吉이 公의 爲人이 殊常함을 보고 그의 집에 歡待을 하고 至夜에 安吉이 妻妾三人을 불러 말하되 今夜이 居士에게 侍宿을 하는 者는 終身偕老를 맺게 하리라 하였더니 {{TagRef|10}} 그 二妻는 「寧不並居언정 何以於人同宿이리요」하야 不應하였고 그 一妻는 「公若許면 終身並居하리다」하고 命을 이어 公에 從하였으니 賓客을 歡待하는대 一種奇異한 風俗이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安吉의 妻妾三人中에 妾은 아무 말이 없고 오히려 二妻만이 可否의 答이 있으니 그 妻妾乃至二妻의 間에 어느 程度의 身分上 差等이 있었던가를 잘 알 수 없는 일이다.<ref>三國遺事券第二文虎王法敏條</ref> 그러나 그 當時 畜妾이란 것을 大體로 不當視하였던 것은 一夫一婦婚의 確立에 따라서 必然한 要求가 아니면 안되였을 것이다. 이제 그 實例를 新羅의 貴族 崔伉의 傳記에서 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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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번= {{TagSpage|50-2}}{{TagRef|11}}新羅崔伉字石南 有愛妾 父母禁之 不得見數月 伉暴死 經八日 夜中伉往妾家 妾不知其死也 顚喜迎接 伉首揷石枏枝 分與妾曰 父母許與汝同居 故來耳 遂與妾還到其家 伉踰垣而入 夜將曉 久無消息 家人出見之 問來由 妾具說 家人{{TagPage|51-1}}曰伉死八日 今日欲葬 何說怪事 妾曰良人與我分揷石枏枝 可以此爲驗 於是開棺視之 屍首揷石枏 露濕衣裳 履已穿矣 妾知其死 痛哭欲絶 伉乃還蘇 偕老二十年而終<ref>大東韻玉券八 三</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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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4번= {{TagSpage|51-2}}이것은 勿論 한 개의 說話에 不過한 것이나 當時보터 作妾의 不美하다는 一船觀念을 傳한 바 있고 또 妾이란 것은 妻妾同居形式뿐 아니라 別居의 類型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妾은 이에 勞役 奴隸로서의 婢妾이 아니라 享樂 奴穎로서의 愛妾의 役割을 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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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번= 二<br/>조선에 있어서는 일찍 삼한시대에 부가장권가족제의 확립과 함께 일부일처제가 정상한 혼인 형식이었던 것은 이미 논급한 바 있거니와 타방으로 또한 일부다처제 내지 축첩제가 병행되었던 것을 문헌상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조선의 속에 『沃沮國小 追於大國之間 遂臣屬句麗 (略) 又送其美女 以為婢妾 遇之如奴僕』이라 하였으니, 부락 상호 간의 투쟁의 산물로서 비첩이 성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고 고구려 대무신왕 십오년 춘삼월에는 대신구도, 속구, 분구 등 삼인이 죄를 얻어 서인이 됨에 『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其所欲』이라는 기록을 보면 부락 내에 있어서도 권세에 의하여 처첩을 약탈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고구려의 속에 『無牢獄 有罪 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라 하였고 백제의 속에 『婦人犯姦者 入夫爲婢』라 하였으니 범죄자의 처녀 또는 범간녀 등이 강제적으로 노비가 된 것을 전한 것이나 이러한 경우에는 대개 비첩으로 되고말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저 이러한 사실은 원시적 공산태의 붕괴와 사유재산의 출현에 따라서 생긴 사회 경제 발전 과정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부녀가 전패의 결과로서 정복자의 비첩이 된다던가 가족의 범죄로 인하여 노비가 된다던가 또는 부권 계급에 매각된다던가 하여 거반 재산시된 것은 제다민족의 고대사회에 널리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부녀의 저렬한 지위가 결정적으로 된 최초의 단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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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 이러한 과정을 지나 생긴 첩은 점차로 발전하여 귀족군에게 이른바 사치 노예의 역할을 하게되었다. 신라의 왕족간에 엄재하였던 골품제에 의하면 「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女 雖娶常爲妾媵」이라하였으니 계급적 내혼제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처첩의 지위는 상당한 차등이 있었을 것이나 그들 첩을 왕비와 함께 왕후귀족의 연석에 참렬하였던 모양이다. 천성 2년(A. D 927)정해구월 백제 견훤의 침략을 당하여 망국의 길을 재촉한 신라의 경애왕이 비빈종척으로 더불어 포석정에 연유하다가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은 이미 저명한 사실이거니와 그 기록의 일단에 「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匐乞爲奴婢 萱縱兵摽掠公私財物 入處王宫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数人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進校勘 而強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이라함을 보면 전승에 의한 처첩의 약탈의 경로를 엿볼 수 있다. 또 견훤의 처첩이 수다하였던 것은 「萱多妻妾 有子十餘人」의 기록으로써 알 수 있고 견훤의 부 아자개 「慈之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라 하였다. 고구려 유리왕이 즉위 삼년 동십월에 왕비 송씨가 훙하자 계실로서 경취이녀하였는데 그 기록에 「一曰禾姬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谷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還 二女爭闘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䇿馬追之 雉姬怒不還」이라 하였음을 보면 후취한 이처의 간에 지위의 차등이 있었을 듯하나 상호 질투가 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 시대에 왕의 서제 차득공이 치의를 입고 비파를 들고 마치 거사의 차림으로 지방을 순행한 일이 있었더니 주사 안길이 공의 위인이 수상함을 보고 그의 집에 환대를 하고 지야에 안길이 처첩삼인을 불러 말하되 금야이 거사에게 시숙을 하는 자는 종신해로를 맺게 하리라 하였더니 그 이처는 「寧不並居언정 何以於人同宿이리요」하여 부응하였고 그 일처는 「公若許면 終身並居하리다」하고 명을 이어 공에 종하였으니 빈객을 환대하는데 일종 기이한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안길의 처첩 삼인중에 첩은 아무 말이 없고 오히려 이처만이 가부의 답이 있으니 그 처첩 내지 이처의 간에 어느 정도의 신분상 차등이 있었던가를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당시 축첩이란 것을 대체로 부당시하였던 것은 일부일부혼의 확립에 따라서 필연한 요구가 아니면 안되였을 것이다. 이제 그 실례를 신라의 귀족 최항의 전기에서 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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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번= 新羅崔伉字石南 有愛妾 父母禁之 不得見數月 伉暴死 經八日 夜中伉往妾家 妾不知其死也 顚喜迎接 伉首揷石枏枝 分與妾曰 父母許與汝同居 故來耳 遂與妾還到其家 伉踰垣而入 夜將曉 久無消息 家人出見之 問來由 妾具說 家人曰伉死八日 今日欲葬 何說怪事 妾曰良人與我分揷石枏枝 可以此爲驗 於是開棺視之 屍首揷石枏 露濕衣裳 履已穿矣 妾知其死 痛哭欲絶 伉乃還蘇 偕老二十年而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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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4번= 이것은 물론 한 개의 설화에 불과한 것이나 당시부터 작첩의 불미하다는 일반 관념을 전한 바 있고 또 첩이란 것은 처첩 동거 형식뿐 아니라 별거의 유형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첩은 이에 노역 노예로서의 비첩이 아니라 향악 노영로서의 애첩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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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 {{TagSpage|52}}三<br/>高麗朝에 이르러서도 王侯貴族을 비롯하야 閥族富家의 間에 妻妾並畜의 習俗이 盛行하였던 것이 史實에 歷然하니 卽 {{TagRef|1}}「高麗官府有媵 國官有妾 民庶之妻 雜役之婢 服飾相類 富家娶妻三四人 小不相合輒離居 產子居別室」<ref>高麗圖經雜俗條</ref>이라는 記錄으로써 그 實狀을 잘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歷代의 王은 그 過半이 多妻制를 持續하였고 正配의 外에는 이것을 『內職』이라고 名稱하였다⎯時代에 따라서 그 名稱은 여러가지로 改變하였지만 高麗史에 依하면 {{TagRef|2}}「高麗之制 王母稱王太后 妾稱夫人 貴妃·淑妃·德妃·賢妃 是爲夫人秩並正一品 自餘尙宮·尙寢·尙食·尙針皆有員次 靖宗以後或稱宮主或稱院主或稱翁主 改復不常未可詳也」<ref>高麗史券第八十八, 列傳券第一, 后妃條</ref>라 하였으니 夫人 以下는 모다 이것을 內職이라는 稱號로써 通用하였든 模樣이다. 勿論 內職이라고 表示하여있을만큼 어떤 職務를 맡었을 것이나 그것이 끝 正配 以外의 妾賤인 것이 틀임없을 것이다. 이 內職의 制度는 國初에 아무런 定制가 없고 {{TagRef|3}}「后妃而下以某院·某宮夫人爲號」<ref>同上券第七十七, 志券三十一百官二內職條<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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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時有尙宮·尙寢·尙食·尙針之職 又有貴妃·淑妃等號 ○靖宗以後或稱院主·院妃或稱宮主 ○文宗定官制貴妃·淑妃·德妃·賢妃並正一品 ○忠宣王改宮主爲翁主 ○忠惠王以後 後宮女職尊卑無等 私婢官妓 亦封翁主·宅主.</ref>라하는대 비롯하야 漸次로 變速의 經路를 밟아오다가 麗末 恭讓王 時에 都評議使司의 上言에 依하야 그 秩序를 明瞭히 하려고 努力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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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 {{TagRef|4}}恭讓王三年八月都評議使司上言 自古天子之配爲后 諸侯之配爲妃……我國家 近代以來 紀綱陵夷 不循禮制 后妃·翁主·宅主之稱 或出時君之所欲 或因權勢之私情 皆失其義 至於臣僚妻室之封祖宗之贈 皆無定制 願自今定以王之正配稱妃 冊授金印 世子正配稱嬪 冊授銀印……文武一品正妻封小國夫人 二品正妻封大郡夫人……凡婦人須自室女爲人正妻者得封 父無官嫡母無子而次妻之子 有官者許封嫡母 其次妻雖不得因夫受封 所生之子有官者 當從母以子貴之例受{{TagPage|53-1}}封……從之<ref>同上券第七十五 志第二十九 選擧詮注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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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 {{TagSpage|53-2}}이에 依하면 文武高官에 正妻 次妻가 있고 그것은 곧 相續 上 嫡庶와 不可分離의 關係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次妻와 正妻外에 있었을 妾과의 間에 身分 上어느 程度의 差別이 있었던가는 不明하나 妾이란 것이 그다지 低劣란 地位가 아니였든 것이라 推測할 수 있을만큼 一般的 制度이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一般民間에 있어서도 妾은 妻와 다같이 擅去 또는 改嫁함을 法禁하였으니 {{TagRef|5}}「妻擅去徒二年 改嫁,流二千里 妾擅去徒一年 改嫁二年半 娶者同罪 不知有夫 不坐」<ref>同上第八十四 志券第三十八 刑法一戶婚條</ref>이라는 刑律에 依하면 妾은 永續的 結合의 關係이였든 것이 明瞭하다. {{TagRef|6}}麗史列傳에 依하면 多妻多妾의 記錄이 자못 頗多하야 이것을 枚擧하기 難하나 이제 그 二三의 實例을 擧示하여 보건대.<ref>同上券第百六 列傳池大淵·崔忠獻·金元命傳條</ref> 禑王의 世에 池大淵은 行伍에서 立身하야 드듸어 宰輔가 되였는데 그 姬妾이 거이 三十人에 達하였다 (或云妾十二人其子益謙妾七人)하였고 高宗年間에 崔忠獻은 처음 上將軍宋淸의 女를 娶한 後 大將軍孫洪胤을 殺害하야 其妻任氏를 娶하고 또 康宗의 庶女王氏를 娶하야 各各 綏成宅主(任氏) 靜和宅主(王氏)에 封하였는대 이윽고 李至榮의 妓妾 紫雲仙을 至榮의 死後에 姬妾으로 삼었었다. 또 麗末 恭愍王 時에 宰相 金相命은 贊成 李龜壽와 刎蝢의 交友이였었는대 어느날 龜壽가 元命의 家를 지나자 酒宴을 베푸러 그의 妻妾으로 하여금 同席케 하매 元命의 畜妾함을 龜壽 憤慨하야 「君爲相 家不齊, 何以正國」고 하며 그의 妾을 叱下하야 不飮而去하였다하니 그것은 한갓 享樂을 目的한 畜妾의 俗을 不當視한 것이 當時 士大夫를 비롯하야 一般의 夫婦觀이였던 것임을 傳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대 忠烈王 時에 오히려 畜妾을 奬勵함과 같은 記錄이 傳하야있으니 即 大付卿 朴褕의 上疏의 一端에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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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 {{TagSpage|53-3}}{{TagRef|7}}我國本男少女多 今尊卑皆止一妻 無子者亦不敢畜妾 異國人之來者 則娶無定限 恐人物皆將北流 請大小臣僚 娶庶妻{{TagPage|54-1}}隨品降殺 以至庶人得娶一妻一妾 其庶妻所生者 亦得比適子從仕 如是則怨曠以消 戶口以增矣<ref>同上券第百六 列傳第十九朴楡傳</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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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번= {{TagSpage|54-2}}이것은 當時 元에 對한 貢女의 弊端을 論破하고 婦女의 北流를 防止하려는 社會政策 上의 獻議이였을만큼 그 述辭에 修飾이 있음을 考慮하야 「婦女聞之 莫不怨懼 會 燈夕 褕扈駕行 有一嫗指之曰 請畜庶妻者 彼老乞兒也 聞者傳相指之 巷陌之閒 紅指如束 時宰相有畏其室者 寢其議不行」이라 하였음을 보건대 婦女北流防止策으로서의 畜庶妻妾奬勵論이 結局 아무런 奏効를 얻지 못하고만 것은 一般으로 當時에 多畜庶妻의 制를 必要로 삼은 見解가 朝廷에서 多少 論議가 되였었으리라 싶은 것은 隣接의 大國家古에 對하려는 高麗의 그럴듯한 國策인 듯도 하거니와 忠烈朝에 그것이 곧 王의 政見이였든 것을 傳한 記錄이 있다. 卽 大將軍 金琿이 上將軍 金文庇의 집에서 圍碁의 노름을 하던 中 文庇의 妻 朴氏가 琿의 偉猊에 戀情을 기울니게 되고 琿도 또한 朴氏의 뜻을 짐작한지 未久에 文庇死하고 또 琿의 妻가 死하였음으로 마츰내 兩人이 情을 通하고만 事案에 對하야 監察이 그 非禮를 糾彈하게까지 되였었음에 마지못하야 琿을 海島에 流配하고 朴을 곧 竹由로 도라가게 하였는데 {{TagRef|8}}「初王以戶口日耗 令士民皆畜庶妻 庶妻乃良家女也 其子孫許通仕路 若不顧信義 棄舊從新者 隨卽罪之 所司方議施行 及琿犯禮遂寢」<ref>同上券第百三 金慶孫 列傳 條</ref>이라함에 보아서 아다싶이 信義를 不顧하고 離合을 함부로 할 境遇에는 處罰을 嚴히 하였던 것이 當時의 情況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와 같이 並畜庶妻를 公認함은 곧 人口增殖政策 上의 所以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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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6번= {{TagSpage|54-3}}이와 같이 高麗時代에는 多妻制와 畜妾制가 並行하고 妾의 地位는 妻의 그것의 比하야 그다지 懸隔한 것이 아니였다고 推測된다. 그러든 것이 李朝에 이르러서는 妻妾의 分이 嚴하여지고 또 多妻制가 崩壞된 傾向이 顯著하게 되었으니 {{TagPage|55-1}}그것은 相續 上 곧 嫡庶의 問題가 漸次로 深刻하여지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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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 三<br/>고려조에 이르러서도 왕후귀족을 비롯하여 벌족부가의 간에 처첩병축의 습속이 성행하였던 것이 사실에 역연하니 즉 「高麗官府有媵 國官有妾 民庶之妻 雜役之婢 服飾相類 富家娶妻三四人 小不相合輒離居 產子居別室」이라는 기록으로써 그 실상을 잘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역대의 왕은 그 과반이 다처제를 지속하였고 정배의 외에는 이것을 『내직』이라고 명칭하였다⎯시대에 따라서 그 명칭은 여러 가지로 개변하였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高麗之制 王母稱王太后 妾稱夫人 貴妃·淑妃·德妃·賢妃 是爲夫人秩並正一品 自餘尙宮·尙寢·尙食·尙針皆有員次 靖宗以後或稱宮主或稱院主或稱翁主 改復不常未可詳也」라 하였으니 부인 이하는 모두 이것을 내직이라는 칭호로써 통용하였던 모양이다. 물론 내직이라고 표시하여 있을 만큼 어떤 직무를 맡었을 것이나 그것이 끝 정배 이외의 첩천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내직의 제도는 국초에 아무런 정제가 없고 「后妃而下以某院·某宮夫人爲號」라하는대 비롯하여 점차로 변속의 경로를 밟아오다가 여말 공양왕 시에 도평의사사의 상언에 의하여 그 질서를 명료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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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 恭讓王三年八月都評議使司上言 自古天子之配爲后 諸侯之配爲妃……我國家 近代以來 紀綱陵夷 不循禮制 后妃·翁主·宅主之稱 或出時君之所欲 或因權勢之私情 皆失其義 至於臣僚妻室之封祖宗之贈 皆無定制 願自今定以王之正配稱妃 冊授金印 世子正配稱嬪 冊授銀印……文武一品正妻封小國夫人 二品正妻封大郡夫人……凡婦人須自室女爲人正妻者得封 父無官嫡母無子而次妻之子 有官者許封嫡母 其次妻雖不得因夫受封 所生之子有官者 當從母以子貴之例受封……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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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 이에 의하면 문무고관에 정처 차처가 있고 그것은 곧 상속 상 적서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차처와 정처 외에 있었을 첩과의 간에 신분 상 어느 정도의 차별이 있었던가는 불명하나 첩이란 것이 그다지 저열한 지위가 아니었든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만큼 일반적 제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민 간에 있어서도 첩은 처와 다 같이 천거 또는 개가함을 법금하였으니 「妻擅去徒二年 改嫁,流二千里 妾擅去徒一年 改嫁二年半 娶者同罪 不知有夫 不坐」이라는 형률에 의하면 첩은 영속적 결합의 관계였든 것이 명료하다. 여사열전에 의하면 다처다첩의 기록이 자못 파다하여 이것을 매거하기 난하나 이제 그 2, 3의 실례을 거시하여 보건대. 우왕의 세에 지대연은 행오에서 입신하야 드디어 재보가 되였는데 그 희첩이 거의 삼십인에 달하였다 (혹운첩12인기자익겸첩7인)하였고 고종년간에 최충헌은 처음 상장군 송청의 여를 취한 후 대장군 손홍윤을 살해하야 기처 임 씨를 취하고 또 강종의 서녀 왕 씨를 취하야 각각 수성택주(임씨) 정화택주(왕씨)에 봉하였는대 이윽고 이지영의 기첩 자운선을 지영의 사후에 희첩으로 삼었었다. 또 여말 공민왕 시에 재상 김상명은 찬성 이구수와 문혈의 교우였는데 어느 날 구수가 원명의 가를 지나자 주연을 베풀어 그의 처첩으로 하여금 동석하게 함에 원명의 축첩함을 구수 분개하여 「君爲相 家不齊, 何以正國」고 하며 그의 첩을 질하하여 불음이거하였다하니 그것은 한갓 향악을 목적한 축첩의 속을 부당시한 것이 당시 사대부를 비롯하여 일반의 부부관이였던 것임을 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대 충렬왕 시에 오히려 축첩을 장려함과 같은 기록이 전하여 있으니 즉 대부경 박유의 상소의 일단에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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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 我國本男少女多 今尊卑皆止一妻 無子者亦不敢畜妾 異國人之來者 則娶無定限 恐人物皆將北流 請大小臣僚 娶庶妻隨品降殺 以至庶人得娶一妻一妾 其庶妻所生者 亦得比適子從仕 如是則怨曠以消 戶口以增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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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번= 이것은 당시 원에 대한 공녀의 폐단을 논파하고 부녀의 북류를 방지하려는 사회정책 상의 헌의였을만큼 그 술사에 수식이 있음을 고려하여 「婦女聞之 莫不怨懼 會 燈夕 褕扈駕行 有一嫗指之曰 請畜庶妻者 彼老乞兒也 聞者傳相指之 巷陌之閒 紅指如束 時宰相有畏其室者 寢其議不行」이라 하였음을 보건대 부녀북류방지책으로서의 축서처첩장려론이 결국 아무런 주효를 얻지 못하고만 것은 일반으로 당시에 다축서처의 제를 필요로 삼은 견해가 조정에서 다소 논의가 되었으리라 싶은 것은 인접의 대국가고에 대하려는 고려의 그럴듯한 국책인 듯도 하거니와 충렬조에 그것이 곧 왕의 정견이였던 것을 전한 기록이 있다. 즉 대장군 김혼이 상장군 김문비의 집에서 위기의 노름을 하던 중 문비의 처 박씨가 혼의 위례에 연정을 기울이게 되고 혼도 또한 박 씨의 뜻을 짐작한지 미구에 문비 사하고 또 혼의 처가 사하였음으로 마침내 양인이 정을 통하고만 사안에 대하여 감찰이 그 비례를 규탄하게까지 되였었음에 마지 못하여 혼을 해도에 유배하고 박을 곧 죽유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初王以戶口日耗 令士民皆畜庶妻 庶妻乃良家女也 其子孫許通仕路 若不顧信義 棄舊從新者 隨卽罪之 所司方議施行 及琿犯禮遂寢」이라함에 보아서 알다시피 신의를 부고하고 이합을 함부로 할 경우에는 처벌을 엄히 하였던 것이 당시의 정황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와 같이 병축서처를 공인함은 곧 인구 증식 정책 상의 소이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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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6번=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다처제와 축첩제가 병행하고 첩의 지위는 처의 그것의 비하야 그다지 현격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던 것이 이조에 이르러서는 처첩의 분이 엄하여지고 또 다처제가 붕괴된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상속 상 곧 적서의 문제가 점차로 심각하여지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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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1일 (목) 08:0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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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첩제사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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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妾制史小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1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김두헌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9년12월
시작쪽 043쪽 종료쪽 093쪽 전체쪽 51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목차







본문


본문1: 一


대저 일부다처제라 하여도 그것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그중에 가장 원시적인 것은 처된 다수의 여자가 전연 평등한 지위에 서서 동일한 대우를 받은 경우인데 실제로는 극히 희소한 다처 형태요 오히려 다처 간에는 어떤 순위가 있는 것이 통상이다. 그리하여 그 순위의 정도가 심해저서 그중 일처만이 특별히 강하게 부와 결합하고 따라서 가장 높은 지위를 독점하여 여타 제처는 그보다 열등한 지위에 있게 될 때 그것은 거반 일부일처제와 근사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른바 첩제가 그 형식에 있어서는 분명히 일부다처제이면서 실질에 있어서는 어쨌든지 일부일처제의 일변태로서 생기게 된 것은 곧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회와 시대에 따라서는 처에 대한 첩의 지위가 그다지 심하게 열등치 않은 경우가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첩제는 이른바 다처제와 구별하기 난하나 고대 문명 민족에 있어서는 거반 예외없이 존재한 형태이었다.
쪽수▶P44-2 大抵 원문주5▶一夫多妻制라 하여도 그것에는 몇가지의 類型이 있다.[1] 그中에 가장 原始的인 것은 妻된 多數의 女子가 全然平▶P45 等한 地位에 서서 同一한 待遇를 받은 境遇인대 實際로는 極히 稀少한 多妻形態요 오히려 多妻間에는 어떤 順位가 있는 것이 通常이다. 그리하야 그 順位의 正度가 甚하야저서 그中 一妻만이 特別히 强하게 夫와 結合하고 따라서 가장 높은 地位를 獨占하야 餘他 諸妻는 그보다 劣等한 地位에 있게 될 때 그것은 거반 一夫一妻制와 近似한 形態를 가추우게 된다. 이른바 妾制가 그 形式에 있어서는 分明히 一夫多妻制이면서 實質에 있어서는 어쨋든지 一夫一妻制의 一變態로서 생기게 된 것은 곧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社會와 時代에 따라서는 妻에 對한 妾의 地位가 그다지 甚하게 劣等치 않은 境遇가 있음을 看過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妾制는 이른바 多妻制와 區別하기 難하나 古代 文明 民族에 있어서는 거반 例外없이 存在한 形態이었다.
고대 『헤부라이』민족에 있어서는 처첩의 간에 판연한 구별이 있었으나 수처 간에는 법률적으로 하등 신분의 상위가 없었고 남자가 취할 수 있는 처의 수에도 특정한 제한이 없어서 영화의 왕 『소로몬』은 칠백의 후비, 삼백의 빈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고, 장로들은 4, 5처를 거느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다. 그러나 점차 개명함에 따라 예언자와 사회 여론의 반대로 다처제가 점멸하야⎯ 기독교 초창 시대에도 약간 허인되었으나⎯11세기 초기에 이르러서 겨우 소멸 되었다 한다. 고대 희랍에 있어서는 역사시대 이래로 일부일부제가 확립하였으나 『호―마』시대에는 정처 외에 전승 포로에 의한 첩이 수다하였던 것이 『일리야드』, 『오딧세이』에 전하였으며 그 전성시대에도 사회 여론의 비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축첩의 속이 성행하였으나 일반으로 첩은 가내 노예에서 선출된 자요 따라서 첩자는 가족의 성원이 되지 못하여 가조신의 제사나 가산 상속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고대 라마에 있어서의 일부일부제는 희랍의 그것보다 훨씬 엄격한 것이었으나 축첩제는 공연히 승인된 제도였다. 그것은 시초엔 법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Concubinatus라는 결합 형식이었는데 사회적 대세에 의하여 점차로 법적 승인을 받게 된 것이였다.
쪽수▶P45-2 古代 『헤부라이』民族에 있어서는 妻妾의 間에 判然한 區別이 있었으나 數妻間에는 法律的으로 何等 身分의 相違가 없었고 男子가 娶할 수 있는 妻의 數에도 特定한 制限이 없어서 榮華의 王 『소로몬』은 七百의 后妃, 三百의 嬪이 있었다는 傳設이 있고, 長老들은 四, 五妻를 거리는 것이 普通이었다 한다. 원문주6▶그러나 漸次 開明함에 따라 豫言者와 社會輿論의 反對로 多妻制가 漸滅하야⎯ 基督敎 初創時代에도 若干 許認되었으나⎯十一世紀 初期에 이르러서 겨우 消滅되었다 한다.[2] 원문주7▶古代 希臘에 있어서는 歷史時代 以來로 一夫一婦制가 確立하였으나 『호―마』時代에는 正妻 外에 戰勝 捕虜에 依한 妾이 數多하였던 것이 『일리야드』, 『오딧세이』에 傳하여있으며 그 全盛時代에도 社會輿論의 非難이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畜妾의 俗이 盛行하였으나 一般으로 妾은 家內 奴隸에서 選出된 者요 따라서 妾子는 家族의 成員이 되지못하야 家祖神의 祭祀나 家産相續에 參與할 權利가 없었던 것이다.[3] 古代羅馬에 있어서의 一夫一婦制는 希臘의 그것보다 훨신 嚴格한 것이었으나 畜妾制는 公然히 承認된 制度이였었다.원문주8▶그것은 始初엔 法的으로 認定을 받지못한 Concu▶P46binatus라는 結合 型式이였는대 社會的 大勢에 依하야 漸次로 法的 承認을 받게 된 것이였다.[4]
지나의 첩제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찍 주대에는 계급에 따라 첩수의 제한과 명칭의 차별이 제정되어 천자일취십이녀·제후일취구녀·대부일처이첩·사일처일첩으로써 원칙을 삼고 왕비가 사거하면 잉(첩)을 곧 계립케하였다. 민간의 축첩은 공허된 바가 아니었으나 실제 상으로 널리 실행되였던 것은 첩이 그 부를 군이라고 호칭하였음으로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예제 상으로는 첩과 첩자의 상복 관계가 명시되었고 법제상으로도 처첩에 관한 법규가 제정되었다. 그러나 제도로서 허인된 축첩의 근본 요구는 대가족제의 본질인 가계 존속을 위한 자식을 얻고자 하는 데 있음으로 정처주의에 입각한 처첩의 서를 분명히 한 것은 사회 통제상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니 명률에 제정된 처첩실서률은 곧 그 현현일 것이다. 그런대 당률에 있어서는 첩의 신분에 관한 규정이 없음을 볼진대 당시 첩의 계급적 차별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은 것이었던지 알 수 없으나 청률에 있어서는 거반 명률을 그대로 답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첩의 신분의 제한에 관한 조목을 산제하였음을 보면 당시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물론하고 누구든지 축첩이 일반적이었음으로 이것을 전연 방임한 것이 치세 방침상 필요한 것이라고 본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근래에까지 첩은 곧 가정의 성원으로서 공인되어있었으니 대리원의 판례에 「첩은 가족의 일원임으로써 기타가족과 같이 상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하였음을 보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일본에 있어서는 명치13년형법전의 공포와 함께 축첩제는 말살되였고 명치31년 현행 민법 시행 이후 민법상으로도 전연 인정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 즉시로 축첩의 사실이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최고의 기록으로는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其俗 國之大人 皆四五婦 下戶或二三婦 婦不淫 不妬忌」라 하였음에 그것이 다처제였던가 축첩제였던가를 명언하기 난하나 기기에 전한바 천황의 적후 즉 皇夫人(オホキサキ)에 대한 『キサキ』 또는 『ヒメ』, 적처 즉 牟加比女(ムカヒメ)에 대한 『女』, 전처 즉 (コナミ)에 대한 『宇波那通(ウハナリ)』등의 명칭으로써 첩제의 실상을 알 수 있고 왕조시대에는 법제상으로 명료하게 첩을 인정하였다. 대빈률령에는 『妻妾二等親』이라고 명시하여 처첩이 거의 동등의 지위에 있었으나 첩의 신분은 점차로 전락되어 덕천시대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저열하였던 것이 명치유신정부가 오히려 첩제를 공인하여 처첩이인등친의 율을 복고하였던 것은 신흥 자본주의 세력에 수반한 축첩 성행의 사회 현상을 반영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공연한 첩제에서 은연한 첩제로 변환한 것이 그 발전 과정이었다.
쪽수▶P46-2 支那의 妾制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즉 周代에는 階級에 따라 妾數의 制限과 名稱의 差別이 制定되야 天子一娶十二女·諸侯一娶九女·大夫一妻二妾·士一妻一妾으로써 原則을 삼고 王妃가 死去하면 媵(妾)을 곧 繼立케하였다. 民間의 畜妾은 公許된 바가 아니였으나 實際上으로 널리 實行되였든 것은 妾이 그 夫를 君이라고 呼稱하였음으로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미 禮制上으로는 妾과 妾子의 喪服關係가 明示되였고 法制上으로도 妻妾에 關한 法規가 制定되였었다. 그러나 제도로서 許認된 畜妾의 根本 要求는 大家族制의 本質인 家系 存續을 爲한 子息을 얻고자 하는 데 있음으로 正妻主義에 立脚한 妻妾의 序를 分明히 한 것은 司會 統制上 切實히 必要한 일이었을 것이니 明律에 制定된 원문주9▶妻妾失序律[5]은 곧 그 顯現일 것이다. 그런대 唐律에 있어서는 妾의 身分에 關한 規定이 없음을 볼진대 當時 妾의 階級的 差別이 그다지 重要視되지 않은 것이였든지 알 수 없으나 淸律에 있어서는 거반 明律을 그대로 踏襲하였음에도 不拘하고 特히 妾의 身分의 制限에 關한 條目을 刪除하였음을 보면 當時에는 社會的 地位 如何를 勿論하고 누구던지 畜妾이 一般的이였음으로 이것을 全然 放任한 것이 治世 方針上 必要한 것이라고 본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近來에까지 妾은 곧 假定의 成員으로서 公認되여있었으니 大理院의 判例에 원문주10▶>「妾은 家族의 一員임으로써 其他家族과 같이 相當한 待遇를 받을 것이라」[6]하였음을 보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日本에 있어서는 明治十三年刑法典의 公布와 함께 畜妾制는 抹殺되였고 明治三十一年 現行 民法 施行 以後 民法上으로도 全然 認定하지 않게 되였으나 그 即時로 畜妾의 事實이 消滅된 것은 아니였다. 最古의 記錄으로는 三國志 魏志 倭人傳에 「其俗 國之大人 皆四五婦 下戶或二三婦 婦不淫 不妬忌」라 하였음에 그것이 多妻制이였든가 畜妾制이였든가를 明言하기 難하나 記紀에 傳한바 天皇의 嫡后 即 皇夫人(オホキサキ)에 對한 『キサ▶P47キ』 또는 『ヒメ』, 嫡妻 即 牟加比女(ムカヒメ)에 對한 『女』, 前妻 即 古那美(コナミ)에 對한 『宇波那通(ウハナリ)』等의 名稱으로써 妾制의 實狀을 알 수 있고 王朝時代에는 法制上으로 明瞭하게 妾을 認定하였다. 원문주11▶大賓律令에는 『妻妾二等親』이라고 明示하야 妻妾이 거이 同等의 地位에 있었으나 妾의 身分은 漸次로 轉落되야 德川時代에 이르러서는 至極히 低劣하였던 것이 明治維新政府가 오히려 妾制를 公認하야 妻妾二人等親의 律을 復古하였던 것은 新興 資本主義 勢力에 隨伴한 畜妾 盛行의 社會 現象을 反映함이였든 것이다.[7] 그러나 全體的으로 보면 公然한 妾制에서 隱然한 妾制로 變還한 것이 그 發展 過程이였다. 목차1해독문1번=일
일부일부혼은 현하 문명 사회에 있어서 가장 널리 실행 되어있는 일반적 혼인 형식일 뿐 아니라 그것이 또한 인류가 가진 바 최고의 이상적 혼인 형태인 것은 누구나 다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적 혼인 형태에 이르기까지에 인류는 이미 여러 가지 혼인 양식을 경험하고 왔던 것이다. 인간은 모든 물건을 식료로 삼을 수 있는 「범식자」임과 같이 모든 혼인의 형식 중에서 생활할 수 있는 「범식자」라고 어떤 학자는 말하였거니와 실로 인류의 혼인사는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하고 있다. 이제 혼인 당사자의 수로 보아서 혼인 관계를 든다면 대체로 단식과 복식의 이 양식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식혼은 곧 일부일부혼을 말한 것이겠고 복식혼은 군혼, 다부일부혼, 일부다부혼 등의 유형을 말한 것인데 그 분포의 상태는 시대와 민족에 따라서 다른 바가 있다. 원래 혼인의 형태는 가족의 형태에 의존하야 그것과 부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것에 관하야서는 일즉 부권가족에 역사적으로 앞선 모권가족의 존재를 창설한 『바코―휀』과 가족의 형태는 5계단을 지나 발전하였다고 주장한 『몰간』 등이 군혼 내지 난혼을 인류가 가진 바 최초의 혼인 형태라고 제창하였음을 이어 『엥겔스』가 가족제도에 관한 유물사관적 견해를 전개한 이래로 일부일부제는 사유재산의 관념의 성장에 따라 점차 확립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어있다. 그러나 인류의 원시적 혼인형태는 결코 난혼 내지 군혼 형태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웨스타말크』, 『그롯세』등이 해박한 사실조사에 의하여 갈파하였고 또 근래에는 유납학파의 거장 『슈밋트』, 『콮펠스』 등이 문화사적 민속학적 방법에 의하여 혼인의 원시적 형태는 곧 일부일부혼이였든 것이 인간의 자연적 본질에 기본된 것임을 논증하였다. 이제 이 상반된 학설의 어느 것이 정당하냐함은 우리의 당면의 문제가 아님으로 여기에 대한 평론은 할애하거니와 무릇 제다민족이 각자 다른 혼인 형식을 가지고 있음은 해민족의 문명정도와 특수사정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 또 어떤 민족에 있어서나 유일한 혼인양식을 가지고 있다 하기보다 오히려 다양의 혼인형식이 병존한다는 것이 거반 통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다부일부제는 서장이나 남인도의 일부에서 실행되고 있으나 거기에는 또한 일부일부혼과 일부다부혼이 병행하고 있다하며 허다히 일부다부혼이 당사로 되어있는 사회에 있어서도 역시 일부일부혼을 정당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포 상태야 어쨌든 이것을 조선에 있어서 보건대 적어도 역사시대 이래로는 군혼이라던가 다부일부혼의 존재를 거의 인증할 수가 없고 오직 일부일부혼제도가 일찍 삼한 이래로 정당한 혼인 형태로서 확립하였고 그 변태로서 일부다처제가 병행하여 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일부다처제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첩제가 일부일부와 어떠한 관계에 있어서 발전하여 왔는가를 고찰하려 하는 것이다.



































본문2: 二



조선에 있어서는 일찍 삼한시대에 부가장권가족제의 확립과 함께 일부일처제가 정상한 혼인 형식이었던 것은 이미 논급한 바 있거니와 타방으로 또한 일부다처제 내지 축첩제가 병행되었던 것을 문헌상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조선의 속에 『沃沮國小 追於大國之間 遂臣屬句麗 (略) 又送其美女 以為婢妾 遇之如奴僕』이라 하였으니, 부락 상호 간의 투쟁의 산물로서 비첩이 성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고 고구려 대무신왕 십오년 춘삼월에는 대신구도, 속구, 분구 등 삼인이 죄를 얻어 서인이 됨에 『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其所欲』이라는 기록을 보면 부락 내에 있어서도 권세에 의하여 처첩을 약탈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고구려의 속에 『無牢獄 有罪 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라 하였고 백제의 속에 『婦人犯姦者 入夫爲婢』라 하였으니 범죄자의 처녀 또는 범간녀 등이 강제적으로 노비가 된 것을 전한 것이나 이러한 경우에는 대개 비첩으로 되고말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저 이러한 사실은 원시적 공산태의 붕괴와 사유재산의 출현에 따라서 생긴 사회 경제 발전 과정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부녀가 전패의 결과로서 정복자의 비첩이 된다던가 가족의 범죄로 인하여 노비가 된다던가 또는 부권 계급에 매각된다던가 하여 거반 재산시된 것은 제다민족의 고대사회에 널리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부녀의 저렬한 지위가 결정적으로 된 최초의 단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쪽수▶P48
원문주1▶朝鮮에 있어서는 일즉 三韓時代에 父家長權家族制의 確立과 함께 一夫一妻制가 正常한 婚姻 形式이였든 것은 이미 論及한 바 있거니와 他方으로 또한 一夫多妻制 乃至 蓄妾制가 並行되였던 것을 文獻上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8] 古代 朝鮮▶P49-1의 俗에 『沃沮國小 追於大國之間 遂臣屬句麗 (略) 又送其美女 以為婢妾 遇之如奴僕』원문주2▶ [9]이라 하였으니, 部落 相互間의 鬪爭의 産物로서 婢妾이 盛行하였든 것을 알 수 있고 高句麗大武神王十五年春三月에는 大臣仇都, 速苟, 焚求等三人이 罪를 어더 庶人이 됨에 원문주3▶『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其所欲』[10]이라는 記錄을 보면 部落內에 있어서도 權勢에 依하야 妻妾을 掠奪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高句麗의 俗에 원문주4▶『無牢獄 有罪 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11]라 하였고 百濟의 俗에 원문주5▶『婦人犯姦者 入夫爲婢』[12]라 하였으니 犯罪者의 妻女 또는 犯姦女 等이 强制的으로 奴婢가 된 것을 傳한 것이나 이러한 境遇에는 大蓋 婢妾으로 되고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大抵 이렇한 事實은 原始的 共産態의 崩壞와 私有財産의 出現에 따라서 생긴 社會 經濟 發展 過程의 必然的 産物이라고 할 수 있으니 婦女가 戰敗의 結果로서 征服者의 婢妾이 된다던가 家族의 犯罪로 因하야 奴婢가 된다던가 또는 富權 階級에 賣却된다던가 하야 거반 財産視된 것은 諸多民族의 古代社會에 널리 볼 수 있는 現象이다. 그리하야 그것은 婦女의 低劣한 地位가 決定的으로 된 最初의 段階를 이루었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 생긴 첩은 점차로 발전하여 귀족군에게 이른바 사치 노예의 역할을 하게되었다. 신라의 왕족간에 엄재하였던 골품제에 의하면 「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女 雖娶常爲妾媵」이라하였으니 계급적 내혼제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처첩의 지위는 상당한 차등이 있었을 것이나 그들 첩을 왕비와 함께 왕후귀족의 연석에 참렬하였던 모양이다. 천성 2년(A. D 927)정해구월 백제 견훤의 침략을 당하여 망국의 길을 재촉한 신라의 경애왕이 비빈종척으로 더불어 포석정에 연유하다가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은 이미 저명한 사실이거니와 그 기록의 일단에 「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匐乞爲奴婢 萱縱兵摽掠公私財物 入處王宫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数人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進校勘 而強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이라함을 보면 전승에 의한 처첩의 약탈의 경로를 엿볼 수 있다. 또 견훤의 처첩이 수다하였던 것은 「萱多妻妾 有子十餘人」의 기록으로써 알 수 있고 견훤의 부 아자개 「慈之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라 하였다. 고구려 유리왕이 즉위 삼년 동십월에 왕비 송씨가 훙하자 계실로서 경취이녀하였는데 그 기록에 「一曰禾姬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谷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還 二女爭闘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䇿馬追之 雉姬怒不還」이라 하였음을 보면 후취한 이처의 간에 지위의 차등이 있었을 듯하나 상호 질투가 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 시대에 왕의 서제 차득공이 치의를 입고 비파를 들고 마치 거사의 차림으로 지방을 순행한 일이 있었더니 주사 안길이 공의 위인이 수상함을 보고 그의 집에 환대를 하고 지야에 안길이 처첩삼인을 불러 말하되 금야이 거사에게 시숙을 하는 자는 종신해로를 맺게 하리라 하였더니 그 이처는 「寧不並居언정 何以於人同宿이리요」하여 부응하였고 그 일처는 「公若許면 終身並居하리다」하고 명을 이어 공에 종하였으니 빈객을 환대하는데 일종 기이한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안길의 처첩 삼인중에 첩은 아무 말이 없고 오히려 이처만이 가부의 답이 있으니 그 처첩 내지 이처의 간에 어느 정도의 신분상 차등이 있었던가를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당시 축첩이란 것을 대체로 부당시하였던 것은 일부일부혼의 확립에 따라서 필연한 요구가 아니면 안되였을 것이다. 이제 그 실례를 신라의 귀족 최항의 전기에서 또 볼 수 있다.
쪽수▶P49-2이러한 過程을 지나 생긴 妾은 漸次로 發展하야 貴族群에게 이른바 奢侈 奴隸의 役割을 하게되였다. 新羅의 王族間에 嚴在하였던 骨品制에 依하면 원문주6▶「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女 雖娶常爲妾媵」[13]이라하였으니 階級的 內婚制가 存在하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妻妾의 地位는 相當한 差等이 있었을 것이나 그들 妾을 王妃와 함께 王侯貴族의 宴席에 參列하였든 模樣이다. 天成二年(A. D 927)丁亥九月 百濟 甄萱의 侵略을 當하야 亡國의 길을 재촉한 新羅의 景哀王이 妃嬪宗戚으로 더부러 鮑石亭에 宴遊하다가 不意의 襲擊을 當한 것은 이미 著名한 史實이거니와 그 記錄의 一端에 원문주7▶「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匐乞爲奴▶P50-1婢 萱縱兵摽掠公私財物 入處王宫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数人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進校勘 而強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14]이라함을 보면 戰勝에 依한 妻妾의 掠奪의 經路를 엿볼 수 있다. 또 甄萱의 妻妾이 數多하였든 것은 원문주8▶「萱多妻妾 有子十餘人」[15]의 記錄으로써 알 수 있고 甄萱의 父 阿慈个 「慈之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라 하였다. 高句麗 琉璃王이 卽位三年冬十月에 王妃 松氏가 薨하자 繼室로서 更娶二女하였는대 그 記錄에 원문주9▶「一曰禾姬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谷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還 二女爭闘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䇿馬追之 雉姬怒不還」[16]이라 하였음을 보면 後娶한 二妻의 間에 地位의 差等이 있었을 듯하나 相互嫉妬가 甚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新羅 文武王 時代에 王의 庶弟 車得公이 緇衣를 입고 琵琶를 들고 마치 居士의 차림으로 地方을 巡行한 일이 있었더니 州使 安吉이 公의 爲人이 殊常함을 보고 그의 집에 歡待을 하고 至夜에 安吉이 妻妾三人을 불러 말하되 今夜이 居士에게 侍宿을 하는 者는 終身偕老를 맺게 하리라 하였더니 원문주10▶ 그 二妻는 「寧不並居언정 何以於人同宿이리요」하야 不應하였고 그 一妻는 「公若許면 終身並居하리다」하고 命을 이어 公에 從하였으니 賓客을 歡待하는대 一種奇異한 風俗이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安吉의 妻妾三人中에 妾은 아무 말이 없고 오히려 二妻만이 可否의 答이 있으니 그 妻妾乃至二妻의 間에 어느 程度의 身分上 差等이 있었던가를 잘 알 수 없는 일이다.[17] 그러나 그 當時 畜妾이란 것을 大體로 不當視하였던 것은 一夫一婦婚의 確立에 따라서 必然한 要求가 아니면 안되였을 것이다. 이제 그 實例를 新羅의 貴族 崔伉의 傳記에서 또 볼 수 있다.
新羅崔伉字石南 有愛妾 父母禁之 不得見數月 伉暴死 經八日 夜中伉往妾家 妾不知其死也 顚喜迎接 伉首揷石枏枝 分與妾曰 父母許與汝同居 故來耳 遂與妾還到其家 伉踰垣而入 夜將曉 久無消息 家人出見之 問來由 妾具說 家人曰伉死八日 今日欲葬 何說怪事 妾曰良人與我分揷石枏枝 可以此爲驗 於是開棺視之 屍首揷石枏 露濕衣裳 履已穿矣 妾知其死 痛哭欲絶 伉乃還蘇 偕老二十年而終
쪽수▶P50-2원문주11▶新羅崔伉字石南 有愛妾 父母禁之 不得見數月 伉暴死 經八日 夜中伉往妾家 妾不知其死也 顚喜迎接 伉首揷石枏枝 分與妾曰 父母許與汝同居 故來耳 遂與妾還到其家 伉踰垣而入 夜將曉 久無消息 家人出見之 問來由 妾具說 家人▶P51-1曰伉死八日 今日欲葬 何說怪事 妾曰良人與我分揷石枏枝 可以此爲驗 於是開棺視之 屍首揷石枏 露濕衣裳 履已穿矣 妾知其死 痛哭欲絶 伉乃還蘇 偕老二十年而終[18]
이것은 물론 한 개의 설화에 불과한 것이나 당시부터 작첩의 불미하다는 일반 관념을 전한 바 있고 또 첩이란 것은 처첩 동거 형식뿐 아니라 별거의 유형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첩은 이에 노역 노예로서의 비첩이 아니라 향악 노영로서의 애첩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쪽수▶P51-2이것은 勿論 한 개의 說話에 不過한 것이나 當時보터 作妾의 不美하다는 一船觀念을 傳한 바 있고 또 妾이란 것은 妻妾同居形式뿐 아니라 別居의 類型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妾은 이에 勞役 奴隸로서의 婢妾이 아니라 享樂 奴穎로서의 愛妾의 役割을 한 것이였다.























본문3: 三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왕후귀족을 비롯하여 벌족부가의 간에 처첩병축의 습속이 성행하였던 것이 사실에 역연하니 즉 「高麗官府有媵 國官有妾 民庶之妻 雜役之婢 服飾相類 富家娶妻三四人 小不相合輒離居 產子居別室」이라는 기록으로써 그 실상을 잘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역대의 왕은 그 과반이 다처제를 지속하였고 정배의 외에는 이것을 『내직』이라고 명칭하였다⎯시대에 따라서 그 명칭은 여러 가지로 개변하였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高麗之制 王母稱王太后 妾稱夫人 貴妃·淑妃·德妃·賢妃 是爲夫人秩並正一品 自餘尙宮·尙寢·尙食·尙針皆有員次 靖宗以後或稱宮主或稱院主或稱翁主 改復不常未可詳也」라 하였으니 부인 이하는 모두 이것을 내직이라는 칭호로써 통용하였던 모양이다. 물론 내직이라고 표시하여 있을 만큼 어떤 직무를 맡었을 것이나 그것이 끝 정배 이외의 첩천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내직의 제도는 국초에 아무런 정제가 없고 「后妃而下以某院·某宮夫人爲號」라하는대 비롯하여 점차로 변속의 경로를 밟아오다가 여말 공양왕 시에 도평의사사의 상언에 의하여 그 질서를 명료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쪽수▶P52
高麗朝에 이르러서도 王侯貴族을 비롯하야 閥族富家의 間에 妻妾並畜의 習俗이 盛行하였던 것이 史實에 歷然하니 卽 원문주1▶「高麗官府有媵 國官有妾 民庶之妻 雜役之婢 服飾相類 富家娶妻三四人 小不相合輒離居 產子居別室」[19]이라는 記錄으로써 그 實狀을 잘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歷代의 王은 그 過半이 多妻制를 持續하였고 正配의 外에는 이것을 『內職』이라고 名稱하였다⎯時代에 따라서 그 名稱은 여러가지로 改變하였지만 高麗史에 依하면 원문주2▶「高麗之制 王母稱王太后 妾稱夫人 貴妃·淑妃·德妃·賢妃 是爲夫人秩並正一品 自餘尙宮·尙寢·尙食·尙針皆有員次 靖宗以後或稱宮主或稱院主或稱翁主 改復不常未可詳也」[20]라 하였으니 夫人 以下는 모다 이것을 內職이라는 稱號로써 通用하였든 模樣이다. 勿論 內職이라고 表示하여있을만큼 어떤 職務를 맡었을 것이나 그것이 끝 正配 以外의 妾賤인 것이 틀임없을 것이다. 이 內職의 制度는 國初에 아무런 定制가 없고 원문주3▶「后妃而下以某院·某宮夫人爲號」[21]라하는대 비롯하야 漸次로 變速의 經路를 밟아오다가 麗末 恭讓王 時에 都評議使司의 上言에 依하야 그 秩序를 明瞭히 하려고 努力하였다.
恭讓王三年八月都評議使司上言 自古天子之配爲后 諸侯之配爲妃……我國家 近代以來 紀綱陵夷 不循禮制 后妃·翁主·宅主之稱 或出時君之所欲 或因權勢之私情 皆失其義 至於臣僚妻室之封祖宗之贈 皆無定制 願自今定以王之正配稱妃 冊授金印 世子正配稱嬪 冊授銀印……文武一品正妻封小國夫人 二品正妻封大郡夫人……凡婦人須自室女爲人正妻者得封 父無官嫡母無子而次妻之子 有官者許封嫡母 其次妻雖不得因夫受封 所生之子有官者 當從母以子貴之例受封……從之
원문주4▶恭讓王三年八月都評議使司上言 自古天子之配爲后 諸侯之配爲妃……我國家 近代以來 紀綱陵夷 不循禮制 后妃·翁主·宅主之稱 或出時君之所欲 或因權勢之私情 皆失其義 至於臣僚妻室之封祖宗之贈 皆無定制 願自今定以王之正配稱妃 冊授金印 世子正配稱嬪 冊授銀印……文武一品正妻封小國夫人 二品正妻封大郡夫人……凡婦人須自室女爲人正妻者得封 父無官嫡母無子而次妻之子 有官者許封嫡母 其次妻雖不得因夫受封 所生之子有官者 當從母以子貴之例受▶P53-1封……從之[22]
이에 의하면 문무고관에 정처 차처가 있고 그것은 곧 상속 상 적서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차처와 정처 외에 있었을 첩과의 간에 신분 상 어느 정도의 차별이 있었던가는 불명하나 첩이란 것이 그다지 저열한 지위가 아니었든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만큼 일반적 제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민 간에 있어서도 첩은 처와 다 같이 천거 또는 개가함을 법금하였으니 「妻擅去徒二年 改嫁,流二千里 妾擅去徒一年 改嫁二年半 娶者同罪 不知有夫 不坐」이라는 형률에 의하면 첩은 영속적 결합의 관계였든 것이 명료하다. 여사열전에 의하면 다처다첩의 기록이 자못 파다하여 이것을 매거하기 난하나 이제 그 2, 3의 실례을 거시하여 보건대. 우왕의 세에 지대연은 행오에서 입신하야 드디어 재보가 되였는데 그 희첩이 거의 삼십인에 달하였다 (혹운첩12인기자익겸첩7인)하였고 고종년간에 최충헌은 처음 상장군 송청의 여를 취한 후 대장군 손홍윤을 살해하야 기처 임 씨를 취하고 또 강종의 서녀 왕 씨를 취하야 각각 수성택주(임씨) 정화택주(왕씨)에 봉하였는대 이윽고 이지영의 기첩 자운선을 지영의 사후에 희첩으로 삼었었다. 또 여말 공민왕 시에 재상 김상명은 찬성 이구수와 문혈의 교우였는데 어느 날 구수가 원명의 가를 지나자 주연을 베풀어 그의 처첩으로 하여금 동석하게 함에 원명의 축첩함을 구수 분개하여 「君爲相 家不齊, 何以正國」고 하며 그의 첩을 질하하여 불음이거하였다하니 그것은 한갓 향악을 목적한 축첩의 속을 부당시한 것이 당시 사대부를 비롯하여 일반의 부부관이였던 것임을 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대 충렬왕 시에 오히려 축첩을 장려함과 같은 기록이 전하여 있으니 즉 대부경 박유의 상소의 일단에 이러하다.
쪽수▶P53-2이에 依하면 文武高官에 正妻 次妻가 있고 그것은 곧 相續 上 嫡庶와 不可分離의 關係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次妻와 正妻外에 있었을 妾과의 間에 身分 上어느 程度의 差別이 있었던가는 不明하나 妾이란 것이 그다지 低劣란 地位가 아니였든 것이라 推測할 수 있을만큼 一般的 制度이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一般民間에 있어서도 妾은 妻와 다같이 擅去 또는 改嫁함을 法禁하였으니 원문주5▶「妻擅去徒二年 改嫁,流二千里 妾擅去徒一年 改嫁二年半 娶者同罪 不知有夫 不坐」[23]이라는 刑律에 依하면 妾은 永續的 結合의 關係이였든 것이 明瞭하다. 원문주6▶麗史列傳에 依하면 多妻多妾의 記錄이 자못 頗多하야 이것을 枚擧하기 難하나 이제 그 二三의 實例을 擧示하여 보건대.[24] 禑王의 世에 池大淵은 行伍에서 立身하야 드듸어 宰輔가 되였는데 그 姬妾이 거이 三十人에 達하였다 (或云妾十二人其子益謙妾七人)하였고 高宗年間에 崔忠獻은 처음 上將軍宋淸의 女를 娶한 後 大將軍孫洪胤을 殺害하야 其妻任氏를 娶하고 또 康宗의 庶女王氏를 娶하야 各各 綏成宅主(任氏) 靜和宅主(王氏)에 封하였는대 이윽고 李至榮의 妓妾 紫雲仙을 至榮의 死後에 姬妾으로 삼었었다. 또 麗末 恭愍王 時에 宰相 金相命은 贊成 李龜壽와 刎蝢의 交友이였었는대 어느날 龜壽가 元命의 家를 지나자 酒宴을 베푸러 그의 妻妾으로 하여금 同席케 하매 元命의 畜妾함을 龜壽 憤慨하야 「君爲相 家不齊, 何以正國」고 하며 그의 妾을 叱下하야 不飮而去하였다하니 그것은 한갓 享樂을 目的한 畜妾의 俗을 不當視한 것이 當時 士大夫를 비롯하야 一般의 夫婦觀이였던 것임을 傳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대 忠烈王 時에 오히려 畜妾을 奬勵함과 같은 記錄이 傳하야있으니 即 大付卿 朴褕의 上疏의 一端에 이러하다.
我國本男少女多 今尊卑皆止一妻 無子者亦不敢畜妾 異國人之來者 則娶無定限 恐人物皆將北流 請大小臣僚 娶庶妻隨品降殺 以至庶人得娶一妻一妾 其庶妻所生者 亦得比適子從仕 如是則怨曠以消 戶口以增矣
쪽수▶P53-3원문주7▶我國本男少女多 今尊卑皆止一妻 無子者亦不敢畜妾 異國人之來者 則娶無定限 恐人物皆將北流 請大小臣僚 娶庶妻▶P54-1隨品降殺 以至庶人得娶一妻一妾 其庶妻所生者 亦得比適子從仕 如是則怨曠以消 戶口以增矣[25]
이것은 당시 원에 대한 공녀의 폐단을 논파하고 부녀의 북류를 방지하려는 사회정책 상의 헌의였을만큼 그 술사에 수식이 있음을 고려하여 「婦女聞之 莫不怨懼 會 燈夕 褕扈駕行 有一嫗指之曰 請畜庶妻者 彼老乞兒也 聞者傳相指之 巷陌之閒 紅指如束 時宰相有畏其室者 寢其議不行」이라 하였음을 보건대 부녀북류방지책으로서의 축서처첩장려론이 결국 아무런 주효를 얻지 못하고만 것은 일반으로 당시에 다축서처의 제를 필요로 삼은 견해가 조정에서 다소 논의가 되었으리라 싶은 것은 인접의 대국가고에 대하려는 고려의 그럴듯한 국책인 듯도 하거니와 충렬조에 그것이 곧 왕의 정견이였던 것을 전한 기록이 있다. 즉 대장군 김혼이 상장군 김문비의 집에서 위기의 노름을 하던 중 문비의 처 박씨가 혼의 위례에 연정을 기울이게 되고 혼도 또한 박 씨의 뜻을 짐작한지 미구에 문비 사하고 또 혼의 처가 사하였음으로 마침내 양인이 정을 통하고만 사안에 대하여 감찰이 그 비례를 규탄하게까지 되였었음에 마지 못하여 혼을 해도에 유배하고 박을 곧 죽유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初王以戶口日耗 令士民皆畜庶妻 庶妻乃良家女也 其子孫許通仕路 若不顧信義 棄舊從新者 隨卽罪之 所司方議施行 及琿犯禮遂寢」이라함에 보아서 알다시피 신의를 부고하고 이합을 함부로 할 경우에는 처벌을 엄히 하였던 것이 당시의 정황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와 같이 병축서처를 공인함은 곧 인구 증식 정책 상의 소이이었다 하겠다.
쪽수▶P54-2이것은 當時 元에 對한 貢女의 弊端을 論破하고 婦女의 北流를 防止하려는 社會政策 上의 獻議이였을만큼 그 述辭에 修飾이 있음을 考慮하야 「婦女聞之 莫不怨懼 會 燈夕 褕扈駕行 有一嫗指之曰 請畜庶妻者 彼老乞兒也 聞者傳相指之 巷陌之閒 紅指如束 時宰相有畏其室者 寢其議不行」이라 하였음을 보건대 婦女北流防止策으로서의 畜庶妻妾奬勵論이 結局 아무런 奏効를 얻지 못하고만 것은 一般으로 當時에 多畜庶妻의 制를 必要로 삼은 見解가 朝廷에서 多少 論議가 되였었으리라 싶은 것은 隣接의 大國家古에 對하려는 高麗의 그럴듯한 國策인 듯도 하거니와 忠烈朝에 그것이 곧 王의 政見이였든 것을 傳한 記錄이 있다. 卽 大將軍 金琿이 上將軍 金文庇의 집에서 圍碁의 노름을 하던 中 文庇의 妻 朴氏가 琿의 偉猊에 戀情을 기울니게 되고 琿도 또한 朴氏의 뜻을 짐작한지 未久에 文庇死하고 또 琿의 妻가 死하였음으로 마츰내 兩人이 情을 通하고만 事案에 對하야 監察이 그 非禮를 糾彈하게까지 되였었음에 마지못하야 琿을 海島에 流配하고 朴을 곧 竹由로 도라가게 하였는데 원문주8▶「初王以戶口日耗 令士民皆畜庶妻 庶妻乃良家女也 其子孫許通仕路 若不顧信義 棄舊從新者 隨卽罪之 所司方議施行 及琿犯禮遂寢」[26]이라함에 보아서 아다싶이 信義를 不顧하고 離合을 함부로 할 境遇에는 處罰을 嚴히 하였던 것이 當時의 情況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와 같이 並畜庶妻를 公認함은 곧 人口增殖政策 上의 所以이었다 하겠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다처제와 축첩제가 병행하고 첩의 지위는 처의 그것의 비하야 그다지 현격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던 것이 이조에 이르러서는 처첩의 분이 엄하여지고 또 다처제가 붕괴된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상속 상 곧 적서의 문제가 점차로 심각하여지게 된 까닭이다.
쪽수▶P54-3이와 같이 高麗時代에는 多妻制와 畜妾制가 並行하고 妾의 地位는 妻의 그것의 比하야 그다지 懸隔한 것이 아니였다고 推測된다. 그러든 것이 李朝에 이르러서는 妻妾의 分이 嚴하여지고 또 多妻制가 崩壞된 傾向이 顯著하게 되었으니 ▶P55-1그것은 相續 上 곧 嫡庶의 問題가 漸次로 深刻하여지게 된 까닭이다.

















본문4: 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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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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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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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7: 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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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8: 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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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1. 이것을 동렬적 다처제, 순열적 다처제, 이열적 다처제로 삼분하는 것이 일반이다. (가족제도전집사논편일, 중천선지조, 혼인사개설, 36頁. Müller-Lyer, F.. Formen der Ehe, der Famille und der Verwandtscbaft. 木下史郞 역『婚姻の諸形式』68頁.(이것을 同列的 多妻制, 順列的 多妻制, 異列的 多妻制로 三分하는 것이 一般이다. (家族制度全集史論篇一,中川善之助, 婚姻史槪說, 三六頁. Müller-Lyer, F.. Formen der Ehe, der Famille und der Verwandtscbaft. 木下史郞譯『婚姻の諸形式』六八頁.)
  2. Bennett, W. H. The Hebrew Family(in Hasting's Dictionary of the Bible. I. P. 843)
  3. Goodsell, W. . A History of the Family as a social and Educational Institution. P. 95
  4. Concubinatus라는 말은 희랍의 Pallakē라는 말을 수입하여 된 Paelicatus 또는 Paelex라는 말과 같은 내용을 가진 말인데 그것은 최초엔 계속적 혼인 관계를 맺은 일남일녀의 법외적 결합을 의미하던 것이 내종에는 유처의 남자 결합한 녀자를 가리켜 말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첩제는 충분한 시민권을 가진 동등 계급 남녀의 결합 (Matrimonium justum) 의 법제에 의거할 수 없는 여자와 동거할 경우를 말한 것이니 이를테면 그것은 충분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열등 계급에 있는 남녀의 결합(Matrimoniu-m non justum)을 점차로 합법화한 결혼 형식이다. (Goodsell. W. ibid., P. 121)(Concubinatus라는 말은 希臘의 Pallakē라는 말을 受入하야된 Paelicatus 또는 Paelex라는 말과 같은 內容을 가진 말인대 그것은 최초엔 繼續的 婚姻 關係를 매즌 一男一女의 法外的 結合을 意味하던 것이 乃終에는 有妻의 男子 結合한 女子를 가르처 말하게 되엿다. 엇잿든 이러한 妾制는 充分한 市民權을 가진 同等 階級 男女의 結合 (Matrimonium justum) 의 法制에 依據할 수업는 女子와 同居할 境遇를 말한 것이니 이를테면 그것은 充分한 市民權을 갓지 못한 劣等 階級에 있는 男女의 結合(Matrimoniu-m non justum)을 漸次로 合法化한 結婚 形式이다. (Goodsell. W. ibid., P. 121))
  5. 妻妾失序律(明律第六卷戶律婚姻條)
    凡以妻爲妾者枚一百 妻在以妾爲妻者枚九十 並改正 若有妻更娶妻者亦枚九十 離異 其民年四十以上無子者 方聽娶妾 違者笞四十
  6. 大理院判例要旨, 中華民國七年上字九二二號
  7. 中川善之助箸 『妻妾論』 四七頁以下. 家族制度全集 史論篇一, 婚姻篇所載 玉城肇氏論文 『妾』 一六三頁以下參照
  8. 拙稿『朝鮮禮俗의 硏究』叅照(菁丘學叢第二十四號所揭)
  9. 三國志魏志東沃沮傳
  10. 三國史記券第十四高句麗本紀第二
  11. 三國志魏志高句麗傳
  12. 北史券九十四百濟傳
  13. 新唐書新羅傳
  14. 三國遺事券第二, 金傳大王條
  15. 同上後百濟甄萱條
  16. 三國史記高句麗本紀第一琉璃王三年條
  17. 三國遺事券第二文虎王法敏條
  18. 大東韻玉券八 三
  19. 高麗圖經雜俗條
  20. 高麗史券第八十八, 列傳券第一, 后妃條
  21. 同上券第七十七, 志券三十一百官二內職條
    顯宗時有尙宮·尙寢·尙食·尙針之職 又有貴妃·淑妃等號 ○靖宗以後或稱院主·院妃或稱宮主 ○文宗定官制貴妃·淑妃·德妃·賢妃並正一品 ○忠宣王改宮主爲翁主 ○忠惠王以後 後宮女職尊卑無等 私婢官妓 亦封翁主·宅主.
  22. 同上券第七十五 志第二十九 選擧詮注條
  23. 同上第八十四 志券第三十八 刑法一戶婚條
  24. 同上券第百六 列傳池大淵·崔忠獻·金元命傳條
  25. 同上券第百六 列傳第十九朴楡傳
  26. 同上券第百三 金慶孫 列傳 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