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시문화의 기원(3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본문1-1: ③ 사회상)
(본문1-3: ⑤ 주의 흥기와 은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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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4번={{TagSpage|168-2}}民俗學에서 出發하야, 先史時代 乃至는 古代의 中國을 論하는 「漢學徒」들은, 거기서 牧遊文化素를 보았었다. 母權的 栽培文化素를 보았었다. 이 모든 것을 그런대 年代的으로 順列하여야 되겠섰다. 거기서, 考古學上의 事勢가 엇전지는 조금도 생각할 準備도 않고, 그들의 想像力에 맊여서, 「歷史」(!)를 만들어 놓는다. 거리하야 지어놓은 歷史가, 「商族은 農民이오, 周族은 牧夫」였다.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이 와서, 호미로 땅파는 中國 兩班(商族)을 때려부셨으니, 그것이 周國의 起興이다. 말 타는 되놈의 神 「하날」을 中國에 갖어온 것도 勿論 이 周 되놈이다!」 이렇게, 그들은 어렵쟌케 說明을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들은 「개소리」를 하는것이다.
 
|목차1-2원문4번={{TagSpage|168-2}}民俗學에서 出發하야, 先史時代 乃至는 古代의 中國을 論하는 「漢學徒」들은, 거기서 牧遊文化素를 보았었다. 母權的 栽培文化素를 보았었다. 이 모든 것을 그런대 年代的으로 順列하여야 되겠섰다. 거기서, 考古學上의 事勢가 엇전지는 조금도 생각할 準備도 않고, 그들의 想像力에 맊여서, 「歷史」(!)를 만들어 놓는다. 거리하야 지어놓은 歷史가, 「商族은 農民이오, 周族은 牧夫」였다.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이 와서, 호미로 땅파는 中國 兩班(商族)을 때려부셨으니, 그것이 周國의 起興이다. 말 타는 되놈의 神 「하날」을 中國에 갖어온 것도 勿論 이 周 되놈이다!」 이렇게, 그들은 어렵쟌케 說明을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들은 「개소리」를 하는것이다.
 
|목차1-2원문5번={{TagSpage|168-3}}그들은 中國 本土에 牧遊文化가 들어온 것은 周代로 始作하는 줄 아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인 것은, 第一章 第三節에서 벌써 보았다. 則, 黑陶文化에 벌써 牧遊文化 影響은 많었든 것을 우리는 거기서 보았다. 그뿐 外라 우리는 또 商族도 原來는 「알타이」 牧遊文化系에서 出發한 것이, 西膜時代에 벌써 農民化한 것을 보았었다. 그들{{TagPage|169-1}}이 黃河 中流地帶에 와서 牧遊文化素를 漸漸 더 喪失하였음에도 不拘하고, 그들은 그러나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버릇을 全然 喪失한 것은 아니엿다. 그것은 그들의 天神思想에도 表現되여 있다.
 
|목차1-2원문5번={{TagSpage|168-3}}그들은 中國 本土에 牧遊文化가 들어온 것은 周代로 始作하는 줄 아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인 것은, 第一章 第三節에서 벌써 보았다. 則, 黑陶文化에 벌써 牧遊文化 影響은 많었든 것을 우리는 거기서 보았다. 그뿐 外라 우리는 또 商族도 原來는 「알타이」 牧遊文化系에서 出發한 것이, 西膜時代에 벌써 農民化한 것을 보았었다. 그들{{TagPage|169-1}}이 黃河 中流地帶에 와서 牧遊文化素를 漸漸 더 喪失하였음에도 不拘하고, 그들은 그러나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버릇을 全然 喪失한 것은 아니엿다. 그것은 그들의 天神思想에도 表現되여 있다.
|목차1-2원문6번={{TagSpage|169-2}}胡適 敎授가 顧頡剛氏에게 보낸, 民國十二年 五月 三十日付의 書信 中에는,<blockquote no="09">{{TagRef|18}}關於「帝」字, 我也認爲「天帝」. 此字是世界最古的字, 古義「帝」與「天」當相同, 正如其音之同紐. 試看<br/><br/>五字同出一源, 大概是根可能的. 看郊祀志可見許多「帝」原爲西方民族(秦民族)的天神, 此是無可疑的.…</blockquote>云云의 句가 있다.<ref>「古史辯」 第一册, 民國十五年 三月, 本論 一九九頁. </ref> 劉復氏가 指摘햇듯이, 여기서 「帝」字가 「世界最古的字」라는 것은 勿論 不當한 말이다. 이것은 或, 誤記(clerical error)일런지도 몰을 것이다. 그것은 如何했던, 胡適氏가 여기서 「帝」와 「天」의 起生的 關聯을 論함에는 一意가 있는 것이다. 나는 胡適氏의 同文을 구경하기 퍽 前부터, 兩字가 同一 系統임을 믿어 왔었다. (勿論 胡氏와는 퍽 相異한 意味에서). 그리고 또, 「帝」가 Dyaus, Zeus, Tir 等 語와 關聯이 있을 可能性도 생각해본 바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帝」와 「天」, 兩字가 모다 天及天神을 意味하는 「알타이」語 의 Tengeri에서 由來한 것이라고 하는 便이 妥當하다고 생각해 온 바이다. 여기에 關한 理論에 言及하기 前에 그런대, 나는 劉復氏의 胡適氏 批評에 좀 言及할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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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6번={{TagSpage|169-2}}胡適 敎授가 顧頡剛氏에게 보낸, 民國十二年 五月 三十日付의 書信 中에는,<blockquote no="09">{{TagRef|18}}關於「帝」字, 我也認爲「天帝」. 此字是世界最古的字, 古義「帝」與「天」當相同, 正如其音之同紐. 試看<br/>[[파일:도유호_중도문3-13.png|100px]]<br/>五字同出一源, 大概是根可能的. 看郊祀志可見許多「帝」原爲西方民族(秦民族)的天神, 此是無可疑的.…</blockquote>云云의 句가 있다.<ref>「古史辯」 第一册, 民國十五年 三月, 本論 一九九頁. </ref> 劉復氏가 指摘햇듯이, 여기서 「帝」字가 「世界最古的字」라는 것은 勿論 不當한 말이다. 이것은 或, 誤記(clerical error)일런지도 몰을 것이다. 그것은 如何했던, 胡適氏가 여기서 「帝」와 「天」의 起生的 關聯을 論함에는 一意가 있는 것이다. 나는 胡適氏의 同文을 구경하기 퍽 前부터, 兩字가 同一 系統임을 믿어 왔었다. (勿論 胡氏와는 퍽 相異한 意味에서). 그리고 또, 「帝」가 Dyaus, Zeus, Tir 等 語와 關聯이 있을 可能性도 생각해본 바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帝」와 「天」, 兩字가 모다 天及天神을 意味하는 「알타이」語 의 Tengeri에서 由來한 것이라고 하는 便이 妥當하다고 생각해 온 바이다. 여기에 關한 理論에 言及하기 前에 그런대, 나는 劉復氏의 胡適氏 批評에 좀 言及할냐고 한다.
 
|목차1-2원문7번={{TagSpage|169-3}}劉復氏는, 音의 相似가 반듯이 同一 系統語임을 意味하는 것이 아님을 論하야 印度, 希臘, 羅典(拉丁)語와 帝, 天과의 關係 云云에 信憑치 못할 點이 있음을 論하는 一方 그러나 「바빌론」 古語와 天, 帝와의 關係의 可能性을 들어
 
|목차1-2원문7번={{TagSpage|169-3}}劉復氏는, 音의 相似가 반듯이 同一 系統語임을 意味하는 것이 아님을 論하야 印度, 希臘, 羅典(拉丁)語와 帝, 天과의 關係 云云에 信憑치 못할 點이 있음을 論하는 一方 그러나 「바빌론」 古語와 天, 帝와의 關係의 可能性을 들어
|목차1-2원문8번={{TagSpage|169-4}}巴比侖最古象形文中有一「」字, 其音爲e-dim 或 e-din 其義爲「天」. 又有一「」字, 其音爲 din-gir 或 dim-mer 或 dimer, 其義爲「天帝」, 或爲「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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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8번={{TagSpage|169-4}}巴比侖最古象形文中有一「[[파일:도유호_중도문3-14.png|40px]]」字, 其音爲e-dim 或 e-din 其義爲「天」. 又有一「[[파일:도유호_중도문3-15.png|40px]]」字, 其音爲 din-gir 或 dim-mer 或 dimer, 其義爲「天帝」, 或爲「人生」.
|목차1-2원문9번={{TagSpage|169-5}}我們把金文中的「帝」字: (周愙鼎), (皸狄鼎), {{TagPage|170-1}}(聃敦)等, 和甲骨文中的: , , , , , , , , , , 拿來和比較, 形體實在像極了; 便是說文中的, 也還相差不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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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9번={{TagSpage|169-5}}我們把金文中的「帝」字: [[파일:도유호_중도문3-16.png|40px]](周愙鼎), [[파일:도유호_중도문3-17.png|40px]](皸狄鼎), {{TagPage|170-1}}[[파일:도유호_중도문3-18.png|40px]](聃敦)等, 和甲骨文中的: [[파일:도유호_중도문3-19.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0.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1.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2.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3.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4.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5.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6.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7.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8.png|40px]], 拿來和[[파일:도유호_중도문3-29.png|40px]]比較, 形體實在像極了; 便是說文中的[[파일:도유호_중도문3-30.png|40px]], 也還相差不多.
|목차1-2원문10번={{TagSpage|170-2}}{{TagRef|19}}說文中的「天」作, 金文作(頌鼎), (毛公鼎), 甲骨文作, , , 和字相比, 雖不得像, 也還有些影子라고 말한다.<ref>劉復, 『「帝」與「天」』(北京大學研究所國學門月刊 第一卷, 第三號. 「古史辨」 第二冊, 民國十九年 八月, 二〇-二七頁). 「帝」에 關하야 武內義雄氏는, 「帝」の最も原始的な形は▽或は▼であって, 本来は草木の花が散ってあとにむすばれた果實を描いたものであるが, この 果實はやがて草木を發生せしめる種子を藏する所であるから, 轉じて草木發生の根源を示す様になり, 後又一轉して人間の祖先を示す様に成ったものらしい라고 한다. {「支那思想史(岩波全書, 第七三卷) 昭和十一年, 五頁}. 武內氏의 說에는 左袒할 수가 없다.</ref> 劉復氏의 이 理論에는 勿論 一義가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天」이나 「帝」라는 語가 直接 「바빌론」에서 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빌론」 과의 關係에 關하야는 劉氏도 오직 推則에 못하였을 따름이오 確然한 論斷은 避하였다. 그런대,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알타이」語系의 「텡거리」는 벌써 「바빌론」으로도 넘어간 듯하다. 字의 一音價 din-gir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Din-gir가 dim-mer dimer로 變하기는 퍽 쉬운 것인 만큼, tengeri tengri tenger는 din-gir를 通하야 結局 dimer에까지 聯結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대, 「天」이나 「帝」는 「바빌론」과는 間接으로 關聯이 있는 것으로, 中國과 前亞細亞의 天神은 모다 中央亞細亞 牧遊族의 天神에서 各其 派生한 것일 것이다. 오직 中國의 天, 帝의 文字만은 前亞細亞의 그것에 直接 聯結되였기가 쉬운 것이다. 即 「天」이나 「帝」는 「텡거리」가 單綴語 中國語에 와서, 不得已 單綴化한 것이오, 이것을 表示하는 文字만은 「바빌론」에서 넘어온 것이기가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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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0번={{TagSpage|170-2}}{{TagRef|19}}說文中的「天」作[[파일:도유호_중도문3-31.png|40px]], 金文作[[파일:도유호_중도문3-32.png|40px]](頌鼎), [[파일:도유호_중도문3-33.png|40px]](毛公鼎), 甲骨文作[[파일:도유호_중도문3-34.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35.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36.png|40px]], 和[[파일:도유호_중도문3-37.png|40px]]字相比, 雖不得像, 也還有些影子라고 말한다.<ref>劉復, 『「帝」與「天」』(北京大學研究所國學門月刊 第一卷, 第三號. 「古史辨」 第二冊, 民國十九年 八月, 二〇-二七頁). 「帝」에 關하야 武內義雄氏는, 「帝」の最も原始的な形は▽或は▼であって, 本来は草木の花が散ってあとにむすばれた果實を描いたものであるが, この 果實はやがて草木を發生せしめる種子を藏する所であるから, 轉じて草木發生の根源を示す様になり, 後又一轉して人間の祖先を示す様に成ったものらしい라고 한다. {「支那思想史(岩波全書, 第七三卷) 昭和十一年, 五頁}. 武內氏의 說에는 左袒할 수가 없다.</ref> 劉復氏의 이 理論에는 勿論 一義가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天」이나 「帝」라는 語가 直接 「바빌론」에서 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빌론」 과의 關係에 關하야는 劉氏도 오직 推則에 못하였을 따름이오 確然한 論斷은 避하였다. 그런대,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알타이」語系의 「텡거리」는 벌써 「바빌론」으로도 넘어간 듯하다. [[파일:도유호_중도문3-38.png|40px]]字의 一音價 din-gir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Din-gir가 dim-mer dimer로 變하기는 퍽 쉬운 것인 만큼, tengeri tengri tenger는 din-gir를 通하야 結局 dimer에까지 聯結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대, 「天」이나 「帝」는 「바빌론」과는 間接으로 關聯이 있는 것으로, 中國과 前亞細亞의 天神은 모다 中央亞細亞 牧遊族의 天神에서 各其 派生한 것일 것이다. 오직 中國의 天, 帝의 文字만은 前亞細亞의 그것에 直接 聯結되였기가 쉬운 것이다. 即 「天」이나 「帝」는 「텡거리」가 單綴語 中國語에 와서, 不得已 單綴化한 것이오, 이것을 表示하는 文字만은 「바빌론」에서 넘어온 것이기가 쉬운 것이다.
|목차1-2원문11번={{TagSpage|170-3}}劉復氏는 다시 「帝」에 關하야<blockquote no="10">吳大澂以爲「帝」象花蒂形, 與「鄂不」之「不」同意, 却很有意思. 白虎通裏說: 「帝者, 諦也, 象可承 也」. 「諦也」二字還是承襲舊義, 「象可承也」却很可注意, 因爲「可承」正是花蒂的作用. (여기서 襲舊義란 帝諦也라는 說文 中의 舊見解말이다—都)<br/>大約「帝」的本義是花蒂, 作「天帝」用是第二義.</blockquote>를 云云한다. 花蒂가 帝가 된 것의 氏의 說明이 뒤딸아 나오는바, 그것에는 左袒할 수가 없다. 그런대 氏가 左袒하는 吳大澂의 「帝象花蒂形」說은 以下 더 論할 바와 같이 郭沫若氏도 採用하는 바 郭氏는 거기서 이것을 生殖崇拜와 關聯하야 論한다. 劉氏는 그런대 「不」字가 「不」字의 古字이오, 「大」를 意味하는 이 「丕」字의 金文(虢叔{{TagPage|171-1}}鐘), (王孫鐘), (聃敦) 等이나, 甲骨文의 , , , 等이 「바빌론」의 (天)에 相似한 것도 또 指摘한다. 「帝」字의 象形이 花帝를 象徵한 것인가에는 나는 퍽 疑心을 갖고 있는 者이다. 그러나, 「丕」字의 金文, 甲骨文이 「」字에 近似한 것은 나도 認定하는 바이다. 「不」 即 「丕」는 大이오 天도 大이다. 이것의 前亞細亞의 象形字가 中國에 넘어온 것은 決코 異常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語源的으로는 中國의 「天」이나 「帝」는 前亞細亞와는 間接으로밖에 關聯 못 되였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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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1번={{TagSpage|170-3}}劉復氏는 다시 「帝」에 關하야<blockquote no="10">吳大澂以爲「帝」象花蒂形, 與「鄂不」之「不」同意, 却很有意思. 白虎通裏說: 「帝者, 諦也, 象可承 也」. 「諦也」二字還是承襲舊義, 「象可承也」却很可注意, 因爲「可承」正是花蒂的作用. (여기서 襲舊義란 帝諦也라는 說文 中의 舊見解말이다—都)<br/>大約「帝」的本義是花蒂, 作「天帝」用是第二義.</blockquote>를 云云한다. 花蒂가 帝가 된 것의 氏의 說明이 뒤딸아 나오는바, 그것에는 左袒할 수가 없다. 그런대 氏가 左袒하는 吳大澂의 「帝象花蒂形」說은 以下 더 論할 바와 같이 郭沫若氏도 採用하는 바 郭氏는 거기서 이것을 生殖崇拜와 關聯하야 論한다. 劉氏는 그런대 「不」字가 「不」字의 古字이오, 「大」를 意味하는 이 「丕」字의 金文[[파일:도유호_중도문3-39.png|40px]](虢叔{{TagPage|171-1}}鐘), [[파일:도유호_중도문3-40.png|40px]](王孫鐘), [[파일:도유호_중도문3-41.png|40px]](聃敦) 等이나, 甲骨文의 [[파일:도유호_중도문3-42.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43.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44.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45.png|40px]] 等이 「바빌론」의 [[파일:도유호_중도문3-46.png|40px]](天)에 相似한 것도 또 指摘한다. 「帝」字의 象形이 花帝를 象徵한 것인가에는 나는 퍽 疑心을 갖고 있는 者이다. 그러나, 「丕」字의 金文, 甲骨文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47.png|40px]]」字에 近似한 것은 나도 認定하는 바이다. 「不」 即 「丕」는 大이오 天도 大이다. 이것의 前亞細亞의 象形字가 中國에 넘어온 것은 決코 異常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語源的으로는 中國의 「天」이나 「帝」는 前亞細亞와는 間接으로밖에 關聯 못 되였다고 나는 믿는다.
 
|목차1-2원문12번={{TagSpage|171-2}}「天」은 如何間 「알타이」語系의 tengeri tengri tenger 等 語의 單綴化이다. 나는 그것을 처음 岡正雄氏에게서 들었었다. {{TagRef|20}}그 後 「뿔라잏히 쉬타이너」 敎授도 蒙古語의(天을 意味하는) tengri와 「天」과의 關聯의 可能性을 指摘 하였다.<ref>R. Bleichsteiner: Die Gelbe Kirche, Wien 1937, S. 28</ref> 以上에서 數次 論한 바와 같이, 나는 「帝」도 tengeri의 單綴化라고 보는바(帝의 古音은 아마 tei일 것이다), 이 天, 帝 兩語는 모다 直接 中央亞細亞 牧遊文化系에서 넘어왔음에도 不拘하고, 그것을 傳한 部族層은 相異하기가 쉬운 것이다. 한 部族은 「天」으로 傳하였고, 다른 한 部族은 「帝」로 傳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것은 「鴻鷺」가 部族層의 相異에 伴하야 한번은 「黑」으로 省略되였고, 달은 한번은 「鷺」로 省略된 것과 事務가 同一한 것이다.
 
|목차1-2원문12번={{TagSpage|171-2}}「天」은 如何間 「알타이」語系의 tengeri tengri tenger 等 語의 單綴化이다. 나는 그것을 처음 岡正雄氏에게서 들었었다. {{TagRef|20}}그 後 「뿔라잏히 쉬타이너」 敎授도 蒙古語의(天을 意味하는) tengri와 「天」과의 關聯의 可能性을 指摘 하였다.<ref>R. Bleichsteiner: Die Gelbe Kirche, Wien 1937, S. 28</ref> 以上에서 數次 論한 바와 같이, 나는 「帝」도 tengeri의 單綴化라고 보는바(帝의 古音은 아마 tei일 것이다), 이 天, 帝 兩語는 모다 直接 中央亞細亞 牧遊文化系에서 넘어왔음에도 不拘하고, 그것을 傳한 部族層은 相異하기가 쉬운 것이다. 한 部族은 「天」으로 傳하였고, 다른 한 部族은 「帝」로 傳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것은 「鴻鷺」가 部族層의 相異에 伴하야 한번은 「黑」으로 省略되였고, 달은 한번은 「鷺」로 省略된 것과 事務가 同一한 것이다.
 
|목차1-2원문13번={{TagSpage|171-3}}이 天神觀念의 起源에 關하야 「쉬밑」 及 「콥쓰」 兩師나 又는 同一 系統의 天主敎 宣敎師들은, 그것에 近似한 것이 벌써 最原始文化(「原文化」)族들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나는 信憑할 수가 없다. 아니, 「프로이쓰」(Preuss) 其他의 諸學者는, 그것은 天主敎 神父의 獨斷的 說敎에 不過하다고 嘲笑를 하는 바이다.
 
|목차1-2원문13번={{TagSpage|171-3}}이 天神觀念의 起源에 關하야 「쉬밑」 及 「콥쓰」 兩師나 又는 同一 系統의 天主敎 宣敎師들은, 그것에 近似한 것이 벌써 最原始文化(「原文化」)族들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나는 信憑할 수가 없다. 아니, 「프로이쓰」(Preuss) 其他의 諸學者는, 그것은 天主敎 神父의 獨斷的 說敎에 不過하다고 嘲笑를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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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0번={{TagSpage|174-1}}天神 다음에 내가 論할냐는 것은 殷民의 生殖器 崇拜 云云의 問題이다. {{TagRef|25}}여기에 關하여는 碩學 「카-ㄹ 그렌」 敎授가 이미 論한 바가 잇거니와,<ref>B. Karlgren: “Some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Bulletin of the Museum of Far Eastern Antiquities”(Östasiatiska Samlingarna), No. 2, 1930.</ref> 同 敎授와는 關係가 없이 郭沫若氏도 이 宗敎的 習俗의 存在를 指摘하였다. 또 郭氏나 「카-ㄹ 그렌」 敎授 以前에 錢玄同氏는(비록 殷代를 直接 取扱한 것은 아니나) 易 이 生殖器 崇拜時代의 產物이며, 乾坤二卦가 男女生殖器의 記號임을 論하여 如左히 말하였다.<blockquote no="11">{{TagRef|26}}我以爲原始的易卦是生殖器崇拜時代底東西, 「乾」 「坤」 二卦即是兩性底生殖器底記號.<ref>錢玄同, 「答顧頡剛先生書」(「讀書雜志」 第十期. 「古史辨」 第一冊, 本論 七七頁). 郭沫若, 前揭書, 三版書後卄頁 參照.</ref></blockquote>
 
|목차1-2원문20번={{TagSpage|174-1}}天神 다음에 내가 論할냐는 것은 殷民의 生殖器 崇拜 云云의 問題이다. {{TagRef|25}}여기에 關하여는 碩學 「카-ㄹ 그렌」 敎授가 이미 論한 바가 잇거니와,<ref>B. Karlgren: “Some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Bulletin of the Museum of Far Eastern Antiquities”(Östasiatiska Samlingarna), No. 2, 1930.</ref> 同 敎授와는 關係가 없이 郭沫若氏도 이 宗敎的 習俗의 存在를 指摘하였다. 또 郭氏나 「카-ㄹ 그렌」 敎授 以前에 錢玄同氏는(비록 殷代를 直接 取扱한 것은 아니나) 易 이 生殖器 崇拜時代의 產物이며, 乾坤二卦가 男女生殖器의 記號임을 論하여 如左히 말하였다.<blockquote no="11">{{TagRef|26}}我以爲原始的易卦是生殖器崇拜時代底東西, 「乾」 「坤」 二卦即是兩性底生殖器底記號.<ref>錢玄同, 「答顧頡剛先生書」(「讀書雜志」 第十期. 「古史辨」 第一冊, 本論 七七頁). 郭沫若, 前揭書, 三版書後卄頁 參照.</ref></blockquote>
 
|목차1-2원문21번={{TagSpage|174-2}}錢氏의 意見에는 一義가 있다. 陰陽思想은 그것이 勿論 中國에서 起源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起源은 如何間 「交合」에 關한 原始人의 魔法 及 宗敎思想에 있는 것으로, 中國에 있어서도 事勢는 同一했던 것이다. {{TagRef|27}}아니 錢氏만 아니라, 「에르케쓰」氏도 「坤」卦가 陰門 記號임을 指摘하얏다.<ref>E. Erkes: “Some remarks on Karlgren's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Östasiatiska Samlingarna”, No. 3, 1931.</ref>
 
|목차1-2원문21번={{TagSpage|174-2}}錢氏의 意見에는 一義가 있다. 陰陽思想은 그것이 勿論 中國에서 起源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起源은 如何間 「交合」에 關한 原始人의 魔法 及 宗敎思想에 있는 것으로, 中國에 있어서도 事勢는 同一했던 것이다. {{TagRef|27}}아니 錢氏만 아니라, 「에르케쓰」氏도 「坤」卦가 陰門 記號임을 指摘하얏다.<ref>E. Erkes: “Some remarks on Karlgren's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Östasiatiska Samlingarna”, No. 3, 1931.</ref>
|목차1-2원문22번={{TagSpage|174-3}}{{TagRef|28}}錢氏 後에 또 周予同氏는 錢氏의 理論을 傳承하여(이것을 그는 明言치는 않았다), 儒敎의 「仁」과 「孝」를 生殖器 崇拜와 關聯하여 論하였다.<ref>周予同, 『「孝」與「生殖器崇拜」』(「一般」第三卷, 第一號. 「古史辯」 第二冊, 二三二-二五三頁).</ref> 그는 거기서 儒家 發生 當時에는 아직도 民間에 生殖器 崇拜思想이 相當한 努力을 갖고 있는 것을 指摘하며, 儒家는 이것을 原始宗敎形에서 「生殖崇拜」의 哲學으로 展開하며, 좀 더 發展하여 孝와 仁의 倫理的 範疇에까지 到達한 것이라고 論하였다. 그리하여 그 發展過程의 關係를 如左히 表示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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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2번={{TagSpage|174-3}}{{TagRef|28}}錢氏 後에 또 周予同氏는 錢氏의 理論을 傳承하여(이것을 그는 明言치는 않았다), 儒敎의 「仁」과 「孝」를 生殖器 崇拜와 關聯하여 論하였다.<ref>周予同, 『「孝」與「生殖器崇拜」』(「一般」第三卷, 第一號. 「古史辯」 第二冊, 二三二-二五三頁).</ref> 그는 거기서 儒家 發生 當時에는 아직도 民間에 生殖器 崇拜思想이 相當한 努力을 갖고 있는 것을 指摘하며, 儒家는 이것을 原始宗敎形에서 「生殖崇拜」의 哲學으로 展開하며, 좀 더 發展하여 孝와 仁의 倫理的 範疇에까지 到達한 것이라고 論하였다. 그리하여 그 發展過程의 關係를 如左히 表示하였다.<br/>[[파일:도유호_중도문3-48.png|150px]]
 
|목차1-2원문23번={{TagSpage|174-4}}그는 여기서 이것을 易의 思想과 關聯하여 論하며 錢氏와 同樣으로, 또 易의 乾坤二卦가 男女 生殖器의 記號이며, 그것이 生殖器 崇拜 時代의 産物임을 論하였다. 그리고 仍終에는 所謂 生殖器 崇拜, 實是原始社會之普遍的 信仰이라고까지 論하였다. (以下에도 더 論할 바와 같이 이 普遍的 信仰論에는 勿論 左袒할 수가 없다).
 
|목차1-2원문23번={{TagSpage|174-4}}그는 여기서 이것을 易의 思想과 關聯하여 論하며 錢氏와 同樣으로, 또 易의 乾坤二卦가 男女 生殖器의 記號이며, 그것이 生殖器 崇拜 時代의 産物임을 論하였다. 그리고 仍終에는 所謂 生殖器 崇拜, 實是原始社會之普遍的 信仰이라고까지 論하였다. (以下에도 더 論할 바와 같이 이 普遍的 信仰論에는 勿論 左袒할 수가 없다).
|목차1-2원문24번={{TagSpage|174-5}}인제 郭沫若氏의 意見을 論하여 보건대, 氏는 祖妣 崇拜와 關聯하여 甲骨文의 「祖」字가 陰莖의 象形이고, 「妣」{{TagPage|175-1}}字가 陰門의 象形이며 또 「神」, 「祗」의 象形이 , 等임을 들어, 거기서 生殖器 崇拜의 事實을 看破할냐고 한다. 그리하여<blockquote no="12">{{TagRef|29}}大抵宗教實起源於生殖崇拜, 其事於骨文中大有啓示. 如祖先崇拜之祖妣字實即牡牝器之象徵(骨文祖字作且妣字作匕), 一切神祗均稱「示」, 示字作或作實即生殖器之倒懸. 又如上帝之帝本象花蒂之形, 其意亦重在生殖.</blockquote>이라고 한다.<ref>郭沫若, 前揭書, 二九〇頁.</ref> 郭氏가 여기서 「生殖崇拜」라는 것은 좀 더 具體的으로 말하면, 바로 「生殖器 崇拜」의 稱이다. 勿論 兩者는 別로 區別할 必要가 없는 것이다. {{TagRef|30}}郭氏의 이 生殖崇拜論은, 비록 明言치는 않었으나, 朱芳圃氏도 大槪 採用한 바이다.<ref>朱芳圃, 前揭書, 第六章, 第二節(上冊).</ref> 그런대 郭沫若氏는 여기서 이렇게 生殖器 崇拜만 아니라, 宗敎의 起源이 바로 生殖器 崇拜에 있는 것이라고 論한다. 이것은 勿論 過言이다. 宗敎는 그 起源이 魔法에 있는 것은 나 亦 認定하는 바이다. 魔法은 그리고 原則的으로 類似 魔法(Analogiezauber)인대, 그곳에도 이 生殖魔法, 繁殖魔法(Fruchtbarkeitszauber)이 그 首位를 占領하고 있는 것이다. 이 諸點으로 보아, 生殖器 崇拜(印度의 「사이ᅄᅵ즘」 Saivism같은)에 宗敎의 起源을 찾는 郭氏의 態度에 一意가 없는 것도 아니나, 그러나 그의 主張이 不當한 것은 現存한 諸原始種族 中에는 이것을 全然 몰으는 者가 許多한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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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4번={{TagSpage|174-5}}인제 郭沫若氏의 意見을 論하여 보건대, 氏는 祖妣 崇拜와 關聯하여 甲骨文의 「祖」字가 陰莖의 象形이고, 「妣」{{TagPage|175-1}}字가 陰門의 象形이며 또 「神」, 「祗」의 象形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49.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0.png|40px]] 等임을 들어, 거기서 生殖器 崇拜의 事實을 看破할냐고 한다. 그리하여<blockquote no="12">{{TagRef|29}}大抵宗教實起源於生殖崇拜, 其事於骨文中大有啓示. 如祖先崇拜之祖妣字實即牡牝器之象徵(骨文祖字作且妣字作匕), 一切神祗均稱「示」, 示字作[[파일:도유호_중도문3-51.png|40px]]或作[[파일:도유호_중도문3-52.png|40px]]實即生殖器之倒懸. 又如上帝之帝本象花蒂之形, 其意亦重在生殖.</blockquote>이라고 한다.<ref>郭沫若, 前揭書, 二九〇頁.</ref> 郭氏가 여기서 「生殖崇拜」라는 것은 좀 더 具體的으로 말하면, 바로 「生殖器 崇拜」의 稱이다. 勿論 兩者는 別로 區別할 必要가 없는 것이다. {{TagRef|30}}郭氏의 이 生殖崇拜論은, 비록 明言치는 않었으나, 朱芳圃氏도 大槪 採用한 바이다.<ref>朱芳圃, 前揭書, 第六章, 第二節(上冊).</ref> 그런대 郭沫若氏는 여기서 이렇게 生殖器 崇拜만 아니라, 宗敎의 起源이 바로 生殖器 崇拜에 있는 것이라고 論한다. 이것은 勿論 過言이다. 宗敎는 그 起源이 魔法에 있는 것은 나 亦 認定하는 바이다. 魔法은 그리고 原則的으로 類似 魔法(Analogiezauber)인대, 그곳에도 이 生殖魔法, 繁殖魔法(Fruchtbarkeitszauber)이 그 首位를 占領하고 있는 것이다. 이 諸點으로 보아, 生殖器 崇拜(印度의 「사이ᅄᅵ즘」 Saivism같은)에 宗敎의 起源을 찾는 郭氏의 態度에 一意가 없는 것도 아니나, 그러나 그의 主張이 不當한 것은 現存한 諸原始種族 中에는 이것을 全然 몰으는 者가 許多한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목차1-2원문25번={{TagSpage|175-2}}郭氏의 以上의 意見 中, 「神」字 「祗」字의 甲骨文 , 等은 男子 生殖器를 낼여들인 것의 象徵이라고 하는 것에도 多少 疑問이 있는 것이다. 「크리-ㄹ」氏는 그것이 果然 무엇을 意味하였는가는, 一種의 수수꺼끼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날에서 흘러나리는 神力을 表示하는 것일런지도 몰으겠다고 한다.(“…its form is something of an enigma. It may represent the spiritual force streaming down from the heavens to men below.” — Creel : Ibid, P. 178). 「크리-ㄹ」氏의 意見에는 一意가 있는 것이다. {{TagRef|31}}神, 祗의 象形字가 「雨」字의 象形에 近似한 것은, 氏의 이 推測의 論據를 더구나 堅固히 하는 바 이다.<ref>「雨」의 骨文이 水滴의 落下를 象徵하는 것을 나는 「뿔아잏히쉬타이너」 敎授에게 말하였더니, 同 敎授는 그것이 天의 精液의 落下를 象徵하는 것이기도 쉽다고 對答하였었다. 그리고 보면 神祗의 象形字 은 天의 精液의 落下를 意味한 것이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雨」의 甲骨文이 天의 精液 落下의 象徵이라고는 나는 암만 해야 생각할 수가 없다.</ref> 郭氏의 理論에는 이렇게 弱點도 있으나 {{TagPage|176-1}}그러나 그가 祖妣 兩字의 甲骨文字를 男女 生殖器의 象形으로 본 것은 果然 正當한 見解인 것이다. {{TagRef|32}}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祖」의 原字 「且」의 象形이 陰莖인 것뿐 外라, 「妣」 의 原字 「匕」의 骨文인, , , , 等等도 果然 陰門의 象形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生殖器 崇拜와 直接 關係가 있었던 것이다.<ref>郭氏는 詩經 小雅篇의 斯于, 楚茨, 章 等의 詩句를 神殿 內의 性交라는 宗敎儀式과 關聯시킬냐고 하나(郭, 二八八頁), 그것은 아마 獨斷에 不過한 主張일 것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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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5번={{TagSpage|175-2}}郭氏의 以上의 意見 中, 「神」字 「祗」字의 甲骨文 [[파일:도유호_중도문3-53.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4.png|40px]] 等은 男子 生殖器를 낼여들인 것의 象徵이라고 하는 것에도 多少 疑問이 있는 것이다. 「크리-ㄹ」氏는 그것이 果然 무엇을 意味하였는가는, 一種의 수수꺼끼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날에서 흘러나리는 神力을 表示하는 것일런지도 몰으겠다고 한다.(“…its form is something of an enigma. It may represent the spiritual force streaming down from the heavens to men below.” — Creel : Ibid, P. 178). 「크리-ㄹ」氏의 意見에는 一意가 있는 것이다. {{TagRef|31}}神, 祗의 象形字가 「雨」字의 象形에 近似한 것은, 氏의 이 推測의 論據를 더구나 堅固히 하는 바 이다.<ref>「雨」의 骨文이 水滴의 落下를 象徵하는 것을 나는 「뿔아잏히쉬타이너」 敎授에게 말하였더니, 同 敎授는 그것이 天의 精液의 落下를 象徵하는 것이기도 쉽다고 對答하였었다. 그리고 보면 神祗의 象形字 [[파일:도유호_중도문3-54.png|40px]]은 天의 精液의 落下를 意味한 것이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雨」의 甲骨文이 天의 精液 落下의 象徵이라고는 나는 암만 해야 생각할 수가 없다.</ref> 郭氏의 理論에는 이렇게 弱點도 있으나 {{TagPage|176-1}}그러나 그가 祖妣 兩字의 甲骨文字를 男女 生殖器의 象形으로 본 것은 果然 正當한 見解인 것이다. {{TagRef|32}}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祖」의 原字 「且」의 象形이 陰莖인 것뿐 外라, 「妣」 의 原字 「匕」의 骨文인, [[파일:도유호_중도문3-55.png|5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6.png|5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7.png|5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8.png|50px]] 等等도 果然 陰門의 象形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生殖器 崇拜와 直接 關係가 있었던 것이다.<ref>郭氏는 詩經 小雅篇의 斯于, 楚茨, 章 等의 詩句를 神殿 內의 性交라는 宗敎儀式과 關聯시킬냐고 하나(郭, 二八八頁), 그것은 아마 獨斷에 不過한 主張일 것이다.</ref>
|목차1-2원문26번={{TagSpage|176-2}}「祖」字가 原來는 陰莖의 象徵이었든 것은 「에르케쓰」氏에 依하건대, 벌써 그의 先師인 碩學 「콘라듸」 敎授(Conrady)가 看破한 바로, 「에」氏는 學生 時代에 벌써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公開 못 된 意見이다. 西洋 學者 中 이것을 맨 처음 紙面上에 發表한 분은 내가 아는 限, 「카-ㄹ 그렌」 敎授인 것이다. 同 敎授는 그런데 여기서 陰莖에만 言及하고 陰門에는 別로 言及한 바가 없다. 그러나 그가 古代 支那文字의 祖, 伯, 魄, 土, 社의 原形이 陰莖의 象形이었다고 하는 것은 모다 正當한 主張이다(第六圖比較). 그런대, 여기서 「社」字 即 地神을 意味하는 字의 原形이 「土」字(「示」는 後에 添加한 것)의 原形과 同一하며, 그것이 亦是 陰莖의 象形)이었던 것은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以下에도 더 論할 바와 같이 天이 女이오, 地가 男이라는 가장 녯날의 觀念의 殘影인 듯하다. 그리고 社가 陰莖의 象徵이었든 만큼 이 地神에 對한 犧牲 提供을 意味하는 「宜」字의 象形은 이 陰莖에다 肉片을 건 것인 것이다. 「카-ㄹ 그렌」 敎授는, 先祖의 位碑(即 「主」)의 現在形象이 로 되야 「且」字를 聯想케 하는 것을 들어, 그 根源이 生殖器 崇拜의 녯날에 溯及되는 것까지 指摘하는 바, 거기에도 一意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如何間 上古 中國에 이런 宗敎가 있었든 것은 河南에서 出土된 (現在 瑞典國 首都 스톡홂 東洋博物館 所藏)石製(代理石같은 것)의 陰莖相(第七圖)도 證明하는 바이다. 同 出土品의 年代는 아직 未詳이나, 그것은 벌써 殷代에 溯及되는 것이기가 퍽 可能한 것이다(必然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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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6번={{TagSpage|176-2}}「祖」字가 原來는 陰莖의 象徵이었든 것은 「에르케쓰」氏에 依하건대, 벌써 그의 先師인 碩學 「콘라듸」 敎授(Conrady)가 看破한 바로, 「에」氏는 學生 時代에 벌써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公開 못 된 意見이다. 西洋 學者 中 이것을 맨 처음 紙面上에 發表한 분은 내가 아는 限, 「카-ㄹ 그렌」 敎授인 것이다. 同 敎授는 그런데 여기서 陰莖에만 言及하고 陰門에는 別로 言及한 바가 없다. 그러나 그가 古代 支那文字의 祖, 伯, 魄, 土, 社의 原形이 陰莖의 象形이었다고 하는 것은 모다 正當한 主張이다(第六圖比較). 그런대, 여기서 「社」字 即 地神을 意味하는 字의 原形이 「土」字(「示」는 後에 添加한 것)의 原形과 同一하며, 그것이 亦是 陰莖의 象形)이었던 것은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以下에도 더 論할 바와 같이 天이 女이오, 地가 男이라는 가장 녯날의 觀念의 殘影인 듯하다. 그리고 社가 陰莖의 象徵이었든 만큼 이 地神에 對한 犧牲 提供을 意味하는 「宜」字의 象形은 이 陰莖에다 肉片을 건 것인 것이다. 「카-ㄹ 그렌」 敎授는, 先祖의 位碑(即 「主」)의 現在形象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59.png|40px]]로 되야 「且」字를 聯想케 하는 것을 들어, 그 根源이 生殖器 崇拜의 녯날에 溯及되는 것까지 指摘하는 바, 거기에도 一意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如何間 上古 中國에 이런 宗敎가 있었든 것은 河南에서 出土된 (現在 瑞典國 首都 스톡홂 東洋博物館 所藏)石製(代理石같은 것)의 陰莖相(第七圖)도 證明하는 바이다. 同 出土品의 年代는 아직 未詳이나, 그것은 벌써 殷代에 溯及되는 것이기가 퍽 可能한 것이다(必然 그럴 것이다).
 
|목차1-2원문27번={{TagSpage|176-3}}「카-ㄹ 그렌」 敎授는, 祖先 崇拜가 곧 生殖器 崇拜요 그것은 子孫 繁殖 乃至는 이것과 直接 關係가 있는 農作物의
 
|목차1-2원문27번={{TagSpage|176-3}}「카-ㄹ 그렌」 敎授는, 祖先 崇拜가 곧 生殖器 崇拜요 그것은 子孫 繁殖 乃至는 이것과 直接 關係가 있는 農作物의
{{TagPage|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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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8번={{TagSpage|177}}[[파일:도유호_중도문3-60.png|섬네일|가운데|第六圖 甲骨文及殷周金文上의 祖伯社等諸字<br/>(Aus Karlaren: Some Fecundity Symbols etc)]]
第六圖 甲骨文及殷周金文上의 祖伯社等諸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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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29번={{TagSpage|178-1}}豊作을 爲함에 第一義가 있음을 論한다. 祖先 崇拜의 動機가 孝心에 있는 것이 아니라 巧利的 利己心에 있었음은, 「카-ㄹ 그렌」 敎授가 참 正當히 看破한 바로 적어도 墓訟事꾼은 이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宗敎心理의 根源은 結局 모다 여기에 있는 것이다. 神에 對한 態度만 아니라, 人間의 「倫理道德觀」 一般에 있어, 그 歸結點은 할 수 없이 이 利己心 線上에서 運動하고 있는 것이다. {{TagRef|33}}그러기에, 所謂 「人生哲學」(Lebensphilesophie)의 寵兒, 「짐멜」(Georg Simmel)氏도, 吾人이 世上에 對하여 善을 行하면, 그와 同時에 거기에 對한 報酬를, 結局은 無意識的으로나마 期待하지 않을 수 없는 這間의 事情을 告白하고 만 것이다.<ref>仔細히 記憶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아마 Samhnlung Göschen, Bd. 500.로 發表된 「짐멜」 敎授의 「哲學主要問題」(Hauptprobleme der Philosophie) 中에 씨여있든가 보이다. 比較하기를 바란다.</ref> 그런대 「카-ㄹ 그렌」 敎授가 祖先 崇拜와 生殖器 崇拜와의 不可分的 關係를 論하는 것을 나는 여기서 文化圈的 考察과 關聯하여 좀 더 吟味할 必要를 感하는 바이다.
(Aus Karlaren: Some Fecundity Symbols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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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0번={{TagSpage|178-2}}[[파일:도유호_중도문3-61.png|섬네일|가운데|第七圖 河南省, 黃河北岸出土石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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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1번={{TagSpage|178-3}}祖先 崇拜가 곧 子孫 繁殖, 豊作 等의 助長을 爲한 宗敎儀式 發生的 關係가 있다면, 거기에는 多少 語弊가 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生殖魔法 乃至는 生殖器 崇拜와, 祖先 崇拜(Ahne kult)는 果然 同一한 文化圈 內에서 起源된 것이다. 即 舊階段의 母權文化, 栽培文化系가 兩者의 本鄕인 것이다. 이 問題의 史的 考察을 하기 爲하여는 우리는 그런대 石器時代의 藝術에 다시 言及하지 않으면 않 되겠다.
{{TagPage|178-1}}豊作을 爲함에 第一義가 있음을 論한다. 祖先 崇拜의 動機가 孝心에 있는 것이 아니라 巧利的 利己心에 있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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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2번={{TagSpage|178-4}}{{TagRef|34}}「회르네쓰」 敎授(Moritz Heernes)는 先史時代의 藝術(美術)을 論함에 際하여, 藝術은 人間의 職能(Funktion)이라고 하며, 舊石器時代의 彫刻, 土偶, 壁畵들을 人間의 審美的 職能에서 自發한 表現物로 取扱하였였다.<ref>Horness-Menghin: Urgeschichte der bildenden Kunst in Europa, Wien 1925.</ref> {{TagPage|179-1}}그는 그의 이 考察을 藝術의 人類學的 考察이라고 自稱하였다. 即, 그는 藝術의 歷史的 考察을 못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先史時代의 藝術은 그것이 純粹한 藝術 그것만을 爲하여 職能的으로 된 것은 決코 아니오, 魔法 及 (魔法의 發展階段인)宗敎와 直接關係가 있었든 것이다. 蒙古 「오르도쓰」의 舊石器時代의 女神像이나, 西伯利亞 「말타」의 그것이나, 歐羅巴 「오린냑」文化, 「막달렌]文化의 女神像은, 그것이 栽培文化便에서 온 大母神(Magna Mater) 崇拜의 事實을 證明하는 考古學的 遺物에 不過한 것이다 「오린냑」文化, 「막달렌」文化의 壁畵나 彫刻品에 보이는 動物像, 生殖器形 等은, 그것이 狩獵의 好結果 又는 狩獵對象인 動物의 繁殖을 爲한 魔法의 手段에 不過한 것이다. 이 狩獵的의 刃器文化에는 그런대 「토템」性이 퍽 濃厚하여 뵈이는 바, 「토템」主義者들은 魔法을 누구보다도 甚히 盛行하였든 것이다. 即 魔法은 「토템」文化에 있어서, 極端的으로 發展을 했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魔法 中에서도 그 首位를 占領한 生殖魔法은 여기서 가장 甚하게 摘用되었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生殖魔法은, 그들의 女神崇拜와 同樣으로 原來는 母權的 栽培文化系에서 넘어온 것이다(第一章 第二節 註四 參照).
第七圖 河南省, 黃河北岸出土石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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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3번={{TagSpage|179-2}}佛蘭西, 「도르돈」州(Dordogne) 「ᄙᅩ쎌」(Laussel)에서 出土된 여러 神像 中에는 男女 性交의 場面을 뵈이는 浮彫가있다(第八圖). {{TagRef|35}}그런데, 여기서 男女의 位置는 女在上, 男在下로 되어있는 것이다.<ref>Vgl.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Zürich 1933, S. 156. G. Wilke: 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Mannus-BibliotherkNr. 31), Leipzig 1923, S. 17.</ref> 이 美術作品은 疑心할 餘地가 없이, 繁殖魔法에 使用한 神像으로 그것은 어느 點으로 보던지, 拳楔(斧器) 文化, 栽培文化便에서 傳來한 文化現象이다. 여기서 女神의 位置가 上部에 있는 것은, 그리고, 母權制 影響의 一面을 傅하는 바일 것이다. (그랬다고, 그것이 아직도 母權制가 남어있었음을 證明하는 것은 決코 아니다). 이 栽培文化의 이 性交相은 母權 影響이 甚한 古代의 前亞細亞에서도 陶器紋樣(第九圖), 彫刻 其他에 出現한다. 아니 거기서는 그들의 陰陽思想의 根據가 이것으로 되어있는바, 天地萬物은, 이 女天, 男地의 交合의 結果로 生成한다. 舊石器時代의 女男 兩神의 性交가 이렇게 天地의 性交에까지 일은 것은 勿論 其後의 發展階段으로, 이 觀念의 象徵化가 {{TagPage|180-1}}바로 그들의 女天男地의 宇宙圖像인 것이다. 이런 圖像은 勿論 古代 坎及에도 있었든 것이다(第十圖). 여기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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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4번={{TagSpage|180-2}}[[파일:도유호_중도문3-62.png|섬네일|가운데|第八圖 南佛 「ᄙᅩ쎌」(Laussel)의 「오린냑」文化期의 浮彫.<br/>(Aus L. Frobeuius: Kulturgeschichte Afrikas)]]
長 29,7 cm. 上部輪緣의 直經 8,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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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5번={{TagSpage|180-3}}女子가 天임은, 母權制의 影響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宇宙圖는 亞弗利加의 「쑤단」(Sudan) 一帶에 가서는 太牛이 男在上, 女在下로 位置가 박꿔젔는 바, 그것은 父
(Aus Karlgren: Some Feundity Symbols 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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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6번={{TagSpage|180-4}}[[파일:도유호_중도문3-63.png|섬네일|가운데|第九圖 波斯 알리-아받 (Aly-Abad) 出土의 陶器上에있는 紋樣. (Aus G, Wilke: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 Leipzig 1923, S. 16.)]]
「카-ㄹ 그렌」 敎授가 참 正當히 看破한 바로 적어도 墓訟事꾼은 이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宗敎心理의 根源은 結局 모다 여기에 있는 것이다. 神에 對한 態度만 아니라, 人間의 「倫理道德觀」 一般에 있어, 그 歸結點은 할 수 없이 이 利己心 線上에서 運動하고 있는 것이다. {{TagRef|33}}그러기에, 所謂 「人生哲學」(Lebensphilesophie)의 寵兒, 「짐멜」(Georg Simmel)氏도, 吾人이 世上에 對하여 善을 行하면, 그와 同時에 거기에 對한 報酬를, 結局은 無意識的으로나마 期待하지 않을 수 없는 這間의 事情을 告白하고 만 것이다.<ref>仔細히 記憶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아마 Samhnlung Göschen, Bd. 500.로 發表된 「짐멜」 敎授의 「哲學主要問題」(Hauptprobleme der Philosophie) 中에 씨여있든가 보이다. 比較하기를 바란다.</ref> 그런대 「카-ㄹ 그렌」 敎授가 祖先 崇拜와 生殖器 崇拜와의 不可分的 關係를 論하는 것을 나는 여기서 文化圈的 考察과 關聯하여 좀 더 吟味할 必要를 感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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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7번={{TagSpage|181-1}}權文化의 影響에 그 原因이 있을 것이다. 前亞細亞의 이 生殖魔法은 그들의 宗敎上에서 大役割을 演하였는 바, 그 結果는 亂雜無道한 性交的 宗敎 禮式으로 끝였든 것은 吾人이 周知하는 바이다. 亞弗利加 一部에나, 印度에는 (「시ᅄᅡ」敎 等) 現在도 그 遺風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儀式의 過程은 言語道斷의 淫行으로 된 것이 大部分이다. 그들은 이 淫亂한 宗敎儀式에 依하여 야만 農作物의 收獲을
|목차1-2원문28번={{TagSpage|178-2}}祖先 崇拜가 곧 子孫 繁殖, 豊作 等의 助長을 爲한 宗敎儀式 發生的 關係가 있다면, 거기에는 多少 語弊가 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生殖魔法 乃至는 生殖器 崇拜와, 祖先 崇拜(Ahne kult)는 果然 同一한 文化圈 內에서 起源된 것이다. 即 舊階段의 母權文化, 栽培文化系가 兩者의 本鄕인 것이다. 이 問題의 史的 考察을 하기 爲하여는 우리는 그런대 石器時代의 藝術에 다시 言及하지 않으면 않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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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8번={{TagSpage|181-2}}[[파일:도유호_중도문3-64.png|섬네일|가운데|第十圖 埃及木棺上의 圖像<br/>(aus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목차1-2원문29번={{TagSpage|178-3}}{{TagRef|34}}「회르네쓰」 敎授(Moritz Heernes)는 先史時代의 藝術(美術)을 論함에 際하여, 藝術은 人間의 職能(Funktion)이라고 하며, 舊石器時代의 彫刻, 土偶, 壁畵들을 人間의 審美的 職能에서 自發한 表現物로 取扱하였였다.<ref>Horness-Menghin: Urgeschichte der bildenden Kunst in Europa, Wien 1925.</ref> {{TagPage|179-1}}그는 그의 이 考察을 藝術의 人類學的 考察이라고 自稱하였다. 即, 그는 藝術의 歷史的 考察을 못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先史時代의 藝術은 그것이 純粹한 藝術 그것만을 爲하여 職能的으로 된 것은 決코 아니오, 魔法 及 (魔法의 發展階段인)宗敎와 直接關係가 있었든 것이다. 蒙古 「오르도쓰」의 舊石器時代의 女神像이나, 西伯利亞 「말타」의 그것이나, 歐羅巴 「오린냑」文化, 「막달렌]文化의 女神像은, 그것이 栽培文化便에서 온 大母神(Magna Mater) 崇拜의 事實을 證明하는 考古學的 遺物에 不過한 것이다 「오린냑」文化, 「막달렌」文化의 壁畵나 彫刻品에 보이는 動物像, 生殖器形 等은, 그것이 狩獵의 好結果 又는 狩獵對象인 動物의 繁殖을 爲한 魔法의 手段에 不過한 것이다. 이 狩獵的의 刃器文化에는 그런대 「토템」性이 퍽 濃厚하여 뵈이는 바, 「토템」主義者들은 魔法을 누구보다도 甚히 盛行하였든 것이다. 即 魔法은 「토템」文化에 있어서, 極端的으로 發展을 했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魔法 中에서도 그 首位를 占領한 生殖魔法은 여기서 가장 甚하게 摘用되었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生殖魔法은, 그들의 女神崇拜와 同樣으로 原來는 母權的 栽培文化系에서 넘어온 것이다(第一章 第二節 註四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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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39번={{TagSpage|182-1}}豐富히 할 수가 있는 줄로 믿는 까닭이다.
|목차1-2원문30번={{TagSpage|179-2}}佛蘭西, 「도르돈」州(Dordogne) 「ᄙᅩ쎌」(Laussel)에서 出土된 여러 神像 中에는 男女 性交의 場面을 뵈이는 浮彫가있다(第八圖). {{TagRef|35}}그런데, 여기서 男女의 位置는 女在上, 男在下로 되어있는 것이다.<ref>Vgl.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Zürich 1933, S. 156. G. Wilke: 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Mannus-BibliotherkNr. 31), Leipzig 1923, S. 17.</ref> 이 美術作品은 疑心할 餘地가 없이, 繁殖魔法에 使用한 神像으로 그것은 어느 點으로 보던지, 拳楔(斧器) 文化, 栽培文化便에서 傳來한 文化現象이다. 여기서 女神의 位置가 上部에 있는 것은, 그리고, 母權制 影響의 一面을 傅하는 바일 것이다. (그랬다고, 그것이 아직도 母權制가 남어있었음을 證明하는 것은 決코 아니다). 이 栽培文化의 이 性交相은 母權 影響이 甚한 古代의 前亞細亞에서도 陶器紋樣(第九圖), 彫刻 其他에 出現한다. 아니 거기서는 그들의 陰陽思想의 根據가 이것으로 되어있는바, 天地萬物은, 이 女天, 男地의 交合의 結果로 生成한다. 舊石器時代의 女男 兩神의 性交가 이렇게 天地의 性交에까지 일은 것은 勿論 其後의 發展階段으로, 이 觀念의 象徵化가 {{TagPage|180-1}}바로 그들의 女天男地의 宇宙圖像인 것이다. 이런 圖像은 勿論 古代 坎及에도 있었든 것이다(第十圖). 여기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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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40번={{TagSpage|182-2}}生殖魔法, 生殖器 崇拜는 古代 「게르만」族 中에도 있었든 것으로, 인제 印度에 關하여 좀 더 詳論하건대, 「시ᅄᅡ」 崇拜 (Sivakult)나 「삭틔즘」(Saktism)의 現代形은 그만두고라도 그것이 벌써 「아리안」 以前의 印度 都市文化에 있었든 것은 「마-ᄉힲᆯ」氏가 이미 指摘한 바이다. {{TagRef|36}}同氏는 이 印度 都市文化層에서 出土된 石製(主로 石灰石 及 雪花石膏)의 男女 生殖器形 彫刻品이나, 그것의 小形인 貝製 其他의 美術作品들은, 「사이ᅄᅵ즘」(Saivism)의 特徵的 崇拜對象, 即 陰門(yonI)과 陰莖(linga)에 比定되는 것을 指摘하였었다.<ref>Mohenjo-Daro etc., Vol. Ⅰ. Chapter Ⅴ, Religion.</ref> 이 「요늬-」와 「ᄙᅵᇰ가」의 崇拜는 果然 「아리안」 以前의 印度 都市文化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役割을 演하였든 것이다.
第八圖 南佛 「ᄙᅩ쎌」(Laussel)의 「오린냑」文化期의 浮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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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41번={{TagSpage|182-3}}인제 中國에 關하여 考察하건대, 前亞細亞나 印度와 關係가 많었든 中國의 上古에 이런 「요늬-」와 「ᄙᅵᇰ가」의 崇拜가 있었음은 決코 無理가 아니다. 그러나 中國의 그것은 벌써 高級文化의 影響 以前에 있었기가 쉬운 것이다. 벌써 그 前에 栽培文化의 影響은 中國 땅에 이것도 傳한 것으로, 原商族은 이것을 「本士民」에게서 傳承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西方에서 온 高級文化의 影響下에 그 形態에 多少 變化를 받었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이 「요-늬」 及 「ᄙᅵᇰ가」의 崇拜는 殷代 以後에도 퍽 오래 남어 있은 것으로, 周予同氏의 以上에 紹介한 理論 中에서도 (비록 그의 理論에 讚同키 어려운 대가 많기는 하나)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Aus L. Frobeuius: Kulturgeschichte Afrikas)
 
 
 
女子가 天임은, 母權制의 影響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宇宙圖는 亞弗利加의 「쑤단」(Sudan) 一帶에 가서는 太牛이 男在上, 女在下로 位置가 박꿔젔는 바, 그것은 父
 
第九圖 波斯 알리-아받 (Aly-Abad) 出土의 陶器上에있는 紋樣. (Aus G, Wilke: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 Leipzig 1923, S. 16.)
 
 
 
{{TagPage|181-1}}權文化의 影響에 그 原因이 있을 것이다. 前亞細亞의 이 生殖魔法은 그들의 宗敎上에서 大役割을 演하였는 바, 그 結果는 亂雜無道한 性交的 宗敎 禮式으로 끝였든 것은 吾人이 周知하는 바이다. 亞弗利加 一部에나, 印度에는 (「시ᅄᅡ」敎 等) 現在도 그 遺風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儀式의 過程은 言語道斷의 淫行으로 된 것이 大部分이다. 그들은 이 淫亂한 宗敎儀式에 依하여 야만 農作物의 收獲을
 
 
 
第十圖 埃及木棺上의 圖像
 
(aus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TagPage|182-1}}豐富히 할 수가 있는 줄로 믿는 까닭이다.
 
|목차1-2원문31번={{TagSpage|182-2}}生殖魔法, 生殖器 崇拜는 古代 「게르만」族 中에도 있었든 것으로, 인제 印度에 關하여 좀 더 詳論하건대, 「시ᅄᅡ」 崇拜 (Sivakult)나 「삭틔즘」(Saktism)의 現代形은 그만두고라도 그것이 벌써 「아리안」 以前의 印度 都市文化에 있었든 것은 「마-ᄉힲᆯ」氏가 이미 指摘한 바이다. {{TagRef|36}}同氏는 이 印度 都市文化層에서 出土된 石製(主로 石灰石 及 雪花石膏)의 男女 生殖器形 彫刻品이나, 그것의 小形인 貝製 其他의 美術作品들은, 「사이ᅄᅵ즘」(Saivism)의 特徵的 崇拜對象, 即 陰門(yonI)과 陰莖(linga)에 比定되는 것을 指摘하였었다.<ref>Mohenjo-Daro etc., Vol. Ⅰ. Chapter Ⅴ, Religion.</ref> 이 「요늬-」와 「ᄙᅵᇰ가」의 崇拜는 果然 「아리안」 以前의 印度 都市文化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役割을 演하였든 것이다.
 
|목차1-2원문32번={{TagSpage|182-3}}인제 中國에 關하여 考察하건대, 前亞細亞나 印度와 關係가 많었든 中國의 上古에 이런 「요늬-」와 「ᄙᅵᇰ가」의 崇拜가 있었음은 決코 無理가 아니다. 그러나 中國의 그것은 벌써 高級文化의 影響 以前에 있었기가 쉬운 것이다. 벌써 그 前에 栽培文化의 影響은 中國 땅에 이것도 傳한 것으로, 原商族은 이것을 「本士民」에게서 傳承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西方에서 온 高級文化의 影響下에 그 形態에 多少 變化를 받었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이 「요-늬」 及 「ᄙᅵᇰ가」의 崇拜는 殷代 以後에도 퍽 오래 남어 있은 것으로, 周予同氏의 以上에 紹介한 理論 中에서도 (비록 그의 理論에 讚同키 어려운 대가 많기는 하나)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목차1-2해독문1번=은민의 종교는 다색적이엿다. 그들의 숭배 대상은 천, 지, 산, 천, ‘조비’(선조) 등등에 걸쳤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거기에 전부 언급하려고 하는 바는 아니다. 오직 그 중에서 학계에 문제되어, 재음미의 필요가 있는 수점에 언급하려고 한다. (상대 종교문제 중 두수 및 인사에 관하여는 앞 절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목차1-2해독문1번=은민의 종교는 다색적이엿다. 그들의 숭배 대상은 천, 지, 산, 천, ‘조비’(선조) 등등에 걸쳤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거기에 전부 언급하려고 하는 바는 아니다. 오직 그 중에서 학계에 문제되어, 재음미의 필요가 있는 수점에 언급하려고 한다. (상대 종교문제 중 두수 및 인사에 관하여는 앞 절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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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4번=민속학에서 출발하여, 선사시대 내지는 고대의 중국을 논하는 「한학도」들은, 거기서 목유문화소를 보았었다. 모권적 재배문화소를 보았었다. 이 모든 것을 그런데 연대적으로 순열하여야 되겠섰다. 거기서, 고고학상의 사세가 엇전지는 조금도 생각할 준비도 않고, 그들의 상상력에 맊여서, ‘역사’(!)를 만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지어놓은 역사가, ‘상족은 농민이오, 주족은 목부’였다.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이 와서, 호미로 땅파는 중국 양반(상족)을 때려부셨으니, 그것이 주국의 기흥이다. 말 타는 되놈의 신 하늘을 중국에 가져온 것도 물론 이 周 되놈이다!’ 이렇게, 그들은 어렵지 않게 설명을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들은 ‘개소리’를 하는것이다.
 
|목차1-2해독문4번=민속학에서 출발하여, 선사시대 내지는 고대의 중국을 논하는 「한학도」들은, 거기서 목유문화소를 보았었다. 모권적 재배문화소를 보았었다. 이 모든 것을 그런데 연대적으로 순열하여야 되겠섰다. 거기서, 고고학상의 사세가 엇전지는 조금도 생각할 준비도 않고, 그들의 상상력에 맊여서, ‘역사’(!)를 만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지어놓은 역사가, ‘상족은 농민이오, 주족은 목부’였다.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이 와서, 호미로 땅파는 중국 양반(상족)을 때려부셨으니, 그것이 주국의 기흥이다. 말 타는 되놈의 신 하늘을 중국에 가져온 것도 물론 이 周 되놈이다!’ 이렇게, 그들은 어렵지 않게 설명을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들은 ‘개소리’를 하는것이다.
 
|목차1-2해독문5번=그들은 중국 본토에 목유문화가 들어온 것은 주대로 시작하는 줄 아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인 것은, 제1장 제3절에서 벌써 보았다. 칙, 흑도문화에 벌써 목유문화 영향은 많았던 것을 우리는 거기서 보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 상족도 원래는 알타이 목유문화계에서 출발한 것이, 서막시대에 벌써 농민화한 것을 보았었다. 그들이 황하 중류지대에 와서 목유문화소를 점점 더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나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버릇을 전연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천신사상에도 표현되어 있다.
 
|목차1-2해독문5번=그들은 중국 본토에 목유문화가 들어온 것은 주대로 시작하는 줄 아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인 것은, 제1장 제3절에서 벌써 보았다. 칙, 흑도문화에 벌써 목유문화 영향은 많았던 것을 우리는 거기서 보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 상족도 원래는 알타이 목유문화계에서 출발한 것이, 서막시대에 벌써 농민화한 것을 보았었다. 그들이 황하 중류지대에 와서 목유문화소를 점점 더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나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버릇을 전연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천신사상에도 표현되어 있다.
|목차1-2해독문6번=호적(胡適) 교수가 고힐강씨에게 보낸, 민국12년 5월 30일부의 서신 중에는,<blockquote no="09">{{TagRefT|18}}關於「帝」字, 我也認爲「天帝」. 此字是世界最古的字, 古義「帝」與「天」當相同, 正如其音之同紐. 試看<br/><br/>五字同出一源, 大概是根可能的. 看郊祀志可見許多「帝」原爲西方民族(秦民族)的天神, 此是無可疑的.…</blockquote>운운의 구가 있다.<ref group="a">「古史辯」 제일册, 民國十5년 3月, 본론 19九頁. </ref> 유복(劉復)씨가 지적했듯이, 여기서 ‘帝’자가 ‘세계最古적자’라는 것은 물론 부당한 말이다. 이것은 혹, 오기(clerical error)일런지도 모를 것이다. 그것은 여하했던, 호적씨가 여기서 ‘帝’와 ‘天’의 기생적 관련을 논함에는 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나는 호적씨의 동 논문을 구경하기 퍽 전부터, 양자가 동일 계통임을 믿어 왔었다. (물론 호씨와는 퍽 상이한 의미에서). 그리고 또, ‘帝’가 Dyaus, Zeus, Tir 등 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본 바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帝’와 ‘天’, 두 자가 모두 천 및 천신을 의미하는 알타이어의 Tengeri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온 바이다. 여기에 관한 이론에 언급하기 전에 그런데, 나는 유복씨의 호적씨 비평에 좀 언급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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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6번=호적(胡適) 교수가 고힐강씨에게 보낸, 민국12년 5월 30일부의 서신 중에는,<blockquote no="09">{{TagRefT|18}}關於「帝」字, 我也認爲「天帝」. 此字是世界最古的字, 古義「帝」與「天」當相同, 正如其音之同紐. 試看<br/>[[파일:도유호_중도문3-13.png|100px]]<br/>五字同出一源, 大概是根可能的. 看郊祀志可見許多「帝」原爲西方民族(秦民族)的天神, 此是無可疑的.…</blockquote>운운의 구가 있다.<ref group="a">「古史辯」 제일册, 民國十5년 3月, 본론 19九頁. </ref> 유복(劉復)씨가 지적했듯이, 여기서 ‘帝’자가 ‘세계最古적자’라는 것은 물론 부당한 말이다. 이것은 혹, 오기(clerical error)일런지도 모를 것이다. 그것은 여하했던, 호적씨가 여기서 ‘帝’와 ‘天’의 기생적 관련을 논함에는 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나는 호적씨의 동 논문을 구경하기 퍽 전부터, 양자가 동일 계통임을 믿어 왔었다. (물론 호씨와는 퍽 상이한 의미에서). 그리고 또, ‘帝’가 Dyaus, Zeus, Tir 등 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본 바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帝’와 ‘天’, 두 자가 모두 천 및 천신을 의미하는 알타이어의 Tengeri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온 바이다. 여기에 관한 이론에 언급하기 전에 그런데, 나는 유복씨의 호적씨 비평에 좀 언급하려고 한다.
 
|목차1-2해독문7번=유복씨는, 음의 상사(相似)가 반드시 동일 계통어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논하여 인도, 그리스, 라틴어와 帝, 天과의 관계 운운에 신빙치 못할 점이 있음을 논하는 한편 바빌론 고어와 天, 帝와의 관계의 가능성을 들어
 
|목차1-2해독문7번=유복씨는, 음의 상사(相似)가 반드시 동일 계통어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논하여 인도, 그리스, 라틴어와 帝, 天과의 관계 운운에 신빙치 못할 점이 있음을 논하는 한편 바빌론 고어와 天, 帝와의 관계의 가능성을 들어
|목차1-2해독문8번={{TagSpage|169-4}}巴比侖最古象形文中有一「」字, 其音爲e-dim 或 e-din 其義爲「天」. 又有一「」字, 其音爲 din-gir 或 dim-mer 或 dimer, 其義爲「天帝」, 或爲「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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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8번=巴比侖最古象形文中有一「[[파일:도유호_중도문3-14.png|40px]]」字, 其音爲e-dim 或 e-din 其義爲「天」. 又有一「[[파일:도유호_중도문3-15.png|40px]]」字, 其音爲 din-gir 或 dim-mer 或 dimer, 其義爲「天帝」, 或爲「人生」.
|목차1-2해독문9번={{TagSpage|169-5}}我們把金文中的「帝」字: (周愙鼎), (皸狄鼎), {{TagPage|170-1}}(聃敦)等, 和甲骨文中的: , , , , , , , , , , 拿來和比較, 形體實在像極了; 便是說文中的, 也還相差不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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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9번=我們把金文中的「帝」字: [[파일:도유호_중도문3-16.png|40px]](周愙鼎), [[파일:도유호_중도문3-17.png|40px]](皸狄鼎), [[파일:도유호_중도문3-18.png|40px]](聃敦)等, 和甲骨文中的: [[파일:도유호_중도문3-19.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0.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1.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2.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3.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4.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5.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6.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7.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28.png|40px]], 拿來和[[파일:도유호_중도문3-29.png|40px]]比較, 形體實在像極了; 便是說文中的[[파일:도유호_중도문3-30.png|40px]], 也還相差不多.
|목차1-2해독문10번={{TagSpage|170-2}}{{TagRefT|19}}說文中的「天」作, 金文作(頌鼎), (毛公鼎), 甲骨文作, , , 和字相比, 雖不得像, 也還有些影子라고 말한다.<ref group="a">劉復, 『「帝」與「天」』(北京大學研究所國學門月刊 第一卷, 第三號. 「古史辨」 第二冊, 民國十九年 八月, 二〇-二七頁). 「帝」에 關하야 武內義雄氏는, 「帝」の最も原始的な形は▽或は▼であって, 本来は草木の花が散ってあとにむすばれた果實を描いたものであるが, この 果實はやがて草木を發生せしめる種子を藏する所であるから, 轉じて草木發生の根源を示す様になり, 後又一轉して人間の祖先を示す様に成ったものらしい라고 한다. {「支那思想史(岩波全書, 第七三卷) 昭和十一年, 五頁}. 武內氏의 說에는 左袒할 수가 없다.</ref> 유복씨의 이 이론에는 물론 일의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天이나 帝라는 말이 직접 바빌론에서 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빌론과의 관계에 관하여는 유씨도 오직 추측에 못하였을 따름이오 확연한 논단은 避하였다. 그런데,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알타이어계의 텡거리는 벌써 바빌론으로도 넘어간 듯하다. 자의 한 음가 din-gir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Din-gir가 dim-mer dimer로 변하기는 퍽 쉬운 것인 만큼, tengeri tengri tenger는 din-gir를 통하여 결국 dimer에까지 연결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天이나 帝는 바빌론과는 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중국과 전아시아의 천신은 모두 중앙아시아 목유족의 천신에서 각기 파생한 것일 것이다. 오직 중국의 天, 帝의 문자만은 전아시아의 그것에 직접 연결되었기가 쉬운 것이다. 즉 天이나 帝는 텡거리가 단철어 중국어에 와서, 부득이 단철화한 것이오, 이것을 표시하는 문자만은 바빌론에서 넘어온 것이기가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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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원문10번={{TagRef|19}}說文中的「天」作[[파일:도유호_중도문3-31.png|40px]], 金文作[[파일:도유호_중도문3-32.png|40px]](頌鼎), [[파일:도유호_중도문3-33.png|40px]](毛公鼎), 甲骨文作[[파일:도유호_중도문3-34.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35.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36.png|40px]], 和[[파일:도유호_중도문3-37.png|40px]]字相比, 雖不得像, 也還有些影子라고 말한다.<ref group="a">劉復, 『「帝」與「天」』(北京大學研究所國學門月刊 第一卷, 第三號. 「古史辨」 第二冊, 民國十九年 八月, 二〇-二七頁). 「帝」에 關하야 武內義雄氏는, 「帝」の最も原始的な形は▽或は▼であって, 本来は草木の花が散ってあとにむすばれた果實を描いたものであるが, この 果實はやがて草木を發生せしめる種子を藏する所であるから, 轉じて草木發生の根源を示す様になり, 後又一轉して人間の祖先を示す様に成ったものらしい라고 한다. {「支那思想史(岩波全書, 第七三卷) 昭和十一年, 五頁}. 武內氏의 說에는 左袒할 수가 없다.</ref> 유복씨의 이 이론에는 물론 일의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天이나 帝라는 말이 직접 바빌론에서 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빌론과의 관계에 관하여는 유씨도 오직 추측에 못하였을 따름이오 확연한 논단은 避하였다. 그런데,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알타이어계의 텡거리는 벌써 바빌론으로도 넘어간 듯하다. [[파일:도유호_중도문3-38.png|40px]]자의 한 음가 din-gir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Din-gir가 dim-mer dimer로 변하기는 퍽 쉬운 것인 만큼, tengeri tengri tenger는 din-gir를 통하여 결국 dimer에까지 연결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天이나 帝는 바빌론과는 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중국과 전아시아의 천신은 모두 중앙아시아 목유족의 천신에서 각기 파생한 것일 것이다. 오직 중국의 天, 帝의 문자만은 전아시아의 그것에 직접 연결되었기가 쉬운 것이다. 즉 天이나 帝는 텡거리가 단철어 중국어에 와서, 부득이 단철화한 것이오, 이것을 표시하는 문자만은 바빌론에서 넘어온 것이기가 쉬운 것이다.
|목차1-2해독문11번=유복씨는 다시 帝에 관하여<blockquote no="10">吳大澂以爲帝象花蒂形, 與「鄂不」之「不」同意, 却很有意思. 白虎通裏설: 「帝자, 諦也, 象可承 也」. 「諦也」二자還是承襲舊義, 「象可承也」却很可주의, 因爲「可承」정是花蒂적작용. (여기서 襲舊義란 帝諦也라는 설文 中의 舊견해말이다—都)<br/>大約帝적本義是花蒂, 作「천제」用是第二義.</blockquote>를 운운한다. 花蒂가 帝가 된 것의 씨의 설명이 뒤따라 나오는바, 그것에는 좌단할 수가 없다. 그런데 씨가 좌단하는 오대징의 「帝象花蒂形」설은 이하 더 논할 바와 같이 곽말약씨도 채용하는 바 곽씨는 거기서 이것을 생식숭배와 관련하여 논한다. 유씨는 그런데 ‘不’자가 ‘不’자의 고자이오, ‘大’를 의미하는 이 ‘丕’자의 금문(虢叔}鐘), (王孫鐘), (聃敦) 등이나, 갑골문의 , , , 등이 바빌론의 (天)에 상사한 것도 또 지적한다. 帝자의 상형이 花帝를 상징한 것인가에는 나는 퍽 의심을 갖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丕’자의 금문, 갑골문이 「」자에 근사한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不’ 즉 ‘丕’는 大이오 天도 大이다. 이것의 전아시아의 상형자가 중국에 넘어온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원적으로는 중국의 天이나 帝는 전아시아와는 간접으로밖에 관련 못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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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11번=유복씨는 다시 帝에 관하여<blockquote no="10">吳大澂以爲帝象花蒂形, 與「鄂不」之「不」同意, 却很有意思. 白虎通裏설: 「帝자, 諦也, 象可承 也」. 「諦也」二자還是承襲舊義, 「象可承也」却很可주의, 因爲「可承」정是花蒂적작용. (여기서 襲舊義란 帝諦也라는 설文 中의 舊견해말이다—都)<br/>大約帝적本義是花蒂, 作「천제」用是第二義.</blockquote>를 운운한다. 花蒂가 帝가 된 것의 씨의 설명이 뒤따라 나오는바, 그것에는 좌단할 수가 없다. 그런데 씨가 좌단하는 오대징의 「帝象花蒂形」설은 이하 더 논할 바와 같이 곽말약씨도 채용하는 바 곽씨는 거기서 이것을 생식숭배와 관련하여 논한다. 유씨는 그런데 ‘不’자가 ‘不’자의 고자이오, ‘大’를 의미하는 이 ‘丕’자의 금문[[파일:도유호_중도문3-39.png|40px]](虢叔鐘), [[파일:도유호_중도문3-40.png|40px]](王孫鐘), [[파일:도유호_중도문3-41.png|40px]](聃敦) 등이나, 갑골문의 [[파일:도유호_중도문3-42.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43.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44.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45.png|40px]] 등이 바빌론의 [[파일:도유호_중도문3-46.png|40px]](天)에 상사한 것도 또 지적한다. 帝자의 상형이 花帝를 상징한 것인가에는 나는 퍽 의심을 갖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丕’자의 금문, 갑골문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47.png|40px]]」자에 근사한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不’ 즉 ‘丕’는 大이오 天도 大이다. 이것의 전아시아의 상형자가 중국에 넘어온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원적으로는 중국의 天이나 帝는 전아시아와는 간접으로밖에 관련 못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목차1-2해독문12번=天은 여하간 알타이어계의 tengeri tengri tenger 등 말의 단철화이다. 나는 그것을 처음 강정웅씨에게서 들었었다. {{TagRefT|20}}그 후 블라이히슈타이너 교수도 몽고어의(天을 의미하는) tengri와 天과의 관련의 가능성을 지적하였다.<ref group="a">R. Bleichsteiner: Die Gelbe Kirche, Wien 1937, S. 28</ref> 이상에서 수차 논한 바와 같이, 나는 帝도 tengeri의 단철화라고 보는바(帝의 고음은 아마 tei일 것이다), 이 天, 帝 두 말은 모두 직접 중앙아시아 목유문화계에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한 부족층은 상이하기가 쉬운 것이다. 한 부족은 天으로 전하였고, 다른 한 부족은 帝로 전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것은 ‘鴻鷺’가 부족층의 상이에 수반하여 한번은 ‘黑’으로 생략되었고, 다른 한번은 ‘鷺’로 생략된 것과 사무가 동일한 것이다.
 
|목차1-2해독문12번=天은 여하간 알타이어계의 tengeri tengri tenger 등 말의 단철화이다. 나는 그것을 처음 강정웅씨에게서 들었었다. {{TagRefT|20}}그 후 블라이히슈타이너 교수도 몽고어의(天을 의미하는) tengri와 天과의 관련의 가능성을 지적하였다.<ref group="a">R. Bleichsteiner: Die Gelbe Kirche, Wien 1937, S. 28</ref> 이상에서 수차 논한 바와 같이, 나는 帝도 tengeri의 단철화라고 보는바(帝의 고음은 아마 tei일 것이다), 이 天, 帝 두 말은 모두 직접 중앙아시아 목유문화계에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한 부족층은 상이하기가 쉬운 것이다. 한 부족은 天으로 전하였고, 다른 한 부족은 帝로 전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것은 ‘鴻鷺’가 부족층의 상이에 수반하여 한번은 ‘黑’으로 생략되었고, 다른 한번은 ‘鷺’로 생략된 것과 사무가 동일한 것이다.
 
|목차1-2해독문13번=이 천신관념의 기원에 관하여 슈미트 및 코퍼스 양 선생나 또는 동일 계통의 천주교 선교사들은, 그것에 근사한 것이 벌써 최원시문화(‘원문화’)족들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나는 신빙할 수가 없다. 아니, 프로이스(Preuss) 기타의 여러 학자는, 그것은 천주교 신부의 독단적 설교에 불과하다고 조소를 하는 바이다.
 
|목차1-2해독문13번=이 천신관념의 기원에 관하여 슈미트 및 코퍼스 양 선생나 또는 동일 계통의 천주교 선교사들은, 그것에 근사한 것이 벌써 최원시문화(‘원문화’)족들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나는 신빙할 수가 없다. 아니, 프로이스(Preuss) 기타의 여러 학자는, 그것은 천주교 신부의 독단적 설교에 불과하다고 조소를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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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0번=천신 다음에 내가 논하려는 것은 은민의 생식기 숭배 운운의 문제이다. {{TagRefT|25}}여기에 관하여는 석학 칼그렌 교수가 이미 논한 바가 있거니와,<ref group="a">B. Karlgren: “Some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Bulletin of the Museum of Far Eastern Antiquities”(Östasiatiska Samlingarna), No. 2, 1930.</ref> 동 교수와는 관계가 없이 곽말약씨도 역(易)의 종교적 습속의 존재를 지적하였다. 또 곽씨나 칼그렌 교수 이전에 전현동씨는(비록 은대를 직접 취급한 것은 아니나) 이 생식기 숭배시대의 산물이며, 건곤 두 괘가 남녀생식기의 기호임을 논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blockquote no="11">{{TagRefT|26}}我以爲原始的易卦是生殖器崇拜時代底東西, 「乾」 「坤」 二卦即是兩性底生殖器底記號.<ref group="a">錢玄同, 「答顧頡剛先生書」(「讀書雜志」 第十期. 「古史辨」 第一冊, 本論 七七頁). 郭沫若, 前揭書, 三版書後卄頁 參照.</ref></blockquote>
 
|목차1-2해독문20번=천신 다음에 내가 논하려는 것은 은민의 생식기 숭배 운운의 문제이다. {{TagRefT|25}}여기에 관하여는 석학 칼그렌 교수가 이미 논한 바가 있거니와,<ref group="a">B. Karlgren: “Some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Bulletin of the Museum of Far Eastern Antiquities”(Östasiatiska Samlingarna), No. 2, 1930.</ref> 동 교수와는 관계가 없이 곽말약씨도 역(易)의 종교적 습속의 존재를 지적하였다. 또 곽씨나 칼그렌 교수 이전에 전현동씨는(비록 은대를 직접 취급한 것은 아니나) 이 생식기 숭배시대의 산물이며, 건곤 두 괘가 남녀생식기의 기호임을 논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blockquote no="11">{{TagRefT|26}}我以爲原始的易卦是生殖器崇拜時代底東西, 「乾」 「坤」 二卦即是兩性底生殖器底記號.<ref group="a">錢玄同, 「答顧頡剛先生書」(「讀書雜志」 第十期. 「古史辨」 第一冊, 本論 七七頁). 郭沫若, 前揭書, 三版書後卄頁 參照.</ref></blockquote>
 
|목차1-2해독문21번=전씨의 의견에는 한 의의가 있다. 음양사상은 그것이 물론 중국에서 기원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기원은 여하간 ‘교합’에 관한 원시인의 마법 및 종교사상에 있는 것으로, 중국에 있어서도 사세는 동일했던 것이다. {{TagRefT|27}}아니 전씨만 아니라, 에르케스씨도 ‘坤’괘가 음문 기호임을 지적하였다.<ref group="a">E. Erkes: “Some remarks on Karlgren's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Östasiatiska Samlingarna”, No. 3, 1931.</ref>
 
|목차1-2해독문21번=전씨의 의견에는 한 의의가 있다. 음양사상은 그것이 물론 중국에서 기원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기원은 여하간 ‘교합’에 관한 원시인의 마법 및 종교사상에 있는 것으로, 중국에 있어서도 사세는 동일했던 것이다. {{TagRefT|27}}아니 전씨만 아니라, 에르케스씨도 ‘坤’괘가 음문 기호임을 지적하였다.<ref group="a">E. Erkes: “Some remarks on Karlgren's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Östasiatiska Samlingarna”, No. 3, 1931.</ref>
|목차1-2해독문22번={{TagRefT|28}}전씨 후에 또 주여동씨는 전씨의 이론을 전승하여(이것을 그는 명언치는 않았다), 유교의 ‘仁’과 ‘孝’를 생식기 숭배와 관련하여 논하였다.<ref group="a">周予同, 『「孝」與「生殖器崇拜」』(「一般」第三卷, 第一號. 「古史辯」 第二冊, 二三二-二五三頁).</ref> 그는 거기서 유가 발생 당시에는 아직도 민간에 생식기 숭배사상이 상당한 노력을 갖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유가는 이것을 원시종교형에서 ‘생식숭배’의 철학으로 전개하며, 좀 더 발전하여 孝와 仁의 윤리적 범주에까지 도달한 것이라고 논하였다. 그리하여 그 발전과정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표시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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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2번={{TagRefT|28}}전씨 후에 또 주여동씨는 전씨의 이론을 전승하여(이것을 그는 명언치는 않았다), 유교의 ‘仁’과 ‘孝’를 생식기 숭배와 관련하여 논하였다.<ref group="a">周予同, 『「孝」與「生殖器崇拜」』(「一般」第三卷, 第一號. 「古史辯」 第二冊, 二三二-二五三頁).</ref> 그는 거기서 유가 발생 당시에는 아직도 민간에 생식기 숭배사상이 상당한 노력을 갖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유가는 이것을 원시종교형에서 ‘생식숭배’의 철학으로 전개하며, 좀 더 발전하여 孝와 仁의 윤리적 범주에까지 도달한 것이라고 논하였다. 그리하여 그 발전과정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표시하였다.<br/>[[파일:도유호_중도문3-48.png|150px]]
 
|목차1-2해독문23번=그는 여기서 이것을 역(易)의 사상과 관련하여 논하며 전씨와 동양(同樣)으로, 또 易의 건곤 2괘가 남녀 생식기의 기호이며, 그것이 생식기 숭배 시대의 산물임을 논하였다. 그리고 종래에는 소위 생식기 숭배, 實是원시사회之보편적 신앙이라고까지 논하였다. (이하에도 더 논할 바와 같이 이 보편적 신앙론에는 물론 좌단할 수가 없다).
 
|목차1-2해독문23번=그는 여기서 이것을 역(易)의 사상과 관련하여 논하며 전씨와 동양(同樣)으로, 또 易의 건곤 2괘가 남녀 생식기의 기호이며, 그것이 생식기 숭배 시대의 산물임을 논하였다. 그리고 종래에는 소위 생식기 숭배, 實是원시사회之보편적 신앙이라고까지 논하였다. (이하에도 더 논할 바와 같이 이 보편적 신앙론에는 물론 좌단할 수가 없다).
|목차1-2해독문24번=이제 곽말약씨의 의견을 논하여 보건대, 씨는 조비(祖妣) 숭배와 관련하여 갑골문의 ‘祖’자가 음경의 상형이고, ‘妣’자가 음문의 상형이며 또 ‘神’, ‘祗’의 상형이 , 등임을 들어, 거기서 생식기 숭배의 사실을 간파하려고 한다. 그리하여<blockquote no="12">{{TagRefT|29}}大抵宗教實起源於生殖崇拜, 其事於骨文中大有啓示. 如祖先崇拜之祖妣字實即牡牝器之象徵(骨文祖字作且妣字作匕), 一切神祗均稱「示」, 示字作或作實即生殖器之倒懸. 又如上帝之帝本象花蒂之形, 其意亦重在生殖.</blockquote>이라고 한다.<ref group="a">郭沫若, 前揭書, 二九〇頁.</ref> 곽씨가 여기서 ‘생식숭배’라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생식기 숭배’의 칭이다. 물론 양자는 별로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TagRefT|30}}곽씨의 이 생식숭배론은, 비록 명언치는 않았으나, 주방포씨도 대개 채용한 바이다.<ref group="a">朱芳圃, 前揭書, 第六章, 第二節(上冊).</ref> 그런데 곽말약씨는 여기서 이렇게 생식기 숭배만 아니라, 종교의 기원이 바로 생식기 숭배에 있는 것이라고 논한다. 이것은 물론 과언이다. 종교는 그 기원이 마법에 있는 것은 나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 마법은 그리고 원칙적으로 유사 마법(Analogiezauber)인대, 그곳에도 이 생식마법, 번식마법(Fruchtbarkeitszauber)이 그 수위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 諸점으로 보아, 생식기 숭배(인도의 사이비즘 Saivism같은)에 종교의 기원을 찾는 곽씨의 태도에 한 의의가 없는 것도 아니나, 그러나 그의 주장이 부당한 것은 현존한 諸원시종족 중에는 이것을 전연 모르는 자가 허다한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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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4번=이제 곽말약씨의 의견을 논하여 보건대, 씨는 조비(祖妣) 숭배와 관련하여 갑골문의 ‘祖’자가 음경의 상형이고, ‘妣’자가 음문의 상형이며 또 ‘神’, ‘祗’의 상형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49.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0.png|40px]] 등임을 들어, 거기서 생식기 숭배의 사실을 간파하려고 한다. 그리하여<blockquote no="12">{{TagRefT|29}}大抵宗教實起源於生殖崇拜, 其事於骨文中大有啓示. 如祖先崇拜之祖妣字實即牡牝器之象徵(骨文祖字作且妣字作匕), 一切神祗均稱「示」, 示字作[[파일:도유호_중도문3-51.png|40px]]或作[[파일:도유호_중도문3-52.png|40px]]實即生殖器之倒懸. 又如上帝之帝本象花蒂之形, 其意亦重在生殖.</blockquote>이라고 한다.<ref group="a">郭沫若, 前揭書, 二九〇頁.</ref> 곽씨가 여기서 ‘생식숭배’라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생식기 숭배’의 칭이다. 물론 양자는 별로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TagRefT|30}}곽씨의 이 생식숭배론은, 비록 명언치는 않았으나, 주방포씨도 대개 채용한 바이다.<ref group="a">朱芳圃, 前揭書, 第六章, 第二節(上冊).</ref> 그런데 곽말약씨는 여기서 이렇게 생식기 숭배만 아니라, 종교의 기원이 바로 생식기 숭배에 있는 것이라고 논한다. 이것은 물론 과언이다. 종교는 그 기원이 마법에 있는 것은 나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 마법은 그리고 원칙적으로 유사 마법(Analogiezauber)인대, 그곳에도 이 생식마법, 번식마법(Fruchtbarkeitszauber)이 그 수위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 諸점으로 보아, 생식기 숭배(인도의 사이비즘 Saivism같은)에 종교의 기원을 찾는 곽씨의 태도에 한 의의가 없는 것도 아니나, 그러나 그의 주장이 부당한 것은 현존한 諸원시종족 중에는 이것을 전연 모르는 자가 허다한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목차1-2해독문25번=곽씨의 이상의 의견 중, ‘神’자 ‘祗’자의 갑골문 , 등은 남자 생식기를 내려들인 것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에도 다소 의문이 있는 것이다. 크릴씨는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는, 일종의 수수께끼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신力을 표시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고 한다.(“…its form is something of an enigma. It may represent the spiritual force streaming down from the heavens to men below.” — Creel : Ibid, P. 178). 크릴씨의 의견에는 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TagRefT|31}}神, 祗의 상형자가 ‘雨’자의 상형에 근사한 것은, 씨의 이 추측의 논거를 더구나 견고히 하는 바 이다.<ref group="a">‘雨’의 골문이 물방울의 낙하를 상징하는 것을 나는 블라이히슈타이너 교수에게 말하였더니, 동 교수는 그것이 天의 정액의 낙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쉽다고 대답하였었다. 그리고 보면 神祗의 상형자 은 天의 정액의 낙하를 의미한 것이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雨’의 갑골문이 天의 정액 낙하의 상징이라고는 나는 암만 해야 생각할 수가 없다.</ref> 곽씨의 이론에는 이렇게 약점도 있으나 그러나 그가 祖, 妣 두 자의 갑골문자를 남녀 생식기의 상형으로 본 것은 과연 정당한 견해인 것이다. {{TagRefT|32}}이제 더 논할 바와 같이 ‘祖’의 원자 ‘且’의 상형이 음경인 것뿐 아니라, ‘妣’ 의 원자 ‘匕’의 골문인, , , , 등등도 과연 음문의 상형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식기 숭배와 직접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ref group="a">곽씨는 詩經 小雅篇의 斯于, 楚茨, 章 等의 시구를 신전 내의 성교라는 종교의식과 관련시키려고 하나(곽, 288頁), 그것은 아마 독단에 불과한 주장일 것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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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5번=곽씨의 이상의 의견 중, ‘神’자 ‘祗’자의 갑골문 [[파일:도유호_중도문3-53.png|4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4.png|40px]] 등은 남자 생식기를 내려들인 것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에도 다소 의문이 있는 것이다. 크릴씨는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는, 일종의 수수께끼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신力을 표시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고 한다.(“…its form is something of an enigma. It may represent the spiritual force streaming down from the heavens to men below.” — Creel : Ibid, P. 178). 크릴씨의 의견에는 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TagRefT|31}}神, 祗의 상형자가 ‘雨’자의 상형에 근사한 것은, 씨의 이 추측의 논거를 더구나 견고히 하는 바 이다.<ref group="a">‘雨’의 골문이 물방울의 낙하를 상징하는 것을 나는 블라이히슈타이너 교수에게 말하였더니, 동 교수는 그것이 天의 정액의 낙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쉽다고 대답하였었다. 그리고 보면 神祗의 상형자 [[파일:도유호_중도문3-54.png|40px]]은 天의 정액의 낙하를 의미한 것이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雨’의 갑골문이 天의 정액 낙하의 상징이라고는 나는 암만 해야 생각할 수가 없다.</ref> 곽씨의 이론에는 이렇게 약점도 있으나 그러나 그가 祖, 妣 두 자의 갑골문자를 남녀 생식기의 상형으로 본 것은 과연 정당한 견해인 것이다. {{TagRefT|32}}이제 더 논할 바와 같이 ‘祖’의 원자 ‘且’의 상형이 음경인 것뿐 아니라, ‘妣’ 의 원자 ‘匕’의 골문인, [[파일:도유호_중도문3-55.png|5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6.png|5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7.png|50px]], [[파일:도유호_중도문3-58.png|50px]] 등등도 과연 음문의 상형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식기 숭배와 직접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ref group="a">곽씨는 詩經 小雅篇의 斯于, 楚茨, 章 等의 시구를 신전 내의 성교라는 종교의식과 관련시키려고 하나(곽, 288頁), 그것은 아마 독단에 불과한 주장일 것이다.</ref>
|목차1-2해독문26번=‘祖’자가 원래는 음경의 상징이었던 것은 에르케스씨에 의하건대, 벌써 그의 선사(先師)인 석학 콘라디 교수(Conrady)가 간파한 바로, 에르케스씨는 학생 시대에 벌써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공개 못 된 의견이다. 서양 학자 중 이것을 맨 처음 지면상에 발표한 분은 내가 아는 한, 칼그렌 교수인 것이다. 동 교수는 그런데 여기서 음경에만 언급하고 음문에는 별로 언급한 바가 없다. 그러나 그가 고대 지나문자의 祖, 伯, 魄, 土, 社의 원형이 음경의 상형이었다고 하는 것은 모두 정당한 주장이다(제6도 비교). 그런데, 여기서 ‘社’자 즉 지신을 의미하는 자의 원형이 ‘土’(‘示’는 후에 첨가한 것)의 원형과 동일하며, 그것이 역시 음경의 상형)이었던 것은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이하에도 더 논할 바와 같이 天이 女이오, 지가 남이라는 가장 엣날의 관념의 잔영인 듯하다. 그리고 社가 음경의 상징이었던 만큼 이 지신에 대한 희생 제공을 의미하는 ‘宜’자의 상형은 이 음경에다 육편을 건 것인 것이다. 칼그렌 교수는, 선조의 위비(즉 ‘主’)의 현재형상이 로 되야 ‘且’자를 연상케 하는 것을 들어, 그 근원이 생식기 숭배의 엣날에 소급되는 것까지 지적하는 바, 거기에도 한 의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하간 상고 중국에 이런 종교가 있었던 것은 하남에서 출토된 (현재 스웨덴국 수도 스톡홀름 동양박물관 소장)석제(대리석같은 것)의 음경상(제7도)도 증명하는 바이다. 동 출토품의 연대는 아직 미상이나, 그것은 벌써 은대에 소급되는 것이기가 퍽 가능한 것이다(필연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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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6번=‘祖’자가 원래는 음경의 상징이었던 것은 에르케스씨에 의하건대, 벌써 그의 선사(先師)인 석학 콘라디 교수(Conrady)가 간파한 바로, 에르케스씨는 학생 시대에 벌써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공개 못 된 의견이다. 서양 학자 중 이것을 맨 처음 지면상에 발표한 분은 내가 아는 한, 칼그렌 교수인 것이다. 동 교수는 그런데 여기서 음경에만 언급하고 음문에는 별로 언급한 바가 없다. 그러나 그가 고대 지나문자의 祖, 伯, 魄, 土, 社의 원형이 음경의 상형이었다고 하는 것은 모두 정당한 주장이다(제6도 비교). 그런데, 여기서 ‘社’자 즉 지신을 의미하는 자의 원형이 ‘土’(‘示’는 후에 첨가한 것)의 원형과 동일하며, 그것이 역시 음경의 상형)이었던 것은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이하에도 더 논할 바와 같이 天이 女이오, 지가 남이라는 가장 엣날의 관념의 잔영인 듯하다. 그리고 社가 음경의 상징이었던 만큼 이 지신에 대한 희생 제공을 의미하는 ‘宜’자의 상형은 이 음경에다 육편을 건 것인 것이다. 칼그렌 교수는, 선조의 위비(즉 ‘主’)의 현재형상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59.png|40px]]되어 ‘且’자를 연상케 하는 것을 들어, 그 근원이 생식기 숭배의 엣날에 소급되는 것까지 지적하는 바, 거기에도 한 의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하간 상고 중국에 이런 종교가 있었던 것은 하남에서 출토된 (현재 스웨덴국 수도 스톡홀름 동양박물관 소장)석제(대리석같은 것)의 음경상(제7도)도 증명하는 바이다. 동 출토품의 연대는 아직 미상이나, 그것은 벌써 은대에 소급되는 것이기가 퍽 가능한 것이다(필연 그럴 것이다).
 
|목차1-2해독문27번=칼그렌 교수는, 선조 숭배가 곧 생식기 숭배요 그것은 자손 번식 내지는 이것과 직접 관계가 있는 농작물의
 
|목차1-2해독문27번=칼그렌 교수는, 선조 숭배가 곧 생식기 숭배요 그것은 자손 번식 내지는 이것과 직접 관계가 있는 농작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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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8번=[[파일:도유호_중도문3-60.png|섬네일|가운데|第六圖 甲骨文及殷周金文上의 祖伯社等諸字<br/>(Aus Karlaren: Some Fecundity Symbols etc)]]
第六圖 갑골문및殷周금문상의 祖伯社等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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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29번=풍작을 위함에 제일義가 있음을 논한다. 선조 숭배의 동기가 효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巧利적 이기심에 있었음은, 칼그렌 교수가 참 정당히 간파한 바로 적어도 묘송사꾼은 이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종교심리의 근원은 결국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태도만 아니라, 인간의 ‘윤리도덕관’ 일반에 있어, 그 귀결점은 할 수 없이 이 이기심 선상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TagRefT|33}}그러기에, 소위 ‘인생철학’(Lebensphilesophie)의 총아, 짐멜(Georg Simmel)씨도,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선을 행하면, 그와 동시에 거기에 대한 보수를, 결국은 무의식적으로나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저간의 사정을 고백하고 만 것이다.<ref group="a">자세히 기억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아마 Samhnlung Göschen, Bd. 500.로 발표된 짐멜 교수의 「철학주요문제」(Hauptprobleme der Philosophie) 중에 쓰여있든가 보이다. 비교하기를 바란다.</ref> 그런데 칼그렌 교수가 선조 숭배와 생식기 숭배와의 불가분적 관계를 논하는 것을 나는 여기서 문화권적 고찰과 관련하여 좀 더 음미할 필요를 느끼는 바이다.
(Aus Karlaren: Some Fecundity Symbols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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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0번=[[파일:도유호_중도문3-61.png|섬네일|가운데|第七圖 河南省, 黃河北岸出土石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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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1번=선조 숭배가 곧 자손 번식, 풍작 등의 조장을 위한 종교의식 발생적 관계가 있다면, 거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생식마법 내지는 생식기 숭배와, 선조 숭배(Ahne kult)는 과연 동일한 문화권 내에서 기원된 것이다. 즉 구계단의 모권문화, 재배문화계가 양자의 본향인 것이다. 이 문제의 역사적 고찰을 하기 위하여는 우리는 그런데 석기시대의 예술에 다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풍작을 위함에 제일義가 있음을 논한다. 선조 숭배의 동기가 효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巧利적 이기심에 있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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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2번={{TagRefT|34}}회르네스 교수(Moritz Heernes)는 선사시대의 예술(미술)을 논함에 제하여, 예술은 인간의 직능(Funktion)이라고 하며, 구석기시대의 조각, 토우, 벽화들을 인간의 심미적 직능에서 자발한 표현물로 취급하였였다.<ref group="a">Horness-Menghin: Urgeschichte der bildenden Kunst in Europa, Wien 1925.</ref> 그는 그의 이 고찰을 예술의 인류학적 고찰이라고 자칭하였다. 즉, 그는 예술의 역사적 고찰을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예술은 그것이 순수한 예술 그것만을 위하여 직능적으로 된 것은 결코 아니오, 마법 및 (마법의 발전계단인)종교와 직접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몽고 오르도스의 구석기시대의 여신상이나, 시베리아 말타의 그것이나, 유럽 오리냐크문화, 막달렌문화의 여신상은, 그것이 재배문화편에서 온 대모신(Magna Mater) 숭배의 사실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유물에 불과한 것이다 오리냐크문화, 막달렌문화의 벽화나 조각품에 보이는 동물상, 생식기형 등은, 그것이 수렵의 좋은 결과 또는 수렵대상인 동물의 번식을 위한 마법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수렵적의 인기문화에는 그런데 토템성이 퍽 농후하여 보이는 바, 토템주의자들은 마법을 누구보다도 심히 성행하였던 것이다. 즉 마법은 토템문화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발전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마법 중에서도 그 수위를 점령한 생식마법은 여기서 가장 심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식마법은, 그들의 여신숭배와 동양으로 원래는 모권적 재배문화계에서 넘어온 것이다(제1장 제2절 주4 참조).
第七圖 하남省, 황하北岸출토石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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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3번=프랑스, 도르도뉴주(Dordogne) 로셀(Laussel)에서 출토된 여러 신상 중에는 남녀 성교의 장면을 보이는 부조가있다(제8도). {{TagRefT|35}}그런데, 여기서 남녀의 위치는 여재상, 남재하로 되어있는 것이다.<ref group="a">Vgl.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Zürich 1933, S. 156. G. Wilke: 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Mannus-BibliotherkNr. 31), Leipzig 1923, S. 17.</ref> 이 미술작품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번식마법에 사용한 신상으로 그것은 어느 점으로 보던지, 권설 문화, 재배문화편에서 전래한 문화현상이다. 여기서 여신의 위치가 상부에 있는 것은, 그리고, 모권제 영향의 일면을 전하는 바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직도 모권제가 남아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재배문화의 이 성교상은 모권 영향이 심한 고대의 전아시아에서도 도기문양(제9도), 조각 기타에 출현한다. 아니 거기서는 그들의 음양사상의 근거가 이것으로 되어있는바, 천지만물은, 이 여천(女天), 남지(男地)의 교합의 결과로 생성한다. 구석기시대의 여남 양 신의 성교가 이렇게 천지의 성교에까지 이른 것은 물론 그 후의 발전계단으로, 이 관념의 상징화가 바로 그들의 여천남지의 우주도상인 것이다. 이런 도상은 물론 고대 이집트에도 있었던 것이다(제10도). 여기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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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4번=[[파일:도유호_중도문3-62.png|섬네일|가운데|第8圖 南佛 로셀(Laussel)의 오리냐크문화기의 부조.<br/>(Aus L. Frobeuius: Kulturgeschichte Afrikas)]]
長 29,7 cm. 상部輪緣의 直經 8,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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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5번=여자가 천임은, 모권제의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우주도는 아프리카의 수단(Sudan) 일대에 가서는 태반이 남재상, 여재하로 위치가 바꾸어졌는 바, 그것은 부
(Aus Karlgren: Some Feundity Symbols 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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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6번=[[파일:도유호_중도문3-63.png|섬네일|가운데|제9도 페르시아 알리-아바드 (Aly-Abad) 출토의 도기상에있는 문양. (Aus G, Wilke: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 Leipzig 1923, S. 16.)]]
칼그렌 교수가 참 정당히 간파한 바로 적어도 묘송사꾼은 이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종교심리의 근원은 결국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태도만 아니라, 인간의 ‘윤리도덕관’ 일반에 있어, 그 귀결점은 할 수 없이 이 이기심 선상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TagRefT|33}}그러기에, 소위 ‘인생철학’(Lebensphilesophie)의 총아, 짐멜(Georg Simmel)씨도,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선을 행하면, 그와 동시에 거기에 대한 보수를, 결국은 무의식적으로나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저간의 사정을 고백하고 만 것이다.<ref group="a">자세히 기억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아마 Samhnlung Göschen, Bd. 500.로 발표된 짐멜 교수의 「철학주요문제」(Hauptprobleme der Philosophie) 중에 쓰여있든가 보이다. 비교하기를 바란다.</ref> 그런데 칼그렌 교수가 선조 숭배와 생식기 숭배와의 불가분적 관계를 논하는 것을 나는 여기서 문화권적 고찰과 관련하여 좀 더 음미할 필요를 느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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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7번=권문화의 영향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전아시아의 이 생식마법은 그들의 종교상에서 대역할을 연출하였는 바, 그 결과는 난잡무도한 성교적 종교 예식으로 끝였던 것은 우리가 주지하는 바이다. 아프리카 일부에나, 인도에는 (시바교 등) 현재도 그 유풍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의식의 과정은 언어도단의 음행으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이 음란한 종교의식에 의하여 야만 농작물의 수획을
|목차1-2해독문28번=선조 숭배가 곧 자손 번식, 풍작 등의 조장을 위한 종교의식 발생적 관계가 있다면, 거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생식마법 내지는 생식기 숭배와, 선조 숭배(Ahne kult)는 과연 동일한 문화권 내에서 기원된 것이다. 즉 구계단의 모권문화, 재배문화계가 양자의 본향인 것이다. 이 문제의 역사적 고찰을 하기 위하여는 우리는 그런데 석기시대의 예술에 다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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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8번=[[파일:도유호_중도문3-64.png|섬네일|가운데|제10도 이집트 목관 위의 도상<br/>(aus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목차1-2해독문29번={{TagRefT|34}}회르네스 교수(Moritz Heernes)는 선사시대의 예술(미술)을 논함에 제하여, 예술은 인간의 직능(Funktion)이라고 하며, 구석기시대의 조각, 토우, 벽화들을 인간의 심미적 직능에서 자발한 표현물로 취급하였였다.<ref group="a">Horness-Menghin: Urgeschichte der bildenden Kunst in Europa, Wien 1925.</ref> 그는 그의 이 고찰을 예술의 인류학적 고찰이라고 자칭하였다. 즉, 그는 예술의 역사적 고찰을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예술은 그것이 순수한 예술 그것만을 위하여 직능적으로 된 것은 결코 아니오, 마법 및 (마법의 발전계단인)종교와 직접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몽고 오르도스의 구석기시대의 여신상이나, 시베리아 말타의 그것이나, 유럽 오리냐크문화, 막달렌문화의 여신상은, 그것이 재배문화편에서 온 대모신(Magna Mater) 숭배의 사실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유물에 불과한 것이다 오리냐크문화, 막달렌문화의 벽화나 조각품에 보이는 동물상, 생식기형 등은, 그것이 수렵의 좋은 결과 또는 수렵대상인 동물의 번식을 위한 마법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수렵적의 인기문화에는 그런데 토템성이 퍽 농후하여 보이는 바, 토템주의자들은 마법을 누구보다도 심히 성행하였던 것이다. 즉 마법은 토템문화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발전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마법 중에서도 그 수위를 점령한 생식마법은 여기서 가장 심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식마법은, 그들의 여신숭배와 동양으로 원래는 모권적 재배문화계에서 넘어온 것이다(제1장 제2절 주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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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39번=풍부히 할 수가 있는 줄로 믿는 까닭이다.
|목차1-2해독문30번=프랑스, 도르도뉴주(Dordogne) 로셀(Laussel)에서 출토된 여러 신상 중에는 남녀 성교의 장면을 보이는 부조가있다(제8도). {{TagRefT|35}}그런데, 여기서 남녀의 위치는 여재상, 남재하로 되어있는 것이다.<ref group="a">Vgl.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Zürich 1933, S. 156. G. Wilke: 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Mannus-BibliotherkNr. 31), Leipzig 1923, S. 17.</ref> 이 미술작품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번식마법에 사용한 신상으로 그것은 어느 점으로 보던지, 권설 문화, 재배문화편에서 전래한 문화현상이다. 여기서 여신의 위치가 상부에 있는 것은, 그리고, 모권제 영향의 일면을 전하는 바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직도 모권제가 남아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재배문화의 이 성교상은 모권 영향이 심한 고대의 전아시아에서도 도기문양(제9도), 조각 기타에 출현한다. 아니 거기서는 그들의 음양사상의 근거가 이것으로 되어있는바, 천지만물은, 이 여천(女天), 남지(男地)의 교합의 결과로 생성한다. 구석기시대의 여남 양 신의 성교가 이렇게 천지의 성교에까지 이른 것은 물론 그 후의 발전계단으로, 이 관념의 상징화가 바로 그들의 여천남지의 우주도상인 것이다. 이런 도상은 물론 고대 이집트에도 있었던 것이다(제10도). 여기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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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40번=생식마법, 생식기 숭배는 고대 게르만족 중에도 있었던 것으로, 이제 인도에 관하여 좀 더 상론하건대, 시바 숭배 (Sivakult)나 「삭틔즘」(Saktism)의 현대형은 그만두고라도 그것이 벌써 아리안 이전의 인도 도시문화에 있었던 것은 마샬씨가 이미 지적한 바이다. {{TagRefT|36}}동씨는 이 인도 도시문화층에서 출토된 석제(주로 석회석 및 설화석고(雪花石膏))의 남녀 생식기형 조각품이나, 그것의 소형인 패제(貝製) 기타의 미술작품들은, 사이비즘(Saivism)의 특징적 숭배대상, 즉 음문(yonI)과 음경(linga)에 비정되는 것을 지적하였었다.<ref group="a">Mohenjo-Daro etc., Vol. Ⅰ. Chapter Ⅴ, Religion.</ref> 이 요니와 링가의 숭배는 과연 아리안 이전의 인도 도시문화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펼쳤던 것이다.
第8圖 南佛 로셀(Laussel)의 오리냐크문화기의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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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2해독문41번=이제 중국에 관하여 고찰하건대, 전아시아나 인도와 관계가 많았던 중국의 상고에 이런 요니와 링가의 숭배가 있었음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그것은 벌써 고급문화의 영향 이전에 있었기가 쉬운 것이다. 벌써 그 전에 재배문화의 영향은 중국 땅에 이것도 전한 것으로, 원상족은 이것을 ‘본토민’에게서 전승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방에서 온 고급문화의 영향하에 그 형태에 다소 변화를 받었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이 요니 및 링가의 숭배는 은대 이후에도 퍽 오래 남아 있는 것으로, 주여동씨의 이상에 소개한 이론 중에서도 (비록 그의 이론에 찬동키 어려운 데가 많기는 하나)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Aus L. Frobeuius: Kulturgeschichte Afrikas)
 
 
 
여자가 천임은, 모권제의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우주도는 아프리카의 수단(Sudan) 일대에 가서는 태반이 남재상, 여재하로 위치가 바꾸어졌는 바, 그것은 부
 
第九圖 페르시아 알리-아받 (Aly-Abad) 출토의 도기상에있는 문양. (Aus G, Wilke: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 Leipzig 1923, S. 16.)
 
 
 
권문화의 영향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전아시아의 이 생식마법은 그들의 종교상에서 대역할을 연출하였는 바, 그 결과는 난잡무도한 성교적 종교 예식으로 끝였던 것은 우리가 주지하는 바이다. 아프리카 일부에나, 인도에는 (시바교 등) 현재도 그 유풍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의식의 과정은 언어도단의 음행으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이 음란한 종교의식에 의하여 야만 농작물의 수획을
 
 
 
第十圖 埃및木棺상의 도상(圖상)
 
(aus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풍부히 할 수가 있는 줄로 믿는 까닭이다.
 
|목차1-2해독문31번=생식마법, 생식기 숭배는 고대 게르만족 중에도 있었던 것으로, 이제 인도에 관하여 좀 더 상론하건대, 시바 숭배 (Sivakult)나 「삭틔즘」(Saktism)의 현대형은 그만두고라도 그것이 벌써 아리안 이전의 인도 도시문화에 있었던 것은 마샬씨가 이미 지적한 바이다. {{TagRefT|36}}동씨는 이 인도 도시문화층에서 출토된 석제(주로 석회석 및 설화석고(雪花石膏))의 남녀 생식기형 조각품이나, 그것의 소형인 패제(貝製) 기타의 미술작품들은, 사이비즘(Saivism)의 특징적 숭배대상, 즉 음문(yonI)과 음경(linga)에 비정되는 것을 지적하였었다.<ref group="a">Mohenjo-Daro etc., Vol. Ⅰ. Chapter Ⅴ, Religion.</ref> 이 요니와 링가의 숭배는 과연 아리안 이전의 인도 도시문화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펼쳤던 것이다.
 
|목차1-2해독문32번=이제 중국에 관하여 고찰하건대, 전아시아나 인도와 관계가 많았던 중국의 상고에 이런 요니와 링가의 숭배가 있었음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그것은 벌써 고급문화의 영향 이전에 있었기가 쉬운 것이다. 벌써 그 전에 재배문화의 영향은 중국 땅에 이것도 전한 것으로, 원상족은 이것을 ‘본토민’에게서 전승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방에서 온 고급문화의 영향하에 그 형태에 다소 변화를 받었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이 요니 및 링가의 숭배는 은대 이후에도 퍽 오래 남아 있는 것으로, 주여동씨의 이상에 소개한 이론 중에서도 (비록 그의 이론에 찬동키 어려운 데가 많기는 하나)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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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3원문1번={{TagSpage|185}}西洋學徒 中에는 아직도, 周族은 牧遊民이었으니 그들은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形體로 中國에 와서 殷商農民을 征服하였다고 믿는 者가 많으나, 그것이 어두당투 않는 잠꼬대인 것은 以上에서 벌써 여러 번 論及한 바이다. 周族은 벌써 農民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뿐 外라, 征服 當時에는 벌써 殷商 都市文化의 影響 及 西方의 影響을 퍽 {{TagPage|186-1}}받은 바로 이미 國家도 形成하였고, 世襲王朝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周文王을 西伯이라고 하였으니 周國은 原來는 「殷帝國」의 「伯爵領」인 듯이 뵈이기는 하나, 그것은 周族이 殷商族의 支配下에 살었던 事實을 反影하는 것은 決코 아니다.
 
|목차1-3원문1번={{TagSpage|185}}西洋學徒 中에는 아직도, 周族은 牧遊民이었으니 그들은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形體로 中國에 와서 殷商農民을 征服하였다고 믿는 者가 많으나, 그것이 어두당투 않는 잠꼬대인 것은 以上에서 벌써 여러 번 論及한 바이다. 周族은 벌써 農民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뿐 外라, 征服 當時에는 벌써 殷商 都市文化의 影響 及 西方의 影響을 퍽 {{TagPage|186-1}}받은 바로 이미 國家도 形成하였고, 世襲王朝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周文王을 西伯이라고 하였으니 周國은 原來는 「殷帝國」의 「伯爵領」인 듯이 뵈이기는 하나, 그것은 周族이 殷商族의 支配下에 살었던 事實을 反影하는 것은 決코 아니다.
|목차1-3원문2번={{TagSpage|186-2}}郭沫若氏는 「周」字의 甲骨文이 로 되어있는 것은 殷商民이, 周族의 田作을 表示한 것으로 이것으로 周族이 農民이었던 것은 넉넉히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果然 郭氏의 鏡敏한 觀察이라고 하겠다. 郭氏의 이 意見에는 더 反對할 餘地가 없다. 四圍에 牧遊種族이 둘러싼 殷商民에게는 周族의 農作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었을 것이다. 따라서, 農作을 象徵하는 字로 周族을 表示하였음은 가장 當然한 것이다. {{TagRef|37}}그런대, 이 字를 나는 印度河 地帶, 아리안 以前의 都市文化의 文字에서도 發見하였다.{{TagRef|37}}주1: <ref>例하면, John Marshall: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中에 複寫된 印度河地帶 都市文化層 出土의 印章, 第四百四十四號(Seals No. 444)上의 文字는 다음과 같다.<br/><br/>이 外에도 字는 數次 뵈이는 바이다.</ref> 勿論 印度文字 中의 字도 「周」字였다고 할 論理的 根據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如何間 印度文字(In lus seript)에 字가 뵈이는 것은 나의 注意를 퍽 惹起하는 바이다. 今後 印度文字를 研究하는 분은 여기에 注意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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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3원문2번={{TagSpage|186-2}}郭沫若氏는 「周」字의 甲骨文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65.png|40px]]로 되어있는 것은 殷商民이, 周族의 田作을 表示한 것으로 이것으로 周族이 農民이었던 것은 넉넉히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果然 郭氏의 鏡敏한 觀察이라고 하겠다. 郭氏의 이 意見에는 더 反對할 餘地가 없다. 四圍에 牧遊種族이 둘러싼 殷商民에게는 周族의 農作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었을 것이다. 따라서, 農作을 象徵하는 字로 周族을 表示하였음은 가장 當然한 것이다. {{TagRef|37}}그런대, 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66.png|40px]]字를 나는 印度河 地帶, 아리안 以前의 都市文化의 文字에서도 發見하였다.<ref>例하면, John Marshall: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中에 複寫된 印度河地帶 都市文化層 出土의 印章, 第四百四十四號(Seals No. 444)上의 文字는 다음과 같다.<br/>[[파일:도유호_중도문3-67.png|80px]]<br/>이 外에도 [[파일:도유호_중도문3-68.png|40px]]字는 數次 뵈이는 바이다.</ref> 勿論 印度文字 中의 [[파일:도유호_중도문3-69.png|40px]]字도 「周」字였다고 할 論理的 根據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如何間 印度文字(In lus seript)에 [[파일:도유호_중도문3-70.png|40px]]字가 뵈이는 것은 나의 注意를 퍽 惹起하는 바이다. 今後 印度文字를 研究하는 분은 여기에 注意하기를 바란다.
 
|목차1-3원문3번={{TagSpage|186-3}}周族이 農民族이었던 것은, 其外의 史籍上 傳統(勿論 모다 信憑할 수는 없으나)에 依하여도 더 疑心할 餘地가 없다. 그들도 이렇게, 農民이었으나,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도 牧遊文化의 傳統이 殷商族에 比하여는 더 많었던 듯하다. 그들은 그런대, 그 言語에 있어서는, 如何하였느냐고 하면, 거기에 關하여는, 아직 論斷할 規範이 別로 없는 것이다. 아니 古文尙書周書, 武成篇 中에 뵈이는 「死魄」이라는 語는 朝鮮語의 「새벽」(曉)이나 土耳其語의 「사바익」(Sabaik-?)(亦是 새벽, dawn을 意味함)과 關聯된 字로 「알타이」語의 語音的 寫記(Phonetis che Schreibung)에 不過한 感이 있다. (따라서 「死魄」을 「生魄」에 對立시키는 在來의 傳統은 曲解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그것은 周語가 아직은 「알타이」語系의 多綴的 語였고, 單綴語는 아니었던 듯한 感도 없지 못하기는 하다. {{TagRef|38}}그러나 武成篇은 今文에는 없는 것인 만큼, 同篇의 史籍價値에는 問題가 많을뿐더러,<ref>南宋 初에 吳才老가, 所謂 孔安國傳古文尙書를 疑惑하기 始作한 以後, 現今에 일으기까지 그 僞作임을 指摘하는 學者가 많다. 朱子門人 蔡沈이는 書序만은 孔子의 作이 아님을 指摘하였으나, 其外에는 古文을 採用하였었다. 不幸히 蔡沈의 後世에및인 影響이 퍽 컷든 것이다. 그러나, 나 亦, 古文이 僞作임을 看過할 수가 없다. 나같은 殘薄한 者가 여기에 敢히 入唃함은 너모나 當突하기는 하나, 나는, 今文에 없는 古文 諸篇의 文體가 平易함을 보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 假作性을 感하게 된 바이다. 勿論 今文에도 文體가 平易한 者가 없는 것은 아니나, 大體로 보아, 今文에 없는 古文 諸篇은 암만 해야 伏生이 傳한 今文 諸篇의 文體보다 平易한 것이다. 吳才老의 意見과 同樣으로 그것은 古文의 僞作임을 말하는 것이다.<br/>古文僞作說과 相對하야는 또 所謂 孔安國尙書大傳僞作說이 問題이다. 孔璧書는 原來 世間에 傳한 바 되였으나 兵火가 많은 中國 일이라, 後世에 不幸이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대 이 孔瑩書(古文)에, 武帝時, 孔子十二世孫 孔安國이 傳을 썼다는 것은 암만 해야 無根之說인 듯하다. 現存한 所謂 孔安國尙書大傳이란, 孔子十二世孫과는 何等 關聯이 없는 듯하다. 따라서 이것을 僞作이라고 하는 것은 當然한 主張이다. 그런대 여기에 關하야 武內義雄 敎授는 퍽 滋味있는 말을 한다. 그의 意見이 얼마나 正當한가는 讀者諸君의 判斷에 맊이고, 나는 오직 그의 理論을 紹介함에 끛인다.—<br/>『所謂孔安國傳なるものは東晋の梅賾によって世に出た本で淸初の考證家閻若璩は之を以て梅賾の僞撰と断定したが, 其後丁晏は梅賾以前にこの書が存在した證據をあげ, 又其傳意が王肅義に合するものが多いことを指摘して肅の僞撰と想定した. 然し丁晏の想定も未だ證據不充分である. 王肅の門人に孔晁といふ者があって逸周書の注をかいてゐるが, 此人に又尙書疑問三巻の著作があつて, 隋志にはこれを孔晁の共撰だとしてゐるが, 新唐志には之を王肅孔安國の問答を錄したものと注記してゐるから孔晁は字を安國といったことが明瞭である. そこで私は尙書の孔安國傳なるものを孔晁の傳だと考へたい. 之を孔晁に配すればそれが王肅義と合するのも當然で, 又それが梅賾以前に存することに疑を容れる必要がなくなる. それは兎も角も尙書の孔安國傳が王肅に因縁のある注だといふことは確實である.』 【武内義雄 「支那思想史」(岩破全書 第七十三卷), 昭和十一年 二一九頁】</ref> 그것이 果然 「알타이」系의 語랫대야, 그것으로 周語의 多綴語性을 {{TagPage|187-1}}證明할 수는 到底히 없는 것이다. (「제비 하나를 보고, 벌써 여름이라고 할 수야 있나.」 Eine Schwalbe macht noch keinen Sommer.)
 
|목차1-3원문3번={{TagSpage|186-3}}周族이 農民族이었던 것은, 其外의 史籍上 傳統(勿論 모다 信憑할 수는 없으나)에 依하여도 더 疑心할 餘地가 없다. 그들도 이렇게, 農民이었으나,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도 牧遊文化의 傳統이 殷商族에 比하여는 더 많었던 듯하다. 그들은 그런대, 그 言語에 있어서는, 如何하였느냐고 하면, 거기에 關하여는, 아직 論斷할 規範이 別로 없는 것이다. 아니 古文尙書周書, 武成篇 中에 뵈이는 「死魄」이라는 語는 朝鮮語의 「새벽」(曉)이나 土耳其語의 「사바익」(Sabaik-?)(亦是 새벽, dawn을 意味함)과 關聯된 字로 「알타이」語의 語音的 寫記(Phonetis che Schreibung)에 不過한 感이 있다. (따라서 「死魄」을 「生魄」에 對立시키는 在來의 傳統은 曲解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그것은 周語가 아직은 「알타이」語系의 多綴的 語였고, 單綴語는 아니었던 듯한 感도 없지 못하기는 하다. {{TagRef|38}}그러나 武成篇은 今文에는 없는 것인 만큼, 同篇의 史籍價値에는 問題가 많을뿐더러,<ref>南宋 初에 吳才老가, 所謂 孔安國傳古文尙書를 疑惑하기 始作한 以後, 現今에 일으기까지 그 僞作임을 指摘하는 學者가 많다. 朱子門人 蔡沈이는 書序만은 孔子의 作이 아님을 指摘하였으나, 其外에는 古文을 採用하였었다. 不幸히 蔡沈의 後世에및인 影響이 퍽 컷든 것이다. 그러나, 나 亦, 古文이 僞作임을 看過할 수가 없다. 나같은 殘薄한 者가 여기에 敢히 入唃함은 너모나 當突하기는 하나, 나는, 今文에 없는 古文 諸篇의 文體가 平易함을 보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 假作性을 感하게 된 바이다. 勿論 今文에도 文體가 平易한 者가 없는 것은 아니나, 大體로 보아, 今文에 없는 古文 諸篇은 암만 해야 伏生이 傳한 今文 諸篇의 文體보다 平易한 것이다. 吳才老의 意見과 同樣으로 그것은 古文의 僞作임을 말하는 것이다.<br/>古文僞作說과 相對하야는 또 所謂 孔安國尙書大傳僞作說이 問題이다. 孔璧書는 原來 世間에 傳한 바 되였으나 兵火가 많은 中國 일이라, 後世에 不幸이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대 이 孔瑩書(古文)에, 武帝時, 孔子十二世孫 孔安國이 傳을 썼다는 것은 암만 해야 無根之說인 듯하다. 現存한 所謂 孔安國尙書大傳이란, 孔子十二世孫과는 何等 關聯이 없는 듯하다. 따라서 이것을 僞作이라고 하는 것은 當然한 主張이다. 그런대 여기에 關하야 武內義雄 敎授는 퍽 滋味있는 말을 한다. 그의 意見이 얼마나 正當한가는 讀者諸君의 判斷에 맊이고, 나는 오직 그의 理論을 紹介함에 끛인다.—<br/>『所謂孔安國傳なるものは東晋の梅賾によって世に出た本で淸初の考證家閻若璩は之を以て梅賾の僞撰と断定したが, 其後丁晏は梅賾以前にこの書が存在した證據をあげ, 又其傳意が王肅義に合するものが多いことを指摘して肅の僞撰と想定した. 然し丁晏の想定も未だ證據不充分である. 王肅の門人に孔晁といふ者があって逸周書の注をかいてゐるが, 此人に又尙書疑問三巻の著作があつて, 隋志にはこれを孔晁の共撰だとしてゐるが, 新唐志には之を王肅孔安國の問答を錄したものと注記してゐるから孔晁は字を安國といったことが明瞭である. そこで私は尙書の孔安國傳なるものを孔晁の傳だと考へたい. 之を孔晁に配すればそれが王肅義と合するのも當然で, 又それが梅賾以前に存することに疑を容れる必要がなくなる. それは兎も角も尙書の孔安國傳が王肅に因縁のある注だといふことは確實である.』 【武内義雄 「支那思想史」(岩破全書 第七十三卷), 昭和十一年 二一九頁】</ref> 그것이 果然 「알타이」系의 語랫대야, 그것으로 周語의 多綴語性을 {{TagPage|187-1}}證明할 수는 到底히 없는 것이다. (「제비 하나를 보고, 벌써 여름이라고 할 수야 있나.」 Eine Schwalbe macht noch keinen Sommer.)
 
|목차1-3원문4번={{TagSpage|187-2}}周族은 牧遊族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거기서 一步 더 나가 周族은 股族과 同一한 種族이라고 主張하는 분도 있다. 거기에 一義가 없는 것도 아니나, 나는, 어느 點으로 보든지 周族은 (비록 原來는 殷族과 同樣으로 中央亞細亞 牧遊文化系의 族이기는 하나) 殷族과는 相異한 種族이라고 믿는 者 中의 하나이다. 小川琢治 博士는 周族에 關하여 『殷人は西來の一種族でその鄕土は甘肅省北界に在つて今の蘭州の岸に近い河北にも占居したと想はれ, 是よりも更に西方にゐた姜姓戎即ち羌族の涇渭流域に移住したのが周人であつたと考へてよいらしい』(續集 七十六頁)라고 하며, 周族을 羌族과 關聯시킨다. 博士의 意見에는 一意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나는 여기에 左袒할 수가 없다. 나는 博士가 이렇게 생각하는 理由를 몰라 하는 바이다. 周族의 由來에 關하여는, 如何間 今後의 硏究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목차1-3원문4번={{TagSpage|187-2}}周族은 牧遊族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거기서 一步 더 나가 周族은 股族과 同一한 種族이라고 主張하는 분도 있다. 거기에 一義가 없는 것도 아니나, 나는, 어느 點으로 보든지 周族은 (비록 原來는 殷族과 同樣으로 中央亞細亞 牧遊文化系의 族이기는 하나) 殷族과는 相異한 種族이라고 믿는 者 中의 하나이다. 小川琢治 博士는 周族에 關하여 『殷人は西來の一種族でその鄕土は甘肅省北界に在つて今の蘭州の岸に近い河北にも占居したと想はれ, 是よりも更に西方にゐた姜姓戎即ち羌族の涇渭流域に移住したのが周人であつたと考へてよいらしい』(續集 七十六頁)라고 하며, 周族을 羌族과 關聯시킨다. 博士의 意見에는 一意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나는 여기에 左袒할 수가 없다. 나는 博士가 이렇게 생각하는 理由를 몰라 하는 바이다. 周族의 由來에 關하여는, 如何間 今後의 硏究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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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3해독문1번=서양학도 중에는 아직도, 주족은 목유민이었으니 그들은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형체로 중국에 와서 은상농민을 정복하였다고 믿는 자가 많으나, 그것이 어두당투 않는 잠꼬대인 것은 이상에서 벌써 여러 번 논급한 바이다. 주족은 벌써 농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뿐 아니라, 정복 당시에는 벌써 은상 도시문화의 영향 및 서방의 영향을 퍽 받은 바로 이미 국가도 형성하였고, 세습왕조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주 문왕을 서백(西伯)이라고 하였으니 주국은 원래는 ‘殷帝國’의 ‘伯爵領’인 듯이 보이기는 하나, 그것은 주족이 은상족의 지배하에 살았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목차1-3해독문1번=서양학도 중에는 아직도, 주족은 목유민이었으니 그들은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형체로 중국에 와서 은상농민을 정복하였다고 믿는 자가 많으나, 그것이 어두당투 않는 잠꼬대인 것은 이상에서 벌써 여러 번 논급한 바이다. 주족은 벌써 농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뿐 아니라, 정복 당시에는 벌써 은상 도시문화의 영향 및 서방의 영향을 퍽 받은 바로 이미 국가도 형성하였고, 세습왕조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주 문왕을 서백(西伯)이라고 하였으니 주국은 원래는 ‘殷帝國’의 ‘伯爵領’인 듯이 보이기는 하나, 그것은 주족이 은상족의 지배하에 살았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목차1-3해독문2번=곽말약씨는 ‘周’자의 갑골문이 로 되어있는 것은 은상民이, 주족의 田作을 표시한 것으로 이것으로 주족이 농민이었던 것은 넉넉히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과연 곽씨의 예민한 관찰이라고 하겠다. 곽씨의 이 의견에는 더 반대할 여지가 없다. 사위에 목유종족이 둘러싼 은상민에게는 주족의 농작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었을 것이다. 따라서, 농작을 상징하는 자로 주족을 표시하였음은 가장 당연한 것이다. {{TagRefT|37}}그런데, 이 자를 나는 인도하 지대, 아리안 이전의 도시문화의 문자에서도 발견하였다.<ref group="a">예하면, John Marshall: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중에 복사된 인도하지대 도시문화층 출토의 인장, 제444호(Seals No. 444)상의 문자는 다음과 같다.<br/><br/>이 외에도 자는 수차 보이는 바이다.</ref> 물론 인도문자 중의 자도 ‘周’자였다고 할 논리적 근거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하간 인도문자(In lus seript)에 자가 보이는 것은 나의 주의를 퍽 야기하는 바이다. 금후 인도문자를 연구하는 분은 여기에 주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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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3해독문2번=곽말약씨는 ‘周’자의 갑골문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65.png|40px]]로 되어있는 것은 은상民이, 주족의 田作을 표시한 것으로 이것으로 주족이 농민이었던 것은 넉넉히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과연 곽씨의 예민한 관찰이라고 하겠다. 곽씨의 이 의견에는 더 반대할 여지가 없다. 사위에 목유종족이 둘러싼 은상민에게는 주족의 농작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었을 것이다. 따라서, 농작을 상징하는 자로 주족을 표시하였음은 가장 당연한 것이다. {{TagRefT|37}}그런데, 이 [[파일:도유호_중도문3-66.png|40px]]자를 나는 인도하 지대, 아리안 이전의 도시문화의 문자에서도 발견하였다.<ref group="a">예하면, John Marshall: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중에 복사된 인도하지대 도시문화층 출토의 인장, 제444호(Seals No. 444)상의 문자는 다음과 같다.<br/>[[파일:도유호_중도문3-67.png|80px]]<br/>이 외에도 [[파일:도유호_중도문3-68.png|40px]]자는 수차 보이는 바이다.</ref> 물론 인도문자 중의 [[파일:도유호_중도문3-69.png|40px]]자도 ‘周’자였다고 할 논리적 근거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하간 인도문자(In lus seript)에 [[파일:도유호_중도문3-70.png|40px]]자가 보이는 것은 나의 주의를 퍽 야기하는 바이다. 금후 인도문자를 연구하는 분은 여기에 주의하기를 바란다.
 
|목차1-3해독문3번=주족이 농민족이었던 것은, 그 외의 사적상 전통(물론 모두 신빙할 수는 없으나)에 의하여도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도 이렇게, 농민이었으나,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도 목유문화의 전통이 은상족에 비하여는 더 많았던 듯하다. 그들은 그런데, 그 언어에 있어서는, 여하하였느냐고 하면, 거기에 관하여는, 아직 논단할 규범이 별로 없는 것이다. 아니 고문상서주서, 무성편 중에 보이는 ‘死魄’이라는 말은 조선어의 ‘새벽’(曉)이나 터키어의 사바익(Sabaik-?)(역시 새벽, dawn을 의미함)과 관련된 자로 알타이어의 어음적 사기(寫記, Phonetis che Schreibung)에 불과한 감이 있다. (따라서 ‘死魄’을 ‘生魄’에 대립시키는 재래의 전통은 곡해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그것은 주어(周語)가 아직은 알타이어계의 다철적 어였고, 단철어는 아니았던 듯한 감도 없지 못하기는 하다. {{TagRefT|38}}그러나 무성편은 금문에는 없는 것인 만큼, 동편의 사적(史籍) 가치에는 문제가 많을뿐더러,<ref group="a">南宋 初에 吳才老가, 소위 공안국전 고문상서를 의혹하기 시작한 이후, 현금에 이르기까지 그 위작임을 지적하는 학자가 많다. 주자문인 채심이는 書序만은 공자의 작이 아님을 지적하였으나, 그 외에는 고문을 채용하였었다. 불행히 채심의 후세에 미친 영향이 퍽 컸던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고문이 위작임을 간과할 수가 없다. 나같은 잔박한 자가 여기에 감히 참견함은 너모나 당돌하기는 하나, 나는, 금문에 없는 고문 제편의 문체가 평이함을 보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 가작성을 느끼게 된 바이다. 물론 금문에도 문체가 평이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보아, 금문에 없는 고문 제편은 암만 해야 복생이 전한 금문 제편의 문체보다 평이한 것이다. 吳才老의 의견과 동양(同樣)으로 그것은 고문의 위작임을 말하는 것이다.<br/>고문위작설과 상대하여는 또 소위 공안국 상서대전 위작설이 문제이다. 공벽서는 원래 세간에 전한 바 되었으나 병화가 많은 중국 일이라, 후세에 불행히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 공벽서(고문)에, 무제시, 공자 12세손 공안국이 전을 썼다는 것은 암만 해야 무근지설인 듯하다. 현존한 소위 공안국 상서대전이란, 공자 12세손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듯하다. 따라서 이것을 위작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하여 무내의웅(武內義雄) 교수는 퍽 재미있는 말을 한다. 그의 의견이 얼마나 정당한가는 독자제군의 판단에 맡기고, 나는 오직 그의 이론을 소개함에 그친다.—<br/>『所謂孔安國傳なるものは東晋の梅賾によって世に出た本で淸初の考證家閻若璩は之を以て梅賾の僞撰と断定したが, 其後丁晏は梅賾以前にこの書が存在した證據をあげ, 又其傳意が王肅義に合するものが多いことを指摘して肅の僞撰と想定した. 然し丁晏の想定も未だ證據不充分である. 王肅の門人に孔晁といふ者があって逸周書の注をかいてゐるが, 此人に又尙書疑問三巻の著作があつて, 隋志にはこれを孔晁の共撰だとしてゐるが, 新唐志には之を王肅孔安國の問答を錄したものと注記してゐるから孔晁は字を安國といったことが明瞭である. そこで私は尙書の孔安國傳なるものを孔晁の傳だと考へたい. 之を孔晁に配すればそれが王肅義と合するのも當然で, 又それが梅賾以前に存することに疑を容れる必要がなくなる. それは兎も角も尙書の孔安國傳が王肅に因縁のある注だといふことは確實である.』 【武内義雄 「支那思想史」(岩破全書 第七十三卷), 昭和十一年 二一九頁】</ref> 그것이 과연 알타이계의 언어랬대야, 그것으로 주어(周語)의 다철어성을 증명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제비 하나를 보고, 벌써 여름이라고 할 수야 있나.」 Eine Schwalbe macht noch keinen Sommer.)
 
|목차1-3해독문3번=주족이 농민족이었던 것은, 그 외의 사적상 전통(물론 모두 신빙할 수는 없으나)에 의하여도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도 이렇게, 농민이었으나,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도 목유문화의 전통이 은상족에 비하여는 더 많았던 듯하다. 그들은 그런데, 그 언어에 있어서는, 여하하였느냐고 하면, 거기에 관하여는, 아직 논단할 규범이 별로 없는 것이다. 아니 고문상서주서, 무성편 중에 보이는 ‘死魄’이라는 말은 조선어의 ‘새벽’(曉)이나 터키어의 사바익(Sabaik-?)(역시 새벽, dawn을 의미함)과 관련된 자로 알타이어의 어음적 사기(寫記, Phonetis che Schreibung)에 불과한 감이 있다. (따라서 ‘死魄’을 ‘生魄’에 대립시키는 재래의 전통은 곡해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그것은 주어(周語)가 아직은 알타이어계의 다철적 어였고, 단철어는 아니았던 듯한 감도 없지 못하기는 하다. {{TagRefT|38}}그러나 무성편은 금문에는 없는 것인 만큼, 동편의 사적(史籍) 가치에는 문제가 많을뿐더러,<ref group="a">南宋 初에 吳才老가, 소위 공안국전 고문상서를 의혹하기 시작한 이후, 현금에 이르기까지 그 위작임을 지적하는 학자가 많다. 주자문인 채심이는 書序만은 공자의 작이 아님을 지적하였으나, 그 외에는 고문을 채용하였었다. 불행히 채심의 후세에 미친 영향이 퍽 컸던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고문이 위작임을 간과할 수가 없다. 나같은 잔박한 자가 여기에 감히 참견함은 너모나 당돌하기는 하나, 나는, 금문에 없는 고문 제편의 문체가 평이함을 보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 가작성을 느끼게 된 바이다. 물론 금문에도 문체가 평이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보아, 금문에 없는 고문 제편은 암만 해야 복생이 전한 금문 제편의 문체보다 평이한 것이다. 吳才老의 의견과 동양(同樣)으로 그것은 고문의 위작임을 말하는 것이다.<br/>고문위작설과 상대하여는 또 소위 공안국 상서대전 위작설이 문제이다. 공벽서는 원래 세간에 전한 바 되었으나 병화가 많은 중국 일이라, 후세에 불행히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 공벽서(고문)에, 무제시, 공자 12세손 공안국이 전을 썼다는 것은 암만 해야 무근지설인 듯하다. 현존한 소위 공안국 상서대전이란, 공자 12세손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듯하다. 따라서 이것을 위작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하여 무내의웅(武內義雄) 교수는 퍽 재미있는 말을 한다. 그의 의견이 얼마나 정당한가는 독자제군의 판단에 맡기고, 나는 오직 그의 이론을 소개함에 그친다.—<br/>『所謂孔安國傳なるものは東晋の梅賾によって世に出た本で淸初の考證家閻若璩は之を以て梅賾の僞撰と断定したが, 其後丁晏は梅賾以前にこの書が存在した證據をあげ, 又其傳意が王肅義に合するものが多いことを指摘して肅の僞撰と想定した. 然し丁晏の想定も未だ證據不充分である. 王肅の門人に孔晁といふ者があって逸周書の注をかいてゐるが, 此人に又尙書疑問三巻の著作があつて, 隋志にはこれを孔晁の共撰だとしてゐるが, 新唐志には之を王肅孔安國の問答を錄したものと注記してゐるから孔晁は字を安國といったことが明瞭である. そこで私は尙書の孔安國傳なるものを孔晁の傳だと考へたい. 之を孔晁に配すればそれが王肅義と合するのも當然で, 又それが梅賾以前に存することに疑を容れる必要がなくなる. それは兎も角も尙書の孔安國傳が王肅に因縁のある注だといふことは確實である.』 【武内義雄 「支那思想史」(岩破全書 第七十三卷), 昭和十一年 二一九頁】</ref> 그것이 과연 알타이계의 언어랬대야, 그것으로 주어(周語)의 다철어성을 증명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제비 하나를 보고, 벌써 여름이라고 할 수야 있나.」 Eine Schwalbe macht noch keinen Sommer.)
 
|목차1-3해독문4번=주족은 목유족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주족은 은족과 동일한 종족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다. 거기에 일의가 없는 것도 아니나, 나는, 어느 점으로 보든지 주족은 (비록 원래는 은족과 동양으로 중앙아시아 목유문화계의 족이기는 하나) 은족과는 상이한 종족이라고 믿는 자 중의 하나이다. 소천탁치 박사는 주족에 관하여 『殷人は西來の一種族でその鄕土は甘肅省北界に在つて今の蘭州の岸に近い河北にも占居したと想はれ, 是よりも更に西方にゐた姜姓戎即ち羌族の涇渭流域に移住したのが周人であつたと考へてよいらしい』(續集 七十六頁)라고 하며, 주족을 강족과 관련시킨다. 박사의 의견에는 한 의의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나는 여기에 좌단할 수가 없다. 나는 박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몰라 하는 바이다. 주족의 유래에 관하여는, 여하간 금후의 연구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목차1-3해독문4번=주족은 목유족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주족은 은족과 동일한 종족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다. 거기에 일의가 없는 것도 아니나, 나는, 어느 점으로 보든지 주족은 (비록 원래는 은족과 동양으로 중앙아시아 목유문화계의 족이기는 하나) 은족과는 상이한 종족이라고 믿는 자 중의 하나이다. 소천탁치 박사는 주족에 관하여 『殷人は西來の一種族でその鄕土は甘肅省北界に在つて今の蘭州の岸に近い河北にも占居したと想はれ, 是よりも更に西方にゐた姜姓戎即ち羌族の涇渭流域に移住したのが周人であつたと考へてよいらしい』(續集 七十六頁)라고 하며, 주족을 강족과 관련시킨다. 박사의 의견에는 한 의의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나는 여기에 좌단할 수가 없다. 나는 박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몰라 하는 바이다. 주족의 유래에 관하여는, 여하간 금후의 연구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2024년 11월 20일 (수) 11:2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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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시문화의 기원(3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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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中國都市文化의 起源 (三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14 발행기관 @
저자 도유호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6월
시작쪽 149쪽 종료쪽 191쪽 전체쪽 043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고고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1: ③ 사회상


상족(商족)은 원래는 중앙아시아 목유민에서 출발한 것이나 그들은 서막시대에 벌써 농민화를 하였고, 황하 중류 지역에 들어왔을 때는 그들은 본토민에게 점점 더 동화를 하여 버렸던 것이다. 그들의 사회도 농촌문화적의 사회였던 것이다. 그들의 추장제는 그러나, 서방에서 온 고급문화, 도시문화의 왕조제의 영향을 받아 어느덧 세습적이 되었던 것이니 이 영향 이전에는 선거제가 중국에 존재하였었던 것은, 요순우(堯舜禹)의 선위에 관한 사적상의 전통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상족이 ‘세습적 왕조’(다소 어폐가 있다)를 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주대 이후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이것도 소둔촌의 은허에 이래한 이후에 점점 더 발전하였던 것이다.(상대의 세습은 주대와는 달라 습위자는 아들보다도, 먼저 동생이었던 것은 일반이 다 아는 바이다.)
쪽수▶P149-1商族은 原來는 中央亞細亞 牧遊民에서 出發한 것이나 그들은 西膜時代에 벌써 農民化를 하였고, 黃河 中流 地域에 들어왔을 때는 그들은 本土民에게 漸漸 더 同化를 하여 버렸든 것이다. 그들의 社會도 農村文化的의 社會였든 것이다. 그들의 酋長制는 그러나, 西方에서 온 高級文化, 都市文化의 王朝制의 影響을 받어 어느듯 世製的이 되었든 것이니 이 影響 以前에는 選擧制가 中國에 存在하였었든 것은, 堯舜禹의 禪位에 關한 史籍上의 傳統에 反影되어 있는 것이다. 商族이 「世襲的 王朝」(多少 語弊가 있다)를 形成하였음에도 不拘하고 그것은 周代 以後의 그것과는 根本的으로 달을 뿐 外라, 이것도 小屯村의 殷墟에 移來한 以後에 漸漸 더 發展하였든 것이다.(商代의 世襲은 周代와는 달라 襲位者는 子보다도, 먼저 弟었든 것은 一般이 다 아는 바이다.)
나는 앞 절 말에서 상민(商民)의 주거의 발전은 동시에 사회 계급 분화의 과정을 동반한 것이오, 지배기관의 종적(縱的) 발전을 의미한 것이라고 하였었다. 사실, 지하의 도혈(陶穴) 속에 기침(起寢)한 ‘상왕(商王)’은 은상민 일반을 떠나기가 얼마 못 되었던 것이다. 그는 세습적 추장이었음에 불구하고 아직은 일개의, 군사상, 종교상, 행정상의 지도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상의 궁궐에 앉았을 때는 그는 벌써 인민의 머리 위를 훨씬 지나가는, 높은 계상(階상)에서 사방을 향하여 호령하는 군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아직도 절대적의 전제군주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은국이 망할 때까지 그들의 사회 근저는 아직도 농촌문화적인 점이 많았던 것이다. 현대문주1▶그렇기에, 중국의 곽말약(곽沫若)씨만 아니라 만국정(萬國鼎)씨도, 상대 사회는 민족적 촌락제로 구분된 코뮤니즘의 사회라고 하였던 것이다.[a 1] 이 코뮤니즘 사회의 근저는 왕조의 기원에 의하여 물론 퍽 동요되는 것이다. 현대문주2▶그러나 아직도 대체로는 농촌문화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은 남아메리카 잉카 왕조 하의 페루국의 예를 보아도 넉넉히 상상할 수가 있다.[a 2] 여기서도, 유럽인이 정복하기까지는 코뮤니즘적 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농촌문화의 코뮤니즘과는 달랐으니, 사실은 전 국토는 국왕의 소유였고, 국왕이 이것을 백성에게 분배하여 사용케 한 것이다. 이 계급분화 및 지배기관의 종적(縱的) 발전이 중국에 있었어도 점진적으로 되었던 것은, 노자 도덕경(제17, 태상장) 중에도 반영되어 있으니, 거기에는

太상 下知有之 其次親之 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운운의 구절이 있다. 여기에, 태상이란, 상고시대를 말하는 것이오. 하(下)란 천하백성말이오, 지(之)란 군왕의 대명사이다. 현대문주3▶그리고 기차(其次)란 그 다음 시대란 말이다.[a 3] 청유최술 이후, 지금에는 나도 노자라는 인물의 존재는 퍽 의심하는 바이나, 그러나 여하간 도덕경 중의 이 구절에, 역사발전과정의 일면이 반영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이다.
쪽수▶P149-2나는 前節 末에서 商民의 住居의 發展은 同時에 社會 階級 分化의 過程을 同伴한 것이오, 支配機關의 縱的 發展을 意味한 것이라고 하였었다. 事實, 地下의 陶穴 속에 起寢한 「商王」은 殷商民 一般을 떠나기가 얼마 몯 되었든 것이다. 그는 世襲的 酋長이었음에 不拘하고 아직은 一個의, 軍事上, 宗敎上, 行政上의 指導者에 不過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그가 地上의 宮厥에 앉었을 때는 그는 벌써 人民의 머리 우를 훨신 지나가는, 높은 階上에서 四▶P150-1方을 向하여 呼令하는 君主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아직도 絕對的의 專制君主는 決코 아니었든 것이다. 殷國이 亡할 때까지 그들의 社會 根底는 아직도 農村文化的인 點이 많었든 것이다. 원문주1▶그러기에, 中國의 郭沫若氏만 아니라 萬國鼎氏도, 商代 社會는 民族的 村落制로 區分된 「콤뮤니즘」의 社會라고 하였든 것이다.[1] 이 「콤뮤늬즘」 社會의 根底는 王朝의 起源에 依하여 勿論 퍽 動搖되는 것이다. 원문주2▶그러나 아직도 大體로는 農村文化의 傳統이 그대로 남어 있었든 것은 南亞米利加 「잉카」 王朝 下의 「페루」國의 例를 보아도 넉넉히 想像할 수가 있다.[2] 여기서도, 歐羅巴人이 征服하기까지는 「콤뮤늬즘」的 社會였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農村文化의 「콤뮤늬즘」과는 달렀으니, 事實은 全國土는 國王의 所有였고, 國王이 이것을 百姓에게 分配하여 使用케 한 것이다. 이 階級分化 及 支配機關의 縱的 發展이 中國에 있었어도 漸進的으로 되였든 것은, 老子 道德經(第十七, 太上章) 中에도 反影되여 있으니, 거기에는

太上 下知有之 其次親之 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云云의 句가 있다. 여기에, 太上이란, 上古時代를 말하는 것이오. 下란 天下百姓말이오, 之란 君王의 代名詞이다. 원문주3▶그리고 其次란 그 다음 時代란 말이다.[3] 清儒崔述 以後, 只今에는 나도 老子라는 人物의 存在는 퍽 疑心하는 바이나, 그러나 如何間 道德經 中의 이 句節에, 歷史發展過程의 一面이 反影되여 있는 것만은 事實인 것이다.
현대문주4▶석학 동작빈씨는 상대에 벌써 봉건제가 있었고, 5등작제가 있었겠다고 주장하나,[a 4] 나는 그의 주장에 한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단하기를 주저하는 바이다. 갑골문 중에서 공후백자남의 여러 글자를 발견하였고, 또 문헌 고증에 의하여 이것을 빙증하기는 하였으나, 바로 이 문헌 고증에 있어 우리는 고려할 여지를 가진 것이다. 동작빈씨같은 세계적 대학자에게, 이 점에 있어 내가 반대하는 것은 퍽 당돌한 짓임은 사실이다. 나는 그와 같이 고전에 통효한 자는 아니다. 비록 그러나, 바로 이 계급제에 관하여, 고전은 필연히 사적(史的) 사실과는 배치되는 방향으로 윤색을 당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지나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쪽수▶P150-2원문주4▶碩學 董作賓氏는 商代에 벌써 封建制가 있었고, 五等爵制가 있었겠다고 主張하나,[4] 나는 그의 主張에 一意가 있음에도 不拘하고 左袒하기를 躊躇하는 바이다. 甲骨文 中에서 公侯伯子男의 諸字를 發見하였고, 또 文獻 考證에 依하여 이것을 憑證하기는 하였으나, 바로 이 獻 考證에 있어 우리는 考慮할 餘地를 갖인 것이다. 董作賓氏같은 世界的 大學者에게, 이 點있어 내가 反對하는 것은 퍽 當突한 짓임은 事實이다. 나는 그와 같이 古典에 通曉한 者는 아니다. 비록 그러나, 바로 이 階級制에 關하여, 古典은 必然히 史的 事實과는 背馳되는 方向으로 潤色을 當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支那에만 限한것이 아니다.
동작빈씨도 여기서 물론 단연히 주장하는 것은 아니오, 추측함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갑골문 중의 ‘공’자는, 주대와 같은 공작의 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다고 한다.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그뿐 아니라, 복사 중의 ‘남’자도 이 관련에서 논하는 것은 부당한 듯하다. 또 ‘자’자도 동(董)씨의 해석대로 채용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직 ‘후’자와 ‘백’자에 있어서는, 그것이 과연 봉건적 작위였을 가능성이 많다. 비록 그러나, 여기서, 확정적 논단은 아직 불가능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여하간, 여기서 5等爵의 봉건제를 논함은 아직은 그 근거가 부약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 벌써 봉건적 행정구분의 단서가 보이는 것만은, 동작빈씨의 연구에 의하여,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곽말약씨나 만국정씨 모양으로 덮어놓고 공산주의 사회를 운운함은 문제인 것이다. 현대문주5▶그러나 곽씨가 지적한 바와 같이[a 5] 은대 금문 중에는, 주대의 것과 같은 사전, 사노에 관한 기재는 전연 결여한 것은 ex silentio 논단이기는 하나 상대에는 아직 봉건제가 없었던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쪽수▶P151-1董作賓氏도 여기서 勿論 斷然히 主張하는 것은 아니오 推測함에 不過하다. 그리고, 그 自身도, 甲骨文 中의 「公」字는, 周代와 같은 公爵의 位를 指稱하는 것은 아니겠다고 한다. 나의拙見에 依하건대, 그뿐 外라, 卜辭 中의 「男」字 도 이 關聯에서 論하는 것은 不當한 듯하다. 또 「子」字도 董氏의 解釋대로 採用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직 「侯」字와 「伯」字에 있었어는, 그것이 果然 封建的 爵位였을 可能性이 많다. 비록 그러나, 여기서도, 確定的 論斷은 아직 不可能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如何間, 여기서 五等爵의 封建制를 論함은 아직은 그 根據가 薄弱한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商代에 벌써 封建的 行政區分의 端緖가 뵈이는 것만은, 董作賓氏의 硏究에 依하여,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郭沫若氏나 萬國鼎氏 모양으로 덮어놓고 共產主義 社會를 云云함은 問題인 것이다. 원문주5▶그러나 郭氏가 指摘한 바와 같이[5] 殷代 金文 中에는, 周代의 것과 같은 賜田, 賜奴에 關한 記載는 全然 缺如한 것은 ex silentio 論斷이기는 하나 商代에는 아직 封建制가 없었든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다.
‘상’이란 자는 원래는 도시의 보통명사로, 그것이 후에는 상도의 고유명사가 되었고, 또 종래에는 상족의 국명이 된 것이다. 이것은 전절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의 국가가 도시국가에서 시작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 일반은 상왕조의 천하통일이라고 하나, 사실은 상국의 멸망시까지, 그 도시국가적 성질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국가 영역의 범위는, 주대와는 달라서 봉건제의 단서가 다소 보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광대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도시 및 그 주위의 지역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란 아직은 농촌적 도시었으니, 그 주민 중의 대부분은 아직도 농민이였던 것은 넉넉히 엿볼 수가 있다.
쪽수▶P151-2「商」이란 字는 原來는 都市의 普通名詞로, 그것이 後에는 商都의 固有名詞가 되었고, 또 仍終에는 商族의 國名이 된 것이다. 이것은 前節에서도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그들의 國家가 都市國家에서 始作했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 一般은 商王朝의 天下統一이라고 하나, 事實은 商國의 滅亡時까지, 그 都市國家的 性質은 남어 있었든 것이다. 따라서 그 國家 領域의 範圍는, 周代와는 달라서 封建制의 端緖가 多少 뵈임에도 不拘하고, 別로 廣大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一都市 及 其 周圍의 地域에 不過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都市란 아직은 農村的 都市었으니, 그 住民 中의 大部分은 아직도 農民이였든 것은 넉넉히 엿볼 수가 있다.
이 은상농민의 사회상과 관련하여는, 그들의 산업상태 그들의 경제상태도 논하여야 되겠으나, 그것은 내가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는 바이다. 독자는 곽말약씨, 주방포씨의 저서 및 안양발굴보고, 나진옥씨의 저서 기타를 여기에 관하여 참고하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가장 단편적으로 오직 두셋의 사항에 언급하기로만 한다.
쪽수▶P151-3이 殷商農民의 社會相과 關聯하여는, 그들의 產業狀態 그들의 經濟狀態도 論하여야 되겠으나, 그것은 내가 여기서 詳論할 수는 없는 바이다. 讀者는 郭沫若氏, 朱芳圃氏의 著書及, 安陽發掘報告, 羅振玉氏의 著書 其他를 여기에 關하여 參考하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가장 斷片的으로 오직 二三의 事項에 言及하기로만 한다.
은상민의 경제는 벌써 퍽 발전된 농경계단에 도달하였으니, 앙소문화기에 벌써 있었던 도작 외에, 그들은 맥, 직, 서, 화 등 곡물을 경작하였고, 그들에게는 가축으로는 (개는 물론하고), 한우(旱牛), 물소, 말, 코끼리, 양, 돼지, 닭류 등등이 있었는바, 이것은 복사로도 알 수가 있고 또 고고학적으로 실물재료에 의하여도 증명할 수가 있다. 그 외에 또 養蠶의 산업이 상족에게 있었던 것은 갑골문에 의하여도(蠶, 桑, 繭 3자皆有) 알 수가 있는바, 이것이 벌써 선사시대에 있었던 것은 산서 서음촌의 고치의 출토에 의하여 빙증된 바이다. 그들의 목축은, 복사에는 취급된 수가 퍽 적음에 불구하고, 그 범위가 컸던 것은 희생에 바친 소가 1회 수백 두를 계산한 형적이 복사에 보이는 것으로도 넉넉히 상상할 수가 있다. 그리고 또 그들의 문화재가 쌀에서 말이나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잡다하였던 것은 그들의 문화가 각종 문화의 종합이였던 것을 증명하는 것 이다. 쌀이 벌써 그 전에 남에서 들어온 것인 듯하면, 물소도 그 계통은 남쪽에 있을 것이다. 이 남의 관련에 있어서는 소위 ‘견부’도 여기서 지적하여둔다. 이 견부(肩斧, Shulterbeil)를 하이네 겔던박사는 오스트로아시아족(Austroasiaten)의 것이라고 하는바, 그것이 정당한 주장인지는 물론 모르는 바이나, 여하간 이것이 남방문화 영향 관련이 있었음은 사실인 듯하다.
쪽수▶P152-1殷商民의 經濟는 벌써 퍽 發展된 農耕階段에 到達하였으니, 仰韶文化期에 벌써 있었든 稻作 外에, 그들은 麥, 稷, 黍, 禾 等 穀物을 耕作하였고, 그들에게는 家畜으로는 (犬은 勿論하고), 旱牛, 水牛, 馬, 象(코키리), 羊, 豚, 鷄類 等等이 있었는바, 이것은 卜辭로도 알 수가 있고 또 考古學的으로 實物材料에 依하여도 證明할 수가 있다. 其外에 또 養蠶의 產業이 商族에게 있었든 것은 甲骨文에 依하여도(蠶, 桑, 繭 三字皆有) 알 수가 있는바, 이것이 벌써 先史時代에 있었든 것은 山西 西陰村의 繭의 出土에 依하여 憑證된 바이다. 그들의 牧畜은, 卜辭에는 取扱된 數가 퍽 적음에 不拘하고, 그 範圍가 컷든 것은 犧牲에 供한 牛가 一回 數百 頭를 計算한 形跡이 卜辭에 뵈이는 것으로도 넉넉히 想像할 수가 있다. 그리고 또 그들의 文化財가 米에서 馬나 象에 이르기까지, 雜多하였든 것은 그들의 文化가 各種 文化의 綜合이였든 것을 證明하는 것 이다. 米가 벌써 그 前에 南에서 들어온 것인 듯하면, 水牛도 그系統은 南에 있을 것이다. 이南의 關聯에 있어서는 所謂 「肩斧」도 여기서 指摘하여둔다. 이 「肩斧」(Shulterbeil)를 「하이네·깰데언」博士는 「오-스트로아지아」族(Austroasiaten)의 것이라고 하는바, 그것이 正當한 主張인지는 勿論 몰으는 바이나, 如何間 이것이 南方文化 影響 關聯이 있었음은 事實인 듯하다.
상족은 여하간 가장 풍부한 산물을 갖았던 것이며, 그들의 사회에는(페루의 잉카왕국에 산, 백인종 습래 이전의 인디언과 동양(同樣)으로), 빈민층은 없었던 것을 우리는 넉넉히 엿볼 수가 있다. 이 일반적 경제상, 사회상에 예외를 이룬 것은 오직 노예층뿐이였던 것이다.
쪽수▶P152-2商族은 如何間 가장 豐富한 産物을 갖었든 것이며, 그들의 社會에는(「페루」의 「잉카」王國에 산, 白人種 襲來 以前의 「인듸안」과 同樣으로), 貧民層은 없었든 것을 우리는 넉넉히 엿볼 수가 있다. 이 一般的 經濟相, 社會相에 例外를 일운 것은 오직 奴隷層뿐이였든 것이다.
원상족은 중국에 들어오며, 본토민의 여러 종족 속에 섞여 살았던 것이다. 그들이 벌써 본토민의 문화에 융화되어 언어상으로도 ‘중국화’를 한 안양시대에도, 그들의 주위에는 여러 종족이 살었으며, 그들은 또 이 주위의 종족들과 자주 교전하였던 것은, 갑골문이 벌써 증명하는 바이다. 그 주위족 중 가장 저명할 것은 귀방(혹은 토방)과, 강족(羗(羌)족)인 것이다. 강족은 목양족이였었다. 그런 고로 복사에는 ‘羗’이 도유호 중도문3-1.png 도유호 중도문3-2.png 도유호 중도문3-3.png 도유호 중도문3-4.png 등으로 되어있는 바, 이것은 도유호 중도문3-5.png(羊)에다 ‘人’을 더하여놓은, 양인(羊人)을 상징한 것이다. 이 강족은 상족이 제일 심하게 박해한 종족인바, 그것이 모두 동일한 한 종족의 칭이였는지, 이 목양인 중에는 상이한 제종족이 포함되었는지는 모르는 바이다. 서로 피차에 상이한 종족이라도 양을 먹였으면 그것을 모두 강이라고 하였기도 퍽 가능한 것이다. (몽고인이 북지나의 제족을 모두 한인이라고 하였거나, 고대 지나인이 남방 제족을 다 덮어놓고 남만이라고 했듯이). 그것은 여하했던, 여하간 이 강인을 상인은 퍽 미워했고, 그 박해가 심하였는바, 그 추격의 이유는, 크릴(Creel)씨는, 양은 초원에서 풀을 먹으면, 풀뿌리에 닿도록 파들어가며 먹는 버릇이 있어서, 소 먹이는 상민에게는 해가 심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문주6▶이런 예는 북미합중국 서부에도 있었으니 거기서 목양목우민 간에 ‘전쟁’이 있었던 것은 최근의 사실이라고 한다.[a 6] 다소 투기적 견해이나 한 의의가 있다.
쪽수▶P152-3原商族은 中國에 들어오며, 本土民의 諸種族 속에 섞여 살었든 것이다. 그들이 벌써 本土民의 文化에 融化되여 言語上으로도 「中國化」를 한 安陽時代에도, 그들의 周圍에는 여러 種族이 살었으며, 그들은 또 이 周圍의 種族들과 자조 交戰하였든 것은, 甲骨文이 벌써 證明하는 바이다. 그 周圍族 中 가장 著名할 것은 鬼方(或은 土方)과, 羗(羌)族인 것이다. 羗族은 牧羊族이였었다. 그런 故로 卜辭에는 「羗」이 ▶P153-1 도유호 중도문3-1.png 도유호 중도문3-2.png 도유호 중도문3-3.png 도유호 중도문3-4.png 等으로 되여있는 바, 이것은 도유호 중도문3-5.png(羊)에다 「人」을 加하여놓은, 羊人 象徵한 것이다. 이 羌族은 商族이 第一 甚하게 迫害한 種族인바, 그것이 모다 同一한 一種族의 稱이였는지, 이 牧羊人 中에는 相異한 諸種族이 包含되었는지는 모르는 바이다. 서로 彼此에 相異한 種族이라도 羊을 먹였으면 그것을 모다 羌이라고 하였기도 퍽 可能한 것이다. (蒙古人이 北支那의 諸族을 모다 漢人이라고 하였거나, 古代 支那人이 南方 諸族을 다 덮어놓고 南蠻이라고 했듯이). 그것은 如何했던, 如何間 이 羌人을 商人은 퍽 미워했고, 그 迫害가 甚하였는바, 그 追擊의 理由는, 「크리-ㄹ」(Creel)氏는, 羊은 草原에서 풀을 먹으면, 草根에 닫도록 파들어가며 먹는 벌읏이 있어서, 소(牛) 먹이는 商民에게는 害가 甚하였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문주6▶이런 例는 北米合衆國 西部에도 있었으니 거기서 牧羊牧牛民 間에 「戰爭」이 있었든 것은 最近의 史實이라고 한다.[6] 多少 投機的 見解이나 一意가 있다.
은민이 전쟁을 하였으면 부로(俘虜)를 가져오는 것은 필연한 일이다. 그런데 은인은 그러면, 이 부로로 가저온 외인은 여하히 처치하였는가가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답은 이 부로의 살해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죽여버렸던 것이다. 이 사실을 맨 처음 인식한 분은 곽말약씨이 다. 그는 ‘伐’자 상형인 도유호 중도문3-6.png의 의의를 정당히 해득하였던 것이다.
쪽수▶P153-2殷民이 戰爭을 하였으면 俘虜를 가져오는 것은 必然한 일이다. 그런대 殷人은 그러면, 이俘虜로 가저온 外人은 如何히 處致하였는가가 問題이다. 이 問題의 解答은 이 俘虜의 殺害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다 죽여버렸든 것이다. 이 事實을 맨 처음 認識한 분은 郭沫若氏이 다. 그는 「伐」字의 象形인 도유호 중도문3-6.png의 意義를 正當히 解得하였든 것이다.
40px은, 사람을 戈, 즉 斧(안데르손씨의 견해에 의하여 斧라고 함. 즉 도유호 중도문3-8.png형의 기구)로 살해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현대문주7▶곽씨의 이 견해에 반대하여, 동작빈씨는 (羅振玉씨의 武舞설 모양으로) ‘伐’은 고전에 의하건대, 무기 ‘戈’를 가지고 추는 일종의 무도라고 하며, 복사에 ‘伐’자 하에 강인 몇 명의 사람 수가 쓰여 있으면 그것은, 그만큼한 수의 강인이 병무를 연주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나,[a 7] 그것은 부당한 주장이다. 크릴씨도 지적한 바와 같이 典籍 중에 伐이 무용의 일종으로 되어 있으면, 그것은 오직 과거의 인사(人祠, Mense henopfer)의 한 잔영예 불과한 것이다. 처음에는 인사(살인제) 집행시에, 그 의식의 하나로 무용을 병주하였던 것이다. 후에 인사는 없어젔으나, 무용만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쪽수▶P153-340px은, 사람을 戈, 即 斧(「안데르쏜」氏의 見解에 依하여 斧라고 함. 即 도유호 중도문3-8.png形의 器具)로 殺害함을 象徵하는 것이다. 원문주7▶郭氏의 이 見解에 反對하여, 董作賓氏는 (羅振玉氏의 武舞說 모양으로) 「伐」은 古典에 依한건대, 武器 「戈」를 가지고 추는 一種의 舞蹈라고 하며, 卜辭에 「伐」字 下에 羌人 幾人의 人數가 씨여 있으면 그것은, 그만큼한 數의 羌人이 兵舞를 演奏하였음을 意味한다고 하나,[7] 그것은 不當한 主張이다. 「크리-ㄹ」氏도 指摘한 바와 같이 典籍 中에 伐이 舞踊의 一種으로 되여 있으면, 그것은 오직 過▶P154-1去의 人祠(Mense henopfer)의 一殘影예 不過한 것이다. 처음에는 人祠(殺人祭) 執行時에, 그 儀式의 하나로 舞踊을 併奏하였든 것이다. 後에 人祠는 없어젔으나, 舞踊만이 남어있게 된 것이다.
伐의 갑골문 <이미지>이 인사를 의미하였다는 대에 동씨가 반대한 것은, 고고학적 증명이 없었던들, 혹 허용할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34년 추기의 발굴 이후, 동씨의 주장이 부당한 것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 것이다. 1934년 춘기에 처음 후강의 어느 도굴 당한 지 오랜 고총에서 인사의 형적을 다소 볼 수가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 고총이 너무나 심하게 도굴을 당하였던 만큼, 적극적 논단은 아직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년 추기에, 상대에 속하는 인사의 유골을 구체적으로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 1935년 춘기에는 근 천 개의, 두부가 없는, 희생에 바친 인간의 유골을 출토한 것이다. 그 전년의 것과 합하여 전부 천여 명의, 희생에 제공한 자의 유골(1935년 춘기 공작 종결시) 계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관하여 크릴씨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斷頭 當한 희생자는 모두, 원수 이북의 상총 지대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특수한 갱혈 중에 매장하였었다. 인사에 제공한 희생자는 복사 중에는 보통 십진수 단위로 지칭하였는바 이것은, 그 유골들이 언제나 10명씩 한 갱혈에 매장된 사실과 합치하는 바이다. 사체는 장방형의 갱혈에 매장되었던 바, 때로는 손목이 결박하였듯이 등에 교차가 되어있다. 두골은 분리하여, 그가의 방형 갱혈에 매장되어있다. 두골은 모두 북방을 향한 채, 정렬로 종립하여 갱혈에 매장되었다. 나는 이 두골이나 유골의 다수를 발굴 당시에 목격하였었다.』
“All these decapitated victims have been found in the general area of the Shang cemetery north of the Huan River, but they are buried in special pits. Human sacrificial victims are usually named, in the oracle bone inscriptions, in multiples of ten, and this corresponds with the fact that in every case skeletons are buried in pits which contain ten individuals. The bodies are buried in rectangular pits; sometimes the wrists are crossed behind the back, as if they had been tied. The skulls are buried separately, in square pits near by. Ten skulle are buried in a pit, standing vertically in regular rows, all looking toward the north, I have seen many of these skulls and skeletons in the process of being excavated.” (H. G. Creel: The Birth of China, London 1936, p. 212)

쪽수▶P154-2伐의 甲骨文 <이미지>이 人祠를 意味하였다는 대에 董氏가 反對한 것은, 考古學的 證明이 없었든들, 或 容許할 餘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一九三四年 秋期의 發掘 以後, 董氏의 主張이 不當한 것은 더 疑心할 餘地가 없게 된 것이다. 一九三四年 春期에 처음 後岡의 어나 盜掘 當한 지 오랜 古塚에서 人祠의 形跡을 多少 볼 수가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 古塚이 너무나 甚하게 盜掘을 當하였든 만큼, 積極的 論斷은 아직 不可能했든 것이다. 그러나 同年 秋期에, 商代에 屬하는 人祠의 遺骨을 具體的으로 發見하였든 것이다. 그 다음 一九三五年 春期에는 近 千個의, 頭部가 없는, 犧牲에 供한 人間의 遺骨을 出土한 것이다. 그 前年의 것과 合하여 全部 千餘 名의, 犧牲에 提供한 者의 遺骨(一九三五年 春期 工作 終決時) 計算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關하여 「크리-ㄹ」氏는 如左히 말한다.

『斷頭 當한 犧牲者는 모다, 洹水 以北의 商塚 地帶에서 發見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特殊한 坑穴 中에 埋葬하였었다. 人祠에 提供한 犧牲者는 卜辭 中에는 普通 十進數 單位로 指稱하였는바 이것은, 그 遺骨들이 언제나 十名式 一坑穴에 埋葬된 事實과 合致하는 바이다. 死體는 長方形의 坑穴에 埋葬되였는 바, 때로는 손목이 結縛하였듯이 등(背後)에 交叉가 되여있다. 頭骨은 分離하여, 그가의 方形 坑穴에 埋葬되여있다. 頭骨은 모다 北方을 向한 채, 整列로 縱立하여 坑穴에 埋葬되었다. 나는 이 頭骨이나 遺骨의 多數를 發掘 當時에 目擊하였었다.』
“All these decapitated victims have been found in the general area of the Shang cemetery north of the Huan River, but they are buried in special pits. Human sacrificial victims are usually named, in the oracle bone inscriptions, in multiples of ten, and this corresponds with the fact that in every case skeletons ▶P155-1are buried in pits which contain ten individuals. The bodies are buried in rectangular pits; sometimes the wrists are crossed behind the back, as if they had been tied. The skulls are buried separately, in square pits near by. Ten skulle are buried in a pit, standing vertically in regular rows, all looking toward the north, I have seen many of these skulls and skeletons in the process of being excavated.” (H. G. Creel: The Birth of China, London 1936, p. 212)

부로(俘虜)로 잡어온 적을 이렇게 살육한 것은, 그 원인이 당시 사회가 아직 노동력의 증가를 필요로 안 함에 있었다고 한다. 즉 불필요한 잉여인구의 처리방법으로 이렇게 살육하였다고 학자들은 지금까지 주장하여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보다 좀 더 과거에 소급되는 문화 관계에도 적지 않은 원인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일정한 종교 관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곽말약씨 또한 어느 정도까지 인식한 바이다. 즉 상인은 그들이 그들 이전에 온 족에게서 전승한, 인사의 습속을 이 살육에 의하여 표현하였음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 종교적 전통이 유일의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량적으로 잡어온 적을 제거할 필요에 몰녀서 그들은 이 종교의식과는 하등 관련이 없이도, 이 살육은 단행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현대문주8▶八日辛亥允戈伐二千六百五十六人

이라는 복사구가 증명하는, 다량의 것도 있었던 것이다.[a 8] 그러나 부로 처치방법이 유일의 원인은 아니였던 것은, 그들이 희생에 제공할 인재가 없을 시는, 인재를 획득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던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 즉 그들은 희생용의 인간을 외족에게서 붙잡아 오기 위하여 ‘두수’(頭狩, head hunting, Kopfjagd)를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고 특히 강인 대상으로 한 것이 많던 것이다. 그리하여 복사 중에는 강인 수획의 결과 여부를 복문의 대상으로 한 것이 허다한 것이다. 이것은 즉 두수 및 이것과 관련이 된 인사의 전통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오, 단순한 부로 처치의 수단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식인주의와도 직접 관련된 것으로, 인사, 두수, 식인육은 동일한 문화 현상의 여러 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필연 상족이 중국 땅에 들어온 후 ‘본토민’에게서 배운 ‘재주’로, 벌써 앙소문화 이전, 축돈문화에 고유한 것일 것이다. 과연 상대에는 인육식용도 성행한 것이었으니, 소위 주왕 수의 인육기호는 결코, (유가의 주장과 같이) 수 일인에 한한 만풍은 아니였던 것이다. 현대문주9▶아니, 이 만풍은 중국에는 현재도 전연 소멸한 것은 아니니, 이것은 상원척장(桑原隲藏) 박사도 상론한 바이다.[a 9]
쪽수▶P155-2俘虜로 잡어온 敵을 이렇게 殺戮한 것은, 그 原因이 當時 社會가 아직 勞働力의 增加를 必要로 않함에 있었다고 한다. 即 不必要한 剩餘人口의 處理方法으로 이렇게 殺戮하였다고 學者들은 只今까지 主張하여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보다 좀 더 過去에 溯及되는 文化 關 係에도 적지 않은 原因이 있었음을 看過했어는 않된다. 거기에는 一定한 宗敎 關聯이 있었으니, 그것은 郭沫若氏 亦 어나 程度까지 認識한 바이다. 即 商人은 그들이 그들 以前에 온 族에게서 傳承한, 人祠의 習俗을 이 殺戮에 依하여 表現하였음에 不過한 것이다. 勿論 이 宗敎的 傳統이 唯一의 原因이었든 것은 아니다. 大量的으로 잡어온 敵을 除去할 必要에 몰녀서 그들은 이 宗敎儀式과는 何等 關聯이 없이도, 이 殺戮은 斷行치 않을 수 없었든 것이다. 그렇기에,

원문주8▶八日辛亥允戈伐二千六百五十六人

이라는 卜辭句가 證明하는, 多量的의 것도 있었든 것이다.[8] 그러나 俘虜 處致方法이 唯一의 原因은 아니였든 것은, 그들이 犧牲에 提供할 人材가 없을 時는, 人材를 獲得하기 爲하여 「戰爭」을 하였던 事實이 證明하는 바이다. 即 그들은 犧牲用의 人間을 外族에게서 붓잡어 오기 爲하여 「頭狩」(head hunting, Kopfjagd)를 하였든 것이다. 그것은 그리고 特히 羌人 對象으로 한 것이 많든 것이다. 그리하여 卜辭 中에는 羗人 狩獲의 結果 與否를 卜問의 對象으로 한 것이 許多한 것이다. 이것은 即 頭狩 及 이것과 關聯이 된 人祠의 傳統에 그 原因이 있는 것이오, 單純한 俘虜 處致의 手段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食人主義와도 直接 關聯된 것으로, 人祠, 頭狩, 食▶P156-1人肉은 同一한 文化 現象의 諸面에 不過한 것이다. 그런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必然 商族이 中國 땅에 들어온 後 「本土民」에게서 배운 「才操」로, 벌써 仰韶文化 以前, 畜豚文化에 固有한 것일 것이다. 果然 商代에는 人肉食用도 盛行한 것이었으니, 所謂 紂王受의 人肉嗜好는 決코, (儒家의 主張과 같이) 受 一人에 限한 蠻風은 아니였든 것이다. 원문주9▶아니, 이 蠻風은 中國에는 現在도 全然 消滅한 것은 아니니, 이것은 桑原隲藏 博士도 詳論한 바이다.[9]
인사, 두수, 식인육은 이렇게, 신재배문화 축돈문화에서 출발한 문화현상이다. 그런데 그레브너씨는 두수는 구재배문화의 두골 숭배의 발전한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러나 하이네 겔던교수는, 이 두수를 후인도를 경유하여 남양 도서세계에까지 전한 것은 오스트로네시아족으로, 그것은 원래는 유럽 동남부에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유럽에 있어서는 이것이 그리스의 고대에는 다뉴브강 하류지대에서 남부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던 것은 사적(史籍)이 증명하는 바로, 그것은 벌써 그 퍽 이전에 있었던 것이다. 하이네 겔던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또, 크로아티아족(Kroaten)은 최근까지 행한 만습이니 그들은 전번 제일차대전 바로 얼마 전, 즉 1912년을 최후로 이것을 행하였던 것이다. 이 풍습은 아메리카로도 갔으니, 南米의 아마존강 일대는 아직도 식인도, 인두포수의 천지인 것이다. 「지바로」족(Jivaro) 은 그 중 가장 심한 자의 하나이다. 아니 현대어 카니발리즘(Cannibalism)은 남미대륙 동북부의 대식인족 카리브(Kariben 또는 Karaiben)의 고유명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인사는, 아니, 중부 아메리카 고급문화에 있어서는 그 종교의식상 가장 중요한 지위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아즈텍」족의 것은 그 중에 저명한 자이다. 이 두수 및 인사가 유럽 동남부에서부터 전아시아(고대의)를 것고, 후인도를 거처, 남양에 이르기까지 퍼졌고 또 멀리는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에까지 유전한 일대 문화현상이기는 하나 그 요람지를 바로 유럽 동남부에 찾는 하이네 겔던 교수의 학설에는, 나는 좌단할 수가 없다. 현대문주10▶그보다도, 이 두수는 아시아대륙 동남부에서 기원된 것으로, 그것이 유럽에 온 것은, 항공주가(pile dwelling, Pfahlbau) 및 축돈을 전한, 몽고인종(황인종)계의 신재배문화족의 이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a 10] 물론 그것이 유럽에서 다시 동방으로 반류하였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하면 활판술의 발명국인 조선에 서양인의 활판술이 다시 전래한 것과 사세가 동일한 것이다…여하간 오스트로네시아족(Austronesier)의 동래 이전에, 그것은 벌써 후인도 (Hinterindien) 지대에는 이미 존재한 것으로, 동방에 넓이 전파된 축돈문화는 이 두수 및 인사와 관련이 퍽 깊았던 것일 것이다.
쪽수▶P156-2人祠, 頭狩, 食人肉은 이렇게, 新栽培文化 畜豚文化에서 出發한 文化現象이다. 그런대 「그렙너」氏는 頭狩는 舊栽培文化의 頭骨 崇拜의 發展한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러나 「하이네·껠데언」敎授는, 이 頭狩를 後印度를 經由하여 南洋島嶼 世界에까지 傅한 것은 「오-스트로네지아」 族으로, 그것은 原來는 歐羅巴 東南部에 關聯된 것이라고 한다. 歐羅巴에 있어서는 이것이 希臘의 古代에는 단늄江 下流地帶에서 南部 露西亞에 일으기까지 盛行하였든 것은 史籍이 證明하는 바로, 그것은 벌써 그 퍽 以前에 있었든 것이다. 「하이네 껠데언」敎授의 말에 依하면 이것은 또, 「크로아-트」族(Kroaten)은 最近까지 行한 蠻習이니 그들은 前番 第一次大戰 바로 얼마 前, 即 一九一二年을 最後로 이것을 行하였든 것이다. 이 風習은 亞米利加로도 갔으니, 南米의 「아마조나」河 一帶는 아직도 食人徒, 人頭捕手의 天地인 것이다. 「지바로」族(Jivaro) 은 그 中 가장 甚한 者의 하나이다. 아니 現代語 「카늬발리즘」(Cannibalism)은 南米大陸 東北部의 大食人族 「카립」(Kariben 又는 Karaiben)의 固有名詞에서 由來한 語이다. 人祠는, 아니, 中部 亞米利加 高級文化에 있어서는 그 宗敎儀式上 가장 重要한 地位를 占領하였든 것이다. 「아즈텍」族의 것은 그 中에 著名한 者이다. 이 頭狩 及 人祠가 歐羅巴 東南部에서부터 前亞細亞(古代의)를 것고, 後印度를 거처, 南洋에 일으기까지 퍼졌고 또 멀니는 太平洋을 건너, 亞米利加에까지 流轉한 一大 文化現象이기는 하나 그 搖籃地를 바로 歐羅巴 東南部에 찾는 「하이네·깰데언」 敎授의 學說에는, 나는 左袒할 수가 없다. 원문주10▶그보다도, 이 頭狩는 亞細亞大陸 東南部에서 起源된 것으로, 그것이 歐羅巴에 온 것은, 杭工住家(pile dwelling, ▶P157-1Pfahlbau) 及 畜豚을 傳한, 蒙古人種(黃人種)系의 新栽培文化族의 移動과 關聯이 있을 것이다.[10] 勿論 그것이 歐羅巴에서 다시 東方으로 返流하였을 可能性은 있는 것이다. 그것은 例하면 活版術의 發明國인 朝鮮에 西洋人의 活版術이 다시 傳來한 것과 事勢가 同一한 것이다…如何間 「오-스트로네지아」族(Austronesier)의 東來 以前에, 그것은 벌써 後印度 (Hinterindien) 地帶에는 이미 存在한 것으로, 東方에 넓이 傳派된 畜豚文化는 이 頭狩 及 人祠와 關聯이 퍽 깊었든 것일 것이다.
빈 대학 선사학연구소에서 시험한 연구보고 당시, 나는 하이네 겔던 교수의 학설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두수 및 인사를 채도문화와 관련시키려고 하였었다. 즉 채도문화의 전래와 함께 그것은 중국에 온 것일 듯하다고 하였었다. 현대문주11▶그리고 그 고고학적 재료로는, 안데르손씨가 사과둔, 동굴에서, 채도와 함께, 인사의 형적을 보게 된 사실을 지적하였었다.[a 11] 물론 그때도 나는 오직 일종의 추측에 불과한 것으로 하였을 따름이다. 그때, 거기서 나는 또 伐자의 고음이 붵나 붤인 것을 들었고, 일본어상의 발음은 ツ이나 조선어상의 종음은 ㄹ인데, 여기서 조선어 일반이 원음에 더 근사하고, 또 한문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더 오래 전임을 고려하고, 붤 편이 붵(puʌtㅡ puət)보다 더 고음일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리고 또 이 puʌl(puəl)은 그리스어 pólemos (전쟁)와 관련되는 듯하다고 하였다. 그리스어의 pólemos는 자전에 의하면, pelemizo 혹은 pallo에서 유래한 자로 pelemizo나 pallo는 그 어근이 원래는 pal이나 pel이라고 한다. pelemizo 또는 pallo는 schütteln, schwingen, schleudern, werfen 등, 즉 ‘흔든다’, ‘둘은다’, ‘팔매친다’, ‘던진다’ 등을 의미하는 자로, 이것이 종래에는 ‘전쟁’이 된 것이다. 여기서 ‘던진다’는 것은 창(槍)같은 무기를 던지는 것으로, 다철어인 그리스어에 있어서는 pal이나 pel이 pólemos로까지 전개하였으나, 단철어인 중국어에 있었어는 pual, puo, pl이 그냥 단철어로 남아 있은 것이다(벌의 현 북방음은 fa). 그러나 여기서도 벌(伐)은 종래에는 전쟁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어의 원어근의 pal이나 pel도 원래는 두수시의 투창 등을 의미한 것이겠음을 상상할 수가 있다. 이 모든 점을 고찰하고, 나는 그때 伐이나 polenos는 원래 동일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후자도 두수에 그 근원이 있지나 않을가 추측하였었다. 거기서 나는 또, 라틴어의 belluun(전쟁)도, 그것이 일반이 논하듯이 duellum(Zweikampf)에서 轉訛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어근 이 pal이나 pel일 듯하다고 하였었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중국의 두수는 채도문화와 함께 서방에서 온,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나 아닐가 하였었다. 나는 그 후 멩게스군의 서신에서, 伐자의 t 종음 및 l, r 종음에 관하여, 1, r(流滑종음)이 t로 변하는 것보다도, 그와는 반대로, t가 ], r로 변하는 것이 보통인대, 이것은 Rhotacismus라고 하는 것으로 언어학자 간에는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후 동일한 의견을 좀 더 들어보았었다. 멩게스군의 말도 그랬고, 또 일반법則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나는 지금에도 l, r 종음(유활종음)이 t보다 더 오랜 것은 퍽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조선어에 t 종음이 결여하였으면 문제는, t가 l로 와한 것이라고 간단히 해답을 얻을 수가 있으나, 조선어에는 t 종음이 있는 것은 한자의 1, r 종음이 조선에 와서 비로소 된 것이 아니오, 벌써 그 전에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현대문주12▶따라서, 스웨덴의 칼그렌(Karlgren) 교수가 伐이나 發이나 의 종음을 모두 t로 한 것은, 덮어놓고 가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a 12] 이 모든 점을 종합하고 보면, 伐이나, 「폴레모쓰」가 동일한 어근에서 출발하였고, 또 「폴레모쓰」도 伐과 동양(同樣)으로 「대갈산녕」(두수)이 발전한 것이기도 쉬운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그랬다고 「대갈산녕」 두수의, 요람지가 유럽편에 있다는 이유는 없다. 그것은 아시아 동남에서, 전아시아 (Vorderasien)편으로 갔던 것이 다시 그리스으로(pal, pel이라는 어나, 그 후신 인 pelemizo 나 pallo라는 어와 함께)까지 갔았던 것일런지도 모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과둔의 인사형적은, 그것이 채도에 의하여 전래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근거가 박약한 것을 나는 이제는 고백치 않을 수가 없다. 중국 채도문화에 인사, 두수가 있었음을 나는 상정하는 바이나 그러나 그것은 채도 이전의 것으로 채도문화에 전승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157-2維也納大學 先史學硏究所에서 試驗한 研究報告 當時, 나는 「하이네·껠데언」 敎授의 學說의 影響을 받어, 中國의 頭狩及人祠를 彩陶文化와 關聯시킬냐고 하였었다. 即 彩陶文化의 傳來와 함께 그것은 中國에 온 것일 듯하다고 하였었다. 원문주11▶그리고 그 考古學的 材料로는, 「안데르쏜」氏 가 沙鍋屯, 洞窟에서, 彩陶와 함께, 人祠의 形跡을 보게 된 事實을 指摘하였었다.[11] 勿論 그때도 나는 오직 一種의 推測에 不過한 것으로 하였을 따름이다. 그때, 거기서 나는 또 「伐」字의 古音이 「붵」나 「붤」인 것을 들었고, 日本語上의 發音은 「ツ」이나 朝鮮語上의 終音은「ㄹ」인대, 여기서 朝鮮語 一般이 原音에 더 近似하고, 또 漢文이 朝鮮에 들어온 것은 더 오래 前임을 考慮하고, 「붤」便이 「붵」(puʌt puət)보다 더 古音일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리고 또 이 puʌl(puəl)은 希臘語 pólemos(戰爭)와 關聯되는 듯하다고 하였다. 希臘語의 polenos는 字典에 依하면, pelemizo 或은 pallo에서 由來한 字 로 pelemizo나 pallo는 그 語根이 原來는 pal이나 pel이라고 한다. pelemizo 又는 pallo는 schütteln, schwingen, schleudern, werfen 等, 即 「흔든다」, 「둘은다」 「팔매친다」 「던진다」 等을 意味하는 字로, 이것이 仍終에는 「戰爭」이 된 것이다. 여기서 「던진다」는 것은 槍같은 武器를 던지는 것으로, 多綴語인 希臘語에 있어서는 pal이나 pel이 pólemos로까지 展開하였으나, 單綴語인 中國語에 있었어는 pual, puo, pl이 그냥 單綴語로 남어 있은 것이다(伐의 現 北方音은 fa). 그러 나 여기서도 伐은 仍終에는 戰爭을 意味하게 된 것이다. 希臘語의 原語根의 pal이나 pel도 原來는 頭狩時의 投▶P158槍 等을 意味한 것이겠음을 想像할 수가 있다. 이 모든 點을 考察하고, 나는 그때 「伐」이나 polenos는 原來 同一語根에서 나온 것으로, 後者도 頭狩에 그 根源이 있지나 않을가 推測하였었다. 거기서 나는 또, 羅典語의 belluun(戰爭)도, 그것이 一般이 論하듯이 duellum(Zweikampf)에서 轉訛한 것이 아니라 事實은 그 語根 이 pal이나 pel일 듯하다고 하였었다. 그리고 이것은 同時에, 中國의 頭狩는 彩陶文化와 함께 西方에서 온,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나 아닐가 하였었다. 나는 그 後 「맹게쓰」君의 書信에서, 伐字의 t 終普 及 l, r 終音에 關하야, 1, r(流滑終音)이 t로 變하는 것보다도, 그와는 反對로, t가 ], r로 變하는 것이 普通인대, 이것은 Rhotacismus라고 하는 것으로 言語學者 間에는 잘 알려 진 事實이라고 하는 消息을 들었다. 나는 그 後 同一한 意見을 좀 더 들어보았었다. 「멩게쓰」君의 말도 그랫고, 또 一般法則이 그럼에도 不拘하고, 그러나 나는 只今에도 l, r 終音(流滑終音)이 t보다 더 오랜 것은 퍽 可能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朝鮮語에 t 終音이 缺如하였으면 問題는, t가 l로 訛한 것이라고 簡單이 解答을 얻을 수가 있으나, 朝鮮語에는 t 終音이 있는 것은 漢字의 1, r 終音이 朝鮮에 와서 비로소 된 것이 아니오, 벌써 그 前에 있었든 것을 알 수가 있다. 원문주12▶따라서, 瑞典의 「카-ㄹ 그렌」(Karlgren) 敎授가 「伐」이나 「發」이나 의 終音을 모 다 t로 한 것은, 덮어놓고 可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12] 이 모든 點을 綜合하고 보면, 「伐」이나, 「폴레모쓰」가 同一한 語根에서 出發하였고, 또 「폴레모쓰」도 「伐」과 同樣으로 「대갈산녕」(頭狩)이 發展한 것이기도 쉬운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그랬다고 「대갈산녕」 頭狩의, 搖籃地가 歐羅巴便에 있다는 理由는 없다. 그것은 亞細亞 東南에서, 前亞細亞 (Vorderasien)便으로 갔든 것이 다시 希臘으로(pal, pel이라는 語나, 그 後身 인 pelemizo 나 pallo라는 語와 함께)까지 갔었든 것일런지도 몰을 것이다. 그뿐 外라, 沙鍋屯의 人祠形跡은, 그것이 彩陶에 依하야 傳來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根據가 薄弱한 것을 나는 인제는 告白치 않을 수가 없다. 中國 彩陶文化에 人祠, 頭狩가 있었음을 나는 想定하는 바▶P159-1이나 그러나 그것은 彩陶 以前의 것으로 彩陶文化에 傳承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지나의 인사 및 두수가 그 근원은 어디에 있었던, 여하간 이것은 축돈문화, 신재배문화와 직접 관련된 것이며 원상족이 이래하기 벌써 전에 지나 내지에는 있었던 것으로 상족은 그것을 ‘본토민’에게서 전승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침래하는 족은 들어오는 족족 동화하여 버리는, 지나사의 한 특징이 벌써 그 엣날에도 있었던 것을 였볼 수가 있다.
쪽수▶P159-2支那의 人祠及頭狩가 그 根源은 어대에 있었던, 如何間 이것은 畜豚文化, 新栽培文化와 直接 關聯된 것이며 原商族이 移來하기 벌써 前에 支那 內地에는 있었든 것으로 商族은 그것을 「本土民」에게서 傳承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現在에 일으기까지, 侵來하는 族은 들어오는 족족 同化하야 벌이는, 支那史의 一特徵이 벌서 그 녯날에도 있었든 것을 였볼 수가 있다.
전쟁의 부로가 이렇게 살육을 당하면 그 사회상에 파급하는 영향은 여하하였는가? 아니, 그것은 상대의 국체 그것과 직접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 사회상의 영향이 컸음은 가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상대의 국가는 주대의 그것과는 달라서, 노예제의 기저 위에 섰던 것은 아닌 것이다. 상대에 노예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나, 그것은 아직 국가의 근저는 아니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곽말약씨만 아니라 크릴씨도 『그들에게는 노예가 있었으나, 대량적으로 노예를 소유하는 제도는, 암만 해야, 아직은 없었던 것이다.』(“They had slaves, but they had apparently not worked out a system for taking care of great numbers of slaves." Creel: a.a. o.p.210)
쪽수▶P159-3戰爭의 俘虜가 이렇게 殺戮을 當하면 그 會社上에 波及하는 影響은 如何하였는가? 아니, 그것은 商代의 國體 그것과 直接 關係가 있었든 것이다. 그 社會上의 影響이 컷슴은 可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即, 商代의 國家는 周代의 그것과는 달라서, 奴隸制의 基底 우에 섯든 것은 아닌 것이다. 商代에 奴隸가 없었든 것은 勿論 아니나, 그것은 아직 國家의 根底는 아니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郭沫若氏만 아니라 「크리-ㄹ」氏도 『그들에게는 奴隸가 있었으나, 大量的으로 奴隸를 所有하는 制度는, 암만 해야, 아직은 없었든 것이다.』(“They had slaves, but they had apparently not worked out a system for taking care of great numbers of slaves." Creel: a.a. o.p.210)
비록 노예제가 아직 확립치는 않았으나 상대에 이미 노예가 있었던 것은, 곽말약씨가 벌써 간파한 바이다. 이 노예는 그리고 근본적으로 부로(俘虜)에서 출발한 것이다. 곽씨는 ‘俘’, ‘奚’, ‘奴’ 및 ‘僕’ 등 자의 갑골문상의 상형을 정당히 해석하였었다. 현대문주13▶이것이 부로에서 기원된 것은 곽씨가 이미 간파한 바이다.[a 13] 나는 여기서 중언을 아낀다. ‘妾’이나 ‘臣’ 등 글자도 동일한 관련에서 설명하게 되는바 나는 여기서 곽씨가 설명을 생략한 ‘臣’자 에 조금 사족을 가해보겠다.
쪽수▶P159-4비록 奴隸制가 아직 確立치는 않었으나 商代에 임의 奴隸가 있었든 것은, 郭沫若氏가 벌써 看破한 바이다. 이 奴隸는 그리고 根本的으로 俘虜에서 出發한 것이다. 郭氏는 「俘」, 「奚」「奴」 及 「僕」 等 字의 甲骨文上의 象形을 正當히 解釋하였었다. 원문주13▶이것이 俘虜에서 起源된 것은 郭氏가 임의 看破한 바이다.[13] 나는 여기서 重言을 約한다. 「妾」이나 「臣」 等 字도 同一한 關聯에서 說明하게 되는바 나는 여기서 郭氏가 說明을 省略한 「臣」字 에 조금 蛇足을 加해보겠다.
‘臣’의 갑골문자는 처음에는 도유호 중도문3-9.png이였다. 그것이 후에는 전도하여 도유호 중도문3-10.png로 된 것이다. 그런데 크릴씨의 설명에 의하면 부로(俘虜)는 처음 두수(頭수)에 의하여 그 수를 계산하였던 것이다. 두(頭)는 나중에는 목(目)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로(俘虜) 1명 을 1두(頭)라고 하는 대신에 1목(目)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목’은 나중에는 부로(俘虜) 그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목’으로 부로 자체가 표시되게 되자 ‘목’의 위치를 변경하여 도유호 중도문3-11.png도유호 중도문3-12.png으로 되었던 것이다. 현대문주14▶이렇게 신(臣)이란 즉 부로에서 유래한 노예이다.[a 14] 그것은 한 편 국왕의 신변에서 종사한 노예까지도, 원래는 외래의 부로였고, 상족 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이니 이것으로도 우리는 상대의 사회 구성이, 얼마나 지평선적, 횡적의 것이였던가를 넉넉히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쪽수▶P159-5「臣」의 甲骨文字는 처음에는 도유호 중도문3-9.png이였다. 그것이 後에는 轉倒하야 ▶P160-1도유호 중도문3-10.png로 된 것이다. 그런대 「크리-ㄹ」氏의 說明에 依하면 俘虜는 처음 頭數에 依하야 그 數를 計算하였든 것이다. 頭는 乃終에는 目으로 밖웠든 것이다. 그리하야 俘虜 一名 을 一頭라고 하는 代身에 一目이라고 하였든 것이다. 이 「目」은 乃終에는 俘虜 그것을 意味하게 된 것이다. 그런대 「目」으로 俘虜 自體가 表示되게 되자 「目」의 位置를 變更하야 도유호 중도문3-11.png도유호 중도문3-12.png으로 되였든 것이다. 원문주14▶이렇게 臣이란 即 俘虜에서 由來한 奴隷이다.[14] 그것은 一方 國王의 身邊에서 從事한 奴隷까지도, 原來는 外來의 俘虜엿고, 商族 內에서 由來한 것이 아님을 暗示하는 것이니 이것으로도 우리는 商代의 社會 構成이, 얼마나 地平線的, 橫的의 것이였든가를 넉넉히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노예문제에 관하여 나는 아직 자세한 연구를 못하였으니, 결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이 노예제는 은말에 이르러는, 그 범위가 상당히 컸을 것이다. 벌써 거기서는 농노층도 일정한 카스트를 형성하였던 듯한 바, ‘耤臣’ 혹은 ‘小耤臣’이란 것은 서중서씨도 말하듯이, 바로 이 농노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노예제도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부로 희생이 변하여 그것의 일부가 노예로 사용이 되었으면, 그 사용의 이로움을 알게됨에 따라 살육 대신에 노예사용 범위는 점점 더 확장하여 갔던 것이다. 그러나 사세가 이렇게 되면, 그 반면에 그들의 사회는 동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상 사회는 어느덧 모순의 와중에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 내적 모순은 은말에는 가장 심하였으니, 그 사회상이 얼마나 난잡하였던가는 상서나 그 외의 고적 중에 보이는 주왕 수의 ‘악정’(!)에 관한 기록에도 반영되어있는 것이다. 무왕 발이 은국을 정복한 것도, 사실은 은상 사회의 그 내부적 모순을 이용하여 한 것이다. 이렇게 노예제의 대두는 벌써 은국 멸망의 단서였던 것이다. 그것도 또한 역사발전 변증법의 한 작란이였다.
쪽수▶P160-2이 奴隷問題에 關하야 나는 아직 仔細한 硏究를 못하였으니, 決定的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이 奴隷制는 殷末에 일을어는, 그 範圍가 相當히 컷을 것이다. 벌써 거기서는 農奴層도 一定한 「카스트」를 形成하였 듯한 바, 「耤臣」 或은 「小耤臣」이란 것은 徐中舒氏도 말하듯이, 바로 이 農奴였을 것이다. 그런대 이 奴隸制도 漸進的으로 發展하였든 것이다. 俘虜犧牲이 變하야 그것의 一部가 奴隸로 使用이 되였으면, 그 使用의 利를 알게됨을 딸아 殺戮 代身에 奴隸使用 範圍는 漸々더 擴張하여 갔든 것이다. 그러나 事勢가 이렇게 되면, 그 反面에 그들의 社會는 動搖하기 始作했든 것이다. 殷商 社會는 어느덧 矛盾의 渦中에 끌녀 들어갔든 것이다. 그 內的 矛盾은 殷末에는 가장 甚하였으니, 그 社會相이 얼마나 亂雜하였든가는 尙書나 其外의 古籍 中에 뵈이는 紂王受의 「惡政」(!)에 關한 記錄에도 反되여있는 것이다. 武王發이 殷國을 征服한 것도, 事實은 殷商 社會의 그 內部的 矛盾을 利用하야 한 것이다. 이렇게 奴隸制의 臺頭는 벌써 殷國 滅亡의 端緒였든 것이다. 그것도 또한 歷史發展 辯證法의 한 작란이였다.
은상 사회상과 관련하여, 여기서 나는 가장 간단히 그들의 가족제도에 언급하려고 한다.
쪽수▶P160-3殷商 社會相과 關聯하야, 여기서 나는 가장 簡單히 그▶P161-1들의 家族制度에 言及할냐고 한다.
은상민의 가족제를, 나는 일찍이 곽말약씨 및 주방포씨의 예를 따라, 소위 푸날루아 가족제라고 하고, 거기에는 아직 부권제는 없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것은 전연 오해였던 것을 나는 고백치 않을 수가 없다. 지나 고대에 푸날루아 가족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곽씨가 논한 아황, 여황, 여영과 순, 상에 관한 전설에는 과연 이 푸날루아 혼인제의 사실이 반영되어 있을런지도 모를 것이다. 그뿐 아니라 ‘父’라는 명사가 친부만 아니라, 부와 상비할 연장 일반에 적용된 것, 즉 그 등급적 칭호도, 그것이 혹 이 푸날루아 가족제, 혼인제와 역사적 관련이 있었기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상대에 이르러는, 어느 점으로 보던지, 이 푸날루아제는 벌써 없었던 것이다. 상대는 부권적 가족제였음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하다. 그리고, 이 푸날루아 가족제가 상대 이전의 중국에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내적 발전에 의한 일정한 발전 계단이였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권제와 부권제와의 종합의 결과로 생긴 한 혼합적 현상이였을 것이다. 이 푸날루아제에 근사한 부부관계는, 폴리네시아 일대에 넓이 전파되어있는 바, 거기서는 그것은 이 혼합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 습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를 학자들은 부권사회의 일부로 취급한다. 그런데, 나의 졸견에 의하면, 상대의 가족제든, 이 폴리네시아적의 것도 벌써 아니요, 그것은 벌써 완전한 부권적의 것이였던 듯하다. 에르케스(Erkes)씨는 이 푸날루아를 운운하는 논객들보다도 한 걸음 더 나가, 중국의 가족제는 단순한 내적 발전에 의하여, 모권제에서 부권제로 이천하였고, 또 그 이천기는 대개, 상조(商朝)에서 주조(周朝)로 옴겨간 시기에 상당하다고 하나, 그 주장에는 참말 일푼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밖에 든 것이 없는 것이다. 씨는 거기서 슈미트 코퍼스 양 신부의 모권부권에 관한 이론을 반박하며, 또 그들이 모권문화권과 부권문화권의 기원을 그 특수한 경제적 기저에 귀속시킴을 비난하여, 현대문주15▶그들은 모두 ‘유물론자’라고 노호를 한다.[a 15] 그러나, ‘유심론자’인 그의 이 중국가족제론은 그러면 얼마나 사실에 적합한가는, 그의 여기에 관한 논문을 읽어본 분은 잘 알 것이다. 상대사회를, 모권사회라고 하는 ‘개소리’는 참말 씨와 같이 한학을 직업으로 하는 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 하여서는 너무나 한심한 소리이다.
쪽수▶P161-2殷商民의 家族制를, 나는 일찍이 郭沫若氏 及 朱芳圃氏의 例를 딸아, 所謂 「푸날루아」 家族制라고 하고, 거기에는 아직 父權制는 없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只今에 와서는 그것은 全然 誤解였든 것을 나는 告白치 않을 수가 없다. 支那 古代에 「푸날루아」 家族制가 있었다면 그것은 決코 異常한 것은 아닐 것이다. 郭氏가 論한 娥皇, 女皇, 女英과 舜, 象에 關한 傳說에는 果然 이 「푸날루아」 婚姻制의 事實이 反影되여 있을런지도 몰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父」라는 名詞가 親父만 아니라, 父와 相比할 年長 一般에 摘用된 것, 即 그 等級的 稱號도, 그것이 或 이 「푸」 家族制, 婚姻制와 歷史的 關聯이 있었기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商代에 일을어는, 어나 點으로 보던지, 이 「푸」制는 벌써 없었든 것이다. 商代는 父權的 家族制였음은 더 疑心할 餘地가 없는 듯하다. 그리고, 이 「푸날루아」 家族制가 商代 以前의 中國에 있었다면, 그것은, 決코 內的 發展에 依한 一定한 發展 階段이였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母權制와 父權制와의 綜合의 結果로 생긴 一混合的 現象이였을 것이다. 이 「푸날루아」制에 近似한 夫婦關係는, 「폴리네지아」 一帶에 넓이 傳派되여있는 바, 거기서는 그것은 이 混合의 結果로 發生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 習俗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그 社會를 學者들은 父權社 會의 一部로 取扱한다. 그런대, 나의 拙見에 依하면, 商代의 家族制든, 이 「폴리네지아」的의 것도 벌써 아니요, 그것은 벌써 完全한 父權的의 것이였든 듯하다. 「에르케쓰」(Erkes)氏는 이「푸날루아」를 云云하는 論客들보다도 一步 더 나가, 中國의 家族制는 單純한 內的 發展에 依하야, 母權制에서 父權制로 移遷하였고, 또 그 移遷期는 大概, 商朝에서 周朝로 옴겨간 時期에 相當하다고 하나, 그 主張에는 참말 一分의 價値도 없는 「개소리」밖에 든 것이 없는 것이다. 氏는 거기서 「쉬밑」 「콥쓰」 兩 神父의 母權父權에 關한 理論을 反駁하며, 또 그들이 母權文化圈과 父權文化圈의 起源을 그 特殊한 經濟的 基底에 歸屬식임을 非難하야, 원문주15▶그들은 모다 「唯物論者」라고 怒號를 한다.[15] 그러나, 「唯心論者」인 그의 이 中國家族制論은 그리면 얼마나 史實에 適合한가는, 그의 여기에 關▶P162-1한 論文을 닑어본 분은 잘 알 것이다. 商代社會를, 母權社會라고 하는 「개소리」는 참말 氏와 같이 漢學을 職業으로 하는 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 하여서는 너무나 寒心한 소리이다.
내가 여기서 상대 가족제가 부권제라고 하였다고, 중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일부일부제 하에 살었고, 또 그들은 모두 ‘정조’(!)만 지켜왔다는 말은 아니다. 아니 부권 사회에 있었어도,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별별 재주를 다 불이는 것은 필연의 사실이였다. 그것은 남자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지배적이였고, 여자는 피압박적 지위에있는 사회에 있어도 그런 것이요, 또 여자의 지위가 거진 동등인 남계 중심의 사회에 있어서도 그랬다. 이런 「가루뛰기」(Seitensprung)가 있었대야, 그것이 부권제였음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곽말약씨는 야합 운운에도 언급하였으나, 그거야, 그가 지적한 예뿐일까? 시경국풍에도 이 야합을 암시하는 노래가 많지 않은가?

南有喬木 不可休息 漢有游女 不可求思 漢之廣矣 不可泳思 江之永矣 不可方思

쪽수▶P162-2내가 여기서 商代 家族制가 父權制라고 하였다고, 中國 사람들은 옛날부터 一父一婦制 下에 살었고, 또 그들은 모다 「貞操」(!)만 직혀왔다는 말은 아니다. 아니 父權 社會에 있었어도, 男子만 아니라, 女子도 別別 才操를 다 불이는 것은 必然의 史實이였다. 그것은 男子의 社會的, 經濟的 地位가 支配的이였고, 女子는 被壓迫的 地位에있는 社會에 있어도 그런 것이요, 또 女子의 地位가 거진 同等인 男系 中心의 社會에 있어서도 그랬다. 이런 「가루뛰기」(Seitensprung)가 있었대야, 그것이 父權制였음에는 變함이 없는 것이다. 郭沫若氏는 野合 云云에도 言及하였으나, 그거야, 그가 指摘한 例뿐일까? 詩經國風에도 이 野合을 暗示하는 노래가 많지 않은가?

南有喬木 不可休息 漢有游女 不可求思 漢之廣矣 不可泳思 江之永矣 不可方思

가장 아리따운 노래이다. 라임이나, 내용이나!

野有死麕 白茅包之 有女懷春 吉士誘之

운운의 노래에는 에로 취미(다소 변태적의)가 좀 더 있는 듯하다.

厭浥行露 豈不夙夜 謂行多露

이것은 야합을 청하는 남자에게 拒絶하는 색시의 flirting에 불과한 노래이다.

靜女其妹 俟我於城隅 愛而不見 搖首踟躕

운운의 구절은 야합의 사실을 좀 더 노골적으로 노래한다. 그러기에 주자같은 점잖은 어른도, 이 구절만에는 부득이, 此淫奔期會之詩也라고 고백하였다. 여하간 이상의 구들은 모두 가장 아리따운 노래이나, 그것은 음란한 야합의 풍속을 점쟌케 시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아니 거기에는 모권문화의 영향을 반영하는 바가 적지 않다. 비록 그러기는 하나, 그랬대야 그것은 상민의 부권제를 부정할 규범은 조금도 못 되는 것이다.
쪽수▶P162-3가장 아릿다운 노래이다. 「라임」이나, 內容이나!

野有死麕 白茅包之 有女懷春 吉士誘之

云云의 노래에는 「에로」 趣味(多少 變態的의)가 좀 더 있는 듯하다.

厭浥行露 豈不夙夜 謂行多露

이것은 野合을 請하는 男子에게 拒絶하는 색시의 flirting에 不過한 노래이다.

靜女其妹 俟我於城隅 愛而不見 搖首踟躕

云云의 句는 野合의 事實을 좀 더 露骨的으로 노래한다. 그러기에 朱子같은 점쟌은 어른도, 이 句만에는 不得已, 此淫奔期會之詩也라고 告白하였다. 如何間 以上의 句들은 모다 가장 아릿다운 노래이나, 그것은 淫亂한 野合의 風俗을 점쟌케 詩化한 것에 不過한 것이다. 아니 거기에는 母權文化의 影響을 反影하는 바가 적지 않다. 비록 그러기는 하나, 그랫대야 그것은 商民의 父權制를 否定할 規範은 조금도 못 되는 것이다.
곽말약씨는 복사에 二父, 三父, 多父 等의 구가 보이는 것을 들어 푸날루아제를 빙증하려고 하나, 그것은 ‘父’라는 칭위 하에, 그들은 정말 자기를 만든 ‘아버지’만 아니라, ‘아버지’같이 연장인 어른 일반을 포함한 것을 말하는 것이오, 결코, 그들이 사실 ‘아버지’를 (푸날루아적 의미에서) 많이 가졌던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이 등급적 칭호에 의하여, 그 푸날루아 가족제의 잔영을 가장 미미하게 볼 수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에도 논한 바와 같이, 있었다면, 벌써 상대 이전에 있는 것이오, 상대의 가족제는 될 수가 없다.
쪽수▶P162-4郭沫若氏는 卜辭에 二父, 三父, 多父 等의 句가 뵈이는 것을 들어 「푸날루아」制를 憑證할냐고 하나, 그것은 「父」▶P163-1라는 稱謂 下에, 그들은 정말 自己를 만든 「아부지」만 아니라, 「아부지」같이 年長인 얼은 一般을 包含한 것을 말하는 것이오, 決코, 그들이 事實 「아부지」를 (「푸」的 意味에서) 많이 가젔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이 等級的 稱號에 依하야, 그 「푸날루아」 家族制의 殘影을 가장 微微히 볼 수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以上에도 論한 바와 같이, 있었다면, 벌써 商代 以前에 있는 것이오, 商代의 家族制는 될 수가 없다.
현대문주16▶이 가족제에 관하여 송본신광(松本信廣)씨는 소위 소로레이트 혼인제 및 레비레이트 혼인제를 운위한다.[a 16] 거기에는 신빙할 바가 많다. 중국의 ‘媵’의 제도는 과연 그것이 소로레이트 혼인(Saroratsche)이였던 것이다. 레비레이트 혼인은 유태인 사회에 있었어는 종교 신조가 되야, 원칙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 형적은 벌써 기독경에도 있을 뿐 아니라, 현재의 예를 보건대, 형이 죽은 때, 아직 미혼의 동생이 그 형수인 미망인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 때는, 교당에 가서 승정의 허가를 맡아야 되고, 또 특별한 예식에 의하여, 여호와 앞에서 당사자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한다는 표시로, 피차 침을 뱉어야 하는 법이라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양자는 결혼하는 것이 상례인 것이다. 레비레이트 혼인(Leviratsche)은 일본에도 있는 것으로 사실 이것은 가족관계에 있어, 사망자의 처자를 구조하는 가장 선책인 것이다. 이 제도는, 가장 미미하기는 하나, 과연 중국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권제 그것에 배치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뿐 아니다. 소로레이트제는 사실 부권제의 극단적 一현상인 것이다. 이것은 가장 극단적 부권사회에만 가능한 것인반, 이것이 중국에 있었던 것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영향은 여자를 위하여는 참말 慘劇이였던 것이다. 시경, 국풍소남편의

江有氾, 之子歸, 不我以.

운운의 구는 이 비극의 일면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媵」제나, 레비레이트제는 상대에도 있었는지는 나는 아직 나의 지식으로는 확언할 수가 없다. 있기도 쉬운 일이다. 이 소로레이트제나 레비레이트제는 그런데, 푸날루아제와는 구별하여야 된다. 형제군 대 자매군의 군혼이 아닌 까닭이다. 소로레이트는 부권제의 극단적 현상이오, 레비레이트는 가정생활 문제상의 한 방도(나는 이 방도에는 일정한 사회제도하에서는, 사실 미점이 많은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로 기원된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푸날루아는 그러나,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일부다처의 극단적 부권과, 일부다부의 극단적 모권과의 혼합에 의한, 일종합적 내지는 타협적 현상인 것이다. 이 타협적 현상이 상대에도 아직 남아있었다고는 나는 암만 해야 생각할 수가 없다. 상대 왕가에 있어서는 적어도 이것은 없었던 것이니 거기에는 부권사회의 부자관계가 확연히 표시되어있지 않은가? 여하간 나는 곽말약씨의 「殷代猶保存其先世舜象亞血族羣婚之道習」(二七〇頁)이라는 주장에는 좌단할 수가 없다.
쪽수▶P163-2원문주16▶이 家族制에 關하야 松本信廣氏는 所謂 「쏘로레잍」 婚姻制 及 「ᄙᅦᅄᅵ레잍」 婚姻制를 云謂한다.[16] 거기에는 信憑할 바가 많다. 中國의 「媵」의 制度는 果然 그것이 「쏘로레잍」 婚姻(Saroratsche)이였든 것이다. 「ᄙᅦᅄᅵ레잍」 婚姻은 猶太人 社會에 있었어는 宗敎 信條가 되야, 原則的으로 行하는 것이다. 그 形跡은 벌써 基督經에도 있을 뿐 外라, 現在의 例를 보건대, 兄이 죽은 때, 아직 未婚의 弟가 그 兄嫂인 未亡人과 結婚하기를 願치 않는 때는, 教堂에 가서 僧正의 許可를 맡어야 되고, 또 特別한 禮式에 依하야, 「여호와」 앞에서 當事者 兩人이 서로 미워한다는 表示로, 彼此 춤을 배앝어야 하는 法이라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兩者는 結婚하는 것이 常例인 것이다. 「ᄙᅦᅄᅵ레잍」 婚姻 (Leviratsche)은 日本에도 있는 것으로 事實 이것은 家族關係에 있어, 死亡者의 妻子를 救助하는 가장 善策인 것이다. 이 制度는, 가장 微微하기는 하나, 果然 中國에도 있었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父權制 그것에 背馳되는 것은 決코 아닌 것이다. 그뿐 아니다. 「쏘로」制는 事實 父權制의 極端的 一現象인 것이다. 이것은 가장 極端的 父權社會에만 可能한 것인반, 이것이 中國에 있었던 것은 더 疑心할 餘地가 없다. 그 影響은 女子를 爲하야는 참말 慘劇이였든 것이다. 詩經, 國風召南篇의

江有氾, 之子歸, 不我以.

云云의 句는 이 悲劇의 一面을 뵈이는 것이다. 그런대, 이 「媵」制나, 「ᄙᅦᅄᅵ」制는 商代에도 있었는지는 나는 아직 나의 知識으로는 確言할 수가 없다. 있기도 쉬운 일이다. 이 「쏘로」制나 「ᄙᅦᅄᅵ」制는 그런대, 「푸날루아」制와는 區別하여야 된다. 兄弟群對姉妹群의 群婚이 아닌 까닭이다. 「쏘로」는 父權制의 極端的 現象이오, 「ᄙᅦᅄᅵ」는 家庭▶P164-1生活 問題上의 一方途(나는 이 方途에는 一定한 社會制度下에서는, 事實 美點이 많은 것을 否認할 수가 없다)로 起源된 것이다. 임의 말한 바와 같이 「푸날루아」는 그러나,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一夫多妻의 極端的 父權과, 一婦多夫의 極端的 母權과의 混合에 依한, 一綜合的 乃至는 妥協的 現象인 것이다. 이 妥協的 現象이 商代에도 아직 남아있엇다고는 나는 암만 해야 생각할 수가 없다. 商代 王家에 있었어는 적어도 이것은 없었든 것이니 거기에는 父權社會의 父子關係가 確然히 表示되여있지 않은가? 如何間 나는 郭沫若氏의 「殷代猶保存其先世舜象亞血族羣婚之道習」(二七〇頁)이라는 主張에는 左袒할 수가 없다.






















본문1-2: ④ 종교문제


은민의 종교는 다색적이엿다. 그들의 숭배 대상은 천, 지, 산, 천, ‘조비’(선조) 등등에 걸쳤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거기에 전부 언급하려고 하는 바는 아니다. 오직 그 중에서 학계에 문제되어, 재음미의 필요가 있는 수점에 언급하려고 한다. (상대 종교문제 중 두수 및 인사에 관하여는 앞 절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쪽수▶P166殷民의 宗敎는 多色的이엿다. 그들의 崇拜 對象은 天, 地, 山, 川, 「祖妣」(先祖) 等等에 亘하였던 것이다. 그러▶P167-1나 나는 여기서 거기에 全部 言及할냐고 하는 바는 아니다. 오직 그 中에서 學界에 問題되여, 再吟味의 必要가 있는 數點에 言及할냐고 한다. (商代 宗敎問題 中 頭狩 及 人祠에 關하여는 前節에서 임의 言及하였다.)
내가 여기서 맨 처음 지적하려는 것은 상대의 천신 숭배이다. 나는 서양 학도들, 그 중에도 특히 종족학(민속학)에서 출발하여 논하는 학도들이, 은민은 ‘농민’(물론 그들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재배민을 이렇게 칭위한다)인대, 거기에 목유민 주족이 들어와서 이 농민을 정복하고, 주대 국가를 건설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4-5차 들은 경험이 있다. 지금 서양 한학도 간에 명성이 상당히 높은, 어느 젊은 학자가 빈대학 종족학연구소에서 수년 전에 시험한 강연 중에서도 나는 동일한 주장을 들었었다. 그때 그는 토론이 시작되자, 중국에 천신사상을 전래한 것은 주족이오, ‘천’자도 주어(周語)라고 주장하였었다. 이것은 꽤 맹령한 소리나, 허무하기 그지없는 논법인 것이다. 이것은 민속학자 일반이 범하기 쉬운 오류의 하나로 민속학자들이, 그들의 영역인 현존한 원시족을 떠나, 선사학의 영역인 과거로 소급하는 때에, 보기 쉬운 현상이다. 여기서 나는 또다시 방법론 재검토의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방법론적으로 그들은 오류를 범하였던 까닭에, 그들의 이론에도 이렇게 오류가 있는 것이다.
쪽수▶P167-2내가 여기서 먼 첨 指摘할려는 것은 商代의 天神 崇拜이다. 나는 西洋 學徒들, 그 中에도 特히 種族學(民俗學)에서 出發하여 論하는 學徒들이, 殷民은 「農民」(勿論 그들은 여기서 내가 말하는 栽培民을 이렇게 稱謂한다)인대, 거기에 牧遊民 周族이 들어와서 이 農民을 征服하고, 周代 國家를 建設하였다고 主張하는 것을 四五次들은 經驗이 있다. 只今 西洋 漢學徒 間에 名聲이 相當히 높은, 어느 젊은 學者가 維也納大學 種族學研究所에서 數年 前에 試驗한 講演 中에서도 나는 同一한 主張을 들었었다. 그때 그는 討論이 始作되자, 中國에 天神思想을 傳來한 것은 周族이오, 「天」字도 周語라고 主張하였었다. 이것은 꽤 猛獰한 소리나, 虛無하기 그지없는 論法인 것이다. 이것은 民俗學者 一般이 犯하기 쉬운 誤謬의 하나로 民俗學者들이, 그들의 領域인 現存한 原始族을 떠나, 先史學의 領域인 過去로 溯及하는 때에, 보기 쉬운 現象이다. 여기서 나는 또다시 方法論 再檢討의 必要를 느끼는 것이다. 方法論的으로 그들은 誤謬를 犯하였던 까닭에, 그들의 理論에도 이렇게 誤謬가 있는 것이다.
나는 서론에서 선사고고학은, 고고학적 재료로만은 불충분하기가 그지없는 것을 지적하였다. 거기서 멩힌 교수가 민속학의 종합을 대규모적으로 시험하였었고 또 그 결과가 비록 채 성공은 못되나, 그것만으로도 벌써 획기적 기도였던 것을 나는 또 지적하였었다. 나도 그의 본을 받아 지금까지 논하여 왔었다. 그런데, 선사학도에게 민속학이 이렇게 필요하면, vice versa 민속학도에게는 또 선사학이 그만큼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민속학자로 고고학의 필요를 느꼈고 고고학을 십분 적용한 자도 바로 빈대학에서 처음 출현한 것이다. 하이네 겔던 교수(지금 빈 대학을 떠났다)가 바로 그분이다. 그는 현재의 원시족을 논함에도, 그 이동관계에 소급하여 그들의 과거를 논하려면, 고고학적 고찰이 절대로 필요한 것을 늦겻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민속학과 동시에 고고학을 배웠으니 지금 현존한 민속학자 중에는 그만큼 고고학적 조예가 깊은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빈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빈(물론 1938년 봄 이전의)계의 민속학자나, 또는 이 영향하에 있는 학자들이 고고학을 등한시하는 것을 나는 퍽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고고학적 고찰을 않 하는 한, 그들은 사실 선사시대나 유사시대 초시의 과거에는 언급할 자격이 없는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출발점이 첫째로 고고학적 재료에 있고, 이 고고학적 재료가 논단을 거절하는 때에 비로소 종족학(민속학)에 그 해답을 구하여야 되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민속학적으로 논하는 한학도 중에는 그 출발점이 그와는 정반대인 것이 일반이니, 이상에 지적한 그들의 오류는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고학을 등한시하고, 잘못된 출발점에서 문제를 취급할 때, 무엇보다도 맨 처음 범하는 것은 즉, 연대적 순차인 것이다. 현대문주17▶이 연대적 순차에 있어, 고고학편이 민속학보다 우수한 지위에 있는 것은 그들의 선사(先師) 그레브너씨와 슈미트씨도 고백한 바이다.[a 17]
쪽수▶P167-3나는 緖論에서 先史考古學은, 考古學的 材料로만은 不充分하기가 그지없는 것을 指摘하였다. 거기서 「멩긴」 敎授가 民俗學의 綜合을 大規模的으로 試驗하였었고 또 그 結果가 비록 채 成功은 못되나, 그것만으로도 벌써 劃期的 企圖였던 것을 나는 또 指摘하였었다. 나도 그의 本을 받아 只今까지 論하여 왔었다. 그런대, 先史學徒에게 民俗學이 이렇게 必要하면, vice versa 民俗學徒에게는 또 先史學이 그만큼 必要한 것이다. 그런대 民俗學者로 考古學의 必要를 늦겻고 考古學을 十分 摘用한 者도 바로 維也納大學에서 처음 出現한 것이다. 「하이네, 깰데언」 敎授(只今 維大를 떠낫다)가 바로 그분이다. 그는 現在의 原始族을 論함에도, 그 移動關係에 溯及하야 그들의 過去를 論할냐면, 考古學的 考察이 絕對로 必要한 것을 늦겻든 것이다. 그리하야 그는 民俗學과 同時에 考古學을 ▶P168-1배웠으니 只今 現存한 民俗學者 中에는 그만큼 考古學的 造詣가 깊은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대 그가 維也納大學에서 敎鞭을 잡앗섯슴에도 不拘하고 維也納(勿論 一九三八年 春 以前의)系의 民俗學者나, 또는 이 影響下에 있는 學者들이 考古學을 等閑視하는 것을 나는 퍽 遺憾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考古學的 考察을 않 하는 限, 그들은 事實 先史時代나 有史時代 初始의 過去에는 言及할 資格이 없는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出發點이 첫재로 考古學的 材料에 있고, 이 考古學的 材料가 論斷을 拒絕하는 때에 비로소 種族學(民俗學)에 그 解答을 求하여야 되는 것을 언제나 닞지 말어야 한다. 그런대 民俗學的으로 論하는 漢學徒 中에는 그 出發點이 그와는 正反對인 것이 一般이니, 以上에 指摘한 그들의 誤謬는 그 原因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考古學을 等閑視하고, 잘못된 出發點에서 問題를 取扱할 때, 무엇보다도 먼 첨 犯하는 것은 即, 年代的 順次인 것이다. 원문주17▶이 年代的 順次에 있어, 考古學便이 民 俗學보다 優秀한 地位에 있는 것은 그들의 先師 그렙너氏와 「쉬밑」氏도 告白한 바이다.[17]
민속학에서 출발하여, 선사시대 내지는 고대의 중국을 논하는 「한학도」들은, 거기서 목유문화소를 보았었다. 모권적 재배문화소를 보았었다. 이 모든 것을 그런데 연대적으로 순열하여야 되겠섰다. 거기서, 고고학상의 사세가 엇전지는 조금도 생각할 준비도 않고, 그들의 상상력에 맊여서, ‘역사’(!)를 만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지어놓은 역사가, ‘상족은 농민이오, 주족은 목부’였다.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이 와서, 호미로 땅파는 중국 양반(상족)을 때려부셨으니, 그것이 주국의 기흥이다. 말 타는 되놈의 신 하늘을 중국에 가져온 것도 물론 이 周 되놈이다!’ 이렇게, 그들은 어렵지 않게 설명을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들은 ‘개소리’를 하는것이다.
쪽수▶P168-2民俗學에서 出發하야, 先史時代 乃至는 古代의 中國을 論하는 「漢學徒」들은, 거기서 牧遊文化素를 보았었다. 母權的 栽培文化素를 보았었다. 이 모든 것을 그런대 年代的으로 順列하여야 되겠섰다. 거기서, 考古學上의 事勢가 엇전지는 조금도 생각할 準備도 않고, 그들의 想像力에 맊여서, 「歷史」(!)를 만들어 놓는다. 거리하야 지어놓은 歷史가, 「商族은 農民이오, 周族은 牧夫」였다.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이 와서, 호미로 땅파는 中國 兩班(商族)을 때려부셨으니, 그것이 周國의 起興이다. 말 타는 되놈의 神 「하날」을 中國에 갖어온 것도 勿論 이 周 되놈이다!」 이렇게, 그들은 어렵쟌케 說明을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들은 「개소리」를 하는것이다.
그들은 중국 본토에 목유문화가 들어온 것은 주대로 시작하는 줄 아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인 것은, 제1장 제3절에서 벌써 보았다. 칙, 흑도문화에 벌써 목유문화 영향은 많았던 것을 우리는 거기서 보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 상족도 원래는 알타이 목유문화계에서 출발한 것이, 서막시대에 벌써 농민화한 것을 보았었다. 그들이 황하 중류지대에 와서 목유문화소를 점점 더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나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버릇을 전연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천신사상에도 표현되어 있다.
쪽수▶P168-3그들은 中國 本土에 牧遊文化가 들어온 것은 周代로 始作하는 줄 아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인 것은, 第一章 第三節에서 벌써 보았다. 則, 黑陶文化에 벌써 牧遊文化 影響은 많었든 것을 우리는 거기서 보았다. 그뿐 外라 우리는 또 商族도 原來는 「알타이」 牧遊文化系에서 出發한 것이, 西膜時代에 벌써 農民化한 것을 보았었다. 그들▶P169-1이 黃河 中流地帶에 와서 牧遊文化素를 漸漸 더 喪失하였음에도 不拘하고, 그들은 그러나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버릇을 全然 喪失한 것은 아니엿다. 그것은 그들의 天神思想에도 表現되여 있다.
호적(胡適) 교수가 고힐강씨에게 보낸, 민국12년 5월 30일부의 서신 중에는,

현대문주18▶關於「帝」字, 我也認爲「天帝」. 此字是世界最古的字, 古義「帝」與「天」當相同, 正如其音之同紐. 試看
도유호 중도문3-13.png
五字同出一源, 大概是根可能的. 看郊祀志可見許多「帝」原爲西方民族(秦民族)的天神, 此是無可疑的.…

운운의 구가 있다.[a 18] 유복(劉復)씨가 지적했듯이, 여기서 ‘帝’자가 ‘세계最古적자’라는 것은 물론 부당한 말이다. 이것은 혹, 오기(clerical error)일런지도 모를 것이다. 그것은 여하했던, 호적씨가 여기서 ‘帝’와 ‘天’의 기생적 관련을 논함에는 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나는 호적씨의 동 논문을 구경하기 퍽 전부터, 양자가 동일 계통임을 믿어 왔었다. (물론 호씨와는 퍽 상이한 의미에서). 그리고 또, ‘帝’가 Dyaus, Zeus, Tir 등 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본 바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帝’와 ‘天’, 두 자가 모두 천 및 천신을 의미하는 알타이어의 Tengeri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온 바이다. 여기에 관한 이론에 언급하기 전에 그런데, 나는 유복씨의 호적씨 비평에 좀 언급하려고 한다.
쪽수▶P169-2胡適 敎授가 顧頡剛氏에게 보낸, 民國十二年 五月 三十日付의 書信 中에는,

원문주18▶關於「帝」字, 我也認爲「天帝」. 此字是世界最古的字, 古義「帝」與「天」當相同, 正如其音之同紐. 試看
도유호 중도문3-13.png
五字同出一源, 大概是根可能的. 看郊祀志可見許多「帝」原爲西方民族(秦民族)的天神, 此是無可疑的.…

云云의 句가 있다.[18] 劉復氏가 指摘햇듯이, 여기서 「帝」字가 「世界最古的字」라는 것은 勿論 不當한 말이다. 이것은 或, 誤記(clerical error)일런지도 몰을 것이다. 그것은 如何했던, 胡適氏가 여기서 「帝」와 「天」의 起生的 關聯을 論함에는 一意가 있는 것이다. 나는 胡適氏의 同文을 구경하기 퍽 前부터, 兩字가 同一 系統임을 믿어 왔었다. (勿論 胡氏와는 퍽 相異한 意味에서). 그리고 또, 「帝」가 Dyaus, Zeus, Tir 等 語와 關聯이 있을 可能性도 생각해본 바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帝」와 「天」, 兩字가 모다 天及天神을 意味하는 「알타이」語 의 Tengeri에서 由來한 것이라고 하는 便이 妥當하다고 생각해 온 바이다. 여기에 關한 理論에 言及하기 前에 그런대, 나는 劉復氏의 胡適氏 批評에 좀 言及할냐고 한다.
유복씨는, 음의 상사(相似)가 반드시 동일 계통어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논하여 인도, 그리스, 라틴어와 帝, 天과의 관계 운운에 신빙치 못할 점이 있음을 논하는 한편 바빌론 고어와 天, 帝와의 관계의 가능성을 들어
쪽수▶P169-3劉復氏는, 音의 相似가 반듯이 同一 系統語임을 意味하는 것이 아님을 論하야 印度, 希臘, 羅典(拉丁)語와 帝, 天과의 關係 云云에 信憑치 못할 點이 있음을 論하는 一方 그러나 「바빌론」 古語와 天, 帝와의 關係의 可能性을 들어


유복씨는 다시 帝에 관하여

吳大澂以爲帝象花蒂形, 與「鄂不」之「不」同意, 却很有意思. 白虎通裏설: 「帝자, 諦也, 象可承 也」. 「諦也」二자還是承襲舊義, 「象可承也」却很可주의, 因爲「可承」정是花蒂적작용. (여기서 襲舊義란 帝諦也라는 설文 中의 舊견해말이다—都)
大約帝적本義是花蒂, 作「천제」用是第二義.

를 운운한다. 花蒂가 帝가 된 것의 씨의 설명이 뒤따라 나오는바, 그것에는 좌단할 수가 없다. 그런데 씨가 좌단하는 오대징의 「帝象花蒂形」설은 이하 더 논할 바와 같이 곽말약씨도 채용하는 바 곽씨는 거기서 이것을 생식숭배와 관련하여 논한다. 유씨는 그런데 ‘不’자가 ‘不’자의 고자이오, ‘大’를 의미하는 이 ‘丕’자의 금문도유호 중도문3-39.png(虢叔鐘), 도유호 중도문3-40.png(王孫鐘), 도유호 중도문3-41.png(聃敦) 등이나, 갑골문의 도유호 중도문3-42.png, 도유호 중도문3-43.png, 도유호 중도문3-44.png, 도유호 중도문3-45.png 등이 바빌론의 도유호 중도문3-46.png(天)에 상사한 것도 또 지적한다. 帝자의 상형이 花帝를 상징한 것인가에는 나는 퍽 의심을 갖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丕’자의 금문, 갑골문이 「도유호 중도문3-47.png」자에 근사한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不’ 즉 ‘丕’는 大이오 天도 大이다. 이것의 전아시아의 상형자가 중국에 넘어온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원적으로는 중국의 天이나 帝는 전아시아와는 간접으로밖에 관련 못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쪽수▶P170-3劉復氏는 다시 「帝」에 關하야

吳大澂以爲「帝」象花蒂形, 與「鄂不」之「不」同意, 却很有意思. 白虎通裏說: 「帝者, 諦也, 象可承 也」. 「諦也」二字還是承襲舊義, 「象可承也」却很可注意, 因爲「可承」正是花蒂的作用. (여기서 襲舊義란 帝諦也라는 說文 中의 舊見解말이다—都)
大約「帝」的本義是花蒂, 作「天帝」用是第二義.

를 云云한다. 花蒂가 帝가 된 것의 氏의 說明이 뒤딸아 나오는바, 그것에는 左袒할 수가 없다. 그런대 氏가 左袒하는 吳大澂의 「帝象花蒂形」說은 以下 더 論할 바와 같이 郭沫若氏도 採用하는 바 郭氏는 거기서 이것을 生殖崇拜와 關聯하야 論한다. 劉氏는 그런대 「不」字가 「不」字의 古字이오, 「大」를 意味하는 이 「丕」字의 金文도유호 중도문3-39.png(虢叔▶P171-1鐘), 도유호 중도문3-40.png(王孫鐘), 도유호 중도문3-41.png(聃敦) 等이나, 甲骨文의 도유호 중도문3-42.png, 도유호 중도문3-43.png, 도유호 중도문3-44.png, 도유호 중도문3-45.png 等이 「바빌론」의 도유호 중도문3-46.png(天)에 相似한 것도 또 指摘한다. 「帝」字의 象形이 花帝를 象徵한 것인가에는 나는 퍽 疑心을 갖고 있는 者이다. 그러나, 「丕」字의 金文, 甲骨文이 「도유호 중도문3-47.png」字에 近似한 것은 나도 認定하는 바이다. 「不」 即 「丕」는 大이오 天도 大이다. 이것의 前亞細亞의 象形字가 中國에 넘어온 것은 決코 異常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語源的으로는 中國의 「天」이나 「帝」는 前亞細亞와는 間接으로밖에 關聯 못 되였다고 나는 믿는다.
天은 여하간 알타이어계의 tengeri tengri tenger 등 말의 단철화이다. 나는 그것을 처음 강정웅씨에게서 들었었다. 현대문주20▶그 후 블라이히슈타이너 교수도 몽고어의(天을 의미하는) tengri와 天과의 관련의 가능성을 지적하였다.[a 19] 이상에서 수차 논한 바와 같이, 나는 帝도 tengeri의 단철화라고 보는바(帝의 고음은 아마 tei일 것이다), 이 天, 帝 두 말은 모두 직접 중앙아시아 목유문화계에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한 부족층은 상이하기가 쉬운 것이다. 한 부족은 天으로 전하였고, 다른 한 부족은 帝로 전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것은 ‘鴻鷺’가 부족층의 상이에 수반하여 한번은 ‘黑’으로 생략되었고, 다른 한번은 ‘鷺’로 생략된 것과 사무가 동일한 것이다.
쪽수▶P171-2「天」은 如何間 「알타이」語系의 tengeri tengri tenger 等 語의 單綴化이다. 나는 그것을 처음 岡正雄氏에게서 들었었다. 원문주20▶그 後 「뿔라잏히 쉬타이너」 敎授도 蒙古語의(天을 意味하는) tengri와 「天」과의 關聯의 可能性을 指摘 하였다.[19] 以上에서 數次 論한 바와 같이, 나는 「帝」도 tengeri의 單綴化라고 보는바(帝의 古音은 아마 tei일 것이다), 이 天, 帝 兩語는 모다 直接 中央亞細亞 牧遊文化系에서 넘어왔음에도 不拘하고, 그것을 傳한 部族層은 相異하기가 쉬운 것이다. 한 部族은 「天」으로 傳하였고, 다른 한 部族은 「帝」로 傳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것은 「鴻鷺」가 部族層의 相異에 伴하야 한번은 「黑」으로 省略되였고, 달은 한번은 「鷺」로 省略된 것과 事務가 同一한 것이다.
이 천신관념의 기원에 관하여 슈미트 및 코퍼스 양 선생나 또는 동일 계통의 천주교 선교사들은, 그것에 근사한 것이 벌써 최원시문화(‘원문화’)족들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나는 신빙할 수가 없다. 아니, 프로이스(Preuss) 기타의 여러 학자는, 그것은 천주교 신부의 독단적 설교에 불과하다고 조소를 하는 바이다.
쪽수▶P171-3이 天神觀念의 起源에 關하야 「쉬밑」 及 「콥쓰」 兩師나 又는 同一 系統의 天主敎 宣敎師들은, 그것에 近似한 것이 벌써 最原始文化(「原文化」)族들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나는 信憑할 수가 없다. 아니, 「프로이쓰」(Preuss) 其他의 諸學者는, 그것은 天主敎 神父의 獨斷的 說敎에 不過하다고 嘲笑를 하는 바이다.
슈미트 및 코퍼스 양 선생은 그런데, 이 천신사상이 목유문화에 와서 가장 뚜렷이 발전한 것을 지적한다. 물론 이 천신사상이 좀 확연한 체재를 얻은 것은 그레브너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고급문화(도시문화), 대왕조 시대에 와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엿다. 그것은 사회의 구성이 종적(縱的) 구분(Vertikale Gliederung)에 기저한 때에 그 내부적 대립, 모순을 통제할 의무를 등에 지고, 천상에 올라간 존재이다. 그는 거기서 지하를 향하여 내려다보며, 사다리를 걸어오른 국왕의 한 손을 붙잡아 쥘 의무를 갖고야 비로소 존재적 정당성(Existenzberechtigung)을 소유하였던 것이다. 현대문주21▶비록 그렇기는 하나, 천신사상은 벌써 목유문화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니, 여기에 관한 슈미트, 코퍼스 양 선생의 이론에는 신빙할 바가 많은 것이다.[a 20]
쪽수▶P171-4「쉬밑」 及 「콥퍼쓰」 兩師는 그런대, 이 天神思想이 牧遊文化에 와서 가장 뚜렷이 發展한 것을 指摘한다. 勿論 이 天神思想이 좀 確然한 體裁를 얻은 것은 「그렙너」 敎授가 指摘한 바와 같이, 高級文化(都市文化), 大王朝 時代에 와서 비로소 可能한 것이엿다. 그것은 社會의 構成이 縱的 區分(Vertikale Gliederung)에 基底한 때에 그 內部的 對立 矛盾을 統制할 義務를 등에 지고, 天上에 올라간 存在이다. 그는 거기서 地下를 向하야 내려다보며, ▶P172-1梯子를 걸어올은 國王의 한 손을 붓잡어 쥘 義務를 갖고야 비로소 存在的 正當性(Existenzberechtigung)을 所有하였든 것이다. 원문주21▶비록 그렇기는 하나, 天神思想은 벌써 牧遊文化에 그 起源이 있는 것이니, 여기에 關한 「쉬밑」, 「콥퍼쓰」 兩師의 理論에는 信憑할 바가 많은 것이다.[20]
이 목유문화에 천신사상이 발달한 것은 그들이 주장하듯이, 목유족은 그 경제적 기도가 대규모적이였고, 그들의 노는 세계가 천변무애의 대황원이였던 까닭이다. 그들은 한재(旱災)나 만나면, 때로는 하로에 수백 두의 가축이 몰사를 하는 것이였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넓고 넓은 하늘이 내려 덮였다. 그들은 이 ‘하늘’ 아래를 하로에도 수백 리씩 편력하는 때가 많았다. 거기서 그들은 맨 처음 가장 위력이 있는 신주를 필요로 하였고, 또 이 신주는 필연적으로 광활무궁한 천상에밖에 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 천신은 탄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천신은 나의 졸견에 의하면, 토템문화의 태양신과 인연이 깊은 것으로 태양신에 관한 그들의 과거의 전통이 종래에는, 태양신의 활동영역인 天을 神化하게 된 것인 듯하다. 태양신에서 천신으로의 발전은 오직 한 걸음인 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걸음의 발전은 목유문화의 대규모적 경제와 관련이 된 것이다. 여하간 태양신의 계단이 없이 대번에 ‘하늘아버지’는 문제인 것이다.
쪽수▶P172-2이 牧遊文化에 天神思想이 發達한 것은 그들이 主張하듯이, 牧遊族은 그 經濟的 企圖가 大規模的이였고, 그들의 노는 世界가 天邊無崖의 大荒原이였든 까닭이다. 그들은 旱災나 맛나면, 때로는 하로에 數百 頭의 家畜이 沒死를 하는 것이였다. 그들의 머리 우에는 넓고 넓은 하날이 내려 덮였다. 그들은 이 「하날」 아래를 하로에도 數百 里式 遍歷하는 때가 많았다. 거기서 그들은 먼 첨 가장 威力이 있는 神主를 必要로 하였고, 또 이 神主는 必然的으로 廣闊無窮한 天上에밖에 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 天神은 誕生하였든 것이다. 그런대, 이 天神은 나의 拙見에 依하면, 「토템」文化의 太陽神과 因緣이 깊은 것으로 太陽神에 關한 그들의 過去의 傳統이 仍終에는, 太陽神의 活動領域인 天을 神化하게 된 것인 듯하다. 太陽神에서 天神으로의 發展은 오직 一步인 感이 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이 一步의 發展은 牧遊文化의 大規模的 經濟와 關聯이 된 것이다. 如何間 太陽神의 階段이 없이 대번에 「하날아부지」는 問題인 것이다.
중앙아시아 목유문화에서 기원된 알타이어 Tengeri는 天을 의미하였고, 또 천신을 의미하였는바, 이것이 중국에 가서 天이 되고 帝가 되었으면, 이것은 폴리네시아 일대에 가서는 Tangaloa, Tangaroa(탕가롸)가 되었고, 대륙 동북의 야쿠르족(Jakuten)에게 가서는 Tangara(탕가라)가 되었고, 몽고족에게는 텡그리(Tengri), 텡걸 그대로 남아 있었고, 바빌론에 가서는 Dingir가 되었고, 우리 조선에 와서는 天군, 단군이 된 것이다. 현대문주22▶최남선씨가 단군을 위지의 천군과 동일신격으로 보았고, 그것을 몽고어의 텡걸(텡그리) 및 현 조선방언의 ‘무당’을 의미하는 당굴에 비정한 것은 참말, 최씨와 같은 석학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탁견인 것이다.[a 21]
쪽수▶P172-3中央亞細亞 牧遊文化에서 起源된 「알타이」語 Tengeri는 天을 意味하였고, 또 天神을 意味하였는바, 이것이 中國에 가서 天이 되고 帝가 되였으면, 이것은 「폴리네시아」 一帶에 가서는 Tangaloa, Tangaroa(탕가롸)가 되였고, 大陸 東北의 「야쿠르」族(Jakuten)에게 가서는 Tangara(탕가라)가 되였고, 蒙古族에게는 「텡그리」(Tengri) 「텡걸」 그대로 남어 있었고, 巴比倫에 가서는 Dingir가 되였고, 우리 朝鮮에 와서는 天君, 檀君이 된 것이다. 원문주22▶崔南善氏가 檀君을 魏志의 天君과 同一神格으로 보았고, 그것을 蒙古語의 「텡걸」(「텡그리」) 及 現 朝鮮方言의「무당」을 意味하는 「당굴」에 比定한 것은 참말, 崔氏와 같은 碩學에게서만 期待할 수 있는 卓見인 것이다.[21]
은상족이 천신을 숭배하였던 것은 갑골문만 아니라, 그 외의 고고학적 재료로도 증명할 수가 있으니, 순황토로 쌓은 제단의 기지를 발견한 것이 그것이다. 이 제단은 정남향이였고, 그 정전에는, 이 제단을 수 미터 떠나서, 주춧돌들이 늘어있는 바, 이것은 이화원의 명 고궁에 가장 상사(相似)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황토제단 주위에는 짐승 뼈들이 있는 바, 그것은 희생물의 유골이였던 것이다. 현대문주23▶여하간 여기서, 후세에 황토제단에서 천신에 제하는 그 의식이, 벌써 은상대에 있었던 것은 넉넉히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a 22]
쪽수▶P172-4殷商族이 天神을 崇拜하였든 것은 甲骨文만 아니라, 其外의 考古學的 材料로도 證明할 수가 있으니, 純黃土로 싸▶P173-1흔 祭壇의 基址를 發見한 것이 그것이다. 이 祭壇은 正南向이였고, 그 正前에는, 이 祭壇을 數米突 떠났어, 「지췻돌」(柱石)들이 느려있는 바, 이것은 頤和園의 明故宮에 가장 相似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黃土祭壇 周圍에는 獸骨들이 있는 바, 그것은 犧牲物의 遺骨이였든 것이다. 원문주23▶如何間 여기서, 後世에 黃土祭壇에서 天神에 祭하는 그 儀式이, 벌써 殷商代에 있었든 것은 넉넉히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22]
천신은 물론 은인의 유일한 신은 아니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그 외에 또 무엇보다도 선조 숭배도 하였고, 산천에 제한 형적도 있고, 또 그 외에 허다한 신을 많이 가졌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천신이 그 중에도 최고신이였음에는 별로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은인의 이 천신은, 그들의 조비의 혼과 동양으로, 가장 잔악한 신이었으니, 그는 그런 고로, 인육에 비린내 나는 제찬을 받고야 만족하여 했던 것이다. 메깃코의 日신, 풍우신 등에 지지 않게, 은민의 천제는 남상(濫觴)하는 인혈배에 도취하기를 즐겨한 어른이다. 비린내 주정이 심했던 어른이다.
쪽수▶P173-2天神은 勿論 殷人의 唯一한 神은 아니였다. 임의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其外에 또 무엇보다도 祖先 崇拜도 하였고, 山川에 祭한 形跡도 있고, 또 其外에 許多한 神을 많이 가졌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天神이 그 中에도 最高神이였음에는 別로 더 疑心할 餘地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殷人의 이 天神은, 그들의 祖妣의 魂과 同樣으로, 가장 殘惡한 神이었으니, 그는 그런 故로, 人肉에 비린내 나는 祭饌을 받고야 滿足하여 했든 것이다. 「멕시코」의 日神, 風雨神 等에 지지 않게, 殷民의 天帝는 濫觴하는 人血杯에 陶醉하기를 질겨 한 어른이다. 비릿내 酒酊이 甚햇든 어른이다.
현대문주24▶마스페로 교수는, 고대 지나의 종교는 대체로 귀족적의 것이라고 하였다(La religion chinoise ancienne était essentiellement aristocratique).[a 23] 그 말에는 진리가 있다. 그랬다고, 그도 말하듯이, 평민은 종교 관련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이 평민이 있었기에, 종교는 귀족의 행사가 된 것이다. 종교는 그들의 지배를 위한 가장 필요한 무기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물을냐는 것은 그러면, 은상시대에 있어 그들의 종교는 얼마나 귀족적이었는가이다. 물론 거기에도 허다한 종교 형태가 있었겠으니, 그것이 모두 귀족적일 수는 없다. 평민적인 것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천제만은 은대에 있었어도 벌써 귀족적의 신주았던 것이겠다. 여하간 그는 지배적의 대신위였던 것이다. 천제는 어디로 가나 늘 最高 지배자의 역할을 행하는 분이다. 그는 내부적 모순을 강력적으로 진압할 의무를 등에 진 분이다. 사회의 내적 모순이 심했던 은말에 있어서도 그 어른의 역할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쪽수▶P173-3원문주24▶「마스뻬로」 敎授는, 古代 支那의 宗敎는 大體로 貴族的의 것이라고 하였다(La religion chinoise ancienne était essentiellement aristocratique).[23] 그 말에는 眞理가 있다. 그랬다고, 그도 말하듯이, 平民은 宗敎 關聯에서 除外되었다는 것은 決코 아니다. 아니 이 平民이 있었기에, 宗敎는 貴族의 行事가 된 것이다. 宗敎는 그들의 支配를 爲한 가장 必要한 武器엿든 것이다. 인제, 우리가 여기서 물을냐는 것은 그러면, 殷商時代에 있어 그들의 宗敎는 얼마나 貴族的이었는가이다. 勿論 거기에도 許多한 宗敎 形態가 있었겠으니, 그것이 모다 貴族的일 수는 없다. 平民的인 것도 있었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天帝만은 殷代에 있었어도 벌써 貴族的의 神主었든 것이겠다. 如何間 그는 支配的의 大神位엿든 것이다. 天帝는 어대로 가나 늘 最高 支配者의 役割을 行하는 분이다. 그는 內部的 矛盾을 强力的으로 鎭壓할 義務를 등에 진 분이다. 社會의 內的 矛盾이 甚했든 殷末에 있어서도 그 어른의 役割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천신 다음에 내가 논하려는 것은 은민의 생식기 숭배 운운의 문제이다. 현대문주25▶여기에 관하여는 석학 칼그렌 교수가 이미 논한 바가 있거니와,[a 24] 동 교수와는 관계가 없이 곽말약씨도 역(易)의 종교적 습속의 존재를 지적하였다. 또 곽씨나 칼그렌 교수 이전에 전현동씨는(비록 은대를 직접 취급한 것은 아니나) 이 생식기 숭배시대의 산물이며, 건곤 두 괘가 남녀생식기의 기호임을 논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현대문주26▶我以爲原始的易卦是生殖器崇拜時代底東西, 「乾」 「坤」 二卦即是兩性底生殖器底記號.[a 25]

쪽수▶P174-1天神 다음에 내가 論할냐는 것은 殷民의 生殖器 崇拜 云云의 問題이다. 원문주25▶여기에 關하여는 碩學 「카-ㄹ 그렌」 敎授가 이미 論한 바가 잇거니와,[24] 同 敎授와는 關係가 없이 郭沫若氏도 이 宗敎的 習俗의 存在를 指摘하였다. 또 郭氏나 「카-ㄹ 그렌」 敎授 以前에 錢玄同氏는(비록 殷代를 直接 取扱한 것은 아니나) 易 이 生殖器 崇拜時代의 產物이며, 乾坤二卦가 男女生殖器의 記號임을 論하여 如左히 말하였다.

원문주26▶我以爲原始的易卦是生殖器崇拜時代底東西, 「乾」 「坤」 二卦即是兩性底生殖器底記號.[25]

전씨의 의견에는 한 의의가 있다. 음양사상은 그것이 물론 중국에서 기원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기원은 여하간 ‘교합’에 관한 원시인의 마법 및 종교사상에 있는 것으로, 중국에 있어서도 사세는 동일했던 것이다. 현대문주27▶아니 전씨만 아니라, 에르케스씨도 ‘坤’괘가 음문 기호임을 지적하였다.[a 26]
쪽수▶P174-2錢氏의 意見에는 一義가 있다. 陰陽思想은 그것이 勿論 中國에서 起源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起源은 如何間 「交合」에 關한 原始人의 魔法 及 宗敎思想에 있는 것으로, 中國에 있어서도 事勢는 同一했던 것이다. 원문주27▶아니 錢氏만 아니라, 「에르케쓰」氏도 「坤」卦가 陰門 記號임을 指摘하얏다.[26]
현대문주28▶전씨 후에 또 주여동씨는 전씨의 이론을 전승하여(이것을 그는 명언치는 않았다), 유교의 ‘仁’과 ‘孝’를 생식기 숭배와 관련하여 논하였다.[a 27] 그는 거기서 유가 발생 당시에는 아직도 민간에 생식기 숭배사상이 상당한 노력을 갖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유가는 이것을 원시종교형에서 ‘생식숭배’의 철학으로 전개하며, 좀 더 발전하여 孝와 仁의 윤리적 범주에까지 도달한 것이라고 논하였다. 그리하여 그 발전과정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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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74-3원문주28▶錢氏 後에 또 周予同氏는 錢氏의 理論을 傳承하여(이것을 그는 明言치는 않았다), 儒敎의 「仁」과 「孝」를 生殖器 崇拜와 關聯하여 論하였다.[27] 그는 거기서 儒家 發生 當時에는 아직도 民間에 生殖器 崇拜思想이 相當한 努力을 갖고 있는 것을 指摘하며, 儒家는 이것을 原始宗敎形에서 「生殖崇拜」의 哲學으로 展開하며, 좀 더 發展하여 孝와 仁의 倫理的 範疇에까지 到達한 것이라고 論하였다. 그리하여 그 發展過程의 關係를 如左히 表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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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기서 이것을 역(易)의 사상과 관련하여 논하며 전씨와 동양(同樣)으로, 또 易의 건곤 2괘가 남녀 생식기의 기호이며, 그것이 생식기 숭배 시대의 산물임을 논하였다. 그리고 종래에는 소위 생식기 숭배, 實是원시사회之보편적 신앙이라고까지 논하였다. (이하에도 더 논할 바와 같이 이 보편적 신앙론에는 물론 좌단할 수가 없다).
쪽수▶P174-4그는 여기서 이것을 易의 思想과 關聯하여 論하며 錢氏와 同樣으로, 또 易의 乾坤二卦가 男女 生殖器의 記號이며, 그것이 生殖器 崇拜 時代의 産物임을 論하였다. 그리고 仍終에는 所謂 生殖器 崇拜, 實是原始社會之普遍的 信仰이라고까지 論하였다. (以下에도 더 論할 바와 같이 이 普遍的 信仰論에는 勿論 左袒할 수가 없다).
이제 곽말약씨의 의견을 논하여 보건대, 씨는 조비(祖妣) 숭배와 관련하여 갑골문의 ‘祖’자가 음경의 상형이고, ‘妣’자가 음문의 상형이며 또 ‘神’, ‘祗’의 상형이 도유호 중도문3-49.png, 도유호 중도문3-50.png 등임을 들어, 거기서 생식기 숭배의 사실을 간파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현대문주29▶大抵宗教實起源於生殖崇拜, 其事於骨文中大有啓示. 如祖先崇拜之祖妣字實即牡牝器之象徵(骨文祖字作且妣字作匕), 一切神祗均稱「示」, 示字作도유호 중도문3-51.png或作도유호 중도문3-52.png實即生殖器之倒懸. 又如上帝之帝本象花蒂之形, 其意亦重在生殖.

이라고 한다.[a 28] 곽씨가 여기서 ‘생식숭배’라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생식기 숭배’의 칭이다. 물론 양자는 별로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대문주30▶곽씨의 이 생식숭배론은, 비록 명언치는 않았으나, 주방포씨도 대개 채용한 바이다.[a 29] 그런데 곽말약씨는 여기서 이렇게 생식기 숭배만 아니라, 종교의 기원이 바로 생식기 숭배에 있는 것이라고 논한다. 이것은 물론 과언이다. 종교는 그 기원이 마법에 있는 것은 나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 마법은 그리고 원칙적으로 유사 마법(Analogiezauber)인대, 그곳에도 이 생식마법, 번식마법(Fruchtbarkeitszauber)이 그 수위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 諸점으로 보아, 생식기 숭배(인도의 사이비즘 Saivism같은)에 종교의 기원을 찾는 곽씨의 태도에 한 의의가 없는 것도 아니나, 그러나 그의 주장이 부당한 것은 현존한 諸원시종족 중에는 이것을 전연 모르는 자가 허다한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쪽수▶P174-5인제 郭沫若氏의 意見을 論하여 보건대, 氏는 祖妣 崇拜와 關聯하여 甲骨文의 「祖」字가 陰莖의 象形이고, 「妣」▶P175-1字가 陰門의 象形이며 또 「神」, 「祗」의 象形이 도유호 중도문3-49.png, 도유호 중도문3-50.png 等임을 들어, 거기서 生殖器 崇拜의 事實을 看破할냐고 한다. 그리하여

원문주29▶大抵宗教實起源於生殖崇拜, 其事於骨文中大有啓示. 如祖先崇拜之祖妣字實即牡牝器之象徵(骨文祖字作且妣字作匕), 一切神祗均稱「示」, 示字作도유호 중도문3-51.png或作도유호 중도문3-52.png實即生殖器之倒懸. 又如上帝之帝本象花蒂之形, 其意亦重在生殖.

이라고 한다.[28] 郭氏가 여기서 「生殖崇拜」라는 것은 좀 더 具體的으로 말하면, 바로 「生殖器 崇拜」의 稱이다. 勿論 兩者는 別로 區別할 必要가 없는 것이다. 원문주30▶郭氏의 이 生殖崇拜論은, 비록 明言치는 않었으나, 朱芳圃氏도 大槪 採用한 바이다.[29] 그런대 郭沫若氏는 여기서 이렇게 生殖器 崇拜만 아니라, 宗敎의 起源이 바로 生殖器 崇拜에 있는 것이라고 論한다. 이것은 勿論 過言이다. 宗敎는 그 起源이 魔法에 있는 것은 나 亦 認定하는 바이다. 魔法은 그리고 原則的으로 類似 魔法(Analogiezauber)인대, 그곳에도 이 生殖魔法, 繁殖魔法(Fruchtbarkeitszauber)이 그 首位를 占領하고 있는 것이다. 이 諸點으로 보아, 生殖器 崇拜(印度의 「사이ᅄᅵ즘」 Saivism같은)에 宗敎의 起源을 찾는 郭氏의 態度에 一意가 없는 것도 아니나, 그러나 그의 主張이 不當한 것은 現存한 諸原始種族 中에는 이것을 全然 몰으는 者가 許多한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곽씨의 이상의 의견 중, ‘神’자 ‘祗’자의 갑골문 도유호 중도문3-53.png, 도유호 중도문3-54.png 등은 남자 생식기를 내려들인 것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에도 다소 의문이 있는 것이다. 크릴씨는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는, 일종의 수수께끼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신力을 표시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고 한다.(“…its form is something of an enigma. It may represent the spiritual force streaming down from the heavens to men below.” — Creel : Ibid, P. 178). 크릴씨의 의견에는 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현대문주31▶神, 祗의 상형자가 ‘雨’자의 상형에 근사한 것은, 씨의 이 추측의 논거를 더구나 견고히 하는 바 이다.[a 30] 곽씨의 이론에는 이렇게 약점도 있으나 그러나 그가 祖, 妣 두 자의 갑골문자를 남녀 생식기의 상형으로 본 것은 과연 정당한 견해인 것이다. 현대문주32▶이제 더 논할 바와 같이 ‘祖’의 원자 ‘且’의 상형이 음경인 것뿐 아니라, ‘妣’ 의 원자 ‘匕’의 골문인, 도유호 중도문3-55.png, 도유호 중도문3-56.png, 도유호 중도문3-57.png, 도유호 중도문3-58.png 등등도 과연 음문의 상형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식기 숭배와 직접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a 31]
쪽수▶P175-2郭氏의 以上의 意見 中, 「神」字 「祗」字의 甲骨文 도유호 중도문3-53.png, 도유호 중도문3-54.png 等은 男子 生殖器를 낼여들인 것의 象徵이라고 하는 것에도 多少 疑問이 있는 것이다. 「크리-ㄹ」氏는 그것이 果然 무엇을 意味하였는가는, 一種의 수수꺼끼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날에서 흘러나리는 神力을 表示하는 것일런지도 몰으겠다고 한다.(“…its form is something of an enigma. It may represent the spiritual force streaming down from the heavens to men below.” — Creel : Ibid, P. 178). 「크리-ㄹ」氏의 意見에는 一意가 있는 것이다. 원문주31▶神, 祗의 象形字가 「雨」字의 象形에 近似한 것은, 氏의 이 推測의 論據를 더구나 堅固히 하는 바 이다.[30] 郭氏의 理論에는 이렇게 弱點도 있으나 ▶P176-1그러나 그가 祖妣 兩字의 甲骨文字를 男女 生殖器의 象形으로 본 것은 果然 正當한 見解인 것이다. 원문주32▶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祖」의 原字 「且」의 象形이 陰莖인 것뿐 外라, 「妣」 의 原字 「匕」의 骨文인, 도유호 중도문3-55.png, 도유호 중도문3-56.png, 도유호 중도문3-57.png, 도유호 중도문3-58.png 等等도 果然 陰門의 象形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生殖器 崇拜와 直接 關係가 있었던 것이다.[31]
‘祖’자가 원래는 음경의 상징이었던 것은 에르케스씨에 의하건대, 벌써 그의 선사(先師)인 석학 콘라디 교수(Conrady)가 간파한 바로, 에르케스씨는 학생 시대에 벌써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공개 못 된 의견이다. 서양 학자 중 이것을 맨 처음 지면상에 발표한 분은 내가 아는 한, 칼그렌 교수인 것이다. 동 교수는 그런데 여기서 음경에만 언급하고 음문에는 별로 언급한 바가 없다. 그러나 그가 고대 지나문자의 祖, 伯, 魄, 土, 社의 원형이 음경의 상형이었다고 하는 것은 모두 정당한 주장이다(제6도 비교). 그런데, 여기서 ‘社’자 즉 지신을 의미하는 자의 원형이 ‘土’(‘示’는 후에 첨가한 것)의 원형과 동일하며, 그것이 역시 음경의 상형)이었던 것은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이하에도 더 논할 바와 같이 天이 女이오, 지가 남이라는 가장 엣날의 관념의 잔영인 듯하다. 그리고 社가 음경의 상징이었던 만큼 이 지신에 대한 희생 제공을 의미하는 ‘宜’자의 상형은 이 음경에다 육편을 건 것인 것이다. 칼그렌 교수는, 선조의 위비(즉 ‘主’)의 현재형상이 도유호 중도문3-59.png로 되어 ‘且’자를 연상케 하는 것을 들어, 그 근원이 생식기 숭배의 엣날에 소급되는 것까지 지적하는 바, 거기에도 한 의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하간 상고 중국에 이런 종교가 있었던 것은 하남에서 출토된 (현재 스웨덴국 수도 스톡홀름 동양박물관 소장)석제(대리석같은 것)의 음경상(제7도)도 증명하는 바이다. 동 출토품의 연대는 아직 미상이나, 그것은 벌써 은대에 소급되는 것이기가 퍽 가능한 것이다(필연 그럴 것이다).
쪽수▶P176-2「祖」字가 原來는 陰莖의 象徵이었든 것은 「에르케쓰」氏에 依하건대, 벌써 그의 先師인 碩學 「콘라듸」 敎授(Conrady)가 看破한 바로, 「에」氏는 學生 時代에 벌써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公開 못 된 意見이다. 西洋 學者 中 이것을 맨 처음 紙面上에 發表한 분은 내가 아는 限, 「카-ㄹ 그렌」 敎授인 것이다. 同 敎授는 그런데 여기서 陰莖에만 言及하고 陰門에는 別로 言及한 바가 없다. 그러나 그가 古代 支那文字의 祖, 伯, 魄, 土, 社의 原形이 陰莖의 象形이었다고 하는 것은 모다 正當한 主張이다(第六圖比較). 그런대, 여기서 「社」字 即 地神을 意味하는 字의 原形이 「土」字(「示」는 後에 添加한 것)의 原形과 同一하며, 그것이 亦是 陰莖의 象形)이었던 것은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以下에도 더 論할 바와 같이 天이 女이오, 地가 男이라는 가장 녯날의 觀念의 殘影인 듯하다. 그리고 社가 陰莖의 象徵이었든 만큼 이 地神에 對한 犧牲 提供을 意味하는 「宜」字의 象形은 이 陰莖에다 肉片을 건 것인 것이다. 「카-ㄹ 그렌」 敎授는, 先祖의 位碑(即 「主」)의 現在形象이 도유호 중도문3-59.png로 되야 「且」字를 聯想케 하는 것을 들어, 그 根源이 生殖器 崇拜의 녯날에 溯及되는 것까지 指摘하는 바, 거기에도 一意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如何間 上古 中國에 이런 宗敎가 있었든 것은 河南에서 出土된 (現在 瑞典國 首都 스톡홂 東洋博物館 所藏)石製(代理石같은 것)의 陰莖相(第七圖)도 證明하는 바이다. 同 出土品의 年代는 아직 未詳이나, 그것은 벌써 殷代에 溯及되는 것이기가 퍽 可能한 것이다(必然 그럴 것이다).
칼그렌 교수는, 선조 숭배가 곧 생식기 숭배요 그것은 자손 번식 내지는 이것과 직접 관계가 있는 농작물의
쪽수▶P176-3「카-ㄹ 그렌」 敎授는, 祖先 崇拜가 곧 生殖器 崇拜요 그것은 子孫 繁殖 乃至는 이것과 直接 關係가 있는 農作物의
第六圖 甲骨文及殷周金文上의 祖伯社等諸字
(Aus Karlaren: Some Fecundity Symbols etc)
쪽수▶P177
第六圖 甲骨文及殷周金文上의 祖伯社等諸字
(Aus Karlaren: Some Fecundity Symbols etc)
풍작을 위함에 제일義가 있음을 논한다. 선조 숭배의 동기가 효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巧利적 이기심에 있었음은, 칼그렌 교수가 참 정당히 간파한 바로 적어도 묘송사꾼은 이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종교심리의 근원은 결국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태도만 아니라, 인간의 ‘윤리도덕관’ 일반에 있어, 그 귀결점은 할 수 없이 이 이기심 선상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문주33▶그러기에, 소위 ‘인생철학’(Lebensphilesophie)의 총아, 짐멜(Georg Simmel)씨도,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선을 행하면, 그와 동시에 거기에 대한 보수를, 결국은 무의식적으로나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저간의 사정을 고백하고 만 것이다.[a 32] 그런데 칼그렌 교수가 선조 숭배와 생식기 숭배와의 불가분적 관계를 논하는 것을 나는 여기서 문화권적 고찰과 관련하여 좀 더 음미할 필요를 느끼는 바이다.
쪽수▶P178-1豊作을 爲함에 第一義가 있음을 論한다. 祖先 崇拜의 動機가 孝心에 있는 것이 아니라 巧利的 利己心에 있었음은, 「카-ㄹ 그렌」 敎授가 참 正當히 看破한 바로 적어도 墓訟事꾼은 이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宗敎心理의 根源은 結局 모다 여기에 있는 것이다. 神에 對한 態度만 아니라, 人間의 「倫理道德觀」 一般에 있어, 그 歸結點은 할 수 없이 이 利己心 線上에서 運動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주33▶그러기에, 所謂 「人生哲學」(Lebensphilesophie)의 寵兒, 「짐멜」(Georg Simmel)氏도, 吾人이 世上에 對하여 善을 行하면, 그와 同時에 거기에 對한 報酬를, 結局은 無意識的으로나마 期待하지 않을 수 없는 這間의 事情을 告白하고 만 것이다.[32] 그런대 「카-ㄹ 그렌」 敎授가 祖先 崇拜와 生殖器 崇拜와의 不可分的 關係를 論하는 것을 나는 여기서 文化圈的 考察과 關聯하여 좀 더 吟味할 必要를 感하는 바이다.
第七圖 河南省, 黃河北岸出土石相
쪽수▶P178-2
第七圖 河南省, 黃河北岸出土石相
선조 숭배가 곧 자손 번식, 풍작 등의 조장을 위한 종교의식 발생적 관계가 있다면, 거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생식마법 내지는 생식기 숭배와, 선조 숭배(Ahne kult)는 과연 동일한 문화권 내에서 기원된 것이다. 즉 구계단의 모권문화, 재배문화계가 양자의 본향인 것이다. 이 문제의 역사적 고찰을 하기 위하여는 우리는 그런데 석기시대의 예술에 다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쪽수▶P178-3祖先 崇拜가 곧 子孫 繁殖, 豊作 等의 助長을 爲한 宗敎儀式 發生的 關係가 있다면, 거기에는 多少 語弊가 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生殖魔法 乃至는 生殖器 崇拜와, 祖先 崇拜(Ahne kult)는 果然 同一한 文化圈 內에서 起源된 것이다. 即 舊階段의 母權文化, 栽培文化系가 兩者의 本鄕인 것이다. 이 問題의 史的 考察을 하기 爲하여는 우리는 그런대 石器時代의 藝術에 다시 言及하지 않으면 않 되겠다.
현대문주34▶회르네스 교수(Moritz Heernes)는 선사시대의 예술(미술)을 논함에 제하여, 예술은 인간의 직능(Funktion)이라고 하며, 구석기시대의 조각, 토우, 벽화들을 인간의 심미적 직능에서 자발한 표현물로 취급하였였다.[a 33] 그는 그의 이 고찰을 예술의 인류학적 고찰이라고 자칭하였다. 즉, 그는 예술의 역사적 고찰을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예술은 그것이 순수한 예술 그것만을 위하여 직능적으로 된 것은 결코 아니오, 마법 및 (마법의 발전계단인)종교와 직접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몽고 오르도스의 구석기시대의 여신상이나, 시베리아 말타의 그것이나, 유럽 오리냐크문화, 막달렌문화의 여신상은, 그것이 재배문화편에서 온 대모신(Magna Mater) 숭배의 사실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유물에 불과한 것이다 오리냐크문화, 막달렌문화의 벽화나 조각품에 보이는 동물상, 생식기형 등은, 그것이 수렵의 좋은 결과 또는 수렵대상인 동물의 번식을 위한 마법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수렵적의 인기문화에는 그런데 토템성이 퍽 농후하여 보이는 바, 토템주의자들은 마법을 누구보다도 심히 성행하였던 것이다. 즉 마법은 토템문화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발전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마법 중에서도 그 수위를 점령한 생식마법은 여기서 가장 심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식마법은, 그들의 여신숭배와 동양으로 원래는 모권적 재배문화계에서 넘어온 것이다(제1장 제2절 주4 참조).
쪽수▶P178-4원문주34▶「회르네쓰」 敎授(Moritz Heernes)는 先史時代의 藝術(美術)을 論함에 際하여, 藝術은 人間의 職能(Funktion)이라고 하며, 舊石器時代의 彫刻, 土偶, 壁畵들을 人間의 審美的 職能에서 自發한 表現物로 取扱하였였다.[33] ▶P179-1그는 그의 이 考察을 藝術의 人類學的 考察이라고 自稱하였다. 即, 그는 藝術의 歷史的 考察을 못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先史時代의 藝術은 그것이 純粹한 藝術 그것만을 爲하여 職能的으로 된 것은 決코 아니오, 魔法 及 (魔法의 發展階段인)宗敎와 直接關係가 있었든 것이다. 蒙古 「오르도쓰」의 舊石器時代의 女神像이나, 西伯利亞 「말타」의 그것이나, 歐羅巴 「오린냑」文化, 「막달렌]文化의 女神像은, 그것이 栽培文化便에서 온 大母神(Magna Mater) 崇拜의 事實을 證明하는 考古學的 遺物에 不過한 것이다 「오린냑」文化, 「막달렌」文化의 壁畵나 彫刻品에 보이는 動物像, 生殖器形 等은, 그것이 狩獵의 好結果 又는 狩獵對象인 動物의 繁殖을 爲한 魔法의 手段에 不過한 것이다. 이 狩獵的의 刃器文化에는 그런대 「토템」性이 퍽 濃厚하여 뵈이는 바, 「토템」主義者들은 魔法을 누구보다도 甚히 盛行하였든 것이다. 即 魔法은 「토템」文化에 있어서, 極端的으로 發展을 했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魔法 中에서도 그 首位를 占領한 生殖魔法은 여기서 가장 甚하게 摘用되었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生殖魔法은, 그들의 女神崇拜와 同樣으로 原來는 母權的 栽培文化系에서 넘어온 것이다(第一章 第二節 註四 參照).
프랑스, 도르도뉴주(Dordogne) 로셀(Laussel)에서 출토된 여러 신상 중에는 남녀 성교의 장면을 보이는 부조가있다(제8도). 현대문주35▶그런데, 여기서 남녀의 위치는 여재상, 남재하로 되어있는 것이다.[a 34] 이 미술작품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번식마법에 사용한 신상으로 그것은 어느 점으로 보던지, 권설 문화, 재배문화편에서 전래한 문화현상이다. 여기서 여신의 위치가 상부에 있는 것은, 그리고, 모권제 영향의 일면을 전하는 바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직도 모권제가 남아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재배문화의 이 성교상은 모권 영향이 심한 고대의 전아시아에서도 도기문양(제9도), 조각 기타에 출현한다. 아니 거기서는 그들의 음양사상의 근거가 이것으로 되어있는바, 천지만물은, 이 여천(女天), 남지(男地)의 교합의 결과로 생성한다. 구석기시대의 여남 양 신의 성교가 이렇게 천지의 성교에까지 이른 것은 물론 그 후의 발전계단으로, 이 관념의 상징화가 바로 그들의 여천남지의 우주도상인 것이다. 이런 도상은 물론 고대 이집트에도 있었던 것이다(제10도). 여기서도
쪽수▶P179-2佛蘭西, 「도르돈」州(Dordogne) 「ᄙᅩ쎌」(Laussel)에서 出土된 여러 神像 中에는 男女 性交의 場面을 뵈이는 浮彫가있다(第八圖). 원문주35▶그런데, 여기서 男女의 位置는 女在上, 男在下로 되어있는 것이다.[34] 이 美術作品은 疑心할 餘地가 없이, 繁殖魔法에 使用한 神像으로 그것은 어느 點으로 보던지, 拳楔(斧器) 文化, 栽培文化便에서 傳來한 文化現象이다. 여기서 女神의 位置가 上部에 있는 것은, 그리고, 母權制 影響의 一面을 傅하는 바일 것이다. (그랬다고, 그것이 아직도 母權制가 남어있었음을 證明하는 것은 決코 아니다). 이 栽培文化의 이 性交相은 母權 影響이 甚한 古代의 前亞細亞에서도 陶器紋樣(第九圖), 彫刻 其他에 出現한다. 아니 거기서는 그들의 陰陽思想의 根據가 이것으로 되어있는바, 天地萬物은, 이 女天, 男地의 交合의 結果로 生成한다. 舊石器時代의 女男 兩神의 性交가 이렇게 天地의 性交에까지 일은 것은 勿論 其後의 發展階段으로, 이 觀念의 象徵化가 ▶P180-1바로 그들의 女天男地의 宇宙圖像인 것이다. 이런 圖像은 勿論 古代 坎及에도 있었든 것이다(第十圖). 여기서도
第8圖 南佛 로셀(Laussel)의 오리냐크문화기의 부조.
(Aus L. Frobeuius: Kulturgeschichte Afrikas)
쪽수▶P180-2
第八圖 南佛 「ᄙᅩ쎌」(Laussel)의 「오린냑」文化期의 浮彫.
(Aus L. Frobeuius: Kulturgeschichte Afrikas)
여자가 천임은, 모권제의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우주도는 아프리카의 수단(Sudan) 일대에 가서는 태반이 남재상, 여재하로 위치가 바꾸어졌는 바, 그것은 부
쪽수▶P180-3女子가 天임은, 母權制의 影響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宇宙圖는 亞弗利加의 「쑤단」(Sudan) 一帶에 가서는 太牛이 男在上, 女在下로 位置가 박꿔젔는 바, 그것은 父
제9도 페르시아 알리-아바드 (Aly-Abad) 출토의 도기상에있는 문양. (Aus G, Wilke: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 Leipzig 1923, S. 16.)
쪽수▶P180-4
第九圖 波斯 알리-아받 (Aly-Abad) 出土의 陶器上에있는 紋樣. (Aus G, Wilke: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 Leipzig 1923, S. 16.)
권문화의 영향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전아시아의 이 생식마법은 그들의 종교상에서 대역할을 연출하였는 바, 그 결과는 난잡무도한 성교적 종교 예식으로 끝였던 것은 우리가 주지하는 바이다. 아프리카 일부에나, 인도에는 (시바교 등) 현재도 그 유풍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의식의 과정은 언어도단의 음행으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이 음란한 종교의식에 의하여 야만 농작물의 수획을
쪽수▶P181-1權文化의 影響에 그 原因이 있을 것이다. 前亞細亞의 이 生殖魔法은 그들의 宗敎上에서 大役割을 演하였는 바, 그 結果는 亂雜無道한 性交的 宗敎 禮式으로 끝였든 것은 吾人이 周知하는 바이다. 亞弗利加 一部에나, 印度에는 (「시ᅄᅡ」敎 等) 現在도 그 遺風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儀式의 過程은 言語道斷의 淫行으로 된 것이 大部分이다. 그들은 이 淫亂한 宗敎儀式에 依하여 야만 農作物의 收獲을
제10도 이집트 목관 위의 도상
(aus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쪽수▶P181-2
第十圖 埃及木棺上의 圖像
(aus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풍부히 할 수가 있는 줄로 믿는 까닭이다.
쪽수▶P182-1豐富히 할 수가 있는 줄로 믿는 까닭이다.
생식마법, 생식기 숭배는 고대 게르만족 중에도 있었던 것으로, 이제 인도에 관하여 좀 더 상론하건대, 시바 숭배 (Sivakult)나 「삭틔즘」(Saktism)의 현대형은 그만두고라도 그것이 벌써 아리안 이전의 인도 도시문화에 있었던 것은 마샬씨가 이미 지적한 바이다. 현대문주36▶동씨는 이 인도 도시문화층에서 출토된 석제(주로 석회석 및 설화석고(雪花石膏))의 남녀 생식기형 조각품이나, 그것의 소형인 패제(貝製) 기타의 미술작품들은, 사이비즘(Saivism)의 특징적 숭배대상, 즉 음문(yonI)과 음경(linga)에 비정되는 것을 지적하였었다.[a 35] 이 요니와 링가의 숭배는 과연 아리안 이전의 인도 도시문화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펼쳤던 것이다.
쪽수▶P182-2生殖魔法, 生殖器 崇拜는 古代 「게르만」族 中에도 있었든 것으로, 인제 印度에 關하여 좀 더 詳論하건대, 「시ᅄᅡ」 崇拜 (Sivakult)나 「삭틔즘」(Saktism)의 現代形은 그만두고라도 그것이 벌써 「아리안」 以前의 印度 都市文化에 있었든 것은 「마-ᄉힲᆯ」氏가 이미 指摘한 바이다. 원문주36▶同氏는 이 印度 都市文化層에서 出土된 石製(主로 石灰石 及 雪花石膏)의 男女 生殖器形 彫刻品이나, 그것의 小形인 貝製 其他의 美術作品들은, 「사이ᅄᅵ즘」(Saivism)의 特徵的 崇拜對象, 即 陰門(yonI)과 陰莖(linga)에 比定되는 것을 指摘하였었다.[35] 이 「요늬-」와 「ᄙᅵᇰ가」의 崇拜는 果然 「아리안」 以前의 印度 都市文化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役割을 演하였든 것이다.
이제 중국에 관하여 고찰하건대, 전아시아나 인도와 관계가 많았던 중국의 상고에 이런 요니와 링가의 숭배가 있었음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그것은 벌써 고급문화의 영향 이전에 있었기가 쉬운 것이다. 벌써 그 전에 재배문화의 영향은 중국 땅에 이것도 전한 것으로, 원상족은 이것을 ‘본토민’에게서 전승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방에서 온 고급문화의 영향하에 그 형태에 다소 변화를 받었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이 요니 및 링가의 숭배는 은대 이후에도 퍽 오래 남아 있는 것으로, 주여동씨의 이상에 소개한 이론 중에서도 (비록 그의 이론에 찬동키 어려운 데가 많기는 하나)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쪽수▶P182-3인제 中國에 關하여 考察하건대, 前亞細亞나 印度와 關係가 많었든 中國의 上古에 이런 「요늬-」와 「ᄙᅵᇰ가」의 崇拜가 있었음은 決코 無理가 아니다. 그러나 中國의 그것은 벌써 高級文化의 影響 以前에 있었기가 쉬운 것이다. 벌써 그 前에 栽培文化의 影響은 中國 땅에 이것도 傳한 것으로, 原商族은 이것을 「本士民」에게서 傳承하였기가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西方에서 온 高級文化의 影響下에 그 形態에 多少 變化를 받었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이 「요-늬」 及 「ᄙᅵᇰ가」의 崇拜는 殷代 以後에도 퍽 오래 남어 있은 것으로, 周予同氏의 以上에 紹介한 理論 中에서도 (비록 그의 理論에 讚同키 어려운 대가 많기는 하나)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1-3: ⑤ 주의 흥기와 은국의 멸망


서양학도 중에는 아직도, 주족은 목유민이었으니 그들은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형체로 중국에 와서 은상농민을 정복하였다고 믿는 자가 많으나, 그것이 어두당투 않는 잠꼬대인 것은 이상에서 벌써 여러 번 논급한 바이다. 주족은 벌써 농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뿐 아니라, 정복 당시에는 벌써 은상 도시문화의 영향 및 서방의 영향을 퍽 받은 바로 이미 국가도 형성하였고, 세습왕조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주 문왕을 서백(西伯)이라고 하였으니 주국은 원래는 ‘殷帝國’의 ‘伯爵領’인 듯이 보이기는 하나, 그것은 주족이 은상족의 지배하에 살았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쪽수▶P185西洋學徒 中에는 아직도, 周族은 牧遊民이었으니 그들은 「꺼덕꺼덕 말 탄 되놈」의 形體로 中國에 와서 殷商農民을 征服하였다고 믿는 者가 많으나, 그것이 어두당투 않는 잠꼬대인 것은 以上에서 벌써 여러 번 論及한 바이다. 周族은 벌써 農民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뿐 外라, 征服 當時에는 벌써 殷商 都市文化의 影響 及 西方의 影響을 퍽 ▶P186-1받은 바로 이미 國家도 形成하였고, 世襲王朝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周文王을 西伯이라고 하였으니 周國은 原來는 「殷帝國」의 「伯爵領」인 듯이 뵈이기는 하나, 그것은 周族이 殷商族의 支配下에 살었던 事實을 反影하는 것은 決코 아니다.
곽말약씨는 ‘周’자의 갑골문이 도유호 중도문3-65.png로 되어있는 것은 은상民이, 주족의 田作을 표시한 것으로 이것으로 주족이 농민이었던 것은 넉넉히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과연 곽씨의 예민한 관찰이라고 하겠다. 곽씨의 이 의견에는 더 반대할 여지가 없다. 사위에 목유종족이 둘러싼 은상민에게는 주족의 농작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었을 것이다. 따라서, 농작을 상징하는 자로 주족을 표시하였음은 가장 당연한 것이다. 현대문주37▶그런데, 이 도유호 중도문3-66.png자를 나는 인도하 지대, 아리안 이전의 도시문화의 문자에서도 발견하였다.[a 36] 물론 인도문자 중의 도유호 중도문3-69.png자도 ‘周’자였다고 할 논리적 근거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하간 인도문자(In lus seript)에 도유호 중도문3-70.png자가 보이는 것은 나의 주의를 퍽 야기하는 바이다. 금후 인도문자를 연구하는 분은 여기에 주의하기를 바란다.
쪽수▶P186-2郭沫若氏는 「周」字의 甲骨文이 도유호 중도문3-65.png로 되어있는 것은 殷商民이, 周族의 田作을 表示한 것으로 이것으로 周族이 農民이었던 것은 넉넉히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果然 郭氏의 鏡敏한 觀察이라고 하겠다. 郭氏의 이 意見에는 더 反對할 餘地가 없다. 四圍에 牧遊種族이 둘러싼 殷商民에게는 周族의 農作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었을 것이다. 따라서, 農作을 象徵하는 字로 周族을 表示하였음은 가장 當然한 것이다. 원문주37▶그런대, 이 도유호 중도문3-66.png字를 나는 印度河 地帶, 아리안 以前의 都市文化의 文字에서도 發見하였다.[36] 勿論 印度文字 中의 도유호 중도문3-69.png字도 「周」字였다고 할 論理的 根據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如何間 印度文字(In lus seript)에 도유호 중도문3-70.png字가 뵈이는 것은 나의 注意를 퍽 惹起하는 바이다. 今後 印度文字를 研究하는 분은 여기에 注意하기를 바란다.
주족이 농민족이었던 것은, 그 외의 사적상 전통(물론 모두 신빙할 수는 없으나)에 의하여도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도 이렇게, 농민이었으나,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도 목유문화의 전통이 은상족에 비하여는 더 많았던 듯하다. 그들은 그런데, 그 언어에 있어서는, 여하하였느냐고 하면, 거기에 관하여는, 아직 논단할 규범이 별로 없는 것이다. 아니 고문상서주서, 무성편 중에 보이는 ‘死魄’이라는 말은 조선어의 ‘새벽’(曉)이나 터키어의 사바익(Sabaik-?)(역시 새벽, dawn을 의미함)과 관련된 자로 알타이어의 어음적 사기(寫記, Phonetis che Schreibung)에 불과한 감이 있다. (따라서 ‘死魄’을 ‘生魄’에 대립시키는 재래의 전통은 곡해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그것은 주어(周語)가 아직은 알타이어계의 다철적 어였고, 단철어는 아니았던 듯한 감도 없지 못하기는 하다. 현대문주38▶그러나 무성편은 금문에는 없는 것인 만큼, 동편의 사적(史籍) 가치에는 문제가 많을뿐더러,[a 37] 그것이 과연 알타이계의 언어랬대야, 그것으로 주어(周語)의 다철어성을 증명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제비 하나를 보고, 벌써 여름이라고 할 수야 있나.」 Eine Schwalbe macht noch keinen Sommer.)
쪽수▶P186-3周族이 農民族이었던 것은, 其外의 史籍上 傳統(勿論 모다 信憑할 수는 없으나)에 依하여도 더 疑心할 餘地가 없다. 그들도 이렇게, 農民이었으나,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도 牧遊文化의 傳統이 殷商族에 比하여는 더 많었던 듯하다. 그들은 그런대, 그 言語에 있어서는, 如何하였느냐고 하면, 거기에 關하여는, 아직 論斷할 規範이 別로 없는 것이다. 아니 古文尙書周書, 武成篇 中에 뵈이는 「死魄」이라는 語는 朝鮮語의 「새벽」(曉)이나 土耳其語의 「사바익」(Sabaik-?)(亦是 새벽, dawn을 意味함)과 關聯된 字로 「알타이」語의 語音的 寫記(Phonetis che Schreibung)에 不過한 感이 있다. (따라서 「死魄」을 「生魄」에 對立시키는 在來의 傳統은 曲解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그것은 周語가 아직은 「알타이」語系의 多綴的 語였고, 單綴語는 아니었던 듯한 感도 없지 못하기는 하다. 원문주38▶그러나 武成篇은 今文에는 없는 것인 만큼, 同篇의 史籍價値에는 問題가 많을뿐더러,[37] 그것이 果然 「알타이」系의 語랫대야, 그것으로 周語의 多綴語性을 ▶P187-1證明할 수는 到底히 없는 것이다. (「제비 하나를 보고, 벌써 여름이라고 할 수야 있나.」 Eine Schwalbe macht noch keinen Sommer.)
주족은 목유족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주족은 은족과 동일한 종족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다. 거기에 일의가 없는 것도 아니나, 나는, 어느 점으로 보든지 주족은 (비록 원래는 은족과 동양으로 중앙아시아 목유문화계의 족이기는 하나) 은족과는 상이한 종족이라고 믿는 자 중의 하나이다. 소천탁치 박사는 주족에 관하여 『殷人は西來の一種族でその鄕土は甘肅省北界に在つて今の蘭州の岸に近い河北にも占居したと想はれ, 是よりも更に西方にゐた姜姓戎即ち羌族の涇渭流域に移住したのが周人であつたと考へてよいらしい』(續集 七十六頁)라고 하며, 주족을 강족과 관련시킨다. 박사의 의견에는 한 의의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나는 여기에 좌단할 수가 없다. 나는 박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몰라 하는 바이다. 주족의 유래에 관하여는, 여하간 금후의 연구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쪽수▶P187-2周族은 牧遊族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거기서 一步 더 나가 周族은 股族과 同一한 種族이라고 主張하는 분도 있다. 거기에 一義가 없는 것도 아니나, 나는, 어느 點으로 보든지 周族은 (비록 原來는 殷族과 同樣으로 中央亞細亞 牧遊文化系의 族이기는 하나) 殷族과는 相異한 種族이라고 믿는 者 中의 하나이다. 小川琢治 博士는 周族에 關하여 『殷人は西來の一種族でその鄕土は甘肅省北界に在つて今の蘭州の岸に近い河北にも占居したと想はれ, 是よりも更に西方にゐた姜姓戎即ち羌族の涇渭流域に移住したのが周人であつたと考へてよいらしい』(續集 七十六頁)라고 하며, 周族을 羌族과 關聯시킨다. 博士의 意見에는 一意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나는 여기에 左袒할 수가 없다. 나는 博士가 이렇게 생각하는 理由를 몰라 하는 바이다. 周族의 由來에 關하여는, 如何間 今後의 硏究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소천 박사의 주장과는 달라, 주족은 강족과는 다른 종족이라고 하더라도, 주족이 서쪽에서 온 족임에는 여하간 더 논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동서를 물론하고 학자 일반이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 주족을 거느리고 은국 정벌을 단행한 무왕, 본장 제3절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은국의 내적 모순을 잘 이해하여, 그 기회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생각하면, 인사의 ‘잔악’한 풍습이 노예제로 전환하기 시작한 때, 은국 멸망의 단서는 벌써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역사발전 변증법의 한 ‘작란’이었던 것이다.
쪽수▶P187-3小川博士의 主張과는 달라, 周族은 羌族과는 달은 種族이라고 하더라도, 周族이 西에서 온 族임에는 如何間 더 論할 餘地가 없다. 그것은 東西를 勿論하고 學者 一般이 다 認定하는 바이다. 그런대 이 周族을 거느리고 殷國 征伐을 斷行한 武王, 本章 第三節에서도 임의 말한 바와 같이, 殷國의 內的 矛盾을 잘 理解하여, 그 期會를 利用하였던 것이다. 생각하면, 人祠의 「殘惡」한 風習이 奴隷制로 轉換하기 始作한 때, 殷國 滅亡의 端緖는 벌써 뵈었던 것이다. 그것도 歷史發展 辯證法의 한 「작란」이었던 것이다.
주족이 은상족을 정벌할 때, 무왕은, 주족 이외에, 은상족에게 적개심을 가진 다른 종족들도 인솔하였던 것이다. 상서주서 목서편에 의하면, 거기에는 庸, 蜀, 羌, 髳, 微, 盧, 彭, 濮의 허다한 종족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는바, 이렇게 다수한 이종족을 동원한 것은, 은상족의 군세가 아직도 가장 강성하였던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당시 무왕 발도 그 기도가 만만치 않은 것을 알았기에,

今日之事, 不愆于六步七步 乃止齊焉 夫子朂哉 一八七

라든가,

不愆于四伐 五代 六伐 七伐 乃止齊焉 朂哉勗哉夫子

라고, 군대를 향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조심만 아니라, 동시에 은군의 세력이 강대하였음을 빙증하는 것이다.
쪽수▶P187-4周族이 殷商族을 征伐할 때, 武王은, 周族 以外에, 殷商族에게 敵愾心을 가진 달은 種族들도 引率하였던 것이다. 尙書周書牧誓篇에 依하면, 거기에는 庸, 蜀, 羌, 髳, 微, 盧, 彭, 濮의 許多한 種族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는 바, 이렇게 多數한 異種族을 動員한 것은, 殷商族의 軍勢가 아직도 가장 强盛하였던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다. 當時 武王發도 그 企圖가 만만치 않은 것을 알었기에,

今日之事, 不愆于六步七步 乃止齊焉 夫子朂哉 一八七

▶P188-1라던가,

不愆于四伐 五代 六伐 七伐 乃止齊焉 朂哉勗哉夫子

라고, 軍隊를 向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單純한 操心만 아니라, 同時에 殷軍의 勢力이 强大하였음을 憑證하는 것이다.
주족의 침습에 의하여, 화려한 안양문화의 건설자 은상족의 국가도 부득이 멸망을 하였었다. 이 가장 의미 깊은 대사건이 야기한 해는 사적(史籍) 전통에 의하여 서력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1122년이 된다. 이 계산은 사실상의 연대를 상거하기가 과연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은상족 정복에 참가한 종족 중에는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강족도 있었는바, 이 강족이 그 중에서 가장 큰 역할을 펼쳤다는 것은 학자 일반이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그것은 강족이 은상족에게 가장 박해를 받았던 까닭이니 이 기회에 그들은 옛날의 분풀이로, 가장 악심을 내서 싸웠을 것이다. 목양족 강인의 천재지구(天載之仇)는 이렇게 드디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국지장망(國之將亡)을 예상한 기자가 미자를 향하여 국망 후 타족의 신복이 됨을 두려워하며 「商其淪喪 我罔爲臣僕 詔王子出廸」를 부르짖은, 그 구절 중에는 3000여 년 후의 오늘에도, 듣는 자의 눈물을 짜내는 바가 있다. 그러나, 은민은 그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쪽수▶P188-2周族의 侵襲에 依하여, 華麗한 安陽文化의 建設者 殷商族의 國家도 不得已 滅亡을 하였었다. 이 가장 意味 깊은 大事件이 惹起한 해(年)는 史籍的 傳統에 依하여 西曆으로 換算하면, 紀元前 千一百二十二年(1122)이 된다. 이 計算은 事實上의 年代를 相距하기가 果然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런대 殷商族 征服에 參加한 種族 中에는 以上에서 본 바와 같이 羌族도 있었는바, 이 羌族이 그 中에서 가장 큰 役割을 演하였다는 것은 學者 一般이 모다 認定하는 바이다. 그것은 羌族이 殷商族에게 가장 迫害를 받았었던 까닭이니 이 期會에 그들은 녯날의 忿푸리로, 가장 惡心을 내여서 싸웠을 것이다. 牧羊族 羌人의 天載之仇는 이렇게 드듸여 悲慘한 最後를 맟웠던 것이다. 國之將亡을 豫想한 箕子가 微子를 向하여 國亡 後 他族의 臣僕이 됨을 두려워하며 「商其淪喪 我罔爲臣僕 詔王子出廸)를 부르짖은, 그 句節 中에는 三千年餘 後의 오늘에도, 듣는 者의 눈물을 짜내는 바가 있다. 그러나, 殷民은 그 運命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은국이 망한 후, 그 왕가는 ‘은국’의 고지에 봉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宋’이라고 하였는바, 이 ‘宋’은 물론 ‘商’의 와라는 것은 일반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은민은 주족에게 정복을 당하자, 그 운명이 참말 비참하였으니, 상류계급 및 그 외의 위험분자는 모두 낙읍에 붙들려 왔고, 그렇지 않은 자의 대부분도 노예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주국이 낙양에 신도읍을 경영할 때, 그 건설공사에 종사한 것은, 여기에 취집되었던 은민이었는 바, 소위 ‘庶殷’이란, 벌써 노예로 화한 은민의 칭인 것이다. 찬란한 과거의 역사를 가진 은민은, 그러나, 그들의 안목에는 아직 서융의 하나로밖에 안 보였던 외족에게 이렇게 압박을 당하고 만족하였을 리가 없으니, 그들은 그런 고로 자주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상서주서 중의 대고, 강고, 주고, 재촌, 소고, 낙고, 다사, 다방 제편 중에는 그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예하면, 주고편 중, 무왕이 동생 강숙을 매토에 봉하며, 하는 말 중에

厥或誥曰 群飮 汝勿佚 盡執拘以歸于周 予其殺

이라는 구는, 무왕이 음주의 해를 염려하여 한 도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음주를 구실로 하고 회집하여는 반역을 도모하였던 까닭이다. ‘군음’이 무서웠기에 “그럴 때마다, 모조리 붙잡아 내게로 보내라. 내가 죽여 버릴 터이니”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 다사편 중에서, 새로 건설한 낙읍에 와서 은민에게 하는 주공의 말이

王曰 告爾殷多士 今予惟不爾殺 予惟時命有申

을 운운하였다. 즉, 너희들은 모두 죽일 것이나, 차마 그럴 수 없어 살려두며, 너희에게 또 한 번 고하노니 잘 들어라! 운운이다. 암만 그랬대야 노예적 사역에 분을 못 이긴 은국 유민이 그 말을 들었을 리가 없다.
쪽수▶P188-3殷國이 亡한 後, 그 王家는 「殷國」의 古址에 封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宋」이라고 하였는바, 이 「宋」은 勿論 「商」의 訛라는 것은 一般이 認定하는 바이다. 그런대 殷民은 周族에게 征服을 當하자, 그 運命이 참말 悲慘하였으니, 上流階級 及 其外의 危險分子는 모다 洛邑에 붓들려 왔고, 그렇지 않은 者의 大部分도 奴隷로 使用되었던 것이다. 周國이 洛陽에 新都를 經營할 때, 그 建設工事에 從事한 것은, 여기에 聚集되었던 殷民이었는바, 所謂 「庶殷」이란, 벌써 奴隷로 化한 殷民의 稱인 것이다. 燦爛한 過去의 歷史를 가진 殷民은, 그러나, 그들의 眼目에는 아직 西戎의 一로밖에 안 뵈었던 外族에게 이렇게 壓迫을 當하고 滿足하였을 理가 없으니, 그들은 그런 故로 자조 叛亂을 이르켰던 것이다. 尙書周書 中의 大誥, 康誥, 酒誥, 梓村, 召誥, 洛誥, 多士, 多方, 諧篇 中에는 그 事實▶P189-1이 잘 反影되어 있는 것이다. 例하면, 酒誥篇 中, 武王이 弟康叔을 妹土에 封하며, 하는 말 中에

厥或誥曰 群飮 汝勿佚 盡執拘以歸于周 予其殺

이라는 句는, 武王이 飲酒의 害를 念慮하여 한 道德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飮酒를 口實로 하고 會集하여는 反逆을 圖謀하였던 까닭이다. 「群飮」이 무서웟기에 「그럴 때마다, 모조리 붓잡어 내게로 보내라. 내가 죽여 버릴 터이니.」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 多士篇 中에서, 새로 建設한 洛邑에 와서 殷民에게 하는 周公의 말이

王曰 告爾殷多士 今予惟不爾殺 予惟時命有申

을 云云하였다. 則, 너희들은 모다 죽일 것이나, 참아 그럴 수 없어 살녀두며, 너희에게 또 한 번 告하노니 잘들어라! 云云이다. 암만 그랫대야 奴隷的 仕役에 忿을 못 익인 殷國 遺民이 그말을 들었을 理가 없다.
은국이 망한 후, 주왕 수의 아들 무경을 고토에 봉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명색뿐이었던 것이다. 이 ‘봉토’의 위험을 감시하기 위하여 주 왕실에서 관채 강삼숙을 파견하였던 것은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성왕시에 이 삼감이 무경이와 합력하여 반역을 하였다는 것은, 사실인즉 은민의 최후적 대거사였던 것이다. 삼숙이 은민을 선동하였다기보다도 이 삼숙의 주공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은민이 구왕가의 유혈을 받들어 선두에 세우고 거사를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무경관숙이 목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은민의 압박은 더구나 참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족에 대한 은민의 반항이란 물론 원상족 전부의 반항은 결코 아니오, 오직 은상 도시문화권 내의 협의적 은민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원상족 일반과는 벌써 인연이 멸어졌던 까닭이다.
쪽수▶P189-2殷國이 亡한 後, 紂王受의 子 武庚을 古土에 封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名色뿐이었던 것이다. 이 「封土」의 危險을 監視하기 爲하여 周 王室에서 管蔡康三叔을 派遣하였던 것은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다. 成王時에 이 三監이 武庚이와 合力하여 反逆을 하였다는 것은, 事實인즉 殷民의 最後的 大舉事였던 것이다. 三叔이 殷民을 煬動하였다기보다도 이 三叔의 周公에 對한 不滿을 利用하여 殷民이 舊王家의 遺血을 받들어 先頭에 세우고 舉事를 하였던 것이다. 그 結果 武庚管叔이 목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殷民의 壓迫은 더구나 慘酷하였던 것이다. 그런대, 周族에 對한 殷民의 反抗이란 勿論 原商族 全部의 反抗은 決코 아니오, 오직 殷商 都市文化圈 內의 狹義的 殷民에 不過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原商族 一般과는 벌써 因緣이 멸어졌던 까닭이다.
중국학자들은 모두, 이 상족은 주의 압박을 못 이겨 사방에 유리하여 상고(商賈)가 되었다고 논한다. 그 이론에는 한 의의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보면, 그들의 운명은 그야말로 유태인의 운명을 관련케 하는 바가 많다. 여하간 은상족의 비참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던 것이다.
쪽수▶P189-3中國學者들은 모다, 이 商族은 周의 壓迫을 못 닉여 四方에 流離하여 商賈가 되었다고 論한다. 그 理論에는 一意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보면, 그들의 運命은 그야말로 猶太人의 運命을 關聯케 하는 바가 많다. 如何間 殷商族의 悲慘은 우리가 想像하는 以上이었던 것이다.
은상족을 이렇게 정복한 주족은, 그런데, 이상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비록 농민이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중앙아시아 목유족의 전통이 퍽 심하여 보인다. 그것은 그들의 제도 일반에 표현되어있는 것이다. 왕국유씨는 그의 「殷周制度論」에서, 정치상으로나 문화상으로나, 중국에는 아직까지 은주의 과도기 같은 대변혁은 없었다고 하는바, 거기에는 물론 진리가 있다. 오직 이 모든 변혁을 주공 1인의 공로로 아는 것은 근본적 오해인 것이다. 주공보다도 거기서 움직인 힘은 한 편으로는 황원문화, 목유문화 시대의 전통이오, 다른 한 편으로는 또 서방에서 전래한 정복적 대국가 건설의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국가도 정복적 대국가로 전개하였으니, 그들은 상족만 아니라, 그 외의 제족을 점점 더 정복하였으며, 종래에는 ‘천하’를 통일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국가가 정복적 국가가 되었으면, 그것은 동시에 또 노예국가였던 것이다. 그들은 피정복민을 노예화하였으며, 이 노예 사용을 근저로 한 농작, 즉 노농제를 개시하였던 것이다. 천하통일이란, 여기서 필연적으로, 분립적 봉건제의 예비조건이었으니, 그것은 유럽사에서 보면, 카를 대제(Karl der Grosse)의 천하통일은 봉건적 분립을 필연히 초래하였던 것과 사세가 근사한 바이다. 벌써 메로빙거 시대(Merowinger Zeit)에 단서를 보인 봉건제가 카롤링거 시대(Karolinger Zeit)에 이르러 완전히 전개하기 시작한 것과 근사하게 상대에 다소 싹이 트기 시작했던 봉건제는 주대에 이르러 완전히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주(東周) 시대에는 그 분립이 완전이 되었으며, 중앙집권은 전연 몰락하였던 것이다.(완)
쪽수▶P189-4殷商族을 이렇게 征服한 周族은, 그런데, 以上에서 임의 言及한 바와 같이 비록 農民이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中央亞細亞 牧遊族의 傳統이 퍽 甚하여 뵈인다. 그것은 그▶P190들의 制度 一般에 表現되어있는 것이다. 王國維氏는 그의 「殷周制度論」에서, 政治上으로나 文化上으로나, 中國에는 아직까지 殷周의 過渡期같은 大變革은 없었다고 하는바, 거기에는 勿論 眞理가 있다. 오직 이 모든 變革을 周公 一人의 功勞로 아는 것은 根本的 誤解인 것이다. 周公보다도 거기서 움직인 힘(力)은 一方으로는 荒原文化, 牧遊文化 時代의 傳統이오, 他方으로는 또 西方에서 傳來한 征服的 大國家 建設의 思想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國家도 征服的 大國家로 展開하였으니, 그들은 商族만 아니라, 其外의 諸族을 漸漸 더 征服하였으며, 仍終에는 「天下」를 統一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國家가 征服的 國家가 되었으면, 그것은 同時에 또 奴隷國家였던 것이다. 그들은 被征服民을 奴隸化하였으며, 이 奴隸 使用을 根底로 한 農作, 即 奴農制를 開始하였던 것이다. 天下統一이란, 여기서 必然的으로, 分立的 封建制의 豫 備條件이었으니, 그것은 歐羅巴史에서 보면, 「카롤」大帝(Karl der Grosse)의 天下統一은 封建的 分立을 必然히 招來하였던 것과 事勢가 近似한 바이다. 벌써 「메로ᅄᅳ」 時代(Merowinger Zeit)에 端緖를 뵈인 封建制가 「카롤」 時代(Karolinger Zeit)에 일을어 完全히 展開하기 시작한 것과 近似하게 商代에 多少 싹이 트기 始作했던 封建制는 周代에 일을어 完全히 展開하기 始作했던 것이다. 그리하야 東周時代에는 그 分立이 完全이 되었으며, 中央集權은 全然 沒落하였던 것이다.(完)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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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郭沫若, 「中國古代社會硏究」, 上海 一九三二年. 萬國鼎 「中國田制史」(中國地政學會叢書 第一種), 上册, 南京, 民國二十三年.
  2. Vgl. T. A. Joyce; South American Archaeology, London 1912, Chapter V.
  3. 「震檀學報」 第八卷 中의 德文 拙稿 Konfuzius und Laotse in Lichte der chinesischen Sozialgeschichte 參照. 西洋 學者 中에서 道德經을 多少 正當히 理解한 분은 故 「ᅄᅵᆯ헮」(Richard Wilehlm)氏에 限하였을 것이다. 西洋文으로 飜譯된 道德經 中에는 참말 虛無孟獰한 것이 많다. 飜譯은 그리고 原意와는 背馳되는 것이 常例였다. 그러나 오직 Wilchelm 敎授의 譯만은 原意를 傳하는 바가 많다. 敎授의 道德經 全譯은 나는 아직 目擊한 배 없다. 오직 그의 老子에 關한 著書 中에 拔抄한 것 十餘 章을 보았을 따름이다. 그것도 나는 以上의 德文 拙稿를 거진 끝낼냐고 할 때 入手했든 것으로 거기에 依하야 내게는 參考된 바가 퍽 많었다. 나는 仝拙稿 中에서 오직 數章의 斷句를 飜譯하였음에 不過하나, 그것으로나마, 나는 道德經 飜譯의 方途는 指示하였다고 믿는다. 나는 거기서 例하면 名可名 非常名의 「名」을 첫번의 名詞는 Begriff라고 飜譯하였고, 그 대음 것의 動詞는 bestimmen 又는 bestimmt werden으로 飜譯하였다. 그 後 「ᅄᅵᆯ헮」氏의 譯을 보니, 그는 거기서 名을 Name라고 飜譯은 하였으나, 그 意味는 Begriff라고 하였었다. 그는 「常」을 남과 같이 ewig라고 飜譯하였으나, 그것보다도 absolut로 飜譯하는 것이 좀 더 適合해 뵈이는 바이다. 그리하야 Begriff, der bestimmt werden kaun, ist ncht der(od. kein) absolute (absoluter) Begriff라고 하고 보면, 거기서 비로소 老子哲學의 本意는 알게 되는 것이다. 英國의 「웨일리」(Arthur Waley)氏는, 그의 道德經 英譯 及 註釋 The way and its power 中에서 「ᅄᅵᆯ헮」 敎授의 譯이 第一 適當한 것이라고는 하면서 그의 例를 본받지 않고, 自己의 獨特한 飜譯을 試驗하였었다. 거기서 그는 그리하여 原意를 떠난 点을 많이 뵈여준다. 「ᅄᅵᆯ헮」氏에는 足脫不及인 것이다.
  4. 董作賓, 「五等爵在殷商」(歷史語言研究所集刊, 第六本, 第三分, 民國二十五年.)(Academia Sinica : Bulletin of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Vol. Ⅵ, Part 3. Shanghai 1933)
  5. 郭沫若, 前揭書, 三一二頁
  6. Creel: a. a. O. P. 215.
  7. 郭沫若, 前揭書, 「卜辭中之古代社會」章. 董作賓, 『「獲自麟」解』(安陽發掘報告, 第二期). 仝, 「帶矛說」,(仝第四期」.
  8. 郭沫若, 前揭書, 二八二頁 參照.
  9. 桑原隲藏, 「支那人間に於ける食人肉の風習」(「東洋學報」 第十四卷 第一號. 及, 「東洋文明史論叢」 東京及京都 昭和九年). 「支那人の食人肉風習」(「太陽」 第二十五卷 第七號. 及, 「東洋史說苑」 東京及京都, 昭和二年). 勿論 食人肉이라고 모다가 一定한 文化圈과 關聯된 것은 決코 아니다. 饑饉時나 戰亂時는 不得已 이 惡行을 犯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歐羅巴에도 例가 많었다. 그러나 常時에 食人이나, 又는 怨讎를 죽인 때 그 肉을 噬食하는 것은 모다 新栽培文化의 遺風인 것이다. …그런대 歐羅巴의 例를 보건대 中世紀에 먹을 게 없으면 人相食한 것은 그만두고라도, 바로 十七世紀에 三十年戰爭으로 因하여 戰時나 戰後에 獨逸이나 東部 佛蘭西에서 餓死者의 屍體에 개(犬)나 人間이 덤벼들어 고기 뜯어 먹은 것이나, 平民이 兒童을 殺戮하야 食用에 供하였거나, 又는 배줄인 亂兵이 良民을 잡어먹은 것 等은 아직도 記憶에 남어있을 만치 近世史上의 事件이였든 것이다. Vgl. Josef Kulischer: Allgemeine Wirtschaftsgeschichte Ⅱ. Bd., München und Berlin 1929, S. 17 f. f.
  10. 일즉이 瑞西 首都 「베른」(Bern)大學, 動物解剖學者 「뛰르스트」 敎授(U. Duerst)도 「알프쓰」地帶에 杭工住家文化를 傳한 者는 黃人種系의 種族으로, 그들은 同時에 豚을 가지고 왔든 것을 證明하였다. 거기의 豚은 所謂 Sus palustris(Torfschwein)라는 것으로, 이것이 東方에서 온 것이 確然한 것은, 여기에 相當한 野生形이 거기에는 全然 缺如하였음으로도, 알 수가 있다. Vgl. Explorations in Turkestan, Vol. Ⅰ. P. 67, Vol. Ⅱ. P. 357.
  11. J. G. Andersson: “An early Chinese Culture” in the “Bulletin of the Geological Survey of China” No. 5. Ⅰ 1923, P. 16.
  12. B. Karlgren: Analytic Dictionary of Chinese and Sino-Japanese, Paris 1923.
    「들는다」, 「듯는다」에서 보면 여기서는 確然히 「들」이 變하야 「듯」이 된 것이다. 이것은 l, r의 終音이 t 終音 以前인 것의 好例이다.
  13. 郭沫若, 前揭書, 二八三頁
  14. Creel: a. a. O. P. 163.
  15. Eduard Erkes: “Der Primat des Weibes im alten China” in “Sinica” hrsg. vom China-Institut Frankfurt am Main, Ⅹ. Jahrgang(1925), Heft 4, S. 166.
    「쉬밑」, 「콥퍼쓰」 兩氏는 天主敎 僧侶임에도 不拘하고, 그들은 不得已, 唯物史觀的 方法論에서 摘用한 바가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原始文化의 諸現象을 이것에 依하야만 說明할 수 있었든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인만큼, 그들의 理論은 唯物史觀 그것과는 差異가 甚한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學者 中에는, 그들을 唯物論者라고 責하는 者가 많다. 그것은 自己의 學說은 이 「쉬」 「콥」 兩氏의 學說에는 足脫不及인 것에 화가 난 끝에 하는 辱說인 境遇가 많은 것이다. 「에르케쓰」氏는 그 中의 하나이다. 나는 伯林大學의 「투른ᅄᅡᆯ뜨」 敎授(Richard Thurnwald)의 著書 中에서도 읽은 일이 있다. 나는 퍽 섭섭히 생각하는 바이다.
  16. 松本信廣, 「古代文化論」 第四章.
  17. F. Graebner: Methode der Ethnologie(Kulturgeschichtliche Bibliothek, hrag. von W. Foy, Ⅰ. Reihe Ⅰ) Heidelberg 1911, S. 74 ff.
    W. Schmidt: Handbuch der Methode der kulturhistorischen Ethnologie, Münster in Westfalen 1937, S. 270 ff.
  18. 「古史辯」 第一册, 民國十五年 三月, 本論 一九九頁.
  19. R. Bleichsteiner: Die Gelbe Kirche, Wien 1937, S. 28
  20. Vgl. “Lehrbuch der Völkerkunde” hrsg. von K. Th Preuss, Stuttgart 1937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chmidt: Ursprung der Gottesidee Ⅰ. Bd.(이것은 卷數가 많은 것인대, 第一卷만 아니라, 다른 卷도 參照. 但, 나는 이것은 가장 外觀的으로밖에 못 구경하였다.
    F. Graebner: Das Weltbild der Primitiven.
  21. 崔南善, 「壇君及其研究」(開闢社 發行 「別乾坤」, 第三卷 第三號, 昭和三年 五月).
    崔南善이 學界에서 「외입」을 한다는 것은 내가 여기서 새삼스럽게 論할 必要가 없다. 이 論文에 있어서도 崔氏는 꽤 「외입」을 한다. 그러나 그와 同時에 그는, 風聞에 들니는 바와는 全然 달으게, 堂堂한 理論을 展開하고 있다. 그 中에는 참말 나를 感服하야 마지 않게 하는 點이 퍽 많다. 아마 朝鮮에서 檀君을 論한 분 中에는 崔氏만큼 卓見을 展開한 분은 없을 것이다(勿論 그의 檀君崇拜論은 「에누리」하고 보아서 말이다). 白南雲氏는 그의 著 「朝鮮社會經濟史」(昭和八年) 中에서 檀君을 論하는 中 崔南善氏를 批評하는 바(一四頁), 거기서 그는 崔氏의 弱點만 指摘하고, 그의 長處에는 全然 言及치 않는 것은, 나를 퍽 섭섭하게 하는 바이다. 白氏 崔評은 如何間 不當한 無根之說이다. 그뿐 外라, 그 荒唐한 部分(그것은 事實, 其外의 部分에는 直接 背馳되는 것이다)만 除去하고 보면, 崔氏의 理餘은 白氏의 幼稚한 俗論類는 決코 아닌 것이다. 白南雲氏는 거기서 自己의 理論은 가장 科學的 見解라고 자랑은 하나, 그것은 그의 「아부지」 等等 語의 「語源的」 解釋(必是, 渡部義通氏 等의 흉내일것이다)과 同樣으로, 科學的으로는 何等 價値가 없는 俗論인 것이다. 朝鮮史를 世界史의 全的 過程에서 論한다는 그가, 이 檀君은 何故로 他族과의 關聯이 없이 局部的으로만 論하는가? 崔南善氏가 檀君은 「당굴」이오 「텅걸」이라고 한 소리를 뻔히 듣고도, 그렇게 어두 당투 않는 소리를 하는 그 理由를 나는 몰라하는 바이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더 말하야 둔다. 우리는 部分的 考察만 하지 말고, 部分은 全體와 關聯하야 論하여야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않 된다. 心理學 乃至는 哲學에는 所謂 게쉬탈트說(Gestalt-Theorie)이라는 것이 있다. 그 學說에는 不當한 點도 많으나, 그들이 거기서 全的, 統一的 認識을 主張하고, 部分과 全體의 關聯을 高調함에는 一理가 있다. 部分的 考察 以上을 못하는 우리 東洋의 史學徒 諸君은 「게쉬탈트」說의 現在의 두 巨星 W. Koehler氏와 M. Wertheimer氏의 著作品들을 좀 읽어볼 必要가 있다. …
    檀君과 같은 말에 「당굴」이 있다면, 天神思想과, 「ᄉힲ마늬즘」(Shamanism)과의 關聯이 여기서는 問題이다. 「ᄉힲ마늬즘」의 起源에 關하야는, 그것을 北極地帶(그ㄹ베너)에 찾는 분도 있고, 또는 東南亞細亞 母權文化에 찾는 분도 있고, 또는 中央亞細亞 牧遊文化에 찾는 분도 있다. 나는 아직 누구의 主張이 正當한지를 몰으겠다. 그러나 如何間 이것은 가장 널리 퍼진 것으로, 北極族만 아니라 中央亞細亞 牧遊民 間에도 그것은 가장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야 牧遊文化의 流轉과 함께 「ᄉힲ마늬즘」을 同時에 傳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天神」과 「무당」은 同時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ᄉힲ마늬즘」은 또 南쪽 方面에서도 朝鮮에 들어온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러나 勿論 아직은 나는 잘 몰으는 바이다. …如何間 檀君은 「하나님」만 아니라, 同時에 「무당」이였든 것은 엿볼 수가 있다. 崔氏의 意見에는 참말 그럴 듯한 點이 있다!
  22. 朱芳圃, 「甲骨學商史編」, 第六章, 第四節(上冊) 參照.
  23. Henri Maspero: La Chine Antique(Histoire du Monde, Tome Ⅳ), Paris 1927, P. 156.
  24. B. Karlgren: “Some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Bulletin of the Museum of Far Eastern Antiquities”(Östasiatiska Samlingarna), No. 2, 1930.
  25. 錢玄同, 「答顧頡剛先生書」(「讀書雜志」 第十期. 「古史辨」 第一冊, 本論 七七頁). 郭沫若, 前揭書, 三版書後卄頁 參照.
  26. E. Erkes: “Some remarks on Karlgren's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Östasiatiska Samlingarna”, No. 3, 1931.
  27. 周予同, 『「孝」與「生殖器崇拜」』(「一般」第三卷, 第一號. 「古史辯」 第二冊, 二三二-二五三頁).
  28. 郭沫若, 前揭書, 二九〇頁.
  29. 朱芳圃, 前揭書, 第六章, 第二節(上冊).
  30. 「雨」의 骨文이 水滴의 落下를 象徵하는 것을 나는 「뿔아잏히쉬타이너」 敎授에게 말하였더니, 同 敎授는 그것이 天의 精液의 落下를 象徵하는 것이기도 쉽다고 對答하였었다. 그리고 보면 神祗의 象形字 도유호 중도문3-54.png은 天의 精液의 落下를 意味한 것이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雨」의 甲骨文이 天의 精液 落下의 象徵이라고는 나는 암만 해야 생각할 수가 없다.
  31. 郭氏는 詩經 小雅篇의 斯于, 楚茨, 章 等의 詩句를 神殿 內의 性交라는 宗敎儀式과 關聯시킬냐고 하나(郭, 二八八頁), 그것은 아마 獨斷에 不過한 主張일 것이다.
  32. 仔細히 記憶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아마 Samhnlung Göschen, Bd. 500.로 發表된 「짐멜」 敎授의 「哲學主要問題」(Hauptprobleme der Philosophie) 中에 씨여있든가 보이다. 比較하기를 바란다.
  33. Horness-Menghin: Urgeschichte der bildenden Kunst in Europa, Wien 1925.
  34. Vgl.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Zürich 1933, S. 156. G. Wilke: 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Mannus-BibliotherkNr. 31), Leipzig 1923, S. 17.
  35. Mohenjo-Daro etc., Vol. Ⅰ. Chapter Ⅴ, Religion.
  36. 例하면, John Marshall: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中에 複寫된 印度河地帶 都市文化層 出土의 印章, 第四百四十四號(Seals No. 444)上의 文字는 다음과 같다.
    도유호 중도문3-67.png
    이 外에도 도유호 중도문3-68.png字는 數次 뵈이는 바이다.
  37. 南宋 初에 吳才老가, 所謂 孔安國傳古文尙書를 疑惑하기 始作한 以後, 現今에 일으기까지 그 僞作임을 指摘하는 學者가 많다. 朱子門人 蔡沈이는 書序만은 孔子의 作이 아님을 指摘하였으나, 其外에는 古文을 採用하였었다. 不幸히 蔡沈의 後世에및인 影響이 퍽 컷든 것이다. 그러나, 나 亦, 古文이 僞作임을 看過할 수가 없다. 나같은 殘薄한 者가 여기에 敢히 入唃함은 너모나 當突하기는 하나, 나는, 今文에 없는 古文 諸篇의 文體가 平易함을 보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 假作性을 感하게 된 바이다. 勿論 今文에도 文體가 平易한 者가 없는 것은 아니나, 大體로 보아, 今文에 없는 古文 諸篇은 암만 해야 伏生이 傳한 今文 諸篇의 文體보다 平易한 것이다. 吳才老의 意見과 同樣으로 그것은 古文의 僞作임을 말하는 것이다.
    古文僞作說과 相對하야는 또 所謂 孔安國尙書大傳僞作說이 問題이다. 孔璧書는 原來 世間에 傳한 바 되였으나 兵火가 많은 中國 일이라, 後世에 不幸이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대 이 孔瑩書(古文)에, 武帝時, 孔子十二世孫 孔安國이 傳을 썼다는 것은 암만 해야 無根之說인 듯하다. 現存한 所謂 孔安國尙書大傳이란, 孔子十二世孫과는 何等 關聯이 없는 듯하다. 따라서 이것을 僞作이라고 하는 것은 當然한 主張이다. 그런대 여기에 關하야 武內義雄 敎授는 퍽 滋味있는 말을 한다. 그의 意見이 얼마나 正當한가는 讀者諸君의 判斷에 맊이고, 나는 오직 그의 理論을 紹介함에 끛인다.—
    『所謂孔安國傳なるものは東晋の梅賾によって世に出た本で淸初の考證家閻若璩は之を以て梅賾の僞撰と断定したが, 其後丁晏は梅賾以前にこの書が存在した證據をあげ, 又其傳意が王肅義に合するものが多いことを指摘して肅の僞撰と想定した. 然し丁晏の想定も未だ證據不充分である. 王肅の門人に孔晁といふ者があって逸周書の注をかいてゐるが, 此人に又尙書疑問三巻の著作があつて, 隋志にはこれを孔晁の共撰だとしてゐるが, 新唐志には之を王肅孔安國の問答を錄したものと注記してゐるから孔晁は字を安國といったことが明瞭である. そこで私は尙書の孔安國傳なるものを孔晁の傳だと考へたい. 之を孔晁に配すればそれが王肅義と合するのも當然で, 又それが梅賾以前に存することに疑を容れる必要がなくなる. それは兎も角も尙書の孔安國傳が王肅に因縁のある注だといふことは確實である.』 【武内義雄 「支那思想史」(岩破全書 第七十三卷), 昭和十一年 二一九頁】






현대문주


  1. 郭沫若, 「中國古代社會硏究」, 上海 一九三二年. 萬國鼎 「中國田制史」(中國地政學會叢書 第一種), 上册, 南京, 民國二十三年.
  2. Vgl. T. A. Joyce; South American Archaeology, London 1912, Chapter V.
  3. 「震檀學報」 제8권 중의 독문 졸고 Konfuzius und Laotse in Lichte der chinesischen Sozialgeschichte 참조. 서양 학자 중에서 도덕경을 다소 정당히 이해한 분은 고 빌헬름(Richard Wilehlm)씨에 한하였을 것이다. 서양문으로 번역된 도덕경 중에는 참말 허무맹랑한 것이 많다. 번역은 그리고 원의(原意)와는 배치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오직 Wilchelm 교수의 역만은 원의(原意)를 전하는 바가 많다. 교수의 도덕경 전역은 나는 아직 목격한 바 없다. 오직 그의 노자에 관한 저서 중에 발초한 것 10여 장을 보았을 따름이다. 그것도 나는 이상의 독문 졸고를 거진 끝내려고 할 때 입수했던 것으로 거기에 의하여 내게는 참고된 바가 퍽 많았다. 나는 동 졸고 중에서 오직 수 장의 단구를 번역하였음에 불과하나, 그것으로나마, 나는 도덕경 번역의 방도는 지시하였다고 믿는다. 나는 거기서 예하면 名可名 非常名의 ‘名’을 첫 번의 명사는 Begriff라고 번역하였고, 그 다음 것의 동사는 bestimmen 또는 bestimmt werden으로 번역하였다. 그 후 빌헬름씨의 번역을 보니, 그는 거기서 名을 Name라고 번역은 하였으나, 그 의미는 Begriff라고 하였었다. 그는 ‘常’을 남과 같이 ewig라고 번역하였으나, 그것보다도 absolut로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적합해 보이는 바이다. 그리하여 Begriff, der bestimmt werden kaun, ist ncht der(od. kein) absolute (absoluter) Begriff라고 하고 보면, 거기서 비로소 노자철학의 본의는 알게 되는 것이다. 영국의 「웨일리」(Arthur Waley)씨는, 그의 도덕경 영역 및 주석 The way and its power 중에서 빌헬름 교수의 역이 제일 적당한 것이라고는 하면서 그의 예를 본받지 않고, 자기의 獨特한 번역을 시험하였었다. 거기서 그는 그리하여 원의(原意)를 떠난 점을 많이 보여준다. 빌헬름씨에는 족탈불급(足脫不및)인 것이다.
  4. 董作賓, 「五等爵在殷商」(歷史語言研究所集刊, 第六本, 第三分, 民國二十五年.)(Academia Sinica : Bulletin of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Vol. Ⅵ, Part 3. Shanghai 1933)
  5. 郭沫若, 前揭書, 三一二頁
  6. Creel: a. a. O. P. 215.
  7. 郭沫若, 前揭書, 「卜辭中之古代社會」章. 董作賓, 『「獲自麟」解』(安陽發掘報告, 第二期). 仝, 「帶矛說」,(仝第四期」.
  8. 郭沫若, 前揭書, 二八二頁 참조.
  9. 桑原隲藏, 「支那人間に於ける食人肉の風習」(「東洋學報」 第十四卷 第一號. 及, 「東洋文明史論叢」 東京及京都 昭和九年). 「支那人の食人肉風習」(「太陽」 第二十五卷 第七號. 及, 「東洋史說苑」 東京及京都, 昭和二年). 물론 식인육이라고 모두가 일정한 문화권과 관련된 것은 결코 아니다. 기근시나 전란시는 부득이 이 악행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유럽에도 예가 많았다. 그러나 상시에 식인이나, 또는 원수를 죽인 때 그 고기를 서식(噬食)하는 것은 모두 신재배문화의 유풍인 것이다. …그런데 유럽의 예를 보건대 중세기에 먹을 게 없으면 사람이 서로 먹은 것은 그만두고라도, 바로 17세기에 30년 전쟁으로 인하여 전시나 전후에 독일이나 동부 프랑스에서 아사자의 시체에 개나 인간이 덤벼들어 고기 뜯어 먹은 것이나, 평민이 아동을 살육하여 식용에 공하였거나, 또는 배 주린 난병이 양민을 잡아먹은 것 등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을 만치 근세사상의 사건이였던 것이다. Vgl. Josef Kulischer: Allgemeine Wirtschaftsgeschichte Ⅱ. Bd., München und Berlin 1929, S. 17 f. f.
  10. 일즉이 스위스 수도 베른(Bern)대학, 동물해부학자 뒤르스트 교수(U. Duerst)도 알프스지대에 항공주가문화를 전한 자는 황인종계의 종족으로, 그들은 동시에 돼지를 가지고 왔든 것을 증명하였다. 거기의 豚은 소위 Sus palustris(Torfschwein)라는 것으로, 이것이 동방에서 온 것이 확연한 것은, 여기에 상당한 야생형이 거기에는 전연 결여하였음으로도, 알 수가 있다. Vgl. Explorations in Turkestan, Vol. Ⅰ. P. 67, Vol. Ⅱ. P. 357.
  11. J. G. Andersson: “An early Chinese Culture” in the “Bulletin of the Geological Survey of China” No. 5. Ⅰ 1923, P. 16.
  12. B. Karlgren: Analytic Dictionary of Chinese and Sino-Japanese, Paris 1923.
    「들는다」, 「듯는다」에서 보면 여기서는 확연히 「들」이 변하여 「듯」이 된 것이다. 이것은 l, r의 종음이 t 종음 이전인 것의 好例이다.
  13. 곽말약, 전게서, 二83頁
  14. Creel: a. a. O. P. 163.
  15. Eduard Erkes: “Der Primat des Weibes im alten China” in “Sinica” hrsg. vom China-Institut Frankfurt am Main, Ⅹ. Jahrgang(1925), Heft 4, S. 166.
    슈미트, 코퍼스 양 씨는 천주교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득이, 유물사관적 방법론에서 적용한 바가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원시문화의 제현상을 이것에 의하여만 설명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인만큼, 그들의 이론은 유물사관 그것과는 차이가 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 중에는, 그들을 유물론자라고 책하는 자가 많다. 그것은 자기의 학설은 이 슈미트, 코퍼스 양씨의 학설에는 족탈불급인 것에 화가 난 끝에 하는 욕설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에르케스씨는 그 중의 하나이다. 나는 베를린대학의 투른발드 교수(Richard Thurnwald)의 저서 중에서도 읽은 일이 있다. 나는 퍽 섭섭히 생각하는 바이다.
  16. 松本信廣, 「古代文化論」 第四章.
  17. F. Graebner: Methode der Ethnologie(Kulturgeschichtliche Bibliothek, hrag. von W. Foy, Ⅰ. Reihe Ⅰ) Heidelberg 1911, S. 74 ff.
    W. Schmidt: Handbuch der Methode der kulturhistorischen Ethnologie, Münster in Westfalen 1937, S. 270 ff.
  18. 「古史辯」 제일册, 民國十5년 3月, 본론 19九頁.
  19. R. Bleichsteiner: Die Gelbe Kirche, Wien 1937, S. 28
  20. Vgl. “Lehrbuch der Völkerkunde” hrsg. von K. Th Preuss, Stuttgart 1937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chmidt: Ursprung der Gottesidee Ⅰ. Bd.(이것은 권수가 많은 것인대, 제1권만 아니라, 다른 권도 참조. 단, 나는 이것은 가장 외관적으로밖에 못 구경하였다.
    F. Graebner: Das Weltbild der Primitiven.
  21. 崔南善, 「壇君及其研究」(開闢社 發行 「別乾坤」, 第三卷 第三號, 昭和三年 五月).
    최남선이 학계에서 ‘외입’을 한다는 것은 내가 여기서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가 없다. 이 논문에 있어서도 최씨는 꽤 ‘외입’을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풍문에 들리는 바와는 전연 다르게, 당당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참말 나를 감복하여 마지 않게 하는 점이 퍽 많다. 아마 조선에서 단군을 논한 분 중에는 崔씨만큼 탁견을 전개한 분은 없을 것이다(물론 그의 단군숭배론은 ‘에누리’하고 보아서 말이다). 백남운씨는 그의 저서 「조선사회경제사」(昭和8년) 중에서 단군을 논하는 중 최남선씨를 비평하는 바(一4頁), 거기서 그는 崔씨의 약점만 지적하고, 그의 뛰어난 점에는 전연 언급치 않는 것은, 나를 퍽 섭섭하게 하는 바이다. 白씨 崔評은 여하간 부당한 무근지설이다. 그뿐 아니라, 그 황당한 부분(그것은 사실, 그 외의 부분에는 직접 배치되는 것이다)만 제거하고 보면, 崔씨의 理餘은 白씨의 유치한 俗論類는 결코 아닌 것이다. 백남운씨는 거기서 자기의 이론은 가장 과학적 견해라고 자랑은 하나, 그것은 그의 아부지 등등 말의 ‘어원적’ 해석(필시, 渡部義通씨 등의 흉내일 것이다)과 동양(同樣)으로, 과학적으로는 하등 가치가 없는 俗論인 것이다. 조선사를 세계사의 전적 과정에서 논한다는 그가, 이 단군은 어째서 다른 족과의 관련이 없이 국부적으로만 논하는가? 최남선씨가 단군은 당굴이오 「텅걸」이라고 한 소리를 뻔히 듣고도, 그렇게 어두 당투 않는 소리를 하는 그 이유를 나는 몰라하는 바이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더 말하여 둔다. 우리는 부분적 고찰만 하지 말고, 부분은 전체와 관련하여 논하여야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심리학 내지는 철학에는 소위 게쉬탈트설(Gestalt-Theorie)이라는 것이 있다. 그 학설에는 부당한 점도 많으나, 그들이 거기서 전적, 통일적 인식을 주장하고, 부분과 전체의 관련을 高調함에는 일리가 있다. 부분적 고찰 이상을 못하는 우리 東洋의 史학도 제군은 「게쉬탈트」설의 현재의 두 巨星 W. Koehler씨와 M. Wertheimer씨의 저작품들을 좀 읽어볼 필요가 있다. …
    단군과 같은 말에 당굴이 있다면, 천신사상과, 샤머니즘(Shamanism)과의 관련이 여기서는 문제이다. 샤머니즘의 기원에 관하여는, 그것을 북극지대(그ㄹ베너)에 찾는 분도 있고, 또는 동남아시아 모권문화에 찾는 분도 있고, 또는 중앙아시아 목유문화에 찾는 분도 있다. 나는 아직 누구의 주장이 정당한지를 모르겠다. 그러나 여하간 이것은 가장 널리 퍼진 것으로, 북극족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목유민 間에도 그것은 가장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유문화의 流轉과 함께 샤머니즘을 동시에 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천신」과 「무당」은 동시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샤머니즘은 또 남쪽 방면에서도 조선에 들어온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러나 물론 아직은 나는 잘 모르는 바이다. …여하간 단군은 「하나님」만 아니라, 동시에 「무당」이였던 것은 엿볼 수가 있다. 崔씨의 의견에는 참말 그럴 듯한 점이 있다!
  22. 朱芳圃, 「甲骨學商史編」, 第六章, 第四節(上冊) 參照.
  23. Henri Maspero: La Chine Antique(Histoire du Monde, Tome Ⅳ), Paris 1927, P. 156.
  24. B. Karlgren: “Some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Bulletin of the Museum of Far Eastern Antiquities”(Östasiatiska Samlingarna), No. 2, 1930.
  25. 錢玄同, 「答顧頡剛先生書」(「讀書雜志」 第十期. 「古史辨」 第一冊, 本論 七七頁). 郭沫若, 前揭書, 三版書後卄頁 參照.
  26. E. Erkes: “Some remarks on Karlgren's ‘Fecundity Symbols in ancient China’” in “Östasiatiska Samlingarna”, No. 3, 1931.
  27. 周予同, 『「孝」與「生殖器崇拜」』(「一般」第三卷, 第一號. 「古史辯」 第二冊, 二三二-二五三頁).
  28. 郭沫若, 前揭書, 二九〇頁.
  29. 朱芳圃, 前揭書, 第六章, 第二節(上冊).
  30. ‘雨’의 골문이 물방울의 낙하를 상징하는 것을 나는 블라이히슈타이너 교수에게 말하였더니, 동 교수는 그것이 天의 정액의 낙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쉽다고 대답하였었다. 그리고 보면 神祗의 상형자 도유호 중도문3-54.png은 天의 정액의 낙하를 의미한 것이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雨’의 갑골문이 天의 정액 낙하의 상징이라고는 나는 암만 해야 생각할 수가 없다.
  31. 곽씨는 詩經 小雅篇의 斯于, 楚茨, 章 等의 시구를 신전 내의 성교라는 종교의식과 관련시키려고 하나(곽, 288頁), 그것은 아마 독단에 불과한 주장일 것이다.
  32. 자세히 기억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아마 Samhnlung Göschen, Bd. 500.로 발표된 짐멜 교수의 「철학주요문제」(Hauptprobleme der Philosophie) 중에 쓰여있든가 보이다. 비교하기를 바란다.
  33. Horness-Menghin: Urgeschichte der bildenden Kunst in Europa, Wien 1925.
  34. Vgl. L. Frobenius: Kulturgeschichte Afrikas, Zürich 1933, S. 156. G. Wilke: Die Religion Der Indogermanen in Archäologischer Beleuchtung(Mannus-BibliotherkNr. 31), Leipzig 1923, S. 17.
  35. Mohenjo-Daro etc., Vol. Ⅰ. Chapter Ⅴ, Religion.
  36. 예하면, John Marshall: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중에 복사된 인도하지대 도시문화층 출토의 인장, 제444호(Seals No. 444)상의 문자는 다음과 같다.
    도유호 중도문3-67.png
    이 외에도 도유호 중도문3-68.png자는 수차 보이는 바이다.
  37. 南宋 初에 吳才老가, 소위 공안국전 고문상서를 의혹하기 시작한 이후, 현금에 이르기까지 그 위작임을 지적하는 학자가 많다. 주자문인 채심이는 書序만은 공자의 작이 아님을 지적하였으나, 그 외에는 고문을 채용하였었다. 불행히 채심의 후세에 미친 영향이 퍽 컸던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고문이 위작임을 간과할 수가 없다. 나같은 잔박한 자가 여기에 감히 참견함은 너모나 당돌하기는 하나, 나는, 금문에 없는 고문 제편의 문체가 평이함을 보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 가작성을 느끼게 된 바이다. 물론 금문에도 문체가 평이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보아, 금문에 없는 고문 제편은 암만 해야 복생이 전한 금문 제편의 문체보다 평이한 것이다. 吳才老의 의견과 동양(同樣)으로 그것은 고문의 위작임을 말하는 것이다.
    고문위작설과 상대하여는 또 소위 공안국 상서대전 위작설이 문제이다. 공벽서는 원래 세간에 전한 바 되었으나 병화가 많은 중국 일이라, 후세에 불행히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 공벽서(고문)에, 무제시, 공자 12세손 공안국이 전을 썼다는 것은 암만 해야 무근지설인 듯하다. 현존한 소위 공안국 상서대전이란, 공자 12세손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듯하다. 따라서 이것을 위작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하여 무내의웅(武內義雄) 교수는 퍽 재미있는 말을 한다. 그의 의견이 얼마나 정당한가는 독자제군의 판단에 맡기고, 나는 오직 그의 이론을 소개함에 그친다.—
    『所謂孔安國傳なるものは東晋の梅賾によって世に出た本で淸初の考證家閻若璩は之を以て梅賾の僞撰と断定したが, 其後丁晏は梅賾以前にこの書が存在した證據をあげ, 又其傳意が王肅義に合するものが多いことを指摘して肅の僞撰と想定した. 然し丁晏の想定も未だ證據不充分である. 王肅の門人に孔晁といふ者があって逸周書の注をかいてゐるが, 此人に又尙書疑問三巻の著作があつて, 隋志にはこれを孔晁の共撰だとしてゐるが, 新唐志には之を王肅孔安國の問答を錄したものと注記してゐるから孔晁は字を安國といったことが明瞭である. そこで私は尙書の孔安國傳なるものを孔晁の傳だと考へたい. 之を孔晁に配すればそれが王肅義と合するのも當然で, 又それが梅賾以前に存することに疑を容れる必要がなくなる. それは兎も角も尙書の孔安國傳が王肅に因縁のある注だといふことは確實である.』 【武内義雄 「支那思想史」(岩破全書 第七十三卷), 昭和十一年 二一九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