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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② 전성기와 조선악극단 활동)
(② 전성기와 조선악극단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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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은 1937년 정식 데뷔 이후 오케레코드에서 이난영에 버금가는 인기 가수가 되었으며, 다양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간판 스타로 활동했다.<ref name="ency2"/> 가볍지 않고 중후한 듯하면서도 시원한 창법에는 ‘청초한 색기’로 불리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고,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최고 인기 가수로 자리매김했다.<ref name="ency2"/> 대표곡으로는 데뷔곡 〈연락선은 떠난다〉 외에도 〈아시나요〉, 〈처녀야곡〉, 〈불망의 글자〉, 〈토라진 눈물〉, 〈항구의 무명초〉, 〈잘 있거라 단발령〉, 〈역마차〉 등이 있다.<ref name="ency2"/>
 
장세정은 1937년 정식 데뷔 이후 오케레코드에서 이난영에 버금가는 인기 가수가 되었으며, 다양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간판 스타로 활동했다.<ref name="ency2"/> 가볍지 않고 중후한 듯하면서도 시원한 창법에는 ‘청초한 색기’로 불리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고,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최고 인기 가수로 자리매김했다.<ref name="ency2"/> 대표곡으로는 데뷔곡 〈연락선은 떠난다〉 외에도 〈아시나요〉, 〈처녀야곡〉, 〈불망의 글자〉, 〈토라진 눈물〉, 〈항구의 무명초〉, 〈잘 있거라 단발령〉, 〈역마차〉 등이 있다.<ref name="ency2"/>
  
오케레코드의 적극적 지원 속에서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으며, 공연과 악극 무대를 통해 대중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였다.<ref name="ency1"/> 특히 〈연락선은 떠난다〉는 항구에서의 이별을 다룬 노래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한을 드러내어 큰 사랑을 받았다는 평가가 있다.<ref name="enc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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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의 적극적 지원 속에서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으며, 공연과 악극 무대를 통해 대중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였다.<ref name="ency"/> 특히 〈연락선은 떠난다〉는 항구에서의 이별을 다룬 노래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한을 드러내어 큰 사랑을 받았다는 평가가 있다.<ref name="ency2"/>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시 체제 속에서 가수들이 군국가요 보급에 동원되었고, 장세정 역시 〈지원병의 어머니〉, 〈그대와 나〉 등 여러 군국가요를 발표하였다.<ref name="ency2"/> 또한 일제강점기 여성 가수로서 이난영과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으며 꾸준한 인기를 유지했다.<ref name="ency2"/>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시 체제 속에서 가수들이 군국가요 보급에 동원되었고, 장세정 역시 〈지원병의 어머니〉, 〈그대와 나〉 등 여러 군국가요를 발표하였다.<ref name="ency2"/> 또한 일제강점기 여성 가수로서 이난영과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으며 꾸준한 인기를 유지했다.<ref name="ency2"/>

2025년 11월 25일 (화) 20:12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강단비(CB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장세정(張世貞)
출처 :
 
한글명 장세정 한자명 張世貞 영문명 Jang Se-jeong 가나명 이칭
성별 여성 생년 1921년 몰년 2003년 출신지 평안남도 평양 전공 대중가요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1936년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공연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1937년 「연락선은 떠난다」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1]

이후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의 간판급 가수로 부상했다.[1]

광복 이후에도 1950년대 초까지 악극 무대에 꾸준히 서며 「울어라 은방울」, 「샌프란시스코」 등의 대표곡을 발표해 인기를 이어갔다.[1]

1970년대 초까지도 공연과 방송을 통해 활발히 활동하였다.[1]


생애


① 초기 생애와 데뷔 과정

1921년 평양 출생.[1] 평안남도 평양(平壤: 현 평양직할시)에서 출생하여 생후 두 달 만에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단에 들어가서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2]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 화신백화점의 악기점에서 근무하던 중, 만 15세 무렵이던 1936년에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가요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을 계기로 오케레코드의 이철에게 발탁되어 가수가 되었다.[2]


② 전성기와 조선악극단 활동

장세정은 1937년 정식 데뷔 이후 오케레코드에서 이난영에 버금가는 인기 가수가 되었으며, 다양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간판 스타로 활동했다.[2] 가볍지 않고 중후한 듯하면서도 시원한 창법에는 ‘청초한 색기’로 불리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고,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최고 인기 가수로 자리매김했다.[2] 대표곡으로는 데뷔곡 〈연락선은 떠난다〉 외에도 〈아시나요〉, 〈처녀야곡〉, 〈불망의 글자〉, 〈토라진 눈물〉, 〈항구의 무명초〉, 〈잘 있거라 단발령〉, 〈역마차〉 등이 있다.[2]

오케레코드의 적극적 지원 속에서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으며, 공연과 악극 무대를 통해 대중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였다.[1] 특히 〈연락선은 떠난다〉는 항구에서의 이별을 다룬 노래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한을 드러내어 큰 사랑을 받았다는 평가가 있다.[2]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시 체제 속에서 가수들이 군국가요 보급에 동원되었고, 장세정 역시 〈지원병의 어머니〉, 〈그대와 나〉 등 여러 군국가요를 발표하였다.[2] 또한 일제강점기 여성 가수로서 이난영과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으며 꾸준한 인기를 유지했다.[2]


제목4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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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1.0 1.1 1.2 1.3 1.4 1.5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세정".
  2. 2.0 2.1 2.2 2.3 2.4 2.5 2.6 2.7 위키백과, 「장세정」, 한국어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