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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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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4번=浿水出樂浪鏤方東入于海, 从水貝聲, 一曰出浿水縣
 
|목차6해독문4번=浿水出樂浪鏤方東入于海, 从水貝聲, 一曰出浿水縣
 
|목차6해독문5번=이라고 하고 있다. {{TagBook|[[설문]]}}중에는 때때로 상흠(桑欽)의 설을 인용한 곳이 있기 때문에 위 {{TagBook|[[설문]]}}의 처음 일구(一句)는 이 {{TagBook|[[수경]]}}에 의거한 것이고, 끝의 일구(一句)는 아마 한지(漢志)({{TagBook|[[한서]]}}**지리지(地理志))이든가 혹은 한지(漢志)와 같은 계통의 자료에 의거한 것일 것이지만, {{TagBook|[[수경]]}}의 설에는 이중의 의난점(疑難點)을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수류(水流)의 방향에 관한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수원지(水源地)에 관한 의문이다. 전자에 관해서는 이미 북위(北魏)의 역도원(酈道元)으로부터 의심이 일었고, 그는 그 ({{TagBook|[[수경]]}}) 주(注)에서 “昔燕人衛滿自浿水而至朝鮮...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라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러하고, ‘東入于海’는 패수(浿水)에는 요령부득의 구절이다. 우리 근세의 정다산(丁茶山)(약용(若鏞))과 같은 이는 그의 「패수변(浿水辨)」11)에서 {{TagBook|[[수경]]}}본문에 착오가 없음을 변론하고, 그 구두를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 過于臨浿縣東, 入于海”라고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TagBook|[[수경]]}}의 문례(文例) 상, 과연 모두 이렇게 끊어야 할지 문제이다. 왜냐하면 {{TagBook|[[수경]]}}에 나타나는 지나(支那)의 하천 대부분은 그 하류에 있어서 ‘東入于海’, ‘東北入于海’, ‘東南入于海’, 또는 ‘南入于海’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산의 구두는 {{TagBook|[[수경]]}}의 문례(文例)로 보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면치 못한다. 저자의 고의인지 부주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TagBook|[[수경]]}}에 패수(浿水)를 ‘東入于海’라고 한 것은 그 문례(文例)에는 일치하더라도 착오임에 틀림없다. 착오는 착오로써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착오를 무리하게 설명하면 곡변(曲辨)이 된다.
 
|목차6해독문5번=이라고 하고 있다. {{TagBook|[[설문]]}}중에는 때때로 상흠(桑欽)의 설을 인용한 곳이 있기 때문에 위 {{TagBook|[[설문]]}}의 처음 일구(一句)는 이 {{TagBook|[[수경]]}}에 의거한 것이고, 끝의 일구(一句)는 아마 한지(漢志)({{TagBook|[[한서]]}}**지리지(地理志))이든가 혹은 한지(漢志)와 같은 계통의 자료에 의거한 것일 것이지만, {{TagBook|[[수경]]}}의 설에는 이중의 의난점(疑難點)을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수류(水流)의 방향에 관한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수원지(水源地)에 관한 의문이다. 전자에 관해서는 이미 북위(北魏)의 역도원(酈道元)으로부터 의심이 일었고, 그는 그 ({{TagBook|[[수경]]}}) 주(注)에서 “昔燕人衛滿自浿水而至朝鮮...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라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러하고, ‘東入于海’는 패수(浿水)에는 요령부득의 구절이다. 우리 근세의 정다산(丁茶山)(약용(若鏞))과 같은 이는 그의 「패수변(浿水辨)」11)에서 {{TagBook|[[수경]]}}본문에 착오가 없음을 변론하고, 그 구두를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 過于臨浿縣東, 入于海”라고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TagBook|[[수경]]}}의 문례(文例) 상, 과연 모두 이렇게 끊어야 할지 문제이다. 왜냐하면 {{TagBook|[[수경]]}}에 나타나는 지나(支那)의 하천 대부분은 그 하류에 있어서 ‘東入于海’, ‘東北入于海’, ‘東南入于海’, 또는 ‘南入于海’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산의 구두는 {{TagBook|[[수경]]}}의 문례(文例)로 보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면치 못한다. 저자의 고의인지 부주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TagBook|[[수경]]}}에 패수(浿水)를 ‘東入于海’라고 한 것은 그 문례(文例)에는 일치하더라도 착오임에 틀림없다. 착오는 착오로써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착오를 무리하게 설명하면 곡변(曲辨)이 된다.
|목차6해독문6번=다음으로 의문이라고 할 점은, “浿水出樂浪鏤方縣0”의 구절이다. 누방(鏤方)이라는 낙랑군의 속현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는 물론, **진서(晋書)** 지리지(地理志)(낙랑군조(樂浪郡條))에도 보이는 현명(縣名)으로 낙랑군의 멸망 무렵까지 존속해 있었던 것 같고, 패수(浿水) 내지 그 이남의 땅이 고구려에게 빼앗겨 낙랑(樂浪)의 패수현(浿水縣), 증지현(增地縣). im邯縣(?) 및 점제현(黏蟬縣)과 같은 열수(列水) 이북의 제현(諸縣)이 모두 없어진 뒤에도, 누방현(鏤方縣)은 다른 조선(朝鮮), 둔유(屯有), 혼미(渾彌), 수성(遂城), 사망(駟望)의 제현(諸縣)(열수(列水) 이남 이동에 있었던 것인 듯하다)과 함께 여전히 의연하게 그 이름을 보전하고 있었던 점12)에서 보면, 그것은 패수의 상류 방면과 같이 먼 동북 땅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곽씨의 **수경주(水經注)**에 인용된 감인(闞駰)의 **십삼지(十三志)**에는 명확히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누방현(鏤方縣)은 패수 유역의 땅에 있지 않고, 오히려 열수의 동쪽 지류역(支流域)(삼등강(三登江) 유역?) 땅에 위치하였던 듯하다. 여(余)는 이 현을 지금의 성천군(成川郡) 내지 양덕군(陽德郡) 근처로 예상하지만, 그것은 어쨌든 낙랑군의 동북쪽인 패수현(浿水縣)으로부터 서류(西流)하는 패수(浿水)를 그 군치(郡治)의 동쪽인 누방현(鏤方縣)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TagBook|[[수경]]}}의 설에는 아무리 요령을 얻으려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TagPerson|[[허신]]}}도 {{TagBook|[[수경]]}}의 이 설에는 다소간의 의심스러움이 있다고 보이고, ‘一曰出浿水縣’의 일설(一說)을 부가했다). 그러면 {{TagBook|[[수경]]}}의 저자는 어째서 이러한 요령 부득이함을 범했던 것일까. 오류에도 무언가 그가 의거한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 대부분은 그의 조선 지리에 관한 지식의 빈약, 아니 빈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무하였음에 원인하였을 것이지만, 또한 어떤 오문(誤聞), 오견(誤見), 오사(誤寫)에 의해 그 열수(列水)의 한 원류지(源流地)인 누방현(鏤方縣)(양덕(陽德) 성천(成川) 등지)을 패수의 발원지로 하고, 게다가 그것을 황해로 동주(東注)하는 지나(支那)의 하천 흐름 방식에 ‘東入于海’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상상된다. {{TagBook|[[수경]]}}에는 열수(列水)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대요수(大遼水)나 소요수(小遼水)라는 요동(遼東) 방면의 하천과 또는 낙랑군의 패수까지 넣고 있으면서 묘하게도 (낙랑군 안을 관류하는) 열수(列水)라는 대하천은 싣고 있지 않았다(염난수(鹽難水)와 마자수(馬訾水)는 저자 시대에 그 중간지대에 이미 고구려국이 흥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략한 것일 것이다). 열수(列水)가 패수(浿水) 보다도 대하천임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명칭부터 말하면, 패수 쪽이 열수보다도 한층 널리 알려져 있었고, 특히 패수는 **사기** 조선전에 (국경하(國境河)로서) 자주 보이는 명하(名河)였기 때문에 당시 지나(支那) 내지의 인사에게는 그것에 주의가 많이 쏠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TagBook|[[수경]]}}에서는 조선의 하천으로써 특히 패수(浿水)만을 넣고, 열수(列水)나 대수(帶水)는 모두 생략하게 되었던 것일 것이다. {{TagPerson|[[허신]]}}의 {{TagBook|[[설문]]}}에도 열수(列水) 대수(帶水)는 보이지 않는데, 이유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명대(名大)의 패수(浿水)가 실대(實大)의 열수(列水)를 압도하게 된 것은 이미 {{TagBook|[[수경]]}} 및 {{TagBook|[[설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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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6번=다음으로 의문이라고 할 점은, “浿水出樂浪鏤方縣0”의 구절이다. 누방(鏤方)이라는 낙랑군의 속현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는 물론, **진서(晋書)** 지리지(地理志)(낙랑군조(樂浪郡條))에도 보이는 현명(縣名)으로 낙랑군의 멸망 무렵까지 존속해 있었던 것 같고, 패수(浿水) 내지 그 이남의 땅이 고구려에게 빼앗겨 낙랑(樂浪)의 패수현(浿水縣), 증지현(增地縣). im邯縣(?) 및 점제현(黏蟬縣)과 같은 열수(列水) 이북의 제현(諸縣)이 모두 없어진 뒤에도, 누방현(鏤方縣)은 다른 조선(朝鮮), 둔유(屯有), 혼미(渾彌), 수성(遂城), 사망(駟望)의 제현(諸縣)(열수(列水) 이남 이동에 있었던 것인 듯하다)과 함께 여전히 의연하게 그 이름을 보전하고 있었던 점12)에서 보면, 그것은 패수의 상류 방면과 같이 먼 동북 땅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곽씨의 **수경주(水經注)**에 인용된 감인(闞駰)의 {{TagBook|[[십삼지]]}}에는 명확히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누방현(鏤方縣)은 패수 유역의 땅에 있지 않고, 오히려 열수의 동쪽 지류역(支流域)(삼등강(三登江) 유역?) 땅에 위치하였던 듯하다. 여(余)는 이 현을 지금의 성천군(成川郡) 내지 양덕군(陽德郡) 근처로 예상하지만, 그것은 어쨌든 낙랑군의 동북쪽인 패수현(浿水縣)으로부터 서류(西流)하는 패수(浿水)를 그 군치(郡治)의 동쪽인 누방현(鏤方縣)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TagBook|[[수경]]}}의 설에는 아무리 요령을 얻으려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TagPerson|[[허신]]}}도 {{TagBook|[[수경]]}}의 이 설에는 다소간의 의심스러움이 있다고 보이고, ‘一曰出浿水縣’의 일설(一說)을 부가했다). 그러면 {{TagBook|[[수경]]}}의 저자는 어째서 이러한 요령 부득이함을 범했던 것일까. 오류에도 무언가 그가 의거한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 대부분은 그의 조선 지리에 관한 지식의 빈약, 아니 빈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무하였음에 원인하였을 것이지만, 또한 어떤 오문(誤聞), 오견(誤見), 오사(誤寫)에 의해 그 열수(列水)의 한 원류지(源流地)인 누방현(鏤方縣)(양덕(陽德) 성천(成川) 등지)을 패수의 발원지로 하고, 게다가 그것을 황해로 동주(東注)하는 지나(支那)의 하천 흐름 방식에 ‘東入于海’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상상된다. {{TagBook|[[수경]]}}에는 열수(列水)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대요수(大遼水)나 소요수(小遼水)라는 요동(遼東) 방면의 하천과 또는 낙랑군의 패수까지 넣고 있으면서 묘하게도 (낙랑군 안을 관류하는) 열수(列水)라는 대하천은 싣고 있지 않았다(염난수(鹽難水)와 마자수(馬訾水)는 저자 시대에 그 중간지대에 이미 고구려국이 흥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략한 것일 것이다). 열수(列水)가 패수(浿水) 보다도 대하천임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명칭부터 말하면, 패수 쪽이 열수보다도 한층 널리 알려져 있었고, 특히 패수는 {{TagBook|[[사기]]}} 조선전에 (국경하(國境河)로서) 자주 보이는 명하(名河)였기 때문에 당시 지나(支那) 내지의 인사에게는 그것에 주의가 많이 쏠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TagBook|[[수경]]}}에서는 조선의 하천으로써 특히 패수(浿水)만을 넣고, 열수(列水)나 대수(帶水)는 모두 생략하게 되었던 것일 것이다. {{TagPerson|[[허신]]}}의 {{TagBook|[[설문]]}}에도 열수(列水) 대수(帶水)는 보이지 않는데, 이유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명대(名大)의 패수(浿水)가 실대(實大)의 열수(列水)를 압도하게 된 것은 이미 {{TagBook|[[수경]]}} 및 {{TagBook|[[설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목차6해독문7번=그러나 {{TagBook|[[수경]]}}과 같이 권위 있는 지리서에 저명한 패수(浿水)에 대해 그러한 엉터리 설이 쓰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이에 주의를 기울인 학자가 나온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북위의 역도원(酈道元)과 같은 이는 특히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이 그것에 빈틈없이 주시하였고, 상술한 바와 같은 의문을 발한 것이다. 역씨(酈氏)는 그 해석에 고심하였고, 마침내 이것을 고구려인 사자(使者)에게 질문해 보았다고 한다. 그의 **수경주(水經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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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7번=그러나 {{TagBook|[[수경]]}}과 같이 권위 있는 지리서에 저명한 패수(浿水)에 대해 그러한 엉터리 설이 쓰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이에 주의를 기울인 학자가 나온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북위의 {{TagPerson|[[역도원]]}}과 같은 이는 특히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이 그것에 빈틈없이 주시하였고, 상술한 바와 같은 의문을 발한 것이다. {{TagPerson|[[역도원]]}}는 그 해석에 고심하였고, 마침내 이것을 고구려인 사자(使者)에게 질문해 보았다고 한다. 그의 **수경주(水經注)**에
 
|목차6해독문8번=余訪蕃使(○高句麗人 使者), 言城(○平壤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卽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 以朝鮮爲遠, 循遼東故塞, 至浿水爲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盖經, 誤證也
 
|목차6해독문8번=余訪蕃使(○高句麗人 使者), 言城(○平壤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卽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 以朝鮮爲遠, 循遼東故塞, 至浿水爲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盖經, 誤證也
|목차6해독문9번=라고 하는 것이 즉 그것이다. 고구려 사자의 대답은 국도(國都)가 패수(浿水)의 북안(北岸)에 있고, 그 수(水)는 그곳으로부터 서류(西流)하여 고(故) 낙랑군치(樂浪郡治)였던 조선현(朝鮮縣)의 땅을 지나, 다시 서북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역씨(酈氏)는 사자의 말을 믿고, 한지(漢志)와 **사기** 조선전을 대조하여 마침내 조선현지(朝鮮縣址)의 북쪽을 흐르는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열수(列水))이 패수(浿水)임이 틀림없고, {{TagBook|[[수경]]}}의 본문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역씨설(酈氏說)의 결론(패수(浿水) {{TagArgument|[[대동강설]]}})은 별문제로 하고, 그의 연구 방법과 태도는 매우 과학적이고 또한 신중하다고 생각된다. 처음 {{TagBook|[[수경]]}}의 본문에 대하여 의문을 발하고, 다음으로 {{TagBook|[[설문]]}}, {{TagBook|[[십삼지]]}} 등의 서적에 의해 한층 의문점이 증가하였고, 아무리 하여도 해석이 안 되었기 때문에 끝에는 자국에 사신으로 온 고구려인에게 이것을 질문하였으며, 더욱이 사한(史漢)의 기사를 고려하여 결론을 내린 그의 신중한 태도에 대해서는 참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역씨(酈氏)의 결론은 여(余)의 그것과는 서로 다르지만, 그로 인해 역씨(酈氏)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그리고 탐구욕이 풍부한 학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인(吾人)은 역씨설(酈氏說)의 기초를 이루는 고구려 사자의 말을 단순히 그 사람의 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의 설로써 책임을 동사자(同使者)에게 돌려야 하는가라는 것에 여(余)는 또한 그렇게 간단히 처리하고 싶지도 않다. 고구려 사자의 패수설({{TagArgument|[[대동강설]]}})은 오히려 당시 그 나라의 지식 계급간에 행해져 있던 통설로 생각된다. 즉 당시 고구려의 문인 학자 사이에는 지금의 대동강(열수)을 패수라고 생각하고, 보통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쓰기도 했던 것이며 그 사자도 또한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마치 우리 근세의 문인들이 국도(國都) 앞을 흐르는 한강을 옛날의 열수(列水)라고 생각하고, 시문담화(時文談話) 속에서 태연히 그 명칭을 사용했던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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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9번=라고 하는 것이 즉 그것이다. 고구려 사자의 대답은 국도(國都)가 패수(浿水)의 북안(北岸)에 있고, 그 수(水)는 그곳으로부터 서류(西流)하여 고(故) 낙랑군치(樂浪郡治)였던 조선현(朝鮮縣)의 땅을 지나, 다시 서북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TagPerson|[[역도원]]}}는 사자의 말을 믿고, {{TagBook|[[한서]]}} 지리지와 {{TagBook|[[사기]]}}조선전을 대조하여 마침내 조선현지(朝鮮縣址)의 북쪽을 흐르는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열수(列水))이 패수(浿水)임이 틀림없고, {{TagBook|[[수경]]}}의 본문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역씨설(酈氏說)의 결론(패수(浿水) {{TagArgument|[[대동강설]]}})은 별문제로 하고, 그의 연구 방법과 태도는 매우 과학적이고 또한 신중하다고 생각된다. 처음 {{TagBook|[[수경]]}}의 본문에 대하여 의문을 발하고, 다음으로 {{TagBook|[[설문]]}}, {{TagBook|[[십삼지]]}} 등의 서적에 의해 한층 의문점이 증가하였고, 아무리 하여도 해석이 안 되었기 때문에 끝에는 자국에 사신으로 온 고구려인에게 이것을 질문하였으며, 더욱이 사한(史漢)의 기사를 고려하여 결론을 내린 그의 신중한 태도에 대해서는 참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TagPerson|[[역도원]]}}의 결론은 여(余)의 그것과는 서로 다르지만, 그로 인해 {{TagPerson|[[역도원]]}}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그리고 탐구욕이 풍부한 학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인(吾人)은 역씨설(酈氏說)의 기초를 이루는 고구려 사자의 말을 단순히 그 사람의 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의 설로써 책임을 동사자(同使者)에게 돌려야 하는가라는 것에 여(余)는 또한 그렇게 간단히 처리하고 싶지도 않다. 고구려 사자의 패수설({{TagArgument|[[대동강설]]}})은 오히려 당시 그 나라의 지식 계급간에 행해져 있던 통설로 생각된다. 즉 당시 고구려의 문인 학자 사이에는 지금의 대동강(열수)을 패수라고 생각하고, 보통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쓰기도 했던 것이며 그 사자도 또한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마치 우리 근세의 문인들이 국도(國都) 앞을 흐르는 한강을 옛날의 열수(列水)라고 생각하고, 시문담화(時文談話) 속에서 태연히 그 명칭을 사용했던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대동강에 대한 고구려국인 일반의 통칭(오히려 속칭)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물론 구래(舊來) 대로의 칭호로 열수(列水)나 혹은 그것과 가까운 사음(寫音)을 사용했을 것이다. 대동강 하구에 있어서 지금의 은율군(殷栗郡)을 고구려시대에는 율구(栗口)(즉 열구(列口)) 또는 율천(栗川)이라고 부른 적이 있기 때문에 당시 대동강의 속칭은 역시 율수(栗水)나 율천(栗川)으로 불렸을 것이다. 율수(栗水), 율천(栗川)이야말로 열수(列水)이고, 또한 열수야말로 한대(漢代) 이후부터 불리어 온 구칭(舊稱)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 고구려인에게는 (지식계급이든 아니든 불문하고) 열수(列水)에 관한 사상(史上)의 지식은 패수(浿水)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당히 빈약, 아니 오히려 전무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열수는 패수(浿水) 정도로 두드러지게 그 이름을 사상(史上)에 나타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나(支那)의 독서인 간에게도 자주 망각된 수명(水名)이 되었다. 고구려인은 평소, 그 이름(열수)을 부르고 있었으나 그것이 한대(漢代) 이전부터의 사상(史上)의 구명(舊名)임은 알지 못하고, 게다가 문인 사이에서는 한초 이래 국경하(國境河)로서 사상(史上)에 저명하였던 패수를 항상 이 대하(大河)(낙랑열수(樂浪列水))에 비정하였던 것은 아닐까. 고구려 사자가 역도원과 서로 접촉한 연대는 본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세(492~519)에 해당한 듯하고(이 왕의 시대에는 거의 연년(連年) 사자를 위(魏)로 보내고 있고, 역씨(酈氏)도 또한 그즈음에 해당하는 위(魏) 효문제(孝文帝), 선무제(宣武帝)에게 역사(歷仕)했던 인물이다), 당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지(427) 이미 칠팔십년이 지났고, 또한 낙랑대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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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대동강에 대한 고구려국인 일반의 통칭(오히려 속칭)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물론 구래(舊來) 대로의 칭호로 열수(列水)나 혹은 그것과 가까운 사음(寫音)을 사용했을 것이다. 대동강 하구에 있어서 지금의 은율군(殷栗郡)을 고구려시대에는 율구(栗口)(즉 열구(列口)) 또는 율천(栗川)이라고 부른 적이 있기 때문에 당시 대동강의 속칭은 역시 율수(栗水)나 율천(栗川)으로 불렸을 것이다. 율수(栗水), 율천(栗川)이야말로 열수(列水)이고, 또한 열수야말로 한대(漢代) 이후부터 불리어 온 구칭(舊稱)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 고구려인에게는 (지식계급이든 아니든 불문하고) 열수(列水)에 관한 사상(史上)의 지식은 패수(浿水)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당히 빈약, 아니 오히려 전무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열수는 패수(浿水) 정도로 두드러지게 그 이름을 사상(史上)에 나타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나(支那)의 독서인 간에게도 자주 망각된 수명(水名)이 되었다. 고구려인은 평소, 그 이름(열수)을 부르고 있었으나 그것이 한대(漢代) 이전부터의 사상(史上)의 구명(舊名)임은 알지 못하고, 게다가 문인 사이에서는 한초 이래 국경하(國境河)로서 사상(史上)에 저명하였던 패수를 항상 이 대하(大河)(낙랑열수(樂浪列水))에 비정하였던 것은 아닐까. 고구려 사자가 {{TagPerson|[[역도원]]}}과 서로 접촉한 연대는 본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세(492~519)에 해당한 듯하고(이 왕의 시대에는 거의 연년(連年) 사자를 위(魏)로 보내고 있고, {{TagPerson|[[역도원]]}}도 또한 그즈음에 해당하는 위(魏) 효문제(孝文帝), 선무제(宣武帝)에게 역사(歷仕)했던 인물이다), 당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지(427) 이미 칠팔십년이 지났고, 또한 낙랑대방이
 
|목차6해독문10번=[[파일:이병도_패수고-1.jpg|가운데|827 × 1092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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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1번= 멸망한지(313~314) 약 2세기가 지나 있다. 패수 유역을 빼앗긴지(늦어도 후한말 삼국 초에는 고구려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이미 긴 세월이 지났다. 고구려인은 패수 유역을 소유할 때부터 이미 그 수명(水名)을 (자국식으로) 고쳐서 살수(薩水)라고 칭하였다. ‘살(薩)’이 고구려어에서 청(淸)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의 사음(寫音)이라는 점은 그 하천의 이름이 나중에 청천강(淸川江)으로 개칭되었던 것과 또한 고려시대의 청주목(淸州牧)의 속현이었던 청천현(淸川縣)의 고명(古名)이 역시 살매(薩買)였다는 점에서 이것을 증명할 수 있다(그렇다면 패수(浿水)의 패(浿)도 고조선어로 청(淸)이나 청(靑)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 옮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지만-실제로 현재 청(靑)이라는 말에 ‘푸룬’ ‘푸룻’(Purun. Purut) 또는 ‘파란’ ‘파랏’(Paran. Parat)라는 말이 있고, 패(浿)의 음과 매우 흡사하며, 또한 벽란도(碧瀾渡)(예성강(禮成江))의 구명(舊名)에도 패하(浿河), 패강(浿江)의 칭(稱)이 있었기 때문에 자못 그럴듯하게 생각되지만, 그러한 언어적 고증에는 신중을 요하기 때문에 급히 단정하고 싶지 않고, 다양한 고어를 조사한 뒤가 아니면 부족하기 때문에 후고(後考)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목차6해독문11번= 멸망한지(313~314) 약 2세기가 지나 있다. 패수 유역을 빼앗긴지(늦어도 후한말 삼국 초에는 고구려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이미 긴 세월이 지났다. 고구려인은 패수 유역을 소유할 때부터 이미 그 수명(水名)을 (자국식으로) 고쳐서 살수(薩水)라고 칭하였다. ‘살(薩)’이 고구려어에서 청(淸)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의 사음(寫音)이라는 점은 그 하천의 이름이 나중에 청천강(淸川江)으로 개칭되었던 것과 또한 고려시대의 청주목(淸州牧)의 속현이었던 청천현(淸川縣)의 고명(古名)이 역시 살매(薩買)였다는 점에서 이것을 증명할 수 있다(그렇다면 패수(浿水)의 패(浿)도 고조선어로 청(淸)이나 청(靑)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 옮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지만-실제로 현재 청(靑)이라는 말에 ‘푸룬’ ‘푸룻’(Purun. Purut) 또는 ‘파란’ ‘파랏’(Paran. Parat)라는 말이 있고, 패(浿)의 음과 매우 흡사하며, 또한 벽란도(碧瀾渡)(예성강(禮成江))의 구명(舊名)에도 패하(浿河), 패강(浿江)의 칭(稱)이 있었기 때문에 자못 그럴듯하게 생각되지만, 그러한 언어적 고증에는 신중을 요하기 때문에 급히 단정하고 싶지 않고, 다양한 고어를 조사한 뒤가 아니면 부족하기 때문에 후고(後考)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목차6해독문12번=이 패수가 그 이름을 고쳐 또한 소유주를 바꿔 긴 연월을 경과한 사이에 그 위치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독서인들은 사상(史上)에서 기억한 패수(浿水)를 대하(大河)처럼 생각하고, 마침내 그 국도(國都)(낙랑군의 중심 지역) 아래를 흐르는 지금의 대동강에 이 이름을 연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패수 {{TagArgument|[[대동강설]]}}은 후기 고구려인에게서 시작되고, 그것이 역씨(酈氏)을 비롯한 지나(支那)의 학자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수당시대에 이르러서는 내외를 통해 일반적으로 대동강을 부르는 본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패수의 이름이 열수의 그것을 대신한 것으로 즉 열수의 이름이 패수의 그것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패하(浿河), 패강(浿江)의 이름은 또한 지금의 예성강(벽란도)을 부르는 호칭이 된 적도 있지만, 어느 것도 한대(漢代)의 패수(浿水)와는 교섭이 없다. {{TagArgument|[[한대(漢代)의 패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지금의 청천강이 아니면 안 됨을 거듭 말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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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6해독문12번=이 패수가 그 이름을 고쳐 또한 소유주를 바꿔 긴 연월을 경과한 사이에 그 위치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독서인들은 사상(史上)에서 기억한 패수(浿水)를 대하(大河)처럼 생각하고, 마침내 그 국도(國都)(낙랑군의 중심 지역) 아래를 흐르는 지금의 대동강에 이 이름을 연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패수 {{TagArgument|[[대동강설]]}}은 후기 고구려인에게서 시작되고, 그것이{{TagPerson|[[역도원]]}}을 비롯한 지나(支那)의 학자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수당시대에 이르러서는 내외를 통해 일반적으로 대동강을 부르는 본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패수의 이름이 열수의 그것을 대신한 것으로 즉 열수의 이름이 패수의 그것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패하(浿河), 패강(浿江)의 이름은 또한 지금의 예성강(벽란도)을 부르는 호칭이 된 적도 있지만, 어느 것도 한대(漢代)의 패수(浿水)와는 교섭이 없다. {{TagArgument|[[한대(漢代)의 패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지금의 청천강이 아니면 안 됨을 거듭 말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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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5일 (토) 16:5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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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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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浿水考 학술지 청구학총 수록권호 청구학총13 발행기관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3년08월
시작쪽 110쪽 종료쪽 136쪽 전체쪽 027쪽 연재여부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조선의 하천으로 일찍부터 지나인(支那人)에게 알려진 것은 즉 패수(浿水).열(렬)수(列(洌)水)의 이수(二水)이다. 패수의 이름은 사기서적 조선전(朝鮮傳)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어 한서서적 조선전(朝鮮傳) 및 동지리지(同地理志)에 나오고 있는데 한서서적** 조선전(朝鮮傳)은 대개 사기서적 조선전(朝鮮傳)의 전재(轉載)이고), 그 지리지에는 수명(水名)으로서의 패수 이외에 또한 낙랑군의 속현으로써의 그것도 보인다. 현명(縣名)인 ‘패수’는 말할 것도 없이 수명(水名) 그 자체를 답습한 것이다. 다음의 열수(列水)는 수명(水名)보다도 그 수명(水名)으로 인해 생겼다고 여겨지는 ‘열양(列陽)’ ‘열구(列口)’등의 지명이 한층 오래된 문헌에 나오고 있고 또한 저명하다. 즉 열수의 이름은 한서서적 지리지 및 양자방언(楊子方言)서적 등에 나타나는 데 반하여 ‘열양(列陽)’은 선진(先秦)시대의 저서라고 하는 **산해경(山海經)서적**에 보이고, ‘열구(列口)’는사기서적 조선전에 이미 보이고 있다한서서적 지리지에 열구(列口)는 낙랑군의 일현명(一縣名)으로 되어 있다). 열양(列陽). 열구(列口)에 관해서는 후절(後節)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열수(列水)의 이름이 지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일 것으로 여겨진다.
쪽수▶P110-1조선의 하천으로 일찍부터 支那人에게 알려진 것은 즉 浿水․列(洌)水의 二水이다. 浿水의 이름은 󰡔史記󰡕 朝鮮傳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어 󰡔漢書󰡕 朝鮮傳 및 同地理志에 나오고 있는데(󰡔한서󰡕 조선전은 대개 󰡔사기󰡕 조선전의 轉載이고), 그 지리지에는 水名으로서의 浿水이외에 또한 낙랑군의 속현으로써의 그것도 보인다. 縣名인 ‘浿水’는 말할 것도 없이 水名 그 자체를 답습한 것이다. 다음의 列水는 水名보다도 그 水名으로 인해 생겼다고 여겨지는 ‘列陽’ ‘列口’등의 지명이 한층 오래된 문헌에 나오고 있고 또한 저명하다. 즉 열수의 이름은 󰡔한서󰡕 지리지 및 楊子 󰡔方言󰡕 등에 나타나는 데 반하여 ‘列陽’은 先秦시대의 저서라고 하는 󰡔山海經󰡕에 보이고, ‘列口’는 󰡔사기󰡕 조선전에 이미 보이고 있다(󰡔한서󰡕 지리지에 列口는 낙랑군의 一縣名으로 되어 있다). 列陽․列口에 관해서는 後節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列水의 이름이 지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일 것으로 여겨진다.
패수와 열수는 마치 형제천(兄弟川) 혹은 자매천(姉妹川)으로 일컬을 만한 관계에 있고, 전자는 특히 한초(漢初)의 조선 내지 낙랑군의 북경을 흐르는 국경하(國境河) 또는 군경하(郡境河)로써, 후자는 그 국중(國中)을 관류하는 국중하(國中河) 혹은 국내하(國內河)로써 각각 저문(著聞)되었고, 오인(吾人)이 그 중 하나를 이야기 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떠올렸다고 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패수는 국경하(國境河)였던 만큼, 그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저대(著大)하였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학자들의 주의를 끈 하천이 되었다. 그리고 두 하천의 위치는 조선 낙랑의 강역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들이 지금의 무슨 무슨 천(川)에 해당하는가는 불명료하기 때문에 그 위치에 관하여 일찍부터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다양한 의논이 있었고 난문제의 하나로 여겨졌다. 지금까지 학계의 주목을 끈 주요한 학설을 들어 보면, 패수에는 대동강설학설압록강설학설청강설학설 등이 있고, 열수에는 마찬가지로 대동강설학설한강설학설임진강설학설 등이 있다. 더욱이 이외에 양 하천을 마음대로 요동 방면의 어떤 하천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일설로 들 필요도 없다.
쪽수▶P110-2 패수와 열수는 마치 兄弟川 혹은 姉妹川으로 일컬을 만한 관계에 있고, 전자는 특히 漢初의 조선 내지 낙랑군의 북▶P111-1경을 흐르는 國境河 또는 郡境河로써, 후자는 그 國中을 貫流하는 國中河 혹은 國內河로써 각각 著聞되었고, 吾人이 그 중 하나를 이야기 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떠올렸다고 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패수는 國境河였던 만큼, 그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著大하였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학자들의 주의를 끈 하천이 되었다. 그리고 두 하천의 위치는 조선 낙랑의 강역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들이 지금의 무슨 무슨 川에 해당하는 가는 불명료하기 때문에 그 위치에 관하여 일찍부터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다양한 議論이 있었고 難問題의 하나로 여겨졌다. 지금까지 학계의 주목을 끈 주요한 학설을 들어 보면, 패수에는 大同江說ㆍ鴨綠江說ㆍ淸川江說 등이 있고, 열수에는 마찬가지로 대동강설ㆍ한강설ㆍ임진강설 등이 있다. 더욱이 이외에 兩河川을 마음대로 요동방면의 어떤 하천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一說로 들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근래 대동강공간 유역에 있어서 낙랑군 시대의 유적유물의 발굴 발견에 의해 조선 낙랑의 중심 지역은 점점 확실성을 얻고 있으며, 특히 대동강하 유역인 용강군(龍岡郡)공간 해운면(海雲面) 운평동(雲坪洞)에서 고(故) 금서(今西)인물 박사가 발견한 한대의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는 이 주변이-그중에서도 군 서쪽의 한와(漢瓦)가 나온 어을동고성(於乙洞古城)공간이-한서서적** 지리지에 보이는 낙랑군 점제현치의 소재지였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자료가 되었고, 따라서 오랜 기간 학자들 사이에 문제가 되어 왔던 열수의 위치에 최후의 결정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열수는 한서서적 지리지, 낙랑군(樂浪郡) 탄열현조(呑列縣條)에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秥蟬入海, 行八百二十里”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의 용강군(龍岡郡)공간(즉 점제(秥蟬))에 이르러 황해(黃海)로 들어가는 대동강공간임이 틀림없음이 판명되었다. 더욱이 이에 대해서는 고(故) 금서(今西)인물 박사의 「열수고(洌水考)」원고라는 상세한 논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것이 좋으나, 여하튼 구래의 열수(列水) 「대동강설(大同江說)」학설은 저 고비(古碑)의 발견에 의해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단지 학자들 사이에 의연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한대의 패수로 당시의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공간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앞의 사실로 명확하게 되었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의 압록강공간이냐 청천강공간이냐가 의문이다. 그러나 패수 문제도 조만간 결정되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현 학계는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여(余)는 일찍이 「「진번군고(眞番郡考)」」원고를 초고(草稿)할 때 이 패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약간 한마디를 덧붙인 적이 있고, 그리고 그에 관한 충분한 고증을 타일로 기약하였는데, 이번에는 조금 상세하게 비견(卑見)을 진술하여 삼가 제현의 교정을 바라고자 한다.
쪽수▶P111-2그런데 근래 대동강유역에 있어서 낙랑군시대의 유적유물의 발굴발견에 의해 조선 낙랑의 중심지역은 점점 확실성을 얻고 있으며, 특히 대동강하유역인 龍岡郡(海雲面 雲坪洞)에서 故 今西박사가 발견한 원문주1▶한대[1]의 秥蟬縣神祠碑는 이 주변이-그중에서도 郡 서쪽의 漢瓦가 나온 於乙洞古城이-󰡔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낙랑군 점제현치의 소재지였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자료가 되었고, 따라서 오랜 기간 학자들 사이에 문제가 되어 왔던 열수의 위치에 최후의 결정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열수는 󰡔한서󰡕 지리지, 樂浪郡 呑列縣條에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秥蟬入海, 行八百二十里”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의 龍岡郡(즉 秥蟬)에 이르러 黃海로 들어가는 대동강임이 틀림없음이 판명되었다. 원문주2▶더욱이 이에 대해서는 故今西 박사의 「洌水考」[2] 라는 상세한 논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것이 좋으나, 여하튼 구래의 列水 大同江說은 저 古碑의 발견에 의해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단지 학자들 사이에 의연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한대의 패수로 당시의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앞의 사실로 명확하게 되었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의 압록강이냐 청천강이냐가 의문이다. 그러나 패수문제도 조만간 결정되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현 학계는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余는 일찍이 원문주3▶ 「眞番郡考」[3] 를 草稿할 때 이 패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약간 한마디를 덧붙인 적이 있고, 그리고 그에 관한 충분한 고증을 他日로 기약하였는데, 이번에는 조금 상세하게 卑見을 진술하여 삼가 諸賢의 敎正을 바라고자 한다.




































본문2: (2)


그러면 패수문제를 해결하려 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학자의 주의를 야기하고 해석을 요하는 곳은 사기서적 조선전의 다음 기사이다.
쪽수▶P112-2그러면 패수문제를 해결하려 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학자의 주의를 야기하고 해석을 요하는 곳은 사기 조선전의 다음 기사이다.
(A)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鄣塞, (B)秦滅燕, 屬遼東外徼, (C)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D)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
쪽수▶P112-3(A)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鄣塞, (B)秦滅燕, 屬遼東外徼, (C)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D)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
위에서 여(余)가 부호를 매긴 것과 같이 이를 네 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A단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대연(大燕)이 일찍이 조선과 진번을 약속(略屬)하였고 그곳에 관리를 두어 장새(鄣塞)를 쌓았다고 하는 것, B단은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그 영토를 점유하고 나서 진번과 조선을 요동의 외요에 직속시켰다고 하는 것, C단은 한(漢)이 진(秦)을 대신하여 일어나자 그곳(진번조선)이 멀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물러나서 패수를 경계로 하였으며, 그 이남의 조선진번도 (명의상)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D절은 한(漢)의 연후(燕侯) 노관(盧綰)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연인(燕人) 만(滿)(위략서적에는 위만(衛滿)으로 보인다)이라고 하는 자가 또한 망명하여 도당 천여인을 모아 만이인(蠻夷人)(조선인)의 풍모를 하고 동주(東走)하여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넜으며, 진(秦)의 고공지(故空地)였던 상장하장(上鄣下鄣)에 거하였고 그곳에서 진번조선인과 옛날 연제(燕齊)방면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점점 역속(役屬)하여 마침내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는 것이다.
쪽수▶P112-4위에서 余가 부호를 매긴 것과 같이 이를 네 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A단은 戰國時代의 大燕이 일찍이 조선과 ▶P113-1 진번을 略屬하였고 그곳에 관리를 두어 鄣塞를 쌓았다고 하는 것, B단은 秦이 燕을 멸하고 그 영토를 점유하고 나서 진번과 조선을 요동의 외요에 직속시켰다고 하는 것, C단은 漢이 秦을 대신하여 일어나자 그곳(진번조선)이 멀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물러나서 패수를 경계로 하였으며, 그 이남의 조선진번도 (명의상)燕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D절은 漢의 燕侯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燕人 滿(󰡔魏略󰡕에는 衛滿으로 보인다)이라고 하는 자가 또한 망명하여 도당 천여인을 모아 蠻夷人(조선인)의 풍모를 하고 東走하여 塞를 나와 浿水를 건넜으며, 秦의 故空地였던 上鄣下鄣에 거하였고 그곳에서 진번조선인과 옛날 燕齊방면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점점 役屬하여 마침내 왕이 되어 王險에 도읍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사기서적의 기사는 즉 진번조선과 연(燕), 진(秦), 한(漢) 삼대의 역사지리적 관계와 위만조선의 입국 유래를 서술한 것이지만, 이곳에 이미 패수의 명칭이 나오고 있다. 패수가 요동과 조선(낙랑)의 경계가 되게 된 것은 한초(漢初)부터이고, 그보다 이전의 연진(燕秦) 시대에는 패수를 넘어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서 조선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기 C절에 “漢興, 爲其遠難守...至浿水爲界”라고 하였고, 또한 다음 D절중에 “滿...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云云”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다. 이 진(秦)의 ‘故空地上下鄣’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패수 유역에서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 이르는 사이에 두어졌던 상하 두 곳의 장새(鄣塞)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곳은 실로 연(燕)이 앞서 진번조선을 약속(略屬)하여 관리를 두어 장새(鄣塞)를 쌓았다고 하는 그 장새(鄣塞)임이 틀림없고, 진대(秦代)의 소위 요동외요(遼東外徼)(설명, 밑에 보인다)라는 것도 즉 그것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상하장(上下鄣) 사이를 특히 “고공지(故空地)”라고 한 것은 그곳이 원래 일종의 완충지대로 사람을 거주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외요(外徼)란 즉 외계(外界) 혹은 외새(外塞)의 뜻으로 고(故) 금서(今西)인물 박사는 이에 대하여 사기서적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의 “南至䍧牱江爲徼”라는 곳의 색은주(索隱注)에 “張揖云徼塞也, 以木柵水爲蠻夷界”라고 하는 것을 인용하여 “외요(外徼)란 군(郡) 밖으로 나가 만이(蠻夷)와의 사이에 목책을 만들고 병사를 주둔시켜 만이(蠻夷)를 진무(鎭撫)하며 그 침구(侵寇)를 차단하는 새(塞)이다. 후대의 봉황성(鳳凰城)과 같이 이것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고 해석하였는데학설, 매우 좋은 견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연진(燕秦)시대에 요동군과 조선국(기씨(箕氏))의 사이에는 일종의 완충지대(실은 조선의 침구를 차단하기 위한 방어지대)를 설치하여 그 일부분을 요동군의 내계(內界)로 하고 다른 한쪽을 외계(外界)로 한 것 같다. 이처럼 요동군과 조선군의 사이에 내외 이계(二界)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내외 이계는 어디였을까? 이는 패수 문제를 해결함에 매우 중요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쪽수▶P113-2 이들 󰡔사기󰡕의 기사는 즉 진번․조선과 燕․秦․漢 三代의 역사지리적 관계와 위만조선의 立國由來를 서술한 것이지만, 이곳에 이미 패수의 명칭이 나오고 있다. 패수가 요동과 조선(낙랑)의 경계가 되게 된 것은 漢初부터이고, 그보다 이전의 燕秦時代에는 패수를 넘어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서 조선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기 C절에 “漢興, 爲其遠難守…至浿水爲界”라고 하였고, 또한 다음 D절중에 “滿…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云云”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다. 이 秦의 ‘故空地上下鄣’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패수유역에서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 이르는 사이에 두어졌던 상하 두 곳의 鄣塞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곳은 실로 燕이 앞서 진번조선을 略屬하여 관리를 두어 鄣塞를 쌓았다고 하는 그 鄣塞임이 틀림없고, 秦代의 소위 遼東外徼(설명, 밑에 보인다)라는 것도 즉 그것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上下鄣 사이를 특히 “故空地”라고 한 것은 그곳이 원래 일종의 완충지대로 사람을 거주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外徼란 즉 外界 혹은 外塞의 뜻으로 故今西박사는 이에 대하여 󰡔史記󰡕 司馬相如傳의 “南至䍧牱江爲徼”라는 곳의 索隱注에 “張揖云徼塞也, 以木柵水爲蠻夷界”라고 하는 것을 인용하여 「洌水考」(註152와 같음) “外徼란 郡 밖으로 나가 蠻夷와의 사이에 목책을 만들고 병사를 주둔시켜 蠻夷를 鎭撫하며 그 侵寇를 차단하는 塞이다. 후대의 鳳凰城과 같이 이것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고 해석하였는데, 매우 좋은 견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燕秦時代에 요동군과 조선국(箕氏)의 사이에는 일종의 완충지대(실은 조선의 침구를 차단하기 위한 방어지대)를 설치하여 그 일부분을 요동군의 內界로 하고 다른 한쪽을 外界로 한 것 같다. 이처럼 요동군과 조선군의 사이에 內外 二界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내외이계는 어디였을까? 이는 패수문제를 해결함에 매우 중요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본문3: (3)


먼저 (연진(燕秦) 대의) 요동군의 외계(外界)에 대해 고찰함에 있어, 산해경서적의 해내북경조(海內北經條)에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고 하는 일절이 있다. 이 문장은 때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오독하게 하기로 저명한데, 구두(句讀)는 위와 같이 끊어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고,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며, 열양은 연에 속한다”라고 읽는 것이 올바르다. 동진(東晋)의 곽박(郭璞)인물은 이곳에 주를 하여 “朝鮮, 今樂浪縣(○낙랑군(樂浪郡)의 수현(首縣)이라는 뜻), 箕子所封也,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라고 하였는데 곽박(郭璞)인물씨의 주를 기다릴 것도 없이, 열양은 열구(列口)와 마찬가지로 열수(列水)와 관계된 지명이고, 열구(列口)가 열수(列水)의 입구(하구)라는 뜻임에 대해, 열양(列陽)은 열수(列水)의 북쪽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대개 산의 북쪽, 물의 남쪽은 음이라 하고, 물의 북쪽, 산의 남쪽을 양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곽박(郭璞)인물씨가 열수를 “今在帶方”이라고 한 것은 열수의 하류역(下流域) 일부분이 당시의 대방군(지금의 황해도)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余)는 「진번군고(眞番郡考)」에서 열구(列口)(이전에는 낙랑군의 일현(一縣)이었지만, 후에는 대방군의 일현(一縣)이 되었다)를 대동강의 하류로 황해도의 서북쪽인 은율군(殷栗郡)(고구려시대의 율구(栗口)) 근처로 비정하였는데, 그것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다음 열양(列陽)은-지금 언급한 바와 같이 열수(列水)의 북쪽이라는 뜻이기 때문에-대동강 이북의 땅, 특히 지금의 평양보다 북쪽의 땅을 그렇게 칭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상하장(上下鄣)의 방어지대에 대하여 연(燕)으로부터) 열양(列陽)의 새로운 명칭이 주어졌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열양은 열수(대동강)로부터 북쪽의 땅에 대한 호칭이고, 조선(기씨(箕氏))은 상기와 같이 ‘열양(列陽)의 동(東)(정확하게는 남(南))에 있다’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고, 강 즉 열수(列水)로써 연(燕)및 진(秦)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환언하면, 연진(燕秦)시대의 요동 외계는 이 열수(列水)임이 틀림없고 그보다 북쪽은 열양(列陽)에 속하고, 남쪽은 조선에 속했던 것이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이 전연(全燕)에게 침략당하여 그 영토를 상당히 잃어버린 결과이고 그 이전의 조선 영토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현저히 서방으로 진출하였으며, 그 수도도 처음은 열수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郭璞의 주(註)에 ‘朝鮮, 今樂浪縣’이라는 것은 물론 침략 후의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때의 조선 중심지를 곽박(郭璞)인물씨는 낙랑군의 치현(治縣)인 조선현(朝鮮縣), 지금 평양공간의 대안(對岸)인 대동군(大同郡)공간 대동강면(大同江面) 토성리(土城里) 방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곽씨설학설은 과연 확실한 근거 위에서 내려진 것일까, 혹은 단지 추측으로서의 언급인가, 그것은 상세하지는 않지만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낙랑군의 조선현은 그 위치가 아마도 처음부터 지금의 토성리방면에 있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성(王險城)(평양공간)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고 인정되지만, 특히 그곳을 조선현치(朝鮮縣治)로 했다는 것은 역시 그곳이 기씨조선(후기)의 중심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조선현의 위치와 그 현명(縣名)으로부터 유추하여 지금의 토성리 부근이 기씨조선 후기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없다. 그래서 여(余)는 연(燕)의 침략 후에 있어서 조선의 중심지를 곽박(郭璞)인물(郭)씨와 마찬가지로 낙랑군의 조선현치로 비정함과 함께 당시 조선의 세력은 겨우 강동(江東)공간 일대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쪽수▶P114-2먼저 (燕秦代의)요동군의 外界에 대해 고찰함에 있어, 󰡔산해경󰡕의 海內北經條에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고 하는 일절이 있다. 이 문장은 때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오독하게 하기로 저명한데, 句讀는 위와 같이 끊어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고,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며, 열양은 연에 속한다”라고 읽는 것이 올바르다. 東晋의 郭璞은 이곳에 주를 하여 “朝鮮, 今樂浪縣(○樂浪郡의 首縣이라는 뜻), 箕子所封也,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라고 하였는데 곽씨의 주를 기다릴 것도 없이, 열양은 列口와 마찬가지로 列水와 관계된 지명이고, 列口가 列水의 입구(河▶P115口)라는 뜻임에 대해, 列陽은 列水의 북쪽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대개 산의 북쪽, 물의 남쪽은 陰이라 하고, 물의 북쪽, 산의 남쪽을 陽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곽씨가 열수를 “今在帶方”이라고 한 것은 열수의 下流域 일부분이 당시의 대방군(지금의 황해도)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余는 「眞番郡考」에서 列口(이전에는 낙랑군의 一縣이었지만, 후에는 대방군의 一縣이 되었다)를 대동강의 하류로 황해도의 서북쪽인 殷栗郡(고구려시대의 栗口) 근처로 비정하였는데, 그것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다음 列陽은-지금 언급한 바와 같이 列水의 북쪽이라는 뜻이기 때문에-대동강 이북의 땅, 특히 지금의 평양보다 북쪽의 땅을 그렇게 칭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上下鄣의 방어지대에 대하여 (燕으로부터)列陽의 새로운 명칭이 주어졌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열양은 열수(대동강)로부터 북쪽의 땅에 대한 호칭이고, 조선(箕氏)은 上記와 같이 ‘列陽의 東(정확하게는 南)에 있다’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고, 강 즉 列水로써 燕(및 秦)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환언하면, 燕秦時代의 요동외계는 이 列水임이 틀림없고 그 보다 북쪽은 列陽에 속하고, 남쪽은 조선에 속했던 것이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이 全燕에게 침략당하여 그 영토를 상당히 잃어버린 결과이고 그 이전의 조선 영토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현저히 西方으로 진출하였으며, 그 수도도 처음은 열수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郭璞의 註에 ‘朝鮮, 今樂浪縣’이라는 것은 물론 침략후의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때의 조선 중심지를 곽씨는 낙랑군의 治縣인 朝鮮縣, 지금 평양의 對岸인 大同郡 大同江面 土城里 방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곽씨설은 과연 확실한 근거 위에서 내려진 것일까, 혹은 단지 추측으로서의 언급인가, 그것은 상세하지는 않지만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낙랑군의 조선현은 그 위▶P116-1치가 아마도 처음부터 지금의 토성리방면에 있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인 王險城(평양)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고 인정되지만, 특히 그곳을 朝鮮縣治로 했다는 것은 역시 그곳이 기씨조선(후기)의 중심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조선현의 위치와 그 縣名으로부터 유추하여 지금의 토성리 부근이 기씨조선 후기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없다. 그래서 余는 燕의 침략 후에 있어서 조선의 중심지를 郭씨와 마찬가지로 낙랑군의 조선현치로 비정함과 함께 당시 조선의 세력은 겨우 江東 일대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산해경서적의 앞서 인용한 “海北山南”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원래부터 막연한 말로써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설이 있는데, 여(余)가 보기에 “海北山南”은 단순히 조선(朝鮮) Proper만이 아니라 실은 그 남쪽의 진번(眞番)5)(혹은 당시 조선의 지배 하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까지도 포함시킨 말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해북(海北)이란 진번(지금의 황주(黃州)공간 이남에 있어서황해도공간경기공간 일부)의 남해(南海)인 지금의 경기만(京畿灣)보다 북쪽 땅이고, 산남(山南)이란 즉 대동강공간 상류역(上流域)에 있어서 묘향산맥보다 이남의 땅일 것으로 생각된다. 묘향산맥은 반도의 서북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산맥 중 가장 저대(著大)한 것으로 그 주봉을 이루는 묘향산은 높이 6,300척, 한편 태백산이라고도 하여 단군의 강림지로 전해지고 있는 옛날부터의 명산이다. 여말의 문호 목은 이색은 그의 「묘향산기(妙香山記)」에서 “香山, 在鴨綠水南岸.平壤府之北, 與遼陽爲界, 山之大莫之與比, 而長白之所分也”라고 언급하고, 그 산의 자연 지리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요컨대 이 “海北山南”은 다소 정치적 구획을 초월하여 자연 지리적 구획에 의해 조선 진번을 한데 묶어 표현한 말일 것으로 생각된다.
쪽수▶P116-2 그렇다면, 󰡔산해경󰡕의 앞서 인용한 “海北山南”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원래부터 막연한 말로써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설이 있는데, 余가 보기에 “海北山南”은 단순히 朝鮮 Proper만이 아니라 실은 그 남쪽의 원문주5▶ 眞番 [4](혹은 당시 조선의 지배하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까지도 포함시킨 말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海北이란 진번(지금의 黃州 이남에 있어서 황해도 및 경기 일부)의 南海인 지금의 京畿灣보다 북쪽 땅이고, 山南이란 즉 大同江上流域에 있어서 묘향산맥보다 이남의 땅일 것으로 생각된다. 묘향산맥은 반도의 서북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산맥 중 가장 著大한 것으로 그 주봉을 이루는 묘향산은 높이 六千三百尺, 한편 태백산이라고도 하여 단군의 강림지로 전해지고 있는 옛날부터의 명산이다. 여말의 문호 목은 이색은 그의원문주6▶ 「妙香山記」 [5]에서 “香山, 在鴨綠水南岸․平壤府之北, 與遼陽爲界, 山之大莫之與比, 而長白之所分也”라고 언급하고, 그 산의 자연 지리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요컨대 이 “海北山南”은 다소 정치적 구획을 초월하여 자연 지리적 구획에 의해 조선진번을 한데 묶어 표현한 말일 것으로 생각된다.




































































































본문4: (4)


연진(燕秦)시대 요동군의 외계(外界)를 열수(列水)로 인정하는 오인(吾人)은 더욱이 그 내계(內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거기에는 이러한 문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위지서적 삼한전(三韓傳)의 배주(裴注)에 인용된 하기 어환(魚豢)의 위략서적 일절(一節)이 즉 그것이다.
쪽수▶P117-1燕秦時代 요동군의 外界를 列水로 인정하는 吾人은 더욱이 그 內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거기에는 이러한 문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魏志󰡕 三韓傳의 裴注에 인용된 下記 魚豢의 󰡔魏略󰡕 一節이 즉 그것이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燕自尊爲王ㆍ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溴水,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渡溴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ㆍ故中國亡命,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以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 告準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戰, 不敵也
쪽수▶P117-2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燕自尊爲王ㆍ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溴水,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渡溴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ㆍ故中國亡命,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以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 告準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戰, 不敵也
위략서적의 문장은 앞서 인용한 사기서적의 문장을 보충할 만한 중요한 기사라고 생각되는데, 연(燕)과 조선의 관계나 패수와 위만 근거지의 관계가 이에 의해 한층 상세히 엿볼 수 있다. 연(燕)의 조선 경략은 이에 의하면 진개(秦開)인물라는 명장에 의하여 행해지고-이 무렵은 연(燕)의 전성시대라고 할만한 소왕(昭王)인물(B.C. 311~279)의 치세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데-진개(秦開)인물는 즉 조선(朝鮮) 서방을 공격하여 이천여 리의 땅을 취하고, 만번한(滿潘汗)이라는 곳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 그 때문에 조선은 마침내 약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보면, 연(燕)의 경략 전의 조선 영토라는 것은 현저히 서방으로 진출해 있고, 요동 방면도 소유하고 있었지만, 진개(秦開)인물가 공취한 ‘이천여리’라는 것은 어디부터 기산(起算)된 것일까. 이것이 과연 본디 조선의 소유와 관련된 지방이었을까. 그리고 그 경계가 되었다는 만번한(滿潘汗)이라는 곳은 지금의 어디로 비정해야 할 것인가-더욱이 이것이 전절(前節)에서 燕(연)이 열수로써 경계로 했다는 것과 모순되지는 않은가-이러한 점은 그(연진(燕秦)시대의) 요동군의 내계(內界) 위치를 생각함에는 물론 문제의 패수 위치를 결정함에도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사기서적 흉노전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이러한 일절(一節)이 보인다.
쪽수▶P117-3이 󰡔위략󰡕의 문장은 앞서 인용한 󰡔사기󰡕의 문장을 보충할 만한 중요한 기사라고 생각되는데, 燕과 조선의 관계나 패수와 위만 근거지의 관계가 이에 의해 한층 상세히 엿볼 수 있다. 燕의 조선경략은 이에 의하면 秦開라는 명장에 의하여 행해지고-이 무렵은 燕의 전성시대라고 할만한 昭王(B.C. 311~279)의 치세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데-진개는 즉 朝鮮西方을 공격하여 이천여리의 땅을 취하고, 滿潘汗이라는 곳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 그 때문에 조선은 마침내 약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보면, 燕의 경략 전의 조선영토라는 것은 현저히 西方으로 진출해 있고, 요동방면도 소유하고▶P118-1 있었지만, 진개가 공취한 ‘이천여리’라는 것은 어디부터 起算된 것일까. 이것이 과연 본디 조선의 소유와 관련된 지방이었을까. 그리고 그 경계가 되었다는 滿潘汗이라는 곳은 지금의 어디로 비정해야 할 것인가-더욱이 이것이 前節에서 燕이 열수로써 경계로 했다는 것과 모순되지는 않은가-이러한 점은 그(燕秦時代의) 요동군의 內界 위치를 생각함에는 물론 문제의 패수 위치를 결정함에도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사기󰡕 흉노전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이러한 一節이 보인다.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郤千餘里…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 以拒胡
쪽수▶P118-2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郤千餘里…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 以拒胡
이것은 마찬가지로 연장(燕將)진개(秦開)인물의 동호 정벌 및 그 결과로 즉 진개(秦開)인물는 동호를 쳐부수고, 이를 퇴각시킨 것이 천여 리, 연(燕)은 그 사이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5군을 두고, 첫 번째의 상곡군치(上谷郡治)인 조양(造陽)(지금의 하북(河北)공간 회래현(懷來縣)부터 끝인 요동군치 평양공간(지금의 요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동호(東胡)라는 것은 백조(白鳥)인물 박사가 언급한 바와 같이 몽고종(蒙古種)을 골자로 하고, 이것에 Tunguse종을 가미한 잡종으로 지금의 요하 상류인 서라목륜하(西喇木倫河) 유역을 근거로 하여 그 좌우에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 조선과는 전혀 다른 방면이고, 따라서 “東胡郤千餘里”(천여 리라는 것은 실제로 천수백 리일지도 모른다)는 조선이 아니라 순수하게 동호족이 쫓겨난 이수(里數)를 말한 것으로, 특히 신치(新置)된 상곡군(上谷郡)(조양(造陽))으로부터 요서군(遼西郡)(차로(且盧))까지 이르는 거리를 개산(槪算)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 요동방면까지 이어진 신축된 장성은 다음 진대(秦代)의 장성 일부를 이루고, 지금의 장성(이것은 남북조 이래 천여 년간 점차적으로 쌓여진 것이다)과 비교하여 훨씬 북방을 지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진개(秦開)인물의 동략(東略)은 단지 동호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조선 방면에도 이르게 되었으며 그 서쪽 땅을 많이 취하였다. 이 위략서적의 “攻其西方(○朝鮮) 取地二千餘里”설이 생기게 된 이유인데, 그 소위 ‘이천여 리’는 모두 조선의 서부지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그 안에는 실제로 사기서적의 “東胡郤千餘里”의 이수(里數)도 더해진 것으로 해석하고자 하며, 위략서적의 찬자는 그것을 망각했던 것일 것이다(최근 중추원 촉탁 대원리무(大原利武)인물씨도 여(余)와 거의 같은 의견을 발표하였다. 즉 ‘이천여 리’-이것도 실제로는 이천수백 리일지도 모르지만-의 계산은, 그 상곡군(上谷郡)의 조양(造陽)에서 동쪽, 만번한(滿潘汗)까지의 개략적인 이수(里數)인 듯 하고, 그 절반(실은 절반이 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은 동호의 땅에, 나머지 절반은 조선 지방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본디 동호와 조선의 경계는 아마도 지금의 요하변(遼河邊)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다면 연(燕)의 신치(新置) 5군 중,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의 4군은 본래 동호의 땅이고, 나머지 1군인 요동군(遼東郡)만이 조선의 서부지방으로 여겨진다. 위략서적의 찬자가 진개(秦開)인물의 약지(略地) 이천여 리를 모두 조선의 서부지방으로만 보고 그 안에 동호의 땅이 포함된 것을 망각한 것과 같이 사기서적의 찬자도 연(燕)의 신치(新置) 5군을 전부 동호의 땅이었던 것처럼 말하여 요동군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각각이 한쪽 편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연(燕)의 약지(略地) 이천여 리 중, 조선이 실제 잃은 부분은 대략 천 리 정도밖에 안될 것이고, 그리고 그 천 리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의 서계(西界)였다고 생각되는 요하 유역부터 동쪽의 만번한(滿潘汗)까지의 사이(즉 요동군의 서단에서 동단까지의 사이)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만번한(滿潘汗)은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드디어 도착하게 된다.
쪽수▶P118-3 이것은 마찬가지로 燕將 진개의 동호 정벌 및 그 결과로 즉 진개는 동호를 쳐부수고, 이를 퇴각시킨 것이 천여리, 燕은 그 사이에 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의 5郡을 두고, 첫 번째의 上谷郡治인 造陽(지금의 河北 懷來縣)부터 끝인 요동군치 襄平(지금의 遼陽)에 이르는 長城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원문주7▶東胡라는 것은 白鳥박사가 언급한 바와 같이[6] 蒙古種을 骨子로 하고, 이것에 Tunguse種을 가미한 잡종으로 지금의 요하 상류인 西喇木倫河 유역을 근거로 하여 그 좌우에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 조선과는 전혀 다른 방면이고, 따라서 “東胡郤千餘里”(천여리라는 것은 실제로 천수백리일지도 모른다)는 조선이 아니라 순수하게 동호족이 쫓겨난 里數를 말한 것으로, 특히 新置된 上谷郡(造陽)으로부터 遼西郡(且盧)까지 이르는 거리를 槪算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 요동방면까지 이어진 신축된 장성은 다음 秦代의 장성 일부를 이루고, 지금의 장성(이것은 남북조이래▶P119 천여년간 점차적으로 쌓여진 것이다)과 비교하여 훨씬 북방을 지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진개의 東略은 단지 동호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조선방면에도 이르게 되었으며 그 서쪽 땅을 많이 취하였다. 이 󰡔위략󰡕의 “攻其西方(○朝鮮) 取地二千餘里”說이 생기게 된 이유인데, 그 소위 ‘이천여리’는 모두 조선의 서부지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그 안에는 실제로 󰡔사기󰡕의 “東胡郤千餘里”의 里數도 더해진 것으로 해석하고자 하며, 󰡔위략󰡕의 찬자는 그것을 망각했던 것일 것이다(원문주8▶최근 중추원 촉탁 大原利武씨도 余와 거의 같은 의견을 발표하였다[7]). 즉 ‘이천여리’-이것도 실제로는 이천수백리일지도 모르지만-의 계산은, 그 上谷郡의 造陽에서 동쪽, 滿潘汗까지의 개략적인 里數인 듯 하고, 그 절반(실은 절반이 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은 동호의 땅에, 나머지 절반은 조선지방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본디 동호와 조선의 경계는 아마도 지금의 遼河邊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다면 燕의 新置 5군 중, 上谷․漁陽․右北平․遼西의 4군은 본래 동호의 땅이고, 나머지 1군인 遼東郡만이 조선의 서부지방으로 여겨진다. 󰡔위략󰡕의 찬자가 진개의 略地 이천여리를 모두 조선의 서부지방으로만 보고 그 안에 동호의 땅이 포함된 것을 망각한 것과 같이 󰡔사기󰡕의 찬자도 燕의 新置 5군을 전부 동호의 땅이었던 것처럼 말하여 요동군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각각이 한쪽 편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燕의 略地 이천여리 중, 조선이 실제 잃은 부분은 대략 천리 정도밖에 안될 것이고, 그리고 그 천리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의 西界였다고 생각되는 요하유역부터 동쪽의 滿潘汗까지의 사이(즉 요동군의 서단에서 동단까지의 사이)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滿潘汗은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드디어 도착하게 된다.
위략서적의 소위 만번한(滿潘汗)은 연(燕)의 요동군 동단이 틀림없지만, 그것은 한대(漢代)가 되어서도 그러했던 것 같고, 실제로 한서서적 지리지의 요동군(遼東郡) 속현조(屬縣條)에는 다음에 제시하는 바와 같이 문현(文縣)ᆞ번한현(番汗縣)의 이름이 나온다.
쪽수▶P120-1󰡔위략󰡕의 소위 滿潘汗은 燕의 요동군 東端이 틀림없지만, 그것은 漢代가 되어서도 그러했던 것 같고, 실제로 󰡔한서󰡕 지리지의 遼東郡 屬縣條에는 다음에 제시하는 바와 같이 文縣ㆍ番汗縣의 이름이 나온다.
文(莾曰文亭) 番汗(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應劭曰汗水出塞外, 西南入海)
쪽수▶P120-2文(莾曰文亭) 番汗(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應劭曰汗水出塞外, 西南入海)
위략서적의 만번한(滿潘汗)이 즉 이 문(文), 번한(番汗)의 두 현을 연친(連稱)한 것임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바(조금 앞에서도 소개한 대원리무(大原利武)씨도 그러한 의견9)이었다고 기억한다)로, 만(滿)과 문(文)은 근사한 음, 번한(潘汗)과 번한(番汗)은 완전히 동음이다. 그리고 위의 한지(漢志)에 의하면, 번한현(番汗縣)은 패수(沛水)라는 하천의 유역에 위치하고, 패수(沛水)는 새외(塞外)로부터 나와 서남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응소의 주에는, 패수(沛水)를 한수(汗水)로 하고 있지만, 패(沛)와 한(汗)은 자음이-사고(師古)의 주에 ‘沛音普蓋反, 汗音寒’라고 한 바와 같이-전혀 다르지만, 자형(字形)은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혹은 패자(沛字)를 한자(汗字)로 전와(轉訛)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 위치한 현명(縣名)이 번한(番汗)이기 때문에 패수(沛水)를 한편으로 한수(汗水)라고도 칭했던 것인지, 그 어느 쪽도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허신인물설문서적에도 “沛水出遼東番汗塞外, 西南入海”라고 하고, 여기에는 특히 요동(遼東) 번한새외(番汗塞外)의 구절이 보이기 때문에 앞의 ‘새외(塞外)’가 이것임을 알 수 있다. 패수(沛水)의 위치를 살피는 것은 즉 만번한(滿潘汗)의 그것을 살피는 것이고, 동시에 요동군(遼東郡)의 동계(東界)(내계(內界))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종래, 패수(浿水) 압록강설학설을 취하는 학자들 중에는 패(沛)와 패(浿)의 자음관계로부터 이것을 혼동하여 패수(沛水) 즉 패수(浿水)라 하고, 압록강의 하류를 가지고 일률적으로 이것에 비정하였으며, 따라서 번한현(番汗縣)도 그 북안(北岸) 근처인 것처럼 말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같은 한서서적** 지리지에는 압록강이 염난수(鹽難水)로 나타나고, 마자수(馬訾水)(지금의 동가강(佟佳江))와 합류하여, 요동군(遼東郡)의 서안평현(西安平縣)(지금의 안동현(安東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쪽수▶P120-3󰡔위략󰡕의 滿潘汗이 즉 이 文․番汗의 두 현을 連稱한 것임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바(원문주9▶조금 앞에서도 소개한 大原利武씨도 그러한 의견[8]이었다고 기억한다)로, 滿과 文은 근사한 音, 潘汗과 番汗은 완전히 同音이다. 그리고 위의 漢志에 의하면, 番汗縣은 沛水라는 하천의 유역에 위치하고, 沛水는 塞外로부터 나와 서남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응소의 주에는, 沛水를 汗水로 하고 있지만, 沛와 汗은 자음이-師古의 주에 ‘沛音普蓋反, 汗音寒’라고 한 바와 같이-전혀 다르지만, 字形은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혹은 沛字를 汗字로 轉訛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 위치한 縣名이 番汗이기 때문에 沛水를 한편으로 汗水라고도 칭했던 것인지, 그 어느 쪽도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許慎의 󰡔說文󰡕에도 “沛水出遼東番汗塞外, 西南入海”라고 하고, 여기에는 특히 遼東 番汗塞外의 구절이 보이기 때문에 앞의 ‘塞外’가 이것임을 알 수 있다. 沛水의 위치를 살피는 것은 즉 滿潘汗의 그것을 살피는 것이고, 동시에 遼東郡의 東界(內界)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종래, 浿水 鴨綠江說을 취하는 학자들 중에는 沛와 浿의 자음관계로부터 이것을 혼동하여 沛水 즉 浿水라 하고, 압록강의 하류를 가지고 일률적으로 이것에 비정하였으며, 따라서 番汗縣도 그 北岸 근처인 것처럼 말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같은 󰡔한서󰡕 지리지에는 압록강이 鹽難水로 나타나고, 馬訾水(지금의 佟佳江)와 합류하여, 遼東郡의 西安平縣(지금의 安東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즉 **한지(漢志)** 현토군(玄菟郡), 서개마현조(西蓋馬縣條)에
쪽수▶P121-1 즉 󰡔漢志󰡕 玄菟郡, 西蓋馬縣條에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一千一百里, 莾曰 玄菟亭)
쪽수▶P121-2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一千一百里, 莾曰 玄菟亭)
라는 것이 그것이고, 이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졸고 「현토군급임둔군고(玄菟郡及臨屯郡考)」원고 안에서 이미 발표해 두었지만. 사견으로는 서개마현(西蓋馬縣)(동가강반(佟佳江畔)인 부이강구(富爾江口)로 비정한다) 아래를 흐르는 마자수(馬訾水)를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으로 간주하고, 그 하천이 현치(縣置)가 있는 곳에서 조금 서북쪽으로 굴절하여 더욱이 (서남류(西南流)하여)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가며, 또한 다시 서남으로 흘러가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해석하였다. 다음의 ‘過郡二’란 모두가 말하는 바와 같이 현토(玄菟). 요동(遼東) 이군(二郡)을 경류(經流)한다는 것이다. 마자수(馬訾水)가 지류이고 염난수(鹽難水)가 본류인 점은 위에서 ‘馬訾水...入鹽難水云云’라는 것으로 명확해졌지만(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본말을 전도하여 전자를 본류로, 후자를 지류로 생각해 왔다), 당시 압록강에는 이미 다른 수명(水名)이 주어져 있었고, 또한 그 하류의 북안에는 상기와 같이 요동군(遼東郡)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이 두어졌기 때문에 이 하천의 하류를 가지고 패수(沛水) 및 패수(浿水)로 비정하거나, 혹은 그 북안에서 번한현(潘汗縣)을 구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책에서 각각 별개의 수명(水名) 또는 지명으로써 나타난 이상은 역시 각각 별개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여(余)는 패수(沛水)(내지 패수(浿水)) 압록강설학설에는 처음부터 반대로 「진번군고(眞番郡考)」원고를 쓸 때부터 패수(沛水) 박천강(博川江)이라는 신설을 제창하였던 것이다. 즉 패수(沛水)는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강이고, 번한현(番汗縣)은 박천군(博川郡) 그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천강은 일명 대영강(大寧江)이라고도 하고, 수원(水源)을 창성(昌城) 및 삭주(朔州)에서 발하며, 태천(泰川), 박천(博川) 두 군을 지나 더 한층 서남류(西南流)하고 청천강(淸川江)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의 대하(大河)이다. 박천(博川)의 박음(博音)이 패수(沛水)의 패(沛), 번한(番汗)의 번(番)에 가까운 것도 우연이 아닐 듯싶다. 그리고 박천강 유역은 요동군의 서계(西界)로 생각되는 대요하(大遼河)로부터 마침 천리 내외(한대(漢代)의 1리(一里)는 구조선(舊朝鮮)의 것과 큰 차가 없다)의 땅에 해당하고, 앞서 언급한 여(余)의 논법과 털끝만큼도 벗어나지 않는다. 단 문현(文縣)의 위치에 대해서는 번한현(番汗縣) 만큼 자세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번한(番汗)과 연칭되었을 정도의 현이었기 때문에 그 부근의 인현(隣縣)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쪽수▶P121-3라는 것이 그것이고, 이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원문주10▶졸고 「玄菟郡及臨屯郡考」 [9] 안에서 이미 발표해 두었지만. 私見으로는 西蓋馬縣(佟佳江畔인 富爾江口로 비정한다) 아래를 흐르는 馬訾水를 지금의 佟佳江으로 간주하고, 그 하천이 縣置가 있는 곳에서 조금 서북쪽으로 굴절하여 더욱이 (西南流하여) 鹽難水로 들어가며, 또한 다시 西南으로 흘러가 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해석하였다. 다음의 ‘過郡二’란 모두가 말하는 바와 같이 玄菟․遼東 二郡을 經流한다는 것이다. 馬訾水가 지류이고 鹽難水가 본류인 점은 위에서 ‘馬訾水…入鹽難水云云’라는 것으로 명확해졌지만(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본말을 전도하여 전자를 본류로, 후자를 지류로 생각해 왔다), 당시 압록강에는 이미 다른 水名이 주어져 있었고, 또한 그 하류의 북안에는 上記와 같이 遼東郡의 西安平縣이 두어졌기 때문에 이 하천의 하류를 가지고 沛水 및 浿水로 비정하거나, 혹은 그 북안에서 潘汗縣을 구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책에서 각각 별개의 水名 또는 지명으로써 나타난 이상은 역시 각각 별개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余는 沛水(내지 浿水)鴨綠江說에는 처음부터 반대로 「眞番郡考」를 쓸 때부터 沛水 博川江이라는 신설을 제창하였던 것이다. 즉 沛水는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강이고, 番汗縣은 博川郡 그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천강은 일명 大寧江이라고도 하고, 水源을 昌城 및 朔州에서 발하며, 泰川․博川 두 군을 지나 더 한층 西南流하고 淸川江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의 大河이다. 博川의 博音이 沛水의 沛, 番汗의 番에 가까운 것도 우연이 아닐 듯싶다. 그리고 박천강유역은 요동군의 ▶P122-1西界로 생각되는 大遼河로부터 마침 千里 內外(漢代의 一里는 舊朝鮮의 것과 큰 차가 없다)의 땅에 해당하고, 앞서 언급한 余의 논법과 털끝 만큼도 벗어나지 않는다. 단 文縣의 위치에 대해서는 番汗縣 만큼 자세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番汗과 연칭되었을 정도의 현이었기 때문에 그 부근의 隣縣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진개(秦開)인물 동략(東略)의 결과, ‘만번한(潘汗縣)에 이르러 경계를 이루다’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지금의 박천강을 경계로 했다는 것이다. 연대(燕代) 요동군의 동(정)계(東(正)界)는 즉 이것이지만, 연(燕)은 이 때 혹은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세력을 일으켜 더욱 남진하였고, 열수(列水)에 이르러 조선과 경계를 나누었으며, 이것을 요동군의 외계(外界)로 함과 동시에 전자를 이와 대비시켜 내계(內界)라고 하였을 것이다.
쪽수▶P122-2 그렇다면, 秦開 東略의 결과, ‘潘汗縣에 이르러 경계를 이루다’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지금의 박천강을 경계로 했다는 것이다. 燕代 요동군의 東(正)界는 즉 이것이지만, 燕은 이 때 혹은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세력을 일으켜 더욱 南進하였고, 列水에 이르러 조선과 경계를 나누었으며, 이것을 요동군의 外界로 함과 동시에 前者를 이와 대비시켜 內界라고 하였을 것이다.
요동군의 내계(內界)(패수(沛水))와 외계(外界)(열수(列水)) 사이에는 기술(旣述)한 바와 같이, 일종의 완충지대 아니 오히려 연(燕)의 (조선에 대한) 방어지대가 설치되고, 처음에는 그곳에 인민을 거주시키지 않았으며, 다만 연(燕)은 패수(浿水) 이남 열수(列水) 이북에 있어서 특히 상하장(上下鄣)(아마도 상장(上鄣)은 패수(浿水) 부근에, 하장(下鄣)은 열수(列水) 북안(北岸)에 축조된 듯하고, 한지(漢志) 낙랑군조(樂浪郡條)에 ‘有雲鄣’라고 하는 운장(雲鄣)은 이들 상하장(上下鄣) 중의 하나일 것 같으나 그 위치는 상세하지 않다)을 쌓아 이병(吏兵)을 주둔시키고, 조선의 침구에 대비하였던 것 같은데, 진말(秦末)에 이르러 천하가 혼란해지자 연제조(燕齊趙)의 북지나(北支那)의 인민이 고난을 피해 조선 지방으로 흘러 들어간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왕 준은 이들을 서방에 살게 하였던 것이다. 앞의 위략서적의 문장 중에 “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라는 것이 즉 그것으로 여기에서 서방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상하장(上下鄣)의 고공지(故空地)를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침내 후에 이 지대를 근거로 한 연인(燕人) 위만이 그곳에서 진번조선인 및 고(故) 연제(燕齊)의 망명자들을 역속(役屬)했다는 사기서적의 기사가 있고(제2절 참조), 더욱이 같은 위략서적의 문장 안에도 “燕人衛滿...東渡溴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故中國亡命, 爲朝鮮藩屛”라고 하여, 여기에 소위 ‘故燕齊亡命者’라든가 ‘故中國亡命’이라는 것은 모두 이 고공지(故空地)에 있어서 진말(秦末)의 피난민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위략서적의 문장 안에 연거푸 보이는 ‘추수(溴水)’는 물론 패수(浿水)의 잘못으로 패수 이남의 소위 ‘고공지(故空地)’가 진말(秦末)부터 이미 조선왕 준의 세력권 내로 복귀되었던 것은 상기 위략서적이 나타낸 사실에 의해 분히 엿볼 수 있다. 한(漢)이 일어나 패수(浿水)를 한계로 하여 조선과 경계를 이루고 그 이남의 땅을 포기함에 이른 것은 틀림없이 이 때문이고, 사기서적의 소위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가 그것이다. ‘爲其遠難守’는 문자 그대로의 이유보다도 조선 세력의 서출(西出)을 보다 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遼東故塞’는 패수(沛水)(박천)유역에 있어서 번한새(番汗塞)를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사기**의 하문(下文)에 “滿...東走出塞, 渡浿水”라고 보이는 새(塞)도 물론 그것을 말한다.
쪽수▶P122-3 요동군의 內界(沛水)와 外界(列水) 사이에는 旣述한 바와 같이, 일종의 완충지대 아니 오히려 燕의(조선에 대한) 방어지대가 설치되고, 처음에는 그곳에 인민을 거주시키지 않았으며, 다만 燕은 浿水以南 列水以北에 있어서 특히 上下鄣(아마도 上鄣은 浿水부근에, 下鄣은 列水北岸에 축조된 듯하고, 漢志 樂浪郡條에 ‘有雲鄣’라고 하는 雲鄣은 이들 上下鄣 중의 하나일 것 같으나 그 위치는 상세하지 않다)을 쌓아 吏兵을 주둔시키고, 조선의 침구에 대비하였던 것 같은데, 秦末에 이르러 천하가 혼란해 지자 燕齊趙의 北支那의 인민이 고난을 피해 조선 지방으로 흘러들어간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왕 준은 이들을 서방에 살게 하였던 것이다. 앞의 󰡔위략󰡕의 문장 중에 “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라는 것이 즉 그것으로 여기에서 서방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上下鄣의 故空地를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침내 후에 이 지대를 근거로 한 燕人 위만이 그곳에서 진번조선인 및 故燕齊의 ▶P123-1망명자들을 役屬했다는 󰡔사기󰡕의 기사가 있고(제2절 참조), 더욱이 같은 󰡔위략󰡕의 문장 안에도 “燕人衛滿…東渡溴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故中國亡命, 爲朝鮮藩屛”라고 하여, 여기에 소위 ‘故燕齊亡命者’라든가 ‘故中國亡命’이라는 것은 모두 이 故空地에 있어서 秦末의 피난민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위략󰡕의 문장 안에 연거푸 보이는 ‘溴水’는 물론 浿水의 잘못으로 패수 이남의 소위 ‘故空地’가 秦末부터 이미 조선왕 준의 세력권내로 복귀되었던 것은 상기 󰡔위략󰡕이 나타낸 사실에 의해 충분히 엿볼 수 있다. 漢이 일어나 浿水를 한계로 하여 조선과 경계를 이루고 그 이남의 땅을 포기함에 이른 것은 틀림없이 이 때문이고, 󰡔사기󰡕의 소위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가 그것이다. ‘爲其遠難守’는 문자 그대로의 이유보다도 조선세력의 西出을 보다 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遼東故塞’는 沛水(박천)유역에 있어서 番汗塞를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사기󰡕의 下文에 “滿…東走出塞, 渡浿水”라고 보이는 塞도 물론 그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의 패수(浿水)는 패수(沛水)(박천)의 남쪽, 열수(列水)(대동강)의 북쪽-즉 구요동군(舊遼東郡)의 내계(內界)와 외계(外界)의 중간-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면 아무래도 지금의 청천강을 진한(秦漢)시대의 패수(浿水)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패수(浿水) 청천강설학설의 최초 논자로도 생각되는 우리 구암(久庵) 한백겸인물선생(이조 선조 및 광해군대의 인물)이 그 저술 동국지리서적 (낙랑군조)에서
쪽수▶P123-2그렇다면 문제의 浿水는 沛水(박천)의 남쪽, 列水(대동강)의 북쪽-즉 舊遼東郡의 內界와 外界의 중간-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면 아무래도 지금의 청천강을 秦漢시대의 浿水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浿水 淸川江說의 최초 논자로도 생각되는 우리 久庵 韓百謙선생(이조 선조 및 광해군대의 인물)이 그 저술 󰡔동국지리지󰡕(낙랑군조)에서
愚按秦漢皆以浿水爲朝鮮北界, 其非大同江明矣, 又馬訾水出西蓋馬, 入西安平, 則此當爲鴨綠江, 而淸川江在鴨綠ㆍ大同之間, 恐此爲浿水云云
쪽수▶P123-3愚按秦漢皆以浿水爲朝鮮北界, 其非大同江明矣, 又馬訾水出西蓋馬, 入西安平, 則此當爲鴨綠江, 而淸川江在鴨綠ㆍ大同之間, 恐此爲浿水云云
라고 서술하고, 패수(浿水) 대동강설학설 . 압록강설학설 을 일축하며 청천강설학설을 주장한 것은 참으로 탁견이라고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다(단 한백겸인물은 대동강이 열수(列水)인 것과 압록강의 본류가 마자수(馬訾水)가 아니라 염난수(鹽難水)인 점을 알지 못한 결점이 있다).
쪽수▶P124-1라고 서술하고, 浿水 大同江說․鴨綠江說을 일축하며 淸川江說을 주장한 것은 참으로 탁견이라고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다(단 久庵은 대동강이 列水인 것과 압록강의 본류가 馬訾水가 아니라 鹽難水인 점을 알지 못한 결점이 있다).






































본문5: (5)


이상은 연(燕), 진(秦), 한(漢)의 기씨조선(箕氏朝鮮)에 있어서 정치지리적 관계 내지 위만(衛滿) 동래(東來)에 관한 사실에 의해 패수(浿水)의 위치를 고찰한 것이지만, 다음으로는 더 나아가 한무제인물 당시의 위씨조선(衛氏朝鮮)에 대한 교섭 사실, 아울러 그 (조선)정토관계(征討關係)0의 지리에 의해 이것을 한층 더 확인하고자 한다.
쪽수▶P114-2이상은 燕․秦․漢의 箕氏朝鮮에 있어서 정치지리적 관계 내지 衛滿 東來에 관한 史實에 의해 浿水의 위치를 고찰한 것이지만, 다음으로는 더 나아가 漢武帝 당시의 衛氏朝鮮에 대한 교섭 사실, 아울러 그 (朝鮮)征討關係의 지리에 의해 이것을 한층 더 확인하고자 한다.
먼저 사기서적 조선전의 그것에 관한 기사를 아래에 언급하기로 한다. 동전(同傳)에 의하면,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시대에 이르러 꾀어낸 곳에 한(漢)의 망인(亡人)이 점점 많아지고, 그들은 한 번도 한(漢)에 들어가 천자를 뵌 적도 없으며, 게다가 그 인방(隣邦)의 나라(진국(辰國))는 상서를 올려 천자를 배알하고자 하나, 그들은 또한 이를 막고 지나갈 수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한무제인물 원봉(元封) 2년(B.C. 109) 한(漢)은 섭하인물라는 사신을 보내어(왕험성(王險城)공간에 와서) 왕 우거인물를 타일렀다. 그렇지만 우거인물는 끝까지 조서를 받들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섭하인물는 돌아가 계상(界上)공간에 이르러 패수(浿水)를 임하고, 어자(御者)를 시켜 자신을 배웅한 조선(朝鮮) 비왕(裨王) 장(長)을 죽이고, 곧바로 패수(浿水)를 건너 새(塞)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돌아가서 이것을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천자는 이를 가상히 여겨 섭하인물를 배하여 요동군(遼東郡)의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인물를 원망하여 병사를 일으켜 섭하인물를 습격하여 죽였다.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한(漢)의 조선 정토 거행을 보기에 이른다. 정토군은 해륙 양면으로 나뉘어 그해 가을, 수군으로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어 제(齊)로부터 나아가 발해(渤海)(황해(黃海))를 건너게 하였고, 육군으로는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로 하여금 요동(遼東)을 나와 우거인물를 토벌케 하였다. 이에 우거인물도 병사를 발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이를 막았다. 그러므로 좌장군의 졸정(卒正)이 요동병(遼東兵)을 많이 거느리고 선종(先縱)하였으나 패산(敗散)하여 겨우 도망하여 돌아왔기 때문에 군법에 의해 참(斬)을 당하였다. 그 사이, 해군의 누선장군은 제병(齊兵) 7천 인을 거느리고 (열구(列口)로부터) 먼저 왕험(王險)에 이르러, 이를 공격하자 우거인물는 성을 지키고 있다가 그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바로 성을 나와 싸워 크게 누선의 군사를 격퇴하였다. 장군 양복은 그 무리를 잃고, 산속에 숨어 있다가 10여 일이 지나 흩어진 병사를 모으는 상태였다. 이보다 앞서 누선장군은 열구(列口), 즉 열수(列水)의 하구에 이르러 당연히 좌장군(육군)이 조선에 이르기를 기다려 같이 진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선종(先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한다. 여(余)는 사기서적의 이 사실을 읽을 때마다 후대 수(隋)의 고구려(평양 중심) 정토에 있어서 마찬가지 상황이었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누선장군 양복은 마치 수(隋)의 내호아(來護兒)와 같다. 즉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이끌고 해로로 대동강에 들어와(육군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평양성을 쳤으나 도리어 복병 때문에 크게 패퇴하여 해포(海浦)에 환둔(還屯)했다는 것과 매우 흡사하여 흥미롭다.
쪽수▶P114-3 먼저 사기 조선전의 그것에 관한 기사를 아래에 언급하기로 한다. 同傳에 의하면, 위만의 손자 右渠時代에 이르러 꾀어낸 곳에 漢의 亡人이 점점 많아지고, 그들은 한번도 漢에 들어가 천자를 뵌 적도 없으며, 게다가 그 隣邦의 나라(辰國)는 상서를 올려 천자를 배알하고자 하나, 그들은 또한 이를 막고 지나갈 수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한무제 元封 2년(B.C. 109) 漢은 涉何라는 사신을 보내어(王險城에 와서) 왕 우거를 타일렀다. 그렇지만 우거는 끝까지 조서를 받들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섭하는 돌아가 界上에 이르러 浿水를 臨하고, 御者를 시켜 자신을 배웅한 朝鮮 裨王 長을 죽이고, 곧바로 浿水를 건너 塞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돌아가서 이것을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천자는 이를 가상히 여겨 섭하를 배하여 遼東郡의 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병사를 일으켜 섭하를 습격하여 죽였다.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漢의 조선정토▶P125-1거행을 보기에 이른다. 정토군은 해륙양면으로 나뉘어 그해 가을, 水軍으로는 樓船將軍 楊僕을 보내어 齊로부터 나아가 渤海(黃海)를 건너게 하였고, 陸軍으로는 左將軍 荀彘로 하여금 遼東을 나와 우거를 토벌케 하였다. 이에 우거도 병사를 발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이를 막았다. 그러므로 좌장군의 卒正이 遼東兵을 많이 거느리고 先縱하였으나 敗散하여 겨우 도망하여 돌아왔기 때문에 군법에 의해 斬을 당하였다. 그 사이, 해군의 누선장군은 齊兵 7천인을 거느리고 (列口로부터)먼저 王險에 이르러, 이를 공격하자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다가 그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바로 성을 나와 싸워 크게 누선의 군사를 격퇴하였다. 장군 양복은 그 무리를 잃고, 산속에 숨어 있다가 10여일이 지나 흩어진 병사를 모으는 상태였다. 이보다 앞서 누선장군은 列口, 즉 列水의 河口에 이르러 당연히 좌장군(육군)이 조선에 이르기를 기다려 같이 진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先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한다. 余는 󰡔사기󰡕의 이 사실을 읽을 때마다 후대 隋의 고구려(평양중심)정토에 있어서 마찬가지 상황이었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누선장군 양복은 마치 隋의 來護兒와 같다. 즉 來護兒가 江淮의 수군을 이끌고 海路로 대동강에 들어와(육군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평양성을 쳤으나 도리어 복병 때문에 크게 패퇴하여 海浦에 還屯했다는 것과 매우 흡사하여 흥미롭다.
좌장군(左將軍) 순체인물는 조선의 패수(浿水) 서군(西軍)을 공격하였으나 더 진격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무제인물는 다시 위산(衛山)이라는 자를 사신으로 보내어 병멸(兵威)로써 우거인물를 타일렀다. 우거인물는 사자를 인견하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항복을 청하였고, 태자를 보내어 사죄하고자 하였으며(말 5천 필을 바치고, 군량을 보냈다), 많은 무장 병사를 따르게 하였다. 태자가 패수를 건너려고 함에 사자(위산(衛山)) 및 좌장군(순체)은 그 변심을 의심하여 태자에게 무리의 무기를 해제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태자도 그들에게 사살(詐殺)당할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그대로 무리를 데리고 되돌아 왔다. 위산은 그 때문에 주살을 면하지 못했지만 그 뒤의 전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즉,
쪽수▶P125-2左將軍 荀彘는 조선의 浿水 西軍을 공격하였으나 더 진격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武帝는 다시 衛山이라는 자를 사신으로 보내어 兵威로써 우거를 타일렀다. 우거는 사자를 인견하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항복을 청하였고, 태자를 보내어 사죄하고자 하였으며(말 5천필을 바치고, 군량을 보냈다), 많은 무장병사를 따르게 하였다. 태자가 패수를 건너려고 함에 사자(衛山) 및 좌장군(순체)은 그 변심을 의심하여 태자에게 무리의 무기를 해제하기를 청하▶P126-1였다. 그러자 태자도 그들에게 詐殺당할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그대로 무리를 데리고 되돌아 왔다. 위산은 그 때문에 주살을 면하지 못했지만 그 뒤의 전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즉,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쪽수▶P126-2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라고 한다.
쪽수▶P126-3라고 한다.
이상의 사실 중에 나타난 패수(浿水)가 모두 국도(國都) 왕험성(王險城)과의 관계로부터 지금의 청천강공간임을 한층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왕험성(王險城)은 한서서적 지리지 신찬(臣瓚)의 주(注)에 “在樂浪郡浿水之東”라고 보이고 있고, 이것이 지금의 평양공간 근처임은 조선 및 지나(支那) 고래(古來)의 소설(所說)의 대부분이 일치하는 바인데 삼국사기서적 고구려기(高句麗紀) 동천왕(東川王) 21년 조에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라고 하는 것은-왕험(王險)이 선인(仙人)의 이름으로 변화한 것은 마치 같은 평양공간의 을밀(乙蜜)이라는 지명이 선인화되어 을밀선인 등의 칭호가 있는 것과 같다- 고구려 이래의 소전(所傳)인 듯하고, **사기정의(史記正義)** 소인(所引)의 **괄지지(括地志)**(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16년 위왕태소상(魏王泰所上))에 “高麗(○高句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也”라고 하는 것은 지나(支那) 고래(古來)의 소전인 듯하다), 여(余)는 다시 상술의 사기서적 기사를 통해 한층 그러함을 확인하려고 한다. 즉 상기의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왕험성(王險城)을 목표로 한 한(漢)의 육해군의 진로가-하나는 요동으로부터 패수를 건너 성을 치려고 하고, 하나는 해로로 열수(列水)를 거슬러 올라가 성을 공격하려고 했다- 마치 후대 수(隋)의 육해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향해 전진한 그 경로와 다른 곳이 없었다는 점, 이것이 그 하나이다. 또한 위의 인용문에서 보았다시피 마침내 한군(漢軍)이 왕험성(王險城)을 포위함에 이르러서는 패수(浿水)를 건너 온 좌장군(육군)은 특히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고, 다시 열수(列水)를 거슬러 왔다. 누선군(해군)은 특히 성 남쪽에 거하고, 서북남 삼면으로부터 성을 공격했다고 하는 것, 이것이 다른 하나로 왕험성(王險城)의 위치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부여해 준 기사라고 해석된다. 이에 있어서 왕험성(王險城)은 지금의 평양공간을 빼놓고는 이것에 비정할 장소가 없다. 성을 둘러싸는데 서북남 삼면만 했다는 것은 역시 성의 동쪽은 대동강에 직면하고 있어 손발을 뻗칠 만한 여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만약 평양공간의 대안인 토성리(土城里)와 같은 방면으로 비정해 보면 그 동쪽을 버리고 서북남(西北南) 삼면으로부터만 이것을 포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여(余)가 진번군고(眞番郡考)원고를 썼을 때부터 주장해 온 것이지만, 선유(先儒) 중에는 이러한 중요한 문자를 간과하였기 때문에 왕험성(王險城)의 위치를 때때로 당치도 않은 곳에 비정한 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 왕험성(王險城)이 지금의 평양이 다름없다고 한다면, 패수(浿水)는 자연히 평양공간의 북쪽인 청천강(淸川江)에 비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至城下”의 **사기**의 문면(文面)은, 틀림없이 이것을 증명할 가장 중요한 문자이고, ‘乃前至城下’라고 한 이상은 패수(浿水)와 왕험성(王險城)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음을 명확히 알 수 있으며, 패수(浿水) 압록강설학설의 불밀착(不密着)은 이것에도 존재한다.
쪽수▶P126-4이상의 사실 중에 나타난 浿水가 모두 國都 王險城과의 관계로부터 지금의 청천강임을 한층 의심할 여지가 없다. 王險城은 󰡔한서󰡕 지리지 臣瓚의 注에 “在樂浪郡浿水之東”라고 보이고 있고, 이것이 지금의 평양 근처임은 조선 및 支那 古來의 所說의 대부분이 일치하는 바인데(󰡔三國史記󰡕 高句麗紀 東川王 21年條에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라고 하는 것은-王險이 仙人의 이름으로 변화한 것은 마치 같은 평양의 乙蜜이라는 지명이 선인화되어 을밀선인 등의 칭호가 있는 것과 같다- 고구려 이래의 所傳인 듯하고, 󰡔史記正義󰡕 所引의 󰡔括地志󰡕(唐太宗 貞觀十六年 魏王泰 所上)에 “高麗(○高句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也”라고 하는 것은 支那 古來의 소전인 듯하다), 余는 다시 상술의 󰡔사기󰡕 기사를 통해 한층 그러함을 확인하려고 한다. 즉 상기의 사실로 알 수 있듯이 王險城을 목표로 한 漢의 육해군의 진로가-하나는 요동으로부터 패수를 건너 城을 치려고 하고, 하나는 해로로 列水를 거슬러 올라가 城을 공격하려고 했다- 마치 후대 隋의 육해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향해 전진한 그 경로와 다른 곳이 없었다는 점, 이것이 그 하나이다. 또한 위의 인용문에서 보았다시피 마침내 漢軍이 王險城을 포위함에 이르러서는 浿水를 건너 온 좌장군(육군)은 특히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고, 다시 列水를 거슬러 왔다. 누선군(해군)은 특히 城 남쪽에 거하고, 서북남 삼면으로부터 성을 공격▶P127-1했다고 하는 것, 이것이 다른 하나로 王險城의 위치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부여해 준 기사라고 해석된다. 이에 있어서 王險城은 지금의 평양을 빼놓고는 이것에 비정할 장소가 없다. 성을 둘러싸는데 서북남 삼면만 했다는 것은 역시 성의 동쪽은 대동강에 직면하고 있어 손발을 뻗칠 만한 여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만약 평양의 대안인 土城里와 같은 방면으로 비정해 보면 그 동쪽을 버리고 西北南 삼면으로부터만 이것을 포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余가 󰡔眞番郡考󰡕를 썼을 때부터 주장해 온 것이지만, 先儒 중에는 이러한 중요한 문자를 간과하였기 때문에 王險城의 위치를 때때로 당치도 않은 곳에 비정한 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 王險城이 지금의 평양이 다름없다고 한다면, 浿水는 자연히 평양의 북쪽인 淸川江에 비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至城下”의 󰡔사기󰡕의 文面은, 틀림없이 이것을 증명할 가장 중요한 문자이고, ‘乃前至城下’라고 한 이상은 浿水와 王險城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음을 명확히 알 수 있으며, 浿水 鴨綠江說의 不密着은 이것에도 존재한다.
청천강공간은 즉 고구려시대의 살수(薩水)로, 수원이 낭림산(狼林山)에서 발하고, 서남쪽으로 달려가 구룡강(九龍江)을 품고, 안주공간의 북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가는 지금의 평안남북도공간를 나누는 자연적 정치적 경계이다. 강의 길이는 일본의 이수(里數)로 50리에 지나지 않지만, 하류의 강폭은 약간 넓고, 강의 남쪽에는 묘향산맥이 동서로 달리고 있으며, 강의 북쪽에는 적유산맥(狄踰山脈)을 끼고 저절로 땅의 남북을 구획하는 천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어 이후 강북을 청북(淸北), 강남을 청남(淸南)이라고 부르는 칭호조차 생겨났다. 그렇다면, 패수(浿水)의 국경하(國境河)로서의 면목은(압록강으로 비정하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비정하더라도 충분히 서 있다.
쪽수▶P127-2淸川江은 즉 고구려시대의 薩水로, 수원이 狼林山에서 발하고, 서남쪽으로 달려가 九龍江을 품고, 安州의 북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가는 지금의 평안남북도를 나누는 자연적 정치적 경계이다. 강의 길이는 일본의 里數로 50리에 지나지 않지만, 하류의 강폭은 약간 넓고, 강의 남쪽에는 묘향산맥이 동서로 달리고 있으며, 강의 북쪽에는 狄踰山脈을 끼고 저절로 땅의 남북을 구획하는 천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어 이후 강북을 淸北, 강남을 淸南이라고 부르는 칭호조차 생겨났다. 그렇다면, 浿水의 國境河로서의 면목은(압록강으로 비정하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비정하더라도 충분히 서 있다.
한서서적 지리지, 낙랑군(樂浪郡) 패수현조(浿水縣條)에 의하면, “水(○浿水)西至增地入海, 莾曰樂鮮亭”라고 보이고, 패수(浿水)는 패수현(浿水縣)으로부터 서류(西流)하여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증지현은 말할 것도 없이 낙랑군의 일현(一縣)으로 패수 하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의 안주군(安州郡) 일대의 땅임은 거의 의심할 수 없고, 그리고 패수현은 이것보다 동북쪽에 위치하였으며, 뒤에 언급할 감인(闞駰)의 **십삼지(十三志)**에도 “浿水縣在樂浪東北”라고 하기 때문에, 지금의 청천강공간 상류 혹은 중류가 아니면 안 되지만, 그것이 왕망 시대에는-낙랑군(樂浪郡)이 낙선군(樂鮮郡)으로 바뀌었을 때-낙선정(樂鮮亭)으로 개칭되었을 정도이기 때문에(아마 패수현(浿水縣)은 요동(遼東) 낙랑(樂浪) 사이를 통하는 요로(要路) 중의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에) 설마 상류와 같은 편벽한 곳은 아닌 듯하고, 따라서 여(余)는 이것을 그 중류인 영변군(寧邊郡) 근처로 비정함에 주저하지 않는다. 영변(寧邊)은 청천강의 본 유역과 그 지류인 구룡강(九龍江) 유역의 사이에 개재하는 고래로부터의 명군(名郡)으로, 특히 고려시대(성종(成宗) 14년)에는 방어사(防禦使)가 두어지고, 조선시대(태종(太宗) 13년, 또한 세종(世宗) 11년)에는 도호부(都護府) 혹은 대도호부(大都護府)로까지 올라간 중진(重鎭)이다. 청천강공간 유역에 있어서 중진(重鎭)으로써는 안주공간가 제일이고, 그 다음이 이 영변공간이었다.
쪽수▶P127-3 󰡔한서󰡕 지리지, 樂浪郡 浿水縣條에 의하면, “水(○浿水)西至增地入海, 莾曰樂鮮亭”라고 보이고, 浿水는 浿水縣으로부터 西▶P128-1流하여 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증지현은 말할 것도 없이 낙랑군의 一縣으로 패수 하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의 安州郡 일대의 땅임은 거의 의심할 수 없고, 그리고 패수현은 이것보다 동북쪽에 위치하였으며, 뒤에 언급할 闞駰의 󰡔十三志󰡕에도 “浿水縣在樂浪東北”라고 하기 때문에, 지금의 청천강 상류 혹은 중류가 아니면 안 되지만, 그것이 왕망시대에는-樂浪郡이 樂鮮郡으로 바뀌었을 때-樂鮮亭으로 개칭되었을 정도이기 때문에(아마 浿水縣은 遼東樂浪 사이를 통하는 要路중의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에) 설마 상류와 같은 偏僻한 곳은 아닌 듯 하고, 따라서 余는 이것을 그 중류인 寧邊郡 근처로 비정함에 주저하지 않는다. 寧邊은 청천강의 本流域과 그 지류인 九龍江流域의 사이에 개재하는 고래로부터의 名郡으로, 특히 고려시대(成宗 14년)에는 防禦使가 두어지고, 조선시대(太宗 13년, 또한 世宗 11년)에는 都護府 혹은 大都護府로까지 올라간 重鎭이다. 청천강유역에 있어서 重鎭으로써는 安州가 第一이고, 그 다음이 이 寧邊이었다.
사기서적 조선전에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라고 하는 패수서군(浿水西軍)은 물론 패수 하류에 있어서 증지(增地)(안주(安州))방면의 조선 방어군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방비가 (하류였던 만큼) 매우 엄중했기 때문에 ‘未能破自前’이었던 듯하고, 또한 하문(下文)에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至城下”라고 하는 패수상군(浿水上軍)은 즉 패수현(浿水縣)(영변(寧邊))에 있어서 방어군을 말한 듯하며, 좌장군은 패수서군(浿水西軍)(안주)을 돌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력을 돌려 패수상군(浿水上軍)(영변)으로 향하게 하고, 마침내 이것을 무찌르고 나아가 왕험성(王險城) 하에 이른 것이다. 증지현(增地縣)을 해안로의 요진(要鎭)이라고 한다면, 패수현(浿水縣)은 내륙로의 중지(重地)라고 해야 한다. 위씨조선의 방비가 패수현 방면에서 조금 약했기 때문에 한군(漢軍)에게 패하였고, 마침내 국도(國都)가 포위되어 드디어 멸망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쪽수▶P128-2 󰡔사기󰡕 조선전에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라고 하는 浿水西軍은 물론 패수 하류에 있어서 增地(安州)방면의 조선 방어군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방비가 (하류였던 만큼)매우 엄중했기 때문에 ‘未能破自前’이었던 듯하고, 또한 下文에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至城下”라고 하는 浿水上軍은 즉 浿水縣(寧邊)에 있어서 방어군을 말한 듯하며, 좌장군은 浿水西軍(안주)을 돌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력을 돌려 浿水上軍(영변)으로 향하게 하고, 마침내 이것을 무찌르고 나아가 王險城下에 이른 것이다. 增地縣을 海岸路의 要鎭이라고 한다면, 浿水縣은 내륙로의 重地라고 해야 한다. 위씨조선의 방비가 패수현 방면에서 조금 약▶P129-1했기 때문에 漢軍에게 패하였고, 마침내 國都가 포위되어 드디어 멸망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본문6: (6)


이 한대(漢代)의 패수(浿水)는 낙랑군의 동북(東北)으로부터 나와, 서류(西流)하여 패수군(浿水郡)을 지나고,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국경하(國境河) 혹은 군계하(郡界河)로, 지금의 청천강공간이 그것에 해당 되어야 함은 이상 서술한 점에서 거의 의심을 품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한(漢)의 상흠인물의 저(著)라고 말하는수경서적의 패수조(浿水條)에는
쪽수▶P129-2이 漢代의 浿水는 낙랑군의 東北으로부터 나와, 西流하여 浿水郡을 지나고, 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國境河 혹은 郡界河로, 지금의 청천강이 그것에 해당되어야 함은 以上 서술한 점에서 거의 의심을 품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漢의 桑欽의 著라고 말하는 󰡔水經󰡕의 浿水條에는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於臨浿縣, 東入于海
쪽수▶P129-3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於臨浿縣, 東入于海
라고 하고, 후한(後漢) 허신인물설문서적에도
쪽수▶P129-4라고 하고, 後漢 許愼의 󰡔說文󰡕에도
浿水出樂浪鏤方東入于海, 从水貝聲, 一曰出浿水縣
쪽수▶P129-5浿水出樂浪鏤方東入于海, 从水貝聲, 一曰出浿水縣
이라고 하고 있다. 설문서적중에는 때때로 상흠(桑欽)의 설을 인용한 곳이 있기 때문에 위 설문서적의 처음 일구(一句)는 이 수경서적에 의거한 것이고, 끝의 일구(一句)는 아마 한지(漢志)(한서서적**지리지(地理志))이든가 혹은 한지(漢志)와 같은 계통의 자료에 의거한 것일 것이지만, 수경서적의 설에는 이중의 의난점(疑難點)을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수류(水流)의 방향에 관한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수원지(水源地)에 관한 의문이다. 전자에 관해서는 이미 북위(北魏)의 역도원(酈道元)으로부터 의심이 일었고, 그는 그 (수경서적) 주(注)에서 “昔燕人衛滿自浿水而至朝鮮...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라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러하고, ‘東入于海’는 패수(浿水)에는 요령부득의 구절이다. 우리 근세의 정다산(丁茶山)(약용(若鏞))과 같은 이는 그의 「패수변(浿水辨)」11)에서 수경서적본문에 착오가 없음을 변론하고, 그 구두를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 過于臨浿縣東, 入于海”라고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수경서적의 문례(文例) 상, 과연 모두 이렇게 끊어야 할지 문제이다. 왜냐하면 수경서적에 나타나는 지나(支那)의 하천 대부분은 그 하류에 있어서 ‘東入于海’, ‘東北入于海’, ‘東南入于海’, 또는 ‘南入于海’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산의 구두는 수경서적의 문례(文例)로 보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면치 못한다. 저자의 고의인지 부주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경서적에 패수(浿水)를 ‘東入于海’라고 한 것은 그 문례(文例)에는 일치하더라도 착오임에 틀림없다. 착오는 착오로써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착오를 무리하게 설명하면 곡변(曲辨)이 된다.
쪽수▶P129-6이라고 하고 있다. 󰡔說文󰡕 중에는 때때로 桑欽의 說을 인용한 곳이 있기 때문에 위 󰡔說文󰡕의 처음 一句는 이 󰡔水經󰡕에 의거한 것이고, 끝의 一句는 아마 漢志(󰡔漢書󰡕地理志)이든가 혹은 漢志와 같은 계통의 자료에 의거한 것일 것이지만, 󰡔水經󰡕의 說에는 二重의 疑難點을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水流의 방향에 관한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水源地에 관한 의문이다. 전자에 관해서는 이미 北魏의 酈道元으로부터 의심이 일었고, 그는 그 (󰡔水經󰡕)注에서 “昔燕人衛滿自浿水而至朝鮮…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라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러하고, ‘東入于海’는 浿水에는 요령부득의 구절이다. 우리 近世의 丁茶山(若鏞)과 같은 이는 원문주11▶그의 「浿水辨」 [10]에서 󰡔水經󰡕 본문에 착오가 없음을 변론하고, 그 句讀를 “浿▶P130-1水出樂浪鏤方縣東南, 過于臨浿縣東, 入于海”라고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水經󰡕의 文例上, 과연 모두 이렇게 끊어야 할지 문제이다. 왜냐하면 󰡔水經󰡕에 나타나는 支那의 하천 대부분은 그 하류에 있어서 ‘東入于海’, ‘東北入于海’, ‘東南入于海’, 또는 ‘南入于海’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산의 구두는 󰡔水經󰡕의 文例로 보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면치 못한다. 저자의 고의인지 부주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水經󰡕에 浿水를 ‘東入于海’라고 한 것은 그 文例에는 일치하더라도 착오임에 틀림없다. 착오는 착오로써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착오를 무리하게 설명하면 曲辨이 된다.
다음으로 의문이라고 할 점은, “浿水出樂浪鏤方縣0”의 구절이다. 누방(鏤方)이라는 낙랑군의 속현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는 물론, **진서(晋書)** 지리지(地理志)(낙랑군조(樂浪郡條))에도 보이는 현명(縣名)으로 낙랑군의 멸망 무렵까지 존속해 있었던 것 같고, 패수(浿水) 내지 그 이남의 땅이 고구려에게 빼앗겨 낙랑(樂浪)의 패수현(浿水縣), 증지현(增地縣). im邯縣(?) 및 점제현(黏蟬縣)과 같은 열수(列水) 이북의 제현(諸縣)이 모두 없어진 뒤에도, 누방현(鏤方縣)은 다른 조선(朝鮮), 둔유(屯有), 혼미(渾彌), 수성(遂城), 사망(駟望)의 제현(諸縣)(열수(列水) 이남 이동에 있었던 것인 듯하다)과 함께 여전히 의연하게 그 이름을 보전하고 있었던 점12)에서 보면, 그것은 패수의 상류 방면과 같이 먼 동북 땅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곽씨의 **수경주(水經注)**에 인용된 감인(闞駰)의 십삼지서적에는 명확히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누방현(鏤方縣)은 패수 유역의 땅에 있지 않고, 오히려 열수의 동쪽 지류역(支流域)(삼등강(三登江) 유역?) 땅에 위치하였던 듯하다. 여(余)는 이 현을 지금의 성천군(成川郡) 내지 양덕군(陽德郡) 근처로 예상하지만, 그것은 어쨌든 낙랑군의 동북쪽인 패수현(浿水縣)으로부터 서류(西流)하는 패수(浿水)를 그 군치(郡治)의 동쪽인 누방현(鏤方縣)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수경서적의 설에는 아무리 요령을 얻으려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허신인물수경서적의 이 설에는 다소간의 의심스러움이 있다고 보이고, ‘一曰出浿水縣’의 일설(一說)을 부가했다). 그러면 수경서적의 저자는 어째서 이러한 요령 부득이함을 범했던 것일까. 오류에도 무언가 그가 의거한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 대부분은 그의 조선 지리에 관한 지식의 빈약, 아니 빈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무하였음에 원인하였을 것이지만, 또한 어떤 오문(誤聞), 오견(誤見), 오사(誤寫)에 의해 그 열수(列水)의 한 원류지(源流地)인 누방현(鏤方縣)(양덕(陽德) 성천(成川) 등지)을 패수의 발원지로 하고, 게다가 그것을 황해로 동주(東注)하는 지나(支那)의 하천 흐름 방식에 ‘東入于海’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상상된다. 수경서적에는 열수(列水)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대요수(大遼水)나 소요수(小遼水)라는 요동(遼東) 방면의 하천과 또는 낙랑군의 패수까지 넣고 있으면서 묘하게도 (낙랑군 안을 관류하는) 열수(列水)라는 대하천은 싣고 있지 않았다(염난수(鹽難水)와 마자수(馬訾水)는 저자 시대에 그 중간지대에 이미 고구려국이 흥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략한 것일 것이다). 열수(列水)가 패수(浿水) 보다도 대하천임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명칭부터 말하면, 패수 쪽이 열수보다도 한층 널리 알려져 있었고, 특히 패수는 사기서적 조선전에 (국경하(國境河)로서) 자주 보이는 명하(名河)였기 때문에 당시 지나(支那) 내지의 인사에게는 그것에 주의가 많이 쏠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경서적에서는 조선의 하천으로써 특히 패수(浿水)만을 넣고, 열수(列水)나 대수(帶水)는 모두 생략하게 되었던 것일 것이다. 허신인물설문서적에도 열수(列水) 대수(帶水)는 보이지 않는데, 이유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명대(名大)의 패수(浿水)가 실대(實大)의 열수(列水)를 압도하게 된 것은 이미 수경서적설문서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쪽수▶P130-2 다음으로 의문이라고 할 점은, “浿水出樂浪鏤方縣0”의 구절이다. 鏤方이라는 낙랑군의 속현은, 󰡔漢書󰡕 地理志․󰡔後漢書󰡕 郡國志에는 물론, 󰡔晋書󰡕 地理志(樂浪郡條)에도 보이는 縣名으로 낙랑군의 멸망 무렵까지 존속해 있었던 것 같고, 浿水 내지 그 이남의 땅이 고구려에게 빼앗겨 樂浪의 浿水縣․增地縣․邯縣 및 黏蟬縣과 같은 列水以北의 諸縣이 모두 없어진 뒤에도, 鏤方縣은 다른 朝鮮․屯有․渾彌․遂城․駟望의 諸縣(列水 以南 以東에 있었던 것인 듯하다)과 함께 여전히 의연하게 원문주12▶ 그 이름을 보전하고 있었던 점 [11] 에서 보면, 그것은 패수의 상류 방면과 같이 먼 동북 땅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郭氏의 󰡔水經注󰡕에 인용된 闞駰의 󰡔十三志󰡕에는 명확히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鏤方縣은 패수유역의 땅에 있지 않고, 오히려 열수의 동쪽 支流域(三登江流域?) 땅에 위치하였던 듯하다. 余는 이 현을 지금의 成川郡 내지 陽德郡 근처로 예상하지만, 그것은 어쨌든 낙랑군의 동북쪽인 浿水縣으로부터 西流하는 浿水를 그 郡治의 동쪽인 鏤方縣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水經󰡕의 說에는 아무리 요령▶P131-1을 얻으려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許愼도 󰡔水經󰡕의 이 설에는 다소간의 의심스러움이 있다고 보이고, ‘一曰出浿水縣’의 一說을 부가했다). 그러면 󰡔水經󰡕의 저자는 어째서 이러한 요령 부득이함을 범했던 것일까. 오류에도 무언가 그가 의거한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 대부분은 그의 조선 지리에 관한 지식의 貧弱, 아니 貧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무하였음에 원인하였을 것이지만, 또한 어떤 誤聞 誤見 誤寫에 의해 그 列水의 한 源流地인 鏤方縣(陽德 成川 등지)을 패수의 발원지로 하고, 게다가 그것을 황해로 東注하는 支那의 하천 흐름방식에 ‘東入于海’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想像된다. 󰡔水經󰡕에는 列水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大遼水나 小遼水라는 遼東 방면의 하천과 또는 낙랑군의 패수까지 넣고 있으면서 묘하게도 (낙랑군 안을 貫流하는)列水라는 대하천은 싣고 있지 않았다(鹽難水와 馬訾水는 著者 時代에 그 중간지대에 이미 고구려국이 흥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략한 것일 것이다). 列水가 浿水보다도 대하천임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명칭부터 말하면, 패수 쪽이 열수보다도 한층 널리 알려져 있었고, 특히 패수는 󰡔사기󰡕 조선전에 (國境河로서)자주 보이는 名河였기 때문에 당시 支那 內地의 人士에게는 그것에 주의가 많이 쏠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水經󰡕에서는 조선의 하천으로써 특히 浿水만을 넣고, 列水나 帶水는 모두 생략하게 되었던 것일 것이다. 許氏의 󰡔說文󰡕에도 列水 帶水는 보이지 않는데, 이유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名大의 浿水가 實大의 列水를 압도하게 된 것은 이미 󰡔水經󰡕 및 󰡔說文󰡕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수경서적과 같이 권위 있는 지리서에 저명한 패수(浿水)에 대해 그러한 엉터리 설이 쓰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이에 주의를 기울인 학자가 나온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북위의 역도원인물과 같은 이는 특히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이 그것에 빈틈없이 주시하였고, 상술한 바와 같은 의문을 발한 것이다. 역도원인물는 그 해석에 고심하였고, 마침내 이것을 고구려인 사자(使者)에게 질문해 보았다고 한다. 그의 **수경주(水經注)**에
쪽수▶P129-6그러나 󰡔水經󰡕과 같이 권위 있는 지리서에 저명한 浿水에 대해 그러한 엉터리 說이 쓰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이에 주의를 기울인 학자가 나온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북위의 酈道元과 같은 이는 특히 󰡔水經注󰡕를 저술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이 그것에 빈틈없이 주시▶P132-1하였고, 상술한 바와 같은 의문을 발한 것이다. 酈氏는 그 해석에 고심하였고, 마침내 이것을 고구려인 使者에게 질문해 보았다고 한다. 그의 󰡔水經注󰡕에
余訪蕃使(○高句麗人 使者), 言城(○平壤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卽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 以朝鮮爲遠, 循遼東故塞, 至浿水爲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盖經, 誤證也
쪽수▶P132-2余訪蕃使(○高句麗人 使者), 言城(○平壤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卽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 以朝鮮爲遠, 循遼東故塞, 至浿水爲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盖經, 誤證也
라고 하는 것이 즉 그것이다. 고구려 사자의 대답은 국도(國都)가 패수(浿水)의 북안(北岸)에 있고, 그 수(水)는 그곳으로부터 서류(西流)하여 고(故) 낙랑군치(樂浪郡治)였던 조선현(朝鮮縣)의 땅을 지나, 다시 서북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역도원인물는 사자의 말을 믿고, 한서서적 지리지와 사기서적조선전을 대조하여 마침내 조선현지(朝鮮縣址)의 북쪽을 흐르는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열수(列水))이 패수(浿水)임이 틀림없고, 수경서적의 본문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역씨설(酈氏說)의 결론(패수(浿水) 대동강설학설)은 별문제로 하고, 그의 연구 방법과 태도는 매우 과학적이고 또한 신중하다고 생각된다. 처음 수경서적의 본문에 대하여 의문을 발하고, 다음으로 설문서적, 십삼지서적 등의 서적에 의해 한층 의문점이 증가하였고, 아무리 하여도 해석이 안 되었기 때문에 끝에는 자국에 사신으로 온 고구려인에게 이것을 질문하였으며, 더욱이 사한(史漢)의 기사를 고려하여 결론을 내린 그의 신중한 태도에 대해서는 참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역도원인물의 결론은 여(余)의 그것과는 서로 다르지만, 그로 인해 역도원인물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그리고 탐구욕이 풍부한 학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인(吾人)은 역씨설(酈氏說)의 기초를 이루는 고구려 사자의 말을 단순히 그 사람의 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의 설로써 책임을 동사자(同使者)에게 돌려야 하는가라는 것에 여(余)는 또한 그렇게 간단히 처리하고 싶지도 않다. 고구려 사자의 패수설(대동강설학설)은 오히려 당시 그 나라의 지식 계급간에 행해져 있던 통설로 생각된다. 즉 당시 고구려의 문인 학자 사이에는 지금의 대동강(열수)을 패수라고 생각하고, 보통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쓰기도 했던 것이며 그 사자도 또한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마치 우리 근세의 문인들이 국도(國都) 앞을 흐르는 한강을 옛날의 열수(列水)라고 생각하고, 시문담화(時文談話) 속에서 태연히 그 명칭을 사용했던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대동강에 대한 고구려국인 일반의 통칭(오히려 속칭)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물론 구래(舊來) 대로의 칭호로 열수(列水)나 혹은 그것과 가까운 사음(寫音)을 사용했을 것이다. 대동강 하구에 있어서 지금의 은율군(殷栗郡)을 고구려시대에는 율구(栗口)(즉 열구(列口)) 또는 율천(栗川)이라고 부른 적이 있기 때문에 당시 대동강의 속칭은 역시 율수(栗水)나 율천(栗川)으로 불렸을 것이다. 율수(栗水), 율천(栗川)이야말로 열수(列水)이고, 또한 열수야말로 한대(漢代) 이후부터 불리어 온 구칭(舊稱)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 고구려인에게는 (지식계급이든 아니든 불문하고) 열수(列水)에 관한 사상(史上)의 지식은 패수(浿水)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당히 빈약, 아니 오히려 전무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열수는 패수(浿水) 정도로 두드러지게 그 이름을 사상(史上)에 나타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나(支那)의 독서인 간에게도 자주 망각된 수명(水名)이 되었다. 고구려인은 평소, 그 이름(열수)을 부르고 있었으나 그것이 한대(漢代) 이전부터의 사상(史上)의 구명(舊名)임은 알지 못하고, 게다가 문인 사이에서는 한초 이래 국경하(國境河)로서 사상(史上)에 저명하였던 패수를 항상 이 대하(大河)(낙랑열수(樂浪列水))에 비정하였던 것은 아닐까. 고구려 사자가 역도원인물과 서로 접촉한 연대는 본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세(492~519)에 해당한 듯하고(이 왕의 시대에는 거의 연년(連年) 사자를 위(魏)로 보내고 있고, 역도원인물도 또한 그즈음에 해당하는 위(魏) 효문제(孝文帝), 선무제(宣武帝)에게 역사(歷仕)했던 인물이다), 당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지(427) 이미 칠팔십년이 지났고, 또한 낙랑대방이
쪽수▶P132-3라고 하는 것이 즉 그것이다. 고구려 사자의 대답은 國都가 浿水의 北岸에 있고, 그 水는 그곳으로부터 西流하여 故樂浪郡治였던 朝鮮縣의 땅을 지나, 다시 西北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酈氏는 사자의 말을 믿고, 漢志와 󰡔사기󰡕 조선전을 대조하여 마침내 朝鮮縣址의 북쪽을 흐르는 지금의 大同江(列水)이 浿水임이 틀림없고, 󰡔水經󰡕의 본문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酈氏說의 결론(浿水 大同江說)은 별문제로 하고, 그의 연구 방법과 태도는 매우 과학적이고 또한 신중하다고 생각된다. 처음 󰡔수경󰡕의 본문에 대하여 의문을 발하고, 다음으로 󰡔說文󰡕․󰡔十三志󰡕 등의 서적에 의해 한층 의문점이 증가하였고, 아무리 하여도 해석이 안 되었기 때문에 끝에는 自國에 사신으로 온 고구려인에게 이것을 질문하였으며, 더욱이 史漢의 기사를 고려하여 결론을 내린 그의 신중한 태도에 대해서는 참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酈氏의 결론은 余의 그것과는 서로 다르지만, 그로 인해 酈氏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그리고 탐구욕이 풍부한 학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吾人은 酈氏說의 기초를 이루는 고구려 사자의 말을 단순히 그 사람의 그 때 기분 내키는 대로의 說로써 책임을 同使者에게 돌려야 하는가라는 것에 余는 또한 그렇게 간단히 처리하고 싶지도 않다. 고구려 사자의 패수설(대동강설)은 오히려 당시 그 나라의 지식계급간에 행해져 있던 통설로 ▶P133생각된다. 즉 당시 고구려의 문인 학자 사이에는 지금의 대동강(열수)을 패수라고 생각하고, 보통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쓰기도 했던 것이며 그 사자도 또한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마치 우리 근세의 문인들이 國都 앞을 흐르는 한강을 옛날의 列水라고 생각하고, 時文談話 속에서 태연히 그 명칭을 사용했던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대동강에 대한 고구려국인 일반의 통칭(오히려 속칭)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물론 舊來 대로의 칭호로 列水나 혹은 그것과 가까운 寫音을 사용했을 것이다. 대동강 하구에 있어서 지금의 殷栗郡을 고구려시대에는 栗口(즉 列口) 또는 栗川이라고 부른 적이 있기 때문에 당시 대동강의 속칭은 역시 栗水나 栗川으로 불렸을 것이다. 栗水․栗川이야말로 列水이고, 또한 열수야말로 漢代以後부터 불리어 온 舊稱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 고구려인에게는(지식계급이든 아니든 불문하고) 列水에 관한 史上의 지식은 浿水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당히 빈약, 아니 오히려 전무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열수는 浿水 정도로 두드러지게 그 이름을 史上에 나타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支那의 讀書人間에게도 자주 망각된 水名이 되었다. 고구려인은 평소, 그 이름(열수)을 부르고 있었으나 그것이 漢代 以前부터의 史上의 舊名임은 알지 못하고, 게다가 문인 사이에서는 한초이래 國境河로서 史上에 저명하였던 패수를 항상 이 大河(樂浪列水)에 비정하였던 것은 아닐까. 고구려 사자가 역도원과 서로 접촉한 연대는 본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고구려 文咨王世(492~519)에 해당한 듯하고(이 왕의 시대에는 거의 連年 사자를 魏로 보내고 있고, 酈氏도 또한 그 즈음에 해당하는 魏 孝文帝․宣武帝에게 歷仕했던 인물이다), 당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지(427) 이미 칠팔십년이 지났고, 또한 낙랑대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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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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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지(313~314) 약 2세기가 지나 있다. 패수 유역을 빼앗긴지(늦어도 후한말 삼국 초에는 고구려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이미 긴 세월이 지났다. 고구려인은 패수 유역을 소유할 때부터 이미 그 수명(水名)을 (자국식으로) 고쳐서 살수(薩水)라고 칭하였다. ‘살(薩)’이 고구려어에서 청(淸)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의 사음(寫音)이라는 점은 그 하천의 이름이 나중에 청천강(淸川江)으로 개칭되었던 것과 또한 고려시대의 청주목(淸州牧)의 속현이었던 청천현(淸川縣)의 고명(古名)이 역시 살매(薩買)였다는 점에서 이것을 증명할 수 있다(그렇다면 패수(浿水)의 패(浿)도 고조선어로 청(淸)이나 청(靑)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 옮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지만-실제로 현재 청(靑)이라는 말에 ‘푸룬’ ‘푸룻’(Purun. Purut) 또는 ‘파란’ ‘파랏’(Paran. Parat)라는 말이 있고, 패(浿)의 음과 매우 흡사하며, 또한 벽란도(碧瀾渡)(예성강(禮成江))의 구명(舊名)에도 패하(浿河), 패강(浿江)의 칭(稱)이 있었기 때문에 자못 그럴듯하게 생각되지만, 그러한 언어적 고증에는 신중을 요하기 때문에 급히 단정하고 싶지 않고, 다양한 고어를 조사한 뒤가 아니면 부족하기 때문에 후고(後考)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쪽수▶P134-2칠팔십년이 지났고, 또한 낙랑대방이 멸망한지(313~314) 약 2세기가 지나 있다. 패수유역을 빼앗긴지(늦어도 후한말 삼국초에는 고구려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이미 긴 세월이 지났다. 고구려인은 패수유역을 소유할 때부터 이미 그 水名을(자국식으로) 고쳐서 薩水라고 칭하였다. ‘薩’이 高句麗語에서 淸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의 寫音이라는 점은 그 하천의 이름이 나중에 淸川江으로 개칭되었던 것과 또한 고려시대의 淸州牧의 속현이었던 淸川縣의 古名이 역시 薩買였다는 점에서 이것을 증명할 수 있다(그렇다면 浿水의 浿도 고조선어로 淸이나 靑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 옮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P135-1-실제로 현재 靑이라는 말에 ‘푸룬’ ‘푸룻’(Purun. Purut) 또는 ‘파란’ ‘파랏’(Paran. Parat)라는 말이 있고, 浿의 음과 매우 흡사하며, 또한 碧瀾渡(禮成江)의 舊名에도 浿河 浿江의 稱이 있었기 때문에 자못 그럴듯하게 생각되지만, 그러한 언어적 고증에는 신중을 요하기 때문에 급히 단정하고 싶지 않고, 다양한 고어를 조사한 뒤가 아니면 부족하기 때문에 後考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이 패수가 그 이름을 고쳐 또한 소유주를 바꿔 긴 연월을 경과한 사이에 그 위치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독서인들은 사상(史上)에서 기억한 패수(浿水)를 대하(大河)처럼 생각하고, 마침내 그 국도(國都)(낙랑군의 중심 지역) 아래를 흐르는 지금의 대동강에 이 이름을 연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패수 대동강설학설은 후기 고구려인에게서 시작되고, 그것이역도원인물을 비롯한 지나(支那)의 학자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수당시대에 이르러서는 내외를 통해 일반적으로 대동강을 부르는 본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패수의 이름이 열수의 그것을 대신한 것으로 즉 열수의 이름이 패수의 그것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패하(浿河), 패강(浿江)의 이름은 또한 지금의 예성강(벽란도)을 부르는 호칭이 된 적도 있지만, 어느 것도 한대(漢代)의 패수(浿水)와는 교섭이 없다. 한대(漢代)의 패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지금의 청천강이 아니면 안 됨을 거듭 말해 둔다.학설
쪽수▶P135-2이 패수가 그 이름을 고쳐 또한 소유주를 바꿔 긴 年月을 경과한 사이에 그 위치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독서인들은 史上에서 기억한 浿水를 大河처럼 생각하고, 마침내 그 國都(낙랑군의 중심지역) 아래를 흐르는 지금의 대동강에 이 이름을 연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패수 대동강설은 후기 고구려인에게서 시작되고, 그것이 酈氏을 비롯한 支那의 학자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수당시대에 이르러서는 내외를 통해 일반적으로 대동강을 부르는 本名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패수의 이름이 열수의 그것을 대신한 것으로 즉 열수의 이름이 패수의 그것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浿河 浿江의 이름은 또한 지금의 예성강(벽란도)을 부르는 호칭이 된 적도 있지만, 어느 것도 漢代의 浿水와는 交涉이 없다. 漢代의 패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지금의 청천강이 아니면 안 됨을 거듭 말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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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秥蟬縣 古碑 발견의 전말 및 비문에 관해서는 昭和 2년(1927) 3월 朝鮮總督府 발행의 古蹟調査特別報告第4 冊󰡔樂浪郡時代の遺蹟󰡕 本文을 참고하길 바란다.
  2. 京城帝國大學 法文學會 第2部 論文集 朝鮮支那文化の研究.
  3. 󰡔史學雜誌󰡕 第40編 第5號.
  4. 진번의 위치에 대해서는 졸고 「眞番郡考」(註 153과 같음)속에 상세히 이것을 언급해 두었다.
  5. 󰡔東國輿地勝覽󰡕(卷之54) 寧邊府 山川條.
  6. 「周代の戎狄に就いて」(󰡔東洋學報󰡕 第14卷 第2號).
  7. 「山海經の倭と蓋國に就いて」(雜誌 󰡔朝鮮󰡕 第212號).
  8. 同上.
  9. 󰡔史學雜誌󰡕 第41編 第4號.
  10. 󰡔我邦疆域考󰡕.
  11. 󰡔晋書󰡕 地理志 樂浪郡條 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