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복제도의 연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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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8번= {{TagSpage|19-3}} 이 原則에 準하야 其他 家族과 親族에까지 等分이 制定되였을 것이요, 또한 時代에 變還에 따라 그 等分이 複雜 多岐하게 變異되였을 것이다. 父母에 對하여서는 元來 다름이 없을 것이나, 母에 對하여는 父의 生存하는 境遇에 限하야 期年喪을 取하였으니, 禮記 雜記에 「碁之喪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禅」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것이다. 그러면 父의 生存하는 동안 母에 對하야 特히 期年制를 取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것은 다음에 說明하려 하나, 如何間 祖父母 妻・衆子・長子婦 等의 近親도 亦是 이 期年制를 取하게 된 섬이다. 그러나 妻・衆子・長子婦는 卑屬의 地位에 있고 祖父母는・尊屬의 地位에 있음으로 이 尊卑를 區別하기 爲하야 尊屬인 祖父母에 限하야 母에 對함과 가티 齊衰期年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 두 境遇를 區別하기 爲하야 母의 境遇에는 杖期라 하고 祖父母의 境遇에는 不杖期라고 規定하였다. 祖父母가 尊屬으로서 齊衰라 하니, 曾祖父母・高祖父母도 또한 齊衰의 中에 든 것이나, 다만 祖의 遠近에 依하야 差別이 생기게 되야 結局 齊衰에는 여러 等級이 包含하게 된다. 即
 
|목차3원문18번= {{TagSpage|19-3}} 이 原則에 準하야 其他 家族과 親族에까지 等分이 制定되였을 것이요, 또한 時代에 變還에 따라 그 等分이 複雜 多岐하게 變異되였을 것이다. 父母에 對하여서는 元來 다름이 없을 것이나, 母에 對하여는 父의 生存하는 境遇에 限하야 期年喪을 取하였으니, 禮記 雜記에 「碁之喪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禅」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것이다. 그러면 父의 生存하는 동안 母에 對하야 特히 期年制를 取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것은 다음에 說明하려 하나, 如何間 祖父母 妻・衆子・長子婦 等의 近親도 亦是 이 期年制를 取하게 된 섬이다. 그러나 妻・衆子・長子婦는 卑屬의 地位에 있고 祖父母는・尊屬의 地位에 있음으로 이 尊卑를 區別하기 爲하야 尊屬인 祖父母에 限하야 母에 對함과 가티 齊衰期年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 두 境遇를 區別하기 爲하야 母의 境遇에는 杖期라 하고 祖父母의 境遇에는 不杖期라고 規定하였다. 祖父母가 尊屬으로서 齊衰라 하니, 曾祖父母・高祖父母도 또한 齊衰의 中에 든 것이나, 다만 祖의 遠近에 依하야 差別이 생기게 되야 結局 齊衰에는 여러 等級이 包含하게 된다. 即
 
|목차3원문19번= {{TagSpage|19-4}} [[파일:김두헌 오복제도-2.png|가운데|450px]]
 
|목차3원문19번= {{TagSpage|19-4}} [[파일:김두헌 오복제도-2.png|가운데|450px]]
|목차3원문20번= {{TagSpage|19-5}} 祖에 對하야서는 大槪 이러한 差等이 原則이나, 特히 그 例外로 父卒한 境遇에 子孫은 曾祖父와 高祖父에 對하야 斬{{Tagpage|20-1}}衰三年을 服期로 삼으니, 이것은 곧 嫡々 繼承을 至極히 尊重視한 까닭이다. 그리고 보면 期即 一週年 以上의 喪은 喪期 全體로 보아 相當히 重要한 것이겠으니, 父母喪을 除하고는 一 週年의 喪期를 要함은 本宗으로 보아 祖父母・伯叔父母・姑・兄弟姊妹・衆子女・長子婦・姪及姪女・長孫・長曾孫・長玄孫・同居繼父 等이요 妻爲夫黨으로 보아 長子婦・女及 衆子・姪及姪女 等이요 妾爲夫君族으로 보아 父母・女君・子等이요 出嫁女爲本宗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요 人後者爲本生親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니, 親族으로서는 가장 近親關係에 있음을 알 수 잇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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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0번= {{TagSpage|19-5}} 祖에 對하야서는 大槪 이러한 差等이 原則이나, 特히 그 例外로 父卒한 境遇에 子孫은 曾祖父와 高祖父에 對하야 斬{{TagPage|20-1}}衰三年을 服期로 삼으니, 이것은 곧 嫡々 繼承을 至極히 尊重視한 까닭이다. 그리고 보면 期即 一週年 以上의 喪은 喪期 全體로 보아 相當히 重要한 것이겠으니, 父母喪을 除하고는 一 週年의 喪期를 要함은 本宗으로 보아 祖父母・伯叔父母・姑・兄弟姊妹・衆子女・長子婦・姪及姪女・長孫・長曾孫・長玄孫・同居繼父 等이요 妻爲夫黨으로 보아 長子婦・女及 衆子・姪及姪女 等이요 妾爲夫君族으로 보아 父母・女君・子等이요 出嫁女爲本宗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요 人後者爲本生親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니, 親族으로서는 가장 近親關係에 있음을 알 수 잇는 것이다.
|목차3원문21번= {{TagSpage|20-2}} 家禮에 依하면 喪人의 葬式 以後에 喪中의 祭禮로서 七段階의 祭祀를 要한 것이니, 虞祭・卒哭・祖祭・小祥・大祥・禪祭 吉祭가 그것이요 吉祭로써 完全히 喪期를 終了한다. 勿論 이七回의 祭禮가 모든 等級의 喪全般에 通用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喪期의 服에까지 適用된 것이냐 함은 禮典에 明瞭한 規定이 없다. 原則上으로 보아 小祥은 期 大祥은 再期인 것이요「爲父母・妻・長子禪疏 妻爲夫亦禪」이라는 規定이 있고 吉祭는 禪祭의 翌日 吉辰을 卜하야 行하되 是月에 時祭가 있으면 祭行치 않은 境遇가 있으니, 이 七回의 祭祀를 全部 要한 坡服은 父母・祖父母・妻・長子妻爲夫를 비롯하야 大槪 期年 以上의 尊屬親에 及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大槪 이러한 政階의 祭禮는 무슨 意味를 가진 것일가? 虞祭는 葬後 最初의 祭禮인데 그 本義는 慰靈에 있을 것이요 死靈의 處所 方位 時等의 觀念이 招福 禳災에 깊은 關係가 있다는 原始的 信仰에서 나온 것이겠다.(1) 그럼으로 葬後吉辰을 擇하야 初虞 再虞 三虞를 要하되 一次 以上은 반드시 魂帛을 持來한 後 家中에서 祭行할 것이라 한다. 卒哭으로 말하면 葬後 約 一箇月 後에 行한 것으로 되여있다. 元來 이 哭은 病人이 絕命하자 「擧哀男女哭瓣無數」라 하야 哀哭慟哭함을 禮儀로 삼어 文公家禮에도 「哭盡哀 乃代哭 不絕聲」이라 하여 「無時哭」이라 하야 哭婢와 같은 奇形的인 習俗을 이루게 되였다. 勿論 이 哀哭이란 것이 近親의 死別에 對한 自然表現의 人間哀{{Tagpage|21-1}}情이거니와 長久한 時日의 慣習은 오히려 野卑喧騷에 흘러 現代의 識者로 하요금 懒忌의 感을 갓개 함에는 좀 더 깊이 省察하지 않으면 안될 問題가 되엿다. 일즉이 雅亭・李德懋의 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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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1번= {{TagSpage|20-2}} 家禮에 依하면 喪人의 葬式 以後에 喪中의 祭禮로서 七段階의 祭祀를 要한 것이니, 虞祭・卒哭・祖祭・小祥・大祥・禪祭 吉祭가 그것이요 吉祭로써 完全히 喪期를 終了한다. 勿論 이七回의 祭禮가 모든 等級의 喪全般에 通用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喪期의 服에까지 適用된 것이냐 함은 禮典에 明瞭한 規定이 없다. 原則上으로 보아 小祥은 期 大祥은 再期인 것이요「爲父母・妻・長子禪疏 妻爲夫亦禪」이라는 規定이 있고 吉祭는 禪祭의 翌日 吉辰을 卜하야 行하되 是月에 時祭가 있으면 祭行치 않은 境遇가 있으니, 이 七回의 祭祀를 全部 要한 坡服은 父母・祖父母・妻・長子妻爲夫를 비롯하야 大槪 期年 以上의 尊屬親에 及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大槪 이러한 政階의 祭禮는 무슨 意味를 가진 것일가? 虞祭는 葬後 最初의 祭禮인데 그 本義는 慰靈에 있을 것이요 死靈의 處所 方位 時等의 觀念이 招福 禳災에 깊은 關係가 있다는 原始的 信仰에서 나온 것이겠다.(1) 그럼으로 葬後吉辰을 擇하야 初虞 再虞 三虞를 要하되 一次 以上은 반드시 魂帛을 持來한 後 家中에서 祭行할 것이라 한다. 卒哭으로 말하면 葬後 約 一箇月 後에 行한 것으로 되여있다. 元來 이 哭은 病人이 絕命하자 「擧哀男女哭瓣無數」라 하야 哀哭慟哭함을 禮儀로 삼어 文公家禮에도 「哭盡哀 乃代哭 不絕聲」이라 하여 「無時哭」이라 하야 哭婢와 같은 奇形的인 習俗을 이루게 되였다. 勿論 이 哀哭이란 것이 近親의 死別에 對한 自然表現의 人間哀{{TagPage|21-1}}情이거니와 長久한 時日의 慣習은 오히려 野卑喧騷에 흘러 現代의 識者로 하요금 懒忌의 感을 갓개 함에는 좀 더 깊이 省察하지 않으면 안될 問題가 되엿다. 일즉이 雅亭・李德懋의 言에
 
|목차3원문22번= {{TagSpage|21-2}} 哭聲勿促欲喘也 勿緩欲欠也 勿太文而節也 勿太野而呼也 勿如吼如嘶 駭人聽間以招婦妾童孺之諛笑 東俗喪主哭音 連呼哀吿 外曾祖朴孝靖公曾曰 連呼二音 只出喉舌 自然問歇不如哀々 一音直出心 仲傷痛而無所泊也.(2)
 
|목차3원문22번= {{TagSpage|21-2}} 哭聲勿促欲喘也 勿緩欲欠也 勿太文而節也 勿太野而呼也 勿如吼如嘶 駭人聽間以招婦妾童孺之諛笑 東俗喪主哭音 連呼哀吿 外曾祖朴孝靖公曾曰 連呼二音 只出喉舌 自然問歇不如哀々 一音直出心 仲傷痛而無所泊也.(2)
 
|목차3원문23번= {{TagSpage|21-3}} 라 하야 哭의 方法을 指示하엿고 事神의 暫間에는 一段 哭을 中止할 것으로 하고 婦女의 非禮를 酵戒하였다. 即  
 
|목차3원문23번= {{TagSpage|21-3}} 라 하야 哭의 方法을 指示하엿고 事神의 暫間에는 一段 哭을 中止할 것으로 하고 婦女의 非禮를 酵戒하였다. 即  
 
|목차3원문24번= {{TagSpage|21-4}} 凡忌祭進酌 闔門必止哭肅靜 欲其神乏煩也 婦人不識禮意當其時也 或冇不止哭者 雖使止之而位哭不己 豈事神之禮 類多此習改之可也.(3)  
 
|목차3원문24번= {{TagSpage|21-4}} 凡忌祭進酌 闔門必止哭肅靜 欲其神乏煩也 婦人不識禮意當其時也 或冇不止哭者 雖使止之而位哭不己 豈事神之禮 類多此習改之可也.(3)  
|목차3원문25번= {{TagSpage|21-5}} 라 함은 適時의 哭을 必要로 한 것이니, 따라서 當然히 하여야 할 哭을 하지 않은 境遇에는 또한 이것을 不孝不順이라 하야 「居喪婦女自取便安 朝夕哭二時上典 或不預者有之 孝順乏道亡矣」라 하였으니 結局 哭이란 것이 禮의 不可避한 것을 功實히 說破함이다. 생각컨대 禮의 起原과 本質에 關하야 批判的 識見을 갓지 못하고 오즉 聖人의 遗制라 하야 無條件하고 信奉하든 禮論家의 說明일만큼 別로히 雅亭의 見識을 오늘날 非難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當初에 이 哭의 發生論的 起原을 차자본다 하면 아마도 死靈에 對한 禁忌의 殘跡이라 하겠다. 大槪 原始民族의 信仰으로서 花靈에 對하야 大聲叫號하며 或은 散髮하며-平時에 散髮한 民族은 反對로 結髮하며 或은 舞踊을 하는 等 여러가지 儀式이 있었든 것이다.(4) 即 이러한 儀式으로써 禳災拂禍의 信仰을 이루었든 것이니 禮記 奔喪篇에 依하면 「又哭盡哀」니 「哭成 踊」이니 「括髮祖成踊」이니 「成踊盡哀」니 하는 等의 文句가 있음은 곧 이러한 原始的 形態의 禮儀化된 것인가 생각되는 것이다. 如何間 이 哭이 禮儀로서 不可避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無期限하고 繼續할 수는 없는 일이니 따라서 適當한 時{{Tagpage|22-1}}期를 定하야 哭을 撤하되 爾來로는 哭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오즉 朝夕의 上食과 朔望의 奠祀에 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야 그 時期로 말하면 葬後 約一箇月을 原則으로 삼는대 或時 葬式이 數日을 要한 境遇에는 더 遷延된 수도 있음은 陶庵・李繹의 말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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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5번= {{TagSpage|21-5}} 라 함은 適時의 哭을 必要로 한 것이니, 따라서 當然히 하여야 할 哭을 하지 않은 境遇에는 또한 이것을 不孝不順이라 하야 「居喪婦女自取便安 朝夕哭二時上典 或不預者有之 孝順乏道亡矣」라 하였으니 結局 哭이란 것이 禮의 不可避한 것을 功實히 說破함이다. 생각컨대 禮의 起原과 本質에 關하야 批判的 識見을 갓지 못하고 오즉 聖人의 遗制라 하야 無條件하고 信奉하든 禮論家의 說明일만큼 別로히 雅亭의 見識을 오늘날 非難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當初에 이 哭의 發生論的 起原을 차자본다 하면 아마도 死靈에 對한 禁忌의 殘跡이라 하겠다. 大槪 原始民族의 信仰으로서 花靈에 對하야 大聲叫號하며 或은 散髮하며-平時에 散髮한 民族은 反對로 結髮하며 或은 舞踊을 하는 等 여러가지 儀式이 있었든 것이다.(4) 即 이러한 儀式으로써 禳災拂禍의 信仰을 이루었든 것이니 禮記 奔喪篇에 依하면 「又哭盡哀」니 「哭成 踊」이니 「括髮祖成踊」이니 「成踊盡哀」니 하는 等의 文句가 있음은 곧 이러한 原始的 形態의 禮儀化된 것인가 생각되는 것이다. 如何間 이 哭이 禮儀로서 不可避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無期限하고 繼續할 수는 없는 일이니 따라서 適當한 時{{TagPage|22-1}}期를 定하야 哭을 撤하되 爾來로는 哭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오즉 朝夕의 上食과 朔望의 奠祀에 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야 그 時期로 말하면 葬後 約一箇月을 原則으로 삼는대 或時 葬式이 數日을 要한 境遇에는 더 遷延된 수도 있음은 陶庵・李繹의 말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있다.  
 
|목차3원문26번= {{TagSpage|22-2}} 近俗無貴賤 皆三月而葬 而古禮惟大夫三月 士則逾月 假令人死於晦間而葬於來旬前 則謂之逾月者苟也 若此者三月 而後當行卒哭 大抵所謂逾月者 必過三卜日可也.(5)   
 
|목차3원문26번= {{TagSpage|22-2}} 近俗無貴賤 皆三月而葬 而古禮惟大夫三月 士則逾月 假令人死於晦間而葬於來旬前 則謂之逾月者苟也 若此者三月 而後當行卒哭 大抵所謂逾月者 必過三卜日可也.(5)   
 
|목차3원문27번= {{TagSpage|22-3}} 이 時期에는 아직 死人의 近親間에는 飲食과 居處에 禁制가 있어 喪主 及 兄弟는 疏食飲水 菜果不食庶化木枕의 規定이 있으니 그것은 곧 死靈에 對한 禁忌의 觀念이 深刻한 까닭이다. 다만 成服의 時에 散祭하엿든 服裝의 部分을 一切 絞結할 것이라 하니 漸次 平常服으로 變하는 階段을 表示한 것이겠다.  
 
|목차3원문27번= {{TagSpage|22-3}} 이 時期에는 아직 死人의 近親間에는 飲食과 居處에 禁制가 있어 喪主 及 兄弟는 疏食飲水 菜果不食庶化木枕의 規定이 있으니 그것은 곧 死靈에 對한 禁忌의 觀念이 深刻한 까닭이다. 다만 成服의 時에 散祭하엿든 服裝의 部分을 一切 絞結할 것이라 하니 漸次 平常服으로 變하는 階段을 表示한 것이겠다.  
 
|목차3원문28번= {{TagSpage|22-4}} 祔祭는 卒哭의 翌日에 新神主틀 祠堂에 奉祝하야 祖靈에 合浦하는 禮임은 勿論이어니와 特히 神主合祔에 關하야 一考할 것은곧 昭穆의 序로 配置하는 點이다. 이 昭穆의 序置로써 諸神主는 一堂에 群坐하야 祐祭의 境遇에는 그대로 祭行하게 된다. 中庸에
 
|목차3원문28번= {{TagSpage|22-4}} 祔祭는 卒哭의 翌日에 新神主틀 祠堂에 奉祝하야 祖靈에 合浦하는 禮임은 勿論이어니와 特히 神主合祔에 關하야 一考할 것은곧 昭穆의 序로 配置하는 點이다. 이 昭穆의 序置로써 諸神主는 一堂에 群坐하야 祐祭의 境遇에는 그대로 祭行하게 된다. 中庸에
 
|목차3원문29번= {{TagSpage|22-5}} 凡廟主在本阙之室中 皆束向 及其怡於奴範之室中 則惟太祖東向自如而爲最尊之位 群廟之位入乎此者 皆列於北牖而南向 群廟之入乎此者 皆列於南牖而北向 南向者取其向明 故謂之昭 北向者取其深遠 故謂之穆 葢群廟之列 則左爲昭而右爲穆 祐祭位則北爲昭而南爲穆也.  
 
|목차3원문29번= {{TagSpage|22-5}} 凡廟主在本阙之室中 皆束向 及其怡於奴範之室中 則惟太祖東向自如而爲最尊之位 群廟之位入乎此者 皆列於北牖而南向 群廟之入乎此者 皆列於南牖而北向 南向者取其向明 故謂之昭 北向者取其深遠 故謂之穆 葢群廟之列 則左爲昭而右爲穆 祐祭位則北爲昭而南爲穆也.  
|목차3원문30번= {{TagSpage|22-6}} 라 함은 昭穆 一般을 叙述한 것이요 特히 朝制와 密接한 關係를 가진 것으로 說明한 것이다. 從來로 이 昭穆의 原義를 여기에 보다싶이 大漑는 南明北暗에 因한 것이라 하고 或은 이 明暗의 關係에 陰場의 思想을 結合하야 「昭居左爲陽 穆居{{Tagpage|23-1}}右爲陰一(鄭玄, 禮記集說 卷三十)이라 하고, 或은 「葢取子々孫々 引無極之誼 昭穆字當用紹繆 繆猶績也一(毛際盛, 說文述誼)라 하야 昭穆은 本來 紹繆의 變한 것으로 子々孫々 繼承無極함을 말한 것이라하는 等, 그 說이 多様하다. 或者는 또 이것을 父昭子穆으로 생각하는 境遇도있으나 이것은 全然 認識 不足에서 나온 一 吳見이니 말할 것도 업거니와 이러한 說明의 可否는 姑捨하고 如何間 神位의 配置는 父子의 連續世代를 取하지 않고 祖孫의 隔世同祉를 取하야 이것을 通則으로 삼어 왓는 것이니 따라서 旁親을 雄班으로서 合祀한 境遇에도 「伯叔祖父母褶于高祖 伯叔父母褂于曾祖 妻若兄弟若 兄弟之妻樹于祖 子姪(子婦・姪婦同)祔于父 皆西向」이라 하야, 그 序立을 整然히 한다. 이와 같이 群神主의 順序를 尊重히 함은 要컨대 長幼親疎의 秩序를 嚴守하야 祭祀에 그 倫序의 關係를 明白히 하려는 데 있을 것이니 禮記의 祭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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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0번= {{TagSpage|22-6}} 라 함은 昭穆 一般을 叙述한 것이요 特히 朝制와 密接한 關係를 가진 것으로 說明한 것이다. 從來로 이 昭穆의 原義를 여기에 보다싶이 大漑는 南明北暗에 因한 것이라 하고 或은 이 明暗의 關係에 陰場의 思想을 結合하야 「昭居左爲陽 穆居{{TagPage|23-1}}右爲陰一(鄭玄, 禮記集說 卷三十)이라 하고, 或은 「葢取子々孫々 引無極之誼 昭穆字當用紹繆 繆猶績也一(毛際盛, 說文述誼)라 하야 昭穆은 本來 紹繆의 變한 것으로 子々孫々 繼承無極함을 말한 것이라하는 等, 그 說이 多様하다. 或者는 또 이것을 父昭子穆으로 생각하는 境遇도있으나 이것은 全然 認識 不足에서 나온 一 吳見이니 말할 것도 업거니와 이러한 說明의 可否는 姑捨하고 如何間 神位의 配置는 父子의 連續世代를 取하지 않고 祖孫의 隔世同祉를 取하야 이것을 通則으로 삼어 왓는 것이니 따라서 旁親을 雄班으로서 合祀한 境遇에도 「伯叔祖父母褶于高祖 伯叔父母褂于曾祖 妻若兄弟若 兄弟之妻樹于祖 子姪(子婦・姪婦同)祔于父 皆西向」이라 하야, 그 序立을 整然히 한다. 이와 같이 群神主의 順序를 尊重히 함은 要컨대 長幼親疎의 秩序를 嚴守하야 祭祀에 그 倫序의 關係를 明白히 하려는 데 있을 것이니 禮記의 祭統에  
 
|목차3원문31번= {{TagSpage|23-2}} 夫祭有昭穆 昭穆者所以別父子長幼親疎之序而無亂也 是故有事於大廟則群昭群穆咸在 而不失其倫此之謂親疎之殺也.
 
|목차3원문31번= {{TagSpage|23-2}} 夫祭有昭穆 昭穆者所以別父子長幼親疎之序而無亂也 是故有事於大廟則群昭群穆咸在 而不失其倫此之謂親疎之殺也.
|목차3원문32번= {{TagSpage|23-3}} 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이 倫序를 要求하는대 어찌하야 特히 隔世同祔의 方法을 取하였을가에 對하여는 그 始原的 意義가 어디잇는가를 考察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關하야 近者에 廣島女理舛大學敎授 加藤常賢 氏가 該博한 考證으로써 滋味잇는 硏究를 이룬 바 잇다. 加藤 教授는 現存未開民族間에 흔이 보이는 婚姻階級(marriage-class)의 習俗을 參考하야 昭穆의 起原을 곧 여기에 求하려는 것이다. 婚姻階級이라는 것은 即 原始民族의 토-템 組織에 依하야 族外婚(exogamy)이 嚴然하게 存在한 것인대 이러한 婚姻關係로 因하야 生乎하게 되는 境遇에는 男系 또는 女系의 間接 繼承이 되야結局 階級名이 間接繼承으로 됨으로 여기에 現存 文化社會에는 볼 수 업는 獨特한 形態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特殊한 婚姻關係와 社會組織은 일즉히 Frazer가 「오—스트라리아 民族 間에 祥細한 硏究를 한 것은 이미 學界에서 널리 아는 바이다.(7) 이제 이러한 結婚階級은 곧 隔世的同次階級 即 子孫의 同班階級이 되고 父子의 異{{Tagpage|24}}班階級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隔世同班인 昭穆制度의 起原이라는 것이요 結婚階級의 制度는 「오—스트라리아」와 가튼 低級民族에 現存한 것을 보면 이 結婚階級 制度를 起原으로하는 昭穆 制度도 原始時代에 淵源한 것이리라는 것이 加藤 敎授의 見解이다. 그러나 이說明에는 根本的인 先決 問題가 아즉 證明되지 않은 點에 있어서 運命的인 誤謬을 犯하였으니 따라서 그 說明에 牽强附會의 點이 없지 않은 것이다. 先次로 原始的 社會組織인 토-템 信仰과 族外婚에 依한 이른바 結婚階級 制度란 것이 古代 支那民族 間에도 嚴然히 存在하였다는 證明을 要하는 것이니 이 點에 對하야 形式論理學 上의 先決問題 要求(Peritio Principle)의 誤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스트라리아」 民族에 있는 結婚組織이 모든 原始 民族에 다 存在하엿다고 할 수 없는 일이요-「아에리칸인디만」에는 全然 이러한 結婚階級의 組織이 現存치 않고 「메라네시아」에도 그다지 整然하지 않다-또한 中國의 原始社會에 그러한 組織이 嚴然하였다는 定說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不拘하고 昭穆制度의 起原을 엉뚱한 現存 未開民族의 特殊 婚姻關係에 찾고 따라서 昭穆의 制度를 그대로 中國의 古代 原始時代에 淵源함이라 하니, 이것은 또한 家族制度의 發展史上으로 보아 首旨할 수 없는 일이다. 大抵 昭穆制度는 大家族 制度의 發展過程에서 家族成員의 倫序에 對한 觀念이 和當히 發達된 文化期의 所序이라고 보는 것이 올치 않을가 한다. 따라서 倫序와 道義 觀念에 基因한 昭穆制度라는 것을 原始 家族時代에 淵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이 昭穆의 制度를 어떠한 由來에 依한 것이라고 볼 것인가 함에 對하야 筆者는 아주 쉽게 이와 가티 생각하려는 것이다 即 그것은 現實的인 大家族 生活上에 要求된 倫序觀念의 延長이라고. 本來 大家族의 生活에는 그 成員의 統制가 至極히 必要한 것이요 그러기爲하야 家長의 權限을 强化하는 同時에 家族成員의 服從과 秩序 維持가 要求되는 것이다 父親을 嚴君이라 하야 絕對 尊嚴視하는 것이 子의 義務로 되야 있는 反面에 父가 生存 中에 白己의 子息은 家{{Tagpage|25-1}}長인 父의 孫으로서 家族成員이 되고 따라서 祖孫間에는 特別한 親密이 생겨 父子의 間에는 日常 近接의 機會를 갖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祖孫의 間에는 至極 密接 親近한 關係를 이루게된 것이니 이러한 點은 父子 間에 食卓을 갈이 못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지 못 함에 對하야 祖孫間에는 食卓을 같이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는 習俗을 보아 잘 알만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現實生活의 習俗과 觀念이 그대로 死後의 神主位間에 延長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自然스러운 婦結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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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2번= {{TagSpage|23-3}} 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이 倫序를 要求하는대 어찌하야 特히 隔世同祔의 方法을 取하였을가에 對하여는 그 始原的 意義가 어디잇는가를 考察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關하야 近者에 廣島女理舛大學敎授 加藤常賢 氏가 該博한 考證으로써 滋味잇는 硏究를 이룬 바 잇다. 加藤 教授는 現存未開民族間에 흔이 보이는 婚姻階級(marriage-class)의 習俗을 參考하야 昭穆의 起原을 곧 여기에 求하려는 것이다. 婚姻階級이라는 것은 即 原始民族의 토-템 組織에 依하야 族外婚(exogamy)이 嚴然하게 存在한 것인대 이러한 婚姻關係로 因하야 生乎하게 되는 境遇에는 男系 또는 女系의 間接 繼承이 되야結局 階級名이 間接繼承으로 됨으로 여기에 現存 文化社會에는 볼 수 업는 獨特한 形態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特殊한 婚姻關係와 社會組織은 일즉히 Frazer가 「오—스트라리아 民族 間에 祥細한 硏究를 한 것은 이미 學界에서 널리 아는 바이다.(7) 이제 이러한 結婚階級은 곧 隔世的同次階級 即 子孫의 同班階級이 되고 父子의 異{{TagPage|24}}班階級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隔世同班인 昭穆制度의 起原이라는 것이요 結婚階級의 制度는 「오—스트라리아」와 가튼 低級民族에 現存한 것을 보면 이 結婚階級 制度를 起原으로하는 昭穆 制度도 原始時代에 淵源한 것이리라는 것이 加藤 敎授의 見解이다. 그러나 이說明에는 根本的인 先決 問題가 아즉 證明되지 않은 點에 있어서 運命的인 誤謬을 犯하였으니 따라서 그 說明에 牽强附會의 點이 없지 않은 것이다. 先次로 原始的 社會組織인 토-템 信仰과 族外婚에 依한 이른바 結婚階級 制度란 것이 古代 支那民族 間에도 嚴然히 存在하였다는 證明을 要하는 것이니 이 點에 對하야 形式論理學 上의 先決問題 要求(Peritio Principle)의 誤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스트라리아」 民族에 있는 結婚組織이 모든 原始 民族에 다 存在하엿다고 할 수 없는 일이요-「아에리칸인디만」에는 全然 이러한 結婚階級의 組織이 現存치 않고 「메라네시아」에도 그다지 整然하지 않다-또한 中國의 原始社會에 그러한 組織이 嚴然하였다는 定說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不拘하고 昭穆制度의 起原을 엉뚱한 現存 未開民族의 特殊 婚姻關係에 찾고 따라서 昭穆의 制度를 그대로 中國의 古代 原始時代에 淵源함이라 하니, 이것은 또한 家族制度의 發展史上으로 보아 首旨할 수 없는 일이다. 大抵 昭穆制度는 大家族 制度의 發展過程에서 家族成員의 倫序에 對한 觀念이 和當히 發達된 文化期의 所序이라고 보는 것이 올치 않을가 한다. 따라서 倫序와 道義 觀念에 基因한 昭穆制度라는 것을 原始 家族時代에 淵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이 昭穆의 制度를 어떠한 由來에 依한 것이라고 볼 것인가 함에 對하야 筆者는 아주 쉽게 이와 가티 생각하려는 것이다 即 그것은 現實的인 大家族 生活上에 要求된 倫序觀念의 延長이라고. 本來 大家族의 生活에는 그 成員의 統制가 至極히 必要한 것이요 그러기爲하야 家長의 權限을 强化하는 同時에 家族成員의 服從과 秩序 維持가 要求되는 것이다 父親을 嚴君이라 하야 絕對 尊嚴視하는 것이 子의 義務로 되야 있는 反面에 父가 生存 中에 白己의 子息은 家{{TagPage|25-1}}長인 父의 孫으로서 家族成員이 되고 따라서 祖孫間에는 特別한 親密이 생겨 父子의 間에는 日常 近接의 機會를 갖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祖孫의 間에는 至極 密接 親近한 關係를 이루게된 것이니 이러한 點은 父子 間에 食卓을 갈이 못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지 못 함에 對하야 祖孫間에는 食卓을 같이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는 習俗을 보아 잘 알만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現實生活의 習俗과 觀念이 그대로 死後의 神主位間에 延長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自然스러운 婦結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목차3원문33번= {{TagSpage|25-2}} 祔祭에 關聯하야 昭穆에 對한 說明이 너무 길게 되였으나 喪期의 變遷에 따라 段階的으로 行하는 祭祀-祭禮라 하기보다 오히려 喪禮의 順序에 關하야 다시 本問題로 들어가 보건대 卒哭과 祔祭 後에는 小祥大祥이 가장 重要한 것임은 우리의 周知한 바이니 이제 詳細한 考察을省略하거니와, 禪祭・吉祭(元來 吉祭는 家禮에 없는 것인데 特히 喪禮備要에는 吉禮를 採用하야 禪祭 外에 또 規定한 것인 듯 하다)를 맛추기까지 漸次 平當服으로 變遷한 것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다. 이에 關하야 栗谷의 擊蒙要訣 居喪儀條에 이러한 過程을 說明한 바 있으니
 
|목차3원문33번= {{TagSpage|25-2}} 祔祭에 關聯하야 昭穆에 對한 說明이 너무 길게 되였으나 喪期의 變遷에 따라 段階的으로 行하는 祭祀-祭禮라 하기보다 오히려 喪禮의 順序에 關하야 다시 本問題로 들어가 보건대 卒哭과 祔祭 後에는 小祥大祥이 가장 重要한 것임은 우리의 周知한 바이니 이제 詳細한 考察을省略하거니와, 禪祭・吉祭(元來 吉祭는 家禮에 없는 것인데 特히 喪禮備要에는 吉禮를 採用하야 禪祭 外에 또 規定한 것인 듯 하다)를 맛추기까지 漸次 平當服으로 變遷한 것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다. 이에 關하야 栗谷의 擊蒙要訣 居喪儀條에 이러한 過程을 說明한 바 있으니
 
|목차3원문34번= {{TagSpage|25-3}} 凡三年之喪 古禮則廢祭 而朱子曰 古人居喪 衰麻之衣 不釋於身 哭泣之聲 不絕於口 其出入居處衣服飮食 皆與平日 絕異故 宗廟之祭雖廢 而幽明之間兩無憾焉 今人居喪與古人異 而廢此一事 恐有所未安 朱子之言 如此故 未葬前 準禮廢祭 而卒哭後則 於四時節祀及忌祭墓祭 使服輕者行薦而饌品減於常時 只一獻可也 朱予喪中 以墨衰薦于廟 今人以俗制服當墨衰 若無服輕者則喪人恐可以俗制喪服行祀 朞大功 則葬後 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未葬前時祭可廢 忌祭墓祭略行如上儀 總小功則成服前廢祭 雖忌日亦下可行 成服後 則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服中時祀 當以玄冠素服黑帶行之.
 
|목차3원문34번= {{TagSpage|25-3}} 凡三年之喪 古禮則廢祭 而朱子曰 古人居喪 衰麻之衣 不釋於身 哭泣之聲 不絕於口 其出入居處衣服飮食 皆與平日 絕異故 宗廟之祭雖廢 而幽明之間兩無憾焉 今人居喪與古人異 而廢此一事 恐有所未安 朱子之言 如此故 未葬前 準禮廢祭 而卒哭後則 於四時節祀及忌祭墓祭 使服輕者行薦而饌品減於常時 只一獻可也 朱予喪中 以墨衰薦于廟 今人以俗制服當墨衰 若無服輕者則喪人恐可以俗制喪服行祀 朞大功 則葬後 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未葬前時祭可廢 忌祭墓祭略行如上儀 總小功則成服前廢祭 雖忌日亦下可行 成服後 則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服中時祀 當以玄冠素服黑帶行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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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3번= {{TagSpage|26-9}} 이라 하고 最低等級의 喪에까지도 哭의 規定이 있어
 
|목차3원문43번= {{TagSpage|26-9}} 이라 하고 最低等級의 喪에까지도 哭의 規定이 있어
 
|목차3원문44번= {{TagSpage|26-10}}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목차3원문44번= {{TagSpage|26-10}}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목차3원문45번= {{TagSpage|26-11}} 라는 等々 우리의 理解에 困難할만큼 諸多 禁制가 規定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禁制의 發生的 起原을 찾는다면 元來 呪{{Tagpage|27-1}}術宗敎的 禁忌의 觀念에 基本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禮敎로서는 다만 哀의 表示 孝의 至道라고 說하여 있을 뿐이다. 禮敎란 것은 本來 한 權威性을 가지고 民衆에 臨한것이니, 一般人으로서는 至極히 實行難인 것임은 勿論일 것이다. 이에 關하야 이러한 逸話가 禮記에 傳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나라 어떤 사람이 大祥의 祭禮를 아츰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歌舞歡樂함을 보고 子路가 그 非禮至極함을 非難嘲笑함에 對하야 孔子는 오히려 子路를 責望하였으니, 孔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無理가 아님을 理解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孔子는 予路의 外出한 後 다른 門人들에 말하기를 長期의 喪制를 잘 遵守하였으나 아즉 더 一個月만 지나면 完全히 居喪의 儀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야 禮敎의 尊重視할 것을 教示하었다 한다. 그러나 禮敎 그대로가 實行되기는 誰某를 勿論하고 困難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禮敎에 있어서도 一定한 期限을 經한 後 正規의 喪服에서 一段 輕服으로 減하는 制度 即 受服을 制定하였으니, 儀禮喪服經 大功章에 이러한 規定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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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5번= {{TagSpage|26-11}} 라는 等々 우리의 理解에 困難할만큼 諸多 禁制가 規定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禁制의 發生的 起原을 찾는다면 元來 呪{{TagPage|27-1}}術宗敎的 禁忌의 觀念에 基本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禮敎로서는 다만 哀의 表示 孝의 至道라고 說하여 있을 뿐이다. 禮敎란 것은 本來 한 權威性을 가지고 民衆에 臨한것이니, 一般人으로서는 至極히 實行難인 것임은 勿論일 것이다. 이에 關하야 이러한 逸話가 禮記에 傳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나라 어떤 사람이 大祥의 祭禮를 아츰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歌舞歡樂함을 보고 子路가 그 非禮至極함을 非難嘲笑함에 對하야 孔子는 오히려 子路를 責望하였으니, 孔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無理가 아님을 理解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孔子는 予路의 外出한 後 다른 門人들에 말하기를 長期의 喪制를 잘 遵守하였으나 아즉 더 一個月만 지나면 完全히 居喪의 儀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야 禮敎의 尊重視할 것을 教示하었다 한다. 그러나 禮敎 그대로가 實行되기는 誰某를 勿論하고 困難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禮敎에 있어서도 一定한 期限을 經한 後 正規의 喪服에서 一段 輕服으로 減하는 制度 即 受服을 制定하였으니, 儀禮喪服經 大功章에 이러한 規定이 있다.
 
|목차3원문46번= {{TagSpage|27-2}}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목차3원문46번= {{TagSpage|27-2}}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목차3원문47번= {{TagSpage|27-3}} 이라 하니 이 受服의 規定은 大功에 關한 것이요 大功殮章과 齊衰三月章에는 分明히 無受라 하였고 斬衰章에나 齊衰章에는 아무런 規定 없는 것을 보면, 受服이란 것이 五服 全體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목차3원문47번= {{TagSpage|27-3}} 이라 하니 이 受服의 規定은 大功에 關한 것이요 大功殮章과 齊衰三月章에는 分明히 無受라 하였고 斬衰章에나 齊衰章에는 아무런 規定 없는 것을 보면, 受服이란 것이 五服 全體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목차3원문48번= {{TagSpage|27-4}} 以上의 外에 喪期에 關하여는 重喪의 問題 (除服의 順序는 先滿先除 後滿後除를 原則으로한다.) 月日의 計算問題 重様된 祭祀의 站後問題 等이 있거니와, 이러한 問題는 여기에 省略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制度에 關하야 잠간 考察하겠다. 喪을 當한 境遇에는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禁制가 있을만큼 一定한 期限에 業務를 中斷치 않으면 안됨으로 公職에 있는 者에 對하야 一定한 休暇를 給與하는 일이 國家 法制 上으로 規定되였는 것이다. 이 給暇의 原則으로{{Tagpage|28-1}} 말하면 亦是 等級的 差異가 有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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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8번= {{TagSpage|27-4}} 以上의 外에 喪期에 關하여는 重喪의 問題 (除服의 順序는 先滿先除 後滿後除를 原則으로한다.) 月日의 計算問題 重様된 祭祀의 站後問題 等이 있거니와, 이러한 問題는 여기에 省略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制度에 關하야 잠간 考察하겠다. 喪을 當한 境遇에는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禁制가 있을만큼 一定한 期限에 業務를 中斷치 않으면 안됨으로 公職에 있는 者에 對하야 一定한 休暇를 給與하는 일이 國家 法制 上으로 規定되였는 것이다. 이 給暇의 原則으로{{TagPage|28-1}} 말하면 亦是 等級的 差異가 有하야
 
|목차3원문49번= {{TagSpage|28-2}} [[파일:김두헌 오복제도-3.png|가운데|450px]]
 
|목차3원문49번= {{TagSpage|28-2}} [[파일:김두헌 오복제도-3.png|가운데|450px]]
 
|목차3원문50번= {{TagSpage|28-3}} 로 되여있다.(8) 給暇로 말하면 當喪의 境遇뿐만 아니라 大小祥・禪祭・忌祭・時祭・改葬의 境遇에도 數十日 乃至 數日이 歷代의 法典에 制定되여 있으니 말하자면 今日의 官公吏服務規定에 不過한 것이나 그것이 國家의 法制上 重要視되였음은 社會의 組織이 大家族 制度에 基本하야 先祖 崇拜의 觀念이 尊重된 까닭이다. 이러한 給暇制度가 朝鮮에 있어서는 일즉 五服制度가 高麗 初에 傳來함에 따라 始作한 것이니 成宗 四年에 처음으로 制定하야 數次의 改正이 歷代를 通하야 繼續되고 李朝 時代에 또한 그런 것이 史實에 歷然한 바이다.
 
|목차3원문50번= {{TagSpage|28-3}} 로 되여있다.(8) 給暇로 말하면 當喪의 境遇뿐만 아니라 大小祥・禪祭・忌祭・時祭・改葬의 境遇에도 數十日 乃至 數日이 歷代의 法典에 制定되여 있으니 말하자면 今日의 官公吏服務規定에 不過한 것이나 그것이 國家의 法制上 重要視되였음은 社會의 組織이 大家族 制度에 基本하야 先祖 崇拜의 觀念이 尊重된 까닭이다. 이러한 給暇制度가 朝鮮에 있어서는 일즉 五服制度가 高麗 初에 傳來함에 따라 始作한 것이니 成宗 四年에 처음으로 制定하야 數次의 改正이 歷代를 通하야 繼續되고 李朝 時代에 또한 그런 것이 史實에 歷然한 바이다.

2024년 11월 6일 (수) 22: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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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제도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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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五服制度의 硏究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5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김두헌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07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59쪽 전체쪽 059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喪服(상복)의 제도는 원래 死者(사자) 즉 喪者(상자)에 대한 服者(복자)의 親疎遠近(친소원근) 관계와 가족적 사회적 尊卑(존비)의 지위 신분에 의하여 등급의 차이를 표시한 것인데, 그 등급적 차이가 이른바 斬衰(참최)・齊衰(자최)・大功(대공)・小功(소공)・緦麻(시마)의 오등급으로 되어있는 까닭에 상복제도를 곧 오복제도라고도 함은 우리가 널리 잘 아는 바이어니와, 이 五服(오복)의 등급이 무엇을 표준하고 무슨 근거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냐 함은 그다지 명료하지 않다. 文公家禮(문공가례)에 의하면 「斬不緝也 凡衣裳旁及下際 皆不縫纖」이라 하고, 「齊緝也 凡衣裳 旁及下際 皆緝」이라 하여 服裝(복장)의 末端(말단)을 緝(집) 또는 不緝(불집)하는 것으로써 最重(최중)한 참최의 복장과 자최 이하의 복장과를 구별하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등급의 차이가 복장제작 상의 방법에 의거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여기에 이 제작상 방법의 차이가 왜 다만 斬齊(참자) 2복에 한하여 표시되었느냐 하면 거기에는 한 개의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문공가례에 의하면 참최는 「用極鹿生麻布爲之」라 하고 자최는 「用比斬衰次等鹿生布」라 하고, 점차로 대공은 자최에 비하여, 또 소공은 대공에 비하여 稍熟細布(초숙세포)를 사용하고 시마는 極細熟布(극세숙포)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등급의 차이가 복장의 자료 즉 織布(직포)의 精粗(정조) 및 生熟(생숙)에 의거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이 직포의 정조의 차이가 왜 대공 소공 시마에 한하여 표시되었으며 왜 緝不緝(집불집)의 구분 원리 이외에 또 이런 구분 표준이 제정되었느냐 함에는 또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여하간 제작상으로나 자료상으로나 정조의 차이는 공통하여, 重服(중복)일수록 粗略(조약)하여서 수공이 경감되어 있는 것만은 간취하기에 용이한 葬實(장실)이다. 그리하여 이 사실은 일방으로 복자가 이상 시에 처할 만큼 비생산적인 생활양식의 자연한 표현이라 하겠고, 他方(타방)으로 상중의 상장이 평상시와 특이함을 요하는 주술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보기에 족한 것이다. 무릇 상장에 관한 諸多儀式(제다의식) 절차가 死靈(사령)에 대한 금기 즉 禳禍招福(양화초복)의 원시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널리 제민족간에 편재한 민속이어니와, 상복이 또한 사령에 대한 공포와 죽음의 感染(감염)에 대한 恐懼(공구)에 公本(공본)된 것이라 함은 일반 종교민족학자의 인정한 바이다,(2) 그러면 이러한 주술종교적 의미가 어찌하여 상기한바 오복의 명칭에는 표시되지 않엇는가 하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것이나, 의례 이외의 諸多(제다) 지나 고문헌에는 역시 이러한 주술종교적 의미를 표시한 오복의 명칭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으로 제2등급인 자최는 의례상복편에 「疏衰裳齊」라 하였으니, 이 齊(자)는 곧 齊正(자정) 齊等(자등) 齊整(자정) 등의 의미로 복장의 제작상 그 緣(연)을 縫紡(봉방)하여 齊一(제일)히 한다는 것을 표시함은 상기한 바와 같다, 그런데 論語(논어) 孟子(맹자) 荀子(순자) 등의 전적에는 어디나 다 자최로 되여있다, 즉
쪽수▶P1喪服의 制度는 元來 死者 即 喪者에 對한 服者의 親疎遠近 關係와 家族的 社會的 尊卑의 地位身分에 依하야 等級의 差異를 表示한 것인대, 二等級的 差異가 이른바 斬衰・齊衰・大功・小功・緦麻의 五等級으로 되어있는 까닭에 喪服制度를 곧 五服制度라고도 함은 우리가 널리 잘 아는 바이어니와, 이 五服의 等級이 무엇을 標準하고 무슨 根據에 依하야 構成된 것이냐 함은 그다지 明瞭하지 않다. 文公家禮에 依하면 「斬不緝也 凡衣裳旁及下際 皆不縫纖」이라 하고, 「齊緝也 凡衣裳 旁及下際 皆緝」이라 하야 服裝의 末端을 緝 또는 不緝하는 것으로써 最重한 斬衰의 服裝과 齊衰 以下의 服裝과를 區別하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等級의 差異가 服裝製作 上의 方法에 依據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여기에 이 製作上 方法의 差異가 웨다만 斬齊 二服에 限하야 表示되였느냐 하면 거기에는 한 개의 疑問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P2-1다. 또 文公家禮에 依하면 斬衰는 「用極鹿生麻布爲之」라 하고 齊衰는 「用比斬衰次等鹿生布」라 하고, 漸次로 大功은 齊衰에 比하야, 또 小功은 大功에 比하야 稍熟細布를 使用하고 網麻는 極細熟布를 使用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等級의 差異가 服裝의 資料 即 織布의 精粗 及 生熟에 依據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이 織布의 精粗의 差異가 웨 大功 小功 縮麻에 限하야 表示되였으며 웨 緝不緝의 區分原理 以外에 또 이런 區分 標準이 制定되였느냐 함에는 또한 疑問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如何間 製作上으로나 資料上으로나 精粗의 差異는 共通하야, 重服일수록 粗略하여서 手工이 輕減되여 있는 것만은 看取하기에 容易한 葬實이다. 그리하야 이 事實은 一方으로 服者가 異常時에 處할 만큼 非生產的인 生活樣式의 自然한 表現이라 하겠고, 他方으로 喪中의 喪裝이 平常時와 特異함을 要하는 呪術宗敎的 意味를 가진 것이라고 보기에 足한 것이다. 무릇 喪葬에 關한 諸多儀式 節次가 死靈에 對한 禁忌 即 禳禍招福의 原始宗敎的 意味를 가지고 있음은 널리 諸民族間에 遍在한 民俗이어니와, 喪服이 또한 死靈에 對한 恐怖와 死의 感染에 對한 恐懼에 公本된 것이라 함은 一般 宗敎民族學者의 認定한 바이다,(2) 그러면 이러한 呪術宗敎的 意味가 어찌하야 上記한바 五服의 名稱에는 表示되지 않엇는가 하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事情이 있을 것이나, 儀禮 以外의 諸多 支那 古文獻에는 亦是 이러한 呪術宗敎的 意味를 表示한 五服의 名稱을 發見할 수 있는 것이다. 一般으로 第二級报인 齊衰는 儀禮喪服篇에 「疏衰裳齊」라 하였으니, 이 齊는 곧 齊正 齊等 齊整 等의 意味로 服裝의 製作上 그 緣을 縫紡하야 齊一히 한다는 것을 表示함은 上記한 바와 같다, 그런데 論語 孟子 荀子 等의 典籍에는 어데나 다 齋衰로 되여있다, 即
見齋衰者 雖狎必變 (論語鄕黨篇)
쪽수▶P2-2 見齋衰者 雖狎必變 (論語鄕黨篇)
三年之喪 齋疏之服 (孟子滕文公篇)
쪽수▶P2-3 三年之喪 齋疏之服 (孟子滕文公篇)
三年之喪 稱情而立文 所以爲至痛極也 齋戒苴枚 居廬食粥 席薪枕槐 所以爲至痛飾也(荀子 禮論篇)
쪽수▶P3-1 三年之喪 稱情而立文 所以爲至痛極也 齋戒苴枚 居廬食粥 席薪枕槐 所以爲至痛飾也(荀子 禮論篇)
이제 이 齋(자)의 宇義(자의)를 보건대 곧 齋戒(재계) 齋日(재일) 齋忌(재기) 등에 보다시피 금기를 의미한 것이니 이것은 正(정)히 喪服의 주술종교적 의미를 표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자최란 것은 원래 齋衰(재최)이던 것이 齋齊(재제)의 음형이 相似(상사)한 소치로 齋衰(재최)라 하게 된 것이라 하겠고 또 이것을 疏衰(소최)라 하였음은 일찍 鄭玄(정현)의 注(주)한 바 「疏猶如屬」이라 함과 같이 齋忌(재기)의 복을 평시의 복에 비하여 疏粗(소조)한 布(포)로써 제작한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면 왜 이 자최에 한하여 상복 본래의 원시종교적 의미를 표시하였을까 하면 그것은 곧 상복의 시원적 형태에 있서서 이 자최복이 가장 중심적인 것인 까닭이라고 보겠고 민속의 변천 範鬣(범렵)의 발전에 따라서 기타 제 등급의 복으로 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상복의 등급이 그 원시적 형태에 있어서 이미 오등급으로 정연하게 紙織(지직)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니, 지나 고문헌 중에 상장의 예가 비교적 상술하여 있는 순자의 禮論篇(예ᄚᅩᆫ편)에는 참최와 대공의 이등급이 기재되지 않았음은 곧 이러한 사실을 明證(명증)한 것이겠다. 이세 이러한 근거의 입각하여 異灣(이ᄆᆘᆫ)의 신진 郭明昆(곽명곤)이란 이는 의례의 五成(오성)의 조직이 후대의 加作(가작)이요 아마도 孟筍(맹순) 이후의 시대에 당시의 貝俗(패속)으로 되어있는 자최 소공 시마의 3복에 대하여 참최와 대공을 자최와 소공의 위에 첨가한 것이라고 하였으니,(3) 이제 의례에 대한 사적 고증의 시비는 필자로서 論斷(논단)키 어려운 문제이나. 여하간 오복의 조직이 예교문화의 발전에 따라서 점차로 성립된 것이요 상고 시대로부터 완비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은 정당한 견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순자의 예론 중에는 오직 삼등급의 상복 밖에는 제정된 바가 없으니 의복의 제도는 필연코 맹순 이후의 시대에 제정된 것이라고 추측함은 그다지 큰 오류가 아닐 것이요 이 오복의 제도가 확립함은 상복의 습속이 한갓 예교에 한정되지 않고 법제로 확정된 이후의 사실이라고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3-2 이제 이 齋의 宇義를 보건대 곧 齋戒 齋日 齋忌 等에 보다싶이 禁忌를 意味한 것이니 이것은 正히 喪服의 呪術宗敎的 意味를 表示한 것이 分明하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齊衰란 것은 元來 齋衰이던 것이 齋齊의 音形이 相似한 所致로 齋衰라 하게 된 것이라 하겠고 또 이것을 疏衰라 하였음은 일즉 鄭玄의 注한 바 「疏猶如屬」이라 함과 같이 齋忌의 服을 平時의 服에 比하야 疏粗한 布로써 製作한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면 웨 이 齊衰에 限하야 喪服 本來의 原始宗敎的 意味를 表示하였을가 하면 그것은 곧 喪服의 始原的 形熊에 있서서 이 齊衰服이 가장 中心的인 것인 까닭이라고 보겠고 民俗의 變遷 範鬣의 發展에 따라서 其他 諸 等級의 服으로 分化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喪服의 等級이 그 原始的 形態에 있어서 이미 五等級으로 整然하게 紙織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니, 支那 古文獻 中에 喪葬의 禮가 此絞的 詳述하여 있는 荀子의 禮論篇에는 斬衰와 大功의 二等級이 記載되지 않었음은 곧 이러한 事實을 明證한 것이겠다. 이세 이러한 根據의 立脚하야 異灣의 新進 郭明昆이란 이는 儀禮의 五成의 組織이 後代의 加作이요 아마도 孟筍 以後의 時代에 當時의 貝俗으로 되어있는 齊衰 小功 緦麻의 三服에 對하야 斬衰와 大功을 齊衰와 小功의 우에 添加한 것이라고 하였으니,(3) 이제 儀禮에 對한 史的 考證의 是非는 筆者로서 論斷키 難한 問題이나. 如何間 五服의 組織이 禮敎文化의 發展에 따라서 漸次로 成立된 것이요 上古 時代로부터 完備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은 正當한 見解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미 考察한 바와 같이 荀子의 禮論 中에는 오즉 三等級의 喪服밖에는 制定된 바가 없으니 衣服의 制度는 必然코 孟荀 危後의 時代에 制定된 것이라고 推測함은 그다지 큰 誤謬가 아닐 것이요 이 五服의 制度가 確立함은 喪服의 習俗이 한갓 禮敎에 限定되지 않고 法制로 確定된 以後의 史實이라고 보는 것도 當然한 일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오복제도는 예제로서 또한 법제로서 중국문화를 ■節(■절)한지 이미 장구한 세월을 가졌으니, 따라서 그 발전 과정에 있어서, 그 원시종교적 의미는 불식간에 상실되고 다만 제작상 또는 자료상의 등급만이 오복의 명칭에 잔존된 것이겠고 이 오복의 제도는 그대로 조선 일본에 전파하여 이른바 대가족 제도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상장의 경중 喪期(상기)의 장단 상복자의 신분관계의 부문에 의하여 오복의 구조 원리를 탐구하려한다.(4)
쪽수▶P4-1 그러나 엇젯든 이 五服制度는 禮制로서 또한 法制로서 中國文化를 閃節힌지 이미 長久한 歲月을 가젔으니, 따라서 그 發捉過程에 있어서 發展過程에 있어서, 그 原始宗敎的 意味는 不識間에 喪失되고 다만 製作上 또는 資料上의 等級만이 五服의 名稱에 殘存된 것이겠고 이 五服의 制度는 그대로 朝鮮 日本에 傳播하야 이른바 大家族 制度의 基礎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喪裝의 輕重 喪期의 長短 喪服者의 身分關係의 部門에 宜하야 五服의 構造 原理를 探究하려한다.(4)


































본문2: 2


상장에 관하여 우선 그 자료가 왜 麻布(마포)로 되어 있느냐 함에는 무슨 근거가 있을 듯하다. 일반으로 상복이 주술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한, 상용복과 다를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그 직물의 종류까지 상용복의 그것과 다른 것을 취하였는가 어뗜가 함은 의례 상복제의 제정된 당시의 지나 민속을 분명히 하기 전에 어떻다고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 마포란 것은 동양민속의 의복지로서 사용하게 된 지 그 기원이 상당히 장구한 일이지만 그것을 특히 상복용으로 한 것은 비교적 粗大(조대)한 布(포)류란 것이 중상일수록 조대한 직포임을 보아 분명한 일이요, 또 그 布色(포색)이 조악하게 보인 까닭인가 생각 된다. 직포의 조대함을 사용함은 곧 가공이 근소한 까닭이요 수공이 근소한 것을 사용함은 비생산적 상기에 있는 裝服者(장복자)로서 생활상 필연한 경제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그럼으로 직물의 정조를 구별하는 데는 방직상의 升(승)을 표준하고 참최 3승 자최 4승・5승・6승 대공 7승・8승・9승 소공 11승・12승 시마 15승 등의 등급이 상복기에 규정되어 있다. 또 복색으로 말하면 일반으로 백색・흑색・암청색이 사용되고 원칙상으로는 廉價(염가)하고 평범한 직물의 자연색이 사용된 것은 널리 제민족에 잇는 습속이다.(1) 그러나 상복을 주술종교적 견지에서 볼 때 사령에 대한 금기의 표시를 마포요, 같은 추악한 색으로써 함은 또한 원시종교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경제적 및 종교적 요구에 기인한 직포의 정조와 복색의 미추는 또한 상포의 사용에 당하여 생숙의 구별에도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례에 의하면 자최엔 極麤生布(극추생포), 참최엔 次麤生布(차추생포), 期(기)엔 次等生布(차등생포), 대공엔 稍麤熟布(초추숙포), 소공엔 稍細熟布(초세숙포), 시마엔 極細熟布(극세숙포)를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즉 麤生布(추생포)는 방직이 조대하고 색채가 추악함으로 중상에 용하고, 숙세포는 이에 반함으로 경상에 용하여 등급의 차이를 표시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또한 상장의 일부분인 終帶(종대)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즉 참최엔 苴麻(저마) 즉 有子麻(유자마), 자최 이하엔 某麻(모마) 즉 無子麻(무자마), 시마엔 熟麻(숙마)가 사용된다. 의례 상복편에 의하면 斬衰章傳(참최장전)에 「苴経者 麻之有賞也 宜経大精 左本在下 去五分一 以爲帶」라 하였고, 齊衰章傳(자최장전)에 「牡麻者某麻也」라 하였으니, 이 直麻(직마)는 雌麻(자마)로 某麻(모마)에 비하여 조악하고, 모마는 雄麻(웅마)로 苴麻(저마)에 비하여 精美(정미)함으로 인하여 참자 2자에 배당된 것이 명백하다. 일찍히 정현의 주에 「苴麻者其貌苴 以爲経 服重者尙靂惡」이라 함은 곧 이러한 점을 말한 것이다.
쪽수▶P4-2喪裝에 關하야 于先 그 資料가 웨 麻布로 되여있느냐 함에는 무슨 根據가 있을 듯하다. 一般으로 喪服이 呪術宗敎的 意義를 가지고 있는 限, 常用服과 다를 것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그 織物의 種類까지 常用服의 그것과 다른 것을 取하였는가 어뗜가 함은 儀禮喪服制의 制定된 當時의 支那民俗을 分明히 하기 前에 어떠타고 말하기 難한 일이다. 다만 이 麻布란 것은 東洋民俗의 衣服地로서 使用하게 된지 그 起原이 相當히 長久한 일이지만 그것을 特히 喪服用으로 한 것은 比牧的 粗大한 布類란 것이 重喪일수록 粗大한 織布임을 보아 分明한 일이요, 또 그 布色이 粗惡하게 보인 까닭인가 생▶P5-1각 된다. 織布의 粗大함을 使用함은 곧 加工이 僅少한 까닭이요 手工이 僅少한 것을 使用함은 非生産的 喪期에 잇는 裝服者로서 生活上 必然한 經濟的 要求에 依한 것이라 하겠다, 그럼으로 織物의 精粗를 區別하는 데는 紡織上의 升을 標準하고 斬衰 三升 齊衰 四升・五升・六升 大功 七升・八升・九升 小功 十一升・十二升 緦麻 十五升 等의 等級이 喪服記에 規定되여 있다. 또 服色으로 말하면 一般으로 白色・黑色・暗靑色이 使用되고 原則上으로는 廉價하고 平凡한 織物의 自然色이 使用된 것은 널리 諸民族에 잇는 習俗이다.(1) 그러나 喪服을 呪術宗敎的 見地에서 볼 때 死靈에 對한 禁忌의 表示틀 麻布요, 가튼 醜惡한 色으로써 함은 또한 原始宗敎的 要求에 依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經濟的 及 宗敎的 要求에 基因한 織布의 精粗와 服色의 美醜는 또한 喪布의 使用에 當하야 生熟의 區別에도 表示되여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家禮애 依하면 斬衰엔 極麤生布, 齊衰엔 次麤生布, 期엔 次等生布, 大功엔 稍麤熟布, 小功엔 稍細熟布, 總엔 極細熟布를 使用하도록 規定되여 있다. 即麤生布는 紡織이 粗大하고 色彩가 醜惡함으로 重喪에 用하고, 熟細布는 이에 反함으로 輕喪에 用하야 等級의差異를 表示한 것이다. 이러한 差異는 또한 喪裝의 一部分인 終帶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即 斬衰엔 苴麻 即有子麻, 齊衰 以下엔 某麻 即 無子麻, 總엔 熟麻가 使用된다. 儀禮 喪服篇에 依하면 斬衰章傳에 「苴経者 麻之有賞也 宜経大精 左本在下 去五分一 以爲帶」라 하였고, 齊衰章傳에 「牡麻者某麻也」라 하였으니, 이 直麻는 雌麻로 牡麻에 比하야 粗惡하고, 某麻는 雄麻로 苴麻에 比하야 精美함으로 因하야 斬齊 二者에 配當된 것이 明白하다. 일즉히 鄭玄의 註에 「苴麻者其貌苴 以爲経 服重者尙靂惡」이라 함은 곧 이러한 點을 말한 것이다.
다음에 상장의 제부분을 보건대 가장 주요한 것은 물론 衰裳(최상)이다. 衰(최)는 원래 縗(최)로 作(작)하여 상의를 말하고, 裳(상)은 곧 하의를 말한 것이다. 衰衣(최의)에는 전면으로 보아서 項部(항부, 濶中(활중) 또는 闕中(궐중))에 領(령, 또는 加領(가령))이 있고 肩部(견부)에 適(적, 辟領(피령))이 있고 흉부(當心處, 당심처)에 최가 있고 後而(후이)으로 보아서 背部(배부)에 負板(부판)이 있으니, 제각기 규정된 寸法(촌법)에 따라 布片(포편)을 附添(부첨)한 것이다. 그러면 대체 이러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에 유래한 것인가 하면, 혹은 실효 상의 요구에 의한 것, 혹은 금의 의미를 표시한 것, 혹은 상용복과의 차이를 지시한 것 등이려니와, 당초에 상복이 제작될 당시의 지나복이 어떤 것이던가를 명백히 알기 전에는 이것을 어떠하다고 확언하기 어렵다. 그 중에 부겁과 같은 것은 葬儀(장의) 이전에 한하여 所用(소용)된 것을 보면 원시민속에 있어서 복자 자신이 상자의 시체를 背負(배부)치야 운반하는데 실용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견부의 적과 부판과 흉부의 최는 대공 이하에 소용되지 않은 것을 보면 상의 경중을 표시하기 위하여 첨가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 뿐 아니라 최의의 착복상으로 보아 상의 경중에 따라서 ■을 달리하는 것이니, 즉 참최엔 前掩(전엄) 其後(기후) 자최엔 後掩(후엄) 其前(기전)이라는 규정이다. 이에 대하여 裳衣(상의)로 말하면 그 장단을 適宜(적의)히 하여 6폭 또는 7폭 12폭 등 예서의 度定(탁정)이 一様(일양)하지 않다. 이 衰裳(최상)의 제작에 관하여 특히 주의할 만한 것은 衣端(의단)을 縫緝(봉집)하는 데 向內(향내) 向外(향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가례 주에 「衣縫向外 裳縫向内」라 하였으며 의 즉 衰衣(상의)만은 오복의 어느 경우에나 다 향외로 된 것이 특색이다. 어쨌든 그것은 복자의 불길을 상징하고 따라서 평상복과의 차이를 표시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衰裳(최상)의 내복으로 申衣(신의)란 것이 있으니 中單衣(중단의) 또는 상용의 周衣(주의)와 흡사한 것이요 衰衣(상의)보다는 稍細布(초세포)를 用(용)하여 그 邊端(변단)을 다 봉집한 것이다. 이 외에 冠(관)・首純(수순)・孝巾(효건)・腰耗(요모)・絞帶(교대)・行纏(행전)・履(리) 등이 있고, 또 婦女(부녀)에 한하여 竹釵(죽채)・蓋頭(개두)가 있으니 그 製法(제법)은 예서에 따라 차이가 있거니와 그 원형은 大差(대차)가 없을 것이다, 이제 四禮便覽(사례편람)에 의하여 상장 일반의 제작법을 대략 擧示(거시)하면 이러하다
쪽수▶P5-2다음에 喪裝의 諸部分을 보건대 가장 主要한 것은 勿論 衰裳이다. 衰는 元來 縗로 作하야 上衣를 말하고, 裳은 곧 下衣를 말한 것이다. 衰衣에는 前面으로 보아서 項部(濶中 또는 闕中)에 領(또는 加領)이있고 肩部에 適(辟領)이 있고 胸部(當心▶P6-1處)에 衰가 있고 後而으로 보아서 背部에 負板이 있으니, 제각금 規定된 寸法에 따라 布片을 附添한 것이다. 그러면 大體 이러한 것이 무엇을 意味하고 무엇에 由來한 것인가 하면, 或은 實效 上의 要求에 依한 것, 或은 禁의 意味를 表示한 것, 或은 常用服과의 差異를 指示한 것 等이려니와, 當初에 喪服이 制作될 當時의 支那服이 어떤 것이던가를 明白히 알기 前에는 이것을 어떠하다고 確言하기 어렵다. 그 中에 負极과 가튼 것은 葬儀 以前에 限하야 所用된 것을 보면 原始民俗에 있어서 服者 自身이 喪者의 屍體를 背負치야 運搬하는데 實用되였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肩部의 適과 負板과 胸部의 衰는 大功 以下에 所用되지 않은 것을 보면 喪의 輕重을 表示하기 爲하야 添加한 것임은 分明하다. 그뿐아니라 衰衣의 着服上으로 보아 喪의 輕重에 따라서 ■을 달리하는 것이니, 即 斬衰엔 前掩 其後 齊衰엔 後掩 其前이라는 規定이다. 이에 對하야 裳衣로 말하면 그 長短을 適宜히 하야 六幅 또는 七幅 十二幅 等 禮書의 度定이 一様하지 않다. 이 衰裳의 製作에 關하야 特히 注意할만한 것은 衣端을 縫緝하는 데 向內 向外의 差異가 있다는 것이다, 即 家禮註에 「衣縫向外 裳縫向内」라 하였으며 衣 即 衰衣만은 五服의 어느 境遇에나 다 向外로 된 것이 特色이다. 엇잿든 그것은 服者의 不吉을象徵하고 따라서 平常服과의 差異를 表示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야 이 衰裳의 內服으로 申衣란 것이 있으니 中單衣 또는 常用의 周衣와 恰似한 것이요 衰衣보다는 稍細布를 用하야 그 邊端을 다 縫緝한 것이다. 이 外에 冠・首純・孝巾・腰耗・絞帶・行纏・履 等이 있고, 또 婦女에 限하야 竹釵・蓋頭가 있으니 그 製法은 禮書에 따라 差異가 있거니와 그 原形은 大差가없을 것이다, 이제 四禮便覽에 依하야 喪裝 一般의 製作法을 大略 擧示하면 이러하다
一, 衰衣. 用布二幅 其長四尺六寸 中屈下垂 前後各長二尺三寸 除縫餘一寸則長一尺二寸.
쪽수▶P6-2 一, 衰衣. 用布二幅 其長四尺六寸 中屈下垂 前後各長二尺三寸 除縫餘一寸則長一尺二寸.
① 辟領. 兩肩上巾血處四寸之卜, 而疊後兩某左右幅各裁入四寸訖 分招所栽者向外 各加而肩上 只爲左有適 即辟領 旣摺所裁者向外 其前後左右虛處各四寸 即濶中也 大功以下 無辟領 其分摺向外者如诃去之 以後兩票聯合背後縫.
쪽수▶P6-3 ① 辟領. 兩肩上巾血處四寸之卜, 而疊後兩某左右幅各裁入四寸訖 分招所栽者向外 各加而肩上 只爲左有適 即辟領 旣▶P7-1摺所裁者向外 其前後左右虛處各四寸 即濶中也 大功以下 無辟領 其分摺向外者如诃去之 以後兩票聯合背後縫.
② 袂. 用布二幅各長四尺六寸 中屈之 縫聯於外身之左右 又縫合其下際除縫餘一寸則亦各二尺二寸 又於袂端縫合其下 一尺爲方袂 留其二寸 一寸爲袂口 即枇也.
쪽수▶P7-2 ② 袂. 用布二幅各長四尺六寸 中屈之 縫聯於外身之左右 又縫合其下際除縫餘一寸則亦各二尺二寸 又於袂端縫合其下 一尺爲方袂 留其二寸 一寸爲袂口 即枇也.
③ 加領. 別用布長一尺六寸許闊八寸許縱摺而中分之 其下一半兩端各裁斷方四寸 際去不用 只裕中間八寸以加後之闢中 從項上分左右對摺向前垂下 以加於前濶中.
쪽수▶P7-3 ③ 加領. 別用布長一尺六寸許闊八寸許縱摺而中分之 其下一半兩端各裁斷方四寸 際去不用 只裕中間八寸以加後之闢中 從項上分左右對摺向前垂下 以加於前濶中.
④ 袷. 即加於領裏者 用布一條 長一尺六寸許 廣一尺四寸 分作三條 二條疊縫於領 以加於範闊中 一條换拓爲二重 加於後闊中 並加領 乃三重也.
쪽수▶P7-4 ④ 袷. 即加於領裏者 用布一條 長一尺六寸許 廣一尺四寸 分作三條 二條疊縫於領 以加於範闊中 一條换拓爲二重 加於後闊中 並加領 乃三重也.
⑤ 帶下. 用縱布廣一尺一寸 上屬於衣橫繞於腰 以腰之濶狹爲度除縫餘 一寸則高一尺
쪽수▶P7-5 ⑤ 帶下. 用縱布廣一尺一寸 上屬於衣橫繞於腰 以腰之濶狹爲度除縫餘 一寸則高一尺
⑥ 袵. 用 布二幅 各長三尺五寸 每幅上於左旁一尺之下 裁入六寸 下於右旁 一尺之上 亦裁人 六寸 便於劃處 相望斜裁 以廣頭向上疊之 血邊在外交峡 垂之如燕尾狀 齋綴於衣兩旁腋下 斬衰前掩其後 齊衰以下役袍其前.
쪽수▶P7-6 ⑥ 袵. 用 布二幅 各長三尺五寸 每幅上於左旁一尺之下 裁入六寸 下於右旁 一尺之上 亦裁人 六寸 便於劃處 相望斜裁 以廣頭向上疊之 血邊在外交峡 垂之如燕尾狀 齋綴於衣兩旁腋下 斬衰前掩其後 齊衰以下役袍其前.
⑦ 衰. 用布長六寸廣四寸 綴於衣外衿之前當心處 大功以下不用
쪽수▶P7-7 ⑦ 衰. 用布長六寸廣四寸 綴於衣外衿之前當心處 大功以下不用
⑧ 負板, 用而方尺八寸 綴於領下 當背龍之 大功時下不用
쪽수▶P7-8 ⑧ 負板, 用而方尺八寸 綴於領下 當背龍之 大功時下不用
⑨ 衣聲. 四即小帶 二各綴於內外衿旁 一綴於衣外右处下 一綴於衣沖左建下 使相掩結
쪽수▶P7-9 ⑨ 衣聲. 四即小帶 二各綴於內外衿旁 一綴於衣外右处下 一綴於衣沖左建下 使相掩結
二, 裳. 用布七幅 長短隨宜縫含爲前三後四 每縫除左右縫餘各一寸 前後不連 每幅作三輒 其輒則於每幅上頭 用指提起小許 摺向右又提起小許摺向左 兩相擄著 用線綴住而空其中 以爲輒 相揍在外 與幅巾輒不同 如是者三 又以布一條 廣四五寸 縱摺之 繼前後七幅 而前後相當處 疊複小許而夾縫之 約圍於腰 又交掩小許 兩端有小帶 後帶短向前 前帶長向後 使重圍而相結於前
쪽수▶P7-10 二, 裳. 用布七幅 長短隨宜縫含爲前三後四 每縫除左右縫餘各一寸 前後不連 每幅作三輒 其輒則於每幅上頭 用指提起小許 摺向右又提起小許摺向左 兩相擄著 用線綴住而空其中 以爲輒 相揍在外 與幅巾輒不同 如是者三 又以布一條 廣四五寸 縱摺之 繼前後七幅 而前後相當處 疊複小許而夾縫之 約圍於腰 又交掩小許 兩端有小帶 後帶短向前 前帶▶P8-1長向後 使重圍而相結於前
三, 冠. 用厚紙糊爲材 廣五寸二分半 裏以布 布升比衰稍細 三年之喪 鍛而勿灰 蕃以下 用灰銀 裝積爲三梁 其法從一方 針七分半之外 又中摺七分半爲梁 如是者凡三 所餘又七分半 裝積之則爲廣三寸 或以廣五寸二分半之材 分識作七以第二分 第四分 第六分中摺之 爲梁則如法而大功以上皆向右 小功以下皆向左 用線縱縫其梁 長足跨頂前後 斩衰以麻繩爲武 齊衰以下用布 夾縫廣一寸許 從額上約之 至項後交向前 各至耳邊結之 垂其餘爲纓 使結於題下 屈冠兩頭 入武內 向外反屈之 縫於武 所謂外畢.
쪽수▶P8-2 三, 冠. 用厚紙糊爲材 廣五寸二分半 裏以布 布升比衰稍細 三年之喪 鍛而勿灰 蕃以下 用灰銀 裝積爲三梁 其法從一方 針七分半之外 又中摺七分半爲梁 如是者凡三 所餘又七分半 裝積之則爲廣三寸 或以廣五寸二分半之材 分識作七以第二分 第四分 第六分中摺之 爲梁則如法而大功以上皆向右 小功以下皆向左 用線縱縫其梁 長足跨頂前後 斩衰以麻繩爲武 齊衰以下用布 夾縫廣一寸許 從額上約之 至項後交向前 各至耳邊結之 垂其餘爲纓 使結於題下 屈冠兩頭 入武內 向外反屈之 縫於武 所謂外畢.
四, 孝巾. 用以承冠者 其制用布衷首 合縫在後之中 摺其兩方 藏在案 縫合其上 從前後望少如方冠 俗稱頭巾.
쪽수▶P8-3 四, 孝巾. 用以承冠者 其制用布衷首 合縫在後之中 摺其兩方 藏在案 縫合其上 從前後望少如方冠 俗稱頭巾.
五, 中衣. 用以郁衰服者 用布用熟同衰服 布升衰梢細 那即渺舟 斬衰亦以布緣邊 或用中單衣 制如俗(周遮衣)袂端不圓殺 袂端及衿裔末 皆緣之 一名汗衫.
쪽수▶P8-4 五, 中衣. 用以郁衰服者 用布用熟同衰服 布升衰梢細 那即渺舟 斬衰亦以布緣邊 或用中單衣 制如俗(周遮衣)袂端不圓殺 袂端及衿裔末 皆緣之 一名汗衫.
五, 首絰. 用以加於冠上者 用麻兩股相交 其大斬衰九寸 齊衰七寸二分 大功五寸七分 小功四寸六分 纏三寸五分. 斬衰麻本在左從額前向右圍之 以其末加本上而繫之 齊衰以下 麻本在右 從簽刖向左圍之 以其未繫於本下. 斬衰以麻繩爲櫻而垂之 結於願下 齊衰以下 用布 小功以下 無纓 中殡七月 亦無櫻
쪽수▶P8-5 五, 首絰. 用以加於冠上者 用麻兩股相交 其大斬衰九寸 齊衰七寸二分 大功五寸七分 小功四寸六分 纏三寸五分. 斬衰麻本在左從額前向右圍之 以其末加本上而繫之 齊衰以下 麻本在右 從簽刖向左圍之 以其未繫於本下. 斬衰以麻繩爲櫻而垂之 結於願下 齊衰以下 用布 小功以下 無纓 中殡七月 亦無櫻
六, 腰経. 巾以申束絞帶上者 用麻兩股相交 五分首耗去一 以爲腰統 其圍斬衰七寸二分 齊衰五寸七分 大功四寸六分 小功三寸五分 綱二寸八分 其長中取圍腰而相結處左右 各綴小帶 以備固結斬衰用麻繩 齊衰以下用布 絰和交之卜左右 各散垂三尺不絞 至卒哭後絞之 年五十以上者及小功以下及婦人 不散垂 初即絞之 亦垂三尺 兩頭用麻繩結之 使不解散.
쪽수▶P8-6 六, 腰経. 巾以申束絞帶上者 用麻兩股相交 五分首耗去一 以爲腰統 其圍斬衰七寸二分 齊衰五寸七分 大功四寸六分 小功三寸五分 綱二寸八分 其長中取圍腰而相結處左右 各綴小帶 以備固結斬衰用麻繩 齊衰以下用布 絰和交之卜左右 各散垂三尺不絞 至卒哭後絞之 年五十以上者及小功以下及婦人 不散垂 初即絞之 亦垂三尺 兩頭用麻繩結之 使不解散.
七, 絞帶. 散膏用以束於腰経下者 斬衰用麻纖一條 長十八九尺 中屈之 爲兩股各一尺餘 結合於张予然後合其餘 順目相糾 四脚積而相重 即三重四胰 其大較小於腰経 通長八九尺 圍腰從左 過後至前 乃以其右端 穿彊子而反揷於右 齊衰以下 用布廣四寸許夾縫之爲二寸 大功小功總以此較狹 皆屈其右端尺許 用線綴住以爲张 布外各如其冠 生熟各如其服.
쪽수▶P9-1 七, 絞帶. 散膏用以束於腰経下者 斬衰用麻纖一條 長十八九尺 中屈之 爲兩股各一尺餘 結合於张予然後合其餘 順目相糾 四脚積而相重 即三重四胰 其大較小於腰経 通長八九尺 圍腰從左 過後至前 乃以其右端 穿彊子而反揷於右 齊衰以下 用布廣四寸許夾縫之爲二寸 大功小功總以此較狹 皆屈其右端尺許 用線綴住以爲张 布外各如其冠 生熟各如其服.
七, 行糰. 家禮所謂勒帛 小學所謂縛袴 禮雖不見於喪服 今人皆用布爲之 固不可廢 升布當如中衣.
쪽수▶P9-2 七, 行糰. 家禮所謂勒帛 小學所謂縛袴 禮雖不見於喪服 今人皆用布爲之 固不可廢 升布當如中衣.
八, 履. 斬衰菅履 齊衰疎履 不杖麻履 齊衰三月與大功繩履 小功以不吉履無絢.
쪽수▶P9-3 八, 履. 斬衰菅履 齊衰疎履 不杖麻履 齊衰三月與大功繩履 小功以不吉履無絢.
九, 蓋頭. 用以障身者 用布稍細者 凡三幅長與身齊或五尺 數斯不緝邊 齊衰緝邊 今俗羅兀其遺意.
쪽수▶P9-4 九, 蓋頭. 用以障身者 用布稍細者 凡三幅長與身齊或五尺 數斯不緝邊 齊衰緝邊 今俗羅兀其遺意.
이 외에 童子服(동자복)이 있으니 그 체제는 長者(장자)의 그것과 다름이 없거니와 冠巾(관건)首経(수경)이 없는 것이 특색이요, 또 侍者服(대자복) 妾婢服(첩비복)의 제정이 있으니 전자는 生布衣(생포의)로 俗制(속제)의 直領(직령) 혹은 中單衣(중단의)와 흡사하며 후자는 생포 背子(배자)를 用(용)함이 특색이다. 또 공통 자료인 마포는 상의 경중에 따라 생숙 麤細(추세)의 차이가 있음은 기술한 바와 같거니와 経帶(경대)에 용한 마 역시 차이가 있으니 참최에는 저마 즉 유자마를 용하고 자최 이하에는 모마 즉 무자마를 용하고 총에는 숙마를 용한다는 규정이다.
쪽수▶P9-5 이 外에 童子服이 있으니 그 體制는 長者의 그것과 다름이 없거니와 冠巾首経이 없는 것이 特色이요, 또 侍者服 妾婢服의 制定이 있으니 前者는 生布衣로 俗制의 直領 或은 中單衣와 恰似하며 後者는 生布 背子를 用함이 特色이다. 또 共通 資料인 麻布는 喪의 輕重에 따라 生熟 屬細의 差異가 있음은 旣述한 바와 같거니와 経帶에 用한 麻 亦是 差異가 있으니 斬衰에는 苴麻 即有子麻를 用하고 齊衰 以下에는 桌麻 即無子麻를 用하고 總에는 熟麻를 用한다는規定이다
이 외에 상장의 일부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杖(장)이다 소위 苴杖(저장)은 참최엔 竹杖(죽장)이요 자최엔 桐杖(동장)인대 桐(동)이 없으면 柳(유)를 용한 것이 일반이니 이것은 예기 喪服小記(상복소기)에 「苴杖竹也 削杖桐也」라는 원칙에 의한 것이겠다. 그러면 왜 이 죽과 동이 사용되었느냐 함에는 그 기원을 一考(일고)할 만한 일이다. 원래 상장 그것이 주술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이 효장이란 것도 악령을 구축하고 邪魔(사마)를 진무하는 일종의 呪具(주구, talisman)라고 볼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죽과 동이 특히 사령을 진무하는 呪刀(주도)을 가진 것으로 본 까닭이였던지? 이제 잠깐 문헌을 참고하건대 순자에는 齊衰苴杖(자최저장)이라 할 뿐이요 참최와 장에 대하여 아무런 규정이 없는데 이 점으로 보아서 이미 말한 바 곽명곤이란 이는 참최가 자최에서 파생함과 갈이 削杖(삭장)이 저장에서 파생한 것이라 하여 이와 같이 말하였다.
쪽수▶P9-6 이 外에 喪裝의 一部로서 看過할 수 없는 것은 技이다 所謂 孝杖은 斬衰엔 竹杖이요 齊衰엔 桐杖인대 桐이 없으면 柳를 用한 것이 一般이니 이것은 禮記 喪服小記에 「苴杖竹也 削杖桐也」라는 原則에 依한 것이겠다. 그러면 웨 이 竹과 桐이 使用되였느냐 함에는 그 起原을 一考할 만한 일이다. 元來 喪裝 그것이 呪術宗敎的 意義를 가지고 있음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이 孝杖이란 것도 惡靈을 驅逐하고 邪魔를 鎭撫하는 一種의 呪具(talisman)라고 볼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竹과 相이 特히 死靈을 鎭撫하는 呪刀을 가진 것으로 본 까닭이였던지? 이제 잠간 文獻을 參考하건대 苟子에는 齊衰苴杖이라 할 뿐이요 斬衰와 杖에 對하야 아무런 規定이 없는대 이 點으로 보아서 이미 말한 바 郭明昆이란 이는 斬틀:Tagpage衰가 齊衰에서 派生함과 갈이 削杖이 苴杖에서 派生한 것이라 하야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의례 상복편의 作者(작자)는 자최에 대하여 참최를 생각해낸 것 같이 저장에 대하여 삭장을 생각해 낸 것인가 한다. 혹은 斬(참)과 削(삭)은 같은 관념 연합의 심리에서 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리하여 新案(신안)의 참최에 종래의 저장을 배당하였음으로 종래의 자최에 신안의 삭장을 배당한 것 같다 운운(2) (譯原文, 역원문)
쪽수▶P10-2 儀禮喪服篇의 作者는 齊衰에 對하야 斬衰를 생각해낸 것 같이 苴杖에 對하야 削杖을 생각해 낸 것인가 한다. 或은 斬과 削은 같은 觀念聯合의 心理에서 構成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가. 그리하야 新案의 斬衰에 從來의 苴杖을 配當하였음으로 從來의 齊衰에 新案의 削杖을 配當한 것 같다 云云(2) (譯原文)
그렇다면 왜 新案(신안)의 참최에 신안의 삭장을 배당치않고 오히려 종래의 자최에 신안의 삭장을 배당하였는가에 대하여 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의례 상복편이 그가 말한 바와 같이 후대의 가작인지 아닌지는 필자 용이히 논단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이 점에 관하여는 그의 설명에 전후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는 삭장을 저마 즉 雌麻(자마)로 제작한 것이 그 원시적 형태라고 推斷(추단)하였으나, 여기에 또한 의문이 없지 않다. 원래 자마를 저마라 함은 이미 정현의 주한 바와 같이 그 色容(색용)이 癖惡(벽악)한 까닭이요 따라서 저장直의 저는 다만 조악한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찍 일본학자 湖村(호촌)・桂五十郞(계오십랑) 씨의 주석에 의하면
쪽수▶P10-3 그렇다면 웨 新案의 斬衰에 新案의 削杖을 配當치않고 오히려 從來의 齊衰에 新案의 削杖을 配當하였는가에 對하야 한 疑問이 생기는 것이다. 儀禮 喪服篇이 그가 말한 바와 같이 後代의 加作인지 아닌지는 筆者 容易히 論斷하기 어려운 問題이지만 이 點에 關하야는 그의 設明에 前後 矛盾을 늣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는 在杖을 苴麻 即 雌麻로 製作한 것이 그 原始的 形態라고 推斷하였으나, 여기에 또한 疑問이 없지 않다. 元來 雌麻를 苴麻라 함은 이미 鄭玄의 注한 바와 같이 그 色容이 癖惡한 까닭이요 따라서 直杖의 苴는 다만 粗惡한 것을 意味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즉 日本學者 湖村・桂五十郞氏의 註釋에 依하면
저는 黯(암)이다. 상중 憂痛(우통)의 극에 貌(모)가 蒼黯(창암)하다는 뜻으로 인하여 저장이라 한 것이다.(3) (譯原文)
쪽수▶P10-4 苴는 黯이다. 喪中 憂痛의 極에 貌가 蒼黯하다는 뜻으로 因하야 苴杖이라 한 것이다.(3) (譯原文)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저장은 苴色(저색)의 죽으로 제작한 장이라고 보겠거니와, 특히 죽으로써 주구를 삼는 것은 무슨 동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듣건대 현금 臺灣(대만)에 있어도 父喪(부상)엔 죽을 용하고 母喪(모상)엔 旃瀆木(전독목)을 용한다고 한다. 다만 孝杖(효장)의 원시적 형태를 주구로 볼테이면 장에 의미가 있을 것이요 그 장의 종류를 택한 것은 그 사회환경의 편의 여하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중국이나 대만 또는 조선에서는 이 죽이 적당하다고 본 까닭일 것이다 물론 이 효장이란 것을 주술종교적 의미로 본 것도 응당이려니와 또 當喪(당상)한 最近親(최근친)으로서 애통이 극한 소치로 신체를 지지하는데 所用(소용)있다는 실효적 요구에도 기인함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죽장과 삭장을 구별하였음은 「大圓地方」이라는 관념과 父天母地(부천모지)라는 관념이 연합하여 참최와 자최에 배당한 것인가 한다.
쪽수▶P10-5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苴杖은 苴色의 竹으로 製作한 杖이라고 보겠거니와, 特히 竹으로써 呪具를 삼는 것은 무슨 動因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듯건대 現今 毫灣에 있어도 父喪엔 竹을 用하고 母喪엔 旃瀆木을 用한다고 한다. 다만 孝杖의 原始的 形態를 呪具로 볼테이면 杖에 意味가 있을 것이요 그 枝의 種類를 擇한 것은 그 社會環境의 便宜 如何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中國이나 臺灣 또는 朝鮮에서는 이 竹이 適當하다고 본 까닭일 것이다 勿論 이 孝杖이란 것을 呪術宗敎的 意味로 본 것도 應當이려니와 또 當喪한 最近親으로서 哀痛이 極한 所致로 身體를 支持하는데 所用있다는틀:Tagpage 實效的 要求에도 起因함을 看過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야 竹杖과 削杖을 區別하였음은 「大圓地方」이라는 觀念과 交天母地라는 觀念이 聯合하야 斬衰와 齊衰에 配當한 것인가 한다.
이상으로써 當喪(당상) 즉시의 상장 일반에 관하여 개관하였거니와, 또 상기의 遷移(천이)에 따라 점점 상장이 변해 감을 간과하여서는 안될것이다. 대저 상기의 경과에 따라 차차로 상복에 귀환하게 됨은 자연한 경로일 것이다. 이제 그 變服(변복)의 경로를 보건대 朞年(기년) 이하는 일회로써 족한 것이나 삼년상인 경우에는, 小祥(소상)・大祥(대상)・禪(선)의 3기를 획하아 변이한다. 먼저 소상에는 練服(연복)으로 변하되 冠巾衰裳(관건쇠상)을 조금 精細(정세)한 練布(연포)로 제작한다. 또 부판・適(적)・琴(금)는 그대로 두지만 남자는 首絰(수질)을 去(거)하고 부인은 腰紅(요홍)을 거한다 그 대로 葛紅(갈혹, 속칭 총올치)을 사용한다. 喪禮備要(상례비요)에 「應服作者改吉服 然猶盡其月 不服金珠錦繍紅紫」라 함은 기년상에 1주년을 지나면 일절 素衣(소의)로 변복할 것을 말한 것이요 사례편람에 「按家禮 只云 陳練服而無某服不練之文 正服不練 雖是蹄說 旣練液中衣 不練衰裳 則上下表夷其不相稱 並練衰裳 恐得宜」 라 함은 삼년상엔 소상에 연복으로 변함을 말한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기를 당하여 봉집하지 않고 두었던 참쇠상을 봉집한다 하나, 또 다른 사람은 斬衰終三年不緝(참최종삼년불집)이라야 새로 봉집치 않은 것을 예의 원칙으로 삼는다. 士儀(사의)에 의하면
쪽수▶P11-2 以上으로써 當喪 卽時의 喪裝 一般에 關하야 槪觀하였거니와, 또 喪期의 遷移에 따라 漸々 喪裝이 變헤감을 看過하여서는 안될것이다. 大抵 喪期의 經過에 따라 次々로 常服에 歸還하게 됨은 自然한 經路일 것이다. 이제 그 變服의 經路를 보건대 朞年 以下는 一回로써 足한 것이나 三年喪인 境遇에는, 小祥・大祥・禪의 三期를 劃하아 變異한다. 먼저 小祥에는 練服으로變 하되 冠巾衰裳을 조곰 精細한 練布로 製作한다. 또 負板・適・琴는 그대로 두지만 男子는 首絰을 去하고 婦人은 腰紅을 去한다 그 代로 葛紅(俗稱총올치)을 使用한다. 喪禮備要에「應服作者改吉服 然猶盡其月 不服金珠錦繍紅紫」라 함은 朞年喪에 一週年을 지나면 一切 素衣로 變服할 것을 말한 것이요 四禮便覺에 「按家禮 只云 陳練服而無某服不練之文 正服不練 雖是蹄說 旣練液中衣 不練衰裳 則上下表夷其不相稱 並練衰裳 恐得宜」 라 함은 三年喪엔 小祥에 練服으로 變함을 말한 것이다. 或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期를 當하야 縫緝하지 않고 두엇든 斬衰裳을 縫緝한다 하나, 또 다른 사람은 斬衰終三年不緝이라야 새로 縫糾치 않은 것을 禮의 原則으로 삼는다. 士儀에 依하면
按喪服斬衰傳 斬不褂也 此必終三年 無變者也 若於小祥緝 不易以布帶 則與齊衰何別乎.(4) 라 하였으니, 斬不緝(참불집)이 원칙일 것이요 麻繩(마승)의 교대도 또한 그대로 지속할 것이라 한다. 다음에 대상엔 또한 연복으로 변하되 檀弓(단궁)에 「祥而縞」라 하였으니, 縞(호)는 즉 순백이요 복장은 일절 백색으로 된다. 사의에 의하면 白布笠(백포립)・布綱巾(포강건, 白綿絲爲領又以爲圏子(백면사위령우이위권자))・白布直領(백포직령)・白布帶叩麻靴(백포대고마화)를 용하고, 부인도 또한 白衣裳(백의상)을 착용한 것이라 하엿다. 마지막으로 례제(대상 후 약 1개월 내)엔 禪服(선복)으로 변하되 譲布笠(양포립)・讓布帶(양포대)・矗駿綱巾(촉준강건, 흑색)・擧布衫(거포삼)・熟麻靴(숙마화, 또는 皂靴(조화)) 등 일절 암색을 용하고 특히 부인은 옥색(담청색)을 용함이 사의의 규정이다. 譲(양)은 說文(설문)에 淺靑黑(천청흑)이라 하였고, 淺黑(천흑)이면 회색이 되고 淺靑(천청)이면 옥색이 되니 조선에 있어서 전자는 남자에 후자는 여자에 상용된 것이겠다. 禮記聞傳(예기문전)에 「禪而纖」이라 하고 그 주에 「黑經白緯」라 하였으니, 이것은 곧 器(기)과 흡사한 것이라고 보겠다. 사의에 「按東俗無黑經白緯者 只用麻布 淡黑染之以代用而惟笠與帶爲然矣」라 함에 보다시피 일반으로 조선에는 담흑 즉 회색이 상용복색이라 보겠고 필경 선에 이르러 吉服(길복) 즉 常服(상복)으로 변함을 아는 것이다. 또 한가지 상인의 외출용으로 조선 고유한 것은 소위 方笠(방립)이란 것이 있으니, 그 形大(형대)와 竹製(죽제)인 것임은 우리가 주지한 바어니와, 사의에 「按高麗之時代一言以上 皆着黑章方笠 吏胥着白方笠 聞其制古也 후세爲喪者之服也」라 함에 의하면 원래는 상복용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이것을 喪人用(상인용)으로 삼은 것은 복중의 상인이 몸소 죄인으로 자처하여 타인에 접함을 피하는 관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보겠다.
쪽수▶P11-3 按喪服斬衰傳 斬不褂也 此必終三年 無變者也 若於小祥緝 不易以布帶 則與齊衰何別乎.(4) 라 하였으니, 斬不緝이 原則일 것이요 麻繩의 絞帶도 또한 그대로 持續할 것이라 한다. 다음에 大祥엔 또한 練服으로 變하되 檀弓에 「祥而縞」라 하였으니, 続는 卽 純白이요 服裝은 一 切白色으로 된다. 士儀에 依하면 白布笠・布綱巾(白綿絲爲領又以爲圏子)・白布直領・白布帶叩麻靴를 用하고, 婦人도 또한 白衣裳을 着用한 것이라 하엿다. 마주막으로 禮祭(大祥後約一個月內)엔 禪服으로 變하되 譲布笠・讓布帶・矗駿綱巾(黑色)・擧布衫・熟麻靴(또는 皂靴) 等 一切 黯色틀:Tagpage을 用하고 特히 婦人은 玉色(淡靑色)을 用함이 士儀의 規定이다. 譲은 說文에 淺靑黑이라 하였고, 淺黑이면 灰色이 되고 淺靑이면 玉色이 되니 朝鮮에 있어서 前者는 男子에 後者는 女子에 常用된 것이겠다. 禮記間傳에 「禪而纖」이라 하고 그 註에 「黑經白緯」라 하였으니, 이것은 곧 器과 恰似한 것이라고 보겠다. 士儀에 「按東俗無黑經白緯者 只用麻布 淡黑染之以代用而惟笠與帶爲然矣」라 함에 보다싶이 一般으로 朝鮮에는 淡黑 即 灰色이 常用服色이라 보겠고 畢竟 禰에 이르러 吉服 即 常服으로 變함을 아는 것이다. 또 한가지 喪人의 外出用으로 朝鮮 固有한것은 所謂 方笠이란 것이 있으니, 그 形大와 竹製인 것임은 우리가 周知한 바어니와, 士儀에 「按高麗之時代一言以上 皆着黑章方笠 吏胥着白方笠 聞其制古也 後世爲喪者之服也」라 함에 依하면 元來는 喪服用이 아닌 것이 分明하고, 이것을 喪人用으로 삼은 것은 服中의 喪人이 몸소 罪人으로 自處하야 他人에 接함을 避하는 觀念에서 始作된 것이라고 보겠다.
이제 상기의 예론으로 보건대 소상 시에 비로소 백색복을 용한 것 같이 보이나 조선에 있어서 상중의 일상용복은 상의 당초부터 백색복임은 일반의 습속이요 만약 불행하여 상이 연속한 경우에는 백의가 상당히 장기한을 통하여 계속 됨은 우리의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인하여 조선 백의의 습속은 혼이 이 상복제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려 함도 무리가 아닌 일이라 하겠다. 즉 이에 관하여 통설에 의하면 明宗(명종) 을축 이후로 국휼이 연속하여 일반 인민으로 하여금 국상을 勵行(여행)케 하고 따라서 素衣(소의)를 착용케 함으로 인하여 누차의 백의 금제가 있었음에 불구하고 드디어 백의의 속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芝峯(지봉) 李捽光(이수광)의 설에 의하건대
쪽수▶P12-2 이제 上記의 禮論으로 보건대 小祥 時에 비로소 白色服을 用한 것 같이 보이나 朝鮮에 있어서 喪中의 日常用服은 喪의 當初부터 白色服임은 一般의 習俗이요 萬若 不幸하야 喪이 連續한 境遇에는 白衣가 相當히 長期限을 通하야 繼續 됨은 우리의 잘 아는 바이다. 그럼으로 因하야 朝鮮 白衣의 習俗은 혼이 이 喪服制에 基因한 것으로 說明하려 함도 無理가 아닌 일이라 하겠다. 卽 이에 關하야 通說에 依하면 明宗 乙丑 以後로 國恤이 連續하야 一般 人民으로 하여금 國喪을 勵行케 하고 따라서 素衣를 着用케 함으로 因하야 累次의 白衣禁制가 있었음에 不拘하고 드디어 白衣의 俗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芝峯 李捽光의 說에 依하건대
東方之人 雖曰好着冃衣 然有禁制 故先王朝猶有白衣禁亂 士人無識者出入亦穿紅衣直領 余幼時及見之 蓋嘉靖乙丑以後 累經國恤 乃着素衣 遂之風俗今則紅直領絕無 而擧國皆衣素 華人笑之(5)
쪽수▶P12-3 東方之人 雖曰好着冃衣 然有禁制 故先王朝猶有白衣禁亂 士人無識者出入亦穿紅衣直領 余幼時及見之 蓋嘉靖乙丑以後 累經國恤 乃着素衣 遂之風俗今則紅直領絕無 而擧國皆衣素 華人笑之(5)
라 하였고, 또 이와 같은 의견으로 文獻備考(문헌비고)에
쪽수▶P13-1 라 하엿고, 또 이와 가튼 意見으로 文獻備考에
肅宗十七年 申白衣之禁 國法元有禁白衣之制 自明宗乙丑以後 累經國恤 仍着素衣 此爲華人听笑.(6)
쪽수▶P13-2 肅宗十七年 申白衣之禁 國法元有禁白衣之制 自明宗乙丑以後 累經國恤 仍着素衣 此爲華人听笑.(6)
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설혹 명종 을축 이래 국상의 계속으로 인하여 소의가 장려되었다 할지라도 벌서 그 이전에 백의의 속이 널리 있었다는 것을 명종 을축 이전의 백의 금제의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經國大典(경국대전)의 刑典(형전) 禁條(금조)에
쪽수▶P13-3 라고 傳하였다. 그러나 設或 明宗 乙丑 以來 國喪의 繼續으로 因하야 素衣가 獎勵되였다 할지라도 벌서 그 以前에 白衣의 俗이 널리 있었다는 것을 明宗 乙丑 以前의 白衣禁制의 事實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經國大典의 刑典禁條에
大小人員用紅衣白色表衣, 白笠紅粘者 酒器外金銀 靑畫白磁器者
쪽수▶P13-4 大小人員用紅衣白色表衣, 白笠紅粘者 酒器外金銀 靑畫白磁器者
라 하였고 그 주에 「正兵庶人白色衣勿禁」이라 한 것을 보면 이조의 초기에도 백의의 속이 一 반적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이 백의의 금제가 국가의 법령으로서 반포하게 되었던가를 살피건대 복색으로써 관민상하의 별을 분명히 하자는 데 근거한 것 같다. 일찍 鄭道傳(정도전)이 上書(상서)로써 복색을 통제하자는데 비롯하여 太祖(태조) 무인 7년 6월 계유에
쪽수▶P13-5 라 하였고 그 註에 「正兵庶人白色衣勿禁」이라 한 것을 보면 李朝의 初期에도 白衣의 俗이 一 般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이 白衣의 禁制가 國家의 法令으로서 頒布하게 되였던가를 살피건대 服色으로써 官民上下의 別을 分明히 하자는 데 根據한 것 같다. 일즉 鄭道傳이 上書로써 服色을 統制하자는데 비롯하야 太祖 戊寅 七年 六月 登酉에
憲司上言 先王衣之制 尊卑有等 正間之色不可紊也 我國家上下服用 尙未有章 願自今進上服 用皆正色 凡男女黃色・灰色・航素之衣 一皆禁斷 上允之.(7)
쪽수▶P13-6 憲司上言 先王衣之制 尊卑有等 正間之色不可紊也 我國家上下服用 尙未有章 願自今進上服 用皆正色 凡男女黃色・灰色・航素之衣 一皆禁斷 上允之.(7)
라 한 것이 그 발단인 듯하고 또 그 이면에는 민간의 의복이 사치에 흐름이 있을 것을 금단하려는 의사도 있었을 것이니 부녀의 복제에 黑羅帽(흑라모)・由箱裙(유상군) 등을 금지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어 世祖(세조) 병자 2년 3월 병신에 集賢殿直提學(집현전직제학) 梁誠之(양성지)의 上疏(상소)에
쪽수▶P13-7 라 한 것이 그 發端인 듯하고 또 그 裡面에는 民間의 衣服이 奢侈에 흐름이 있을 것을 禁斷하려는 意思도 있었을 것이니 婦女의 服制에 黑羅帽・由箱裙 等을 禁止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어 世祖 丙子 二年 三月 丙申에 集賢殿直提學 梁誠之의 上疏에
一定服色 盖服色之定 所以辨上下 一風俗不可不嚴也 元人尙白 大明尙黑 以至日本尙靑 皆有一定之制焉 吾東方朝冠公服 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 任用雜色甚爲鄙俚 乞依公服制度 堂上官以上爲一色 六品以上爲一色 流品員成衆官 衣冠子弟爲一色 諸衛軍士爲一色 京外良人史胥爲一色 京外良吏胥爲一色 公私賤口工匠爲一色 以此依品漸次穿着 或締用一色 以齊國俗.(8)
쪽수▶P13-8 一定服色 盖服色之定 所以辨上下 一風俗不可不嚴也 元人尙白 大明尙黑 以至日本尙靑 皆有一定之制焉 吾東方朝冠公服 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 任用雜色甚爲鄙俚 乞依公服制度 堂上官以上爲一色 六品以上爲一色 流品員成衆틀:Tagpage官 衣冠子弟爲一色 諸衛軍士爲一色 京外良人史胥爲一色 京外良吏胥爲一色 公私賤口工匠爲一色 以此依品漸次穿着 或締用一色 以齊國俗.(8)
이라 하였으니, 복색 제정을 일층 더 철저히 하여 계급의 표시를 분명히 하자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의의 속은 여전히 존속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어찌 그리도 강인한 힘으로써 백의의 속이 존속하였느냐 하면 기왕 이졸광의 설과 같이 명종 을축 이후의 국휼로 인한 것이라고도 하겠거니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벌서 고려시대에도 백의의 속이 일반적이였던 것을 보아서 알 것이요 또한 고려 말엽에 五行圖讖(오행도참)사상으로써 백의의 금제가 있었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즉 忠烈王(충렬왕) 원년 6월에 大司局(대사국)의 상언이 있었으니
쪽수▶P14-2 이라 하였으니, 服色制定을 一層 더 徹底히 하야 階級의 表示를 分明히 하자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白衣의 俗은 如前히 存續한 것은 事實이다. 그러면 어찌 그리도 强靱한 힘으로써 白衣의 俗이 存續하였느냐 하면 己往 李捽光의 說과 같이 明宗 乙丑 以後의 國恤로 因한 것이라고도 하겠거니와, 그보다 더 根源的인 原因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벌서 高麗時代에도 白衣의 俗이 一般的이였든 것을 보아서 알 것이요 또한 高麗 末葉에 五行圖讖思想으로써 白衣의 禁制가 있었음을 보아도 알 일이다. 即 忠烈王 元年 六月에 大司局의 上言이 있었으니
大司局言 東方木位 色當尙靑而白者金之色也 國人自着戎服 多視以白紆衣 木制於金之象也 請禁白色服從之
쪽수▶P14-3 大司局言 東方木位 色當尙靑而白者金之色也 國人自着戎服 多視以白紆衣 木制於金之象也 請禁白色服從之
라 함이 그것이다. 물론 이 오행도참사상으로서의 설명은 미신에 불과한 것일 것이나 그것은 고려 민간의 심리를 포착하기에 족한 신념이었던 것이요, 또 그 반면에는 백의의 속이 일반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또 고려 이전에 소급하여 삼국시대로 보건대 舊唐書(구당서)에 신라의 풍속을 말하되
쪽수▶P14-4 라 함이 그것이다. 勿論 이 五行圖讖思想으로서의 說明은 迷信에 不過한 것일 것이나 그것은 高麗 民間의 心理를 捕捉하기에 足한 信念이었든 것이요, 또 그 反面에는 白衣의 俗이 一般的이였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또 高麗 以前에 遡及하야 三國時代로 보건대 舊唐書에 新羅의 風俗을 말하되
其風俗刑法衣服與高一句麗百濟略同 而朝服尙白.(10)
쪽수▶P14-5 其風俗刑法衣服與高一句麗百濟略同 而朝服尙白.(10)
이라 하고, 고구려의 속을 말하되
쪽수▶P14-6 이라 하고, 高句麗의 俗을 말하되
衣裳服飾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斷.(11)
쪽수▶P14-7 衣裳服飾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斷.(11)
이라 하였으니, 그 기록이 중국인의 관찰에 의한 것이요, 또한 간단한 것이나마, 대개 그 일반을 窺知(규지)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보건대 조선 민족은 상고 시대로부터 尙白(상백)의 속을 이루었던 것이요, 그 연원이 구원한 일인 만큼 명종 을축 이후 국휼에 기인한다는 이수광의 설을 그대로 수긍할 수 없음은 이미 城大(성대)교수 烏山喜一(오산희일) 씨의 설파함과 갈다. 그러나 한번 더 돌이켜 본다면 본래가 백의의 속으로 律續(율속)하던 중 일층 이것을 深厚(심후)하게 되고 다시 변개 할 수 없게 된 것은 역대의 국휼로 인한 국상보다도 오히려 민간의 예속이 점차로 일반화하여 상복의 제도가 勵行(여행)하게 됨에 따라 복중의 백의가 불식 중 통상용으로 되었다는 것이 그 副因(부인)으로서 고려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염색술이 발달되지 못하고 色衣(색의)를 용이히 求調(구조)할 수 없을만큰 경제적 조건이 불허한 것도 고려할 것이려니와, 상중에 있는 복인의 불생산적이요 불사교적인 생활형태에서 자연히 발생된 습속이 전통적인 백의의 속을 일층 더 강인하게 존속케 한 것이라고 볼만한 일이다.
쪽수▶P14-8 이라 하였으니, 그 記錄이 中國人의 觀察에 依한 것이요, 또한 簡短한 것이나마, 大槪 그 一般을 窺知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가티 보건대 朝鮮 民族은 上古 時代로 부터 尙白의 俗을 이루었든 것이요, 그 淵源이 久遠한 일인 만큼 明宗 乙丑 以틀:Tagpage後 國恤에 基因한다는 李眸光의 說을 그대로 首肯할 수 없음은 이미 城大敎授 烏山喜一 氏의 說破함과 갈다. 그러나 한번 더 도리켜 본다면 本來가 白衣의 俗으로 律續하던 中 一層 이것을 深厚하게 되고 다시 戀改 할 수 없게 된 것은 歷代의 國恤로 因한 國喪보다도 오히려民間의 禮俗이 漸次로 一般化하야 喪服의 制度가 勵行하게 됨에 따라 服中의 白衣가 不識中 通堂用으로 되었다는 것이 그 副因으로서 老慮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勿論 그 裡面에는 染色術이 發達되지 못하고 色衣를 容易히 求調할 수 없을만큰 經濟的 條件이 不許한 것도 考慮할 것이려니와, 喪中에 있는 服人의 不生產的이요 不社交的인 生活形態에서 自然히 發生된 習俗이 傳統的인 白衣의 俗을 一層 더 強靱하게 存續케 한 것이라고 볼만한 일이다.
















본문3: 3


상복 기한은 그 등급적 차이가 상장과 함께 오복제도의 기본 요소를 이룸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갈거니와, 이제 등급을 말하건대 3년 1년 9월 7월 5월 3월의 6종이 있다 하겠다.
쪽수▶P16-1喪服期限은 그 等級的 差異가 喪裝과 함께 五服制度의 基本要素를 일움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갈거니와, 이제 等級을 말하건대 三年 一年 九月 七月 五月 三月의 六種이 있다 하겠다.
김두헌 오복제도-1.png
쪽수▶P16-2
김두헌 오복제도-1.png
즉 상기의 최단한 것은 3월이요 最長한 것은 3년인대, 이 3년이란 것은 만3년이 아니고 실은 만2개년에 해당한 것이다. 의례 士虞篇(사우편)에
쪽수▶P16-3 即 喪期의 最短한 것은 三月이요 最長한 것은 三年인대, 이 三年이란 것은 滿三年이 아니고 實은 滞二箇年에 該當한 것이다. 儀禮 士虞篇에
期而小祥 又期而大祥 中尤而禪 是月也占祭 猶未配.
쪽수▶P16-4 期而小祥 又期而大祥 中尤而禪 是月也占祭 猶未配.
라 함은 이 삼년상기를 말한 것인데, 정현의 주에 의하면
쪽수▶P16-5 라 함은 이 三年喪期를 말한 것인대, 鄭玄의 註에 依하면
中猶間也 禪祭名也 與大祥間一月 自我至此二十七月.
쪽수▶P17-1 中猶間也 禪祭名也 與大祥間一月 自我至此二十七月.
이라 하였으니, 즉 만27개월의 기간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나 이 27월이라는 것도 禮論家(예ᄚᅩᆫ가)에 의하여서는 2설을 달리한 바 있으나, 王肅(왕숙)은 의례 사우편에 있는바 『中月而禪』이라는 것을 月中而禪(월중이선)이라고 해석하였으니, 이것을 정현의 설에 비하면 1개월이 감소하게 된 것이요, 가례에는 정현의 설에 從(종)하여 있으나 朱子(주자) 자신은 그의 모 祝夫人(축부인)을 위하여 26월 상에 복하였고, 唐(당)의 王无感(왕무감) 淸(청)의 毛奇齡(모기령)은 3년을 3개년으로 해석하여 36월로 할 것이라 하였고, 순자 예론편과 白虎通喪服條(백호통상복조)에는 25월로 되어있는 등 그 설이 일정치 않다. 조선에서는 일반으로 가례에 종하여 27월 설을 취하여 왔다. 그리하여 이 27월에는 그 중에 윤월을 산입치 안키로 되여있다. 그러면 어떠한 근거에 의하여 윤월을 계산에 넣지 않은가에 대하여서는 예론가의 여러가지 설명이 있는 듯하나, 요컨대 상기를 규정 한도 이내로 단축시키지 않으려하는 孝哀(효애)의 정에 의한 것이라 한다. 일찍이 이조 仁祖(인조) 시대의 예론가 愚伏(우복)・鄭經世(정경세)의 주석에 「數閃未免 欲急之嫌」이라 함은 곧 이러한 점을 말한 것이겠다.
쪽수▶P17-2 이라 하였으니, 即 滿二十七箇月의 期間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나 이 二十七月이라는 것도 禮論家에 依하야서는 二說을 달리한 바 있으나, 王肅은 依禮 士虞篇에 있는바 『中月而禪』이라는 것을 月中而禪이라고 解釋하였으니, 이것을 鄭玄의 說에 比하면 一箇月이 減小하게 된 것이요, 家禮에는 鄭去의 說에 從하여 있으나 朱子 自身은 그의 母祝夫人을 爲하야 二十六月喪에 服하였고, 唐의 王无感 淸의 毛奇齡은 三年을 三箇年으로 解釋하야 三十六月로 할 것이라 하였고, 苟子 禮論篇과 白虎通喪服條에는 二十五月로 되어있는 等 그 說이 一定치 않다. 朝鮮에서는 一般으로 家禮에 從하야 二十七月 說을 取하여 왔다. 그리하야 이 二十七月에는 그 中에 閏月을 算入치 안키로 되여있다. 그러면 어떠한 根據에 依하야 閏月을 計算에 너치않은가에 對하야서는 禮論家의 여러가지 說明이 있는 듯하나, 要컨대 喪期를 規定限度 以內로 短縮식히지 않으려하는 孝哀의 情에 依한 것이라 한다. 일즉이 李朝 仁祖時代의 禮論家 愚伏・鄭經世의 註釋에 「數閃未免 欲急之嫌」이라 함은 곧 이러한 點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근거에 의하여 이 최고상인 3년상이란 것이 제정된 것이며, 또 이에 준하여 이하 오급의 기한이 그와 같이 제정되었는가를 예설에 의하여 살펴보자. 예기 三年問(삼년문)에
쪽수▶P17-3 그러면 果然 엇더한 根據에 依하야 이 最高喪인 三年喪이란 것이 制定된 것이며, 또 이에 準하야 以下五級의 期限이 그와 같이 制定되였는가를 禮說에 依하야 살펴보자. 禮記 三年問에
三年之喪何也 曰稱情而立文 因以飾群 別親疏貴賤之節 而弗可損益也 故曰無易之道也. (中略) 凡生犬地恐間者 有血氣之屬 必有知 有知之屬莫不知 愛其類. (中略) 故有血氣之屬者 莫知於人 故人於其親也 至死無窮 將山夫患邪淫之人與 則彼朝死而夕忘之 然而從之 則是曾禽獸之不若也 夫焉相與群居而不亂乎 將由夫修飾之君子與 則三年之喪 二十五月而畢 若厠之過隙 然而遂之 則工無窮也 故先王爵爲之 立中制節 童使足以成文理则釋之矣
쪽수▶P17-4 三年之喪何也 曰稱情而立文 因以飾群 別親疏貴賤之節 而弗可損益也 故曰無易之道也. (中略) 凡生犬地恐間者 有血氣之屬 必有知 有知之屬莫不知 愛其類. (中略) 故有血氣之屬者 莫知於人 故人於其親也 至死無窮 將山夫患邪淫之人與 則彼朝死而夕忘之 然而從之 則是曾禽獸之不若也 夫焉相與群居而不亂乎 將由夫修飾之君子與 則三年之喪 二十五月而畢 若厠之過隙 然而遂之 則工無窮也 故先王爵爲之 立中制節 童使足以成文理则釋之矣
라 하였으니, 3년의 상은 즉 애통의 정을 의식에 표시한 것이요, 만약 知情意(지정의)를 소유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哀情(애정)을 표시한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곧 금수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또한 그 애통의 정을 그대로 방임한다면 곧 그 생업을 다할 수 없게 될 것임으로써, 聖人(성인)이 이것을 참작하여 小人(소인)과 같이 경박함에 기우치지 않고 또한 君子(군자)와 같이 제한이 없이 애통함에 흐르지 않고 오직 그 중도를 취하여 제정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것은 순자의 예론편 중의 삼년상조에 있는 견해와 같거니와 삼년상이란 것을 중도로서 취한 것은 자연법칙에 준한 것이라 하는 것이다. 즉 동서 동편에 의하면
쪽수▶P18-1 라 하였으니, 三年의 喪은 即 哀痛의 情을 儀式에 表示한 것이요, 萬若 知情意를 所有한 社會的 存在로서의 人間이 그 哀情을 表示한 形式을 가추우지 못하면 곧 禽獸와 다름이 없을 것이나, 또한 그 哀痛의 情을 그대로 放任한다면 곧 그 生業을 다할수 없게 될 것임으로써, 聖人이 이것을 參酌하야 小人과 가티 輕薄함에 기우치지 않고 또한 君子와 가티 制限이 없이 哀痛함에 흐르지 않고 오즉 그 中道를 取하야 制定한 것이라는 見解이다. 이것은 荀子의 禮論篇 中의 三年喪條에 잇는 見解와 같거니와 三年喪이란 것을 中道로서 取한것은 自然法則에 準한 것이라 하는 것이다. 卽 同書 同篇에 依하면
然則何以分之 曰至親以期斷 是何也 曰天地則己易矣 四時則徧矣 其在宇宙者 莫不更始也 故先王策以此象之也 然則三年何也 曰加隆焉 案使倍之 故再期也 由九月以下何也 曰案使不及也 故三年以爲隆 緦麻小功 以爲殺 期九月以爲間 上取蒙於天 下取法於地 中取於人 人所以群居和一之理盡矣.
쪽수▶P18-2 然則何以分之 曰至親以期斷 是何也 曰天地則己易矣 四時則徧矣 其在宇宙者 莫不更始也 故先王策以此象之也 然則三年何也 曰加隆焉 案使倍之 故再期也 由九月以下何也 曰案使不及也 故三年以爲隆 緦麻小功 以爲殺 期九月以爲間 上取蒙於天 下取法於地 中取於人 人所以群居和一之理盡矣.
라 하였으니, 즉 우주 자연의 근본 원리에 기준하여 사계 一循(일순)의 현상에 따라 만1년으로써 회생의 의미를 표시하고 특히 至親(지친)인 부모에 한하여는 이것을 배하여 再期(재기) 즉 2주년이라는 기한을 제정한 것이요 그 이하의 등분은 9개월을 중간으로 삼아 천지인 三才(삼재)의 理(이)에 거하여 제정한 것이라는 것이요 이와 같은 것이 오로지 선왕의 제정으로써 절대시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순자의 설 중에는 일종 유교철학자 류의 독단적 해석이 있을 뿐이요 그 원시적 의미를 찾을 수 없으나 그러나 이렇게 상기의 제정을 지극히 존엄한 것으로 말한 것은 예교의 본질적 일 요구에 의한 것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이 오등분에 배정된 친소의 관계는 원칙상 이와 같이 규정되어 있다.
쪽수▶P18-3 라 하였으니, 即 宇宙 自然의 根本 原理에 基準하야 四季 一循의 現象에 따라 滿一年으로써 回生의 意味를 表示하고 特히 至親인 父母에 限하여는 이것을 倍하야 再期 即 二周年이라는 期限을 制定한 것이요 그 以下의 等分은 九箇月을 中間으로 삼아 天地人 三才의 理에 據하야 制定한 것이라는 것이요 이와 같은 것이 오로지 先王의 制定으로써 絕對視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荀子의 說 中에는 一種 儒敎哲學者流의 獨斷的 解釋이 있을 뿐이요 그 原始的 意味를 차질수 없으나 그러나 이러케 喪期의 制定을 至極히 尊嚴한 것으로 말한 것은 禮敎의 本覧的 一 要求에 依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다. 그리하야 이 五等分에 配定된 親疎의 關係는 原則上 이와 같이 規定되여 있다.
3년, 부모.
쪽수▶P18-4 三年, 父母.
1년, 조부모・백숙부모・형제자매 등.
쪽수▶P18-5 一年, 祖父母・伯叔父母・兄弟姊妹等.
9월, 從(종)형제자매 등.
쪽수▶P18-6 九月, 從兄弟姊妹等.
5월, 從(종)조부모・再從(재종)형제 등.
쪽수▶P19-1 五月, 從祖父母・再從兄弟等.
3월, 族從(족종)증조부모・三從(삼종)형제 등.
쪽수▶P19-2 三月, 族曾祖父母・三從兄弟等.
이 원칙에 준하여 기타 가족과 친족에까지 등분이 제정되었을 것이요, 또한 시대에 변환에 따라 그 등분이 복잡 다기하게 변이되었을 것이다. 부모에 대하여서는 원래 다름이 없을 것이나, 모에 대하여는 부의 생존하는 경우에 한하여 기년상을 취하였으니, 예기 雜記(잡기)에 「碁之喪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禅」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것이다. 그러면 부의 생존하는 동안 모에 대하여 특히 기년제를 취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것은 다음에 설명하려 하나, 여하간 조부모 처・衆子(중자)・長子婦(장자부) 등의 近親(근친)도 역시 이 기년제를 취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처・중자・장자부는 卑屬(비속)의 지위에 있고 조부모는・존속의 지위에 있으므로 이 존비를 구별하기 위하여 존속인 조부모에 한하여 모에 대함과 같이 齊衰(자최) 기년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 두 경우를 구별하기 위하여 모의 경우에는 杖期(장기)라 하고 조부모의 경우에는 不杖期(불장기)라고 규정하였다. 조부모가 존속으로서 齊衰(자최)라 하니, 증조부모・고조부모도 또한 齊衰(자최)의 중에 든 것이나, 다만 조의 원근에 의하여 차별이 생기게 되어 결국 자최에는 여러 등급이 포함하게 된다. 즉
쪽수▶P19-3 이 原則에 準하야 其他 家族과 親族에까지 等分이 制定되였을 것이요, 또한 時代에 變還에 따라 그 等分이 複雜 多岐하게 變異되였을 것이다. 父母에 對하여서는 元來 다름이 없을 것이나, 母에 對하여는 父의 生存하는 境遇에 限하야 期年喪을 取하였으니, 禮記 雜記에 「碁之喪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禅」이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것이다. 그러면 父의 生存하는 동안 母에 對하야 特히 期年制를 取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것은 다음에 說明하려 하나, 如何間 祖父母 妻・衆子・長子婦 等의 近親도 亦是 이 期年制를 取하게 된 섬이다. 그러나 妻・衆子・長子婦는 卑屬의 地位에 있고 祖父母는・尊屬의 地位에 있음으로 이 尊卑를 區別하기 爲하야 尊屬인 祖父母에 限하야 母에 對함과 가티 齊衰期年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 두 境遇를 區別하기 爲하야 母의 境遇에는 杖期라 하고 祖父母의 境遇에는 不杖期라고 規定하였다. 祖父母가 尊屬으로서 齊衰라 하니, 曾祖父母・高祖父母도 또한 齊衰의 中에 든 것이나, 다만 祖의 遠近에 依하야 差別이 생기게 되야 結局 齊衰에는 여러 等級이 包含하게 된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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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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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조)에 대하여서는 대개 이러한 차등이 원칙이나, 특히 그 예외로 父卒(부졸)한 경우에 자손은 증조부와 고조부에 대하여 斬衰(참최) 3년을 服期(복기)로 삼으니, 이것은 곧 嫡々(적적) 계승을 지극히 존중시한 까닭이다. 그리고 보면 期(기) 즉 1주년 이상의 상은 상기 전체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것이겠으니, 부모상을 제하고는 1주년의 상기를 요함은 本宗(본종)으로 보아 조부모・백숙부모・姑(고)・형제자매・衆子女(중자녀)・장자부・姪及姪女(질급질녀)・長孫(장손)・長曾孫(장증손)・長玄孫(장현손)・同居繼父(동거계부) 등이요 妻爲夫黨(처위부당)으로 보아 장자부・女及衆子(여급중자)・姪及姪女(질급질녀) 등이요 妾爲夫君族(첩위부군족)으로 보아 부모・女君(여군)・子(자) 등이요 出嫁女爲本宗(출가녀위본종)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부모급조부모) 등이요 人後者爲本生親(인후자위본생친)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부모급조부모) 등이니, 친족으로서는 가장 근친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쪽수▶P19-5 祖에 對하야서는 大槪 이러한 差等이 原則이나, 特히 그 例外로 父卒한 境遇에 子孫은 曾祖父와 高祖父에 對하야 斬▶P20-1衰三年을 服期로 삼으니, 이것은 곧 嫡々 繼承을 至極히 尊重視한 까닭이다. 그리고 보면 期即 一週年 以上의 喪은 喪期 全體로 보아 相當히 重要한 것이겠으니, 父母喪을 除하고는 一 週年의 喪期를 要함은 本宗으로 보아 祖父母・伯叔父母・姑・兄弟姊妹・衆子女・長子婦・姪及姪女・長孫・長曾孫・長玄孫・同居繼父 等이요 妻爲夫黨으로 보아 長子婦・女及 衆子・姪及姪女 等이요 妾爲夫君族으로 보아 父母・女君・子等이요 出嫁女爲本宗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요 人後者爲本生親으로 보아 父母及祖父母 等이니, 親族으로서는 가장 近親關係에 있음을 알 수 잇는 것이다.
가례에 의하면 상인의 葬式(장식) 이후에 상중의 제례로서 7단계의 제사를 요한 것이니, 虞祭(우제)・卒哭(졸곡)・祖祭(조제)・小祥(소상)・大祥(대상)・禪祭(선제)・吉祭(길제)가 그것이요 길제로써 완전히 상기를 종료한다. 물론 이 7회의 제례가 모든 등급의 상 전반에 통용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상기의 복에까지 적용된 것이냐 함은 禮典(예전)에 명료한 규정이 없다. 원칙상으로 보아 소상은 期(기) 대상은 再期(재기)인 것이요 「爲父母・妻・長子禪疏 妻爲夫亦禪」이라는 규정이 있고 길제는 선제의 익일 吉辰(길진)을 卜(복)하여 행하되 是月(시월)에 時祭(시제)가 있으면 祭行(제행)치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 7회의 제사를 전부 요한 피복은 부모・조부모・처・長子妻爲夫(장자처위부)를 비롯하여 대개 기년 이상의 존속친에 及(급)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대개 이러한 政階(정계)의 제례는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일가? 우제는 葬後(장후) 최초의 제례인데 그 본의는 慰靈(위령)에 있을 것이요 사령의 처소 방위 시등의 관념이 招福(초복) 禳災(양재)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원시적 신앙에서 나온 것이겠다.(1) 그럼으로 장후 길진을 택하여 初虞(초우) 再虞(재우) 三虞(삼후)를 요하되 일차 이상은 반드시 魂帛(혼백)을 持來(지래)한 후 家中(가중)에서 祭行(제행)할 것이라 한다. 졸곡으로 말하면 장후 약 1개월 후에 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이 哭(곡)은 病人(병인)이 절명하자 「擧哀男女哭瓣無數」라 하여 哀哭慟哭(애곡통곡)함을 예의로 삼아 문공가례에도 「哭盡哀 乃代哭 不絕聲」이라 하여 「無時哭」이라 하여 哭婢(곡비)와 같은 기형적인 습속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이 哀哭(애곡)이란 것이 근친의 사별에 대한 자연 표현의 인간 哀情(애정)이거니와 장구한 시일의 관습은 오히려 野卑喧騷(야비훤소)에 흘러 현대의 식자로 하여금 懒忌(나기)의 감을 갖게 함에는 좀 더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가 되었다. 일찍이 雅亭(아정)・李德懋(이덕무)의 말에
쪽수▶P20-2 家禮에 依하면 喪人의 葬式 以後에 喪中의 祭禮로서 七段階의 祭祀를 要한 것이니, 虞祭・卒哭・祖祭・小祥・大祥・禪祭 吉祭가 그것이요 吉祭로써 完全히 喪期를 終了한다. 勿論 이七回의 祭禮가 모든 等級의 喪全般에 通用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喪期의 服에까지 適用된 것이냐 함은 禮典에 明瞭한 規定이 없다. 原則上으로 보아 小祥은 期 大祥은 再期인 것이요「爲父母・妻・長子禪疏 妻爲夫亦禪」이라는 規定이 있고 吉祭는 禪祭의 翌日 吉辰을 卜하야 行하되 是月에 時祭가 있으면 祭行치 않은 境遇가 있으니, 이 七回의 祭祀를 全部 要한 坡服은 父母・祖父母・妻・長子妻爲夫를 비롯하야 大槪 期年 以上의 尊屬親에 及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면 大槪 이러한 政階의 祭禮는 무슨 意味를 가진 것일가? 虞祭는 葬後 最初의 祭禮인데 그 本義는 慰靈에 있을 것이요 死靈의 處所 方位 時等의 觀念이 招福 禳災에 깊은 關係가 있다는 原始的 信仰에서 나온 것이겠다.(1) 그럼으로 葬後吉辰을 擇하야 初虞 再虞 三虞를 要하되 一次 以上은 반드시 魂帛을 持來한 後 家中에서 祭行할 것이라 한다. 卒哭으로 말하면 葬後 約 一箇月 後에 行한 것으로 되여있다. 元來 이 哭은 病人이 絕命하자 「擧哀男女哭瓣無數」라 하야 哀哭慟哭함을 禮儀로 삼어 文公家禮에도 「哭盡哀 乃代哭 不絕聲」이라 하여 「無時哭」이라 하야 哭婢와 같은 奇形的인 習俗을 이루게 되였다. 勿論 이 哀哭이란 것이 近親의 死別에 對한 自然表現의 人間哀▶P21-1情이거니와 長久한 時日의 慣習은 오히려 野卑喧騷에 흘러 現代의 識者로 하요금 懒忌의 感을 갓개 함에는 좀 더 깊이 省察하지 않으면 안될 問題가 되엿다. 일즉이 雅亭・李德懋의 言에
哭聲勿促欲喘也 勿緩欲欠也 勿太文而節也 勿太野而呼也 勿如吼如嘶 駭人聽間以招婦妾童孺之諛笑 東俗喪主哭音 連呼哀吿 外曾祖朴孝靖公曾曰 連呼二音 只出喉舌 自然問歇不如哀々 一音直出心 仲傷痛而無所泊也.(2)
쪽수▶P21-2 哭聲勿促欲喘也 勿緩欲欠也 勿太文而節也 勿太野而呼也 勿如吼如嘶 駭人聽間以招婦妾童孺之諛笑 東俗喪主哭音 連呼哀吿 外曾祖朴孝靖公曾曰 連呼二音 只出喉舌 自然問歇不如哀々 一音直出心 仲傷痛而無所泊也.(2)
라 하여 곡의 방법을 지시하였고 事神(사신)의 暫間(잠간)에는 일단 곡을 중지할 것으로 하고 부녀의 非禮(비례)를 酵戒(효계)하였다. 즉
쪽수▶P21-3 라 하야 哭의 方法을 指示하엿고 事神의 暫間에는 一段 哭을 中止할 것으로 하고 婦女의 非禮를 酵戒하였다. 即
凡忌祭進酌 闔門必止哭肅靜 欲其神乏煩也 婦人不識禮意當其時也 或冇不止哭者 雖使止之而位哭不己 豈事神之禮 類多此習改之可也.(3)
쪽수▶P21-4 凡忌祭進酌 闔門必止哭肅靜 欲其神乏煩也 婦人不識禮意當其時也 或冇不止哭者 雖使止之而位哭不己 豈事神之禮 類多此習改之可也.(3)
라 함은 適時(적시)의 곡을 필요로 한 것이니, 따라서 당연히 하여야 할 곡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또한 이것을 不孝不順(불효불순)이라 하여 「居喪婦女自取便安 朝夕哭二時上典 或不預者有之 孝順乏道亡矣」라 하였으니 결국 곡이란 것이 예의 불가피한 것을 功實(공실)히 설파함이다. 생각컨대 예의 기원과 본질에 관하여 비판적 식견을 갖지 못하고 오직 성인의 유제라 하여 무조건하고 신봉하던 예론가의 설명일만큼 별로히 아정의 견식을 오늘날 비난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초에 이 곡의 발생론적 기원을 찾아본다 하면 아마도 사령에 대한 금기의 殘跡(잔적)이라 하겠다. 대개 원시민족의 신앙으로서 花靈(화령)에 대하여 大聲叫號(대성규호)하며 혹은 산발하며-평시에 산발한 민족은 반대로 結髮(결발)하며 혹은 舞踊(무용)을 하는 등 여러가지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4) 즉 이러한 의식으로써 禳災拂禍(양재불화)의 신앙을 이루었던 것이니 예기 奔喪篇(장상편)에 의하면 「又哭盡哀」니 「哭成踊」이니 「括髮祖成踊」이니 「成踊盡哀」니 하는 등의 문구가 있음은 곧 이러한 원시적 형태의 예의화된 것인가 생각되는 것이다. 여하간 이 곡이 예의로서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무기한하고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니 따라서 적당한 시기를 정하여 곡을 撤(철)하되 이내로는 곡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오직 朝夕(조석)의 上食(상식)과 朔望(삭망)의 奠祀(전사)에 한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기로 말하면 장후 약 1개월을 원칙으로 삼는데 혹시 葬式(장식)이 수일을 요한 경우에는 더 遷延(천연)된 수도 있음은 陶庵(도암)・李繹(이역)의 말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있다.
쪽수▶P21-5 라 함은 適時의 哭을 必要로 한 것이니, 따라서 當然히 하여야 할 哭을 하지 않은 境遇에는 또한 이것을 不孝不順이라 하야 「居喪婦女自取便安 朝夕哭二時上典 或不預者有之 孝順乏道亡矣」라 하였으니 結局 哭이란 것이 禮의 不可避한 것을 功實히 說破함이다. 생각컨대 禮의 起原과 本質에 關하야 批判的 識見을 갓지 못하고 오즉 聖人의 遗制라 하야 無條件하고 信奉하든 禮論家의 說明일만큼 別로히 雅亭의 見識을 오늘날 非難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當初에 이 哭의 發生論的 起原을 차자본다 하면 아마도 死靈에 對한 禁忌의 殘跡이라 하겠다. 大槪 原始民族의 信仰으로서 花靈에 對하야 大聲叫號하며 或은 散髮하며-平時에 散髮한 民族은 反對로 結髮하며 或은 舞踊을 하는 等 여러가지 儀式이 있었든 것이다.(4) 即 이러한 儀式으로써 禳災拂禍의 信仰을 이루었든 것이니 禮記 奔喪篇에 依하면 「又哭盡哀」니 「哭成 踊」이니 「括髮祖成踊」이니 「成踊盡哀」니 하는 等의 文句가 있음은 곧 이러한 原始的 形態의 禮儀化된 것인가 생각되는 것이다. 如何間 이 哭이 禮儀로서 不可避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無期限하고 繼續할 수는 없는 일이니 따라서 適當한 時▶P22-1期를 定하야 哭을 撤하되 爾來로는 哭을 함부로 하지 않고 오즉 朝夕의 上食과 朔望의 奠祀에 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야 그 時期로 말하면 葬後 約一箇月을 原則으로 삼는대 或時 葬式이 數日을 要한 境遇에는 더 遷延된 수도 있음은 陶庵・李繹의 말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있다.
近俗無貴賤 皆三月而葬 而古禮惟大夫三月 士則逾月 假令人死於晦間而葬於來旬前 則謂之逾月者苟也 若此者三月 而後當行卒哭 大抵所謂逾月者 必過三卜日可也.(5)
쪽수▶P22-2 近俗無貴賤 皆三月而葬 而古禮惟大夫三月 士則逾月 假令人死於晦間而葬於來旬前 則謂之逾月者苟也 若此者三月 而後當行卒哭 大抵所謂逾月者 必過三卜日可也.(5)
이 시기에는 아직 死人(사인)의 근친 간에는 음식과 거처에 금제가 있어 상주 및 형제는 疏食飲水 菜果不食庶化木枕의 규정이 있으니 그것은 곧 사령에 대한 금기의 관념이 심각한 까닭이다. 다만 成服(성복)의 때에 散祭(산제)하였던 복장의 부분을 일절 絞結(교결)할 것이라 하니 점차 평상복으로 변하는 階段(계단)을 표시한 것이겠다.
쪽수▶P22-3 이 時期에는 아직 死人의 近親間에는 飲食과 居處에 禁制가 있어 喪主 及 兄弟는 疏食飲水 菜果不食庶化木枕의 規定이 있으니 그것은 곧 死靈에 對한 禁忌의 觀念이 深刻한 까닭이다. 다만 成服의 時에 散祭하엿든 服裝의 部分을 一切 絞結할 것이라 하니 漸次 平常服으로 變하는 階段을 表示한 것이겠다.
祔祭(부제)는 졸곡의 익일에 新神主(신신주)를 祠堂(사당)에 奉祝(봉축)하여 祖靈(조령)에 合附(합부)하는 예임은 물론이어니와 특히 신주 합부에 관하여 일고할 것은 곧 昭穆(소목)의 序(서)로 배치하는 점이다. 이 소목의 序置(서치)로써 제신주는 一堂(일당)에 群坐(군좌)하여 祐祭(우제)의 경우에는 그대로 제행하게 된다. 中庸(중용)에
쪽수▶P22-4 祔祭는 卒哭의 翌日에 新神主틀 祠堂에 奉祝하야 祖靈에 合浦하는 禮임은 勿論이어니와 特히 神主合祔에 關하야 一考할 것은곧 昭穆의 序로 配置하는 點이다. 이 昭穆의 序置로써 諸神主는 一堂에 群坐하야 祐祭의 境遇에는 그대로 祭行하게 된다. 中庸에
凡廟主在本阙之室中 皆束向 及其怡於奴範之室中 則惟太祖東向自如而爲最尊之位 群廟之位入乎此者 皆列於北牖而南向 群廟之入乎此者 皆列於南牖而北向 南向者取其向明 故謂之昭 北向者取其深遠 故謂之穆 葢群廟之列 則左爲昭而右爲穆 祐祭位則北爲昭而南爲穆也.
쪽수▶P22-5 凡廟主在本阙之室中 皆束向 及其怡於奴範之室中 則惟太祖東向自如而爲最尊之位 群廟之位入乎此者 皆列於北牖而南向 群廟之入乎此者 皆列於南牖而北向 南向者取其向明 故謂之昭 北向者取其深遠 故謂之穆 葢群廟之列 則左爲昭而右爲穆 祐祭位則北爲昭而南爲穆也.
라 함은 소목 일반을 서술한 것이요 특히 朝制(조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종래로 이 소목의 原義(원의)를 여기에 보다시피 대개는 南明北暗(남명북암)에 인한 것이라 하고 혹은 이 명암의 관계에 음양의 사상을 결합하여 「昭居左爲陽 穆居右爲陰一(정현, 예기집설 권30)이라 하고, 혹은 「葢取子々孫々 引無極之誼 昭穆字當用紹繆 繆猶績也一(毛際盛(모제성), 說文述誼(설문술의))라 하여 소목은 본래 紹繆(소무)의 변한 것으로 子々孫々 繼承無極함을 말한 것이라 하는 등, 그 설이 다양하다. 혹자는 또 이것을 父昭子穆(부소자목)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은 전연 인식 부족에서 나온 일 吳見(오견)이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러한 설명의 가부는 고사하고 여하간 神位(신위)의 배치는 부자의 연속세대를 취하지 않고 祖孫(조손)의 隔世同祉(격세동지)를 취하여 이것을 通則(통칙)으로 삼아 왔는 것이니 따라서 旁親(방친)을 雄班(웅반)으로서 합사한 경우에도 「伯叔祖父母褶于高祖 伯叔父母褂于曾祖 妻若兄弟若 兄弟之妻樹于祖 子姪(子婦・姪婦同)祔于父 皆西向」이라 하여, 그 序立(서립)을 정연히 한다. 이와 같이 群(군)신주의 순서를 존중히 함은 요컨대 長幼親疎(장유친소)의 질서를 엄수하여 제사에 그 倫序(윤서)의 관계를 명백히 하려는 데 있을 것이니 예기의 祭統(제통)에
쪽수▶P22-6 라 함은 昭穆 一般을 叙述한 것이요 特히 朝制와 密接한 關係를 가진 것으로 說明한 것이다. 從來로 이 昭穆의 原義를 여기에 보다싶이 大漑는 南明北暗에 因한 것이라 하고 或은 이 明暗의 關係에 陰場의 思想을 結合하야 「昭居左爲陽 穆居▶P23-1右爲陰一(鄭玄, 禮記集說 卷三十)이라 하고, 或은 「葢取子々孫々 引無極之誼 昭穆字當用紹繆 繆猶績也一(毛際盛, 說文述誼)라 하야 昭穆은 本來 紹繆의 變한 것으로 子々孫々 繼承無極함을 말한 것이라하는 等, 그 說이 多様하다. 或者는 또 이것을 父昭子穆으로 생각하는 境遇도있으나 이것은 全然 認識 不足에서 나온 一 吳見이니 말할 것도 업거니와 이러한 說明의 可否는 姑捨하고 如何間 神位의 配置는 父子의 連續世代를 取하지 않고 祖孫의 隔世同祉를 取하야 이것을 通則으로 삼어 왓는 것이니 따라서 旁親을 雄班으로서 合祀한 境遇에도 「伯叔祖父母褶于高祖 伯叔父母褂于曾祖 妻若兄弟若 兄弟之妻樹于祖 子姪(子婦・姪婦同)祔于父 皆西向」이라 하야, 그 序立을 整然히 한다. 이와 같이 群神主의 順序를 尊重히 함은 要컨대 長幼親疎의 秩序를 嚴守하야 祭祀에 그 倫序의 關係를 明白히 하려는 데 있을 것이니 禮記의 祭統에
夫祭有昭穆 昭穆者所以別父子長幼親疎之序而無亂也 是故有事於大廟則群昭群穆咸在 而不失其倫此之謂親疎之殺也.
쪽수▶P23-2 夫祭有昭穆 昭穆者所以別父子長幼親疎之序而無亂也 是故有事於大廟則群昭群穆咸在 而不失其倫此之謂親疎之殺也.
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이 윤서를 요구하는데 어찌하여 특히 隔世同祔(격세동부)의 방법을 취하였을까에 대하여는 그 시원적 의의가 어디있는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하여 近者(근자)에 廣島文理科大學(광도문리과대학) 교수 加藤常賢(가등상현) 씨가 해박한 고증으로써 자미있는 연구를 이룬 바 있다. 가등 교수는 현존 미개 민족간에 흔히 보이는 婚姻階級(혼인계급, marriage-class)의 습속을 참고하여 소목의 기원을 곧 여기에 구하려는 것이다. 혼인계급이라는 것은 즉 원시민족의 토-템 조직에 의하여 族外婚(족외혼, exogamy)이 엄연하게 존재한 것인데 이러한 혼인관계로 인하여 生子(생자)하게 되는 경우에는 남계 또는 여계의 간접 계승이 되어 결국 계급명이 간접 계승으로 됨으로 여기에 현존 문화사회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혼인관계와 사회조직은 일찍히 Frazer가 「오—스트라리아 민족 간에 상세한 연구를 한 것은 이미 학계에서 널리 아는 바이다.(7) 이제 이러한 결혼계급은 곧 隔世的(격세적) 同次(동차) 계급 즉 자손의 同班階級(동반계급)이 되고 부자의 異班階級(이반계급)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격세동반인 소목제도의 기원이라는 것이요 결혼계급의 제도는 「오—스트라리아」와 가튼 저급 민족에 현존한 것을 보면 이 결혼계급 제도를 기원으로 하는 소목 제도도 원시시대에 연원한 것이리라는 것이 가등 교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근본적인 선결 문제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점에 있어서 운명적인 오류을 범하였으니 따라서 그 설명에 견강부회의 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先次(선차)로 원시적 사회조직인 토-템 신앙과 족외혼에 의한 이른바 결혼계급 제도란 것이 고대 지나민족 간에도 엄연히 존재하였다는 증명을 요하는 것이니 이 점에 대하여 형식논리학 상의 선결문제 요구(Peritio Principle)의 오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스트라리아」 민족에 있는 결혼조직이 모든 원시 민족에 다 존재하였다고 할 수 없는 일이요-「아에리칸인디만」에는 전연 이러한 결혼계급의 조직이 현존치 않고 「메라네시아」에도 그다지 정연하지 않다-또한 중국의 원시사회에 그러한 조직이 엄연하였다는 정설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목제도의 기원을 엉뚱한 현존 미개 민족의 특수 혼인관계에 찾고 따라서 소목의 제도를 그대로 중국의 고대 원시시대에 연원함이라 하니, 이것은 또한 가족제도의 발전사 상으로 보아 수긍할 수 없는 일이다. 대저 소목제도는 대가족 제도의 발전 과정에서 가족성원의 倫序(윤서)에 대한 관념이 和當(화당)히 발달된 문화기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윤서와 도의 관념에 기인한 소목제도라는 것을 원시 가족시대에 연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이 소목의 제도를 어떠한 유래에 의한 것이라고 볼 것인가 함에 대하여 필자는 아주 쉽게 이와 같이 생각하려는 것이다 즉 그것은 현실적인 대가족 생활 상에 요구된 윤서 관념의 연장이라고. 본래 대가족의 생활에는 그 성원의 통제가 지극히 필요한 것이요 그러기 위하여 가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가족성원의 복종과 질서 유지가 要求되는 것이다. 父親(부친)을 嚴君(엄군)이라 하여 절대 존엄시하는 것이 子(자)의 의무로 되어있는 반면에 부가 생존 중에 자기의 자식은 가장인 부의 손으로서 가족성원이 되고 따라서 祖孫(조손)간에는 특별한 친밀이 생겨 부자의 간에는 일상 근접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조손의 간에는 지극 밀접 친근한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니 이러한 점은 부자 간에 식탁을 갈이 못하고 유희 오락을 같이 더불어하지 못 함에 대하여 조손 간에는 식탁을 같이하고 유희 오락을 같이 더불어하는 습속을 보아 잘 알만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현실생활의 습속과 관념이 그대로 사후의 神主位(신주위)간에 연장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23-3 라 함은 곧 이것을 말한 것이겠다. 그러면 이 倫序를 要求하는대 어찌하야 特히 隔世同祔의 方法을 取하였을가에 對하여는 그 始原的 意義가 어디잇는가를 考察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關하야 近者에 廣島女理舛大學敎授 加藤常賢 氏가 該博한 考證으로써 滋味잇는 硏究를 이룬 바 잇다. 加藤 教授는 現存未開民族間에 흔이 보이는 婚姻階級(marriage-class)의 習俗을 參考하야 昭穆의 起原을 곧 여기에 求하려는 것이다. 婚姻階級이라는 것은 即 原始民族의 토-템 組織에 依하야 族外婚(exogamy)이 嚴然하게 存在한 것인대 이러한 婚姻關係로 因하야 生乎하게 되는 境遇에는 男系 또는 女系의 間接 繼承이 되야結局 階級名이 間接繼承으로 됨으로 여기에 現存 文化社會에는 볼 수 업는 獨特한 形態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特殊한 婚姻關係와 社會組織은 일즉히 Frazer가 「오—스트라리아 民族 間에 祥細한 硏究를 한 것은 이미 學界에서 널리 아는 바이다.(7) 이제 이러한 結婚階級은 곧 隔世的同次階級 即 子孫의 同班階級이 되고 父子의 異▶P24班階級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隔世同班인 昭穆制度의 起原이라는 것이요 結婚階級의 制度는 「오—스트라리아」와 가튼 低級民族에 現存한 것을 보면 이 結婚階級 制度를 起原으로하는 昭穆 制度도 原始時代에 淵源한 것이리라는 것이 加藤 敎授의 見解이다. 그러나 이說明에는 根本的인 先決 問題가 아즉 證明되지 않은 點에 있어서 運命的인 誤謬을 犯하였으니 따라서 그 說明에 牽强附會의 點이 없지 않은 것이다. 先次로 原始的 社會組織인 토-템 信仰과 族外婚에 依한 이른바 結婚階級 制度란 것이 古代 支那民族 間에도 嚴然히 存在하였다는 證明을 要하는 것이니 이 點에 對하야 形式論理學 上의 先決問題 要求(Peritio Principle)의 誤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스트라리아」 民族에 있는 結婚組織이 모든 原始 民族에 다 存在하엿다고 할 수 없는 일이요-「아에리칸인디만」에는 全然 이러한 結婚階級의 組織이 現存치 않고 「메라네시아」에도 그다지 整然하지 않다-또한 中國의 原始社會에 그러한 組織이 嚴然하였다는 定說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不拘하고 昭穆制度의 起原을 엉뚱한 現存 未開民族의 特殊 婚姻關係에 찾고 따라서 昭穆의 制度를 그대로 中國의 古代 原始時代에 淵源함이라 하니, 이것은 또한 家族制度의 發展史上으로 보아 首旨할 수 없는 일이다. 大抵 昭穆制度는 大家族 制度의 發展過程에서 家族成員의 倫序에 對한 觀念이 和當히 發達된 文化期의 所序이라고 보는 것이 올치 않을가 한다. 따라서 倫序와 道義 觀念에 基因한 昭穆制度라는 것을 原始 家族時代에 淵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이 昭穆의 制度를 어떠한 由來에 依한 것이라고 볼 것인가 함에 對하야 筆者는 아주 쉽게 이와 가티 생각하려는 것이다 即 그것은 現實的인 大家族 生活上에 要求된 倫序觀念의 延長이라고. 本來 大家族의 生活에는 그 成員의 統制가 至極히 必要한 것이요 그러기爲하야 家長의 權限을 强化하는 同時에 家族成員의 服從과 秩序 維持가 要求되는 것이다 父親을 嚴君이라 하야 絕對 尊嚴視하는 것이 子의 義務로 되야 있는 反面에 父가 生存 中에 白己의 子息은 家▶P25-1長인 父의 孫으로서 家族成員이 되고 따라서 祖孫間에는 特別한 親密이 생겨 父子의 間에는 日常 近接의 機會를 갖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祖孫의 間에는 至極 密接 親近한 關係를 이루게된 것이니 이러한 點은 父子 間에 食卓을 갈이 못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지 못 함에 對하야 祖孫間에는 食卓을 같이하고 遊戯娛樂을 같이 더부러하는 習俗을 보아 잘 알만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現實生活의 習俗과 觀念이 그대로 死後의 神主位間에 延長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自然스러운 婦結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祔祭(부제)에 관련하여 소목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길게 되었으나 喪期(상기)의 변천에 따라 단계적으로 행하는 제사-祭禮(제례)라 하기보다 오히려 喪禮(상례)의 순서에 관하여 다시 본문제로 들어가 보건대 졸곡과 부제 후에는 소상, 대상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우리의 주지한 바이니 이제 상세한 고찰을 생략하거니와, 선제・길제(원래 길제는 가례에 없는 것인데 특히 상례비요에는 길례를 채용하여 선제 외에 또 규정한 것인 듯하다)를 맞추기까지 점차 평상복으로 변천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에 관하여 栗谷(율곡)의 擊蒙要訣(격몽요결) 居喪儀條(거상의조)에 이러한 과정을 설명한 바 있으니
쪽수▶P25-2 祔祭에 關聯하야 昭穆에 對한 說明이 너무 길게 되였으나 喪期의 變遷에 따라 段階的으로 行하는 祭祀-祭禮라 하기보다 오히려 喪禮의 順序에 關하야 다시 本問題로 들어가 보건대 卒哭과 祔祭 後에는 小祥大祥이 가장 重要한 것임은 우리의 周知한 바이니 이제 詳細한 考察을省略하거니와, 禪祭・吉祭(元來 吉祭는 家禮에 없는 것인데 特히 喪禮備要에는 吉禮를 採用하야 禪祭 外에 또 規定한 것인 듯 하다)를 맛추기까지 漸次 平當服으로 變遷한 것은 이미 言及한 바와 같다. 이에 關하야 栗谷의 擊蒙要訣 居喪儀條에 이러한 過程을 說明한 바 있으니
凡三年之喪 古禮則廢祭 而朱子曰 古人居喪 衰麻之衣 不釋於身 哭泣之聲 不絕於口 其出入居處衣服飮食 皆與平日 絕異故 宗廟之祭雖廢 而幽明之間兩無憾焉 今人居喪與古人異 而廢此一事 恐有所未安 朱子之言 如此故 未葬前 準禮廢祭 而卒哭後則 於四時節祀及忌祭墓祭 使服輕者行薦而饌品減於常時 只一獻可也 朱予喪中 以墨衰薦于廟 今人以俗制服當墨衰 若無服輕者則喪人恐可以俗制喪服行祀 朞大功 則葬後 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未葬前時祭可廢 忌祭墓祭略行如上儀 總小功則成服前廢祭 雖忌日亦下可行 成服後 則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服中時祀 當以玄冠素服黑帶行之.
쪽수▶P25-3 凡三年之喪 古禮則廢祭 而朱子曰 古人居喪 衰麻之衣 不釋於身 哭泣之聲 不絕於口 其出入居處衣服飮食 皆與平日 絕異故 宗廟之祭雖廢 而幽明之間兩無憾焉 今人居喪與古人異 而廢此一事 恐有所未安 朱子之言 如此故 未葬前 準禮廢祭 而卒哭後則 於四時節祀及忌祭墓祭 使服輕者行薦而饌品減於常時 只一獻可也 朱予喪中 以墨衰薦于廟 今人以俗制服當墨衰 若無服輕者則喪人恐可以俗制喪服行祀 朞大功 則葬後 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未葬前時祭可廢 忌祭墓祭略行如上儀 總小功則成服前廢祭 雖忌日亦下可行 成服後 則當祭如平時 但不受昨 服中時祀 當以玄冠素服黑帶行之.
라 함이 그 일단이다.
쪽수▶P26-1 라 함이 그 一端이다.
상중의 기한에는 복장의 제정이 중요함은 물론이어니와, 또 여러 가지 금제가 있으니 자신 및 부모의 無朞(무기) 이상 喪(상)이라야 冠婚(관혼)의 儀(의)를 이룰 수 있다 하여 혼인관계의 필수조건이 되어있고 居喪(거상) 不樂(불악)이라 하여 가무 환락을 금하고 음식・거처・언어・대인관계에 있어 금지의 조건이 다다하다 禮記間傳(예기간전)에
쪽수▶P26-2 喪中의 期限에는 服裝의 制定이 重要함은 勿論이어니와, 또 여러 가지 禁制가 있으니 自身 及 父母의 無朞以上喪이라야 冠婚의 儀를 이룰 수 있다 하야 婚姻關係의 必須條件이 되어있고 居喪 不樂이라 하야 歌舞議樂을 禁하고 飮食・居處・言語・對人關係에 있어 禁止의 條件이 多多하다 禮記間傳에
斬衰三日不食 齊衰二日不食 大功三不食 小功緦麻再不食 土與歛焉則壹不食 故父母之喪 旣殯食粥 朝一溢米 暮一溢米 齊衰之喪 疏食水飮 不食菜果 大功之喪 不食醯醬 小功緦麻 不飮醴酒 此哀之發於飮食者也.
쪽수▶P26-3 斬衰三日不食 齊衰二日不食 大功三不食 小功緦麻再不食 土與歛焉則壹不食 故父母之喪 旣殯食粥 朝一溢米 暮一溢米 齊衰之喪 疏食水飮 不食菜果 大功之喪 不食醯醬 小功緦麻 不飮醴酒 此哀之發於飮食者也.
라 함은 음식의 금제요 또한 기한의 변천에 따라서 변동이 있어서
쪽수▶P26-4 라 함은 飮食의 禁制요 또한 期限의 變遷에 따라서 變動이 있어서
父母之喪 旣虞卒哭 疏食水飮 不食菜果 則期而小祥食菜果 又期而大祥有醯醬 中月而禪 禪而飮醴酒.
쪽수▶P26-5 父母之喪 旣虞卒哭 疏食水飮 不食菜果 則期而小祥食菜果 又期而大祥有醯醬 中月而禪 禪而飮醴酒.
라는 단계적 차이를 이룬다. 또 거처에 관하여는
쪽수▶P26-6 라는 段階的 差異를 이룬다. 또 居處에 關하여는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언어 대인관계에 대하여는
쪽수▶P26-7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言語 對人關係에 對하야는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쪽수▶P26-8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이라 하고 최저등급의 상에까지도 곡의 규정이 있어
쪽수▶P26-9 이라 하고 最低等級의 喪에까지도 哭의 規定이 있어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쪽수▶P26-10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라는 등등 우리의 이해에 곤란할 만큼 諸多(제다) 금제가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금제의 발생적 기원을 찾는다면 원래 주술종교적 금기의 관념에 기본한 것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예교로서는 다만 哀(애)의 표시 효의 至道(지도)라고 설하여 있을 뿐이다. 예교란 것은 본래 한 권위성을 가지고 민중에 임한 것이니, 일반인으로서는 지극히 실행난인 것임은 물론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 이러한 일화가 예기에 전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노)나라 어떤 사람이 대상의 제례를 아침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가무 환락함을 보고 子路(자로)가 그 비례 지극함을 비난 조소함에 대하여 孔子(공자)는 오히려 자로를 책망하였으니, 공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무리가 아님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외출한 후 다른 문인들에 말하기를 장기의 상제를 잘 준수하였으나 아직 더 1개월만 지나면 완전히 居喪(거상)의 儀(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예교의 존중시할 것을 교시하었다 한다. 그러나 예교 그대로가 실행되기는 誰某(수모)를 물론하고 곤란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예교에 있어서도 일정한 기한을 지난 후 정규의 상복에서 일단 輕服(경복)으로 감하는 제도 즉 受服(수복)을 제정하였으니, 의례 喪服經(상복경) 大功章(대공장)에 이러한 규정이 있다.
쪽수▶P26-11 라는 等々 우리의 理解에 困難할만큼 諸多 禁制가 規定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禁制의 發生的 起原을 찾는다면 元來 呪▶P27-1術宗敎的 禁忌의 觀念에 基本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禮敎로서는 다만 哀의 表示 孝의 至道라고 說하여 있을 뿐이다. 禮敎란 것은 本來 한 權威性을 가지고 民衆에 臨한것이니, 一般人으로서는 至極히 實行難인 것임은 勿論일 것이다. 이에 關하야 이러한 逸話가 禮記에 傳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나라 어떤 사람이 大祥의 祭禮를 아츰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歌舞歡樂함을 보고 子路가 그 非禮至極함을 非難嘲笑함에 對하야 孔子는 오히려 子路를 責望하였으니, 孔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無理가 아님을 理解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孔子는 予路의 外出한 後 다른 門人들에 말하기를 長期의 喪制를 잘 遵守하였으나 아즉 더 一個月만 지나면 完全히 居喪의 儀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야 禮敎의 尊重視할 것을 教示하었다 한다. 그러나 禮敎 그대로가 實行되기는 誰某를 勿論하고 困難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禮敎에 있어서도 一定한 期限을 經한 後 正規의 喪服에서 一段 輕服으로 減하는 制度 即 受服을 制定하였으니, 儀禮喪服經 大功章에 이러한 規定이 있다.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쪽수▶P27-2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이라 하니 이 수복의 규정은 대공에 관한 것이요 大功殮章(대공렴장)과 齊衰三月章(자최삼월장)에는 분명히 無受(무수)라 하였고 斬衰章(참최장)에나 齊衰章(자최장)에는 아무런 규정 없는 것을 보면, 수복이란 것이 오복 전체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쪽수▶P27-3 이라 하니 이 受服의 規定은 大功에 關한 것이요 大功殮章과 齊衰三月章에는 分明히 無受라 하였고 斬衰章에나 齊衰章에는 아무런 規定 없는 것을 보면, 受服이란 것이 五服 全體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상의 외에 상기에 관하여는 重喪(중상)의 문제 (除服(제복)의 순서는 先滿先除(선만선제) 後滿後除(후만후제)를 원칙으로한다.) 월일의 계산 문제 重様(중양)된 제사의 站後(참후)문제 등이 있거니와, 이러한 문제는 여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상가)제도에 관하여 잠깐 고찰하겠다. 상을 당한 경우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금제가 있을만큼 일정한 기한에 업무를 중단치 않으면 안되므로 공직에 있는 자에 대하여 일정한 휴가를 급여하는 일이 국가 법제 상으로 규정되었는 것이다. 이 給暇(급가)의 원칙으로 말하면 역시 등급적 차이가 有(유)하여
쪽수▶P27-4 以上의 外에 喪期에 關하여는 重喪의 問題 (除服의 順序는 先滿先除 後滿後除를 原則으로한다.) 月日의 計算問題 重様된 祭祀의 站後問題 等이 있거니와, 이러한 問題는 여기에 省略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制度에 關하야 잠간 考察하겠다. 喪을 當한 境遇에는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禁制가 있을만큼 一定한 期限에 業務를 中斷치 않으면 안됨으로 公職에 있는 者에 對하야 一定한 休暇를 給與하는 일이 國家 法制 上으로 規定되였는 것이다. 이 給暇의 原則으로▶P28-1 말하면 亦是 等級的 差異가 有하야
김두헌 오복제도-3.png
쪽수▶P28-2
김두헌 오복제도-3.png
로 되어있다.(8) 급가로 말하면 當喪(당상)의 경우뿐만 아니라 大小祥(대소상)・禪祭(선제)・忌祭(기제)・時祭(시제)・改葬(개장)의 경우에도 수십일 내지 수일이 역대의 법전에 제정되어 있으니 말하자면 금일의 官公吏服務規定(관공리복무규정)에 불과한 것이나 그것이 국가의 법제上 중요시되었음은 사회의 조직이 대가족 제도에 기본하여 선조 숭배의 관념이 존중된 까닭이다. 이러한 급가제도가 조선에 있어서는 일찍 오복제도가 고려 초에 전래함에 따라 시작한 것이니 성종 4년에 처음으로 제정하여 수차의 개정이 역대를 통하여 계속되고 이조 시대에 또한 그런 것이 사실에 歷然(역연)한 바이다.
쪽수▶P28-3 로 되여있다.(8) 給暇로 말하면 當喪의 境遇뿐만 아니라 大小祥・禪祭・忌祭・時祭・改葬의 境遇에도 數十日 乃至 數日이 歷代의 法典에 制定되여 있으니 말하자면 今日의 官公吏服務規定에 不過한 것이나 그것이 國家의 法制上 重要視되였음은 社會의 組織이 大家族 制度에 基本하야 先祖 崇拜의 觀念이 尊重된 까닭이다. 이러한 給暇制度가 朝鮮에 있어서는 일즉 五服制度가 高麗 初에 傳來함에 따라 始作한 것이니 成宗 四年에 처음으로 制定하야 數次의 改正이 歷代를 通하야 繼續되고 李朝 時代에 또한 그런 것이 史實에 歷然한 바이다.


라는 단계적 차이를 이룬다. 또 거처에 관하여는
쪽수▶P26-6 라는 段階的 差異를 이룬다. 또 居處에 關하여는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언어 대인관계에 대하여는
쪽수▶P26-7 父母之喪 居倚蘆寢席枕塊 期而小祥居望室寢有席 又期而大祥居復寢 中月而禪 禪而牀 大功之馥寢有席 小功網麻牀可也라 함이 그것이요 또 言語 對人關係에 對하야는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쪽수▶P26-8 斬衰唯而不對 齊衰對而不言. 疏衰之喪人請見之則見 不請見人. 大功言而不議 小功緦麻議而不及樂.
이라 하고 최저등급의 상에까지도 곡의 규정이 있어
쪽수▶P26-9 이라 하고 最低等級의 喪에까지도 哭의 規定이 있어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쪽수▶P26-10 大功之哭三曲而優 小功緦麻哀容可也
라는 등등 우리의 이해에 곤란할 만큼 諸多(제다) 금제가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금제의 발생적 기원을 찾는다면 원래 주술종교적 금기의 관념에 기본한 것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예교로서는 다만 哀(애)의 표시 효의 至道(지도)라고 설하여 있을 뿐이다. 예교란 것은 본래 한 권위성을 가지고 민중에 임한 것이니, 일반인으로서는 지극히 실행난인 것임은 물론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 이러한 일화가 예기에 전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노)나라 어떤 사람이 대상의 제례를 아침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가무 환락함을 보고 子路(자로)가 그 비례 지극함을 비난 조소함에 대하여 孔子(공자)는 오히려 자로를 책망하였으니, 공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무리가 아님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외출한 후 다른 문인들에 말하기를 장기의 상제를 잘 준수하였으나 아직 더 1개월만 지나면 완전히 居喪(거상)의 儀(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예교의 존중시할 것을 교시하었다 한다. 그러나 예교 그대로가 실행되기는 誰某(수모)를 물론하고 곤란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예교에 있어서도 일정한 기한을 지난 후 정규의 상복에서 일단 輕服(경복)으로 감하는 제도 즉 受服(수복)을 제정하였으니, 의례 喪服經(상복경) 大功章(대공장)에 이러한 규정이 있다.
쪽수▶P26-11 라는 等々 우리의 理解에 困難할만큼 諸多 禁制가 規定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禁制의 發生的 起原을 찾는다면 元來 呪▶P27-1術宗敎的 禁忌의 觀念에 基本한 것이 이미 言及한 바와 같거니와, 禮敎로서는 다만 哀의 表示 孝의 至道라고 說하여 있을 뿐이다. 禮敎란 것은 本來 한 權威性을 가지고 民衆에 臨한것이니, 一般人으로서는 至極히 實行難인 것임은 勿論일 것이다. 이에 關하야 이러한 逸話가 禮記에 傳하여 있다. 언제인가 魯나라 어떤 사람이 大祥의 祭禮를 아츰에 마치고 그날 저녁 때에 歌舞歡樂함을 보고 子路가 그 非禮至極함을 非難嘲笑함에 對하야 孔子는 오히려 子路를 責望하였으니, 孔子의 생각에도 그 사람의 無理가 아님을 理解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孔子는 予路의 外出한 後 다른 門人들에 말하기를 長期의 喪制를 잘 遵守하였으나 아즉 더 一個月만 지나면 完全히 居喪의 儀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 하야 禮敎의 尊重視할 것을 教示하었다 한다. 그러나 禮敎 그대로가 實行되기는 誰某를 勿論하고 困難할 일이다. 그러므로써 禮敎에 있어서도 一定한 期限을 經한 後 正規의 喪服에서 一段 輕服으로 減하는 制度 即 受服을 制定하였으니, 儀禮喪服經 大功章에 이러한 規定이 있다.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쪽수▶P27-2 喪服大功布衰裳 牡麻經纓布带 三月以小功衰 即葛.
이라 하니 이 수복의 규정은 대공에 관한 것이요 大功殮章(대공렴장)과 齊衰三月章(자최삼월장)에는 분명히 無受(무수)라 하였고 斬衰章(참최장)에나 齊衰章(자최장)에는 아무런 규정 없는 것을 보면, 수복이란 것이 오복 전체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쪽수▶P27-3 이라 하니 이 受服의 規定은 大功에 關한 것이요 大功殮章과 齊衰三月章에는 分明히 無受라 하였고 斬衰章에나 齊衰章에는 아무런 規定 없는 것을 보면, 受服이란 것이 五服 全體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상의 외에 상기에 관하여는 重喪(중상)의 문제 (除服(제복)의 순서는 先滿先除(선만선제) 後滿後除(후만후제)를 원칙으로한다.) 월일의 계산 문제 重様(중양)된 제사의 站後(참후)문제 등이 있거니와, 이러한 문제는 여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상가)제도에 관하여 잠깐 고찰하겠다. 상을 당한 경우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금제가 있을만큼 일정한 기한에 업무를 중단치 않으면 안되므로 공직에 있는 자에 대하여 일정한 휴가를 급여하는 일이 국가 법제 상으로 규정되었는 것이다. 이 給暇(급가)의 원칙으로 말하면 역시 등급적 차이가 有(유)하여
쪽수▶P27-4 以上의 外에 喪期에 關하여는 重喪의 問題 (除服의 順序는 先滿先除 後滿後除를 原則으로한다.) 月日의 計算問題 重様된 祭祀의 站後問題 等이 있거니와, 이러한 問題는 여기에 省略하기로 하고, 다만 喪暇制度에 關하야 잠간 考察하겠다. 喪을 當한 境遇에는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禁制가 있을만큼 一定한 期限에 業務를 中斷치 않으면 안됨으로 公職에 있는 者에 對하야 一定한 休暇를 給與하는 일이 國家 法制 上으로 規定되였는 것이다. 이 給暇의 原則으로▶P28-1 말하면 亦是 等級的 差異가 有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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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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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되어있다.(8) 급가로 말하면 當喪(당상)의 경우뿐만 아니라 大小祥(대소상)・禪祭(선제)・忌祭(기제)・時祭(시제)・改葬(개장)의 경우에도 수십일 내지 수일이 역대의 법전에 제정되어 있으니 말하자면 금일의 官公吏服務規定(관공리복무규정)에 불과한 것이나 그것이 국가의 법제上 중요시되었음은 사회의 조직이 대가족 제도에 기본하여 선조 숭배의 관념이 존중된 까닭이다. 이러한 급가제도가 조선에 있어서는 일찍 오복제도가 고려 초에 전래함에 따라 시작한 것이니 성종 4년에 처음으로 제정하여 수차의 개정이 역대를 통하여 계속되고 이조 시대에 또한 그런 것이 사실에 歷然(역연)한 바이다.
쪽수▶P28-3 로 되여있다.(8) 給暇로 말하면 當喪의 境遇뿐만 아니라 大小祥・禪祭・忌祭・時祭・改葬의 境遇에도 數十日 乃至 數日이 歷代의 法典에 制定되여 있으니 말하자면 今日의 官公吏服務規定에 不過한 것이나 그것이 國家의 法制上 重要視되였음은 社會의 組織이 大家族 制度에 基本하야 先祖 崇拜의 觀念이 尊重된 까닭이다. 이러한 給暇制度가 朝鮮에 있어서는 일즉 五服制度가 高麗 初에 傳來함에 따라 始作한 것이니 成宗 四年에 처음으로 制定하야 數次의 改正이 歷代를 通하야 繼續되고 李朝 時代에 또한 그런 것이 史實에 歷然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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