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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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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3번={{TagSpage|172-2}}支那猿人 以後 舊石器時代의 中國의 文化相은 가장 알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 關하여는 아직 理論의 根{{TagPage|173-1}}據가 너무나 薄弱하다. 『오르도쓰』나 林西 等地의 極히 部分的의 發掘만으로는 到底히 무어라고 論할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은 支那의 都市文化論과는 아모 關係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新石器時代에 이르러서는 考古學的 材料도 多少理論의 餘地를 許할 뿐더러, 이 新石器時代를 取扱치 않고는 支那文明의 起源에 關하야 理解가 不可能한 것이다. 아니 그 當時의 影響은 只今에도 남어있다.
 
|목차2-1원문3번={{TagSpage|172-2}}支那猿人 以後 舊石器時代의 中國의 文化相은 가장 알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 關하여는 아직 理論의 根{{TagPage|173-1}}據가 너무나 薄弱하다. 『오르도쓰』나 林西 等地의 極히 部分的의 發掘만으로는 到底히 무어라고 論할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은 支那의 都市文化論과는 아모 關係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新石器時代에 이르러서는 考古學的 材料도 多少理論의 餘地를 許할 뿐더러, 이 新石器時代를 取扱치 않고는 支那文明의 起源에 關하야 理解가 不可能한 것이다. 아니 그 當時의 影響은 只今에도 남어있다.
 
|목차2-1원문4번={{TagSpage|173-2}}舊石器時代 後期에에서 新石器時代로의 過渡期 或은 新石器時代 初期의 中國을 黃河 中流域을 中心으로 考察하건대, {{TagRef|12}}여기에는 一方 北極地帶에서 南下한 文化의 影響이 퍽 많으니, 石器材料에 板石(Schiefer)을 使用하는 것은 그 根源이 무엇보다도 먼첨 北極文化의 影響에 있는 것이다. 如何間 北方에서 南下한 文化 影響이 퍽 많은바, 板石製의 有柄矢鏃(Scha tpfeilsp tze) 半月刀 即 弓形刀(Bogenmeser) 等이나 또는 所謂 櫛目紋土器, 即 櫛陶(Kammkeramik)의 傳統은 모다 北方文化系의 것이다.<ref>이 所謂 櫛目紋土器(Kammkeramik)는 北歐羅巴에도 왓는 바, 이것을 kammkeramishe Kultur 或은 Wohnplatzkultur라고 한다. 멩긴 敎授가 이것을 東方文化系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當然한 主張인 바, 피틔오늬(R. Pittioni)氏는 여기에 反對하야, 北歐에 이것을 가저온 族은 「인도게르만」族이라고 하며, 그는 이것이 東으로는 멀니 日本에까지 가있는 것을 몰으는 모양이다. 내게는 이 櫛陶와 「인도게르만」族의 移動과는 何等 關係가 있어 뵈지 않는다.(R. Pittioni: “Die Uraltertumskunde zur Frage der indogermanischen Urheimat” in “Wiener Beiträge zur Kulturgeschichte und Linguistik,” Jahrgang Ⅳ, 1936. Derselbe; Urgeschichte -allgemeine Urgeschichte und Urgeschichte österreichs, Leipzig u. Wien, 1937, S. 55.)<br/>櫛目文土器 或은 櫛陶에 關하야 大場磐雄氏는 그의 「考古學」(現代哲學全集 第十六卷, 昭和十年, 五三頁) 中에서, 日本에 이것이 傳來되엿는지는 아직 未定이라고 하나, 大山柏氏가 經營하는 「史前學雜誌」 中에서 나는 完全히 櫛目文土器의 紋인 것의 寫眞을 보았으며, 岡正雄氏의 말에 依하야도 이 櫛陶는 日本에 왓다고 한다. 이것은 朝鮮에도 傳來한 것이나, 아직 實物이고 寫眞이고 나는 못 보앗다.</ref> 그런대 여기서 하나 注意할 것은, 中國 本土에는 이 過渡期나 또는 新石器時代 初期에는 아직 牧遊文化의 影響이 적은 것이다. 그 대신 여기에는 栽培文化, 그 中에도 特히 新階段의 畜豚文化의 影響이 퍽 많으니 飼養豚의 遺骨이 多數히 發見되는 것은 그 證據인 것이다. 여기서 發掘된 蓆紋陶器(Mattenkeramik)는 멩긴 敎授의 主張대로 이 畜豚文化系의 것일 것이다. 멩긴氏는 圓筒斧(Walzenbeil)도 여기에 歸屬시키나, 하이네·껠데언氏에 依하면, 이것은 「兩級文化」 即 舊栽培文化와 關聯이 된 것인 듯하다. {{TagRef|13}}그러나 圓筒斧는 아마 新階段과도 關聯이 있을 것이다.<ref>O. Menghin: Weltgeschichte der Steinzeit, Wien 1931, S. 274 ff. Heine-Geldern: “Urheimat usw.” Mattenkeramik를 中國 學者들은 繩紋陶器라고 하는 바, 이것은 日本語上의 術語를 輸入한 것이다. 그런대 이것을 日本 石器時代의 所謂 繩紋土器와는 混同해서는 않 될 것이겠다. 나는 아직 日本考學에는 도모지 門外漢이니 아모 容喙할 資格은 없으나, 日本의 繩紋土器라는 것은 봄애 西洋北歐 乃至 中歐의 所謂 Schnurkeramki의 紋模樣으로 된 것이 많다. 이것만을 繩紋土器라고 하는지, 거기에는 Mattenkeramik도 包含되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原來는 Mattenkeramik만을 意味했는지를 나는 잘 몰으겠다. 그런대 萬一 兩者를 混同해서 모다 蓆紋土器라고 한다면, 그것은 않될 것이겠다. 如何間 내가 여기서 蓆紋土器라고 한다면, 그것은 獨逸語의 Mattenkeramik의 譯이다.</ref> 이 畜豚文化는 極東文化諸族의 先史時代에 廣大히 傳派된 것으로, 이것은 諸族의 其後 發展의 基礎를 일운 것이다. 이것은 先史考古學 以外의 民俗學 乃至 言語學的 事實과 合致되는 것은 가장 注意할 것인바, 이 畜豚文化 傳來의 考古學的 事實과 直接 關聯된 것은 母權的 新栽培文化의 傳來였고, 또 言語學的으로는, 「오-스트리」語(Austrisch)의 波及인 것이다.
 
|목차2-1원문4번={{TagSpage|173-2}}舊石器時代 後期에에서 新石器時代로의 過渡期 或은 新石器時代 初期의 中國을 黃河 中流域을 中心으로 考察하건대, {{TagRef|12}}여기에는 一方 北極地帶에서 南下한 文化의 影響이 퍽 많으니, 石器材料에 板石(Schiefer)을 使用하는 것은 그 根源이 무엇보다도 먼첨 北極文化의 影響에 있는 것이다. 如何間 北方에서 南下한 文化 影響이 퍽 많은바, 板石製의 有柄矢鏃(Scha tpfeilsp tze) 半月刀 即 弓形刀(Bogenmeser) 等이나 또는 所謂 櫛目紋土器, 即 櫛陶(Kammkeramik)의 傳統은 모다 北方文化系의 것이다.<ref>이 所謂 櫛目紋土器(Kammkeramik)는 北歐羅巴에도 왓는 바, 이것을 kammkeramishe Kultur 或은 Wohnplatzkultur라고 한다. 멩긴 敎授가 이것을 東方文化系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當然한 主張인 바, 피틔오늬(R. Pittioni)氏는 여기에 反對하야, 北歐에 이것을 가저온 族은 「인도게르만」族이라고 하며, 그는 이것이 東으로는 멀니 日本에까지 가있는 것을 몰으는 모양이다. 내게는 이 櫛陶와 「인도게르만」族의 移動과는 何等 關係가 있어 뵈지 않는다.(R. Pittioni: “Die Uraltertumskunde zur Frage der indogermanischen Urheimat” in “Wiener Beiträge zur Kulturgeschichte und Linguistik,” Jahrgang Ⅳ, 1936. Derselbe; Urgeschichte -allgemeine Urgeschichte und Urgeschichte österreichs, Leipzig u. Wien, 1937, S. 55.)<br/>櫛目文土器 或은 櫛陶에 關하야 大場磐雄氏는 그의 「考古學」(現代哲學全集 第十六卷, 昭和十年, 五三頁) 中에서, 日本에 이것이 傳來되엿는지는 아직 未定이라고 하나, 大山柏氏가 經營하는 「史前學雜誌」 中에서 나는 完全히 櫛目文土器의 紋인 것의 寫眞을 보았으며, 岡正雄氏의 말에 依하야도 이 櫛陶는 日本에 왓다고 한다. 이것은 朝鮮에도 傳來한 것이나, 아직 實物이고 寫眞이고 나는 못 보앗다.</ref> 그런대 여기서 하나 注意할 것은, 中國 本土에는 이 過渡期나 또는 新石器時代 初期에는 아직 牧遊文化의 影響이 적은 것이다. 그 대신 여기에는 栽培文化, 그 中에도 特히 新階段의 畜豚文化의 影響이 퍽 많으니 飼養豚의 遺骨이 多數히 發見되는 것은 그 證據인 것이다. 여기서 發掘된 蓆紋陶器(Mattenkeramik)는 멩긴 敎授의 主張대로 이 畜豚文化系의 것일 것이다. 멩긴氏는 圓筒斧(Walzenbeil)도 여기에 歸屬시키나, 하이네·껠데언氏에 依하면, 이것은 「兩級文化」 即 舊栽培文化와 關聯이 된 것인 듯하다. {{TagRef|13}}그러나 圓筒斧는 아마 新階段과도 關聯이 있을 것이다.<ref>O. Menghin: Weltgeschichte der Steinzeit, Wien 1931, S. 274 ff. Heine-Geldern: “Urheimat usw.” Mattenkeramik를 中國 學者들은 繩紋陶器라고 하는 바, 이것은 日本語上의 術語를 輸入한 것이다. 그런대 이것을 日本 石器時代의 所謂 繩紋土器와는 混同해서는 않 될 것이겠다. 나는 아직 日本考學에는 도모지 門外漢이니 아모 容喙할 資格은 없으나, 日本의 繩紋土器라는 것은 봄애 西洋北歐 乃至 中歐의 所謂 Schnurkeramki의 紋模樣으로 된 것이 많다. 이것만을 繩紋土器라고 하는지, 거기에는 Mattenkeramik도 包含되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原來는 Mattenkeramik만을 意味했는지를 나는 잘 몰으겠다. 그런대 萬一 兩者를 混同해서 모다 蓆紋土器라고 한다면, 그것은 않될 것이겠다. 如何間 내가 여기서 蓆紋土器라고 한다면, 그것은 獨逸語의 Mattenkeramik의 譯이다.</ref> 이 畜豚文化는 極東文化諸族의 先史時代에 廣大히 傳派된 것으로, 이것은 諸族의 其後 發展의 基礎를 일운 것이다. 이것은 先史考古學 以外의 民俗學 乃至 言語學的 事實과 合致되는 것은 가장 注意할 것인바, 이 畜豚文化 傳來의 考古學的 事實과 直接 關聯된 것은 母權的 新栽培文化의 傳來였고, 또 言語學的으로는, 「오-스트리」語(Austrisch)의 波及인 것이다.
|목차2-1원문5번={{TagSpage|173-3}}{{TagRef|14}}民俗學上에서 먼저 그렙너는 極東文化의 基礎가 이 母權系 文化에 있었음을 指摘하였는바, 그것은 쉬밑, 콥퍼쓰, 兩 神父도 指摘하였다.<ref>F. Graebner: Ethnologie, S. 520.<br/>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ref> {{TagRef|15}}인제 言語學的으로 보{{TagPage|174-1}}건대 첫째 日本語에는 이 「오-스트리」語系가 퍽 많은바 그 文章的 構成이 「알타이」語的 根底를 가졌음에 不拘하고, 그 語彙에 있어서는「오-스트리」語系의 要素가 많은 것은 이미 松本信廣氏도 指摘한 바이다.<ref>N. Matsumoto: Le japonais et les langues<br/>austroasiatiques, paris 1923.<br/>松本信廣 著 「古代文化論」 東京, 昭和七年. 松本氏 及 그의 先師 프씰루스키(Przyluski)氏는, 쉬밑 師의 用語 「오-스트리」語 代身에 「오-스트로아지아」語라는 用語를 使用하자고 하나, 나는 쉬밑 師의 用語 便이 낫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하이네·껠데언 敎授가 「오-스트로아지아」族과는 原來는 系統이 全然 달은 것이라고 主張함을 봄애, 그것을 더욱이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야 [[파일:도유호_중도문1-3|100px]]로 하는 것이 正當하다고 생각한다.<br/>하이네·껠데언 博士는 「오-스트로아지아」語와 「오-스트로네지아」語와는 同一 語源에서 派生한 것이 아니라, 相互 相異한 兩 語族이 其後의 混合에 依하야 (「오아」語가 「오네」語化를 하였거나, 又는 「오네」語가 「오아」語化를 하야 相似하게 된 것인 듯하다고 한다. 그의 主張에는 가장 그럴듯한 點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아」語와 「오네」語가 只今에 와서는 同一語系에 屬하는 事實에 抵觸되는 바는 조금도 없다. 따라 이 兩者를 「오-스트리」語 下에 取扱함은 가장 正當하다고 생각한다.(Heine-Geldern; a. a. O)</ref> 인제 朝鮮語를 들어보건대, 朝鮮語도 그 文章構造는 「알타이」語的이나 語彙에 있어서는 역시 「오-스트리」語的 分子가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斷片的 比較의 結果이나, 이것만으로도 나는 「오-스트레」語的 要素를 넉넉히 認識할 수가 있다.) 아니 中國語에 있어서도 그 語의 骨子가 벌서 「오-스트리」語的, 좀 더 가까히 말하면 「오-스트로아지아」(Austroasiatisch)的인 것이다. {{TagRef|16}}쉬밑氏의 學說에 依하면, 中國語가 첫재 人數로 그 主要成分을 形成하는 所謂 「西藏支那語」(Tibeto-chinesische Sprachen)란 「알타이」語와 「오-스트로아지아」語에 가까운 語와의 綜合으로 된 것인대, 그 單綴性 及 所謂 「級語」(例하면 中語의 一個人의 「個」, 一杯酒의 「杯」, 一枚紙의 「枚」 等)等은 「오-스트로아지아」語系에서 傳承한 것이라고 한다.<ref>W. Schmidt; Die Sprachfamilien und Sprachenkreise der Erde(Kulturgesichtliche Biblithek Ⅰ. Reihe 5). Heidelberg 1926, S. 148, 524. 「쉬」 師의 말이, 여기에 關하야 近似한 意見은 발서 트롬벳틔(A. Trombetti)氏가 發表하였다고 한다. 「트」氏의 代表作이라고 할 Elementi diGlottologin, Bologna 1923를 읽어볼 次로 圖書館에서 빌어는 왔으나 伊太利語라 내게는 難解이다. 그러나 伊太利語 아시는 분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朝鮮語에 「오-스트리」語素가 있는 例를 들어보건대, 「女」를 朝鮮 方言으로는 「에미내」, 日本古語(古事記)로는 おみな(おんな의 前身), 「부루」語(Buru)로는 emhinn, vina. 「다약」語(Dayak)로는 habinai 等等. 「兄」 「年長」 等을, 朝鮮語로는 「어니」, 日本語로는 「アニ」(兄), 琉球語로는 「안이」(an’i)「안오」(an’o)(兄), 安南語로는 anh(兄), 「몬」語(mon)로는 anai(叔), 等等. 太陽을 「호카」語로는 alla, orn, la. 「폴리네지아」語로는 ra, 「인도네지아」語로는 「날」(日)을 lau, 朝鮮語의 「날」은 「라」나 「ᄙᅡ」의 訛이니, l, r의 始音(Anlaut)이 없는 朝鮮語에 있어서는 그것은 n으로 變하였고(母音ㅏ와 合함애), 또 그리면서도 單綴의 獨立的 發音을 하는 때 l, r은 終音(Anslaut)으로 發音되니, 거기서 「ᄙᅡ」나 「라」는 「날」이 되고 만 것이다. 諺文의 라, 랴, 러, 려를 날, 냐, 널, 녀, 로 읽는 것과 同一한 例이다.… 朝鮮語에 이렇게, 「오-스트리」語素가 있는 것은 事實이나, 그것은 日本語에 比하면 퍽 적은 듯하다.<br/>인제 「말」에 關한 말썽은 그만하고, 純文化現象에서 二三의 母權文化系統의 素(言語로는 「오-스트리」語와 關聯되는)를 들어보자. 朝鮮에는 只今도 사람이 죽으면 埋葬하였다가, 다시 파내서 改葬하는 風俗이 있다. 그것도 母權文化系의 頭骨 崇拜에 있어, 사람이 죽으면 埋葬하였다가, 內部가 腐蝕된 後에 白骨을 파내서, 거기서 頭骨만을 집어내어, 잘 닦어서 걷어두는 「蠻風」의 遺風인 것이다. 「文明」을 하였으니 頭骨 崇拜는 없어젔으나, 한 번 묻었든 죽엄을 파내는 버릇은 只今도 남어있다. 또 朝鮮의 假面舞란, 그 由來는 母權文化素에서 盛行하는, 南子들의 「秘密結社」에 있어, 그 儀式時에 行하는 假面舞에 있는 것이다. 또는 朝鮮 下流社會에서는 只今도 盛行하는 奉仕婚, 賣買婚의 風習도 그 由來는 母權文化素에 있는 것이다. 西洋人의 極度로 發達한 現代의 文明 中에도 가만이 처다보면 이런 「蠻風」의 遺風은 수둑한 것이다.</ref> 그런대 「오-스트로아지아」語, 또는 이 「오스트로아지아」語 及 「오스트로네지아」語(Austronesisch)를 合하여 稱하는, 以上의 「오-스트리」語는 文化的으로 原來 母權文化系 諸族의 語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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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원문5번={{TagSpage|173-3}}{{TagRef|14}}民俗學上에서 먼저 그렙너는 極東文化의 基礎가 이 母權系 文化에 있었음을 指摘하였는바, 그것은 쉬밑, 콥퍼쓰, 兩 神父도 指摘하였다.<ref>F. Graebner: Ethnologie, S. 520.<br/>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ref> {{TagRef|15}}인제 言語學的으로 보{{TagPage|174-1}}건대 첫째 日本語에는 이 「오-스트리」語系가 퍽 많은바 그 文章的 構成이 「알타이」語的 根底를 가졌음에 不拘하고, 그 語彙에 있어서는「오-스트리」語系의 要素가 많은 것은 이미 松本信廣氏도 指摘한 바이다.<ref>N. Matsumoto: Le japonais et les langues<br/>austroasiatiques, paris 1923.<br/>松本信廣 著 「古代文化論」 東京, 昭和七年. 松本氏 及 그의 先師 프씰루스키(Przyluski)氏는, 쉬밑 師의 用語 「오-스트리」語 代身에 「오-스트로아지아」語라는 用語를 使用하자고 하나, 나는 쉬밑 師의 用語 便이 낫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하이네·껠데언 敎授가 「오-스트로아지아」族과는 原來는 系統이 全然 달은 것이라고 主張함을 봄애, 그것을 더욱이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야 [[파일:도유호_중도문1-3.png|100px]]로 하는 것이 正當하다고 생각한다.<br/>하이네·껠데언 博士는 「오-스트로아지아」語와 「오-스트로네지아」語와는 同一 語源에서 派生한 것이 아니라, 相互 相異한 兩 語族이 其後의 混合에 依하야 (「오아」語가 「오네」語化를 하였거나, 又는 「오네」語가 「오아」語化를 하야 相似하게 된 것인 듯하다고 한다. 그의 主張에는 가장 그럴듯한 點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아」語와 「오네」語가 只今에 와서는 同一語系에 屬하는 事實에 抵觸되는 바는 조금도 없다. 따라 이 兩者를 「오-스트리」語 下에 取扱함은 가장 正當하다고 생각한다.(Heine-Geldern; a. a. O)</ref> 인제 朝鮮語를 들어보건대, 朝鮮語도 그 文章構造는 「알타이」語的이나 語彙에 있어서는 역시 「오-스트리」語的 分子가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斷片的 比較의 結果이나, 이것만으로도 나는 「오-스트레」語的 要素를 넉넉히 認識할 수가 있다.) 아니 中國語에 있어서도 그 語의 骨子가 벌서 「오-스트리」語的, 좀 더 가까히 말하면 「오-스트로아지아」(Austroasiatisch)的인 것이다. {{TagRef|16}}쉬밑氏의 學說에 依하면, 中國語가 첫재 人數로 그 主要成分을 形成하는 所謂 「西藏支那語」(Tibeto-chinesische Sprachen)란 「알타이」語와 「오-스트로아지아」語에 가까운 語와의 綜合으로 된 것인대, 그 單綴性 及 所謂 「級語」(例하면 中語의 一個人의 「個」, 一杯酒의 「杯」, 一枚紙의 「枚」 等)等은 「오-스트로아지아」語系에서 傳承한 것이라고 한다.<ref>W. Schmidt; Die Sprachfamilien und Sprachenkreise der Erde(Kulturgesichtliche Biblithek Ⅰ. Reihe 5). Heidelberg 1926, S. 148, 524. 「쉬」 師의 말이, 여기에 關하야 近似한 意見은 발서 트롬벳틔(A. Trombetti)氏가 發表하였다고 한다. 「트」氏의 代表作이라고 할 Elementi diGlottologin, Bologna 1923를 읽어볼 次로 圖書館에서 빌어는 왔으나 伊太利語라 내게는 難解이다. 그러나 伊太利語 아시는 분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朝鮮語에 「오-스트리」語素가 있는 例를 들어보건대, 「女」를 朝鮮 方言으로는 「에미내」, 日本古語(古事記)로는 おみな(おんな의 前身), 「부루」語(Buru)로는 emhinn, vina. 「다약」語(Dayak)로는 habinai 等等. 「兄」 「年長」 等을, 朝鮮語로는 「어니」, 日本語로는 「アニ」(兄), 琉球語로는 「안이」(an’i)「안오」(an’o)(兄), 安南語로는 anh(兄), 「몬」語(mon)로는 anai(叔), 等等. 太陽을 「호카」語로는 alla, orn, la. 「폴리네지아」語로는 ra, 「인도네지아」語로는 「날」(日)을 lau, 朝鮮語의 「날」은 「라」나 「ᄙᅡ」의 訛이니, l, r의 始音(Anlaut)이 없는 朝鮮語에 있어서는 그것은 n으로 變하였고(母音ㅏ와 合함애), 또 그리면서도 單綴의 獨立的 發音을 하는 때 l, r은 終音(Anslaut)으로 發音되니, 거기서 「ᄙᅡ」나 「라」는 「날」이 되고 만 것이다. 諺文의 라, 랴, 러, 려를 날, 냐, 널, 녀, 로 읽는 것과 同一한 例이다.… 朝鮮語에 이렇게, 「오-스트리」語素가 있는 것은 事實이나, 그것은 日本語에 比하면 퍽 적은 듯하다.<br/>인제 「말」에 關한 말썽은 그만하고, 純文化現象에서 二三의 母權文化系統의 素(言語로는 「오-스트리」語와 關聯되는)를 들어보자. 朝鮮에는 只今도 사람이 죽으면 埋葬하였다가, 다시 파내서 改葬하는 風俗이 있다. 그것도 母權文化系의 頭骨 崇拜에 있어, 사람이 죽으면 埋葬하였다가, 內部가 腐蝕된 後에 白骨을 파내서, 거기서 頭骨만을 집어내어, 잘 닦어서 걷어두는 「蠻風」의 遺風인 것이다. 「文明」을 하였으니 頭骨 崇拜는 없어젔으나, 한 번 묻었든 죽엄을 파내는 버릇은 只今도 남어있다. 또 朝鮮의 假面舞란, 그 由來는 母權文化素에서 盛行하는, 南子들의 「秘密結社」에 있어, 그 儀式時에 行하는 假面舞에 있는 것이다. 또는 朝鮮 下流社會에서는 只今도 盛行하는 奉仕婚, 賣買婚의 風習도 그 由來는 母權文化素에 있는 것이다. 西洋人의 極度로 發達한 現代의 文明 中에도 가만이 처다보면 이런 「蠻風」의 遺風은 수둑한 것이다.</ref> 그런대 「오-스트로아지아」語, 또는 이 「오스트로아지아」語 及 「오스트로네지아」語(Austronesisch)를 合하여 稱하는, 以上의 「오-스트리」語는 文化的으로 原來 母權文化系 諸族의 語인 것이다.
 
|목차2-1원문6번={{TagSpage|174-2}}{{TagRef|17}}母權系 文化 關係에 關하야 콥퍼쓰는 經濟的으로나 其他의 諸文化現象에 있어 南支那는 아직도 그 主要成分이 母權系 文化, 그 中에도 特히 新階段의 것임을 指摘하얏는바, 그것은 果然 正當한 主張이라 하겠다.<ref>Schmidt und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604</ref> 여기서 나는 또 中國語와 가장 近接한 「타이」語를 使用하는 「타이」(Thai)族이 아직도 母權的임을 參考로 말하여둔다.
 
|목차2-1원문6번={{TagSpage|174-2}}{{TagRef|17}}母權系 文化 關係에 關하야 콥퍼쓰는 經濟的으로나 其他의 諸文化現象에 있어 南支那는 아직도 그 主要成分이 母權系 文化, 그 中에도 特히 新階段의 것임을 指摘하얏는바, 그것은 果然 正當한 主張이라 하겠다.<ref>Schmidt und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604</ref> 여기서 나는 또 中國語와 가장 近接한 「타이」語를 使用하는 「타이」(Thai)族이 아직도 母權的임을 參考로 말하여둔다.
 
|목차2-1원문7번={{TagSpage|174-3}}中國의 先史時代에 母權社会가 存在하였음은 어느 點으로 보던지 別로 의심할 餘地가 없으나, 文獻上으로는 나는 別로 證明할 根據를 모르는 바이다. 學者 中에는 「姓」字가 女와 生의 合字임은 母權制 時代의 形跡이라고 하는 이가 많으나 그것은 女子의 家門 由來를 表示함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즉 男子의 「氏」에 相對하야 女子의 本來 氏族系統을 指稱하는 것에 不過한 것이라는 說에 나는 贊同한다. 그와 反對로, 一方 이 「姓」字에서 母權素를 찾기는 하나, 他方 이 對外婚的 氏姓制에서 토템主{{TagPage|175-1}}義의 殘跡을 찾을려는 쉬밀, 콥퍼쓰 兩氏의 態度에는 그럴듯한 點이 있다. 「쉬」 「코」 兩氏와는 出發點이 달으나, 松本信廣氏도 이 「姓」에서 「토템이즘」과 또 母權制의 形跡을 찾으려고 한다. {{TagRef|18}}「토템이즘」 問題와는 全然 關聯이 없이, 小川琢治 博士나 마스뻬로(H. Maspero) 敎授는 尙書堯典 中의 義和條를 神話로 還元하여놓고 거기서 太陽 神話의 存在를 찾어내는바, 이렇게 太陽神話의 形跡까지 認識하게 되면, 上古中國에 「토템」主義가 있었음도 可能한 일이다.<ref>Schmidt u. Koppers: a. a. O. 여기서 「쉬밑」 神父는 말하기를, “…vielleicht sind aber die vierhundert quasi-exogamen Familiennamen Chinas noch letzte Uberbleibsel alter Totemclans;…”(S. 231)<br/>여기서 quasi-exogam이란 用語를 쓰나, 그것은 不當한 主張이다. Exogam의 한 字만 써야 當然한 것이다. 그것은 쉬밑 師가 中國 乃至 極東 一般의 家族 及 氏族制度를 잘 몰으는 까닭이다. 또 여기에 四百氏姓이라는 것도 그 出處는 나는 몰으겠다. 如何間 그것은그렇다고 하더라도, 同書(二三〇頁 以下)에서 中國에 「토템이즘」 形跡이 이 姓氏制 以外에는 없는 것을 指摘한 것은 當然하다.<br/>松本, 「古代文化論」 第三章.<br/>小川琢治, 「支那歷史地理硏究」, 東京及京都, 昭和三年 第六章.<br/>Henri Maspero: “Légendes mythologiques dans le Chou King” in “Journal Asiatique” publié par la Socéité Asiatique, Paris Jan.-Mars 1924(Tom CCⅣ). 「마스뻬로」氏가 云謂하는 太陽神話에는 「토템」神話性이 퍽 薄弱해 보인다. (ainsi le-deux courses du soleil étaient également jalouées par les Hi et les Ho, saconrse annuelle et sa conrse journaliére, et le soloil ne ponvant se tromper. (P. 46)</ref> 비록 그렇기는 하나 나는 이 姓氏制 即 對外婚的 氏族制를 가지고 牧遊文化와 關聯이 없는 純「토템이즘」을 찾는 것은 不當하다고 믿는 者이다. 여기에 關聯하야 우리는 먼첨 中央亞細亞 牧遊民의 氏族關係를 좀 더 明確히 할 必要가 있다. 여기에 關하야 나는 잘 모르나, 蒙古族의 氏族 觀念을 보아 對外婚的 氏族制는「토템」文化에만 아니라, 原來는 牧遊文化에도 固有한 것이며, 그것은 또 牧遊文化가 「토템」文化의 (初)階段에서 派生한 것을 自證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意味에서 쉬밑, 콥퍼쓰 兩 神父가 「토템」文化만을 「對外婚的 父權文化」(Exogam vaterrechtliche Kultur)fk 하고, 中國, 朝鮮 等地의 高新文化를 「自由婚的 父權文化」(Freivaterrechtliche kultur)라는 槪念 下에 處理하는 것은 根本的 誤解라고 생각한다. 中國의 姓氏制는 如何間 「토템이즘」과 關係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間接으로 牧遊文化를 通하야 있는 것이오 거기에 直接 「토템」文化 傳來의 形跡이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推測한다. 이 對外婚的 姓制를 論外로 하고 보면 쉬밑, 콥퍼쓰 兩氏도 論하듯이, 中國에는 極東의 文化族 一般과 同樣으로 「토템이즘」의 形跡이 別로 없으니, 이 點은 印度와는 根本的으로 달은 것이다.
 
|목차2-1원문7번={{TagSpage|174-3}}中國의 先史時代에 母權社会가 存在하였음은 어느 點으로 보던지 別로 의심할 餘地가 없으나, 文獻上으로는 나는 別로 證明할 根據를 모르는 바이다. 學者 中에는 「姓」字가 女와 生의 合字임은 母權制 時代의 形跡이라고 하는 이가 많으나 그것은 女子의 家門 由來를 表示함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즉 男子의 「氏」에 相對하야 女子의 本來 氏族系統을 指稱하는 것에 不過한 것이라는 說에 나는 贊同한다. 그와 反對로, 一方 이 「姓」字에서 母權素를 찾기는 하나, 他方 이 對外婚的 氏姓制에서 토템主{{TagPage|175-1}}義의 殘跡을 찾을려는 쉬밀, 콥퍼쓰 兩氏의 態度에는 그럴듯한 點이 있다. 「쉬」 「코」 兩氏와는 出發點이 달으나, 松本信廣氏도 이 「姓」에서 「토템이즘」과 또 母權制의 形跡을 찾으려고 한다. {{TagRef|18}}「토템이즘」 問題와는 全然 關聯이 없이, 小川琢治 博士나 마스뻬로(H. Maspero) 敎授는 尙書堯典 中의 義和條를 神話로 還元하여놓고 거기서 太陽 神話의 存在를 찾어내는바, 이렇게 太陽神話의 形跡까지 認識하게 되면, 上古中國에 「토템」主義가 있었음도 可能한 일이다.<ref>Schmidt u. Koppers: a. a. O. 여기서 「쉬밑」 神父는 말하기를, “…vielleicht sind aber die vierhundert quasi-exogamen Familiennamen Chinas noch letzte Uberbleibsel alter Totemclans;…”(S. 231)<br/>여기서 quasi-exogam이란 用語를 쓰나, 그것은 不當한 主張이다. Exogam의 한 字만 써야 當然한 것이다. 그것은 쉬밑 師가 中國 乃至 極東 一般의 家族 及 氏族制度를 잘 몰으는 까닭이다. 또 여기에 四百氏姓이라는 것도 그 出處는 나는 몰으겠다. 如何間 그것은그렇다고 하더라도, 同書(二三〇頁 以下)에서 中國에 「토템이즘」 形跡이 이 姓氏制 以外에는 없는 것을 指摘한 것은 當然하다.<br/>松本, 「古代文化論」 第三章.<br/>小川琢治, 「支那歷史地理硏究」, 東京及京都, 昭和三年 第六章.<br/>Henri Maspero: “Légendes mythologiques dans le Chou King” in “Journal Asiatique” publié par la Socéité Asiatique, Paris Jan.-Mars 1924(Tom CCⅣ). 「마스뻬로」氏가 云謂하는 太陽神話에는 「토템」神話性이 퍽 薄弱해 보인다. (ainsi le-deux courses du soleil étaient également jalouées par les Hi et les Ho, saconrse annuelle et sa conrse journaliére, et le soloil ne ponvant se tromper. (P. 46)</ref> 비록 그렇기는 하나 나는 이 姓氏制 即 對外婚的 氏族制를 가지고 牧遊文化와 關聯이 없는 純「토템이즘」을 찾는 것은 不當하다고 믿는 者이다. 여기에 關聯하야 우리는 먼첨 中央亞細亞 牧遊民의 氏族關係를 좀 더 明確히 할 必要가 있다. 여기에 關하야 나는 잘 모르나, 蒙古族의 氏族 觀念을 보아 對外婚的 氏族制는「토템」文化에만 아니라, 原來는 牧遊文化에도 固有한 것이며, 그것은 또 牧遊文化가 「토템」文化의 (初)階段에서 派生한 것을 自證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意味에서 쉬밑, 콥퍼쓰 兩 神父가 「토템」文化만을 「對外婚的 父權文化」(Exogam vaterrechtliche Kultur)fk 하고, 中國, 朝鮮 等地의 高新文化를 「自由婚的 父權文化」(Freivaterrechtliche kultur)라는 槪念 下에 處理하는 것은 根本的 誤解라고 생각한다. 中國의 姓氏制는 如何間 「토템이즘」과 關係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間接으로 牧遊文化를 通하야 있는 것이오 거기에 直接 「토템」文化 傳來의 形跡이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推測한다. 이 對外婚的 姓制를 論外로 하고 보면 쉬밑, 콥퍼쓰 兩氏도 論하듯이, 中國에는 極東의 文化族 一般과 同樣으로 「토템이즘」의 形跡이 別로 없으니, 이 點은 印度와는 根本的으로 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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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3번=지나원인 이후 구석기시대의 중국의 문화상은 가장 알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 관하여는 아직 이론의 근거가 너무나 박약하다. 오르도스나 임서(林西) 등지의 극히 부분적의 발굴만으로는 도저히 무어라고 논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지나의 도시문화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고고학적 재료도 다소 이론의 여지를 허락할 뿐더러, 이 신석기시대를 취급치 않고는 지나문명의 기원에 관하여 이해가 不가능한 것이다. 아니 그 當時의 영향은 지금에도 남아있다.
 
|목차2-1해독문3번=지나원인 이후 구석기시대의 중국의 문화상은 가장 알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 관하여는 아직 이론의 근거가 너무나 박약하다. 오르도스나 임서(林西) 등지의 극히 부분적의 발굴만으로는 도저히 무어라고 논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지나의 도시문화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고고학적 재료도 다소 이론의 여지를 허락할 뿐더러, 이 신석기시대를 취급치 않고는 지나문명의 기원에 관하여 이해가 不가능한 것이다. 아니 그 當時의 영향은 지금에도 남아있다.
 
|목차2-1해독문4번=구석기시대 후기에에서 신석기시대로의 과도기 혹은 신석기시대 초기의 중국을 황하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고찰하건대, {{TagRefT|12}}여기에는 한 편 북극지대에서 남하한 문화의 영향이 퍽 많으니, 석기재료에 판석(Schiefer)을 사용하는 것은 그 근원이 무엇보다도 맨 처음 북극문화의 영향에 있는 것이다. 여하간 북방에서 남하한 문화 영향이 퍽 많은바, 판석제의 유병시족(有柄矢鏃, Scha tpfeilspitze), 반월도 즉 궁형도(弓形刀, Bogenmeser) 등이나 또는 소위 즐목문토기(櫛目紋土器), 즉 즐도(櫛陶, Kammkeramik)의 전통은 모두 북방문화계의 것이다.<ref group="a">이 소위 즐목문토기(Kammkeramik)는 북유럽에도 왔는 바, 이것을 kammkeramishe Kultur 혹은 Wohnplatzkultur라고 한다. 멩힌 교수가 이것을 동방문화계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인 바, 피티오니(R. Pittioni)씨는 여기에 반대하여, 북유럽에 이것을 가져온 족은 인도게르만족이라고 하며, 그는 이것이 동으로는 멀리 일본에까지 가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내게는 이 즐도와 인도게르만족의 이동과는 하등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R. Pittioni: “Die Uraltertumskunde zur Frage der indogermanischen Urheimat” in “Wiener Beiträge zur Kulturgeschichte und Linguistik,” Jahrgang Ⅳ, 1936. Derselbe; Urgeschichte -allgemeine Urgeschichte und Urgeschichte österreichs, Leipzig u. Wien, 1937, S. 55.)<br/>즐목문토기 혹은 즐도에 관하여 대장반웅(大場磐雄)씨는 그의 『考古學』(現代哲學全集 第十六卷, 昭和十年, 五三頁) 中에서, 일본에 이것이 전래되었는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하나, 대산백(大山柏)씨가 경영하는 『史前學雜誌』 중에서 나는 완전히 즐목문토기의 무늬의 것의 사진을 보았으며, 강정웅(岡正雄)씨의 말에 의하여도 이 즐도는 일본에 왔다고 한다. 이것은 조선에도 전래한 것이나, 아직 실물이고 사진이고 나는 못 보앗다.</ref>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중국 본토에는 이 과도기나 또는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아직 목유문화의 영향이 적은 것이다. 그 대신 여기에는 재배문화, 그 중에도 특히 신계단의 축돈문화의 영향이 퍽 많으니 사양돈의 유골이 다수 발견되는 것은 그 증거인 것이다. 여기서 발굴된 석문도기(蓆紋陶器, Mattenkeramik)는 멩힌 교수의 주장대로 이 축돈문화계의 것일 것이다. 멩힌씨는 원통부(圓筒斧, Walzenbeil)도 여기에 귀속시키나, 하이네 겔던씨에 의하면, 이것은 「양급(兩級)문화」 즉 구재배문화와 관련이 된 것인 듯하다. {{TagRefT|13}}그러나 원통부는 아마 신계단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ref group="a">O. Menghin: Weltgeschichte der Steinzeit, Wien 1931, S. 274 ff. Heine-Geldern: “Urheimat usw.” Mattenkeramik를 중국 학자들은 승문도기(繩紋陶器)라고 하는 바, 이것은 일본어상의 술어를 수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일본 석기시대의 소위 승문토기(繩紋土器)와는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겠다. 나는 아직 일본고고학에는 도무지 문외한이니 아무 참견할 자격은 없으나, 일본의 승문토기라는 것은 보매 서양 북유럽 내지 중유럽의 소위 Schnurkeramki의 무늬모양으로 된 것이 많다. 이것만을 승문토기라고 하는지, 거기에는 Mattenkeramik도 포함되었지, 그렇지 않으면 원래는 Mattenkeramik만을 의미했는지를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만일 양자를 혼동해서 모두 석문토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안 될 것이겠다. 여하간 내가 여기서 석문토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독일어의 Mattenkeramik의 번역이다.</ref> 이 축돈문화는 극동문화제족의 선사시대에 광대히 전파된 것으로, 이것은 제족의 그 후 발전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선사고고학 이외의 민속학 내지 언어학적 사실과 합치되는 것은 가장 주의할 것인바, 이 축돈문화 전래의 고고학적 사실과 직접 관련된 것은 모권적 신재배문화의 전래였고, 또 언어학적으로는, 오스트로어(Austrisch)의 파급인 것이다.
 
|목차2-1해독문4번=구석기시대 후기에에서 신석기시대로의 과도기 혹은 신석기시대 초기의 중국을 황하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고찰하건대, {{TagRefT|12}}여기에는 한 편 북극지대에서 남하한 문화의 영향이 퍽 많으니, 석기재료에 판석(Schiefer)을 사용하는 것은 그 근원이 무엇보다도 맨 처음 북극문화의 영향에 있는 것이다. 여하간 북방에서 남하한 문화 영향이 퍽 많은바, 판석제의 유병시족(有柄矢鏃, Scha tpfeilspitze), 반월도 즉 궁형도(弓形刀, Bogenmeser) 등이나 또는 소위 즐목문토기(櫛目紋土器), 즉 즐도(櫛陶, Kammkeramik)의 전통은 모두 북방문화계의 것이다.<ref group="a">이 소위 즐목문토기(Kammkeramik)는 북유럽에도 왔는 바, 이것을 kammkeramishe Kultur 혹은 Wohnplatzkultur라고 한다. 멩힌 교수가 이것을 동방문화계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인 바, 피티오니(R. Pittioni)씨는 여기에 반대하여, 북유럽에 이것을 가져온 족은 인도게르만족이라고 하며, 그는 이것이 동으로는 멀리 일본에까지 가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내게는 이 즐도와 인도게르만족의 이동과는 하등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R. Pittioni: “Die Uraltertumskunde zur Frage der indogermanischen Urheimat” in “Wiener Beiträge zur Kulturgeschichte und Linguistik,” Jahrgang Ⅳ, 1936. Derselbe; Urgeschichte -allgemeine Urgeschichte und Urgeschichte österreichs, Leipzig u. Wien, 1937, S. 55.)<br/>즐목문토기 혹은 즐도에 관하여 대장반웅(大場磐雄)씨는 그의 『考古學』(現代哲學全集 第十六卷, 昭和十年, 五三頁) 中에서, 일본에 이것이 전래되었는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하나, 대산백(大山柏)씨가 경영하는 『史前學雜誌』 중에서 나는 완전히 즐목문토기의 무늬의 것의 사진을 보았으며, 강정웅(岡正雄)씨의 말에 의하여도 이 즐도는 일본에 왔다고 한다. 이것은 조선에도 전래한 것이나, 아직 실물이고 사진이고 나는 못 보앗다.</ref>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중국 본토에는 이 과도기나 또는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아직 목유문화의 영향이 적은 것이다. 그 대신 여기에는 재배문화, 그 중에도 특히 신계단의 축돈문화의 영향이 퍽 많으니 사양돈의 유골이 다수 발견되는 것은 그 증거인 것이다. 여기서 발굴된 석문도기(蓆紋陶器, Mattenkeramik)는 멩힌 교수의 주장대로 이 축돈문화계의 것일 것이다. 멩힌씨는 원통부(圓筒斧, Walzenbeil)도 여기에 귀속시키나, 하이네 겔던씨에 의하면, 이것은 「양급(兩級)문화」 즉 구재배문화와 관련이 된 것인 듯하다. {{TagRefT|13}}그러나 원통부는 아마 신계단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ref group="a">O. Menghin: Weltgeschichte der Steinzeit, Wien 1931, S. 274 ff. Heine-Geldern: “Urheimat usw.” Mattenkeramik를 중국 학자들은 승문도기(繩紋陶器)라고 하는 바, 이것은 일본어상의 술어를 수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일본 석기시대의 소위 승문토기(繩紋土器)와는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겠다. 나는 아직 일본고고학에는 도무지 문외한이니 아무 참견할 자격은 없으나, 일본의 승문토기라는 것은 보매 서양 북유럽 내지 중유럽의 소위 Schnurkeramki의 무늬모양으로 된 것이 많다. 이것만을 승문토기라고 하는지, 거기에는 Mattenkeramik도 포함되었지, 그렇지 않으면 원래는 Mattenkeramik만을 의미했는지를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만일 양자를 혼동해서 모두 석문토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안 될 것이겠다. 여하간 내가 여기서 석문토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독일어의 Mattenkeramik의 번역이다.</ref> 이 축돈문화는 극동문화제족의 선사시대에 광대히 전파된 것으로, 이것은 제족의 그 후 발전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선사고고학 이외의 민속학 내지 언어학적 사실과 합치되는 것은 가장 주의할 것인바, 이 축돈문화 전래의 고고학적 사실과 직접 관련된 것은 모권적 신재배문화의 전래였고, 또 언어학적으로는, 오스트로어(Austrisch)의 파급인 것이다.
|목차2-1해독문5번={{TagRefT|14}}민속학상에서 먼저 그레브너는 극동문화의 기초가 이 모권계 문화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는바, 그것은 슈미트, 코퍼스, 양  신부도 지적하였다.<ref group="a">F. Graebner: Ethnologie, S. 520.<br/>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ref> {{TagRefT|15}}인제 언어학적으로 보건대 첫째 일본語에는 이 오스트로어계가 퍽 많은바 그 문장적 구성이 알타이어적 근저를 가졌음에 불구하고, 그 어휘에 있어서는 오스트로어계의 요소가 많은 것은 이미 송본신광(松本信廣)씨도 지적한 바이다.<ref group="a">N. Matsumoto: Le japonais et les langues<br/>austroasiatiques, paris 1923.<br/>松本信廣 著 『古代文化論』 東京, 昭和七年. 松本氏 및 그의 선사 프씰루스키(Przyluski)씨는, 슈미트 선생의 용어 오스트로어 대신에 오스트로아시아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하나, 나는 슈미트 선생의 용어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하이네 겔던 교수가 오스트로아시아족과는 원래는 계통이 전연 다른 것이라고 주장함을 봄애, 그것을 더욱이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여  [[도유호_중도문1-3|100px]]로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br/>하이네 겔던 박사는 오스트로아시아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와는 동일 어원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상호 상이한 양 어족이 그 후의 혼합에 의하여 (오스트로아시아어가 오스트로네시아어화를 하였거나, 또는 오스트로네시아어가 오스트로아시아어화를 하여 서로 비슷하게 된 것인 듯하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는 가장 그럴듯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스트로아시아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가 지금에 와서는 동일어계에 속하는 사실에 저촉되는 바는 조금도 없다. 따라 이 양자를 오스트로어 하에 취급함은 가장 정당하다고 생각한다.(Heine-Geldern; a. a. O)</ref> 이제 조선어를 들어보건대, 조선어도 그 문장구조는 알타이어적이나 어휘에 있어서는 역시 오스트로어적 분자가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단편적 비교의 결과이나, 이것만으로도 나는 오스트로어적 요소를 넉넉히 인식할 수가 있다.) 아니 중국어에 있어서도 그 어의 골자가 벌써 오스트로어적, 좀 더 가까이 말하면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tisch)적인 것이다. {{TagRefT|16}}슈미트씨의 학설에 의하면, 중국어가 첫째 인수(人數)로 그 주요성분을 형성하는 소위 「서장(西藏)지나어」(Tibeto-chinesische Sprachen)란 알타이어와 오스트로아시아어에 가까운 어와의 종합으로 된 것인대, 그 단철성(單綴性) 및 소위 급어(級語)(예를 들면 중국어의 일개인(一個人)의 ‘개’, 일배주(一杯酒)의 ‘杯’, 일매지(一枚紙)의 ‘매’ 등)등은 오스트로아시아어계에서 전승한 것이라고 한다.<ref group="a">W. Schmidt; Die Sprachfamilien und Sprachenkreise der Erde(Kulturgesichtliche Biblithek Ⅰ. Reihe 5). Heidelberg 1926, S. 148, 524. 슈미트 선생의 말이, 여기에 관하여 근사한 의견은 벌써 트롬베티(A. Trombetti)씨가 발표하였다고 한다. 트롬베티씨의 대표작이라고 할 Elementi diGlottologin, Bologna 1923를 읽어볼 차로 도서관에서 빌려는 왔으나 이태리어라 내게는 난해이다. 그러나 이태리어 아시는 분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조선어에 오스트로어소가 있는 예를 들어보건대, ‘女’를 조선 방언으로는 에미내, 일본고어(고사기)로는 おみな(おんな의 전신), 부루어(Buru)로는 emhinn, vina. 다약어(Dayak)로는 habinai 등등. ‘兄’, ‘年長’ 등을, 조선어로는 어니, 일본어로는 アニ(兄), 유구어로는 안이(an’i), 안오(an’o)(兄), 안남어로는 anh(兄), 몬어(mon)로는 anai(叔), 등등. 태양을 호카어로는 alla, orn, la. 폴리네시아어로는 ra, 인도네시아어로는 ‘날’(日)을 lau, 조선어의 ‘날’은 ‘라’나 ‘ᄙᅡ’의 와(訛)이니, l, r의 시음(Anlaut)이 없는 조선어에 있어서는 그것은 n으로 변하였고(모음 ㅏ와 합하매), 또 그러면서도 단철(單綴)의 독립적 발음을 하는 때 l, r은 종음(Anslaut)으로 발음되니, 거기서 ‘ᄙᅡ’나 ‘라’는 ‘날’이 되고 만 것이다. 언문의 라, 랴, 러, 려를 날, 냐, 널, 녀, 로 읽는 것과 동일한 예이다.… 조선어에 이렇게, 오스트로어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일본어에 비하면 퍽 적은 듯하다.<br/>이제 ‘말’에 관한 말썽은 그만하고, 순문화현상에서 두셋의 모권문화계통의 요소(언어로는 오스트로어와 관련되는)를 들어보자. 조선에는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였다가, 다시 파내서 개장하는 풍속이 있다. 그것도 모권문화계의 두골 숭배에 있어,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였다가, 내부가 부식된 후에 백골을 파내서, 거기서 두골만을 집어내어, 잘 닦아서 걷어두는 ‘만풍(蠻風)’의 유풍인 것이다. ‘문명’을 하였으니 두골 숭배는 없어졌으나, 한 번 묻었던 주검을 파내는 버릇은 지금도 남아있다. 또 조선의 가면무란, 그 유래는 모권문화소에서 성행하는, 남자들의 ‘비밀결사’에 있어, 그 의식시에 행하는 가면무에 있는 것이다. 또는 조선 하류사회에서는 지금도 성행하는 봉사혼, 매매혼의 풍습도 그 유래는 모권문화소에 있는 것이다. 서양인의 극도로 발달한 현대의 문명 중에도 가만히 쳐다보면 이런 ‘만풍’의 유풍은 수둑한 것이다.</ref> 그런데 오스트로아시아어, 또는 이 오스트로아시아어 및 오스트로네시아어(Austronesisch)를 합하여 칭하는, 이상의 오스트로어는 문화적으로 원래 모권문화계 제족의 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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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1해독문5번={{TagRefT|14}}민속학상에서 먼저 그레브너는 극동문화의 기초가 이 모권계 문화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는바, 그것은 슈미트, 코퍼스, 양  신부도 지적하였다.<ref group="a">F. Graebner: Ethnologie, S. 520.<br/>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ref> {{TagRefT|15}}인제 언어학적으로 보건대 첫째 일본語에는 이 오스트로어계가 퍽 많은바 그 문장적 구성이 알타이어적 근저를 가졌음에 불구하고, 그 어휘에 있어서는 오스트로어계의 요소가 많은 것은 이미 송본신광(松本信廣)씨도 지적한 바이다.<ref group="a">N. Matsumoto: Le japonais et les langues<br/>austroasiatiques, paris 1923.<br/>松本信廣 著 『古代文化論』 東京, 昭和七年. 松本氏 및 그의 선사 프씰루스키(Przyluski)씨는, 슈미트 선생의 용어 오스트로어 대신에 오스트로아시아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하나, 나는 슈미트 선생의 용어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하이네 겔던 교수가 오스트로아시아족과는 원래는 계통이 전연 다른 것이라고 주장함을 봄애, 그것을 더욱이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여  [[파일:도유호_중도문1-3.png|100px]]로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br/>하이네 겔던 박사는 오스트로아시아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와는 동일 어원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상호 상이한 양 어족이 그 후의 혼합에 의하여 (오스트로아시아어가 오스트로네시아어화를 하였거나, 또는 오스트로네시아어가 오스트로아시아어화를 하여 서로 비슷하게 된 것인 듯하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는 가장 그럴듯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스트로아시아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가 지금에 와서는 동일어계에 속하는 사실에 저촉되는 바는 조금도 없다. 따라 이 양자를 오스트로어 하에 취급함은 가장 정당하다고 생각한다.(Heine-Geldern; a. a. O)</ref> 이제 조선어를 들어보건대, 조선어도 그 문장구조는 알타이어적이나 어휘에 있어서는 역시 오스트로어적 분자가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단편적 비교의 결과이나, 이것만으로도 나는 오스트로어적 요소를 넉넉히 인식할 수가 있다.) 아니 중국어에 있어서도 그 어의 골자가 벌써 오스트로어적, 좀 더 가까이 말하면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tisch)적인 것이다. {{TagRefT|16}}슈미트씨의 학설에 의하면, 중국어가 첫째 인수(人數)로 그 주요성분을 형성하는 소위 「서장(西藏)지나어」(Tibeto-chinesische Sprachen)란 알타이어와 오스트로아시아어에 가까운 어와의 종합으로 된 것인대, 그 단철성(單綴性) 및 소위 급어(級語)(예를 들면 중국어의 일개인(一個人)의 ‘개’, 일배주(一杯酒)의 ‘杯’, 일매지(一枚紙)의 ‘매’ 등)등은 오스트로아시아어계에서 전승한 것이라고 한다.<ref group="a">W. Schmidt; Die Sprachfamilien und Sprachenkreise der Erde(Kulturgesichtliche Biblithek Ⅰ. Reihe 5). Heidelberg 1926, S. 148, 524. 슈미트 선생의 말이, 여기에 관하여 근사한 의견은 벌써 트롬베티(A. Trombetti)씨가 발표하였다고 한다. 트롬베티씨의 대표작이라고 할 Elementi diGlottologin, Bologna 1923를 읽어볼 차로 도서관에서 빌려는 왔으나 이태리어라 내게는 난해이다. 그러나 이태리어 아시는 분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조선어에 오스트로어소가 있는 예를 들어보건대, ‘女’를 조선 방언으로는 에미내, 일본고어(고사기)로는 おみな(おんな의 전신), 부루어(Buru)로는 emhinn, vina. 다약어(Dayak)로는 habinai 등등. ‘兄’, ‘年長’ 등을, 조선어로는 어니, 일본어로는 アニ(兄), 유구어로는 안이(an’i), 안오(an’o)(兄), 안남어로는 anh(兄), 몬어(mon)로는 anai(叔), 등등. 태양을 호카어로는 alla, orn, la. 폴리네시아어로는 ra, 인도네시아어로는 ‘날’(日)을 lau, 조선어의 ‘날’은 ‘라’나 ‘ᄙᅡ’의 와(訛)이니, l, r의 시음(Anlaut)이 없는 조선어에 있어서는 그것은 n으로 변하였고(모음 ㅏ와 합하매), 또 그러면서도 단철(單綴)의 독립적 발음을 하는 때 l, r은 종음(Anslaut)으로 발음되니, 거기서 ‘ᄙᅡ’나 ‘라’는 ‘날’이 되고 만 것이다. 언문의 라, 랴, 러, 려를 날, 냐, 널, 녀, 로 읽는 것과 동일한 예이다.… 조선어에 이렇게, 오스트로어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일본어에 비하면 퍽 적은 듯하다.<br/>이제 ‘말’에 관한 말썽은 그만하고, 순문화현상에서 두셋의 모권문화계통의 요소(언어로는 오스트로어와 관련되는)를 들어보자. 조선에는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였다가, 다시 파내서 개장하는 풍속이 있다. 그것도 모권문화계의 두골 숭배에 있어,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였다가, 내부가 부식된 후에 백골을 파내서, 거기서 두골만을 집어내어, 잘 닦아서 걷어두는 ‘만풍(蠻風)’의 유풍인 것이다. ‘문명’을 하였으니 두골 숭배는 없어졌으나, 한 번 묻었던 주검을 파내는 버릇은 지금도 남아있다. 또 조선의 가면무란, 그 유래는 모권문화소에서 성행하는, 남자들의 ‘비밀결사’에 있어, 그 의식시에 행하는 가면무에 있는 것이다. 또는 조선 하류사회에서는 지금도 성행하는 봉사혼, 매매혼의 풍습도 그 유래는 모권문화소에 있는 것이다. 서양인의 극도로 발달한 현대의 문명 중에도 가만히 쳐다보면 이런 ‘만풍’의 유풍은 수둑한 것이다.</ref> 그런데 오스트로아시아어, 또는 이 오스트로아시아어 및 오스트로네시아어(Austronesisch)를 합하여 칭하는, 이상의 오스트로어는 문화적으로 원래 모권문화계 제족의 어인 것이다.
 
|목차2-1해독문6번={{TagRefT|17}}모권계 문화 관계에 관하여 코퍼스는 경제적으로나 기타의 제문화현상에 있어 남지나는 아직도 그 주요성분이 모권계 문화, 그 중에도 특히 신계단의 것임을 지적하였는바, 그것은 과연 정당한 주장이라 하겠다.<ref group="a">Schmidt und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604</ref> 여기서 나는 또 중국어와 가장 근접한 타이어를 사용하는 타이(Thai)족이 아직도 모권적임을 참고로 말하여둔다.
 
|목차2-1해독문6번={{TagRefT|17}}모권계 문화 관계에 관하여 코퍼스는 경제적으로나 기타의 제문화현상에 있어 남지나는 아직도 그 주요성분이 모권계 문화, 그 중에도 특히 신계단의 것임을 지적하였는바, 그것은 과연 정당한 주장이라 하겠다.<ref group="a">Schmidt und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604</ref> 여기서 나는 또 중국어와 가장 근접한 타이어를 사용하는 타이(Thai)족이 아직도 모권적임을 참고로 말하여둔다.
 
|목차2-1해독문7번=중국의 선사시대에 모권사회가 존재하였음은 어느 점으로 보던지 별로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문헌상으로는 나는 별로 증명할 근거를 모르는 바이다. 학자 중에는 ‘姓’자가 女와 生의 합자임은 모권제 시대의 형적이라고 하는 이가 많으나 그것은 여자의 가문 유래를 표시함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즉 남자의 ‘씨’에 상대하여 여자의 본래 씨족계통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설에 나는 찬동한다. 그와 반대로, 한 편 이 ‘姓’자에서 모권소를 찾기는 하나, 다른 한 편 이 대외혼적 씨성제에서 토템주의의 잔적을 찾으려는 슈미트, 코퍼스 양씨의 태도에는 그럴듯한 점이 있다. 슈미트, 코퍼스 양씨와는 출발점이 달으나, 송본신광(松本信廣)씨도 이 ‘姓’에서 토테미즘과 또 모권제의 형적을 찾으려고 한다. {{TagRefT|18}}토테미즘 문제와는 전연 관련이 없이, 소천탁치(小川琢治) 박사나 마스페로(H. Maspero) 교수는 상서요전 중의 의화조를 신화로 환원하여놓고 거기서 태양신화의 존재를 찾아내는바, 이렇게 태양신화의 형적까지 인식하게 되면, 상고 중국에 토템주의가 있었음도 가능한 일이다.<ref group="a">Schmidt u. Koppers: a. a. O. 여기서 「슈미트」 신부는 말하기를, “…vielleicht sind aber die vierhundert quasi-exogamen Familiennamen Chinas noch letzte Uberbleibsel alter Totemclans;…”(S. 231)<br/>여기서 quasi-exogam이란 용어를 쓰나, 그것은 부당한 주장이다. Exogam의 한 자만 써야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슈미트 선생이 중국 내지 극동 일반의 가족 급 씨족제도를 잘 모르는 까닭이다. 또 여기에 사백씨성이라는 것도 그 출처는 나는 모르겠다. 여하간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서(230쪽 이하)에서 중국에 토테미즘 형적이 이 성씨제 이외에는 없는 것을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br/>松本, 『古代文化論』 제3장.<br/>小川琢治, 「支那歷史地理硏究」, 東京及京都, 昭和三年 第六章.<br/>Henri Maspero: “Légendes mythologiques dans le Chou King” in “Journal Asiatique” publié par la Socéité Asiatique, Paris Jan.-Mars 1924(Tom CCⅣ). 마스페로씨가 운위하는 태양신화에는 토템신화성이 퍽 박약해 보인다. (ainsi le-deux courses du soleil étaient également jalouées par les Hi et les Ho, saconrse annuelle et sa conrse journaliére, et le soloil ne ponvant se tromper. (P. 46)</ref> 비록 그렇기는 하나 나는 이 성씨제 즉 대외혼적 氏족制를 가지고 목유문화와 관련이 없는 純토테미즘을 찾는 것은 不當하다고 믿는 者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우리는 먼첨 중앙아시아 목유민의 씨족관계를 좀 더 明確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관하여 나는 잘 모르나, 몽고족의 씨족 관념을 보아 대외혼적 씨족제는 토템문화에만 아니라, 원래는 목유문화에도 고유한 것이며, 그것은 또 목유문화가 토템문화의 (초기)계단에서 파생한 것을 자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의미에서 슈미트, 코퍼스 양 신부가 토템문화만을 ‘대외혼적 부권문화’(Exogam vaterrechtliche Kultur)라 하고, 중국, 조선 등지의 고신문화를 「자유혼적 부권문화」(Freivaterrechtliche kultur)라는 개념 하에 처리하는 것은 근본적 오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성씨제는 여하간 토테미즘과 관계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間接으로 목유문화를 通하여 있는 것이오 거기에 직접 토템문화 전래의 형적이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 대외혼적 성제를 논외로 하고 보면 슈미트, 코퍼스 양씨도 논하듯이, 중국에는 극동의 문화족 일반과 동양으로 토테미즘의 형적이 별로 없으니, 이 점은 인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목차2-1해독문7번=중국의 선사시대에 모권사회가 존재하였음은 어느 점으로 보던지 별로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문헌상으로는 나는 별로 증명할 근거를 모르는 바이다. 학자 중에는 ‘姓’자가 女와 生의 합자임은 모권제 시대의 형적이라고 하는 이가 많으나 그것은 여자의 가문 유래를 표시함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즉 남자의 ‘씨’에 상대하여 여자의 본래 씨족계통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설에 나는 찬동한다. 그와 반대로, 한 편 이 ‘姓’자에서 모권소를 찾기는 하나, 다른 한 편 이 대외혼적 씨성제에서 토템주의의 잔적을 찾으려는 슈미트, 코퍼스 양씨의 태도에는 그럴듯한 점이 있다. 슈미트, 코퍼스 양씨와는 출발점이 달으나, 송본신광(松本信廣)씨도 이 ‘姓’에서 토테미즘과 또 모권제의 형적을 찾으려고 한다. {{TagRefT|18}}토테미즘 문제와는 전연 관련이 없이, 소천탁치(小川琢治) 박사나 마스페로(H. Maspero) 교수는 상서요전 중의 의화조를 신화로 환원하여놓고 거기서 태양신화의 존재를 찾아내는바, 이렇게 태양신화의 형적까지 인식하게 되면, 상고 중국에 토템주의가 있었음도 가능한 일이다.<ref group="a">Schmidt u. Koppers: a. a. O. 여기서 「슈미트」 신부는 말하기를, “…vielleicht sind aber die vierhundert quasi-exogamen Familiennamen Chinas noch letzte Uberbleibsel alter Totemclans;…”(S. 231)<br/>여기서 quasi-exogam이란 용어를 쓰나, 그것은 부당한 주장이다. Exogam의 한 자만 써야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슈미트 선생이 중국 내지 극동 일반의 가족 급 씨족제도를 잘 모르는 까닭이다. 또 여기에 사백씨성이라는 것도 그 출처는 나는 모르겠다. 여하간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서(230쪽 이하)에서 중국에 토테미즘 형적이 이 성씨제 이외에는 없는 것을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br/>松本, 『古代文化論』 제3장.<br/>小川琢治, 「支那歷史地理硏究」, 東京及京都, 昭和三年 第六章.<br/>Henri Maspero: “Légendes mythologiques dans le Chou King” in “Journal Asiatique” publié par la Socéité Asiatique, Paris Jan.-Mars 1924(Tom CCⅣ). 마스페로씨가 운위하는 태양신화에는 토템신화성이 퍽 박약해 보인다. (ainsi le-deux courses du soleil étaient également jalouées par les Hi et les Ho, saconrse annuelle et sa conrse journaliére, et le soloil ne ponvant se tromper. (P. 46)</ref> 비록 그렇기는 하나 나는 이 성씨제 즉 대외혼적 氏족制를 가지고 목유문화와 관련이 없는 純토테미즘을 찾는 것은 不當하다고 믿는 者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우리는 먼첨 중앙아시아 목유민의 씨족관계를 좀 더 明確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관하여 나는 잘 모르나, 몽고족의 씨족 관념을 보아 대외혼적 씨족제는 토템문화에만 아니라, 원래는 목유문화에도 고유한 것이며, 그것은 또 목유문화가 토템문화의 (초기)계단에서 파생한 것을 자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의미에서 슈미트, 코퍼스 양 신부가 토템문화만을 ‘대외혼적 부권문화’(Exogam vaterrechtliche Kultur)라 하고, 중국, 조선 등지의 고신문화를 「자유혼적 부권문화」(Freivaterrechtliche kultur)라는 개념 하에 처리하는 것은 근본적 오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성씨제는 여하간 토테미즘과 관계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間接으로 목유문화를 通하여 있는 것이오 거기에 직접 토템문화 전래의 형적이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 대외혼적 성제를 논외로 하고 보면 슈미트, 코퍼스 양씨도 논하듯이, 중국에는 극동의 문화족 일반과 동양으로 토테미즘의 형적이 별로 없으니, 이 점은 인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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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3원문3번={{TagSpage|194-3}}安陽 殷墟의 發掘은, 中央硏究院(Academia Sinica)의 企圖에 依하야 비로소 組織的 科學的으로 하게 된 것은 世間이 周知하는 바이다. 이 發掘에 依하야 무엇보다도 먼저 (一八九八年 以來 甲骨卜辭가 世間에 紹介되었음에 不拘하고) 一種의 傳說에 不過하든 商代史의 一部는 完全히 「歷史期」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東西 學者 中에는 아직까지도 甲骨卜辭의 殷商時代性을 否定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何等 根據가 없는 것의로, 이렇게 된다면 「나폴레온」의 史的 存在도 否定 當할 餘地가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좀 더 옛날에 도라가 孔子의 存在는 넉넉히 疑心할 餘地가 있을 것이겠다.
 
|목차2-3원문3번={{TagSpage|194-3}}安陽 殷墟의 發掘은, 中央硏究院(Academia Sinica)의 企圖에 依하야 비로소 組織的 科學的으로 하게 된 것은 世間이 周知하는 바이다. 이 發掘에 依하야 무엇보다도 먼저 (一八九八年 以來 甲骨卜辭가 世間에 紹介되었음에 不拘하고) 一種의 傳說에 不過하든 商代史의 一部는 完全히 「歷史期」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東西 學者 中에는 아직까지도 甲骨卜辭의 殷商時代性을 否定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何等 根據가 없는 것의로, 이렇게 된다면 「나폴레온」의 史的 存在도 否定 當할 餘地가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좀 더 옛날에 도라가 孔子의 存在는 넉넉히 疑心할 餘地가 있을 것이겠다.
 
|목차2-3원문4번={{TagSpage|194-4}}勿論 疑心이란 學問上 퍽 必要한 것이니, 疑心의 結果가 가장 有效한 境遇(積極的으로나 消極的으로)가 많은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必要 없는 疑心은 도로혀 不幸한 結果를 招來하는 法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發掘의 結果 商代史의 一部가 「有史時代」로 넘어온 것은 決코 否定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목차2-3원문4번={{TagSpage|194-4}}勿論 疑心이란 學問上 퍽 必要한 것이니, 疑心의 結果가 가장 有效한 境遇(積極的으로나 消極的으로)가 많은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必要 없는 疑心은 도로혀 不幸한 結果를 招來하는 法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發掘의 結果 商代史의 一部가 「有史時代」로 넘어온 것은 決코 否定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목차2-3원문5번={{TagSpage|194-5}}殷墟 發掘의 卜辭는 史籍上의 傳說과 背馳되는 點도 많으나, 合致되는 店도 많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은 여기에 遷都한 事實이니, 이곳에 遷都한 것은 {{TagPage|195-1}}書經에 依하면 盤庚時인바, 發掘의 結果도 盤庚時까지 遡及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西曆 紀元前 十五世紀 末 或은 十四世紀 初까지에 中國의 有史時代는 遡及한다. 殷墟의 發掘에 依하면 殷代 遺物 以外에 또 先史時代의 遺物도 出土되었으니, 殷墟에 벌서 黑陶文化 彩陶문화의 諸文化層이 있었든 것이다. 그러나 發掘에 從事한 中央硏究院員 諸氏는 이 一個處의 出土品만으로는 아직 商文化와 仰韶文化 以外에는 文化層的 年代體系를 樹立할 수가 없었든 것이다. 비록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벌서 文化素의 「多數」(!)가, 그때까지는 도모지 몰랐든, 東便에서 온 어느 文化潮流에 그 起源을 둔 形蹟을 볼 수가 있었든 것이다. 그리하야 徐中舒氏는 벌서 鯨骨, 海貝 等의 出土品이나 數次 遷都에 關한 史籍上의 傳說 等은 商族이 東便의 海岸地帶에서 온 消息을 傳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든 것이다. 그러든바, 내종에는 山東省 城子崖에 文化遺址가 發見되었든 것이다. {{TagRef|31}}그리하야 一九三〇年 一九三一年 二回에 亘하여 發掘을 試하였다. 거기서 發見한 것이 即 黑陶文化 或은 後岡文化이다.<ref>中國考古報告集之一, 「城子崖」(山東歷城縣龍山鎭之黑陶文化之遺址), 南京, 民國二十三年.<br/>[[파일:도유호_중도문1-1.png|섬네일|가운데|第二圖, 城子崖上層出土의 靑銅器(「城子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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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3원문5번={{TagSpage|194-5}}殷墟 發掘의 卜辭는 史籍上의 傳說과 背馳되는 點도 많으나, 合致되는 店도 많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은 여기에 遷都한 事實이니, 이곳에 遷都한 것은 {{TagPage|195-1}}書經에 依하면 盤庚時인바, 發掘의 結果도 盤庚時까지 遡及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西曆 紀元前 十五世紀 末 或은 十四世紀 初까지에 中國의 有史時代는 遡及한다. 殷墟의 發掘에 依하면 殷代 遺物 以外에 또 先史時代의 遺物도 出土되었으니, 殷墟에 벌서 黑陶文化 彩陶문화의 諸文化層이 있었든 것이다. 그러나 發掘에 從事한 中央硏究院員 諸氏는 이 一個處의 出土品만으로는 아직 商文化와 仰韶文化 以外에는 文化層的 年代體系를 樹立할 수가 없었든 것이다. 비록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벌서 文化素의 「多數」(!)가, 그때까지는 도모지 몰랐든, 東便에서 온 어느 文化潮流에 그 起源을 둔 形蹟을 볼 수가 있었든 것이다. 그리하야 徐中舒氏는 벌서 鯨骨, 海貝 等의 出土品이나 數次 遷都에 關한 史籍上의 傳說 等은 商族이 東便의 海岸地帶에서 온 消息을 傳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든 것이다. 그러든바, 내종에는 山東省 城子崖에 文化遺址가 發見되었든 것이다. {{TagRef|31}}그리하야 一九三〇年 一九三一年 二回에 亘하여 發掘을 試하였다. 거기서 發見한 것이 即 黑陶文化 或은 後岡文化이다.<ref>中國考古報告集之一, 「城子崖」(山東歷城縣龍山鎭之黑陶文化之遺址), 南京, 民國二十三年.<br/>[[파일:도유호_중도문1-1.png|섬네일|가운데|第二圖, 城子崖上層出土의 靑銅器(「城子崖」에서).]]</ref>
 
|목차2-3원문6번={{TagSpage|195-2}}城子崖에서는 二個의 相異한 文化層을 볼 수가 있었다. 下層의 黑陶文化層과 上層의 灰陶文化層이 바로 그것이다. 上層에서는 文字도 發見되었고, 靑銅器도 發見되었다. 商代文化 中에서 大役割을 演하는 卜骨은 上下 兩層에서 모두 發掘되었는데, 殷墟와는 달리, 여기에는 龜甲은 全然 缺如하고 骨材만 있는 것이다. 卜骨은 모다 文字를 全然 缺如한 外에 또 小屯村 殷墟의 것에 比하면, 더 原始的 性質을 가지고 있다. 小屯村이나 仰韶와 同樣으로, 上下 兩 文化層은 모다 蓆紋陶器와 圓筒斧의 傳統을 包含하얐고, 또 半月刀나 有柄矢鏃(Schaflp eilspitze) 等 北極文化 系統의 影響, (아니 그보다도 도로혀 北部亞細亞 文化系統의 影響)을 指示하는 文化素도 小屯村이나 仰韶와 同樣으로, 上下 兩 文化層에서 出土되었다. {{TagRef|32}}上層文化 中에 보이는 靑銅器는 中央西伯利亞(미누씬스크 Minusinsk)의 靑銅器時代 文化 乃至 歐羅巴의 靑銅器時代 文化와의 關聯의 消息을 傳하는바, 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이것은 上古 中國의 靑銅器 一般이 西方 及 西北方과 關聯을 가진 것에 合致되는 事實이다.<ref>「城子崖」, 圖版第五十二比較.<br/>上層出土인 圖版第五十二, 第6의 畑形의 小刀와 仝第9의 「刀錢」(刀柄에 輪이 있는 것)은, 「미누씬스크」(Minusinsk)의 青銅刀와 함께, 歐羅巴 靑銅器時代 末期 「우르넨ᅋᅦᆯ드」文化(Urnenfelderkultur)를 聯想케 하는 바가 퍽 많다(第二圖). 이 等의 靑銅器形이 어대서 出發한 것인지는 몰으겠으나, 여기에 關하야 우리는, 「일리리아」族(Illyrer)의 言語가, 東部 인도게르만語인 所謂 「싸템」(Satem)語系에 屬하는 것에 注意할 必要가 있다. 鐵器時代의 「일리리아」族은 그 祖上이 발서, 이 「우르」文化時代의 東方과의 相互關係에 그 原因이 있음이나 아닐런지?</ref> 上層을 中央硏{{TagPage|196-1}}究院員 諸氏는 譚國 遺址라고 하는바, 그들의 主張이 正當한지 不然한지를 나는 도모지 모르겠다. 日本 學者들도 이것은 벌서 定說로, 더 疑心할 餘地가 없는 줄로 아나,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여기에는 아직 좀 더 硏究할 餘地가 있는 듯하다.
 
|목차2-3원문6번={{TagSpage|195-2}}城子崖에서는 二個의 相異한 文化層을 볼 수가 있었다. 下層의 黑陶文化層과 上層의 灰陶文化層이 바로 그것이다. 上層에서는 文字도 發見되었고, 靑銅器도 發見되었다. 商代文化 中에서 大役割을 演하는 卜骨은 上下 兩層에서 모두 發掘되었는데, 殷墟와는 달리, 여기에는 龜甲은 全然 缺如하고 骨材만 있는 것이다. 卜骨은 모다 文字를 全然 缺如한 外에 또 小屯村 殷墟의 것에 比하면, 더 原始的 性質을 가지고 있다. 小屯村이나 仰韶와 同樣으로, 上下 兩 文化層은 모다 蓆紋陶器와 圓筒斧의 傳統을 包含하얐고, 또 半月刀나 有柄矢鏃(Schaflp eilspitze) 等 北極文化 系統의 影響, (아니 그보다도 도로혀 北部亞細亞 文化系統의 影響)을 指示하는 文化素도 小屯村이나 仰韶와 同樣으로, 上下 兩 文化層에서 出土되었다. {{TagRef|32}}上層文化 中에 보이는 靑銅器는 中央西伯利亞(미누씬스크 Minusinsk)의 靑銅器時代 文化 乃至 歐羅巴의 靑銅器時代 文化와의 關聯의 消息을 傳하는바, 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이것은 上古 中國의 靑銅器 一般이 西方 及 西北方과 關聯을 가진 것에 合致되는 事實이다.<ref>「城子崖」, 圖版第五十二比較.<br/>上層出土인 圖版第五十二, 第6의 畑形의 小刀와 仝第9의 「刀錢」(刀柄에 輪이 있는 것)은, 「미누씬스크」(Minusinsk)의 青銅刀와 함께, 歐羅巴 靑銅器時代 末期 「우르넨ᅋᅦᆯ드」文化(Urnenfelderkultur)를 聯想케 하는 바가 퍽 많다(第二圖). 이 等의 靑銅器形이 어대서 出發한 것인지는 몰으겠으나, 여기에 關하야 우리는, 「일리리아」族(Illyrer)의 言語가, 東部 인도게르만語인 所謂 「싸템」(Satem)語系에 屬하는 것에 注意할 必要가 있다. 鐵器時代의 「일리리아」族은 그 祖上이 발서, 이 「우르」文化時代의 東方과의 相互關係에 그 原因이 있음이나 아닐런지?</ref> 上層을 中央硏{{TagPage|196-1}}究院員 諸氏는 譚國 遺址라고 하는바, 그들의 主張이 正當한지 不然한지를 나는 도모지 모르겠다. 日本 學者들도 이것은 벌서 定說로, 더 疑心할 餘地가 없는 줄로 아나,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여기에는 아직 좀 더 硏究할 餘地가 있는 듯하다.
 
|목차2-3원문7번={{TagSpage|196-2}}發掘 遺址는 多少 丘狀을 形成한 곳에 있는바, 거기에는 城壁의 遺址가 있었다 처음 發掘時에는 이 城壁을 上層文化에 屬하는 것인 줄로 알었으나, 第二次 發掘 以後 이것은 下層文化에 屬하는 것이리라고, 發掘 當事者들은 推測한다. 이 推測에는 一義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現場에 못 가본 내게는 書籍을 通한 報道로만은 勿論 判斷할 能力이 없다. 그러나 이 文化에 牧遊文化의 影響이 많은 것을 보아, 侵襲하는 牧遊民에게 對한 防備로 城壁을 築成한 것은 當時 農民의 當然히 할 일이었다. 그러기에 城址도 바로 丘上에 있다.
 
|목차2-3원문7번={{TagSpage|196-2}}發掘 遺址는 多少 丘狀을 形成한 곳에 있는바, 거기에는 城壁의 遺址가 있었다 처음 發掘時에는 이 城壁을 上層文化에 屬하는 것인 줄로 알었으나, 第二次 發掘 以後 이것은 下層文化에 屬하는 것이리라고, 發掘 當事者들은 推測한다. 이 推測에는 一義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現場에 못 가본 내게는 書籍을 通한 報道로만은 勿論 判斷할 能力이 없다. 그러나 이 文化에 牧遊文化의 影響이 많은 것을 보아, 侵襲하는 牧遊民에게 對한 防備로 城壁을 築成한 것은 當時 農民의 當然히 할 일이었다. 그러기에 城址도 바로 丘上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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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3해독문3번=안양 은허의 발굴은, 중앙연구원(Academia Sinica)의 기도에 의하여 비로소 조직적 과학적으로 하게 된 것은 세간이 주지하는 바이다. 이 발굴에 의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1898년 이래 갑골복사((甲卜骨辭))가 세간에 소개되었음에 불구하고) 일종의 전설에 불과하던 상대사의 일부는 완전히 ‘역사기’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동서 학자 중에는 아직까지도 갑골복사의 은상시대성을 부정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하등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이렇게 된다면 나폴레옹의 사적 존재도 부정당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좀 더 옛날에 돌아가 공자의 존재는 넉넉히 의심할 여지가 있을 것이겠다.
 
|목차2-3해독문3번=안양 은허의 발굴은, 중앙연구원(Academia Sinica)의 기도에 의하여 비로소 조직적 과학적으로 하게 된 것은 세간이 주지하는 바이다. 이 발굴에 의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1898년 이래 갑골복사((甲卜骨辭))가 세간에 소개되었음에 불구하고) 일종의 전설에 불과하던 상대사의 일부는 완전히 ‘역사기’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동서 학자 중에는 아직까지도 갑골복사의 은상시대성을 부정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하등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이렇게 된다면 나폴레옹의 사적 존재도 부정당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좀 더 옛날에 돌아가 공자의 존재는 넉넉히 의심할 여지가 있을 것이겠다.
 
|목차2-3해독문4번=물론 의심이란 학문상 퍽 필요한 것이니, 의심의 결과가 가장 유효한 경우(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가 많은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필요 없는 의심은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발굴의 결과 상대사의 일부가 「유사시대」로 넘어온 것은 결코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목차2-3해독문4번=물론 의심이란 학문상 퍽 필요한 것이니, 의심의 결과가 가장 유효한 경우(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가 많은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필요 없는 의심은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발굴의 결과 상대사의 일부가 「유사시대」로 넘어온 것은 결코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목차2-3해독문5번=은허 발굴의 복사는 사적상의 전탈과 배치되는 점도 많으나, 합치되는 점도 많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기에 천도한 사실이니, 이곳에 천도한 것은 서경에 의하면 반경시(盤庚時)인바, 발굴의 결과도 반경시까지 소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서력 기원전 15세기 말 혹은 14세기 초까지에 중국의 유사시대는 소급한다. 은허의 발굴에 의하면 은대 유물 이외에 또 선사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으니, 은허에 벌써 흑도문화, 채도문화의 여러 문화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굴에 종사한 중앙연구원원 제씨는 이 일개처의 출토품만으로는 아직 상문화와 앙소문화 이외에는 문화층적 연대체계를 수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벌써 문화소의 ‘다수’(!)가, 그때까지는 도무지 몰랐던, 동편에서 온 어느 문화조류에 그 기원을 둔 형적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중서씨는 벌써 고래 뼈, 바다 조개 등의 출토품이나 수차 천도에 논한 사적상의 전설 등은 상족이 동편의 해안지대에서 온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던바, 나중에는 산동성 성자애(城子崖)에 문화유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TagRefT|31}}그리하여 1930년, 1931년 2회에 걸쳐 발굴을 시도하였다. 거기서 발견한 것이 즉 흑도문화 혹은 후강문화이다.<ref group="a">中國考古報告集之一, 「城子崖」(山東歷城縣龍山鎭之黑陶文化之遺址), 南京, 民國二十三年.<br/>[[파일:도유호_중도문1-1.png|섬네일|가운데|第二圖, 城子崖上層出土의 靑銅器(「城子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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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3해독문5번=은허 발굴의 복사는 사적상의 전탈과 배치되는 점도 많으나, 합치되는 점도 많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기에 천도한 사실이니, 이곳에 천도한 것은 서경에 의하면 반경시(盤庚時)인바, 발굴의 결과도 반경시까지 소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서력 기원전 15세기 말 혹은 14세기 초까지에 중국의 유사시대는 소급한다. 은허의 발굴에 의하면 은대 유물 이외에 또 선사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으니, 은허에 벌써 흑도문화, 채도문화의 여러 문화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굴에 종사한 중앙연구원원 제씨는 이 일개처의 출토품만으로는 아직 상문화와 앙소문화 이외에는 문화층적 연대체계를 수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벌써 문화소의 ‘다수’(!)가, 그때까지는 도무지 몰랐던, 동편에서 온 어느 문화조류에 그 기원을 둔 형적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중서씨는 벌써 고래 뼈, 바다 조개 등의 출토품이나 수차 천도에 논한 사적상의 전설 등은 상족이 동편의 해안지대에서 온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던바, 나중에는 산동성 성자애(城子崖)에 문화유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TagRefT|31}}그리하여 1930년, 1931년 2회에 걸쳐 발굴을 시도하였다. 거기서 발견한 것이 즉 흑도문화 혹은 후강문화이다.<ref group="a">中國考古報告集之一, 「城子崖」(山東歷城縣龍山鎭之黑陶文化之遺址), 南京, 民國二十三年.<br/>[[파일:도유호_중도문1-1.png|섬네일|가운데|第二圖, 城子崖上層出土의 靑銅器(「城子崖」에서).]]</ref>
 
|목차2-3해독문6번=성자애에서는 2개의 상이한 문화층을 볼 수가 있었다. 하층의 흑도문화층과 상층의 회도문화층이 바로 그것이다. 상층에서는 문자도 발견되었고, 청동기도 발견되었다. 상대문화 중에서 대역할을 보이는 복골은 상하 양층에서 모두 발굴되었는데, 은허와는 달리, 여기에는 귀갑은 전연 결여하고 골재만 있는 것이다. 복골은 모두 문자를 전연 결여한 밖에 또 소둔촌 은허의 것에 비하면, 더 원시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소둔촌이나 앙소와 동양으로, 상하 양 문화층은 모두 석문도기(蓆紋陶器)와 원통부(圓筒斧)의 전통을 포함하였고, 또 반월도나 유병시족(有柄矢鏃, Schaflp eilspitze) 등 북극문화 계통의 영향, (아니 그보다도 도리어 북부아시아 문화계통의 영향)을 지시하는 문화소도 소둔촌이나 앙소와 同樣으로, 상하 양 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 {{TagRefT|32}}상층문화 중에 보이는 청동기는 중앙시베리아(미누신스크 Minusinsk)의 청동기시대 문화 내지 유럽의 청동기시대 문화와의 관련의 소식을 전하는바, 인제 더 논할 바와 같이 이것은 상고 중국의 청동기 일반이 서방 및 서북방과 관련을 가진 것에 합치되는 사실이다.<ref group="a">「城子崖」, 도판 제52비교.<br/>상층출토인 도판 제52, 제6의 전형(畑形)의 소도(小刀)와 동 제9의 ‘도전(刀錢)’(칼자루에 고리가 있는 것)은, ‘미누신스크’(Minusinsk)의 청동도와 함께, 유럽 청동기시대 말기 우르넨펠드문화(Urnenfelderkultur)를 연상케 하는 바가 퍽 많다(제2도). 이등의 청동기형이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에 관하여 우리는, 일리리아족(Illyrer)의 언어가, 동부 인도게르만어인 소위 사템(Satem)어계에 속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철기시대의 일리리아족은 그 조상이 벌써, 이 우르문화시대의 동방과의 상호관계에 그 원인이 있음이나 아닐런지?</ref> 상층을 중앙연구원원 제씨는 담국(譚國) 유지라고 하는바, 그들의 주장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일본 학자들도 이것은 벌써 정설로,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줄로 아나,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여기에는 아직 좀 더 연구할 여지가 있는 듯하다.
 
|목차2-3해독문6번=성자애에서는 2개의 상이한 문화층을 볼 수가 있었다. 하층의 흑도문화층과 상층의 회도문화층이 바로 그것이다. 상층에서는 문자도 발견되었고, 청동기도 발견되었다. 상대문화 중에서 대역할을 보이는 복골은 상하 양층에서 모두 발굴되었는데, 은허와는 달리, 여기에는 귀갑은 전연 결여하고 골재만 있는 것이다. 복골은 모두 문자를 전연 결여한 밖에 또 소둔촌 은허의 것에 비하면, 더 원시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소둔촌이나 앙소와 동양으로, 상하 양 문화층은 모두 석문도기(蓆紋陶器)와 원통부(圓筒斧)의 전통을 포함하였고, 또 반월도나 유병시족(有柄矢鏃, Schaflp eilspitze) 등 북극문화 계통의 영향, (아니 그보다도 도리어 북부아시아 문화계통의 영향)을 지시하는 문화소도 소둔촌이나 앙소와 同樣으로, 상하 양 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 {{TagRefT|32}}상층문화 중에 보이는 청동기는 중앙시베리아(미누신스크 Minusinsk)의 청동기시대 문화 내지 유럽의 청동기시대 문화와의 관련의 소식을 전하는바, 인제 더 논할 바와 같이 이것은 상고 중국의 청동기 일반이 서방 및 서북방과 관련을 가진 것에 합치되는 사실이다.<ref group="a">「城子崖」, 도판 제52비교.<br/>상층출토인 도판 제52, 제6의 전형(畑形)의 소도(小刀)와 동 제9의 ‘도전(刀錢)’(칼자루에 고리가 있는 것)은, ‘미누신스크’(Minusinsk)의 청동도와 함께, 유럽 청동기시대 말기 우르넨펠드문화(Urnenfelderkultur)를 연상케 하는 바가 퍽 많다(제2도). 이등의 청동기형이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에 관하여 우리는, 일리리아족(Illyrer)의 언어가, 동부 인도게르만어인 소위 사템(Satem)어계에 속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철기시대의 일리리아족은 그 조상이 벌써, 이 우르문화시대의 동방과의 상호관계에 그 원인이 있음이나 아닐런지?</ref> 상층을 중앙연구원원 제씨는 담국(譚國) 유지라고 하는바, 그들의 주장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일본 학자들도 이것은 벌써 정설로,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줄로 아나,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여기에는 아직 좀 더 연구할 여지가 있는 듯하다.
 
|목차2-3해독문7번=발굴 유지(遺址)는 다소 언덕 모양을 형성한 곳에 있는바, 거기에는 성벽의 유지가 있었다 처음 발굴시에는 이 성벽을 상층문화에 속하는 것인 줄로 알었으나, 제2차 발굴 이후 이것은 하층문화에 속하는 것이리라고, 발굴 당사자들은 추측한다. 이 추측에는 일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장에 못 가본 내게는 서적을 통한 보도로만은 물론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 문화에 목유문화의 영향이 많은 것을 보아, 침습하는 목유민에게 대한 방비로 성벽을 축성한 것은 당시 농민의 당연히 할 일이었다. 그러기에 성지도 바로 언덕 위에 있다.
 
|목차2-3해독문7번=발굴 유지(遺址)는 다소 언덕 모양을 형성한 곳에 있는바, 거기에는 성벽의 유지가 있었다 처음 발굴시에는 이 성벽을 상층문화에 속하는 것인 줄로 알었으나, 제2차 발굴 이후 이것은 하층문화에 속하는 것이리라고, 발굴 당사자들은 추측한다. 이 추측에는 일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장에 못 가본 내게는 서적을 통한 보도로만은 물론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 문화에 목유문화의 영향이 많은 것을 보아, 침습하는 목유민에게 대한 방비로 성벽을 축성한 것은 당시 농민의 당연히 할 일이었다. 그러기에 성지도 바로 언덕 위에 있다.

2024년 11월 20일 (수) 00:4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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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시문화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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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中國都市文化의 起源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2 발행기관 @
저자 도유호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0년9월
시작쪽 160쪽 종료쪽 201쪽 전체쪽 042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고고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이 글은 내가 지난 여름 빈에서 전운이 중첩한 속에 쓴 것이다. 원고가 불과 1개월 내외에 끝났던 만큼 부족한 데는 물론 많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와서는 다시 쓰고 싶은 데가 여러 군데이다. 그러나 사정상 부득이 그대로 발표하기로 한다. 오직 선배 제위의 비평과 지도를 비는 바이다.
이 글은 내가 昨夏 維也納에서 戰雲이 重疊한 속에 쓴 것이다. 原稿가 不過 一個月 內外에 끝났든 만큼 不足한 대는 勿論 많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와서는 다시 쓰고 싶은 대가 여러 군대이다. 그러나 事情上 不得已 그대로 發表하기로 한다. 오직 先輩 諸位의 批評과 指導를 비는 바이다.






본문


본문1: 서론


인류학상에서는 인류의 기원에 관하여 단원론, 다원론이 대립을 하고 가장 맹렬히 싸우고 있었다. 한 편에서—인류는 어느 일정한 지점에서 단 한 번 기원된 것이다. 이것이 그후 발전하여 여러 인종으로 분기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조상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즉, 다른 한 편에서는—아니다 인류는 원류(猿類)에서 한 번만 발전했던 것이 아니라 지구상 여러 지점에서 수차로 전후하여 원류는 인류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현금 지구상의 여러 인종은 그 조상들이 인류기에 이르러 비로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인종 중에는, 원류시기에 벌써 혈통을 달리한 자가 있다고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의 결과는 결국 단원론의 승리에 끝나고 말았다. 현금에 이르러는 (체질)인류학상에 있어서는 이 단원적 기원론이 정설이 되고 말았다.
쪽수▶P160人類學上에서는 人類의 起源에 關하여 單元論 多元論이 對立을 하고 가장 猛烈히 싸우고 있었다. 一便에서—人類는 어느 一定한 地點에서 單 한번 起源된 것이다. 이것이 그후 發展하야 諸人種으로 分岐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地上에 사는 全人의 祖上은 同一▶P161-1한 것이라고 主張한즉, 다른 한 便에서는—아니다 人類는 猿類에서 한 번만 發展했던 것이 아니라 地球上 여러 地點에서 數次로 前後하야 猿類는 人類로 發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現今 地球上의 諸人種은 그 祖上들이 人類期에 이르러 비로소 달러진 것은 아니다. 이 人種 中에는, 猿類時期에 벌서 血統을 달리한 자가 있다고 主張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論爭의 結果는 結局 單元論의 勝利에 끝이고 말었다. 現今에 이르러는 (體質)人類學上에 있어서는 이 單元的 起源論이 定說이 되고 말었다.
Monogenese! 즉 단원적 기원! 이것은 (체질)인류학상에서는 제인종 간의 동일 혹은 유사현상에 관하여도 적용되는 것이니 아직 여기에 관하여는 학자 간의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여 있기는 하나, 이것도 정설이 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현대문주1▶(체질)인류학자 중, 에곤 폰 아이크슈테(E. von Eickstedt)나, 바이너트(Hans Weinert) 같은 분은—예하면—현 유럽인종 중 소위 알핀종(Alphine)에게 몽고인종 즉 황인종계의 특징이 많은 것은 황인종계의 혈통을 받은 관계로 기생한 것이 아니라, 유럽인종 자체 내에서 기생한 특수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나, 그것은 그들이 신석기시대에 알프스 지대에 이주한 항공주가문화(杭工住家文化, Pfahlbaukultur)의 지지자는 아시아 편에서 온 인종적으로는 몽고인종계(몽고족과는 근본적으로 구분할 것!)에 속하는 종족이었던 것을 조금도 모르고 하는 주장에 불과한 것이니, 인류학자라도 선사학의 지지이 조금 있는 분에게는 현재 알핀인종 중의 황인종소는 동방에서 온 종족의 결과인 것을 더 의심할 여지 없이 인정할 것이다.[a 1] 또 바이너트씨는 동남아시아 도서지대의 어떤 종족들 중에 보이는 흑인종적 현상, 즉 축발(縮髮, Krusiaar)이나 흑색피부 등을 흑인종과는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형성한 것이라고 하나, 그것도 그가 이 도서세계와 아프리카와의 문화교통관계를 모르고 하는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여하간 이런 근거가 없는 주장을 제거하고 보면 인종문제에 있어서도 단원론에 의하여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쪽수▶P161-2Monogenese! 即 單元的 起源! 이것은 (體質)人類學上에서는 諸人種 間의 同一 或은 類似現象에 關하여도 適用되는 것이니 아직 여기에 관하여는 學者 間의 意見이 一致되지 못하야 있기는 하나, 이것도 定說이 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원문주1▶(體質)人類學者 中, 아익쉬테트(E. von Eickstedt)나, ᅄᅡ이네르트(Hans Weinert) 같은 분은—例하면—現 歐羅巴人種 中 所謂 알핀種(Alphine)에게 蒙古人種 即 黃人種系의 特徵이 많은 것은 黃人種系의 血統을 받은 關係로 起生한 것이 아니라, 歐羅巴人種 自體 內에서 起生한 特殊的 現象이라고 主張하나, 그것은 그들이 新石器 時代에 알프쓰 地帶에 移住한 杭工住家文化(Pfahlbaukultur)의 支持者는 亞細亞 便에서 온 人種的으로는 蒙古人種係(蒙古族과는 根本的으로 區分할 것!)에 屬하는 種族이었던 것을 조금도 모르고 하는 主張에 不過한 것이니, 人類學者라도 先史學의 知識이 조금 있는 분에게는 現在 알핀人種 中의 黃人種素는 東方에서 온 種族의 結果인 것을 더 疑心할 餘地 없이 認定할 것이다.[1] 또 ᅄᅡ이네르트氏는 東南亞細亞 島嶼地帶의 어떤 種族들 中에 보이는 黑人種的 現象, 即 縮髮(Krusiaar)이나 黑色皮膚 等을 黑人種과는 關係없이 獨立的으로 形成한 것이라고 하나, 그것도 그가 이 島嶼世界와 亞弗利加와의 文化交通關係를 모르고 하는 主張에 不過한 것이다. 如何間 이런 根據가 없는 主張을 除去하고 보면 人種問題에 있어서도 單元論에 依하야만 說明이 可能한 것이다.
이 단원적 기원은 다시 문화현상에 있어서도 그리되었으니 이 사실을 나는 우리 동방학도 제군에게 향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고조하여둔다. 어느 격리한 여러 지점에서 동일 혹은 유사한 문화현상이 발견되는 때에는 좀 자세히 검토하여 보면 그것들은 언제나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혹은 소급적으로나, 상호 관련되어 있는 것이오. 결코 서로 독립적으로 각기 발생한 것은 아닌 것이다. 저간의 소식을 잘 알아야 비로소 역사 발전의 변증적 과정을 전적으로 관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도 단원에서 출발하여야 문제의 해결이 가능할 줄로 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로 여기서 다원론, 독립적 발생론이 완고히 반대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인류기원론에 관한 과거의 사세를 회고할 때—거기서 다원적 기원론이 얼마나 완강히 목을 벌리고 있었던가를 회고할 때—여기서도 현금의 완강한 다원론적 반대의 말로는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쪽수▶P161-3이 單元的 起源은 다시 文化現象에 있어서도 그리되얐▶P162-1으니 이 事實을 나는 우리 東方學徒 諸君에게 向하야 무엇보다도 먼저 高調하여둔다. 어느 隔離한 諸地點에서 同一 或은 類似한 文化現象이 發見되는 때에는 좀 仔細히 檢討하여 보면 그것들은 언제나 直接으로나 間接으로나 或은 溯及的으로나, 相互 關聯되어 있는 것이오. 決코 서루 獨立的으로 各其 發生한 것은 아닌 것이다. 這間의 消息을 잘 알어야 비로소 歷史 發展의 辯證的 過程을 全的으로 觀察할 수가 있는 것이다. 即 여기서도 單元에서 出發하여야 問題의 解決이 可能할 줄로 안다. 그러나 不幸히도 바로 여기서 多元論, 獨立的 發生論이 頑固히 反對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人類起源論에 關한 過去의 事勢를 回顧할 때—거기서 多元的 起源論이 얼마나 頑强히 목을 벌이고 있었든가를 回顧할 때—여기서도 現今의 頑强한 多元論的 反對의 末路는 想像하기가 어렵지 않다.
나는 여기서 체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단원적 기원의 원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발전의 변증법은 이 출발점상의 단원을 다선적 운동으로, 즉 발전방향에 있어서는 다원적으로 분해하는 것이다. 즉 단원은 다원으로 부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정적 계단으로 출현한 다원은 단원 편을 향하여 다시 자기부정을 하게 되는 것이니, 바로 여기에 인류문화발전의 변증법, 역사발전의 변증법이 있는 소이다. 이제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논하여 보자.
쪽수▶P162-2나는 여기서 體質的으로나 文化的으로나 單元的 起源의 原理를 主張한다. 그러나 發展의 辯證法은 이 出發點上의 單元을 多線的 運動으로, 即 發展方向에 있어서는 多元的으로 分解하는 것이다. 即 單元은 多元으로 否定을 當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否定的 階段으로 出現한 多元은 單元便을 向하야 다시 自己否定을 하게 되는 것이니, 바로 여기에 人類文化發展의 辯證法, 歷史發展의 辨證法이 있는 所以다. 이제 이것을 좀더 具體的으로 論하여 보자.
인류의 기원이 한 장소 한 시기에 단원적으로 소급되는 것은 그에 이상에 논한 바와 같이 이미 정설이 되어있으나, 인원(人猿, Anthropopithecus, Menschenafe)이 원인(猿人, Pithecanthropus, Affenmensch)이 된 장소와 시기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거기에는 이론이 구구하다. 장소문제는 아직 너무나 난문제이니,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단지 시간문제만을 논하여 보건대 인류의 존재는 지질 제3기에는 암만해도 아직 없었다고 믿어진다.(프랑스 학자 중에는 제4기 초, 제3기 말로 계산하는 분이 많은바, 그때 그들이 제3기 말의 인류를 운위하는 경우에는, 그것은 사실 제4기 초의 인류를 논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논하는 제3기 인류 운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첫째 선사고고학상으로는 도저히 제4기 이전의 인류의 존재는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인바, 아직까지 지층적으로 제3기의 인류가 증명된 일은 도무지 없다. 인류의 기원은 사실상 제4기의 도래라는, 지질학적 현상과 불가분적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쪽수▶P162-3人類의 起源이 一場所 一時期에 單元的으로 遡及되는 것은 그에 以上에 論한 바와 같이 이미 定說이 되어있으나, 人猿(Anthropopithecus, Menschenafe)이 猿人(Pithecanthropus, Affenmensch)이된 場所와 時期는 어데에 있는 가 하면 거기에는 理論이 區區하다. 場所問題는 아직 너무나 難問題이니, 여기서는 論外로 하고, 단지 時間問題만을 論하야 보건대 人類의 存在는 地質第三紀에는 암만해도 아직 없었다고 믿어진다.(佛蘭西 學者 中 에는 第四紀 初 第三紀 末로 計算하는 분이 많은바, 그때 그들이 第三紀 末의 人類를 云謂하는 境遇에는, 그것은 事實 第四紀 初의 人類를 論하는 것으로, 一般히 論하는 第三紀 人類 云云과는 根本的으로 달은 것이다.) 첫재 ▶P163-1先史考古學上으로는 到底히 第四紀 以前의 人類의 存在는 認定할 수가 없는 것인바, 아직까지 地層的으로 第三紀의 人類가 證明된 일은 도모지 없다. 人類의 起源은 事實上 第四紀의 到來라는, 地質學的 現象과 不可分的 關係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제4기는 빙하기의 도래로부터 시작되거니와, 바로 이 빙하기라는, 생물계 특히 당시의 생물계의 최고영장으로 있든 인원세계의 일대 참극은 인원에서 원인으로의 에서 비약적 발전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현대문주2▶그때 현재의 인원 침팬지와 비등한 발전계단에 있든 인원의 일부는, 이 한랭한 기후와 악전고투를 하던 결과, 그만 짐승의 계단을 벗어나 인간계단에 달하였던 것이다.[a 2] 현대문주3▶이것은 물론 오직 일보의 진화이었으나, 여기에는 질적 변화가 있었으니, 이 일보의 진화에 의하여 그 후의 발전은 가능하였다.[a 3] 이것을 단행한 편에서는 꾸준히 발전하여 나중에는 현금의 대문명까지 건설하였으나, 이 일보의 진보를 단행치 못한 편은 오늘날까지 동물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그야말로 변증적이었으니, 빙하기는 말하자면 생의 부정이었고, 여기에 대한 인원의 투쟁은 생의 긍정이었다. 이 부정긍정의 대립의 결과, 종합의 계단으로 나온 것이 바로 인류의 출생이었다. 원(猿)에서 인(人)으로의 발전은 이상에 논한 바와 같이 비약적, 질적 발전이던 것이다.
쪽수▶P163-2第四紀는 氷河期의 到來로부터 시작되거니와, 바루 이 氷河期라는, 生物界 特히 當時의 生物界의 最高靈長으로 있든 人猿世界의 一大慘劇은 人猿에서 猿人으로의 에서 飛躍的 發展을 招來하였던 것이다. 원문주2▶그때 現在의 人猿 「쉼판제」와 比等한 發展階段에 있든 人猿의 一部는, 이 寒冷한 氣候와 惡戰苦鬪를 하든 結果, 그만 「짐생」의 階段을 벗어나 人間階段에 達하였던 것이다.[2] 원문주3▶이것은 勿論 오직 一步의 進化이었으나, 여기에는 質的 變化가 있었으니, 이 一步의 進化에 依하야 其後의 發展은 可能하였다.[3] 이것을 斷行한 便에서는 一向 發展하여 내종에는 現今의 大文明까지 建設하였으나, 이 一步의 進步를 斷行치 못한 便은 今日까지 動物의 領域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모든 過程은 그야말로 辨證的이었으니, 氷河期는 말하자면 生의 否定이었고, 여기에 對한 人猿의 鬪爭은 生의 肯定이었다. 이 否定肯定의 對立의 結果, 綜合의 階段으로 나온 것이 바루 人類의 出生이었다. 猿에서 人으로의 發展은 以上에 論한 바와 같이 飛躍的, 質的 發展이든 것이다.
동일한 출발에서 시작한 인류의 그 후의 발전은 체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기다양으로 여러 방향을 향하여 다원적으로 운동하게 된 것이다. 체질적으로 제인종이 기원발전하게 되면, 문화적으로도 제문화권이 기원 발전하게 된다. 선사고고학적으로 보면 구석기시대 전기에 벌써 권설문화(拳楔文化, Faustkeilkultur)와 인기문화(刃器文化, Klingenkultur)와는 아주 계통이 다른 문화로 출현한다. 민속학(종족학)상으로 보면 소위 ’원문화‘라는, 채취경제 계단의 원시문화에 있어서 벌써 소위 픽멘문화 타스만문화 부메랑문화들은 계통을 달리하는 발전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분기된 제방향으로 운동하는 발전선들은 상호접촉하게 된다. 여기서 제문화는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려는 경향을 보인다. 다원은 즉 단원 편을 향하여 자기부정을 한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여기서 최초의 단원이 그냥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 단원 편을 향한 자기부정은 사실 다원을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이니, 여기서 문화는 더 발전되는 것이며, 인류문화발전의 변증법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자체 내의 내재력에 의한 「내적 발전」에 대하여 「외적 발전」이라고 하여 둔다. 물론 문화의 발전은 이 외적 발전에 의하여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밖에 내적 발전도 있는 것이다. 이 외적 발전도 내적 발전과 상응하여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문화는 원시시대로 소급하면 소급할수록 외적 발전에 의한 바가 더 커지는 것이다.
쪽수▶P163-3同一한 出發에서 始作한 人類의 其後의 發展은 體質的으로나 文化的으로나 多岐多樣으로 諸方向을 向하야 多元的으로 運動하게 된 것이다. 體質的으로 諸人種이 起源發展하게 되면, 文化的으로도 諸文化圈이 起源 發展하게 된다. 先史考古學的으로 보면 舊石器 時代 前期에 벌서 拳楔文化(Faustkeilkultur)와 刃器文化(Klingenkultur)와는 아조 系統이 달은 文化로 出現한다. 民俗學(種族學)上으로 보면 所謂 「原文化」라는, 採取經濟階段의 原始文化에 있어서 벌서 所謂 「픽멘」文化 「타스만」文化 「뿌메랑」文化들은 系統을 달리하는 發展傾向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分岐된 諸方向으로 運動하는 發展線들은 相互接觸하게 된다. 여기서 諸文化는 다시 合하여 하나가 되려는 傾向을 보인다. 多元은 即 ▶P164-1單元便을 向하야 自己否定을 한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여기서 最初의 單元이 그냥 復舊되는 것이 아니라, 이 單元便을 向한 自己否定은 事實 多元을 더 複雜하게 하는 것이니, 여기서 文化는 더 發展되는 것이며, 人類文化發展의 辨證法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自體 內의 內在力에 依한 「內的發展」에 對하여 「外的發展」이라고 하야 둔다. 勿論 文化의 發展은 이 外的發展에 依하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밖에 內的發展도 있는 것이다. 이 外的發展도 內的發展과 相應하야 비로소 效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人類의 文化는 原始時代로 遡及하면 遡及할수록 外的發展에 依한 바가 더 커지는 것이다.
문화는 처음 동일점에서 출발한 것이 각기 다른 모양의 방향으로 발전하다가 전전유동(轉轉流動)한 결과 서로 접촉융합하여 새 문화를 형성하였으면, 따라서 전지구상의 문화상은 이리저리 교차관련되여있는 것이니, 그런 고로 지구상의 어느 한 문화는 그것만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여기서 전문화의 전적 관찰의 필요가 생기는 바이며, 세계사의 통일적 고찰은 필요하여지는 것이다. 만일 이 상호관련의 사실이 없이 각기 독립적으로 발전한 제문화만이 문제라면 사실 세계사의 통일적 고찰이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니, 그 사실은 역사철학의 대성자인 선철 헤르더(Herder)가 그의 역작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 중에서 벌써 간파한 바이다. 헤르더의 이 역사철학론을 기저로 하여 그의 이론을 대량적으로 표절한 헤겔(Hegel)은 헤르더의 이론을 이념주의적 투기로 곡해하였던 만큼, 헤겔학을 전승한 그의 후배들도, 좌우양익을 막론하고, 헤르더의 이 탁견을 몰각하였었다. 현대문주4▶’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운위하는 논객제군은 물론 이것을 알었을 理가 없다.[a 4]
쪽수▶P164-2文化는 처음 同一點에서 出發한 것이 각기 異樣의 方向으로 發展하다가 轉轉流動한 結果 서루 接觸融合하야 새 文化를 形成하였으면, 따라서 全地球上의 文化相은 이리저리 交叉關聯되여있는 것이니, 그런 故로 地球上의 어느 한 文化는 그것만으로는 決코 理解할 수가 없게 된다. 여기서 全文化의 全的 觀察의 必要가 생기는 바이며, 世界史의 統一的 考察은 必要하야지는 것이다. 만일 이 相互關聯의 事實이 없이 각기 獨立的으로 發展한 諸文化만이 問題라면 事實 世界史의 統一的 考察이란 別로 意味가 없는 것이니, 그 事實은 歷史哲學의 大成者인 先哲 헤르더(Herder)가 그의 力作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 中에서 벌서 看破한 바이다. 헤르더의 이 歷史哲學論을 基底로 하야 그의 理論을 大量的으로 剽竊한 헤-겔(Hegel)은 헤르더의 理論을 理念主義的 投機로 曲解하였던 만큼, 헤-겔學을 傳承한 그의 後輩들도, 左右兩翼을 莫論하고, 헤르더의 이 卓見을 沒却하였었다. 원문주4▶『亞細亞的 生産樣式』을 云謂하는 論客諸君은 勿論 이것을 알었을 理가 없다.[4]
내가 이 졸문 본론에서 논하려는 중국역사의 문제도, 문화상호관계의 사실에 의하여 비로소 세계사의 전적 고찰과 불가분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니,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 운운으로 중국역사를 논한 제군의 노력은 처음부터 모순덩어리였던 것이다. 통일적 고찰의 기초조건이 없이 그냥 덮어놓고 중국사를 세계사의 일부 내지 일과정으로 논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모순이 아니고 무엇인가?
쪽수▶P164-3내가 이 拙文 本論에서 論하려는 中國歷史의 問題도, 文化相互關係의 事實에 依하야 비로소 世界史의 全的, 考察과 不可分的으로 關聯되어 있는 것이니, 所謂 『亞細亞的 生産樣式』 云云으로 中國歷史를 論한 諸君의 努力은 처음부터 矛盾덩어리였든 것이다. 統一的 考察의 基礎條件이 없이 그냥 덮어놓고 中國史를 世界史의 一部 乃至 一過程으로 論할려는 그들의 努力은 그야말로 ▶P165-1矛盾이 아니고 무엇인가?
문화의 상호접촉에 의한 종합적 발전이란, 어떠한 경우에나 접촉의 필연적 결과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종의 문화가 접촉은 하였으나, 그 종합의 결과가 발전사적으로는 하등 의미가 없는 것도 많다. 그런데 이 종합적 발전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즉 농촌문화 혹은 농경문화(Bauenerkultur)의 기원이니, 소위 고급문화(혹은 문명)의 기원은 그 기저가 이 농촌문화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농촌문화가 기원된 것은 인류 발전의 전 과정으로 보면 참말 지난 날의 일인 것이다. 이것은 최후의 기빙하인 뷔름빙하기(Wiirm-Eiszeit)를 지나서, 그 후에 수차 반복된 퇴거기적 여러 빙하계단도 다 지나서 지질학상의 ‘현재’에 이르러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이 ‘현재’란 역시 빙하기와 빙하기의 중간기(Interglazial)에 불과한 것이니, 이 중간기 중에도 가장 최근에 생긴 현대의 문명을 자랑하는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좀 회고하고, 그리고 장차 도래할 시대도 좀 상상해보고, 또 이 다음 올 빙하기도 좀 상상해볼 것이 아닌가!…
쪽수▶P165-2文化의 相互接觸에 依한 綜合的 發展이란, 어떠한 境遇에나 接觸의 必然的 結果인 것은 決코 아니다. 異種의 文化가 接觸은 하얐으나, 그 綜合의 結果가 發展史的으로는 何等 意味가 없는 것도 많다. 그런데 이 綜合的 發展 中 가장 意味 있는 것은 即 農村文化 或은 農耕文化(Bauenerkultur)의 起源이니, 所謂 高級文化(或은 文明)의 起源은 그 基底가 이 農村文化에 있었든 것이다. 그런데 이 農村文化가 起源된 것은 人類 發展의 全 過程으로 보면 참말 昨日之事인 것이다. 이것은 最後의 期氷河인 『ᅄᅱ름』氷河期(Wiirm-Eiszeit)를 지나서, 그 후에 數次 反復된 退去期的 諸氷河階段도 다 지나서 地質學上의 『現在』에 이르러 비로소 形成된 것이다. 이 『現在』란 역시 氷河期와 氷河期의 中間期(Interglazial)에 不過한 것이니, 이 中間期 中에도 가장 最近에 생긴 現代의 文明을 자랑하는 우리는 우리의 過去를 좀 回顧하고, 그리고 장차 到來할 時代도 좀 想像해보고, 또 이 다음 올 氷河期도 좀 想像해볼 것이 아닌가!…
이상에서 우리는 문화의 단원적 기원, 문화의 유동, 문화의 상호관계, 전적 조망을 통하여 고찰하는 부분적 문화현상의 처리 등에 다소 언급하였다. 이것을 근저로 하여 우리는 중국의 선사시대(물론 유사시대와 관련 있는 한)를 좀 더 논하여보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종족학(민속학)적 고찰, 고고학적 고찰 기타를 종합적으로 처리한다. 특히 양자의 종합을 가능한 한에서 가장 힘써보려고 한다. 이 졸문 중에서 나는 선사기에서 유사기 즉 기록에 실린 역사시대로의 과도기를 중심으로 하게 되는바, 여기에는 이 양자의 종합이 필요할 뿐 아니라 또 가능하다고 믿는다. 특히 현재 그 근방에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문화를 가진 종족이 많이 둘러싼 중국의 당시를 논함에 있어서는 이것은 유럽에 비하면, 더구나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다.
쪽수▶P165-3以上에서 우리는 文化의 單元的 起源, 文化의 流動, 文化의 相互關係, 全的 眺望을 通하야 考察하는 部分的 文化現象의 處理 等에 多少 言及하얐다. 이것을 根底로 하야 우리는 中國의 先史時代(勿論 有史時代와 關聯 있는 限)를 좀더 論하여보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種族學(民俗學)的 考察, 考古學的 考察 其他를 綜合的으로 處理한다. 特히 兩者의 綜合을 可能한 限에서 가장 힘써보려고 한다. 이 拙文 中에서 나는 先史期에서 有史期 即 記錄에 실린 歷史時代로의 過渡期를 中心으로 하게 되는바, 여기에는 이 兩者의 綜合이 必要할 뿐 外라 또 可能하다고 믿는다. 特히 現在 그 隣方에는 아직도 原始時代의 文化를 가진 種族이 많이 둘러싼 中國의 當時를 論 함에 있어서는 이것은 歐羅巴에 比하면, 더구나 可能한 것이라고 믿는다.
선사고고학만으로는 인류문화의 전체상을 파지할 수가 없다. 여기서 고고학자들은 가장 불만을 느끼게 되는 바이다. 현대문주5▶그리하여 이것을 현재 아직 남아있는 원시종족들의 문화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민속학과 종합하려고 한 것은 여러 학자들의 노력이었다. 그 중에도 이것을 가장 규모적으로 시험한 분은 모리츠 회르네스 교수(Moritz Hoernes)였었다.[a 5] 그러나 회르네스 교수의 노력은 당시 아직 민속학이 그리 발전되지 못하였던 만큼 결국 성공치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그의 사후, 그의 제자요 후계자인 멩힌(O. Menghin) 교수가 계승한바, 그는 여기서 문화유동, 문화권에 제일 주의하는 그레브너, 슈미트, 코퍼스파의 소위 문화사학파 계통의 민속학을 채용하고, 이것과 선사고고학의 종합을 시험하였다. 그리하여 된 것이 그의 명저 『석기시대세계사』(Weltgeschichte der Sternzert, Wien 1931)이다. 그러나 이 멩힌 교수의 노력도 그리 성공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 노력이 채 성공은 못하였으나 그러나 여기에는 비약적 발전이 있으니, 이것으로 석기시대 연구에 신방향이 개척된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쪽수▶P165-4先史考古學만으로는 人類文化의 全相을 把持할 수가 없다. 여기서 考古學者들은 가장 不滿을 늦끼게 되는 바이다. 원문주5▶그리하야 이것을 現在 아직 남어있는 原始種族들의 文化를 硏究對象으로 하는 民俗學과 綜合하려고 한 것은 여▶P166-1러 學者들의 努力이었다. 그 中에도 이것을 가장 規模的으로 試驗한 분은 모릿츠·회르네쓰 教授(Moritz Hoernes)였었다.[5] 그러나 회르네쓰 教授의 努力은 當時 아직 民俗學이 그리 發展되지 못하였든 만큼 結局 成功치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努力은 그의 死後, 그의 弟子요 後繼者인 멩긴(O. Menghin) 敎授가 繼承한바, 그는 여기서 文化流動, 文化圈에 第一 注意하는 그렙너, 쉬밑, 콥퍼쓰派의 所謂 『文化史學派』 系統의 民俗學을 採用하고, 이것과 先史考古學의 綜合을 試驗하였다. 그리하야 된 것이 그의 名著 『石器時代世界史』(Weltgeschichte der Sternzert, Wien 1931)이다. 그러나 이 멩긴 敎授의 努力도 그리 成功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 努力이 채 成功은 못하였으나 그러나 여기에는 飛躍的 發展이 있으니, 이것으로 石器時代 硏究에 新方向이 開拓된 것을 나는 認定하지 않을 수 없다.
멩힌 교수의 주장에 먼저 약점으로 보이는 것은, 그의 소위 『원석기시대의 골기(骨器)문화』(Protolithische Knochenkultur)라는 것이다. 이것은 암만 보아야 하등 존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밖에 아니 생각된다. 그가 논하는 『중석기시대의 골기문화』(Miolithische Knochen kultur), 즉 구석기시대 후기의 골기문화라는 것도 학자들은 일반이 채용치 않는 바이다. 이것만은 채용한다고 하더라도 여하간 전자는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멩힌 교수가 이렇게 구석기시대 전기에 벌써 골문화라는 것을 하나 더 가하여, 권설문화, 인기문화, 골기문화로 문화권을 삼분한 것은, 그가 슈미트, 코퍼스의 삼분설을 그냥 채용한 것에 그 원인이 있는바, 나는 바로 민속학상의 이 삼분설에 벌써 결함이 있다고 믿는 자이다. 그들은 소위 ‘원문화’에서 토템문화, 목유문화, (양자가 다 부권적) 및 모식적 농업문화(재배문화)가 각기 기원되었다고 하나, 그보다도 나는 그들의 선구자인 그레브너(F. Graebner)가 첫째 모권적의 문화와 부권적의 문화와를 구분하여놓고, 부권문화 중에서 토템적 수렵문화는 구계단이요, 여기서 신계단의 목유문화가 다시 파생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 편이 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슈미트, 코퍼스 양씨도 목유문화와 토템문화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만은 인정하는바,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토템적 수렵문화가 현재의 토템문화 제족 중에 보이는 극단적 제문화현상을 형성하기 벌써 이전에, 일부는 목유문화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목유문화는 그 영향을 그 후 부절히 파급하였으니, 동 영향 하에 수렵족들은 목유민화하기를 여러 번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슈미트 및 코퍼스 양 선생은 가장 오래고 대표적인, 중앙아시아의 목유민들에게는 토템주의가 전연 결여하였다고 논하나, 그것은 사실에 위반되는 주장이다. 블라이히슈타이너 교수(R. Bleichsteiner)도 지적하듯이 이 목유족들에게는 토테미즘의 잔재가 아직도 꽤 남아있는 것이다. 오직 완전한 토테미즘의 형태만은 여기서 부득이 소멸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니, 그것은 그들이 제일 친밀한 동물을 식용에 이바지할 경우에 처하게 된 까닭이다. 현대문주6▶토테미즘이, 이렇게 해소는 당하였으나, 그 여풍이 아직 남아있는 것은 첫째 그들의 씨족적 대외혼제(Clan-Exogamie)에서도 엿볼 수가 있는바, 쉬·콥 양 선생은 이것을 전연 간과하였던 것이다.[a 6] 그런데 비록 본래의 토템문화와 목유문화와는 이렇게 관계가 있으나, 그러나 양자는 벌써 상이한 문화권인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이 졸문에서도 상이한 것으로 취급한다.
쪽수▶P166-2멩긴 敎授의 主張에 먼저 弱點으로 보이는 것은, 그의 所謂 『原石器時代의 骨器文化』(Protolithische Knochenkultur)라는 것이다. 이것은 암만 보아야 何等 存在的 根據가 없는 것으로밖에 아니 생각된다. 그가 論하는 『中石器時代의 骨器文化』(Miolithische Knochen kultur), 卽 舊石器時代 後期의 骨器文化라는 것도 學者들은 一般이 採用치 않는 바이다. 이것만은 採用한다고 하드라도 如何間 前者는 否認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멩긴 敎授가 이렇게 舊石器時代 前期에 벌서 骨文化라는 것을 하나 더 可하야, 拳楔文化, 刃器文化, 骨器文化로 文化圈을 三分한 것은, 그가 쉬밀, 콥퍼쓰의 三分說을 그냥 採用한 것에 그 原因이 있는바, 나는 바로 民俗學上의 이 三分說에 벌서 缺陷이 있다고 믿는 者이다. 그들은 所謂 『原文化』에서 『토템』文化, 牧遊文化, (兩者가 다 父權的) 及 母權的 『農業文化』(栽培文化)가 각기 起源되었다고 하나, 그보다도 나는 그들의 先驅者인 그렙너(F. Graebner)가 첫재 母權的의 文化와 父權的의 文化와를 區分하여놓고, 父權文化 中에서 『토템』的 狩獵文化는 舊階段이요, 여기서 新階段의 牧遊文化가 다시 派生한 것이라고 하는 主張 便이 더 正當하다고 생각한다. 쉬밀, 콥퍼쓰 兩氏도 牧遊文化와 『토템』文化가 密接한 關係가 있었던 것만은 認定하는바, 나의 ▶P167-1拙見에 依하건대, 『토템』的 狩獵文化가 現在의 『토템』文化 諸族 中에 보이는 極端的 諸文化現象을 形成하기 발서 以前에, 一部는 牧遊文化로 發展하였던 것이다. 牧遊文化는 그 影響을 그 후 不絶히 波及하였으니, 同影響 下에 狩獵族들은 牧遊民化하기를 여러 번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쉬밀及콥퍼쓰 兩師는 가장 오래고 代表的인, 中央亞細亞의 牧遊民들에게는 『토템』主義가 全然 缺如하였다고 論하나, 그것은 事實에 違反되는 主張이다. 쁠라이히쉬타이너 敎授(R. Bleichsteiner)도 指摘하듯이 이 牧遊族들에게는 『토템이즘』의 殘滓가 아직도 꽤 남어있는 것이다. 오직 婉轉한 『토템이즘』의 形態만은 여기서 不得已 消滅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니, 그것은 그들이 第一 親密한 動物을 食用에 供할 境遇에 處하게 된 까닭이다. 원문주6▶『토템이즘』이, 이렇게 解消는 當하얐으나, 그 餘風이 아직 남어있는 것은 첫재 그들의 氏族的 對外婚制(Clan-Exogamie)에서도 엿볼 수가 있는바, 「쉬」·「콥」 兩師는 이것을 全然 看過하였든 것이다.[6] 그런데 비록 本來의 『토템』文化와 牧遊文化와는 이렇게 關係가 있으나, 그러나 兩者는 발서 相異한 文化圈인 것이다. 따라서 兩者는 이 拙文에서도 相異한 것으로 取扱한다.
멩힌 교수의 ‘골기문화’에는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고학과 민속학의 종합에는 정당한 자가 많으니, 첫째, 권설문화는 모권적의 재배문화(그레브너 및 쉬콥 양씨의 소위 농업문화)와 합치되는 것이요, 인기문화는 아직 토템주의와의 관계는 확연치 않다고 하더라도, 여하간 그것이 평원에서 수렵을 주로 하는 종족들의 문화였던 것만은 사실인듯하다. 더구나 멩힌 교수가 구석기시대 후기, 즉 그의 말한 ‘중석기시대’(Miolithikum)(이것을 소위 Mesolithikum이라는 것과 혼동치 말 것)에서 신석기시대로의 과도기를 ‘원신석기시대’(Protoneolithikum)라고 하고, 거기서 사양(사양)동물의 유골을 기저로 하고 문화를 구분한 것은 가장 그럴듯하다고 믿는다.
쪽수▶P167-2멩긴 敎授의 『骨器文化』에는 弱點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그의 考古學과 民俗學의 綜合에는 正當한 자가 많으니, 첫재, 拳楔文化는 母權的의 栽培文化(그렙너 及 쉬콥 兩氏의 所謂 農業文化)와 合致되는 것이요, 刃器文化는 아직 『토템』主義와의 關係는 確然치 않다고 하더라도, 如何間 그것이 平原에서 狩獵을 主로 하는 種族들의 文化였던 것만은 事實인듯하다. 더구나 멩긴 敎授가 舊石器時代 後期, 即 그의 말한 『中石器時代』Miolithikum)(이것을 所謂 Mesolithikum이라는 것과 混同치 말 것)에서 新石器時代로의 過渡期를 『原新石器時代』(Protoneolithikum)라고 하고, 거기서 飼養動物의 遺骨을 基底로 하고 文化를 區分한 것은 가장 그럴듯하다고 믿는다.
원시문화 중 모권문화를 그레브너 교수는 구, 신 양자로 구분하여 구자(舊者)를 양급(兩級)문화(Zweiklassenkultur)라고 하고, 신자(新者)를 ‘멜라네시아 활 문화’(Melanesische Boge kultur)라고 하였다. 그런데 후자에 있어서는 거기서 벌써 목유문화의 영향을 받아 축돈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양 문화의 그레브너적 술어에는 어폐가 많기에 이것을 나는 컨(F. Kern) 및 멩힌 양씨의 예를 따라 구재배문화(Altpflanzertum) 신재배문화(Jungpflanzertum)라고 하여둔다. 여기서 농업이라고 않고 재배라고 하는 것은 이 원시적 재배를 농촌문화의 농업과는 질적으로 구별할 필요를 느낀 까닭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신재배문화를 일개의 독립한 문화로 취급하는 것은 그것이 신계단에 도달한 후 일정한 문화권으로 다시 유동을 했던 까닭이다.
쪽수▶P167-3原始文化 中 母權文化를 그렙너 教授는 舊新 兩者로 區分하야 舊者를 『兩級文化』(Zweiklassenkultur)라고 하고, 新者를 『멜라네지아弓 文化』(Melanesische Boge lkultur)라고 하였다. 그런데 後者에 있어서는 거기서 벌서 牧遊文▶P168-1化의 影響을 받아 蓄豚을 하게 된 것이다. 이 兩 文化의 그렙너的 術語ᅵ에는 語弊가 많기에 이것을 나는 케른(F. Kern) 及 멩긴 兩氏의 例를 따라 舊栽培文化(Altpflanzertum) 新栽培文化(Jungpflanzertum)라고 하야둔다. 여기서 農業이라고 않고 栽培라고 하는 것은 이 原始的 栽培를 農村文化의 農業과는 質的으로 區別할 必要를 느긴 까닭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新栽培文化를 一個의 獨立한 文化로 取扱하는 것은 그것이 新階段에 到達한 후 一定한 文化圈으로 다시 流動을 했든 까닭이다.
신재배문화에 관하여는 그 후 하이네 겔던(Heine-Geldern) 박사의 오스트로네시아족 이동에 관한 연구에 의하여 재래의 학설에 정정을 가할 필요가 발생한 것이다. 현대문주7▶하이네 박사는 재래 신재배문화의 요소라고 한 것 중의 많은 부분을 이 오스트로네시아족의 것이라고 주장한다.[a 7] 그러나 그렇다고 이 신재배문화가 일정한 문화권이었음에는 변동이 없는 것이다.
쪽수▶P168-2新栽培文化에 關하야는 그 후 하이네·껠데언(Heine-Geldern) 博士의 『오-스트로네지아』族 移動에 關한 硏究에 依하야 在來의 學說에 訂正을 加할 必要가 發生한 것이다. 원문주7▶하 博士는 在來 新栽培文化의 要素라고 한 것 중의 多部分을 이 『오-스트로네지아』族의 것이라고 主張한다.[7] 그러나 그렇다고 이 新栽培文化가 一定한 文化圈이었음에는 變動이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한 여러 문화 중 어떤 것을 이제 우리는 중국문화에서 찾아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계와는 하등 관계가 없이 중국 내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닌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국의 도시문화 고급문화도 중국 내부에서 기원된 것은 결코 아니요, 그것이 외부에서 온 것임도 보게 될 것이다.
쪽수▶P168-3以上에서 論 한 諸文化 中 어떤 것을 인제 우리는 中國文化에서 찾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外界와는 何等 關係가 없이 中國 內에서 獨立的으로 일어난 것은 決코 아닌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中國의 都市文化 高級文化도 中國 內部에서 起源된 것은 決코 아니요, 그것이 外部에서 온 것임도 보게 될 것이다.





























본문2: 一. 황하문화




본문2-1: ① 재배문화와 중국문화 일반과의 관계


문화의 교류융화는 중국에 있어서도 가장 심하였으니 현재의 중국은 다른 어느 나라에 지지 않게, 별별 종족, 별별 문화가 이리저리 엉키고 모여서 된 것이다. 그 융화작용은 그러나 아직도 결코 완전히 된 것은 아니니, 맨 처음 눈에 띄는 것은 남북의 문화적 대립 그것이다. 남과 북은 지금도 언어(모두 지나어에 속하기는 하나) 뿐만 아니라 문화 일반에 있어서 사실은 아주 상이한 제종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상이한 제종족이 모여 들었던 것은 고전 중에도 이 구석 저 구석에 기재되었으니, 예하면 맹자(膝文公章上)가 진량의 제자인 진상에게
陳良楚產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
운운이라 하여, 진량이 초인(楚人)으로 유도를 배웠음을 칭찬하는 한편, 또 진상의 한 스승인 초인 허행에 관하여는,
今也 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 子倍子之師而學之 亦異於曾子矣
라 하였는데, 이는 초국이 만족(蠻族)의 나라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초국은 당시 광대한 나라로, 동일한 종족으로 형성된 것은 결코 아니니, 그 내부에도 별별 종족들이 모여 살었던 것이다. 또 오(吳)와 월(越)이 ‘중원’과는 상이한 종족들이었던 것도 문헌이 증명하는 바이다. 아니 그뿐이랴. 남북조시대에 있어 북조의 후위, 북제, 북주, 수 그중에서 한인계의 국가는 수조뿐이었고, 그밖에는 모두 선비족계의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주지하는 바이다. 그것은 서력 기원후 5-6세기의 일이다. 수조의 남북통일 이후 이럭저럭, 그들도 모두 중국화를 해버렸다. 또 만주인이 중국화한 것은 가장 근세의 일이 아닌가. 그들은 아직도 사회적으로는 일종의 카스트를 형성하고 있으나 그것까지도 전연 없어지고, 아주 융화해버릴 날도 멀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런 교류융화의 현상은 선사시대로 소급되니, 선사시대에도 세계의 다른 여러 지대와 같은 모양으로 이것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종족의 혼동은 동일한 몽고인종 즉 황인종 간에서만 단행된 것이 아니라 이인종소(異人種素)도 거기 있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쪽수▶P170文化의 交流融化는 中國에 있어서도 가장 甚하얐으니 ▶P171-1現在의 中國은 다른 어느 나라에 지지 않게, 別別 種族, 別別 文化가 이리저리 엉키고 모혀서 된 것이다. 그 融化作用은 그러나 아직도 決코 完全히 된 것은 아니니, 먼첨 눈에 띄이는 것은 南北의 文化的 對立 그것이다. 南과 北은 只今도 言語(모다 支那語에 屬하기는 하나) 뿐만 아니라 文化 一般에 있어서 事實은 아조 相異한 諸種族을 形成하고 있는 것이다. 中國에 相異한 諸種族이 모혀들었든 것은 古典 中에도 이 구석 저 구석에 記載되었으니, 例하면 孟子(膝文公章上)가 陳良의 弟子인 陳相에게
陳良楚產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
云云이라 하야, 陳良이 楚人으로 儒道를 배웠음을 稱讚하는 一方, 또 陳相의 一師인 楚人 許行에 關하여는,
今也 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 子倍子之師而學之 亦異於曾子矣
라 하였는데, 이는 楚國이 「蠻族」의 나라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楚國은 當時 廣大한 나라로, 同一한 種族으로 形成된 것은 決코 아니니, 그 內部에도 別別 種族들이 모와 살었든 것이다. 또 吳와 越이 「中原」과는 相異한 種族들이었든 것도 文獻이 證明하는 바이다. 아니 그뿐이랴. 南北朝時代에 있어 北朝의 後魏 北齊 北周 隋 그중에서 漢人系의 國家는 隋朝뿐이었고, 그밖에는 모다 鮮卑族系의 것이라는 것은 吾人이 周知하는 바이다. 그것은 西曆 紀元后 五六世紀의 일이다. 隋朝의 南北統一 以後 이럭저럭, 그들도 모다 中國化를 해버렸다. 또 滿洲人이 中國化한 것은 가장 近世의 일이 아닌가. 그들은 아직도 社會的으로는 一種의 「카스트」를 形成하고 있으나 그것까지도 全然 없어지고, 아조 融化해버릴 날도 멀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런 交流融化의 現象은 先史時代로 溯及되니, 先史時代에도 世界의 다른 諸地帶와 同樣으로 이 것은 繼續되었든 것이다. 그리고 種族의 混同은 同一한 蒙古人種 即 黃人種 間에서만 斷行된 것이 아니라 異人種素도 거기 있는 것을 看過할 수 없다.
우리가 주지하듯이 북경 부근에서는(주구점), 가장 원고한 과거의 원인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것을 처리한 고 블랙 교수(Black)는 독일의 바이너트 교수와 상의한 결과, Sinanthropus Pekinensis라고 명명하였다. 안트로푸스라는 희랍어를 사용하고 호모(Homo)라는 라틴어를 회피한 것은, 원인 계단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라고 바이너트씨는 말하는바, 여하간 이것은 자바의 Pithacanthiopia에 퍽 가까운 원인이다. 현대문주8▶그러나 이것은 벌써 통일적 계단의 것이 아니니, 지금까지 발견된 두개골 중에는 벌써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에 가까운 것, 환언하면 벌써 원인의 영역을 벗어나려 고하는 자도 있다.(소위 제2지나원인(Sinanthropus Ⅱ of Locus D))[a 8] 그런데 이 지나원인 연구는 블랙 교수의 별세 후,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 바이덴라이히(F. Weidenreich)씨에게로 넘어가게 되였는 바, 바씨는 이 지나원인의 하악골이 두터운 것, 즉 여기에 소위 Torus mandibularis가 형성된 것은, 이 원인과 몽고인종, 즉 황인종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으로 이 지나원인은 몽고인종의 선구자라고 주장한 것은 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대문주9▶바씨의 이 주장은 지나사 연구에 종사하는 사가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적지 않았으니, 중국문명의 본토 고유성, 즉 그것의 내적 기원발전설을 지지하는 학자에는 이 바씨 주장을 무기로 하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 크릴 박사는 그 좋은 예인 것이다.[a 9] 바씨의 이 주장은, 문화유동, 종족유동, 인종유동의 사실을 고조하는 슈미트씨에게까지 영향을 파급한 바가 있었다. 현대문주10▶그리하여, 그도 이 사실은 가장 주의했던 것이다.[a 10] 그러나, 바이덴라이히씨의 동 주장에는 별로 근거가 없는 듯하다. 현대문주11▶바이너트씨의 설에 의하면 Torus mandibularis는 결코 지나원인의 발전방향이 몽고인종 편만 아니라 유럽인종 편을 향하여도 가능한 것을 지적한다.[a 11] 여하간 여기서 우리는 지나문화를 논함에 이르러 지나고급문화의 기원을 지나원인에서부터 출발하여 논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지나원인의 하악골 후성(厚成)은 지나문화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도 알게 된다. 지나원인 이래 수십만 년 중국 땅에는 허다한 종족이 오고가고 했던 것이다.
쪽수▶P171-2우리가 周知하듯이 北京 附近에서는(周口店), 가장 遠古한 過去의 猿人의 遺骨이 發見되었다. 當時 이것을 處理한 故 뿔랙 敎授(Black)는 獨逸의 ᅄᅡ이네르트 敎授와 相議한 結果, Sinanthropus Pekinensis라고 命名하였다. 안▶P172-1트로푸쓰라는 希臘語를 使用하고 「호모」(Homo)라는 羅典語를 回避한 것은, 猿人 階段임을 表示하기 爲함이라고 ᅄᅡ이네르트氏는 말하는바, 如何間 이것은 「쟈바」의 Pithacanthiopia에 퍽 가까운 猿人이다. 원문주8▶그러나 이것은 벌써 統一的 階段의 것이 아니니, 只今까지 發見된 頭蓋骨 中에는 벌써 「네안더탈」人(Homo neanderthalensis)에 가까운 것, 換言하면 벌써 猿人의 領域을 벗어나려 고하는 者도 있다.(所謂 第二 「支那猿人」Sinanthropus Ⅱ of Locus D)[8] 그런데 이 「支那猿人」 硏究는 뿔랙 敎授의 別世 後, 前 獨逸 佛郎府大學 敎授 ᅄᅡ이덴라이히(F. Weidenreich)氏에게로 넘어가게 되였는 바, ᅄᅡ氏는 이 支那猿人의 下顎骨이 두터운 것(厚), 即 여기에 所謂 Torus mandibularis(토-루쓰·만듸불라-리쓰) 形成된 것은, 이 猿人과 蒙古人種, 即 黃人種의 關係를 証明하는 것으로 이 支那猿人은 蒙古人種의 先驅者라고 主張한 것은 學界에 널리 알려진 事實이다. 원문주9▶ᅄᅡ氏의 이 主張은 支那史 硏究에 從事하는 史家들에게까지 그 影響이 적지 않았으니, 中國文明의 本土 固有性, 即 그것의 內的 起源發展說을 支持하는 學者에는 이 ᅄᅡ氏 主張을 武器로 하는 자까지 있게 되였다. 크리-ㄹ 博士는 그 好例인 것이다.[9] ᅄᅡ氏의 이 主張은, 文化流動, 種族流動, 人種流動의 事實을 高調하는 쉬밀氏에게까지 影響을 波及한 바가 있었다. 원문주10▶그리하야, 그도 이 事實은 가장 注意했던 것이다.[10] 그러나, ᅄᅡ이덴라이히氏의 同 主張에는 別로 根據가 없는 듯하다. 원문주11▶ᅄᅡ이네르트氏의 說에 依하면 Torus mandibularis는 決코 支那猿人의 發展方向이 蒙古人種便만 아니라 歐羅巴人種便을 向하야여도 可能한 것을 指摘한다.[11] 如何間 여기서 우리는 支那文化를 論함에 至하야 支那高級文化의 起源을 支那猿人에서부터 出發하야 論할 수는 到底히 없는 것을 알게 된다. 또 支那猿人의 下顎骨 厚成은 支那文化의 固有性을 說明하는 것은 決코 아닌 것도 알게 된다. 支那猿人 以來 數十萬年 中國 땅에는 許多한 種族이 오고가고 했든 것이다.
지나원인 이후 구석기시대의 중국의 문화상은 가장 알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 관하여는 아직 이론의 근거가 너무나 박약하다. 오르도스나 임서(林西) 등지의 극히 부분적의 발굴만으로는 도저히 무어라고 논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지나의 도시문화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고고학적 재료도 다소 이론의 여지를 허락할 뿐더러, 이 신석기시대를 취급치 않고는 지나문명의 기원에 관하여 이해가 不가능한 것이다. 아니 그 當時의 영향은 지금에도 남아있다.
쪽수▶P172-2支那猿人 以後 舊石器時代의 中國의 文化相은 가장 알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 關하여는 아직 理論의 根▶P173-1據가 너무나 薄弱하다. 『오르도쓰』나 林西 等地의 極히 部分的의 發掘만으로는 到底히 무어라고 論할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은 支那의 都市文化論과는 아모 關係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新石器時代에 이르러서는 考古學的 材料도 多少理論의 餘地를 許할 뿐더러, 이 新石器時代를 取扱치 않고는 支那文明의 起源에 關하야 理解가 不可能한 것이다. 아니 그 當時의 影響은 只今에도 남어있다.
구석기시대 후기에에서 신석기시대로의 과도기 혹은 신석기시대 초기의 중국을 황하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고찰하건대, 현대문주12▶여기에는 한 편 북극지대에서 남하한 문화의 영향이 퍽 많으니, 석기재료에 판석(Schiefer)을 사용하는 것은 그 근원이 무엇보다도 맨 처음 북극문화의 영향에 있는 것이다. 여하간 북방에서 남하한 문화 영향이 퍽 많은바, 판석제의 유병시족(有柄矢鏃, Scha tpfeilspitze), 반월도 즉 궁형도(弓形刀, Bogenmeser) 등이나 또는 소위 즐목문토기(櫛目紋土器), 즉 즐도(櫛陶, Kammkeramik)의 전통은 모두 북방문화계의 것이다.[a 12]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중국 본토에는 이 과도기나 또는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아직 목유문화의 영향이 적은 것이다. 그 대신 여기에는 재배문화, 그 중에도 특히 신계단의 축돈문화의 영향이 퍽 많으니 사양돈의 유골이 다수 발견되는 것은 그 증거인 것이다. 여기서 발굴된 석문도기(蓆紋陶器, Mattenkeramik)는 멩힌 교수의 주장대로 이 축돈문화계의 것일 것이다. 멩힌씨는 원통부(圓筒斧, Walzenbeil)도 여기에 귀속시키나, 하이네 겔던씨에 의하면, 이것은 「양급(兩級)문화」 즉 구재배문화와 관련이 된 것인 듯하다. 현대문주13▶그러나 원통부는 아마 신계단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a 13] 이 축돈문화는 극동문화제족의 선사시대에 광대히 전파된 것으로, 이것은 제족의 그 후 발전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선사고고학 이외의 민속학 내지 언어학적 사실과 합치되는 것은 가장 주의할 것인바, 이 축돈문화 전래의 고고학적 사실과 직접 관련된 것은 모권적 신재배문화의 전래였고, 또 언어학적으로는, 오스트로어(Austrisch)의 파급인 것이다.
쪽수▶P173-2舊石器時代 後期에에서 新石器時代로의 過渡期 或은 新石器時代 初期의 中國을 黃河 中流域을 中心으로 考察하건대, 원문주12▶여기에는 一方 北極地帶에서 南下한 文化의 影響이 퍽 많으니, 石器材料에 板石(Schiefer)을 使用하는 것은 그 根源이 무엇보다도 먼첨 北極文化의 影響에 있는 것이다. 如何間 北方에서 南下한 文化 影響이 퍽 많은바, 板石製의 有柄矢鏃(Scha tpfeilsp tze) 半月刀 即 弓形刀(Bogenmeser) 等이나 또는 所謂 櫛目紋土器, 即 櫛陶(Kammkeramik)의 傳統은 모다 北方文化系의 것이다.[12] 그런대 여기서 하나 注意할 것은, 中國 本土에는 이 過渡期나 또는 新石器時代 初期에는 아직 牧遊文化의 影響이 적은 것이다. 그 대신 여기에는 栽培文化, 그 中에도 特히 新階段의 畜豚文化의 影響이 퍽 많으니 飼養豚의 遺骨이 多數히 發見되는 것은 그 證據인 것이다. 여기서 發掘된 蓆紋陶器(Mattenkeramik)는 멩긴 敎授의 主張대로 이 畜豚文化系의 것일 것이다. 멩긴氏는 圓筒斧(Walzenbeil)도 여기에 歸屬시키나, 하이네·껠데언氏에 依하면, 이것은 「兩級文化」 即 舊栽培文化와 關聯이 된 것인 듯하다. 원문주13▶그러나 圓筒斧는 아마 新階段과도 關聯이 있을 것이다.[13] 이 畜豚文化는 極東文化諸族의 先史時代에 廣大히 傳派된 것으로, 이것은 諸族의 其後 發展의 基礎를 일운 것이다. 이것은 先史考古學 以外의 民俗學 乃至 言語學的 事實과 合致되는 것은 가장 注意할 것인바, 이 畜豚文化 傳來의 考古學的 事實과 直接 關聯된 것은 母權的 新栽培文化의 傳來였고, 또 言語學的으로는, 「오-스트리」語(Austrisch)의 波及인 것이다.
현대문주14▶민속학상에서 먼저 그레브너는 극동문화의 기초가 이 모권계 문화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는바, 그것은 슈미트, 코퍼스, 양 신부도 지적하였다.[a 14] 현대문주15▶인제 언어학적으로 보건대 첫째 일본語에는 이 오스트로어계가 퍽 많은바 그 문장적 구성이 알타이어적 근저를 가졌음에 불구하고, 그 어휘에 있어서는 오스트로어계의 요소가 많은 것은 이미 송본신광(松本信廣)씨도 지적한 바이다.[a 15] 이제 조선어를 들어보건대, 조선어도 그 문장구조는 알타이어적이나 어휘에 있어서는 역시 오스트로어적 분자가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단편적 비교의 결과이나, 이것만으로도 나는 오스트로어적 요소를 넉넉히 인식할 수가 있다.) 아니 중국어에 있어서도 그 어의 골자가 벌써 오스트로어적, 좀 더 가까이 말하면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tisch)적인 것이다. 현대문주16▶슈미트씨의 학설에 의하면, 중국어가 첫째 인수(人數)로 그 주요성분을 형성하는 소위 「서장(西藏)지나어」(Tibeto-chinesische Sprachen)란 알타이어와 오스트로아시아어에 가까운 어와의 종합으로 된 것인대, 그 단철성(單綴性) 및 소위 급어(級語)(예를 들면 중국어의 일개인(一個人)의 ‘개’, 일배주(一杯酒)의 ‘杯’, 일매지(一枚紙)의 ‘매’ 등)등은 오스트로아시아어계에서 전승한 것이라고 한다.[a 16] 그런데 오스트로아시아어, 또는 이 오스트로아시아어 및 오스트로네시아어(Austronesisch)를 합하여 칭하는, 이상의 오스트로어는 문화적으로 원래 모권문화계 제족의 어인 것이다.
쪽수▶P173-3원문주14▶民俗學上에서 먼저 그렙너는 極東文化의 基礎가 이 母權系 文化에 있었음을 指摘하였는바, 그것은 쉬밑, 콥퍼쓰, 兩 神父도 指摘하였다.[14] 원문주15▶인제 言語學的으로 보▶P174-1건대 첫째 日本語에는 이 「오-스트리」語系가 퍽 많은바 그 文章的 構成이 「알타이」語的 根底를 가졌음에 不拘하고, 그 語彙에 있어서는「오-스트리」語系의 要素가 많은 것은 이미 松本信廣氏도 指摘한 바이다.[15] 인제 朝鮮語를 들어보건대, 朝鮮語도 그 文章構造는 「알타이」語的이나 語彙에 있어서는 역시 「오-스트리」語的 分子가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斷片的 比較의 結果이나, 이것만으로도 나는 「오-스트레」語的 要素를 넉넉히 認識할 수가 있다.) 아니 中國語에 있어서도 그 語의 骨子가 벌서 「오-스트리」語的, 좀 더 가까히 말하면 「오-스트로아지아」(Austroasiatisch)的인 것이다. 원문주16▶쉬밑氏의 學說에 依하면, 中國語가 첫재 人數로 그 主要成分을 形成하는 所謂 「西藏支那語」(Tibeto-chinesische Sprachen)란 「알타이」語와 「오-스트로아지아」語에 가까운 語와의 綜合으로 된 것인대, 그 單綴性 及 所謂 「級語」(例하면 中語의 一個人의 「個」, 一杯酒의 「杯」, 一枚紙의 「枚」 等)等은 「오-스트로아지아」語系에서 傳承한 것이라고 한다.[16] 그런대 「오-스트로아지아」語, 또는 이 「오스트로아지아」語 及 「오스트로네지아」語(Austronesisch)를 合하여 稱하는, 以上의 「오-스트리」語는 文化的으로 原來 母權文化系 諸族의 語인 것이다.
현대문주17▶모권계 문화 관계에 관하여 코퍼스는 경제적으로나 기타의 제문화현상에 있어 남지나는 아직도 그 주요성분이 모권계 문화, 그 중에도 특히 신계단의 것임을 지적하였는바, 그것은 과연 정당한 주장이라 하겠다.[a 17] 여기서 나는 또 중국어와 가장 근접한 타이어를 사용하는 타이(Thai)족이 아직도 모권적임을 참고로 말하여둔다.
쪽수▶P174-2원문주17▶母權系 文化 關係에 關하야 콥퍼쓰는 經濟的으로나 其他의 諸文化現象에 있어 南支那는 아직도 그 主要成分이 母權系 文化, 그 中에도 特히 新階段의 것임을 指摘하얏는바, 그것은 果然 正當한 主張이라 하겠다.[17] 여기서 나는 또 中國語와 가장 近接한 「타이」語를 使用하는 「타이」(Thai)族이 아직도 母權的임을 參考로 말하여둔다.
중국의 선사시대에 모권사회가 존재하였음은 어느 점으로 보던지 별로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문헌상으로는 나는 별로 증명할 근거를 모르는 바이다. 학자 중에는 ‘姓’자가 女와 生의 합자임은 모권제 시대의 형적이라고 하는 이가 많으나 그것은 여자의 가문 유래를 표시함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즉 남자의 ‘씨’에 상대하여 여자의 본래 씨족계통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설에 나는 찬동한다. 그와 반대로, 한 편 이 ‘姓’자에서 모권소를 찾기는 하나, 다른 한 편 이 대외혼적 씨성제에서 토템주의의 잔적을 찾으려는 슈미트, 코퍼스 양씨의 태도에는 그럴듯한 점이 있다. 슈미트, 코퍼스 양씨와는 출발점이 달으나, 송본신광(松本信廣)씨도 이 ‘姓’에서 토테미즘과 또 모권제의 형적을 찾으려고 한다. 현대문주18▶토테미즘 문제와는 전연 관련이 없이, 소천탁치(小川琢治) 박사나 마스페로(H. Maspero) 교수는 상서요전 중의 의화조를 신화로 환원하여놓고 거기서 태양신화의 존재를 찾아내는바, 이렇게 태양신화의 형적까지 인식하게 되면, 상고 중국에 토템주의가 있었음도 가능한 일이다.[a 18] 비록 그렇기는 하나 나는 이 성씨제 즉 대외혼적 氏족制를 가지고 목유문화와 관련이 없는 純토테미즘을 찾는 것은 不當하다고 믿는 者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우리는 먼첨 중앙아시아 목유민의 씨족관계를 좀 더 明確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관하여 나는 잘 모르나, 몽고족의 씨족 관념을 보아 대외혼적 씨족제는 토템문화에만 아니라, 원래는 목유문화에도 고유한 것이며, 그것은 또 목유문화가 토템문화의 (초기)계단에서 파생한 것을 자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의미에서 슈미트, 코퍼스 양 신부가 토템문화만을 ‘대외혼적 부권문화’(Exogam vaterrechtliche Kultur)라 하고, 중국, 조선 등지의 고신문화를 「자유혼적 부권문화」(Freivaterrechtliche kultur)라는 개념 하에 처리하는 것은 근본적 오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성씨제는 여하간 토테미즘과 관계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間接으로 목유문화를 通하여 있는 것이오 거기에 직접 토템문화 전래의 형적이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 대외혼적 성제를 논외로 하고 보면 슈미트, 코퍼스 양씨도 논하듯이, 중국에는 극동의 문화족 일반과 동양으로 토테미즘의 형적이 별로 없으니, 이 점은 인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쪽수▶P174-3中國의 先史時代에 母權社会가 存在하였음은 어느 點으로 보던지 別로 의심할 餘地가 없으나, 文獻上으로는 나는 別로 證明할 根據를 모르는 바이다. 學者 中에는 「姓」字가 女와 生의 合字임은 母權制 時代의 形跡이라고 하는 이가 많으나 그것은 女子의 家門 由來를 表示함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즉 男子의 「氏」에 相對하야 女子의 本來 氏族系統을 指稱하는 것에 不過한 것이라는 說에 나는 贊同한다. 그와 反對로, 一方 이 「姓」字에서 母權素를 찾기는 하나, 他方 이 對外婚的 氏姓制에서 토템主▶P175-1義의 殘跡을 찾을려는 쉬밀, 콥퍼쓰 兩氏의 態度에는 그럴듯한 點이 있다. 「쉬」 「코」 兩氏와는 出發點이 달으나, 松本信廣氏도 이 「姓」에서 「토템이즘」과 또 母權制의 形跡을 찾으려고 한다. 원문주18▶「토템이즘」 問題와는 全然 關聯이 없이, 小川琢治 博士나 마스뻬로(H. Maspero) 敎授는 尙書堯典 中의 義和條를 神話로 還元하여놓고 거기서 太陽 神話의 存在를 찾어내는바, 이렇게 太陽神話의 形跡까지 認識하게 되면, 上古中國에 「토템」主義가 있었음도 可能한 일이다.[18] 비록 그렇기는 하나 나는 이 姓氏制 即 對外婚的 氏族制를 가지고 牧遊文化와 關聯이 없는 純「토템이즘」을 찾는 것은 不當하다고 믿는 者이다. 여기에 關聯하야 우리는 먼첨 中央亞細亞 牧遊民의 氏族關係를 좀 더 明確히 할 必要가 있다. 여기에 關하야 나는 잘 모르나, 蒙古族의 氏族 觀念을 보아 對外婚的 氏族制는「토템」文化에만 아니라, 原來는 牧遊文化에도 固有한 것이며, 그것은 또 牧遊文化가 「토템」文化의 (初)階段에서 派生한 것을 自證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意味에서 쉬밑, 콥퍼쓰 兩 神父가 「토템」文化만을 「對外婚的 父權文化」(Exogam vaterrechtliche Kultur)fk 하고, 中國, 朝鮮 等地의 高新文化를 「自由婚的 父權文化」(Freivaterrechtliche kultur)라는 槪念 下에 處理하는 것은 根本的 誤解라고 생각한다. 中國의 姓氏制는 如何間 「토템이즘」과 關係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間接으로 牧遊文化를 通하야 있는 것이오 거기에 直接 「토템」文化 傳來의 形跡이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推測한다. 이 對外婚的 姓制를 論外로 하고 보면 쉬밑, 콥퍼쓰 兩氏도 論하듯이, 中國에는 極東의 文化族 一般과 同樣으로 「토템이즘」의 形跡이 別로 없으니, 이 點은 印度와는 根本的으로 달은 것이다.
중국의 모권제가 문헌상으로는 빙증하기 어려운 것은 나의 졸견에 의하면 부권제가 벌써 퍽 오래 전에 이것을 해소하여버린 까닭인 듯하다. 여기에 관하여 우리는 채도문화 이후에 목유문화적 색채가 농후한 흑도문화가 있었고, 또 그 후에 회도문화가 있었는대, 이것이 자라나서 상대의 도시문화가 일어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상대 이후에 기록된 (갑골문을 합하여) 사료에는 모권 형적이 적은 것은 가장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모권 그것의 형적은 적으나, 모권문화적 현상은 상대에 와서도 퍽 많았던 것이다.
쪽수▶P175-2中國의 母權制가 文獻上으로는 憑證하기 어려운 것은 나의 拙見에 依하면 父權制가 벌써 퍽 오래 前에 이것을 解消하여버린 까닭인 듯하다. 여기에 關하야 우리는 彩陶文化 以後에 牧遊文化的 色彩가 濃厚한 黑陶文化가 있었고, 또 그 後에 灰陶文化가 있었는대, 이것이 자라나서 商代의 都市文化가 일어난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따라서 商代 以後에 記錄된 (甲骨文을 合하야) 史料에는 母權形跡이 적은 것은 가장 當然한 일이다. 그런대 母權 그것▶P176의 形跡은 적으나, 母權文化的 現象은 商代에 와서도 퍽 많었든 것이다.































본문2-2: ② 중국농촌문화의 기원과 채도


축돈적 재배문화가 아직 농촌문화로 채 발전하기 전에 중국에는 서방에서 소위 채도문화(앙소문화)가 전래하였던 것이다. 이 채도문화에 관하여는 그 발견자 안데르손(Andersson) 박사 이하 내외 학자가 다수 논하였고, 그 이론도 구구하였거니와, 이 채도를 발견하자, 안데르손씨가 먼첨 생각한 것은, 중국문화 서방기원논의 재음미였던 것이다. 거기서 안데르손씨는 라쿠페리(Terrien de Lacouperie)씨의 학설을 다시 검토할 필요를 느꼈었다. 그뿐 아니라 안데르손씨는 채도와 함께 유럽인종 계통의 어느 종족의 이동을 상상하였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 채도의 동래와 관련하여 논하려는 것도 물론 중국문화와 서방(중국에서 보아 서방!)문화와의 관계여하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국 농촌문화의 기원에 논한 문제이다.
쪽수▶P180-1畜豚的 栽培文化가 아직 農村文化로 채 發展하기 前에 中國에는 西方에서 所謂 彩陶文化(仰韶文化)가 傳來하였든 것이다. 이 彩陶文化에 關하야는 그 發見者 안데르쏜(Andersson) 博士 以下 內外 學者가 多數히 論하였고, 그 理論도 區區하였거니와, 이 彩陶를 發見하자, 안데르쏜氏가 먼첨 생각한 것은, 中國文化 西方起源論의 再吟味였든 것이다. 거기서 「안」氏는 ᄙᅡ꾸뻬리(Terrien de Lacouperie)氏의 學說을 다시 檢討할 必要를 느꼈었다. 그뿐 아니라 「안」氏는 彩陶와 함께 歐羅巴人種 系統의 어느 種族의 移動을 想像하였다. 우리가 只今 여기서 이 彩陶의 東來와 關聯하여 論하련는 것도 勿論 中國文化와 西方(中國에서 보아 西方!)文化와의 關係如何이다. 좀 더 具體的으로 말하면 中國 農村文化의 起源에 關한 問題이다.
현대문주19▶중국의 농촌문화가 서방에서 온 것인 듯하며 그것이 유럽의 농촌문화와 관련되는 바가 많은 듯하다 함은, 소천탁치 박사가 벌써 채도 문제와는 하등 관련이 없이 논한 바이어니와, 소천 박사 이후 동 박사의 의견 여하는 도무지 모르고 안데르손씨의 채도와 중화문명과의 관련설 및 프랑케 교수(Otto Franke)의 대하(大夏) 토하라설에 의하여, 멩힌 교수는 채도문화의 전래와 중국 농촌문화와의 관계를 논하였다.[a 19] 그런데 중국의 농촌문화를 논하기 전에 여기서는 먼저 농촌문화의 개념을 좀 천명할 필요가 있다.
쪽수▶P180-2원문주19▶中國의 農村文化가 西方에서 온 것인 듯하며 그것이 歐羅巴의 農村文化와 關聯되는 바가 많은 듯하다 함은, 小川琢治 博士가 벌써 彩陶 問題와는 何等 關聯이 없이 論한 바이어니와, 小川 博士 以後 同博士의 意見如何는 도모지 몰으고 「안」氏의 彩陶와 中華文明과의 關聯說 及 ᅋᅳ랑케 敎授(Otto Franke)의 大夏 「토하라」說에 依하여, 멩긴 敎授는 彩陶文化의 傳來와 中國 農村文化와의 關係를 論하였다.[19] 그런데 中國의 農村文化를 論하기 前에 여기서는 몸첨 農村文化의 槪念을 좀 闡明할 必要가 있다.
농촌문화를 첫째 우리는 원시농업 즉 재배문화와 질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선철 헤르더가 동물의 사축을, 인류의 가장 의미 깊은 비약적 문화현상으로 취급하였으면(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dehte der Menscheit), 이 농촌문화의 기원은 발전사적 의의가 목축의 의의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농촌문화의 문화사적 의의를 정당히 인식한 것은 참말 멩힌씨의 조예인 것이다. 현대문주20▶슈미트, 코퍼스의 학설을 전승한 그가 슈미트, 코퍼스를 초월한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a 20]
쪽수▶P180-3農村文化를 첫째 우리는 原始農業 即 栽培文化와 質的으로 區別할 必要가 있는 것이다. 先哲 헤르더가 動物의 飼畜을, 人類의 가장 意味 깊은 飛躍的 文化現象으로 取扱하얐으면(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dehte der Menscheit), 이 農村文化의 起源은 發展史的 意義가 牧畜의 意義보다 적지 안을 것이다. 이 農村文化의 文化史的 意義를 正當히 認識한 것은 참말 멩긴氏 造詣인 것이다. 원문주20▶쉬밑, 코퍼쓰의 學說을 傳承한 그가 쉬밑, 코퍼쓰를 超▶P181-1越한 것은 바로 이 點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20]
농촌문화의 기원지를 멩힌씨는 유프라테스, 티그리스의 양하지대(兩河地帶)로 보는바, 이 지대가 농경문화와 무슨 인연이 있었음은, 소위 범바빌론(Panbabylonismus)의 선구자 한씨(Eduard Hahn)도 비록 전연 착오된 견지에서나 벌써 간파한 바는, 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멩힌의 학설은 그러나 범바빌론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서 신재배문화와 축우문화와의 종합으로, 신재배문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계단인 농촌문화가 일어난 것을 논하였다. 이 문화 그는 첫째 Dorfkultur라고도 하고, 또는 Baorukultur라고도 하였다. 컨(F. Kern) 교수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Dorfkultur(촌락문화)라면 다소 어폐가 있기에, 나는 양자를 합하여 농촌문화라고 하여둔다. 현대문주21▶멩힌과는 하등 관계가 없이 소천 박사는 벌써 ‘촌락’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인바, 박사는 여기서 이것을 어느 정도까지 멩힌적 의미에서 사용한 것은 참말 그의 심장(深長)한 조예를 말하는 것이다.[a 21]
쪽수▶P181-2農村文化의 起源地룔 멩긴氏는 「유-ᅋᅳ랄」, 「틔그리쓰」의 兩河地帶로 보는바, 이 地帶가 農耕文化와 무슨 因緣이 있었음은, 所謂 汎바빌론(Panbabylonismus)의 先驅者 하-ㄴ氏(Eduard Hahn)도 비록 全然 錯誤된 見地에서나 벌써 看破한 바는, 學界에 널리 알려진 事實이다. 멩긴의 學說은 그러나 汎바빌론主義와는 根本的으로 달은 것이다. 여기서 新栽培文化와 畜牛文化와의 綜合으로, 新栽培文化와는 質的으로 달은 階段인 農村文化가 일어난 것을 論하였다. 이 文化 그는 첫째 Dorfkultur 라고도 하고, 또는 Baorukultur라고도 하였다. 케른(F. Kern) 敎授도 이미 言及한 바와 같이, Dorfkultur(村落文化)라면 多少 語弊가 있기에, 나는 兩者를 合하야 農村文化라고 하야둔다. 원문주21▶멩긴과는 何等 關係가 없이 小川 博士는 벌서 「村落」이란 用語를 使用한 것인바, 博士는 여기서 이것을 어느 程度까지 멩긴的 意味에서 使用한 것은 참말 그의 深長한 造詣를 말하는 것이다.[21]
멩힌은 이 전(前)아시아(Vorderusion)에서 일어난 농촌문화를 제1차적 농촌문화, 혹은 동방농촌문화라고 칭한다. 여기서 출발하여 제2차적 농촌문화, 혹은 인도게르만 농촌문화가 기원된 것을 논한다. 이 제2次적 농촌문화에 관하여는 다소 의문되는 바가 있고 반대도 퍽 많은바, 나의 천박한 학식으로는 여기에 관하여 물론 참견할 자격은 없다. 이것은 인도게르만족 문제와 직접 관계된 것으로, 나는 이 점에 있어서는 여하간 멩힌 학설에 그리 찬동치 못하겠다. 멩힌은 인제 더 논할 바와 같이 이 인도게르만 농촌문화가 트리필랴(Tripolje) 문화지대에서 토하라(Tocharer)의 동방 이동에 의하여 중국에 전래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였으나, 그것은 근거가 적은 것임은 이제 차차 더 말하려 한다.
쪽수▶P181-3멩긴은 이 前亞細亞(Vorderusion)에서 일어난 農村文化를 第一次的 農村文化, 或은 東方農村文化라고 稱한다. 여기서 出發하여 第二次的 農村文化, 或은 「인도게르만」 農村文化가 起源된 것을 論한다. 이 第二次的 農村文化에 關하야는 多少 疑問되는 바가 있고 反對도 퍽 많은바, 나의 淺薄한 學識으로는 여기에 關하야 勿論 容喙할 資格은 없다. 이것은 「인도게르만」族 問題와 直接 關係된 것으로, 나는 이 點에 있어서는 如何間 멩긴 學說에 그리 贊同치 못하겠다. 멩긴은 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이 「인도게르만」 農村文化가 「트리폴녜」(Tripolje) 文化地帶에서 「토하라」(Tocharian)의 東方移動에 依하야 中國에 傳來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였으나, 그것은 根據가 적은 것임은 인제 차차 더 말하려 한다.
멩힌의 학설에는 불만한 점도 많다고 하더라도, 여하간 그가 농촌문화를 재배문화와 근본적으로 구별한 것이며 농촌문화의 요소로 우류(牛類)의 사양을 든 것은 탁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문주22▶소의 사양을 코퍼스는 돼지 동양으로 그 뿔이 반월형임에 의하여 태음숭배의 종교관념이 동기가 되어, 모권적 원시농업문화권 내에서 처음 한 것이겠다고 하는바,[a 22] 거기에는 일의가 있기도 하나, 그것은 여하했든 이 소 내지 각생동물의 사양은 벌써 목축문화 중의 일대 특수문화권이 되었으며, 이 축우문화가 신재배문화와 종합하여 거기서 농촌문화가 기원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여하간 이 종합적 대문화는 토지가 비옥하고 자연적 조건이 좋은 양하지대에서 처음 기원되었던 것이다.
쪽수▶P181-4멩긴의 學說에는 不滿한 點도 많다고 하더라도, 如何間 그가 農村文化를 栽培文化와 根本的으로 區別한 것이며 農村文化의 要素로 牛類의 飼養을 擧한 것은 卓見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원문주22▶牛의 飼養을 코퍼쓰는 豚과 同樣으로 其角이 半月形임에 依하여 太陰崇拜의 宗敎觀念이 動機▶P182-1가 되야, 母權的 原始農業文化圈 內에서 처음 한 것이겠다고 하는바,[22] 거기에는 一義가 있기도 하나, 그것은 如何했던 이 牛 乃至 角生動物의 飼養은 벌써 牧畜文化 中의 一大 特殊文化圈이 되었으며, 이 畜牛文化가 新栽培文化와 綜合하여 거기서 農村文化가 起源된 것은 事實인 듯하다. 如何間 이 綜合的 大文化는 土地가 肥沃하고 自然的 條件이 좋은 兩河地帶에서 처음 起源되었던 것이다.
이 농촌문화가 재배문화와 다른 것은, 첫째 여기서 우력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보습(犁 Pflug, plongh)의 사용을 초래시킨 것이다. 학자 중에는, 동물을 사용하기 전에 벌써 보습을 쓰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도 많으나, 나는 보습의 기원은 이것을 끌 짐승의 힘을 前提로 한다고 주장하는 자의 하나이다. 이집트 고총의 벽화에, 소 대신에 사람이 보습을 끄는 장면이 보이는 것은 결코 보습의ㅡ발생연대가 더 오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노예제 하에 인력이 값싼 것의 반영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력 사용에서 보습 사용까지의 중간 기간은 얼마나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나는 모른다. 여기에 논한 구구한 이론은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한, 공론에 불과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인력 대신에 우력이 사용되고 호미 대신에 보습이 사용되자, 환언하면 사람의 힘으로 호미를 들고 땅을 파던, 소위 Hackbau 대신에, 소에다 보습을 미여 밭갈이하는 소위 Phughan가 등장하자, 인류문화에는 비약적 진보가 가능했던 것이다. 저간의 소식은 모건 및 엥겔스도 그들이 논한 소위 전농(田農, Feldbau)조에서 잘 설명한 바이다.
쪽수▶P182-2이 農村文化가 栽培文化와 달은 것은, 첫째 여기서 牛力의 使用은 필연적으로 「보습」(犁 Pflug, plongh)의 使用을 招來시킨 것이다. 學者 中에는, 動物을 使用하기 前에 벌써 「보습」을 쓰게 되었다고 主張하는 분도 많으나, 나는 「보습」의 起源은 이것을 끄을 「짐생」의 힘을 前提로 한다고 主張하는 자의 하나이다. 埃及 古塚의 壁畫에, 소 대신에 사람이 보습을 끄는 場面이 보이는 것은 決코 「보습」의ㅡ 發生年代가 더 오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奴隸制 下에 人力이 값산 것의 反影에 不過하다. 그런대 牛力 使用에서 「보습」 使用까지의 中間 期間은 얼마나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나는 몰은다. 여기에 關한 區區한 理論은 아직 考古學的으로 證明이 않되는 限, 空論에 不過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대 人力 대신에 牛力이 使用되고 「호미」 대신에 「보습」이 使用되자, 換言하면 사람의 힘으로 호미를 들고 땅을 파든, 所謂 Hackbau 대신에, 소에다 보습을 미여 밭갈이하는 所謂 Phughan가 登場하자, 人類文化에는 飛躍的 進步가 可能했던 것이다. 這間의 消息은 모르간 급 엥겔쓰도 그들이 論한 所謂 「田農」(Feldbau)條에서 잘 說明한 바이다.
이렇게 재배문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농촌문화가 기원되자, 이것은 다시(신재배문화가 구재배문화와는 달리 새로운 독립적 문화권으로 유전을 만들었듯이) 새로운 정한 문화권적 형태로 사방을 향하여 전파작용을 작했던 것이다. 문제의 채도는 맨 처음 이 농촌문화의 파급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쪽수▶P182-3이렇게 栽培文化와는 質的으로 달은 農村文化가 起源되자, 이것은 다시(新栽培文化가 舊栽培文化와는 달리 새로운 獨立的 文化圈으로 流轉을 始作했듯이) 새로운 定한 文化圈的 形態로 四方을 向하여 傳播作用을 始作했던 것이다. 問題의 彩陶는 먼첨 이 農村文化의 波及과 關聯되어 있는 것이다.
채색도기의 요람지는 아직 자세히는 알 수가 없으나 농촌문화의 요람지와 상거가 얼마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제 기원되었는지도 아직 우리는 잘 모르나, 그러나 그것은 도시문화 기원 이전에 된 것인 듯하다. 이 채도를 사용한 당시의 전아시아의 농민들은 고급문화에 가장 가까웠든 것이다. 이 채도는 다시 고급문화, 도시문화로 직접 넘어갔으니, 그런 고로 수사(Susa)의 도시문화에 채도가 많은 것이라든지 인도 하천지대의 도시문화(Mohenjodaro, Harappa)에 채도가 많은 것은, 저간의 소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농촌문화에서 도시문화로의 발전과정에 관하여는 인제 차차 더 논하겠다.
쪽수▶P182-4彩色陶器의 搖籃地는 아직 仔細히는 알 수가 없으나 農村文化의 搖籃地와 相距가 얼마 않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제 起源되었는지도 아직 우리는 잘 몰으나, 그러▶P183-1나 그것은 都市文化 起源 以前에 된 것인 듯하다. 이 彩陶를 使用한 當時의 前亞細亞의 農民들은 高級文化에 가장 가까웠든 것이다. 이 彩陶는 다시 高級文化, 都市文化로 直接 넘어갔으니, 그런 故로 「쑤사」(Susa)의 都市文化에 彩陶가 많은 것이라든지 印度 河地帶의 都市文化(Mohenjodaro, Harappa)에 彩陶가 많은 것은, 這間의 消息을 말하는 것이다. 이 農村文化에서 都市文化로의 發展過程에 關하야는 인제 차차 더 可論하겠다.
채색도기가 중국에 온 것은 여하간 도시문화가 중국에 전래하기 전부터 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방 도시문화 동래의 단서가 벌써 여기에 있었던 것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쪽수▶P183-2彩色陶器가 中國에 온 것은 如何間 都市文化가 中國에 傳來하기 前부터 始作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西方 都市文化 東來의 端緖가 벌써 여기에 있었든 것도 干戈할 수는 없는 것이다.
멩힌 교수는 황하문화를 취급함에 제하여 『석기시대의 세계사』 중에서 앙소문화에는 아직 우골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이것을 농촌문화 이전의 재배문화로 취급하였다. 즉 그는 이 앙소문화 중의 채도와 함께 인도게르만 농촌문화 전래의 가능성이 있음에 불그하고, 이 앙소문화를 아직 그가 논한 「완전한 신석기시대」(Mixoneolithikum) 중에서는 취급치 못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중국 편에서 오는 보도에는 이 채도문화에는 아직 우골이 없었다고 하였음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러하나, 그 후 직접으로 스웨덴 국도, 스톡홀름에 가서 당지 동양박물관을 방문하고 앙소문화기의 우골실물을 보았던 것이다. 현대문주23▶그리하여 그는, 그가 논한 황하문화는 농촌문화였던 것을 알게 되었으며, 『석기시대세계사』 중의 자기의 이론에는 정정할 바가 있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a 23] 크릴씨는 스톡홀름의 동물 유골 검사결과를 모르고, 그 후도 그의 저서 중에서 앙소문화기에는 우의 사축이 없었다고 하나, 그것은 암만 해야 오해일 것이다. 스톡홀름의 검사결과에 의하여, 이 소의 사양을 채도문화에 인정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이 앙소기에는 소 사양의 범위가 컸는가 하면, 그것은 아마 문제일 것이다. 하이네 겔던 교수의 논문 중에는 멩힌 교수가 우골의 양을 꽤(in ziemlicher Menge) 보았다고 써 있으나, 중국 내지에 있는 학자들(중국인이나 외국인이나이 간과할 지경이었으니 그 양이 얼마나 되었는가는 알 수가 있다.
쪽수▶P183-3멩긴 敎授는 黃河文化를 取扱함에 祭하야 「石器時代의 世界史」 中에서 仰韶文化에는 아직 牛骨이 없다는 것을 理由로, 이것을 農村文化 以前의 栽培文化로 取扱하였다. 即 그는 이仰韶文化 中의 彩陶와 함께 「인도게르만」 農村文化 傳來의 可能性이 있음에 不拘하고, 이 仰韶文化를 아직 그가 論한 「完全한 新石器時代」(Mixoneolithikum) 中에서는 取扱치 못하였든 것이다. 이것은 勿論 中國便에서 오는 報道에는 이 彩陶文化에는 아직 牛骨이 없었다고 하였음에 그 原因이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러하나, 其後 直接으로 瑞典 國都, 「스톡홂」에 가서 當地 東洋博物舘을 訪問하고 仰韶文化期의 牛骨實物을 보았던 것이다. 원문주23▶그리하야 그는, 그가 論한 「黃河文化」는 農村文化였든 것을 알게 되었으며, 「石器時代世界史」 中의 自己의 理論에는 訂正할 바가 있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23] 크리-ㄹ氏는 「스톡홂」의 動物 遺骨 檢查結果를 몰으고, 그 후도 그의 著者 中에서 仰韶文化期에는 牛의 飼畜이 없었다고 하나, 그것은 암만 해야 誤解일 것이다. 「스톡홂」의 檢查 結果에 依하야, 이 牛의 飼養을 彩陶文化에 認定하는 것이 當然할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이 仰韶期에는 牛 飼養의 範圍가 컸는가 하면, 그것은 아마 問題일 것이다. 하이네·껠데언 敎授의 論文 中에는 멩긴 敎授가 牛骨의 量을 꽤(in ziemlicher Menge) 보았다고 써 있으나, 中國 內地에 있는 學者들(中人이나 外人이나)이 看過할 지경이었으니 그 量이 얼마나 되었는가는 알 수가 있다.
소 사양의 정도가 아직 시초적이었음에 불구하고 앙소문화는 그 발전된 채색도기의 사용과 함께 고도의 농촌문화였던 것이다(벼 농사도 벌써 여기에 있었다). 여기서 나는 그 문화현상이 어느 정도까지는 ‘정상적’ 순서를 벗어났다는 감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은 중국이 문화를 외부에서 수입한, 그 피동적 역할의 결과인 것이다. 피동적으로 문화를 전수하는 때는 그 문화 기원지와는 순서가 바꾸어져서 흡입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니, 이것은 중국 도시문화에 있어서는 더구나 그랬던 것이다. 즉 아직 도시문화가 채 기원되기 전에 중국에는 문자가 전래한 것은 그 좋은 예인 것이다. 이런 예는 우리 조선에도 있으니, 김해 패총 발굴의 결과, 거기에는 신석기시대에서 아직 동기나 청동기시대를 경유하기 전에 벌써 철이 전래한 것을 알게 되는바, 동이나 청동은 철 이후에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쪽수▶P184-1牛 飼養의 程度가 아직 始初的이었음에 不拘하고 仰韶文化는 그 發展된 彩色陶器의 使用과 함께 高度의 農村文化였든 것이다(稻作도 벌써 여기에 있었다). 여기서 나는 그 文化現象이 어느 程度까지는 「正常的」 順序를 벗어났다는 感을 禁할 수 없다. 이것은 中國이 文化를 外部에서 輸入한, 그 被動的 役割의 結果인 것이다. 被動的으로 文化를 傳受하는 때는 그 文化 起源地와는 順序가 바꾸어저서 吸入되는 境遇가 많은 것이니, 이것은 中國 都市文化에 있어서는 더구나 그랬든 것이다. 即 아직 都市文化가 채 起源되기 前에 中國에는 文字가 傳來한 것은 그 好例인 것이다. 이런 例는 우리 朝鮮에도 있으니, 金海 貝塚 發掘의 結果, 거기에는 新石器時代에서 아직 銅器나 靑銅器時代를 經由하기 前에 벌서 鐵이 傳來한 것을 알게 되는바, 銅이나 靑銅은 鐵 以後에 비로소 登場한 것이다.
앙소문화는 여하간 농촌문화이다. 그런데 인제 여기에 관하여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채도는 그러면 여하히 하여 중국에 들어왔는가? 아니 앙소문화의 기원은 여하히 되었는가? 그것은 어느 종족 이동과 관련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문화발사(Kulturansstrahlung)에 의하여 종족 이동과는 관계가 없이 된 것인가? 현대문주24▶이 문제에 관하여는 내외 학자 간에 참말 이론이 구구하였다. 세간에 이미 알려지듯이, 고 블랙 박사는 채도문화층의 인류 유골을 조사해본 결과, 그것을 현재의 북지나인의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논단하였다.[a 24] 이 블랙씨의 논단을 가지고 학자들의 다수는(중국 학자나 서양 학자를 막론하고), 채도문화는 어느 백인종계의 종족의 이동에 의하여 중국에 전래한 것은 결코 아니고, 오직 문화만의 전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블랙 박사의 이 단정은 백인계의 종족이동을 부정할 만한 근거가 사실은 못 되는 것이다. 어째서인고 하면 현재의 북지나인에게는 백인종계(즉 유럽인)의 특징이 이 구석 저 구석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현대문주25▶아이크슈테씨는 몽고인종 중에서 북지나의 이 인종을 ‘지나인종’(Sinide)이라는 명목 하에 취급하는바, 거기서 역시 유럽인종계의 특징을 지적한다.[a 25] 나는 1937년 빈대학 선사학연구소에서 시험한 연구보고 「중국국가의 기원」 중에서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유럽인종과 몽고인종과의 혼혈로 된, 아이크슈테의 소위 ‘투란’인종(Turanide)에 근사한 혈통을 가진 어느 종족이 이 채도를 북지나에 함께 가지고 왔을런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가 있다. 물론 그것은 추측에 불과한 것이었다. 별로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었다.
쪽수▶P184-2仰韶文化는 如何間 農村文化이다. 그런데 인제 여기에 關하여 問題가 하나 더 있다. 彩陶는 그러면 如何히 하여 中國에 들어왔는가? 아니 仰韶文化의 起源은 如何히 되었는가? 그것은 어느 種族移動과 關聯이 있었는가? 不然이면, 丹脣한 文化發射(Kulturansstrahlung)에 依하여 種族移動과는 關係가 없이 된 것인가? 원문주24▶이 問題에 關하여는 內外 學者 間에 차말 理論이 區區하였다. 世間에 이미 알려지듯이, 故 뿔랙 博士는 彩陶文化層의 人類 遺骨을 調査해본 結果, 그것을 現在의 北支那人의 것과 別로 差異가 없는 것이라고 論斷하였다.[24] 이 뿔랙氏의 論斷을 가지고 學者들의 多數는(中國 學者나 西洋 學者를 莫論하고), 彩陶文化는 어느 白人種系의 種族의 移動에 依하여 中國에 傳來한 것은 決코 아니고, 오직 文化만의 傳來에 依한 것이라고 主張한다. 그러나 뿔랙 博士의 이 斷定은 白人系의 種族移動을 否定할 만한 根據가 事實은 못되는 것이다. 何故인고 하면 現在의 北支那人에게는 白人種系(即 歐羅巴人)의 特徵이 이 구석 저 구석에 남어있는 까닭이다. 원문주25▶아익쉬렐氏는 蒙古人種 中에서 北支那의 이 人種을 「支那人種」(Sinide)이라는 名目 下에 取扱하는바, 거기서 역시 歐羅巴人種系의 特徵을 指摘한다.[25] 나는 一九三七年 維大 先史學硏究所에서 試驗한 硏究報告 「中國國家의 起源」 中에서 이 事實을 指摘하면서, 歐羅▶P185-1巴人種과 蒙古人種과의 混血로 된, 아익쉬텔의 所謂 「투란」人種(Turanide)에 近似한 血統을 가진 어느 種族이 이 彩陶를 北支那에 함께 가지고 왔을런지 몰으겠다고 말한 바가 있다. 勿論 그것은 推測에 不過한 것이었다. 別로 根據가 있는 主張은 아니었다.
중국의 채색도기에 관하여, 나는 아직 실물은 하나도 본 일이 없다. 모두 도판을 통하여 보았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저간의 자세한 소식을 전할 자격이 없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 중에도 특히 감숙성 지대의 것은 퍽 정련된 것이며, 이것은 우크라이나 지방 트리필랴의 것에 퍽 근사하다고 한다. 나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트리필랴계의 채색도기는 실물을 볼 수가 있었다. 감숙성 출토품만 아니라 하남성 출토품도, 도판으로 보아서는 사실 트리필랴 채도에 퍽 근사하다. 현대문주26▶그런데 여기에 관하여 교본증길(橋本增吉) 교수는 감숙지대의 것은 금석병용시대에 중앙아시아에 여기 논한 기술자가 동래한 것을 암시함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렇게 백인의 종족이동설에는 반대하나, 기술자의 개인적 이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소이다.[a 26]
쪽수▶P185-2中國의 彩色陶器에 關하야, 나는 아직 實物은 하나도 본 일이 없다. 모다 圖版을 通하야 보았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這間의 仔細한 消息을 傳할 資格이 없다. 그런대 學者들은 그 中에도 特히 甘肅省 地帶의 것은 퍽 精練된 것이며, 이것은 「우크라인」 地方 「트리풀녜」의 것에 퍽 近似하다고 한다. 나는 「우크라인」에서 온 「트리풀녜」系의 彩色陶器는 實物을 볼 수가 있었다. 甘肅省 出土品만 아니라 河南省 出土品도, 圖版으로 보아서는 事實 「트리풀녜」 彩陶에 퍽 近似하다. 원문주26▶그런데 여기에 關하야 橋本增吉 敎授는 甘肅地帶의 것은 金石倂用時代에 中央亞細亞에 여기 關한 技術者가 東來한 것을 暗示함이 아닌가고 한다. 그는 이렇게 白人의 種族移動說에는 反對하나, 技術者의 個人的 移來는 可能하다고 생각하는 所以다.[26]
이 채도 동래에 관하여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멩힌 교수는 우크라이나에서 인도게르만족의 일부인 토하라(Tocharer)족이 이것을 가지고 온 것이며, 따라서 이 모양으로 인도게르만의 농촌문화가 중국에 전래한 것이나 아닐까고 추측하였다. 씨는 여기서 결코 그것을 일정한 주장으로 한 것은 아니다. 지금에는 이 추측까지도 기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가 여기서 이 추측의 기저로 한 것은 마르크바르트씨(Marquart)의 주장을 좌단하려한 프랑케씨의 이 주장에는 참말 근거가 박약한 것이다. 현대문주27▶프랑케씨의 대하(大夏)에 관한 논문은 나는 오직 하나밖에 읽어본 일이 없는바, 거기서 그가 대하라는 족명이 벌써 상서에 보인다고 하는 것은 그 논거를 나는 모르는 바이다.[a 27] 현대문주28▶이 대하와 토하라의 관련에 관하여는 할룬(Haloun) 교수도 수차 논한 바가 있거니와[a 28] 여하간 이 대하에 논한 내외 학자의 의론은 구구한 모양이다. 물론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는 아직 별로 연구해본 일은 없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무어라고 떠벌림은 다소 주제넘은 짓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한 지식으로나마 감히 의론을 시험함을, 독자 제군은 용서하기를 바란다. … 현대문주29▶여기에 관하여 소천탁치 박사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서중서(徐中舒)씨는 프랑케씨 등의 자서래동(自西來東)설에 반대하여 자동래서설을 운위하나, 서씨의 설도 억설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a 29] 대하에 관하여는 일주서 왕회편의 『大夏自白牛』 운운의 구절이 현존한 사적 중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 그런데 동편 중에는 또 「都郭往往」 운운의 구절도 있다. 토하라족과 관련하여 논함에 제하여 구태여 대하에는 언급하면서 ‘도곽(都郭)’을 전연 도외시하는 것은 소천탁치 박사도 말한 바와 같이 좌단하기가 어려운 바이다. ‘도곽’은 산해경에는 ‘都廣’ ‘都觀’ ‘敦薨’ 등으로 되어있는데, 그것은 과연 후세의 도화라(覩貨邏), 토화라(吐火羅)의 고명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소천 박사는 하후씨와 동종인 서하가 서천하여 대하가 되었다고 하는바, 서중서는 일보 더 나가 하(夏)가 서천하여 대하가 되고, 대하가 종내에는 더화라(覩貨邏)(吐火羅, 吐呼羅, 兜佉, 兜勒, 등등)가 되었다고 하며 그는 거기서 대하를 도관(都觀)과 연결시킨다. 그런데 이 도관은 물론 도곽(都郭)과 동일한 것으로, 씨가 이 도관과 관련시키는 대하는 왕회편에는 도곽과는 이종족으로 되어있는 것은, 이 문제의 취급을 퍽 복잡하게 하는 바이다. 여하간 서씨의 이론에는 그리 감심할 수가 없다.
쪽수▶P185-3이 彩陶 東來에 關하야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멩긴 敎授는 「우크라인」에서 「인도게르만」族의 一部인 「토하라」(Tocharer)族이 이것을 가지고 온 것이며, 따라서 이 모양으로 「인도게르만」의 農村文化가 中國에 傳來한 것이나 아닐까고 推測하였다. 氏는 여기서 決코 그것을 一定한 主張으로 한 것은 아니다. 지금에는 이 推測까지도 棄却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가 여기서 이 推測의 基底로 한 것은 마르크ᅄᅡ르트氏(Marquart)의 主張을 左袒하야한 ᅋᅳ랑케氏의 이 主張에는 참말 根據가 薄弱한 것이다. 원문주27▶ᅋᅳ랑케氏의 大夏에 關한 論文은 나는 오직 하나밖에 읽어본 일이 없는바, 거기서 그가 大夏라는 族名이 벌서 尙書에 보인다고 하는 것은 그 論據를 나는 모르는 바이다.[27] 원문주28▶이 大夏와 「토하라」의 關聯에 關하여는 할루-ㄴ(Haloun) 敎授도 數次 論한 바가 있거니와[28] 如何間 이 大夏에 關한 內外 學者의 議論은 區區한 모양이다. 勿論 나는 이 問題에 關하야는 아직 別로 硏究해본 일은 없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무어라고 떠벌임은 多少 주제넘은 짓이기▶P186-1는 하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나의 不足한 知識으로나마 敢히 議論을 試驗함을, 讀者 諸君은 容恕하기를 바란다. … 원문주29▶여기에 關하야 小川琢治 博士의 影響을 받은 中國의 徐中舒氏는 「ᅋᅳ」氏 等의 自西來東說에 反對하야 自東來西說을 云爲하나, 徐氏의 說도 臆說에 不過한 것일 것이다.[29] 大夏에 關하여는 逸周書 王會篇의 『大夏自白牛』 云云의 句가 現存한 史籍 中 最古의 記錄일 것이다. 그런데 同篇 中에는 또 「都郭往往」 云云의 句도 있다. 「토하라」族과 關聯하여 論함에 際하야 귀태여 大夏에는 言及하면서 「都郭」을 全然 度外視하는 것은 小川琢治 博士도 말한 바와 같이 左袒하기가 어려운 바이다. 「都郭」은 山海經에는 「都廣」 「都觀」 「敦薨」 等으로 되어있는데, 그것은 果然 後世의 覩貨邏, 吐火羅의 古名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小川 博士는 夏后氏와 同宗인 西夏가 西遷하야 大夏가 되었다고 하는바, 徐中舒는 一步 더 나가 夏가 西遷하야 大夏가 되고, 大夏가 乃終에는 覩貨邏(吐火羅, 吐呼羅, 兜佉, 兜勒, 等等)가 되었다고 하며 그는 거기서 大夏를 都觀과 聯結시킨다. 그런데 이 都觀은 勿論 都郭과 同一한 것으로, 氏가 이 都觀과 關聯시키는 大夏는 王會篇에는 都郭과는 異種族으로 되어있는 것은, 同 問題의 取扱을 퍽 複雜히 하는 바이다. 如何間 徐氏의 理論에는 그리 感心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사기 한서 등에 보이는 대하는 아무다리야강(Amudarja) 이남, 인도 이북 사이에 있었고, 후에는 대월지국에 정복을 당한 박트리아(Bactria)국의 칭인 것이다. 이 박트리아는 희랍인의 국이었는바, 무제시 대월지국과의 연맹을 사명으로, 이 서방의 원경에 편력하였던 장건은 이것을 덮어놓고 대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과연, 일주서, 관자 등에 보이는 대하와 동일한 것인가는 퍽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또 이 박트리아를 바로 토하라족의 국이라고 프랑케씨 이하 주장하는 분이 있는바, 그것은 박트리아 지대가 토하라(토하로이 Toxaroi) 그 외의 제족에게 탈취를 당하였다는 스트라보(Strabo)의 보도에 의한 주장일 것이다. 박트리아가 과연 당시 토하라족의 점령한 것이었다면, 장건의 대하는 이 토하라의 사음이기가 쉽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의문이 퍽 많은 것이다. 박트리아는 암만 해도 희랍인의 국이었던 것이라고 나는 믿는 바이다.
쪽수▶P186-2그런데 史記 漢書 等에 보이는 大夏는 「아무」河(Amudarja) 以南, 印度 以北間에 있었고, 後에는 大月氏國에 征服을 當한 「빡트리아」(Bactria)國의 稱인 것이다. 이 「빡트리아」는 希臘人의 國이었는바, 武帝時 大月氏國과의 聯盟을 使命으로, 이 西方의 遠境에 遍歷하였든 張騫이는 이것을 덮어놓고 大夏라고 하였든 것이다. 이것이 果然, 逸周書, 管子 等에 보이는 大夏와 同一한 것인가는 퍽 問題인 것이다. 그런데 또 이 「빡트리아」를 바로 「토하라」族의 國이라고 ᅋᅳ랑케氏 以下 主張하는 분이 있는바, 그것은 「빡트리아」 地帶가 「토하라」(토하로이 Toxaroi) 其外의 諸族에게 奪取를 當하였다는 스트라보(Strabo)의 報道에 依한 主張일 것이다. 「빡트리아」가 果然 當時 「토하라」族의 占領한 것이었다면, 張騫의 大夏는 이 「토하라」의 寫音이기가 쉽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疑問이 퍽 많은 것이▶P187-1다. 「빡트리아」는 암만 해도 希臘人의 國이었든 것이라고 나는 믿는 바이다.
인제 육조 이후 서역의 불적(佛蹟)으로 기록에 실린 더화라(覩貨邏)와 대하에 관하여 보건대, 도화라는 토하라에 가장 근사한 명칭이다. 그것이 과연 토하라족의 동래와 직접 관련이 있었기는 십분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토하라는 도화라를 통하여 일주서 왕회편의 대하나 도곽과 관련이 되기도 쉬운 바이다. 현대문주30▶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주실 천하통일 초기의 족명(그것도 전국시대 이후의 윤색일런지도 모르지만)과 신석기시대 중기 내지 말기의 채색도기와를 관련시킴에는 시간적 격리가 너무나 큰 감이 있는 바이다.[a 30]
쪽수▶P187-2인제 六朝 以後 西域의 佛蹟으로 記錄에 실린 覩貨邏와 大夏에 關하야 보건대, 覩貨邏는 「토하라」에 가장 近似한 名稱이다. 그것이 果然 「토하라」族의 東來와 直接 關聯이 있었기는 十分 可能한 것이다. 따라서, 「토하라」는 覩貨邏를 通하야 逸周書 王會篇의 大夏나 都郭과 關聯이 되기도 쉬운 바이다. 원문주30▶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周室天下統一 初期의 族名(그것도 戰國時代 以後의 潤色일런지도 모르지만)과 新石器時代 中期 乃至 末期의 彩色陶器와를 關聯시킴에는 時間的 隔離가 너무나 큰 感이 있는 바이다.[30]
앙소문화의 동래와 관련하여 여기서 더 논할 것은, 하이네 겔던 교수의 오스트로네시아족 이동론인 것이다. 이 오스트로네시아족은 원래는 ‘앙소족’과 혈족관계가 있는 것으로, 중국(남부)에서 출발하여 후인도(Hinterindien)를 경유하고 말레이반도 서남단을 경유하여 남양으로도 갔고 또 필리핀, 대만을 거쳐 일본에도 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족은 ‘앙소족’과 함께 결국은 동남유럽 및 다뉴브강 지대의 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족의 문화재(Kulturgnt)의 대표적의 것으로, 하이네씨는 소위 ‘사릉부(四稜斧)’(Vicrkantbeil)를 든다. 그리고 하이네씨는 또 두수(頭狩, Kopfjagd)나 축돈이나 소나 항공주가 등을 모두 이 족이 가지고 간 것이라고 하며, 이 여러 점에서 유럽 동남부의(물론 아직 인도게르만 이전의) 여러 문화현상과 비교한다. 그리고 백인계에 속한다는 폴리네시아족의 인종문제도 이 이동에 관련시킬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한다.
쪽수▶P187-3仰韶문화의 東來와 關聯하야 여기서 더 論할 것은, 하이네·껠데언 敎授의 「오-스트로네지아」族 移動論인 거서이다. 이 「오-스ㅡ트로네지아」族은 原來는 「仰韶族」과 血族關係가 있는 것으로, 中國(南部)에서 出發하여 後印度(Hinterindien)를 經由하고 馬來半島 西南端을 經由하야 南洋으로도 갔고 또 比律賓 臺灣을 거처 日本에도 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族은 「仰韶族」과 함께 結局은 東南歐羅巴 及 단륩江 地帶의 文化와 關聯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族의 文化財(Kulturgnt)의 代表的의 것으로, 「하」氏는 所謂 「四稜斧」(Vicrkantbeil)를 擧한다. 그리고 「하」氏는 또 頭狩(Kopfjagd)나 畜豚이나 牛나 杭工住家 等을 모두 이 族이 가지고 간 것이라고 하며, 이 諸點에서 歐洲 東南部의(勿論 아직 「인도게르만」 以前의) 諸文化現象과 比較한다. 그리고 白人系에 屬한다는 「폴리네지아」族의 人種問題도 이 移動에 關聯시킬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한다.
하이네 겔던 박사의 이 모든 주장에는 퍽 재미있는 점도 많다. 아니 그가 주장하듯이 앙소문화의 사릉부나 기타가 그의 운위하는 오스트로네시아족의 문화재와 관련되는 바가 많다. 그러나 그는 아직 모든 것을 문제로 제출할 뿐이고, 단언을 피하는 만큼, 그 역시 이 문화관련에 있어 이것의 유럽와의 관계가 과연 종족(내지는 인종) 이동에 있는가, 단순한 문화유전(流轉)에 있는가의 문제에 관하여는 결국 확언한 바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가 드는 문화재(문화소)가 모두 과연 이 오스트로네시아족의 이동과 관계가 있는가는 퍽 문제인 것이다. 항공주가나 돼지나 두수(Kopfjagd, Head hunting)는 그보다도 도리어 동에서 유럽 편으로 갔다고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여하간 하이네 겔던 교수의 이론에 의하여 앙소문화론에 다소 참고재료가 제공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결코 앙소문화와 어느 유럽인종계의 종족 이동과의 관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운위하는 ‘앙소족’이란 결국 일개의 구상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쪽수▶P187-4하이네·껠데언 博士의 이 모든 主張에는 퍽 滋味있는 點도 많다. 아니 그가 主張하듯이 仰韶文化의 四稜斧나 其他가 그의 云爲하는 「오-스트로네지아」族의 文化財와 關聯되는 바가 많다. 그러나 그는 아직 모든 것을 問題로 提出할 분이고, 斷言을 피하는 만큼, 그 亦是 이 文化關聯에 있어 이것의 歐羅巴와의 關係가 果然 種族(乃至는 人種) 移動에 있는가, 單純한 文化流轉에 있는가, 의 問題에 關하야는 結局 確言한 바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가 擧하는 文化財(文化素)가 모두 果然 이 「오-스트로네지아」族의 ▶P188-1移動과 關係가 있는가는 퍽 問題인 것이다. 杭工住家나 豚이나 頭狩(Kopfjagd, Head hunting)는 그보다도 도로혀 東에서 歐羅巴便으로 갔다고 하는 것이 當然할 것이다. 如何間 하이네·껠데언 敎授의 理論에 依하여 仰韶文化論에 多少 參考材料가 提供된 것은 事實이나, 그것은 決코 仰韶文化와 어느 歐羅巴人種系의 種族 移動과의 關聯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云爲하는 「仰韶族」이란 結局 一個의 構想的 存在에 不過한 것이다.
채도의 전래는 이렇게 어느 종족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전연 부인할 수도 없는 사세이다. 교본증길씨의 절충적 견해도 문제의 해결은 조금도 못 되는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중국 농촌문화는 서방의 농촌문화와 근사한 점이 많다. 그것은 인도게르만 이전의 다뉴브 지대 농촌문화와 관련이 있어보일 뿐만 아니라, 또 특히 인도게르만 농촌문화에 근사한 점이 많으니, 소천탁치 박사가 여기에 주의한 것은 참말 주밀한 고찰이라고 하겠다. 소천 박사는 이하에도 더 논한 바와 같이 은도(殷都)의 하나인 박(亳)이 발음상 라틴어의 Pagus나 희랍어의 Pagos와 관련되는 것을 말하고, 또 로마 전제(田制)가 선진전제(先秦田制)에 근사한 것을 들어 말한다. 亳(박)은 원래 촌락을 의미한 것이니, ‘원상족(原商族)의 발원지인 지금의 중가리아(新疆省)에서는 스벤 헤딘(Sven Hedin)씨의 보도에 의하건대 촌락, 정원 등을 Bag이라 한다고 한다. 지금 터키 수도 앙카라대학에 러시아문학 교수로 있는 언어학자 멩게스군(K. Menges)의 서신에 의하건대, 이 Bag은 원래는 페르시아어라고 한다. 여하간 이 ‘박’은 원래는 인도게르만어족의 어로, 인도게르만 농촌문화의 동래와 함께 전래한 어일 것이다. 그런데 ‘박’을 중심으로 한 인도게르만 농촌문화가 벌써 채도문화와 관련되었다고 주장할 근거가 무엇이냐고 하면, 거기에는 대답이 좀 곤란한 것이다. 채도 이후에 전래한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쪽수▶P188-2彩陶의 傳來는 이렇게 어느 種族의 移動과 關聯이 있다고 斷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全然 否認할 수도 없는 事勢이다. 橋本增吉氏의 折衷的 見解도 問題의 解決은 조금도 못되는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中國 農村文化는 西方의 農村文化와 近似한 點이 많다. 그것은 「인도게르만」 以前의 「단늅」 地帶 農村文化와 關聯이 있어보일 뿐만 아니라, 또 特히 「인도게르만」 農村文化에 近似한 點이 많으니, 小川琢治 博士가 여기에 注意한 것은 참말 綢密한 考察이라고 하겠다. 小川 博士는 以下에도 더 論한 바와 같이 殷都의 하나인 亳이 發音上 羅典語의 Pagus나 希臘語의 Pagos와 關聯되는 것을 말하고, 또 羅馬田制가 先秦田制에 近似한 것을 들어 말한다. 亳(박)은 原來 村落을 意味한 것이니, 「原商族」의 發源地인 只今의 「즁가리」(新疆省)에서는 「스ᅄᅦᆫ·헤듼」(Sven Hedin)氏의 報道에 依하건대 村落 庭園 等을 Bag이라 한다고 한다. 지금 土耳其 首都 「앙카라」大學에 露西亞文學 敎授로 있는 言語學者 「멩게쓰」君(K. Menges)의 書信에 依하건대, 이 Bag은 原來는 波斯語라고 한다. 如何間 이 「박」은 原來는 「인도게르만」語族의 語로, 「인도게르만」 農村文化의 東來와 함께 傳來한 語일 것이다. 그런데 「박」을 中心으로 한 「인도게르만」 農村文化가 벌서 彩陶문화와 關聯되었다고 主張할 根據가 무엇이냐고 하면, 거기에는 對答이 좀 困難한 것이다. 彩陶 以後에 傳來한 것이라고도 主張할 수가 있는 것이다.
대체로 중국문화 내지 극동의 고급문화 일반과 인도게르만 문화 간에 공통되는 점이 많은 것은, 또 소위 문화사학파의 민속학자 간에도 이미 인식된 바로, 슈미트, 코퍼스 두 선생은 이것은 인도게르만족은 원래는 목유민, 그 중에도 특히 축우족이었는바, 그들은 주로 축마족인 우랄알타이족과 가장 인접하여 살았고, 따라서 문화交通이 퍽 많았음에도 있다고 늘 주장하여 온다. 축우제족과 축마제족이 원래는 문화상에 있어 공통되는 바가 많았음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벌써 중국문화에는, 알타이계의 목유문화의 형적이 별로 안 보이는 신석기시대에 채도문화가 전래했음을 보았으매, 슈미트, 코퍼스 양씨의 주장만으로 만족할 수는 도저히 없는 거서이다. 역시 농촌문화상의 관련에 그 근저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여러 점으로 보아, 나는 중국의 채도문화는 서방과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인도게르만적 농촌문화와 관계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생각하는 바이다. 아직은 모든 것은 물론 추측에 불과하다. 금후의 발굴 및 연구에 의하여 나의 이 추측은 아주 오해인 것을 나 자신이 인식할 날이 올런지도 모르겠다.
쪽수▶P188-3大體로 中國文化 乃至 極東의 高級文化 一般과 「인도게르만」 文化 間에 共通되는 點이 많은 것은, 또 所謂 文化史學派의 民俗學者 間에도 이미 認識된 바로, 쉬밀, 콥퍼쓰 兩師는 이것은 「인도게르만」族은 原來는 牧遊民, 그 ▶P189中에도 特히 畜牛族이었는바, 그들은 主로 畜馬族인 「우랄·알타이」族과 가장 隣接하야 살았고, 따라서 文化交通이 퍽 많었음에도 있다고 늘 主張하야 온다. 畜牛諸族과 畜馬諸族이 原來는 文化上에 있어 共通되는 바가 많었음은 나도 認定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벌서 中國文化에는, 「알타이」系의 牧遊文化의 形蹟이 別로 않 보이는 新石器時代에 彩陶문화가 傳來했음을 보았으매, 쉬밀, 콥퍼쓰 兩氏의 主張만으로 滿足할 수는 到底히 없는 거서이다. 亦是 農村文化上의 關聯에 그 根底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諸點으로 보아, 나는 中國의 彩陶文化는 西方과 關係가 있을 뿐만 아니라, 特히 「인도게르만」的 農村文化와 關係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생각하는 바이다. 아직은 모든 것은 勿論 推測에 不過하다. 今後의 發掘 及 硏究에 依하여 나의 이 推測은 아주 誤解인 것을 나 自身이 認識할 날이 올런지도 모르겠다.
























본문2-3: ③ 후강문화


일찍이 안데르손씨가 중국 채도문화는 ‘아나우’(Anau) ‘수사’(Susa), ‘트리필랴’(Tripolje) 등지와 관계가 있었으리라고 하였을 때 중국 학자들의 대부분은 여기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 반대의 최대 동기는 그들의 편견적 정치적 감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이라기보다도 무의식적으로 나온 편견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장 반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들도 채색도기의 자서래동설의 진리를 승인치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중앙연구원 발간의 「안양발굴보고」에는 저간의 소식이 잘 반영되어있다. 그러나 이 동래설의 승인은 덮어놓고 아무 대상(代償) 없이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승인의 대상으로 그들은 소위 흑도문화 혹은 후강문화와 은상문화와의 밀접한 관계 및 이 흑도문화의 중국문명사상의 의의를 고조한다. 그들은 여기서 채도문화 또는 앙소문화는 비록 서방에서 오기는 하였으나 불원에 몰락하였고, 또 후세에 남겨둔 영향도 별로 없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흑도문화는 동편에서 서래하여, 상대문화 기원의 기초를 형성하였다고 주장하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은상문화는 흑도문화(후강문화)의 직접 발전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주장에도 편견적 정치(定置)감이 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정치적 낭만주의’(Politiische Romantik)는 중국 학자들만 아니라, 동양의 한학자 또는 서양의 한학자 중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크릴씨는 그들 중의 한 분이다. 중국문화의 본토성을 주장하든 나머지, Creel씨 역시 이 흑도문화의 특수한 의의를 고조한다. 나는 이 흑도문화의 고조를 “Schwarzkeramische Theorie” 즉 ‘흑도설’이라고 명칭한 일이 있거니와 크릴씨의 저 The Birth of China가 1936년 발표된 이후, 이 ‘흑도설’은 사실 서양 한학자 중에 꽤 전파되었던 것이다.
쪽수▶P193-1일즉이 안데르쏜氏가 中國 彩陶文化는 「아나우」(Anau) 「쑤사」(Susa), 「트리폴녜」(Tripolje) 等地와 關係가 있었으리라고 하였을 때 中國 學者들의 大部分은 여기에 反對하였든 것이다. 이 反對의 最大 動機는 그들의 偏見的 政治的 感情에 있섰든 것이다. 그것은 意識的이라기보다도 無意識的으로 나온 偏見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장 反對를 하였음에도 不拘하고 내종에는 그들도 彩色陶器의 自西來東說의 眞理를 承認치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中央研究院 發刊의 「安陽發掘報告」에는 這間의 消息이 잘 反映되어있다. 그러나 이 東來說의 承認은 덮어놓고 아무 代償 없이 한 것은 決코 아니다. 이 承認의 代償으로 그들은 所謂 「黑陶文化」 或은 「後岡文化」와 殷商文化와의 密接한 關係를 及 이 黑陶文化의 中國文明史上의 意義를 高調한다. 그들은 여기서 彩陶문화 又는 仰韶文化는 비록 西方에서 오기는 하얐으나 不遠에 沒落하였고, 또 後世에 남겨둔 影響도 別로 없다. 그러나 그와 反對로 黑陶文化는 東便에서 西來하야, 商代文化 起源의 基礎를 形成하였다고 主張하다. 그들의 主張에 依하면, 殷商文化는 黑陶文化(後岡文化)의 直接 發展에 不過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主張에도 偏見的 定置감이 있음은 숨길 수 없는 事實이다. 이 「政治的 浪漫主義」(Politiische Romantik)는 中國 學者들만 아니라, 東洋의 漢學者 又는 西洋의 漢學者 中에서도 發見할 수가 있다. 크리-ㄹ氏는 그들 중의 한 분이다. 中國文化의 本土性을 主張하든 남어지, Creel氏 역시 이 黑陶文化의 特殊한 意義를 高調한다. 나는 이 黑陶文化의 高調를 “Schwarzkeramische Theorie” 即 「黑陶說」이라고 ▶P194-1名稱한 일이 있거니와 「크리-ㄹ」氏의 著 The Birth of China가 一九三六年 發表된 以後, 이 「黑陶說」은 事實 西洋 漢學者 中에 꽤 傳播되었던 것이다.
채도문화는 후세에 영향을 남긴 바 없이 몰락하였다는 주장에는 첫째 하등 근거가 없으니, 상대문화층l에서 복사를 실은 갑골과 동시에 앙소형의 도기가 출토된 것은 이 채도문화의 여파가 아직 상대에도 남아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을 상대인의 고고학적 골동품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그러기에 중앙연구원계 학자들 중에서도 일부에서는 앙소문화의 여파가 후대에도 남아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발굴보고 중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모순당착되는 이론은 흑도문화론에서도 볼 수가 있으니, 그들은 한 편으로는 흑도문화와 은상문화의 직접 관련을 운위하나, 다른 한 편으로는 동시에 또 은상문화는 흑도문화의 연장이 아니라, 거기에는 새로운 문화층이 출현하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쪽수▶P194-2彩陶文化는 後世에 影響을 남긴 배 없이 沒落하였다는 主張에는 첫재 何等 根據가 없으니, 商代文化層l에서 卜辭를 실은 甲骨과 冬時에 仰韶形의 陶器가 出土된 것은 이 彩陶문화의 餘波가 아직 商代에도 남어있는 것을 証明하는 것이다. 그것을 商代人의 考古學的 骨董品으로만 取扱하는 것은 不當한 것이다. 그러기에 中央硏究院系 學者들 中에서도 一部에서는 仰韶文化의 餘波가 後代에도 남어있는 것을 指摘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發掘報告 中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矛盾撞着되는 理論은 黑陶文化論에서도 볼 수가 있으니, 그들은 一方으로는 흑도문화와 殷商文化의 直接 關聯을 云爲하나, 他方으로는 冬時에 또 殷商文化는 黑陶文化의 延長이 아니라, 거기에는 새로운 文化層이 出現하는 事實을 指摘하는 것이다.
안양 은허의 발굴은, 중앙연구원(Academia Sinica)의 기도에 의하여 비로소 조직적 과학적으로 하게 된 것은 세간이 주지하는 바이다. 이 발굴에 의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1898년 이래 갑골복사((甲卜骨辭))가 세간에 소개되었음에 불구하고) 일종의 전설에 불과하던 상대사의 일부는 완전히 ‘역사기’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동서 학자 중에는 아직까지도 갑골복사의 은상시대성을 부정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하등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이렇게 된다면 나폴레옹의 사적 존재도 부정당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좀 더 옛날에 돌아가 공자의 존재는 넉넉히 의심할 여지가 있을 것이겠다.
쪽수▶P194-3安陽 殷墟의 發掘은, 中央硏究院(Academia Sinica)의 企圖에 依하야 비로소 組織的 科學的으로 하게 된 것은 世間이 周知하는 바이다. 이 發掘에 依하야 무엇보다도 먼저 (一八九八年 以來 甲骨卜辭가 世間에 紹介되었음에 不拘하고) 一種의 傳說에 不過하든 商代史의 一部는 完全히 「歷史期」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東西 學者 中에는 아직까지도 甲骨卜辭의 殷商時代性을 否定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何等 根據가 없는 것의로, 이렇게 된다면 「나폴레온」의 史的 存在도 否定 當할 餘地가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좀 더 옛날에 도라가 孔子의 存在는 넉넉히 疑心할 餘地가 있을 것이겠다.
물론 의심이란 학문상 퍽 필요한 것이니, 의심의 결과가 가장 유효한 경우(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가 많은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필요 없는 의심은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발굴의 결과 상대사의 일부가 「유사시대」로 넘어온 것은 결코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쪽수▶P194-4勿論 疑心이란 學問上 퍽 必要한 것이니, 疑心의 結果가 가장 有效한 境遇(積極的으로나 消極的으로)가 많은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必要 없는 疑心은 도로혀 不幸한 結果를 招來하는 法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發掘의 結果 商代史의 一部가 「有史時代」로 넘어온 것은 決코 否定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은허 발굴의 복사는 사적상의 전탈과 배치되는 점도 많으나, 합치되는 점도 많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기에 천도한 사실이니, 이곳에 천도한 것은 서경에 의하면 반경시(盤庚時)인바, 발굴의 결과도 반경시까지 소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서력 기원전 15세기 말 혹은 14세기 초까지에 중국의 유사시대는 소급한다. 은허의 발굴에 의하면 은대 유물 이외에 또 선사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으니, 은허에 벌써 흑도문화, 채도문화의 여러 문화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굴에 종사한 중앙연구원원 제씨는 이 일개처의 출토품만으로는 아직 상문화와 앙소문화 이외에는 문화층적 연대체계를 수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벌써 문화소의 ‘다수’(!)가, 그때까지는 도무지 몰랐던, 동편에서 온 어느 문화조류에 그 기원을 둔 형적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중서씨는 벌써 고래 뼈, 바다 조개 등의 출토품이나 수차 천도에 논한 사적상의 전설 등은 상족이 동편의 해안지대에서 온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던바, 나중에는 산동성 성자애(城子崖)에 문화유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현대문주31▶그리하여 1930년, 1931년 2회에 걸쳐 발굴을 시도하였다. 거기서 발견한 것이 즉 흑도문화 혹은 후강문화이다.[a 31]
쪽수▶P194-5殷墟 發掘의 卜辭는 史籍上의 傳說과 背馳되는 點도 많으나, 合致되는 店도 많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은 여기에 遷都한 事實이니, 이곳에 遷都한 것은 ▶P195-1書經에 依하면 盤庚時인바, 發掘의 結果도 盤庚時까지 遡及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西曆 紀元前 十五世紀 末 或은 十四世紀 初까지에 中國의 有史時代는 遡及한다. 殷墟의 發掘에 依하면 殷代 遺物 以外에 또 先史時代의 遺物도 出土되었으니, 殷墟에 벌서 黑陶文化 彩陶문화의 諸文化層이 있었든 것이다. 그러나 發掘에 從事한 中央硏究院員 諸氏는 이 一個處의 出土品만으로는 아직 商文化와 仰韶文化 以外에는 文化層的 年代體系를 樹立할 수가 없었든 것이다. 비록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벌서 文化素의 「多數」(!)가, 그때까지는 도모지 몰랐든, 東便에서 온 어느 文化潮流에 그 起源을 둔 形蹟을 볼 수가 있었든 것이다. 그리하야 徐中舒氏는 벌서 鯨骨, 海貝 等의 出土品이나 數次 遷都에 關한 史籍上의 傳說 等은 商族이 東便의 海岸地帶에서 온 消息을 傳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든 것이다. 그러든바, 내종에는 山東省 城子崖에 文化遺址가 發見되었든 것이다. 원문주31▶그리하야 一九三〇年 一九三一年 二回에 亘하여 發掘을 試하였다. 거기서 發見한 것이 即 黑陶文化 或은 後岡文化이다.[31]
성자애에서는 2개의 상이한 문화층을 볼 수가 있었다. 하층의 흑도문화층과 상층의 회도문화층이 바로 그것이다. 상층에서는 문자도 발견되었고, 청동기도 발견되었다. 상대문화 중에서 대역할을 보이는 복골은 상하 양층에서 모두 발굴되었는데, 은허와는 달리, 여기에는 귀갑은 전연 결여하고 골재만 있는 것이다. 복골은 모두 문자를 전연 결여한 밖에 또 소둔촌 은허의 것에 비하면, 더 원시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소둔촌이나 앙소와 동양으로, 상하 양 문화층은 모두 석문도기(蓆紋陶器)와 원통부(圓筒斧)의 전통을 포함하였고, 또 반월도나 유병시족(有柄矢鏃, Schaflp eilspitze) 등 북극문화 계통의 영향, (아니 그보다도 도리어 북부아시아 문화계통의 영향)을 지시하는 문화소도 소둔촌이나 앙소와 同樣으로, 상하 양 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 현대문주32▶상층문화 중에 보이는 청동기는 중앙시베리아(미누신스크 Minusinsk)의 청동기시대 문화 내지 유럽의 청동기시대 문화와의 관련의 소식을 전하는바, 인제 더 논할 바와 같이 이것은 상고 중국의 청동기 일반이 서방 및 서북방과 관련을 가진 것에 합치되는 사실이다.[a 32] 상층을 중앙연구원원 제씨는 담국(譚國) 유지라고 하는바, 그들의 주장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일본 학자들도 이것은 벌써 정설로,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줄로 아나,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여기에는 아직 좀 더 연구할 여지가 있는 듯하다.
쪽수▶P195-2城子崖에서는 二個의 相異한 文化層을 볼 수가 있었다. 下層의 黑陶文化層과 上層의 灰陶文化層이 바로 그것이다. 上層에서는 文字도 發見되었고, 靑銅器도 發見되었다. 商代文化 中에서 大役割을 演하는 卜骨은 上下 兩層에서 모두 發掘되었는데, 殷墟와는 달리, 여기에는 龜甲은 全然 缺如하고 骨材만 있는 것이다. 卜骨은 모다 文字를 全然 缺如한 外에 또 小屯村 殷墟의 것에 比하면, 더 原始的 性質을 가지고 있다. 小屯村이나 仰韶와 同樣으로, 上下 兩 文化層은 모다 蓆紋陶器와 圓筒斧의 傳統을 包含하얐고, 또 半月刀나 有柄矢鏃(Schaflp eilspitze) 等 北極文化 系統의 影響, (아니 그보다도 도로혀 北部亞細亞 文化系統의 影響)을 指示하는 文化素도 小屯村이나 仰韶와 同樣으로, 上下 兩 文化層에서 出土되었다. 원문주32▶上層文化 中에 보이는 靑銅器는 中央西伯利亞(미누씬스크 Minusinsk)의 靑銅器時代 文化 乃至 歐羅巴의 靑銅器時代 文化와의 關聯의 消息을 傳하는바, 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이것은 上古 中國의 靑銅器 一般이 西方 及 西北方과 關聯을 가진 것에 合致되는 事實이다.[32] 上層을 中央硏▶P196-1究院員 諸氏는 譚國 遺址라고 하는바, 그들의 主張이 正當한지 不然한지를 나는 도모지 모르겠다. 日本 學者들도 이것은 벌서 定說로, 더 疑心할 餘地가 없는 줄로 아나,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여기에는 아직 좀 더 硏究할 餘地가 있는 듯하다.
발굴 유지(遺址)는 다소 언덕 모양을 형성한 곳에 있는바, 거기에는 성벽의 유지가 있었다 처음 발굴시에는 이 성벽을 상층문화에 속하는 것인 줄로 알었으나, 제2차 발굴 이후 이것은 하층문화에 속하는 것이리라고, 발굴 당사자들은 추측한다. 이 추측에는 일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장에 못 가본 내게는 서적을 통한 보도로만은 물론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 문화에 목유문화의 영향이 많은 것을 보아, 침습하는 목유민에게 대한 방비로 성벽을 축성한 것은 당시 농민의 당연히 할 일이었다. 그러기에 성지도 바로 언덕 위에 있다.
쪽수▶P196-2發掘 遺址는 多少 丘狀을 形成한 곳에 있는바, 거기에는 城壁의 遺址가 있었다 처음 發掘時에는 이 城壁을 上層文化에 屬하는 것인 줄로 알었으나, 第二次 發掘 以後 이것은 下層文化에 屬하는 것이리라고, 發掘 當事者들은 推測한다. 이 推測에는 一義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現場에 못 가본 내게는 書籍을 通한 報道로만은 勿論 判斷할 能力이 없다. 그러나 이 文化에 牧遊文化의 影響이 많은 것을 보아, 侵襲하는 牧遊民에게 對한 防備로 城壁을 築成한 것은 當時 農民의 當然히 할 일이었다. 그러기에 城址도 바로 丘上에 있다.
성자애의 흑도문화층은 지방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양 소둔촌의 흑도층과 합치가 된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문화층이 발견되자, 중국 학자들은 은상문화의 기원을 바로 이 문화에 소급시켰다. 그런데 동양의 흑도문화는 다시 안양에서 소둔촌의 은허와 서로 거리가 얼마 안 되는 곳, 후강이라는 지점에서 (역시 언덕 위에서) 또 발견되었다. 후강의 발굴에 의하여 앙소기에서 소둔기까지의 연대의 선후관계(Chronologische Re henfolge)를 측정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후강에서도 성벽이 발견되었는바, 여기서는 이것이 흑도문화에 속하는 것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하다. 현대문주33▶후강에서 측정한 문화연대의 선후관계는 소둔에 있어서도 적용되는데, 이제 여기서 성자애 발굴보고 중의 표식을 전재하건대,[a 33]
상층 소둔문화 회도, 기타유물, 동우(同于)은허.
중층 후강문화 흑도, 기타유물, 동우성자애.
하층 앙소문화 채도, 기타유물, 동우앙소村.
다시 말하면, 연대상의 선후관계로는 다음과 같은 순서이다.
채도→흑도→회도
쪽수▶P196-3城子崖의 黑陶文化層은 地方的 差異가 있음에도 不拘하고, 安陽 小屯村의 黑陶층과 合致가 된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文化層이 發見되자, 中國 學者들은 殷商文化의 起源을 바루 이 文化에 遡及시켰다. 그런데 同樣의 黑陶文化는 다시 安陽에서 小屯村의 殷墟와 相距하기 얼마 안 되는 곳, 後岡이라는 地點에서 (역시 丘上에서) 또 發見되었다. 後岡의 發掘에 依하야 仰韶期에서 小屯期까지의 年代의 先後關係(Chronologische Re henfolge)를 測定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後岡에서도 城壁이 發見되었는바, 여기서는 이것이 黑陶文化에 屬하는 것은 더 疑心할 餘地가 없는 듯하다. 원문주33▶後岡에서 測定한 文化年代의 先後關係는 小屯에 있어서도 摘用되는데, 이제 여기서 城子崖 發掘報告 中의 表式을 轉載하건대,[33]
上層 小屯文化 灰陶, 其他遺物, 同于殷墟.
中層 後岡文化 黑陶, 其他遺物, 同于城子崖.
下層 仰韶文化 彩陶, 其他遺物, 同于仰韶村.
다시 말하면, 年代上의 先後關係로는 如左의 順序이다.
彩陶→黑陶→灰陶
지층적으로 보건대 그 지층이 서로 교착되여 판단이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정당히 청산하고 보면, 그것은 결국 문화층과 대체로 합치가 된다. 현대문주34▶이 지층의 형성은 인간 문화활동의 결과인 까닭이다. 이제 양사영(梁思永)씨의 보고에 의하건대, 동 지층의 상상도는 아래 그림과 같다.[a 34]
쪽수▶P196-4地層的으로 보건대 그 地層이 서로 交錯되여 判斷이 困難함에도 不拘하고 正當히 淸算하고 보면, 그것은 結局 ▶P197-1文化層과 大體로 合致가 된다. 원문주34▶이 地層의 形成은 人間 文化活動의 結果인 까닭이다. 이제 梁思永氏의 報告에 依하건대, 同 地層의 想像圖는 下圖와 같다.[34]
쪽수▶P197-2
도유호 중도문1-2.png
쪽수▶P197-2
도유호 중도문1-2.png
이 흑도문화와 관련하여 중국 학자들이나, 또는 미국 학자 크릴씨 등은 동부 혹은 동북부에 있는 어떤 문화중심지를 상상하며 거기서 중국의 고급문화 즉 문명이 출발하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동부 혹은 동북부에서 온(이렇게 그들은 주장한다) 이 흑도문화가 중화문명의 시초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 주장의 논리적 근거란, 即 흑도문화와 은상문화와는 발생적 관련(Genetischer Zusammenhang)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하여 그들은, 은상문화의 가장 중요한 규범인 복골의 습속은 더 고풍적 형태로, 흑도문화에도 출현할 뿐 아니라 상문화층은 흑도문화층에 직접 연속한다는 것을 고조한다.
쪽수▶P197-3이 黑陶文化와 關聯하야 中國 學者들이나, 또는 米國 學者 크리-ㄹ氏 等은 東部 或은 東北部에 있는 어떤 文化中心地를 想像하며 거기서 中國의 高級文化 即 文明이 出發하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東部 或은 東北部에서 온(이렇게 그들은 主張한다) 이 黑陶文化가 中華文明의 始初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 主張의 論理的 根據란, 即 黑陶文化와 殷商文化와는 發生的 關聯(Genetischer Zusammenhang)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關하야 그들은, 殷商文化의 가장 重要한 規範인 骨卜의 習俗은 더 古風的 形態로, 黑陶文化에도 出現할 뿐의라 商文化層은 黑陶文化層에 直接 連續한다는 것을 高調한다.
흑도문화가 동방 또는 북방에서 왔다는 것은 아직 證明된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당분간 우리는 이 주장만은 어느 정도까지 채용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 흑도문화에서 복골이 보인다고, 그것이 상문화의 직접 선구자라는 이유는 없다. 슬라빅(A. Slawik)군은, 흑도문화 중의 복골제는 그 기원이 사실 은상문화의 영향에 소급될 수가 있다고 하는바, 그것은 당연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도문화의 복골제가 상묺雫의 것보다 더 오래다고 하자. 그랬대야, 이상의 여러 학자의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거기서 흑도문화는 은상문화의 혼합적 구성에 있어 오직 한 요소가 될 수가 있었을 뿐이다.
쪽수▶P197-3黑陶文化가 東方 又는 北方에서 왔다는 것은 아직 證明된 事實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當分間 우리는 이 主張만은 어느 程度까지 採用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 黑陶文化에서 卜骨이 뵈인다고, 그것이 商文化의 直接 先驅者라는 理由는 없다. 「슬라ᅄᅵᆨ」(A. Slawik)君은, 黑陶文化 中의 骨卜制는 그 起源이 事實 殷商文化의 影響에 遡及될 수가 있다고 하는바, 그것은 當然한 主張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黑陶文化의 卜骨제가 상묺雫의 것보다 더 오래다고 하자. 그랬대야, 以上의 諸學者의 主張은 別로 根▶P198-1據가 없는 것이다. 거기서 黑陶文化는 殷商文化의 混合的 構成에 있어 오직 一要素가 될 수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일찍이 연구보고 당시에 흑도문화의 성벽의 존재를 들어 거기에 벌써 도시문화적 단서가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도시문화라고 할 수는 없고, 도시문화는 상대에 이르러 비로소 작된 것을 지적하였었다. 성벽은 유럽의 농촌문화에도 있은 예가 많은 것으로 이것만으로는 도시문화의 규범은 물론 못 된다. 비록 그러나 흑도문화(후강문화)의 이 성벽은 목유문화, 황원(荒原)문화의 파급과 관련된 것을 보았으매, 나는 그때 그 주장을 했던 것이다.
쪽수▶P198-2나는 일즉이 硏究報告 當時에 黑陶文化의 城壁의 存在를 들어 거기에 벌서 都市文化的 端緖가 뵈는 것이라고 主張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都市문화라고 할 수는 없고, 都市文化는 商代에 이르러 비로소 始作된 것을 指摘하였었다. 城壁은 歐羅巴의 農村文化에도 있은 例가 많은 것으로 이것만으로는 都市文化의 規範은 勿論 못 된다. 비록 그러나 黑陶文化(後岡文化)의 이 城壁은 牧遊文化, 荒原文化의 波及과 關聯된 것을 보았으매, 나는 그때 그 主張을 했든 것이다.
중국에 목유문화의 영향이 좀 확연히 보이는 것은 이 후강문화에 이르러 비로소 작된다. 채도문화에도 축우가 있었던 것은 이상에서 이미 본 바이다. 그러나 그것은 농촌문화의 범위를 벗어 못 난 것이다. 그러나 이 후강문화, 흑도문화에 이르러는 저골(猪骨)과 구골(狗骨)을 이어 마골과 우골이 많이 출토되었다. 현대문주35▶즉 우마의 뼈는 제2위를 점령한다.[a 35]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농촌문화를 경유하여서만의 우마 사양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직접 중앙아시아 내지 그 이동에서 출발한 황원문화(Septpenkultur), 즉 전투적 목유문화의 영향이 보이는 듯하다. 여기에 관하여 복골제에 좀 더 언급하기로 하자.
쪽수▶P198-3中國에 牧遊文化의 影響이 좀 確然히 뵈는 것은 이 後岡文化에 이르러 비로소 始作된다. 彩陶문화에도 畜牛가 있었든 것은 以上에서 이미 본 바이다. 그러나 그것은 農村文化의 範圍를 벗어 못 난 것이다. 그러나 이 後岡文化, 黑陶文化에 이르러는 猪骨과 狗骨을 次하야 馬骨과 牛骨이 많이 出土되었다. 원문주35▶即 牛馬의 骨은 第二位를 占領한다.[35] 그런데 이것은 單히 農村文化를 經由하여서만의 牛馬 飼養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直接 中央亞細亞 乃至 그 以東에서 出發한 荒原文化(Septpenkultur), 即 戰鬪的 牧遊文化의 影響이 뵈이는 듯하다. 여기에 關하야 骨卜制에 좀 더 言及하기로 하자.
크릴씨는 라슨(Larson)씨의 보도에 의하여, 현재에 몽고족 중에는 복골의 습속이 있는 예를 지적하는바, 그것은 남대 및 흑도문화의 그것에 근사한 것이라고 한다. 아프리카에 귀복(龜卜)이 있다는 소식은 웨일리씨(Arthur Waley)의 저서를 통하여도 나는 또 들었다. 이제 동작빈(董作賓)씨의 연구결과를 듣건대 요사 서하전에는
以艾灼羊脾骨
이라고 쓰여있으니, 그것은 당시 중앙아시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오, 또 고대 일본에 관하여 후한서 동이전에는
倭灼骨以卜, 下用決吉凶
이라고 쓰여있다. 현대문주36▶대마도에 현재도 동일한 풍습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a 36] 도서국의 이 풍습은 물론 대륙에서 온 것일 것이다. 이 복골귀복(卜骨龜卜)의 풍습은 나의 생각에 의하건대 샤머니즘(Shamanism)과 퍽 관련이 깊은 듯한대, 샤머니즘도 그것이 비록 남방 모권족 간에서 기원된 가능성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중앙아시아 및 그 이동의 목유족이나, 또는 북극족 간에 퍽 성행하는 것으로, 여기서 다시 남하하기 작한 것인 만큼, 이 귀복복골의 남하와 대개 동일한 경로를 밟어 전래한 듯하다. 이 여러 점을 들어보면 흑도문화의 복골제는 중앙아시아와의 문화관계를 전하는 것이다. 여하간 이 흑도문화는 농촌문화의 근저를 가졌으나, 거기에는 벌써 목유문화, 황원문화의 영향이 퍽 많다. 그런데 여기서 이 황원문화의 영향은 ‘정복’의 정치적 사실과 여하한 관계가 있었는가고 하면, 그것은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 여기에 벌써 원시적 정복국가의 형성이 가능하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결코 증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고학적 재료로는 그것은 하등 논리적 근거를 못 가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목유문화계의 종족이 여기서 바로 농민화하여 아직 무계급의 농촌문화만을 형성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쪽수▶P198-4「크리-ㄹ」氏는 「ᄙᅡ-슨」(Larson)氏의 報道에 依하야, 現在에 蒙古族 中에는 骨卜의 習俗이 있는 禮를 指摘하는바, 그것은 南代 及 黑陶文化의 그것에 近似한 것이라고 한다. 亞弗利加에 龜卜이 있다는 消息은 「웨일리」氏(Arthur Waley)의 著書를 通하여도 나는 또 들었다. 인제 董作賓氏의 硏究結果를 듣건대 遼史 西夏傳에는
以艾灼羊脾骨
이라고 씨여있으니, 그것은 當時 中央亞細亞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오, 또 古代 日本에 關하야 後漢書 東夷傳에는
倭灼骨以卜, 下用決吉凶
이라고 씨여있다. 원문주36▶對馬島에 現在도 同一한 風濕이 있다는 消息을 들었다고 한다.[36] 島嶼國의 이 風習은 勿論 大陸에서 온 것일 것이다. 이 骨卜龜卜의 風習은 나의 생각에 依하건대 「솨만이즘」(Shamanism)과 퍽 關聯이 ▶P199-1깊은 듯한대, 「솨만이즘」도 그것이 비록 南方 母權族 間에서 起源된 可能性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中央亞細亞 及 其 以東의 牧遊族이나, 又는 北極族 間에 퍽 盛行하는 것으로, 여기서 다시 南下하기 始作한 것인 만큼, 이 龜卜骨卜의 南下와 大槪 同一한 經路를 밟어 傳來한 듯하다. 이 諸點을 들어보면 黑陶文化의 骨卜制는 中央亞細亞와의 文化關係를 傳하는 것이다. 如何間 이 黑陶文化는 農村文化의 根底를 가졌으나, 거기에는 벌서 牧遊文化, 荒原文化의 影響이 퍽 많다. 그런데 여기서 이 荒原文化의 影響은 「征服」의 政治的 事實과 如何한 關係가 있었는가고 하면,, 그것은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 여기에 벌서 原始的 征服國家의 形成이 可能하였다고 主張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決코 證明이 可能한 것은 아니다. 考古學的 材料로는 그것은 何等 論理的 根據를 못 가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牧遊文化系의 種族이 여기서 바루 農民화하야 아직 武階級의 農村文化만을 形成하였을 可能性도 充分히 있는 것이다.
흑도문화의 본질은 대개 이상에 기술한 바와 같은 바, 상문화는 이 흑도문화의 단순한 연장이 아닌 것은 이제 다음 장에서 더 간파할 것이다.
쪽수▶P199-2黑陶文化의 本質은 大槪 以上에 奇術한 바와 같은 바, 商文化는 이 黑陶文化의 單純한 延長이 아닌 것은 인제 次章에서 더 看破할 것이다.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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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Egon v. Eickstedt: Rassenkunde und Rassengeschichte der Menschheit, Stuttgart 1934(1933).
    Hans Weinert: Entstehung der Menschenrassen, Stuttgart 1933.
    이 兩者 中 同個所의 頁數는 仔細히 記憶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한쓰·ᅄᅡ이네르트는 先史考古學의 便에는 처음부터 言及치 않기로 하얐으니, 그의 批評은 여기서는 그만두고 아익쉬테트에 關하야 좀 批判을 해보자. 以上의 著書 『人種學及人種史』는 只今 第二版이 訂正增補되야 配本으로 出版 中이나 나는 第一板밖에 못 닑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著者는 體質人類學 以外의 領域, 特히 先史考古學 方面을 퍽 參考하얏다. 그러나 그가 先史考古學에는 얼마나 門外漢인가는, 바로 이 杭工住家文化 問題에 있어서도 알 수가 있으니, 先史考古學의 豫備知識이 不足하였기에, 그는 또 歐羅巴 鐵器時代의 『할쉬탙』文化(Hallstattkultur)의 先驅者는 이 杭工住家文化人이요, 이 杭工住家文化人이 後에 『할쉬탙』文化를 建設하얏다고 主張한다. 하고 보면 그가 杭工住家文化人이 東方에서 온 異人種이였든 것을 몰은 것도 無理는 아니다. 아익쉬텥 敎授는 또 同 著書 中에서 그의 獨特한 所謂 『生物動態』(Biodynamik)의 理論을 展開하얐다. 이 理論이 人類學界에 있어서, 當時 一大 『쎈쎄이슌』이였음은 事實이나, 그러나 이 理論은 何等 根據가 없는 것이니, 첫재 그는 文化關係와 體質關係와의 區分을 못하고, 兩者를 混同한 것이 그 誤謬의 最大原因이였든 것이다.
  2. Vg: Hans We nert: a. s. 9. S. 12.
  3. 現今 發掘된 猿人 中 가장 原始的인 것은 『쟈바』島의 猿人 Pithecanthropus erectus인바, ᅄᅡ이네르트 敎授는, 그 中에도, 一九三七年 夏, 쾨-닉쓰ᅄᅡᆯ뜨 博士(Koenigswald)의 손을 거쳐 알게 된 第二『쟈바』 猿人 Pithecanthropus erectusⅡ은, 一八九二年 뚜보이스 敎授(Eugen Dubois)가 發見한 第一쟈바 猿人 Pithecanthropus erectusⅠ보다도 더 原始的이요, 또 所謂 『밋싱ᄙᅵᇰ크』(Missing link)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그가 『움솨우』誌(Umschau, 4. Heft, 23. Januar 1933)에 發表한 論文 中에서 論하얐으나, 亦是 同年 即 一九三八年에 發表한 前揭書에는 第一『쟈바』人과 第二『쟈바』人과의 發展階段的 差異에 關하야는 何等 明言이 없다.…
    最原始的 頭蓋骨 問題에 關하야, 現在 『支那猿人』 處理의 當事者 ᅄᅡ이덴라이히 敎授는, L地點의 第二頭蓋骨(Skull Ⅱ of Locus L)을 『쟈바』의 『피테칸트로푸쓰』와 比較하며 前者 便이 더 原始的을을 論한다. 即 그는 最原始的 階段을 支那猿人 中에 찾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注意할 것은, 支那猿人 中의 問題의 이 L地點 第二頭蓋骨은 女子의 것인듯하다는 것이다. 萬若 女子라면, F. Weidenreich 敎授가 腦匣(brain case)의 腦容量能力을 『피테』의 그것과 比較하는 데에는 左袒키 어려운 點이 있지 않을가? 더구나 그 中央弓形線(Median sagittal line) 即 頭額의 側面的 輪郭이 『피테』에 比하야 더 發展한 階段을 呈하는 것이 ᅄᅡ이덴라이히 敎授의 說 의 弱點을 暴露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人類學者가 아니니, 나의 이 拙見은 勿論 問題가 않 된다.
    Franz Weidenreich: “The relation of Sinanthropus Pekinensis to Pithecanthropus, Javanthropus and Rhodesian Man” in “the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Vol. LⅩⅦ, January-June 1937.…
    如何間, 『밋싱ᄙᅵᇰ크』는 아직 發見되지 못하얐으나, 『ᅈᅡᅄᅡ』猿人은 『밋싱ᄙᅵᇰ크』를 떠나기 얼마 않된다.
  4. 헤-겔과 헤르더의 關係에 關하야는 震檀學報 第八卷에 發表한 拙稿 Konfuzius und Laotse in Lichte der chinesischen Sozialgeschichte 中에서도 조금 言及한 바가 있다.(거기에는 誤植이 퍽 많는 바, 그것은 勿論 나의 잘못은 아니다. 그 대신 거기서 犯한 나의 過失은, 무엇보다도 몬저, 거기서 내가, 漢末 天下를 騷動시킨 張角 一派의 黃巾亂에 言及치 않은 것이다. 讀者의 寬大한 諒解를 비는 바이다.)
  5. Moritz Hoernes: Natur- und Urgeschichte des Menschen, 2 Bde, Wien u. Leipzig 1909.
  6. W. Schmidt u. W. Koppers: Völker und Kulturen(Der Mensch aller Zeiten Ⅲ. Bd.), Regensburg 1924.
    F. Graebner: “Ethnologie” in “Kultur der Gegenwart” hrsg. von P. Hinneberg, 3. Teil, 5. Abteilung(Anthropologie), Leipzig u. Berlin 1923.
    R. Bleichsteiner: “Zum eurasiatischen Tierstil” in “Berichte des Asien Arbeitskreises”, Heft 2, Juni 1939(Wien u. Peking), S. 35.
  7. R. Heine-Geldern: “Urheimat und früheste Wanderungen der Austronesier” in “Anthropos”, ⅩⅩⅦ(1934).
  8. 支那猿人의 發展階段的 差異에 關하여는 H. ᅄᅡ이네르트 敎授의 意見에 依한다. Weinert: Entstehung der Menschenrassen, S. 47 ff
  9. H. G. Creel: The Birth of China, London 1936, P 41.
  10. W. Schmidt: “The oldest culture circle in China” in “Monumenta Serica,” Journal of Oriental Studies of the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華裔學志), VoⅠ, 1935.
    아직 支那猿人의 軀幹部가 全然 出土되기 前에, 松本信廣氏는 그 理由를 물었고(「古代文化論」, 第七頁), 또 이 質問의 對答에 相當한 것으로 쉬밑 師는 同 論文 中에서 如左히 말하였다. “It has been astonishing that up to now only skulls and jaw-bones have been found at Chou-k’ou-tien. This reminds us of the custom of the Audamauese Pygmies and the Kurnai (and Kulin of sontheast Australia, of preserving the skull and jaw-bone as a remembrance of the dead and carrying these on their necks.”(P.9).
    그러나 그 後 支那猿人의 大腿骨(femora)及 上膊骨(humeri)이 出土되였다. Vgl. Franz Weidenreich: “Discovery of the Femur and the Humerus of Sinanthropus Pekinensis” in “Nature,” Vol.141, April 1938.
  11. H. Weinert: Entstehung usw., S 53, 63 etc.
  12. 이 所謂 櫛目紋土器(Kammkeramik)는 北歐羅巴에도 왓는 바, 이것을 kammkeramishe Kultur 或은 Wohnplatzkultur라고 한다. 멩긴 敎授가 이것을 東方文化系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當然한 主張인 바, 피틔오늬(R. Pittioni)氏는 여기에 反對하야, 北歐에 이것을 가저온 族은 「인도게르만」族이라고 하며, 그는 이것이 東으로는 멀니 日本에까지 가있는 것을 몰으는 모양이다. 내게는 이 櫛陶와 「인도게르만」族의 移動과는 何等 關係가 있어 뵈지 않는다.(R. Pittioni: “Die Uraltertumskunde zur Frage der indogermanischen Urheimat” in “Wiener Beiträge zur Kulturgeschichte und Linguistik,” Jahrgang Ⅳ, 1936. Derselbe; Urgeschichte -allgemeine Urgeschichte und Urgeschichte österreichs, Leipzig u. Wien, 1937, S. 55.)
    櫛目文土器 或은 櫛陶에 關하야 大場磐雄氏는 그의 「考古學」(現代哲學全集 第十六卷, 昭和十年, 五三頁) 中에서, 日本에 이것이 傳來되엿는지는 아직 未定이라고 하나, 大山柏氏가 經營하는 「史前學雜誌」 中에서 나는 完全히 櫛目文土器의 紋인 것의 寫眞을 보았으며, 岡正雄氏의 말에 依하야도 이 櫛陶는 日本에 왓다고 한다. 이것은 朝鮮에도 傳來한 것이나, 아직 實物이고 寫眞이고 나는 못 보앗다.
  13. O. Menghin: Weltgeschichte der Steinzeit, Wien 1931, S. 274 ff. Heine-Geldern: “Urheimat usw.” Mattenkeramik를 中國 學者들은 繩紋陶器라고 하는 바, 이것은 日本語上의 術語를 輸入한 것이다. 그런대 이것을 日本 石器時代의 所謂 繩紋土器와는 混同해서는 않 될 것이겠다. 나는 아직 日本考學에는 도모지 門外漢이니 아모 容喙할 資格은 없으나, 日本의 繩紋土器라는 것은 봄애 西洋北歐 乃至 中歐의 所謂 Schnurkeramki의 紋模樣으로 된 것이 많다. 이것만을 繩紋土器라고 하는지, 거기에는 Mattenkeramik도 包含되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原來는 Mattenkeramik만을 意味했는지를 나는 잘 몰으겠다. 그런대 萬一 兩者를 混同해서 모다 蓆紋土器라고 한다면, 그것은 않될 것이겠다. 如何間 내가 여기서 蓆紋土器라고 한다면, 그것은 獨逸語의 Mattenkeramik의 譯이다.
  14. F. Graebner: Ethnologie, S. 520.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15. N. Matsumoto: Le japonais et les langues
    austroasiatiques, paris 1923.
    松本信廣 著 「古代文化論」 東京, 昭和七年. 松本氏 及 그의 先師 프씰루스키(Przyluski)氏는, 쉬밑 師의 用語 「오-스트리」語 代身에 「오-스트로아지아」語라는 用語를 使用하자고 하나, 나는 쉬밑 師의 用語 便이 낫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하이네·껠데언 敎授가 「오-스트로아지아」族과는 原來는 系統이 全然 달은 것이라고 主張함을 봄애, 그것을 더욱이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야 도유호 중도문1-3.png로 하는 것이 正當하다고 생각한다.
    하이네·껠데언 博士는 「오-스트로아지아」語와 「오-스트로네지아」語와는 同一 語源에서 派生한 것이 아니라, 相互 相異한 兩 語族이 其後의 混合에 依하야 (「오아」語가 「오네」語化를 하였거나, 又는 「오네」語가 「오아」語化를 하야 相似하게 된 것인 듯하다고 한다. 그의 主張에는 가장 그럴듯한 點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아」語와 「오네」語가 只今에 와서는 同一語系에 屬하는 事實에 抵觸되는 바는 조금도 없다. 따라 이 兩者를 「오-스트리」語 下에 取扱함은 가장 正當하다고 생각한다.(Heine-Geldern; a. a. O)
  16. W. Schmidt; Die Sprachfamilien und Sprachenkreise der Erde(Kulturgesichtliche Biblithek Ⅰ. Reihe 5). Heidelberg 1926, S. 148, 524. 「쉬」 師의 말이, 여기에 關하야 近似한 意見은 발서 트롬벳틔(A. Trombetti)氏가 發表하였다고 한다. 「트」氏의 代表作이라고 할 Elementi diGlottologin, Bologna 1923를 읽어볼 次로 圖書館에서 빌어는 왔으나 伊太利語라 내게는 難解이다. 그러나 伊太利語 아시는 분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朝鮮語에 「오-스트리」語素가 있는 例를 들어보건대, 「女」를 朝鮮 方言으로는 「에미내」, 日本古語(古事記)로는 おみな(おんな의 前身), 「부루」語(Buru)로는 emhinn, vina. 「다약」語(Dayak)로는 habinai 等等. 「兄」 「年長」 等을, 朝鮮語로는 「어니」, 日本語로는 「アニ」(兄), 琉球語로는 「안이」(an’i)「안오」(an’o)(兄), 安南語로는 anh(兄), 「몬」語(mon)로는 anai(叔), 等等. 太陽을 「호카」語로는 alla, orn, la. 「폴리네지아」語로는 ra, 「인도네지아」語로는 「날」(日)을 lau, 朝鮮語의 「날」은 「라」나 「ᄙᅡ」의 訛이니, l, r의 始音(Anlaut)이 없는 朝鮮語에 있어서는 그것은 n으로 變하였고(母音ㅏ와 合함애), 또 그리면서도 單綴의 獨立的 發音을 하는 때 l, r은 終音(Anslaut)으로 發音되니, 거기서 「ᄙᅡ」나 「라」는 「날」이 되고 만 것이다. 諺文의 라, 랴, 러, 려를 날, 냐, 널, 녀, 로 읽는 것과 同一한 例이다.… 朝鮮語에 이렇게, 「오-스트리」語素가 있는 것은 事實이나, 그것은 日本語에 比하면 퍽 적은 듯하다.
    인제 「말」에 關한 말썽은 그만하고, 純文化現象에서 二三의 母權文化系統의 素(言語로는 「오-스트리」語와 關聯되는)를 들어보자. 朝鮮에는 只今도 사람이 죽으면 埋葬하였다가, 다시 파내서 改葬하는 風俗이 있다. 그것도 母權文化系의 頭骨 崇拜에 있어, 사람이 죽으면 埋葬하였다가, 內部가 腐蝕된 後에 白骨을 파내서, 거기서 頭骨만을 집어내어, 잘 닦어서 걷어두는 「蠻風」의 遺風인 것이다. 「文明」을 하였으니 頭骨 崇拜는 없어젔으나, 한 번 묻었든 죽엄을 파내는 버릇은 只今도 남어있다. 또 朝鮮의 假面舞란, 그 由來는 母權文化素에서 盛行하는, 南子들의 「秘密結社」에 있어, 그 儀式時에 行하는 假面舞에 있는 것이다. 또는 朝鮮 下流社會에서는 只今도 盛行하는 奉仕婚, 賣買婚의 風習도 그 由來는 母權文化素에 있는 것이다. 西洋人의 極度로 發達한 現代의 文明 中에도 가만이 처다보면 이런 「蠻風」의 遺風은 수둑한 것이다.
  17. Schmidt und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604
  18. Schmidt u. Koppers: a. a. O. 여기서 「쉬밑」 神父는 말하기를, “…vielleicht sind aber die vierhundert quasi-exogamen Familiennamen Chinas noch letzte Uberbleibsel alter Totemclans;…”(S. 231)
    여기서 quasi-exogam이란 用語를 쓰나, 그것은 不當한 主張이다. Exogam의 한 字만 써야 當然한 것이다. 그것은 쉬밑 師가 中國 乃至 極東 一般의 家族 及 氏族制度를 잘 몰으는 까닭이다. 또 여기에 四百氏姓이라는 것도 그 出處는 나는 몰으겠다. 如何間 그것은그렇다고 하더라도, 同書(二三〇頁 以下)에서 中國에 「토템이즘」 形跡이 이 姓氏制 以外에는 없는 것을 指摘한 것은 當然하다.
    松本, 「古代文化論」 第三章.
    小川琢治, 「支那歷史地理硏究」, 東京及京都, 昭和三年 第六章.
    Henri Maspero: “Légendes mythologiques dans le Chou King” in “Journal Asiatique” publié par la Socéité Asiatique, Paris Jan.-Mars 1924(Tom CCⅣ). 「마스뻬로」氏가 云謂하는 太陽神話에는 「토템」神話性이 퍽 薄弱해 보인다. (ainsi le-deux courses du soleil étaient également jalouées par les Hi et les Ho, saconrse annuelle et sa conrse journaliére, et le soloil ne ponvant se tromper. (P. 46)
  19. J.G. Andersson: “An early Chinese Culture” in “Bulletin of the Geological Survey of China,” No. 5. Ⅰ. 1923.
    小川琢治, 「支那歷史地理研究續集,」 昭和四年, 四三一頁
    O. Franke: “Die prähistorischen Funde in Nordchina und die älteste chinesische Geschichte,” in “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 zu Berlin,” ⅩⅩⅨ, 1926.
    O. Menghin: “Die ethnische Stellung der ostbandkeramischen Kulturen, Heittiter und Tocharer,” in “Hruschewski-Festschrift,” Kiew 1928. Derselbe; Weltgeschichte usw, S. 556.
  20. Vgl. F. Kern: Die Anfänge der Weltgeschichte, Leipzig u. Berlin 1933.
  21. Menghin; Weltgeschichte usw. Derselbe; Geist und Blut, Wien 1934.
    小川, 前揭書
  22.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507, 519
    牛角의 半月形이 太陰 崇拜의 母權社會에 있어 神聖化된 것은, 舊石器時代의 美術品 中에서도 認識할 수가 있는바 歐羅巴 舊石器期의 刃器文化 「오린냑」文化(Aurignacien) 中期에 뵈이는 半月形의 牛角을 든 女人의 石灰石 浮彫(佛蘭西 도르돈州 로셀Laussel 出土)는 그 好例이다.(第一圖)
    第一圖, 南佛로쎈 洞屈의 女神像浮彫(오린냑文化).

    「오린냑」文化는 狩獵을 主로 하는 文化였으나(토템文化인 듯), 거기에는 발서 拳楔文化, 母權的 舊栽培文化의 影響이 많이 보이니, 其外에도 많이 뵈이는 女神像의 彫刻들은 모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民俗學上에서 「쉬밀」 及 「콥퍼쓰」 兩氏가 舊母權文化와 「토템」文化가 발서 일즉이 混合한 事實을 云謂하는 것은 이 考古學的 事實에 가장 符合되는 것이다. 女神像은 우리가 다 알듯이 「오르도쓰」에서도 發見되였다. 其外 西伯利亞 「말타」에서도 發見되었다. 東方의 舊石器時代 後期 即 「中石器時代」의 刃器文化는 舊石器時代 前期의 것 即 「므스떼르」文化(Moustérien)와 確然한 區別이 없이 過渡的 形態로 出土되는 바, 여기서 學者들은 一般이, 이것은 아직 歐羅巴에 各其 區別되야 傳來하기 前의 本鄕的 現象이라고 하는바, 나도 그 圖版들을 본 맨 처음의 印象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누가나 直觀的으로 感하게 될 것이다. 그런대 여기에 關하야 注意할 것은 東方에는 女神像이 좀 더 일즉이 나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舊石器時代의 刃器文化에 잇어, 前期에서 后期로의 發展은 事實은, 바로 拳楔文化(斧器文化)의 外來的 影響을 받아 된 것일런지도 몰으겟다. 여기서 또 하나 더 注意할 것은 萬若 그렇다면 「토템」主義란 것도, 原來는 母權制와 아조 關係가 없엇든 것(그렙너, 쉬밑의 콥퍼쓰 主張)이 아니라, 事實은 이 舊母權文化의 影響을 받어 된 것일런지도 몰으겟다. 「토템」文化의 對外婚制에는 舊母權文化의 兩級制(對外婚的)와 多少 共通되는 바가 있다. 如何間 這間의 關係는 참말 알기가 어렵다. 「토템」文化의 起源에 關하야 問題가 가장 複雜하야지는 것은, 如何間, 발서 가장 녯날에 이렇게 文化가 混同된 結果인바 이것으로 보아도, 나는 栽培經濟 便이 牧畜經濟보다 퍽 以前에 起源된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太陰 崇拜에서 出發한 牛의 崇拜는 農村文化 乃至는 都市文化期에 일을어도 前亞細亞 及 其附近의 諸族의 宗敎上에는 大役割을 演했던 것이다. 여기에 關하야는 Vgl. F. Kern: “Die Welt worein die Griechen traten” in “Anthropos” Jhrg. 1929 S. 167-219, Jahrg. 1930 S. 195-207, S. 793-799.
    「콥퍼쓰」가 推想하듯이 月崇拜의 宗敎思想에서 畜牛에까지 展開하얐기는(牧遊文化의 影響을 받아) 가장 可能한 事이다. 그러나, 암만 보아야, 畜牛는 母權的 栽培文化系에서 始作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母權的 文化의 創作으로 했어는 너모나 큰 文化現象일 뿐 外라, 어느 點으로 보던지, 民俗學 及 考古學的 事實에 그렇게 잘 合致되지 않는다. 牛를 神聖視한 남어지, 그들은 人力으로 牛를 支配할 勇氣는 못 내였을 것이다.
  23. Vgl. Heine-Geldern: a. a. O. S. 594. F. Kern: a. a. O. S. 86.
  24. “It becomes difficult therefore to avoid the conclussion that the Sha Kuo T'un and Yang Shao people-conformed to a type essentially similar to that represented by the present day North; Chinese with whom comparison as been made.” (Black: “Sha Kuo T'un and Yang Shao Human Skeletal Remains,” in “Palaeontologia Sinica,” Series D, Vol 1 Fascicle 3. Peking 1925. P.98) 이것은 내가 同 論文을 읽을 때 抄記한 「노-트」에서 再記하는 바, 「크리-ㄹ」氏의 著書 中의 參考書欄에 있는 「쁠랙」氏의 論文題目과 比較한즉, 그 題目이 내 것과는 달으다. 내 것은 「쁠랙」氏 論文 中의 第三節의 題일런지도 몰으겠다. 내 「노-트」에는 ⅲ라는 表가 씨여있다. 如何間 參照해보기를 바란다.
  25. “Es ist unverkennbar, diss die Spezialisierung der Siniden im Vergleich mit den Tungiden in Richtung des europiden Typus geht. Das zeigen Gestalt und Körperbau, wie der relativ holie Nasenrüken unde die Abschwächung aller rassentypisch mongoliden Merkmale.” (Eickstedt: Rassenkunde usw. S. 200)
  26. 橋本增吉, 「東洋古代史」(平凡社, 世界歷史大系 第三卷) 東京, 昭和十一年, 九二頁
  27. O. Franke: a. a. O.
  28. Gustav Haloun: Seit wann kannten die Chinesen die Tochaner oder Indogermanen überhaupt, Ⅰ. Teil, Leipzig 1925. Derselbe: “Zur Üe-tsï-Frage” in “Zeitschrift der Deutschen Morgenländischen Gesellschaft” hrsg. von P. Kahle, Bd. 91(Neue Folge Bd. 16) Leipzig 1937. 「할루-ㄴ」 敎授는, 一九三七年 發表한 後者의 論文 中에서 「토하라」를 月氏에 比定하나, 나는 그 理論에는 암만 해야 左袒할 수가 없다. 그는 거기서 또 大夏가 發音上으로도 「토하라」에 近似치 않다는 것을 主張하기 爲하야, 「大」의 古音은 d‘âd나 t’âd였고, 「夏」의 古音은, (「카-ㄹ그렌」 敎授의 g’å보다도 一步 더 나가) zgå였다고 한다. 따라서 D’âd(Tâ’d)-zgå는 Тохорой(Tócharoi, Tóxaroi)에는 比定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全然 臆說인 것이니, 「漢」은 Xan으로 쓰고, 「黃」은 Xuan으로 쓰는 그가 「夏」만은 何等 그 古音을 zgå로 할냐고 하는가? 「夏」는 古音이 암만 해야 cha(獨逸語音)나 Xa였든 것이다. 또 「大」字의 音도 d의 終音이였었다는 것은 不當한 主張이다. …「할루-ㄴ」 敎授는 끝으로 「스키-트」(Skythen)와 「키메르」(Kimmerer)의 兩族을 드는 바, 이런 「인도게르만」系의 種族이 西北方에 왔든 것은 考古學的으로도 證明된 바이다.
  29. 徐中舒, 「再論小屯與仰韶」(安陽發掘報告, 第四期).
  30. 彩陶를 「안데르쏜」氏는 新石器時代 或은 金石倂用時代의 것이라 하였다. 日本 學者들은 여기서 다시 이것을 金石倂用時代의 것이라고만 하는 傾向이 있다. 中國 學者들에 左袒하야, 나는 新石器時代의 것으로만 본다. 純石器時代에 外來의 金屬器가 가장 微微하게 조금 뵈이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으로 발서 金石竝用期를 云謂하는 것은 歐羅巴의 例를 보아도 가장 不當한 것이다.
  31. 中國考古報告集之一, 「城子崖」(山東歷城縣龍山鎭之黑陶文化之遺址), 南京, 民國二十三年.
    第二圖, 城子崖上層出土의 靑銅器(「城子崖」에서).
  32. 「城子崖」, 圖版第五十二比較.
    上層出土인 圖版第五十二, 第6의 畑形의 小刀와 仝第9의 「刀錢」(刀柄에 輪이 있는 것)은, 「미누씬스크」(Minusinsk)의 青銅刀와 함께, 歐羅巴 靑銅器時代 末期 「우르넨ᅋᅦᆯ드」文化(Urnenfelderkultur)를 聯想케 하는 바가 퍽 많다(第二圖). 이 等의 靑銅器形이 어대서 出發한 것인지는 몰으겠으나, 여기에 關하야 우리는, 「일리리아」族(Illyrer)의 言語가, 東部 인도게르만語인 所謂 「싸템」(Satem)語系에 屬하는 것에 注意할 必要가 있다. 鐵器時代의 「일리리아」族은 그 祖上이 발서, 이 「우르」文化時代의 東方과의 相互關係에 그 原因이 있음이나 아닐런지?
  33. 「城子崖」 九五頁.
  34. 梁思永, 後岡發掘小記(安陽發掘報告 第四期). 여기서 深灰土는 彩陶文化, 綠土는 黑陶文化, 淺灰土는 灰陶文化와 相對되는바, 나의 獨逸文 草稿 及 打字稿에는 淺灰土는 灰陶 及 白陶와 相對된다고 씨여있고, 또 鉛筆로 描寫한 圖面紙上에는 白陶文化라고만 씨여있다. 白陶 云云은 좀 未詳이다. 그러나 只今은 原文과 더 比校할 수는 없다. 따라서 比較는 讀者에게 맛긴다. 白陶의 文化系統은 퍽 不明한 것으로, 그것은 梅原末治 博士도 云謂한 바이다. 梅原末治, 「殷墟出土白色土器の研究」(東方文化學院京都硏究所硏究報告, 第一冊), 昭和七年. 六十頁以下及同書佛文概要第五頁參照.
  35. 城子崖 出土 獸骨에는 狗, 兎, 馬, 猪, 獐, 鹿, 麋鹿, 羊, 牛의 九種이 있다. 여기에 關하야 這九種 中, 除麋鹿一種只見於下文化層外, 其他九種皆上下兩文化層所共有內中以猪骨, 狗骨, 爲最多, 馬骨, 牛骨, 次之, 鹿骨, 羊骨又吹之, 兎骨只見三用塊.(「城子崖」 第九一頁)라고 씨여있다.
    여기서 兎馬猪의 羅典名에 sp. 라는 略字가 붙었으니, 馬는 Equus sp.로 되여있다. sp. 가 무었인지를 나는 몰으겠다. 이 獸骨의 檢査에 關하야는, 그 結果를 섯을 딸음이오, 그 結論의 理由에 關하야는 何等 說明이 없다. 그 判定을 그냥 採用하기는 多少 어려운 點이 많다. 더구나 馬에 있어서는 그것의 判定이 퍽 어려운 것으로 驢馬와 混同되는 境遇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驢馬 出現은 事實, 馬 以上으로 例外이겠고, 또 馬이면, 野生馬일 수는 없으니, 決局 家畜馬밖에 남는 것이 없다. 獸骨 中 猪骨狗骨이 많은 것은 新栽培文化의 影響이 가장 큰 것을 說明하는 것이다. 狗는 여기서 食用에 提供하기 爲하야 主로 飼養하였을 것이다. 食狗는 이 栽培文化의 産物이다. 食人 다음에 가는 母權的 栽培人의 「創作」(!)인 것이다.
  36. Creel: a. a. O., S. 185-186
    Arthur Waley: The way and its Power, 2nd edit., London 1936, P. 18 註二 中에는 다음과 같은 句가 있다. Tortoise-divination is also practised in Africa. See H. A. Junod: The Life of a S. African Tribe, 2nd edit. 1927, Ⅱ. 549.”…亞弗利加에 이런 風俗이 있다는 것은 朱芳圃氏의 「甲骨學商史編」 中에도 씨여있다. 董作賓, 「甲骨文研究的擴大」(安陽發掘報告, 第二期). 對馬島의 骨卜制에 關하야는 內藤虎次郞 博士의 著書 中에는 左記의 句節이 있다—「日本では近来まで對馬に於ては, 鹿の肩骨で占ふ方法が遺つて居りました.」(內藤, 「東洋文化史研究」, 東京及京都, 昭和十一年, 九-一〇頁)






현대문주


  1. Egon v. Eickstedt: Rassenkunde und Rassengeschichte der Menschheit, Stuttgart 1934(1933).
    Hans Weinert: Entstehung der Menschenrassen, Stuttgart 1933.
    이 양자 중 동개소의 쪽수는 자세히 기억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한스 바이너트는 선사고고학의 편에는 처음부터 언급치 않기로 하였으니, 그의 비평은 여기서는 그만두고 아이크슈테에 관하여 좀 비판을 해보자. 이상의 저서 『人種學及人種史』는 지금 제2판이 정정증보되야 배본으로 출판 중이나 나는 제1판밖에 못 읽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체질인류학 이외의 영역, 특히 선사고고학 방면을 퍽 참고하였다. 그러나 그가 선사고고학에는 얼마나 문외한인가는, 바로 이 항공주가문화 문제에 있어서도 알 수가 있으니, 선사고고학의 예비지식이 부족하였기에, 그는 또 유럽 철기시대의 할쉬탙문화(Hallstattkultur)의 선구자는 이 항공주가문화인이요, 이 항공주가문화인이 후에 할쉬탙문화를 건설하였다고 주장한다. 하고 보면 그가 항공주가문화인이 동방에서 온 이인종이였던 것을 모른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이크슈테 교수는 또 동 저서 중에서 그의 독특한 소위 ‘생물동태’(Biodynamik)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 이론이 인류학계에 있어서, 당시 일대 센세이션이였음은 사실이나, 그러나 이 이론은 하등 근거가 없는 것이니, 첫째 그는 문화관계와 체질관계와의 구분을 못하고, 양자를 혼동한 것이 그 오류의 최대원인이였던 것이다.
  2. Vg: Hans We nert: a. s. 9. S. 12.
  3. 현금 발굴된 원인 중 가장 원시적인 것은 자바섬의 원인(Pithecanthropus erectus)인바, 바이너트 교수는, 그 중에도, 1937년 여름, 쾨닉스발트 박사(Koenigswald)의 손을 거쳐 알게 된 제2자바원인(Pithecanthropus erectusⅡ)은, 1829년 두보이스 교수(Eugen Dubois)가 발견한 제1자바원인(Pithecanthropus erectusⅠ)보다도 더 원시적이요, 또 소위 ‘미싱링크’(Missing link)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그가 『움솨우』지(Umschau, 4. Heft, 23. Januar 1933)에 발표한 논문 중에서 논하였으나, 역시 동년 즉 1938년에 발표한 전게서에는 제1자바인과 제2자바인과의 발전계단적 차이에 관하여는 하등 명언이 없다.…
    최원시적 두개골 문제에 관하여, 현재 지나원인 처리의 당사자 바이덴라이히 교수는, L지점의 제2두개골(Skull Ⅱ of Locus L)을 자바의 피테칸트로푸스와 비교하며 전자 편이 더 원시적임을 논한다. 즉 그는 최원시적 계단을 지나원인 중에 찾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지나원인 중의 문제의 이 L지점 제2두개골은 여자의 것인듯하다는 것이다. 만약 여자라면, F. Weidenreich 교수가 뇌갑(腦匣, brain case)의 뇌용량능력을 피테의 그것과 비교하는 데에는 좌단(左袒)키 어려운 점이 있지 않을까? 더구나 그 중앙궁형선(Median sagittal line) 즉 두액(頭額)의 측면적 윤곽이 피테에 비하여 더 발전한 계단을 띠는 것이 바이덴라이히 교수의 설의 약점을 폭로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학자가 아니니, 나의 이 졸견은 물론 문제가 안 된다.
    Franz Weidenreich: “The relation of Sinanthropus Pekinensis to Pithecanthropus, Javanthropus and Rhodesian Man” in “the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Vol. LⅩⅦ, January-June 1937.…
    여하간, ’미싱링크‘는 아직 발견되지 못하얐으나, 자바원인은 ’미싱링크‘를 떠나기 얼마 안 된다.
  4. 헤겔과 헤르더의 관계에 관하여는 진단학보 제8권에 발표한 졸고 Konfuzius und Laotse in Lichte der chinesischen Sozialgeschichte 중에서도 조금 언급한 바가 있다.(거기에는 오식이 퍽 많는 바, 그것은 물론 나의 잘못은 아니다. 그 대신 거기서 범한 나의 과실은, 무엇보다도 먼저, 거기서 내가, 한말 천하를 소동시킨 장각 일파의 황건란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독자의 관대한 양해를 비는 바이다.)
  5. Moritz Hoernes: Natur- und Urgeschichte des Menschen, 2 Bde, Wien u. Leipzig 1909.
  6. W. Schmidt u. W. Koppers: Völker und Kulturen(Der Mensch aller Zeiten Ⅲ. Bd.), Regensburg 1924.
    F. Graebner: “Ethnologie” in “Kultur der Gegenwart” hrsg. von P. Hinneberg, 3. Teil, 5. Abteilung(Anthropologie), Leipzig u. Berlin 1923.
    R. Bleichsteiner: “Zum eurasiatischen Tierstil” in “Berichte des Asien Arbeitskreises”, Heft 2, Juni 1939(Wien u. Peking), S. 35.
  7. R. Heine-Geldern: “Urheimat und früheste Wanderungen der Austronesier” in “Anthropos”, ⅩⅩⅦ(1934).
  8. 지나원인의 발전계단적 차이에 관하여는 H. 바이너트 교수의 의견에 의한다. Weinert: Entstehung der Menschenrassen, S. 47 ff
  9. H. G. Creel: The Birth of China, London 1936, P 41.
  10. W. Schmidt: “The oldest culture circle in China” in “Monumenta Serica,” Journal of Oriental Studies of the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華裔學志), VoⅠ, 1935.
    아직 지나원인의 구간부(軀幹部)가 전연 출토되기 전에, 松本信廣氏는 그 이유를 물었고(「고대문화론」, 제7쪽), 또 이 질문의 대답에 상당한 것으로 슈미트 선생은 동 논문 중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It has been astonishing that up to now only skulls and jaw-bones have been found at Chou-k’ou-tien. This reminds us of the custom of the Audamauese Pygmies and the Kurnai (and Kulin of sontheast Australia, of preserving the skull and jaw-bone as a remembrance of the dead and carrying these on their necks.”(P.9).
    그러나 그 후 지나원인의 대퇴골(femora) 및 상박골(humeri)이 출토되었다. Vgl. Franz Weidenreich: “Discovery of the Femur and the Humerus of Sinanthropus Pekinensis” in “Nature,” Vol.141, April 1938.
  11. H. Weinert: Entstehung usw., S 53, 3 etc.
  12. 이 소위 즐목문토기(Kammkeramik)는 북유럽에도 왔는 바, 이것을 kammkeramishe Kultur 혹은 Wohnplatzkultur라고 한다. 멩힌 교수가 이것을 동방문화계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인 바, 피티오니(R. Pittioni)씨는 여기에 반대하여, 북유럽에 이것을 가져온 족은 인도게르만족이라고 하며, 그는 이것이 동으로는 멀리 일본에까지 가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내게는 이 즐도와 인도게르만족의 이동과는 하등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R. Pittioni: “Die Uraltertumskunde zur Frage der indogermanischen Urheimat” in “Wiener Beiträge zur Kulturgeschichte und Linguistik,” Jahrgang Ⅳ, 1936. Derselbe; Urgeschichte -allgemeine Urgeschichte und Urgeschichte österreichs, Leipzig u. Wien, 1937, S. 55.)
    즐목문토기 혹은 즐도에 관하여 대장반웅(大場磐雄)씨는 그의 『考古學』(現代哲學全集 第十六卷, 昭和十年, 五三頁) 中에서, 일본에 이것이 전래되었는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하나, 대산백(大山柏)씨가 경영하는 『史前學雜誌』 중에서 나는 완전히 즐목문토기의 무늬의 것의 사진을 보았으며, 강정웅(岡正雄)씨의 말에 의하여도 이 즐도는 일본에 왔다고 한다. 이것은 조선에도 전래한 것이나, 아직 실물이고 사진이고 나는 못 보앗다.
  13. O. Menghin: Weltgeschichte der Steinzeit, Wien 1931, S. 274 ff. Heine-Geldern: “Urheimat usw.” Mattenkeramik를 중국 학자들은 승문도기(繩紋陶器)라고 하는 바, 이것은 일본어상의 술어를 수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일본 석기시대의 소위 승문토기(繩紋土器)와는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겠다. 나는 아직 일본고고학에는 도무지 문외한이니 아무 참견할 자격은 없으나, 일본의 승문토기라는 것은 보매 서양 북유럽 내지 중유럽의 소위 Schnurkeramki의 무늬모양으로 된 것이 많다. 이것만을 승문토기라고 하는지, 거기에는 Mattenkeramik도 포함되었지, 그렇지 않으면 원래는 Mattenkeramik만을 의미했는지를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만일 양자를 혼동해서 모두 석문토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안 될 것이겠다. 여하간 내가 여기서 석문토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독일어의 Mattenkeramik의 번역이다.
  14. F. Graebner: Ethnologie, S. 520.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15. N. Matsumoto: Le japonais et les langues
    austroasiatiques, paris 1923.
    松本信廣 著 『古代文化論』 東京, 昭和七年. 松本氏 및 그의 선사 프씰루스키(Przyluski)씨는, 슈미트 선생의 용어 오스트로어 대신에 오스트로아시아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하나, 나는 슈미트 선생의 용어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하이네 겔던 교수가 오스트로아시아족과는 원래는 계통이 전연 다른 것이라고 주장함을 봄애, 그것을 더욱이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여 도유호 중도문1-3.png로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이네 겔던 박사는 오스트로아시아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와는 동일 어원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상호 상이한 양 어족이 그 후의 혼합에 의하여 (오스트로아시아어가 오스트로네시아어화를 하였거나, 또는 오스트로네시아어가 오스트로아시아어화를 하여 서로 비슷하게 된 것인 듯하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는 가장 그럴듯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스트로아시아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가 지금에 와서는 동일어계에 속하는 사실에 저촉되는 바는 조금도 없다. 따라 이 양자를 오스트로어 하에 취급함은 가장 정당하다고 생각한다.(Heine-Geldern; a. a. O)
  16. W. Schmidt; Die Sprachfamilien und Sprachenkreise der Erde(Kulturgesichtliche Biblithek Ⅰ. Reihe 5). Heidelberg 1926, S. 148, 524. 슈미트 선생의 말이, 여기에 관하여 근사한 의견은 벌써 트롬베티(A. Trombetti)씨가 발표하였다고 한다. 트롬베티씨의 대표작이라고 할 Elementi diGlottologin, Bologna 1923를 읽어볼 차로 도서관에서 빌려는 왔으나 이태리어라 내게는 난해이다. 그러나 이태리어 아시는 분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조선어에 오스트로어소가 있는 예를 들어보건대, ‘女’를 조선 방언으로는 에미내, 일본고어(고사기)로는 おみな(おんな의 전신), 부루어(Buru)로는 emhinn, vina. 다약어(Dayak)로는 habinai 등등. ‘兄’, ‘年長’ 등을, 조선어로는 어니, 일본어로는 アニ(兄), 유구어로는 안이(an’i), 안오(an’o)(兄), 안남어로는 anh(兄), 몬어(mon)로는 anai(叔), 등등. 태양을 호카어로는 alla, orn, la. 폴리네시아어로는 ra, 인도네시아어로는 ‘날’(日)을 lau, 조선어의 ‘날’은 ‘라’나 ‘ᄙᅡ’의 와(訛)이니, l, r의 시음(Anlaut)이 없는 조선어에 있어서는 그것은 n으로 변하였고(모음 ㅏ와 합하매), 또 그러면서도 단철(單綴)의 독립적 발음을 하는 때 l, r은 종음(Anslaut)으로 발음되니, 거기서 ‘ᄙᅡ’나 ‘라’는 ‘날’이 되고 만 것이다. 언문의 라, 랴, 러, 려를 날, 냐, 널, 녀, 로 읽는 것과 동일한 예이다.… 조선어에 이렇게, 오스트로어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일본어에 비하면 퍽 적은 듯하다.
    이제 ‘말’에 관한 말썽은 그만하고, 순문화현상에서 두셋의 모권문화계통의 요소(언어로는 오스트로어와 관련되는)를 들어보자. 조선에는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였다가, 다시 파내서 개장하는 풍속이 있다. 그것도 모권문화계의 두골 숭배에 있어,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였다가, 내부가 부식된 후에 백골을 파내서, 거기서 두골만을 집어내어, 잘 닦아서 걷어두는 ‘만풍(蠻風)’의 유풍인 것이다. ‘문명’을 하였으니 두골 숭배는 없어졌으나, 한 번 묻었던 주검을 파내는 버릇은 지금도 남아있다. 또 조선의 가면무란, 그 유래는 모권문화소에서 성행하는, 남자들의 ‘비밀결사’에 있어, 그 의식시에 행하는 가면무에 있는 것이다. 또는 조선 하류사회에서는 지금도 성행하는 봉사혼, 매매혼의 풍습도 그 유래는 모권문화소에 있는 것이다. 서양인의 극도로 발달한 현대의 문명 중에도 가만히 쳐다보면 이런 ‘만풍’의 유풍은 수둑한 것이다.
  17. Schmidt und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604
  18. Schmidt u. Koppers: a. a. O. 여기서 「슈미트」 신부는 말하기를, “…vielleicht sind aber die vierhundert quasi-exogamen Familiennamen Chinas noch letzte Uberbleibsel alter Totemclans;…”(S. 231)
    여기서 quasi-exogam이란 용어를 쓰나, 그것은 부당한 주장이다. Exogam의 한 자만 써야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슈미트 선생이 중국 내지 극동 일반의 가족 급 씨족제도를 잘 모르는 까닭이다. 또 여기에 사백씨성이라는 것도 그 출처는 나는 모르겠다. 여하간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서(230쪽 이하)에서 중국에 토테미즘 형적이 이 성씨제 이외에는 없는 것을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
    松本, 『古代文化論』 제3장.
    小川琢治, 「支那歷史地理硏究」, 東京及京都, 昭和三年 第六章.
    Henri Maspero: “Légendes mythologiques dans le Chou King” in “Journal Asiatique” publié par la Socéité Asiatique, Paris Jan.-Mars 1924(Tom CCⅣ). 마스페로씨가 운위하는 태양신화에는 토템신화성이 퍽 박약해 보인다. (ainsi le-deux courses du soleil étaient également jalouées par les Hi et les Ho, saconrse annuelle et sa conrse journaliére, et le soloil ne ponvant se tromper. (P. 46)
  19. J.G. Andersson: “An early Chinese Culture” in “Bulletin of the Geological Survey of China,” No. 5. Ⅰ. 1923.
    小川琢治, 「支那歷史地理研究續集,」 昭和四年, 四三一頁
    O. Franke: “Die prähistorischen Funde in Nordchina und die älteste chinesische Geschichte,” in “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 zu Berlin,” ⅩⅩⅨ, 1926.
    O. Menghin: “Die ethnische Stellung der ostbandkeramischen Kulturen, Heittiter und Tocharer,” in “Hruschewski-Festschrift,” Kiew 1928. Derselbe; Weltgeschichte usw, S. 556.
  20. Vgl. F. Kern: Die Anfänge der Weltgeschichte, Leipzig u. Berlin 1933.
  21. Menghin; Weltgeschichte usw. Derselbe; Geist und Blut, Wien 1934.
    小川, 前揭書
  22.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507, 519
    우각의 반월형이 태음 숭배의 모권사회에 있어 신성화된 것은, 구석기시대의 미술품 중에서도 인식할 수가 있는바 유럽 구석기기의 인기문화 오린냑문화(Aurignacien) 중기에 보이는 반월형의 우각을 든 여인의 석회석 부조(프랑스 도르돈주 로셀(Laussel) 출토)는 그 좋은 예이다.(제1도)
    第一圖, 南佛로쎈 洞屈의 女神像浮彫(오린냑文化).

    오린냑문화는 수렵을 주로 하는 문화였으나(토템문화인 듯), 거기에는 벌써 권설문화, 모권적 구재배문화의 영향이 많이 보이니, 그 외에도 많이 보이는 여신상의 조각들은 모두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민속학상에서 슈미트 및 코퍼스 양씨가 구모권문화와 토템문화가 벌써 일찍이 혼합한 사실을 운위하는 것은 이 고고학적 사실에 가장 부합되는 것이다. 여신상은 우리가 다 알듯이 오르도스에서도 발견되였다. 그 외 시베리아 말타에서도 발견되었다. 동방의 구석기시대 후기 즉 중석기시대의 인기문화는 구석기시대 전기의 것 즉 무스티에 문화(Moustérien)와 확연한 구별이 없이 과도적 형태로 출토되는 바, 여기서 학자들은 일반이, 이것은 아직 유럽에 각기 구별되어 전래하기 전의 본향적 현상이라고 하는바, 나도 그 도판들을 본 맨 처음의 인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하여 주의할 것은 동방에는 여신상이 좀 더 일찍이 나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구석기시대의 인기문화에 있어, 전기에서 후기로의 발전은 사실은, 바로 권설문화(부기문화)의 외래적 영향을 받아 된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또 하나 더 주의할 것은 만약 그렇다면 토템주의란 것도, 원래는 모권制와 아조 관계가 없엇든 것(그레브너, 슈미트의 코퍼스 주장)이 아니라, 사실은 이 구모권문화의 영향을 받아 된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토템문화의 대외혼制에는 구모권문화의 양급제(대외혼적)와 다소 공통되는 바가 있다. 여하간 저간의 관계는 참말 알기가 어렵다. 토템문화의 기원에 관하여 문제가 가장 복잡하여지는 것은, 여하간, 벌써 가장 옛날에 이렇게 문화가 혼동된 결과인바 이것으로 보아도, 나는 재배경제 편이 목축경제보다 퍽 이전에 기원된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태음 숭배에서 출발한 소의 숭배는 농촌문화 내지는 도시문화기에 이르러도 전아시아 및 그 부근의 여러 족의 종교상에는 대역할을 펼쳤던 것이다. 여기에 관하여는 Vgl. F. Kern: “Die Welt worein die Griechen traten” in “Anthropos” Jhrg. 1929 S. 167-219, Jahrg. 1930 S. 195-207, S. 793-799.
    코퍼스가 추상하듯이 달 숭배의 종교사상에서 축우에까지 전개하였기는(목유문화의 영향을 받아) 가장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암만 보아야, 축우는 모권적 재배문화계에서 시작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모권적 문화의 창작으로 해서는 너무나 큰 문화현상일 뿐 아니라, 어느 점으로 보던지, 민속학 및 고고학적 사실에 그렇게 잘 합치되지 않는다. 소를 신성시한 나머지, 그들은 인력으로 소를 지배할 용기는 못 내였을 것이다.
  23. Vgl. Heine-Geldern: a. a. O. S. 594. F. Kern: a. a. O. S. 86.
  24. “It becomes difficult therefore to avoid the conclussion that the Sha Kuo T'un and Yang Shao people-conformed to a type essentially similar to that represented by the present day North; Chinese with whom comparison as been made.” (Black: “Sha Kuo T'un and Yang Shao Human Skeletal Remains,” in “Palaeontologia Sinica,” Series D, Vol 1 Fascicle 3. Peking 1925. P.98) 이것은 내가 동 논문을 읽을 때 초기한 노트에서 재기하는 바, 크릴씨의 저서 중의 참고서란에 있는 블랙씨의 논문제목과 비교한즉, 그 제목이 내 것과는 달으다. 내 것은 블랙씨 논문 중의 제3절의 제목일런지도 모르겠다. 내 노트에는 ⅲ라는 표가 쓰여있다. 여하간 참조해보기를 바란다.
  25. “Es ist unverkennbar, diss die Spezialisierung der Siniden im Vergleich mit den Tungiden in Richtung des europiden Typus geht. Das zeigen Gestalt und Körperbau, wie der relativ holie Nasenrüken unde die Abschwächung aller rassentypisch mongoliden Merkmale.” (Eickstedt: Rassenkunde usw. S. 200)
  26. 橋本增吉, 「東洋古代史」(平凡社, 世界歷史大系 제3권) 東京, 昭和十一年, 九二頁
  27. O. Franke: a. a. O.
  28. Gustav Haloun: Seit wann kannten die Chinesen die Tochaner oder Indogermanen überhaupt, Ⅰ. Teil, Leipzig 1925. Derselbe: “Zur Üe-tsï-Frage” in “Zeitschrift der Deutschen Morgenländischen Gesellschaft” hrsg. von P. Kahle, Bd. 91(Neue Folge Bd. 16) Leipzig 1937. 할룬 교수는, 1937년 발표한 후자의 논문 중에서 토하라를 월지(月氏)에 비정하나, 나는 그 이론에는 암만 해야 좌단할 수가 없다. 그는 거기서 또 대하가 발음상으로도 토하라에 근사치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大’의 고음은 d‘âd나 t’âd였고, ‘夏’의 고음은, (칼그렌 교수의 g’å보다도 일보 더 나가) zgå였다고 한다. 따라서 D’âd(Tâ’d)-zgå는 Тохорой(Tócharoi, Tóxaroi)에는 비정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연 억설인 것이니, ‘漢’은 Xan으로 쓰고, ‘黃’은 Xuan으로 쓰는 그가 ‘夏’만은 하등 그 고음을 zgå로 하려고 하는가? ‘夏’는 고음이 암만 해야 cha(독일어음)나 Xa였던 것이다. 또 ‘大’자의 음도 d의 종음이였었다는 것은 부당한 주장이다. …할룬 교수는 끝으로 스키트(Skythen)와 키메르(Kimmerer)의 양족을 드는바, 이런 인도게르만계의 종족이 서북방에 왔던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된 바이다.
  29. 徐中舒, 再論小屯與仰韶」(안양발굴보고, 제4기).
  30. 채도를 안데르손씨는 신석기시대 혹은 금석병용시대의 것이라 하였다. 일본 학자들은 여기서 다시 이것을 금석병용시대의 것이라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 학자들에 좌단하여, 나는 신석기시대의 것으로만 본다. 순석기시대에 외래의 금속기가 가장 미미하게 조금 보이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으로 벌써 금석병용기를 운위하는 것은 유럽의 예를 보아도 가장 부당한 것이다.
  31. 中國考古報告集之一, 「城子崖」(山東歷城縣龍山鎭之黑陶文化之遺址), 南京, 民國二十三年.
    第二圖, 城子崖上層出土의 靑銅器(「城子崖」에서).
  32. 「城子崖」, 도판 제52비교.
    상층출토인 도판 제52, 제6의 전형(畑形)의 소도(小刀)와 동 제9의 ‘도전(刀錢)’(칼자루에 고리가 있는 것)은, ‘미누신스크’(Minusinsk)의 청동도와 함께, 유럽 청동기시대 말기 우르넨펠드문화(Urnenfelderkultur)를 연상케 하는 바가 퍽 많다(제2도). 이등의 청동기형이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에 관하여 우리는, 일리리아족(Illyrer)의 언어가, 동부 인도게르만어인 소위 사템(Satem)어계에 속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철기시대의 일리리아족은 그 조상이 벌써, 이 우르문화시대의 동방과의 상호관계에 그 원인이 있음이나 아닐런지?
  33. 「城子崖」 95쪽.
  34. 양사영, 후강발굴소기(안양발굴보고 제4기). 여기서 심회토는 채도문화, 녹토는 흑도문화, 천회토는 회도문화와 상대되는바, 나의 독일문 초고 및 타자고에는 천회토는 회도 및 백도와 상대된다고 쓰여있고, 또 연필로 묘사한 도면지상에는 백도문화라고만 쓰여있다. 백도 운운은 좀 미상이다. 그러나 지금은 원문과 더 비교할 수는 없다. 따라서 비교는 독자에게 맛긴다. 백도의 문화계통은 퍽 불명한 것으로, 그것은 매원말치(梅原末治) 박사도 운위한 바이다. 梅原末治, 「殷墟出土白色土器の研究」(東方文化學院京都硏究所硏究報告, 第一冊), 昭和七年. 60쪽 이하 및 동서 프랑스문 개요 제5쪽 참조.
  35. 성자애 출토 짐승 뼈에는 개, 토끼, 말, 돼지, 노루, 사슴, 미록(麋鹿), 양, 소의 9종이 있다. 여기에 관하여 這九種 中, 除麋鹿一種只見於下文化層外, 其他九種皆上下兩文化層所共有內中以猪骨, 狗骨, 爲最多, 馬骨, 牛骨, 次之, 鹿骨, 羊骨又吹之, 兎骨只見三用塊.(「城子崖」 第91쪽)라고 쓰여있다.
    여기서 토, 마, 저의 라틴명에 sp. 라는 약자가 붙었으니, 말은 Equus sp.로 되여있다. sp. 가 무엇인지를 나는 모르겠다. 이 짐승 뼈의 검사에 관하여는, 그 결과를 썼을 따름이요, 그 결론의 이유에 관하여는 하등 설명이 없다. 그 판정을 그냥 채용하기는 다소 어려운 점이 많다. 더구나 말에 있어서는 그것의 판정이 퍽 어려운 것으로 여마(驢馬)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여마의 출현은 사실, 말 이상으로 예외이겠고, 또 말이면, 야생마일 수는 없으니, 결국 가축마밖에 남는 것이 없다. 짐승 뼈 중 저골, 구골이 많은 것은 신재배문화의 영향이 가장 큰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개는 여기서 식용에 제공하기 위하여 주로 사양하였을 것이다. 식구(食狗)는 이 재배문화의 산물이다. 식인(食人) 다음에 가는 모권적 재배인의 ‘창작’(!)인 것이다.
  36. Creel: a. a. O., S. 185-186
    Arthur Waley: The way and its Power, 2nd edit., London 1936, P. 18 주2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Tortoise-divination is also practised in Africa. See H. A. Junod: The Life of a S. African Tribe, 2nd edit. 1927, Ⅱ. 549.”…아프리카에 이런 풍속이 있다는 것은 주방포씨의 「甲骨學商史編」 중에도 쓰여있다. 董作賓, 「甲骨文研究的擴大」(안양발굴보고, 제2기). 대마도의 복골제에 관하여는 내등호차랑(內藤虎次郞) 박사의 저서 중에는 좌기의 구절이 있다—「日本では近来まで對馬に於ては, 鹿の肩骨で占ふ方法が遺つて居りました.」(內藤, 「東洋文化史研究」, 東京及京都, 昭和11年, 9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