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대 산신의 성에 취하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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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 朝鮮 古代 山神의 性에 就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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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손진태의 「조선 고대 산신의 성에 취하야」은 『진단학보』 1권(1934.11.)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은 "서언", "민속 상의 산신의 성", "고산명 급 고전설 상의 산신의 성", "결언"으로 구성된다. 손진태는 조선 민속 상의 산신의 성별 변천을 중국 사상과의 관련 안에서 살펴본다. 그는 중국과 조선 고유의 종교 접합으로 산신사상이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사회사적 변화에 따라, 본래 여성이었던 산신이 부부신으로, 나아가 남신이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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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번= {{TagSpage|145-2}}古記錄의 傳하는 바에 依하면, 古代 半島의 住民은 많이 山谷 사이에 散居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朝鮮과 같은 山岳國에 住居하는 種族의 未開時代에 있어 極히 當然한 事象이었다. 그러면 有史以前의 그들은 많은 或은 極히 原始的인 農耕도 하였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主로는 射獵에 依하야 그 經濟生活 營爲하였을 것이다。果然 그러면 그들의 經濟生活에 가장 重要하였던 것은 實로 山岳的 環境이지 아니하였을 수 없다. 山岳은 그들의 衣食住 모든 것의 資料를 供給하는 者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山岳은 그들에 取하야 가장 直接的이요 또 가장 重大한 崇拜 對象이었을 것이다. 山神崇拜思想의 起源을, 山岳 그것이 幽玄神祕한 念을 生起하게 함에 求하고저 하는 從來의 心理說에 對하야 나는 그다지 贊意를 表하지 아니하는者의 한사람이다. 勿論 그러한 神祕觀念에 因하야 崇拜하게 된 境遇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境遇에 이것은 차라리 未開人의 異常事物 崇拜心理로서 解釋할 바이요, 그들이 日常으로 親接하고 또 그 環境中에서 生活하고 있는 普通의 山岳들은 그들에 取하야 決코 異常한 事物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神秘的 存在도 아니었을 것이다. 未開人의 神秘는 恒常 異常性이 거기에 伴隨됨을 {{TagPage|146-1}}要하였으므로써이다. 類달리 높고 幽玄한 山, 風雲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山, 불을 吐하는 山, 害獸 毒虫이 많은 至極히 要險한 山, 異蹟을 가진 山 等等은, 그러한 諸般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되었던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만이 오직 崇拜 對象으로 되었으리라든지, 또는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岳의 崇拜 思想이 漸次 遍典되어 모든 山岳이 崇拜되게 되었으리라든지, 그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서는, 未開時代의 山岳崇拜思想의 起源은, 다른 許多한 境遇의 原始的 宗敎思想의 그것과 같이, 이것을 單一한 理由로 簡單히 그 모든 境遇를 說明하여 버리고저 하는 것은 頗히 無理이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極히 普通의 境遇에 있어, 朝鮮 古代의 未開住民이 가지었던, 그들의 周圍에 있는 何等의 異常性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一般 山岳의 崇拜思想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 一般 山岳이 그들의 經濟生活과 가장 近密하고도 重大한 關係를 가지었던 바에 因하야 生起함이 아니었을가 한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就하여는 여러 가지로 異論도 있을 터이므로, 아직 宿題로 하야 後日의 熟考를 自期하는 바이나, 何如는 山岳 그것은 古代 朝鮮 住民의 生活과 極히 重要한 關係에 있었을 것을 여기에 重言하여 두고저 하는 바이다.  
 
|원문2번= {{TagSpage|145-2}}古記錄의 傳하는 바에 依하면, 古代 半島의 住民은 많이 山谷 사이에 散居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朝鮮과 같은 山岳國에 住居하는 種族의 未開時代에 있어 極히 當然한 事象이었다. 그러면 有史以前의 그들은 많은 或은 極히 原始的인 農耕도 하였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主로는 射獵에 依하야 그 經濟生活 營爲하였을 것이다。果然 그러면 그들의 經濟生活에 가장 重要하였던 것은 實로 山岳的 環境이지 아니하였을 수 없다. 山岳은 그들의 衣食住 모든 것의 資料를 供給하는 者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山岳은 그들에 取하야 가장 直接的이요 또 가장 重大한 崇拜 對象이었을 것이다. 山神崇拜思想의 起源을, 山岳 그것이 幽玄神祕한 念을 生起하게 함에 求하고저 하는 從來의 心理說에 對하야 나는 그다지 贊意를 表하지 아니하는者의 한사람이다. 勿論 그러한 神祕觀念에 因하야 崇拜하게 된 境遇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境遇에 이것은 차라리 未開人의 異常事物 崇拜心理로서 解釋할 바이요, 그들이 日常으로 親接하고 또 그 環境中에서 生活하고 있는 普通의 山岳들은 그들에 取하야 決코 異常한 事物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神秘的 存在도 아니었을 것이다. 未開人의 神秘는 恒常 異常性이 거기에 伴隨됨을 {{TagPage|146-1}}要하였으므로써이다. 類달리 높고 幽玄한 山, 風雲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山, 불을 吐하는 山, 害獸 毒虫이 많은 至極히 要險한 山, 異蹟을 가진 山 等等은, 그러한 諸般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되었던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만이 오직 崇拜 對象으로 되었으리라든지, 또는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岳의 崇拜 思想이 漸次 遍典되어 모든 山岳이 崇拜되게 되었으리라든지, 그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서는, 未開時代의 山岳崇拜思想의 起源은, 다른 許多한 境遇의 原始的 宗敎思想의 그것과 같이, 이것을 單一한 理由로 簡單히 그 모든 境遇를 說明하여 버리고저 하는 것은 頗히 無理이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極히 普通의 境遇에 있어, 朝鮮 古代의 未開住民이 가지었던, 그들의 周圍에 있는 何等의 異常性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一般 山岳의 崇拜思想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 一般 山岳이 그들의 經濟生活과 가장 近密하고도 重大한 關係를 가지었던 바에 因하야 生起함이 아니었을가 한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就하여는 여러 가지로 異論도 있을 터이므로, 아직 宿題로 하야 後日의 熟考를 自期하는 바이나, 何如는 山岳 그것은 古代 朝鮮 住民의 生活과 極히 重要한 關係에 있었을 것을 여기에 重言하여 두고저 하는 바이다.  
 
|원문3번= {{TagSpage|146-2}}그러면 朝鮮 古代의 山神 信仰은 果然 어떠하였든가, 記錄의 傳하는 바 없어 지금 그것을 알기는 매우 困難하나, 中古 以後의 諸種 文獻에 散見되는 山神에 關한 短片的 諸記錄에 據하야 多少間 그 古代의 面影을 推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고 그 古代 面影의 하나인 山神의 性에 就하야 考論하고저 하는 것이 이 一論의 主旨이며, 論述의 便宜上 나는 現今 民俗上의 山神의 性으로부터 말하고저 한다.
 
|원문3번= {{TagSpage|146-2}}그러면 朝鮮 古代의 山神 信仰은 果然 어떠하였든가, 記錄의 傳하는 바 없어 지금 그것을 알기는 매우 困難하나, 中古 以後의 諸種 文獻에 散見되는 山神에 關한 短片的 諸記錄에 據하야 多少間 그 古代의 面影을 推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고 그 古代 面影의 하나인 山神의 性에 就하야 考論하고저 하는 것이 이 一論의 主旨이며, 論述의 便宜上 나는 現今 民俗上의 山神의 性으로부터 말하고저 한다.
|원문4번= {{TagSpage|147-1}}現今 民俗上의 山神은 俗으로 山神靈 又는 山神, 山靈 等으로 稱謂되며, 繪畵, 彫刻上에서는 恒常 騎虎한 男性神으로 되어있으며 (畵는 主로 山神祠內 及 巫覡의 神房內에 奉置되어 있으나, 民間의 諸種 祀祠內 及 寺刹內에서 發見하는 境遇도 許多하다.) 普通으로는 白髮의 老人으로 表現되어 있으나, 附圖 第一에 보는 바와 같이 黑髥을 가진 境遇도 없지는 않다. 이 附圖 第一은 The Marquess Cnrzon of Kedleston, In the Diamond Mountains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 XLV. No. 3. Oct. 1924. p.358.)에서 取한 바이나, 筆者의 解題에는‘A buddha carving in a rock niche’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無論 佛像이 아니요, 明白히 山神像인 것은 그 服裝이며, 容貌 及 그 가장 特徵되는 범을 곁에 가진 點 等에 依하야 判然하다. 이 岩凹彫像의 發見 場所에 就하야 筆者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마 金剛山中의 어디일가 생각한다. 이렇게 岩壁에 山神像 彫刻하는 것은 極히 稀罕한 일로 나는 寡聞하야 아직 類를 例見聞하지 못하였다. 附圖 第二는 約十年前 내가 黃州邑 德日山의 山神堂 (黃州의 俗에 或은 이것을 「부근」 堂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부근은 文獻上에는 俗音을 따라 附根이라고도 보이고, 咸은 意味를 含하게 하야 府君이라고도 表現되어 있다) 內의 神畵中에서 그 一部를 撮影한 것으로 中央이 府君 即 附根神이요, 府君의 右에 騎虎한 白髮老人이 山神이다. 府君의 左는 俗에 山神阿只氏라고 하는 山神의 妻이며, 또 그 左의 素服한 婦人像은 府君 阿只氏라고 하였다. 이 外에도 三佛•七星神•藥師佛•應神 等의 神像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山神이 騎虎男神으로 되어있고, 또 或은 虎 그것을 山神이라고 하는 思想은 虎를 山君이라고 하는 中國의 宗敎思想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이것은 虎를 山神{{TagPage|148-1}}이라고 하였던 朝鮮 固有의 宗敎思想의 開展된 것이라고 解釋하는 편이 有理할 줄 안다. 即 「三國志」 濊傳에 「祭虎以爲神」이라고 보이는 것은 今日 騎虎山神과 반듯이 歷史的 關係를 가지었던 까닭이므로써이다. 濊는 今日의 江原道 地方에 居住하였고, 江原道는 近年까지도 범나라이었고, 一般으로 생각되었던 것만치 半島 內의 가장 山岳地方이었으므로 그 地方에 古來로 虎 崇拜가 盛하였을 것은 疑心할 수 없으나, 이것은 濊族에 限한 바 아니요, 半島 全體의 普通的 信仰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또 범은 山神과 떠나서도 그 獰猛한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의 對象이 될 必然性을 가진 動物이며, 또 그것이 山岳에 棲息하는 關係上, 一步를 展하야 山神으로도 崇拜될 可然性도 가진 動物이므로 이것은 虎山神 思想으로서 遺傳되고, 또 他方으로는 山 그것을 山神이라고 생각하던 原始 思想에서 山神을 人格神으로 한 思想이 發達되어 虎山神•人格山神 이 兩者가 合하면서 人格神 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는 오직 山神의 使者인 靈獸로 看做되며, 虎神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 即 山神으로 信仰되어 있는 것이 今日의 現象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朝鮮의 龍神이 龍에 탄 女神(俗稱 아가씨)으로 表現되는 것과 그 軌를 같이하였다. 그리고 後世에 이르러서는 佛敎 及 道敎의 思想과도 關係를 맺게 되었으며 또 社會 經濟生活의 發展에 伴하야 山神信仰思想에도 여러 가지 複雜한 變展을 보게 되었으나, 그러한 問題에는 지금 言及하지 아니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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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4번= {{TagSpage|147}}現今 民俗上의 山神은 俗으로 山神靈 又는 山神, 山靈 等으로 稱謂되며, 繪畵, 彫刻上에서는 恒常 騎虎한 男性神으로 되어있으며 (畵는 主로 山神祠內 及 巫覡의 神房內에 奉置되어 있으나, 民間의 諸種 祀祠內 及 寺刹內에서 發見하는 境遇도 許多하다.) 普通으로는 白髮의 老人으로 表現되어 있으나, 附圖 第一에 보는 바와 같이 黑髥을 가진 境遇도 없지는 않다. 이 附圖 第一은 The Marquess Cnrzon of Kedleston, In the Diamond Mountains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 XLV. No. 3. Oct. 1924. p.358.)에서 取한 바이나, 筆者의 解題에는‘A buddha carving in a rock niche’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無論 佛像이 아니요, 明白히 山神像인 것은 그 服裝이며, 容貌 及 그 가장 特徵되는 범을 곁에 가진 點 等에 依하야 判然하다. 이 岩凹彫像의 發見 場所에 就하야 筆者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마 金剛山中의 어디일가 생각한다. 이렇게 岩壁에 山神像 彫刻하는 것은 極히 稀罕한 일로 나는 寡聞하야 아직 類를 例見聞하지 못하였다. 附圖 第二는 約十年前 내가 黃州邑 德日山의 山神堂 (黃州의 俗에 或은 이것을 「부근」 堂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부근은 文獻上에는 俗音을 따라 附根이라고도 보이고, 咸은 意味를 含하게 하야 府君이라고도 表現되어 있다) 內의 神畵中에서 그 一部를 撮影한 것으로 中央이 府君 即 附根神이요, 府君의 右에 騎虎한 白髮老人이 山神이다. 府君의 左는 俗에 山神阿只氏라고 하는 山神의 妻이며, 또 그 左의 素服한 婦人像은 府君 阿只氏라고 하였다. 이 外에도 三佛•七星神•藥師佛•應神 等의 神像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山神이 騎虎男神으로 되어있고, 또 或은 虎 그것을 山神이라고 하는 思想은 虎를 山君이라고 하는 中國의 宗敎思想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이것은 虎를 山神{{TagPage|148-1}}이라고 하였던 朝鮮 固有의 宗敎思想의 開展된 것이라고 解釋하는 편이 有理할 줄 안다. 即 「三國志」 濊傳에 「祭虎以爲神」이라고 보이는 것은 今日 騎虎山神과 반듯이 歷史的 關係를 가지었던 까닭이므로써이다. 濊는 今日의 江原道 地方에 居住하였고, 江原道는 近年까지도 범나라이었고, 一般으로 생각되었던 것만치 半島 內의 가장 山岳地方이었으므로 그 地方에 古來로 虎 崇拜가 盛하였을 것은 疑心할 수 없으나, 이것은 濊族에 限한 바 아니요, 半島 全體의 普通的 信仰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또 범은 山神과 떠나서도 그 獰猛한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의 對象이 될 必然性을 가진 動物이며, 또 그것이 山岳에 棲息하는 關係上, 一步를 展하야 山神으로도 崇拜될 可然性도 가진 動物이므로 이것은 虎山神 思想으로서 遺傳되고, 또 他方으로는 山 그것을 山神이라고 생각하던 原始 思想에서 山神을 人格神으로 한 思想이 發達되어 虎山神•人格山神 이 兩者가 合하면서 人格神 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는 오직 山神의 使者인 靈獸로 看做되며, 虎神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 即 山神으로 信仰되어 있는 것이 今日의 現象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朝鮮의 龍神이 龍에 탄 女神(俗稱 아가씨)으로 表現되는 것과 그 軌를 같이하였다. 그리고 後世에 이르러서는 佛敎 及 道敎의 思想과도 關係를 맺게 되었으며 또 社會 經濟生活의 發展에 伴하야 山神信仰思想에도 여러 가지 複雜한 變展을 보게 되었으나, 그러한 問題에는 지금 言及하지 아니하려 한다.
|원문5번= {{TagSpage|148-2}}上述한 바와 같이 今日의 山神은 明白히 男性으로 되어있으나 (巫覡은 或 山神마누라라 云云하나, 그들은 男性神에게도 마누라라는 尊稱을 使用하므로, 마누라라는 말만으로서는 그 性을 區別하기 어렵다) 이것이 果然 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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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5번= {{TagSpage|148-2}}上述한 바와 같이 今日의 山神은 明白히 男性으로 되어있으나 (巫覡은 或 山神마누라라 云云하나, 그들은 男性神에게도 마누라라는 尊稱을 使用하므로, 마누라라는 말만으로서는 그 性을 區別하기 어렵다) 이것이 果然 古<br/>{{TagPage|149}}[[파일:손진태_조선 고대 산신-1.jpg|가운데|900px]]<br/>{{TagPage|150}}代 以來 信仰狀態이었는가? 古山名 及 古傳說上으로 考究하면, 古代의 山神은 今日과는 反對로 女性이었던 것을 推察할 수 있다. 먼저 古山名上으로부터 생각하여 보자. 「東國輿地勝覽」을 보면, 그 卷三 漢城府 山川條에 都城의 西에 母岳이란 것이 있어, 李朝의 太宗은 一時 이 母岳下에 卜都한 일이 있었으며, 同書 卷六 廣州牧 山川條에는 州南 三十里에 大母山이 있고, 同卷 十一 楊州牧 古跡條에는 洲西 五里에 大母山城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나온 城名일씨 明白하며, 同卷 十二 江華 都護府 山川條에는 府南 三十里에 大母城山이 있고, 同卷 十四 淸風郡 山川條에는 郡四 十五里에 婦山이 있고, 同卷十六 鎭川縣 古跡條에는 縣東 六里에 大母山城이 있으며, 同卷 十七 公州 山川條에는 州北 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二十  結城縣 祠廟條에는 母山堂이란 것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얻은 神堂의 名稱일 것이며, 同卷  三四 金溝縣 山川條에는 縣東 二十五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沃溝縣 山川條에는 縣北 一里에 母山이 있어 鎭山으로 되어 있으며, 同卷 泰仁縣 山川條에는 縣東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三六 靈光郡 山川條에는 郡南 二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咸平縣 山川條에는 縣北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으며, 同卷 三九 淳昌郡 城郭條에는 郡西 四里에 大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十 順天都護府 山川條에는 富有縣에 母后山이란 것이 있으며, 同卷 四十 同福縣 山川條에도 이 母后山이 보이며, 同卷 四一 平山都護府 古跡條에는 府南 七十里에 慈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三 海州牧 山川條에는 州西 四里에 善女山이란 것이 있고, 同卷 五四 慈山郡 山川條에는 郡西 二十里에 慈母山이 있다. 이렇게 數多한 母岳•大母山•婦山•母岳山•母山•母后山•慈母山 等은 생각하건대 俗名의 意譯일 듯하며, 또는 그 俗名은 어미 山 또는 할미山 等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미 或은 아미{{TagPage|151-1}}라고 하던 名山을 母山•母岳 等으로 意譯하지 않고 그것을 音譯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의 一例는 「東國輿地勝覽」 卷十一 積城縣 古跡條에 阿未城이라고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阿未산의 城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하며, 現今 大邱에 있는 峨嵋山이란 것도 俗名 애미山을 音譯할 時에 唐詩 中에서 有名한 山을 取來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許多한 母山•母岳에 對하야 父山 또는 父岳의 名은 殆無하야 「三國遺事」 卷五 仙桃聖母隨喜佛事의 條에 新羅의 五岳 中에 그 中央이 父岳이요 亦云 公山이란 것이 있을 뿐이나, 이것조차 支那의 五岳思想에서 作出된 것 같고, 民族思想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高麗史」 辛禑列傳 十四年 六月條에 禑가 男山에 올랐다 한 바이 있으나 이것은 極히 例外의 事에 屬할 바이다.
|원문6번= {{TagSpage|149-1}}第一圖 岩凹內의 山神 彫像 (金剛山所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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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6번= {{TagSpage|151-2}}다음에 古傳說을 按하면, 「三國遺事」에는 壇君이 死後에 阿斯達의 山이 되셨으며、同書 卷一 第四 脫解王條에 依하면, 新羅 傳說上의 王 脫解가 東岳神으로 되어있어 「一云, 崩後二十七世文虎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九日辛酉, 夜見夢於太宗, 有老人貌甚盛猛, 日我是脫解也, 拔我骨於䟽川丘, 塑像安於土含山, 王從其言, 故至今國, 祀不絕, 即東岳神也云」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如斯히 男性의 神聖을 山神으로 한 것은 後世의 支配階級의 意識的 企圖가 多分으로 그 中에 包含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民族信仰上의 自然的 所産이라고는 肯定하기 어렵다. 土含山은 新羅 五岳의 一로 東岳에 當하며, 이 岳神을 脫解로 한 것은 決코 民間의 自然的 信仰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고 또 「三國遺事」 卷三 眞慈師條에는 新羅 眞智王代의 일을 記錄한 中에 「山靈變老人出迎日云云」이란 句가 있어, 이것이 果然 六世紀의 說話 그대로인지 아닌지는 疑問이라 할지라도, 如上의 諸 傳說로서 생각하면,{{TagPage|152}}新羅의 盛時로부터 以降 高麗 一統時代에 亘하야 當時의 支配階級 또는 知識階級 사이에 支那 傳來의 父權本位의 思想에 依하야 或은 또 必然的 社會思想에 依하야, 漸次로 山神을 男性으로 하고저 하는 傾向이 있었던 것을 推測할 수 있을가 한다. 그러나 民間信仰 上에서의 山神은 比較的 後世까지도 舊來의 女神思想을 傳守하였던 모양으로 許多한 傳說은 모두 그것을 女神으로 하였으며, 오직 聖한 어떤 女性을 어떤 山에 屬하게 한 것만이 傳說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無論 原始 形態가 아니요, 後世에 있어 偉人崇拜思想과 結附되어서의 所産일 터이나, 어디까지 女山神이라는 思想을 傳守하여 온 것은 이것에 依하야 察知할 수 있다. 지금 그 例를 列擧하면 「三國遺事」 卷一에 依하면, 新羅의 第二 南解王의 妃 雲帝夫人은 雲梯山 聖母로서 高麗末까지 그 神祠가 迎日縣西에 있어 祈旱을 行하였으며, 「東國輿地勝覽」에 依하면, 그 卷二一 慶州府 祠廟條에는 「神母祠, 在鵄述嶺, 神母即朴堤上妻也, 堤上死於倭國, 其妻不勝其慕, 登鵄述嶺, 望日本痛哭而終, 遂爲鵄述嶺神母, 其村人至今祀之」란 것이 있고, 同書 三十 晉州牧 祠廟條에는 「聖母廟, 在智異山天王峰頂, 有聖母像, 其頂有劒痕, 諺云, 倭爲我太祖 所破窮蹙, 以爲天王不助, 不勝其憤, 斫之而去」라는 것이 있고, 이 聖母의 일이 同 卷三一 咸陽郡 祠廟條에서는 「聖母祠,嗣宇二, 一在智異山天王峯上, 一在郡南嚴川里, 高麗李承休帝王龍紀云, 太祖之母威肅王后」라 하야, 高麗 王建太祖의 母后로 되어 있다. 또 同書 卷三十 陜川郡 祠廟條에는 「正見天王詞,在海印寺中, 俗傳大伽倻國王后正見, 死爲山神」이라고 있다. 山神을 天王이라고 하는 所以然에 就하여는 「民俗學」 五卷 十二號 所載 拙文 「朝鮮の累石壇と蒙古の鄂博に就ぃて」 中에 旣述하였으므로 여기에는 省略하나, 如斯히 祠名을 天王祠 (天王은{{TagPage|153}} 佛敎의 四天王에서 나온 모양이다 라 稱謂하면서도 거기에 奉祀되어 있는 神이 실상으로는 聖母로 되어 있는 것은 名稱上에는 비록 佛敎의 影響을 입었으나, 古代 以來의 女山神思想을 傳守하여 온 것이라고 볼 바가 아닌가 한다. 그 所謂 神母 又는 聖母라는 것을 女性 中의 神聖에서 求한 것은 後世에 附會된 事實이요, 그 山의 神은 聖母며 以前부터 存在하였을지 疑心할 수 없으며, 그 古來의 山神에 特히 女性의 神聖을 結附한 所以는 古來의 山神이 女性이었던 것을 말하는 바가 아닐가 한다. 이보다 더욱 興味있는 傳說은 「東國輿地勝覽」 卷 四二 牛峯縣 山川의 條에 引用되어 있는 「編年通錄」 所載의 高麗 傳說이다. 「聖居山, 在縣南六十里, 一名九龍山, …金寬毅編年通錄, 聖骨將軍居扶蘇山右谷, 一日與同里九人, 鷹捕平那山, 會日暮, 就宿岩竇, 有虎當竇口大吼, 十人相謂曰, 虎欲啗我輩, 試投冠, 攬者當之, 遂皆投之, 虎攬聖骨冠, 聖骨出, 欲與虎鬪, 虎忽不見竇崩, 九人皆不得出, 聖骨還報平那郡, 來葬九人, 先祀山神, 其神現曰, 予以寡婦主此山, 幸遇聖骨將軍, 欲與爲夫婦, 共理神政, 請封爲此山大王, 言訖, 與聖骨俱隱不見, 郡人因封聖骨爲大王, 立祠祭之, 以九人同亡, 改山名曰九龍, 云云」이라 하였다. 이 聖居山 傳說에서 特히 우리가 興味를 느끼는 것은 山神이 虎로 化한 點, 山神이 스스로 寡婦라 稱한 點, 及 女山神이 夫神을 얻어 夫婦로 神政을 共理하겠다고 한 點이다. 山神이 虎로도 되는 思想에 就하여는 이미 前述하였다. 寡婦인 山神이 夫神을 얻고저 하였다는 것은 古來의 女山神思想이 漸次 男山神思想으로 遷移하는 過程을 말하는 바이 아닐가 한다. 이 外에도 또 神仙思想의 影響을 받은 數三의 女山神 說話를 引擧할 수 있다. 그 하나는 新羅의 西述聖母 傳說로서, 이것은 高句麗의 聖母神 信仰에 比할 바는 아니지마는 그것은 別問題로 하고, 이 新羅의 聖母神{{TagPage|154}} 傳說이 보이는 最古 記錄은 「三國史記」 卷十二末 史論 中에 金富軾이 自己의 말로 「政和中, 我朝遺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日,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라고 한 이 다. 이에 依하여 보면, 金富軾은 全然 東神聖母란 것을 알지 못하였다. 하물며 仙桃山이란 것은 空想上의 産物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不拘하고 「東國輿地勝覽」 卷二一 慶州府 祠廟條에는 西嶽을 仙桃山에 比當하고, 다시 一步를 進하야 「世傳, 赫居世乃聖母之所誕也」라 하였다. 이 뿐 아니라 「三國遺事」 卷五 仙桃聖母隨喜佛事條에는 벌서 더욱 複雜하게 「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得神仙之術, 歸止海東, 久而不還, 父皇寄書繫足云, 隨鳶所止爲家, 蘇得書放鳶,飛到此山而止, 遂來宅爲地仙, 故名西鳶山, 神母久據玆山, 鎭佑邦國, 靈異甚多, 有國已來, 常 爲三祀之一, 秩在群望之上, …其始到辰韓也, 生聖子爲東國始君, 盖赫居閼英三聖之所自也」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一見하야, 그 大體가 「三國史記」의 記錄을 基礎로 하야 構想된 說話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 說話의 全部가 全然 架空上의 所産이요 民族信仰과는 何等의 因緣도 없겠느냐 하면, 나는 반듯이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宋의 佑神舘內 一堂의 女仙이란 것이 全혀 無限한 思想上의 産物이었다 할지라도, 王襄이 高麗에 來朝하였을 때에 그는 東神聖母란 것을 祭하였다. (三國遺事에는 「大宋國使王襄到我朝, 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라고 明白히 말하였다). 그러면 當時 高麗에 聖母崇拜가 있었던 것은 大略 明白하다. 高麗에 없는 聖母神을 宋使가 일{{TagPage|155}}부러 作出하야 祭하였을 理는 萬無하며, 또 宋使가 佑神館 所祀 仙桃山女神을 何等의 政略으로 特히 東國 始祖의 聖母라고 하여 그것을 祭하였으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면, 「三國遺事」 卷一이 新羅의 始祖 赫居世王을 「西述聖母之所誕也」라고 한 것은 仙桃山 女神의 記錄에 由하야 附會揑造한 바가 아니요, 新羅에 元來로 存在하였던 傳說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新羅는 比較的 母權의 風이 强하게 遺存하였던 나라이었다. 하므로 그 新羅에 母神傳說이 遺傳되어 있었으리라고 볼지라도 決코 無理한 想像이라고는 排斥할 수 없을 것이다. 뿐 아니라, 高句麗에도 聖母信仰이 있었으며, 高麗 太祖의 母后도 그러한 意味에서 崇拜되었었다. 新羅의 그 國母神 傳說이 即 西述聖母 傳說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 나의 意見이다. 果然 그러하면 그 西述聖母는 實로 西述山神이었던 것이다. 述의 音은 鳶의 수리와 類音이므로 西述山은 西鳶山으로도 되고, 또 仙桃山 女神의 傳說 中, 辰韓에 이르러 海東의 始主를 낳았다는 말이 있음에 因하야, 이 女仙 傳說은 容易히 傳來의 西述聖母 傳說과 合致하게 되어 (仙桃山 女仙과 東神聖母를 同一者라고 解釋하는 金富軾의 以來의 說에는 猝然히 同意하기 어렵다) 仙桃山 女仙 即 西述聖母 即 東神聖母라고 說話가 發展되었으며, 다시 一方으로는 仙桃山 即 西述山 (興覽의 西嶽) 으로 되고, 西鳶山의 鳶에서 作出한 것이 鳶의 書信을 傳한 說話가 되어, 前引한 遺事의 說話로 完成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 또 「東國輿地勝覽」 卷十四 忠州牧 山川條에 「連珠峴, 在州南五里, 諺傳連珠女仙, 遊風流山, 或遊是峴, 云云」이란 것이며, 또 同 古跡條에 例 「泡母臺, 在風流山, 高數十丈, 諺傳昔有仙女名薔薇, 自號泡母, 常遊其上, 香滿一洞, 唐明皇聞之, 遣道士迎入宮, 號貞完夫人」이란 것도 固來의 女山神思想이 女仙傳說化한{{TagPage|156}} 것이 아닌가 한다. 또다시 「三國遺事」 券五 朗智乘雲條에 ?良州 阿曲縣의 靈鷲山에 就하야 「傳云山主乃辯才天女」라고 한 것도 佛敎의 神과 바꾸면서도 오히려 古來 固有의 女山神思想을 傳하야 特히 辯才天女를 擇한 것이 아닌가 한다. 辯才天女는 차라리 江河와 關係있는 神이요 山과는 何等의 因緣도 없음에 不拘하고 이것을 擇한 까닭으로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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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7번= {{TagSpage|156-2}}上述한 바를 要컨대 朝鮮 古代의 山神은 古山名 及 古傳說上으로 보아 一般으로 女性神이었던 모양이며, 그 或種의 山에 女性의 偉聖이며 女仙 等을 配한 것은 後世의 發達된 思想일 터이나, 아직 오히려 母權의 遺跡을 그 中에 發見할 수 있으며, 이러한 女神 尊重의 宗敎思想은 이것을 社會學的으로 보더라도 母權 遺風의 아직 遺存하였던 當時의 社會思想과도 矛盾되는 바 없고 極히 當然性을 가지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當初의 山神은 홀로 女神만이 山神이었고 夫婦神임을 必要하지 아니하였을 터이나, 後世에 이르러 父權思想이 發達됨을 따라 女山神에, 夫神이 없지 못할 것을 要請하게 되고, 畢竟은 男神이 主神이 되어, 女神은 단지 山神의 妻란 地位에까지 下落된 것이 今日 우리가 民俗上에서 보는 現象이 아닌가 한다. 宗敎思想이 社會思想에 따라 變遷되는 一例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山神堂 內의 一隅에서 發見되는 俗所謂 山神 아가씨 又는 山神 마누라라고 하는 것이 即 山神의 妻이다. (第三圖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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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1번= 서언──민속 상의 산신의 성──고산명 급 고전설 상의 산신의 성──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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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2번= 고기록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대 반도의 주민은 많이 산곡 사이에 산거(散居)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조선과 같은 산악국에 주거하는 종족의 미개 시대에 있어 극히 당연한 사상(事象)이었다. 그러면 유사 이전의 그들은 많은 혹은 극히 원시적인 농경도 하였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로는 수렵에 의하여 그 경제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과연 그러면 그들의 경제생활에 가장 중요하였던 것은 실로 산악적 환경이지 아니하였을 수 없다. 산악은 그들의 의식주 모든 것의 자료를 공급하는 자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산악은 그들에 취하여 가장 직접적이요 또 가장 중대한 숭배 대상이었을 것이다. 산신숭배 사상의 기원을, 산악 그것이 유현신비(幽玄神祕)한 염(念)을 생기하게 함에 구하고자 하는 종래의 심리설에 대하여 나는 그다지 찬의를 표하지 아니하는 자의 한사람이다. 물론 그러한 신비 관념에 인하여 숭배하게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이것은 차라리 미개인의 이상 사물 숭배 심리로서 해석할 바이요, 그들이 일상으로 친접(親接)하고 또 그 환경 중에서 생활하고 있는 보통의 산악들은 그들에 취하야 결코 이상한 사물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신비적 존재도 아니었을 것이다. 미개인의 신비는 항상 이상성이 거기에 반수(伴隨)됨을 요하였음으로써이다. 유달리 높고 유현(幽玄)한 산, 풍운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산, 불을 토하는 산, 해수(害獸) 독충이 많은 지극히 요험(要險)한 산, 이적(異蹟)을 가진 산 등등은, 그러한 제반 이상성에 인하야 숭배되었던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성을 가진 산만이 오직 숭배 대상으로 되었으리라든지, 또는 이러한 이상성을 가진 산악의 숭배 사상이 점차 편전(遍典)되어 모든 산악이 숭배되게 되었으리라든지, 그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서는, 미개 시대의 산악숭배 사상의 기원은, 다른 허다한 경우의 원시적 종교사상의 그것과 같이, 이것을 단일한 이유로 간단히 그 모든 경우를 설명하여 버리고자 하는 것은 파(頗)히 무리이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극히 보통의 경우에 있어, 조선 고대의 미개 주민이 가지었던, 그들의 주위에 있는 하등의 이상성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일반 산악의 숭배사상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 일반 산악이 그들의 경제생활과 가장 근밀하고도 중대한 관계를 가지었던 바에 인하야 생기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취하여는 여러 가지로 이론(異論)도 있을 터이므로, 아직 숙제로 하야 후일의 숙고를 자기(自期)하는 바이나, 하여는 산악 그것은 고대 조선 주민의 생활과 극히 중요한 관계에 있었을 것을 여기에 중언하여 두고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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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3번= 그러면 조선 고대의 산신 신앙은 과연 어떠하였든가, 기록의 전하는 바 없어 지금 그것을 알기는 매우 곤란하나, 중고 이후의 제종(諸種) 문헌에 산견되는 산신에 관한 단편적 제기록에 거(據)하여 다소간 그 고대의 면영을 추측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고 그 고대 면영의 하나인 산신의 성에 취하여 고론(考論)하고자 하는 것이 이 일론(一論)의 주지이며, 논술의 편의상 나는 현금 민속상의 산신의 성으로부터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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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4번= 현금 민속상의 산신은 속으로 산신령 우(又)는 산신, 산령 등으로 칭위되며, 회화, 조각상에서는 항상 기호(騎虎)한 남성신으로 되어있으며 (화는 주로 산신사 내 급 무격(巫覡)의 신방 내에 봉치되어 있으나, 민간의 제종 사사(祀祠) 내 급 사찰 내에서 발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보통으로는 백발의 노인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부도(附圖) 제1에 보는 바와 같이 흑염을 가진 경우도 없지는 않다. 이 부도 제1은 The Marquess Cnrzon of Kedleston, In the Diamond Mountains ({{TagBook|[[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 XLV. No. 3. Oct. 1924. p.358.)에서 取한 바이나, 필자의 해제에는‘A buddha carving in a rock niche’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론 불상이 아니요, 명백히 산신상인 것은 그 복장이며, 용모 급 그 가장 특징 되는 범을 곁에 가진 점 등에 의하여 판연하다. 이 암요(岩凹) 조상의 발견 장소에 취하여 필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마 금강산 중의 어디일까 생각한다. 이렇게 암벽에 산신상 조각하는 것은 극히 희한한 일로 나는 과문하야 아직 유를 예견문(例見聞)하지 못하였다. 부도 제2는 약 10년 전 내가 황주읍 덕일산의 산신당 (황주의 속에 혹은 이것을 「부근」 당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부근은 문헌상에는 속음(俗音)을 따라 부근(附根)이라고도 보이고, 함은 의미를 함(含)하게 하여 부근(府君)이라고도 표현되어 있다) 내의 신화 중에서 그 일부를 촬영한 것으로 중앙이 부군 즉 부근신이요, 부군의 우에 기호(騎虎)한 백발노인이 산신이다. 부군의 좌는 속에 산신아지씨라고 하는 산신의 처이며, 또 그 좌의 소복한 부인상은 부군아지씨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삼불•칠성신•약사불•응신(應神) 등의 신상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산신이 기호(騎虎) 남신으로 되어있고, 또 혹은 호(虎) 그것을 산신이라고 하는 사상은 호(虎)를 산군이라고 하는 중국의 종교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이것은 호(虎)를 산신이라고 하였던 조선 고유의 종교사상이 개전(開展)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유리할 줄 안다. 즉 「{{TagBook|[[삼국지]]}}」 예전(濊傳)에 「제호이위신(祭虎以爲神)」이라고 보이는 것은 금일 기호(騎虎) 산신과 반드시 역사적 관계를 가지었던 까닭이므로써이다. 예(濊)는 금일의 강원도 지방에 거주하였고, 강원도는 근년까지도 범나라이었고, 일반으로 생각되었던 것만치 반도 내의 가장 산악지방이었으므로 그 지방에 고래로 호(虎) 숭배가 성하였을 것은 의심할 수 없으나, 이것은 예족(濊族)에 한한 바 아니요, 반도 전체의 보통적 신앙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또 범은 산신과 떠나서도 그 영맹(獰猛)한 이상성에 인하여 숭배의 대상이 될 필연성을 가진 동물이며, 또 그것이 산악에 서식하는 관계상, 일보를 전하여 산신으로도 숭배될 가연성(可然性)도 가진 동물이므로 이것은 호산신(虎山神) 사상으로서 유전되고, 또 타방으로는 산 그것을 산신이라고 생각하던 원시 사상에서 산신을 인격신으로 한 사상이 발달되어 호산신(虎山神)•인격산신 이 양자가 합하면서 인격신 사상이 우세한 경우에는 호(虎)는 오직 산신의 사자인 영수(靈獸)로 간주되며, 호신(虎神) 사상이 우세한 경우에는 호(虎) 즉 산신으로 신앙되어 있는 것이 금일의 현상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조선의 용신이 용에 탄 여신(속칭 아가씨)으로 표현되는 것과 그 궤를 같이하였다. 그리고 후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급 도교의 사상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또 사회 경제생활의 발전에 반(伴)하여 산신신앙 사상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변전을 보게 되었으나, 그러한 문제에는 지금 언급하지 아니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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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5번=상술한 바와 같이 금일의 산신은 명백히 남성으로 되어있으나 (무격(巫覡)은 혹 산신마누라라 운운하나, 그들은 남성신에게도 마누라라는 존칭을 사용하므로, 마누라라는 말만으로서는 그 성을 구별하기 어렵다) 이것이 과연 고<br/>[[파일:손진태_조선 고대 산신-1.jpg|가운데|900px]]<br/>대 이래 신앙상태이었는가? 고산명 급 고전설 상으로 고구(考究)하면, 고대의 산신은 금일과는 반대로 여성이었던 것을 추찰할 수 있다. 먼저 고산명 상으로부터 생각하여 보자. 「{{TagBook|[[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그 권3 한성부 산천조에 도성의 서(西)에 모악(母岳)이란 것이 있어, 이조의 태종은 일시 이 모악 하에 복도(卜都)한 일이 있었으며, 동서 권6 광주목 산천조에는 주남(州南) 30리에 대모산(大母山)이 있고, 동권11 양주목 고적조에는 주서(洲西) 5리에 대모산성(大母山城)이 있어 이것은 산명에서 나온 성명일씨 명백하며, 동권12 강화 도호부 산천조에는 부남(府南) 30리에 대모산성(大母城山)이 있고, 동권14 청풍군 산천조에는 군서(郡四) 15리에 부산(婦山)이 있고, 동권16 진천현 고적조에는 현동(縣東) 6리에 대모산성(大母山城)이 있으며, 동권17 공주 산천조에는 주북(州北) 10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고, 동권12 결성현 사묘조에는 모산당(母山堂)이란 것이 있어 이것은 산명에서 얻은 신당의 명칭일 것이며, 동권34 금구현 산천조에는 현동(縣東) 25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고, 동권 옥구현 산천조에는 현북(縣北) 1리에 모산(母山)이 있어 진산(鎭山)으로 되어 있으며, 동권 태인현 산천조에는 현동(縣東) 30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고, 동권36 영광군 산천조에는 군남(郡南) 20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고, 동권 함평현 산천조에는 현북(縣北) 30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으며, 동권 삼구 순창군 성곽조에는 군서(郡西) 4리에 대모산성(大母山城)이 있고, 동권40 순천도호부 산천조에는 부유현에 모후산(母后山)이란 것이 있으며, 동권40 동복현 산천조에도 이 모후산(母后山)이 보이며, 동권41 평산도호부 고적조에는 부남(府南) 70리에 자모산성(慈母山城)이 있고, 동권43 해주목 산천조에는 주서(州西) 4리에 선녀산이란 것이 있고, 동권54 자산군 산천조에는 주서(郡西) 20리에 자모산(慈母山)이 있다. 이렇게 수다한 모악(母岳)•대모산(大母山)•부산(婦山)•모악산(母岳山)•모산(母山)•모후산(母后山)•자모산(慈母山) 등은 생각하건대 속명의 의역일 듯하며, 또는 그 속명은 어미산 또는 할미산 등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미 혹은 아미라고 하던 명산을 모산•모악 등으로 의역하지 않고 그것을 음역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의 일례는 「{{TagBook|[[동국여지승람]]}}」 권11 적성현 고적조에 아미성이라고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아미산의 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며, 현금 대구에 있는 아미산이란 것도 속명 애미산을 음역할 시에 당시 중에서 유명한 산을 취래(取來)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허다한 모산•모악에 대하여 부산(父山) 또는 부악(父岳)의 명(名)은 태무하야 「{{TagBook|[[삼국유사]]}}」 권 5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의 조에 신라의 오악(五岳) 중에 그 중앙이 부악(父岳)이요 역운 공산(公山)이란 것이 있을 뿐이나, 이것조차 지나의 오악사상(五岳思想)에서 작출된 것 같고, 민족사상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TagBook|[[고려사]]}}」 신우례전(辛禑列傳) 14년 6월조에 우(禑)가 남산(男山)에 올랐다 한 바 있으나 이것은 극히 예외의 사(事)에 속할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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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6번= 다음에 고전설을 안(按)하면,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사후에 아사달의 산이 되셨으며, 동서 권1 제4 탈해왕조에 의하면, 신라 전설 상의 왕 탈해가 동악신(東岳神)으로 되어있어 「一云, 崩後二十七世文虎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九日辛酉, 夜見夢於太宗, 有老人貌甚盛猛, 日我是脫解也, 拔我骨於䟽川丘, 塑像安於土含山, 王從其言, 故至今國, 祀不絕, 即東岳神也云」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여사(如斯)히 남성의 신성을 산신으로 한 것은 후세의 지배계급의 의식적 기도가 다분으로 그중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민족신앙 상의 자연적 소산이라고는 긍정하기 어렵다. 토함산(土含山)은 신라 오악의 일로 동악에 당하며, 이 악신(岳神)을 탈해로 한 것은 결코 민간의 자연적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고 또 「{{TagBook|[[삼국유사]]}}」 권3 진자사(眞慈師)조에는 신라 진지왕(眞智王)대의 일을 기록한 중에 「山靈變老人出迎日云云」이란 구가 있어, 이것이 과연 6세기의 설화 그대로인지 아닌지는 의문이라 할지라도, 여상(如上)의 제 전설로서 생각하면, 신라의 성시로부터 이강(以降) 고려 일통시대에 긍하야 당시의 지배계급 또는 지식계급 사이에 지나 전래의 부권 본위의 사상에 의하여 혹은 또 필연적 사회사상에 의하야, 점차로 산신을 남성으로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을까 한다. 그러나 민간신앙 상에서의 산신은 비교적 후세까지도 구래의 여신사상을 전수하였던 모양으로 허다한 전설은 모두 그것을 여신으로 하였으며, 오직 성(聖)한 어떤 여성을 어떤 산에 속하게 한 것만이 전설적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물론 원시 형태가 아니요, 후세에 있어 위인숭배 사상과 결부되어서의 소산일 터이나, 어디까지 여산신(女山神)이라는 사상을 전수하여 온 것은 이것에 의하의 찰지(察知)할 수 있다. 지금 그 예를 열거하면 「{{TagBook|[[삼국유사]]}}」 권1에 의하면, 신라의 제2 남해왕의 비 운제부인(雲帝夫人)은 운제산(雲梯山) 성모로서 고려 말까지 그 신사가 영일현서(迎日縣西)에 있어 기한(祈旱)을 행하였으며, 「{{TagBook|[[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그 권21 경주부 사묘조에는 「神母祠, 在鵄述嶺, 神母即朴堤上妻也, 堤上死於倭國, 其妻不勝其慕, 登鵄述嶺, 望日本痛哭而終, 遂爲鵄述嶺神母, 其村人至今祀之」란 것이 있고, 동서 30 진주목 사묘조에는 「聖母廟, 在智異山天王峰頂, 有聖母像, 其頂有劒痕, 諺云, 倭爲我太祖 所破窮蹙, 以爲天王不助, 不勝其憤, 斫之而去」라는 것이 있고, 이 성모의 일이 동 권31 함양군 사묘조에서는 「聖母祠, 嗣宇二, 一在智異山天王峯上, 一在郡南嚴川里, 高麗李承休帝王龍紀云, 太祖之母威肅王后」라 하야, 고려 왕건 태조의 모후(母后)로 되어 있다. 또 동서 권30 합천군 사묘조에는 「正見天王詞, 在海印寺中, 俗傳大伽倻國王后正見, 死爲山神」이라고 있다. 산신을 천왕이라고 하는 소이연에 취하여는 「{{TagJournal|[[민속학]]}}」 5권 12호 소재 졸문 「{{TagArticle|[[朝鮮の累石壇と蒙古の鄂博に就ぃて]]}}」 중에 기술(旣述)하였으므로 여기에는 생략하나, 여사(如斯)히 사명(祠名)을 천왕사 (천왕은 불교의 사천왕에서 나온 모양이다 라 칭위하면서도 거기에 봉사되어 있는 신이 실상으로는 성모로 되어 있는 것은 명칭 상에는 비록 불교의 영향을 입었으나, 고대 이래의 여산신 사상을 전수하여 온 것이라고 볼 바가 아닌가 한다. 그 소위 신모 우(又)는 성모라는 것을 여성 중의 신성에서 구한 것은 후세에 부회(附會)된 사실이요, 그 산의 신은 성모며 이전부터 존재하였을지 의심할 수 없으며, 그 고래의 산신에 특히 여성의 신성을 결부한 소이는 고래의 산신이 여성이었던 것을 말하는 바가 아닐까 한다. 이보다 더욱 흥미 있는 전설은 「{{TagBook|[[동국여지승람]]}}」 권 42 우봉현 산천의 조에 인용되어 있는 「{{TagBook|[[편년통록(編年通錄)]]}}」 소재의 고려 전설이다. 「聖居山, 在縣南六十里, 一名九龍山, …金寬毅編年通錄, 聖骨將軍居扶蘇山右谷, 一日與同里九人, 鷹捕平那山, 會日暮, 就宿岩竇, 有虎當竇口大吼, 十人相謂曰, 虎欲啗我輩, 試投冠, 攬者當之, 遂皆投之, 虎攬聖骨冠, 聖骨出, 欲與虎鬪, 虎忽不見竇崩, 九人皆不得出, 聖骨還報平那郡, 來葬九人, 先祀山神, 其神現曰, 予以寡婦主此山, 幸遇聖骨將軍, 欲與爲夫婦, 共理神政, 請封爲此山大王, 言訖, 與聖骨俱隱不見, 郡人因封聖骨爲大王, 立祠祭之, 以九人同亡, 改山名曰九龍, 云云」이라 하였다. 이 성거산(聖居山) 전설에서 특히 우리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산신이 호(虎)로 화한 점, 산신이 스스로 과부라 칭한 점, 급 여산신이 부신(夫神)을 얻어 부부로 신정(神政)을 공리(共理)하겠다고 한 점이다. 산신이 호(虎)로도 되는 사상에 취하여는 이미 전술하였다. 과부인 산신이 부신(夫神)을 얻고자 하였다는 것은 고래의 여산신 사상이 점차 남산신 사상으로 천이(遷移)하는 과정을 말하는 바 아닐까 한다. 이외에도 또 신선 사상의 영향을 받은 수삼의 여산신 설화를 인거(引擧)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신라의 서술성모(西述聖母) 전설로서, 이것은 고구려의 성모신 신앙에 비할 바는 아니지마는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이 신라의 성모신 전설이 보이는 최고 기록은 「{{TagBook|[[삼국사기]]}}」 권12 말 사론 중에 김부식이 자기의 말로 「政和中, 我朝遺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日,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라고 한 이 다. 이에 의하여 보면, 김부식은 전연 동신성모(東神聖母)란 것을 알지 못하였다. 하물며 선도산(仙桃山)이란 것은 공상 상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TagBook|[[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사묘조에는 서악(西嶽)을 선도산(仙桃山)에 비당(比當)하고, 다시 일보를 진(進)하여 「世傳, 赫居世乃聖母之所誕也」라 하였다. 이뿐 아니라 「{{TagBook|[[삼국유사]]}}」 권5 선도성모수희불사조(仙桃聖母隨喜佛事條)에는 벌서 더욱 복잡하게 「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得神仙之術, 歸止海東, 久而不還, 父皇寄書繫足云, 隨鳶所止爲家, 蘇得書放鳶,飛到此山而止, 遂來宅爲地仙, 故名西鳶山, 神母久據玆山, 鎭佑邦國, 靈異甚多, 有國已來, 常 爲三祀之一, 秩在群望之上, …其始到辰韓也, 生聖子爲東國始君, 盖赫居閼英三聖之所自也」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일견하여, 그 대체가 「{{TagBook|[[삼국사기]]}}」의 기록을 기초로 하야 구상된 설화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 설화의 전부가 전연 가공 상의 소산이요 민족신앙과는 하등의 인연도 없겠느냐 하면, 나는 반드시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송(宋)의 우신관(佑神舘) 내 일당의 여선(女仙)이란 것이 전혀 무한한 사상 상의 산물이었다 할지라도, 왕양(王襄)이 고려에 내조(來朝)하였을 때에 그는 동신성모(東神聖母)란 것을 제(祭)하였다. ({{TagBook|[[삼국유사]]}}에는 「大宋國使王襄到我朝, 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라고 명백히 말하였다). 그러면 당시 고려에 성모 숭배가 있었던 것은 대략 명백하다. 고려에 없는 성모신을 송사(宋使)가 일부러 작출하여 제(祭)하였을 리는 만무하며, 또 송사(宋使)가 우신관(佑神館) 소사(所祀) 선도산(仙桃山) 여신을 하등의 정략으로 특히 동국 시조의 성모라고 하여 그것을 제(祭)하였으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면, 「{{TagBook|[[삼국유사]]}}」 권1이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을 「西述聖母之所誕也」라고 한 것은 선도산(仙桃山) 여신의 기록에 유(由)하여 부회열조(附會揑造)한 바가 아니요, 신라에 원래로 존재하였던 전설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신라는 비교적 모권의 풍이 강하게 유존하였던 나라이었다. 하므로 그 신라에 모신 전설이 유전되어 있었으리라고 볼지라도 결코 무리한 상상이라고는 배척할 수 없을 것이다. 뿐 아니라, 고구려에도 성모 신앙이 있었으며, 고려 태조의 모후(母后)도 그러한 의미에서 숭배되었었다. 신라의 그 국모신 전설이 즉 서술성모(西述聖母) 전설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과연 그러하면 그 서술성모(西述聖母)는 실로 서술산신(西述山神)이었던 것이다. 술(述)의 음은 연(鳶)의 수리와 유음이므로 서술산(西述山)은 서연산(西鳶山)으로도 되고, 또 선도산(仙桃山) 여신의 전설 중, 진한에 이르러 해동의 시주(始主)를 낳았다는 말이 있음에 인하여, 이 여선 전설은 용이히 전래의 서술성모(西述聖母) 전설과 합치하게 되어 (선도산(仙桃山) 여선과 동신성모(東神聖母)를 동일자라고 해석하는 김부식의 이래의 설에는 졸연(猝然)히 동의하기 어렵다) 선도산(仙桃山) 여선 즉 서술성모(西述聖母) 즉 동신성모(東神聖母)라고 설화가 발전되었으며, 다시 일방으로는 선도산(仙桃山) 즉 서술산(西述山)(흥람(興覽)의 서악(西嶽))으로 되고, 서연산(西鳶山)의 연(鳶)에서 작출한 것이 연(鳶)의 서신을 전한 설화가 되어, 전인한 유사의 설화로 완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 또 「{{TagBook|[[동국여지승람]]}}」 권14 충주목 산천조에 「連珠峴, 在州南五里, 諺傳連珠女仙, 遊風流山, 或遊是峴, 云云」이란 것이며, 또 同 古跡條에 例 「泡母臺, 在風流山, 高數十丈, 諺傳昔有仙女名薔薇, 自號泡母, 常遊其上, 香滿一洞, 唐明皇聞之, 遣道士迎入宮, 號貞完夫人」이란 것도 고래의 여산신 사상이 여선 전설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다시 「{{TagBook|[[삼국유사]]}}」 권5 낭지승운조(朗智乘雲條)에 ?양주 아곡현의 영취산에 취하야 「傳云山主乃辯才天女」라고 한 것도 불교의 신과 바꾸면서도 오히려 고래 고유의 여산신 사상을 전하야 특히 변재천녀(辯才天女)를 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변재천녀(辯才天女)는 차라리 강하(江河)와 관계있는 신이요 산과는 하등의 인연도 없음에 불구하고 이것을 택한 까닭으로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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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7번= 상술한 바를 요컨대 조선 고대의 산신은 고산명 급 고전설 상으로 보아 일반으로 여성신이었던 모양이며, 그 혹종의 산에 여성의 위성(偉聖)이며 여선 등을 배(配)한 것은 후세의 발達된 사상일 터이나, 아직 오히려 모권의 유적을 그중에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여신 존중의 종교사상은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보더라도 모권 유풍의 아직 유존하였던 당시의 사회사상과도 모순되는 바 없고 극히 당연성을 가지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초의 산신은 홀로 여신만이 산신이었고 부부신임을 필요하지 아니하였을 터이나, 후세에 이르러 부권 사상이 발달됨을 따라 여산신에, 부신(夫神)이 없지 못할 것을 요청하게 되고, 필경은 남신이 주신이 되어, 여신은 단지 산신의 처(妻)란 지위에까지 하락된 것이 금일 우리가 민속 상에서 보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종교사상이 사회사상에 따라 변천되는 일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산신당 내의 일우(一隅)에서 발견되는 속(俗) 소위 산신 아가씨 우(又)는 산신 마누라라고 하는 것이 즉 산신의 처이다. (제3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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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대 산신의 성에 취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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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 古代 山神의 性에 就하야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손진태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4년11월
시작쪽 145쪽 종료쪽 156쪽 전체쪽 012쪽 연재여부 범주 논문 분야 민속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손진태의 「조선 고대 산신의 성에 취하야」은 『진단학보』 1권(1934.11.)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은 "서언", "민속 상의 산신의 성", "고산명 급 고전설 상의 산신의 성", "결언"으로 구성된다. 손진태는 조선 민속 상의 산신의 성별 변천을 중국 사상과의 관련 안에서 살펴본다. 그는 중국과 조선 고유의 종교 접합으로 산신사상이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사회사적 변화에 따라, 본래 여성이었던 산신이 부부신으로, 나아가 남신이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본문


서언──민속 상의 산신의 성──고산명 급 고전설 상의 산신의 성──결언
쪽수▶P145-1序言──民俗上의 山神의 性──古山名 及 古傳說 上의 山神의 性──結言
고기록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대 반도의 주민은 많이 산곡 사이에 산거(散居)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조선과 같은 산악국에 주거하는 종족의 미개 시대에 있어 극히 당연한 사상(事象)이었다. 그러면 유사 이전의 그들은 많은 혹은 극히 원시적인 농경도 하였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로는 수렵에 의하여 그 경제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과연 그러면 그들의 경제생활에 가장 중요하였던 것은 실로 산악적 환경이지 아니하였을 수 없다. 산악은 그들의 의식주 모든 것의 자료를 공급하는 자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산악은 그들에 취하여 가장 직접적이요 또 가장 중대한 숭배 대상이었을 것이다. 산신숭배 사상의 기원을, 산악 그것이 유현신비(幽玄神祕)한 염(念)을 생기하게 함에 구하고자 하는 종래의 심리설에 대하여 나는 그다지 찬의를 표하지 아니하는 자의 한사람이다. 물론 그러한 신비 관념에 인하여 숭배하게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이것은 차라리 미개인의 이상 사물 숭배 심리로서 해석할 바이요, 그들이 일상으로 친접(親接)하고 또 그 환경 중에서 생활하고 있는 보통의 산악들은 그들에 취하야 결코 이상한 사물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신비적 존재도 아니었을 것이다. 미개인의 신비는 항상 이상성이 거기에 반수(伴隨)됨을 요하였음으로써이다. 유달리 높고 유현(幽玄)한 산, 풍운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산, 불을 토하는 산, 해수(害獸) 독충이 많은 지극히 요험(要險)한 산, 이적(異蹟)을 가진 산 등등은, 그러한 제반 이상성에 인하야 숭배되었던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성을 가진 산만이 오직 숭배 대상으로 되었으리라든지, 또는 이러한 이상성을 가진 산악의 숭배 사상이 점차 편전(遍典)되어 모든 산악이 숭배되게 되었으리라든지, 그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서는, 미개 시대의 산악숭배 사상의 기원은, 다른 허다한 경우의 원시적 종교사상의 그것과 같이, 이것을 단일한 이유로 간단히 그 모든 경우를 설명하여 버리고자 하는 것은 파(頗)히 무리이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극히 보통의 경우에 있어, 조선 고대의 미개 주민이 가지었던, 그들의 주위에 있는 하등의 이상성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일반 산악의 숭배사상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 일반 산악이 그들의 경제생활과 가장 근밀하고도 중대한 관계를 가지었던 바에 인하야 생기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취하여는 여러 가지로 이론(異論)도 있을 터이므로, 아직 숙제로 하야 후일의 숙고를 자기(自期)하는 바이나, 하여는 산악 그것은 고대 조선 주민의 생활과 극히 중요한 관계에 있었을 것을 여기에 중언하여 두고자 하는 바이다.
쪽수▶P145-2古記錄의 傳하는 바에 依하면, 古代 半島의 住民은 많이 山谷 사이에 散居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朝鮮과 같은 山岳國에 住居하는 種族의 未開時代에 있어 極히 當然한 事象이었다. 그러면 有史以前의 그들은 많은 或은 極히 原始的인 農耕도 하였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主로는 射獵에 依하야 그 經濟生活 營爲하였을 것이다。果然 그러면 그들의 經濟生活에 가장 重要하였던 것은 實로 山岳的 環境이지 아니하였을 수 없다. 山岳은 그들의 衣食住 모든 것의 資料를 供給하는 者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山岳은 그들에 取하야 가장 直接的이요 또 가장 重大한 崇拜 對象이었을 것이다. 山神崇拜思想의 起源을, 山岳 그것이 幽玄神祕한 念을 生起하게 함에 求하고저 하는 從來의 心理說에 對하야 나는 그다지 贊意를 表하지 아니하는者의 한사람이다. 勿論 그러한 神祕觀念에 因하야 崇拜하게 된 境遇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境遇에 이것은 차라리 未開人의 異常事物 崇拜心理로서 解釋할 바이요, 그들이 日常으로 親接하고 또 그 環境中에서 生活하고 있는 普通의 山岳들은 그들에 取하야 決코 異常한 事物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神秘的 存在도 아니었을 것이다. 未開人의 神秘는 恒常 異常性이 거기에 伴隨됨을 ▶P146-1要하였으므로써이다. 類달리 높고 幽玄한 山, 風雲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山, 불을 吐하는 山, 害獸 毒虫이 많은 至極히 要險한 山, 異蹟을 가진 山 等等은, 그러한 諸般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되었던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만이 오직 崇拜 對象으로 되었으리라든지, 또는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岳의 崇拜 思想이 漸次 遍典되어 모든 山岳이 崇拜되게 되었으리라든지, 그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서는, 未開時代의 山岳崇拜思想의 起源은, 다른 許多한 境遇의 原始的 宗敎思想의 그것과 같이, 이것을 單一한 理由로 簡單히 그 모든 境遇를 說明하여 버리고저 하는 것은 頗히 無理이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極히 普通의 境遇에 있어, 朝鮮 古代의 未開住民이 가지었던, 그들의 周圍에 있는 何等의 異常性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一般 山岳의 崇拜思想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 一般 山岳이 그들의 經濟生活과 가장 近密하고도 重大한 關係를 가지었던 바에 因하야 生起함이 아니었을가 한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就하여는 여러 가지로 異論도 있을 터이므로, 아직 宿題로 하야 後日의 熟考를 自期하는 바이나, 何如는 山岳 그것은 古代 朝鮮 住民의 生活과 極히 重要한 關係에 있었을 것을 여기에 重言하여 두고저 하는 바이다.
그러면 조선 고대의 산신 신앙은 과연 어떠하였든가, 기록의 전하는 바 없어 지금 그것을 알기는 매우 곤란하나, 중고 이후의 제종(諸種) 문헌에 산견되는 산신에 관한 단편적 제기록에 거(據)하여 다소간 그 고대의 면영을 추측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고 그 고대 면영의 하나인 산신의 성에 취하여 고론(考論)하고자 하는 것이 이 일론(一論)의 주지이며, 논술의 편의상 나는 현금 민속상의 산신의 성으로부터 말하고자 한다.
쪽수▶P146-2그러면 朝鮮 古代의 山神 信仰은 果然 어떠하였든가, 記錄의 傳하는 바 없어 지금 그것을 알기는 매우 困難하나, 中古 以後의 諸種 文獻에 散見되는 山神에 關한 短片的 諸記錄에 據하야 多少間 그 古代의 面影을 推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고 그 古代 面影의 하나인 山神의 性에 就하야 考論하고저 하는 것이 이 一論의 主旨이며, 論述의 便宜上 나는 現今 民俗上의 山神의 性으로부터 말하고저 한다.
현금 민속상의 산신은 속으로 산신령 우(又)는 산신, 산령 등으로 칭위되며, 회화, 조각상에서는 항상 기호(騎虎)한 남성신으로 되어있으며 (화는 주로 산신사 내 급 무격(巫覡)의 신방 내에 봉치되어 있으나, 민간의 제종 사사(祀祠) 내 급 사찰 내에서 발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보통으로는 백발의 노인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부도(附圖) 제1에 보는 바와 같이 흑염을 가진 경우도 없지는 않다. 이 부도 제1은 The Marquess Cnrzon of Kedleston, In the Diamond Mountains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서적, Vol. XLV. No. 3. Oct. 1924. p.358.)에서 取한 바이나, 필자의 해제에는‘A buddha carving in a rock niche’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론 불상이 아니요, 명백히 산신상인 것은 그 복장이며, 용모 급 그 가장 특징 되는 범을 곁에 가진 점 등에 의하여 판연하다. 이 암요(岩凹) 조상의 발견 장소에 취하여 필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마 금강산 중의 어디일까 생각한다. 이렇게 암벽에 산신상 조각하는 것은 극히 희한한 일로 나는 과문하야 아직 유를 예견문(例見聞)하지 못하였다. 부도 제2는 약 10년 전 내가 황주읍 덕일산의 산신당 (황주의 속에 혹은 이것을 「부근」 당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부근은 문헌상에는 속음(俗音)을 따라 부근(附根)이라고도 보이고, 함은 의미를 함(含)하게 하여 부근(府君)이라고도 표현되어 있다) 내의 신화 중에서 그 일부를 촬영한 것으로 중앙이 부군 즉 부근신이요, 부군의 우에 기호(騎虎)한 백발노인이 산신이다. 부군의 좌는 속에 산신아지씨라고 하는 산신의 처이며, 또 그 좌의 소복한 부인상은 부군아지씨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삼불•칠성신•약사불•응신(應神) 등의 신상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산신이 기호(騎虎) 남신으로 되어있고, 또 혹은 호(虎) 그것을 산신이라고 하는 사상은 호(虎)를 산군이라고 하는 중국의 종교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이것은 호(虎)를 산신이라고 하였던 조선 고유의 종교사상이 개전(開展)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유리할 줄 안다. 즉 「삼국지서적」 예전(濊傳)에 「제호이위신(祭虎以爲神)」이라고 보이는 것은 금일 기호(騎虎) 산신과 반드시 역사적 관계를 가지었던 까닭이므로써이다. 예(濊)는 금일의 강원도 지방에 거주하였고, 강원도는 근년까지도 범나라이었고, 일반으로 생각되었던 것만치 반도 내의 가장 산악지방이었으므로 그 지방에 고래로 호(虎) 숭배가 성하였을 것은 의심할 수 없으나, 이것은 예족(濊族)에 한한 바 아니요, 반도 전체의 보통적 신앙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또 범은 산신과 떠나서도 그 영맹(獰猛)한 이상성에 인하여 숭배의 대상이 될 필연성을 가진 동물이며, 또 그것이 산악에 서식하는 관계상, 일보를 전하여 산신으로도 숭배될 가연성(可然性)도 가진 동물이므로 이것은 호산신(虎山神) 사상으로서 유전되고, 또 타방으로는 산 그것을 산신이라고 생각하던 원시 사상에서 산신을 인격신으로 한 사상이 발달되어 호산신(虎山神)•인격산신 이 양자가 합하면서 인격신 사상이 우세한 경우에는 호(虎)는 오직 산신의 사자인 영수(靈獸)로 간주되며, 호신(虎神) 사상이 우세한 경우에는 호(虎) 즉 산신으로 신앙되어 있는 것이 금일의 현상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조선의 용신이 용에 탄 여신(속칭 아가씨)으로 표현되는 것과 그 궤를 같이하였다. 그리고 후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급 도교의 사상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또 사회 경제생활의 발전에 반(伴)하여 산신신앙 사상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변전을 보게 되었으나, 그러한 문제에는 지금 언급하지 아니하려 한다.
쪽수▶P147現今 民俗上의 山神은 俗으로 山神靈 又는 山神, 山靈 等으로 稱謂되며, 繪畵, 彫刻上에서는 恒常 騎虎한 男性神으로 되어있으며 (畵는 主로 山神祠內 及 巫覡의 神房內에 奉置되어 있으나, 民間의 諸種 祀祠內 及 寺刹內에서 發見하는 境遇도 許多하다.) 普通으로는 白髮의 老人으로 表現되어 있으나, 附圖 第一에 보는 바와 같이 黑髥을 가진 境遇도 없지는 않다. 이 附圖 第一은 The Marquess Cnrzon of Kedleston, In the Diamond Mountains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 XLV. No. 3. Oct. 1924. p.358.)에서 取한 바이나, 筆者의 解題에는‘A buddha carving in a rock niche’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無論 佛像이 아니요, 明白히 山神像인 것은 그 服裝이며, 容貌 及 그 가장 特徵되는 범을 곁에 가진 點 等에 依하야 判然하다. 이 岩凹彫像의 發見 場所에 就하야 筆者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마 金剛山中의 어디일가 생각한다. 이렇게 岩壁에 山神像 彫刻하는 것은 極히 稀罕한 일로 나는 寡聞하야 아직 類를 例見聞하지 못하였다. 附圖 第二는 約十年前 내가 黃州邑 德日山의 山神堂 (黃州의 俗에 或은 이것을 「부근」 堂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부근은 文獻上에는 俗音을 따라 附根이라고도 보이고, 咸은 意味를 含하게 하야 府君이라고도 表現되어 있다) 內의 神畵中에서 그 一部를 撮影한 것으로 中央이 府君 即 附根神이요, 府君의 右에 騎虎한 白髮老人이 山神이다. 府君의 左는 俗에 山神阿只氏라고 하는 山神의 妻이며, 또 그 左의 素服한 婦人像은 府君 阿只氏라고 하였다. 이 外에도 三佛•七星神•藥師佛•應神 等의 神像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山神이 騎虎男神으로 되어있고, 또 或은 虎 그것을 山神이라고 하는 思想은 虎를 山君이라고 하는 中國의 宗敎思想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이것은 虎를 山神▶P148-1이라고 하였던 朝鮮 固有의 宗敎思想의 開展된 것이라고 解釋하는 편이 有理할 줄 안다. 即 「三國志」 濊傳에 「祭虎以爲神」이라고 보이는 것은 今日 騎虎山神과 반듯이 歷史的 關係를 가지었던 까닭이므로써이다. 濊는 今日의 江原道 地方에 居住하였고, 江原道는 近年까지도 범나라이었고, 一般으로 생각되었던 것만치 半島 內의 가장 山岳地方이었으므로 그 地方에 古來로 虎 崇拜가 盛하였을 것은 疑心할 수 없으나, 이것은 濊族에 限한 바 아니요, 半島 全體의 普通的 信仰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또 범은 山神과 떠나서도 그 獰猛한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의 對象이 될 必然性을 가진 動物이며, 또 그것이 山岳에 棲息하는 關係上, 一步를 展하야 山神으로도 崇拜될 可然性도 가진 動物이므로 이것은 虎山神 思想으로서 遺傳되고, 또 他方으로는 山 그것을 山神이라고 생각하던 原始 思想에서 山神을 人格神으로 한 思想이 發達되어 虎山神•人格山神 이 兩者가 合하면서 人格神 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는 오직 山神의 使者인 靈獸로 看做되며, 虎神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 即 山神으로 信仰되어 있는 것이 今日의 現象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朝鮮의 龍神이 龍에 탄 女神(俗稱 아가씨)으로 表現되는 것과 그 軌를 같이하였다. 그리고 後世에 이르러서는 佛敎 及 道敎의 思想과도 關係를 맺게 되었으며 또 社會 經濟生活의 發展에 伴하야 山神信仰思想에도 여러 가지 複雜한 變展을 보게 되었으나, 그러한 問題에는 지금 言及하지 아니하려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금일의 산신은 명백히 남성으로 되어있으나 (무격(巫覡)은 혹 산신마누라라 운운하나, 그들은 남성신에게도 마누라라는 존칭을 사용하므로, 마누라라는 말만으로서는 그 성을 구별하기 어렵다) 이것이 과연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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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이래 신앙상태이었는가? 고산명 급 고전설 상으로 고구(考究)하면, 고대의 산신은 금일과는 반대로 여성이었던 것을 추찰할 수 있다. 먼저 고산명 상으로부터 생각하여 보자. 「동국여지승람서적」을 보면, 그 권3 한성부 산천조에 도성의 서(西)에 모악(母岳)이란 것이 있어, 이조의 태종은 일시 이 모악 하에 복도(卜都)한 일이 있었으며, 동서 권6 광주목 산천조에는 주남(州南) 30리에 대모산(大母山)이 있고, 동권11 양주목 고적조에는 주서(洲西) 5리에 대모산성(大母山城)이 있어 이것은 산명에서 나온 성명일씨 명백하며, 동권12 강화 도호부 산천조에는 부남(府南) 30리에 대모산성(大母城山)이 있고, 동권14 청풍군 산천조에는 군서(郡四) 15리에 부산(婦山)이 있고, 동권16 진천현 고적조에는 현동(縣東) 6리에 대모산성(大母山城)이 있으며, 동권17 공주 산천조에는 주북(州北) 10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고, 동권12 결성현 사묘조에는 모산당(母山堂)이란 것이 있어 이것은 산명에서 얻은 신당의 명칭일 것이며, 동권34 금구현 산천조에는 현동(縣東) 25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고, 동권 옥구현 산천조에는 현북(縣北) 1리에 모산(母山)이 있어 진산(鎭山)으로 되어 있으며, 동권 태인현 산천조에는 현동(縣東) 30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고, 동권36 영광군 산천조에는 군남(郡南) 20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고, 동권 함평현 산천조에는 현북(縣北) 30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으며, 동권 삼구 순창군 성곽조에는 군서(郡西) 4리에 대모산성(大母山城)이 있고, 동권40 순천도호부 산천조에는 부유현에 모후산(母后山)이란 것이 있으며, 동권40 동복현 산천조에도 이 모후산(母后山)이 보이며, 동권41 평산도호부 고적조에는 부남(府南) 70리에 자모산성(慈母山城)이 있고, 동권43 해주목 산천조에는 주서(州西) 4리에 선녀산이란 것이 있고, 동권54 자산군 산천조에는 주서(郡西) 20리에 자모산(慈母山)이 있다. 이렇게 수다한 모악(母岳)•대모산(大母山)•부산(婦山)•모악산(母岳山)•모산(母山)•모후산(母后山)•자모산(慈母山) 등은 생각하건대 속명의 의역일 듯하며, 또는 그 속명은 어미산 또는 할미산 등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미 혹은 아미라고 하던 명산을 모산•모악 등으로 의역하지 않고 그것을 음역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의 일례는 「동국여지승람서적」 권11 적성현 고적조에 아미성이라고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아미산의 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며, 현금 대구에 있는 아미산이란 것도 속명 애미산을 음역할 시에 당시 중에서 유명한 산을 취래(取來)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허다한 모산•모악에 대하여 부산(父山) 또는 부악(父岳)의 명(名)은 태무하야 「삼국유사서적」 권 5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의 조에 신라의 오악(五岳) 중에 그 중앙이 부악(父岳)이요 역운 공산(公山)이란 것이 있을 뿐이나, 이것조차 지나의 오악사상(五岳思想)에서 작출된 것 같고, 민족사상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고려사서적」 신우례전(辛禑列傳) 14년 6월조에 우(禑)가 남산(男山)에 올랐다 한 바 있으나 이것은 극히 예외의 사(事)에 속할 바이다.
쪽수▶P148-2上述한 바와 같이 今日의 山神은 明白히 男性으로 되어있으나 (巫覡은 或 山神마누라라 云云하나, 그들은 男性神에게도 마누라라는 尊稱을 使用하므로, 마누라라는 말만으로서는 그 性을 區別하기 어렵다) 이것이 果然 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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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0代 以來 信仰狀態이었는가? 古山名 及 古傳說上으로 考究하면, 古代의 山神은 今日과는 反對로 女性이었던 것을 推察할 수 있다. 먼저 古山名上으로부터 생각하여 보자. 「東國輿地勝覽」을 보면, 그 卷三 漢城府 山川條에 都城의 西에 母岳이란 것이 있어, 李朝의 太宗은 一時 이 母岳下에 卜都한 일이 있었으며, 同書 卷六 廣州牧 山川條에는 州南 三十里에 大母山이 있고, 同卷 十一 楊州牧 古跡條에는 洲西 五里에 大母山城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나온 城名일씨 明白하며, 同卷 十二 江華 都護府 山川條에는 府南 三十里에 大母城山이 있고, 同卷 十四 淸風郡 山川條에는 郡四 十五里에 婦山이 있고, 同卷十六 鎭川縣 古跡條에는 縣東 六里에 大母山城이 있으며, 同卷 十七 公州 山川條에는 州北 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二十 結城縣 祠廟條에는 母山堂이란 것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얻은 神堂의 名稱일 것이며, 同卷 三四 金溝縣 山川條에는 縣東 二十五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沃溝縣 山川條에는 縣北 一里에 母山이 있어 鎭山으로 되어 있으며, 同卷 泰仁縣 山川條에는 縣東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三六 靈光郡 山川條에는 郡南 二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咸平縣 山川條에는 縣北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으며, 同卷 三九 淳昌郡 城郭條에는 郡西 四里에 大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十 順天都護府 山川條에는 富有縣에 母后山이란 것이 있으며, 同卷 四十 同福縣 山川條에도 이 母后山이 보이며, 同卷 四一 平山都護府 古跡條에는 府南 七十里에 慈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三 海州牧 山川條에는 州西 四里에 善女山이란 것이 있고, 同卷 五四 慈山郡 山川條에는 郡西 二十里에 慈母山이 있다. 이렇게 數多한 母岳•大母山•婦山•母岳山•母山•母后山•慈母山 等은 생각하건대 俗名의 意譯일 듯하며, 또는 그 俗名은 어미 山 또는 할미山 等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미 或은 아미▶P151-1라고 하던 名山을 母山•母岳 等으로 意譯하지 않고 그것을 音譯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의 一例는 「東國輿地勝覽」 卷十一 積城縣 古跡條에 阿未城이라고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阿未산의 城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하며, 現今 大邱에 있는 峨嵋山이란 것도 俗名 애미山을 音譯할 時에 唐詩 中에서 有名한 山을 取來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許多한 母山•母岳에 對하야 父山 또는 父岳의 名은 殆無하야 「三國遺事」 卷五 仙桃聖母隨喜佛事의 條에 新羅의 五岳 中에 그 中央이 父岳이요 亦云 公山이란 것이 있을 뿐이나, 이것조차 支那의 五岳思想에서 作出된 것 같고, 民族思想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高麗史」 辛禑列傳 十四年 六月條에 禑가 男山에 올랐다 한 바이 있으나 이것은 極히 例外의 事에 屬할 바이다.
다음에 고전설을 안(按)하면,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사후에 아사달의 산이 되셨으며, 동서 권1 제4 탈해왕조에 의하면, 신라 전설 상의 왕 탈해가 동악신(東岳神)으로 되어있어 「一云, 崩後二十七世文虎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九日辛酉, 夜見夢於太宗, 有老人貌甚盛猛, 日我是脫解也, 拔我骨於䟽川丘, 塑像安於土含山, 王從其言, 故至今國, 祀不絕, 即東岳神也云」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여사(如斯)히 남성의 신성을 산신으로 한 것은 후세의 지배계급의 의식적 기도가 다분으로 그중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민족신앙 상의 자연적 소산이라고는 긍정하기 어렵다. 토함산(土含山)은 신라 오악의 일로 동악에 당하며, 이 악신(岳神)을 탈해로 한 것은 결코 민간의 자연적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고 또 「삼국유사서적」 권3 진자사(眞慈師)조에는 신라 진지왕(眞智王)대의 일을 기록한 중에 「山靈變老人出迎日云云」이란 구가 있어, 이것이 과연 6세기의 설화 그대로인지 아닌지는 의문이라 할지라도, 여상(如上)의 제 전설로서 생각하면, 신라의 성시로부터 이강(以降) 고려 일통시대에 긍하야 당시의 지배계급 또는 지식계급 사이에 지나 전래의 부권 본위의 사상에 의하여 혹은 또 필연적 사회사상에 의하야, 점차로 산신을 남성으로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을까 한다. 그러나 민간신앙 상에서의 산신은 비교적 후세까지도 구래의 여신사상을 전수하였던 모양으로 허다한 전설은 모두 그것을 여신으로 하였으며, 오직 성(聖)한 어떤 여성을 어떤 산에 속하게 한 것만이 전설적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물론 원시 형태가 아니요, 후세에 있어 위인숭배 사상과 결부되어서의 소산일 터이나, 어디까지 여산신(女山神)이라는 사상을 전수하여 온 것은 이것에 의하의 찰지(察知)할 수 있다. 지금 그 예를 열거하면 「삼국유사서적」 권1에 의하면, 신라의 제2 남해왕의 비 운제부인(雲帝夫人)은 운제산(雲梯山) 성모로서 고려 말까지 그 신사가 영일현서(迎日縣西)에 있어 기한(祈旱)을 행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서적」에 의하면, 그 권21 경주부 사묘조에는 「神母祠, 在鵄述嶺, 神母即朴堤上妻也, 堤上死於倭國, 其妻不勝其慕, 登鵄述嶺, 望日本痛哭而終, 遂爲鵄述嶺神母, 其村人至今祀之」란 것이 있고, 동서 30 진주목 사묘조에는 「聖母廟, 在智異山天王峰頂, 有聖母像, 其頂有劒痕, 諺云, 倭爲我太祖 所破窮蹙, 以爲天王不助, 不勝其憤, 斫之而去」라는 것이 있고, 이 성모의 일이 동 권31 함양군 사묘조에서는 「聖母祠, 嗣宇二, 一在智異山天王峯上, 一在郡南嚴川里, 高麗李承休帝王龍紀云, 太祖之母威肅王后」라 하야, 고려 왕건 태조의 모후(母后)로 되어 있다. 또 동서 권30 합천군 사묘조에는 「正見天王詞, 在海印寺中, 俗傳大伽倻國王后正見, 死爲山神」이라고 있다. 산신을 천왕이라고 하는 소이연에 취하여는 「민속학학술지」 5권 12호 소재 졸문 「朝鮮の累石壇と蒙古の鄂博に就ぃて원고」 중에 기술(旣述)하였으므로 여기에는 생략하나, 여사(如斯)히 사명(祠名)을 천왕사 (천왕은 불교의 사천왕에서 나온 모양이다 라 칭위하면서도 거기에 봉사되어 있는 신이 실상으로는 성모로 되어 있는 것은 명칭 상에는 비록 불교의 영향을 입었으나, 고대 이래의 여산신 사상을 전수하여 온 것이라고 볼 바가 아닌가 한다. 그 소위 신모 우(又)는 성모라는 것을 여성 중의 신성에서 구한 것은 후세에 부회(附會)된 사실이요, 그 산의 신은 성모며 이전부터 존재하였을지 의심할 수 없으며, 그 고래의 산신에 특히 여성의 신성을 결부한 소이는 고래의 산신이 여성이었던 것을 말하는 바가 아닐까 한다. 이보다 더욱 흥미 있는 전설은 「동국여지승람서적」 권 42 우봉현 산천의 조에 인용되어 있는 「편년통록(編年通錄)서적」 소재의 고려 전설이다. 「聖居山, 在縣南六十里, 一名九龍山, …金寬毅編年通錄, 聖骨將軍居扶蘇山右谷, 一日與同里九人, 鷹捕平那山, 會日暮, 就宿岩竇, 有虎當竇口大吼, 十人相謂曰, 虎欲啗我輩, 試投冠, 攬者當之, 遂皆投之, 虎攬聖骨冠, 聖骨出, 欲與虎鬪, 虎忽不見竇崩, 九人皆不得出, 聖骨還報平那郡, 來葬九人, 先祀山神, 其神現曰, 予以寡婦主此山, 幸遇聖骨將軍, 欲與爲夫婦, 共理神政, 請封爲此山大王, 言訖, 與聖骨俱隱不見, 郡人因封聖骨爲大王, 立祠祭之, 以九人同亡, 改山名曰九龍, 云云」이라 하였다. 이 성거산(聖居山) 전설에서 특히 우리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산신이 호(虎)로 화한 점, 산신이 스스로 과부라 칭한 점, 급 여산신이 부신(夫神)을 얻어 부부로 신정(神政)을 공리(共理)하겠다고 한 점이다. 산신이 호(虎)로도 되는 사상에 취하여는 이미 전술하였다. 과부인 산신이 부신(夫神)을 얻고자 하였다는 것은 고래의 여산신 사상이 점차 남산신 사상으로 천이(遷移)하는 과정을 말하는 바 아닐까 한다. 이외에도 또 신선 사상의 영향을 받은 수삼의 여산신 설화를 인거(引擧)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신라의 서술성모(西述聖母) 전설로서, 이것은 고구려의 성모신 신앙에 비할 바는 아니지마는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이 신라의 성모신 전설이 보이는 최고 기록은 「삼국사기서적」 권12 말 사론 중에 김부식이 자기의 말로 「政和中, 我朝遺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日,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라고 한 이 다. 이에 의하여 보면, 김부식은 전연 동신성모(東神聖母)란 것을 알지 못하였다. 하물며 선도산(仙桃山)이란 것은 공상 상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동국여지승람서적」 권21 경주부 사묘조에는 서악(西嶽)을 선도산(仙桃山)에 비당(比當)하고, 다시 일보를 진(進)하여 「世傳, 赫居世乃聖母之所誕也」라 하였다. 이뿐 아니라 「삼국유사서적」 권5 선도성모수희불사조(仙桃聖母隨喜佛事條)에는 벌서 더욱 복잡하게 「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得神仙之術, 歸止海東, 久而不還, 父皇寄書繫足云, 隨鳶所止爲家, 蘇得書放鳶,飛到此山而止, 遂來宅爲地仙, 故名西鳶山, 神母久據玆山, 鎭佑邦國, 靈異甚多, 有國已來, 常 爲三祀之一, 秩在群望之上, …其始到辰韓也, 生聖子爲東國始君, 盖赫居閼英三聖之所自也」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일견하여, 그 대체가 「삼국사기서적」의 기록을 기초로 하야 구상된 설화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 설화의 전부가 전연 가공 상의 소산이요 민족신앙과는 하등의 인연도 없겠느냐 하면, 나는 반드시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송(宋)의 우신관(佑神舘) 내 일당의 여선(女仙)이란 것이 전혀 무한한 사상 상의 산물이었다 할지라도, 왕양(王襄)이 고려에 내조(來朝)하였을 때에 그는 동신성모(東神聖母)란 것을 제(祭)하였다. (삼국유사서적에는 「大宋國使王襄到我朝, 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라고 명백히 말하였다). 그러면 당시 고려에 성모 숭배가 있었던 것은 대략 명백하다. 고려에 없는 성모신을 송사(宋使)가 일부러 작출하여 제(祭)하였을 리는 만무하며, 또 송사(宋使)가 우신관(佑神館) 소사(所祀) 선도산(仙桃山) 여신을 하등의 정략으로 특히 동국 시조의 성모라고 하여 그것을 제(祭)하였으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면, 「삼국유사서적」 권1이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을 「西述聖母之所誕也」라고 한 것은 선도산(仙桃山) 여신의 기록에 유(由)하여 부회열조(附會揑造)한 바가 아니요, 신라에 원래로 존재하였던 전설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신라는 비교적 모권의 풍이 강하게 유존하였던 나라이었다. 하므로 그 신라에 모신 전설이 유전되어 있었으리라고 볼지라도 결코 무리한 상상이라고는 배척할 수 없을 것이다. 뿐 아니라, 고구려에도 성모 신앙이 있었으며, 고려 태조의 모후(母后)도 그러한 의미에서 숭배되었었다. 신라의 그 국모신 전설이 즉 서술성모(西述聖母) 전설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과연 그러하면 그 서술성모(西述聖母)는 실로 서술산신(西述山神)이었던 것이다. 술(述)의 음은 연(鳶)의 수리와 유음이므로 서술산(西述山)은 서연산(西鳶山)으로도 되고, 또 선도산(仙桃山) 여신의 전설 중, 진한에 이르러 해동의 시주(始主)를 낳았다는 말이 있음에 인하여, 이 여선 전설은 용이히 전래의 서술성모(西述聖母) 전설과 합치하게 되어 (선도산(仙桃山) 여선과 동신성모(東神聖母)를 동일자라고 해석하는 김부식의 이래의 설에는 졸연(猝然)히 동의하기 어렵다) 선도산(仙桃山) 여선 즉 서술성모(西述聖母) 즉 동신성모(東神聖母)라고 설화가 발전되었으며, 다시 일방으로는 선도산(仙桃山) 즉 서술산(西述山)(흥람(興覽)의 서악(西嶽))으로 되고, 서연산(西鳶山)의 연(鳶)에서 작출한 것이 연(鳶)의 서신을 전한 설화가 되어, 전인한 유사의 설화로 완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 또 「동국여지승람서적」 권14 충주목 산천조에 「連珠峴, 在州南五里, 諺傳連珠女仙, 遊風流山, 或遊是峴, 云云」이란 것이며, 또 同 古跡條에 例 「泡母臺, 在風流山, 高數十丈, 諺傳昔有仙女名薔薇, 自號泡母, 常遊其上, 香滿一洞, 唐明皇聞之, 遣道士迎入宮, 號貞完夫人」이란 것도 고래의 여산신 사상이 여선 전설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다시 「삼국유사서적」 권5 낭지승운조(朗智乘雲條)에 ?양주 아곡현의 영취산에 취하야 「傳云山主乃辯才天女」라고 한 것도 불교의 신과 바꾸면서도 오히려 고래 고유의 여산신 사상을 전하야 특히 변재천녀(辯才天女)를 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변재천녀(辯才天女)는 차라리 강하(江河)와 관계있는 신이요 산과는 하등의 인연도 없음에 불구하고 이것을 택한 까닭으로써이다.
쪽수▶P151-2다음에 古傳說을 按하면, 「三國遺事」에는 壇君이 死後에 阿斯達의 山이 되셨으며、同書 卷一 第四 脫解王條에 依하면, 新羅 傳說上의 王 脫解가 東岳神으로 되어있어 「一云, 崩後二十七世文虎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九日辛酉, 夜見夢於太宗, 有老人貌甚盛猛, 日我是脫解也, 拔我骨於䟽川丘, 塑像安於土含山, 王從其言, 故至今國, 祀不絕, 即東岳神也云」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如斯히 男性의 神聖을 山神으로 한 것은 後世의 支配階級의 意識的 企圖가 多分으로 그 中에 包含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民族信仰上의 自然的 所産이라고는 肯定하기 어렵다. 土含山은 新羅 五岳의 一로 東岳에 當하며, 이 岳神을 脫解로 한 것은 決코 民間의 自然的 信仰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고 또 「三國遺事」 卷三 眞慈師條에는 新羅 眞智王代의 일을 記錄한 中에 「山靈變老人出迎日云云」이란 句가 있어, 이것이 果然 六世紀의 說話 그대로인지 아닌지는 疑問이라 할지라도, 如上의 諸 傳說로서 생각하면,▶P152新羅의 盛時로부터 以降 高麗 一統時代에 亘하야 當時의 支配階級 또는 知識階級 사이에 支那 傳來의 父權本位의 思想에 依하야 或은 또 必然的 社會思想에 依하야, 漸次로 山神을 男性으로 하고저 하는 傾向이 있었던 것을 推測할 수 있을가 한다. 그러나 民間信仰 上에서의 山神은 比較的 後世까지도 舊來의 女神思想을 傳守하였던 모양으로 許多한 傳說은 모두 그것을 女神으로 하였으며, 오직 聖한 어떤 女性을 어떤 山에 屬하게 한 것만이 傳說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無論 原始 形態가 아니요, 後世에 있어 偉人崇拜思想과 結附되어서의 所産일 터이나, 어디까지 女山神이라는 思想을 傳守하여 온 것은 이것에 依하야 察知할 수 있다. 지금 그 例를 列擧하면 「三國遺事」 卷一에 依하면, 新羅의 第二 南解王의 妃 雲帝夫人은 雲梯山 聖母로서 高麗末까지 그 神祠가 迎日縣西에 있어 祈旱을 行하였으며, 「東國輿地勝覽」에 依하면, 그 卷二一 慶州府 祠廟條에는 「神母祠, 在鵄述嶺, 神母即朴堤上妻也, 堤上死於倭國, 其妻不勝其慕, 登鵄述嶺, 望日本痛哭而終, 遂爲鵄述嶺神母, 其村人至今祀之」란 것이 있고, 同書 三十 晉州牧 祠廟條에는 「聖母廟, 在智異山天王峰頂, 有聖母像, 其頂有劒痕, 諺云, 倭爲我太祖 所破窮蹙, 以爲天王不助, 不勝其憤, 斫之而去」라는 것이 있고, 이 聖母의 일이 同 卷三一 咸陽郡 祠廟條에서는 「聖母祠,嗣宇二, 一在智異山天王峯上, 一在郡南嚴川里, 高麗李承休帝王龍紀云, 太祖之母威肅王后」라 하야, 高麗 王建太祖의 母后로 되어 있다. 또 同書 卷三十 陜川郡 祠廟條에는 「正見天王詞,在海印寺中, 俗傳大伽倻國王后正見, 死爲山神」이라고 있다. 山神을 天王이라고 하는 所以然에 就하여는 「民俗學」 五卷 十二號 所載 拙文 「朝鮮の累石壇と蒙古の鄂博に就ぃて」 中에 旣述하였으므로 여기에는 省略하나, 如斯히 祠名을 天王祠 (天王은▶P153 佛敎의 四天王에서 나온 모양이다 라 稱謂하면서도 거기에 奉祀되어 있는 神이 실상으로는 聖母로 되어 있는 것은 名稱上에는 비록 佛敎의 影響을 입었으나, 古代 以來의 女山神思想을 傳守하여 온 것이라고 볼 바가 아닌가 한다. 그 所謂 神母 又는 聖母라는 것을 女性 中의 神聖에서 求한 것은 後世에 附會된 事實이요, 그 山의 神은 聖母며 以前부터 存在하였을지 疑心할 수 없으며, 그 古來의 山神에 特히 女性의 神聖을 結附한 所以는 古來의 山神이 女性이었던 것을 말하는 바가 아닐가 한다. 이보다 더욱 興味있는 傳說은 「東國輿地勝覽」 卷 四二 牛峯縣 山川의 條에 引用되어 있는 「編年通錄」 所載의 高麗 傳說이다. 「聖居山, 在縣南六十里, 一名九龍山, …金寬毅編年通錄, 聖骨將軍居扶蘇山右谷, 一日與同里九人, 鷹捕平那山, 會日暮, 就宿岩竇, 有虎當竇口大吼, 十人相謂曰, 虎欲啗我輩, 試投冠, 攬者當之, 遂皆投之, 虎攬聖骨冠, 聖骨出, 欲與虎鬪, 虎忽不見竇崩, 九人皆不得出, 聖骨還報平那郡, 來葬九人, 先祀山神, 其神現曰, 予以寡婦主此山, 幸遇聖骨將軍, 欲與爲夫婦, 共理神政, 請封爲此山大王, 言訖, 與聖骨俱隱不見, 郡人因封聖骨爲大王, 立祠祭之, 以九人同亡, 改山名曰九龍, 云云」이라 하였다. 이 聖居山 傳說에서 特히 우리가 興味를 느끼는 것은 山神이 虎로 化한 點, 山神이 스스로 寡婦라 稱한 點, 及 女山神이 夫神을 얻어 夫婦로 神政을 共理하겠다고 한 點이다. 山神이 虎로도 되는 思想에 就하여는 이미 前述하였다. 寡婦인 山神이 夫神을 얻고저 하였다는 것은 古來의 女山神思想이 漸次 男山神思想으로 遷移하는 過程을 말하는 바이 아닐가 한다. 이 外에도 또 神仙思想의 影響을 받은 數三의 女山神 說話를 引擧할 수 있다. 그 하나는 新羅의 西述聖母 傳說로서, 이것은 高句麗의 聖母神 信仰에 比할 바는 아니지마는 그것은 別問題로 하고, 이 新羅의 聖母神▶P154 傳說이 보이는 最古 記錄은 「三國史記」 卷十二末 史論 中에 金富軾이 自己의 말로 「政和中, 我朝遺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日,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라고 한 이 다. 이에 依하여 보면, 金富軾은 全然 東神聖母란 것을 알지 못하였다. 하물며 仙桃山이란 것은 空想上의 産物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不拘하고 「東國輿地勝覽」 卷二一 慶州府 祠廟條에는 西嶽을 仙桃山에 比當하고, 다시 一步를 進하야 「世傳, 赫居世乃聖母之所誕也」라 하였다. 이 뿐 아니라 「三國遺事」 卷五 仙桃聖母隨喜佛事條에는 벌서 더욱 複雜하게 「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得神仙之術, 歸止海東, 久而不還, 父皇寄書繫足云, 隨鳶所止爲家, 蘇得書放鳶,飛到此山而止, 遂來宅爲地仙, 故名西鳶山, 神母久據玆山, 鎭佑邦國, 靈異甚多, 有國已來, 常 爲三祀之一, 秩在群望之上, …其始到辰韓也, 生聖子爲東國始君, 盖赫居閼英三聖之所自也」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一見하야, 그 大體가 「三國史記」의 記錄을 基礎로 하야 構想된 說話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 說話의 全部가 全然 架空上의 所産이요 民族信仰과는 何等의 因緣도 없겠느냐 하면, 나는 반듯이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宋의 佑神舘內 一堂의 女仙이란 것이 全혀 無限한 思想上의 産物이었다 할지라도, 王襄이 高麗에 來朝하였을 때에 그는 東神聖母란 것을 祭하였다. (三國遺事에는 「大宋國使王襄到我朝, 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라고 明白히 말하였다). 그러면 當時 高麗에 聖母崇拜가 있었던 것은 大略 明白하다. 高麗에 없는 聖母神을 宋使가 일▶P155부러 作出하야 祭하였을 理는 萬無하며, 또 宋使가 佑神館 所祀 仙桃山女神을 何等의 政略으로 特히 東國 始祖의 聖母라고 하여 그것을 祭하였으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면, 「三國遺事」 卷一이 新羅의 始祖 赫居世王을 「西述聖母之所誕也」라고 한 것은 仙桃山 女神의 記錄에 由하야 附會揑造한 바가 아니요, 新羅에 元來로 存在하였던 傳說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新羅는 比較的 母權의 風이 强하게 遺存하였던 나라이었다. 하므로 그 新羅에 母神傳說이 遺傳되어 있었으리라고 볼지라도 決코 無理한 想像이라고는 排斥할 수 없을 것이다. 뿐 아니라, 高句麗에도 聖母信仰이 있었으며, 高麗 太祖의 母后도 그러한 意味에서 崇拜되었었다. 新羅의 그 國母神 傳說이 即 西述聖母 傳說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 나의 意見이다. 果然 그러하면 그 西述聖母는 實로 西述山神이었던 것이다. 述의 音은 鳶의 수리와 類音이므로 西述山은 西鳶山으로도 되고, 또 仙桃山 女神의 傳說 中, 辰韓에 이르러 海東의 始主를 낳았다는 말이 있음에 因하야, 이 女仙 傳說은 容易히 傳來의 西述聖母 傳說과 合致하게 되어 (仙桃山 女仙과 東神聖母를 同一者라고 解釋하는 金富軾의 以來의 說에는 猝然히 同意하기 어렵다) 仙桃山 女仙 即 西述聖母 即 東神聖母라고 說話가 發展되었으며, 다시 一方으로는 仙桃山 即 西述山 (興覽의 西嶽) 으로 되고, 西鳶山의 鳶에서 作出한 것이 鳶의 書信을 傳한 說話가 되어, 前引한 遺事의 說話로 完成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 또 「東國輿地勝覽」 卷十四 忠州牧 山川條에 「連珠峴, 在州南五里, 諺傳連珠女仙, 遊風流山, 或遊是峴, 云云」이란 것이며, 또 同 古跡條에 例 「泡母臺, 在風流山, 高數十丈, 諺傳昔有仙女名薔薇, 自號泡母, 常遊其上, 香滿一洞, 唐明皇聞之, 遣道士迎入宮, 號貞完夫人」이란 것도 固來의 女山神思想이 女仙傳說化한▶P156 것이 아닌가 한다. 또다시 「三國遺事」 券五 朗智乘雲條에 ?良州 阿曲縣의 靈鷲山에 就하야 「傳云山主乃辯才天女」라고 한 것도 佛敎의 神과 바꾸면서도 오히려 古來 固有의 女山神思想을 傳하야 特히 辯才天女를 擇한 것이 아닌가 한다. 辯才天女는 차라리 江河와 關係있는 神이요 山과는 何等의 因緣도 없음에 不拘하고 이것을 擇한 까닭으로써이다.
상술한 바를 요컨대 조선 고대의 산신은 고산명 급 고전설 상으로 보아 일반으로 여성신이었던 모양이며, 그 혹종의 산에 여성의 위성(偉聖)이며 여선 등을 배(配)한 것은 후세의 발達된 사상일 터이나, 아직 오히려 모권의 유적을 그중에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여신 존중의 종교사상은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보더라도 모권 유풍의 아직 유존하였던 당시의 사회사상과도 모순되는 바 없고 극히 당연성을 가지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초의 산신은 홀로 여신만이 산신이었고 부부신임을 필요하지 아니하였을 터이나, 후세에 이르러 부권 사상이 발달됨을 따라 여산신에, 부신(夫神)이 없지 못할 것을 요청하게 되고, 필경은 남신이 주신이 되어, 여신은 단지 산신의 처(妻)란 지위에까지 하락된 것이 금일 우리가 민속 상에서 보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종교사상이 사회사상에 따라 변천되는 일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산신당 내의 일우(一隅)에서 발견되는 속(俗) 소위 산신 아가씨 우(又)는 산신 마누라라고 하는 것이 즉 산신의 처이다. (제3도 참조)
쪽수▶P156-2上述한 바를 要컨대 朝鮮 古代의 山神은 古山名 及 古傳說上으로 보아 一般으로 女性神이었던 모양이며, 그 或種의 山에 女性의 偉聖이며 女仙 等을 配한 것은 後世의 發達된 思想일 터이나, 아직 오히려 母權의 遺跡을 그 中에 發見할 수 있으며, 이러한 女神 尊重의 宗敎思想은 이것을 社會學的으로 보더라도 母權 遺風의 아직 遺存하였던 當時의 社會思想과도 矛盾되는 바 없고 極히 當然性을 가지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當初의 山神은 홀로 女神만이 山神이었고 夫婦神임을 必要하지 아니하였을 터이나, 後世에 이르러 父權思想이 發達됨을 따라 女山神에, 夫神이 없지 못할 것을 要請하게 되고, 畢竟은 男神이 主神이 되어, 女神은 단지 山神의 妻란 地位에까지 下落된 것이 今日 우리가 民俗上에서 보는 現象이 아닌가 한다. 宗敎思想이 社會思想에 따라 變遷되는 一例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山神堂 內의 一隅에서 發見되는 俗所謂 山神 아가씨 又는 山神 마누라라고 하는 것이 即 山神의 妻이다. (第三圖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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