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덕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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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center><big>'''👩🏻‍🏫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분류:2024-1 BigData(SNU)|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김민정(KNU2024)]]이 작성했습니다.'''</big></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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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인물정보
 
|사진= 권덕규.png
 
|사진= 권덕규.png
|사진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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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
 
|대표명= 권덕규(權悳奎)
 
|대표명= 권덕규(權悳奎)
 
|한글명= 권덕규
 
|한글명= 권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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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1950
 
|몰년= 1950
 
|출신지= 경기 김포
 
|출신지= 경기 김포
|전공= 독립운동, 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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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독립운동, 국어학, 역사학<ref>허재영,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2861074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한국문학언어학회』, 2010.06, 29쪽. 역사학자로서 우리의 고유 정신을 연구하고 지켜온 대표적인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다른 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학자 중 한 명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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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항목
 
{{인물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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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글상자|
 
{{글상자|
|내용= 권덕규(權悳奎, 1890년 ~ 1950년)는 한국의 국어학자이자, 역사가였다. 호는 애류(崖溜)이며, 1913년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모교와 중앙학교·중동학교에서 국어 및 국사를 가르쳤다. 주시경(周時經)의 뒤를 잇는 몇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 뒤 조선어학회의 역사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12월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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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권덕규(權悳奎, 1890년 ~ 1950년)는 한국의 국어학자이자, 역사가였다.<ref>허재영,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2861074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한국문학언어학회』, 2010.06, 29쪽</ref> 호는 애류(崖溜)이며, 1913년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모교와 중앙학교·중동학교에서 국어 및 국사를 가르쳤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주시경(周時經)의 뒤를 잇는 몇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ref>허재영,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2861074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한국문학언어학회』, 2010.06, 30쪽. 권덕규의 저술 목록 중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것은 '주시경 선생의 역사'이다. <조선어문경위(1923)>에 실린 '주시경 선생 전기'를 보면, 이는 일찍부터 권덕규가 쓴 것으로 알려져 왔던 글이다. 이 글은 주시경에 대한 최초의 전기문으로 알려져있으며, 이처럼 권덕규의 삶은 스승인 주시경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ref>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 뒤 조선어학회의 역사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12월 「한글맞춤법통일안」<ref>허재영,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2861074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한국문학언어학회』, 2010.06, 30쪽에서는 「한글마춤법통일안」이라고 기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정확한 명칭이 확인되지 않는다.</ref>의 원안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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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학력 그리고 그의 특징'''===
 
==='''출생 및 학력 그리고 그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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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권덕규(權悳奎, 호는 애류 崖溜)는 1891년 8월 7일에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TagInstitution|회문의숙}}을 졸업한 뒤, 휘문고보, 중앙고보 등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TagInstitution|조선어 연구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애주가로도 유명하여 학교가 끝나면 선술집으로 들렀다가 집에 가는 것이 일과였다. 집 판 돈을 술값으로 다 날리기도 하고 술 한 잔 걸치고 라디오 생방송을 하다가 코를 골고 잠을 드는 등 유명한 일화가 많다. 거침없고 고집이 세지만 과오는 솔직하게 인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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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권덕규(權悳奎, 호는 애류 崖溜)는 1891년 8월 7일에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1913년 {{TagInstitution|회문의숙}}을 졸업한 뒤, 휘문고보, 중앙고보 등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TagInstitution|조선어 연구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그는 애주가로도 유명하여 학교가 끝나면 선술집으로 들렀다가 집에 가는 것이 일과였다.<ref>『[https://www.nl.go.kr/NL/contents/N20103000000.do?schM=contView&schIdSub=CO0000003902 [근.현대의위인들]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중앙도서관</ref> 집 판 돈을 술값으로 다 날리기도 하고 술 한 잔 걸치고 라디오 생방송을 하다가 코를 골고 잠을 드는 등 유명한 일화가 많았으며 거침없고 고집이 세지만 과오는 솔직하게 인정하였다고 한다.<ref>『[https://www.nl.go.kr/NL/contents/N20103000000.do?schM=contView&schIdSub=CO0000003902 [근.현대의위인들]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중앙도서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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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사항'''===
 
==='''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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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Institution|휘문고보}}, {{TagInstitution|중앙고보}}, {{TagInstitution|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으며, {{TagPerson|주시경}} 선생의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 1921년 조선어 연구회 창립 회원이었다. 1930년 맞춤법 통일안 원안 작성 위원이었으며 표준말 사정 위원으로서 저서로는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 <을지문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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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Institution|휘문고보}}, {{TagInstitution|중앙고보}}, {{TagInstitution|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으며, {{TagPerson|주시경}} 선생의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 1921년 조선어 연구회 창립 회원이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_생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1930년 맞춤법 통일안 원안 작성 위원이었으며 표준말 사정 위원으로서 저서로는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 <을지문덕><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870 일제강점기 때,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한 국어학자]』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생애 및 활동사항</ref>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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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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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는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일제 형사들이 그를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고 갔다가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돌려보냈다. 그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연루된 33인 중 하나였다. {{TagInstitution|조선어학회}}의 회원으로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활약했고, '조선어대사전'의 편찬 위원을 맡았기에 일제의 탄압은 불가피했다. 그는 해방 뒤 십일회 회원에 포함됐으나 행방불명됐다. 저서로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 <을지문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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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는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29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 事件)_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ref>KBS역사저널 그날,"[https://www.youtube.com/watch?v=pRvClBKg_DE 역덕이슈 오늘 I 83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시작되다]", ''YouTube'', 작성일: 2019년 1월 24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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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일제 형사들이 그를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고 갔다가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돌려보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_생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그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연루된 33인 중 하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_생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TagInstitution|조선어학회}}의 회원으로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활약했고, '조선어대사전'의 편찬 위원을 맡았기에 일제의 탄압은 불가피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_생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그는 해방 뒤 십일회 회원에 포함됐으나 행방불명됐다.<ref>『[https://namu.wiki/w/권덕규 나무위키_권덕규_생애]』<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나무위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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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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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권덕규 선생이 반일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에 참여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과 <조선어대사전>의 편찬을 통해, 우리말과 한글을 영구히 유지하는 언어 독립투쟁을 전개한 공훈이 인정돼 광복 74주년이 되는 올해에 독립유공자로 결정됐다. 늦었지만 참으로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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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권덕규 선생이 반일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에 참여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과 <조선어대사전>의 편찬을 통해, 우리말과 한글을 영구히 유지하는 언어 독립투쟁을 전개한 공훈이 인정돼 광복 74주년이 되는 해에 독립유공자로 결정<ref>『[https://namu.wiki/w/권덕규 나무위키_권덕규_생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나무위키.에서는 권덕규가 1950년 3월 5일 자택에서 외출한 후 실종되었고, 이후 1950년 10월 24일 별세한 것으로 사망신고 되었다. 2019년 10월 국가보훈처 공군전자사료관으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ref>됐다. 늦었지만 참으로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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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연구의 필요』'''===
 
==='''『조선어 연구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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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Article|「조선어 연구의 필요」}}에서 자신의 연구 단계를 3단계로 설정하였는데, 첫째 ‘실용’, 말과 글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적는 방법에 대한 연구 단계. 둘째 ‘과학’,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단계. 셋째 ‘응용’, 고대의 언어, 문자, 문학 등을 통해 인문 발달의 과정을 탐구하는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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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Article|「조선어 연구의 필요」}}에서 자신의 연구 단계를 3단계로 설정하였는데, 첫째 ‘실용’, 말과 글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적는 방법에 대한 연구 단계. 둘째 ‘과학’,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단계. 셋째 ‘응용’, 고대의 언어, 문자, 문학 등을 통해 인문 발달의 과정을 탐구하는 단계이다.<ref>역사 혁명가, "[https://blog.naver.com/bcliff/221338984620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 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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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online style="color:purple"> 『네이버 블로그 - 역사 혁명가』 <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8년 8월 14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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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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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는 한민족을 영구히 말살하고자 일본어를 국어로, 일문을 국문으로 보급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 책동은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빚어졌다.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 선열들은 우리말과 글을 영구히 보존해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언어 독립운동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맞서는 항일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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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는 한민족을 영구히 말살하고자 일본어를 국어로, 일문을 국문으로 보급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일제의 조선어 말살 책동은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빚어졌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 선열들은 우리말과 글을 영구히 보존해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언어 독립운동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맞서는 항일투쟁이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TagInstitution|조선어학회}} 항일투사들은 언어 독립운동의 내용으로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선정하며,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는 등 민족어 규범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고자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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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Institution|조선어학회}} 항일투사들은 언어 독립운동의 내용으로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선정하며,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는 등 민족어 규범 수립운동을 전개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아울러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고자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진행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이렇게 {{TagInstitution|조선어학회}}가 일제의 일본어 상용정책에 맞서 조선말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33인을 체포해 탄압했다. 일제로부터 고문도 많이 받아 {{TagPerson|이윤재}}와 {{TagPerson|한징}}이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TagPerson|이극로}}, {{TagPerson|최현배}}, {{TagPerson|정인승}} 등 핵심 인사들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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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TagInstitution|조선어학회}}가 일제의 일본어 상용정책에 맞서 조선말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33인을 체포해 탄압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일제로부터 고문도 많이 받아 {{TagPerson|이윤재}}와 {{TagPerson|한징}}이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TagPerson|이극로}}, {{TagPerson|최현배}}, {{TagPerson|정인승}} 등 핵심 인사들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2019년까지 조선어학회 선열 33인 가운데 25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 3명({{TagPerson|이극로}}, {{TagPerson|이만규}}, {{TagPerson|정열모}})은 분단 때문에 포상이 이뤄지지 못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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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까지 조선어학회 선열 33인 가운데 25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 3명({{TagPerson|이극로}}, {{TagPerson|이만규}}, {{TagPerson|정열모}})은 분단 때문에 포상이 이뤄지지 못한 사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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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조의 한글사전 『말모이』 편찬 참여'''===
 
==='''최조의 한글사전 『말모이』 편찬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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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는 {{TagPerson|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TagInstitution|조선광무회}}에서 주시경과 그의 제자인 권덕규가 민족주의적인 애국계몽의 수단으로 편찬하였다. 911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거의 원고가 마무리되었으나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현재는 그 일부의 원고가 남아 있다. 현전하는 {{TagBook|『말모이』}}는 표제가 ㅁㅏㄹㅁㅗㅇㅣ로 가로 풀어쓰기로 되어 있으며, ‘알기’·‘본문(本文)’·‘찾기’·‘자획(字劃)찾기’로 짜여져 있다. 청색 원고지에 붓으로 쓴 이 원고본은 판심서명이 ‘말모이’로 되어 있고, 240자의 원고지로 모두 153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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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는 {{TagPerson|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TagInstitution|조선광무회}}에서 주시경과 그의 제자인 권덕규가 민족주의적인 애국계몽의 수단으로 편찬하였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822 말모이_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국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정의'부분을 인용했다.</ref> 911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거의 원고가 마무리되었으나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현재는 그 일부의 원고가 남아 있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822 말모이_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국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내용'부분을 인용했다.</ref> 현전하는 {{TagBook|『말모이』}}는 표제가 ㅁㅏㄹㅁㅗㅇㅣ로 가로 풀어쓰기로 되어 있으며, ‘알기’·‘본문(本文)’·‘찾기’·‘자획(字劃)찾기’로 짜여져 있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822 말모이_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국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내용'부분을 인용했다.</ref> 청색 원고지에 붓으로 쓴 이 원고본은 판심서명이 ‘말모이’로 되어 있고, 240자의 원고지로 모두 153면이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822 말모이_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국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내용'부분을 인용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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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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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ocs.google.com/spreadsheets/d/1QTCg9tkXhtdaqNUigIbEZZFDmUFdEN0sTVzrdINQ2pI/edit?usp=sharing Timeline Google Spreadsh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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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 Graph'''===
 
==='''Network 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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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참고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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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권덕규 위키백과_권덕규_생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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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5440&cid=46674&categoryId=46674 네이버 지식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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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혁명가, "[https://blog.naver.com/bcliff/221338984620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 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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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online style="color:purple"> 『네이버 블로그 - 역사 혁명가』 <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8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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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29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 事件)_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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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재영,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2861074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한국문학언어학회』, 2010.06, 29~31쪽.
 +
* 『[https://namu.wiki/w/권덕규 나무위키_권덕규_생애]』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나무위키.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870 일제강점기 때,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한 국어학자]』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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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nl.go.kr/NL/contents/N20103000000.do?schM=contView&schIdSub=CO0000003902 [근.현대의위인들]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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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822 말모이_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국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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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31일 (수) 00:0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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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규(權悳奎)
권덕규.png
출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한글명 권덕규 한자명 權悳奎 영문명 Kwon Deok-gyu 가나명 이칭 애류(崖溜)
성별 생년 1890년 몰년 1950년 출신지 경기 김포 전공 독립운동, 국어학, 역사학[1]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권덕규(權悳奎, 1890년 ~ 1950년)는 한국의 국어학자이자, 역사가였다.[2] 호는 애류(崖溜)이며, 1913년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모교와 중앙학교·중동학교에서 국어 및 국사를 가르쳤다.[3] 주시경(周時經)의 뒤를 잇는 몇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4]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 뒤 조선어학회의 역사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12월 「한글맞춤법통일안」[5]의 원안을 작성하였다.


생애


출생 및 학력 그리고 그의 특징

권덕규(權悳奎, 호는 애류 崖溜)는 1891년 8월 7일에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6] 1913년 회문의숙기관을 졸업한 뒤, 휘문고보, 중앙고보 등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7] 조선어 연구회기관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8] 그는 애주가로도 유명하여 학교가 끝나면 선술집으로 들렀다가 집에 가는 것이 일과였다.[9] 집 판 돈을 술값으로 다 날리기도 하고 술 한 잔 걸치고 라디오 생방송을 하다가 코를 골고 잠을 드는 등 유명한 일화가 많았으며 거침없고 고집이 세지만 과오는 솔직하게 인정하였다고 한다.[10]


활동사항

휘문고보기관, 중앙고보기관, 중등학교기관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으며, 주시경인물 선생의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 1921년 조선어 연구회 창립 회원이었다.[11] 1930년 맞춤법 통일안 원안 작성 위원이었으며 표준말 사정 위원으로서 저서로는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 <을지문덕>[12]이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

이는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13]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14] 때, 일제 형사들이 그를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고 갔다가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돌려보냈다.[15] 그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연루된 33인 중 하나였다.[16] 조선어학회기관의 회원으로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활약했고, '조선어대사전'의 편찬 위원을 맡았기에 일제의 탄압은 불가피했다.[17] 그는 해방 뒤 십일회 회원에 포함됐으나 행방불명됐다.[18]


상훈

권덕규 선생이 반일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에 참여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과 <조선어대사전>의 편찬을 통해, 우리말과 한글을 영구히 유지하는 언어 독립투쟁을 전개한 공훈이 인정돼 광복 74주년이 되는 해에 독립유공자로 결정[19]됐다. 늦었지만 참으로 기쁜 일이다.





연구


『조선어 연구의 필요』

「조선어 연구의 필요」원고에서 자신의 연구 단계를 3단계로 설정하였는데, 첫째 ‘실용’, 말과 글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적는 방법에 대한 연구 단계. 둘째 ‘과학’,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단계. 셋째 ‘응용’, 고대의 언어, 문자, 문학 등을 통해 인문 발달의 과정을 탐구하는 단계이다.[20]


조선어학회 사건

일제는 한민족을 영구히 말살하고자 일본어를 국어로, 일문을 국문으로 보급했다.[21] 일제의 조선어 말살 책동은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빚어졌다.[22]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 선열들은 우리말과 글을 영구히 보존해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언어 독립운동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맞서는 항일투쟁이었다.[23]

조선어학회기관 항일투사들은 언어 독립운동의 내용으로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선정하며,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는 등 민족어 규범 수립운동을 전개했다.[24] 아울러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고자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진행했다.[25] 이렇게 조선어학회기관가 일제의 일본어 상용정책에 맞서 조선말을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33인을 체포해 탄압했다.[26] 일제로부터 고문도 많이 받아 이윤재인물와 한징인물이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27] 이극로인물, 최현배인물, 정인승인물 등 핵심 인사들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28]

2019년까지 조선어학회 선열 33인 가운데 25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29]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 3명(이극로인물, 이만규인물, 정열모인물)은 분단 때문에 포상이 이뤄지지 못한 사례다.[30]


최조의 한글사전 『말모이』 편찬 참여

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는 최남선(崔南善)인물이 설립한 조선광무회기관에서 주시경과 그의 제자인 권덕규가 민족주의적인 애국계몽의 수단으로 편찬하였다.[31] 911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거의 원고가 마무리되었으나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현재는 그 일부의 원고가 남아 있다.[32] 현전하는 『말모이』서적는 표제가 ㅁㅏㄹㅁㅗㅇㅣ로 가로 풀어쓰기로 되어 있으며, ‘알기’·‘본문(本文)’·‘찾기’·‘자획(字劃)찾기’로 짜여져 있다.[33] 청색 원고지에 붓으로 쓴 이 원고본은 판심서명이 ‘말모이’로 되어 있고, 240자의 원고지로 모두 153면이다.[34]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권덕규 Institution: 회문의숙 A graduates B
Person: 권덕규 Institution: 중앙고보 A worksAt B
Person: 권덕규 Person: 주시경 A hasMaster B
Book: 『말모이』 Person: 권덕규 A cocreator B
Person: 권덕규 Article: 「조선어 연구의 필요」 A isWriterOf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네이버 블로그 - 역사 혁명가』 online, 작성일: 2018년 8월 14일.






주석


  1. 허재영,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한국문학언어학회』, 2010.06, 29쪽. 역사학자로서 우리의 고유 정신을 연구하고 지켜온 대표적인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다른 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학자 중 한 명이다.
  2. 허재영,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한국문학언어학회』, 2010.06, 29쪽
  3.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4. 허재영,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한국문학언어학회』, 2010.06, 30쪽. 권덕규의 저술 목록 중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것은 '주시경 선생의 역사'이다. <조선어문경위(1923)>에 실린 '주시경 선생 전기'를 보면, 이는 일찍부터 권덕규가 쓴 것으로 알려져 왔던 글이다. 이 글은 주시경에 대한 최초의 전기문으로 알려져있으며, 이처럼 권덕규의 삶은 스승인 주시경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5. 허재영,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한국문학언어학회』, 2010.06, 30쪽에서는 「한글마춤법통일안」이라고 기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정확한 명칭이 확인되지 않는다.
  6.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7.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8.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9. [근.현대의위인들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online, 국립중앙도서관
  10. [근.현대의위인들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online, 국립중앙도서관
  11. 위키백과_권덕규_생애online, 위키백과
  12. 일제강점기 때,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한 국어학자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생애 및 활동사항
  13.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 事件)_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 KBS역사저널 그날,"역덕이슈 오늘 I 83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시작되다", YouTube, 작성일: 2019년 1월 24일.
  15. 위키백과_권덕규_생애online, 위키백과
  16. 위키백과_권덕규_생애online, 위키백과
  17. 위키백과_권덕규_생애online, 위키백과
  18. 나무위키_권덕규_생애online, 나무위키
  19. 나무위키_권덕규_생애online, 나무위키.에서는 권덕규가 1950년 3월 5일 자택에서 외출한 후 실종되었고, 이후 1950년 10월 24일 별세한 것으로 사망신고 되었다. 2019년 10월 국가보훈처 공군전자사료관으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20. 역사 혁명가,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 형제 !", 『네이버 블로그 - 역사 혁명가』 online, 작성일: 2018년 8월 14일.
  21.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22.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23.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24.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25.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26.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27.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28.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29.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30. 위키백과_권덕규online, 위키백과.
  31. 말모이_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국어사전.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정의'부분을 인용했다.
  32. 말모이_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국어사전.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내용'부분을 인용했다.
  33. 말모이_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국어사전.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내용'부분을 인용했다.
  34. 말모이_일제강점기 주시경(1876-1914)이 19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국어사전.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내용'부분을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