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본문1-1: (1)양전법)
(본문4-2: (2)신공법의 적용)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37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31번째 줄: 131번째 줄:
 
      
 
      
 
</table>
 
</table>
|목차1-1원문10번=
+
|목차1-1원문10번={{TagSpage|99-4}}<blockquote no="05">備考 一, 頃畝法에서는 周尺 方五尺 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 百畝爲一頃이다. 따라서 一畝는 六千平方周尺이다<sup>世宗實錄 二十五年 十一月 甲子條</sup>.<br/>二, 여기 結負를 頃畝로 換算할 때에 使用한 {{ruby|周尺|○○}}은 그 實長이 曲尺 六寸六分에 該當하니(柳馨遠磻溪隨錄 卷二 所載 世宗朝所定 周尺圖<sup>後世復原者也</sup> 及 增補文獻備考 卷九十一 樂考度量衡條 參照), 이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田 各 一結의 實積을 尺貫法 度量衡의 坪數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br/>上田一結 一, 八四六坪强 一, 八四四坪<br/>中田一結 二, 八九七坪弱 二, 八九七坪{{TagPage|100-1}}<br/>下田一結 四, 一八四坪弱 四, 一八二坪<br/>(下段의 數字는 和田一郎博士 著 「朝鮮의 土地制度 及 地稅制度 調査報告書」 大正 九年 刊中의 數字 同書 六九五頁)<br/>三, 또 上中下 三種田의 量田尺에 依한 面積과 (三種田이 다 各其 量田尺으로 六尺爲一步 三十五步 平方爲一結, 即 一結은 二百十量田尺平方 即 四萬四千一百平方尺) 周尺에 依한 面積(上田은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과의 關係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量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br/>上田尺 曲一·二二八尺(0.66曲尺×√152568(周尺)÷210(量田尺)=1.2276曲尺etc.)<br/>中田尺 曲一·五三七尺<br/>下田尺 曲一·八四八尺<br/>이에 三種尺의 實長은 二指計十<sup>(指幅)</sup> 云々의 淵源에 符節을 合하듯이 맞는다.<br/>四, 手指尺의 性質을 最初에 생각해 본 이는 丁茶山인데 그는 經世遺表(卷九 結負考辨)에서 手指尺을 規定하야 <cite no="01">「⋯⋯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cite>라 하얐으니 即 「指」라는 것을 「뺌」으로 解釋한 것이다. 그러나 指를 뺌으로 解釋한다면 吾人이 本項 冒頭에 揭出한바 手指尺에 關한 두 가지 資料 中 後者 即 龍飛御天歌의 二十指·二十五指·三十指 說을 說明할 수가 있으나 前者 即 世宗實錄에 보이는 河演 上言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 說을 說明할 수가 없을 뿐더러(萬一 指를 뺌이라면 二指計十 等의 苟且한 表現法을 取할 理가 없다) 三種尺의 實長이 너머 기러저서 上田一結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의 實積에 到底히 符合치 아니하야 그 不當한 것이 的確한즉, 이는 그의 千慮一失에 屬하는 것이다. 다음에 手指尺의 實長을 實際로 計算한 사람은 河合弘民 博士인데 (同文館判, 經濟大辭書 結負條 參照, 大正 三年 刊), 그는 그의 計算 經路를 仔細이 밝히지 아니하얐으나 何如間에 龍飛御天歌에 실려 있는 上中下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와 結負{{TagPage|101-1}} 作成法에 依하야 計算하였다는 것인데 그 結果 一{{ruby|指長曲尺一寸三分餘|○○○○○○○○○}} 即 一等田尺一尺長 二尺六寸餘를 得하얐다. 그러나 龍飛御天歌의 資料란 딴 것이 아니니, 三等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는 吾人이 前揭 使用한 것이오 結負 作成法이라는 것은 <cite no="02">「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ruby|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cite>로 叙述되여 있는 것이니 實積 四十四尺一寸爲束이라는 말은 實積 四百四十一尺爲一負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實積 四萬四千一百尺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二百十尺平方爲一結(√44100=210) 即 六尺爲一步, 三十五步平方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當然이 吾人의 得한 結果와 符合하여야 할 것이다. 勿論 博士도 周尺長은 曲六寸六分임을 알고 있다(前揭 辭書 土地制度條 參照). 吾人의 {{ruby|計算|○○}}에 틀림이 없는 限 博士의 得한 結果는 誤謬이다. 그리고 博士는 {{ruby|一指|○○}}長曲尺一寸三分餘를 得하고는 「一指」의 處置에 困難하야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曲一寸三分餘에는 當치 않다), <cite no="03">「一指란 손가락 두 개의 幅이리라」</cite>고 附說하였으나 거북한 說明이다. 다음 和田一郎 博士는 高麗 結負를 論할 지음에, 上中下三種田의 坪數만 算出하고 (前出. 方法은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에 依하야), 三種手指尺의 說明은 不可解라 하야 抛棄하였다(前揭 書 六九六頁). 河合 博士의 論文이 計算의 經過를 밝히지 안 하였음으로 盛岡高農 鏡保之助敎授가 다시 手指尺長의 計算을 試하였는데(盛岡高等農林學校 創立 二十五周年 記念論叢. 昭和 三年 刊. 「時代를 달리 한 結負制度 間의 脈絡.」), 敎授는 計算의 資料를 專혀 文獻 備考에 是賴한 지라 同書 卷百四十八에 工巧롭게도 魚魯之謬를 犯하야 있는바 世宗 二十五年 賛成 河演 上言 中에 보이는 高麗 結負制에 關한 數字를 無批判하게 써서 計算을 하야(雪上加霜으로 氏의 計算法이 亦 荒唐無稽하다) 結局 一指長 曲一寸二分七厘一毛 即 一等{{TagPage|102-1}}尺長二尺五寸四分二厘를 得하였다. 文獻 備考만을 是賴하였다 하지마는 同書 中에는 前記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만 있는 것이 아니라, 亦是 正當한 資料도 있으니 그것은 李朝 肅宗 三十五年 平川君 申琓의 上疏에 보이는 數字로(同書 卷百四十二), 亦是 龍飛御天歌와 같이 <cite no="04">「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cite>의 說明法이다. 鏡氏도 한 번은 이 數字를 들어서 計算을 하야 一指長曲五分九厘五毛 即 上田尺長曲一尺 二寸九分을 得하였으나 (事實은 吾人의 得한 結果와 當然이 符合하여야 할 것이지마는 거기도 計算의 差錯이 있어 近似하게밖에 못 되였다.) 博士 河合弘氏의 一指長一寸三分餘에는 大端이 距離가 먼 지라 周章狼狽하야 平川君疏 中의 數字를 誤謬라 하야 버리고, 前記와 같이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 中의 數字를 取하야 計算한 結果, 偶然이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니 이것은 河合 博士의 一指에 가까운 지라, 大喜하고 다음엔 一步를 進하여 河合 博士와 自己와의 相異는 博士의 計算이 不精한 타시라고 定해 버렸다. 또,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고는 그 結果를 高麗 結負法의 他要素에 類推하야 새로운 臆說을 創造하였으나 本論에는 그다지 緊要치 안 하니 多及치 안 한다. 何如間에 手指尺의 考究가 從來 以上과 같음으로 그 眞意을 沒却할가 저어하야 多少 長皇한 叙述을 試한 바이다.</blockquote>
|목차1-1원문11번=
+
|목차1-1원문11번={{TagSpage|102-2}}그런데 上中下 三種田의 實際 分布 狀況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慶尙·全羅道에서는 上田은 千結 中에 一二結 中 田은 百結 中에 一二結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었다. 또 慶尙·全羅 以外의 道에는 上田은 絕無하고 千結 中에 一二結의 中田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였다. 即 大凡하게 말하자면 全國 田은 一結五十七畝의 劃一的인 制度에 依存하고 있었든 것이다.<sup>(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sup>
|목차1-1원문12번=
+
|목차1-1원문12번={{TagSpage|102-3}}다음 田分 三等法의 是非를 暫間 檢討하건댄 大關切 三種田의 面積比는 16:25:36이오 그것들에서 同額의 租稅를 (一結三十斗) 徵收한다 하니 그렇면 此等 三種田 同一面積의 生產量의 比는 一等田:二等田=25:16과, 二等田:三等田=26:25와의 連比 67:42:30(이 數字{{TagPage|103-1}}는 後에 말할 바와 같이, 世宗이 新量田法을 設定하라고 三種田法의 不合理를 論할 때에 든 數字인데 그것은 當時 一結稅額 三十斗가 가르키는 數 三十을 便宜上 下田에 配當하고 作成한 數字로 槪算이다.)이 되여야 처음으로 收稅의 公平을 期할 수가 있을 것이다. 果然 三種量田尺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과 三種田 同一面積의 收量과의 사이에 이러한 偶然的인 神秘的인 關係가 存在할 수가 있었을가. 全然 생각지 못할 일이다. 實로 三種尺의 決定, 따라서 또 그 平方으로 되는 地積의 決定은 가장 原始的인 自然發生的인 數 觀念의 基礎 우에 선 것이였다.
|목차1-1원문13번=
 
|목차1-1원문14번=
 
|목차1-1원문15번=
 
|목차1-1원문16번=
 
|목차1-1원문17번=
 
|목차1-1원문18번=
 
|목차1-1원문19번=
 
|목차1-1원문20번=
 
|목차1-1원문21번=
 
|목차1-1원문22번=
 
|목차1-1원문23번=
 
|목차1-1원문24번=
 
|목차1-1원문25번=
 
|목차1-1원문26번=
 
|목차1-1원문27번=
 
|목차1-1원문28번=
 
|목차1-1원문29번=
 
|목차1-1원문30번=
 
  
 
|목차1-1해독문1번=과전법 조문에 1결 30두라 하였으니, 먼저 ‘결’로 따지는 양전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목차1-1해독문1번=과전법 조문에 1결 30두라 하였으니, 먼저 ‘결’로 따지는 양전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6번째 줄: 178번째 줄:
 
      
 
      
 
</table>
 
</table>
|목차1-1해독문10번=
+
|목차1-1해독문10번=<blockquote no="05">비고 1. 경묘법에서는 주척 방5척위1보 240보위1묘 100묘위1경이다. 따라서 1묘는 6천평방주척이다<sup>세종실록 25년 11월 갑자조</sup>.<br/>2. 여기 결부를 경묘로 환산할 때에 사용한 {{ruby|주척|○○}}은 그 실장(實長)이 곡척 6촌6분에 해당하니(유형원 반계수록 권2 소재 세종 조(朝) 소정 주척도<sup>후세복원자지</sup> 및 증보문헌비고 권91 악고도량형조 참조), 이에 의하여 상 중 하 3종전 각 1결의 실적을 척관법 도량형의 평수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다.<br/>상전1결 1,846평강 1,844평<br/>중전1결 2,897평약 2,897평<br/>하전1결 4,184평약 4,182평<br/>(하단의 숫자는 이치로 와다(和田一郎) 박사 저 「조선의 토지제도 및 지세제도 조사보고서」 대정 9년 간 중의 숫자 같은 책 695쪽)<br/>3. 또 상 중 하 3종전의 양전척에 의한 면적과 (3종전이 다 각기 양전척으로 6척위1보 35보 평방위1결, 즉 1결은 210양전척평방 즉 4만4천1백평방척) 주척에 의한 면적(상전은 152,568평방주척 등)과의 관계에 의하여 상 중 하 3종 양전척의 실장을 곡척으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다.<br/>상전척 곡1·228척(0.66곡척×√152568(주척)÷210(양전척)=1.2276곡척etc.)<br/>중전척 곡1·537척<br/>하전척 곡1·848척<br/>이에 3종척의 실장은 2지계10<sup>(지폭)</sup> 운운의 연원에 부절을 합하듯이 맞는다.<br/>4. 수지척의 성질을 최초에 생각해 본 이는 정다산인데 그는 경세유표(권9 결부고변)에서 수지척을 규정하여 <cite no="01">“⋯⋯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cite>라 하였으니 즉 ‘지(指)’라는 것을 ‘뺌’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지를 뺌으로 해석한다면 우리가 본항 모두에 게출(揭出)한바 수지척에 관한 두 가지 자료 중 후자 즉 용비어천가의 20지·25지·30지 설을 설명할 수가 있으나 전자 즉 세종실록에 보이는 하연(河演) 상언의 2지계10 2지계5 3지계5 3지계10 설을 설명할 수가 없을 뿐더러(만일 지(指)를 뺌이라면 2지계10 등의 구차한 표현법을 취할 리가 없다) 3종척의 실장이 너무 길어져서 상전1결 152,568평방주척 등의 실적에 도저히 부합하지 아니하여 그 부당한 것이 적확한즉, 이는 그의 천려일실에 속하는 것이다. 다음에 수지척의 실장을 실제로 계산한 사람은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 박사인데(동문관판, 경제대사서 결부조 참조, 대정 3년 간), 그는 그의 계산 경로를 자세히 밝히지 아니하였으나 여하간에 용비어천가에 실려 있는 상 중 하 3종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와 결부 작성법에 의하여 계산하였다는 것인데 그 결과 1{{ruby|지장곡척1촌3분여|○○○○○○○○○}} 즉 1등전척1척장 2척6촌여를 얻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의 자료란 다른 것이 아니니, 3등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는 우리가 앞에서 사용한 것이오 결부 작성법이라는 것은 <cite no="02">“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ruby|實績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cite>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니 실적 44척1촌위속이라는 말은 실적 441척위1부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실적 4만4천1백척위1결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210척평방위1결(√44100=210) 즉 6척위1보, 35보평방위1결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당연히 우리가 얻은 결과와 부합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박사도 주척장은 곡6촌6분임을 알고 있다(앞서 든 사서 토지제도조 참조). 우리의 {{ruby|계산|○○}}에 틀림이 없는 한 박사가 얻은 결과는 오류이다. 그리고 박사는 {{ruby|1지|○○}}장곡척1촌3분여를 얻고는 ‘1지’의 처치에 곤란하여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곡1촌3분여에는 당치 않다), <cite no="03">“1지란 손가락 두 개의 폭이리라”</cite>고 부설(附說)하였으나 거북한 설명이다. 다음 이치로 와다 박사는 고려 결부를 논할 즈음에, 상 중 하 3종전의 평수만 산출하고 (전출. 방법은 3종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에 의하여), 3종수지척의 설명은 불가해라 하여 포기하였다(앞서 든 책 696쪽). 가와이 히로타미 박사의 논문이 계산의 경과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성강고농(盛岡高農) 카가미 야수노수케(鏡保之助) 교수가 다시 수지 척장의 계산을 시도하였는데(성강고등농림학교 창립 25주년 기념논총. 소화 3년 간. 「시대를 달리 한 결부제도 간의 맥락.」), 교수는 계산의 자료를 전혀 문헌비고에 시뢰(是賴)한 지라 같은 책 권148에 공교롭게도 어로지류를 범하여 있는바 세종 25년 찬성 하연 상언 중에 보이는 고려 결부제에 관한 숫자를 무비판하게 써서 계산을 하여(설상가상으로 씨의 계산법이 또한 황당무계하다) 결국 1지장 곡1촌2분7리1수 즉 1등척장2척5촌4분2리를 얻었다. 문헌비고만을 시뢰하였다 하지만 같은 책 중에는 앞서 든 어로차착(魚魯差錯)의 하연 상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 정당한 자료도 있으니 그것은 이조 숙종 35년 평천군 신완의 상소에 보이는 숫자로(같은 책 권142), 역시 용비어천가와 같이 <cite no="04">“實績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cite>의 설명법이다. 카가미씨도 한 번은 이 숫자를 들어서 계산을 하여 1지장곡5분9갑5수 즉 상전척장곡1척 2촌9분을 얻었으나 (사실은 우리가 얻은 결과와 당연히 부합하여야 할 것이지만 거기도 계산의 차착이 있어 근사하게밖에 못 되었다.) 박사 가와이 히로타미씨의 1지장1촌3분여에는 대단히 거리가 먼 지라 주장낭패(周章狼狽)하여 평천군소 중의 숫자를 오류라 하여 버리고, 앞서 든 것과 같이 어로차착의 하연 상언 중의 숫자를 취하여 계산한 결과, 우연히 1지장곡1촌2분7리1수를 얻으니 이것은 가와이 박사의 1지에 가까운 지라, 대희하고 다음엔 일보를 나아가 가와이 박사와 자기와의 상이(相異)는 박사의 계산이 부정한 탓이라고 정해 버렸다. 또, 1지장곡1촌2분7리1수를 얻고는 그 결과를 고려 결부법의 다른 요소에 유추하여 새로운 억설을 창조하였으나 본론에는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다급(多及)하지 않는다. 하여간에 수지척의 고구가 종래 이상과 같으므로 그 진의를 몰각할까 저어하여 다소 장황한 서술을 시도한 바이다.</blockquote>
|목차1-1해독문11번=
+
|목차1-1해독문11번=그런데 상 중 하 3종전의 실제 분포 상황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경상·전라도에서는 상전은 1000결 중에 12결 중 전은 100결 중에 12결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는 다 하전이었다. 또 경상·전라 이외의 도에는 상전은 절무하고 1000결 중에 12결의 중전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는 다 하전이었다. 즉 대범하게 말하자면 전국 전은 1결57묘의 획일적인 제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sup>(세종실록 12년 8월 무인조)</sup>
|목차1-1해독문12번=
+
|목차1-1해독문12번=다음 전분 3등법의 시비를 잠깐 검토하건대 대관절 3종전의 면적비는 16:25:36이요 그것들에서 동액의 조세를 (1결30두) 징수한다 하니 그렇다면 차등 3종전 동일면적의 생산량의 비는 1등전:2등전=25:16과, 2등전:3등전=26:25와의 연비 67:42:30(이 숫자는 후에 말할 바와 같이, 세종이 신양전법을 설정하라고 3종전법의 불합리를 논할 때에 든 숫자인데 그것은 당시 1결세액 30두가 가리키는 수 30을 편의상 하전에 배당하고 작성한 숫자로 개산(槪算)이다.)이 되어야 처음으로 수세의 공평을 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과연 3종양전척의 2지계10 2지계5 3지계5 3지계10과 3종전 동일면적의 수량과의 사이에 이러한 우연적인 신비적인 관계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 전연 생각지 못할 일이다. 실로 3종척의 결정, 따라서 또 그 평방으로 되는 지적(地積)의 결정은 가장 원시적인 자연발생적인 수 관념의 기초 위에 선 것이었다.
|목차1-1해독문13번=
 
|목차1-1해독문14번=
 
|목차1-1해독문15번=
 
|목차1-1해독문16번=
 
|목차1-1해독문17번=
 
|목차1-1해독문18번=
 
|목차1-1해독문19번=
 
|목차1-1해독문20번=
 
|목차1-1해독문21번=
 
|목차1-1해독문22번=
 
|목차1-1해독문23번=
 
|목차1-1해독문24번=
 
|목차1-1해독문25번=
 
|목차1-1해독문26번=
 
|목차1-1해독문27번=
 
|목차1-1해독문28번=
 
|목차1-1해독문29번=
 
|목차1-1해독문30번=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23번째 줄: 187번째 줄:
 
----
 
----
 
{{Layout1-2
 
{{Layout1-2
|목차1-2원문1번= @
+
|목차1-2원문1번={{TagSpage|103-2}}①一結當 收稅定額⋯⋯前揭 科田法 條文에서 본 것과 같이 田 一結當 收稅定額은 公田·私田을 勿論하고 水田 一結에는 糙米(粗米 即 玄米) 三十斗 旱田(밭) 一結에는 雜穀 三十斗다. 이는 上中下 三種田에 共通되는 法則이다. 即 田의 肥瘠差에 依하야 各々 다른 實積으로써 一結을 作成하야 가지고 그것들에서 同額의 徵稅를 하는 것이니 此를 稱하야 {{ruby|同科收租|○○○○}}라 한다. 一結三十斗라는 稅額은 元來 李太祖가 田稅制度 改革을 할 때에 麗末의 混亂狀態를 是正하야 高麗 太祖의 十分取 一主義를 復舊한 것이며<sup>(高麗史 卷七十八, 辛禑 十四年 七月 趙浚書 參照)</sup> 또 前揭 科田法 條文에 <cite no="05">「一結三十斗 以上의 橫斂을 하는 者는 〿으로 論한다」</cite> 하였으니 구태여 麗末 收稅의 高度 搾取的 實狀을 새삼스럽게 銓索하야 보지 않드라도 新法의 稅率이 從來의 混亂 狀態에 比하야 進步的인 役割을 한 것은 疑心할 餘地가 없다. 더욱이 새로 擡頭한 政權의 가장 有力한 人心 收纜策의 하나로서 田稅 輕減이 當然이 생각되였을 것을 推察컨댄 이 新 定稅率의 意義를 容易히 窺知할 수가 있다.
 +
|목차1-2원문2번={{TagSpage|103-3}}②損實踏驗法⋯⋯一結三十斗라는 것은 平常年의 稅額이오 不稔한 해에는 適當이 減額을 하게 되여 있으니 此所謂 {{ruby|損實法|○○○}}이오 損과 實을 決定함에는 實地 踏査를 要하는 것이니 此所謂 {{ruby|踏驗法|○○○}}이라. 損實踏驗法의 沿革을 보면, 먼저 恭讓王 三年에 科田法을 發布하면서 同年 五月에 따로 損實踏驗法을 發布하였으니 그 內容은 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 田制條에
 +
|목차1-2원문3번={{TagSpage|104-1}}<blockquote no="06">{{ruby|損實法|○○}} 十分爲律 損一分減一分租 損二分減二分租 以次准減 損至八分 全除其租 {{ruby|踏驗|○○}}則 其官守令審檢 辨報監司 監司差委官更審 監司·首領官又審之 如有踏驗不實者 罪之 各品科田損實則 令其田主 自審收租</blockquote>
 +
|목차1-2원문4번={{TagSpage|104-2}}라 하였다. 即 減收 每 一割에 稅 一割(三斗)을 減하야 減收八割에 이르러 免稅한다. 踏驗은 公田에 있어서는 먼첨 그 고을 守令이 此를 行하야 監司에게 報告한다. 監司는 그 報告의 正否을 鑑別하는 意味에서 多數의 委官(踏驗의 臨時委員이니 다른 고을의 留鄕品官 等으로써 此에 充當한다.)을 派遣하야 再審하고 다시 監司·首領官(監司의 補佐官)이 親審한다. 科田을 爲始한 諸私田의 踏驗은 其田主가 任意로 此를 行하도록 한다. 다음에 太祖 二年 更定損實之法은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
 +
|목차1-2원문5번={{TagSpage|104-3}}<blockquote no="07">一結內損二十負以下者 全收 損三十負以上者 隨其所損負數 減除 以至損七十負 則減七十負租 其餘實數依數收租 揖至八十負者 全除其租 一結不足之田 亦以負數 束數 分數十分 二分損者全收 三分以上損者 隨其所損 分數減除 以至七分損者 減七分 損至八分者全除</blockquote>
 +
|목차1-2원문6번={{TagSpage|104-4}}라 하였다. 恭讓王 三年의 損實法과 大同하나 一結 以上 一結 未滿의 田을 通하야 二割 以下의 減收를 無視한 것이 注目된다. 踏驗法은 前과 다름없다. 또 그 다음 太宗朝 更定損實踏驗法은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
 +
|목차1-2원문7번={{TagSpage|104-5}}<blockquote no="08">各道田地 擇廉幹品官 換道分差路驗 隨損給損 雖一分實 收一分租 一分損減一分租 其官守令 隨即擲簡 (摘奸) 敬差官出其不意 周行考察 不公踏驗者 罪之</blockquote>
 +
|목차1-2원문8번={{TagSpage|104-6}}라 하였다. 即 (一)委官을 他道 品官 中에서 任命하야 먼첨 此로써 踏驗을 行하게 할 것 (二)損實은 前과 같이 一割 減收부터 起算하는 代身 一割 實收에까지 미칠 것 (三)委官의 踏驗 結果를 守令이 檢覆할 것 (四)朝廷에서 特히 隨時 敬差官을 任命하야 更히 檢査할 것 等이라. 法規上 從來보담 甚히 嚴格해 진 것을 알겠다. 此法에 依한 各 損實年의 收稅額을 表示하면 다음과 같다.
 +
|목차1-2원문9번={{TagSpage|104-7}}<blockquote no="09">平常年 三〇斗 一割減收年 二七斗<br/>二割減收年 二四斗 三割減收年 二一斗<br/>四割減收年 一八斗 五割減收年 一五斗{{TagPage|105-1}}<br/>六割減收年 一二斗 七割減收年 九斗<br/>八割減收年 六斗 九割減收年 三斗</blockquote>
 +
|목차1-2원문10번={{TagSpage|105-2}}却說 各 損實踏驗法을 法規上으로 一瞥한다면 實로 盡善盡美의 感이 不無한데 그러면 그 實際는 果然 如何하얐을가. 먼첨 公田의 그것을 보자. 吾人은 損實踏驗法 自體가 발서 모든 缺陷을 包藏하고 있음을 본다. 即 踏驗은 거의 田의 一束一負마다 行하게 되여 있는데 此는 勞力上 果然 可能한 일일까. 또 損實法은 減收의 率에 應하야 減稅를 한다고 하지마는 그 減收의 率이라는 것이 果然 한 사람이 此를 斷定한다면 어떠한 사람도 다시 다룰 餘地가 없을 만큼 自明한 것일가. 여기에 無限의 混亂을 惹起할 機會가 있는 것이다.
 +
|목차1-2원문11번={{TagSpage|105-3}}第一 「守令이 親審한다」고 하지마는 한 사람의 守令이―그들의 守令으로서의 主要한 任務는 거의 每日 公人·私人의 賓客을 相對로 酒宴을 베푸는 데 盡한다고 하야도 그리 過言이 아닐 其守令들이―管內의 田을 親審한다는 것은 到底이 不可能한 일이다. 勢不得不 部下의 鄕吏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田畝에 派遣된 鄕吏란 全혀 文字 그대로 들에 놓인 虎狼이라 그들의 橫暴狼籍는 거의 筆舌에 盡치 못하는 것이 있다. 워낙 「守令의 親審」을 한댓자 事態에 別다름이 없는 것이지마는. 또 委官이라는 品官(地方에 蟠踞하는 士族) 出身의 多數한 臨時 委員은 隊를 成하야 田野之間을 橫行하게 되는데 그들 亦是 그 好惡에 쫓아 至極히 放恣하게 行動한다. 監司·首領官의 檢査 같은 것은 事實上 不可能한 일이오, 또 一道에 한두 사람의 敬差官이 派遣되였다고 하드래도 이 亦 事實上 無意味한 일이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大闕을 下直할 때만은 틀림없는 「敬差官」이었겠지마는 한번 田野에 오게 되면 鄕吏·委官과 조금도 가릴 바가 없게 되는 것이 普通이라. 드듸어 百姓들은 敬差官을 싫여하야 <cite no="06">「차라리 荒田에서 實稅를 바칠지언정 敬差官의 낱짝을 보기를 願하지 않게」</cite> 되였다<sup>(太宗實錄 三年 九月 丁酉條)</sup>. 世宗 二十三年 七月 右議政 申槩는 其上疏 中에서 當時 아직 下三道 以外의 地에 現行되고 있던 損實踏驗法의 實情을 論하여 <cite no="07">「委官의 損實踏驗이 泛濫이 已甚이라. 그리고도 酒肉支應<sup>(接待)</sup>의 弊가 甚巨하다. 書員·算士<sup>(다 鄕吏로써 充當한다)</sup>는 謀를 弄하며 姦{{TagPage|106-1}}을 肆하고 그 損實을 磨勘<sup>(査定)</sup>하는 文은 有를 無라 하며 無를 有라 하고 多를 少라 하며 少를 多라 하고 實田을 隱欺함이 每面<sup>(一邑에 邑及四面이 있다)</sup>에 數十結을 不下하며 또 其官<sup>(守令)</sup>이 損實踏驗의 費用이라 稱目하고 雜凡無名의 賦斂를 하는 것이 원 租稅보다 많다.」</cite>라고 하였지마는<sup>(世宗實錄 二十三年 七月 己亥條)</sup> 損實踏驗이란 大강 이와 같은 것이었다.
 +
|목차1-2원문12번={{TagSpage|106-2}}公田의 踏驗이 벌써 이러하였으니 私田의 그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私田의 踏驗은 科田法에 依하여 公田의 受給者가 此를 行하게 되였었는데 이 受給者인 不在地主들은 搾取의 再生產을 考慮할 餘地도 없이 踏驗을 苛酷히 하는 故로 中間에 法을 고처 私田도 官에서 踏驗하기로 하였다. 그러고 보니 佃客은 {{ruby|踏驗|●●}}하는 官人과 {{ruby|收租|●●}}하는 田主에 對하여 二重 應待를 하게 되여 (踏驗人 及 收租人에 對하여는 共히 發狂的인 應待를 必要하였다) 도리혀 罷弊할 뿐 아니라 田主側에서는 踏驗의 官人은 過輕하다고 줄창 不平을 하였다. 드듸어 太宗 十五年 八月 以後 私田의 田主踏驗을 復舊하였다. 元來 田主踏驗의 境遇에 田主가 苛酷한 踏驗을 하는 것은 勿論이지마는 때로 田主는 일부러 가을에 踏驗을 하지 않고 收穫 後 冬期 或은 明春에 와서 죄다 實數로 收租를 해가는 者도 많었다. 이 때문에 同年 九月에 이르러 踏驗 勵 行의 令을 申嚴하지 않으면 안 될 地境이었다. 後에 世宗 元年 七月에 다시 私田官 踏驗으로 變更하였는대 그 結果는 上述의 狀態를 再現하는 데 지나지 안 하였다<sup>(太宗實錄, 十五年 八月 甲戌條, 世宗實錄, 元年 七月 辛酉條)</sup>.
 +
|목차1-2원문13번={{TagSpage|106-3}}此等 損實踏驗法의 弊를 救濟하기 爲하여, 定額收稅法을 樹立한 것이 所謂 「貢法」이다.
  
|목차1-2해독문1번= @
+
|목차1-2해독문1번=①1결당 수세정액⋯⋯앞서 든 과전법 조문에서 본 것과 같이 전 1결당 수세정액은 공전·사전을 물론하고 수전 1결에는 조미(조미(粗米) 즉 현미) 30두 한전(밭) 1결에는 잡곡 30두다. 이는 상 중 하 3종전에 공통되는 법칙이다. 즉 전의 비척차(肥瘠差)에 의하여 각각 다른 실적으로써 1결을 작성하여 가지고 그것들에서 동액의 징세를 하는 것이니 이를 칭하여 {{ruby|동과수조|○○○○}}라 한다. 1결30두라는 세액은 원래 이태조가 전세제도 개혁을 할 때에 고려 말의 혼란 상태를 시정하여 고려 태조의 10분취 1주의를 복구한 것이며<sup>(고려사 권78, 신우 14년 7월 조준서 참조)</sup> 또 앞서 든 과전법 조문에 <cite no="05">“1결30두 이상의 횡렴을 하는 자는 〿으로 논한다”</cite> 하였으니 구태여 고려말 수세의 고도 착취적 실상을 새삼스럽게 전색(銓索)하여 보지 않더라도 신법의 세율이 종래의 혼란 상태에 비하여 진보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욱이 새로 대두한 정권의 가장 유력한 인심 수람책(收纜策)의 하나로서 전세 경감이 당연히 생각되었을 것을 추찰컨대 이 새로운 정세율의 의의를 용이하게 규지할 수가 있다.
 +
|목차1-2해독문2번=②손실답험법⋯⋯1결30두라는 것은 평상년의 세액이요 불임한 해에는 적당히 감액을 하게 되어 있으니 차소위 {{ruby|손실법|○○○}}이요 손과 실을 결정함에는 실지 답사를 요하는 것이니 차소위 {{ruby|답험법|○○○}}이라. 손실답험법의 연혁을 보면, 먼저 공양왕 3년에 과전법을 발포하면서 같은 해 5월에 따로 손실답험법을 발포하였으니 그 내용은 고려사 권78 식화지 전제조에
 +
|목차1-2해독문3번=<blockquote no="06">{{ruby|損實法|○○}} 十分爲律 損一分減一分租 損二分減二分租 以次准減 損至八分 全除其租 {{ruby|踏驗|○○}}則 其官守令審檢 辨報監司 監司差委官更審 監司·首領官又審之 如有踏驗不實者 罪之 各品科田損實則 令其田主 自審收租</blockquote>
 +
|목차1-2해독문4번=라 하였다. 즉 감수 매 1할에 세(稅) 1할(3두)을 감하여 감수 8할에 이르러 면세한다. 답험은 공전에 있어서는 먼저 그 고을 수령이 이를 행하여 감사에게 보고한다. 감사는 그 보고의 정부(正否)를 감별하는 의미에서 다수의 위관(답험의 임시위원이니 다른 고을의 유향품관 등으로써 이에 충당한다.)을 파견하여 재심하고 다시 감사·수령관(감사의 보좌관)이 친심한다. 과전을 위시한 모든 사전의 답험은 그 전주가 임의로 이를 행하도록 한다. 다음에 태조 2년 경정손실지법은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
 +
|목차1-2해독문5번=<blockquote no="07">一結內損二十負以下者 全收 損三十負以上者 隨其所損負數 減除 以至損七十負 則減七十負租 其餘實數依數收租 揖至八十負者 全除其租 一結不足之田 亦以負數 束數 分數十分 二分損者全收 三分以上損者 隨其所損 分數減除 以至七分損者 減七分 損至八分者全除</blockquote>
 +
|목차1-2해독문6번=라 하였다. 공양왕 3년의 손실법과 대동하나 1결 이상 1결 미만의 전을 통하여 2할 이하의 감수를 무시한 것이 주목된다. 답험법은 전과 다름없다. 또 그 다음 태종 조(朝) 경정손실답험법은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
 +
|목차1-2해독문7번=<blockquote no="08">各道田地 擇廉幹品官 換道分差路驗 隨損給損 雖一分實 收一分租 一分損減一分租 其官守令 隨即擲簡 (摘奸) 敬差官出其不意 周行考察 不公踏驗者 罪之</blockquote>
 +
|목차1-2해독문8번=라 하였다. 즉 (1)위관을 다른 도의 품관 중에서 임명하여 먼저 이로써 답험을 행하게 할 것 (2)손실은 전과 같이 1할 감수부터 기산(起算)하는 대신 1할 실수(實收)에까지 미칠 것 (3)위관의 답험 결과를 수령이 검복(檢覆)할 것 (4)조정에서 특히 수시 경차관을 임명하여 다시 검사할 것 등이라. 법규상 종래보다 심히 엄격해 진 것을 알겠다. 이 법에 의한 각 손실년의 수세액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
|목차1-2해독문9번=<blockquote no="09">平常年 三〇斗 一割減收年 二七斗<br/>二割減收年 二四斗 三割減收年 二一斗<br/>四割減收年 一八斗 五割減收年 一五斗<br/>六割減收年 一二斗 七割減收年 九斗<br/>八割減收年 六斗 九割減收年 三斗</blockquote>
 +
|목차1-2해독문10번=각설하고 각 손실답험법을 법규상으로 일별한다면 실로 진선진미의 감이 불무(不無)한데 그러면 그 실제는 과연 어떠하였을까. 먼저 공전의 그것을 보자. 우리는 손실답험법 자체가 벌써 모든 결함을 포장하고 있음을 본다. 즉 답험은 거의 전의 일속 일부마다 행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노력상 과연 가능한 일일까. 또 손실법은 감수의 율(率)에 응하여 감세를 한다고 하지마는 그 감수의 율이라는 것이 과연 한 사람이 이를 단정한다면 어떠한 사람도 다시 다룰 여지가 없을 만큼 자명한 것일까. 여기에 무한의 혼란을 야기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
|목차1-2해독문11번=제일 ‘수령이 친심한다’고 하지만 한 사람의 수령이―그들의 수령으로서의 주요한 임무는 거의 매일 공인·사인의 빈객을 상대로 주연(酒宴)을 베푸는 데 진(盡)한다고 하여도 그리 과언이 아닐 그 수령들이―관내의 전을 친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세불득불(勢不得不) 부하의 향리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전묘에 파견된 향리란 전혀 문자 그대로 들에 놓인 호랑이라 그들의 횡포 낭자(狼籍)는 거의 필설에 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워낙 ‘수령의 친심’을 한다고 해도 사태에 별다름이 없는 것이지만. 또 위관이라는 품관(지방에 반거하는 사족) 출신의 다수한 임시 위원은 무리를 이루어 전야지간을 횡행하게 되는데 그들 역시 그 호오에 좇아 지극히 방자하게 행동한다. 감사·수령관의 검사 같은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요, 또 한 도에 한두 사람의 경차관이 파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또한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대궐을 하직할 때만은 틀림없는 ‘경차관’이었겠지만 한번 전야에 오게 되면 향리·위관과 조금도 가릴 바가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 드디어 백성들은 경차관을 싫어하여 <cite no="06">“차라리 황전에서 실세를 바칠지언정 경차관의 낯짝을 보기를 원하지 않게”</cite> 되었다<sup>(태종실록 3년 9월 정유조)</sup>. 세종 23년 7월 우의정 신개(申槩)는 그 상소 중에서 당시 아직 하3도 이외의 땅에 현행되고 있던 손실답험법의 실정을 논하여 <cite no="07">“위관의 손실답험이 범람이 이심(已甚)이라. 그러고도 주육 지응<sup>(접대)</sup>의 폐가 심거하다. 서원·산사<sup>(다 향리로써 충당한다)</sup>는 꾀를 농하며 간(姦)을 사(肆)하고 그 손실을 마감<sup>(사정)</sup>하는 글은 유를 무라 하며 무를 유라 하고 다를 소라 하며 소를 다라 하고 실전을 은기(隱欺)함이 매 면<sup>(1읍에 읍 및 4면이 있다)</sup>에 수십결을 불하하며 또 그 관<sup>(수령)</sup>이 손실답험의 비용이라 칭목(稱目)하고 잡범 무명의 부렴을 하는 것이 원 조세보다 많다.”</cite>라고 하였지만<sup>(세종실록 23년 7월 기해조)</sup> 손실답험이란 대강 이와 같은 것이었다.
 +
|목차1-2해독문12번=공전의 답험이 벌써 이러하였으니 사전의 그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사전의 답험은 과전법에 의하여 공전의 수급자가 이를 행하게 되었었는데 이 수급자인 부재 지주들은 착취의 재생산을 고려할 여지도 없이 답험을 가혹히 하는 고로 중간에 법을 고쳐 사전도 관에서 답험하기로 하였다. 그러고 보니 전객은 {{ruby|답험|●●}}하는 관인과 {{ruby|수조|●●}}하는 전주에 대하여 이중 응대를 하게 되어 (답험인 및 수조인에 대하여는 공히 발광적인 응대를 필요하였다) 도리어 파폐할 뿐 아니라 전주측에서는 답험의 관인은 과경(過輕)하다고 줄창 불평을 하였다. 드디어 태종 15년 8월 이후 사전의 전주답험을 복구하였다. 원래 전주답험의 경우에 전주가 가혹한 답험을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때로 전주는 일부러 가을에 답험을 하지 않고 수확 후 동기(冬期) 혹은 명춘에 와서 죄다 실수(實數)로 수조를 해가는 자도 많았다. 이 때문에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답험 여행(勵行)의 령을 신엄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후에 세종 원년 7월에 다시 사전관 답험으로 변경하였는데 그 결과는 위에서 말한 상태를 재현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sup>(태종실록, 15년 8월 갑술조, 세종실록, 원년 7월 신유조)</sup>.
 +
|목차1-2해독문13번=이들 손실답험법의 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정액수세법을 수립한 것이 소위 ‘공법’이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32번째 줄: 220번째 줄:
 
----
 
----
 
{{Layout2
 
{{Layout2
|목차2원문1번= @
+
|목차2원문1번=
  
|목차2해독문1번= @
+
|목차2해독문1번=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41번째 줄: 229번째 줄:
 
----
 
----
 
{{Layout2-1
 
{{Layout2-1
|목차2-1원문1번= @
+
|목차2-1원문1번={{TagSpage|106-4}}「貢法」이란 中國 夏王朝에서 行하였다고 傳하는 什一의 定額田稅法이라. 그러나 世宗이 制定한 「貢法」이란 新法을 創始한 最初의 動機가 所謂 貢法에 있었을 다름이요 그 內容에 있어서는 所謂 夏朝의 貢法과 무척 다른 것이 되여버렸으니, 구태여 所謂 夏朝의 貢法을 說{{TagPage|107-1}}明할 必要를 느끼지 안는다. 다만 兩者는 定額稅法이라는 一點이 共通하다는 意味에서만 共通한 이름이 許容되는 것인가 한다.
 +
|목차2-1원문2번={{TagSpage|107-2}}世宗은 일직이 損實踏驗法의 弊를 熟知하고 此에 代할 新法을 考究하고 있었다. 世宗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일직이 集賢殿을 創設하여 其職掌의 一部分으로 古今의 典制를 硏究시키고 있었는데 마침내 從來 田稅法의 矯正策을 所謂 夏朝의 貢法에서 求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런데 實錄의 諸記事에 依하면 王 自身은 貢法에 對하여 非常한 關心을 보이고 있는 데 反하여, 그의 諸臣僚는 故意인지 無能인지 此新法에 對하여 甚히 冷淡한 態度를 가지고 있었다. 諸臣은 王의 貢法에 關한 諮問에 對하야 恒常 大部分은 反駁의 態度를 取하고 王이 다시 事理를 밝혀서 此를 辨하면 처음으로 「上敎允當이로소이다」하고 對答을 하야 그 無能을 發揮하고 있는 것이었다. 貢法 制定은 大部分 王 自身의 裁斷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過言이 아니다. 貢法이 그 發議 以來 二十數年을 經하여 처음으로 一般的 實施를 보게 된 까닭도 實로 此間의 事情에 起因하는 것이다.
 +
|목차2-1원문3번={{TagSpage|107-3}}世宗 十二年에 王은 貢法에 關한 案을 提示하고 此에 對한 意見을 널리 中外에 묻기로 하였다. 此時의 案으로는 從來의 損實踏驗法을 全廢하고 當時 實行되고 있던 上中下 三種田에서 年의 登否를 莫論하고 一律로 一結十斗를 徴하자 하는 것이었다. 王의 下問은 다음과 같은 結果를 招致하였다<sup>(實錄 八月 戊寅條)</sup>.
 +
|목차2-1원문4번={{TagSpage|107-4}}<table border="1" cellspacing="0">
  
|목차2-1해독문1번= @
+
<tr>
 +
<td>道別</td>
 +
<td>人別</td>
 +
<td>賛成</td>
 +
<td>不賛成</td>
 +
</tr> 
 +
 
 +
<tr>
 +
<td>京中</td>
 +
<td>二品以上官<br/>三品以下現職官<br/>同前職官</td>
 +
<td>九<br/>二五九<br/>四四三</td>
 +
<td>三〇<br/>三九三<br/>一一七</td>
 +
</tr> 
 +
 
 +
<tr>
 +
<td>開城府</td>
 +
<td>品官·村民</td>
 +
<td>一,一二三</td>
 +
<td>七一</td>
 +
</tr> 
 +
 
 +
<tr>
 +
<td>京畿道</td>
 +
<td>守令<br/>品官·村民</td>
 +
<td>二九<br/>一七,〇七六</td>
 +
<td>五<br/>二三六</td>
 +
</tr> 
 +
 
 +
<tr>
 +
<td>平安道</td>
 +
<td>守令<br/>品官·村民</td>
 +
<td>六<br/>一,三二六</td>
 +
<td>三六<br/>二八,四七四</td>
 +
</tr>   
 +
 
 +
<tr>
 +
<td>黃海道</td>
 +
<td>守令<br/>品官·村民</td>
 +
<td>一七<br/>四,四五四</td>
 +
<td>一七<br/>一五,六〇一</td>
 +
</tr>   
 +
 
 +
<tr>
 +
<td>忠淸道</td>
 +
<td>守令<br/>品官·村民</td>
 +
<td>三五<br/>六,九八二</td>
 +
<td>二八<br/>一四,〇一二</td>
 +
</tr>   
 +
 
 +
<tr>
 +
<td>江原道</td>
 +
<td>守令<br/>品官·村民</td>
 +
<td>五<br/>九三九</td>
 +
<td>一〇<br/>六,八八八</td>
 +
</tr>   
 +
 
 +
<tr>
 +
<td>咸吉道</td>
 +
<td>守令<br/>品官·村民</td>
 +
<td>三<br/>七五</td>
 +
<td>一五<br/>七,三八七</td>
 +
</tr> 
 +
 
 +
<tr>
 +
<td>慶尙道</td>
 +
<td>守令<br/>品官·村民</td>
 +
<td>五五<br/>三六,二六二</td>
 +
<td>一六<br/>三七七</td>
 +
</tr>
 +
 
 +
<tr>
 +
<td>全羅道</td>
 +
<td>守令<br/>品官·村民</td>
 +
<td>四二<br/>二九,五〇五</td>
 +
<td>一四<br/>二七五</td>
 +
</tr>
 +
 
 +
<tr>
 +
<td>計</td>
 +
<td></td>
 +
<td>九八,六五七(九八,六四五)</td>
 +
<td>七四,一四九(七四,〇〇三)</td>
 +
</tr> 
 +
 
 +
</table>
 +
|목차2-1원문5번={{TagSpage|108-2}}<blockquote no="10">備考. 各 道의 集計는 賛成 九八,六四五, 不賛成 七四, 〇〇三이 되어야 할 터인데 實錄의 計는 各各 九八,六五七 及 七四,一四九로 되여 있다. 아마 各 道 數字의 記載에 脫漏가 있는 모양이다.</blockquote>
 +
|목차2-1원문6번={{TagSpage|108-3}}이 時代에 있어 이런 性質의 問題에 對하여 이와 같이 一般의 民意를 數字的으로 무렀다는 것은 벌써 한 箇의 破格的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試問은 觀察使·守令을 通해서 行하여젔는데, 此에 對한 民意의 上達이 事實上 如何한 事情 아래서 具體化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左右間 이 數字에 信憑을 두고 보자. 全體를 通하여 賛成은 九萬八千餘人, 不賛成은 七萬四千餘人으로, 賛成이 多少 優勢이나, 此를 道別로 본다면, 京畿·慶尙·全羅 三道는 거의 다 賛成이요, 平安·江原·咸吉 三道는 거의 다 不賛成이요, 黃海·忠淸 二道는 不賛成派가 賛成派보다 훨신 優勢이다. 그 理由는 容易히 想像할 수 있는 것과 같이 大概 最初 三道는 土地生產力이 높아서 一結十斗의 定額稅는 從來의 損實法보담 有利하다고 생각된 까닭이요, 다음 三道는 正히 그 反對인 까닭이다. 그리고 最後의 二道는, 生產力은 대개 中이나 (或 最初의 三道와 伯仲하나), 一結十斗의 定額稅는 아직 萬全을 期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不賛成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貢法 그것을 一律로 排斥하는 것은 아니요 全國 內의 田을 通하여 絕對 無條件으로 一結十斗를 徵收한다는, 至極히 單純素朴한 方法에 對해서 不滿을 품은 뜻도 多分이 있었다. 何如間 今番試問에 依하여 貢法에 對한 一般의 好意는 充分이 證明되였다 할 수 있고, 今後로 남은 問題는 차라리 技術的인 改善問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목차2-1원문7번={{TagSpage|109-1}}그런데 이때 全國에 向하여 貢法의 賛否를 묻는 同時에, 廷臣에 對해서도 그 可否의 議論을 徵하였다. 可便의 論을 要約하면 大概 다음과 같다.
 +
|목차2-1원문8번={{TagSpage|109-2}}一. 委官·敬差官은 흔이 橫暴·無能·狹猾 三者 中의 一 以上 具有한 者니, 此弊를 矯正함에는 貢法만한 것이 없다.
 +
|목차2-1원문9번={{TagSpage|109-3}}二. 貢法의 全般的 即時 實行을 或 어렵다고 생각하거던 먼저 京畿 一二州郡에 此를 試驗하든지, 或 山間郡과 平地郡과의 各各 數十 郡에 此를 試驗하든지 하여, 그 成績을 보고 漸次 他에 미치게 하는 것이 如何한가.
 +
|목차2-1원문10번={{TagSpage|109-4}}三. 貢法을 行함에는 從來의 田의 等級을 그대로 하여서는 實行 不可能하니, 此際에 田을 九等으로 난호아 各 等田에 各各 다른 定額稅를 課하는 것이 如何한가.
 +
|목차2-1원문11번={{TagSpage|109-5}}이에 對하여 否便의 理論을 들으면 다음의 諸點에 要約할 수가 있다.
 +
|목차2-1원문12번={{TagSpage|109-6}}一. 生產力이 千差萬別한 全國 內 田을 通하여 一律로 定額稅 十斗을 課한다는 것은 不當하다. 勿論 從來일지라도 上中下 三種田에 對하여 ᅳ結當 同類의 課稅를 해왔지마는, 此는 各 一結의 面積에 廣狹이 있으며, 또 隨損給損(損에 따라 稅를 減함)이니만치 下田일지라도 何等의 不便이 없었다. 그런데 貢法의 一結十斗로 劃一한다면, 損키 쉬운 下田은 恒常 그 實收에 不相當한 高額의 稅를 바치게 될 것이다.
 +
|목차2-1원문13번={{TagSpage|109-7}}二. 富民은 많이 良田을 갖었으니 반드시 貢法을 歡迎할 것이요, 貧民은 많이 惡田을 갖었으니 반드시 貢法을 怨望할 것이다. 또 良田이 많은 全羅·慶尙道民은 貢法을 좋와할 것이나 他道는 다 貢法을 실허할 것이다.
 +
|목차2-1원문14번={{TagSpage|109-8}}三. 一結十斗란 損實法에 依하면 六割 以下 減收年의 稅額이다. 從來의 例에 徵하면 六割 以下 減收年이란 여간하여 없는 것이다. 이제 一結十斗로 定額한다면, 國庫의 大減收를 免치 못할 것이다.
 +
|목차2-1원문15번={{TagSpage|109-9}}四. 一結十斗로 定額한다면 國庫가 減收될 뿐 아니라 諸倉庫<sup>(宮中關係)</sup>·公須<sup>(地方政廳 費用)</sup>·衙祿(地方宮祿)·驛田 等의 收租도 大減收를 免치 못할 것이니, 勢不得已 此等에게{{TagPage|110-1}} 田을 加給하게 될 것이요, 그것은 또 軍資田<sup>(軍備用田)</sup>을 割讓하는 以外에 他道가 없으니, 自然 國防의 危機를 招來하게 된다.
 +
|목차2-1원문16번={{TagSpage|110-2}}五. 貢法을 實施함에는 田을 九等級에 난호아 全國的으로 量田을 한 後가 아니면 不可能하다.
 +
|목차2-1원문17번={{TagSpage|110-3}}六. 委官·敬差官의 弊는 此를 矯正하면 그만이다. 그 人選을 嚴하게 하고 그 待遇를 改善하면 足하지 안는가.
 +
|목차2-1원문18번={{TagSpage|110-4}}貢法 拒否論者 中에는 絕對 反對의 强硬論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意見을 보건댄, 大概는 技術上 彫琢에 依해서 解決될 性質의 것이었다. 또 貢法 賛成論者 中에도 今回의 提案에 새로 多大한 修正을 加한 後에 實施하자는 意見도 있었다.
 +
|목차2-1원문19번={{TagSpage|110-5}}八道의 賛否 數는 賛成便이 大端이 優勢하나, 否便의 數도 無視할 수 없을 程度이었고, 또 朝廷의 議論은 否便이 차라리 많았기 때문에 이 機會에 即時 從來의 法을 廢棄하고 貢法으로 變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番 問題는 單純이 한 試問으로 돌려 버리고, 世宗 十八年에 정작 貢法 制定을 着手할 때까지 六年 間 一切 廟議의 表面에는 上程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王 自身과 集賢殿을 僞始한 一部 臣僚 間에는 그 硏究가 進行되고 있었든 모양이다.
 +
 
 +
|목차2-1해독문1번=‘공법’이란 중국 하왕조(朝)에서 행하였다고 전하는 11의 정액전세법이라. 그러나 세종이 제정한 ‘공법’이란 새 법을 창시한 최초의 동기가 소위 공법에 있었을 따름이요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소위 하조(朝)의 공법과 무척 다른 것이 되어버렸으니, 구태여 소위 하조의 공법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양자는 정액세법이라는 하나의 점이 공통하다는 의미에서만 공통한 이름이 허용되는 것인가 한다.
 +
|목차2-1해독문2번=세종은 일찍이 손실답험법의 폐를 숙지하고 이에 대할 신법을 고구하고 있었다. 세종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찍이 집현전을 창설하여 이 직장의 일부분으로 고금의 전제를 연구시키고 있었는데 마침내 종래 전세법의 교정책을 소위 하조의 공법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실록의 모든 기사에 의하면 왕 자신은 공법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데 반하여, 그의 모든 신료는 고의인지 무능인지 이 신법에 대하여 심히 냉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신하는 왕의 공법에 관한 자문에 대하여 항상 대부분은 반박의 태도를 취하고 왕이 다시 사리를 밝혀서 이를 분별하면 처음으로 ‘상교 윤당이로소이다’하고 대답을 하여 그 무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법 제정은 대부분 왕 자신의 재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과언이 아니다. 공법이 그 발의 이래 20수년을 경하여 처음으로 일반적 실시를 보게 된 까닭도 실로 이러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
|목차2-1해독문3번=세종 12년에 왕은 공법에 관한 안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널리 중외에 묻기로 하였다. 이때의 안으로는 종래의 손실답험법을 전폐하고 땅시 실행되고 있던 상 중 하 3종전에서 연(年)의 등부(登否)를 막론하고 일률로 1결10두를 징하자 하는 것이었다. 왕의 하문(下問)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치하였다<sup>(실록 8월 무인조)</sup>.
 +
|목차2-1해독문4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
<td>도별</td>
 +
<td>인별</td>
 +
<td>찬성</td>
 +
<td>불찬성</td>
 +
</tr> 
 +
 
 +
<tr>
 +
<td>경중</td>
 +
<td>2품 이상 관<br/>3품 이하 현직 관<br/>앞과 같은 직관</td>
 +
<td>9<br/>259<br/>443</td>
 +
<td>30<br/>393<br/>117</td>
 +
</tr> 
 +
 
 +
<tr>
 +
<td>개성부</td>
 +
<td>품관·촌민</td>
 +
<td>1,123</td>
 +
<td>71</td>
 +
</tr> 
 +
 
 +
<tr>
 +
<td>경기도</td>
 +
<td>수령<br/>품관·촌민</td>
 +
<td>29<br/>17,076</td>
 +
<td>5<br/>236</td>
 +
</tr> 
 +
 
 +
<tr>
 +
<td>평안도</td>
 +
<td>수령<br/>품관·촌민</td>
 +
<td>6<br/>1,326</td>
 +
<td>36<br/>28,474</td>
 +
</tr>   
 +
 
 +
<tr>
 +
<td>황해도</td>
 +
<td>수령<br/>품관·촌민</td>
 +
<td>17<br/>4,454</td>
 +
<td>17<br/>15,601</td>
 +
</tr>   
 +
 
 +
<tr>
 +
<td>충청도</td>
 +
<td>수령<br/>품관·촌민</td>
 +
<td>35<br/>6,982</td>
 +
<td>28<br/>14,012</td>
 +
</tr>   
 +
 
 +
<tr>
 +
<td>강원도</td>
 +
<td>수령<br/>품관·촌민</td>
 +
<td>5<br/>939</td>
 +
<td>10<br/>6,888</td>
 +
</tr>   
 +
 
 +
<tr>
 +
<td>함길도</td>
 +
<td>수령<br/>품관·촌민</td>
 +
<td>3<br/>75</td>
 +
<td>15<br/>7,387</td>
 +
</tr> 
 +
 
 +
<tr>
 +
<td>경상도</td>
 +
<td>수령<br/>품관·촌민</td>
 +
<td>55<br/>36,262</td>
 +
<td>16<br/>377</td>
 +
</tr>
 +
 
 +
<tr>
 +
<td>전라도</td>
 +
<td>수령<br/>품관·촌민</td>
 +
<td>42<br/>29,505</td>
 +
<td>14<br/>275</td>
 +
</tr>
 +
 
 +
<tr>
 +
<td>계</td>
 +
<td></td>
 +
<td>98,657(98,645)</td>
 +
<td>74,149(74,003)</td>
 +
</tr> 
 +
 
 +
</table>
 +
|목차2-1해독문5번=<blockquote no="10">비고. 각 도의 집계는 찬성 98,645, 불찬성 74,003이 되어야 할 터인데 실록의 계는 각각 98,657 및 74,149로 되어 있다. 아마 각 도 숫자의 기재에 탈루가 있는 모양이다.</blockquote>
 +
|목차2-1해독문6번=이 시대에 있어 이런 성질의 문제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일반의 민의를 숫자적으로 물었다는 것은 벌써 한 개의 파격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문은 관찰사·수령을 통해서 행해졌는데, 이에 대한 민의의 상달이 사실상 여하한 사정 아래서 구체화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좌우간 이 숫자에 신빙을 두고 보자. 전체를 통하여 찬성은 9만8천여인, 불찬성은 7만4천여인으로, 찬성이 다소 우세이나, 이를 도별로 본다면, 경기·경상·전라 3도는 거의 다 찬성이요, 평안·강원·함길 3도는 거의 다 불찬성이요, 황해·충청 2도는 불찬성파가 찬성파보다 훨씬 우세이다. 그 이유는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대개 최초 3도는 토지생산력이 높아서 1결10두의 정액세는 종래의 손실법보다 유리하다고 생각된 까닭이요, 다음 3도는 정히 그 반대인 까닭이다. 그리고 최후의 2도는, 생산력은 대개 중(中)이나 (혹 최초의 3도와 백중하나), 1결10두의 정액세는 아직 만전을 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불찬성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공법 그것을 일률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요 전국 내의 전을 통하여 절대 무조건으로 1결10두를 징수한다는, 지극히 단순소박한 방법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뜻도 다분히 있었다. 하여간 이번 시문에 의하여 공법에 대한 일반의 호의는 충분히 증명되었다 할 수 있고, 금후로 남은 문제는 차라리 기술적인 개선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목차2-1해독문7번=그런데 이때 전국에 향하여 공법의 찬부를 묻는 동시에, 정신(廷臣)에 대해서도 그 가부의 의논을 징하였다. 가편(可便)의 논을 요약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
|목차2-1해독문8번=1. 위관·경차관은 흔히 횡포·무능·협활 3자 중의 하나 이상 구유한 자니, 이 폐를 교정함에는 공법만한 것이 없다.
 +
|목차2-1해독문9번=2. 공법의 전반적 즉시 실행을 혹 어렵다고 생각하거든 먼저 경기 12주군에 이를 시험하든지, 혹 산간군과 평지군과의 각각 십수 군에 이를 시험하든지 하여, 그 성적을 보고 점차 타(他)에 미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
|목차2-1해독문10번=3. 공법을 행함에는 종래의 전의 등급을 그대로 하여서는 실행 불가능하니, 차제에 전을 9등으로 나누어 각 등전에 각각 다른 정액세를 매기는 것이 어떠한가.
 +
|목차2-1해독문11번=이에 대하여 부편(否便)의 이론을 들면 다음의 점들로 요약할 수가 있다.
 +
|목차2-1해독문12번=1. 생산력이 천차만별한 전국 내 전을 통하여 일률로 정액세 10두를 매긴다는 것은 부당하다. 물론 종래일지라도 상 중 하 3종전에 대하여 1결당 동류의 과세를 해왔지만, 이는 각 1결의 면적에 광협이 있으며, 또 수손급손(손에 따라 세를 감함)인 만큼 하전일지라도 하등의 불편이 없었다. 그런데 공법의 1결10두로 획일한다면, 손(損)하기 쉬운 하전은 항상 그 실수(實收)에 불상당한 고액의 세를 바치게 될 것이다.
 +
|목차2-1해독문13번=2. 부민은 많이 양전을 가졌으니 반드시 공법을 환영할 것이요, 빈민은 많이 악전을 가졌으니 반드시 공법을 원망할 것이다. 또 양전이 많은 전라·경상도민은 공법을 좋아할 것이나 다른 도는 다 공법을 싫어할 것이다.
 +
|목차2-1해독문14번=3. 1결10두란 손실법에 의하면 6할 이하 감수년의 세액이다. 종래의 예에 징하면 6할 이하 감수년이란 여간하여 없는 것이다. 이제 1결10두로 정액한다면, 국고의 대감수를 면치 못할 것이다.
 +
|목차2-1해독문15번=4. 1결10두로 정액한다면 국고가 감수될 뿐 아니라 모든 창고<sup>(궁중관계)</sup>·공수<sup>(지방정청 비용)</sup>·아록(지방궁록)·역전 등의 수조도 대감수를 면치 못할 것이니, 세부득이 이들에게 전을 가급하게 될 것이요, 그것은 또 군자전<sup>(군비용전)</sup>을 할양(割讓)하는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으니, 자연 국방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
|목차2-1해독문16번=5. 공법을 실시함에는 전을 9등급에 나누어 전국적으로 양전을 한 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
|목차2-1해독문17번=6. 위관·경차관의 폐는 이를 교정하면 그만이다. 그 인선을 엄하게 하고 그 대우를 개선하면 족하지 않는가.
 +
|목차2-1해독문18번=공법 거부론자 중에는 절대 반대의 강경론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의견을 보건대, 대개는 기술상 조탁에 의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었다. 또 공법 찬성론자 중에도 이번의 제안에 새로 다대한 수정을 가한 후에 실시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
|목차2-1해독문19번=8도의 찬부 수는 찬성편이 대단히 우세하나, 부편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고, 또 조정의 의논은 부편이 차라리 많았기 때문에 이 기회에 즉시 종래의 법을 폐기하고 공법으로 변경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 문제는 단순히 한 시문으로 돌려 버리고, 세종 18년에 정작 공법 제정을 착수할 때까지 6년 깐 일절 묘의의 표면에는 상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 자신과 집현전을 위시한 일부 신료 간에는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50번째 줄: 446번째 줄:
 
----
 
----
 
{{Layout2-2
 
{{Layout2-2
|목차2-2원문1번= @
+
|목차2-2원문1번={{TagSpage|110-6}}實錄에 依하면, 世宗 十八年 五月 丁亥에 王은 갑작이 領議政 黃喜 以下를 불러, 貢法의 節目을 議論케 하였다. 大關切 前回 貢法 試問 失敗의 主原因은 어듸 있었느냐 하면 全國內田에서 全然 劃一的으로 一結十斗의 定額稅를 課하자 하는 데 있었다. 勿論 田에 上中下의 三種이 있고, 그들 一結의 面積에는 廣狹의 差가 있으나, 上中田은 오히려 例外요 全國內田은 거의 下田 一種이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그 生產力에 千差萬別이 있는 一切의 田에서 劃一的으로, 더구나 豊凶을 不問하고 一律로 一結十斗를 課하고자 한 것은 오히려 無謀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前回의 失敗에 鑑하여 黃喜 等의 議는 먼저 田의 等級 制定(此를 {{ruby|田品等第|○○○○}}라 稱한다)으로 注意를 돌렸다. 가로대
 +
|목차2-2원문2번={{TagSpage|110-7}}<blockquote no="11">一. 土地生產力의 高下에 依하여 國內의 道를 三等으로 區分한다. 慶尙·全羅·忠淸의 南三道를 最高로 看做{{TagPage|111-1}}하여 {{ruby|上等道|○○○}}라 하고, 京畿·江原·黃海의 中三道를 그 다음이라 하여 {{ruby|中等道|○○○}}라 하고, 平安·咸吉의 北二道를 最下라 하여 {{ruby|下等道|○○○}}라 한다.<br/>二. 各 等道의 田은 從來의 導行帳(土地臺帳)을 憑據하여 다시 三等級으로 區分한다.<br/>三. 徃年의 損實數 及 公家 豫算額을 參酌하여 三等道 三等田의 稅額을 各定한다.</blockquote>
 +
|목차2-2원문3번={{TagSpage|111-2}}고 云々하였다. 王은 그의 意見을 可하다 하여 이 原則에 依한 具體案을 作成하도록 閏六月 己卯에 「貢法詳定所」라는 委員會를 設置케 하였다. 貢法詳定所의 原案은 十月 丁卯에 戶曹를 거처 上啓된 後, 多少의 修正을 겪어 翌 十九年 七月 丁酉에 中外에 發布하게 되었으니, 要項은 如左하다.
 +
|목차2-2원문4번={{TagSpage|111-3}}一. 稅額
 +
|목차2-2원문5번={{TagSpage|111-4}}<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
<td></td>
 +
<td>上田一結</td>
 +
<td>中田一結</td>
 +
<td>下田一結</td>
 +
</tr> 
  
|목차2-2해독문1번= @
+
<tr>
 +
<td>上等道(慶·全·忠)</td>
 +
<td>二〇斗</td>
 +
<td>一八斗</td>
 +
<td>一六斗</td>
 +
</tr> 
 +
 
 +
<tr>
 +
<td>中等道(京·江·黃)</td>
 +
<td>一八斗</td>
 +
<td>一六斗</td>
 +
<td>一四斗</td>
 +
</tr> 
 +
 
 +
<tr>
 +
<td>下等道(成·平)</td>
 +
<td>一六斗</td>
 +
<td>一四斗</td>
 +
<td>一二斗</td>
 +
</tr> 
 +
 
 +
</table>       
 +
|목차2-2원문6번={{TagSpage|111-5}}<blockquote no="12">但一. 濟州島는 地瘠한 故로 三等田을 區別치 않고, 一律로 一結十斗를 課한다.<br/>二. 三種田에 다 水田·旱田을 區別하야 水田은 糙米, 旱田은 黃豆(大豆)를 한다.</blockquote>
 +
|목차2-2원문7번={{TagSpage|111-6}}二. 免稅<br/>一田을 {{ruby|全部|○○}} 休耕한 境遇 及 一戶의 所耕이 {{ruby|全部|○○}} 損失된 境遇에 限하여 耕作人의 申告에 依하여 守令이 親審한 後 免稅한다.
 +
|목차2-2원문8번={{TagSpage|111-7}}三. 田의 移動<br/>(가). 元籍 所載 水田·旱田은 其後 地目이 事實上 變更된다 할지라도 改量하기 前에는 그 變更을 認定치 않고 元籍을 쪼차 收稅한다.<br/>(나). 加耕田은 守令이 每歳 親密하여 田籍에 續錄한다.<br/>(다). 無故이 休耕 二箇年에 及하는 境遇에는 告發人{{TagPage|112-1}}에 其休耕田을 奪與한다.
 +
|목차2-2원문9번={{TagSpage|112-2}}四. 陳損의 審驗이 不實하며, 加耕田을 隨時 續錄치 안는 守令은 罪한다.
 +
|목차2-2원문10번={{TagSpage|112-3}}右法은 中外에 發布되여, 곧 實行에 옮길려고 하였으나, 마침 공교롭게 世宗 十九年은 全國的으로 大凶이 들어 所定의 稅額을 一律로 强行할 수가 없게 되였다. 貢法 反對論者들은 이런 機會를 타서 곧 喧々囂々의 論을 이르키였다. 王은 不得已 八月 乙酉에 傳旨하여 貢法을 全然 斷念하고 從來의 損實法을 繼續하기로 하였다. 傳旨와 함께 發한 王의 談話는,
 +
|목차2-2원문11번={{TagSpage|112-4}}<blockquote no="13">貢法 考古參今 與大臣議定 本欲便於民也 予以否德 在位二十餘年 未甞有一年之豐 連歲凶歉 後世(歲)之豐 亦未必也 此法斷不可行也 然 此法既定 頒于中外 則 後世子孫 必有可行之時云々.</blockquote>
 +
|목차2-2원문12번={{TagSpage|112-5}}이라고 하여, 貢法 施行을 後世 子孫에게 미루어 버렸으니 오래동안의 計畫은 다시 百尺의 深淵으로 드러간 셈이었다. 그러나 一便 생각컨대, 年의 豐凶에 依하여 貢法의 實施 能否가 決定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곧 所定 貢法의 立法上 缺陷을 暗示하는 것이었다.
 +
 
 +
|목차2-2해독문1번=실록에 의하면, 세종 18년 5월 정해에 왕은 갑자기 영의정 황희 이하를 불러, 공법의 절목을 의논하게 하였다. 대관절 전 회 공법 시문 실패의 주원인은 어디 있었느냐 하면 전국 내 전에서 전연 획일적으로 1결10두의 정액세를 부과하자 하는 데 있었다. 물론 전에 상 중 하의 3종이 있고, 그들 1결의 면적에는 광협의 차가 있으나, 상중전은 오히려 예외요 전국 내 전은 거의 하전 1종이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그 생산력에 천차만별이 있는 일절의 전에서 획일적으로, 더구나 풍흉을 불문하고 일률로 1결10두를 부과하고자 한 것은 오히려 무모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 회의 실패에 감(鑑)하여 황희 등의 의(議)는 먼저 전의 등급 제정(이를 {{ruby|전품등제|○○○○}}라 칭한다)으로 주의를 돌렸다. 가로대
 +
|목차2-2해독문2번=<blockquote no="11">1. 토지생산력의 고하(高下)에 의하여 국내의 도를 3등으로 구분한다. 경상·전라·충청의 남3도를 최고로 간주하여 {{ruby|상등도|○○○}}라 하고, 경기·강원·황해의 중3도를 그 다음이라 하여 {{ruby|중등도|○○○}}라 하고, 평안·함길의 북2도를 최하라 하여 {{ruby|하등도|○○○}}라 한다.<br/>2. 각 등도의 전은 종래의 도행장(토지대장)을 빙거하여 다시 3등급으로 구분한다.<br/>3. 왕년의 손실 수 및 공가 예산액을 참작하여 3등도 3등전의 세액을 각정(各定)한다.</blockquote>
 +
|목차2-2해독문3번=고 운운하였다. 왕은 그의 의견을 옳다 하여 이 원칙에 의한 구체안을 작성하도록 윤6월 기묘에 ‘공법상정소’라는 위원회를 설치하게 하였다. 공법상정소의 원안은 10월 정묘에 호조를 거쳐 상계된 후, 다소의 수정을 겪어 익 19년 7월 정유에 중외에 발포하게 되었으니, 요항은 다음과 같다.
 +
|목차2-2해독문4번=1. 세액
 +
|목차2-2해독문5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
<td></td>
 +
<td>상전 1결</td>
 +
<td>중전 1결</td>
 +
<td>하전 1결</td>
 +
</tr> 
 +
 
 +
<tr>
 +
<td>상등도(경·전·충)</td>
 +
<td>20두</td>
 +
<td>18두</td>
 +
<td>16두</td>
 +
</tr> 
 +
 
 +
<tr>
 +
<td>중등도(경·강·황)</td>
 +
<td>18두</td>
 +
<td>16두</td>
 +
<td>14두</td>
 +
</tr> 
 +
 
 +
<tr>
 +
<td>하등도(함·평)</td>
 +
<td>16두</td>
 +
<td>14두</td>
 +
<td>12두</td>
 +
</tr> 
 +
 
 +
</table>
 +
|목차2-2해독문6번=<blockquote no="12">단 1. 제주도는 지척(地瘠)한 고로 3등전을 구별하지 않고, 일률로 1결10두를 부과한다.<br/>2. 3종전에 다 수전·한전을 구별하여 수전은 조미, 한전은 황두(대두)를 한다.</blockquote>
 +
|목차2-2해독문7번=2. 면세<br/>1전을 {{ruby|전부|○○}} 휴경한 경우 및 1척의 소경이 {{ruby|전부|○○}} 손실된 경우에 한하여 경작인의 신고에 의하여 수령이 친심한 후 면세한다.
 +
|목차2-2해독문8번=3. 전의 이동<br/>(가). 원적 소재 수전·한전은 그 후 지목(地目)이 사실상 변경된다 할지라도 개량하기 전에는 그 변경을 인정하지 않고 원적을 좇아 수세한다.<br/>(나). 가경전은 수령이 매 해 친밀하여 전적에 속록한다.<br/>(다). 무고하게 휴경 2개년에 미치는 경우에는 고발인에 이 휴경전을 탈여(奪與)한다.
 +
|목차2-2해독문9번=4. 진손(陳損)의 심험이 부실하며, 가경전을 수시 속록하지 않는 수령은 죄한다.
 +
|목차2-2해독문10번=이 법은 중외에 발포되어, 곧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으나, 마침 공교롭게 세종 19년은 전국적으로 대흉이 들어 소정의 세액을 일률로 강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공법 반대론자들은 이런 기회를 타서 곧 훤훤효효의 논을 일으켰다. 왕은 부득이 8월 을유에 전지하여 공법을 전연 단념하고 종래의 손실법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전지와 함께 발한 왕의 담화는,
 +
|목차2-2해독문11번=<blockquote no="13">貢法 考古參今 與大臣議定 本欲便於民也 予以否德 在位二十餘年 未甞有一年之豐 連歲凶歉 後世(歲)之豐 亦未必也 此法斷不可行也 然 此法既定 頒于中外 則 後世子孫 必有可行之時云々.</blockquote>
 +
|목차2-2해독문12번=이라고 하여, 공법 시행을 후세 자손에게 미루어 버렸으니 오랫동안의 계획은 다시 백척의 심연으로 들어간 셈이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건대, 연(年)의 풍흉에 의하여 공법의 실시 능부(能否)가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곧 소정(所定) 공법의 입법상 결함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59번째 줄: 537번째 줄:
 
----
 
----
 
{{Layout2-3
 
{{Layout2-3
|목차2-3원문1번= @
+
|목차2-3원문1번={{TagSpage|112-6}}翌 二十年은 多幸이 豊年이었다. 前後 近 十年을 두고 硏究가 거듭되든 貢法은 一時的 事情에 依하여 暫間 그 施行을 보지 못하고 後世 子孫에게 希望을 두었으나, 이런 機會를 타서 다시 廟議에 上程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에도 勿論 反對者가 많았고, 或은 貢法을 實施함에는 모름직이 徃年과 같이 國民 一般에 諮問한 後에 할 것이라 하는 者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圖大事者는 不謀於衆이라 하고 七月 癸巳에 드디어 決議하여 前年에 頒布한 節目에 쫓아 먼저 慶尙·全羅의 一部에 此를 試驗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實로 貢法 實施의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二年 間의 試驗期를 지나, 成績은 良好하다고 認定된 故로 二十二年부터 慶尙·全羅 兩道는 一般的으로 貢法의 施行을 보게 되였든 것이다.<sup>(實錄 五月 己酉條)</sup>
 +
|목차2-3원문2번={{TagSpage|112-7}}同年 八月 己亥에 貢法의 節目을 多少 修正하였으니, 그 內容은 다음과 같다.
 +
|목차2-3원문3번={{TagSpage|112-8}}一. 收稅額
 +
|목차2-3원문4번={{TagSpage|113-1}}<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
<td></td>
 +
<td></td>
 +
<td>上·中田一結</td>
 +
<td>下田一結</td>
 +
</tr> 
 +
 
 +
<tr>
 +
<td>上等道(慶尙·全羅道)</td>
 +
<td>上等官<br/>中等官<br/>下等官</td>
 +
<td>二〇斗<br/>一九斗<br/>一八斗</td>
 +
<td>一七斗<br/>一六斗<br/>一五斗</td>
 +
</tr>       
 +
 
 +
<tr>
 +
<td>中等道(忠淸·京畿·黃海道)</td>
 +
<td>上等官<br/>中等官<br/>下等官</td>
 +
<td>一八斗<br/>一七斗<br/>一六斗</td>
 +
<td>〿一五斗<br/>一四斗<br/>一三斗</td>
 +
</tr> 
 +
 
 +
<tr>
 +
<td>下等道(江原·咸吉·平安道)</td>
 +
<td>上等官<br/>中等官<br/>下等官</td>
 +
<td>一七斗<br/>一六斗<br/>一五斗</td>
 +
<td>一四斗<br/>一三斗<br/>一二斗</td>
 +
</tr> 
 +
         
 +
</table>
 +
|목차2-3원문5번={{TagSpage|113-2}}<blockquote no="14">〿實錄에 1〇斗로 적혔으나, 前後 關係로 一五斗인 것이 自明하다.<br/>注意. 一. 道의 分等法이 十九年의 그것보담 一層 自然的 生產力의 差異에 가깝게 되었다.<br/>二. 各 等道 가운데서 다시 그 生產力의 差異에 依하여 三等官의 區別을 세워 節目을 더 精細히 하였다.</blockquote>
 +
|목차2-3원문6번={{TagSpage|113-3}}二. 上中田 同額 收稅의 辨<br/>中田의 稅額을 上田의 그것에까지 끌어올렸다. 이것은 上中田은 本 地品의 差異가 不相遠할 뿐더러 그 面積의 差異(16~25)가 中下田 間의 그것(25~26)에 比하여 적고, 貢法 以前은 勿論 同科 收租이었었는 故로, 지금 이것을 還元하여도 相關이 없다. 但, 下田은 貢法 以前에 面積을 널리 하여 上中田과 同科 收租를 해왔었으나, 암만 하여도 下田은 陳損키 쉬운 것이니, 이는 從來와 같이 上中田과 區別한다.
 +
|목차2-3원문7번={{TagSpage|113-4}}三. 休耕田은 陳告에 依하여 守令이 覈實하고, 一部 起耕의 것은 그 起耕 數에 限하여 課稅한다.
 +
|목차2-3원문8번={{TagSpage|113-5}}四. 災傷의 「衆所共知處」는 監司의 啓聞에 依하여 敬差官을 派하여 覈實한 後 其損傷分만큼 減稅한다.<br/>注意. 右 休耕田, 災傷田에 關한 規定은 十九年의 것(其 第二條)에 比하여 幾分 間 緩和된 感이 있으나, 이 條項이 實際로 發動을 보기에는 매우 困難하리라는 것은 容易이 想像할 수가 있다.
 +
|목차2-3원문9번={{TagSpage|113-6}}五. 其他 條件은 從來의 法에 쫓는다.
 +
|목차2-3원문10번={{TagSpage|113-7}}이 修正案은 우선 現在 貢法이 實施되여 있는 慶尙·全羅의 兩道에 適用되고, 다음 翌 二十六年부터 忠淸道도 全般的으로 貢法의 施行을 보게 되였다.<sup>(實錄 七月 乙亥條)</sup>
 +
 
 +
|목차2-3해독문1번=익 20년은 다행히 풍년이었다. 전후 근 10년을 두고 연구가 거듭되던 공법은 일시적 사정에 의하여 잠깐 그 시행을 보지 못하고 후세 자손에게 희망을 두었으나, 이런 기회를 타서 다시 묘의에 상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에도 물론 반대자가 많았고, 혹은 공법을 실시함에는 모름지기 왕년과 같이 국민 일반에 자문한 후에 할 것이라 하는 자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도대사자(圖大事者)는 불모어중(不謀於衆)이라 하고 7월 계사에 드디어 결의하여 전년에 반포한 절목에 좇아 먼저 경상·전라의 일부에 이를 시험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실로 공법 실시의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2년 간의 시험기를 지나, 성적은 양호하다고 인정된 고로 22년부터 경상·전라 양도는 일반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sup>(실록 5월 기유조)</sup>
 +
|목차2-3해독문2번=같은 해 8월 기해에 공법의 절목을 다소 수정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목차2-3해독문3번=1. 수세액
 +
|목차2-3해독문4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
<td></td>
 +
<td></td>
 +
<td>상·중전 1결</td>
 +
<td>하전 1결</td>
 +
</tr> 
  
|목차2-3해독문1번= @
+
<tr>
 +
<td>상등도(경상·전라도)</td>
 +
<td>상등관<br/>중등관<br/>하등관</td>
 +
<td>20두<br/>19두<br/>18두</td>
 +
<td>17두<br/>16두<br/>15두</td>
 +
</tr>       
 +
 
 +
<tr>
 +
<td>중등도(충청·경기·황해도)</td>
 +
<td>상등관<br/>중등관<br/>하등관</td>
 +
<td>18두<br/>17두<br/>16두</td>
 +
<td>〿15두<br/>14두<br/>13두</td>
 +
</tr> 
 +
 
 +
<tr>
 +
<td>하등도(강원·함길·평안도)</td>
 +
<td>상등관<br/>중등관<br/>하등관</td>
 +
<td>17두<br/>16두<br/>15두</td>
 +
<td>14두<br/>13두<br/>12두</td>
 +
</tr> 
 +
         
 +
</table>
 +
|목차2-3해독문5번=<blockquote no="14">〿실록에 10두로 적혔으나, 전후 관계로 15두인 것이 자명하다.<br/>주의. 1. 도의 분등법이 19년의 그것보다 일층 자연적 생산력의 차이에 가깝게 되었다.<br/>2. 각 등도 가운데서 다시 그 생산력의 차이에 의하여 3등관의 구별을 세워 절목을 더 정세히 하였다.</blockquote>
 +
|목차2-3해독문6번=2. 상중전 동액 수세의 변<br/>중전의 세액을 상전의 그것에까지 끌어올렸다. 이것은 상중전은 본 지품의 차이가 불상원(不相遠)할 뿐더러 그 면적의 차이(16~25)가 중하전 간의 그것(25~26)에 비하여 적고, 공법 이전은 물론 동과 수조였었는 고로, 지금 이것을 환원하여도 상관이 없다. 단, 하전은 공법 이전에 면적을 널리 하여 상중전과 동과 수조를 해왔었으나, 암만 하여도 하전은 진손하기 쉬운 것이니, 이는 종래와 같이 상중전과 구별한다.
 +
|목차2-3해독문7번=3. 휴경전은 진고(陳告)에 의하여 수령이 핵실하고, 일부 기경의 것은 그 기경 수에 한하여 과세한다.
 +
|목차2-3해독문8번=4. 재상(災傷)의 ‘중소공지처’는 감사의 계문에 의하여 경차관을 파(派)하여 핵실한 후 이 손상분만큼 감세한다.<br/>주의. 이 휴경전, 재상전에 관한 규정은 19년의 것(그 제2조)에 비하여 기분(幾分) 간 완화된 감이 있으나, 이 조항이 실제로 발동을 보기에는 매우 곤란하리라는 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가 있다.
 +
|목차2-3해독문9번=5. 기타 조건은 종래의 법에 좇는다.
 +
|목차2-3해독문10번=이 수정안은 우선 현재 공법이 실시되어 있는 경상·전라의 두 도에 적용되고, 다음 익 26년부터 충청도도 전반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보게 되었다.<sup>(실록 7월 을해조)</sup>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68번째 줄: 624번째 줄:
 
----
 
----
 
{{Layout3
 
{{Layout3
|목차3원문1번= @
+
|목차3원문1번=  
  
|목차3해독문1번= @
+
|목차3해독문1번=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77번째 줄: 633번째 줄:
 
----
 
----
 
{{Layout3-1
 
{{Layout3-1
|목차3-1원문1번= @
+
|목차3-1원문1번={{TagSpage|114-1}}①從來 貢法의 缺陷
 +
|목차3-1원문2번={{TagSpage|114-2}}慶尙·全羅 兩道는 其一部分은 世宗 二十年부터, 其全部는 二十二年부터, 그리고 忠淸道는 二十三年부터 各々 貢法이 實施되였지마는, 그 實施 貢法에는 幾多의 缺陷이 包藏되여 있었다.
 +
|목차3-1원문3번={{TagSpage|114-3}}第一로 貢法은 從來의 田品 三等別主義에 立脚되어 있다. 그中 上中二種田은 本千結에 一二結 或百結에 一二結의 良田인 만큼, 그다지 豊凶이 있을 理가 없고, 따라서 此에 賦課된 一結二十斗 乃至 十五斗의 定額稅(前節 三叅照)는, 貢法 以前의 一結三十斗에 比하면 實로 莫大한 輕減이었다. 그 대신 下田은 年의 豊凶에 依하여 그 收穫이 顯著이 左右되는 만큼, 一結十七斗 乃至 十二斗의 定額稅(同上 叅照)는 貢法 以前에 比하여 오히려 大端한 增稅를 意味하는 것이었다. 또 如何한 惡田이라도 下等田보담 다시 나려갈 수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二十三年 七月 己亥 右議政 申槩의 上疏는 這問의 消息을 傳하고 있다. 即 그에 依하면 慶尙·全羅의 試驗 成績을 보면 上中田의 所有者는 貢法을 歡迎하고, 下田의 所有者는 此를 憎惡하는 것이었다. 上中田의 所有者는 勿論 富者요 下田의 所有者는 貧者이다. 다시 各 道의 損實法 時의 最高 收稅額과, 貢法 實施에 依하여 {{ruby|實現될|○○○}} {{ruby|額|○}}과를 比較 表示하면 다음과 같았다.<sup>(申의 疏中의 數字)</sup>但, 慶尙·全羅 二道의 數字는 勿論 貢法 實施에 依하여 이미 {{ruby|實現된|○○○}} {{ruby|數|○}}字다.
 +
|목차3-1원문4번={{TagSpage|114-4}}<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
<td></td>
 +
<td>損實法</td>
 +
<td>損實法</td>
 +
<td>貢法에 依하여 實現될 額(B)</td>
 +
<td>B에서 A를 減한 額(C)</td>
 +
<td>A:C</td>
 +
</tr>
 +
 
 +
<tr>
 +
<td></td>
 +
<td>年次</td>
 +
<td>最高 收稅額(A)</td>
 +
<td></td>
 +
<td></td>
 +
<td></td>
 +
</tr>     
 +
 
 +
<tr>
 +
<td>慶尙道</td>
 +
<td>世宗 十六年</td>
 +
<td>一六九,八一一 米豆幷石</td>
 +
<td>二五七,七二八 米豆幷石</td>
 +
<td>八七,九一七 米豆幷石</td>
 +
<td>五三%</td>
 +
</tr>   
 +
 
 +
<tr>
 +
<td>全羅道</td>
 +
<td>仝右</td>
 +
<td>一五八,一八四 米豆幷石</td>
 +
<td>二六八,九八六 米豆幷石</td>
 +
<td>一一〇,八〇三 米豆幷石</td>
 +
<td>七〇%</td>
 +
</tr>   
 +
 
 +
<tr>
 +
<td>忠淸道</td>
 +
<td>世宗 二十二年</td>
 +
<td>九〇,四五一 米豆幷石</td>
 +
<td>一八七,八三九 米豆幷石</td>
 +
<td>九七,三八八 米豆幷石</td>
 +
<td>一〇七%</td>
 +
</tr>   
 +
 
 +
<tr>
 +
<td>黃海道</td>
 +
<td>仝右</td>
 +
<td>四一,五七三 米豆幷石</td>
 +
<td>一四三,三三〇 米豆幷石</td>
 +
<td>一〇一,七五七 米豆幷石</td>
 +
<td>二四五%</td>
 +
</tr>   
 +
 
 +
<tr>
 +
<td>江原道</td>
 +
<td>仝右</td>
 +
<td>二〇,〇九九 米豆幷石</td>
 +
<td>三一,四〇七 米豆幷石</td>
 +
<td>一一,三〇八 米豆幷石</td>
 +
<td>五六%</td>
 +
</tr>   
 +
 
 +
<tr>
 +
<td>京畿道</td>
 +
<td>世宗 十六年</td>
 +
<td>三七,三九〇 米豆幷石</td>
 +
<td>五〇,二〇〇 米豆幷石</td>
 +
<td>一二,八一〇 米豆幷石</td>
 +
<td>三四%</td>
 +
</tr>   
  
|목차3-1해독문1번= @
+
<tr>
 +
<td>咸吉道</td>
 +
<td>世宗 二十二年</td>
 +
<td>二九,二四四 米豆幷石</td>
 +
<td>五六,二三二 米豆幷石</td>
 +
<td>二六,九八八 米豆幷石</td>
 +
<td>九二%</td>
 +
</tr>   
 +
 
 +
<tr>
 +
<td>平安道</td>
 +
<td>仝右</td>
 +
<td>五四,七四六 米豆幷石</td>
 +
<td>一四二,三三九 米豆幷石</td>
 +
<td>八七,五九三 米豆幷石</td>
 +
<td>一五九%</td>
 +
</tr> 
 +
 
 +
<tr>
 +
<td>計</td>
 +
<td></td>
 +
<td></td>
 +
<td>一,一三八,〇六一 米豆幷石</td>
 +
<td></td>
 +
<td></td>
 +
</tr>     
 +
 
 +
</table>
 +
|목차3-1원문5번={{TagSpage|115-2}}即 貢法에 依한 見積額은 損實時 最高額보담도 三割四分 乃至 二十四割五分의 大增稅가 된다. 이는 結局 무엇을 意味하는 것인가. 從來의 損實法은 極히 恣意的인 것이라고 하지마는, 그리고 또 正稅 以外에 갖인 非合法的 收斂을 同伴하는 것이라고 하지마는, 國庫에 바치는 稅額은 事實上 恒常 五割 以上 減收의 例(第一節, 二, ② 叅照)에 依하고 있었든 것이다. 그런데다가 至今 卒然이 巨額의 增稅를 한다는 것은, 적어도 表面上으로는 重大한 問題이다. 그래서 申槩는 그 上疏 中에서 下等田을 다시 三等으로 區分하여, 從來의 上中田과 合하여 都合 五等田品制를 制定하기를 主張하게 되였다.
 +
|목차3-1원문6번={{TagSpage|115-3}}從來 貢法의 第二의 缺陷은 其田品等第에 있어 三等道 三等官主義를 採用한 일이다. 大體로 말하면 上等道는 中等道에 比하여, 中等道는 下等道에 比하여, 또 上等官은 中等官에 比하여, 中等官은 下等官에 比하여 各々 높은 生產力을 가지고 있는 것은 事實이지마는, 特殊한 것을 들어 말하면, 下等道 下等官에도 上等道 上等官의 上田에라도 匹敵할 田이 있을 것이며, 또 上等道 上等官에도 下等道 下等官의 下田 以下에 屬할 만한 田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三等道 三等官主義로 結縛해 놓는다는 것은 大端한 不合理였다.
 +
|목차3-1원문7번={{TagSpage|115-4}}第三의 缺陷은, 貢法은 年의 豊凶을 無視한 點이다. 勿論 貢法은 損實法의 弊를 救하기 爲하여 創案된 것이지마는, 年의 豊凶을 一切 無視하고, 一定의 稅額을―더군다나 從來 損實 數보담 큰 額을―强要한다는 것은 甚히 困難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貢法에 있어도 어떠한 方法으로든지, 年의 豊凶을 酌量한다는 것이 要請되였다.
 +
|목차3-1원문8번={{TagSpage|115-5}}②二十五年 十月 癸丑의 變革 下敎
 +
|목차3-1원문9번={{TagSpage|115-6}}드듸어 下三道 全部에 貢法이 實施되여 二箇年을 經한 二十五年 十月 癸丑에는 其前數次會議의 結果를 綜合하{{TagPage|116-1}}여, 다음과 같은 顯著한 變革을 보인 下敎를 作成 發布하게 되였다.
 +
|목차3-1원문10번={{TagSpage|116-2}}其一 田品은 五等으로 區分하고, 量田은 頃畝制에 依한다.
 +
|목차3-1원문11번={{TagSpage|116-3}}田品五等의 理는 前記 申槩의 疏에 論議된 것과 같다. 또 從來의 量田法은 吾人이 旣知하는 바와 같이 實積 標準에 依한 것이 아니요 收稅 標準에 依한 것이다. 即 結負制에 있어서는 같은 一結이라 하드라도 그것은 한 個의 地積을 表示한다는 것보담 오히려 한 箇의 收稅 單位를 表示하는 것에 가깝다. 結負制의 缺陷은 여러가지가 있어, 여기서 구태여 이를 詳論치 않드라도, 그것이 다른 社會에서 行하여지고 있든 面積主義의 頃畝法에 比하여 實로 中間的인 姦僞 搾取의 機會가 介入키 쉬운 것이오, 따라서 納稅者인 農民 側에서 보든지 收稅者인 國家 自身에서 보든지 決코 合理的인 制度가 아닌 것은 容易히 想像할 수가 있는 것이다. (結負法의 弊에 關하여는 柳磻溪<sup>磻溪隨錄</sup>丁茶山<sup>經世遺表</sup> 等이 痛論하였으니, 叅考하기 바란다) 王은 元來 熱心한 頃畝論者로 이번에 이와 같이 下敎에 그 理想을 表示하여, 從來의 {{ruby|計指田尺|○○○○}}(上中下 三種田尺은 원 手指를 標準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다)을 變하고 새로 {{ruby|周尺|○○}}에 依한 頃畝法으로 量田하기로 하였다.
 +
|목차3-1원문12번={{TagSpage|116-4}}其二 從來의 田品等弟에 있어서의 三等道 三等官의 標準을 全廢하고 田品은 모름직이 全國을 通한 한 箇의 標準 內에서 五等으로 區分한다.
 +
|목차3-1원문13번={{TagSpage|116-5}}理由는 旣述한 바와 같다.
 +
|목차3-1원문14번={{TagSpage|116-6}}其三 年分에 上上·上中·上下·中上·中中·中下·下上·下中·下下의 九等을 設한다.
 +
|목차3-1원문15번={{TagSpage|116-7}}每歲 季秋에 各 官 守令은 禾穀 結實의 狀을 審視하야, 水田·旱田別로 其官은 九等 年分의 何者에 該當할 것인가를 定하야 監司에 報告하고, 監司는 管內 各 官의 年分을 다시 檢覈하고 綜合하야 其道는 何年分인가를 定하야 가지고 戶曹를 通하야 啓聞한다. 即 年分等第는 一道 單位인데, 但 特別한 取扱을 要하는 官은 따로 한다.
 +
|목차3-1원문16번={{TagSpage|116-8}}③諸實踐
 +
|목차3-1원문17번={{TagSpage|116-9}}右 十月 癸丑의 下敎에 依하야 다음의 諸實踐을 하게 되였다.
 +
|목차3-1원문18번={{TagSpage|117-1}}甲. 田品等第
 +
|목차3-1원문19번={{TagSpage|117-2}}(가) 下三道 田品等第
 +
|목차3-1원문20번={{TagSpage|117-3}}十一月 丙辰에 敬差官 二十八人을 全羅·忠淸·慶尙 三道에 보내여 田品等第를 行하게 하였다. 이번 田品은 五等에 나누기로 되였는데, 其依據할 節目(要項)은 다음과 같었다.
 +
|목차3-1원문21번={{TagSpage|117-4}}一. 從來 下三道의 上中田은 水旱年을 勿論하고 禾糓이 茂盛한 田으로써 하였다. 그런데 新貢法은 九等年分과 災傷을(前節 二十二年 八月 己亥 節目 第四條) 酌量하게 되여 있으니 從來의 上等 旱水田을 모조리 新法의 第一等田으로 하고 從來의 中等 旱水田을 모조리 新法의 第二等田으로 한다. 但, 從來의 上中 分等이 不得其中하였든 者는 適當이 斟酌하야 或昇 或降한다.
 +
|목차3-1원문22번={{TagSpage|117-5}}二. 從來의 下等水田 內에 水源은 없드라도 地味가 膏腴한 者는 新法의 第一·第二·第三等田에 適宜改編한다(從來의 所謂 下等田은 年次에 依하야 豊凶이 있는 田이니, 年分·災傷의 酌量이 없든 舊貢法에 있어서는 當然이 上·中田과 同列에 넣을 수가 없었으나 新法에 있어서는 此를 酌量하게 되여 있으니, 第一·第二等田에 編入하야도 相關이 없다는 뜻이다). 또 從來의 下等田 內에 地勢가 높고 沙土가 相半한 瘠田이라도 萬一 水源이 있는 것이면 이를 新法의 第二·第三等田에 編入한다.
 +
|목차3-1원문23번={{TagSpage|117-6}}三. 舊下等田 內에서 新第三等田에 屬하지 몯할 田을 新第四等田으로 하고, 다시 沙石 瘠薄하야 江原·咸吉·平安道의 最下 水田에 無異한 者를 新第五等田으로 한다. 但, 적어도 堤防 灌漑의 便이 있는 곳은, 地의 肥瘠을 勿論하고, 第五等田에는 屬하지 몯한다.
 +
|목차3-1원문24번={{TagSpage|117-7}}四. 山田 內에서 山腰·山下田이라 할지라도 地味가 豊沃한 者는 다시 適當이 斟酌하야 新五等田法에 依하야 律한다(山田에 關하야는 後述 第五節註 參照).
 +
|목차3-1원문25번={{TagSpage|117-8}}여기서 暫間 各 節目을 檢討하기로 하자. 우선 舊三等田과 新五等田과의 關係를 表示하면 다음과 같다.
 +
|목차3-1원문26번={{TagSpage|118-1}}[[파일:박시형 전세제도-1.png|가운데|650px]]
 +
|목차3-1원문27번={{TagSpage|118-2}}右에 依하야 自明한 바와 같이 下三道에는 如干한 惡田이 아니고는 第四·第五等田은 없게 된다. 勿論 申槩 等이 애초에 田分五等을 主張한 理由라든지, 또 十月 癸丑의 下敎의 精神이라든지는 이런 結果를 어들라고 한 것은 아니였지마는, 거기에 年分·災傷의 酌量이라는 것을 加味하야 정작 實踐으로 옮기게 된 이렇게 變質하야 버린 것이다. 그러나 年分等第라는 것은 每筆田에 個別的으로 行하는 것이 아니요 한 個의 커다란 集團에 對하야 實行되는 것이며, 또 災傷에 關한 規定은 後述할 바와 같이 其發動이 甚히 困難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적지 않은 舊下等田을 新一·二等으로 改編했다는 것은, 立法上의 한 個의 自家撞着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목차3-1원문28번={{TagSpage|118-3}}또 一二三四의 各 項을 通하야 分等의 規定이 甚히 嚴格한 우에다가,敬差官 等은 實踐에 際하야 많이 上意에 阿諛하야 分等을 苛酷히 한 故로 中外의 物情이 騷然하게 되였다. 因하야 十二月 乙巳 鄭麟趾를 都巡察使로 하야 下三道에 派遣할 지음에 여러가지로 新法의 辯解를 百姓에게 들리게 하는 一方, 敬差官 等의 高重 分等을 警戒하는 바가 있었다.
 +
|목차3-1원문29번={{TagSpage|118-4}}(나) 京畿 田品等第
 +
|목차3-1원문30번={{TagSpage|118-5}}元來 田品等第에 一定한 準據가 있는 것이지마는, 그 實踐은 꽤 루-즈한 것이어서, 個個의 敬差官에 依하야 相當한 差異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下三道 田品等第의 進行 中에 여러가지 不平이 있음에 鑑하야, 새로 京畿 田品等第를 始作하기 前에, 일을 愼重히 하기 爲하야 十二月 癸巳, 田制詳定所<sup>(十一月 甲子에 設置되였다)</sup> 提調인 晉陽大君 瑈<sup>(世祖)</sup>·左賛成 河演·知中樞院使 鄭麟趾·戶曹判書 朴從愚 等의 重臣을 西郊에 派遣하야 田品等第의 試驗을 해보기까지 하였{{TagPage|119-1}}다. 이에 同月 丙申에 敬差官 二十人을 京畿에 派遣하야 等第를 着手케 하였다. 等第의 節目은 下三道의 것과 同一한 것은 勿論이다. 다만 京畿 田分의 實踐에 있어서는 한 가지 特殊한 事情을 想像할 수가 있다. 即 京畿 內에는 大貴族 等의 農莊이 많으니 그들은 自家의 農庄에는 될 수 있는 대로 田分을 가볍게 하기를 希望하였을 것이며, 또 그렇게 實行시켰을 것이다. 時代는 훨신 뒤떠러지지마는 丁茶山은 그 牧民心書(田政條)에서 京畿 內에 있는 自己 所有 田에 對하야 다음과 같이 述懷한 것이 있다.
 +
|목차3-1원문31번={{TagSpage|119-2}}<blockquote no="15">余有薄田 在畿內楊根郡 水田七十斗落 旱田二十日耕 都只一結 及謫南徼 見水田差沃者 率二十斗落 己爲一結 由是觀之 {{ruby|南方之田|○○○○}} {{ruby|多係一二等|○○○○○}} {{ruby|其瘠薄者爲三四等|○○○○○○○○}} {{ruby|京畿之田|○○○○}} {{ruby|其腴者或入五等|○○○○○○○}} {{ruby|餘皆六等|○○○○}} {{ruby|可知也|○○○}} 云云</blockquote>
 +
|목차3-1원문32번={{TagSpage|119-3}}此中의 <cite no="08">「餘皆六等」</cite>은 信키 어려우나, <cite no="09">「其腴者或入五等」</cite>은 首肯할 수 있는 일이다(六等田法에 對하야는 後述). 대관절 此時 京畿田의 甚히 가벼운 田分은 事實은 世宗朝 以來의 化石일 것이다. 일로써 미루어, 非但 京畿뿐 아니라 他道에 있어서도 田品等第란 其田의 所有者 如何에 依하야 많이 左右되는 것임을 알겠다.
 +
|목차3-1원문33번={{TagSpage|119-4}}그런데 京畿에 貢法이 實施된 的確한 年次를 나는 不幸이(或 不注意로) 實錄에서 發見치 몯하였으나, 前後 關係로 미루어, 本道에 田品等第가 實行된 二十五年의 翌年인 二十六年부터인가 한다.
 +
|목차3-1원문34번={{TagSpage|119-5}}乙. 頃畝法의 實踐
 +
|목차3-1원문35번={{TagSpage|119-6}}(가) 量田試驗
 +
|목차3-1원문36번={{TagSpage|119-7}}十一月 甲子에 田制詳定所를 設置하고 晉陽大君·河演·朴從愚·鄭麟趾等의 重臣을 其提調로 하였다. 從來의 結負制를 廢하고 새로 頃畝法을 樹立한 것은 旣述한 바로, 急速히는 行하지 몯한다 하드라도 將次는 全國 田을 此法에 依하야 改量치 안으면 안 될 것이니, 이에 詳定所 事務의 第一着手로, 翌 乙丑日에 河演·鄭麟趾 等의 提調와 判書雲峴事 李純之·注薄 朴允昌·金淡 等<sup>(鄭·李·金 等은 當時의 算學의 大家이었다)</sup>을 京畿 安山郡에 派遣하야 頃畝法에 依한 量田을 試驗케 하였다. 그 事目(節目)은 如左하다.
 +
|목차3-1원문37번={{TagSpage|119-8}}一. 周尺五{{ruby|尺|○}}平方爲一{{ruby|步|○}} 二百四十步爲一{{ruby|畝|○}} 百畝爲一{{ruby|頃|○}}{{TagPage|120-1}}五頃爲一{{ruby|字|○}}
 +
|목차3-1원문38번={{TagSpage|120-2}}二. 山谷 及 陵坂傾側田의 塍(時畔)이 가장 많은 者는 實積의 二十分之一, 다음으로 많은 者는 三十分之一, 또 다음으로 많은 者는 四十分之一을 各々 減한다. 但 平地는 不在此限이다.
 +
|목차3-1원문39번={{TagSpage|120-3}}三. 私處의 家舍 基地 及 苧·楮·莞田・菓園・漆林·竹林 等 적어도 利用하야 收益이 있는 地는 他田의 例에 依하야 모조리 測量한다. 但 公處 及 寺院의 基地는 不在此限이다.
 +
|목차3-1원문40번={{TagSpage|120-4}}(後에 頃畝法이 不行하게 되여 條項一은 歸之無用했지마는, 二·三은 그대로 後世 量田의 一規準이 된 것은 勿論이다)
 +
|목차3-1원문41번={{TagSpage|120-5}}여기에 暫間 興味를 끄는 一事는, 安山의 量田이 無事終了하였을 때,王은 此成功을 李純之·金淡 等의 算學의 功으로 돌리고, 即時 集賢殿에 命하야 歷代 算學의 法을 考啓하라 하는 等, 世宗朝의 算學에 對한 興味의 勃興을, 實로 이 量田事業에 緣起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對한 論議는 筆者의 能히 할 바이 아니요, 다만 有志君子의 注意를 喚起함에 그친다.
 +
|목차3-1원문42번={{TagSpage|120-6}}(나) 頃畝法과 稅法
 +
|목차3-1원문43번={{TagSpage|120-7}}頃畝法은 二百四十步로써 一畝를 삼고, 百畝는 즉 一頃이 되는 것이나, 每步에 收稅階段을 만드는 것은 煩鎻에 失함으로, 二十六年 正月 庚午 議政府의 啓에 據하야 二十四步로 一{{ruby|分|○}}을 삼고 十分으로 一畝를 삼어(端數는 四捨五入한다), 某田은 幾畝幾分인가를 定하야 가지고 一定한 稅를 徵收하게 한다.
 +
|목차3-1원문44번={{TagSpage|120-8}}(다) 換算表의 作成
 +
|목차3-1원문45번={{TagSpage|120-9}}頃畝法이 制定되였음으로 全國 田은 장차 이 法에 依하야 改量할 것이나, 應急策으로 舊結負法에 依한 上中下田의 實積을 頃畝法의 面積으로 換算할 必要가 있다. 그러나 各個田에 則하야 各人이 一々이 計算을 한다면 事涉緩慢할 뿐 아니라 또 錯誤의 念慮가 있는 故로 正月 庚午 議政府의 啓에 依하야 舊某 等田 畿結 畿負 幾束은 新 幾字 幾頃 幾畝 幾分에 該當하는 것인가를 미리 換算하야 表를 만들어 鑄字所로 하여금 印出 頒布케 하였다.
 +
 
 +
|목차3-1해독문1번=①종래 공법의 결함
 +
|목차3-1해독문2번=경상·전라 두 도는 그 일부분은 세종 20년부터, 그 전부는 22년부터, 그리고 충청도는 23년부터 각각 공법이 실시되었지만, 그 실시 공법에는 기다의 결함이 포장되어 있었다.
 +
|목차3-1해독문3번=제1로 공법은 종래의 전품 3등별주의에 입각되어 있다. 그중 상 중 2종전은 본 1000결에 12결 혹 100결에 12결의 양전인 만큼, 그다지 풍흉이 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이에 부과된 1결20두 내지 15두의 정액세(앞 절 3 참조)는, 공법 이전의 1결30두에 비하면 실로 막대한 경감이었다. 그 대신 하전은 연(年)의 풍흉에 의하여 그 수확이 현저히 좌우되는 만큼, 1결17두 내지 20두의 정액세(위와 같은 절 참조)는 공법 이전에 비하여 오히려 대단한 증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여하한 악전이라도 하등전보다 다시 내려갈 수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23년 7월 기해 우의정 신개의 상소는 저간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경상·전라의 시험 성적을 보면 상중전의 소유자는 공법을 환영하고, 하전의 소유자는 이를 증오하는 것이었다. 상중전의 소유자는 물론 부자요 하전의 소유자는 빈자이다. 다시 각 도의 손실법 때의 최고 수세액과, 공법 실시에 의하여 {{ruby|실현될|○○○}} {{ruby|액|○}}과를 비교 표시하면 다음과 같았다.<sup>(신(申)의 상소 중의 숫자)</sup>단, 경상·전라 두 도의 숫자는 물론 공법 실시에 의하여 이미 {{ruby|실현된|○○○}} {{ruby|숫|○}}자다.
 +
|목차3-1해독문4번=<table border="1" cellspacing="0">
 +
                       
 +
<tr>
 +
<td></td>
 +
<td>손실법</td>
 +
<td>손실법</td>
 +
<td>공법에 의하여 실현될 액(B)</td>
 +
<td>B에서 A를 감한 액(C)</td>
 +
<td>A:C</td>
 +
</tr>
 +
 
 +
<tr>
 +
<td></td>
 +
<td>연차</td>
 +
<td>최고 수세액(A)</td>
 +
<td></td>
 +
<td></td>
 +
<td></td>
 +
</tr>     
 +
 
 +
<tr>
 +
<td>경상도</td>
 +
<td>세종 16년</td>
 +
<td>169,811 미두병석</td>
 +
<td>257,728 미두병석</td>
 +
<td>87,917 미두병석</td>
 +
<td>53%</td>
 +
</tr>   
 +
 
 +
<tr>
 +
<td>전라도</td>
 +
<td>위와 동일</td>
 +
<td>158,184 미두병석</td>
 +
<td>268,986 미두병석</td>
 +
<td>110,803 미두병석</td>
 +
<td>70%</td>
 +
</tr>   
 +
 
 +
<tr>
 +
<td>충청도</td>
 +
<td>세종 22년</td>
 +
<td>90,451 미두병석</td>
 +
<td>187,839 미두병석</td>
 +
<td>97,388 미두병석</td>
 +
<td>107%</td>
 +
</tr>   
 +
 
 +
<tr>
 +
<td>황해도</td>
 +
<td>위와 동일</td>
 +
<td>41,573 미두병석</td>
 +
<td>143,330 미두병석</td>
 +
<td>101,757 미두병석</td>
 +
<td>245%</td>
 +
</tr>   
 +
 
 +
<tr>
 +
<td>강원도</td>
 +
<td>위와 동일</td>
 +
<td>20,099 미두병석</td>
 +
<td>31,407 미두병석</td>
 +
<td>11,308 미두병석</td>
 +
<td>56%</td>
 +
</tr>   
 +
 
 +
<tr>
 +
<td>경기도</td>
 +
<td>세종 16년</td>
 +
<td>37,390 미두병석</td>
 +
<td>50,200 미두병석</td>
 +
<td>12,810 미두병석</td>
 +
<td>34%</td>
 +
</tr>   
 +
 
 +
<tr>
 +
<td>함길도</td>
 +
<td>세종 22년</td>
 +
<td>29,244 미두병석</td>
 +
<td>56,232 미두병석</td>
 +
<td>26,988 미두병석</td>
 +
<td>92%</td>
 +
</tr>   
 +
 
 +
<tr>
 +
<td>평안도</td>
 +
<td>위와 동일</td>
 +
<td>54,746 미두병석</td>
 +
<td>142,339 미두병석</td>
 +
<td>87,583 미두병석</td>
 +
<td>159%</td>
 +
</tr> 
 +
 
 +
<tr>
 +
<td>계</td>
 +
<td></td>
 +
<td></td>
 +
<td>1,138,061 미두병석</td>
 +
<td></td>
 +
<td></td>
 +
</tr>     
 +
 
 +
</table>
 +
|목차3-1해독문5번=즉 공법에 의한 견적액은 손실 때의 최고액보다도 3할4푼 내지 24할5푼의 대증세가 된다. 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종래의 손실법은 극히 자의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또 정세(正稅) 이외에 가진 비합법적 수렴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국고에 바치는 세액은 사실상 항상 5할 이하 감수의 예(제1절, 2, ② 참조)에 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지금 졸연히 거액의 증세를 한다는 것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중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신개는 그 상소 중에서 하등전을 다시 3등으로 구분하여, 종래의 상중전과 합하여 더힙 5등전품제를 제정하기를 주장하게 되었다.
 +
|목차3-1해독문6번=종래 공법의 제2의 결함은 그 전품등제에 있어 3등도 3등관주의를 채용한 일이다. 대체로 말하면 상등도는 중등도에 비하여, 중등도는 하등도에 비하여, 또 상등관은 중등관에 비하여, 중등관은 하등관에 비하여 각각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수한 것을 들어 말하면, 하등도 하등관에도 상등도 상등관의 상전에라도 필적할 전이 있을 것이며, 또 상등도 상등관에도 하등도 하등관의 하전 이하에 속할 만한 전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3등도 3등관주의로 결박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불합리였다.
 +
|목차3-1해독문7번=제3의 결함은, 공법은 연(年)의 풍흉을 무시한 점이다. 물론 공법은 손실법의 폐를 구(救)하기 위하여 창안된 것이지만, 연의 풍흉을 일절 무시하고, 일정의 세액을―더군다나 종래 손실 數보담 큰 額을―强要한다는 것은 심히 困難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공법에 있어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연의 풍흉을 작량한다는 것이 요청되었다.
 +
|목차3-1해독문8번=②25년 10월 계축의 변혁 하교
 +
|목차3-1해독문9번=드디어 하3도 전부에 공법이 실시되어 2개년을 경한 25년 10월 계축에는 그 전 수차회의의 결과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현저한 변혁을 보인 하교(下敎)를 작성 발포하게 되었다.
 +
|목차3-1해독문10번=1. 전품은 5등으로 구분하고, 양전은 경묘제에 의한다.
 +
|목차3-1해독문11번=전품5등의 이(理)는 앞서 든 신개의 소에 논의된 것과 같다. 또 종래의 양전법은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실적 표준에 의한 것이 아니요 수세 표준에 의한 것이다. 즉 결부제에 있어서는 같은 1결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한 개의 지적(地積)을 표시한다는 것보다 오히려 한 개의 수세 단위를 표시하는 것에 가깝다. 결부제의 결함은 여러가지가 있어, 여기서 구태여 이를 상론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던 면적주의의 경묘법에 비하여 실로 중간적인 간위 착취의 기회가 개입하기 쉬운 것이요, 따라서 납세자인 농민 측에서 보든지 수세자인 국가 자신에서 보든지 결코 합리적인 제도가 아닌 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부법의 폐에 관하여는 유반계<sup>반계수록</sup>정다산<sup>경세유표</sup> 등이 통론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왕은 원래 열심한 경묘론자로 이번에 이와 같이 하교에 그 이상을 표시하여, 종래의 {{ruby|계지전척|○○○○}}(상중하 3종전척은 원 수지를 표준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을 변하고 새로 {{ruby|주척|○○}}에 의한 경묘법으로 양전하기로 하였다.
 +
|목차3-1해독문12번=2. 종래의 전품등제에 있어서의 3등도 3등관의 표준을 전폐하고 전품은 모름지기 전국을 통한 한 개의 표준 내에서 5등으로 구분한다.
 +
|목차3-1해독문13번=이유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
|목차3-1해독문14번=3. 연분에 상상·상중·상하·중상·중중·중하·하상·하중·하하의 9등을 세운다.
 +
|목차3-1해독문15번=매해 계추에 각 관 수령은 화곡 결실의 상을 심시하여, 수전·한전별로 그 관은 9등 연분의 어느 것에 해당할 것인가를 정하여 감사에 보고하고, 감사는 관내 각 관의 연분을 다시 검핵하고 종합하여 그 도는 어떤 연분인가를 정하여 가지고 호조를 통하여 계문한다. 즉 연분등제는 1도 단위인데, 단 특별한 취급을 요하는 관은 따로 한다.
 +
|목차3-1해독문16번=③제(諸)실천
 +
|목차3-1해독문17번=이 같은 10월 계축의 하교에 의하여 다음의 제실천을 하게 되었다.
 +
|목차3-1해독문18번=갑. 전품등제
 +
|목차3-1해독문19번=(가) 하3도 전품등제
 +
|목차3-1해독문20번=11월 병진에 경차관 28인을 전라·충청·경상 3도에 보내 전품등제를 행하게 하였다. 이번 전품은 5등에 나누기로 되었는데, 그 의거할 절목(요항)은 다음과 같았다.
 +
|목차3-1해독문21번=1. 종래 하3도의 상중전은 수한년을 물론하고 화곡이 무성한 전으로써 하였다. 그런데 신공법은 9등 연분과 재상을(앞 절 22년 8월 기해 절목 제4조) 작량하게 되어 있으니 종래의 상등 한수전을 모조리 신법의 제1등전으로 하고 종래의 중등 한수전을 모조리 신법의 제2등전으로 한다. 단, 종래의 상중 분등이 부득기중하였던 자는 적당히 짐작하여 혹승(或昇) 혹강(或降)한다.
 +
|목차3-1해독문22번=2. 종래의 하등수전 내에 수원(水源)은 없더라도 지미(地味)가 고유(膏腴)한 자는 신법의 제1·제2·제3등전에 적의개편한다(종래의 소위 하등전은 연차에 의하여 풍흉이 있는 전이니, 연분·재상의 작량이 없던 옛 공법에 있어서는 당연히 상·중전과 동렬에 넣을 수가 없었으나 신법에 있어서는 이를 작량하게 되어 있으니, 제1·제2등전에 편입하여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또 종래의 하등전 내에 지세가 높고 사토가 상반(相半)한 척전이라도 만일 수원이 있는 것이면 이를 신법의 제2·제3등전에 편입한다.
 +
|목차3-1해독문23번=3. 옛 하등전 내에서 새로운 제3등전에 속하지 못할 전을 새로운 제4등전으로 하고, 다시 사석 척박하여 강원·함길·평안도의 최하 수전에 무이(無異)한 자를 새로운 제5등전으로 한다. 단, 적어도 제방 관개의 편이 있는 곳은, 땅의 비척을 물론하고, 제5등전에는 속하지 못한다.
 +
|목차3-1해독문24번=4. 산전 내에서 산요·산하전이라 할지라도 지미가 풍옥한 자는 다시 적당히 짐작하여 새로운 5등전법에 의하여 율(律)한다(산전에 관하여는 뒤의 제5절 주(註) 참조).
 +
|목차3-1해독문25번=여기서 잠깐 각 절목을 검토하기로 하자. 우선 옛 3등전과 새로운 5등전과의 관계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
|목차3-1해독문26번=[[파일:박시형 전세제도-1.png|가운데|650px]]
 +
|목차3-1해독문27번=이에 의하여 자명한 바와 같이 하3도에는 여간한 악전이 아니고는 제4·제5등전은 없게 된다. 물론 신개 등이 애초에 전분5등을 주장한 이유라든지, 또 10월 계축의 하교의 정신이라든지는 이런 결과를 얻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연분·재상의 작량이라는 것을 가미하여 정작 실천으로 옮기게 된 이렇게 변질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연분등제라는 것은 매 필전에 개별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요 한 개의 커다란 집단에 대하여 실행되는 것이며, 또 재상에 관한 규정은 후술할 바와 같이 그 발동이 심히 곤란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적지 않은 옛 하등전을 새로운 1·2등으로 개편했다는 것은, 입법상의 한 개의 자가당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목차3-1해독문28번=또 1 2 3 4의 각 항을 통하여 분등의 규정이 심히 엄격한 위에다가, 경차관 등은 실천에 제하여 많이 상의(上意)에 아유(阿諛)하여 분등을 가혹히 한 고로 중외의 물정이 소연하게 되었다. 인(因)하여 12월 을사 정인지를 도순찰사로 하여 하3도에 파견할 즈음에 여러가지로 신법의 변해를 백성에게 들리게 하는 한편, 경차관 등의 고중(高重) 분등을 경계하는 바가 있었다.
 +
|목차3-1해독문29번=(나) 경기 전품등제
 +
|목차3-1해독문30번=원래 전품등제에 일정한 준거가 있는 것이지만, 그 실천은 꽤 루-즈한 것이어서, 개개의 경차관에 의하여 상당한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하3도 전품등제의 진행 중에 여러가지 불평이 있음에 감(鑑)하여, 새로 경기 전품등제를 시작하기 전에, 일을 신중히 하기 위하여 12월 계사, 전제상정소<sup>(11월 갑자에 설치되었다)</sup> 제조(提調)인 진양대군 유(瑈)<sup>(세조)</sup>·좌찬성 하연·지중추원사 정인지·호조판서 박종우 등의 중신을 서교에 파견하여 전품등제의 시험을 해보기까지 하였다. 이에 같은 달 병신에 경차관 20인을 경기에 파견하여 등제를 착수하게 하였다. 등제의 절목은 하3도의 것과 동일한 것은 물론이다. 다만 경기 전분의 실천에 있어서는 한 가지 특수한 사정을 상상할 수가 있다. 즉 경기 내에는 대귀족 등의 농장이 많으니 그들은 자가(自家)의 농장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전분을 가볍게 하기를 희망하였을 것이며, 또 그렇게 실행시켰을 것이다. 시대는 훨씬 뒤떨어지지만 정다산은 그 목민심서(전정조)에서 경기 내에 있는 자기 소유 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한 것이 있다.
 +
|목차3-1해독문31번=<blockquote no="15">余有薄田 在畿內楊根郡 水田七十斗落 한전二十日耕 都只一結 及謫南徼 見水田差沃者 率二十斗落 己爲一結 由是觀之 {{ruby|南方之田|○○○○}} {{ruby|多係一二等|○○○○○}} {{ruby|其瘠薄者爲三四等|○○○○○○○○}} {{ruby|京畿之田|○○○○}} {{ruby|其腴者或入5등|○○○○○○○}} {{ruby|餘皆六等|○○○○}} {{ruby|可知也|○○○}} 云云</blockquote>
 +
|목차3-1해독문32번=이 중의 <cite no="08">“餘皆六等”</cite>은 믿기 어려우나, <cite no="09">“其腴者或入五等”</cite>은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6등전법에 대하여는 뒤에 논함). 대관절 이때 경기전의 심히 가벼운 전분은 사실은 세종 조(朝) 이래의 화석일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비단 경기뿐 아니라 다른 도에 있어서도 전품등제란 그 전의 소유자 여하에 의하여 많이 좌우되는 것임을 알겠다.
 +
|목차3-1해독문33번=그런데 경기에 공법이 실시된 적확한 연차를 나는 불행히(혹 부주의로) 실록에서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전후 관계로 미루어, 본 도에 전품등제가 실행된 25년의 익년인 26년부터인가 한다.
 +
|목차3-1해독문34번=을. 경묘법의 실천
 +
|목차3-1해독문35번=(가) 양전시험
 +
|목차3-1해독문36번=11월 갑자에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진양대군·하연·박종우·정인지 등의 중신을 그 제조로 하였다. 종래의 결부제를 폐하고 새로 경묘법을 수립한 것은 이미 논한 바로, 급속히는 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장차는 전국 전을 이 법에 의하여 개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이에 상정소 사무의 제1착수로, 익 을축일에 하연·정인지 등의 제조와 판서운현사 이순지·주박 박윤창·김담 등<sup>(정·이·김 등은 당시의 산학의 대가였다)</sup>을 경기 안산군에 파견하여 경묘법에 의한 양전을 시험하게 하였다. 그 사목(절목)은 아래와 같다.
 +
|목차3-1해독문37번=1. 주척5{{ruby|척|○}}평방위1{{ruby|보|○}} 240보위1{{ruby|묘|○}} 100묘위1{{ruby|경|○}}5경위1{{ruby|자|○}}
 +
|목차3-1해독문38번=2. 산곡 및 능판경측전의 승(시반)이 가장 많은 자는 실적의 20분의 1, 다음으로 많은 자는 30분의 1, 또 다음으로 많은 자는 40분의 1을 각각 감한다. 단 평지는 부재차한이다.
 +
|목차3-1해독문39번=3. 사처의 가사 기지 및 저(苧)·저(楮)·완전・과원・칠림·죽림 등 적어도 이용하여 수익이 있는 땅은 다른 전의 예에 의하여 모조리 측량한다. 단 공처 및 사원의 기지는 부재차한이다.
 +
|목차3-1해독문40번=(후에 경묘법이 불행하게 되어 조항1은 귀지무용했지만, 2·3은 그대로 후세 양전의 하나의 규준이 된 것은 물론이다)
 +
|목차3-1해독문41번=여기에 잠깐 흥미를 끄는 한 사건은, 안산의 양전이 무사종료하였을 때, 왕은 이 성공을 이순지·김담 등의 산학의 공으로 돌리고, 즉시 집현전에 명하여 역대 산학의 법을 고계하라 하는 등, 세종 조(朝)의 산학에 대한 흥미의 발흥을, 실로 이 양전사업에 연기(緣起)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능히 할 바가 아니요, 다만 유지 군자의 주의를 환기함에 그친다.
 +
|목차3-1해독문42번=(나) 경묘법과 세법
 +
|목차3-1해독문43번=경묘법은 240보로써 1묘를 삼고, 100묘는 즉 1경이 되는 것이나, 매 보에 수세 계단을 만드는 것은 번쇄에 실(失)하므로, 26년 정월 경오 의정부의 계에 근거하여 24보로 1{{ruby|분|○}}을 삼고 10분으로 1묘를 삼아(단수는 사사오입한다), 어느 전은 기묘 기분인가를 정하여 가지고 일정한 세를 징수하게 한다.
 +
|목차3-1해독문44번=(다) 환산표의 작성
 +
|목차3-1해독문45번=경묘법이 제정되었음으로 전국 전은 장차 이 법에 의하여 개량할 것이나, 응급책으로 옛 결부법에 의한 상 중 하 전의 실적을 경묘법의 면적으로 환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각개 전에 즉하여 각 사람이 일일이 계산을 한다면 사섭(事涉) 완만할 뿐 아니라 또 착오의 염려가 있는 고로 정월 경오 의정부의 계에 의하여 옛 어느 등전 기결(畿結) 기부(畿負) 기속(幾束)은 새 기자(幾字) 기경(幾頃) 기묘(幾畝) 기분(幾分)에 해당하는 것인가를 미리 환산하여 표를 만들어 주자소로 하여금 인출 반포하게 하였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86번째 줄: 932번째 줄:
 
----
 
----
 
{{Layout3-2
 
{{Layout3-2
|목차3-2원문1번= @
+
|목차3-2원문1번={{TagSpage|121-1}}①廢止 頃畝·仍舊 結負=田分 六等·同科 收租
 +
|목차3-2원문2번={{TagSpage|121-2}}二十五年 十月 癸丑 下敎의 其一―結負法을 廢止하야 量田은 實積主義의 頃畝法에 依하야 統一하고 다만 田品을 五等으로 나누어서 收租에 階段을 둔다는 原則과 및 其後의 諸實踐은 守舊論者들의 시끄러운 反對論을 惹起하였다. 그들의 論旨를 들으면 다음과 같었다.
 +
|목차3-2원문3번={{TagSpage|121-3}}<blockquote no="16">{{ruby|第一로|○○○}}, 王은 結負制를 古制(中華先王之制)가 아니라 하야 排斥하고, 즐겨 頃畝法을 採用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古制라 하드라도 百姓에 大利害가 없고, 다만 一般의 視聽을 驚駭케 할 뿐이 아니냐. {{ruby|다음|○○}} 頃畝法을 採用하면, 五等田의 一單位面積은 다 같은 故로 그들의 稅額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年分九等法을 乘하면, 都合 五九四十五種의 各異한 稅額을 區別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여, 算計煩冗하야 奸吏가 因緣爲盜할 것이다. {{ruby|또|○}}, 從來에 兵役과 賦役은 結負法에 依하야 一結幾何라는 標準으로 簡單이 賦課할 수가 있었으나, 頃畝法에 依하야 田分五等으로 稅額이 各異하야지면, 兵役과 賦役의 賦課率도 또한 煩鎻하야 질 것이다. 頃畝法은 以上의 三缺陷을 가진 것이니, 在來의 結負法을 좇아 諸等田의 面積의 廣狹을 適宜斟酌하야 同一 名目의 一結로 하고, 거기다 同科收租를 하는 것이 좋다. 一結의 稅額이 皆同하면 오직 年分에 依한 差異가 있을 뿐으로 其法이 極簡하다.</blockquote>
 +
|목차3-2원문4번={{TagSpage|121-4}}【筆者는 생각컨대 此種論者의 頃畝法 反對 理由의 하나로, 여기는 叙述되여 있지 아니하지만, 頃畝法 實施에 依하야 當然이 惹起될 또 한 가지 混亂이 있다. 그것은 諸處折給田 特히 科田·功臣田·別賜田 等 私田의 折給額에 關한 問題다. 從來 此等私田은 結單位로써 折給되여 있고, 一結當 收稅額은 皆同하였든 故로 田主 等은 此等 私田에서 아모 不平이 없이 自己에게 도라오는 稅額을 安心하고 取할 수가 있었으나, 萬一 頃畝法으로 하야 一結의 田積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稅額이 各異하야진다면, 私田의 受給者들은 從來와 같이 不平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도라오는 稅를 取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無限한 混亂이 惹起될 것은 當然한 일이{{TagPage|122-1}}다. 그렇다고 해서 田의 等級에 依하야 私田의 折給額을 加減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田制의 根本을 攪亂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야 頃畝制는 이 社會의 封建官僚에 對하야 어듸까지든지 귀찮은 物件이었다. 일즉이 柳磻溪는 그 隨錄(卷之一)에 있어서 <cite no="09">「{{ruby|古|○}}(中國){{ruby|之頃畝|○○○}}는 {{ruby|主地|○○}}(積)하고, {{ruby|今|○}}(朝鮮) {{ruby|之結負|○○○}}는 {{ruby|主稅|○○}}한다」</cite>는 것을 論하고, <cite no="10">「{{ruby|古今法制|○○○○}}의 {{ruby|指意所分|○○○○}}이 {{ruby|斯可見矣|○○○○}}로다」</cite>하고 痛歎한 일이 있지마는, 二 所謂 「指意」란, 이 全體로서의 封建政府 그것의 指意이기 前에, 爲先 個人으로서의 封建官僚의 指意이었든 것이다.】
 +
|목차3-2원문5번={{TagSpage|122-2}}此에 對하야 王은 다음과 같이 反駁하였다.
 +
|목차3-2원문6번={{TagSpage|122-3}}<blockquote no="17">{{ruby|第一로|○○○}} {{ruby|頃畝法이|○○○○}} {{ruby|一定하면|○○○○}}, {{ruby|地品의|○○○}} {{ruby|高下를|○○○}} {{ruby|變更할|○○○}} {{ruby|境遇에는|○○○○}} {{ruby|다만|○○}} {{ruby|그|○}} {{ruby|稅額을|○○○}} {{ruby|改定하면|○○○○}} {{ruby|그만이요|○○○○}}, {{ruby|量田의|○○○}} {{ruby|數는|○○}} {{ruby|自若하야|○○○○}} {{ruby|何等의|○○○}} {{ruby|變更을|○○○}} {{ruby|받지|○○}} {{ruby|아니한다|○○○○}}. {{ruby|그러나|○○○}} {{ruby|萬一|○○}} {{ruby|地品에|○○○}} {{ruby|依하야|○○○}} {{ruby|結負를|○○○}} {{ruby|定한다면|○○○○}}, {{ruby|地品을|○○○}} {{ruby|變更할|○○○}} {{ruby|때마다|○○○}} {{ruby|自然이|○○○}} {{ruby|結負의|○○○}} {{ruby|數가|○○}} {{ruby|變化를|○○○}} {{ruby|받고|○○}}, {{ruby|따라서|○○○}} {{ruby|田制의|○○○}} {{ruby|細胞組織인|○○○○○}} {{ruby|字丁之制|○○○○}}<sup>(五結爲一字)</sup>{{ruby|가|○}} {{ruby|盡壞하야|○○○○}} {{ruby|紛紜하기|○○○○}} {{ruby|짝이|○○}} {{ruby|없으리니|○○○○}}, {{ruby|奸吏는|○○○}} {{ruby|이로|○○}} {{ruby|因緣하야|○○○○}} {{ruby|盜를|○○}} {{ruby|할|○}} {{ruby|것이다|○○○}}.<br/>땅에 大小가 있어 同科收租하는 것이 收稅上 便利한 것은 諸君의 所論과 같으나, 古 聖人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理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行치 않고 頃畝法에 因하야 後世에 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理致가 있었든 까닭이다.<br/>{{ruby|다음|○○}}, 諸君은 頃畝法에 依한 收稅의 煩鎻를 呼訴하나 損實法 때 일을 생각하면, 當時 田分收租의 節目이야말로 奚啻千萬하였느냐(逐段損實). 그러면 서로 能히 이를 行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新法은 煩冗하다 하지마는 民은 다만「吾田은 某等田이니 某等年에는 幾斗를 納하면 된다」는 것만 외여두면, 奸吏에게 속을 理가 없다. 下三道에 現行되여 있는 貢法(三等田 差科 收稅)으로만 보드라도 差科 收稅는 諸君이 念慮하는 것 같이 煩鎻한 것은 決코 아니다.<br/>{{ruby|第三으로|○○○○}}, 兵役·賦役의 賦課는 何必 從來의 一結幾許에 固執할 것 없이 새로 定하는 稅額의 多寡에 依하야 適當이 賦課하면 그만 아니냐.</blockquote>
 +
|목차3-2원문7번={{TagSpage|122-4}}【筆者는 생각건대 以上은 王이 其弊多端한 結負法을{{TagPage|123-1}} 廢止하고, 그 理想으로 하는 實積主義의 頃畝法을 斷行하려 한 大文字다. 그러나 그 理想은 後述할 바와 같이 實現을 보지 몯하고, 드디어 舊套 그대로 李朝 末期에 及하였으니, 恨된 일이라 하겠다.】
 +
|목차3-2원문8번={{TagSpage|123-2}}이에 守舊論者들은 한 個의 折衷案을 내었다.
 +
|목차3-2원문9번={{TagSpage|123-3}}<blockquote no="18">御說이 至當하나 그러나 法이란 大利害가 없는 限, 從來의 風俗習慣에 좇는 것이 좋으니, 何必 一々이 中國의 法을 본받을 것이 무엇이냐. 또 地有大小하야 同科收租를 하는 것이 收稅上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簡便한 것이다. 然則 이제 結負法의 長處(同科收租의 便)를 남기고 그 短處(結負法의 三等田尺은 全然 恣意的이오 何等의 規準이 없는 것이다. 第一節, 一, 叅照)를 버려 한 個의 折衷制度를 세우는 것이 어떠하냐. 即, {{ruby|結負制의|○○○○}} {{ruby|同科收租主義는|○○○○○○○}} {{ruby|그냥|○○}} {{ruby|살리고|○○○}} {{ruby|다만|○○}} {{ruby|從來의|○○○}} {{ruby|三等田尺을|○○○○○}} {{ruby|버리고|○○○}} {{ruby|周尺에|○○○}} {{ruby|依하야|○○○}} {{ruby|새로|○○}} {{ruby|制定할|○○○}} {{ruby|六等田|○○○}}(前年 十月 癸丑 下敎에는 田分五等으로 되였었으나, 그 後 最惡田은 五等田만 가지고는 律할 수 없으니 새로 第五等田을 二分하야 第五等 밑에 第六等田을 두자는 議論이 이러났다)의 {{ruby|廣狹을|○○○}} {{ruby|適當히|○○○}} {{ruby|詳定하는|○○○○}} {{ruby|것이|○○}} {{ruby|어떠냐|○○○}}.</blockquote>
 +
|목차3-2원문10번={{TagSpage|123-4}}王도 드디어 同科收租 至上論의 勢에 밀려 二十六年 六月 甲申에 議政府·六曹에게 兩論을 再吟味하도록 傳旨를 나렸다. 이 會議는 上述의 折衷論을 採擇하였으니, 其要項은 左의 三條이었다.
 +
|목차3-2원문11번={{TagSpage|123-5}}一. 頃畝步法을 고처, {{ruby|舊에|○○}} {{ruby|依하야|○○○}} {{ruby|結負束把로|○○○○○}} {{ruby|한다|○○}}.
 +
|목차3-2원문12번={{TagSpage|123-6}}二. 旣定의 五等田 밑에 다시 一等을 設하야 都合 {{ruby|田分六等|○○○○}}으로 한다.
 +
|목차3-2원문13번={{TagSpage|123-7}}三. 其六等田을 {{ruby|다|○}} {{ruby|周尺을|○○○}} {{ruby|써서|○○}} {{ruby|量하고|○○○}}, 適當히 其廣狹을 酌量하야 {{ruby|同科收租|○○○○}}로 한다.
 +
|목차3-2원문14번={{TagSpage|123-8}}이리하야 右의 二原則―田分六等·同科收租(一의 「結負法」이라는 것과, 三의 「同科收租」라는 것은 同義語다)는 움직이지 몯할 것으로 되였다. 여기에서 讀者는 自然이 깨닷는 바가 있으리라. 元來 頃畝法의 長處는 {{ruby|地積의|○○○}} {{ruby|一定|○○}}이라는 데 있는 것이요, 世宗大王의 着目處도 본래 여기에 있었던 것인데, 그 要點은 허울 좋게 敬遠되여 버리고, 다만 「{{ruby|量田은|○○○}} {{ruby|周尺을|○○○}} {{ruby|쓴다|○○}}」(事實 正確히 말하자면, 此는 次項에서 볼 바와 같이 「{{ruby|量田尺은|○○○}} {{ruby|周尺으로|○○○○}} {{ruby|標準을|○○○}}{{TagPage|124-1}} {{ruby|삼는다|○○○}}」는 것에 지나지 안는다)는 것으로, 겨우 그 形骸만을 남기게 되었다. 但 그것은 全然 恣意的인 舊三等田尺을 驅逐하여 버리는 데는 功이 있었던 것이다.
 +
|목차3-2원문15번={{TagSpage|124-2}}②二十六年 十一月 戊子 貢法 最後의 定着
 +
|목차3-2원문16번={{TagSpage|124-3}}田分六等·同科收租·年分九等의 原則이 確定되였으니, 그 具體案을 作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ruby|먼저|○○}} {{ruby|六等田分의|○○○○}} {{ruby|區別은|○○○}} {{ruby|土地의|○○○}} {{ruby|生產力에|○○○○}} {{ruby|標準을|○○○}} {{ruby|두기로|○○○}} {{ruby|한다|○○}}. 이를 爲하여는 假令 舊下等田 一結의 面積인 五十七畝의 地(第一節 一, 參照)를 取하여 가지고, 이 地積을 가진 最良田 及 最惡田의 生產力을 查定하여 兩者의 中間에 適當히 六等田을 配分하는 方法을 取한다. 또 이를 爲하여는, 七月 辛亥 田制詳定所에 命하여 該事項을 各官의 識理品官 及老農에 詢問케 하며, 또 各官 官屯田<sup>(地方官廳의 用度를 辨하는 田)</sup>該面積地의 過去 五箇年 間의 米糓實收量을 調査케 하였다.
 +
|목차3-2원문17번={{TagSpage|124-4}}다시 八月 丁未 金宗瑞·李叔時·鄭麟趾 等 田制詳定所의 三大臣을 忠淸道 淸安縣에 派遣하여 (時에 王은 眼疾을 療養하기 爲하여 淸州 椒水에 行幸 中이었던 故로, 그 近傍의 地를 擇한 것이다) 禾糓 稔實 狀況에 依하여 土地生產力을 査定하고, 다시 그 結果에 좇아 田品等第를 行케 하여 今後 全國的으로 行할 田品等第의 規準으로 삼었다. 이 試驗等第가 끝난 後에 다시 下三道에 各各 山間郡·平原郡 하나씩을 擇하여―忠淸道 庇仁·淸安, 慶尙道 咸安·高靈, 全羅道 高山·光陽―거기에 敬差官을 派遣하여 淸安縣 試驗等第의 法을 본받어 田分을 等第하고, 또 그 等第에 좇아 量田을 始作케 하였다. 이리하여 六縣의 等第·量田이 거의 끝날 지음에 田制詳定所는 其동안의 論議를 綜合하여 十一月 戊子에 上啓하고 王은 이에 從하여 新定貢法을 中外에 頒布하게 되었다. 이 新定貢法은 頒布와 同時에 爲先 上記六縣에 實施하게 되였으니, 貢法의 決定版으로, 그 諸規定은 다음과 같다.
 +
|목차3-2원문18번={{TagSpage|124-5}}第一 田積과 稅額
 +
|목차3-2원문19번={{TagSpage|124-6}}一. 單位面積의 生產力의 査定<br/>舊三等田의 面積이란 全然 恣意的이었고 따라서 거기서 徵收하는 稅額이란 極히 不正確한 것이었는 故로(勿論 三等田에서 다 그 收量의 十分之一을 課稅한다는 작정은 어렴풋이 있었지마는, 그 작정이란 累{{TagPage|125-1}}說한 바와 같이 퍽 漠然한 것이였다), 새로 六等田을 區分하여, 各其 生產力에 應하여 稅를 徵하기로 한다. 그러기 爲하여는 爲先 單位面積에 있어서의 六等田 各箇의 收量을 在定할 必要가 있다. 此를 品官老農에 묻고 官屯田의 收量을 調査하고, 다시 下三道 六縣에 試驗하여 얻은 結果는 다음과 같다. 먼저 {{ruby|五十七畝地|○○○○○}}(舊下田一結의 地積) {{ruby|上々年의|○○○○}} 一等水田의 收量은 베八十石(米四十石), 六等水田의 收量은 베二十石(米十石)으로 査定한다. 其間의 四等을 均分하여 (米40石-10石)÷5=6石 다음과 같이 한다.<br/>五十七畝地六等田上々年의 收量<br/>一等田 米四〇石<br/>二等田 三四石(以下 六石식 漸減)<br/>三等田 二八石<br/>四等田 二二石<br/>五等田 一六石<br/>六等田 一〇石<br/>旱田은 水田에 準하여 一等田 黃豆 四十石, 二等田 黃豆 三十四石 等으로 한다.
 +
|목차3-2원문20번={{TagSpage|125-2}}二. 무릇 稅는 收量의 {{ruby|二十分之一|○○○○○}}을 課한다.<br/>五十七畝地 六等田 上々年의 稅額<br/>一等田 米三〇斗 (一石은 十五斗니, 따러서 三〇斗는 收量 四十石의 二十分之一인 二石에 該當한다. 餘皆倣比)<br/>二等田 二五斗 五升<br/>三等田 二一斗<br/>四等田 一六斗 五升<br/>五等田 一二斗<br/>六等田 七斗 五升
 +
|목차3-2원문21번={{TagSpage|125-3}}三. 年分九等<br/>全實爲 上々年 九分實爲 上中年<br/>八分實爲 上下年 七分實爲 中上年<br/>六分實爲 中々年 五分實爲 中下年<br/>四分實爲 下上年 三分實爲 下中年<br/>二分實爲 下々年
 +
|목차3-2원문22번={{TagSpage|125-4}}四. 同科收租에 依한 各等田의 實積<br/>六等田을 다 五十七畝로 一結을 定하여 가지고, 이에 依하여, 二와 같이 收稅額을 各々 달리 한다면, 非但{{TagPage|126-1}} 節目이 煩鎻해질 뿐 아니라, 私田折給·兵役·賦役 負擔 等에 關하여 算計가 甚煩함을 未免하리니, 前例에 依하여 結負의 廣狹을 各々 다르게 定하여 가지고, 同科收租를 行하기로 한다. 그러면 如何한 稅額을 基準으로 하여 結負의 廣狹을 定할 것인가. 萬一 六等田 一結의 七斗五升을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 一結은 五十七畝가 될 것이나, 一等田의 一結이 너머 좁아진다. 同理로 一等田 一結의 三十斗를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允執厥中하여 {{ruby|二十斗同科|○○○○○}}로써 結의 積을 定하기로 한다. 其結果는 左와 如하다.<br/>一等田一結 三八·〇畝(57(畝):30(斗)=x(畝): 20(斗). x=38畝 etc.<br/>二等田一結 四四·七<br/>三等田一結 五四·二<br/>四等田一結 六九·〇<br/>五等田一結 九五·〇<br/>六等田一結 一五二·〇
 +
|목차3-2원문23번={{TagSpage|126-2}}五. 年分九等에 依한 諸等田一結의 稅額<br/>上々年 二〇斗 上中年 一八斗<br/>上下年 一六斗 中上年 一四斗<br/>中々年 一二斗 中下年 一〇斗<br/>下上年 八斗 下中年 六斗<br/>下々年 四斗<br/> (上中年=上々年 20斗×0.9=18斗. etc.)
 +
|목차3-2원문24번={{TagSpage|126-3}}六. 各 等田의 一量田尺<br/>各 等田은 다 其 {{ruby|量田尺|○○○}} 一〇〇尺四方으로 一結을 삼는다. 따라서 各量田尺의 周尺에 依한 長은 다음과 같이 定한다.<br/>一等田尺 周尺 四尺七寸七分<br/>二等田尺 周尺 五尺一寸八分<br/>三等田尺 周尺 五尺七寸〇分<br/>四等田尺 周尺 六尺四寸三分<br/>五等田尺 周尺 七尺五寸五分<br/>六等田尺 周尺 九尺五寸五分<br/>註一. 頃畝法에는 周尺五尺四方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인 故로 一畝는 六〇〇〇平方周尺이다. 따라서{{TagPage|127-1}} 1-等田尺=√16000(平方周尺)×38(畝)÷100=4.77周尺이 된다. 餘皆倣此)<br/>二. 이에 各 等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一周尺은 曲〇·六六尺).<br/>一等田尺 曲三·一四八尺<br/>二等田尺 曲三·四一九尺<br/>三等田尺 曲三·七六二尺<br/>四等田尺 曲四・三四四尺<br/>五等田尺 曲四·九八三尺<br/>六等田尺 曲六·三〇三尺<br/>다시 이 曲尺 數에 依하여 各 等田一結의 實積을 坪數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 (各 等田一結은 各 其量田尺의 百尺平方이오, 一坪은 勿論 曲六尺平方이다.)<br/>一等田一結 二,七五三·一坪<br/>二等田一結 三,三四六·七坪<br/>三等田一結 三,九三一·九坪<br/>四等田一結 四,七二三·五坪<br/>五等田一結 六,八九七・三坪<br/>六等田一結 一一,〇三五·五坪<br/>三. 世宗朝 所定周尺은 旣述한 바와 같이 曲六寸六分이나, 後에 其長이 느러나서, 磻溪隨錄(卷二)에 <cite no="11">「今量田尺所用周尺<sup>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sup>」</cite>이라 하고 그려 놓은 周尺은 其長이 曲七寸이나 되니, 이것은 仁祖 十二 甲戌年 以後에 느러난 것이다. (文獻備考 卷百四十二 參照) 따라서 甲戌 以後의 尺長과 結積에는 多少의 差異가 生하는 것이니 注意하기 바란다.
 +
|목차3-2원문25번={{TagSpage|127-2}}七. 結負束把<br/>結負束把의 이름은 從來와 같이 한다. 一結爲百負, 一負爲十束, 一束爲十把, 故로 結負束把와 新量田尺과의 關係는 如左하다.<br/>一結 1〇,〇〇〇平方量田尺<br/>一負 1〇〇平方量田尺<br/>一束 1〇平方量田尺<br/>一把 1平方量田尺<br/>또 一字五結의 制는 舊에 依한다.<br/>(以上 一 及 二는 田積과 稅額을 決定하는 데 있어서의 論理的 過程이오 法의 表面에는 三, 四, 五, 六, 七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勿論이다.)
 +
|목차3-2원문26번={{TagSpage|127-3}}八. 諸位田의 移動<br/>田積 改定에 伴하야 公私諸位田의 給付額에 當然이 移動이 生할 것이나, 此는 爲先 舊額에 依하야 端數{{TagPage|128-1}}를 부처 給해 두기로 한다.
 +
|목차3-2원문27번={{TagSpage|128-2}}第二 年分等第
 +
|목차3-2원문28번={{TagSpage|128-3}}★九. 各 道 監司의 報告<br/>各道監司는 年의 豊凶에 依하야 各邑別로 다시 旱田·水田別로, 上々에서 下々에 이르는 年分을 上啓한다. 「某邑의 水田은 某等年, 旱田은 某等年」의 形式으로 上々年은 十分實이요, 下々年은 二分實이요, 一分實은 免税한다.
 +
|목차3-2원문29번={{TagSpage|128-4}}十. 政府의 決定<br/>監司의 上啓는 議政府·六曹에 下하야 擬議한 後, 申聞하야 年分을 決定한다. 或 必要를 認할 時는 政府는 다시 朝官을 派遣하야 審査한 後 啓聞하야 年分을 定한다.
 +
|목차3-2원문30번={{TagSpage|128-5}}第三 減免之制
 +
|목차3-2원문31번={{TagSpage|128-6}}★十一. 陳荒田은 免稅한다.<br/>田籍에 {{ruby|正田|○○}}으로 되여있는 것은 다 每年 起耕할 만한 땅인데, 懶怠에 依하야 陳荒하는 者가 많으니, 此弊를 除去하기 爲하야 正田은 一部 陳荒과 全部 陳荒을 不問하고 一律 收稅하기로 한다. 但 田籍에 {{ruby|續田|○○}}으로 되여있는 것은 陳荒하기 쉬운 땅이니, 陳荒한 境遇에는 守令이 作者의 告狀에 依하야 親審한 後 監司에 傳報하고, 監司·首領官은 다시 其數를 覈하야 啓聞하고 中央에서는 다시 朝官을 派遣하야 審査한 後 免税한다.
 +
|목차3-2원문32번={{TagSpage|128-7}}十二. 沈沒田은 免稅한다.<br/>水로 因하야 沈沒된 田은 正田·續田을 不問하고 前條 陳荒田과 같은 手續을 經한 後 免稅한다.
 +
|목차3-2원문33번={{TagSpage|128-8}}★十三. 災傷田은 減免한다.<br/>病·蟲·水·旱害 等에 依하야 連伏(相接한 地)十結 以上에 亘하야 거의 全損하야 他田과 같이 九等年分으로 律할 수 없는 災傷田은 陳荒田과 같은 手續을 經過한 後 減免한다.
 +
|목차3-2원문34번={{TagSpage|128-9}}十四. 右 陳荒·沈沒·災傷田을 守令이 有故하야 親審치 몯하는 境遇에는 監司가 差人하야 審査한다. 萬一 守令이 惰怠하야 親審을 行하지 안는다든지 或 事實에 反한 報告를 한다든지 하는 境遇에는 此를 嚴罰에{{TagPage|129-1}} 處한다.<br/>★表를 지른 것은 後에 多少 修正當한 것이다.
  
|목차3-2해독문1번= @
+
|목차3-2해독문1번=①폐지 경묘·잉구 결부=전분 6등·동과 수조
 +
|목차3-2해독문2번=25년 10월 계축 하교의 그 1―결부법을 폐지하여 양전은 실적주의의 경묘법에 의하여 통일하고 다만 전품을 5등으로 나누어서 수조에 계단을 둔다는 원칙과 및 그 후의 제실천은 수구론자들의 시끄러운 반대론을 야기하였다. 그들의 논지를 들으면 다음과 같았다.
 +
|목차3-2해독문3번=<blockquote no="16">{{ruby|제1로|○○○}}, 왕은 결부제를 옛 제도(중화선왕지제)가 아니라 하여 배척하고, 즐겨 경묘법을 채용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옛 제도라 하더라도 백성에 큰 이해가 없고, 다만 일반의 시청을 경해하게 할 뿐이 아니냐. {{ruby|다음|○○}} 경묘법을 채용하면, 5등전의 1단위면적은 다 같은 고로 그들의 세액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연분9등법을 승하면, 도합 59405종의 각이한 세액을 구별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어, 산계 번용(煩冗)하여 간리가 인연위도(因緣爲盜)할 것이다. {{ruby|또|○}}, 종래에 병역과 부역은 결부법에 의하여 1결기하라는 표준으로 간단히 부과할 수가 있었으나, 경묘법에 의하여 전분5등으로 세액이 각이하여지면, 병역과 부역의 부과율도 또한 번쇄하여 질 것이다. 경묘법은 이상의 세 결함을 가진 것이니, 재래의 결부법을 좇아 모든 등전의 면적의 광협을 적의 짐작하여 동일 명목의 1결로 하고, 거기다 동과 수조를 하는 것이 좋다. 1결의 세액이 모두 같으면 오직 연분에 의한 차이가 있을 뿐으로 이 법이 극간(極簡)하다.</blockquote>
 +
|목차3-2해독문4번=【필자는 생각건대 이러한 논자의 경묘법 반대 이유의 하나로, 여기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경묘법 실시에 의하여 당연히 야기될 또 한 가지 혼란이 있다. 그것은 모든 곳의 절급전 특히 과전·공신전·별사전 등 사전의 절급액에 관한 문제다. 종래 이들 사전은 결단위로써 절급되어 있고, 1결당 수세액은 모두 같았던 고로 전주 등은 이들 사전에서 아무 불평이 없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세액을 안심하고 취할 수가 있었으나, 만일 경묘법으로 하여 1결의 전적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세액이 각이하여진다면, 사전의 수급자들은 종래와 같이 불평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돌아오는 세를 취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무한한 혼란이 야기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의 등급에 의하여 사전의 절급액을 가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전제의 근본을 교란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여 경묘제는 이 사회의 봉건관료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귀찮은 물건이었다. 일찍이 유반계는 그 수록(권지1)에 있어서 <cite no="09">”{{ruby|古|○}}(中國){{ruby|之頃畝|○○○}}는 {{ruby|主地|○○}}(積)하고, {{ruby|今|○}}(朝鮮) {{ruby|之結負|○○○}}는 {{ruby|主稅|○○}}한다”</cite>는 것을 논하고, <cite no="10">”{{ruby|古今法制|○○○○}}의 {{ruby|指意所分|○○○○}}이 {{ruby|斯可見矣|○○○○}}로다”</cite>하고 통탄한 일이 있지만, 2 소위 ‘지의(指意)’란, 이 전체로서의 봉건정부 그것의 지의이기 전에, 우선 개인으로서의 봉건관료의 지의였던 것이다.】
 +
|목차3-2해독문5번=이에 대하여 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
|목차3-2해독문6번=<blockquote no="17">{{ruby|제1로|○○○}} {{ruby|경묘법이|○○○○}} {{ruby|일정하면|○○○○}}, {{ruby|지품의|○○○}} {{ruby|고하를|○○○}} {{ruby|변경할|○○○}} {{ruby|경우에는|○○○○}} {{ruby|다만|○○}} {{ruby|그|○}} {{ruby|세액을|○○○}} {{ruby|개정하면|○○○○}} {{ruby|그만이요|○○○○}}, {{ruby|양전의|○○○}} {{ruby|수는|○○}} {{ruby|자약하여|○○○○}} {{ruby|하등의|○○○}} {{ruby|변경을|○○○}} {{ruby|받지|○○}} {{ruby|아니한다|○○○○}}. {{ruby|그러나|○○○}} {{ruby|만일|○○}} {{ruby|지품에|○○○}} {{ruby|의하여|○○○}} {{ruby|결부를|○○○}} {{ruby|정한다면|○○○○}}, {{ruby|지품을|○○○}} {{ruby|변경할|○○○}} {{ruby|때마다|○○○}} {{ruby|자연히|○○○}} {{ruby|결부의|○○○}} {{ruby|수가|○○}} {{ruby|변화를|○○○}} {{ruby|받고|○○}}, {{ruby|따라서|○○○}} {{ruby|전제의|○○○}} {{ruby|세포조직인|○○○○○}} {{ruby|자정지제|○○○○}}<sup>(5결위1자)</sup>{{ruby|가|○}} {{ruby|진괴하여|○○○○}} {{ruby|분운하기|○○○○}} {{ruby|짝이|○○}} {{ruby|없으리니|○○○○}}, {{ruby|간리는|○○○}} {{ruby|이로|○○}} {{ruby|인연하여|○○○○}} {{ruby|도를|○○}} {{ruby|할|○}} {{ruby|것이다|○○○}}.<br/>땅에 대소가 있어 동과 수조하는 것이 수세상 편리한 것은 제군의 소론과 같으나, 옛성인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행하지 않고 경묘법에 인하여 후세에 수범(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이치가 있었던 까닭이다.<br/>{{ruby|다음|○○}}, 제군은 경묘법에 의한 수세의 번쇄를 호소하나 손실법 때 일을 생각하면, 당시 전분수조의 절목이야말로 해시(奚啻) 천만하였느냐(축단손실). 그러면 서로 능히 이를 행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신법은 번용하다 하지만 백성은 다만 ‘모든 전은 어느 등전이니 모든 해에는 기두를 납하면 된다’는 것만 외워두면, 간리에게 속을 리가 없다. 하3도에 현행되어 있는 공법(3등전 차과 수세)으로만 보더라도 차과 수세는 제군이 염려하는 것 같이 번쇄한 것은 결코 아니다.<br/>{{ruby|제3으로|○○○○}}, 병역·부역의 부과는 하필 종래의 1결기허에 고집할 것 없이 새로 정하는 세액의 다과에 의하여 적당히 부과하면 그만 아니냐.</blockquote>
 +
|목차3-2해독문7번=【필자는 생각건대 이상은 왕이 그 폐(弊)다단한 결부법을 폐지하고, 그 이상으로 하는 실적주의의 경묘법을 단행하려 한 대문자다. 그러나 그 이상은 후술할 바와 같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드디어 구투(舊套) 그대로 이조 말기에 이르렀으니, 한(恨)된 일이라 하겠다.】
 +
|목차3-2해독문8번=이에 수구론자들은 한 개의 절충안을 내었다.
 +
|목차3-2해독문9번=<blockquote no="18">임금의 말씀이 지당하나 그러나 법이란 큰 이해(利害)가 없는 한, 종래의 풍속 습관에 좇는 것이 좋으니, 하필 일일이 중국의 법을 본받을 것이 무엇이냐. 또 지유대소(地有大小)하여 동과 수조를 하는 것이 수세상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간편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결부법의 장처(동과 수조의 편)를 남기고 그 단처(결부법의 3등전척은 전연 자의적이오 하등의 규준이 없는 것이다. 제1절, 1, 참조)를 버려 한 개의 절충제도를 세우는 것이 어떠하냐. 즉, {{ruby|결부제의|○○○○}} {{ruby|동과수조주의는|○○○○○○○}} {{ruby|그냥|○○}} {{ruby|살리고|○○○}} {{ruby|다만|○○}} {{ruby|종래의|○○○}} {{ruby|3등전척을|○○○○○}} {{ruby|버리고|○○○}} {{ruby|주척에|○○○}} {{ruby|의하여|○○○}} {{ruby|새로|○○}} {{ruby|제정할|○○○}} {{ruby|6등전|○○○}}(전년 10월 계축 하교에는 전분5등으로 되었었으나, 그 후 최악전은 5등전만 가지고는 율할 수 없으니 새로 제5등전을 2분하여 제5등 밑에 제6등전을 두자는 의논이 일어났다)의 {{ruby|광협을|○○○}} {{ruby|적당히|○○○}} {{ruby|상정하는|○○○○}} {{ruby|것이|○○}} {{ruby|어떠냐|○○○}}.</blockquote>
 +
|목차3-2해독문10번=왕도 드디어 동과 수조 지상론의 세에 밀려 26년 6월 갑신에 의정부·육조에게 양론을 재음미하도록 전지를 내렸다. 이 회의는 위에 적은 절충론을 채택하였으니, 그 요항은 다음 3개의 조였다.
 +
|목차3-2해독문11번=1. 경묘보법을 고처, {{ruby|구에|○○}} {{ruby|의하여|○○○}} {{ruby|결부속파로|○○○○○}} {{ruby|한다|○○}}.
 +
|목차3-2해독문12번=2. 이미 정한 5등전 밑에 다시 1등을 설(設)하여 도합 {{ruby|전분6등|○○○○}}으로 한다.
 +
|목차3-2해독문13번=3. 그 6등전을 {{ruby|다|○}} {{ruby|주척을|○○○}} {{ruby|써서|○○}} {{ruby|양하고|○○○}}, 적당히 그 광협을 작량하여 {{ruby|동과수조|○○○○}}로 한다.
 +
|목차3-2해독문14번=이리하여 이 같은 2원칙―전분6등·동과 수조(1의 ‘결부법’이라는 것과, 3의 ‘동과 수조’라는 것은 동의어다)는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되었다. 여기에서 독자는 자연히 깨닫는 바가 있으리라. 원래 경묘법의 장처는 {{ruby|지적의|○○○}} {{ruby|일정|○○}}이라는 데 있는 것이요, 세종대왕의 착목처도 본래 여기에 있었던 것인데, 그 요점은 허울 좋게 경원되어 버리고, 다만 ‘{{ruby|양전은|○○○}} {{ruby|주척을|○○○}} {{ruby|쓴다|○○}}’(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다음 항목에서 볼 바와 같이 ‘{{ruby|양전척은|○○○}} {{ruby|주척으로|○○○○}} {{ruby|표준을|○○○}} {{ruby|삼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겨우 그 형해만을 남기게 되었다. 단 그것은 전연 자의적인 옛 3등전척을 구축(驅逐)하여 버리는 데는 공이 있었던 것이다.
 +
|목차3-2해독문15번=②26년 11월 무자 공법 최후의 정착
 +
|목차3-2해독문16번=전분6등·동과 수조·연분9등의 원칙이 확정되었으니, 그 구체안을 작성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ruby|먼저|○○}} {{ruby|6등전분의|○○○○}} {{ruby|구별은|○○○}} {{ruby|토지의|○○○}} {{ruby|생산력에|○○○○}} {{ruby|표준을|○○○}} {{ruby|두기로|○○○}} {{ruby|한다|○○}}. 이를 위하여는 가령 옛 하등전 1결의 면적인 57묘의 땅(제1절 1, 참조)를 취하여 가지고, 이 지적을 가진 최양전 및 최악전의 생산력을 사정하여 양자의 중간에 적당히 6등전을 분배하는 방법을 취한다. 또 이를 위하여는, 7월 신해 전제상정소에 명하여 해당 사항을 각 관의 식리품관 및 노농에 순문하게 하며, 또 각 관 관둔전<sup>(지방관청의 용도를 변하는 전)</sup>해당 면적지의 과거 5개년 간의 미곡실수량을 조사하게 하였다.
 +
|목차3-2해독문17번=다시 8월 정미 김종서·이숙시·정인지 등 전제상정소의 세 대신을 충청도 청안현에 파견하여 (이 때에 왕은 안질을 요양하기 위하여 청주 초수에 행행 중이었던 고로, 그 근방의 땅을 택한 것이다) 화곡 임실 상황에 의하여 토지생산력을 사정하고, 다시 그 결과에 좇아 전품등제를 행하게 하여 금후 전국적으로 행할 전품등제의 규준으로 삼았다. 이 시험등제가 끝난 후에 다시 하3도에 각각 산간군·평원군 하나씩을 택하여―충청도 비인·청안, 경상도 함안·고령, 전라도 고산·광양―거기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청안현 시험등제의 법을 본받아 전분을 등제하고, 또 그 등제에 좇아 양전을 시작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여섯 현의 등제·양전이 거의 끝날 즈음에 전제상정소는 그동안의 논의를 종합하여 11월 무자에 상계하고 왕은 이에 따라 새로 정한 공법을 중외에 반포하게 되었다. 이 새로 정한 공법은 반포와 동시에 우선 위에 적은 여섯 현에 실시하게 되었으니, 공법의 결정판으로, 그 모든 규정은 다음과 같다.
 +
|목차3-2해독문18번=제1 전적과 세액
 +
|목차3-2해독문19번=1. 단위면적의 생산력의 사정<br/>옛 3등전의 면적이란 전연 자의적이었고 따라서 거기서 징수하는 세액이란 극히 부정확한 것이었는 고로(물론 3등전에서 다 그 수량의 10분의 1을 과세한다는 작정은 어렴풋이 있었지마는, 그 작정이란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퍽 막연한 것이었다), 새로 6등전을 구분하여, 각기 생산력에 응하여 세를 징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우선 단위면적에 있어서의 6등전 각개의 수량을 재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 품관 노농에 묻고 관둔전의 수량을 조사하고, 다시 하3도 6현에 시험하여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ruby|57묘지|○○○○}}(옛 하전1결의 지적) {{ruby|상상년의|○○○○}} 1등 수전의 수량은 벼 80석(미 40석), 6등 수전의 수량은 벼 20석(미 10석)으로 사정한다. 그 동안의 4등을 균분하여 (미 40석-10석)÷5=6석 다음과 같이 한다.<br/>57묘지6등전 상상년의 수량<br/>1등전 미 40석<br/>2등전 34석(이하 6석씩 점감)<br/>3등전 28석<br/>4등전 22석<br/>5등전 16석<br/>6등전 10석<br/>한전은 수전에 준하여 1등전 황두 40석, 2등전 황두 34석 등으로 한다.
 +
|목차3-2해독문20번=2. 무릇 세는 수량의 {{ruby|20분지1|○○○○○}}을 부과한다.<br/>57묘지 6등전 상상년의 세액<br/>1등전 미 20두 (1석은 15두니, 따라서 30두는 수량 40석의 20분의 1인 2석에 해당한다. 여개방차)<br/>2등전 25두 5승<br/>3등전 21두<br/>4등전 16두 5승<br/>5등전 12두<br/>6등전 7두 5승
 +
|목차3-2해독문21번=3. 연분9등<br/>전실위(實爲) 상상년 9분실위 상중년<br/>8분실위 상하년 7분실위 중상년<br/>6분실위 중중년 5분실위 중하년<br/>4분실위 하상년 3분실위 하중년<br/>2분실위 하하년
 +
|목차3-2해독문22번=4. 동과 수조에 의한 각 등전의 실적<br/>6등전을 다 57묘로 1결을 정하여 가지고, 이에 의하여, 2와 같이 수세액을 각각 달리 한다면, 비단 절목이 번쇄해질 뿐 아니라, 사전절급·병역·부역 부담 등에 관하여 산계가 심번(甚煩)함을 미면하리니, 전례에 의하여 결부의 광협을 각각 다르게 정하여 가지고, 동과 수조를 행하기로 한다. 그러면 여하한 세액을 기준으로 하여 결부의 광협을 정할 것인가. 만일 6등전 1결의 7두 5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 1결은 57묘가 될 것이나, 1등전의 1결이 너머 좁아진다. 동리(同理)로 1등전 1결의 30두를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윤집궐중(允執厥中)하여 {{ruby|20두동과|○○○○○}}로써 결의 적을 정하기로 한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br/>1등전1결 38·0묘(57(묘):30(두)=x(묘): 20(두). x=38묘 etc.<br/>2등전1결 44·7<br/>3등전1결 54·2<br/>4등전1결 69·0<br/>5등전1결 95·0<br/>6등전1결 152·0
 +
|목차3-2해독문23번=5. 연분9등에 의한 모든 등전1결의 세액<br/>상상년 20두 상중년 18두<br/>상하년 16두 중상년 14두<br/>중중년 12두 중하년 10두<br/>하상년 8두 하중년 6두<br/>하하년 4두<br/> (상중년=상상년 20두×0.9=18두. etc.)
 +
|목차3-2해독문24번=6. 각 등전의 일량 전척<br/>각 등전은 다 그 {{ruby|양전척|○○○}} 100척4방으로 1결을 삼는다. 따라서 각 양전척의 주척에 의한 장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br/>1등전척 주척 4척7촌7분<br/>2등전척 주척 5척1촌6분<br/>3등전척 주척 5척7촌0분<br/>4등전척 주척 6척4촌3분<br/>5등전척 주척 7척5촌5분<br/>6등전척 주척 9척5촌5분<br/>주1. 경묘법에는 주척5척4방위1보, 240보위1묘인 고로 1묘는 6000평방주척이다. 따라서 1-등전척=√16000(평방주척)×38(묘)÷100=4.77주척이 된다. 여개방차)<br/>2. 이에 각 등전척의 실장을 곡척으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1주척은 곡0·66척).<br/>1등전척 곡3·148척<br/>2등전척 곡3·419척<br/>3등전척 곡3·762척<br/>4등전척 곡4・344척<br/>5등전척 곡4·983척<br/>6등전척 곡6·303척<br/>다시 이 곡척 수에 의하여 각 등전1결의 실적을 평수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각 등전1결은 각 그 양전척의 100척평방이요, 1평은 물론 곡6척평방이다.)<br/>1등전1결 2,753·1평<br/>2등전1결 3,346·7평<br/>3등전1결 3,931·9평<br/>4등전1결 4,723·5평<br/>5등전1결 6,897・3평<br/>6등전1결 11,035·5평<br/>3. 세종 조(朝) 소정(所定) 주척은 이미 쓴 바와 같이 곡6촌6분이나, 후에 그 장이 늘어나서, 반계수록(권2)에 <cite no="11">「今量田尺所用周尺<sup>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sup>」</cite>이라 하고 그려 놓은 주척은 그 장이 곡7촌이나 되니, 이것은 인조 12 갑술년 이후에 늘어난 것이다. (문헌비고 권142 참조) 따라서 갑술 이후의 척장과 결적에는 다소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니 주의하기 바란다.
 +
|목차3-2해독문25번=7. 결부속파(結負束把)<br/>결부속파의 이름은 종래와 같이 한다. 1결위100부, 一부위10속, 1속위10파, 고로 결부속파와 새로운 양전척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br/>1결 10,000평방양전척<br/>1부 100평방양전척<br/>1속 10평방양전척<br/>1파 1평방양전척<br/>또 1자5결의 제(制)는 옛 방식에 의한다.<br/>(이상 1 및 2는 전적과 세액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의 논리적 과정이요 법의 표면에는 3, 4, 5, 6, 7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
|목차3-2해독문26번=8. 모든 위전의 이동<br/>전적 개정에 반(伴)하여 공사의 모든 위전의 급부액에 당연히 이동이 생길 것이나, 이는 우선 옛 액에 의하여 단수(端數)를 붙여 급(給)해 두기로 한다.
 +
|목차3-2해독문27번=제2 연분등제
 +
|목차3-2해독문28번=★9. 각 도 감사의 보고<br/>각 도 감사는 한 해의 풍흉에 의하여 각 읍별로 다시 한전·수전별로, 상상에서 하하에 이르는 연분을 상계한다. ‘모 읍의 수전은 모 등년, 한전은 모 등년’의 형식으로 상상년은 10분실이요, 하하년은 2분실이요, 1분실은 면세한다.
 +
|목차3-2해독문29번=10. 정부의 결정<br/>감사의 상계는 의정부·육조에 내려 의의(擬議)한 뒤, 신문(申聞)하여 연분을 결정한다. 혹 필요를 인식할 때는 정부는 다시 조관을 파견하여 심사한 후 계문하야 연분을 정한다.
 +
|목차3-2해독문30번=제3 감면지제
 +
|목차3-2해독문31번=★11. 진황전은 면세한다.<br/>전적에 {{ruby|정전|○○}}으로 되어있는 것은 다 매년 기경할 만한 땅인데, 나태에 의하여 진황하는 자가 많으니, 이 폐를 제거하기 위하여 정전은 일부 진황과 전부 진황을 불문하고 일률 수세하기로 한다. 단 전적에 {{ruby|속전|○○}}으로 되어있는 것은 진황하기 쉬운 땅이니, 진황한 경우에는 수령이 작자의 고장에 의하여 친심한 후 감사에 전보하고, 감사·수령관은 다시 그 수를 핵(覈)하여 계문하고 중앙에서는 다시 조관을 파견하여 심사한 후 면세한다.
 +
|목차3-2해독문32번=12. 침몰전은 면세한다.<br/>물로 인하여 침몰된 전은 정전·속전을 불문하고 앞의 조 진황전과 같은 수속을 경(經)한 후 면세한다.
 +
|목차3-2해독문33번=★13. 재상전은 감면한다.<br/>병·충·수·한해 등에 의하여 연복(상접한 땅)10결 이상에 달해 거의 전손(全損)하여 다른 전과 같이 9등연분으로 율할 수 없는 재상전은 진황전과 같은 수속을 경과한 후 감면한다.
 +
|목차3-2해독문34번=14. 이 진황·침몰·재상전을 수령이 유고하여 친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감사가 차인(差人)하여 심사한다. 만일 수령이 타태하여 친심을 행하지 않는다든지 혹 사실에 반한 보고를 한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이를 엄벌에 처한다.<br/>★표를 지른 것은 후에 다소 수정당한 것이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95번째 줄: 1,007번째 줄:
 
----
 
----
 
{{Layout4
 
{{Layout4
|목차4원문1번= @
+
|목차4원문1번=
  
|목차4해독문1번= @
+
|목차4해독문1번=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304번째 줄: 1,016번째 줄:
 
----
 
----
 
{{Layout4-1
 
{{Layout4-1
|목차4-1원문1번= @
+
|목차4-1원문1번={{TagSpage|129-3}}① 田積 整理
 +
|목차4-1원문2번={{TagSpage|129-4}}田積 改定의 다음에 오는 것은 諸位田 整理에 關한 問題다. 貢法 定着의 翌年인 二十七年 七月 乙酉에 議政府·六曹의 上啓에 依하야 舊田積과 新田積과의 差異에 말미암아 當然이 생기는바 公私 諸位田의 盈(過) 縮(不足)은 或은 國庫에 移屬하고 或은 新規 補給하고 또 從來 折給額이 區々不定하든 것은 此를 一定하기로 하였다. 또 從來 그 額이 一定하든 것 中에서 이 지음에 一律로 減額한 것도 있다. 다시 어떤 種類의 位田은 全然 革除하기로 하였다. 要컨댄 田制의 全般에 亘하야 面目이 一新하게 된 것이다. 第一의 過不足의 添削을 한 것은 驛田<sup>(郵驛에 對한 給田)</sup>이요, 第二의 折給額을 一定한 것은 鄕校位田<sup>(鄕校에 對한 給田)</sup>·州縣衙祿田<sup>(守令의 俸祿田)</sup>·公須田(地方官廳의 用度田)·院田(行旅投宿所院에 對한 給田) 等이요, 第三의 一律減額을 한 것은 渡田<sup>(大河의 指定 渡津에 對한 給田)</sup>·站田<sup>(水運을 맡는 水站에 對한 給田)</sup> 等이다. 그리고 第四의 全然 革除해버린 것은 各司公廨田<sup>(中央 各 官廳에 折給되여 있든 點心費用田)</sup>을 비롯하야 諸祭位田<sup>(全州 慶基殿(太祖眞殿)·社稷 祭位田·文宣王 祭位田·祀典 所載 諸嶽·海·瀆·山·川·城隍 祭位田 等)</sup>·人吏位田<sup>(鄕吏에 對한 給田)</sup>·瓦匠田<sup>(東·西窰瓦匠에 對한 給田)</sup>・宗廟干田<sup>(宗廟所屬于(凡役賤者總謂之干)에 對한 給田)</sup>·奉常寺 祭壇直田<sup>(祭祀 及 議謚를 掌하는 奉常寺의 祭壇直이에 對한 給田)</sup>·水軍田<sup>(紅曄·喬河에 配置되었든 特別 水軍에 對한 給田)</sup> 等이다<sup>(以上 諸位田의 本質과, 및 그들에 對한 處理 諸方法의 各其 理由에 對하여는, 다시 詳論을 하여야 처음으로 事態가 밝아질 것이로되, 本論의 主流가 아닌 故로 割愛한다)</sup>. 그런데 以上 四箇의 處理 方法 中, 第四의 全然 革除는 無難이 直時 實行할 수가 있었을 것이나, 他 三方法에 依한 것은 어느 것이나 正確히 此를 實行하랴면 其地方의, 新法에 依한 一般的 量田 結果를 기다려야 할 것이요, 또 事實 各 道의 量田은 後述할 것과 같이 極히 綏慢히 實行된 것인 故로, 此等 新規定의 正確한 適用은 相當한 時日을 要한 것이다. 더욱이 驛田·衙祿田·公須田 等 巨額에 達하는 位田의 處理는 그러하였다.
 +
|목차4-1원문3번={{TagSpage|129-5}}以上 諸位田 處理 外에 또 남은 것은 科田<sup>(朝館에 對한 給田)</sup>·功臣田<sup>(功臣 及 其子孫에 對한 給田)</sup>에 對한 問題일 것인데, 此兩種田은 다{{TagPage|130-1}} 京畿 內에 存在하는 것인 故로, 其整理는 京畿의 一般的 量田<sup>(世祖 七年 次項 參照)</sup> 結果를 기다린 後에 하였을 것이다.
 +
|목차4-1원문4번={{TagSpage|130-2}}②「稅」의 處理
 +
|목차4-1원문5번={{TagSpage|130-3}}科田法에 依하야 規定된, 國家가 科田을 爲始하야 諸私田에서 一結二斗씩 徵收하는 {{ruby|稅|○}}는</sup>(처음 {{ruby|租|○}}와 {{ruby|稅|○}}를 區別하여 使用하든 때의 本來의 意味에 있어서의 稅. 第一節 緒頭 參照)</sup>, 新法에 있어서는 如何이 處理되었는가.
 +
|목차4-1원문6번={{TagSpage|130-4}}二十七年 七月 乙酉의 決定으로는,
 +
|목차4-1원문7번={{TagSpage|130-5}}<blockquote no="19">一. 前此一結 定稅三斗<sup>(筆者曰, 三斗之間, 恐脫十字)</sup> 各品科田 及外方各位私田 則一結二斗 今一結極數 改定二十斗 而稅米豆 從本稅之數計除 其一結二斗仍舊.</blockquote>
 +
|목차4-1원문8번={{TagSpage|130-6}}라고 하였다. 此規定은 다음과 같이 解釋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即 新法에 있어서는 田積도 變更되였고, 또 一結當 收稅額도 三十斗에서 二十斗로 變更이 되였지마는, 私田稅 一結二斗는 此를 變更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야 一結의 收稅 「極數」 二十斗<sup>(年分 上々年의 一結當 收稅額이니, 一結의 最高 收稅額)</sup>인 「本稅」<sup>(即, 私田法의 所謂 租)</sup>에 對하야 私田稅 二斗로 하고, 本稅가 年分에 依하야 減額되는 데 타라 私田稅도 此를 「計除」(「減額」)하기로 한다. 即 本稅 二十斗에 對하야 私田稅 二斗, 本稅 十八斗에 對하야 私田稅 一斗 八升 等으로. 그런데 本稅 對 私田稅 間의 規定도 田積 整理 問題와 같이 京畿 內에 一般的으로 新貢法이 適用된 後에야 實行된 것은 勿論이다.
 +
|목차4-1원문9번={{TagSpage|130-7}}그리고 여기서 暫間 밝혀 둘 것은, 科田法에 있어서는 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 外의 모든 田에서 이 私田稅를 받게 되여 있었는데, 其後 幾多의 變遷을 겪어 結局 經國大典에서는 織田<sup>(科田의 後身이니, 現職 官僚에 對한 給田)</sup>과 寺田<sup>(寺院에 許容된 私田)</sup>만이 이 稅를 바치기로 되여 있다.
  
|목차4-1해독문1번= @
+
|목차4-1해독문1번=① 전적 정리
 +
|목차4-1해독문2번=전적 개정의 다음에 오는 것은 모든 위전 정리에 관한 문제다. 공법 정착의 익년인 27년 7월 을유에 의정부·육조의 상계에 의하여 옛 전적과 새 전적과의 차이에 말미암아 당연히 생기는바 공사 모든 위전의 영(과) 축(부족)은 혹은 국고에 이속하고 혹은 신규 보급하고 또 종래 절급액이 구구부정하던 것은 이를 일정하기로 하였다. 또 종래 그 액이 일정하던 것 중에서 이 즈음에 일률로 감액한 것도 있다. 다시 어떤 종류의 위전은 전연 혁제하기로 하였다. 요컨대 전제의 전반에 이르러 면목이 일신하게 된 것이다. 제1의 과부족의 첨삭을 한 것은 역전<sup>(우역에 대한 급전)</sup>이요, 제2의 절급액을 일정한 것은 향교위전<sup>(향교에 대한 급전)</sup>·주현아록전<sup>(수령의 봉록전)</sup>·공수전(지방관청의 용도전)·원전(행려 투숙소원에 대한 급전) 등이요, 제3의 일률 감액을 한 것은 도전<sup>(대하의 지정 도진에 대한 급전)</sup>·참전<sup>(수운을 맡는 수참에 대한 급전)</sup> 등이다. 그리고 제4의 전연 혁제해버린 것은 각사 공해전<sup>(중앙 각 관청에 절급되어 있던 점심비용전)</sup>을 비롯하여 모든 제위전<sup>(전주 경기전(태조 진전)·사직 제위전·문선왕 제위전·사전 소재 모든 악·해·독·산·천·성황 제위전 등)</sup>·인리 위전<sup>(향리에 대한 급전)</sup>·와장전<sup>(동·서요 와장에 대한 급전)</sup>・종묘 한전<sup>(종묘 소속 한(범역천자 총위지한)에 대한 급전)</sup>·봉상사 제단직전<sup>(제사 및 의시(議謚)를 장(掌)하는 봉상사의 제단직에 대한 급전)</sup>·수군전<sup>(홍엽·교하에 배치되었던 특별 수군에 대한 급전)</sup> 등이다<sup>(이상 모든 위전의 본질과, 및 그들에 대한 처리 제방법의 각기 이유에 대하여는, 다시 상론을 하여야 처음으로 사태가 밝아질 것이지만, 본론의 주류가 아닌 고로 할애한다)</sup>. 그런데 이상 4개의 처리 방법 중, 제4의 전연 혁제는 무난히 즉시 실행할 수가 있었을 것이나, 다른 세 방법에 의한 것은 어느 것이나 정확히 이를 실행하려면 그 지방의, 신법에 의한 일반적 양전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요, 또 사실 각 도의 양전은 후술할 것과 같이 극히 수많이 실행된 것인 고로, 이들 새 규정의 정확한 적용은 상당한 시일을 요한 것이다. 더욱이 역전·아록전·공수전 등 거액에 달하는 위전의 처리는 그러하였다.
 +
|목차4-1해독문3번=이상 모든 위전 처리 외에 또 남은 것은 과전<sup>(조관(朝館)에 대한 급전)</sup>·공신전<sup>(공신 및 그 자손에 대한 급전)</sup>에 대한 문제일 것인데, 이 두 종의 전은 다 경기 내에 존재하는 것인 고로, 그 정리는 경기의 일반적 양전<sup>(세조 7년 아래 항목 참조)</sup> 결과를 기다린 후에 하였을 것이다.
 +
|목차4-1해독문4번=② ‘세’의 처리
 +
|목차4-1해독문5번=과전법에 의하여 규정된, 국가가 과전을 위시하여 모든 사전에서 1결2두씩 징수하는 {{ruby|세|○}}는</sup>(처음 {{ruby|조|○}}와 {{ruby|세|○}}를 구별하여 사용하던 때의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세. 제1절 서두 참조)</sup>, 신법에 있어서는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
|목차4-1해독문6번=27년 7월 을유의 결정으로는,
 +
|목차4-1해독문7번=<blockquote no="19">一. 前此一結 定稅三斗<sup>(筆者曰, 三斗之間, 恐脫十字)</sup> 各品科田 及外方各位私田 則一結二斗 今一結極數 改定二十斗 而稅米豆 從本稅之數計除 其一結二斗仍舊.</blockquote>
 +
|목차4-1해독문8번=라고 하였다. 이 규정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신법에 있어서는 전적도 변경되었고, 또 1결당 수세액도 30두에서 20두로 변경이 되었지만, 사전세 1결2두는 이를 변경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결의 수세 ‘극수’ 20두<sup>(연분 상상년의 1결당 수세액이니, 1결의 최고 수세액)</sup>인 ‘본세’<sup>(즉, 사전법의 소위 조)</sup>에 대하여 사전세 2두로 하고, 본세가 연분에 의하여 감액되는 데 따라 사전세도 이를 ‘계제’(‘감액’)하기로 한다. 즉 본세 20두에 대하여 사전세 2두, 본세 18두에 대하여 사전세 1두 8승 等으로. 그런데 본세 대 사전세 간의 규정도 전적 정리 문제와 같이 경기 내에 일반적으로 새 공법이 적용된 후에야 실행된 것은 물론이다.
 +
|목차4-1해독문9번=그리고 여기서 잠깐 밝혀 둘 것은, 과전법에 있어서는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 외의 모든 전에서 이 사전세를 받게 되어 있었는데, 그 후 기다의 변천을 겪어 결국 경국대전에서는 직전<sup>(과전의 후신이니, 현직 관료에 대한 급전)</sup>과 사전<sup>(사원에 허용된 사전)</sup>만이 이 세를 바치기로 되어 있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313번째 줄: 1,041번째 줄:
 
----
 
----
 
{{Layout4-2
 
{{Layout4-2
|목차4-2원문1번= @
+
|목차4-2원문1번=
 +
|목차4-2원문2번=
 +
|목차4-2원문3번=
 +
|목차4-2원문4번=
 +
|목차4-2원문5번=
 +
|목차4-2원문6번=
 +
|목차4-2원문7번=
 +
|목차4-2원문8번=
 +
|목차4-2원문9번=
 +
|목차4-2원문10번=
  
|목차4-2해독문1번= @
+
|목차4-2해독문1번=
 +
|목차4-2해독문2번=
 +
|목차4-2해독문3번=
 +
|목차4-2해독문4번=
 +
|목차4-2해독문5번=
 +
|목차4-2해독문6번=
 +
|목차4-2해독문7번=
 +
|목차4-2해독문8번=
 +
|목차4-2해독문9번=
 +
|목차4-2해독문10번=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2024년 11월 24일 (일) 17:14 판

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다운받기

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李朝田稅制度의 成立過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14 발행기관
저자 박시형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6월
시작쪽 96쪽 종료쪽 148쪽 전체쪽 53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이 소편의 목적은, 이조가 전 조(朝) 고려의 퇴폐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한 개의 새로운 전제(田制)를 확립한 제공작 중, 특히 전세제도에 관한 것에 대하여, 그 확립의 전말과 제도의 내용을 구명하는 데 있다. 대개 이조의 전세제도는 태조가 자신의 권력으로써 고려 공양왕 3년에 발포한 과전법에 의하여 잠정적인 편법을 발견하였고, 그 후 태종 조(朝)의 다소의 수정을 거쳐, 마침내 세종 조(朝)에 이르러 결정적인 대변혁을 거쳐 가지고, 세조 이후 경국대전에 등재되어, 그 이후 길이 만세불역지법(萬世不易之法)으로 시행하려던 것이니 이 소편의 당면적인 토구(討究)의 대상은 즉 경국대전 소재 전세관계 제조문의 내면적인 해석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96-1이 小篇의 目的은, 李朝가 前朝 高麗의 頹廢된 土地制度를 改革하야 한 箇의 새로운 田制를 確立한 諸工作中, 特히 田稅制度에 關한 것에 對하야, 그 確立의 顚末과 制度의 內容을 究明하는 데 있다. 大概 李朝의 田稅制度는 太祖가 自身의 權力으로써 高麗 恭讓王 三年에 發布한 科田法에 依하야 暫定的인 便法을 發見하얐고, 그 後 太宗朝의 多少의 修正을 거처, 마침내 世宗朝에 이르러 決定的인 大變革을 거처 가지고, 世祖 以後 經國大典에 登載되여, 厥後 기리 萬世不易之法으로 施行하랴든 것이니 이 小篇의 當面的인 討究의 對象은 即 經國大典 所載 田稅關係 諸條文의 內面的인 解釋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본문


본문1: 1.공법 이전의 수세법


이조 최초의 전조에 관한 법제는 고려 공양왕 3년에 발포된 소위 ‘과전법’ 중의 다음과 같은 하나의 조가 주문이 되어 있다.
쪽수▶P96-2李朝 最初의 田租에 關한 法制는 高麗 恭讓王 三年에 發布된 所謂「科田法」 中의 次揭 一條가 主文이 되어 있다.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穀三十斗(○○○○○) 此外有橫斂者 以臟論고려사 권78 식화지

쪽수▶P97-1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穀三十斗(○○○○○) 此外有橫斂者 以臟論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

위의 조는 세종 조(朝)의 공법이 시행되기까지 유효하는 법이니, 이에 대하여 차례대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쪽수▶P97-2右一條는 世宗朝의 貢法이 施行되기까지 有效하는 法이니, 이에 對하야 逐次 解釋을 試코자 한다.
위의 조의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잠깐 해혹을 하여 둘 것이 있다. 즉 과전법 중, 위에 든 전조(○○)에 관한 규정에 계속하여,
쪽수▶P97-3右條의 解釋에 드러가기 前에 여기서 暫間 解惑을 하야 둘 것이 있다.即 科田法 中, 右揭 田租(○○)에 關한 規定에 繼續하여,

除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外 凡有田者皆納() 水田一結 白米二斗 早田一結 黄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쪽수▶P97-4

除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外 凡有田者皆納() 水田一結 白米二斗 早田一結 黄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이라는 조가 있는데, 이것은 전세(○○)에 관한 규정이다. 그러면 조(租)와 세(稅)는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면, ()는 국가가 직접 수납하는 공과로 1결에 30두씩 마련이요, 이에 대한 ()는 능침·창고·궁사·공해 소속의 일반 공전과 공신전이라는 특별한 사전과를 제외한 일절의 전 즉 과전·직전·별사전·군전 등의 모든 사전과, 향·진·역·관 등의 모든 외역전과의 소유자(점유자)가 그들에게 사급된 수화전 혹은 경작전의 소득 중에서 국가에 납부하는 바, 감축된(○○○) ()로 1결에 2두씩 마련이다. 따라서 일반 공전은 조 이외에 다시 세를 바치는 것은 없다. 국가에서 조를 수납하는 전과 세를 수납하는 전은 최초부터 구별되어 있다. 환언하면 조는 일반 전에 대한 본래의 공과요, 세는 특정한 사인에게 수조권 또는 경작권을 부여한 전에 대하여 국가가 전연 이를 방임하지 않고 그들의 수입의 일부를 갈라서 거두는, 말하자면 감축된 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초에는 조와 세의 이름을 명확히 구분하였으나 후에는 점점 ‘조’자를 사용하지 않고 종래의 조도 ‘세’라고 칭하게 되었다. 물론 경국대전 등에는 ‘조’자를 일절 사용하지 안 하였다. 양자는 본질적으로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인 이상 두 용어의 통일은 조금도 불가가 없었던 것이다. 이 소편에 있어 ‘조’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러한 의미의 용어니 독자는 이를 살피기 바란다.
쪽수▶P97-5이라는 一條가 있는데, 이것은 田稅(○○)에 關한 規定이다. 그러면 租와 稅는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면, ()는 國家가 直接 收納하는 公課로 一結에 三十斗씩 마련이요, 此에 對한 ()는 陵寢·倉庫·宮司·公廨所屬의 一般 公田과 功臣田이라는 特別한 私田과를 除外한 一切의 田 即 科田·職田·別賜田·軍田 等의 諸私田과, 鄕·津·驛·舘 等의 諸外役田과의 所有者(占有者)가 그들에게 賜給된 收和田 或은 耕作田의 所得 中에서 國家에 納付하는 바, 減縮된(○○○) ()로 一結에 二 斗式 마련이다. 따라서 一般公田은 租以 外에 다시 稅를 바치는 것은 없다. 國家에서 租를 收納하는 田과 稅를 收納하는 田은 最初부터 區別되여 있다. 換言하면 租는 一般 田에 對한 本來의 公課요, 稅는 特定한 私人에게 收租權 又는 耕作權을 賦與한 田에 對하야 國家가 全然 此를 放任하지 않고 그들의 收入의 一部를 갈라서 거두는, 말하자면 減縮된 租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最初에는 租와 稅의 名을 明確히 區分하얐으나 後에는 漸々 「租」字를 使用하지 않고 從來의 租도 「稅」라고 稱하게 되였다. 勿論 經國大典 等에는「租」字를 一切 使用하지 안 하였다. 兩者는 本質的으로 何等의 差異가 없는 것인 以上 두 用語의 統一은 조금도 不可가 없었던 것이다. 이 小篇에 있어 「稅」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러한 意味의 用語니 讀者는 이를 諒하기 바란다.


































본문1-1: (1)양전법


과전법 조문에 1결 30두라 하였으니, 먼저 ‘결’로 따지는 양전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쪽수▶P97-6科田法 條文에 一結 三十斗라 하얐으니, 먼저 「結」로 따지는 量田法을 說明할 必要가 있다.
①양전척⋯⋯양전(전지 측량)의 기초가 되는 양전척(○○○)의 제도는 고려 조(朝)에서 이조로 그냥 인계된 것인데 세종실록 12년 8월 무인조에
쪽수▶P97-7①量田尺⋯⋯量田(田地測量)의 基礎가 되는 量田尺(○○○)의 制▶P98-1度는 高麗朝에서 李朝로 그냥 引繼된 것인데 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에

惣制河演上言 自前朝 只以上中下三等定制 將農夫手 二指計十 爲上田尺 二指計五 三指計五 爲中田尺 三指計十 爲下田尺

쪽수▶P98-2

惣制河演上言 自前朝 只以上中下三等定制 將農夫手 二指計十 爲上田尺 二指計五 三指計五 爲中田尺 三指計十 爲下田尺

이라 하고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는
쪽수▶P98-3이라 하고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는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 上田尺 二十指 中田尺 二十五指 下田尺 三十指

쪽수▶P98-4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 上田尺 二十指 中田尺 二十五指 下田尺 三十指

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일절의 전은 위선 그 비척(肥瘠)의 차이에 의하여 상 중 하 3등급에 구별된다. 이리하여 이 3종전을 측량하는 양전척은 각각 다르다. 3종 양전척을 결정한 최초의 표준은 정당한 농부의 2지(생각건대 제2지와 제3지였을 것이다)를 밀착하여 그 횡격(橫隔)의 선을 좇아 이를 거듭하기를 열 번한 후 그 전장을 상전척(○○○) 1척으로 하고 같은 법으로 2지를 5도, 3지(생각건대 제2 제3 제4지였을 것이다)를 5도 거듭하여 그 전장을 가지고 중전척(○○○) 1척으로 하고 3지를 10도 거듭하여 하전척(○○○) 1척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3종 척장의 비는 대강 20:25:30=4:5:6이 되는 셈이다.
쪽수▶P98-5라 하였다. 이에 依하면 一切의 田은 위선 그 肥瘠의 差異에 依하야 上中下 三等級에 區別된다. 이리하야 이 三種田을 測量하는 量田尺은 各々 다르다. 三種 量田尺을 決定한 最初의 標準은 正常한 農夫의 二指(생각컨대 第二指와 第三指이었을 것이다)를 密着하야 그 橫隔의 線을 쫓아 此를 거듭하기를 열 번한 후 그 全長을 上田尺(○○○) 一尺으로 하고 同法으로 二指를 五度, 三指(생각컨댄 第二 第三 第四指이었을 것이다)를 五度 거듭하야 그 全長을 가지고 中田尺(○○○) 一尺으로 하고 三指를 十度 거듭하야 下田尺(○○○) 一尺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三種尺長의 比는 大綱 20:25:30=4:5:6이 되는 셈이다.
②결부제⋯⋯상 중 하 3종전의 각 지적법은 다음과 같다. 무릇 지적의 단위를 ()이라 칭하고 결의 100분의 1을 ()라 하고 부의 10분의 1을 ()이라 하고 속의 10분의 1을 ()라 한다. 이 모든 등수법은 거의 고려 조(朝) 이전부터의 원칙인 모양이다. 또 고려 조(朝)의 양전법은 문종 23년의 제정에 의하여 양전척(○○○) 대척을 장1보(○○)라 하고 33보 4방을 지적 1결(○○)로 정하였다고려사 권78. 식화지 전제 경리조. 그런데 실제의 양전에 있어서는 고려말의 현제(現制)로서는 3보 3척 4방을 가지고 1부로 하고 있었다. 이 제(制)에 의하면 1부는 12·25평방보 3.5(보)×2.5(보)=12.25평방보가 되어 1결 1,089평방보 33(법)×33(보)=1089평방법의 100분의 1보다 넓게 된다. 이 실지 측량상의 오차는 아마 문종의 결법 제정 당시부터 그랬을 것인데 산법의 미발달에서 나온 착오인가 한다. 공양왕 원년에 장차 대두할 신 정권에 의하여 전반적인 양전이 실행되었는데 그때도 물론 이 3보3척 4방위 1부의 방법에 의거하여 이조로 넘어 온 것이다. 그러다가 태종 5년에 다시 전국적 양전을 할 때에 이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하여, 1부의 지적을 축소시켜 3보1척8촌(3·3보)4방으로 하였다. 이에 의하여 1부는 10·89평방보 3.3(보)×3.3(보)=10,89평방보가 되어 1결의 100분의 1에 해당하게 되었으나 지방에 종래 실제(○○)행하여져(○○○○) 오던(○○) 1결(○○)의 면적(1부12·25평방보의 100배 1,235평방보)은 상당한 축소를 보게 되어 인민에 대하여는 결국 그만한 증세가 되어 버린 셈이다(1결당 세액은 부동하는 고로). 이에 세종 10년 10월에 이르러 전세 경멸(輕滅)의 의미에서 태종 5년 이래의 신제(新制)를 폐하고 다시 1부는 전과 같이 3보3척 4방으로 하고, 1결을 넓혀 35보 4방으로 하였다. 이리하여 1결은 1,235평방보 35(보)×35(보)=1225평방보가 되어 다시 1부의 100배에 해당하게 되었다세종실록 10년 10월 신사조 참조.
쪽수▶P98-6②結負制⋯⋯上中下 三種田의 各 地積法은 다음과 같다. 무릇 地積의 單位를 ()이라 稱하고 結의 百分之一을 ()라 하고 負의 十分之一을 ()이라 하고 束의 十分之一을 ()라 한다. 이 諸等數法은 거의 高麗朝 以前부터의 原則인 모양이다. 또 高麗朝의 量田法은 文宗 二十三年의 制定에 依하야 量田尺(○○○) 六尺을 長一步(○○)라 하고 三十三步 四方을 地積 一結(○○)로 定하얐다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田制經理條. 그런데 實際의 量田에 있어서는 高麗末의 現制로서는 三步三尺 四方을 가지고 一負로 하고 있었다. 此制에 依하면 一負는 一二·二五平方步 3.5(步)×2.5(步)=12.25平方步가 되여 一結 一, 〇八九平方步 33(法)×33(步)=1089平方法의 百分之一보다 넓게 된다. 이 實地 測量 上의 誤差는 아마 文宗의 結法 制定 當時부터 그랬을 것인데 算法의 未發達에서 나온 錯誤인가 한다. 恭讓王 元年에 將次 擡頭할 新政權에 依하야 全般的인 量田이 實行되였는데 그때도 勿論 이 三步三尺 四方爲 一負의 方法에 依據하야 李朝로 넘어 온 것이다. 그렇다가 太宗 五年에 다시 全國的 量▶P99-1田을 할 때에 이 不合理를 是正하기 爲하야, 一負의 地積을 縮少시켜 三步一尺八寸(三·三步)四方으로 하얐다. 이에 依하야 一負는 1〇·八九平方步 3.3(步)×3.3(步)=10,89平方步가 되여 一結의 百分之一에 該當하게 되였으나 他方에 從來 實際(○○)行하야저(○○○○) 오든(○○) 一結(○○)의 面積(一負一二·二五平方步의 百倍 一,二三五平方步)은 相當한 縮少를 보게 되여 人民에 對하야는 結局 그만한 增稅가 되여 버린 셈이다(一結當 稅額은 不動하는 故로). 이에 世宗 十年 十月에 이르러 田稅輕滅의 意味에서 太宗 五年 以來의 新制를 廢하고 다시 一負는 前과 같이 三步三尺 四方으로 하고, 一結을 넓히어 三十五步 四方으로 하았다. 이리하야 一結은 一,二三五平方步 35(步)×35(步)=1225平方步가 되여 다시 一負의 百倍에 該當하게 되였다世宗實錄 十年 十月 辛巳條 參照.
이 최후의 방법은 세종의 공법 제정 때까지 지속되어 온 것인데 이 법에 의한 상중하(○○○) 3종전(○○○) 각1결의(○○○○) 실적(○○)은 두루 척제에 의한 지나의 경묘법으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았다 한다세종실록 26년 6월 갑신조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
쪽수▶P99-2이 最後의 方法은 世宗의 貢法 制定 때까지 持續되여 온 것인데 此法에 依한 上中下(○○○) 三種田(○○○) 各一結의(○○○○) 實積(○○)은 周尺制에 依한 支那의 頃畝法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았다 한다世宗實錄 二十六年 六月 甲申條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
전별/경묘법 경묘법에 의한 평방척(주척)수 동묘수 면적비 비고: 3등전의 면적비 16:25:36은 3등전척의 장의 비 4:5:6의 자승비에 해당하다.
상전1결 152,568평방척 25·43묘 16
중전1결 239,414평방척 39·90묘 25
하전1결 345,744평방척 57·62묘 36
쪽수▶P99-3
田別/頃畝法 頃畝法에 의한 平方尺(周尺)數 同畝數 面積比 備考: 三等田의 面積比 16:25:36은 三等田尺의 長의 比 4:5:6의 自乘比에 該當하다.
上田一結 一五二,五六八平方尺 二五·四三畝 一六
中田一結 二三九,四一四平方尺 三九·九〇畝 二五
下田一結 三四五,七四四平方尺 五七·六二畝 三六

비고 1. 경묘법에서는 주척 방5척위1보 240보위1묘 100묘위1경이다. 따라서 1묘는 6천평방주척이다세종실록 25년 11월 갑자조.
2. 여기 결부를 경묘로 환산할 때에 사용한 주척(○○)은 그 실장(實長)이 곡척 6촌6분에 해당하니(유형원 반계수록 권2 소재 세종 조(朝) 소정 주척도후세복원자지 및 증보문헌비고 권91 악고도량형조 참조), 이에 의하여 상 중 하 3종전 각 1결의 실적을 척관법 도량형의 평수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다.
상전1결 1,846평강 1,844평
중전1결 2,897평약 2,897평
하전1결 4,184평약 4,182평
(하단의 숫자는 이치로 와다(和田一郎) 박사 저 「조선의 토지제도 및 지세제도 조사보고서」 대정 9년 간 중의 숫자 같은 책 695쪽)
3. 또 상 중 하 3종전의 양전척에 의한 면적과 (3종전이 다 각기 양전척으로 6척위1보 35보 평방위1결, 즉 1결은 210양전척평방 즉 4만4천1백평방척) 주척에 의한 면적(상전은 152,568평방주척 등)과의 관계에 의하여 상 중 하 3종 양전척의 실장을 곡척으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다.
상전척 곡1·228척(0.66곡척×√152568(주척)÷210(양전척)=1.2276곡척etc.)
중전척 곡1·537척
하전척 곡1·848척
이에 3종척의 실장은 2지계10(지폭) 운운의 연원에 부절을 합하듯이 맞는다.
4. 수지척의 성질을 최초에 생각해 본 이는 정다산인데 그는 경세유표(권9 결부고변)에서 수지척을 규정하여 “⋯⋯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라 하였으니 즉 ‘지(指)’라는 것을 ‘뺌’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지를 뺌으로 해석한다면 우리가 본항 모두에 게출(揭出)한바 수지척에 관한 두 가지 자료 중 후자 즉 용비어천가의 20지·25지·30지 설을 설명할 수가 있으나 전자 즉 세종실록에 보이는 하연(河演) 상언의 2지계10 2지계5 3지계5 3지계10 설을 설명할 수가 없을 뿐더러(만일 지(指)를 뺌이라면 2지계10 등의 구차한 표현법을 취할 리가 없다) 3종척의 실장이 너무 길어져서 상전1결 152,568평방주척 등의 실적에 도저히 부합하지 아니하여 그 부당한 것이 적확한즉, 이는 그의 천려일실에 속하는 것이다. 다음에 수지척의 실장을 실제로 계산한 사람은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 박사인데(동문관판, 경제대사서 결부조 참조, 대정 3년 간), 그는 그의 계산 경로를 자세히 밝히지 아니하였으나 여하간에 용비어천가에 실려 있는 상 중 하 3종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와 결부 작성법에 의하여 계산하였다는 것인데 그 결과 1지장곡척1촌3분여(○○○○○○○○○) 즉 1등전척1척장 2척6촌여를 얻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의 자료란 다른 것이 아니니, 3등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는 우리가 앞에서 사용한 것이오 결부 작성법이라는 것은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實績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니 실적 44척1촌위속이라는 말은 실적 441척위1부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실적 4만4천1백척위1결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210척평방위1결(√44100=210) 즉 6척위1보, 35보평방위1결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당연히 우리가 얻은 결과와 부합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박사도 주척장은 곡6촌6분임을 알고 있다(앞서 든 사서 토지제도조 참조). 우리의 계산(○○)에 틀림이 없는 한 박사가 얻은 결과는 오류이다. 그리고 박사는 1지(○○)장곡척1촌3분여를 얻고는 ‘1지’의 처치에 곤란하여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곡1촌3분여에는 당치 않다), “1지란 손가락 두 개의 폭이리라”고 부설(附說)하였으나 거북한 설명이다. 다음 이치로 와다 박사는 고려 결부를 논할 즈음에, 상 중 하 3종전의 평수만 산출하고 (전출. 방법은 3종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에 의하여), 3종수지척의 설명은 불가해라 하여 포기하였다(앞서 든 책 696쪽). 가와이 히로타미 박사의 논문이 계산의 경과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성강고농(盛岡高農) 카가미 야수노수케(鏡保之助) 교수가 다시 수지 척장의 계산을 시도하였는데(성강고등농림학교 창립 25주년 기념논총. 소화 3년 간. 「시대를 달리 한 결부제도 간의 맥락.」), 교수는 계산의 자료를 전혀 문헌비고에 시뢰(是賴)한 지라 같은 책 권148에 공교롭게도 어로지류를 범하여 있는바 세종 25년 찬성 하연 상언 중에 보이는 고려 결부제에 관한 숫자를 무비판하게 써서 계산을 하여(설상가상으로 씨의 계산법이 또한 황당무계하다) 결국 1지장 곡1촌2분7리1수 즉 1등척장2척5촌4분2리를 얻었다. 문헌비고만을 시뢰하였다 하지만 같은 책 중에는 앞서 든 어로차착(魚魯差錯)의 하연 상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 정당한 자료도 있으니 그것은 이조 숙종 35년 평천군 신완의 상소에 보이는 숫자로(같은 책 권142), 역시 용비어천가와 같이 “實績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의 설명법이다. 카가미씨도 한 번은 이 숫자를 들어서 계산을 하여 1지장곡5분9갑5수 즉 상전척장곡1척 2촌9분을 얻었으나 (사실은 우리가 얻은 결과와 당연히 부합하여야 할 것이지만 거기도 계산의 차착이 있어 근사하게밖에 못 되었다.) 박사 가와이 히로타미씨의 1지장1촌3분여에는 대단히 거리가 먼 지라 주장낭패(周章狼狽)하여 평천군소 중의 숫자를 오류라 하여 버리고, 앞서 든 것과 같이 어로차착의 하연 상언 중의 숫자를 취하여 계산한 결과, 우연히 1지장곡1촌2분7리1수를 얻으니 이것은 가와이 박사의 1지에 가까운 지라, 대희하고 다음엔 일보를 나아가 가와이 박사와 자기와의 상이(相異)는 박사의 계산이 부정한 탓이라고 정해 버렸다. 또, 1지장곡1촌2분7리1수를 얻고는 그 결과를 고려 결부법의 다른 요소에 유추하여 새로운 억설을 창조하였으나 본론에는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다급(多及)하지 않는다. 하여간에 수지척의 고구가 종래 이상과 같으므로 그 진의를 몰각할까 저어하여 다소 장황한 서술을 시도한 바이다.

쪽수▶P99-4

備考 一, 頃畝法에서는 周尺 方五尺 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 百畝爲一頃이다. 따라서 一畝는 六千平方周尺이다世宗實錄 二十五年 十一月 甲子條.
二, 여기 結負를 頃畝로 換算할 때에 使用한 周尺(○○)은 그 實長이 曲尺 六寸六分에 該當하니(柳馨遠磻溪隨錄 卷二 所載 世宗朝所定 周尺圖後世復原者也 及 增補文獻備考 卷九十一 樂考度量衡條 參照), 이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田 各 一結의 實積을 尺貫法 度量衡의 坪數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
上田一結 一, 八四六坪强 一, 八四四坪
中田一結 二, 八九七坪弱 二, 八九七坪▶P100-1
下田一結 四, 一八四坪弱 四, 一八二坪
(下段의 數字는 和田一郎博士 著 「朝鮮의 土地制度 及 地稅制度 調査報告書」 大正 九年 刊中의 數字 同書 六九五頁)
三, 또 上中下 三種田의 量田尺에 依한 面積과 (三種田이 다 各其 量田尺으로 六尺爲一步 三十五步 平方爲一結, 即 一結은 二百十量田尺平方 即 四萬四千一百平方尺) 周尺에 依한 面積(上田은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과의 關係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量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
上田尺 曲一·二二八尺(0.66曲尺×√152568(周尺)÷210(量田尺)=1.2276曲尺etc.)
中田尺 曲一·五三七尺
下田尺 曲一·八四八尺
이에 三種尺의 實長은 二指計十(指幅) 云々의 淵源에 符節을 合하듯이 맞는다.
四, 手指尺의 性質을 最初에 생각해 본 이는 丁茶山인데 그는 經世遺表(卷九 結負考辨)에서 手指尺을 規定하야 「⋯⋯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라 하얐으니 即 「指」라는 것을 「뺌」으로 解釋한 것이다. 그러나 指를 뺌으로 解釋한다면 吾人이 本項 冒頭에 揭出한바 手指尺에 關한 두 가지 資料 中 後者 即 龍飛御天歌의 二十指·二十五指·三十指 說을 說明할 수가 있으나 前者 即 世宗實錄에 보이는 河演 上言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 說을 說明할 수가 없을 뿐더러(萬一 指를 뺌이라면 二指計十 等의 苟且한 表現法을 取할 理가 없다) 三種尺의 實長이 너머 기러저서 上田一結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의 實積에 到底히 符合치 아니하야 그 不當한 것이 的確한즉, 이는 그의 千慮一失에 屬하는 것이다. 다음에 手指尺의 實長을 實際로 計算한 사람은 河合弘民 博士인데 (同文館判, 經濟大辭書 結負條 參照, 大正 三年 刊), 그는 그의 計算 經路를 仔細이 밝히지 아니하얐으나 何如間에 龍飛御天歌에 실려 있는 上中下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와 結負▶P101-1 作成法에 依하야 計算하였다는 것인데 그 結果 一指長曲尺一寸三分餘(○○○○○○○○○) 即 一等田尺一尺長 二尺六寸餘를 得하얐다. 그러나 龍飛御天歌의 資料란 딴 것이 아니니, 三等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는 吾人이 前揭 使用한 것이오 結負 作成法이라는 것은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로 叙述되여 있는 것이니 實積 四十四尺一寸爲束이라는 말은 實積 四百四十一尺爲一負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實積 四萬四千一百尺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二百十尺平方爲一結(√44100=210) 即 六尺爲一步, 三十五步平方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當然이 吾人의 得한 結果와 符合하여야 할 것이다. 勿論 博士도 周尺長은 曲六寸六分임을 알고 있다(前揭 辭書 土地制度條 參照). 吾人의 計算(○○)에 틀림이 없는 限 博士의 得한 結果는 誤謬이다. 그리고 博士는 一指(○○)長曲尺一寸三分餘를 得하고는 「一指」의 處置에 困難하야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曲一寸三分餘에는 當치 않다), 「一指란 손가락 두 개의 幅이리라」고 附說하였으나 거북한 說明이다. 다음 和田一郎 博士는 高麗 結負를 論할 지음에, 上中下三種田의 坪數만 算出하고 (前出. 方法은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에 依하야), 三種手指尺의 說明은 不可解라 하야 抛棄하였다(前揭 書 六九六頁). 河合 博士의 論文이 計算의 經過를 밝히지 안 하였음으로 盛岡高農 鏡保之助敎授가 다시 手指尺長의 計算을 試하였는데(盛岡高等農林學校 創立 二十五周年 記念論叢. 昭和 三年 刊. 「時代를 달리 한 結負制度 間의 脈絡.」), 敎授는 計算의 資料를 專혀 文獻 備考에 是賴한 지라 同書 卷百四十八에 工巧롭게도 魚魯之謬를 犯하야 있는바 世宗 二十五年 賛成 河演 上言 中에 보이는 高麗 結負制에 關한 數字를 無批判하게 써서 計算을 하야(雪上加霜으로 氏의 計算法이 亦 荒唐無稽하다) 結局 一指長 曲一寸二分七厘一毛 即 一等▶P102-1尺長二尺五寸四分二厘를 得하였다. 文獻 備考만을 是賴하였다 하지마는 同書 中에는 前記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만 있는 것이 아니라, 亦是 正當한 資料도 있으니 그것은 李朝 肅宗 三十五年 平川君 申琓의 上疏에 보이는 數字로(同書 卷百四十二), 亦是 龍飛御天歌와 같이 「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의 說明法이다. 鏡氏도 한 번은 이 數字를 들어서 計算을 하야 一指長曲五分九厘五毛 即 上田尺長曲一尺 二寸九分을 得하였으나 (事實은 吾人의 得한 結果와 當然이 符合하여야 할 것이지마는 거기도 計算의 差錯이 있어 近似하게밖에 못 되였다.) 博士 河合弘氏의 一指長一寸三分餘에는 大端이 距離가 먼 지라 周章狼狽하야 平川君疏 中의 數字를 誤謬라 하야 버리고, 前記와 같이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 中의 數字를 取하야 計算한 結果, 偶然이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니 이것은 河合 博士의 一指에 가까운 지라, 大喜하고 다음엔 一步를 進하여 河合 博士와 自己와의 相異는 博士의 計算이 不精한 타시라고 定해 버렸다. 또,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고는 그 結果를 高麗 結負法의 他要素에 類推하야 새로운 臆說을 創造하였으나 本論에는 그다지 緊要치 안 하니 多及치 안 한다. 何如間에 手指尺의 考究가 從來 以上과 같음으로 그 眞意을 沒却할가 저어하야 多少 長皇한 叙述을 試한 바이다.

그런데 상 중 하 3종전의 실제 분포 상황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경상·전라도에서는 상전은 1000결 중에 12결 중 전은 100결 중에 12결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는 다 하전이었다. 또 경상·전라 이외의 도에는 상전은 절무하고 1000결 중에 12결의 중전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는 다 하전이었다. 즉 대범하게 말하자면 전국 전은 1결57묘의 획일적인 제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세종실록 12년 8월 무인조)
쪽수▶P102-2그런데 上中下 三種田의 實際 分布 狀況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慶尙·全羅道에서는 上田은 千結 中에 一二結 中 田은 百結 中에 一二結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었다. 또 慶尙·全羅 以外의 道에는 上田은 絕無하고 千結 中에 一二結의 中田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였다. 即 大凡하게 말하자면 全國 田은 一結五十七畝의 劃一的인 制度에 依存하고 있었든 것이다.(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
다음 전분 3등법의 시비를 잠깐 검토하건대 대관절 3종전의 면적비는 16:25:36이요 그것들에서 동액의 조세를 (1결30두) 징수한다 하니 그렇다면 차등 3종전 동일면적의 생산량의 비는 1등전:2등전=25:16과, 2등전:3등전=26:25와의 연비 67:42:30(이 숫자는 후에 말할 바와 같이, 세종이 신양전법을 설정하라고 3종전법의 불합리를 논할 때에 든 숫자인데 그것은 당시 1결세액 30두가 가리키는 수 30을 편의상 하전에 배당하고 작성한 숫자로 개산(槪算)이다.)이 되어야 처음으로 수세의 공평을 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과연 3종양전척의 2지계10 2지계5 3지계5 3지계10과 3종전 동일면적의 수량과의 사이에 이러한 우연적인 신비적인 관계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 전연 생각지 못할 일이다. 실로 3종척의 결정, 따라서 또 그 평방으로 되는 지적(地積)의 결정은 가장 원시적인 자연발생적인 수 관념의 기초 위에 선 것이었다.
쪽수▶P102-3다음 田分 三等法의 是非를 暫間 檢討하건댄 大關切 三種田의 面積比는 16:25:36이오 그것들에서 同額의 租稅를 (一結三十斗) 徵收한다 하니 그렇면 此等 三種田 同一面積의 生產量의 比는 一等田:二等田=25:16과, 二等田:三等田=26:25와의 連比 67:42:30(이 數字▶P103-1는 後에 말할 바와 같이, 世宗이 新量田法을 設定하라고 三種田法의 不合理를 論할 때에 든 數字인데 그것은 當時 一結稅額 三十斗가 가르키는 數 三十을 便宜上 下田에 配當하고 作成한 數字로 槪算이다.)이 되여야 처음으로 收稅의 公平을 期할 수가 있을 것이다. 果然 三種量田尺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과 三種田 同一面積의 收量과의 사이에 이러한 偶然的인 神秘的인 關係가 存在할 수가 있었을가. 全然 생각지 못할 일이다. 實로 三種尺의 決定, 따라서 또 그 平方으로 되는 地積의 決定은 가장 原始的인 自然發生的인 數 觀念의 基礎 우에 선 것이였다.





























본문1-2: (2)수세액


①1결당 수세정액⋯⋯앞서 든 과전법 조문에서 본 것과 같이 전 1결당 수세정액은 공전·사전을 물론하고 수전 1결에는 조미(조미(粗米) 즉 현미) 30두 한전(밭) 1결에는 잡곡 30두다. 이는 상 중 하 3종전에 공통되는 법칙이다. 즉 전의 비척차(肥瘠差)에 의하여 각각 다른 실적으로써 1결을 작성하여 가지고 그것들에서 동액의 징세를 하는 것이니 이를 칭하여 동과수조(○○○○)라 한다. 1결30두라는 세액은 원래 이태조가 전세제도 개혁을 할 때에 고려 말의 혼란 상태를 시정하여 고려 태조의 10분취 1주의를 복구한 것이며(고려사 권78, 신우 14년 7월 조준서 참조) 또 앞서 든 과전법 조문에 “1결30두 이상의 횡렴을 하는 자는 〿으로 논한다” 하였으니 구태여 고려말 수세의 고도 착취적 실상을 새삼스럽게 전색(銓索)하여 보지 않더라도 신법의 세율이 종래의 혼란 상태에 비하여 진보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욱이 새로 대두한 정권의 가장 유력한 인심 수람책(收纜策)의 하나로서 전세 경감이 당연히 생각되었을 것을 추찰컨대 이 새로운 정세율의 의의를 용이하게 규지할 수가 있다.
쪽수▶P103-2①一結當 收稅定額⋯⋯前揭 科田法 條文에서 본 것과 같이 田 一結當 收稅定額은 公田·私田을 勿論하고 水田 一結에는 糙米(粗米 即 玄米) 三十斗 旱田(밭) 一結에는 雜穀 三十斗다. 이는 上中下 三種田에 共通되는 法則이다. 即 田의 肥瘠差에 依하야 各々 다른 實積으로써 一結을 作成하야 가지고 그것들에서 同額의 徵稅를 하는 것이니 此를 稱하야 同科收租(○○○○)라 한다. 一結三十斗라는 稅額은 元來 李太祖가 田稅制度 改革을 할 때에 麗末의 混亂狀態를 是正하야 高麗 太祖의 十分取 一主義를 復舊한 것이며(高麗史 卷七十八, 辛禑 十四年 七月 趙浚書 參照) 또 前揭 科田法 條文에 「一結三十斗 以上의 橫斂을 하는 者는 〿으로 論한다」 하였으니 구태여 麗末 收稅의 高度 搾取的 實狀을 새삼스럽게 銓索하야 보지 않드라도 新法의 稅率이 從來의 混亂 狀態에 比하야 進步的인 役割을 한 것은 疑心할 餘地가 없다. 더욱이 새로 擡頭한 政權의 가장 有力한 人心 收纜策의 하나로서 田稅 輕減이 當然이 생각되였을 것을 推察컨댄 이 新 定稅率의 意義를 容易히 窺知할 수가 있다.
②손실답험법⋯⋯1결30두라는 것은 평상년의 세액이요 불임한 해에는 적당히 감액을 하게 되어 있으니 차소위 손실법(○○○)이요 손과 실을 결정함에는 실지 답사를 요하는 것이니 차소위 답험법(○○○)이라. 손실답험법의 연혁을 보면, 먼저 공양왕 3년에 과전법을 발포하면서 같은 해 5월에 따로 손실답험법을 발포하였으니 그 내용은 고려사 권78 식화지 전제조에
쪽수▶P103-3②損實踏驗法⋯⋯一結三十斗라는 것은 平常年의 稅額이오 不稔한 해에는 適當이 減額을 하게 되여 있으니 此所謂 損實法(○○○)이오 損과 實을 決定함에는 實地 踏査를 要하는 것이니 此所謂 踏驗法(○○○)이라. 損實踏驗法의 沿革을 보면, 먼저 恭讓王 三年에 科田法을 發布하면서 同年 五月에 따로 損實踏驗法을 發布하였으니 그 內容은 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 田制條에

損實法(○○) 十分爲律 損一分減一分租 損二分減二分租 以次准減 損至八分 全除其租 踏驗(○○)則 其官守令審檢 辨報監司 監司差委官更審 監司·首領官又審之 如有踏驗不實者 罪之 各品科田損實則 令其田主 自審收租

쪽수▶P104-1

損實法(○○) 十分爲律 損一分減一分租 損二分減二分租 以次准減 損至八分 全除其租 踏驗(○○)則 其官守令審檢 辨報監司 監司差委官更審 監司·首領官又審之 如有踏驗不實者 罪之 各品科田損實則 令其田主 自審收租

라 하였다. 즉 감수 매 1할에 세(稅) 1할(3두)을 감하여 감수 8할에 이르러 면세한다. 답험은 공전에 있어서는 먼저 그 고을 수령이 이를 행하여 감사에게 보고한다. 감사는 그 보고의 정부(正否)를 감별하는 의미에서 다수의 위관(답험의 임시위원이니 다른 고을의 유향품관 등으로써 이에 충당한다.)을 파견하여 재심하고 다시 감사·수령관(감사의 보좌관)이 친심한다. 과전을 위시한 모든 사전의 답험은 그 전주가 임의로 이를 행하도록 한다. 다음에 태조 2년 경정손실지법은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
쪽수▶P104-2라 하였다. 即 減收 每 一割에 稅 一割(三斗)을 減하야 減收八割에 이르러 免稅한다. 踏驗은 公田에 있어서는 먼첨 그 고을 守令이 此를 行하야 監司에게 報告한다. 監司는 그 報告의 正否을 鑑別하는 意味에서 多數의 委官(踏驗의 臨時委員이니 다른 고을의 留鄕品官 等으로써 此에 充當한다.)을 派遣하야 再審하고 다시 監司·首領官(監司의 補佐官)이 親審한다. 科田을 爲始한 諸私田의 踏驗은 其田主가 任意로 此를 行하도록 한다. 다음에 太祖 二年 更定損實之法은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

一結內損二十負以下者 全收 損三十負以上者 隨其所損負數 減除 以至損七十負 則減七十負租 其餘實數依數收租 揖至八十負者 全除其租 一結不足之田 亦以負數 束數 分數十分 二分損者全收 三分以上損者 隨其所損 分數減除 以至七分損者 減七分 損至八分者全除

쪽수▶P104-3

一結內損二十負以下者 全收 損三十負以上者 隨其所損負數 減除 以至損七十負 則減七十負租 其餘實數依數收租 揖至八十負者 全除其租 一結不足之田 亦以負數 束數 分數十分 二分損者全收 三分以上損者 隨其所損 分數減除 以至七分損者 減七分 損至八分者全除

라 하였다. 공양왕 3년의 손실법과 대동하나 1결 이상 1결 미만의 전을 통하여 2할 이하의 감수를 무시한 것이 주목된다. 답험법은 전과 다름없다. 또 그 다음 태종 조(朝) 경정손실답험법은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
쪽수▶P104-4라 하였다. 恭讓王 三年의 損實法과 大同하나 一結 以上 一結 未滿의 田을 通하야 二割 以下의 減收를 無視한 것이 注目된다. 踏驗法은 前과 다름없다. 또 그 다음 太宗朝 更定損實踏驗法은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

各道田地 擇廉幹品官 換道分差路驗 隨損給損 雖一分實 收一分租 一分損減一分租 其官守令 隨即擲簡 (摘奸) 敬差官出其不意 周行考察 不公踏驗者 罪之

쪽수▶P104-5

各道田地 擇廉幹品官 換道分差路驗 隨損給損 雖一分實 收一分租 一分損減一分租 其官守令 隨即擲簡 (摘奸) 敬差官出其不意 周行考察 不公踏驗者 罪之

라 하였다. 즉 (1)위관을 다른 도의 품관 중에서 임명하여 먼저 이로써 답험을 행하게 할 것 (2)손실은 전과 같이 1할 감수부터 기산(起算)하는 대신 1할 실수(實收)에까지 미칠 것 (3)위관의 답험 결과를 수령이 검복(檢覆)할 것 (4)조정에서 특히 수시 경차관을 임명하여 다시 검사할 것 등이라. 법규상 종래보다 심히 엄격해 진 것을 알겠다. 이 법에 의한 각 손실년의 수세액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104-6라 하였다. 即 (一)委官을 他道 品官 中에서 任命하야 먼첨 此로써 踏驗을 行하게 할 것 (二)損實은 前과 같이 一割 減收부터 起算하는 代身 一割 實收에까지 미칠 것 (三)委官의 踏驗 結果를 守令이 檢覆할 것 (四)朝廷에서 特히 隨時 敬差官을 任命하야 更히 檢査할 것 等이라. 法規上 從來보담 甚히 嚴格해 진 것을 알겠다. 此法에 依한 各 損實年의 收稅額을 表示하면 다음과 같다.

平常年 三〇斗 一割減收年 二七斗
二割減收年 二四斗 三割減收年 二一斗
四割減收年 一八斗 五割減收年 一五斗
六割減收年 一二斗 七割減收年 九斗
八割減收年 六斗 九割減收年 三斗

쪽수▶P104-7

平常年 三〇斗 一割減收年 二七斗
二割減收年 二四斗 三割減收年 二一斗
四割減收年 一八斗 五割減收年 一五斗▶P105-1
六割減收年 一二斗 七割減收年 九斗
八割減收年 六斗 九割減收年 三斗

각설하고 각 손실답험법을 법규상으로 일별한다면 실로 진선진미의 감이 불무(不無)한데 그러면 그 실제는 과연 어떠하였을까. 먼저 공전의 그것을 보자. 우리는 손실답험법 자체가 벌써 모든 결함을 포장하고 있음을 본다. 즉 답험은 거의 전의 일속 일부마다 행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노력상 과연 가능한 일일까. 또 손실법은 감수의 율(率)에 응하여 감세를 한다고 하지마는 그 감수의 율이라는 것이 과연 한 사람이 이를 단정한다면 어떠한 사람도 다시 다룰 여지가 없을 만큼 자명한 것일까. 여기에 무한의 혼란을 야기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쪽수▶P105-2却說 各 損實踏驗法을 法規上으로 一瞥한다면 實로 盡善盡美의 感이 不無한데 그러면 그 實際는 果然 如何하얐을가. 먼첨 公田의 그것을 보자. 吾人은 損實踏驗法 自體가 발서 모든 缺陷을 包藏하고 있음을 본다. 即 踏驗은 거의 田의 一束一負마다 行하게 되여 있는데 此는 勞力上 果然 可能한 일일까. 또 損實法은 減收의 率에 應하야 減稅를 한다고 하지마는 그 減收의 率이라는 것이 果然 한 사람이 此를 斷定한다면 어떠한 사람도 다시 다룰 餘地가 없을 만큼 自明한 것일가. 여기에 無限의 混亂을 惹起할 機會가 있는 것이다.
제일 ‘수령이 친심한다’고 하지만 한 사람의 수령이―그들의 수령으로서의 주요한 임무는 거의 매일 공인·사인의 빈객을 상대로 주연(酒宴)을 베푸는 데 진(盡)한다고 하여도 그리 과언이 아닐 그 수령들이―관내의 전을 친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세불득불(勢不得不) 부하의 향리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전묘에 파견된 향리란 전혀 문자 그대로 들에 놓인 호랑이라 그들의 횡포 낭자(狼籍)는 거의 필설에 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워낙 ‘수령의 친심’을 한다고 해도 사태에 별다름이 없는 것이지만. 또 위관이라는 품관(지방에 반거하는 사족) 출신의 다수한 임시 위원은 무리를 이루어 전야지간을 횡행하게 되는데 그들 역시 그 호오에 좇아 지극히 방자하게 행동한다. 감사·수령관의 검사 같은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요, 또 한 도에 한두 사람의 경차관이 파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또한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대궐을 하직할 때만은 틀림없는 ‘경차관’이었겠지만 한번 전야에 오게 되면 향리·위관과 조금도 가릴 바가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 드디어 백성들은 경차관을 싫어하여 “차라리 황전에서 실세를 바칠지언정 경차관의 낯짝을 보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다(태종실록 3년 9월 정유조). 세종 23년 7월 우의정 신개(申槩)는 그 상소 중에서 당시 아직 하3도 이외의 땅에 현행되고 있던 손실답험법의 실정을 논하여 “위관의 손실답험이 범람이 이심(已甚)이라. 그러고도 주육 지응(접대)의 폐가 심거하다. 서원·산사(다 향리로써 충당한다)는 꾀를 농하며 간(姦)을 사(肆)하고 그 손실을 마감(사정)하는 글은 유를 무라 하며 무를 유라 하고 다를 소라 하며 소를 다라 하고 실전을 은기(隱欺)함이 매 면(1읍에 읍 및 4면이 있다)에 수십결을 불하하며 또 그 관(수령)이 손실답험의 비용이라 칭목(稱目)하고 잡범 무명의 부렴을 하는 것이 원 조세보다 많다.”라고 하였지만(세종실록 23년 7월 기해조) 손실답험이란 대강 이와 같은 것이었다.
쪽수▶P105-3第一 「守令이 親審한다」고 하지마는 한 사람의 守令이―그들의 守令으로서의 主要한 任務는 거의 每日 公人·私人의 賓客을 相對로 酒宴을 베푸는 데 盡한다고 하야도 그리 過言이 아닐 其守令들이―管內의 田을 親審한다는 것은 到底이 不可能한 일이다. 勢不得不 部下의 鄕吏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田畝에 派遣된 鄕吏란 全혀 文字 그대로 들에 놓인 虎狼이라 그들의 橫暴狼籍는 거의 筆舌에 盡치 못하는 것이 있다. 워낙 「守令의 親審」을 한댓자 事態에 別다름이 없는 것이지마는. 또 委官이라는 品官(地方에 蟠踞하는 士族) 出身의 多數한 臨時 委員은 隊를 成하야 田野之間을 橫行하게 되는데 그들 亦是 그 好惡에 쫓아 至極히 放恣하게 行動한다. 監司·首領官의 檢査 같은 것은 事實上 不可能한 일이오, 또 一道에 한두 사람의 敬差官이 派遣되였다고 하드래도 이 亦 事實上 無意味한 일이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大闕을 下直할 때만은 틀림없는 「敬差官」이었겠지마는 한번 田野에 오게 되면 鄕吏·委官과 조금도 가릴 바가 없게 되는 것이 普通이라. 드듸어 百姓들은 敬差官을 싫여하야 「차라리 荒田에서 實稅를 바칠지언정 敬差官의 낱짝을 보기를 願하지 않게」 되였다(太宗實錄 三年 九月 丁酉條). 世宗 二十三年 七月 右議政 申槩는 其上疏 中에서 當時 아직 下三道 以外의 地에 現行되고 있던 損實踏驗法의 實情을 論하여 「委官의 損實踏驗이 泛濫이 已甚이라. 그리고도 酒肉支應(接待)의 弊가 甚巨하다. 書員·算士(다 鄕吏로써 充當한다)는 謀를 弄하며 姦▶P106-1을 肆하고 그 損實을 磨勘(査定)하는 文은 有를 無라 하며 無를 有라 하고 多를 少라 하며 少를 多라 하고 實田을 隱欺함이 每面(一邑에 邑及四面이 있다)에 數十結을 不下하며 또 其官(守令)이 損實踏驗의 費用이라 稱目하고 雜凡無名의 賦斂를 하는 것이 원 租稅보다 많다.」라고 하였지마는(世宗實錄 二十三年 七月 己亥條) 損實踏驗이란 大강 이와 같은 것이었다.
공전의 답험이 벌써 이러하였으니 사전의 그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사전의 답험은 과전법에 의하여 공전의 수급자가 이를 행하게 되었었는데 이 수급자인 부재 지주들은 착취의 재생산을 고려할 여지도 없이 답험을 가혹히 하는 고로 중간에 법을 고쳐 사전도 관에서 답험하기로 하였다. 그러고 보니 전객은 답험(●●)하는 관인과 수조(●●)하는 전주에 대하여 이중 응대를 하게 되어 (답험인 및 수조인에 대하여는 공히 발광적인 응대를 필요하였다) 도리어 파폐할 뿐 아니라 전주측에서는 답험의 관인은 과경(過輕)하다고 줄창 불평을 하였다. 드디어 태종 15년 8월 이후 사전의 전주답험을 복구하였다. 원래 전주답험의 경우에 전주가 가혹한 답험을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때로 전주는 일부러 가을에 답험을 하지 않고 수확 후 동기(冬期) 혹은 명춘에 와서 죄다 실수(實數)로 수조를 해가는 자도 많았다. 이 때문에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답험 여행(勵行)의 령을 신엄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후에 세종 원년 7월에 다시 사전관 답험으로 변경하였는데 그 결과는 위에서 말한 상태를 재현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태종실록, 15년 8월 갑술조, 세종실록, 원년 7월 신유조).
쪽수▶P106-2公田의 踏驗이 벌써 이러하였으니 私田의 그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私田의 踏驗은 科田法에 依하여 公田의 受給者가 此를 行하게 되였었는데 이 受給者인 不在地主들은 搾取의 再生產을 考慮할 餘地도 없이 踏驗을 苛酷히 하는 故로 中間에 法을 고처 私田도 官에서 踏驗하기로 하였다. 그러고 보니 佃客은 踏驗(●●)하는 官人과 收租(●●)하는 田主에 對하여 二重 應待를 하게 되여 (踏驗人 及 收租人에 對하여는 共히 發狂的인 應待를 必要하였다) 도리혀 罷弊할 뿐 아니라 田主側에서는 踏驗의 官人은 過輕하다고 줄창 不平을 하였다. 드듸어 太宗 十五年 八月 以後 私田의 田主踏驗을 復舊하였다. 元來 田主踏驗의 境遇에 田主가 苛酷한 踏驗을 하는 것은 勿論이지마는 때로 田主는 일부러 가을에 踏驗을 하지 않고 收穫 後 冬期 或은 明春에 와서 죄다 實數로 收租를 해가는 者도 많었다. 이 때문에 同年 九月에 이르러 踏驗 勵 行의 令을 申嚴하지 않으면 안 될 地境이었다. 後에 世宗 元年 七月에 다시 私田官 踏驗으로 變更하였는대 그 結果는 上述의 狀態를 再現하는 데 지나지 안 하였다(太宗實錄, 十五年 八月 甲戌條, 世宗實錄, 元年 七月 辛酉條).
이들 손실답험법의 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정액수세법을 수립한 것이 소위 ‘공법’이다.
쪽수▶P106-3此等 損實踏驗法의 弊를 救濟하기 爲하여, 定額收稅法을 樹立한 것이 所謂 「貢法」이다.




























본문2: 2.공법 시행기









































본문2-1: (1)세종 12년의 공법 시문


‘공법’이란 중국 하왕조(朝)에서 행하였다고 전하는 11의 정액전세법이라. 그러나 세종이 제정한 ‘공법’이란 새 법을 창시한 최초의 동기가 소위 공법에 있었을 따름이요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소위 하조(朝)의 공법과 무척 다른 것이 되어버렸으니, 구태여 소위 하조의 공법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양자는 정액세법이라는 하나의 점이 공통하다는 의미에서만 공통한 이름이 허용되는 것인가 한다.
쪽수▶P106-4「貢法」이란 中國 夏王朝에서 行하였다고 傳하는 什一의 定額田稅法이라. 그러나 世宗이 制定한 「貢法」이란 新法을 創始한 最初의 動機가 所謂 貢法에 있었을 다름이요 그 內容에 있어서는 所謂 夏朝의 貢法과 무척 다른 것이 되여버렸으니, 구태여 所謂 夏朝의 貢法을 說▶P107-1明할 必要를 느끼지 안는다. 다만 兩者는 定額稅法이라는 一點이 共通하다는 意味에서만 共通한 이름이 許容되는 것인가 한다.
세종은 일찍이 손실답험법의 폐를 숙지하고 이에 대할 신법을 고구하고 있었다. 세종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찍이 집현전을 창설하여 이 직장의 일부분으로 고금의 전제를 연구시키고 있었는데 마침내 종래 전세법의 교정책을 소위 하조의 공법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실록의 모든 기사에 의하면 왕 자신은 공법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데 반하여, 그의 모든 신료는 고의인지 무능인지 이 신법에 대하여 심히 냉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신하는 왕의 공법에 관한 자문에 대하여 항상 대부분은 반박의 태도를 취하고 왕이 다시 사리를 밝혀서 이를 분별하면 처음으로 ‘상교 윤당이로소이다’하고 대답을 하여 그 무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법 제정은 대부분 왕 자신의 재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과언이 아니다. 공법이 그 발의 이래 20수년을 경하여 처음으로 일반적 실시를 보게 된 까닭도 실로 이러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쪽수▶P107-2世宗은 일직이 損實踏驗法의 弊를 熟知하고 此에 代할 新法을 考究하고 있었다. 世宗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일직이 集賢殿을 創設하여 其職掌의 一部分으로 古今의 典制를 硏究시키고 있었는데 마침내 從來 田稅法의 矯正策을 所謂 夏朝의 貢法에서 求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런데 實錄의 諸記事에 依하면 王 自身은 貢法에 對하여 非常한 關心을 보이고 있는 데 反하여, 그의 諸臣僚는 故意인지 無能인지 此新法에 對하여 甚히 冷淡한 態度를 가지고 있었다. 諸臣은 王의 貢法에 關한 諮問에 對하야 恒常 大部分은 反駁의 態度를 取하고 王이 다시 事理를 밝혀서 此를 辨하면 처음으로 「上敎允當이로소이다」하고 對答을 하야 그 無能을 發揮하고 있는 것이었다. 貢法 制定은 大部分 王 自身의 裁斷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過言이 아니다. 貢法이 그 發議 以來 二十數年을 經하여 처음으로 一般的 實施를 보게 된 까닭도 實로 此間의 事情에 起因하는 것이다.
세종 12년에 왕은 공법에 관한 안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널리 중외에 묻기로 하였다. 이때의 안으로는 종래의 손실답험법을 전폐하고 땅시 실행되고 있던 상 중 하 3종전에서 연(年)의 등부(登否)를 막론하고 일률로 1결10두를 징하자 하는 것이었다. 왕의 하문(下問)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치하였다(실록 8월 무인조).
쪽수▶P107-3世宗 十二年에 王은 貢法에 關한 案을 提示하고 此에 對한 意見을 널리 中外에 묻기로 하였다. 此時의 案으로는 從來의 損實踏驗法을 全廢하고 當時 實行되고 있던 上中下 三種田에서 年의 登否를 莫論하고 一律로 一結十斗를 徴하자 하는 것이었다. 王의 下問은 다음과 같은 結果를 招致하였다(實錄 八月 戊寅條).
도별 인별 찬성 불찬성
경중 2품 이상 관
3품 이하 현직 관
앞과 같은 직관
9
259
443
30
393
117
개성부 품관·촌민 1,123 71
경기도 수령
품관·촌민
29
17,076
5
236
평안도 수령
품관·촌민
6
1,326
36
28,474
황해도 수령
품관·촌민
17
4,454
17
15,601
충청도 수령
품관·촌민
35
6,982
28
14,012
강원도 수령
품관·촌민
5
939
10
6,888
함길도 수령
품관·촌민
3
75
15
7,387
경상도 수령
품관·촌민
55
36,262
16
377
전라도 수령
품관·촌민
42
29,505
14
275
98,657(98,645) 74,149(74,003)
쪽수▶P107-4
道別 人別 賛成 不賛成
京中 二品以上官
三品以下現職官
同前職官

二五九
四四三
三〇
三九三
一一七
開城府 品官·村民 一,一二三 七一
京畿道 守令
品官·村民
二九
一七,〇七六

二三六
平安道 守令
品官·村民

一,三二六
三六
二八,四七四
黃海道 守令
品官·村民
一七
四,四五四
一七
一五,六〇一
忠淸道 守令
品官·村民
三五
六,九八二
二八
一四,〇一二
江原道 守令
品官·村民

九三九
一〇
六,八八八
咸吉道 守令
品官·村民

七五
一五
七,三八七
慶尙道 守令
品官·村民
五五
三六,二六二
一六
三七七
全羅道 守令
品官·村民
四二
二九,五〇五
一四
二七五
九八,六五七(九八,六四五) 七四,一四九(七四,〇〇三)

비고. 각 도의 집계는 찬성 98,645, 불찬성 74,003이 되어야 할 터인데 실록의 계는 각각 98,657 및 74,149로 되어 있다. 아마 각 도 숫자의 기재에 탈루가 있는 모양이다.

쪽수▶P108-2

備考. 各 道의 集計는 賛成 九八,六四五, 不賛成 七四, 〇〇三이 되어야 할 터인데 實錄의 計는 各各 九八,六五七 及 七四,一四九로 되여 있다. 아마 各 道 數字의 記載에 脫漏가 있는 모양이다.

이 시대에 있어 이런 성질의 문제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일반의 민의를 숫자적으로 물었다는 것은 벌써 한 개의 파격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문은 관찰사·수령을 통해서 행해졌는데, 이에 대한 민의의 상달이 사실상 여하한 사정 아래서 구체화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좌우간 이 숫자에 신빙을 두고 보자. 전체를 통하여 찬성은 9만8천여인, 불찬성은 7만4천여인으로, 찬성이 다소 우세이나, 이를 도별로 본다면, 경기·경상·전라 3도는 거의 다 찬성이요, 평안·강원·함길 3도는 거의 다 불찬성이요, 황해·충청 2도는 불찬성파가 찬성파보다 훨씬 우세이다. 그 이유는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대개 최초 3도는 토지생산력이 높아서 1결10두의 정액세는 종래의 손실법보다 유리하다고 생각된 까닭이요, 다음 3도는 정히 그 반대인 까닭이다. 그리고 최후의 2도는, 생산력은 대개 중(中)이나 (혹 최초의 3도와 백중하나), 1결10두의 정액세는 아직 만전을 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불찬성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공법 그것을 일률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요 전국 내의 전을 통하여 절대 무조건으로 1결10두를 징수한다는, 지극히 단순소박한 방법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뜻도 다분히 있었다. 하여간 이번 시문에 의하여 공법에 대한 일반의 호의는 충분히 증명되었다 할 수 있고, 금후로 남은 문제는 차라리 기술적인 개선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쪽수▶P108-3이 時代에 있어 이런 性質의 問題에 對하여 이와 같이 一般의 民意를 數字的으로 무렀다는 것은 벌써 한 箇의 破格的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試問은 觀察使·守令을 通해서 行하여젔는데, 此에 對한 民意의 上達이 事實上 如何한 事情 아래서 具體化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左右間 이 數字에 信憑을 두고 보자. 全體를 通하여 賛成은 九萬八千餘人, 不賛成은 七萬四千餘人으로, 賛成이 多少 優勢이나, 此를 道別로 본다면, 京畿·慶尙·全羅 三道는 거의 다 賛成이요, 平安·江原·咸吉 三道는 거의 다 不賛成이요, 黃海·忠淸 二道는 不賛成派가 賛成派보다 훨신 優勢이다. 그 理由는 容易히 想像할 수 있는 것과 같이 大概 最初 三道는 土地生產力이 높아서 一結十斗의 定額稅는 從來의 損實法보담 有利하다고 생각된 까닭이요, 다음 三道는 正히 그 反對인 까닭이다. 그리고 最後의 二道는, 生產力은 대개 中이나 (或 最初의 三道와 伯仲하나), 一結十斗의 定額稅는 아직 萬全을 期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不賛成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貢法 그것을 一律로 排斥하는 것은 아니요 全國 內의 田을 通하여 絕對 無條件으로 一結十斗를 徵收한다는, 至極히 單純素朴한 方法에 對해서 不滿을 품은 뜻도 多分이 있었다. 何如間 今番試問에 依하여 貢法에 對한 一般의 好意는 充分이 證明되였다 할 수 있고, 今後로 남은 問題는 차라리 技術的인 改善問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전국에 향하여 공법의 찬부를 묻는 동시에, 정신(廷臣)에 대해서도 그 가부의 의논을 징하였다. 가편(可便)의 논을 요약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쪽수▶P109-1그런데 이때 全國에 向하여 貢法의 賛否를 묻는 同時에, 廷臣에 對해서도 그 可否의 議論을 徵하였다. 可便의 論을 要約하면 大概 다음과 같다.
1. 위관·경차관은 흔히 횡포·무능·협활 3자 중의 하나 이상 구유한 자니, 이 폐를 교정함에는 공법만한 것이 없다.
쪽수▶P109-2一. 委官·敬差官은 흔이 橫暴·無能·狹猾 三者 中의 一 以上 具有한 者니, 此弊를 矯正함에는 貢法만한 것이 없다.
2. 공법의 전반적 즉시 실행을 혹 어렵다고 생각하거든 먼저 경기 12주군에 이를 시험하든지, 혹 산간군과 평지군과의 각각 십수 군에 이를 시험하든지 하여, 그 성적을 보고 점차 타(他)에 미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쪽수▶P109-3二. 貢法의 全般的 即時 實行을 或 어렵다고 생각하거던 먼저 京畿 一二州郡에 此를 試驗하든지, 或 山間郡과 平地郡과의 各各 數十 郡에 此를 試驗하든지 하여, 그 成績을 보고 漸次 他에 미치게 하는 것이 如何한가.
3. 공법을 행함에는 종래의 전의 등급을 그대로 하여서는 실행 불가능하니, 차제에 전을 9등으로 나누어 각 등전에 각각 다른 정액세를 매기는 것이 어떠한가.
쪽수▶P109-4三. 貢法을 行함에는 從來의 田의 等級을 그대로 하여서는 實行 不可能하니, 此際에 田을 九等으로 난호아 各 等田에 各各 다른 定額稅를 課하는 것이 如何한가.
이에 대하여 부편(否便)의 이론을 들면 다음의 점들로 요약할 수가 있다.
쪽수▶P109-5이에 對하여 否便의 理論을 들으면 다음의 諸點에 要約할 수가 있다.
1. 생산력이 천차만별한 전국 내 전을 통하여 일률로 정액세 10두를 매긴다는 것은 부당하다. 물론 종래일지라도 상 중 하 3종전에 대하여 1결당 동류의 과세를 해왔지만, 이는 각 1결의 면적에 광협이 있으며, 또 수손급손(손에 따라 세를 감함)인 만큼 하전일지라도 하등의 불편이 없었다. 그런데 공법의 1결10두로 획일한다면, 손(損)하기 쉬운 하전은 항상 그 실수(實收)에 불상당한 고액의 세를 바치게 될 것이다.
쪽수▶P109-6一. 生產力이 千差萬別한 全國 內 田을 通하여 一律로 定額稅 十斗을 課한다는 것은 不當하다. 勿論 從來일지라도 上中下 三種田에 對하여 ᅳ結當 同類의 課稅를 해왔지마는, 此는 各 一結의 面積에 廣狹이 있으며, 또 隨損給損(損에 따라 稅를 減함)이니만치 下田일지라도 何等의 不便이 없었다. 그런데 貢法의 一結十斗로 劃一한다면, 損키 쉬운 下田은 恒常 그 實收에 不相當한 高額의 稅를 바치게 될 것이다.
2. 부민은 많이 양전을 가졌으니 반드시 공법을 환영할 것이요, 빈민은 많이 악전을 가졌으니 반드시 공법을 원망할 것이다. 또 양전이 많은 전라·경상도민은 공법을 좋아할 것이나 다른 도는 다 공법을 싫어할 것이다.
쪽수▶P109-7二. 富民은 많이 良田을 갖었으니 반드시 貢法을 歡迎할 것이요, 貧民은 많이 惡田을 갖었으니 반드시 貢法을 怨望할 것이다. 또 良田이 많은 全羅·慶尙道民은 貢法을 좋와할 것이나 他道는 다 貢法을 실허할 것이다.
3. 1결10두란 손실법에 의하면 6할 이하 감수년의 세액이다. 종래의 예에 징하면 6할 이하 감수년이란 여간하여 없는 것이다. 이제 1결10두로 정액한다면, 국고의 대감수를 면치 못할 것이다.
쪽수▶P109-8三. 一結十斗란 損實法에 依하면 六割 以下 減收年의 稅額이다. 從來의 例에 徵하면 六割 以下 減收年이란 여간하여 없는 것이다. 이제 一結十斗로 定額한다면, 國庫의 大減收를 免치 못할 것이다.
4. 1결10두로 정액한다면 국고가 감수될 뿐 아니라 모든 창고(궁중관계)·공수(지방정청 비용)·아록(지방궁록)·역전 등의 수조도 대감수를 면치 못할 것이니, 세부득이 이들에게 전을 가급하게 될 것이요, 그것은 또 군자전(군비용전)을 할양(割讓)하는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으니, 자연 국방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쪽수▶P109-9四. 一結十斗로 定額한다면 國庫가 減收될 뿐 아니라 諸倉庫(宮中關係)·公須(地方政廳 費用)·衙祿(地方宮祿)·驛田 等의 收租도 大減收를 免치 못할 것이니, 勢不得已 此等에게▶P110-1 田을 加給하게 될 것이요, 그것은 또 軍資田(軍備用田)을 割讓하는 以外에 他道가 없으니, 自然 國防의 危機를 招來하게 된다.
5. 공법을 실시함에는 전을 9등급에 나누어 전국적으로 양전을 한 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쪽수▶P110-2五. 貢法을 實施함에는 田을 九等級에 난호아 全國的으로 量田을 한 後가 아니면 不可能하다.
6. 위관·경차관의 폐는 이를 교정하면 그만이다. 그 인선을 엄하게 하고 그 대우를 개선하면 족하지 않는가.
쪽수▶P110-3六. 委官·敬差官의 弊는 此를 矯正하면 그만이다. 그 人選을 嚴하게 하고 그 待遇를 改善하면 足하지 안는가.
공법 거부론자 중에는 절대 반대의 강경론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의견을 보건대, 대개는 기술상 조탁에 의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었다. 또 공법 찬성론자 중에도 이번의 제안에 새로 다대한 수정을 가한 후에 실시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쪽수▶P110-4貢法 拒否論者 中에는 絕對 反對의 强硬論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意見을 보건댄, 大概는 技術上 彫琢에 依해서 解決될 性質의 것이었다. 또 貢法 賛成論者 中에도 今回의 提案에 새로 多大한 修正을 加한 後에 實施하자는 意見도 있었다.
8도의 찬부 수는 찬성편이 대단히 우세하나, 부편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고, 또 조정의 의논은 부편이 차라리 많았기 때문에 이 기회에 즉시 종래의 법을 폐기하고 공법으로 변경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 문제는 단순히 한 시문으로 돌려 버리고, 세종 18년에 정작 공법 제정을 착수할 때까지 6년 깐 일절 묘의의 표면에는 상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 자신과 집현전을 위시한 일부 신료 간에는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쪽수▶P110-5八道의 賛否 數는 賛成便이 大端이 優勢하나, 否便의 數도 無視할 수 없을 程度이었고, 또 朝廷의 議論은 否便이 차라리 많았기 때문에 이 機會에 即時 從來의 法을 廢棄하고 貢法으로 變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番 問題는 單純이 한 試問으로 돌려 버리고, 世宗 十八年에 정작 貢法 制定을 着手할 때까지 六年 間 一切 廟議의 表面에는 上程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王 自身과 集賢殿을 僞始한 一部 臣僚 間에는 그 硏究가 進行되고 있었든 모양이다.

























본문2-2: (2)세종 18년·19년 간의 공법 논의


실록에 의하면, 세종 18년 5월 정해에 왕은 갑자기 영의정 황희 이하를 불러, 공법의 절목을 의논하게 하였다. 대관절 전 회 공법 시문 실패의 주원인은 어디 있었느냐 하면 전국 내 전에서 전연 획일적으로 1결10두의 정액세를 부과하자 하는 데 있었다. 물론 전에 상 중 하의 3종이 있고, 그들 1결의 면적에는 광협의 차가 있으나, 상중전은 오히려 예외요 전국 내 전은 거의 하전 1종이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그 생산력에 천차만별이 있는 일절의 전에서 획일적으로, 더구나 풍흉을 불문하고 일률로 1결10두를 부과하고자 한 것은 오히려 무모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 회의 실패에 감(鑑)하여 황희 등의 의(議)는 먼저 전의 등급 제정(이를 전품등제(○○○○)라 칭한다)으로 주의를 돌렸다. 가로대
쪽수▶P110-6實錄에 依하면, 世宗 十八年 五月 丁亥에 王은 갑작이 領議政 黃喜 以下를 불러, 貢法의 節目을 議論케 하였다. 大關切 前回 貢法 試問 失敗의 主原因은 어듸 있었느냐 하면 全國內田에서 全然 劃一的으로 一結十斗의 定額稅를 課하자 하는 데 있었다. 勿論 田에 上中下의 三種이 있고, 그들 一結의 面積에는 廣狹의 差가 있으나, 上中田은 오히려 例外요 全國內田은 거의 下田 一種이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그 生產力에 千差萬別이 있는 一切의 田에서 劃一的으로, 더구나 豊凶을 不問하고 一律로 一結十斗를 課하고자 한 것은 오히려 無謀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前回의 失敗에 鑑하여 黃喜 等의 議는 먼저 田의 等級 制定(此를 田品等第(○○○○)라 稱한다)으로 注意를 돌렸다. 가로대

1. 토지생산력의 고하(高下)에 의하여 국내의 도를 3등으로 구분한다. 경상·전라·충청의 남3도를 최고로 간주하여 상등도(○○○)라 하고, 경기·강원·황해의 중3도를 그 다음이라 하여 중등도(○○○)라 하고, 평안·함길의 북2도를 최하라 하여 하등도(○○○)라 한다.
2. 각 등도의 전은 종래의 도행장(토지대장)을 빙거하여 다시 3등급으로 구분한다.
3. 왕년의 손실 수 및 공가 예산액을 참작하여 3등도 3등전의 세액을 각정(各定)한다.

쪽수▶P110-7

一. 土地生產力의 高下에 依하여 國內의 道를 三等으로 區分한다. 慶尙·全羅·忠淸의 南三道를 最高로 看做▶P111-1하여 上等道(○○○)라 하고, 京畿·江原·黃海의 中三道를 그 다음이라 하여 中等道(○○○)라 하고, 平安·咸吉의 北二道를 最下라 하여 下等道(○○○)라 한다.
二. 各 等道의 田은 從來의 導行帳(土地臺帳)을 憑據하여 다시 三等級으로 區分한다.
三. 徃年의 損實數 及 公家 豫算額을 參酌하여 三等道 三等田의 稅額을 各定한다.

고 운운하였다. 왕은 그의 의견을 옳다 하여 이 원칙에 의한 구체안을 작성하도록 윤6월 기묘에 ‘공법상정소’라는 위원회를 설치하게 하였다. 공법상정소의 원안은 10월 정묘에 호조를 거쳐 상계된 후, 다소의 수정을 겪어 익 19년 7월 정유에 중외에 발포하게 되었으니, 요항은 다음과 같다.
쪽수▶P111-2고 云々하였다. 王은 그의 意見을 可하다 하여 이 原則에 依한 具體案을 作成하도록 閏六月 己卯에 「貢法詳定所」라는 委員會를 設置케 하였다. 貢法詳定所의 原案은 十月 丁卯에 戶曹를 거처 上啓된 後, 多少의 修正을 겪어 翌 十九年 七月 丁酉에 中外에 發布하게 되었으니, 要項은 如左하다.
1. 세액
쪽수▶P111-3一. 稅額
상전 1결 중전 1결 하전 1결
상등도(경·전·충) 20두 18두 16두
중등도(경·강·황) 18두 16두 14두
하등도(함·평) 16두 14두 12두
쪽수▶P111-4
上田一結 中田一結 下田一結
上等道(慶·全·忠) 二〇斗 一八斗 一六斗
中等道(京·江·黃) 一八斗 一六斗 一四斗
下等道(成·平) 一六斗 一四斗 一二斗

단 1. 제주도는 지척(地瘠)한 고로 3등전을 구별하지 않고, 일률로 1결10두를 부과한다.
2. 3종전에 다 수전·한전을 구별하여 수전은 조미, 한전은 황두(대두)를 한다.

쪽수▶P111-5

但一. 濟州島는 地瘠한 故로 三等田을 區別치 않고, 一律로 一結十斗를 課한다.
二. 三種田에 다 水田·旱田을 區別하야 水田은 糙米, 旱田은 黃豆(大豆)를 한다.

2. 면세
1전을 전부(○○) 휴경한 경우 및 1척의 소경이 전부(○○) 손실된 경우에 한하여 경작인의 신고에 의하여 수령이 친심한 후 면세한다.
쪽수▶P111-6二. 免稅
一田을 全部(○○) 休耕한 境遇 及 一戶의 所耕이 全部(○○) 損失된 境遇에 限하여 耕作人의 申告에 依하여 守令이 親審한 後 免稅한다.
3. 전의 이동
(가). 원적 소재 수전·한전은 그 후 지목(地目)이 사실상 변경된다 할지라도 개량하기 전에는 그 변경을 인정하지 않고 원적을 좇아 수세한다.
(나). 가경전은 수령이 매 해 친밀하여 전적에 속록한다.
(다). 무고하게 휴경 2개년에 미치는 경우에는 고발인에 이 휴경전을 탈여(奪與)한다.
쪽수▶P111-7三. 田의 移動
(가). 元籍 所載 水田·旱田은 其後 地目이 事實上 變更된다 할지라도 改量하기 前에는 그 變更을 認定치 않고 元籍을 쪼차 收稅한다.
(나). 加耕田은 守令이 每歳 親密하여 田籍에 續錄한다.
(다). 無故이 休耕 二箇年에 及하는 境遇에는 告發人▶P112-1에 其休耕田을 奪與한다.
4. 진손(陳損)의 심험이 부실하며, 가경전을 수시 속록하지 않는 수령은 죄한다.
쪽수▶P112-2四. 陳損의 審驗이 不實하며, 加耕田을 隨時 續錄치 안는 守令은 罪한다.
이 법은 중외에 발포되어, 곧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으나, 마침 공교롭게 세종 19년은 전국적으로 대흉이 들어 소정의 세액을 일률로 강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공법 반대론자들은 이런 기회를 타서 곧 훤훤효효의 논을 일으켰다. 왕은 부득이 8월 을유에 전지하여 공법을 전연 단념하고 종래의 손실법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전지와 함께 발한 왕의 담화는,
쪽수▶P112-3右法은 中外에 發布되여, 곧 實行에 옮길려고 하였으나, 마침 공교롭게 世宗 十九年은 全國的으로 大凶이 들어 所定의 稅額을 一律로 强行할 수가 없게 되였다. 貢法 反對論者들은 이런 機會를 타서 곧 喧々囂々의 論을 이르키였다. 王은 不得已 八月 乙酉에 傳旨하여 貢法을 全然 斷念하고 從來의 損實法을 繼續하기로 하였다. 傳旨와 함께 發한 王의 談話는,

貢法 考古參今 與大臣議定 本欲便於民也 予以否德 在位二十餘年 未甞有一年之豐 連歲凶歉 後世(歲)之豐 亦未必也 此法斷不可行也 然 此法既定 頒于中外 則 後世子孫 必有可行之時云々.

쪽수▶P112-4

貢法 考古參今 與大臣議定 本欲便於民也 予以否德 在位二十餘年 未甞有一年之豐 連歲凶歉 後世(歲)之豐 亦未必也 此法斷不可行也 然 此法既定 頒于中外 則 後世子孫 必有可行之時云々.

이라고 하여, 공법 시행을 후세 자손에게 미루어 버렸으니 오랫동안의 계획은 다시 백척의 심연으로 들어간 셈이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건대, 연(年)의 풍흉에 의하여 공법의 실시 능부(能否)가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곧 소정(所定) 공법의 입법상 결함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쪽수▶P112-5이라고 하여, 貢法 施行을 後世 子孫에게 미루어 버렸으니 오래동안의 計畫은 다시 百尺의 深淵으로 드러간 셈이었다. 그러나 一便 생각컨대, 年의 豐凶에 依하여 貢法의 實施 能否가 決定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곧 所定 貢法의 立法上 缺陷을 暗示하는 것이었다.





























본문2-3: (3)세종 20년에서 25년까지의 시험


익 20년은 다행히 풍년이었다. 전후 근 10년을 두고 연구가 거듭되던 공법은 일시적 사정에 의하여 잠깐 그 시행을 보지 못하고 후세 자손에게 희망을 두었으나, 이런 기회를 타서 다시 묘의에 상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에도 물론 반대자가 많았고, 혹은 공법을 실시함에는 모름지기 왕년과 같이 국민 일반에 자문한 후에 할 것이라 하는 자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도대사자(圖大事者)는 불모어중(不謀於衆)이라 하고 7월 계사에 드디어 결의하여 전년에 반포한 절목에 좇아 먼저 경상·전라의 일부에 이를 시험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실로 공법 실시의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2년 간의 시험기를 지나, 성적은 양호하다고 인정된 고로 22년부터 경상·전라 양도는 일반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실록 5월 기유조)
쪽수▶P112-6翌 二十年은 多幸이 豊年이었다. 前後 近 十年을 두고 硏究가 거듭되든 貢法은 一時的 事情에 依하여 暫間 그 施行을 보지 못하고 後世 子孫에게 希望을 두었으나, 이런 機會를 타서 다시 廟議에 上程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에도 勿論 反對者가 많았고, 或은 貢法을 實施함에는 모름직이 徃年과 같이 國民 一般에 諮問한 後에 할 것이라 하는 者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圖大事者는 不謀於衆이라 하고 七月 癸巳에 드디어 決議하여 前年에 頒布한 節目에 쫓아 먼저 慶尙·全羅의 一部에 此를 試驗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實로 貢法 實施의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二年 間의 試驗期를 지나, 成績은 良好하다고 認定된 故로 二十二年부터 慶尙·全羅 兩道는 一般的으로 貢法의 施行을 보게 되였든 것이다.(實錄 五月 己酉條)
같은 해 8월 기해에 공법의 절목을 다소 수정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쪽수▶P112-7同年 八月 己亥에 貢法의 節目을 多少 修正하였으니, 그 內容은 다음과 같다.
1. 수세액
쪽수▶P112-8一. 收稅額
상·중전 1결 하전 1결
상등도(경상·전라도) 상등관
중등관
하등관
20두
19두
18두
17두
16두
15두
중등도(충청·경기·황해도) 상등관
중등관
하등관
18두
17두
16두
〿15두
14두
13두
하등도(강원·함길·평안도) 상등관
중등관
하등관
17두
16두
15두
14두
13두
12두
쪽수▶P113-1
上·中田一結 下田一結
上等道(慶尙·全羅道) 上等官
中等官
下等官
二〇斗
一九斗
一八斗
一七斗
一六斗
一五斗
中等道(忠淸·京畿·黃海道) 上等官
中等官
下等官
一八斗
一七斗
一六斗
〿一五斗
一四斗
一三斗
下等道(江原·咸吉·平安道) 上等官
中等官
下等官
一七斗
一六斗
一五斗
一四斗
一三斗
一二斗

〿실록에 10두로 적혔으나, 전후 관계로 15두인 것이 자명하다.
주의. 1. 도의 분등법이 19년의 그것보다 일층 자연적 생산력의 차이에 가깝게 되었다.
2. 각 등도 가운데서 다시 그 생산력의 차이에 의하여 3등관의 구별을 세워 절목을 더 정세히 하였다.

쪽수▶P113-2

〿實錄에 1〇斗로 적혔으나, 前後 關係로 一五斗인 것이 自明하다.
注意. 一. 道의 分等法이 十九年의 그것보담 一層 自然的 生產力의 差異에 가깝게 되었다.
二. 各 等道 가운데서 다시 그 生產力의 差異에 依하여 三等官의 區別을 세워 節目을 더 精細히 하였다.

2. 상중전 동액 수세의 변
중전의 세액을 상전의 그것에까지 끌어올렸다. 이것은 상중전은 본 지품의 차이가 불상원(不相遠)할 뿐더러 그 면적의 차이(16~25)가 중하전 간의 그것(25~26)에 비하여 적고, 공법 이전은 물론 동과 수조였었는 고로, 지금 이것을 환원하여도 상관이 없다. 단, 하전은 공법 이전에 면적을 널리 하여 상중전과 동과 수조를 해왔었으나, 암만 하여도 하전은 진손하기 쉬운 것이니, 이는 종래와 같이 상중전과 구별한다.
쪽수▶P113-3二. 上中田 同額 收稅의 辨
中田의 稅額을 上田의 그것에까지 끌어올렸다. 이것은 上中田은 本 地品의 差異가 不相遠할 뿐더러 그 面積의 差異(16~25)가 中下田 間의 그것(25~26)에 比하여 적고, 貢法 以前은 勿論 同科 收租이었었는 故로, 지금 이것을 還元하여도 相關이 없다. 但, 下田은 貢法 以前에 面積을 널리 하여 上中田과 同科 收租를 해왔었으나, 암만 하여도 下田은 陳損키 쉬운 것이니, 이는 從來와 같이 上中田과 區別한다.
3. 휴경전은 진고(陳告)에 의하여 수령이 핵실하고, 일부 기경의 것은 그 기경 수에 한하여 과세한다.
쪽수▶P113-4三. 休耕田은 陳告에 依하여 守令이 覈實하고, 一部 起耕의 것은 그 起耕 數에 限하여 課稅한다.
4. 재상(災傷)의 ‘중소공지처’는 감사의 계문에 의하여 경차관을 파(派)하여 핵실한 후 이 손상분만큼 감세한다.
주의. 이 휴경전, 재상전에 관한 규정은 19년의 것(그 제2조)에 비하여 기분(幾分) 간 완화된 감이 있으나, 이 조항이 실제로 발동을 보기에는 매우 곤란하리라는 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가 있다.
쪽수▶P113-5四. 災傷의 「衆所共知處」는 監司의 啓聞에 依하여 敬差官을 派하여 覈實한 後 其損傷分만큼 減稅한다.
注意. 右 休耕田, 災傷田에 關한 規定은 十九年의 것(其 第二條)에 比하여 幾分 間 緩和된 感이 있으나, 이 條項이 實際로 發動을 보기에는 매우 困難하리라는 것은 容易이 想像할 수가 있다.
5. 기타 조건은 종래의 법에 좇는다.
쪽수▶P113-6五. 其他 條件은 從來의 法에 쫓는다.
이 수정안은 우선 현재 공법이 실시되어 있는 경상·전라의 두 도에 적용되고, 다음 익 26년부터 충청도도 전반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보게 되었다.(실록 7월 을해조)
쪽수▶P113-7이 修正案은 우선 現在 貢法이 實施되여 있는 慶尙·全羅의 兩道에 適用되고, 다음 翌 二十六年부터 忠淸道도 全般的으로 貢法의 施行을 보게 되였다.(實錄 七月 乙亥條)






























본문3: 3.공법 정착






































































































본문3-1: (1)세종 25년 7월부터 익 26년 6월까지―공법의 수정


①종래 공법의 결함
쪽수▶P114-1①從來 貢法의 缺陷
경상·전라 두 도는 그 일부분은 세종 20년부터, 그 전부는 22년부터, 그리고 충청도는 23년부터 각각 공법이 실시되었지만, 그 실시 공법에는 기다의 결함이 포장되어 있었다.
쪽수▶P114-2慶尙·全羅 兩道는 其一部分은 世宗 二十年부터, 其全部는 二十二年부터, 그리고 忠淸道는 二十三年부터 各々 貢法이 實施되였지마는, 그 實施 貢法에는 幾多의 缺陷이 包藏되여 있었다.
제1로 공법은 종래의 전품 3등별주의에 입각되어 있다. 그중 상 중 2종전은 본 1000결에 12결 혹 100결에 12결의 양전인 만큼, 그다지 풍흉이 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이에 부과된 1결20두 내지 15두의 정액세(앞 절 3 참조)는, 공법 이전의 1결30두에 비하면 실로 막대한 경감이었다. 그 대신 하전은 연(年)의 풍흉에 의하여 그 수확이 현저히 좌우되는 만큼, 1결17두 내지 20두의 정액세(위와 같은 절 참조)는 공법 이전에 비하여 오히려 대단한 증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여하한 악전이라도 하등전보다 다시 내려갈 수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23년 7월 기해 우의정 신개의 상소는 저간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경상·전라의 시험 성적을 보면 상중전의 소유자는 공법을 환영하고, 하전의 소유자는 이를 증오하는 것이었다. 상중전의 소유자는 물론 부자요 하전의 소유자는 빈자이다. 다시 각 도의 손실법 때의 최고 수세액과, 공법 실시에 의하여 실현될(○○○) ()과를 비교 표시하면 다음과 같았다.(신(申)의 상소 중의 숫자)단, 경상·전라 두 도의 숫자는 물론 공법 실시에 의하여 이미 실현된(○○○) ()자다.
쪽수▶P114-3第一로 貢法은 從來의 田品 三等別主義에 立脚되어 있다. 그中 上中二種田은 本千結에 一二結 或百結에 一二結의 良田인 만큼, 그다지 豊凶이 있을 理가 없고, 따라서 此에 賦課된 一結二十斗 乃至 十五斗의 定額稅(前節 三叅照)는, 貢法 以前의 一結三十斗에 比하면 實로 莫大한 輕減이었다. 그 대신 下田은 年의 豊凶에 依하여 그 收穫이 顯著이 左右되는 만큼, 一結十七斗 乃至 十二斗의 定額稅(同上 叅照)는 貢法 以前에 比하여 오히려 大端한 增稅를 意味하는 것이었다. 또 如何한 惡田이라도 下等田보담 다시 나려갈 수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二十三年 七月 己亥 右議政 申槩의 上疏는 這問의 消息을 傳하고 있다. 即 그에 依하면 慶尙·全羅의 試驗 成績을 보면 上中田의 所有者는 貢法을 歡迎하고, 下田의 所有者는 此를 憎惡하는 것이었다. 上中田의 所有者는 勿論 富者요 下田의 所有者는 貧者이다. 다시 各 道의 損實法 時의 最高 收稅額과, 貢法 實施에 依하여 實現될(○○○) ()과를 比較 表示하면 다음과 같았다.(申의 疏中의 數字)但, 慶尙·全羅 二道의 數字는 勿論 貢法 實施에 依하여 이미 實現된(○○○) ()字다.
손실법 손실법 공법에 의하여 실현될 액(B) B에서 A를 감한 액(C) A:C
연차 최고 수세액(A)
경상도 세종 16년 169,811 미두병석 257,728 미두병석 87,917 미두병석 53%
전라도 위와 동일 158,184 미두병석 268,986 미두병석 110,803 미두병석 70%
충청도 세종 22년 90,451 미두병석 187,839 미두병석 97,388 미두병석 107%
황해도 위와 동일 41,573 미두병석 143,330 미두병석 101,757 미두병석 245%
강원도 위와 동일 20,099 미두병석 31,407 미두병석 11,308 미두병석 56%
경기도 세종 16년 37,390 미두병석 50,200 미두병석 12,810 미두병석 34%
함길도 세종 22년 29,244 미두병석 56,232 미두병석 26,988 미두병석 92%
평안도 위와 동일 54,746 미두병석 142,339 미두병석 87,583 미두병석 159%
1,138,061 미두병석
쪽수▶P114-4
損實法 損實法 貢法에 依하여 實現될 額(B) B에서 A를 減한 額(C) A:C
年次 最高 收稅額(A)
慶尙道 世宗 十六年 一六九,八一一 米豆幷石 二五七,七二八 米豆幷石 八七,九一七 米豆幷石 五三%
全羅道 仝右 一五八,一八四 米豆幷石 二六八,九八六 米豆幷石 一一〇,八〇三 米豆幷石 七〇%
忠淸道 世宗 二十二年 九〇,四五一 米豆幷石 一八七,八三九 米豆幷石 九七,三八八 米豆幷石 一〇七%
黃海道 仝右 四一,五七三 米豆幷石 一四三,三三〇 米豆幷石 一〇一,七五七 米豆幷石 二四五%
江原道 仝右 二〇,〇九九 米豆幷石 三一,四〇七 米豆幷石 一一,三〇八 米豆幷石 五六%
京畿道 世宗 十六年 三七,三九〇 米豆幷石 五〇,二〇〇 米豆幷石 一二,八一〇 米豆幷石 三四%
咸吉道 世宗 二十二年 二九,二四四 米豆幷石 五六,二三二 米豆幷石 二六,九八八 米豆幷石 九二%
平安道 仝右 五四,七四六 米豆幷石 一四二,三三九 米豆幷石 八七,五九三 米豆幷石 一五九%
一,一三八,〇六一 米豆幷石
즉 공법에 의한 견적액은 손실 때의 최고액보다도 3할4푼 내지 24할5푼의 대증세가 된다. 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종래의 손실법은 극히 자의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또 정세(正稅) 이외에 가진 비합법적 수렴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국고에 바치는 세액은 사실상 항상 5할 이하 감수의 예(제1절, 2, ② 참조)에 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지금 졸연히 거액의 증세를 한다는 것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중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신개는 그 상소 중에서 하등전을 다시 3등으로 구분하여, 종래의 상중전과 합하여 더힙 5등전품제를 제정하기를 주장하게 되었다.
쪽수▶P115-2即 貢法에 依한 見積額은 損實時 最高額보담도 三割四分 乃至 二十四割五分의 大增稅가 된다. 이는 結局 무엇을 意味하는 것인가. 從來의 損實法은 極히 恣意的인 것이라고 하지마는, 그리고 또 正稅 以外에 갖인 非合法的 收斂을 同伴하는 것이라고 하지마는, 國庫에 바치는 稅額은 事實上 恒常 五割 以上 減收의 例(第一節, 二, ② 叅照)에 依하고 있었든 것이다. 그런데다가 至今 卒然이 巨額의 增稅를 한다는 것은, 적어도 表面上으로는 重大한 問題이다. 그래서 申槩는 그 上疏 中에서 下等田을 다시 三等으로 區分하여, 從來의 上中田과 合하여 都合 五等田品制를 制定하기를 主張하게 되였다.
종래 공법의 제2의 결함은 그 전품등제에 있어 3등도 3등관주의를 채용한 일이다. 대체로 말하면 상등도는 중등도에 비하여, 중등도는 하등도에 비하여, 또 상등관은 중등관에 비하여, 중등관은 하등관에 비하여 각각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수한 것을 들어 말하면, 하등도 하등관에도 상등도 상등관의 상전에라도 필적할 전이 있을 것이며, 또 상등도 상등관에도 하등도 하등관의 하전 이하에 속할 만한 전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3등도 3등관주의로 결박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불합리였다.
쪽수▶P115-3從來 貢法의 第二의 缺陷은 其田品等第에 있어 三等道 三等官主義를 採用한 일이다. 大體로 말하면 上等道는 中等道에 比하여, 中等道는 下等道에 比하여, 또 上等官은 中等官에 比하여, 中等官은 下等官에 比하여 各々 높은 生產力을 가지고 있는 것은 事實이지마는, 特殊한 것을 들어 말하면, 下等道 下等官에도 上等道 上等官의 上田에라도 匹敵할 田이 있을 것이며, 또 上等道 上等官에도 下等道 下等官의 下田 以下에 屬할 만한 田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三等道 三等官主義로 結縛해 놓는다는 것은 大端한 不合理였다.
제3의 결함은, 공법은 연(年)의 풍흉을 무시한 점이다. 물론 공법은 손실법의 폐를 구(救)하기 위하여 창안된 것이지만, 연의 풍흉을 일절 무시하고, 일정의 세액을―더군다나 종래 손실 數보담 큰 額을―强要한다는 것은 심히 困難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공법에 있어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연의 풍흉을 작량한다는 것이 요청되었다.
쪽수▶P115-4第三의 缺陷은, 貢法은 年의 豊凶을 無視한 點이다. 勿論 貢法은 損實法의 弊를 救하기 爲하여 創案된 것이지마는, 年의 豊凶을 一切 無視하고, 一定의 稅額을―더군다나 從來 損實 數보담 큰 額을―强要한다는 것은 甚히 困難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貢法에 있어도 어떠한 方法으로든지, 年의 豊凶을 酌量한다는 것이 要請되였다.
②25년 10월 계축의 변혁 하교
쪽수▶P115-5②二十五年 十月 癸丑의 變革 下敎
드디어 하3도 전부에 공법이 실시되어 2개년을 경한 25년 10월 계축에는 그 전 수차회의의 결과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현저한 변혁을 보인 하교(下敎)를 작성 발포하게 되었다.
쪽수▶P115-6드듸어 下三道 全部에 貢法이 實施되여 二箇年을 經한 二十五年 十月 癸丑에는 其前數次會議의 結果를 綜合하▶P116-1여, 다음과 같은 顯著한 變革을 보인 下敎를 作成 發布하게 되였다.
1. 전품은 5등으로 구분하고, 양전은 경묘제에 의한다.
쪽수▶P116-2其一 田品은 五等으로 區分하고, 量田은 頃畝制에 依한다.
전품5등의 이(理)는 앞서 든 신개의 소에 논의된 것과 같다. 또 종래의 양전법은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실적 표준에 의한 것이 아니요 수세 표준에 의한 것이다. 즉 결부제에 있어서는 같은 1결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한 개의 지적(地積)을 표시한다는 것보다 오히려 한 개의 수세 단위를 표시하는 것에 가깝다. 결부제의 결함은 여러가지가 있어, 여기서 구태여 이를 상론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던 면적주의의 경묘법에 비하여 실로 중간적인 간위 착취의 기회가 개입하기 쉬운 것이요, 따라서 납세자인 농민 측에서 보든지 수세자인 국가 자신에서 보든지 결코 합리적인 제도가 아닌 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부법의 폐에 관하여는 유반계반계수록정다산경세유표 등이 통론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왕은 원래 열심한 경묘론자로 이번에 이와 같이 하교에 그 이상을 표시하여, 종래의 계지전척(○○○○)(상중하 3종전척은 원 수지를 표준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을 변하고 새로 주척(○○)에 의한 경묘법으로 양전하기로 하였다.
쪽수▶P116-3田品五等의 理는 前記 申槩의 疏에 論議된 것과 같다. 또 從來의 量田法은 吾人이 旣知하는 바와 같이 實積 標準에 依한 것이 아니요 收稅 標準에 依한 것이다. 即 結負制에 있어서는 같은 一結이라 하드라도 그것은 한 個의 地積을 表示한다는 것보담 오히려 한 箇의 收稅 單位를 表示하는 것에 가깝다. 結負制의 缺陷은 여러가지가 있어, 여기서 구태여 이를 詳論치 않드라도, 그것이 다른 社會에서 行하여지고 있든 面積主義의 頃畝法에 比하여 實로 中間的인 姦僞 搾取의 機會가 介入키 쉬운 것이오, 따라서 納稅者인 農民 側에서 보든지 收稅者인 國家 自身에서 보든지 決코 合理的인 制度가 아닌 것은 容易히 想像할 수가 있는 것이다. (結負法의 弊에 關하여는 柳磻溪磻溪隨錄丁茶山經世遺表 等이 痛論하였으니, 叅考하기 바란다) 王은 元來 熱心한 頃畝論者로 이번에 이와 같이 下敎에 그 理想을 表示하여, 從來의 計指田尺(○○○○)(上中下 三種田尺은 원 手指를 標準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다)을 變하고 새로 周尺(○○)에 依한 頃畝法으로 量田하기로 하였다.
2. 종래의 전품등제에 있어서의 3등도 3등관의 표준을 전폐하고 전품은 모름지기 전국을 통한 한 개의 표준 내에서 5등으로 구분한다.
쪽수▶P116-4其二 從來의 田品等弟에 있어서의 三等道 三等官의 標準을 全廢하고 田品은 모름직이 全國을 通한 한 箇의 標準 內에서 五等으로 區分한다.
이유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쪽수▶P116-5理由는 旣述한 바와 같다.
3. 연분에 상상·상중·상하·중상·중중·중하·하상·하중·하하의 9등을 세운다.
쪽수▶P116-6其三 年分에 上上·上中·上下·中上·中中·中下·下上·下中·下下의 九等을 設한다.
매해 계추에 각 관 수령은 화곡 결실의 상을 심시하여, 수전·한전별로 그 관은 9등 연분의 어느 것에 해당할 것인가를 정하여 감사에 보고하고, 감사는 관내 각 관의 연분을 다시 검핵하고 종합하여 그 도는 어떤 연분인가를 정하여 가지고 호조를 통하여 계문한다. 즉 연분등제는 1도 단위인데, 단 특별한 취급을 요하는 관은 따로 한다.
쪽수▶P116-7每歲 季秋에 各 官 守令은 禾穀 結實의 狀을 審視하야, 水田·旱田別로 其官은 九等 年分의 何者에 該當할 것인가를 定하야 監司에 報告하고, 監司는 管內 各 官의 年分을 다시 檢覈하고 綜合하야 其道는 何年分인가를 定하야 가지고 戶曹를 通하야 啓聞한다. 即 年分等第는 一道 單位인데, 但 特別한 取扱을 要하는 官은 따로 한다.
③제(諸)실천
쪽수▶P116-8③諸實踐
이 같은 10월 계축의 하교에 의하여 다음의 제실천을 하게 되었다.
쪽수▶P116-9右 十月 癸丑의 下敎에 依하야 다음의 諸實踐을 하게 되였다.
갑. 전품등제
쪽수▶P117-1甲. 田品等第
(가) 하3도 전품등제
쪽수▶P117-2(가) 下三道 田品等第
11월 병진에 경차관 28인을 전라·충청·경상 3도에 보내 전품등제를 행하게 하였다. 이번 전품은 5등에 나누기로 되었는데, 그 의거할 절목(요항)은 다음과 같았다.
쪽수▶P117-3十一月 丙辰에 敬差官 二十八人을 全羅·忠淸·慶尙 三道에 보내여 田品等第를 行하게 하였다. 이번 田品은 五等에 나누기로 되였는데, 其依據할 節目(要項)은 다음과 같었다.
1. 종래 하3도의 상중전은 수한년을 물론하고 화곡이 무성한 전으로써 하였다. 그런데 신공법은 9등 연분과 재상을(앞 절 22년 8월 기해 절목 제4조) 작량하게 되어 있으니 종래의 상등 한수전을 모조리 신법의 제1등전으로 하고 종래의 중등 한수전을 모조리 신법의 제2등전으로 한다. 단, 종래의 상중 분등이 부득기중하였던 자는 적당히 짐작하여 혹승(或昇) 혹강(或降)한다.
쪽수▶P117-4一. 從來 下三道의 上中田은 水旱年을 勿論하고 禾糓이 茂盛한 田으로써 하였다. 그런데 新貢法은 九等年分과 災傷을(前節 二十二年 八月 己亥 節目 第四條) 酌量하게 되여 있으니 從來의 上等 旱水田을 모조리 新法의 第一等田으로 하고 從來의 中等 旱水田을 모조리 新法의 第二等田으로 한다. 但, 從來의 上中 分等이 不得其中하였든 者는 適當이 斟酌하야 或昇 或降한다.
2. 종래의 하등수전 내에 수원(水源)은 없더라도 지미(地味)가 고유(膏腴)한 자는 신법의 제1·제2·제3등전에 적의개편한다(종래의 소위 하등전은 연차에 의하여 풍흉이 있는 전이니, 연분·재상의 작량이 없던 옛 공법에 있어서는 당연히 상·중전과 동렬에 넣을 수가 없었으나 신법에 있어서는 이를 작량하게 되어 있으니, 제1·제2등전에 편입하여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또 종래의 하등전 내에 지세가 높고 사토가 상반(相半)한 척전이라도 만일 수원이 있는 것이면 이를 신법의 제2·제3등전에 편입한다.
쪽수▶P117-5二. 從來의 下等水田 內에 水源은 없드라도 地味가 膏腴한 者는 新法의 第一·第二·第三等田에 適宜改編한다(從來의 所謂 下等田은 年次에 依하야 豊凶이 있는 田이니, 年分·災傷의 酌量이 없든 舊貢法에 있어서는 當然이 上·中田과 同列에 넣을 수가 없었으나 新法에 있어서는 此를 酌量하게 되여 있으니, 第一·第二等田에 編入하야도 相關이 없다는 뜻이다). 또 從來의 下等田 內에 地勢가 높고 沙土가 相半한 瘠田이라도 萬一 水源이 있는 것이면 이를 新法의 第二·第三等田에 編入한다.
3. 옛 하등전 내에서 새로운 제3등전에 속하지 못할 전을 새로운 제4등전으로 하고, 다시 사석 척박하여 강원·함길·평안도의 최하 수전에 무이(無異)한 자를 새로운 제5등전으로 한다. 단, 적어도 제방 관개의 편이 있는 곳은, 땅의 비척을 물론하고, 제5등전에는 속하지 못한다.
쪽수▶P117-6三. 舊下等田 內에서 新第三等田에 屬하지 몯할 田을 新第四等田으로 하고, 다시 沙石 瘠薄하야 江原·咸吉·平安道의 最下 水田에 無異한 者를 新第五等田으로 한다. 但, 적어도 堤防 灌漑의 便이 있는 곳은, 地의 肥瘠을 勿論하고, 第五等田에는 屬하지 몯한다.
4. 산전 내에서 산요·산하전이라 할지라도 지미가 풍옥한 자는 다시 적당히 짐작하여 새로운 5등전법에 의하여 율(律)한다(산전에 관하여는 뒤의 제5절 주(註) 참조).
쪽수▶P117-7四. 山田 內에서 山腰·山下田이라 할지라도 地味가 豊沃한 者는 다시 適當이 斟酌하야 新五等田法에 依하야 律한다(山田에 關하야는 後述 第五節註 參照).
여기서 잠깐 각 절목을 검토하기로 하자. 우선 옛 3등전과 새로운 5등전과의 관계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117-8여기서 暫間 各 節目을 檢討하기로 하자. 우선 舊三等田과 新五等田과의 關係를 表示하면 다음과 같다.
박시형 전세제도-1.png
쪽수▶P118-1
박시형 전세제도-1.png
이에 의하여 자명한 바와 같이 하3도에는 여간한 악전이 아니고는 제4·제5등전은 없게 된다. 물론 신개 등이 애초에 전분5등을 주장한 이유라든지, 또 10월 계축의 하교의 정신이라든지는 이런 결과를 얻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연분·재상의 작량이라는 것을 가미하여 정작 실천으로 옮기게 된 이렇게 변질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연분등제라는 것은 매 필전에 개별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요 한 개의 커다란 집단에 대하여 실행되는 것이며, 또 재상에 관한 규정은 후술할 바와 같이 그 발동이 심히 곤란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적지 않은 옛 하등전을 새로운 1·2등으로 개편했다는 것은, 입법상의 한 개의 자가당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18-2右에 依하야 自明한 바와 같이 下三道에는 如干한 惡田이 아니고는 第四·第五等田은 없게 된다. 勿論 申槩 等이 애초에 田分五等을 主張한 理由라든지, 또 十月 癸丑의 下敎의 精神이라든지는 이런 結果를 어들라고 한 것은 아니였지마는, 거기에 年分·災傷의 酌量이라는 것을 加味하야 정작 實踐으로 옮기게 된 이렇게 變質하야 버린 것이다. 그러나 年分等第라는 것은 每筆田에 個別的으로 行하는 것이 아니요 한 個의 커다란 集團에 對하야 實行되는 것이며, 또 災傷에 關한 規定은 後述할 바와 같이 其發動이 甚히 困難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적지 않은 舊下等田을 新一·二等으로 改編했다는 것은, 立法上의 한 個의 自家撞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1 2 3 4의 각 항을 통하여 분등의 규정이 심히 엄격한 위에다가, 경차관 등은 실천에 제하여 많이 상의(上意)에 아유(阿諛)하여 분등을 가혹히 한 고로 중외의 물정이 소연하게 되었다. 인(因)하여 12월 을사 정인지를 도순찰사로 하여 하3도에 파견할 즈음에 여러가지로 신법의 변해를 백성에게 들리게 하는 한편, 경차관 등의 고중(高重) 분등을 경계하는 바가 있었다.
쪽수▶P118-3또 一二三四의 各 項을 通하야 分等의 規定이 甚히 嚴格한 우에다가,敬差官 等은 實踐에 際하야 많이 上意에 阿諛하야 分等을 苛酷히 한 故로 中外의 物情이 騷然하게 되였다. 因하야 十二月 乙巳 鄭麟趾를 都巡察使로 하야 下三道에 派遣할 지음에 여러가지로 新法의 辯解를 百姓에게 들리게 하는 一方, 敬差官 等의 高重 分等을 警戒하는 바가 있었다.
(나) 경기 전품등제
쪽수▶P118-4(나) 京畿 田品等第
원래 전품등제에 일정한 준거가 있는 것이지만, 그 실천은 꽤 루-즈한 것이어서, 개개의 경차관에 의하여 상당한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하3도 전품등제의 진행 중에 여러가지 불평이 있음에 감(鑑)하여, 새로 경기 전품등제를 시작하기 전에, 일을 신중히 하기 위하여 12월 계사, 전제상정소(11월 갑자에 설치되었다) 제조(提調)인 진양대군 유(瑈)(세조)·좌찬성 하연·지중추원사 정인지·호조판서 박종우 등의 중신을 서교에 파견하여 전품등제의 시험을 해보기까지 하였다. 이에 같은 달 병신에 경차관 20인을 경기에 파견하여 등제를 착수하게 하였다. 등제의 절목은 하3도의 것과 동일한 것은 물론이다. 다만 경기 전분의 실천에 있어서는 한 가지 특수한 사정을 상상할 수가 있다. 즉 경기 내에는 대귀족 등의 농장이 많으니 그들은 자가(自家)의 농장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전분을 가볍게 하기를 희망하였을 것이며, 또 그렇게 실행시켰을 것이다. 시대는 훨씬 뒤떨어지지만 정다산은 그 목민심서(전정조)에서 경기 내에 있는 자기 소유 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한 것이 있다.
쪽수▶P118-5元來 田品等第에 一定한 準據가 있는 것이지마는, 그 實踐은 꽤 루-즈한 것이어서, 個個의 敬差官에 依하야 相當한 差異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下三道 田品等第의 進行 中에 여러가지 不平이 있음에 鑑하야, 새로 京畿 田品等第를 始作하기 前에, 일을 愼重히 하기 爲하야 十二月 癸巳, 田制詳定所(十一月 甲子에 設置되였다) 提調인 晉陽大君 瑈(世祖)·左賛成 河演·知中樞院使 鄭麟趾·戶曹判書 朴從愚 等의 重臣을 西郊에 派遣하야 田品等第의 試驗을 해보기까지 하였▶P119-1다. 이에 同月 丙申에 敬差官 二十人을 京畿에 派遣하야 等第를 着手케 하였다. 等第의 節目은 下三道의 것과 同一한 것은 勿論이다. 다만 京畿 田分의 實踐에 있어서는 한 가지 特殊한 事情을 想像할 수가 있다. 即 京畿 內에는 大貴族 等의 農莊이 많으니 그들은 自家의 農庄에는 될 수 있는 대로 田分을 가볍게 하기를 希望하였을 것이며, 또 그렇게 實行시켰을 것이다. 時代는 훨신 뒤떠러지지마는 丁茶山은 그 牧民心書(田政條)에서 京畿 內에 있는 自己 所有 田에 對하야 다음과 같이 述懷한 것이 있다.

余有薄田 在畿內楊根郡 水田七十斗落 한전二十日耕 都只一結 及謫南徼 見水田差沃者 率二十斗落 己爲一結 由是觀之 南方之田(○○○○) 多係一二等(○○○○○) 其瘠薄者爲三四等(○○○○○○○○) 京畿之田(○○○○) 其腴者或入5등(○○○○○○○) 餘皆六等(○○○○) 可知也(○○○) 云云

쪽수▶P119-2

余有薄田 在畿內楊根郡 水田七十斗落 旱田二十日耕 都只一結 及謫南徼 見水田差沃者 率二十斗落 己爲一結 由是觀之 南方之田(○○○○) 多係一二等(○○○○○) 其瘠薄者爲三四等(○○○○○○○○) 京畿之田(○○○○) 其腴者或入五等(○○○○○○○) 餘皆六等(○○○○) 可知也(○○○) 云云

이 중의 “餘皆六等”은 믿기 어려우나, “其腴者或入五等”은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6등전법에 대하여는 뒤에 논함). 대관절 이때 경기전의 심히 가벼운 전분은 사실은 세종 조(朝) 이래의 화석일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비단 경기뿐 아니라 다른 도에 있어서도 전품등제란 그 전의 소유자 여하에 의하여 많이 좌우되는 것임을 알겠다.
쪽수▶P119-3此中의 「餘皆六等」은 信키 어려우나, 「其腴者或入五等」은 首肯할 수 있는 일이다(六等田法에 對하야는 後述). 대관절 此時 京畿田의 甚히 가벼운 田分은 事實은 世宗朝 以來의 化石일 것이다. 일로써 미루어, 非但 京畿뿐 아니라 他道에 있어서도 田品等第란 其田의 所有者 如何에 依하야 많이 左右되는 것임을 알겠다.
그런데 경기에 공법이 실시된 적확한 연차를 나는 불행히(혹 부주의로) 실록에서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전후 관계로 미루어, 본 도에 전품등제가 실행된 25년의 익년인 26년부터인가 한다.
쪽수▶P119-4그런데 京畿에 貢法이 實施된 的確한 年次를 나는 不幸이(或 不注意로) 實錄에서 發見치 몯하였으나, 前後 關係로 미루어, 本道에 田品等第가 實行된 二十五年의 翌年인 二十六年부터인가 한다.
을. 경묘법의 실천
쪽수▶P119-5乙. 頃畝法의 實踐
(가) 양전시험
쪽수▶P119-6(가) 量田試驗
11월 갑자에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진양대군·하연·박종우·정인지 등의 중신을 그 제조로 하였다. 종래의 결부제를 폐하고 새로 경묘법을 수립한 것은 이미 논한 바로, 급속히는 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장차는 전국 전을 이 법에 의하여 개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이에 상정소 사무의 제1착수로, 익 을축일에 하연·정인지 등의 제조와 판서운현사 이순지·주박 박윤창·김담 등(정·이·김 등은 당시의 산학의 대가였다)을 경기 안산군에 파견하여 경묘법에 의한 양전을 시험하게 하였다. 그 사목(절목)은 아래와 같다.
쪽수▶P119-7十一月 甲子에 田制詳定所를 設置하고 晉陽大君·河演·朴從愚·鄭麟趾等의 重臣을 其提調로 하였다. 從來의 結負制를 廢하고 새로 頃畝法을 樹立한 것은 旣述한 바로, 急速히는 行하지 몯한다 하드라도 將次는 全國 田을 此法에 依하야 改量치 안으면 안 될 것이니, 이에 詳定所 事務의 第一着手로, 翌 乙丑日에 河演·鄭麟趾 等의 提調와 判書雲峴事 李純之·注薄 朴允昌·金淡 等(鄭·李·金 等은 當時의 算學의 大家이었다)을 京畿 安山郡에 派遣하야 頃畝法에 依한 量田을 試驗케 하였다. 그 事目(節目)은 如左하다.
1. 주척5()평방위1() 240보위1() 100묘위1()5경위1()
쪽수▶P119-8一. 周尺五()平方爲一() 二百四十步爲一() 百畝爲一()▶P120-1五頃爲一()
2. 산곡 및 능판경측전의 승(시반)이 가장 많은 자는 실적의 20분의 1, 다음으로 많은 자는 30분의 1, 또 다음으로 많은 자는 40분의 1을 각각 감한다. 단 평지는 부재차한이다.
쪽수▶P120-2二. 山谷 及 陵坂傾側田의 塍(時畔)이 가장 많은 者는 實積의 二十分之一, 다음으로 많은 者는 三十分之一, 또 다음으로 많은 者는 四十分之一을 各々 減한다. 但 平地는 不在此限이다.
3. 사처의 가사 기지 및 저(苧)·저(楮)·완전・과원・칠림·죽림 등 적어도 이용하여 수익이 있는 땅은 다른 전의 예에 의하여 모조리 측량한다. 단 공처 및 사원의 기지는 부재차한이다.
쪽수▶P120-3三. 私處의 家舍 基地 及 苧·楮·莞田・菓園・漆林·竹林 等 적어도 利用하야 收益이 있는 地는 他田의 例에 依하야 모조리 測量한다. 但 公處 及 寺院의 基地는 不在此限이다.
(후에 경묘법이 불행하게 되어 조항1은 귀지무용했지만, 2·3은 그대로 후세 양전의 하나의 규준이 된 것은 물론이다)
쪽수▶P120-4(後에 頃畝法이 不行하게 되여 條項一은 歸之無用했지마는, 二·三은 그대로 後世 量田의 一規準이 된 것은 勿論이다)
여기에 잠깐 흥미를 끄는 한 사건은, 안산의 양전이 무사종료하였을 때, 왕은 이 성공을 이순지·김담 등의 산학의 공으로 돌리고, 즉시 집현전에 명하여 역대 산학의 법을 고계하라 하는 등, 세종 조(朝)의 산학에 대한 흥미의 발흥을, 실로 이 양전사업에 연기(緣起)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능히 할 바가 아니요, 다만 유지 군자의 주의를 환기함에 그친다.
쪽수▶P120-5여기에 暫間 興味를 끄는 一事는, 安山의 量田이 無事終了하였을 때,王은 此成功을 李純之·金淡 等의 算學의 功으로 돌리고, 即時 集賢殿에 命하야 歷代 算學의 法을 考啓하라 하는 等, 世宗朝의 算學에 對한 興味의 勃興을, 實로 이 量田事業에 緣起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對한 論議는 筆者의 能히 할 바이 아니요, 다만 有志君子의 注意를 喚起함에 그친다.
(나) 경묘법과 세법
쪽수▶P120-6(나) 頃畝法과 稅法
경묘법은 240보로써 1묘를 삼고, 100묘는 즉 1경이 되는 것이나, 매 보에 수세 계단을 만드는 것은 번쇄에 실(失)하므로, 26년 정월 경오 의정부의 계에 근거하여 24보로 1()을 삼고 10분으로 1묘를 삼아(단수는 사사오입한다), 어느 전은 기묘 기분인가를 정하여 가지고 일정한 세를 징수하게 한다.
쪽수▶P120-7頃畝法은 二百四十步로써 一畝를 삼고, 百畝는 즉 一頃이 되는 것이나, 每步에 收稅階段을 만드는 것은 煩鎻에 失함으로, 二十六年 正月 庚午 議政府의 啓에 據하야 二十四步로 一()을 삼고 十分으로 一畝를 삼어(端數는 四捨五入한다), 某田은 幾畝幾分인가를 定하야 가지고 一定한 稅를 徵收하게 한다.
(다) 환산표의 작성
쪽수▶P120-8(다) 換算表의 作成
경묘법이 제정되었음으로 전국 전은 장차 이 법에 의하여 개량할 것이나, 응급책으로 옛 결부법에 의한 상 중 하 전의 실적을 경묘법의 면적으로 환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각개 전에 즉하여 각 사람이 일일이 계산을 한다면 사섭(事涉) 완만할 뿐 아니라 또 착오의 염려가 있는 고로 정월 경오 의정부의 계에 의하여 옛 어느 등전 기결(畿結) 기부(畿負) 기속(幾束)은 새 기자(幾字) 기경(幾頃) 기묘(幾畝) 기분(幾分)에 해당하는 것인가를 미리 환산하여 표를 만들어 주자소로 하여금 인출 반포하게 하였다.
쪽수▶P120-9頃畝法이 制定되였음으로 全國 田은 장차 이 法에 依하야 改量할 것이나, 應急策으로 舊結負法에 依한 上中下田의 實積을 頃畝法의 面積으로 換算할 必要가 있다. 그러나 各個田에 則하야 各人이 一々이 計算을 한다면 事涉緩慢할 뿐 아니라 또 錯誤의 念慮가 있는 故로 正月 庚午 議政府의 啓에 依하야 舊某 等田 畿結 畿負 幾束은 新 幾字 幾頃 幾畝 幾分에 該當하는 것인가를 미리 換算하야 表를 만들어 鑄字所로 하여금 印出 頒布케 하였다.












본문3-2: (2)세종 26년 6월부터 11월까지―공법의 완성


①폐지 경묘·잉구 결부=전분 6등·동과 수조
쪽수▶P121-1①廢止 頃畝·仍舊 結負=田分 六等·同科 收租
25년 10월 계축 하교의 그 1―결부법을 폐지하여 양전은 실적주의의 경묘법에 의하여 통일하고 다만 전품을 5등으로 나누어서 수조에 계단을 둔다는 원칙과 및 그 후의 제실천은 수구론자들의 시끄러운 반대론을 야기하였다. 그들의 논지를 들으면 다음과 같았다.
쪽수▶P121-2二十五年 十月 癸丑 下敎의 其一―結負法을 廢止하야 量田은 實積主義의 頃畝法에 依하야 統一하고 다만 田品을 五等으로 나누어서 收租에 階段을 둔다는 原則과 및 其後의 諸實踐은 守舊論者들의 시끄러운 反對論을 惹起하였다. 그들의 論旨를 들으면 다음과 같었다.

제1로(○○○), 왕은 결부제를 옛 제도(중화선왕지제)가 아니라 하여 배척하고, 즐겨 경묘법을 채용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옛 제도라 하더라도 백성에 큰 이해가 없고, 다만 일반의 시청을 경해하게 할 뿐이 아니냐. 다음(○○) 경묘법을 채용하면, 5등전의 1단위면적은 다 같은 고로 그들의 세액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연분9등법을 승하면, 도합 59405종의 각이한 세액을 구별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어, 산계 번용(煩冗)하여 간리가 인연위도(因緣爲盜)할 것이다. (), 종래에 병역과 부역은 결부법에 의하여 1결기하라는 표준으로 간단히 부과할 수가 있었으나, 경묘법에 의하여 전분5등으로 세액이 각이하여지면, 병역과 부역의 부과율도 또한 번쇄하여 질 것이다. 경묘법은 이상의 세 결함을 가진 것이니, 재래의 결부법을 좇아 모든 등전의 면적의 광협을 적의 짐작하여 동일 명목의 1결로 하고, 거기다 동과 수조를 하는 것이 좋다. 1결의 세액이 모두 같으면 오직 연분에 의한 차이가 있을 뿐으로 이 법이 극간(極簡)하다.

쪽수▶P121-3

第一로(○○○), 王은 結負制를 古制(中華先王之制)가 아니라 하야 排斥하고, 즐겨 頃畝法을 採用하였으나, 그러나 아무리 古制라 하드라도 百姓에 大利害가 없고, 다만 一般의 視聽을 驚駭케 할 뿐이 아니냐. 다음(○○) 頃畝法을 採用하면, 五等田의 一單位面積은 다 같은 故로 그들의 稅額은 다 다르다. 거기다 다시 年分九等法을 乘하면, 都合 五九四十五種의 各異한 稅額을 區別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여, 算計煩冗하야 奸吏가 因緣爲盜할 것이다. (), 從來에 兵役과 賦役은 結負法에 依하야 一結幾何라는 標準으로 簡單이 賦課할 수가 있었으나, 頃畝法에 依하야 田分五等으로 稅額이 各異하야지면, 兵役과 賦役의 賦課率도 또한 煩鎻하야 질 것이다. 頃畝法은 以上의 三缺陷을 가진 것이니, 在來의 結負法을 좇아 諸等田의 面積의 廣狹을 適宜斟酌하야 同一 名目의 一結로 하고, 거기다 同科收租를 하는 것이 좋다. 一結의 稅額이 皆同하면 오직 年分에 依한 差異가 있을 뿐으로 其法이 極簡하다.

【필자는 생각건대 이러한 논자의 경묘법 반대 이유의 하나로, 여기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경묘법 실시에 의하여 당연히 야기될 또 한 가지 혼란이 있다. 그것은 모든 곳의 절급전 특히 과전·공신전·별사전 등 사전의 절급액에 관한 문제다. 종래 이들 사전은 결단위로써 절급되어 있고, 1결당 수세액은 모두 같았던 고로 전주 등은 이들 사전에서 아무 불평이 없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세액을 안심하고 취할 수가 있었으나, 만일 경묘법으로 하여 1결의 전적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세액이 각이하여진다면, 사전의 수급자들은 종래와 같이 불평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돌아오는 세를 취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무한한 혼란이 야기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의 등급에 의하여 사전의 절급액을 가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전제의 근본을 교란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여 경묘제는 이 사회의 봉건관료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귀찮은 물건이었다. 일찍이 유반계는 그 수록(권지1)에 있어서 ()(中國)之頃畝(○○○)主地(○○)(積)하고, ()(朝鮮) 之結負(○○○)主稅(○○)한다”는 것을 논하고, 古今法制(○○○○)指意所分(○○○○)斯可見矣(○○○○)로다”하고 통탄한 일이 있지만, 2 소위 ‘지의(指意)’란, 이 전체로서의 봉건정부 그것의 지의이기 전에, 우선 개인으로서의 봉건관료의 지의였던 것이다.】
쪽수▶P121-4【筆者는 생각컨대 此種論者의 頃畝法 反對 理由의 하나로, 여기는 叙述되여 있지 아니하지만, 頃畝法 實施에 依하야 當然이 惹起될 또 한 가지 混亂이 있다. 그것은 諸處折給田 特히 科田·功臣田·別賜田 等 私田의 折給額에 關한 問題다. 從來 此等私田은 結單位로써 折給되여 있고, 一結當 收稅額은 皆同하였든 故로 田主 等은 此等 私田에서 아모 不平이 없이 自己에게 도라오는 稅額을 安心하고 取할 수가 있었으나, 萬一 頃畝法으로 하야 一結의 田積이 다 같고, 따라서 그들의 稅額이 各異하야진다면, 私田의 受給者들은 從來와 같이 不平 없이 점잖게, 그들에게 도라오는 稅를 取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無限한 混亂이 惹起될 것은 當然한 일이▶P122-1다. 그렇다고 해서 田의 等級에 依하야 私田의 折給額을 加減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그러냐 하면 그것은 또 田制의 根本을 攪亂시키는 것이니까. 이리하야 頃畝制는 이 社會의 封建官僚에 對하야 어듸까지든지 귀찮은 物件이었다. 일즉이 柳磻溪는 그 隨錄(卷之一)에 있어서 ()(中國)之頃畝(○○○)主地(○○)(積)하고, ()(朝鮮) 之結負(○○○)主稅(○○)한다」는 것을 論하고, 古今法制(○○○○)指意所分(○○○○)斯可見矣(○○○○)로다」하고 痛歎한 일이 있지마는, 二 所謂 「指意」란, 이 全體로서의 封建政府 그것의 指意이기 前에, 爲先 個人으로서의 封建官僚의 指意이었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쪽수▶P122-2此에 對하야 王은 다음과 같이 反駁하였다.

제1로(○○○) 경묘법이(○○○○) 일정하면(○○○○), 지품의(○○○) 고하를(○○○) 변경할(○○○) 경우에는(○○○○) 다만(○○) () 세액을(○○○) 개정하면(○○○○) 그만이요(○○○○), 양전의(○○○) 수는(○○) 자약하여(○○○○) 하등의(○○○) 변경을(○○○) 받지(○○) 아니한다(○○○○). 그러나(○○○) 만일(○○) 지품에(○○○) 의하여(○○○) 결부를(○○○) 정한다면(○○○○), 지품을(○○○) 변경할(○○○) 때마다(○○○) 자연히(○○○) 결부의(○○○) 수가(○○) 변화를(○○○) 받고(○○), 따라서(○○○) 전제의(○○○) 세포조직인(○○○○○) 자정지제(○○○○)(5결위1자)() 진괴하여(○○○○) 분운하기(○○○○) 짝이(○○) 없으리니(○○○○), 간리는(○○○) 이로(○○) 인연하여(○○○○) 도를(○○) () 것이다(○○○).
땅에 대소가 있어 동과 수조하는 것이 수세상 편리한 것은 제군의 소론과 같으나, 옛성인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행하지 않고 경묘법에 인하여 후세에 수범(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이치가 있었던 까닭이다.
다음(○○), 제군은 경묘법에 의한 수세의 번쇄를 호소하나 손실법 때 일을 생각하면, 당시 전분수조의 절목이야말로 해시(奚啻) 천만하였느냐(축단손실). 그러면 서로 능히 이를 행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신법은 번용하다 하지만 백성은 다만 ‘모든 전은 어느 등전이니 모든 해에는 기두를 납하면 된다’는 것만 외워두면, 간리에게 속을 리가 없다. 하3도에 현행되어 있는 공법(3등전 차과 수세)으로만 보더라도 차과 수세는 제군이 염려하는 것 같이 번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으로(○○○○), 병역·부역의 부과는 하필 종래의 1결기허에 고집할 것 없이 새로 정하는 세액의 다과에 의하여 적당히 부과하면 그만 아니냐.

쪽수▶P122-3

第一로(○○○) 頃畝法이(○○○○) 一定하면(○○○○), 地品의(○○○) 高下를(○○○) 變更할(○○○) 境遇에는(○○○○) 다만(○○) () 稅額을(○○○) 改定하면(○○○○) 그만이요(○○○○), 量田의(○○○) 數는(○○) 自若하야(○○○○) 何等의(○○○) 變更을(○○○) 받지(○○) 아니한다(○○○○). 그러나(○○○) 萬一(○○) 地品에(○○○) 依하야(○○○) 結負를(○○○) 定한다면(○○○○), 地品을(○○○) 變更할(○○○) 때마다(○○○) 自然이(○○○) 結負의(○○○) 數가(○○) 變化를(○○○) 받고(○○), 따라서(○○○) 田制의(○○○) 細胞組織인(○○○○○) 字丁之制(○○○○)(五結爲一字)() 盡壞하야(○○○○) 紛紜하기(○○○○) 짝이(○○) 없으리니(○○○○), 奸吏는(○○○) 이로(○○) 因緣하야(○○○○) 盜를(○○) () 것이다(○○○).
땅에 大小가 있어 同科收租하는 것이 收稅上 便利한 것은 諸君의 所論과 같으나, 古 聖人이라도 이것을 몰랐을 理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行치 않고 頃畝法에 因하야 後世에 垂範한 것은 반드시 그럴 理致가 있었든 까닭이다.
다음(○○), 諸君은 頃畝法에 依한 收稅의 煩鎻를 呼訴하나 損實法 때 일을 생각하면, 當時 田分收租의 節目이야말로 奚啻千萬하였느냐(逐段損實). 그러면 서로 能히 이를 行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新法은 煩冗하다 하지마는 民은 다만「吾田은 某等田이니 某等年에는 幾斗를 納하면 된다」는 것만 외여두면, 奸吏에게 속을 理가 없다. 下三道에 現行되여 있는 貢法(三等田 差科 收稅)으로만 보드라도 差科 收稅는 諸君이 念慮하는 것 같이 煩鎻한 것은 決코 아니다.
第三으로(○○○○), 兵役·賦役의 賦課는 何必 從來의 一結幾許에 固執할 것 없이 새로 定하는 稅額의 多寡에 依하야 適當이 賦課하면 그만 아니냐.

【필자는 생각건대 이상은 왕이 그 폐(弊)다단한 결부법을 폐지하고, 그 이상으로 하는 실적주의의 경묘법을 단행하려 한 대문자다. 그러나 그 이상은 후술할 바와 같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드디어 구투(舊套) 그대로 이조 말기에 이르렀으니, 한(恨)된 일이라 하겠다.】
쪽수▶P122-4【筆者는 생각건대 以上은 王이 其弊多端한 結負法을▶P123-1 廢止하고, 그 理想으로 하는 實積主義의 頃畝法을 斷行하려 한 大文字다. 그러나 그 理想은 後述할 바와 같이 實現을 보지 몯하고, 드디어 舊套 그대로 李朝 末期에 及하였으니, 恨된 일이라 하겠다.】
이에 수구론자들은 한 개의 절충안을 내었다.
쪽수▶P123-2이에 守舊論者들은 한 個의 折衷案을 내었다.

임금의 말씀이 지당하나 그러나 법이란 큰 이해(利害)가 없는 한, 종래의 풍속 습관에 좇는 것이 좋으니, 하필 일일이 중국의 법을 본받을 것이 무엇이냐. 또 지유대소(地有大小)하여 동과 수조를 하는 것이 수세상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간편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결부법의 장처(동과 수조의 편)를 남기고 그 단처(결부법의 3등전척은 전연 자의적이오 하등의 규준이 없는 것이다. 제1절, 1, 참조)를 버려 한 개의 절충제도를 세우는 것이 어떠하냐. 즉, 결부제의(○○○○) 동과수조주의는(○○○○○○○) 그냥(○○) 살리고(○○○) 다만(○○) 종래의(○○○) 3등전척을(○○○○○) 버리고(○○○) 주척에(○○○) 의하여(○○○) 새로(○○) 제정할(○○○) 6등전(○○○)(전년 10월 계축 하교에는 전분5등으로 되었었으나, 그 후 최악전은 5등전만 가지고는 율할 수 없으니 새로 제5등전을 2분하여 제5등 밑에 제6등전을 두자는 의논이 일어났다)의 광협을(○○○) 적당히(○○○) 상정하는(○○○○) 것이(○○) 어떠냐(○○○).

쪽수▶P123-3

御說이 至當하나 그러나 法이란 大利害가 없는 限, 從來의 風俗習慣에 좇는 것이 좋으니, 何必 一々이 中國의 法을 본받을 것이 무엇이냐. 또 地有大小하야 同科收租를 하는 것이 收稅上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簡便한 것이다. 然則 이제 結負法의 長處(同科收租의 便)를 남기고 그 短處(結負法의 三等田尺은 全然 恣意的이오 何等의 規準이 없는 것이다. 第一節, 一, 叅照)를 버려 한 個의 折衷制度를 세우는 것이 어떠하냐. 即, 結負制의(○○○○) 同科收租主義는(○○○○○○○) 그냥(○○) 살리고(○○○) 다만(○○) 從來의(○○○) 三等田尺을(○○○○○) 버리고(○○○) 周尺에(○○○) 依하야(○○○) 새로(○○) 制定할(○○○) 六等田(○○○)(前年 十月 癸丑 下敎에는 田分五等으로 되였었으나, 그 後 最惡田은 五等田만 가지고는 律할 수 없으니 새로 第五等田을 二分하야 第五等 밑에 第六等田을 두자는 議論이 이러났다)의 廣狹을(○○○) 適當히(○○○) 詳定하는(○○○○) 것이(○○) 어떠냐(○○○).

왕도 드디어 동과 수조 지상론의 세에 밀려 26년 6월 갑신에 의정부·육조에게 양론을 재음미하도록 전지를 내렸다. 이 회의는 위에 적은 절충론을 채택하였으니, 그 요항은 다음 3개의 조였다.
쪽수▶P123-4王도 드디어 同科收租 至上論의 勢에 밀려 二十六年 六月 甲申에 議政府·六曹에게 兩論을 再吟味하도록 傳旨를 나렸다. 이 會議는 上述의 折衷論을 採擇하였으니, 其要項은 左의 三條이었다.
1. 경묘보법을 고처, 구에(○○) 의하여(○○○) 결부속파로(○○○○○) 한다(○○).
쪽수▶P123-5一. 頃畝步法을 고처, 舊에(○○) 依하야(○○○) 結負束把로(○○○○○) 한다(○○).
2. 이미 정한 5등전 밑에 다시 1등을 설(設)하여 도합 전분6등(○○○○)으로 한다.
쪽수▶P123-6二. 旣定의 五等田 밑에 다시 一等을 設하야 都合 田分六等(○○○○)으로 한다.
3. 그 6등전을 () 주척을(○○○) 써서(○○) 양하고(○○○), 적당히 그 광협을 작량하여 동과수조(○○○○)로 한다.
쪽수▶P123-7三. 其六等田을 () 周尺을(○○○) 써서(○○) 量하고(○○○), 適當히 其廣狹을 酌量하야 同科收租(○○○○)로 한다.
이리하여 이 같은 2원칙―전분6등·동과 수조(1의 ‘결부법’이라는 것과, 3의 ‘동과 수조’라는 것은 동의어다)는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되었다. 여기에서 독자는 자연히 깨닫는 바가 있으리라. 원래 경묘법의 장처는 지적의(○○○) 일정(○○)이라는 데 있는 것이요, 세종대왕의 착목처도 본래 여기에 있었던 것인데, 그 요점은 허울 좋게 경원되어 버리고, 다만 ‘양전은(○○○) 주척을(○○○) 쓴다(○○)’(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다음 항목에서 볼 바와 같이 ‘양전척은(○○○) 주척으로(○○○○) 표준을(○○○) 삼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겨우 그 형해만을 남기게 되었다. 단 그것은 전연 자의적인 옛 3등전척을 구축(驅逐)하여 버리는 데는 공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23-8이리하야 右의 二原則―田分六等·同科收租(一의 「結負法」이라는 것과, 三의 「同科收租」라는 것은 同義語다)는 움직이지 몯할 것으로 되였다. 여기에서 讀者는 自然이 깨닷는 바가 있으리라. 元來 頃畝法의 長處는 地積의(○○○) 一定(○○)이라는 데 있는 것이요, 世宗大王의 着目處도 본래 여기에 있었던 것인데, 그 要點은 허울 좋게 敬遠되여 버리고, 다만 「量田은(○○○) 周尺을(○○○) 쓴다(○○)」(事實 正確히 말하자면, 此는 次項에서 볼 바와 같이 「量田尺은(○○○) 周尺으로(○○○○) 標準을(○○○)▶P124-1 삼는다(○○○)」는 것에 지나지 안는다)는 것으로, 겨우 그 形骸만을 남기게 되었다. 但 그것은 全然 恣意的인 舊三等田尺을 驅逐하여 버리는 데는 功이 있었던 것이다.
②26년 11월 무자 공법 최후의 정착
쪽수▶P124-2②二十六年 十一月 戊子 貢法 最後의 定着
전분6등·동과 수조·연분9등의 원칙이 확정되었으니, 그 구체안을 작성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먼저(○○) 6등전분의(○○○○) 구별은(○○○) 토지의(○○○) 생산력에(○○○○) 표준을(○○○) 두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는 가령 옛 하등전 1결의 면적인 57묘의 땅(제1절 1, 참조)를 취하여 가지고, 이 지적을 가진 최양전 및 최악전의 생산력을 사정하여 양자의 중간에 적당히 6등전을 분배하는 방법을 취한다. 또 이를 위하여는, 7월 신해 전제상정소에 명하여 해당 사항을 각 관의 식리품관 및 노농에 순문하게 하며, 또 각 관 관둔전(지방관청의 용도를 변하는 전)해당 면적지의 과거 5개년 간의 미곡실수량을 조사하게 하였다.
쪽수▶P124-3田分六等·同科收租·年分九等의 原則이 確定되였으니, 그 具體案을 作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먼저(○○) 六等田分의(○○○○) 區別은(○○○) 土地의(○○○) 生產力에(○○○○) 標準을(○○○) 두기로(○○○) 한다(○○). 이를 爲하여는 假令 舊下等田 一結의 面積인 五十七畝의 地(第一節 一, 參照)를 取하여 가지고, 이 地積을 가진 最良田 及 最惡田의 生產力을 查定하여 兩者의 中間에 適當히 六等田을 配分하는 方法을 取한다. 또 이를 爲하여는, 七月 辛亥 田制詳定所에 命하여 該事項을 各官의 識理品官 及老農에 詢問케 하며, 또 各官 官屯田(地方官廳의 用度를 辨하는 田)該面積地의 過去 五箇年 間의 米糓實收量을 調査케 하였다.
다시 8월 정미 김종서·이숙시·정인지 등 전제상정소의 세 대신을 충청도 청안현에 파견하여 (이 때에 왕은 안질을 요양하기 위하여 청주 초수에 행행 중이었던 고로, 그 근방의 땅을 택한 것이다) 화곡 임실 상황에 의하여 토지생산력을 사정하고, 다시 그 결과에 좇아 전품등제를 행하게 하여 금후 전국적으로 행할 전품등제의 규준으로 삼았다. 이 시험등제가 끝난 후에 다시 하3도에 각각 산간군·평원군 하나씩을 택하여―충청도 비인·청안, 경상도 함안·고령, 전라도 고산·광양―거기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청안현 시험등제의 법을 본받아 전분을 등제하고, 또 그 등제에 좇아 양전을 시작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여섯 현의 등제·양전이 거의 끝날 즈음에 전제상정소는 그동안의 논의를 종합하여 11월 무자에 상계하고 왕은 이에 따라 새로 정한 공법을 중외에 반포하게 되었다. 이 새로 정한 공법은 반포와 동시에 우선 위에 적은 여섯 현에 실시하게 되었으니, 공법의 결정판으로, 그 모든 규정은 다음과 같다.
쪽수▶P124-4다시 八月 丁未 金宗瑞·李叔時·鄭麟趾 等 田制詳定所의 三大臣을 忠淸道 淸安縣에 派遣하여 (時에 王은 眼疾을 療養하기 爲하여 淸州 椒水에 行幸 中이었던 故로, 그 近傍의 地를 擇한 것이다) 禾糓 稔實 狀況에 依하여 土地生產力을 査定하고, 다시 그 結果에 좇아 田品等第를 行케 하여 今後 全國的으로 行할 田品等第의 規準으로 삼었다. 이 試驗等第가 끝난 後에 다시 下三道에 各各 山間郡·平原郡 하나씩을 擇하여―忠淸道 庇仁·淸安, 慶尙道 咸安·高靈, 全羅道 高山·光陽―거기에 敬差官을 派遣하여 淸安縣 試驗等第의 法을 본받어 田分을 等第하고, 또 그 等第에 좇아 量田을 始作케 하였다. 이리하여 六縣의 等第·量田이 거의 끝날 지음에 田制詳定所는 其동안의 論議를 綜合하여 十一月 戊子에 上啓하고 王은 이에 從하여 新定貢法을 中外에 頒布하게 되었다. 이 新定貢法은 頒布와 同時에 爲先 上記六縣에 實施하게 되였으니, 貢法의 決定版으로, 그 諸規定은 다음과 같다.
제1 전적과 세액
쪽수▶P124-5第一 田積과 稅額
1. 단위면적의 생산력의 사정
옛 3등전의 면적이란 전연 자의적이었고 따라서 거기서 징수하는 세액이란 극히 부정확한 것이었는 고로(물론 3등전에서 다 그 수량의 10분의 1을 과세한다는 작정은 어렴풋이 있었지마는, 그 작정이란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퍽 막연한 것이었다), 새로 6등전을 구분하여, 각기 생산력에 응하여 세를 징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우선 단위면적에 있어서의 6등전 각개의 수량을 재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 품관 노농에 묻고 관둔전의 수량을 조사하고, 다시 하3도 6현에 시험하여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57묘지(○○○○)(옛 하전1결의 지적) 상상년의(○○○○) 1등 수전의 수량은 벼 80석(미 40석), 6등 수전의 수량은 벼 20석(미 10석)으로 사정한다. 그 동안의 4등을 균분하여 (미 40석-10석)÷5=6석 다음과 같이 한다.
57묘지6등전 상상년의 수량
1등전 미 40석
2등전 34석(이하 6석씩 점감)
3등전 28석
4등전 22석
5등전 16석
6등전 10석
한전은 수전에 준하여 1등전 황두 40석, 2등전 황두 34석 등으로 한다.
쪽수▶P124-6一. 單位面積의 生產力의 査定
舊三等田의 面積이란 全然 恣意的이었고 따라서 거기서 徵收하는 稅額이란 極히 不正確한 것이었는 故로(勿論 三等田에서 다 그 收量의 十分之一을 課稅한다는 작정은 어렴풋이 있었지마는, 그 작정이란 累▶P125-1說한 바와 같이 퍽 漠然한 것이였다), 새로 六等田을 區分하여, 各其 生產力에 應하여 稅를 徵하기로 한다. 그러기 爲하여는 爲先 單位面積에 있어서의 六等田 各箇의 收量을 在定할 必要가 있다. 此를 品官老農에 묻고 官屯田의 收量을 調査하고, 다시 下三道 六縣에 試驗하여 얻은 結果는 다음과 같다. 먼저 五十七畝地(○○○○○)(舊下田一結의 地積) 上々年의(○○○○) 一等水田의 收量은 베八十石(米四十石), 六等水田의 收量은 베二十石(米十石)으로 査定한다. 其間의 四等을 均分하여 (米40石-10石)÷5=6石 다음과 같이 한다.
五十七畝地六等田上々年의 收量
一等田 米四〇石
二等田 三四石(以下 六石식 漸減)
三等田 二八石
四等田 二二石
五等田 一六石
六等田 一〇石
旱田은 水田에 準하여 一等田 黃豆 四十石, 二等田 黃豆 三十四石 等으로 한다.
2. 무릇 세는 수량의 20분지1(○○○○○)을 부과한다.
57묘지 6등전 상상년의 세액
1등전 미 20두 (1석은 15두니, 따라서 30두는 수량 40석의 20분의 1인 2석에 해당한다. 여개방차)
2등전 25두 5승
3등전 21두
4등전 16두 5승
5등전 12두
6등전 7두 5승
쪽수▶P125-2二. 무릇 稅는 收量의 二十分之一(○○○○○)을 課한다.
五十七畝地 六等田 上々年의 稅額
一等田 米三〇斗 (一石은 十五斗니, 따러서 三〇斗는 收量 四十石의 二十分之一인 二石에 該當한다. 餘皆倣比)
二等田 二五斗 五升
三等田 二一斗
四等田 一六斗 五升
五等田 一二斗
六等田 七斗 五升
3. 연분9등
전실위(實爲) 상상년 9분실위 상중년
8분실위 상하년 7분실위 중상년
6분실위 중중년 5분실위 중하년
4분실위 하상년 3분실위 하중년
2분실위 하하년
쪽수▶P125-3三. 年分九等
全實爲 上々年 九分實爲 上中年
八分實爲 上下年 七分實爲 中上年
六分實爲 中々年 五分實爲 中下年
四分實爲 下上年 三分實爲 下中年
二分實爲 下々年
4. 동과 수조에 의한 각 등전의 실적
6등전을 다 57묘로 1결을 정하여 가지고, 이에 의하여, 2와 같이 수세액을 각각 달리 한다면, 비단 절목이 번쇄해질 뿐 아니라, 사전절급·병역·부역 부담 등에 관하여 산계가 심번(甚煩)함을 미면하리니, 전례에 의하여 결부의 광협을 각각 다르게 정하여 가지고, 동과 수조를 행하기로 한다. 그러면 여하한 세액을 기준으로 하여 결부의 광협을 정할 것인가. 만일 6등전 1결의 7두 5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 1결은 57묘가 될 것이나, 1등전의 1결이 너머 좁아진다. 동리(同理)로 1등전 1결의 30두를 기준으로 한다면, 6등전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윤집궐중(允執厥中)하여 20두동과(○○○○○)로써 결의 적을 정하기로 한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1등전1결 38·0묘(57(묘):30(두)=x(묘): 20(두). x=38묘 etc.
2등전1결 44·7
3등전1결 54·2
4등전1결 69·0
5등전1결 95·0
6등전1결 152·0
쪽수▶P125-4四. 同科收租에 依한 各等田의 實積
六等田을 다 五十七畝로 一結을 定하여 가지고, 이에 依하여, 二와 같이 收稅額을 各々 달리 한다면, 非但▶P126-1 節目이 煩鎻해질 뿐 아니라, 私田折給·兵役·賦役 負擔 等에 關하여 算計가 甚煩함을 未免하리니, 前例에 依하여 結負의 廣狹을 各々 다르게 定하여 가지고, 同科收租를 行하기로 한다. 그러면 如何한 稅額을 基準으로 하여 結負의 廣狹을 定할 것인가. 萬一 六等田 一結의 七斗五升을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 一結은 五十七畝가 될 것이나, 一等田의 一結이 너머 좁아진다. 同理로 一等田 一結의 三十斗를 基準으로 한다면, 六等田이 너머 넓어진다. 이에 允執厥中하여 二十斗同科(○○○○○)로써 結의 積을 定하기로 한다. 其結果는 左와 如하다.
一等田一結 三八·〇畝(57(畝):30(斗)=x(畝): 20(斗). x=38畝 etc.
二等田一結 四四·七
三等田一結 五四·二
四等田一結 六九·〇
五等田一結 九五·〇
六等田一結 一五二·〇
5. 연분9등에 의한 모든 등전1결의 세액
상상년 20두 상중년 18두
상하년 16두 중상년 14두
중중년 12두 중하년 10두
하상년 8두 하중년 6두
하하년 4두
(상중년=상상년 20두×0.9=18두. etc.)
쪽수▶P126-2五. 年分九等에 依한 諸等田一結의 稅額
上々年 二〇斗 上中年 一八斗
上下年 一六斗 中上年 一四斗
中々年 一二斗 中下年 一〇斗
下上年 八斗 下中年 六斗
下々年 四斗
(上中年=上々年 20斗×0.9=18斗. etc.)
6. 각 등전의 일량 전척
각 등전은 다 그 양전척(○○○) 100척4방으로 1결을 삼는다. 따라서 각 양전척의 주척에 의한 장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1등전척 주척 4척7촌7분
2등전척 주척 5척1촌6분
3등전척 주척 5척7촌0분
4등전척 주척 6척4촌3분
5등전척 주척 7척5촌5분
6등전척 주척 9척5촌5분
주1. 경묘법에는 주척5척4방위1보, 240보위1묘인 고로 1묘는 6000평방주척이다. 따라서 1-등전척=√16000(평방주척)×38(묘)÷100=4.77주척이 된다. 여개방차)
2. 이에 각 등전척의 실장을 곡척으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1주척은 곡0·66척).
1등전척 곡3·148척
2등전척 곡3·419척
3등전척 곡3·762척
4등전척 곡4・344척
5등전척 곡4·983척
6등전척 곡6·303척
다시 이 곡척 수에 의하여 각 등전1결의 실적을 평수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각 등전1결은 각 그 양전척의 100척평방이요, 1평은 물론 곡6척평방이다.)
1등전1결 2,753·1평
2등전1결 3,346·7평
3등전1결 3,931·9평
4등전1결 4,723·5평
5등전1결 6,897・3평
6등전1결 11,035·5평
3. 세종 조(朝) 소정(所定) 주척은 이미 쓴 바와 같이 곡6촌6분이나, 후에 그 장이 늘어나서, 반계수록(권2)에 「今量田尺所用周尺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이라 하고 그려 놓은 주척은 그 장이 곡7촌이나 되니, 이것은 인조 12 갑술년 이후에 늘어난 것이다. (문헌비고 권142 참조) 따라서 갑술 이후의 척장과 결적에는 다소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니 주의하기 바란다.
쪽수▶P126-3六. 各 等田의 一量田尺
各 等田은 다 其 量田尺(○○○) 一〇〇尺四方으로 一結을 삼는다. 따라서 各量田尺의 周尺에 依한 長은 다음과 같이 定한다.
一等田尺 周尺 四尺七寸七分
二等田尺 周尺 五尺一寸八分
三等田尺 周尺 五尺七寸〇分
四等田尺 周尺 六尺四寸三分
五等田尺 周尺 七尺五寸五分
六等田尺 周尺 九尺五寸五分
註一. 頃畝法에는 周尺五尺四方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인 故로 一畝는 六〇〇〇平方周尺이다. 따라서▶P127-1 1-等田尺=√16000(平方周尺)×38(畝)÷100=4.77周尺이 된다. 餘皆倣此)
二. 이에 各 等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一周尺은 曲〇·六六尺).
一等田尺 曲三·一四八尺
二等田尺 曲三·四一九尺
三等田尺 曲三·七六二尺
四等田尺 曲四・三四四尺
五等田尺 曲四·九八三尺
六等田尺 曲六·三〇三尺
다시 이 曲尺 數에 依하여 各 等田一結의 實積을 坪數로 換算하면 다음과 같다. (各 等田一結은 各 其量田尺의 百尺平方이오, 一坪은 勿論 曲六尺平方이다.)
一等田一結 二,七五三·一坪
二等田一結 三,三四六·七坪
三等田一結 三,九三一·九坪
四等田一結 四,七二三·五坪
五等田一結 六,八九七・三坪
六等田一結 一一,〇三五·五坪
三. 世宗朝 所定周尺은 旣述한 바와 같이 曲六寸六分이나, 後에 其長이 느러나서, 磻溪隨錄(卷二)에 「今量田尺所用周尺今量田尺以此周尺計造이라 하고 그려 놓은 周尺은 其長이 曲七寸이나 되니, 이것은 仁祖 十二 甲戌年 以後에 느러난 것이다. (文獻備考 卷百四十二 參照) 따라서 甲戌 以後의 尺長과 結積에는 多少의 差異가 生하는 것이니 注意하기 바란다.
7. 결부속파(結負束把)
결부속파의 이름은 종래와 같이 한다. 1결위100부, 一부위10속, 1속위10파, 고로 결부속파와 새로운 양전척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결 10,000평방양전척
1부 100평방양전척
1속 10평방양전척
1파 1평방양전척
또 1자5결의 제(制)는 옛 방식에 의한다.
(이상 1 및 2는 전적과 세액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의 논리적 과정이요 법의 표면에는 3, 4, 5, 6, 7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쪽수▶P127-2七. 結負束把
結負束把의 이름은 從來와 같이 한다. 一結爲百負, 一負爲十束, 一束爲十把, 故로 結負束把와 新量田尺과의 關係는 如左하다.
一結 1〇,〇〇〇平方量田尺
一負 1〇〇平方量田尺
一束 1〇平方量田尺
一把 1平方量田尺
또 一字五結의 制는 舊에 依한다.
(以上 一 及 二는 田積과 稅額을 決定하는 데 있어서의 論理的 過程이오 法의 表面에는 三, 四, 五, 六, 七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勿論이다.)
8. 모든 위전의 이동
전적 개정에 반(伴)하여 공사의 모든 위전의 급부액에 당연히 이동이 생길 것이나, 이는 우선 옛 액에 의하여 단수(端數)를 붙여 급(給)해 두기로 한다.
쪽수▶P127-3八. 諸位田의 移動
田積 改定에 伴하야 公私諸位田의 給付額에 當然이 移動이 生할 것이나, 此는 爲先 舊額에 依하야 端數▶P128-1를 부처 給해 두기로 한다.
제2 연분등제
쪽수▶P128-2第二 年分等第
★9. 각 도 감사의 보고
각 도 감사는 한 해의 풍흉에 의하여 각 읍별로 다시 한전·수전별로, 상상에서 하하에 이르는 연분을 상계한다. ‘모 읍의 수전은 모 등년, 한전은 모 등년’의 형식으로 상상년은 10분실이요, 하하년은 2분실이요, 1분실은 면세한다.
쪽수▶P128-3★九. 各 道 監司의 報告
各道監司는 年의 豊凶에 依하야 各邑別로 다시 旱田·水田別로, 上々에서 下々에 이르는 年分을 上啓한다. 「某邑의 水田은 某等年, 旱田은 某等年」의 形式으로 上々年은 十分實이요, 下々年은 二分實이요, 一分實은 免税한다.
10. 정부의 결정
감사의 상계는 의정부·육조에 내려 의의(擬議)한 뒤, 신문(申聞)하여 연분을 결정한다. 혹 필요를 인식할 때는 정부는 다시 조관을 파견하여 심사한 후 계문하야 연분을 정한다.
쪽수▶P128-4十. 政府의 決定
監司의 上啓는 議政府·六曹에 下하야 擬議한 後, 申聞하야 年分을 決定한다. 或 必要를 認할 時는 政府는 다시 朝官을 派遣하야 審査한 後 啓聞하야 年分을 定한다.
제3 감면지제
쪽수▶P128-5第三 減免之制
★11. 진황전은 면세한다.
전적에 정전(○○)으로 되어있는 것은 다 매년 기경할 만한 땅인데, 나태에 의하여 진황하는 자가 많으니, 이 폐를 제거하기 위하여 정전은 일부 진황과 전부 진황을 불문하고 일률 수세하기로 한다. 단 전적에 속전(○○)으로 되어있는 것은 진황하기 쉬운 땅이니, 진황한 경우에는 수령이 작자의 고장에 의하여 친심한 후 감사에 전보하고, 감사·수령관은 다시 그 수를 핵(覈)하여 계문하고 중앙에서는 다시 조관을 파견하여 심사한 후 면세한다.
쪽수▶P128-6★十一. 陳荒田은 免稅한다.
田籍에 正田(○○)으로 되여있는 것은 다 每年 起耕할 만한 땅인데, 懶怠에 依하야 陳荒하는 者가 많으니, 此弊를 除去하기 爲하야 正田은 一部 陳荒과 全部 陳荒을 不問하고 一律 收稅하기로 한다. 但 田籍에 續田(○○)으로 되여있는 것은 陳荒하기 쉬운 땅이니, 陳荒한 境遇에는 守令이 作者의 告狀에 依하야 親審한 後 監司에 傳報하고, 監司·首領官은 다시 其數를 覈하야 啓聞하고 中央에서는 다시 朝官을 派遣하야 審査한 後 免税한다.
12. 침몰전은 면세한다.
물로 인하여 침몰된 전은 정전·속전을 불문하고 앞의 조 진황전과 같은 수속을 경(經)한 후 면세한다.
쪽수▶P128-7十二. 沈沒田은 免稅한다.
水로 因하야 沈沒된 田은 正田·續田을 不問하고 前條 陳荒田과 같은 手續을 經한 後 免稅한다.
★13. 재상전은 감면한다.
병·충·수·한해 등에 의하여 연복(상접한 땅)10결 이상에 달해 거의 전손(全損)하여 다른 전과 같이 9등연분으로 율할 수 없는 재상전은 진황전과 같은 수속을 경과한 후 감면한다.
쪽수▶P128-8★十三. 災傷田은 減免한다.
病·蟲·水·旱害 等에 依하야 連伏(相接한 地)十結 以上에 亘하야 거의 全損하야 他田과 같이 九等年分으로 律할 수 없는 災傷田은 陳荒田과 같은 手續을 經過한 後 減免한다.
14. 이 진황·침몰·재상전을 수령이 유고하여 친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감사가 차인(差人)하여 심사한다. 만일 수령이 타태하여 친심을 행하지 않는다든지 혹 사실에 반한 보고를 한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이를 엄벌에 처한다.
★표를 지른 것은 후에 다소 수정당한 것이다.
쪽수▶P128-9十四. 右 陳荒·沈沒·災傷田을 守令이 有故하야 親審치 몯하는 境遇에는 監司가 差人하야 審査한다. 萬一 守令이 惰怠하야 親審을 行하지 안는다든지 或 事實에 反한 報告를 한다든지 하는 境遇에는 此를 嚴罰에▶P129-1 處한다.
★表를 지른 것은 後에 多少 修正當한 것이다.


















본문4: 4.공법 정착 이후의 제문제















































본문4-1: (1)제위전에 관한 문제


① 전적 정리
쪽수▶P129-3① 田積 整理
전적 개정의 다음에 오는 것은 모든 위전 정리에 관한 문제다. 공법 정착의 익년인 27년 7월 을유에 의정부·육조의 상계에 의하여 옛 전적과 새 전적과의 차이에 말미암아 당연히 생기는바 공사 모든 위전의 영(과) 축(부족)은 혹은 국고에 이속하고 혹은 신규 보급하고 또 종래 절급액이 구구부정하던 것은 이를 일정하기로 하였다. 또 종래 그 액이 일정하던 것 중에서 이 즈음에 일률로 감액한 것도 있다. 다시 어떤 종류의 위전은 전연 혁제하기로 하였다. 요컨대 전제의 전반에 이르러 면목이 일신하게 된 것이다. 제1의 과부족의 첨삭을 한 것은 역전(우역에 대한 급전)이요, 제2의 절급액을 일정한 것은 향교위전(향교에 대한 급전)·주현아록전(수령의 봉록전)·공수전(지방관청의 용도전)·원전(행려 투숙소원에 대한 급전) 등이요, 제3의 일률 감액을 한 것은 도전(대하의 지정 도진에 대한 급전)·참전(수운을 맡는 수참에 대한 급전) 등이다. 그리고 제4의 전연 혁제해버린 것은 각사 공해전(중앙 각 관청에 절급되어 있던 점심비용전)을 비롯하여 모든 제위전(전주 경기전(태조 진전)·사직 제위전·문선왕 제위전·사전 소재 모든 악·해·독·산·천·성황 제위전 등)·인리 위전(향리에 대한 급전)·와장전(동·서요 와장에 대한 급전)・종묘 한전(종묘 소속 한(범역천자 총위지한)에 대한 급전)·봉상사 제단직전(제사 및 의시(議謚)를 장(掌)하는 봉상사의 제단직에 대한 급전)·수군전(홍엽·교하에 배치되었던 특별 수군에 대한 급전) 등이다(이상 모든 위전의 본질과, 및 그들에 대한 처리 제방법의 각기 이유에 대하여는, 다시 상론을 하여야 처음으로 사태가 밝아질 것이지만, 본론의 주류가 아닌 고로 할애한다). 그런데 이상 4개의 처리 방법 중, 제4의 전연 혁제는 무난히 즉시 실행할 수가 있었을 것이나, 다른 세 방법에 의한 것은 어느 것이나 정확히 이를 실행하려면 그 지방의, 신법에 의한 일반적 양전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요, 또 사실 각 도의 양전은 후술할 것과 같이 극히 수많이 실행된 것인 고로, 이들 새 규정의 정확한 적용은 상당한 시일을 요한 것이다. 더욱이 역전·아록전·공수전 등 거액에 달하는 위전의 처리는 그러하였다.
쪽수▶P129-4田積 改定의 다음에 오는 것은 諸位田 整理에 關한 問題다. 貢法 定着의 翌年인 二十七年 七月 乙酉에 議政府·六曹의 上啓에 依하야 舊田積과 新田積과의 差異에 말미암아 當然이 생기는바 公私 諸位田의 盈(過) 縮(不足)은 或은 國庫에 移屬하고 或은 新規 補給하고 또 從來 折給額이 區々不定하든 것은 此를 一定하기로 하였다. 또 從來 그 額이 一定하든 것 中에서 이 지음에 一律로 減額한 것도 있다. 다시 어떤 種類의 位田은 全然 革除하기로 하였다. 要컨댄 田制의 全般에 亘하야 面目이 一新하게 된 것이다. 第一의 過不足의 添削을 한 것은 驛田(郵驛에 對한 給田)이요, 第二의 折給額을 一定한 것은 鄕校位田(鄕校에 對한 給田)·州縣衙祿田(守令의 俸祿田)·公須田(地方官廳의 用度田)·院田(行旅投宿所院에 對한 給田) 等이요, 第三의 一律減額을 한 것은 渡田(大河의 指定 渡津에 對한 給田)·站田(水運을 맡는 水站에 對한 給田) 等이다. 그리고 第四의 全然 革除해버린 것은 各司公廨田(中央 各 官廳에 折給되여 있든 點心費用田)을 비롯하야 諸祭位田(全州 慶基殿(太祖眞殿)·社稷 祭位田·文宣王 祭位田·祀典 所載 諸嶽·海·瀆·山·川·城隍 祭位田 等)·人吏位田(鄕吏에 對한 給田)·瓦匠田(東·西窰瓦匠에 對한 給田)・宗廟干田(宗廟所屬于(凡役賤者總謂之干)에 對한 給田)·奉常寺 祭壇直田(祭祀 及 議謚를 掌하는 奉常寺의 祭壇直이에 對한 給田)·水軍田(紅曄·喬河에 配置되었든 特別 水軍에 對한 給田) 等이다(以上 諸位田의 本質과, 및 그들에 對한 處理 諸方法의 各其 理由에 對하여는, 다시 詳論을 하여야 처음으로 事態가 밝아질 것이로되, 本論의 主流가 아닌 故로 割愛한다). 그런데 以上 四箇의 處理 方法 中, 第四의 全然 革除는 無難이 直時 實行할 수가 있었을 것이나, 他 三方法에 依한 것은 어느 것이나 正確히 此를 實行하랴면 其地方의, 新法에 依한 一般的 量田 結果를 기다려야 할 것이요, 또 事實 各 道의 量田은 後述할 것과 같이 極히 綏慢히 實行된 것인 故로, 此等 新規定의 正確한 適用은 相當한 時日을 要한 것이다. 더욱이 驛田·衙祿田·公須田 等 巨額에 達하는 位田의 處理는 그러하였다.
이상 모든 위전 처리 외에 또 남은 것은 과전(조관(朝館)에 대한 급전)·공신전(공신 및 그 자손에 대한 급전)에 대한 문제일 것인데, 이 두 종의 전은 다 경기 내에 존재하는 것인 고로, 그 정리는 경기의 일반적 양전(세조 7년 아래 항목 참조) 결과를 기다린 후에 하였을 것이다.
쪽수▶P129-5以上 諸位田 處理 外에 또 남은 것은 科田(朝館에 對한 給田)·功臣田(功臣 及 其子孫에 對한 給田)에 對한 問題일 것인데, 此兩種田은 다▶P130-1 京畿 內에 存在하는 것인 故로, 其整理는 京畿의 一般的 量田(世祖 七年 次項 參照) 結果를 기다린 後에 하였을 것이다.
② ‘세’의 처리
쪽수▶P130-2②「稅」의 處理
과전법에 의하여 규정된, 국가가 과전을 위시하여 모든 사전에서 1결2두씩 징수하는 ()는(처음 ()()를 구별하여 사용하던 때의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세. 제1절 서두 참조), 신법에 있어서는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쪽수▶P130-3科田法에 依하야 規定된, 國家가 科田을 爲始하야 諸私田에서 一結二斗씩 徵收하는 ()는(처음 ()()를 區別하여 使用하든 때의 本來의 意味에 있어서의 稅. 第一節 緒頭 參照), 新法에 있어서는 如何이 處理되었는가.
27년 7월 을유의 결정으로는,
쪽수▶P130-4二十七年 七月 乙酉의 決定으로는,

一. 前此一結 定稅三斗(筆者曰, 三斗之間, 恐脫十字) 各品科田 及外方各位私田 則一結二斗 今一結極數 改定二十斗 而稅米豆 從本稅之數計除 其一結二斗仍舊.

쪽수▶P130-5

一. 前此一結 定稅三斗(筆者曰, 三斗之間, 恐脫十字) 各品科田 及外方各位私田 則一結二斗 今一結極數 改定二十斗 而稅米豆 從本稅之數計除 其一結二斗仍舊.

라고 하였다. 이 규정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신법에 있어서는 전적도 변경되었고, 또 1결당 수세액도 30두에서 20두로 변경이 되었지만, 사전세 1결2두는 이를 변경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결의 수세 ‘극수’ 20두(연분 상상년의 1결당 수세액이니, 1결의 최고 수세액)인 ‘본세’(즉, 사전법의 소위 조)에 대하여 사전세 2두로 하고, 본세가 연분에 의하여 감액되는 데 따라 사전세도 이를 ‘계제’(‘감액’)하기로 한다. 즉 본세 20두에 대하여 사전세 2두, 본세 18두에 대하여 사전세 1두 8승 等으로. 그런데 본세 대 사전세 간의 규정도 전적 정리 문제와 같이 경기 내에 일반적으로 새 공법이 적용된 후에야 실행된 것은 물론이다.
쪽수▶P130-6라고 하였다. 此規定은 다음과 같이 解釋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即 新法에 있어서는 田積도 變更되였고, 또 一結當 收稅額도 三十斗에서 二十斗로 變更이 되였지마는, 私田稅 一結二斗는 此를 變更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야 一結의 收稅 「極數」 二十斗(年分 上々年의 一結當 收稅額이니, 一結의 最高 收稅額)인 「本稅」(即, 私田法의 所謂 租)에 對하야 私田稅 二斗로 하고, 本稅가 年分에 依하야 減額되는 데 타라 私田稅도 此를 「計除」(「減額」)하기로 한다. 即 本稅 二十斗에 對하야 私田稅 二斗, 本稅 十八斗에 對하야 私田稅 一斗 八升 等으로. 그런데 本稅 對 私田稅 間의 規定도 田積 整理 問題와 같이 京畿 內에 一般的으로 新貢法이 適用된 後에야 實行된 것은 勿論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밝혀 둘 것은, 과전법에 있어서는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 외의 모든 전에서 이 사전세를 받게 되어 있었는데, 그 후 기다의 변천을 겪어 결국 경국대전에서는 직전(과전의 후신이니, 현직 관료에 대한 급전)과 사전(사원에 허용된 사전)만이 이 세를 바치기로 되어 있다.
쪽수▶P130-7그리고 여기서 暫間 밝혀 둘 것은, 科田法에 있어서는 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 外의 모든 田에서 이 私田稅를 받게 되여 있었는데, 其後 幾多의 變遷을 겪어 結局 經國大典에서는 織田(科田의 後身이니, 現職 官僚에 對한 給田)과 寺田(寺院에 許容된 私田)만이 이 稅를 바치기로 되여 있다.






























본문4-2: (2)신공법의 적용




































본문4-3: (3)연분등제


@
@


































본문4-4: (4)감면지제


@
@


































본문5: 5.공법 개관


@
@














































본문6: 6.공법 여론


@
@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현대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